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악연
"사구령."
낯설다.
눈앞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모습이 낯설다.
아니, 눈앞의 남자는 익숙하지만 존재해선 안 될 자의 실존實存이 낯설다.
붉어져 가는 구령의 눈앞에 선한 인상의 남자가 두른 푸른 도포가 파도처럼 넘실댔다.
"네가, 어떻게…. 커헉!"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검의 기운에 말을 마치지 못한 구령이 붉은 피를 왈칵 쏟아 냈다.
구령의 도포는 피를 머금고도 여전히 검다.
그저 축축하게 무게만 더해 가는 구령의 옷자락이 채 흡수하지 못한 핏방울이 금세 붉은 웅덩이를 이뤘다.
"진휘…."
예상치 못한 인물의 기습에 차마 반격하지 못했던 구령이 제 배를 뚫고 지나간 검을 흔들리는 눈길로 좇았다.
"죽은 게, 아니었나…."
한 스승 아래서 도道를 익힌 형제이자 악우惡友인 진휘는 분명 3년 전, 구령의 눈앞에서 죽었다.
아니, 죽은 줄 알았다.
이를 아드득 갈아 낸 구령이 제 배를 가르고 들어온 검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벼려 낸 칼날이 파고들 때마다 살갗이 벌어져 흘러나온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땅을 적셨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진휘의 검이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찌르고 들어왔던 검이 뒤로 물러날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갈 듯 고통스러웠지만, 구령은 이를 악물고 외마디 비명을 삼켜 냈다.
"죽음의 문턱에서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경지를 초월한 자는 죽음에서 다시 피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지.
그러나 느껴지는 진휘의 기운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휘가 검을 휙 털어 내자 푸르게 시린 날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구령의 피가 사방으로 후드득 튀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당신의 생명력은 경이로운 수준이군요. 저는 죽어도 당신을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피식 웃는 구령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몸을 덮치는 오한에 구령의 이가 빠르게 부딪쳐 따닥따닥 듣기 싫은 소리를 울렸다.
"그 검…. 예사 물건이 아니로군."
몸을 보호하는 호신부護身符는 진휘의 공격으로 깨진 지 오래였다.
분명 저보다 한 수 아래인 진휘의 도력만으로 호신부를 부수는 건 불가했다.
필시 이 힘은 진휘의 것만은 아니다.
"…그래. 죽었다 깨어나니, 좀, 다르더냐."
가쁜 숨을 토해 내는 구령의 모습을 깔아 보는 진휘의 눈길은 더없이 차가웠다.
"예. 당신을 이토록 몰아붙일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네 힘만이 아닐 터."
구령은 필사적으로 진휘의 신경을 돌리며 시간을 끌었다.
흐트러진 기를 한데 모아 장기 회복에 집중한 구령의 안에서 뜨거운 기운이 몰아쳤다.
"바른길만 고집하는 샌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째 네 안에 삿된 기운이 넘쳐흐르는구나."
정도正道를 걷고 언제나 바른말만 하는 진휘였다.
우도방의 올바른 모양새를 빚어 놓은 듯했던 진휘는 별안간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 구령을 죽음의 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네게 힘을 빌려준 이는 누구냐."
진휘와의 대련에 언제나 백전백승을 거뒀던 구령이었다.
이 근방은 물론 다섯 산봉우리를 뒤져도 구령의 도술에 견줄 이는 손에 꼽았으니 이 힘은 필시 진휘만의 것이 아니다.
진휘의 손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힘줄이 불거진 그의 손을 타고 검에 옮겨붙은 푸른빛이 심상치 않은 힘을 뿜어냈다.
쉬이 깨질 리 없는 호신부를 마른 나뭇잎 부수듯 박살 내는 것에 일조한 것은 저 수상한 기운이 분명했다.
"원시천존께서 저와 함께하십니다."
"사선을 넘나들더니 농담도 할 줄 알게 되었군."
숨이 가빠 오고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다.
터진 배가 가까스로 아물었지만, 구령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뒤로는 스승인 약로선인의 거처가 있으니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내어 줄 수 없었다.
진휘를 잃은 뒤 상실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스승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새 생명을 얻었거든 스승님께 문안을 올리진 못할망정 한 스승 아래서 수행하던 내게 검을 겨누는 까닭이 무어냐."
"스승도 사형도 내 안에서 모두 지웠습니다."
"하하. 약로선인께서 들으시거든 통탄하시겠군."
뜨끈하게 통증이 번지는 복부를 꽉 누른 구령이 잇새로 신음을 뱉어 냈다.
"저승사자가 네 녀석에게 무어라 속삭였는지 못 본 새에 후레자식이 다 되어 돌아왔구나."
구령의 일갈에 진휘의 반듯한 미간에 매서운 주름이 잡혔다.
언제나 수줍게 웃을 줄이나 알던 두 눈에 원망과 후회, 분노가 한데 엉켰다.
"당신은 모릅니다. 나면서 모든 걸 쥐고 있던 당신은… 절대 알 수 없어!"
진휘의 안에서 휘몰아치는 넘쳐나는 도력이 집채만 한 파도처럼 흔들렸다.
처음으로 쥐어 본 무시무시한 힘을 다루기 어려웠지만, 구령도 해내는 것을 저라고 못 할 리 없다는 생각만으로 버텨 냈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제가 되레 힘에 먹힐 것만 같았다.
구령은 언제나 이런 힘을 자유자재로 다뤘다고 생각하니 진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당신을 꺾고 스승님께 문안을 올리렵니다."
우우웅.
진휘가 꺼내 든 검을 휘어 감은 푸른빛이 더욱 시리게 빛났다.
구령과 진휘 사이에 피비린내를 머금은 눅눅한 바람이 불었다.
"이 검으로…!"
타앗!
땅을 박찬 진휘의 발아래서 작은 돌멩이가 차르륵 퍼졌다.
푸른 검이 일선을 그리며 달려드는 순간, 구령이 제 발아래 고여 있는 피 웅덩이에 손을 푹 담갔다.
철퍽.
기분 나쁜 감각에 눈살을 찌푸린 구령이 제 피를 허공에 흩뿌리자 시공이 멈춘 듯 사방이 고요했다.
제게 달려드는 진휘의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방울방울 튀는 피를 손끝으로 그어 글자를 새긴 구령이 그것에 제 기운을 훅 불어넣었다.
"우레! 바라! 해모로! 도래솔!"
슈우욱.
검은 기운이 팽창하고 응축됐다.
구령의 두려운 점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감히 인간의 육신으로 하늘과 땅, 명과 암의 신을 소환수로 둘 수 있는 저 끝 모를 힘!
제아무리 신급 소환수를 지녔어도 하나 이상의 소환수를 가질 수 있는 일은 드물었고 가지고 있대도 동시에 여러 소환수를 부르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그게 가능한 것이 바로 도사 사구령이었으니, 진휘는 제 살 위로 끼쳐 오르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한계까지 응축한 검은 기운이 이내 콰아앙 굉음을 울리며 터지더니 곧 거대한 네 장수의 모습으로 구령의 눈앞에 우뚝 섰다.
침산針山의 가장 높은 나무보다 커다란 우레와 바라는 두툼한 팔짱을 낀 채 감히 제 주인에게 도전장을 내민 도사 진휘를 깔아 보았다.
새까만 천으로 얼굴을 감싼 도래솔이 쥐고 있던 거대한 장창으로 땅을 긋자 카가각 바위 갈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마터면 발을 잘릴 뻔한 진휘가 혀를 차고는 뒤로 잽싸게 멀어졌다.
'사구령! 설마 저만한 부상을 입고도 소환수를 모조리 소환할 줄이야…!'
신급 소환수를 넷이나 소환했으니 상황은 대충 정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 구령이 스승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휙 몸을 돌리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기분 나쁜 기운이다.
제 호신부를 깨뜨린 것과 같은 그 기운에 구령이 서둘러 제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해모로를 거둬들이려 한 순간─
가까스로 버티고 선 진휘가 손안에 응축해 둔 푸른 송곳 안에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해모로!!"
푸욱─!
황금빛으로 빛나는 해모로의 몸에 푸른 송곳이 날카롭게 박혔다.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던 진휘가 손안에 응축해 둔 푸른 송곳 안에 검은 기운을 담아 죽기 살기로 덤벼든 것이다.
부서져 가는 해모로의 혼에 구령이 서둘러 손을 휘둘렀다.
이미 혼이 부서진 해모로는 구할 수 없으니 진휘와 가장 가까운 도래솔을 먼저 거둬들였다.
저희는 거두어지지 않는지 우왕좌왕하는 바라와 우레에게 손짓해 대기시킨 구령은 코앞까지 달려드는 진휘를 놓치지 않았다.
진휘의 텅 빈 뒷공간을 향해 손짓한 구령이 벼락같은 호통으로 소환수에게 명했다.
"우레, 바라! 공空 경계를 열어라!"
"뭐…!"
구령의 명령에 우레와 바라가 기다란 비단 포를 펄럭이며 손을 뻗어 공간을 잡아 벌리자 허공이 쩌저적 갈라졌다.
쿠우우우….
찢어진 공간에서 바람이 불어닥쳐 사방의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윽…!"
카각!
땅에 검을 박고 버틴 진휘의 입에서 벅찬 신음이 터졌다.
공의 경계에 빠진 자는 무한한 시공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맨다는 말이 있다.
공의 경계 자체가 허상이라는 도사도 많았지만, 신급 소환수를 여럿 두고 있는 수준의 도사라면 시도해 볼 만한 술법이었다.
이를 까득 깨문 진휘가 다시 한번 우렁찬 기합을 내뱉으며 구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서 빛나는 푸른 송곳이 다시금 몸집을 부풀려 검의 형태로 변했다. 진휘의 힘보다도 위험한 건 바로 저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이었다.
저 빌어먹을 기운이 대체 무슨 힘인지 알 수 없으나 신급 소환수의 혼을 부술 정도로 부정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보통의 기운이 아니다.
구령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개똥을 밟지를 않나, 그뿐이랴. 저자에서 돈은 몽땅 날렸고 스승님 주머니 좀 뒤져 볼까 해 들른 산에서 죽은 줄 알았던 사제에게 별안간 배를 뚫리다니.
이 어리석은 사제는 뭐에 홀렸는지 스승까지 죽이겠노라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제가 아무리 후레자식이어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훅. 훅. 땅을 접어 달려오는 진휘의 잽싼 걸음에 구령은 피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동시에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는 힘에 흙바닥이 움푹 팼다.
한 번 뚫렸던 배를 다시 한번 가르고 들어오는 검날에 되레 놀란 것은 진휘였다.
"뭐…!"
그 부상을 입고 정면으로 덤벼들 줄 몰랐던 진휘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미 신급 소환수를 넷이나 꺼내 부린 타격이 컸는지 구령의 씩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렀다.
"뭘 그리 놀라? 이건 예상하지 못했더냐."
무릇 도를 닦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가 우선인 법.
구령에게서 서둘러 물러서려는 진휘의 손목을 잡은 힘이 제법 강했다.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쥐어 오는 구령의 아귀힘에 진휘의 입에서 "으윽." 하고 억눌린 소리가 흘렀다.
도력만큼이나 신체의 순수한 힘 역시 월등한 구령이 진휘의 멱살을 움켜쥔 채 몰아치는 공간의 경계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 함께 가 보자. 저 까마득한 심연으로…!"
우레와 바라를 거둬들이자 서서히 원래 모양으로 좁아지는 공간의 찢어진 공간에 몸이 서서히 먹혀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완전한 어둠으로 시야가 가려질 무렵에 저 멀리 산 아래서 벌어진 소란에 달려오는 스승의 모습이 희끄무레한 점처럼 보였다.
'이거야, 원. 인사도 못 올리는군.'
평생을 속 썩이고 살아온 것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겨우 살아 돌아온 줄 알았던 사제와 치고받는 모습을 보였으니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혹시 아느냐. 이 몸도 원시천존께옵서 보살펴 주실지."
스승의 목숨값치고 나쁘지 않다.
구령은 정말 그리 생각했다.
이후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뺨을 스치는 온기도 나무를 흔드는 소리도 빛도 어둠도 없는 말 그대로의 무無.
제가 멱살을 움켜쥐었던 진휘가 아직도 제 손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구령아.」
죽음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심연으로 몸이 가라앉는 듯했다.
「사구령.」
서서히 잠겨 들어가는 정신 속에서 구령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천명天命이다.」
<2화>
여기는 어디인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어억."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벌떡 일어선 구령이 요란하게 기침했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밀려 들어오는 기억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죽은 줄 알았던 진휘가 나타나 저를 공격하고 스승의 목숨까지 앗아 가려 들었던 웃지 못할 사건이 마치 기나긴 꿈처럼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분명 타들어 갈 듯 고통스럽던 복부에서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으응?"
옷고름을 풀어 제 배를 살핀 구령은 상처는커녕 매끈한 제 복부에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꿈이라도 꾼 건가.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찬 땅에 앉은 채 턱을 괴고 골몰하던 그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세차게 털어 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 분명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그 기억에만 다가가려 하면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아파 도무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을 한데 모은 구령은 제가 찢어 놓은 공간에 빨려 들어간 것을 떠올리고 무릎을 탁 쳤다.
동귀어진할 셈이었건만 뜻하지 않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허. 진짜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머리를 긁적인 그가 제 천재성에 감탄했다.
기억의 마지막 조각은 사색이 되어 달려오던 스승, 약로선인의 모습이었다.
쓴 입맛을 다신 구령이 비뚤어진 갓을 벗어 던지고는 제 다 풀어 헤쳐진 검은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무의 공간을 구성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사가 불로불사의 몸에 가깝다지만, 시공을 비틀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술법이었다.
언젠가 스승의 서재에서 봤던 책에서나 한 줄 기록되어 있는 술법인지라 구령 역시 시도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영원토록 암흑의 공간을 떠돌아다닌다던 이야기는 결국 낭설이었나 보다.
구령은 아무래도 허공을 찢어 그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디 정반대의 공간으로 내뱉어진 건가 추측했다.
"그럼 진휘 이 녀석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 있겠군."
쯧, 혀를 찬 구령이 영차 몸을 일으키고 흙 묻은 도포를 털털 털어 냈다.
구령은 다시 그 얼굴을 만난다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100년을 살게 할 셈이었다.
