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40

130. 사기 아이템

9층 이후로 특별히 장비를 갱신한 적은 없지만, 내 마력을 흘려넣은 장비의 내구성은 매우 훌륭하다.

16층에서도 충분히 통용되는 것은 물론이요, 저층에서는 마땅히 교체할 필요가 없을 정도.

하지만 벼락불과 별빛이 깃든 황금의 도끼는 아무렇지 않게 내 방패를 베어 가르고, 내 팔을 잘라냈다.

왼팔을 통째로 베어낸 도끼는 멈추지 않고 내 옆구리까지 파고들었다. 황급히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쿠르릉!

강화된 신체능력으로 발을 굴러 물러났다. 팔이 떨어져 나간 건 물론이요, 옆구리까지 깊게 패였다.

씨발, 저게 대체 뭐지?

방어력과 내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몸통이 상하로 분리됐을 거다.

최종 피해를 60% 감소시키는 [강철의 혼]을 가진 내 몸을 두부 취급하다니.

단순히 방어력 100% 무시 같은 옵션이 달려 있다는 수준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상식을 벗어난 위력이다.

"씹, 뭐 공간 절단이라던가...그런 건가?"

그뿐만이 아니다. 왼팔의 절단된 부분과 옆구리에 열상을 입었다. 아마도 전기 속성의 부가 피해.

사선의 모든 것을 저항 없이 절단하는 위력, 거기에 내 내성 스킬을 뚫고 전기로 지져버리는 효과까지.

번쩍거리는 것만 빼면 생긴 건 평범한 냉병기인데, 효과 면에서는 차라리 광선검에 더 가깝다.

"이놈의 탑은 양심이 어떻게 되먹은 거야, 진짜로!"

-타닥!

분노를 입 밖으로 내며 재빨리 달린다. 일단 도끼에 맞아 절단돼버린 내 왼팔을 먼저 주웠다.

내가 가진 수준의 포션으로는 사지 결손을 치료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대로 불구가 된다.

주워든 왼팔을 절단된 팔뚝에 갖다 붙이고, 인벤토리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포션을 꺼냈다.

병은 이빨로 부숴서 따고, 그대로 상처 부위에 들이붓는다.

[초재생]의 효과와 포션의 효과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잘려나간 부위가 천천히 붙기 시작했다.

좋아, 덜렁거리긴 하지만 대충 붙었다.

인벤토리에서 붕대를 꺼내 왼팔을 칭칭 감아 고정했다. 장애인 신세를 면했지만, 잠시간은 못 쓰겠다.

-쿵! 쿵! 쿵!

내가 그렇게 응급조치를 하는 사이, 미노타우로스는 다시 도끼를 들고 거리를 좁힌 상태였다.

높이 치켜든 도끼를 내려찍는다. 경로를 예측하고 옆으로 가볍게 굴러 피했다.

-콰르릉!

도끼가 내리 찍힌 지점에서 빛나는 마력이 폭발했다. 여기에 범위 피해까지 붙어 있나.

미노타우로스는 땅에 박아넣은 도끼를 아무 저항 없이 수직으로 휘둘렀다.

이미 공격이 닿지 않을 거리를 확보했지만,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콰광!

무언가 머리 위를 날았다. 저 멀리까지 날아간 빛살이 벽을 가볍게 절단해 버렸다.

참격이 원거리까지 쏘아졌다.

검령이 보여준 진짜 검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벌어진 일 자체는 유사하다.

"이런 미친..."

방어 불능의 공격력에 속성 공격 옵션, 거기에 원거리 공격기까지 내장된 무기라고?

양심이 없는 건가? 에픽 등급의 무기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

단순히 전력 차이가 심한 싸움이라면 이제껏 몇 번이고 해왔다.

3층의 리자드맨 유적에서 빠져나올 때라던가, 7층에서 메르세데스와 결투를 벌였을 때라던가.

아니면 9층에서 하이엘프 왕과 첫 전투를 치렀을 때라던가- 히든 보스를 찾아다닌 탓에 그 밖에도 몇 번이고 있었지.

하지만 공격력 하나만 이렇게까지 차이 나는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그 차이도 너무나 극단적이다.

-콰광!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도끼가 지면을 내려찍으며 미친 듯이 빛을 발하며 충격파를 쏟아낸다.

저걸 맞았다가는 온몸이 가루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저 도끼의 위력은 말 그대로 상식을 벗어났으니까.

처음의 충돌 이후, 나는 여러 방법으로 저 도끼를 받아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도끼와 부딪혔던 무기들이 장난감처럼 망가져서 땅바닥을 뒹굴고 있으니, 딱 봐도 알 수 있겠지.

에르웬이 만들어 준 검이라면 저걸 받아칠 수 있을까?

글쎄, 자신이 없다. 에보니 스틸도 저 도끼의 파괴력 앞에서는 두부나 다름없을 것이다.

최소한 미스릴, 아니면 그 이상의 내구도를 자랑하는 아다만타이트나 오리하르콘제의 무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모두 17층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작은 완드라고 해도, 미스릴제의 물건을 하나라도 갖고 있다는 게 원래는 말이 안 되는 거다.

물론 굳이 도끼를 받아치는 것이 집착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무기가 사기인 거지, 저 미노타우로스가 사기적으로 강한 건 또 아니니까.

사기템만 믿고 우쭐거리는 좆밥 쯤이야, 여유롭게 쓰러트리고 반대로 무기를 뺏어 줄 수 있다.

문제는 저 미노타우로스가 좆밥이 아니라는 거다.

스펙 자체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고, 도끼를 다루는 기술 역시 뭔가 어설픈 부분이 많은 놈이다.

하지만 진짜로, 다른 건 몰라도 저 도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쓴다.

자신의 강함을 뛰어넘는 사기적인 아이템을 활용하는 법을 몸에 체득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평범한 도끼를 다루는 기술은 대단치 않겠지만, 저 도끼 하나만큼은 잘 다룬다.

아마도 무기술을 익힐 때부터 저 도끼를 쓴다는 걸 전제로 익힌 거겠지. 여러모로 극단적인 놈이다.

무기를 뺏을 상황을 전혀 안 내주는 데다가, 겨루기를 피하고 빈틈을 찌를 각도 전혀 주지 않는다.

사각지대를 노려서 공격해도 곧바로 눈치채고 대응하는데다가, 페인트도 손쉽게 읽어낸다.

극단적으로 높은 공격력을 모범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 활용하고 있다.

심지어 원거리 공격도 도통 통하질 않는다.

"흐읍!"

변칙적인 궤도를 그리도록 투척한 쇠구슬이 미노타우로스에게 쇄도한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는 여유롭게 땅바닥을 내려찍고, 막대한 전격을 발생시켜 그것을 모두 떨어트렸다.

3층의 하얀 리자드맨이 사용했던 전기 배리어와 비슷한 기술, 위력은 당연히 상위호환.

어떤 아이템을 던져도 도끼질 한 방으로 모두 대응해 낸다.

메르세데스에게 사용했던 아이템을 쏟아붓는 전술도 아마 통하지 않을 거다.

어떤 장애물도 저 도끼 한 방이면 가루가 되어버리니까.

젠장, 하다못해 공간이라도 좀 더 넓으면 좋겠는데...보스룸도 하필 좁은 편이라.

"어쩐다."

아직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아예 전투를 포기하고 다음 층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다.

조금 전에 잠깐 전이문에 손을 대 봤는데, 보스가 부활했음에도 여전히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저놈은 잡고 가고 싶은데...쓰러트리면 보상으로 저 도끼를 줄지도 모르잖아.

아니, 아니지, 잠깐만.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게 가능하다는 건, 저놈은 지금 보스 판정이 아니라는 뜻 아닌가?

좋은 생각이 났다.

-콰광!

달려들어오는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피해 내고, [신속] 스킬을 사용해 질주했다.

저 놈은 공격력만큼은 초월적이지만, 그 밖의 스펙은 내게 못 미친다.

당연히 속도 역시 내가 압도적으로 우위, 작정하고 달리면 절대 쫓아올 수 없다.

물론 이 보스룸 안에서 아무리 달려봤자 끝은 분명하기에,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저놈이 보스 판정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것도 가능할 거 아니야?

-쾅!

나는 일직선으로 쭉 달려서, 보스룸 끝에 있는 문짝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잠시 기다리니, 저 멀리서 뇌광을 두른 미노타우로스가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스 몬스터는 원래 보스룸에 철저히 격리되어, 바깥으로 나올 수 없는 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스테리오스라는 이름이 붙으며 다른 몬스터로 거듭난 저놈은, 나를 따라 보스룸 바깥으로 나왔다.

"역시, 이게 되네."

무대가 보스룸 하나에 한정된 게 아니라면 방법은 아직 있다.

"계속 쫓아와 봐."

공간 한번 넓게 써 보자고.

**

16층의 미궁은 다른 층의 미궁과 복잡해도 상당히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다.

복잡한 길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에게 습격당하는 구조.

지도가 완벽하게 공유되고 있는 현대의 도전자들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1세대 당시에는 상당히 고생했다나.

그리고 여기, 그 1세대의 도전자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길을 어쩌지 못해 고생하는 놈이 하나 있었으니.

당연히 커뮤니티를 잘 써먹고 있는 나는 아니고, 저기 저 사기템을 든 소대가리 녀석이다.

-쾅! 콰광! 쾅!

무식한 위력의 도끼를 휘두르며 복잡한 길을 일직선으로 주파하는 미노타우로스.

하지만 그렇게 직진만 한다고 돌파할 수 있는 미궁이라면 복잡하다고 말할 일도 없었겠지.

놈은 내가 유유히 피해 간 함정을 그대로 밟고, 거대한 쇳덩이에 짓눌려 아래층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나는 멀리서 놈에게 여유롭게 쇠구슬을 투척한다.

물론 놈은 특유의 전격 방어로 모두 쳐내고, 곧바로 파편을 짓밟으며 위로 올라와 나를 쫓지만.

말했듯이, 이 미궁은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미노타우로스와 마주치는 구성.

-멈칫.

장애물을 부수며 나를 추적하던 놈은, 돌연 마주친 동족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의 미노타우로스는 모두 놈의 백성이라던가?

이유야 어찌 됐건, 내달리던 발도 휘두르던 도끼도 모두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빈틈!"

-콰지직!

인벤토리에서 꺼낸 할버드를 곧게 내질러,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를 함께 꿰뚫었다.

고기방패가 있어서 치명타를 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유효타.

-우오오오오오오!!!

고통 때문인지 빡침 때문인지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나를 쫓아온다.

하지만 그 속도로는 절대 나를 따라잡을 수 없다. 괜히 다른 미노타우로스와 마주쳐 빈틈을 노출할 뿐.

뿔조각 열 개를 바쳐서 진행할 수 있는 이 녀석의 원래 2페이즈는, 인간으로의 변신.

하지만 인간이 되었음에도 제단에 바쳐진 뿔조각을 보고 분노하여 이성을 잃는다는 설정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미노타우로스가 휘말리는 모습을 계속 목격하면 어떻게 될까?

"자, 빡쳐라."

어서 이성을 잃고 날뛰면서, 나한테 빈틈을 노출해라. 놓치지 않을 테니까.

치사하게 사기템을 들고 나온 대가를 똑똑히 치러라!

131. 벽

싸움에 장시간 집중한다는 건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전투의 고양감은 뜻밖에 금방 꺼지기 마련이고, 집중력은 결국 체력에서 나오는 거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체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어서 집중력이 떨어지면 곧 빈틈이 드러난다. 당연한 일이다.

제 분수에 맞지 않는 무기를 휘두르며 날뛰는 미노타우로스- 아스테리오스도 시간이 지나자 지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나를 계속 쫓아왔고, 중간마다 다른 미노타우로스가 미끼로 이용되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쿵쿵쿵쿵쿵!

장애물을 부수며 돌진해 오는 아스테리오스, 하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그 기세와 속도는 현저히 줄어 있다.

"응, 이거나 먹어."

나는 쇠구슬을 던지고 주변의 잔해를 날리며, 여유롭게 거리를 벌린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공교롭게도 내 체력은 거의 무한이나 다름없거든.

매일같이 마력강화를 키고 인터벌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기른데다가, [초재생] 스킬의 효과까지 있으니까.

떨어질 부분이라고는 마력량 하나뿐인데, 그것도 검령의 족집게 강의 덕분에 연비가 많이 좋아진 상태.

[대장장이의 걸작 : 요정시대의 검]

고유 지속 효과 : 마력 흡수

몬스터를 처치할 시, 처치한 몬스터의 마력 일부를 흡수.

흡수한 마력 수치에 따라 내구도 회복, 자동 청결 효과.

회복분을 초과한 마력은 착용자의 MP를 회복시킴.

거기에 에르웬이 만들어준 내 검에 달린 고유 효과가 계속해서 MP를 리필해주고 있기까지 하다.

보스룸 안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옵션이지만, 이렇게 잡몹이 있는 장소까지 활용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효율을 낼 수 있지.

이미 12층에서 한번 작정하고 옵션을 실험해서, 대규모 전장에서 내 마력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계산을 냈거든.

