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50

140. 천부의 재능

우리를 노리고 접근한 적의 숫자는 총 마흔 정도쯤 되었다.

구성은 룬 베어와 비슷한 짐승형 몬스터가 대부분에, 독수리를 닮은 비행형 몬스터가 몇 있는 정도였다.

특기할 만한 부분으로는 몬스터 중 웨어울프가 있었다는 점이 있겠다. 2층에서 보스로 등장했던 그거 맞다.

상층에 올라가면 잡몹으로도 등장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한데, 18층은 딱히 상층도 아니지 않나.

물론 2층의 보스 개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 같지만, 일개 잡몹치고는 매우 강한 축에 속할 거다.

그런 놈들이 집단으로 지능적인 움직임을 취한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과연 에픽 퀘스트라고 해야 하나, 초장부터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내 스펙이 그보다 훨씬 높아서 괜찮았지만.

“굉장하다, 진혁악마님도 마법사야?”

싸움이 끝나고, 원거리에서 쇠구슬을 던져 모든 몬스터를 제압해 버린 나를 보며 꼬마-에인이 그렇게 물었다.

진짜 악마인 건 아니지만, 악마한테 마법사느냐고 묻는 건 뭔 경우래.

그리고 방금 내가 한 행동의 어디가 마법처럼 보인 건지 모르겠다. 그냥 쇠구슬만 던졌잖아.

저 꼬마의 눈에 이게 마법처럼 보인다면, 엄마가 마법사라는 말의 신뢰도까지 좀 떨어지는데.

별 것도 아닌 일을 진짜 마법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막, 엄마 손은 약손 그런 것처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엄마의 직업을 헷갈리지는 않겠지? 그냥 신기해서 그렇게 말한 거겠지?

“마법사 아니야, 방금 그건 마법도 아니고.”

“그치만 마법 같았는데.”

“대체 어디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꼬마 에인은 회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냥 마법 같았어. 마법이랑 똑같았는걸.”

이런 어린아이의 표현력에 무엇을 기대하랴,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보다, 몬스터랑 싸우느라 시간이 훅 지나가 저녁이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소환되었던 시간부터가 늦은 오후쯤은 되었던 모양이다. 기온도 확 떨어졌고.

어차피 내가 업고 갈거긴 하지만, 아이의 체력을 고려해서라도 오늘은 이쯤에서 쉬었다 가야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 저택에서 하루쯤 쉬었다가 나오는 것도 괜찮을 뻔했네.

여기서 바로 멈추긴 좀 그렇고, 몬스터들의 시체에서 가능한 한 멀어져서 적당한 자리를 하나 찾도록 하자.

“해도 졌으니까 조금만 더 가서 쉬자. 아직 춥지는 않지?”

“응, 나 안 추워.”

“나중에 병나지 말고 지쳤으면 바로바로 말해.”

나는 에인에게 그렇게 일러두고, 적당한 자리로 이동해서 야영지를 차리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엘프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 만큼 숲 속에서 밤을 보내는 일에는 익숙하다.

그것 말고도 평소에 종종 야영하는 만큼 몸에 익기도 했고, 관련된 아이템도 많은 편.

이 숲 속은 나무며 덩굴 같은 것들이 빽빽해서 야영지를 차릴 공터가 마땅히 없긴 한데.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공터야 만들면 그만이니까.

“진혁악마님, 우리 나무에 올라가서 자는 거야?”

여기서 야영할 방법이 달리 없는 것처럼 보였는지, 에인이 그렇게 물었다.

“아니, 기다려 봐.”

나는 인벤토리에서 긴 장검 하나를 꺼내서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그걸로 주변의 나무를 싹싹 베어냈다.

무쇠도 두부처럼 갈라버릴 수 있는 오러가 있으니, 벌목은 일도 아니지.

“진혁악마님 대단해, 마법 같아.”

그렇게 나는 몇 분 만에 야영에 필요한 공간을 완벽히 확보했고, 빠르게 야영지를 차려내었다.

그나저나 얘는 이젠 나무를 베는 것마저 마법 같다고 하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건 신기해하지도 않으면서.

에인의 머릿속에서 마법 같은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 건지, 감이 안 온다.

**

나는 어린애들이랑 부대끼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돌보는 것 자체는 잘하는 편이다. 이는 내 성장 배경에서 기인한다.

가족도 친척도 엄마 한 명뿐인 사고무탁의 편모가정,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일상이었다.

엄마는 나를 혼자 두는 것을 꺼렸지만, 그렇다고 정신없는 일터로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나는 방과 후에는 항상 복지센터에 맡겨져 있게 되었다.

복지센터에는 다양한 사연의 아이들이 모여든다. 나랑 비슷한 환경의 아이들도 있었고, 더 심한 환경의 아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나보다 어린아이들도 많이 있었고, 복지사 선생님들의 손은 아이들의 숫자에 비해 항상 부족했으니.

아이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상황이 종종 일어나고는 했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고.

돌이켜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마냥 엄마 등골만 빼먹던 호로새끼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옴뇸뇸.

내가 만들어 준 잡탕죽을 맛있다는 듯이 먹고 있는 꼬마를 보니 저절로 그때 생각이 난다.

내 인벤토리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지만, 이것들을 당장 에인에게 먹일 수는 없었다.

상태를 보니 꽤 오랜 시간 기아 상태로 지낸 듯싶은데, 난데없이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안 될 테니.

치즈돈까스 도시락이야 당연히 안 될 테고, 화이트롤은……어떨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보류.

그래서 일단 도시락에 들어있는 밥이랑 잡다한 재료들을 섞어서 죽을 만들어 주었다.

죽 만드는 법은 잘 몰랐지만, 이럴 때 쓰라고 커뮤니티가 있는 거 아니겠어?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도움요청)오래굶은 애한테 치돈먹이면 당연히 안되겠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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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 애한테 먹일만한거 있을까

없으면 대충 분해해서 죽이라도끓여줘야할것같은데

먹여도 될만한거랑 아닌거 좀 꼽아주셈

죽 만드는 법도 좀 알려주면 ㄳ하겠음

물론 글을 올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댓글에 개소리만 달렸지만, 그거야 뭐 늘 있는 일이고.

참고로 이 글에 달렸던 주된 개소리로는 ‘치돈 줄’ 이라거나 ‘와 농농이 뭐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웃긴 건 ‘농ㅋㅋㅋ쭉ㅋㅋㅋ’ 이라고 댓글을 단 놈이 이후 가장 자세하게 여러 팁을 줬다는 점인데.

듣기로는 원래 아동복지사 일을 하던 도전자라는데, 세상에는 진짜 별의별 놈이 다 있는 것 같다.

-옴뇸뇸.

뭐, 내 부족한 요리실력으로 만든 잡탕죽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거적떼기를 입고 있어서 좀 빛이 바래는 감도 있지만, 어쨌든 귀엽게 생긴 꼬마니까.

아마 열 살만 더 먹어도 굉장한 미소녀가 될……어라, 그러고 보니까 얘 남자야 여자야.

이쁘장하게 생기긴 했는데 묘하게 헷갈리네. 하필 어린애다 보니까.

“야, 너 남자냐 여자냐.”

“몰라.”

“그걸 왜 모르는데.”

얘는 뭔데 자기 성별도 몰라? 마력을 전개해 몸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긴 한데.

조금 전까지 ‘농ㅋㅋ’ 거리는 댓글을 보다 와서 그런지,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 느낌이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어린애고, 엄마한테 데려다 주기만 하면 그만인데.

-옴뇸뇸.

남자애건 여자애건, 하는 짓이 귀엽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도 하고.

**

식사를 마친 에인에게 담요와 망토를 겹겹이 덮어주고, 모닥불 앞에 앉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당분간 그건 힘들 것 같다.

그러니 마법 대신 남는 시간 동안 검술 단련이라도 해야겠다.

어차피 꼬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동행하는 동안은 자지 않고 지키고 있을 필요가 있으니.

이런 자잘한 시간도 유효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탑의 도전자지.

검령이 보여줬던 빛나는 원을 무기에 씌우는 기술,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꽤 유용해 보였다.

그걸 베껴내는 것을 목표로, 일단은 다양한 무기에 균등하게 오러를 씌우는 연습부터 시작하자.

-덜그럭.

인벤토리에서 여러 무기를 꺼내어 바닥에 늘어놓았다.

주무장으로 사용하는 직검이며 창이나 도끼 같은 것과, 부무장으로 애용하는 단검과 방패 등.

차례대로 하나씩 집어서 겉면에 오러를 씌우고, 각각의 MP 소모량이나 오러의 유지력을 체크한다.

역시 체감했던 대로, 익숙한 직검 타입이 연비와 위력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안정적이다.

그 다음으로는 단검이나 손도끼 같은 부무장이 뒤를 따르고, 그다음으로는 둔기와 대형 도끼가 뒤따른다.

아무래도 무기의 길이나 오러를 씌워야 하는 면적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듯하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 하기에도 뭐한 것이, 가장 효율이 나쁜 무장은 내게 익숙한 방패였다.

형태며 면적이며 익숙함이며, 모든 면에서 직검의 바로 다음가는 무장인데도 말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방어구에 두르는 건 원래 효율이 안 좋다던가?

아니, 어쩌면 재질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우웅!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완드를 꺼내 오러를 둘러보았다.

내가 다루는 그 어떤 무장보다도 부드럽고 빠르게 오러가 둘러진다.

미스릴은 단순히 단단할 뿐만이 아니라, 마력의 전도 효율이 대단하기로 유명한 재질.

장비 욕심은 없는 편이지만, 이게 완드가 아니라 단검 정도만 됐어도 참 좋았을 거란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템 재질에 따라 스킬의 전개 능력이 달라지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닌데 말이지.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인지,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검령 녀석은 나랑 다르게 순수하게 검만 쓰는 검사여서, 이런 건 잘 모르는 것 같던데.

-부스럭.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야영용 텐트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꼬마 에인이 기어나왔다.

딱히 큰 기척은 안 냈는데, 오러의 불빛이 새어 들어갔나?

“왜, 화장실?”

에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다.

“진혁악마님이 마법을 써서 깼어.”

그게 뭔 소리람, 오러의 불빛 때문에 깼다는 뜻인가……아니, 잠깐만.

그러고보니까 이 녀석, 내가 오러를 쓰거나 마력을 사용할 때마다 마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건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는데, 유독 오러를 쓸 때만 그랬지.

마법같았다, 마법이랑 똑같았다……표현력이 부족해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하다.

이 꼬마는 마력을 느끼고 있는 거다. 마법사의 자식이라서 그런 건가?

게다가 내 오러에서 유출되는 마력은 그리 크지도 않은데, 그걸 자다가도 느꼈다고?

뭐야 이 꼬마, 마력 감응력이 어떻게 되먹은 거지.

141. 마법사의 길

만약 에인이 내가 발휘하고 있는 오러에서 살짝 누출된 마력을 감지한 거라면.

오롯이 선천적인 마력감응력만을 발휘해, 자던 중에 그걸 느끼고 깨어난 거라면-이 꼬맹이의 마력감응력은 장난이 아닌거다.

선천적으로 강력한 마력감응력을 타고나는 엘프 중에도 그게 가능한 녀석들은 얼마 없을 거다.

다크엘프 최고의 그림자마법사인 엘레노어도 될까 말까 한 수준인데……아니,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이 꼬마는 에픽퀘스트의 트리거가되는 NPC다. 엘레노어랑 같은 포지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람이랑 아무런 차이가 없는 언동도 그렇고, 최상급엘리트 NPC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혈사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일부러 준비한 중요한 제물아닌가.

그렇다면 뭔가 특별한 힘이 잠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허참, 그냥 불쌍한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진혁 악마님은 안 자?”

“어.”

“왜 안 자?”

“악마는 원래 안자.”

나는 눈을 비비며 질문 공세를 해오는 에인에게 대충 대답했다.

그러자 에인은 꾸물거리며 기어나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며.

