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30

120. 하늘의 신관

얼타고 있는 앤젤라를 두고, 하늘지기의 쉼터에서 나와 천족 부부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기다리던 대로, 날개가 두 쌍이 달린 천족- 신관이라 불리는 이들이 둘이나 서 있었다.

천족 부부는 형사에게 취조당하는 일반인처럼, 두 명의 신관에게 쩔쩔매며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나머지는 본인에게 듣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그것도 신관들이 나를 발견하며 끝나게 되었다. 날개를 펼친 신관이 순식간에 내 앞으로 이동했다.

속도가 빠르네, 역시 신관은 다른 천족들이랑 기본 스펙 차이가 꽤 나는군.

"일주일 전, 천계로 올라온 지상인이 당신 맞습니까."

"어."

"저는 천신님의 뜻을 대행하는 신관, 아드리엘이라 합니다."

아드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 옆의 다른 신관, '로피엘'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로피엘은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훤칠한 남자, 아드리엘은 긴 금발을 가진 여자 천족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는 각각 창과 활, 감지되는 마력의 양은 마족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그렇게 적은 것도 아니다.

"현재 당신께는 두 가지 혐의가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7구역 신수 폭행, 다른 하나는 하늘지기 약취 혐의입니다."

"약취?"

"하늘지기 앤젤라에게 지상의 지식을 전수했지요. 이는 정순한 천족의 심신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약취에 해당합니다."

역시 앤젤라와 있었던 일은 파악하고 있었군. 그런데 그게 약취에 해당한다니, 천계의 법은 참 골때리는구나.

"서로 간의 동의가 있는 행위였어, 그게 어떻게 약취가 되는데?"

나는 순수한 의문을 내뱉었다. 그러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천족 부부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다가왔다.

"전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이가 그런 일에 스스로...그럴 리가 없어요!"

"맞습니다, 앤젤라는 선하고 순수하며 고결한 천족입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천족의 본질이 완전무결하다고 믿는 이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겠지만. 사실인 걸 어쩌나.

당신들 딸 쩔더라.

아무튼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했다고.

"전후 상황은 조사를 진행하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은 안심하고 들어가 계시길."

신관은 처참한 표정을 한 천족 부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신수 폭행은 부정한 지상인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정상이 참작되겠습니다만…하늘지기 약취 혐의는 천벌감입니다."

"신관들에 의해 집행되는 5급 천벌이 당신께 내려질 예정이며, 조사 결과에 따라 3급 천벌까지 상향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고 중추로 따라오신다면, 6급 천벌 이하까지 정상을 참작해 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내 목적은 원래부터 중추에 가는 거였다. 그러니 굳이 여기서 저항할 이유는 없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부정을 씻지 못한 인간족의 힘으로는 우리 신관에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안 싸울 이유도 딱히 없다. 중추에 가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따라가기는 할 건데."

-스릉.

"그 전에 실력 좀 보자."

이만큼 큰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싸워 볼 기회는 좀처럼 없거든.

**

검을 뽑고 마력을 전개하자마자, 두 명의 신관은 거의 발작하듯 빠르게 반응했다.

"어리석은 짓을, 당장 그만두십시오!"

아드리엘이 재빠르게 활에 세 발의 화살을 메겼다. 하지만 그게 재빨라 봤자 근접 전사만 할까.

나는 칼등으로 활을 든 손을 후려쳤다. 탁, 소리와 함께 시위에 메겨졌던 화살 중 하나만이 초근거리에서 쏘아졌다.

궤도를 읽고, 고개를 가볍게 젖혀 피해낸다.

화살의 속도 자체는 빠르지만, 이런 짧은 거리에서는 사선이 뻔하기에, 속도와 상관없이 가볍게 피할 수 있다.

-콰광!

빗나간 화살이 저만치 떨어진 구름에 박히며 폭발했다.

뭐야 저게, 위력이 엄청 세네.

화살이 아니라 박격포가 따로 없군. 지금 상태로 그냥 맞으면 큰일 나겠다.

근거리에서 활로 상대할 수는 없을 거라고 판단을 마쳤는지, 아드리엘은 거리를 벌리며 빛나는 마력을 흩뿌렸다.

마력은 주변의 구름을 흡수해 형태를 이루었다. 그렇게, 여러 종류의 동물 형태를 한 소환수가 생겨났다.

아드리엘이 신관으로서 가진 은총 중 하나일 거다.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골렘 같은 거겠지.

저걸로 시간을 끌고 확실하게 거리를 벌릴 생각인가 본데, 내가 여태까지 깨부순 골렘이 몇 개인 줄 아냐?

-촤악!

소환수는 내 검격 한 번에 핵을 파괴당해 소멸했다. 다만 직후, 다른 소환수들이 내게 들러붙어 움직임을 방해했다.

-쐐액!

그 때를 노려 쏘아지는 화살 한 발, 빈틈을 노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림없다.

"어딜."

-휙!

이번에도 고개를 가볍게 까딱여 피해냈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원거리 공격에 당하지 않는다.

근접 전사에게 원거리 사격은 가장 큰 약점, 그렇기에 나는 그 부분을 더 철저히 보완했다.

[마력 감지], [초감각], [감각 강화]등의 스킬을 모조리 엮어서 완성한 감지능력은 이미 레이더나 다름없다.

스탯이 토막 난 상태에선 그것도 약해지긴 하지만, 그동안 감지능력을 복구를 위주로 단련했으니.

그렇게 화살을 피해낸 직후, 머리 위에서 감지되는 쏜살같은 움직임.

"흐아앗!"

어느새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신관 로피엘이, 불꽃이 휘감긴 창을 들고 수직으로 낙하했다.

소환수를 떨쳐내며 뒤로 크게 뛰었다. 콰광, 구름 지면에 박히는 불타는 창.

"부정한 것을 불태우는 신염을 맛보아라!"

지면에 박아넣은 창을 뽑아 휘두르며, 요란하게 소리치는 로피엘. 신염이라 불리는 불꽃이 넘실거린다.

무슨 성스러운 불꽃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저건 그냥 불이다. 내 [화염 내성]에 막히는.

몰아치는 화염을 무시하고 뛰어들어, 검을 휘둘러 창과 맞부딪혔다.

-카앙!

"으윽?"

창을 든 로피엘이 살짝 주춤한다. 근력은 내가 더 우위에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밀어붙이려는 찰나, 놈의 창에 붙어있는 불꽃이 일렁거리며 변화가 일어났다.

분명 불타는 창이었던 무기가, 한순간에 불타는 도끼로 변했다.

-후웅, 쾅!

갑작스러운 변화에 한 발짝 뒤로 뛰었더니, 그 자리를 강타하는 불타는 도끼.

그리고 도끼는 다시 창의 형태로 변했다. 창과 도끼 형태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변형도 있으려나. 어쨌든 이걸 내가 상대하는 날이 올 줄이야. 마음에 든다.

"그 창, 좋아 보인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무기라, 나도 꼭 하나 갖고 싶은걸.

**

인벤토리를 이용해 여러 종류의 무기를 바꿔가며 싸우는 내 고유의 전법.

그걸 조금 다른 형태로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다. 직접 상대해보니 확실히 까다로운 전법이네.

-카강! 카앙! 캉!

창과 도끼에 이어 미늘창이며 검이며 봉의 형태로도 변하는 무기와, 내 검이 반복해서 맞부딪힌다.

무기술 자체가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지만, 화염 공격까지 병행해 수비적으로 싸우니 이거 참 난공불락이다.

물론 스킬 몇 개를 사용하면 쉽게 뚫을 수 있겠지만, 단순히 검술만으로 공략하기는 꽤 힘든걸.

-피잉!

그 때, 내 검이 뻗어 나가는 타이밍에 쏘아진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귀를 스쳐 지나간다.

빈틈이 없지는 않은데, 그 빈틈은 저 멀리 떨어진 아드리엘의 화살이 절묘하게 메꿔진다.

스펙은 그럭저럭, 무기술도 그럭저럭, 하지만 은총이라는 특수한 능력과 척척 잘 맞는 호흡이 상승효과를 보이고 있다.

파티 플레이의 장점이라는 게 역시 이런 거겠지. 나 같은 솔플러는 평생 못 해볼 싸움 방식이다.

"아, 그것도 아닌가."

신관의 실력은 잘 봤다. 그럼 이제 이놈들의 팀워크를 파훼해 보도록 할까.

-후웅!

나는 로피엘의 창을 피해내며, 인벤토리에서 꺼낸 검을 아드리엘을 향해 힘차게 집어 던졌다.

"헉!"

-콱!

검은 아드리엘의 머리 옆에 아슬아슬하게 박혔다. 맞았으면 좋았겠지만, 맞추려고 던진 것도 아니다.

내가 던진 검은 그냥 그런 [강철 직검]이 아니라, 칼레온이었으니까.

[검령 각성]

하급 마법석을 끼운 채로 던진 칼레온을 각성시켜, 검령을 불러냈다.

"이놈...보나 마나 전투 중에 나를 불렀겠지, 이번에는 어디냐! 이번에야말로 내 실력을 제대로!"

원래 마검이었기 때문인지, 검령은 흉흉한 마력을 풍긴다. 그 모습을 본 로피엘과 아드리엘은 격하게 반응했다.

"이 무슨 사악한 기운! 피해라, 아드리엘!"

검을 들어 올린 검령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직감했는지, 로피엘은 내게서 떨어져 아드리엘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놈의 창끝에 막대한 불꽃이 실린다. 아껴두고 있던 필살기인지, 그 기세가 실로 대단하다.

"흐아압!"

-콰앙!

로피엘의 일격은 어마어마한 범위에 불꽃을 토해내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제약이 걸린 칼레온은 거대 뿔토끼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스탯의 소유자, 당연히 그 폭발을 피할 힘은 없었다.

검령 칼레온, 사망.

하지만 애초에 싸움을 맡기려고 소환한 칼레온이 아니다. 미끼 역할은 충분히 해 줬다.

칼레온에 대처하느라 빈틈이 훤히 드러났다. 궁수가 커버해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빈틈.

[신속]

민첩 스탯을 증폭시켜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그대로 빈틈을 향해 일격.

"크헉!"

내 검에 적중 당한 로피엘이 쓰러지고, 남은 것은 혼자서는 싸우기 어려운 궁수 아드리엘 뿐.

이 정도면 딱 15층에 어울리는 수준이네, 제약이 아니었으면 상대도 안 됐겠어.

자, 내가 이겼다.

121. 대죄를 범하다

역시 전투는 어느 정도 투닥거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압도적인 스탯과 스킬 성능을 바탕으로 찍어누르는 싸움은 정신을 해이해지게 만드는 법이다.

25층의 랭커인 최길현만 해도, 실전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창기사라고 부르기에도 창피한 수준이었으니.

나도 그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어떤 수단으로든 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14층에서는 마력강화를 자체 봉인하고 전투하는 것으로 감각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역시 좀 부족함이 있었는데.

이렇게 스탯이 토막 난 상태에서 기량을 발휘해 싸우니, 훨씬 더 팽팽하게 감이 유지되는 것 같다.

마족들은 아무래도 너무 힘으로만 찍어누르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기량 싸움을 할 기회는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 한참 느슨한 상태긴 하지만, 이 정도면 몸풀기로는 썩 괜찮았다.

"헉, 허억...어떻게, 지상의 인간이...이토록..."

바닥에 엎어져 버르적거리던 아드리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로피엘을 쓰러트린 이후, 아드리엘은 혼자서 열심히 싸웠지만- 당연히 나를 이길 수 있을리는 없었다.

길게 잴 것 없이 모든 화살을 피해낸 다음 거리를 좁혀, 명치를 존나 쎄게 때려줬더니 이 꼴이다.

보통 천족들보다는 월등히 강한 모양이지만, 그래 봤자 결국 15층 수준이라는 거겠지.

그나마 내 스탯이 반 토막 난 상태라 싸움이 성립되기라도 한 거다.

14층 마족들은 마왕급 개체도 내 주먹 한 방에 뼈까지 으스러지곤 했으니까. 얘네 수준으로는 뻔하지 뭐.

"야, 너희 얼마나 강한 거냐. 같은 신관 중에서는 어느 정도로 센 거야?"

나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비척거리는 로피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알려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정한 자여, 당신에게 천벌이 내릴 겁니다!"

천족들은 험한 말도 쉽게 못 한다더니, 표정만 살벌하지 하나도 안 무서운 경고로군.

"내리라지, 뭐."

어차피 대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포션을 꺼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로피엘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왜 이렇게 쫄아, 누가 뭐 고문이라도 한대?

