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팔석 八石 2
"뭐? 우리 마을을 돕는다고?"
알버트를 노려보는 휴고의 눈빛이 매서웠다.
알버트는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나무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그래. 얘기를 들어 보니 레이븐에서 온 건 확실한 것 같고 상당한 실력자인가 봐! 쇠창살을 손으로 열었다니까?"
"풉."
"큭큭. 들었어? 아무래도 알버트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야."
마을 남자들이 제각각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조롱 한가운데 선 구령은 덤덤한 얼굴을 하고서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그래, 그래. 아무래도 도적놈들을 감옥에서 꺼내 줬으니 변명거리라도 필요했겠지."
"휴고. 이 남자는 동방인이야. 우리가 봐 온 도적하고 다르잖아."
"멍청하긴. 동방인이라고 도적질하지 말란 법은 없어."
피식 웃은 휴고가 손짓하자 문 근처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휴고가 미소를 지운 삭막한 얼굴로 알버트를 노려봤다.
커다란 흉터가 난 눈매는 그저 감정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압감을 자아냈다.
"알버트. 네가 순진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다 하다 도적놈 이야기를 다 들어 줬단 말이야? 지금 이놈들이 돌변해서 우릴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쩔 셈인데?"
"그, 그건…."
알버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휴고는 그의 뒤에 선 구령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섰다.
그는 척 보기에도 저희보다 힘도 못 쓰게 생긴 구령이 알버트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지켜볼 셈이었다.
"피부에 생채기라도 나면 우는 거 아니야?"
킥킥 웃은 휴고가 구령의 턱을 쥐자 뒤에서 순식간에 날아든 흑구의 손이 그의 두툼한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낸 흑구가 낮게 으르렁댔다.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큭…! 무슨 힘이…!"
꽈아악.
손목의 피부와 그 아래 근육이 짓눌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도 못 지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휴고의 모습에 우왕좌왕하던 남자들이 벌컥 열린 문에 시선을 빼앗겼다.
휴고의 지시로 지하 감옥에 다녀온 남자가 식은땀으로 푹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진짜야!"
"뭐? 으, 아악! 아프다고!"
"쇠창살이 휘어 있었다고! 녹은 것처럼!"
남자의 말에 코웃음 친 흑구가 쥐고 있던 휴고의 손목을 내던지듯 놔주었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휴고가 얼빠진 얼굴로 이방인들을 바라봤다.
"…그런."
"아직도 못 믿겠다면 이번엔 네 몸을 그렇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흐익."
손을 들어 흑구를 가볍게 말린 구령이 휴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너덜너덜해진 손목을 바라본 구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고. 걸레짝을 만들어 놨구나. 그래, 네 눈에 아직도 내가 도적으로 보이더냐?"
겁에 질린 휴고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내 도적으로 몰린 게 영 억울하다만 힘든 자들을 외면할 정도로 막돼먹은 치는 아니지."
"정말… 도적도 아니고 우리를 그냥 도와주는 거라고?"
"오냐. 너희가 약간의 정성을 보인다면 못 해 줄 것도 없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러잖아도 도적들한테 털려서 곳간이 비는데 사례라니.
그러나 눈앞에서 목격한 흑구의 힘을 보니 인간의 마음이란 게 또 갈대처럼 흔들렸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사례는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다.
"틀림없이 몰아내 준다고 약속한다면 사례도 넉넉히 하지."
휴고의 손을 잡고 일으킨 구령이 악당처럼 씩 웃었다.
"감히 이 마을 방향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구령은 알버트가 두 손으로 두드려 대던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덧 경계심을 푼 마을 사람들은 구령 몫의 맥주 한 잔을 내왔다.
거품 아래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술을 보고 구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생처음 보는 커다란 맥주잔이 신기해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를 보고 모두 재미있는 사람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으음. 독특한 맛이로다."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살짝 내 맛을 본 구령이 찌릿한 탄산에 몸서리쳤다.
"오! 형씨, 미식가로구만. 보리로 만든 맥주요."
"그렇군. 맛이 좋구나."
"그래? 나도 술은 안 마셔 봤는데."
자연스레 구령의 잔을 넘겨받으려던 흑구가 알버트의 손에 저지당했다.
"어린애는 술은 안 되지. 자, 포도 주스나 마시라고."
"이…! 필멸자가 감히 나를 능멸해!"
"어허. 흑구야, 앉거라. 넌 지금 누가 봐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다."
"젠장."
털썩 주저앉은 흑구가 커다란 잔에 가득 찬 포도 주스를 벌컥벌컥 넘겼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한 잔 더 달라 하니 사람들은 또 그걸 보고 왁자하게 웃었다.
마시다 보니 제법 맛있는 맥주를 어느덧 반이나 비운 구령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내내 뚱한 표정인 휴고가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도적단은 뭐 하는 놈들이지?"
"글쎄. 우리도 알면 이 고생은 안 하지.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나타나서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공격하는데 손 쓸 틈이 있나."
"원한 살 짓은 없었고?"
"우린 광부야. 평생 굴이나 파고 사는 놈들이 원한 살 만한 일을 했을 리 없지."
구령이 생각에 잠겨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도적단은 그가 살던 곳에서도 언제나 활개 치고 다니던 존재였다.
제 영역만 침범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지 않은 구령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여비를 벌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신중히 몰아내야 했다.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구령이 입가를 타고 흐르는 맥주를 손등으로 대충 훑어냈다.
"내 일단 그 광산을 좀 보고 싶은데."
* * *
"…어마어마한데?"
경이로움에 입을 떡 벌린 흑구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에 텅텅 울려 퍼졌다.
입구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갱을 따라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퀴퀴한 물비린내와 미미한 화약 냄새가 뒤섞여 묘하게 긴장됐다.
"여러 광물이 많이 나는 귀한 곳이지. 우리에게는 보물 창고나 다름없어.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렇게 세대를 거듭해 이 광산 덕분에 지금껏 먹고살 수 있었던 거야."
휴고가 너른 가슴을 자랑스럽게 활짝 폈다.
깨진 바위틈 사이로 어두컴컴한 동굴을 비추는 불빛을 받아 간간이 광물이 번뜩였다.
구령은 마치 이 광산이 제 것이라도 된 것처럼 헤벌쭉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이제 입가에 흐르려는 침을 서둘러 삼켜 내고는 본 적도 없는 도적 떼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내 그 경우 없는 도적놈들을 싹 잡아다 다신 얼씬도 못 하게 해 주마!"
"의욕이 아주 넘치시는군, 그래. 든든해."
휴고는 구령의 시꺼먼 속도 모르고 씩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놈들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들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쳐들어오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부지런하기도 하네."
"우리도 광산을 지키면 좋겠지만, 집을 비우면 가족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오히려 있으면 방해만 된다. 얌전히 문 걸어 잠그고 오붓하게 저녁이나 먹거라."
귀찮은 듯 도포를 펄럭이는 구령의 모습에 휴고가 입맛을 쩝 다셨다.
피곤한지 크게 하품한 흑구가 "왜 낮에 안 오고?" 묻자, 구령이 그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
"이 물정 모르는 놈아. 그놈들이 퍽이나 대낮에 와서 털어 가겠다."
머리를 붙잡고 씨근덕거리는 흑구의 뒤에서 휴고가 쓰게 웃었다.
"밤중에만 출몰하고 광물도 과감하게 몽땅 털어 가는 놈들이지. 싸움에도 능숙한 것 같은데 공격적이기까지 하니까 지켜야 하는 입장으로 손 쓸 도리가 없어."
"이래서 인간들이란."
휴고는 꼭 저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구는 흑구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가 뒷짐을 지고 동굴 이곳저곳을 살피는 구령의 모습에 투박한 손길로 뺨을 긁적였다.
"동방인을 본 적 없어서 수상한 녀석이라 생각했어. 당신한테는 미안하게 됐군."
"되었다. 뭐 수상한 놈 취급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번 일이 잘된다면 금이 대수야? 마을의 은인으로 모실게."
생계를 위협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때때로 생사보다 더.
휴고는 제 앞에서 묘한 의복을 걸치고 어슬렁거리는 구령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부디 도적단을 내쫓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먼저 돌아가겠다는 휴고를 손짓 한 번으로 배웅한 구령은 그가 멀리 떠나기까지 잠시 뜸을 들이고는 흑구를 끌고 광산 밖으로 향했다.
"흑구야. 네 힘으로 저 바위를 예까지 가져올 수 있겠느냐?"
광산의 입구를 능히 가리고도 남을 거대한 바위의 자태에도 흑구는 기죽는 법 없이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당연하지."
"그럼 됐다. 거기서 불이나 좀 비춰 보거라."
구령의 말에 아무 나뭇가지나 주워 라이트닝 마법을 걸자, 나뭇가지의 끝이 별이라도 달린 것처럼 노란 불을 환하게 밝혔다.
구령은 흑구가 밝힌 빛에 의존해 딱딱한 바닥에 주저앉아 품에서 꺼내 든 노란 부적을 여러 장 펼쳐 놓고 거침없이 도안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흑구는 붉은 경면 주사로 그려 나가는 부적의 기묘한 도안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뭐야?"
"부적이라는 거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 몰라도 사용자의 힘에 따라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도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녀석이지."
"이까짓 게 천재지변을 일으킨다고?"
흑구가 괜히 발끝으로 부적을 툭 건드리자 구령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왜? 못 믿겠느냐?"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구령의 눈치를 살피고 슬그머니 발을 뺀 흑구가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세 미소를 지운 구령이 부적 열댓 장을 일렬로 쭉 늘어놓고 양손을 펼쳐 두 눈을 꾹 감았다.
천재지변을 일으킬 정도의 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봉인부로 광산을 틀어막기엔 무리가 없을 정도의 힘은 있었다.
그의 쭉 뻗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온몸의 세포를 타고 손가락 마디, 손바닥 전체에 구령의 도력이 실렸다.
파직!
번쩍이는 빛에 흑구가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리다 해도 그는 그 이름도 두려운 블랙 드래곤의 후손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기운이 종이에 흡수되는 걸 흑구가 놓칠 리 없었다.
'무슨 힘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종류의 위험한 마법인 건 분명해. 도대체 이 동방인이라는 녀석들의 정체가 뭐지?'
그런 흑구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구령이 제힘이 제대로 실린 부적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 아직 실력 안 죽었군. 흑구야, 가서 바위 가져오너라."
"무슨 물 한 잔 떠오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어허. 이 또한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일."
"웃기고 있네. 금 아니었으면 우리가 여기 남기나 했겠어?"
"불경하도다. 쉿."
검지를 제 입술에 갖다 대는 구령의 모습에 흑구가 몸서리쳤다.
짐승보다 못한 놈.
나보다 못한 놈.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생각을 속으로 씹어 댄 흑구가 투덜대며 저 멀리 홀로 우뚝 서 있는 바위로 다가갔다.
흑구의 키를 곱절은 넘고 성인 열 명이 손을 잡고 둘러도 다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바위였다.
"퉤."
손에 침을 뱉은 흑구가 양손을 짝짝 맞부딪히고는 바위의 아래에 손을 쑥 밀어 넣자 으드득 바닥 갈리는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흐읍…! 끅…!"
드래곤의 몸뚱이로 하면 주둥이로도 굴렸을 바위인데 아무렴 인간의 육체로 들어 올리려니 제아무리 흑구여도 힘에 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흑구 잘한다! 이야, 그놈 힘도 좋다!"
저 멀리서 부채나 펄럭대고 있는 구령의 면상에 언젠가 주먹을 꽂아 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흑구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광산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드래곤의 몸으로 흘려 본 적 없는 땀이 비 오듯 쏟아져 금세 옷을 흠뻑 적셨다.
바위의 무게가 실린 걸음이 땅을 디딜 때마다 큰 소리를 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더라면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을 게 뻔했다.
쿠웅!
겨우 구령의 앞까지 다다른 흑구가 그의 앞에 바위를 내려놓고 곧장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세상에. 입에서 피 맛이 난다.
흑구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취급에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서 울었다가는 저 미친 사구령 놈에게 어떤 놀림을 당할지 모르니 흑구는 그저 입술을 비뚜름하게 꺾고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한마디의 치하도 없는 구령은 신이 나서 바위의 여기저기에 노란 부적을 벽지처럼 발라 댔다.
바위의 양면에 예닐곱 장씩 붙인 노란 부적의 도면이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다.
"이제 이걸로 도적놈들이 들어오면 광산을 막을 거다."
저 혼자만 뿌듯한 구령의 청천벽력 같은 음성에 흑구가 충혈된 눈을 부라렸다.
"누가?"
구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너지."
"야… 이…! 미친놈아!!"
쩌렁쩌렁 울리는 흑구의 고함에 구령이 귀를 막은 채 광산으로 줄행랑쳤다.
뒤에서 울려 퍼지는 절규에도 큭큭 웃어 댄 그가 문득 시야에 걸리는 광산 수레에 다가섰다.
여러 가지 광물이 난다는 게 허풍이 아니었는지 수레 한가득 제각각 독특한 광물이 구령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돌덩이처럼 보이는 광물을 이리저리 헤집어 살피던 그가 한 돌덩이를 잡아 들었다.
"이건…."
깨진 암석 속에서 홀로 노란 빛을 발하는 덩어리.
구령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웅황雄黃…!"
팔석八石 중 하나이자, 연단煉丹에 꼭 필요한 웅황…!
구령이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여의주가 아니어도 도력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방법이.
<11화>
팔석 八石 3
세상에는 도사가 힘을 얻는 데 필요한 여덟 개의 광물이 존재한다.
단사 丹砂, 웅황 雄黃, 자황 雌黃, 공청 空靑,
유황 硫黃, 운모 雲母, 융염 戎鹽, 초석 硝石.
이 여덟 개의 광물을 일컬어 흔히 팔석八石이라 하였다.
여덟 개의 광물은 각기 다른 힘을 가지고 있어 하나하나 정성껏 고아 내고 빻아 환단丸丹으로 빚어 먹으면 섭취자의 도력이 한 단계 더 상승하는 효과를 낸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중 단사를 아홉 번 고아 다른 일곱 개의 광물과 함께 빚어 구단九丹을 만들고 이를 여덟 신선이라 알려진 팔선八仙에게 인정받으면 경지에 이르는 도력을 지닌다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광물과 다름없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직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싸하게 느껴지는 기운은 틀림없었다.
구령은 웅황을 든 손이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걸 느꼈다.
애초에 그가 있던 곳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운 광물이었지만, 그걸 찾는다 하더라도 전설 속 여덟 신선을 봤다는 이가 없으니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구령은 이 팔석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도력이 돌아온다 해도 한 단계 더 성장할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웅황을 쥔 그의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흑구야. 마음 단단히 먹거라."
"응?"
"내 기필코 도적놈들을 쫓아내고 이 웅황을 가져가야겠으니."
"웅왕?"
땀에 전 흑구가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고개를 저은 구령이 혀를 끌끌 찼다.
"웅황이다, 이놈아. 금보다 귀한 웅황."
"그렇게 귀한 거 얻으려면 그냥 내가 본모습으로 변하는 게 낫지 않아? 한 번 소리만 질러 줘도 다 나가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다 광산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밖에서 처리하는 거지."
두 주먹을 불끈 쥔 흑구의 계획에 구령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서라. 마을 사람들한테 공포심만 심어 주는 격이다."
흑구의 투덜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수레를 마저 살피던 구령이 의외의 물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염석이로군."
수레 안에는 뜨겁게 달궈진 숯처럼 붉은 화염석이 많았다.
"흑구야. 이 돌에 잠재된 불의 기운이 좀 필요한데 네 힘 좀 빌리자."
"돌? 돌로 뭘 하려고?"
흑구가 영 미심쩍은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구령을 흘겼다.
구령이 대답 없이 손바닥을 펼쳐 입김을 후 불어 넣자 푸른 불꽃 덩어리가 일렁이더니 그의 손을 떠나 광산 이곳저곳을 해파리처럼 유영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불꽃 마법인가?"
"도깨비불이라는 것인데, 해를 끼치진 못해도 여러 개가 저렇게 어두운 광산을 돌아다니면 꽤 볼만할 게다."
