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새 엘프
이중으로 버프를 받은 칼날의 손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가서, 두부나 젤리 같은 것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박아넣은 칼을 쥐고 손목을 비튼다. 검손잡이를 쥔 채, 마력강화의 힘을 살려 그대로 놈의 몸 위를 질주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각!
달리는 그대로 비늘이 잘려나가며 피가 튄다. 덩치가 크고 피통이 많은 대신, 방어력은 높지 않은 것 같다.
50인 이상 규모의 레이드라고 해도, 데미지가 안 박히면 공략 자체가 불가능할 거다.
그러니 9층 수준의 도전자들로도 데미지 자체는 입힐 수 있도록 설계된 거겠지. 그렇다면 나한테는 아주 편하다.
나 하나가 9층 도전자 백 명 어치만큼 강한 건 아니다.
하지만 각 층의 보스를 단독으로 격파할 수 있는 만큼, 나는 9층 도전자 스무 명 어치 정도로는 충분히 강하다.
-콰가각!
나와 함께 뱀용의 몸에 상륙한 인원들도 각자 사정없이 무기를 휘두르며 상처를 입혀 나간다.
나 못지않게 강한 메르세데스나 왕국군 군단장 라인하르트, 그리고 엘레노어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뱀의 비늘을 벗기고 그 살을 파헤쳤다.
이렇게만 흘러가면 오래 걸리지 않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
-꿈틀.
사슬에 묶인 뱀이 거칠게 몸을 뒤흔들었다. 놈의 몸에 올라타 있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지진이나 다름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도 마법은 쓸 수 있다. 공중에 떠오르는 칠흑의 마법진.
그 곳에서 하이엘프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던 검은 가지가 무수히 튀어나와 우리를 덮쳤다.
-카캉!
저 가지 공격 자체는, 이놈의 근처에서 날뛰는 잡몹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지 하나하나의 힘은 약하다. 충분히 튕겨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물량과 그 부가 효과, 저 수많은 가지 중 하나라도 쳐내지 못하고 맞으면 끝장이다.
-카강! 카앙! 카앙!
가지를 이용한 공격이 오기 시작하면서, 인원 대부분이 방어에 급급해졌다.
이 마당에,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건 소수.
나와 메르세데스처럼 마력강화의 방호력으로 가지를 받아낼 수 있는 이들 몇몇뿐이다.
다행이게도, 왕국군의 정예병력인 기사들은 수준은 떨어지지만 마력강화가 가능한 이들이 몇몇 있었다.
-쿠르릉!
마력의 빛에 휩싸인 기사들이 몸을 날리자, 가지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뚝뚝 부러진다. 나도 똑같이 공세를 이어나갔다.
구속이 이어지는 동안에 최대한 데미지를 입혀 놔야 한다. 이렇게 좋은 딜타임은 아마 다시는 안 올 거다.
그렇게 몇 분간 뱀용의 몸을 난도질하던 중,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구속의 사슬이 파괴되며- 놈이 몸을 일으켰다.
[세계를 삼키는 뱀이 분노합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 이것도 커뮤니티에서 알려준 대로다. 예고 후 발생하는 광폭화 패턴.
"광폭화다, 리콜!"
배에서 온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내 쩌렁쩌렁한 말소리에 반응한 근처의 기사들이 복창해 전파했다.
손목에 착용한 마도구를 조작한다. 잠시 후, 우리는 전이 마법에 의해 역소환되었다.
근접 딜 타임 종료, 그러면 다음은- 다시 재장전을 마친 공성병기들의 차례다.
-콰과광! 콰광!
광폭화 패턴이 발생한 뱀용을 향해, 무수한 마력의 탄환이 날아가 처박혔다.
**
포병들이 '이 정도면 산도 조각낼 수 있을 겁니다' 라고 호언장담했던 말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뱀용은 상상 이상으로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마포에 얻어맞고 있었다.
월드 보스는 그 스펙과 규모가 어마어마할 뿐이지, 특별히 복잡한 패턴은 없을 거라던데- 정말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산조차 조각내 버릴 수 있다는 포격에 일방적으로 맞고 있지만, 비명만 요란할 뿐 어째 시원찮다.
"기본 데미지 감소가 붙어있긴 한 모양이네."
마포를 이용한 포격도, 발리스타를 이용한 물리 공격도, 모두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고 있다.
나와 특공대원들이 긁어놓은 상처는 이렇게 멀리서 보니 볼펜으로 북북 선을 그려놓은 정도로밖에 안 보이고.
역시, 커뮤니티에서 언급된 약점을 노리지 않는 한은 제대로 처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작성자 : 김창진#1421]
[제목 : 님들 나 월드보스 약점 찾은거 같음]
진혁이가 세번째 글에 올린 사진인데, 이거 확대해보니까
(사진)
이 부분 보임? 잘 보면 저기 하나만 비늘 거꾸로임, 이거 역린인거같거든
보스 이름도 뭐시기 뱀용이랬으니까 약점부위 있으면 이거일거같은데
- 와 씨발 진짜네 어케찾았냐?
- 이새끼는 이걸 확대해볼생각을했네 ㅋㅋㅋ
- ㄴ ㄹㅇ 나는 다크엘프 찌찌만 확대해보고 있었는데...
- ㄴ 윗 대댓 서버 직업 좋아하는 축구선수 급함 ㅃㄹ
- ㄴ 1772 전사 신두형좋아함 ㅎ
- ㄴ 아오 전평 ㅋㅋ
- 용들 원래 역린이 따로 있음? 드래곤 잡아본사람 말좀
- ㄴ 없는데 월드보스라 따로 있는거 아님?
- ㄴ 월보는 원래 약점부위 하나씩 있대 공략하라고
레이드 계획을 다 세우고, 대부분이 레이드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타이밍에 올라온 글 하나.
내가 올린 스크린샷 중 하나에서 거꾸로 된 비늘이 하나 발견되었고, 추측하기에는 그게 약점일 거라고 했다.
실제 월드 레이드를 경험해 본 이들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부분이 약점일 것이라 의견을 내놓았었지.
타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크리티컬이 터지는 부위, 우리 특공대의 제 일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커뮤니티에서 역린을 발견한 시간이 조금만 빨랐어도, 전투 개시 전에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직접 놈의 몸에 올라타서, 스크린샷과 위치를 대조해보며 찾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아아아아!!
포격이 거의 끝나갈 때쯤, 뱀용이 비명을 지르며 광폭화 상태가 풀렸다. 다시 특공대의 시간이다.
광폭화는 일정 이상 데미지를 입히면 풀린다. 이번에 빠르게 광폭화를 뺄 수 있었던 건, 레이드 개시 직후의 초반 극딜 덕분일 터.
다음 광폭화부터는 쉽게 대처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특공대가 마음 놓고 나설 기회도 없을 거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 못 찾아내면 힘들어져."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리콜 마도구를 사용해 다시 한번 뱀용의 몸에 올라타기 위해 전이했다.
그런 우리를 맞이해 준 것은, 조금 전과 같은 무방비한 비늘 대지가 아닌-
"뭐야 저게."
- 팔이 네 개 달린 괴상망측한 거인의 무리였다.
**
뱀의 비늘에서 솟아오른, 찰흙을 빚어 만든 것 같은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
멀리서 보기에도 그 덩치가 상당해 보인다.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심상치 않다.
"맙소사...대체 어디까지 타락한 거냐."
나와 가까운 위치에서 낙하하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메르세데스만이 아니었다.
왕국군을 제외한 정예 병력, 즉 다크엘프와 하이엘프 대부분이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대로 빠르게 낙하해, 검을 휘둘러 거인 하나를 거칠게 베어버렸다.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야, 이게 뭔데 그래."
토막난 거인을 걷어차며 묻자, 내 옆에 있던 하이엘프가 인상 쓰며 말했다. 인간족은 모를 거라고.
"모른다, 모르지만...어쩐지 알 수 있다. 저 거인이 우리와 동질의 존재라는 것을."
나를 향해 더 많은 거인이 몰려들었다. 이제 보니, 새까만 거인의 일그러진 머리에는 특징적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세계수를 삼켰기 때문에, 이런 일도 가능한 건가."
거인의 귀 부분이, 마치 엘프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다는 것. 동질의 존재라는 게 그런 의미인가.
생긴 건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지만, 엄연히 세계수를 통해 창조된 생명체.
저 거인은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에 이어서 창조된- 새로운 엘프종인 것이다.
"의식하지 마, 그럴 때 아니잖아."
나는 이름 모를 하이엘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비틀린 엘프 거인을 향해 돌진했다.
덩치는 크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나는 시선으로는 뱀용의 비늘을 샅샅이 훑으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전투 중에 다른 것을 상대로 시선을 파는 건 악수였던 모양이다.
-후웅, 투둑!
무언가 거대한 작살 같은 것이,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확 튀었다.
뭐지? 가지는 아니고, 저 거인이 원거리 공격을 한 건가?
놀라며 바라보자, 거인의 새까만 네 팔에 쥐어진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지들도 엘프라 이건가."
거인의 손에는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대한 활이 들려 있었다.
**
각각의 거인들이 검이며 활이며 무기를 들었다.
찢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살피며 다시 흘겨 보니, 무기들의 윤곽이 하나같이 익숙했다.
새까만 색깔에 찰흙을 빚어 만든 것처럼 뭉뚱그린 모습이지만, 다른 엘프들의 무기와 매우 닮았다.
그리고 저 특징적인 자세도, 궁술에 관심을 갖고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놈들은 제대로 된 엘프식 궁술을 구사하고 있는 거다. 마법 같은 궤도를 그리며 필중하는 신비한 궁술을.
원래 엘프의 궁술은 사기적이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결국 기술이 특별할 뿐, 활과 화살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었으니까. 피하지는 못해도 쳐내고 막는 건 쉬웠다.
하지만 저 거인이 네 팔로 다루는 활의 크기는 장난이 아니고, 화살 하나하나가 고래 잡는 작살 사이즈다.
거기에 화살에서 풍기는 세계수의 기운, 아무리 봐도 특수 효과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활을 든 거인의 숫자는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수십, 어쩌면 백을 넘을지도 모른다.
"염병하네."
저런 미친 활이 필중의 궁술로 쏘아진다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진짜.
저 놈들을 상대하면서 하나뿐인 역린을 찾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해야지 뭐, 씨발."
뭐, 언제는 할 만한 일이라서 했었나.
101. 뱀 사냥
활과 화살의 크기가 거대한 만큼, 날아드는 화살이 내는 소리 역시 남다르다.
-푸학!
다크엘프의 대형 발리스타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며, 화살 세례가 닥쳤다.
이렇게나 커다란 주제에 날아드는 속도는 평범한 화살에 전혀 뒤처지지도 않고, 오히려 더 빠르다는 인상이다.
팔이 네 개라서 활을 더 세게 쏠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엘프의 궁술로 쏘아지는 화살은 피할 수 없다.
-쾅!
마력감지를 전개해 날아드는 화살을 방패로 받아냈다. 부딪히는 소리 역시 아주 요란하다.
그리고 위력도, 씨발, 이거 생각보다 더 센데.
마력감지를 쓴 내 스펙으로도 제대로 받아내기 힘든 공격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학!"
"커헉!"
화살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이들이 몸을 관통당하며 픽픽 쓰러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치명적이지 않은 부분을 맞은 이들도, 화살을 맞은 직후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예상대로 화살 자체에 뭔가 부가 효과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 방만 맞으면 즉시 무력화인가.
"씨발 진짜."
이거, 역린을 찾으려면 일단 저 거인들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내게 활을 쏜 거인을 향해 단숨에 거리를 좁혀, 크게 검을 휘둘러 다리를 베어버렸다.
덩치가 워낙 커서, 어지간해서는 한 방에 끝낼 수가 없다. 방어력과는 별개로 무조건 두 번은 베야 한다.
-촤악!
그렇게 한 놈을 베는 사이에, 다른 거인들은 한 번 더 화살을 메기고- 검을 든 거인들은 뛰어들어온다.
"흐읍!"
메르세데스를 비롯해 도드라지게 강한 몇몇은 당연히 거꾸로 거인을 쓰러트리지만, 그건 역시 소수.
필중필살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며, 거대한 덩치로 밀고 들어오는 거인에 대부분이 속수무책이다.
거기에 뱀용 본체는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드문드문 초반의 검은 가지 공격이 쏟아지고 있으니.
씨발, 이 지랄을 여기서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인벤토리에서 쇠구슬을 잔뜩 꺼내, 뒤틀린 엘프 거인들을 향해 냅다 흩뿌렸다.
놈들은 공격력은 강해도 방어력은 형편없으니까, 이렇게 대충 날린 쇠구슬로도 처치할 수 있을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 양심 없는 새끼들은 엘프 특유의 민첩한 몸놀림도 갖고 있었다.
-후웅! 후웅!
"지랄, 이걸 피한다고?"
저 산만한 덩치로 어떻게 저리도 잽싼지, 단순한 궤적의 쇠구슬을 가볍게 피해낸다.