한데 어딜 둘러봐도 진휘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진휘의 기뿐만이 아니었다.
"흠."
구령은 눈에 익은 듯 낯선 숲을 빙 둘러보며 크게 숨소리를 냈다.
"여기는 어디인고?"
항상 보던 나무보다 훨씬 키가 크고 봄 같지 않게 바싹 마른 낙엽이 발아래 굴러다녔다.
내단에 입은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탓에 구령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구령은 가장 고요한 기운이 흐르는 방향으로 걸으면서도 어쩐지 축지법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걸 느꼈다.
평소라면 몇 걸음 되지 않아 도착했을 게 분명한데 지금은 산속에서 상처 입은 채 헤매는 평범한 병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음이었다.
헉헉 숨소리를 낸 게 얼마 만인지, 넓적한 바위에 도착한 구령이 벌러덩 드러누워 이마를 덮고 있는 갓을 벗어다 던져 놓고 구슬땀을 훔쳤다.
"어째 기가 영 안 모이는 것 같은데."
구령은 가만히 눈을 감고 기의 흐름을 훑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과 공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허투루 놓치지 않고 그들로부터 생生의 기를 느끼려 애썼다.
평소라면 모든 것의 기운이 몸에 스며들어 도력을 회복했을 텐데 어쩐지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엉성하게 제 몸을 수박 겉핥듯 스치고 지나가 영 기가 모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구령이 고개를 갸우뚱 꺾고 제대로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었다.
미미하게 소환수들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제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그들의 귀에 닿을 정도로 제 힘이 온전치 못한 게 분명했다.
'…해모로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군. 역시 혼이 부서졌나.'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구령의 뺨에 선선한 바람이 스쳤다.
신급 수호신이 부서지면 살아생전 선도를 행한 것이 인정되어 36천을 각 100일간 돌아 그 혼을 수습한다 하였으니 이 이별이 끝은 아니었다.
부디 저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빈 해모로가 36천을 무사히 돌기를 기도한 구령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들숨에 겪어 본 적 없는 이국의 향이 폐 가득 들어찼고 날숨에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마음이 차분해질수록 고통은 잦아들었다.
"…좋아."
어느 정도 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구령이 어두컴컴한 산속을 둘러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낮인 것 같은데 항상 보던 나무보다 훨씬 키가 큰 나무로 빼곡한 산은 태양의 빛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눈치였다.
익숙하지 않은 이곳에 어둠까지 찾아온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게 뻔했다.
구령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갓을 쥔 구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으쌰 일으켰다.
"자, 일단 그 애송이 녀석을 먼저 찾아볼까."
* * *
진휘를 찾아 산을 뒤지는 구령은 제 모습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쩌렁쩌렁 큰 소리를 지르고 걸었다.
"진휘 도사!"
인기척 없는 산속에서 목청 높여 외쳐 봤자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다.
"멍청한 놈아! 어디 있느냐!"
멍청한 놈아아아 어디 있느냐아아….
멍청한 놈아아 어디 있느냐아….
멍청한 놈아… 어디 있느냐….
멍청한 놈… 어디 있느….
멍청… 멍청… 멍청….
어디… 어디… 어디….
진휘를 마음껏 흉보고 뿌듯해진 구령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닫았다.
"어디에 잘 있겠지, 뭐."
죽었다가도 깨어난 놈이 이 와중에도 잘 못 있으면 도사 이름을 뺏어야 한다고 혼자 으름장을 놓은 구령이 나무 열매를 따 먹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걷다 보니 운치도 있고 제법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꼭 머루처럼 생겼구나. 한데 알이 이리 굵어? …어우! 시큼해."
한 주먹 가득 열매를 쥐고 우적우적 씹어 대던 구령이 저 아래서 냇가에 고개를 처박고 물을 마시는 짐승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걸음을 우뚝 멈췄다.
구령이 퉤 뱉은 씨앗을 발로 툭 차고 천천히 그 뒷모습을 살폈다.
'…사람?'
구령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분명 짐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몸을 일으키자 사람의 등판이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상반신은 사람의 몸통을 하고 있고 허리 아래로는 말과 같은 형상이었다.
'어디 보자. 키는… 8자 남짓한가.'
처음 보는 생명체와 시비를 다투고 싶지 않았던 구령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지만.
파삭.
"이런 망할 나뭇가지를 보았나!"
썩어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밟는 바람에 그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도력이 안정치 않아 당장 도망칠 수 없던 구령의 앞으로 짐승의 다리가 우두두두 천지를 울리며 달려들었다.
"%^#!"
바닥을 긁는 것 같은 쩍쩍 갈라지는 낮은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구령은 푸드덕 날아가는 새 떼 아래서 두 귀를 틀어막고 남자의 고함을 막아 냈다.
"…#$%? !@$^&*$$^&*…. $% !$%^ㅉ#?"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군."
놀란 눈치의 남자에게 어깨를 으쓱 털어 보이자 말이 안 통하는 걸 느꼈는지 남자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산 아래를 가리키는 그 모습이 꼭 당장 산을 나가라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산 아래로 내려가라고?"
"#@ #%$^!"
"이놈아, 소리 지르지 말거라! 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소리가 왜 이리 커?"
남자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어 번 치고는 구령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어차피 이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이 짐승의 다리를 한 남자가 제게 적대적이라면 진작 공격을 해 왔을 거란 생각에 구령은 별다른 저항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경사로 보아 아마 산에서 내려가는 길을 알려 주려는 듯했다.
뒷짐을 지고 산 비탈길을 걷는 구령은 제가 처한 상황이 두렵지 않은지 풍경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예가 어딘지 모르겠다만 풍경이 기가 막히는구나. 내 약로선인이라 하여 모시는 스승이 있는데 모셔 온다면 필시 좋아하시겠어. 하아…. 내 이곳에 오기 전에 속을 좀 썩여서 말이야. 속세의 선물은 영 달가워하질 않으시니 이런 산 구경이나 시켜 드리면 좋겠구나."
"! !@$ @%#$^."
구령은 이 남자와 말은 안 통해도 관심 없는 주제에 잔뜩 짜증이 난 건 알 것 같았다.
쩝 입맛을 다신 구령이 냇가를 지날 무렵 "잠깐 서 보아라!" 다급히 외쳤다.
영문도 모른 채 멈춘 남자는 냇가로 달려가는 구령의 모습에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냇가를 샅샅이 살핀 구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냇가의 풀을 죄 뜯기 바빴다.
"!! #$@!$ !@$%@%?"
"어허. 기다려 보아라. 내 신기한 걸 보여 주마."
불그스름한 빛깔을 띠는 단풍 모양의 풀과 넙데데한 둥근 이파리를 죄 뜯어낸 구령이 이마를 긁적였다.
"이걸 말려야 하는데."
평소라면 시간을 들여 바람에 바싹 말렸을 테지만, 지금 당장 그럴 시간은 없었다.
구령은 아직 온전치 않은 도력에 잠시 망설이다가 곧 결심한 듯 풀숲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잔뜩 뜯은 풀을 무릎 앞에 모아 놓고 두 손을 모은 구령이 손바닥 가득 기운을 집중했다.
따뜻한 기운이 몰려들어 곧 그의 손바닥 주변으로 붉은 기가 맴돌았다.
"지금은 이마저도 힘들군."
다시 한번 진휘 도사를 향한 분노에 이를 간 구령이 버석버석하게 마른 풀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만하면 됐다."
구령은 마른 풀들을 오른 손바닥에 올려놓고 왼 손바닥으로 비벼 으깬 뒤 곰방대의 연통에 밀어 넣었다.
불을 일으키기엔 아직 불안정해 잠시 고민한 구령이 제 품을 샅샅이 뒤졌다.
'분명 챙겼을 텐데….'
불 화火 자가 적힌 노란 부적을 꺼내 든 구령이 싱글벙글 웃었다.
마른 잎사귀를 으깨 넣은 연통에 부적을 붙이고 짧게 주문을 외자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솔솔 올라왔다.
구령이 곰방대를 힘껏 빨아들이고 연기를 뱉어 내기를 반복했다.
서너 번째의 연기를 길게 뿜어낸 구령이 씩 웃으며 남자를 돌아봤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인고?"
남자는 귀에 꽂히는 구령의 음성에 손끝이 떨렸다.
"다, 당신…! 우리말을 할 줄 알았나?"
방금까지 말이라곤 통하지 않던 사이였는데 별안간 대화가 통하는 모습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구령은 예상한 반응인 듯 작게 웃었다.
"설마하니 이곳에 구언초口言草와 청이초聽耳草가 있을 줄은 몰랐다만, 운이 좋았지."
"…그게 뭐요?"
"냇가에서 뜯은 풀 말이다. 구언초는 척 보기에 그저 떨어진 단풍 같다만, 약재로 쓴다면 그 풀이 자란 땅의 말을 할 수 있고, 청이초 또한 약재로 쓴다면 그 풀이 자란 땅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한다."
"…내 눈엔 그저 잡초로 담배를 태우는 미친놈처럼 보였는데."
"고약한지고. 도사가 공으로 되는 줄 아느냐?"
"도사는 또 뭐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 남자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이던 구령이 귀찮아져 손을 내저었다.
"몰라도 된다. 어쨌든 내가 별 희한한 곳으로 떨어졌단 것만은 알겠다. 내 평생 발아래 청이초를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스승의 도감에 적혀 있던 약초 중 간혹 서방국과 동방국의 말이 통하지 않을 적에 언어를 배우지 않고 익힐 수 있는 풀이라 하여 농으로 넘겼던 것을 써먹게 되니, 구령은 자신이 적어도 서방국에 온 것인가 생각했다.
곰방대를 잘근잘근 씹는 구령의 옆에서 마법과 같은 일을 마주한 남자는 이자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란 걸 직감했다.
"난 켄타우로스요.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저주받은 몸이지."
"켄타우루수? 어째 이름도 생긴 것만큼이나 특이하구나. 나는 도사 사구령이라 한다. 그래, 그나저나 나와 비슷한 행색의 남자를 본 적 없느냐?"
"당신과 비슷한…?"
구령을 위아래로 훑은 켄타우로스는 전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 털었다.
"워낙 독특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인간은 본 기억이 없군."
"…그렇군."
적어도 이 근방에 진휘의 흔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 게냐?"
구령이 목을 쭉 빼고 아직 한참 남은 산길을 내려다봤다.
켄타우로스는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곧 있으면 고블린들이 몰려올 거요. 놈들은 밤눈이 밝거든."
"고부린? 이름이 영 고약한데."
"그렇소. 아주 고약한 놈들이지. 적어도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당신을 인간이 사는 마을로 데려다줘야겠다 생각한 거요."
"놈들이 강한가?"
"개체로는 약할지 몰라도 떼로 덤비는 습성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지."
켄타우로스는 말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난 인간과 어울려 지낼 수 없는 반인반수요. 이런 나도 한때는 인간 마을에 살았었지. 그들이 날 쫓아내긴 했어도 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벗이라 여기니 산에 홀로 떨어진 당신을 모른 척할 수가 없더군."
"…쫓겨났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이니 이보다 불길할 수 없었겠지."
쓰게 웃은 켄타우로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산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이 어느덧 산 너머로 기울어 모습을 완전히 감춘 채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에서 켄타우로스와 등을 맞대고 선 구령은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키득키득 게걸스럽게 웃는 소리가 사방을 에워쌌다.
켄타우로스의 네 발이 다그닥 소리를 내며 불안을 드러냈다.
"내가 시간을 벌어 볼 테니 당신은 산에서 내려가는 게 좋겠소. 마을엔 경비대가 있으니 저놈들도 섣불리 따라나서진 못하니까."
켄타우로스의 조언을 들은 척 만 척 허리춤에 매달린 호리병을 꺼내 든 구령이 말의 허리께를 툭툭 두드렸다.
"내 망나니여도 은혜를 모르는 불한당은 아니지."
"구령!"
퐁!
호리병의 뚜껑을 열자 주변의 기가 휘몰아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점점 거세진 소용돌이는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킬 듯 몸을 부풀렸지만, 놀랍게도 나뭇잎은 미풍에 흔들리는 것처럼 고요하게 움직일 뿐 그 소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키에엑!"
켄타우로스는 제 곁을 스쳐 날아가는 고블린들이 저 작은 호리병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망연히 바라봤다.
꼭 기묘한 힘에 홀린 기분이었다.
주변의 고블린을 모두 빨아들인 구령이 호리병의 심연 속에서 아우성치는 요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마개를 꾹 닫아 잠갔다.
"다, 당신 도대체 뭡니까?"
켄타우로스의 떨리는 음성에 구령이 흐트러진 도포의 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다시 뒷짐을 졌다.
"도사라 하지 않았느냐?"
<3화>
도사를 개차반으로 알아
"그 호리병 안에 고블린이 다 들어갔단 말이오?"
"그뿐이겠느냐? 온 천지 요괴란 요괴는 다 들어가 있으니 이 작은 병 안이 곧 지옥일 게다."
호리병을 흔들어 보이자 켄타우로스가 깜짝 놀라 두 걸음 물러섰다.
구령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무서우냐?"
"…그게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아주 난장판 되는 게지."
"끔찍하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켄타우로스가 다시 앞장섰다.
"날 새기 전엔 마을에 도착할 거요. 난 그곳까지 들어갈 순 없으니 마을 입구 근처까지만 바래다주겠소."
"내 은인이라 하면 되지 않으냐?"
"퍽이나 믿겠군. 반인반수가 얼마나 재수 없는 취급을 받는지 모르시오?"
켄타우로스는 이 낯선 동방의 이방인이 제 처지를 알 리 없다는 사실에 자조했다.
"당신은 적어도 날 보고 기절하진 않더군."
구령은 사람 몸통에 말 허리가 달린 것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인 인면어人面魚는 물론이고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 푸른 소, 날개 달린 개, 다리 달린 물고기 같은 것이 수두룩한 곳에서 오랜 세월을 수련하며 산 탓에 되레 말이 통하는 반인반수는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하물며 구령에게 있어 가장 혐오스러운 건 겉보기에 흉측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살던 땅에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핏덩이를 산속에 버려두고 가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
구령의 읊조림에 켄타우로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악마보다 못한 자들이로군."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부른다. 네 겉보기에 비록 짐승일지 몰라도 내게 베푼 행동은 그 어떤 자보다 따뜻한데 누가 누구더러 손가락질한단 말이냐?"
