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벼락의 통치자
마법 관련 클래스에는 꼭 하나씩 달려 있다는 자동 방어 스킬.
피지컬이 뛰어난 적에게 단번에 당하지 않도록 내구력을 보충해주는 방어막을, 리자드맨이 쓰고 있다.
양심이 없는 거 아닌가. 전사인데 전사 카운터 스킬을 갖고 있다니.
저놈이 들고 있는 무기가 사실 창이 아니라 스태프였던걸까? 그런 것치고는 근육이 미친놈처럼 붙었는데?
속성이 전기라는 점도 문제다. 내가 가진 내성 스킬 중에서 전기 속성을 커버하는 건 없다.
그리고 전격의 특성상 공격당하는 순간에 움직임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도 있고.
물론 맞아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긴 한데.
아무튼 일단 저 양심 없는 배리어를 파훼할 방법을 먼저 찾아보자. 분명 뭔가 제약이 있겠지.
-타다다닥!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리자드맨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인벤토리에서 짱돌 몇 개를 꺼내서 더 던졌다.
그나마 녀석의 속도가 별로 빠르지 않은 덕분에, 자유롭게 거리를 벌리고 견제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지직!
날아간 짱돌은 이번에도 전격에 격추당해 막히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몇 번이나 막을 수 있을지 볼까.
인벤토리에 넣어둔 짱돌의 숫자는 충분하다. 이번에는 한 번에 다섯 개의 작은 짱돌을 꺼내서 흩뿌리듯 던져 보았다.
다섯 개의 짱돌 중 세 개가 격추되고, 나머지 두 개는 그냥 빗나갔다.
하지만 사실 가만히 있었어도 제대로 맞는 짱돌은 두 개 뿐이었을 거다. 일부러 그렇게 던졌거든.
맞아도 별 위협이 안 될 짱돌을 굳이 막은 걸로 봐서는 수동이 아니라 자동으로 작동하는 스킬인 것 같고.
가만 둬도 맞지 않았을 짱돌까지 요격한 걸 보면, 배리어가 작동하는 간격도 대충 알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 배리어도 무한히 유지되는 건 아니겠지.
시간 제한 방식일까, 아니면 횟수 제한 방식일까, 아니면 MP가 바닥나기 전까지 유지되는 토글형 스킬일까.
스피드 차이 덕분에 어차피 선공권은 나에게 있다. 시간을 들여 하나씩 밑천을 벗겨 내 보자.
-후웅!
이번에는 짱돌이 아닌 방패를 던졌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만큼 같은 투척 공격이라도 위력은 큰 차이가 난다.
쏜살같이 날아든 방패를 향해 리자드맨의 전격이 충돌했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패가 튕겨 나갔다.
짱돌처럼 산산조각이 나는 게 아니라 전격에 맞아 튕겨 나가는 정도인가.
배리어가 내뿜는 전격의 위력은 투사체의 종류나 위력에 관계없이 일정한 것 같다.
-케륵!
일방적으로 뭔가를 던져대는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달려드는 리자드맨.
나는 인벤토리에서 예비 방패를 꺼내 착용하고, 장검을 내세운 채 맞서 달려들었다.
배리어의 작동 간격이 내 예상대로라면, 베기가 아닌 찌르기 공격으로 파훼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단골 스킬인 돌격기, 소드 차지를 사용해 놈의 심장 부근을 노렸다.
내가 계속해서 얍삽하게 원거리 공격을 할 거라 생각했는지, 리자드맨의 표정에 당황이 어렸다.
반격을 상정하지 않고 있던 리자드맨을 상대로 날린 완벽한 찌르기 공격, 이건 무조건 통한다.
-파지직!
그러나 내 소드 차지는 허공을 갈랐다. 정확하게는, 번쩍이는 번개 이펙트를 뚫고 지나갔다.
번개로 변한 리자드맨은 그대로 내 공격을 흘려버리고는, 배후를 잡은 채 창을 내찔렀다.
이런 시발, 너 설마 물리 면역이냐?
**
등 뒤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창을 직감에 의존해 피해 내고, 재빠르게 도약해 자세를 바꿨다.
[직감 Lv.8]
직감 스킬은 지금처럼 시야 바깥에서 공격이 날아올 때, 특유의 간질거리는 감각으로 경고해 준다.
레벨이 낮을 때는 무슨 스킬인가 싶었지만, 8레벨에 도달한 지금은 이만한 사기 스킬이 없다.
상급 전사 리자드맨들을 상대하면서 등 뒤에 눈깔이 달렸나 싶었던 순간이 잔뜩 있었지.
그런데 이젠 내가 등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움직일 수 있다.
-촤악!
찌르기가 빗나가자 빠르게 태세를 바꿔, 횡으로 창을 휘두르는 리자드맨.
공격 방식의 전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실력으로도 빨간 띠를 두른 상급 리자드맨에 전혀 뒤지지 않겠어.
창대를 휘두르는 공격 정도는 그냥 맞아주고 반격해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냥 회피했다.
전격을 쓰는 놈이니까, 저 창대에도 전기가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그보다, 이런 지근거리에서 격투를 벌여도 되는 상대가 아니다. 자칫하면 배리어의 간격에 들어간다.
나는 허리춤에 메어 뒀던 손도끼를 집어던지며, 땅을 박차 거리를 벌렸다.
"후우."
시발, 존나 깜짝 놀랐네. 방금 그건 대체 뭐였던 거지.
해적 만화에서 나오는 자연계 열매 능력자도 아니고, 번개로 변해서 공격을 피하다니.
진짜 그런 거라면 아예 공략이 불가능한 거 아닌가, 그 만화는 주인공이 고무라서 이겼던 거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진짜 물리 면역은 아니겠지. 분명 뭔가 제한이 있는 회피 스킬일거다.
연속 사용이 불가능하거나, 횟수에 제한이 있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있겠지.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배리어다. 일정 간격 안에 들어가는 순간 감전될 가능성이 있으니, 뭘 할 수가 없다.
"무기를 바꿔 볼까."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리자드맨이 쓰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창을 꺼냈다.
[초급 창술 Lv. 8]
마침 이럴 때를 위해 창술을 배워 놨거든.
**
본격적으로 상급 전사 리자드맨들과 투닥거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곧 무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리치가 근접 전투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리자드맨들은 검이며 방패며 도끼며 망치며 온갖 무기를 사용했지만,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창이었다.
그렇잖아도 리자드맨들은 하나같이 2m에 달하는 키를 가진 굉장한 떡대들.
신체 조건도 우월한 놈들이 무기까지 더 긴 걸 쓰면서 간격을 유지하니, 보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그 덕분에 억지로 인파이팅을 거는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아무튼 검이라는 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때마침 검술의 성장도 더뎌진 김에, 검 이외의 다른 무기도 써보기 시작했다.
그 첫 타자가 바로 창이었다.
마침 내게는 아주 훌륭한 교관들이 있었다. 리자드맨들이 가장 많이 쓰는 무기가 창이었으니.
직접 창을 맞대며 실전 형식으로 창술을 익혀 갔고, 결국 창술 스킬을 얻어 8레벨까지 성장시켰다.
창 뿐만이 아니다.
창에 익숙해진 후에는 도끼나 둔기를 다루는 법도 익혔고, 아예 무기 없이 방패만 써서 싸우는 방법도 익혀 냈다.
여전히 가장 잘 다루는 건 검과 방패 조합이지만, 이제 나는 대부분의 무기술에서 리자드맨 상급 전사를 능가한다.
클래스는 그냥 전사지만, 나는 사실상 웨폰마스터나 다름없다.
마스터라고 하기에는 죄다 초급 수준을 못 벗어나긴 했지만, 3층에서 이 수준이면 훌륭하지.
내가 리자드맨 특유의 창술 자세를 취하자, 하얀 리자드맨은 놀란 듯이 창을 고쳐 쥐었다.
-후웅!
당황하고 있는 놈에게 먼저 달려들어 창을 내질렀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반응이 느리다.
전기 배리어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며, 아웃복싱을 하듯 창술을 구사한다.
이 놈도 창술 실력은 상당한 듯 보였지만, 묘하게 순간순간 허술한 점이 엿보였다.
"아하, 이제 좀 알겠네."
창술을 익히면서 알게 된 건데, 리자드맨의 창술에는 나름의 품새 내지는 초식 같은 게 있었다.
짬밥을 많이 먹은 리자드맨일수록 초식을 구사하는 게 부드럽고, 동시에 그 사이사이의 빈틈을 잘 메운다.
하지만 이놈은 사기적인 번개 배리어 때문인지, 초식을 벗어난 동작을 취할 때 방어가 많이 흐트러진다.
-파지직!
그리고 그 틈을 노려 공격을 날리면, 조금 전의 번개로 변하는 회피기를 사용해 위치를 바꾼다.
창술의 빈틈을 경험이 아닌 스킬로 메우는 방식.
하지만 그것도 이렇게 몇 번이나 보니까 그것도 패턴이 드러난다. 장기전은 처음인 모양이지?
-촤악!
회피기를 사용해 내 배후를 잡은 리자드맨의 위치를 예측하고, 뒤로 돌면서 검을 휘둘렀다.
모처럼 다양한 무기술을 익혔는데, 전투 도중에 장비를 바꿔 빈틈을 찌리는 수법을 안 쓰면 아깝지.
번개로 변하는 회피기의 연속 사용 횟수는 이미 간파했다. 놈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베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손도끼를 던졌을 때, 전격 배리어의 약점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배리어의 작동 범위에 들어갔을 때 쏘아지는 전격의 위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것.
안 그래도 전기 속성 내성도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파지지직!
배리어의 간격에 들어가자, 쏘아진 전광이 몸을 관통한다.
확실히 찌릿찌릿하긴 한데,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창을 내던지고 허리춤의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목을 노리고 단검을 쑤셔 박으려던 순간. 리자드맨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동안 리자드맨과 워낙에 많이 싸웠다 보니, 이 일그러진 표정의 의미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저건 웃음이다.
그냥 기뻐서 웃는 게 아니라, 자신이 준비한 노림수에 상대가 그대로 걸려들었을 때 나오는 비웃음.
"이런, 씹."
빛나는 벼락이 내 주변을 휘감는다. 딱 보니 알겠다. 나를 제압할 수 있는 비장의 수를 숨겨두고 있었군.
나를 둘러싼 번개는 고리의 형태를 이루더니, 그 안쪽에 자리한 나를 향해 벼락을 퍼부었다.
-파지지지직!!
손에서 단검을 놓쳤다. 통증은 별로 없지만, 전신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린다.
전격을 통해 범위 안에 들어온 상대방을 마비시켜 제압하는 스킬인가. 근접 전사에겐 최악의 카운터 기술이다.
하얀 리자드맨은 전기에 지져지며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향해, 특유의 비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다가왔다.
-케르륵, 케륵!
내가 떨어트린 단검을 주워들고, 어디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라는 듯 번쩍 들어 올렸다.
저 놈도 이 마비 함정이 전사들간의 싸움에서 얼마나 사기적인 스킬인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대놓고 빈틈을 드러내고 있는 거겠지.
근데, 도마뱀 새끼야.
내 마비 내성 레벨이 몇이게?
-푸욱!
인벤토리에서 꺼낸 새 단검이 리자드맨의 목을 꿰뚫고, 크리티컬 이펙트를 터트렸다.
전기 속성에 당해본 적 없어서 조금 경계하긴 했는데, 결국 마비는 부가 효과에 불과하다는 거겠지.
마비독을 포함한 온갖 독을 칵테일로 쑤셔 박으며 키운 내 내성을 뚫고 효과를 낼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뭐, 3층 필드 보스 수준이라면 당연한 거겠지.
[마비 내성 Lv. 11]
두 자릿수 레벨의 내성 스킬이, 고작 이 정도에 뚫릴 리가 있나.
경계했던 전격 배리어도, 회피 스킬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니 죄다 겉만 화려한 거품이었다.
"이름이 뭐, 벼락의 통치자?"
이딴 수준으로 뭘 통치하겠다고, 좆밥 도마뱀 새끼가.
#31. 전진
크리티컬로 모가지를 팍팍 쑤셔진 리자드맨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강한 몬스터는 죽은 뒤에도 한동안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목에 구멍을 숭숭 뚫어놨어도, 사실 죽지 않고 살아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 물론 이놈은 지금 죽은 게 맞다.
어떤 리자드맨 한 마리가 죽은 척하고 나를 기습했던 적이 있어서, 꾸준히 확인사살을 하는 버릇을 들여 놨거든.
그것도 워낙에 많이 하다보니, 이제 리자드맨에 한해서라면 굳이 찔러보지 않아도 죽었는지 아닌지는 대충 구별이 된다.