나는 에인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로 손을 옮긴 다음, 조그만 돌멩이에 살짝 오러를 둘렀다.

그러자 에인은 ‘응?’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내쪽을 쳐다보았다. 이건 확실하다.

이 꼬마는 내가 작정하고 약하게 두른 오러를 아무렇지 않게 감지해냈다.

허참, 별 경우를 다 보겠네. 이런 녀석이 어떻게 납치 같은 걸 당한 거야?

아니, 예민하기만 하고 전투능력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는구나.

응? 잠깐만, 그것도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이 녀석한테 정말 전투능력이 없는지는 모르는 거 아닌가?

내가 소환되었을 때는 애초에 죽어가고 있었고, 지금도 많이 쇠약해진 상태니까.

체내의 마력량은 희박하지만, 사용 효율이 좋다면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야 꼬마야, 엄마가 마법사라고 했지?”

“응, 우리 엄마 마법사야.”

“그럼 엄마한테 마법을 배운 적은 없어?”

에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어린애라 어쩔 수 없는 건가.

“나도 마법 배우고 싶었는데,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엄마가 위험해서 안된다고 했어.”

어린애 라고는 하지만 그게 위험할만한 일인가,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도통 모르겠네.

정 마법이 위험하면 이론만 가르쳐줘도 될 거 아닌가. 애초에 마법사들은 그런 족속 아니었나.

죄다 괴팍하고 음침하면서 마법에 진심인자들, 더 높은 마법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자들.

상식적인 대부분의 마법사는 그래도 선을 지키고 있지만, 인신공양에 빠지는 이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마법사들이 이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를 그냥 썩혀둘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뭐, 자세한 사정을 아는 것도 아니라 무슨 추측을 해도 억측일 뿐이지만.

“근대 진혁 악마님, 나 소원 하나 더 빌어도 돼?”

에인은 모닥불을 쳐다보더니 갑작스레 그렇게 물었다. 나는 말해보라고 했다.

“나도 진혁 악마님처럼 마법 쓰고 싶어. 우리 엄마한테 멋있는 마법 보여주고 싶어……”

엄마를 만나고 싶다, 엄마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거참, 어려운 이야기를 하네.

시련의 탑이 나를 의식하고 안배한 것이라는 생각은……너무 과한 걸까?

그보다, 내가 쓰는건 마법 아니라니까.

**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가르쳐주고 싶지만, 애초에 나도 마법을 배우려고 18층에 온 거다.

나도 몰라서 배우려고 온 건데 뭘 가르쳐주겠어, 하지만 마법이 아닌 다른 거라면 가르쳐줄 수도 있지.

오러도 결국 마력을 이용하는 기술이고, 기초적인 마력의 운영법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그걸 이 꼬마가 이해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그것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할까 싶고.

“엄마가 엄청 좋아하는 마법 있어, 내가 그거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어……”

에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에인에게 그 마법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가 맨날 맨날 보고 있는 마법, 나 그거 기억하고 있어.”

에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저 멀리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와, 땅바닥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뭘 그리는 건가 싶었지만, 조금 기다려보니 금방 알 수 있었다.

공간이 좁아서 완전히 그려내지는 못했지만, 그건 분명히 모종의 마법진이었다.

그것도, 마법적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복잡하고 수준이 높은 마법진.

아무리 봐도 그냥 되는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걸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고?

자기 엄마가 어느 마탑의 마법사인지도 모르고,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꼬마가?

“나 이거하고 싶어.”

조막만 한 손으로 자신이 그린 마법진을 가리키고 있는 에인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검령 놈이 내 마력강화와 검술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좀 알 것 같다.

너무도 기형적으로 발달한 재능의 편린, 확실히 그냥 두고 보기 힘드네.

“그래, 알았어.”

“진짜?”

“마법 가르쳐줄게.”

정말로 마법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마력운용의 기초만큼은 제대로 가르쳐주자.

이 선택이 나중에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돌아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괜찮다.

엄마라는 사람이 ‘위험하다’며 마법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괜찮다.

내가 여태까지 뭘 위해서 강해졌는데, 어떤 일이 벌어져도 대처하기 위해서 아닌가.

“나도 어디까지 가르쳐줄 수 있을지는 몰라, 배우는 건 어디까지나 네 몫이고.”

당장 에인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일이 나중에 독으로 돌아오게 될지라도.

“그래도 괜찮으면 가르쳐줄게.”

이 어마어마한 원석이 제대로 깎이는 순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궁금해서 못 견디겠다.

[퀘스트발생: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재능]

마침 시스템도 이렇게 내 선택을 도와주고 있지 않나.

**

새로 생긴 퀘스트는 기존의 에픽퀘스트의 파생형태로 등록되었다.

자체 보상은 없지만 에픽퀘스트의 전체 진행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엘프층에서도 몇 번 있었지.

따지고 보면 보상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보상을 모른다는 것에 가깝다. 일종의 분기점 인 셈.

아무튼 나는 에인에게 마력운용을 가르쳐주기로 했고, 그 시간은 하루에 두시간정도로 정했다.

낮에는 숲에서 나가기 위해 움직여야하고, 밤에 시간을 많이 쓰기에는 에인의 체력이 부족하다.

마법을 배우겠다고 설치다가 괜히 병이라도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두 차례 몬스터 무리를 조우한것 이외에는 별 탈없이 숲을 전진했다.

중간중간 에인의 식사와 휴식을 위해 멈춰 서긴 했지만, 꽤 많이 전진했다.

에인의 식사는 여전히 대충 끓인 잡탕 죽이었지만, 이 꼬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맛있게도 먹어댔다.

-옴뇸뇸.

내가 끓인 거긴 하지만, 나도 먹으면서 이게 뭔 맛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안쓰럽다고 해야 할까,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오죽 오래 굶었으면 저럴까 싶기도 하고.

시련의 탑도전자들의 소울푸드인 치돈도시락을 먹이면 얼마나 잘 먹을까 궁금하다.

물론 커뮤니티에 상담한 결과 당장 먹일 수 있는 음식은 저 잡탕죽 하나뿐이지만.

조금씩 체력도 회복되는 것 같고, 숲을 나갈 때쯤이면 뭐든 먹여줄 수 있겠지.

도시로 가면 식당도 있을 테니, 아예 뭐든 사먹이는 것도 괜찮겠네.

“그게 그렇게 맛있냐?”

-끄덕끄덕.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그리고 그 날밤, 야영준비를 마치고나와 에인은 다시 모닥불을 끼고 앉았다.

이제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법수업, 정확하게는 마력운용수업이 시작되는데.

생각해 보니까, 마력운용을 가르쳐주는 데에는 치명적인 애로사항이 하나 있었다.

“어……그러니까.”

정작 그걸 가르쳐줘야 하는 내가 마력운용의 이론을 잘 모른다는 것.

이론을 아예 안 배운 건 아니지만, 나는 엘레노어와의 심상공유를 통해 마력감응을 깨우쳤었다.

그 이후에도 항상 직감에 의존해서 마력을 다뤄왔고,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완전히 내식대로였다.

여기까지는 좋다. 내가 실전에서 익힌 그 방식을 그대로 전해주면 그만이니까.

무엇보다 에인은 이쪽으로 굉장한 재능을 가진 것이 분명하지 않나.

하지만 문제는 정작 내가 다른 사람한테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에 쥐약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말재주부터가 파멸적인 수준인데, 대체 무슨 수업을 하겠어?

커뮤니티에 올린 정보글 몇 개도 ‘가독성ㅈ같네’ 같은 소리를 들은 내가 말이다.

“진혁 악마님, 나 하나도 모르겠어. 나 마법 못쓰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근데 진혁 악마님이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미안하다 얘야, 네가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병신이라 그래. 오랜만에 하는 자학이군.

어쩐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나이트엘프의 비술이라도 재현해 봐?

하지만 그 비술은 여러 모로 문제도 많고, 나 혼자서 제대로 재현해 낼 자신도 없다.

아니, 사실 방법은 있지만 내키지 않을 뿐이다. 어쩔 수 없구먼.

[검령각성]

나는 인벤토리에서 칼레온을 꺼내, 검령을 소환했다.

“쳇, 요즘 좀 잠잠해졌다했더니 바로 이런 식인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고 소환된 검령은 대뜸 눈앞에 있는 에인에게 오러를 담은 검을 휘둘렀다.

“이 새끼가 미쳤나.”

-깡!

검령칼레온, 사망.

142. 육아일기

아무래도 검령은 내가 매일같이 전투 중에 불러내던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모양이다.

대뜸 소환되자마자 눈앞에 있는 꼬마 에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려 했던 건 그래서였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어린 꼬마를 보자마자 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튼 나는 검령을 다시 불러내고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꼬마는 적이 아니라고.

그리고 나는 이 꼬마에게 마력운용의 기본을 알려 주려고 한다고.

그 후에 하는 말이, 적을 외견만으로 판단하는 건 안좋은 버릇이라나 뭐라나.

외견이 어린아이라고 해서 그 속까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 같다는데.

조금 흥미가 있어서 들어 보니, 마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품은 인간은 노화가 급속도로 느려진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바깥 세상의 헌터들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외모가 많았던 것 같다.

전에는 그냥 돈을 처발라서 그런 줄 알았었는데……아무튼.

“그래서 나를 불러냈단 말이지, 이해했다.”

“그래 임마, 바로 칼부터 꺼내면 쓰나.”

“그걸 네가 말하느냐, 이 썩을 놈아?”

검령은 뭐라고 불평을 하려는 듯 했으나, 내가 미스릴 완드를 들어올리자 바로 입을 닥쳤다.

도구 주제에 주인한테 깝치고 있어, 뒈질라고 말이야.

아무튼 나는 그렇게 검령을 불러내 에인과 대면시켰다. 에인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검령을 올려다보았다.

검령은 곧 마력을 일으켜 에인의 몸을 훑어보았다. 에인이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력을 매우 예민하게 감지하는 에인에게 저런 탐색은 말 그대로 온몸을 더듬어지는 것 같겠지.

씁,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좀 불건전한데?

노숙자 행색의 늙은이가 귀여운 꼬마를 마구 더듬어대며 추행하는 그림과 상황이잖아.

“흐음……이 비린내나는 꼬맹이가 그렇게나 대단한 원석이라고……?”

“어, 굉장한 녀석이야.”

“이딴 게 말이냐? 내가 보기에는 그냥 쓰레기 같다만?”

아니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한 대 더 맞고 싶어서 환장했나.

“마력의 총량은 개미 눈곱만도 못하고, 사지에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뼈도 얇고 빈약하군.”

아,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마법 쪽의 재능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골병이 들었던 적도 있는 것 같으니, 나이가 먹어도 기골은 형편 없겠어.”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검사를 보는 눈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검을 들면 한 달 안에 객사할 쓰레기 아니냐. 네놈도 보는 눈이 형편없군.”

근데, 아무리 그래도 애를 눈앞에 두고 못하는 말이 없네, 뒤질라고.

-깡!

“크헉!”

하여튼 이 검령 새끼는 꼭 안해도 될 말을 해서 매를 번다니까.

애초에 누가 평가질하라고 꺼낸 줄 아나, 마력운용이나 잘 가르치란 말이야.

나는 검령의 대가리를 연타해 다시 돌려보내고, 에인의 눈치를 잠시 살폈다.

다행이게도 에인은 딱히 주눅든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려운 말이라 못 알아들은 건가.

인벤토리에서 칼레온을 꺼내 다시 하급 마법석으로 검령을 소환하고, 다시 설명해 주었다.

“마법 쪽이라면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고얀 놈 같으니……”

검령은 투덜거리면서도 의외로 마력운용을 가르쳐 주라는 내 명령에 순순히 응했다.

나한테 기술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는 분명 존나게 비싸게 굴었던 것 같은데, 괜히 꼽네.

“자, 어린 애송아. 어디 스승님이라고 한번 해 보거라.”

아니, 한결같은 놈이었군.

