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010화. 계약과 언약 (3)

"...?"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경비대장」의 두 눈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게…"

그럴 수밖에.

놈은 분명 내 머리통을 쪼개버릴 심산으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드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

몸짓을 보면 분명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야, 그것이 「언령」이니까.

거스를 수 없는 절대명령.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놈이 분노에 치를 떨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에 나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팔짱을 껴 보였다.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말했지."

「언령」은 듣는 자로 하여금 어떤 명령이든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하는 능력이었지만, 당연하게도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자결하라』 처럼, 모든 생명체들이 지닌 생존본능을 거스르게 하는 그런 명령은 무의식에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명령들조차 따르게끔 하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스킬 레벨이 필요했고, 겨우 3레벨밖에 되지 않는 음유시인에게는 택도 없는 이야기였다.

단, 『꿇어라』 같은 수준의 명령 정도는 지금의 내게도 충분히 가능했다.

"기분이 어때?"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경비대장」을 내려다보며,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네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복종해야 하는 기분이."

성공률의 문제도 있었다.

걸리기만 한다면 무조건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스킬이기에, 밸런스 상 그 기본적인 명령조차도 성공률은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네가 여기서 상품 취급하던 이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된 기분이 어떠냐고."

하지만 '매혹된' 상대에게 매력 30을 가지고 건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놈의 레벨과 정신력 스탯에 비례하는 '저항력'을 이미 아득히 상회하고 있는 이상, 절대 실패할 일도 없었으니까.

"이, 개새끼가...!"

물론 지금은 놈을 무력화시켰을 뿐이었다.

「언령」은 근본적으로 군중제어기, 흔히 말하는 CC기였기에 이것만으로 놈을 끝장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딜을 넣기 위해 「독설」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시전한 순간 걸어두고 있는 「언령」이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뭐, 꼭 직접 놈을 처리할 필요 역시 없었지만.

참가자들이 전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 이후로 주변의 난장판은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다.

난잡하게 널브러진 경비들의 시체나 나무 파편들, 곳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정도를 제외한다면.

이제 이곳에 남은 건 나와 '동료', 「경비대장」, 놈의 칼에 맞고 쓰러졌던 남자와 그를 부축하는 근육질의 여성, 그런 그들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는 네 사람뿐이었다.

어차피 계약서도 본인들이 들고 있겠다 혼란을 틈타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아직 계속 여기에 남아있다는 건 설령 싸울 순 없을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우릴 돕고 싶어 했던 거겠지.

"여러분. 남아있는 술통들을 모아와 주시겠어요?"

실제로 그들은 내 부탁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움직여 아직 온전한 술통들을 하나씩 찾아 가져왔다.

그리고, 그렇게 가져온 술통들을 모두 「경비대장」의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들도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미──"

돌연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 이놈과 마찬가지로.

"미친, 새끼들아...!"

이 양조장의 술들은 대체로 다 도수가 높았다. 빨리 취하면 취할수록 그만큼 지갑도 빨리 열리는 법이니.

그리고, 도수가 높은 술에는 불이 붙는다.

지금도 곳곳에 타오르고 있는 불꽃들이 증명하듯이.

그렇다면, 만약 말이다.

"그만──"

그런 술들이 담긴 통을 잔뜩 모아 쌓아놓고 불을 붙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개새끼들아! 그만해! 멈추라고!"

한 가지 확실한 건 「경비대장」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었다.

놈은 어떻게든 움직이려 애를 쓰는 듯 보였지만, 그저 핏기가 싹 가셨던 얼굴이 다시 시뻘개지며 핏대가 서기만 할 뿐 일어서지는 못했다.

"큭...!"

결국, 내 「언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놈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야, 노── 아니, 너! 그래, 너! 너 기억 안 나냐? 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 대해줬냐? 어, 어제도 배고파하는 것 같길래 내가 남은 사과를 던져줬었잖아?"

방금까지 욕을 퍼붓던 놈은 끝내 다급히 작전을 바꿔, 자신의 주위에 술통을 놓고 있는 이들을 향해 애원하기 시작했다.

"어, 어차피 너희들이 이렇게 도망친다 해봤자 그 낙인 때문에 다 금방 잡힌다고! 알겠냐? 그러니까 날 도와! 그럼 내가, 내가 다 책임지고 너네 다 풀어주마, 어!?"

하지만 다들 듣는 체도 하지 않으며 묵묵히 술통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금세 준비가 끝나, 남은 건 불을 붙이는 것뿐이었다.

당연하지만 휘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붙일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 어이 북방 엘프!"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눈치챈 듯한 「경비대장」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레벨이 오른 건 나만이 아니었으니까.

임시 파티원으로서 취급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정식 동료'였다.

즉, 합류한 순간부터 나와 레벨과 경험치를 공유했다.

다시 말해 그녀 역시 레벨 업을 했고, 그러면서 전투 시 사용할 수 있는 서클의 개수도 한 개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애걸하는 「경비대장」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문으로 향했다.

드디어 이 역겨운 공간과 작별할 시간이었다.

다른 이들을 먼저 다 내보낸 후 나와 '동료'만 남았을 때, 나는 여태 벗어두었던 자루를 도로 얼굴에 뒤집어쓰며 마지막으로 양조장을 둘러보았다.

「경비대장」은 술통들의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도망쳐 봐야 어쩌고 상회가 네놈들을 찾을 거라니 저쩌고 뭐라뭐라 악써대고 있었지만,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었다.

"여긴 올 때마다 늘 싹 다 불태워 버리고 싶었어."

'동료'는 이미 들어 올린 한 손을 술통들을 향해 겨누고 있었고, 그 앞에는 '서클'──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화염구」."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폭발이 일었다.

* * *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어느새 양조장 전체를 뒤덮었고, 은은한 달빛과 함께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이 불길은 분명 슈타우트 도심에서도 보일 터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어서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런데, 먼저 나와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분위기가 조금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요?"

"이, 이분의 상처가…!"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으윽… 서, 선생님…."

아무래도 아까 베였던 상처가 치명상이 된 건지, 한눈에 봐도 그는 '빈사'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봐! 눈감으면 안 돼! 정신 차려!"

그의 옆에 쪼그려 앉은 근육질의 여성이 어떻게든 의식을 잡아두며 지혈을 해보려는 듯했지만, 남자의 상황은 그런 걸로 나아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명백하게, 그의 숨소리와 맥박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다행히도, 난 이런 상황에 어떤 노래를 연주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치유의 노래」 말이다.

"노래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마땅한 악기가 없으니, 직접 목소리로 부르는 수밖엔 없었다.

"...예?"

"노, 노래요?"

황당하게 들리겠지. 심지어 다 죽어가고 있는 남자마저 조금은 당황한 눈치였으니.

"그게 무슨…"

하지만 지금은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모두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목을 가다듬은 나는 이어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딱, 딱, 딱.

104BPM으로 리듬을 타며.

『Staying alive~』

당장 떠올린 노래의 구절을 불렀다.

딱, 딱, 딱, 딱.

"──허억!"

그 순간,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면서 멈춰가던 심장이 다시 두근! 하고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죽음의 문턱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스테잉 얼라아아──"

"서, 선생님?"

"──아, 음. 크흠."

심폐소생술을 할 때 추천되는 노래여서인지는 몰라도 생각보다도 효과가 빨랐다.

…노래에 심취하게 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고.

"음유시인으로서의 본능이 그만."

"저를… 살려주셨군요."

"오는 게 있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죠."

"선생님…!"

딱히 빈말은 아니었다. 그와 옆의 여성이 「경비대장」을 붙잡아 두지 않았다면 난 아마 진작 놈의 칼에 맞고 죽었을 거다.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죠."

여성과 함께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 후, 나는 안도하고 있는 다른 이들을 한 사람씩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만 결국 임시적인 처치예요. 피를 많이 흘렸으니 가급적 빨리 치유사를 찾아야 할 겁니다."

"아는 치유사가 있어요."

내 말에 돌연 손을 들며 답한 건, 한창 싸움이 벌어질 당시 경비에게 붙잡혔던 이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여전히 남자를 부축하고 있는 여성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동의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를 들고 '티아리아'에 있는 마법사 네로를 찾아가도록 하세요. 그분을 찾아가면 낙인을 지우고 계약 술식을 해제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이는 노예 루트를 탄 이후 찍힌 낙인을 지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아, 그리고 이거."

나는 이어 사무실에서 챙겨두었던 금화 자루를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크게 의미 있는 액수가 아니었지만, 이들에겐 달랐으니까.

"가져가세요. 여러분 모두 티아리아까지 갈 여비론 충분할 겁니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근육질의 여성은 끝내 자루를 건네받았고, 옆에서 부축되고 있는 남자는 그걸 보곤 다소 울컥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에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말했잖아요, 이용한 거라고. 실제로 이용당해서 죽을 뻔했는데 무슨 은혜입니까."

"선생님…"

"가세요. 행운을 빕니다."

모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후, 그들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살아남을 거다. 끝내 자유를 얻을 테지.

그리고 훗날 우리 모두의 일이 다 잘 풀리고 나면, 언젠가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 거다.

"주인님."

그런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 내 옆에 홀로 남게 된 '동료'를 찾으러 온 거고.

"다음 명령을."

그녀는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무표정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야지."

나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계약자로서 고한다.』

그것의 날을 손바닥에 대고 슥 그었다.

"…!"

그 순간, 줄곧 목석같던 그녀가 아주 살짝이었지만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바로 단검을 도로 검집에 넣은 후 옷 안쪽에 돌돌 말아 챙겨두었던 '이스트우드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나, 유빈은 나에게 귀속된 계약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피가 흐르는 손바닥으로, 힘껏 구기듯 감싸 쥐며.

『──계약 파기.』

011화. 계약과 언약 (4)

선언과 함께, 내 피에 반응한 계약서가 처음 계약이 성립될 때와 같은 빛을 발했다.

동시에 '동료'에게 채워진 목걸이 또한 그때와 같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두 동강 나 풀려버리며 그대로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당신과 소녀를 연결하던 마력의 선이 완전히 끊겨버렸다는 것을 느낍니다.

소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예속되지 않습니다.

"──미안해."

그렇게 바닥을 나뒹구는 목걸이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나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제대로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방법이 없었다고는 해도, 너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

"...."

그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 넌 자유라는 의미야."

어차피 지금 계약을 파기한다고 해서 당장 이 계약서를 없앨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또, 그녀의 목 뒤에 찍힌 낙인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계약서에 적혀있던 내 이름이 지워지며, 그녀가 다시 새 주인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뿐이다.

"주인──"

"난 더 이상 너의 주인 같은 게 아냐."

그러니 어떤 관점에서는, 그저 내가 그녀를 통제할 수단을 스스로 포기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지 몰랐다.

"이제 그 어느 것도 너를 옭아매지 못할 거야. 너는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어."

물론 이대로 그녀와의 계약을 유지했다면 그녀는 앞으로도 충실히 나를 따랐을 것이다.

나를 절대 거스르지 못하는, 최대의 전력이 되어주었겠지.

그리고 그런 예속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은, 오직 관계의 형식만이 그럴 뿐 그녀는 어디까지나 나와 동등한 존재라고 여기며 실제로 그렇게 대접해주는 약간의 위선을 통해 덜어내려 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게 아마,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테고.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것은 게임일 뿐"이라며 오직 효율을 위해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들의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저 0과 1로 코딩된 스크립트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내게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게임이건 어쩌건. 지금은 더 이상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과도 별 상관없이.

양심에 찔려서라거나, 뭐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없었다.

그게 다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뿐이고.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해하게 될 거야, 언젠간."

"저에겐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야,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그녀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그녀가 받은 저주였다.

자신을 배신해 노예로 전락시킨 자들에 의해 능력과 신분, 기억, 하물며 자유의지마저도 전부 박탈당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이 세계에 몇 명 존재하지 않는 20레벨의 대마법사였어야 할 그녀가 지금 나와 같은 3레벨의 초보 마법사인 이유다.

"생길 거야, 분명."

그리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복종한다는, 또는 최소한 의존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이러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너와 가급적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 …너한테, 부디 부탁해야 할 게 있어서."

"부탁… 말입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게. 네가 필요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마왕'을 찾아 쓰러뜨려야 해. 아직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목숨이 달린 문제거든. 하지만 나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마왕을 쓰러뜨리는 건 물론이고, 애초에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부터 말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내 동료가 되어 앞으로 나와 함께 여행해주었으면 해."

"...."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침묵의 중간에도, 지금까지 대화를 이어오면서도, 주사위가 구르는 일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말해,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당신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솔직히,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답하리라는 걸.

그리고 지금의 이 '따른다'는 결정이 정말로 그녀가 온전한 자신의 선택에 의해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말하기는 좀, 어떻게 들릴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보호'가 필요했다.

내가 그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조금 전 말했듯 지금 그녀의 사고는 기본이 복종, 최소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런 상태의 그녀를 가만히 방치한다면, 분명 얼마 못 가 또다시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 거다.

설령 계약서나 낙인 같은 게 없다 했더라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 걸려있는 저주의 메커니즘이자 무서움이었다.

따라서,

"나는 유빈이라고 해. 빈이라고 부르면 돼."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너는…"

"…이스트우드."

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쪽 숲에서 저를 찾아냈다고, 상인들은 저를 그렇게 불러왔습니다."

게임에서 그녀는 본명이 밝혀지기 전까지 저 이스트우드, 혹은 이스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노예상들이 편의상 붙인 상품명일 뿐이다.

"다른 이름은? 혹시 떠오르는 건 없어? 원래 이름이라든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슈리네.

이것이 그녀의 본명이었다.

하지만 이 이름을 지금 당장 말해봤자 의미도 없었고, 애초에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직은,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다.

"…리네."

적어도 그녀가 스스로 이름을 되찾을 때까지는.

"예?"

"괜찮다면, 앞으로 '리네'라고 부를게. 네 이름 말이야."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아, 물론 어디까지나 네 마음에 든다면 말이지만."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약속할게, 리네."

키가 작은 편인 리네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 나는 얼굴에 뒤집어쓴 자루를 벗었다.

최대한 진실하게 그녀를 대하려 노력하는 이 순간만큼은 잠시 벗어둬야 할 것 같았기에.

다른 이들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리네라면 괜찮았다.

이전에 언급했듯, 리네는 기억을 잃은 대마법사라는 설정답게 온갖 좋은 특성들과 특수 능력(특전)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매혹 면역'이었다.

리네는 「매혹」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리네의 앞에서만은 마음껏 내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앞으로의 여행은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너를 위한 여행이기도 할 거야."

리네는 앞으로 잃어버린 힘과 기억을 되찾으며,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점점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여행 동안, 나는 다시는 이번처럼 네 의지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자신은 동쪽 숲에서 찾아낸 엘프 노예 같은 게 아니라, 훨씬 더 위대한 존재라는 걸 다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다.

"만약 네 의지와는 다른 행동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네가 납득할 수 있게끔 최대한 설득할 거야. 그럼에도 네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포기할 거야."

물론 마왕을 무찌르는 데에 대마법사인 그녀의 힘이 필요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리네."

리네는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뭇거렸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끝내 내 손을 맞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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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이스트우드'가 정식으로 파티에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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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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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퀘스트

「Wires and Chains (선과 사슬)」

◇ 모험을 통해 이스트우드의 기억을 되찾을 단서를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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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계약이나 마력의 선 같은 게 아닌, 서로의 손으로.

* * *

다음 날.

슈타우트로 돌아와 하룻밤을 보낸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옷가게였다.

여관도 거리도, 어젯밤 교외의 양조장이 모조리 불타버린 일로 도시 전체가 시끌시끌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곳의 정체가 실은 노예 경매장이었다는 걸 아는 이들은 드물었다.

알고 있는 자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대놓고 노예를 연상시키는 누더기를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이런 자루를 두 명이서 같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건… 설령 양조장에서의 사건이 없었다 해도 누군가에게 잡혀가기 딱 좋은 일이지 않겠나.

"제 옷… 말입니까?"

"응. 직접 원하는 걸로 골라. 네가 입고 싶은 걸로."

