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과보호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리즈멜과 함께하는 검술 연습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폭발적인 성과를 보였다.
중급에 도달한 검술 스킬은 물론이요, 검 이외의 다른 무기술 스킬의 레벨도 무척 많이 올랐다.
리즈멜이 알려준 '검을 쓰는 요령'은 다른 날붙이 무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검술도 무조건 검만 쓰는 건 아니다. 근육의 협응성을 끌어내는 방법, 호흡을 조절하는 방법 등도 함께 배웠다.
당연히 이는 박투술 스킬의 성장으로도 이어졌고, 방패술이나 투척 스킬 역시 천천히 함께 성장해 나갔다.
-촤악!
가볍게 휘두른 수련검이 그림자 인형을 일격에 잠재웠다. 전보다 더 강화된 인형이지만, 예외 없이 모두 한 방.
수련검의 날이 상하고 부러졌던 것도 이제는 옛말, 무기의 내구도가 깎이는 속도도 이젠 한참 느려졌다.
전반적인 몸을 쓰는 방법을 다시 세움으로써, 맨몸 운동을 통한 스탯 향상도 전보다 조금 더 효율이 좋아졌다.
근력 스탯은 이제 거의 오르지 않지만, 민첩 스탯은 꽤 유의미한 수준으로 올랐고.
정찰대의 임무를 도와주며 스킬을 사용하다 보니, 마스터리에 붙은 한손검 숙련도 수치도 꽤 올랐다.
1층 초반의 폭업이 떠오르는 어마어마한 성장세다. 아주 만족스럽다.
"이제 검술이 완전히 몸에 익은 모양이네, 우리 대원들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
리즈멜도 나의 성장세를 보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첫 대면때의 까칠한 태도는 이미 완전히 없어진 상태.
"그, 그래도 너무 우쭐해 하지 마라? 인간족 치고 괜찮다는 뜻이니까...!"
가끔씩 자신의 캐릭터성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저러긴 하지만, 이젠 그냥 귀여울 뿐이다.
"아, 그러셔."
나는 피식 웃으며 수련검을 집어넣었다. 리즈멜은 오늘의 시험을 통과하면 심화 단계로 넘어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쓰러트린 그림자 인형이 그 시험의 마지막이었다. 즉, 이제부터 심화 단계로 간다는 뜻.
그런데 심화 단계에서는 진짜로 뭘 배우는 건지 감이 안 온다.
다크엘프식 검술 자체는 이미 응용기까지 포함해 다 배웠으니, 더 배울 기술은 없을 것 같아서.
"네가 배운 게 전부가 아니니까 그렇지, 아직 남은 동작이 몇 개 있어."
"무슨 동작인데."
"지금의 네 상태로는 쓸 수 없는 기술이야. 우선은 눈을 틔워야지."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그림자 인형을 소환했다. 인형들은 리즈멜의 주변을 둘러싸고 무기를 겨누었다.
"일단, 잘 봐."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수련검을 뽑은 리즈멜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후웅!
눈을 감은 리즈멜을 향해 인형의 무기가 휘둘러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가볍게 피해 낸다. 실눈을 뜨고 있나 싶었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도 똑같이 피한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는 흉내 낼 수 있는 기술이다. 내겐 공격을 감지하는 [직감] 스킬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못 한다.
내 직감은 사각지대의 공격을 감지하고, 원거리에서의 공격을 미리 알아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리즈멜은 동시에 갖은 방향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피해내고 있다.
심지어 그 와중에 반격도 하고 있다.
-촤악!
정확한 검로를 그리지 않으면 해치울 수 없는 인형이, 단번에 베여 쓰러졌다.
저 디테일한 회피 자체는 직감 스킬이 더 성장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저건 레벨과 무관하게 안 된다.
직감은 위기를 감지하는 스킬이지, 적이 어디 있고 어떻게 공격해야 맞는지를 알려주는 스킬이 아니니까.
"하, 끝내주네."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저걸 배우게 될 거란 말이지?
**
눈을 감고 인형을 쓰러트리는 시범을 보인 리즈멜은 내게 물었다.
"너는 상대를 눈으로만 보고 있지?"
평소였다면 그럼 눈이 아니라 뭘로 보냐고 말했겠지만, 리즈멜이 보여준 시범이 내 입을 막았다.
"하지만 세상을 인식하는 감각은 시각 하나만이 아니잖아. 귀나 손으로도 세상은 볼 수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여러 창작물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소리로 주변을 파악한다거나, 공기의 흐름으로 주변을 파악한다거나. 그런 거.
하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나. 시련의 탑 같은 게 있는 시점에서 말이 안 되는 일이 뭐가 있겠냐만은.
"알아듣는 게 빨라서 좋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모든 감각을 엮어서 하나로 만드는 거지."
리즈멜이 말하는 것은 소리로 어림해서 피한다, 바람이 닿는 촉각으로 어림해서 피한다,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전부를 하나로 엮어서, 자신 주변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없애는- 생체 레이더를 구축하는 것.
"그게 한다고 되는 거야?"
"뭐, 애송이에겐 어렵겠지."
리즈멜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신경을 긁었다. 오호라,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아 그래, 그럼 빨리 알려줘 봐. 이번에도 금방 배울 테니까."
리즈멜은 내 대답에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결정체를 그림자 위로 집어 던졌다.
-콰르륵!
인형을 소환하던 지금까지의 그림자 마법과는 규모가 매우 달랐다. 순식간에 어둠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차단되니 당황스럽다. 나는 얼마 전에 습득한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집광]
작은 빛의 입자가 내 손으로 모여들어 조명을 만드는 스킬. 수정 거미를 잡고 얻은 그거다.
그런데 분명 스킬을 썼는데도 빛무리가 모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지, 고장 났나.
상태창에 표기된 MP는 줄어들었으니, 시전이 안 된 건 아니다.
MP만 빨아먹고 스킬이 실패할 수도 있나.
그렇게 잠시 고민하다가 금방 답을 찾아내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빛을 모으는 스킬이지 빛을 만드는 스킬이 아니다.
즉, 주변에 빛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뜻. 내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게 된다.
"어, 저기, 애송아. 뭐라고 말 좀 해볼래? 갑자기 깜깜해져서 많이 놀랐지? 무섭진 않아?"
잠깐 말을 안 하고 있었더니 아주 별 소리를 다 한다. 취급이 진짜 한결같네.
"누굴 바보로 아나, 이게 뭔지 설명이나 해. 안 놀랐으니까."
"아, 그, 그렇겠지. 나도 딱히 걱정한 건 아니거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퍽이나 그렇겠다. 얘는 갈수록 좀 이상해지는 것 같네.
아마 다른 오감을 키우기 위해서 내 시야를 차단한 거겠지.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인데.
"그럼, 지금부터 힘내 봐."
그냥 힘내라고 말한 다음 방치하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지.
**
설마 그대로 내버려 두나 싶었는데, 그냥 잠시 적응할 시간을 준다는 의미였나 보다.
[리즈멜의 선별 시험(중급)이 시작됩니다.]
시스템의 알림과 함께, 그림자 인형이 소환될 때의 '슈루룩' 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소리로 가늠해보면, 숫자는 아마 하나.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싸우며 감각을 익히라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심화 훈련은 진행하다 보면 다칠 수도 있다고 했었지. 인형의 공격력에 내가 당할 일은 없겠지만.
-스릉.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수련검을 들고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다른 감각은 모르겠고, 일단은 청각에 의존해서 상황을 파악해 보자.
적은 하나 뿐이기도 하고, 직감 스킬의 보조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한두 번 상대해 본 것도 아니니까.
-탁탁탁.
그림자 인형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방향은 정면에서 살짝 오른쪽, 속도는 평범하다. 거리가 좁혀지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대충 짐작 간다.
문제는 가까이 다가온 인형이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를 모른다는 거다.
무기가 검이니까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만, 왼쪽인지 오른쪽인지조차 모르는 상황.
-후웅.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직감 스킬이 반응한다. 우측 어깨로 들어오는 내려베기다.
-카앙!
검로를 예측하고 수련검을 맞부딪혔다. 그런데 검을 맞댄 느낌이 살짝 이상하다.
아 시발, 알겠다.
이거 양손검이네.
깨달은 순간, 인형이 맞대고 있던 검의 각도를 비틀었다. 익숙한 흘려내기 동작이지만, 이어지는 동작을 모르겠다.
그리고 왼뺨에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직감의 경고. 나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었다.
-휘잉!
바람 가르는 소리,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감촉.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갔다.
리자드맨처럼 무식하게 싸우는 타입이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인형의 검술 수준이 높아서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아예 검술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말자. 방어 후 반격이 아니라 먼저 공세를 취한다.
-타닥!
나는 앞으로 한 발짝 깊이 파고들며, 수련검의 날을 붙잡아 하프 소딩 자세를 잡았다.
양손검 검술은 그 특성상 절대 커버할 수 없는 범위가 일부 존재한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양손검의 위치를 통해 인형의 자세를 예측하고, 억지로 간격을 좁혀 공격한다.
-파각!
정확도 문제로 공격의 위력이 크게 반감되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대로 검을 비틀어서 크게 베어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뭔가 단단한 것이 내 이마를 후려쳤다.
-빠악!
"윽."
검 손잡이로 맞은 건가? 그 상태에서 어떻게, 아니, 애초에 내가 자세를 잘못 가늠했나?
다시 한번 바람을 가르는 칼날의 소리가 들렸다. 직감에 의존해 적당히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연계기를 모두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빠악! 콱!
순식간에 목과 어깨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직후, 어둠이 걷혔다.
"어떡해. 애송아, 괜찮아?"
걱정 가득한 표정의 리즈멜이 내게 달려오며 물었다. 그야 당연히 괜찮지.
기껏해야 날에 맞아서 피가 좀 나는 정도인데, 왜 멈추고 지랄이야.
계속 하라고.
61. 리스트 컷 신드롬
다친 부위가 하필 목이긴 하지만, 결코 깊은 상처는 아니다.
경동맥같은 큰 혈관이 베인 것도 아니라, 지혈 없이 방치하더라도 과다출혈로 이어지지 않을 거다.
애초에 나는 [전투 치유] 스킬이 있어서, 이 정도 상처는 가만두기만 해도 금방 회복된다.
"호들갑은, 안 죽어."
불안한 표정으로 포션을 내미는 리즈멜의 손을 쳐냈다. 포션이라면 나도 많다, 애초에 필요도 없고.
리즈멜도 자기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을 거다.
이 정도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크리스탈 거미때 자가치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었으니.
"벼, 별로 걱정한 거 아니거든?"
