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안티 메이지
갑작스레 나타나 시비를 거는 인물은 미역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청색 마탑의 문장이 그려진 푸른 로브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청색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
나이는 겉보기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지만, 마법사를 외형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들었다.
생긴 꼬락서니나 말투는 저따위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나이를 먹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하나,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다는 것.
대놓고 도발하는 듯한 말투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 몸을 훑고 지나간 마력이 무척 싸가지가 없다.
마력을 이용한 스캔에도 일종의 매너……뭐랄까, 시선 처리 같은 개념이 존재한다.
가볍게 슬쩍 훑어보는 감지방식, 몰래 들여다보는 감지방식, 그리고 대놓고 품평하듯 뜯어 보는 감지방식.
이 자식의 마력감지는 맨 후자에 속했다. 시선으로 비유하자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보고 코웃음을 치는 느낌?
상대를 어지간히 얕보거나, 시비를 걸 생각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내가 먼저 물은 것 같은데.”
나는 전방위로 마력을 전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마법사 역시 그물처럼 마력을 전개했다.
“그걸 내가 대답까지 해 줘야 하나? 얼치기도 아니고, 척 보면 알 텐데?”
피식 웃으며 양팔을 벌린 마법사. 놈의 한 손에는 길쭉한 완드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내 미스릴 완드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이는 완드다.
그리고 여태까지 만났던 그 어떤 적과도 다른 이 묘한 마력의 전개법- 확실히 대충 짐작은 간다.
“여기의 마탑주냐?”
“알면서 왜 묻나?”
실로 죽빵 마려운 태도로 대답하는 놈- 청색 마탑의 마탑주는, 가볍게 손짓해 마법진을 띄워 올렸다.
내 마법적 지식은 여전히 일천하지만, 저것들이 모두 공격과 속박 계열의 마법진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최초의 마력 스캔만 해도 물론 그랬지만, 역시 이놈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를 적대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너는 뭐 하는 새끼신가? 이렇게 보여도 나는 아주 당황하고 있단 말이지?”
청색의 마탑주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몇 개의 마법진이 추가로 떠올랐다.
“조금 전에 올라온 보고를 듣고, 기특한 것이 다 있다고 생각해서 설레설레 내려와 본 거란 말이야.”
“생판 모르는 어린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려 한다니, 거 참 보기 드문 미담이라고.”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찾아왔다는 놈의 기척이 영 이상해서, 눈으로 직접 보러 온 건데.”
떠오른 마법진이 빛나며, 마탑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확 사라졌다.
“너, 이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로군……그렇지?”
전개된 마법진이 일제히 가동을 개시한다. 순식간에 소환된 수십 개의 은색 물방울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여럿 꺼내 일제히 마력을 두른다. 내 뒤에는 꼬마 에인이 있다.
마탑주의 공격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피하기보다는 막아야 한다.
-쾅!
무거운 충격이 방패 위를 때렸다.
**
마탑주는 고작 18층에 등장하는 NPC라고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왜냐, 애초에 도전자가 싸우라고 만들어진 상대가 아니니까. 단순한 층수 이상의 무력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방패 위로 부딪힌 은색 물방울의 충격을 몸으로 느끼며, 역시 추측한 대로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그렇지만, 이놈도 18층 수준이 아니구만.
“어느 세계에서 건너온 거지? 혈사교 놈들의 헛짓거리가 성공한 거라면, 역시 마계 같은 곳인가?”
마탑주는 은색의 물방울을 손짓으로 조작하며 그렇게 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다.
조금 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묻고 있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혈사교와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보다. 그것 때문에 혈사교랑 엮어서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고.
혈사교와 관계가 있으면서,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다- 당연히 악마나 마족 같은 거로 생각하겠지.
“야, 꼬맹이. 이거 잘 갖고 구석에 숨어 있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앞으로 나오면 안 된다.”
“진혁악마님, 싸울 거야?”
“싸우기 싫은데 싸워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휘말리지 않게 잘 숨어 있고.”
나는 에인에게 방어와 은신 기능이 있는 아이템을 몇 종류 챙겨주고, 검과 방패에 골고루 마력을 둘렀다.
싸우기 싫다고 말한 참이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도 않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는 일단 한 대 패주고 싶었거든.
문제는 상대방이 마법사이기도 해서, 함부로 싸우다가는 에인이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
일단 방어용 아이템을 챙겨주긴 했지만, 저걸로 제대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아스테리오스랑 싸우면서 섬 하나가 개박살났던 걸 생각하면, 마력강화를 키고 뛰어다니기만 해도 위험할 거다.
투척 같은 요란한 전법은 불가능할 거고, 반격 위주로 최대한 간결하게 싸울 필요가 있겠다.
“오호라, 꼬마 쪽이 악마 사역자인 건가? 악마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한편 청색 마탑주는 에인의 ‘진혁악마님’ 이라는 호칭을 듣고,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테고, 저 꼬맹이 앞에서 나는 악마가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에인은 내가 악마라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사역자는 무슨, 저건 진짜 무해한 어린애니까 괜히 건들 생각 마시지?”
“무해한 어린아이가 너 같은 괴물과 함께 다닐 리가 있나, 웃기는군!”
마탑주가 손짓하자, 거대한 은색 물 덩어리가 출렁이며 나를 향해 쏘아졌다.
청색 마탑에 걸맞은 물 속성 마법, 하지만 다루고 있는 저 물방울은 누가 봐도 물이 아니다.
아마도 액체 금속이나 뭐 그런 거겠지, 색깔과 무게를 보면 수은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려나.
아마도 어딘가의 커뮤니티일 텐데, 수은의 비중은 물의 13배에 달한다고 읽은 기억이 있다.
저 커다란 액체 덩어리는 얼핏 봐도 백 리터는 넘을 것 같은 크기, 수은이라고 생각하면 몇 톤을 훌쩍 넘겠지.
그런 게 유체의 특성을 살린 채로 고속으로 날아든다. 충격량은 교통사고 따위를 아득히 넘을 터.
하지만 강력하기로는 내 방어력 역시 못지않다.
-콰앙!!
날아드는 액체금속을 방패를 이용해 정면에서 받아쳤다.
평범한 18층 도전자가 이따위 짓을 했다가는 그대로 방어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을 거다.
공격이 재빠르고 정확하기보다는, 한방 한방의 위력이 매우 파괴적인 타입으로 보이는데.
아마 원래대로라면 원거리 포격전이나 기동성을 살려서 싸워야 하는 상대일 거다.
“꼬맹아, 괜찮냐?”
나는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에인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에인은 내가 준 아이템을 모두 재빨리 가동하고, 혼자서 나름대로의 마법 방어막까지 쳐 둔 상태였다.
“응, 근데 이거 깨졌어.”
하지만 충돌 순간의 충격파가 닿은 모양인지, 방어막에는 흠집이 나 있었다. 역시나.
이 거리라면 내가 마력강화를 켜고 도약하기만 해도 여파에 휩쓸릴 거다. 일이 귀찮아졌네.
그 사이, 액체금속의 덩어리는 이제 원뿔 모양으로 형태를 바꿔서 나한테 쏟아지고 있었다.
-쾅! 콰앙! 콰광!
어처구니없는 위력의 액체금속 탄환을 방패로 막아내며, 침착하게 한 걸음씩 전진한다.
젠장, [신속]을 키고 단번에 도약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생고생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괜찮은 부분이 하나 있긴 하다.
“뭐냐, 어떻게 이토록 단단하지……?”
내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놈의 표정이, 보고 있자니 아주 재미있다.
분명 마탑주는 매우 강하다. 보통의 18층 도전자는 결코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나는 거의 모든 속성의 공격에 내성이 있으며, 마법 내성도 별도로 갖고 있다.
거기에 모든 피해를 60% 감소시키는 [강철의 혼]까지, 나는 마법사 계열의 완벽한 카운터다.
마탑주고 나발이고, 지금의 나를 마법으로 돌파하려면 월드 보스 수준은 기어나와야 할 거다.
-쾅! 콰광!
액체금속 세례를 뚫고 마침내 에인이 숨어 있는 자리로부터 거리를 벌려 냈다.
[혼신]
[신속]
두 가지의 버프를 사용해 단번에 [민첩] 스탯을 증폭시키고, 마탑주를 향해 뛰어든다.
점점 긴장으로 굳어가던 마탑주의 표정이 단번에 사색이 되며, 놈의 몸 주변을 액체금속이 감쌌다.
유체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마력을 통해 고정해 둔 액체금속의 방어막, 과연 얼마나 단단할까.
뭐, 사실은 별 관심 없다. 얼마나 단단하건 오러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니까.
-푸욱!
얇게 오러를 두른 [강철 직검]이 방어막을 그대로 관통해, 마탑주의 어깨를 찔렀다.
그리고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만 하고 끝났겠지만- 넌 싸가지가 없으니 하나 추가해야겠다.
[라이트닝 차지]
[대전]
[약점 간파]
“끄아아아악!”
검을 타고 흘러들어 간 번개 속성의 마력이, 마탑주의 전신을 지져버렸다.
역시 물 속성한테는 전기 속성 공격이지.
151. 파랑의 마녀
마법사라고 하면 비실비실하다는 인식이 좀 있지만, 마탑주쯤 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바로 기절할 줄 알았던 청색의 마탑주는 몸을 움찔움찔 떨었지만, 아직 의식이 남아 있었다.
“핫, 혈사교는……대체 뭘 소환한 건지……제기랄.”
마탑주는 자신이 오판했다며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생각해보면 딱히 오판한 것도 아니다.
혈사교가 원래 소환하려던 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간에 나보다 강하진 않았을 테니까.
청색 마탑주 혼자서 어떻게 해볼 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쉽게 패배하지는 않았겠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는 설득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이놈을 죽일 경우 생기는 문제는 한둘이 아니다.
살인 혐의로 당장 수배가 걸릴지도 모르고, 최소한 다른 마탑들과 적대하게 되는 건 확정이니까.