**

에인은 나와 다르게 순순히 검령을 스승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그게 스승에 대한 존중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검령의 이름이 ‘스승님’인줄 아는 모양이다만.

그래도 오랜만에 존칭을 들어보는 검령의 기분이 좋아 보이기에, 오해는 일부러 풀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응, 나 이거 할 수 있어.”

그리고 제대로 된 이론과 설명으로 마력운용을 배우기 시작한 에인의 성장속도는 굉장했다.

고작 몇 시간만에 마력운용의 기초를 깨우치고, 몸 밖으로 마력을 방출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내가 저걸 해내기까지 얼마나 걸렸더라……새삼 재능의 차이를 실감하게 되는군.

“으하하하! 이거 아주 가르치는 맛이 있는 애송이구나, 검사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이 참 아쉬워……”

검령도 아주 신바람이 나서 이런저런 기교를 가르쳐 주었고, 그 결과.

“진혁악마님 이거 봐, 반짝반짝.”

에인은 내 스킬 중 하나인 [집광]과 비슷한, 빛을 발생시키는 마법을 터득했다.

뭐, 마법의 급을 따지자면 매우 기초적인 수준- 수학으로 치면 구구단 정도의 마법이긴 하다.

하지만 에인은 진짜 구구단도 못 뗐을 만한 나이인지라, 굉장한 재능이라는 건 맞다.

“허, 너 지금 이거 따라한 거지?”

나는 놀라워하며 [집광] 스킬을 사용했다. 에인이 일으킨 빛을 빼앗아 빛의 구체가 만들어진다.

“진혁악마님 마법 대단해, 내 건데 뺏어갔어.”

“어……뭐, 그렇지.”

“다음에는 나도 그거 해볼래, 뺏는거.”

에인은 그러더니 제멋대로 마력을 만지작거리며, 내 [집광]의 빛을 빼앗으려 했다.

마법의 재능은 물론이요 의욕까지 출중하다. 이 동행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됐다, 조금 뺏어왔다.”

-조만간이면 내가 이 꼬마한테 반대로 마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돼도 딱히 나쁠 건 없으려나.

**

검령을 불러낸 건 여러모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꼬마 에인의 지도를 검령에게 맡기고 나는 혼자서 단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점이 참 좋았다.

물론 단련에 따른 성과는 아직까지 딱히 없었지만, 어쨌든.

에인도 검령을 상당히 잘 따르는 것 같고, 꼬마를 돌봐야 하는 부분이 줄어든 건 이득이다.

마음같아서는 검령에게 에인을 완전히 맡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다.

검령 소환 기능은 여러 번 연속으로 사용하면 쿨타임이 걸리고, 소환의 지속 시간도 그렇게 길지 않다.

소환에 쓸 수 있는 마법석은 수백개 단위로 있지만, 하루 종일 소환을 지속하려면 소모량이 꽤 될거다.

그렇기에 숲을 주파해야하는 낮 동안은 여전히 나와 꼬마 에인 단 둘만의 시간이었다.

“이거 엄청엄청엄청 맛있다.”

-옴뇸뇸.

그동안 건강이 무척 빠르게 좋아진 에인은 이제 죽 이외의 음식도 별 탈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에인이 먹고 있는 것은 내가 꺼내준 김밥, 아직 다른 자극적인 음식은 조금 이를 것 같아서 이것부터 줘 봤다.

그냥 김밥일 뿐인데 뭐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하기사, 그 잡탕죽도 좋다고 먹었을 정도니.

“나 이런거 처음 봤어, 진혁악마님은 맨날 이런 거 먹어?”

“아니, 나도 가끔밖에 안 먹어.”

“그렇구나, 귀한 거야?”

“귀한 건 아니고, 내가 별로 안 좋아해.”

에인은 건강이 좋아진 이후로 수다가 늘었다. 수다의 주제는 대부분이 이런 실없는 질문들이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일까, 아니면 내 존재가 에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걸까.

할 수 있는 대답이 거짓말과 건성인 설명밖에 없는 처지로서는 마냥 듣기 편하지는 않다.

“그게 그렇게 맛있냐.”

“응,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평소에는 뭘 먹고 지냈길래.”

그래서 가끔 이렇게 거꾸로 에인을 향해 물음을 던져 보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시원찮다. 대답의 대부분이 ‘잘 몰라’ 였으니까.

혈사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한테 잡혀 있었으니, 당연히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지는 못했겠지만-

“나는 그냥 밥 먹었어, 엄마가 주는 밥.”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닌 내 눈으로 보기에도 에인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조차 너무나 무지하다. 이 꼬마는 밥이라는게 정확히 뭔지도 모른다.

엄마가 주는 밥이 어떤 음식이었는지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단순히 언어, 어휘능력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혈사교에게 뭔가 당한 걸지도 모른다.

“진혁악마님, 나 빨리 엄마 보고싶어.”

에인이 질문 다음으로 입에 올리는 말은 대부분 ‘엄마’와 관련된 것이다.

엄마를 보고 싶다는 말, 엄마 생각을 했다는 말, 엄마한테 마법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귀여워서 그냥 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신경에 좀 거슬린다.

항상 마력감지를 최대 범위로 전개하고 있느라 집중력 소모가 심한데, 귓가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대니까.

그렇다고 꼬마한테 엄마 얘기좀 그만 하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은근히 곤란하다.

-아우우우우우!!

그 때였다.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마력감지에 다가오는 생명반응이 잡혔다.

매일같이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이 숲의 몬스터 무리다. 나는 에인을 내려놓고 칼레온을 꺼냈다.

[검령 각성]

“흠.”

마침 시간도 슬슬 늦어가고 있으니, 검령을 소환해 에인을 맡기기 딱 좋았다.

“이번에는 칼질 안 하네, 상황은 대충 알겠지? 꼬맹이 잘 지켜라.”

“흥, 보모 노릇을 시킬거면 최소한 중급 마법석 정도는 쓰거라.”

검령의 불평을 흘려넘긴 뒤, 무기를 들고 감지되는 몬스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말로는 중급 정도는 쓰라고 하지만, 검령은 하급으로 소환되어도 그럭저럭 강한 편이다.

스펙은 딸려도 오러를 비롯한 강력한 기술을 쓰기 때문에, 적어도 잡몹 한둘을 못 당해낼 수준은 아니다.

그렇게 검령과 에인을 두고 숲을 향해 달려나가는 순간.

“진혁악마님, 다녀와.”

검령의 등 뒤에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에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한테 배웅을 받아보는게 얼마만이더라.

143. 유년의 세계

에인을 검령에게 맡겨두기만 해도 전투는 무척 수월해진다.

이 18층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은 보통 도전자들에겐 상당한 난적이겠지만, 나한텐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의 숫자가 많고 지능적이라는 점은 별 방해도 되지 않는다. 나는 원래 이런 섬멸전에 능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섬멸전에 능하다는 말도 좀 웃기다. 나는 이미 거의 모든 전투 형식에 능하다.

다수를 대상으로 한 섬멸전, 소수를 대상으로 한 결투전, 도주하는 적을 쫓는 추격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적을 상대하는 소모전, 그 밖의 여러 전투 형식.

그나마 약한 것을 찾자면 특정한 대상을 지키는 방어전과 공중전 정도밖에 없다.

이 얼마 안 되는 약점들도 마법을 터득하는 순간 모두 해결되어버린다.

애초에 근접 전사한테 공중전이 약점이라고 지적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만.

-갸오오오!

아차, 잠시 생각이 다른 길로 샜다. 상대가 아무리 약해도 전투에는 집중해야지.

검치호를 닮은 몬스터가 바짝 달려드는 것을 방패로 흘려내고, 손에 든 할버드를 휘둘렀다.

콰직, 하며 검치호의 어깻죽지에 할버드의 날이 꽂힌다. 이 상태로 단번에 손잡이를 당기면.

-콰득!

이렇게 어깻죽지를 통째로 뜯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할버드로만 가능한 당겨 베기 기술.

사실 오러를 두르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잡기술을 쓸 것 없이 토막이 나야 정상이지만.

현재 나는 일부러 약한 수준의 오러만을 두른 채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단련이다. 무기 종류에 따른 오러 효율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간 개인 단련과 몇 번의 실험 결과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길이가 길고 형태가 복잡한 무기일수록 오러를 잘 씌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검 종류는 워낙 사용이 익숙해서 대검이건 소검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만.

창이나 도끼 등은 그 크기와 길이에 비례해 오러의 효율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오러를 씌워야 하는 금속 부위의 형태에 따라서도 변화가 생긴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라서,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오러를 형성해야 해서- 결국 숙련도 문제다.

-콰직!

핼버드를 붕붕 휘둘러 몬스터 두 마리를 더 처치하고, 흔들리는 오러를 다시 다잡았다.

숙련도는 결국 손에 익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아주 잘하는 일이다.

이제 예전처럼 내 노력이 그대로 수치로 표현되는 일은 잘 없지만, 그건 이제 상관없다.

“흡!”

-으적!

새로 나타난 몬스터의 절반가량을 핼버드로 정리하고, 이번에는 직검을 꺼냈다.

핼버드를 이용한 오러 발현은 이제 상당히 안정적이게 된 것 같으니, 이제 다음 차례.

검령이 사용하는 검술을 흉내 내며 싸워 본다. 그 기술의 깊이와 형식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더 이상 밑천을 털리고 싶어하지 않은 검령이 알려주지 않고 있는 빛의 고리를 만드는 기술.

이건 그걸 터득하기 위한 단련의 일환이다. 뭐, 순수한 검술 단련도 계속해야 하니까.

검술, 검술, 검술, 오러, 마법을 배우기는 이미 그른 것 같으니 이거라도-

“이놈의 숲은 언제쯤 나갈 수 있으려나.”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법이 배우고 싶다.

**

이번에는 꽤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몰려온 탓에, 전투가 끝났을 때는 완전한 저녁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이만 쉬자, 너도 더 걷기 힘들지?”

전투를 마치고 돌아와, 지친 듯 검령의 다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에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에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야영지를 차렸다. 에인도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나를 도왔다.

사실 에인이 도움이 된 부분은 거의 없었지만, 돕겠답시고 나서는 모습이 귀여워서 아무튼 괜찮았다.

검령 자식은 이런 건 쥐약이라면서 탱자탱자 쳐 놀기만 했는데 말이지.

“아니, 너는 마계를 누비고 다녔다는 놈이 이런 것 하나도 못하냐?”

“잡일은 적당한 잡놈을 잡아다 시키면 그만 아니냐.”

“일하기 싫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고?”

“웃기는군, 오히려 하인 하나 두지 않는 네가 이상한 거다.”

나무에 기대어 젠체하고 있는 검령을 잠시 노려보았다. 흠, 그런 말을 네가 해도 되는 거냐?

“그 눈은 뭐지, 설마 이 위대한 검령 칼레온을 하인이라 칭하려는 건가?”

말하는 꼴을 보니 자기가 대충 그런 신세라는 건 아는 모양인 것 같다. 그걸 알면서도 저러나.

“애초에 네놈은 사고방식이 이상하다. 그만한 힘과 재능을 가졌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그렇게 되는 거냐.”

“내가 뭘.”

“사자가 토끼 가죽을 쓰고 있지 않으냐. 강자로 태어난 자는 순리답게 강자로서 행동해야 하는 거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앞으로 더 완드로 때려 달라는 건가?

“태생의 격을 스스로 낮추지 말라는 이야기다.”

검령은 혀를 쯧쯧 차며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왜 무쇠조차 가를 수 있는 검으로 채소 따위를 썰고 있느냐며.

내가 에인을 돌봐주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 밖에도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도.

뭐, 답지 않게 보모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 마법도 이미지상으로는 나랑 별로 안 어울리고.

하지만 태어난 순리가 어쩌고 하는 말은 나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다.

검령은 혼자 착각하고 있지만, 애초에 나는 탑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냥 한심한 개백수였다.

놈이 검사로서의 재능을 평가할 때 논하는 것은 근골의 강인함이나 보유한 마력의 총량 같은 것들.