심지어 놈들이 들고 있는 무구 중에는 방패도 있어서,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막아내기까지.
팔이 네 개라서 궁병인 주제에 방패를 함께 쓸 수 있다. 효율이 존나 좋은 몸뚱이다.
"이 내가 직접 창조한 엘프들은 어떤가, 어리석은 인간족아."
욕설을 내뱉으며 또 하나의 거인을 베어 넘기던 중, 머릿속에서 전음이 울려 퍼졌다.
하이엘프 왕의 목소리다. 생각해 보니, 뱀으로 변한 직후에도 제대로 말할 수 있었지. 이 새끼.
"수호와 개척을 목적으로 탄생한 두 엘프종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그들은 오직 전투를 위해 태어난 병사이니."
"그래 이 새끼야, 차원이 다르게 좆같이 생겼네."
"패배자의 발상이군, 외모는 아무래도 좋지. 새로운 별에 가장 먼저 뿌리내릴 나의 엘프들이 미의 기준이 될 테니까."
대꾸하는 꼴을 보니 보통 여유로운 게 아닌 것 같다. 비웃음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나쁘다.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에 이어, 새 별에서 새롭게 떠오를 나의 엘프들을- 이 자리에서 던 엘프라고 명명하겠다."
주둥이로 떠드는 게 아니라서 막을 수도 없고, 아니지, 잠깐만, 주둥이?
가만 있어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역린이라는 명확한 급소에 시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인가. 급소는 그 밖에도 달리 있잖아.
"부상당한 사람들 전부 리콜해, 마력강화 안 되는 놈들도 전부! 아니 그냥 싹 다! 그리고 포격!"
나는 잠시 꺼두었던 마력강화를 다시 발동하고, 검을 들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
갖가지 공격이 다시금 날아들지만, 나는 방어력을 믿고 무작정 정면으로 돌진했다.
-콰곽, 과직, 콰광!
마력강화의 방호력과 [철벽] 스킬을 더해 공격을 받아내며, 몸통박치기로 길을 뚫는다.
최대 속도로 질주하자, 금세 뱀용의 머리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높이 점프했다.
뛰어오른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쩍 벌려지는 아가리, 이 정도로 큰 주둥아리면 당연히 나 정도는 한입에 삼키겠지.
나는 전이와 리콜을 위해 필요한 손목의 마도구를 잠시 떼어 인벤토리에 넣어놓고, 그대로 놈의 입안으로 다이빙했다.
뭣하러 힘들게 급소를 찾고 있단 말인가. 생명체라고 한다면 몸속은 대부분 급소일 거 아니야?
몸 안에 있으면 포격 타이밍에 맞춰서 복귀할 필요도 없고, 귀찮게 거인을 상대할 필요도 없다.
-촤자자작!
뱀용의 식도로 추정되는 부분을 칼로 긁으며 내려왔다. 분수처럼 쏟아진 피와 축축한 소화액이 몸에 잔뜩 묻었다.
현재 나는 갑옷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비를 해제하고 거의 맨몸으로 있는 상태다.
원래라면 이 소화액인지 뭔지에 녹아서 소화되어야 하겠지만, 내가 부식 내성 레벨이 보통 높은 게 아니라서.
"근데 뱀 내장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입을 통해 들어왔으니 여기는 위장이나 식도겠지, 심장 같은 부위를 노리고 싶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나.
이렇게 되면 이제는 인벤토리에 준비해 둔 그 물건의 차례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꺼냈다.
마석을 엮어 만든 간이식 마력 폭탄. 원래는 역린을 가르고 처박을 예정이었지만, 이번에는 여기서 쓰자.
-푹!
나는 가능한 한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와서, 검을 휘둘러 상처를 낸 자리에 마석 폭탄을 잘 심어두었다.
"아군을 버리고 내 뱃속으로 들어오다니, 생에 미련이 없는가- 이름 모를 인간족이여."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전음. 목소리가 조금 전과 살짝 다르다. 이런 건 생각 못 했나 보지?
-후두둑, 후둑!
위벽인지 뭔지 모를 벽면에서 새까만 체액이 쏟아진다. 조금 전의 위액과는 달라 보인다.
거인이나 나뭇가지 이외의 몸을 지키는 수단인가. 살짝 손을 대 보니, 불로 지진 것처럼 손끝이 타들어 갔다.
이 느낌도 통증도 모두 익숙하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자체적으로 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도록 해라."
엘프 왕의 선언과 함께 넘쳐흐르는 독액의 세례에도, 나는 꿈쩍하지 않고 폭탄을 만졌다.
내 독 내성과 부식 내성을 뚫는 게 뭐 어떻다고, 애초에 내가 내성을 키운 방법 자체가 이런 식이었는데.
내 재생력과 이 녀석의 독액, 그리고 내 공격력과 이 녀석의 생명력이 서로 겨루는 거다.
"누가 먼저 죽나 해 보자."
[혼신] 스킬로 내구력을 최대한 증폭시키고, [철벽]스킬을 사용하며, 나는 폭탄을 가동했다.
**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고, 터져 나온 마력에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 그대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사방 모두가 뱀용의 몸뚱어리, 아무렇게나 베어도 전부 공격으로 들어간다. 문제는 내 몸뚱이긴 한데.
[패시브 스킬 : 기절 내성 13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 : 전투 지속 16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몇몇 스킬 레벨이 계속해서 오르는 걸 보면, 분명 심하게 만신창이일 게 뻔하다. 실제로 통증도 장난이 아니고.
마음같아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지만, 목이 잘못됐는지 소리가 안 나온다.
그래서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내 앞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베고 또 베었다.
그러던 중, 약간의 감각이 몸에 돌아오며-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푸학!
바람이 끼쳐오는 방향으로 몸을 내밀었더니, 바깥이었다. 뱀의 배를 가르고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아아아아아!!
뱀용의 요란한 비명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속에서 날뛰는 사이, 바깥쪽에서도 피해를 준 모양.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전이용 마도구를 다시 장착하고, 리콜을 요청했다.
-츠팟!
공간 전이 특유의 울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나는 연합 부대의 진지 중 하나로 귀환했다.
"맙소사, 꼴이 말이 아니군. 포션, 누가 포션을 가져와!"
아마도 걸레짝이 되었을 내 몸뚱이를 보고 난리 치는 병사에게 손을 휘휘 젓고, 내 포션을 꺼내 마셨다.
마시려고 했는데 질질 흐르는 걸 봐서는 얼굴도 어떻게 됐나 보네, 사지가 안 날아간 게 천만다행이다.
"크...어윽, 아, 아아."
그럭저럭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HP가 상당히 갈린 상태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차피 회복될 내 HP가 아니라, 월드 보스의 HP다.
나는 진지 밖으로 나가서 뱀용의 상태를 살폈다. 그 잠깐 사이, 바깥은 말도 안 되는 꼴이 되어 있었다.
"허, 씨팔, 저게 뭐야."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난 뱀용의 몸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왜 뜨거운 공기가 느껴지나 했더니, 불타고 있잖아. 나는 진지의 병사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조금 전부터 갑자기 스스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모종의 마법 같은데."
HP가 감소하면서 나타난 새 패턴이겠지, 커뮤니티에서도 피가 깎이고 난 이후가 진짜라고 했으니.
마법 공격에 대한 방어 대책은 착실하게 갖춰져 있다. 난데없이 브레스를 쏴도 한 번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뱀용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이어진 것은 마법이 아닌 물리 공격.
-콰과과광!
화염을 휘감은 뱀은 그대로 그 거체를 움직여, 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102. 상성
압도적인 거체에서 나오는 파괴력과, 몸에 휘감은 불꽃이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화염 폭풍.
그렇잖아도 어마어마한 범위를 쓸어버릴 그 공격은, 나무가 가득한 대산림이라는 환경에서 재앙으로 변모했다.
뱀용의 몸부림으로 뽑혀나간 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주변의 땅이 그것을 뒤따른다.
까마득하게 높이 상승한 잔해들은 모조리 불이 붙은 채로 다시 낙하했다.
그렇게 불붙은 잔해는 또 다른 잔해에 불을 붙이고, 이윽고 퍼져 나가는 산불을 만들었다.
"이런 미친...!"
불타기 시작한 뱀용의 공격은 내가 있는 자리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큰 문제였다.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마포가 박살이 나고, 마포를 다루는 병사와 마법사들이 단번에 휩쓸려버렸다.
마포 포격이야말로 이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화력인데, 그 절반이 날아가 버린 거다.
-슈루룩!
내 옆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그 안에서 다수의 엘프와 인간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림자 마법을 쓸 수 있는 누군가가 급하게 전이를 사용해 대피시킨 것 같다.
그 때, 불타고 있던 뱀용이 나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눈동자가 분명하게 나를 직시했다.
"거기 있었구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전음, 그와 동시에 뱀용은 다시 한번 그 불타는 몸으로- 이쪽을 향해 몸을 뻗었다.
-콰과광!
진행경로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무시하고 직진, 나는 [혼신]을 비롯한 버프를 발동해 즉시 뛰어올랐다.
곧 내가 있던 자리를 뱀용의 거체가 휩쓸었다. 근처에 있던 아군들이 모조리 짓뭉개지고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몸 속에 들어가 난동을 부려놓은 게 녀석의 신경을 긁은 걸까. 내 쪽에 제대로 어그로가 끌린 것 같다.
순간, [직감] 스킬 특유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들어 발밑으로 방패를 내밀었다.
-쾅!
방패 위로 무식하게 큰 화살이 박혔다. 거인 엘프가 사용하는 그 화살, 그것도 불이 붙은 채다.
마력감지를 사용해 감각을 뻗어 보니, 내가 있던 자리를 통째로 뭉개버린 뱀용의 뒤통수에 거인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직후,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거인들이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푸학!
마치 지면이 나를 향해 불을 토하는 것 같았다.
다 세기도 힘든 숫자의 불화살이, 공중에 있는 나를 노리고 쏘아졌다.
나는 재빨리 반응했다.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고 소드 차지를 시전, 돌진 판정을 이용해 화살의 경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엘프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는다. 불화살이 기묘한 각도로 꺾여 나를 노렸다.
"씨이, 발!"
인벤토리에서 가장 큰 방패를 꺼내 양손에 들고, 최대한 몸을 가려 화살을 받아내었다.
최대한 모두 막으려 노력했지만, 불화살의 숫자가 숫자였기에 몸에도 많은 숫자가 박혀 들어왔다.
불화살이 몸에 박히는 순간 눈치챘다. 화살의 추적 능력에 기술이 아니라 마법이 쓰였음을.
어쩐지 유도 성능이 너무 말이 안 된다 싶었지, 마법을 부여해서 쏜 거였군.
대마법 내성 스킬과 화염 내성 스킬이 없었다면 안 비운 재떨이 같은 꼴이 되었을 거다.
"놓치지 않는다."
뱀용이 다시 한번 전음으로 말했다. 온몸에 불화살이 박힌 나를 향해, 놈의 머리가 다시 한 번 닥친다.
자유자재로 몸을 꺾을 수 있는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공중에서는 거의 움직일 수 없다.
-쿠구구구궁!
지면에서 솟구친 뱀용의 대가리는 나를 곧바로 치지 않고, 한 번 목을 굽혀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발, 설마, 아니겠지.
몸에 박힌 불화살을 뽑아내며, 나는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고- 뱀용은 나를 향해 대가리를 내리꽂았다.
불타는 대형 빌딩이 나를 향해 낙하하는 꼴, 이대로 있다간 지면에 처박히고 저 대가리에 뭉개진다.
그런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대처할 방법이 없다.
돌진기로 피할 수 있을만한 크기가 아니다. 저런 걸 방패로 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도박이다. 한 번만 살면 된다.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들을 있는 대로 눈앞에 소환했다.
이 물건들이 조금이라도 충격을 완화해 주기를 바라며, 마력강화를 발동했고.
다음 순간, 의식이 끊겼다.
**
정신이 들자, 물에 잠긴 듯 몽롱한 감각이 전신을 덮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즉사는 안 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HP 바는 밑바닥을 넘어서 아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걸 보니 정말 없는 건 아닐 테고, 한 1~2 정도쯤 남았으려나?
일단 내 몸이 무슨 꼴인지부터 다시 체크하자. 마력감지와 감각강화를 사용한다.
손끝은 움직이고, 어깨도 대충 움직이고, 팔도, 다리도 대충 움직이는데- 다 오른쪽만 움직인다.
좌반신이 날아갔나? 근데 그랬으면 죽었을 텐데?
일단 인벤토리를 기억에 의존해 조작해서, 포션을 꺼낸 뒤 오른손으로 대충 깨부쉈다.
-주르륵.
얼굴에 포션이 퍼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목이 꺾여 있진 않았던 모양이네.
"윽, 끄하악...!"
천천히 좌반신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고, 망가졌던 시야도 회복되었다. 몸을 일으켜 포션을 하나 더 마셨다.