구령의 말에 켄타우로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멀리 횃불이 밝은 성벽이 가까워지자 구령과 발맞춰 나란히 걷던 켄타우로스의 걸음이 점차 느려져 어느새 구령의 다섯 걸음 뒤에서 멈췄다.
"난 여기까지요."
"오냐. 고맙다."
구령은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뒤로 성큼성큼 걸어 켄타우로스 앞에 섰다.
끙 앓는 소리를 낸 구령이 쭈그리고 앉아 갓을 벗자 내내 갓에 가려져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손 이리 내라."
"왜, 왜 이러시오?"
"어허."
켄타우로스의 손을 잡아끌어다가 바람으로 날을 세워 살짝 상처를 내자 따끔한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갑작스러운 일에 켄타우로스가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에 구령은 품에서 꺼낸 빈 종이에 그의 지장을 꾹 찍어 냈다.
"이게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닌데 내 당장 네게 보답할 게 없어 해 주는 것이니 감사한 줄 알아라."
"이게 뭔데 그러시오?"
"이 종이가 천언지天言紙라는 것인데 아주 귀해서 나도 얼마 없는 종이다. 내 네 신변을 보호해 줄 호신부를 하나 적어 줄 테니 언제든 몸에서 떼지 말고 가지고 있거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구령이 천언지에 호신을 위한 도안을 그려 나갔다.
구령이 복잡한 도안의 끝에 켄타우로스의 지장 위로 자신의 지장도 겹쳐 찍은 뒤 켄타우로스의 낡은 상의 주머니에 호신부를 접어 넣었다.
"그런 게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겠군."
켄타우로스는 영 믿지 않는 눈치로 웃었지만, 구령이 넣어 준 부적을 도로 빼는 일은 하지 않았다.
"믿든 믿지 않든 그리될 게다. 보통의 호신부가 한 번 쓰고 사라지는 것과 달리 천언지는 술사가 죽지 않는 한 영원하니 네 자손에게도 물려주고 그 자손에게도 물려주면 된다."
"…술사가 댁 아니오? 꼭 죽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구령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씩 웃어 보였다.
"내 천언지를 누군가에게 보답 없이 준 것은 네가 두 번째다. 부디 잃어버리지 말거라."
"그래. 고맙소. 그나저나 찾는다던 자는 어떤 사람이오?"
"진휘라는 사내인데 눈이 소 눈깔처럼 큼직하고 키는 내 눈썹만큼 온다. 나와 비슷한 옷을 걸쳤는데 맑은 호수 같은 푸른색이지. 척 보기에 선해 보이는 인상이다만 지금 아주 미쳐 있으니 발견하거든 덤벼들진 말고."
"그렇군. 내 꼭 기억하고 있겠소."
"그래. 연이 닿으면 또 볼 터이니 지긋지긋한 작별 인사는 그때 가서 하자구나."
켄타우로스는 다시 갓을 고쳐 쓰고 마을로 향하는 구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람이 불자 그의 검은 도포가 안개처럼 넘실대고 구슬로 꿴 갓끈이 부딪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판에 울렸다.
홀로 들판을 유유히 걷던 구령이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리자, 숨이 턱에 찬 켄타우로스가 부적을 꼭 쥔 채 서 있었다.
"…당신이 온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도 인간과 어울려 살 수 있었을까?"
자신만의 성을 쌓아 올린 채 모든 다른 것을 배척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내심 미웠다.
미워하면 할수록 마음이 힘들어 이해하는 것으로 인내했다.
한데, 오늘 만난 기이한 이방인은 말투가 밉살맞을지언정 호의에 호의로 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구령은 켄타우로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했다.
"세상 만물은 평등하고 그대는 인간과 자연의 좋은 점을 두루 갖추었으니 언젠가 자네의 본질을 알아봐 줄 이가 나타날 테지. 그리고 그런 이는 비단 내가 온 곳이 아니더라도 존재하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의 말을 곱씹은 켄타우로스가 멀어지는 구령의 뒷모습을 보며 서서히 어깨를 곧게 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걷는 구령의 등에 대고 말의 다리를 한 남자는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켄타우로스와 헤어진 뒤 마을에 들어선 구령은 기운이 강했던 산속과 달리 활기 넘치는 시장의 모습에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펑퍼짐한 원피스와 단출한 티셔츠, 바지 차림으로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퍽 낯설었다.
'하나같이 이국적으로 생겼군.'
그러고 보니 켄타우로스도 독특한 하반신에 가려져 그렇지 꽤 짙은 인상의 사내였다.
이곳은 자신이 있던 곳과 어느 정도는 닮아 있었고 또 어느 정도는 몹시 다른 양상을 띠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나 처음 보는 요괴는 달랐지만, 이 땅에 자라는 약초는 제법 눈에 익은 것들이 있었다.
구령은 우선 쉬고 싶었다.
불안정한 기를 다스리기에도 벅찬 환경인데 봉인 주구를 사용하고 천언지에 호신부까지 적어 주는 바람에 기운이 몽땅 빠지고 말았다.
구령은 객주라도 찾을 요량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약초를 태워 귀와 입을 트이게 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간판을 읽을 수 없단 사실이었다.
무엇을 하는지 그림을 새겨 넣은 간판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푸줏간이나 과일 가게는 뻔히 알겠는데 어째 휴식할 수 있는 그림으로 보이는 건 도통 찾을 수가 없어 피로가 더욱 쌓이는 듯했다.
"이보시오."
저를 흘끗대던 남자를 붙잡고 말을 걸자 그는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멀찍이 도망쳐 버렸다.
"낭패로구만."
아쉬운 입맛을 쩝 다신 구령이 다시 지친 걸음을 재촉하는데 발치에서 도포 자락을 잡아끄는 손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 힘이 너무도 미약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구령은 슬그머니 몸을 돌려 제 옷자락을 움켜쥔 손을 따라 천천히 얼굴을 확인했다.
며칠은 굶은 것처럼 볼이 쑥 팬 아이가 담벼락에 기대앉은 채 구령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정돈되지 않은 빗자루 같은 머리가 푸석푸석하게 날렸고 손톱 아래로는 새까맣게 때가 탄 채였다. 바지는 원래 짧았는지 아니면 옷을 살 돈이 없었는지 바싹 마른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옷자락을 빼낼 수 있을 테지만, 구령은 아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다.
"왜 그러느냐?"
아이는 쩍쩍 갈라져 피딱지가 앉은 입술로 소리를 내려 달싹거렸지만, 힘이 없는지 도로 입을 닫아 버리기 일쑤였다.
"흠."
턱을 괸 채로 아이의 말을 기다리던 구령이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쿡 찍었다.
"네가 이 도사님을 좀 도와줄 테냐?"
아이는 바로 그걸 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구령은 더 지체할 것 없이 아이의 다리 아래로 손을 쑥 넣어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른 아이를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내내 침울하던 아이의 눈이 생기를 되찾고 보석을 박아 넣은 듯 반짝였다.
"자. 이 도사님께서는 지금 몹시 피로하고 시장하구나. 내 이 여독을 좀 풀고 싶은데 객주를 좀 알려 주려무나."
"객주?"
"비슷한 거라도."
아이는 구령이 바라는 바를 하나둘 머리로 세어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여기요."
앙상한 손가락이 지금껏 제가 기대어 있던 담벼락 건물의 간판을 가리켰다.
"여관."
애석하게도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건물이었다.
머쓱한 구령이 애써 웃으며 아이의 부스스한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그, 참, 아주 똘똘한 녀석일세! 그래. 내 네가 글자를 읽을 수 있나 한 번 시험해 보았다. 아주 기특하구나. 음, 기특해."
아이를 사뿐히 내려놓고 민망함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구령 앞에서 바싹 마른 손바닥이 쫙 펼쳐졌다.
"도와줬으니까 돈 주세요."
그 당당한 요구에 구령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뭐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허. 말세로다. 맹랑한 꼬맹이가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구나."
끌끌 혀를 차면서도 동전 닷 냥을 꺼내다가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주자 아이의 표정이 팍삭 구겨졌다.
"이게 뭐야? 우리나라 돈으로 줘야죠!"
"내 나라에선 이게 돈이었다."
"아, 진짜! 별 거지 같은 외국인한테 걸려서!"
힘없이 팔랑거리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장사처럼 화를 냈다.
"이렇게 생긴 거 없어요?"
아이가 제 주머니에서 동전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꺼내 보여 주자 오히려 구령이 버럭 고함쳤다.
"인석아! 똑같이 생겼지 않으냐? 이게 어른을 등쳐 먹으려고."
"어딜 봐서 똑같아요? 주머니 봐 봐요!"
기어이 구령의 주머니를 털어 동전과 은자를 확인한 아이는 똥 밟았다며 투덜대고는 동전 닷 냥을 챙겨 자리를 떴다.
이제 막 태어난 거나 다름없는 꼬맹이가 맹랑하게 구는 모습에 "고얀 놈, 버르장머리 없는 놈!" 화를 펄펄 낸 구령이 여관의 문을 벌컥 열었다.
일일이 화를 내느니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관의 주인은 처음 보는 동방국 행색의 손님이 들어오자 반갑게 맞이하는 것도 잊은 채 남은 방의 열쇠를 슬그머니 카운터 아래로 감췄다.
"이보시게, 주인장. 방 하나만 내어 주시오."
"돈은 있으시고?"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에도 제법 익숙해진 구령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하. 거, 참. 이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돈을 좋아하는군. 그래, 숙박비는 얼마요?"
"싼 방은 30 쿠퍼 정도요."
"어디 보자."
주머니를 털어 동전을 잔뜩 꺼낸 구령이 뿌듯하게 웃는 얼굴로 카운터를 탕탕 두드렸다.
"방을 내어 오너라!"
* * *
마을 입구 언저리의 거대한 고목나무에 오른 구령이 별로 수놓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코를 훌쩍였다.
"고얀 놈들 같으니. 돈이 다 같은 돈이지. 힘든 여행객을 이리 내쳐? 원시천존께서 아시면 통탄하실 노릇이로구나. 젠장. 춥긴 또 왜 이리 추워?"
도포를 한껏 여며 몸을 둥그렇게 만 구령이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너른 어깨가 자꾸만 나무 위에서 삐져나와 몸을 이리저리 돌려도 편하게 눕기가 영 쉽지 않았다.
사실 공간을 찢고 그 안에 뛰어든 건 제 선택이었지만, 누군가를 탓해야 이 분한 마음이 풀릴 것 같은 구령은 진휘를 원망하며 이를 박박 갈았다.
애초에 진휘가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애초에 그날 죽은 게 아니었던 건가. 그렇게 사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약로선인의 손을 놓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진휘의 모습을 떠올린 구령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
「원시천존께서 저와 함께하십니다.」
진휘의 의미심장한 말이 과연 진실일지 알 수 없지만, 감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단호했다.
구령이 복잡한 머리에 한숨을 푹 밀어냈다.
진휘를 만나거든 그 멱살을 틀어쥐고 산 아래서 떨어뜨려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지던 그가 근처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저 아이는….'
분명 제게 돈을 갈취하고도 거지니 뭐니 막말을 서슴지 않았던 아이가 고목나무 근처 성벽의 개구멍을 찾아 손을 더듬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순찰을 돌고 있는 경비병에게 걸리면 좋지 않게 끝날 게 뻔했고 무엇보다 성벽 너머는 켄타우로스와 고블린이 있는 산이었다.
작디작은 개구멍을 빠져나가려고 밥을 거르기라도 한 건지 바싹 야윈 몸이 쑥 빠져나가자 구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됐다, 됐어. 다 제가 자초하는 일인 게지."
벌떡 일으키고 있던 상체에서 힘을 빼 다시 누운 그의 발끝이 초조하게 달달달 떨렸다.
"쯧."
나무를 타고 성벽을 가뿐하게 넘어선 그가 아이의 작은 그림자를 서둘러 뒤쫓았다.
<4화>
동방의 귀인
밤의 산은 위험하다.
그 불변의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른이 아이에게 세뇌하듯 가르쳐 온 생존의 법칙이었다.
밤에 산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자는 보통 미친놈이거나 도사이거나 그도 아니면 미친 도사일 뿐이었다.
미친 도사인 사구령은 제게 돈을 갈취한 아이의 안전을 위해 뒤를 밟아 산속으로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아이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않은 채 경비병에게 들킬세라 어둠 속에 작은 몸을 숨겨 가며 허겁지겁 산에 올라 모습을 감추기 바빴다.
구령은 나무에 올라 아이의 행적을 잠자코 지켜봤다.
다 낡은 옷의 해진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 온 종이를 펼쳐 든 아이는 미미하게 지상을 비추는 달빛에 의지해 서툰 솜씨로 베껴 온 그림을 지도 삼아 땅을 살폈다.
'약초인가.'
구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잘 보이지 않는 아이의 그림을 훑었다.
밤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땅을 헤집는 손은 고작해야 동전 몇 닢을 쥐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척 작았다.
턱을 괴고 아이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령이 짧게 한숨을 뱉어 내곤 사뿐하게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소리 없이 내려선 구령이 제 뒤까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약초 찾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는 뒤에서 불쑥 넘어오는 손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누구야!"
달빛을 등에 지고 선 검은 도포 자락을 보고 아이는 숨을 헉 집어삼켰다.
구령은 아이가 삐뚤빼뚤 그려 온 그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림엔 영 소질이 없는 녀석이로구만."
"놀리러 왔어요?"
"한가해 구경이나 와 봤다."
별 이상한 아저씨 다 보겠다면서 구령을 흘긴 아이가 도로 종이를 홱 빼앗았다.
"놀릴 거면 가요! 나 바쁘니까."
"낮엔 사람 등쳐 먹고 밤엔 산 뒤지러 담이나 타고. 뭐, 바빠 보이는구나."
제 정강이를 퍽퍽 때리는 아이의 주먹이 생각보다 매서워 땅을 데굴데굴 구른 구령이 어느새 아이의 손길이 닿는 풀을 유심히 지켜봤다.
"무슨 약초를 그리 찾느냐?"
"돈도 볼 줄 모르는 아저씨가 알려 준다고 뭘 알겠어요?"
톡 쏘는 말이 제법 맵다.
그렇지만 아이의 매콤한 말에도 굴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인 구령은 제 도포를 한 번 펄럭이며 으스댔다.