돌아다니다 보이는 미노타우로스를 한 번씩 푹찍해주기만 하면 쉽게 쉽게 MP가 차오른다.

-오오오오오오오!!

멀리서 분노에 찬 아스테리오스의 포효가 들린다. 포효한 놈은 그대로 벼락불의 도끼를 휘둘렀다.

거리가 상당히 먼 데에도 장애물을 모조리 무시하고 날아드는 참격.

하지만 마력감지로 동작을 완벽히 읽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걸 맞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콰광!

"어우."

이 공격도 벌써 몇 번째인지, 이젠 박살이 날 장애물도 거의 안 남았다. 개판이구만.

현재 나와 아스테리오스는 미궁 지역에서까지 벗어나, 16층의 무대인 섬 전역을 초토화한 상태.

초토화라는 표현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아마도 이 섬에서 앞으로 수십 년간은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할 거다.

생태계의 근간이 되는 지형이 전부 박살 난데다가, 내가 여기저기 흩뿌린 독이 대지를 오염시키고 있거든.

모처럼의 소모전인데, 어마어마하게 높은 내성이 있으면서 독을 활용하지 않는 건 아쉽잖아?

"어디, 슬슬 나자빠질 때가 됐는데."

나는 거리를 벌려 놓고 마력감지를 펼쳐 아스테리오스의 상태를 살폈다.

중간중간 마주쳤던 잡몹 미노타우로스를 미끼 삼아서 만들어 냈던 상처들이 조금씩 썩어가고 있다.

마비와 출혈은 물론 환부가 점점 썩어들어가기까지 하는 내 특제 맹독 칵테일의 효과다.

독 내성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잘 길러지지 않아서, 효율을 높여 보려고 직접 제조했던 물건인데.

역시 나 이외의 생물에겐 아주 잘 먹히는군, 아마 지금 나는 방사능 냉각수에 뛰어들어도 멀쩡하지 않을까?

나중에 연금술이나 포션 제조도 한번 익혀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오러랑 마법이 먼저지만.

-쿵!

잠시 후, 한참의 추적 끝에 마침내 체력의 한계가 찾아온 아스테리오스가 무릎을 꿇었다.

도끼를 붙들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거의 탈진 직전인 것 같다. 휴, 끝났구만.

얕볼 수 없겠네, 내 특제 맹독 칵테일에 당했는데도 이 정도나 날뛰다니.

근력이나 순발력은 나보다 못하지만, 순수한 지구력 자체만은 나보다 나을지도 모르겠어.

[초재생] 같은 걸 두르고 있는 나랑 순수 지구력을 겨뤄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건 둘째치고 말이다.

나는 [강철 직검]과 방패를 들고, 이제껏 계속 피해 다녔던 아스테리오스에게 다가갔다.

"대단한데."

아스테리오스의 소머리에 붙어 있는 두 눈에는 아직도 선명한 이성이 깃들어 있었다.

원래는 빡치게 만들어서 빈틈을 노릴 생각이었는데, 이 꼴이 됐는데도 변함없이 이성을 유지하다니.

근성과 정신력 모두 훌륭하다. 템빨만 아니었으면 순수하게 칭찬해 줄 수 있었을 거다.

"거 뭐냐, 졸렬하다고 생각하진 말고."

나를 노려보는 아스테리오스에게 변명하듯 말하고, 깔끔하게 목을 쳐주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때였다. 아스테리오스의 손에 쥐어진 도끼가 다시금 찬란한 별빛을 발했다.

아스테리오스가 지금까지 날뛸 수 있었던 건 저 무기의 덕이 컸다.

그런데 그렇게나 휘둘러 댔는데도, 아직도 뭐가 남았다고? 대체 저거 뭐 하는 무기야?

-콰르르릉!

도끼에 서려 있던 별빛이 폭사하며, 천둥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아스테리오스의 몸뚱이는 일렁이는 번갯불에 다시금 휩싸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이런 씨발, 히든 보스한테 이런 걸 따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알지만...여기 16층이라고.

왜 저런 사기템까지 들고 있는 주제에, 마력강화까지 쓸 수 있는 건데?

-오오오오오!!

금빛 도끼가 휘둘러진다. 별생각 없이 거리를 너무 좁혔다.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아직 아슬아슬한 정도다. 아예 못 피하는 건 아니다. 몸을 기울여 사선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휘둘러지는 도끼의 속도가 이상하다. 강화의 폭이 예상 이상으로 크다.

찌릿하는 [초감각] 스킬의 경고가 답을 내린다. 회피 불능.

"인벤토리."

시선으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있는 대로 장애물을 쏟아낸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집중 속에서,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도끼는 그 모든 것을 가볍게 가르고.

내 어깻죽지로 파고들어와, 뼈와 살을 모조리 끊으며 몸을 찢어발겼다.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며, 순간 눈에 들어온 시스템 인터페이스 한구석.

HP : 0/1300

나의 죽음을 알리는 숫자.

**

등짝이 축축해지는 기분 나쁜 감각에 눈을 떴다.

"뭐여."

마지막 기억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 HP가 0이 되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는 시커멓고 축축한 물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알몸이고.

이거 진짜 뭔데, 죽어서 사후 세계에 온 건가?

그럼 이 물은 그건가?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강물, 뭐라더라, 삼도천? 스틱스 강?

아니면 그냥 주마등을 보고 있는 건가. 가끔 그런 적이 몇 번 있긴 했지.

고민해도 답을 알려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뭐, 언제나 그랬지. 나는 솔플러니까.

-철퍽.

"어휴."

축축한 강물 위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쉰다. 이게 사후 세계건 주마등이건 달라질 건 없으니.

싸움은 끝났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원인은 한심하게도 방심.

천천히 되새겨본 기억은 눈앞에 영상이 되어 나타났다. 내 몸을 가르는 금빛 도끼의 모습이 보인다.

"진짜 사기 아니냐?"

내 방어력을 너무 쉽게 무시한 거 아닌가. [초재생] 덕분에 거의 풀피였던 것 같은데, 한방 컷이라니.

젠장, 그 소대가리 새끼는 대체 왜 갑자기 마력강화를 쓴 건데. 그 강화 효과만 아니었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닌가. 애초에 이놈,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거잖아.

보스랑은 별개로 취급되는 몬스터였으니, 보스 때랑은 별개로 또 2페이즈가 있을 수도 있는 건데.

원본 보스의 3페이즈로 인식해서, 4페이즈까지는 없을 거로 생각하는 바람에...젠장.

"씨발...그것만 아니었으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아쉽다. 아직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데, 방심 한 번에 죽어버리다니.

칼레온의 검령을 소환해 써먹는 전략도 아직 있었고, 내 2페이즈라고 할 수 있는 [불굴]도 아직 안 켜졌었는데.

엄마의 복수를 하겠다고, 엘레노어의 한을 풀어 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 이게 무슨 꼴인지.

"아니 씨발, 애초에 왜 16층에 그딴 새끼가 있는 건데. 그 도끼는 또 뭐고."

하드 모드도 정도가 있지, 이건 슈퍼익스트림극한헬모드잖아. 제작자 뭐 하는 새끼야?

염병, 누군지도 모르는 제작자인지 GM인지를 어떻게 탓하랴. 원래 솔플이라는게 그런 거겠지.

실수를 커버해 줄 동료가 없으니 매 순간순간이 원코인, 탓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내 선택이었고, 내 실패였으며, 내 능력 부족이었다.

애초에 이 패배의 최대 원인은 내가 그 도끼 한 방에 죽을 정도로 약했다는 것이니까.

"아니, 근데 씨발 진짜."

하지만 애초에 고작 16층인데, 그런 걸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스펙을 만드는 게 가능하긴 했던 걸까?

내가 얼마나 많은 히든 요소를 파먹으면서 성장했는데, 여기서 더 강해진다는 게 말이나 돼?

존나 억울해 씨발!

-첨벙! 첨벙!

억울함을 담아 찰박거리는 수면을 두들겼지만, 그 억울함은 또 금방 날아가 버렸다.

뭘 억울해하나. 더 강해진다는 게 말이 왜 안 되는데, 강해질 방법 있었잖아.

"오러."

검령이 가르쳐 준 오러를 완벽히 습득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면을 쳐다보고 있자니, 돌연 물속에서 한 자루 검이 떠올랐다.

뭔데 이거, 지금이라도 오러 한번 만들어 보라고 주는 건가? 이제 와서?

"뭐, 할 것도 없으니."

나는 짜증을 내면서도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력을 조작했다.

외부로 방출한 마력을 단단하게 압축시켜 검에 두른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마력 지배]로 마나의 입자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조작할 수 있음에도 그렇다. 그 입자가 어디 한두 개여야지.

수백만개의 모래알을 하나하나 조종할 수 있다고 해서, 예술적인 모래성을 만드는 게 쉬워지던가?

"아, 씁...될 것 같긴 한데."

마침 고요한 세상이다. 삼도천인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중하기엔 딱 좋다. 뭐든 해 보자.

검령이 알려준 요령을 되새기며 천천히 마력을 흘려 넣고, 단단하게 굳힌다.

마력강화랑은 반대되는 기술이라고 들었는데, 넘실거리는 마력의 모습이 마력강화와 비슷하다.

이 상태로도 오러를 만들 수 있긴 한데, 그래 봤자 쥐꼬리만 한 수준이고.

"음…다시, 다시."

도자기를 깨는 장인처럼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해 봤지만, 제대로 되는 건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이게 맞는 방법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 검령 그 새끼가 나 엿 먹어보라고 잘못 알려준 건 아닐까?

듣기에는 그럴싸하고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는 것 같아서 그대로 따라 해봤는데 안 되잖아.

"아니면 그냥 안 맞는 건가."

요령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잖아. 나랑 검령의 방식이 맞지 않는 걸지도.

좋아, 요령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내 마음대로 한번 해 보자.

마침 견본 자체는 몇 번이고 봤다. 검령이 보여줬던 오러를 내 방식대로 만들어보자.

-파캉!

뭔가 될 것 같았는데, 마력을 견디지 못한 검이 먼저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아 씁, 이번에는 진짜 괜찮았던 것 같은데- 사실 아니었던 걸까?

좀 더 해보고 싶은데, 어디 검 더 없나.

"오, 있다."

몇 번 두리번거리자 저 멀리 호수에서 다시금 검이 솟아올랐다.

찰박거리는 물을 밟고 지나가, 새롭게 나타난 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연습을 계속했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봤을까. 또다시 검이 폭발하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지만 곧 저 멀리서 새 검이 솟아올랐다. 호수를 가르고 다시 그것을 주워, 같은 일을 반복했다.

-찰박, 찰박.

한 걸음 걸어서 새 검을 줍고, 다시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부러트리고, 다시 걸어서 새 검을 줍고.

그렇게 대체 몇 번을 반복했을까. 수백 번, 아니면 수천 번, 어쩌면 수억 번쯤?

한참의 시간을 들여 연습한 결과, 마침내 내 손에는 단단한 오러가 씌워진 검이 쥐어졌다.

"뭐야, 별거 없네."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였지만, 성공하고 나니 어쩐지 별것 아니었다는 감상뿐.

완성된 오러를 거두고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득 얼마나 시간을 들였는지 궁금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검을 줍기 위해 한 걸음씩 앞으로 왔을 뿐인데, 이렇게 돌아보니 어마어마하게 멀리도 왔구나.

"저건 또 뭐람."

그냥 평평한 호수를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커다란 산을 하나 넘어온 모양이다.

90도에 가깝게 깎아지른 거대한 산은 얼핏 커다란 벽으로도 보였다.

**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눈을 떴다.

어두운 시야가 밝아지고, 몸에 닥치는 격렬한 통증.

분명히 죽은 줄 알았던 몸은 아직 살아 있었다. 영락없이 삼도천을 건너고 있는 줄 알았건만.

눈앞에는 번쩍이는 도끼를 든 아스테리오스, 바닥에는 흥건한 핏물, 그리고 아른거리는 시스템 인터페이스.

HP : 0/1300

분명히 HP가 제로가 되었는데,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절단된 줄 알았던 상반신이 간신히 붙어 있다.

아니, 이걸 붙어 있다고 해야 하나? 등뼈 하나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꼴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HP가 0이 되기 전까지는 치명상을 안 입는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어떤 상처를 입어도 HP가 남아있으면 어쨌든 한 번은 산다.

풀피 상태에서 일격을 먹었기에, 즉사하지 않고 이런 꼴로나마 살아 있는 거다.

"커, 크헉. 썅."

하지만 이 꼴로 뭘 어쩌라고, 진짜 딱 살아만 있잖아.

아스테리오스가 별빛 도끼를 다시 한번 들어 올렸다.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 같다.

이젠 HP도 다 떨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초재생] 스킬로 조금 회복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놈의 공격이 더 빠르다.

즉사를 면하면 뭐 해, 완전히 전투불능 상태인데!

이런 씨발, 뭔가 방법이 없나? HP는 다 떨어졌어도 MP는 아직 남아 있다, 이걸로 뭔가 할 수 있으려나?

-쿠르릉!

걸레짝이 된 몸으로 마력강화를 발동한다. 전신에 마력을 흘려 넣어 억지로 몸을 움직인다.