시련의 탑에 들어오기 전의 내게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나는 결코 강자로서 태어난 몸이 아니다.

기술의 이해력이나 응용력이라면 모를까,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한 태생의 격을 논할 수는 없지.

애초에, 저렇게 떠드는 검령 역시 답지 않게 에인을 꽤나 아끼는 것 같은데 말이다.

“스승님, 태생이라는 게 뭐야?”

“태어날 때부터 가진 힘이나 자격을 말하는 거다.”

“태어날 때 뭘 가지는데?”

저 봐라, 에인이 뭐라고 묻기 시작하자 귀여운 손주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을 하지 않나.

“이 몸은 검사가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고, 저놈도 전사로서의 운명을 타고났지.”

인자한 표정과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하는 검령, 근데 누구 마음대로 내 운명이 전사라는 거야.

한 마디 하려던 순간, 꼬마 에인이 검령에게 손가락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럼 나는 뭘 가지고 태어난 거야?”

일단 나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귀여움을 타고난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마법사의 재능 내지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려나- 그리 생각한 순간, 검령은 의외의 답을 말했다.

“그건 네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아직 어린 네게 어떤 자질이 잠자고 있을지 모르니.”

초대면에 쓰레기니 뭐니 지껄여 댔던 검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주 팔불출 할배가 따로 없지.

**

그로부터 이틀 후, 등에 업힌 에인에게 동화 이야기를 해 주며 걷고 있던 때였다.

뜬금없이 동화 이야기를 왜 했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다 이유가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에인을 조용히 만드려면 내가 대신 떠드는 방법밖에 없었거든.

참고로 이미 지구에서 읽었던 동화 내용은 다 써먹어서, 다크엘프의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참이다.

나를 어린애 취급하던 다크엘프들이 해 주던 이야기를, 내가 진짜 어린아이에게 해 주고 있는 거다.

“현자님 멋있다. 나도 현자님처럼 되고 싶어. 진혁악마님, 나 소원 하나 더 빌어도 돼?”

“소원을 빌 게 아니라, 네가 직접 마법을 배워서 현자가 되면 되잖아.”

“그렇구나, 그럼 나도 마법 배우면 현자님 될 수 있어? 나쁜 마왕 물리치는 멋진 용사님도?”

언젠가부터 동화책 속의 용사와 현자를 동경하기 시작한 에인, 나는 그렇다고 답해 주었다.

빈말이 아니다. 에인이 가진 마법적 재능은 실로 굉장한 것이니까.

지난 며칠 사이에 에인은 이미 스킬을 사용하는 내 수준을 가볍게 따라잡아 버렸다.

이제는 내가 사용하는 [집광]과 [철벽]등을 거의 모두 재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올라온 상태다.

마력의 총량이 부족하여 마법의 실제 성능은 애매하지만, 그 숙련도는 기적적인 수준.

이대로 이 꼬마가 마법사 부모 밑에서 꾸준히 수련한다면, 정말로 현자든 용사든 될 수 있겠지.

“나도 현자님이랑 용사님 할 수 있구나……근데 진혁악마님, 나 방금 소원 취소할래.”

하지만 에인이 무언가를 동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역시.

아마도 검령에게 태생이 어쩌고 하는 말을 듣고 난 이후로 장래를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조그만 머리에서 나오는 장래를 향한 수많은 고민은, 실로 어린아이다운 방식으로 뚝 끊긴다.

“나는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제일 좋아.”

에인에게 1순위는 언제나 ‘엄마’ 였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엄마와 함께하는 것을 더 원한다.

얼마 전에 처음 먹여주었던 치즈돈까스마저, 엄마에게도 먹여주고 싶다며 아껴 두려고 했을 정도니까.

그래, 이 나이대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란 곧 세상 전부와 같다고- 커뮤니티에서 읽은 적이 있었지.

-부스럭.

우거진 수풀을 헤치자 저 멀리 탁 트인 길이 눈에 들어오며, 미니맵이 마침내 지도와 겹친다.

꼬마 에인의 소원을 향한 여정이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는 마침내 숲 밖으로 나왔다.

“자, 너희 엄마 찾으러 가자.”

사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144. 거부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18층의 지도와 미니맵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우리가 빠져나온 숲은 예상 이상으로 외진 곳에 처박혀 있었다. 말 그대로 미니맵의 맨 구석 끝 부분쯤.

아마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오래 걸리지 않아서 구역을 제한하는 파괴 불가 장벽을 만날 수 있었을 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찾는 상대가 마법사인 이상 마탑으로 가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게 어떤 마탑이느냐인데.

적색이나 청색 같은 메이저한 마탑들은 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찾아가기도 간단하지만-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보나마나 어마어마하게 마이너한 색의 마탑에 있을 테지, 아마 거의 모든 마탑을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나 혼자서 작정하고 돌아보면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나 혼자서는 에인의 ‘엄마’를 알아볼 방법이 없다.

대강의 인상착의라도 알 수 있으면 어떻게든 할 만하겠지만, 이 부분에도 당연히 애로사항이 있었으니.

“엄마는 예쁘게 생겼어, 그리고 어른이고, 키가 크고, 으응.”

에인이 엄마의 인상착의를 도통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 아무리 물어도 그냥 ‘예쁘다’ 라고밖에 표현을 못 한다.

키가 크다고는 하지만 아이의 시선이라 진짜 큰지 어떤지도 모르겠고, 머리색도 흔한 갈색이라고 하고.

결국 내가 에인의 엄마에 대해 아는 건,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라는 것.

연령대도 모르고, 어른이라고 말하지만 의외로 성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건 뭐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가 더 쉽겠네. 정보가 진짜 아무것도 없잖아.

“진짜 이게 최선이야?”

“응, 똑같이 그렸어.”

“아닐 것 같은데.”

그래서 하다못해 그림으로라도 표현해 달라고 했는데, 역시 어린아이의 그림으로는 가망이 없었다.

복잡한 마법진을 쉽게 그려내길래 조금은 기대했건만, 결국 이런 식이로군.

게다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마법사들은 외부인이 마탑에 출입하는 것을 썩 반기지 않는다는 것.

평범한 도전자들은 결국 마탑에 의해 소환된 입장이라, 최소한 손님 취급을 받지만……나는 사정이 다르다.

문전박대는 물론이요,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당연히 내가 이기긴 하겠지만.

“진혁악마님, 안 가는 거야?”

고민에 고민을 더해 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짜던 중, 에인이 옷소매를 당기며 재촉했다.

그래, 어차피 고민해봐야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움직이자.

“아냐, 가자. 손 꼭 잡고.”

나는 그대로 에인을 데리고 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적색등의 메이저한 마탑이 위치한 중앙 도시는 이 마을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구조다.

이곳에서는 일단 에인에게 입힐 옷을 좀 사고, 숙소를 빌려서 애를 좀 씻기기도 해야 할 것 같다.

[정화] 스킬로 꾸준히 오염을 제거해 주긴 했지만, 아직 꾀죄죄한 꼴인 건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자칫 병이 들지도 모르니, 청결은 여러 방법으로 유지해 줄 필요가 있다.

마을의 입구는 산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함인지, 뾰족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 간단한 무장을 갖춘 떡대들이 울타리와 함께 서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를 보고 대뜸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 울타리 문을 거칠게 닫아버린 다음 쇠사슬을 걸었다.

“허?”

저게 뭐 하는 짓이지?

**

이 마을이 여행자나 외부인을 거절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저건 누가 봐도 우리가 마을에 들어오는 걸 막으려는 것 같다. 하지만 대체 뭘 위해서?

나는 지금 딱히 무장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기껏해야 검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을 뿐.

차림새만 보면 오히려 저 떡대 놈들이 더 든든하게 무장한 상태이기에, 외견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닐 거다.

애초에 꾀죄죄한 꼬마의 손을 꼭 잡고 걸어들어오는 여행자를 문전박대할 이유가 있나?

무슨 사정이 있는 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란 뜻인데.

“이봐요, 이것 좀 열어봐요. 무슨 일인데.”

“맞아, 열어줘.”

“어린애도 있다고, 최소한 설명은 해 주지?”

나는 울타리 문을 툭툭 두들기며 그 너머에 있는 떡대들을 향해 말했다. 에인도 작은 손으로 그것을 거들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기는커녕, 떡대들은 쥐죽은 듯이 침묵만 지키고 있다.

“없는 척하지 말고, 문 앞에 서 있는 거 다 알거든?”

떡대 놈들은 내 말이 떠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오히려 입술을 깨물고 침묵을 지켰다.

입만 닥치고 있다고 기척이 안 나는 게 아닌데 말이지. 마력이 닿는 범위라면 내 시야에 사각은 없다고.

이 마을에서는 에인을 위한 생필품을 사야 했기에, 난동을 부릴 생각은 없었지만……어쩔 수 없나.

“셋 셀 때까지 안 열면 그냥 힘으로 연다.”

-절그럭.

말을 꺼내자마자 들려오는 사슬 소리, 하지만 문에 걸어놓은 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아니다.

떡대 놈들이 사슬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하고 있었다. 뭔가 마력이 움직이는데.

어라, 잠깐만, 이거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몇 층에서였지?

결계 마법이랑 비슷한 기척이다. 움직인 마력의 양을 보면 결계는 절대 아닐 테고.

“이 새끼들 봐라.”

사슬을 더 강화하거나 마법적인 잠금장치를 다는 마법쯤 되겠네, 나 참.

너무 가소롭고 같잖아서 짜증이 치밀 지경이다. 그때, 에인이 내 등을 쿡쿡 찔렀다.

에인은 자신의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는, 묘한 마력의 흐름을 일으켰다.

“나 저거 할 수 있어, 내가 해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게 잠긴 울타리 문을 향해 에인이 마력을 흘려 넣었다.

-철컥, 철컥!

사슬을 매개로 발동한 마법이 점점 해제되어간다. 울타리 너머의 떡대들이 웅성거린다.

많이 놀란 모양인데,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얘가 언제 이런 것까지 할 수 있게 됐지?

검령은 마력의 운용법을 알려줬을 뿐, 제대로 마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집광]을 보고 흉내를 내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건 얘기가 다른데.

“됐다, 진혁악마님, 이거 열렸어.”

에인은 그렇게 순식간에 마법 자물쇠를 풀어버리고는, 위풍당당하게 울타리 문을 밀어젖혔다.

물론 마법은 풀렸어도 떡대들이 문을 막고 있는 탓에 열리진 않았지만.

“으응……읏차, 왜 안 열리지……”

에인은 자신이 뭔가 잘못한 줄 알았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은 제대로 열렸으니까 기죽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이건 마법으로 막혀 있는 게 아니라고, 마법은 네가 풀었으니까 남은 건 내가 풀겠다고.

7층 다크엘프들의 말투를 흉내 내 보니, 나치고는 꽤 괜찮은 위로의 말이 나왔다.

-콰앙!!

그리고 울타리 문은 내 발차기 한 번에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

**

문을 막던 떡대들은 근골은 훌륭했지만, 체내의 마력량은 극단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마력이 없어서 몸이라도 기른 느낌?

그동안 보아온 NPC는 대부분 약한 일반인 아니면 강한 초인 두 종류로 갈리곤 했는데, 이놈들은 딱 그 중간에 있었다.

마력이나 특수한 힘이 없는 순수 인간 중에서는 최상급, 하지만 그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하급.

어정쩡하기 없는 그 강함 때문에, 이번에는 나도 힘 조절이 조금 어려웠다.

“큭, 커헉……!”

가볍게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떡대가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오러를 씌운 것도 아니고, 마력을 실은 것도 아니고, 스킬을 써서 때린 것도 아니다.

그냥 힘이 좀 많이 들어갔을 뿐인 평범한 주먹질, 하지만 그 한 대를 못 견디고 무너져버렸다.

쓰읍, 마력 없이 단련된 인간의 몸이 이렇게 물렁물렁할 줄은 몰랐네.