그게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에인의 엄마를 찾는 일이 무지막지하게 어려워지겠지.
“너야말로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난 혈사교 놈들이랑 별 관계없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탑주의 상처 입은 어깨를 꾹꾹 밟아주었다. 원래 이러면 설득력이 높아진다.
“크, 아악……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의심하는 마탑주를 위해, 나는 이어서 설득력을 추가로 높여주는 아이템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튼튼하고 단단한 미스릴 완드, 이게 또 설득에는 직빵이지.
-깡!
“아악!”
정수리를 강타당한 마탑주가 신음했다. 나는 완드를 다시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말을 이었다.
“내가 혈사교 놈들한테 소환된 건 맞는데, 저 꼬맹이 엄마 찾아주러 왔다는 건 진짜거든? 좀 들어 보지?”
나는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혈사교의 마법진에 의해 소환되었다는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혈사교 놈들을 몰살해버렸다는 이야기와, 제물로 바쳐진 꼬마 에인이 나를 악마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청색 마탑주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조금씩 표정을 바꾸었다. 나도 슬슬 발을 떼고 놈을 놓아주었다.
“믿기지 않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
“그러니까 너도 안 죽이고 살려주잖아.”
“흥, 그런 건 증거가 못 된다만?”
마탑주는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손을 휙 휘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간 마력이 마법진을 그리며 은색 물방울을 토해 내었다.
이 새끼가 놔줬더니 또 지랄이네, 진짜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잠깐, 저쪽을 봐라.”
주먹을 휘두르려던 순간, 마탑주가 손가락을 세우며 내 뒤편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어느새 액체금속으로 이루어진 고리에 둘러싸인 꼬마 에인이 있었다.
이 새끼, 내가 아니라 꼬맹이를 노리고 마법을 전개한 거였나……여기서 인질을 잡는다고?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여만 봐라, 네가 보호하는 저 쥐방울을 산산조각내주지.”
마탑주는 진땀을 흘리며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내 손에는 이미 검이 들려 있었다.
이 녀석의 반응속도는 이미 대충 감을 잡았다. 꽤 빠르긴 하지만 그래 봤자 마법사.
검에 두른 오러는 이 녀석이 어떤 방어를 펼치건 말끔하게 절단할 수 있다. 일격이면 충분하다.
“야, 내 칼이랑 네 마법 중에 뭐가 더 빠를 것 같냐?”
조용히 [혼신]을 발동해 [민첩] 스탯을 증폭시킨다. 마탑주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하, 허세는. 마탑주를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꼬맹이는 죽어.”
이 녀석이 알 리가 없지만, 나는 결코 허세는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증명했다.
“무슨 손가락을?”
-서걱, 툭.
깔끔하고 조용한 일섬이, 청색 마탑주의 손목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
가짜 현자의 마법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마법사에게 손은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듣자하니, 현존하는 마법의 7할은 손목 부근에 흐르는 마력회로를 이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나.
심장 근처에 존재하는 마력회로의 집합- 마나 하트가 마력의 총량과 생산량을 좌우한다면.
손목 부근의 마력회로는 마나 터널이라 불리며, 마력의 출력을 좌우하는 기관이라고 할 정도다.
“끄아아아아악!”
그렇기에, 순식간에 손목이 날아간 청색 마탑주는 전기로 지져졌을 때보다 더한 비명을 질렀다.
마탑주는 왼손에 들린 완드로 액체금속을 조작해, 잘려나간 손목을 재빨리 붙들어 절단면에 붙였다.
거기에 그 위로 팔찌처럼 액체금속을 둘렀는데, 아무래도 곧바로 접합을 시도하는 모양.
심지어 마력의 흐름을 보니, 별개의 방법으로 출혈을 봉쇄하고 혈류를 조작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액체금속을 다루지만 역시 근간은 물 속성이라 이건가, 피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구나?
“끄흑……후욱, 후욱, 후욱……젠장, 젠장할……”
마탑주는 눈앞에 있는 나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잘려나간 손을 접합하는 것에 집중했다.
신경쓰지 않는다기보다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아무래도 어지간히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걸 그대로 둘 리가, 나는 액체금속이 둘러진 마탑주의 손목을 짓밟아버렸다.
-콱!
“끅!”
주변에 살짝 퍼져 있던 마탑주의 마력이 격하게 흔들렸다. 마력이 역류한 듯하다.
마탑주를 반불구로 만든다고 나한테 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에 한 짓이 괘씸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손목 접합 작업을 강제로 중단당한 마탑주는 나를 올려다보며 독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눈깔 봐라, 나랑 하던 얘기는 마저 해야지? 그거 붙이게 놔두면 내 말 믿어줄 거냐?”
마탑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만 봐도 대충 뭐라고 말할지 알 것 같다.
조금도 굽힐 생각이 없구만, 이러면 에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일단 죽이는 수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하며, [강철 직검]을 들어 올려 얇게 오러를 씌웠다.
“그만 하시죠, 두 분다.”
그 때, 마탑주가 걸어 내려왔던 계단 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허리 라인이 드러나는 꼭 끼는 로브와, 커다란 챙이 인상적인 고깔모자를 쓴 여자였다.
한 손에 완드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곳 소속의 마법사인 것 같은데.
“사정은 들었습니다. 일단 저희 마탑주님을 좀 놓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숨을 푹푹 쉬며 말하는 모습을 보니, 이쪽은 말이 좀 통할 것 같다.
**
나는 마탑주를 짓밟던 발을 떼고, 여자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청색 마탑의 마탑주 대리, 에올피아라고 합니다. 마탑주님을 대신해 이 마탑의 운영과 지휘를 맡고 있습니다.”
에올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파랑의 마녀’ 라는 자신의 이명을 함께 소개했다. 들어본 적은 없다.
신경이 쓰이는 건 오히려 이명이 아니라 마탑주 대리라는 황당한 직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탑주 본인이 부재중인 것도 아닌데 왜 그 대리가 따로 있단 말인가.
“저희 마탑주님은 아무래도 그……조금 문제가 많으셔서 말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일을 치셨군요.”
에올피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알아서 그런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내 발밑에 있던 청색 마탑주는 에올피아를 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올피아, 어서 저쪽의 꼬마를 포박해라!”
“마탑주님은 잠시 닥치고 계시겠습니까?”
그리고 곧바로 닥쳤다. 아니, 뭔, 너희는 상하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냐?
“마탑주님이 입을 열 때마다 제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제발 지금은 얌전히 손이나 붙이고 계시죠.”
공손한 듯 전혀 공손하지 않은 말투로 마탑주를 쏘아붙인 에올피아는 저벅저벅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마력감지를 펼쳐서 탐지해 봤지만, 딱히 마탑주보다 강하거나 격이 높은 마법사라는 느낌은 전혀 안 든다.
체내의 마력량도 훨씬 적고, 마력의 갈무리도 그리 잘 되어있지 않다. 아마도 마탑주보다 두 수는 아래.
“손님, 실례지만 마력을 거두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 마탑에선 광역 탐지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는 부탁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마력을 거두었다.
“에올피아! 놈은 혈사교가 불러낸 이계의 괴물이다, 손님 대접은 집어치워!”
“얌전히 손이나 붙이고 계시라고 분명 말씀드렸……언제 그걸 또 다 붙이셨습니까……?”
“방해만 없으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내 실력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러자 덜렁거리는 손목을 달고 위풍당당하게 일어서는 청색 마탑주.
“예, 물론입니다. 그 마법 실력 하나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분 아닙니까.”
에올피아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더니, 청색 마탑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구두 굽으로, 마탑주의 발을 세게 짓밟아 버렸다.
“악! 뭐 하는 거냐!”
“가만히 계십쇼, 쫌!”
작은 목소리로 답한 에올피아는 이어서, 한 손에 든 완드로 마탑주의 명치를 푹푹 찔렀다.
“상대가 괴물인 줄 알면 좀 굽힐 줄도 아셔야지, 괜히 센 척하려다 이게 뭔 꼴입니까! 쪽팔리지도 않습니까!”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마탑주를 타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에르웬이 나한테 몇 번 저랬던 것 같은데……에이,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었지.
“진혁악마님, 끝났어?”
액체금속 고리가 흐트러지며 마법에서 빠져나온 꼬마 에인이, 내 등을 쿡쿡 찔렀다.
그래, 끝난 모양이다.
152. 괴물과 괴물
에올피아는 나와 에인을 마탑주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마탑주가 이용하기 위한 시설인 만큼 응접실은 탑에서 특히 높은 장소에 있었다.
덕분에 계단을 상당히 많이 올라가야 했는데, 다리도 짧은 꼬마 에인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당연히 나는 에인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올라갔다. 청색 마탑주는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찼다.
“흥, 웃기는 연극이군.”
그 싸가지 없는 모습에 잠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보다 에올피아가 먼저 움직였다.
-우당탕!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을 휙 휘두르니, 계단을 올라가던 마탑주가 혼자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덜렁거리는 손목을 고치느라 바쁘던 마탑주는 그대로 몇 바퀴나 우당탕 굴러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행실이 나쁘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혼자 넘어지시는 것 아닙니까, 마탑주님.”
“네 짓이잖냐, 에올피아!”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하시다니, 그러다가 한 번 더 넘어지셔도 저는 모릅니다.”
마탑주는 투덜거리면서도 손목을 부여잡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량한 꼴이다.
그나저나 방금 그건 마법이었나? 마력감지를 꺼두긴 했지만 [초감각]으로도 전혀 전조를 못 느꼈다.
궁금해져서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니, 에올피아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제 고유마도인 ‘마법 발걸이’ 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한 번 넘어트릴 수 있습니다.”
고유마도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일정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의 성명절기 같은 것이라고.
마법을 대부분 스킬로 사용하고 있는 도전자 중에선 사용자가 거의 없지만, 상층의 NPC 중에선 제법 있다던가.
에올피아의 마법은 그런 거창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대단해 보였다.
“굉장한데, 그런 게 된다고?”