그렇게 완전히 감각을 회복하고 나니,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불타는 주변이었다.
나는 크레이터처럼 푹 패인 구덩이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구덩이 근처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이거 뭔 운석 충돌 현장 같네, 운석은 아니지만 빌딩 사이즈 뱀이 충돌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콰과광! 콰광!
힘겹게 몸을 일으키니, 멀리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뱀용의 머리에 짓뭉개져서 의식을 잃었는데도,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알 만했다.
내가 여기 뻗어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어그로를 끌어서 싸워 주고 있었던 거다. 목숨 빚졌네.
"끄, 으헉...씨발, 움직여, 그렇지."
걸레가 된 몸에 채찍질을 해가며 억지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저쪽에서 싸우는 이의 기척이 느껴진다.
엘레노어다. 그리고 아마도 메르세데스도, 왕국군 군단장이라는 놈도 있는 것 같다.
우리 쪽 최고전력 중에서 딱 나만 빠진 상태다.
염병할, 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라고 그렇게 폼 잡았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을 지키겠다는 네 바람만큼은 완벽하게 이뤄주겠다고 결심했는데.
네가 거기서 싸우고, 내가 여기에 처박혀 있는 건 좀 아니잖아. 그치?
"후우…후우…"
가슴 쪽 뼈가 어떻게 된 건지, 숨만 쉬어도 통증이 온다. 몸 안의 마력 상태도 이상하다.
마력강화를 사용한 뒤에 찾아오는 신체의 반동.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게 더 심하게 온 것 같다.
자력으로 마력강화가 불가능한 이상, 반동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죽지는 않겠지.
-쿠르릉!
충돌 때의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진 펜던트를 부여잡고, 다시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불굴]과 [혼신]이 모두 발동하고 있음을 느끼며, 세 명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처음보다 눈에 띄게 작아진 덩치에, 팔이 돋아나 있는 뱀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
아무래도 불이 붙은 채로 날뛰던 게 2페이즈의 시작 패턴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불태웠기 때문인지 뱀용의 몸집은 크게 작아져 있었고, 그 대신 어이없게도 팔이 돋아나서 검을 들고 있었다.
솔직히 뱀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이없는 꼬락서니지만, 나는 저게 더 마음에 든다.
"너,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불타는 검을 휘두르는 뱀용을 상대로 맞서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소리쳤다. 다른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그대, 그런 몸으로 움직이다간 죽는다! 물러나 있어라!"
별 말 없이 감탄한듯한 표정을 짓는 왕국군 군단장과 다르게, 엘레노어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미 결별을 선언했음에도 엘레노어는 여전히 나를 걱정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내가 어떤 위기를 거쳐 왔는지 알면서,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서.
그리고 내가 어떤 순간에 가장 강해지는지도, 알면서.
"물러설 곳이 있을 것 같은가, 이 별을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라고 말했건만!"
-화르륵!
뱀용이 불타는 검을 휘두르자, 그 방향대로 거대한 화염이 솟구쳐 나를 덮쳤다.
나는 내성을 믿고 화염을 몸으로 뚫어내고, 반대로 뱀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든 무기는 평소에 쓰던 검이 아니라, 찌르기에 용이한 창.
-후웅!
뱀용은 몸을 비틀어 가볍게 창을 피해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미 내 손에는 다른 무기가 들려 있었다. 묵직한 도끼가.
-콰직!
단숨에 거리를 좁혀, 도끼로 놈의 몸통을 내려찍었다. 여전히 데미지는 잘만 들어간다.
공격을 허용한 뱀용이 이번에는 입에서 불을 뿜었다. 나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서걱.
불길에 반대로 뛰어들고, 이번에는 검을 휘둘러 놈의 몸을 베었다.
뱀용의 다음 패턴은 검이었다. 불타는 검은 막아내도 그 화염으로 데미지를 입힌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 놈의 화염은 단 한 번도 내게 대단한 피해를 주지 못했었다.
-카앙!
검격의 무게가 굉장하다. 절로 팔이 떨릴 지경이다. 하지만 물리 공격만 막았으면 됐다.
"뭐, 뭐지, 인간족은 불에 안 타는 거였나...?"
불꽃에 지져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내 모습을 보고, 뱀용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드러냈다.
분위기 확 깨는 말이구먼, 여태까지의 여유롭던 태도가 다 가짜였던 것처럼 느껴져.
"너, 역시 그 왕자 놈 조상이 맞긴 하구나?"
속성 공격은 전부 화염 중심이고, 이젠 덩치도 작아졌고, 마법사라 그런지 검 솜씨는 영 아니고.
하하, 맨날 억까만 당하다가 가장 중요한 월드 보스 레이드에서 이런 억빠를 받을 줄이야.
극상성을 만나니까 아주 어질어질하지, 이 새끼야?
나도 그 기분 알아.
103.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는 이번 월드 레이드를 준비하면서 커뮤니티의 도전자들에게 내 스펙을 일부 공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교 대상인 랭커들의 스펙에 대해서도 일부 알게 되었다.
내 짐작대로, 현재의 내 스펙은 25층에 체류 중인 저층 랭커들을 확실하게 웃돌고 있었다.
물론 노멀 클래스의 한계로 액티브 스킬의 다양성 등에서는 아무래도 밀리긴 했지만.
딱 하나, 전체 스펙 중에서 딱 한 부분 만큼은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내성 스킬.
비교적 최근에 습득한 [대마법 내성]이나 [주문 내성]등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초반에 얻어서 꾸준히 성장시킨 [화염 내성]이나 [독 내성] 같은 스킬은 비교 대상이 마땅히 없을 정도였다.
듣기로는, 75층 이상에 체류 중인 최상위 랭커급도 이 정도의 내성 레벨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랭커급 중에서 드물게 나와 비슷하거나 높은 내성을 가진 이들도 있기는 있다는 모양이지만.
그들 마저도 나처럼 다양한 방면의 내성을 골고루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고로, 화염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현시점의 뱀용이 내게 유효타를 입히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콰직!
힘차게 내려친 전투망치가 뱀용의 거추장스러운 팔 한쪽을 으스러트렸다.
"크아아악! 네 이노옴!"
말 그대로 덧붙였던 사족을 상실한 뱀용은 추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저 외침 자체에도 마법적 효과가 있는지, 몸의 상처 이곳저곳이 욱신거리더니 불길이 피어났다.
나와 함께 맨 앞에서 싸우던 메르세데스와 군단장도 함께 불에 휩싸였다.
다만, 마법사로서 후열에서 싸운 엘레노어에게선 불길이 피어나지 않았다.
저 검이나 몸에서 돋아난 가지로 입힌 상처만이 발화하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양심 없는 패턴이다.
화염의 위력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니지만, 입힌 피해에 비례하는 광역 회피불가 패턴인 것 아닌가.
나한테 화염 내성이 없었다면 불합리하다고 온갖 욕을 쏟아냈어도 모자라다.
"재주는 다 부렸냐."
상처에서 돋아난 불길을 툭툭 때려서 꺼트리고, 다시 무기를 쥔 채로 뱀용에게 달려들었다.
뱀용은 기겁하며 마구 가지를 뻗어댔지만, 처음보다 뻗을 수 있는 가지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불타는 몸도 점점 작아져서, 이젠 월드 보스라는 거창한 이름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푹!
길쭉한 창이 뱀용의 몸에 꽂혔고, 놈은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며 커다란 몸을 꿈틀대었다.
이젠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도 제대로 못 보여주고 있다. 하긴, 그 한참을 나한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발악이랍시고 내보였던 패턴도 다 파훼해버렸고, 보아하니 마땅히 날뛸 힘도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끝내자, 징그러운 새끼야."
나는 뒤편에 있는 세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엘레노어를 제외한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달려들었다.
일격의 공격력은 나보다 메르세데스가 높고, 공격 속도는 인간 군단장 녀석이 더 빠르다.
나는 저 최상급 NPC 두 사람에 비해, 마력강화의 수준이며 기본적인 스탯이며 모두 뒤떨어진다.
-슈루룩!
하지만 내 몸에 휘감기는 검은 그림자, 엘레노어의 보조 마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화르륵! 쾅!
터져나온 폭염이 함께 달려든 두 사람을 밀어내지만, 화염을 견딜 수 있는 나는 저지당하지 않는다.
뱀용은 그런 나를 향해, 불타는 가지들을 있는 대로 쏟아내었다.
행색이며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이것이 마지막 발악.
나는 마땅히 피하기 힘든 그 공격을 그냥 몸으로 받아내며, 어렵게 찾아낸 뱀용의 역린을 맞찔렀다.
-푸학!
붉은 빛으로 터지는 크리티컬 이펙트, 그리고 가지에 찔린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오늘 하루 몇 번이나 바닥을 보였던 HP 바가, 다시금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깎여 나간다.
나는 죽어가는 몸은 무시한 채, 그대로 놈의 역린을 연달아 찔렀다.
-콱콱콱콱콱!
모든 찌르기가 크리티컬을 터트리고, 놈의 공격도 내 몸을 모두 관통했지만.
처절한 맞찌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니라 타오르는 뱀 쪽이었다.
"아아아아아아!"
-쿵!
놈이 쓰러졌다.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를 처치하셨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공격대를 모두가 칭송할 것입니다!]
[공격대 명단 : 서진혁 (1명)]
[레이드에 참가한 모든 공격대원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주르륵 올라오는 알림창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하나하나 다 읽기 힘들 정도였다.
이만한 보상을 받았는데도 성장의 쾌감이나 뿌듯함은 뒤따르지 않았다.
월드 보스를 클리어했다는 것은,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고른 작별이 찾아왔다는 뜻이니까.
"아무튼...이겼네."
나는 쓰러진 뱀용의 머리를 짓밟고 작은 목소리로 승리를 선언했다.
"이제 정말로 작별이겠구나, 그대."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엘레노어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쓰게 웃었다.
**
요란하게 올라온 보상 관련 알림을 모조리 꺼 버리고, 엘레노어에게 다가갔다.
"저걸 쓰러트렸으니 이제 퀘스트라는 건 끝났을 텐데, 어느 시점에서 의식이 사라지는지를 모르겠구나."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레이드 시작 직전과는 다르게 후련한 모습이다.
"보상을 수령하고 나면 거기서 끝이야. 이미 보상은 인벤토리에 들어왔으니까, 곧 이겠지."
"흐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는 건가. 아직은 깡통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니까. 너도 내 기억에서 봤을 거 아니야.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거."
메르세데스와 군단장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둘 다 NPC니까.
"근데, 작별 인사라면 우리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모르겠구나, 그걸 작별 인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뱀용의 시체에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는 둘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살짝 떨어져 이야기했다.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은데,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제대로 입 밖에 낼 자신이 없구나."
엘레노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 쉬었다.
"이야기하다 도중에 끊겨 버리면, 분명 오해를 낳을 게 뻔하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중간하게 대화하다가 돌연 깡통으로 변해 버리면, 충격이 클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통해,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깡통으로 변해버리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 그 때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도.
"승전고를 울리고, 피해를 수습해야겠어. 그대는 그동안 떠나도 괜찮고- 승리를 만끽해도 좋다."
마음같아서는, 아니- 결심한 대로라면 바로 떠나야겠지.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지금 바로 떠났을 거다.
내 재생에도 한계가 있기는 한 모양인지, 몇 번이나 연달아 반죽음에서 살고 나니 회복이 더뎌졌다.
이 꼴로 마력강화를 계속 사용한 반동 탓일지도 모르겠다. 펜던트도 이 꼴이고.
-절그럭.
내게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줬던 펜던트는 격한 싸움 도중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내구도가 깎인 게 아니라 아예 파괴 판정인지, 아이템 이름과 분류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월드 레이드 보상으로 얻은 게 많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력강화 펜던트를 잃어버리고 말다니.
소모한 아이템과 골드를 생각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최종적으로는 손해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잃은 것을 모두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
나는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미궁 구역을 찾았다.
미궁 구역 자체는 월드 보스 레이드로 소멸했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이문은 이곳에 있었다.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완료 처리가 되긴 했지만, 아직 랭크를 산정 중이라나.
랭크 산정이 끝나면 보상은 자동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다음 층으로 올라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다.
보상을 받기 전인 만큼, 아직 엘레노어는 깡통으로 변하지 않았겠지만.
괜히 따로 작별 인사를 해서 무언가 응어리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나온 거다.
"뭐, 다들 어떻게 됐는지는 대충 봤으니까..."
그래도 지난 하루 동안, 후일담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볼 수는 있었다.
엘레노어는 세계수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처치된 뱀용의 시체를 가져가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메르세데스는 왕자를 위한 묘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설프지만 남은 하이엘프들을 이끌어 보겠다고 말했다.
왕국군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지만, 군단장이라는 놈이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건네고 떠나갔다.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 왕국으로 오라고, 나만 한 실력자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나.
