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광란의 질주
보스를 처치하자, 제단에 놓인 석상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이제 무너진 석상 아래에 숨겨진 레버를 당기고, 몇 가지 조작을 더 가하면 히든 던전에 진입할 수 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장비를 점검한다.
에보니 스틸로 만든 다크엘프제 방어구 풀세트.
무기도 가장 좋은 것으로 착용하고, 방패 아래로 에르웬이 만들어 준 팔목보호대를 착용했다.
앞으로 몇 층을 더 올라가야 수준이 맞는 적이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한 게 몇 분 전이지만.
이 던전을 기믹 수행 없이 혼자서 돌파하려면 이 정도 준비는 당연히 해야 한다.
-끼기기기긱!
제단 바닥이 열리고 히든 던전으로 향하는 문이 드러났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비취의 계단]
히든 던전은 비취라는 이름 그대로 녹색의 수정이 가득한 지하 신전 비슷한 곳이다.
물론 신전은 신전인데, 너무 고대 양식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지하라는 특성 탓에 동굴에 더 가깝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얻은 던전 지도를 켜 놓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딸랑!
어디선가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감지에 몇 종류의 생명 반응이 걸린다.
녹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나비 같은 것이 내게 접근해 왔다.
수정 나비는 내 주변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더니, 날개를 퍼덕여 둥근 광원체를 쏘아냈다.
내가 [집광] 스킬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광원이다.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치지직...!
강한 열기를 뿜어내는 광원체가 손가락 끝을 지졌다. 이렇게 작은데도 내 화염 내성을 뚫는다.
위력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 화염 내성으로 막을 수 없는 복합 속성이라 그렇다.
빛의 구슬을 쏘아대는 나비들을 손으로 붙잡아 으깨버리고, 이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 히든 던전의 몬스터는 모두 이런 타입이다.
몬스터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저런 빛구슬이나 광선을 쏘아서 원거리 공격을 하는 방식.
7층의 히든 보스였던 크리스탈 거미와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잠시 후,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거북이 형태다.
등딱지가 녹색 수정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거북이라기보다는 사족보행 달팽이 같은 외형이다.
-우우웅...!
거북이의 입에 녹색 빛구슬이 모였다. 모여든 빛구슬은 여러 갈래의 광선이 되어 내게 쏟아졌다.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빛구슬을 쳐내고, 단번에 거북이에게 접근해 일격을 먹였다.
-콰직!
새까만 칼날이 수정 덩어리를 뚫고 박혀 들어가, 거북이의 숨통을 끊었다.
던전의 기믹은 이 거북이가 나타나는 구간부터 시작된다.
때마침 계단만 따라 내려가면 그만이던 구조가 확 넓어지고, 동서남북으로 다양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확인해 보니, 공략글에 나와 있는 기믹 수행용 장치들도 모두 그대로 있는 모양이다.
"후우...해보자, 해 봐."
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몸을 풀고, 기믹이 있는 동쪽 길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는다.
-쿵!
그대로 발밑을 있는 힘껏 박차,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욱, 하는 칼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초고속 질주를 시작하고 대략 이 초 뒤.
-찌릿.
직감, 마력감지, 감각 강화, 내 시야를 넓혀주는 세 가지 스킬이 모두 동시에 경고를 외친다.
발 밑을 주의하라고.
-콰과광!!
지면에서 거대한 광선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
크리스탈 거미의 입에서 발사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굵기의 녹색 광선.
SF영화에 종종 나오곤 하는, 위성 병기의 포격을 연상케 하는 공격이 발밑에서 솟구쳤다.
"시! 발!"
비명 대신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걸 멈추면 죽는다.
-콰과광!
쏘아지는 광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달려나가는 나를 노리고 몇 번이고 연달아 쏘아진다.
이 끝없이 쏘아지는 양심 없는 광선이 바로 이 던전의 기믹이다.
비취의 영약은 이 던전 최하층에 고여 있는 샘물, 그리고 그 샘물을 지키는 살벌한 몬스터가 있으니.
미친 감지범위와 미친 사거리의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내는 괴물, 에메랄드 와이번이 그것이다.
에메랄드 와이번은 이 구간에 들어선 침입자를 감지해, 침입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냅다 광선을 쏴버린다.
위력은 즉사 수준, 광선의 면적도 뭉쳐있는 사람 서너 명쯤은 한 번에 덮쳐 증발시킬 수 있을 만큼 넓다.
그 미친 광선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
파티원들과 협력해 이 던전의 장치를 작동시켜 광선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뿐이다.
떨어져 있는 장치 여럿을 동시에 작동시켜야 하므로, 당연히 혼자서는 못 한다.
다른 탑의 도전자들에겐 일종의 협력 퍼즐 게임이지만.
솔플러인 나한테는 목숨을 걸고 하는 러닝 액션 게임인 셈이다.
-콰과광!
"으억, 씹!"
광선 포격을 피해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내 앞길을 또 한발의 광선이 가로막았다.
나는 재빨리 달리는 방향을 억지로 틀고, 던전의 벽을 밟아서 회피해 냈다.
지금 꼴을 보면 알겠지만, 광선을 쏘는 와이번은 한 마리가 아니다. 전부 다 해서 여섯 마리라던가.
기믹을 수행할 수 있다면 여섯 마리든 열 마리든 아무 상관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
그나마 마력감지를 익혀서 광선이 날아오는 것을 미리 감지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그냥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으면 지금쯤 광선을 세 발쯤 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 번만 맞아도 뒤지겠지만!
그 때, 마력감지가 애매한 위치에서 동시에 쏘아지는 광선을 감지했다.
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내, 좁은 통로의 벽면에 박아넣었다.
어마어마한 가속도가 붙었던 몸이 단번에 제동하고, 한 발짝 앞과 두 발짝 뒤의 위치를 광선이 꿰뚫었다.
"허, 씨발."
젠장, 이런 게 또 문제다. 그냥 계속 달리기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편할 거다.
타이밍에 맞춘 정확한 방향전환과 정지를 해내지 못하면, 그것대로 광선에 맞을 수가 있다.
이렇게 멈추는 것도 오래 끌면 안 된다. 발밑에서 다시금 찌릿한 경고가 울렸다.
[혼신]
"후웁!"
인생 최장거리의 제자리 멀리뛰기로, 발밑에서 쏘아진 광선을 피해냈다.
**
이 광선 포격의 가장 좆같은 점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날아온다는 점이다.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장소가 영약이 고여 있는 위치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광선의 발사 지점이 가까워지니까, 그만큼 광선이 빨리 날아온다는 것.
사실 좆같은 점은 그 밖에도 많다.
일단, 광선에 맞아 박살 나고 수복되고를 반복하며 던전의 지형이 조금씩 바뀌어 버린다는 점.
지형이 계속 바뀌어대는 탓에 원래 예정보다 이동 경로의 거리가 훌쩍 늘어나고 말았다.
나는 무한으로 달릴 수 있는 러닝 액션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엄연히 체력에 한계가 있다.
달리는 중에 틈틈이 포션을 섭취할 수 있긴 하지만, 포션을 마시다가 호흡이 꼬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자칫 발이 꼬이기라도 하면 광선에 맞아 뒈질 텐데, 지형마저 지랄이 나니까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광선 포격과는 별개로, 여기가 어쨌든 던전이라는 점. 던전에는 당연히 몬스터가 나온다.
초반에 나오던 나비나 거북이 정도라면 무시할 수 있겠지만, 점점 크고 센 놈들이 나오고 있다.
-그오오오오!
지금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직선 방향에 수정체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이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스파이크 박힌 방패를 꺼냈다.
방패를 내세운 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나가, 정확한 타이밍에 [혼신]을 발동시켰다.
-콰광!
수정으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은 들이받힌 그대로 박살이 났다.
내 스펙이 조금만 딸렸어도 이렇게 몬스터를 몸으로 뚫고 지나가는 짓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속으로 불평하는 한편, [질주]스킬의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표시되었다.
영약이 있는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위험요소는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몸은 점점 편해지고 있다.
던전의 위험도가 올라가는 것보다 내가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위기상황에 처하면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
한참을 달려 마침내 유일한 안전지대에 도착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던데, 대체 몇 시간을 내리 달린 건지 감이 안 온다.
"흐아..."
다리가 떨리고 숨도 마음처럼 잘 쉬어지지 않는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눈앞이 어지럽다.
고개를 숙이면 토할 것 같아서, 일부러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이 던전을 그냥 달려서 돌파한 사람은 아마 전 서버에 나 하나 뿐일 거다.
[빨간 포션]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참고 억지로 포션을 들이켰다.
지쳐있던 몸은 포션과 [전투 재생]의 효과로 금방 회복된다. 다시 한번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 준비를 한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저 바닥에 고여 있는 영약을 퍼담는 것.
하지만 문제는 여태껏 줄기차게 광선을 쏴대던 와이번이 영약 고인 바닥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정상적인 플레이 방식은, 던전의 장치와 미끼를 활용해 와이번의 시선을 돌리고 영약만 쏙 빼 오는 것.
이것도 당연히 솔플러인 내겐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다.
다 죽이고 뺏어오면 된다.
안전한 곳에 자리잡고 마음대로 저격해대는 것도 이젠 끝이다, 좆같은 익룡 새끼들아.
이 층에 내 수준에 맞는 적이 없다면, 찾아가면 그만이다.
81. 에메랄드 와이번
에메랄드 와이번의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하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가 아니니까.
하나의 던전을 구성하는 기믹으로 배치된 존재, 반드시 피해서 행동해야만 하는 무대장치.
하지만 상층에 등장하는 와이번 계통의 몬스터가 어느 정도 스펙인지 생각해 보면, 대충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일단 저만한 위력의 복합 속성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낼 수 있을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다는 건 확정.
쏘아지는 광선에서 느껴지는 마력량만 해도 대충 내 전체 마력과 비슷한 정도다.
나는 전사 클래스라 마력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어마어마한 수치다.
일단 내 기본 스펙부터가 8층 수준은 한참 넘어서 있으니까. 비슷하기만 해도 반칙 수준인 거다.
그리고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호환쯤 되는 종족으로, 그 신체의 강인함도 예사롭지 않다.