번갯불을 싣고 도끼가 내리쳐진다. 이판사판으로 검을 든 손을 휘두른다.

어차피 저 미친 도끼가 상대라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일 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간 주마등.

그저 망상일지도 모르는 그 세계에서 터득해 낸 기술을 떠올리며 휘두른 검은.

-카앙!

단단한 오러를 두르고, 아스테리오스의 도끼를 막아내었다.

[패시브 스킬 : 오러 마스터리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야, 너 이제 좆됐다."

[업적 달성 : 각성]

132. 번개와 불화살

천천히 흐르는 체내의 마력이 내 몸 상태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하게 알려준다.

내 몸은 정말로 한 차례 두 동강이 났다. 저 빌어처먹을 사기적인 도끼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척추뼈를 끊었다.

하지만 HP로 인한 시스템의 보호 기능, 치명상을 방지해 준다는 모호한 기능이 그 상태로도 나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그 직후 [초재생]과 [불굴]이 발동하며 절단되었던 뼈가 아슬아슬하게 붙은 상태.

그렇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는 상태의 몸을, 마력으로 억지로 조종하고 있는 거라고.

-카강!

아스테리오스의 도끼를 흘려내며 뒤로 한 발짝 뛰었다. 전신에 미친듯한 격통이 닥친다.

그럴테지, 기적 수준을 넘어서 절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으니.

그것도 그냥 움직인 게 아니라, 저 미친 도끼를 막아내기까지 하지 않았나.

"흐...흐핫."

하지만 입에서는 마땅히 나와야 할 신음 대신, 웃음이 흐른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생명의 위기, 그 속에서 이뤄낸 진화, 기쁘지 않을 수가 있나.

-쿵! 쿵! 쿵!

거리를 벌린 나를 향해 아스테리오스가 다시금 닥쳐든다. 용맹하기 그지없는 사나운 돌진, 이어지는 일격.

마력강화까지 전개한 탓에 매우 빠른 속도를 내고 있지만, 지금의 내게는 슬로우 모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몸 상태로 저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걸 수백 번도 더 고민할 수 있을 만큼.

"이걸로 할까?"

마력강화를 통해 방출된 마력을 조작하여, 특정한 형태로 직조한다. 방사형의 원뿔 형태로.

마력의 입자 하나하나를 원하는 대로 배치해 도형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었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날아드는 도끼를 향해 오러를 두른 검으로 살짝 쳐내고, 원뿔형태로 배치한 마력을 이용해 빗겨낸다.

허공에 방패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방패를 이용한 흘리기는 내 특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콰아아앙!

천파만파 갈라지는 마력의 잔흔과 벼락 세례, 무사히 빗겨냈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진다.

팔과 손목 부근의 근육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 역시 정면으로 받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아스테리오스는 이어서 다시 도끼를 휘두른다.

느릿하게 보이는 그것을 천천히 확인하고, 최적의 대처 방법을 고민한 뒤, 실천으로 옮긴다.

-카가강!

오러를 두른 검으로 다시금 도끼를 흘려내고, 놈의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든다.

[약점 간파]

놈의 명치가 눈에 훤히 들어온다. [약점 간파]의 효과로 어디를 노려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레벨이 오른 [약점 간파]의 정확한 스킬 성능은, 상대방의 취약한 부위를 표시하는 것.

그리고 그 부위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하게 타격하면, 강제로 크리티컬 판정을 발생시킨다.

여태까지는 강제 크리티컬을 터트릴 기회가 좀처럼 없었으나, 이번에는 될 것 같았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철벽]을 두르고 뻗은 내 주먹이 어떻게 나아가는지가 보인다.

가장 정확한 경로로 천천히 수정해 나가며, 가장 정확한 타격의 타이밍에 마력을 집중해서.

검이 아닌 맨주먹에, 단단한 오러를 형성해 내뻗는다.

-콰앙!!!

고막이 절로 욱신거리는 폭발음과 함께, 터지는 붉은 이펙트.

마력강화의 방호력을 손쉽게 뚫어낸 내 타격에 의해, 아스테리오스는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도끼에 몸을 잘린 순간 내가 겪었던 것은, 주마등도 임사체험도 아니었다.

이제껏 없었던 극한의 위기 속에서, 한계까지 발휘된 집중력이 만들어 낸 환상.

일이초 남짓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머릿속으로 진행한 시뮬레이션.

[패시브 스킬 : 사고 가속 7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내 집중력이 육체의 한계를 돌파했다.

**

푸른 알림창이 연달아 눈앞에 떠오른다.

[전투 각성]등의 패시브 스킬 레벨이 껑충 뛰어오르고, [마력 지배]와 [마력 강화]의 레벨도 올랐다.

한번에 몇 단계의 경지를 껑충 뛰어넘은 게 틀림없었다. 역시 나는 위험에 처할수록 더 빠르게 성장한다.

-우오오오오오오!!

멀리 날아가 처박혔던 아스테리오스가 포효한다. 그에 호응하듯 놈의 도끼가 벼락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아마도 3페이즈에 들어간 거겠지, 방금 그 일격으로 놈의 HP를 잔뜩 깎아버린 것 같으니.

아스테리오스는 이제 온몸에 혈관을 연상시키는 금빛 선을 새기고, 전신에서 전격을 발하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도끼에 깃든 힘을 육체에 나눠준 것이다.

마력강화에 이어 한 번 더 모든 스펙이 뛰어올랐겠지.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초월적이던 도끼의 공격력은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우우우웅!

내 검에 씌워진 오러가 놈의 마력과 공명한다. 나는 공명에서 비롯한 떨림이 이끄는 대로 마력을 움직였다.

[라이트닝 차지]

-파지직!

그러자 스킬이 발동하며, 오러가 번개의 속성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서부터 찌릿찌릿한 감각이 근육으로 흘러들어왔다. 내 몸뚱이가 마력을 못 견디고 있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을 움켜쥔 것 같군. HP가 조금 차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죽기 직전이니까.

HP : 7/1300

보통은 숨넘어가기 직전이라고 할 만한 HP양이지만, 이게 차오르기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에 날이 바짝 서 있다. 도망쳐서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는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거다.

여전히 몸은 등뼈로 간신히 이어져 있고, 출혈량은 이미 상식을 벗어난 수준.

정면에서 무기를 부딪치는 순간 충격파에 휩쓸려 간신히 붙어있는 허리가 뚝 부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낌이 온다. 확신할 수 있다.

만신창이가 된 지금의 내가, 이전까지의 그 어떤 순간의 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파직! 파지직!

금빛 뇌광을 몸에 깃들이고 다가오는 아스테리오스의 실루엣은 가히 뇌신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어서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그 기세는, 돌진하는 황소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벼락을 보는 것만 같았다.

번갯불이 쏘아지듯, 정면으로 달려오는 놈을 향해- 나 역시 지면을 폭파시키며 맞서 달려들었다.

-쩌엉! 콰광!

부딪히는 무기, 쏟아지는 마력의 격류가 파도가 되어 주변을 들이엎는다.

우리의 싸움이 만들어내는 여파는 이미 재해에 가까웠다.

**

하늘이 비명을 지르고, 뒤집힌 대지는 다시금 처참히 쓰러진다.

"오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아!!"

사이좋게 기합을 내지르며 빛나는 무기를 부딪친다. 흩어지는 마력과 전격이 다시금 주변을 휩쓴다.

저 여파에 대체 몇 번이나 얻어맞았을까. 전격에 지져진 내장이 꿈틀대며 격통을 만든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아스테리오스의 몸은 강화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목숨을 내던지는 싸움에 이미 섬은 초토화라는 말로 모자라는 꼴이 되어 있었다.

흙과 모래는 모조리 증발해버렸고, 미궁의 구조물이며 자연의 나무 등은 모두 흔적도 남지 않았다.

주변은 그저 돌, 돌, 돌, 핵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암석과 그 파편만이 굴러다닌다.

섬 하나의 지표면이 완전히 쓸려나간 것이다.

내가 오러를 깨우친 뒤로 수십 분간 이어진 전투, 이렇게까지 되고 나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HP : 64/1300

계속해서 깎여나가고 회복하고를 반복한 내 HP의 잔량은 이 정도.

다른 도전자들이라면 여기까지 HP가 깎인 것만으로 죽다 살았다고 말할 테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몸 상태가 어떤 꼴이 되건 마력을 통해 억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당장의 전투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숫자만 저렇지 풀 컨디션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스테리오스는 어떤가.

도끼의 파괴력과 공격력도, 신체의 기동력과 완력도, 모두 전혀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만한 출력을 끌어내며 찾아오는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천천히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싸움은 이미 내가 이겼다. 합을 주고받을 것도 없이, 그냥 적당히 피해 다니기만 해도 이길 수 있다.

"...그렇게 끝내기는 좀 아쉽지."

하지만 나는 굳게 검을 쥐었다.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아스테리오스를 곧게 마주한 채, 정신을 집중했다.

오러를 발현하고 곧바로 실전에 써먹으면서, 이것도 대충 가닥은 잡았다.

하지만 오러와 다르게 시도해 본 적 자체도 없고, 눈으로 본 적도 한 번밖에 없는 기술이다.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처참하게 실패하고 놈의 도끼에 맞아 뒈질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지금처럼 최대로 고양된 상태가 아니면 언제 또 터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패하면 죽는다고?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나는 원래 위험할 때마다 더 빠르게 성장해왔다. 이번에도 나 자신을 믿는 거다.

[사고 가속]

느려진 세계에서 흘러가는 마력의 입자를 통제해 내며, 기술을 준비한다.

실제로는 찰나, 체감하기에는 몇 시간쯤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 지나며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왔고.

정확히 세 걸음 멀리 떨어져 있는 뇌신은 총알처럼 쏘아져 다가왔다.

-우오오오오!!

황금빛 벼락을 깃들인 채 기합을 재리는 아스테리오스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아직 검이 닿을 리 없는 거리지만, 수직으로 그어낸 일섬은 자연스럽게 대기를 가르고 쏘아졌고.

붉은색 크리티컬 이펙트와 함께, 아스테리오스의 몸을 갈라내었다.

-촤악!

[패시브 스킬 : 오러 마스터리 2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검기, 습득 완료.

133. 케라우노스

검기에 맞아 두 동강 난 아스테리오스는 그대로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눈앞에 나타난 클리어 메시지를 지워 없애며, 나는 포션을 퍼부어 몸을 회복했다.

성치 않은 몸을 억지로 움직였기 때문일까, 전신에 닥치는 격통이 장난이 아니다.

단지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도 굉장했다.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반동인지,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하기 싫은 나른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스테리오스를 쓰러트리고 나타난 메시지를 되새기면 나른함은 저절로 날아간다. 파격적인 보상을 얻었으니까.

[최초 클리어 보상 : '성위 : 케라우노스' 를 획득하셨습니다.]

얼핏 봐도 심상치 않은 이름의 보상, 그리고 아스테리오스의 시체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있는 황금빛 도끼.

내 몸을 아무렇지 않게 절단해버리는 절삭력, 휘두를 때마다 주변을 초토화하는 파괴력.

거기에 사용자에게 힘을 공급하기까지 하는 지속력까지 보유한 최강의 무기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내 주 무기는 항상 검과 방패였는데, 이러면 도끼를 메인으로 바꿔야 하나?

"아니, 아니지."

호들갑부터 떨지 말고 자세한 성능부터 체크해 보자. 혹시 모르지 않나.

원래 게임에서도 보스가 쓰던 아이템은 플레이어의 손에 들어오면 확 약해지는 법이다.

애초에 저런 괴물 같은 아이템을 이런 저층에서 그냥 던져줄 것 같지도 않고.

나는 땅에 박힌 채로 어마어마한 힘을 내뿜고 있는 도끼에게 다가갔다. 곧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성위 : 케라우노스]

공격력 + ??? (번개)

치명타 피해 : x 5.0

내구도 ???/???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0회

공격력과 내구도가 모두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다.

뭐지, 무슨 의미지? 일단 물음표가 세 개씩이니까 세 자릿수의 공격력을 가진 건가?

나는 곧바로 그 밑에 달린 고유 지속 효과 탭을 확인했다. 효과는 어마어마하게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고유 지속 효과 : 성위의 권능

벼락의 성위와 연동되어 공격력과 내구도 상승, 이는 무효화되지 않음.

해당하는 성위를 보유하지 않을 경우, 착용 제한과 관계없이 사용 불가.

성위는 상응하는 신격 혹은 특성으로 대체할 수 있음.

그런데 거창한 이름과는 별개로, 정작 옵션은 디메리트- 이게 다 무슨 소린지도 알아볼 수도 없다.

아니, 착용 제한이랑 별개로 사용할 수 없다고? 이게 대체 뭔 경우야?

조건으로 요구하는 성위라는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한테 그런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상응하는 특성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가진 [강철의 혼]으로 되는 건가?

내 아이템이라고 해서 내가 다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니면 너무 아쉬운데.

"어디..."

나는 땅에 박힌 도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잡이를 쥐는 순간, 번갯불이 튀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느껴진 어마어마한 힘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으나.

-파지직!

"씹!"