이번에도 뻔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휙 돌리는 리즈멜. 나는 상처가 나은 것을 보여주며, 계속 이어서 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5분만에 다시 시작된 어둠 속에서의 시험.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청각과 촉각을 활용해가며 인형에 맞섰다.
하지만 두어 번 합을 나누고 나면 꼭 한 번씩 헛손질을 했다. 직감 스킬의 보조가 있는데도 이 모양이다.
그리고 문제는 계속되는 리즈멜의 참견이었다. 내가 유효타를 허용했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내 상태를 살핀다.
"이번에는 진짜 크게 다쳤잖아. 잠시 쉬었다가 해."
"크게 다치긴 무슨, 멀쩡하니까 계속하라고."
"피가 그렇게 나는데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야."
나는 몸 쓰는 일에는 도무지 재능이 없다. 직접 구르고 깨지며 배우지 않으면 뭐 하나 제대로 익힐 수 없는 놈이다.
그런데 리즈멜은 내가 구르거나 깨진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시험을 멈추고 내 상태를 살핀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 이래서 대체 언제쯤 성장할 수 있을지, 까마득해 짐작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다.
솔직히, 시야가 제한되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 몰랐다. 상상도 못 해본 약점이다.
3층의 리자드맨 주술사를 시작으로, 조금씩 마법을 사용하는 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흑마법이나 저주 계열 쪽의 마법에는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수단도 수두룩하게 있다.
당장 그림자 마법을 다루는 이곳의 다크엘프들만 해도 그렇지 않나.
박투술과 다른 무기술을 봉인한 상태였다고 해도, 고작 인형 하나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알게 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는 리즈멜이 말하는 감각의 확장을 꼭 터득해야만 한다.
"으흠, 그 정도면 처음치고는 엄청나게 잘하는 거야."
내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리즈멜이 대뜸 그렇게 말해왔다.
"원래 이건 하루이틀만에 터득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거든. 배움이 빠른 인간족이라도 다를 건 없어."
"하루이틀로 안 되면, 보통은 얼마나 걸리는데."
"매일같이 수련한다는 기준에서, 첫 단계를 넘기기까지- 길면 10년, 짧으면 반 년. 나도 반 년은 걸렸어."
익숙한 단위다. 1층에서 내가 날려 먹은 시간이 반년 정도였고, 3층에서 폐관수련에 들인 시간도 그 정도였다.
투자하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짧아도 반년일 경우는 좀 다르다.
추모의 집의 유골 안치기간은 보통 처음에는 15년, 그리고 때마다 연장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무연고자의 경우에는 10년이라고 들었다. 임시 보관 기간이 2년씩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12년.
물론 졸업자들을 통해 탑 바깥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길드 쪽에 말을 전해두면, 어떻게든 늘릴 수는 있다.
고로, 꼭 몇 년 안에 나가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몇 년이 걸려도 나가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생각이다. 내 목표에 시간제한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내가 쌓아온 노력과 힘을 믿을지언정, 내 의지와 성실함은 결코 믿지 않는다.
내 근본은 결국 엄마의 등골을 빼먹던 앰생 백수 새끼다. 어쩌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했지만, 한 번 관성을 잃으면 끝이다.
인간을 마냥 귀여워하는 다크엘프에게 둘러싸여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분명 나는 다시 멈춰 서고 말 거다.
"반년이라고?"
"음, 빠르다면."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인지 황급히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너는 제법 재능도 있고, 인간족은 원래 배움이 빠르지 않으냐며, 넉넉히 일 년이면 꼭 익힐 수 있을 거라고.
그래,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도 일 년쯤 되면 익힐 수 있겠지. 그럴 생각이 없을 뿐.
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이 걸린다면, 과격한 방식을 쓰면 한 달 정도면 되지 않겠어?
**
리즈멜과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오늘도 엘레노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 오늘은 조금 빨리 돌아왔구나. 연습이 일찍 끝난 건가?"
나는 엘레노어의 물음에 오늘은 볼 일이 있다고 대충 대답하며, 곧바로 장비를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너무하는구나, 제대로 대꾸도 안 해주고."
엘레노어는 태도가 매몰차다며 서운하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딱히 행선지를 묻거나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분명히 말리려고 했을 테니까.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7층 전역의 지도를 켜고, 미리 점찍어둔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목적지는 진영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거의 손대지 않았던 필드 보스의 출몰 지역이다.
[저주받은 제단]
여긴 다크엘프 진영에서 황혼 거미 토벌을 진행하는 것처럼, 왕국군 진영을 선택할 경우 와야 하는 장소다.
출몰하는 몬스터는 이 지역에 흘러넘치는 저주에 영향받아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
근처를 지나다니다 저주에 당한 산적, 왕국 병사, 기사 등이 적으로 나타난다.
-적이다, 적이다, 적은 죽인다.
-싸워라, 우리의 왕국을 수호하라.
-모조리 쓸어버리자, 얘들아.
초점 없는 눈으로 무기를 빼 들고 접근하는 저주받은 인간들을 앞에 두고, 나는 단검을 뽑았다.
내가 3층에서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무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위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독화살을 몸에 찌르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리자드맨에게 무모하게 덤벼들고.
그렇게 자신의 생존 본능을 자극해, 폭발적인 성장을 해낸 거다.
이번에도, 해야 할 일은 다르지 않다.
-촤악!
오른손의 단검으로 내 눈을 그었다.
거창한 그림자 마법이 없어도 이거라면 쉽게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
"끄, 으윽, 씨발."
상상 이상으로 고통이 크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게 피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에 더해, 사방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눈, 제대로 베었으니 포션을 마셔도 바로 회복되진 않겠지. 이걸로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압도적인 위기감. 그리고 묘한 흥분에 손끝이 덜덜 떨린다.
"후, 후우."
적은 무딘 무기만 쓰는 그림자 인형이 아니다. 다쳤다고 멈춰줄 리즈멜도 이제 없다.
검을 뽑아들고, 적의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
스펙을 낮추고 촉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이번에는 방어구도 모두 해제하고 왔다.
어떤 게임처럼 빤쓰만 입고 나온 건 아니지만, 방어력 면에서는 그것과 큰 차이도 없다.
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무기는 저주로 인해 더욱 강화된 상태이기에, 더더욱 공격을 허용하면 안 되는 상황.
-휘잉!
작은 바람 소리에 의존해,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냈다. 이미 내 몸에는 깊고 얕은 자상이 네다섯 개는 새겨져 있다.
하지만 개중 치명상은 하나도 없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도, 치명상에 한해서라면 어떻게든 됐다.
산적으로 추측되는 냄새나는 놈의 도끼 공격을 피해내고, 앞으로 크게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것은 목, 휘둘러지는 무기의 높이를 추측해 어깨의 위치를 계산하고, 그보다 살짝 위로 검을 그었다.
-촤악!
살을 찢고 뼈가 있는 부분까지 칼날이 닿는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대로 목을 노렸다.
목을 베어버린 산적을 걷어차고, 다른 방향에서 덤벼드는 누군가의 창을 회피하고 반격했다.
-서걱!
눈이 보이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공격에는 크리티컬이 터졌을 것 같았다.
그런 손맛이다. 치명상을 입힐 때의 손맛.
리즈멜이 알려준 오감의 활용법이 머릿속에서 쏙쏙 떠오른다. 뺨에 닿는 흙먼지의 감촉에 웃음이 나온다.
분명, 무거운 망치를 땅에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었지.
지금 날아온 흙먼지는 그 망치가 휘둘러지며 닿은 것. 그리고 특유의 묵직한 바람 소리, 휘두를 때의 호흡.
정확한 타이밍에 검을 들어, 망치를 휘두르고 있을 산적의 손목 위치를 베어버렸다.
고작 무기 휘두르는 소리와 발소리만으로 상황을 어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많은 감각이 주변의 상황을 읽어주고 있는데, 고작 그런 것에만 의지하고 있었다니.
-촤악!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적을 베어버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가 한결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전투 치유]와 아이템 효과로 눈이 회복된 것 같다.
그리고 회복된 눈앞으로 푸른 인터페이스 메시지가 여럿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패시브 스킬 : 감각 강화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어느새 새로운 스킬이 습득되어 있었고, 직감 스킬의 레벨도 조금 올라 있었다. 해낸 거다.
"흐핫."
실실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에 더해,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위대한 이 땅의 왕이시여, 사악한 마법사의 제단을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병사도 기사도 더 이상 보내지 않으시고, 그저 주변을 봉쇄하라는 명령만 내리십니까.]
[그곳을 지키는 망자가 그토록 두려우십니까. 이미 부패해 썩어버린 무사의 시체가!]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6층의 좀비를 연상케 하는 검을 든 시체.
[BOSS - 그 옛날 썩어버린 무사]
무기를 든 자세와 기백 모두 예사롭지 않으나,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눈을 그었다.
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 과격한 방식으로 한 달.
그리고, 내 방식으로는 반나절.
역시 나한테는 이게 맞아.
62. 모순의 본심
필드 보스를 쓰러트린 후, 감각 강화 스킬의 레벨이 한 번 더 상승했다.
그리고 [감각 증폭]이라는 새로운 액티브 스킬도 습득했다. 스킬의 성능은 단순하게 오감을 더 강화하는 것.
감각 증폭을 켜면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생체 레이더가 된다.
그냥 민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의 반사로 위치를 파악하는 반향정위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위기를 깨부수며 이룩한 성장은 언제나 짜릿하다. 나는 만족하며 다크엘프의 마을로 되돌아왔다.
마을에는 밤을 지새운 듯 보이는 엘레노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 피냄새가 나는구나."
그러고보니 다크엘프는 후각이 예민하다 했지. 장비를 갈아입긴 했지만,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나.
밤중에 갑자기 장비를 챙기고 외출하더니,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상황.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을 법도 한데, 엘레노어는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대는 내 취향이란 말이지...보면 볼수록 탐나서 원,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 아깝구나."
음, 뭔가 심오한 말을 하려나 했는데 아니었네. 야성미가 넘치는 연하인지 뭔지가 취향이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엘레노어는 내가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대도 밤을 새운 거지? 잠은 안 자도 되나?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딱히."
"인간족은 좀 자주 먹는 편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그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다크엘프는 종족 전체가 식사 주기가 뜸한 편이고, 나도 항상 화이트롤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니까.
물론 다크엘프들은 나랑 눈만 마주쳐도 간식을 먹이려고 들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필드 보스를 잡은 직후에 화이트롤을 먹어서 따로 뭘 먹을 필요는 없고, 수면도 딱히 필요하지 않다.