[퀘스트 완료 : 유적의 보물을 찾아서 - 탐사대장 윈저]
애초에 퀘스트도 완료됐고, 필드 보스 클리어 메시지와 보상도 전부 들어왔다.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구라를 칠 리는 없으니까, 굳이 죽었는지 어땠는지 확인해 볼 것도 없지.
[퀘스트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목표 달성 보상 : '라이트닝 차지 Lv.1' 을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이 새로운 벼락의 통치자입니다.]
필드 보스 보상은 별것 없었고, 퀘스트 보상도 스킬 하나를 빼면 크게 대단할 건 없었다.
새로운 장비 아이템을 얻긴 했는데, 최대 강화 수치 기준으로 봐도 원래 내 최고 장비랑 큰 차이가 없는 물건이었다.
애초에 지금 끼고 있는 방어구며 무기며 하는 것들부터가 전부 다 내구도만 높은 잡템 세트다.
특별한 옵션이 붙은 장신구 계열은 좋은 걸로 착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제 아이템에는 딱히 집착하지 않는다.
유니크 등급 이상의 물건이라면 좀 혹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스펙도 충분히 오버 스펙이라서.
아이템 이외의 수확은 새로 달성된 업적 보상 정도일까.
[업적 달성 : 벼락의 통치자]
[업적 보상 ' 지능+5' 을 획득하셨습니다.]
네 가지 스탯 중에서 가장 수치가 낮았던 지능이 한번에 5가 올랐다.
마법사 클래스가 아니라서 지능 수치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늘어나서 나쁠 건 없지.
전사 클래스라고 해도, 스킬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MP의 총량은 지능 수치의 영향을 받으니까.
아무튼, 결국 이번의 가장 큰 수확은 [라이트닝 차지]라는 스킬이 될 것 같은데.
차지 스킬이라면 역시 그거겠지, 무기에 속성 효과를 부여하는 거.
리자드맨의 시체에 박아 놨던 단검을 뽑아서, 스킬을 사용해 봤다.
[라이트닝 차지]
단검 위로 잠시 푸른 스파크가 번쩍 튀는 듯싶더니, 이내 곧 가라앉았다.
뭐지, 써진 거 맞나.
상태창에 보이는 MP가 줄어든 걸 보니 작동하긴 한 모양인데, 생각보다 이펙트가 너무 심심한데.
아직 1레벨이라서 그런 걸까, 겉으로만 안 보이고 지금 단검에 전기가 흐르고 있는 건가?
흠, 주변에 잡몹이라도 있었으면 대충 잡아와서 함 쑤셔 보는 건데.
이거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다가 시험해 봐야겠구만.
독 내성 스킬의 성장이 멈춘 이후, 한동안 안 했던 건데.
-푸욱!
그렇게 나는 주저앉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단검으로 쑤시기 시작했다.
**
상처가 난 허벅지에 포션을 부어 치유하고, 단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좆구린데."
한 시간 정도 꾸준히 시간을 들여서 내 몸에다 시험해 본 결과, 이 스킬은 폐급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일단 스킬의 기본 사양은 MP가 바닥날 때까지 유지할 수 있는 토글형 버프 스킬.
지속 효과로 장착하고 있는 무기류 하나에 한해서 전기를 흐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기의 위력이 아주 형편없었다. 마비 효과가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추가 데미지가 전혀 없다.
아무리 1레벨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냥 두꺼운 스웨터를 벗을 때 나는 정전기 정도밖에 안 느껴질 줄이야.
심지어 그런 주제에 연비까지 구리다. 중간중간 껐다 켜기를 반복했는데도 MP가 반 이상 소모되었다.
내 레벨에 한 시간 정도 썼다가 말았다 한 수준으로 MP통이 반 토막 날 정도의 연비라니.
평균적인 3층 도전자라면 얼마 유지하지도 못 할 거다. 게다가 마나 포션은 소모품 중에서도 비싼 편인데.
위력이 구려도 속성 내성을 기르는 용도로 쓸 수 있으면 괜찮겠는데, 너무 약해서 내성 스킬도 딱히 안 생기는 것 같다.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완전 계륵이다.
당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나한테 몇 없는 액티브 스킬이라 계속 쓰면서 레벨을 올리긴 해야 한다.
"다른 차지 스킬도 다 이런가?"
허벅지가 다 나은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했다. 간만에 커뮤니티를 들어가 봐야겠다.
성장시킬 가치가 있는 스킬인지, 나 같은 일반 전사가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인지.
전사 클래스한테 안 맞는 스킬이라면, 버려야지 뭐. 인제 와서 클래스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니.
-시련의 탑 오픈 커뮤니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렇게 정보 검색을 위해 켠 커뮤니티는, 어째서인지 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피셜) 4회차 페스티벌 이벤트 확정]
**
오픈 커뮤니티의 글 리젠 속도는 원래도 빠른 편이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와시발 페스티벌 진짜 열리네]
[씨발 4차 페스티벌 개쎾쓰ㅅㅅㅅㅅㅅㅅ]
[페스 기간 정확히 나왔음?]
[그럼 메테오스톤 복각임?? 시세 떨어지냐?]
[페스티벌 던전은 예전이랑 똑같이나오는거?]
[2차 페스때 던전 정보 다 공유함]
대형 업데이트 공지가 뜬 게임 커뮤니티랑 비슷한 분위기다. 공통 키워드는 페스티벌.
시련의 탑에 페스티벌이라는 이벤트가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페스티벌은 대충 3년 주기로 열리는 서버 공통 이벤트로, 각기 다른 탑의 도전자들이 만나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다.
공용 필드로 이동한 도전자들끼리 협력해서 던전을 깨고 보상을 얻을 수 있고, 페스티벌 한정 장비를 파밍하는 시스템.
나도 1층에 처박혀 있을 적에는 이 페스티벌이 탈출의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많은 기대를 걸었었는데.
얼마 안 돼서 이벤트 참가 최소 조건이 1층 클리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멘탈이 많이 흔들렸었지.
내가 시련의 탑에 들어온 게 천지개벽 이후로 10년이 되는 해였고, 들어와서 대충 일 년 반이 지났지.
그럼 슬슬 때가 되긴 했네.
[근데 페스티벌에 진혁이 오냐?]
끝임없이 갱신되는 페이지를 새로고침 하다가 눈에 들어온 글 하나.
아니,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지.
게시글을 열어 보니, 비슷한 관심을 가진 도전자들의 댓글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허 참, 이거 완전 전설의 포켓몬 취급이네.
좋은 성장 기회이니만큼 당연히 참가하기는 할 건데, 괜히 어그로 끌리지 않게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많은 도전자들이 나를 호의적으로 봐주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도전자들도 분명 있을 테니까.
내가 같은 층수의 도전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센 건 맞지만, 고층 도전자나 랭커들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부족할 거다.
괜히 스펙 높은 미친놈이 나를 고깝게 봐서 시비를 걸어오면, 소속된 길드나 집단도 없는 나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아니다, 하나 있긴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소란스러운 커뮤니티 창을 꺼 버렸다.
스펙 높은 미친놈이 시비를 걸 게 걱정되면, 누가 덤벼와도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내가 강해져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실력 향상을 목표로 한 폐관 수련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팍팍 층수를 올리며 전진해 스펙을 올리면 그만.
"가볼까."
할 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이 탑의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
보스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떠오르는 여러 줄의 메시지.
[이종족의 언어를 습득한 천재 학자, 카라만타는 자신의 친우가 된 리자드맨에게 물었다.]
[전사 종족의 지도자가 어째서 제사를 관장하는 주술사인가?]
[리자드맨은 대답했다, 너는 그들이 어떤 무서운 주술을 부릴 수 있는지 모른다고.]
저 너머에는 요란한 제사상을 차린 주술사 리자드맨이 벌벌 떨며 주문을 읊고 있었다.
[BOSS - 최고위 주술사 알케만]
꽤 늦게 정립된 최신 공략에 따르면, 입장하자마자 저놈을 공격하면 외우고 있는 주문을 멈출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소환되는 고대 리자드맨 전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한 층 난이도가 하락하는 특수 기믹이라나.
그리고 내 투척술이라면 단번에 공격을 성공하고 주문을 멈출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가만히 서서 주문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케르륵! 케르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자드맨 주술사의 손에 들린 스태프가 빛났다.
보랏빛의 오묘한 빛이 넘실거리자, 제단에 놓여 있던 뼛조각들이 저절로 일어서며 살이 붙기 시작했다.
[BOSS - 가장 위대한 도끼잡이 가투낙]
[BOSS - 가장 노련한 창잡이 로페고탄]
[BOSS - 가장 날카로운 활잡이 하프락]
[BOSS - 가장 굳건한 방패잡이 이텔]
어깨에 보라색 띠를 달고 있는, 상급 전사를 능가하는 리자드맨의 영웅들이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부족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영웅을 모조리 불러낸 주술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절대 패배할 리가 없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눈빛.
"다 했냐?"
그러나 놈이 보고 있는 내 눈에 담긴 확신은, 그보다 몇 배는 선명하리라.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3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32. 전야
리자드맨 영웅들은 확실히 매우 강했다.
하나하나가 무기를 자신의 신체보다 자유롭게 다루고 있었고, 힘을 합친 연계 기술도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3층에서 장기간의 폐관수련을 거친 내 실력은 이미 그들보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승리하고, 별 볼 일 없는 클리어 보상을 챙긴 뒤 4층에 진입했다.
나는 이미 스펙과 실력 모두 4층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고, 실제로 4층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모두 내 적수가 못 됐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쉽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4층에는 몬스터보다 훨씬 좆같은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저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빌어처먹을 태양이었다.
"씨이이발, 더워 뒤지겠네."
4층의 메인 테마는 사막이었다. 그것도 밤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더위의 사막.
여관에 자빠져 있건, 사냥하러 돌아다니건, 온종일 폭염의 더위에 시달리며 괴로워해야만 했다.
심지어 몬스터도 죄다 화염 속성 공격을 하는 놈들이었다.
종류는 고블린이나 코볼트나 리자드맨처럼, 여태껏 탑을 올라오며 봤던 몬스터들의 팔레트 스왑 버전.
패턴은 예전에 봤던 것들과 별로 다를 것 없고, 그냥 불덩이를 던지고 뿜어내는 능력이 더해졌을 뿐이었다.
당연히 실력을 키우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되지 않고,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더워져서 짜증만 난다.
심지어 화염 내성은 이미 3층에서 올릴 대로 올린 상태여서, 더더욱 얻어갈 게 없었다.
"더위 내성 같은 건 없나."
조금 전에 쓰러트린 필드보스의 잔해를 밟으며 혼잣말로 푸념했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런 내성 스킬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마 화염 내성이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겠지.
오픈 커뮤니티의 공략글에서 위험하다고 언급했던 탈수 증세가 전혀 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뚝, 뚝.
더위를 식히고자 옷 안쪽에 집어넣은 얼음조각이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녹아 흘러내린다.
지금 내 몸이 거의 철판 수준의 온도로 달궈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뜨거운데도 체온은 뜻밖에 큰 변화가 없고, 이제껏 딱히 더위를 먹은 적도 없으니.
화염 내성 스킬이 더위에서 몸을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겠지. 정신은 안 지켜주는 모양이지만.
"이제 그냥 올라갈까."
이번 필드보스를 쓰러트린 것으로, 4층에서 챙길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챙긴 상태다.
사막을 횡단하는 캐러밴을 호위하는 퀘스트가 아직 남긴 했는데, 그건 보상이 별 거 아니니까 넘겨도 될 것 같고.
중대형 보물상자는 4층에 넘어온 첫날에 거의 다 털어먹었으니, 남은 건 골드나 강화재료를 얻을 수 있는 소형뿐.
나머지 퀘스트와 몬스터를 싹싹 긁어먹어도 이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울 거다.
"넘어가자."
4층에 진입한 지 오늘로 나흘째, 필드를 모조리 평정한 나는 곧바로 보스를 잡으러 향했다.
**
4층의 보스 몬스터는 불 뿜는 도마뱀 괴물인 샐러맨더였다.
맨날 두 발로 걷는 도마뱀 인간을 보다가, 평범하게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도마뱀을 보니 위화감이 엄청났다.
샐러맨더의 주요 패턴은 화염방사와 화염구 투척, 그리고 불타는 이빨로 깨무는 공격 등이었다.
이미 화염 내성을 굉장히 높게 올린 나한테는 그냥 맞아줘도 큰 문제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2페이즈가 되면 전신을 불로 휘감고 달려들어 덤벼드는데, 공격 방식이 너무 단순해서 그냥 다 피해버렸다.
아마 평범한 4층 도전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보스였을 텐데, 나와는 상성이 너무 나빴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4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얻은 건 아이템에 화염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샐러맨더의 영혼석].