완전 뭉개질 만큼 부드러운 건 또 아니고, 그렇다고 내 주먹을 견딜 만큼 단단한 것도 아니고.

살짝 녹은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때린 느낌이다. 아마 뼈가 죄다 으스러졌겠지.

“그러게 왜 사람 면전에서 문을 닫아. 설명도 안 하고.”

“헉, 허억……”

“뭐라고 말 좀……어휴, 가만있어봐. 입 벌려.”

나는 쌕쌕거리며 죽어가는 떡대의 입에 억지로 고성능의 포션을 물려주고 잠시 기다렸다.

에인에게 쓴 것과 같은 포션인데, 이렇게 기골이 튼튼한 놈이라면 부작용 없이 효과만 누릴 수 있을 거다.

사실 부작용이 어느 수준인지는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병든 어린아이도 견딜 수 있을 정도니까.

별 문제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윽……으으윽……”

떡대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파랗게 물들며, 눈이 뒤집혀 검은자위가 사라져버렸다.

재빨리 마력을 전개해 놈의 몸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포션으로 인한 치료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크게 소모되었는지, 여러 장기가 기능부전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허우대도 좋은 놈이 요 조막만 한 어린애보다 체력이 없단 말이야? 뭔데?

“가지가지 한다 진짜.”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포션을 꺼내 떡대에게 퍼부었다.

열받아서 한 대 패줄 생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한편, 마을 안쪽에서는 하나둘씩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전투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다. 무기도 절반 이상은 농기구였고.

쪼그만 어린애만도 못한 체력을 가진 덩치들이며, 잔뜩 쫄아 있는 주민이며.

에픽 퀘스트라는 설정에 어울리는 모종의 사건이 있었던 건 확실한 모양이다.

145. 현자의 마을

가볍게 마력을 전개하여, 무기를 든 주민들의 수준을 가늠해 보았다.

문 앞을 지키던 떡대들이 단련된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매우 약했다.

품고 있는 마력의 양은 고만고만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다.

“왜 지랄들이지.”

나는 중상을 입고 기절한 떡대에게 마저 포션을 퍼부으며 중얼거렸다.

나한테 적의가 없다는 사실은 이 수준 차이만 봐도 명백하지 않나, 죽이려면 진작에 다 죽였지.

이러면 오히려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위압]

가볍게 스킬을 사용해, 무기를 들고 나온 주민들에게 압박을 주었다.

[위압] 스킬의 효과는 상대방과의 힘의 차이가 클수록 눈에 띄게 잘 듣는다.

원래 이 정도의 차이라면 단순히 [위압]을 전개하는 것만으로 전원을 혼절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적당히 출력을 조절해서 약간만 압박을 주고 있는 상태.

“으, 으헉……!”

몇몇 주민들이 헛숨을 내쉬며 벌벌 떠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로 압박을 받았으면 겁먹고 주저앉거나 도망칠 만도 한데, 의외로 그러지는 않는다.

도망치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그것도 슬슬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지.

“우린 딱히 댁들한테 해코지할 생각이 없는데, 이게 뭐 하는 짓들이지?”

적당한 압박은 상대방에게서 대화를 이끌어 낸다. 맹수와 대화가 통한다면 누구든 시도해 볼 테니.

“우,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이 미친 자식들, 더 이상 네놈들에겐 누구도 내줄 수 없다!”

이것 봐라, 쥐 죽은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기를 들이밀던 떡대의 말문이 확 트였지 않나.

말하는 걸 들어보니 역시 뭔가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흠, 이거 느낌이 확 오는데?

이 마을은 혈사교의 마법사들이 악마 소환 의식을 벌이는 그 장소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렇다면, 인신공양에 쓸 제물을 얻으러 혈사교 놈들이 찾아온 적이 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더 이상이라.”

더 이상 내줄 수 없다는 건, 그동안은 내준 적이 있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나와 에인을 그 혈사교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 주민들이 가진 마력량이 형편없는 이유도 대충, 마력량이 많으면 제물이 된다거나 그런 거겠지?

“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네놈들 뜻대로 뭐든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마라!”

그나저나-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말한 것 같은데, 내용이 이래서는 너무 허접한 공갈이잖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면 뭐 어쩔 건데, 그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뭔가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내가 스킬을 통해 주고 있는 압박과는 별개로, 이 주민들은 과하게 겁먹은 상태다.

이래서는 애초에 대화가 성립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대화 말고 다른 수단을 쓰는 수밖에.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조금 거친 방법이 되겠지만, 차근차근 오해를 풀어 보자.

**

팔다리가 한 군데씩 꺾여서 바닥에 자빠져 있는 주민에게 포션을 던져주었다.

“자, 인정?”

“이, 인정하겠소.”

“암, 그래야지.”

주민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포션을 받아 들이켰다. 이런 주민의 숫자는 거의 수십에 달했다.

겁 먹은 주민들은 십여 분간의 전투 끝에 모두 제압되었다.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힘든 전투였다.

주민들을 죽이지 않고, 불구로 만들지도 않고, 적당한 수준의 상해만 입혀서 제압하기 위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그냥 다 죽이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1분 안에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는데, 꽤 시간을 썼다.

“인정이야?”

“그, 그래, 인정하마.”

“응, 이거 마셔.”

꼬마 에인도 내 흉내를 내며 쓰러진 주민들에게 포션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렇게 다시 몇 분을 들여 모든 주민이 회복되기까지 기다린 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이 마을에 아무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고,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이라고.

저 산에 있는 혈사교인가 뭔가 하는 놈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적대하고 있다고.

주민들은 이미 포션을 받아먹으며 ‘인정’을 선언한 상태인데도 어마어마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이 새끼들 봐라, 아무도 안 죽이고 포션까지 나눠줬는데도 아직도 의심질이야? 뒤질래?”

먼저 무기를 들고 덤벼놓고 이딴 태도라니, 이쯤 되면 슬슬 내가 진짜 악마로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왜, 이번 층에 그런 설정이 걸려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소환된 도전자가 악마로 보이는 설정.

혈사교 놈들이나 꼬마 에인이나 아무렇지 않게 나를 악마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꼬마야,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여?”

“잘 보여.”

“그래, 너한테 내가 뭘 물어보겠니.”

나는 에인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고, 주민들을 향해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뿔이나 날개나 꼬리가 달린 것도 아니니까, 다른 부분이 어떻게 보이더라도 악마라고 단정하기는 힘들 거다.

지금처럼 무기를 들고 덤빈 이들을, 죽일 수 있음에도 살려 주는 자비로운 모습을 보인 이상은.

“애초에 왜 내가 혈사교랑 한 패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유 좀 들어 보자.”

그래서 나는 외견이 아닌 다른 이유를 묻는 말을 던졌다. 주민들은 하나둘씩 이유를 들어 보였다.

“놈들이 거대한 의식을 벌인다면서 한동안 안 보여서……”

“마법사들은 남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그런 게 너무 흉악해서……”

대부분이 근거 없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개중 한 사람의 말만큼은 달랐다.

“혀, 현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무시할 수 없는 키워드가 나왔다. 직후, 현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남자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주민들도 화들짝 놀라 남자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현자라는 존재를 비밀로 하고 있던 모양.

앞에서 말한 이유는 전부 덧붙인 구실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아마 이거겠군.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 봐.”

나는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완드를 꺼내 툭툭 두들기며, 현자에 대해 물었다.

**

약간의 협박을 곁들였음에도, 마을 주민들은 현자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쓸모라고는 없는 놈들이다. 내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에인이 훨씬 도움이 될 지경이군.

에인은 조금 전부터 내가 들려준 동화를 떠올렸는지, 현자를 꼭 보고 싶다며 내게 칭얼거리고 있다.

요 조그만 꼬마는 역시 악마를 소원 들어주는 요정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소원이라고 하고 있으니.

뭐, 주민들이 현자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건 사실 아무래도 좋다. 내가 직접 찾으면 그만이니.

“현자씩이나 하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당연히 마법사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초감각] 스킬을 발동하고, 마력감지를 최대 수준으로 전개했다.

내 마력감지 범위는 이 마을 하나쯤은 쉽게 뒤덮는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면 그 깊이 역시 더욱 깊어진다.

눈만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사방 모든 물체의 뒷면과 내면, 그 감촉과 질감까지 세세히 느끼는 힘.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내면까지 마력을 이용해 가볍게 훑어 낸다.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다른 주민들은 물론이요, 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의 솜털 하나하나까지 감각하며.

어떤 건물의 지하에 꼭꼭 숨어 은폐 마법을 두르고 있는 어떤 마법사의 존재를 감지해 내었다.

“찾았다.”

마법사는 내가 퍼트린 마력을 느낀 것인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마법사가 숨어 있는 건물의 방향으로 단번에 도약해, 발밑에 오러를 두르고 그 천장을 덮쳤다.

오러를 이용한 타격과 마력 방출의 조합으로 건물을 단번에 가루로 만들고, 지하까지 파고든다.

-콰과광!!

“으, 으아악!”

건물을 붕괴시키며 나타난 나를 보며 기겁하는 마법사, 현자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꼬락서니는 아니다.

에인이 알면 실망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현자라는 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내가 주민들을 통해 알아낸 이 ‘현자’에 대한 정보는 몇 가지뿐.

이 마을에 남은 유일한 마법사라는 사실, 마을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는 사실.

그리고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흑발의 전사와, 회색 머리칼과 눈을 가진 어린아이를 막으라 했다는 사실.

마을 시민들은 현자의 말을 따라나와 에인을 혈사교 패거리로 간주하고 맞선 것인데.

이렇게 직접 그 현자를 보니,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은 누구도 내줄 수 없다던 외침의 의미까지.

“진짜 창의적인 새끼들이네, 이거.”

자칭 현자의 몸에는 묘한 느낌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최근에 느껴본 적이 있는 마력이다.

그리고 마력감지를 통해 옷 속을 투시하니 보이는 해골과 뱀이 그려진 표식, 이것도 본 적이 있다.

나를 불러낸 악마 소환진에 그려져 있던 표식, 즉 혈사교 마법사들의 상징과 똑같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위대한 짐승이여, 당신의 수족이 되겠습니다!”

이 마을은 현자로 위장한 혈사교 마법사의 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던 거다.

146. 가짜 현자

사연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혈사교에 의해 지속해서 착취당하고 있었다.

주민들도 한 때는 맞서 싸우려 했으나, 몇 번이나 실패로 돌아간 이후로는 저항을 완전히 단념.

마을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현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몇몇 주민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던 상태.

하지만 그 현자의 정체가 혈사교의 끄나풀이었고, 이 마을은 사실 통째로 인간 농장이었던 거다.

대체 어떤 중간 과정을 거쳐야 혈사교의 마법사가 현자로서 마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방법으로 주민들이 저항을 단념하도록 만들어서, 천천히 가축으로 전락시킨 것.

아마 이런 처지에 의문을 품고 있던 이들이 우선적으로 제물이 되었을 테지.

“대가리 한번 재미있게도 굴리네, 존만한 새끼들이.”

-우득, 우득!

“아아아아악!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 발에 잘근잘근 밟히고 있는 혈사교 마법사가 소리 질렀다.

지는 인간 농장을 굴리고 있었던 주제에, 고작 양다리가 으스러진 것 두고 엄살이 심하다.

뭐, 아마 내 손에 의해 혈사교의 마법사들이 떼 몰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러는 거겠지만.

통신 마법 같은 걸로 그 저택 지하의 상황을 눈치채고, 내가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수를 써둔 거겠지.

마을 주민들에게 나와 에인을 혈사교의 일원이라 일러두고, 어떻게든 막으라고 지시하는 식으로.

걸리면 뒈질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어서, 본인은 은폐 마법을 두르고 숨어있던 거고.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이유를 한번 대 봐.”

나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발버둥을 치는 현자를 계속해서 밟으며 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는 상태였다. 마을의 현자라는 위치도 그렇고, 이놈에겐 쓸모가 많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 줘패다 보면 다른 것도 미주알고주알 불 게 뻔하니까. 안 하면 손해지.