흑구가 가까이 다가온 도깨비불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차가운 기운이 흑구의 손을 부드럽게 훑었다.
"으으. 기분이 이상해, 이거."
구령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턱 막았다.
"너…. 저걸 만졌느냐?"
"…아, 아니."
"거짓말하지 말고. 만진 게 확실해?"
재차 묻는 구령의 닦달에 흑구는 이제 울상이 됐다.
"왜애! 왜! 만졌다, 그래! 뭐! 왜!"
100살 먹은 용 놀려 먹는 재미에 푹 빠진 구령이 일부러 침울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불을 만지면 혼을 빼앗겨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고 말한다는 걸 내 깜빡했구나."
"…어?"
"안타깝게 되었구나. 이건 내 힘으로도 도리가 없다."
한숨을 푹 내쉬는 구령의 멱살을 잡은 흑구가 그의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댔다.
"이 미친놈이…! 제일 중요한 걸 까먹으면 어떡해? 이 빌어먹을 필멸자 놈을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따악!
흑구의 머리에 꿀밤이 날아들었다.
"아악!"
머리통을 붙잡고 주저앉은 흑구가 나약한 인간 육신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구령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로 흑구의 머리를 턱턱 거칠게 쓰다듬었다.
"농이다, 농."
그 한마디에 얼굴이 풀어지는 게 영락없는 똥개였다.
100년을 살아도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탓인지 흑구는 놀리는 맛이 좋았다.
"보기보다 겁이 많구나, 너."
"누가 겁을 먹었다고…!"
버럭 소리치려는 흑구의 머리통을 꽉 붙잡은 구령이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 그래서 날 아직도 빌어먹을 필멸자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겠다?"
"하하…. 아니, 그건…."
"형님으로 모시겠다던 주제에 말 놓은 것도 눈을 감아 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군."
팟!
지금이라도 말을 높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흑구가 재빨리 고개를 쳐들었다.
구령 역시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서서 광산 바깥을 향해 섰다.
"들었어?"
"그래. 확실히 적은 수는 아니로구나."
두두두두!
땅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들른다는 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구령에겐 오히려 고마운 상황이었다.
"흑구야. 화염석에 네 기운으로 불을 질러라."
"광산에? 미쳤어?"
"괜찮다. 화염석에 붙은 불은 도로 화염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불만 붙이고 넌 서둘러 나가서 문 닫을 준비나 하거라."
흑구는 가만히 듣자 하니 어쩐지 제 일이 가장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토를 달았다가는 심장을 빼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 같아 일단 입을 다물고 화염석에 불꽃 마법의 주문을 걸어 이 돌에서 저 돌로 불길이 옮겨붙을 수 있게 했다.
순식간에 붉은 불길에 휩싸인 구령을 흘끗 바라본 흑구가 광산의 입구로 내달렸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오냐. 내 신호나 기다리거라. 동이 트면 바위에서 멀리 떨어지고."
구령이 내민 손바닥에서 퐁퐁 솟아난 푸른 불꽃이 붉은 화염석의 불꽃과 뒤섞였다.
그 가운데서 검은 도포를 휘감고 서 있는 구령의 모습은 마치 지옥도의 수문장을 연상케 했다.
"자아. 오너라!"
* * *
두두두두!
광산으로 향하는 스무 마리가량의 말이 내는 발소리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말에 오른 남자들은 하나같이 두건으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몸만 보더라도 그들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일! 광산에 불이 보이는데?"
어두컴컴해야 할 광산에서 푸르고 붉은 불빛이 일렁였다.
무리의 선두를 달리고 있던 대장 가일 옆으로 망원경을 쥔 남자가 잽싸게 붙어 상황을 전달했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는 가일이 코웃음 쳤다.
"오늘은 도망가지 않았나 보지?"
"그래 봤자 다 털릴 게 뻔한데 말이야."
"발악하는군! 하!"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긴 울음을 내뱉은 말이 속도를 높였다.
더스트 루트에 매몰되어 있는 수많은 광물은 그들에게 있어 좋은 먹잇감이었다.
수도는 물론 다른 마을들과도 단절되어 있어 구조 요청이 쉽지 않았고 광물을 가공해 다른 나라로 팔아넘긴다면 증거조차 남지 않았다.
더스트 루트의 질 좋은 광물은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이곳은 아무 때나 드나들며 털어 가도 좋은 보물 창고 같은 곳이었다.
광산 근처에 말을 묶어 놓고 시원하게 볼일까지 본 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광산에 들어섰다.
이미 사구령의 손바닥 안인 줄도 모르고.
"아까부터 무슨 불이 이렇게 밝아? 마을 놈들은 안 보이는데."
멀찍이서 일렁거리는 불을 바라보던 가일이 주변을 꼼꼼히 살폈지만,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일!"
"왜 그래?"
"수레가 텅 비었는데?"
"뭐…!"
서둘러 동료들을 밀치고 수레를 살핀 가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기저기 널린 수레가 온통 비어 있었다.
"이 새끼들이…. 함정인가?"
으드득.
이를 간 가일이 수레를 쾅 내리치자 바로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때였다.
쉭!
"저기…. 가일?"
날아든 도깨비불이 가일의 등 뒤에서 푸른 불을 밝혔다.
쉭!
"가, 가일…."
"젠장! 생각 중이잖아! 닥쳐 봐!"
쉭!
"가일! 피해!"
남자의 외침에 깜짝 놀란 가일이 황급히 몸을 옆으로 던졌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레 위로 엎어진 가일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저게 대체 뭐야…?"
가일은 제 눈앞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도는 세 개의 도깨비불을 보고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도깨비불을 잘 모르는 그들의 눈에는 그저 푸른 파이어 볼이 달려든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마법이야."
"평범한 파이어 볼이 아닌 건가?"
"이게 파이어 볼이라고? 파이어 볼이 이렇게 떠다닐 수가 있어?"
"젠장. 이놈들 용병이라도 고용한 거 아냐?"
용병 이야기에 무리가 크게 술렁였다.
"그러고 보니 동방국 놈들이 기묘한 힘을 쓴다던데."
"그놈들이 용병으로 활동한다는 건 들어 본 적 없어."
그들은 특유의 호전적인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손에 든 각자의 무기를 꽉 그러쥐었다.
침을 퉤 뱉은 가일이 도깨비불이 돌아가는 방향을 지그시 노려봤다.
"가서 죽여 놓자고."
그때, 도깨비불을 불러들인 구령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도포 자락을 탈탈 털어 주름을 펴고 있었다.
가일을 필두로 광산 깊숙한 곳으로 걷는 남자들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구령이 엄지와 검지를 입에 물었다.
휘익─!
광산에 울려 퍼지는 휘파람 소리에 깜짝 놀란 도적단이 퇴로를 쳐다봤지만, 이미 쿠구구궁 굉음을 내며 닫히는 출입구로 달려 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자식들이…!"
영락없이 더스트 루트의 함정에 빠진 가일은 퇴로가 막혔으니 이제 그저 전진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안은 채 점점 불빛이 밝아 오는 광산 깊은 곳까지 걸어간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몸이 돌처럼 굳고 말았다.
타오르는 붉은 화염석과 푸른 도깨비불 사이로 한 사람의 걸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새까만 옷을 걸친 구령은 눈앞에서 잔뜩 굳어 있는 남자들을 살피며 빙긋 웃어 보였다.
"남의 재물을 탐하는 자가 그대들인가?"
선두에 선 가일이 범상치 않은 용병의 등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넌 누구냐?"
그는 목소리를 떨지 않은 자신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구령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는구나."
구령이 한 발자국 내딛자 화염석 하나가 불꽃을 빨아들여 촛불처럼 훅 꺼졌다.
한 발자국에 또 하나의 빛이 사라졌다.
구령이 그들 앞에 섰을 때는 붉은 화염석은 모두 빛을 잃었고 희미한 푸른 불꽃만이 구령의 주위를 맴돌며 그의 얼굴에 어른어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 너희 같은 자를 잘 알지. 염치도 없고 포악한 짐승 같은 자들 말이야."
구령이 손을 뻗자 그의 어깨와 팔을 타고 도깨비불이 가일의 코앞에서 푸른 불꽃을 일렁였다.
가일은 존재하지도 않는 뜨거움을 느끼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 이거 치워!"
"섭섭한 소리. 내 동방국에서 미친놈으로 이름 제법 날린 도사인데 오늘 너희를 잡아 죽이면 금은보화를 준다더구나."
"뭐, 뭐?"
"하하! 놀랄 일인가? 너희의 손에 묻힌 피는 생각도 않고 말이야."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달리 구령의 눈길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가일이 버럭 소리쳤다.
"우리도 땅을 빼앗겼어!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땅을 빼앗겨?"
"그래! 우리가 땅을 빼앗길 때 다른 나라 녀석들은 그저 손 놓고 보고만 있었지. 그런 우리가 좀 나눠 갖고 살자는 게 뭐가 나빠! 애초에 이놈들이 도와주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우격다짐에 구령이 이마를 짚었다.
"미치겠군. 말도 통해야 대화를 나누는 거지, 원. 얌전히 있거라! 불 흔들리지 않느냐?"
구령의 고함에 도깨비불이 훅 늘어나 남자들을 에워쌌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불꽃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이들이 "이, 이게 도대체 뭐야?" 하고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미지未知만큼 두려운 건 없다.
무엇이든 안다면 대처할 수 있겠지만, 알 수 없는 힘 앞에서는 제아무리 대단한 이라 해도 조심스러웠다.
구령은 그 심연의 두려움을 건드렸다.
두려워하고 긴장으로 얼어붙어 올바른 판단을 할 기회조차 앗아 갔다.
"저 불에 안 닿게 해!"
가일의 외침에 남자들이 몸을 주춤주춤 뒤로 물러 한 덩어리로 뭉쳤다.
"오냐. 닿지 않게 조심하거라. 손끝이라도 스쳤다가는 너희의 영혼을 끄집어내 도륙하고 지옥 불에 내던져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될 테니."
"뭐…?"
도깨비불은 도력을 그리 많이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술법이었다.
위력은 전혀 없지만, 무지한 이들에게는 겁을 주기 딱 좋았기에 구령이 입꼬리를 씩 당겨 웃었다.
짜악!
구령이 손을 마주치고 양옆으로 쫙 벌리자 수십 개의 도깨비불이 퐁퐁퐁퐁 솟아나 허공을 유영했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도깨비불을 향해 구령이 손짓하자 일렁이는 불꽃이 한데 뒤엉켜 거대한 불꽃 괴물의 형상으로 변했다.
"자. 사냥 시간이다."
광산 밖까지 울려 퍼지는 도적단의 비명에 드러누워 쉬고 있던 흑구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가 이내 도로 누워 늘어지게 하품했다.
<12화>
팔석 八石 4
"겁먹지 마! 덤벼!"
"흐랴앗!!"
달려드는 도적의 검을 쥐고 있던 부채로 맞서 슥 흘려보낸 구령이 손날로 그의 목을 후려쳤다.
"커억!"
힘을 증폭시켜 준다는 치우의 염주를 쓸 것도 없었다.
자고로 강한 도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 법.
300년간 약로선인의 밑에서 수없이 체력을 단련해 온 구령이 한낱 인간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이 자식이!"
"열들 내지 마시게. 밤은 긴데 즐겨야지."
씩 웃은 구령이 도포를 벗어 던지고 자세를 잡았다.
꽉 쥐는 주먹에 팔뚝을 타고 산맥 같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가끔 도사가 잔재주만 부린다고 하는 놈들이 있어 내 주먹맛도 좀 보여 주련다."
"웃기지 마! 이야아!!"
카가각!
땅을 긁으며 쳐올리는 검이 묵직했다.
땅을 짚고 반 바퀴 돌아 아슬아슬하게 날을 피한 구령이 그대로 땅을 짚어 남자의 가슴에 발길질을 날렸다.
퍽!
정확하게 흉통을 맞은 남자가 컥컥 숨을 토해 내며 두 걸음 물러섰다.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구령이 손을 까딱 흔들자 약이 바짝 오른 남자들이 떼거리로 덤벼들었다.
"이 새끼가 사람을 우습게 알고…!"
"사람도 사람 나름인 법."
섬뜩하게 눈동자를 빛낸 구령이 부적 여러 장을 촤르륵 꺼내 들었다.
훅 숨을 불어넣자 화염에 휩싸이는 노란 종이에 남자들이 주춤주춤 걸음을 물렀다.
"저, 저게 뭐야?"
"또 이상한 수를 쓰려고 하는군."
"이상한 수라. 내 아끼는 부적을 그리 말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침울하게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 구령이 고개를 팍 들어 올렸다.
"…! 다들 피해!"
가일의 외침에도 구령이 히죽 웃으며 "한발 늦었다!" 하고 외쳤다.
활활 타오르는 부적을 남자들에게 날리자 마치 자석이라도 붙는 것처럼 그들의 몸에 척척 붙었다.
"으, 아악! 떼 줘! 뜨거워! 뜨겁다고!!"
"크으윽…! 속이 타는 것 같아…!"
불은 어디에도 옮겨붙지 않고 부적에서만 타고 있는데, 남자들은 마치 제 몸이 타는 것처럼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건 네놈들의 혼을 갉아먹는 쥐의 이름으로 쓴 부적이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남의 재산을 탐하는 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물건이지."
손을 탁탁 턴 구령이 벗어 둔 도포를 펄럭여 몸에 걸쳤다.
"뭐, 너무 무서워 말거라. 도둑질하려는 마음만 갉아먹고 나면 통증도 멎을 게다."
눈치를 채고 홀로 벽으로 붙어 화를 면한 가일이 분한 마음에 이를 빠드득 갈았다.
"너… 이 새끼!!"
도적단은 그간 더스트 루트의 광물을 훔쳐다 팔아 제법 배를 불린 참이었다.
좋은 돈줄을 이대로 놓칠 수 없던 가일이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훔친 광물을 팔아다 장만한 값비싼 무기였다.
"죽여 버리겠어! 으아아!!"
가일이 육중한 몸으로 악을 쓰며 구령에게 달려들었다.
후웅.
날아드는 검에 허리를 뒤로 젖힌 구령이 "어이쿠." 하고는 뒤로 타닥 물러섰다.
얼핏 보기에도 무게가 나가는 검에 힘을 실어 휘두르니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게 뻔했다.
타앗─
몸을 뒤로 돌려 한 손으로 땅을 짚은 구령이 가일에게서 가뿐하게 멀어졌다.
가일이 씨근덕거릴 때마다 커다란 몸집이 흉포하게 부풀었다.
잠시 뺨을 긁적이던 구령이 손에 잡히는 화염석 하나를 들어 올렸다.
"거 승산 없는 싸움을 즐기는 자였군, 그래."
"개소리하지 마!"
"쯧쯧…. 그 덩치에 휘두르는 데에만 한세월 걸리는 검을 사면 어쩌나."
화염석을 꽉 쥔 구령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휘두르다 틈이 생기지."
씩 웃은 구령이 다시 한번 덤벼드는 가일을 향해 화염석을 던졌다.
어찌나 빠른지 쐐액 날아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뻐억!!
가일의 관자놀이에 명중한 화염석이 바닥에 툭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한순간에 적막이 내려앉은 동굴에서 가일이 휘청거리더니 곧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끄윽…. 윽…."
여전히 부적의 화염과 함께 몸부림치는 제 부하들 옆에 쓰러진 가일을 바라보던 구령이 뺨을 긁적였다.
"…너무 세게 던졌나?"
그나마 부적의 화염이 가장 덜한 남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그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가슴에 붙은 부적은 떼어 내려고 해도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떨어지지 않으니 어디 강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허억, 헉…."
설마 더스트 루트에서 이런 용병을 구했을 줄이야…!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려던 남자가 동굴의 입구에 겨우 도달했다.
육중한 바위에 가로막힌 바닥을 벅벅 파던 그가 문득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빛에 입을 헤 벌렸다.
어딘가에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분명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곧 절망의 그림자에 뒤덮였다.