속성 부여라고 하면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추가되는 속성 데미지의 수치는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고층에 올라가면 이보다 좋은 부여 아이템을 쉽게 얻을 수 있다나.
그래서 그냥 갖고 있는 잡템에다가 쓰고 치워버렸다.
최대 기여도 보상은 무려 [화염 내성] 스킬이었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그 스킬 맞다.
이미 있는 스킬을 주면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는데, 원래 갖고 있던 내성과 통합되면서 레벨이 하나 올랐다.
최후의 일격 보상은 [샐러맨더의 눈]이라는 스태프, 마법사 템이라 그냥 인벤토리에서 썩을 예정이다.
처음에는 페스티벌 기간에 다른 도전자한테 팔아버릴까 생각했는데, 이벤트 맵에서는 거래가 안 된다더라.
그 맵에서 거래할 수 있는 건 오직 이벤트 관련 재화와 아이템뿐이라나.
여러 편법과 꼼수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거래하는 방법이 있다고 커뮤니티에 올라오긴 했었는데.
자세히 읽어 보니 그것도 솔플러인 나한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어디 쓸 데가 있으려나."
**
4층에서 얻은 영혼석과 스태프는 5층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5층의 메인 테마는 4층의 정반대인 설원이었고, 추운 설산 지대에서 두 아이템은 큰 도움이 되었다.
부싯돌 용도로.
착용 제한 때문에 장착할 수는 없었지만, 스태프 끝에 달린 빨간 장식을 세게 두드리면 불씨가 튀더라고.
뭐든간에 타는 재질로 땔깜을 준비하고, 스태프로 좀 두들기면 금세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고, 화염 속성을 부여한 단검도 손난로 대용으로 아주 적절했다.
5층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4층보다는 성의가 있는 편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똑같이 냉기 속성만 부여된 재탕 몬스터였지만, 드문드문 새로운 몬스터가 나왔다.
상당히 강력한 얼음 공격을 하는 설원 눈토끼라거나, 하얀 오랑우탄처럼 생긴 설원 트롤이라거나.
특히 설원 트롤 놈들이 내 마음에 아주 쏙 드는 몬스터였다.
트롤은 덩치가 좀 큰 것 빼고는 인간이랑 거의 구조가 비슷하고, 재생능력이 유독 뛰어난 몹이었는데.
그 특성 덕분에 맨손 기술의 연습대로 쓰기 딱 좋았다.
아니 글쎄, 내 주먹으로 30분을 후드려 까도 안 죽더라니까?
아, 물론 중간부터는 죽여달라는 듯 울부짖긴 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일주일 동안 박투술 스킬을 2레벨이나 올릴 수 있었다. 그래플링 기술도 많이 늘었고.
하지만 그래도 결국 짐승 계열인지라, 연습할 수 있는 기술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트롤을 제외하면 다 고만고만한 몬스터들이고, 4층과 마찬가지로 얻어갈 수 있는 건 초반에 다 챙겼다.
이 지역의 퀘스트와 히든 요소는 마법사를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특별히 더 파헤칠 것도 없다.
"넘어가자."
나는 이렇게 2주 만에 설원을 평정하고 다시 보스를 잡으러 떠났다.
**
5층의 보스는 설원 트롤을 거대화시켜놓은 것처럼 생겨먹은 예티였다.
그렇다고 정말 트롤이랑 하는 짓까지 똑같은 건 아니었고, 상당히 지능적인 면이 엿보이는 놈이었다.
패턴은 얼음 몽둥이 휘두르기랑, 마법 고드름 발사하기, 그리고 땅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지랄하기가 있었다.
무식하게 큰 예티의 덩치와 맞물린 얼음 몽둥이 공격은 대단한 범위를 자랑했지만, 궤적이 너무 뻔했다.
고드름 발사는 위력은 상당했지만, 리자드맨의 화살 공격과 비슷한 속도여서 그냥 피할 수 있었고.
땅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지랄하는 패턴은, 보스를 잡은 뒤 커뮤니티에 검색해 본 뒤에야 뭔지 알 수 있었다.
"아, 그게 마비 유발 광역기였구나."
마비 내성이 높아서 그냥 씹어버렸는데, 커뮤니티 도전자들의 말로는 의외로 위험한 패턴 중 하나라고 한다.
공격이 죄다 범위가 넓고 위력이 강한 편이니, 잠깐이라도 마비에 걸리면 좆될 수 있긴 하겠네.
정석 공략법은 원거리 딜러들이 패턴 범위 바깥에 자리잡고, 소수정예 탱커진이 예티의 어그로를 완전 마크하는 것.
마비에 걸려서 공격을 허용하게 되어도, 최소 한 대는 버틸 수 있는 스펙의 탱커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그딴 거 다 좆까라 하고 들이박아서 인파이팅으로 죽여버렸지만, 원래 솔플은 그런 법이지.
5층 클리어 보상으로 얻은 건 둔기로 분류되는 [예티의 얼음 몽둥이]와, [예티의 털가죽 망토]였다.
몽둥이 쪽은 고블린 로드의 도끼처럼 무식하게 커다랗고 공격력이 높은 둔기였고.
털가죽 망토는 냉기 속성 저항력을 올려주는 옵션이 붙은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쏠쏠하게 좋은 옵션이긴 한데, 아이템으로 속성 저항을 챙기면 내성 스킬 성장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몽둥이와 함께 장착한 다음, 업적 달성 보상만 받은 뒤 인벤토리에 처박아 뒀다.
[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예."
이렇게 한 달도 안 걸려서 4층과 5층을 클리어하고, 나는 6층으로 진입했다.
**
약간의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빛에 휩싸이고, 다음 순간 나타난 또 다른 세계.
6층 지역 초입은 지금까지 지나온 지역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진짜 실내네."
벌써 미궁 지역에 들어온 것처럼, 빛이 들지 않는 꽉 막힌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오픈 커뮤니티에 알려진 대로라면, 6층 지역은 전체가 전통적인 형태의 미궁이라고 한다.
미노타우로스, 스켈레톤, 좀비, 슬라임. 그런 다양한 몬스터가 나온다고 했었지.
- 시련의 탑 오픈 커뮤니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세한 정보를 찾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커뮤니티를 열었다. 그러자 첫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소식.
[속보) 4차 페스티벌 날짜 확정]
시련의 탑 도전자들이 모이는 대규모 이벤트, 페스티벌까지- 앞으로 한 달.
#33. 시련의 탑 6층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니, 그새 이번에 열리는 페스티벌에 대한 정보가 많이 풀려 있었다.
듣기로, 이번 4번째 페스티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에 대해서 그동안 갑론을박이 많았다고 한다.
3년전에 열린 페스티벌이 '그랜드 페스티벌' 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가 함께하는 큰 규모로 열렸기 때문이라는데.
이번 페스티벌이 그때와 같은 '그랜드' 일지, 아니면 같은 나라끼리만 연결되는 일반 페스티벌일지로 많이들 싸웠다나.
그리고 정보가 풀린 지금, 가려진 승자는 후자였다.
이번 4번째 페스티벌은 지난 1차와 2차 때와 같은 형식의 일반 페스티벌이었던 거다.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어쨌든, 페스티벌 이벤트에서 주목할만한 요소는 총 네 가지.
첫째는 파티를 맺어 도전할 수 있는 스페셜 미니 던전, 이걸 통해서 이벤트에 쓰이는 주요 재화를 파밍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는 재화를 통해 교환할 수 있는 이벤트 한정 아이템, 커뮤니티에서 말이 많은 '메테오스톤' 장비다.
메테오스톤 장비는 이벤트가 아니면 아예 습득할 수 없는 소재의 특수 장비로, 착용 제한이 없으면서 매우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나는 이제 장비 아이템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구할 방법이 극도로 한정된 장비라니까 좀 흥미가 간다.
한정이라는 단어는 정말 여러모로 매력적이란 말이지.
그리고 셋째로, 도전자들끼리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배틀 토너먼트 대회가 있는데- 이건 별 관심 없다.
나는 동레벨의 다른 도전자에 비해 더 강할 뿐, 시련의 탑에 처박혀 몇 년을 지낸 진짜 랭커들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물론, 탑에서 나가자마자 최소 A급의 자리가 약속된 최상위 랭커들은 양심상 토너먼트에는 안 나온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작 50레벨의 노말 클래스 전사가 비벼볼 틈은 없겠지.
마지막으로 넷째, 다른 서버의 생산직 도전자들을 통한 간접 거래와 아이템 수입이 있다.
시련의 탑 도전자들이 가질 수 있는 클래스에는 전투와 관련이 없는 생산직 클래스도 존재한다.
블랙스미스 스킬을 가진 대장장이라던가, 포션 제조 스킬을 가진 연금술사라던가, 장신구를 제작할 수 있는 세공사라던가.
이런 생산직 도전자들이 만드는 장비는 일반 드랍템이나 상점제 아이템보다 성능이 월등하다.
그리고 이런 생산직 클래스가 가진 공통 기능 중 하나로, 주문 제작이라는 것이 있다.
별 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서 재료를 받고 강화나 아이템 제작을 대신 해 주는 시스템인데.
주목할 만한 점이, 거래가 불가능한 이벤트 맵에서도 이 시스템은 그대로 작동한다는 거다.
재료만 있으면 다른 서버의 장인급 생산직이 만든 최고급 장비를 얻어오는 게 가능하다는 뜻.
그리고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강화재료와 골드 같은 건 차고 넘칠 만큼 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 접선만 잘하면, 평생 쓸 수 있는 아이템을 마련해서 올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내가 몇 년째 사람이랑 말을 섞어본 적이 없는 사회력 제로의 엠생이라는건데.
"음..."
어디서 NPC라도 하나 데려다 놓고, 대화하는 법을 연습해 두는 게 좋으려나?
**
생각을 정리한 뒤 오픈 커뮤니티를 끄고, 일단 6층 공략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대화 연습을 하려고 해도, 정상적인 NPC가 없다고 알려진 6층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6층은 지역 전체가 거대한 미궁으로 이뤄진 장소.
살아있는 사람보다 언데드가 더 많고, 나타나는 NPC들도 오랫동안 미궁을 헤매느라 맛이 간 놈들뿐이라고 한다.
확실히 6층은 제정신으로 오래 체류하기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았다.
"좆같긴 하네."
아직 몬스터나 함정 같은 건 마주치지 않았는데, 벌써 기분이 엿 같다.
가볍게 숨만 쉬어도 썩은내가 코끝을 찌른다. 냉장고에서 두 달쯤 방치해서 곰팡이가 난 음식 냄새다.
거기에 여기저기 기분 나쁜 모양의 얼룩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얼룩에 가까이 가면 또 색다른 썩은내가 났다.
비둘기들이 쪼아먹는 취객의 토사물에서나 날 법한 냄새, 그리고 드문드문 섞인 피 냄새.
그동안 워낙 많이 구르고 깨지고 했다 보니까, 피 냄새 하나만큼은 잘 구분이 된다.
-그르르...
그렇게 몇 분간 걷다가, 드디어 첫 번째 적을 만났다.
미궁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썩은내의 근원, 걸어 다니는 시체인 좀비 무리였다.
역겹게 생겼다는 이야기는 커뮤니티에서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건 상상 초월이다.
왜 도전자들이 최악의 층 중 하나로 6층을 꼽았는지 알 것 같네.
으 씨발, 저 눈깔 덜렁거리는 것 좀 봐.
심지어 좀비 각각의 부패 진행도와 손상 부위가 조금씩 달라서, 전부 개성적으로 징그럽다.
꼴보기 싫어서라도 빨리 죽여서 치우든가 해야지 원.
-타닥!
검과 방패를 들고 좀비 무리 사이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저 정도는 맨손으로도 충분할 것 같지만, 저런 것들이랑 육탄전을 하고 싶지는 않다.
-빠각!
방패를 휘둘러 맨 앞에 있던 놈의 머리를 박살 내버리고, 검을 뻗어 그다음 놈의 목을 뚫어버렸다.
어디서 본 내용이었는데, 사람의 오감 중 가장 빨리 지치는 게 후각이라던가.
좀비 두 놈을 눕혀버린 시점에서 내 후각은 반쯤 마비되어, 더 이상 썩은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촤악!
좀비 두 놈의 모가지를 더 썰어버리고, 터져 나오는 크리티컬 이펙트를 넘어서 후방에 선 마지막 한 놈을 노렸다.
소드 마스터리 숙련도도 높여야 하니까, 이번에는 일부러 스킬을 썼다.
검을 십자 모양으로 두 번 휘두르는 2연격 스킬, 더블 슬래시.
스킬의 발동과 함께, 검신이 빛나고 몸이 멋대로 움직여 공격 동작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좀비의 이상한 모습.
좀비의 목 부분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자세도 마치 뭔가를 토해내려는 듯 보였다.