“미리 말해두는데, 나를 죽이면 마을 주민들이 어쩌고 하는 개소리는 안 듣는다. 그딴 건 이유가 못 돼.”

“하, 하지만……끄아악!”

“쓸데없는 소리 말고 뭐든 어필이나 해, 개수작부리면 다리를 뜯어버릴라니깐.”

당장 내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이 녀석의 쓸모는 세 가지쯤 된다.

첫째는 이놈이 마을의 원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편의를 봐주기에 상당히 좋은 조건이다.

이놈의 말 한마디면 마을 주민들이 우리에게 최대한 협조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둘째는 이놈이 혈사교의 마법사라는 것, 당연히 중요한 제물이었던 에인에 관해서도 이것저것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에인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만.

셋째로,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놈은 혈사교라는 수상한 집단 출신이지만 어쨌든 마법사.

그것도 한 마을에서 현자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 실력이 있는 마법사다.

당장 내 마력감지로부터 몸을 감추기 위해 사용했던 은폐 마법만 해도, 수준이 꽤 높았으니 말이지.

고로, 18층에서의 내 원래 목표였던 마법 배우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

자칭 현자는 내 발밑을 기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어필했다.

아쉽게도 놈이 어필한 내용은 하나같이 별 영양가가 없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쓸모가 없는 편이었지.

뭔, 이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제물로 바쳐 나를 강화해주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개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스펙업 수단이라면 뭐든 찾아다니는 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에픽 퀘스트가 꼬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 꼬마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이 놈은 에인의 신상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이 마을에서 수급해 온 제물이 아니라는 것밖에는.

하지만 어쨌든 마법은 배울 수 있을 것 같으니, 당장은 살려 둬야겠지.

나는 가짜 현자놈과 적당히 말을 맞춘 다음,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박차며 밖으로 올라왔다.

“혀, 현자님!”

주민들은 건물 앞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에인은 그 사이 웬 떡대놈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여차하면 인질로 쓸 모양이었으려나, 가짜 현자가 말을 맞춰둔 대로 앞으로 나섰다.

“다들 걱정 마시지요, 저는 무사합니다. 조금 오해가 있었군요.”

오호라, 나한테 매달릴 때랑은 말하는 투가 완전히 다르다. 신비로운 마법사 느낌을 내는걸.

단순히 말투만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마법을 펼쳐서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대충 내 [위압]스킬이랑 비슷한가. 체내 마력이 극도로 적은 이상 전혀 눈치채지 못할 속임수다.

“여기 이분은 혈사교 일당이 아닙니다. 혈사교의 흑마법에 휘말려 버린 탓에, 마력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더군요.”

“그, 그게 사실입니까……?”

“예, 제 부족함 때문에 여러분에게 수고를 끼쳐 드렸군요. 그나마 다들 많이 다치지 않으셔서 참 다행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다들 결국 별말은 하지 않았다.

많이 안 다친 게 아니라, 많이 다쳤다가 회복된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가짜 현자를 향한 존경심이나 뭐 그런 것 때문에 입에 담지는 않은 거겠지. 많이 안 다친 것 맞는데 말이야.

“원래 다 죽여버리려다가 참은 거야.”

내가 제대로 싸웠으면 니들은 시체도 못 남기고 죽었어, 이것들아.

**

가짜 현자는 꾸며낸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주민들에게 우리를 손님으로 대하라고 말했다.

혈사교를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마을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하지만 적당한 때에 이야기할 생각이긴 하다. 더는 인신공양의 공포에 떨지 않도록 말이다.

이후, 우리에게는 편하게 쓰라면서 빈집 하나가 주어졌다.

혈사교에게 끌려가 희생당한 이들이 많으므로, 이 마을에는 빈집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꼬마 에인을 데리고 빈 집 안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여러 아이템을 사용해 공간을 편하게 정돈해 두었다.

회복에 도움을 준다는 향초 같은 것도 피워두고, 이어서 에인을 욕조에 집어넣고 씻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데, 요 꼬마 마법사는 생긴 것과 맞지 않게 남자아이였다.

뭐, 2차 성징이 올 시기도 아직 한참 남았고- 본판이 워낙 예쁘장하니 구분이 안 될 만도 했던 것 같네.

여자아이라면 돌보기가 더 번거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다행이군.

“나는 남자야?”

“어, 남자.”

“그렇구나.”

에인은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성별을 재확인했다. 남자애라고 해도 귀여운 건 변하지 않는다.

아, 가짜 현자에 관한 이야기는 에인에게도 대충 해 두었다. 혈사교라는 부분까지 자세히 밝힌 건 아니고.

대충 진짜 현자가 아니라 위장하고 있을 뿐인 평범한 마법사라고만 해두었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그럼 현자님 아니야? 나 현자님이 꼭 보고 싶었는데, 소원이었는데.”

에인은 욕조에서 물장구를 치며 아쉬워했다. 뭐, 동화책 속의 현자가 실존할 리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 동화는 엘프들이 나오는 7~9층에서 들었던 거라, 18층에서는 실화일 수가 없거든.

“현자는 아니지만 마법사는 맞아, 잠깐 이 마을에서 그놈한테 마법을 배우고 가려고.”

“진혁악마님은 마법 잘하잖아.”

“아니, 저번에도 마법은 잘 모른다고 했잖아……봐, 이거 마법 아니라니까?”

나는 손에 오러를 피워올리며 말했다. 에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게 뭐가 다르냐고 물었다.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은 에인도 의욕을 표했다. 자기도 함께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서.

요 어린애가 인신공양을 일삼는 미치광이 흑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워도 되는 걸까 싶은데.

“괜찮겠지, 뭐.”

그 가짜 현자가 개수작을 부리면 내 선에서 컷하면 되니까, 상관없으려나.

**

에인에게 마을에서 얻은 새 옷을 입히고, 함께 식사를 마친 뒤 마법을 배우기 위해 현자의 거처로 향했다.

내가 건물을 아작내 놓은 탓에, 가짜 현자는 공방을 포기하고 적당한 빈집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사실 그 건물이 멀쩡했어도 거기서 마법을 배울 생각은 없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공방 안에서 온갖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어떤 개수작을 부릴지 모르지 않나.

마력의 움직임으로 대강의 수작질은 감지할 수 있기도 하고, 솔직히 뭔 수작을 걸어와도 다 깨부술 자신이 있지만.

나와 함께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에인은 사정이 다르니 말이지. 애초에 상대가 미친 흑마법사니까.

“어, 어서 오십시오, 그럼 말씀드렸던 마법서부터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가짜 현자는 고분고분 자신의 책장에서 가져온 마법서를 꺼내며, 마법 강의를 시작했다.

“진혁악마님, 마법서래.”

“알아, 너도 마법서 본 적 있잖아.”

“진혁악마님이 보여준 그거?”

꼬마 에인은 시작부터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우리가 지금부터 배울 것은 마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참고로 이 가짜 현자는 에인과 마찬가지로 나를 악마 비슷한 걸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한테 마법을 가르친다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다.

그 탓에,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을 뭔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좀 쉽게 하라고 인마, 쉽게!”

당연히 마법 강의의 내용은 더럽게 어려웠다.

147. 천재

탑의 시스템은 도전자에게 기본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언어 이해 능력을 부여한다.

이는 단순한 번역기 수준이 아니라, 언어의 뉘앙스나 발음 등 모호한 부분을 적당하게 바꿔주기까지 하는 정도다.

덕분에 탑의 도전자는 어떤 세계에 떨어져도 말이 통하지 않아 고생할 일은 없다.

하지만 이 능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시스템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언어와 문자도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법에 사용되는 룬 문자와 주문 언어다.

그리고 가짜 현자의 강의는 상당한 양의 룬 문자와 주문 언어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문외한인 학문을 모르는 언어로 듣고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 룬 문자 좀 빼고 설명해 봐, 못 알아먹겠네.”

“하지만……”

“하라면 좀 해, 기초 부분은 어떻게든 될 거 아니야?”

가짜 현자는 내가 시키는 대로 룬을 배제하고 강의를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대학 시절, 출결체크도 제대로 안 한다던 헛소문에 낚여 들었던 생판 모르는 교양 과목이 떠오른다.

분명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대체 뭔 소린가 싶었던, 그 막막함이 지금 똑같이 느껴지고 있다.

“저, 저는 정말로, 최대한 쉽게 설명했습니다.”

저 굽실거리는 가짜 현자놈이 일부러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굽신거리는 척하면서, 내가 문외한인 것을 알고 엿 먹어보라는 의도로.

“머리에 돌 맞은 침팬지에게 알려준다는 생각으로 설명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내 쪽이 문제인 게 맞는 모양이다.

아니 시발, 그래도 머리에 돌 맞은 침팬지도 이해할 수준은 아니지 않냐? 내가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펜을 놓은지 제법 되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4년제 대학까지 졸업했다고. 좋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야, 꼬맹이. 너는 좀 알겠냐.”

“쪼끔.”

“진짜로?”

그 와중에 마법사의 재능이 흘러넘치는 꼬마 에인은 나름대로 알아듣긴 한 모양이었다.

요놈이 똑똑한 걸까, 아니면 내가 멍청한 걸까- 마력을 다루는 분야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말이지.

나는 잠시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서 룬 문자와 주문 언어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왕초보가 복습하며 가르치는 룬 문자 1편]

[주문 언어 동호회원을 모집합니다.txt]

[룬문자만든새끼 누구냐 씨발거]

[하루에 룬 하나씩 외우기 23일차]

의외로 도전자들 사이에서도 룬 문자와 주문 언어를 익히려는 시도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진지하게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생소한 언어에 흥미를 가진 정도인 것 같다.

룬 공부 관련한 게시글의 댓글에는, 그래서 이걸로 마법 쓸 수 있느냐는 물음이 하나씩 꼭 달려 있었고.

- 좀 연습하면 파이어볼정도는 외워서 할 수 있을 듯?

- 우리 동호회원들도 마법은 걍 다 스킬로 쓰지 ㅋㅋ 실전성은 없음

- 틀딱헌터들은 퀘스트때문에 조금씩 공부했다는데 이젠 무쓸모긴함

- 주문언어로 말할수있게 해주는 스킬 있을걸? 차라리 그거 얻으셈 ㅇㅇ

답변은 대부분 이런 것들뿐이었다. 취미로 인공어 같은 걸 공부하는 놈들이랑 비슷한 결인듯싶다.

뭐, 그렇겠지. 어지간히 언어에 재능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금방 습득할 수도 없을 테니.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외국어를 습득하려면 최소한 2,000시간 이상을 들여야 한다고 한다.

하루에 4시간씩 꼬박 2년을 공부해야 한다는 건데, 보통 도전자는 시련의 탑에 그만큼 오래 체류하지를 않는다.

몇 년 이상을 탑에서 보내는 건 대형 길드의 간부들이나 고등급 헌터를 노리는 랭커들 뿐.

그런 놈들이 한가하게 언어 공부 같은 걸 할 리가 없으니, 당연히 동호회라는 놈들 수준도 뻔하겠지.

나중에 개인적으로 동호회원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당장은 단념해야겠군.

“이론은 넘어가고, 그냥 실전부터 하자. 아무 마법이나 하나 알려줘 봐.”

“난 많이 알려줘도 돼.”

“가능한 한 쉽고 간단한 공격 계열로, 시전 단계부터 시작해서.”

가짜 현자는 두 가지 마법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했다. 첫 번째는 기본 공격 마법인 매직 미사일.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의 살점을 제물로 바쳐서 시전하는 블러드 샷이라는 흑마법이었다.

제물이 필요해서 그렇지 구동 자체는 매우 쉽고 기초적이라던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새끼야.

-깡!

“아악!”

혈사교 티를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가짜 현자의 대갈통을 미스릴 완드로 마사지해주었다.

