001화. 허약체질 관심종자 얼굴천재 (1)
"이거, 팔면 얼마 정도 나올 것 같냐?"
...뭐?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신은 서서히 눈을 뜹니다.
대체, 뭔…?
그런데 무언가에 의해 눈앞이 가려진 걸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당신은 몸을 움직여보려 하지만, 손발이 꽁꽁 묶여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왔는지도 모를 뜨내기라며. 비싸게 팔리겠어?"
"그래도 왜──"
옆에서는 계속 생소한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생소해...?
'...아냐.'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할 지경이었다.
'…꽤 반반하다던데.'
"꽤 반반하다던데."
이렇게, 놈이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바로 읊을 수 있을 정도로는.
'목소리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거기에, 저 말이 만약 내가 '전사'였다면 힘 좀 쓴다는 식으로, '마법사'였다면 마법 좀 쓴다는 식으로 바뀌었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직접 보기라도 했냐? 장사치들이 하는 말이 늘 그렇지 뭐."
그러니 당연하지만, 이게 전부 게임에서 보았던 대사라는 것 역시도.
그렇다는 건…
왜 당신은 여기서 눈을 뜨게 된 걸까요?
'…미친.'
이곳이, 게임 속 세계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평소처럼 메시지창을 확인하던 나는 그만 이 한마디와 함께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진짜 인증 마크잖아."
제작사 공식 계정이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뜻이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나름 유명한 게이머다.
전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롤플레잉 게임 〈소드 오브 소울〉 시리즈의 열성팬으로서 취미 삼아 공유해왔던 캐릭터 빌드들이 운 좋게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덕이었다.
그래서 종종 외국인들이 내 계정을 찾아와 감사나 응원의 말을 남길 때도 있긴 했는데…
[안녕하세요. 당신의 빌드들 잘 봤다. 우리도 당신의 큰 팬입니다.]
이렇게, 무려 제작사 공식계정이 따로 DM을 보내온 건 처음이었다.
[모두 창의적이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또한 우리 게임의 철학에 굉장히 잘 어울렸습니다.]
번역기를 돌렸는지 묘하게 어색한 말투였지만, 이해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번 작 〈소드 오브 소울: 흉성의 용사〉에서는 음유시인 클래스의 선택률이 높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업데이트에서 음유시인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캐릭터 빌드를 좋아하고 따라한다. 따라서 우리는 원한다, 당신의 피드백.]
"...뭐?"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고나서는 차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우선 DM창을 나가 계정의 프로필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해보았다. 인증마크도 팔로워 수도, 확실히 공식 계정이 맞았다.
"아무리 봐도 사칭은… 아니지…?"
메시지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는데, 결국 요점은 이랬다.
[당신에게 다음 업데이트 버전을 보내주겠다. 직접 당신만의 음유시인 빌드를 만들어 테스트해달라.]
"베타테스트를, 해달라는 건가…?"
게임 제작 업계에 대해선 잘 모르는데... 이래도 되나?
내가 나름 빌드장인이라 유명하기는 해도, 아직 발표하지도 않은 패치의 테스트판을 일개 유저한테? 외부인한테 그냥 보내주겠다고?
이거 그… 형평성 문제라든가? 아니면 뭐, 법적으로 곤란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닌가? 기밀 유출 어쩌고라든가.
이런 의문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 흔한 일이다. 문제없다.]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흔한 일이라고? 진짜?
그럴 수가… 있나? 있으려나? 이것이 말로만 듣던 IT업계의 자유분방함?
근데 뭐, 어쨌든 공식계정은 확실해 보이고 저쪽이 알아서 먼저 보내준다는데 최소한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리고 설령 문제가 되는 일이라도… 솔직히, 엄청나게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선택받았다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설마 팔로워가 천만이 넘는 공식계정이 느닷없이 나한테 무슨 악성파일을 뿌리지는 않을 거 아닌가.
그리고 만에 하나 사실은 해킹이었다고 해도, 공계를 해킹해서까지 나 하나를 엿 먹이려고 하는 정도의 성의라면 인정하고 한 번은 당해 줘야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물론, 그런 사소한 우려는 설치가 완료된 후 완전히 불식되었지만.
"…이게 진짜네."
정말로 '소소 흉성'이 실행된 것이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브금도, 언제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타이틀 화면도 전부 그대로인.
이를 보니, 무심코 미소가 지어졌다.
"──음유시인이라."
나는 먼저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마침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작인 '흉성'에서는 아직 한 번도 음유시인 빌드를 올려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구상해둔 건 몇 개 있었지만, 여태껏 올려온 다른 빌드들보다는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밀렸었기 때문이다.
"어디 한 번 깎아볼까."
뚜두둑, 관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소드 오브 소울 시리즈의 음유시인 클래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통적으로 비전투 상황에선 소위 '말빨'로 주로 활약하고 전투 상황에선 아군에게 버프를 거는 서포터 느낌으로 사용되어온 클래스였다.
그래서 빌드라 할 것도 사실 딱히 없었다. 그냥 적당히 '매력' 스탯을 올리고 노래를 불러 다른 강한 동료들에게 버프를 걸어주면 그걸로 할 일은 다 한 셈이니까.
한 마디로, 전투 땐 별로 재미가 없다.
그리고 특히 이번 작인 '흉성'은 TRPG를 원작으로 하는 소소 시리즈의 전통인 '주사위를 굴려 특정 행동의 성공, 실패 여부를 결정하는 턴제 전투' 방식과, 오늘날의 라이트한 게이머들이 선호하는 '실시간 액션'을 접목해 더욱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워진 전투 시스템을 만들어냈다고 대호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따라서 그런 대호평 컨텐츠의 대부분을 아예 처음부터 피하거나 혹은 재미없게 보내야 하는 음유시인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더 떨어질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내 '음유시인 빌드'는 그렇지 않을 테지만.
캐릭터 생성 창을 띄운 나는 바로 패드를 쥐고 스틱을 조종했다.
"클래스 선택… 음유시인."
음유시인은 애초에 근본적으로 높은 '매력' 스탯을 활용한 [설득] 등을 통해 전투를 피하는 쪽으로 설계된 클래스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깎을 빌드는 전투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즐길' 것이다.
전투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음유시인의 이점은 그대로 살리면서, 전투 시엔 평범한 서포터가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활약할 수 있게 만들어서.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클래스 이름만 음유시인이지 사실상 전혀 음유시인답지 않은 전투를 하는 캐릭터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내 빌드 지론이었다.
우선 성능이 좋아야 하는 건 기본 전제로 깔아두고, RP(롤플레잉)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빌드는 절대 깎지 않는다.
소소 시리즈가 인기 있던 이유는 주사위와 종이, 그리고 같이 할 사람들만 있으면 언제든 즐길 수 있는 TRPG의 요소를 잘 살린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다른 평범한 롤플레잉 게임들보다 훨씬 컨셉 잡고 놀기 좋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냥 성능이, 효율이 좋다는 이유로 그 컨셉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플레이를 한다면… 이 게임의 진정한 재미를 놓쳐버리는 느낌이랄까.
물론 사람마다 즐기는 법은 각자 다양한 법이고 거기에다 대고 내가 뭐라 할 자격 같은 건 없고 애초에 이유도 없지만, 나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는 거지.
이 지론이 내가 유명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성능도 챙기는데, RP의 재미까지 챙기는 빌드들을 올린다고 말이다.
지금 내게 테스트를 시켜 주는 공식도, 아마 그런 빌드를 원하는 걸 테고.
그러니,
"스탯."
우선은 '능력치' 분배다.
스탯은 빌드의 뼈, 기본 골자다. 모든 빌드는 기초 스탯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서부터 시작된다.
힘(STR), 민첩(DEX), 지능(INT), 정신(MEN), 매력(CHA).
처음 캐릭터를 생성할 때 각 스탯은 모두 4로 시작하고, 여기서 21개의 스킬 포인트가 주어져 원하는 스탯에 배분할 수 있다.
이중 음유시인이 찍어야 하는 주 스탯은 당연히 '매력'이었다.
따라서 화면의 팁 창에서는 먼저 어느 정도 매력을 찍고, 남은 포인트들을 다른 네 스탯에 골고루 분배하는 게 무난하다고 추천 중이었지만──
"──좋아."
나는 그런 무난한 음유시인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따라서 스탯 배분을 마친 후,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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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 04
DEX 04
INT 07
MEN 06
CH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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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레벨부터 매력에 몰빵했다. 설정상 여기까지가 필멸자(?)의 한계라고 알려진 20까지.
즉, 1레벨이지만 매력 하나만큼은 이미 인간계 최강이 되었다는 소리다.
그 이후론 뭐랄까… 문자 그대로 신계의 영역이었다. 이 세계에서 매력 스탯이 가장 높은 존재인 '미(美)의 신'이 30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좀 더 와닿으려나.
이렇게 스탯 분배를 마쳤으니,
"다음은, 트레잇."
이번엔 '특성'의 차례였다.
더 다양한 롤플레잉을 위해 그 캐릭터의 성격이라든지 아니면 외모적 특징 같은 걸 설정해 스탯 등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캐릭터 생성 시 최대 세 개의 특성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백 개에 가까운 다양한 특성들 중, 나는 먼저 이 두 개의 특성을 선택했다.
바로 「관심종자」와, 「방구석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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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종자」
당신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인정욕구 괴물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주목할 때 당신은 행복감을 느끼고 활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주목받지 못할 때는 쉽게 우울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입니다.
효과
MEN –2/CHA +2
아군/적/중립 상태의 개체에게 '주목받는' 상태일 때, '행복한' 버프를 받습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우울한' 디버프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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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관심종자」는… 뭐, 문자 그대로 관심종자였다. 언제나 관심에 목마른 귀찮은 인간이 된다는 거다.
내가 정신력을 6까지 올려둔 이유이기도 했다.
정신력은 특히나 다른 스탯들에 비해 초기 수치인 4가 정말로 마지노선 같은 느낌인지라, 이 이하로 떨어져 버리면 진짜 개복치가 돼버려서 아무리 다른 스탯들이 높아도 뭘 할 수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할까. 그래서 이 「관심종자」 특성을 골랐을 때 깎이는 수치를 감안해 미리 2점을 투자해뒀다.
이 「관심종자」가 관심을 받아 행복해지면 모든 '매력' 판정에 이점을 받는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주사위값이 뜨지 않았을 경우 그 굴림을 아예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한번 더 던질 기회를 줘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우울한 상태일 땐 매력뿐만 아니라 모든 스탯 판정에 불리해진다. 이쪽은 반대로 필요한 값이 나와도 한 번 더 던지게 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는 거지.
이처럼 충족했을 때의 이점보다 충족하지 못했을 때의 단점이 압도적으로 강한 탓에 지금까지는 대체로 롤플레잉용, 예능용 특성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의외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계속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성능 좋은 버프를 상시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러니 적어도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한 특성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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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예술가」
당신은 야외 활동과 거리가 먼, 집돌이/집순이입니다.
신은 당신에게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주었지만 운동신경까지 주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효과
STR –2/DEX -1/CHA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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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예술가」는 훨씬 더 직관적인 특성이었다.
예술 쪽을 담당하는 스탯인 매력을 3 올려주는 대신, 운동신경 쪽을 담당하는 힘과 민첩을 합쳐서 3 깎는다.
한 마디로 허약체질의 예술가로 만들어버린다는 뜻이다.
음유시인 캐릭터에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힘과 민첩을 희생하는 대신 주 스탯인 매력을 올려주는, 리스크와 리턴이 직관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에 기존 음유시인 빌드들에서도 애용되던 특성이다.
이전부터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에, 이 두 특성을 고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관건은 마지막 특성이었다.
후보군들이야 있지만 뭘 넣어도 뭐랄까, 딱 들어맞는 조각이라는 느낌이 덜 하달까. 지금껏 내가 음유시인 빌드의 업로드를 미뤄왔던 이유도 이거고.
그래도 아무튼 골라야 하니 뭘 고르는 게 좋을까 잠시 둘러보다가…
"…응? 뭐야 이거."
한 특성이 내 시선을 확 끌었다.
"「경국지색」…?"
분명, 처음 보는 특성이었다.
나는 서둘러 커서를 가져다 대 상세 설명을 띄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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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색(傾國之色)」
당신은 한 나라를 무너뜨릴 정도의 절세미인입니다.
누구라도 당신을 보면 한눈에 반하겠지만, 그만큼 시기와 질투, 또 강한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효과
CHA +5
당신을 시야 범위 내에 둔 인간종 아군/적/중립 개체를 '매혹된' 상태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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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무래도 다음 패치에서 추가되는 신규 특성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음유시인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고민했다더니, 확실히 음유시인들이 고르기에 딱 좋은 특성 아닌가.
우선 다른 스탯을 깎지도 않으면서 매력 스탯을 무려 5씩이나 올려준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든다.
솔직히, 이 정도면 소위 OP(오버파워) 특성이다. 그냥 OP도 아니고 그냥 개사기 OP다.
아마 업데이트가 정식 발매될 때쯤이면 수치가 조정될 확률이 매우, 아주 매우 높아 보였다.
다만 아군이나 적 불문하고 이 캐릭터를 본 인간종 상대 모두에게 '매혹된' 상태로 만들어버린다는 부분은… 확실히 장단점이 있을 것 같긴 했다.
문자 그대로 한 나라를 기울게 할 수준의 외모라는 표현에는 마냥 긍정적인 뜻만 담겨있지는 않다는 걸, 제작진들은 아마 '매혹된'의 페널티로 표현하려 했던 거겠지.
여기서 언급되는 「매혹」은 일종의 마법, 환술에 가까운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마약 같은 거다.
이 경우엔 문자 그대로 얼굴에 중독되게 만드는 셈이겠지.
그래서 그 얼굴을 또 보지 않으면 금단증상이 온다는 거다.
주접이 아니라, 정말로.
예를 들어 우리가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쳤던 미인 혹은 좋아하는 연예인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뭐 그런 수준이 아니라, 어제까진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었던 이웃이 완전 맛이 가선 느닷없이 칼을 들고 찾아와 감금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수준의 이야기다.
그게 뭐 어차피 죽여야 할 적이라면 모를까, 절대 트러블을 일으켜선 안 될 중요 인물이나 또는 늘 같이 다녀야 하는 동료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걸린다고 생각하면…
"…골때리네."
확실히, 애로와 에로가 판치는 모험이 되겠지. 물론 후자보단 전자의 비율이 훨씬 압도적으로 높을 테고.