바위 가득 제 몸에 붙은 것과 똑같은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희고 푸른 빛을 뿜고 있었다. 결계 부적에 가로막힌 앞길에 남자가 절규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구령의 악랄한 웃음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 퍼졌다.
* * *
흑구는 구령의 일이 모두 끝나기를 기다리며 커다란 고목 아래서 잠을 청한 참이었다.
드래곤의 몸일 때는 몰랐는데, 인간의 몸으로 노숙하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축축한 아침 이슬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밤 동안 굳은 몸을 달랬다.
아직 잠잠한 광산을 한 번 살핀 그는 멀리서 터오는 붉은 아침 해에 구령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묶여 있는 말들을 풀어 주고 저 역시 멀리 수레 뒤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구령이 붙여 둔 봉인부에 아침 해의 빛이 닿자 붉은 도안이 부글부글 끓었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살피던 흑구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귀를 틀어막았다.
'터진다…!'
콰아앙!!
흑구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광산을 막고 있던 바위가 가루처럼 부서졌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혼비백산한 도적들이 넋이 나간 채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을 잡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흑구는 광산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구령을 발견하고는 놈들을 포기한 채 구령에게 달려갔다.
"이봐! 다 끝난 거야?"
뿌연 먼지를 손부채로 날린 구령이 쉽게 답하지 못하고 연신 쿨럭쿨럭 기침을 토했다.
"크흠! 오냐. 다 끝났다."
"후우."
이번엔 올바른 판단을 했으니 얻어맞을 일은 없겠다 생각한 흑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놈들, 아주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더구나. 네가 그 꼴을 봤어야 하는데."
"아까 달려가는 거 보니까 알겠더라."
"음. 다시는 이 마을에 얼씬거리지 않겠다고 내 단단히 약조 받아 두었다."
"말들도 다 놀라서 도망갔어. 온 길을 걸어가려면 꽤 힘들겠지."
"허. 네가 했느냐? 기특한지고."
"뭘 이 정도로."
칭찬에 우쭐해진 흑구가 싫지 않은지 입술을 삐죽였다.
구령이 흑구에게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걷는 사이 저 멀리 더스트 루트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흑구가 바위를 들고 옮길 때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라 여긴 마을 사람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 이방인들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구령 님! 흑구 님!"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알버트가 커다란 덩치로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겼다.
"무사하셨네요!"
"당연하지."
"놈들에게 다시는 이 마을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아 내었다. 심려 말거라."
흑구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던 알버트는 물론, 마을 사람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놈들이…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어?"
인파를 헤치고 구령의 앞에 다가온 휴고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의 뒤로 이제 막 옹알이를 하기 시작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휴고의 아내는 그의 거친 인상과 달리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넓은 천 밴드로 고정한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치였다.
구령은 세 가족을 흘끗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 털었다.
"아주 울며불며 한 번만 봐 달라더군. 다시는 이곳 사람들을 못살게 굴지 않겠다고 말이야."
"아…! 세상에."
휴고가 경탄했다.
그의 아내가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끼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 모두 제각기 환호하며 마을의 안녕을 자축했다.
"아부! 부브."
구령이 휴고의 아내에게 안긴 아기에게 손가락을 내밀자 아기는 침이 가득 찬 입으로 뭐라 옹알거리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구령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더스트 루트의 사람들은 은인을 이리 세워 둘 수 없다며 흑구와 구령의 등을 떠밀며 촌장의 집으로 가자 성화였다.
"촌장? 촌장도 있었어?"
흑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자 휴고가 뺨을 긁적였다.
"내가 촌장이야."
"휴고… 자네가?"
"그 못 믿겠다는 얼굴은 뭐야?"
구령의 미심쩍은 눈길에 휴고가 버럭 화내자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흑구는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인간 마을의 이야기를 곰곰이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보통 촌장이라 하면 늙은 필멸자를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더스트 루트는 광부의 마을이야. 노인이 없지는 않지만, 위험한 일이 많다 보니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우리 마을의 규칙이거든. 그리고 촌장은 반드시 현역 광부가 맡게 되어 있어."
"호오. 네놈이 감투를 쓰고 있었구나."
구령은 그제야 사례 운운하던 휴고의 자신감을 이해했다.
휴고 부부 내외의 초대를 받아 방문한 휴고의 집은 마을 중앙에 있었는데 감투를 쓴 것치고 그리 넓거나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마을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한 명의 주민일 뿐이지 권력을 부릴 생각은 없다는 휴고의 말에 구령이 기특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스트 루트의 집들은 모두 돌을 깎아 만든 구조였는데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분 좋은 서늘함이 발목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 울퉁불퉁한 벽면에는 움푹하게 파서 만든 선반이 있었다.
그의 아내 취향인지 선반마다 더스트 루트에서는 보기 드문 향기로운 꽃들이 화병에 그득하게 꽂혀 있었다. 꽃이 자랄 만한 환경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오는 길에 꽃은 못 봤는데. 여기까지 상인이 오나?"
구령이 물기를 머금은 꽃잎을 어루만지며 묻자, 휴고의 험상궂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휴고를 대신해 그의 아내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꽃이 시들기 시작하면 남편이 바위산 아래로 내려가 꽃을 한 아름 꺾어다 주거든요. 후후. 귀여운 사람이에요."
"크흠! 뭘 또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흑구가 히죽 웃으며 작게 휘파람을 불자 휴고가 크게 헛기침했다.
구령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갸륵한지고."
"됐거든!"
"부끄러워하기는."
큭큭 웃은 구령이 그리 넓지 않은 집을 둘러봤다.
돌을 깎아 만든 집은 차갑고 적막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선반에 가득한 화병을 제외하더라도 제법 아늑한 분위기였다.
두툼하게 짜인 카펫과 방과 방을 잇는 공간에는 색색의 커튼이 달려 있었다.
자연석을 길게 깎은 테이블이 무엇보다 멋있었는데, 휴고는 기꺼이 흑구와 구령에게 난로가 가까운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 줬다.
"다시 한번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인사하지."
목을 가다듬은 휴고가 양 무릎에 손을 척 올리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마가 테이블에 닿기 직전에야 멈춘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단전에 힘을 주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 왔다.
"우리 마을을 도와주어 정말 고맙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구령은 문득 그들이 제게 토로하던 억울함이 떠올랐다.
"한데, 놈들이 땅을 빼앗겼다고 하던데 그건 뭔 소리냐?"
"아아."
휴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녀석들은 검은 언덕에서 내려온 알렌시아인이야."
<13화>
팔석 八石 5
"검은 언덕?"
구령이 고개를 갸우뚱 모로 꺾자, 휴고는 제 설명이 부족하다 느꼈는지 여섯 개의 조약돌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육각형으로 배치했다.
"넌 동방인이니 잘 모를 수 있지. 자세히 설명할게. 이곳은 총 여섯 개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어. 시계 방향으로 하일란, 미드플랫, 실버스노우, 모트왈, 헤븐리 피스, 엘렌우드. 가운데에는 영원의 호수를 놓고 중립 지역으로 지정해 누구도 오갈 수 없게 해 놨지."
텅 빈 가운데 공간을 툭툭 손가락으로 두드린 휴고의 설명에도 구령은 미동이 없었다.
휴고가 늘어놓은 조약돌의 형태를 유심히 지켜보는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렇다 보니 이 여섯 개의 국가를 이동하려면 육로나 바깥을 통한 바닷길로 배를 타고 이동하는 수밖에 없지. 바닷길을 타고 가면 하일란과 엘렌우드 사이에 검은 언덕이 있어. 검은 언덕은 척박한 땅이라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지?"
"뭐, 그런 땅이 있었던 것 같기도."
먼 옛날의 기억을 되짚는 흑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던 검은 언덕에 얼마 전부터 흉흉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 온갖 마물이 그 지역으로 향한다고 말이야."
"마물?"
되묻는 구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휴고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토해 냈다.
"젠장! 알렌시아인이 땅을 빼앗긴 건 안타깝지만, 검은 언덕은 모트왈에서 도울 수 없어! 적어도 주변의 하일란이나 엘렌우드에 화풀이를 해야지."
"도울 수 없다? 다른 이유가 있나 보군."
"…큰 전쟁을 겪고 각 국가 간 관계가 많이 틀어졌어. 제아무리 검은 언덕에서 지원 요청을 하더라도 양옆의 하일란이나 엘렌우드를 지나기엔 부담스러운 거야."
휴고는 땅을 빼앗기고 일상을 잃은 그들을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투박한 손이 연신 마른 얼굴을 쓸었다.
"알렌시아인은 그 이후로 유목 생활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약탈해 살고 있어. 우리도 그중 하나였던 거지. …이 먼 땅까지 내려왔으니 분명 그 녀석들에게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겠지."
"저들만이 아니로구나. 인간사가 이리 복잡하다, 흑구야."
헛헛하게 웃는 구령의 자조에 흑구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그는 이 필멸자들이 짧은 생을 살면서 행하는 모든 발버둥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렌시아인에겐 미안하지만, 우리도 우리의 터전을 지켜야지."
"미안할 게 뭐 있느냐? 가장 큰 본능인 생존을 위협받으면 누군들 칼을 들고 일어서는 것뿐이다. 놈들도 너희도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게지."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문 구령이 씁쓸한 입안을 연초로 헹궈 냈다.
휴고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두꺼운 손으로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자, 자. 이런 얘기는 이제 됐고! 사례에 대해 얘기해 보자고. 은인에겐 얼마든지 내줄 수 있지."
휴고의 말에 흑구가 눈을 빛내며 구령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구령, 광산 하나 달라고 해."
"저 꼬맹이 입 좀 다물라고 해 줄래?"
"쯧. 감히 필멸자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휴고와 흑구가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구령은 품을 뒤져 광물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수레에서 찾은 웅황은 흑구에게도 익숙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금은 당연히 줄 거라 생각하고. 내 금 외에 이 두 개의 광물을 더 받아 가련다."
구령이 꺼낸 광물 두 개를 찬찬히 살핀 휴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털었다.
"웅황이랑 단사잖아. 죄다 독성 광물이로구만. 정말 이거면 돼?"
"그래. 많이 들고 옮길 수 없으니 주먹만 한 놈으로 하나씩만 주면 된다."
"어렵지야 않은데…."
소소한 사례에 오히려 미안해진 휴고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휴고의 반응에 흑구가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금! 금을 많이 줘."
"아까부터 어린 게 엄청 밝히네. 다 들고 갈 수나 있고?"
휴고가 어이없어 헛헛한 웃음을 터뜨리자 눈이 맛이 간 흑구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다른 짐을 다 버리면 돼!"
"이 녀석 제정신이 아니로구만."
흥분한 흑구의 머리에 딱밤을 내리꽂은 구령이 "금은 두 덩이면 충분하다." 하고 일렀다.
마치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망연자실한 흑구가 차가운 돌 테이블 위에 풀썩 엎어졌다.
"내가 여길 뭐 하러 따라와서는…! 금도 안 주고, 일만 시키고…! 사구령, 너도 금이 좋다더니!"
이제 옷자락을 쥐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한 흑구의 모습에도 구령은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구령에게 중요한 건 금 따위가 아니었다.
그에겐 금보다도 귀한 웅황과 단사가 있었다.
"가공해서 줄까?"
"얼마나 걸리지?"
"금방 하지. 언제 출발할 건데?"
"한숨 자고 바로 출발하고 싶다만."
한창 손님들 대접할 준비에 여념 없던 휴고의 아내가 깜짝 놀라 커튼을 젖히고 얼굴을 쏙 뺐다.
"그렇게 빨리 가시나요? 하루만 쉬고 가시면 좋을 텐데."
"갈 길이 멀어 어쩔 수 없구나. 뭐, 노숙이야 익숙하니 못 할 것도 없지."
입맛을 쩝 다신 구령이 벌써부터 뻐근한 것 같은 등을 한 번 쭉 폈다.
"가공은 얼마 안 걸려. 여기서 밥이나 먹고 한숨 푹 자고 있으라고. 금방 도와줄 테니까."
"오냐. 그 덕분에 살았구나. 내 그 돌이 무척 중하니 흠집 나지 않게 잘 부탁하마."
"하하! 은인 부탁인데 어련하겠어?"
그렇게 말한 휴고가 두 개의 광물을 챙겨 집을 비운 사이, 구령과 흑구는 그의 아내가 차려 준 푸짐한 한 상을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먹을 게 귀한 동네에서 이토록 넉넉한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스트 루트의 주민들이 이들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이런 음식은 남기는 것이야말로 실례라지만, 정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굶고 있던 구령과 흑구는 꼭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눈앞의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참으로 맛이 좋구나."
"필멸자 놈들이 제법이야."
음식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자 휴고의 아내가 수줍게 웃으며 바지런히 차를 내어 왔다.
순식간에 초토화된 식탁에서 그대로 엎어진 둘은 꼴딱 밤을 지새운 후유증으로 금세 곯아떨어졌다.
아마 휴고가 돌아와 깨우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한밤중에나 눈을 뜰 뻔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 그대로 휴고는 금세 돌아왔다.
그는 부드러운 융 주머니에 담아 온 붉은 단사와 노랗고 붉은 웅황을 구령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틀림없군. 좋아. 고맙구나."
"다룰 땐 특히 조심하라고. 뭐, 알아서 잘할 것 같지만, 상당히 위험한 광물들이니까 말이야."
"오냐."
씩 웃는 휴고의 뒤에서 알버트가 번쩍번쩍 빛나는 금덩이 두 개를 들고 쭈뼛쭈뼛 앞으로 나섰다.
"고맙습니다. 두 분 모두."
쑥스러운 듯 웃는 알버트를 한 번 꽉 끌어안은 구령이 어깨 펴라며 그의 등을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 차가운 호수 바닥일지도 모르지. 그때 쇠창살을 휜 건 미안하게 되었다."
"하하. 아뇨.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믿는 건 너의 자유였지. 누군가를 믿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게 두려움에 따른 것이었든 아니든, 네 마음씨가 이 마을을 구한 거나 다름없다."
매번 더스트 루트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라고 손가락질받던 알버트였다.
노력으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더스트 루트의 광부들처럼 터프한 건 알버트가 노력으로도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마을에서 겉도는 저 자신이 싫었다.
그런 저를 인정해 주고 마을의 영웅으로 추대해 주는 구령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알버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네 덩치가 아깝구나. 어깨 활짝 펴고 살아라."
"읏…. 네!"
알버트가 안경을 들추고 눈물을 슥슥 훔쳤다.
제 등을 따뜻하게 감싸는 휴고의 두툼한 손에 그간의 설움이 모두 녹아내리는 듯했다.
"고맙구나, 알버트야."
씩 웃는 구령의 얼굴에 알버트가 그의 손을 덥석 쥐고 연신 허리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더스트 루트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뜻밖의 이득을 취한 광산 마을을 떠나는 구령의 걸음이 이전보다 가벼웠다.
융 주머니를 두툼하게 채운 두 개의 광물을 만족스레 살핀 구령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여섯 개 남았군.'
* * *
"지름길은 개뿔."
작게 속삭이는 구령의 목소리에 앞서 걷던 흑구가 우뚝 멈췄다.
이제 막 민둥민둥한 마지막 바위 언덕을 내려서던 구령이 흑구와 부딪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이놈, 왜 멈춰 서고 그러느냐? 넘어져서 머리라도 깨지면 책임질 테냐?"
"지름길을 지름길이라고 알려 줬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넌 보름이나 걸리는 길을 지름길이라 하던? 바위산만 타고 넘어오느라 아주 발바닥 가죽이 다 벗겨질 지경이다, 이놈아."
"돌아가는 건 더 오래 걸렸어, 멍청아!"
"뭐, 뭐…? 멍청이?"
300년 넘도록 처음 듣는 모욕에 구령이 뻐근한 뒷목을 잡았다.
흑구도 숙이고 들어갈 마음은 없는지 그런 구령을 눈앞에 두고도 씨근덕거리며 휙 뒤돌아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이토록 싸울 일인가 싶지만, 피로가 극에 달한 두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보법으로 편리하게 여행 다니던 구령과 산세 좋은 곳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던 블랙 드래곤에게 이런 고된 여행은 낯설고 어려웠다.
