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메르세데스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꼬락서니길래, 대뜸 덤비기보다는 말을 걸어 본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칼빵 한대 놓고 시작할 걸 그랬다.
눈깔이 완전 살인마 눈깔이다. 증오며 분노며 살의며 격한 감정은 죄다 저기에 고여 있다.
"네놈이 어떻게, 인간 주제에...역시 인간이 아니었던 건가...!"
그 와중에도 내가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는 의문을 품고 있다.
눈깔은 완전 맛이 갔지만, 인지능력이나 이성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인데-
"아니,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어...!"
-라고 생각하자마자 이성을 포기해 버리는군. 나도 긴장 속에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쿠르릉, 하는 마력강화 특유의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르세데스의 몸에 마력의 빛이 휘감겼다.
예전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마력강화를 쓴다. 이렇게 되면 이쪽도 아낄 필요는 없겠지.
-쿠르릉!
나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곧바로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검을 받아내었다.
조건도 동등한 덕분에 제법 잘 받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강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하긴, 서로 마력강화가 없는 상태에서의 기본 스펙부터 저쪽이 위였으니까. 당연한가.
게다가 템빨인 나와 다르게 마력강화의 수준 자체도 저쪽이 더 높은 것 같다.
-콰광!
메르세데스가 내 검을 위로 쳐올림과 동시에, 폭발이 발생했다.
서로의 마력이 부딪히며 생긴 반발력이 만들어낸 여파다. 마력강화 사용자끼리는 흔한 일이라던가.
검을 쳐낸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카이트 실드 형태를 한 방패의 끄트머리로 내 가슴께를 노렸다.
뾰족한 방패인 만큼 저 공격의 위력은 육중한 도끼질에 가깝다.
-콰각!
내 방패로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막아낸 뒤, 반댓손의 검을 휘둘러 목을 노린다.
메르세데스는 날밑을 이용해 익숙한 듯 막아냈고, 그대로 손목과 어깨를 놀려 소드 레슬링으로 이어갔다.
근력에 차이가 있는 만큼, 이런 대치가 이어지면 당연히 내가 불리하다.
[혼신]
버프를 발동해 근력을 증폭시켜, 억지로 대치 구도를 깨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놀고 있던 다리를 휘둘러, 기습적으로 킥을 날렸지만- 바로 막혔다.
메르세데스는 다시 방패를 휘둘러, 뻗어진 내 다리를 그대로 내려찍으려 시도했다.
-콰앙!
단순한 공격이었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패가 내려찍은 지면이 쩌적, 갈라졌다.
자세가 낮아진 메르세데스를 향해 측면에서 검을 휘둘렀지만, 바로 방패에 막혔다.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거리를 좁혔고,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찔러넣었다.
나도 방패를 이용해 막아낸 뒤, 다시금 이어진 초근접에서의 힘겨루기.
"눈깔 봐라."
여전히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메르세데스에게 한 마디 던져 보았다.
"흐으!"
메르세데스는 이를 악문 채 어정쩡한 소리를 뱉으며, 격하게 몸을 비틀어 공격했다.
대체 왜 이렇게 흥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잘 된 일이다.
저번 결투 때와 비슷하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린 탓에 움직임이 과격하고 단조로워졌다.
이건 무조건 내가 이긴다.
**
나도 7층 때보다 여러모로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메르세데스는 버거운 상대다.
근력과 순발력 양면에서 월등하고, 기본적인 검술 실력도 우위, 마력강화의 숙련도마저 역시 압도적.
하지만 승패는 그런 스펙적인 우월함에서 갈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결투 때와 똑같은 결말로 이어졌다.
-콰앙!
내 방패에 얼굴 측면을 거하게 얻어맞은 메르세데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내 마력강화는 백 퍼센트 아이템에 의존하는 템빨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월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속력, 내 체력과 지구력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는 싸움이 이어지고 부상이 늘어나며, 점점 마력강화를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현 시점에 이르러서 그 출력은 초반의 절반 정도, 내 제한적 마력강화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렇게 스펙이 거의 동등하게 맞춰졌으니, 내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를 추격해 허리춤의 손도끼를 휘둘렀다.
"크윽!"
막아내지 못하고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한 메르세데스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내겐 [혼신]과 [약점 간파] 같은 다양한 스킬, 그리고 투척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술이 있다.
거기에 부상을 입으면 더 강해지는 최상급의 전투 지속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메르세데스가 단기 결전으로 끝낼 수 있는 스펙 차이를 갖지 못한 시점에서,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이, 더러운...더러운 인간 주제에, 죽인다, 반드시 죽이겠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악을 쓰고 덤벼드는 이유는 뭘까.
"못 죽인다니까."
-콰직!
둔기를 휘둘러,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한쪽 팔을 쳤다. 부러지는 손맛이 있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덤벼들었다.
역시 상태가 이상하다.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제 몸을 신경 쓰지도 않고 덤벼온다.
처녀 엘프의 귀를 잘라버린다는 게 무척 심한 일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원한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아까 전에는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쾅!
발길질로 메르세데스를 멀리 날려버렸다. 허리부터 나무에 부딪힌 녀석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마나를 전부 다 썼는지 마력강화도 끊겼고, 사지 중 멀쩡한 부위가 한 군데도 없다.
나처럼 재생 능력이나 HP에 따른 시스템의 보정도 없는 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거다.
-드드득, 드득!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부러진 팔 대신 어깨로 몸을 지지하고 억지로 일어섰다.
검을 쥐고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비틀거리면서도 내게 달려든다.
"아아아아아아!!"
이제는 아예 악쓰며 소리까지 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발길질했다.
-쿵!
또 한번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는 이마와 무릎으로 땅을 문대가며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지저분해진 얼굴에서 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비탄과 원망.
흙먼지로 칠갑된 메르세데스의 뺨에서는 이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네놈 때문이다, 다 네놈 때문이야...!"
이렇게까지 누구한테 원망받아 보는 건 정말로 처음이다.
솔직히 당황스럽다.
아니, 좀 이유는 말해주고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해일 수도 있잖아.
"네놈 때문에, 전하는...!"
오, 마침 맥락을 파악할 키워드가 나왔다.
전하라면 그 하이엘프 왕자 놈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놈에게 딱히 뭔가 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처음 만났을 때 팔을 꺾어버린 거랑, 여자 뒤에 숨느냐고 야유한 것 정도?
이 정도로 원망받을 만큼 거창한 짓은 전혀 안 했다. 귀 자른 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케이, 일단 제압한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자.
"좀 자라."
나는 그대로, 메르세데스의 명치에 플라잉 니킥을 꽂아 기절시켰다.
**
나는 기절시킨 메르세데스를 다크엘프 마을로 끌고 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려면 일단 정신을 차리도록 회복을 시켜야 할 테고,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니까.
정확히는 회복은 시킬 수 있는데, 회복돼서 일어난 이 녀석이 날뛰면 다시 제압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펜던트를 재충전하기 전에는 다시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메르세데스는 침상에 눕혀진 후, 세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여, 여기는..."
"어, 일어났냐."
정신을 차린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검을 뽑으려 했다.
"움직이지 마라, 혹시 또 지랄발광할까 봐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서 마법을 잔뜩 깔아 놨거든."
당연하지만 검과 갑옷은 싹 다 압수해 놨고, 침상 근처에는 제압용 마법을 잔뜩 깔아 놓은 상태다.
엘레노어는 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죽일까 했는데, 이것저것 궁금한 게 좀 생겨서."
"네놈에게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다. 죽여라."
"안 물어봤는데 니가 먼저 지껄였잖아. 뭔진 모르겠는데, 내 탓이라며?"
아무래도 말실수였는지, 메르세데스는 '큿'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붙잡힌 엘프 여기사가 '큿, 죽여라' 라고 하는 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몰랐는데, 예전 그 왕자놈이 왕위를 계승했다며? 네가 말한 전하가 걔 맞지?"
"..."
"나 때문에 그 전하가 어떻게 된 것처럼 말했잖아, 엘레노어한테 그 얘길 하니까 그러더라고."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다.
"다크엘프에게 선전포고를 한 건 그놈이라고, 엄청 뜬금없고 이상한 타이밍에 싸움을 걸었다던데."
두 엘프 진영은 8층 시점에서부터 사실상 전쟁 중이었지만, 정말로 전쟁이 선포된 것은 왕이 바뀐 이후라고 들었다.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건 선대 왕이 아니라, 그 어설퍼 보이던 왕자놈이었던거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서로 간의 교류가 끊긴 지도 백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 놈과 약혼 관계로 오래 알고 지냈던 엘레노어의 말에 따르면, 무척 황당했다고.
"네 꼬락서니도 어째 좀 이상하고, 너희 쪽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거 아니냐?"
메르세데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막 던져 봤는데,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다.
"어디가 내 탓인지, 좀 들어 보자."
메르세데스도 분명 이 에픽 퀘스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91. 계승된 것
나한테 사람을 심문하는 기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메르세데스 본인이 뭐든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었기에, 설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전하가 이상해져 버린 거야...!"
이야기의 시작은 당연히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 이 부분은 대충 듣고 흘려넘겼다.
"원래 전하께선 평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분이셨다. 타고난 성정부터 싸움과 분쟁에는 맞지 않으셨지."
"걔가? 선전포고를 했는데?"
"네놈은 전하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 거다!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셨어!"
아차, 내 욕은 잘 넘겼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바로 딴죽을 걸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 딴죽에 제대로 긁힌 메르세데스는 그 왕자놈이 얼마나 온화하고 상냥한지 떠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거의 다 흘려듣긴 했지만, 대충 들어도 엄청나게 콩깍지가 씐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용맹한 타입이 취향인 엘레노어가 비실비실하고 유약하다고 매번 까 댔으니까.
"하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뒤부터, 전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눈빛부터 완전히 달라지셨어."
"총명하게 빛나던 눈이 빛을 잃고, 선대 왕을 연상시키는 메마른 감정만을 말했다."
"과거의 당신께선 매일같이, 어떻게 해서든 이 지긋지긋한 분쟁을 끝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간추리자면,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사람이 확 달라졌다 이건데.
"전하께선 내가 네놈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것이 전쟁의 시발점이었다며, 내게 추방령을 내리셨다."
이건 예상대로다. 결투 건으로 트집을 잡혀서 내쫓긴 것.
"나는 어떻게든 전하를 되돌리려 애를 썼지만, 검밖에 다룰 줄 모르는 내겐...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왕이 되니까 본색을 드러낸 거 아니야? 너는 거슬리니까 팽당한 거고."
"전하께선 그런 분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인간족은 정말 머리까지 글러 먹었군!"