"어허. 이래 봬도 훌륭하신 약로선인 아래서 오래도록 수행한 몸. 약초 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인 것을."
아이는 못 미더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약초 찾던 손을 멈추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눈앞의 수상쩍은 남자를 응시했다.
"하트 세이버라는 풀이에요. 여기 이파리가 이렇게 길쭉한 하트 모양이라고 하는데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엉성한 그림을 들이밀고 열심히 설명하는 아이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구령이 코로 깊은숨을 밀어냈다.
"전혀 모르겠군."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방해나 하지 말고 저리 찌그러져 있어요!"
"네 그림이 엉망인 걸 나더러 어찌하란 말이냐?"
"어휴. 믿은 내가 바보지."
아이가 다시 약초 찾기에 전념한 사이, 구령은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달빛 아래 이리저리 비추어 가며 제가 아는 약초 중 이와 비슷한 것이 있나 헤아렸다.
짙은 구름에 달빛이 한 번 사위었다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무렵, 구령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누굴 주려고 찾느냐?"
"어머니요."
아이는 부루퉁한 얼굴이었지만 딱히 숨길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렇군."
"그건 왜요?"
"네 어미가 나병을 앓는 게냐?"
"나병…?"
처음 듣는 단어에 아이의 고개가 갸우뚱 꺾였다.
구령은 다그치지 않고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가장 대표적인 증상으로 다시 물었다.
"혹 살이 썩어 가고 있는 병을 앓고 있느냐?"
툭 던진 말에 아이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그렇지.
구령은 제 기억 속 한 약초를 떠올렸다.
"네가 찾는 풀이 하트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 고향에선 이와 비슷한 훈초라는 풀이 자란다. 네가 그 풀을 찾는다면 필시 나병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뿐이다."
몸을 으쌰 일으킨 구령이 도포를 탈탈 털었다.
그가 의아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곳은 달이 원체 밝아 자랄 수가 없을 게다.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좀 더 들어가야 하니 내 옆에 꼭 붙어 걷거라."
구령의 손을 잡고 일어선 아이가 도포 자락을 꽉 움켜쥔 채 그의 곁에 섰다.
지금부터 향할 산중의 깊은 어둠이 아이의 용기를 야금야금 훔쳐 가는 듯했다.
구령이 그런 아이의 마음을 달래 주듯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투박하게 쓰다듬자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가시고 다시 한번 어머니를 향한 용기가 자랐다.
"가자."
두 사람의 그림자는 곧 어두운 응달에 가려져 모습을 감췄다.
* * *
아이는 제 이름을 도미닉이라 했다.
산속 깊이 응달까지 걷는 동안 도미닉은 쉬지 않고 떠들었는데 구령은 그 덕분에 이곳이 '모트왈'이라는 작은 나라의 변두리 마을 '레이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레이븐은 원체 작은 마을이라 통용 화폐가 아닌 동전을 받아 주지 않지만, 수도로 나가면 받아 주는 상점이 많을 거라는 얘기도 빼먹지 않았다.
"이름들이 죄다 어렵구나. 모투알이니 레이븐이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설치고 다니신 거예요?"
"어허. 설치다니. 용감하다고 하거라."
도미닉은 영 못 미더운 구령의 모습에도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첫 만남에 패악을 부린 게 영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도미닉은 중간마다 자신이 얼마나 뉘우치고 있는지 사과를 곁들였다.
"저처럼 어린애는 일꾼으로 써 주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도움을 주고 돈을 받는 일이 많아요. 아침엔 제가 죄송했고요!"
"오냐. 뉘우치면 됐다. 약초는 뭘 보고 베껴 온 거냐?"
"마을에 공용 도서관이 있거든요. 약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까 제가 직접 구해 보려고…. 저희 어머니한테는 말씀하시면 안 돼요! 오늘도 몰래 나온 거란 말이에요."
"글쎄다."
"아저씨이."
제 허리춤에 매달려 말꼬리를 늘이는 도미닉의 모습에 이죽거린 구령이 뒷짐을 지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어두운 산속에서도 가장 음기가 가득한 곳에 도달한 구령은 눅눅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미미한 달빛에 의존해 붉은 꽃을 피워 낸 식물을 골라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독초도 만만치 않군.'
구령은 저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는 도미닉을 향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서라, 아서. 괜히 헤집고 다녔다가 쓸 만한 약초나 잔뜩 밟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얌전히 기다리거라."
"도와주겠대도 뭐라고 하기는…."
"뭐, 인석아?"
"아니에요."
부루퉁해진 도미닉의 음성에 작게 웃은 구령은 독초 군락에서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는 훈초를 골라다 한 아름 따서 도미닉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귀한 약초이긴 해도 억센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풀이니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채집하는 건 아닌지 제법 넉넉하게 나 있어 다행이었다.
"이만하면 그래도 몇 달은 가겠지. 잘 말려다가 향주머니로 만들어 지니시면 호전되실 게다."
도미닉은 향긋한 훈초를 안아 들고서 제 은인을 올려다봤다.
구령을 담은 큼직하고 둥글둥글한 눈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반짝였다.
도미닉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구령은 응달에 들어선 직후부터 느껴지는 시선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몸을 움직였더니 덥구나. 이것 좀 걸치고 있거라."
"더워요? 쌀쌀한데…."
"자. 됐으니 입어라."
도포를 벗어 도미닉의 머리 위에 덮은 구령이 나무 사이에서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세었다.
'둘, 셋…. 일곱 정도인가. 고부린인가 뭔가 하는 녀석보다 기운이 세군.'
켄타우로스야 척 보기에도 튼튼해 뵀으니 걱정 없이 호리병을 꺼내 들어 상대했지만, 도미닉은 어리다 못해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아이였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휘말려 화를 입을 수 있으니 구령 역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도미닉아. 내 잠깐 너를 안고 달려야겠다."
"갑자기요? 으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미닉을 어깨에 둘러업은 구령이 노란 눈깔 아래 허옇게 드러나는 이빨을 마주한 순간, 그들로부터 다섯 걸음 앞서 공격을 피했다.
"카르륵…!"
약이 바짝 오른 놈들이 목을 긁으며 위협하자 도포에 파묻힌 도미닉이 불안한지 몸을 허우적거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구령의 말에도 기어이 얼굴을 빼꼼 내민 도미닉은 제게 일어난 일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쉬익,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귓가를 때리고 방금까지 응달에 있던 제 몸이 어느새 나무숲을 벗어나 달빛이 가득한 들판까지 나와 있었다.
저 뒤에서 마물 무리가 아가리를 벌린 채 쫓아왔지만,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아, 아저씨? 너무 빠른 것 같은데…. 달리는 것보다 빠른 것 같은데…."
훅. 훅.
마치 땅 위를 짧게 나는 것처럼 마을과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순식간에 성벽을 뛰어넘어 고목나무에 오른 구령이 도미닉을 내려 주자 멀미를 참지 못한 도미닉이 먹은 것 없는 속을 요란하게 게워냈다.
"우웨엑."
"거 엄살은."
"우욱….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순식간에 마을까지 왔잖아요!"
"축지법이다, 축지법. 예서 누워 있던 것도 그나마 쉰 거라고 힘이 조금 돌아오더구나. 오늘은 더 못 달리겠다. 너도 어서 집으로 가거라."
과장이 아닌지 고목나무에 기대앉은 구령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가 덮어 주었던 도포를 쥐고 쩔쩔매던 도미닉이 구령의 축 늘어진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저씨. 우리 집으로 가요."
"…뭐라?"
"약초도 구해 줬고 제가 아침에 잘못한 것도 있는데…. 우리 집에서 쉬어요."
"됐다. 가서 어머니 약이나 드려라."
구령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젓자 도미닉의 뺨이 뾰로통하게 부풀었다.
"저 그리고 고목나무 못 내려가요. 아저씨가 내려 줘야 해요."
당당한 요구에 구령이 갸륵한 미소를 띤 채 도미닉의 이마에 꿀밤을 쥐어박았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결국 도미닉을 안고 고목나무 아래로 내려선 구령은 저보다 한참 작은 그의 뒤를 따라 마을의 골목을 한참 누비다 낡은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나병 환자에게도, 아이가 자라기에도 썩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구령은 악취를 풍기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안긴 도미닉의 환한 미소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병 때문에 악취를 풍길지언정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건 비단 외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제 아이를 산속에서 지켜 준 수상쩍은 이방인을 경계하지도 않고 그저 그들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면서 부디 편하게 쉬시기를 간청했다.
훈초를 말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도미닉은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약초를 늘어놓은 뒤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어머니의 침대맡에서 잠들었다.
구령은 도미닉을 제 침대에 누이고 낡은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처했다.
잠들기 전, 그녀는 귀한 손님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의 평안한 밤을 위해 다 낡은 커튼을 쳐 달빛을 가려 주었다.
"도미닉이 평생을 살아가며 몇 번 만나기 어려운 귀인을 만났군요."
"착한 아이요. 도움받아 마땅하지."
"동방국에서 오셨나요?"
동방국.
구령은 그 동방국이 자신이 온 곳을 일컫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구령을 보고 신기한 듯 쳐다보긴 했어도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말인즉슨─
"혹 이 땅에 동방국에서 온 이가 많소?"
"여긴 작은 마을이라 흔치 않지만, 수도에는 많지 않아도 몇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머리가 검고 독특한 의복을 걸친 사람들이 늙지도 않은 채 마법사와 비슷한 신기한 마법을 부린다더군요."
"그렇군."
분명 도사일 터.
구령은 이곳에 와 있는 도사가 비단 본인뿐이 아니란 사실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다만, 진휘 도사와 함께 떨어진 저와 달리 그들은 어떤 연유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힘의 파동이 아니었던 건가. 희한한 일도 다 있군. 내 원래 있던 곳에서는 서방의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었다.
과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인지.
그 답을 찾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수도로는 어찌 갈 수 있소?"
"남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산등성이만 넘으면 또 금방 도착할 거예요."
그녀는 여러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손님을 향해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도미닉을 시켜 배웅해 드릴 수 있게 할 테니 오늘은 이만 푹 쉬세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급히 피웠던 벽난로의 불이 이제야 방 안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
도미닉이 방에 잔뜩 늘어놓은 훈초에서 물기를 머금고 갓 피어난 들꽃 향기가 온기를 타고 진동했다.
구령은 그제야 불편한 의자에서도 잠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은혜에 고맙소."
늘어지게 하품하기 무섭게 까무룩 수마에 빠지는 낯선 손님을 보고 도미닉의 어머니는 침상에 누워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
<5화>
선익도?
조금이라도 쉬었다 가시라는 도미닉 모자의 만류에도 구령은 완고했다.
이 작은 마을에 진휘가 없는 건 확실한 것 같으니 채비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채비라 봐야 짐 하나 없이 덜렁 몸만 날아왔으니 사실 마음이나 먹는 게 전부였지만.
"수도까지 가려면 한참 걸릴 텐데 더 쉬었다 가요, 아저씨."
"됐다. 내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 봐야 할 게 산더미라 바로 출발하련다."
"그치만…."
"도미닉. 도사님도 바쁘시다잖니."
칭얼거리던 도미닉이 어머니의 다부진 음성에 입을 꾹 닫았다.
도사가 뭔지 모르겠지만, 구령이 저를 그리 칭하는 것을 듣고 도미닉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구령을 도사님이라 불러 주었다.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도사 소리를 들으니 구령은 감개무량할 지경이었다.
"도미닉 말대로 가시는 길이 고될 텐데 식량이라도 챙겨 가시죠."
"먹을 게 있소?"
"대단한 건 아니고 골목에 빵집이 있어요. 도미닉이 안내해 드릴 거예요."
반색하던 구령이 문득 동전을 받지 않겠다며 성화였던 여관을 떠올리고 입술을 비뚜름하게 다물었다.
"되었소. 단식 수련도 했는데 몇 끼 굶는다고 안 죽더이다."
"…뭘 한다고 단식까지 한대요?"
"그런 게 있소."
구령이 몇 날 며칠을 굶어 가며 벽곡단 몇 알로 버텼던 지난날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워서 인사하는 무례를 용서하라는 도미닉 어머니의 말에 구령은 일어나든 눕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며 일갈했다.
그는 다시 한번 훈초 향주머니를 꼭 차고 다닐 것을 신신당부했다.
"인석이 또 마을에 들어가지 않도록 내 넉넉히 따 왔으니 거기 있는 훈초 몽땅 쓰시오. 다행히 그대의 용태가 심각하지 않아 이만한 양이면 충분히 병마를 물리칠 수 있을 거요."
"명심할게요. 벌써 세 번째 말씀하시네요."
"중요한 일은 백번 말해도 충분치 않은 법."
도포를 휙 둘러 입은 구령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쾌차하시오."
매서운 눈매치고 다정하기 그지없던 구령의 모습에 도미닉 어머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당신의 여행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 * *
집을 나선 도미닉과 구령이 골목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들 앞으로 누군가 불쑥 나타나 일방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도미닉을 봤을 때와 비슷하게 행색이 초라한 사내였다.
덥수룩하게 기른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짙은 고동색 눈알을 빛내는 그는 도미닉은 알은체도 않고 구령의 손을 덥석 잡아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우와! 진짜 동방인이잖아? 이런 시골 마을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허. 무엄한지고."
"이런, 미안해요. 내가 흥분했네. 헉. 눈이 정말 검네. 혹시 그 신기하게 생긴 모자 좀 벗어 볼 수 없을까요? 머리카락도 까만가요?"
"이 마을엔 별난 자가 많군."
구령은 갓을 벗기려는 그의 손을 찰싹 쳐 내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도미닉도 그의 등장이 그리 달갑지 않았는지 "그만해, 와이너!" 하고 그의 낡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와이너는 아프지도 않은 지 와하하 웃으며 도미닉의 뺨을 꼬집었다.
"으아악! 아파! 그만해, 멍청아!"
"으하하! 꼬맹이가 제법 힘이 세졌는데?"
"아는 사이냐?"
"무시해요. 마을에서 유명한 미치광이거든요."
와이너의 손에서 겨우 벗어난 도미닉이 제 머리 옆에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해 보이자 구령은 과연 알 것 같다며 입술을 쭉 끌어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너는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뒤를 졸졸 따르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댔다.