서로 배려하는 법도 모르는 둘이 만나 함께 다니니 지금껏 참은 게 용한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갈라서자, 갈라서! 길라잡이 노릇이나 똑바로 하고 성낼 것이지. 이래서 어린애 데리고는 영 못 다니겠다. 어째 백 년밖에 못 산 것들은 저리 건방진지, 원. 진휘 도사 그놈과 다를 게 없구나."
올챙이 적 생각 못 한 개구리 사구령의 으름장에 흑구가 저 멀리서 "그러든가!" 하고 빽 소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 심장이라도 꺼내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할 것을.
구령이 한숨을 푹 쉬면서 점처럼 멀어져 가는 흑구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봤다.
애초에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한 그였다.
30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그의 인생 아주 찰나에 스승 약로선인만이 곁에 잠시 머물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날 찾고 계실지도 모르겠군.'
걱정 많은 스승의 모습을 떠올린 구령이 자조했다.
'그나저나… 여섯 개의 나라가 붙어 있다라.'
휴고가 들려준 이 땅의 이야기는 내내 구령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구령이 살던 곳 역시 하나의 호수를 감싸고 여섯 개의 거대한 산이 우뚝 솟은 모양이라면, 이건 과연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구령은 문득 스승이 제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구령아. 이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단다. 모든 것은 필연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운명이 되는 거란다.」
나긋나긋하던 제 스승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귓가에 들릴 것처럼 선명했다.
모든 것은 원시천존의 천명에 따른 필연이라는 그 말을, 당시엔 코웃음 쳤던 구령이었다.
제 거지 같은 운명이 필연이라면, 구령은 원시천존을 원망해야 마땅했다.
<14화>
그레이엄 기사단
"야."
사념에 사로잡힌 구령은 제가 흑구를 지나친 줄도 몰랐다.
"야! 사구령!"
"음?"
저를 불러 세우는 소리에 그제야 걸음을 멈춘 구령이 좌우를 살피다가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분명 저보다 앞서가던 흑구가 우두커니 서서 제게 손짓하고 있었다.
"뭐야? 갈라서는 게 아니었느냐?"
히죽히죽 웃는 구령의 놀림에 흑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농담 따먹기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너 잠깐 이리 와 봐."
흑구는 긴히 할 말이 있는지 구령의 손목을 끌고 숲의 나무 사이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헤쳐 걸었다.
아까부터 킁킁거리며 길을 찾던 흑구가 문득 걸음을 멈춰 저희의 오른쪽에 자란 커다란 나무 뒤로 향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던 구령은 나무 뒤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뺨을 긁적였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을 두른 이의 얼굴이 허옇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죽은 게냐?"
"죽진 않은 것 같은데. 아까부터 피 냄새가 어지간히 나야 말이지."
코를 지독하게 찌르던 피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낸 흑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을 돕고 살겠다는 대단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남을 돕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성격도 아닌 구령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이를 지나치기에도 찝찝한 마음이 드는 건 그가 아직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하아…. 어째 이곳에 오고부터 남을 돕기만 하는 것 같구나."
"도와줄 거야?"
흑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 말에 구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라고 보여 준 것 아니었느냐?"
"돈이 될 만한 게 있으면 가져가는 거 아니었어?"
끔벅끔벅.
흑구와 눈빛을 주고받던 구령이 이마를 턱 짚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녀석이 말 그대로 인면수심이었지, 참.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인면수심? 그게 무슨 뜻인데?"
"사람 얼굴에 짐승의 마음이 깃든 걸 뜻하지."
"난 또 뭐라고. 욕하는 건 줄 알았네."
어차피 틀린 말이 아니기에 기분 나쁠 것도 없는 흑구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 털었다.
구령이 그런 흑구의 모습에 한심스러운 듯 혀를 끌끌 찼다.
"뭐, 죽지 않았으면 누군가 발견하겠지.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을 도울 이유는 없다. 가자."
"그래? 어지간히 다친 것 같은데."
흑구의 말에 끙 앓는 소리를 낸 구령이 우뚝 멈춰 섰다.
힘 있는 자일수록 약자를 외면해선 안 된다던 스승의 호통이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짧은 고민 끝에 콧김을 흥 뿜은 구령이 쓰러진 사람의 갑옷을 절걱절걱 풀어 냈다.
그는 곧 제 코를 찌르는 역한 피 냄새에 도포 자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지독하군."
갑옷 속에 드러난 것은 여자의 몸이었다.
갑옷을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무기가 옆구리를 깊게 스친 듯했다.
이미 곪아 터진 상처에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악취가 풍겼다.
쯧 혀를 찬 구령의 옆에 쪼그려 앉은 흑구가 벗겨 낸 갑옷을 이리저리 살폈다.
"가문의 문장이 있어."
갑옷 견장에 새겨진 문장은 곧 신분과 소속을 증명했다.
검은 바탕에 다리가 세 개 달린 금색의 새가 포효하고 있는 문장으로 가문의 정보까진 읽을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용병이 아닌 한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임을 뜻했다.
구령이 흑구의 손에서 견장을 빼앗아 무서운 눈매로 이리저리 살폈다.
"뭐야? 왜 그래?"
흑구가 문장을 빤히 들여다보는 구령이 의아해 이유를 묻자, 그는 곧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툭 던진 견장의 무게에 뽀얀 흙먼지가 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한 가문의 기사가 이렇게 홀로 쓰러져 있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서방국이든 동방국이든 이름난 가문은 으레 사병단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들이 제각기 공격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문 탓이었다.
구령이 팔짱을 낀 채 쓰러져 있는 기사의 모습을 살폈다.
"가문끼리 싸움이라도 붙은 건가."
"그랬겠지. 곧 죽을 것 같은데 죽고 나면 물건이나 챙길까? 갑옷은 꽤 값이 나가 보이는데."
한없이 가벼운 흑구의 목소리에 구령이 "이놈이!" 하고 호통치며 딱밤을 먹였다.
"악!"
"아주 도적질을 하겠다고 써 붙이고 다니지 그러냐?"
"네게 여비만 충분했어도 내가 이렇게 돈에 집착했겠어?"
"이제 금도 받았는데 부족할 건 또 뭐란 말이냐?"
"그깟 금 두 덩이를 어디에 쓰겠다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쓰러져 있던 사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으윽…."
고통에 찬 신음에 구령과 흑구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기사에게로 향했다.
"쉽게 죽을 운명은 아닌 모양이다. 가서 약초라도 좀 뜯어 오거라."
흑구가 약초를 찾기 위해 달려간 사이, 구령은 제 손바닥 가득 기氣를 실어 그녀의 찢어진 옆구리에 가까이 붙였다.
푸른 기운이 일렁이면서 그녀의 환부를 감쌌다.
잠시 부상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이미 피를 너무도 많이 흘린 탓에 서둘러 의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면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령! 근처에는 약초로 쓸 만한 풀이 없어."
"쯧. 순 잡초뿐이더니."
흑구는 제가 발견한 사람이긴 해도 구령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뭘 그렇게까지 해? 필멸자의 목숨이 다하는 것쯤이야 흔한 일이잖아."
"저,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축생 같으니라고."
"난 오히려 네가 더 신기한데.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서 아직도 저런 필멸자들에게 쏟을 관심이 남아 있단 말이야?"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흑구의 말에 구령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냐. 인간의 마음이란 영영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지."
그녀의 환부에서 손을 뗀 구령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서방국으로 날아오기 전, 무의식 속에서 저를 부르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른 것은 왜일까.
「천명天命이다.」
그 목소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구령은 제가 이곳으로 날아온 것에 어떠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필연이라는 스승의 말처럼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물 흐르듯 흘려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지금껏 서방국에서 선의를 가지고 타인을 도왔을 때 운의 흐름이 제게 돌아오는 걸 느꼈다.
이판사판.
언제나 노름판에 뛰어들기를 즐겼던 구령은 제 운명 역시 커다란 판에 걸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품을 뒤져 융 주머니를 꺼내 들자 흑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건 왜?"
"상처에 잘 듣는 녀석이 있지."
마치 저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주어진 두 개의 광물에 구령은 기꺼이 개중 한 개의 광물을 덥석 집었다.
귀한 것은 응당 귀하게 쓰여야 하는 법.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다른 이에게 돌려주기 위함이란다." 하고 빙긋 웃던 스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죽어 가는 이를 외면해서야 큰 그릇이 될 리 없지 않으냐? 내 이걸로 공을 세워 원시천존께 예쁨 좀 받아 보련다."
"도대체 네가 하는 말은 반도 못 알아먹겠다."
한숨을 푹 내쉰 흑구가 그의 손에 들린 웅황을 보고 제가 더 아쉬운 소리를 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제련소로 달려가 환단으로 빚겠다며 설레발치던 게 눈에 훤했는데 그걸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꺼내 든다는 게 흑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요한 거라며."
"광물쯤이야 언제든 구할 수 있겠지."
"괜찮겠어?"
손에 도력을 실은 구령이 웅황 덩어리를 움켜쥐었다.
빠직. 빠직.
금이 가기 시작한 웅황을 응시하는 구령이 어깨를 으쓱 털었다.
"고작해야 돌이다. 사람 목숨보다야 귀하겠느냐?"
파사삭 부서지는 웅황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흑구가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사는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크윽…."
어둠 속에서 헤매던 시야는 눈 깜빡임 두 번으로 금세 어둠에 적응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린 기억을 되짚는 그녀가 무거운 머리를 주물렀다.
붉게 물결 치는 머리카락이 뒤통수를 흠뻑 적셨던 피로 잔뜩 떡이 져 있었다.
수도 모트왈로 향하던 길에 매복해 있던 살수들과 벌였던 치열한 전투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러다가 머리를 맞았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른 그녀가 사방이 어두운 동굴을 둘러봤다.
타닥타닥.
불씨가 튀는 소리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모닥불을 쬐고 있는 두 남자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인기척에 흑구가 먼저 반응했다.
"눈 떴나 본데."
그 말에 뒤돌아 앉아 있던 구령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새까만 남자의 날렵한 턱선과 쌍꺼풀 없이 쭉 찢어져 시큰둥한 눈매는 잘난 것과 별개로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상처는 괜찮소?"
구령의 물음에 그녀는 그제야 제 옆구리를 더듬더듬 살폈다.
분명 깊숙하게 베이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한데 통증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의아했다.
혹시 제가 머리를 다치며 꿈을 꿨나 생각했지만, 길쭉하게 상처 나 있는 옆구리는 그 모든 게 현실이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당신들께서 저를 도와주셨습니까?"
"동행인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하여 내 잠시 그대의 상처를 돌보았지."
"회복 마법에 능하신가 봅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통증이 모두 멎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아, 일어나지 마시오."
일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던 기사를 향해 구령이 손을 휘저었다.
"피를 많이 쏟아 아직 빈혈기가 있을 거거든. 상처 회복은 할 수 있다만, 빠져나간 피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지라 서둘러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는 것이 좋겠소."
"그, 그렇습니까?"
어쩐지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기운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의원을 찾기 위해서는 마을로 가야 했는데 숲속 한복판에서 쓰러진 터라 마을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방법은 여기서 버티거나 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인데….'
그러잖아도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이 이상의 신세를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급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꼭 보답할 테니… 염치없는 줄은 압니다만, 부탁을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형형이 빛나는 기사의 눈빛에 구령이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뱉어 냈다.
"들어나 보지."
"감사합니다…! 저는 사람을 찾기 위해 길을 서두르던 중 매복해 있던 살수들의 기습에 꼼짝없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상처가 깊어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 여행가님들께서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흑구가 작게 혀를 찼다.
구령에게로 상체를 슥 기울인 그가 "그러게 돈이나 뺏고 버리자니까." 하고 밉살스럽게 속삭였다.
"물론 이 은혜는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레이엄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쿵!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그녀의 눈빛이 간절했다.
"목적지는?"
"…! 수도 모트왈입니다."
"그레이엄 기사단이라 함은, 그레이엄 가문의 기사단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모트왈 국왕 폐하의 신임을 받은 유서 깊은 가문으로 기사의 이름을 건 채 모실 수 있어 영광일 따름이죠. …뭐, 지금은 조금 오해가 있긴 합니다만…."
그녀가 말끝을 흐렸지만, 거리가 먼 터라 구령과 흑구에게는 그 뒷말이 닿지 못했다.
구령이 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목적지가 같다면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국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가문을 돕는다면 뭐가 됐든 훗날 도움받을 수 있을 빚을 지워 놓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저희 가문의 기사를 살렸다고 하면 적어도 그 명망 높다는 가문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좋소. 돕도록 하지."
구령의 말에 기사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구령이 손을 들어 저지하고는 조건을 덧붙였다.
"단, 우리도 가는 길이 바쁜 몸이라 그대의 속도에 맞춰 줄 순 없을 것 같군. 불편하겠지만, 우리의 방식을 따라 주면 고맙겠소."
"무, 물론입니다!"
그녀는 조건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 몸으로 홀로 숲을 걷는 것보다야 안전할 테니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그레이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리디아 로만이라고 합니다. 두 분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법 예의를 아는 필멸자로군. 나는 프릭키팍투…."
"얘는 흑구고 나는 사구령이라 하오."
저를 노려보는 흑구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구령이 갓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잠깐 쉬고 계시오. 우린 잠시 나가 방법을 찾아보겠소."
일언반구도 듣지 못한 흑구가 "어어?" 하고 황급히 그를 따라나섰다.
노을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하늘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걷던 구령이 제 다리를 퍽 걷어차는 힘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쳤느냐! 네 힘으로 때렸다간 골절되기 십상이거늘 감히 사람을 걷어차?"
"부러지지도 않았으면서 엄살은. 그나저나 무슨 생각인데? 부상당한 사람을 데리고 어떻게 가겠다는 거야? 부축은 누가 할 건데? 난 안 해!"
"원, 녀석. 진정 좀 하거라."
잔뜩 흥분한 흑구를 달래 겨우 진정시킨 구령이 "부축은 안 해도 된다." 하고 입꼬리를 씩 당겨 웃었다.
"그럼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거야?"
"오냐. 당연히 있지. 좋은 수가."
숲을 가로질러 제법 깊이 걸어 들어온 구령이 거대한 나무 기둥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탄성 좋은 기둥을 철썩 때리자 꺼끌꺼끌한 나뭇결이 손바닥 가득 느껴졌다.
"이 녀석이 좋겠군."
<15화>
수도 모트왈
쿠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제 앞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 기둥에 리디아가 푸른 눈을 끔뻑였다.
나무의 수많은 가지에 달린 넓적한 나뭇잎이 마치 거대한 이불처럼 그녀의 발아래 깔렸다.
"이게 뭡니까?"
"오는 길에 딱 좋은 떡갈나무가 있더군."
떡갈나무를 홀로 옮긴 흑구가 씨근덕거리며 구령을 노려봐도 그는 콧방귀조차 뀌는 법이 없었다.
리디아는 저 작은 소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괴력이 나오는지 의아했지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신비한 일을 설명할 길이 없기에 구태여 제 궁금증을 들이밀진 않았다.
턱을 괴고 떡갈나무를 살펴보는 구령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터졌다.
그는 곧 제가 걸치고 있던 검은 도포를 벗어 한 번 크게 털어 낸 뒤에 떡갈나무 가지 위에 넓게 펼쳤다.
"어디, 앉아 보시오."
씩 웃은 구령이 어서 앉으라며 채근하자 리디아가 엉거주춤 그의 도포 위에 슬며시 앉아 봤다.
무릎을 끌어안고 불편하게 앉아 있는 리디아의 모습에 구령은 좀 더 편하게 눕거나 엎드려서 가지를 잡아 보라는 둥 꼭 참견 많은 집안 어른처럼 귀찮게 굴었다.
"살이 쓸리거나 불편한 느낌은 없으시오?"
"예에…. 뭐, 갑옷으로 감싸고 있으니 크게 불편한 건 못 느끼겠네요."
리디아가 절그럭거리는 갑옷을 들어 보이다가 문득 숨을 헉 집어삼켰다.