그 잠깐 접촉했을 뿐인데, 맞닿은 손가락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 재로 변해버렸다.

잠깐이지만 맞닿은 채로 느꼈더니 알 것 같다. 아스테리오스는 이 도끼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내 속성 내성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태워버린 위력이 문제가 아니다. 느껴지는 힘의 문제다.

"사기템 수준이 아닌데, 이거."

아무리 봐도, 도끼가 주인의 낮은 수준에 맞춰 힘을 조절해 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만약 아스테리오스가 이 도끼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었다면.

일격을 내리치는 것만으로, 16층의 무대인 이 섬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

당장 사용은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케라우노스는 내 인벤토리에 보관되었다.

손도 못 대는 무기를 굳이 챙겨갈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아직 16층밖에 안 됐으니 나중에는 또 모르는 거 아닌가.

사용에 필요한 성위라는 것을 내가 얻을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언젠가 내성빨로 극복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아니면 적을 노리고 인벤토리에서 드롭해서 접촉시키면...이건 어려우려나, 드롭은 드롭이지 사출이 아니니까.

기껏 손에 넣은 도끼를 써먹을 방법이 없다는 건 아쉽지만, 그 밖에도 수확은 잔뜩 있다.

[오러 마스터리 Lv.2]

일단 전사의 삼신기중 하나라는 [오러 마스터리]를 손에 넣은 것.

상대가 너무 강했던지라 아직 위력은 실감이 안 나지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진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이제 더 이상 쇠구슬과 무기 투척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 비행형 적도 쉽게 잡을 수 있을 테지.

거기에 [약점 간파] 스킬의 레벨도 겸사겸사 올랐고, [사고 가속]이라는 새로운 스킬도 습득했다.

[사고 가속]의 효과는 조금 전의 싸움에서 제대로 느껴봤기에 딱히 알아볼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사고의 속도를 극한까지 높여주는 것.

가속된 사고는 내 육체의 한계를 초월해,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준다.

그 시간이 멈춘 세상 속에서 나는 여유롭게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대응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예전에도 극한까지 집중하면 주변이 조금 느리게 보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 현상이 스킬화된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아직 자력으로 끌어낼 수는 없지만, 아예 가상의 세계를 구축해 무언가를 시뮬레이션하는 것도 가능하고.

아무튼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다. 솔직히 검기를 깨우친 것보다 이게 더 큰 수확일지도 모른다.

"아 맞다."

나는 내친김에 칼레온을 꺼내 검령을 소환했다.

갑자기 소환된 검령은 이번에도 바로 전투태세를 취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젠장, 이번에는 또 뭐냐! 어디 드래곤이라도 날뛰고 있는 건가!"

나와 아스테리오스가 맞붙으며 초토화된 주변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검령.

나는 담담하게 검을 들어 올리고 오러를 씌워, 녀석에게 보여주었다.

"야, 이거 봐라. 알아보겠어?"

"뭐냐, 전투가 아닌...그거 설마 오러인가?"

"그래 새끼야, 너 저번에 한 말 다시 한번 해봐."

이 건방진 검령 새끼는 오러를 익히지 못해 답답해하는 나에게 아주 좆같은 소리를 잔뜩 씨부려 줬었다.

뭐라고 했더라, 아무리 날고 기어도 2년은 꼬박 연습해야 도달할 수 있을 거라던가?

그때는 정말로 그럴 것만 같아서, 제대로 반박도 못 하고 완드로 패기만 했었는데.

"맞아야겠지?"

이제는 당당하게 오러를 두른 무기로 패버릴 수 있게 되었다.

-깡!

검령 칼레온, 사망.

**

보스전의 결과를 정산하고 난 뒤에는, 오랜만에 커뮤니티를 켜서 글을 작성했다.

[16층 새로운 히든 발견함]

내용은 이번에 알아낸 아스테리오스의 출현 조건, 나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쓰는 정보 공유 글이다.

아주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내 나름대로 검술 단련 방법이나, 마력 운용의 팁 같은 걸 공유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 밖에도 내가 알아낸 탑의 배경 설정 몇 개를 고고학자 계열 도전자들에게 공유해 준 적도 있었고.

하지만 내가 올린 정보글은 대부분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았었다.

- 이새끼 마법사임? 지가 뭔데 마력운용 팁을 준대?

- ㄴ 전사도 마력다룰줄 알면 관련 스킬 얻을수있대

- ㄴ 1세대도 아니고 저딴 좆같은짓까지 해서 그 스킬 하나를 얻어야함?

- 어 스킬북 딸깍으로 배울거야~ 뭔 명상을하고앉았노 그시간에 골드캐는게 더 빠름 ㅋㅋ

- 전붕이가 마력쓸줄 알아서 어따씀? 진짜모름

다른 탑의 도전자들과 내 인식이 크게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단련이나 특정한 기술을 체득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도전자들도 대충 알고는 있었다.

다름아닌 1세대 도전자들이 그런 식으로 스킬을 얻고 성장해 왔으니까.

하지만 스킬의 획득 루트와 공략이 확실하게 정립된 지금은 시간 낭비로 취급되고 있었다.

원시인들이 우가우가하던 시절에나 쓰던 방법이라나.

경제체계가 꽉 잡혀 있는 다른 서버에서는, 그런 단련을 할 시간에 그냥 몬스터를 잡는 게 더 이득이라고 한다.

스킬은 골드를 모아 스킬북을 사면 그만, 스탯은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리면 그만.

실전감각이나 응용능력이 무뎌진다는 점은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다.

아, 고등급 헌터를 목표로 장기간 체류 중인 랭커들은 조금 다른 구석도 있긴 했다.

물론 결국 레벨과 클래스의 차이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도긴개긴이었지만.

뭐, 애초에 솔플러인 나와 다른 탑의 도전자들간에 인식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하니까- 딱히 그런 점이 안타깝지는 않았다.

전사가 마력 계열 스킬을 얻어서 어디에 쓰느냐, 그런 건 마법사한테 맡기면 그만 아니냐. 타당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정보 공유 글을 거의 쓰지 않는다. 애초에 환경이 너무 다르고, 알려줘 봤자 신경도 안 쓸 거니까.

하지만 이번 히든은 조건이 명확하여, 공유할 가치가 충분했다.

- 이새끼시발 뿔조각 천개는 어케모은거냐?

- ㄴ 와 진짜네 유니크템 필요하다는거에 쏠려서 생각도못했네 이새끼 솔플이잖아

- ㄴ 저거 확정드랍도 아니지않음? 그럼 혼자 미노타우로스를 얼마나 잡은거임?

- ㄴ 두세마리에 하나꼴로 나옴 그럼 ㅅㅂ 혼자 3천은 잡았다는건데

- ㄴ 시발 인간구제역이노 ㅋㅋㅋㅋ

- ㄴ 집단폐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언제나 그랬듯 반응은 다른 쪽으로 튀었지만.

134. 시련의 탑 17층

성장 기념으로 치즈돈까스 도시락 하나를 까먹으며, 느긋하게 커뮤니티를 구경했다.

[대형상자 아직 안털린 서버 있긴하냐?]

[오늘부터 뿔조각 모으기 노가다 드간다 ㅋㅋ]

[근데 2661 저새끼 구라 아님?]

내 정보 공유글에 대한 도전자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랬듯이 제각각이었다.

진지하게 히든을 한번 노려보려는 이들도 있었고, 틈새시장을 노려 이득을 챙겨 보려는 이들도 있었고.

내가 공유한 정보가 아예 거짓말일 수 있다며 의심하는 이들까지도 있었다.

뭐, 사실 의심은 당연한 거다.

히든피스와 관련된 정보글은 어그로나 낚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니까.

내가 올린 스크린샷만으로 모든 정보가 검증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애초에 내 신용도가 낮은 점도 문제다.

화려한 망령시절의 전적에, 허풍처럼 들리는 썰, 솔플러라는 특성상 분탕을 쳐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점 등등.

완전 실명제 커뮤니티에서 혼자만 반고닉으로 있는 셈이니, 신뢰를 받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안 믿어.

특히 이번 정보글은 더더욱 그렇다. 정보 검증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이 많아도 너무 많으니.

미노타우로스의 뿔조각 천 개쯤이야, 경매장을 통해 사들이거나 대형 길드에서 작정하고 모집하면 금방 모이겠지만.

대형 보물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유니크 장신구 4종을 모두 모으는 건 일부 서버에서는 아예 불가능하다.

대부분 서버의 보물상자가 진작에 다 털렸고, 졸업자들이나 사망자들이 갖고 있다가 없어졌으면 다시 얻을 수도 없고.

게다가 보스인 아스테리오스를 상대하는 데 필요한 스펙 수준도 어마어마하게 높기까지 하다.

나조차도 고전을 면치 못했으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상층의 랭커들이 플로어를 거슬러 내려와야 할 텐데.

플로어를 거슬러 내려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저층 랭커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겠지.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다시 한번 말하는데 아무나 하지 마라 보스 존나쎄다]

나 내구스탯 100넘고 뎀감기까지 있는데 한방컷날뻔했다

16층 스펙으로는 탱이고 지랄이고 좆도 안되니까 중상층이상 랭커만 도전하셈

솔직히 최초클보상 말고는 보상도 구려서 할이유도 없을듯

- 그래도 한방컷은 안났으니까 탱 잘서면 되는거아님?

- ㄴ ㅈㄹㄴ

- ㄴ 내구 100 넘는 탱커가 어디 흔하냐?

- 뭐임시발 너 내구 100넘는다고? 구라아님?

- 내구 백넘는데 한방컷ㅇㅈㄹ한다 16층인데 뭔 ㅋㅋ

- ㄴ 히든인데 그럴수도있는거아님?

- ㄴ 16층 전붕이새끼가 내구 100넘는다는거부터 말안됨

- ㄴ 탑서운이야기 : 2661게이는 1층에서 40렙을찍은 개미친새끼다

- 저 재료템 다모은새끼가 아무나겠냐 신경쓰지마셈 ㅇㅇ

혹시 모르니 아스테리오스의 스펙에 대해 경고를 진지하게 여러 번 남겨두고, 커뮤니티를 닫았다.

마지막으로 대형 길드의 간부들에게도 이번 히든에 관해 개인 쪽지로 몇 가지 말을 전해두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식하게 들이받다가 죽는 놈이 나오면 그건 자연사라고 쳐야 한다.

이제 다음 층으로 올라가 볼까.

나는 폐허가 된 섬에서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

전이문 특유의 울렁이는 감각을 느끼며 새롭게 펼쳐진 17층의 세상.

"어우 씨, 생각보다 심한데."

전이문 너머로 넘어오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숨이 턱턱 막히는 습기와 열기였다.

대체 습도가 얼마나 높은 건지, 실내 수영장 내지는 습식 사우나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열기나 더위 자체에 대한 내성은 매우 높지만, 환경이 가져다주는 불쾌함은 딱히 줄어들지 않는단 말이지.

왜 도전자들이 저층 최악의 층 중 하나로 꼽는지 알 것 같다. 스트레스가 팍팍 쌓이겠어.

"이번 층은 빨리 넘어가야겠어."

17층의 배경은 정글이라고 해야 하나, 밀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울창한 숲 속이다.

지능이 높아 사회를 이루고 사는 침팬지의 마을이 안전지대로 존재하고, 그 외의 지역에는 야수들이 나오는 식.

특이하게 판타지틱한 몬스터가 아니라 마력으로 능력이 강화되었을 뿐인 짐승들이 주 적으로 나온다.

그냥 좀 센 짐승이 나온다고 하면 만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17층에 나오는 짐승들은 모두 하나같이...오, 마침 저기 하나 나오네.

-뀌이이이이익!!

울창한 나무를 박살 내며,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어 왔다.

생긴 건 그냥 상아가 좀 길게 뻗은 멧돼지지만,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가끔 사람들이 멧돼지의 덩치를 경차 수준의 사이즈라고 부풀려 말하고는 하는데.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저놈은 그걸 넘어서, 20톤 덤프트럭 크기였다.

이곳의 짐승들은 단순히 피지컬이 강화된 것을 넘어서, 어마어마한 체급까지 갖고 있다.

나는 주먹에 마력을 두르고 [철벽] 스킬을 발동시켜, 달려오는 멧돼지의 머리에 꿀밤을 놓아 주었다.

-꽝!

망치로 후려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멧돼지는 즉사했다.

초반부터 나오는 걸 보면 알겠지만, 이만한 덩치를 갖고 있음에도 이놈은 잡몹.

17층의 하이라이트는 이 밀림을 사분할 하고 있는 네 마리의 '주인' 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짐승이다.

판정은 필드 보스지만, 거의 레이드 수준으로 인원을 꾸려야만 공략할 수 있는 놈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포인트로, 그 주인 짐승의 종류가 완전히 랜덤이라는 점이 있다.

어느 탑에는 초대형 멧돼지가, 어느 탑에는 초대형 고릴라가, 또 어느 탑에는 초대형 늑대가.

어떤 짐승이 어떤 타입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필드 보스의 난이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한다.

어떤 탑에는 유니크 개체인 흑호가 보스로 나왔다던데, 미궁 보스보다 강해서 오랫동안 공략이 막혀 있었다나?