이게 누구보고 머리 타령이야, 머리가 정상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전하께선 이미...내게 결투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이다."
메르세데스는 제 잘린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더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패배는 신경 쓰지 말라며, 잘린 귀도 고칠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푸른빛 두 눈이 그립다는 듯 과거를 떠올렸다.
"백 년이 지날 때까지 고칠 방법을 못 찾으면, 책임져 주겠다고...하셨는데."
메르세데스의 목소리가 쥐꼬리만 하게 작아졌다. 얼굴에는 조금 붉은빛이 감돌았다.
얼씨구, 지랄을 하세요.
둘이서 아주 천 년의 순애 서사를 만들고 계셨구먼, 커뮤니티 썰풀이 탭에다가 올리면 반응 좋겠어.
그래도 이제 대충 이해는 되네, 왜 그렇게 나를 원망했는지도 알 것 같다.
아마 메르세데스도 그게 진짜로 내 탓이라 믿는 건 아닐 거다. 일종의 현실도피였겠지.
한 가지 대상을 정해놓고 그것에 몰두하는 것으로, 감정을 덮어버리려 한 것이다.
무슨 마음인지 안다.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이런 도피는 진짜 문제를 직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왕자가 변한 원인은 뻔하다.
왕위를 계승한 것.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퀘스트 알림이 눈앞에 떠올랐다.
**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은 단독 행동을 통해 이 전쟁의 배후에 대한 미심쩍은 정보를 습득하였습니다.
이를 잘 파고들어 보면,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고 : 해당 퀘스트의 난이도는 매우 높습니다, 25인 이상의 파티로 진행하시기를 권장합니다.)
[퀘스트 목표]
1. 비밀을 파헤치기.
2. 흑막을 밝혀내기.
3. 전쟁을 종결시키기.
**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메르세데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쓸데 없는 군더더기를 빼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니,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확실히 이상하군, 선전포고보다도 놈이 자신의 제1기사를 추방해 버렸다는 게 무척 이상해."
좋으나 싫으나 왕자와 메르세데스를 오래 알고 지낸 엘레노어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대여,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엘레노어는 이미 채비를 마친 나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야. 내가 직접 봐야겠어."
나는 하이엘프의 영역에 침입해, 직접 왕자 놈의 면상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갱신된 퀘스트 목표와 설명은 이게 이 길었던 진영 퀘스트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가장 단순하고 빠른 방법으로 퀘스트를 깬다.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그대라도 혼자서 놈들의 진영에 쳐들어가겠다니!"
엘레노어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소리쳤다.
드물게 보이던 걱정하는 표정과는 좀 다르다. 뭔가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 아니야."
하지만 나는 엘레노어가 말한 것처럼 혼자서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메르세데스랑 같이 가기로 했어, 자기도 그 왕자 놈 일 때문에 답답했던 모양이던데?"
거창한 설득도 필요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는 아직도 왕자놈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인간족 따위와 힘을 합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전하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나?
메르세데스가 알려준 루트를 따라 잠입하면 전투는 거의 치르지 않고 왕자놈의 면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솔직히, 나랑 메르세데스가 작정하고 힘을 합치면 정면돌파도 가망이 없는 건 아니다.
얼굴을 본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대충 잡아놓고 칼로 쑤시면 비밀인지 뭔지도 다 불지 않겠어?
"하지만, 하지만..."
엘레노어는 답지 않게 자신없는 모습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느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가만히 보면, 계속 그랬다. 바라는 대로 계속 함께 자 줬건만, 엘레노어의 눈에 담긴 별빛은 점점 흐려지기만 했다.
분명히 잘 자는 것 같은데도 항상 피곤해 보였고, 예전과 같은 자유분방함과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 그 최고조다.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말리겠어."
엘레노어는 혼자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가지 않겠다' 고 말할 뻔했을 정도로- 처연한 모습이었다.
"..."
아니, 신경 쓰지 말자. 아무리 사람처럼 보여도, 저건 결국 영혼 없는 깡통.
NPC를 신경쓰느라 이렇게 중요한 퀘스트를 내팽개친다니, 말도 안 되지.
절대 멈추지 않기로 다짐했잖아.
**
메르세데스에게 장비를 돌려주고, 펜던트를 충전한 뒤 곧바로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지만, 메르세데스의 머리 위에는 제대로 우호를 의미하는 녹색 콘솔이 떠 있었다.
확실하게 아군으로 합류했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시스템은 언제나 정직하니까.
"여기도 그동안 많이 바뀌었네."
7층에서의 대결 이후로 처음으로 와보는 대수림 안쪽은 역시 전쟁으로 완전히 갈아엎어진 상태였다.
하이엘프가 그렇게 중히 여긴다던 자연은 죄다 깎여 나갔고, 널찍한 길이며 감시탑 같은 것이 요란하게 설치되어 있다.
"전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려 바꾼 것이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과나무도 가차 없이 베어 버리시더군."
메르세데스가 구겨진 표정으로 또 추억담을 이야기했다. 관심 없는 이야기라 그냥 흘려들었다.
그렇게 두니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흘러, 이제는 전쟁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족 왕국군을 욕하고 있었다.
"세계수에 대한 존중은 조금도 없이, 탐욕에 빠져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실로 미개했지."
그러던 중, 멀리서 저벅거리는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
나도 메르세데스도 감각이 아주 예민한 편이기에, 곧 발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욕하는 거 듣고 왔나 보다, 야."
하이엘프 진영을 노리는 왕국군 병단이 이곳까지 침입해 있었다. 그것도 아마 상당한 정예 병력이.
"흥, 마침 잘 됐군. 어차피 네놈도 엘레노어의 편에서 싸우고 있겠지? 여기서 적을 줄여두고 갈까."
"미쳤냐, 잠입한다며. 여기서 애먼 놈들이랑 싸워서 어쩌려고?"
"내 실력을 뭐로 보는 거지, 평범한 인간족 병사 따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베어버릴 수 있다."
추방당한 뒤로 어지간히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7층에서 보던 거랑 성격이 완전 딴판이 되어 있네.
"실력 운운하면서 뒷짐 지고 싸우다가 쳐발린 어떤 년이 갑자기 생각나네."
"..."
"정신 좀 차려라, 너희 전하 생각은 안 하냐?"
단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메르세데스는 뽑았던 검을 조용히 집어넣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우리는 그대로 왕국군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하이엘프의 왕성을 향한 잠입을 개시했다.
92. 하이엘프의 왕
엘레노어에게 받았던 망토를 활용해 [은신]을 발동하고, 조용히 탑을 타고 올라갔다.
탑 꼭대기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하이엘프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메르세데스는 적당히 기절만 시키라고 했지만, 아쉽게도 나한테 그런 재주는 없다.
-푹!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찔러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경계병은 언제나 2인 1조.
"뭣, 누구냐, 악!"
뒤늦게 나를 발견한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대번에 목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아슬아슬했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탑의 경계병을 제압한 뒤에는 다시 내려와, 반대쪽 탑을 제압한 메르세데스와 합류했다.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는데, 아무래도 경계병을 죽여버렸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매우 불쾌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는지 따지려 하지는 않았다.
이 잠입 루트는 전투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아예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편한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렇게 각 탑을 정리하고 난 뒤에는, 메르세데스가 준비한 장비를 활용했다.
소형 글라이더같이 생긴 묘한 물건이었는데, 원리는 모르겠지만 잠시간 활공이 가능하다고.
"가지."
활공 장비를 장착하고 그대로 탑에서 뛰어내렸다. 감시탑을 모두 정리했기 때문에 비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처럼 요새화된 대산림을 공중에서 쭉 가로질러, 하이엘프의 마을 안쪽으로 손쉽게 입성했다.
그 뒤로는 더욱 간단했다. [은신]을 발동하고 속도를 살려 쾌속 질주, 왕이 거하고 있는 성으로 침투한다.
-으적.
성의 창틀을 도끼로 깨부순 뒤, 사뿐히 안으로 내려앉았다.
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감지를 펼쳤다. 그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장난 아니네, 이게 세계수?"
7층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계수의 압도적인 마력량에 저절로 숨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게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서 나오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천 년 전에 비하면 한참 약해진 상태다. 우리의 세계수는 인간족이 감히 넘봐도 될 만한 존재가 아니야."
메르세데스는 세계수의 마력을 느끼고 움찔거리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뭐, 말은 나도 동의한다.
7층에서는 그나마 멀리서 봤었지만, 이 성은 세계수가 있는 자리에 지어진 거니까- 확실하게 실감 난다.
하이엘프들은 이걸 그냥 지키고만 있지만, 인간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텐데.
이만한 마력의 덩어리가 작정하고 이용되면, 분명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거다.
이건 결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사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미친 물건이다.
"핵폭탄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핵폭탄?"
"그런 게 있어, 그래서 왕은 어디에 있는 건데?"
나는 잠시 삼천포로 빠진 생각을 되돌렸다. 메르세데스는 손가락으로 저편의 문을 가리켰다.
세계수와 직접 연결된 옥좌가 자리한 곳, 하이엘프 왕의 알현실.
-끼이익.
그 문이 저절로 움직여 열렸다.
**
나와 메르세데스는 재빨리 근처의 물건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열린 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오려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문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기척이다. 7층에서 만났던 그 왕자 놈이 저 안에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문은 대체 왜 혼자 열린 거지. 하이엘프식 자동문 센서가 오작동을 한 건 아닐 테고.
-들어와라.
"뭐야."
머릿속에서 대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야, 존나 이상한, 그보다 나한테 말한 건가?
숨었던 자리에서 슬금슬금 움직여 메르세데스를 쳐다보자, 나와 같은 목소리가 들린 눈치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활짝 열린 문 앞에 섰다.
-안으로, 들어와라.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메르세데스가 처연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게 7층의 그 왕자 놈이라고?
분명 생긴 건 똑같다. 딱 봐도 싸움은 존나 못 하게 생긴 기생오라비 외모.
하지만 눈빛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선대 다크엘프 여왕보다 더 메말라 있는 눈빛.
"그렇게 살금살금 오지 않아도...언젠가 이곳에 부를 생각이었다. 가까이 와라, 셋 모두."
하이엘프 왕은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셋이라니?
"들켰나."
나는 내 배후에서 불쑥 튀어나온 강렬한 기척에 경악했다.
"너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어?"
그림자에 휩싸여 나타난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 발밑을 가리켰다.
"그대의 그림자에 길을 뚫어 놓았지, 그대를 말릴 방법이 이것 말곤 떠오르지 않았거든."