혹시 제가 불편하게 잘까 봐 걱정되어 침대를 마련해 주려는 그들의 배려에 드물게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지만, 그 기분 좋은 설렘은 머지않아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훌륭하군. 그렇다면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합시다."
"…지금 말입니까? 기껏 침대까지 만들어 주셨는데 써 보지도 않고요?"
"침대? 무슨 침대를 말하는 거요?"
구령이 도통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리디아는 제가 깔고 앉아 있는 그의 부드럽고 매끈한 도포를 쥐었다가 놓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제 착각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대의 몸이 성치 않으니 그대를 태워 옮길 수 있을 만한 것을 구해 왔거든. 마침 이 떡갈나무 이파리가 사람을 태우기에도 알맞고 기둥째 끌기에도 나쁘지 않은 듯해 가져온 거요."
"기둥째 끌어요?"
대체 누가? 그럼 전 이 이파리에 앉아서 썰매 타듯 끌려간다는 소리인가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눈앞의 흑구 표정이 꼭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져 리디아는 많은 말들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흑구는 구령을 태워 죽일 듯 노려보면서 나무 기둥을 비스듬하게 올려 한쪽 어깨에 걸쳤다.
"내가 살다 살다 필멸자 끌어 주겠다고 썰매 개 노릇을 다 하게 될 줄은…. 허!"
흑구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은 구령이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훅 뱉어 냈다.
"뭐, 조금만 참거라. 아직 이 세계의 힘 있는 자들을 알지 못하니 이 기회에 조금씩 알아 두면 좋지 않으냐."
보통 힘 있는 자일수록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는 법이었다.
진휘가 지니고 있던 힘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힘을 선망하는 자라면 진휘의 목숨을 건져 그 삿된 힘을 안겨 준 이의 정체에 관한 것을 알고 있을 터.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구령의 말에 흑구가 짧게 혀를 찼다. 그의 목적을 위해 협조하겠다는 계약을 해 버렸으니 좋든 싫든 그 고집에 어울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리디아를 돌아보는 흑구의 노란 눈동자가 매서웠다.
"뭐 해? 꽉 잡아."
리디아는 구령의 도포 위에 앉아 떡갈나무의 질긴 가지를 움켜쥐었다.
기둥뿌리를 짊어진 흑구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넓적한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꼭 커다란 양탄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제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아이를 혹사시키기에는 기사도 정신에 위배되어 리디아가 찝찝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저기… 그냥 걸을까요?"
"뭐라고! 안 들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소통조차 쉽지 않았다.
"제가!! 그냥!! 걸어갈까요!!"
리디아가 다시 한번 목청 높여 소리치자 걸음을 우뚝 멈춰선 흑구가 사나운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웃기지 마. 다친 주제에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지."
"윽…."
"뭐, 걱정 마시오. 저래 봬도 힘 하나는 좋은 놈이라."
뒷짐을 진 채 옆을 따라 걷는 구령이 한 번씩 부채질을 해 큰 바람을 불러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힘이 덜 들어가는지 흑구의 걸음도 가벼워져 조금 더 속도가 붙었다.
"그래서, 찾고 있다는 자는 누구요?"
"…소공작님께서 홀로 수도로 향하시게 되어 급히 자취를 좇고 있던 참입니다. 영민한 분이긴 해도 아직 어리신지라 걱정이 되어…."
"가출?"
"아닙니다. 그레이엄 가문을 시기하는 자들이 힘을 합쳐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입장이 난처해졌거든요."
리디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으득 깨물고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구령과 흑구에게 들려주었다.
권력 찬탈을 노린다는 누명에도 모트왈의 국왕은 그레이엄 공작을 끝까지 믿어 작위를 박탈시키지 않았지만, 그레이엄 가문을 시기하는 귀족 연합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뒤, 다른 가문으로부터 사신이 찾아왔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정찰하던 중 유랑민의 습격을 당했다며 급히 힘을 보태 달라는 그 부탁에 그레이엄 공작은 기꺼이 자신의 기사단을 출정시키겠노라 회신했다.
100일 동안의 근신 처분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출정에 기사 단장은 정예 단원 몇몇과 함께 공작저를 지키기로 하고 리디아가 기사단을 이끌게 되었다.
"뭐, 예상하셨다시피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미 함정을 파 놓았더군요."
"공작저는?"
"습격이 있었지만, 단장님의 기지로 다행히 공작님 내외를 별장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저 역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다른 가문 모두 입을 맞춰 도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공작님께서 홀로 독단적으로 기사단을 출정시킨 것이라며 다시 한번 논란에 불을 붙였습니다. 공작님께서 크게 상심하신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말없이 떡갈나무를 끌고 있던 흑구가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그렇게까지 국왕의 신임을 받았으면서 누명 쓸 일이 뭐가 있는데?"
"그레이엄 가문은 걸출한 마법사를 배출해 낸 가문으로 국가 공헌을 높이 사 작위를 받은 곳입니다. 한데, 얼마 전에 마력이 폭주했던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으음. 있었지."
흑구와 리디아는 같은 날을 떠올린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레이엄 가문과 연관이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겁니다. 권력 찬탈을 위해 어둠의 힘을 끌어다 쓴 거라고요."
리디아의 뾰족하게 날 선 말에 흑구가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했다.
"하. 웃기는 소리. 고작 인간 종족이 낼 수 있는 수준의 마력 폭주가 아니었어."
"그러니 저희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리디아가 답답함에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구령만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슬그머니 흑구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
흑구는 그것도 모르느냐고 쏘아붙이려다가 구령이 이곳의 사람이 아니란 걸 상기하고는 쩝 입맛을 다셨다.
"마력은 알지?"
"음. 듣자 하니 나의 도력과 비슷한 힘인 것 같더군."
"그래. 그 마력이 한꺼번에 폭주한 적이 있었어. 마력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생명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몸 안의 마력이 요동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본인의 안에 깃든 힘을 제어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으니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어."
"운기조식으로 다스리면 되지 않으냐?"
"…그게 뭔데?"
"호흡과 명상으로 기운을 다스리는 것이지."
구령이 크게 호흡하는 시늉을 하며 설명하자 흑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멍청아. 그게 되는 거면 그 고생을 하겠어?"
"허. 운기조식을 못 하는 술사라니. 통탄스럽구나."
"하하…. 아무튼 악몽 같은 열흘이었습니다."
쓰게 웃은 리디아의 말을 들으며 터벅터벅 걷던 구령이 우뚝 멈췄다.
리디아는 제 뒤에서 걷지 않고 있는 구령을 의아한 눈길로 살폈지만, 그의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아 섣불리 그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열흘 전 일어났다는 마력의 증폭.
틀림없었다.
제가 이 세계로 넘어온 그날이 분명했다.
'마력의 증폭이라. 어쨌거나 내가 이곳으로 넘어온 것과 관련 있는 건 확실한 것 같군.'
다시 한번 힘을 회복해 공의 경계를 열 수도 있겠지만, 보통 공의 경계 안에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했으니 실상 이곳으로 떨어진 것 자체가 우연이자 기적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마력이란 것을 이용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어느새 저 멀리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산등성이에 걸려 천천히 떠오르자 지금껏 지평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저게 뭐야?"
떡갈나무를 끄느라 헉헉거리는 흑구의 말에 빼꼼 고개를 내민 리디아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랑스럽게 편 그녀의 어깨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모트왈의 성벽입니다."
시야에 꽉 들어찬 성벽은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성벽에 난 검문소 앞으로 수도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제는 직접 걷겠다는 리디아의 말에 흑구가 반색하며 지긋지긋한 떡갈나무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통행증을 사용하면 제가 저 안으로 들어갔다는 게 다른 가문의 사람들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통행증?"
구령이 고개를 갸우뚱 꺾으며 묻자 그와 눈을 맞춘 리디아도 덩달아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설마 없으세요?"
자신의 옷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은 리디아가 동그란 펜던트 하나를 꺼내 보였다.
황동 펜던트에는 소쩍새의 모양과 그 아래로 '모트왈'이라는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각 나라별로 수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필수거든요. 보통 여행객들은 본인 나라에서 출발할 때 임시 허가증을 발급받아 오는데…."
리디아의 친절한 설명도 이 세계로 뚝 떨어진 구령이나 인간 종족과 어울릴 일 없는 흑구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멍청한 얼굴로 "너 있느냐?", "내가 필멸자들 규칙을 왜 따라?" 하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리디아가 이마를 턱 짚었다.
"두 분은 그럼 검문소 입구에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제출하시면 임시 발급증이 나올 거예요."
"음. 그렇군."
"…설마 그것도 없어요?"
"본디 물 따라 바람 따라 거니는 도사에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필요치 않은 법!"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붙잡히면 바로 감옥행이라고요!"
리디아의 초조한 눈길이 빠르게 줄어드는 검사 대기 줄을 훑었다.
"흑구야, 잠시 리디아와 함께 좀 기다리거라."
갓을 푹 눌러쓴 구령이 별다른 설명 없이 대기 줄을 이탈했다.
그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는 흑구의 옆에서 리디아가 동그란 눈을 끔벅였다.
"…구령 님은 어딜 가시는 겁니까?"
"저 자식 머릿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흑구는 타들어 가는 심지처럼 점점 짧아지는 줄에 세게 혀를 찼다.
'낭패로군. 차라리 돌파하면…. 아니야. 분명 경비대가 쫓아오겠지?'
구령이 돌아오기도 전에 저희의 차례가 도래하고 있었다.
앞의 한 사람만 지나면 저희 차례인데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구령의 모습에 흑구는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불안으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딜 갔는지 주변을 살피던 흑구의 앞을 가리고 있던 마지막 대기자가 성문 안으로 사라지고 경비대원은 사형 선고처럼 흑구를 불러 세웠다.
"다음. 이리 가까이."
괜히 여기서 거부당하면 다음 심사는 더 까다로워질지 몰랐다.
차라리 여기서 물러서고 구령을 찾아 다시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쿵쿵 뛰어 대는 심장에 흑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서 왔지?"
"우, 우리는…."
흑구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그때였다.
"…!"
흑구가 제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에 더없이 표정이 밝아졌다.
뒤돌아보자 갓을 슬쩍 올린 구령이 힘겨운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씩 웃은 그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펼치자 세 개의 펜던트가 짤랑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차르륵 떨어졌다.
"레이븐에서 셋. 흑구와 사구령."
구령이 씩 웃으며 엉거주춤 서 있는 리디아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리디아다."
<16화>
그레이엄 소공작의 행방
세 사람의 펜던트와 얼굴을 번갈아 확인한 경비대원은 생기 없는 눈으로 펜던트를 돌려줬다.
과연 이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흑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기 무섭게 경비대원이 몸을 슥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손짓에 세 사람 모두 잔뜩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쓴 채 성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두꺼운 벽의 그림자를 넘어서자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수도 모트왈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입을 헤 벌리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흑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구령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허. 왜 이러느냐."
"너 뭐야? 펜던트 어디서 났어?"
그 말에 피식 웃은 구령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모트왈의 광장을 향해 걷는 구령은 지금쯤 펜던트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할 이름 모를 그들을 위해 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날씨가 좋~구나!"
* * *
수도 모트왈은 그리 넓지 않은 영토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국가의 자랑인 상업 도시답게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상점이 유명했다.
재단, 세공, 잡화, 무기, 마도구, 서점….
그 종류를 나열해도 수백 가지는 될 상점이 빽빽하게 들어선 모트왈의 골목은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둥근 돔 형태의 지붕을 취한 건물이 제각기 모양이 다른 화려한 타일로 개성을 뽐내거나 아예 민무늬로 오직 상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도 있었다.
"형씨! 무기 필요 없어?"
"에이. 요즘은 방어구를 든든히 챙겨야지. 무기가 백날 좋아야 뭐 하나? 방어가 안 되면 공격도 소용이 없어요."
"당신 말 다 했어?"
"저저, 평생 무기 팔더니 성격도 날 선 거 보시오."
"야!"
소란스러운 상인들은 그 존재만으로 모트왈의 명물이 되어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왁자하게 터지는 웃음과 호객의 소음 속에서 구령은 신중하게 가게 하나하나를 살폈다.
잠시 둘러볼 곳이 있다는 리디아의 말에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숙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뒤, 구령은 그중에서 가장 바쁜 상점을 찾는 중이었다.
금괴 두 덩이를 턱 하니 내놓아도 충분한 금화를 내어 줄 수 있을 규모의 상점이 필요했다.
잡화점은 일단 탈락이었다.
자잘한 물건을 사고파는 가게에 금화가 많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은 탓이었다.
같은 이유로 식료품 상점도 탈락이었다.
몇 군데를 돌아보던 구령은 결국 무기상을 택했다.
이유 하나. 사람이 붐비다가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이 있다.
이유 둘. 값비싼 무기를 사고파는 상점인 만큼 금화 유동률이 높을 것 같았다.
이유 셋. 더는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햐! 상당한 물건을 가져오셨네."
무기상은 오랜만에 받아 보는 묵직한 금괴에 당장 내어 줄 수 있는 금화를 머리로 계산했다.
한참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던 그가 별안간 안타까운 얼굴로 "아이고. 이를 어쩌나." 하고 가슴을 두드렸다.
"금화가 지금 충분치가 않네."
"이 집도 틀려먹었네."
쯧 혀를 찬 흑구가 바로 돌아서려 하자, 무기상이 황급히 일행을 붙들었다.
"어유! 성격도 급하셔! 기다려 보슈."
세 사람을 세워 둔 무기상이 창고를 뒤적이더니 몇 개의 무기를 진열대 위에 늘어놨다.
철퇴, 소드, 팔시온, 메이스 따위의 흉악한 물건들이었다.
그는 이런 살벌한 무기를 내놓은 사람치고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바닥을 비볐다.
"어떻게… 이것 중에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시려나?"
그는 지금 척 보기에도 이곳 주민이 아닌 일행에게 끼워 팔기를 할 속셈인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디서 장난질이냐고 화를 버럭 내고 돌아섰겠지만, 무기상의 선택은 탁월했다.
한 명은 동방국에서 온 도사에, 한 명은 이제 막 인간의 몸을 얻은 드래곤이라니.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흠."
선택권을 쥐고 있는 구령은 무기상이 꺼내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에게 익숙한 건 그래 봐야 검 종류가 다였다.
이리저리 물건을 쥐어 보던 그가 가장 끝에 있던 단검 하나를 골라 들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낡은 단검은 가장 위력이 없어 보였지만, 존재 자체로 위용을 뽐내는 우아한 세공이 들어간 물건이었다.
"이걸로 하지."
일부러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커다랗고 흉흉한 무기 위주로 골라 왔던 무기상은 제 상점에 있는지도 몰랐던 저 조그마한 단검이 어느새 섞여 들어갔는지 의아했다.
"…정말 그걸로 되겠습니까?"
단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구령을 꼭 뭐에 홀린 것처럼 빤히 바라보면서 얼빠진 소리로 물은 무기상이 서둘러 제 입을 헙 틀어막았다.
저 이방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이 거래를 성사시킬 요량으로 그가 금화 주머니를 서둘러 내밀었다.
"헤헤. 보는 눈이 있으시네. 요즘 누가 무거운 무기를 들고 다닌답니까? 단검이면 충분하지, 암."
싱글벙글 웃는 무기상으로부터 단검과 금화 주머니를 넘겨받은 구령이 "고맙소." 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앞까지 달려 나와 인사해 주는 무기상의 모습에 흑구가 만족스러운 콧김을 뿜었다.
"저 녀석은 예의를 좀 아는 필멸자로군."
"네놈 입에서 나올 말이냐? 그나저나 오늘은 드디어 침대에서 잘 수 있겠구나."
"온몸이 뻐근해. 인간의 몸뚱이는 왜 이리 약한 거야?"
레이븐에서 숙박을 거절당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구령은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끌어안은 채 비장한 걸음으로 여관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도시답게 무척 좋아 보이는 여관이었다.
골드의 개념만 알고 있던 구령은 2실버라는 말에 우왕좌왕했지만, 다행히 마음씨 좋은 여관 주인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방에 입성할 수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 넓은 창까지 난 좋은 방을 두 개나 잡을 수 있다니.