"동방인이 이런 시골 마을엔 어쩐 일인가요? 혹시 전쟁이 임박했나? 역사서엔 없지만 각 국가에 호의적인 동방인은 전쟁에 참가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전쟁?"
"대답하지 마요, 아저씨. 와이너한테 잘못 걸리면 끝도 없단 말이에요."
끙 앓는 소리를 낸 구령이 "오냐." 하고 도로 입을 딱 다물었다.
골목을 빠져나갈 즈음, 와이너가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어디로 가고 있어요? 수도? 아니면 선익도?"
"…선익도?"
구령이 선익도에 반응하자 와이너는 더욱 흥분한 몸짓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환호했다.
"역시! 동방인들이 선익도에 몰려 산다는 게 사실이에요? 다들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곳이라면서 안 믿더라고요."
"이곳의 동방인은 모두 선익도의 사람이냐?"
"어…. 글쎄요.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요?"
"내가 온 곳은 침산이라 하는 곳이다. 나와 같은 생김새의 인간들이 그곳에 몰려 있느냐?"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였다.
"아저씨는 와이너 말을 믿어요? 유명한 미치광이라니까요."
"난 지금 미치광이 말이어도 좋으니 단서가 필요하거든. 이야기꾼 말을 듣다 보면 종종 보물 같은 단서가 나오는 법."
도미닉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제 말을 귀담아들어 주는 이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와이너는 오히려 반색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구령이 턱짓으로 신호하자 그는 기다렸단 듯 입술을 축였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동방국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당신도 날 수 있나요?"
구름을 타고 난다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구령은 굳이 이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젓자 와이너는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내뱉었다.
"뭐, 종종 그런 열등한 사람도 있는 법이죠."
"네놈은 주둥이가 방정이구나."
"아무튼 우린 그들을 프레윙이라고 부르는데 죽음의 바다에 그들이 모여 사는 섬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선익도인가."
와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종종 목격되는 동방인들도 그에 관련해서 입을 열지 않으니 알 길이 없는 거죠."
구령은 그가 말하는 선익도니 뭐니 하는 것들이 저와 같은 도사이거나 적어도 동향의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디, 그 선익도라는 곳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구령의 채근에 와이너가 어깨를 으쓱 털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뭐 얼마나 되겠어요?"
"쯧."
"수도에 종종 나타난다고 하니까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있을 거예요."
도미닉의 어머니가 했던 말과 같았다.
이곳의 사람들이 독특한 복식의 구령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분명 이런 자가 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수도로 가려는 길이었어요."
구령을 대신해 도미닉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와이너는 기특한 동네 꼬마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으면서 최근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을 잊지 않고 전했다.
"요즘 마물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혼자서 선익도를 찾는 게 쉬운 일도 아닐 테고."
와이너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구령의 귀에 바짝 붙어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아하무래해도호… 비히히밀스러후우운 섬이잖아효오오오…."
"아잇! 이 망할 놈! 떨어져서 말해라!"
간지러워 몸을 배배 꼰 구령이 와이너를 밀치고 귀를 탈탈 털었다.
와이너는 밀쳐지고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헤븐리 피스로 찾아가 보세요. 용병 길드가 몰려 있는 곳이라 도움이 될 거예요."
"넌 어찌 나를 이리 도와주느냐?"
"동방인만 생각하면 심장이 떨려요. 모든 게 비밀스럽다니."
"…음흉한 자로고."
괜히 마을에서 유명한 미치광이가 아닌 것 같았다.
못마땅한 표정의 구령이 한 걸음 물러서자 와이너가 머리를 긁으며 웃어 보였다.
그 천진한 미소가 음흉한 건 둘째 치고 나쁜 사내로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섬을 찾거든 나중에라도 이 마을에 오셔서 섬이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만 알려 줄래요?"
"그거면 되겠느냐?"
"물론이죠! 너무 궁금한데 아는 동방인도 없고 수도까지 가는 건 엄두도 안 나더라고요."
못 할 것 없는 약속이었다.
좋은 정보를 얻은 값치고는 오히려 싸게 느껴질 정도로.
순수한 궁금증과 알고자 하는 욕구를 높이 사는 구령은 그런 와이너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
구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갓끈의 구슬이 절그럭 소리 냈다.
"내 틀림없이 약조하마."
신난 와이너를 뒤로 하고 얼마 안 가 저 멀리 남동쪽으로 향하는 길목이 희끄무레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미닉의 조금 느려진 걸음에 맞춰 구령 역시 모르는 척 속도를 줄였다.
구령이 살아온 날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날을 살았고, 앞으로도 구령의 삶에 비해 훨씬 짧은 생을 살게 될 도미닉은 감정에 솔직한 아이였다.
첫 만남이 엉망이었던 이방인과의 이별이 아쉬워 아이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어른어른 맺혀 있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 도미닉의 얼굴을 본 구령이 씩 웃었다.
"우느냐?"
"안 울거든요!"
손등으로 눈물을 박박 문질러 닦은 도미닉이 투덜거렸다.
코를 훌쩍인 도미닉이 마을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구령과 마주 보며 섰다.
울음을 참느라 코끝이 빨개졌는데도 우는 게 아니라고 우겨 대는 통에 구령은 놀리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처음에 아저씨한테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해요."
"되었다. 그 나이에나 그럴 수 있는 게지."
"그리고 말투 할아버지 같다고 생각한 것도 죄송해요."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고 가야 하는 건데."
"헤헤."
피식 웃은 구령이 도미닉의 작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머니는 괜찮으실 게다."
"…흑."
그 말에 그만 도미닉의 눈에서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도미닉이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흐어엉. 아저씨, 고마워요. 흑, 흐윽…. 아저씨가 아니었으며언…. 어어엉…."
"오냐. 다 안다, 그래."
멋쩍게 뺨을 긁적이던 구령이 머뭇거리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도미닉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옳지, 옳지."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커다란 손길에 도미닉이 그의 도포에 얼굴을 묻고 연신 울음을 삼켰다.
구령은 해 본 적도 없는 위로를, 그것도 어린아이에게 하려니 영 막막했지만, 역시 이럴 때는 스승님 흉내만 한 게 없었다.
먼 옛날 스승이 제게 해 줬던 위로를 떠올리며 어쭙잖게 흉내 내자 놀랍게도 도미닉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다 울었느냐?"
"…크응. 네."
"…지금 코 풀었느냐?"
"…아닌데요."
검은 도포가 반짝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이번만 넘어가 준다는 마음으로 인내한 구령이 깊은 한숨을 삼켰다.
"만남에는 언제나 이별이 함께하는 법. 그렇기에 인연이 소중한 것임을 새기고 살거라."
"알았어요.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아까 와이너가 말한 것처럼 숲에 마물들이 들끓고 있대요."
"오냐. 내 명심하마. 네 어미가 걱정할 테니 이제 들어가 보아라."
고개를 끄덕인 도미닉이 열 걸음을 채 가지 못하고 뒤돌았다.
구령이 진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제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의 인생에서 아마 오래도록 기억될 강렬한 인연과의 이별의 파도가 무섭게 쏟아졌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포말처럼 벅찬 감정을 추스를 길 없는 도미닉이 양팔을 높이 들어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다음에! 꼬옥! 우리 마을에 다시 오세요!"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이별에 구령이 파안했다.
검은 소매가 인사를 대신해 펄럭였다.
* * *
도미닉의 마을을 떠난 지 3일째.
완전하게 돌아오지 않는 힘을 쓰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구령은 섣불리 도술을 부려 이동하기 곤란했다.
실로 오랜만에 몸으로 부딪치는 여행을 하려니 제아무리 사구령이라도 여간 지치는 게 아니었다.
밤중에는 마물을 피해 되도록 나무 위에서 잠을 청하고 낮에는 열매나 작은 동물을 사냥해 배를 채우는 야만스러운 날이 이어지자 슬슬 잊고 있던 분노가 들끓었다.
"진휘 그놈은 대체 어딜 갔는지, 원."
구령이 쯧 혀를 찼다.
이곳에 함께 떨어진 게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진휘를 생각하자 속에서 열이 끓어 냉수나 한 모금 마시려는데 하필 수통이 텅 비었다.
아직 날이 밝으니 수통을 채워둘 요량으로 냇가를 찾은 구령이 맑은 냇물에 수통을 넣자 꼴꼴꼴꼴 수통 채워지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쉴 곳을 찾아 두리번대던 구령의 몸이 일순 굳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강한 기운이 근처에서 느껴졌다.
주위를 두리번대던 구령의 위로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니.
어둠이 내려앉았다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검은 비늘로 뒤덮인 집채만 한 검은 몸집에 바위보다 거대한 날개, 샛노란 눈을 희번덕이는 생명체는 새도 아니요, 뱀도 아니었다.
노란 눈동자 안에 세로로 길게 쭉 뻗은 검은 동공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며 구령을 담았다.
화염처럼 붉은 기다란 혓바닥이 채찍처럼 날름댔다.
"묘한 기운의 필멸자여."
천둥처럼 우르릉대는 음성은 분명 저 생명체의 것이 분명했다.
구령이 마른침을 넘겼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6화>
여의주 사냥
거대한 도마뱀 같기도 하고 뱀의 몸통 같기도 한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비늘이 빛을 받아 흑요석처럼 반짝였다.
그의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기운에 구령의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보통 녀석은 아니로군.'
도력이 평소와 같았다면 긴장할 일도 없었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재의 구령은 불안정한 도력 탓에 함부로 도술을 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찌할까.'
구령에게는 안정화된 도력을 이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축지법으로 도망치기.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구령은 도망치는 것에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10리 정도라면 너끈히 내뺄 수 있을 정도의 도력이 회복된 참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채 도망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녀석에게 달린 커다란 날개가 장식이 아니라면 축지법으로 움직여도 금세 따라 잡힐 수도 있었다.
둘째. 분신술로 혼란을 준 뒤 본체는 숨기.
사실 분신술은 구령이 즐기는 도술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뜯어 제 모습과 꼭 닮은 분신을 여럿 만들어 내는 건 화려함의 극치이자 훌륭한 양동 작전을 펼칠 수 있지만, 머리카락을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분신술을 남발하던 도사가 대머리가 됐다는 소식을 듣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한 움큼 뽑았을 터였다.
셋째. 주구를 사용해 맞서기.
호리병으로 빨아들이기엔 상대의 기운이 너무 거셌다.
또한 부적은 아직 넉넉하다 해도 유한한 자원이기에 섣불리 쓰긴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를 따지고 드니 나머지 주구도 마찬가지였다.
구령이 제게 주어진 선택지를 곱씹는 게 길어지자 그를 앞에 세워 둔 존재가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다시 한번 우르릉 우는 소리를 냈다.
"필멸자여.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네 정체가 무엇인지 물었다만."
"거 성격 한번 급하군. 보통 상대방에 대해 물을 때는 본인 소개 먼저 하는 게 상식이거늘. 어찌 그 정도 예의도 없는 자가 필멸자 운운하느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령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도력만 멀쩡했어도 이런 귀찮은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젠 별 희한한 것들이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다가 필멸자라니?
필멸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 고생을 하며 수행한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눈앞의 존재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구령의 모습에 눈에 띄게 당황하며 제 소개를 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나는 이 산의 정복자요, 주인에 오른 블랙 드래곤. 만물이 이르기를 최초의 어둠과 잔악한 힘. 다른 이름으로 프리키팍투스 칼리고 포텐티아 크루델리타스글레바라 한다."
따라 하기는커녕 외울 수도 없는 이름에 구령이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닫았다.
'부릭기박두수…. 서방국 녀석들 이름은 도대체가 해괴하군.'
프리키팍투스 칼리고 포… 블랙 드래곤은 노란 눈을 끔벅이며 구령의 모습을 살폈다.
느껴 본 적 없는 묘한 기운이 제 구역에 들어선 것을 느낀 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내려왔더니 겉보기에 그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필멸자가 있어 그 정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별안간 예의를 들먹이며 혼날 줄 몰랐던 터라 졸지에 제 소개까지 해 버린 그는 구령의 정체가 못내 궁금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구령은 쉽게 나오지 않는 해답에 일단 시간을 끌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도사 사구령이다."
"…도사?"
반질반질하게 검은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자 한숨을 푹 내쉰 구령이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어깨를 털썩 털었다.
"온갖 재주를 부리는 재주꾼이라 생각하거라."
블랙 드래곤이 구령으로부터 묘한 기운을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구령 역시 그에게서 알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구령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분명 알고 있는 기운인데도 그 안에 흐르는 기가 다르니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네 존재에 대한 설명은 그것으로 끝인가?"
"음?"
쿠우웅. 쿠웅.
블랙 드래곤이 걸음을 옮기자 육중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쑤욱 고개를 내린 드래곤의 머리는 구령의 키에 맞먹었다.
구령의 머리통만 한 노란 눈동자 안의 새까만 동공이 세로로 가늘게 쭉 찢어지며 눈앞의 기묘한 동방인을 담았다.
"네 몸, 자세히 보니 마력이 깃들었군."
"마력?"
"내게 먹히기 위해 스스로 찾아온 자라면 칭찬을 아끼지 않으마."
그르르 울리는 낮은 소리를 낸 드래곤의 붉은 혀가 시뻘겋게 치솟는 불길처럼 날름거렸다.
짐승의 표정을 읽는 능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웃는 얼굴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건방진 도마뱀 같으니.
구령 역시 붉은 입술을 씩 끌어 올렸다.
"네놈, 용이로구나."
블랙 드래곤이 뭘 일컫는지 몰랐던 구령이 드디어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구령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읽기 위해 그가 마력을 공명한 순간이 있었다.
블랙 드래곤이 제 기운을 개방한 순간, 구령은 그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여의주의 기운에 비로소 이 짐승이 이 세상의 흑룡임을 깨달았다.
여의주.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 수행을 거쳐 얻게 된다는 전설의 보주寶珠.
여의주를 손에 넣은 자는 그 힘은 물론이요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알려진 보물 중의 보물이니 구령이 손에 넣기만 한다면 도력을 회복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을 게 뻔했다.
"뭐?"
구령이 눈을 희번덕거리자 그에게 가까이 붙어 있던 블랙 드래곤이 재빠르게 머리를 뒤로 물렸다.
'베이는 줄 알았다…!'
매섭게 날을 세운 기운은 마치 보이지 않는 칼 같았다.
구령은 지체할 것 없이 남아 있는 도력을 모조리 쏟아부어서라도 녀석의 여의주를 빼앗을 셈이었다.