정확히는, 후자로 가기 전에 이미 전자에서 싹 다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동료들과 건실한 모험을 통한 건전한 교류로 정정당당하게 호감도를 쌓아 올리는 대신, "엥? 그냥 그거 「매혹」 걸면 되는 거 아님? 개꿀~" 하고 꼼수를 썼다가 게임의 장르가 순식간에 공포 스릴러, 배틀로얄로 바뀌더니 그대로 게임이 터져버려 천벌 받은 녀석들의 증언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근데 그런 「매혹」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시적으로 걸어버린다는 거다. 까다로운 페널티임은 분명했다.
다만.
또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경국지색」이야말로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빌드에 마지막 방점을 찍어줄 수 있는 특성이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딱 들어맞는 퍼즐 조각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게다가, 상시 「매혹」의 페널티를 통제할 방법이 분명 있을 거다.
예를 들면, 투구 같은 걸 뒤집어쓰면 된다든가?
그럼 조건은 꼭 얼굴을 전부 가리는 풀페이스 헬멧 같은 거여야 되나?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투구 칸에 낄 수 있는 아이템이면 전부 된다든가?
아무튼, 그쪽이 나한테 바라는 것도 결국은 '테스트'고,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골라야 하는 특성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게, 특성 세 개까지 모두 정하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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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 04(-2)
DEX 04(-1)
INT 07
MEN 06(-2)
CHA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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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핫."
보시다시피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무려 '미의 신'과 동등한, 30의 매력 스탯을 지닌 1레벨 음유시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 정도면 이 세계에선 아마 미의 신의 현현이라 불릴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롤플레잉할 맛이 나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제 내 구상대로 된다면, 이 음유시인은 지금처럼 전투에 들어가서 노래만 연주하는, 걸어 다니는 쥬크박스 및 버프머신이 아니라── 버프도 넣으면서 군중제어기도 꼬박꼬박 섞어주고, 거기에 웬만한 상대는 원턴킬을 낼 딜도 뽑는 만능캐가 될 거다.
얼굴과 세 치 혀 하나로 한 부대를 상대하고, 왕국을 좌지우지하고, 세상의 미래를 결정짓는── 세계 최강의 '아가리 파이터'가 탄생한 것이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이 경우엔 진짜 문자 그대로 아가리 파이터였다. 말로, 정확히는 「독설」을 통해 싸운다는 의미에서.
"뭐, 비록 유리몸에 유리멘탈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파티를 꾸려 모험하는 게임이니만큼 그 정도 단점이야 동료들이 메꿔주면 된다.
본인이야 힘들지도 모르겠다만… 게임 속 캐릭터니까.
그 부작용을 직접 겪는 건 내가 아니니까… 뭐, 알빠임?
이제 남은 건, 지금 내 눈앞에 완성된 '허약체질인데 관심병까지 걸린, 악마의 혀를 지닌 미의 신급 얼굴천재'의 외모를 정해주는 것뿐이었다.
간만에 롤플레잉할 맛이 나는 빌드가 뽑혔으니 설정에 어울리는 외모를 위해 평소보다 좀 더 공들여 깎아야겠지.
라는 마음가짐으로, 외모 설정 버튼을 누른 순간──
"──?"
빡, 하고.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은 묵직한 느낌이 들기 무섭게, 시야가 핑 돌았다.
* * *
그리고 눈을 떠보니, 지금 이 상황이었다.
'실화냐....'
틀림없었다.
이곳은 '소소 흉성'의 세계였다.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들이나, 손발이 묶이고 얼굴에는 자루가 씌워진 채로 마차를 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은, 전부 캐릭터 생성을 마친 후 바로 나오는 프롤로그의 일부였고.
그렇다는 건 정황상, 내가 의식을 잃기 전까지 빌드를 깎은 캐릭터── '흉성(凶星)의 용사' 본인이 되었다고 봐야겠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생생한 감촉들을 포함한 이 모든 게 전부 질 나쁜 꿈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말해, 앞으로 이 얼굴과 혀 하나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002화. 허약체질 관심종자 얼굴천재 (2)
당신은 경위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아닌데.'
내 머릿속에서… 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수수께끼의 목소리'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적어도 외모 설정 버튼을 누르던 순간까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당신은 누구일까요?
그러니 당연하게도 '내'가 누군지, 또 '흉성의 용사'가 어떤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고.
그나마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당신의 이름뿐입니다.
'…이름?'
오히려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쪽이었다.
정확히는, 애초에 기억에 없었다.
이름은 외모 설정까지 마친 다음 가장 마지막에 짓게 되는데, 내 의식은 그 전에 끊겨버렸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오직 '유빈'이라는, 내… 원래 이름뿐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의문이었지만, 우선은 지금의 상황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군요.
'목소리'는 계속해서 튜토리얼의 대사를 읊고 있었지만, 내가 마차에 태워진 채 이동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파악해둬야 할 것들이 확실히 있기는 했다.
이를테면, 지금 '목소리'가 제안하고 있는 [관찰]이라든가.
게임에서는 이런 특정한 행동들을 할 때마다 먼저 주사위를 굴려 성공 여부를 '판정'한다.
그 과정이 과연 지금은 어떻게…
--
[관찰]
난이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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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 순간, 익숙한 알림에 이어 게임 내내 보아왔던 주사위가 '떠올랐다'.
세계관 설정상으로는,
'소울 스톤'.
이라 불리는 물건이.
이 세계에서 '영혼'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영혼의 운명을 결정하는 도구입니다.
설정상으로는 그렇고, 그냥 까놓고 말해 정육면체 주사위다.
그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자루가 씌워진 채 손발이 묶인 채였고.
하지만, 그럼에도 소울 스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당신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증거죠.
굳이 따지자면, 나의 내면에.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보였고, 만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질감이나 무게가 느껴졌다.
이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행동을 할 때마다 주사위를 굴려야 하는 건 게임과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한데, 게임과는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래. 하나 더.
'주사위가, 두 개네…?'
원래대로라면 하나만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뭐, 그 이유가 아예 추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앞서 '목소리'가 말했듯, 소울 스톤은 영혼의 증거다. 사실상 영혼 그 자체라 봐도 무방하지.
그렇다면, 게임을 하면서 내내 봐온 저 멋들어진 칠흑색 흑요석 주사위── 원래 이 '흉성의 용사'라는 인물에게 깃들어있는 영혼과,
소울 스톤이 당신의 길을 인도해줄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존재할 리 없는 소재인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지극히 평범한 흰색 주사위── 나, '유빈'이라는 존재의 영혼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터.
'흥미로운걸.'
원리야 어찌 됐든, 정말로 주사위를 한 개 더 굴릴 수 있는 것이라면 굉장한 이득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주사위들은 어떻게 굴리는 걸까.
그 방법을 고민하며, 주위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
주사위가 던져졌다.
'이렇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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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 보정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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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찰]은 사실상 이 게임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알려주기 위한 연습용 굴림이다.
그러니 여기선 '대실패'를 의미하는 1만 뜨지 않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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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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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보니 주사위 둘의 값을 합치는 게 아닌 둘 중 값이 더 높은 쪽이 선택되는 방식인 듯했는데,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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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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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무언가에 가로막히는 느낌이 듭니다.
불규칙한 덜컹거림. 딱딱한 나무 바닥의 감촉. 또각또각 들려오는 발굽 소리와 푸르륵, 하고 투레질하는 소리.
아무래도, 머리에 무언가가 씌워진 채로 마차에 태워져 이동 중인 상황 같군요.
"애초에, 이게 얼마에 팔려봤자 우리한테 떨어지는 건 똑같을 텐데."
"그건 맞긴 해."
그리고 이 마차를 몰고 있는 이들은 분명 당신을 '상품'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노예상들 밑에서 일하는 놈들이니까.
즉,
이로써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해졌군요.
당신은 어디론가 팔려 가고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노예로 팔려 가고 말 거다.
작전이 필요했다.
'스테이터스.'
이를 위해 혹시나 해서 시도해 봤더니,
--
유 빈
Lv.1
종족 : 인간
클래스 : 음유시인
STR 04(-2)
DEX 04(-1)
INT 07
MEN 06(-2)
CHA 20(+5)
특성
「관심종자」
「방구석 예술가」
「경국지색」
--
원리는 모르겠지만, 소위 '상태창'이 이렇게 주사위 때와 마찬가지로 심상의 형태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마음을 먹는 것이 트리거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정하지 않았었기 때문일까, 내 원래 이름이 그대로 적혀있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띄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
스킬 목록
[클래스 스킬]
음유시인의 노래
(용맹/신속/지혜/신성/매료)
격려
독설
[고유 스킬]
???
--
'…역시.'
이로써 혹시라도 다른 인물일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의식을 잃기 전 빌드를 깎은 그 음유시인이 맞았다.
그러니 그쪽으로 작전을 짜야 한다는 의미였고.
우선, 신체 능력을 사용하는 선택지는 웬만해선 배제해야겠지.
예를 들면 이 줄을 어떻게든 [근력]으로 끊어내려 한다든가, [은신]을 통해 마차에서 몰래 뛰어내린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지금 내 신체 능력은 평균보다 한참 아래, 모험가 평균은커녕 일반인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그런 주제에 앞으로 뭘 어떻게 살아남겠다는 건지, 스스로 한심할 정도였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그나마 믿을 건 얼굴 하나뿐인데 이렇게 자루를 뒤집어씌워 놓으니 완전히 쓸모없지 않나. 이래 가지고 뭘 어떻게 세상을 지킨다는 건지. 차라리 이대로 노예로 팔려가 버려 그나마 하루하루 밥이라도 얻어먹으면서 운이 좋다면 주인님 되시는 분한테 예쁨이라도 받는 게 이런 무가치한 나한테 훨씬 어울리는...
'...뭐?'
아니,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설마, 이건…'
목소리의 주인들이 당신에게서 관심을 끊은 것을 느낀 순간, 문득 우울감이 엄습해 옵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이제 아무도 당신을 봐주지 않습니다.
--
「관심종자」 특성 발동
현재 상태 : '우울한'
--
'…X됐다.'
아무래도 '우울한' 디버프는 내 감정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정말 순식간에 부정적인 감정들로 뒤덮여 버릴 정도로.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얼마에 팔릴 것 같냐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관두자마자 그 잠깐 사이를 못 참고 바로 우울해지냐…?!
'이런 귀찮은 「관심종자」 같으니라고…!'
완전 성가신 인간이잖아 이거. 평소라면 절대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타입 1순위다.
스스로한테마저도 이렇게 귀찮게 느껴지는데 하물며 이런 나를 누가 신경이나 써주겠나? 이런 귀찮은 인간을 누가 동료로 삼아주겠냐고. 그러니까 차라리 정말 노예로...
'...헉!'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됐다.
일단, 어떻게든 '주목받는' 상태가 되어야 했다.
"HEYYEYAAEYAAAEYAEYAA──"
"? 어이 닥쳐!"
"──옛!?"
철썩!
공기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나는 노래를 멈추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날아든 채찍이 내 발밑의 바닥을 때린 것이다.
"뭐, 뭐야 갑자기 저놈?"
"미친놈인가…?"
하지만 덕분에 '우울한' 디버프가 제거되… 나 싶었지만, 잠시였다.
'자, 잠깐! 좀 더! 좀 더 내 얘기를 해달라고!'
경고성 채찍질과 깜짝 놀랐다는 듯한 반응만으로 그친 탓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우울함이 다시 나를 잠식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서 노래는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이렇게… 시야가 가려져 있는 이상.
설령 저쪽이 아직 나를 보고 있다고 해도, 내 쪽에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목받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예 노래를 멈추지 않는 방법도 있겠지만… 다음에 날아올 채찍이 그때도 바닥을 때릴 거라곤 장담할 수 없는 이상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다.
만에 하나 그 채찍이 나한테 향한다면, 웬만해선 빈사고 재수 없으면 즉사다. 그것이 체력(HP)을 높여주는 '힘'이 2밖에 안 되는 개복치의 숙명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일단, 내 얼굴에 뒤집어씌워진 이 자루부터 어떻게든 해야 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덜컹거림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곧 마차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노예상들의 야영지 말이다.
그리고 프롤로그의 스토리가 그대로 진행된다면, 이들을 고용한 노예상은 저녁이 되어서야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마차에서 뛰어내리거나 아예 역으로 탈취해 버리지 못했던 플레이어들을 위한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랄까.
즉, 놈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말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물론 노예가 된다는 게 '게임 오버'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팔려 간 뒤로도 모험은 충분히 가능했다. 흔히 '노예 루트'라 불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기에 흉성이 갓겜이란 소리를 들었던 거고.
단, 한 번 「노예 낙인」이라는 특성이 찍혀버리면 그것을 지우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적어도 스토리 중반쯤은 가야 지울 수 있었으니까.
그 말은, 그때까지는 어딜 가도 노예 출신 취급을 받게 되어 '매력'이 깎여버린다는 거다. 가끔은 도망친 노예라 생각한 추격자들이 붙는 귀찮은 경우도 생기고.
그러니 노예 루트는 가급적 피해야 했다. 지금 내 유일한 무기가 매력 스탯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냥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이, 내려."
용병 중 하나가 묶여있는 나를 끌고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허튼짓은 꿈도 꾸지 마라."
머지않아 거세게 밀쳐버렸고, 나는 그대로 딱딱한 바닥에 내팽개쳐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아마 철창 안에 던져넣은 거겠지. 그리고 역시나, 곧 끼이익─ 하고 낡은 철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여기에 가만히 있다간, 당신은 그대로 '거래'되어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 겁니다.
동시에 '목소리'가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뭔가 해야 합니다.
행동하라고.
만약 힘 위주로 찍은 전사였다면, [근력]으로 먼저 이 줄부터 끊었을 거다.
마법사였다면 [마법]을 사용해 줄을 태워버렸을 거고.
도적이었다면 몰래 숨겨두었던 날붙이로 [기교]를 발휘해 줄을 자르라고 했겠지만… 내겐 어느 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음유시인이었다.
그런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결국──
"저, 저기!"
"…음?"
'말빨' 뿐이었다.
"뭐야?"
"아, 그게..."
그런데, 일단 저놈이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불러세우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저… 그러니까..."
'우울한' 디버프 탓인지 막상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무슨 대사를 하면서 풀어달라고 했었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뭐 하자는 거지?"
그러자 용병이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장난치는 거냐!"