"포션이야 임마, 마셔."

"으읏."

"진짜 포션이라니까?"

포션병을 들이밀자, 로피엘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내용물을 의심하는 건가 싶어서 눈앞에서 내가 마시는 모습도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계속 거부한다.

사실 진짜 독극물이었어도 나한테는 안 통해서 이런 시늉을 하는 의미는 없긴 하다.

하지만 그걸 알고 저러는 것 같지는 않다. 설마 인간의 물건이라고 피하는 건가.

"결국 힘을 쓰게 만드는구만, 가만있어. 입 벌려 새끼야."

"읏, 으읍!"

"어허, 가만히, 이빨 치우고. 더 다치고 싶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입에 포션병을 처박아 삼키게 했다. 아마 이 정도면 금방 회복되겠지.

이 녀석들은 나를 중추로 안내해 줘야 한다. 그리고 애초부터 죽일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아드리엘을 치유하고, 다른 곳에 쓰러져 있는 로피엘에게도 포션을 억지로 퍼부어 치료했다.

그러고 나니, 잠시 내버려뒀던 아드리엘은 뭔 궁상인지- 제 어깨를 감싸 안고 뚝뚝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윽, 으윽...으흐흑...지상의 인간에게, 더럽혀졌어..."

아니 시발, 살려줬더니 뭐 하는 짓이야.

그림이 존나 이상하잖아.

**

앤젤라는 사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마인드가 열린 애였던 걸까.

아드리엘은 무슨 성범죄라도 당한 것처럼 오열하며 울었고, 깨어난 로피엘은 발작하듯 내게 덤벼들었다.

이후 로피엘은 다시 처맞아 반죽음이 된 채 구름에 처박혔고, 아드리엘은 오열하다 못해 자결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얼씨구, 지랄을 해라. 그깟 포션 좀 먹었다고 아주 염병을..."

"이거 놓으세요! 나, 나는 더 이상...이런 몸으로는...!"

"네 몸에 티끌 하나 안 묻었어, 미친년아!"

너무 서러워하길래 중간까지는 좀 안쓰럽다고도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이젠 그냥 질릴 지경이다.

광신도가 따로 없구만, 세뇌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그러니 다른 탑의 15층이 다 그 모양이지.

이런 상황에 느그 신은 그냥 비둘기라고 말하면 반발만 심해지겠지.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내 말재주로는 뭐라고 해도 안 통할 텐데, 어쩔 수 없구만.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시발 이거 어떡함?]

15층 진행 중인데 신관년 존나 울면서 자살하려함

나 중추로 데려간다길래 한번 싸워본다음 포션 먹여서 살려줬거든

안 먹으려 하길래 억지로 먹였더니 더럽혀졌다고 개지랄함

세뇌 단단히 당한거같은데 얘 설득하려면 어떡해야하냐

아무나 대본좀 짜주셈 급함 나 중추가야됨

(사진)

이럴 때는 역시 커뮤니티지. 내 등반에 관심이 있는 망령들은 한둘이 아니니 분명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예상대로 글을 올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오좀꼴

- 와 시발련 우는거봐라 존나꼴리네 ㅋㅋㅋㅋ

- ㄴ 좋아하는 축구선수 이름 빨리 급함

- 줘패놓고 억지로 약먹이면 나같아도 울겠다 미친놈아

- ㄴ 진혁이는 싸패라 그런거 모른다

- 천족눈나 짤 이게다임?

- ㄴ 도움을 받으려면 마땅한 '성의'가 있어야하지 않겠냐?

- ㄴ 진혁아 형은 많은거 안바란다 딱 다섯장만 풀자

- ㄴ 이거 ㄹㅇ이다 진혁아 성의표시만 살짝 하자

- 우는거 살짝 반응오네 아

- 근데 진혁게이야 니네 탑에는 왤케 예쁜NPC가 많냐

- ㄴ 이새끼 원래 비틱전문 분탕이었잖음 ㅋㅋ 이것도 고도의 비틱인거임

- 얘 언제 15층갔음? 존나빠르네

물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댓글이 달리기까지는, 언제나처럼 한참 걸렸다.

**

어떻게든 시간을 들여서 아드리엘을 진정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나를 중추로 데려가야 하지 않느냐.

그런 말을 한참 쏟아내었다. 커뮤니티에서 알려준 대로 말한 거라서, 나도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나 혼자서는 절대 떠올릴 수 없었을 청산유수 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것만 대충 기억나는 정도.

이러면 나를 중추로 이송한 뒤 자살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 전에 천계에 난리가 날 거라서 그건 상관없다.

"중추에 가려면...우선 이걸 마시셔야 합니다..."

아드리엘은 내게 푸른 빛의 액체가 담긴 병을 들이밀었다. 이게 뭔지는 이미 커뮤니티를 통해 알고 있었다.

도전자에게 걸려 있는 제약을 완화해주는 포션이다. 여기서는 성수라고 부르는 것 같다.

물론 실상은 성수가 아니라 특수한 연금술 포션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진짜 성수는 내 인벤토리에도 들어 있다. 그냥 다른 층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소모품이거든.

"부정한 자를 천신님이 거하신 곳에 그냥 들여보낼 수 없기에...최소한의 부정을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아드리엘은 거의 벌벌 떨며 말했다. 나는 얌전히 성수라고 주장하는 포션을 받아 마셨다.

[천계의 기운이 땅에서 태어난 부정한 자를 거부합니다. 모든 스탯이 저하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에서 '대폭' 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그냥 저하된다는 말로 바뀌었다.

"상태창."

확인해 보니, 반 토막이 났던 스탯이 1할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15층은 퀘스트를 진행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원래 스탯을 회복할 수 있는 구조다.

최종적으로 미궁 지역에 도전할 때가 되면 모든 스탯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방식.

하지만 이렇게 퀘스트 라인을 정직하게 따라가면, 히든 보스인 천신에게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른 탑의 천계는 지금도 서서히 최악의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그럼...가시죠."

나는 아드리엘과 로피엘을 따라, 천계의 중추로 향했다.

**

천계의 중추는 거대한 구름으로 둘러싸인 신전 같은 장소다.

실제로 천신을 모시고 있는 곳이기에 신전이 맞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의 천족은 모두 신관이다.

그 수많은 신관 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대신관이라는 녀석인데, 나는 곧 그 대신관과 마주했다.

"로피엘, 아드리엘, 둘 다 수고 많았습니다. 많이 지친 모양이니,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요."

날개가 네 쌍이나 달린 대신관은 나를 데려온 두 신관을 물리고, 나와 독대했다.

"지상의 인간이여, 그대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이제부터는 그대의 죄를 묻겠습니다."

대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신전의 중앙으로 안내했다. 천벌이 집행되는 제단이다.

"우선, 하늘지기 약취 혐의에 대해서는..."

"어, 내가 했어."

"예?"

원래대로라면 복잡한 절차가 있겠지만, 나는 그런 걸 모두 무시하고 말했다.

"다 내가 했으니까, 질질 끌지 말고 바로 그 천벌이나 내려 보라고."

당황하는 대신관, 신경 쓰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낸다. 그대로 뛰어올라 제단을 내려찍는다.

-콰앙!

그 중요하다는 제단이 초전박살난다. 나는 이어서 쇠구슬을 꺼내 주변으로 흩뿌렸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진다. 천계의 중추, 그것도 제단에서의 난동은 이들의 법에 따르면 일급 천벌감.

일급 천벌은 신관에 의해 집행되지 않는다. 천벌의 주체인 천신 본인이 나서서 심판하는 최대의 금기이기에.

그리고 그 일급 심판의 정체는, 천신을 자칭하는 비둘기 괴물에게로의 인신공양.

"실성한 겁니까, 지상의 인간이여...?"

이제 저 대신관은 나를 천신에게 데려가야만 한다.

122. 둥지

15층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경우, 도전자는 천천히 부정을 씻어내고 미궁에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부정을 완벽하게 씻은 인간은 천신이 거하고 있는 장소로 들어갈 수 없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를 천신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괜찮다.

[천계의 기운이 땅에서 태어난 부정한 자를 거부합니다. 모든 스탯이 저하됩니다.]

나는 아직 천계의 힘으로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 천신은 나를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있을 터.

거기에 제단에서 깽판을 부렸으므로, 일급 천벌이라는 것을 내릴 명분도 확보되었다. 이제 얌전히 투항하기만 하면 된다.

"에우리엘, 플로엘, 단타니엘! 신성 결계를 펼치세요, 일급 천벌을 집행하겠어요!"

대신관은 무기를 꺼내들며 곧바로 천벌을 준비했다. 결계가 펼쳐지기 전에 내가 날뛰면 안 되니, 막아설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결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일급 천벌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그래도 모처럼이니, 대신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 볼까.

대신관의 무기는 이번에도 창이었다. 자유자재로 변형하던 그 창이랑 완벽히 똑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신관의 무기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은, 무기 자체의 성능이 아닌 그들이 가진 은총이란 것의 힘.

대신관에게 무기 변형 능력이 없으면 평범한 창일 뿐- 그렇게 생각한 순간, 대신관은 신박한 능력을 선보였다.

-쿠구구구궁!

창을 들어 올린 대신관 주변으로 빛나는 마나가 모여들더니, 이내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이루었다.

느낌 상, 아드리엘이 사용하던 소환수와 유사한 힘이다. 대신관 본인이 되어 거대한 마력의 소환수가 된 셈이다.

핵을 부수면 한 방에 정리되겠지만, 그 핵이 대신관 본인인데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몸체의 크기가 너무 거대하다.

단번에 꿰뚫을 수 있으려면 어마어마하게 긴 무기가 필요할 텐데, 그런 건 나한테 없고.

강력한 원거리 공격으로 중심을 노려 볼까, 마력으로 이루어진 몸체에 쇠구슬이 얼마나 통하려나.

"날뛰게 두지 않겠습니다!"

대신관이 손에 들린 창을 휘두르자, 마력 거인의 팔이 움직였다.

[초감각]

마력감지를 전개하고, 날아드는 팔을 피해내었다. 크기가 큰 만큼 공격 자체는 둔중하다.

이번에는 상대의 공격에 집중하기보다는, 내 공격을 확실하게 넣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라, 인벤토리에서 꺼낸 쇠구슬에 마력을 담았다.

[라이트닝 차지]

벼락이 깃든 쇠구슬을 힘껏 투척했다. 마력 거인의 몸에 부딪힌 쇠구슬은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멈췄다.

하지만 쇠구슬에 실려 있던 내 마력으로 이루어진 벼락은 거인의 몸에 제대로 꽂혔다.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물리 공격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딱 깃들어 있는 마력만큼의 피해만 들어갔나. 이러면 무기 투척으로도 효과는 딱히 없겠군.

"특수한 탱커...그렇게 봐야 하나."

어차피 대신관의 역할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결계가 펼쳐지고 천벌이 집행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마력이 깃든 검으로 계속 깎아내면 언젠가는 반드시 잡을 수 있겠지만, 시간 소모는 무척 클 거다.

오러를 다룰 줄 알면 검기를 쏴서 대신관 본체를 베어버릴 수 있을 텐데, 나는 아직 그런 건 못하니까.

"그럼 이거나 시험해 봐야겠네."

[검령 각성]

이번에는 한방에 뒤지면 안 되니까, 특별히 평소보다 좋은 중급 마법석을 사용해 검령을 불러냈다.

제약도 완화됐을 테니, 이제는 그럭저럭 실력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이놈, 또 이런 상황에서 불러내다니! 존중이라고는 없는 놈이로구나!"

소환된 검령 칼레온이 이번에도 불평을 말했다. 기껏 중급을 써서 불러줬더니, 첫 마디부터 저 모양인가.

"큭큭, 그래도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재료를 썼나 보군. 이번에는 그럭저럭 마력이..."

[천계의 기운이 땅에서 태어난 부정한 자를 거부합니다. '검령 칼레온'의 모든 스탯이 크게 저하됩니다.]

"마력이...뭐냐, 여전히 형편없지 않으냐! 이런 상태로 어떻게 싸우라는 거냐!"

어랍쇼, 제약이 완화됐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아무래도 소환수와 주인의 제약은 별개로 취급하나 보다.

"읏, 이토록 부정한 혼을 불러내다니. 사라지도록 하세요!"

부정을 전혀 씻지 못한 검령을 보고 대신관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콰광!

그렇게 이번에도 검령 칼레온, 사망.

**

모루를 깎아 바늘을 만드는 것 같은 노가다 끝에, 거대한 마력의 거인이 너덜너덜한 꼴로 천천히 쓰러졌다.