내 [초감각]으로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저 밑의 청색 마탑주도 ‘걸리기만 해 봐라’ 라며 이를 박박 갈고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런 과장 없는 담백한 사실인 것이 분명하다.
조금 전에 마력감지를 통해 느꼈던 에올피아의 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은밀성.
그런 은밀성으로 한다는 게 고작 발걸기라니, 조금 우습게도 들리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하지, 엄청난 마법이잖아.”
상대가 누구든 한 번 넘어트릴 수 있다니, 어마어마한 실전성을 가진 견제용 기술 아닌가?
치열한 싸움 도중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혼자 넘어진다니, 보통 치명적인 게 아니다.
고유마도만 아니었으면 나도 사정사정해서 한 번 배워 보고 싶을 정도다.
“……그렇습니까. 오랜만에 듣는 말입니다.”
에올피아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며, 계속 계단을 올랐다.
**
계단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마탑주의 응접실은 무척 더러웠다.
이런 장소를 손님 대접용으로 쓴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더러웠다.
에올피아도 응접실이 이 꼴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는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깊게 한숨을 쉬며 마탑주를 바라보았다.
“마탑주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저 연금대 구매 예산은 제가 기각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 그거…사비로 샀다. 좀 비싸지만 지출할 가치가 있었지.”
“제가 분명히 금전 문제가 아니라 공간과 안전상의 문제로 기각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에올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마탑주의 발을 구두굽으로 세게 찍어 버렸다.
“그걸 다른 곳도 아니고, 손님 접대용의 응접실에 두신 이유가 대체 뭡니까.”
뭔가 우둑우둑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저거 괜찮은 거 맞나.
“아니, 윽, 당연히 내 공방에 두면 네가 잔소리할 게 뻔하니……치우면 되잖냐.”
마탑주는 그대로 연금대라 불린 장비를 해체해, 응접실 밖으로 갖고 나갔다.
자연스럽게 응접실에는 나와 에인과 에올피아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훼방꾼이 없어진 셈인가.
에올피아는 완드를 휘둘러 염동력 같은 마법으로 방 안의 물건들을 가볍게 정리하곤, 우리를 소파로 안내했다.
소파는 뭔가 마법이 걸려 있는지 푹신했고, 테이블 위에는 저절로 접시가 날아와 단출한 다과가 차려졌다.
“우와.”
에인은 곧바로 쿠키에 손을 뻗었다. 혹시나 독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내가 먼저 하나 집어 먹었다.
독이 들어 있어도 나한테는 안 통하니 분별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또 독 소믈리에거든.
그동안 온갖 독을 다 먹어본 덕분인지, 이제는 맛으로 독이 들었는지 어떤지 분별할 수 있다.
[초급 요리 Lv.3]
이 염병할 요리 스킬에 달린 미각 향상 효과 덕분에, 최근 들어 정확도가 더 높아지기도 했고.
나는 독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에인에게 다과가 담긴 접시를 통째로 내주었다.
-옴뇸뇸.
전부터 생각한 건데, 요 꼬맹이는 먹을 때가 제일 귀엽다. 조그만 게 다람쥐 같아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탑주님이 워낙 의견이 분명하신 분이셔서, 간혹 이런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나는 마주 앉은 에올피아의 표현에 감탄했다. 의견이 분명하다니, 그걸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저렇게 보여도 나쁜 분은 아닙니다. 손님께서 모쪼록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마탑주의 인성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럼, 그 아이의 어머니를 찾는다고 하셨습니까? 사정을 이야기해주시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정이라면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입구 부근에서 어떤 마법사가 연락을 돌렸다고도 했고.
애초에 내가 한창 마탑주랑 싸울 때, 사정은 들었다고 말하면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건가? 하지만 더 말해줄 게 없는데?
“아,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두 분을 멈추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에올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샐쭉 움직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제가 늦었다면, 손님께선 분명 마탑주님을 죽이고……모든 마탑의 적이 되셨겠죠.”
단언하는 목소리에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단순히 내 행동만이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확신하는 듯한 느낌.
내가 청색 마탑주를 죽이고 수배자가 되어서 쫓기기 시작한다면, 그 후에 일어날 미래.
“혈사교가 우습게 보일 최대의 적이.”
에올피아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
청색 마탑주는 순수한 마법사로서의 역량만으로 탑주 자리를 먹은 인물.
청색 마탑 자체가 굉장한 메이저급 마탑이기에, 청색 마탑주와 다른 마탑주의 실력 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청색 마탑주와 잠깐이지만 맞붙어본 관점에서 말하자면- 동급의 마법사가 열 명쯤 있어도 내가 이길 수 있다.
방어마법이고 나발이고 오러 앞에서는 평등하며, 공격마법도 마력강화를 쓰지 않은 상태로도 버틸만한 정도.
18층에 존재하는 마탑의 총 숫자가 얼마나 되더라. 기억하기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
마탑주급의 마법사가 서로 서포팅을 해줄 때 생길 시너지 같은 것을 고려해도, 대충 견적이 나온다.
설령 마탑 전체를 적대하게 된다 한들, 승리의 천칭은 내 쪽으로 훨씬 크게 기울 것이다.
에픽 퀘스트가 걸린 이상, 나는 마탑과 척을 지면 곤란한 처지지만.
그건 마탑 쪽도 마찬가지, 분쟁이 벌어져도 가능하면 원만하게 풀고 싶겠지.
에올피아처럼 내 역량을 제대로 가늠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렇겠지.”
나는 에올피아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 마탑주가 조금만 더 지랄을 떨었으면 참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냥 싸가지가 없는 건 그냥저냥 봐줄 수 있다.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하이엘프 쪽에서 잔뜩 봤다.
하지만 주도권을 잡겠답시고 꼬맹이를 인질로 잡은 건 선을 넘은 짓이었다.
아무튼, 나는 에올피아가 부탁한 대로 다시 한번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좀 더 자세하게.
에인이 가진 마법적 재능을 근거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부모가 아니겠느냐는 말을 포함해서.
“마법적 재능은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는 편이니, 타당한 추측이십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에올피아는 마력감지를 사용해 에인의 몸을 훑었다. 내가 말한 재능을 직접 가늠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인의 재능은 그런 탐지로 가늠할 수 있는 영역에 있지 않다. 당장 보유한 마력량은 형편없으니까.
에인의 진가는 마법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과 응용력, 그리고 어마어마한 마력 감응력에 있다.
그런데, 그렇게 봐도 모를 거라는 말을 꺼내려던 순간.
-카앙!
에인은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당당하게 입증했다.
에올피아가 퍼트린 마력이 반발을 받아 크게 밀려났다. 나도 불과 조금 전에 겪어본 일이다.
마력감지를 차단했던 청색 마탑주의 마법- 시전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그것을.
“와, 진혁악마님. 나 이것도 했어.”
에인은 자신의 쥐꼬리만 한 마력으로, 아무렇지 않게 재현해 낸 것이다.
“그래, 잘했다. 어머니가 보면 기뻐하시겠어.”
경악한 에올피아의 표정을 보며, 나는 조금 뿌듯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때, 우리 꼬맹이 쩔지?
153. 에올피아
문외한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재능이다. 진짜 마법사가 본다면 놀라는 게 당연하지.
에인의 마법을 보고 그 재능의 편린을 눈치챈 에올피아는 곧바로 말을 고쳤다.
“……그렇군요, 이 아이는 확실히 대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게 틀림없습니다.”
에올피아는 로브 속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메모한 뒤 바로 뜯어냈다.
뜯어낸 종이를 테이블 위에 있는 수정구에 붙이자, 마력이 흔들리며 종이가 사라지고 작은 빛이 일었다.
수정구를 통해 뭔가 메시지를 전한 것 같다. 감각으로 짐작해보자면 전음과 비슷한 방식일까.
“아이의 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은,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은 ‘엄마’의 이름조차 모르고, 인상착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덕분에 ‘이러이러한 아이가 있다’ 라고 다른 마탑에 알리는 것 말고는 딱히 받을 수 있는 도움도 없는 상태.
하지만 에올피아는 턱을 짚고 잠시 고민하더니,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이지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에올피아는 이어서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 앞에 갖다 댔다.
“우선 이 아이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알리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이게 무슨 소리람.
“이 아이의 재능은 이상합니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만, 재능이라기보다는 능력으로 보인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이렇게 어린 나이에, 처음 본 마법을 무영창으로- 마법진까지 생략하고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건 나도 안다. 그렇기에 에인의 재능이 그만큼 굉장하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나.
“보통의 마법사가 이 아이의 재능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으십니까?”
“천 년에 한번 태어날만한 오성의 천재?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것은 이치를 벗어난 힘을 품고 있다’ 라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게 뭐 어떻다고, 뭐가 다른 건데.
한편 에인은 고민하는 나를 보더니, 꾸물꾸물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진혁악마님, 이거 먹어.”
그리고는 접시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마지막 과자 한 개를 내 입에 들이밀었다. 음, 그래.
과자를 받아먹자 입안에 단맛이 확 퍼졌다. 으적으적 씹어 삼키고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곧 결론이 나왔다.
아하, 그런 거군. 에인의 재능을 에인이 가진 자질이 아니라, 뭔가 외적인 것으로 생각할 거라 이건가.
“마법사란, 자신의 마법을 발전시키고 더 높은 성취에 닿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족속입니다.”
에올피아는 내 표정을 살피고는, 이해했음을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현대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탑의 규칙을 따르며 얌전히 지내고 있습니다만, 그건 그들이 도덕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올피아는 이어서 가볍게 마탑의 역사를 설명했다. 최초의 마탑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 따위를.
처음에는 갑자기 뭔 역사 강의를 하나 했지만, 듣다 보니 나도 저절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신공양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혈사교가 먼 과거에는 정식 마탑이었다는 이야기 즈음부터였을 거다.
마법사는 원래 괴짜가 많다지만, 과거의 마법사들은 단지 괴짜라고 칭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연구와 마탑의 지원을 저울질한 결과, 후자가 더 이득임을 학습했을 뿐입니다.”
