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마음을 담는 그릇
이제껏 지나온 모든 층의 자원을 완전히 독점한 만큼, 나한테는 차고 넘칠 만큼의 골드가 있다.
아이템 강화에 얼마를 쏟아붓건, 포션과 화이트롤을 얼마나 사들이건, 결코 마를 일이 없는 수준의 자금.
다크엘프의 장비는 상점제라도 꽤 고급품이라 가격이 제법 나가는 편이지만, 그래 봤자 결국 7층의 아이템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둔 골드라면 이런 아이템쯤은 수백 개까지도 살 수 있다.
"뭐냐, 뭐야, 인간족의 농담 같은 건가? 내 가게의 무기를 전부 다 사겠다고?"
다크엘프 대장장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무슨 비유나 장난처럼 여겼다.
나도 이 말을 진지하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말이어서 뱉은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농담인 것도 아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골드 드롭 버튼을 눌렀다.
-촤라라라락!
막대한 양의 금화가 모래처럼 후두둑 쏟아졌다. 대장장이는 멍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아이템 박스를 넓은 걸로도 갖고 있구나, 근데, 뭐냐, 이거 진짜 전부 금화냐?"
"어."
"인간족의 연금술이 금화를 마구 만들 수 있을 만큼 진보한 거냐? 아니면 뭐냐, 너 어디의 왕족이냐?"
키 작은 다크엘프 대장장이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파는 거야 안 파는 거야.
"귀엽다 싶어서 좋은 무기를 골라주려고 했는데, 하는 짓은 하나도 안 귀엽구나. 뭐, 팔기야 할 건데."
대장장이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벽에 걸어둔 무기를 꺼내 내 앞에 늘어놓았다.
[에보니 스틸 블레이드]
공격력 + 58 (참격)
치명타 피해 : x 2.5
내구도 850/85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15회
옵션을 보니 확실히 상점제치고 매우 훌륭하다. 특히 내 바람대로 내구도가 무척 높다.
그리고 내구도 외의 기본 스탯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지만, 최대 강화 횟수가 15회로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에 [예리] 강화를 잔뜩 붙이면 어지간한 저레벨제 유니크 무기를 웃도는 공격력이 나올 거다.
"기가 막히는데."
오픈 커뮤니티에서도 저층에서 다크엘프제 에보니 장비를 풀셋으로 맞춘 전사는 전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던가.
물론 이런 걸로 전부위를 맞출 만한 자본력이 있으면 애초에 전사로 전직하질 않을 테니, 그냥 놀리는 말이지만.
아무튼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가 있을 만도 하다. 완전 지갑전사용 템이잖아, 이거.
"이거 다 살게."
"진짜로 다 사는 거냐."
대장장이에게 값을 지불하고 [에보니 스틸 블레이드]를 장착해보았다.
내가 저레벨 상점제 장비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도 한 몫을 한다.
고레벨 유니크 장비들은 대부분 외형이 독특해, 다루기에 불편할 때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에보니 무기는 디자인도 깔끔하게 세련되었으며, 무게중심이나 밸런스가 손에 착 감겼다.
단순한 사용감만 보면 내가 가장 선호하는 심플한 디자인의 [강철 직검]과 엇비슷할 정도.
역시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하길 잘한 것 같다. 이참에 다크엘프제로 장비를 싹 갈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화도 필요하겠지.
"이 수십 자루 무기를 다 강화해달라고? 우리 가게의 재료를 다 털어도 못 할 텐데."
얼토당토없어하는 다크엘프 대장장이에게,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강화재료를 쏟아내 보였다.
"어이구, 오늘 허리 나가겠구만."
대장장이는 한숨을 내쉬며 망치를 집었다.
**
대장장이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재료를 받아들고 작업대로 이동했다.
혹시 강화 옵션도 일일이 말로 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게도 곧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사용 소재는 당연히 상한까지, 붙이는 옵션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내구] 몰빵.
"내구도를 더 높이고 싶다고? 이걸로 뭐 산이라도 파내려 하느냐?"
평소에 쓰던 상점제 세트를 이걸로 바꾸는 거니까, 내구에 몰아서 투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장장이는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성실하게 강화를 해 주었다. 그걸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깡! 깡! 깡!
재료를 털어 넣고 풀무와 화로를 가동하며, 모루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정성껏 망치질을 이어나간다.
여타 대장장이 NPC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 그걸 구경하는 게 어디가 재미있느냐고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 다크엘프는 모두 몸매가 뛰어나다. 이 대장장이도 키는 작지만, 가슴은 결코 작지 않다.
불 앞에서 열기를 받아가며 일하는 직종이다 보니, 옷차림은 상당히 가볍고...정성껏 망치질할 때마다, 음, 흔들린다.
나는 지금 오픈 커뮤니티 불후의 명짤 중 하나인 [단신거유 밤깐프의 진심200% 망치질]을 라이브로 보고 있는 거다.
"자, 이번에도 다 됐다. 받아라."
대장장이는 보통 NPC들보다 무척 빠른 속도로 강화를 마치고, 무기를 하나하나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단하기만 한 무기를 잔뜩 갖고 뭘 하려는 거냐?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
"튼튼한 무기가 좋아서."
"좀 지나치게 튼튼한 거 아니냐? 그리고 수십 자루나 필요한 이유는 뭐고?"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충 무시하려다가, NPC 호감도가 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당히 설명해주었다.
너무 강한 무기는 내 실력을 키우는데 방해가 되고, 여러 무기를 동시에 다루기에 예비까지 여러 자루가 필요한 거라고.
그러자 대장장이는 강화를 마친 무기 한 자루를 내려놓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무기를 얼마나 험하게 쓰길래, 예비를 몇 개씩이나 들고 다녀야 하는 거냐?"
"내가 힘이 좀 세서, 싸우다 보면 쉽게 부러지거든."
"얼씨구, 힘이 세다고 무기가 그리 쉽게 망가지겠느냐? 어디, 네가 원래 쓰던 장비 좀 보여다오."
뭔가 마을 노인장 어르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대장장이다. 나는 별생각 없이 무기를 보여주었다.
내가 애용하는 상점제 세트와, 가끔 꺼내는 풀세팅 장비 모두.
대장장이는 내 장비를 보며 '허어', '쯧쯧' 하는 추임새를 넣더니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간족아, 이건 무기가 아니라 네 잘못이잖느냐."
그리고 대뜸 잔소리를 시작했다.
**
생각해보면 다크엘프도 여타 창작물의 엘프처럼 매우 장수하는 종족이었다.
인간은 길게 살아봐야 100년인데, 엘프에게 그 정도는 아직 한창때의 청년이라던가.
그래서 그런지, 키 작은 다크엘프 대장장이는 매우 꼰대같은 말투로 나를 질책했다.
"나 참, 네가 죽으면 부러트린 무기들이 마중 나와서 네게 욕을 퍼붓겠구나. 이래놓고 왜 내 탓을 했느냐고."
날이 빠진 흔적만 봐도 얼마나 무식하게 다뤘는지, 대장장이인 자기 눈에는 훤하다나.
대장장이는 이렇게 무기를 다루는 건 짐승뿐이라며, 대체 언제부터 인간족이 그렇게 무식했냐고 열을 토했다.
투척을 제외한 내 전투기술 대부분은 리자드맨에게서 나온 것이니, 짐승처럼 다루는 게 당연한 거긴 한데.
"아무튼, 이건 그냥 두고 못 보겠다. 내가 넘겨준 무기가 아까워서라도 참견 좀 해야겠어."
아무튼,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대장간 안쪽으로 들어가 종이 한 장을 갖고 나왔다.
펜을 들고 무언가 휘갈기고 있는데, 다크엘프의 언어인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리즈멜이라는 녀석을 찾아가서, 이 편지를 보여주거라. 에르웬이 보냈다고 하면 바로 알아들을 거야."
"그게 누군데."
"내 친척이다. 아직 어리지만, 검 솜씨 하나는 일품이야. 편지를 보면 성심성의껏 검을 가르쳐 줄 거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검을 가르쳐 준다니, 내가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아닌가?
시련의 탑의 여러 NPC 중에는,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대가를 받고 스킬을 가르쳐 주는 NPC가 몇몇 있다.
그리고 커뮤니티에 따르면, 다크엘프 진영 쪽에도 그런 NPC 하나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요구하는 호감도와 훈련을 받기까지 깨야 하는 복잡한 퀘스트인데,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싹 다 스킵하고 검술만 배울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딱히 억지로 시키는 건 아니다. 대신, 제대로 배우고 온다면 상을 하나 주마."
얼떨떨해하는 내 표정을 불만의 표시로 알아들었는지, 대장장이는 헛기침하더니 멋대로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눈앞에 떠오르는 푸른 퀘스트 창.
[에르웬의 참견 - 검술 훈련]
설명 : 대장장이 에르웬은 오지랖이 넓은 성격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인간족 손님에게도 그녀의 오지랖은 여전했습니다. 바로 당신 말입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검술 훈련을 주선해 주고, 당신의 의욕을 높이기 위해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퀘스트 목표]
1. 리즈멜의 기초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
2. 리즈멜의 심화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선택).
3. 리즈멜의 선별 시험을 완료하기(선택).
4. 리즈멜과의 대련에서 승리하기(선택).
양치기 소녀의 퀘스트를 연상시키는, 선택 목표가 아주 많은 퀘스트였다.
리즈멜의 훈련이니 시험이니 하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내게 무척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자명하다.
그런데 그걸 완료하면 따로 보상까지 준다니, 보상이 아무리 형편없는 거라고 해도 나는 환영이다.
"최근에 좀 좋은 주괴가 들어왔거든, 그걸로 네게 딱 맞는 검을 하나 만들어 주마. 어떠냐?"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예전에 봤던 뻘글 하나를 검색으로 찾아냈다.
[다크엘프 << 맘마통만큼 마음도 넓은 누님들인거 같으면 개추 ㅋㅋ]
그리고 즉시 개추를 박았다.
다크엘프는 최고의 종족이 맞다.
#51. 에픽 퀘스트
너무 좋은 아이템은 안 쓰는 주의지만, 그렇다고 들어오는 아이템을 마다할 생각은 없다.
흔쾌히 퀘스트를 수락하자, 대장장이는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기막힌 검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고 거저 주는 건 아니라면서, 성실히 배우지 않으면 국물도 없을 거라고 경고를 하긴 했는데.
퀘스트 완료 조건 대부분이 선택사항에, 별다른 제한이 걸려 있지도 않은 걸 보면 그냥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대충 배우는 시늉만 해도 검은 만들어 주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할 생각은 없다. 체계적인 검술의 힘은 하이엘프 기사와의 싸움에서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리자드맨을 상대하며 야매로 익힌 검술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의 전투법, 벌써 기대가 된다.
대장장이 에르웬에게 퀘스트와 아이템을 받은 뒤로는, 다른 상점 계열 장소를 하나씩 찾아다녔다.
하지만 방문할 수 있었던 곳은 두 군데가 전부였다. 하나는 포션을 파는 잡화점, 다른 하나는 식료품점이었다.
"어머, 인간족이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니? 초대라도 받은 거야?"
잡화점의 여주인은 포션을 사는 나를 보자마자 관심을 표시했고, 덤이라며 정체 모를 환약을 하나 챙겨 줬다.
[녹영환]
엘프 종족 사이에서 전해지는 비전의 영약.
종족 특성인 장생의 비결이라는 소문도 퍼져 있으나, 검증된 바는 없다.
엘프 사회에서는 가정에서 만드는 영양제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섭취 시 1회에 한하여 랜덤한 스탯 하나가 영구적으로 상승한다.
약국에서 비타민 주듯 하길래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스탯을 영구적으로 올려주는 굉장한 아이템이었다.
검색해 보니, 다크엘프와 하이엘프에 관계없이 엘프 진영을 선택하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양 진영의 퀘스트 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무조건 한 개는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나.