"여의주 가지고 있지?"
소매 주머니에 팔을 찔러 넣고 건들건들 다가오는 구령의 모습에 드래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자, 잠깐. 아까부터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것이냐?"
"그것만 내놓으면 살려는 주마."
구령이 도포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자 드래곤의 기다랗고 두꺼운 목을 타고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대체 무엇을 꺼낼 심산인지 몸을 잔뜩 낮추고 구령을 노려보던 드래곤은 스윽 빠져나오는 손끝에 덜렁 잡혀 나온 물건에 그만 참지 못하고 푸르릉 코웃음을 쳤다.
"단검?"
구령의 손에 들린 물건은 섬세한 세공이 들어가 살상용으로 쓰기에도 애매한 단검이었다.
고작해야 꺼낸다는 게 단검이라니.
블랙 드래곤의 웃음기 어린 숨결에 주변의 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우매한 필멸자여. 고작 단검 따위로 감히 이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이거 아주 시건방진 놈이로구만?"
씩 웃은 구령이 한 뼘이 되지 않는 검집에서 단검을 꺼내 들며 풍신風神과 우신雨神의 주문을 외자 블랙 드래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드리웠다.
쿠르르….
천둥을 몰고 온 불길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
방금까지 맑았던 하늘에서 솨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쫄딱 맞은 블랙 드래곤이 몸을 후르르 털어 냈다.
'잔재주를 부리는군. 마법사 중에 날씨를 부리는 자가 있다고 들은 적은 없는데.'
하지만 고작해야 비를 내리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비를 내리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고 생각했겠지?"
"뭣…!"
제 생각을 그대로 읽어 내는 구령의 모습에 블랙 드래곤이 펄쩍 뛰었다.
구령이 던진 뇌우雷雨 부적이 도력으로 끌어낸 비에 젖어 들어가자 파지직, 파직!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번쩍이는 빛을 뿜었다.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내게 그깟 라이트닝 마법이 통할… 끄아아악!! 아파! 아파!!"
아우, 염병! 이거 뭐야!
말을 겨우 삼킨 블랙 드래곤이 황급히 하늘을 살폈다. 라이트닝 마법 정도는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제 몸에 번개가 작렬했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부들부들 떤 블랙 드래곤이 "크아악!" 하고 소리치자 그의 입에서 검은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을 다 살라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위력에 구령이 자세를 바로잡고 호신부를 펼쳤다.
"빌어먹을 필멸자 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거대한 이빨을 빠드득 간 블랙 드래곤이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응시했다.
온데간데없는 구령의 모습에 그가 흥 코웃음 쳤다.
"뼈도 못 추렸군."
"누가 뼈를 못 추려?"
"! 크윽…!"
"내게 그깟 얕은수는 통하지 않는다."
블랙 드래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른 구령이 그의 머리에 부적 한 장을 척 붙이고 주문을 외자 몸이 천근만근인 듯 무거웠다.
쿠웅!
몸을 끌어당기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블랙 드래곤이 경악했다.
제 눈앞에 훌쩍 내려선 구령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채였다.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냐!"
구령은 블랙 드래곤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놈이 뱉은 힘을 온몸에 맞았는데 생채기 하나 없다니. …빗나간 건 아닐 텐데.'
구령의 허튼 생각을 알 길 없는 블랙 드래곤은 미지의 힘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드래곤 생애 처음 겪는 변고에 그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사실 애석하게도 프리키팍투스 칼리고 포텐티아 크루델리타스글레바는 이제 막 청소년기에 진입한 어린 드래곤이었다.
블랙 드래곤은 청소년기에 진입한 개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무리에서 방출시켰는데, 그렇게 방출된 어린 드래곤은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인간들의 경외를 받으며 제물이나 받아먹고 이름을 날리는 게 보편적인 성장 과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운 나쁜 드래곤이 처음 만난 인간이 사구령이라는 규격 외의 인물만 아니었더라면 보통의 드래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태평한 삶을 누렸을 터였다.
"감히 필멸자 주제에 이 나를 겁박하다니…!"
블랙 드래곤은 여의주가 뭔지 알 길도 없었을뿐더러 한낱 인간이 저를 쓰러뜨렸다는 생각에 난생처음 분노와 수치로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즈우우웅.
가까스로 입을 벌린 드래곤의 입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보라색의 기운에 구령이 틈을 주지 않고 힘차게 도약했다.
'보통 이 정도면 어지간한 놈들은 이미 쓰러졌을 텐데…. 용은 용이라는 건가. …되었다. 나 역시 이판사판! 놈의 여의주를 빼앗을 수만 있다면 남은 도력을 모두 끌어내도 상관없다.'
단검을 손으로 감싼 구령이 제 손바닥을 촥 베어 내자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다.
이를 악물고 허공에 피를 뿌리자 빗물에 섞인 핏방울이 눅눅하게 젖은 땅으로 무겁게 추락했다.
손바닥에 흐르는 피로 허공에 글씨를 새기는 구령의 안에서 안정되지 않은 도력이 날뛰었다.
금방이라도 속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고 이곳 만물이 저를 거부하는 것처럼 자신이 지닌 힘의 개방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입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소매로 감춘 구령이 완성된 글씨에 제 도력을 힘껏 불어넣었다.
"나와라, 우레!"
콰아앙!!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우레의 거대한 모습에 블랙 드래곤은 잠시 당황했는지 커다란 귀를 뒤로 휙 젖혔다가 기다란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브레스를 뿜어내려는 드래곤의 아가리를 움켜쥔 우레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울리는 번개를 등에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드래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크으윽…!!"
밖으로 터지지 못하고 제 안에서 맴도는 브레스를 결국 허공에 내뿜은 드래곤이 크아악 포효하자 우레 역시 밀리지 않은 채 제 주인의 앞에서 천둥과 같은 고함을 질렀다.
퍼더덕 날아가는 새 떼를 가만히 바라보던 구령이 흐르는 피를 닦은 채 히죽 웃어 보였다.
"이래도 잔재주라 하겠느냐? 미련한 도마뱀 녀석."
<7화>
촉법 드래곤 1
제가 밀린 상황이 못마땅한지 거대한 꼬리를 붕붕 흔드는 드래곤의 힘에 주변 나무가 성냥개비처럼 맥을 못 추고 부러져 사방에 널브러졌다.
'역시 오래 유지하긴 힘들겠군.'
우레 하나를 소환하는 데에도 힘에 부쳤다.
서둘러 여의주를 되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구령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우레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무릇 소환수의 힘은 곧 도사의 능력이니 저를 호시탐탐 노리는 드래곤의 앞에서 이대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수야 없었다.
쯧 혀를 찬 구령이 제 갓을 툭 벗어 던지고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우두둑.
한 손 가득 잡힌 머리카락을 거칠게 뜯어내자 두피에 고통이 엄습했다.
"끄악!"
눈물을 찔끔 흘린 구령이 제 피보다 소중한 머리카락을 입가에 가져가 작게 주문을 읊조리고는 허공에 후 불어 날렸다.
펄럭펄럭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점차 뻣뻣하게 굳더니 이내 각각 형태를 갖추었다.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별수 없지!"
펑! 퍼버벙!
희뿌연 안개를 뚫고 등장한 열댓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구령의 분신에 블랙 드래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여의주 사냥을 해 보실까!"
"나쁘게 생각 말아라. 여의주야 수행하면 또 생기지 않느냐?"
"순순히 내놓으면 살려는 주마."
사방에서 떠드는 분신들 사이로 숨어든 구령이 드래곤의 눈을 피해 그의 발아래로 빠르게 돌진했다.
"자, 어디 이것도 막아 보거라!"
"크윽."
퍼억!
허공을 팽이처럼 돌아 정수리를 찍어 누르는 뒤꿈치가 해머처럼 묵직했다.
골이 울려 비틀거리는 드래곤의 앞발 아래서 구령의 두 분신이 힘을 합쳐 한 분신의 발을 잡아 위로 휙 던졌다.
쐐애액─!
퍽!!
"크억!"
재빠르게 날아든 발길질에 이번엔 고개가 뒤로 휙 꺾인 드래곤이 쿨럭쿨럭 기침을 토할 때마다 입에서 보랏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잽싸게 도망 다니는 분신들을 향해 꼬리를 휘두르려던 드래곤이 꼼짝도 않는 제 몸에 휙 뒤돌자 히죽히죽 웃고 있는 우레가 "우어억!!" 하고 소리 지르며 드래곤의 몸을 질질 잡아끌었다.
콰아악.
발톱을 땅에 박아 움직이지 않으려던 드래곤의 머리 위로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번개가 작렬했다.
"끄으윽…. 이… 빌어먹을 녀석들이!!"
크아악.
드래곤의 포효에 언덕 너머의 산짐승들마저 놀라 화다닥 도망을 쳤다.
슬슬 형태가 무너져 가는 우레를 흘끗 바라본 구령이 쯧 혀를 차고는 서둘러 드래곤의 몸 위를 기어올랐다.
'우레가 버텨 주는 동안에 찾아야 한다. 여의주는 대체 어디지?'
서둘러 여의주를 빼내 자리를 뜰 셈이었던 구령이 드래곤의 몸을 등반하다가 몸이 기우뚱 기우는 걸 느끼고는 허공에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가 팔을 퍼덕일 때마다 기다란 도포 자락이 검은 장막처럼 허공에 휘날렸다.
"크윽!"
후웅.
블랙 드래곤이 앞발을 휘젓자 그 풍압에 분신 몇몇이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독을 품은 숨결에도 끄떡 않던 분신들이 물리적인 발톱 공격 한 번에 푸시시 맥없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우레! 돌아와라!"
구령의 외침에 우레가 침울한 표정으로 허공에 흩어졌다.
분신을 모두 물리친 블랙 드래곤은 제 허벅지를 기어오르던 구령의 고함에 그를 발견하고는 거대한 발톱으로 너풀거리는 옷깃을 쥐어 허공에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
잔뜩 약이 올랐는지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는 블랙 드래곤의 모습에 구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이리되는군."
소매에 쑥 넣었다 빼는 손에 환도環刀가 들려 있었다.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의아해하는 블랙 드래곤이 잠시 멈춘 틈을 타, 구령이 숨을 불어 도력을 넣자 붉은빛이 날 선 검을 감쌌다.
"아직도 잔재주가 남았느냐?"
블랙 드래곤의 콧방귀에 구령이 씩 웃었다.
"오냐. 어디 도사 놈 재주에 놀라 보거라!"
구령이 블랙 드래곤에게 옷자락이 잡혀 매달린 채로 검을 높이 쳐들었다.
블랙 드래곤의 머리를 향해 있던 검이 쐐액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향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에 블랙 드래곤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으나, 수 초가 흐르도록 몸에 고통이나 이변이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끔벅. 끔벅.
노란 눈동자를 끔벅이던 블랙 드래곤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사방이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웃어 댔다.
"으하하! 검도 다루지 못하는 자가 입만 살았구나. 바람만 가르는 거라면 검이 아니라 부채를 쓰는 게 낫지 않겠느냐?"
블랙 드래곤의 조롱에 검을 쥐고 있던 구령의 손에서 힘이 탁 풀어졌다.
"포기하고 얌전히 내 일부가 되거라."
붉은 혀가 허공을 가르고 날름댔다.
철썩!
때를 놓치지 않은 구령이 손을 뻗어 블랙 드래곤의 미끈한 혀를 잡아챘다.
"오냐. 세 치 혀는 모두 놀렸느냐?"
"큭…! 네놈…!"
"여의주를 아주 재미난 곳에 숨겨 두었더구나."
씩 웃은 구령의 눈동자가 검과 같은 붉은빛을 머금고 빛났다.
"이 검은 일점도一點刀라 하는데 주문을 외고 허공을 가르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보여 주는 신비한 검이니라."
"여의주란 게 무엇이냐? 내겐 없는 것을 찾는군."
블랙 드래곤의 말에 구령이 코웃음 치며 검의 끝으로 그의 기다란 목 아래 거대한 흉곽 부근을 쿡 찔렀다.
드래곤의 심장.
수많은 마법사가 탐하고 갈망하는 궁극의 물건.
블랙 드래곤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내 심장을 달라고? 필멸자여, 미쳤느냐?"
"아까부터 필멸자, 필멸자 시끄럽다. 내 그놈의 죽음이 싫어 300년을 넘게 수행에 몰두했는데 네까짓 흑룡에게 필멸자 소리를 들어야겠느냐?"
300년.
블랙 드래곤은 제가 살아온 것의 배는 넘는 삶을 살아왔다는 그의 말에 노란 두 눈을 끔벅였다.
"어쨌든 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힘을 되찾아야겠으니 네가 좀 도와주거라."
"…원래 있던 세상?"
"그래. 이곳 사람들은 동방국이라 부르는 듯하던데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련다."
말을 마친 구령이 검을 블랙 드래곤의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죽으란 소리를 뻔뻔하게도 해 대는 인간의 작태에 블랙 드래곤이 서둘러 쥐고 있던 구령의 옷자락을 내동댕이쳤다.
촤아악.
순식간에 풀숲에 미끄러진 구령이 "이놈이!" 하고 버럭 화를 내자, 블랙 드래곤이 두 앞발을 쫙 펴서는 "잠깐, 잠깐." 하고 그를 말렸다.
그러고 보니 기묘한 힘을 쓰는 검은 머리의 인간 종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설마하니 이 녀석이 그 부류인가!
"뭐냐?"
블랙 드래곤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성년에 이른 드래곤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자신은 아직 어린 개체였기에 정식으로 드래곤 슬레이어와 맞닥뜨려 본 적도 없는 애송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묘한 힘을 쓰는 사내와 정식으로 맞붙는다면 저 역시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거란 생각에 선뜻 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 등을 돌렸다가는 언제 또 심장을 노려질지 모르니 차라리 이자 옆에 붙어 서둘러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걸 돕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어차피 자신은 앞으로도 몇백 년은 거뜬히 살아갈 드래곤이었고 이자가 300년을 수행했다는 말이 허풍인지 진실인지 알 길은 없으나 같이 움직이다가 그가 죽어 주기라도 하면 저는 자유의 몸이 될 뿐이었다.
'손해 볼 게 없군.'
그렇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거창한 어린 블랙 드래곤은 그리 판단력이 좋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쿠웅!