에올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에 앉은 에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에인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운 이야기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귀담아듣지 않았거나.
“물론, 현대의 마법사들을 그 시절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겠습니다만……”
즉, 에올피아의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
“이 아이가 가진 ‘이치를 벗어난 힘’을 어떻게 해서든 빼앗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마법사들이 에인을 노릴지도 모른다.
**
에올피아의 이야기에는 납득했다. 물론 비약이 심한 이야기이긴 했다.
마법사들이 죄다 미치광이 매드사이언티……사이언스가 아니군, 아무튼 그런 기질을 갖고 있다는 건데.
마탑 입구에서 만났던 마법사도 그렇고, 내가 보기엔 평범하게 친절하거나 얌전해 보이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장 청색 마탑의 마법사들 대부분은 나랑 마탑주가 맞붙을 때 죄다 겁먹고 공방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나.
그 놈들이 갑자기 에인을 납치해 해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좀,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에인이 에픽 퀘스트의 중심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긴 하다.
“근데.”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나는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에올피아부터 경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장 댁이 거기서 그렇게 있으면서, 마법사 인성 평균을 운운하는 게 맞는 거야? 너는 얘가 안 탐나?”
에올피아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자신은 다르다며 걸치고 있던 로브를 홱 하고 벗어던졌다.
어머나 시발, 갑자기 뭐 하세요?
“진혁악마님, 안 보여.”
“애들은 보면 안 돼.”
나는 잽싸게 에인의 눈을 가렸다. 로브를 벗은 에올피아는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하는 짓인가 했지만, 그 자리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장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저거 그거잖아, 형태가 살짝 다르긴 하지만- 혈사교의 문장이랑 똑 닮았는데.
“저는 어릴 적 혈사교에게 납치당해, 수 년간 지속적인 착취를 당하고 마나 하트를 적출당했습니다.”
에인의 몸에는 없었지만, 돌이켜 보니 제물로 바쳐진 시체들 중에는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 탓에 제 마력량은 보통보다 낮은 편입니다. 이젠 청색 마탑에선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뭔가 숨겨둔 비밀을 밝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
에올피아는 로브를 다시 입고는, 쓰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건 청색 마탑 소속이라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터벅터벅하는 발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청색 마탑주가 들어왔다.
“그때 저를 구해주신 분이, 바로 이 탑의 마탑주시니까요.”
에올피아는 살짝 웃음기가 있는 눈동자로 마탑주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마탑주 놈이 그렇게 말했었지, 기특하다고- 보기 드문 미담이라 생각했다고.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태도를 바꾸긴 했지만, 진심이었던 건가.
“그런데 마탑주님, 왜 그 연금대는 다시 들고 오셨습니까?”
“마땅히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시 여기 둬도 괜찮……”
“그거 똑바로 처분하기 전까진 탑에 들어올 생각 마시죠.”
어쩐지, 갑자기 이 둘의 관계가 다른 느낌으로 보이기 시작하네.
**
그 이후, 에올피아는 에인을 데리고 다른 마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자신이 다른 마탑 구성원들의 명단을 만들어 올 테니, 아이에게 보여주고 ‘엄마’를 지목하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를 탑에서 보호하고 있다가 그렇게 ‘엄마’ 가 누구인지 식별되면, 그때 안전하게 만남을 주선하자고.
에인에 관한 이야기가 통신을 통해 다른 마탑에 퍼진 상태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직 괜찮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나로서도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 명단이 나올 때까지 이 마탑에 체류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에인의 안전도 확보할 수 있고, 굳이 먼 여정을 떠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마법을 배우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 에인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나도 함께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가만히 두기 아쉬운 재능입니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고 마탑주님과 제가 따로 가르친다면 안전은 보장됩니다.”
정확하게는 에올피아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것이었지만, 나도 꼽사리 정도는 낄 수 있겠지.
“에올피아, 나보고 외부인에게 개인 과외를 해주라는 거냐? 나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만?”
“마탑주님의 일정은 제가 전부 다 알고 있는데, 어디가 한가하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음…아무튼 네가 모르는 일정이 있다. 마탑주에겐 마탑주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지.”
청색 마탑주는 뭐라 뭐라 떠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내가 듣기에 그로부터 이어진 이야기는-
“아까 전의 연금대가 있다면 좀 덜 바빠질 수도 있지만…네가 꼭 버리라고 했으니 방법이 없구나.”
“하아……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께서 왜 이러십니까. 그 연금대 하나면 됩니까?”
“그리고 저번에 신청한 유체 변환기 예산까지 통과되면 시간이 날 것 같기도 한데…아악, 발 좀 그만 밟아라!”
-그냥 커뮤니티에서 가끔 보았던 사이좋은 WWE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괜히 옆구리가 허전해지는군.
“왜 그래, 진혁악마님?”
나는 무릎에 앉은 꼬마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깐의 쓸쓸함을 달랬다.
“좋아, 가르쳐 주도록 하지.”
“아, 뭐 하나만 더 부탁하자.”
곧 합의를 마친 마탑주와 에올피아는 에인을 가르치기로 확정했고, 나는 거기에 제안 하나를 더 얹었다.
이 꼬맹이가 마법을 배울 거라면, 당연히 장만해야 하는 게 하나 있으니까.
“얘 완드 좀 만들어 줘.”
그러자, 퀘스트 발생을 알리는 인터페이스가 눈앞에 떠올랐다.
154. 애착 형성 법칙
나는 에인이 어엿한 한 명의 마법사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어엿한 마법사라면 자신만의 완드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에인에게 완드를 맞춰주기로 했다.
완드는 다른 클래스의 무기들이랑은 조금 다른 특성이 있는데, 바로 주인의 마력을 탄다는 것이다.
주인의 마력에 의해 길이 들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나.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동안 마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알게 된 사실이다.
실제로 오픈 커뮤니티에도 익숙한 완드를 쓸 때 더 시전이 잘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퍼져 있기도 하다.
스탯이나 시스템상으로 나타나는 효과가 아니기에, 대부분은 그냥 기분 탓이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지만.
당장 나도 손에 익은 [강철 직검]을 가장 많이 쓰고 있으니, 그런 개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 에인이 싸구려 완드에 익숙해져서 장비를 갈아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고급품을 맞춰 줄 생각이다.
무엇보다, 상점제의 기성품 완드는 다른 무기류보다 상위 장비와의 성능 격차가 심하기도 하니까.
주인의 머리카락이나 피를 넣어서 주문 제작하는 완드는 거의 평생 쓸 수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당연히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 완드 제작에는 상당한 금액이 듭니다. 괜찮으십니까?”
에올피아의 물음과 함께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창이 반짝이며 추가 정보를 표시했다.
[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완드 제작]
설명 : 당신은 청색 마탑에 정식으로 완드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마탑은 당신에게 은혜를 입혀두고 싶기에, 분명히 최고의 장인에게 제작을 맡겨 줄 것입니다.
하지만 완드의 제작에는 굉장히 비싼 재료와 설비가 필요합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공짜로는 못 해줄 만큼이요.
당신을 악마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당신에게 받은 완드를 평생 간직하고 사용할 것입니다.
아이를 생각한다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투자할 필요가 있겠죠.
[퀘스트 목표]
1. 완드에 사용할 기본 재료를 준비하기(선택).
2. 완드에 사용할 심재를 준비하기(선택).
3. 완드 제작 비용을 지불하기(선택).
4. 완드 제작하기.
각각의 선택 목표의 옆에 작은 아이콘이 표시되었고, 시선을 옮기자 [자세히 보기]라고 표시되었다.
[자세히 보기]를 활성화하자, 온갖 재료들의 목록이 나열되었다.
특히 3번 목표의 옆에는 제작 비용의 상세가 표시되었는데- 와우, 비싸게 만들려면 진짜 비싸게 할 수 있구나.
필수 목표는 완드 제작 하나뿐이니, 아무 재료를 준비하지 않고도 제작과 퀘스트 완료는 가능할 거다.
하지만 실제로 제작되는 완드와 퀘스트 보상은 에르웬의 퀘스트처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고.
“여기, 간단한 카탈로그가 있습니다. 완드 제작 비용은 이쪽을 참고하시면……”
나는 에올피아가 내민 카탈로그를 흘깃 쳐다만 보고, 인벤토리를 열어 골드 드롭 버튼을 눌렀다.
-촤르르르르르륵!
엘프 층 이후로 또 한동안 쌓아두었던 막대한 양의 골드가 쏟아졌다. 어차피 달리 쓸 곳도 없다.
내가 내놓은 금액은 퀘스트란에 표시된 제작 비용 탭에 적힌 최대 수치의 두 배.
최대 수치를 넘어서도 금액을 투입할 수 있다고 하니까, 넉넉하게 그 두 배쯤 넣으면 되지 않을까 한다.
“반짝반짝하다.”
에인은 테이블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쌓인 금화를 보고 즐겁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리고 에올피아와 마탑주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고- 목소리가 나온 것은 대충 5분 뒤.
“아까는 실례가 많았다. 이제 보니까 눈이 맑고 심신이 깨끗하니, 혈사교랑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게 틀림없어!”
마탑주의 띠꺼운 태도가 금전의 힘으로 치료되는 순간이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나는 에올피아와의 완드 제작 상담을 마치고 에인과 함께 숙소로 이동했다.
에올피아의 배려로 우리는 청색 마탑에 있는 빈 연구실 하나를 제공받아 이용할 수 있었다.
뭐, 마을에 있는 제대로 된 숙소를 이용해도 괜찮았겠지만- 마법 교습까지 받으려면 여기가 제일 편하겠지.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커뮤니티를 켜고, 이번 퀘스트와 관련하여 필요한 정보를 조금 더 검색했다.
“심재는 뭐든 쓸 수 있다고 했었지……”
완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퀘스트 창에 나온 대로 크게 두 가지지만, 이게 자세히 파고들면 또 무척 복잡하다.