"식욕이 없거든."
나는 대충 대답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식욕이고 수면욕이고 하는 건 옅어진 지 오래니까.
아니, 저절로 옅어졌다기보다는 스스로 잘라낸 것에 가깝겠다.
1층에 처박혀 있던 시절에도, 꼴에 입이라고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처먹었으니까.
일차원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그때의 정신상태로 이 7층에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다크엘프들에게 빌붙어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받아먹고, 밤에는 엘레노어랑 뒹굴지 않았을까.
그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역겨움이 치민다. 짐승만도 못한 꼴이겠지.
가슴에 깊이 박아넣은 의무와 책임감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 거다.
"그런가,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닌데."
엘레노어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식욕을 잃어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
엘레노어와는 잠깐의 대화 끝에 헤어졌다. 서로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정찰대의 건물로 이동했고, 정찰대원 다크엘프들의 관심을 흘려넘기며 리즈멜을 찾았다.
리즈멜과 만나자마자 다시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한 몸풀기를 마치고, 어제 하던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리즈멜은 어제보다 훈련의 난이도를 낮춰서 천천히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서걱!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휘두른 검이 가볍게 인형을 베어냈다.
"뭐야, 오늘은 컨디션이 무척 좋은 모양이네? 푹 쉬다 왔구나?"
특별히 더 훈련한 것도 아니지만, 어제와는 사뭇 다른 결과에, 리즈멜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뭐, 반은 맞다.
쉬다 온 건 아니지만 컨디션이 좋기는 하니까.
그리고 훈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험이 급격히 진도를 나갈 마다, 리즈멜의 표정은 점점 나빠져 갔다.
처음에는 마냥 기뻐하며 칭찬도 하고, 너무 우쭐해하지 말라며 틱틱거리기도 했지만.
내가 인형 다섯을 동시에 여유롭게 쓰러트리고, 어제 보여줬던 동작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시작할 때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리즈멜은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아낌없이 내보였다.
눈을 감고 여유롭게 인형을 무찌르며, 감각의 확장을 완벽히 다루고 있음을 증명했다.
"어떻게 된 거야?"
리즈멜이 돌연 험악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가 알려준 거잖아. 틀린 부분 있어?"
리즈멜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어젯밤에 뭐 했어?"
리즈멜의 눈동자에 다시 깊은 걱정이 담겼다.
**
나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켕기는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설명했다.
"그냥 실전에서 연습 좀 하고 왔어, 별 거 아냐."
하지만 끝맺고 보니 별로 떳떳한 말투가 아니었다. 이것도 내 부족한 말재주 탓이겠지.
"실전에서 연습하고 왔다니, 지금 장난해? 네 눈을 베면서 싸우는 게 어떻게 그냥 연습인데!"
리즈멜은 내게 바짝 달라붙어서, 추궁하듯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무리하지 말라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그런데 왜?"
"뭐가."
"왜 또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굴기 시작한 거냐고. 그렇게까지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아."
"그러면, 왜?"
"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내었다.
수정 거미 때와 똑같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한 거라고.
리즈멜은 그때도 이 대답을 듣고,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뭔가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자꾸만 위험하게 실전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라고. 내가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정한 이유도 그거였어."
"내가 검술을 가르쳐서 너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 준다면, 위험한 짓을 감수할 일도 더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알았어, 네가 그렇게 급하지 않다는 거. 여유가 있어 보였거든."
그리고, 리즈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즈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그냥 강해지는 게 좋은 거잖아."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어떤 의미에서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리즈멜은 내가 성장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
나는 1층을 공략하고 처음으로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행위의 짜릿함을 알게 되었다.
그 짜릿함은 싸구려 도파민에 빠져 있던 내게 너무나 크고 새로운 자극이었고, 나는 한동안 그것을 쫓아 달렸다.
아니, 지금도 다를 것 없다. 나는 지금도 성장할 때마다 격한 쾌감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노력을 즐기는 건 평범하게 좋은 일 아닌가?
당장 내가 시련의 탑을 공략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것 아닌가, 성장의 쾌감.
"네가 위험한 방식밖에 몰라서, 그 방법으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리즈멜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토 달지 않고 들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내가 가르쳐 주는 걸 따라오기만 해도 충분해. 나는 네가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어."
리즈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리즈멜과의 수련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어느 부분이 달랐다고는 나도 말하기 힘들지만.
"내가 너무 조심하게 굴어서 싫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리즈멜의 걱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부분도 분명 있긴 했다.
하지만 꼭 그게 이유라고 할 수만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내가 느끼기 시작한 초조함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나는 왜 어제만 유독 그렇게 초조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뜻밖에 빠르게 답이 나왔다.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지나다가는, 다시 예전처럼 한심한 놈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그거였지.
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 그건 쉽다. 리즈멜이 말한 그대로다.
나는 리즈멜과 수련하며 강해지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만족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만족을 누려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욕망을 모조리 거세했다. 식사는 화이트롤만으로 제한하고, 수면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환상적인 몸매에 눈길을 빼앗기면서, 엘레노어의 유혹을 모조리 거부했다.
"그러네, 네 말이 맞다."
리즈멜은 내가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처럼 군다고 말했다. 그 말은 무척 정확했다.
할 수 있어서 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본심은 따로 있었던 거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죽고 싶은 거였어."
모정을 빌미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채 사람 하나를 착취하고 죽여버린 희대의 쓰레기, 서진혁.
나는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거다.
그 새끼가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서, 자꾸만 죽음으로 내몰았던 거다.
하지만 죽어버리면 탑을 나가서 엄마에게 사과한다는 목표도 이룰 수 없으니까, 나는 그조차도 이룰 수 없었다.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모두 나의 본심. 둘 다 나의 욕망.
그러나 내 가슴에 박아넣은 맹세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멈춰 서지 않고 끝없이 나아간다. 이 탑의 천장을 뚫고 벗어날 때까지.'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 리즈멜.
63. 세계수가 열매를 맺던 시절에
리즈멜은 내 대답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모르겠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참의 침묵 끝에 리즈멜은 그런 말과 함께, 투명한 눈물을 흘렸다.
다크엘프가 인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다시 알았다. 이런 걸로 울어줄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구나.
조용히 눈물을 닦아낸 리즈멜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우리의 검술을 모두 체득했고, 눈도 제대로 틔웠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더 없을 거야."
[퀘스트 완료 : 에르웬의 참견 - 검술 훈련]
"에르웬 이모님에게도 말을 전해 둘게, 너는 검술 훈련을 모두 마쳤다고. 그러니까, 이젠 나를 찾아오지 마."
퀘스트 창에 붙어있던 선택 목표들이 모두 완료 처리되었다. 대련이니 선별 시험이니 하는 건 아직 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식으로 퀘스트가 완료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상만 제대로 들어오면 상관없겠지만.
[퀘스트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목표 달성 보상 : NPC 에르웬을 통해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최고의 검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기대감을 부추기는 시스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나는 리즈멜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떠나게 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즈멜이 나를 어떤 심정과 생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무슨 의도로 내게 검을 가르쳐 준 건지.
그리고 조금 전 내가 내뱉은 말에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두 짐작은 가지만.
"어쩌겠어, NPC인데."
나는 혼자 연무장에 주저앉아, 변명 같은 말로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
혼자 연무장에서 괜히 검술 연습을 해 보며 저녁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쯤, 그곳을 벗어나 대장장이 에르웬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다른 다크엘프에 비해 유독 작은 키를 가진 대장장이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뭐냐, 조금 더 일찍 올 줄 알았건만. 연장자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냐, 몹쓸 것아."
"기다려 달라고 한 적 없는데."
"나 참, 여전히 말하는 본새는 귀여운 점이 없구나. 표정은 또 그게 뭐냐, 비 맞은 오렌같은 꼴인데."
오렌이라는 건 맥락상 이 7층에 서식하는 동물 같은 거겠지. 지금 내 표정이 그렇게까지 안 좋은가?
"리즈멜도 많이 상심한 표정이던데, 둘이 싸우기라도 한 게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즈멜의 마음이 상한 건 알겠지만, 딱히 싸운 것도 뭣도 아니다.
나로서는 그냥 새삼스레 자아 성찰을 한 것뿐이다. 리즈멜은 내가 한 말에 멋대로 충격을 받았을 뿐.
에르웬도 특별히 캐물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일도 있는 거라면서, 대장간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대장간 안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저번에 내가 물건을 싹쓸이했는데도, 어느새 다시 꽉 차 있었다.
이 대장장이의 작업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는 나도 잘 알고 있기에, 새삼스레 놀라지는 않았다.
"저번에 가져다준 주괴를 활용하느라 고생 좀 했지, 그래도 덕분에 무척 좋은 검이 만들어졌지 뭐냐."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예스러운 케이스에 담긴 검 한 자루를 꺼내, 내게 건네었다.
"살펴봐라, 마음에 들 거다."
만들어진 검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에보니 스틸 한손검, 거기에 약간의 장식을 더한 것처럼 보였다.
[대장장이의 걸작 : 요정시대의 검]
공격력 + 85 (참격)
치명타 피해 : x 2.8
내구도 880/88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15회
하지만 시스템이 표시하는 아이템 정보는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기본 공격력부터가 화끈하다.
내 한손검 중에서 가장 공격력이 높은 [늑대 사냥의 검]을 가볍게 능가하는 수치.
거기다가 강화 시행 횟수는 에보니 스틸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 15회나 된다.
7층 수준을 한참 넘어선 적을 상대해 온 보상일까, 7층에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아이템이 아니다.
"밸런스 잡힌 튼튼한 검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거창한 마법 기능 같은 건 넣지 않았고-"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그래도 마법 재료를 쓰는 마당에 아무것도 없으면 아쉬울 거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너한테 딱 맞는 기능 하나만 넣어 뒀다."
아이템 정보는 기본 스탯으로 끝이 아니다.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된 검에는 고유 효과도 붙어 있었다.
고유 지속 효과 : 마력 흡수
몬스터를 처치할 시, 처치한 몬스터의 마력 일부를 흡수.
흡수한 마력 수치에 따라 내구도 회복, 자동 청결 효과.
회복분을 초과한 마력은 착용자의 MP를 회복시킴.
몬스터를 처치할 때마다 자동으로 내구도가 수리되고, 그에 더해 MP를 리필시켜주는 미친 알짜배기 옵션.
아이템 수리에 들어가는 골드나 재료는 차고 넘치는 신세지만, 실시간 회복은 나에게도 특별하다.
나는 솔플러라는 특성상 늘어지는 다대일 전투 상황에 처할 일이 매우 많은 편이다.