물론 내가 9층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로 맹세했으니.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이 세계를 지켜냈다는 약간의 자부심 정도만을 갖고 떠나서- 괴로울 때면 가끔 떠올리자.
아니, 아니지. 자부심은 무슨, 내가 그런 걸 가져도 될 리가 있나. 잊어버리자.
[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나는 곧바로 10층으로 넘어가기 위해 전이문을 활성화했고.
-쿵!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먼 곳에서 터져 나와 하늘을 울렸다.
그리고 마력감지에 느껴지는 폭발적인 힘의 파장. 위치는 다크엘프의 요새가 있는 그쪽이다.
뭐야 이게, 에픽 퀘스트는 이미 클리어했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끝이 아니라고?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다, 계층 전이문은 아직 작동하고 있다. 어차피 퀘스트는 다 끝났다.
하지만 정신 차린 순간, 나는 이미 다크엘프의 마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야, 이게, 이게 다 뭔, 지랄 마 진짜."
그곳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정체불명의 검은 쐐기에 배를 관통당한 엘레노어의 모습이었다.
104. 서진혁 : 엑스포지션
전속력으로 달려 돌아온 다크엘프의 마을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뱀용에게서 지켜낸 것이 무색할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높이 솟아 있던 탑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해를 벗어난 상황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다급히 마력을 퍼트려 엘레노어를 찾았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푹.
뱀용이 다루던 가지를 그림자로 다시 엮어낸 듯한 검은 쐐기.
엘레노어의 등을 꿰뚫고 솟아나 있는 그것에선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했다.
쐐기는 저 멀리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로부터 뻗어나와 있었다.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형태를 갖추었다.
인간이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구성요소가 부족한, 너저분한 진흙 덩어리로 빚은 듯한 인영.
"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멸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입인지 뭔지 모를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그것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놈이다.
-투둑.
검은 형체가 쐐기를 뽑아냈다. 엘레노어는 휘청거리며 땅에 엎어졌다. 피가 흥건하다.
"엘레노어."
나는 좀처럼 불러본 적이 없었던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허겁지겁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을 꺼내고, 엘레노어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명백하게 상태가 나쁘다. 출혈량이 너무 많다. 이건 상처가 아물어도- 아냐, 생각하지 말자.
"정신 차려, 야, 네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으면 어쩌라고...!"
나는 다시 포션을 들이붓고, 그리고, 엘레노어의 상처를, 이걸, 어떡해야 하지?
"그, 대..."
엘레노어가 흐릿하게 눈뜨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모든 엘프의 왕, 별을 건너 새 엘프의 지도자가 될 자, 죽음과 멸망을 거부하는 자!"
전음과 뒤섞인 육성, 형태가 저런 꼴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으득.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니, 세게 악문 이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욕망의 총체다, 누구나 꿈꾸는 불사의 소망을 대변하는 자다!"
"아가리 닥쳐, 씨발 새끼야!"
"욕망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네놈 따위의 검은 내게 닿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추한 진흙덩이를 보며 검을 뽑았다. 놈은 촉수처럼 휘어지는 팔을 휘둘렀다.
그 속도며 기세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바로 [혼신]을 발동해 그것을 받아냈다.
-콰광!
단순히 부딪히기만 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쳐 뒤로 나동그라졌다.
잠시 내려두었던 엘레노어의 몸 역시 그것에 휘말려 굴러갔다.
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말도 안 돼, 이젠 월드 보스도 뭣도 아닌데.
"왜, 왜 항상…왜 맨날, 왜 자꾸, 왜 너 같은 새끼가! 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히든 보스고, 월드 보스고, 솔플로는 못 깨는 기믹 던전이고, 왜 죄다 내 앞에만 나타나고 지랄이냔 말야.
이렇게 강해졌는데도 항상 더 강한 놈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는다. 언제나, 항상, 나만!
"좀 적당히 하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감정에 반응해 마력이 요동친다. 파도치는 마력은 줄줄 새나갈 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마력강화만 할 수 있었으면, 펜던트가 아직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내가 솔플러가 아니었다면.
그러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서진혁 이 병신같은 새끼는 왜.
-쾅!!!
"큭!"
어느새 또 한 번 쏘아진 촉수가 방패 위를 때리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쳤다.
조금 전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엘레노어의 몸은 또다시 휘말려 밀려났다.
좆같다. 마력강화도 못 하는 상태로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이 새끼도 뒤지게 세다, 씨발.
"씨바알!"
검을 집어넣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엘레노어의 몸을 둘러업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엘레노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분명 휘말려서 죽고 말 거다.
나는 그대로 곧장 바깥을 향해 달렸다. 다행이게도 저놈의 공격은 그렇게 멀리까지 닿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몇 번 공격이 스쳐서 위험했지만, 이동속도 역시 느린 모양인지 금방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쾅! 쾅!
나를 뒤쫓던 진흙 괴물은 다크엘프 마을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에 더 멀리 달렸다.
[별빛이 자라는 호수]
그렇게 도달한 곳은, 언젠가 요정과 함께 춤추었던-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들었던 장소.
어쩌면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나는 죽어가는 엘레노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
꿰뚫렸던 자리가 조금은 아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내가 몇 번이나 빈사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포션의 성능이 아니라 재생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9층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은 결손 수준의 상처는 수복하지 못한다. 이렇게 큰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여, 왜 돌아왔나.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던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픽 퀘스트는 분명 완료되었다. 실제로 나는 층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왜 돌아와서...또 다쳐서는."
자신의 몸에 뻥 뚫린 구멍은 보이지도 않는지, 대수롭지도 않은 내 상처를 걱정하는 엘레노어.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니까.
다크엘프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건 이젠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차피 퀘스트는 끝났으니까.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NPC니까, 자아 없는 깡통대가리에 불과하니까.
돌아올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래, 그렇구나…우리를 걱정해 준 거지? 가슴이 그대를 움직인 거야."
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미 옛저녁에 내버리기로 해 놓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탑을 올라야 한다는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마음이 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심하다, 한심해, 서진혁.
그렇게 욕을 봤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대체 몇 번을 더 겪어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거냐.
아니, 빌어먹을,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란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많은 것을 버렸다.
하찮은 욕구.
쌓인 습관.
인간성.
선택지.
안주하는 행복.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끝에.
"후후, 저 망령에게 감사해야겠는걸."
어떻게 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만이 남았다.
"이렇게, 준비했던 말을 그대에게 남길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엘레노어는 죽음에 둘러싸이고 있음에도, 분명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슬퍼하지 마라, 그대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지 않나."
나는 그 웃음 앞에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오히려 지금에 만족한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깡통이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그대 품에 안겨서 떠나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엘레노어의 손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갑기까지 했다, 이미 시체처럼.
"뭐, 신세 한탄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했지. 그냥, 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음이 기쁘다며, 엘레노어는 한 번 더 눈웃음을 지었다.
뺨을 쓰다듬는 손도, 힘겹게 지어 보이는 웃음도.
마치 나를 달래기 위한 몸짓처럼 보였다.
"그대는 여기로 오면 안 됐어. 의지를 관철할 셈이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어야지."
엘레노어는 뒤이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왜 여기로 달려왔느냐고.
의지와 상반되는 마음이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그 대답을 이미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나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음 때문이라고, 내 나약함이 끝내 버리지 못한 그것 때문이라고.
한심한 인간쓰레기, 앰창인생 서진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라고.
엘레노어는 내가 토해내는 말을 듣고는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 뺨을 살짝 두드렸다.
"이런...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구나. 힘껏 때려 줄 셈이었는데."
그리고 손은 다시금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틀렸어."
책망하고자 하는 이의 손길과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대의 기억과 심상을 모두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지금 그대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 줄도 알고 있지."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를 뚝뚝 흘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내 어깨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대는 나약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아.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야."
꾸욱, 하고. 약하지만 확실하게, 엘레노어가 나를 안고 속삭였다.
"그대는 한 번도 죽음 따위를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에 전해져 오는걸."
뭔가,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냥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토할 것 같다.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렇게 삼켜 내니,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 뺨이 뜨겁다.
"항상, 용서받고 싶었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눈물이, 왜 지금 와서 모습을 보이는지.
왜 알아먹지도 못할 말에 눈물 따위가 흐르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나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뭐가, 뭐가…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그대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대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야."
엘레노어의 손이 이번에는 아물어 가는 내 상처를 쓰다듬었다. 따가웠다.
"그대의 기억을 모두 보았다고 했지 않나. 그대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는지,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엘레노어는 내 몸 이곳저곳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평소에 하던 추행이 아니었다.
이번에 손을 댄 자리는 모두, 내가 내성을 키우기 위해 반복해서 자해했던 자리였다.
"벌을 받고 싶었겠지, 벌을 받고 나면 용서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힘겹게 눈을 돌렸던 진심이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그건,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지?
나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죽은 엄마뿐이니까.
내가 엄마를 죽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나는 핑계만 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자신을 살필 수 없다. 돌아본다고 한들 보이는 건 '과거의 자신'이라는 타인뿐이지."
"반성하며 사는 이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흠결을 찾아 고쳐내려 하니 말이야."
"하지만 감히 말하겠다. 그대의 그것은 결코 흠결이 아니야. 헷갈리지 마라, 그대의 행동은 정말 옳은가?"
엘레노어가 말하는 내 행동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봐도 좀처럼 답은 나오질 않는다.
"그대의 어머니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대가 자신을 괴롭히며, 죽음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있었나?"
엘레노어는 내 과거를 보았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 그 긴 필름에 얼룩처럼 남아 있는 우리 엄마의 모습도.
엄마는 내가 어딜 가서든 기죽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내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깎아, 모든 좋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탑에 갇혀 썩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나를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나를 위해 뛰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대를 원망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그랬을 리가 없다.
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 백수 새끼여도, 엄마는 나를 미련할 정도로 사랑해줬으니까.
깨달았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엄마는 나를 탓하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으로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과 함께 눈물도 나왔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자신을 용서해 주라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걸,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 봐라, 그대의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그대는 아닐 게 당연하지 않나."
"모르겠어."
"아니,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것이 원망스럽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시야에서 배제했던 것이.
"그리고 그대의 가슴 속에서 끓는 그 감정이,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리고 엘레노어는 나에게 그 감정의 이름을 속삭였다.
**
그 뒤로, 엘레노어는 보다 직설적으로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도 한 번 깨닫고 나니, 엘레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아, 슬슬...정말로 끝인 모양이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구나, 평소에 단련해 두길 잘했어."
엘레노어의 생명이 한계에 달했음을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호수 덕분이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연결되었던 고리가, 감정을 공유하며 다시금 짙어진 것이다.
"자, 눈물 자국은 이제 지우고- 옳지, 전보다 눈빛이 더 멋있어졌구나. 내 취향이야."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옅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쪽.
관능적인 농담을 툭툭 던져대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입맞춤이 내 입술에 닿았다.
창백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래, 뭐, 경험 많은 척해도 결국 그렇겠지.
오래 전부터 약혼자가 정해져서, 누굴 만날 자유도 없던 녀석이 연애를 따로 해 봤겠나.
"응, 마지막이니까…꼭 해보고 싶었다. 미안하구나, 그동안 나이도 한참 많은 게 집적거려서 귀찮았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동안 벽을 세웠던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아니."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생생히 느껴졌기에, 나는 곧바로 응했다.
엘레노어의 목을 받치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내 쪽에서 입을 맞추었다.
"후후, 역시 내가 고른 남자라니까. 마음에 쏙 들어."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얼마나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잘 전해진다.
뭐, 굳이 거창한 정신 연결 따위가 없어도- 저 새빨갛게 물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때, 엘레노어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죽을 때 나타나는 빛이다.
"아아, 딱 맞췄구나."
서서히 말단부터 사라져 가는 엘레노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살짝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이왕이면...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빼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레노어의 육체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 혼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한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분명 마음을 통해 전했으니까.
[업적 달성 : 약속]
그런 거, 다음에 만났을 때 하면 된다고.
[업적 보상 '강철의 혼' 을 획득하셨습니다.]
**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하이엘프의 왕, 죽음에서 돌아온 망령은 아직도 마을을 헤집고 있었다.
나는 검과 방패를 다시 착용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놈이 날뛰고 있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니 새삼 실성했나, 어리석은 인간족 검사여."
잠깐 사이에 다른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것인지, 전음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진다.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역시 9층의 스펙은 아득히 뛰어넘은 괴물이다.
이놈은 과연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고, 어떤 배경설정이 있길래, 이런 스펙을 가진 걸까.
별 관심은 없다. 버려두고 떠나도 상관없는 적이지만, 나는 맞서기를 택했다.
"작고 약한 인간족이여, 그 가냘픈 검으로 나를- 불사의 욕망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어."
"오호라, 무언가 각오를 다진 모양이지. 각오 따위 무한한 욕망 앞에서 하찮은 것을."
망령은 주절주절 계속해서 떠들었다. 어디 그 각오를 한번 말해보라며.
느낀 것은 많았지만, 새삼스레 거창한 각오 같은 걸 다지지는 않았다.