여기 2661번 탑에도 그런 개체가 나와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오러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제대로 실험해 볼 수 있을 거 아니야.

**

나는 침팬지들이 사는 마을에 들리는 건 생략하고, 우선 동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밀림 구역을 사분할 하고 있는 보스들은 당연히 동서남북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일단은 동쪽부터, 한 놈을 잡은 다음 밀림 전체를 한 바퀴 돈 다음 미궁 지역으로 갈 거다.

"오, 이런 것도 있었지 참?"

쭉 전진하다 보니, 웬 거대한 파리지옥 같은 식물이 나를 향해 아가리를 뻗어왔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가끔 파리지옥이니 끈끈이주걱이니 라플레시아니 하는 식물들도 적으로 나타난다.

막 덩굴을 휘두르면서 공격하는 그런 몬스터스러운 놈들이 아니라, 진짜 딱 거대화된 식충 식물.

그리고 식충 식물이 있는 만큼 거대한 해충들도 나타난다. 주먹만 한 크기의 모기 같은 게.

물론 모두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파지지직!

덤벼온 파리지옥이 [라이트닝 차지]에 당해 까맣게 타버렸다.

비단 파리지옥뿐만이 아니라, 조금 전에 말한 주먹만한 사이즈의 모기도 계속 비슷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 스킬을 상시 펼쳐두는 것으로, 나는 인간 전기파리채 같은 짓을 할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도 감전사시킬 수 있는데, 좀 큰 모기나 식물 따위야 말할 것도 없지.

"지능이 딸리니까 그냥 불나방이랑 다를 게 없네."

-파지직!

다가오면 타죽을 뿐인데도 덤벼오는 거대 모기와 거대 말벌을 보며 계속 전진했다.

처음 마주쳤던 거대 멧돼지에 이어 거대 원숭이와 거대 악어도 주먹으로 아작내가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

[동쪽 주인의 구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맵에 들어서니, 딱 필드 보스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우! 우우우우! 우! 우! 우!

동쪽 밀림의 주인 개체는 산만한 크기를 자랑하는 고릴라, 나름대로 강한 축에 속하는 보스였다.

그것도 연륜을 나타내는 흰 털이 돋아있는 실버백 고릴라다. 마력량도 꽤 되는 것 같고, 이건 당첨이군.

"무기를 꺼내면 거의 무조건 선제공격을 한댔나?"

나는 커뮤니티에서 봤던 팁을 떠올리며, 가볍게 [강철 직검]을 뽑았다. 이어서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

[밀림의 주인은 공물을 바치지 않는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BOSS - 동쪽의 주인 실버 백]

[짐승의 눈이 당신을 위압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뭔가 제약 같은 게 걸리는 듯하다가 캔슬되었다. 오러의 위력을 실험하기 딱 좋겠다.

-둥둥둥둥둥!!

땅까지 울릴 정도로 가슴팍을 두들겨대는 고릴라를 쳐다보며, 천천히 검에 오러를 둘렀다.

곧 고릴라는 나를 향해 쿵쿵거리며 접근해 왔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고작 두 걸음 만에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다.

[도약] 스킬과 [신속] 스킬을 함께 전개하며 공중으로, 고릴라의 머리를 노리고 뛰어오른다.

저만한 덩치니까 단번에 베어내긴 힘들겠지, 일단 되는대로 오러를 길게 뻗어서 크게 베어보자-

"응?"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길게 뻗은 오러와 생각 이상으로 쉽게 베어지는 머리.

['동쪽의 주인 실버 백' 을 처치하셨습니다.]

필드 보스가 평타 한 방에 즉사해버렸다.

135. 최강의 육상동물

내 스펙이 17층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는 사실은 나도 모르는 게 아니다.

비교대상이 부족해 어느 수준이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마력강화를 습득하기 전에도 25층 랭커급은 넘어서 있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많이 놀라웠다. 원래, 보스급 몬스터를 평타 한 방에 쓰러트린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방컷 자체는 이미 7층 보스전에서도 한번 해 본 적 있지만, 그때랑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때는 상대가 맷집이 약한 기동성 위주의 적이었고, 쓸 수 있는 스킬을 모두 쓴 다음 날린 최대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이번 적은 높은 체력과 맷집을 무기로 내세우는 대형 짐승타입의 보스였는데- 딱 평타 한 방 컷.

[오러 마스터리]가 전사의 삼신기인 이유는 사거리가 짧은 전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사거리도 사거리지만, 공격력의 상승 수준도 정말 어마어마하다.

"마력 지배랑 시너지가 난 건가...?"

나중에 검령을 불러서 오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밑천을 다 털리고 별 거 남지도 않은 놈이지만, 설명충 역할로는 아직 쓸모가 많으니.

그렇게 만족스러워하며 검날을 털어내자, 우두머리를 잃은 대형 고릴라 몇 마리가 나를 에워쌌다.

-우! 우! 우!

고릴라들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동물들이라 그런지 인간보다 훨씬 표정을 알기가 쉽다.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한방에 목이 썰린 걸 보고 느낀 게 많은 모양이지.

나를 둘러싼 고릴라들은 딱히 덤벼들 생각은 하지 않고, 천천히 눈치를 보더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원숭이는 이를 보이며 웃는 게 항복 표시라던데, 고릴라는 좀 다른가 보네.

흠, 근데 어쩌나.

항복한다고 살려줄 생각 없는데?

오러의 성능 검증은 아직 안 끝났다고. 그리고 경험치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마침 딱 모여줘서 참 고마운걸. 그냥 도망쳤으면 굳이 쫓지는 않았을 텐데.

-스릉.

동쪽 밀림에 피바람이 불었다.

**

동쪽을 지배하고 있는 고릴라 무리를 해치운 뒤에는 북쪽 밀림 지역으로 이동했다.

오러의 위력과 유지력을 실험할 겸, 가는 길에 보이는 장애물을 하나씩 베어 넘기며 이동했는데.

그렇게 북쪽 지역에 도착하니, 동쪽 지역과 북쪽 지역을 이어주는 넓은 길 하나가 생겨버렸다.

당연히 길 중간 중간에는 두 토막 난 대형 짐승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고.

뭔가 환경파괴범이 된 기분인데, 이거.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북쪽 지역에는, 17층에 들어오자마자 만났던 것과 비슷한 멧돼지가 우두머리로 있었다.

북쪽을 지배하고 있는 돼지라니, 이거 완전...물론 이놈은 미사일을 갖고 있지는 않겠지.

애초에 북한 정권은 대격변 때 완전히 망하고, 지방 군벌들이 나누어 점령하고 있는 상태라 전부 옛말이긴 하다만.

그래도 오랫동안 박힌 인식이라는 게 있어서, 아직도 북쪽의 돼지라고 하면 뭔가 이런 생각이 난단 말이지.

[밀림의 주인은 공물을 바치지 않는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BOSS - 북쪽의 주인 자이언트 보어]

[짐승의 눈이 당신을 위압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시작된 보스전, 거대한 상아가 인상적인 멧돼지는 처음부터 맹렬한 돌격을 실시했다.

그리고 나는 오러를 두른 [강철 직검]으로 그 돌격을 받아쳤고- 그렇게 한순간에 싸움이 끝나버렸다.

['북쪽의 주인 자이언트 보어' 를 처치하셨습니다.]

나름 특수한 개체였던 실버 백보다 약한 놈일 텐데, 이러나저러나 똑같이 한 방이라 딱히 차이는 안 느껴진다.

오러가 너무 날카로워서 딱히 베는 맛도 없고, 그렇다고 보상이 좋은 것도 아니고.

경험치는 대량으로 주는 것 같지만, 이러면 뭔가 싸우는 것 자체가 허무하네.

압도적인 강함이 시시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물론 내 목표를 위해서는 아직 한참 더 강해져야겠지만, 당장은 시시할 따름.

다음에는 아예 맨손에 오러를 두르고 싸워 볼까.

**

서쪽 밀림의 주인을 해치우고 나서 깨달았다.

오러를 활용하는 한, 내가 17층에서 긴장을 유지하며 싸울 방법은 아예 없다는 것을.

서쪽 밀림의 주인은 거대한 코뿔소였다. 원래도 거대한 동물이 거대화하니까 정말 산만한 덩치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덩치가 무색하게, 오러를 실은 맨주먹만으로 일 분 만에 완벽하게 요리해버릴 수 있었다.

긴장감은 당연히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시시해서 도중에 아무래도 좋은 잡생각만 떠오를 정도였다.

코에 뿔 달린 소라서 코뿔소라니, 이름 한번 진짜 대충 지은 것 같다던가...뭐 그런 거.

['서쪽의 주인 그랜드 라이노' 를 처치하셨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보상은 경험치 말고는 별것 없었다. 커뮤니티에서 왜 필드 보스를 걸러도 된다는지 알 만했다.

나야 오러가 있어서 쉽게 해치우지만, 다른 도전자들은 이런 놈을 상대하려면 굉장히 고생할 텐데.

그런 놈들이 주는 보상이 고작 경험치랑 골드가 전부라니, 가성비가 너무 나쁘다.

솔직히 나도 지금 괜히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

일부러 오러를 쓰지 않고 싸울까 싶기도 했지만- 이건 강한 아이템을 쓰는 거랑은 또 결이 다르단 말이지.

오러의 사용과 활용을 습관화하지 않으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오러를 써야 할 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어떤 기술을 단순히 습득하는 것과, 완벽히 체화하는 건 차이가 크니까.

아쉽긴 하지만 이번 층은 빠르게 깨고 넘어가도록 하자. 뭐, 원래도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층이 나온다. 일단 거기까지만 빨리 가자.

"그러니까 너희도 빨리 덤벼라."

나는 검을 뽑아들고, 우두머리가 죽어 혼란에 빠진 코뿔소 무리를 향해 선언했다.

이제 남은 건 남쪽 밀림과 미궁 지역의 보스뿐이다.

**

남쪽 밀림으로 향하던 중, 나는 괜찮은 생각을 하나 떠올려 실행에 옮겼다.

-뿌우우우우!!

저 멀리서 흉포해진 거대 코끼리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화려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내가 가진 아이템 중에서 두 번째로...아니, 세 번째로 좋은 검인 칼레온을 꺼내 마법석을 끼운다.

[검령 각성]을 사용해 검령을 불러낸 다음,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코끼리를 가리킨다.

"가라 검령몬."

"이런 썩을 놈!"

검령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순순히 무기를 들고 코끼리에게 돌진했다.

그대로 검에 얇은 오러를 씌운 검령은 화려한 검술을 펼쳐, 거대한 코끼리를 깎아내듯 베어 간다.

역시 저놈의 검술은 본받을 점이 많다. 한참 부족한 마력으로 저만한 오러를 만들어 싸우는 것도 그렇고.

나는 조금 전부터 적을 마주칠 때마다 검령을 불러서 대신 싸우게 하고 있었다. 검술을 눈으로 보고 베낄 셈으로.

험한 싸움이면 험한 싸움일수록 놈은 점점 더 신기한 기술과 기교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걸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이, 직접 오러를 두르고 시시한 몬스터와 싸워서 경험치를 먹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저놈은 검에 빛나는 고리 같은 걸 감아서 휘두르는 이상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한테는 알려준 적 없는 기술인데, 아마 저놈의 숨겨둔 필살기 같은 게 아닐까 한다.

"나중에 저것도 알려달라고 해야지."

그러는 사이, 코끼리가 두꺼운 코를 휘두르며 싸움은 결판이 났다.

-쾅!

부상을 입은 검령은 코끼리의 코를 피해내지 못하고 그대로 명중 당해 죽었다.

하급 마법석의 쥐꼬리만 한 마력량으로는 저 정도가 한계인 거겠지.

저 코끼리는 다른 짐승들보다 훨씬 강해 보이니, 애초에 이길 거라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나는 오러를 두른 검을 뽑아들고, 빈사상태가 된 코끼리를 마무리했다.

그 때였다. 멀리서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막대한 존재감이 가까이 접근해 왔다.

"오, 보스인가."

아마도 이 남쪽 밀림의 보스겠지. 이번에는 그대로 다른 보스들보다 더 센 놈이 있는 모양이다.

가볍게 마력감지를 전개해, 다가오는 보스의 모습을 파악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짐승의 종류는 완전 랜덤이라더니...이런 것도 나온단 말이야?

-그르르르르...!

대형 짐승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타난 그것은, 대형 빌딩만한 사이즈의 파충류.

아니, 분류상으로 따지면 파충류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런 인상을 주는 짐승이다.

육상 최강의 짐승이라는 코끼리가 우두머리를 먹지 못한 이유가 뭘까 했는데.

-크와아아아아!!

[밀림의 주인은 공물을 바치지 않는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BOSS - 남쪽의 주인 드래고니안 렉스]

[짐승의 눈이 당신을 위압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와 씨발, 티라노잖아."

영화에서나 보던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한 보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좋은 것을 보여주지]

(사진)

거대 티라노다

-????

-ㅅㅂ뭐임?

- ㅋㅋㅋㅋㅋㅋㅋㅋ

- 와시발 킹짱룡

- 저거 설마 17층 필보냐?