[씨발 좆좆좆좆새끼들 영양제 하나 주면서 존나 꺼드럭대네 ㅋㅋ]
물론 파면 팔수록 괴담밖에 나오지 않는 하이엘프 진영에서는 그냥 쉽게 주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그리고 식료품점의 NPC는 태닝 양아치 같은 비주얼의 다크엘프 부부였는데, 이쪽도 내게 꽤 호의를 표시했다.
"허어, 인간족은 오랜만에 보는구만...여보, 우리 저번에 만든 과자 남은 거 있지? 그거 좀 갖다 줘."
이쯤되니 다크엘프에게 인간은 길고양이 비슷한 걸로 보이나 싶을 지경이었다.
"얘, 목마르진 않아? 우유 줄까?"
물론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식료품점에서 시간이 끌린 사이 엘레노어가 나를 찾았다.
"미안하다, 시간이 좀 걸렸지? 좋은 방을 찾아준다는 게 그만."
"상관없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쪽이다, 따라와라."
엘레노어는 나를 거대한 나무 주거지 안으로 안내했다. 내가 쓸 방은 계단을 서너 층 오른 높이에 있었다.
다크엘프의 거주지라고 해도 여타 여관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좋은 방이라고 하던데, 특별히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뭐, 어쨌든 공짜 숙소가 생긴 셈이니 불평할 생각은 없다.
"그대도 아이템 박스를 갖고 있지? 그러면 특별히 정리할 짐은 없을 테고."
그러고 보니, NPC들은 도전자의 인벤토리를 '아이템 박스'라는 마법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따라와라, 공용 욕탕을 안내해 줄 테니까. 그대, 우선은 좀 씻는 게 좋겠어."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하이엘프 기사랑 싸우면서 흙먼지가 많이 묻긴 했다.
"피 냄새가 진동하거든."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네.
**
6층에서 피와 독을 뒤집어쓴 채로 한참 지냈던 게 아직 덜 빠진 건가.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전에 박박 씻어서 지운다고 지운 건데, 설마 아직 배어 있을 줄은 몰랐다.
"엘프는 인간족보다 후각이 좋은 편이거든, 그렇다 해도 특별히 싫어하는 일은 없겠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하이엘프 왕자가 왜 나를 보고 그렇게 기겁하며 덤벼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새까맣고 흉흉한 디자인의 대검을 들고 있는, 온몸에 피와 독의 냄새가 배어있는 외부인.
거기에 왕국군과 하이엘프의 대수림을 둘러싼 분쟁의 존재를 고려하면, 경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심지어 그놈이 사냥하던 룬 베어를 대검으로 썰어버린 뒤였으니까, 더 위험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거랑 하이깐프 새끼들의 박살 난 인성은 완전히 별개 문제지만.
"아무튼, 들어가자꾸나. 이쪽이다."
엘레노어에게 안내받은 다크엘프의 욕탕은 무척 넓고 호화로웠다.
엘프 특유의 자연주의가 영향을 미쳤는지, 잘 개발된 온천 비슷한 분위기였다. 어쩌면 진짜 온천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 욕탕에는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그게 뭔지는 엘레노어가 자연스럽게 날 끌고 온 걸 통해 유추할 수 있겠지.
"미친, 혼욕이잖아."
그렇다. 이 공용 욕탕은 남녀의 구분이 없다.
"인간족은 이런 문화가 없던가? 불편하면 나가 주겠다만."
"아니, 굳이 나갈 건 없고. 그냥 안 익숙해서 그래."
물론 딱히 나쁜 일은 아니기에, 구태여 엘레노어를 내보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커뮤니티에서 다크엘프의 이런 문화가 언급된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호감도를 일정 수치 이상으로 올려야만 이렇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도전자들이 일부러 언급을 안 했거나.
오픈 커뮤니티는 실명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스템이니까, 대놓고 이 정도 수위의 이야기를 하기엔 좀 그랬을 수도 있지.
"검색해 볼까."
괜히 궁금해져서 커뮤니티에 '혼욕'을 키워드로 검색을 돌려 봤다. 언급된 글은 확실히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글 내용을 살펴봐도, 혼욕 문화가 있다는 것 자체는 언급되지만 그걸 직접 겪어봤다는 내용은 좀처럼 없다.
호감도에 따른 차이가 있거나, 시스템적으로 도전자와 혼욕이 이루어지지는 않도록 막혀 있는 모양.
어쩌면 1세대 헌터들만 겪어본 유니크 이벤트거나, 내가 개척한 히든 요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내 퀘스트창에 등록된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초대]
엘레노어의 초대를 수락하자 등록된, 에픽 퀘스트.
**
시련의 탑의 퀘스트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한 차례 클리어하면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일반 퀘스트,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는 반복 퀘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세대 당시에 모두 소진된 수량 한정의 유니크 퀘스트.
하지만 이건 시스템상의 공식적인 분류가 아니고, 도전자들이 임의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에픽 퀘스트 같은 건...들어본 적 없는데."
그리고 당연히 에픽 퀘스트라는게 있다는 사실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검색을 돌려 봐도 관련 정보는 거의 없었다.
히든 요소를 발견한 일부 도전자가 에픽 퀘스트라는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적이 있긴 한 모양인데.
정작 실제로 받아봤다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드문드문 입소문에 오르내릴 뿐이다.
그래도 몇 차례 교차검증이 이루어져, 아무튼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은 확인된 모양이지만.
-뽀글뽀글.
뜨끈한 욕탕에 몸을 지지며, 퀘스트 창에 등록된 정보를 눈에 새기듯 천천히 읽어보았다.
퀘스트 설명은 그냥 다른 퀘스트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다크엘프의 역사와 목적이 어쩌고 하는 내용뿐.
다만 그 아래, 퀘스트 목표와 보상이 적힌 칸에 표기된 낯선 메시지만이 다른 퀘스트와 다르다.
[에픽 퀘스트의 보상과 목표는 당신의 도전 기록에 따라 달라집니다.]
커뮤니티에 알려진 다크엘프 진영 퀘스트의 최종 보상은, 다크엘프 여왕이 하사하는 아이템이다.
몇가지 종류 중에서 고를 수 있고, 그중에서 특히 인기인 것이 [여왕기사의 검]이라는 무기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진입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에픽 퀘스트 루트를 깨면 그 이상의 보상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려나.
-촤아악.
그렇게 고민하던 중,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엘레노어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어우 미친. 이렇게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구나, 다크엘프.
시련의 탑이 아직 야만스러운 공간이던 시절, NPC에게 몹쓸 짓을 시도했던 놈들이 있다고 했었지.
불건전한 접촉을 하자마자 마을의 NPC 모두와 적대 상태가 되어서, 경비병 NPC에게 몇 놈이 죽었다던가.
하지만 NPC 쪽에서 먼저 이렇게 들이대는 건 아무 문제 없는 모양이다. 존나 깜짝 놀랐네.
"그대, 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내가 퀘스트 창을 바라보고 있던 걸 인식한 건가.
아니, 근데 NPC한테 그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보다, 슬슬 퀘스트를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다.
"아, 나랑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서?"
자꾸만 시선을 끄는 특정 신체부위에서 눈을 돌리며, 엘레노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몇몇 퀘스트는 이렇게 NPC와 직접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내용이 진행되지 않는다.
웬만해서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흘러가겠지만, 엘리트 NPC니까 적극 말을 걸 필요가 있겠지.
"아, 그거."
그런데, 엘레노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대가 팔을 꺾어놓은 그 왕자 녀석 있잖나, 그거 내 약혼자다."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소리야.
#52. 엘프의 역사
대뜸 나를 공격했던 하이엘프 왕자 녀석이, 눈앞의 다크엘프의 약혼자였단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약혼자를 조져놓은 대가를 치르라는 뭐 그런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호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놈을 패 줬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괜히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거다. 침착하게 대답하자.
"그게."
하지만 십여 초간의 고민 끝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게 다였다.
"놀랐나 보군? 질책하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애초에 말했잖으냐,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들었다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운을 뗀 건데.
"사랑해서 맺은 약혼 관계도 아니고, 그런 비실비실한 놈은 내 취향도 아니다. 나는 좀 더-"
-툭.
"-피 냄새가 물씬 풍겨올 만큼, 야성적으로 단련된 사내를 좋아하거든."
약간 상기된 목소리를 내뱉으며, 생긋 웃음을 지은 엘레노어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두드렸다.
뭐야 시발, 어딜 만져요.
방구석에 처박혀 살아온 앰생 인생인 만큼, 그런 경험 같은 건 거의 없다시피 한 나지만 알 수 있다.
"후후."
이 손짓에는 분명 평범하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놀리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의도가 있어!
그럼 이건 흔히들 말하는 플러팅인가? 난 지금 *약혼자가 있는* 다크엘프에게 플러팅을 당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몸매 좋고 섹시한 다크엘프에게 그런 걸 당하면 기분이 좋아야 할 것 같은데, 뭔가 좀 다르다.
"그대, 생긴 것과 다르게 수줍음이 많은 편이구나?"
만족스러운 듯 나를 보며 웃는 엘레노어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나는 내가 양손으로 몸을 감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나 씨발,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다소곳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거지.
"미친, 씨발!"
나는 거의 버둥거리다시피 움직여 욕탕에서 빠져나왔다. 이건 플러팅 같은 게 아니다.
이건 추행이다! 그리고 희롱이다! 나는 씨발 다크엘프에게 치한 행위를 당하고 있는 거다!
"참, 그냥 농담이다. 그렇게 기겁할 것까지는 없잖으냐."
"뭔, 미친, 그딴 농담을 왜 해?"
"자, 다시 들어오거라. 몸이 식을 거다."
결국 나는 쭈뼛거리는 한편으로 다시 탕에 들어갔다. 물론 엘레노어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안 잡아먹으니까 좀 가까이 앉아라, 그렇게 멀리 앉으면 목소리도 안 들리겠어!"
하지만 엘레노어는 보란 듯이 가까이 다가왔고, 우리는 그렇게 멀어지고 가까워지고를 몇 분간 반복하게 됐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일단 우리와 그 숲쟁이 녀석들의 역사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결국 제대로 이야기를 시작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
나는 RPG 게임을 할 때, 길고 장황한 스토리나 배경 설정 같은 건 일단 스킵하고 보는 타입이었다.
내 처참한 집중력으로는 그런 어려운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애초에 진득히 앉아서 이해할 의지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엘레노어의 이야기는 그 낭랑한 목소리 때문일까, 길고 장황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왔다.
물론, 이야기하는 도중 자꾸만 스멀스멀 다가오는 검은 손을 떼내느라 집중이 흐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야기의 전반부는 나도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세계수의 가지에서 태어난 포레스트 엘프와 세계수의 나무 둥치 그늘에서 태어난 나이트 엘프.
한 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두 엘프는 각각 세계수의 수호와 숲의 개척이라는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시간이 흐르며 이렇게 나누어진 역할은 점점 범위를 넓혀 갔다.
포레스트 엘프는 숲 전체의 관리와 전통의 보존, 그리고 세계수를 향한 제사까지 담당하게 됐고.
나이트 엘프는 숲의 개척을 넘어서 외세와의 싸움과 전투를 전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 분담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본질을 잃고 오염되어 갔고.
포레스트 엘프는 자신들을 더 위대한 엘프, 하이 엘프라고 자칭하며 귀족과 같은 삶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전투와 개척을 담당하던 나이트 엘프는 다크 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위층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그리던 어느 날, 이런 어긋난 계급체계에 반발한 다크엘프가 봉기를 일으키며 전쟁이 발발.
전쟁의 결과는 어느 쪽도 승리라 할 수 없었으며,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는 깊은 갈등의 골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천 년간 이어진 갈등은 인간 왕국의 군대가 대수림을 노리고 끼어들며, 삼파전 양상으로 변질되었고.