다만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다른 몬스터처럼, 육체가 녹색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렇다면 놈들의 방어력도 결국 녹색 수정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즉, 유리 대포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뭐, 이런 식의 희망적 관측만 쌓아놓고 적을 판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긴 하지만.
아무튼 승산은 충분하다. 광선 이외의 공격이라면 맞고 버틸 자신도 있다.
"대충 됐나."
지쳤던 몸이 만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 와이번의 마력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
비취의 영약이 고여 있는 샘은 넓은 공동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공동의 구석마다 굴이 하나씩 파여 있었고, 그 굴에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 잡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영약을 향해 달려가면 사방팔방의 와이번에게 저격당하는 구조.
여기선 원래 감지를 피할 수 있는 우회로를 통해 와이번들을 지나치고, 던전의 기믹을 발동해 시선을 돌려놔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기믹을 써먹을 수 없으므로, 우회로만을 이용한다.
이곳의 와이번들은 주기적으로 잠에 들고, 침입자를 감지하면 깨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던전의 우회로를 사용해 굴로 들어가면, 놈들의 잠을 깨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이 놈들이 잠에서 깨는 순간은, 도전자가 놈들에게 접촉하거나 우회로와 굴을 벗어나 놈들의 감지에 걸릴 때.
반대로 말하면, 우회로를 벗어나지 않거나 접촉하기 전까지는 안 깨어난다는 뜻이다.
선빵을 박고 시작하기 딱 좋다는 거다.
눈치를 보면서 슬슬 피해 가야 하는 와이번에게, 나는 당당히 다가가 검을 들어 올렸다.
"덤벼라, 익룡 새꺄."
-콰직!
와이번 한 마리의 눈알에 있는 힘껏 검을 박아넣었다. 생각보다 더 깊이 박혔다.
-그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은 크게 소리치며 깨어났고,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꺠어난 와이번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넘치고, 주변에 무작위하게 퍼져 있던 마력이 그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력량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허 시발, 이게 드래곤이 아니라 와이번이라고?
와이번의 체내에 쌓여 있는 마력량도 어마어마한데, 대기 중의 마력마저 놈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이딴 미친 생물을 여섯이나 가져다 놓을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이 탑을 설계한 놈이 누구건 간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레벨 디자인을 해놓을 리가 없다.
-키이이이잉!
그렇게 잠시 얼타는 사이, 와이번의 쩍 벌어진 주둥아리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
나는 당연히 선빵을 맞은 와이번이 취할 행동을 몇 가지 상상해 뒀다.
하지만 이건 살짝 예상을 빗나갔다. 상정하지 못한 정도는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네.
근거리니까 당연히 발톱이나 이빨로 덤벼올 줄 알았는데, 대뜸 면상에다가 광선을 박으려고 하다니.
빈대 잡겠다고 미사일을 쏘는 꼴이잖아.
-콰과과광!!
물론 신속한 빈대인 나는 미사일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원래 이런 광역 공격은 멀리서보다 가까이에서 피하는 게 더 쉽다. 사출기는 사각지대가 분명하니까.
와이번의 턱 옆으로 회피함과 동시에,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목 언저리를 베어보았다.
-촤악!
역시 생각보다 잘 베인다. 예상대로 이놈들의 방어력은 그렇게 대단치 않다.
이거라면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계속 베는 것만으로 처치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놈이 나를 그렇게 두느냐인데.
-그와아아아!!
와이번이 소리를 지르며 날개 끝의 발톱을 휘둘렀다.
상당히 빠른 속도지만, 마력강화를 발동한 메르세데스의 공격에 비하면 아직 괜찮은 수준이다.
팔과 날개가 일체화된 특유의 신체구조 탓에, 동작이 너무 크다는 점도 주요했다.
-카가가가각!
휘둘러진 발톱과 날개 끄트머리에 걸린 벽면이 좍좍 갈려나간다.
발톱 공격을 피해낸 직후에는 놈의 턱주가리가 닥쳐왔다. 그렇겠지, 이쪽으로 오면 이젠 이빨이겠지.
역시 이놈들의 강함은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무한 포격에 의존하고 있다.
딱히 그걸 뺀다고 약한 건 아니다. 평범한 8층 도전자의 스펙이라면 발톱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찢겼을 것이다.
하지만 딱 그것까지는 반응하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스펙이 있다면, 대응해야 할 패턴 자체가 적다.
지형 특성상 비행도 불가능, 근거리에서는 포격도 마음대로 못 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근접전뿐인데, 저 어정쩡한 신체구조는 근접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날개를 퍼덕거리고 날아올라서 포격하는 것만으로 다 이길 수 있을 테니, 저따위 구조를 하고 있는 거겠지.
이건 비유하자면 티라노사우르스 인간의 대결 같은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인간이 티라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만, 종목을 인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티라노사우르스의 그 옹졸한 앞다리로 인간과 권투 시합을 해서 이길 순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 싸움의 종목을 일대일 근접 육탄전으로 정했고, 와이번의 몸뚱이는 근접전에 적합하지 않다.
고작 그뿐이지만, 내 승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
와이번은 신체 구조가 근접전에 부적합할 뿐, 딱히 지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녀석은 근접전이 이어질수록 본인만 다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오오오오!
바로 버둥거리며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단 처한 환경을 바꾸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플라잉-도마뱀 새끼는 지능이 낮지는 않지만 딱히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나가려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여기저기 다 베인 상태에서 그러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콰곽! 콱!
인벤토리에서 대형 장병기를 꺼내 집어던져, 와이번의 날개를 바닥에 꿰어버렸다.
이미 잔뜩 부상을 당한 상태인 만큼 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속도도 대단치 않았고, 반대로 내겐 여유가 있었다.
꿰뚫린 날개를 힘으로 뜯어내고 나가려 해도, 내가 새 창을 던져서 다시 꽂아넣는 게 더 빨랐다.
-그아아아아!
와이번의 포효가 이제는 그냥 비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저 포효에 피어 효과도 있지 않나?
근데 마비 내성 때문인지 아무 효과도 안 느껴지네. 역시 내성은 올려두면 무조건 이득이라니까.
-쿠웅!
녹색 수정이 돋아난 와이번의 몸은 금세 걸레짝이 되었고, 이젠 힘이 다 빠졌는지 바닥에 쓰러졌다.
이러면 남은 건 숨통을 끊는 것뿐이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도 아니라서 보상은 뭘 줄까 싶긴 한데. 은근히 기대된다.
뻗어버린 와이번의 모가지를 짓밟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와이번의 주둥아리에 막대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지랄이네."
발악으로 최후의 광선 한 발을 쏘려는 건가 싶어서, 재빨리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와이번은 광선을 쏘지 않았다. 모여든 마력은 빛나는 구체가 되어 굴 바깥을 향해 날아갔다.
뭐지, 기력이 딸려서 이제 못 쏘게 된 건가? 하지만 왜 바깥쪽을 향해서 쏜 거지?
"아."
그 이유를 깨달은 순간,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마력감지에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걸려들었다.
-그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
-그아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와 저절로 소름이 돋는 마력의 파도.
에메랄드 와이번의 마지막 선택은 구조 요청, 빛의 구슬을 통해 다른 굴의 와이번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놈들에게 동족을 향한 정 따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들어 있던 와이번이 모두 깨어났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왜 굴 밖으로 기어나가려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와이번 본인만이 알겠지.
어쩌면 구조 요청이 아니라 이판사판으로 다른 놈들의 잠을 억지로 깨운 걸 수도 있겠다.
-쿵쿵쿵쿵쿵!
와이번 다섯 마리의 발소리가 들리고, 곧 막대한 마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깨어나자마자 침입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광선을 갈기려는 것이다.
그것도 다섯 마리가 동시에.
씨발.
이건 못 피하는데.
직후, 눈을 뜨기조차 힘든 빛이 시야를 모조리 덮어버렸다.
82. 불나방
위기 상황 속에서 집중력과 판단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나는 시야가 한순간에 백색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혼신]스킬을 사용해 내구 스탯을 증폭, [철벽]스킬을 발동해 방어력을 증강.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차폐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벽히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부족하다면, 다음은 주변을 이용할 차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최대 사이즈의 차폐물, 에메랄드 와이번의 뒤편으로 몸을 감춘다.
예측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깝지만, 이놈들의 몸은 본인의 공격에 대한 내성이 있을 것이다.
그게 신체 자체의 내구력으로 되는 건지, 아니면 특이한 마법적 수단으로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전자라면 살 것이고, 후자라면 뒤지겠지. 뻗어버린 와이번이 곧이곧대로 내 방패가 되줄리가 없으니.
여기까지 판단을 마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초 정도.
-콰과광!
터져 나온 굉음이 울리던 귓가에는 곧 이명만이 맴돌고, 시야는 이미 새하얀 상태.
청각, 시각, 그리고 이어서 촉각과 마력 지각마저 마비된다.
상태창의 HP 바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깎여나가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물속에 잠겨 있는듯한 몽롱함을 느끼며,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재빠르게 마력을 순환시켜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 동시에 내 쪽으로 광선을 쏘았던 와이번들을 감지했다.
내 쪽을 향해 쿵쿵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거리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저 놈들도 그렇게 느려터진 건 아니라서, 거리가 좁혀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텐데.
의식이 끊겼던 것은 거의 한순간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잠깐 사이 몸은 아주 걸레짝이 다 됐다.
"커헉."
헛기침이 멋대로 나온다. 뭔가 토할 것 같았는데도, 피는커녕 침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마 목이 타들어 간 것 같다. 씨발, 숨만 쉬어도 불로 지져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눈도 제대로 지져진 것 같고, 사지도 멀쩡한 곳이 없다. 이 정도면 거의 석탄이 됐겠는데.
상태창에 표시된 HP는 거의 바닥에 가깝다.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쿡, 커헉, 큭, 씨, 바하알..."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뭔가 기분이 좋다. 타들어 간 입꼬리가 삐쭉 솟아올랐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이룰 때마다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맹세가 나를 앞으로 잡아끈다면, 성장의 쾌감은 내 등을 떠미는 역할.