다만, 깨달았다.
나는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고, 그 이유도 조금씩 달랐으며, 개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분노가 진정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스릉.
천천히 검을 뽑았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강한 적이다.
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력강화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맞설 수 있을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마력강화를 발동시켜주는 펜던트는 완전히 망가져 힘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그런 건 필요 없다.
-쿠르릉!
내 안의 마력이 폭발하며 막혀 있던 길을 질주한다.
마력은 주인의 감정과 의지에 크게 영향받기에, 내 모순된 마음으로는 마력강화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헷갈리지 않는다. 엘레노어가 가르쳐 준 것이 있으니까.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 엘레노어를 속박하는 것, 우리 엄마를 죽인 것.
다시는 환경과 타인을 탓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탓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나의 진정한 적.
이 시련의 탑 그 자체야말로, 나의 적이다.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방법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탑을 깨부수고,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의지는 화살이고, 마음은 불꽃이랬지."
이 탑을 쳐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 이게 나의 화살, 스스로 맹세한 의지.
그리고, 내 화살에 힘을 실어줄 불꽃은- 저놈이 묻고 있는 각오 따위가 아니라 가벼운 약속.
"나는, 거유 미녀 다크엘프랑 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뺄 거다."
스스로 거세했던 욕망이 불꽃이 되었고, 이제 내 마음과 의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려면 너 같은 좆밥한테 막히면 안 되거든."
자력으로 이룬 마력강화의 힘으로, 날아드는 망령의 공격을 모조리 쳐낸다.
나는 이미 어지간한 저층 랭커 이상까지 성장했지만, 이 탑 자체가 목표인 이상 그걸로는 부족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걸 위한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자신을 학대하며 뒤따라오는 성장의 쾌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쾌감을 쫓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가장 앞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콰과광!!
내가 휘두른 검에서 방출된 마력이 망령의 좌반신을 통째로 으깨버리는 것을 보며, 다짐했다.
이 탑의 천장을 꿰뚫고, 그 너머까지 솟아오르는 불화살이 되겠다고.
[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랭크 : SSS]
[에픽 아이템 : '엘레노어의 영혼'을 획득하셨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당신에게 영구히 귀속됩니다.]
[시련의 탑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105. 시련의 탑 14층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3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질척거리는 핏물이 묻은 검을 한 번 털어내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숨을 골랐다.
13층의 보스는 스프링처럼 생긴 다리가 특징적인, 디어 뭐시기라는 이름의 사슴 인간 몬스터였다.
전용 기믹을 수행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속도로 보스룸 안을 뛰어다니며 주변을 초토화하는 괴물.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 기믹은 솔플러인 나 혼자서는 수행할 수 없는 구조였다.
기믹을 등에 업은 보스는 한시도 쉬지 않고 미친 속도로 움직여, 딜 타이밍도 내주지 않고 보스룸을 박살 냈지만.
뭐, 어쨌든 내가 이겼다.
-찰칵.
나는 클리어 메시지를 담은 스크린샷 한 장을 찍어서, 오픈 커뮤니티에 올렸다.
조작 의혹을 제기할지도 모르니, 제대로 시스템 시계가 찍히게끔 조절해서.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어 형이야]
(사진)
형은 결과로 증명해
- 뭐야 ㅅㅂ 어케했냐
- ㅅㅂ뭐임 5분지난거아님?
- ㅋㅋㅋㅋㅋㅋㅋ이게되네 ㅅㅂ
- 진혁아 나는 사실 믿고있었다 한번만용서해다오
- ㄴ 알몸 제로투 입갤 ㅋㅋㅋㅋㅋㅋㅋ
- ㄴ 자 드가자 ㅋㅋㅋ 인증 없으면 알지?
- 구라치지마 씨발 이거 주작 아님? 저게 말이됨?
나와 내기를 했던 도전자들이 말이 되는 일이냐며 경악하고는, 마구잡이로 댓글을 달아 댄다.
어휴,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들어봤나.
13층 보스의 기믹이 솔로 플레이로는 수행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기믹을 수행하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는 점.
그딴 게 뭐 어떻다고. 난이도가 비정상적이면 뭐 하나, 도전자인 나도 정상 범주를 벗어났는데.
확실히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긴 했지만- 뛰어다니느라 숨이 좀 찼을 뿐, 엄청 쉽게 이겼구만.
이 놈이 뭐랬더라, 오늘 안에 잡으면 1층 마을 중앙에서 알몸 제로투 댄스를 추겠다 했었나?
여기 이놈은 10트안에 잡으면 공개 삭발 인증한다고 했었고.
아, 여기 마지막 놈은 자기랑 같은 층 도전자들 전부한테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뿌리겠다고 했었지.
안전자산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이나 막 뱉었나 본데, 내가 어지간히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 치돈 10개 뿌리면 빤스는 입게해준다 어떤데
- ㄴ 20개 뿌릴테니까 하나만 더 입어도 괜찮겠습니까 형님
- ㄴ ㅇㅋ 20개 제대로 뿌리고 인증하셈
- ㄴ 캬시발 이거지 바로 줄서봅니다
- ㄴ 줄
- ㄴ 줄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받은 도전자들에 의해 게시판이 '대 진 혁' 으로 도배되는 모습을 보고, 커뮤니티를 껐다.
월드 보스 레이드를 솔플로 클리어한 이후, 커뮤니티에서 내 유명도는 어마어마하게 높이 치솟았다.
당연히 내 스펙에 대한 관심 역시 매우 높아졌고, 드문드문 이렇게 나를 두고 내기가 걸리는 일도 생겼을 정도.
하지만 정작 내게 관심을 두는 도전자 중에서, 내 스펙을 제대로 짐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서진혁 Lv.68 (전사)
HP : 1280/1280
MP : 770/770
근력 : 106 (96+10)
민첩 : 102 (91+11)
내구 : 113 (98+15)
지능 : 101 (89+12)
내 스펙이 이렇게 미친 수준까지 올랐을 거라고.
**
일반적인 도전자들이 스탯을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 레벨업과 장비 업그레이드다.
업적을 달성하면 레벨과 별개로 스탯을 올릴 수 있긴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도전자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대부분의 업적은 오픈 커뮤니티라는 정보 공유의 장이 있음에도, 그 달성 조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조건이 알려진 업적을 되는대로 챙긴다 한들, 들이는 시간에 비해 그 상승량은 매우 적은 편.
그 밖에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라고는 효율이 거의 없기로 유명한 신체단련뿐이다.
나는 9층을 클리어한 이후, 일부러 업적 달성을 위해 히든 보스를 찾아다녔다.
수행할 수 있는 기믹을 일부러 수행하지 않는다거나, 본래라면 대적할 일이 없는 NPC를 대적하거나 하는 식으로.
예전에는 그런 '억까' 요소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불합리하다고 여겼지만.
내 새로운 목표가 합리를 벗어난 영역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합리를 찾아 나설 필요가 있었다.
탑을 올라가야 한다는 의지, 이대로 멈춰 서고 싶은 마음, 자신을 향한 혐오와 학대.
여러 모순을 안고 무작정 위험에 몸을 던지던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내 의지와 마음은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본다. 분명한 목표의식은 그만큼 행동에 힘을 실어 준다.
그렇게 온갖 강적을 찾아서 부딪히고, 빠짐없이 단련을 반복한 결과가 이 스탯. 그리고-
[웨폰 마스터리 Lv.2] [전투 각성 Lv.33] [전투 지속 Lv.31] [마력 지배 Lv.3] [마력 강화 Lv.3] [종합 원소 내성 Lv. 11] [종합 상태이상 내성 Lv. 9] [종합 대마법 내성 Lv. 8] [대지 정령의 가호(+철벽) Lv.15] [바람 정령의 가호(+신속) Lv.15] [번개 정령의 가호(+대전) Lv.15] [라이트닝 차지 Lv.23 ] [약점 간파 Lv.8] [초감각 Lv.7] [초재생 Lv.2] [혼신 Lv.13] [집광 Lv.11] [불굴 Lv.17] [도약 Lv. 4] [명상 Lv. 6] [위압 Lv. 2]
-이젠 요약 표시를 하지 않으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지경으로 늘어난 스킬 목록이다.
여러 무기술이 통합되어 웨폰 마스터리로 변경되고, 여러 패시브가 상위 스킬로 진화하면서 줄어든 게 그나마 이 정도.
요약 표시를 풀고 자세히 보기를 누르면, 내성 스킬의 목록만으로도 시스템 창이 눈앞을 가득 메울 정도다.
물론 여전히 액티브 스킬은 많지 않고, 전사 클래스의 삼신기라는 [축지]와 [오러 마스터리]는 얻지 못한 상태지만.
그 대신 여러 단련의 성과로, 마법사 클래스의 삼신기인 [마력 지배] 스킬을 갖게 되긴 했다.
뭐, 아직 강해질 여지가 많다는 것이니- 스킬의 부족함은 오히려 기쁠 뿐이다.
"아직 멀었지, 이 정도로는."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 [엘레노어의 영혼]을 한 번 다시 확인하며, 나는 14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공간 전이 특유의 울렁거림과 함께 도착한 14층의 배경은 이제까지의 어떤 층보다 살풍경했다.
하늘은 새빨갛고, 구름은 모조리 새까맣고, 땅은 온통 유황빛에 여기저기에 흉흉한 화염이 흩뿌려져 있다.
거기에 마법사들에게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공기 중에 섞인 높은 밀도의 마력.
첫 인상은 확실히 커뮤니티에서 말하던 대로다. 언뜻 보기에 지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고.
시련의 탑 14층의 배경은 마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악한 마력과 강인한 신체를 타고난다는 개사기 종족- 마족의 고향.
도전자가 떨어지는 장소는 그중에서도, 마계 어느 지역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오, 저게 그거인가."
저 멀리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관문과, 그 관문을 막아서고 있는 빨간 피부의 거한이 보였다.
등에는 날개가 돋아나 있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눈은 흰자 부분이 새까만 역안이다.
마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마족이다. 1세대 도전자들의 목숨을 수없이 빼앗았다는 바로 그놈이겠지.
마계 안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저런 문지기가 지키는 관문을 셋이나 통과해야 한다.
당연히 힘으로 뚫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저 문지기들은 하나하나가 보스 이상으로 강력한, 전투로 돌파하지 말라고 만들어진 몹이다.
첫 번째 문지기는 통행증 내지는 제물을 바쳐서.
두 번째 문지기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세 번째 문지기는 퍼즐을 풀어서 돌파하는 방식.
통행증은 초반의 외곽 지역에서 퀘스트를 깨면 얻을 수 있고, 수수께끼와 퍼즐의 정답은 커뮤니티에 다 나와 있다.
공략 없이 무작정 도전했어야만 했던 1세대 도전자들에게는 굉장히 난감한 관문이었다지만.
현재는 커뮤니티에서 답지를 보고 베끼는 것으로, 누구나 쉽게 통과해서 경험치 보상을 먹을 수 있는 개꿀 구간인 셈.
참고로 통행증을 얻는 방법은 물론이요, 퍼즐과 수수께끼는 탑마다 모두 동일하다.
즉, 나 역시 어렵게 머리를 굴리고 퀘스트를 깰 필요 없이 각 관문을 쉽게 돌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곧바로 관문으로 향했고, 곧 문지기인 붉은 마족이 나를 가로막았다.
"멈춰라."
마족은 생긴 것과 다르게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 중후한 미성이었다.
"나는 이 관문의 주인, 적색의 갈트람이다- 이곳을 지나가려는 너는 누구냐."
"서진혁."
"관문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마땅한 제물이 필요하다. 너는 제물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참고로 이놈이 말하는 제물은 생물의 영혼을 말한다. 공교롭게도 내 인벤토리에는 영혼의 파편이 하나 있다.
물론 엘레노어의 영혼을 이딴 잡놈한테 줄 생각은 없다.
붉은 마족 갈트람은 팔짱을 낀 채, 흉흉한 마력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제물을 준비하지 않은 자는 지나갈 수 없다. 관문의 통행증은 갖고 있는가."
"그런 건 없다."
"통행증도 제물도 없다면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나는 마족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당연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통행증이 없으면 지나갈 수 없다고? 나랑 내기할까?
진짜로 못 지나가는지.
106. 서쪽 마계의 최강자
검을 뽑고 적의를 드러내자마자, 피부에 따끔따끔하게 다가오는 흉포한 마력.
엘프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궁술과 마나 친화력을 갖고 있듯, 마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대한 마력을 갖는다.
단순히 가진 마력의 총량만이 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력을 품고 살아온 만큼 그 지배력도 굉장하다.
마계의 높은 마력 농도와 이런 마족의 특성이 합쳐지면, 이렇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만으로도 굉장한 물리력을 낸다.
-투둑.
날카로운 마력이 신체를 압박하자, 한겨울 한파에 노출된 것처럼 입술이 멋대로 터졌다.
이것도 나라서 이 정도인 거고, 보통 인간이라면 이미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보통 인간은 아닌 듯하군."
