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

#40. 랭커

시련의 탑 도전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초대장에 의해 납치되어 억지로 끌려온 일반인, 헌터가 되기 위해 탑을 오르는 공략파, 그리고 랭커.

랭킹이라는 시스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누가 랭커고 아니고를 딱 잘라 구분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커뮤니티에서 랭커라 불리는 건, 시련의 탑 고층에서 장기간 체류 중인 공략파 도전자.

그리고 시련의 탑을 구분짓는 세 개의 플로어에 체류하고 있는 버스기사들이다.

25층, 50층, 75층.

시련의 탑은 층마다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지만, 그중에서 이 세 층은 플로어라 불리며 시스템상 특별하게 취급된다.

별도의 미궁 지역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고, 한 번 공략되면 사라지는 수호자 보스만 덜렁 있는 장소.

그리고 다른 층처럼 전이문으로 쉽게 오갈 수 없고, 특수한 방법으로만 넘나들 수 있다.

그렇기에 버스기사들은 그 이상의 층으로 넘어가지 않고, 뉴비들을 자신이 있는 층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맡는다.

"25층에 거주하고 있는 저층 랭커에요, 최근에 엄청 유명해요..."

김진아의 설명에 따르면, 내 앞에서 창을 꺼낸 최길현은 랭커 중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저층 랭커.

하지만 명색이 랭커라고 불리는 만큼, 단순히 저층에 거주하고 있다고 얕볼 수 없다.

25층까지 도전자들을 인양하는 버스기사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건, 그 이하 층의 보스를 쉽게 잡을 수 있다는 뜻.

나처럼 쌩 솔플로 공략하지는 않겠지만, 기준 미달의 도전자들을 이끌고 24층까지 공략할 힘은 있다는거다.

"지, 진혁 씨, 저희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달리 방법이 있나.

나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내게 다가온 김진아와 파티원들을 뒤로 물려 놓고, 방패와 검을 들었다.

솔로 플레이라는 점 때문에, 나는 6층을 공략하고 있음에도 보통의 6층 도전자보다 월등히 강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랭커라면 25층에 체류하고 있어도 일반적인 25층 도전자보다 스펙상 훨씬 강하겠지.

레벨도 저쪽이 더 높을거고, 아이템도 당연히 저쪽이 더 좋을 거다.

당장 저기 나자빠진 동생 놈만 봐도 과분한 갑옷과 도끼를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 내가 그랬다."

씩씩거리며 창을 쥐고 있는 랭커, 최길현을 향해 말했다.

"네 동생놈이 던전 입구에서 알박기를 해 놓고, 우리가 들어가겠다니까 패드립을 했거든."

대화가 가능한 표정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말부터 꺼내 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내 동생 면상에 싸커킥을 갈겼다고? 패드립? 느금마한테 그러라고 배웠냐?"

"그건 아닌데, 니 동생은 너한테 배웠나 보네."

"닥쳐, 좆같은 새끼야. 딱 보니까 렙만 높은 거지새끼 같은데, 넌 오늘 살아서 못 돌아간다."

동생 새끼 인성교육이 처참하다 했더니, 형 쪽도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대화로 풀긴 글렀군.

내가 여기서 싸움을 피하고 원만하게 풀려고 하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진 않지만.

나도 패드립을 한 번 더 들어놓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

창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추측할 수 있는 직업은 레어 클래스인 창기사.

전사계열 레어 클래스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스킬을 갖고 있어, 인기가 많은 클래스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티에는 창기사 클래스의 주요 스킬 정보가 많이 풀려 있는 상태.

곧이곧대로 스킬을 써 가며 빈틈을 보여주지는 않겠지만, 염두해서 나쁠 건 없을 거다.

그나저나, 창인가.

근접 전사들끼리의 대결에서 리치의 차이는 아주 큰 영향력을 갖는다.

내 검과 방패에 비해 놈의 창은 압도적인 리치를 자랑하고, 피지컬도 저쪽이 강할 거라고 예상되는 상황.

심지어 나보다 키도 크고 팔도 길어 보인다. 동생 놈은 나보다 좀 작았는데, 영양분을 혼자 처먹었나.

나도 창술을 익힌 만큼 창을 꺼내서 대응해도 괜찮겠지만, 진짜 창기사를 상대로 어설픈 창술이 먹힐까 싶다.

지금은 익숙한 검과 방패로 인파이팅을 펼치는 게 좀 더 낫겠지.

"뒤져!"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창을 내질러오는 최길현.

역시 내 예상대로 스펙이 상당한지, 창을 뻗는 속도와 힘 모두 굉장하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나를 얕보고 있는 탓인지, 창을 뻗는 자세와 동작이 어정쩡하다.

방패를 내밀어 창날을 빗겨 막으며, 앞으로 한 발짝 파고들었다.

이 녀석이 전력으로 내지른 창의 위력을 정면에서 감당하기는 힘들 거다.

-카각!

창날이 비스듬히 스치고 지나간 방패에서 불똥이 튀었다. 대충 스쳤는데도 이 정도라니, 역시 랭커.

창의 간격 안쪽에 발을 들여놓은 채, 놈의 옆구리를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장비를 덜 갖추고 나온 건지, 아니면 원래 가벼운 장비를 선호하는건지, 동생과 다르게 중갑은 아니다.

이 정도면 내 찌르기도 충분히 박아넣을만 할 거다.

-타닥!

그러나 최길현은 뒤로 크게 뛰어 찌르기를 피해 냈다.

근력뿐만 아니라 민첩 스탯도 상당히 높은 것 같다. 그런데, 왜 뒤로 뛰어서 피한 거지.

내 클래스나 스킬을 모르니까 신중하게 거리를 벌리고, 아웃복싱으로 상대하겠다는 건가.

무기의 이점을 살리려면 확실히 그게 좋겠지. 방금 한 합으로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놈이 펼친 동작은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씨발새끼가!"

아웃복싱으로 나오기는커녕, 조금 전과 똑같이 욕설을 내뱉으며 정면으로 돌진해 오는 최길현.

뭐지, 이 새끼?

아까와 똑같이 어정쩡한 자세로 뻗어져 오는 찌르기를, 옆으로 슬쩍 한 걸음 움직여 피해 냈다.

내가 측면으로 움직였음에도, 최길현은 궤도를 바꾸거나 창대를 휘둘러 대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찌르기의 기세를 주체하지 못한 것처럼 두 발자국 정도 더 앞으로 나갔을 뿐.

나는 과하게 파고드느라 훤히 드러난 최길현의 관자놀이를 방패로 후려갈겼다.

-빠악!

방어력이 높아서인지 무슨 돌덩이를 후려치는 느낌이다.

머리를 맞은 최길현은 한번 휘청거리더니, 몸을 틀어서 내 쪽을 향해 다시 창을 뻗었다.

창날이 푸르스름한 빛을 낸다. 무슨 스킬인지 알고 있다. 3연속 찌르기 공격인 스피어 버스터.

-훙훙훙!

잘 알려진 스킬을 대놓고 눈앞에서 쓰니, 맞아주려야 맞아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측면으로 피해낸 다음, 이번에는 방패 대신 검을 휘둘러 최길현의 목을 노렸다.

방어력을 보니까 이렇게 갈겨도 목이 썰릴 것 같지는 않다.

"커헉!"

울대를 칼날로 얻어맞은 최길현은 뒤로 나자빠지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자세다.

설마 이 새끼, 그냥 이 자세로 찌르기밖에 못 하는 건가?

아니 설마, 아니겠지. 랭커잖아.

"흐아압!"

기합을 지르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자세로 찌르기를 날려오는 최길현.

슬쩍 측면으로 피해내니, 이번에는 창을 크게 휘둘러 제대로 옆을 공격했다.

하지만 어째 창이 아니라 봉 같은 걸 쓰는 느낌으로 휘두른다.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글쎄.

이 새끼, 왜 이렇게 싸움을 못 하지?

**

몇 분간 합을 주고받은 끝에, 나는 확신을 내렸다.

이 새끼는 좆밥이다.

사실 처음 공격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흥분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보면 볼수록 이놈의 실력은 처참했다. 숙련된 창사가 많은 리자드맨을 오래 상대해 봤기에 단언할 수 있다.

이놈한테는 창기사라는 클래스명이 어울리지 않는다. 창 기능사 정도가 딱 어울린다.

랭커인 만큼 피지컬은 강력하지만, 창을 다루는 기술이 턱없이 부족하다.

비교하자면 리자드맨 중급 전사의 말단 정도쯤 될까?

민첩 스탯이 높아서인지 반응속도가 빨라, 종종 날카로운 일격을 날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합해서 중급 전사 말단급으로밖에 안 보인다. 저층이라고 해도 이딴 게 랭커라니.

망치를 완드처럼 들고 다니는 성기사에, 방패 두고 쌍검을 쓰는 쌍검충이 있는 우리 파티보다 심각하다.

둘을 보면서 왜 실력이 그 모양인가 했는데, 그 정도만 해도 도전자들 사이에서는 좀 치는 수준이었던 거다.

심지어 이 녀석은 전투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글러 먹었다.

-빠악!

무식하게 달려드는 최길현의 발목을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놈의 스텝이 흐트러지다 못해, 중심을 잃어버리고 훅 넘어져 버렸다.

"병신인가...누가 싸우는데 깔창을 끼고 오냐?"

동생에 비해 키가 꽤 크가 싶었는데, 신발에 깔창을 깔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걸로.

내가 어림한 깔창 높이를 빼 보면 아마 동생보다 키가 작을 거다.

이 정도면 신발이 아니라 자가용이나 탑승물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헉, 허억...시발, 새끼, 가아..."

혼자 온 힘을 다해서 덤벼들고, 나한테 주야장천 얻어맞은 최길현은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먼지나게 처맞아 놓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욕을 지껄이고 있다.

"아가리."

-깡!

헥헥거리는 최길현의 정수리를 세게 후려갈겼다.

최길현의 실력을 제대로 인식한 후, 나는 검을 집어넣고 다른 걸 무기 삼아 휘두르고 있었다.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건 1층에서 얻은 미스릴 완드.

전사인 나한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라 한동안 인벤토리에 처박아 놓기만 했었는데.

재질이 미스릴이라서 매우 가볍고 단단해, 방어력 높은 이놈을 후드려까는 몽둥이로 딱 좋았다.

-깡! 깡! 깡!

실로폰채에 두들겨지는 실로폰처럼 미스릴 완드에 대가리를 헌납하고 있는 최길현.

처음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구경꾼들도, 아무것도 못 하고 두들겨 맞기만 하는 랭커를 보며 조금씩 웃고 있었다.

후환이 두려운지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있지만, 깡 좋은 몇 명은 실실 웃어대며 시스템의 캡쳐 기능을 이용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커뮤니티에 [실시간 25층 랭커 굴욕.jpg]쯤 되는 제목으로 유머글이 올라와 있지 않을까.

솔직히 같은 남자로서, 실시간으로 자존심이 산산조각나는게 보여 좀 안쓰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이, 개새, 애미 뒤진, 씨발, 새끼."

대가리를 처맞으면서 습관처럼 패드립을 뱉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손이 나가 버린다.

"아가리."

-깡!

이 날 커뮤니티에서 최길현의 사진은 개추 300개를 받았다.

#41. 알 수 없는 것

아무리 지능 낮은 짐승이라도 처맞다 보면 행동이 교정되는 법.

미스릴 완드로 한참을 두들겨 맞은 창 기능사 최길현은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다.

"씨발, 씨발..."

다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를 아득바득 갈아 댔다.

"너 이 새끼, 뭐 하는 새끼야...너 이거 감당 가능하냐?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최길현은 이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빽에게 또 빽이 있었다니, 놀라울 지경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놈의 빽이 나한테 무슨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막말로, 그 빽이 나한테 뭘 할 수 있는데?

이벤트가 끝나면 나는 다시 2661 서버 시련의 탑으로 돌아가고, 향후 3년간 다른 도전자와 만날 일은 없다.

페스티벌 맵에서 나를 위협하려고 해도, 나는 이번 이벤트에 절박한 것도 아니니 그냥 탑으로 돌아가면 그만.