"저는 딱히 지금도 상관없습니다만."

"…그건 사실 천 조각이지 옷이 아냐."

"그랬던, 겁니까…?"

그리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설령 그런 이유가 없었다 해도 내가 눈을 두기가 힘들었다.

면적이 적고 뭐 이런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보고 있기가 안쓰럽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이렇게 답한 리네는 여전히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더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옷가게에 들어온 이후, 나는 리네에게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라 하고는 얌전히 근처에 앉아 기다렸다.

얼굴을 가리는 데엔 어차피 후드가 달린 로브 하나 정도면 충분했고, 그 안에 평소 입고 다닐 옷은 가급적 리네 본인이 선택해줬으면 했기 때문이다.

"...."

리네는 역시나 스스로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에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저한다기보다는… 그냥, 정말로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라고 할까.

옷을 둘러보다가도 계속 내 쪽을 슬쩍 돌아보는 모습을 보면 무심코 당장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아야 했다.

본인이 원하는 옷을 고를 때까지 일절 끼어들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게 내 일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못 참고 끼어들어서 "이런 건 어때?" 하고 묻는 순간 리네는 바로 그걸 고를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본인이 원하는 걸 깨달았으면 했다.

고작 옷을 고르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사소한 선택도 지금의 리네에게는 중요한 과정일 테니.

"골라주시지 않는 겁니까?"

"내가 입는 게 아니니까. 네가 원하는 걸 고르면 돼."

"저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음에도 데려오셔서, 저를 꾸미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뭐라고 널 꾸미니 어쩌니 하겠어."

무심코 쓴웃음이 지어졌다.

"난 너의 주인 같은 게 아니라 동료야."

비록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한때는 그녀의 '주인'이었으니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가책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말해야 했다.

"여기 오자고 한 건 딱히 내가 보고 싶은 옷을 입어줬으면 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남이 던져준 그런 옷 같지도 않은 옷이 아니라 네가 직접 고른 걸 입어줬으면 해서 그런 거지."

"…하지만 저는 옷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뭐, 천천히 고민해 볼 만큼 고민해 봐. 시간은 충분하니까."

결국 리네는 다시 옷들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걸로 하겠습니다."

드디어 고른 옷을 조심스레 들어 내밀어 보였다.

그 옷을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는, 기억을 잃기 전의 그녀가 주로 입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마음에 들어?"

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잃었더라도 취향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까.

"입을 때 편할 것 같아서…"

"그게 기준이었나…."

생각해보면 늘 무표정하고 얌전한 모습 때문에 티가 잘 안 나지만 실은 엄청 귀찮음이 많은 성격이라는 설정이었던가….

이후 그 옷으로 바로 갈아입고 나온 리네는 마치 확인해달라는 듯 양팔을 슬쩍 든 채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떻습니까?"

"네 마음에 든다니 나도 좋아."

"그렇습니까."

살 게 정해졌으니 이젠 계산을 할 차례였다.

참고로, 지금 내게는 한 푼도 없었다.

그런데 계산은 어떻게 하냐고?

"외상으로 해주시죠."

"외상 입으실래요 손님?"

"3일 안에 갚으러 오죠."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

[설득]

성공

--

"──아주 좋은 생각 같군요!"

012화. 도박사의 오류 (1)

비록 리네를 동료로 맞이했지만, '파티'라 불리기엔 우리 두 사람만으론 부족했다.

딱히 비유 같은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 세계에선 최소한 세 명은 되어야 본격적으로 파티라 취급된다.

실제로 법이 그랬다. 모험가 길드법인지 뭔지. 어떤 계약서나 의뢰서 같은 걸 쓸 때 파티의 개념은 세 명부터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우리가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명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지금 이 도시에 있었다.

* * *

쿠웅!

딱딱한 물체와 단단한 나무판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달그락달그락, 하고 무언가 작은 것들이 계속 부딪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자, 자! 얼른 걸어 걸어!"

술로 유명한 도시답게 아직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주점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그 와중에도 유독 시끌벅적한 곳이 있었다.

"떠──"

환호성과 탄식이 교차하고 있는 그곳에선,

"떴다! 떴다아아아──!!"

"아아악! 아니, 아니 이게 어떻게?! 으아아악!!"

흔히 말하는,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주사위가 굴러가고 눈이 굴려지며 주사위 눈 하나하나에 금화가 짤랑대고 술잔이 찰랑댔다.

"자네, 이번엔 누가 이길 것 같나?"

"저 아가씨가 오늘 끗발이 제대로 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진풍경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구경꾼들이—대체로 한 손에 술잔을 든 채—도박꾼들과 일희일비를 함께하고 있었다.

"하하핫! 이야~ 오늘은 어째 운이 착착 붙는데!"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가 한 명 있었다.

"미리 미안해 아저씨들! 오늘 나한테 다 털리게 생겼네~?"

여러모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우선, 하프엘프였다. 하물며 다크엘프와의 혼혈이었고.

인간들과의 교류가 드문 엘프족 중에서도, 심지어 같은 엘프들 사이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다크엘프들이었다.

순혈에 집착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타 종족과의 교류 자체를 하려 들지 않는 다크엘프와 인간의 혼혈은 사실상 한 개인이 한평생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온 대륙을 통틀어봐도 굉장히 드문 존재들이었다.

"좋아! 나 진짜 안 보고 건다, 아저씨들? 쫄리면 뒈지시든지."

물론 덩치 좋고 인상 거친 사내들밖에 없는데도 그 사이에서 전혀 기죽는 기색 없이, 오히려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당연히 한몫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앞에 수북이 쌓여있는 금화들도 금화들이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 더미 옆의 단검 한 자루였다.

"여자애 하나 뜯어먹겠다고 다 큰 아저씨들끼리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말이야, 응? 무섭다 무서워~"

마치, 이상한 수작을 부리기라도 하면 바로 이 단검을 뽑아 찍어버릴 거라는 듯 당당하게 꽂혀있는.

"자, 6 떠라 6! 6! 6!"

누가 봐도 명백하게, 저 도박판을 지배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유── 6! 6이다!!"

"말도 안 돼!?"

어떤 의미로든.

"우와! 봤어? 봤어!? 캬하하핫!"

그때였다.

"사기 치고 있네, 이 씨X!"

쾅!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친 한 사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그 소리에 맞먹을 정도로 발을 쿵쿵 구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이를 본 그녀는 바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더니 똑같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사기?"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갈며 노려보는 사내를, 그녀는 턱을 슬쩍 든 채 빤히 마주 바라보았다.

"방금 못 봤어? 나 진짜 쳐다도 안 보고 걸었는데."

해볼 테면 언제든 해보라는 듯이.

"그게 사기지! 어떻게, 어떻게 거기서 6이 뜬다는 걸 아는데!"

"몰랐다니깐 그러네."

"구라 치지 마!"

"잔으로 덮어놓은 걸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알아? 억지 부리지 말라고~"

"이, 이 사기꾼 새끼가…!"

그녀가 계속 빈정대자, 사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거칠게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놀란 주변의 사내들도 다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이, 아저씨."

그녀는 여전히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키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쪽팔리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다 큰 아저씨가 여자애한테 주사위 게임 좀 졌다고 꼬장이나 부리고. 자꾸 이러면 이 동네 아저씨들 소문이 뭐라고 나겠어?"

"…!"

그 순간, 사내가 돌연 숨을 삼켰다.

굳어버린 얼굴만 본다면 마치 정곡을 찔린 나머지 뭐라 반박하지 못해 당황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무 작잖아, 아저씨."

정확히는, 밑에.

방금까진 분명 탁자 위에 꽂혀있던 단검의 끝이 어느새 사내의 다리 사이를 겨누고 있었다.

"그릇이 작아."

여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장에라도 찔러버리겠다는 듯.

"이익…!"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깬 건 사내의 어깨를 붙잡으며 끼어든 구경꾼이었다.

"자, 자, 너무 마셨군 자네."

"아가씨 말이 맞아. 계속 덮어뒀던 걸 무슨 수로 보겠나."

"다 재밌자고 놀던 거 아닌가. 너무 과몰입했어."

그를 시작으로 주변에서 다들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하자,

"…씨X!"

사내는 결국 욕지거리를 뱉으며 멱살을 쥔 손을 홱 놓아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태연스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무심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시 봤어?"

그리고 옆에 있는 리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프엘프로군요."

하지만 돌아온 건 굉장히 담담한, 그보다는 딱히 아무런 관심도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였다.

"저 인간, 방금 다 털렸어."

"예?"

"그 잠깐 사이에 팔찌고 목걸이고 지갑이고 전부 싹 다 털어갔다고."

리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사실 이렇게 말한 나도 그녀가 그럴 거라는 걸 미리 알고 보지 못했다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유심히 살펴봐도 까딱하면 놓칠 정도로 아주 잽싸고 현란한 [기교]였으니.

처음 멱살을 잡힐 땐 막으려는 듯 팔목을 스치며, 팔찌를.

사내가 더욱 거칠게 멱살을 쥐자 주변에서 하나둘씩 일어나며 끌린 의자 소리에 잠시 고개가 돌아간 순간, 목걸이를.

마지막으로 멱살을 잡던 손을 도로 놓자 단검도 함께 거두는 척 허리춤에 묶어둔 끈을 끊어버리며, 지갑을.

그렇게 그녀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던 사내의 코를 단숨에 베어갔다.

"유감이야 아저씨~."

"저, 저게 진짜…!"

팅! 하고 그녀가 튕긴 금화가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잡아챈 사내는 분을 삭이지 못하면서도,

"바이바이~"

마치 약 올리듯 쪽, 하고 손 키스를 보내는 그녀에게 끝내 아무 말도 못 하곤 그저 씩씩대며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짓는 저 능글맞은 미소. 나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미소였다.

아무렴, 익숙하다마다.

"아, 잠깐만. 나도 한잔해야지. 여기 맥주 한 잔!"

──그녀의 이름은, '이블린'.

흉성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이비'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녀가, 바로 내가 찾고 있는 '도적'이었다.

"자, 계속할까?"

아, 참고로 사내가 옳았다.

저 도박판은 실제로 전부 사기였다.

이러나저러나 결국에는 이비가 지금 다시 자리에 앉은 이들의 모든 금화를 따가는 구조였으니까.

그러니 만약 그가—저 테이블에 앉은 '플레이어'들이 종종 그러듯이—차근차근 조작이라는 증거들을 모아 고발했다면, 역으로 당하는 건 분명 이비가 됐을 거다.

물론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 벌로 싹 다 털렸지만.

킥킥댄 이비는 종업원에게 건네받은 맥주를 바로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단숨에 잔을 절반 가까이 비운 후 아주 잠깐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런 표정으로 입술 위쪽에 묻은 흰 거품을 혀로 할짝 핥아냈다.

"저 하프엘프가 신경 쓰이십니까?"

"음? 뭐, 그렇지."

애초에 지금 이 술집에 온 것 자체가 이비를 찾으러 온 거니.

하지만 여기서 당장 이비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를 찾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후아아암──"

문득 이비는 입을 쩍 벌리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어 목 뒤를 매만진다거나 금화 한 뭉치를 떼어내 손안에서 잘그락잘그락 비벼댔지만, 그럼에도 자꾸 눈이 끔뻑거리는 걸 보면 영 잠기운이 달아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냐…?"

쿵!

하고, 느닷없이 이비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일까, 대부분 놀라기보다는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다.

"…뭐, 뭐야?"

그렇게 엎어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이비를 다들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푸──"

이비는 태평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단순히 곯아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게 확인되자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

테이블의 주변이 다시 한번 정적에 휩싸였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참가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의 눈이 주사위가 굴러갈 때보다 더 빠르게 양옆으로 굴러갔다.

"다, 다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참가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저 돈은 그, 저 아가씨가 정당히 따간 거잖나…?"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도, 수북이 쌓여있는 금화들로부터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괜히 눈독들이지──"

아니나 다를까,

"──우오오오!!"

와장창!

테이블이 엎어졌다.

"비켜! 내 거야!"

참가자고 구경꾼이고 너도나도 일제히 테이블로 몰려든 것이다.

동시에 이비의 앞에 쌓여있던 금화들이 짤랑짤랑! 소리와 함꼐 온 바닥에 흩어졌다.

"놔! 내가 먼저 집었어!"

"아아아악!"

"어, 어떤 새끼가 깨물어!?"

우지끈! 의자가 부서지고, 챙그랑! 술잔이 깨지고, 퍽! 주먹이 날아갔다.

한 마디로,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혼란이 머지않아 술집 전체로 퍼졌을 때, 바닥에 엎어진 채 방치되어 있던 이비를 돌연 누군가가 들어 어깨 위에 둘러메는 모습이 보였다.

"가자, 리네."

그에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앞에 펼쳐진 혼란을 묵묵히 바라보는 중인 리네의 팔을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한 번 더 '동료'를 구하러 갈 때였다.

다만, 그전에 먼저 찾아가야 할 자가 있었다.

"어이."

난투극을 피해 카운터 쪽으로 몸을 숨긴 종업원 말이다.

"누구…"

"술에 탄 수면제, 남아있지?"

"…예, 예?"

아까 이비에게 술을 가져다줬던.

"누가 두둑한 팁이랑 같이 준 거 있잖아. 이걸 타서 저 하프엘프한테 주라고. 그냥 재울 뿐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는──"

『내놔.』

"──!"

* * *

사악… 사악…

규칙적으로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음에 이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소리의 정체가 날붙이를 가는 소리였다는 걸 바로 깨닫게 되었다.

움찔 놀란 이비는 곧장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찰그랑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

그제야 이비는 자신이 쇠사슬에 묶인 채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헛웃음을 지었다.

"시X 진짜."

그러더니 자신의 앞에서 날붙이를 갈고 있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를 향해 물었다.

"티아리아에서 왔냐?"

"보스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이블린."

"아, 어련하시겠어."

"우선 네놈이 금고에서 훔쳐 간 보물들을 전부 찾아낼 때까진 우리 마음대로 다뤄도 좋다 하시더군."

"빌어먹을 노인네가. 이미 진작에 다 엿 바꿔 먹었는데 뭐 아직도 그걸 찾고 지X이야."

"어딨냐, 이블린?"

"방금 말했잖아 멍청한 새끼야. 엿 바꿔 먹었다고."

이비는 피식 비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러자 단검을 갈던 걸 멈춘 남자는 그대로 성큼성큼 이비를 향해 걸어갔다.

"재밌냐, 응? 넌 지금 상황이 웃겨?"

"시X 니들이 자꾸 웃기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남자는 이내 팔짱을 끼며 슬쩍 턱짓했고, 이를 본 다른 세 사람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이비를 향해 걸어왔다.

각자 하나 이상의 연장을 손에 든 채로.

"아, 야, 야! 아아~ 잠깐잠깐!"

그걸 본 이비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급히 몸을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하… 그래, 이제 생각나네. 말해줄게. 어디다 숨겨놨는지."

갑작스레 돌변한 이비의 태도에, 남자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너한테만 말해줄 테니까 이리 와 봐." 하는 이비에게로 조금씩 더 다가갔다.

"네 엄──"

"In einem Bächlein helle, Da schoß in froher Eil~"

느닷없이,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에 이비를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렸고,

"──아?"

잠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Die launische Forelle vorüber wie ein Pfeil~"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뭐야 저건?"

'자루'를 보고는.

* * *

"Ich stand an dem Gestade Und sah in süßer Ruh~"

슈베르트의 〈송어〉를 열창하며, 나는 성큼성큼 '무대'의 중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고 없이 시작된 나의 [공연]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들 홀린 듯 터벅터벅 내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Des muntern Fischleins Bade im klaren Bächlein zu~"

딱 한 사람, 쇠사슬에 묶여있는 이비만 빼고.

그렇게 내 노래에 이끌려 온 네 사람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Des muntern Fischleins Bade im klaren Bächlein zu~"

1절을 끝으로 나는 노래를 멈추었고, 동시에 네 관객들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오며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짝짝짝!