"자, 자루!"
그 목소리에 놀라, 그만 나도 모르게 바로 본론을 뱉어버렸다.
"뭐? 자루?"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이, 이것 좀… 버, 벗겨주세요…!"
"...뭐?"
용병이 어이없어하는 게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보이는 건 아니고 느껴졌다.
그야 마땅한 빌드업도 없이 다짜고짜 벗겨달라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왜?"
"다, 답답해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
--
[설득]
난이도 15
--
홀연 나타난 주사위들이 구르기 시작했다.
--
CHA 보정치 +25
우울한
--
비록 자루에 얼굴이 가려져 매력 스탯 5가 깎였다 한들, '대실패'만 아니라면 충분히 [설득] 가능한 난이도였다.
그러니,
'1만 아니면 된다…!'
--
⚀
--
'!?'
근데 떠버렸다.
--
⚂
--
하지만 그 옆에서 뜬 3으로 인해 '성공' 판정이 된 건지, 다행히도 주사위가 다시 한번 더 구르기 시작했다.
'우울한' 디버프 때문에 주사위가 두 개인 지금 상황에 어떤 식으로 적용될지 의문이었는데, 아무래도 저 두 개 중 무조건 높은 쪽을 고른 후 그걸 주사위 한 개로 치는 모양이었다.
--
⚃ / ⚃
결과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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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굴림은 양쪽 모두 4.
--
[설득]
성공
--
난이도 15를 훌쩍 뛰어넘는, 무난한 성공이었다.
"…그, 그래?"
상대방은 당신의 말에 묘한 설득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호소가 통한 모양이군요.
과정이야 어설펐지만, 어쨌든 통한 것이다.
자루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실루엣이 점점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허튼수작 부리면…"
그리고 그 기척이 머지않아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자루를 슬쩍 들춰낸 순간──
"──읏."
오랜만에 보는 빛에 본능적으로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이, 지금 내 눈앞의 상대에게는 어쩌면 윙크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
순간적으로 숨을 삼킨 그가 그대로 굳어버린 채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자각했다.
'──걸렸다.'
완벽하게, '매혹된' 모습이었다.
꿀꺽, 놈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저기, 마저 벗겨주실래요…?"
"어? 어, 어! 그, 그래…!"
이어 최대한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척 슬쩍 시선을 피하며 부탁하자, 그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반쯤 들춰내다 말았던 자루를 홱 젖혀버렸다.
그것으로 자루의 간섭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됐다…!'
역시 먹힌다. 먹힌다고.
가진 게 얼굴뿐이라고? 그럼 얼굴을 써먹으면 되잖아! 역시 내 작전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미인이야…!'
내 빌드는 틀리지 않았다.
이 얼굴로 나는 내 목숨을,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이 끝내주는 얼굴 하나만 있으면,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난 얼굴천재다…!!'
당신을 향한 열렬한 시선을 느끼며, 당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주목받고 있군요.
--
「관심종자」 특성 발동
현재 상태 : '행복한'
--
'갈채하라!'
미의 신의 현현이라 불릴 나의 빼어난 미모에 갈채하라…!
003화. 허약체질 관심종자 얼굴천재 (3)
눈앞의 상대는 당신에게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루를 벗겨낸 용병은 그대로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다시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매혹되었군요.
마치, 내 다음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의 관심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젠 여기서 나갈 차례였다.
"마음에 들어요?"
"…으, 응?"
"제 얼굴."
용병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 그대로 나의 미모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 모습을 보며, 무심코 씩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같이 나갈까요?"
"...어?"
"아무도 안 올 만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줘요."
내 말에, 한순간 용병이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완전히 넋이 나가 있던 그의 눈빛도 잠시나마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나의 입장상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왜, 왜지…?"
"…하아."
그에 나는 보란 듯 한숨을 내쉬고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걸 물어봐야 알아요?"
그는 고분고분했던 아까까지와는 완전히 뒤집힌 내 태도에 적잖게 당황한 듯했지만,
"그야, 남들한테 보이면 곤란한 일을 하고 싶으니까 그렇겠죠?"
"…!"
잠시뿐이었다.
"그러니 아무한테도 방해받는 일 없이 단둘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좋겠는데."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숙인 그대로 슬쩍 눈을 치뜨며 이렇게 말하자마자,
"...."
꿀꺽, 한 번 더 침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설득]을 위한 주사위 굴림조차 필요 없었다.
방금의 한 마디로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린 건지 그가 다시금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왜 내가 갑자기 자신을 유혹해 오는 건지 그 이유를 생각할 여유 따위는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로.
"따, 따라와라."
결국 그는 나를 도로 일으켜 세웠다.
다만 손발의 결박은 역시나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다,
"여기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자루를 씌워두마. …괘, 괜찮겠지?"
나를 몰래 데리고 나가는 걸 들켜선 안 된다며 내게 다시 자루를 씌우려 했다.
뭐,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 이렇게 자루를 벗은 채로 나간다면 나의 이 미모는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 없을 테지. 분명 지금 이 야영지에 있는 인간들이 죄다 모여들고 말 거다.
물론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볼 수 없다는 단점은 있겠지만, 적어도 철창 안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단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그렇다고 지금 머릿속이 오직 욕망만으로 가득 찼을 이 녀석이 딴맘을 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미 한번 '매혹된' 이상 내 얼굴이 잠시 가려진다고 해서 다시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빨리 다시 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이곳을 빠져나가는 속도를 높인다면 모를까.
그래서 동의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놈은 서둘러,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내게 도로 자루를 씌웠다. 그러고는 마치 처음 이 철창으로 끌고 올 때처럼 내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부디 누군가에게 걸려 귀찮아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나는 얌전히 녀석을 따라갔다.
이미 매혹이 걸려 '주목받는' 상태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다행히 이번에는 얼굴이 가려졌음에도 '우울한' 디버프가 걸리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내 감각들도 멀쩡해, 비록 보이는 건 없었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내 밧줄을 당기는 세기나 걸음소리만 들어도 놈이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러다 얼마 후부턴 더 이상 주변에서 말소리를 비롯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부터 풀잎들이 내 발목을 간지럽히듯 스치는 감촉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야영지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해 근처의 숲을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자루를 다시 벗겨줄 때까지는 얌전히 놈을 따라가기로 했다.
아무리 매혹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는 해도 놈이 나를 경계하는 기운은 지금껏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나 혼자만 놔두고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 어차피 손발도 묶어두고 눈도 자루로 가려놨는데, 무기도 마법도 없이 고작 노래나 부를 줄 아는 1레벨짜리 음유시인 따위가 이제와서 뭘 하겠냐는 거다. 자기한테 해코지는커녕 도망치지도 못할 텐데.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내가 평범한 음유시인이었다면, 말이지.'
놈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평범한 1레벨 음유시인이 아니었지만.
무려 매력 30의, 미의 신의 현현이라 불리게 될 1레벨 음유시인이다.
사실 보통의 서포터 음유시인 빌드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극단적으로 매력을 찍는 경우가 없었다.
음유시인은 근본적으로 비전투 상황에서 활약하는 클래스라 다양한 스탯 판정들을 통과하기 위해선 여러 스탯을 골고루 찍어주는 편이 나았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매력을 시작부터 20까지 찍는다고 해서 초반에 걸어줄 수 있는 아군 버프가 극단적으로 좋아지냐? 하면 그것도 또 아니었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석적인 서포터 음유시인의 이야기일 뿐.
내가 이 빌드를 짜면서 가장 핵심 스킬로 생각했던 건, 바로 「독설」이었다.
정석적 음유시인의 핵심 스킬인 「격려」, 「음유시인의 노래」와 같이 1레벨부터 사용할 수 있는 음유시인만의 고유 클래스 스킬로, 위의 두 개가 현란한 연주와 말빨로 아군을 고무시키는 스킬이라면 이쪽은 문자 그대로 적에게 「독설」을 날려 전의를 떨어뜨린다.
정신을 부숴 대미지를 주는 것과 동시에 말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대미지가 들어간다. 그리고 이 대미지는 매력 스탯을 기반으로 정해진다.
「경국지색」 특성이 이 빌드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매력 스탯을 높여주는 것도 높여주는 거지만, '매혹된' 상태가 되면 「독설」 같은 매력 기반 스킬들은 무조건 치명타가 터지니까.
그러니 무기도 마법도 필요 없었다.
내 혀가 무기고 마법이었다.
"어이, 이쪽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를 용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서는 다시 내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말없이 자루를 홱 벗겨버렸다.
"...!"
그렇게 내 얼굴이 다시 드러난 순간, 놈은 처음 나를 봤을 때처럼 숨을 삼켰다.
다만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잔뜩 얼굴이 붉어진 채였고, 숨소리도 거칠어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그 몇 십 분 사이에도 내 얼굴을 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확실히 이젠 인내심의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나는 먼저 가볍게 밀쳐냈다. 그러고는 당황한 듯 바라보는 놈을 향해 말없이 슬쩍 양손을 올려 보였다.
그러자 뒤늦게 이해한 놈은 바로 허둥지둥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나의 양손을 묶은 밧줄을 잘라냈다.
그 후 아래쪽도 잘라달라고 하려 했지만, 놈은 손의 줄을 잘라내자마자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나를 거칠게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한시라도 빨리 나와 '남들한테 보이면 곤란한 일'을 하고 싶은가 보다.
그럼 뭐, 해드려야지.
"──야."
씩 입꼬리를 올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내게 다가온 용병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
'매혹된'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이어 천천히 입을 열어,
『내가 진짜 너 같은 XXXX랑 할 것 같냐 이 XX XXX XXXX야? 꿈 깨시지 XX XX XXX.』
"──!?"
방송이었다면 삐─ 소리로 죄다 뒤덮였을 「독설」을 놈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퍼부은 순간,
--
치명타!
'노예상의 용병'의 정신이 붕괴되었다!
--
"──컥!"
돌연 머리를 부여잡은 놈의 눈이 완전히 뒤집히더니, 이내 입에 거품을 물며 힘없이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다.
놈이 바라는 대로 '남들한테 보이면 곤란한 일'을 해준 것이다.
바로 「독설」을 퍼부어 사람을 죽이는 일 말이지.
"어, 잠까── 앗?!"
그렇게 고꾸라진 놈은 그대로 내 위로 엎어져 버렸고, 나는 자연스레 깔려버리고 말았다.
"아 진짜…!"
힘이 2밖에 안 돼서 그런지 좀 낑낑대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몸을 비틀어 가며 무사히 빠져나온 나는 바로 바닥을 나뒹굴던 단검을 주워 발 쪽의 밧줄도 마저 잘라낸 후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중에도 놈은 여전히 바닥에 엎어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야 시체니까.
마침내 완전히 자유를 되찾았지만… 아직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이를지도 모르겠다.
"…어디야 여기?"
아마 숲속 깊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숲이 아닌 벽으로 둘러싸인 실내… 정확히는 어떤 방이었다.
드문드문 횃불들이 걸려있는 덕에, 그 벽이 낡은 벽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아니, 설마."
순간적으로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나가보면 알게 될 테니,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을 나섰다.
바깥에는 방 안과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횃불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그것들을 지표 삼아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어둠을…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복도를 헤쳐 나가고 있자니, 아까 애써 부정했던 가능성이 자꾸만 스멀스멀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 수밖에 없었다.
…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거다.
확실히, 방금 떠오른 그 장소라면 내가 저놈에게 부탁했던 '아무도 안 올 만한 으슥한 곳'에 부합하기는 한다만 말이다.
그래, 분명 부합하기는 하지만──
"──케륵."
'아, 시X.'
너무 부합하잖아…!
'그 미친 새끼가…!'
무심코 소리를 칠 뻔했던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모퉁이의 벽에 숨었다.
그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그 후 조심스레 벽 너머로 빼꼼 한쪽 눈을 내민 순간,
'...!'
그만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고블린들과 눈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케륵."
그래, 고블린'들'.
한 놈이 아니라 두 놈이었다.
그런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저 애초부터 이쪽을 보던 게 우연이었던 건지는 몰라도 고블린들은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적어도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냥 다행이라고 말하기에는 역시 무리였다.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봐버린 이상,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분명, 아무도 안 올 만한 곳에 데려가달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여긴… 여긴 너무 안 올 만한 곳이잖아 또라이 새끼야…!'
아무리 욕망에 눈이 멀었어도 그렇지, 그 많고 많은 으슥한 곳 중 고른다는 게 하필,
'하필 던전이냐...?!'
그래, 이곳은 던전이었다. 틀림없이.
004화. 허약체질 관심종자 얼굴천재 (4)
당신은 저 생물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자동으로 [환경] 판정이 성공하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덩치, 흉측한 얼굴, 크고 뾰족한 코와 귀.
고블린이군요.
'알아 이 새끼야…!'
저놈들이 고블린이라는 당연한 사실뿐만 아니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정확히는, 어떤 던전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고블린 미궁」.
초회차 플레이어들이 프롤로그가 진행되는 노예상들의 야영지에서 탈출한 뒤 지도도 없이 헤매다 종종 도착하곤 하는 던전으로, 사실상 튜토리얼용 던전이라 할 수 있다.
이 게임의 던전들은 이런 곳이다, 하고 맛보기로 알려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그런 튜토리얼용 던전답게 난이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뭐가 됐든 문제는 던전이란 사실이었다.
'돌겠네.'
아까 전의 그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졌던 방은 역시나 '휴게실'이었던 모양이다.
용병놈이 그걸 알고 나를 거기로 데려간 건 아닐 거고, 아마 본인도 몰랐겠지. 여기가 던전이라는 것 자체부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휴식'을 취하려고 던전으로 들어오겠나.
그냥 적당히 으슥한 곳을 찾다 뭔 동굴 같은 게 있길래 살펴봤다가 어쨌든 여기면 쉬기에 좋겠다 싶어서 냅다 들어온 거겠지. 애초에 던전 안 휴게실들의 설정 자체도 그런 셈이고.
「고블린 미궁」에는 총 두 곳의 휴게실이 존재한다. 던전 초입부에 하나와, 소위 보스방 근처에 하나.
놈이 나를 보스방 앞까지 데려왔을 리도 없으니 이번에는 전자 쪽일 터.
그러니 다시 말해,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던전의 입구… 이 경우엔 출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케륵? 케르륵!"
문제는 그 유일한 출구로 향하는 길목을 저 고블린들이 완전히 가로막고 있다는 거였고.