바깥 세계에도 아무 연고가 없으니, 바깥에서 내 주변인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놈의 빽이 대기업 회장이건, 대한민국 대통령이건, 하늘나라 하나님이건 나한테는 안 통한다.

"왜, 느금마가 안 알려주디?"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놈들에게 이제까지 들었던 패드립을 돌려주었다.

"이, 이 씨발 새끼가!"

그렇게 남한테 패드립을 갈겨 놓고, 자기가 듣는 건 못 참겠는지 발끈하며 덤비려 드는 최길현.

그러나 나에게 한참을 처맞은 트라우마 때문인지, 미스릴 완드를 슬쩍 들어 올리자 바로 움츠러들었다.

-풉.

그 모습을 보고, 구경꾼 중 한 명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건지 웃음을 터트리려 했다.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웃었어!"

최길현은 얼굴이 새빨개져선 박박 소리를 질러댔다. 비참한 모습임에도 랭커인 탓인지, 급격히 주변이 조용해졌다.

"씨발, 방금 쪼갠 새끼 누구냐고! 나와, 나오라고 씨바앜!"

-깡!

"내가 웃었다, 씨발아."

발작하는 최길현에게 마지막으로 미스릴 완드를 두들겨 준 다음, 찌그러진 놈을 두고 인파를 헤쳤다.

이 소란에 시선이 몰린 덕분에, 원래 들어가려던 포탈 앞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던전 다시 가죠?"

"네? 아, 저기, 그게."

미스릴 완드를 집어넣으며 다가가자, 김진아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김진아만이 아니라 김민형과 김진석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 김민형은 살짝 떫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기도 하마터면 저렇게 처맞을 뻔했다는 걸 알아서 그러는 걸까.

"분위기가 이래서, 오늘은 좀...다음에, 다음에 가요."

김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분위기가 이런데 여유롭게 던전에 들어가기에는 좀 그랬나 보다.

나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일단은 자리를 떠났다.

**

김진아는 친구 채팅으로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떻겠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알겠다고 답장하긴 했지만, 막상 진짜로 쉴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시련의 탑에 들어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한 이후, 나는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도전과 성장의 연속이었고, 모든 시간마다 피와 칼이 함께했다.

수면이나 식사 시간도 마찬가지.

수면 시간은 몸이 버틸 수 있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편안한 잠자리는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식사는 항상 혀가 마비될 정도로 단맛만 나는 화이트롤과, 일정량의 독만을 섭취해 왔다.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사 먹었던 국밥을 제외하면, 제대로 밥 비슷한 것을 먹어본 지도 무척 오래됐다.

성장의 성취감이 가져다주는 도파민을 잃으면 그걸로 끝장, 한 번 관성을 놓치면 그대로 늘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몰아넣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어제 맛보았던 세로토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다' 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안정감은 딱히 나를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가볍게 환기를 해 주고 나니까, 더욱 컨디션이 좋아진 느낌이다.

운동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먹고 쉬는 것까지 운동이라고 하던데.

나도 슬슬, 한 번쯤 휴식을 취하며 자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진짜 뭐 하지."

문제는 휴식의 필요성을 느끼긴 했지만, 진짜 뭘 하면서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커뮤니티나 구경하면 되는 건가?

하지만 그건 휴식이라기보다는 그냥 시간을 내다 버리는 거 아닌가.

휴식도 휴식 나름이지, 최소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음..."

나는 고민하며 오픈 커뮤니티를 열었다. 그리고 페스티벌 맵에서 할 수 있는 이벤트 목록을 찾았다.

미니 던전 공략 외에는 도전자끼리 즐길 수 있는 간소한 미니게임이나 퀘스트 같은 게 전부다.

하나같이 영 내키지 않는데다가, 애초에 혼자서 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스크롤을 쭉쭉 내리다, 문득 눈에 들어온 일정이 하나.

[시련의 탑 최강자 결정 토너먼트 - 예선]

페스티벌의 메인 이벤트 중 하나인 토너먼트 예선전이 오늘이었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토너먼트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으니, 예선 참가 신청도 안 했다.

쟁쟁한 랭커와 고층 도전자들이 겨루는 토너먼트에 내 수준으로 나가서 활약할 구석은 없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원래 직접 참가하는 것만큼이나 구경하는 것도 재밌는 법.

고층 랭커들의 실력을 보며 견문을 넓히고, 동시에 휴식도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컨텐츠 같은데.

오늘은 이거나 보러 가야겠다.

**

노점에서 파는 팝콘과 탄산음료를 사서 관중석에 자리를 잡았다.

본선이 아님에도 구경하러 온 도전자들의 숫자는 굉장히 많았다. 거의 프로야구 경기 수준의 관중이다.

하긴, 3년에 딱 한 번만 열리는 스포츠 대회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렇잖아도 오락거리가 적은 시련의 탑 세계에서, 이만큼 자극적인 컨텐츠도 없겠지.

토너먼트 예선전은 5명의 참가자를 한 조로 모아놓고 펼치는 배틀로얄 형식의 경기.

동서남북에 위치한 4개의 경기장에서 동시에 치르는 식이라, 도전자의 수준에 따라 인기가 눈에 띄게 갈린다는데.

이렇게 관객이 많은 걸 보니, 아마 예선전 중에서 상당히 주목도가 높은 경기가 예정된 것 같다.

"이번 조에는 누구누구 나오냐? 볼만한 거 있어?"

"강태진이랑 이영원이 같은 조란다, 거의 본선 급임."

"실화냐, 그 둘이 예선에서 붙는다고?"

옆 좌석의 도전자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커뮤니티에서 본 적 있는 이름이 언급되고 있었다.

이영원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강태진은 작년쯤부터 커뮤니티에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공략파 도전자다.

아마추어 복싱선수 출신의 헌터 지망생으로, [스톰 스트라이커]라는 격투가 계열 유니크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다나.

혼자만 툭 튄다면 경기가 금방 끝나버리겠지만, 같은 조에 쟁쟁한 도전자가 하나 더 있는 모양.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아, 시작한다."

옆자리 도전자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는 사이, 금세 예선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장에 등장한 다섯 명의 도전자는 모두 남자였다. 그중에서 강태진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혼자만 별다른 무기 없이, 건틀렛을 끼고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은 짧은 머리칼의 남자. 저 사람이겠지.

그리고 이영원이라는 도전자는...저 사람인가, 후덕한 체형에 자기 키만한 대검을 든 전사.

다른 세 명의 도전자가 각각 겁에 질려 있거나, 낭패라는 듯 이마를 감싸 쥐고 있었기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어떤 싸움을 보여 주려나.

**

재수없게 강자들과 같은 조에 걸려버린 도전자 세 명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기권을 선언했다.

경기 중 입은 부상은 모두 회복된다고는 하지만, 랭커급 도전자한테 비벼볼 생각은 안 들었던 거겠지.

그렇게 경기는 곧바로 강태진과 이영원의 일기토로 접어들었는데, 경기의 흐름이 뭐랄까.

"에라이, 존나 게이같이 싸우네."

음, 그래 그거.

옆자리의 관객이 내가 생각한 걸 그대로 표현해주었다. 유망주라던 강태진이 정말 게이같이 싸웠다.

경기 초반에는 그래도 볼 만했다. 높은 방어력과 한방 공격력을 자랑하는 이영원에 맞서 강태진은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스톰 스트라이커]라는 이름에 맞게 내 눈으로도 쫓기 힘들 만큼 매우 빠른 공격을 퍼부어 댔는데.

그러던 중, 이영원의 대검에 공격 한 번을 허락한 뒤로 급격히 태세를 바꾸었다.

-부웅, 쾅!

강태진의 주먹에서 쏘아지는 바람의 포탄이 이영원을 가격했다.

유니크 클래스는 달라도 뭐가 다른지, 강태진은 격투가 주제에 원거리 공격 스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위력이 강해 보이진 않았는데, 강태진은 그대로 거리를 벌린 채 원거리 공격만 이어나갔다.

육중한 근접 전사인 이영원의 접근을 이동 스킬과 민첩 스탯빨로 따돌리고, 그냥 멀리서 장풍 연타.

상성을 이용한 공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흥 유망주와 랭커간의 싸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낮았다.

[경기 종료]

[경기 시간 초과로 잔여 HP가 더 많은 도전자가 승리합니다.]

[승리 : 강태진]

결말은 시간 초과로 인한 강태진의 자동 승리. 멀리서 한 대도 맞지 않고 장풍만 계속 날려댔으니 당연한 일이다.

"에라이 씨팔, 눈 버렸네. 저럴 거면 왜 기어나온 거야?"

"말조심해, 누가 듣겠다."

중얼거리며 경기장을 나가는 옆자리 관객의 말이 이번에도 내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대단한 기교나 실력을 보여주기는커녕, 그냥 클래스 성능을 내세워 밀어붙이는 찌질한 모습만 드러냈으니.

창을 쓰는건지 이쑤시개를 쓰는건지 분간이 안 되는 최길현도 그렇고, 내가 다른 도전자들에게 너무 기대한 걸까?

커뮤니티에서 같은 서버 도전자들이 평가하는 것과는 실상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띠링.

아쉬워하며 다음 경기를 기다리던 중, 친구 채팅의 알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김진아 : 진혁씨 혹시 조금 이따 시간 괜찮으세요?]

아, 때마침 잘 됐네.

#42. 김진아

나는 시간이라면 지금 당장도 괜찮다고 답했지만, 정작 김진아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진아는 '그럼 이때쯤은 어떠세요' 라며 약속 시간을 새로 잡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던 나는 그냥 승낙했다.

약속 장소는 페스티벌 중앙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한 카페테리아.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잠시 따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이야기라면 친구 채팅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할텐데, 왜 굳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는 걸까.

게다가 왜 굳이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둘이 따로 이야기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거 설마 그린라이트인가, 김민형이 내게 띠껍게 굴었던 이유가 이렇게 밝혀지는 건가.

에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서로 얼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일이 있겠나. 내가 뭐 연예인급으로 잘생긴 거면 모르겠는데.

인벤토리에서 지저분한 거울 조각을 꺼내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화장실 거울을 보며 '나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소리를 하기 마련. 나도 별로 다를 건 없다.

하지만 별생각 없이 꺼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괜찮기는커녕, 무척 낯설게만 보였다.

"뭐지."

내가 언제부터 이런 눈을 하고 있었더라.

**

토너먼트 예선 경기는 아직 몇 개 남았지만,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관에 마련된 욕실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을 만지고 표정을 바꿔 봤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게 정말 내 얼굴인가, 내가 대체 언제부터 이런 몰골을 하고 있었지?

특별히 초췌하다거나, 어딘가 나빠 보이는 건 아니다. 그냥 뭔가 어색하다.

시련의 탑 세계에 들어온 뒤로 거울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자신이 낯설게 비친다.

"그냥 들뜬 건가."

안 그런 척했지만, 여자랑 약속이 잡혔다는 이유로 괜히 생김새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건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당장 내 추한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을 앰생이라고 부르기까지만 해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회피적인 성격과 방어기제는 때로 자신마저 속이기에, 나는 자신의 민낯을 계속 들추고 바라볼 의무가 있다.

그냥 여자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떠서 외모가 신경 쓰이는 건가.

그게 아니면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까.

"모르겠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의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아맞힐 수 있다던데.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을 아무리 노려봐도, 무엇하나 알 수 없었다.

-쏴아아.

욕실에 들어온 김에 덜 빠진 피 냄새나 씻어내자며, 나는 물을 틀었다.

**

혼자 뻘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약속 시간에 조금 늦고 말았다. 한 5분 정도.

김진아는 천천히 와도 괜찮다고 채팅을 보냈지만, 내 쪽이 마음이 편치 않아 조금 서둘렀다.

카페테리아에 도착하자, 빈 테이블 사이에서 혼자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김진아가 보였다.

"진혁 씨."

마법사용 장비가 아닌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앉아, 손을 살랑이며 나를 부르는 김진아.

목소리나 얼굴은 이전과 그대로지만, 복장이 달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뭘 그렇게 급하게 오세요, 천천히 와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런다고 진짜 천천히 오면 보통 욕먹지 않나요."

"에이, 제가 진혁씨 덕을 본 게 얼마인데 그 정도로 욕을 하겠어요?"