대신관은 결국 베지 못했지만, 마력 거인 자체를 칼질로 깎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뭐, 핵이 있는 골렘 타입의 적이라도 무한히 재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마력이 떨어지면 그걸로 끝이지.

"헉, 허억...어째서 지상의 인간이 이토록 강할 수 있는 건지...하지만 그대도 이제 끝입니다."

한참의 전투 끝에 마력이 바닥난 대신관이 헉헉거리며 승리를 선언했다.

대신관이 버티는 사이, 일급 천벌을 위한 결계는 완성되었다. 천신을 위한 밥상이 차려진 거다.

"비록 저도 함께 결계에 갇혔지만...이 한 몸 바쳐서 그대와 같은 죄인을 벌할 수 있다면 바라던바."

시간을 끄느라 함께 밥상에 갇혀버린 대신관은 벌벌 떨면서 그렇게 말했다.

"저를 죽여도 결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화풀이할 셈이라면 얼마든지 해 보세요."

대신관은 목숨을 바친 동귀어진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전부 틀렸다.

일단 나는 어차피 천신에게 스스로 찾아갈 요량이었다. 결계는 있건 말건 아무 상관 없다.

그리고 나는 대신관을 굳이 죽일 생각도 없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천신이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이 결계도 돌파할 수 있다. 애초에 이 결계는 딱히 신성한 뭔가가 아니다.

그냥 마력으로 구성된 평범한 결계 마법. 좀 단단하고 구성이 치밀하기는 하지만 부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마력강화 켜고 전력으로 몇 번 들이받으면 박살 날 걸?

"내가 너를 왜 죽이냐?"

"예?"

"마침 잘 됐네, 따라와."

일급 심판은 금기를 범한 자를 결계 안에 집어넣고, 문밖으로 나온 천신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처벌.

신관들은 결계를 펼치고 나면 자신들의 눈을 가리기에, 천신의 모습도 천벌의 정체도 모르는 채로 그것을 집행한다.

나는 마력을 소진하고 뻗은 대신관의 목덜미를 잡아채, 천신이 있는 문 너머로 질질 끌고 갔다.

"대신관씩이나 되면서, 천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

천계 곳곳에는 천신의 모습을 상상한 이런저런 장식품과 조각상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천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도전자들과 나로서는 웃기는 꼴이란 말이지.

"자, 잠깐! 멈추세요, 감히 천신님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은 지독한 불경!"

너희가 숭배하고 찬양하는 신이 어떤 모습인지, 이 천계가 어떤 장소인지 똑똑히 봐라.

빨간약 먹을 시간이다.

**

결계가 펼쳐지면 천신이 스스로 기어나오게 되어 있지만, 나는 먼저 문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천계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그 천계의 중심지인 이곳은 무척이나 살풍경하다.

천계를 구성하는 구름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지나면, 천천히 드러나는 지저분한 오물이 쌓인 통로.

[천신의 뉨터]

믿기지 않겠지만 이 지저분한 곳이 천신이 거하는 장소가 맞다고,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준다.

하지만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천신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왕을 넘어서는 수준의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으니까.

그리고 천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더러운 통로가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질질 끌려온 대신관과 나는 통로의 끝에서 마침내 천신을 만날 수 있었다.

"자, 저기 있다. 저게 너희가 모시는 신이야."

"무, 무슨..."

"저렇게 생겼을 줄은 몰랐지?"

오물로 오염되어 지저분해진 흰색 깃털, 천족들의 것과 똑 닮은 날개가 여덟 쌍.

날개를 달고 있는 몸뚱이는 온통 깃털로 뒤덮여 있고, 몸뚱이에 붙어 있는 머리의 개수는 셋.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날개가 많고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비둘기 괴물의 형상.

"그리고, 저렇게 사는 생물인 줄도 몰랐을 테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비둘기 괴물의 발밑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지저분하게 파먹힌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 익숙한 얼굴이 있을 것이다.

금기를 범해 일급 천벌을 받은 자들, 인신공양으로 바쳐진 옛 천족과 몇몇 인간들의 시체니까.

천족들이 살던 진짜 천계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다.

남아있는 이곳은 그저 거대한 식인 비둘기의 둥지일 뿐이며, 천신은 천족에게 기생하는 괴물일 뿐.

[천계를 창조한 위대한 신이자,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의 아버지.]

[땅을 걷지 않으며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절대신.]

[위대하신 천신께 경배하라, 모든 것을 바쳐 그를 섬겨라.]

[ALMIGHTY GOD - 천신]

막대한 마력의 압박과 함께, 평소와 조금 다르게 일렁거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지랄하네."

-쿠르릉!

마력강화를 사용해 압박하는 마력을 밀어냈다.

그러자, 희미하게 떠올라 있던 시스템 메시지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나는 진짜 시스템 메시지, 신으로 위장하고 있는 괴물의 진짜 정체.

[구름에 둥지 짓고 살아가는 새에게 찾아온 기묘한 행운이 하늘의 운명을 갈랐으니.]

[너무나 위험한 힘을 얻은 멍청한 짐승은, 게걸스레 신앙을 잡아먹었다.]

[하늘을 버리고 사라져 버린 신이시여, 어찌하여 세상에 이런 것을 낳으셨나이까?]

[HIDDEN BOSS - 신앙에 기생하는 자]

"땅으로 떨궈주지."

마계보다 끔찍한 식인 비둘기의 둥지, 천계는 오늘 내 손에 멸망한다.

123. 실낙원

그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하늘 위에 존재하던 진짜 천계는 이미 옛적에 멸망했다.

하늘 위의 남은 땅은 이제 비둘기 괴물의 둥지뿐, 천족들이 모시는 천신이라는 것도 어느 시점에선가 사라져버렸다.

아니, 애초에 천신이라는 게 원래 존재하기는 했던 건지도 불명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 기원불명의 정신조종 능력을 갖춘 비둘기 괴물이 천신의 자리를 빼앗아 기생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천신교의 교리를 교묘하게 뒤틀어, 천족들을 자신의 둥지에 가두고 먹이를 바치는 종으로 만들었다.

웃기는 것은, 정작 그런 비둘기 괴물 본인의 지성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점이다.

괴악한 능력을 갖췄을 뿐, 그 본질은 그냥 먹고 싸는 괴물에 불과하다. 결국 끝내는 모든 천족을 먹어치울 것이 뻔하다.

모든 탑의 15층 천계는 저 비둘기의 둥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천천히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도전자들이 이런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 마땅히 손쓸 방법이 없다.

커뮤니티의 영향을 배제했을 때, 도전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15층 보스전을 치른 이후다.

15층의 보스가 저 비둘기의 동족으로, 머리가 두 개 달린 하위 버전의 괴물이기 때문이다.

보스전 이후 진실을 깨닫고 천신을 토벌하고 싶어도, 천신의 뉨터로 향하는 문은 부정을 씻어낸 자들에겐 열리지 않는다.

커뮤니티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 도전자들도 마찬가지, 부정을 씻지 않은 상태여야만 천신에게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을 씻기 전의 반 토막 난 스탯으로 히든 보스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

여태껏 히든 보스에게 과감하게 도전했던 이들은 모두 소식이 끊겨 버렸다.

"그, 그럴 리가...이게 천신님의...정체라고...?"

내 간략한 설명을 들은 대신관이 처참한 표정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믿고 따른 신이 저런 괴물딱지였고, 자신들은 고결한 것도 뭣도 아니었다니.

정신적으로도 충격이 클 테고, 이 공간에 넘쳐흐르는 마력에 의한 충격도 클 테지.

"빠져 있어."

나는 빨간약을 먹고 발작 중인 대신관을 밀쳐낸 뒤, 비둘기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은 대신관을 챙겨줄 여유가 없다. 괜히 시작부터 마력강화를 켠 게 아니다.

저 비둘기 괴물은 우스운 꼬락서니와 다르게, 징그러울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도약하자마자, 그 힘의 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번쩍!

시야를 메우는 강렬한 빛, 다음 순간 내 온몸에는 화염이 달라붙어 있었다.

로피엘이 사용하던 성스러운 불꽃이라는 것과 동질의 힘이다.

그럴 테지, 신관들이 사용하는 은총의 근원이 저 녀석이니까.

신관들이 자랑스럽게 달고 있는 여러 쌍의 날개는 마력을 수신하는 안테나 역할.

은총이란 비둘기 괴물의 거대한 마력을 빌려서 사용하는 평범한 마법에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즉, 저 비둘기와 싸운다는 것은 모든 천족과 신관을 하나로 뭉쳐 놓은 것에 맞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 거 나한테 안 통해, 새대가리 새끼야."

좆밥이라는 뜻이다.

**

은총이라는 게 정말로 신성한 힘이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만 거창할 뿐 그 본질이 평범한 마법이라면, 종합 대마법 내성을 지니고 있는 내겐 통하지 않는다.

지금도 내게 들러붙은 화염은 어마어마한 온도를 내고 있지만, 나를 완전히 불태울 만한 위력은 나오지 않았다.

-타닥!

비둘기 괴물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힘차게 도약해 아래턱을 노리며 창을 뻗었다.

깃털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던 비둘기는 자세를 일으키며, 퍼드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역시 결국은 짐승, 반응이 아주 정직하다. 이러면 다음으로 날아오는 공격도 뻔하겠지.

세 개의 대가리 중 하나가 확하고 뻗어나와, 부리로 나를 내려찍으려 한다.

앞쪽으로 미끄러지며 슬라이딩해 그것을 피해내고, 이번에는 도끼를 꺼내 휘둘렀다.

-파박!

비둘기의 날개에 스치며 깃털 몇 개가 날아갔다.

그리고 그 깃털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나 참, 별걸 다 할 줄 아네.

좌측으로 몸을 크게 구르며 피해냈다.

-콰과곽!

땅에 박힌 더러운 깃털은 표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고, 묘한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공격 하나하나에 마력이 담겨 있군. 이런 점에서는 마족들과도 어느 정도 비슷한가.

나도 비슷한 짓을 할 수 있지만, 지능 스탯이 크게 떨어져 있는 지금은 좀 어렵다.

어려울 뿐이지, 못 한다는 건 아니지만.

[투척용 수리검]

인벤토리에서 소모성 투척무기를 몇 개 꺼내 손에 쥐었다.

10층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인데, 쇠구슬에 비해 특별히 좋은 점이 없어서 잘 쓰진 않는다.

연달아 쏘아지는 깃털을 향해, 마력을 담은 그것들을 일제히 집어던졌다.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내 투척술은, 날아드는 깃털을 하나하나 맞춰 떨구는 것도 가능케 한다.

-카강! 카가강!

깃털을 전부 요격해 내며, 다시금 벌어졌던 거리를 좁힌다. 그 때, 두 개의 비둘기 머리가 움직였다.

-■■■■.

벌어진 부리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나왔다.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눈치챘다.

공간을 가득 채운 마력이 물결치며 성질을 변화시킨다. 14층의 마족들도 종종 보여줬던 다중 마법 전개.

화염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했는지, 화염을 제외한 각종 속성 마법이 몰아친다.

뭐, 가장 잘 견디는 속성이 화염일 뿐이지 다른 속성 내성도 딱히 부족하진 않다.

-쾅! 콰광! 콰과광!

마력강화가 제공하는 방호력에 더해, [철벽] 스킬을 발동시키며 그냥 전진한다.

애초에 내성 스킬이 없었어도 별 문제는 없었을 거다.

[철벽] 스킬의 보조, [혼신] 스킬을 통한 방어력 증폭, 마력강화의 추가 방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기 특성, [강철의 혼]의 모든 피해 60% 감소 효과.

속으로 좆밥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저 비둘기 괴물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기본 스펙만 봐도 15층 보스인 두 머리 비둘기의 상위호환 개체.

다양한 속성의 마법 공격과 더불어, 깃털을 이용한 원거리 물리 공격까지 가능한데다 속도도 빠르다.

거기에 시스템 인터페이스마저 흉내 낼 수 있는 정신오염 효과를 상시 전개하고 있다.

좆밥은 커녕 좆같이 센 놈이다. 그런데 스탯 감소 제약까지 붙은 채로 싸워야 한다.

이런 이유로, 커뮤니티에서는 '공략 불가' 라는 판정이 내려지기까지 한 놈.

하지만 도전자라고는 나 혼자뿐인 이 2661번 탑에서 객관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15층 도전자의 평균 수준, 15층 몬스터의 평균, 도전자들의 객관적 평가.

그딴 게 뭐 어쨌다고.

내 주관으로 평가하건대, 이 비둘기 새끼는 좆밥이 맞다.