쏟아지는 박수 세례에 화답하기 위해 나는 과장된 몸짓과 함께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후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이… 오는 일은 없었고,

"근데 누구쇼?"

대신 박수를 멈추자마자 팔짱을 낀 남자의 물음이 날아왔다.

"이 근처를 방랑하던 음유시인입니다."

"방랑? …이 외진 데 있는 창고에서?"

"그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냥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

[설득]

난이도 22

⚅ / ⚃

대 성 공

--

"…일이, 가끔은 있을 수도 있겠지."

"정말 기막힌 우연이군 그래."

이들에겐 아주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보다 머리에 대체 뭘 뒤집어쓴 거야? 강도야?"

"패션입니다."

"패션인가… 요즘 패션은 심오하네."

"음유시인들 사이에선 저런 게 유행인가보군…."

나한텐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니까.

"줄곧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자 구석구석 거닐다 보니 이런 곳까지 오게 됐군요."

이자들이 이비를 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루트는 이미 「숨겨진 노예 경매장」을 갔다 온 입장에선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컸다.

주력 사업처였던 경매장 겸 양조장이 하룻밤 사이에 문자 그대로 재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회가 망한 건 아니었으니까.

쉬쉬하는 분위기라곤 해도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슈타우트에선 아직 좀 더 머물러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 괜히 이목을 끌어봤자 그다지 도움 될 건 없었다.

"어, 그래…? 뭐, 아무튼 노래 잘 들었다."

"미안한데 우리가 지금 좀 바빠서. 일하던 도중이니 관광은 딴 데 가서 해."

"아무렴요.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가급적 여기서 조용히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나, 이 우연한 만남 역시 슈타리온 님의 인도겠죠."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와인병 하나를 높이 들어 찰랑찰랑 흔들어 보였다.

"이것도 다 인연인데, 우리 슈타리온 님의 뜻을 받들어 딱 한 잔씩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연하지만 이건 그냥 와인이 아니었다.

'수면제를 탄 와인'이지.

마신 순간 10턴 동안 '수면' 상태로 만드는.

"이런 만남을 축하하지 않는다면 분명 슈타리온 님께서 실망하실 겁니다."

이 녀석들이 이비에게 쓴 바로 그 수면제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한잔하자고? 여기서?"

"우리 모두 술의 도시에 있지 않습니까."

'일'을 하던 도중에 갑작스레 나타나선 노래를 부르질 않나 이젠 아예 술까지 권하는 나를 보며 놈들은 역시나 어이없어하는 반응이었지만,

"그런… 가?"

음유시인들이 워낙 괴짜가 많고 대부분 술과 연회를 좋아하는 이미지라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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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난이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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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자체는 아까보다 좀 더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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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 보정치 +25

행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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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봤자 어차피 아까도 지금도 결국 뭐가 됐든 대실패인 1만 뜨지 않으면 되는 수치라는 건 같았지만.

여기서 만약 주사위가 한 개였다면 확률은 6분의 1. 제법 위험한 도박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내 주사위는 두 개거든.'

주사위 두 개가 모두 1이 뜰 확률은 단 36분의 1. 3%도 채 되지 않는 낮은 수치였다.

게다가 설령 그 낮은 확률을 뚫고 대실패가 뜨더라도, 「관심종자」 특성 덕에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

즉 1296분의 1. 내 셈이 맞다면, 여기서 실패가 뜰 확률은 대강 0.07% 정도였다.

요컨대 그냥, 정말 어지간해선 실패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건 도박이 아니라, 수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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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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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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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실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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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뜰 수도 있긴 하지. 아주 낮은 확률이라도 말이다.

비록 3퍼도 안 되는 확률이라곤 해도 그게 절대 뜨지 않는다면 그럼 가챠겜을 만드는 회사들은 전부 다 사기꾼 집단 아니겠는가? 반박 시 당신의 말이 맞다.

--

'행복한' 버프 효과 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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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어차피 한 번 더 굴릴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여차하면 「별의 순간」을 쓸 수도 있겠지.

근데 하루에 딱 한 번 사용 가능한 0%를 100%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거의 100% 성공할 수 있는 굴림에서 0%에 가까운 확률을 피하겠다고 쓰는 것도 좀 말이 안 되지 않나.

설마 또 두 개 다 1이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뜨겠어?

--

⚀ / ⚀

대 실 패

--

"??"

문득, 그만 손이 미끄러진 당신은 그대로 술병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런 적 없는데? 라고 생각했던 때엔 이미 내 몸은 거짓말처럼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높이 쳐들었던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질까봐 어떻게든 다시 붙잡는다는 것이 그만──

"아."

──챙그랑!

그대로 눈앞에 있는 깡패의 머리를 냅다 후려버리고 말았다.

013화. 도박사의 오류 (2)

…그게 말이 되냐고? 애초에 주사위 네 개가 전부 다 1이 뜨는 확률은 말이 되고?

하필 대실패라 그런 것도 있다. 그냥 실패였다면 단순히 술병을 떨어뜨려 깨지는 것 정도로 그쳤겠지.

뭐, 요지는…

'…X됐네.'

내 계획이 방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저 술병마냥 완전히 개박살나버렸다는 소리다.

"...."

일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힘'이 약해서일까, 술병은 깨졌어도 정작 머리를 얻어맞은 깡패는 쓰러지지 않고 여전히 멀쩡하게 서 있었다.

머리가 붉은색 와인에 흠뻑 젖어버린 것과,

"뭐,"

주르륵, 하고 그 와인보다 더 진한 붉은색의 핏줄기가 이마에서 흐르기 시작한 것 정도만 뺀다면 말이다.

"뭐 하는… 짓이냐...?"

그 당사자를 비롯한 대부분 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끔뻑끔뻑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멍한 표정들이었다.

당연하지. 나도 내가 뭔 짓을 한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하하."

계획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이상,

"뭐 하는 짓이냐고 묻──"

이젠 임기응변으로 해결할 수밖에.

"──저, 저기!"

나는 손가락을 쭉 뻗어 놈들의 뒤쪽을 가리켰다.

"도망치려고 하는데요!"

"?!"

그곳에선 이 깡패들의 시선이 전부 내 [공연]에 팔려있던 사이, 혼자서 쇠사슬의 자물쇠를 풀어낸 이비가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로 걷고 있었다.

그렇게 탈출 시도를 갑작스레 고발(?)당한 순간, 이비는 방금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그 자세 그대로 딱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하하."

그러더니, 끝내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시X."

"아니, 저건 또 대체 언제──"

"뭐하고 있어!? 잡아!"

내게 집중됐던 네 명의 시선과 몸이 모두 자연스레 이비에게로 쏠렸고,

"리네!"

덕분에 대응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콰앙!

내가 신호하자마자 멀리 구석에 숨어있던 리네가 쏜 「화염구」가 폭발하며 눈앞의 깡패를 멀리 날려버렸다.

"──우, 우아아악!?"

술에 머리가 홀딱 젖어있던 놈 말이다.

그 광경을 보고 움찔 놀란 깡패들이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지만,

『이게 네 제사주다 이 XX새끼야!』

돌아보는 잠깐 사이 바로 「독설」로 한 놈을 더 처리했다.

이제 남은 건 둘.

둘 다 갑작스레 벌어진 전투에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이 망할 딴따라가── 어억!?"

어느새 잽싸게 달려온 이비가 놈이 칼을 뽑는 것보다 먼저 그 칼을 훔쳐 가더니 어리둥절해 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목 뒤를 찔러버렸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백스탭」이었다.

"히익…!"

눈 깜짝할 새에 혼자 남게 된 사내는 도저히 전황을 뒤집을 수 없다 판단했는지 결국 다급히 도망치는 길을 택했지만,

『꿇어!』

그래봤자 얼마 못 가 내 「언령」에 굴복하고 말았다.

내 외침을 듣자마자 사실상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마치 앉아 소리를 들은 개처럼.

놈은 그 사실이 굉장히 굴욕적이고… 또, 공포스러웠던 모양이다.

"너, 너 뭐야 이 새끼야…?!"

다가가서 직접 내려다본 놈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말했잖아. 이 근처를 방랑하던 음유시인이라고."

"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긴 하냐…?! 우리 보스가 어떤 사람인지 아냐고…!"

어떻게든 그 사실을 숨기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도 최대한 강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잠시였다.

"나한테 금고 털린 새끼지."

이비가 다가와 목을 그어버렸으니까.

그렇게 깡패들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상황이 대충 정리되──

"──움직이지 마."

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는 거 같으면 바로 그어버릴 테니까."

깡패의 목을 그었던 바로 그 칼날이 이번에는 내 목에 들이밀어진 것이다.

"뭐 하는 새끼냐 너?"

그에 나는 능청스레 양팔을 들어 올려 보이며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걸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나선 노래를 쳐부르질 않나, 도망치려는 걸 갑자기 꼰지르질 않나, 근데 또 이놈들하곤 싸우질 않나, 게다가 뭐야 이건? 대가리에 대체 뭘 쓴 거야?"

이비의 물음에 여유롭게 대답하려던 찰나,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녀가 할 말을 끊어버렸다.

"음유시인이니 뭐니 또 지껄이기만 해봐."

"…음유시인 맞는데?"

"이 새끼가 진짜."

사실인 걸 어떡하겠나.

하지만 이비는 지금 해보자는 거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내 목에 댄 칼날을 더욱 목에 밀어 붙여왔다.

이러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살짝 베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주인님."

그때, 리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내 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제자리에 멈춘 그녀는 평소의 무덤덤한 눈빛보다 조금 더 냉담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을."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게 서클을 휘감아 둔 팔을 이비를 향해 겨눈 채로.

"그러지 마, 리네. 그리고 제발 주인님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줘."

나는 그 모습을 본 즉시 들고 있던 양손 중 하나를 급히 뻗어 리네를 만류했다.

"괜찮아, 내가 해결할게."

리네는 내 말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마지못해 팔을 내리긴 했지만, 경계하는 눈초리는 여전했다.

"그래, 얌전히 네 주인님 말 들으라고. 주인님 다친다?"

"난 주인 같은 게 아니야."

"어련하시겠어. 이야, 내가 별꼴을 다 봐 왔지만 세상에 노예를 부리고 다니는 음유시인은 또 처음 보네."

"그녀도 노예가 아니고."

"그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뭔데? 뭐, 그런 놀이야? 노예도 아닌 어린애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만드는 취향이시다? 거참 훌륭도 하셔라."

"어린애도 아냐. 너도 엘프면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반은 인간이라 그런가 보지. 그 잘난 엘프님들한텐 늘 잡종 소리나 듣기만 하고 통 친구 먹을 기회가 없었거든. 그래서 내가 잘 몰랐나 보네."

이죽댄 이비는 리네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해, 할머니?"

"…설명을 들으면 이해하게 될 거야."

"할머니한테 주인님 소리를 듣는 게 네 취향이라는 거?"

"아직 그녀가 이런 관계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럴 뿐이야. 시간을 줘."

"미안한데 평생 이해 못 할 취향이거든."

"어느 정도는 네 말이 맞아. 그녀는 지금이야 비록 자유의 몸이지만, 실제로 노예였었으니까."

"아, 이상취향보단 노예를 대놓고 데리고 다니는 쓰레기가 나으시다?"

"어제, 교외의 양조장이 불탔다는 얘기는 들었지?"

"할 말 없으니까 화제 돌리기? 너무 노골적이잖아."

"사실 거긴 노예 경매장이었어."

흠칫, 칼을 쥔 이비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그녀는 거기서 상품 취급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다 날려버리고 왔지. 엿같아서."

예상대로의 반응에 나는 씩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뭐, 어차피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비슷한 경험 있지 않아? 안 그래?"

"...너, 진짜 뭐냐?"

"음유시인들은 소문에 민감하거든. 언제나 새로운 이야깃거리에 목말라 있으니까. ──그건 네 소문도 마찬가지야, 이비."

"…!"

"티아리아의 악명 높은 카르텔 보스를 털고 사라져 길거리의 전설이 된 다크엘프? 분명 몇 년은 우려먹을 수 있는 단골 노래 소재거든."

이 말에, 잠시 멍해졌었던 이비의 표정이 구겨졌다.

동시에 조금 거두나 싶었던 칼날도 다시금 바짝 밀어 붙여왔다.

"…너도 그 새끼가 보냈냐?"

"그랬으면 널 도우러 여기까지 왔겠어?"

"도와? 시X 그럼 아까 꼰지른 건 뭔데?"

"그건… 미안했어.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했거든."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빈틈을 만들어야 했다. '기습' 판정을 받을 만한.

그리고 실제로 통했다. 놈들이 거의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픽픽 쓰러져 나가지 않았나.

내가 다짜고짜 술병을 내려쳐버린 건 따지자면 '비전투 상황'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고…였던 셈이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건 결국 리네의 「화염구」로부터였다.

그때 놈들은 전부 이비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상태였던 리네의 선공이 기습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비의 파티원인 나도, 그 순간만큼은 놈들의 시야에서 잠깐 벗어나 있었고.

내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나를 노려보는 이비의 눈에서 느껴지던 적대감은 점점 옅어져 갔다.

"…시X."

물론 그렇다고 칼을 거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벌써 슈타우트에까지 소문이 쫙 퍼졌다고?"

"곧 있으면 대륙 전체가 네 노래를 부르게 될걸."

"하, 이래서 인기 스타는 곤란하다니깐."

"응, 곤란할 거야. 안타깝지만, 지금 네 명성으로는 어디 한 군데 오래 머무르는 도피 생활 같은 건 이제 꿈도 꿀 수 없다고 봐야겠지."

실제로 이놈들도 얼마 안 가서 찾아냈잖아? 덧붙인 내 물음을 이비는 부정하지 못했다.

"12도시 어딜 가든 이번처럼 널 노리는 카르텔의 암살자들이 쫓아오겠지."

"이 새끼 음유시인 맞네 이거. 아주 희망찬 격려야, 응? 말로 사람을 기운 나게 하는 재주가 있어."

"그 카르텔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면 아마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살아야겠지. 계속 거처를 바꿔가면서 말이야."

"…뻔히 다 아는 것들만 지껄이지 말고 좀 내가 모르는 쓸모 있는 새로운 정보라도 읊어보지 음유시인?"

"그리고 마침, 우린 지금 함께 대륙을 떠돌아다닐 동료를 찾고 있거든."

"하. 뭐 음악단이라도 차리시려고?"

"그것도 좋지. 언제 같이 합주라도 하자고."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쓴 웬 미친 인간이랑 그런 놈을 노예도 아니라면서 자발적으로 주인님으로 모시는 마조랑?"

"언제까지 혼자 도망 다닐 수 있겠어? 상대는 티아리아의 대귀족들조차 제멋대로 주무르는 놈이야. 인정하자고, 혼자서는 안 돼. 너한텐 도움이 필요해."

"그게 너희다?"

"그야 우리도 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니까. 기브 앤 테이크지. 다짜고짜 오직 선의로 도와주겠다는 사기꾼들보단 훨씬 믿음직하지 않아?"

"…내 도움?"

"길거리의 전설이 된 네 솜씨가 필요하거든. 어디를 좀, 털러 갈 거라."

"아하, 도둑질. 근데 지금 나보단 네가 훨씬 더 전문가처럼 보인다는 건 알지?"

"계획을 짜는 데에 있어선 전문가가 맞을지도."

"어디를 털 건데?"

"지금 당장은? 던전."

"던전?"

"거기서 여행 자금을 벌 생각이거든."

"진짜 털러 갈 곳은 따로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마왕성."

"!?"

한순간, 이비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하. 하하."

기가 찬다는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 이거 순 또라이 새끼네."

"대륙에서 제일가는 카르텔 대가리의 뒤통수를 치고 튀는 것보다 더 또라이 같나?"

"어. 개또라이 새끼야."

문득, 이비는 시선을 내리더니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럴 실력은 되고?"

"거기까지 가면서 자연스레 생길 거야."

"대체 뭔 자신감이지 이 새끼?"

그러면서, 내 목에 들이밀어졌던 칼날은 어느새 내려가 있었다.