어쨌든 가짜 현자는 순순히 매직 미사일의 시전 방법과 마력 운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여기에도 당연히 룬 문자와 주문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지만, 그런 부분은 과감히 생략.

그냥 알려주는 주문을 통째로 외운 다음 따라하는 것으로 시전부터 해봤다.

마법을 시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마력의 흐름과 마법진의 구성.

마력이 생산되는 심장 부근에서부터 시작해, 전신을 순환한 마력을 몸 밖으로 방출한다.

이 때, 주문 언어를 읊는 것으로 방출된 마력의 성질 변화를 일으킨다.

무슨 원리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단순히 주문을 따라 읊는 것만으로 마력이 조금 소모되며 성질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성질 변화를 일으킨 마력은 구성된 마법진을 통과하며, 마지막으로 형태의 변화를 일으킨다.

특정한 성질만을 띠었을 뿐인 마력을 탄환의 형태로 정제하고, 속도와 방향을 설정하는 것 모두 마법진의 몫.

여기까지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이제 시동어를 외쳐 마법을 발동하면 된다.

“매직 미사일.”

-파직!

손바닥 위에서 조그만 마력의 불빛이 생성되었다가 흩어졌다.

원래는 마력 탄환이 만들어져 전방으로 쏘아져야 할 텐데, 쏘아지기는커녕 제대로 모양도 안 잡혔다.

소모한 마력이 많은 건 아니지만, 발휘된 위력은 콩알탄만도 못한 수준이고.

“여, 역시 굉장하십니다. 그렇게 날림으로 시전했는데도 구동이 가능하다니……놀랍습니다.”

당연히 실패한 줄 알았는데, 가짜 현자는 대뜸 대단하다며 칭찬을 해 왔다.

마법진을 엉망진창으로 구성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현상이 발생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나를 악마로 생각하고 있는 이놈은 고위 존재는 달라도 뭐가 다르다고 나불댔는데.

나는 고위 존재도 뭣도 아니고, 진짜로 마법을 처음 배우는 일반인일 뿐이다.

“보통 사람이 마법을 처음 배울 때, 이 정도쯤 하면 잘하는 건가?”

“당연합니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재죠.”

가짜 현자는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뭐지, 사실 그동안 몰랐을 뿐이지 나는 굉장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건가? 전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되어야 했나?

이제 와서 마법사 계열로 클래스를 바꾸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 때, 미약한 마력 반응과 함께 오른편에서 짧은 빛살이 쏘아졌다.

-쾅!

쏘아진 빛살은 나와 가짜 현자의 옆을 지나가, 벽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빛살의 정체는 고속으로 쏘아진 작은 마력의 탄환이었다.

위력은 약하지만, 내 것보다 훨씬 제대로 된 매직 미사일.

“우와, 됐다.”

회색 머리칼의 꼬마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천재는 저런 걸 보고 천재라고 하는 거지.

**

잘 생각해 보니까, 꼬마 에인이 매직 미사일을 한 번에 성공한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검령에게 마력운용의 기초를 배운 것만으로도 내 [집광]을 그대로 따라 하던 녀석 아닌가.

문외한인 상태에서 감각만으로 내 스킬을 그대로 베껴 냈는데, 제대로 이론을 배운 지금은 어떻겠어.

그 후, 우리는 숙소로 쓰는 빈집으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마법을 쓰면서 신이라도 난 건지, 에인은 좀처럼 잠자리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얍.”

-츠팟!

에인의 손에서 형성된 매직 미사일이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고 사라졌다.

뭔가 더 알려준 것도 아닌데, 혼자 매직 미사일을 갖고 놀더니 이젠 저런 것까지 하고 있다.

매직 미사일의 마법진을 임의로 재작성해, 탄환의 발사 궤도와 성질을 변경시킨 것이다.

룬 문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순전히 감각만으로 마법진의 구성 방식을 깨닫고 손본 거다.

저게 말이 되는 건가. 나는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쥐똥만 한 빛을 일으키는 게 전부였는데.

“진혁악마님 이거 봐, 두 개.”

이제 저 꼬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더블 캐스팅을 하고, 주문을 생략한 무영창 시전까지 하고 있다.

마법에 문외한인 나도 그게 쉬운 일이 아닌 줄은 알고 있는데, 대체 뭐가 뭔지.

그러고 보면, 에인이 ‘엄마가 좋아하는 마법’ 이라면서 그려냈던 마법진도 굉장히 복잡했었지.

일부분만 그렸을 뿐인데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마법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정도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의문이 하나.

“엄마한테도 보여주고 싶다.”

이런 미친 재능의 꼬마를 낳은 그 ‘엄마’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엘레노어가 다크엘프의 공주였던 것처럼, 어쩌면 마탑주급 대마법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에픽 퀘스트라면 그 정도의 배경은 있을 것 아냐?

148. 채비

시련의 탑의 NPC는 각 서버마다 조금씩 외형의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2층에서 만난 양치기 소녀 노라의 경우, 1556서버에서는 ‘다이앤’ 이라는 이름이라고 불린다.

머리색도 조금 다르고, 키나 체형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바탕이 되는 성격이나 담당하는 역할만이 같을 뿐.

말하자면 연극의 배역 같은 것이다. 바꿔 말하면, 외형이 조금 달라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동일 인물로 봐도 된다는 것.

그렇기에 나는 반짝거리는 마력 덩어리를 갖고 노는 에인을 잠시 내버려두고, 커뮤니티를 켰다.

[18층 주요 NPC 정리 (3차 수정본)]

에인의 엄마는 매우 강력한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요 NPC 목록에 나와 있을 터.

외형이나 이름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각각의 역할과 배경을 통해 에인의 엄마 후보군을 추릴 수 있을 거다.

나는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마탑주급의 NPC 중에서 만나기 힘든 이들을 위주로 정보를 찾아보았다.

명색이 에픽 퀘스트니까, 분명히 쉽게 만날 수 있는 NPC를 에인의 엄마로 설정하지는 않았겠지.

“성별은 대부분 고정일 텐데……아닌 경우도 없지는 않구나.”

마탑주급 NPC 대부분은 남자지만, 일부 서버에서는 남자 NPC가 여자로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점까지 고려해서, 굳이 여성 NPC로만 한정하지 않고 탐색한다.

후보는 생각보다 금방 좁혀졌다. 18층의 마탑이 아무리 다양하다 한들 마탑주급이 많은 건 아니라서.

첫 번째 후보는 적색 마탑의 마탑주, 게시글을 업로드한 도전자의 서버에서는 ‘헬라’ 라고 불리는 화염 마법사다.

모든 탑에서 변동사항 없이 여성으로만 나온다는 마법사고, 숨겨둔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한다.

뭐, NPC들 사이에서 도는 찌라시라고는 하지만 ‘숨겨둔 아이’ 는 무시할 수 없는 키워드다.

두 번째 후보는 흑색 마탑의 마탑주, 비주류 중의 비주류인 그림자 계열 마법을 다루는 타입이며 성별은 랜덤.

그림자 마법에 대한 인식이 나쁘기 때문인지, 마탑 자체가 상당히 외진 곳에 있다고 한다.

거기에,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탑에서 굉장한 미남 혹은 미녀로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덕분에 퀘스트 비중도 적은 계열임에도 여성 도전자들 사이에서 굉장한 관심을 끌고 있다나.

실제로 자세히 검색해보니까, 이런 내용의 글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작성자 : 임민서#1443]

[제목 : 우리 탑 흑마탑주 진심 얼굴이 반칙임]

(사진)

그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눈은 또 왜 저렇게 날카롭게 생겼냐고ㅠㅠㅠ

그냥 ‘차가운 천재 미남’ 이란 말, 이 사람을 위해 있는 말 아닌가……?

말하는 것도 존.나. 차분한데 은근 히죽히죽 잘 웃는 거 미쳤다고……

카리스마 장착하고 있다가도 문득 보이는 미소에 심장 우르르 쿵쾅쾅됨

솔직히 말해서 마법 같은 거 쌩까고 그냥 얼굴만으로도 전설이다 진짜

마법 쓰는 것도 멋있긴 한데…… 난 그냥 존재 자체가 마법 같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김? 탑 만든사람 미친거 아님?

여초식 주접에 숨이 턱 막히지만, 흑색 마탑주의 정보를 수집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한다.

개중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흑색 마탑주를 찬양하는 주접글마다 하나쯤 꼭 달려 있는 종류의 댓글이었다.

손이 왜 이렇게 예쁘냐,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 내걸로 바꿔주고 싶다, 뭐 그런 내용의 주접 댓글인데.

내용을 살펴 보면, 거의 모든 탑에서 흑색 마탑주는 기혼자로 나오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게다가 중요한 포인트로, 흑색 마탑주의 배우자는 어떤 탑에서도 등장한 적이 없다는 점.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여성 도전자들이 아무리 분석해 봐도, 결국 배우자의 실체는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배우자, 비주류 계열의 마탑주, 굉장한 미남미녀.

조건만 보면 거의 확정 수준이다. 걸리는 점은 흑색 마탑주가 모든 탑에서 흑발로 나온다는 점 정도인데.

“뭐, 배우자 쪽의 유전일수도 있는 거니까……머리색 쯤이야.”

그림자 마법에는 나도 관심이 많은지라, 개인적으로는 이쪽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후보는 커뮤니티에도 관련 정보가 거의 나와 있지 않은 NPC다.

내가 읽은 주요 NPC 정리본에 적힌 이명은 ‘재버워크’.

남색 마탑, 백색 마탑, 갈색 마탑의 마탑주를 모두 겸하고 있는 마법 학회의 원로.

궁정마법사 대부분의 스승이자, 주문 언어학자이자, 아케인 칼리지의 명예교수.

동시에 전 대륙을 떠도는 방랑 마법사라고도 알려진 살아 있는 신비.

설명이 필요 없는 18층 최강의 마법사다.

**

다음 날, 새벽 내내 매직 미사일을 갖고 놀다가 늦잠을 잔 에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인벤토리에 넣어둔 음식도 이제 남은게 별로 없어서, 이번에는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몇 가지 식재료를 얻어 와서,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레시피를 참고 해서 직접 간단한 요리를 해 봤다.

식당에서 사 먹는다는 방법도 있지만, 이 마을의 식당 음식들은 하나같이 많이 부담스러운 것들이었기에.

나야 아무래도 괜찮지만, 요 꼬맹이에게 아침부터 그런 걸 먹였다간 배탈이 날 것 같아서.

-옴뇸뇸.

“응, 이거 맛있어.”

뭐, 이런 짓도 제법 익숙해지기도 했고- 에인의 입맛이 워낙 막입이라 별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아침밥을 만들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하나 일어났는데.

[패시브 스킬 : 초급 요리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뜬금없이 요리 스킬을 습득했다는 알림창이 떠오른 것이었다. 처음 얻는 생활 계열 스킬이다.

요리 스킬도 레벨을 높이면 나름대로 스펙적 이득이 있는 모양이지만, 초급 수준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골드가 넘쳐나는 나로서는 요리에 집착할 이유도 없고, 애초에 스킬 레벨을 더 높일 자신도 없다.

오히려 괜히 기분만 나빴다. 이제서야 내가 요리 비슷한 걸 했다는 느낌이라서.

이게 초급 1레벨 수준이면, 그전까지 만들었던 것들은 요리도 아니었다 이거잖아.

“나는 진혁악마님이 만들어 주는 게 제일 좋아.”

에인이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밥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이 꼬마의 칭찬에 뭔 의미가 있을까.

그러고 난 후에는 다시 가짜 현자를 찾아가 마법 교습을 받았다.

현자는 내 요구대로 가장 기초적인 마법진 구성법과 매직 미사일의 시전 위주로 강의했다.

물론 하루 만에 내 이해력이 갑자기 올라갈 리도 없어서,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매직 미사일.”

-파직!

내가 시전한 매직 미사일은 여전히 손 위에서 짧게 빛나다 사라질 뿐.