"흐, 흐흐흐, 흐흐!"
그렇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쾌감은 성장을 체감했기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아마도.
나는 나를 혐오한다. 스스로 느끼는 쾌감과 온갖 동물적 욕구를 혐오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고 자신을 죽을 위기에 내던져왔다. 죽고 싶어서, 나를 죽이고 싶어서.
그러나 죽을 위기 속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강해지기에, 생각해 보면 이만큼 모순된 행동도 없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위기에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 자체가 아니었을까?
실패하면 죽고, 성공하면 성장한다.
위험천만한 도박처럼 보이지만, 양쪽 모두를 바라는 내겐 어느 쪽이건 당첨일 뿐.
"으헥, 켁, 크, 흐으."
몸이 조금씩 나아가는 것을 느끼며, 내게 접근하는 다섯 마리의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즐겁고, 짜릿하고, 짜증 나고, 징그럽고, 혐오스럽고, 역겹고, 또 즐겁다.
감정과 의지는 마력의 운용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에, 이 순간 내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건 내 마력을 이용하는 게 아니니까, 이런 때라도 안심하고 써먹을 수 있다.
[마력 강화]
-쿠르릉!
충전을 마친 펜던트를 사용하자, 벼락 소리와 함께 온몸에 막강한 힘이 깃들었다.
**
굴 바깥으로 나온 와이번들은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공동 안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건 아니지만, 못 날아오를 정도로 좁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와이번 다섯 마리 중 두 마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젠 놈들의 진짜 무대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나도 지금부터가 진짜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HP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죽지는 않는다.
두 자릿수를 돌파한 [전투 지속]과 [전투 각성]등의 영향도 있겠지, 반쯤 익은 몸으로도 나는 여전히 싸울 수 있다.
거기에 HP가 급격히 떨어지며 발동한 [불굴]의 강화 효과, 펜던트로 발동한 마력강화의 효과.
여태까지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의 내가 더 강하다.
-콰앙!
땅을 박차며 쏜살같이 지상의 와이번에게 접근했다.
와이번은 발톱을 휘둘러 달려드는 나를 후려치려 했으나, 내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거리를 좁힌 뒤, 인벤토리에서 꺼낸 굵은 창을 내질러 와이번의 목 근처에 박아넣었다.
-키이이잉!
공중에 떠 있는 와이번들에게서 강렬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광선이다.
별다른 버프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피할 수 있었던 공격이다. 지금은 더 쉽게 피할 수 있다.
쏘아진 광선이 지면을 휩쓸었지만, 나는 이미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후웁."
공중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자세를 고치고, 한손검을 든 채 소드 차지 스킬을 사용했다.
돌진 판정과 함께 몸이 전방으로 쏘아지고, 순식간에 날아올라 있던 와이번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잡았다."
닿을락 말락한 애매한 거리, 인벤토리에서 대형 할버드를 꺼내 와이번의 어깻죽지에 박아넣었다.
그대로 할버드의 자루를 붙잡고 기어올라,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업적 달성 : 비룡의 기수]
정체모를 업적이 달성되며, 보상으로 스탯이 약간 올랐다.
와이번은 등에 올라탄 나를 떨쳐내기 위해 온갖 곡예비행을 시도했으나, 그런 것에 떨어질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와이번의 어깨에 검과 창을 더 박아넣은 뒤, 더 단단하게 버텼다.
-콰과광! 콰광!
다른 와이번들이 격추를 위해 광선을 쏘아댔지만, 개중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와이번이 잘 날아서인지, 저놈들이 동족을 향해 제대로 쏠 수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올라타니까 편하다는 건 알겠다. 슬슬 편하게 버티는 법도 알 것 같고.
"와이번 라이더같은 클래스는 없나?"
날탈것을 키울 수 있으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벤토리에서 투척용 무기를 새로 꺼냈다.
이렇게 요란하게 비행하는 와이번의 등 위에서도, 내 투척 능력의 정확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흡!"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다른 와이번을 향해, 무기를 집어던져 공격했다.
**
에메랄드 와이번의 최대 약점은 역시 화력에 비해 방어력이 낮다는 점이다.
비행 속도도 생각보다 느려서, 내 최대 특기인 투척 공격으로 몇 번이나 유효타를 입힐 수 있었다.
나는 슬슬 쓸모를 다한 와이번의 어깨를 크게 도려낸 뒤, [혼신]으로 근력을 강화해 손으로 날개를 뜯어버렸다.
-그아아아아아!!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와이번은 추락, 다른 와이번들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채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포션을 들이켜 남은 상처를 치유해가며, 다 죽어가는 와이번들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별거 아니네."
광선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것만 빼면,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뭐, 제대로 실력을 갖추고 난 이후로 대형 몹과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죽지만, 기교랄 게 없는 짐승의 무식한 공격에는 한 대도 안 맞는 식.
아, 물론 이것도 내 기본 스펙이 이놈들을 따라갈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마력강화는 진짜 사기네."
이건 결국 불굴과 펜던트를 이용한 마력강화의 더블 버프가 어이없을 정도로 강력한 덕분이다.
하지만, 강력한 버프 성능이 마냥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전투력 상승을 가져다주는 마력강화의 발동을 완전히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마력강화 사용 후에 찾아오는 반동도 얕볼 수 없고, 충전식인 탓에 원할 때마다 유연하게 쓸 수도 없다.
마력강화의 성능을 알아버린 이상, 아예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역시 너무 강한 아이템은 여러모로 거슬린다.
뭐, 하루라도 빨리 자력으로 마력강화를 할 수 있게 되는 수밖에 없겠지.
그럼 반성은 이쯤 하고, 이제 남은 건 하나.
"자, 이제 네 차례다."
나는 딱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려둔 와이번을 향해 다가갔다.
날개와 발톱을 모두 뜯어버리고, 검과 창으로 바닥에 반쯤 꿰어놓은 에메랄드 와이번.
이런 상태로는 전혀 싸울 수 없겠지만, 주둥아리가 남아 있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하나 있다.
"얼른 쏴 봐."
와이번은 내가 눈앞에 당당히 다가오자, 즉시 마력을 끌어모아 광선을 준비했다.
광선 한 방에 죽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조금 전에 검증이 끝났다.
방패가 되어줄 차폐물은 이제 없지만, 마력강화를 사용 중이라 실질 방어력은 조금 전보다 더 높다.
이놈들은 보스몹 판정도 아니고, 잡으라고 있는 놈들도 아니라서 그런지 보상을 따로 안 준다.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뭐든 챙겨가야 하지 않겠어?
복합 속성의 고위력 공격이니까, 몇 번 맞다 보면 다양한 내성이 쭉쭉 오르지 않겠어?
[패시브 스킬 : 대마법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 : 주문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83. 어설픈 결정
성장의 기쁨은 몸이 불타는 고통보다 아득히 크다.
고통에 대한 내성 따위가 없음에도, 내가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계속해서 맞아줄 수 있던 이유다.
새로 터득한 두 종류의 내성 스킬은 각각 마법 공격 전반과 주문 속성의 피해를 감소시켜주는 것.
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자연 상태의 마력이 가지는 속성을 '주문 속성'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마법을 이용한 여러 방해 효과 같은 것도 대부분 주문 속성으로 판정된다는 듯하다.
그렇다면 무속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겠지 뭐.
아무튼, 이로서 퀘스트 목표인 비취의 영약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
죽을 뻔했던 것치고는 다른 전리품이 없어서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애초에 나는 딱히 보상을 원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다크엘프 여왕에게 세계수에 대해 묻기 위해, 영혼이란 존재에 대해 무언가 답을 얻기 위해, 그래서 온 거다.
내가 느끼고 있는 엘레노어의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그걸 알아서 뭘 어쩔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그냥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뿐인 일이다.
NPC가 NPC처럼 행동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었다지만 다시 고치면 그만 아닌가.
엘레노어와 공유했던 사념과 기억도, 서로 간에 나누었던 정서적인 교류도, 모두 없던 것으로 치면 될 뿐.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나는 이토록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지 않나.
[비취의 영약]
손에 들린 영약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보상이 없어도 괜찮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손에 들린 영약을 내던져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뭐, 이건 퀘스트니까. 게다가 에픽 퀘스트니까. 다 깬 퀘스트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지.
가슴 속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마력을 진정시키며, 나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
다크엘프의 마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여왕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엘레노어의 정혼자라는 신분 덕분에 여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금방 영약을 전달할 수 있었다.
퀘스트 완료 보상은 대단한 것 없이 그냥 경험치와 골드, 그리고 여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전부였다.
영약이 효과가 없다거나, 접견을 거부하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끼익.
삐걱거리는 침대에 등을 기댄 여왕이 나를 노려본다. 여전히 마른 고목 같은 눈동자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나."
여왕의 목소리는 7층에서 들어본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보다 한껏 바짝 눌어붙은 목소리다.
"세계수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다크엘프 중에서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옳다."
"사실, 질문을 추려서 온 건 아니라서 진짜로 '몇 가지'인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걸 전부 듣고 싶은데."
여왕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노인보다는 화석에 가까운 나이 때문인가, 정물처럼 보이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어서, 대뜸 말을 내뱉었다.
"포레스트 엘프가 가진 왕홀과 나이트 엘프가 가진 왕관에는 세계수에게 간섭할 힘이 있다."
마치,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그 힘을 이용하면, 순환하는 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끝이다. 이제 그대는 세계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건 없다고.
**
흐린 빛을 띤 여왕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여왕이 하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세계수에 대해 내가 모르던 건 그것뿐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여왕의 대답은 같았다. 그게 전부라고, 세계수에는 어떤 숨겨진 비밀도 없다고.
여왕은 그 후, 세계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중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여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에르웬이 말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한 기분이다. 나는 고작 경험치 조금과 골드 조금을 위해서 그 고생을 한 거였나.
"포레스트 엘프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것이다. 그들도 나도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떻게 장담하지?"
"설령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도,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이미 세계수는 시들어 힘을 잃었다."
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세계수니 영혼이니 하는 것에 대해 더 알아봤자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있는 거 아니었나, 하이엘프의 화친 제안에 엘레노어를 내주며 응한 이유가 그거잖아.