마력의 압박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내고 있는 나를 보며, 붉은 마족이 말을 흘렸다.
말했듯 이 문지기들은 전투로 돌파하라고 있는 놈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문지기 본인들도 전투를 피하는 면이 있다.
나 때린다, 진짜 때린다, 셋 하면 때린다? 셋, 둘, 하나, 하나 반, 하나 반의반의 반- 뭐 이런 느낌?
그런 놈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려면, 당연히 먼저 선빵을 쳐야 한다.
"내가 보통이 아니긴 해."
놈의 말을 받아치며, 왼손에 매어 뒀던 방패를 냅다 내던졌다.
첫 공격은 간보기, 붉은 마족은 가볍게 방패를 튕겨냈다. 하지만 방패를 튕겨내기 위해 손이 움직였다.
얼굴 부분에 던진 방패를 튕겨냈으니, 당연히 손은 얼굴 부근에 머문다.
팔짱을 끼고 있던 놈의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고, 시야가 가려졌다는 뜻이다.
심장을 노리기 딱 좋은 각이다.
-콱!
빠르게 거리를 좁혀 내지른 검은, 마족의 손바닥에 박혀서 막혔다.
커뮤니티에서 들은 대로다. 마족은 모두 강철처럼 질긴 피부를 갖고 있어서, 방어력이 월등하다고.
이 방어력에는 개체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놈은 사실상 이 14층 마계의 보스 수준.
당연히 방어력도 매우 높다. 내가 뻗은 칼을 이 정도로 막아낼 만큼.
빈틈을 비집고 들어간 공격이 막혔으니, 다음은 저놈의 차례다.
붉은 마족은 곧바로 마력을 뿜어내며, 칼날처럼 변한 손톱을 휘둘렀다. 나는 왼팔을 들어 막았다.
아, 왼팔에 있던 방패는 방금 던져서 없다.
물론 예전처럼 방패를 던져놓고 까먹어서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방패가 별로 필요가 없거든.
-카각!
휘둘러진 마족의 손톱이 내 맨 팔뚝을 스쳐 지나가며, 쇳덩이를 긁은 것처럼 불똥이 튀었다.
대지 정령의 가호가 15레벨에 도달하며 더 강력해진 [철벽]의 버프 효과.
거기에 예전보다 훨씬 높아진 내구력 스탯, 그리고 마지막으로 9층에서 얻은 '강철의 혼' 덕분이다.
"뭣이?"
인간인 내 맨몸이 마족 이상의 내구도를 갖고 있음에 크게 당황한 듯 보이는 붉은 마족.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방금 네 입으로- 그리고 내 입으로도 말했잖아.
나 보통 아니라니까?
이어진 내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은 마족은, 그대로 멀리 날아가 나자빠졌다.
**
현재의 내 기본 방어력은 9층 당시와 비교하면, 방어구를 빼도 거의 두 배 수준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 방어력이란, 스탯창에 표시되는 방어력 수치를 말한다.
[철벽] 스킬을 사용하면 당연히 실질 방어력은 더 높아지고, [혼신] 버프를 발동하면 추가로 더 높아진다.
거기에 [종합 원소 내성]이라는 패시브가 마법이나 속성 공격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 위력을 반감시켜 버리고.
그 방어력을 뚫고 HP가 떨어져도, [전투 치유]가 두 단계 진화하며 생긴 [초재생] 스킬로 곧 회복된다.
그리고 HP가 떨어지면 [불굴] 버프가 발동해 내구를 비롯한 스탯이 또 증폭되어 더 단단해지며.
거기에 마력강화를 사용하면 또 한 번 스탯과 방어력이 증폭되어 더 단단해진다.
내 실질 방어력은 9층 때와 비교하면 거의 몇 배에 이르는 상황. 거기에 '강철의 혼'이 더해진다.
[고유 : 강철의 혼]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부러지지 않는 강한 의지의 표상.
당신의 영혼에 새겨진 이 특성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피해를 60% 감소시킨다.
기존 스탯창에 존재하지 않았던 특성 슬롯이 생기며, 그곳에 자리 잡은 정체불명의 능력.
그 효과는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든 최종 피해를 60% 감소시킨다는 미친 것이었다.
[대지 정령의 가호]의 최종 옵션이 물리 피해에 한정한 5% 감소인데, 이건 깡으로 60%다.
가장 높은 에픽 등급의 클래스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런 미친 패시브가 달려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월드 보스를 처치하고 얻은 수많은 보상이 이 고유 특성이라는 것 하나 앞에서 빛이 바랠 정도니까, 뭘 더 말하랴.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마족, 그리고 그중에서도 잡지 말라고 존재하는 문지기 몹.
강력한 요소나 설정이 그렇게나 덕지덕지 붙어 있는 놈의 공격도, 내 몸에는 흠집 하나를 못 낸다.
"크, 크헉."
발길질에 맞아 날아간 붉은 마족이 기침하더니, 바닥에 시퍼런 피를 토해 내었다.
그 한 방으로 내장이 다 터진 모양이다. 마족의 내장 구조 같은 건 모르겠다만, 존나 아프겠지.
"야, 엄살떨지 말고 뿔이나 꺼내. 너도 뿔 더 있지?"
나는 붉은 마족을 향해 손짓했다. 놈은 아득바득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마족의 가장 대표적인 신체적 특징은 바로 뿔이다.
날개나 손톱이나 색이 반전된 눈깔, 그리고 꼬리 같은 건 마족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뿔만큼은 모든 마족에게 존재한다. 다만, 그 개수는 개체별로 차이가 있다.
뿔의 개수야말로 마족의 강함 그 자체, 3층의 리자드맨들이 어깨에 그려넣은 색깔 띠 같은 거다.
"이, 이놈...후회하지 마라, 내가 뿔을 꺼내게 하다니!"
-우두둑, 뚜둑.
붉은 마족의 이마에서 뿔이 추가로 돋아난다. 상위 마족들이 가진 파워 업 방식.
이 마계의 일반 NPC인 하급 마족들은 하나에서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중급 이상의 마족들은 세 번째 뿔을 꺼내서 파워업하는게 가능하고, 보스에 이르면 그 이상까지 존재한다.
14층 미궁의 보스인 마족 백작인가 남작인가 하는 놈의 최종 형태에 붙어있는 뿔은 다섯 개.
"나, 적색의 갈트람- 서쪽 마계의 23대 마왕의 이름을 걸고, 네놈을 갈가리 찢어 유황불에 태우겠노라."
그리고 갑자기 전직 마왕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설정을 공개한 갈뭐시기의 이마에 돋아난 뿔의 숫자는.
"오, 일곱 개?"
보스보다 두개나 더 많은 일곱 개, 단순하게 생각해도 두 단계는 더 급이 높은 최상위 마족이었다.
**
일곱 개의 뿔을 드러낸 갈릭인가 뭔가는 '큭큭큭' 하며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분위기 잡으면서 웃는 게 아니라, 그 웃음에 주변의 마나가 공명하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처음 드러냈던 흉흉한 마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만 해도 보통 인간들은 수직으로 밟은 깡통처럼 찌그러질 것이다.
아니, 보통 인간이 아니라 시련의 탑 14층 도전자라도- 옴짝달싹 못 하고 있겠지. 그 정도의 힘이다.
"후회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벌써 후회하고 있는가. 인간."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나도 똑같을 거로 생각했는지, 놈은 위풍당당하게 내게 다가왔다.
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는 건데 말이야.
이게 무슨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내 구속 내성, 마비 내성, 석화 내성, 기절 내성...뭐 그런 게 몇 레벨인 줄 아냐?
"관문의 주인을 맡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그 지역을 지배할 힘이 있는 마족이라는 의미다."
갈뭐시기는 자기가 마왕을 맡고 있었을 때가 어땠다더니, 서쪽 마계의 수준이 어땠다느니,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마계나 마왕 같은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렇지, 잘 들어보면 그냥 지가 소싯적에 좀 날렸다는 소리다.
단어만 치환하면 뭐, 내가 강서구 원탑 보스였는데- 그 행동대장 놈이 어쩌고- 나 현역 시절은 급이 달랐고- 어휴.
"거 말 존나 많네, 혓바닥으로 싸우냐?"
나불거리는게 너무 길어서 한 마디 해주자, 놈의 이마에 핏대가 불룩 돋았다.
그냥 떠들게 내버려두고 칼빵을 먹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기습으로 바로 끝내버리면 연습도 안 되니까.
잡지 말라고 만든 놈이라 보상을 안 줄 수도 있으니, 하다못해 샌드백 역할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이렇게 상대를 얕보면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안 되잖아.
"건방진 인간 놈...내 화를 돋우려고 열심이구나, 빈틈을 노려 칼을 찌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어."
"보아하니 상당한 보검인 듯하군, 조금 전과는 달리 힘이 넘쳐흐르고 있어-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이놈은 아무래도 그냥 말이 많은 녀석인 것 같다. 묻지도 않은 부분을 혼자 막 떠들고 있다.
뿔을 개방한 자신의 몸은 압도적으로 더 강해지기에, 아까와 같은 발길질도- 보검의 힘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래도 가만두면 떠드느라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 같다. 쯧, 그냥 넘어가야겠네.
-타닥.
나는 단숨에 놈과의 거리를 좁혀, 내 손에 들린, 하, 보검, 그걸 휘둘렀다.
붉은 마족은 안 통하느니 뭐니 떠드면서, 마력을 두르고 손을 내밀어 막아 냈다.
하지만 안 막혔다. 내 검은 놈의 손과 팔뚝을 통째로 잘라버리고, 몸통에 사선으로 박혀 들어갔다.
"커, 헉!"
저 놈은 이걸 무슨 굉장한 보검으로 본 모양이지만, 이 검에는 사실 아무런 기능도 없다.
[+2 강철 직검]
그러기는 커녕, 그냥 강화 망한 상점제 강철 직검이다.
저 녀석이 보검의 힘이라고 착각한 그건, 그냥 내가 검에 마력을 둘러서 씌운 것에 불과하다.
붉은 이펙트가 터지며 한 번에 치명상을 입은 마족은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말이 짧았으면 명줄은 좀 길었을 텐데, 이거 네가 자초한 거다?"
나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고, 미간을 향해 힘껏 니킥을 박아넣었다.
-콰지직!
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놈의 안면 뼈가 단숨에 으스러졌고, 일곱 개의 뿔도 모두 부러졌다.
이거 설마 이대로 죽은 건가? 왜 마지막까지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지?
"어, 설마."
이 자식, 힘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전부였나?
에이 설마, 뿔이 일곱 개나 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마력도 그렇게 많은데?
"아 씨, 모르겠네."
다음 관문의 문지기를 만나서 실험해보든가 해야겠다.
107. 동쪽 마계의 최강자
내가 9층 이후에서 손에 넣은 가장 좋은 스킬을 하나 꼽으라면, [마력 지배]다.
아, 전사의 삼신기중 하나인 마력강화는 스킬 이전에 자력으로 습득한 기술이라 예외로 쳤다.
말도 안 되는 사기 성능을 자랑하는 강철의 혼은 특성으로 분류되니까 그것도 예외로 치고.
아무튼, [마력 지배]는 전사의 삼신기에 대응하는 마법사 클래스의 삼신기로 꼽히는 스킬이다.
기본적으로는 [마력 감응], [마력 감지], [마력 운용]등의 마법사 필수 스킬들을 모두 하나로 합쳐 놓은 최고급 스킬인데.
이 스킬을 습득한 이후로, 나는 내 안에 흐르는 마나를 말 그대로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가진 마나 뿐만이 아니라, 대기 중에 흐르는 마나를 감지하고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거다.
클래스는 여전히 전사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를 죄다 능가하는 수준의 마력 조작 및 감지능력을 갖추게 된 건데.
그런 내가 보기에, 이 마계의 환경과 마족이라는 종족은 모두 미친 게 틀림없었다.
대기중에 넘쳐흐르는 미친 양의 마력,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그걸 충분히 흡수하며 자라는 마족이라는 미친 종족.
말이 마계지, 이건 이미 생체 마법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공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각 관문을 지키는 세 마리의 처치 불가 마족.
"그런 놈이 그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나는 다음 관문까지 걸어가는 와중,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처치한 붉은 마족이 아무래도 너무 약했다고.
놈의 실제 전투능력은 느껴지는 마력을 통해 어림한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얕보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은 거던가, 아니면 내가 완전히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던가.
둘 중 하나일 텐데,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전자였으면 좋겠다. 후자면 문제점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단순히 14층에선 제대로 맞붙어 볼 상대가 없다는 점도 있고, 내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재지 못한다는 점도 있고.
그러니 제발 이번 문지기는 진짜 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지금의 성장세만 유지해도 100층까지 클리어하는 건 거뜬하겠지만, 내 목표는 그 너머에 있으니.
"멈춰라."