구령은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경이에 찬 눈길로 찬양했다.
"이제 가난한 여행은 끝이다. 내 이것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겠구나."
리디아의 방을 따로 잡아 놓고 둘이 함께 방을 쓰게 된 구령과 흑구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쌓인 여독에 당장에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령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기상에게서 받아 온 단검을 꺼내 침대 위에 툭 올렸다.
낡은 단검을 이리저리 살피던 구령이 손을 단검 위로 올렸다.
구령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기운이 단검의 주위를 감싸고는 이내 묵은 때를 벗겨 내듯 낡은 외관에서 금방 벼려 낸 듯 시리게 푸른 날을 드러냈다.
"역시."
단검을 처음 봤을 때 분명 꽤 좋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주인이 위장술을 걸어 두어 무기상의 눈에 띄진 않은 모양이지만, 구령의 눈을 숨길 수는 없었다.
동방국에도 종종 값비싼 보주를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위장술과 그 결이 비슷해 쉽게 해술解術 할 수 있었다.
"좋은 물건을 얻었군."
씩 웃은 구령이 두 눈을 감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을 느끼는 흑구의 침대로 단검을 툭 던졌다.
눈을 반짝 뜬 흑구가 웬 미스릴 단검의 자태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령을 바라봤다.
"뭐야?"
구령은 벌렁 드러누워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내 주구가 하도 많아 더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너나 가지거라."
"난 이런 거 없어도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단검을 쥔 흑구는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흑구 본체의 발톱이 더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살벌한 발톱을 떠올린 구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네 발톱에 당할 뻔했는데 그걸 모를까? 그거나 휘두르면서 인간인 척하면 조금 더 힘 조절도 쉬울 거다."
"…그래?"
"원래 모습으로 변해 봐야 좋을 것 없으니 얌전히 들고 다니거라."
하품을 늘어지게 한 구령이 베개를 끌어안고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난 이제 눈 좀 붙이련다. 넌 좀 씻고 나오너라. 용 비린내가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원."
"뭣…!"
제 몸 이곳저곳 킁킁 냄새를 맡은 흑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단검으로 그냥 찌르고 도망갈까 생각하던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군가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은 게 처음이라 기분이 영 이상했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든 감정에 익숙한 건 아니니까.
단검의 날에 낯선 제 얼굴이 비쳤다.
선물로 들떠 살짝 상기된 뺨이 우스워 흑구는 도로 검집에 단검을 꽂아 넣고는 품 깊숙이 챙겨 넣었다.
"필멸자들이란. 흥."
침대에 걸터앉아 달랑달랑 흔들리는 다리는 꼬리 대신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구령이 방 문울 두드리는 인기척에 번쩍 눈을 떴다.
늘어지게 하품하며 문을 열자 갑옷은 벗어 두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리디아가 인사를 건네왔다.
"일은 다 보았소?"
"네. 길드 조합원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혹 저희 소공작님의 행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별 소득은 없었지만요."
"내일부터는 그대의 작은 주인을 찾아보도록 하는 게 좋겠군. 여정이 고됐으니 일단 쉬시오."
"그것 말인데요!"
두 사람과 합류한 리디아는 구령이 제게 터무니없이 좋은 방을 주었다며 난색을 보였다.
한사코 돈을 내겠다고 했지만, 구령이 들어 보이는 묵직한 금화 주머니에 쓴 입맛을 다신 그녀가 제 푼돈을 도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친절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됐소. 내 그대를 보고 있노라면 생각나는 이가 있어 그렇소."
구령의 눈은 부드럽게 웃는 입가와 달리 유독 슬퍼 보였다.
그의 사정을 캐묻지 않은 리디아는 그저 호의에 허리를 깍듯이 굽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시 제 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점잖은 걸음으로 침대에 다가서더니 곧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으윽. 침대 푹신하다…!"
이런 사치에 현혹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손으로 누르면 푹 꺼지는 침대는 항상 훈련소의 딱딱한 침대에 익숙해져 있던 몸에 유독 푹신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리디아는 까만 천장에 소공작의 얼굴을 그렸다.
어려서부터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검술을 가르쳐 달라 조르던 그 말간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 왔다.
제겐 분명 모셔야 할 작은 주인임이 틀림없지만, 때때로 그는 우애 좋은 동생 같았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홀로 떠난 그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리디아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오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녀의 꿈에는 추수 시기의 보리처럼 금싸라기를 뿌려 놓은 듯한 금색의 머리카락과 그 아래 영민하게 빛나는 푸른 눈을 지닌 소공작이 나왔다.
슐츠 그레이엄.
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고 싶었지만,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그의 걸음을 힘겹게 따라잡아 손목을 잡아챈 순간 리디아는 꿈에서 깨어났다.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리디아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슐츠…."
* * *
씻고 나온 흑구가 잠든 걸 확인한 구령이 슬그머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포 주머니를 뒤져 융 주머니를 꺼낸 구령은 그 안에 든 붉은 광물, 단사를 달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더스트 루트의 대장장이들이 흠집 없이 제련해 준 덕분에 그 어떤 불순물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단사의 기운만이 구령의 주변을 맴돌았다.
잘그락.
구령이 품을 뒤져 꺼낸 것은 치우의 염주였다.
염주를 손에 감으면 전쟁의 신이라는 치우의 힘을 빌려 온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소모품치고 꽤 튼튼한 편이라 보따리상에게서 제법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이었는데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 구령은 퍽 애용하는 물건이었다.
염주를 감은 손 가득 단사를 쥐자 꼼짝도 않던 광물이 곧 퍼석 소리를 내며 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붉은 가루를 작은 그릇 안에 한데 모은 구령이 제 손바닥을 그 위에 들어 보였다.
"…큭."
바람으로 날을 세워 제 손을 그어 내자 붉은 피가 단사 가루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절구를 구하지 못해 궁색하게나마 티스푼을 가져와 핏물로 단사 가루를 반죽한 구령이 질척해진 반죽을 손에 넣고 둥글게 굴렸다.
끊임없이 자신의 도력을 흘려 넣으며 둥글게 환단을 빚은 구령이 제법 그럴싸하게 모양 잡힌 피떡 환단을 찝찝한 얼굴로 들어 보였다.
"맛도 더럽게 없게 생겼네."
쯧 혀를 찬 그가 입을 크게 벌려 환단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비릿한 피비린내와 톡톡 쏘는 맛이 역했지만, 귀한 영약을 토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죽을상을 하고서 으적으적 씹어 낸 그가 억지로 목구멍을 열어 꿀꺽 힘겹게 삼켜 냈다.
"크윽…."
단사의 기운이 몸 안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구령은 이 날뛰는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서둘러 운기조식에 들어섰다.
뺨을 스치는 공기와 바람의 흐름이 한없이 더뎌져 간다.
날벌레의 날갯짓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감각이 더없이 예민해졌다.
구령은 뜨겁게 용솟음치는 기운에 호통치듯 자신의 도력으로 찍어 눌러 버렸다.
단사의 기운이 제 안에서 꾸물꾸물 집어삼켜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전했던 기운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걸 느낀 구령이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이곳으로 날아온 이후로 소환수 중 우레의 기운밖에 느낄 수 없던 구령은 단사를 흡수하면서 비로소 바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바라."
구령의 부름에 그가 앉아 있던 땅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얼굴이 스르륵 빠져나와 자신의 주인 앞에 무릎 꿇었다.
금방이라도 싸울 준비를 마친 것처럼 매서운 기운을 뿜는 바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구령이 씩 웃어 보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제 떨어지지 않아도 괜찮으니 힘이 필요하면 내 언제든 너의 이름을 부르마."
쿠르르….
바라가 기쁨에 몸을 떨었다.
주술을 해제하는 구령의 손짓에 바라의 몸이 도로 바닥에 푹 꺼져 사라졌다.
팔석의 힘으로 도력의 일부를 되찾은 구령이 제 주먹을 꽉 쥐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대에 몸을 뉘었다.
구령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고른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흑구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몰래 할 거면 티라도 내지 말든가."
끌끌 혀를 찬 흑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깨진 단사 조각과 방울방울 흘린 핏물을 벅벅 닦아 냈다.
'나와 붙었을 때의 힘이 전부가 아니었던 건가. 구령의 힘이 더 강해진 게 분명히 느껴졌어.'
마른침을 꿀꺽 삼킨 흑구가 도로 제 침대에 쏙 들어와 눈을 질끈 감았다.
'까불지 말아야지.'
<17화>
숨바꼭질
동이 트기도 전에 구령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밀려들어 오는 상쾌한 아침 공기에 흑구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잠 좀 자자, 제발…." 하고 우는소리를 했다.
구령은 푹신한 침대가 내린 은혜에 쌓일 대로 쌓여 있던 여독이 이제야 좀 풀린 듯했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뻗어 있는 흑구를 퍽퍽 두드려 깨운 그가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여관의 1층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어제 듣기로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는 말에 무조건 든든히 먹을 셈이었다.
"이런…. 이럴 수가…."
그동안 나무 열매와 버섯으로 연명했던 날들이 구령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다란 테이블에 여러 음식을 놓여 있는데, 이 모든 걸 원하는 만큼 가져다 먹어도 좋다는 여관 주인의 말에 구령이 입을 틀어막았다.
"흑구야."
"어엉?"
여전히 잠이 덜 깬 흑구는 밥이고 뭐고 까치집을 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길게 하품했다.
"나는… 나는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이리도 인심이 좋다니!"
"…이게 그렇게 좋다고?"
물론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하지만.
흑구는 그의 감동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고 입술을 비뚜름하게 꺾었다.
제아무리 만찬이라도 흑구는 아직 신선한 날고기와 산의 가장 맑은 계곡물,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열매 같은 것들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벌써 내려와 계셨습니까?"
"그대도 어서 오시오. 글쎄 이곳의 음식을 다 먹어도 좋다는군."
"하하. 보통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 많죠."
"허. 이럴 수가. 서방국은 인심이 참으로 좋군. 자자. 시장하니 어서들 앉지."
단식을 했던 경력이 무색하게 구령은 여관의 음식을 거덜 낼 것처럼 먹어 대기 시작했다.
도톰하게 부푼 빵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처음 보는 음식이 신기해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가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떡도 밥도 아닌 것이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버터랑 잼도 있네요. 같이 먹으면 더 맛이 좋습니다."
리디아가 슥 내밀어 오는 버터와 잼을 노려보던 흑구는 리디아가 먹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제 몫의 빵에 물컹하고 매끈한 버터와 잼을 듬뿍 발랐다.
'그래 봐야 필멸자들의 음식이지.'
흥 코웃음 치고 크게 베어 문 흑구는 난생처음 맛보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에 제 이마를 퍽 때렸다.
"구령! 너도 이렇게 먹어 봐! 어떻게 이런… 이런 맛이 나지?"
"응? 그건 뭐냐? 쌈장인가?"
흑구가 내미는 빵을 받아먹은 구령이 방금 흑구가 했던 것처럼 제 이마를 퍽 때렸다.
"마… 말도 안 되는 맛이로군. 이것이 무엇이라고?"
"버터랑 잼이요."
"버터…! 잼…!"
그 단어를 잊지 않으려는 듯 몇 번이고 되뇐 구령이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맛에 연신 감탄했다.
흑구는 인간이 만든 것 중 홍차라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맑은 계곡물만 못하지만, 향기를 머금은 물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 오늘부터 소공작님을 찾아다닐 생각입니다. 구령 님께서는 일정이 있으십니까?"
리디아의 물음에 구령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수도에 동방인에 관한 단서가 있을 것이라던 와이너의 말을 잊지 않았다.
"예까지 왔으니 오늘은 동방국과 동방인에 대해 알아볼 셈이오. 과연 이곳에 내 동향同鄕이 있는지."
나이프에 비친 구령의 까만 눈이 희번덕였다.
* * *
모트왈의 변방, 거대한 저택에 내로라하는 모트왈의 귀족 가문이 모여들었다.
퀴퀴한 지하 방으로 향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익숙한 이름을 도마 위에 올렸다.
"그레이엄 공작이 살아 있답니다. 시체를 못 찾았다고 하더군요."
"쳇. 역시 실패했군."
"그러게 헤븐리 피스의 용병단에게 맡기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자들이라면 분명 깔끔하게 해결했을 텐데…."
어떤 이의 볼멘소리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탕 두드렸다.
"모르는 소리! 모트왈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자들이 국왕의 총애를 받는 가문의 암살에 손을 빌려줄 것 같습니까?"
"용병이란 놈들은 돈만 주면 다 하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오?"
"하하. 차라리 알렌시아인에게 맡기는 건? 고향 땅도 잃고 헤매는 자들인데 여차하면 죽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저희끼리 웃고 떠드는 자들 틈에서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눈빛만큼은 날을 세운 검처럼 시리게 빛났다.
이본 크루거.
그레이엄 가문에 밀려 권력을 잃은 크루거 공작이었지만, 아직 그를 추종하는 귀족 가문이 많았다.
그레이엄 가문을 몰아내고 다시금 권력을 쥐겠다는 야심 하나로 뭉친 그들은 크루거 공작의 손짓 한 번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슐츠 그레이엄의 행방은?"
"아직 찾고 있습니다. 병력이 공작 내외를 찾는 것에 집중되어…."
"공작 내외는 어차피 목숨만 부지해 숨어 있으니 더 좇을 것 없소. 사건만 일단락된다면 끝내는 거야 한순간이니…. 그 시간에 슐츠를 찾아내는 게 중하니 그곳으로 인력을 모으는 게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전할 소식이 있다면 마법 거울을 통해 연락해 주시오."
크루거 공작의 말에 한 몸처럼 대답한 남자들이 어두컴컴한 지하 방을 나섰다.
후드를 벗은 젊은 남자가 한 남자 옆으로 바짝 붙었다.
얼마 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가문을 이어받은 젊은 백작이었다.
"저기, 그런데 크루거 공작께서는 왜 슐츠 그 꼬맹이를 찾는답니까? 기껏해야 아카데미에 다니는 코흘리개인데요."
나이 지긋한 백작이 못마땅한 눈길로 그를 흘겼다.
"자네는 그레이엄 가문이 승승장구한 까닭을 무어라 생각하나?"
"그야… 국왕 폐하의 총애가 아닙니까?"
"그 총애가 어디서 왔느냐고."
젊은 백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방탕하게 놀 줄만 알던 치가 제 친구의 뒤를 이은 사실이 영 못마땅했는지 연로한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모트왈은 마력을 지닌 자가 적어. 군사력이 약한 것도 그 이유지. 한데 그레이엄의 핏줄은 죄다 마법사의 핏줄이니 국왕 폐하께서 좋아하시지 않겠나?"
"…핏줄이 전부 다요?"
"음. 날 때부터 마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후천적으로라도 발현하더군."
기다란 흰 수염을 쓰다듬던 그가 깊이 침음했다.
"슐츠 그레이엄은 타고난 마력도 대단한 데다 어린 나이에도 명철한 구석이 있지. 가만히 두었다가는 분명 후환이 될 테니 미리 싹을 잘라 두는 게야."
"그럼 그레이엄 가문이 쇠락하면 다시 크루거 가문이 힘을 되찾겠네요."
"그러니 지금 줄을 잘 대야 한다는 말일세."
연로한 백작의 주름진 눈이 크루거 가문의 문장을 바라봤다.
오래도록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크루거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레이엄.
이본 크루거는 결코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혹 크루거 가문에 붙지 않았다가 그가 다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피바람이 불지 알 수 없으니 연로한 백작은 그저 이 물정 모르는 젊은 백작이 험한 길로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럼 슐츠 그레이엄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원래대로라면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텐데요."
"뭐, 방학 기간이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가 적지 않으니 그사이에 가문의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이미 모트왈에 숨어 있다더군."
"햐. 발 한 번 빠르네요."
"…자네가 감탄할 땐가?"
헤헤 웃는 모습에 노인이 쯥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머지않아 발견될 걸세. 이본 경은 그리 참을성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 * *
"역시 구령 님은 동방인이셨군요. 행색이 독특해 그러진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리디아가 커피 잔을 들어 뜨거운 커피를 호록 들이켰다.