나는 살짝 웃으며 김진아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는 까만 차가 한 잔 놓여 있었다.

"제 마음대로 한 잔 시켰어요. 제가 사는 거니까 취향에 안 맞아도 불평하시면 안 돼요?"

능청스럽게 웃으며 김진아는 내게 차를 권했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홀짝.

아무렇게나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향이 입안에서 흘러넘쳤다. 생소한 맛이다.

생소하긴 하지만 썩 나쁜 맛은 아니었기에,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어때요?"

"괜찮네요."

김진아는 다행이라며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 김진아가 뭘 줬어도 그냥 마시고 똑같은 말을 했을 거다.

내가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말한 건 빈말이 아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혈사포를 들이마시며 살던 참 아닌가.

아마 혼자였으면 이 차도 독화살로 한 번 휘저은 다음에 마셨을 거다.

"아, 과자도 맛있어요. 여기, 드셔 보세요."

김진아는 이번에는 잼이 올라간 과자를 건넸다. 나는 이것도 대충 집어먹었다.

이건 좀 별로네.

대지 정령과의 친밀도를 올리겠다고 진흙 쿠키를 만들어서 먹어본 적도 있으니, 어지간하면 그냥 먹는데.

하필이면 무진장 단맛이네. 화이트롤을 주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한테 단 과자를 주다니.

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김진아의 표정이 나빠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차를 마셔서 넘겼다.

"이것도 괜찮네요."

"일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너무 달아서 그렇지, 괜찮았어요."

김진아는 잠깐 나빠졌던 표정을 금세 되돌리고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

그 뒤로는 잠시간 잡담을 나누었다. 잡담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김진아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걸 들어주며, 가끔 맞장구를 쳐 주는 것 뿐이었다.

오랫동안 칩거 생활을 했던 나에게는 마땅한 잡담거리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거긴 한데.

"죄송해요, 제가 너무 떠들었죠?"

김진아는 한창 즐겁게 떠들다가, 어느새 텅 비어버린 내 찻잔을 눈치채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러려고 진혁 씨를 부른 게 아니었는데...좀 늦었지만,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네, 하세요."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데요, 진혁 씨가 때려눕힌 그 사람이 랭커라는 건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기사 최길현, 클래스 명에 어울리지 않게 처참한 창술 실력을 가진 저층 랭커였지.

토너먼트 경기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오픈 커뮤니티에 이름을 검색해 봤는데, 나오는 건 별로 없었다.

"아마 진혁 씨는 잘 모르실 거예요. 사실 그 사람, 그냥 평범한 랭커가 아니에요."

"랭커치고 많이 약하긴 했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평범한 랭커가 아니라...1554 서버에서 엄청 유명한 망나니거든요."

김진아는 1554 서버에서 떠도는 최길현에 대한 소문을 이것저것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하기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다른 도전자를 폭행하고, 매일같이 여성 도전자를 희롱하고 추행한다고.

또 말하기를- 그에게 반발한 도전자는 뒷골목에서 불구가 되어 발견되는 일이 심심찮게 있다고.

또 또 말하기를- 이미 시련의 탑 안에서 이유가 뭐든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 이상 있다는 소문이라고.

모두 실체가 불명확한 이야기였지만, 김진아는 그것을 담담하게 사실인 양 이야기했다.

"그거 쓰레기 새끼네요, 더 팰 걸 그랬나."

당연히 나는 코웃음 치며 흘려넘겼다. 하지만 김진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증거는 없지만, 소문이 거의 다 진짜라는 거."

그건, 좀 이상한 이야기였다.

내가 이야기를 코웃음 치며 넘긴 건, 그 대부분이 헛소문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련의 탑은 약육강식의 무법 지대 같은 게 아니다.

문명화된 법 아래에서 돌아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버 대부분은 대형 길드에 의해 치안이 잡혀 있는 상황.

범죄를 저지르면 길드에 의해 제재당하고, 그게 아니면 오픈 커뮤니티를 통한 폭로와 공론화도 가능하다.

고작 저층 헌터 따위가 그만한 일을 벌이고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 터.

"아버지가 헌터협회 이사진이래요."

그러나 김진아는 그런 내 의견을 간단하게 반박했다.

"그래서 엄청 난리였대요, 완전 성골 헌터라고. 고층 랭커들도 탑을 나가서 고위 헌터가 되는 게 목표인 이상..."

"그놈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네, 추행 같은 사소한 건 다들 흐린 눈으로 넘어가고, 강력 범죄 수준도 증거가 없으면 그냥 묻히고 말아요."

시련의 탑에서 증거만큼 웃긴 말도 없다. 온갖 마법과 스킬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대체 뭐가 증거가 될 수 있나.

"죄송해요, 제가 그 사람 동생을 못 알아봐서...진혁 씨를 말렸어야 했는데."

김진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심각하게 하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나.

어차피 나는 2661 시련의 탑에서 혼자 지내는 몸인데, 그런 놈을 건드린 게 뭐 별일이라고.

일찍 말리지 못했다는 걸로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며 사과하다니, 김진아도 참 사람이 착한 건지 순진한 건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 때 말렸어야, 말렸어야 했는데..."

나는 소통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그래서 김진아를 달래기 위한 말을 고르는 것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내가 어렵게 고른 말을 꺼내는 것보다 빠르게, 김진아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저도, 1554 서버라서...!"

-쿵!

카페테리아의 출입문이 박살 나며, 땅딸막한 실루엣의 남자 두 명이 걸어들어왔다.

중갑을 입고 도끼를 든 남자, 그리고 경갑을 입고 창을 든 남자.

나에게 처맞았던 최길현 형제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아, 순진한 건 김진아가 아니라 나였네.

"여기 뭐 탔냐?"

나는 잡담을 하며 비워버린 찻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그게..."

김진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빈 포션병을 올려놓았다.

"강력한 지효성의 마비독이랬어요, 지금쯤이면 약효가 나타날 거라고..."

아, 음, 그렇구나.

마비독을 넣으셨구나.

그것, 참.

뭐라고 해야 할까.

"너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애미뒤진 거지새끼야, 다시 붙어 씨발."

재수도 없지.

#43. 오리진

김진아가 어디 서버 사람인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있는 탑 외의 다른 곳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시련의 탑은 약육강식의 무법지대가 아니라고, 나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판단했나.

내가 탑의 사회에 대해 아는 건 외부에서 기사 따위로 접한 이야기와, 탑에 들어와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알게 된 것들뿐.

전자는 시련의 탑 세계와 바깥간의 소통이 매우 느리고 부정확하다는 점 때문에, 애초에 곧이곧대로 믿을 게 못 된다.

그리고 오픈 커뮤니티는 완전한 실명제.

글쓴이의 본명과 소속된 서버까지 커뮤니티에서는 그대로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이건 현피에 최적화된 구조다.

내 험담을 하는 놈이 같은 탑에 소속되어 있다면, 직접 찾아가서 죽여버릴 수 있다.

같은 탑의 도전자가 아니더라도, 대형 길드와 유착관계가 있다면 간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후자로도 특정 랭커나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무척이나 얻기 힘들 것이다.

최길현이 1554서버에서 어떤 짓을 저질러 왔고, 앞으로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아는 건, 같은 서버의 도전자뿐.

저층 랭커라는 점 때문에 본인의 무력도 얕볼 수 없고, 그에 더해 인맥을 기반으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면.

놈이 1554서버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언터쳐블의 폭군으로 군림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 놈과 같은 서버인 김진아에겐 선택권이 없었겠지.

배신이라고 하기에도 우습다. 애초에 목숨 걸고 의리를 다할 만큼 깊은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슬슬 감이 오냐? 사람 잘못 건드린 거, 그러게 거지새끼가 왜 깝쳐서..."

최길현은 창날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히죽댔다.

"니가 그 새끼라며? 커뮤니티에서 애미 뒤졌다고 징징대던 솔플 새끼."

차에 들어간 마비독 때문에 싸울 수 없는 상태라고 아주 단단히 확신하는 눈치다. 뭐 그렇겠지.

이놈은 25층에 체류 중인 랭커, 저층에서 머무는 중인 내가 결코 얻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독을 쓸 수 있었을 거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혀끝의 감각이 살짝 둔해지고 있으니, 상당히 강한 마비독을 넣은 게 틀림없었다.

[마비 내성 Lv. 15]

[독 내성 Lv. 19]

내가 두 자릿수의 이중 내성으로 마비독에 저항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꼼짝도 못 하고 있었겠지.

최길현은 그 사이에 커뮤니티에서 나를 조사해 본 건지, 우리 엄마의 이름을 들먹이며 떠들기에 여념이 없다.

내 바로 뒤에서 훤히 빈틈을 드러내고 있는 최길현에게, 나는 허리춤의 손도끼를 휘두르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콰직!

앉은 자리에서 대충 휘두른 도끼가 최길현의 사타구니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어헉!"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대로 처맞은 최길현은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저건 엄살이다.

미스릴 완드로 한참을 두들겨 맞고도 주둥아리가 살아 있던 것만 봐도, 이놈의 방어력은 매우 높다.

시련의 탑 도전자들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HP에 따른 보호 효과 덕분에, 거의 다치지도 않았을 거다.

치명상을 입지 않게 해준다는 HP의 보호 효과는 방어력과 데미지에 따라 그 수준에 차이가 생기니까.

-우당탕!

카페테리아의 의자를 걷어차며 일어선 뒤, 중갑으로 무장한 동생 쪽의 명치를 밀어 찼다.

가볍게 나가떨어진 두 명을 두고, 나는 여유롭게 인벤토리를 열어 장비를 스위칭했다.

최길현은 마비독의 힘을 얼마나 믿고 있었을까.

어쩌면 나를 완전히 무력화시키지 못하고, 약화시키기만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장비를 갖춰 오지는 않았겠지.

"병신 같은 새끼."

나는 [내구]에만 투자한 방어구와 무기를 해제하고, 한동안 장착하지 않았던 풀템 세트를 장비했다.

내가 봐주고 있었다는 건 생각도 못 한 모양이지.

**

잡템 세팅으로도 여유롭게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실력 차이가 나는 상대였다.

풀템을 장비하고 스펙까지 끌어올린 상태의 내게, 최길현은 창 한번 스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

"끅, 우으윽..."

최길현은 오른팔과 왼 다리가 절단된 채 바닥에 엎어졌고, 동생 쪽도 비슷한 꼴로 벽에 처박혔다.

이 광경이 만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도 안 됐다. 내가 손대중을 완전히 버린 결과다.

"어, 어떠, 어떻게 이 정도로..."

김진아는 나와 대화를 나누던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가만히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천천히 걸어서 김진아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주세요."

김진아는 배신의 대가를 예감하고는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뭐든 하겠다고.

하지만 애초에 나는 김진아를 죽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저기 널브러진 최길현과, 그 동생도 마찬가지로.

김진아의 입장은 이해한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고, 그녀에게 의리를 기대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그래, 나도 안다. 고작 하루뿐인 관계였다.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

"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나는 왜 기분이 나쁜 거냐고.

김진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잊고 살았던 세로토닌의 맛을 보았다.

절대 멈추지 않기로 했던 주제에,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려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축제 분위기에 말려든 건 이벤트 맵에 발을 들여놓은 직후였다. 그건 김진아와 아무 상관 없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나는 그냥, 쉬고 싶었던 거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무엇이든 관계를 쌓고 싶었다. 보통의 도전자들처럼 파티를 맺고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던 그것을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에게서, 김진아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제, 제발, 진혁 씨...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하지만 이게 그 결과다.

김진아는 나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이렇게 배신당할 수밖에 없었다. 원인은 자명하다.

내가 최길현과 싸웠기 때문에? 김진아가 하필 최길현과 같은 탑이었기 때문에? 최길현에게 빽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 모든 것은 내가 솔플러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플러이기 때문에 다른 탑의 사정에 무지했으며, 솔플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런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김진아와 파티를 맺지 않았더라도, 최길현과 부딪히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거다.

솔플러가 혼자가 되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이라고. 그냥 당연한 건데.

[친구 목록]

검을 집어넣고 시스템을 열어, 친구 목록에 등록된 세 사람을 지웠다.

그리고 김진아와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차단 목록에 넣었다. 이제 나는 이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빈사 상태로 쓰러진 최길현 형제와 김진아를 그대로 두고 혼자 카페테리아를 나왔다.