간담이 서늘했다. 엘레노어가 그림자 마법의 달인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7층 초입에서 보여줬던 소환의 응용이겠지, 사용하기에 따라 이건 어마어마한 암살 기술이 되는 거 아닌가.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그대여. 지금 놀라야 할 부분은 여기가 아니지 않나."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펴 왕좌에 앉은 하이엘프 왕을 가리켰다.
"왕좌에 앉은 저것은 그대의 잠입도, 나의 그림자 마법도 모두 꿰뚫어 보았다."
"백 년이 지났다고 한들, 내가 아는 그 머저리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마법에는 조금도 소질이 없는 녀석이었거든, 그런데- 저기 앉은 저건 대체 뭐란 말이냐?"
엘레노어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기에 앉아 있는 건 절대 7층의 그 왕자 놈이 아니다. 생긴 것을 제외한 모든 점이 다르다.
나는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퀘스트 목표]
1. 비밀을 파헤치기.
2. 흑막을 밝혀내기.
3. 전쟁을 종결시키기.
비밀을 파헤치고, 흑막을 밝혀내어, 전쟁을 종결시키기.
이런 목표가 생겼다는 건, 곧 파헤쳐야 할 흑막과 비밀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게 저거겠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가까이 와라. 모두 말해 주겠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는 왕을 향해, 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
내가 앞으로 나서자, 엘레노어와 메르세데스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우리를 들여보낸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쿵 닫혀버렸다. 이건 예상대로다.
나도 ,메르세데스도, 엘레노어도, 문이 닫혔다고 해서 꼼짝없이 갇힐 만큼 약하지 않다.
"반갑다, 고결한 기사 메르세데스. 아름다운 그림자 엘레노어. 그리고- 이름 모를 인간이여."
하이엘프 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인사를 하는데 대답이 없군."
"어, 반갑다."
"그래, 시원한 대답이 듣기 좋군."
하이엘프 왕은 우리를 보며 비식 웃었다. 역시 저건 생긴 것만 저렇지, 아예 다른 사람이다.
"이쪽도 이름을 밝히지, 내 이름은 엘'로휀, 그대들이 만나러 온 엘뤼온의 아버지이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내용물은 다른 사람이었군. 예상대로 선대 왕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거였어.
그런데, 엘레노어는 하이엘프 왕이 밝힌 이름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선대 하이엘프 국왕의 이름은 분명 엘'로나벨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검을 빼들고 있는 메르세데스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착각하지 마라. 나는 엘뤼온의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엘'로나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엘로휀은 우리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하이엘프 전체의 아버지다."
그 순간, 막대한 마력이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쿠궁!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세계수의 거대한 마력이, 의지를 갖춘 것처럼 넘실거리며 진동을 만들어 내었다.
"과거 포레스트 엘프가 자신들을 하이엘프라 칭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는 매 순간 모두의 왕이자 아버지였다."
나는 긴장 속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언제든 마력강화를 할 수 있도록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왕은 우리를 보며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모습이었다.
아주 대놓고 흑막이라고 말하는 꼬락서니다. 하지만 대체 왜 이 타이밍에 본색을 드러냈단 말인가.
"세계수가 혼을 순환시키는 장치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순환이 언제부터 망가졌는지도 알고 있겠군."
"사실 순환의 굴레는 망가지지 않았다. 그저 내 혼을 순환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하이엘프의 왕은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왕홀을 쥐고 왕좌에 앉은 순간에 나와 대체된다."
왕은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들 말이 없군, 이해하기 힘들었나?"
저 단순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바보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하나야, 그걸 왜 이제 와서 우리한테 떠벌리고 있는지."
내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하이엘프 왕은 또다시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왜겠나."
놈은 웃으며 굳게 닫혀버린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순순히 내가 부르는 대로 가까이 와 줬기 때문이지."
그래, 떠벌려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으니까 떠벌린 거였군.
93. 종족 특성
최소한 수천 년 이상을 암약하고 있었을 흑막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체를 드러내도 아무 상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 녀석은 이 순간에 정체를 드러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추측해 보자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입을 완전히 막아버릴 자신이 있거나, 정체가 들켜도 상관이 없을 만큼 목표가 코앞이거나.
우리는 녀석의 정체는 알지만, 녀석의 진짜 목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역대 하이엘프 왕이 모두 저 녀석 하나였다면, 왜 녀석은 다크엘프와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던 걸까.
왜 결혼을 통한 평화 협정이 어그러지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다짜고짜 전쟁을 선포한 것일까.
단순히 연명이 목적이라면, 굳이 세계수를 장악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엘프는 원래 영생하는 종족이니까.
-쿠르릉!
펜던트를 사용해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어쨌든 저 녀석이 흑막이라면 여기서 처치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쥐고 앞으로 돌진하려던 순간, 세계수가 다시 한번 마력을 내뿜었다.
그리고 내 발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마법적인 방해 효과를 받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공포나 두려움 때문에 발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머리가 멈췄다.
지금까지 느껴지고 있던 해일 같던 마력량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는 전력 차이에.
저걸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전혀 생각이 안 나서,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씨발, 저게 대체 뭐야.
하이엘프 왕의 머리 위에 떠오른 콘솔의 색깔이, 새까맣다 못해 조그만 블랙홀처럼 보인다.
그냥 저 모양의 구멍이 허공에 뚫려 있는 것 같다. 너무 어두워서 눈이 착시를 일으키고 있는 거다.
들고 있는 검이 그냥 나무토막처럼 느껴지고, 갑옷과 방패는 종잇장처럼 느껴진다.
"이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어깨에 닿은 손의 감촉,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후웅!
하지만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내 뒤편으로 이동했던 놈은 다시 왕좌로 돌아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순간이동?
마력강화를 사용한 내 반응속도를 능가하는 전조 없는 이동기라고? 말이 되는 건가?
"왜 네가 그렇게 긴장하고 있나, 이름 모를 인간족 검사. 내 목적은 너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세계수의 마력을 등에 업은 하이엘프 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자, 아름다운 그림자여. 네 왕관을 내놓아라."
"왕관...?"
"그래, 그 마지막 한 조각만 있으면...너희를 해할 필요도 없다."
놈은 이번에도 순식간에 이동해, 엘레노어의 앞에 나타났다.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맞지 않았다.
"세계수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장치는 셋, 그 마지막이 왕관이다. 너희는 그것만 내놓으면 돼."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이거였나. 왕관을 가진 엘레노어가 자신 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까.
확실히, 그게 목적이라면 결혼으로 평화 협정을 맺는 게 가장 쉬웠겠지.
그게 어그러지자 힘으로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 거고- 아니, 그건 좀 타이밍이 이상한데.
전쟁을 일으키려면 진작에 일으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이만한 힘이 있으면 굳이 전쟁 따위-
"아하."
- 아니, 그런 거구나. 처음부터 이만한 힘을 갖고 있던 게 아니었어. 백 년에 걸쳐서 얻은 거야.
이건 저 녀석이 쌓아올린 힘이 아니다. 백 년을 들여서 세계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뿐.
그리고 구태여 이 방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도, 당연히 이유가 있었겠지.
"그 말을 듣고 순순히 왕관을 내줄 것 같았나."
-콰과곽!
엘레노어가 손을 휘두르자, 그림자의 가시가 튀어나와 하이엘프 왕을 덮쳤다.
"그래, 내어주지 않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너희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음을- 왜 깨닫지 못했지?"
공간이동으로 가시를 피해낸 왕은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요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실력 행사를 해야만 하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던 적이, 제대로 힘을 쓰려고 하고 있지만.
이제는 견적이 나온다.
어떻게 해야 이 어설픈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
**
얼타고 있던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엘레노어도 그림자를 끌어올려 대비했다.
-우우웅!
하이엘프 왕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법진이 발광하는 구체를 만들어 사방팔방으로 흩뿌렸다.
에메랄드 와이번이 있던 지하 던전을 연상시키는 공격이다.
구체 하나하나가 내 마나 총량만큼의 힘을 품고 있지만, 그 정밀함이나 밀집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콰광! 콰과광!
나는 마력강화의 힘에 더해 [혼신]스킬을 발동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냈다.
엘레노어도 그림자를 이용한 이동 기술로, 메르세데스는 그냥 무식한 속도로 회피해 냈다.
하지만 구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쏘아진다. 이것만 피하다가 체력이 다 떨어지게 생겼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흐읍!"
배에 힘을 빡 넣고, [혼신]스킬로 내구 스탯을 높이고, 마지막으로 [철벽]까지 사용했다.
-콰광!
날아드는 구체를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버렸다. 폭발의 영향으로 전신이 찌릿거린다.
내 다중 내성을 뚫는 공격력, 거기에 폭발 지점에서 마력 폭풍이 휘몰아쳐 속을 진탕으로 만든다.
씨발, 내장만 따로 빼서 원심분리기에 돌리는 것 같다. 목으로 울컥 피가 올라온다.
하지만 부상을 감수하는 것으로, 마법 공격을 뚫고 상대와 거리를 좁히는 것에 성공했다.
"세계수의 마력은 별의 지맥에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카강!
왕은 가볍게 배리어를 생성해 내 검을 막아내며,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모든 나무가 그렇듯이, 땅의 힘을 빼앗아 자신이 성장하는 것이지. 그렇기에 그 힘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하이엘프 왕의 눈이 빛나고, 괴상한 열선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재빨리 방패를 들었다.
-푸슉!
하지만 열선은 방패를 아무렇지 않게 관통해, 내 팔과 가슴팍을 꿰뚫고 그 자리를 열기로 지져버렸다.
"별의 지맥도 언젠가는 고갈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별은 벌써 밑천을 드러내고 있어."
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향해 거대한 그림자의 도끼가 내리쳐졌다. 엘레노어의 공격이다.
하지만 왕은 이번에도 순간이동을 사용해 가볍게 피해 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이 말을 내 힘에 끝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왕의 배후를 노리고 메르세데스가 검을 휘둘렀지만, 마찬가지로 빗나가 버렸다.
"아, 그러셔."
나는 포션을 들이키며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내 주특기를 펼칠 시간이다.
검은 당연히 빗나갔지만, 이미 내 손에는 새로 창이 들려 있다.
창도 빗나가고, 이어서 도끼를 휘둘러도 막히고, 방패를 던져도 빗나간다.
-촤라라라락!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벤토리 안의 물건들을 쏟아내며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
공격이 막히는 건 상관없다. 빗나가는 것도 상관없다. 상처를 입는 것도 상관없다.
아무리 요란하게 날뛰어도 통하는 공격은 하나도 없고,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흐를 뿐이지만 상관없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덤벼들수록, 저 멍청한 녀석은 나를 얕잡아 볼 테니까.
-콰광!