「고블린 미궁」이라는 이름답게 이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전원 하급 고블린이다. 보스도 좀 센 고블린이고.
고블린은 게임 속에 등장하는 최약체 몬스터 중 하나다. 그러니 솔직히 하나씩만 놓고 보면, 딱히 내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 보스 고블린조차도 지금의 나라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다만,
고블린은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몬스터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하나씩만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당신은 이런 속담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고블린을 봤다면 그곳엔 열 마리의 고블린이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여긴 고블린 소굴이고 저 두 마리는 스무 마리의 일부일 뿐이었다.
거기에, 저것들이 우연히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케륵!"
고블린들의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어도, 저것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건 저 몸짓들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고.
아마 휴게실에 머무는 동안 엇갈린 모양인데, 저것들은 분명 입구 쪽의 '함정'을 건드린 놈── 그러니까, 휴게실에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 용병놈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던전들의 입구에는 인공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으레 침입자들에 대한 '경보' 역할을 하는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다.
거기에 걸리면, 이제 흔히 게임 속 던전하면 떠올리는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그런 곳이 되는 거다.
빌어먹을 용병놈은 그걸 하필 또 생각 없이 밟아버린 거고.
요컨대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저 두 놈들처럼 다들 '경계' 상태가 되어 던전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소리다.
아무리 고블린들이 최약체라고 해도 다수와 싸우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특히나 지금의 나로서는 더더욱.
따라서 여기서 다시 뒤로 돌아가 저놈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두 마리를 피하려다 열 마리 스무 마리를 마주치게 되느니, 차라리 더 늦기 전에 저놈들을 처리하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일단 내 「독설」이 실제로 잘 먹힌다는 건 그 멍청한 용병놈이 증명했다.
다만… 애초에 솔로 플레이를, 하물며 홀로 던전을 돌아다니려고 짠 빌드가 아니었다.
고블린에 비하면 거의 두세 배는 튼튼할 용병놈도 한 방에 보내버릴 정도로 막강한 딜이 나오는 건 사실이나, 그만큼 힘과 민첩을 희생했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을 애초부터 만들면 안 됐다.
「독설」은 단일 타겟 스킬이었다. 한 번에 한 놈에게만 퍼부어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적어도 1레벨인 지금은 그랬다.
그리고 단순히 독설을 날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 따지자면 그 독설을 통해 발현되는 일종의 마법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의 언어를 모르는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에게도 통하는 것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다시 사용하는 데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게임으로 치면 한 턴, 현실로 치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몇 초 정도가.
때문에 저 고블린 중 만약 하나라도 내게 거리를 좁혀와서 공격을 해온다면… 솔직히 그걸 내가 피하거나 버텨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독설」을 제외하면 지금 내가 가진 진짜 무기는 아까 챙겨온, 지금 손에 쥔 단검 한 자루뿐이었다. 제대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젠장.'
하지만 여유롭게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어 보였다. 고블린들이 이쪽으로 오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지금이야 모퉁이 덕에 숨어있다고는 해도 결국 외길이라 아예 도망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한 놈을 먼저 처리한 다음, 다른 놈이 나에게 거리를 좁혀오기 전에 처리한다.
이게 지금 내 최선이자 유일한 수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우선은 저놈들과의 거리를 최대한 더 벌려야 했다.
그렇기에,
'이것밖엔 없다…!'
어차피 들고 있어도 제대로 쓰지도 못할 게 뻔한 단검을 그냥 냅다 던져버렸다.
"케륵!?"
고블린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너머를 향해.
저 멀리 던져 고블린들의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
한데, 행동하는 데에 급했던 나머지 잠시 잊고 말았다.
만약 내가 '내가 기억하는 나'였다면 지금 의도했던 행동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힘2짜리 허약체질 음유시인이라는 것을.
"──아."
덜그럭, 하고.
내 손을 떠나 '힘'없이 날아간 단검이 고블린의 머리 위를 넘어가기는커녕 오히려 발밑에 떨어지고 마는 광경을 보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고블린들은 자연스레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그러니까 나를 보게 되었다.
"...."
시선을 끌긴 했는데 최악의 방식으로 끌어버리고 만 거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진짜 무기를 졸지에 상대 앞에다 버려버리는 식으로.
"…케륵?"
그래서 지성이랄 게 거의 없는 고블린들조차도, 결과적으론 자기들보다 지성이 부족한 듯한 짓을 한 나를 보면서 그 진짜 의도를 재려는 듯 잠시 멀뚱멀뚱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니까, 뭐,
"…시X."
욕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케륵!!"
아니나 다를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고블린들은 이내 생각을 멈췄는지 바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니, 네 엄마 고블린!』
당황한 나는 급하게 생각나는 「독설」을 날렸다.
그 순간,
--
'고블린 병사'의 정신이 붕괴되었다!
--
"케륵!"
타겟이었던 고블린 한 마리가 아까의 용병처럼 눈이 뒤집히더니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케, 케륵!?"
뭔가 제대로 된 공격이나 마법 같은 게 날아온 것도 아닌데 옆에서 같이 달리던 동족이 돌연 그렇게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남은 고블린 하나는 움찔 놀라더니 그대로 잠시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땅을 박차 달렸다.
당연히, 반대편으로.
"케, 케르륵! 케륵──!"
그렇게 도망치기 시작한 나를 보고 내가 방금의 정체 모를 공격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눈치챈 건지 아니면 그냥 동족이 죽자 화가 난 건지는 몰라도, 결국 놈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짜증 나는 이유가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었다. 개개인은 약한데, 같이 있던 동족이 공격받거나 죽거나 하면 저렇게 화가 나서 버프를 받아버리거든.
"아, 진짜…!"
무서운 속도로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놈을 보며, 나는 다급히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앗."
턱, 하고.
어설프게 빨리 움직이려던 다리를, 그만 스스로 걸어버리는.
콰당!
그 결과는 당연히 그대로 땅에 엎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온몸이, 특히 안면이 부끄러움 이전에 그냥 순수한 고통으로 달아올랐다.
지금의 나는 힘만 2인 게 아니라, 민첩도 3이라는 사실을 또 뒤늦게 깨닫게 해주는 아픔이었다.
엿 같은 운동치 설정이, 여기서 정말 문자 그대로 내 다리를 걸어버리고 만 거다.
"이, 이 시X…!"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난한 빌드를 짜는 거였는데…! 뭔 운동치냐 운동치는…!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내가 그렇게 엎어져 겨우 몸을 가눌까 말까 하는 사이,
"케르륵──!"
잔뜩 화가 난 고블린은 어느새 내 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내 머리를 아무런 과장 없이 그대로 쪼개버릴, 무딘 칼 한 자루를 높이 치켜든 채로.
그 순간,
"...!"
문득, 움직이던 칼이 그대로 제자리에 멈췄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랬다.
괴성을 내지르던 고블린의 벌려진 입도.
벽에 걸려 일렁이던 횃불도.
튀어 오른 바닥의 작은 돌멩이들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정지된 프레임 속에서, 어느새인가 주사위들이 내 앞에 떠올랐다.
그 초현실적인 광경에,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을.
내가 지금 내리쳐질 저 무딘 칼을, 과연 피할 수 있을지를 가를.
지금 구르고 있는 저 주사위들에 의해, 앞으로의 내 운명도 갈릴 순간이었다.
다시 말해 이대로 피하지 못한다면 저 무딘 날은 예상 그대로 내 머리를 갈라버릴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운명을 '회피'하는 데에 필요한 수치는,
--
회피 굴림 시도
난이도 10
--
10.
그리고 그 회피에 영향을 끼치는 나의 민첩 수치는,
--
DEX 보정치 +3
--
3.
즉, 무슨 난리를 쳐도 나는 저 칼을 피하지 못했다.
딱 하나의 가능성, '대성공'을 의미하는 주사위값 6이 뜨지 않는 한.
--
넘어진
--
게다가 심지어 지금 나는 하필 또 '넘어진' 상태라, 확정적으로 '치명타'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죽는다고?'
100% 확률로 저 칼에 즉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고블린한테?'
그게 내 운명이었다.
'...아니.'
그것을, 뒤집기 전까지는.
'이대로 허무하게 뒤질 것 같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그냥 아무것도 못 해보고 이렇게 고블린의 칼에 죽어버리느니, 최소한 뭐라도 잡아보려 몸부림이라도 치겠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잡을 건 지푸라기 같은 게 아니라──
『──Ālea,』
내 영혼이었다.
『iacta,』
소울 스톤.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지금 읊은 건, 단순히 명언 같은 게 아니었다.
'시전어'였다.
──「별의 순간」.
한 사람의 삶에 아주 드물게 찾아온다는,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운명적인 순간을 잡기 위한.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힘.
흉성의 용사── 지금은 내 몸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그 「별의 순간」이라 불리는 기회를 잡는 이 스킬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을 운에 맡기느니 내 손으로 쟁취하겠다는, 나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였다.
그 의지에 응답한 주사위들의 속도가 점점 더 느려지더니, 곧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은 그 힘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주사위가 뒤집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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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 / 6)
--
운명도 뒤집혔다.
--
대 성 공
--
나는 몸을 뒤집었고.
세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욱!
그러면서 내려쳐진 칼날은 그대로 내 머리가 아닌 허공을 갈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금 전의 「독설」을 통해 소모되었던 마력이 다시 내 안에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위 쿨타임이 찬 것이다.
『──네 아빠 고블린!!』
「독설」을 퍼부을.
"──케륵?!"
머릿속에서 당장 급하게 떠올린 출생의 비밀(?)이 고블린들 사이에서 얼마나 심한 모욕으로 쓰이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내 눈앞의 고블린에게는 통했다는 거겠지.
최소한 검을 다시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입에 게거품을 물고 졸도해 버릴 만큼은 말이다.
잠시 적막이 깔렸다.
"...휴."
그렇게 내 발 앞에 힘없이 쓰러져선 미동도 보이지 않는 고블린의 모습에, 내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까지는.
그러다 보니 긴장이 풀리며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 나머지 결국 나는 놈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말로 아슬아슬, 과장 없이 정말 죽다 살아난 상황이었으니까.
"겨우 살았다아아...."
내가 놈의 칼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했던 스킬인 「별의 순간」은, 던져진 주사위의 값을 무조건 '대성공'인 6으로 고정시키는 스킬이었다.
그런 압도적인 성능을 지닌 스킬이니만큼 원래 스토리 상으론 꽤 나중에나, 최소한 중반부쯤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이었다.
훗날 흉성의 용사──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운명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 운명을 비틀 비장의 일격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건 애초부터 없던 능력이 새로 생기는 게 아니라, 굳이 따지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을 깨우는 것에 가까웠다.
처음 상태창을 확인할 때도 보았던, [고유 스킬]란에 적혀있던 '???'의 정체가 바로 그 스킬이었으니까.
그러니 그 능력을 사용할 시전어만 안다면 지금 당장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했고, 다행히 그 예상이 들어맞은 거다.
"…정말로 다행히, 말이지."
비록 맞지 않았으면 칼에 맞을 상황이었다는 게 심히 유감스럽기는 해도.
다만 다행인 건 다행인 거고, 어찌 됐든 이렇게 마냥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틀림없이 근처에 있을 고블린들이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 소리를 전부 들었을 터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놈들이 더 몰려들 게 뻔했다. 고블린 자체가 태생적으로 그런 몬스터기도 하고.
당신은 운명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사용하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별의 순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적어도 하루가 지나기 전까지는.
설정상 그날 하루의 '운명력'… 요컨대 운을 죄다 끌어 쓰는 뭐 그런 개념이라나.
그렇기에 나는 도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시라도 빨리 이 던전에서 벗어나야 했다.
지금은 던전을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돌아다닐 만한 상황이었다 해도 여기 이 「고블린 미궁」은 굳이 돌 만한 이유가 마땅히 없는 곳이었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니 예상대로 출구는 금방 나왔다. 그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그 빛을 향해 달려 던전을 빠져나왔다.
* * *
던전을 빠져나온 나는 슬슬 싸늘해지는 공기를 맞으며 한동안 숲속을 걸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당장 처한 위기들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급급해 제쳐두어야만 했었던 생각들을 다시 곰곰이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간 끝에 내린 결론부터 말하자면,
"...X됐네 진짜."
였다.
지금 내가 주변에 나를 주목해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우울한' 상황이라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들이 스멀스멀 떠올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진짜로 X됐다.
물론 그건 앞서 노예로 팔려 가기 일보직전이던 상황이나 또는 아까 던전에서 그 고생을 하며 증명된 것처럼, 이 '허약체질 관심종자 얼굴천재'의 몸뚱아리가 써먹는 데에 여러 제약이 걸려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이 몸뚱아리 자체가 문제였다.
정확히는 내가 게임의 주인공인 '흉성의 용사' 본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왜냐?
나는 이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이 세상은 다 같이 X되고 말 거다. 이 게임의 스토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우선 대륙 최북단에 있는 마왕성으로 가 '마왕'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정석적인 용사 스토리지.
놈을 가만히 놔두게 되면 놈은 곧 이 세계의 파멸을 앞당기는 행동을 과장 없이 100퍼센트 해버릴 텐데, 그걸 막을 건 유감스럽게 나 흉성의 용사밖에 없었다.
물론 단순히 강함의 문제 같은 거였다면 그냥 이 세계의 실력자들을 찾아 그들을 성장시켜 마왕을 토벌시키게끔 이끄는… 소위 말해 버스를 타는 방법을 써먹어도 어쩌면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해야 했다. 설정이 그랬다.
이… 몸이.
까놓고 말해 이 몸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
마왕을 막을 유일한 열쇠를 문자 그대로 내가 품고 있는지라, 무조건 부숴야만 하는 반지 같은 느낌으로 일단 마왕의 앞까지는 어떻게든 운반해서 끌고 가야 했다.
요컨대 버스를 타는 승객은커녕, 그 버스를 모는 기사가 될 수도 없었다.
그냥, 내가 버스였다.
군말 없이 묵묵히 굴러가야 하는.
그렇다고 죄다 포기해 버리고 그냥 멸망 전까지 나 몰라라 해버리기엔, 어쨌든 내가 좋아해 왔던 이 세계를 망쳐버린다는 죄책감 이전에 그냥 내가 세상보다 먼저 터져버리고 말 터였다.
이 안에 깃들어있는 영혼을 빌어먹을 마왕놈과 같이 어떻게든 '처리'해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은 없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냥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여태껏 해왔던 수많은 모험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다시 한번 더 이 세상을 구해야 했다.