"시든 고목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나는 내 딸을 위한 평화를 원했을 뿐인 것을."
"당신 딸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던데."
"호전적인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지, 그 아이도 전쟁을 겪으면 생각이 바뀔 터다."
여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랬지, 세계수를 독점하고 우리를 내쫓은 포레스트 엘프를 혐오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된 후에도,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박해를 받은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놈들을 무찌르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자격이."
"하지만 누구보다 오래 살아오며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전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다크엘프의 역사에 대해선 배경 설정 수준으로밖에 몰랐다.
"누가 쏜 화살이건, 얼마나 정당한 화살이건, 그것에 꿰뚫려 죽는 것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시위를 놓은 순간부터, 처음부터 해야 했던 일을 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지."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한자리에 앉아서 대화하기 전까지."
여왕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
여왕과의 긴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이걸로, 엘프의 왕관과 왕홀을 이용하면 세계수와 영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애초에 세계수가 시들어 버린 이상, 그것들을 갖고 있다고 해도 뭔가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엘레노어를 살아있게 하는 것, 내가 감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추측되는 무언가.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허무하다. 나는 정말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상태창."
퀘스트 보상을 받고 레벨이 하나 올랐다. 에메랄드 와이번을 통해 얻은 새 스킬이 눈에 띈다.
"스펙 끝내주네."
등반중인 층수는 물론이요, 레벨에도 어울리지 않는 스펙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이미 솔로 플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아마, 이대로라면 시련의 탑을 클리어하는 것은 무난할 것이다.
솔직히, 작정하고 층수를 올리는 것에만 전념한다면 25층까지는 순식간일 것이다.
미궁 지역의 보물 상자도, 각 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요소도, 목숨 걸고 찾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다.
이번 층에 오랫동안 머물며 단련할 필요도 딱히 없다. 마력 운용 연습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엘레노어.
리즈멜.
에르웬.
아무리 사람 같아도 결국 다들 NPC다. 퀘스트가 끝나면 그냥 깡통 키오스크로 변해버릴 존재들이다.
이 시련의 탑이 그렇게 설계된 걸 어쩌겠어. 나도 결국 탑의 시스템에 속한 존재인데.
탑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탑이 부여한 시스템으로 성장하고, 탑이 정한 방식대로 전진한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괜히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나는 충분히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래, 버리자."
절대 멈춰 서지 않기로 정했잖아, 더는 미련 갖지 말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욕망에 그랬던 것처럼, 잘라내고 버리면 그만.
수면욕도, 식욕도, 성욕도, 모든 것을 거세했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
다음 날,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정찰대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삼대 세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충돌하며 마찰을 벌이고 있다. 이미 전쟁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다.
이 퀘스트 속에서 도전자의 역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세력을 도와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당연히 여러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일정 숫자 이상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그걸로 2장은 끝이다.
결정한 이상 굼뜨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9층으로 넘어간다.
"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해주다니 무척 기쁘구나. 어디, 상으로 입맞춤이라도 해 줄까?"
"할 일이나 알려줘."
"으음,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쌀쌀맞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걸?"
그렇겠지, NPC는 원래 이렇게 대했으니까.
84. 벽
8층의 서브 퀘스트는 대부분 전투와 관련된 것들이다.
다크엘프, 하이엘프, 왕국군의 삼대 세력이 직간접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
나는 다시 정찰대에 합류함과 동시에, 정석적인 퀘스트 내용대로 이곳저곳에서 날뛰었다.
-쾅!
투척한 쇠구슬이 사족보행형 골렘의 머리를 박살 내고, 그 안에 숨어있던 마법사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족 보행형 골렘은 왕국군의 특수 병기 중 하나로, 내부에 술사가 탑승해 조종하는 특이한 골렘이다.
실시간 조종이라는 특징으로 이런저런 정보 수집에 이용되고 있다는데,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뭐, 뭐야...너는 누구냐! 왜 우리를 공격하지!"
인간족 마법사는 오른손에 파이어볼을 만들어내며, 나를 향해 물었다.
확실히 저놈이 보기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상황일 거다.
다크엘프 진영을 정찰할 목적으로 들어왔는데, 웬 인간한테 공격받은 상황이니까.
"이거 안 보이냐?"
나는 내 어깨에 찬 견장을 가리켰다. 견장에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법사는 문양을 알아보더니 경악했다. 인간이 다크엘프의 편에 붙은 게 놀라운 모양.
근데, 인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의 땅에 병기를 끌고 들어왔으면 당연히 공격받는 거 아니냐.
"그, 그건...맙소사, 다크엘프 쪽에 붙다니. 네놈, 더러운 용병 나부랭이였구나!"
-화르륵!
"전투행동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 네놈 같은 인류의 배신자를 놔둘 수는 없지!"
저 마법사 눈에는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이종족의 편을 드는 용병 같은 걸로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뭐, 지금 시점에서는 크게 다를 것도 없긴 하지만.
마법사가 소환한 파이어볼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느껴지는 마력의 양은, 음, 별 거 없네.
-퍼엉!
대충 팔을 휘둘러 파이어볼을 쳐냈다. 역시 이놈도 그냥 잡몹 수준밖에 안 된다.
하긴, 그동안 내가 만났던 NPC들이 유독 강했던 거니까. 애초에 왕국군 NPC들은 다 약하고.
"무, 무슨, 네놈 정말 인간이냐...?"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완드를 꺼내, 마법사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깡!
마법사는 나름의 방어를 펼쳤지만, 미스릴 완드는 그걸 무시하고 놈을 기절시켰다.
기절한 마법사는 대충 버려두고, 사족보행 골렘을 으깬 다음 핵을 뽑아 정찰대에 가져다주었다.
"그렇군, 이게 인간족의 새 병기란 말이지...정말 고맙다, 또 한 건 했구나!"
"어."
"오늘도 그냥 가는 거냐? 너무 그러지 말고, 가끔은 같이 식사라도 하자."
다크엘프 정찰대원의 권유를 무시하고, 나는 오늘도 내 숙소로 혼자 돌아갔다.
**
삼대 세력간의 무력충돌은 점점 잦아지고, 세력의 중심이 되는 NPC들도 점점 바빠진다.
영약을 먹고도 병세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여왕을 대신하고 있는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대여, 요즘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도움을 주는 건 고맙지만, 조금 쉬엄쉬엄 하지그래?"
"됐어."
"그대,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구나. 역시 그대도 나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지? 다 알고 있다!"
덕분에 엘레노어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쳐낼 일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알기는 무슨, 됐으니까 네 일이나 해."
엘레노어는 내 태도 변화를 느끼고 있는 듯했지만,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여왕의 병세가 길었던 육신의 수명이 슬슬 다해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엘레노어는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전쟁에 가까워질수록 더 바빠질 것이다.
나한테는 아주 잘 된 일이었다.
"후우..."
나는 빽빽한 퀘스트창을 띄우고, 오늘도 싸우러 나선다.
**
작정하고 진도를 빼기 시작하니, 퀘스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엘리트 NPC나 히든 보스쯤 되지 않으면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벤토리에는 퀘스트 보상이 계속해서 쌓였고, 경험치를 얻으며 레벨과 스펙도 조금씩 올랐다.
7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질주] 스킬이나 [약점 간파] 스킬의 레벨도 꽤 성장했고, 전반적인 전투 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마력의 운용 쪽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력강화를 자력으로 깨우치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불안하게 요동치는 마력을 뜻대로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펜던트를 사용해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그 감각을 몸에 익히려고 노력한 지도 벌써 몇 주째다.
랭커들이나 사용하는 최상급 스킬을 8층에서 익히려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인 걸까.
"원리는 슬슬 대충 알겠는데..."
명상을 하며 마력을 움직이다 보면, 혈관이나 신경계와는 다른 모종의 통로가 느껴진다.
커뮤니티의 자칭 정통파 메이지들의 말에 따르면, 이건 모든 생물이 갖고 있는 마력의 회로라는 모양이다.
펜던트를 통해 마력강화를 발동하면, 이 회로를 통해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마력은 그대로 다시 방출되는데, 그렇게 방출된 마력은 곧 내 신체를 감싼다.
마력강화를 발동할 때의 '쿠르릉' 하는 천둥소리와, 마력강화가 제공하는 방호력의 원천이 이것이다.
회로를 통해 방출된 마력이 공기를 떨리게 하고, 몸을 두껍게 감싸며 갑옷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흘러들어오는 마력은 펜던트에 충전된 마력일테고."
그렇다면, 자력으로 마력강화를 하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 회로를 통해 마력을 순환시키면 그만.
하지만 미로처럼 복잡한 경로를 마력이 올바르게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렵다.
내 마력은 항상 진정되지 않은 상태로 격하게 움직이고, 제대로 통제되지도 않고 있으니까.
그냥 근육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마력을 쏟아붓는 거라면 어렵지도 않은데 말이다.
"후우...염병할..."
사실, 마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자체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력이 의지와 마음에 반응하기 때문에.
내 의지와 마음이 모순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거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서브 퀘스트는 오늘 자로 거의 모두 클리어했다. 이제 다크엘프의 서 2장도 끝나간다.
즉, 엘레노어가 다시 깡통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
마지막 남은 서브 퀘스트를 완료하고, 진영 퀘스트 2장을 마무리지었다.
이제 남은 건 보상 수령뿐이다. 나는 8층 보스전을 준비하며 숙소에서 혼자 커뮤니티를 들여다보았다.
이번 층의 보스는 8층 초반에 보았던 나무 골렘의 강화판으로, 핵이 따로 없는 특수한 골렘 타입의 적이다.
정석 공략 방식은 화염 속성 마법을 사용한 원거리 포격전.
마법사 위주로 파티를 꾸린다면 10인 이하의 파티로 공략할 수 있을 만큼 상성을 많이 탄다고 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속성 공격은 [라이트닝 차지]의 전기 속성 하나 뿐이기에, 별로 참고할 만한 내용은 못 된다.
기본 패턴도 나무뿌리를 이용한 속박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순하니, 쉽게 깰 것 같다.
-똑똑.
커뮤니티 창을 닫고 나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미 특유의 기척으로 엘레노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문은 노크 직후 곧바로 열렸다.