그게 바로 이 시련의 탑 7층에서 시작되는 진영 퀘스트의 배경이 된다.
**
"그대도 이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인간족에게도 꽤 알려진 모양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그렇다고 대답했다.
커뮤니티로 알게 된 내용이지만, 어쨌든 알려진 건 맞으니까.
"아무튼, 인간족 왕국의 위협을 느낀 그놈들은 뒤늦게 화친을 맺자고 제안을 해 왔다. 낡은 방식으로."
"그럼 약혼은..."
"정략혼이지, 우리의 여왕 폐하는 세계수에 미련이 많으시거든. 망설임 없이 제 딸을 내놓았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엘레노어는 여왕의 딸. 공주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약혼에 불만이 아주 많아. 그놈이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건 둘째치고도 말이다."
엘레노어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선 나는 인간족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수에도 별 미련이 없어, 그 나무는 이미 오래전에 힘을 잃었다."
그래 보인다. 다크엘프들은 인간을 싫어하기는커녕,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몇천 년 전에 떠나왔다는 대수림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대수림이 아니라 이곳이야."
그래 보인다. 이곳의 경치를 보고 감탄하던 내게, 엘레노어는 기쁜 듯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그리고 그 음흉하고 꽉 막힌 숲쟁이 녀석들이 뻔뻔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확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 보인다.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이깐프 놈들이 잘못한 거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여왕 폐하만큼 오래 산 노인들도 이제는 없어, 나이트 엘프라는 옛 이름도 잊혔고."
엘레노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초대]
그리고 내 눈앞에는 퀘스트 완료 알림이 떠올랐다. 엘레노어가 나를 초대한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뜻.
하지만 연계 퀘스트인 만큼, 이것으로 주어지는 보상은 경험치 조금이 전부다. 곧 다음 퀘스트로 이어지겠지.
"나는 그놈들과 화해하고 숲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인간족과도 교류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빛이다.
저건 어떻게 봐도, 꿈꾸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빛이었으니까.
"나는 그 왕자 놈에게서 뭔가 트집 잡을 걸 찾고 있었던 거다. 어떻게 해서든 약혼을 깨고 싶었거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제 또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그리고 그때, 그대가 나타난 거다."
숨이 닿을 듯이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엘레노어는 조용히 읊조렸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나는 그대에게 첫눈에 반한 거다."
"뭐?"
"그대는 내가 평소에 말하던 이상형에 꽤 가깝거든. 분명 다들 납득할 거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다.
이 미친 엘프가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거지.
**
다시 한번 뇌가 정지한 나를 깨운 것은, 엘레노어의 이어진 말이었다.
"그리고 그대도 나한테 반한 거다. 이것도 뭐, 다들 쉽게 납득할거다. 난 예쁘잖아."
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제 알 것 같다. 진영 퀘스트의 전체적인 흐름과도 대충 매치가 된다.
지금 나더러 명분이 되어 달라는 거잖아. 약혼을 깨고 하이엘프와의 화친을 없던 것으로 돌릴 수 있게.
"잘 아는구나, 내가 약혼을 깰 수 있게 도와다오. 대가는 충분히 치르마, 어떠냐."
왜 [다크엘프의 서] 퀘스트가 에픽 퀘스트로 등록됐는지도 이제 알겠다.
퀘스트 보상과 목표가 진행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의 의미도, 에픽이라는 등급까지도.
확실히 이건 에픽 급이다. 다크엘프의 공주가 직접 약속한 대가는 분명 굉장하겠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계획]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하는 대답이 퀘스트의 수락 여부를 가르는 모양이다.
여러모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걸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런 개쩌는 미녀 다크엘프와의 연인 행세라고?
오픈 커뮤니티의 망령들 중에는 돈을 내고서라도 하려는 놈들이 차고 넘칠 거다.
"그래, 알겠어."
"해 주는 거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 수락 알림과 함께, 엘레노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역시 나는 그대가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일어서시면, 어우, 미친, 세상에.
아무튼 다크엘프는 최고의 종족이다.
#53. 정찰대의 리즈멜
욕탕에서 뜨끈하게 몸을 지지고 난 뒤, 나와 엘레노어는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주제는 당연히 약혼 파기를 위해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였다.
"지금은 너무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게 낫다. 그대는 그냥 조금씩 나를 신경 쓰는 티를 내기만 하면 돼."
엘레노어는 적극적인 연인 행세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 부분은 자기가 알아서 풀어나갈 거라며.
하지만 일단 다크엘프의 마을에서 장기간 체류할 필요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내 얼굴을 다른 다크엘프들에게 알려둘 필요가 있다나.
어차피 7층은 미궁 지역도 별 볼 일 없고, 보스의 난이도도 낮은 편에 속한다.
미궁을 탐사하는 것보다 이 마을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그 부분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단순히 얼굴을 알려 두는 걸 넘어서, 어느 정도 좋은 인식을 꾸준히 심어줄 필요도 있다는데.
"그대를 임시 정찰대원으로 삼을까 하는데, 괜찮을까?"
그 방법으로서 나온 것이, 내가 다크엘프의 정찰대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정찰대는 거처 근처의 위험한 몬스터가 발생하는 지역을 탐색하고 퇴치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임시 대원에게 그런 게 들어올 일은 없을 거라고.
즉, 그냥 근처에서 몬스터를 잡으러 다니며 얼굴도장을 찍으란 거다.
평소에 하는 일이랑 전혀 다를 게 없네.
다른 도전자들의 다크엘프 진영 퀘스트랑도 거의 똑같은 루트고.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시늉만 해도, 대부분은 좋아라 할 거다."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당연히 나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아, 그리고 엘레노어에게 '너희한테 인간족이 뭐길래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 고도 물어봤는데.
"왜냐니, 인간족은 대부분 다 귀엽지 않나?"
아무래도 다크엘프는 정말로 인간을 길고양이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유가 딱히 없단다.
본인은 다크엘프 중에서 손꼽히게 젊은 편이라, 다른 이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는 모르겠다고 하던데.
나를 대하던 다크엘프 대장장이의 태도를 생각하면, 기껏해야 씩씩한 어린애 정도로 보는 게 아닐까 한다.
하긴, 수천 년까지도 사는 종족에게 백 년도 못 채우고 죽어버리는 인간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겠지.
"아, 그래도 나는 그대를 꽤 멋진 사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냥 귀엽게만 생각하지는 않아."
"아, 그러셔."
"뭣하면 남녀의 방식으로 한번 대화해 볼텐...농담이다, 농담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자꾸 묘하게 끈적거리는 이 다크엘프가 좀 거시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내일 정찰대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어라. 인간족은 입욕을 오래 하면 현기증이 난다지?"
고작 탕 속에 오래 있었다고 현기증 같은 게 날 몸이 아니긴 하지만, 일단은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엘레노어를 돌려보내고, 나는 방 안에서 혼자 근력 운동에 매진했다.
단순 운동으로도 스탯을 높일 수 있음을 알게 된 시점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은 나의 루틴이다.
쉬기는 무슨, 그렇게 낭비할 시간 없다.
**
다음 날, 엘레노어는 정찰대의 다른 다크엘프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우리의 일을 도와주며 실력을 기르고 싶다더군, 간단한 것이라도 좋으니 뭐든 일을 맡겨줬으면 한다."
정찰대의 다크엘프들은 어제 보았던 잡화점이나 식료품점의 NPC에 비해 무척 침착한 태도로 나를 환영했다.
물론 죄다 비슷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던 걸 보면, 인간을 향한 특유의 호의는 비슷하게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엘레노어가 나를 두고 떠나자마자, 다크엘프들은 나를 둘러싸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하하, 우리 일을 도와주겠다고? 기특한 인간족이 다 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인간족과 교류하는 게 얼마 만인지."
하지만 그런 다크엘프 사이에서, 한 명만이 뭔가 고깝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흥, 인간족이 돕기는 뭘 돕는다고.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지."
긴 머리칼을 올려 묶은 다크엘프 여자였는데, 나와 비슷하게 경장 차림에 검과 활을 매고 있었다.
콘솔은 똑같이 초록색이라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걸음걸이나 분위기만 봐도 약해 보이진 않는다.
언제부터 걸음걸이 같은 걸로 상대의 강함을 어림할 수 있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틀림없다.
아마 여기의 정찰대원 중에서 저 여자가 실력으로는 가장 강할 거다.
저 틱틱거리는 태도도 실력에서 나오는 거라고 봐도 되려나.
뭐, 저런 녀석 한둘은 있어 줘야지. 너무 호의적인 것들만 주변에 있으면 나도 적응하기 힘드니까.
"너무 그러지 마 리즈멜, 비실비실한 걸 싫어하는 엘레노어가 아주 아끼는 것 같던데. 이유가 있지 않겠어?"
"걔는 비실비실한 건 싫어해도, 어린 건 좋아하잖아."
"우리 시선에서 안 어린 인간족이 있기는 하고? 설마 그것만으로 대뜸 데려왔겠어, 굶주린 짐승도 아니고."
뭔가,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이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데. 굶주린 짐승이라는 표현이 왜 나오는 거지.
그리고 방금 리즈멜이라고 했나? 그 이름 분명 어디서 들어 봤는데?
[에르웬의 참견 - 검술 훈련]
[퀘스트 목표]
1. 리즈멜의 기초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
2. 리즈멜의 심화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선택).
3. 리즈멜의 선별 시험을 완료하기(선택).
4. 리즈멜과의 대련에서 승리하기(선택).
맞아, 대장장이가 줬던 검술 훈련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 NPC였다.
뭔가 상상한 분위기랑 많이 다르네. 그 대장장이의 친척이라길래 비슷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일치하는 점이라고는 특정 부위의 풍만함 하나뿐이다.
"뭐, 뭘 뚫어지게 쳐다봐. 인간족!"
물론 검술만 제대로 가르쳐준다면야 아무 불만 없긴 하지만.
**
나는 리즈멜에게 곧바로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건네받아 읽은 리즈멜은 곧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왜 인간족한테 검술 같은 걸...진짜 싫은데...!"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다른 정찰대원들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어 댔다.
싫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다. 내 팔을 잡아당기는 손도 별로 거칠지 않았고.
"미리 말하는데, 날 너무 귀찮게 굴면 가만 안 둘 거야. 애송아."
그러셔, 나도 귀찮게 굴 생각은 없거든.
"검술은 가르쳐 줄 거야?"
"네가 배울 수준이 된다면."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누런 종이쪽지처럼 보였다.
"일단 실력이 어떤지 좀 봐야겠어."
펼쳐진 종이쪽지에는 흑백 그림과 처음 보는 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크엘프가 쓰는 문자 같은데, 시스템에 딸린 간단한 번역 기능으로는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려진 그림은 나도 아는 것이었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본 7층 지역의 몬스터와 똑같이 생겼다.
"안 그래도 오늘은 독거미 토벌을 떠나려 했어. 우리 일을 돕겠다고 했으니까, 불만은 없겠지?"
"어."
"야,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니야? 너 이게 뭔지 몰라? 독거미라니까?"
대충 대답하자, 거꾸로 놀라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리즈멜.
그게 뭐 별 거라고, 7층에 나오는 독거미면 그냥 조금 센 잡몹 아니었나.
"황혼 거미라고 하는 녀석인데, 너보다 두 배는 커다랗고 다리랑 발톱도 엄청 단단하거든? 그리고 독도 있거든?"
리즈멜은 거미 그림을 들고 과장 섞인 설명을 했지만, 나도 이미 공략글에서 읽어서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싸워 본 적은 없지만, 솔직히 저 거미에 대한 거라면 내가 더 자세히 알지 않을까 하는데.
"나도 알아."
"알긴 뭘 알아!"
아니, 안다고 해도 그러네. 왜 사람 말을 안 믿는 거야.