최상급 포션은 절단된 사지도 다시 붙을 수 있다고 한다.

든든한 빽이 있는 최길현은 저대로 내버려 둬도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고, 알아서 잘 살아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마, 김진아는 최길현에게 죽게 되겠지.

그렇지만 김진아도 팔다리가 잘린 채 널브러진 최길현 정도는 혼자서 죽일 수 있을 거다.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겠지만, 시스템으로 차단한 이상 그 결말을 내가 알게 될 일은 없을 거다.

다른 도전자의 사정 따위, 솔플러인 내가 알 게 뭔가.

책임져야 할 죽음은 하나로 충분하다.

**

페스티벌 맵을 나오자, 어두침침한 6층의 분위기가 나를 반겨 주었다.

노점에서 파는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퍼져 있는 페스티벌 맵과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

피와 시체와 독의 향기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마치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 이를테면 고향 같은 곳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다시 장비를 바꾸고 미궁을 향해 전진했다. 6층은 이벤트가 열리기 전에 이미 보스만 남기고 공략을 끝낸 상태였다.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보스룸의 전경이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왕좌에 자리를 잡은 것은 썩어가는 해골 하나.

[핏물과 시체는 그의 몸종이요, 시체를 쪼아먹는 까마귀만이 그의 친우이니.]

[죽음을 넘어 돌아온 자에게 돌아가야 할 것은 마땅히 죽음뿐이라.]

어쩐지 무척 공감되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나며, 해골의 주변에서 검은 기운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BOSS - 던전의 주인, 리치 와이트]

죽음을 극복하고 죽은 몸으로 여전히 살아가는 괴물 마법사, 리치.

-쿠르르르륵!

리치의 손짓에 따라 바닥에서 뼈로 이루어진 병사, 스켈레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스켈레톤들은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고, 나는 검과 방패를 휘둘러 가며 놈들을 모조리 부쉈다.

그러는 사이 리치는 검은 기운에 덮인 채로 주문을 외웠고, 나는 저 주문이 무엇을 낳을지 알고 있었다.

스켈레톤의 떼를 쓰러트리는 사이 아무 방해 없이 주문을 완성한 리치는 마침내 칠흑 일색의 기사를 불러냈다.

6층 최강의 엘리트 몬스터, 데스 나이트.

죽음의 기사가 스켈레톤의 벽을 뚫고 나를 향해 덤벼왔다. 놈의 대검과 내 직검이 맞부딪혔다.

"그래, 이거지."

맞부딪히는 검날에 슬쩍 비친 내 얼굴은 더 이상 낯설게 보이지 않았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6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44. 시련의 탑 7층

6층 클리어 보상으로 새 아이템과 스킬을 하나씩 얻었다.

획득한 아이템은 [죽음의 기사 대검], 이름 그대로 데스나이트가 쓰던 묵직한 대검이다.

디자인도 단순해서 다루기 좋아 보이고, 적당한 무게감과 크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

[소드 마스터리 Lv.1]

- 한손검 숙련 (497 / 999)

- 양손검 숙련 (341 / 999)

[소드 마스터리]의 양손검 숙련도 수치도 상당히 높아진 상태이니, 주 무기로 삼으면 딱 좋을 것 같다.

또한 새로 얻은 스킬은 [암시]라는 이름의 패시브 스킬.

암시라길래 무슨 최면술 같은 건가 싶었는데, 그냥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게 해주는 스킬이라고 한다.

어두침침한 6층을 클리어하고 나서 이런 걸 주다니, 시스템도 뒷북이 심하다.

물론 어두운 맵은 앞으로도 많을 예정이라 딱히 쓸모없는 건 아니지만.

"이거 저주에도 먹히나."

궁금한 점은 3층의 리자드맨 주술사나 조금 전의 리치 보스가 사용하던 시야 방해 마법에도 통하느냐인데.

마침 다음 층도 마법 계열 적이 좀 나타나는 편이라고 하니까, 천천히 알아가자.

서진혁 Lv.53 (전사)

HP : 790/790

MP : 380/380

근력 : 80 (66+14)

민첩 : 62 (58+4)

내구 : 63 (57+6)

지능 : 55 (53+2)

현재 내 풀템 기준 스탯은 이 정도, 레벨은 하나 올랐지만 레벨업과 무관하게 상승한 스탯이 상당하다.

지능을 제외하면 도저히 53레벨 전사의 스탯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

특히 80에 도달한 근력 수치는 동레벨의 다른 도전자를 아득히 넘어선 상태.

스탯만 보면 유니크나 에픽 클래스라도 달고 있는 줄 알겠지만, 나는 여전히 노멀 클래스 전붕이다.

[시련의 탑 6층 전이문을 활성화하실 수 있습니다.]

보스전의 성과를 정리하고 전이문에 손을 댔다. 활성화 알림이 나타나고 나는 곧바로 수락했다.

"예."

전이문을 넘어갈 때의 살짝 어지러운 감각과 함께, 곧 내 눈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나타난 배경은 6층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나무가 빽빽한 산림 한가운데였다.

사실 이번 7층은 내가 여러모로 기대하고 있던 층이다.

다른 층에 비해서 전체 맵의 크기가 굉장히 넓고, 등장하는 NPC와 퀘스트의 숫자도 많은 편.

거기다가 다른 층과 연계되는 대규모 진영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는 층이기도 하다.

진행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경우에 따라 20층 근처까지 이어나갈 수도 있다던데.

그런 초대형 퀘스트의 최초 클리어 보상은 과연 어떤 걸 줄까.

-위이이잉!

기대를 품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나는 머지않아 7층의 첫 몬스터를 마주했다.

이 층에서 처음 만나는 건 거의 무조건 살아있는 나무 괴물이라고 들었는데, 웬 말벌떼가 나타났다.

당연히 몬스터인 만큼 그냥 말벌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가 치와와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고 있다.

"개 징그럽네."

근데 말벌이면 당연히 독도 있겠지?

**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벌독은 내 내성 성장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말벌들의 공격력이 너무 약해서 내 살을 뚫고 침을 박는 것부터 어려웠다.

그리고 몇몇 특별한 개체가 어떻게든 침을 박아넣어도, 잠깐의 따끔함만 느껴질 뿐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런 말벌형 몬스터는 7층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등장하고, 모두 독침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놈들이 예외적으로 독이 없는 놈들일 것 같지는 않으니, 그냥 내 내성 수치가 너무 높은 탓이리라.

하긴, 독화살은 그렇다 쳐도 6층에서 좀비들과 뒤엉키며 올린 수치가 많이 높긴 했지.

[킬러 비의 독침]

드랍한 아이템의 이름을 보면 더더욱 독이 없을 거로 생각하기 힘들고.

-콰직!

바닥에 널브러진 말벌을 검으로 내려찍어 마무리 지었다. 파직거리는 이펙트가 조금씩 튀었다.

이 파직거리는 이펙트는 3층에서 손에 넣은 [라이트닝 차지]의 효과다.

6층에서 내성 노가다를 하면서 [라이트닝 차지]의 스킬 레벨도 조금 오르더니, 이젠 나름 이펙트까지 나온다.

물론 전기로 인한 추가 데미지나 경직 효과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이펙트라도 뜨는 게 어디냐.

이대로 몇 레벨 더 높이면 전격 내성을 키우는 용도 정도로는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검을 수납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한 순간이었다.

-쿵쿵쿵!

멀리서 무언가 육중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들어본 것 중에서는 고블린 로드의 발소리와 제일 비슷하다.

직감 스킬이 조금씩 반응하고 있었다. 몬스터, 그것도 상당히 거대한 몬스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뭔진 모르겠지만, 커다란 놈에게는 커다란 무기를 써 줘야겠지.

[죽음의 기사 대검]

공격력 + 85 (참격)

치명타 피해 : x 2.5

내구도 350/350

고유 효과 : 상처 찢기

한 차례 이상 치명타를 입힌 적에게 가하는 피해가 1.5배 증가.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6회

우월한 기본 공격력과 높은 치명타 피해량, 그리고 유용한 고유 효과가 붙은 [죽음의 기사 대검].

이렇게 강한 아이템은 잘 쓰지 않는 주의지만, 한 번쯤 성능을 시험할 필요는 있다.

-쿵쿵쿵!

무거운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수풀 사이를 가르고 몬스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털가죽으로 덮인 거대한 곰이었다. 이마에 묘한 문장이 새겨진 것을 보니 [룬 베어]가 틀림없다.

야생동물이 있을 법한 환경이라면 꼭 한 마리씩 있다는 유니크 몬스터.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성으로 어지간한 필드 보스 이상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랬던가.

하지만 짐승 따위가 민첩해 봤자 뭐 대수라고.

나는 대검을 크게 당기고, 내 쪽을 향해 달려오는 룬 베어를 향해 맞서 달려들었다.

대검의 날이 어두운 빛으로 빛나며 시전되는 양손검 전용 고위력 스킬, 브레이브 슬래쉬.

그런데 스킬을 시전하고 모션이 발동한 순간, 룬 베어의 등에 꽂힌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왜 화살이 꽂혀 있지.

설마 NPC에게 쫓기다가 내 쪽으로 달려온 건가. 그러면 이걸 쫓고 있던 NPC는 어디에 있지?

-후웅!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룬 베어의 등 뒤에서 화살이 날아와 내 미간을 노렸다.

**

뛰어들어 스킬 모션을 일으키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화살.

나를 노리고 쏜 건 아니겠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하필 스킬 모션을 일으킨 직후라 회피동작을 취할 수도 없다. 내가 이래서 스킬을 잘 안 쓰는 건데.

어떻게 대처할지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그 상태로 스킬 하나를 더 발동했다.

[철벽]

-팅!

얼굴에 [철벽]을 사용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무사히 잘 발동되어 화살을 튕겨내었다.

그리고 스킬 모션은 그대로 이어져, 내 대검은 룬 베어의 어깻죽지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쿠오오오!

우월한 공격력 덕분에 룬 베어의 어깨는 한 방에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고, 나는 그대로 한 번 더 대검을 휘둘렀다.

촤악, 참격과 함께 터져 나오는 요란한 빨간 이펙트. 크리티컬 히트다.

두 번의 공격에 룬 베어는 날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쓰러졌다. 남은 건 확인사살뿐이지만, 잠시 검을 멈추고 기다렸다.

"이봐, 거기 위험해!"

조금 전에 쏜 화살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민첩한 발놀림으로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조금 긴 금발머리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금발벽안 미남의 스테레오타입을 조금 곱상하게 다듬어 옮긴 것 같은 외형. 마치 게임 캐릭터 같다.

하지만 남자의 겉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특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귀였다.

7층은 매우 넓은 맵과 다양한 퀘스트, 그리고 여러 NPC가 어우러져 있는 굉장히 방대한 규모의 층.

그런 7층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진영 퀘스트의 핵심이 되는 세력이 셋 있다.

"뭐, 뭐야. 인간족이 왜 이런 곳에!"

긴 장궁을 짊어진 엘프가 나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

판타지 소재의 창작물이라면 필수요소처럼 등장하는 종족, 엘프.

게임틱한 느낌이 강한 시련의 탑 세계에도 엘프는 존재하며, 그 특징은 창작물에서 다루어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뾰족한 귀와 미형의 외모를 가졌고, 숲과 어우러져 자연 친화적으로 살아가며, 수명이 매우 길고 활을 잘 다룬다.

물론 엘프도 개체마다 차이가 있어서 모두 그런 건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7층의 하이엘프는 그렇다.

"룬 베어는 그대가 쓰러트린 건가? 어째서 인간족이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지?"

하이엘프 남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벌써 엘프와 마주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아직 생각해 둔 게 없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하이엘프 남자가 먼저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 그 불길한 검은 무엇이냐! 옳거니, 네놈이 숲을 침범하고 다닌다던 그 사악한 인간족 무리로구나!"

그러고는 대뜸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혹시 몰라서 말해두겠지만, 나는 아직 한마디도 안 했다.

들고 있는 검이 좀 시커멓고 해골 장식이 달렸다고 해서, 대뜸 사람을 공격하면 쓰나.

이건 진짜 존나게 정당방위다.