HP는 스킬과 아이템 효과 덕분에 계속 회복되지만, MP랑 무기 내구도는 점점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 옵션이라면 내 집중력이 버텨주는 한 언제까지고 최대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거다.
"끝내주는데."
"마음에 드느냐?"
"어어, 엄청."
나는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러 대며, 순순히 기뻐했다.
**
에르웬은 마냥 기뻐하는 나를 보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장간 안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좋아해 주니 어깨가 빠지도록 힘쓴 보람이 있구나, 표정도 훨씬 보기 좋아. 앞으로도 좀 그러고 다녀라."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기본 옵션이 워낙 좋으니, 강화는 좀 나중에 해도 될 것 같다.
에르웬은 언제 준비해 둔 건지, 간단한 다과와 찻잔을 꺼냈다. 나를 위해 일부러 준비해 둔 것처럼 보였다.
다크엘프들은 왜 자꾸 나한테 뭘 먹이려고 드는건지 원.
내가 다크엘프들에게 작은 길고양이 정도로 보이는 건 알고 있지만, 에르웬은 안 그러는 편이었는데.
에르웬이 특별히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 들었는데, 시골 할머니가 종종 찾아오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셈인가.
"인간족이 뭘 좋아하는지는 잘 몰라서, 아무거나 사다 놨는데...혹시 못 먹는 게 있느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좀 앉아라, 설마 검만 홀랑 받아먹고 고생한 사람은 나 몰라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다과는 보아하니 단 것 같아서, 대충 입에 집어넣고 씹어먹었다.
-으적, 으적.
에르웬은 그런 나를 보며 약간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참, 달콤한 과자를 먹으면서 지을만한 표정이 아니잖으냐. 너 같은 인간족은 살면서 처음 보는구나."
마치 나 말고 다른 인간족을 많이 봤다는 듯한 말투였다. 다른 다크엘프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던데.
나는 괜히 궁금해져서, 인간족을 많이 봤느냐고 물었다.
"뭐, 요즘 젊은 것들보다는 많이 본 편이지. 누가 뭐래도 얼마 안 남은 세계수 세대니까 말이다."
"세계수 세대?"
"지금은 다 시들고 썩은 세계수가, 아직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적부터 살아온 늙은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 모두, 세계수를 통해 혼이 순환하고 있다던가.
죽은 엘프의 혼은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고, 세계수는 열매를 맺어 영혼이 깃들 그릇을 다시 낳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환생 시스템, 하지만 이는 세계수가 시들고 힘을 잃으며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한다.
두 엘프 종족의 이름이 하이엘프와 다크엘프가 되기 전의,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옛날의 이야기.
"그 시절의 엘프는 모두 영생이라 할 만큼 길게 살았지. 지금도 매우 길게 사는 편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에르웬의 눈동자는 유독 흐린 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느냐, 영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건 사실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란다. 조금 달라."
"영생이란, 나 외의 모든 것이 죽는 거다."
"오직 나만 두고, 세상 모든 것이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 이별을 고하지. 그런 느낌이란다."
맥락 없는 이야기지만, 그냥 흘려넘길 수는 없는 말이었다. 에르웬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절절한 것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유별난 편이지. 돌이켜 보면 수십 년도 찰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무슨 의미인지 알 만했다. 그렇기에 인간을 마냥 귀엽게 볼 수 있는 거겠지. 생각나는 것을 말하자면-
"인간이 벌레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다크엘프에게 인간은 길고양이보다 더 낮은 무언가처럼 보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르웬은 내 말을 듣더니,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니, 무척이나 위대하게 보여."
에르웬의 부드러운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찰나처럼 짧은 삶을 살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존재감을 남기지. 우리에게 인간과 접해본 기억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수천년을 살았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손에서, 굳센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리즈멜이 너를 특별히 걱정하는 거란다, 얘야."
에르웬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손을 토닥였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토닥이는 그 손길에서는, 어쩐지 많은 것이 느껴졌다.
젠장, NPC는 무슨. 나는 아직도 변명 뿐이구나.
리즈멜한테 사과하러 가야겠다.
6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람처럼 생겼다면, 그건 그냥 사람이다.
이 마을의 다크엘프들은 모두 평범한 NPC가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변명 뒤에 숨었다.
리즈멜이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NPC라는 편리한 방패를 내세운 것이다.
"나 좀, 가볼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웬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렴."
나이 차이가 수천 살은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에르웬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에르웬은 지금쯤 리즈멜이 있을만한 장소를 알려주었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마 살면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을 꼽으라면, 분명 오늘일 것이다.
전속력으로 뛰어 도착한 장소는, 다크엘프의 마을 외곽에 있는 쉼터 비스무레한 곳이었다.
쉼터에는 나무와 덩굴로 만든 그네며 시소 따위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엘프식으로 만든 것처럼 생겼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유독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리즈멜은 쉼터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리즈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즈멜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다크엘프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고, 반대로 다크엘프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다.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심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선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사람이 아닌 NPC로 생각하기 위한 선.
내 이름을 알려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NPC니까, 퀘스트가 끝나면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깡통으로 돌아갈 인형이니까.
"..."
리즈멜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리즈멜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리즈멜의 검술 훈련 퀘스트는 이미 모두 완료처리가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리즈멜이 2층의 양치기 소녀처럼 깡통 인형으로 변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7층 진영 퀘스트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나, 엘리트 NPC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반반이다. 리즈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면 좋을 텐데.
"너, 뭐야...내가 더 찾지 말라고 했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에르웬이 말해 줬어, 아마 여기 있을 거라고."
"이모님이? 엘레노어도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대...?"
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리즈멜은 굉장히 착잡하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럼, 나는 왜 찾아왔는데. 나랑 볼일은 끝났잖아? 나는 인간족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매몰찬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나는 병신이다.
의지도 박약하고, 사회성도 떨어져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욕과 변명뿐인 병신.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말을 골라야 한다. 입을 잘못 놀리면 리즈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 거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걸 잘못하고 살아와서, 잘못만 하고 살아온, 잘못뿐인 사람이라서.
올바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나 같은 병신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한 발짝 나아가는 것.
레벨을 올리기 위해 고블린을 때려잡았듯이, 1층을 깨기 위해 노멀 클래스로 전직했듯이.
이런 나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하는 것.
"미안해."
그리고 리즈멜은 웃었다.
**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리즈멜과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말을 섞을 때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리즈멜이 다크엘프란 점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다크엘프는 모두 인간을 귀여워한다. 내 미숙하고 어수룩한 사과에도 금방 마음을 풀어줄 만큼.
사람을 대하는 방법,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길은 무척 험난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다크엘프의 마음에 놓인 길은, 내 어설픈 걸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던 에르웬의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족은 이래서 싫어, 연약하고 일찍 죽는 주제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하기도 힘들잖아."
"인간족이 다 그렇진 않아, 내가 좀 유별난 거야."
"그렇게 말해도, 나는 인간족을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잘 몰라. 네가 얼마나 유별난 건지."
나는 인간족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리즈멜의 말을 듣고, 인간족이 보통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하다 보니, 인간인 나도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7층 세계의 인간족이 내가 아는 인간과 똑같다는 보장도 없고.
"그럼 보면 되잖아, 나이트 엘프는 원래 숲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며."
"엘레노어랑 어울리더니 똑같은 소리를 하네."
"어울린 적은 별로 없는데, 아무튼 그렇잖아. 나 말고 다른 인간도 좀 만나봐."
리즈멜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들어 보니, 현 여왕이 내린 칙령 탓에 인간과 마음대로 접촉할 수 없다고.
"나도 마음으로는 인간을 많이 만나보고 싶지만...아니, 그치만,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여왕은 하이엘프와 화친을 맺으려는 생각에 인간 진영을 멀리하고 있다던가.
엘프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혼의 순환장치, 세계수와 대수림에 짙은 미련이 있는 탓이라고 들었다.
"아, 이제 좀 알겠네."
에르웬이 내가 엘레노어의 손님이라 맞출 수 있었던 이유. '그 애뿐이니까' 라고 했었지?
공주인 엘레노어 정도가 아니면, 금기를 깨고 인간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엘레노어가 나를 데려온 건, 하이엘프 왕자와의 약혼 파기를 위해서.
약혼이 무산되어 하이엘프와의 화친이 백지화되면, 인간족과의 교류 금지도 풀릴 테고.
엘레노어는 하이엘프와의 화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했었지.
티내지 않고 있지만, 리즈멜을 비롯해 인간을 애호하는 다크엘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엘레노어의 계획에 협력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다.
**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리즈멜과의 검술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나왔다.
그림자 인형을 늘어놓고 혼자 단련하고 있던 리즈멜은, 나를 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여기는 왜 왔어?"
"왜긴, 검술 배워야지."
리즈멜과는 이미 화해를 마쳤다. 그러니 검술 훈련도 당연히 재개할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나.
리즈멜은 내 물음을 듣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진짜였는데."
퀘스트가 완료 처리된 것은 리즈멜이 생각을 바꿔서가 아니었다. 진짜로 내가 모든 훈련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직 리즈멜이 어떻게 수정 거미의 광선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그건 내가 터득한 감각 강화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좀 더 상위의 기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하지만...그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마법의 영역에 더 가까운 거라."
"마법의 영역이라고?"
"응, 나는 검술 전문이라 그걸 가르쳐 줄 수는 없어. 그냥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즉, 어제 일이랑은 별개로 리즈멜과의 검술 훈련은 여기서 끝이었다. 물론, 아예 훈련할 게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검술 외의 다른 무기술도 갖추고 있으니까, 리즈멜을 연습 상대 삼아서 단련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럴 시간에 그냥 정찰대 일을 하면서 필드 몬스터 사냥이나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리즈멜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내 생각과 사상에는 그다지 달라진 부분이 없다.
나는 여전히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며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내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리즈멜과 느긋하게 교류하며 효율 나쁜 단련을 할 생각은 없다.
"그걸 배우고 싶은 거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야지."
"응? 엘레노어가 왜 나와?"
"마법의 영역이라고 했잖아.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는 최고거든."
리즈멜은 '그 변태 같은 계집애랑 너무 어울리는 건 권하고 싶지 않지만' 이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 엘프 여기사의 미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그림자 마법은 다크엘프의 종족 특성인데다가, 내 클래스는 애초에 전사다 보니 대충 넘겼었는데.
그러고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리즈멜과 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말을 했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언젠가 좋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고.
"아하."
이게 그거네.