"역시, 아직 안 자고 있을 줄 알았다.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길 잘했군."
엘레노어는 내 떨떠름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모처럼 그대가 찾아왔는데, 좀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질 못해서 무척 아쉬웠던 참이거든."
"그러셔."
"정찰대에서 전해달라는 것도 전해줄 겸 해서, 잠시 이야기하러 와 봤다."
엘레노어의 손에는 한 쌍의 장갑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저게 진영 퀘스트 2장의 최종 보상 같다.
저걸 받는 순간 이곳의 NPC들은 다시 깡통이 된다. 생각보다 이르지만, 상관없다.
"그대, 요즘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아 보여. 아직도 이유를 말해주기는 힘든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의 탑에 관한 이야기, NPC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아아, 재촉하는 건 아니다. 그냥...그대가 많이 괴로워 보여서."
"그러냐."
"그래 보여,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엘레노어는 쓰게 웃었다. 그리곤 이내 자신이 방해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하기 힘들다고 해서 계속 참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벽에다 대고서라도 이야기해보면 조금 편해질지도 몰라."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퀘스트 보상인 장갑을 내게 건네주었다.
장갑을 받자마자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엘레노어에게서 느껴지던 강렬한 기척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후후, 좋은 밤이구나."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엘레노어의 표정에서 생동감이 옅어졌다.
7층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평범한 NPC로 돌아간 것이다.
벽에다 대고서라도 이야기해보면 편해질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다 니들 때문이잖아, 이 개 같은 깡통 새끼들아..."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생각나는 대로 말을 토해냈다.
딱히 편해지지는 않았다.
85. 시련의 탑 9층
-오오오오...!
페이즈가 전환된 나무 골렘이 괴성을 내지른다.
처음부터 굉장한 크기였던 골렘은 이제 그 키만 해도 6미터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혼신 스킬과 마력강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내겐 크게 의미가 없는 덩치다.
단번에 골렘의 머리 위로 도약해서, 날아드는 나무뿌리 공격을 모두 무시하고 보스룸의 천장을 박찼다.
이중으로 강화된 각력으로 몸을 날려, 수직으로 떨어지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드드드득!
골렘의 몸에서 무수한 나무뿌리가 솟아나며 사선을 가로막았지만, 내 검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콰과곽!
번갯불이 튀며 골렘의 몸체가 거칠게 양단되고, 핵이 없는 탓에 재생도 하지 못하는 골렘은 그대로 무너졌다.
양쪽으로 갈라진 골렘이 쓰러지고, 잠시간의 딜레이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8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요란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시련의 탑 9층 전이문을 활성화하실 수 있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 : '나뭇잎 귀고리'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낙엽 팔찌', '경험치'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후의 일격 보상 : '고목나무 활' 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과 최후의 일격 보상은 서로 똑같았고, 귀고리와 팔찌엔 둘 다 마법사 착용 제한이 걸려 있었다.
활은 대강 쓸 줄도 알고 착용 제한도 없었지만, 원거리 공격이 필요하면 그냥 쇠구슬을 던지면 된다.
쉬운 보스라서 그런가, 보상이 필드 보스보다도 실속이 없다.
다른 도전자가 없어서 경매장에 올릴 수도 없고, 액세서리 종류라서 방패막이용으로 쓸 수도 없다.
뭐, 이제 와서 이런 걸로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중에 상점에다 팔아야겠네."
인벤토리를 닫고, 9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
9층의 배경 역시 7층과 8층에서부터 그대로 이어진다.
7층은 아직 삼대 세력이 충돌을 일으키기 전, 8층은 삼대 세력이 본격적으로 마찰을 빚기 시작한 후.
그리고 이번 9층은 삼대 세력간에 기어이 전쟁이 터진 시간대다.
그래서인지, 전이문을 넘어서 도착한 엘프들의 대산림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나무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벌목된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꺾이고 부러진 모습이었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불타고 박살 나며 이런 꼴이 된 거겠지. 일단 다크엘프 마을로 가자.
[엘프퀘 9층 전역 지도.jpg]
급하게 넘어갔던 8층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제대로 커뮤니티에서 9층 지도를 찾아놓았다.
이번에도 감각을 헤집어놓는 안개에 가로막히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평범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크엘프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다크엘프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고 보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로 높이 벽을 쌓고, 감시탑과 경비용 골렘을 잔뜩 배치했다. 거기에 지형도 뭔가 바뀐 것 같다.
이건 이미 마을이 아니라 요새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스크린샷으로 본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데, 에픽 퀘스트 때문인가?
내가 공성전에 대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핏 봐도 난공불락으로 보이는데.
"거기, 누구냐!"
요새의 겉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있자, 성벽 위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너는 누구냐!"
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마 마을의 다크엘프 중에서 내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나야."
성벽 위의 다크엘프는 활시위를 붙잡은 채, 인상 쓰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몇 번 표정을 바꾸었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마지막에 지은 표정은 분명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퓽!
그리고 나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
나는 7층에서 리즈멜을 통해 다크엘프의 검술을 습득했다.
그 검술은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다크엘프도 근본은 엘프, 이들의 가장 뛰어난 기술은 결국 궁술이었다.
그래서 나도 검술을 배우고 나면, 겸사겸사 궁술까지 익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크엘프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배울 수 없는 기술이어서.
마력 친화력을 태생적으로 타고나듯, 엘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활을 다룰 줄 알았다.
그건 가르쳐 주려 한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식을 무시하는 명중률과, 이치를 무시하는 궤도를 갖는 엘프의 화살.
하지만 마력감지를 개화하고 초월적인 감각을 손에 넣은 내 앞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턱.
쏜살같이 날아오던 화살을 잡아챘다. 반쯤 본능에 따라 잡아놓고도 이게 뭔가 싶었다.
왜 다크엘프가 나한테 화살을 쏘지?
전쟁이 진행 중이라 예민해져 있는 건 이해하지만, 내 얼굴과 견장의 마크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닐 텐데.
"뭔데."
정말 우연히 나를 모르는 극소수의 다크엘프가 보초로 배치되어 있던 걸까?
-쿵, 쿵, 쿵!
요새를 지키고 있는 골렘들이 움직인다.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벽에 있던 다크엘프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하게 나를 적으로 인식한 모양인데.
"야, 너희 나 몰라? 벌써 까먹었어?"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화살 세례였다.
-티디딩!
날아드는 화실을 마력감지와 직감에 의존해 받아치고 막아 냈다.
그런 한편으로 골렘들이 나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 이거 부숴도 되는 건가, 나중에 지장이 생기진 않겠지.
골렘을 상대할 때 좋은 둔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내고, 긴장을 끌어올리며 대치했다.
-우웅...
그러나 골렘은 내게 접근만 하고는, 공격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뭐지.
성벽 위의 다크엘프들도 조금씩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뒤늦게 알아본 건가?
성벽 쪽으로 다시 다가가자, 다크엘프들은 소리쳤다.
"멈춰라, 움직이면 쏘겠다!"
상황을 모르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멈췄다.
내가 순순히 멈추자, 다크엘프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크엘프 한 명이 폴짝 성벽에서 뛰어내려 내 앞에 착지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검 두 자루를 들고 나타난 것은, 8층 때와 또 살짝 달라진 모습의 리즈멜이었다.
"들어라."
리즈멜은 내게 들고 나온 수련검을 던졌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일단 자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
사선으로 내리그어진 검을 그대로 맞받아친다.
한 번 막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찔러드는 공격에, 검을 맞대며 밀어붙였다.
다양한 검로를 향해 힘을 실으며, 서로의 목을 겨누기 위한 근거리에서의 힘 싸움. 우위를 점하기는 쉽다.
[혼신] 스킬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근력을 증폭시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에 살짝 힘을 빼고,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끔 유지한다.
그러던 중, 리즈멜의 빈손이 검신을 부여잡고 위로 젖히려 들었다.
나도 그 동작에 맞추어 검신 끝을 잡으며 힘 싸움에 대응하고, 동시에 몸을 옆으로 옮겼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검신 끝을 쥔 손을 주축으로 자세를 바꾼다.
검신을 잡고, 검의 폼멜 부분을 둔기로 삼아 머리를 노리는 타격기. 여기서 처음 배운 기술이다.
-카강!
리즈멜은 변칙적인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방어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이 기술을 처음 가르쳐 줬을 때, 함께 가르쳐 주었던 대응 수단과 반격기를 그대로 선보이고 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움직이는 리즈멜의 동작이 조금 느려졌다는 점.
결혼을 한 뒤로는 정찰대 임무에서 한발 물러났다고 했었나.
지금도 전투에 맞지 않는 차림을 한 걸 보면, 오랜만에 검을 들고 나온 것이리라.
"예전 같지 않네."
-카앙!
무뎌진 리즈멜의 검기를 받아내며, 빈틈을 찔러 검을 멀리 쳐냈다.
검을 놓친 리즈멜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툭툭 털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너는 너무 변한 게 없잖아, 애송아."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며 성벽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를 겨누던 활이 모두 거두어졌다.
이제야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겠다. 7층에서 8층 사이엔 20년의 세월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8층과 9층 사이의 시간 차이는 얼마나 날 것인가.
지형조차 바꿔가며 쌓아올린 저 굳건한 요새가 몇 년 정도로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다.
다크엘프들이 나를 알아보고도, 망설이다 활을 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백 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예전 모습 그대로인 거야?"
장수하는 엘프에게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백 년.
"어이가 없다, 정말."
맞부딪힌 검에는 분명히 시간이 묻어나 있었다.
그저 NPC에게 존재하는 배경 설정 따위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의 시간이.
이번 층은 시작부터 만만하지 않구나.
86. 꿈 같은 상황
다크엘프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만, 9층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대 세력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이후이니, 다크엘프들도 이미 인간들과 몇 번이나 충돌했을 테니까.
인간을 좋아하고 귀여워하는 성질은 그대로지만, 인간이 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태.
그렇기 때문인지, '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인간' 이 나타나자 다크엘프들은 무척 기뻐했다.
"세상에, 세상에, 너 정말 그 애니? 그동안 뭐 하고 있다가 이제야 온 거야?"