#45. 하이엘프

7층에서 선택할 수 있는 진영은 하이엘프, 다크엘프, 왕국군의 셋으로 나뉜다.

몇 년 전에 집계된 오픈 커뮤니티의 통계를 보면, 진영별 선택률은 각각 29%, 39%, 32%.

큰 차이는 아니지만 하이엘프 진영의 선택률이 가장 낮으며, 다크엘프 진영의 선택률이 가장 높게 나온다.

진영별로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의 내용과 보상이 다르기에, 선택률에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가장 좋은 보상을 준다고 알려진 진영은, 가장 선택률이 낮은 진영인 하이엘프 진영이다.

실제로 내가 읽은 공략글에서도 좋은 보상을 주는 하이엘프 진영을 선택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가장 좋은 보상을 주는 하이엘프 진영의 선택률이 낮은 것인가.

그 이유는 커뮤니티에서 하이엘프라는 키워드로 조금만 검색을 돌려 보면 알 수 있다.

[작성자 : 곽주영#1551]

[제목 : 좆같은 깐프련들은 멸종이 답이다 씨발]

(사진)

이씨발 귀쟁이새끼들이 나 볼때마다 화들짝 놀라면서 활에 손올리는거

친밀도 올리려고 선물줬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간족 문화는 모르겠다며 까는거

좆같았지만 그래도 씨발 지들 보물도 찾아주고 군대도 쫒아내주고 다해줬는데

말로만 영웅이니 느금마니 하면서 손만대도 바로 표정 썩창나는거 ㅅㅂ

하이엘프 기사년은 어깨빵 맞았다고 인간족새끼 그럴줄 알았다며 바로 칼뽑아버리기 ㅋㅋ

씨발 이럴줄 알았으면 불법사할걸그랬다 세계수에 불질러버리게

이거 진영 중간에 못바꾸냐? 보상이고 지랄이고 걍 왕국군 합류해서 깐프련들 멸종시키고싶은데

- ㅋㅋㅋㅋㅋ니가 선택한ㅋㅋㅋㅋ하이깐픜ㅋㅋㅋㅋㅋ

- 숲깐프련들 혐성인걸 이제알았음? 커뮤질 안하고 뭐했냐 ㅋㅋ

- 흠 난 안그랬는데 니 얼굴이 문제인거 아님?

- ㄴ 시발새끼야

- ㄴ '미안하네, 길 잃은 오크인줄 알았지 뭔가'

- ㄴ 깐프새끼들 덩치좀 큰새끼 있다싶으면 다 그소리함 ㅋㅋ

- 아직도 보상에 낚여서 하이엘프 진영가는 놈이 있네 ㅄㅋㅋ

그렇다, 보상이 좋은 건 둘째치고 하이엘프라는 종족이 사람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협력하고 신뢰와 호감을 쌓아도, 인간족을 향한 특유의 태도는 도무지 좋아지질 않는다나.

NPC의 개체별 특징은 서버별로 조금씩 편차가 있기에, 운 나쁜 일부 도전자의 푸념일 수도 있겠지만.

[실시간 우리섭 개좆프.jpg]

[깐프년한테 치한취급받았다 ㅁㅌㅊ?]

[ㅅㅂ노괴절벽깐프년들 존나톡식하네]

[엘프새끼들 다 가스실에 쳐넣고싶은데 정상?]

서버를 불문하고 하이엘프를 욕하는 글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1세대 도전자들의 기록을 살펴봐도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한 쪽의 만족도가 더 높아 보였다.

그렇다면 다소 특수한 면이 있는 2661탑이라고 해도 다를 것 같지 않았고.

나를 보자마자 단검을 뽑고 덤벼드는 엘프 남자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

엘프라고 하면 활을 잘 다룬다는 것과 더불어, 날렵한 이미지라는 인상이 있다.

-타닥! 탁!

그리고 그건 틀리지 않았는지, 하이엘프 남자는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고작 7층에서 나오는 NPC가 낼 수 있는 스피드가 아니었다.

물론 7층 스펙을 넘어선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양손으로 다루던 [죽음의 기사 대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방패로 장비를 변경해 단검을 막아 냈다.

-카강!

속도는 빠르지만 일격의 무게는 무척 가볍다. 순발력과 근력은 뗄 수 없는 관계일 텐데, 역시 뭔가 속임수가 있나.

방패를 휘둘러 엘프 남자의 팔을 튕겨낸 뒤, 제압을 위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엘프 남자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고는,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새로 뽑아 내 옆구리를 노렸다.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반응속도도 상당한 모양이다.

다른 층까지 이어지는 진영 퀘스트의 특성상, 이곳의 NPC 중에는 7층 스펙을 한참 넘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다.

엘리트 몬스터에 대응해 엘리트 NPC라고 부르는 것들, 어쩌면 이 엘프 남자가 그런 게 아닐까?

-콰악!

뻗어진 단검을 [철벽] 스킬을 발동한 손으로 붙잡아 막았다.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인데다가, [철벽]스킬의 도움도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재주는 어렵지 않다.

"뭐, 뭣이!"

설마 그냥 손에 잡힐 줄은 몰랐는지, 크게 놀라는 엘프 남자.

하지만 그러면서도 반대쪽 손의 단검을 제대로 휘두르고 있다. 전투에 대한 집중력이 굉장하다.

나는 붙잡은 단검을 그대로 슬쩍 당긴 뒤, 손을 더 뻗어 엘프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우드득!

나와 엘프 남자의 근력은 성인 남성과 어린아이 이상으로 차이가 난다.

"크흑!"

당연히 손목은 가볍다는 수준을 넘어서 아무 저항 없이 비틀렸다. 놈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떨어진 단검을 발로 차서 멀리 던져버린 뒤, 그대로 반대 손으로 어깨를 붙잡아 팔까지 비틀어버렸다.

5층에서 설원 트롤과 그래플링 싸움을 하면서 익힌 제압술이다.

-쿵!

제압한 엘프 남자를 그 자세 그대로 가까운 나무에 밀어붙여 처박았다.

놈은 자꾸만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이 정도로 근력 차이가 나는 마당에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곧 엘프 남자는 물리적 저항을 단념하고 고함과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익, 이익...! 이거 놔라, 더럽고 추한 인간족 놈! 용서하지 않겠다!"

"어휴, 엘프 새끼들 싸가지는 듣던 그대로네."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주제에 누구에게 예의를 운운하는 것이냐!"

하지만 욕설이라고 해도 태생이 엘프라 그런가, 코리안의 매콤한 패드립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밖에 안 됐다.

자, 어떻게든 제압하긴 했는데. 이제 이걸 어쩌면 좋을까.

대뜸 덤비길래 일단 제압하긴 했는데, 이걸 이대로 죽이면 하이엘프 진영과는 그대로 척지게 되는 거다.

어차피 다른 진영을 선택하면 당연히 대립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시작부터 선택지를 줄이고 싶지는 않다.

커뮤니티에서 소문으로 들었던 하이엘프 놈들의 혐성을 생각하면, 이대로 놔준다고 오해가 풀릴 것 같지도 않다.

-뚜둑!

어이쿠, 고민하다가 손에 힘을 너무 넣고 말았다. 이거 어깨가 제대로 뽑힌 것 같은데.

"크아아악! 페리트! 레고르! 글라니에에에엘! 아무도 없느냐, 도와다오!"

엘프 남자는 이제 대놓고 비명을 질러가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거 좀 많이 추한데.

-쿵!

그 때였다, 숲의 한구석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그보다 먼저 온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펜둘라 기사단 제7석, 페리트 베트라! 이곳에 있습니다아아앗!"

엘프 남자가 버둥거리며 외친 이름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무 사이를 가르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

질주하는 룬 베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내게 달려드는 하나의 인영.

튀어나온 것은 백색의 갑주로 전신을 감싼 금발의 엘프 기사였다.

-카앙!

금발의 엘프가 휘두른 유백색 검을 급히 막아낸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뭐야 이 새끼, 뭔 힘이 이렇게 세지?

나는 급하게 손목을 틀고 검의 각도를 바꾸어, 달려든 엘프 기사의 목 부근을 노렸다.

하지만 동시에 엘프 기사도 손목의 움직임으로 검의 위치를 바꾸었고, 내 일격은 놈의 검에 튕겨 나갔다.

대치 구도가 안 좋다. 나는 빠르게 반댓손에 장비하고 있던 방패를 검 대신 내질렀다.

-쾅!

그러나 내지른 방패를 허공을 가르고, 그 대신 엘프 기사의 백색 방패가 내 턱을 때렸다.

뭐야, 방금 그 각에서 어떻게 방패를 휘두른 건데.

나는 급히 땅을 박차고 뒤로 크게 물러섰다. 엘프 기사는 이어서 덤벼들지 않고, 검을 든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무에 처박혀 낑낑거리고 있는 엘프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금발과 새하얀 피부.

하지만 얼굴의 선이 전체적으로 굵어, 훨씬 강인하고 마초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니,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훨씬 더 강인하다. 방패로 맞은 턱이 얼얼하다.

"감히 엘뤼온 전하를 공격하다니, 이 페리트 베트라가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나는 엘프 기사와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눈짓으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오픈 커뮤니티를 열었다.

그리고 재빨리 '페리트 베트라', '펜둘라 기사단', '엘뤼온' 등의 키워드를 검색했다.

눈대중으로 수집한 정보는 내가 처한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펜둘라 기사단은 하이엘프 진영의 네임드 개체가 소속되는 기사단으로, 주요 임무는 왕족의 호위.

전하라는 호칭과 기사단의 역할을 생각하면, 내가 팔을 분질러 놓은 놈이 하이엘프의 왕자인 것 같다.

"하, 씨발."

그리고 나와 대치하고 있는 저 기사는, 7층 수준을 한참 벗어난 스펙을 자랑하는 엘리트 NPC.

사실상 이 7층의 보스보다 더 강력한 놈이었다.

46. 전사와 기사의 차이

적대건 우호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은 NPC의 머리 위를 쳐다보면 작은 콘솔이 뜬다.

갑자기 튀어나온 하이엘프 기사의 머리 위에 나타난 콘솔의 색깔은 붉은색.

적대관계를 의미하는 콘솔의 색깔은 원래 노란색이지만, 상대와의 레벨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색깔이 짙어진다.

자신보다 낮은 경우에는 노란색, 자신과 대등하거나 근소 우위일 경우에는 주황색, 자신보다 높을 경우에는 붉은색.

극도로 차이가 심하면 평범한 붉은색이 아닌, 어둡고 거무칙칙한 붉은색으로 뜬다고 한다.

이 콘솔은 특수한 스킬이나 아이템이 있으면 몬스터에게도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데, 그건 상관없는 이야기고.

"왜 이딴 게 7층에서 튀어나오는 건데."

내가 바라보고 있는데도 붉은색으로 뜬다는 건, 저 하이엘프 기사의 레벨은 50대를 가볍게 넘는다는 거다.

아무리 엘리트 NPC라고 해도 그렇지, 평범한 7층 도전자는 뭔 짓을 해도 상대가 안 될 놈이 대체 왜 있는 건데?

내가 25층 랭커인 최길현을 일방적으로 털어버릴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놈의 실력이 버러지 수준이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이 하이엘프 기사는 최길현보다 스펙이 딸릴지언정, 실력은 그놈보다 훨씬 뛰어날 거다.

이길 수 있을까?

이정도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위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솜털이 바짝 서는 한편으로, 피가 끓는다.

이렇게 강한 녀석이 상대라면, 그만큼 얻어갈 수 있는 것도 많을 테니까.

"흐아압!"

먼저 움직인 것은 하이엘프 기사였다. 놈은 요란한 기합을 내지르며 방패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근력도 심상치 않았는데 순발력은 더욱 심상치 않다. 순식간에 눈앞에 방패가 닥쳐든다.

-쾅!

나도 방패를 내세워 놈의 실드 배쉬를 맞받아쳤다. 방패끼리 부딪혔을 뿐인데도 온 숲에 소리가 울렸다.

세상에, 이게 사람이야 8톤 트럭이야?