65. 마력
전사 클래스라도 마법 스킬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마법 스킬을 획득하는 퀘스트는 대부분 마법 관련 클래스를 가지고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보물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북도 각각 사용 조건이 걸려 있기에, 전사 클래스가 마법 스킬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단 얻으면 사용할 수는 있다. 딱히 시스템상으로 막혀 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특별한 히든 요소를 발견하거나, 보스를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스킬을 습득하거나.
이런 루트를 밟았다면 전사라도 마법 스킬의 활용이 가능하다. 당장 나도 마법 스킬을 갖고 있긴 하니까.
[집광 Lv.1]
크리스탈 거미를 쓰러트리고 보상으로 얻은 집광 스킬, 효과는 별 거 없지만 일단 마법으로 분류되긴 할 거다.
그리고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지만, 3층에서 얻은 [라이트닝 차지]도 일단은 마법 계열일 거다.
게다가 나는 이미 스킬 획득이 꼭 퀘스트나 스킬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얻은 다양한 패시브 스킬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경험을 통해 터득한 기술은 곧 스킬이 된다.
그렇다면, 전사 클래스인 나도 엘레노어에게 배운다면 그림자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림자 마법을 활용하는 특수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전사 클래스에 완전히 물려버린 처지라, 어중간한 상위 클래스로는 기회가 찾아와도 전직하기 힘들겠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갔다.
엘레노어는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취급이 이상하긴 해도 일단은 공주 신분.
찾아간다고 바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대가 먼저 나를 찾다니, 별일이구나? 저번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아니."
"후후,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은근히 부끄럼을 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안심하고 내게 맡겨라."
엘레노어는 마침 한가했다며, 찾아온 나를 향해 대뜸 개소리를 지껄여 댔다.
참고로 지금 엘레노어가 말한 '저번의 제안' 이란, 늘 던져대는 동침을 하자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새삼스럽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외견이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저 말을 지껄이는 게 쭉쭉빵빵한 다크엘프 미녀가 아니라 못생긴 아줌마였다면, 진작 칼을 뽑아서 휘둘렀을 테니까.
"리즈멜이 그러더라고, 자기는 이제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뭔가 배우고 싶으면 널 찾아가라던데."
"리즈멜이 그런 말을 했다고?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런 말을?"
엘레노어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적게 걸려도 반년은 걸린다는 기술을 하루 만에 터득해 왔으니, 당연한 거겠지.
-드르륵.
엘레노어가 의자를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천천히 내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잠시."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몇 분간 가만히 서 있었다. 뭘 하는 건가 싶은 차에, 엘레노어은 눈을 떴다.
"이거 참, 잠깐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구나. 인간족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빠른데?"
모종의 방법으로 스캔 같은 걸 한 것 같다. 아마 이것도 마법이겠지.
"그대는 정말 봐도봐도 새롭구나, 정말 마음에 들어. 이대로 키스가 하고 싶은데."
이년이 또 지랄이네, 얼굴 치워.
**
엘레노어는 스캔인지 뭔지로 뭘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그 '무언가'를 가르쳐 주겠다 말했다.
물론 엘레노어도 나름대로 바쁜 몸이라, 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내가 검술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그 시간에 다시 보자는 말로 대화를 마쳤다.
그렇게, 해가 진 뒤.
엘레노어는 언제나처럼 반투명한 네글리제 차림으로 내 방을 찾아왔다.
검술 수련의 연장선이나, 마법을 배우게 될 줄 알았는데. 왜 이번에도 저딴 차림이지?
오픈 커뮤니티의 베스트 스크린샷을 뛰어넘는 눈호강이긴 한데.
뭘 가르쳐 주려는 사람의 복장으로는 안 보이는데.
설마 가르쳐 준다는 게 침대 위에서의 기술은 아니겠지?
"아아, 이건 그냥 편한 차림으로 온 것뿐이다. 그대도 참,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저렇게 말하긴 하지만, 네글리제 차림의 다크엘프를 눈앞에 두고 긴장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 리즈멜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거겠지? 그렇다면, 감각의 확장도 터득했을 테고."
"그렇지."
"이런 짧은 시간에 터득한 걸 보니, 그대도 비슷한 수련을 예전부터 해 온 모양이군?"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말이다.
"그럼, 당연히 그 너머의 경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모른다. 리즈멜의 움직임을 보며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자, 엘레노어는 이번에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뭐라뭐라 설명을 시작했다.
리즈멜이 알려주는 검술 이론에 비하면 매우 복잡하고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까놓고 말해, 들으면서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마력을 이용해 주변을 감지하는- 뭐 그런 기술이랑 경지가 있다는 말이지?"
많은 것을 간추린 내 요약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거냐.
그럼 오픈 커뮤니티에서 가끔 언급되던 [마력 감지] 스킬이 맞는 모양이네.
마법사 계열 클래스가 얻을 수 있는 스킬로, 사용하면 마력을 소비해 주변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던데.
미궁의 함정을 미리 찾아내거나 몬스터의 매복을 감지할 수 있어서, 과거에는 매우 중요한 스킬이라고 들었다.
공략이 완성된 지금은 모두 옛말이지만, 1~2세대 도전자들은 파티에 마력감지를 배운 마법사 하나를 꼭 넣고 다녔다고.
1세대 도전자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탑을 공략하고 있는 내게도 꽤 유용한 스킬일거다.
"음, 그대는 이해가 빠르구나. 마력을 감지하고 운용하는 기술은 전사에게도 매우 중요하지."
그 때, 엘레노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정보를 갑작스럽게 내뱉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마력강화를 터득하기 위한 가장 첫걸음이 되는 기술이니까."
그 하이엘프 여기사가 사용하던, 전사 클래스의 삼신기 스킬.
마력강화.
그 습득 조건이 이거였다고?
**
근접 전사 클래스의 고질적인 기동력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최상급 이동 스킬, [축지].
근접 전사 클래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공격 스킬을 제공하는 최상급 마스터리 스킬, [오러 마스터리].
근접 전사에게 무엇보다 우월한 방어력과 스탯 상승을 가져다주는 최상급 버프 스킬, [마력 강화].
이 세 가지 스킬이 삼신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중에서 하나만 터득해도 B급 헌터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고성능의 스킬이라는 점.
그리고 그 성능에 비례해, 습득하기도 매우 어려운 희귀 스킬이라는 점 때문이다.
스킬북의 획득처도 매우 한정적이고, 관련 퀘스트는 대부분 조건이 알려지지 않은 히든 퀘스트.
레벨업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유니크 이상의 희귀 클래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
그런데 그 마력강화의 선행 스킬이, 마력감지였다는 말인가.
"뭐? 진짜야?"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엘레노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마력을 운용하지도 감지하지도 못하면서 마력강화를 깨우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이렇게 들으니까 무척 당연한 소리였다. 어쩌면 다른 도전자들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다른 도전자들이 마력강화를 습득하지 못하는 건- 관련 퀘스트나 스킬북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시스템 보상이나 스킬북에 의존하지 않고 스킬을 습득하는 도전자는 이젠 거의 없는 모양이니까.
"그러네, 당연한 거였네."
나는 곧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하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인성이 박살난 걸로 유명한 개씹좆프년들은, 퀘스트 보상은 좋게 주더라도 내 단련을 도와주진 않았을 테니까.
마력감지도, 마력강화도, 모두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스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이득이다.
"그래, 그럼 빨리 시작하자. 뭐부터 하면 돼?"
"일단 내 볼에 입맞춤을..."
"개소리 말고, 마력 쓰는 법 알려달라고."
엘레노어의 헛소리를 빠르게 커트하고, 거의 멱살잡이를 할 기세로 재촉했다.
다행히 엘레노어도 그 이상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로 시작하자며, 간단한 수련법과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엘레노어가 알려준 수련 방법과 요령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수련 방법이란, 그냥 명상이었다.
심지어 요령이니 뭐니 하기 이전에, 그냥 전제조건부터가 문제였다.
"아니 시발, 그러니까 그 마력을 어떻게 느끼냐고."
"으음, 그러니까 명상을..."
"마력을 느끼면서 명상하라며, 나는 마력을 못 느낀다니까?"
새로운 경지에 닿기까지는 아무래도 한참 걸릴 것 같다.
66. 의지와 마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정신을 집중한다.
호흡은 항상 규칙적으로, 정해진 횟수만큼 끊어서 시행한다.
저절로 떠오르는 잡념은 모두 떨쳐버리고, 오롯이 몸 안의 마력을 느끼는 것에만 신경을 쏟는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린다. 의지대로 조종할 수 없는 근육의 떨림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지나고 또 지나도, 마력인지 지랄인지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그게 대체 뭔데.
"시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의 명상은 할 때마다 괜히 스트레스만 쌓인다.
엘레노어에게 마력 감응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 째, 나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명상을 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다. 마력 감응을 깨우치기는커녕, 매일매일 스트레스만 적립하고 있는 상태.
태생적으로 마력 친화성을 타고나는 엘프의 수련법은 내게 맞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냥 명상이라는 짓거리 자체가 나한테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만히 앉아서 집중력을 끌어올린다는 부분부터가 문제다.
대체 뭘 어떡해야 꼼짝도 안 하고 정신만 집중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뭐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엘레노어는 체내에 흐르는 마력에 집중해 보라고 하는데, 느끼지도 못하는 것에 어떻게 집중하냐고.
그리고, 애당초 나는 집중이라는 행위에 많이 약하다.
방구석에서 커뮤니티 유머글이랑 숏폼만 딸깍거리던 개백수가, 집중이라는 걸 얼마나 해 봤겠나.
내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피가 저절로 끓어오르는 전투 상황 속뿐이다.
신체를 혹사해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잡념이 떠오르고 만다.
이거 진짜 폭포 수련이라도 해야 하나?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쉼 없이 처맞다 보면 잡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관련 내성이 오를지도 모르고.
아니면 폭포가 아니라 불을 피워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명상하는 건 어떨까?
화염 내성도 올릴 수 있을거고, 극한의 고통으로 잡념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 화염 내성이 이미 너무 높아서, 평범한 불꽃에는 백날 지져져도 멀쩡하다는 점인데.
7층은 숲이 배경이라 화염속성 몬스터는 안 나오는데, 다크엘프 중에서 화염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이 있으려나?
마법의 불길 속에 있다 보면, 마력이 뭔지도 좀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생각난 김에 바로 실행으로 옮기자, 일단 속성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부터 찾아보자.
그렇게 몇 시간 뒤.
다크엘프는 대부분 그림자 마법을 사용하는지라, 속성 마법 사용자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어머, 네가 그 소문의 인간족 손님이구나? 화염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를 찾는다고?"
그래도 없지는 않았다. 간신히 화염 마법을 다룰 줄 안다는 정찰대원 한 명을 찾았다.