"──뭐, 좋아. 알겠다고."

대신 이비는 코웃음을 한 번 치며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느 정도 말은 되네. 여차할 때 미끼로 버리고 튈 놈들이 있다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

나는 알고 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 이비야말로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걸.

--

도적 '이블린'이 정식으로 파티에 합류합니다.

--

물론, 처음에는 진짜 저러한 이유로 파티에 합류하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앞으로 우리가 먼저 이비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이비 역시 절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심코 픽 웃음이 새어나올 수밖에.

"──근데 말이야."

하지만,

"…!?"

이것만은 나도 몰랐다.

"한 가지 조건이 있거든."

돌연, 이번에는 칼날이 아닌 손을 뻗어와 내 자루의 끝을 잡아채리라는 건.

"얼굴 하나 못 까는 놈하곤 같이 일 못 하지."

"잠──"

나는 다급히 이비의 팔목을 붙잡고 벗기는 걸 막으려 했다.

"읏."

"뭐야, 싫어?"

이비는 아직 장난을 치듯 별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필사적이었고, 그 탓에 목소리도 조금씩 떨렸다.

이비의 초기 힘 스탯은 8. 반면 나는 2. 거기서 거기라고 하기엔 이미 4배나 차이 나는 것이다.

"네, 네 말이 옳긴 한데…! 나한테도 절대 벗을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아니,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능청 떨던 놈이 갑자기 왜 이러신대? 더 궁금해지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 모습에 이비는 더욱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호, 혹시라도 이걸 벗기면… 굉장히 후회하게 될 거야…!"

"사실 이 안에 아주 놀라운 정체라도 숨기고 있다든가? 절대 얼굴을 들켜선 안 되는 뭐 그런 존재야?"

장난기에 제대로 불이 붙었는지 아예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날름 핥기까지 했다.

"수배자? 아니면 뭐, 궁전에서의 생활이 지루해진 어디 왕자님이라도 되시나?"

"네가, 다치게 될 거라고…!"

"지금 협박하는 거야?"

"문자 그대로…, 네가 상처 입을 거야…!"

"네 얼굴을 보면 내가 상처를 입는다고?"

"그래…!"

"왜?"

"그, 그건..."

"아니 뭐, 말을 해야 납득이라도 할 거 아냐? 내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얼굴도 못 까는 놈을 뭘 믿고 따라다녀?"

싫으면 딴 놈 찾든가. 이렇게 덧붙인 이비는 분명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억지가 아니었다. 지금 맞는 말을 하는 쪽은 이비였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진실을 말할 때였다.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

"네가 봐버리면, 분명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 테니까...!"

"뭐라는 거야 이 새끼?"

014화. 세 명이 오리라 (1)

"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자루를 벗겨 내 얼굴을 보게 되어 내지른 소리…는 당연히 아니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 어느 유적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일단, 지른 사람이 이비인 건 맞았다.

"왜 내가 전위에 서야 되는 건데에에──!?"

자신을 노리고 매섭게 휘둘러진 대검의 칼날을 간신히 피해내며 지른, 절규에 가까운 진짜 비명이기는 했지만.

후욱!

"히야아악!?"

매섭게 휘둘러진 대검의 칼날을 허리를 젖혀 스쳐 보낸 이비가 재차 비명을 내질렀다.

결과만 봤을 땐 저 육중한 일격은 '대실패'로 빗나가며 이비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론 꽤나 아슬아슬한 회피이기는 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뎅겅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법한.

"…저기."

그래서일까.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네가 문득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정말 여기서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은 겁니까…?"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하달까,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편인 지금의 리네에게도 아무래도 이비의 저…

"멀뚱멀뚱 서 있지만 말고 뭐라도 좀 해보라고오오──!"

억울함(?)은 잘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둘이 저쪽에 가봤자 방해만 될 거야."

한 대만 맞아도 나가떨어질 게 뻔했다. 거기서 운이 좋으면 빈사고 나쁘면 뎅겅이겠지. 나나 리네나 소위 '물몸'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린 쓸모가 없으니 팝콘이나 가져와야 하는 상황인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자는 건 아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네에게 나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우린 용기를 나눌 수 있지. 그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크흠. 하고, 나는 한 차례 헛기침을 통해 목을 가다듬었다.

"죽어! 이러다 진짜 죽겠다고!! 히에엑!?"

콰앙!

그 사이 이비가 몸을 빼 피한 커다란 도끼가 그대로 옆에 있던 돌벽을 박살내 버렸다.

그에 나는 평소보다 더욱 빠르게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용기와 희망을 나눌 수 있다는 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A raptsä saa ia dibidäbi dilaaba Risstan dilann delann doe~』

「신속의 노래」.

이비가 상대하고 있는 몬스터들── 낡은 갑옷 차림의 스켈레톤들이 퍼붓는 매서운 공격을 연달아 회피하고 있는 동안, 나는 이비가 훨씬 더 확실하게 피할 수 있게 '민첩' 판정에 이점을 주는 노래를 연주했다.

2배속으로.

『Aaba ripättaa pa rippa riiba ribbi Ribbi dibii disstan delann doe~』

음유시인, 마법사, 도적으로 구성된 파티원 3인의 구성상 정석적인 전위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장 민첩 스탯이 높은 이비를 소위 '회피탱'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이비의 현재 민첩 스탯은 15. 초반 지역을 돌아다니는 레벨 3~4 정도의 몬스터들이 하는 공격 따위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회피할 수 있었다.

『Ia bariila stilann deiaä doe Ba-wa-ba-wa-ba woe woe deiavo~』

거기에 이 「신속의 노래」 버프까지 더해진다면, 사실상 거의 100% 회피가 가능하다고 보면 됐다.

많은 고인물들이 이 구간에서 이비를 회피탱으로 세우는 이유였다. 포션 값에 쪼들릴 수밖에 없는 초반에 전문 탱커를 세우고 힐을 주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식이니까.

누군가 대신 맞아줄 사람이 없다면? 그냥 맞지 않으면 되는 거다.

『Ba risstan dilann si delann doe Ta-ia-ga-ia-ga duu duu deiaä doe~』

실제로, 이비는 지금 모든 공격들을 회피해내면서 그 효율성을 보란 듯 증명해내고 있었고.

"자, 리네 너도 같이."

"예?"

"저 애한테 함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자고."

"…?"

내가 먼저 리듬을 타는 시범을 보여주자, 리네는 이유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런 나를 따라 손가락을 튕기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가볍게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대로의 무표정 그대로 말이다.

만약 Y나 T로 시작하는 동영상 사이트 같은 게 있는 세계였다면 이 광경을 그대로 찍어 올려 나름 인기를 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난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래에 혼을 실었다.

"아랏차차야디비다비딜라바릿치단딜란델란도아바리빳따빠릿빠리이바릿비리비디비리스텐델란도──"

"──도우랬더니 뭔 이상한 노래나 쳐부르고 앉았냐?! 저 묘하게 개열받는 끄덕끄덕은 또 뭐고!?"

뭐, 이비 입장에서는 혼자 여러 마리의 스켈레톤에게 공격받는 동안 이쪽에선 신나게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는 광경처럼 보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 역시 전부 계획의 일부였을 뿐이다.

…사실 뭐, 중간부턴 그냥 흥겨워져서 그런 게 맞긴 한데.

"리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리네가 가볍게 팔을 들어 앞쪽을 향해 겨눈 순간, 곧 푸른 빛에 감싸인 손끝에 커다란 서클 하나가 나타났다.

"이, 빌어먹을 마법쟁이 새끼들아아아악──!!"

저렇게 이비가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어 죄다 한곳에 모아놓으면,

"날려버려."

리네의 「화염구」로 한 번에 모조리 정리해버리는 거다.

요컨대, 흔히 말하는 몹몰이 사냥이다.

일일이 몹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수고와 시간도 덜고, 리네의 서클도 절약하고, 겸사겸사 포션 값도 절약하는.

그야말로 일석삼조 효율의 완벽한 공략법이었다.

근데 그럼 미끼가 된 이비도 함께 휘말리게 되지 않냐고?

다른 마법사들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리네는 달랐다.

리네는 전 대마법사답게 처음부터 좋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짝수 레벨마다 잃어버린 솜씨를 되찾는다는 설정으로 새로운 '특전'을(특성과는 다르다) 선택해 배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인기 있는 특전은 역시, 마법을 통한 아군 오사 확률을 대폭 줄여주는 「정밀 조준」이었다.

리네는 특히나 스킬 구성상 범위 마법들을 쓸 일이 잦기에 적과 근접한 아군을 함께 쓸어버리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사실상 그냥 2레벨을 찍자마자 바로 고민 없이 이 특전을 고르는 편…

"…음?"

잠깐만 있어 봐.

"저기, 리네? 혹시 그… 「정밀 조준」에 익숙해? 네 특기라든가?"

일단, 여태껏 나는 리네의 스탯이라든가 스킬 같은 걸 아직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게 가능한지도 아직 모르겠고.

"예?"

그리고 리네는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서클 두 개를 합친 2서클 짜리의 거대한 「화염구」는 이미 화르륵 작은 불꽃들을 날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한곳에 모인 스켈레톤들과… 그 중앙에 있는 이비를 향해.

"이건 또 뭐야아아아아──!?"

──콰앙!

굉음과 함께, 폭발한 화염이 치솟았다.

"...허."

* * *

전날.

나의 완고한 저항에 이비는 끝내 자루를 벗기는 걸 포기하는 모습이었다. 이비 본인 왈, "개소리를 들었더니 흥이 깨졌다"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이비."

"…아까부터 이비, 이비. 내 친구들만 날 이비라 부르거든?"

"그래서 그런 건데? 너랑 친구하고 싶어서. 오늘부터 친구하자고."

"아까부터 대체 뭔 자신감이지 이 새끼?"

"게다가 이블린이라 불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너 진짜 스토커냐? 뭔데?"

"유빈."

"뭐?"

"내 이름, 유빈이야."

"그래서 시X 그게 누군데?"

"네 친구."

"우리가 대체 언제부터 친구였냐고."

이비는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웃더니 고개를 내둘렀지만, 본인이 모를 뿐 실제로 나와 그녀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던 적이 많았다. 때론 그 이상이기도 했고.

"하, 됐다. …그래서 뭐, 던전에 갈 거라고?"

"응. 도시 근처에 유적이 하나 있어.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낮에 같이 출발하자고."

"던전 털이가 나름 짭짤하다는 얘기는 얼핏 들어본 적 있긴 해. 직접 가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재밌을 거야. 네 뛰어난 그 [기교]를 발휘할 기회가 굉장히 많거든."

자물쇠 따기라든지, 함정 해체라든지, [기교] 판정 굴림이 차고 넘치는 곳이 던전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설령 탱커나 힐러가 없어도 오직 충분한 딜만 있다면 던전을 도는 행위 자체는 가능하지만, [기교] 굴림을 도맡을 민첩 기반의 캐릭터가 없다면 던전을 완벽하게 '공략'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돌 수는 있지만 정말 돌기만 할 뿐이랄까.

던전에 숨겨진 보물상자들을 비롯해 기믹들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들을 죄다 놓친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건 알겠는데…"

그때, 나와 리네를 번갈아 살펴보던 이비는 어째서인지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부족하지 않냐?"

"응?"

"사람 말야, 사람."

"세 명이면 법적으로 파티로서 인정받을 수 있어."

"아니, 말고 새끼야. 보통 던전에 들어간다 하면 그 왜, 좀 막 이렇게… 고기방패로 앞에 세울 만한 녀석이 필요하지 않냐?"

"아하."

요컨대 탱커가 필요하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나도 리네도 지금 이비가 몸짓으로 설명하는 대로의, 척 봐도 전위하면 떠올릴 법한 든든함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실제로도 멀었고.

하지만,

"걱정 마."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보면, 탱커도 이미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이비의 그 의구심 어린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선언하듯 말했다.

"네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할 거니까."

* * *

"이, 이 순 사기꾼 새끼!"

어제의 선언(?)을 떠올리기도라도 한 걸까, 이비는 그야말로 배신감에 치를 떠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뭐?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할 거라고?!"

아무리 그대로 차마 어제처럼 똑바로 마주 볼 수까진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곁눈질로 슬쩍 이비를 훑어보며 답했다.

"…안 났잖아?"

아무튼 안 났죠? 한 대도 안 맞았죠?

"말은 아주 지가 전위에 서서 다 막아줄 것처럼 지껄이더니!?"

"…내가 언제?"

"야, 양심 없는 새끼!"

거짓말은 안 했다 거짓말은.

신속의 노래 버프를 통해 그녀의 회피 확률을 사실상 100%로 만들어줬고, 실제로 결과가 그랬다.

"그리고 미리 좀 말하라고! 뒤지는 줄 알았잖아!?"

리네의 「화염구」도, 다행히 「정밀 조준」 특전이 내 플레이 방식을 기억해 이미 저절로 익혀진 상태였던 건지 결국 또 아슬아슬하게 피해 휘말리지 않았고. …아마도?

"그때, 진짜 아주 요만큼 살짝 조금은 멋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이, 이 개새끼가…!"

자신의 처우(?)보다도 그런 감정을 잠시나마 느꼈다는 사실이 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분을 삼키는 이비였다.

"하… 넌 진짜 나중에 보자 새끼야."

이비는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지금은 화낼 기운도 모자라다는 듯 따지는 걸 관뒀다.

"…그래서, 뭐 건질 것들 좀 있었냐?"

"응? 아, 뭐 별로."

"뭐?"

그렇지 않아도 스켈레톤들이라 나오는 건 사실상 뼈다귀밖엔 없는데, 그마저도 문자 그대로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작살이 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잔뜩 그을린 낡은 갑옷의 파편들 정도가 남긴 했지만, 가져다 판다고 해서 딱히 돈이 되지도 않고 애초에 살 사람도 없는 잡템일 뿐이었다.

"까놓고 말해 그냥 폐품들이야."

"뭣──"

꼭 스켈레톤들이 아니었더라도 사실 던전에서 마주치는 대다수의 몬스터들이 그랬다. 몬스터를 사냥해 얻는 자원은, 아주 특수한 경우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보면 됐다.

"그, 그럼 방금 그 개고생은…"

"300."

"…어?"

"방금 우리가 여섯 마리의 스켈레톤들을 한 방에 보내버리면서 벌어들인 경험치야."

그럼에도 많은 모험가들이 던전을 찾는 이유는, 우선 '경험치'를 꼽을 수 있겠지.

"방금 같은 몹몰이를 앞으로… 한 네 번? 정도만 더 한다면 우리 모두 4레벨이 될 수 있다는 뜻이지."

"이 짓을, 네 번이나 더 한다고…?!"

"물론 진짜 네 번 더 한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애초에 그만한 수의 몬스터들이 있지도 않고.

높은 레벨은, 더 높은 보수의 의뢰로 이어진다.

물론 단순히 경험치만을 얻고자 한다면 던전 바깥의 몬스터들(혹은 인간들)을 잡는 것 또한 방법이겠지만, 무슨 전장이라도 되지 않는 한 던전만큼 몬스터들의 밀집도가 높을 순 없었다.

즉, 효율성이 높다는 거다.

"벌써부터 조바심 낼 필요 없어, 이비. 던전이 주는 보상들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그리고 당연하지만, 경험치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보물이라고 해야 하려나."

"!"

보물이란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온 순간, 여러모로 지쳤는지 칙칙하던 이비의 눈동자에 다시 번쩍, 하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작 표정은 어떻게든 티 내지 않으려 하는 기색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눈에서부터 다 드러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나는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슬쩍 턱짓을 해 보였다.

"얼른 가자. 보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 '웨이브'를 처리했으니, 이제는 보물상자의 차례였다.

(특정한 히든 던전 등을 제외한) 소소 시리즈의 거의 모든 던전들은 한 '스테이지'를 처리하면 최소 한 개 이상의 보물상자가 뜨도록 설계돼있었다.

따라서 그 스테이지였던 스켈레톤 웨이브의 잔해들을 지나쳐, 조금 더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찾았다."