어느덧 도착한 두 번째 관문, 이번에는 파란 몸뚱이의 마족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외형적인 특징으로는 앞서 상대했던 빨간 놈과 다르게 날개가 없고, 이마에 돋아난 뿔의 형태가 달랐다.
아까 놈은 정석적인 악마 뿔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이놈은 보석 같은 빛을 내는 뿔이 뾰족하게 돋아나 있다.
비유하자면, 유니콘 뿔 같은 느낌?
그리고 아까 놈보다 키나 덩치도 작고, 근육량도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게- 좀 더 인텔리스러운 타입으로 보인다.
하지만 품고 있는 마력의 양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마법사 타입이라고 보면 되겠지.
"이 관문을 지나려면 세 가지 문제에 답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마침 관문을 통과하는 방식도 수수께끼 풀이구나, 머리를 써야 하는 타입이야.
물론 오픈 커뮤니티에 정보가 다 공개된 시점에서 머리를 굴릴 필요는 전혀 없지만.
"좋아, 정답은 이거다."
나는 파란 마족의 앞에서 당당하게 검을 뽑았다. 참고로 마족은 아직 문제를 내지 않았다.
"네가 뭔 문제를 낼지는 모르겠지만, 칼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지."
살벌한 마력이 다시금 내 주변을 휘감았다.
**
푸른 마족의 머리 위로 거대한 마력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만들어진 구체는 혼자 꾸물꾸물 거리더니, 이윽고 화염구와 얼음의 창, 그리고 벼락을 뱉어내었다.
순수한 마력을 덩어리로 만든 다음, 그때그때 속성을 바꿔서 토해내는 방식의 공격 마법으로 보인다.
-쾅! 콰광! 콰직!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구는 내 몸에 부딪히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얼음의 창은 막대한 힘으로 내게 쏘아졌다.
마지막으로 벼락은 비처럼 쏟아져 연달아 내 몸을 때렸으며, 순식간에 주변을 새까만 재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모든 마법으로도, 마족은 칼 한 자루를 빼 들고 돌격하는 나를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이건 뭔, 장난하나."
그렇게 맨몸으로 공격을 모두 받아친 나는, 단번에 거리를 좁혀 놈의 어깻죽지를 갈라버렸다.
-촤악!
왼쪽 어깨에 박아넣은 칼을 갈비뼈 부근까지 쑤셔 넣어, 바깥 방향으로 빼서 좌측 상반신을 도려냈다.
종족이 마족이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치명적인 상처, 이놈도 이런 꼴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뿔을 꺼냈다.
뿔의 개수는 여섯, 아까 전의 붉은 마족보다 하나가 적다. 이놈도 보스보다 격이 하나 높다.
"큭큭...이 청색의 라토할에게 뿔을 꺼내게 할 줄이야. 동쪽 마계에도 이만한 강자는 없었는데..."
붉은 마족은 서쪽 최강이라더니, 이놈은 동쪽 최강이었던 전적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놈들이 왜 문지기 역할이나 하면서 거드럭대고 있는지는 좀 의문이긴 한데, 그냥 그런 문화가 있나.
"아까 뒈진 놈도 너랑 비슷한 소리 하다가 한 방에 죽은 거 알고 있냐?"
"뭐라...? 설마 앞선 관문의 갈트할을 말하는 건가?"
"어, 빨간 놈. 그러니까 너는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덤벼, 뒈지기 싫으면."
내가 그렇게 말하자, 푸른 마족은 인상을 구기며 방대한 마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역시 굉장한 수준이다.
아무렴, 이런 마력을 가진 놈들이 그렇게 약한 게 말이 안 되지. 이번에는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겠지?
-우우웅!
마족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마력의 구체가 생성된다. 그 기세와 품은 마력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무래도 저게 놈의 주요 전법인 모양. 구체는 다시 한번 변형하며 갖가지 마법을 쏟아내었다.
-쾅! 콰광! 콰과광!
쏟아지는 오색찬란한 마법이 나를 덮쳤고, 그렇잖아도 만신창이였던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확실히 굉장한 마법이다. 위력도 정밀도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다.
속성도 다양하기에 나처럼 종합 내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준비해서 대응하기도 힘들 거다.
14층 도전자들은 절대 전투로 돌파할 수 없다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만한 수준의 강함이다.
하지만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14층 수준은 분명히 넘었지만, 고작 이게 다인가.
"뭔데, 이 어중간한 건."
갖고 있는 마력의 양에 비하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될 리가 없는데.
**
잠시 후, 푸른 마족은 온몸이 토막 나고 짓이겨진 상태로 내 발밑을 뒹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밑천을 보기 위해, 일부러 치명상을 피해서 이곳저곳을 박살 내 버린 결과였다.
일부러 빗맞히고 빗맞혀서 부상을 늘린 다음, 빈사 상태에서 모든 걸 쏟아낸 최대의 힘을 보고 싶었지만.
푸른 마족은 마지막까지 가진 마력의 수준에 비해 형편없는 전투력만을 발휘하고 뒈져 버렸다.
"진짜 내가 문제인가?"
내가 상대방의 강함을 잘못 재고 있는 건가, 마력의 양을 근거로 이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걸까.
태생적으로 너무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나머지, 마력의 효율적인 활용 능력은 갖추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보스가 아닌 일반 몹 판정이라 개별 보상은 뭐 쥐뿔도 없고,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아니면 뭔 설정이 따로 있나."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고 마계와 마족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미 13층에서부터 히든 요소를 찾기 위해 잔뜩 찾아봤지만, 혹시나 내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결과로 나온 것은 대부분이 이미 읽어 본 글이었고, 마족들의 묘한 강함에 대한 설명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이놈들을 굳이 힘으로 뚫어보려고 한 도전자들은 1세대를 제외하면 있지도 않고.
아, 그러고 보니까 그놈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처음 듣는 소리를 했었지.
서쪽 마계니 동쪽 마계니, 몇 대 마왕이니 뭐니, 적색이니 청색이니 하는 별칭들.
"이것도 뭔가 있으려나."
나는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검색을 시작했다. 더불어 커뮤니티에 수배 글도 하나 올렸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정보 요청)이새끼들 왜이렇게 약함?]
(사진)
14층 문지기 잡았는데 얘네 생각보다 많이 약하다 왜 이러냐
층에 비해서 세긴한데 마력량만큼 전투력이 안 나옴
첫번째 문지기는 지가 서쪽마계 23대마왕인 적색의 갈어쩌고랬고
두번째 문지기는 동쪽 마계에서온 청색의 라토할이랬음
얘네 마력에 비해서 약한이유 알고 있으면 댓글로좀알려줘
이번에도 댓글은 매우 빠르게 달렸다. 물론 그 대부분은 '어케했노 ㅅㅂ련아' 같은 내용이었지만.
내가 쓴 글은 대부분 이렇게 호들갑 섞인 리액션 댓글부터 달린다. 좀 기다리면 알아서 유익한 정보를 물고 와 줄 거다.
그렇게 수배를 때리고 새로 얻은 키워드로 계속 검색하던 중, 드디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을 찾았다.
[(연재) 14층의 배경인 마계 설정에 대해 알아보자 1편.txt]
찾아낸 것은, 자칭 사관이니 고고학자니 하는 특이 성향의 도전자들이 올려놓은 연재글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원색의 마족' 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찾아냈다.
108. 남쪽 마계의 최강자
인간의 세계도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듯, 마계 역시 과거에는 통일되지 않고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 탓에 마족들도 살아가기 힘들다는 외곽 지역인 외마계와, 마족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내마계.
그리고 내마계는 한 번 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지역마다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마왕이 존재했다.
동쪽 마계에는 동쪽의 마왕, 서쪽 마계에는 서쪽의 마왕. 마계에는 총 네 명의 마왕이 균형을 유지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마왕의 좌에 앉기 위한 자격은 오직 하나, 다른 마족을 짓누를 힘.
각 지역의 마왕은 곧 그 지역의 최강자였으며, 최강이 아니게 된 마왕은 다른 강자에 의해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힘의 법칙에 의해 반복되는 쇠락과 부흥, 수많은 도전 속에서 마왕이 교체된 것이 그야말로 수십 번.
몇 번이고 바뀐 왕좌의 주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이 바로, '원색'을 가진 마족들이었다.
마족들마다 타고나는 고유한 마력의 색깔,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색을 가진 이들에게 부여되는 원색의 칭호.
원색의 마족들은 역대 마왕 중에서 누구보다 마왕의 좌를 오래 지켰다.
그 원색의 마족에게서 왕좌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원색의 보유자, 즉 그 마족의 혈연이 대부분이었고.
각 마왕이 20대째를 넘어섰을 시점엔, 동서남북의 마왕 모두가 원색의 마족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원색을 타고나는 것이야말로 마왕의 자격, 그런 인식이 마족들 사이에 박힌 후로 수백 년이 흘렀을 때쯤.
척박한 환경으로 누구도 살 수 없다던 외마계에서 나타난 한 마족이, 각 지역의 마왕을 차례차례 격파하기 시작했다.
가진 마력의 색 따위는 힘을 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 마족이 가진 마력의 빛은 회색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원색이라 칭하기 힘든 어중간한 회색, 창고 구석에 쌓인 먼지 내지는 아무렇게나 섞인 물감의 색.
회색은 최강이라 여겨지던 원색의 마왕들을 모조리 무릎 꿇리고, 동서남북으로 나뉘었던 마계를 홀로 통일시켜버렸다.
최초의 통일 마왕이자, 역대 최강의 마왕.
회색의 마왕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온 마계에 강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원색 마족들의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마왕은 정체 모를 마법으로 색을 가진 마족들에게서 힘의 정수를 뽑아내고, 그들에게 제약을 걸어 자신의 종으로 삼았다.
힘의 정수라는 알 수 없는 것을 빼앗긴 원색의 마족들은 더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소수의 전대 마왕들은 정수를 빼앗긴 후에도 힘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회색의 마왕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전대의 마왕들을 힘으로 복속시키고, 그들을 한낱 문지기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이 고작 문지기 따위가 14층의 보스인 마족 백작보다 강한 이유다.
그렇다면, 왜 14층의 보스가 마왕이 아니라 문지기보다 약한 마족 백작인가. 회색의 마왕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뭐야, 끝이야?"
나는 스크롤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혼잣말했다. 게시글의 마지막 줄에는 '다음 편에 계속' 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허 참, 절단신공이 아주 기가 막히다. 드라마나 소설 하나 쓰면 아주 대성했겠어.
나는 툴툴거리며 다음 편을 검색했다. 그런데 작성자의 이름으로 아무리 검색해봐도, 다음 편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씨발새끼가."
이 마족보다 더한 새끼가, 1편만 싸질러놓고 튀었다!
**
다행이게도 영영 나오지 않을 2편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 게시글의 작성자는 14층의 배경을 파본 도전자 중 하나일 뿐이지, 딱히 창작자가 아니었으니.
14층의 배경을 조사한 도전자는 그 밖에도 있었고, 그런 이들의 글과 댓글을 뒤지다 보니 금세 다음 내용을 알게 됐다.
원색의 마족들로부터 힘의 정수를 빼앗아 간 존재, 이 14층의 최강 몬스터인 문지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회색 마왕.
현재 14층은 그 마왕이 모종의 이유로 쓰러져서 모습을 감춘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상당히 골때렸다. 이 14층의 배경도 다른 층의 배경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법공학이 극도로 발전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46층, 그곳의 보스가 바로 회색의 마왕- 그 영혼이었다는 거다.
46층의 어떤 퀘스트에서 등장하는 사교도가 실행한 소환 의식이 성공해, 마왕의 영혼이 소환되었다는 것.
즉, 마왕이 쓰러졌다는 건 영혼만 다른 세계로 소환되어서 몸만 남아버린 상황이라는 거다.
"와, 어이가 없네."
문지기가 마력량에 비해 약한 이유는 힘의 정수라는 게 뽑혔기 때문이고, 그걸 뽑아간 건 회색 마왕.
그렇다면 회색 마왕은 힘의 정수를 잃지 않은 문지기- 그 막대한 마력을 온전히 활용하는 마족들보다 훨씬 셀 거다.
이렇게까지 강하다는 설정이 잔뜩 붙었으니, 히든 보스로 회색 마왕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뭐, 영혼이 다른 세계에 소환돼? 남은 건 빈껍데기 몸뚱어리 뿐?
관심 가는 키워드가 여럿 있긴 하지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 층에서 전투적인 면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
마지막 세 번째 관문의 정공법은 거대한 블록으로 만들어진 퍼즐을 푸는 것.
퍼즐의 해법은 커뮤니티에 상세하게 나와 있지만, 여태껏 그랬듯이 나는 그딴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멈춰라, 이곳을 지나가려면 네놈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
"그래그래, 난 무식하니까 내 방식으로 지나갈게."
"지혜롭지 못한 자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돌아가라."
나는 인벤토리에서 큼지막한 망치를 꺼내, 녹색의 마족이 들이민 거대 블록을 박살내버렸다.
-쾅!