"어, 가능한 강하고 오래가는 걸로 불 좀 피워줬으면 해서."
정찰대원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나는 곧바로 만들어진 불꽃의 벽 안으로 들어갔다.
"얘,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리고 5초 만에 끌려나왔다.
**
내가 불에 들어가 명상을 하려 했다는 소식은 엘레노어에게도 금방 전해졌다.
"그런 방법으로 마력을 느껴보려 한 건, 온 세상을 통틀어서 그대 한 명 뿐일 거야. 황당하구나."
나는 엘레노어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그럴 리가, 한 명도 없을 거다."
엘레노어는 내 말을 딱 잘라 끊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 단호한 태도다.
"그런 방법을 쓴다고 해서 딱히 마력을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대는 참 막무가내구나."
막무가내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감각 강화를 포함해, 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기술을 습득해 왔으니까.
"그런데 그대가 명상에 그렇게 약할 줄은 몰랐어, 집중력이 부족한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러냐, 난 그럴 것 같았는데."
"그대는 자기평가가 아주 낮구나, 그대가 싸우는 모습을 한 번 보면 누구나 똑같이 생각할 텐데."
높게 평가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런 건 강해지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방해지.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대에게 집중력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마,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마음?"
"일전에, 그대가 싸우는 모습이 무척 위태롭게 보인다고 한 적이 있었지?"
그랬었다. 리즈멜과 크리스탈 거미를 쓰러트리고 돌아온 날이었던가.
검과 내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었지.
추상적인 말이라 그냥 흘려넘겼었던 걸로 기억한다.
애초에, 검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한다고?
"검은 도구다. 그리고 도구는 사람의 의지를 담아 휘둘러지는 것이야."
"그렇다면, 검과 주인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무슨 의미일 것 같나?"
"검을 휘두르는 이유와, 검을 휘두르는 순간의 마음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야."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한걸음 성큼 다가와 내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대의 마음이 무엇보다 위태롭게 보인다."
엘레노어의 말은 충격적일 정도로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말한 그대로, 내 마음이며 정신은 분명 위태로운 상태다.
나는 항상 일차원적인 욕망에 눈길을 주었고, 그런 것에 눈길을 주는 자신을 혐오해 왔다.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을 모두 갖고 있음에도, 그 모두를 스스로 거세해 버렸다.
죽음을 바라며 위기에 뛰어들면서도, 살아남아 이 탑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내가 이런 불안정한 심리를 자각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내 마음이 무척이나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
"그대는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어. 그건 그것대로 굉장한 의지력을 의미하지만, 나는 그걸 좋게 생각하지 않아."
엘레노어는 내 가슴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 언제나 내 욕망대로 행동한다. 내 의지는 언제나 마음과 같은 방향을 달리지. 혹 그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의지는 화살이요, 마음은 불꽃이라. 두 가지가 함께하면, 하늘조차 꿰뚫고 나아가는 불화살이 되지."
"그대는 불 속에 들어가 명상을 할 게 아니라,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지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눈동자는, 언젠가 봤던 것과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꿈꾸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을 닮은 빛을.
**
엘레노어의 이야기는 분명 강렬하게 다가왔지만, 그게 실질적인 힘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모순된 의지와 마음이 잡념을 만들어, 명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정작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금방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닌 것 같고.
역시 그냥 불에 들어가서 고통으로 잡념을 지우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가시 박힌 방석 같은 걸 구해서 앉는다거나, 진짜로 폭포 수련을 한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자,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그대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뭐어, 그대가 바뀌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도 아니었어."
그리고는 '언젠가 생각이 바뀌었을 때, 내가 한 말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덧붙였다.
확실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할 것 같긴 하다.
"자, 그럼 조언은 이쯤하고...이번에는 실질적인 해결 방법으로 넘어가 볼까?"
"해결 방법? 그런 게 있어?"
"물론이지, 나도 지난 일주일간 그대를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찾고 있었거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쭉 내민 가슴이 자꾸 눈에 걸린다.
그나저나, 그냥 명상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내버려 두는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 있었구나.
뭔가 오늘따라 엘레노어를 여러모로 다시 보게 된다. 역시 다크엘프의 공주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서고를 조사해서 나이트 엘프의 오래된 비술을 하나 찾아냈지, 이거라면 아마 그대도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꺼냈다.
엘프 언어로 쓰여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그 비술이라는 게 뭔데, 그것만 있으면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거야?"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편리한 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감각을 전달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서로의 정신을 연결해 사념을 전달할 수 있는 비술이다. 효과는 어제 직접 시험해 봤지, 썩 괜찮더군."
설명만 들으면 텔레파시 같은 걸로 들리는데, 그게 어디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
"내가 마력을 느끼는 감각을 그대에게 직접 전해줄 생각이다. 그러면 그대도 감을 잡을 수 있지 않겠어?"
아하, 그런 거구나. 그거라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명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마력을 아예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그 비술이라는 걸로 마력을 간접적으로 한 번 느끼고 나면, 어디에 어떻게 집중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거다.
"후후, 기대되는구나."
어쩐지 엘레노어의 웃음이 좀 음흉하게 들리긴 하지만.
별 일 없겠지.
#67. 가장 먼저 태어난 언어
세계수의 그늘에서 태어난 나이트 엘프의 비술은, 밤에 가까운 시각에 더 강력해진다고 한다.
그렇기에 비술을 행하는 시간은 자연스레 밤으로 잡혔다.
나는 해가 저물 때까지 평소처럼 혼자 체력단련을 했고, 엘레노어는 달이 밝게 뜰 즈음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마침 오늘은 만월이 뜨는 밤이다. 어서 가자꾸나."
나이트 엘프의 비술이 강력해지는 것은 밤에 가까운 시각이지만, 딱히 어두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달이 밝다는 점은 오히려 밤이라는 개념을 더 강하게 만들기에, 보름달이 오히려 비술의 효과를 증폭시켜 줄 거라고.
비술이니 주술이니 하는 것들은 옛날 방식의 마법 같은 것이라, 이런 추상적인 요건이 중요하다나 뭐라나.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비술을 펼치는 데에 무슨 지리적 요건이 필요하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요정이 사랑하는 땅에 갈 거다. 항상 마력이 풍부하게 솟아나는 곳이라, 마력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엘레노어는 나를 이끌었다.
이윽고 도착한 장소는 어떤 널찍한 호숫가. 다크엘프의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장소였다.
[별빛이 자라는 호수]
호숫가에 도착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지명을 알렸다.
던전은 아니지만 나름 특별한 장소로 취급되고 있는 곳 같다. 그러고 보니 관련된 커뮤니티 글을 본 적이 있다.
공략글은 아니고, 어떤 서버의 도전자가 누구한테 홀딱 반해서 고백하게 됐다는 썰풀이 글이었다.
실명이 그대로 공개되는 커뮤니티에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당연히 성공했다는 뜻이었고.
그 고백을 성공한 자리가 바로 여기였다고 들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분위기 좋은 장소긴 하다.
-찌르르르...
시골에서나 듣던 풀벌레 소리가 조금씩 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달빛이 비치는 호수가 흔들린다.
하지만 굳이 다른 층에서 내려오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와야 할 장소인지는 모르겠다.
그 커플은 20층 언저리를 공략 중인 도전자라고 했으니, 7층 근처까지 내려오려면 무척 번거로웠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엘레노어가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마력이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다. 멋진 장소여서 꼭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
엘레노어의 이런 말에도 도무지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렇게까지 멋진 장소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대에겐 아직 이른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그럼, 바로 시작할까?"
-툭, 툭.
엘레노어는 마을에서 챙겨온 지팡이 같은 것으로 땅을 두들기더니, 작은 조약돌 몇 개를 바닥에 뿌렸다.
"이 비술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의 정신으로 향하는 통로를 잇는 거라고 봐야 한다."
"통로를 통해 곧바로 사념이 흘러들어 가는 건 아니야, 서로 문을 열어줌으로써 그 너머를 엿볼 수 있게 되지."
"그대에게 내 사념의 문을 열어줄 테니, 그대는 그걸 따라 들어오기만 하면 돼. 어렵지 않을 거다."
간략한 설명이 끝나고, 준비를 마친 엘레노어는 내 얼굴을 붙잡았다.
"눈을 감고, 문을 찾아라."
그대로 눈을 감고 이마를 맞댄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이는 어두운 통로 멀리, 금빛의 문이 보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손대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열렸다. 나는 문 너머의 빛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언가 약한 저항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물속에 잠수한 채로 걷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다지 강한 것은 아니었던지라, 나는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천천히 빛이 모습을 바꾸었다.
-게 섯거라!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흠칫 몸을 돌렸다. 무언가 작은 빛무리가 목소리를 내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다.
소리를 내는 빛무리는 조금씩 형태를 갖추었고, 이내 작은 아이의 모습이 되었다.
나는 아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어릴 적의 엘레노어였다. 하얀 토끼처럼 생긴 짐승을 열심히 쫓아가고 있었다.
사냥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웃으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놀고 있는 것 같다.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나타난 것은 기억에 있는 장소였다. 얼마 전, 리즈멜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쉼터였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엘프식으로 만든 듯 보였던 바로 그 장소, 하지만 정작 이용하는 어린아이는 없어 보였는데.
이제 보니 그 의미를 알겠다. 이곳은 엘레노어가 어릴 적에 만들어진 장소였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요 조그만 짐승아!
엘레노어는 요리조리 놀이터 곳곳을 쏘다니는 작은 짐승을 끝없이 쫓았다. 짐승은 곧 작은 울타리를 넘어갔다.
-아아, 거긴 안 되는데.
울타리 너머로는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고 들었던 엘레노어는 잠시 걸음을 망설였다.
토끼를 쫓고 싶은 마음과, 울타리를 넘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잠시 충돌했다.
하지만 이윽고 생각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울타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마음과 의지는 곧 일치했고, 엘레노어는 힘차게 달려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숲 바깥의 개척을 담당하던 나이트 엘프의 본능,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습성.
다크엘프의 공주로 태어난 엘레노어는 누구보다 그 습성과 본능을 강하게 타고났던 것이다.
나는 어느새 과거의 엘레노어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엘레노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엘레노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전달되고 있었다.
울타리를 넘은 엘레노어는 토끼를 붙잡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울타리 너머를 좀 더 탐색하고 싶다는 듯,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별빛이 자라는 호수에 도착했다.
-와아, 예뻐!
엘레노어는 눈을 반짝이며, 호숫가에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호수의 물결이 내게도 함께 느껴졌다.