쏟아낸 무기들이 산산이 조각나서 흩날린다. 하이엘프 왕이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막대한 마력이 모인 손아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소리쳤다.
"문을 부숴! 여기서 나가!"
메르세데스와 엘레노어는 내 외침에 곧바로 반응했다.
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많이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하이엘프 왕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우리가 이 방에 들어온 뒤에야 문을 닫고, 다 이겼다는 듯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녀석의 힘은 세계수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존재의 힘을 아무런 제약 없이 행사할 수는 없을 터.
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전장에 나가서 죄다 쓸어버리고 엘레노어의 왕관을 빼앗았겠지.
그렇다면 추측해 볼 수 있는 제약은- 세계수와 연결된 왕좌가 있는 이 방 안에서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하이엘프 왕은 공간이동을 사용해, 도주하려는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이 방 바깥에선 세계수의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저렇게 급하게 막는 거겠지.
그런데 어쩌나, 사실 내 노림수는 탈출이 아니었는데.
내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면서 시선을 끌고, 탈출하라고 외쳤기 때문에- 당연히 그게 노림수라고 생각했겠지.
힘에 취해서 상대를 얕보다가 엿 먹는 거, 그게 니들 종족 특성인가 보구나.
[라이트닝 차지]
[감각 증폭]
[약점 간파]
[혼신]
사용할 수 있는 버프 스킬을 모두 사용하고, 수없이 던져대던 무기 중 하나를 붙잡아 다시 내던졌다.
녀석에게 무식하게 달려들었던 이유도, 탈출하라고 외친 이유도, 모두 이걸 노리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내던져진 무기가 노리는 것은, 세계수와 연결된 하이엘프의 왕좌.
-콰앙!
전력으로 내던진 한 자루 창이 왕좌를 산산조각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모든 하이엘프의 아버지이자 왕이라고 했나, 확실히 그런 것 같네.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실력은- 그 왕자 놈이랑 다를 게 없어.
94. 탐욕의 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과, 그 마력을 무한에 가깝게 공급하는 세계수.
공격 한방한방이 마력강화를 발동한 내게도 치명적이며, 양심 없는 방어력과 딜레이 없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한다.
시련의 탑이 지랄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냐만은, 아무리 그래도 이런걸 정공법으로 공략하라고 던져놓았을 리가 없다.
25인 기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 내가 9층 평균 도전자보다 스무 배쯤은 더 셀 테니까.
-콰광!
"크헉!"
왕좌를 파괴하자마자, 엘레노어를 공격하려던 하이엘프 왕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역시, 예상대로 왕좌가 놈의 약점이었다. 마력감지로 살펴보니,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놈이 사방팔방에 펼쳐두었던 마법진도 모두 사라졌고, 숨쉬기도 힘들던 마력의 격류 역시 잠잠해졌다.
"케헥."
그리고 나도 거의 동시에 피를 토했다. 이 한 번으로 왕좌를 파괴하기 위해 너무 몸을 혹사했다.
제대로 맞은 공격은 몇 번 없었지만, 그 몇 번이 모두 치명적이었다.
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맞은 부위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시스템상 즉사는 안 하지 참.
"엘레노어, 문을!"
메르세데스가 엘레노어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문을 향해 그림자를 날렸다.
-콰광!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산산조각났다. 왕좌를 파괴했으니 이제 문은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은 문보다는 쓰러진 왕의 목을 베어서 마무리 짓고 싶은 타이밍인데-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
마력강화가 저절로 해제되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출혈량도 장난이 아니고, 내장도 어떻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때, 갑자기 발밑이 꺼지며 시야가 확 뒤집혔다.
"억, 뭐여, 씹."
다음 순간, 나는 엘레노어의 양팔에 안겨 있었다. 그림자 마법으로 나를 불러온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방법밖에 없었어. 어서 빠져나가자."
"아니, 그보다, 확인 사살!"
"저자라면 방금 죽었다. 생명 반응이 완전히 끊겼어."
그건 나도 안다. 내 마력감지에도 저놈은 죽은 걸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걸로 끝이 아니다.
클리어 메시지가 안 뜨고 있다고.
-드드득!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꼭 빗나가지 않는다.
각혈하며 쓰러졌던 하이엘프 왕의 몸이 이변을 일으켰다.
**
새까만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왕의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검은 가지는 거미의 다리처럼 땅을 짚어, 숨이 끊어진 왕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어리석구나."
무한에 가깝던 마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어이가 없을 정도의 마력이 그 죽은 몸에 흐르고 있다.
"왕관만 손에 넣으면...너희에게도 내 대의를 이해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왕좌를 부숴 버리다니."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미친 마법을 난사하면서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세계수는 별의 지맥을 흡수해 성장하는 나무라고...이 의미를 왜 모른단 말이냐?"
"이미 이 별은 글렀단 말이다. 우리 엘프가 태어난 시점에서, 이 별의 멸망은 예견되어 있었어!"
"왜 엘프종이 뛰어난 마력 지각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 세계수가 바랐기 때문이다, 마력이 넘치는 새 땅을 찾아내기를!"
우리는 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두고,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새 땅을 찾지 못하면 세계수는 끝이다, 세계수가 끝나면 엘프도 끝이다! 우리의 혼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단 말이다!"
엘레노어는 나를 들쳐업고 속도를 냈다.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유지하며 함께 달렸다.
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빠르다. 이미 하이엘프 왕이 있던 알현실에서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닌데도.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내가 끝날 줄 알았느냐! 비축해둔 힘은 충분하다, 너희는 멸망을 앞당겼을 뿐이야!"
그 때였다. 침입자인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 하이엘프 기사들이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뭐 하는 놈들이냐!"
"비켜라!"
"메, 메르세데스 님?"
메르세데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호통치자, 기사들이 당황하며 멈춰 섰다.
추방당한 신세라지만, 과거 하이엘프의 제일 기사였던 배경은 어디 가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그 때, 근처의 벽에서 검은 나뭇가지가 튀어나와 작살처럼 기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저, 저건 대체...!"
가지에 꿰뚫린 기사들은 잠시 버둥거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어 먼지로 변해버렸다.
"왕관을 순순히 넘겼다면, 희생해야 할 생명은 인간족 병사들의 것만으로 충분했으나...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새까만 가지가 왕의 목소리를 담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이미 가지도 뭣도 아니다.
닿는 것의 생명을 무식하게 빨아들이는 괴물의 촉수일 뿐.
우리의 퇴로도 순식간에 검은 가지로 둘러싸여 막히고 말았다. 엘레노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여, 나를 있는 힘껏 붙잡고 있어라. 절대 놓치면 안 돼."
엘레노어는 우뚝 멈추더니, 메르세데스를 한 손으로 잡고 그림자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분수처럼 솟구친 그림자가 우리를 천장으로 사출해 버렸다.
-쾅! 콰광! 콰과광!
몇 겹의 천장을 뚫고,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그 충격이 내 내장을 뒤흔들었다.
그렇잖아도 아작나서 곤죽이 되었던 속이 뒤틀린다. 목구멍으로 뭔가 올라왔다.
"으허억, 컥."
입에서 거하게 피를 토해내며 바라본 지상은 끔찍했다.
왕성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가지는 이제 거대한 파도처럼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엘프들을 모조리 꿰뚫어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번식하듯 분열해 점점 더 주변을 덮어 갔다.
그 속도는 산불이 강풍을 업고 번지는 것처럼 빨랐고, 뻗어 나간 가지는 이제 세계수를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를 타고 기어오르는 새까만 가지는, 나무의 양분을 흡수하는 겨우살이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런 얌전한 것보다는- 배배 꼬인 수십만 마리의 뱀이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엘레노어도, 메르세데스도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별을 떠나, 머나먼 땅에 새 엘프의 왕국을 세우겠다. 이제 왕관 따위는 필요 없다."
"세계수와 함께 온전히 떠나고 싶었지만, 왕좌가 부서지고 연결이 망가진 이상-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모두 멸망시켜 세계수의 양분으로 삼아주마."
시끄럽다 못해 하늘에 쩌렁쩌렁 울리는 전음, 무수한 가시는 이윽고 하나로 얽혀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세계수에 필적하는 크기로 얽혀 만들어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뱀.
[경고, 에픽 퀘스트의 진행도가 99%를 초과함에 따라, 계층의 설정이 변경됩니다.]
[미궁 지역이 소멸합니다. 보스 몬스터의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임시로 에픽 퀘스트에 이양됩니다.]
[에픽 퀘스트 진행 중, 우호도 80 이상의 NPC와 파티를 결성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월드 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파티와 공격대의 편성 인원 제한이 해제됩니다.]
[주의 : 월드 레이드의 난이도는 50인 이상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
새빨간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처음 보는 메시지를 띄웠다.
월드 레이드, 공격대, 모르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 2661 서버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단어들이었다.
동시에 에픽 퀘스트가 한 번 더 갱신되었고, 거대한 뱀의 이름이 허공에 새겨졌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아집이 만들어낸 괴물, 긴 삶을 살며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나 누구보다 사람다운 자.]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끝없이 번식하고 번영하며, 최후의 최후까지 꿈꾸는 자.]
[살아있는 욕망의 총체이며,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숨쉬기를 바라는 불꽃. 무엇으로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
거대한 검은 뱀은 그대로 세계수를 밑동부터 갉아먹으며 그 마지막 가지까지 부수어 입 안에 넣었다.
탐욕스럽게 생명의 나무를 먹어치우고,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 뱀은-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세상을 삼킬 것이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만 출현하는 초대규모 레이드 대상, 월드 보스로 거듭난 왕이 붉은 눈을 빛냈다.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갱신된 에픽 퀘스트의 내용은 이것이 정말로 최후의 싸움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목표는 지극히 단순했다. 저 뱀을 처치할 것.
7층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참을 이어져 온 다크엘프의 서가 마침내 최종장에 진입했다.
95. 레이드 준비
7층에서 시작하는 진영 퀘스트는 진행 방식에 따라 20층대까지 이어진다.
다만 진영 퀘스트가 중심이 되는 층은 9층까지만이다.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연관된 퀘스트가 나올 뿐이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후일담이나 팬서비스 수준으로 엘프나 인간 진영이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정도.
소위 '세계관'이 엄밀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커뮤니티 도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저 꼬락서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수를 집어삼키고, 말 그대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거대한 뱀.
그리고 극소수의 엘프 NPC가 등장하는 층의 황폐한 배경.
아마도, 이 9층의 세계관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 저 뱀 때문에 한 번 멸망한 다음의 세계라는 설정으로.
"맙소사...어떻게 이런 일이."
몇 번이나 그림자 마법을 사용해 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는, 멍하니 무너져가는 성을 바라보았다.