이런 시발, 설마, 아니지?
-구웨에에에에에엑!!!
"야 이 씨발!"
좀비의 목구멍에서 막대한 양의 피가 분수처럼 쏘아졌다.
**
커뮤니티에 정리된 6층 몬스터 일람표에 이런 패턴을 쓰는 녀석은 없었다.
아마 이것도 나 혼자뿐인 이 탑에서만 볼 수 있는, 진즉에 씨가 마른 수량 한정 유니크 몬스터겠지.
근데 이게 시발 오락실 고전 총게임도 아니고, 왜 혈사포를 쏘고 지랄이야.
-촤자작!
대체 그 몸 어디에서 그런 피가 튀어나오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피의 양.
이미 스킬 모션을 일으켰던 나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피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좀비들이 풍겨대던 엿 같은 썩은내와 피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찌른다.
아니, 그냥 물리적으로 코에 들어왔다. 개 씨발.
-촤악!
스킬 모션은 그대로 진행되어, 혈사포를 뿜은 좀비는 그대로 토막 나서 뒤졌다.
처음 만난 몬스터가 하필 좀비라는 것도 좆같은데, 그중에 이딴 새끼가 섞여 있다니, 운이 너무 나쁜 거 아닌가.
좀 줘패기 좋은 미노타우로스나, 신선한 슬라임이나, 그런 게 나와주면 어디 덧나는 건가.
"아이, 썅, 뭔 냄새가 이래."
나는 짜증 내며 피를 툭툭 털었다. 그런데, 피를 뒤집어쓴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치지직...!
뭐야 이거, 산성 혈액이나 뭐 그런 건가? 아니면 독 종류?
3층에서 독화살을 박아넣으며 키운 독 내성을 뚫다니, 이거 아무래도 엄청 센 독 같은데.
인벤토리에 해독 포션도 있고, 딱히 상처 부위로 침투한 것도 아니라서 그냥 씻어내면 그만이긴 한데.
"음."
내 독 내성을 뚫을 수준의 독이라면, 이거 이대로 가만히 버티다 보면 내성이 더 오르는 거 아닌가?
솔직히 독을 뒤집어쓰고 다닌다 해서, 이 6층의 몬스터 중 나한테 위협이 될 만한 게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한번, 이거 이대로 뒤집어쓰고 다녀 볼까?
문제점이라면 자꾸 썩은 피 냄새가 난다는 것뿐인데, 후각은 원래 금방 지치는 법이고.
내 몸에 냄새가 밸 수도 있겠지만, 내가 6층에 맞선 보러온 것도 아니고. 뭐 어때.
**
좀비가 뱉어낸 혈사포는 내 예상대로 무척 강한 독이었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옛날 1세대 헌터들의 글을 찾아보니, 이거 한 번에 생사를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3층에서 키운 내 내성은 그 위험한 독을 좀 화끈하게만 느껴질 수준으로 약화시켜버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3층에서 나는 독화살을 식기 대신으로 썼을 정도니까. 화이트롤을 독화살로 찍어서 독째로 먹고 그랬지.
아무튼 나는 이번 기회에 독 내성을 한계까지 키울 생각으로, 6층에서 조금 길게 체류하기로 정했다.
6층은 다른 층보다 전체 지역이 매우 넓은 편이기도 했고, 파밍할 수 있는 보물상자의 숫자도 많았던지라 딱 좋았다.
1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브 퀘스트 하나하나까지 파먹어 스펙을 올리고, 매일매일 독 내성을 올리는 나날.
마침내 혈사포를 한 바가지 들이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는 수준까지 독 내성이 올랐을 때쯤.
[지역 통합 이벤트 : 시련의 탑 페스티벌이 개최됩니다!]
[포탈을 통해 공용 서버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페스티벌 이벤트가 열리며, 눈앞에 푸른 포탈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포탈에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씻고 가야겠지?"
한 달 내내 피랑 독을 뒤집어쓰고 살았는데, 냄새가 얼마나 나겠어.
이대로 그냥 들어가면 몬스터로 착각한 도전자한테 칼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건 자연사지.
#34. 페스티벌
나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6층은 전체가 미궁이라는 특성상, 마을 지역의 인프라가 매우 빈약하다는 것.
당연히 여관 시설도 매우 형편없었고, 샤워나 목욕에 쓸 비누 따위도 턱없이 부족했다.
덕분에 나는 여관의 모든 방을 빌린 다음 비치된 비누를 싹 다 긁어모은다는 괴상한 짓거리를 벌여야만 했다.
심지어 깨끗한 물도 거의 없어서, 인벤토리에 있는 우유와 포션을 물 대신 써가며 힘겹게 씻었다.
옷은 싸그리 새걸로 바꿨고, 갑옷도 인벤토리에 있는 예비품으로 바꿔 최대한 피 냄새가 나지 않게 조치했다.
"진짜 맞선 보러 나가는 것 같네."
한 달 전 자신의 발언을 떠올리며 그렇게 혼잣말했을 때는, 이미 이벤트가 열리고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오픈런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누구랑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괜히 지각하는 기분이네.
[이벤트 서버 : A 구획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포탈에 손을 대고, 알림창의 메시지를 수락했다.
보스룸에서 전이문을 이용할 때와는 살짝 다른 감각이 몸을 감싸고, 곧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중앙에 분수대가 위치한 근대 유럽 분위기의 광장이었다.
광장 중앙에는 다른 구획으로 이동하는 포탈이 또 여럿 있었다. 저걸로 이벤트 맵을 드나드는 거겠지.
그리고 역시 예상한 대로 사람이 많다. 진짜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어우, 씨..."
오랫동안 방구석 칩거 생활을 한 데다가, 시련의 탑에서까지 솔플을 이어온 나에겐 너무나 낯선 분위기.
우글거리는 인파와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죄다 비위에 거슬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인기피증이 생긴 건가.
하지만 거북한 한편으로 묘하게 반갑기도 하다.
2층에서 양치기 소녀의 충격적인 변화를 본 이후로, 사람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NPC까지도 일부러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사람 냄새를 맡으니, 나도 살아있다는 실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이 축제 분위기도 꽤 봐줄 만하고.
원래는 바로 이벤트 재화를 얻을 수 있는 미니 던전부터 가려고 했었는데,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일단 걷자, 걸으면서 뭐든 둘러보자.
**
커뮤니티에서 페스티벌 소식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들떴는지 알 것 같다.
페스티벌 이벤트는 말 그대로 축제였다. 이벤트 시스템과는 별개로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에에, 팝콘 큰 거 하나랑 탄산 나왔습니다! 어이쿠, 조심!"
저기서 팝콘과 음료수를 팔고 있는 남자는 NPC가 아니다.
페스티벌 소식이 뜨자마자 장사를 준비해서 직접 노점을 차린 도전자였다. 심지어 저 팝콘도 직접 만든 거란다.
22층의 어떤 반복 퀘스트를 깨서 얻을 수 있는 옥수수를 이용해, 직접 연구에 연구를 더해 레시피를 확립했다나.
저 팝콘장수만이 아니다. 광장 가까이의 골목골목마다 도전자들이 직접 세운 노점들이 잔뜩 들어차 있다.
판매하는 음식의 수준은 대학교 축제 내지는 후미진 동네의 푸드트럭 수준 정도일까.
하지만 시련의 탑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먹거리를 팔고 있다 보니까, 인기가 상당하다.
심지어 저쪽에는 큰 냄비를 여러 개 가져다가 국밥을 끓여서 파는 도전자도 있었다.
[1450 서버 명물, 붓싼 싸나이의 진국 돼지국밥!]
[함 무바라, 디진다 아이가!]
저 빛나는 대머리가 인상적인 캐리커처가 박혀 있는 간판도 직접 제작한 거겠지.
시련의 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들어오다 보니, 이런 독특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정말 많다.
"크으...내가 시련의 탑에서 국밥을 다 먹어보네, 미친 거 아니냐?"
"근데 저 사람 서울 토박이라 그러지 않았냐? 왠 부산 사나이?"
"넌 그게 중요하냐? 국물에 붓싼의 혼이 담겨 있잖아, 그럼 됐지."
국밥을 한 사발 때리고 나오는 도전자들의 인간적인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괜히 국밥이 땡겼다.
씁, 근데 나는 저거 못 사지 않나.
일반 교환이 막혀 있어서, 이벤트 전용 재화나 서버별 길드에서 발행한 신용 어음으로만 결제할 수 있을 텐데.
미니 던전을 열심히 깨야 할 이유가 방금 하나 생긴 것 같다.
**
중앙 광장에서 포탈을 타고, 미니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전용 맵으로 이동했다.
던전별로 한 파티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일까, 맵을 바꿔가며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사람이 꽤 많았다.
마침 아무도 줄을 서지 않은 포탈이 하나 보여서, 그 앞으로 이동했다.
[비밀의 황금 사원(중급) : 권장레벨 40~50]
마침 권장레벨 40~50으로, 내 레벨대에 딱 맞는 던전이었다.
현재 내 레벨은 52, 50레벨 이후로 요구 경험치량이 터무니없이 늘어서 거의 오르지 않은 상태다.
물론 스펙은 일반적인 50레벨 도전자들을 크게 상회하고 있지만, 이 권장 레벨은 파티플레이 기준으로 적힌 거다.
내 실질 스펙은 60레벨 이상이니, 이 정도면 솔플로 공략하기에 딱 좋은 수준이겠지.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입장 포탈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들어가려는 순간.
"저기, 잠시만요!"
등 뒤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려오며, 처음 보는 사람 세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올리며,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완드를 들고 있는 긴 머리의 여자 한 명, 등에 커다란 둔기를 짊어지고 있는 중갑 남자 전사 한 명.
그리고 뾰족한 카이트 실드와 검 두 자루를 차고 있는 경갑 남자 전사가 또 한 명.
정석에서 살짝 벗어난 형태의 3인 파티처럼 보인다.
나는 포탈에서 손을 내리고,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혹시 지금 들어가시려는 거에요? 그, 아직 다른 파티원분들 안 오신 거면 저희 먼저 좀 어떻게..."
적정 레벨대의 던전 자리를 찾고 있던 파티인 것 같다. 근데 어쩌나, 나는 혼자 들어갈 셈이었는데.
"아뇨, 솔플인데요."
대화하기가 어색해 일부러 짧게 대답했다. 장발의 여자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러시구나...드디어 자리 찾은 줄 알았는데, 한발 늦었네요."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다. 그런다고 양보해줄 생각은 없지만.
여자는 파티원으로 보이는 두 남자에게 터덜터덜 걸어가, 오늘은 틀렸다며 고개젓곤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어쩐지 나 들으라고 저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무시하고 포탈에 손을 올려, 다시 입장을 시도했다.
"저 근데, 솔플로 하시는 거면 레벨이 어떻게 되세요?"
그 때, 다시 맥을 끊으며 말을 걸어오는 여자 도전자. 나는 손을 내리고 대충 대답했다.
"52요."
"네? 52요?"
"네, 왜요."
그러자 여자는 깜짝 놀란 듯이 펄쩍 뛰고는, 요동치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적정 레벨이 40~50이라고 그냥 들어가면 안 돼요! 그건 파티 플레이 기준으로 적힌 거라고요!"
응, 나도 알아.
**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김진아라고 밝혔다.
김진아는 이 미니 던전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손짓 발짓을 다 써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혼자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고, 파티원을 구해서 같이 들어가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했다.
"마침 여기 밸런스 좋은 3인 파티가 하나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들이랑 같이 파티를 짜서 들어가자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혼자서는 못 깰 거고, 파티원이 늘어난다고 해서 보상이 엄청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잘 된 거라면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말솜씨가 아주 제법이었다.
온 몸을 써가면서 요란하게 말하는 꼴이 어떤 양치기 NPC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NPC는 개한테도 말싸움으로 못 이길 정도로 언변이 부족하고, 이쪽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나도 솔로 플레이에 특별히 집착하는 건 아니니까, 이번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예, 뭐...그러세요."
솔플이나 파티플이나 보상은 별 차이가 없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파티플레이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
"그럼 파티 신청할게요, 대신 파티장은 그쪽 분 드릴게요!"
[김진아 도전자 외 2인 파티가 당신을 초대했습니다.]
"수락한다."
[파티장을 위임받았습니다.]
파티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넘어온 파티장 권한, 눈앞에 나타난 파티 UI가 매우 어색하다.
"저희 파티는 1탱커, 1딜러, 1원딜 조합이에요. 여기 둘은 성기사랑 검투사 클래스고, 저는 마법사에요."
망치를 든 중갑 전사가 탱과 힐을 담당하는 성기사, 검과 방패를 쓰는 경갑 전사가 근접 딜러인 검투사라고 한다.