일단 기본 재료만 해도 네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완드 몸체의 재질, 회로에 사용할 재질, 회로에 부어넣을 연금액, 회로에 넣을 핵.
연금액이야 가장 순도가 높은 걸 사면 그만이고, 핵은 어차피 마법석을 쓰니까 인벤토리에서 하나 꺼내 주면 그만.
문제는 나머지 두 종류인데, 가장 좋은 건 미스릴과 진은이라고 들었다. 둘 다 18층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다.
진은 같은 경우에는 수배를 때려 보면 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아서 운에 맡겨야 하고.
미스릴은 정말 어쩌다 한 번 생길만한 재료라서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면 적어도 그 둘 다음으로 좋은 재료를 구해다 줄 필요가 있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런 기본 재료들이 아닌 심재다. 이건 선택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뭐든간에 마력을 품은 재료라면 심재로 넣을 수 있다는데, 이 심재가 또 완드의 성능을 크게 가른다고 한다.
몬스터의 신체 일부라던가, 그냥 질 좋은 마법석이라던가, 아니면 희귀한 마법생물의 부산물이라던가.
아예 드래곤의 심장 같은 걸 넣으면 정말 엄청난 완드가 된다는데, 18층에서 그걸 구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일단 후보로 생각해 둔 건 마계 층에서 습득한 [마왕의 뿔]이라는 기타 아이템이다.
그런 사악해 보이는 물건을 에인의 완드에 넣어도 괜찮을지가 좀 걱정인데.
“미궁을 한 번 다녀와야겠는데……”
내일은 시간을 내서 미궁 지역에 다녀와 보도록 하자. 아니면 필드 보스라도 찾아가던가.
아예 18층 미궁의 보스를 죽이고 목을 따오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보스만 잡고 전이문은 나중에 쓰면 되니까.
한편, 에인은 에올피아에게서 받은 색연필을 이용해 종이에 그림을 잔뜩 그리고 있었다.
그냥 낙서를 하고 있는 건 당연히 아니고, 자기가 쓸 완드의 디자인을 정하고 있는 것이다.
에인의 요망이 백 퍼센트 반영되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는 맞춰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니까.
“다 그렸어? 어디 한번 보자.”
나는 에인이 어떤 완드를 원할까 싶어서, 침대에서 내려와 색색으로 칠해진 종이를 살펴보았다.
에인은 그림에는 썩 재능이 없다. 당연히 그려진 완드의 모습도 무척 난해했다.
“음……이거 엄청나게 화려하네, 근데 너무 큰 거 아니야?”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화려하기는 한데, 정말 딱 어린애들이 생각할 만한 화려함이다.
왜, 어린아이들은 뭐가 됐건 일단 덕지덕지 붙인 걸 좋아하지 않던가.
장식도 이것저것 잔뜩 달려 있고, 대충 가늠해 본 완드의 길이도 매우 길었다.
“큰 게 좋아.”
아마 이대로 만들어진다면 완드가 아니라 스태프가 될 것이다. 비용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이거랑 이거랑 이것도 다 들어갔으면 좋겠어, 소원이야.”
에인은 완드가 커야만 하는 이유를 재잘거리며, 자신이 그린 그림의 포인트를 하나씩 짚었다.
“이건 스승님 칼 모양이고, 이건 저번에 먹었던 맛있는 거고, 이건 내 마법사 문장이야.”
에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넣고 싶어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처럼.
그리고 완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들어가는, 에인의 마법사 문장은- 내게도 익숙한 형태였다.
“진혁악마님이랑 똑같은 거야.”
내가 항상 차고 다니는 견장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형태,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장이었다.
“하, 요 꼬맹이가 진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색연필을 쥔 에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이러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
다음 날, 나는 오랜만에 혼자서 무장을 갖추고 마탑 밖으로 나왔다.
마법 강의는 나도 함께 듣고 싶지만, 일단은 에인의 완드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확보하기로 했다.
솔직히 에인이랑 같이 강의를 들어봤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은 그냥 괜히 그런 기분이었다.
나 자신의 성취를 이루기보다는, 에인을 위해 뭔갈 해 주고 싶은- 그런 기분이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다들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나한테 뭐든 챙겨주고 싶어하던 다크엘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우선이었던 다른 사람까지도.
미련해 보일 만큼 자신을 깎아가며, 나에게 뭐든 주고 싶어했던 우리 엄마를.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
“진혁악마님, 잘 다녀와. 다치지 마.”
“그래, 마법 공부 잘 하고.”
“응, 일찍 와야 돼?”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하는 에인을 보며 생각을 고쳤다. 아직 엄마를 이해하긴 힘들 것 같다고.
저 귀엽고 기특한 꼬맹이와는 다르게, 나는 썩 좋은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나은 저 꼬맹이의 이야기- 이 에픽 퀘스트의 끝은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만 한다.
그걸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월드 보스건 지랄이건 다 죽여 버릴 것이다.
155. 호문쿨루스
꿈틀거리는 검은 몸체를 가진 괴수가 나를 향해 갈고리를 날려 왔다.
나는 날아드는 갈고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전진해, 다리에 오러를 둘러 괴수의 몸을 걷어찼다.
그걸로 끝이었다. 괴수의 몸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머지않아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진짜 딱 18층 수준밖에 안 되네.”
나는 이번 전투 도중에 입은 유일한 피해, 갑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드롭 아이템을 회수했다.
18층 미궁 지역의 특징은 등장하는 몬스터 대부분이 마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궁 자체가 어떤 마법사가 만든 공방이 사악한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 변이해 생겼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정은 커뮤니티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별로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라서 안 읽었다.
“그러니까 이게……B 타입 호문쿨루스 맞나.”
다만 커뮤니티에 정리된 18층 미궁 몬스터의 종류는 꼼꼼히 읽었다. 내가 쓰러트린 것은 호문쿨루스라는 몬스터.
마법 실험의 부산물로 생긴 찌꺼기들이 내재된 마력의 영향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괴물이라고 한다.
방금 그 갈고리가 달린 괴수는 호문쿨루스 B타입, 연금술 실험에서 태어난 부산물로 높은 방어력이 특징이라고 들었다.
물론 그 높다는 게 평범한 18층 도전자들 기준이다 보니, 오러를 두른 공격 앞에서는 그냥 종잇장이었다.
뭐, 미궁 지역 공략은 이미 예전부터 이런 상황이긴 했다.
특별한 기믹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보스도 조금 센 잡몹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는 상황이었으니.
실전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걱정해 아이템을 빼고 싸우는 방법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오러를 운용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아이템 한두개는 내 스펙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애초에 내 아이템이 하나같이 [내구] 업그레이드만 올린 것들이었다는 점도 있고.
-갸오오오!
갈림길을 하나 지나치자, 이번에는 머리가 세 개 달린 해골 모습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마력감지를 항상 전개해 두고 있었던 만큼, 딱히 놀랄 건 없었다.
왼손의 방패에 오러를 두르고, 가볍게 휘둘러 해골 머리통 세 개를 동시에 박살 내버렸다.
-쾅!
아직도 방패에 오러를 두르는 건 유독 효율이 나쁘다. 하지만 평범한 잡몹한테는 이 정도도 과분했다.
머리통이 박살나며 즉사한 해골의 드롭 아이템을 확인했다. [호문쿨루스 C의 뼛가루], 잡템이다.
에인의 지팡이에 들어갈 재료를 구하러 온 건데, 죄다 이런 잡몹들만 나와서 실망스럽다.
분명 마력량이 매우 많은 변이 호문쿨루스라던가, 흑마법사 리치라던가, 그런 것들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필드 보스랑 비슷한 판정인 미니 보스라고, 출현율이나 스폰율이 매우 낮게 잡혀 있는 것 같다.
다른 서버에선 사냥 중인 다른 도전자들에게 제보를 받아 미니보스만 쏙쏙 골라 먹으면 그만이라던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한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이래서 솔플은 안된다니까.
“검령이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검령을 미궁에 풀어두고 미니 보스 스폰 알림이로 써도 괜찮았겠지만……아쉽게도 칼레온은 지금 내게 없다.
에인을 마탑에 혼자 두는 게 살짝 걱정이라, 중급 마석을 네 개나 박아넣어서 보호자로 붙여 놨거든.
지속시간이랑 쿨타임 문제 때문에 결국 비는 시간은 생기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애초에 내 전투에선 미끼 용도로밖에 딱히 쓸데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유효하게 써먹으려 한 건데.
“쓰읍……”
상황이 이렇게 되니 괜히 아쉽다. 에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만.
이게 다 미궁의 몬스터들이 생각 이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필드 보스급이 팍팍 나와주면 얼마나 좋아?
어쩔 수 없네, 혹시 몰라서 내버려 두려고 했지만- 바로 보스의 모가지를 따러 가야겠다.
**
오픈 커뮤니티의 지도를 활용해 찾아간 보스룸, 문을 열자마자 음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말했듯이, 18층 미궁은 어떤 마법사의 공방이 사악한 무언가에게 영향받아 몬스터의 소굴로 변이해버린 곳.
이곳의 보스는 그 마법사 본인이 자신의 실험체들과 뒤섞여 탄생한 굉장히 강력한 호문쿨루스라는 설정이다.
그리고 어두운 안개 저편에서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타난 보스는, 그 설정에 맞게 징그러운 외형을 하고 있었다.
금방 바다에서 건져낸 익사체에 호문쿨루스의 파편을 붙여둔 것처럼 생겨먹은 모습.
[코끝을 찌르는 진득한 썩은내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몸, 바다에 빠져 죽은 시체가 걷고 있었소.]
[이것은 질 나쁜 괴담이 아닌, 그 공방의 주인이었던 마법사의 말로요.]
[무모한 모험가여, 부디 저 끔찍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배우는 바가 있기를 바라오.]
[BOSS - 심연의 익사자 세루온]
하지만 그 징그러운 외형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보스 몬스터가 가진 굉장한 양의 마력이었다.