"조심해, 아직 본인인지 모르잖아! 인간은 백 년이면 죽는다고!"
"에이, 백 년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거겠지."
나를 보고 마냥 좋아하는 다크엘프가 절반, 그리고 미심쩍게 여기는 다크엘프가 또 절반.
그리고 후자의 절반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슬금슬금 가까이 오려고 하고 있다.
언제 봐도 이상할 정도로 인간을 좋아하는 종족이다. 인간과 전쟁 중이라는 기분은 또 어떨는지.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나서 백 년이나 안 나타나길래, 당연히 죽은 줄 알았어."
나를 요새 안으로 데려온 리즈멜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게 이상할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보통 인간족은 이 정도면 다 늙지 않아?"
나도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고민이었는데, 아직 마땅히 생각난 건 없었다.
다른 탑처럼 깡통 NPC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나만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1세대 도전자들도 이런 느낌으로 탑을 올랐을까, 아니면 내가 있는 탑이 특별한 걸까.
"보통은 그렇지."
리즈멜의 물음에 적당히 대답하고, 마력을 흩뿌려 요새 안쪽의 환경을 훑어보았다.
바깥에서 볼 때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는데,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더 장난이 아니다.
이건 뭐 드래곤이라도 쳐들어오지 않는 한은 절대 안 뚫릴 것 같다. 수준이 좀 과한 거 아닌가.
"흥, 네가 보통 애송이가 아니긴 해. 보나 마나 백 년 동안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다가, 어떻게 된 거겠지."
리즈멜은 전혀 늙지 않고 나타난 내 모습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그 불안불안한 검술도 마력도 예전이랑 전혀 달라진 게 없어, 그건 가짜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백 년동안 그대로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마음은 천 년을 살아도 변치 않을 때가 있는 법이야. 특히나, 길을 잃은 자의 방황은 쉽게 멈출 수 없어."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내게 가까이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네 덕분에 많은 인간족을 만나볼 수 있었어. 그러고 나니까, 네가 얼마나 유별난지도 알겠더라고."
그러고 보니, 7층에서 리즈멜과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결국 그 끝은 전쟁이 되었지만, 엘레노어의 계획을 도우며 이뤄낸 약속이었다.
"나는 뭐, 딱히- 인간족이나, 너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네 그런 점이 나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백이십년 동안 많은 인간을 보고 겪어온 리즈멜은, 나의 병든 부분을 잊지 않고- 이 말을 오래도록 준비했을 것이다.
"나로는 어렵겠지만, 엘레노어라면 할 수 있겠지. 사랑하는 사이잖아."
근데, 첫눈에 반해서 어쩌고 하던 그거 다 구라였는데.
백이십년동안 믿고 있었구나.
이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 잘못이다.
**
어쨌거나, 요새 안으로 들어왔으니 빠르게 퀘스트 진도를 빼기로 했다.
다크엘프들의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모두 쳐내고, 곧바로 엘레노어를 만나러 갔다.
리즈멜도 처음부터 나를 엘레노어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라, 시간 낭비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다크엘프 마을, 르우엘의 그루터기 전체가 요새화된 만큼 왕족이 지내는 거주공간도 무척 거대해졌다.
예전에는 그냥 다 똑같은 나무 아파트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성 같은 것이 생긴 거다.
성에는 따로 경비 병력이 있었고, 나는 순조롭게 그걸 통과해 엘레노어를 마주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엘레노어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그런 말을 내뱉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이 8층에서 골골거리던 것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만, 9층의 퀘스트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나았을 줄 알았는데.
다크엘프 여왕의 상징, 세계수에 간섭할 힘이 있다는 왕관은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이렇게 선명한 꿈은 또 처음인데...환상 마법?"
"환상 아니야."
"맙소사, 이젠 말까지 하는군. 만질 수도 있나?"
엘레노어는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쓸었다. 가만히 두자, 손은 목선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더 천천히 내려가, 내 허벅지에 닿더니 점점 안쪽으로-
"이게 미쳤나."
-가게 둘 수는 없지, 백 년이 지났다더니 이 년은 변한 게 없네.
"어어, 정말 그대인가?"
내가 손을 확 쳐내자, 엘레노어는 그제야 눈앞의 광경이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백 년이나 지났는데, 인간족인 그대가 어떻게? 정말로 그대인가? 다시 돌아온 건가?"
내 마음을 무엇보다 크게 뒤흔드는 상대, 역시 엘레노어를 상대하는 건 거북하다.
뭐라고 설명을 뱉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
엘레노어가 알아서 진정하기까지, 그저 가만히.
**
여왕이 된 엘레노어가 자리하고 있는 알현실은 무척 넓다.
일단 성이기도 하고, 여왕이기도 하니까 이런 곳에 있는 모양인데, 공간 낭비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신하라고 할만한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옥좌와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있을 뿐.
그야말로 공간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엘레노어는 이 공간을 잘 나눠 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좀 놔."
"싫다."
가만히 두니 진정을 하기는커녕, 나한테 매미처럼 바짝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으니까.
다른 다크엘프들도 날 보고 막 접근해 오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이렇게 닿아 있지 않으면 실감이 안 난단 말이다. 그대가 정말 내 곁에 있다는 게."
나는 인상 쓰며 달라붙어 있는 엘레노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뭔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마른 고목을 연상시키던 전 여왕과 닮은 눈을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여왕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레노어도 전쟁을 겪으면 바뀔 것이라고.
"약혼을 깰 명분이 필요할 때 나타나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약혼을 깨 주고 훌쩍 떠나버렸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한 시기에 나타나서는, 우리를 한껏 돕고 또 훌쩍 사라져버렸지."
"그리고 이제는 내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시기에,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지 않았느냐."
내 어깨를 꼭 끌어안은 엘레노어의 팔이 살짝 떨렸다.
"두 번까지는 우연이라고 쳐도, 이 정도면 보고도 못 믿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그것도 그렇겠지 싶었다. 나는 그냥 퀘스트 라인을 따라왔을 뿐이지만.
내가 엘레노어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엘레노어의 중요한 순간만을 골라서 시련의 탑에 배치한 거다.
"그렇겠네."
NPC의 시점에서 보는 도전자는 너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고, 굉장한 존재겠지.
어쩌면 엘레노어가 내게 강한 호감을 보이는 것도, 시스템이 정해놓은 결정 사항일지도 모른다.
"후후, 어떻게 생긴 것까지 딱 내 이상형인지 모르겠다. 그대라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스템에 의해 정해진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경 설정일까.
적어도 내가 들여다보았던 엘레노어의 과거는, 리즈멜의 검에서 느껴졌던 세월은.
"그러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몰라."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창작된 배경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
엘레노어는 그러고도 한동안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고, 결국 내가 억지로 떨쳐내야만 했다.
"그대도 정말 너무하구나, 아직 백 년 치를 보충하기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그래서 백 년 동안 붙어 있겠다고?"
"당연한 거 아닌가, 정혼자가 백 년 동안 얼굴도 안 비춰서 쓸쓸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는 음흉한 표정으로 웃으며 제 아랫배를 툭툭 건드렸다. 또 지랄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에픽 퀘스트 진행을 위해 뭔가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전쟁 상황에 내가 도울 일이라면 뻔하지, 원래 퀘스트 라인도 이런 식이니까.
자신이 선택한 진영의 지도자에게 임무를 받고, 8층에서처럼 전선에 나서 활약하는 것.
"아아, 물론 있지. 오직 그대만 해줄 수 있는 일이야."
엘레노어도 결국 퀘스트를 위해 존재하는 NPC다. 결국 흐름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쓸데없이 오래 붙어있지 말자, 이번에도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보상만 받는 거다.
그런데,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정된 퀘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나랑 동침해 주겠나?"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엘레노어의 헛소리가 그대로 퀘스트로 등록되었다.
"허?"
이게 무슨 지랄이지?
87. 리베르타스의 별
그동안 내가 에픽 퀘스트에 파악한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하나,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둘, 에픽 퀘스트는 그 원본이 되는 퀘스트와 큰 진행 방식은 다르지 않으나, 난이도가 매우 높다.
셋,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시스템이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 따라 다르게 지급한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해서 한 줄로 평가하자면,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NPC들의 자아가 보통보다 강한 만큼,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반응과 서브 퀘스트를 낳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에픽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서사적이다.
삼대 세력의 갈등 속에서 태어나는 서사에 내가 직접 개입하는 형태.
9층의 광경이 커뮤니티에서 보던 것과 여러 차이가 있는 것도, 내가 이들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퀘스트는, 아마 내 존재가 엘레노어의 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여왕의 명령을 수행하여, 그녀를 도우십시오.
[퀘스트 목표]
1.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기(진행 상황에 따라 변경됩니다).
내가 깨 왔던 어떤 퀘스트보다 그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표가 명령 완수 하나뿐이라니.
물론, 9층의 진영 퀘스트 내용은 원래 이렇다. 그 명령이 다양한 서브 퀘스트로 분화되어서 그렇지.
그런데 엘레노어가 내게 내린 명령은 어딜 봐도 '동침' 이었다.
물론 퀘스트 목표가 '엘레노어와 뜨거운 밤 보내기' 이딴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황이나 맥락을 보면 그게 완수 조건일 것 같단 말이지.
"아, 이 정도로 왜 그러느냐! 진짜 딱 손만 잡고 잔다니까!"
"퍽이나 그렇겠다!"
"원래 손잡고 자다 보면, 다른 곳도 잡을 수 있고 그런 거다!"
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상이 뭐건 간에 이건 안 된다.
물론 엘레노어는 매력적이다. 다크엘프들에 대부분 그렇지만, 내가 눈으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섹시하니까.
그래서 안 되는 거다. 성욕을 떨치지 못하고 육체관계를 맺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이미 7층에서 다소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거기에 육체적인 교감까지 더해지고 나면, 엘레노어가 깡통이 된 이후를 견딜 수 없을 거다.
"그냥 곁잠만으로 괜찮다니까!"
어떻게든 엘레노어의 바람을 바꿔야 한다.