산산조각난 블록이 후두두 떨어지자, 녹색 마족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처음 봤던 붉은 마족은 육탄전 위주의 근접 전투형, 그다음으로 본 푸른 마족은 마법을 난사하는 원거리 공격형.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도록 배치된 건지, 두 쌍의 날개를 펼친 녹색 마족의 주 무기는 속도였다.
-훙훙훙훙훙!
날개를 펼치고 내 주변을 고속 비행으로 맴돌았다. 그 여파로 발생하는 충격파만 해도 심상찮은 수준.
속도 면에서는 기믹을 풀지 않은 13층의 보스와 비슷한 정도. 층수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거다.
13층 보스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놈은 뛰는 게 아니라 아예 날아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비행 중의 움직임도 별 제약 없이 매우 자유로워 보이니, 나 같은 근접 전사 타입에겐 무척 불리한 상성이다.
원거리 공격은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지만, 공중전은 비행 능력이 없는 한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으니까.
"근데, 그렇게 붕붕 날아서 뭐 어쩔건데."
다만 이 녹색 마족은 붕붕 날아다니기만 할 뿐, 뭔가 공격을 시도하려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내가 공중전이 약점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상대방이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즉, 비행과 원거리 공격 수단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성립한다는 거다. 이놈은 그런 게 없어 보이고.
"숨통을 끊어주마!"
그 때, 녹색 마족이 소리치며 급하게 속도를 높였다. 설마 저 속도로 들이받으려는 건가?
근데, 그런 식으로 공격하려면 최소한 숨통을 끊니 어쩌니 하면서 타이밍을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병신인가."
나는 곧바로 타이밍을 맞춰 스킬을 발동했다.
[철벽]
[혼신]
-콰앙!
전속력으로 내 몸에 들이받은 녹색 마족의 몸뚱이가 박살 나며, 육편을 흩뿌렸다.
몸통박치기를 하려면 자신과 상대 중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는 알고 했어야지.
"크허억...말도 안 된다, 어떻게...!"
바위에 부딪힌 계란 꼴이 된 녹색 마족이 부들거렸다. 그래도 간신히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다.
곧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이마에서 뿔이 돋아났다. 뿔의 개수는 이번에도 여섯, 푸른 마족과 똑같다.
이거, 첫 번째로 만났던 붉은 마족이 가장 강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놈도 한 방감이었는데.
"제법이구나, 남쪽 마계의 26대 마왕인 이 로투랑이 뿔을 꺼내게 할 줄이야!"
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 저 새끼가 와서 혼자 들이받고 뒤지려 한 거지.
놈은 뿔을 꺼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것처럼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내구력도 올랐을 테고, 이미 한 번 당해봤으니 무식하게 들이받으려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속도로 승부하려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었다.
나는 이미 13층 보스를 단순한 전력질주로 따라잡아 본 전적이 있다. 그보다 더 빨라질 수단도 있고.
[신속]
순간적으로 이동속도를 높여주는 [신속] 스킬을 사용해 단번에 녹색 마족의 배후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의 뒷덜미를 붙잡은 뒤, 얼굴을 땅에 처박아 버렸다.
-쾅!
그대로 지면에 뿌리채소처럼 심어진 놈의 팔다리를 우둑우둑 꺾었다.
전투적인 면에서는 말했듯 이미 기대를 접었지만, 영혼 소환이라는 키워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야, 너는 전직 마왕씩이나 되는 놈이 쪽팔리게 뭐 하는 거냐?"
나는 제압한 녹색 마족을 향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얌마, 인간한테 털리니까 기분이 어때. 힘의 정수인가 뭔가, 그거 다시 찾고 싶지 않아?"
너, 나랑 혁명 한번 하자.
109. 욕구불만
나는 함께 힘의 정수를 되찾으러 가자고, 매우 열정적으로 녹색 마족을 설득했다.
물론 나는 말재주가 정말 형편없으며, 남을 말로 설득하는 일에는 완전히 젬병이다.
"크아아악! 이 악마 같은 놈, 알았다! 알아들었다!"
그래서 말로 안 했다.
말이 아닌 [라이트닝 차지]를 이용한 내 짜릿한 설득에, 녹색 마족은 완전히 넘어왔다.
물론 진짜로 전기찜질만 한 건 아니고, 적당히 주물러 준 다음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이야기를 꾸며 냈다.
당연히 내가 꾸며낸 거짓말에는 허점이 많았지만, 그 허점은 커뮤니티의 망령들이 알아서 보충해 주었다.
[마계에 레볼루쑝 일으키려고 하는데 대본좀 써줄사람 구함]
시간이 남아도는 커뮤 망령들, 그리고 마계의 배경 설정에 관심이 많은 사관 도전자들이 설정을 잡아준 거다.
"그, 그게 사실이냐. 정말 마왕이 무력화되었다고? 거짓말은 아니겠지?"
현재 이 녹색 마족은, 나를 모종의 사고에 휘말려 외마계에 떨어져 살아온 인간으로 알고 있는 상태다.
"그래 인마, 그 새끼 그거 영혼만 어디로 소환돼서 몸뚱이만 남았다니까?"
커뮤니티에서 손에 넣은 정보, 자체적으로 잡은 설정, 그리고 상대방을 착하게 만드는 무력.
"네, 네놈의 말이 사실이라면...매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로군."
이 세 가지의 조화로, 나는 전직 마왕을 훌륭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녹색 마족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정보를 공유했다.
듣자하니, 회색의 마왕에겐 타인의 힘을 빼앗고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힘의 정수란 건 회색 마왕이 전대의 마왕들에게서 뽑아낸 힘을 응축시켜놓은 보석 같은 거라고 하고.
실체가 존재하는 물건이니, 마왕이 무력화된 지금- 작정하고 쳐들어간다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을 거라고.
물론 마왕성에 정면으로 쳐들어가려면 단둘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나는 때를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너 말고도 마왕한테 당한 놈들이 있잖아? 그 녀석들을 싹 모아서 쳐들어가는 게 어때?"
힘의 정수를 뺏긴 마족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당장 동서남북의 마왕만 세도 일단 네 명은 되고.
그 네 명 중 두 명을 내가 죽이긴 했는데, 대충 동서남북의 2인자 마족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정수를 뺏겼다는 것은 마왕의 견제 대상이 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놈들을 싹 모으면 큰 전력이 될 거다.
"그렇군, 그렇다면 성공률도 크게 오르겠어. 혁명의 동지를 모으자는 건가."
녹색 마족은 그 혁명 동지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군이 아니라 내 적을 모으러 다니는 여정이라니, 리버스 포켓몬 마스터구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전대 마왕의 비원 - 힘의 정수]
설명 : 당신은 과거 남쪽 마계의 마왕으로 군림했던 녹색의 마족, 로투랑의 야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색의 마왕을 두려워해 문지기의 신분으로 숨죽이고 있었지만, 그에겐 아직 마왕의 좌를 향한 집념이 깃들어 있었죠.
그는 힘의 정수를 되찾고 회색의 마왕을 무찔러, 다시금 마왕의 좌에 올라서고자 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도울 수도, 방해할 수도, 혹은 돕는 척하며 자신의 실리만을 챙길 수도 있을 겁니다.
[퀘스트 목표]
1.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손에 넣기.
2. 로투랑에게 힘의 정수를 돌려주기(선택).
3.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파괴하기(선택).
4.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빼앗기(선택).
5. 로투랑을 살해하기(선택).
퀘스트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 녹색 마족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선택지에 가까웠다.
일단 힘의 정수를 손에 넣기만 하면, 그다음에 어떤 선택을 하든 보상은 들어올 거다.
문제는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 때 보상이 가장 크느냐, 그건데.
나는 잠시 퀘스트 목표를 보며 고민하다가-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가만 보니까 이거, 선택 목표 전부 달성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정수를 돌려준 다음 다시 뺏고, 뺏은 건 부숴 버리고, 마지막으로 죽여 버리면 되겠는데?
"북쪽 마계 놈들이라면 설득하기 쉬울 거다,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녹색 마족과 동행했다.
**
마계를 배경으로 하는 14층에도 마을로 불리는 거주 공간은 존재한다.
사실, 말이 마계지 내마계 안쪽은 의외로 살기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사소한 단점 몇 개가 있을 뿐.
밤이 되면 드물게 거대한 마수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간다는 점이나, NPC도 죄다 음험한 마족이라는 것 정도?
NPC 마족들은 뿔이 하나밖에 없는 허접들이라, 14층까지 올라올 저력이 있는 도전자에겐 대수롭지 않은 문제다.
전대 마왕이라는 놈들이 죄다 따까리 신세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마족은 기본적으로 강약약강 정신이니까.
하지만 그 강약약강 정신이라는 게 이번에는 나를 참 귀찮게 했다.
"어이, 인간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로투랑 님의 시종 같은 건가?"
"인간 따위가 시종이라니, 휴대식이겠지!"
마을의 마족들이 도전자에게 시비를 털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절대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뿔 두 개짜리와 세 개짜리의 마족들은 전혀 절대적 약자가 아니다. 강자 축에 속하지.
단순한 마력의 양만 보면 나와 비슷하거나 더 많고, 거기에 마족의 종족 특성인 강한 마나 지배력을 가진 놈들.
그렇기에 딱 봐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녹색 마족에겐 굽실거리고, 그 옆에 있는 나에겐 거들먹거리기 바쁘다.
북쪽 마계의 마왕을 맡고 있었다던 녀석을 찾기 위해 지역을 넘어온 지 벌써 두 시간 째.
그 두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상황에 놓였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대응하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야, 이놈들은 어떠냐?"
"빼앗기지 않았다, 약해."
힘의 정수를 빼앗기지 않은 평범하게 약한 마족들이란 뜻이다.
로투랑은 대답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내게 시비를 걸던 마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마왕 출신의 강자인 로투랑과 내가 맞먹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표정.
-콰지직!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가장 가까운 마족을 정수리부터 반으로 갈라버렸다.
**
마계 북쪽 지역으로 넘어온 두 시간 동안, 내가 처치한 마족의 숫자는 대충 백쯤 된다.
그리고 백이나 되는 마족을 잡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기술이 매우 부족하다는 거다.
타고난 육체의 강인함과 보유한 마력의 양은 굉장하지만, 거대하다기보다는 비대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힘의 정수를 뺏긴 놈들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놈들마저 마력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해 빠졌으니.
살만 뒤룩뒤룩 찐 도축장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이, 이 자식이!"
대뜸 몸이 반으로 갈라진 동료를 보곤, 격분하여 달려드는 뿔 세 개짜리 마족.
나는 [강철 직검]에 마력을 흘려 넣고, 달려드는 마족 녀석의 팔을 빛나는 칼날로 베어버렸다.
이 [강철 직검]은 1층에서도 구할 수 있는 상점제 잡템인 만큼, 원래라면 마족들의 강인한 육체를 벨 수 없다.
[예리] 풀강을 해도 예리함이 부족하고, [내구] 풀강을 해도 내구도가 부족해 쉽게 부러지는 게 당연한 수준.
하지만 내 마력을 흘려 예리함과 내구도를 보충함으로써, 천하의 보검 못지않은 무기가 된다.
-촤악!
마족 하나를 더 베어 넘기고, 옆에서 손톱을 휘둘러오는 다른 마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통째로 분질러진 마족의 목이 눈앞에 알맞게 놓였다.
그대로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몸통과 머리를 이별시켜주었다.
검에 마력을 흘려 넣는 것은 액티브 스킬을 사용하는 감각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MP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동작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스킬의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력을 다루는 검술이 스킬에 비해 부족한 점이라면, 복잡한 조작을 요구한다는 것 정도뿐.
버튼 하나로 쓸 수 있는 매크로와, 하나하나 직접 입력해서 발동하는 커맨드의 차이다.
예전에는 나도 그 '커맨드 입력'을 어려워해서, 액티브 스킬을 섞어 쓰곤 했지만.
[마력 지배]를 손에 넣고 마력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검술 스킬 자체를 아예 안 쓰게 되었다.
[웨폰 마스터리 Lv.2]
- 한손검 숙련 (929 / 999)
하지만 시스템은 이걸 스킬 사용으로 인식하는지, 스킬을 쓸 때마다 오르는 숙련도 수치는 계속 상승 중.
곧 한손검 숙련도는 최대치인 999를 찍을 예정이다. 이것도 업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끝났어, 마저 가자."
덤벼오는 마족들을 싹 쓸어버린 후, 피를 털어낸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어느 쪽이 마족인지 모르겠군, 외마계에서 살다 보면 인간도 이렇게 되는 건가."
녹색 마족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내 처지가 이렇다.
14층 최강 수준인 몬스터가 질겁할 정도의 강함.
커뮤니티의 랭커들도 내가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가늠을 못 하고 있다.
이러니까 자꾸 회색의 마왕인지 뭔지에 대해서 미련이 생길 수밖에.
힘의 정수를 완전히 되찾은 마계 혁명 군단이 충분히 강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