"너 거미독에 당해 본 적 없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한 번 중독되면 팔다리가 다 굳어서 한참은 못 움직인다고!"
거미독에 당해 본 적은 아직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없을 거다. 마비 계열 독이라면 더더욱.
7층의 몬스터 따위가 내 쌍내성을 뛰어넘을 만큼 강한 독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독 내성 스킬이 19레벨에서 멈춰서 살짝 불편했던 참이거든. 이번 기회에 20까지 올리지 뭐.
"나도 아니까 그냥 좀 가자, 황혼 거미랬지?"
"어, 야!"
"안 오면 나 혼자 간다."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서 황혼 거미가 서식하는 지역의 지도를 펼쳐,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리즈멜은 또 나를 붙잡고 해독제를 갖고 가야 한다느니 어쩌니 떠들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다크엘프의 거주지를 떠나서 도착한 황혼 거미의 소굴.
-키리릭! 키릭!
거미 떼는 어째서인지 소굴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마중하듯 우글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7층은 유독 커뮤니티의 공략글이랑 다른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뭐, 그래 봤자 거미 숫자가 좀 많은 정도긴 하지만.
-스릉.
검을 뽑아들고 방패를 고쳐쥐며, 거미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돌연 리즈멜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위험하니까 물러서 있어. 너 같은 애송이, 거미독에 당해서 앓아누워도 돌봐줄 생각 없으니까!"
아니, 실력이 어떤지 본다면서 네가 나서면 어쩌라는 건데.
뭐 하는 년이야, 이거.
#54. 거미 소굴
황혼 거미는 7층의 다른 몬스터보다는 좀 더 까다롭고 강한 편이다.
이동속도도 상당히 빠르고, 거미줄을 쏴서 움직임을 묶는 특수 패턴도 존재하고, 방어력도 꽤 높다.
거기에 기본 공격이 중독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공략글에서는 3인 이상의 파티로 사냥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런 황혼 거미가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숫자로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비정상적인 상황.
이건 평범한 7층 도전자 파티가 공략할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다.
물론, 이런 황혼 거미의 대량 발생 원인으로는 짚이는 점이 있다.
"나서지 말고, 내 뒤에 있어!"
실력을 보겠다고 했으면서, 자기 뒤에 숨으라 말하고 있는 다크엘프 리즈멜의 존재.
엘리트 NPC와 동행하는 것을 전제로 난이도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겠지. 스토리 버전 느낌으로.
다른 탑의 황혼거미 소굴은 이렇게 NPC에 의해 한 번 정리되어 난이도가 하락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나하고는 별 관계없는 이야기다. 나는 평범한 7층 도전자의 스펙을 아득히 웃돌고 있으니까.
"너나 나서지 마."
나는 리즈멜을 제치고 거미떼를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황혼 거미가 잽싸게 반응하여 거미줄을 뿜었다.
검술 실력을 보겠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검방 위주로만 싸워볼까.
저 거미줄은 일단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들지만, 그 대신인지 발사 속도와 사거리는 그리 대단치 않다.
-타닥!
가볍게 발을 굴러 피해 내고, 크게 뛰어올라 거미의 머리에 과감하게 올라탔다.
황혼 거미의 덩치는 개체마다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크기만 해도 거의 멧돼지 수준이다.
그리고 거미의 신체 구조상, 이렇게 등이나 머리 위로 올라타기만 해도 이놈들은 마땅히 공격할 방법이 없어진다.
공략글에도 황혼 거미의 공략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제로 시도하는 도전자는 별로 없다나.
하기사, 최소 멧돼지만 한 크기의 독거미한테 달려들어 올라탄다는 전법을 누가 실제로 해 보겠어.
"와 씨발, 존나 징그러워."
거미 신체 표면의 부슬부슬한 솜털이 굉장히 기분 나쁘다. 나는 질색하며 바로 검을 내리쳤다.
-콱!
황혼 거미의 외피는 상당히 단단한 편이지만, 내 근력 수치 앞에서는 손쉽게 관통된다.
검을 내리친 부위에서 반투명한 녹색의 체액이 촤악-하고 뿜어져 나왔다.
황혼 거미의 체액은 그 자체로 약한 독성과 강력한 부식성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검으로 황혼 거미를 찌르면, 무기의 내구도가 순식간에 감소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에보니 스틸 재질의 장비는 높은 내부식성을 갖고 있기에, 검의 내구도는 전혀 깎이지 않았다.
역시 다크엘프제 무기야. 성능 확실하다니까.
-후웅!
내가 다크엘프제 검의 성능에 감탄하고 있던 그 순간, 돌연 주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커다란 황혼 거미 하나가 뛰어올라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점프력이 상당하네.
처치한 거미의 머리를 밟고, 다른 거미의 머리 위로 올라타며 공격을 피해 냈다.
-콱!
그런데, 뛰어올랐던 황혼 거미가 내가 있던 자리를 내려찍기 직전에 무언가에 맞아 날아갔다.
"너, 너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거미 무서운 줄도 모르고...!"
리즈멜이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든 채 소리쳤다. 뭐에 맞아서 날아갔나 했는데, 화살이었나.
황혼 거미는 그 덩치를 생각하면 무게도 장난이 아닐 텐데, 조그만 화살 한 발에 뚫려서 저렇게 고꾸라지다니.
역시 엘리트 NPC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까. 화살 한 발의 위력이 어이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거미가 저렇게 많은 이유가 있네, 진짜 엄청 세잖아.
"빨리 이리로 와! 다친다!"
"아니, 실력 보고 싶다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거미 머리 하나를 더 베어버린 뒤, 다른 거미에게 그대로 달려들었다.
**
내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걸 알자, 리즈멜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해 거미의 숫자를 줄이는 것에 주력했다.
리즈멜은 활 솜씨도 장난이 아니었지만, 검을 다루는 솜씨는 더욱 장난이 아니었다.
나도 어지간한 거미는 한두 방으로 제압할 수 있는데, 리즈멜은 내가 한 마리를 잡을 시간에 두 마리씩을 베어 넘겼다.
대인 전투도 아니고, 고작 잡몹 사냥에서 이 정도까지 실력 차이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
이건, 동선의 차이라고 해야 하려나. 덮쳐드는 거미를 상대로 대처하는 속도와 유연함이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대충 다 잡은 것 같은데."
어쨌든, 나와 리즈멜은 입구에서부터 우글거리던 황혼 거미를 거의 다 쓸어버렸다.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바닥에는 거미의 녹색 체액과 독액이 뒤섞여 조그만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제야 한숨 좀 돌리겠네, 왜 그렇게 위험천만한 짓을 해서는...!"
"네가 실력 보여달라며."
"난 그렇게 무식하게 덤벼들라고 한 적은 없어, 바보 같은 인간족아!"
리즈멜은 빼액 소리치며, 옆구리에 끼고 있는 가방을 뒤지더니 작은 손수건과 포션 같은 걸 꺼냈다.
색깔을 보니 해독 포션 종류다. 리즈멜은 손수건에 포션을 묻히고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거미 체액이 다 튀었잖아, 병나려고 작정했지? 더럽게, 얼굴 이리 내놔!"
그리고는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박박 닦아대기 시작했다. 아니, 뭔, 이 정도로 누가 병이 난다고.
"너 같은 애송이는 모르겠지만, 눈이나 코나 입으로 튀면 큰일이거든? 도움은 못 되도 짐은 되지 말라고!"
"어으브업업."
"가만히, 좀, 지금 닦고 있잖아, 입술 가만히 못 두겠어? 확 잡아 뜯어버린다!"
이쯤되니 슬슬 이 녀석의 성격도 대충 알 것 같다. 겉으로만 틱틱거리지, 다른 다크엘프랑 다를 게 없잖아.
나는 해독 포션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리즈멜의 손을 떼어내고, 이 정도는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야, 너 거미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이 녀석들 독은 체액이랑 섞이면 더 강해지거든?"
리즈멜은 그렇게 운을 떼더니, 황혼 거미의 독이 어디까지 변질될 수 있는지 한참을 떠들었다.
듣고 보니, 왜 그렇게 경계하는지 대충 알 것 같기는 했다. 아무래도 과장이 좀 섞인 것 같긴 하지만.
"이게 그렇게까지 위험하다고?"
"그렇다니까, 왜 말을 안 들어!"
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참기 힘들거든. 마침 저기 웅덩이에 저렇게 많은 독액 칵테일이 고여 있잖아.
나는 리즈멜의 경고를 한귀로 듣고 흘리며, 웅덩이에 모인 독액을 손으로 한 바가지 퍼마셨다.
-꿀꺽.
부식성 독액 특유의 타들어 가는 짜릿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야, 야야, 야! 뭐 하는 거야, 얘가 미쳤, 그거 당장 뱉어! 지지야, 지지, 퉤!"
리즈멜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먹어보니 역시 그렇게 대단한 독은 아니었다.
6층 좀비의 혈사포랑 비슷한 수준이구만, 이 정도는 나한테 안 통하지.
**
리즈멜은 독을 들이키는 나를 보고 기겁했지만, 독이 안 듣는 체질이라고 말하자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했다.
"아무리 독에 강한 체질이라고 해도 그렇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물론 왜 그런 걸 집어먹느냐며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토하라며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려는 건 멈췄으니까 됐다.
"그래서, 거미 토벌은 이걸로 끝?"
나는 검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리즈멜은 고개를 저으며 처음에 보여줬던 쪽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이제 보니까, 그냥 쪽지가 아니라 일종의 지령서인 것 같다.
"아니, 예상보다 거미의 숫자가 너무 많았어. 이렇게 대량 발생한 이유가 있을 테니, 좀 더 조사해 봐야 해."
리즈멜은 어쩌면 황혼 거미의 특수한 변이 개체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덧붙였다.
오픈 커뮤니티의 공략글에 따르면, 이 황혼 거미 서식지 안쪽은 던전으로 취급되지만 보스는 따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건 내 경험상, 한 번 처치되면 다시는 스폰되지 않는 유니크 보스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인간족 애송이를 달고 진행할 만한 임무가 아닌데...아, 진짜."
리즈멜이 중얼거리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한 모양이다.
"야, 인간족아. 우리 정찰대에는 왜 들어오겠다고 한 거야?"
"이런 거 하려고."
"이런 거라니, 인간족은 독거미랑 노는 걸 좋아했었나?"
설명하기 힘들어서 대충 대답했더니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인간이 독거미를 왜 좋아해.
"실력을 기르고 싶다고 했잖아, 실전 경험이 필요해서 그런 거야. 겸사겸사 너희 일도 도울 수 있으면 좋은 거고."
리즈멜은 내 말을 듣더니 잠시 게슴츠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이 콧소리를 내었다.
"흥, 기특한 소리를 다 하네. 엘레노어가 왜 좋다고 데려왔는지 알겠어, 완전 그 계집애 취향의 애송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툭툭 치는 게, 매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엘레노어가 너한테 이상한 짓은 안 하지?"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그렇게 속삭인다. 이상한 짓이라니, 뭐지.
"동침하자거나, 엄한 곳을 만진다거나, 그러면 딱 잘라서 싫다고 말해야 해. 알겠어?"
어째 다크엘프의 공주 취급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라고 따지기도 귀찮아서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저 소굴에 있을 보스가 더 중요하니까.
#55. 히든 보스
황혼 거미의 소굴 안쪽은 여러 방향으로 구불구불하게 뻗어 있어, 헤매기 딱 좋은 지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앞서 가지 말라니까, 제대로 표시해두지 않으면 길 잃기 십상이라고!"
리즈멜은 그 대책으로 뭔가 특수한 도구를 사용해, 지나온 길마다 표시를 남기고 있었다.
"그럴 일 없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하지만 나는 그런 리즈멜을 두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당연히 커뮤니티 공략글에 소굴의 지도가 있기 때문이다.