모든 마법 공격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신속] 스킬을 발동해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이번에는 피할 기회 같은 건 주지 않겠다. 여기는 좁고 지저분한 새둥지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이 비둘기는 내 몇 안 되는 약점인 공중전 강요와 일방적인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적이지만.

그런 놈이 음흉하게 처박혀서 날개를 펼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으니, 다 무슨 소용이랴?

맨날 받아 처먹기만 하느라 날아오를 생각도 안 하는 꼬라지 하고는.

시내 한복판의 닭둘기랑 다를 게 전혀 없잖아.

-콰직!

도약과 함께 펼친 소드 차지로, 비둘기 대가리 하나를 꿰뚫었다.

**

머리를 꿰뚫린 비둘기는 그대로 픽 쓰러졌지만, 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대가리를 장식으로 셋이나 달고 있을리는 없겠지, 하나당 페이즈가 하나씩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잠시 움직이지 않게 된 비둘기 괴물을 내버려두고, 구석에 처박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대신관의 멱살을 쥐었다.

"야, 야, 정신 차려. 너 지금부터 진짜 중요한 일 해야 하거든? 자, 포션 마시고."

"윽, 이거 놓으...지상의 부정한 약물을..."

"저 꼬라지 보고도 아직도 그 소리가 나오냐? 닥치고 그냥 처먹어, 좀!"

힘으로 대신관의 입에 포션병을 쳐넣고, 억지로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킨 후 일으켜 세웠다.

"잘 들어, 천계는 이미 저 비둘기 새끼의 둥지야. 저놈이 죽으면 붕괴해, 그리고 나는 저놈을 꼭 죽일 거고."

"그런데 니들이 가만히 있으면, 천계랑 같이 무너져서 추락사하겠지?"

"바깥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훅 떨어질 텐데, 제대로 날아서 살아남을 놈들이 몇이나 될 거 같냐?"

말하는 사이, 쓰러져 있던 비둘기 괴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2페이즈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천계는 망했어, 니들은 이제 지상에서 살아야 해. 네가 나가서 그걸 설명하라고."

"그, 그런...어찌 그런 가혹한."

"가혹하기는 개뿔, 너희가 지상을 알기는 하냐? 내가 지상 물이 좀 든 천족을 하나 알거든?"

앤젤라를 물들여 타락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떡볶이 튀김 순대에 홀딱 반해서 일탈을 선택하던 앤젤라처럼, 한 번 고삐가 풀리면 그다음은 쉬울 거라는 것을.

온갖 것들을 다 부정하다며 멀리하고 금지해 온 천족은, 사실 자극에 약한 개허접 종족이라는 것을.

"장담한다, 니들 다 지상 내려가고 한 달 안에...인생 절반 손해 보고 살았다고 말할 거야."

2페이즈로 넘어간 비둘기 괴물이 마력을 내뿜으며, 천장과 바닥이 모조리 뒤흔들린다.

나는 바깥을 향해 대신관을 밀어서 날려버리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지상은 살판나겠어."

순수하고 세상 물정 모르면서 자극에 약한 미남미녀 종족이 잔뜩 이주해 올 테니.

124.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비둘기 괴물은 2페이즈에 돌입하자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다.

내 검에 꿰뚫렸던 머리통 하나가 축 처진 채로 덜렁거리는 한편, 몸에서는 여러 장의 날개가 더 돋아났다.

날개만 스무 쌍이 넘으니, 이젠 비둘기가 아니라 그냥 날개로만 이루어진 괴물처럼 보인다.

이 비둘기와 동족이라는 15층 보스의 2페이즈도 대충 이런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던데.

신앙에 기생하는 생태며 이만한 땅을 하늘에 띄워 올리는 힘이며, 대체 뭐 하는 생물인가 싶다.

하지만 가장 어이없는 것은, 역시 저 비둘기가 가진 기상천외한 양의 마력이다.

-쿵!

마력강화를 통해 신체능력을 끌어올리고, 진각을 밟으며 놈에게 전진했다.

선수필승, 사용하는 무기는 가장 손에 익은 검으로 충분하다. 칼날에 마력을 씌우며 앞으로 내지른다.

비둘기는 수십 개나 되는 날개를 펄럭이더니 푸르게 빛나는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스탯이 절반까지 깎여 나갔음에도, 여러 스킬과 마력강화의 보조를 받은 내 일격은 그리 쉽게 막아낼 수 없다.

에르웬이 만들어 준 새까만 검이 방어막을 찔러 부수며 나아갔다.

-콱!

방어막은 관통했으나, 여러 겹으로 겹친 날개를 반쯤 꿰뚫은 것으로 끝이었다.

2페이즈로 넘어가더니 물리 방어력도 증가한 건가. 아니면 방어막의 완충 효과가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에 흘려 넣은 마력으로 [라이트닝 차지]를 발동한다.

거기에 [대전] 스킬을 추가로 사용해, 검 끝에서 강렬한 전광을 터트린다.

-파지지직!

방출된 번개 속성의 마나는 상대를 감전시킴과 동시에 폭발을 일으킨다.

-쾅!

전기 폭발을 정면에서 맞은 비둘기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생각보다 쉽게 공격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자빠졌던 비둘기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섰다. 다시 한번 날개를 활짝 펼치며.

대기 중의 마력이 떨린다. 분명 뭔가 성가신 공격을 할 셈이다.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이 정도 거리를 좁히고 다시 일격을 넣는 건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신속]

순간적으로 민첩 스탯을 증폭시키고, 동굴을 단숨에 가로질러 한 번 더 일격을 뻗었다.

-쾅!

필살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위력이 나왔지만, 이번 공격은 비둘기가 펼친 방어막에 막히고 말았다.

조금 전보다 방어막의 구성이 더 치밀하다. 짐승 수준의 지성을 갖고 있다더니, 믿기지 않는 학습속도다.

그래도 괜찮다. 일격으로 뚫리지 않으면 연격으로 전환하면 그만.

"인벤토리."

장검과 장창, 도끼와 망치, 곤봉과 단검, 각기 다른 무기를 쏟아내며 쉴 새 없이 공격을 이어나간다.

그에 맞춰서 계속해서 생성되는 방어막과, 방어막이 뚫린 자리를 메꾸는 여러 겹의 날개.

계속해서 두들겨도 도통 유효타를 입히기가 힘들다. 오히려 점점 더 방어막이 단단해지는 느낌까지 든다.

"후우...썅, 이거 왜 이렇게..."

고작 수십 번 방어막을 두들겼을 뿐인데도 숨이 턱 끝까지 찬다. 역시 점점 더 단단해지는...아니, 잠깐만.

이런 일로 내가 숨이 가빠질 리가 없는데?

**

들고 있는 무기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지친 것과는 별개로 공격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방어막이 점점 더 단단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상태창!"

위화감을 느끼고, 나는 재빨리 상태창을 켜 스탯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진혁 Lv.69 (전사)

HP : 1300/1300

MP : 780/780

근력 : 43 (100+10)(!)

민첩 : 43 (95+11)(!)

내구 : 48 (99+15)(!)

지능 : 42 (90+12)(!)

15층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스탯이 더 낮아져 있다. 거의 40레벨 수준으로.

그래, 그러고 보니 천계에 펼쳐져 있는 제약 자체가 저 비둘기놈의 힘이었지. 그걸 더 강화한 건가.

상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마력을 최대한 멀리 퍼트린다. 주변을 뒤덮고 있는 마력의 밀도 탓에 감지가 쉽지 않다.

힘을 약화시키는 모종의 결계 같은 게 작용하고 있는 건가. 심지어 점점 그 밀도가 짙어지고 있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네.

"범위를 좁혔군."

제약이 걸리는 범위를 천계 전체에서 급격하게 좁히는 것으로, 제약의 정도를 강화한 거다.

그렇다면 좁혀진 범위 바깥으로 나가면 제약도 당연히 약해질 터.

이 스탯으로 그냥 맞서기에는 너무 불리하다. 나는 재빨리 뒤돌아 동굴 바깥으로 향했다.

-펄럭!

그러자, 장식인가 싶었던 날개를 퍼덕이며 어마어마한 속도를 낸 비둘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새끼 봐라."

내가 제약 범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셈인가. 여기서 말려 죽이겠다 이거지?

좋아, 어디 한번 죽어 보자.

인벤토리에서 어떤 검 하나를 꺼내, 마력을 가득 담은 뒤 지면에 깊숙히 박아넣었다.

그러자 비둘기는 날개를 펼치고 마법을 사용해, 광선 같은 것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역시 이놈은 새대가리치고 지능이 높다.

지면에 검을 박아넣은 행위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공격해 온 거다.

하지만 역시 새대가리군.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무작정 공격만 한다고 다가 아니거든.

-후웅!

나는 움직이기 시작한 비둘기를 두고, 놈이 몸으로 막고 있던 출구 방향으로 검을 집어 던졌다.

이번에 집어 던진 검은 그냥 검이 아니라, 화려하게 장식된 마검...이었던 것.

나한테도 그리 많지 않은 상급 마석을 끼운 칼레온을 출구로 던져넣고, [검령 각성] 발동.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 방향으로 뛰어! 개짓거리 하면 또 죽여버릴 거니까!"

"뭐, 뭐라...? 크윽, 몸이 천근 같군!"

"범위를 벗어나면 힘이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괜히 싸울 생각 말고 멀리 달려!"

그동안 몇 번이나 죽인 보람이 있는지, 검령은 이번에는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저놈한테 자유를 주려는 건 아니다. 칼레온의 본체인 검에 마력으로 마킹을 해 뒀다.

그 반응으로 이 결계의 작용 범위를 대충 알 수 있을 거다.

저 개복치가 뒈지지 않고 범위 밖으로 나갈 때의 이야기지만, 상급 마석을 썼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서진혁 Lv.69 (전사)

HP : 1300/1300

MP : 780/780

근력 : 42 (100+10)(!)

민첩 : 42 (95+11)(!)

내구 : 47 (99+15)(!)

지능 : 41 (90+12)(!)

문제는 안 그래도 처참한 수준까지 떨어진 내 스탯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건데.

순수 스탯만 보면 1층 클리어 당시와 비슷한 수준, 물론 실질 전투력은 그때랑은 비교가 안 된다.

숨이 턱턱 막히는군. 그래도 뭐, 못 버틸 정도는 아니겠지.

도박 한번 해 보자.

**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깃털 세례가 미친 듯이 쏘아진다.

처음에는 투척으로 쉽게 맞받아칠 수 있었던 깃털이지만, 이젠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치명적이게 느껴진다.

이런 씨발 양심이라고는 없는 비둘기 대가리 새끼,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콰과과곽!

온 몸을 내던지듯 굴러서 간신히 깃털을 피해내고, 조금 전에 다쳤던 다리를 살폈다.

놈의 부리 공격에 당했던 다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 있었다.

마력강화가 아니었다면 다리가 잘려나갔을 거다. [초재생]이 없었으면 걷지도 못했을 거고.

2페이즈로 넘어왔지만, 비둘기의 공격 능력은 1페이즈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문제는 내 스탯이 버러지 수준으로 깎였다는 점, 비둘기의 공격 하나하나가 즉사기에 가깝게 변하고 말았다.

[강철의 혼]을 비롯한 각종 방어력 증폭 수단이 없었다면, 이미 마법 공격에 맞고 가루가 됐을 거다.

땅에 박힌 깃털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마법 공격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는데, 저 깃털만큼은 막을 수가 없다. 아마 맞으면 확실하게 죽는다.

그래도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다.

즉사기 수준의 공격을 난사하는 말도 안 되는 적이지만, 오랜만에 위기를 맞이한 내 집중력은 어마어마하게 치솟아 있다.

아슬아슬한 간극을 유지하며 공격을 피하고, 아슬아슬하게 스킬을 사용해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역시 나는 위기 앞에서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지난 일주일간의 단련보다, 지금 몇 분간 성장한 것이 더 크다. 당장 마력강화만 해도 그렇다.

한 번 발동한 마력강화를, 지능 스탯마저 떨어진 상황에 이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을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미친 소리 같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급성장의 쾌감인지.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검령을 통해 결계의 범위도 파악이 끝났고- 곧 싸움은 끝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심호흡하고 있던 순간, 돌연 머릿속에 전음이 울려 퍼졌다.

- 너...졌다...나, 이겼다. 너 내 먹이다.

"뭐여 씨벌."

지금 저 새대가리 새끼가 말한 건가?

짐승 수준의 지능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그러기는커녕 말까지 하네?

근데 조류 새끼가 누구보고 먹이래?