시간이 흐른다. 시점은 점점 빠르게 바뀌어 간다. 작달막하던 엘레노어는 빠르게 성장해 성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호수의 모습도 점점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그저 꽃이 많이 피었을 뿐인 호수가, 빛나기 시작했다.
별빛이 자란다는 말에 딱 걸맞게,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솟아올라 엘레노어의 주변을 둘러쌌다.
아름답다.
별이 비처럼 내리고, 웃음소리와 함께 요정이 춤추며, 그 가운데에서 엘레노어도 함께 춤을 추었다.
엘레노어가 느끼고 있는 즐거움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고, 엘레노어를 둘러싼 요정의 호흡도 함께 전해졌다.
숨을 들이키면 별빛이 몸 안으로 들어와 함께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깨달았다.
이 별빛이 바로 내가 느끼고 싶어하던 마력이었음을.
[패시브 스킬 : 마력 감응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맞닿아 있던 엘레노어의 이마가 떨어져 나갔다.
**
엘레노어의 사념 세계에서 떠나 눈을 뜬 순간, 주변에서 용솟음치는 마력의 빛이 보였다.
"어때, 이제 그대도 볼 수 있겠지?"
호숫가에는 어느새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한 요정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별빛- 아니, 반딧불을 닮은 마력의 빛도 요정들과 함께 주변을 에워싸고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20층대의 도전자들이 굳이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가 있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이 호수의 아름다움이.
"요정들이 그대와 춤추고 싶어하는구나, 어울려 주는 게 어떤가?"
"뭐? 춤을 추라고?"
"어려울 것 없다, 함께 빙글빙글 돌아주는 걸로 충분해."
요정들이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엘레노어는 등을 떠밀었다. 나는 얼결에 그대로 끌려갔다.
"선율에 몸을 맡기는 거야, 처음은 듣는 귀부터."
요정들은 무작정 나와 함께 마구잡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규칙성이라고는 없는 혼잡한 움직임이다.
"감각을 넓히는 법을 배웠으니, 그대에게도 들릴 테지."
"바람 소리, 물소리, 풀과 벌레의 소리."
"그것들이 하나가 되어 노래를 만들고 있잖아?"
귓가에 노래가 들리기 시작하며, 혼란하게 보이던 요정들의 움직임이 점점 춤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그것을 쫓아가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그도 그럴게, 나는 춤을 춰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엘레노어는 말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어머니인 대지가 낳은 생명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어. 어떤 언어보다 먼저 만들어져, 가슴 깊이 새긴 음색을."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난 생명이 아니다. 탑 바깥에서 태어나 끌려들어 온 인간이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엘레노어가 말한 것처럼- 춤출 수 있었다.
요정들의 손길에 이끌려 움직일 때마다,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듯 몸이 선율을 따라간다.
분명, 그냥 춤추고 있을 뿐인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함께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인데도-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패시브 스킬 : 마력 감응 2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 : 요정과 춤추는 자]
[업적 보상 '정령 친화도+50' 을 획득하셨습니다.]
68. 마지막 단락
업적이 달성되며 정령 친화도가 올랐고, 그에 따라 [대지 정령의 가호] 스킬의 레벨도 올랐다.
이미 스킬에 붙은 기능은 다 개방되어 있어서, 여기서 더 레벨이 오를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뭔가 새로운 기능이 생긴 건 아니고, 그냥 전반적인 효과의 수치가 높아졌다.
패시브로 제공되는 방어력 수치가 오르고, 물리 데미지 감소 수치도 살짝 오른 정도.
거기에 어째서인지 내구 스탯이 추가로 상승했다.
각각의 상승치는 그리 높지 않지만, 전부 합쳐 보면 상당한 수준일 것이다.
가호에 붙어 있는 [철벽]스킬의 성능도 조금 올랐을 거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봤다.
"이거 은근히 지치네."
잠깐의 쉴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 춤추는 요정들에게서 멀어져, 엘레노어의 옆에 주저앉았다.
"요정들을 접하는 것 자체가 마력을 소비하는 일이라서 그런 거다. 그만큼 어울릴 수 있는 게 대단한 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엿본 기억 속의 엘레노어도 요정과 그렇게 오래 어울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마력 친화도가 높기 때문인지, 나보다는 더 버텼던 것 같지만. 새삼스레 그걸로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는다.
"그대, 내 기억을 보았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릴 적의 엘레노어가 뛰놀던 모습, 이 호수에 도착해 요정과 어울리던 모습, 그리고 성장한 뒤의 모습까지 보았다.
솔직히, 내가 정확히 어디까지 본 건지도 모르겠다. 사념은 단순히 기록물처럼 읽어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엘레노어와 반쯤 동화되어 있었다.
엘레노어가 느끼던 것을 나도 똑같이 느꼈고, 엘레노어가 생각하던 것을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이던데."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단순히 이상한 기분이었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엘레노어는 NPC다.
7층에서부터 시작되는 진영 퀘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시련의 탑이 창조한 공산품.
시련의 탑은 내가 있는 2661탑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탑에도 그 탑의 엘레노어가 있을 것이다. 엘레노어라는 이름은 아닐 테고, 똑같은 외형도 아니겠지만.
한없이 비슷한 모습으로, 같은 역할을 맡은 NPC가 존재하겠지.
그런 존재의 과거를 엿보고 체험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상천외한 느낌이었다.
탑의 시스템에 의해 창조된 NPC의 배경 설정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엘레노어' 라는 독립된 존재의 과거.
정말로 엘레노어는 그냥 NPC에 불과한 걸까? 시련을 위해 준비된 일회성 존재가 맞는 걸까?
퀘스트를 모두 마치고 나면, 평범한 깡통으로 돌아가 버리는- 그런 존재가.
"좀 부끄럽구나."
이렇게 수줍은 표정으로 미소 짓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사실 나도 그대의 과거를 엿보고 싶었어. 필요한 일이라지만, 내 것만 보여주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나."
엘레노어는 살짝 한숨 쉬며 말했다. 나에게는 무척 아찔한 말이었다. 내 기억을 엿보려 했다니.
"나는 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지. 문은 열린 이상 양방향으로 통하는 법이야. 나도 그대의 사념을 향해 다가갔다."
"지금, 내 기억을 봤다는 거야?"
"그래, 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볼 수는 없었지. 그대의 정신은 내가 넘보지 못하는 무언가로 가로막혀 있었어."
나는 엘레노어를 가로막은 무언가가 시련의 탑의 시스템일 것이라 짐작했다.
엘레노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억에 동화되어 체험할 수도 없었고,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며 말을 이었다.
기껏해야 내가 리즈멜과 수련하는 모습, 그리고 혼란했던 감정 일부만을 느낄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 밖에는...보고도 이해하기 힘든 사념의 단편뿐이었다. 그대가 여러 세계를 넘나드는 모습이었지."
그리고 순간 흠칫했다. 여러 세계를 넘나드는 모습이라니, 그렇다는 건.
"그대여, 시련의 탑이라는 게 대체 뭔가?"
엘레노어는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다.
**
그로부터 이 주 정도가 지났다.
나는 아침부터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마력감응 스킬을 획득하면서 마력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명상은 여전히 쉽지 않다.
느껴지는 마력의 움직임 자체가 워낙 시원찮은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감각이 많이 둔하다.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 조작 Lv.1]
[마력 감지 Lv.1]
1레벨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마력 관련 스킬을 새로 얻었다.
마력감응이 마력의 존재를 느끼는 스킬이라면, 마력조작은 체내의 마력을 직접 움직여 활용하는 스킬이다.
그리고 체내의 마력을 방출해 주변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마력감지, 리즈멜이 수정 거미의 공격을 간파한 방법이다.
스킬이라고 해도 이건 검술 스킬과 마찬가지로, 그냥 내가 도달한 경지를 수치화한 것에 불과하다.
마력을 다루는 기술을 여럿 터득하긴 했지만, 그 수준은 아직 간신히 1레벨에 닿아 있을 뿐이라는 거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엘레노어가 걸어 들어왔다.
"오, 이제는 안 놀라는구나. 내 기척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모양인걸."
그 말대로, 나는 엘레노어가 오는 것을 마력감지를 통해 미리 알아차리고 있었다.
마력감지는 감각 강화 이상으로 훌륭한 탐지기가 되어 준다. 그리고 엘레노어의 존재는 유독 탐지에 잘 잡히는 편이다.
그림자 마법의 달인이면서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는 엘레노어는, 그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갖고 있으니까.
"네 기척만 간신히 느끼는 수준이야, 아직 멀었어."
"그 정도면 무척 빠른 거다. 분명 그대는 마력강화까지 터득할 수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 어디...저번에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리자드맨의 유적에 들어가는 부분까지였다. 어서 말해다오."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것도 이젠 익숙하다.
나는 호수에서 마력감응을 깨우친 그날 이후, 엘레노어에게 꾸준히 모험담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모험담이란 당연히 내가 시련의 탑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말한다.
나는 그날, 시련의 탑이 무엇이느냐고 묻는 엘레노어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나는 여러 차원과 세계를 넘나들며 시련에 도전하고 있는 모험가라고.
거짓말이라고는 하지만, 탑의 시스템에 대한 부분을 빼면 사실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한심하게 살다가 엄마의 부고를 받고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까지 간략하게나마 말하고 말았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애매한 거짓말을 할 것도 없이, 그냥 몰라도 된다는 말로 때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기억을 엿보고, 호수에서 요정과 춤추었던 그 순간은 내게 여러모로 특별하게 남았다.
그러는 중 엘레노어의 정신과 마음에 무언가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내심 누군가에게 토해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저 꿈꾸는 눈동자를 그저 외면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어쨌든 엘레노어는 나이트 엘프의 후손다운 왕성한 호기심을 내보이며, 내게 넘나들어 온 차원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는 시스템이나 NPC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고,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대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아. 어쩜 그렇게 새로운 것투성이인지, 어린아이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엘레노어는 약혼을 깨고 자유를 찾으면, 자신도 그렇게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고개를 살랑거렸다.
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약혼 파기를 위한 의욕이 더해지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나는 혼자 단련에 매진하고 있을 뿐인데도, 퀘스트는 점점 진도를 빼 나간다.
**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다지 대단한 일은 없었다.
마력 운용에 관한 몇 가지 잡다한 기술을 손에 넣은 것과, 무기술 레벨이 조금 더 올랐다는 것 정도.
그 밖에는, 점점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나와 엘레노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엘레노어가 평소에 떠벌리고 다닌 '취향' 에 내가 워낙 잘 들어맞았기에, 원래도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엘레노어와 별 연관이 없는 평범한 다크엘프들도 나를 점점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아아, 네가 엘레노어의 걔구나?"