이름은 성기사 쪽이 김민형, 검투사 쪽이 김진석이라고 한다. 셋 다 김씨네.
마법사인 김진아를 제외하면 둘 다 레어 클래스에, 레벨은 순서대로 44, 45, 46으로 나보다 조금 낮은 정도.
"이름이, 진혁 씨라고 했죠? 진혁씨는 클래스가 어떻게 되세요? 전사 쪽이죠?"
"네, 그냥 전사요."
"아, 그냥 전사...노말 클래스세요?"
클래스를 밝히자 조금 놀란 듯이 눈을 깜빡이는 김진아.
그리고, 처음부터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성기사 김민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야, 전붕이셨어?"
이 새끼, 말투가 좀 띠껍다?
#35. 파티 플레이
'전붕이'는 일반 전사 클래스를 가진 도전자를 부르는 대표적인 멸칭이다.
현재 시련의 탑은 이미 100층까지 모두 공략되었고, 온갖 버스기사와 랭커들 덕분에 상당히 쾌적한 환경이 된 상태다.
당연히 레어 클래스의 전직루트와 공략법도 확립된지 오래고, 경매장에서 쉽게 전직용 아이템을 구할 수도 있다.
게다가, 랭커 버스를 통해 전직하지 않은 상태로도 층을 오르거나 전직을 준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
물론, 딱히 일반 클래스로 전직했다고 해서 다른 상위 클래스로 직업을 바꿀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클래스가 바뀌면 이전의 마스터리 스킬과 숙련도가 초기화되기 때문에, 상위 클래스로의 전직은 빠를수록 좋다.
아, 동종 클래스라면 일부 스킬의 성장치는 계승되긴 한다. 문제는 스킬 성장치만이 아니다.
클래스에 따라 레벨업시의 스탯 상승치가 차이 나는 경우도 있어서, 일반 클래스 상태의 레벨업은 그 자체로 손해다.
내가 1층에서 전직을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전사는 유일하게 별 조건 없이 1층에서 전직할 수 있는 클래스지만, 전직과 동시에 미래의 고점을 깎아먹는 클래스니까.
심지어 전사 계열은 마스터리가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아서, 상위 클래스로 계승되는 스킬도 매우 적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멀 클래스인 전사를 달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다.
돈도 빽도 없어서 랭커 버스는 계속 후순위, 같은 이유로 다른 클래스로 빠르게 전직할 방법도 없음.
그렇다고 천년만년 차례를 기다릴 인내심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전사로라도 전직을 질러버린 흙수저 도전자.
거기에 다른 전사 계열 클래스의 하위호환이나 다름없는 직업 성능이 어우러져, 전붕이라는 멸칭이 생긴 거다.
하지만 사실, 전사로 빠르게 전직해 초반을 넘기는 도전자는 의외로 많은 편이다.
고점이 좀 깎이긴 하지만, 대충 초반만 넘기고 다른 클래스로 바꾸면 스펙에 큰 하자가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전붕이라는 멸칭의 진짜 주인공은 나 같은 고레벨 전사다.
전사로 전직해 꾸역꾸역 초반을 넘기고 나서도, 똑같이 돈과 빽이 없어 빠르게 클래스를 바꾸지 못한 소수가 걷는 루트.
자본이 생겨도 이제 쌓인 성장치가 너무 많아서 포기할 수 없게 되버린, 소위 말하는 전사 클래스에 '물린' 놈들.
나는 배경이 좀 특수하지만, 어쨌든 일반 클래스로 과성장했다는 점에서 전붕이라는 말에 들어맞는 상태긴 하다.
근데 시발, 그걸 사람 면전에다 대고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워처먹은 싸가지인거지?
"뭐?"
나는 곧바로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성기사 김민형은 뭐 불만 있느냐는 듯이 턱을 까딱였다.
이 새끼 봐라, 아주 자신감이 넘쳐 흐르네.
이 놈의 레벨은 44, 나보다 8레벨이 낮다.
상당히 큰 차이긴 하지만 레벨이 스펙의 전부는 아니다. 일단 저놈은 레어 클래스다.
노멀 클래스와 레어 클래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큰 건 아니지만, 8레벨 차이 정도는 메꿀만하다.
그리고, 딱 보니 다른 두 명보다 아이템이 한 급수는 더 높아 보인다.
내 쪽은 대놓고 잡템으로 보이는 걸 끼고 있으니, 아이템과 클래스의 차이로 본인이 우위일 거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자, 이놈을 어쩌면 좋을까. 스펙 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툭, 툭.
허리에 찬 손도끼를 툭툭 건드리며 잠시 분위기를 살폈다. 대뜸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도 없으니.
그러던 중, 먼저 움직인 것은 저 싸가지도 나도 아니었다.
"야, 자리 양보해주신 분한테 전붕이가 뭐야, 전붕이가!"
폴짝 뛰어오른 김진아가 완드를 휘둘러 싸가지의 정수리를 후려갈겼다.
-깡!
오우, 경쾌한 사운드.
**
김진아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가며 사과를 연발했다.
당연히 본인만 사과하는 게 아니라, 싸가지 없는 성기사 놈에게도 잔소리를 쏟으며 사과를 시켰다.
물론 성기사 놈은 지가 뭘 잘못했느냐는 듯이 대충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아예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나도 커뮤니티에서 만만한 전붕이를 놀려댄 전과가 있으니, 이번은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냥 현실이랑 커뮤 구분이 잘 안 되는 놈인 셈 치지 뭐.
내 이름을 모르는 걸 보면 커뮤를 자주 들어가는 놈은 아닌 모양이지만.
아무튼, 그다음에는 간단하게 던전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정하는 시간이었다.
세 사람은 계속 합을 맞춰오던 고정 파티인지라, 내가 끼어들어 거들기에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짧은 회의 끝에 내 포지션은 후방 보호로 결정되었다. 원딜러인 김진아를 곁에서 보호하는 역할이다.
"잠깐, 그건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아?"
"너는 앞에서 탱 서야지."
"그래, 우리 원래 하던 대로 하기로 했잖아."
싸가지 성기사 놈이 조금 반발하긴 했지만, 포지션을 굳이 바꿀 명분이 없었던 탓에 금세 진압되었다.
저 새끼가 왜 나한테 꼽게 굴었는지 대충 알 만하네.
여자 앞에서 가오 좀 잡아보고 싶었다 이거겠지, 마음은 알지만 다음에는 얄짤 없을 줄 알아라.
[입장하시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으니, 빠르게 포지션을 정리한 뒤에는 곧바로 포탈을 탔다.
"예."
포탈을 넘어서자 나타난 것은, 커다란 황금빛 유적이었다.
**
던전의 전체적인 양식은 3층의 리자드맨 유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겉보기부터 훨씬 넓다는 점이랑, 여기저기에 금붙이가 장식으로 붙어 있다는 점 정도?
저거 설마 진짜 금인가. 싹 다 벗겨서 바깥 세계에다 내다 팔면 얼마쯤 나올까 궁금하네.
물론 시련의 탑 안의 아이템은 클리어 후에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커뮤니티에 풀린 정보를 보면, 여기의 주요 몬스터는 골렘 종류라고 해요."
김진아의 설명이었다. 골렘 종류는 나도 한 번뿐이지만 상대해 본 적이 있다.
4층 사막 지역의 필드 보스가 모래 골렘이었거든.
온 몸이 바위랑 모래로 되어 있어서 공격을 해도 데미지가 들어가는 것 같지가 않았었다.
머리통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세 번 연속으로 박살 내고 나니까 재생을 멈추고 쓰러졌었지.
"골렘 몬스터 잡아 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어려울 건 없어요, 핵만 찾아서 부수면 쉽게 잡히거든요."
그렇군, 그럼 그 모래 골렘은 머리통 부분에 핵이 있었나 보다. 완전 우연으로 잡은 거였네.
이진아는 자기가 아는 걸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지, 골렘에 대해 이런저런 지식을 마구 늘어놓았다.
나는 대충 맞장구를 치며 보폭을 맞춰 걸었는데, 앞장서 있는 싸가지 성기사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 그 렙에 골렘도 안 잡아봤나..."
좀 띠껍긴 하지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넘어갔다.
그로부터 잠시 후, 땅이 쿵쿵 울리면서 커다란 바위 골렘이 나타났다.
4층의 모래 골렘보다 좀 더 큰가, 머리 높이만 3m는 되어 보인다.
골렘이 나타나자 세 사람은 재빨리 움직여 포지션을 갖추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흐압!"
가장 먼저, 탱커를 담당하는 성기사가 대방패를 들고 실드 배쉬를 써서 골렘을 들이받았다.
방패가 번쩍번쩍 빛난 걸 보면 성기사의 스킬인 모양이다. 하지만 골렘에게 데미지가 잘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뒤를 이어서, 검투사 클래스라던 김진석이 쌍검을 뽑아들고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똑같은 길이의 검 두 자루가 번쩍 빛나며 스킬이 시전됐다. 무려 여섯 번을 연속 공격하는 스킬이었다.
골렘을 구성하고 있는 돌이 팍팍 깎여나가는 걸 보면 데미지가 꽤 센 것 같다.
두 명의 근접 담당이 그렇게 골렘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마법사인 김진아는 스킬을 캐스팅했다.
"매직 미사일!"
-콰광!
새하얀 마법 투사체가 연달아 날아가, 골렘의 가슴 부근을 크게 파괴했다.
파괴된 가슴 부근에는 새빨갛고 둥근 돌멩이가 하나 박혀 있었는데, 저게 골렘의 핵인 것 같다.
근접 담당인 두 명은 드러난 핵을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포지션을 지키며 탱킹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김진아의 두 번째 매직 미사일이 완성되었고, 곧 빠르게 발사되어 핵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쿵!
[수호 골렘의 바위파편]
[페스티벌 코인]
골렘이 쓰러지고 드롭된 아이템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한 게 없는데 아이템은 나한테 들어오네.
이래서 파티장을 양보하겠다는 말을 선심 쓰듯 한 거였구나. 파티장이 보상을 먹튀할 수도 있는 구조네.
"어때요 진혁 씨, 뭐 떴어요?"
"재료랑 코인 하나 떴네요."
잡몹을 잡는다고 코인이 무조건 뜨는 건 아닌 모양인지, 김진아는 운이 좋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보다, 저희 실력 어때요? 괜찮은 파티라고 했죠?"
마나 포션을 마시던 김진아가 대뜸 물었다.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확실히 포지션을 지키면서 침착하게 싸우는 모습은 꽤 괜찮았지만, 실력을 평가하자면 글쎄.
"예, 그렇네요."
나는 적당히 빈말을 주워섬기며, 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대충 흘려넘겼다.
내가 사회성이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어떤 성기사 새끼처럼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니라서.
대놓고 좆밥이라고 말하면 안 될 거 아냐.
#36. 전붕이
무난하게 골렘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세 사람의 실력은 솔직히 별 볼 일 없었다.
나보다 스펙이 낮고 공격력이 약한 건 당연한 거라, 그걸 지적할 생각은 없다.
그냥 스펙 외의 실력이 별로였다. 마법사인 김진아는 잘 모르겠지만, 전위에 서는 두 사람이 문제다.
우선 45레벨의 검투사, 김진혁.
아무리 탱커가 따로 있다고 해도 그렇지, 무기로 쌍검을 쓴다는 게 말이 되나?
나도 3층에서 여러 무기술을 연습하며, 검 두 자루를 동시에 쓰는 기술을 연습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전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해 그만뒀다. 쌍검은 병신 기술이다.
방패를 포기해야 한다는 디메리트는 차치하고, 일단 검 두 개를 한꺼번에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나온다.
검이 두 자루면 공격 패턴이 두 배가 되고, 화려한 연격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건 그냥 환상이다.
오히려 양손으로 검 한 자루를 쓰는 것보다 훨씬 움직임이 단조로워진다.
양손검으로는 손목과 팔꿈치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연속기를 펼칠 수 있지만.
쌍검으로 연속기를 펼치려면 그야말로 온몸을 비틀어 가며 지랄을 떨어야 뭔가 될까 말까다.
나도 나름대로 양손의 검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는 무척 우스웠다.
한 손의 검으로 공격을 전담하고, 나머지 한 손의 검으로는 방어에만 전념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았던 거다.
즉, 쌍검은 검방의 하위 호환이다.
물론 서로 다른 길이의 검 두 자루를 들어서 의외성을 발휘한 변칙 공격을 한다는 방법도 있긴 있다.
그런데, 그럴 바에는 검 대신 한손도끼를 채용하는 게 더 변칙적이고 다양한 공격이 가능하다.
심지어 김진혁이 쓰는 쌍검은 똑같이 생긴 두 자루 장검이다.
길이가 짧은 소검 두 자루를 쓴다면 나름대로 이점이 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마저도 아니라니.