함정이 가득하던 리자드맨의 유적과 다르게, 황혼 거미의 소굴은 공략글에 나온 그대로의 지형을 하고 있다.
보스가 있을 법한 넓은 공간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으니,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거미를 잡으며 전진하면 그만.
"이래서 애송이는 싫다니까. 최소한 앞서 가지는 마, 떨어지면 찾기 힘드니까!"
리즈멜도 저렇게 말하면서 잘만 쫓아오고 있고.
그렇게 얼마간 성큼성큼 걷다 보니, 금세 공략글에 나온 것과는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지나온 황혼 거미의 소굴 내부는 거미줄이 널린 걸 빼면, 평범한 종유석 동굴로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벽 여기저기에 정체 모를 빛나는 광물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이게 뭐지."
빛나는 광물을 손으로 툭툭 두들겨보니, 평범한 암석보다 훨씬 단단한 경도를 느낄 수 있었다.
판타지 창작물에 흔히 나오는 빛나는 크리스탈, 뭐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마법사 계열의 장비에 사용되는 희귀한 재료 아이템일지도 모르겠다.
"이건...라이트 미스릴이잖아?"
리즈멜이 크리스탈의 정체를 아는 듯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곧바로 되물었다.
"이게 미스릴이라고?"
미스릴이라면 아다만타이트, 오리하르콘과 함께 시련의 탑에서 가장 귀하고 강력한 재료 중 하나다.
내가 갖고 있는 아이템 중에서도 1층의 대형 상자를 까서 얻은 완드 하나만이 유일하게 미스릴 재질인데.
이 많은 게 전부 미스릴이라면,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뭔가 잘못된 상황인 거다.
"미스릴이 아니라 라이트 미스릴, 이름만 비슷하지 아예 다른 물건이야. 인간족은 잘 모르나?"
"어, 그게 뭔데."
"희귀하게 볼 수 있는 크리스탈인데, 빛깔이랑 단단함이 미스릴을 연상시켜서 그렇게 불러."
리즈멜이 말하기를, 황금과 황철석 같은 관계라고 보면 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관계인지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냥 대충 비슷하지만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다른 광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넘어갔다.
"진짜 미스릴만큼 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미 소굴에 박혀 있을만한 물건은 아니야."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미스릴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속인데, 그런 것에 빗대어질 물건이 이런 곳에 널려있다니.
게다가, 오픈 커뮤니티의 정보글에 이런 물건의 존재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었다.
척 보기에도 양이 상당한 게, 2세대 시기의 도전자들도 한 번쯤 발견해서 활용해 봤을법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는 건, 저 앞의 보스룸과 관련된 모종의 이유로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일단 앞으로 가보자."
나는 라이트 미스릴이라는 광물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라이트 미스릴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라이트 미스릴이 내는 빛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박혀 있는 미스릴의 형태도 특유의 뾰족한 모양이 아닌, 조각나 있거나 뭉그러져 변형된 것들뿐.
조각난 건 그렇다 쳐도, 저렇게 뭉그러트리려면 대체 뭔 짓을 해야 하는 거지?
그렇게 사소한 의문을 품으며 조금씩 나아가던 중, 마침내 도착한 보스룸.
-까드득, 까드득.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내가 품었던 의문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
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돌을 깎아내는 듯한 소리.
6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암시]스킬 덕분에, 약간의 빛으로도 그 모습을 식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황혼 거미들과 비교해도 단연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거미가, 크리스탈을 씹어먹고 있었다.
"허, 별게 다 있네."
"쉿, 조용히!"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에 허탈한 소리를 내자, 리즈멜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스멀스멀 그림자가 올라오는 것이, 일종의 은신 마법을 쓴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직감] 스킬의 찌릿찌릿한 경고가 저 거미를 가리키고 있다. 이미 놈의 시야에 포착되었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들키지 않았더라도, 얌전히 몸을 숨긴다는 선택지는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까드득, 까득.
기괴한 형태의 이빨로 크리스탈을 갉아먹은 거미의 엉덩이에서 기묘하게 뭉그러진 덩어리가 떨어졌다.
저 거미는 빛나는 크리스탈을 갉아먹고, 빛을 잃은 크리스탈을 배설하고 있었다.
저런 짓거리를 왜 하고 있는지는 거미의 외견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다.
놈은 단순히 거대할 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빛나는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크리스탈- 라이트 미스릴을 섭취하고 그 성질을 손에 넣었거나, 저런 성질 때문에 크리스탈을 먹을 필요가 있거나.
어느 쪽이건, 저놈은 어마어마하게 단단한 내구력과 공격력을 갖췄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당연히 쓰러트렸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도 두둑하겠지.
-절그럭.
"야, 가만히 있어...!"
방패를 고쳐매고 앞으로 나설 준비를 하자, 리즈멜이 기겁하며 나를 말렸다.
"이미 들켰어, 싸워야 해."
나는 당연히 무시하며 자세를 갖추고, 인벤토리에서 쇠구슬을 꺼내 손에 쥐었다.
저 거미놈은 먹던 걸 마저 먹고 우리를 상대하려는 모양인데, 얌전히 앉아서 선수를 뺏길 생각은 없거든.
두 개의 쇠구슬을 동시에 쥐고, 거미의 눈 부분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쾅!
크리스탈 거미의 머리통에 쇠구슬이 충돌하며 폭발음이 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황혼 거미의 아종, 누군가 만들어낸 인조 생명체, 세계수의 썩은 가지에서 태어난 괴물.]
[정체에 대한 추측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하늘 아래 가장 위험한 거미라는 것.]
[HIDDEN BOSS - 수정 거미 아라나시아]
집채만한 크기의 크리스탈 거미가, 우리를 죽이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
움츠리고 있던 몸을 펴기만 했는데도 거미굴 전체가 뒤흔들린다.
곳곳에 숨어 있던 새끼 거미들이 재빠르게 움직여 달아난다. 입구에서 우글대던 놈들도 이렇게 내쫒긴 놈들이었을까.
히든 보스라는 처음 보는 타이틀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은신하고 있던 리즈멜에게 흘깃 시선을 보냈다. 리즈멜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버티고 있을 테니까, 네가 빨리 달려가서 지원을 불러와."
그런데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역시 겉으로만 틱틱거리고, 속으로는 인간을 좋아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지.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나는 모처럼 마주친 보스를 두고 도망칠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다. 그 반대라면 또 모를까.
"싫은데."
"야!"
짧게 대답하자 역정 내며 소리치는 리즈멜. 나는 수정 거미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한 채로 말했다.
"내가 이런 거 하러 왔다고 말했잖아. 지원을 부르거나 같이 싸우는 건 네가 알아서 해, 난 도망칠 생각 없으니까."
리즈멜이 뭐라고 말하려 하는 눈치였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거미를 향해 돌진했다.
-후웅!
거미가 앞다리를 들어 올리자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다리 하나하나의 무게가 상당한 모양이다.
당연히 저런 거에 찍히면 남아나는 곳이 없겠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른 황혼 거미랑 다르지 않을 거다.
-쿠웅!
수정 거미의 앞다리 공격을 피해내며, 놈의 머리를 향해 크게 도약했다. 역시 다를 거 없구만.
앞다리를 이용한 공격의 타이밍이며, 내리찍는 지점이며, 그냥 황혼 거미의 확대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차이점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거미의 입이 기괴하게 찢어졌다.
그리고 입안에서 발사되는 무수한 크리스탈 파편.
뭔데 저거, 금강창파냐?
재빨리 방패를 내세우고,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철벽] 스킬로 보호한다.
-콰과곽!
"아, 썅."
방패와 다리 부근에 파편 몇 개가 박혔다. 깊이 박힌 건 아니지만, 튕겨내지 못한 시점에서 실패다.
생각보다 공격력이 많이 세네.
그래도 일단 거미 머리에는 착지했다. 거미의 신체 구조상 등 위에 올라타면 일단은 안전하다.
허벅지에 박힌 크리스탈 파편을 손으로 뽑아내고, 포션을 마시기보다 먼저 검을 내리쳐봤다.
-카앙!
예상대로 더럽게 단단하다. 하지만 방금 그걸로 그럭저럭 크게 흠집이 났다.
뭐, 못 잡을 정도는 아니네.
한 곳을 계속 공격해서 흠집을 크게 벌리고, 깊숙이 검을 꽂아넣어서 크리티컬을 터트려 보자.
-슈룩!
그 때, 갑자기 발밑에서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리즈멜이 툭 튀어나왔다.
"진짜, 왜 그렇게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는 거야! 안 그래도 오래 못 살면서, 더 일찍 죽고 싶어서 그래?"
이상한 이동 기술로 단번에 내 옆으로 이동한 리즈멜은 곧장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즈멜의 잔소리를 들어줄 시간은 없었다. 직감 스킬의 짜릿한 경고가 돌연 발밑에서 울렸다.
-끼기기긱!
우리가 밟고 서 있던 수정 거미의 머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놈의 기괴한 이빨이 내 쪽을 향했다.
이번에도 파편 발사인가 싶었지만, 돌연 사색이 된 리즈멜이 나를 밀쳐냄과 동시에, 빛이 터져 나왔다.
-콰과광!
"뭐야, 씨발!"
왜 거미가 레이저빔을 쏘고 지랄이야.
#56.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한 줄기 섬광이 천장을 꿰뚫었다.
공격이 스친 방패 모서리에 타닥거리는 불꽃이 달라붙었다. 손으로 툭툭 쳐서 끄자, 그 자리는 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
히든 보스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은 만큼, 위협적인 고유 패턴을 갖고 있을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모가지를 꺾어 광선을 쏠 줄은 몰랐다.
아니 시발, 양심이 없는 거 아닌가.
대체 거미랑 레이저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뭘 쏜다면 특수한 거미줄이나 독 같은 걸 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입에서 크리스탈 파편을 쏘는 패턴이 있으면서, 같은 입으로 레이저를 쏘는 건 또 뭔데.
위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통으로 맞았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어이없게 뒤질 뻔했다.
"야, 인간족, 괜찮아?"
그림자로 몸을 감싸 광선을 방어해 낸 리즈멜이 나를 향해 물었다.
내가 거미의 레이저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리즈멜이 순간적으로 반응해 나를 밀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금 달랐다. 리즈멜은 공격을 보고 반응한 게 아니었다.
그건 분명 예측이었다.
리즈멜은 거미의 입에서 광선이 쏘아질 것을 예측하고, 재빨리 나를 밀친 뒤 그림자로 몸을 감쌌다.
나도 [직감] 스킬의 보정 덕분에, 공격의 전조를 예측해서 피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리즈멜은 직감 스킬을 가진 나보다 훨씬 빠르게 공격을 예측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즈멜은 공격의 형태까지 예측했다. 조금 전의 파편 발사가 아니라, 광선 공격이 올 줄 알았던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그림자로 몸을 감싸 방어한다는 판단은 내리지 못했겠지.
어떻게 그것까지 알 수 있었을까. 설마 거미의 공격 방식을 미리 알고 있었나.
"너..."
그에 관해 질문하려던 순간, 바닥이 흔들렸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밟고 있던 거미의 등이 흔들린 것이다.
-쿠궁!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거미의 등에서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다. 나와 리즈멜은 가시를 피해 뛰어내렸다.
조금 전에 모가지가 돌아간 것도 그렇고, 어느 정도 신체를 변형하는 게 가능한 모양이다.
이러면 등에 올라타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미 전투의 필승 공식은 못 써먹겠군.
"조심해, 계속 온다!"
땅에 내려온 우리를 향해, 거미의 거대한 다리가 휘둘러졌다.
-쾅!
기본적인 다리 공격은 여전히 황혼 거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속도도 변변찮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다리 공격이 반복되는 동안은 여유가 있다. 이 틈에 저놈의 패턴을 분석해 두자.
지금까지 확인된 패턴은 총 네 가지.