비둘기 대가리를 달고 있으면 얌전히 옥수수나 쪼아먹을 것이지.

- 나...너보다 강하다, 그러니까 너, 내 먹이다. 하늘에 있는 건 다 내 거다. 나 천신이다.

"얼씨구, 비둘기 새끼가 진짜 지가 신인 줄 아네."

- 나 신 맞다...신으로 될 수 있다고 했다...우리 거래했다...

"거래?"

비둘기는 뭐라 뭐라 계속해서 떠들었으나, 어눌한 어투와 유아 같은 말투 탓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 새대가리랑 대화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이걸로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 너 잡아먹을 거다...너 약해졌다, 너 이제 죽는다...

비둘기 괴물은 결계를 한계까지 좁히고, 이제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선언했지만.

이긴 건 나다. 나는 마력을 가득 담아 땅바닥 깊숙이 박아넣었던 검- [피를 먹는 나선검]을 향해 마력을 날렸다.

미리 연결해 둔 마력의 패스를 통해 [대전] 스킬을 사용해, 번개 속성의 마나를 전송.

혼자 회전하여 천계의 밑바닥까지 구멍을 뚫은 나선검은, 그것을 신호로 머금고 있던 마력을 단번에 토해낸다.

-꽈과광!!

한계 이상까지 머금었던 마력이 쏟아지며 일어나는 대폭발이, 그대로 붕괴를 낳는다.

-쿠구궁!

지반이 무너지며 나선검이 뚫었던 긴 구멍이 거대한 싱크홀로 변해 나와 비둘기를 집어삼켰다.

구멍은 천계의 바닥까지 그대로 뚫려 있다. 즉, 이 아래로 떨어지면 그대로 지상.

-펄럭!

비둘기 괴물은 날개를 퍼덕여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닭둘기 아니랄까 봐 반응이 무척 느렸다.

제약을 강화하기 위해 한계까지 좁혔던 결계의 범위는, 이렇게 구름 밑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벗어났다.

고로 내 스탯은 원래대로 복구되었고- 공중에서 비둘기 새끼의 날개를 자르는 건 일도 아니게 됐다.

-촤악!

소드 차지를 사용해 놈에게 달라붙은 뒤, 날개를 죄다 뜯어내 버렸다.

"벌써 까먹었냐, 새대가리 새끼야? 땅으로 떨궈 준다니까."

천계는 고도 몇천 미터에 있었을까. 뭐, 최소한 구름보다 높이 있던 건 확실하다.

[철벽]

[혼신]

[불굴]

마력강화를 포함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버프를 사용하고.

비둘기의 몸에서 돋아나는 날개를 계속해서 뜯어가며, 그대로 지면을 향해 자유낙하했다.

나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안 죽을 자신 있는데, 너는 어떨까.

-꽈앙!

125. 관측

자유낙하로 가속하는 속도에는 결국 한계가 있다던가.

맨몸으로 음속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내가, 고작 자유낙하의 충격 정도로 뻗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둘기를 붙잡고 지면을 향해 추락하던 도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부딪히며 그만 생각이 바뀌었다.

-콰광!

"끄억!"

그리고 잠시 기억이 끊겼다. 9층의 뱀용에게 처박혔을 때랑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내구가 올랐음에도 이런 충격이라니, 대체 뭐에 부딪힌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보니, 낙하의 충격으로 만들어진 자리에 달라붙은 핏덩이가 보였다.

어우, 완전히 곤죽이 다 됐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꼬락서니지만, 군데군데 붙어 있는 깃털과 흩어진 조각을 보면 비둘기가 틀림없겠지.

인벤토리와 상태창을 열어 보니 처치 보상도 제대로 들어온 듯하고, 제대로 죽은 모양이다.

떨어진 지 조금 시간이 지난 모양, 아마 지금쯤이면 천계도 한창 붕괴 중이거나- 이미 다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내가 문제다. 당장 나부터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여기가 어디래."

인터페이스에는 맵 이름도 제대로 뜨지 않고, 지도에도 [???] 라고만 표시되고 있다.

15층의 무대인 천계를 완전히 벗어난 탓이겠지, 주변을 둘러봐도 인간의 흔적 같은 건 전혀 없다.

아, 혹시 내가 추락 도중에 부딪혔던 벽이 그건가?

각 층 지역의 맨 끝자락에 존재한다는 끝의 장벽.

파괴 불가 오브젝트 판정이 붙은 투명한 막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방금 부딪히면서 파괴된 거 아닌가?

각 층마다 맵의 넓이는 천차만별이라고 들었는데, 15층 천계는 정말 천계까지만 무대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천신을 처치해 천족들을 땅으로 돌려보낸다는 내 선택은 시스템이 상정하지 못한 길이었던 건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쯤 천족 NPC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왔을까? 자아는 유지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가 궁금하다. 나는 제대로 그들을 해방한 걸까.

아, 근데 이러면 15층 미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보니까, 미궁 지역도 천계에 포함된 건데- 천계가 무너졌으면 그것도 없어진 거 아닌가.

그러면 클리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전이문은 어떻게 되는 거고.

설마 여기서 영영 갇혀 지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거 남 걱정할 때가 아니네.

일단 어디로든 움직여서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대충 방향 하나 골라서 쭉 가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아 맞다, 칼레온."

생각해보니까, 검령이 천족들이랑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응?"

칼레온에게 마킹해 둔 마력을 탐색하려던 순간,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길래 마력이 아예 감지가 안 되는 거지. 대체 얼마나 떨어진 거야.

알고 보니, 칼레온은 무슨 판정이 된 건지 내 인벤토리에 혼자 돌아와 있었다.

칼레온의 마력을 쫓아서 이동할 셈이었는데, 곤란하게 됐네.

그리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중, 돌연 눈앞이 깜깜해졌다.

- 아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어?

[상위 존재 : GM ■■■가 당신의 시야를 차단합니다.]

이게 뭐야, 상위 존재? 시야 차단?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싸늘한 감각이 몸을 감싼다.

"씨, 씨발!"

나는 거의 발작하듯 마력강화를 전개했다. 전신의 마력을 모조리 밖으로 토해낼 기세로.

하지만 아무리 마력을 일으켜 저항해도 시야는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제대로 저항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숨쉬는 법조차 잊고 시야를 가린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게 저항하던 중, 아주 살짝- 살짝 무언가 보였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5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다음 순간, 어둡게 물들었던 시야가 한순간에 되돌아왔다.

펼쳐진 것은 옅게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가, 16층의 초반 부분이었다.

[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 : '천신의 축복을 받은 치마'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영광의 축복', '경험치'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후의 일격 보상 : '액티브 스킬 - 정화'를 획득하셨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15층 보스 클리어 판정과 함께, 시야를 가리던 어둠 너머를 엿보았던 내 눈은.

"크, 아악."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눈물을 쏟아내었다.

**

생각하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칼레온이 혼자 인벤토리로 돌아온 경위, 15층이 멋대로 클리어 된 이유, 획득한 여러 보상들.

파괴 불가 판정인 끝의 장벽이 파괴되었던 일, 그리고 상위 존재라는 알 수 없는 것의 개입.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내게 찾아온 고통은 지옥을 연상시켰다.

"아아아아악!!"

눈이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뇌를 찌른다. 그리고 머리가 흐물흐물하게 녹아 바깥으로 흐른다.

뭐지, 이게 대체 뭐지, 이게 대체 무슨,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으허억, 커헉, 끄아악...!"

치솟는 구역감에 무언가를 한 바가지 토해냈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아니라,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씨발, 눈이, 얼굴이 통째로 축축하다. 뱉어낸 것 외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

눈에서, 귀에서, 코에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피가 모두 용암처럼 느껴진다. 진짜 용암도 그냥 버틸 수 있는데, 뜨겁다.

"씨바, 씨바악! 개 같은, 아악, 끄으, 그그극!"

바닥에서 마구잡이로 뒹굴며 손에 잡히는 것들을 전부 움켜쥐었다. 모래, 돌, 그리고 내 몸뚱이.

-뿌드득!

고통을 견디기 위해 부여잡은 어깨가 내 악력에 의해 일그러지며 또 피를 흘려대었다.

뇌가, 누가 내 뇌에다가 끓는 물을 붓고 휘젓는 느낌이다! 그게 씨발 무슨 느낌인지 알 리가 없는데도!

인벤토리를 마구잡이로 뒤진다. 도움이 될 만한 포션이란 포션은 전부 꺼낸다.

일일히 병을 따고 마시는 것도 사치다. 나는 포션을 병째로 입 안에 넣고 그냥 씹어 삼켰다.

-으적, 으적!

하지만 어떤 포션도 내 상태를 낫게 할 수 없었다. 스킬, 스킬은 뭔가 없을까.

조금 전에 얻었던 정화 스킬이 눈에 들어왔다. 사용법도 효과도 모르는 채로 일단 사용했다.

하지만 아무 효과가, 아니, 이상하다.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MP : 0/790

MP 수치가 조금도 남지 않고 동나 있었다. 대체 뭘 했다고 마력이 완전히 바닥난 거지?

기억나는 건 하나다. 시야 차단에서 벗어나려고 발작적으로 마력강화를 써서 날뛴 것, 고작 그거 하나.

아주 잠깐 차단된 시야 너머를 엿본 것 하나만으로, 마력이 완전히 소진되고 말았다.

젠장, 씨발, 이게 말이 돼? 뭔가, 뭔가 다른 방법은.

-툭.

무작정 인벤토리를 뒤지며 아이템을 꺼내던 중, 단검 한 자루가 눈앞에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고통에서 비롯한 발작적인 충동. 나는 대번에 그것을 쥐었다. 죽으면 끝난다.

죽으면 고통도 끝난다! 이 간단한 방법을 내가 왜 모르고 있었는지!

"흐, 흐하, 흐흐흐흐하하!"

기뻐서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나는 단검을 움켜쥐고, 대번에 그것을 내 목에 찔러넣-

"좆까 이 씨발럼아아아아아악!!"

-지 않고, 저 멀리 집어던져 버렸다.

**

단검을 집어던지고 텅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마구 때렸다.

"아아악! 썅!"

내 얼굴을 때리고, 지면도 때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부수면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뇌가 곤죽이 되는 고통이 뭐 별거라고, 내가 왜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데?

나는 이 빌어처먹을 탑에게 받아내야 할 대가가 있단 말이다.

쭉쭉빵빵한 다크 엘프랑 침대에서 뒹굴어야 한단 말이다.

나를, 엄마를, 엘레노어를 괴롭게 한 값을 치르게 해야 한단 말이다.

"후우…후우…후우우...!"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심호흡했다. 시야 너머에 뭔가 커다란 형체가 들어왔다.

근육이 빵빵한 소머리 괴물, 16층의 주요 몬스터 중 하나인 [미노타우로스 워리어]다.

숫자가 꽤 많다. 내가 발버둥치며 지르는 소리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것 같다.

마침 잘 됐다.

"허억, 후우…좋아, 좋다고."

이대로 가만히 고통에 몸부림치고만 있으면 죽는다.

직관적인 위기감이 신체에 활력을 돌게 만든다. 역시 나는 이런 게 잘 맞아.

머리를 둘로 쪼개고 용암을 퍼붓는 것 같은 고통도, 흘러넘치는 피눈물도, 무엇도 멈추지 않았지만.

적을 눈앞에 두고, 나는 침착함을 되찾고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아아아아아!!"

소리를 내지르며 먼저 몬스터들 사이로 뛰어들어간다.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며 싸운다.

싸우면 싸울수록 고통은 잊혀간다. 활력과 침착함을 되찾아가며, 적을 베어넘긴다.

시야에 드문드문 푸른 알림창이 떠올랐으나, 신경 쓰지 않고 적만을 바라보며 벤다.

그렇게 어느새 미노타우로스 수십 마리를 발밑에 눕혔을 때쯤, 정신이 나갈 것만 같던 고통은 가라앉았고.

[정신 오염 내성 Lv. 33을 획득하셨습니다.]

내 상태창에는 어처구니없는 레벨의 새로운 내성 스킬이 등록되어 있었다.

126. 시련의 탑 16층

갑옷을 잠깐 벗어두고, 깨끗한 수건 하나를 꺼내서 목덜미를 닦았다.

식은땀이랑 피가 뒤섞여서 아주 지저분하다. 하필 숙소를 구하기 힘든 16층에서 이렇게 될 줄이야.

뭐라 형언하기 힘든 고통은 이제 완전히 잦아들었고, 소진되었던 MP도 다시 차올랐다. 다른 컨디션도 모두 정상.