- ㄴ 배경 보니까 맞는듯

- ㄴ 거기 시발 공룡도 나왔냐 원래???

- ㄴ 다른나라 서버에선 가끔 있었대

- 왜 깃털없음?

- ㄴ 깃털 ㅇㅈㄹ 황라노님은 그런거 없다

나는 곧바로 스크린샷을 잔뜩 찍어서 커뮤니티에 업로드했고, 세 자릿수의 개추를 받았다.

136. 오버스펙

두꺼운 회갈색 비늘로 덮인 근육질의 몸체와 크고 흉악한 턱.

균형을 잡기 위해 쭉 뻗어 있는 길쭉한 꼬리, 또륵또륵 굴러가는 눈알과 굵고 두꺼운 다리.

그리고 그런 강력한 외견과 상반되는 졸렬한 사이즈의 앞발까지, 그림으로 그린듯한 티라노의 모습이다.

이건 진짜 대박이네, 안 그래도 커다란 공룡이 거대화까지 하니까 완전 드래곤이 따로 없다.

평범한 멧돼지도 20톤 덤프트럭 사이즈가 되는 마당에, 공룡이라면 당연히 이만한 덩치는 갖춰 줘야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장난 아니게 크네. 이쯤 되면 짐승도 뭣도 아니고 거대괴수에 가깝다. 고질라 그런 거 말이야.

-크와아아아아!

초거대 티라노는 다른 밀림의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향해 적대감을 풀풀 뿌리며 달려왔다.

생물이 아니라 자연경관이 나를 향해 닥쳐들고 있는 것 같다.

거대한 괴성을 전혀 뒤지지 않는 거대한 턱을 뻗어오는 티라노,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며 물러났다.

그런데, 어라.

상대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거리를 잘못 쟀다. 좀 더 크게 뛰었어야 했는데, 이거 씨발 물리겠는데?

-후욱!

티라노의 어마어마한 이빨이 나를 물어뜯기 위해 닥쳐들었다. 나는 곧바로 [혼신] 스킬을 발동했다.

위아래로 덮쳐오는 이빨을 양손으로 붙들고 막아낸다.

-콱!

"어우, 씨."

덩치가 거대한 만큼 이빨의 무게도 장난이 아니고, 치악력도 미쳐버린 수준이군.

내 완력으로도 이대로 붙잡고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 같다. 턱을 잡아서 벌리기에는...그냥 너무 커서 안 되고.

이만큼 커다란 적을 상대하는 건 9층 이후로 완전히 처음인데, 역시 크다는 건 그 자체로 상당한 강점이군.

뭐, 그렇다고 해도 못 이길 상대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쉽지.

-쿠르릉!

마력강화를 발동해 스탯을 증폭시키고, 이빨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이빨이 내게 닿기 전,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철벽]을 더해 발차기를 날렸다.

-쾅!

내 킥에 맞은 티라노의 이빨이 그대로 박살 나 날아가며 공간이 확보되었고, 나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놈은 덩치가 큰 만큼 무척 둔하다. 다시 입을 벌리는 것보다 내가 놈의 머리에 뛰어 올라타는 게 훨씬 빨랐다.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낸다. 적의 덩치가 거대한 만큼, 이쪽도 거대한 무기를 써야 한다.

[참우도]

꺼낸 무기는 오묘한 이름이 붙은 대검. 검신의 길이가 무려 2m를 넘기는 무식하게 큰 무기.

이만한 사이즈의 무기는 원래 제대로 써먹기 힘들어, 그동안 꺼낼 일이 없었지만- 이럴 때는 이만한 게 없다.

대검의 칼날에 오러를 씌우며 그 길이를 확장해 낸다. 그렇잖아도 길었던 검신이 전봇대만 한 수준까지 길어진다.

그 상태로 검기의 방출까지 염두에 두며, 거대한 티라노의 뒷목을 향해 크게 휘두른다.

-서걱!

아무리 베이스가 되는 짐승이 공룡씩이나 된다 한들, 결국은 17층의 필드 보스.

마력강화와 오러를 함께 사용한 내 공격 앞에서, 가뿐히 목이 달아났다.

여러모로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생물이지만, 거대 돌덩이 하나에 멸종당한 범부 아닌가.

['남쪽의 주인 드래고니안 렉스' 를 처치하셨습니다.]

17층 전역 제패 완료.

**

17층 미궁 지역의 보스는 필드 보스와 다소 겹치는 감이 있는 고릴라형 몬스터였다.

다만 단순히 덩치만 큰 고릴라는 아니었고, 무슨 고대의 힘을 얻었다느니 뭐니 하면서 마력을 다룰 줄 알았다.

땅을 내려치니 넓은 범위에 마력 폭발이 일어나고, 가슴팍에 박힌 보석으로 마력포를 쏘기도 했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7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물론 그래 봤자 평범한 17층 수준의 보스였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가뿐히 이길 수 있었다.

17층을 진행하며, 오러의 성능에 대해서도 대충 감을 잡았다.

우선, 오러가 가지는 절삭력은 절대적이다. 보스가 사용하던 마력 배리어를 포함해 모든 것을 손쉽게 절단한다.

공격력 수치가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러 자체가 가지는 파괴력이 매우 높은 것이다.

안 그래도 9층 이후 장비를 거의 교체하지 않고 있는데, 오러 덕분에 더더욱 장비를 교체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지금보다 더 공격력이 높은 무기를 갖추더라도 오러를 두른 [강철 직검]보다 강한 위력을 내진 못할 테니까.

"이러면 역시 내구 몰빵이 맞겠네."

앞으로도 장비는 지금처럼만 유지하도록 하자. 내구도 수치만 높여서 최대한 오래 쓸 수 있도록.

에르웬이 만들어준 검처럼 자체 수리 기능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고.

아, 하지만 오러가 가지는 장점은 단순히 공격력으로 끝이 아니다.

오러는 연비가 좋다.

무기에 마력을 쑤셔 넣어서 강화하던 기존의 방법은 실시간으로 MP가 계속 소모됐지만, 오러는 그 반대.

방출한 마력을 단단하게 굳혀 무기 표면에 두른다는 점 때문인지, 한 번 발동하면 그 이후에는 MP가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

물론 아예 소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아직 내가 오러를 단단하게 유지하는 능력 면에서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오러를 잘 통제한다면, 최초 발동시를 제외하면 아예 소모값을 없게 할 수 있을 거다.

마력강화의 연비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으니, 내 전투 지속력은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는 셈.

지금 수준으로는 대충...별도의 보급 없이 20시간까지는 마력강화와 오러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실제 전투에 돌입하면 다른 스킬도 사용해야하니, 정말 20시간을 풀 컨디션으로 싸울 수는 없겠지.

밀림 지역을 완전히 제패하고 나서도 제법 긴 시간을 체류하며 직접 실험해 본 결과다.

그렇잖아도 히든 보스가 아니면 25층 플로어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 적수는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오러를 습득한 후로는 그 정도도 아니다. 미궁의 보스몹도 좀 센 잡몹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니.

이러면 앞으로는 층을 빨리 오르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개인 단련과 히든 찾기에 집중해야 하나?

나는 고민하며, 상태창을 열어 부족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

50레벨을 넘긴 이후로는 레벨적 성장은 매우 더뎠지만, 스탯은 매우 많이 올랐다.

서진혁 Lv.73 (전사)

HP : 1350/1350

MP : 880/880

근력 : 119 (109+10)

민첩 : 113 (102+11)

내구 : 118 (103+15)

지능 : 112 (100+12)

그리고 이번 층에서는 레벨도 조금 올라서, 이제는 73레벨이다.

마력과 오러등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다룬 덕분인지, 지능 스탯이 눈에 띄게 오른 상태.

이로서 모든 순수 스탯이 100을 넘겼다. 70대의 레벨임에도 실질 스펙은 100레벨급.

시련의 탑에 들어온지도 대충 삼 년쯤 됐나.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이만한 스펙을 만들기에는 역시 짧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바깥세상도 이래저래 많이 변했다고 하던데, 만약 지금 스펙으로 바깥에 나가면 나는 어떤 등급의 헌터가 될까.

첫 목표였던 D등급 헌터는 당연히 옛 저녁에 넘었고, 최소한 A급은 따놓은 당상이지 않을까 한다.

S급까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현역 S급 헌터들은 대부분이 유니크나 에픽 클래스의 소유자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도 노멀 클래스, 내 스펙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딱 클래스의 등급 하나뿐이다.

"인벤토리."

인벤토리를 꺼내, 이번에 획득한 것을 포함해 그동안 모아둔 전직용 아이템을 꺼냈다. 클래스 북이라는 물건이다.

[포레스트 워리어의 클래스 북]

[에이션트 아처의 클래스 북]

[창기사의 클래스 북]

순서대로 레어, 유니크, 레어 등급의 클래스로 바로 전직할 수 있는 아이템. 사용 조건은 모두 충족해 있다.

즉, 언제든 사용만 하면 노멀 클래스인 [전사]를 버리고 다른 직업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거다.

하필 가장 높은 등급인 유니크 클래스가 궁수 계열인 [에이션트 아처]라는건 매우 아쉽지만.

다른 두 클래스북은 일부 스킬을 계승할 수 있는 전사 계열의 클래스.

당분간은 개인 단련 이외에는 스펙을 올릴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 클래스 체인지도 고려해 볼 만은 하다.

만약 스킬이 모두 계승되기만 한다면, 큰 파워업을 할 수 있겠지.

문제는 어디까지 계승이 될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거다. 내가 가진 스킬 대부분은 특이한 방식으로 손에 넣은 것이니.

순수하게 단련과 학습으로 습득한 스킬은 시스템적으로 계승이 되는 걸까?

1세대 도전자들의 기록을 뒤져봐도 그것과 관련해서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정보를 공유하고 기록하는 것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일단은 관두자."

스펙업이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제 클래스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다음 층으로 넘어가자. 누가 뭐래도 18층은 내가 무척이나 기다리던 층이니까.

마법적 요소가 유독 많이 등장하고, 많은 도전자가 마법사 계열로 클래스를 바꾸는 층.

고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법을 제대로 배워볼 수 있는 층이다.

137. 시련의 탑 18층

18층의 배경은 마법에 대한 주목도가 매우 높은 어느 왕국의 마탑이다.

마탑은 특정한 계열의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연구에 힘쓰는 곳으로, 현대 대한민국에 비교하자면 대학 연구실쯤 된다.

적색 마탑에서는 화염 속성 위주의 연구를, 청색 마탑에서는 물 속성 위주의 연구를 하는 식.

그리고 전이문을 통과한 도전자는, 그런 여러 마탑 중 무작위 한 곳에 전이되게 된다.

배경설정 상으로는 소환 실험을 진행하던 중, 무언가 사고가 발생해 애먼 사람이 소환된 상황이라고.

아무튼 그렇게 소환된 도전자는 나름 사고를 당한 셈이다 보니, 마법사들에게 나름의 대접을 받게 된다.

당연히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법을 접하고, 자질에 따라 직접 마법을 배워볼 수도 있는 구조.

덕분에 여기서 많은 도전자가 각 마탑의 속성을 따라 해당하는 계열의 마법사로 클래스를 바꾸기도 한다.

마법과 안 맞는 도전자들은 그냥 평범하게 퀘스트 라인을 따라가면 그만이고.

그리고 그 퀘스트 라인은 엘프 진영 퀘스트처럼, 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다음 층까지도 일부 이어진다.

엘프 퀘스트 만큼 거대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유명한 중대규모 진영 퀘스트인 셈.

차이가 있다면 진영을 도전자가 마음대로 고를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퀘스트 라인은 소환된 마탑의 색에 따라 결정되고, 도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협조와 비협조 둘 중 하나뿐.

이런 특성 탓에, 당연히 커뮤니티에서도 마탑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꽤 많이 돌아다닌다.

왜냐, 마법사라는 족속은 기본적으로 다 괴팍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작성자 : 강찬성#1551]

[제목 : 불쟁이년들 진짜 마법사 맞냐 시발?]

(사진)

이새끼들 연구하다가 뭐 삑났는지 극대노하더니 갑자기 파이어볼 터트리는데?

마탑주는 그거보더니 마침 자기도 뭐하나 불태우고 싶었다 ㅇㅈㄹ하고

갑자기 단체 캠프파이어하더니 불 잘못번져서 탑에 갇힘 시발 ㅋㅋ

이새끼들 마법사가아니라 그냥 미친 방화범새끼들인데

화염 마법을 다루는 적색 마탑은 시도때도없이 불마법을 마구 휘두르다가 화재를 내기 일쑤라던가.

물 마법을 다루는 청색 마탑은 근처를 지나다기만 해도 물벼락을 맞기 일쑤라던가.

빛 마법을 다루는 백색 마탑은 온종일 24시간 눈이 멀 것 같은 조명이 켜져 있다던가 하는 특징들.

- 사진 ㅅㅂ 지옥에서찍었냐? ㅋㅋㅋㅋㅋ

- 화재는 불평 ㅋㅋㅋㅋㅋ

- 불길뭐냐 ㅋㅋㅋ 너 살아나올수있냐?