이렇게, 보물상자와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발견한 보물상자라서일까, 우뚝 멈춰 선 이비는 역시나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야, 저거…?"

이쪽을 흘깃 돌아보는 이비를 마주 보며,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자에는 역시나,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이는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걸 본 이비는 씩 웃더니 곧 손가락과 손목으로 뚜둑뚜둑 뼈소리를 내며 상자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순간,

──데구르르.

"…음?"

돌연, 주사위가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이블린

[직감] 실패

--

그러더니 곧 이런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이스트우드

[직감] 실패

--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보물상자에 흥미가 생긴 듯한 리네가 슬쩍 다가가 이비의 뒤쪽에서 기웃거린 순간, 이번에도 같은 알림이 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반적인 보물상자를 앞에 두고 [직감] 판정을 위해 주사위를 굴리는 일은 없다.

당신은 눈앞의 보물상자로부터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낍니다.

--

[직감] 실패

--

하지만 그 꺼림칙함의 원인을 모르겠군요.

눈앞의 보물상자에선 딱히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단순한 기분 탓이었나 봅니다.

이건 기분 탓도 아니고 분명 평범한 보물상자도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이 물건의 정체 역시 분명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설마… 주사위 굴림에 실패해버려서?

단순히 기억이 가물가물한 수준이 아니었다. 뭔가가… 굳이 따지자면, 나의 '영혼'이 그 정체를 떠올리는 걸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당연하다. 소울 스톤이란 애초에 그런 물건이니까. 내 영혼에 한 번 '불가능'하다고 각인되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정말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니, 근데 진짜 뭐였지…?'

도저히 떠오를 기미가 없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헤매던 찰나,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땐 이비는 이미 상자의 자물쇠를 만지고 있었다.

"뭐가 있는지 한 번 볼──"

──와그작!

"!?"

"아."

생각났다.

"「미믹」이다."

"어, 어두워!? 무서워──!!"

015화. 세 명이 오리라 (2)

"...."

뚝, 뚝, 뚝.

흠뻑 젖어있는 이비의 머리카락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이비의 발밑은 그렇게 떨어지는 물들로 이미 축축한 수준을 넘어 거의 웅덩이가 고인 수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비의 표정은…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내가 물려버린 이비를 구출하는 사이, 리네는 「물 폭탄」과 「벼락」의 콤보로 미믹을 단숨에 처리해버렸다.

그때 이비는 물 폭탄을 함께 맞아버린지라, 지금 그녀를 뒤덮고 있는 저 투명한 액체의 정체는 분명 물이었다.

마치 조개 껍질이 벌어지듯 활짝 열어 젖혀진 채 긴 혀를 바깥으로 쭉 내밀고 있는 저 미믹의 타액…은 아마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을 것이다.

"...집에 갈래."

이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저 액체는 전부 마법에 의해 생성된 순수하고 깨끗한 100% 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물 치고는 뭔가 굉장히 끈적끈적 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지금은 얌전히 모른 체 해주기로 하자.

"...어이."

"예, 옙?"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왠지 여기서 개고생은 나 혼자 다 하고 있지 않냐?"

결국 들켜버렸나… 가 아니라.

"그럴 리가. 나도 굉장히 힘들다고."

"네가 뭘 했다고? 노래하고 춤추느라?"

"내 둘도 없는 친구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둘로 찢어버릴까 이 새끼…."

"그치만 나랑 이 던전은 상성이 나쁜걸."

정확히는 언데드 몬스터와 내 매력 몰빵 음유시인 빌드는 근본적으로 상성이 별로였다.

우선, 언데드들의 대부분은 「독설」과 같은 정신계열 공격에 절반의 대미지밖에 입지 않았다.

「언령」 같은 스킬은 아예 듣지도 않았고.

그야 애초에 듣지를 못하니까.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고블린 같은 것들에도 「독설」이 통하던 이유는, 어쨌든 그것들은 살아있는 존재기 때문이었다. 뇌가, 정신이 몸을 통제하는.

하지만 언데드들은 이미 죽은 존재다.

내 심한 「독설」에 상처를 받거나 「언령」에 굴복할 뇌가(정신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거다.

그래서 사실 설정대로라면 정신계열 대미지 스킬도 아예 통하지 않는 게 맞겠지만, 아무래도 게임 밸런스 상 그러기까진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딱 반값만 들어가는 거였고.

그리고 이 던전, 「술고래의 무덤」은 저 미믹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몬스터들이 다 언데드인 던전이었다.

뭐,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스켈레톤 같은 잡몹들 정도라면 대미지가 반토막 난 「독설」로도 처리는 가능했다.

다만 단일 타겟 스킬의 한계상 효율이 극단적으로 떨어질 뿐이었지.

따라서 「독설」로 딜을 하느니, 차라리 회피탱인 이비에게 노래 버프를 걸어주며 회피 확률을 높여주는 게 훨씬 효율적인 것이다.

"요컨대 넌 여기선 딱히 쓸모가 없으니 지금처럼 계속 노래나 쳐부르겠다 이거냐?"

"에이, 설마."

나는 그럴 리가 없지 않냐며 가볍게 손사래를 쳐 보인 후 바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가벼운 춤 정도라면 같이 춰줄게."

"너는 한밤중에 뒤에서 찔리면 그냥 올 게 왔구나 해라."

아무튼, 그래서 웬만하면 이런 언데드 던전은 거르겠지만… 이곳만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을 클리어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들 때문에라도 말이다.

"뭐, 장난은 슬슬 그만 치고. 돈이나 챙기자고."

"장난인 줄 아네?"

그리고 그 보상 중 하나를 챙기기 위해, 나는 씩 웃으며 미믹이 있던 곳을 슬쩍 턱짓하며 가리켰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어라?"

그러자 이비도 곧 그 이유를 알아차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방금까지 존재했던 길쭉한 혀와 뾰족뾰족한 이빨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고, 오직 평범한 보물상자만이—다시 굳게 닫힌 채로—덩그러니 남아있었으니까.

"뭐, 뭐야? 어디 갔어?"

이비는 그럼에도 방금 전의 경험 때문인지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짓더니 살짝 거리를 벌린 채 발로 툭툭 건드려보기 시작했고,

"…!"

돌연 벌컥 열린 상자를 보고 움찔 뒤로 물러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냐 이거."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상자 앞으로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야 방금까지 흉측한 괴물이었던 것이 진짜 보물상자가 된 거니까.

그것도, 반짝거리는 금화가 정말로 한가득 담겨있는.

"이, 이게 다 얼마야…?"

꿀꺽 침을 삼킨 이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자 안에 담긴 금화를 한 움큼 쥐어 만져보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어제의 도박판 위에 쌓여있던 금화들보다 더 많은 양이 담겨있었다.

"진짜 보물상자가 됐군요."

리네 역시 신기했는지 어느새 이비의 옆으로 다가가 함께 상자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던전에서 마주치는 보물상자를 열 때마다 모두 이런 식으로 '당첨'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비율을 따진다면 사실 꽝이 더 많은 편이긴 하지.

하지만, 미믹은 달랐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아까까진 분명 몬스터였잖아."

미믹을 사냥하면 나오는 보물상자의 경우, 이렇게 확정적으로 당첨이었다.

왜냐.

"여태 놈한테 먹힌 모험가들이 소화되고 남은 것들이래."

"...."

잔뜩 들뜬 채 상자 안의 돈을 챙기고 있던 이비의 표정이 돌연 싹 굳어버리더니 손에 움켜쥐었던 금화들이 마치 모래가 빠져나가듯 짤랑짤랑 떨어졌다.

"걱정 마. 챙긴다고 해서 저주 같은 건 안 걸리니까."

"누, 누가 유령 같은 거 무서워한다 그랬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참 나!"

이비는 황급히 떨어진 금화들을 도로 주우며 항변했지만, 안타깝게도 저 갈 곳 잃은 시선이나 파들파들 떨리는 손부터 어떻게든 하지 않는 이상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난 그냥 저주라 그랬지 유령이란 단어는 딱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이비의 명예를 위해 그냥 모른 체 하기로 했다.

사실 우리가 아까 날려버렸던 스켈레톤들도 따지자면 근본적으론 유령에 가까운 존재인데 말이지.

아무래도 직접 때려잡을 수 있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의 차이인가? 무력감의 차이?

"아무튼,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 가자고."

뭐, 어차피 내가 아무리 고민한다 해봤자 도통 빨라질 기미가 없는 이비의 손이 빨라지진 않을 터였기에, 나는 자루를 들고 이비의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아 상자 안의 금화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던전에선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니까."

* * *

「술고래의 무덤」.

슈타우트 서쪽에 위치한 이 유적형 던전의 주요 몬스터들은 조금 전에도 말했듯, 대부분 언데드였다.

원래부터 이 무덤을 지켜왔지만 이제는 뼈만 남게 된 스켈레톤들 혹은 비교적 최근에 태어난, 이 던전에 깔린 짙은 마력에 잠식된 모험가들의 시체… 였던 좀비 같은.

--

[환경]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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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데드의 습성을 떠올립니다.

대다수의 언데드는 이미 뇌가 파괴되어 스스로 사고하거나 활동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특별한 개체가 아니라면, 하나의 의식—흔히 '하이브 마인드'라 알려진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군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 원념, 이번 경우에는 '던전의 보스'가 혼자 RTS(실시간 전략) 게임 중이라는 거다.

그러니 언데드들을 움직이는 그 의식── '원념'의 주인을 퇴치한다면, 그것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 보스를 처치하면 저 언데드 군단도 다 같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 스켈레톤들과 좀비들의 반응이 아무래도 느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임적으로 말하면, 민첩 스탯이 그리 높지 않았다.

"대체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되는 거냐고오오──!?"

민첩이 높은 캐릭터를 전방에 세우는 회피탱 전략이 이번에도 아주 효과적으로 먹혔다는 뜻이지.

"우와악!? ──야! 날려! 시X 빨리 날려버리라고!!"

──콰앙!!

2서클의 불덩이가 화려하게 폭발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일제히 떠오르는 경험치 획득 알림이 순식간에 내 시야를 덮을 기세로 떠올랐다.

언제 봐도 짜릿한 광경이었다.

"후우─ 나는 아침에 맡는 화염구 냄새가 좋아."

"니가 뭘 했는데 가오 잡고 있냐!?"

뭘 하긴. 〈발퀴레의 기행〉을 노래했지. 빰빠바 바바~ 빰빠바 바바~

하나 유감스럽게도 내 노력(?)을 몰라준 이비가 저 외침과 함께 던진 작은 돌멩이가 내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하아… 하… 저 망할 딴따라 새끼...."

이어 축 몸을 늘어뜨린 채 짙은 연기를 뚫고 터덜터덜 걸어 나온 이비는 곧 근처의 벽에 기대더니 그대로 무너져내리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돌연 소매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리네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염구의 냄새를 좋아하셨던 겁니까?"

"응?"

"원하신다면 앞으로 매일 아침마다 화염구를 시전해 깨워드리겠습니다."

"뭐? 아, 아니 그러지 마. 그냥 농담이었어…."

무슨 정신 나간 기상법이야 그건.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진…"

리네는 여전히 평소대로의 무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뭔가 미묘하게 아쉬워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바뀌었다고 할 뻔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지.

어찌 됐든, 우리는 이렇게 또 한 스테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이젠 보상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보물상자 말이다.

이번에는 미믹이 아닌 진짜 상자였고,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즉, 이비의 차례였다.

그리고 그 자물쇠를 따기 전에,

"멈춰."

--

이블린

[지각] 성공

--

먼저 처리해야 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상자를 향해 다가가던 이비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서선 다가오지 말라고 손을 뻗은 걸 보면 알 수 있듯.

"함정이야."

던전에서 함정을 마주쳤을 때의 대처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함정 자체를 해체해버린다.

이 경우는 가장 많은 시간이 들고 또 해체 실패 시의 위험부담이 크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둘째, 함정을 피한다.

함정을 발견한 즉시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리거나, 혹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함정의 가동을 막는 거다.

셋째, 함정을 가동시킨다.

제일 하책이긴 하지만, 일회성 함정일 경우나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쓸 수 있는 대처다.

그리고 이 셋 모두, 어떤 함정인지를 파악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조사]를 통해.

--

[조사]

난이도 13

--

[조사]는 지능 스탯 기반의 판정이었다.

이비의 초기 지능 스탯은 6.

그리고 최초로 [지각] 혹은 [직감]에 성공했을 시 이후 추가 판정 굴림에서 해당 스탯의 절반만큼 보정치를 얻는, 그녀의 특성 중 하나인 「예리한 감각」 덕에 3의 추가 보정치를 얻는다.

거기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

"그 노래 또 부르면 그냥 확 밀어 던져버릴 줄 알아."

"오케이 바이…"

비타민처럼 상큼한 요들송으로 생기가 넘쳐 일이 잘 돼… 가는 기분이 들고 머리가 맑아져… 가는 기분이 들게 해주려 「지혜의 노래」까지 불러주려 했지만, 이는 본인의 거절로 인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

INT 보정치 +6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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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비의 보정치는 9.

이제 이비의 주사위 눈이 4 이상만 뜨면 됐다.

--

실 패

--

"아오, 진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앞의 바닥을 유심히 관찰하던 이비였지만, 결국 때려치우겠다는 듯 성을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아까 네가 부르던 그, 그 지능 떨어지는 노래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잖아! 집중이 안 된다고 집중이!"

"지능이 높아지는 노래인데."

"지X하네!"

억울한 음해이긴 했지만 뭐, 그녀의 말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노래를 선택한 이유도 머릿속에서 바로 떠오르는 걸 부르다 보니 자연스레 중독성이 강한 게 튀어나온 거니.

어쨌든, 이비는 함정의 존재를 알아차리긴 했어도 그 정체를 파악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네가 한 번 봐 볼래, 리네?"

우리에겐 리네가 있었으니까.

리네의 초기 지능 스탯은 14. 그러니 딱히 다른 버프들을 계산하지 않아도, 그냥 1만 뜨지 않으면 됐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리네는 천천히 앞쪽으로 나섰고, 그대로 조용히 바닥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

성 공

--

"희미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고대 마법에 의해 작동하는 함정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곧장 그 정체를 파악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무슨 함정인지 알겠어?"

재차 고개를 끄덕인 리네가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마 저 바닥에 마법진이 설치되어있을 겁니다. 저 구간의 벽돌들을 밟게 되면, 양옆의 벽에 설치된 또 다른 마법진들이 반응하여 마법을 방출하는 구조 같습니다."

"발판 함정인가."

던전 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함정이었다.

바닥의 스위치를 밟으면 뾰족한 창이 튀어나온다거나,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혹은 불이 뿜어진다거나 전기가 흐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번 경우는 후자, 물리 쪽이 아닌 마법 쪽인 모양이었고.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건 전혀 아니었다.

흔하다는 건,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습게 봤다가 즉사해버리는 경우도 정말 허다할 정도로.

"들었지 이비?"

"나도 귀 있거든?"

전문가의 손길이 없다면, 말이지만.

016화. 세 명이 오리라 (3)

"꽤 범위가 넓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뭐, 어차피 그래봤자 저 부분만 안 밟으면 된다는 거 아냐?"

해체하는 데엔 시간이 드니 그냥 피해서 상자만 열고 오겠다.

이게 이비의 선택이었다.

"나도 그편이 제일 낫겠다 생각했어."

드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해체에 실패해 작동시켜버릴 확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이비의 민첩 스탯과, [기교] 판정에 도움을 주는 도적 클래스의 패시브 등을 고려한다면 이런 저렙 구간 던전의 함정들 따위야 그냥 1만 뜨지 않아도 쉽게 해체할 수 있겠지만,

'꼭 한 번씩 뜬단 말이지, 이게.'

나처럼 두 개를 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아무리 보정치를 높여봤자 6분의 1이라는 실패 가능성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니까.

심지어 두 개를 두 번씩이나 굴려도 뜨더라니까? 어떻게 아는지 이유는 묻지 마라.