18층의 보스치고는 가진 마력의 양이 너무 많다. 마법사 타입의 보스라서 특별히 더 많이 갖고 있는 걸까.
아무튼 저걸 완드에 갈아 넣으면 상당히 쏠쏠할 것 같다. 나는 곧바로 검을 들고 오러를 둘렀다.
[심연의 마력이 당신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심연의 마력이 당신의 발을 둔하게 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심연의 마력이 당신의 장비를 부식시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18층 보스의 공략을 귀찮게 만든다는 세 종류 상태이상은 가뿐하게 저항해 주고.
생긴게 징그러워서 오래 보고 싶지 않으니, 버프 효과가 있는 스킬과 마력강화를 모두 전개한다.
백색의 마력이 나를 감싸며, 주변을 스멀스멀 덮어오던 검은 안개가 밀려나 사라졌다.
-쿠르릉!
마력강화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천둥소리를 울리며, 단숨에 접근해 검을 휘두른다.
[약점 간파] 스킬로 생성한 약점 부위를 오러가 두른 검으로 찌르자, 요란하게 터지는 붉은 이펙트.
크리티컬 판정과 함께 [라이트닝 차지]의 벼락이 흘러들어가고, 보스는 쓰러졌다.
“해치웠나?”
일격에 쓰러진 보스는 손가락 하나 꿈틀하지 못했고, 곧 클리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8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해치웠다!”
부활의 주문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였다.
**
1분도 걸리지 않았던 짧은 보스전이 끝나고, 나는 전이문을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전이문 활성화 권한은 다음에 다시 따면 되고, 중요한 건 저 좆밥 보스가 준 보상인데- 아무래도 꽝인 것 같다.
우선 저놈이 드랍하는 주요 아이템은 [심연의 파편]이라는 높은 등급의 고유 마법석이다.
이 마법석의 특이한 점은 가공 방법이 매우 많다는 것, 파편을 뭉쳐서 더 높은 등급의 마법석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심연의 파편]을 합쳐서 얻는 [심연의 근원]이라는 아이템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에인의 완드에 이걸 넣어 줄 생각이었다.
최초 클리어 보상이나 최후의 일격 보상으로 파편이 아닌 근원을 바로 딸 수 있을 줄 알고 잡은 거였는데.
[정화된 심연의 파편]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준 건 묘한 접두사가 붙은 다른 아이템이었다. 이런 걸로는 만족 못 하지.
어차피 18층에서는 조금 더 체류할 예정이니, 보스가 재스폰되기를 기다렸다가 몇 번 반복해서 잡도록 하자.
[정화된 심연의 파편]을 모아서 [정화된 심연의 근원]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여기 써 있으니.
그나저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게 됐네. 이러면 미니 보스를 기다려보는 게 좋으려나.
-꿈틀꿈틀.
그렇게 보스룸에서 나와 미궁 입구 쪽으로 다시 걸어가던 중, 슬라임 형태의 호문쿨루스 하나가 나타났다.
호문쿨루스는 꿈틀거리더니 인간과 비슷한 형태로 몸을 변형시켰다. 저게 아마 E 타입이었지?
평소에는 슬라임 형태로 지내다가, 인간의 형태를 모방해 덤빈다는 타입.
인간을 모방한다고 해도 그냥 무기를 든 마네킹 모습이라, 딱히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모양이다.
내 앞에 나타난 호문쿨루스는 검과 방패를 든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여,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눈앞에 도달한 검.
-카강!
“씹!”
뭐야 이 새끼, 왜 이렇게 빠르지?
아니, 빠르기만 한 게 아니다. 검격이 장난 아니게 무겁다.
그냥 잡몹인 줄 알았더니 히든 보스였나? 아니, 시스템 메시지는 안 나타났는데?
그보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등골이 찌릿거리며 본능에 위기감을 전한다. 뭔가 이상하다.
호문쿨루스가 변형으로 만들어낸 검을 위로 튕겨내며, 안쪽으로 파고드는 검세를 취한다.
-카강! 캉!
그러나 다음 순간, 호문쿨루스는 엄청난 힘으로 내 검을 튕겨내며 반대로 어깨를 노려왔다.
재빠르게 [혼신] 스킬을 발동해 [내구] 스탯을 증폭시키고- [철벽]까지 함께 둘렀다.
-푸욱!
그러나 호문쿨루스의 검은 내 어깨를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상처를 남겼다.
씨발, 이 새끼 진짜로 뭐야. 무슨 공격력이 이렇게 센 거지? 내 방어력을 부분적으로나마 뚫는다고?
시스템 메시지도 안 나타나는 일반 몬스터가 이따위로 강하다고? 양심이 어디 간 거지?
어깨를 부여잡고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호문쿨루스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 순간,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아, 지랄.”
형태를 바꾼 호문쿨루스는 무척 정교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왜 이렇게 센가 했더니, 놈은 내 모습을 모방하고 있었다.
156. 거울 깨기
E타입 호문쿨루스는 인간을 모방할 수 있지만, 그 수준은 사실 대단치 않다.
기껏해야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한 마네킹 내지는 목각인형 같은 모습으로 변신할 뿐.
하지만 저 호문쿨루스는 내 외형과 장비를 매우 정밀한 수준으로 모방하고 있다.
보스는 확실히 아니고, 그냥 특수 개체인가.
1층의 검은 뿔토끼처럼 초창기에 의해 모두 토벌되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몬스터.
그러나 그 위험도는 이 18층 미궁 지역의 보스를 아득히 능가한다. 녀석이 복제한 나 자신이 그러하니까.
그렇다면, 저 복제는 과연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 걸까.
일단 스탯과 공격력만큼은 완전히 재현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장착 중인 장비나 아이템은…애초에 내가 좋은 장비를 안 끼고 있으니 별 의미가 없고.
역시 관건은 스킬인데, 놈이 이것까지 모방하고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도전자의 스펙을 완전히 1대1로 복사하는 적이라고 해도, 딱히 양심이 없는 난이도 설정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도전자들은 결국 파티 플레이를 하니까. 저런 게 한 마리 뚝 떨어져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다.
파티 플레이로 성장한 도전자들은 역할분담이 잘 되어 있는 만큼, 대부분 약점이 명확하기도 하니까.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다구리를 놓으면 못 잡을 수가 없겠지- 결국 또 솔플이 문제다.
“안 덤비냐?”
나는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유지한 채, 호문쿨루스를 향해 말을 던져 보았다.
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며, 나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전의 공격적인 모습과는 또 다르다.
저 자세는 다크엘프류 검술의 기본형 중 하나. 저걸 그대로 취한다는 것의 의미는 명백하다.
-찌릿.
순간 미간에 찌릿한 감각이 닥치며, 호문쿨루스의 검이 내 턱 끝을 스쳐 지나갔다.
재빨리 몸을 뺐지만 베일 뻔했다. 내 반응속도와 순발력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살짝 다른가.
저 자세에서 이런 식으로 공격을 잇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역시 판단에는 차이가 있나.
회피와 동시에 오러를 두른 발길질을 뻗어, 호문쿨루스의 명치를 찼다.
제대로 들어갔다 싶었지만, 놈은 크게 밀려나지도 않고 내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휘감았던 오러를 마력으로 환원해 폭발시키는 것으로, 그 손을 떨쳐내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와 나 씨발, 내 몸이긴 한데 뭐가 저렇게 단단하냐. 오러까지 두르고 찼는데도 이러네.
-후웅!
호문쿨루스는 다시 한번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뻗어오는 검에 내 검을 부딪친다.
동등한 위력의 오러와 오러가 충돌하며, 서로를 부수고 마력의 파편을 주변으로 흩뿌렸다.
그냥 부서진 마력의 덩어리라고는 하지만, 그 원본이 오러였던 만큼 저 파편 하나하나도 굉장한 살상력을 가진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파편이 흩날리는 중심으로 뛰어들어가며, 허리춤에 매어 뒀던 도끼를 휘둘렀다.
[혼신]
[신속]
두 가지 버프 스킬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스탯을 증폭시켜서, 단번에 목을 노린다.
하지만 놈은 방패를 들어 올려 도끼를 막아내었다. 도끼를 놓고 방패를 손으로 붙잡아 당긴다.
놈은 힘 싸움에 밀리지 않으려 왼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타이밍을 맞추어 반대로 힘을 뺐다.
커뮤니티에서 눈대중으로 읽었던 탈력을 이용한 합기도인가 뭔가 하는 잡기술이다.
휘청이며 뒤로 넘어가는 호문쿨루스의 다리를 걸어, 마운트를 잡는- 어라?
안 넘어간다.
그 잠깐 사이에 상황판단을 마치고, 무게중심을 조절해 균형을 잡은 건가.
다리걸기를 받아내고 반대로 내 멱살을 잡아, 번개 같은 되치기를 시도하는 호문쿨루스.
하지만 나도 반대쪽 다리를 뒤로 뻗으며 무게중심을 조절하고, 허리를 틀었다.
-우당탕!
서로 몸이 얽힌 채로 넘어졌다. 재빨리 일어나며 검과 방패를 고쳐 쥐었다.
호문쿨루스 역시 똑같은 속도로 자세를 갖춘 상태였다.
판단능력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울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염병……”
내 동작을 완벽하게 베끼는 학습속도, 내 공격에 그대로 대응하는 반응속도.
이거 아무래도 시간이 엄청나게 끌릴 것 같다.
**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고 돌진하는 호문쿨루스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주었다.
-쾅!
폭발음이 터졌지만 호문쿨루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대로 방패를 휘둘러 온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방패로 스위칭해, 그 공격을 막아낸 후 곧바로 다시 스위칭했다.
살짝 휘어있는 형태의 단검, 깊이 뻗어온 호문쿨루스의 손목을 노리고 날을 긋는다.
-샤악!
하지만 [신속]을 발동해 순발력을 높인 호문쿨루스는 생채기 하나만 얻고 몸을 뺐다.