웃긴 건 김진혁이 소형 방패를 갖고 다닌다는 점이다.
상황에 따라 딜링을 포기하고 탱을 서야 할 때 검방으로 스위칭한다고 하는데, 그냥 어이가 없다.
다음으로 넘어가서, 44레벨의 싸가지 성기사.
이 새끼는 망치를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게 분명하다.
탱킹에 전념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망치로 유효타를 입힐 수 있을만한 상황에도 손을 절대 안 뻗는다.
그냥 한 손으로 방패만 내세워서 막기만 반복할 뿐, 그럴 거면 망치를 버리고 양손 방패를 쓰는 게 맞지 않나?
한손에 들고 있는 게 망치가 아니라, 망치 모양 완드라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 공통의 문제점.
스킬을 너무 많이 쓴다.
물론 숙련도를 올리려면 스킬을 많이 써야 한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불필요하게 스킬을 쓴다.
마스터리에 붙어 있는 스킬은 특정한 동작을 취하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여 기술을 펼치는 방식이다.
즉, 일단 스킬을 쓰면 도중에 동작을 수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골렘이 한 마리뿐이었기에 망정이지, 갑자기 한 마리가 더 나타나서 끼어들면 어떻게 대처할 셈일까.
그 밖에도,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전투 중에 펼치는 모든 동작이 안일하기 그지없다.
파티원이 자신의 허점을 메워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투 방식.
훈훈하게 포장하면 신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변수에 취약하다는 약점만이 보인다.
이건 순전히 내가 솔플러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일까?
모르겠다.
**
그 뒤에도 골렘은 주기적으로 한 마리씩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세 사람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연계를 펼치며 골렘을 쓰러트렸고, 성과는 꽤 짭짤했다.
[페스티벌 코인]
[메테오스톤 파편]
[골렘의 황금 조각]
이번에는 골렘 한 마리가 아이템을 세 개나 드롭했다. 김진아는 드롭 아이템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와, 파편이 또 떴어요? 우리 이걸로 세 개째잖아요, 완전 대박."
"많이 뜬 겁니까."
"네, 원래 이 레벨대 던전은 보스 잡을 때 2~3개씩 드롭되는게 메인이거든요."
아직 보스를 잡지 않았는데도 3개나 먹었으니, 운이 매우 좋은 거라며 방방 뛰었다.
"혹시 행운 버프라도 묻어있어요? 왜 이렇게 잘 나오지?"
아,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매 끼니를 화이트롤로 때워서 항상 행운 버프가 달려 있다는 거.
김진아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어쩐지 너무 잘 뜨는 것 같았다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심지어 행운 토템이니 뭐니 말하면서, 같이 들어오기를 너무 잘했다고 꺅꺅거리기까지.
"진혁 씨는 오늘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냥 우리한테 행운 버프만 묻혀줘도 1인분! 아니 2인분!"
싸가지 없는 성기사 자식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당연히 무시했다. 뭐 어쩌라고.
왜 아니꼽게 구는지 이해는 하지만, 이해한다고 그걸 다 받아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딱히 선을 세게 넘은 적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있긴 하지만, 계속 띠껍게 굴면 나도 못 참을 수 있다.
잠시 후, 신이 난 김진아와 함께 던전을 걷던 중 이변이 발생했다.
-쿠구궁!
유적의 지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골렘이 나타날 때랑 비슷하지만, 규모가 이상하리만치 컸다.
성기사 놈도 재빨리 방패와 망치를 들어 올리고, 김진혁도 쌍검을...어휴, 쌍검은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네.
아무튼. 몬스터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니, 김진아를 중앙에 두고 둘러싸는 형태로 포지션을 갖췄다.
-쿠광!
요동치기 시작한 지면은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지면 사이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올라왔다. 지금까지 상대한 골렘의 손과 비슷해 보였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둘씩 골렘의 손이 지면에서 솟아오르더니, 이내 천천히 일어나 우리를 둘러쌌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과 똑같은 골렘이 어디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꽤 많네.
"이, 이게 뭐야...함정? 공략글에 이런 건 없었는데!"
많은 숫자의 골렘을 보며 당황하는 김진아. 역시 변수가 생기니까 판단이 제대로 안 되나 보다.
시련의 탑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완벽히 공략됐지만, 페스티벌의 미니 던전은 사정이 다르다.
이벤트 자체가 3년에 한 번 짧은 기간 동안 열리는 일이다보니, 공략이 정립되지 않은 거다.
나름대로 정보가 풀렸어도, 지금처럼 드물게 발동하는 특수한 시스템 같은 건 알려지지 않았을 테고.
"진아야, 내 뒤에 숨어!"
당황한 김진아를 확 잡아당기며 방패를 앞세우는 성기사. 저건 이런 상황에서까지 폼을 잡으려 그러네.
지금은 어딜 봐도 탱커가 앞장서서 길을 뚫어야 하는 상황 아닌가. 거기서 버텨서 뭐 하려고?
아니지, 마침 잘 됐다. 그냥 그렇게 방패 들고 숨어 있어라.
-저벅.
나는 검을 잠시 만지작거리다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싸가지 성기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뭐 해 전붕이 새끼야!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오 뭐야, 나도 뒤에 숨으라고?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의외로 나쁜 놈은 아닌가?
"안 뒤지니까 짜져 있어, 성바퀴 새끼야."
나는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묵직한 쇠구슬을 꺼냈다.
**
투척은 1층에서부터 애용한 내 주력 공격수단 중 하나다.
누구 말마따나 전붕이로 솔플을 해 온 내겐, 어떤 것이든 좋으니 원거리 공격 수단이 절실했으니까.
내 손에 들린 쇠구슬은 6층에서 입수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상점에 팔아봤자 얼마 나오지도 않는 잡템이다.
하지만 그간 갈고닦은 내 [투척술] 스킬과 만나면, 어지간한 무기보다 훨씬 강한 공격수단이 된다.
상대는 덩치만 크고 지능은 별볼일 없는 골렘, 심지어 가슴팍의 핵이라는 명확한 약점까지 존재한다.
핵의 강도는 김진아의 매직 미사일 두 방에 박살나는 정도.
김진아가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파티의 평균 수준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간다.
어깨에 힘을 빡 넣고, 오른손에 든 쇠구슬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쾅!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핵이 들어 있는 골렘의 가슴팍이 완전히 박살 났다.
예상대로 김진아의 마법공격보다 내 투척이 더 세다.
만지작거리던 검은 도로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준비해 둔 쇠구슬 몇 개를 더 꺼냈다.
-쾅! 쾅! 쾅!
쇠구슬 하나를 던질 때마다 골렘이 한 마리씩 침몰한다.
적정 레벨 40~50이라더니, 그냥 잡몹이라 그런지 엄청 약하네. 핵의 내구도가 너무 낮아.
있는 힘껏 던지지 않으면 한 방에 부수기 힘들고, 던지는 것도 짱돌이 아니라 쇠구슬이긴 하지만.
역시 이 정도면 그냥 솔로 플레이로 쉽게 깰 수 있었겠다.
[누가 나의 사원에서 난동을 부리는가!]
땅에서 기어나온 골렘들을 모조리 박살 내자,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골렘들의 손이 튀어나왔던 균열을 가르고, 전신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조각상 같은 게 기어올라왔다.
[BOSS - 조각난 황금의 지배자]
오픈 커뮤니티에서 슬쩍 봤던 미니던전의 보스였다. 나는 다시 검을 꺼냈다.
"보, 보스! 우리도 싸우자, 빨리!"
"거, 됐으니까 그냥 거기 계세요."
뒤늦게 끼어드려는 김진아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와서 돕기는 뭘.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구경이나 하시지.
솔플러 전붕이가 어떻게 싸우는지.
#37. 본보기
전신에서 황금빛을 뿌리는 동상 형태의 몬스터.
평범한 인간형 동상은 아니고,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생긴 것만 보면 저것도 골렘 종류 같은데, 그러면 잡몹들이랑 똑같이 가슴팍에 핵이 박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쿵!
땅을 거세게 박차며 동상을 향해 단번에 뛰어올랐다. 그러자 동상의 여섯 팔 중 두 개가 움직였다.
내가 뛰어오른 위치를 노리고 크게 벌려진 팔, 파리를 잡듯 손뼉이라도 칠 모양이다.
공중이니만큼 회피 동작은 불가능, 하지만 스킬은 이런 때에 쓰라고 있는 거다.
돌진 기술인 소드 차지를 사용해, 공중에서 몸을 전방으로 쏘아낸다.
-콱!
스킬 이펙트로 반짝거리는 검이 동상의 가슴팍에 정확히 박혔다.
그런데 손맛이 좀 이상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당연히 무기물일 줄 알았는데, 살을 찌르는 느낌이다.
번쩍거리는 금 쪼가리는 표면만 덮고 있을 뿐, 안쪽은 제대로 피가 통하는 살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이러면 골렘들처럼 급소가 되는 핵은 따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좋은데."
약점이 없으면 안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한테는 이게 훨씬 더 낫다.
파괴해야만 하는 핵이 따로 있는 타입이라면, 노릴 수 있는 부위가 한정되는 셈이니까.
그리고 피와 살이 존재하는 생물이라면 모두 공통되는 약점이 있는 법이니까. 저기 저 대갈통 세 개라던가.
검이 박힌 느낌으로 볼 때, 내구도도 그렇게 높지 않은 모양이니. 죄다 슥슥 썰어줄 수 있겠네.
-촤악!
가슴팍에 박았던 검을 비틀어 뽑았다. 그러자 붉은색이 아닌 녹색의 피가 튀었다.
색깔만 보면 독처럼 보이는데, 독이건 아니건 별로 상관없다. 내 독 내성 레벨이 몇인데.
보스의 금색 손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날아왔다. 놈의 가슴팍을 힘차게 걷어차며 뒤로 물러섰다.
-꽈앙!
커다란 충격음이 터지며 보스의 몸이 기우뚱 넘어갔다. 내 근력 스탯도 스탯이지만, 보스가 생각보다 가볍다.
당연히 커다란 덩치와 내구력을 기반으로 파괴력을 발휘하는 보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발차기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의외로 육탄전 타입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끼리릭!
다음 순간, 내 추측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보스의 머리통 중 하나가 입을 열고, 마법 공격을 해 왔다.
기이잉- 기계의 작동음 같은 소리와 함께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화염을 토해낸 것이다.
"위험해요!"
살짝 떨어진 위치에 있던 김진아가 소리쳤다. 마법 공격의 위력이 강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확실히, 내뱉어진 화염에선 4층 보스인 샐러맨더의 화염 공격 이상의 기세가 느껴졌다.
근데, 그 샐러맨더의 화염도 나한테는 거의 안 통했거든.
-화르륵!
방패를 내세워 쏘아진 화염을 막아 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방패 너머에서 전해져 오지만, 고작 이 정도에 내 살은 불타지 않는다.
[화염 내성 Lv.14]
두 자릿수에 도달한 화염 내성 스킬이 내 몸을 보호하고 있다. 이 정도는 그냥 뜨끈하지 뭐.
"미친..."
파티의 탱커 담당인 싸가지 성기사가 혼잣말로 욕하는 것이 들려왔다.
많이 놀란 모양인데, 탱커라는 자식이 고작 이 정도에 그렇게 놀라서 쓰나.
-저벅, 저벅.
나는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화염의 줄기를 몸으로 뚫고 전진했다.
보스와의 거리는 금세 좁혀졌고, 쏘아지던 화염의 줄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뚝 끊겼다.
-끼리릭.
그리고 다시 한번 기계음을 내며 입을 벌리는 보스의 또 다른 머리통.
이번에 쏘아진 것은 화염이 아니라 커다란 얼음송곳이었다.
불로 안 되니까 얼음으로 잡아 보겠다 뭐 그런 것 같은데.
[서리 내성 Lv.11]
아직 서리 내성의 레벨은 화염 내성에 비해 낮은 편이니까, 그렇게 틀린 방법은 아니다.
근데 누가 그걸 그냥 맞아 준대? 방패는 장식으로 보이냐?
-쾅!
날아든 얼음송곳을 방패를 휘둘러 박살내버리고, 보스의 발밑으로 미끄러지며 접근했다.
동시에 검과 방패를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다른 무기로 스위칭했다.
[+5 용맹한 전사의 소검]
[+5 용맹한 전사의 소검]
3층에서 리자드맨을 죽이고 다닐 때에 얻었던 소검을 각각 한 자루씩, 두 자루를 들었다.
선호하는 무기는 아니지만, 마침 이런 때니까.
잘 봐라, 쌍검충아.
이도류는 이렇게 쓰는 거다.
**
여섯 개는 되던 팔과 두 다리가 모조리 잘려나가, 버둥거리는 오뚝이가 되어버린 보스 몬스터.