그런 이상 함정이 무조건 지나가야 할 경로를 완전히 막고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경우는 그냥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후──"

한 차례 쭉 기지개를 켠 이비는 성큼성큼 앞쪽으로 다가갔고,

──팟! 하고 땅을 박차며 대각 방향으로 비스듬히 뛰어올랐다.

이어 그대로 벽 위를 걷듯 발을 몇 번 디디는가 싶더니, 다시 힘껏 박차며 반동을 이용해 앞쪽으로 뛰었다.

그렇게 눈 깜짝하니 어느새 상자 앞에 사뿐히 착지해 있었다.

함정은 당연히 발동되지 않았다. 아예 함정 근처의 바닥을 한 번도 밟지 않았으니까.

"오오."

이 세계에선 뭐라 부르는지 잘 모르겠다만, 내 관점에선 훌륭한 파쿠르 동작이었다.

그 묘기에 감탄한 내가 가볍게 박수를 보내자 그런 나를 보던 리네도 뒤따라 무덤덤한 표정으로 짝짝 영혼 없는 물개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왜 저래?"

이를 본 이비는 말은 저렇게 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겸연쩍어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지 잽싸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허리에 찬 작은 파우치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해정 도구」였다.

--

난이도 13

--

이비의 초기 민첩 스탯인 14보다 낮은 난이도였기에 이번에도 주사위값이 1만 아니라면 무조건 성공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

⚅ (6)

대 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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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송곳같이 생긴 도구들을 자물쇠 구멍에 꽂기 무섭게,

"열었다."

철컥!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이비가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이비는 도구를 도로 파우치에 집어넣으며 상자 안을 내려다보다가,

"응?"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뭐가 들어있는데?"

"아니, 돈 조금이랑… 뭐야 이건? 포션?"

이비가 상자 안에서 집어 든 포션병을 찰랑댔다.

병의 형태와 내용물의 색깔을 보아 일반 등급의 체력 포션이었다.

"그리고… 활 한 자루랑, 화살 몇 개?"

"활? 무슨 활?"

"그냥, 나무로 된 활?"

"보여줘 봐."

이비는 곧장 상자에서 활을 꺼내 내게 휙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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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된 단궁」 (고급)

효과 – 명중/피해 굴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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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의 말대로, '그냥 나무로 된 활'에서 크게 벗어나는 물건은 아니었다. 거기서 딱 한 단계 더 강화된 무기랄까.

"…이게 끝?"

첫 던전의 첫 보물상자가 다름 아닌 미믹의 보상이어서였을까, 이비는 다소 실망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었다. 미믹에 비하면 아무래도 초라할 수밖에. 특히 초반 지역 던전의 상자라 더더욱 말이다.

'꽝'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첨'이라 보기에도 힘든 이런 대다수의 보물상자들론 이제 성이 차지 않으리라는 거지.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소득이었다.

"이비, 활 쏠 줄 알지?"

아주 시의적절하게 쓸만한 물건을 얻었다는 점에선 말이다.

"어? 뭐, 대충은."

"그럼 이건 네가 써."

나는 「강화된 단궁」을 다시금 이비를 향해 던졌고, 이비는 그렇게 자신에게 날아온 단궁을 본능적으로 잡아챘다.

활은 민첩 스탯이 높은 이비가 쓰기에 딱 알맞은 민첩 기반의 무기였다.

더군다나 이비는 다크엘프 혼혈이었다. 엘프들이 태생적으로 그렇듯, 이비 역시 활에 재능을 지녔다는 뜻이다.

"이비, 너는 검보다 활이 어울려."

라는 거지.

"…뭐?"

"농담이야. 검도 잘 어울려."

"갑자기 뭔 개소리야?"

도적이라는 클래스와 하프엘프라는 종족까지, 활은 여러모로 이비와 궁합이 잘 맞는 무기였다.

때문에 그녀가 단검이 아닌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게끔 하는 플레이어들도 많았어서, 이비의 육성법은 대체로 '단검 도적'과 '활 도적'으로 양분되곤 했다.

"챙겨둬. 보스를 잡을 때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이제 머지않아 보스전을 치르게 될 텐데, 단검을 통한 근거리 공격만으론 아무래도 조금 빡셀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원거리 공격도 가능해졌으니, 훨씬 더 수월한 공략도 가능해지겠지.

정말이지 타이밍 좋게 나와주었다.

"…딱히 그런 이상한 헛소리 안 했어도 어차피 챙길 거였어."

이렇게 말한 이비는 손에 쥔 활을 등에다 메더니 바로 화살통도 상자에서 꺼내 함께 허리 부근에 매달았다.

* * *

타닥, 타닥.

타오르던 장작이 비스듬히 미끄러지자 작은 불씨들이 튀어 오르듯 사방으로 흩날렸다.

나는 한동안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잘 타네.' 같은 생각을 마음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면서.

대부분의 던전들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문자 그대로 '휴게실'이 꼭 최소 하나씩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설정상 앞서 던전에 왔던 모험가들이 마련해놓은 비밀 거처이기 때문에 레벨이 낮은 던전일수록 휴게실의 숫자는 더 많아진다. 그야 그만큼 사람들이 자주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니까.

뭐 나중에는 도저히 앞서 온 사람들이 없었을 것 같은 곳에조차도 어떻게 꼭 하나씩은 준비되어 있긴 한데, 그건 게임적 허용인 걸로 치고.

실제로 「술고래의 무덤」에 숨겨진 휴게실은 총 세 곳이었고, 이곳은 그 셋 중 보스방 바로 앞에 설치된 휴게실이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나가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문을 열면, 바로 이 던전의 보스── 「술고래의 망령」과 마주치게 된다는 소리다.

지금은 그 전에 재정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구체적으론 리네의 서클을 회복할.

사실 체력을 회복할 수단은 굳이 이런 휴식이 아니어도 많았다. 포션도 있고, (아직 우리 중 누구도 전문 힐러는 없지만) 회복 스킬도 있지.

하지만 마법사들의 탄환 개념인 서클의 회복은, 이렇게 시간을 들여 휴식을 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현재 3레벨 기준으로 리네의 총 서클 개수는 아홉 개.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리네는 2서클짜리 「화염구」를 두 번, 1서클의 「물 폭탄」과 「벼락」을 각각 한 번씩, 총 여섯 개의 서클을 소비했다.

때문에 빠르고 온전한 휴식을 위해, 리네가 마력의 회복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요 몇 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

아무래도 이비는 그 침묵이 묘하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책상다리로 앉아 연신 두 다리를 흔들며 발을 꼼지락대던 이비는,

"어이."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어 운을 뗐다.

"리네, 랬나?"

무릎을 끌어안은 채 쪼그려 앉아 타오르는 모닥불을 다소곳이 바라보고 있던 리네에게.

하지만 리네는 여전히 모닥불을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 이비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노예였었는데 저 녀석이 자유로 만들어줬다는 거, 진짜냐?"

이비의 이 물음을 듣기 전까지는.

"사실 지금도 부려 먹히고 있는 건 아니고?"

"주인님께선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리네는 이비를 만난 이래 가장 강한 어조로 단호하게 답했다.

"리네...."

그 해명(?)을 들은 나로서는 얼굴을 감싸 쥔 채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께선 저를 노예로 삼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계약을 파기해 제게 자유를 찾아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예의 신분이었던 저를 하대하지도 학대하지도 않고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주시며 저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시는 분입니다."

누가 들어도 이미 완벽히 세뇌된 노예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할 법한 소리잖아….

"어…"

실제로 이비의 질색하는 표정을 보면 여지없이 그쪽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제가 옷 같지도 않던 천 조각을 입고 있어 곤란한 상황이었을 때는 부디 옷을 골라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오랫동안 그저 가만히 지켜봐 주실 뿐이었습니다."

"...."

그러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러니까 그… 저 말이, 전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맞기는 한데….

"…너 진짜 괜찮냐? 그… 도와줘?"

"이상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저는 주인님께 거둬진 이후로 언제나 괜찮은 것 이상입니다."

대체 저걸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탓에 섣불리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좌절하고 있으니, 문득 리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자기 딴에는 완벽한 설명(?)을 했다고 여긴 거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가벼운 목례를 보내오지도 않았을 테니.

"...야."

"...정말로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

오해가 어찌저찌 풀리고… 아니, 솔직히 정말 풀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더 이상 그 화제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이곳에 오면 원래 하려던 일을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파티원들의 스탯을 확인해보는 일 말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했다.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것뿐만이 아니라 동료들의 상태창 역시 직접 확인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찍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두 사람 다 이미 스탯과 스킬이 모두 투자된 상태였으니까.

게임의 옵션 중 '자동 육성 모드'라는 게 있기는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들이나 스탯 분배 등에 머리 쓰기 귀찮은 플레이어들을 위해 레벨업 때마다 본인 캐릭터를 제외하고 혹은 본인 캐릭터까지 포함하여 알아서 스탯과 스킬을 투자해주는 기능인데, 어쩌면 그것과 비슷한 구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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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우드

Lv.3

종족 : 엘프

클래스 : 마법사

STR 04

DEX 05

INT 16

MEN 12

CHA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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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Lv.3

종족 : 하프엘프

클래스 : 도적

STR 08

DEX 14

INT 06

MEN 05

CHA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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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확인해본 현재 두 사람의 스탯 상황이었다.

특성 칸은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잠겨 있었다.

일정한 호감도를 쌓거나, 혹은 동료의 개인 퀘스트 진행도에 따라 볼 수 있게 되는 구조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물론 보이지만 않을 뿐 특성들은 이미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도 똑같았고.

리네의 「기억상실 대마법사」라는 특성에 포함된 특전 중 하나인 '매혹 면역'이 제대로 먹히던 거나, 이비의 「예리한 감각」이 '???'로 표시되긴 했지만 보정값을 제대로 더했던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하지만, 두 사람의 스킬창은 지금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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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 스킬]

(1서클)

돌풍

마력 화살

물 폭탄

바위 방패

벼락

화염구

(2서클)

서리 칼날

[고유 스킬]

시간차 시전

정밀 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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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의 경우 우선 2레벨에는 「마력 화살」과 「정밀 조준」을, 2서클 마법을 익힐 수 있는 3레벨에는 「서리 칼날」을 배운 모양이었다. 리네의 경우 정확히는 이미 익혔던 걸 떠올리는 개념이지만.

두 번 다 지능 스탯을 올린 것도 그렇고, 분명 나라도 저렇게 찍었을 것이기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자동 육성 모드'.

--

[클래스 스킬]

눈속임 공격

백스탭

히트 앤 런

[고유 스킬]

재빠른 손놀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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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비의 경우엔, 마법사인 리네나 유사 마법사인 나와 달리 애초부터 스킬의 선택지가 적긴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로 전혀 불만 없이 분배되어 있었다.

"흐음."

이렇게 둘의 상태창도 확인했으니,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정말 딱 한 가지만이 남아있었다.

"야. 그 보스란 놈, 세냐?"

그리고 때맞춰, 이번에도 침묵을 견디지 못한 이비가 먼저 운을 떼주었다.

"아무래도 센 편이지."

"으."

내 대답을 듣자 미간을 찌푸린 이비는 머지않아 나를 슬쩍 곁눈질하듯 흘기더니, 다시금 조심스레 물어왔다.

"…뭐 쉽게 잡는 방법 같은 건 없고?"

그 기다려왔던 질문을 들은 순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 채로, 나는 자신 있게 고했다.

"물론 있지."

"오?"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오오── 어이."

"리네. 이비."

"야. 잠깐, 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줘."

자, 보스전의 작전을 세울 때였다.

017화. 세 명이 오리라 (4)

"■■, ■■■──"

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으르렁댔다.

화륵!

동시에 꺼져 있던 홰에 돌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륵, 화륵, 화륵──

그렇게 홀로 타오르기 시작한 횃불들이 서서히 방 안의 어둠을 걷어낸 바로 그 순간,

──화르륵! 하고.

또 하나의 거대한 불꽃이 일렁였다.

푸른빛의.

"…!"

순수한, 마력의 오라가.

그 푸른 불꽃은 한 언데드를 심지로 삼아 타오르고 있었다.

같은 인간종이었던 존재라곤 생각되지 않는—나나 이비보다 거의 세 배 가까이는 커 보이는—우람한 체구를 지닌.

생전이었다면 틀림없이 그 육중한 몸집을 전부 단단한 암벽과도 같은 근육으로 뒤덮었을.

비록 세월의 풍파를 맞아 이제 남은 건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 그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 있는 먼지와 거미줄로 덮인 백골뿐이지만── 그럼에도,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위압감만은 여전히 남아있는.

어떤 한 전사의.

"■■■■■──!!"

거센 「분노」의 포효가, 어둠을 찢어발기며 메아리쳤다.

「술고래의 망령」.

마침내, 이 던전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 *

"언데드 전사?"

이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방에 돌입하기 전, 휴게실에서 작전을 짤 때의 일이다.

--

[역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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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전 슈타우트의 어느 주점에서 들었던, 이 무덤의 전설을 주제로 한 음유시인의 노래를 떠올립니다.

"먼 옛날~ 슈타리온을 섬기던 한 위대한 전사가 있었네~"

"뭐, 뭐야? 갑자기 뭔 또 노래를…"

"그는 위대한 성전의 전장에서 전사했지만~ 죽음은 그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네~ 그의 힘을 탐낸 한 탐욕스러운 귀족은…"

"아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야, 공용어로 말해."

"…크흠. 그 귀족은 강령술사를 고용해 죽은 전사를 되살리려 했어.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을 생각이었던 거지."

하지만 음유시인들이 밥 먹듯(혹은 밥을 먹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과욕도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

"결국 전사의 막강한 힘을 통제하는 데에 실패했고, 잘못된 강령술이 실패한 여파로 이 무덤 전체가 저주를 받게 되었다── 라는, 흔한 이야기야."

"그러니까, 그 술고래인지 뭔지 하는 놈이 그 전설 속에 나오는 전사다 이거냐?"

"그렇지."

"전설로 불렸을 정도면 무지 세겠고?"

"셌었지. 지금이야 저주받은 언데드 상태라 레벨도 거의 반의반 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서 몇 레벨인데? 지금."

"4."

"시X 16레벨이었다는 소리 아냐…."

「경비대장」보다야 낮아 낫지만, 4레벨도 지금 시점에선 꽤나 까다로운 보스기는 했다.

더군다나 놈을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인 「언령」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 상대인지라, 이비의 이런 걱정도 절대 기우라 부를 순 없을 터.

하지만,

"걱정 마."

결국엔 몬스터였다.

"우리 셋이서 충분히 잡을 수 있으니까."

잡으라고 존재하는.

"자, 「술고래의 망령」은 세 개의 '페이즈'를 가진 보스야."

먼저 1페이즈는, 단순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죽이려 드는 놈의 공격을 최대한 피하면서, 이쪽은 최대한 때리면 돼.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넘어가지지."

"…누가?"

"응?"

"누가 피하고 누가 때리는데."

"…."

나는 말없이 싱긋 미소만을 지었다.

차마 지금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술고래의 망령」!

그 상대는~

"이럴 줄 알았다 이 X바아아아아알──!!"

"■■■──!"

후욱!

이비의 키만한 묵직한 도끼가 휘둘러지며 공기를 찢어발겼다.

"끼야악!?"

그 일격을 간신히 몸을 던져 피한 이비가 낙법을 쓰며 털썩, 바닥에 엎어졌다.

그 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이어지는 공격들을 피해냈다.

쾅! 쾅! 콰앙──!

도끼날이 땅을 때릴 때마다 부서진 돌바닥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게임 화면이었다면 그럴 때마다 '빗나감!' 이라는 자막이 떠오르는 걸 보며 여유를 부렸겠지만,

"왜!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안타깝게도 이비는 차마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이처럼, 보스전도 지금까지와 기본 전략은 같았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우선 나는 보스방에 들어온 이후로 쭉 「신속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지금의 내 빌드는 태생상 언데드와 상성이 나빴다.

그게 「독설」로 한 방에 정리되지 않는 보스급 몬스터라면 더더욱.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이 게임의 소위 '어그로 시스템'은, 대부분의 경우 그 턴에 가장 큰 대미지를 입힌 캐릭터한테 튀는 구조였다.