광선 발사, 파편 발사, 가시 생성, 다리 공격.
다리 공격은 둔해서 쉽게 피할 수 있지만, 무게를 생각하면 막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파편 발사는 속도가 빠른 편이지만 위력은 높지 않다. 맞는다고 다른 부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광선은 발사 속도도 빠르고, 위력도 절륜하다. 방패 모서리가 불탄 걸 보면 아마 막을 수도 없을 거다.
가시 생성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공격의 전조가 확실하니, 쉽게 피할 수 있다.
"할 만하네."
외형을 생각해보면 거미줄 발사나 독 공격 같은 추가 패턴이 있겠지만, 그 정도는 별문제 없을 거다.
"할만하다니, 무슨 소리야! 도망쳐야지!"
내 혼잣말을 들은 리즈멜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랬더니,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며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해댄다.
저런 걸 두고 도망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커다란 성장의 기회가 떡하니 있는데, 어떻게 그냥 도망칠 수가 있지?
목숨이 아까워서 등을 보이고 달아난 결과는 어땠었나, 현실을 두려워해 도피하고 처박힌 결과는 또 어땠었나.
"저 정도면 이길 수 있어, 생각한 게 좀 있거든."
상대를 똑바로 보고,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자신에게 묻는다.
눈앞의 적이 후퇴 말고는 답이 안 나오는 막막한 상대인가?
아니, 전혀.
결론을 내리고 나니 자연스레 피가 끓는다. 성장의 쾌감을 기대하는 심장이 멋대로 쿵쾅거린다.
-쿵쿵쿵!
거미는 여전히 육박전을 고집하며 다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위기감은 전혀 없다.
손에 들린 검과 방패를 다잡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덤벼드는 거미를 향해 다시금 맞서 달려들었다.
**
나와 거미가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만큼,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번쩍거리는 다리가 나를 내려찍기 위해 휘둘러졌지만, 이번에도 말끔하게 피해 냈다.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내고, 이번에는 거미의 배 밑으로 침투하기 위해 달려 봤다.
-끼긱.
그러자 거미의 입이 벌어지며, 다수의 크리스탈 파편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공중이었기에 마음대로 피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직감 스킬의 성능과 민첩 스탯을 최대한 발휘해 공격을 회피하고, 피할 수 없는 파편만 방패로 막는다.
한 발도 맞지 않은 채 거미의 배 아래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자 거미의 몸뚱이가 즉시 변형을 시작했다.
등 위에 올라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돋아나기 시작한 크리스탈 가시가 나를 노렸다.
-쾅! 쾅!
정수리를 꿰뚫을 기세로 뻗어지는 가시를 몸을 굴러 가며 피해냈다.
가시의 생성 속도는 빠르지만 역시 전조가 확실하게 보인다. 팔을 크게 당겨 스킬을 시전했다.
-카강!
브랜디쉬가 발동하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칼날은 내 예상대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가시를 베었다.
가시의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박살나며 떨어져 나갔다. 한 번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없을 뿐이지, 공격 자체는 역시 통한다.
-끼릭!
다음 순간, 거미의 머리가 확 꺾이며 내가 있는 배 밑을 바라보았다. 광선 공격이 온다.
전조는 감지하기 힘들지만, 범위를 알고 방향을 알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다.
-콰과광!
거미의 배 밑을 한줄기의 광선이 휩쓸었다. 물론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거리를 벌리자, 거미는 이번에도 다리 공격으로 응해 왔다.
히든이니 뭐니 해도 역시 고작 7층 보스. 공격 패턴이 단순하다.
평범한 도전자는 저 공격력과 방어력을 당해내지 못했겠지만, 이렇게 되면 이젠 그냥 반복 작업이다.
뭐야 이거, 좆밥이었잖아.
**
솔로 플레이로 대형 보스를 공략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다 피하고, 다 맞추면 된다. 공격력과 방어력 같은 스탯은 최소한의 공방을 성립시킬 정도면 충분하다.
크리스탈 거미는 내가 여태껏 상대한 어떤 보스보다 커다랬고, 그만큼 강력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지능이 매우 낮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낮은 것도 아니다.
그냥 생긴 그대로의 지능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거미 대가리에 딱 걸맞은 거미 수준의 지능이었지.
공격 패턴이 단순하면 높은 스펙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랭커인 창 조무사 최길현이 내 상대가 못 됐던 것처럼.
-쿠웅!
내 지속적인 공격에 다리 대부분을 파괴당한 크리스탈 거미가 허무하게 주저앉았다.
거미의 몸체는 내 기본 공격으로도 어떻게든 손상시킬 수 있었고, 스킬을 쓰면 더 유효한 타격이 들어갔다.
당연히 그보다 내구도가 약한 다리를 파괴하는 건 더 쉬웠다. 이걸로 거미는 이동할 수 없는 샌드백이 되었다.
"쓸데없이 튼튼하기만 하네, 좆도 아닌 게."
-캉! 카앙!
혹시 모를 2페이즈의 존재를 염두에 둔 채, 거미의 머리를 [죽음의 기사 대검]으로 두들겼다.
-쾅! 콰앙!
물론 거미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괴한 방향으로 머리를 꺾어 가며 광선을 쏘아 댔다.
하지만 새로운 패턴도 아니고, 이미 광선 공격의 타이밍은 완전히 외운 채다. 맞아주려야 맞아줄 수가 없었다.
결국 거미는 다리가 박살 나 주저앉은 후, 십여 분간 내 일방적인 공격을 받은 끝에 숨이 끊어졌다.
[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 : '라이트 미스릴 주괴X5'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육각수정 목걸이'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후의 일격 보상 : '액티브 스킬 - 집광'을 획득하셨습니다.]
히든 보스라서 그런지 보상이 상당히 짭짤하다. 스킬창과 인벤토리를 열어 보상의 정확한 옵션을 확인했다.
목걸이는 MP 최대치를 소소하게 올려주는 효과, [집광]은 주변의 빛을 모아 작은 조명을 만드는 스킬이라고 한다.
나도 그 거미처럼 광선을 쏠 수 있게 되나 싶었는데, 그냥 손전등이 하나 생긴 거였나.
좀 실망스러운데.
"거 봐, 이긴다고 했지."
인터페이스를 닫고, 살짝 떨어진 위치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리즈멜에게 말했다.
리즈멜은 나와 거미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냥 질린 표정으로 계속 바라봤을 뿐.
"이, 이겼으면 다야? 몇 번이나 죽을 뻔했잖아, 얼마나 놀랐는데!"
"죽을 뻔은 무슨, 한 대도 안 맞았구만."
"맞으면 죽으니까 당연하지! 계속 맞을 뻔했잖아! 뭘 잘했다고 웃어!"
나는 갑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파편에 맞아 입었던 상처는 이미 [전투 치유]로 완전히 회복된 상태.
즉, 생채기 하나 없이 이긴 셈이다. 이쯤 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충분히 알았을 거다.
"너, 정상이 아니야. 알고 있어?"
하지만 리즈멜의 눈빛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강한 염려가 느껴졌다.
내가 뭘 어쨌다고.
#57. 무자각
거미굴의 보스인 크리스탈 거미를 쓰러트렸으니, 남은 일은 마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리즈멜은 크리스탈 거미에 대해 보고해야겠다며, 떨어져 나온 수정 파편 몇 개를 주머니에 담아 갔다.
나도 라이트 미스릴이라는 소재에는 관심이 있었기에, 따로 몇 개를 챙겨 담았는데.
[빛을 잃은 라이트 미스릴]
인벤토리에 넣고 정보를 살펴보니, 빛을 잃어 원래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결국 얻을 수 있었던 라이트 미스릴은 클리어 보상으로 받은 주괴 다섯 개가 전부였다.
이러니까 커뮤니티에 관련 정보가 없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얻어서 써먹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던 거다.
그래도 주괴 다섯이면 장비 하나 만드는 데는 쓸 수 있겠지, 나중에 그 대장장이한테 갖다 주자.
다크엘프 마을로 돌아가는 길, 리즈멜은 내내 말이 없었다.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는데,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어색한 내겐 오히려 반가운 침묵이었다.
다크엘프 정찰대는 거미 소굴 소탕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힘들었을 텐데 뭐라도 좀 먹을래?"
"벌써 한 건 해치우다니, 기특한 인간족이네."
"어엿한 정찰대원 느낌이 물씬 나기 시작했구나. 멋져."
마치 첫 심부름을 성공적으로 마친 어린애를 칭찬하는 분위기였던지라, 영 기껍지는 않았지만.
리즈멜은 그런 나를 두고 혼자 크리스탈 거미에 대해 보고를 마쳤다.그리고 곧장 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정찰대원들에게 받은 과자 하나를 우물우물 씹고 있는 내게, 리즈멜은 물었다.
"너, 검술을 배우려는 이유가 뭐야."
사뭇 진지한 표정, 다른 층의 무감정한 NPC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리즈멜은 이미 내가 건네었던 편지를 읽었다. 그러면 내가 대장장이에게 검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묻는 걸 보면,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님을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대답했다.
"강해지려고."
검술은 결국 싸우는 기술이다. 그걸 배우는 이유에 이밖에 달리 뭐가 있을까 싶다.
"그럼, 강해지려는 이유가 뭔데? 이미 인간족 치고는 엄청나게 강하잖아?"
"인간족 치고 강한 걸로 안 되니까 그렇지. 나는 훨씬 더 강해져야 돼."
NPC에게 시련의 탑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떠들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이해할 수도 없을거고.
리즈멜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강해질 거야."
이상한 말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강해질 거라니.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말한다.
"네 실력은 잘 봤어, 기술은 부족해도 재능은 있었지. 그 정도면 나한테 배우지 않아도 알아서 강해질 수 있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굳이 리즈멜에게 검술을 배우지 않아도 나는 멈추지 않고 성장할 거다.
"그러니까, 위험하게 실전에 머리를 들이밀어 가며 경험을 쌓을 필요도 없어.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급하게 구는 거야?"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며, 내가 그 거미에게 그렇게 달려들 필요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지원을 부르고 정찰대원의 도움을 받아 싸우는 것으로도 유익한 경험이 됐을 거라고.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나는 리즈멜의 말을 받아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건."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마땅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내가 거미에게 달려든 건 보스 처치 보상을 먹고 성장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딱히 보상이 절박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히든 보스가 있는 줄도 몰랐고, 어떤 보상을 줄지도 몰랐으니까. 심지어 혼자 싸울 필요도 없었다.
리즈멜을 비롯한 다른 다크엘프들과 협력해 싸워도, 최대 기여도 보상과 최초 클리어 보상은 들어왔을 거다.
게다가 나는 이미 7층 수준을 아득히 상회할 만큼 강하다. 이대로 아무 성장이 없어도 10층까지는 무난히 깰 거다.
리즈멜과 거미굴로 향한 이유도, 그냥 실력을 보여주고 검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공략법도 모르는 크리스탈 거미에게 혼자 덤벼들 이유는 전혀 없었던 거다.
그 순간에 내가 이유로 삼았던 것은 하나.
"할 수 있으니까."
절대 멈추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
리즈멜은 내 대답을 듣고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뭘 알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다. 리즈멜은 나를 정찰대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왔다.
대충 봐도 뭐 하는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허수아비와 무딘 칼이 널려 있는 넓은 장소, 단련을 위한 공간이겠지.
1. 리즈멜의 기초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
2. 리즈멜의 심화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선택).
3. 리즈멜의 선별 시험을 완료하기(선택).
4. 리즈멜과의 대련에서 승리하기(선택).
시스템 인터페이스 한구석에 퀘스트 목표가 저절로 떠올랐다. 이제부터 검술을 가르쳐 주려는 모양이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인간족 애송이에게 검술을 가르쳐 본 경험은 없어. 그러니까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할 거야."
"그러던가."