블랙 드래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형님으로 모시겠다!"
구령이 팔짱을 낀 채 제 앞에 무릎 꿇은 블랙 드래곤을 살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술을 부리고 일점도까지 휘두른 게 화근이었는지 도력이 바닥난 게 느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뒷짐으로 감춘 구령이 코로 한숨을 길게 뿜었다.
"내가 뭐 하러?"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저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건지 떠볼 필요가 있었다.
구령에게 필요한 건 오직 힘을 되돌릴 수 있는 영험한 보주였고 이곳에서 호형호제할 아우가 아니었다.
솨아아.
불어닥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 세계의 불청객과 최강의 생물 사이를 가르고 나뭇잎을 흔들었다.
"드래곤 하트가 필요한 거라면 줄 수 없다. 이것은 내 목숨과도 직결된 것."
"됐다. 죽여서 가져가면 그만인 것을."
검을 치켜드는 구령의 모습에 블랙 드래곤이 냉큼 앞발을 휙휙 저었다.
거대한 앞발이 흔들릴 때마다 위협적으로 바람을 갈랐다.
"잠깐, 잠깐!"
"또 뭐냐? 거참, 녀석 혀도 길다."
끌끌 혀를 찬 구령이 못마땅한 듯 어깨 위로 검을 둘러 툭툭 두드렸다.
블랙 드래곤의 검은 미간이 굴욕으로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난 이제 100살을 넘기고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드래곤이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신변을 토로한 블랙 드래곤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청소년기라는 건 그렇다.
나이를 밝히는 게 부끄럽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무서울 게 없고 우주의 중심엔 내가 있다는 그 강력한 믿음은 으레 인간의 나이가 열다섯 정도에 이르면 통과 의례처럼 찾아왔고 그건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드래곤은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인간 수명의 100배 정도 된다는 드래곤의 수명 탓에 인간이라면 짧게 2년, 길게는 5년 정도 이어지는 이 시기가 드래곤들에게는 100년 정도 이어졌다.
그들이 인간에게 제물을 받고 세상의 지배자처럼 구는 시기가 보통 이때쯤 이루어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고 300살 정도 먹은 드래곤이라면 응당 자연에 의탁하여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고 살아가고는 했다.
'설마하니 저보다 훨씬 어린 나 같은 드래곤한테 해코지하진 않겠지.'
그러니 세상에 거칠 게 없던 이 블랙 드래곤은 난생처음 조우한 미지의 인물에게 나이를 방패로 한 번 숙이고 들어가기를 택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령이 난감한 낯으로 이마를 긁적이는 걸 본 블랙 드래곤이 속으로 웃었다.
"뭐 어쩌란 게냐?"
시큰둥한 구령이 늘어지게 하품하자 드래곤이 두 눈을 끔뻑이다가 곧 아가리를 떡하니 크게 벌렸다.
"…뭐라?"
"방금까지 죽이겠다고 덤벼든 놈을 내 무엇 하러 봐주느냐? 내 힘없는 생명이라면 겁에 질려 그랬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겠다마는…."
드래곤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구령의 눈이 영 곱지 않았다.
"갓 태어난 새끼 사슴한테 물어봐도 네 녀석이 힘없다는 말은 못 하겠지."
"큭…. 그래도!"
"어허. 생명을 쉽게 빼앗는 자는 그 무거움을 알아야 하는 법. 내 그 드래곤 하트인지 뭔지 하는 것을 가져다가 좋은 일에 쓸 터이니 감사한 줄 알거라. 죽어서 거름도 되고 좋은 일에도 쓰이고 얼마나 좋으냐?"
드래곤의 이빨이 맞물려 으드득 소리가 크게 울렸다.
구령의 힘에 여력이 있다 생각한 드래곤은 이미 진이 다 빠진 제 몸으로 덤벼 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제 창창한 앞날을 위해 기다란 목이 그 앞에서 얌전히 숙여졌다.
"나는 어리다. 어린 것은 천지분간을 못 한다 하지 않는가. 나이를 더 먹었다는 네가 좀 나를 봐 다오."
드래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령이 잠시 고민하는 듯 목을 울리더니 고개를 휙 숙여 드래곤의 노란 눈깔을 고요히 들여다봤다.
"어리면 살생을 해도 된다는 말이냐?"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드래곤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해츨링 시절에 저를 혼내던 어머니의 기운과 무척 흡사했다.
'완전 미친놈이로군. …엄마 밑에서 좀 더 비비고 살다 나올걸.'
<8화>
촉법 드래곤 2
"아까 무슨 최초의 어둠이니 힘이니 하지 않았더냐? 이 산의 정복자고 주인이라며. 네 아무리 어리다 한들 100살이나 먹었으면 알 거 다 아는 나이지."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블랙 드래곤이 입을 꾹 다물었지만, 구령의 잔소리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존재하기를 자처했다면 그 순간 이미 세월을 초월한 현자인 법. 하물며 만물 중 으뜸이라는 용이 나이를 운운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게냐? 심지어 100년이나 살아 놓고? 인석아. 인간 나이 일백이면 이미 염라대왕 앞이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어찌 그리 비겁한 소릴 하는지. 부끄럽지도 않더냐?"
"…으음."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블랙 드래곤의 꼬리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한숨을 푹 내쉰 구령은 어째 녀석의 모습에서 제 어린 시절이 보였다. 문득 제 스승의 노고를 이해하게 된 구령이 쯧 혀를 찼다.
고개를 휙휙 저어 사념을 떨친 구령이 검을 쥔 손에 힘주는 것을 보고 블랙 드래곤이 침을 꿀꺽 넘겼다.
덩치만큼이나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계약을 하지."
"계약?"
"보아하니 여의주라는 둥 이곳의 상식에 박식하지 않더군. 길라잡이가 필요하지 않겠나? 네 말대로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인 나를 곁에 두는 게 네게도 이득일 터."
나이로 협박하는 것도 안 통하자 이제는 말 그대로 세 치 혀를 놀리는 수밖에 없었다.
블랙 드래곤은 구령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내 심장을 걸고 돕도록 하지. 수많은 지식과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만물의 이야기도 들려주마. 필멸…. 아니, 현자여. 네가 밟고 선 땅에 대해 알지 못하면 방향을 정하지 못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지."
구령이 짧게 침음했다.
"그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내 심장을 취하라. 단, 네가 살 길을 찾는다면 내 목숨을 좇는 일은 멈추는 거다."
도력을 모두 소진한 지금, 구령에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인 구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왼쪽 소매에 밀어 넣었다.
"좋아. 받아들이마."
그때였다.
슈팟!
블랙 드래곤의 몸에서 나온 검은빛과 구령의 몸에서 나온 붉은빛이 뒤엉키더니 곧 검은빛은 구령의 몸으로, 붉은빛은 블랙 드래곤의 몸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뭐, 뭐냐? 이게."
"계약이다. 나는 네가 힘을 되찾을 때까지 널 해칠 수 없고 너 역시 힘을 되찾은 이후에는 나를 해치지 못한다. 한쪽의 마력이 다른 한쪽을 공격하려 한다면 몸에 들어간 상대방의 힘이 먼저 움직여 안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이지."
그 말에 구령이 못마땅한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이미 약속한 것을 무를 수도 없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드래곤은 곧 자신의 몸을 검은빛으로 감쌌다.
그의 몸에서 나온 검은 빛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무슨…!"
즈우웅.
블랙 드래곤의 몸을 감싼 검은 빛이 순간 환하게 빛났다가 점차 그 크기를 줄여 나갔다.
처음엔 그의 몸집만큼 거대했던 빛이 바위만큼, 나무만큼 점점 줄어들었다.
파삭.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구령의 앞에서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그곳에 구령의 가슴께에나 올 듯한 크기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반항기가 가득했다.
옷은 언젠가 몰래 지켜봤던 인간의 것과 구령이 입은 것을 합쳐 검은 상의와 하의를 입었는데, 평범해 보이는 옷 위에 구령의 도포와 비슷한 짧은 재킷을 걸친 채였다.
"…너 둔갑술을 쓸 줄 알았더냐?"
"뭐? 뭔데, 그게."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던 짐승의 소리가 아니라 이제 막 변성기가 지난 불안정한 음성에 어째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런 구령을 단박에 알아챈 블랙 드래곤이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둔갑인지, 뭔지. 앞으로 널 따라가야 하는데 그 모습으로는 어림도 없지. 편의상 인간의 몸을 흉내 낸 것뿐이다."
"호오. 제법 소질이 있구나."
구령의 칭찬에 블랙 드래곤은 칭찬이 싫지 않은 듯 입술을 삐죽였다.
"별것 아니다. 이깟 하급 마법."
"한데…."
우쭐대는 블랙 드래곤의 말을 가만히 듣던 구령이 이제 막 불을 붙인 곰방대를 들어 그대로 그의 이마를 후려쳤다.
따악!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처음 느껴 보는 물리적 고통에 놀란 블랙 드래곤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댔다.
"무, 무슨 짓이야!"
"어째 말이 영 짧구나? 형님으로 모시겠다면 응당 말을 높여야 하거늘."
"뭐?"
"앞으로 공손하게 말을 높여 부르거라."
"내가 왜…."
항변하려던 블랙 드래곤이 제 왼쪽 소매에 손을 쑥 집어넣는 구령을 보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도대체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괴상한 소매라고 생각했다.
"옳지."
씩 웃은 구령이 블랙 드래곤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벅벅 문지르자 작은 손바닥이 그 손을 매섭게 쳐 냈다.
"네 이름이 뭐라 했지? 부릭… 부릭기? 해괴한 이름이었는데."
곰곰이 생각에 잠긴 구령의 말에 블랙 드래곤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이토록 굴욕적인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프리키팍투스 칼리고 포텐티아 크루델리타스 글레바 님이시다."
"아, 그래. 부릭기박두수. 부르기가 영 어렵단 말이지."
쩝 입맛을 다시는 구령의 모습에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블랙 드래곤이 짧게 한숨을 토해 냈다.
부릭기, 부릭기….
한참 그의 이름을 뇌까리던 구령이 문득 밀려드는 귀찮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긁적였다.
"흑구라 하자."
"흑…?"
"흑구."
아무리 들어도 어감이 이상하다.
드래곤의 얼굴 근육이 불안하게 경련했다.
"…그게 뭐냐?"
"네 이름이다."
"…흑구?"
"오냐."
아무래도 계약을 잘못한 것 같다고 생각한 블랙 드래곤이 지금이라도 무를까 운을 떼려 할 때, 구령이 그의 머리를 꽉 움켜쥔 채 거칠게 문질렀다.
웃는 얼굴이 꽤 살벌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흑구야."
* * *
진휘와 구령이 공의 경계에 집어삼켜질 무렵, 이 세계에도 큰 이변이 있었다.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던 미드플랫 왕국의 위대한 전사, 샤크룸이 영면에 들었다.
대륙이 평화에 젖은 지금 그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도, 끔찍한 불치병을 앓다가 병사한 것도 아니었다.
최근 검은 언덕에서 불어오는 불미스러운 소문의 온상을 확인하기 위해 미드플랫 국왕의 부름을 받고 왕궁으로 향하던 중 별안간 피를 토하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놀랍게도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고 원인 모를 그의 죽음에 미드플랫의 땅이 비통에 잠긴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곤란하군. …곤란해."
샤크룸의 죽음을 전달받은 미드플랫의 국왕 레그노는 밤이 늦도록 침소에 들지 못하고 집무실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선대 국왕이 집권하던 시절보다 훨씬 간소화된 장식품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모두 지워 버린 집무실은 삭막한 분위기를 풍겼다.
방의 끝에서 끝으로 불안하게 걷던 그가 고풍스러운 조각이 섬세하게 들어간 오래된 책상을 내리쳤다.
쾅!
그의 손길 한 번에 책상 위 잉크통이 출렁이다 검은 잉크를 쿨럭쿨럭 뱉어 내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두툼한 옷과 망토로 가렸지만, 그의 바싹 마른 얼굴과 책상을 내리칠 때 살짝 보인 가느다란 팔목은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이리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즉위한 지 이제 3년 차에 접어든 젊은 국왕에게 영웅의 죽음은 제법 무겁게 다가왔다.
죽은 샤크룸은 오래도록 공을 쌓아 선대 국왕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신임을 한 번에 받고 있던 국가의 영웅이었다.
선대 국왕이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죽은 날에도 많은 이들은 그의 조카인 레그노를 의심했다.
왕위에 눈이 멀어 삼촌을 독살하고 왕관을 쓴 자라 손가락질받으며 오른 자리였다.
"이래서야 백성들은 또 나를 탓하겠구나. 선대 국왕을 죽인 것도 모자라 전쟁 영웅까지 죽였다고 말이야. 빌어먹을…!"
쨍그랑!
그가 던진 유리 장식이 벽에 맞아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 옆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벌벌 떨던 측근 관료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전령의 모습에 반색했다.
"폐하!"
샤크룸의 죽음에 관해 서둘러 알아보도록 보낸 자였다.
그는 신중하게 주변을 샅샅이 살펴 국왕과 그의 측근들만이 자리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운을 뗐다.
"샤크룸이 죽은 장소를 기점으로 특이한 사항은 없었는지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오, 오오. 그래! 뭔가 건질 게 있더냐?"
"사망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만…. 특이하게도 주변에 마력을 지닌 자들 모두 그날 하나같이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합니다."
레그노의 가느다란 눈썹이 위로 휙 치켜 올라갔다.
"이상한 기운?"
"예. 마력이 거친 파도라도 만난 것처럼 울렁거리는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이죠."
"…기이한 일도 다 있군. 자네는 그게 샤크룸 그자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보나?"
전령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대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늙은 관료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샤크룸은 전사면서 강력한 마력을 지닌 자였습니다. 마력을 지닌 자들이 하나같이 모두 같은 기운을 느꼈다면 분명 샤크룸 역시 그 기운을 강하게 느꼈겠지요."
"그렇다면 분명 원인이 있겠군. 백성들의 불신이 더 커지기 전에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네."
"그렇습니다. 지금 폐하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라도 샤크룸의 죽음에 관련한 자를 찾아 엄하게 다스리셔야 합니다."
"검은 언덕은 어쩌면 좋소? 전쟁이 또 일어나려는 건 아니겠지?"