- ㄴ 몰라시발 이거어케햐냐

- ㄴ 저기 세이브포인트있네 저기까지만 가라

- ㄴ 세이브포인트 ㅇㅈㄹㅋㅋㅋㅋㅋ

- 이건 ㄹㅇ 불평인데 ㅋㅋ

- 불평인척 가면쓴 얼평 ㅋㅋㅋ

- ㄴ 얼붕이들이 저걸 어케찍는데 ㅋㅋ

그리고 도전자들은 그런 마탑들간의 차이를 유희거리로 삼아, 커뮤니티 내에서 흔히 말하는 '갈드컵'을 벌이기도 했다.

상반되는 속성의 마법사들끼리는 성격도 상극이라, 퀘스트를 진행하는 도전자들 사이에서도 충돌이 꽤 있는 편이거든.

특히 마탑에 입적해 클래스를 변경한 이들은, 아예 서로를 깎아내리며 커뮤에서건 현실에서건 으르렁거리기도 한다나?

목구멍을 다 태워버리겠다느니, 면상에 얼음송곳 박아주겠다느니 하는 말도 꽤나 오갔던 걸로 안다.

반쯤은 장난이라고 하지만, 달리 말하면 나머지 반은 장난이 아니라는 거고.

뭐, 내가 있는 2661탑은 다른 도전자가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탑들 간 퀘스트 보상 차이가 좀 있다 보니, 어느 마탑에 소환되느냐는 꽤 중요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번개 속성을 다루는 황색 마탑이나, 그림자 마법을 연구하는 흑색 마탑에 소환되었으면 좋겠다.

전자는 내가 지금도 잘 다루고 있는 속성이고, 후자는 다크엘프와 연관이 깊은 속성이니까.

환각 마법을 다룬다지만 기껏해야 눈속임밖에 못 하는 자색 마탑 같은 곳은 정말 최악인데.

"황색, 황색, 황색...흑색, 흑색, 흑색."

나는 그렇게 주문처럼 중얼거린 뒤, 약간의 긴장과 함께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

전이문 특유의 울렁거리는 감각이 지나가며, 나는 곧 나를 둘러싼 마법진을 볼 수 있었다.

커뮤니티의 정보에 따르면, 소환된 순간 마법진의 형태를 살피는 것으로 어느 마탑에 소환됐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마법진이 발하고 있는 마력광의 색깔이 어떤 것인지, 마법진에 사용된 재료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법진에 새겨진 각 문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통해, 소환자가 누구인지도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다나.

소환자의 마탑에서의 입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퀘스트도 편해진다고 하니, 이것도 꽤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곧바로 마법진을 살폈다. 우선 마법진의 색깔은 뭐라 형언하기 힘든 거무튀튀한 색.

뭐지, 흑색 마탑도 이런 색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소환 순간을 찍은 스크린샷이 많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그러면 마법진의 재료를 살펴봐야 하는데...여기저기 퍼져 있는 재료 역시 뭔가 이상했다.

주먹만한 크기의 고깃덩어리, 피처럼 붉은 액체가 담긴 잔, 그리고 저 허연 건.

뭐야, 저거 설마 뼈인가?

소환에 쓰이는 재료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지만, 이런 재료로 소환을 진행한다는 말은 아예 못 들어봤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마법진에 박힌 문장을 살폈다.

문장 역시 소환에 임한 마법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소속된 마탑의 상징물은 꼭 문장에 박혀 있다고 들었다.

적색 마탑은 화염 도마뱀인 샐러맨더의 상징을, 청색 마탑은 물의 정령인 운디네의 상징을 넣는 식으로.

나를 소환한 마법사의 문장은 뿔이 돋아난 두개골을 한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는 형태였다.

내가 알기로 이런 상징물을 사용하는 마탑은 어디에도 없다.

-파앗!

잠시 후, 소환이 완료되며 시야가 단번에 확 트였다.

그리고 나를 반겨준 것은 묘하게 익숙한 악취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광경.

"흐하하하! 성공한 것인가! 마침내!"

기쁜 듯 웃어젖히는 남자의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단검, 그 발밑에 널브러진 것은 사람의 시체 여럿.

내 소환에 사용된 재료는 각각 인간의 심장, 인간의 피, 인간의 생 갈비뼈였다.

"이런 씨발."

아무래도 나, 마탑에 소환된 게 아닌 것 같은데?

**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재빠르게 사방에 마력을 퍼트렸다.

단시간에 주변 환경의 정보를 얻기에는 마력감지만 한 것이 없다. 오감을 모두 압도하는 성능의 육감이니까.

가장 먼저 탐지된 것은 인간, 이건 이미 눈으로도 확인했다. 내 소환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이 대충 오십 정도.

그 절반 정도가 마력을 갈무리하고 있는 마법사다. 하지만 뭔가 조금 다른걸.

내가 마법사를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이들이 품고 있는 마력은 뭔가 무겁고 불길했다.

마치, 마족의 마력처럼.

널브러져 있는 시체는 대부분 인간 여성 혹은 아이의 것,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시체에 마력이 남아있지 않다.

목숨이 끊어져도 그 육체에 깃들어 있던 소량의 마력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죽기 직전에 마력을 모두 빨렸거나, 시체로부터 마력을 추출 당한 것이 틀림없다. 거기에 이 재료들을 보면 명확하다.

"뭔 씨발, 악마 소환이라도 하려고 한 거야?"

나를 소환한 마법진은 인신공양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정규 마탑에서 이런 일이 자행될 리는 없겠지.

왜 이딴 곳에 소환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엄청나게 나쁜걸.

"보라, 동지들이여! 이 길버트 가잘이 마침내 모독의 짐승을 불러냈노라!"

나를 불러낸 소환자는 미친 듯이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동지들에게도 느껴지겠지, 저것이 가진 막대한 힘! 넘쳐흐르는 마력이!"

아무래도 마력감지를 위해 흩뿌린 내 마력을 느낀 모양인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까부는지 모르겠다.

내 힘이 얼마나 대단하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소환자는 이어서 선언했다.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라고.

그러더니 오른손의 단검을 역수로 쥐고, 바닥에 널브러진 어린아이의 시체를 질질 끌어당겼다.

아니, 마력을 전개해 살펴보니 시체가 아니었다. 죽기 직전이지만, 미묘하게 생기가 남아있다.

"뭐 하려는..."

-파직!

마법진 밖으로 나가려 움직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저항감이 느껴졌다.

모종의 마법적인 방해인가. 단순한 구속은 아닌 것 같고, 뭔가 결계 같은 걸 펼친 모양인데.

소환자는 어린아이를 붙들고, 단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 더럽혀진 피를 제물로, 모독의 짐승은 나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서슬퍼런 칼날이 아이의 심장을 향해 떨어진다. 결계에 갇힌 나는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을 리가 있나.

이건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딴 종잇장 같은 결계로 누굴 붙들어 놓겠다는 건지.

-와장창!

결계를 힘으로 깨부수고 아이를 노리던 단검을 손으로 붙잡아 막았다.

으적, 피가 묻은 칼날을 부러트려 버리자 소환자는 입을 떡 벌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딱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누굴 종으로 삼겠다고?"

일단 이 새끼는 죽이고 시작해도 된다.

138. 회색 눈을 가진 아이

누가 봐도 악마 소환 의식으로 보이는 현장.

왜 내가 여기에 소환되었을까, 짐작 가는 바는...솔직히 너무 많아서 오히려 잘 모르겠다.

마계를 정복해 버린 것 때문일 수도 있겠고, 마왕을 죽이고 칼레온을 빼앗은 것 때문일 수도 있겠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탑에서 최초로 입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어떤 조건이 마침 들어맞았을 수도 있을 거다.

이것도 억까라고 하면 억까인가. 내가 예외 상황에 놓인 게 한두 번도 아니다 보니, 이제 별로 신경은 안 쓰이긴 하는데.

아무튼 생각해 봐야 할 요소는 잔뜩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죽여도 상관없을 거다.

"뭐, 뭐냐! 억제 마법진은 아직 작동하고 있을 터!"

내가 결계를 무시하고 나오자, 크게 당황하며 나불거리는 소환자. 단순히 움직임만 막는 결계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억제라고 해봤자 천계 전체에 퍼져있던 그것만 할까. 일개 마법사가 내 힘을 어떻게 억제하겠어.

지난 층의 짐승들도 무슨 디버프를 거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자연스럽게 저항 판정이 떴었고.

[구속의 마법진이 당신을 구속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억제의 마법진이 당신을 억제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봉인의 마법진이 당신을 봉인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이거 봐라, 지금도 바로 뜨네. 마법진만 세 개나 준비해 둔 모양인데, 급이 떨어지면 숫자가 많아도 의미가 없지.

"백 명의 순결한 처녀를 제물로 바쳐 연성한 마법진이 통하지 않는다니! 대체 얼마나 고위의 존재가 소환한 거지…?!"

가만히 있으니 개소리를 지껄이는 소환자. 이깟 쓰레기 같은 결계를 만들겠다고 사람 백 명을 죽였단 말인가.

하는 짓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에, 재주까지 빈약하니 이만큼 혐오스러운 인종은 달리 없겠군.

-우드득!

나는 단검을 쥔 소환자의 손목을 가볍게 두 바퀴 정도 돌려서 뜯어냈다.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는 놈의 머리통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메이스로 후려갈겼다.

으적, 골통이 말 그대로 박살 나며 놈은 즉사했다. 놈에게 붙들려 있던 어린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딱 봐도 무척 험한 꼴을 당한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살아 있긴 하지만 상태가 보통 안 좋은 게 아니다.

겉도 별로 멀쩡하지는 않지만, 속이 완전히 엉망진창이군. 이건 살기 글렀겠어.

"하하하, 멍청한 길버트! 그러게 정석대로 계약진을 그리라고 말했건만! 저 모독의 짐승은 내가 차지하겠다!"

그러던 중, 소환자가 아닌 다른 놈들이 저마다 마력을 일으켜 뭔가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악마소환을 자행하던 놈들 아니랄까 봐 아주 콩가루구만, 이놈들도 싹 다 죽여도 되겠어.

나는 주저앉은 아이를 내버려두고, 무기를 장검으로 교체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오러를 길게 확장해 쓸 수 있는 장검이 더 편할 거란 계산에서였다.

숙련도에 따른 차이 때문인지, 이렇게 평소에 쓰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장검이 가장 오러를 씌우기가 쉽더라고.

[위압]

10층에서 손에 넣었던 위압 스킬을 광역으로 전개한다.

이건 마력을 흩뿌려서 적을 위축시키는 스킬인데, 그동안은 소모하는 마력량에 비해 효과가 약해서 잘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운용 방식을 한번 갈아엎고 오러를 익히면서 효율이 좋아졌으니, 이럴 때는 써봄직했다.

신체능력이 부족한 다수의 약한 적이 상대일 때 말이다.

-털썩, 털썩.

내 마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몇 놈들이 거품을 물고 픽 쓰러진다.

다른 마법사들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벌벌 떨었다. 각자 전개하던 마법에 몇 군데 구멍이 났다.

집중력 수준 하고는, 형편없구만.

[신속] 스킬을 사용해 바로 파고들어, 가장 많은 마력을 갖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놈은 제법 빠른 속도로 방어마법을 전개했지만, 오러는 그런 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목을 날려버렸다.

그동안 마법사와는 싸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다수의 마법사를 한 번에 상대하는 건 아예 처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육체 단련의 정도가 형편없기 때문인지, 이놈들은 내 접근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그냥 잡몹 무더기를 상대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없다.

-서걱!

길게 확장시킨 오러를 크게 휘둘러 주변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칼질 한 번에 최소 세 명이 휘말리고, 휘말린 놈들은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그대로 썰려나간다.

18층의 수준이래봤자 이 정도인 거겠지, 이딴 것들은 백이 있건 천이 있건 똑같은 병풍이다.

정체불명의 악마소환자들을 전멸시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업적 달성 : 혈사교 토벌]

**

마력감지를 전개해 주변에 다른 적이 더 없는지 살폈다.

범위 안에 다른 생명반응 없음, 딱 하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이 붙어 있는 어린아이만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마 이 혈사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인신공양에 쓰려는 목적으로 구해 온 꼬마인 것 같은데.

가능하면 살려주고 싶은데, 이건 이미 숨넘어가기 직전...아니, 이미 반쯤 숨이 넘어가 있다.

솔직히 내가 싸우는 도중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 아직도 어찌저찌 살아 있네.

하지만 내가 가진 포션으로 치료하긴 힘들 것 같은데, 차라리 숨을 끊어줘야 하나.

"엄마..."

죽어가는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듣고 넘기기 힘든 말이었다.

그래, 사람된 도리로서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해보자.

인벤토리에서 망토를 꺼내 바닥에 깔고, 아이를 그 위에 눕힌 다음 포션을 꺼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효과가 센 포션, 다만 이 포션에는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상처를 재생시키는 대신, 사용자의 기력을 소모한다는 것.

[초재생]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나는 상관이 없지만,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쇠약사를 유발한다.

특히 이렇게 숨넘어가기 직전의 꼬마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포션이 아니면 아예 살아날 가망이 없다.