나도 엘레노어도 갑작스레 벌어진 참사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가장 동요하고 있는 것은 역시 메르세데스였다.
소중히 여기던 왕자는 몸을 빼앗겨 버렸고, 고향은 실시간으로 거대한 괴물에게 무너지고 있다.
"어,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메르세데스에게는 이 참상을 막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하이엘프 왕의 곁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으며, 그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세계수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깊게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힘겨워하다, 끝내 추방당하고 기회를 빼앗겼다.
"..."
멍하니 파괴되는 성을 지켜보던 메르세데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야, 어디 가려고."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녀석을 붙잡았다.
"지금은 추방당한 신세지만, 나는 하이엘프의 제1기사다. 우리의 도시가 무너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안 두고 보면 뭐 어쩔건데, 네가 봐도 저긴 이미 그르지 않았냐?"
"그렇다고 해도...해야만 하는 일이다. 내겐 버려둘 수 없는 의무가 있어.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평소같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이번에는 가게 둘 수 없었다.
미궁 지역이 소멸하고, 나는 에픽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으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에픽 퀘스트에 멸망 엔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저 뱀을 처치해야만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다.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문제는 저 뱀이 공격대를 편성해 싸워야 하는 월드 보스고, 이 빌어처먹을 탑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는 점.
나는 9층 도전자의 평균 스펙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으나, 저런 걸 혼자 쓰러트릴 수는 없다.
최소 50인의 공격대를 편성해야만 하는 적, 그걸 나 혼자 쓰러트리려면 평범한 도전자보다 100배쯤은 세야 할 거다.
나는 그 정도로 강하지 않다. 메르세데스 같은 강력한 아군을 잃으면 끝장이다.
"지금 저기로 달려가서 혼자 뒤지는 게 네 의무냐?"
나는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해도 괜찮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동족을 구하고 싶어서 가는 거라면 안 말려, 말리기는 무슨- 도와줄 수도 있어."
"...그 꼬락서니로 말이냐?"
"사지가 날아간 것도 아니고, 내장 좀 갈린 건 포션 때려 부으면 어떻게든 돼. 좀만 있으면 다 나아."
어차피 전쟁은 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진영을 불문하고 하나라도 아군을 늘려야 하는 상황.
우호도 80 이상의 NPC를 파티원으로 넣을 수 있다는 건, 아마 이런 걸 의도한 설정일 테니까.
"엘레노어, 도와줄 수 있어?"
나 하나가 더해진다고 될 일도 아니기에, 나는 엘레노어에게도 물었다. 아마 엘레노어라면 흔쾌히-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두 눈에 별빛은 없다.
아니, 표정은 아무래도 괜찮지.
이거야말로 엘레노어가 원하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 아닌가.
**
커뮤니티에서 월드 보스에 관한 정보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50인 이상 규모의 공격대가 필요한 대규모 레이드, 난이도는 출현 층수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매우 높음.
클리어 시 확정으로 에픽 등급의 보상을 드롭, 보상은 아이템이나 에픽 등급 전직서 등이 존재.
영국의 유명 S급 헌터인 제라드 그레이엄이 보유한 [용살자]라는 에픽 클래스가 월드 보스 레이드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점으로, 월드 보스는 출현 직후의 개시 패턴이 종료되면 잠시 휴식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
지금 내 눈앞에는 저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간이 카운트 되고 있었다.
아마 이건 시스템의 안배로 주어진 공격대 결성을 위한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효하게 활용해야겠지.
-촤악!
똬리를 튼 거대한 뱀 근처에서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가시덩굴 괴물을 베어버리고, 무너진 건물로 향했다.
거대한 석재 덩어리를 힘으로 밀어서 치우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엘프를 일으킨 뒤 포션을 먹였다.
구해낸 엘프는 그대로 엘레노어가 설치한 그림자 워프 포인트로 옮겨, 마을로 호송한다.
벌써 이 짓거리를 몇 시간이나 반복했다.
재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이 된 기분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기를 쓴다는 것 정도일까.
"이건 뭐 끝이 없어서 더 좋네."
계속해서 스폰되는 가시덩굴 괴물을 썰어버리며 나는 계속해서 파괴된 도시를 누볐다.
휴면 상태에 들어간 월드 보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잡몹들은 내게 훌륭한 포션이 되어주었다.
원래는 이놈들도 만만치 않은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내 스펙 앞에서는 그저 그런 잡몹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여러 스킬과 무기의 옵션으로 잡몹을 잡을수록 HP와 MP를 회복할 수 있다.
"이쪽은 거의 끝났다."
다른 쪽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합류하며 말했다.
"왕성과 인접한 지역이라 피해가 컸어, 살아남은 이들이 무척 적었다...이쪽은 어땠지?"
"여기도 대충 그래."
"역시 그런가, 예상하고 있었지만...남은 이들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것에 기뻐해야 할까."
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마땅히 답해줄 방법이 없는 말이었다. 다만 조용히 포션 한 병을 건네주었다.
HP와 MP를 무한대로 회복할 수 있는 건 나 뿐, 메르세데스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친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만한 숫자를 구할 수는 없었을 거야."
내가 준 포션을 받아들며, 메르세데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내가 구조에 큰 몫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구조된 인원을 받아준 건 엘레노어와 다크엘프들이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대수로운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메르세데스가 느끼는 건 또 다르겠지. 어쨌든 내가 말을 꺼내서 실행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나로서는 레이드에 참여할 아군을 하나라도 늘리기 위한 일이었을 뿐이지만.
"정말로, 고맙다."
이 고압적인 엘프의 태도를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
갑작스러운 월드 보스의 출현으로 하이엘프 세력은 완전히 와해하였고, 소수 난민만이 남았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것은 하이엘프만이 아니었다. 마침 도시를 공격하려고 준비 중이던 왕국군 진영도 큰 피해를 보았다.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다크엘프 진영뿐, 하지만 세상을 먹어치우겠다고 선언한 뱀이 다음으로 향할 목표는 뻔하다.
하이엘프를 쓸어버렸으니, 다음에는 다크엘프의 차례겠지. 그다음에는 남은 인간 세력을 쓸어버릴 테고.
그래도 어쨌든, 유일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다크엘프 진영은 현재- 난민촌이 되어 있었다.
"개판이네."
구조된 하이엘프와 마찬가지로 구조된 소수의 왕국군 병사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모여 있다.
하이엘프들은 그나마 같은 엘프종 사이라서, 상대적으로 경계가 심하지 않다.
하지만 왕국군 병사들은 상황을 조금도 모르고 휩쓸렸다 구조된 상황이다 보니, 유독 날이 서 있다.
그리고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은 난데없이 받게 된 인간 난민들을 향해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젠 전쟁의 기억 때문에 인간이라고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지만, 기본적인 습성은 그대로.
다크엘프들에겐 화재 현장에서 꼬질꼬질한 새끼고양이 무리를 구조해 온 꼴이니까, 이 정도면 잘 참고 있는 거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불편한 대치를 원해서 이들을 구조해 온 게 아니다.
월드 보스의 활동 정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이들을 규합해서 전력으로 삼아야 한다.
"엘레노어가 잘 해줘야 할 텐데."
이미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왕국군 본진에 전령을 보내두었다. 곧 이 자리에서 삼대 세력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들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드는 건, 말재주라고는 쥐뿔도 없는 내겐 불가능한 일.
판은 깔아뒀으니, 이젠 기대를 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긴급)월드 보스 레이드 팁 구함]
지금부터 나는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레이드 전략을 구상한다.
96. 커뮤니티의 순기능
현 세대의 도전자들은 대부분 커뮤니티에 올라온 공략을 보고, 정석대로 보스를 잡는 타입이다.
당연히 처음 보는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는 영 신통치 못하다.
하지만 고등급 헌터가 되기 위해 장기 체류 중인 일부 최상위 공략파 도전자나, 소수의 고인물 도전자들은 다르다.
시련의 탑 내부의 질서 유지를 위해 남은 길드 마스터나, S급을 목표로 한참 동안 처박혀 있는 최고위 랭커들.
이들은 1세대 도전자에 한없이 가까운 경험을 쌓았으며, 실제로 1~2세대 당시에 탑을 오른 경우도 있다.
- 진혁이 살아있었네 ㅋㅋ 생존신고임?
- 얘 아직도 솔플임? 2661에 아직도 뉴비 없음?
- ㄴ 그런듯? 커뮤에 2661태그 단놈이 아무도 없음
- 월드보스는 뭐임 저런거 처음보는데
- 저건 몇층 보스임?
- ㄴ 뭐야시발 월드보스네 저게 왜 저기있음???
여전히 커뮤니티에서 높은 주목도를 가진 내 글에는 빠르게 댓글이 달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영양가 있는 정보는 커녕, 기껏 올린 스크린샷을 보지도 않고 댓글을 단다.
하지만 하나둘씩 글의 내용을 확인하고, 소문으로만 듣던 월드 보스의 존재에 경악한다.
- ㅅㅂ저거뭐임?
- 월드보스?? 저거 진짜 있는거였냐?
- ㄴ 월드보스가 뭐임?
- ㄴ 히든같은건데 공격대 수십명짜서 단체공략해야되는거임
- ㄴ ㅅㅂ? 근데 얘 솔플러아님?
- 이 ㅅㄲ 이젠 념글각보려고 주작까지하네 ㅋㅋ 구라치지마라
- ㄴ 저걸 어떻게 주작해 ㅅㅂ련아 ㅋㅋ
이쯤에서 글을 하나 더 올렸다. 시스템 메시지를 캡쳐한 사진을 덧붙이고, 상황 설명을 곁들여서.
댓글도 댓글이지만, 개인 쪽지 알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온다. 개중에는 최상위 길드의 연락도 몇몇 있었다.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월드 보스가 나타났던 건 다 합해서 3번이었다고 한다.
그 3번의 레이드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대부분 유니크 내지는 에픽 등급의 보상을 받아, 최상위 헌터가 되었고.
최상위 길드의 길드원들은 당연히 월드 보스의 존재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겠지.
물론, 우리 탑으로 넘어올 수 없는 이상- 관심이 있어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만.
이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나 팁은 분명 공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커뮤니티를 열었다.
잠깐 사이에 댓글이 거의 수백 개가 달려 있었고, 순식간에 백 단위의 추천을 받아 내 글은 바로 인기글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의 떡밥이 이쪽으로 옮겨진다. 관련된 글이 계속해서 페이지를 채운다.
[월드보스 나온거 이번이 몇번째임?]
[근데 저거 잡을수 있음?]
[2661섭에 사람이 50명이 있냐?]