**
우선은 엘레노어가 왜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한 차례 기억을 공유하고 사념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나는 엘레노어의 눈만 봐도 대강의 감정을 알 수 있다.
지금 엘레노어의 눈은 어딘가 이상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반짝이고 있던 별빛이 크게 사그라졌다.
"요즈음 잠자리에 들기가 무척 어렵다."
엘레노어는 나와 한참 간 씨름한 뒤에야, 간신히 진심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대가 떠난 이후, 무척 오래도록 전쟁을 지켜보았다. 숲쟁이 놈들, 그리고 인간족 왕국, 많이도 죽고 죽였지."
"약혼을 깨고 숲쟁이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할 때는,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렸던 거야."
"언제든 눈을 감으면 망자들의 비명이 들려, 지난 백 년간 스러져간 동포들의 목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질 않아."
엘레노어는 전대 여왕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을 겪으며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당한 싸움, 정당한 보복,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되갚으려 한 대가겠지."
그리고, 전대 여왕과 똑같은 언어를 그 입으로 자아내고 있었다.
"방식이야 어쨌든, 대화로 풀려고 했던 어머니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정당함과는 관계없이 활시위를 놓은 순간, 함께 앉아 대화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라고.
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백 년이라니, 내 평생을 쏟아야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 거다.
언제나 제 욕망이 바라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 엘레노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시간.
내가 걸음 한 번으로 그냥 지나쳐 버린 시간이- 엘레노어의 눈에 깃든 별빛을 흐리게 한 거다.
"물론, 그렇다고 그 재수 없는 왕자 놈이랑 혼인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왜, 후회하는 거 아니었어?"
"그놈이랑 맺어졌으면, 이렇게 그대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엘레노어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흐려졌던 별빛이 조금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백이십 년 전부터,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어. 쉬이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만은."
"구태여 비유하자면, 생기가 돈다고 해야 할까."
"그대가 없는 동안은 항상 죽어 있는 듯했고, 그대와 함께 있는 동안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지."
엘레노어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후, 너무 이상한 말인가?"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그랬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그대, 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그 혼욕탕에서, 엘레노어는 내가 퀘스트 창을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
일반 NPC들은 눈앞에서 대놓고 시스템 창을 보고 있어도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그냥 혼자서 넋 놓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엘레노어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내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시련의 탑의 존재를 엿보았고, 내가 모종의 시련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이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인벤토리를 이용해 상식을 벗어난 전투법을 써도, 공간 마법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게 NPC 아닌가.
마력도 못 다루는 놈이 허공에서 마구 무기를 뽑아내 휘둘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메르세데스와의 싸움에서는 마력 운용을 깨우친 상태였기에, 공간 마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하이엘프 기사 놈과 처음 싸울 때는, 의문을 가질 만도 했는데 말이다.
애초에 내 전법을 보며, 무기를 얼마냐 많이 다루는 거냐고만 지껄여댔었지.
마력 운용이나 마법에 대해 무지한 에르웬 정도만이 '아이템 박스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내가 정리한 에픽 퀘스트의 특징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틀렸다.
8층에서 에픽 퀘스트의 시작을 끊은 건 에르웬이었다.
리즈멜이야 그렇다 쳐도, 에르웬은 절대로 엘리트 NPC가 아니다.
그냥 흔한 대장간 NPC일 뿐인데도, 엘리트 NPC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픽 퀘스트가 완료되면, 이들은 모두 원본대로 자아를 상실하고 깡통이 되어버린다.
즉, 에픽 퀘스트가 모든 NPC들에게 고도의 자아를 부여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인간에 가까운 면을 갖고 있는 최상급 엘리트 NPC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엘레노어는 퀘스트가 완료된 이후에도 그나마 덜 기계적인- 불쾌한 골짜기 수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런 엘레노어가 에픽 퀘스트를 통해 더 강한 자아를 얻은 결과가, 시스템의 인식인 거라면?
"그대여, 왜 그러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깡통이 조금 덜 깡통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터.
하지만, 만약 엘레노어가 시스템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라면- 털어놓을 수 있는 거 아닐까?
내가 그동안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던 건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털어놓아 봤자 NPC들은 듣지도 못하니까. 오픈 커뮤니티에서도 그랬었다.
[걍 퀘스트 NPC랑 말할때는 롤플레잉 한다고 생각하셈]
사람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NPC를 상대로, 시련의 탑에 대한 주제를 막 말하면 안 된다고.
시스템에 존재하는 모종의 차단책으로, 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NPC는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못 듣거나,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듣거나, 이야기 자체를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면, NPC의 설정이 리셋되어 버린다.
리셋되는 설정의 정확한 범위는 모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
나는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퀘스트 창을 가볍게 흘겨보며, 나는 말했다.
"진짜 손만 잡고 자는 거다."
88. 동침
사실 엘레노어는 생각보다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시도때도 없이 추행을 시도하고, 동침하자며 몸을 들이밀긴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결국 포기한다.
그러니 정말로 손만 잡고 자자고 약속한 이상, 이상한 짓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아닌가?
솔직히 확신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엘레노어가 개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힘으로 막으면 된다.
동침 제의 자체도 불면증을 해결해 보고자 한 것이었으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아직 이런 걱정을 할 때는 아니다. 잠은 밤에 자는 거고, 지금은 아직 한창 낮이니까.
이후에는 엘레노어에게 삼대 세력이 얽힌 전쟁의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었다.
우선, 백 년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한 인간족 왕국군이 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엘프에게 선전포고했다.
듣기로는 엘프가 자리 잡은 대수림이 인간족 왕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나.
다만 그간 실효지배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엘프를 몰아내고 숲을 차지할 생각이라는 것 같다.
문제는 하이엘프의 대산림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다크엘프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왕국군은 하이엘프와 다크엘프를 싸잡아 자신들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이종족 세력으로 칭했다.
다크엘프와 하이엘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리상 먼저 공격받는 것은 당연히 다크엘프, 상황을 보면 엘프끼리 연합해서 왕국군을 막아야 할 테지만.
이 미친 혐성 개씹좆프 새끼들은 연합은 커녕, 뜬금없이 다크엘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다크엘프만 영문도 모른 채, 선전포고 없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물론 명분은 우리 쪽에서 먼저 주었지,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뿐 전쟁은 그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그렇겠지,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거라면 엘레노어가 이렇게까지 닳아빠지진 않았을 테니.
"하지만 그래도 숲쟁이 놈들의 선전포고는 조금...이상한 점이 많았지."
뭐, 백 년간의 전쟁이니 이래저래 엉킨 지점이 많으리라. 이 정도면 원래의 명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솔직히, 엘프라면 모를까 인간 왕국이 백 년이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부터 평범하진 않다.
다크엘프 진영을 두 쪽에서 다굴하는 형태가 아니라, 셋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그대...싸우러 갈 생각이구나?"
엘레노어가 내 생각을 바로 눈치채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9층의 왕국군은 백 년간의 발전이 쌓인 덕택에 7층, 8층 이상으로 강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엘레노어나 메르세데스 급으로 강한 전력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균형이 안 맞으니까.
이미 성장 수준은 충분하기에, 꼭 그 전력과 맞서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싸우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백 년 전보다 더 강해졌을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습지만, 죽지 마라."
내 몸에 밴 피 냄새를 좋아하던 엘레노어도, 백 년이 지나니 이런 소리를 다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
전쟁은 백 년간 이어졌을지라도, 전투가 백 년간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요새 외에도 다크엘프의 영역은 더 있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국지전 같은 게 드문드문 벌어지고 있다 들었다.
물론 적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이 요새를 함락시키는 거니까, 뭐가 됐든 이쪽으로 온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정찰대의 역할은 그들을 한 발 먼저 발견해서 받아치는 것. 나도 그 역할을 함께 맡기로 했다.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안개에 방해받지 않는 구역까지 나오자 곧바로 적들이 보였다.
깃발을 보니 왕국군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구성 인원이 어쩐지 이상했다.
"뭐야 저거, 좀비?"
언데드인지 몬스터인지, 하여튼 사람은 아닌 것들이 군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니, 따져보자면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았다.
적진에 마법사가 몇몇 보이는데, 아무래도 특수한 방식으로 조종하거나 사역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백 년 동안 전쟁을 이어오려면 인적 자원을 아낄 방법을 찾아야 했겠지.
몬스터를 잡아다가 사역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병사뿐만이 아니라 병기까지 아낄 수 있을 거다.
"마법사는 얼마나 되려나...어디."
나는 일단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시도했다.
-키잉!
그런데, 웬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감지가 차단되었다. 동시에 몬스터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그에에으엑!
감지를 차단하는 모종의 수단을 마련해 둔 건가. 기습 공격은 글렀네.
"■■■■, ■■■!"
왕국군의 마법사가 정체불명의 주문 같은 것을 외치자, 몬스터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존재를 인지하고 전투태세로 들어간 거겠지. 좋아, 어디 해 보자.
검과 방패를 장착하고 앞으로 나섰다. 몬스터 부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퍼걱!
가볍게 발길질해 선두에 선 몬스터를 멀리 걷어차 날려버렸다.
날아간 몬스터는 그대로 나무에 여러 번 부딪혀 나가떨어졌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왔다.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 몬스터를 날려버렸는데, 멈추려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마법사들이 상황 인식을 못 했거나, 인식했지만 몬스터를 멈추지 못하거나, 뭐 그런 거겠지.
군대라길래 뭔가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촤악!
이어서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며, 방패로 밀쳐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어차피 다대일의 싸움, 받아치기보다는 이렇게 파고들어 섬멸하는 게 낫다.
요즘 레벨이 통 오르지 않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잔뜩 사냥해 보겠네.
**
레벨은 이번에도 안 올랐다. 역시 층수보다 레벨이 너무 높은 것 같다.
몬스터 부대의 숫자가 백을 훌쩍 넘겼는데도 이 모양이니, 한동안 레벨업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레벨업은 잘 안 되고 있어도, 개인적인 단련으로도 조금씩 스펙을 올리고 있으니까 큰 상관은 없다.
그렇게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난 뒤에는, 요새로 돌아와 엘레노어와의 동침 준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아무튼 잘 준비를 했다. 일단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왔으니 목욕부터.