더 이상 마법 공격도 못 하게 되어버린 금색 머리통을 망치로 두들겨 부쉈다.
-쾅!
[클리어 보상 : '메테오스톤 파편 X3' 을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메테오스톤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매번 최초 클리어라는 문구만 보다가, 이런 담백한 메시지를 보니까 좀 신선했다.
보스는 뭐, 별 볼일 없었다.
세 개의 머리가 내뿜는 속성 공격은 나한테 통하지 않았고, 여섯 개의 손을 이용한 육탄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익숙하지 않은 쌍검으로도 쉽게 찍어누를 수 있었고, 망치로 무기를 바꾼 뒤에는 더 쉬웠다.
시간을 잰 건 아니지만 몇 분 만에 결판이 났다. 아마 이 미니 던전의 최단 시간 클리어가 아닐까.
HP : 779/780
마법 공격을 받았을 때 줄어들었던 피통도 [전투 치유]스킬 덕분에 거의 다 찼네.
"어, 어어...저기, 그러니까."
김진아를 비롯한 파티원 세 명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쌍검충 검투사 김진석은 꿈이라도 꾼 것처럼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고.
마법사 김진아는 입을 떡 벌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싸가지 성기사 김민형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채로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야."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워, 가까이 다가가서 괜히 말을 건네 보았다.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김민형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얘 은근 민첩하네.
"예, 예?"
한 박자 늦게 돌아온 대답은 존댓말이었다. 이거 누가 보면 몇 대 패기라도 한 줄 알겠네.
"전붕이가 뭐 어쨌다고?"
"아, 아뇨, 아닙니다 형님."
심지어 이젠 전붕이가 아니라 형님이랜다. 이 새끼, 내 나이는 알고 형님이라고 하는 건가.
분위기도 그렇고, 바짝 쫄아 있는 것도 그렇고, 갈구기 딱 좋은 상황이네.
하지만 이놈이 싸가지가 없긴 했어도, 딱히 선 넘은 언행을 한 적은 없다.
게다가 내가 골렘을 상대하러 나서자, 뒤지고 싶은 거냐며 나서지 말라고 손짓했지.
말이 거칠긴 했지만 나름대로 걱정을 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수컷의 본능 때문에 꼽게 굴었을 뿐이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애초에 나 같은 새끼가 누굴 나쁘니 뭐니 평가할 자격이 어디 있나. 지 애미 등골 값으로 연명하던 주제에.
마침 주제 파악도 잘 된 것 같고, 그냥 가볍게 교육이나 해 주도록 할까.
"너 탱커지? 방패 들어 봐."
"예? 방패요?"
"그래, 방패 들고 힘 최대한 빡 넣어봐."
김민형은 두 번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방패를 들었다. 자세가 좀 어정쩡하네.
나는 들고 있는 망치 자루로 녀석의 팔과 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방어 자세를 가볍게 교정해 주었다.
3층 폐관 수련 때, 방패만으로 리자드맨과 싸우며 습득한 자세다.
이렇게 자세만 잘 잡아도 어지간한 방어 스킬을 쓰는 것보다 더 충격을 잘 견딜 수 있다.
"간다."
그렇게 방어 자세를 잡은 김민형을 세워 두고, 뚜둑 주먹을 풀었다.
자세를 배웠으니 이제 실전에서 써 봐야 할 거 아니야. 그치?
살짝 떨어진 위치에서 내달려, 김민형의 방패 위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꽈앙!
"어억!"
충격을 이기지 못한 김민형은 그대로 방패와 함께 날아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 속 시원해.
**
보스가 쓰러지며 던전은 클리어 판정이 났고, 우리는 나타난 포탈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비밀의 황금 사원(중급)의 클리어 기록을 경신하셨습니다.]
그러자 웬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나며, 던전 입구에 걸려 있던 조그만 금속판에 우리의 이름이 새겨졌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진짜로 최단 시간 클리어였나보다.
기록을 세운다고 특별한 보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달성했다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와, 클리어 타임 거의 반 토막인데요? 그 함정이 보스전 숏컷이었나봐요."
한편 김진아는 이번에도 방방 뛰며 기뻐했다. 조금 전에도 느낀 거지만, 감정표현이 요란한 사람이다.
약간 리트리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건 일단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진혁 씨 덕분에 이런 기록도 다 세워보네요, 처음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김진아는 그대로 골렘에게 둘러싸였던 순간의 기분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감정표현도 그렇지만, 그냥 말도 많은 사람이구만.
나는 김진아가 떠드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보상을 아직 나누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말했다.
"아, 이거 분배해야죠."
미니 던전의 클리어 보상은 경험치나 골드를 제외하면 모두 파티장에게 들어오는 구조다.
기여도가 높은 파티원에게 따로 주어지는 보상은 예외긴 한데, 그건 당연히 나한테 들어왔고.
거의 나 혼자 깨긴 했지만, 괜히 분배를 안 해줬다고 커뮤니티에서 저격을 먹긴 싫다.
애초에 노점에서 파는 국밥을 사 먹을 코인을 제외하면, 다른 보상에는 별로 관심 없으니.
대충 4등분 해서 나눠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교환 신청 버튼을 찾아 인터페이스를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아, 그거 말인데요. 진혁 씨."
김진아가 생각도 못 했던 제안을 건넸다.
#38. 세로토닌
김진아 파티와 헤어진 뒤, 나는 1450 서버의 명물이라는 국밥을 파는 노점을 방문했다.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노점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페스티벌 코인을 내고 자리를 하나 잡았다.
판매하는 메뉴는 어차피 하나뿐이라, 곧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국밥 나왔습니다, 그릇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고! 이거 뚝배기야!"
국밥은 생소한 디자인의 하얀 그릇에 담겨 있었는데, 생긴 건 다르지만 대충 뚝배기랑 비슷한 그릇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릇에 담긴 국밥은 펄펄 끓고 있었고, 만져보니 그릇 전체가 뜨끈뜨끈한 열을 머금고 있었다.
정작 그릇을 가져다준 사람은 맨손이었는데, 아마 화염 내성 스킬을 갖고 있는 거겠지.
뜨거운 국물을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맛보았다. 국물에는 심심한 수준의 소금간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맨날 화이트롤만 먹고 다녔다보니, 약간의 염분에도 혀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테이블마다 소금과 후추가 하나씩 놓여 있었지만, 굳이 더 넣을 필요는 없겠다.
순정 상태의 국물을 몇 번 맛보고, 따로 나온 부가 재료들을 하나씩 넣었다.
대파 비슷하게 생긴 다진 풀을 한 숟갈 넣고.
후추를 조금 풀고.
양념장을 살짝 더하고.
마지막으로 독화살을 집어넣었다.
[독 묻은 강철 화살(중독 : 강)]
이건 6층에서 입수할 수 있는 강한 위력의 독화살인데, 여기에 묻은 독은 특이하게 무색무취를 띤다.
그렇기에 이렇게 음식에다가 독을 풀고 먹어도 맛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미 내 독 내성 수치는 이런 소모품으로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을 만큼 높아졌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까.
국밥에 독을 넉넉히 풀어 넣은 다음, 밥을 말아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입안에 들어온 국밥의 맛을 음미하는 한편으로,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열어 생소한 창을 띄웠다.
[친구 목록]
나 혼자밖에 없는 2661탑에서는 전혀 들여다볼 일이 없는 친구 목록.
그곳에는 조금 전에 헤어졌던 김진아를 비롯한 파티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김진아가 내게 건넨 제안은 생각보다 실리적이었다.
"진혁 씨는 페스티벌 코인이랑 메테오스톤 중에서, 어떤 게 더 필요하세요?"
대뜸 그런 것을 물은 김진아에게, 나는 코인 쪽이 좀 더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메테오스톤은 이벤트 한정 장비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재료 아이템인데, 나는 장비 종류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페스티벌 코인으로 저층에서 얻을 수 없는 소모품 종류를 수입해 가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
그러자 김진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마침 잘 됐네요, 저희는 메테오스톤이 더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김진아는 던전 클리어 보상을 머릿수대로 나누지 말고, 코인과 메테오스톤으로 서로 나눠서 몰아주자 제안했다.
"그리고 고정 파티를 맺어서, 아까 전처럼 함정에 일부러 걸린 다음 빠르게 보상을 먹는 노가다를 하는 거죠."
그에 더해, 김진아는 아예 파티를 맺어서 일종의 빠른 '코인 작'을 하는 게 어떻겠냐 말했다.
함정에 걸려서 빠르게 보스를 마주친 우리 파티의 클리어타임은 기존 기록들의 절반 이하.
그럼에도 획득한 보상의 양은 보통보다 많은 편이기에, 애매한 상위 던전보다 이 던전을 계속 도는 게 더 이득일 거라고.
한 번의 클리어로 얻을 수 있는 재화의 양은 다른 던전보다 적지만, 소요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나.
거기에, 김진아는 조금 전의 함정을 다시 끌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근데, 제가 왜요."
하지만 나는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대체 내가 그들과 파티를 맺어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김진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에이, 말씀드렸잖아요. 코인 몰빵을 하자고요."
알고 보니, 김진아가 말한 몰빵이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범위를 갖고 있었다.
김진아는 메테오스톤을 받는 대신, 개별 보상과 각자 이벤트 퀘스트를 통해 얻는 코인까지 모두 넘겨줄 셈이었던거다.
김진아 파티는 내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메테오스톤을 수급하고.
나는 혼자 상위 던전을 가는 것보다 빠르게 많은 양의 코인을 수급한다.
서로 원하는 재화가 다르기에 가능한 거래. 하지만 이 거래가 성립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바로, 내가 메테오스톤을 아예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나는 메테오스톤과 페스티벌 코인 중 후자를 더 선호한다고 했을 뿐, 전자가 필요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아는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지, 내가 메테오스톤이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때려맞췄다.
그 근거를 묻자, 김진아는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탐정 같은 태도로 말했다.
"진혁 씨가 민형 오빠를 날려버릴 때, 몰래 커뮤니티에 이름을 검색해봤거든요. 유명한 사람일 것 같아서요."
"제가요?"
"네, 아까도 완전 랭커처럼 싸우셨잖아요. 딱 봐도 다른 서버에서 이름 좀 날리고 있을 것 같다 싶었죠."
그렇게 김진아는 내가 과거에 커뮤니티에 올렸던 수많은 비틱글을 보고, 내 자원 사정을 짐작해 냈다.
내가 넘쳐나는 재료로 장비를 마음대로 강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아낸 거다.
그걸 통해 지금 내가 끼고 있는 장비들도 전부 겉모습만 이렇지, 모두 고강화 아이템일 것이라 눈치챘고.
거의 최고 수준으로 강화된 지금 아이템에 비하면, 메테오스톤 장비가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틀린 부분이 좀 있긴 했지만, 대충은 맞았다.
내가 끼고 있는 아이템은 실제로 고강화 아이템들이다. 그 강화를 죄다 [내구]만 붙여 놔서 그렇지.
메테오스톤 장비를 원하지 않는 건, 스펙업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장비 종류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어쨌든, 수락해서 나쁠 건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죠 뭐."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친구 신청과 교환 기능을 사용했다.
**
-툭.
깨끗하게 비운 국밥 그릇을 내려놓고, 해독 포션을 그 안에 들이부어 살짝 닦아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릇에 남아 있는 독에 다른 도전자가 중독될 수도 있다.
"노점 테러범으로 박제되기는 싫으니까."
나는 그릇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페스티벌 코인을 내고 국밥 몇 그릇을 추가로 포장 주문했다.
다른 노점의 먹거리들도 맛 볼 생각이지만, 뭐가 됐든 이곳의 국밥만큼 맛있을 것 같지 않다.
어차피 페스티벌 코인은 아직 잔뜩 있다.
김진아 파티와는 그 후에도 몇 번을 반복해서 함께 던전을 돌았다.
본인이 호언장담한 대로, 김진아는 보스를 불러내는 함정을 잘 기억해 뒀다가 다시 작동시킬 수 있었고.
숏컷을 찾아낸 우리의 클리어 타임은 점점 빨라져, 남들이 던전 한번을 돌 시간에 네 번을 돌 수 있게 되었다.
김진아를 비롯한 세 사람은 막대한 양의 메테오스톤 파편을, 나는 수십 개는 되는 페스티벌 코인을 챙겼다.
"예, 여기 포장 나왔습니다. 바로 드실 거 아니면 발열석 몇 개 넣어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예, 그럼 다음에도 또 찾아주세요! 페스티벌 마지막 날까지 쭉 영업합니다!"
-띠링.
포장한 국밥을 챙기자,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친구 채팅방에서 알람이 울려 댔다.
[김진아 : 진혁게이야 오늘 덕분에 재밌었노]
이게 뭐지 시발. 아까 먹은 국밥에 환각제가 섞여 있었던 건가? 정신 오염?