여기서 잠깐 [사고 가속]을 발동해, 호문쿨루스의 전반적인 상태를 살피며 이제까지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우선 저 놈은 내 스탯 전반과, 사용하는 아이템 및 스킬까지 모두 모방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놈은 내가 사용하는 체술과 무기술까지 그대로 모방한다. 내 아류 검술을 그대로 펼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 전의 공방에서 내가 약간의 우위를 가져왔듯, 놈의 모방도 완벽한 것만은 아니다.
우선, 놈이 모방할 수 있는 스킬과 기술은 내가 보여준 것만으로 한정된다.
패시브 스킬은 그대로 가진 듯하지만, 액티브 종류는 내가 한번 사용했던 것밖에 안 쓰고 있다.
검술이나 무기술도 마찬가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 동작을 베끼지만 결국 베낄 뿐이다.
덕분에 놈은 내가 펼치는 임기응변식의 동작에는 무조건 한 번씩 당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승리한다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씨발, 개 같은 [초재생].
개 같은 [철벽].
개 같은 [혼신].
개 같은 [신속].
아무튼 씨이발 존나 개 같은 스킬이 대체 몇 개인지 모르겠다!
임기응변으로 일격을 먹이면 뭐하나, 방어력이 개좆같이 높아서 치명상을 안 입는데.
천천히 공격을 이어나가서 데미지를 누적시키면 뭐하나, 치명상이 되기 전에 죄다 재생해버리는데.
지금까지 힘겹게 쌓아올린 사기적인 내구력과 전투 지속력이 그대로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씨발 저거 대체 뭘 어떡해야 뒤지는 건데? 죽기는 하는 거냐?
슬슬 임기응변을 통한 기습도 레파토리가 떨어져 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껴두고 있는 마력강화를 사용하면 아직 한 번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공격력이 너무 부족하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HP에 따른 보호 효과 덕분이겠지만, 나는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도 살아난 적이 있다.
내 [초재생]의 성능까지 고려해 본다면, 최소한 일격에 사지 두 개 이상을 날려버려야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남은 승리 플랜은 한 개 정도.
호문쿨루스는 내 모든 스탯과 패시브를 복사하고 있지만, 고유 특성만큼은 복사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피해를 60% 경감시키는 [강철의 혼], 그 차이로 인해 내 쪽이 더 높은 방어력을 가진다.
이 스펙적 우위를 믿고 소모성의 노가드 난타전으로 들어가서, 칠일 밤낮쯤 치고받으면 내가 이길 거다.
여기서 일주일을 내리 싸운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친 짓이다.
내 집중력이 그렇게 오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후우……”
현재 발동 중인 [사고 가속]이 끝나는 순간, 승부수를 띄우자.
**
준비하는 것은 에인에게 붙여주기 위해 검령을 잠깐 소환했을 때, 간략하게 들었을 뿐인 그 기술.
검령은 그것을 ‘오러 서클’이라고 불렀고, 마법사들의 고유마도와 같은 자신만의 의념기라고 설명했다.
의념기라는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고유마도와 같은 선상에 놓이는 걸 보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해내야 한다.
기본 원리는 오러가 마력을 고체처럼 굳힌 것이라는 점을 이용해, 체외에 형성한 오러의 고리를 마력회로로 삼는 것.
한 마디로 외장 마력회로를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더해, 신체능력과 공격력의 증폭을 도모하는 것이다.
[혼신]스킬을 사용해 [지능]스탯을 증폭시킨다.
[사고 가속]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순환시켰던 마력을 체외로 풀어놓으며, 동시에 붙잡아 조작한다.
솔직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이 오는 그대로 오러의 고리를 형성한다.
[마력 지배]라는 사기적인 스킬이 있는 덕분일까, 어떻게든 만들어지는 것 같다.
호문쿨루스 덕분에 내 오러의 발현과정을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
문제는 이게 [사고 가속]이 풀리고 실전으로 들어갔을 때,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것인가인데.
그걸 지금 와서 고민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으랴, 될 거라고 믿고 부딪혀 봐야지.
-키잉!
[사고 가속]이 끝나고, 집중 때문에 느릿하게 흘러가던 세계가 정속으로 움직인다.
동시에 최대한 공격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몸 안에서 순환시키던 마력을 스스로 폭발시킨다.
원래 이따위 짓을 하면 심각한 내상을 입고 죽는 게 당연하지만, 애초에 내가 노린 게 그거다.
-으적!
몸 안에서 폭발한 마력이 내장기를 짓이기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불굴] 스킬이 발동한다.
인위적으로 [불굴]을 켜기 위한 마력 자해, 동시에 마력강화까지 발동한다.
-쿠르릉!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점 간파]까지 발동해, 강제 크리티컬 판정까지 노린다.
이 삼중 강화에 이어서 준비해뒀던 오러 서클까지 발동시킨다- 제발 돼야 하는데, 된 건가 이거?
일단은 팔에 빛나는 고리 하나가 휘감겼다. 힘이 좀 더 실리는 것 같다.
기분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됐다고 치자. 실패했을 가능성은 그냥 배제해.
[라이트닝 차지]
마지막으로 번개 속성의 마력을 검에 가득히 싣고, 삐걱거리는 [강철 직검]을 내지른다.
호문쿨루스는 갑작스럽게 스펙을 뻥튀기시킨 내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하고, 얌전히 공격을 허용한다.
아니, 허용해야 하는데- 서진혁 이 미친 새끼, 반응속도를 대체 어디까지 갈고 닦았던 거지?
호문쿨루스의 눈이 내 검을 쫓는다. 팔이 움직인다.
이런다고 막힐 만한 위력이 아니지만……치명상은 빗겨갈지도 모른다.
저 팔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인벤토리로, 아니, 이 자세로 어떻게 투척해.
시발, 어쩔 수 없다. 오러 서클과 마찬가지로 한 번도 성공해 본 적 없지만, 그냥 기도하며 써 보자.
나는 항상 이럴 때마다 강해졌잖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매직 미사일.”
속사포처럼 주문을 외우고, 되는대로 영창을 한 마법이 앞으로 쏘아졌다.
호문쿨루스는 이 엉터리 마법이 내 승부수인 줄로만 알고, 들어 올린 팔로 그것을 막아 냈다.
그 덕분에 내가 찔러야 할 부위- 심장을 향한 경로는 텅 비었다. 하하 씨발, 이게 되네.
“흐핫.”
절로 튀어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내 검이 호문쿨루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157. 공명
호문쿨루스의 시체가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포션을 마셨다.
[불굴]을 발동시키기 위해 직접 손상시켰던 내장이 서서히 회복되고, 오래 걸리지 않아 컨디션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투 도중에 입은 데미지며 상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래간만에 진땀을 쫙 빼는 싸움이었다.
“콜록, 켁, 아오 씨발, 입으로 순대가 나오네.”
마력 폭발 때문에 걸레가 됐던 내장의 파편을 입 밖으로 토해내고, 조금 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나는 호문쿨루스의 심장을 꿰뚫은 직후, 일부러 지저분하게 검을 사방으로 휘둘러 놈의 몸을 다섯 토막 냈다.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맞고도 살아났던 때를 떠올려 취한 조치였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헛짓이었다.
도전자가 아니라 몬스터로 분류되기 때문인지, 놈은 HP 잔량에 따른 시스템의 보호 효과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시스템의 힘까지 복사할 수 있으면 인벤토리도 다룰 수 있었을 테니까. 당연한 거긴 하다만.
어쨌든 놈은 심장을 관통당하고, [라이트닝 차지]의 효과로 내장이 모두 전기구이가 된 시점에서 끝장이었다.
뭐, [강철의 혼]이 없어서 실질 내구력은 내 절반 이하였을 테니까- 마력강화도 안 쓰고 있는 상태였고.
아무리 내 스탯을 그대로 복사했다 한들, 시스템의 보호 효과 없이 그렇게 당하면 죽는 게 당연하지.
크리티컬 판정과 함께 한 방에 치명상을 입어서, [불굴]이 발동될 틈도 없었던 것 같으니.
“오버킬이었네.”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최강의 한 방,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던 거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확실한 수단을 고른 것뿐이지만- 다음에는 좀 아껴도 되겠네.
그래도 이번 일로 새로운 기술을 얻었으니까, 결과만 보면 썩 만족스러운 전투였다고 할 수 있겠다.
[패시브 스킬 : 오러 마스터리 3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전투를 마치자 떠오른 푸른색 알림창이 무척이나 흡족하다. 오러 마스터리 레벨이 오를 줄이야.
아마도 검령의 의념기인 오러 서클을 습득한 것이 스킬 레벨에 반영된 거겠지.
거기에 마력 지배 스킬의 레벨도 하나 올랐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자력으로 새 스킬을 습득했다.
[패시브 스킬 : 초급 마법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전투 도중에 어쩌다가 시전에 성공한 매직 미사일이 초급 마법을 습득한 걸로 판정된 것 같다.
“매직 미사일.”
-쾅!
시험삼아 다시 한 번 사용해 보자, 제대로 발사된 마력의 탄환이 미궁 벽에 꽂혀 들어갔다.
처음은 뽀록이었지만 한 번 성공하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시전할 수 있었다. 역시 뭐든 도전하고 볼 일이라니까.
물론 스킬 레벨은 고작 1레벨이고, 기초적인 공격 마법이다 보니까 위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냥 쇠구슬 하나 던지는 게 이보다 훨씬 세겠지.
하지만 스탯빨로 나름 위력이 나오기도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꽤 괜찮다.
“그럼 마지막으로……이건데.”
정신을 집중하고 체외로 방출한 마력을 그러모아, 오른팔 위로 단단하게 굳혀 고리를 형성했다.
검령 칼레온의 의념기, 오러 서클.
그걸 발동한 채로, 무기를 들지 않은 오른손을 가까운 벽을 향해 대충 내뻗어보았다.
-콰과광!
튼튼한 미궁의 벽이 가볍게 박살 나며, 약간의 현기증이 머리에 확 몰려왔다.