젠장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시작은 비둘기 괴물과 함께 사이좋게 맵을 뚫고 떨어진 이후, 돌연 나타난 이상한 메시지였다.

'[상위 존재 : GM ■■■가 당신의 시야를 차단합니다.]'

상위 존재, GM이 나의 시야를 차단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주변이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었다.

그 순간 나는 정체 모를 공포를 느끼고, 발작하듯 시야를 가리는 어둠에 저항했다.

죽음의 위기를 넘나든 적은 이제껏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무언가에 공포를 느껴본 건 이번이 두 번째.

고블린 로드에게 쥐어터지고 질질 짰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내가 공포를 느낀 상대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아예 없지는 않다.

GM이라는 존재에게 눈이 가려진 순간 공포를 느꼈으니, 당연히 상위 존재라는 그 GM에게 공포를 느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있는지도 몰랐던 GM이라는 게 왜 내 눈을 가렸는가다.

커뮤니티의 어떤 글을 뒤져봐도, GM이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이 시련의 탑의 주인 같은 존재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전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존재가 나한테 직접 간섭했어야만 하는 이유는 뭐가 있을까.

시스템이 만든 장벽을 뚫고, 맵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에?

거기에, GM이 내게 간섭한 부분은 시야를 가린 것 하나만이 아니다. 나를 이곳에 보냈다는 점.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5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미궁 지역이 혼자 클리어 처리가 되고, 전이문을 쓰지도 않았는데 16층으로 갑작스레 옮겨졌다.

클리어 처리 자체는 미궁이 붕괴한 탓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16층으로 바로 전송됐단 말인가.

기본적인 정보가 너무 적어서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내가 아직 한참 약하다는 점.

고작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에 저항하겠답시고 발버둥쳤을 뿐인데, 가진 마력을 모두 써 버렸다.

그랬는데도 결국 제대로 저항할 수 있었던 건 1초도 안 되는 잠깐뿐이었고.

그 잠깐 목격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잠깐이지만 무너져 내렸다.

상위 존재, 말 그대로 격의 차이라는 것 때문일까?

그저 잠깐 눈으로 봤을 뿐인데 이 꼴이라니, 한심하다.

나를 미치게 만든 게 눈을 가린 GM인지, 아니면 맵 바깥의 다른 무언가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게 탑의 시스템과 어느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즉,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만 하는 상대.

그런데 내 수준으로는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아직 멀었다 이거지?"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

16층의 배경은 바다 한 가운데에 고립된 거대한 섬이다.

오랜만에 나오는 미궁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순 전투 위주의 층으로, 주요 몬스터는 미노타우로스.

1층의 미궁 지역에서 다양한 고블린이 나왔듯, 16층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미노타우로스가 나온다.

고블린 층 보스가 고블린 로드인 것처럼, 당연히 이곳의 보스도 미노타우로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곳의 보스는 특정한 기믹을 수행하는 것으로, 자체 하드 모드로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히든 보스가 없는 대신, 일반 보스에 히든 페이즈가 있는 느낌.

히든 페이즈에 진입한 보스의 강함은 으레 그렇듯 층수에 맞지 않는 강함을 갖고 있지만, 딱히 엄청난 것도 아니다.

아마 지금 당장 싸워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다.

고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스와 몬스터의 강함이 아닌, 이 16층의 또 다른 특징.

NPC나 서브 퀘스트가 아예 없다는 것, 자율 훈련에 매진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거다.

[검령 각성]

칼레온에 하급 마법석을 끼우고, 검령을 소환했다.

"이번엔 어디냐,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소환되자마자 위험하게 검을 붕붕 휘둘러 대는 검령.

나는 쓸데없이 흥분한 검령에게 곧바로 진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깡!

"크악!"

미스릴 완드에 정수리를 강타당한 검령은 곧바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이런 모습만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이 녀석의 검술은 한번 얼핏 봤을 뿐인데도 분명 대단했다.

추측이지만, 검 한 자루로 마계를 평정한 전적이 있다는 말도 아마 허세가 아니었을 거다.

"야, 나 검술 좀 가르쳐주라."

다크엘프식 검술을 넘어 한 번 더 스텝 업을 할 차례가 됐다.

"흥,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이제껏 일회용 고기방패로 써 온 탓인지, 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내 말에 검령은 어마어마하게 뻗댔다.

스승 대접을 하겠다고 맹세하라느니, 존칭을 쓰고 큰절을 올리라느니, 아주 개소리를 다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잠깐 진중한 설득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내 빈약한 말재주로 이 꼰대 검령을 설득하기란 매우 어려웠지만, 다행히 미스릴 완드는 답을 알고 있었다.

-깡!

"크악!"

-깡!

"끄억!"

-깡!

"썩을!"

참고로 하급 마법석으로 소환한 검령의 맷집은 딱 미스릴 완드 세 대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래 이놈아, 어디 계속해 봐라! 몇백 번을 두드려도 나를 꺾을 수는 없을 거다!"

검령의 멘탈과 자존심은 그보다 훨씬 단단했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몇 백번을 두드려도 꺾을 수 없을 거라고? 이놈은 내가 가진 마법석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지?

마법석 한 개에 세 대, 마법석 개수는 3천 개 언저리, 대충 만 대 가까이 두드릴 수 있는데 말이야.

"그만, 그만해라! 이 썩을 놈아, 가르쳐 주마!"

검령 칼레온, 항복.

**

나는 우선 칼레온에게 오러와 검기를 다룰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물론이다, 나는 검 하나로 마계를 평정한 검사지. 인간의 몸으로 마족을 베려면 오러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역시 그때 내가 본 건 오러가 맞았던 모양이다. 전사의 삼신기중 하나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어떻게 오러도 다룰 줄 모르면서 마왕을 쓰러트린 거지?"

"그깟 놈 하나 잡는데 뭐 오러씩이나 필요해?"

"흠, 마족 놈들이 영 허접하긴 하지. 무기술에 능한 놈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듣자하니 칼레온은 회색 마왕의 저주에 당해 검에 처박힌 게 아니라, 말년에 스스로 빙의하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검술의 극에 도달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것이 아쉬워, 생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다가 그렇게 됐다나.

단순히 연명하는 것만이라면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이왕 검사인 만큼 저주를 받더라도 검이 되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 탓에 회색 마왕의 저주에 그대로 침식당하고 사악한 에고 소드로 전락했지만, 후회는 딱히 없었다고.

"하지만 네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 줄 알았다면 그만뒀을 거다."

"그러게 누가 그따위로 거들먹거리래? 검술 하나 알려주는 게 뭐 별거라고."

"이놈이, 내 검술을 배우고 싶어 애걸복걸하던 이들이 몇이나 있었던 줄 아느냐!"

칼레온은 시끄럽게 외치며 버럭댔지만, 내가 미스릴 완드를 꺼내 들어 올리자 다시 얌전해졌다.

"제기랄, 내가 생전이었으면...최상급 마법석만 있었다면...크흑."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검술 훈련. 칼레온은 우선 내 실력을 먼저 보자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실력을 뭐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했는데, 칼레온은 자신을 들고 한번 기술을 펼쳐 보라고 했다.

거창한 걸 보여줄 필요 없이, 기본적인 동작이나 움직임만 봐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나.

다만 오러를 가르쳐 달라고 한 만큼 마력의 운용 능력도 본다고 했으니, 마력은 꼭 사용하라고 했다.

-쿠르릉!

"오오."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칼레온을 쥐자, 검령이 감탄했다.

"아직 젊은데 마력강화를 할 수 있군,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이 몸에게 배울 자격이 있지."

나는 검령의 감탄을 뒤로하고 적당히 검술을 펼쳐 보였다. 다크엘프 검술의 기초 동작들 위주로.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놈의 검령 새끼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는 것.

"음, 흐음, 아앗, 크흐, 후음..."

검을 휘두를 때마다 뭔가 느껴진다는 듯 추임새를 넣어대서, 자꾸 산통을 깬다.

그뿐만이랴, 검에 마력을 주입할 때는 아주 지랄을 떤다.

"그아앗! 이 마력은 너무 크구나앗!"

"젠장, 용사! 이 마력은 대체 뭐냐!"

"검신이, 검신이 달아오르고 있잖아!"

진지하게 이 새끼가 나를 방해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생각해봐야 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검령의 개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대강의 기술을 펼쳐 본 후, 검령이 내린 평가는.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너 뭐하는 인간이냐?"

칭찬인지 욕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127. 마력 운용 개론

검령은 내게 이 기술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검에 마력을 담는 요령이며 마력강화를 알려준 스승 정도는 있겠지, 어디서 배운 거냐?"

나는 내 견장에 붙어 있는 다크엘프 수색대의 마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나한테 제대로 검술을 가르쳐 준 것은 리즈멜이 처음이었다.

마력 운용의 기본은 엘레노어에게서 배웠고.

하지만 검에 마력을 담는 기술이나, 마력강화는 거의 혼자서 터득했다.

"스승은 따로 없어, 그냥 마력을 다루는 기본 요령만 배우고 나머지는 감으로 터득했지."

"마력강화를 그냥 감으로 깨우쳤다고? 터득하기까지 몇 년 정도 걸렸지?"

"정확히 얼마나 걸렸는지는 안 세봐서 모르겠는데...아마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였을걸."

7층 에픽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펜던트를 받은 이후부터, 9층에서 마력강화를 각성하기까지 대충 그 정도였다.

탑 안에서 지내다 보면 날짜감각이 이상해지는 일이 많아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처음 마력감응을 깨우친 때부터 연습한 걸로 치고 날짜를 넉넉하게 계산해도, 대충 서너 달 정도였을 거다.

"그렇게 말하니 더욱 믿기지 않는군, 네놈 사실 인간을 닮은 다른 종족인 건 아니냐?"

"인간 맞아."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뭔가 축복이라도 받았나,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는데."

시련의 탑이라는 특수한 성장 환경 때문일 거라 말할까 했지만, 생각해보니 마력강화에 있어서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내 클래스는 여전히 노말 전사 클래스고, 마법과 관련해서는 시스템의 그 어떤 보정도 받은 적이 없다.

보정이라고 해 봤자- 마력강화를 운용하기 위한 베이스인 체내 마력량, 그리고 신체능력에 수혜를 받은 것 정도일까.

"뭐, 좀 특이한 환경에서 성장하긴 했거든. 마력강화도 완전 자력으로 깨우친 건 아니고."

나는 다크엘프의 보물인 펜던트를 통해 외부의 힘으로 마력강화를 먼저 다뤄봤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안 되는 수준까지는 아니로군...여전히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긴 하지만."

중얼거리는 검령의 표정이 뭔가 미묘했다. 나를 띠껍게 생각하던 눈빛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큭큭...검이 되어 연명한 보람이 있구나. 이토록 빛나는 검사의 오성을 또 한 번 보게 될 줄이야."

아주 만족스러운 눈빛이다. 아무래도 검령의 눈에는 내가 어마어마한 검사의 재목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나한테 운동신경이나 싸움 재능 같은 건 전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쨌든, 검령이 제대로 가르칠 마음이 들었다면 나도 환영이다.

근데, 그래서 내 기술이 뭐 어쨌다는 건데.

잘한다는거야, 못한다는 거야?

**

잠시 후, 검령은 내 마력 운용 방식이 너무나 과격하다고 지적했다.

"네게 스승이 있었다면 그놈을 잡아다가 목을 쳐버리라고 말했을 거다. 이딴 자살 기술을 알려준 놈은 그래야 마땅하지."

"뭐야, 나도 내 방식이 좀 어설프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로 심각해?"

"심각하다마다, 그렇게 정제되지 않은 마력을 무식하게 쑤셔 박아대면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불구가 되기 마련이다."

검령은 그렇게 말하며, 생물의 몸 안에 뻗어있는 마력 회로란 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세한 용어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적인 부분은 다크엘프 마을에서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체내 마력회로를 통해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방법론으로 들어가자, 한 가지 부분이 크게 달랐다.

"요컨대, 인간의 몸으로 마력강화를 펼치려면 그에 걸맞게 마력을 가공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검령은 내가 펜던트를 통해 사용하던 마력강화를 그대로 답습하려고 한 게 흠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것도 마력강화는 마력강화지만, 외부에 충전된 마력을 이용한다는 점 때문에 생략된 공정 몇 단계가 있었을 거라고.

설명을 듣고 이해할수록, 왜 검령이 내 마력강화를 보고 그렇게 어이없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마력강화는 거푸집에 쇳물을 흘려 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체내에서 생산된 마력과 외부에서 흡수한 마력을 모두 한데 녹여 쇳물로 만들고, 그것을 회로에 흘려 넣는 것.