전시 상황이지만 다크엘프의 욕탕은 여전히 훌륭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욕탕이 전체적으로 커진데다가, 탕에 약초 같은 걸 풀어놓은 탓인지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아, 다크엘프의 혼욕 문화도 여전했다.
인간족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알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다가와서 여러모로 곤란했다.
아무튼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마침내 성 안의 침실에서 엘레노어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
일단 승낙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엘레노어가 저런 네글리제 차림만 아니었어도 별로 거리낄 건 없었을 텐데.
"자, 그대도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라. 내 침대는 무척 편하다고."
"어, 음."
"그렇게 겁먹지 말고, 정말로 손만 잡고 잘 거라니까."
엘레노어의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나는 결국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손만 잡고 잔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어는 눕자마자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어차피 밤중에 습격이라도 일어나면 곧장 일어나야 한다, 남녀사이의 일을 치를 시간도 없어."
하긴, 전시 상황에 군주가 느긋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겠지. 아마도.
-훅.
엘레노어가 손짓하자 방 안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나도 순순히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긴 했지만, 이대로 그냥 잘 생각은 없다.
이대로 명상이라도 하며 마력을 굴릴 셈이다.
정말로 딱 손만 잡고 내 옆에 누운 엘레노어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대여."
"왜."
"그대는 정말 인간인가?"
"그런데."
"인간은 백 년밖에 못 사는 거 아니었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그렇구나."
엘레노어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묻지 않는다면 나도 말할 생각은 없다.
낮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엘레노어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NPC라는 사실을 떠나서, 이게 과연 엘레노어에게 말해도 좋은 일인가 해서.
내 심정 자체는 이미 8층을 떠나오며, 자아를 잃은 엘레노어에게 한 번 토해내듯 말했었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딱히 편해지는 건 없었지.
그렇다면 이렇게 자아가 있는 엘레노어에게 말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이트 엘프의 습성을 강하게 물려받은 엘레노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엘레노어는 자유를 사랑한다. 무언가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했다.
그런 엘레노어에게, 너는 탑의 시스템에 종속된 NPC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쌔액, 쌔액.
엘레노어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붙잡은 손과 맞닿은 어깨의 온기가 따듯하다.
원래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던 명상은 완전히 깨졌고, 나는 천천히 수마에 빠졌다.
그리고, 실로 몇 년 만에- 긴 꿈을 꾸었다.
89. 거울상
화살과 마법이 날아다니고, 불이 번지며 숲이 타오른다.
인간과 엘프가 한데 뒤섞여 서로를 베고, 찌르고, 쓰러트리며 목숨을 빼앗는 광경이 눈앞을 스쳐 갔다.
별 감흥 없는 광경이었다. 비극적이라고 느끼기에는 척 보기에도 너무나 조잡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싸우는 이들은 얼굴 없는 마네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무기는 영화 촬영을 위한 소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늘도 나무도 별빛도 모두 조잡한 영상을 띄워 놓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치한 저질 CG 영화를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상상력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이딴 꿈을 만드는 거지.
맥락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겠고, 그냥 무진장 길기만 하잖아.
원래 꿈이라는 게 그런 거긴 하지만, 몇 년 만에 꾸는 꿈의 내용이 이따위니까 뭔가 기분이 나쁜걸.
"이거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야."
내 몸조차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꿈은 이어졌다.
끝없이 조잡한 영상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보다 못해 진이 빠진 내가 꿈속에서마저 잠들게 될 때까지.
그리고 꿈속에서 한 번 더 꿈에 빠져든 그 순간, 내 눈은 저절로 트였다.
"좋은 아침이다, 그대여."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
엘레노어는 내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 것치고는 아직 피곤해 보이는 눈이지만, 피로의 이유가 비단 불면증 때문만은 아닐 거다.
고작 하루 푹 잔 걸로 풀리기에는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겠지.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그대도 무척 푹 자더구나? 그렇게 빼던 것치고는 내 품이 편했나 보지?"
놀랍게도 사실이다. 엘레노어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오랜만에 깊이 잠들긴 했다.
생전 안 꾸던 꿈을 다 꾼 걸 보면, 평소와 다른 잠자리가 영향을 미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깊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아니, 개꿈이나 꿨는데."
엘레노어의 말을 대충 받아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몇 시간이나 잠을 자느라 시간을 날렸으니, 남은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써야 하지 않겠어?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는 엘레노어의 소망,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
하룻밤 같이 잠을 자 준 것만으로 클리어되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요지는 엘레노어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이다.
밤에는 엘레노어와 같이 자주고, 낮에는 엘레노어의 스트레스 요인인 전쟁의 부담을 덜어주도록 하자.
8층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를 것 없다. 매일매일 전장을 누비면서 적을 쓰러트리는 거다.
"꿈이라...나도 간밤에는 꿈을 꾸었지. 오랜만에 깊이 잠든 덕일까, 별난 경험이었어."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엘레노어를 두고 무장을 갖추었다.
**
몬스터를 사역해 편제를 갖춘 왕국군 병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내 스펙이 너무나도 높은 탓에 위기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상대하면서 결코 만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왕국군에는 일반적인 마법사만이 아니라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사역한 몬스터를 조종해 공격할 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마법과 작전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아군을 끼고 싸우는 게 아니라, 혼자 적진에 난입해 싸우는 타입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몬스터들을 잔뜩 돌격시켜 억지로 발을 묶고, 대규모 섬멸을 위해 사용하는 마법을 나 하나에 쏟아붓는 방식.
다수의 주술사와 흑마법사들이 동시에 속박과 디버프를 중첩하니, 나로서도 그 대응은 쉽지 않았다.
사역한 몬스터를 이용해 마력감지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도 있어서, 몇 번이나 강력한 공격을 허용했다.
뭐, 말했듯이 위기라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맞으며 키운 [주문 내성]과 [대마법 내성] 스킬이 착실하게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까.
거기에 화염, 냉기, 전격 계열은 내성 덕분에 이중으로 데미지가 반감되기도 하고.
주술사의 독 계열 공격은 반감되다 못해 아예 무효화되는 지경이었다.
심지어 이 짓거리를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간 갖추지 못했던 내성도 새로 생겼다.
[패시브 스킬 : 저주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자체는 꽤 흔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얻지 못했던 저주에 대한 내성.
저주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한동안 1레벨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야, 그거 좀 더 해봐."
"예, 예?"
"저주 더 해보라고."
흑마법사 하나를 살려서 잡아두고, 나에게 계속 저주를 쓰도록 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잡아둔 흑마법사의 밑천을 탈탈 털어서 [저주 내성]을 3레벨까지 올린 것이 오늘.
9층에 진입한 지 이 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에픽 퀘스트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고 있었다.
**
엘레노어는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잤지만, 어쩐지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으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대 덕분에 요즘은 아주 살 맛이 나는걸?"
"안 그래 보이는데."
"그대가 잘못 보고 있어서 그런 거다. 나는 오히려 그대가 걱정이야."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눈이 달렸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엘레노어의 눈에서 불타오르던 별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껴진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기억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눈치가 좋아진 걸까.
엘레노어의 마음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정말이야, 그냥 조금...고민이 많아져서 그렇다."
이해는 한다. 내가 열심히 날뛰고 있음에도, 전쟁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지금도 매일같이 적은 숫자지만 사상자가 생기고 있다.
나에게는 그저 NPC일 뿐이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소중한 자신의 동포와 백성일 터.
"왕관의 무게에 목이 나갈 것 같아."
지친 듯 말하는 엘레노어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지만, 그 표정만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염병할 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지 않는 한- 이 퀘스트는 깰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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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휘젓고 다닌 것은 다크엘프의 영역 근처 일대뿐이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이를테면 다른 세력의 영역 안쪽까지 파고들어서 공세를 펼친 적은 없었다.
상대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거대한 세력,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혼자서 전부를 압도할 수는 없다.
그냥 숫자만 많다면 모를까, 엘리트 NPC나 메르세데스 같은 오버스펙 개체도 세력별로 존재하는 마당이니.
하지만 이젠 달리 방법도 없고, 이 일대를 지키며 싸우는 것만으로는 더는 성장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뭐, 어쩌겠어.
갖다 박아야지.
노려볼만한 상대는 역시 한 번 밑천을 확인한 하이엘프 진영이다.
하이엘프 왕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높게 쳐도 메르세데스보다는 약할 거다.
그 메르세데스부터가 상식을 두어 단계는 벗어난 스펙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밖의 다른 엘리트급은 그 기사 놈 수준일 테고, 메르세데스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다.
7층에서의 결투로 실력은 충분히 봐 두었고, 스펙은 이제 마력강화로 따라잡을 수 있으니.
나는 장비를 점검하고, 채비를 갖춘 뒤 곧바로 하이엘프의 영역을 향해 걸음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을 맞닥뜨렸다.
장소는 다크엘프와 하이엘프의 영역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대수림의 외곽 지역.
내가 7층에 올라와 처음으로 엘프를 마주쳤던 그 부근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사실, 얼굴 자체는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신체적 특징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한쪽 귀가 짧게 잘려나간 하이엘프 여자.
메르세데스.
하이엘프 최강의 NPC가, 어째서인지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나무둥치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뭐야 저게, 저년이 왜 여기 있지.
맞붙으러 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장소에서 대뜸 혼자 자빠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저 차림은 또 뭐란 말인가. 결투 때의 정복도, 예전에 봤던 갑옷 차림도 아니다.
백 년이 지나면서 뭔가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저만한 녀석이 왜 이렇게 굴러다니는 건지.
이유가 짐작도 안 간다.
심지어 내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고 뻗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하게 지친 모양인데.
-저벅, 저벅.
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검을 한 손에 쥐고 메르세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
메르세데스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더니, 재빨리 검과 방패를 뽑아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내가 입을 떼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간격에 들어간 순간 바로 자세를 잡았다.
그 미친 스펙이나 전투감각이 어디 가진 않았나 보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 네놈은...!"
메르세데스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한테는 몇 주 전, 그리고 녀석에게는 백이십 년 전.
그 귀를 잘라버렸던 때보다도, 더욱 증오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90. 메르세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