다시 말해 내가 「독설」을 쓴 순간, 설령 언데드 대상이라 반토막 난 대미지라고는 해도 곧바로 내게 어그로가 튀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나는 저 커다란 도끼에 한 대만 맞아도 바로 즉사였다. 분명 의사 없이 바로 사망선고를 내려도 허락될 상태가 되겠지.

그러니 놈을 한 턴 안에 마무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아예 건드리지조차 않는 게 나았다.

따라서 이번 던전에서만큼은 얌전히 동료들을 믿고 서포터로서 활약하는 게 최선이리라.

『Deine Zauber binden wieder~』

그나마 다행인 건 언데드 자체가 설정상 고점도 명확하기 때문에, 점점 적들의 수준이 높아지는 후반(북쪽)으로 갈수록 언데드들을 거의 만날 일이 없다는 점일까.

그러니까 이번엔 좀 업혀 가자 동료들아.

"너! 너, 뭔가 개짜증나는 생각하고 있지 않냐 지금!?"

『…Was die Mode streng getheilt~』

일단 저 감 좋은 이비를 던져 놓… 회피탱으로 세운 후,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래로 버프를 걸고, 리네는 훨씬 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최대 사거리를 잡은 채 마법으로 지원한다.

이게 이번 던전 공략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아무래도 보스는 보스이니만큼 민첩이 높은 이비라도 이번에는 무조건 100% 회피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잠──"

'술고래'가 돌연 「노련한 싸움꾼」답게 도끼를 휘두르려다 마는 페이크를 섞었고, 거기에 움찔하고 만 이비는 그만 역동작에 걸려버렸다.

뒤이어, 번쩍인 도끼날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궤적으로 이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후욱! 하고.

게임적으로 표현하면, 회피 굴림 자체를 못 하게 만들어버린 거다.

"──!"

때문에 이비는 그 일격에 반응하지 못했지만,

──콰직!

리네는 '반응'했다.

마치 암벽과 같은 거대한 「바위 방패」가 이비의 앞에 떠오르며, 내리쳐진 도끼날이 단단한 바위에 박혀 들어간 것이다.

"뭐──"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에 당황한 이비는 한순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버리는 바위를 보곤 다급히 자세를 다잡았다.

이전 노예 경매장에서 싸웠던 마법사가 몇 턴 동안을 계속 마법을 퍼붓고 나서야 겨우 부술 수 있었던 리네의 「바위 방패」를, 그냥 도끼질 한 방에 우습게 깨부숴버리는 그 어마어마한 괴력에 마냥 놀라고 있을 틈 따윈 없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그런데, 놀란 건 술고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바위가 자신의 도끼를 막아냈으니.

"■■■■──!"

이내 술고래는 다시 거칠게 도끼를 거두며 공격을 이어가려 했지만,

"어딜!"

지금은 다시 이비의 턴이었다.

술고래가 당황하며 잠시나마 생겨난 빈틈을, 이비는 놓치지 않았다.

"제멋대로 날뛰고 있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이비가 내지른 단검의 칼끝이 빛을 받아 번쩍이며, 술고래의 약점── '뛰지 않는 심장'을 향해 「교활한 일격」을 날렸다.

"핫!"

──쌔액!

빛의 띠를 그린 단검이 술고래의 살점을 파고들어 심장에 닿았다.

하지만, 역시 아직 관통할 수는 없었다.

대신 까각! 하고 그 단단한 심장에 살짝 금을 새기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치명타'였으니까.

"──■■■!!"

이를 증명하듯 괴성과 함께 급히 도끼를 내두르며 이비를 뿌리쳐낸 술고래는 한 손으로 찔린 가슴을 부여잡은 채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 ■■■■──!!"

아주 잔뜩 열이 받았는지 다시 우렁찬 「분노」의… 아니,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격노」의 포효를 질렀다.

"윽…!"

고막을 찢어버릴 기세의 포효에, 그것을 바로 코앞에서 들어버린 이비는 한순간 움찔 '공포' 상태에 걸려 얼어붙어 버린 듯 보였다.

"이비!"

나는 그 광경을 본 즉시 '반응'하여 노래를 중단하고 크게 그녀를 향해 외쳤다.

『피해!』

"!"

나의 「언령」에, '공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퍼뜩 정신을 차린 이비는,

"우왓!?"

바로 자신을 향해 날아온 도끼날을 아슬아슬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더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내 쪽을 돌아보았는데,

"■■■──!"

멈추지 않고 빗나간 도끼의 방향을 틀어 재차 도끼질을 해대는 술고래의 공세 탓에,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훅! 후욱!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강한 바람이 일며 계속 아슬아슬하게 그 옆을 스쳐 가는 이비의 머리칼이 연신 찰랑였다.

「격노」한 상태답게, 술고래는 정말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으아아!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당하기만 하던 게 억울해서 한 번 가오 좀 잡아봤어요!"

이비는 저런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방금 그녀의 '치명타'는 틀림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실제로 계속 공격을 피하기만 하느라 바쁘던 이비는,

"…?"

놈이 빈틈없는 연격을 퍼붓던 처음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머지않아 눈치챈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런 다급한 상황 속에서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일도 없었을 테니.

그렇다.

「격노」의 덕에 술고래가 퍼붓는 공격들의 위력과 속도는 증가했지만, 그러면서 자연스레 휘두르는 동작 역시 훨씬 더욱 커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진짜 죄송──"

빈틈이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한 척 하면서!"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는 이비는 사죄하는 척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도로 몸을 들 때의 반동을 이용해 펄쩍 뛰어올랐다.

동시에 공중에서 빙글, 하고 한 바퀴를 돌며 순식간에 술고래의 뒤를 잡았고──

"시체면 좀 시체답게 얌전히 뒤져있어!"

──푸욱!

이번에는 「눈속임 공격」을 꽂아 넣었다.

바로 눈앞에서 대놓고 찌르더라도 맞추기만 한다면 무조건 '기습 공격' 판정을 받는, 그야말로 눈 뜬 적의 코를 베어가는 도적의 고유 기술을.

"──■■!?"

역수로 쥔 이비의 단검이 술고래의 목 뒤를 찌른 순간, 그것의 우람한 신체가 한 번 더 휘청거렸다.

마치 '기습'을 당해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처럼.

이비는 이번에도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단검을 뽑아내며 착지하자마자 한 차례 더 크게 빙글 회전하여 다시 술고래의 정면으로 돌아가더니──

"──까꿍, 개새끼야."

푹!

이번에도 심장을 노려 단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쩌적!

하고, 경도 높은 심장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경종이 울린 것이다.

* * *

"놈의 약점은 심장이야. 물론 언데드이니만큼 진짜 심장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바닥에 손가락을 대고 큼지막하게 심장 모양을 그려 보였다.

"놈한테 진짜 피해를 주려면 이 심장을 집요하게 노려야 해. 아마 두 번 정도? 제대로만 찌르면 금이 가기 시작할 거야. ──그럼, 그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는 거지."

"야, 잠깐만."

"응?"

"다 알겠는데… 왜 하필 '술고래'야?"

문득 이비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지금 하는 얘기만 들어보면 그냥, 영락없이 광전사 아니냐? 근데 왜 광전사의 망령이 아니고 술고래의 망령인데?"

그 물음에, 나는 무심코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엔 없었다.

"좋은 지적이야."

이비의 말대로, 이곳의 보스는 생전 틀림없이 '광전사'의 길을 택한 전사였다.

그럼에도 「술고래의 망령」이라 불리는 이유는──

"──■, ■■■!!"

1페이즈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이 넓은 방 안에 메아리친 그 순간, 술고래는 고통에 몸부림치듯 있는 힘껏 땅을 쿵쿵 굴렀다.

"우왓!?"

그러면서 생겨난 풍압은 이비를 저 멀리 날려버렸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는 나조차도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이어 술고래는 허리끈… 이라 불러도 되나 싶을 만한, 거의 배의 돛을 펼 때 당길 법한 크기의 두꺼운 끈으로 묶어두었던 큼직한 '병'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에 쥐고 곧바로 벌컥벌컥 들이켠 그 순간,

화르륵──!

술고래를 휘감고 있던 마력의 오라가 더욱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온다!"

2페이즈의 시작이었다.

018화. 세 명이 오리라 (5)

「술고래의 망령」전 2페이즈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었다.

먼저 첫 번째, 방금 전 들이켠 '술'을 통해 자신에게 피해량 증가 버프를 걺과 동시에, 영향을 받고 있던 모든 디버프들을 종류 불문 전부 제거해버린다.

이를테면 '중독'. '감전'. '화상'. 또 그 외에도 보스전을 쉽게 치르기 위해 걸곤 하는 상태이상들── 보스의 입장에선 그런 없어져야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있는데, 그것들을 술의 힘으로 모두 없애버린다는 거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라는, 의사나 성직자들한테 가서 하면 대체로 처맞는 말이 저것의 경우엔 정말로 맞는 말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행복 스파이럴을 무한으로 즐기는 걸 마냥 부러워할 수만은 없는 게, 사실 저건 말만 술이지 우리 같은 필멸자들이 함부로 입에 댔다간 제정신이 가는 게 아니라 저승으로 훅 가는 그런 무언가였다.

그야 이곳을 던전으로 만든 '저주'가 잔뜩 응축되어 주조된 술이니까.

때문에 한 모금만 마셔도 간 수치가 마치 회귀자들이 풀매수 때리는 코인 마냥 떡상해버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벌컥벌컥벌컥──

문제는, 저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2페이즈의 두 번째 특징.

그것은, 저 술을 이용한 광역기가 공격 패턴에 추가되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푸우우우!!

입 안 한가득 머금은 술을 뱉어 뿌리는.

'역시…!'

이번에는, 나를 향해.

이비가 날아가 버리면서, 자연스레 가장 가까운 적이 되어버린 내게 타겟팅이 옮겨온 것이다.

그야말로 '모르면 당해야지'식의 악질 패턴이었다.

갑자기 앞에 세워둔 탱커의 위치를 강제로 변경시키고, 그걸 보고 당황하고 있으면 바로 탱커 뒤에 있던 딜러나 힐러를 노려 콤보 공격을 먹인다. 심지어 피해량 증가 버프를 바르고.

웬만한 탱커들도 제대로 맞으면 버티기 힘든 술 뿌리기‐평타 콤보를, 그 탱커들 뒤에 숨어있던 물몸들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당연히 못 견디고 그대로 끔살이다. 특히 술에 맞아버린 순간 그냥 갔다고 보면 됐다.

──뭐, 물론 몰랐을 때의 이야기지만.

"'망령의 술'."

이것이 보스가 광전사의 망령이 아닌 「술고래의 망령」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놈은 그걸 마셔서 힘을 얻어. 반대로, 우리한테는 뿌려서 힘을 빼앗고."

대표적인 예가 2페이즈부터 나오는 '술 뿌리기' 패턴이었다.

"뿌린다고?"

"뭐, 보면 알 거야."

거기에 직격으로 맞거나, 혹은 맞지는 않았어도 뿌린 뒤 남아있는 장판에 엎어지기라도 하면, 그 캐릭터는 즉시 '만취' 상태이상에 걸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동속도가 크게 낮아지고, 명중률이 떨어지고… 온갖 부정적인 디버프들이 걸리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건 역시 플레이어가 내린 명령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취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몸이 말이 듣지 않는 거다.

심지어 약을 먹이거나 마법 등으로 상태이상을 해제하지 않으면, 10턴 동안이나 그 상태로 버텨야 한다.

그러니,

"무조건 피해야 돼."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촤아악──!

술이 부채꼴 형태로 흩뿌려진 순간, 바로 앞쪽을 향해 몸을 던진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구르며 피해냈다.

만약 뒤쪽이나 옆으로 굴렀다면 점점 넓어지는 부채꼴 모양 장판기의 특성상 결국엔 맞아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부채꼴이 퍼지기 전 앞쪽── '중심각'을 향해 구른다.

그러면 사실상 확정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이 술 뿌리기를 비롯해 대부분의 광역기들은 민첩 스탯에 따라 주사위를 굴려 회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정하는 대신, 그 위치에 서 있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으니까.

"──윽!"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술고래와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다는 점이겠지.

거기에 회피 굴림을 할 필요가 없었을 뿐, 내가 민첩 스탯 3의 운동치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타이밍에 딱 맞춰 굴렀다기보단 정말 문자 그대로 몸을 던져버린 쪽에 매우 가까웠고, 그 탓에 쉽사리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넘어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술고래는 「격노」에 차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바로 눈앞에서.

"…반가워?"

"■■■■──!!"

"어우."

눈이 마주쳐버리니 괜스레 뻘쭘해져 가볍게 인사를 건네봤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포효로 답하는 술고래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뭘 입에 넣은 걸──"

나는 이미 충분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으니까.

"──쳐뿌리고 앉았냐!"

풍압에 밀려 날아갔었던 이비가 도로 잽싸게 달려와,

"더럽게!"

콰직!

하고, 등에 칼을 꽂을.

"■■■──!?"

깔끔한 「백스탭」을 당한 술고래는 잔뜩 열이 받았는지, 그대로 홱 등을 돌리면서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후욱!

육중한 도끼날이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 자연스레 어그로를 이어받은 이비가 재차 탱커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 거리를 벌린 나는 바로 끊겼었던 「신속의 노래」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노랫소리가 다시금 방 안을 가득 메우게 된 순간, 이비의 몸놀림이 마치 리듬을 타듯 한결 더 가벼워지는 것이 보였다.

후욱!

덕분에 무참히 바람을 찢어발긴 저 일격도, 그냥 가뿐히 몸을 빼 피해내는 이비였다.

"히야아악!?"

…뭐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콰앙!

거세게 땅을 내려친 술고래는 곧바로 한 손에 쥔 술병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어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아내기 무섭게 가로로 한 번 더 크게 휘둘렀고, 이비가 이를 피하려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순간──

"이비! 패턴 C!"

입에 머금었던 술을 그대로 내뿜었다.

──촤아악!!

그것을 착지하자마자 곧장 뒤로 펄쩍 공중제비를 넘으며 피해낸 이비는 잽싸게 중심을 잡고 자세를 다잡으려 했지만,

"쳇…!"

술고래는 그럴 틈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술 뿌리기'에는, 세 가지의 패턴이 있었다.

먼저 패턴 A는 상대와 조금 거리가 벌어져 있을 때, 중심각 45도 정도의 부채꼴 형태로 뿜어내는 것이었다.

즉, 처음 내가 앞으로 굴러 피해낸 게 바로 그 패턴 A였다.

패턴 B도 A와 비슷하게 부채꼴 모양으로 뿜어지는 장판기였다.

다만 차이점은 중심각이 90도 정도로 넓어진 형태였고, 뿌리는 방향과 방식도 조금 더 위쪽으로 비를 내리듯 뿌리는 것이었다.

훨씬 더 범위가 넓은 대신 그만큼 뿌려지는 속도도 느려서 가장 피하기 쉬운 패턴이었지만, 이는 애초에 상대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 바닥에 '술 장판'을 깔아두는 게 목적인 패턴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패턴 C가 있는데, 이건 방금 봤듯 그냥 바로 앞에 있는 상대한테 냅다 뱉듯이 뿌려버리는 거다.

패턴 B가 장판을 깔아두는 게 목적이라면, 이쪽은 타겟 하나를 찍고 '만취' 상태이상을 묻히려는 게 목적이었다.

따라서 가장 피하기 어려운 패턴이었고, 아마 우리 셋 중에는 이비만 반응해서 피할 수 있겠지.

"패턴 B!"

이번 건 패턴 B였다.

푸우우우──

뿜어진 망령의 술이 마치 부슬비와 같이 바닥을 적셨다.

이비는 아주 간단히 피해냈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번에는 애초부터 그녀를 맞추기 위한 공격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르랴, 술고래는 곧장 팔을 뻗었다.

방 안의 벽 곳곳에 걸려있는, 전투가 시작되며 저절로 켜졌던 횃불 중 하나를 향해서.