"야, 평소 하던 대로 한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인간족 수준에 맞춰줄 생각 없다는 거거든? 다쳐도 안 봐줄 거거든?"
리즈멜은 투덜거리며 주변에 널린 허수아비를 발로 차서 치워버리고, 무딘 검 한 자루를 내게 건넸다.
[정찰대의 수련검]
공격력 + 20 (참격)
치명타 피해 : x 1.0
내구도 100/10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2회
검에 붙어 있는 스탯은 처참했다. 이야, 1층의 상점제 무기보다 구린 성능의 무기가 있을 줄이야.
그래도 심플한 디자인과 잘 잡힌 무게중심은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는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좋겠지만, 어쨌든 성능과 별개로 사용감은 좋아 보인다.
"나랑 하는 훈련은 무조건 그것만 써서 할 거야. 방패랑 갑옷도 다 벗고 해."
아이템 없이 순수한 검술 기량만 단련하는 방식인가, 완전 마음에 드는데.
"그럼, 일단 이것부터 시작하자."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발밑에 검은 보석 같은 것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보석이 깨지고 그 안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그림자는 조금씩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꾸었고, 이내 무기를 든 인형 비슷한 모습으로 정착했다.
[리즈멜의 선별 시험(초급)이 시작됩니다.]
어라, 그런데, 선별 시험?
기초 훈련이랑 심화 훈련은 어디 갔는데.
**
퀘스트 목표는 분명 기초 훈련-심화 훈련-선별 시험 순으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순서대로 진행하는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시험부터 시작하는 건가?
인간족이라고 안 봐주겠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너, 무기 쓰는 습관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고. 그것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림자 인형의 숫자는 총 다섯, 각각 다른 방향에 자리를 잡고 나를 둘러싸듯 무기를 들었다.
"그 수련검으로 이 인형들을 쓰러트려 봐."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 폴짝 뛰어 멀리 물러났다. 그러자 그림자 인형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다닥!
검을 든 인형 하나가 재빠르게 달려 거리를 좁혀 왔다. 잡몹처럼 생긴 것치고 상당히 빠르다.
달려든 인형이 휘두른 검을 피해 내고, 수련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노렸다.
-파각!
공격 자체는 정확하게 들어갔는데, 수련검의 위력이 너무 약해 제대로 베이질 않았다.
각목 같은 걸로 샌드백을 후려친 느낌이다. 뭔데, 이걸로 유효타를 입히는 게 가능하긴 한 건가?
그냥 나 엿 먹어보라고 불가능한 걸 시키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후웅!
인형이 다시금 휘두른 검을 백스텝으로 피했다. 인형의 공격은 자연스럽게 연계 동작으로 이어졌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이지만, 내 순발력을 따라올 수 있을만한 속도는 없다.
베기가 안 먹히면 이번에는 찌르기다. 연계 공격을 피해 가며 억지로 틈을 찾아낸 뒤, 찌르기를 날렸다.
-콰악!
이번에도 손맛이 영 아니다. 조금 전보다는 괜찮지만, 역시 검을 찔렀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뒤에서 커다란 도끼를 든 그림자 인형이 달려들었다. 일대일이 아닐 줄은 알고 있었다.
직감 스킬의 힘으로 도끼의 궤도를 예측하고, 어깨를 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그리고 놈의 머리통을 향해 팔꿈치를 휘둘렀다.
-슈룩.
그런데, 분명히 명중했을 팔꿈치가 그림자의 머리를 그냥 통과해 버렸다.
뭐야 이거, 물리 공격 무효화?
예상치 못한 헛방에 자세가 흐트러져버렸다. 그 틈을 타고 검을 든 인형이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다.
발차기로 대응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내 발길질은 인형의 몸을 그냥 통과해버렸다.
인형은 검을 휘둘러 내 목을 베- 지는 못하고,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빡!
타이밍이 어긋난 것도 있어서 타격은 크지 않았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나는 오른손의 수련검을 고쳐쥐고 힘차게 휘둘러, 똑같이 기사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파각!
역시나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맞긴 맞았다.
검술 수련이니까, 검으로만 때릴 수 있다 이거지?
"그래, 접수했다."
땅을 박차 인형과 거리를 벌리고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확실히, 이런 방식이면 검 다루는 기술은 좋아지겠네. 거칠지만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근데, 이런 다짜고짜 이런 걸 시켜 놓고 혼자 불안해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아, 저거, 머리...괜찮겠지?"
다쳐도 안 봐준다고 한 지 5분 지났다, 이년아.
#58. 창의적 해결
나는 박투술도 당연히 검술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세 기사들은 단순한 검술만이 아닌 레슬링 기술 같은 것도 수련했다고 하니까, 틀린 것도 아닐 거다.
하지만 일부러 무딘 수련검 한 자루만 들고 갑옷도 없이 맞붙게 했는데, 거기서 박투술로 대응하면 반칙이겠지.
위력도 안 나오는 검으로 싸울 시간에, 그냥 주먹질이랑 발길질로 깨부수는 게 훨씬 빠르다고 해도.
그러면 정작 중요한 검은 하나도 안 쓰게 되어버리니까.
-후웅!
그림자 인형의 검을 피해내며, 다시 한번 수련검을 고쳐쥐고 휘둘렀다.
인형의 공격속도는 모두 그리 대단치 않다.
직감 스킬을 쓸 것도 없이, 순수한 순발력으로 모두 대응 가능한 정도.
-파각!
수련검의 무딘 칼날은 인형의 옆구리에 적중했지만, 이번에도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후려쳤을 때보다 위력이 더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몸통 부분이 특별히 더 단단한 느낌은 아닌데.
뭔가 데미지를 입히기 위한 조건 같은 게 있는 건가. 일단 그걸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
-쿵!
나에게 덤벼드는 인형의 숫자가 하나 늘었다. 이번 인형의 무기는 육중한 망치였다.
공격력이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계속 맞고도 아무런 타격이 없을 만큼 약해 보이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움직이는 인형이 하나씩 늘어나는 구조인가.
마지막에는 다섯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겠군.
인형의 기술 수준은 만만하지 않고, 이런 것들 다섯이 한 번에 덤벼들면 나도 감당하기 힘들 거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다섯이 모두 움직이기 전에 숫자를 줄여 놔야 한다.
"흡!"
근육에 힘을 빡 넣으며, 달려드는 인형의 디딤발을 힘차게 짓밟았다.
-쿵!
당연히 인형의 발은 밟히지 않는다. 하지만 인형의 발을 통과해서, 그 바로 아래의 땅을 밟을 수는 있다.
내 발구름에 땅이 음푹 패이며, 그 땅을 밟고 달려들던 인형의 무게 중심이 비틀렸다.
인형의 허리와 무릎은 물론이요, 어깨까지 위치가 틀어지며 빈틈이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 점을 노려서, 찌르기.
-콰곽!
일자로 찔러넣은 찌르기는 인형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살짝 아쉽지만 유효한 수준으로 들어갔다.
역시,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내 공격 동작에 따라 데미지 수준이 달라지고 있다.
베기 쪽은 잘 먹히지 않지만, 찌르기는 상대적으로 잘 들어간다.
그럼 이제부터는 찌르기 위주의 공격으로 상대해 보자.
인형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뽑아내며, 돌아보지 않고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강!
내 뒤를 노리던 인형의 도끼와 검이 맞부딪혔다. 수련검의 이가 살짝 나갔다.
젠장, 다른 건 몰라도 역시 내구도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제대로 합을 나눈 것도 아닌데 벌써 손상이라니.
검이 부러진다고 해서 새 검을 던져줄 것 같지는 않으니, 최대한 아껴 써야 하는데.
하지만 이걸로 놈들의 공격이 정확히 어느 정도 위력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그 방법이 통할 거다.
**
날이 살짝 빠진 검을 최대한 바짝 잡고, 도끼 인형을 향해 깊이 파고들었다.
인형은 정확한 간격에서 도끼를 휘둘렀다. 본래라면 이걸 검으로 흘리거나 튕겨내고 반격해야겠지만.
[철벽]
-카앙!
왼팔에 [철벽]을 발동한 다음, 팔뚝을 방패 삼아 도끼를 막아 냈다.
역시, 이놈들의 몸을 주먹으로 타격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놈들의 무기를 내 몸으로 막는 건 가능하다.
애초에 그렇지 않으면 이놈들의 공격도 내게 맞지 않을 테니까. 무기만큼은 예외일 줄 알았지.
도끼날에 팔을 살짝 다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전투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는다.
-콰각!
그대로 인형의 품으로 파고들어, 있는 힘껏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었다.
위력은 여전히 어정쩡하지만, 힘을 넣어서 억지로 박아넣으니 꽤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내 찌르기에 의해, 인형의 무게중심이 뒤로 크게 쏠렸다.
-촤악!
발로 바닥을 크게 쓸어 긁어버렸다. 무게중심이 넘어간 인형은 바닥의 패인 부분에 걸려 그대로 넘어진다.
나는 그 위로 무게를 실어, 다시 한번 찌르기를 깊이 박아넣으면, 끝.
-콰직!
몸통을 관통당한 그림자 인형이 깨끗하게 소멸했다.
"경험치는 안 주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검을 뽑고 뒤로 돌았다. 시간이 지나며 인형 네 마리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위협은 되지 않는다. 이 녀석들을 처치할 방법은 이미 대충 윤곽이 잡혔다.
-카앙!
가장 앞서 달려든 인형부터, 수련검을 휘둘러 무기를 쳐냈다.
무기의 내구도 한계 탓에, 충돌 한번한번마다 이가 빠지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카강! 카앙! 캉!
검의 손상을 감수한 채로 합을 나누며, 그대로 한 마리의 인형을 억지로 밀어붙였다.
인형의 검과 내 검이 반복적으로 세차게 충돌하고, 카앙-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검은 부러져 버렸다.
박살난 수련검의 칼날 반쪽이 공중에 떠올랐다.
나는 그걸 그대로 붙잡아, 단검처럼 휘둘러 인형의 목에 처박았다.
-콰직!
한방한방의 위력이 부족하면 뭐 어때, 그만큼 빠르게 연속으로 처박아 버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콱콱콱콱콱콰곽콰악!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인형의 목을 연달아 찔렀다. 위력이 약해도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찌르니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인형의 목에 칼날을 반쯤 박아넣은 뒤, 부러진 수련검의 단면을 그대로 있는 힘껏 목의 반대편으로 쑤셔 넣었다.
칼날을 양쪽에서 쑤셔 박은 형태, 그대로 칼을 잡고 크게 텀블링하며, 회전력을 더해 인형의 목을 잘라냈다.
-콰드득!
베어내기보다는 뜯어내는 형태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한 마리 더 해치웠다.
뒤에서는 망치를 든 인형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나는 왼손의 부러진 칼날을 인형의 안면 부분에 집어 던졌다.
내 주특기인 투척의 정확도는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콰곽!
정확히 안면에 꽂혔다. 깊지는 않지만, 이번에도 상관없다.
"딱 대."
나는 그대로 칼날이 박힌 인형의 안면을 향해 뛰어올라 드롭킥을 갈겼다.
-콰직!
인형을 직접 공격한 게 아니라, 인형의 얼굴에 박힌 칼날을 맞춰서 더 깊게 박아넣은 거다.
내 온 힘을 다한 드롭킥이 칼날을 아주 깊숙이 쑤셔 넣으며, 또 하나 처치 완료.
부러진 칼날을 회수한 뒤, 이번에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부러트려 삼등분했다.
날카롭게 쪼갠 칼날 조각을 단검 내지는 표창으로 삼아, 손가락에 끼워 투척했다.
두 마리 남은 인형은 각각 내게 가슴을 찔렸던 검사 타입과, 아직 멀쩡한 창사 타입.
세 조각의 칼날은 모두 창사 타입의 다리에 꽂혔다.