엘릭서 같은 거라도 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낮은 확률일지라도 행운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주르륵.

아이의 상처 난 몸에 포션을 꼼꼼히 바르고, 입가에 조심히 포션을 한두 방울씩 흘려 넣었다.

그에 더해 오염을 씻어주고 독을 해독하는 효과가 있는 [정화] 스킬을 사용해 준다.

아이는 입가로 흘러들어오는 포션의 감촉에 살짝 눈을 떴다. 나는 말했다.

"살고 싶으면 마셔."

아이는 희미한 회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조금씩 목과 입술을 움직여 포션을 마셨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충분한 것 같다. 그 의지가 기력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환자를 돌보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인 응급조치나 구호법 정도는 대충 알고 있다.

다크엘프 정찰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알아두면 좋다며 가르쳐 주려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내 마력을 조금씩 불어넣어 포션의 효력을 가속하고, 아이의 기력을 보충해 준다.

"어휴..."

마법을 배울 생각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

이제 와서 생각난 건데, 이 정체불명의 집단을 전멸시키면 안 됐던 것 같다.

최소한 한 명 정도는 살려두고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싸우느라 그 생각을 못했네.

그뿐만이 아니라, 마법사 몇 놈을 살려서 이 꼬마를 살리라고 시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딴 수준의 마법사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대충 인신공양을 이용하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았겠어?

다른 마법사 몇 명의 목숨을 바쳐서 이 꼬마를 살린다거나, 뭐 그런 거.

아무튼, 아이의 치료를 시작하고 대충 십여 분이 지났다.

제대로 회복될 가능성은 정말 얼마 안 됐는데, 기적이라도 일어난 건지 아이는 잘 회복되었다.

완전히 멀쩡해진 건 아니지만, 아무튼 죽음의 위기는 벗어난 상태.

"...악마님이야?"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살려준 사람한테 말이 심하네.

뭔가 특별한 기믹이나 장치가 있어서 내가 악마로 보이는 건가...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악마 소환 의식에서 소환되었으니, 생긴 거랑은 별개로 그냥 악마로 여기는 걸까.

"이상한 아저씨들이 악마님을 불러낼 거라고 했어...나를 써서 악마님에게 소원을 빌 거라고 했어."

그러고보니, 이 애의 목숨을 이용해서 나를 종으로 삼겠다니 뭐니 했었지. 제물이었나.

"악마님, 내 소원도 들어주면 안 돼? 나, 엄마한테 가고 싶어..."

아이는 나를 악마라고 부르고 있지만, 악마한테 뭔가를 부탁하는 눈치가 아니다.

나이도 어리고, 혹시 악마가 뭔지 모르는 건가. 대충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같은 거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람된 도리로서 일단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이런 부탁까지 들어줄 의리는 없지.

[에픽 퀘스트 발생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내 눈앞에 대뜸 떠오른 이 푸르스름한 알림창만 없었으면 말이다.

"그래, 꼬맹아."

잠깐이지만 마왕 소리도 들었으니까, 그냥 악마인 셈 치지 뭐.

꼬맹이 하나 엄마한테 데려다 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139.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설명 : 당신은 인신공양을 통해 막대한 힘을 손에 넣고자 하는 마법사 집단인 혈사교를 토벌했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발견한 아이는 혈사교의 인신공양에 쓰일 예정이었던 귀중한 제물이었죠.

당신의 도움으로 아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런 곳에 혼자 방치된다면 결국 죽게 될 겁니다.

철썩같이 당신을 악마라 믿고 있는 불쌍한 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십시오.

[퀘스트 목표]

1. 아이를 보호하기.

2.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선택).

3. 아이를 엄마에게 데려다 주기(선택).

그냥 사소한 서브 퀘스트나 생길 줄 알았는데, 대뜸 에픽 퀘스트가 튀어나올 줄이야.

물론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지. 에픽 퀘스트는 그 규모도 보상도 매우 크니까.

마력강화 기능이 달린 펜던트나 에르웬의 검, 그리고 [강철의 혼]이라는 특성등.

모두 7층에서 시작된 에픽 퀘스트중에 얻은 것이었으니.

당장 이 꼬맹이를 도와주는 게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이득을 줄지 모른다. 성장에 목마른 내게는 너무나 기쁜 기회.

나는 퀘스트를 수락하고, 곧바로 아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소환된 장소는 어떤 저택의 지하실이었다. 중세 내지는 근대 풍으로 지어진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악마 소환 의식을 위해 일부러 저택을 비웠던 걸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군.

"자 그럼...이제 뭘 어째야 하나."

마력을 넓게 퍼트려 확인해 본 결과, 이 일대는 나무가 울창한 숲이다.

엘프의 대수림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이 오가기 상당히 어려운 구조. 저택을 짓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다.

아마 악마 소환 의식을 위해 일부러 외진 곳에 자리를 잡은 거겠지. 덕분에 여러모로 곤란해졌다.

[18층 전역 지도(완성본)]

오픈 커뮤니티에서 입수한 지도에는 내 위치로 추정되는 부분이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천계 때처럼 맵의 바깥에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층에서는 아예 사용되지 않는 지역인 탓에 기록되지 않은 것 같다.

각 지역의 지도는 어디까지나 도전자들이 가진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지다 보니까, 가끔 이런 곳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적당한 의자 하나를 주워다가 회색 머리칼의 꼬마를 앉혀두고 물었다.

"자, 지금부터 네 엄마를 찾으러 갈 건데…어디로 가야 하는지 혹시 알아?"

"우리 엄마는 마법사야. 마법사가 잔뜩 있는 곳으로 가면 찾을 수 있어..."

"아하, 마탑 소속이라 이거군. 엄마가 어디 마탑 소속인지는 알아?"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목적지를 정하기가 힘들다.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더 건넸다.

엄마가 어떤 마법을 쓸 수 있었는지, 엄마 말고 다른 가족은 없는지, 여기에는 어쩌다가 오게 된 건지.

하지만 꼬마는 무엇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순서대로 몰라, 없어, 몰라, 였다.

"엄마가 앉아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는데…이상한 아저씨들이 나타나서 나한테 보자기를 씌웠어."

대충 꼬락서니를 보고 납치당했거니 생각은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울창한 숲 속, 목적지도 불분명하고 길도 모른다. 시작부터 답이 없네.

"그래, 일단 나가자."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일단 숲에서 빠져나가서 도심으로 들어가면 뭐든 되겠지.

숲이 상당히 넓긴 하지만, 나도 다크엘프 정찰대에 있으면서 배운 것들이 여럿 있다.

마력감지까지 넓게 전개하면서 다니면 길이나 방향을 잃지는 않겠지. 숲을 주파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 꼬마가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

수면이나 식사도 생략할 수 있는 나와는 다르게, 이 녀석은 먹고 잘 필요가 있다. 시간이 꽤 지체될 거다.

거기에 숲 속에 몬스터까지 있으면 더 늦어질 테고...이거 은근히 귀찮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미 약속한걸.

**

숲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에게 옷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길도 제대로 트여있지 않은 험한 숲 속을 거적때기만 입고 돌아다닌다는 건 보통 미친 짓이 아니다.

나는 일단 인벤토리에서 남는 천 옷을 몇 개 꺼내서, 대충 북북 찢어 아이에게 맞는 크기로 만들어 주었다.

이 차림도 여전히 거지꼴이긴 하지만, 피 묻은 거적때기 차림보다는 백 배 낫겠지.

"나 이거 불편해."

"참아, 안 입으면 다쳐."

"진짜 불편한데."

나한테 [재봉] 스킬이 있었다면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줄 수 있었겠지만, 그런 스킬이 나한테 있을 리가 없으니.

바늘이라도 하나 있으면 간단하게 바느질이라도 해서 흉내쯤은 내 볼 수 있었겠지만, 내 인벤토리에 있는 바늘은-

[맹독 바늘(마비)]

-뭐 이런 것밖에 없거든, 아무리 독을 씻어내고 정화해도 이걸로 만든 옷을 입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무튼 그렇게 간단한 채비를 마치고, 나는 방향을 정해 아이를 등에 업고 숲으로 향했다.

쪼그만 어린애의 보폭으로 걷는 것보다는 이게 그나마 빠르겠지.

다음에 아예 아기 포대기 싸는 법을 좀 알아봐야겠다. 커뮤니티에 물어보면 한 명쯤은 알려주겠지.

-저벅, 저벅.

한손에 든 칼로 튀어나와있는 가지를 쳐내며, 한동안 조용히 산길을 걸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산속을 걸어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엘레노어가 이런 걸 또 좋아했었지.

요정이 춤추는 호수를 오갈 때였나...나랑 있으면 같이 걷기만 해도 좋다면서, 드문드문 묘한 추파도 날렸었고.

9층까지 올라가면서 그런 밝은 모습은 많이 없어졌지만, 내 기억에 엘레노어는 지금도 웃는 표정으로 남아 있다.

숲 밖으로 나가 더 많은 세상을 접해보기를 원했던, 꿈이 가득한 별빛의 눈동자.

모순에 빠진 채로 마냥 괴로워하기만 했던 나와는 무척이나 다른 눈이어서, 괜히 거북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흘러, 엘레노어가 나와 닮은 눈을 하게 되었을 때- 더욱 사무치는 무언가가 있었고.

언젠가 이 탑을 무너트리고 엘레노어를 다시 살려낸다면, 그때는 나도 마주 웃어줄 수 있을까.

"허, 참."

조용히 걷기만 하니까 별생각이 다 나네, 나도 참.

**

그렇게 한동안 옛 생각을 하며 숲을 걷던 중이었다.

"악마님은 날개가 없네."

등에 업힌 꼬마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해왔다. 아무리 만져봐도 날개가 없다고.

"악마님은 뿔이랑 날개랑 꼬리가 있다고 했는데, 왜 악마님은 없어?"

"악마가 아니니까."

"악마님은 악마님이잖아. 악마님이라서 내 소원 들어주는 거 아니야...?"

별 생각 없이 말했더니 갑자기 이야기가 묘하게 됐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말재주도 없고 아이 돌보기도 해본 적 없는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상황인데.

아, 그러고 보니까 마족 중에는 날개가 없는 놈들도 꽤 많았었지.

"악마라고 다 날개가 있는 건 아니야. 가끔 없는 녀석들도 있어."

사실 악마랑 마족은 다른 종족이긴 하지만, 이 꼬마가 악마라는 게 뭔지 어떻게 알겠어.

"그보다, 악마님이라고 부르지 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뭐라고 불러? 악마님은 이름이 뭐야?"

"진혁, 서진혁이야. 아무렇게나 불러."

"그럼 진혁악마님이야?"

"악마라고 부르지...아니다, 네 마음대로 해."

악마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뭘 바라겠나. 이럴 거면 그냥 악마님이라고 부르게 놔둘 걸 그랬다.

참, 그러고 보니 나도 이 꼬마의 이름을 모른다.

예전에는 일부러 NPC들의 이름을 신경 쓰지 않으려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그럼 네 이름은 뭔데."

"내 이름...에인."

"부르기 쉬워서 좋네."

저택 지하에서 죽였던 놈들 이름은 벌써 기억도 안 나는데, 이렇게 짧은 이름이면 외우기도 부르기도 딱 좋겠다.

"엄마도 비슷한 말 했어, 에인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댔어. 진혁악마님도 그래?"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다...어째 좀 이상한 말이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나저나 에인이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다른 서버의 NPC랑 이름이 겹쳤나?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하긴 하던데.

-찌릿.

그 때, 넓게 펼쳐둔 마력감지에 빠르게 다가오는 생명반응이 느껴졌다.

대충 곰 정도의 덩치에 속도는 자동차 수준, 보유하고 있는 마력량은 꽤 많은 편. 몬스터로군.

7층에서 만났던 룬 베어와 비슷한 몬스터인듯 싶다. 별것도 아닌 놈이지만, 꼬마를 지켜야 하니까 좀 귀찮게 됐네.

나는 업혀 있던 꼬마를 잠시 내려놓고, 쇠구슬 하나를 꺼내서 마력을 담아 집어던졌다.

-빠직, 빠직, 쾅!

여러 개의 나무를 돌파하고 몬스터의 머리에 적중한 쇠구슬이 파공음을 울렸다.

생명반응이 사라졌다. 이거 한 방에 죽을 정도면 역시 약한 놈이었군.

그나마 한 마리여서 다행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력감지에 연달아 반응이 잡혔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날아다니는 놈도 있는 것 같고, 토끼사냥을 하듯 포위망을 펼치고 사방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냥 야생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지능적인 움직임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쇠구슬을 몇 개 더 꺼냈다.

이 죽다 살아난 꼬마를 업고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조금만 빨리 움직여도 꼬마의 몸에 부담이 가해질 테니까.

그렇다고 꼬마를 그냥 내버려두고 혼자 싸울 수도 없으니, 거리가 좁혀지기 전에 최대한 숫자를 줄일 필요가 있다.

-후웅, 쾅!

쇠구슬 하나를 던질 때마다 한 놈씩, 확실하게 숨통이 끊어진다. 이 정도면 별문제는 없겠다.

에픽 퀘스트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쉬운걸.

 

140. 천부의 재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