[서버에 한명밖에없는데 50인레이드는 씨발ㅋㅋ]
[50인 이상이지 50인이 아님]
[이새끼 혼자만 세계관이 다른데?]
그리고 떡밥을 물고 흘러가는 여러 뻘글 사이에서, 어떤 게시글이 많은 추천을 받고 인기글로 솟구쳤다.
[작성자 : 강혁진#1421]
[제목 : 월드 보스 레이드에는 속강이 제일 중요함]
(사진)
갈트람 레이드때 우리 파티에서 기여도 제일 높았음, 위에 인증샷
월드 레이드 대기 시간때 보스 근처에서 잡몹 스폰되는데, 걔네랑 보스랑 속성이 같음
그래서 레이드 시작전에 속성 종류별로 인챈트해서 딜 실험 가능함
어차피 레이드는 한판이니까 공대원한테 일회용 속강 다 붙여주면 딜뻥 존나됨
반대로 공격 맞은다음에 속성저항 붙여두는것도 됨, 탱커진 몸빵 거의 1.5배는 될걸
솔플로는 죽어도 못잡긴한텐데 일단 예전 공략기록 다 찾아보겠음
진혁이가 볼수있게 념글좀 올려주셈
- 오 경험자가 있네 개추
- 즉시 개추 이거 올려야한다
- 근데 진혁이한테 공대원이 어딨음?
- 일회용 속강 가능함? 진혁이 아직 9층이라는데?
- ㄴ ㅇㅇ경매장에서 속성부적 사서 바르면됨 얼마안함
- ㄴ 씨발롬아 서버에 사람이 없는데 경매장 ㅇㅈㄹ ㅋㅋㅋ
커뮤니티 떡밥이 활발하게 굴러가면 나올 수밖에 없는, 경험자와 전문가의 한 마디.
조금씩 유익한 정보가 쌓이고 있다.
**
나는 월드 보스의 외형을 캡쳐해서 올리고, 내 진영 퀘스트의 상황도 상세하게 알렸다.
월드 보스의 정체인 하이엘프 왕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관한 설정에 대해서도, 각 진영의 협력을 구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고 나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용한 정보들이 모였다. 7~9층의 진영 퀘스트는 누구나 다 해 봤으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왕국군 쪽 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하이엘프 진영 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그리고 시련의 탑의 여러 스토리를 연구하는 자칭 역사학자들의 설정에 근거한 의견까지.
[작성자 : 김혁수#1421]
[제목 : 왕국군 병기중에 마포라고 있음]
어떻게 NPC잘 설득하면 끌고올수있을거임, 대형몹이니까 맞추기도 쉬울거임
마포 다 세면 한 50대는 나올거고, 원래 공성전 퀘스트용인데 강화재료 넣고 강화도 가능함
한 4강까지는 효율 좋고, 그 이상은 재료 넘쳐나는거 아니면 비추천
마포는 안된다고 뻗댈수도 있는데 지휘관중에서 4번대 장군 NPC있을거거든?
탑마다 좀 차이는 있어도 퀘스트라인 따라가면 걔가 마포관련 비리 있다고 나옴
그걸로 협박하면 될거임, 이것도 념글좀.
퀘스트 라인에 따라 체험할 수 있는 공성전 이벤트에서 쓰이는 대형 병기. 이건 특히 유용하다.
강화가 효율이 낮은 건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내 인벤토리에는 강화재료가 말 그대로 산더미만큼 있으니까.
이후, 나는 습득한 정보에 따라 다크엘프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잡몹들을 상대로 실험에 나섰다.
그렇게 가장 잘 통하는 속성은 명 속성, 그리고 주문 속성의 공격이 그다음으로 잘 먹힌다는 정보를 커뮤니티에 알렸다.
[작성자 : 고혁준#1556]
[제목 : 명속성 최대한 끌어모으는 팁]
하이엘프 마법사중 엘리트급한테 샤이닝 차지 써달라고 하셈
왕국군 성기사한테 홀리 차지는 샤이닝 차지랑 중첩되니까 같이 바르셈
다크엘프 연금술 상점에서 랜덤 제조 있는데 거기서 빛의 보주 제작해도 좋음
보주는 일회용인데 지속시간 짧으니까 딜타이밍 잡았을때만 쓰셈
마포도 속성 부여 가능한데 명속성은 상승치가 낮으니까 주문속성으로 ㄱㄱ
왕국군 상급 마법사 NPC가 주문의 땅이라고 범위 주문속성 증폭 버프 쓸수있음
마포 첫발사때 꼭 쓰셈
그러자 이번에도 빠르게 정보가 쏟아졌다.
월드 보스 레이드라는 좀처럼 없는 빅 이벤트에, 전 서버 유일의 솔플러를 향한 관심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커뮤니티에 잘 나타나지 않는 최상위 랭커 도전자들도 저마다 경험을 근거로 팁을 주었고.
개중 실전에서 적용할 수 있는 팁의 숫자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내가 정석 레이드를 해본 적 없는 솔플러라는 점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수많은 전략, 전술.
1세대 당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여러 가지 소문과 경험의 법칙들.
하나하나만 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수백 수천이 모여 전해 주는 이 정보들의 가치는 막대하다.
그래, 이게 커뮤니티의 순기능- 진짜 집단 지성이지.
**
커뮤니티에서 퍼다주는 정보를 받아먹고, 대강의 레이드 계획을 완성했다.
내가 공유한 계획을 다른 도전자들이 짚어주고, 수정해 주는 것을 그대로 따르니- 마지막에는 꽤 그럴듯했다.
문제는 이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다.
이건 결국 삼대 세력이 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계획서니까. 협력이 안 되면 전부 끝장이다.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반 토막이 날 거고, 레이드 시작까지 준비를 온전히 마치기도 힘들어질 거다.
나는 뜨겁게 달궈진 커뮤니티에 감사의 표시로, 적당히 '좋은' 스크린샷을 몇 개 살포한 뒤 창을 닫았다.
이제부터 정상회담이 시작된다. 레이드를 앞에 두고 각 세력의 협력 여부가 결정 나는 순간이다.
나를 포함한 몇 인물들의 참관하에, 원탁에 둘러앉은 것은 각 진영의 대표자들.
하이엘프의 대표로는 메르세데스가 자리했고, 왕국군의 대표로는 국왕이 아닌 군단장이라는 자가 나왔다.
느껴지는 기백이며 걸음걸이가 모두 심상치 않은 걸로 봐서, 아마 왕국군 측의 최고 전력 NPC겠지.
그리고 다크엘프 진영의 대표로는 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나와야 하는데.
"다크엘프의 대표는 아직인가."
엘레노어의 기척이 가까워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가까이 있는 다크엘프에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짓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야, 다크엘프 진영의 대표가 회담장에 입장했다.
"어이구야, 척 봐도 아주 거물들이 모였구나."
다크엘프의 대표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작업복을 입고, 쇠 냄새가 풍기는 채로 나타났다.
원탁 앞에 앉은 것은, 엘레노어가 아니라 키 작은 다크엘프 대장장이.
"에르웬?"
에르웬이었다.
97. 정상회담
에르웬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자리에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모두가 웅성거렸다.
예외가 있다면, 엘레노어의 얼굴을 모르는 인간족 왕국군의 대표인 군단장-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의 남자뿐.
"당신이 다크엘프의 여왕인가?"
"어이구, 여왕이라니. 나는 그냥 철 두드리는 늙은이다."
"각 종족의 대표가 모이기로 했을 텐데, 여왕은 오지 않는 건가?"
그는며 자리에 앉는 에르웬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에르웬은 너저분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반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엘레노어가 저런 걸 끼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반지에는 내 견장에 박혀 있는 정찰대 마크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다크엘프 왕실의 문양일 거다.
"제대로 그 아이한테서 역할을 넘겨받고 왔으니, 안심해라. 덩치 큰 인간족아."
덩치 큰 인간족이라고 불린 군단장- 라인하르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일개 대장장이가 종족을 대표한다니, 이 상황을 어지간히 가볍게 보고 있나 보군."
사실 상황에 대해서라면 가장 모르는 형편이면서, 저런 소리를 지껄이나.
뭐, 딱 봐도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원탁에 앉은 에르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이해는 한다. 엄연히 삼대 세력이 모여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인데, 저런 꼴로 나왔으니.
하지만 지금이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인가. 왜 쓸데없이 시비를 거는 거지?
"인간족아, 너야말로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냐? 여기가 뭘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각 종족의 미래를 놓고 협상을..."
"흐음, 이게 협상이라는 단어를 올릴 수 있는 상황 같으냐. 인간족은 저 커다란 뱀을 보지 못했나 보구나."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검은 기운을 가리켰다.
"우리에게 남은 미래는 둘 중 하나다. 다 함께 저것에게 멸망하거나, 다 함께 힘을 합쳐 승리하거나."
"엘레노어- 우리 여왕이 그러더구나. 서로 선택지가 없는 이상 이건 외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그러니 머리를 굴려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보다, 상대에게 앙금이 깊지 않은 이가 나가는 게 맞을 거라고."
동맹은 당연한 전제, 이루어지지 못하면 멸망. 필요한 건 결국 서로 손을 맞잡는다는 행위뿐.
그렇다면 서로 목소리를 높일 일이 없도록, 마음이 넓은 일반인이 원탁에 앉는다.
상황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서.
정확하게는, 이렇게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리려고 시위를 벌인 셈이다.
"무얼, 나는 다크엘프 최고의 연장자다. 사이 나쁜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일에는 도가 텄으니 말이다."
도발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을 내뱉고, 생긋 웃어 보이는 에르웬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
에르웬은 일개 대장장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크엘프의 장로나 다름없는 존재다.
애초에 왕국 측에서도 왕이 아닌 장군이 나왔으니, 다크엘프 진영이라고 꼭 여왕이 나올 필요는 없었다.
왕국군 측도 더 시비를 걸려고 하지는 않았고, 곧 삼대 세력의 연합을 위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말하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초반은 저 뱀의 위험성을 이야기했고, 이후 그 책임 소재에 대해 떠들고 있었던 것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에르웬의 중재로 누가 잘났니 못났니 하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역시 외교적인 이야기가 더해졌다.
왕국군에서 병사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니 없느니, 병기 동원은 경제적으로 힘드니 어쩌니.
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왜 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 이상으로 왕국군 측에 문제가 많다.
하이엘프의 인간 혐오 못지않게, 왕국군 소속의 인간족은 엘프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무슨, 불법체류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징하게 떠들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알겠고, 개씹좆프의 혐성을 겪어 본 탓도 있기야 하겠다만.
결국 저놈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리적인 조건을 자꾸만 걸려고 하고 있었다.