하지만 나는 마력을 정제하는 과정, 즉 쇳덩이를 녹여서 쇳물로 만드는 부분을 생략하고 있었던 거다.

폐금속이나 녹슨 볼트와 너트 같은 걸 무작정 거푸집에 쑤셔 넣고, 힘으로 찍어 눌러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보통 그랬다가는 전신의 마력회로가 파열되고 몸이 산산조각나서 죽었을 거다."

"네 마력강화는 사용한 후에 반드시 몸이 찢어지는 듯한 강한 고통이 찾아온다고 했었지?"

"정확하다. 그건 네 몸이 찢어지고 있었던 거다. 솔직히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군."

검령은 애시당초 이따위 방식으로 마력강화를 할 수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안 쓰는 검이 있으면 하나만 빌려다오, 아무거나 좋으니."

나는 그렇게 말하는 검령에게 [강철 직검] 한 자루를 내주었다. 검령은 그걸 들고 잠시 눈을 감았다.

-절그럭, 절그럭!

검령이 손에 든 직검에 마력이 주입되자, 날밑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며 소음이 일었다.

몇 초 뒤, 직검은 더욱 격하게 요동치며 용광로에 들어간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몇 초 뒤.

-퍼엉!

검이 폭발하며, 수십 개의 쇳조각들이 주변에 흩뿌려졌다.

그 폭발음이며 흩뿌려지는 쇳조각의 모습이 무슨 세열 수류탄이라도 던진 것 같았다.

"이게 네가 하던 짓이다. 무기건 몸뚱이건 진작에 산산조각이 나서 흩뿌려졌어야 했지."

나도 마력감지를 곤두세우고 검령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느껴지는구만.

[마력 지배 Lv.3]

이 스킬이 얼마나 사기적인 거였는지.

**

내가 이제까지 정제하지 않은 마력으로 마력강화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스킬 덕분이었다.

[마력 지배], 마력 감응 계열의 최상위 패시브 스킬로, 마법사의 삼신기 중 하나.

마력의 입자 하나하나를 통제하고 다룰 수 있는 초월적인 지배력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나 참, 어이가 없구나. 너무 뛰어난 탓에 오히려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니. 이건 천재인지 바보인지."

"시끄러워, 나도 알고 나니까 쪽팔리잖아."

"뭐, 그 정도쯤은 되어야 나를 각성시킨 용사답지만...이제부터는 내가 가르쳐 주는 방법대로 해 봐라."

검령은 그렇게 말하며 체내의 마력을 정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중요한 부분이긴 해도 습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력 지배] 덕분에 마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게 나다. 방법을 듣기만 해도 금방 따라 할 수 있었다.

-쿠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마력강화가 발동하고, 몸에 힘이 깃들었다.

강화의 폭 자체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

MP의 소모량도 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 딱 하나 연비가 나쁜 게 문제였던 스킬의 단점이 깨끗하게 해결됐다.

그리고, 이 마력의 정제는 다른 스킬의 운용에도 바로 접목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볍게 뭔가 해 볼까.

-파지직! 파지지직!

"뭐, 뭐냐 그건."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함께 사용해 보았다. 마력강화의 빛이 그대로 번개가 되어 주변에 튄다.

"잠깐만, 어디 뭐 없나."

나는 그 상태로 잠시 검령을 내버려둔 채, 감지를 펼쳐 근처의 미노타우로스 워리어 하나를 포착했다.

바로 [신속] 스킬을 사용해 접근했다. 나를 확인하자 곧바로 도끼를 휘두르는 미노타우로스.

검이 아닌 방패를 꺼내고, [라이트닝 차지]의 효과를 부여해 도끼를 가볍게 막아 보았다.

-파지지직!

"무오오오!"

내 몸과 방패에 흐르는 전기가 놈의 도끼를 타고 흘러가 신체를 통과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그대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픽 쓰러져 버렸다.

죽은 건 아니지만, 제대로 감전됐다. 그냥 방패로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허, 이거 대박이네."

쓰러진 미노타우로스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도 내달리는 전격.

-파지직! 파지지직!

흘러들어간 전격에 의해 미노타우로스는 몇 초간 몸을 경련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늘어진 미노타우로스의 시체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빛으로 변해 천천히 사라졌다.

그냥 손만 대고 잠깐 지졌을 뿐인데, 이 커다란 놈이 그냥 감전사하다니.

-파지직!

게다가 마력강화와 함께 몸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전격 일부를 조종할 수 있기도 하다.

조금만 더 연마하면 원거리에 전격을 쏘아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3층에서 만났던 전기 도마뱀 녀석이 문득 우스워지는걸.

나는 미노타우로스를 처리하고 다시 검령이 있던 장소로 되돌아왔다. 이 녀석, 존나 물건이다.

"야, 다른 건 뭐 더 없냐? 내가 모르는 요령 같은 거, 기초부터 싹 알려줘."

쓸데없이 장식만 달린 불편한 검, 전용 옵션은 일회용 고기방패 소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니까 내가 히든 보스 탐색을 못 그만두지. 이거 또 간만에 폭풍 성장할 수 있겠는걸.

"훗, 이제야 이 칼레온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은 것 같군?"

검령은 되돌아온 나를 보고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순순히 검령을 인정해주었다.

"크하하! 그럼 어디, 이 스승님에게 큰절 한번 올려 볼테냐!"

물론 그건 그거고, 도구 주제에 주인에게 기어오르게 두진 않는다.

-깡!

넌 잘 쳐줘야 과외 선생이야 인마.

128. 소 머리의 미궁

아쉽게도 조금 전의 것처럼 간단하게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은 더 이상 없었다.

어쩌겠어, 뭐든지 날로 먹으려고 하면 탈나는 법이다. 지금부터는 착실하게 시간을 들여서 익혀야지.

잠시 후, 검령은 내가 그토록 기대하던 오러와 검기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오러와 검기는 사실 같은 기술이다. 검을 매개체로 오러를 만들면 그게 곧 검기지."

그건 나도 대충 알고 있었다. 이 검령이 오러를 다루는 모습을 보고 눈치챘으니까.

이름이 다르게 붙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같은 힘이라는 것을.

"그 두 가지를 나눠서 칭하는 이유는 하나다. 같은 기술이지만 응용이 어렵기 때문이지."

검령은 그렇게 말하며 14층 미궁의 보스전 때를 이야기했다. 마력량을 잘못 계산한 탓에 검기를 쏘지 못했던 그 때다.

"이 나조차도 조금만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검사도 검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보통 십수 년이 걸리지."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

"좋다, 오러부터 시작하지. 오러는 말하자면 마력강화의 반대 같은 것이다. 마력강화가 방출이라면 오러는 압축이지."

어쩐지 잠깐 사이에 태도가 고분고분해진 검령은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론적인 부분을 그대로 알아듣기는 무척 어려웠지만, 검령은 나름의 비유를 사용해 가능한 쉽게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말 그대로 검술 족집게 강사가 따로 없었다. 이 늙은 검령은 사실 검보다는 강의에 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정도.

확실히 커뮤니티의 오러 습득자들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것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유익한 정보였다.

아무튼, 기술의 원리를 이해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력강화의 기본 원리는 체내의 고유한 경로를 따라 마력을 방출하는 것.

경로를 따라 순환한 마력에 의해 신체능력이 향상하고, 방출된 마력이 반발력을 만들어 방호 효과를 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오러는 마력을 체내에서 순환시키지 않고, 스킬을 쓸 때처럼 가장 짧은 경로를 따라 마력을 내보낸다.

그렇게 내보낸 마력이 대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게 제어한 뒤, 한계까지 압축시켜 무기에 두르는 것이다.

그 두른 마력을 칼날의 형태로 바꾸어 내던지면 그게 검기인 거고.

"자, 시범을 보여주마."

검령은 설명을 마치고 [강철 직검]하나를 들어 직접 오러를 형성해 보였다.

[마력 지배]를 가진 나보다 제어능력도 훨씬 달릴 테고,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도 형편없을 텐데.

그런 핸디캡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아주 간단하게 검 위에 오러를 둘러낸다.

이렇게만 보면 굉장히 쉬운 기술처럼 보인다. 원리를 알았으니 나도 바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원래 어려워야만 하는 것을 쉽게 하는 놈이 있다면, 그건 그냥 그놈이 존나게 대단한 거라던가.

"흡!"

그로부터 몇 시간을 연습했건만, 나는 내 검에 손톱만큼의 오러조차 피워내지 못했다.

"흐하하하! 이 칼레온이 쉽게 하니 네놈도 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앞으로 십 년은 멀었다!"

검령은 그런 나를 비웃어대며 어마어마하게 잘난 척을 해댔고.

몇 시간 동안 계속 살살 긁어대는 건방진 소환수를 향해, 내 미스릴 완드가 다시금 포효했다.

검령 칼레온, 사망.

**

나는 언제든 연습보다는 실전파였다.

오러고 나발이고 그냥 혼자 낑낑대지 말고, 일단 뭐든 베어보며 생각하기로 했다.

[도전자여, 시련의 탑이 그대를 부르고 있습니다.]

미궁 지역에 입장하면 항상 나오는 고정 메시지와 함께, 미노타우로스가 우글거리는 안쪽으로 들어간다.

초입부터 보이는 까만 피부를 가진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 바깥을 돌아다니는 미노타우로스 워리어의 상위종이다.

까만 놈은 마법 저항이 매우 높은 타입이라, 근접 전사들이 전담해야하는 개체라고 들었다.

물론 나한테는 한주먹거리 수준이겠지, 그러니 이번에는 반대로 마법 쪽 데미지로 한 번 잡아보자.

[라이트닝 차지]

새로 터득한 마력운용 기술을 활용해 전격을 두르고, 맨몸으로 놈에게 접근해 보았다.

딱히 [신속] 스킬을 쓰지 않았음에도 놈의 반응속도는 나를 쫓아오지 못했다. 가볍게 손을 뻗는다.

파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전격이 흘러들어 간다. 감전된 검은 미노타우로스는 몸을 파르르 떤다.

"그극, 그오오오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역시 마법 저항이 높은 놈이라서 그런지 이것만으로 제압되지는 않는다.

별다른 강화 수단 없는 [라이트닝 차지]로는 딱 이 정도인가. 그럭저럭 괜찮네.

아직 주 공격수단으로 쓸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로 원거리에 전격을 쏘아낼 수 있게 된다면 꽤 유효할 거다.

한방에 제압이 안 돼서 그렇지, 어쨌든 몇 초간 마비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나를 앞에 두고 몇 초나 마비된다는 건, 그냥 죽은 거랑 마찬가지다.

-촤악!

가볍게 휘두른 [강철 직검]에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머리.

마력을 제대로 두를 줄 알게 되니 확실히 공격력이 조금 늘었다. 상대가 잡몹이라 큰 체감까지는 안 되지만.

검은 미노타우로스를 쓰러트리고 드롭 아이템을 확인한다. [소머리 전사의 뿔조각] 한 개, 확인.

16층의 보스는 말했듯 자체 하드모드 옵션이 존재한다. 그 옵션을 활성화하기 위한 준비물이 바로 이거다.

모든 미노타우로스 몬스터가 공통으로 드랍하는 [소머리 전사의 뿔조각]을 제단에 바치는 것.

보스룸에서 뿔조각 열 개를 바치면 일반 난이도로 시작되고, 스무 개를 바치면 하드 모드로 시작되는 식이다.

어차피 여기서 한동안 체류하며 오러를 연습할 테니, 나는 특별히 조각을 많이 모아 볼 생각이다.

조각을 더 바친다고 보스가 더 세지는 건 아니지만, 몇백 개쯤 더 바치면 또 다른 히든 보스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지금 기분이 좀 별로다. 오러를 아예 감도 못 잡고 있다는 게 많이 답답하거든.

그러니까, 화풀이 삼아 이 소대가리 놈들을 잔뜩 벨 거다.

"대충 이쯤이었나."

-덜컥!

미궁의 몬스터 소환 함정을 일부러 작동시키며, 전투에 임했다.

**

16층에서는 처음부터 시간을 넉넉하게 쓸 생각이었다.

일단 한 달 정도는 체류할 생각이었고, 오러를 익히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에 따라 조금 조절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오러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오오, 많이 늘었군. 저번만 해도 실밥만 한 크기였는데, 이제는 쥐꼬리 정도는 되지 않나?"

검령의 비아냥대로 내가 형성할 수 있는 오러의 양은 정말 쥐꼬리만 한 수준이 끝이었고, 유지 시간도 매우 짧았다.