──이쯤에서 간단 상식.

도수가 높은 술에는, 불이 붙는다.

얼마 전 경매장에서의 일이 증명해줬듯.

그리고 방금 바닥에 깔린 저 술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강한 저주── 바꿔 말하면 농축된 마력과 함께 숙성된 고대의 술이다.

그러니 정확히 몇 도인지는 몰라도, 일단 도를 넘었다는 건 확실했다.

요컨대,

"■■, ■■──!!"

술고래가 돌연 낚아채듯 손에 쥔 저 횃불을, 그대로 바닥에 깔린 '술 장판'을 향해 던져버리면,

"이런 미친──"

──화르르륵!!

하고, 순식간에 불길이 타오른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등 뒤에 불로 된 장벽을 세워 순식간에 이비의 퇴로를 가로막은 술고래는,

"──!?"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와 도끼를 내려찍었다.

콰광!

땅이 뒤흔들렸다.

이를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해낸 이비는,

"이비! 활을 써!"

"…말 안 해도 알아!"

우리가 '휴게실'에서 짠 작전으로 미리 약속했듯, 바로 등에 맨 「강화된 단궁」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한 번 더 뒤쪽으로 크게 뛰어올라 거리를 벌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통에서 꺼낸 활을 쏘았다.

「히트 앤 런」이라는 기술 이름다운 치고 빠지기였다.

쉬익!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술고래의 두꺼운 허벅지에 꽂혔다.

"■■■■──!"

하지만 술고래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몸을 돌렸고, 이어 날아온 화살들을 도끼를 휘둘러 가볍게 쳐냈다.

그리고 또다시 이비를 향해 펄쩍 뛰어올라,

"야──"

──콰광!

힘껏 도끼를 내려쳤다.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바닥이 완전히 박살나버리는 것을 보며, 이비는 이번에도 「히트 앤 런」으로 화살을 쏘며 거리를 벌렸다.

슈욱! 날아간 화살이 술고래의 어깨에 꽂혔다.

그렇게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열이 받은 걸까, 다시 술을 들이켜자마자 패턴 B의 형태로 흩뿌린 술고래는 곧바로 횃불을 낚아채 던졌다.

화르륵──!

거센 불길이 이비의 등 뒤에서 피어올랐다.

"■■■──!!"

술고래는 그 즉시 땅을 박차며 이비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콰앙!

놈의 도끼는 마찬가지로 바닥을 부술 뿐이었다.

이처럼, 단검 대신 활을 든 이후론 훨씬 더 쉽게 공격들을 피해내고 있는 이비였다.

「히트 앤 런」은 단검을 착용한 채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지만, 접근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이미 거리를 벌려둔 채로 빠져나오는 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쉬익!

하고 날아간 저 화살들은, 비록 약점인 심장을 더 쉽게 노릴 수 있었던 단검과는 달리,

챙! 챙!

하고 맥없이 튕겨져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유효타를 먹일 확률이 낮았다.

"──야!!"

물론,

"아직 멀었냐──!?"

굳이 유효타를 넣을 필요도 없었지만.

1페이즈를 넘긴 것으로, 사실상 '딜러'로서 이비의 역할은 이미 끝난 셈이었으니까.

활로의 전환은 더 쉬운 어그로 관리를 위해서였다.

실제로, 계속되는 이비의 「히트 앤 런」에 잔뜩 열받은 듯한 술고래는 계속해서 그녀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놈은 놓치고 있었다.

『──고정.』

이 전투가 시작된 이래, 아직 자신이 단 한 번도 눈길에 두지 않았던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여태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3페이즈."

술고래 전의 마지막 페이즈였다.

다만, 술고래 개인의 패턴 자체는 2페이즈 때와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체감상의 난이도가 압도적으로 뛰어오르는 이유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는 때야."

적이 술고래 하나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놈의 체력이 4할 정도로 떨어지게 되면, 술고래는 전투 도중 느닷없이 '죽은 자들'에게 술을 뿌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놈 안의 유교 본능이 깨어나 기습제사를 지낸다는 소리도 아니고, 미리 자신의 명복을 비는 퍼포먼스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실은 우리의 명복을 미리 빌어주는 쪽에 가까웠다.

이곳을 던전으로 만든 '저주'로 가득 찬 술을, 그 저주의 원흉들에게 뿌리면서.

요컨대 그를 되살려 지배하려 했던 귀족과, 그 귀족이 데려왔던 나름 실력있는 호위병들, 그리고,

"강령술사, 입니까."

"정답."

그를 실제로 되살린 마법사를 되살려, 자신과 함께 싸우도록 만든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각 개체들 하나씩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잡몹들에 불과한, 큰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귀찮은 존재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귀찮아지는 상황의.

지금 리네가 곧바로 눈치챈 것처럼, 특히 강령술사가 그랬다.

술고래와의 싸움을 계속 방해하는 그 병사 무리(귀족은 사실상 그냥 걸어 다니는 뼈다귀다)를 먼저 처리하고 나면, 강령술사는 그 뼈들을 다시 조립해 되살려버린다.

제한? 없다. 그냥 무한으로 즐긴다.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먼저 강령술사부터 처리해야 되는데… 그것도 잔뜩 열받은 술고래가 틈만 나면 뿌려대는 술 장판과, 또 그 위에다가 질러대는 불길을 피해가면서 잡기에는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3페이즈는 건너뛰자고."

아예 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공략법이었다.

그냥 통째로 스킵해버리는 거다.

* * *

하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되겠지.

그 한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자신이 절대로 눈을 떼어서는 안 됐을 존재였다는 걸.

『전 술식──』

오랜 과거,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난 이후 그 개념을 잊어버리고 있던 자신에게,

『──전개.』

다시 한번 죽음을 선사할, 사신이라는 것을.

019화. 세 명이 오리라 (6)

숫자 3은 예로부터 완전성을 상징해왔다.

따라서 조상들은 세 요소가 모여야 비로소 완전해진다고 여겨왔다.

천·지·인. 육·해·공. 의·식·주.

정(正)·반(反)·합(合).

입법·사법·행정.

성부·성자·성령.

그리고, 탱·딜·힐.

이 세 역할군이 모두 있어야 그 파티는 제대로 된 밸런스를 갖췄다 할 수 있다.

여기서 탱은 이비였다.

나는 엄연히 힐러…는 아니지만 이번 던전에서만은 서포터, 버퍼의 역할이다. 어쨌든 힐러에 가까운 존재지.

따라서, 리네는 딜러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게임을 통틀어, 특히 이런 판타지 배경의 게임에서 가장 압도적인 화력을 낼 수 있는 클래스를 묻는다면 다들 단연 마법사를 떠올리겠지.

더군다나 리네가 어디 그냥 마법사인가? 20레벨의 대마법사다.

비록 지금이야 모종의 이유로 3레벨 마법사로 격하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재능의 편린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일은 그냥 불가능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하지 않나. 주머니 안의 송곳을 숨길 수 없듯 리네가 지닌 재능은 결국 어찌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리네가 이 전투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가 뭐냐고?

그야, 눈에 띄지 않기를 원했으니까.

송곳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 순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단숨에 찔러 죽이려고.

그래.

이번 공략은 우리 세 명이 모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후오오오──

리네가 드디어 마력을 개방하자, 마법진을 중심으로 잠잠했던 마력의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태풍의 눈──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리네의 옷깃이 펄럭일 정도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노래를 멈춘 순간, 줄곧 나를 감싸왔던 선선한 바람도 함께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곡을 노래할 때였다.

「신속의 노래」에서, 「지혜의 노래」로.

"이비!"

흔히 말하는, '처형용 BGM'을 노래할 차례다.

"지금이야!"

그런 내 외침에, 이비는──

"──하."

이제야 때가 왔냐는 듯 기가 차 하는,

"오래도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기대감을 품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어 「재빠른 손놀림」으로 활을 다시 단검으로 잽싸게—게임이었다면, 턴 소모 없이—전환하더니,

"어이, 주정뱅이!"

그대로 힘껏 땅을 박찼다.

줄곧 치고 빠지며 거리를 벌려오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달려든 것이다.

"■■, ■■■──!!"

그에 질세라 포효한 술고래는 달려오는 이비를 마주하며 높이 도끼를 쳐들었다.

콰앙──!

거세게 내리쳐진 도끼가 바닥을 부쉈다.

그러면서 튀어 오른 커다란 파편 하나를 문자 그대로 디딤돌 삼아 공중에서 한 번 더 높이 뛰어오른 이비는,

"영업 종료다!"

마치 갚아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역수로 쥔 단검의 칼끝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면서 빛을 받은 칼끝이 번쩍인 순간,

"■■──!"

이전까지 그녀에게 당했던 걸 본능적으로 기억하기라도 한 걸까.

또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듯 술고래는 바로 도끼를 쥔 손의 반대쪽 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심장을 보호하려고 말이다.

──하지만, 틀렸다.

심장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씩 입꼬리를 올린 이비의 번쩍이는 칼끝이 노리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다른 것이었다.

이미 도끼를 내리쳐버린 이상 술고래는 반대쪽 팔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술병을 쥐고 있는 쪽의.

그렇기에 이비는 단검을 손에서 놓았다.

술고래의 입장에선 당혹감을 보일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높이 치솟은 불기둥을 등진 그림자가, 돌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아래로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또 그것을 그대로 다시 왼손으로 낚아채──

──쉬익!

빛의 띠를 그린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나서도.

그야 완벽한 「눈속임 공격」이었으니까.

이어 이비가 사뿐히 땅에 착지한 순간,

쩌적!

단단한 무언가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쩌적, 쩌적, 하고.

술고래는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그 번쩍이던 단검의 끝이 노렸던 건, 처음부터 자신의 심장이 아니라──

──챙그랑!

머지않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완전히 산산조각 깨져버린 '술병'이었다는 것을.

그러면서 자연스레 병에 담겨있던 술이 파편들과 함께 쏟아져 술고래의 몸을 뒤덮었다.

물론, 그렇다고 술고래가 '만취' 상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애초부터 저 술을 마셔가면서 버프를 얻어오지 않았나.

그걸 마시는 게 아니라 끼얹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고, 오히려 버프를 걸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 ■■■■──!!"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술고래는 더욱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싼 마력의 오라 역시 더욱 활활 불타기 시작했고.

아주 '제대로 불붙는 상태'가 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말이지.'

저 술에 불이 닿았을 때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는 이미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저 여러 갈래의 불길들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나.

저 술은 사실상 기름이나 다름없었다.

요컨대, '화염 취약 상태'가 된 것이다.

『──결속.』

그리고 술고래는 아직까지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리네의 발밑에는 이미 거대한 마법진들이 고정되어있었다.

그렇다. 마법진'들'이.

여러 겹으로 '중첩'된 채로.

그 자체가 하나의 마법진처럼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마치, 서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회전하면서 말이다.

『타올라라──』

──전부 단 하나의 마법, 「화염구」를 시전하기 위해.

3레벨 마법사가 하나의 마법을 사용할 때 최대로 가용할 수 있는 서클의 양은 두 개, 최대 2서클짜리 마법이 끝이었다.

그건 「화염구」를 '강화시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리네는 평범한 3레벨 마법사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2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는 해도── 만약, 한 번(턴)에 모아서 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타올라라──』

「시간차 시전」.

20레벨 대마법사가 지닌 잃어버린 시간이자 기억의 편린.

이 '고유 스킬'을 이용하면, 리네는 자신의 턴에 특정 마법을 바로 시전하는 대신 다음 턴으로 이월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번 전투에서 운용 가능한 총 아홉 개의 서클 중, 「바위 방패」로 소비한 하나를 제외한 남은 여덟 개의 서클을 모두 각각 2서클, 총 네 개의 「화염구」 마법진으로 나누어──

『타올라라──』

원하는 한순간(턴)에, 모조리 쏟아부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술고래는 화염에 취약한 상태가 되어 있었고, 이제 마지막 한 번의 영창만 끝나면 '강화시전'된 2서클 「화염구」 네 개가 동시에 날아가 놈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릴 터였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것뿐──

"──읏!?"

이라고 확신했던 게, 어쩌면 화근이 되었던 걸까.

일순, 나는 보고 말았다.

곧 있을 폭발에 휘말리지 않으려 거리를 벌리던 이비가, 그만 술이 뿌려져 있는 바닥에 미끄러져 삐끗 중심을 잃는 모습을.

…뭐, 사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품었든 그건 그냥 단순히 우연의 일치고, 굳이 저 결과의 원인을 따져본다면 분명 「신속의 노래」를 멈추고 「지혜의 노래」로 전환했기 때문이겠지.

회피 굴림 시엔 대실패가 뜨는 경우가 드물다. 민첩 스탯이 상대의 명중 굴림 수치를 상회하는 만큼, 굴림에 실패하게 되면 다시 주사위를 추가로 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0%가 아닌 이상, 그 확률이 설령 6분의 1이든 36분의 1이든 혹은 10000분의 1이든, 계속 굴리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뜰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이었을 뿐이고.

철퍼덕!

이비가 바닥에 엎어지며, 그 밑에 깔려있던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 ■■──!"

여태 잡힐 듯 전혀 잡히지 않았던 이비가 처음으로 보인 진짜 빈틈을, 술고래는 전혀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놈이 높이 쳐든 도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맞는다, 이건.

이비도 이렇게 직감한 거겠지.

뭘 어떻게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이구나, 라고.

지금 자신을 향해 진 그늘의 정체를 올려다보면서 말이다.

이대로는 직격 확정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자세가 무너져 '넘어진' 상태였으니, 분명 치명타로 들어가겠지.

리네는 '반응'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서클들을 저 「시간차 시전」에 소모했을뿐더러, 설령 남은 서클이 있었다 해도 온 신경을 술식에 집중하느라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닫은 채 오직 마력의 흐름에만 감응하고 있는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이비가 중심을 잃은 바로 그 순간, 이미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여기 네 간수치나 한 번 봐라 이 알중 새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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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저항!

독설의 대미지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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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토막 나긴 했지만, 「독설」의 대미지는 확실하게 술고래에게 들어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어그로가 튀어, 그것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해왔다.

순식간이었다.

"──!"

쿠웅! 하고 땅을 박차며 달려온 그것이, 내 머리를 노려 도끼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눈앞의 도끼도.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달려오려던 이비도.

그러면서 찰박! 하고 그녀의 주위에 방울져 튀어 오른 물방울들도.

영원의 1초── '운명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이 육중한 도끼날에 의해 '갈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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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 굴림 시도

난이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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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을 정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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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X 보정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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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나의 영혼(소울 스톤)을 굴려, 그 결과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데구르르──

『──Ālea,』

그리고,

『iacta, est──!』

나에게는 그 '운명의 시간'을── 「별의 순간」을 붙잡을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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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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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멈춰있던 주사위를 뒤집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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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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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멈춰있던 나의 운명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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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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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본능적으로 몸을 튼 나를 스쳐 지나간 도끼날이 바닥을 깨부쉈다.

그러면서 일어난 「땅울림」에 그만 중심을 잃어 재차 넘어져 버리고 말았지만,

"──리네!"

덕분에, 어느새 앞을 향해 겨누어진 리네의 한 손을 볼 수 있었다.

"날려버려──!!"

나의 온 힘을 다한 외침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

줄곧 감겨져 있던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모습과 함께.

평소와는 다른 색의, 선명한 마력의 빛을 띤 채.

『──타올라라!』

마지막 네 번째의 영창과 함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빠르게 회전하던 네 개의 마법진들이 일제히 정지했다.

──화르르륵!!

지금 이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그 어떤 불길들보다도 더 맹렬하게 타오르는, 네 개의 불꽃들을 소환해내며.

그리고 그제야, 「술고래의 망령」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뒤늦게 발악하며 처음으로 리네를 향해 포효했지만,

"■■■, ■■■──!!"

이제는 단말마의 비명일 뿐이었다.

──팟.

하고.

먼저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소리가 뒤따랐다.

그것이 폭발이었다.

020화. 세 명이 오리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