[서진혁 : ???]
인벤토리에서 급히 해독 포션을 꺼내며, 채팅으로 말투가 왜 그렇게 됐냐고 물었다.
[김진아 : 커뮤에서 다들 이렇게 말하던데]
[김진아 : 이거 아니에요?]
[서진혁 : 네 그거 아님]
내가 커뮤니티에서 망령들과 대화하던 내용을 보고, 이상한 방향으로 학습한 모양이었다.
나는 또 뭐가 잘못된 줄 알았네, 해독 포션은 다시 집어넣자.
-띠링, 띠링.
김진아의 해괴한 인사 이후, 김민형과 김진석도 각자 한 마디씩 채팅을 보내왔다.
[김진석 : 진혁 씨 오늘 수고많으셨습니다.]
[김민형 :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김민형은 나한테 방패 위로 한 대 맞은 후, 꼬박꼬박 나를 형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열정리가 되고 나니까 아주 싹싹하게 군다.
코인을 가지고 거래가 있긴 했지만, 거의 쩔해주다시피 함께 던전을 돌아주고 있으니 당연한 건가.
두 사람의 채팅에 짧게 답장해주고, 포장한 국밥을 들고 여관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양가는 별로 없었다지만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파티플레이를 해 보고, 간만에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김진아를 비롯한 파티원들은 내 박살 난 소통 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코인을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걸 빼고 생각해도, 고정 파티를 맺길 잘한 것 같았다.
사실 단순히 코인을 많이 얻고 싶었을 뿐이라면, 굳이 김진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솔플을 고집할 것 없이, 아예 최상위 던전을 공략하는 고레벨 도전자들의 파티에 끼어들어 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코인은 많이 벌었을지언정, 이렇게 즐거울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러기는 커녕, 내 커뮤니케이션 능력 문제로 갈등을 빚었을지도 모르지.
성장의 체감에서 오는 자극적인 도파민의 홍수가 아닌, 은은한 세로토닌의 물결.
가끔은 이런 것도 좋구나.
**
다음 날, 나는 코인 노가다를 계속할 생각으로 미니 던전의 입장맵을 찾았다.
"진혁 씨, 여기요!"
먼저 도착한 김진아와 파티원들이 포탈 앞에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바로 합류했다.
이제 서로 준비가 됐니 어쨌니 확인할 필요도 없다. 나는 곧장 입장을 위해 포탈 위에 손을 올렸다.
"야, 치워."
그 때, 포탈 옆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웬 놈이 내 손을 쳐냈다. 뭐지 이놈은.
"여기 우리 파티 자리니까."
이 놈도 말투가 보통 싸가지 없는게 아니네, 근데 지금 자리라고 했나.
우리 파티가 모이기 전에 먼저 입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다.
이 놈 주변에는 파티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혼자였으니까.
나 같은 솔플러였다면 이해할 수 있는데, 분명 자기 입으로 파티라고 그러지 않았나?
"뭘 꼴아봐, 꺼져."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지.
#39. 묫자리
탑의 초대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당연히 인성으로 사람을 가려 받지도 않는다. 당장 나 같은 앰생 병신도 초대장을 받았으니까.
20대 남성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군대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거다.
사람 인성의 평균치는 생각보다 매우 낮고, 세상에는 별 되도 않는 걸로 으스대는 놈들이 많다는 거.
하물며 시련의 탑이라는 이질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평균은 또 어떻겠나.
"안 꺼져?"
그러니까 이렇게 대뜸 시비를 터는 놈이 있는 것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니다.
당장 나는 외견만 보면 탑 최하층의 상점제 장비로 무장한 좆밥처럼 보일 테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음,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우리 파티의 어떤 성기사는 그냥 평범한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 뭐예요?"
나는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고, 고개를 돌려 김진아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조금 전 일이니까,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부터 포탈 앞에 있었어요, 근데 안 들어가길래..."
"솔플하러 온 사람은 아닌 거 맞죠? 파티라고 했으니까."
김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기사 김민형이 내게 다가와 슬쩍 말했다.
"형님, 이거 자리 알박기인 거 같은데요. 파티원 한 명 세워놓고 자리 통제하는거요."
나도 온라인 게임은 많이 해 봤으니까,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대충 알고 있었다.
포탈 앞에 선 남자는 살짝 앳된 얼굴에 번쩍거리는 중갑을 입은 전사.
대놓고 알박기를 할 정도면 인맥이 빵빵하거나, 대형 길드 소속일 가능성이 높다.
입고 있는 갑옷도 상당히 좋아 보이고, 본인이 랭커는 아니겠지만 아는 랭커가 있을 수도 있겠다.
괜히 건드렸다가 더러운 놈들이랑 엮일 수도 있지만, 알박기가 애초에 떳떳한 짓은 아니니까- 일단 말이나 해 볼까.
"그쪽 파티원은 아직 아무도 안 온 것 같은데요, 우리는 다 모였고."
나는 조금 망설이며 남자에게 말해봤다. 남자는 나를 한번 슥 훑어보더니, 짧게 말했다.
"근데."
그게 다였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 이놈에 비하면 김민형은 아주 예의 바른 편이었네.
"그러니까 이 자리 우리 먼저 쓰겠다고요. 들어갈 거니까 비키세요."
"여기 우리 파티 자리라니까? 니 자리는 니미, 느금마 묫자리다 븅신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대뜸 중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리고 동시에 내 손이 뻗어졌다.
-쾅!
내 주먹이 놈의 명치에 정확히 꽂히며,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안하무인으로 구는 걸 보면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는 놈이다.
대형 길드가 뒷배로 있을 수도 있고, 랭커 지인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이 셀 수도 있다.
하지만 놈의 얼토당토없는 패드립을 들은 순간,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뭐, 느금마 묫자리?
내가 그 묫자리에 사과 한번이 하고 싶어서, 혼자 대가리 박아 가며 탑을 오르고 있는데.
그따위 소리를 듣고도 손이 안 나가면 이상한 거 아닌가. 이 씨발새끼야.
-우당탕!
내 주먹에 얻어맞은 남자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명치를 갈긴 주먹이 조금 얼얼했다. 심상치 않은 장비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확실히 좋은 갑옷이다.
하지만 내 주먹질에 반응도 못 하고, 그대로 날아가 자빠진 걸 보면 스펙은 별 볼 일 없는 모양이다.
"씨, 씨발, 새끼가."
나동그라진 남자는 턱을 달달 떨며 새빨개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표정만 보면 아주 세상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근데 니가 뭔 자격으로 빡치고 지랄이냐.
"쳤냐? 너 씨발, 내가 누군 줄 알아? 딱 봐도 개쪼렙 거지 새끼가, 뒤질라고."
놈은 중얼중얼 욕을 지껄이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가 주먹을 만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병신, 주먹 부러졌냐? 그러게 좆도 아니면서, 내 갑옷이 얼마짜리인데."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저벅저벅 걸어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소리 할거면 투구는 쓰고 하던가."
-콰직!
"어걱!"
나불거리는 놈의 턱주가리에 죽빵을 꽂아주었다. 허연 이빨이 후두둑 튀었다.
엄청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손맛을 보면 이빨만 아작나는게 아니라 턱뼈까지 어떻게 된 모양이다.
템빨 아니었으면 처음 명치 맞고 나서 숨도 못 쉬고 있었겠네. 뭐 믿고 깝치는거지.
-웅성웅성.
턱이 박살나며 다시 한번 땅에 엎어진 놈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 놈의 지인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싸움이 나서 와본 사람들인 것 같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바닥을 버르적거리던 이름 모를 놈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질질 흘려대며 마셨다.
포션 병의 디자인이 엄청나게 화려했는데, 장비만이 아니라 소모품까지 고급으로 쓰는 모양이다.
"훅, 후욱...씨, 씨발, 새끼."
포션을 들이킨 놈은 또 인벤토리를 만지작거리더니, 뒤늦게 하얀 투구를 뒤집어쓰고 무기를 들었다.
무기는 커다란 양손도끼, 하지만 도끼를 든 폼부터가 어정쩡하다 못해 등신같았다.
패드립으로 시비를 걸어 놓고는, 죽빵 한 대 맞았다고 무기를 들다니.
"넌 씨발 뒤졌어, 거지 새끼야."
돈이 많은 게 그렇게 자랑인지, 거지 운운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한다.
시련의 탑에서 쓸 수 있는 골드라면 나도 썩어날 만큼 많은데, 모르니까 거지니 뭐니 하는거겠지.
근데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왜 의기양양한 거지? 설마 진짜로 투구 썼다고 다 될 줄 아는 건가?
-후웅!
전신을 중갑으로 꼼꼼히 덮은 놈이 도끼를 휘두르며 덤벼 왔다.
자세도 등신같았지만 휘두르는 건 더욱 등신같다. 어떻게 1층의 고블린보다 무기를 못 쓰지.
딱 두 걸음으로 도끼를 피해 내고, 주먹을 꽉 쥔 채 스킬을 사용했다.
[철벽]
무쇠처럼 단단해진 내 주먹이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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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서 폐관수련을 진행하며 레벨을 올린 스킬은 내성 계열만이 아니었다.
[대지 정령의 가호 Lv.10]
대지 속성의 소정령이 당신의 곁에 머무른다.
스킬 레벨은 정령과의 친밀도에 따라 상승하며, 레벨에 따라 새로운 효과가 해금된다.
- 기본 패시브 효과 : 방어력 + 20
- 추가 패시브 효과 : 물리 피해 감소 + 5%
- 추가 액티브 효과 : [철벽] 스킬 사용 가능
정령 친밀도를 올리는 방법을 알아내어, 대지 정령의 가호 스킬을 크게 올릴 수 있었다.
친밀도를 올리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는데, 정령이 깃든 물체와 교감하며 접촉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대지 정령이 깃든 물체라면 당연히 흙, 모래, 돌 등이었고.
한동안 화이트롤과 함께 조약돌을 씹어먹는 것으로 친밀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물론 효율이 썩 높은 건 아니라서, 10레벨을 찍고 액티브 효과를 해금한 건 6층에서의 일이지만.
아무튼, 액티브 스킬인 [철벽]의 효과는 단순하다.
신체 일부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것. 단순하지만 매우 강력하고 유용한 효과다.
이 스킬이 있으면 나는 가죽 갑옷을 입고도 중갑 수준의 방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주먹을 단단하게 만들어 공격력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고.
-쾅!
원래도 금속과 부딪히면 요란한 소리를 내던 내 주먹이, 이번에는 특히 큰 소리를 터트렸다.
도끼를 붕붕 휘두르던 중갑의 사내는 목이 확 꺾이며 한쪽으로 쓰러졌다.
좋은 갑옷으로도 그 충격은 다 감당할 수 없었는지, 쓰러진 놈은 잠시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 뒤진 척이야, 뒤질래?"
-쾅!
다시 한번 [철벽]스킬을 사용해, 쓰러진 놈의 머리통에 싸커킥을 갈겨 주었다.
그제서야 놈은 '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뇌진탕이 온 건지 몸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한 건, '무기를 안 꺼내길 잘했다'는 것이었다.
빈 손이길 다행이지, 흥분해서 무기를 휘둘렀으면 그대로 죽여 버릴 뻔했다.
"지, 진혁 씨. 죽인 거 아니죠?"
갑옷남의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어디를 두들겨 깔까 고민하던 그 때, 김진아가 튀어나와 물었다.
이제 보니 그 사이에 사람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김진아도 거의 버둥거리며 인파를 뚫은 모양이다.
"안 죽었어요, 안 죽일 거고."
김진아는 커뮤니티 검색을 통해 내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던지라, 내가 저놈을 죽여 버릴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뜸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애초에 내가 패드립에 그렇게까지 화낼 자격이 있지도 않고.
몇 년동안 등골을 쪽쪽 빨아먹으며 고생시켜 놓고, 패드립에 머리끝까지 화나서 사람을 죽인다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는 못 한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당연히 죽일 줄 알았다니, 김진아도 살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다른 탑의 사정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형 길드의 통제로 그럭저럭 치안은 잡혀 있을 텐데.
-웅성웅성.
김진아와 대화하는 사이, 싸움 구경을 하러 몰려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길훈아!"
인파를 가르고, 뻗어 있는 갑옷남과 비슷한 얼굴을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어떤, 어떤 씨발새끼가...너냐, 이 개새끼야!"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꼬라보더니, 인벤토리에서 대뜸 창을 꺼내 크게 휘둘러 자세를 잡았다.
창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형제인 모양인데, 저게 저놈의 빽인가.
웅성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 '최길현' 이라는 이름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진혁 씨...저 사람, 랭커에요…!"
그래, 거 아주 든든한 빽을 두셨구먼.
#40. 랭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