창을 제대로 내지르기 위해서는 다릿심을 비롯한 기동력도 중요하다.
인형은 다리에 데미지를 입은 상태로도 훌륭한 찌르기를 선보였으나, 어쨌든 그 속도는 반감되어 무척 느렸다.
-턱.
창을 옆구리에 끼워 붙잡은 뒤, 그대로 거리를 좁혀 부러진 수련검으로 어깨를 공격했다.
힘으로 어깨 근육의 중요한 부분까지 칼날을 깊이 박아넣어, 창을 들지 못할 정도로 훼손했다.
그리고 그대로 창을 빼앗았다.
이 창은 이제 제겁니다.
빼앗은 창을 검사 쪽에게 투척, 내 힘을 충분히 실을 수 있는 내구도의 창은 그대로 검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무기는 주인인 인형에게서 떨어지면 소멸하는 것인지, 관통 직후 스르르 사라졌다.
사라진 창은 다시 창사 인형의 손에 나타났지만, 어깨와 다리를 부상당한 상태에서 나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부러진 수련검으로 목을 여러 번 찔러 마무리해주었다.
이렇게, 다섯 마리 모두 처치 완료.
인형을 공략할 방법을 빠르게 찾아내고 응용하여, 다섯 마리 모두 다른 방식으로 쓰러트렸다.
나도 내가 공격 수단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이 정도로 싸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거 좋네."
임기응변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솔플러인 나에게 아주 딱 맞는 방식의 수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멀리 떨어져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리즈멜을 바라봤는데.
"세상에."
뭐가 문제였는지, 리즈멜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
리즈멜은 가장 먼저 도끼를 막아낸 내 팔뚝의 상처를 살폈다.
물론 상처는 처음부터 깊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전투 치유]스킬에 의해 거의 다 회복된 상태였다.
팔뚝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리즈멜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빽 소리 질렀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이 무식한 애송아!"
"응?"
"진짜, 무기를 무식하게 쓰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잖아...!"
리즈멜은 널브러져 있던 수련검 한 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바닥을 툭툭 쳐서, 다시 한번 그림자를 불러냈다.
내가 상대한 것과 똑같은 그림자 인형. 리즈멜은 인형을 향해 수련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촤악!
"뭐야."
인형은 리즈멜의 참격에 깔끔하게 절단되어, 다시 원래의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이건 정확한 검로를 그리지 않으면 베이지 않게 만들어진 그림자야."
리즈멜은 그대로 그림자 몇 개를 더 불러내어, 수련검으로 베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정확한 검로를 펼친다면 손쉽게 베이지. 정교한 검술 솜씨를 요구하는 시험이라고."
아, 공격마다 위력이 다르게 들어가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
검술을 활용한 다양한 임기응변 능력을 시험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하아...그걸 그렇게 쓰러트린 건 네가 처음이야."
그래도 뭐, 일단 이겼으니까 된 거 아닐까?
59. 검술
리즈멜의 설명을 자세히 들어 보니, 확실히 내가 사용한 방법은 꼼수에 가까웠다.
규칙 안에서 승산을 찾는 게 아니라, 규칙의 허점을 찾아 승리하는 방식.
하지만 이건 내가 솔플러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정석대로 공략을 수행할 수 없는 처지다.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찾아서 이용해야 한다.
내 기본 마인드셋이 이렇게 되어 있는 한, 이번 '시험'의 결과는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공격이 들어갈 검로를 찾아내서 동작을 교정하기 마련인데, 너는 정말...인간족이라서 그런 건가?"
"아닐걸."
"하아, 그래. 내가 아는 인간족은 머리가 똑똑하고 배움이 빠른 종족이었어. 아마 네가 좀 유별난 거겠지."
리즈멜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래, 잘했어. 나도 그런 방식을 쓸 줄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리즈멜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교는 실력이 충분하지 않을 때 부리게 되는 법이야. 너는 기본기가 너무 부족해."
지당한 말이다. 결국 기본 검술이 충분했으면 이렇게 요란하게 싸울 필요도 없었으니까.
저번의 엘프 기사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놈보다 검술에서 앞섰으면, 그냥 무난하게 이길 수 있었을 거다.
나는 검술을 비롯한 기본기의 부족을 차력쇼에 가까운 잔재주로 보완하고 있을 뿐.
이런 방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검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거였으니까.
"일단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조잡해. 검을 도끼나 작두처럼 쓰고 있잖아. 그러니까 무기가 상하지."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는 리즈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다크엘프 진영에 합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딜 가도 이만큼 좋은 스승을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
리즈멜은 내 전투 성향을 보고, 아예 기초 단계부터 새로 가르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제자리에서 검 백 번 휘두르기 같은 체력 향상 부분만 빼고, 어린 다크엘프에게 가르치는 코스를 그대로 밟았다나.
확실히 리즈멜의 가르침은 무척 수준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척 친절하기까지 했다.
이론 부분에서는 내가 알아듣기 힘들만 한 용어는 적당히 바꿔서 말해 줬고.
동작을 실천할 때에는 뒤에서 팔과 손을 잡고 직접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당연히 동작 지도를 받을 때, 내 등에는 굉장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두 개의 덩어리가 밀착하고 있었는데.
그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리즈멜의 강의에는 집중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물론 아예 신경이 안 쓰인 건 아니긴 한데.
그건 솔직히 어쩔 수 없잖아.
그치?
아무튼, 리즈멜의 검술 수업은 거의 반나절간 이어졌다.
리즈멜은 내가 아예 처음부터 배우는 수준인데도, 습득이 매우 빠르다며 칭찬해주었다.
아마 그동안 내가 쌓아온 야매 검술 요령이 베이스가 되어 이해에 도움을 준 듯싶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처음에 했던 그림자 인형과의 대결을 다시 진행했다.
-촤악!
내 원래 검술을 베이스로 다크엘프식 검술을 섞었을 뿐인데도, 결과는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다섯 마리의 그림자 인형은 대부분 일격 내지는 이격 선에서 정리되었으며.
[패시브 스킬 : 중급 검술 2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초급이었던 검술 스킬이 중급으로 진화해, 단번에 2레벨을 달성해버렸다.
검술을 배우기 시작하며 세웠던 목표인 중급 달성을 하루도 안 되어서 해내고 말았다.
캬, 이게 검술 일타 강사의 힘인가.
학생 때는 인강이 뭐라고 비싼 돈을 내며 듣는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진짜 고급 강의는 뭐가 다르긴 다르구나.
오픈 커뮤니티에 자기가 검술 달인이라며 개소리를 꿀팁이라고 씨부려 놓던 등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네.
"와...이게 진짜 검술이구나."
"훗, 그런 거지. 이제 좀 알겠어?"
순식간에 향상된 실력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더니, 리즈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렇게 우쭐대면 괜히 트집을 잡고 싶어지는 게 나같은 앰생들의 종특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성장의 쾌감.
솔직히 이 정도면 스승님이랍시고 큰절 한번 올려야 하는 거 아닐까?
진짜 그럴 생각은 없긴 하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기분이 좋다.
1. 리즈멜의 기초 훈련 3단계를 완료하기(완료).
퀘스트 창을 열어보니, 첫 번째 목표가 완료 처리되어 있었다.
단계 구분 같은 건 배우면서 못 느꼈지만, 어쨌든 기초 훈련 단계는 이걸로 넘어섰다는 거겠지.
지금 배운 게 고작 기초 수준이었다면, 이다음의 심화는 대체 얼마나 개쩌는거지?
무기술 계열 스킬은 상위 랭커들도 대부분 중급 언저리에서 논다던데, 설마 여기서 상급 찍고 가나?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검술 수업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졌는데 애송이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지."
"왜, 난 괜찮은데."
"휴식도 수련이야. 건방지게 토달지 말고 그냥 쉬라면 쉬어!"
괜히 리즈멜을 혹사시켜서 호감도를 깎아 먹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냥 수긍했다.
당연히 쉴 생각은 없다. 지금 배운 걸 복습하기만 해도 새벽은 금방 지나갈 거다.
밤이 깊어간다.
**
리즈멜과의 검술 수련을 마치고, 나는 숙소로 쓰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괜히 바깥에서 돌아다니기보다는, 방 안에서 혼자 단련에 매진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들어온 방 안에는, 엘레노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라, 그대."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침대 위에 요염하게 드러누운 채.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욕탕에서 알몸도 한번 보긴 했지만, 이건 다른 느낌으로 굉장한데.
이게 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은 본능적으로 인터페이스의 캡처 기능을 찾고 있었다.
"정찰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지? 리즈멜과 단둘이서 무시무시한 괴물을 물리쳤다며."
"어, 음, 그렇긴 한데."
"덕분에 나도 기가 팍 살지 뭐냐. 계획의 진도를 더 빠르게 뺄 수 있을 것 같아."
엘레노어가 말하는 계획이란, 나를 명분삼아 하이엘프 왕자와의 약혼을 깨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에픽 퀘스트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니, 나한테도 좋은 소식이긴 하다.
"그러니, 포상을 줄까 해서 말이지. 서로 첫눈에 반한 사이 아니더냐, 동침 정도는 괜찮겠지?"
엘레노어는 요염하게 웃으며, 가까이 오라는 듯이 살살 손짓했다.
대부분의 도전자라면, 아니 그냥 하반신 멀쩡한 남자라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유혹이다.
다만, 리즈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크엘프가 인간을 어떤 느낌으로 생각하는지 알게 됐단 말이지.
그걸 떠올리면서 엘레노어를 바라보니, 뭔가, 좀, 그러네.
미친 변태년을 보는 기분.
다크엘프는 긴 수명에서 비롯한 연령 차이 탓에, 인간을 완전히 어린애처럼 취급한다.
다만 그냥 어린애가 아니라, 좀 많이 귀여운 어린애로.
다크엘프 기준에서 중장년에 해당하는 대장장이 에르웬은 나를 손주 손녀 보듯이 하고.
젊은 편에 속하는 리즈멜이나 정찰대원들은 어린 동생이나 작은 동물을 보듯이 대한다.
엘레노어는 다크엘프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든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거다.
지금 상황은 대충 여고생 내지는 여대생이 남자 초등학생한테 집적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여기에 종족이 다르다는 점까지 더해서 생각하면- 좀 끔찍한 혼종 아닌가.
"아하하, 농담이다 농담! 그대의 반응은 도무지 질리지가 않는구나!"
농담이라고 말하면서도, 먹잇감을 노리는 눈빛을 거두지 않는 이 짐승년을 어쩌면 좋을까.
일단 좀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나 검술 연습해야 한다고.
**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엘레노어는 대뜸 나를 덮치려 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를 놀리는 것 말고도 따로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그대, 리즈멜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다지?"
"어."
"좋은 생각이다. 그대의 검에는 좀 위태로운 면이 있었지."
그러고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었지. 어쩌면 리즈멜보다 내 실력을 잘 알지도 모른다.
검술의 기본을 새롭게 터득한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그때는 좀 조잡하게 싸운 면이 있었다.
인벤토리를 이용한 스위칭 전략, 갖가지 무기를 동시에 다루는 전투 방식.
하이엘프 기사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둘째치고, 그건 역시 전투보다는 차력쇼에 가까웠지.
엘레노어의 눈에는 그게 무척이나 위태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 검과 그대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겠지만."
"앞으로는 다를 거야, 실력이 팍팍 늘고 있거든."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대가 더욱 강해진다면 내 계획도 수월해질 거야. 기대하지."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직은 이르지만, 머지않아 좋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면서.
"좋은 거?"
차림새랑 눈빛 때문인지 매우 불건전한 이야기로 들린다.
직후, 엘레노어는 '아직은 비밀' 이라며 그림자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게 뭐람.
뭐, 어쨌든 다시 혼자가 됐다.
나는 그대로 리즈멜이 가르쳐준 검술을 연습하며 밤을 지새웠다.
60. 과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