"동방인에 관해 아시오?"
"저는 한낱 가문 소속의 기사라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모트왈의 거리에 나오면 구령 님과 비슷한 차림의 동방인들이 보이곤 했습니다."
"…와이너 그 녀석이 이리로 오면 동방인이 많을 거라 하던데 내 어제부터 통 본 적이 없군. 그 엉큼한 녀석에게 속은 것일지도 모르겠소."
한숨을 푹 내쉰 구령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리디아는 그런 구령을 흘끗 바라보고는 할까 말까 망설이던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구령에게 괜한 것을 물었다가 실례인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탓이었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 눈치가 빠른 흑구가 찻잔을 쥔 채로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동방국에서 온 도사래. 잃어버린 힘도 되찾고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도 찾고 있나 봐. 또 뭐랬지? 사람을 찾는댔나?"
"내 정보를 술술 잘도 부는구나, 너."
"숨길 필요가 있긴 하고?"
피식 웃은 흑구가 아까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이 홍차란 걸 마시고부터 심장이 계속 두근거리는데 괜찮은 거야?"
어지간한 독에도 내성이 있는 드래곤의 몸인데 홍차를 마신 이후부터 심장이 과하게 두근거리고 기분이 들떠 저도 모르게 말이 마구 튀어나와 곤란할 지경이었다.
인간들이 이토록 위험한 것을 만들어 마시고 있는 줄 몰랐던 흑구가 홍차가 반쯤 줄어든 찻잔을 매섭게 노려봤다.
아까부터 심장이 이상하다는 흑구의 말에 구령이 심각한 얼굴로 흑구의 이마를 턱 짚어 열부터 재려 들자 흑구는 귀찮았는지 이거 치우라며 손을 휘저었다.
"열은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구령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가 도로 야수처럼 돌변했다.
"네 심장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닌데 소중히 다루지 못하겠느냐?"
"내 심장이 내 거지, 그럼 네 거야?"
"언젠가 내 것이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
"미친 소리 좀 그만하라고!"
아무래도 둘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리디아가 "자리 비켜 드릴까요?" 하고 넌지시 물어 왔다.
"괜찮소. 이 녀석 말대로 나는 동방에서 온 도사인데 잃어버린 힘과 동행을 좀 찾고 있는 참이거든. 한데 정보 모으기가 쉽지 않아 곤란하다오."
"도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 듣는 단어에 리디아가 관심을 보이자 흑구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본 적 없을 도술을 직접 겪었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힘이었다.
"별 잔재주를 다 부려. 마법사도 아닌 게 희한한 마법을 부리고."
"도술이다, 인석아. 도술."
"그렇습니까? 동방국의 마법 같은 건가 보네요."
"뭐, 비슷한 듯 다르더군. 일단 내 몸에 흐르는 도력과 이곳의 마력이 상충해 이전과 아주 똑같은 힘을 내기가 어려워."
구령이 손을 활짝 펼쳤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움켜쥐듯 주먹을 꽉 쥐었다.
따지고 보면 이곳의 마력은 진휘가 내뿜던 힘을 닮아 있었다.
도력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함께 어우러지지 않는 힘이었다.
구령의 말에 흑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나 되는 힘인데 이전과 똑같지가 않다고?'
구령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본 힘은 지금보다 더한 진정한 실력자라는 것이었다.
"찾고 계신다는 분은?"
"진휘라고 하는 자인데 허여멀겋고 고운 인상이오. 눈도 소 눈깔처럼 큼직하고 피부도 희거든. 겉으로 보기에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일 거요. 쯧. 이 모투알인가 하는 곳까지 오는 동안 볼 수가 없더군. 어디로 갔는지…."
"그렇습니까. 소공작님을 찾게 되거든 한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시다 보니 여러 사람을 만나시거든요."
리디아의 말에 구령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래 주겠소?"
"심성이 다정하신 분이라 분명 도움을 주실 겁니다."
"허. 복 받을 자들이로고. 이럴 때가 아니로군. 당장 그 소공작인가 하는 자를 찾아야겠어. 흑구야, 뭐 하느냐? 채비하지 않고!"
"어휴, 내가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계약을 한 것 같다니까."
한숨을 푹 내쉰 흑구가 남은 홍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꽃 같은 향을 풍기는 쌉쌀한 물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눈치였다.
길었던 식사를 마치고 모트왈의 복잡한 로터리에 우두커니 선 세 사람은 정신없이 오가는 수많은 인파를 바라봤다.
행인부터 골목 구석구석의 용병 길드까지 샅샅이 뒤져도 슐츠에 관한 단서를 찾기가 영 쉽지 않았다.
모트왈은 작은 마을에 비해 너무도 넓은 수도였고 사람들은 지금껏 지나쳐 온 마을 사람들보다 냉랭했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아, 진짜. 안 산다고요!"
리디아의 손을 휙 뿌리친 행인이 제 손을 탈탈 털고 멀어지자 흑구가 펄펄 날뛰며 제 팔을 걷어붙였다.
"저 싸가지 없는 필멸자 놈…! 거꾸로 매달아 까마귀 밥으로 만들어 주겠어!"
"저는 괜찮습니다, 흑구 님! 수도의 사람들은 항상 날이 서 있더라고요."
"제까짓 것들이 도시에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저렇게 유세야?"
"하하…."
한숨을 푹 내쉰 리디아가 "쉽지 않네요." 하고 푸념했다.
목도 마르고 다리가 아파 힘들다는 흑구의 투정에 구령이 흠 숨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더스트 루트에서 맛봤던 맥주 그림이 그려진 간판을 발견한 구령이 저곳에서 잠시 힘을 비축하자며 두 사람의 손을 이끌었다.
"무작정 찾는 것보다 셋이 구역이라도 나누는 것이 좋겠군."
"아무래도 범위가 넓어서 더 금세 지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구령이 제 앞에 놓인 메뉴판을 리디아 앞으로 슥 밀고는 주문을 기다리는 종업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맑고 푸른 눈동자에 총명함이 가득한 소년이었다.
"이보시오."
"네?"
"내 이곳에 오고 이토록 눈이 맑은 자는 처음이로군."
구령이 소년의 손을 덥석 잡자 깜짝 놀란 그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결 좋은 밀색 머리카락이 전등 아래서 흔들렸다.
"그대, 도를 아시오?"
"…도?"
리디아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그만 메뉴판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년이 서둘러 떨어진 메뉴판을 집어 리디아에게 도로 전해 주는가 싶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떨어뜨리셨… 리디아?"
소년을 바라보는 리디아의 푸른 눈동자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슐츠…!!"
<18화>
슐츠 그레이엄
"슐츠, 네가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아니, 아니야. 그보다 몸은 괜찮은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리디아가 조급한 손길로 슐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저보다 힘이 센 리디아에게 이리저리 너풀거리며 휘둘리던 슐츠가 작게 웃었다.
"당연하지. 리디아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부모님하고 함께 피신한 게 아니었어?"
"난 너희 가문의 기사야, 슐츠. 널 혼자 둘 리 없잖아. 공작님이라면 걱정 마. 안전한 곳에 모셨으니까."
구령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자 그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구령과 흑구에게로 향했다.
"아는 사이요?"
"이런…. 소개가 늦었습니다, 구령 님. 이분이 제가 찾고 있던 그레이엄 가문의 소공작, 슐츠 그레이엄 경입니다."
리디아가 제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슐츠를 돌아보며 퍽 다정한 투로 구령과 흑구를 소개했다.
"소공작님, 여기 계신 분들은 제게 큰 도움을 주신 은인이십니다. 소공작님의 행방을 좇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리디아의 소개에 그제야 구령의 모습을 제대로 살핀 슐츠가 눈을 빛냈다.
"동방인…. 프레윙이시군요."
프레윙. 와이너가 말한 것과 같다.
선익도에 모여 산다는 저와 같은 동방인들.
"내 동방국에서 왔으나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프레윙들이 모여 사는 선익도라는 곳을 찾고 있다. 아는 바가 있느냐?"
"으음. 선익도는 저도 전설로만 전해 들은 장소여서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나와 같은 동방인들은 본 적 있느냐?"
그 말에 슐츠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개를 크게 끄덕일 때마다 슐츠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럼요. 여기 오기 전에도 아카데미 근처에서 만났어요. 엘렌우드에는 동방인이 장사를 할 때도 있고 볼 일이 많거든요."
"허…. 내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구령이 흥미를 보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일 때, 저 멀리서 가게 주인이 슐츠를 불러 세웠다.
겉보기에 험악한 산적처럼 생긴 그가 무서운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구령 일행을 사나운 눈길로 살폈다.
"뉘슈?"
대답에 따라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에 슐츠가 작은 몸으로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제 가문 사람이에요, 아저씨!"
리디아는 이 위험한 때에 정체를 함부로 밝혀도 되는 것인지 잔뜩 긴장한 채로 제 검 자루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슐츠를 둘러업고 도망칠 셈으로 마른침을 천천히 삼키던 리디아는 별안간 사람 좋게 웃는 가게 주인의 얼굴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이구,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거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이 풀릴 때까지만 더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이 아저씨 도움이 필요하거든 편하게 말하고."
"지내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걸요."
싹싹하게 인사하는 슐츠를 멍하니 바라보던 리디아가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설마하니 제가 모시는 소공작께서 이런 펍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녀가 답답한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이야기하자면 길다는 그의 말에 구령이 슐츠의 허리를 덜렁 들어 제 옆구리에 끼웠다.
"아악! 소공작님! 구, 구령 님, 이게 대체…!"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가서 나누는 게 좋겠소. 이런 곳은 보는 눈은 물론이요 듣는 귀도 많으니."
"차라리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 어떻게 저희 소공작님을 그렇게 짐짝 들듯이…!"
리디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사정했지만, 구령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보시오, 주인장. 내 이 아해를 좀 데리고 가야겠소."
"데려간 김에 밥이나 든든히 먹여 주쇼. 어째 잘난 가문 후계자가 비쩍 말라서, 원."
"걱정 마시게. 도로 안전하게 데리고 오리다."
"하하. 일이 잘 풀려 안 오면 더 좋고!"
정작 구령의 손에 달랑 들린 슐츠는 편한 모습으로 가게 주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광장을 걷는 동안 리디아는 혹여 슐츠의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까 하는 노파심에 제 소공작의 얼굴 위로 천을 덮어 버렸다.
수상쩍은 모양새로 광장을 걷는 세 사람의 한 발자국 뒤로 흑구가 일행이 아닌 척 먼 산을 바라보며 따라 걸었다.
* * *
"비좁군."
구령과 흑구가 머무는 숙소에 네 사람이 빙 둘러앉자 방이 꽉 차는 듯했다.
슐츠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게 즐거운지 꼭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돌아온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나저나 어쩌다 그런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으음, 그게…."
머뭇거리던 슐츠가 제 뺨을 긁적였다.
입술을 달싹이는 슐츠의 콧방울이 들썩였다.
"여비를 몽땅 도둑맞았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슐츠의 콧잔등이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 같은 소년의 얼굴에 리디아가 으드득 이를 갈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어떤 자식들입니까? 감히 대그레이엄 가문의 소공작 주머니를 털어 간 간 큰 놈들이. 본보기로 목을 쳐 광장에 내걸어 주겠습니다."
"화끈해서 좋네."
"흑구야. 조용히 있거라."
리디아의 매서운 눈길에 구령이 흑구의 입을 막은 채 슬그머니 제 쪽으로 당겼다.
슐츠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제 괜찮아, 리디아! 그때 그 가게 주인아저씨가 도와주신 거야. 갈 데가 없으면 가게에서 먹고 지내면서 여비라도 벌어 가라고."
"한데 그자에게는 슐츠 님의 정체를 알려도 괜찮은가요? 분하지만 아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
"응. 크루거 가문에 반감이 있는 분이었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본인 일처럼 화를 내 주시더라고."
리디아가 크게 감동하며 그의 정보를 수첩에 재빨리 적어 내려갔다.
"이럴 수가. 가문이 위세를 회복하거든 크게 보답할 수 있도록 공작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멋쩍게 웃는 슐츠를 빤히 바라보던 구령이 팔짱을 척 끼고 콧김을 뿜었다.
"네 가문에 일어난 일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이미 한배를 탄 몸이니 그 작전을 좀 들어 보도록 하지."
리디아는 믿어도 좋은 사람들이라며 슐츠를 안심시켰다.
그녀의 허락에 잠시 머뭇거리던 슐츠는 곧 조심스럽게 제 품을 뒤져 종이 뭉텅이를 테이블에 턱 올렸다.
저놈의 문자.
구령이 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딴짓하는 흑구의 옆구리를 퍽 찔렀다.
"악! 미쳤어?"
"흠, 흠. 흑구야, 저걸 좀 읽어 보거라."
흑구의 노란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드래곤 역시 인간의 문자 읽는 법은 터득하지 못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흑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머리를 팽팽 굴렸다.
슐츠가 고개를 갸우뚱 꺾고는 입을 열었다.
"뭐, 보셔도 잘 모를 겁니다. 가문끼리 지독하게 엮인 역사와 거짓말의 증거들이라서요."
"아우, 젠장할! 진작 말하란 말이야! 이 조그마한 필멸자 놈, 확 먹어 치워 버릴까 보다!"
긴장이 풀린 흑구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허공에 발을 굴렀다.
"저는 아카데미에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항상 아카데미에 있었던 탓에 제 얼굴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 증거들을 가지고 국왕 폐하를 직접 알현하려고 귀국한 참이에요."
"오호. 기특한지고.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구령이 씩 웃자 슐츠 역시 씩씩한 얼굴로 마주 웃었다.
"가문을 위해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요?"
"슐츠 님…."
리디아가 감격했는지 제 소공작 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렇지만 슐츠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호기롭게 모트왈로 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지만 이미 역모의 누명을 쓴 가문의 자제이자 가택 연금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는 상황에 왕궁으로 정정당당히 들어가 봤자 좋은 취급을 받기는 어려울 게 뻔했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국왕 폐하께서 만나 주실지도 의문이긴 합니다."
쓰게 웃는 슐츠의 모습에 구령이 제 턱을 쥐고 생각에 잠겼다.
"안으로 잠입하는 것만 도우면 되느냐?"
"네?"
"너희의 왕이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올지는 모르겠다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는 힘을 보탤 수 있다."
오늘 처음 본 남자의 호의에 슐츠는 당황한 눈치였다.
리디아가 멋쩍게 웃으며 제가 이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어떻게 모트왈까지 올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서야 슐츠의 경계가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도움받겠습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충분히 사례할 수 있도록…."
"아, 그렇지! 슐츠 님."
리디아가 슐츠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례에 관한 말이 나오자 구령이 찾고 있다는 남자가 떠올랐다.
"혹시 진휘라는 남자에 대해 아십니까?"
익숙한 이름에 구령이 몸을 움찔 떨었다.
"진휘?"
"구령 님께서 찾고 계신다고 합니다. 동방인이라고…. 곱상하니 생겨서 구령 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인상이라고 하시던데 아무런 단서가 없으신가 봐요."
"으음."
"아카데미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니까 이런저런 정보를 좀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진휘…. 진휘라."
슐츠가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최근에 본 동방인은 아까 말한 사람이 전부예요. 아카데미 근처에서 혼자 헤매고 있던 남자요. 이름은 못 물어봤는데…."
슐츠가 얼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구령 님과 비슷한 옷을 입었는데 밝은 푸른색이었어요."
"일단 진휘도 푸른 옷을 입긴 했다만. 그 외에 기억나는 건 없느냐?"
구령이 채근하자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슐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빛이 무척 살벌한 남자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요."
"어때? 네가 찾던 남자가 맞아?"
흑구가 구령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묻자 구령이 깊게 침음했다.
"글쎄다. 청색 옷이라면 비슷한데 눈이 살벌하다라…."
진휘는 선한 인상이 가장 특징적인 남자였다.
처음 본 꼬마가 첫눈에 살벌하다고 말할 정도의 눈매를 가지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구령이 쯧 혀를 차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이 정보라도 쥐고 있어야겠군."