이번에는, '허약체질 관심종자 얼굴천재'로서.
005화. 술과 노예 (1)
앞서 말했듯, 나는 버스다.
일단 밟기만 한다면 최고 속력은 웬만한 스포츠카 뺨치게 나오겠지만… 문제는 무언가가 좀 빠져 살짝 하자가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핸들이라든가.
힘과 민첩 스탯이 모험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치로 여겨지는 4보다 낮은지라, 정말 업혀 다녀야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나를 '캐리'해줄 기사님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즉, 동료들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내가 찾아온 곳은──
슈타우트.
이 게임의 '첫 지역'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조디악 대륙에서 숭배하는 열두 신의 이름을 각각 딴 열두 개의 도시 국가, '12도시' 중 하나로 물의 신인 '슈타리온'을 섬기는 도시입니다.
내가 빙의하게 된 주인공, 흉성의 용사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눈을 떴다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특정한 장소에 온다든가 광경을 보는 것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되고, 그러면 지금처럼 이 '목소리'가 반응해 그 기억을 되짚어주곤 한다. 때로는 회상을 통해 직접 보여주기도 하고.
어쩌면 저곳에는 당신의 구멍 난 기억들을 되살릴 단서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드는군요.
따라서 게임의 초반부는 이런 식으로, 흉성의 용사가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이끌려 본인의 기억을 하나둘씩 되찾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지금처럼 탈출에 성공한 루트에서도, 혹은 탈출에 실패해 노예가 되는 루트에서도 이곳 슈타우트는 그 이야기의 첫 무대가 되는 지역이었다.
사실상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는 곳이랄까.
뭐, 지금은 기억이 아니라 동료들을 찾으러 가고 있지만.
으레 성벽을 두른 대도시들이 그렇듯, 슈타우트 역시 마찬가지로 저 성문을 넘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선 먼저 경비들의 검문을 거쳐야 했다.
역시나 12도시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대도시답게 대기 줄은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꽤 긴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어 금방 내 차례가 올 것 같았다.
사실 말이 검문이지 간단히 신원만 확인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슈타우트는 1레벨, 혹은 갓 2레벨을 찍은 플레이어들이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는 도시다.
흔히 말하는 '레벨 디자인'의 일환이라고 할까.
지리상으로도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마족 세력과 맞대고 있는 최전선── '장벽'이 있는 북쪽과는 아예 딴판인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거다.
실제로 근처에서 출몰하는 마물들도 대체로 북쪽에 비하면 온순한 편이고. 그다지 호전적이지 않다는 의미로도, 레벨이 낮아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그러니 좋게 말하면 여유롭고 나쁘게 보면 군기가 빠져 있어 이런 검문도 웬만큼 수상쩍어 보이는 게 아니라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우선 나는 여기서 한 번 제지당할 예정이었다.
그게 이번 '검문 이벤트'의 내용이었다.
신원만 확실히 확인되면 무사통과가 가능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신원불명의 상태였다. 확인하려야 확인할 신원 자체가 없고, 한술 더 떠 설정상으론 기억조차 없는.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통과할 수 없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검문 이벤트를 통과하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방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성향이나 스탯 등을 고려해 그냥 골라잡으면 됐다.
예를 들면 적당히 말빨로 호소를 해서 [설득]을 하든가, 아니면 대충 신원을 속이는 [기만]을 하든가.
이런 식의 대화에 자신 없는 캐릭터로 짰다면 아예 근처에서 남의 신분증 같은 걸 훔치든가, 혹은 그냥 정정당당(?)하게 뇌물을 찔러줘서 통과하든가.
또 이런 방법들이 전부 불가능할 경우엔, 일단은 순순히 물러난 다음 근처를 돌아다니며 곤란해 보이는 사람── 요컨대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우고 있는 사람을 찾아 퀘스트를 받은 다음 그걸 해결해준 대가로 함께 동행인 척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식의, 이 게임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려주는 이벤트인지라 딱히 걱정할 건 없었는데... 이번엔 조금, 경우가 달랐다.
솔직히, 정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다소 걱정이 들 정도로.
"자, 다음…"
아니나 다를까,
"...!?"
방금 전까지 의욕 없는 얼굴로 건성건성 검문에 임하던 경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바로 움찔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슈타우트는 대도시다. 유동인구가 굉장히 많은.
그런 데에서, 가히 미의 신 급이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닌 내 얼굴을 내놓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도시 전체가 뒤집어질 거다. 아니, 진짜로.
다들 이 얼굴을 한 번 보겠다고 몰려드는 바람에 내 발이 묶여버릴 건 둘째치고, 죄다 매혹에 걸려버려 날 독점하겠답시고 치고받고 싸우다 결국엔 대형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물의 도시라 불리던 곳이 순식간에 여기저기 타오르는 불의 도시가 되는 거다.
그러니 이 얼굴은 정말 필요할 때만 꺼내야 하는 비장의 무기 같은 건데, 문제는 지금의 내게는 얼굴을 완전히 가릴 만한 투구 같은 물건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건 고블린을 쓰러뜨린 후 도로 주웠던 단검 한 자루와, 혹시 몰라 챙겨뒀던 자루 하나뿐이었다.
그래, 내 얼굴에 씌워져 있던 그 자루.
"...??"
다시 말해, 지금 나는 눈구멍 두 개만 살짝 뚫려있는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런 나를 보고 있는 경비가 어느새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제자리에 굳어있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인 셈이었다.
솔직히, 누가 봐도 영락없는 강도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대놓고 성문 앞을 지키는 경비에게 검문을 받으러 온.
그 탓에 인지부조화가 세게 온 듯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경비는 이걸 당장 체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히 고민 중인 듯 보였다.
"뭐, 뭡니까 당신...?"
그러더니 결국 굉장히 조심스러운 투로 말문을 뗐다.
허리춤에 찬 검을 향해 슬쩍 손을 내리면서 말이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겁니까…?"
혹시라도 내가 수상쩍은 반응을 보이면 당장에라도 그걸 뽑을 것처럼.
그러자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주변에선 다들 이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어붙은 공기 속, 주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자루를 뒤집어쓴 강도 의심자(?)인 나는 먼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슬쩍 들어 올린 양손을 그대로 쫙 펼쳐 보였다. 혹시라도 절대 수상한 짓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안심하십시오."
그러고는 이를 보고 한 번 더 흠칫한 경비를 보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정이 있어 비록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
"제 얼굴이, 차마 다른 분들에게 함부로 보여드릴 만한 것이 못 돼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함부로 보일 수 없는 얼굴인 건 뭐, 어쨌든 사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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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난이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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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기만]이 아닌 [설득] 판정이 되었다.
어차피 둘 다 매력 스탯 기반의 판정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지만.
요구 수치가 20이라는 건, 이런 초반의 일반적인 스탯 배분을 고려해보면 사실상 실패하라고 만든 난이도였다.
하지만 내 매력 스탯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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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 보정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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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이렇게 얼굴이 가려진 상태에서도 2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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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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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굴릴 주사위도 두 개고, 만에 하나 두 개 모두 1이 나와 대실패가 뜨더라도 지금처럼 '주목받는' 상태라면 「관심종자」 특성 덕에 한 번 더 주사위들을 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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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과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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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정말 어지간해선 실패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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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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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습니까...?"
상대방이 당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연민을 느낍니다.
그렇게 [설득]에 성공한 결과, 아무래도 내가 딱한 사정이 있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런… 시, 실례했습니다. 고생이 참 많으시겠군요."
"예, 정말로요. 하하…"
"혹시 슈타우트 시민이십니까?"
"아뇨, 타 지역에서 온 모험가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귀하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으십니까? 모험가 길드 등록증 같은 것 말입니다."
방금 [설득] 주사위를 굴렸던 건 내가 수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다짜고짜 공격을 받을 위기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게, 음… 없습니다."
"…예?"
그러니 이번에는, 통과를 위한 굴림의 차례였다.
"모험 중에 도적을 만나 겨우 도망쳤는데, 그때 가진 짐을 전부 털려버린 바람에…."
"...."
이 해명에, 재차 경비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다시 한번 주사위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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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난이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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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이도 자체는 오히려 아까보다 낮아졌다.
그렇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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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 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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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이번 역시 쉽게 속여넘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경비는 당신의 사연을 듣고 측은함을 느끼는 것 같군요.
"정말로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실제로 그는 바로 의심을 거두고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원칙대로라면 안 되는 거지만, 사정이 워낙 딱하시니 이번 한 번만 예외로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나는 뒤집어쓴 자루 덕분에, 들킬 걱정 없이 마음껏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고.
* * *
그렇게 성문을 지나 들어오게 된 슈타우트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름다운 도시였다.
우선 물의 신을 섬기는 도시답게 분수나 연못 등의 물을 이용한 시설들이 굉장히 많았다.
기후도 해안을 둔 온대 기후에, 관개가 잘 된다는 지역적 특성은 농업과 과수업을 발달시키며 자연스레 주조업의 발전을 낳았다.
쉽게 말해 먹고 남은 것들은 죄다 술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대륙에서 가장 맛있다는 평가를 받는.
거기에 앞서 언급했던 초반 지역다운 평화로운 분위기의 영향으로 골목마다 주점들이 늘어져 있었고, 그만큼 놀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아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쳤다.
그러니 마음만 같아선 진득하게 눌러앉아 도시를 마음껏 관광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뭐, 언젠가 그럴 기회가 있을 거다.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술을 찾고 있습니다."
"술, 이요…?"
내 말에, 눈앞의 상대는 바로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대뜸 술을 찾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말이다.
그럴 만도 한 게, 내가 모든 걸 제쳐두고 가장 먼저 달려온 이곳이 주점이 아닌 어느 한 상회의 사무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술이 가장 유명한 특산품인 도시에서 활동하는 상회에 찾아와 술을 찾는 행위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내 눈앞의 상대가 독대하고 있는 게 웬 이상한 존재만 아니었다면.
"그, 그러시군요."
정확히는, 자루를 뒤집어써 누가 봐도 강도처럼 보이는 손님만 아니었다면.
당연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와 그가 독대하게 되기까지도 여러 차례의 [설득] 과정들을 거쳐야만 했다.
성문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보자마자 움찔 놀라며 막으려 한 이곳의 경비들은 물론이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보고 당황한 이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어떤… 술을 찾으시는지…?"
일단 내가 강도가 아니라는 건 [설득]해냈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경계의 기색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술을 찾고 있습니다."
"…저희 상단에서 취급하는 물건들은 전부 여기 슈타우트에서 직접 주조하는 최상급의 술들뿐입니다. 그러니 품질에 대해서라면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 말과 함께 씩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 어차피 보이진 않았겠지만.
"소식통에게 듣기로는, 최근 거의 몇 백 년은 숙성된 특별한 물건을 얻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마치, 엘프처럼요."
엘프. 내가 이 단어를 입에 담은 순간, 나를 바라보는 직원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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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난이도 23
--
다시금 판정이 시작되었다.
이런 극초반에 난이도가 20조차 아닌 23이라는 건 아주 조금의 성공 가능성도 허락지 않겠다는, 사실상 성공하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난이도였다.
그럴 수밖에.
그야 사정이 있다고 [설득]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겉보기엔 누가 봐도 여길 털러 온 게 분명한(사실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도 아니고) 복면강도가, 다짜고짜 사실 너희가 몰래 노예를 사고팔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 말을 들으니 저도 굉장히 관심이 가서 말이죠."
하물며 얼마 전 엘프 노예를 구해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거듭 말했듯, 내 매력 스탯은 이미 일반적인 기준을 한참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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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과 28
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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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내가 누군지, 또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으며 어떻게 그들의 은어를 알고 쓰는지 같은 건 이 사내에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이미 [설득] 당했으니까.
"저희가 진정한 애주가분을 몰라뵈었군요."
내가 진짜 그들의 '손님'이라고.
"그런 것이라면, 저희가 운영하는 양조장을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니 철썩같이 나를 같은 편이라 믿고 이런 음흉한 미소와 함께 '초대장'을 내미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 진정한 애주가분들을 위한 파티가 열릴 예정이거든요."
술 경매가 아닌,
"찾으시는 '엘프와 같은 특별한 술'도, 분명 그 자리에서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노예 경매를 위한.
"그거 참,"
물론 노예를 사들일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
"기대되는군요."
그곳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다.
006화. 술과 노예 (2)
슈타우트는 밝은 도시다.
활기 넘치는 사람들(NPC)도 그렇고, 디자인이라고 할까 도시의 색채 자체도 밝고 화려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늘 어둠도 있는 법.
대륙 최대 도시인 '티아리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지라 마냥 '밝은 사람들'만 모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다만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 역시 이런 밝은 도시 한복판에선 대놓고 어두운 짓을 할 수는 없었기에 지금같이 도시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거였고.
이를테면, 교외의 양조장이라든가.
이곳은 겉으로 보면 호수에 비친 빛이 반짝거리는 인근의 도시와 비슷하게 화사한 색채를 지닌, 낮은 언덕 위에 지어진 목가적인 풍경의 양조장이지만…
"이번 상품은, 다이안에서 직수입 해온 바람 정령의 후손입니다."
지금처럼 밤이 되면, '특별한 술'이라는 이름으로 사슬에 묶인 노예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이 된다.
당연하지만 밝은 분위기도 화사한 색채도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칙칙하고 지저분한 인간 군상들이 득실거릴 뿐인.
"그럼 1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컨대, 소위 초보자 지역이라 불리는 슈타우트에 속해 있기는 해도, 분위기는 아예 딴판이라는 뜻이었다.
바꿔 말하면 위험한 곳이었다.
웬만해선 이 부근에서 마주칠 일 없을 위험한 놈들이 바글바글거리는.
일종의 히든 던전이랄까.
그리고 나는──
"──!?"
그런 곳에 구멍 뚫린 자루를 뒤집어쓴 채 들이닥친, 1레벨 강도 지망생(?)이었고.
"뭐, 뭐야 시발."
나를 보자마자 흠칫 놀란 문지기는 내가 곧장 정식으로 받은 초대장을 내밀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가, 강도냐…?!"
생긴 대로 어디서 뺏어온 게 아닌지 의심하는 거겠지.
하지만,
"걱정 마세요. 사정이 있어서 이런 모습이지만, 그저 평범한 상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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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난이도 20
⚅ / ⚄
대 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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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 습니까?"