일정한 규모의 금전적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대수림의 일부를 영토로 할양하라느니 어쩌니.
에르웬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답답해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계속 돌고 돈다.
레이드를 위한 작전 브리핑 단계에서 꺼내려 했던 거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담판을 지어야지.
"야, 야, 너 닥쳐. 그만 말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장군 옆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모사꾼 새끼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뭔 씨발 말끝마다 뭘 내놓으라니 말라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왕국군 측의 인원들이 발끈하며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당연히 무기를 꺼내서 이놈들을 썰어버리고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건 아니다.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일부러 안 보여주고 있었던 건데."
나는 인벤토리의 골드 탭을 눌러, 에르웬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대량의 금화를 자리에 쏟아부었다.
-촤르르르르르르!
갑자기 뭘 하나 싶어서 지켜보던 왕국군 진영의 인간들이 점점 아연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돈과 이익이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주마, 이 돈벌레 새끼들아.
1층에서 9층까지 올라오면서 모았던 골드를 모두 아낌없이 쏟아붓고, 이후에는 아이템도 꺼냈다.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갑옷이며 무기만 해도 수백 개 이상.
메르세데스와의 결투에서 박살 난 걸 제외하고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까울 것도 없지.
"저 뱀 새끼랑 싸워서 살아남으면, 남은 건 다 가져도 돼. 내 조건은 하나야."
나는 아이템과 골드를 몽땅 쏟아부은 뒤, 마지막으로 내 애검을 꺼내서 모사꾼 놈에게 집어 던졌다.
-콱!
검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맞지 않고 벽에 박힌다. 일부러 안 맞춘 거지만, 맞아도 상관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익' 이랑' 돈'이라는 단어 말했던 새끼들은 다 작전에서 배제하고 시작하는 거."
저런 놈들을 두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분명 남겨 먹으려고 개수작을 부릴 게 분명하니까.
**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삼대 세력 간의 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남은 건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 준비를 마치는 것, 다행히 시간은 아직 그럭저럭 남아 있다.
정상회담 종료 후, 나는 내가 알아낸 뱀에 대한 정보를 있는 대로 다 풀어놓았다.
속성 약점, 중첩되는 축복의 효과,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각,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각 진영의 병기들.
대체 그런 것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적당히 얼버무리니 따지려 들지는 않았다.
이들도 결국 NPC인 이상, 시스템의 존재에 닿을 수 있는 의문은 깊이 파고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차 공략 회의를 마치고 난 이후, 나는 에르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기, 엘레노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어?"
에르웬이 대표 역할로 나온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엘레노어가 아예 나오지 않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에르웬을 대신 내보낸 것도 상당히 급하게 결정된 듯하고,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내 물음에, 에르웬은 잠시 고민하는 듯- 제 턱을 쓰다듬다가 말을 꺼냈다.
"혼자서 준비해야 할 일이 조금 있는 모양이더구나. 바쁘니까 당분간은 찾지 말아달라던데."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지간히 내키지 않는 말을 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음...마음이 많이 복잡한 모양이야. 인간족아, 혹시 그 애한테 뭔가 상처 주는 말을 한 건 아니냐?"
"짚이는 게 없는데."
"너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물어봐도 도통 말하려고 하질 않으니- 하여튼 사랑이란 참 어렵구나."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등을 팍팍 두드렸다. 사랑이라니, 갑자기 뭔 소리야.
곧 에르웬은 대장간 일이 바빠질 것 같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최근 들어 많이 나빠졌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분명 제 입으로 잠은 푹 자고 있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 모양새여서 신경이 쓰였었지.
어차피 조만간 깡통 NPC로 돌아갈 상대에게 무슨 걱정을 하고 신경을 쓰겠냐만은.
날이 갈수록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고는 했다.
"나랑 상관이 있다고?"
나는 에르웬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나빠지는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일까.
에르웬은 멋대로 사랑이 엮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애초부터 얄팍한 관계였는데.
"아, 몰라."
나는 한숨 쉬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달리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았다.
엘레노어가 어떤 상태건 뭐 어쩌랴, 결국 저 월드 보스를 잡지 못하면 다 끝장인 것을.
지금은 잠시 잊어버리고,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98. 엘레노어
삼대 세력의 연합과 레이드 준비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국군 병사들과 하이엘프들은 서로에게 어마어마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세계를 삼킬 기세를 내뿜고 있는 뱀용의 모습과, 그 주변에서 나타나는 잡졸들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이다.
서로 날 세우며 대립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저 뱀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것을.
물론 개개인의 감정 문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거대한 위기 앞에서 분열하는 꼴은 나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월드 보스의 활동 재개까지 앞으로 한 시간.
요새화된 다크엘프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장소에 다수 진지가 깔렸다. 진지에는 각각의 무기가 배치되었다.
내 인벤토리에 가득 차 있던 강화재료와 골드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 최대치까지 강화한 마포가 팔십여 문.
하이엘프의 비전 마법으로 구축한 간이 마력포대가 이십여 문.
다크엘프의 전쟁용 병기인 발리스타가 오십여 개. 이 모든 무기에 하나하나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걸어두었다.
거기에 모든 병력에 내 인벤토리에 남아돌던 장비와 무기를 최대치로 강화해 지급했다.
에르웬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추가로 제작해 준 무구들도 적재적소의 인원에게 배부되어, 전력을 키웠다.
당연히 이 모든 무기에도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부여, 그 밖에도 소모성 포션을 개인별로 지급했다.
이걸로 나는 거지가 됐다.
내 인벤토리에 쌓아두었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자원도, 작정하고 군대를 무장시키니 어느덧 밑천을 보였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번 전투를 위한 포션과 스위칭용 장비 두어 세트가 전부.
어차피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끝이라는 마인드로, 가진 모든 자원을 투자했다.
"어이구야, 이제야 좀 쉬겠구나. 두 번 하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그동안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대었던 에르웬이 앓는 소리를 했다.
"이제 쉬어, 이기든 지든 다음은 없을 거야."
"그것도 그렇겠구나."
"엘레노어는, 싸우기로 한 거 맞지?"
내 물음에 에르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 준비를 하는 동안, 엘레노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 성에 처박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나도 드문드문 얼굴을 보긴 했으니까.
다크엘프의 오래된 주술이나 비전 마법 같은 것을 서고에서 찾아내 마법사들에게 전달한다거나 하기도 했었고.
통솔력을 발휘해서 레이드 준비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지휘하기도 했었다.
나는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이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움직이고 있는 엘레노어는 정말로 여왕다웠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의 엘레노어다운 모습은 도통 보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팔린 기분.
"그렇다더구나, 마침 전투 준비도 끝나갈 때구나. 만나러 가 보지 그러느냐?"
물끄러미 내 표정을 살피던 에르웬이 제안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가 실패하건 성공하건, 아마 엘레노어와는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
왕성으로 들어오자, 그늘진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흐린 눈으로 그러고 있던 엘레노어는, 이내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나 해서, 잠깐 보러 왔어."
나는 왠지 모르게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시피 만전이다, 누가 상대라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엘레노어는 검과 지팡이를 챙기고 갑옷과 망토를 착용한, 말 그대로 완전 무장 상태였다.
다크엘프의 보물을 모조리 꺼내왔다던데,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도 심상찮게 강렬했다.
다만 묘하게, 마력에서 격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 기색이 명상할 때 느끼는 내 마력의 떨림과 비슷했다.
"혼자 뭘 따로 준비한다던 게 그거야?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는데?"
"물론이지, 누가 뭐라 해도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굉장한 보물인걸."
그 세계수가 별의 지맥을 빨아먹는 초거대 기생식물인 점을 생각해보면 좀 깨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실, 이게 다는 아니다. 조금...옛 문헌을 뒤져보고 있었거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책 하나를 꺼냈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새삼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많았지 뭐냐?"
세계수의 정체를 알고 다시 읽으니, 옛 선조가 남겨두었던 기록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고- 엘레노어는 말했다.
그 부분들을 토대로 세계수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연구하니, 새로운 마법에 다다를 수 있었다며.
옅게 웃으며 레이드에 대한 자신감을 뽐내는 엘레노어의 눈은, 여전히 별빛을 잃은 채였으나- 뭔가 미묘하게.
그 때였다, 엘레노어는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의외로 다른 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마력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엘레노어는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대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나?"
흐릿하던 두 눈에서 다시금 약한 별빛이 반짝였다.
**
날이 갈수록 옅어져만 가던 엘레노어의 별빛, 들여다본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꿈 꾸는 눈.
"저 뱀의 목적은 세계수를 삼키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연료 삼아 다른 별로 떠나는 것이다. 꼭 멸망이 목적은 아니야."
그것이 밝게 빛나며, 어딘가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지, 아마 저것은 세계의 9할을 파괴하겠지만- 남은 1할의 땅에서 살 준비를."
"그림자를 이용한 전이는 내 최고의 특기야. 별의 반대편까지 날아가면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거다."
"둘이서 함께 그곳에서 사는 거다. 작은 집이라도 하나 짓고...아아, 불편한 점은 물론 많겠지."
"하지만 뭐, 그런 걸 이겨나가는 게 사랑이니까. 마법이 있으니 대부분은 어떻게든 될 거다. 자신 있어."
"물론 그대는 인간족이니까, 엘프와는 다른 시간을 걷겠지. 앞으로 길어봤자 백 년밖에 못 살 테고."
"하지만 괜찮다. 별의 지맥이 메마르고, 세계수도 떠난 세계에선 아무리 엘프라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물론 그대보다 몇백 년을 더 살겠지만, 그대와 함께한 백 년을 곱씹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거다."
"그리고, 설령 그대가 떠나더라도- 하프엘프는 오래 사는 편이니까. 백 년 안에 아이를 밴다면-"
나는 거기까지 듣고, 손을 들어 엘레노어의 말을 끊었다.
"야,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황스럽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로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엘레노어는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던 여왕이었다. 책임감을 갖고 백성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적어도 이 9층에서는.
싸움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백 년 전에 그렇게 했을 거다.
"여기는 어쩌고, 저 뱀을 내버려두면 다 죽을 거 아니야. 네 백성들은 어쩌게."
나는 가능한 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러 더 침착하게 말했다.
"아, 백성 말이냐."
하지만 엘레노어의 이어진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침착하게 있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그딴 거."
그건,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
판단은 빨랐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엘레노어의 목을 겨누었다.
"너, 엘레노어 아니지."
"아아, 물론이지."
"뭐 하는 놈이야, 너."
그러자, 엘레노어는 웃었다. 목에 칼이 들어왔다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아무렴, 나는 엘레노어가 아니지. 저기 있는 엘프들도 내 백성이 아니고, 이 성도 내 것이 아니야."