반면 꼬마 에인은 이제 매직 미사일을 완전히 통달했고, 가짜 현자에게 직접 그것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가짜 현자는 놀라 자빠졌다. 마력량도 빈약한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냐면서.

“이거, 조금만 잘 키웠으면 아주 양질의 제물이 되었겠……아악!”

-뚜둑!

그 와중에 헛소리를 하길래, 다리 한 짝을 분질러 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그 이후, 매직 미사일을 포기하고 공격 마법 말고도 쉬운 마법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간단한 방어 계열 마법이나, 여기 주민들이 사용했던 마법 자물쇠 같은 유틸적인 계열로.

물론 하나같이 매직 미사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워서, 제대로 시전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마법은 정말 천천히 느긋하게 배워야 할 것 같았고, 나는 노선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자, 너는 지금부터 교과서를 집필한다.”

“예?”

“여기에 네가 마법에 대해 아는 걸 죄다 적어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짜 현자에게 빈 공책을 건네주었다. 이번 층에서 못 익히면 다른 층에서 공부하면 그만.

내 진도가 나가지 않는 탓에 에인도 제대로 마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리라.

물론 이번 층에서 아예 포기하는 건 아니고, 마법 연습 자체는 에인과 함께 계속할 예정이다.

그렇게, 마법 교습을 받기 시작한 지 2주가량이 지났다.

**

원래부터 이 마을에는 최장 2주까지만 체류하기로 마음을 정해뒀었다.

마법을 배우는 건 어디까지나 부가 목표고, 결국 메인은 에픽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이었으니까.

에인을 위한 물품을 충분히 챙기고, 나는 마지막으로 가짜 현자를 찾았다.

“어쩐 일이신지……오늘은 떠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 커헉!”

곧바로 문답무용으로 놈을 죽였다. 이놈이 에인에 대해 알게 된 이상 더더욱 살려둘 수 없었다.

그동안 마법 강의를 들으면서 느낀 거지만, 이 혈사교라는 놈들은 기본적인 사고의 베이스가 남다르다.

인신공양을 이용해 힘을 늘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조건만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가출 청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당장은 현자로서 얌전하게 지내고 있지만, 재능이 넘쳐 흐르는 에인을 노리고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

이 놈에게 집필하게 시킨 ‘교과서’도 완성된 참이고, 에인 역시 이놈에게 더 배울 건 없어 보였다.

근본이 흑마법사라 그런지, 기초 마법의 깊이는 일주일 차의 에인보다 못하더라고.

“진혁악마님, 나 준비 끝났어.”

“그래, 짐은 다 챙겼지?”

“응, 여기 넣어놨어.”

에인은 그동안 익힌 수납 마법인 ‘아이템 박스’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꼬마 에인은 고작 2주 만에 기초 마법에 있어서는 거의 달인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나도 지난 2주 동안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초급 요리 Lv.3]

초급 요리 스킬의 레벨이 3까지 올랐다.

그게 전부다.

시발.

절대로 이것 때문에 마을을 일찍 떠나기로 한 건 아니다.

149. 청색 마탑

마을을 떠나 향하는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청색 마탑.

정확하게는, 청색 마탑을 포함해 몇 개의 마탑이 밀집되어 있는 마법도시 게헨나다.

여러 마법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마법학회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며, 18층의 배경인 왕국의 제2수도라고도 불리는 곳.

적색 마탑이 위치하고 있는 ‘셰올’ 과 함께 가장 많은 마탑이 모여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참고로 19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미궁 지역도 이 도시 근처에 존재한다. 에인이 있는 한 들어가 볼 수는 없겠지만.

“거기 가면 엄마가 있을까?”

“모르지.”

“빨리 엄마 보고 싶다.”

꼬마 에인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엄마를 보고 싶다며 재잘거렸다. 마법을 만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 에인은 항상 이렇다.

재잘거리는 말의 절반은 ‘엄마’와 관련된 것, 나머지 절반은 마법이나 내가 들려준 동화에 관한 것.

그 ‘엄마’ 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수록, 나도 에인의 작은 재잘거림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있잖아 진혁악마님, 엄마 만나기 전에 이거 마법 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다운 주어가 생략된 어법, 에인이 말하는 ‘이거 마법’이란 전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것을 말하는 걸 테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 이라고 말했던 복잡한 마법식, 나는 아직도 그 마법의 실체를 모른다.

애초에 마법진의 전체 모습도 보지 못했고, 전체를 본다 한들 마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아볼 방법도 없을 거다.

“모르……열심히 하면 되겠지.”

대충 모른다고 대답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고쳤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투는 좋지 않지.

“나, 이거 마법도 하고 싶고……현자님도 되고 싶고……엄마도 보고 싶어……”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에인은 무척 욕심이 많다. 무엇하나 포기할 생각을 안 한다.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고 싶다고 말하고, 빨리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도 말하고, 현자가 되고 싶다고도 말한다.

하여간에 대체 악마를 뭐라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악마도 아니지만.

“엄마를 만나면, 그다음에는 뭘 할 건데?”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에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엄마’, 그다음 순위는 무엇일까 해서.

“엄마한테 마법 보여줄 거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마법. 엄마도 좋아할 거야.”

“그러면, 그다음에는?”

“엄마한테도 맛있는 거 먹여줄 거야. 그리고 같이 동화 얘기도 할 거야.”

에인은 이어서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에인이 원하는 것들은 모두 나와 함께 한 것들이었다.

자기 딴에는 즐거웠던 것들을 엄마와 공유하고 싶어하는 거겠지, 그 마음은 나도 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방구석에 처박혀 개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던 시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효도라는 말을 떠올렸었다.

매일같이 아픈 곳이 늘어가는 엄마가 편히 지내기를 바랐다.

찬밥에 김치나 마른반찬 따위로 끼니를 때우던 엄마가 맛있는 것만 먹기를 바랐다.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다고 말하는 엄마를 비행기에 태워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엇하나 실천으로 옮기지 않은 채 마냥 초대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상이나 마찬가지인 ‘인생 역전 찬스’ 따위를 바라면서-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

그에 비하면, 여기 이 꼬맹이는 얼마나 기특한지.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런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에인이, 문득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혁악마님이랑 더 멀리멀리 가보고 싶어.”

작게 재잘거리는 목소리에는 순수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소망만큼은 이뤄줄 수 없다. 이 18층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꼬마가 반드시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할 계기 정도는 되었다.

이제 나는 내 감정을 정확히 안다. 떠오른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쭈, 이 꼬맹이가 누굴 택시인 줄 알아.”

“택시가 뭐야?”

“그런 게 있어, 이 쪼끄만 것아.”

부끄러움을 감추며 거칠게 쓰다듬은 에인의 회색빛 머리카락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

마법도시 게헨나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산 속이랑 다르게 길도 잘 닦여 있는 만큼, 에인의 느릿한 걸음에 발을 맞춰 주어도 도착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우여곡절이 하나도 없었던 건 아니다. 길을 지나던 도중 노상강도 패거리 같은 게 나타나곤 했으니까.

“형님! 형님! 제발 살려주십쇼! 목숨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일개 강도 패거리 따위가 내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뭐, 노상강도치고는 꽤 센 편이긴 했다.

싹 다 죽여버려도 괜찮았겠지만, 꼬맹이가 보는 앞에서 살인을 하는 건 나도 좀 망설여졌다.

“그래, 딱 목숨만 살려 주마.”

“응, 목숨만 살려줄게.”

그래서 죽이는 대신, 적당히 사지를 분질러 놓고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았던 일이 두어 번 정도.

돌이켜 보면 어린애에게 삥 뜯기를 가르친 셈이라, 이래도 됐던 건가 싶은데……거친 세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삥 뜯는 대상도 일반인이 아니라 노상강도고, 강도에게서 강도질하는 건 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런 일을 거치며 도착한 마법도시 게헨나.

게헨나는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에서 반세기 정도 더 전진한 느낌으로 발전해 있는 도시였다.

커뮤니티에서 보던 풍경과는 살짝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다른 층의 차이에 비하면 아직 얌전한 수준이다.

나는 게헨나에 입성하자마자 마탑의 밀집 구역을 찾았고, 꼬마 에인을 데리고 다니며 각 탑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혹시 이 중에서 눈이 익는 것이 있느냐고,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시원찮았다.

“몰라.”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물어보겠니. 기억력도 좋은 애라서 조금은 기대했는데 말이지.

“이게 무슨 그림인데? 이거 있으면 다 마법사인 거야? 우리 엄마도 이런 거 있을까?”

“마탑 소속의 마법사라면 다 하나씩 있다나봐. 네 엄마도 마탑 소속이었으면 아마 있었을 텐데.”

“그러면, 그러면 진혁악마님도 마법사라서 이거 있는 거야?”

에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견장에 붙어 있는 마크를 손으로 가리켰다.

둥근 고리가 휘감겨 있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징표다. 나는 대충 비슷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뭘 형상화한 마크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소중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그림이라고.

“그렇구나, 나도 나중에 그거 갖고 싶다. 이건 소원 아니야.”

아무튼, 이렇게 되면 정말 마탑 하나하나에 다 방문해서 사람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

마탑은 학자들을 위한 연구실 비슷한 곳인 만큼, 일반적으로는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다.

다만, 일부 마탑은 연구비 확보 목적으로 금전을 받고 내부를 공개하기도 한다.

신규 마법사의 등록을 위한 창구 등 몇몇 시설은 기본적으로 개방되어 있기도 하고.

사실 이건 모두 방금 알게 된 사실이다. 원래는 무력을 행사해서 뚫고 가야 하나 싶었거든.

“혈사교에게 납치되었던 아이라고요? 세상에, 용케 거기서 살아 나왔군요?”

커뮤니티에서 듣던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마법사들도 말이 통하는 족속들이었다.

가장 큰 청색 마탑을 찾아가서 사연을 조금 이야기하니까, 안타깝다면서 도와주겠다고 먼저 나서 주었다.

마법사는 수정구를 이용해 에인의 얼굴을 기록한 뒤, 각 마탑에 전송해 연락을 돌렸다.

“대형 마탑에는 모두 연락해뒀어요, 아이 이름이 에인이라고 했죠?”

“예.”

“빨리 어머니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가엽기도 하지.”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쉬고 있으라며, 우리에게 차와 다과를 내주었다.

나름대로 비장한 결심을 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되면 생각보다 싱겁게 일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뭐, 요 꼬맹이에겐 잘 된 일이지만……그리고 나한테도 딱히 나쁠 건 없는 일이지. 그냥 좀 허무할 뿐.

에인은 언제나처럼 ‘옴뇸뇸’ 하는 의성어를 내며 과자를 갉아 먹었다.

그 때였다.

-움찔.

묘한 마력의 기척이 나를 둘러싸더니,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묘하게 익숙한 감각이다.

검령이 내 몸 상태를 살필 때와 매우 비슷한 감각- 그리고 엘레노어의 기억에서도 느껴본 적 있는 감각.

타인이 내 몸을 마력으로 훑어볼 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각이다. 어떤 새끼지?

“방금 어떤 새끼야, 튀어나와라.”

인벤토리에서 검과 방패를 꺼내며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렇게 대놓고 원격에서 타인의 몸을 마력으로 훑는 건,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

물론 나도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한 행동이지만, 이렇게 티를 내면서 훑는다는 건 시비를 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는 곧바로 마력을 최대한 뽑아내 주변에 퍼트렸다. 마탑 안에서 감지되는 생명반응은 거의 백에 이른다.

이게 전부 다 마법사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감지가 끊어졌다.

젠장, 이게 뭐지. 마력감지를 차단하는 마법이 따로 있는 건가.

“재밌는 기척이 느껴져서 잠시 구경하러 내려와 봤는데, 웬 괴물이 있네?”

그 때, 마탑의 구석 계단에서 푸른 옷을 입은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 내려왔다.

“자, 말한 대로 튀어나와 줬는데……그러는 너는 뭐 하는 새끼신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싸가지없는 NPC는 하이엘프 이후로 처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