자루를 뒤집어써도 차마 숨겨지지 않는 내 매력 앞에서는 결국 전부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렇게 들어오게 된 안의 공기는… 더러웠다. 그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악취가 풍기는 곳이었다.
청결을 유지하지 못하는 노예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이들을 우리에 가둬놓고, 정말 상품 다루듯 다루는 썩은 인간들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2500골드 나왔습니다. 2500골드. 더 없습니까?"
그나마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역질이 나는 표정을 억지로 숨기려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리고, 터는 데도 좋고.
여태까지는 오해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겉보기만이 아니라 실제로 도둑질을 하러 여기에 온 거니까.
"2500골드! 낙찰!"
다만 내가 훔칠 건, 이곳에 잔뜩 쌓여있는 돈도 보석도 아니었다.
'동료'였다.
20레벨의 대마법사가 이곳에 있었다.
비록 지금은 기억과 능력을 잃고, 자신의 가치를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상품으로서 취급당하고 있지만.
"자, 다음 상품은──"
더 이상은 아니다.
* * *
이곳, 「숨겨진 노예 경매장」은 프롤로그에서 끝내 탈출하지 못했을 경우, '노예 루트'를 타게 되면 오게 되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완전하게 노예로 팔리기 전 마지막 탈출 기회를 얻게 되고, 탈출에 성공하면 그대로 게임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탈출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완전히 게임 오버가 되는 거고.
그렇기에 보통 이곳에 처음 오게 된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탈출하는 데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20레벨 대마법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존재조차 모르는 채로 넘어가기 십상이었다.
애초에 힌트조차 주지 않으니까.
단순히 안 알려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를 숨기려 한 수준으로.
이 게임에서 그녀를 찾아 동료로 삼을 수 있는 기회는 이날 단 하루, 플레이어가 슈타우트에 온 첫날뿐이다.
오늘이 지나면 노예로 팔려나가 게임 내내 그녀의 존재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일부러 탈출하지 않아 노예 루트를 탄다거나 억지로 여기에 바로 찾아오지 않는 한 아예 만나지조차 못하니, 아무런 정보가 없는 1회차 플레이어들로선 전혀 알 도리가 없는 거지.
즉, 이곳 자체가 히든 던전 취급인 것처럼 그녀 역시 '히든 캐릭터'인 셈이랄까.
물론 밸런스 상 처음부터 만렙 캐릭터를 줄 순 없으니 지금은 능력을 잃었다는 설정으로 1레벨부터 시작하기는 하지만, 대신 온갖 좋은 특성들과 특수 능력들을 가지고 있기에 소위 사기캐라 불리기엔 충분한 존재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구해 동료로 삼아야 했다.
문제는,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녀를 쉽게 동료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루트로 슈타우트에 처음 도착했을 경우 플레이어의 레벨은 보통 1에서 높아 봐야 겨우 2 정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곳엔 그런 슈타우트 근처에선 거의 마주칠 일 없는 4~5렙 용병들이 득실거렸다. 심지어 6렙짜리도 있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녀를 찾을 수 있는 건 오늘 하루뿐이라 다른 데서 레벨을 더 올려서 올 수도 없었다.
따라서 가급적 놈들과는 부딪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요컨대, 비전투 상황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 구, 구매자십니까?"
그리고 음유시인은 태생적으로 비전투 상황의 스페셜리스트지.
"네."
거기에 나는 그냥 음유시인도 아니고.
"아… 그, 이쪽은 출입하시면 안 됩니다. 상품들을 보관해 둔 곳이라서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왔고요."
"…예?"
"미리 상태를 직접 확인해 두고 싶어서 말이죠."
내 말에, 다짜고짜 자루를 뒤집어쓴 놈이 찾아와도 나름 깍듯하게 대하던 상인의 표정이 싹 굳어지더니,
"죄송하지만, 경매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진상을 대하듯 바로 차가운 말투로 딱 잘라 일축했다.
"예외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죠."
"아뇨, 여긴 없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
"──아니. 있습니다."
그에 나 역시 그의 말을 끊고 단언했다.
"내가 이번 경매에서 쓰려는 액수를 알면 분명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
그 순간, 귀찮아하며 나를 외면했던 상인의 시선이 다시금 내 쪽을 향했다. 그러더니 지시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날 내쫓을 준비를 하는 듯했던 근처의 떡대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예를 들면?"
흥미가 동한 거다.
그런 그의 조심스러운 떠보기에, 나는 (어차피 보이지도 않겠지만)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10만 골드."
"...!"
물론 거짓말이다.
지금 내게는 10만 골드는커녕 10골드도 없었다.
'있겠냐고.'
하지만, 직원은 틀림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워낙 큰 액수가 튀어나와 당연하게도 쉽사리 믿지 못하는 눈초리였지만… 혹시라도 진짜일 가능성을 차마 배제하지 못해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혹시, 지금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다시 조심스레 물어왔다.
"당신이라면 10만 골드를 직접 들고 다니겠습니까?"
"아...?"
사실 누가 들어도 궤변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증명은 못 하니 그냥 믿어라, 라는 수준의 이야기였으니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상인도 분명 금방 눈치챌 터였다.
그러나,
--
[설득]
난이도 20
⚁ / ⚂
결과 28
성 공
--
"그건…,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나의 '매력'은 놈이 이성을 되찾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좋습니다. 확인 정도만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죠."
무슨 개소리를 해도 '카리스마(CHA)'가 있다면 그럴싸하게 들리는 법이니.
"이번만 예외로 두겠습니다."
끝내 납득한 상인이 이렇게 말하며 재차 손짓하자, 이쪽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던 경비들도 곧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특별히 찾으시는 상품이 있으신지요?"
"얼마 전 동쪽 숲에서 엘프 한 명을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역시."
상인은 내 말을 듣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님처럼 이 사업에 진심이신 분들이라면 분명 그 상품의 진가를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죠."
그러고는 방금까지의 경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살가운 표정으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10만 골드라는 액수에 잔뜩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쇼."
사실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이놈들이 정말로 알고 있었더라면 10만 골드는커녕 100만 골드를 당장 수레에 실어 가져온다 해도 그냥 꺼지라고 했을 테지만.
그렇게 상인을 따라 들어간 지하실에는, 아직 경매에 나오지 않은 대여섯 명의 노예들이 있었다.
사슬에 묶인 채 철창으로 된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그들에게선 그 어떠한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벽에 드문드문 걸린 등불들이 이곳에 드리운 어둠만은 어떻게든 걷어내고 있었지만, 이 공간 전체에 짙게 깔린 체념만은 차마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겁니다."
그녀는 그 희미한 불빛들조차 잘 닿지 않는, 철창 안의 구석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쪼그려 앉아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해질 대로 해진 누더기에,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추레한 몰골이었다.
그런 전형적인 노예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필시 그녀가 홀로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
"보시다시피, 이런 대륙 남쪽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북방 엘프입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달랐다. 함께 갇혀 있는 다른 노예들을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과.
"지금껏 저희가 취급해온 상품들 중에서도 단연 최상급이라 자부할 수 있습죠."
그 때문인지 상인의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네가 사지 않고 배기겠냐는 듯 말이다.
"혹시 그녀의 건강에 따로 이상은 없습니까?"
"예? 아, 그럼요.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이곳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가 나왔다.
그에 상인은 잠시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더니, 결국 실토하는 투로 답했다.
"…그, 건강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지금껏 전혀 말을 하지 않더군요."
그러고는 다급히 손을 휘휘 내저으며 덧붙였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닙니다. 무언가를 지시하면 순순히 따르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더군요. 아마 우리의 언어를 알아듣기는 해도 말하지는 못한다거나 그런 거겠죠. …아니면 뭐, 그냥 말을 못 한다거나."
상인은 하자를 감추려는 듯 빠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틀렸다.
그녀는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안 하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정말로 달리 이상이라고 할 건 없습니다. 건강 상태도 양호하고요."
말문도 말문이지만, 마음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굳게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 10만 골드라는 액수가 전혀 아깝지 않을──"
이 자는 죽어야 했다.
『역겨운 노예상 쓰레기 새끼.』
"──!?"
내가 성큼 놈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귀에다 대고 「독설」을 속삭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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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상인'의 정신이 붕괴되었다!
--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이 말을 끝으로 입에 거품을 문 그는 그대로 풀썩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
그러니 그 광경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목격한 경비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 어이?"
대놓고 공격을 당했다거나 아니면 대놓고 피를 뿜었다거나 하는 일 없이, 그냥 정말 걷다 말고 다짜고짜 쓰러져버린 셈이었으니까.
우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온 이후 쭉 계단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가 잔뜩 당황하여 머뭇머뭇 다가온 걸 보면 알 수 있듯 말이다.
그는 축 늘어져 있는 상인을 툭툭 건드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이내 팔을 잡고 맥을 짚어보았다.
"주, 죽었…"
그러고는 곧 내 쪽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나는 자루를 벗어 맨얼굴을 드러냈고.
"…!"
「독설」의 쿨타임은 이미 차 있었다.
나는 '매혹된' 그의 눈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게 네 미래야 X새끼야.』
"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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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타!
'노예 경매장 경비'의 정신이 붕괴되었다!
--
털썩!
하고, 상인과 마찬가지로 눈이 뒤집혀버린 경비가 그대로 시체 위에 엎어져 버렸다.
이번에도 즉사였다.
비전투 NPC인 노예상들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용병들의 레벨은 최소 4.
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보통 1레벨짜리의 일반적인 공격으론 잡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피통을 가지고 있지만, 30이라는 매력 수치를 더한 「독설」을 치명타(2배)로 넣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4렙 인간형 npc들의 체력이 평균적으로 40에서 50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치명타 시 최소 60의 대미지가 보장되는 「독설」에는 그냥 쟤도 한 방 얘도 한 방이다.
뭐, 아무튼.
요점은 지금 레벨론 잡기 힘든 놈을 잡았다는 거다.
그리고 그 말은,
--
레벨 업!
Lv. 1 → 2
--
지금 레벨에는 얻기 힘든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스탯 분배나 스킬 습득은 잠시 미뤄두도록 하고,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우선 벗었던 자루를 서둘러 다시 뒤집어쓴 후,
"혹시 봤습니까?"
멀뚱멀뚱 시체들을 바라보는 주변을 향해 물었다.
"제 얼굴."
다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해할 것 같아 말하자면 못 본 척하라고 협박하는 거 아닙니다. 솔직하게 답하세요."
내가 다그치자, 그들은 한 번씩 서로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결국 한 남자가 대표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어둡기도 했고, 갑자기 쓰러져버린 상인한테 시선이 쏠려있었던 모양이다.
딱히 '매혹된' 상태처럼 보이는 이도 없었으니, 거짓말은 아니리라.
"다행이군요."
나는 이어 상인의 품을 뒤져 열쇠뭉치를 찾아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선 당혹스러움, 그와 더불어 강한 의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만은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아예 관심을 가지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소음들을 차단한 채, 홀로 외딴섬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하물며 내가 방금 전 챙긴 열쇠뭉치를 짤랑거리며 철창의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그저 멍하니 구석에 틀어박혀 쪼그려 앉아있을 뿐이었다.
"…안녕."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인사를 건네보았지만, 역시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소녀는 당신의 부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킨 것 같군요.
그녀를 가두고 있는 건 이 철창만이 아니었으니.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였다.
마냥 부른다고 해서 반응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군요.
소녀와 대화를 하려면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목소리 듣고 있다는 거 알아."
왜냐하면 나는,
"금방 꺼내줄게."
그걸 깨부수러 왔으니까.
007화. 술과 노예 (3)
물론 이 말에도 그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벽 비슷한 걸 치고 있다는 점에선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비록 내 목소리가 전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의 그녀에게 [설득]을 시도하는 건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매력이 높다 하더라도 대화를 할 의지 자체가 없는 이와 대화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여러분."
그러니, 일단은 다른 이들을 먼저 [설득]할 때였다.
"여기서 나가게 해드리죠."
나는 이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말에, 다들 조심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개중에는 지금 이게 자신들을 시험하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
전의 같은 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이곳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들에게 절망적이었던 것이겠지.
"...그."
그때, 의심스러워하던 한 명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아까 내 물음에 대표로 고개를 저었던 그 남자였다.
"왜… 우리를 도우신다는 거죠?"
"눈앞의 사람들이 노예 취급당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 …라고 해봤자, 여러분한텐 더 수상쩍게만 들리겠죠."
그런 조건 없는 호의는 현재 그들에겐 있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일 테니.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나는 당신들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한순간, 동요가 일었다.
"나한텐 여기서 빠져나갈 계획이 있고, 여러분의 협력을 얻는다면 그 계획은 훨씬 수월해질 거거든요."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대가 없는 선행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곤란해요."
그 작은 동요야말로 그들이 내 말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
다르게 말하면, 최소한 대화가 성립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계획에선 여러분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으니까요. 까놓고 말해, 수틀리면 방패로 세울 생각입니다."
"…!"
--
[설득]
난이도 10
--
그 말은 내 '매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고.
--
CHA 보정치 +25
--
"하지만."
주사위가 굴러간다는 뜻이다.
"이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보장하죠."
데구루루, 하고.
"내가 당신들이 자유를 찾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
실낱같은 희망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러니까, 내가 당신들을 이용하려는 것처럼, 여러분도 저를 이용하세요."
억지로 구멍을 내서라도 직접 그 희망의 실을 꿰어내면 그만이다.
"기회는 지금뿐이니까."
--
성 공
--
이때까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던 노예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곧 결심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옳은 말씀입니다."
이윽고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뭐, 계획이 잘 풀린다면야 아예 싸울 일도 없겠습니다만."
--
'노예 무리'가 파티에 임시 합류합니다.
--
이로써 '동료'를 제외한 아군 여섯 명을 추가로 얻게 되었다.
다만 이들에게 전투에서의 활약을 기대하지는 못할 터였다.
기억상 이들 중 싸우는 방법을 아는 건 방금 내게 손을 들고 질문한 이 남자와, 저기 있는 근육질의 여자 둘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랜 포로 생활로 쇠약해져 둘 다 소위 반피 상황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전투 NPC 취급이었다.
그래도, 역시 그들이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들을 못 본 척 눈을 돌리고 여기에 놔둔 채 도망가는 것보다도 훨씬 나았고.
"그럼 저희가 뭘 하면 될까요?"
아쉽게도 우리 중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동료'는 줄곧 이런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 상태를 바꿀 수단은 없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이해해줘."