미친듯이 웃어젖히는 엘레노어의 눈빛에서 다시금 별빛이 사그라졌다.
"영혼 없는 깡통 인형 따위가, 어떻게 내 백성이겠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성 안에서 메아리쳤다.
"뭐?"
나는 더는 검을 들이밀 수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엘레노어는 내 검 끝을 손으로 치워내고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은…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어."
"나는 꿈을 통해 그대의 기억과 심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대가 살아온 세계와, 시련의 탑이라는 모형의 세계를 보고 말았지."
그 말을 듣자, 나와 함께 자기 시작하면서 나날이 상태가 나빠져 가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탑에 들어오기 전의 그대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를 잃고 귀기가 들려 날뛰던 그대의 모습도 보았다."
"퀘스트를 마치자 인형처럼 변해서- 그대에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줬던 우리의 모습도, 모두 보았어."
"그러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도 돌아보았지. 돌이켜 보니, 모두 허상처럼 흐릿한 기억이다."
그리고 엘레노어와 함께 자던 매일, 드물게 꾸었던 인형이 나오는 괴상망측한 꿈도.
"평생 자유를 갈망하고, 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었건만- 나는 노예였고, 인형이었다."
엘레노어의 눈에 깃들어 있던 별빛은, 그녀가 물려받은 나이트 엘프의 본능에서 비롯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숲의 바깥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이었으며.
공주라는 타고난 신분과 위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던 마음의 불꽃이기도 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 전부를 잃어버린 엘레노어의 마른 눈은, 나와 무척 닮아 있었다.
99. 닮은꼴
엘레노어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흔들림이 왜 이렇게도 익숙한지.
나는 죽음을 바라지만, 엘레노어는 삶을 바랐다. 내가 내던진 욕망을, 엘레노어는 하나도 놓지 않았다.
두 눈은 언제나 머나먼 별을 올려다보았고, 그 입은 언제나 꿈을 말했다.
종족, 성별, 성격, 습관, 자아-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정 반대.
그랬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이토록 익숙하게, 나 같은 산송장을 닮아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논 플레이어 캐릭터, NPC.
무엇을 길게 생각하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내 백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살아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 이제 와서 죽어도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엘레노어는 내게 바짝 달라붙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뱀은 분명 그대가 겪는 시련의 일부, 퀘스트의 마지막 적이겠지. 그렇다면 저걸 토벌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우는 사람인 줄 몰랐다.
"깡통에 불과한 우리들의 생은 저것과 함께 끝난다. 다 내버리고, 나라도 살고 싶다고 바라는 게 그렇게도 이상한가!"
엘레노어가 소리쳤다. 가슴께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었다.
알고 있는 아픔이었지만, 명칭을 모르기에 부를 수 없는 아픔이다.
다만 그저 아파하며, 가슴께를 누르고 마냥 인내할 뿐.
"나는...알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그대의 심상을 보았기에 알 수 있어.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그대는 우리가 살아있지 않음에 괴로워했어. 모종의 사랑이 있었을 거다."
"퀘스트를 포기하고, 나를 골라다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을거다. 그대가 결정하면 돼."
엘레노어는 내가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힘겹게 외면했던 선택지를 다시금 들이밀었다.
내가 내버렸던 욕망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내 행복을 찾을 기회.
이렇게나 달콤하게 와닿는 유혹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게, 열심히 피해 왔지만, 나는 분명 엘레노어를-
"그대, 탑을 나가면 죽을 생각이지?"
- 이어진 말이 머리를 쾅 후려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대는 항상 죽음을 바라 왔어,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목표가 있기에 그럴 수 없었지. 그렇다면 뻔하지 않나."
"그대는 탑을 나가고, 어머니를 만나면, 죽을 생각이야."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나. 버릴 수 없었던 욕망이 있지 않았나, 분명 이 자리에 있을 거다."
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이름을 알 수 없던 둔통이 계속해서 일었던 자리를.
"그대를 괴롭히는 말뚝을 뽑아 버려라, 나와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끝내 엘레노어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이대로 엘레노어의 어깨를 끌어안으면, 그걸로 끝이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 엘레노어를 고른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엘레노어와 함께 살면 분명 즐거울 것이다. 7층에서 그 잠시간 함께했던 것만으로, 이만한 망설임을 만들었을 정도니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분명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겠지, 아무리 지쳐도 함께라면 분명 웃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엄마를 내버리는 길이다. 분명히 괴로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서진혁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건 탑을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긴 고민 끝에, 쓰레기 병신 서진혁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기 위해 손을 뻗었다.
**
뻗어진 손은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기 직전에, 멈칫하고 말았다.
앞으로 조금, 일 센티미터. 하지만 이 병신새끼는 직전의 직전에 결국 고르지 못했다.
이게 나다. 앰생 병신 방구석 개백수 쓰레기 서진혁.
고민 끝에 고른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엇도 고르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남은 건 엘레노어의 선택이다.
엘레노어가 스스로 움직여 준다면, 엘레노어가 한 발짝 더 내게 다가와 준다면, 그때는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상대에게 선택을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엘레노어는 망설이는 내 손을 보고는, 쓰디쓴 표정으로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마지막 망설임이 그대의 선택이겠지, 백이십 년 전에는 그 망설임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건만."
그렇게 말하며 두 발자국 물러난다. 망설이는 나를 두고, 엘레노어는 포기를 택했다.
그렇겠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한심한 놈이랑 살고 싶지는 않을 거다. 당연한 거고, 현명한 거야.
"오해하지 마라, 나도 그대와 다를 것 없었을 뿐이니까. 백 년을 더 살아오며, 그대를 닮아 버린 모양이야."
"아니야, 내가 병신이지. 네가, 내 어디를 닮았다는 건데."
"내가 나약해서, 그대에게 힘든 결단을 강요했지 않나. 어머니와 나 중에 하나를 고르라니, 내가 너무했지."
세 발자국 물러난 엘레노어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표정은 정직하다.
"내게도 의무가 있다. 이 왕관을 쓰면서 이어받은 의무가. 설령 영혼 없는 깡통일지라도...나는 내 백성들을 지켜야 해."
"그대가 망설여 준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내 백성들에게도, 그대에게도, 이기적으로 굴고 말았어."
"내가 탑에 묶여 있는 존재라고, 그대까지 이 탑에 묶어버리려 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은 입에 담고 말았어."
엘레노어는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래, 우리는 정말로 닮았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으니.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멈춰 서지 않기로 했던 맹세.
여왕으로서 그것과 똑같은 맹세를 가슴에 박아넣은 엘레노어의 마력이, 나와 같은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대는...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해."
우리는 이렇게 똑같은 고민 끝에, 똑같은 결정으로- 결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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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감지가 펜던트를 이용한 템빨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마력은 마음에 영향받아 흔들리니,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마력강화 따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눈물을 지워 없앤 엘레노어는 다시 다크엘프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뱀용 토벌을 위해 앞으로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나도 그 결단에 응해야만 한다. 마음에 휘둘려 싸우기를 망설이지 말자.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월드 보스 레이드 재개까지 : 00'06'24]
뱀용의 재활동 대기 시간까지 앞으로 6분, 병기의 배치와 여타의 준비들은 모두 완료되었다.
-뿌우우우우!
작전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배치되어 있던 마포 부대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쏴라!"
몇 단계에 걸친 버프를 몰아받고, 활동 재개까지 5분이 남은 뱀용을 향해 마력의 탄환과 발리스타가 쏘아졌다.
레이드는 꼭 카운트다운이 끝나야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잡몹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를 선제타격하는 것으로, 원하는 타이밍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만한 포격 수단이 있으면, 강력한 공격을 첫발에 꽂아넣고 시작할 수 있으니.
반드시 5분을 남긴 시점에 최대한의 화력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커뮤니티에서 조언을 받은 바 있다.
-쾅! 콰과광! 쿠과광!
일제히 쏘아진 무기가 뱀용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타한다. 잠에서 깨어난 뱀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역시 화력은 확보하고 볼 일인가. 상상 이상으로 위력도 효과도 훌륭하다.
이 다음은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다. 인벤토리에 준비한 물건이 제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마법진 위로 올랐다.
"무운을."
전이를 담당한 마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마법의 가동과 함께 나는 하늘 위로 내던져졌다.
공중으로 전이된 것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하이엘프 정예 기사들.
그리고 왕국군의 정예 병력과 최고 전력인 군단장, 다크엘프 정찰대의 에이스들과 엘레노어까지.
우리는 뱀용의 급소를 직접 공격하는 특공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몸부림치는 뱀용의 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이 잘 되어야 할 텐데.
-키리리링!
그 때, 지면에서 엄청난 마력의 격류와 함께 커다란 사슬이 솟아올랐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우리 진영의 마법이다.
다크엘프의 그림자 마법은 직접 전투보다는 속박 같은 보조 계열에 치중되어 있다.
그런 만큼, 그쪽 계열을 작정하고 파고들면 굉장한 성능이 나온다. 이 점 역시 커뮤니티에서 검증해 준 내용.
여러 도전자들이 발로 뛰어, 그림자 계열 마법중 가장 속박 판정이 좋은 스킬을 찾아내 주었고.
나는 그렇게 알아낸 스킬을 전파해, 마법사들이 재해석해 대규모 술식으로 쌓아올릴 수 있도록 했다.
원래는 단기간에 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부족한 부분은 마법석 같은 재료를 미친듯이 갈아넣는 것으로 해결.
당연히 그 재료는 내 인벤토리에서 나왔다.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인 단 한번뿐인 속박 마법.
월드 보스를 상대로도 통할지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이게도 잘 된 모양이다. 이제 착지만 하면 된다.
-그아아아아아아!!
사슬에 묶여버린 뱀용이 소리지른다. 포효 자체에 실린 마력이 퍼져나가며 주변 지형을 으스러트린다.
하지만 여기 있는 정예들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엘리트급, 강자 중의 강자들.
-티딩! 팅!
뱀용의 전신에서 쏘아지는 검은 마력탄을 각자의 방식으로 쳐내고, 놈의 몸에 착지해 내려앉았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허울 뿐인 존재일지언정 백성들을 지키겠노라 선언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선택이었는지는, 똑같은 선택을 내렸던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그 선택을 지지하겠다.
우유부단하고 꼴사나운 병신새끼지만, 그런 나이기에 잘 하게 된 일이 하나는 있으니까.
"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분쇄하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적을 찢어 죽이는 것.
너와 결별하고 탑을 올라갈 것을 맹세했으니,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겠어.
-쿠르릉!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뱀용의 두꺼운 비늘에 검을 꽂아넣었다.
100. 새 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