구령이 다시 만나면 후려갈겨 주겠다며 이를 박박 갈았다.
짝!
슐츠가 뭔가 떠오른 듯 크게 손뼉 쳤다.
"그 사람, 검은 언덕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고 했어요."
검은 언덕.
분명 전에도 들은 적 있는 곳이었다.
구령은 그 동방인이 진휘든 아니든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검은 언덕이 그곳에서 가까운가?"
구령의 물음에 슐츠가 고개를 저었다.
"엘렌우드에서 검은 언덕으로 바로 넘어갈 수는 없어요. 옛날 선조들의 전쟁으로 하일란을 통해서만 넘어갈 수 있도록 약속되었거든요."
"모트왈 사람들은 거의 못 넘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하일란과 사이가 좋지 않아 쉽게 허가해 주지 않을 겁니다."
리디아는 부정적인 말과 달리 웃고 있었다.
그런 리디아와 눈을 마주친 슐츠도 생긋 웃었다.
"사례할 만한 것이 떠올랐네요."
"무엇이냐."
"그레이엄 가문은 귀한 마법사 가문으로 국왕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 리디아 저자도 그리 말하더군."
슐츠의 작은 손이 구령의 손을 꼭 붙잡았다.
따끈한 아이의 체온이 금세 구령의 손을 덥혔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그레이엄 가문의 이름을 걸고 국왕 폐하의 추천서를 받아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확신에 찬 슐츠의 목소리에 구령이 두 눈을 빛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곤란한 일을 겪지 않도록 보증해 드리는 증표입니다."
그 말에 구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따악!
구령이 어느새 대화에 흥미를 잃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흑구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뭐 하느냐, 흑구야. 당장 일어서지 않고."
씩씩거리며 제 머리를 문지른 흑구가 구령을 따라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곰방대를 입에 문 구령이 씩 웃으며 창문 멀리 우뚝 서 있는 왕궁을 바라봤다.
"어디, 왕궁에 이자들을 꽂아 넣어 주러 가 보자꾸나."
<19화>
불쾌한 골짜기
구령의 호쾌한 목소리에도 흑구는 영 시큰둥한 눈치였다.
"우리가 무슨 수로 거길 들어가? 한낱 인간이긴 해도 왕이라는 녀석들은 힘이 대단하다고. 네가 '들어가자.' 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에 사는 게 아니란 말이야. 어휴, 너희 동네엔 왕도 없냐?"
끌끌 혀를 차는 흑구의 말에 구령이 코웃음 쳤다.
허구한 날 궁에 들어가 쓸 만한 물건을 죄 쓸어 와 거리 곳곳에 제 얼굴이 떡하니 그려진 방까지 붙었던 구령이었다.
제 화려했던 과거에 대해 떠벌리려던 구령이 별안간 침통한 얼굴로 불만족스럽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도래솔을 부를 수가 없군.'
그림자 속에 숨죽여 사는 도래솔의 능력을 사용하면 궁 안으로 침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도래솔을 부를 수 없게 됐으니 그 편리한 능력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구령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저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는 리디아와 슐츠의 모습을 흘끗 살폈다.
멋에 죽고 멋에 사는지라 온갖 허풍을 떨어 놨으니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네가 태우고 나는 건 어떻겠냐? 상공에 띄워 주기만 하면 내 거기서 저 아해를 안고 뛰어내리든가 하는 것은 가능하다만."
흑구는 제 귀에 속닥거리는 구령의 목소리에 콧김을 흥 뿜으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더스트 루트 같은 산골 동네면 모를까 이렇게 인간이 많은 곳에서 쉽게 모습을 드러낼 순 없어."
"상공으로 높이 오르더라도?"
"그래. 우리 같은 드래곤의 심장을 너만 노릴 것 같아? 한 나라에서 부리는 군사력이면 제아무리 드래곤이어도 활개치기가 쉽지 않단 말이야."
뾰족해진 흑구의 말투에 구령이 아쉬운 입맛을 쩝 다셨다.
무언가 이야기가 잘되어 가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슐츠가 조심스럽게 "저기…." 하고 운을 뗐다.
"방법이 없으시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왕궁은 성벽도 높고 입구를 지키는 경비도 삼엄해 어지간해서는 쉽게 발을 들일 수조차 없거든요."
고작해야 열서너 살의 소년치고는 지나치게 감정을 절제한 듯 깍듯한 말투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총명하게 빛나던 푸른 눈이 시무룩하게 꺼지는 걸 보고 있자니 구령의 마음이 영 착잡했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구령이 문득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경비?"
"네. 왕궁 앞을 교대로 지키는 문지기가 있거든요. 교대로 한시도 쉬지 않고요."
구령과 흑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누군가 경비의 모습을 흉내 내 길만 터 준다면 문제없겠군."
그 말에 눈을 깜빡이던 슐츠가 곧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경악했다.
이자들은 지금 폴리모프를 통해 겉모습을 변화시킬 작정이 분명했다.
아카데미에서도 졸업반이 되어야 그중 한두 명이 쓸 수 있을까 말까인 수준의 마법을!
"그, 그런 고급 마법이 가능하시다고요?"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리디아가 "그렇게 대단한 마법인가요?" 하고 묻자 슐츠는 잔뜩 흥분해 손을 휘두르며 이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리디아는 홀로 타지에서 열심히 공부한 슐츠의 지식에 감탄하며 그레이엄 가문의 앞날이 무척 밝다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뿌듯하게 웃던 슐츠가 곧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구령을 바라봤다.
"그런데 왕궁에는 국왕 폐하의 안전을 위해 언제나 마력 감지기가 돌아가고 있어요. 폴리모프라면 분명 들키고 말 텐데…."
그 말에 흑구도 슬그머니 구령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문제야. 난 내 몸만 변신할 수 있어. 내가 경비병으로 변신해서 너희를 안에 넣어 준다고 해도 그 안에서는 어떻게 할 셈이야?"
두 사람의 걱정에 구령은 되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끔벅였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내 둔갑술이라면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다."
"…둔갑술?"
모든 사람을 변신시킬 수 있으며 마력과 어우러지지 않아 그들이 말하는 감지기에도 걸릴 일이 없는 구령의 도술.
둔갑술만 있다면 모트왈 국왕을 알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 * *
"저 녀석들이로군."
리디아가 내밀어 온 망원경을 받아 든 구령이 작은 구멍에 눈을 갖다 대고 성벽 앞을 우직하게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을 살폈다.
덩치 좋은 두 명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없는 게 꼭 동상이라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이제 할 수 있겠어?"
흑구의 물음에 구령이 망원경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망원경을 빼앗긴 리디아가 돌려 달라는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며 미련 가득한 눈길로 그의 품을 바라봤다.
둔갑술을 쓰기 위해서는 상대의 모습을 관찰해야 한다는 구령의 말에 위험을 무릅쓰고 성벽 근처까지 숨어든 참이었다.
총 세 번의 교대 중 밤새도록 두 번의 교대를 지켜봤으니 곧 있으면 오후 교대가 이루어질 터였다.
품에서 꺼낸 부적을 바닥에 놓은 구령이 주변을 살펴도 먹을 대신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자 제 엄지를 아드득 깨물었다.
빨갛게 피가 배어 나오는 엄지를 종이에 올린 그가 글자를 써 내려 가자 서방인들의 눈에는 꼭 그가 상형 문자라도 적는 것처럼 보였다.
곧 변變이라는 글자를 빼곡히 적은 노란 부적 세 장 위에 손을 올린 구령이 제 도력을 그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저 종이 쪼가리로 보이던 부적들은 도력을 얻으면서 금세 생기라도 도는 듯 푸른빛을 발했다.
"됐다. 이거라면 모습을 감출 수 있을 테지."
구령의 말에 리디아가 제 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던 슐츠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한 채 늘어지게 하품한 슐츠가 "다 된 건가요?" 하고 물었다.
"오냐. 대신 저 궁 안에 들어가는 건 너랑 나뿐이다."
나란히 서 있는 두 명의 경비병을 속이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두 명의 경비병을 만들어야만 했다.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왕을 알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신해야 했으니 그건 적어도 둔갑술을 쓸 수 있는 자신과 이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쥔 슐츠여야 했다.
"리디아와 흑구가 경비병의 모습으로 변해 길을 열어 주고 그사이에 너와 내가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왕을 만날 수 있을 만한 모습으로 둔갑하는 거지. 이해가 가느냐?"
"네. …그런데 정말 마력 감지기에 안 들킬까요?"
슐츠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리디아와 흑구의 배에 부적을 각각 한 장씩 붙이던 구령이 어깨를 으쓱 털었다.
"들키지야 않겠지만, 들키면 또 어떠냐?"
"작전이 또 있나요?"
눈을 반짝이는 슐츠의 물음에 구령이 입꼬리를 씩 끌어당겨 웃었다.
꼭 악당처럼.
"때때로 주먹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
"…네?"
"자, 되었다!"
구령이 큰 소리로 손뼉 치자 리디아와 흑구의 주변으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연기가 일었다.
콜록콜록 작게 기침하면서 손을 휘저은 슐츠가 곧 입을 헤 벌렸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리디아와 흑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저 멀리서 왕궁을 지키던 경비병의 모습을 꼭 닮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구령이 만족스러운 듯 코 밑을 검지로 쓱 문질렀다.
"얼굴까지 같으면 의심을 살 테니 내 나름대로 그 부분까지 신경 써 보았지. 어떻게… 그럴싸하지 않으냐?"
뿌옇던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드러난 두 사람의 얼굴에 기대로 반짝반짝 빛나던 슐츠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얼굴이면서 꼭 사람의 흉내를 낸 무언가처럼 기묘한 불쾌함을 자아냈다.
"어…."
"소공작님, 왜 그러세요? 이상한가요?"
리디아는 제 입에서 꼭 변성기가 막 지난 남자 같은 목소리가 나와 깜짝 놀랐다.
"이걸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슐츠의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한 걸 이상하게 여긴 흑구가 옆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 제 얼굴을 비춰 보고는 "악!" 하고 소리 질렀다.
분명 제가 아는 인간의 모습을 닮긴 닮았는데 너무나도 작위적인 형태에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끼쳐 올랐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제대로 변하지 않았느냐."
"으윽."
딱히 할 말은 없는 게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는 한 탓이었다.
파삭.
흑구를 따라 물웅덩이를 확인한 리디아가 절망하며 무릎을 풀썩 꿇어앉았다.
"…기분이 나쁩니다, 구령 님."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는 제 얼굴을 받아들이기 힘든 리디아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조금 더 미남으로 설정할 것을 그랬나?"
"아뇨.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이 모습은…."
리디아는 이 불쾌함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잘생기든 못생기든 그런 외적인 미의 기준은 중요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리디아의 궁극적인 목적은 슐츠를 안전하게 왕궁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구령이 변신시킨 저희의 모습에 과연 저 경비병들이 속아 줄지 의문이었다.
"꼭 생기다 만 밀랍 인형 같아요."
힘없이 축 늘어진 슐츠의 감상에 리디아가 바로 그거라면서 땅을 치고 통곡했다.
사실 구령의 눈에 서방인들이야 다 거기서 거기인 얼굴이었다.
죄다 코쟁이에 눈도 머리카락도 개성들이 넘치니 대충 그런 특성을 때려 부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면 속여 넘길 수 있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나름 고심해서 만든 모습을 가지고 기분이 나쁘다느니 생기다 만 인형 같다느니 하는 말들이 괘씸해 구령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잘만 만들어 주었구만. 흑구 너는 그 비실비실한 꼬맹이 모습보다야 지금이 훨씬 늠름하고 멋지다! 이대로 가거라!"
이를 바득바득 간 흑구가 구령을 흘겨봤다.
"이 망할…. 걸리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걸리긴 뭘 걸려? 시끄럽다!"
우중충한 얼굴로 왕궁에 향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슐츠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라도 걸렸을 때 그냥 쫓겨만 난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대로 저 둘이 끌려가 모진 처벌을 받거나 그레이엄 가문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는다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터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제 점이 된 두 사람을 살피는 슐츠의 옆에서 구령이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 댔다.
"너무 걱정 말거라. 흑구 저놈이 저래 봬도 할 때는 하는 녀석이거든. 너희 가문의 기사도 기백이 대단한 자더군. 우리를 무사히 저 안으로 넣어 줄 테니 믿고 기다려 보거라."
구령의 말대로 흑구와 리디아는 성벽을 따라 걷는 경비병 뒤에 기척을 숨긴 채 바짝 따라붙었다.
지금부터 교대하러 갈 생각에 벌써 지겹다는 둥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두 경비병의 뒤에서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순식간에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성벽 아래 갈라진 틈새로 끌어 내렸다.
"으으읍!"
절걱절걱 몸부림치는 경비병이 제 허리춤에 매달린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들보다도 빠르게 단검과 장검을 꺼내 든 흑구와 리디아가 각각 붙들고 있는 남자들의 드러난 목덜미에 시린 날을 갖다 붙였다.
조금 힘을 주자 파고든 날에 붉은 핏방울이 가련하게도 떨어져 푹신한 흙을 적셨다.
"조용히 해.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리디아의 나지막한 음성에 경비병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목에 대어진 칼날보다도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저희에게 익숙한 사람의 것과는 묘하게 달라 공포스러운 위화감을 자아냈다.
의도치 않게 경비병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데에 성공한 리디아와 흑구가 놈들의 뒷목을 때려 기절시키고는 그들의 몸을 나무 기둥에 꽁꽁 묶어 두었다.
그들이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얼굴을 감추고 보초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다가서자 입구에 있는 마력 감지기가 정전기라도 오른 듯 지지직 소리를 내며 짧게 진동했다.
"이게 왜 이래?"
경비병이 의아한 듯 마력 감지기를 퍽퍽 때리자 거대한 물건이 곧 잠잠해졌다.
"으이구. 하여튼 이렇게 때려야 말을 듣는다니까."
혀를 끌끌 차는 경비병의 앞에서 흑구와 리디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아꼈다.
그들은 곧 교대 일지에 서명하고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근무지를 벗어났다.
별다른 의심 없이 입구를 차지한 흑구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저 멀리 숨어 있는 구령과 슐츠를 향해 손짓했다.
인간을 크게 웃도는 드래곤의 시력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훤히 보였지만, 옆에 있는 리디아에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두 분이 어디 계시는지 보이시나요?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 눈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
눈썹 위에 손날을 붙이고 멀리 숲을 바라보는 리디아의 말에 흑구가 힘없이 헛헛하게 웃고 말았다.
"…산골 출신이라 그럴 거야."
"그러시군요. 저도 시골 출신이거든요. 그나저나 여기에 뭐 얻을 수 있을 만한 정보는 없을까요?"
경비병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듯한 작은 수납장을 발견한 리디아가 그 안을 거침없이 뒤지다가 곧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낡은 가죽 표지의 수첩에는 일자별로 왕궁을 드나든 사람의 목록과 그 목적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디아는 곧 왕궁의 입구까지 다가온 구령과 슐츠에게 제가 발견한 수첩을 내밀었다.
구령을 대신해 수첩에 적힌 목록을 살피던 슐츠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삼키자 울컥 흔들렸다.
"오늘 랜슬롯 한센 경이 국왕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방문한 모양입니다."
"아는 사이인가?"
"저는 그분을 뵌 적 없지만, 부모님과는 몇 번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본 경의 측근입니다. 자작 가문이었던 한센 가문을 후작까지 올린 것도 이본 경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남자가 왜 이곳에…."
필시 그레이엄 가문의 엄벌을 촉구하기 위해 국왕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침통해진 슐츠의 곁에서 이제 조금씩 눈에 익는 글자를 들여다보던 구령이 대수롭지 않게 콧김을 흥 뿜었다.
"이용해 먹을 수 있겠군."
그의 말에 리디아와 슐츠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눈치를 살폈다.
"내 너를 분명 왕의 앞으로 데려다주겠노라 약조하지 않았더냐. 어디, 이놈들의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때려 주러 가 보자."
슐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은 구령이 뒷짐을 진 채 모트왈 왕궁의 성문에 발을 턱 걸쳤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