문득 팔을 붙잡아도 저항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마치 사람이 아니라 인형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좀 안을게."
비록 힘 2짜리 약골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녀는 몸집이 작은 편이고 그만큼 가벼울 테니 그런 나라도 잠깐 안아 드는 정도는 충분할…
"…!"
"선생님?"
"…우선 누가 이 친구를 좀 들어줄 수 있을까요?"
* * *
『제구실도 못 하는 나약한 XX 새끼.』
"쿨럭!"
내 「독설」에 정신이 붕괴된 경비가 그대로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고, 그렇게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도로 뒤쪽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이를 신호로 계단에서 대기하던 노예들이 올라왔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동료'를 업은 남자까지 올라왔을 때, 가장 먼저 올라왔던 근육질의 여성은 그사이 계획대로 쓰러진 경비의 옷을 챙겨 갈아입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그건… 마법 같은 건가요?"
"그런 셈이죠."
'동료'를 업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곳의 웬만한 경비들은 한 번에 보내버릴 만큼 강력한 마법입니다만, 한 번에 한 사람에게 밖에는 쓰지 못해요."
그나마 싸울 줄 아는 두 사람이 이곳에서 일하는 경비로 변장하고(갑옷을 입어 방어력을 올림과 동시에), 나머지는 그들에게 이끌리는 노예인 척하며 의심받는 걸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시 쓰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걸리니, 만에 하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여러분이 그 시간을 벌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아, 그리고 제가 혹시 이걸 벗게 된다면 가급적 제 얼굴은 보지 마세요."
"예?"
"이 얼굴도 일종의 마법 같은 거라서요. 그러니 만에 하나 싸우게 된다면, 최대한 제 쪽에서 눈을 돌린 채로 싸우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래서 처음에… 예. 모두에게 전해두겠습니다."
"부탁하죠."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상태창을 열어 빠르게 미뤄뒀던 분배를 하기로 했다.
애초에 처음 빌드를 짤 때부터 계획을 세워놨기도 했고, 딱히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매력은 이미 최대치, 미의 신급으로 찍어뒀기 때문에 더 이상 찍고 싶어도 찍지 못했다.
그러니 남은 넷 중에 하나를 찍어야 했는데, 내 선택은 당연히 정신력이었다.
어차피 힘과 민첩은 지금 여기서 1, 2를 더 높여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당장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찍어봐야 똑같이 약골일 테니.
하지만 정신력은 달랐다.
이 세계에선 몸이 망가져도 뭐 어찌어찌 할 수는, 까놓고 말해 렙1짜리도 배울 수 있는 힐 스킬이면 대충 어떻게든 되지만… 정신이 망가진다면? 매우 뛰어난 치료사가 아닌 한 쉽지 않았다.
따라서 정신력만큼은 스탯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사실 비전투 상황에서 매력 다음으로 자주 쓰이는 스탯인 지능도 꽤 구미가 당기는 옵션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역시 생존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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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 06 → 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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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스킬.
이 역시 마찬가지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이번 빌드의 핵심 스킬 중 하나는 다음 레벨인 3레벨에 해금되었다.
그래서 솔직히, 지금은 아무거나 배워도 됐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아무거나 배우기는 좀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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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의 노래 : 치유」를 습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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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른 건 이 「치유의 노래」였다.
이미 습득 중인 클래스 스킬 「음유시인의 노래」의 바리에이션 중 하나로, 기존 다섯 개의 노래들이 각각 해당하는 다섯 개의 스탯 중 하나를 버프해주는 스킬이었다면 이쪽은 이름대로 치유 스킬이었다.
단 '성직자' 같이 전문 힐러들의 것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하는 매우 적은 힐량을 가진 스킬이었기 때문에 이걸 힐용으로 쓰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애초에 이 스킬의 주된 쓰임새는 응급처치용이었다.
그래도 죽음의 문턱에서 한 번 끄집어내는 정도는 가능하니 배워둬서 나쁠 건 없었다.
"갈아입었습니다."
스킬 습득까지 마치니 마침 저쪽의 준비도 끝난 모양이었다.
근육질의 여성은 속옷만 남겨진 경비의 시체를 그대로 지하실 계단을 향해 던져버렸고, 나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따라오세요."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먼저, 이들의 노예계약서를 찾아내야 했다.
이곳의 계약서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이들이 이곳에 끌려오자마자 찍힌 노예 낙인과 마력을 통해 연결된 물건으로, 계약서에 피와 함께 서명을 하게 되면 그 피와 낙인이 연결되어 '주종 관계'를 만든다.
피의 주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다.
그러니 그것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는 한, 이들은 이곳에서 도망친다 한들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계약서들은 사무실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직 경매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구석에 위치한 사무실 근처에는 아직 사람들이 없었다.
지하실과 멀지 않은 곳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동 중 마주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 한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뭐야? 왜 저것들을 벌써──"
『넌 왜 벌써 뒤지냐 쓰레기 새끼야?』
"?!"
그나마도 경비 차림을 한 두 사람을 보고 딱히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쉽게 「독설」로 처리할 수 있었다.
상인에게서 챙겨둔 열쇠뭉치에 이곳을 여는 열쇠도, 또 금고를 여는 열쇠도 모두 있었다.
다만 이 여러 개의 열쇠 중 어느 게 어떤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하나씩 직접 꽂아 맞는 걸 찾아야 했다.
결국 세 번째 시도 끝에 철컥! 하고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곧장 홱 문을 열어젖혔다.
사무실은 역시나 비어있었다. 그렇기에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물건이 더 금방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상자 모양의 작은 금고가.
금고의 열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열쇠 중에서도 가장 반짝거리는, 혼자 재질이 다른 게 있었으니까.
저 화려한 문양들이 새겨진 금고에 딱 맞는 열쇠였다.
당연하지만 구멍에도 잘 맞았고.
금고 안에는 금화 몇 푼이 담긴 자루 하나와 계약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다들 여기서 본인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찾아가세요."
나는 그것들을 금고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노예들은 바로 각자의 계약서를 찾아 챙겨갔다.
"지금 건드리면 안 됩니다.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물론 가만히 업혀있는 '동료'의 계약서는 내가 대신 챙겨뒀다.
'이스트우드'.
계약서에 적힌 이 이름은 진짜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이름을 듣지 못한 그녀를 그저 동쪽 숲에서 찾아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붙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상품명일 뿐.
그럼에도 목 뒤에 찍힌 낙인은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너무나도 손쉽게 박탈해 갈 것이었다.
"…젠장."
그래서,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라곤 해도 여기에 내 피로 내 이름을 적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엿같았다.
현재 문자 그대로 인형과 같은 빈껍데기 상태인 그녀를 '깨울'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곳에선 하지 못했다. 뭐가 됐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시도라도 가능했다.
"선생님, 그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008화. 계약과 언약 (1)
"…최후의 수단입니다."
그녀는 일종의 저주 같은 걸 받아 줄곧 저 상태인 거고, 그 저주는 노예로서 계약을 맺으면 풀리게 된다.
"이 소녀가 말입니까…?"
"그녀는 소녀가 아닙니다."
최소 몇백 년은 살아온 엘프라는 의미로도, 그리고 도저히 평범한 소녀라고 불릴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로도.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이곳에서 깨워야 할 경우── 그러니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거나 한다면, 계약을 맺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무튼, 부디 쓸 일이 없길 바라야죠."
하지만 그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둘 것이다.
깨물었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낸 나는 이어 내 서명을 적어넣은 '이스트우드의 계약서'를 돌돌 말아 옷 안쪽에 넣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하게 각자 챙긴 계약서를 어떻게든 안쪽에 숨겼다.
마음만 같아선 전부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이 계약서들을 물리적으로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계약자와 피로 결속되지만 않았을 뿐, 계약서와 연결된 낙인은 찍힌 순간부터 유효한 탓이었다.
따라서 계약 전에 이 계약서가 찢어진다거나 불탄다거나 아무튼 해가 가해지면, 상품이 어떤 식으로든 도망친 것으로 판단하여 낙인이 발동되어버린다.
산 채로 불태워진다는 뜻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선 이 술식을 해제할 솜씨 좋은 마법사가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바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계약서를 찾는다는 목적까지 달성했다.
이젠 정말로 여기서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문제는, 이 양조장의 출구가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지하실에서 사무실까지는 양조장 안에서도 외진 구석에 위치한 곳이라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유일한 출구로 가기 위해서는 결국 경매장 한복판을 지나가야 했다.
그래서일까, 이 사실을 눈치챈 이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긴장한 눈치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다 잘 풀릴 겁니다."
그에 나는 모두를 한 명씩 바라보며 다독였다.
정확히는,
『여러분은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을 거예요.』
「격려」했다.
당신의 고무적인 격려에 파티원들이 용기를 얻습니다.
정석적 서포터 음유시인의 핵심 스킬인 「격려」는 전투/비전투 상황을 막론한 각종 주사위 굴림에 버프를 준다.
이를테면 누군가 이들 중 한 명을 수상쩍게 여기든가 해 추궁을 해오면, 그걸 [기만]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다.
"…예! 선생님의 말이 맞습니다!"
"다들 너무 쫄지 말자고. 이제 거의 다 왔잖아?"
"몇 십 분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란 상상조차 못 했었죠."
지금은 스킬 레벨도 낮고, 「격려」 자체가 딱히 매력 스탯을 엄청 높인다고 눈에 띄게 효율이 증가하는 스킬도 아닌지라 아마 큰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그럼, 갑시다."
뭐가 됐든 걸어두지 않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네!"
사무실에서 나온 우리는 지금껏 그랬듯 다시 대형을 만들어 경매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700골드!"
손님으로 입장한 내가 제일 앞장서고, 경비로 위장한 두 사람 중 내 옆을 걷는 근육질의 여성과 제일 뒤쪽을 걷는 '동료'를 업은 남자를 사이에 두고 노예들이 줄지어 걷는 형태였다.
누군가 본다면, 내가 저 노예들을 단체로 사들여 경비들의 도움을 받아 데려가는 모습처럼 보이게끔 말이다.
"1800 골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적어도 이 공간 한정으론 그리 이상한 광경이 아니어서인지 다들 경매가 한창인 무대(?) 쪽에만 시선이 쏠릴 뿐 이쪽을 쳐다보는 이들은 딱히 없었다.
가끔씩 근처에서 흠칫 놀라는 반응들이 보이긴 했는데, 그들은 모두 뒤따르는 노예들이 아니라 내가 얼굴에 뒤집어쓴 자루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줄지어 따라오는 노예들의 행렬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설마하니 아직 경매에 올라오지도 않은 노예들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단지 구매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워낙 많은 노예들이 오가는 곳이라 이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경비들도 딱히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외우진 못하고 있다는 설정이었고, 실제로 옆을 지나쳐간 경비들 몇 명도 우리의 행렬을 별로 의심스레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동료'의 얼굴은 바로 알아볼 터였다. 이 주변에서 보기 힘든 북방 엘프에, 또 워낙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외모였으니.
그래서 그녀에겐 따로 변장을 시켜뒀다. …뭐, 사무실에서 찾은 외투를 걸치고 후드를 눌러 씌워 얼굴을 가린 정도였지만.
물론, 「경비대장」 같이 이곳에 들어오는 '상품'들의 얼굴을 전부 하나하나 기억하는 놈도 있긴 했다.
그러니 당연하지만 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고, 놈과는 그냥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레 보이도록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경매장 절반 이상을 가로질렀다.
문지기야 확인차 막아서겠지만 [설득]이든 [기만]이든 [위협]이든 전부 자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절반만 더 가서, 저 문까지 다다르기만 한다면 아무 충돌 없이 여기서 빠져──
"──어이."
"…!"
못 들은 척 무시하고 계속 걸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잠깐 멈추시지."
이미 어깨를 턱 붙잡혀 버려서.
"...."
그에 조심스레 돌아보니,
'…시X.'
역시나,
"내가 아까부터 봐오니까…"
「경비대장」이었다.
하필이면 여기서 가장 걸리면 안 되는 놈.
이 히든 던전의, 레벨6 보스.
놈은 내 뒤를 따라오다 함께 멈춘 노예들의 얼굴을 한 명씩 살펴보더니, 이내 바짝 긴장한 남자의 등에 업혀있는 '동료'에게로 다가가 눌러쓴 후드를 슬쩍 걷어 보였다.
"…역시."
그러고는 씨익,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듯 올려 보였다.
"지금 네가 데리고 다니는 이것들은 전부 우리 쪽의 상품들처럼 보이는데."
확신에 찬 조소였다.
"아직, 경매에 올라오지 않은 상품들 말이야."
"...."
그 말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낌새를 눈치챈 주변의 시선들이 전부 이쪽을 향해왔다.
뒤늦게 눈치챘을 땐 이미 경매마저 중단되어, 양조장 안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왜 아직 팔리지도 않은 상품들이 지하실이 아니라 밖을 나돌아다니고 있는지, 어디 설명을 해보실까?"
꿀꺽, 어디선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온 「경비대장」은 이미 허리춤의 검에 한 손을 얹고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언제든 뽑아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듯이.
"…하아."
이건 뭐, 어떻게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놈한테 걸렸다면야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을지 모르겠다만, 이 녀석만은 아예 [설득]이고 [기만]이고 할 대화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뭐, 싸우는 수밖에.
"…우선 이것부터 좀 벗고 해명해도 되겠습니까?"
"뭐?"
내가 진짜로 해명을 시도할 거라곤 예상치 못한 걸까, 놈은 살짝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엔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끄덕이긴 했지만.
어차피, 나도 정말 해명을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고 싶었을 뿐.
"…!"
역시나 내 신호를 알아차린 노예들은 바로 내 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걸 본 나는 바로 자루를 홱 벗어 버렸다.
"──!?"
그러면서 내 미모가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 주변의 모두가 숨을 삼켰다.
그건 「경비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새 검에 얹었던 손마저 내린 채, 홀린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완벽하게, '매혹된' 모습이었다.
"아름다워...."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증명해주듯.
"…미안해."
"…뭐?"
일순 느껴진 가책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주변의 소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빈껍데기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 방법은 정말, 정말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옷 안에 넣어두었던 계약서를 꽉 쥐었다.
『계약 성립.』
그리고 내가 읊조린 순간, 그녀의 목에 채워진 목걸이가 마력의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이 녀석, 계약을…!"
동시에 내 옷 안쪽의 계약서 역시 빛나기 시작한 걸 본 「경비대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검을 집으려 손을 들었지만,
"──「돌풍」."