평범한 7층 도전자라면 이 실드 배쉬 한방에 교통사고 수준의 상처를 입고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방패끼리의 충돌 직후, 놈은 한손검을 뒤로 크게 당겼다. 베기일까 찌르기일까, 뭐든 간에 그냥 하게 둘 생각은 없다.

한 박자 빠르게 로우킥을 날려 놈의 정강이를 노렸다. 쿵, 더럽게 단단한 각반 때문에 별 타격은 들어가지 않았다.

씨이발, 레벨도 높은 놈이 장비까지 존나 좋은 걸 끼고 있네.

로우킥을 무시하고 날아오는 한손검 찌르기, 재주껏 검을 맞대어 궤도를 틀어 흘려냈다.

아니, 흘려낸 줄 알았다.

놈의 검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내 검을 밀어냈고, 찌르기 동작은 순식간에 베기로 전환되어 내 목을 노렸다.

"썅."

본능적으로 욕을 내뱉고, 급하게 자세를 낮춰 아슬아슬 피해냈다. 머리카락 몇 올이 칼날에 베여 흩날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만큼 뒤이은 공격에 대응할 자세를 갖추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휘둘러진 기사의 하얀 방패가 나를 후려쳤다.

-쾅!

재빨리 [철벽]스킬을 사용해서 충격을 줄였지만, 자세가 흐트러지며 몸이 뒤로 넘어갔다.

"흐아압!"

기사는 기울어진 내 몸통을 향해 검을 내려찍었고,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 회피했다.

고작 몇 초간의 공방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새끼, 7층 수준을 한참 넘어선 스펙은 별문제가 아니다.

스펙이고 지랄이고, 그냥 칼싸움을 존나 잘 한다.

**

-카강! 카앙! 캉!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엘프 기사의 검격을 검과 방패로 막아내고 받아쳤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으로 우리의 숲을 탐냈단 말이냐, 인간족 검사여! 한심하군!"

어떻게든 막고 피할 수는 있었지만, 도저히 공세로 전환할 수가 없었다. 저 나불대는 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혓바닥으로 싸우냐 씨발 깐프 새끼야! 안 닥치면 이빨 다 부숴버린다!"

-콰앙!

방패를 들고 억지로 몸통박치기를 시전해, 간신히 놈을 떼어내고 숨을 골랐다.

"후우, 후우, 썅."

가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호흡이 거칠어진 나에 반해, 엘프 기사는 매우 편안하게 숨쉬고 있다.

내 체력이 저놈보다 모자라서가 아니다. 저놈의 일방적인 공세를 막아내느라 내 쪽이 체력을 더 많이 쓰고 있는 거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수십 합은 주고받았다.

그러는 와중에 놈의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도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일단 의외로 피지컬 차이는 나지 않는 것 같다.

근력은 내 쪽이 위다. 순발력은 저쪽이 조금...아니, 순수한 순발력만 따지자면 비슷한 정도인가.

그리고 반응속도나 판단력은 저놈이 더 위다. [직감]스킬의 보조를 받는 내 동작을 완벽하게 따라잡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실력.

저 놈이 압도적으로 위다. 검과 방패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 차이가 너무 크다.

내 무기술은 어디까지나 3층의 리자드맨들을 상대하며 기른 것.

리자드맨의 무기술을 눈으로 보고 흉내 낸 것에, 내 나름대로 갈고닦은 노하우를 더한 아류 기술이다.

최길현 같은 무식한 창 기능사에 비하면 압도적이지만, 시스템은 이걸 엄연한 [초급 검술]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검술은 커녕 제대로 운동도 해본 적 없는 개백수 출신인 내가 쌓아올린 것치고는 아주 훌륭한 수준이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저놈이 다루는 진짜배기 검술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기술이나 동작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 비유하자면 길거리 막싸움과 프로 격투기 수준의 차이다.

지금은 근력 스탯을 비롯한 체급 차이 덕분에 그나마 공방이라도 성립하고 있는 거다.

시발,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이딴 걸 7층 도전자가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파티를 짠다고 극복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지 않나?

리자드맨 중에는 검방 전사가 별로 없었던지라, 이놈을 상대로 맞붙으며 기술을 키워 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내 수준으로는 이놈의 기술을 훔쳐내기는커녕 버티기도 쉽지 않다.

"그래 씨발, 그만두자."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허. 웃음도 나오질 않는구나, 인간족 검사여. 이게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싸움으로 보이나?"

가소롭다는 듯 말하는 엘프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의 방패에 나의 검이 충돌했다.

"아직도 모르는가! 네놈의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검술은, 이 페리트가 갈고 닦은 검술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래 씨발아, 너 검술 존나 잘한다."

"깨달았으면 얌전히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할 것이지, 왜 주제넘게 계속 덤벼드는 거냐!"

엘프 기사는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대부분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생각은 없다.

나도 인정한다. 검술로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거.

근데 네 입으로 말했잖아, 야만적이고 짐승 같다고.

내 기술은 리자드맨에게서 훔쳐 익힌 것, 그리고 리자드맨 전사는 사실 이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거든.

단순히 무기만 쓰는 게 아니라, 다리를 이용한 킥은 물론이요 꼬리를 휘둘러 공격하기도 하지.

그리고 진짜 급해지면, 톱날 같은 이빨로 물어뜯기도 한다고.

-턱.

내 검을 막아선 엘프 기사의 방패를 손으로 붙잡고, 뜀틀을 뛰듯 몸을 날렸다.

[철벽]

동시에 철벽 스킬을 사용했다. 철벽 스킬의 효과는 신체 일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부위에는 딱히 제한이 없다.

이번에 내가 [철벽]을 활성화한 부위는 이빨.

나는 방패 너머로 달려들어, 하이엘프의 코를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콰직!

정령 친밀도를 높이겠다고 조약돌까지 씹어먹던 내구도의 이빨이다.

그걸 스킬까지 사용해서 한 번 더 강화했으니, 하이엘프의 코 하나쯤 뜯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끄아악!"

검술로만 싸우던 중에 이런 공격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덕분에 쉽게 유효타를 먹였다.

코를 뜯기고 크게 주춤한 놈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몸에 밴 검술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지, 놈은 그런 상태로도 내 검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놈을 검술로 이기는 걸 포기했다.

그래, '검술'로 이기는 것만.

"인벤토리."

인벤토리를 열어 재빨리 장비를 바꿨다. 오른손에 들린 무기가 한손검에서 창으로 바뀌었다.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무기 스위칭, 이놈의 베기에서 찌르기로 빠르게 전환하던 기술을 나는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다.

[+5 강철창]이 쏜살같이 내질러져, 놈의 방패를 빗겨가 가슴팍을 찔렀다.

-카강!

단단한 갑옷 덕분에 데미지가 잘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상관없다. 이제 고작 일격이다.

-카강! 캉! 카강!

엘프 기사는 창을 상대해 본 경험도 많은지,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어 내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검사도 창사도 아니다, 그저 전사일 뿐.

이번에도 인벤토리를 열어서 장비를 스위칭, 무기를 창에서 도끼로 바꾸었다.

-카앙!

"크윽!"

갑작스럽게 바뀐 공격 패턴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어설퍼져가는 놈의 방어.

이번에는 도끼에서 둔기로, 둔기에서 소검으로, 소검에서 장검으로, 장검에서 다시 창으로.

그리고 중간중간 허리춤에 매고 있던 손도끼와 단검을 섞어 사용하자, 엘프 기사의 몸에 점점 상처가 늘어 갔다.

"이, 이놈...! 대체 무기를, 얼마나 많이 다루는 것이냐...!"

점차 밀리기 시작한 엘프 기사는 그렇게 외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빠각!

"껅!"

놈의 나불거리는 주둥아리에 주먹만 한 쇠구슬이 박혀 들어갔다.

단검, 소검, 장검, 대검, 단창, 장창, 도끼, 둔기- 리자드맨에게서 배운 무기술 말고도 내 특기는 하나 더 있다.

1층에서 고블린 로드와 맞서 싸울 때부터 꾸준히 연마한, 투척술.

"내가 안 닥치면 이빨 다 부숴버린다고 했지."

자유자재로 궤도를 바꾸는 회피불능의 마구가 엘프 기사의 안면에 적중했다.

#47. 패배 이벤트

나는 어릴 때부터 돌을 던지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무슨 야구 영재 같은 일화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게 마냥 좋았을 뿐이다.

그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는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돌멩이로 천국의 문이라도 두들겨 보고 싶었나.

어쨌든, 그렇게 어릴 적부터 즐겼던 투척이라는 행위는 이제 나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쾅!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쇠구슬이 엘프 기사의 방패 앞에서 각도를 훅 꺾어, 놈의 허벅지를 맞추었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 엘프 기사는 계속해서 나름대로 몸을 움직이고 방패를 다루어 쇠구슬을 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궤도를 바꾸는 내 다양한 투척술 앞에서, 단 한번도 막아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뿐.

"크, 크윽! 이 비겁한 자식!"

거리를 벌린 채 쇠구슬을 던지는 나를 향해 소리치는 엘프 기사. 할 수 있는 말이 딱히 없는 모양이네.

"우오오오오!!"

엘프 기사는 네 번째 쇠구슬에 얻어맞고는, 분을 참을 수 없었는지 방패를 내밀고 억지로 돌진해왔다.

검술 실력은 저 놈이 압도적으로 우위지만, 저렇게 무식한 돌진을 할 때는 검술이고 뭐고 없다.

놈의 돌진을 피해내며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 옆구리를 노려 크게 휘둘렀다.

-카앙!

엘프 기사는 이번에도 요령껏 방패를 다루어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뒤이은 후속타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한손검을 꺼내고 한 발짝 안쪽으로 파고든 뒤, 목을 향해 휘두른다.

-캉!

갑옷 때문에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제대로 타격이 들어갔다.

그대로 나는 땅을 박차 다시금 거리를 벌리며, 이번에는 손도끼 한 자루를 꺼냈다.

엘프 기사는 이제 내 스위칭 전략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도끼를 이용한 추가 공격을 예상하고 자세를 다잡았다.

하지만 그건 틀린 선택이었다. 나는 투척술을 쓸 줄 아는 거지, 딱히 야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

왜 내가 던질 수 있는 게 쇠구슬 뿐이라고 생각하는거냐, 깐프 새끼야.

-후웅, 콱!

힘차게 집어던진 손도끼가 놈의 뜯겨나간 콧등을 찍어버렸다.

"크헉!"

크리티컬은 안 터졌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치명적이다. 빈틈이 훤히 드러났다.

단검, 소검, 장검, 대검, 방패, 단창, 장창, 둔기, 도끼, 투척- 내가 취할 수 있는 공격 패턴은 이걸로 다가 아니다.

쌍수 무기를 다루는 법도 연마한 만큼, 각각의 무기를 양손으로 다루는 것으로 새 패턴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근접 무기를 각각 다른 방식과 궤도로 투척해 몇 가지 패턴을 더 추가할 수 있다.

거기에 근거리 박투와 그래플링을 섞을 수도 있고, 아직 드러내지 않은 몇 가지 잔재주도 더 있다.

7층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강한 적, 양심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긴장했었는데.

막상 제대로 상대하기 시작하니, 유효타 한 번도 내주지 않고 찍어누를 수 있었다.

역시, 그동안 쌓아온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이겼다.

**

싸움이 시작된 초반과는 완전히 달라진 형세.

기량을 앞세워 나를 여유롭게 몰아붙이던 엘프 기사는 만신창이가 된 채 헉헉거리고 있었고.

거친 숨을 내쉬며 방어에 급급하던 나는 상처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서 있다.

방패로 얻어맞은 데미지는 그 사이 [전투 치유]의 효과로 완전히 회복되어, HP도 완전 만땅.

누가 봐도 승패는 완벽하게 갈렸지만, 엘프 기사는 여전히 투지를 불태우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 나는...펜둘라 기사단의 제7석, 페리트 베트라아! 사악한 인간족 따위에게, 쓰러지지 않는드앗!"

"아니 시발, 먼저 덤벼 놓고 누구한테 사악한 인간족이래?"

"엘뤼온 전하를 공격해 놓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냐, 어둠의 힘을 다루는 인간답게 낯짝도 두껍구나!"

그렇게 나불거리는 엘프 기사의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다. 쓰읍, 하이엘프 새끼들은 원래 다 이런가?