레그노의 걱정에 늙은 관료가 하하 소리 내 웃었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3년입니다. 전쟁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지요. 검은 언덕은 하일란의 엘프족이 먼저 나서서 조사에 착수할 테니 저희는 그저 앉은 채로 들려오는 정보를 수집하면 될 뿐입니다."
"…그렇소?"
"물론이지요."
늙은 관료의 말에 레그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손짓으로 전령을 물린 뒤 이제야 침소에 들기 위해 집무실을 나서는 국왕의 곁에서 끝까지 첨언을 아끼지 않았다.
"강대국일수록 국왕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법입니다."
빙긋 웃는 늙은 관료의 주름에 그림자가 깊어졌다.
* * *
"그러니까, 너는 지금 모트왈 수도로 가고 싶다는 거야?"
"오냐. 근데 말꼬리는 계속 잘라먹을 셈이냐?"
말을 높여 부르랬더니 높이기는커녕 아예 놔 버리는 흑구의 말투에 구령이 눈살을 찌푸려도 이 어린놈의 드래곤은 요지부동이었다.
"이 쪼그마한 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어려운 걸 어쩌라고?"
"오호통재라…. 어째 이런 놈이 길라잡이가 됐는지."
"됐으니까 골라."
구령은 깊은숨을 내쉬며 흑구가 바닥에 그려 놓은 두 개의 지도를 살폈다.
흑구가 탁 짚은 곳은 완만한 들판을 지나는 길이었고.
"오래 걸리는 안전한 길인지. 아니면…."
다시 탁 짚은 곳은 바위 산맥을 지나는 길이었다.
"위험하지만 금방 갈 수 있는 지름길인지."
<9화>
팔석 八石 1
"허억…. 허억…."
험준한 바위 산맥을 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오르는 구령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가뿐한 걸음으로 앞장서던 흑구가 의아한 눈길로 구령을 살폈다.
"괜찮아?"
"…오냐."
구령이 힘겹게 말하고 침을 삼키자 비릿한 피비린내가 넘어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보법步法을 안 쓰고 산을 타는 게 오랜만이라."
"왜 안 써?"
구령이 짜증스럽게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문득 흑구 저놈에게 제 힘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들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를 배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될 일이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구령이 가슴 앞으로 합장했다.
"육체 수행도 게을리해선 안 되는 법."
그런 구령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흑구가 다시 먼저 걸음을 재촉했다.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하여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거늘."
투덜거리며 다시 힘차게 산을 오르던 구령이 문득 뒤를 돌아보자 꼬박 사흘을 건너온 험한 산세가 그 위용을 뽐냈다.
거친 바위산을 이토록 오래도록 탈 줄 몰랐던 구령은 그제야 '지름길'을 택했던 과거의 본인을 원망했다.
육체 수련을 게을리한 건 아니었지만, 원체 험한 산세에 제아무리 구령이어도 힘에 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운지 훨훨 날아다니는 흑구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구령이 제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꽉 그러쥐었다.
'낭패로군. 도력이 조금씩 돌아오고는 있지만, 아직 턱도 없이 부족해. 동방인인지 뭔지 하는 자들은 방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서둘러야 해. …서둘러야 하는데.'
굳은 다짐도 눈앞에 펼쳐진 아득한 산세에 그 기세가 팍 꺾이고 말았다.
고개를 힘차게 저은 구령이 다시 한번 영차 힘을 내 흑구의 뒤를 따르던 그때였다.
콰아앙─!
쿠구구구….
엄청난 굉음에 구령과 흑구가 귀를 틀어막았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냐?"
"그,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여기가 지름길은 맞는 거냐?"
"당연하지! 이래 봬도 내가 이 지역 토박이라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끈한 흑구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을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래,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
"하루만 더 가면 되겠어."
화색이 돌던 구령의 얼굴이 삽시간에 바위처럼 회색으로 식어 버렸다.
"…이런 산을 하루나 더 타라고?"
"내 원래 모습으로 가면 금방 가겠지만, 인간 앞에서 드러내 봤자 좋을 게 없거든."
어깨를 으쓱 턴 흑구가 주저앉아 있는 구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흑구의 손을 잡자 그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구령을 영차 일으켜 세웠다.
"자, 가자."
그렇게 다시 한번 힘을 냈는데.
파삭.
"…음?"
뭔가 밟았다.
쿠르르르─
밟았다는 걸 인지하기 무섭게 발아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춤을 추는 지반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흑구와 구령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붙잡았지만, 구덩이는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사삭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으아악! 흑구야아!"
"이런, 미친!"
비명과 함께 맥없이 떨어지는 구령의 모습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흑구가 욕지기를 씹어 뱉었다.
힘껏 손을 뻗어 봤지만 이미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는 구령을 잡아채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시 매달린 채 고민하던 흑구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저 녀석 진짜 오랫동안 수련한 거 맞아?"
한껏 짜증 섞인 소리로 불만을 토로한 흑구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손을 놓아 버렸다.
부웅.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부유하는 듯하던 몸이 빠르게 추락하는 걸 느끼며 흑구가 짧게 혀를 찼다.
그들이 떨어진 구덩이 주변을 둘러싼 장정 서넛이 시선을 교환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까맣다.
구령은 눈을 여러 번 깜박여도 새까만 시야에 잠시 당황했지만, 눈앞에서 희미하게 번득이는 노란 눈빛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신이 들어?"
흑구가 푹신한 바닥을 두 손으로 꾹꾹 눌렀다.
"바닥이 푹신하더라고. 생각보다 깊지도 않았고."
"…여긴 어디지?"
댕댕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상체를 일으킨 구령이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어둠에 적응한 시야로 단단한 쇠창살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아래를 텅 비게 뚫어 감옥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함정이었군."
구령은 축축하고 단단한 돌벽을 어루만지며 상황을 파악했다.
깊지 않더라도 이미 막혀 버린 천장의 구멍에 다시 위로 올라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흑구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러 명의 걸음 소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릴 환영하지 않는 건 확실한 것 같네."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들고 선 장정 셋이 쇠창살 앞에 섰다.
그들은 처음 보는 독특한 의복을 걸친 구령과 척 보기에도 어려 보이는 흑구를 번갈아 살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나는 침산의 구령이라 한다. 네놈들이야말로 정체가 무엇이냐?"
허리를 짚고 선 구령의 당당한 자기소개에 흑구가 그만 말을 잃고 이마를 짚었다. 저 미친놈….
"퍽이나 안 수상하겠다."
"아, 그렇지. 레이븐이라는 곳에서 왔소. 그곳에 도미닉이라는 아이와 면식이 있으니 그곳에 연통을 넣어 보면 될 터. 내 그리 수상한 자는 아니올시다."
투닥거리는 구령과 흑구를 보고 저희끼리 수군거리던 남자들은 오히려 본인들이 당황한 듯했다.
"아닌 것 같은데?"
"한데 왜 하고많은 길 중에 거길 지나느냐고."
"하긴. 안전하게 갈 거였으면 굳이 이 길이 아니어도…."
"그래도 일단 얘기는 들어 보는 게 어떨까? 심지어 한 명은 어려 보이는데."
웅성웅성.
머리를 모은 채 신중하게 의견을 모으던 그들 뒤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휴고."
남자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산적처럼 거친 수염을 기른 휴고가 틈을 비집고서 외쳤다.
"수상쩍은 건 마찬가지야. 침입자는 봐주어선 안 돼!"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거든 호수로 끌고 가 던지든 짐승의 먹이로 주든 하자고. 아무도 모르게."
휴고가 험악한 눈매로 주위를 살폈다.
그가 개중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자 시꺼먼 검댕이 묻은 사내들의 눈이 그에게로 모였다.
"알버트. 넌 여기 남아 이 녀석들을 감시해."
"내, 내가?"
"그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알버트는 잠시 고민하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주장하던 남자였다.
힘을 못 쓰게 생긴 샌님 같은 외모와 달리 알버트의 몸은 우락부락하게 근육이 잔뜩 붙어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른 이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 알버트는 쇠창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로한지 안경을 벗어 더러운 바지 위에 올려 둔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알버트를 흘끗 바라본 구령이 흑구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게냐? 우리를 호수에 던지겠다는구나."
"뭐, 차라리 버려 주면 고맙지. 그대로 탈출하면 되니까."
자신만만한 흑구의 말에 쇠창살 밖의 알버트가 후후 웃었다.
두 사람의 정체를 알 리 없는 그에겐 그저 근거 없는 허세로 들릴 뿐이었다.
"어려울 겁니다."
안경을 다시 걸친 알버트가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가까이서 보니 두툼한 손에는 굳은살과 이미 흉이 진 상처가 가득했다.
"당신들을 자루에 담고 우리 마을에 넘쳐나는 돌을 그 끝에 매달아 영영 빠져나올 수 없게 가라앉힐 테니까요."
구령은 그 말에 200년 전쯤 약로선인이 저를 궤에 가둬 물에 빠뜨렸던 일을 추억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뒈질 뻔했지. 노인네, 기력도 좋아.
"당신들은 모트왈 사람이 맞습니까?"
"음…."
흑구가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 털었다.
"이쪽은 아니지만, 난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쪽 분은?"
"나도 몰라. 어쨌든 레이븐에서 온 건 확실해."
익숙한 지명에 구령의 표정이 밝아졌다.
"레이븐의 도미닉이라는 아이와 잘 안다. 그쪽에서는 나를 동방인이라 하더군."
"동방인?"
알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쩐지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독특한들 자네들만 할까."
알버트가 안경을 한 번 추슬러 올리고는 구령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확실히 그놈들처럼 험악하게 생기진 않았는데…."
"그놈들? 아까 착각했다는 것처럼 말하던데, 그거랑 관련 있나?"
구령의 말에 알버트가 주변을 살폈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알버트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텅 빈 굴을 울렸다.
"제발 내가 의미 없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 줘요. 당신들, 정말 모트왈에서 온 게 맞는 거죠?"
"사람을 이리 못 믿어서야. 대체 뭐가 그리 무서워 그러느냐?"
구령이 답답함에 가슴을 쿵쿵 두드리자, 알버트가 쇠창살에 바짝 붙었다.
그의 얼굴에 분노와 공포로 열꽃이 피어올랐다.
"도적단이에요! 얼마 전부터 마을에 계속 도적이 나타나고 있거든요. 마을 물건을 약탈하고 반항하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는 아주 비열하고 잔인한 놈들이라고요!"
흑구는 구령이 하는 짓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수도로 보낼 철광이 부족한데 몽땅 털어가고 있으니 우리 밥줄이 끊기게 생겼지 뭡니까? 식량도 죄다 털려 근처 마을까지 가지 않으면 당장 내일 먹을 밥조차 없어요."
"그것참 곤란하게 됐군."
"그래서 녀석들을 잡아 보려고 덫을 쳐 놨는데 댁들이 걸린 거예요."
침울해하던 알버트가 순간 눈을 반짝이는 걸 보고 구령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여행가님들이 좀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대신 여기서 꺼내 드릴게요."
이것 보라지. 결국 귀찮은 부탁을 받고 말았다.
구령이 변명을 찾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까 그 험악한 사내는 우릴 그리 달가워하지 않던데. 우리의 무고함을 알리고 그냥 풀어 주면 어떤가?"
궁색한 변명에도 알버트는 개의치 않고 밝게 웃었다.
"휴고는 완고하긴 해도 마을이 걸린 문제라면 받아 줄 거예요."
영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알버트의 모습에 구령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되도록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흑구가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끄는 구령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알버트를 불렀다.
"필멸자여. 방금 철광이라 했나?"
"필멸…? 저요?"
새파랗게 어린 소년이 절 보고 필멸자라 부르니 아무리 점잖은 알버트여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은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구가 작게 침음했다.
흑구 역시 구령과 다르지 않은 의견이었지만, 철광이 많이 나는 바위 산맥에 위치한 마을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여기가 '더스트 루트'로군."
"더스트 루트?"
흑구의 말에 구령보다도 알버트가 더 놀란 눈치였다.
"우리 마을을 아나요?"
흑구는 그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에게 있어 인근 광산의 유무와 그 질은 무척 중요했다.
광산이 풍부하게 나는 곳일수록 인간에게 얻어 낼 수 있는 광물이 풍부한 탓이었다.
흑구는 광물에 욕심 많은 드래곤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광산을 알아보고 터를 정하라는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인근 광산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바위 산맥에는 작은 광산 마을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철광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더스트 루트였다.
이러나저러나 인간의 본성이란 게 제 고향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유독 경계심이 풀리는 법이라, 알버트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을 사람들과 상의해 봐야겠지만 사례도 해 드릴 수 있어요."
사례라는 말에 구령이 몸을 움찔 떨었다.
눈을 희번덕인 알버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껏 불쌍하게 넓은 어깨를 구겼다.
"마을 남자들은 밤이 되면 여자와 아이들을 지키느라 광산이 텅 비고 말아요. 광산을 지키면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니까요. …정말 어떻게 안 될까요?"
"흐음…."
고민하는 구령의 뒤에 붙은 흑구가 작게 속삭였다.
"철광이랑 금이 많이 나는 마을이야. 그 정도는 도와줘도 될 것 같은데."
흑구의 말에 잠시 도포 소매로 입가를 가린 구령이 히죽 웃었다.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흑구를 크게 꾸짖었다.
"어허!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도와야 쓰겠느냐!"
"…역시 안 되는 거군요."
쇠창살 사이로 쑥 뻗어져 나온 구령의 손이 한껏 풀 죽은 알버트의 손을 꼭 잡았다.
손아귀가 어찌나 센지 알버트가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질러도 구령은 옴짝달싹 않았다.
"내 마음이 영 편치 않으니 도적놈들을 싹 소탕해 주리다."
"으윽, 정말요?"
"하하! 도사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법이지."
호탕하게 웃은 구령이 흑구에게 턱짓하자 한숨을 푹 내쉰 흑구가 양손으로 쇠창살을 잡아 벌렸다.
끼익 끼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쇠창살에 알버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영차 감옥을 빠져나온 구령이 환하게 웃으며 알버트의 어깨에 팔을 턱 하니 얹었다.
"자, 마을로 안내해 주게. 내 광산도 들러 사례금… 크흠! 큼!"
서둘러 말을 얼버무린 구령이 괜히 흐트러지지도 않은 매무새를 고쳤다.
"광산도 들러 그대들이 지키는 귀한 광물도 한번 보고 싶군."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