화아악──!
돌연 공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 거센 바람을 맞고 날아가 버렸다.
우지끈!
날아간 「경비대장」이 한쪽 벽에 나란히 비치되어있던 커다란 술통 중 하나와 부딪히며, 완전히 박살 나버린 술통의 파편들이 담겨있던 술과 함께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뭣──"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다른 경비가 뒤늦게 칼을 뽑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느려터졌는데 뒤지는 것만 빠르구나!』
"욱!?"
놈의 발보다 내 혀가 더 빨랐다.
놈이 내 「독설」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자, 함께 달려오던 다른 경비가 순간 당황했는지 멈칫했다.
근육질의 여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놈에게 다가가 칼을 휘둘렀다.
촤악!
칼끝에 묻어나온 피가 튀었다.
"──우, 우와아악!?"
그 피를 얼굴에 뒤집어 쓰고 만 손님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노, 노예들이 탈출했다!!"
아수라장이 열렸다.
"꺄아아악!"
"사람 살려!"
상인들과 손님들이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하며 서로 먼저 도망치겠답시고 밀치고 엎어지고 부딪히고 바닥을 나뒹구는 와중 챙그랑! 하고 유리잔들이 깨지는 소리라든가, 와장창! 하고 의자들이 엎어지는 소리라든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함께 연달아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경매장 전체가 순식간에 혼돈에 뒤덮였다.
"저 녀석들이다! 잡아!"
그 난장판 속에서 경비 한 명이 다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켜!"
다시 「독설」을 쓰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하지만,
"「화염구」!"
그녀의 마법은 아니었다.
──콰앙!
내 외침과 거의 동시에 놈의 등 뒤에서 날아온 불덩이는 그대로 놈을 직격하며 폭발했다.
그러면서 튄 불똥의 일부가 바닥에 쓰러져있던 부러진 나무 의자에 튀어 화르륵! 불이 붙었다.
자칫 자신의 긴 옷자락에 옮겨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불길을, 그녀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지나치며 그저 터벅터벅 걸어와 내 옆에 섰다.
"주인님."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무기질적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명령을."
그 시선만큼이나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과 소녀를 연결한 마력의 선이 느껴집니다.
그 선이 존재하는 한, 소녀는 당신의 그 어떠한 명령이라도 따를 것입니다.
"마, 망할 노예 새끼가 잘도──"
『뒤통수나 쳐대는 한심한 쫄보 새끼!』
"──컥!"
그런 그녀를 노리고 달려온 경비 하나가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려 했고, 때마침 「독설」이 준비된 나는 바로 놈을 향해 쏘아붙였다.
쿵!
커다란 몸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나는 동료가 쓰러지는 놈과 부딪히지 않게 어깨를 잡고 살짝 잡아당겨 왔고, 그렇게 놈의 머리는 그녀의 바로 발밑에 떨어졌다.
그 정도면 소리 때문에라도 한 번쯤 내려다볼 법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우선, 여기를 전부 쓸어버릴 거야."
009화. 계약과 언약 (2)
내 말에, 그녀는 바로 여섯 개의 작은 '서클'들을 자신의 양팔에 나눠 휘감으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마치 총에 탄약을 장전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딱히 비유가 아니었다. 언제든 원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이… 개자식들이!"
그때, 뒤쪽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술에 홀딱 젖은 몸을 추스른 「경비대장」이 이를 갈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품이고 나발이고, 다 쳐죽여주마!"
자신의 앞에서 도망치던 손님을 방해하지 말라며 내던지듯 밀어버린 놈은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녀석들은 상관없었다.
다만 저놈 하나만은, 지금 당장 부딪힌다면 우리에겐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내 레벨은 끽해야 2. 매력 30의 「독설」이 있다지만, 그걸로 원턴킬을 낼 수 있는 놈들은 저 레벨 4~5의 경비들이 한계였다.
그리고 그건 나와 같은 레벨인 '동료'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반면, 저 자식은 6레벨이었다. 거기다 이 던전의 보스 취급이라 소위 '피통'이라 불리는 것도 다른 동 레벨의 일반 잡몹들보다 훨씬 많았다.
따라서 아무리 매혹을 통해 확정적으로 치명타를 띄운다곤 해도 한 방에 놈을 끝내는 건 지금 시점에선 절대 불가능했다.
반대로 이쪽은 몸이 약한 나나 '동료'가 저놈한테 한 대 맞으면 그냥 바로 즉사 확정이었다.
요컨대 저놈한테 「독설」을 날려봤자 '다음 턴'이면 나는 죽어있을 거란 얘기다.
그러니까,
"선생님! 피하십시오!"
지금은 급(레벨)이 맞는 사람끼리 칼을 맞대야 했다.
챙!
잽싸게 달려온 남자가 「경비대장」의 칼을 막아냈다.
까가각, 맞댄 두 날이 갈렸다.
"방해하지 마라!"
「경비대장」은 맞닿은 날째로 남자를 짓눌러 버릴 기세로 칼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크윽…!"
남자는 점점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돌연 근육질의 여성이 달려와 칼을 내려치지 않았다면 분명 칼째로 베이고 말았겠지.
"빌어먹을 노예 새끼들이…!"
저 두 사람은 이 히든 던전의 아군 NPC들이니만큼 레벨도 이곳의 경비들과 비슷했다.
그러니 그나마 레벨이 좀 맞는 저 두 사람이 경비대장을 묶어두는 동안, 우리 둘이 저 나머지 경비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게 우리가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딴것들은 몰라도 저 북방 엘프만큼은 흠집 내지 말고 잡아! 값이 낮아진──"
"「화염구」."
──콰앙!
폭발이 일며 소리치던 경비가 날아갔다.
"히, 끄아아악──!?"
그렇게 폭발과 함께 튄 작은 불덩이들과 날아간 놈은 바닥에 쏟아져 있던 술 위에 쓰러졌고, 그대로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이미 지쳐 있는 두 사람이 「경비대장」을 상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터였다.
빠르게 정리해야 했다.
지금 '동료'가 쓸 수 있는 마법들은 조금 전에 썼던 「돌풍」과 「화염구」, 그리고 「물 폭탄」, 「바위 방패」, 「벼락」 같은 기초적인 1서클 원소 마법들이었다.
지금 또 한 번의 「화염구」를 시전하면서, 그녀의 팔목에 남아있는 '서클'의 개수는 다섯 개가 되었다.
그 말은 이 전투 동안 앞으로 다섯 번의 1서클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경비대장」을 제외하고 남아있는 경비들의 수는 여섯 명.
"여기 한 새끼 잡았다!"
그중 한 놈이 노예 한 명을 바닥에 쓰러뜨린 채 도망치지 못하도록 누르고 있었다.
『약한 사람만 골라 괴롭히는 주제에 자랑이나 해대는 쫄보 새끼!』
"우욱!?"
이젠 다섯이 남았다.
경비가 내 「독설」을 듣고 쓰러지자, 제압당했던 노예는 바로 재빨리 일어나 도망치는 인파에 섞여 들어갔다.
"입이다!"
그때, 돌연 「경비대장」이 외쳤다.
놈은 두 사람을 홀로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경비들을 살피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누가 저놈의 입을 막아!"
놈의 칼끝이 가리킨 건, 나였다.
그러자 뿔뿔이 흩어진 노예들을 찾느라 인파 속에 파묻혀 혼란스러워하던 경비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왔다.
"뭐해? 막으라고 씨X!!"
호통과 동시에,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이 바로 땅을 박차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직 「독설」은 준비되지 않았다.
"「화염구」!"
콰앙!
'동료'의 손 앞에서 날아간 불덩이가 경비를 직격하며 폭발한 순간, 작은 불꽃들이 사방으로 퍼지더니 그중 하나가 술 웅덩이에 떨어져 화르륵!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타올라라!』
"…!"
주문의 영창이 들려와 잽싸게 고개를 돌려보니, 타오르는 불덩이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바위──"
──퍼엉!
「화염구」가 폭발했다.
어느새 내 앞에 세워진 커다란 「바위 방패」에 가로막혀서.
그러면서 튄 불티들이 방금 전 피어올랐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쳇…!"
「화염구」를 쏜 경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우오오오──!!"
「분노」의 포효를 내지른 경비 하나가 양손에 도끼를 들고 '동료'를 향해 달려왔다.
분명 「바위 방패」를 시전 중이라 대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오산이었다.
"「돌풍」!"
후우욱──!
강한 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바위 방패」를 조종하는 오른손은 여전히 내 쪽으로 쭉 뻗은 채로 왼손을 가볍게 휘둘렀고, 바람은 그 손짓에 응했다.
그럼에도 달려온 경비는 날아가지 않았다. 「분노」의 효과로 인해 강제로 밀려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뭐, 옆에서 타오르던 불길은 그렇지 못했지만.
"으, 으아아아악!!"
화악, 하고 거세게 불어닥친 강풍에 의해 일렁이던 불길이 거대한 화마가 되어 달려오던 경비를 덮쳤다.
그 자리에서 멈춘 놈은 몸에 붙은 불을 끄려 몸부림쳤지만,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놈의 몸에는 여전히 불이 붙어있었다.
이제 남은 경비는 셋.
그중 하나는 나를 향해 계속해서 「화염구」와 「마력 화살」 같은 마법들을 쏴댔지만, 그럴 때마다 내 앞에 떠오른 「바위 방패」가 움직이며 경로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남은 둘은,
"잘도 날뛰었겠다…!"
어느새 내 등 뒤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머리통을 쪼개주마!"
목소리나 뜀박질 소리를 들어봤을 때, 아마 내가 여기서 아무리 서둘러 몸을 돌린다거나 해봤자 저항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돌리자마자 바로 칼이나 맞겠지.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물 폭탄」!"
촤아악!
"윽!?"
문자 그대로 마른하늘에 물벼락을 맞아버린 경비들이 쓸리듯 제자리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들이 잔꾀를…!"
이어 내가 몸을 돌렸을 땐 한 명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였고, 다른 한 명은 이미 잽싸게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벼락」."
콰과광!
이번엔 진짜 벼락이 내려치며, 물에 홀딱 젖어있던 경비 둘을 뼈가 보일 정도로 튀겨버렸다.
그렇게 '동료'의 팔에 남아있던 다섯 개의 서클들이 모조리 소진되었다.
퍼엉!
그러는 사이 「바위 방패」가 다시 한번 「화염구」를 막아냈다.
카앙!
한편 저쪽에선 한 번 더 날과 날이 맞부딪쳤다.
"…!"
놈의 칼을 받아낸 근육질의 여성은 좀 전보다 훨씬 더 힘에 부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경비들을 처리하던 요 몇 분 사이, 대장을 상대하고 있던 두 사람에겐 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늘어나 있었다.
특히 여성의 오른쪽 눈두덩이는 완전히 찢어져 눈까지 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탓에 돌연 칼 대신 주먹을 쥔 대장의 왼손이 날아오는 걸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여성이 휘청거렸고, 대장은 곧장 발을 쳐들어 복부를 걷어찼다.
"욱!"
그 충격에 몸이 숙여지고 두 발은 공중에 붕 떠버린 여성이 그대로 떨어지듯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대장은 그 위에서 칼을 높이 쳐들었다.
푹!
좀 전까지 잠시 바닥에 쓰러져있던 남자가 재빠르게 다시 달려와 급히 몸을 부딪치지 않았다면, 번쩍인 칼끝은 분명 바닥이 아닌 여성의 뒤통수에 꽂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바위 방패」가 계속된 공격에 역시 한계에 다다른 듯 콰직, 콰직, 하고 점점 금이 가는가 싶더니,
『꿰뚫어라!』
와르르!
하며, 결국 「마력 화살」에 의해 산산조각 부서지고 만 것이다.
"하!"
그 순간, 부서진 바위 파편들 사이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경비와 눈이 마주쳤다.
놈도 마법사이니만큼 '동료'가 서클을 모두 소진했다는 걸 눈치챈 거겠지.
더 이상 자신의 마법을 막아낼 수단이 없다는 걸 놈도 아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끝──"
하지만 이 사실은 알지 못한 모양이다.
커다란 「바위 방패」에 의해 줄곧 시야가 가려졌던 탓에, 내 얼굴 역시 한동안 보지 못했다는 걸.
"──!"
일순, 놈은 숨을 삼켰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연홍빛으로 물들었다.
'매혹된' 것이다.
「독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마법이라 쓰면서 꼴에 마법사라 불린다니 그게 더 마법 같구나!』
"윽!?"
'매혹된' 상태인 놈에게 내 「독설」은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경비까지 쓰러지며, 이 던전의 '잡몹'들이 모두 처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보스, 「경비대장」뿐이었다.
"이──"
이 사실을 깨달은 놈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이, 쓸모없는 새끼들!"
물론 부하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 혼자 다 족쳐주마…!"
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 놈은 칼을 홱 비틀어 맞대고 있던 날을 쳐냄과 동시에 빈틈이 생긴 남자의 상체를 베어버렸다.
"안 돼!"
그 광경을 본 여성이 절규하며 달려들었지만, 놈이 내지른 칼자루 끝에 가격당해 거의 날아가듯 쓰러지고 말았다.
「경비대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혀부터 잘라주지!"
앞으로 몇 발짝이면 분명 스스로의 말을 실천하겠지.
「독설」은 준비되지 않았다.
준비해 두었던 서클은 모두 소진되었다.
설령 「독설」이나 '동료'의 마법을 쓸 수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저자를 쓰러뜨리는 데에는 역부족이었겠지만.
그러니 현 상황에서 우리가 놈을 막을 수단은,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곳은 지금 우리의 레벨대로 공략할 만한 던전이 아니었으니까.
놈의 레벨은 6. 잡몹 취급인 경비들의 레벨조차도 4~5레벨이었으니.
──그리고, 내가 처음 레벨 업을 하고 난 뒤로 우리는 총 열두 명의 경비들을 처리했다.
다시 말해,
--
레벨 업!
Lv. 2 → 3
--
한 번 더 레벨이 오르기에 충분한 경험치를 얻었다는 이야기다.
--
습득할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
이 역시 앞에서 언급했듯, 3레벨이 되면 이번 음유시인 빌드의 또 다른 핵심적인 스킬을 배울 수 있었다.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던 이유.
그 스킬의 이름은──
『──꿇어라.』
「언령(言令)」.
간단히 말하자면, 나의 말로 상대방을 조종하는 스킬이었다.
010화. 계약과 언약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