"딱 그 애가 좋아할 것 같이 생겼네."
"그 연하 취향을 어쩌면 좋담?"
"고생이 많겠네, 맛있는 거 줄까?"
다크엘프 특유의 인간 우호 기질도 더해져, 그냥 사람 많은 길만 지나가도 묘하게 간질거리는 시선이 쏟아진다.
뭔가, 초등학생 커플을 응원하는 듯한 느낌 절반에- 엘레노어를 변태 취급하는 느낌 절반 정도?
하이엘프의 왕자와 약혼을 맺은 상태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엘레노어가 비장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여왕폐하가 우리 관계를 알게 됐다. 물론 그대가 사사로운 일을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다 정리해 놨으니."
이게 대뜸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엘레노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내 정혼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을 마쳐 놨거든."
"야, 잠깐, 뭐라고?"
"숲쟁이들 쪽에도 이미 선전포고를 보내 놨지. 그대는 이제 하나만 해 주면 된다. 어렵지 않을 거야."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결투]
퀘스트의 진행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내용을 눈으로 슬쩍 훑었다.
제대로 적혀 있지 않던 퀘스트 달성 조건이 정확하게 표시되었고, 보상 정보까지 간략하게 나타났다.
그렇다는 것은, 이게 7층에서 진행할 수 있는 진영 퀘스트의 마지막이라는 뜻.
다크엘프의 서, 그 첫째 장의 마지막 단락에 도달했다.
"숲쟁이 왕자 놈과의 결투에서 승리해서, 내 정혼자가 되는 거다."
이제 다음 층으로 올라갈 때다.
69. 결투
엘레노어의 말을 듣고 내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그 결투라는 게 내가 아는 결투가 맞느냐는 것이었다.
"그래, 평범한 결투다."
엘레노어는 내가 차원을 넘나드는 모험가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쪽 세계의 상식에 어둡다는 것도 안다.
그런 엘레노어가 그냥 평범한 결투라고 말하는 거라면, 내가 아는 그 결투가 맞겠지.
명예를 걸고 승패를 가리기 위해, 참관인을 두고 공개적으로 행하는 싸움.
엘레노어는 이어서 몇 가지 예시를 들며 결투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그 내용은 매우 평범했다.
특이한 엘프식 결투 규칙 같은 게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
아니, 근데 너무 갑작스럽게 정한 거 아닌가.
대립하고 있는 두 종족의 왕족이 엮인 결투라면 보통 일이 아니잖아. 최소한 나한테 언질은 줬어야지.
"그대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나, 언질을 줬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었을 텐데."
"결투에 대한 대비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
"대비라니, 그 비실비실한 왕자 놈이 상대인데 무슨 대비를 한단 말이냐?"
엘레노어는 내가 굉장히 이상한 소리를 한 것처럼 피식거렸다. 생각해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하이엘프 왕자 놈은 7층에 갓 진입한 나한테 아무것도 못 하고 제압당했었으니까.
그 수준으로는 리즈멜과 엘레노어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강해진 지금의 내 상대가 될 리 없다.
"물론 그놈들도 나름대로 수를 쓰기야 할 거다, 하지만 잔재주로 어떻게 해 볼 만한 차이가 아니잖나?"
"그건 그렇지."
"아마 자기들 편한 대로 규칙을 만들거나, 핸디캡을 요구하겠지만- 그대의 수준이라면 뭐든 괜찮겠지."
엘레노어만큼 내 실력을 잘 아는 사람도 없고, 그 왕자 놈의 실력도 나보다는 엘레노어가 잘 알 거다.
그런 엘레노어가 일말의 변수도 없을 거라고 장담하고 있다. 그럼 아마 그렇겠지 뭐.
7층의 마지막 퀘스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낮은 거 아닌가 싶지만.
평균적인 7층 도전자의 강함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지금의 내 강함은 시련의 탑 몇 층 수준일까.
대강의 깡스펙만 해도 20층대 도전자 수준은 되고, 실력을 감안하면 25층 랭커 이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25층 랭커의 기준을 창기능사 최길현으로 잡아도 되는지가 좀 문제긴 하다.
그놈은 스펙만 높지, 실력은 거의 고블린 수준이었으니까.
저층 유저들에게 버스를 태워주는 랭커들도, 엄연히 파티를 짜서 보스전에 임한다.
뉴비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변수 없이 빠르게 보스를 터트려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최길현은 파티원의 보조를 몰아받고 스킬을 퍼부어서 폭딜을 넣는 역할을 맡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등신같이 찌르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거다.
고로, 강함의 표본으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내 수준이 25층 랭커 이상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물론 7층 수준을 한참 넘었다는 건 확실하니까, 이번에는 걱정할 것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나는 정확히 얼마나 강한 걸까?
**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된 결투의 날짜는 일주일 뒤,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물론 대단한 결전을 치를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딱히 결투를 대비한 특별훈련 같은 걸 하지는 않았다.
그냥 평상시처럼 검술을 단련하고, 여전히 잘 안 되는 명상과 마력 운용을 연습할 뿐이었다.
그 밖에는 엘레노어와 괜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차원을 넘나드는 모험 썰을 풀거나, 여왕을 접견하거나 했다.
다크엘프의 여왕은 엘레노어와 매우 닮은 얼굴에, 좀 많이 지쳐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화친을 위한 약혼을 깨려고 하는 나를 매우 아니꼽게 생각할 것 같았는데, 뜻밖에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던 걸 수도 있지만, 그냥 무덤덤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할 뿐이었다.
여왕 본인보다는 막강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는 세계수 뿌리의 왕관 쪽에 더 눈이 갈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7층은 그 특성상 보스룸으로 가는 길이 매우 간단한 편이다.
미궁 지역보다 일반 필드가 더 험한 면이 있을 정도다. 사실상 진영 퀘스트를 마치면 곧바로 보스에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그럴 예정이다. 다크엘프의 마을에서 너무 오래 지내다가는 마음이 풀어지고 말 테니까.
결투를 마치고, 보상을 받고, 곧바로 보스를 깨고 8층으로 올라간다.
7층의 보스는 나 같은 근접 전사랑은 상성이 안 맞는 편이지만, 공략대로의 스펙이라면 쉽게 깰 수 있을 거다.
너무 훌쩍 떠나버리면 엘레노어가 아쉬워하겠지만, 그런 이유로 7층에 계속 박혀있을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8층에 올라가면 다시 만나게 될 예정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7층을 떠날 것이다.
"후우..."
마력운용을 병행한 마지막 트레이닝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바깥에서 인상적인 기척이 느껴진다. 이 유독 강렬한 마력의 흐름은 분명 엘레노어다.
"그대여, 슬슬 시간이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결투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엘레노어는 일부러 나를 일찍 불렀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결투하는 낭만적인 자리인데, 최소한의 치장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숲쟁이 놈들의 왕도 결투를 참관한다더구나, 놈들의 콧대를 바짝 눌러 줘야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받아들였다.
치장이라고 해도 전투용의 갑옷을 조금 멋지게 꾸밀 뿐이다. 결투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좋아, 가자꾸나."
결투 장소와 방식은 결투를 받아들인 쪽이 결정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이엘프의 구역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물론 하이엘프 놈들이 수작을 부릴 가능성을 경계해, 참관인 명목으로 엘레노어 외의 다크엘프 여럿이 함께했다.
그리고 중요한 결투이기 때문인지, 다크엘프의 여왕과 하이엘프의 왕도 모두 참관하기로 했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을 헤치며 대삼림 안쪽으로 들어온 우리는, 오래 걸리지 않아 다른 하이엘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 결투 상대인 왕자 본인과, 호위기사 몇 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원래는 기사들만 나오기로 했던 것 같은데, 왕자놈까지 나와 있네.
"후후."
엘레노어는 왕자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보란 듯이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큭...!"
그러자 왕자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투지가 넘치는구만.
듣기로는 약혼 관계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주 봐 온 사이라고 하던데.
살다살다 남의 소꿉친구를 뺏어가는 금발 태닝 양아치 포지션에도 서보는구나.
-타닥!
그렇게 잠시 신경전을 벌이던 중, 왕자의 호위기사 사이에서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달려나오는 기세도 심상치 않고, 손에는 날카로운 검을 든 채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사악한 인간족 검사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달려든 것은, 저번에 나한테 얻어터졌던 그 하이엘프 기사였다.
**
참관인 자격으로 동행한 다크엘프 기사들이 대응하려 했지만, 그보다 내가 먼저 나섰다.
결투를 앞두고 있으니 힘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카앙!
휘둘러지는 기사의 검을 내 검으로 받아내고,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하이엘프 왕자도 크게 당황하고 있는 걸 보니, 깐프 놈들이 개수작을 부린 건 아닌 모양이다.
왜 내가 여기 있느냐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왕자의 결투 상대가 나인 줄 모르고 급발진을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굳이 내가 상대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알아서 상황을 정리해 줄 거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엔 좀 아쉽지.
"마침 잘 됐네."
실력을 시험해 보기 딱 좋은 상대가 아닌가.
하이엘프 기사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나를 향해 검을 휘둘러 대었다.
-카앙, 카앙! 카강!
전과 마찬가지로 무척 날카롭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검로, 역시 이놈의 검술 실력은 상당하다.
전에는 이 검술과 방패술의 연계를 어쩌지 못하고, 다양한 무기를 활용한 변칙수로 상대했어야만 했었는데.
감각의 확장과 증폭을 습득한 지금은, 그 현란하던 기술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이고 있다.
물론 이놈도 감각의 확장은 터득한 상태일 거다.
-후웅!
일반적인 템포보다 한 박자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방패 공격을, 두 박자 빠르게 읽어내고 회피했다.
설마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하이엘프 기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놈은 감각 확장을 가진 상태에서, 감각 확장이 없는 내 잔재주에 손쉽게 공략당한 전적이 있다.
그렇다면, 똑같이 감각 확장의 경지에 도달한 지금은 어떨까.
방패를 휘두른 기사의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당겨서 중심을 무너트린 뒤, 바닥에 메다꽂아버렸다.
-쾅!
"크윽!"
검술을 단련하며 자연스레 함께 단련하게 된 격투술이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고 내 힘까지 더해 처박아 버리는 기술이니, 충격이 상당할 거다.
땅에 쓰러진 기사놈의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철벽]
정령 친밀도가 오르며 더욱 강력해진 [철벽]스킬을 두르고, 주먹을 내리꽂는다.
-쾅!
이 놈, 생각보다 별 거 없었네.
70. 챔피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