대체 왜 아까부터 자꾸 사악한 인간족이니, 어둠의 힘을 다루니 하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진짜 사악하고 나쁜 놈이었으면 이미 지들 모가지를 따서 저글링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인간에 대한 혐오가 너무 강해서,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어깨를 뽑아놓은 엘뤼온이라는 엘프가 이놈의 발작 버튼 같은 존재라거나.

어쨌든, 이제 하이엘프 진영에 합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놈들을 두들겨 패 놨으니 합류하기 힘들 것 같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놈들이랑 같은 편을 먹을 자신이 없다.

지금 살짝 말을 섞어 본 것만으로도 답답해 죽을 것 같다. 이딴 놈들이랑 어떻게 편을 먹겠어.

"그래, 그래, 이제 나도 상관 안 하련다."

나는 엘프 기사를 죽이고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때였다.

"!"

[직감]스킬 특유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관자놀이 부근에서 경고를 보냈다.

-쐐액, 탁!

반쯤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이니, 웬 화살 한 발이 손에 잡혔다. 관자놀이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왔다.

뭐야 이거, 대체 어디서 쏜 거지?

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당히 멀리서 쏜 게 분명한데, 이 나무가 빽빽한 숲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삐이이이익!

화살이 날아온 쪽에서 묘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군 생활을 할 적에 몇 번 들은 적 있는 소리다.

"독수리?"

곧 사방에서 수풀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화살의 주인과 독수리 울음소리의 주인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까지다, 인간족 침입자여! 혼자서 우리의 대수림에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았구나!"

활을 들고 거대한 매와 함께 나타난 남자 엘프 궁수 하나, 내가 쓰러트린 놈과 비슷한 갑옷의 남녀 엘프 기사 둘.

거기에 나무 지팡이를 들고 반짝거리는 빛무리를 이끌고 있는 하이엘프 여자가 또 하나.

전부 머리 위에 적대 관계를 의미하는 콘솔이 떠 있었고, 색깔은 한 놈을 빼고 모조리 주황색이었다.

"고생했다, 페리트. 훌륭히 전하를 지켰구나."

두 명의 엘프 기사 중 하나, 은색 한손검을 뽑아든 여기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콘솔의 색깔은...검정.

"미친."

색이 어둡다 못해 아예 새까맣다는 것은,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레벨을 갖고 있다는 뜻.

이 빌어먹을 탑이 어떻게 해서든 나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다.

**

적당히 강한 적이라면 오히려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성장의 기회가 왔다면서.

하지만 이건 아니다. 엘프 여기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새까만 콘솔이 죽음을 형상화해놓은 심볼처럼 보인다.

대체 레벨 차이가 얼마나 나야 콘솔이 새까말 수가 있는 거지? 한 100레벨쯤 되는 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면, 어떻게 도망은 칠 수 있으려나?

아니, 내가 때려눕힌 저 기사 놈이며 왕자 놈이며 둘 다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아마 하이엘프의 종족 특성일 거다.

그걸 생각하면 달리기로는 당연히 상대가 안 될 게 뻔하다. 애초에 나는 이 숲의 지리도 모르는 상태인걸.

시발, 어떡하지.

조심스레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기습이라면 어떻게든 한 방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보아하니 얌전히 잡혀 줄 눈빛은 아니로구나, 자세한 설명은 일단 제압한 뒤에 듣도록 할까?"

-쿠르릉!

돌연 천둥 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엘프 여기사의 몸에 새하얀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스킬이다.

전사 계열 클래스의 삼신기라고 불리는 액티브 버프 스킬, 마력 강화.

지능 수치에 비례해 모든 스탯과 공격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키는 스킬, 도전자 중 저걸 모르는 놈은 아무도 없을 거다.

내가 시발 7층이 아니라 70층으로 이동한 건가? 저딴 걸 쓰는 NPC가 왜 있는 거지?

인벤토리를 시선으로 조작해, 조심스레 풀템 세팅으로 장비를 바꾸었다.

그리고 은빛 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발끝을 움직여서.

"어딜."

시발, 좆됐다.

엘프 여기사의 손끝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눈앞에 칼날이 다가왔고.

-슈루룩!

어디선가 튀어나온 새까만 무언가가 칼날을 휘감아 붙잡았다.

이건 또 뭐야.

"자, 거기까지."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엘프가 있었다.

그냥 엘프가 아닌, 이 7층의 삼대 세력 중 하나.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다크 엘프 여자가.

"하여튼, 숲쟁이 년들은 늘 이렇다니까. 자기들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기분이 나쁘다 싶으면 일단 칼부터 뽑지."

매우매우 공감되는 말을 뱉은 다크엘프 여자는 살짝 웃으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러자 발밑의 그림자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며, 몇 명의 인영을 토내해었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은 여자와 똑같은 어두운 피부색의 다크 엘프 무리였다.

"반갑다, 이름 모를 인간족 검사. 그대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솜씨가 제법이던걸?"

"뭐?"

"원래 저 재수 없는 놈한테 당할 것 같으면 나서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설마 이길 줄은 몰랐거든."

다크 엘프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하이엘프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저년 덕분에 멋지게 나타날 타이밍이 다시 생겨서 참 다행이야."

머리가 팽팽 돌았다. 나는 다크엘프 여자의 말로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시발, 이거 설마 처음부터 강제 패배 이벤트였나?

져야 하는 전투를 이겨서 상황이 꼬인 거였어!

#48. 다크엘프

그림자 속에서 솟아난 다크엘프의 숫자는 총 다섯.

엘프답게 활을 들고 있는 놈도 있었고, 검으로 무장한 놈도 있었다. 다크엘프라는 점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내게 말을 건 다크엘프 여자는 오른손에 무언가 새까만 오오라 같은 걸 휘감고 있다.

하이엘프 여기사의 검을 막아낸 새까만 리본 같은 게 저기서 튀어나온 거겠지.

지금 그림자를 통해 다른 다크엘프를 소환한 수단도 아마 저것일 테고. 저게 뭔지는 이미 대충 알고 있다.

다크엘프의 종족 특성 중 하나인 그림자 마법이겠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은신이나 환상 계열에 특화된 마법이라고 들었는데, 소환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거기다가 저 하이엘프 여기사의 공격을 막아낸 걸로 봐서는, 방어 능력도 굉장한 모양이다.

그림자 마법이 우수해서 가능했던 건지, 아니면 마법사 본인이 강해서 가능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라, 우리는 그대의 편이니까."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다크엘프 NPC 한 명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검을 갖고 있는 전사 타입의 NPC였다. 슬쩍 시선을 옮겨 보니, 놈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콘솔의 색깔은 초록색이었다.

레벨과는 무관하게 우호 내지는 중립 상태의 NPC에게 뜨는 색깔이다.

정말로 내 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적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자식, 어깨를 두드리는 힘이 상당히 세다. 일부러 세게 친 건 아닌 것 같은데, 근력 스탯이 상당한 모양이다.

콘솔 색깔이 모두 초록색이라서 구분은 안 되지만, 저쪽의 하이엘프와 마찬가지로 엘리트급 NPC겠지.

이 정도라면,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양 진영의 최강급 개체가 모두 이 자리에 모였다고 봐도 될 거다.

"하긴, 그대로선 의심스럽겠지. 그럼 좀 더 쉽게 말할까, 우리는 저 숲쟁이들의 적이다."

다크엘프 검사는 적의 적은 아군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엘레노어, 당신이 인간족의 편을 드는 겁니까?"

한편, 하이엘프 여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을 묶은 그림자를 떨쳐내었다.

"그래, 나는 이 인간족이 마음에 들었다. 저 재수 없는 면상을 시원하게 박살 내 주었잖나?"

엘레노어라고 불린 다크엘프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쓰러져 있는 기사를 가리키던 손을 하이엘프 왕자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저 놈이다. 네년이 왕자랍시고 맨날 싸고도니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설쳐대잖느냐."

"전하께선 현명한 분이십니다."

"거 봐라, 지금도 앞뒤 사정도 모르면서 일단 편만 들고 있잖아. 대수림에만 박혀 살면서 현명은 무슨 현명?"

하이엘프 여기사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마력강화의 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하지만 표정은 그 반대로 점점 나빠져 갔다.

"저 멍청이 왕자가 먼저 여기의 인간족을 공격했어, 저 재수 없는 놈은 그것도 모르고 먼저 덤벼들다가 된통 당한 거고."

엘레노어의 말에 그림자에서 나타난 다크엘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덧붙였다.

"꼴사나웠지."

"맥도 못 추던데?"

"그러면서 고결한 척은 아주."

"저런 게 호위?"

입을 가리는 척하며 피식피식 비웃음을 섞는 게, 상대의 신경을 긁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그 모습이 뭐라고 해야 할까, 무척 혼란스러웠다.

2층에서 만난 양치기 소녀처럼, 유독 사람 같은 언행을 보이는 NPC가 드문드문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탑의 경우에도 상층의 엘리트 NPC는 꽤 사람 같은 언행을 한다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NPC들끼리 실제 사람처럼 기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헷갈린다.

이것들이 정말 한낱 일회용의 NPC가 맞는 건지.

**

하이엘프 여기사와 엘레노어의 대치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양쪽의 냉랭하면서도 어딘가 유치한 말싸움도 꽤 길게 이어졌다. 그 양상은 한결같았다.

다크엘프 쪽에서 일부러 비웃음을 던져 가며 하이엘프 쪽을 긁어대고, 하이엘프 쪽은 딱딱한 말투로 무심한 척 받아친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하이엘프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가며 화가 쌓이는 모습이 보이긴 했다.

저렇게 빡쳤으면 이판사판으로 싸우려고 나올 법도 하지만, 딱히 그러지는 않았다.

"그만, 됐습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오히려 검을 집어넣고 먼저 물러나겠다고 말하기까지.

차마 덤비지 못할 정도로 전력 차이가 큰 건가?

다크엘프 쪽도 전원 엘리트 NPC지만, 저 여기사 이상으로 강한 개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그런 천박한 도발에 넘어가 검을 휘두를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엘레노어."

검집을 손으로 치며 말하는 하이엘프 여기사, 말하는 걸 보니 단순히 전력 차이 때문에 덤비지 않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몇 번이고 묵과해 줄 것이라 착각하진 마십시오. 특히, 그쪽의 인간족..."

여기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우리의 숲에 침입해, 전하께 위해를 입히고도 탈 없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 하늘이 내린 행운인 줄 알아라."

하늘이 내린 행운은 무슨,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억까를 당했는데.

"지랄하네, 넌 다음에 만나면 귀 뜯어버린다. 깐프 새끼야."

나는 여기사를 향해 중지손가락을 세웠다. 긁어부스럼이라는 건 알지만, 이번에는 좀 참기 힘들었다.

여기사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그대로 돌아갔고, 다크엘프- 엘레노어는 신 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하하하!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이거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다크엘프 루트를 탄 것 같네.

**

아마 7층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도전자가 겪게 될 상황은 이런 거였을 거다.

룬 베어를 쫓던 하이엘프 왕자와 마주치고, 화살을 맞을 뻔했던 걸 계기로 인연을 맺는다.

안면을 튼 상대가 왕자이니만큼, 하이엘프 진영의 중심과도 상당히 빠르게 접촉할 수 있었겠지.

그리고 그대로 뭔가 규모가 큰 퀘스트를 받아서 자연스럽게 하이엘프 진영에 합류하는 거다.

그게 아니면, 나처럼 무기가 불길하게 생겼다거나 하는 이유로 왕자에게 공격받으며 시작한다.

왕자는 7층에 나오는 것치고는 조금 센 편이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도 아니다.

평범한 7층 도전자라도 단숨에 당하지는 않을 거고, 오히려 이길 수도 있겠지.

그러면 뒤이어 7층 도전자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엘리트 NPC, 호위기사가 출현한다.

아마 기사의 태도는 도전자가 왕자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다.

깔끔하게 쓰러트리거나 싸움을 피하는 방향으로 대처했다면, 기사 역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터.

하지만 나처럼 왕자를 험하게 다루거나, 죽여 버렸을 경우에는 그대로 기사에게 공격받아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때맞춰 나타난 다크엘프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고, 자연스레 그쪽 진영에 합류하게 되는 식이겠지.