"고작 한 달간 연습한 것치고는 제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이 위대한 검령 칼레온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히죽거리는 검령 노인네의 정수리를 미스릴 완드로 강타했다.

-깡!

검령 칼레온, 사망. 이제 저놈은 맞고 뒤지건 말건 계속해서 나를 긁어대고 있다.

이렇게까지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다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학습능력으로 단기간에 자력으로 오러를 터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보다는 한참 더 시간을 들여야 익힐 수 있겠지, 등반 중에 스킬로 얻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고.

마력강화가 많이 안정된 덕분에 한 달 전보다 전력 자체는 상승했지만, 뭔가 제자리걸음을 한 기분인걸.

물론 검령도 나를 놀리는 한편으로, 평범한 검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감을 잡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몬스터라고는 미노타우로스밖에 안 나오는 16층의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건 이게 한계인 것 같다.

"올라가야지, 17층."

보물상자에서 얻은 아이템들도 하나같이 성능 구린 장식용 아이템뿐이니, 파먹을 만큼 파먹었다.

미궁 지역으로 들어와, 빠르게 보스룸으로 이동했다.

보스룸의 문을 열어젖히자, 뿔조각을 바쳐서 보스를 소환하는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위대한 미궁의 주인을 깨우는 방법은, 그 신하를 공물로 바치는 것뿐.]

시스템 메시지를 대충 넘겨 치운 다음, 제단에 손을 대자 바칠 수 있는 아이템이 자동으로 등록되었다.

[소머리 전사의 뿔조각 X 1058]

한 달 내내 미노타우로스를 베어 넘기며 모은 천 개가 넘는 뿔조각이 모두 제단에 올라갔다.

제단이 아주 그냥 고봉밥이 다 됐네. 제물을 받는 보스는 배 터져 죽겠어.

그렇게 제단을 작동시키려는 순간, 아이템 등록 인터페이스가 돌연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뭐지."

그리고 내 인벤토리의 몇 아이템들도 그에 호응하듯 [등록] 표시가 떴다.

[역병에 물든 왕의 목걸이]

[추하게 변모한 왕의 반지]

[간음하는 왕의 황금 팔찌]

[별의 이름을 가진 왕의 귀걸이]

16층의 대형 보물상자에서 나왔던, 등급만 유니크지 효과는 별 쓸 곳 없었던 장비 아이템들이다.

설마 이걸 제단에 바치면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건가? 히든의 히든이 진짜로 있었던 거야?

이야, 이건 못 참지.

나는 곧바로 반응이 있는 아이템을 올리고, 제단을 작동시켜 보스를 소환했다.

-콰르릉!

그렇게 강림한 것은,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벼락을 몸에 깃들인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였다.

129. 벼락과 별

본래 16층의 보스로 나타나는 것은 도끼를 든 거대한 미노타우로스다.

[BOSS - 소머리와 미궁의 왕 미노타우로스]

내 앞에 소환된 보스도 그 이름이며 외형은 내가 아는 정보 그대로였다. 몸에서 번쩍이는 저 번갯불만 빼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해 본 거였는데, 진짜로 알려지지 않은 히든 요소가 더 있었을 줄이야.

하기사, 다른 탑에서는 발견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다.

대형 보물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유니크 장비 아이템을 모조리 바쳐야 하는 거니까.

유니크 장비치고는 성능이 많이 딸리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양보하기에도 아까운 수준의 성능.

저마다 자기가 갖겠다고 싸웠으면 싸웠지, 한 놈에게 이걸 다 몰아줄 생각은 못 했을 거다.

사이좋게 나눠 가지더라도, 그놈들이 한꺼번에 보스룸으로 몰려 올 일은 없었겠지.

혼자서 보물상자를 모조리 독점하는 게 가능한 나 같은 솔플러나 발견할 수 있을만한 조건이다.

"썰 풀게 하나 늘었네."

나중에 커뮤니티에 이런 조건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로 하고, 조용히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제단에 바친 어마어마한 양의 뿔조각은 빛덩이로 변하더니 하늘로 떠올랐다.

딱히 뭔가 간섭하는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저 개수만큼 보스가 강해졌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고.

무엇보다 놈의 몸에 흐르고 있는 번갯불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내 [라이트닝 차지]랑 비교하면 어느 정도려나.

거기에 들고 있는 도끼의 외형도 스크린샷으로 본 거랑은 많이 달라 보이니, 경계할 필요가 있겠지.

-우오오오오!!

미노타우로스가 포효하며 뿔을 앞세워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공략글과 똑같은 평범한 돌진 패턴.

뿔의 물리 공격력이 매우 높으므로, 탱커 계열이 아니면 정면에서 받으면 안 된다고 했던가.

뭐, 다르게 말하면 탱커급 방어력이 있으면 정면에서 받아도 괜찮다는 뜻이다.

-콰앙!

마력을 두른 방패를 앞세워 놈의 돌진을 정면에서 막아냈다. 지직, 발이 뒤로 살짝 밀렸다.

두 걸음 정도인가.

생긴 거랑 다르게 근력은 영 별로네, 그렇게 강하다던 돌진 공격도 시원찮고-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파지직!

"오, 뭐야."

미노타우로스의 몸에 흐르고 있던 벼락이 뿔을 타고 내달렸다. 방패로 막아낸 뿔이 벼락을 띠며 그 길이를 늘였다.

번개 속성의 마나로 뿔의 길이를 확장하고, 추가 속성 공격력을 갖춘 것 같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번개 속성은 화염과 함께 내가 가장 잘 견디는 속성 중 하나다. 나도 번개 속성을 쓰니까.

[라이트닝 차지]

[대전]

[위압]

나도 몸에 번개를 두르고, 추가로 마력을 사용해 상대방을 압박하는 [위압]스킬을 사용해 맞불을 놓았다.

내 몸에서 튀는 푸른 전격과, 미노타우로스의 뿔에서 샘솟는 황색 전격이 맞부딪힌다.

번개의 출력은 거의 호각이지만- 근력은 내가 더 위다. 그대로 방패로 밀어붙여 뿔을 튕겨냈다.

-빠각!

그리고 뿔을 튕겨낸 직후 발차기를 날려, 열심히 들이밀고 있던 황소 머리를 후려쳤다.

그렇게 세게 찬 것도 아닌데, 손맛이 있었다.

-무오...!

미노타우로스는 곧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충격으로 뇌진탕을 일으킨 탓이다.

그동안 격투 실력도 많이 늘었고, 전부터 턱을 노려 맞춰 그로기 상태로 만드는 것도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만한 뿔조각을 처먹고 나온 히든 보스라고는 믿기지 않는 허약함.

"뭐지, 이거."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하며, 뇌진탕을 일으키고 쓰러진 미노타우로스의 등짝에 칼을 박아넣었다.

역시 일단 2페이즈로 넘어가고 나서부터가 진짜인 걸까?

**

탑 안의 세계는 어느 정도 현대 지구의 여러 신화나 공상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고블린이니 웨어울프니 엘프니 하는 여러 종족 모두, 대부분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것들이지 않나.

물론 곧이곧대로 일치하는 부분은 잘 없고, 까놓고 보면 그 실상은 상당히 다른 경우가 많지만.

이 16층의 테마인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은 실제 신화와 비슷한 부분이 꽤 많은 편이다.

그 점이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뿔조각을 20개 이상 바치고 소환한 보스의 히든 페이즈다.

원래는 그냥 소머리 괴물로서 날뛰다 도전자에게 죽음을 맞게 되는 보스는, 히든 페이즈에 들어가면 대뜸 변신을 한다.

소머리가 인간의 머리로 변하고, 반인반수 괴물에서 그냥 괴물같이 덩치가 큰 전사로 변한다는 것.

이것과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설정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배경 설정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많은 건 아니라서 나도 잘은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인간으로 변신한 미노타우로스는 광폭화를 발동시켜 훨씬 더 강해진다고 하는데.

어째 이놈은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쾅!

힘차게 명치를 걷어차니 철판을 차는 느낌이 난다.

확실히 단단하기도 엄청 단단하고, 몸에 두르고 있는 전격의 위력도 상당하지만- 그래 봤자 딱 16층 수준.

히든 보스는커녕 그냥 일반 보스보다 살짝 센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슬슬 인간으로 변신해서 광폭화해 날뛰는 2페이즈로 넘어갈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히든은 히든인데 보스가 강화되는 히든은 아니었던 건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당장 15층의 히든 보스는 내가 아니었으면 공략이 가능할까 싶었을 정도로 악질적인 보스였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그 비둘기 천신은 진짜 어이가 없다. 그렇게 스탯을 깎아대면 뭐 어떻게 잡으라는 건지.

아니, 뭐, 나는 어떻게든 잡아내긴 했지만, 아무튼...이놈에게서는 그런 특별함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스펙만 높으면 뭐 하냐고, 기술도 없고 재주도 없고."

-쾅!

미노타우로스에게 망치를 휘둘러 일격을 먹인 뒤, 그런 감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솔직히 지금보다 깡스펙이 세 배쯤 높은 보스였다고 해도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거다. 패턴이 너무 단조로워서.

공략을 미리 봤기 때문에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짓이 딱 소대가리 수준이다.

"쯧."

-푹!

아쉬움에 혀를 차며 미노타우로스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었다.

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미노타우로스는 쓰러졌다. 이어져서 나오는 클리어 메시지.

16층을 최초로 클리어했니 어쩌니, 최대 기여도 보상을 주니 어쩌니, 보상은 별거 없었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갑옷과 무기를 정리하고, 17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에 손을 댔다.

그 때였다.

-파직!

보스룸 안의 마력이 혼자서 요동치더니, 허공에서 번개 속성의 마나가 생성되었다.

번개의 마나는 스스로 파직거리며 움직여, 쓰러진 미노타우로스의 심장에 연달아서 꽂혔다.

그 모습이 마치,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마음에 든다.

"그래, 그래야지."

뿔조각을 천 개나 처먹고, 유니크 아이템을 네 개나 처먹고, 그걸로 끝나면 안 되지.

이제 진짜 2페이즈 시작하는 거냐?

**

전이문 활성화 권한은 지금도 나한테 있다. 보스의 부활을 기다리지 않고 17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미노타우로스가 다시 일어서기까지 기다렸다. 등반은 언제든 할 수 있다.

번갯불이 몇 번쯤 파직거린 끝에, 미노타우로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외형적인 변화는 전혀 없었다.

원래 하드 모드의 미노타우로스는 두 번째 페이즈에서 인간 형태로 변한다.

그리고 자신의 제단에 놓인 뿔조각을 보고, 백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이성을 잃고 광폭화한다.

인간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이성을 잃고 날뛴다는 점에서 소대가리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부활한 미노타우로스는 뭔가 달랐다. 여전히 소대가리 모습이지만, 그 눈빛이 전혀 달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구나, 내가 누구인지- 내 무기가 무엇인지.]

시스템 메시지가 미노타우로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준다. 미노타우로스의 눈이 향한 곳은 제단 위에 놓인 뿔조각.

[나의 별빛, 나의 벼락, 너만큼은 나를 떠나지 않았구나.]

아니, 그 뿔조각들이 모여 만들어낸 벼락의 덩어리를 바라본다. 덩어리는 천천히 형태를 바꾸었다.

[그래, 다시금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왕좌로.]

벼락으로 이루어진 전투 도끼, 뇌광이 깃든 무구를 손에 쥔 미노타우로스는.

소머리 괴물의 모습임에도 고고하게, 이성이 깃든 전사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자세를 다잡았다.

기술도 재주도 없다는 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듯한 모습의 미노타우로스, 그 머리 위로 떠오른 이름.

[BOSS - 밤하늘 별의 왕 아스테리오스]

그리고 그 이명에 걸맞게 변이한 도끼는, 이젠 벼락불이 아닌 찬란한 별빛을 발하고 있었다.

"흠..."

하지만 영 마음에 안 든다.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는 조금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성을 되찾고 주무기를 손에 넣은 만큼 기량은 크게 달라졌겠지만, 어떠려나.

-쾅!

미노타우로스가 별빛의 도끼를 쥐고 힘차게 내달렸다. 나는 휘둘러지는 도끼를 방패로 막아 냈- 아니.

잠깐만, 뭐야 이거.

내 마력을 때려넣은 방패가 두부처럼 잘려나가고, 그 너머에 있는 내 팔뚝마저 가볍게 파고들었다.

씨발, 좆됐다. 이거 잘린다.

이런 치사한 새끼가, 본체는 그대로고 무기만 사기적으로 파워업했잖아!

130. 사기 아이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