"귀를 뜯어버리겠다니, 살면서 그런 욕은 또 처음 들어보는구나. 그대, 아주 말솜씨가 좋구나?"

"별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세 연놈에게 거하게 한 방씩 먹여주다니, 홀딱 반할 것 같아. 아주 마음에 들어!"

그리고 강제 패배 이벤트인 하이엘프 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나는, 다크엘프 진영에 막대한 호감도를 쌓아버렸다.

엘레노어는 평소부터 왕자와 그 호위기사,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난 여기사를 아주 싫어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고한 척 다른 종족을 깔보는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다나. 하이엘프는 죄다 그렇다면서.

그럼 그냥 하이엘프라는 종족 자체를 다 싫어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 여기사의 공격을 막아낸 걸 봐선, 엘레노어 역시 다크엘프 진영의 최주요 NPC 중 하나일 거다.

"이것도 인연이다, 괜찮으면 우리 마을에 한 번 오지 않겠나? 그대와 느긋하게 이야기가 하고 싶어."

[퀘스트 발생 : 다크엘프의 서 - 초대]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다크엘프 진영에 합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크엘프 진영은 세 진영 중에서 가장 선택률이 높지만, 그건 퀘스트 보상의 수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장 하이엘프 진영부터, 가장 보상이 좋은 데에도 불구하고 NPC들의 성격이 나쁘다는 이유로 선택률이 낮지 않나.

다크엘프 진영의 선택률이 높은 이유는 단 하나.

[밤깐프 <<< 우주 최고의 종족이면 개추 ㅋㅋ]

[다크엘프 눈나 빵 ㅋㅋ.jpg]

[ㅎㅂ)씨이발 니거엘프년들 그림자주머니 미치겠네]

[시련의 탑 NPC 꼴림원탑.realfact]

[좆좆좆좆 VS 다크엘프 비교분석]

[시발새끼들 왜 다크엘프 고르라고 말안해줬냐]

[다크엘프 엄선작 모음(사진많음)]

다크엘프 NPC들의 독보적인 외형에서 비롯한 원초적인 인기뿐이다.

단순히 얼굴만이라면 하이엘프도 만만치 않지만, 다크엘프는 아무래도 특정 부위의 존재감이 굉장한 편이니.

물론 나는 고작 NPC들의 몸매가 좋다는 이유로 진영을 고르는 바보짓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러지 뭐."

그러니까, 내가 엘레노어의 제안과 퀘스트를 수락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진짜로.

#49. 르우엘의 그루터기

시련의 탑에서 장기간 체류한 도전자는 여러 욕구가 옅어지는 경향이 있다.

스탯과 레벨이 상승하며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획득한 도전자는 장기간 수면을 취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에서는 정신건강을 위해 하루 한번의 수면을 권장하고 있지만, 도전자 대부분이 사흘 밤은 거뜬히 샐 수 있다.

나도 상점에서 판매하는 피로회복제나 포션을 사용해 가며 작정하고 버티면, 보름 정도는 무수면으로 버틸 수 있겠지.

애초에, 수면 시간 자체도 극도로 줄어들어 4시간 정도만 자도 풀 컨디션이 될 정도다.

이렇다 보니, 시련의 탑 도전자들은 대부분 매우 빠른 속도로 수면욕을 잃어 간다.

소문에 따르면 어떤 유명 랭커는 48시간 주기로 2시간씩만 의무적으로 자고 있다고 할 정도.

거기에, 시련의 탑 도전자의 육체는 섭취 영양소의 종류와 무관하게 열량만 충족되면 완벽한 퍼포먼스를 낸다.

나와 일부 랭커들이 밥 대신 화이트롤만 먹으며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설탕과 밀가루 덩어리인 화이트롤만 먹고도 살이 찌거나 근육을 잃지 않으며, 스탯에서 비롯한 신체능력은 불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갑 사정이나 효율 문제를 이유로 여러 공략파 도전자들이 식사를 대충 때우는 성향을 갖게 된다.

물론 딱히 미각을 잃어버리는 건 아니라서, 대부분의 도전자가 효율을 뒤로하고 맛있는 식사를 찾긴 한다.

커뮤니티에서도 정신건강을 위해 달에 한 번꼴로 치팅데이를 갖는 걸 권하고 있지만, 이것도 결국 수면과 마찬가지.

고등급 헌터를 지망하는 랭커들은 이런 '식단'을 장기간 유지하고, 그 속에서 조금씩 식욕을 상실해 간다.

하지만 이렇게 굵직한 욕구를 상실해 가는 한편으로, 딱 하나 도무지 옅어지지 않는 욕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성욕이다.

신체능력이 초인에 가까워질수록 혈기는 더욱더 왕성해지니, 옅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지는 욕구.

실제로 시련의 탑 초기에는 도전자들의 성욕이 비뚤어진 방향으로 폭주하여 생긴 문제가 꽤 많았다고 한다.

탑에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손에 들어온 우월한 무력과, 쉽게 식별되는 신체적 약자의 존재.

거기에 법률과 공권력의 힘이 일절 닿을 수 없는 완전한 격리 공간이라는 탑의 특성.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지금처럼 거대 길드의 영향하에 치안이 확립되기까지, 상당히 많은 피가 흘렀다지.

하지만 나는 어떤 스킬의 작용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신적 문제인지, 성욕 때문에 곤란을 치른 적은 없다.

딱히 기능상의 부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욕구가 완전히 거세된 것도 아닐 텐데- 그냥 흥미가 안 생겼다.

뭐, 애초에 혼자 해결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처지라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겠지.

아무튼, 나는 절대로 오픈 커뮤니티의 망령들처럼 다크엘프의 커다란, 음, 그거 때문에 진영을 선택한 게 아니다.

진짜다.

아닌가?

당연히 진영을 고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긴 한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뭐, 있긴 하지.

그래, 안 좋은 버릇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뭐든 합리화하려는 거.

나는 다크엘프의 특정 신체 부위에 이끌렸다, 이건 인정.

하지만 오롯이 그것만을 이유로 진영을 선택한 건 아니다.

"자, 도착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레노어의 발걸음이 멈추고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밤 안개 너머 - 르우엘의 그루터기]

주변을 에워싼 안개가 걷히며, 거대한 나무가 빌딩처럼 서 있는 다크엘프의 마을이 드러났다.

내가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마을의 존재 그 자체다.

**

다크엘프의 어두운 피부색과 어울리는 검은 색깔의 거대 나무.

형태만 따지자면 바오밥 나무에 가깝지만, 아무리 바오밥 나무라고 해도 저렇게 크지는 않을 거다.

저 나무는 다크엘프의 거주지다. 나무 안쪽을 파내고 깎아서 만든, 거대한 자연산 아파트 같은 것.

하늘은 아파트 나무의 가지와 잎으로 덮여 햇볕이 들지 않는다.

그 대신인지, 반딧불 같은 광원체가 이리저리 떠다니며 빛을 내고 있다.

유독 밝은 만월의 밤보다 조금 더 밝은 정도의 광량.

그림자를 다루는 다크엘프의 이미지와 잘 맞는 분위기다.

"허, 참."

오픈 커뮤니티에서 봤던 모습이긴 하지만, 실제로 보니 헛웃음이 나올 만큼 굉장한 경치다.

"대단한데."

평소에도 드문드문 혼잣말을 내뱉곤 했지만, 이번에는 순수한 경탄으로 계속 말이 새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나에게 대뜸 어깨동무를 해 오며,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물었다.

"호오, 대단해 보이나?"

좀 부담스러울 만큼 거리가 가깝다. 게다가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러니, 커다란 어떤 게 자꾸 닿는다.

접촉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평소에도 워낙 말솜씨가 나쁜 탓에, 별 대단한 대답은 못 해주었다.

"숲쟁이 년들은 맨날 어둡고 칙칙하다며, 몸에 곰팡이가 날 것 같다고 난리인데. 그런 반응은 참 오랜만이군."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 지었다. 숲쟁이라는 건 하이엘프를 말하는 거였지, 아마?

이런 장관을 보면서 몸에 곰팡이가 날 것 같다고 지껄였다니, 깐프 새끼들 인성은 정말 명불허전이다.

괜히 커뮤니티에서 개씹좆프를 넘어서 좆좆좆좆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아, 잠시 근처를 둘러보고 있겠나? 손님용 방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오지. 외부인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 말이야."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림자를 일으켜 훌쩍 어디론가 사라졌다.

"좀 멀리 가도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마음껏 돌아다녀도 좋다."

"우린 숲쟁이들이랑은 다르다, 인간이라고 대뜸 해코지하려는 놈은 없을 거야."

"아, 신기하다고 달라붙을 수 있으니까 너무 인파가 많은 쪽은 피해라."

다른 다크엘프들도 저마다 할 일이 있었는지, 한 마디씩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흩어졌다.

예상한 것과 취급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면 나야 좋지.

**

엘레노어는 근처를 둘러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곳의 지리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7층 다크엘프 진영 전역 지도]

세세한 곳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오픈 커뮤니티에는 7층의 전 지역을 망라해 둔 지도가 있으니까.

7층의 마을 지역은 원래 따로 있지만, 이 다크엘프 진영에도 나름대로 마을 같은 인프라는 다 갖춰져 있다.

다크엘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만, 아무튼.

내가 처음 찾은 곳은 무기와 방어구를 판매하는 대장간이었다.

내가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로 이 마을의 존재를 꼽았지만, 이 대장간도 그 안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다.

"손님인가, 지금은 주문 제작은 안 받고 있는...뭐야, 인간족?"

대장간에 발을 들여놓자, 키가 작은 여자 다크엘프가 망치를 든 작업복 차림으로 걸어나왔다.

엘리트 개체가 아닌 평범한 대장장이 NPC일 텐데도, 매우 사람 같은 반응을 보여준다.

"뭐야, 뭐냐, 왜 인간족이 이런 곳에 있지? 길을 잃었나? 미아가 된 거야?"

다크엘프 대장장이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내게 달라붙어 왔다. 다크엘프는 다 이런가.

"초대받아서 온 건데."

어색하게 대답하자, 대장장이는 놀란 듯이 펄쩍 뛰었다. 인간이 이곳에 초대받아 온 건 정말 오랜만이라며.

그리고는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나를 초대한 것이 엘레노어라는 사실까지 알아맞혀 버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서 물어보자, 대장장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애밖에 없거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했다.

"튼튼한 무기를 사고 싶은데."

3대 진영에 소속되어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퀘스트 보상만이 아니다.

각 진영의 마을에서만 사거나 만들 수 있는 특출난 성능의 아이템, 통칭 진영 특산품.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하이엘프 진영에서는 고성능의 포션과 마법사 계열을 위한 방어구와 완드를 판매하고.

그림자 속에서 사는 다크엘프 진영에서는 보통보다 성능이 좋은 금속제 무기와 방어구를 판매한다.

왕국군 진영은 몇몇을 제외하면 특수한 아이템은 없지만, 그 대신 평판에 따라 매우 싼 값에 아이템을 구할 수 있다.

나는 성장에 방해되는 고성능의 아이템은 사용하지 않는 주의다.

하지만 오늘 하이엘프 기사와의 싸움에서 내 평소 장비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공격력을 비롯한 성능이 낮은 건 당연한거지만, 재질의 한계로 인해 내구도가 너무 빨리 닳는다는 점.

하이엘프 기사의 갑옷과 방패, 그리고 검에 부딪힌 무기들이 거의 다 폐품이 되어버렸다.

손실 자체는 얼마든지 메울 수 있지만, 이러다 더 고층으로 올라가면 일격마다 무기를 하나씩 해먹게 될 거다.

공격력은 낮아도 되지만, 내구도만큼은 낮아선 안 된다.

적어도 내 근력을 온전히 감당할 정도로는 단단해야지.

"튼튼한 무기 말이냐? 우리 무기는 뭐든 인간족의 것보단 튼튼하지."

마침 다크엘프들은 에보니 스틸이라는 특수한 재질의 장비를 사용하고 있으니, 튼튼한 장비를 사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어디, 저쪽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봐라."

나는 원하는 무기를 팔아주겠다며 웃음 짓는 다크엘프 대장장이에게 말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싹 다 가져와.

#50. 마음을 담는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