그리고 형성되었던 고리가 붕괴하며, 오른팔 위로 화상 같은 상처가 생겨나며 피가 뚝뚝 흘렀다.
상처에서는 마력이 새어나가고 있다. 방금 그걸로 상태창에 표시되는 MP가 상당히 크게 줄어들었다.
호문쿨루스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는 전체 MP의 삼 분의 일 가량이 확 날아가 버렸었지.
공격의 위력 상승률은 훌륭하지만, 반동과 연비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오러 마스터리의 하위분류 취급인지 스킬창에도 등록되지 않았고, 하자가 너무 많은 기술이다.
단순히 내 기량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아직 이 기술은 실전에서 써먹기 힘들겠다.
애초에 의념기라는게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전에 성공했던 것 자체가 기적일지도 모르지.
자세한 건 나중에 검령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본인 기술이니까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겠어?
상태창과 스킬창을 모두 닫고,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꽤 늦었네.
“꼬맹이 기다리겠네.”
지금은 일단 돌아갈 시간이다.
**
미궁을 빠져나와 청색 마탑으로 돌아오자,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모습의 에인이 나를 맞아주었다.
“진혁악마님 이거 봐, 팔락팔락.”
에인은 품이 넓은 옷소매를 날개처럼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는 시늉을 했고- 실제로 날기 시작했다.
뭐지 시발, 우리 꼬맹이가 비행 청소년이 됐잖아.
지금 쓰고 있는 거 비행 마법인가? 얘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이거 설마 오늘 하루 만에 익힌 거야?
나는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에올피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얘한테 뭘 가르친 거야.
“물방울을 조종해 가벼운 물건을 공중에 띄우는 마법입니다.”
에올피아는 그렇게 운을 띄운 후, 가볍게 에인이 쓰고 있는 마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주먹 크기의 물방울을 여러개 소환해, 그것에 접촉한 대상을 부유시키는 마법.
띄울 수 있는 무게는 해봐야 10kg 정도, 당연히 인간을 띄우는 것은 불가능한 마법이지만.
에인은 물체의 무게를 줄이는 마법을 자신에게 거는 것으로 그 한계를 극복해 비행에 성공했다는 것 같다.
거기에 물방울에 은폐의 마법을 걸어 겉으로 물방울이 보이지 않게 하는 연출까지 더하기까지 했다는데.
확실히 마력감지를 돌려 보니, 에인의 마력으로 형성된 물방울 덩어리가 탐지되었다.
어이가 없네. 그냥 비행 마법보다 훨씬 복잡한 짓을 하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지금, 부유에 경량화에 은폐까지 최소 세 개의 마법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다는 거?”
“예,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 세 가지 마법은 다 오늘 배운 거라고? 나한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겠답시고?”
내가 매직 미사일 하나를 성공하고 기뻐할 동안, 꼬마 에인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더군, 난 세상에 나보다 잘난 마법사는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청색 마탑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우리 꼬맹이가 쩔긴 하지.
근데 이건 쩔어도 너무 쩌는 거 아닌가. 범부는 서러워서 못 살겠네.
“진혁악마님, 나 잘했어?”
“그래, 대단하네.”
“응, 엄마한테도 보여줄 거야.”
앙증맞은 소매를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만 나오지만.
**
나는 재잘거리는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구석에 팽개쳐져 있던 칼레온을 주웠다.
“스승님은 조금 전에 시간 다 돼서 없어졌어.”
나도 알고 있다. 검령을 더 불러내지 못할 시간대를 예상하고 이렇게 맞춰 온 거니까. 별일은 없었나 보네.
어떤 마법을 배웠는지 자랑하는 에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완드 쪽의 용건부터.
나는 미궁 지역에서 손에 넣은 [정화된 심연의 파편]을 꺼내어 마탑주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어떤 것 같아, 완드에 넣을만할까?”
“그런 건 어디서 구해온 거냐.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오다 주웠어, 완드 재료로 쓸만할지나 봐줘.”
마탑주는 이런저런 마법을 펼쳐가며 파편을 살펴보더니, 약간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려주었다.
“재료로서는 일급을 넘어 특급품이다. 다만 다른 재료들이랑 수준이 맞지 않으면 밸런스가 나쁜 완드가 될 테지.”
다행이게도 별다른 부작용 없이 쓸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재료도 이 급으로 맞춰야 한다는 점만 빼고는.
“아까 뭐가 불길하다며, 혹시 위험한 건 아니지? 막, 완드가 암흑 속성이 된다거나 그런 거.”
“안에 깃든 마력이 느낌이 살짝 나쁠 뿐이다. 가공해서 완드에 갈아 넣으면 아무 상관 없어.”
몬스터가 뱉은 재료라 조금 걱정했지만, 정화된 파편이라 별문제는 없는 모양.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겠어.
미궁 보스 몬스터의 리젠 시간은 층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8층의 보스는 24시간으로 빠른 편.
즉, 하루에 한 마리씩 잡는게 가능하다는 뜻. 앞으로도 잔뜩 모아야겠군.
“진혁악마님, 그거 뭐야?”
“네 완드에 들어갈 재료.”
“나 그거 볼래, 나 줘.”
나는 에인의 손에 파편을 들려주었다. 에인은 불길한 마력이 흐르는 파편을 주물럭거렸다.
정화됐다고 해도 좀 기분 나쁜 물건인데, 잘도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리네. 오감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완드에 이런 게 들어간다는 게 신기한 걸까.
평소 마력이 깃든 물건에도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에인이, 어쩐 일인지 파편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며 주물럭거리는 게 귀엽긴 하지만, 이런 걸 자꾸 만지면 뭔가 나쁜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니.
이제 그만 달라고 말하며, 에인의 손에서 파편을 부드럽게 빼앗았다. 에인도 별 불만은 없어 보였다.
“진혁악마님, 나 완드에 그거 많이 넣어주라.”
다만 파편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런 말을 살짝 귀에 속삭였을 뿐인데- 느낌이 괜히 싸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 에인이 딱히 이상한 힘에 홀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처음 보는 계통의 마력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었나 보다.
휴, 괜히 쫄았네.
158. 작은 불씨
청색 마탑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하루에 3시간씩 수면을 취했다.
필요할 때는 몇 날 며칠이고 밤을 새울 수 있지만, 너무 장기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루틴이 잘못 잡혀 버린다.
나는 이제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를 꺼리지 않는다.내 욕망을 불꽃 삼아 솟아오르는 화살이 되기로 했으니까.
한편 에인은 하루에 8시간씩을 잔다.
연령대를 고려하면 못해도 9시간 이상은 자야 할 텐데, 이 꼬마는 좀처럼 쉽게 잠에 들질 않는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방의 조명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에인은 좀처럼 등을 침구에 붙이려 하지 않았다.
“얌마, 너 벌써부터 이렇게 안 자면 어쩌려고. 그러다 키 안 큰다.”
“난 원래 안 컸어.”
“그러니까 앞으로 커야 할 거 아니야, 그거 내려놓고 어여 누워.”
당장은 워낙에 귀염상이라 키가 작아도 괜찮겠지만, 나중에 나이가 먹고 2차 성징이 오면 또 어떻게 역변할지 모르는 법.
얼굴이 꽃미남이어도 키가 작으면 깨는 법이라고, 대학 동기가 사무치게 한탄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에인에게서 마법서를 빼앗은 다음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기본적으로 얌전한 애라서 딱히 반항은 하지 않는다.
“진혁악마님은 안 자잖아. 왜 나만 자야돼?”
“악마는 원래 안 자도 돼.”
“아닌데, 악마도 잠은 잔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오늘따라 말대꾸를 길게 하는 에인, 악마도 잠은 잔다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걸까 싶었다.
“저번에 책에서 봤어. 선생님한테도 물어보니까 그랬어. 악마도 잠은 잔대.”
선생님이란 마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청색 마탑주와 에올피아를 말한다. 에인이 스스로 배운 단어 중 하나다.
상식도 어휘도 너무나 부족했던 에인은, 마탑에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며 스펀지처럼 여러 지식을 흡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악마에 대한 지식도 뭔가 접한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면서도 나를 악마라고 부르나.
“책이 항상 옳은 건 아니야. 나는 좀 특별해서 안 자도 돼.”
어차피 에인의 지식은 마법 쪽에 극단적으로 편중되어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다.
애초에 악마에 관한 지식도 별로 대단한 수준까지 갖춘 건 아닐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나를 ‘진혁악마님’이라고 부를 리가 없으니까. 얘는 아직도 악마가 뭔지 잘 모른다.
“응, 선생님도 진혁악마님은 특별한 악마님이랬어.”
에인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특별한 악마라, 그런 말을 다 했었구만.
“악마는 되게 나쁘댔어. 막 사람도 죽이고 저주도 내리는 게 악마래. 엄청 나빠서 꼭 물리쳐야 된다고 그랬어.”
“그렇겠지.”
“근데 진혁악마님은 특별한 악마라서 착하대. 진혁악마님같은 악마는 하나밖에 없을 거랬어. 선생님이.”
듣다 보니 괜히 낯간지럽다. 나를 악마라고 믿는 꼬맹이를 위해, 특별한 악마니 뭐니 하면서 내 칭찬을 했다는 거니까.
세상에 둘도 없을 착한 악마- 그 고집불통 마탑주가 그랬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 에올피아가 말한 거겠지.
“큰 선생님이 그랬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눈가만 빼꼼 내놓고 있는 에인이 덧붙였다. 마탑주가 그랬다니, 그건 좀 의외네.
괜히 웃음이 나와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도 악마에 대해 몇 마디 해주었다.
18층에서 칭하는 악마가 마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진짜 악마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말고 다른 악마는 다 사악한 쓰레기들이니, 괜히 악마소환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응, 진혁악마님 말고 악마는 다 나빠.”
사탕 주는 아저씨를 쫄래쫄래 따라가면 안 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충고해 두었다.
뭐, 그런 아저씨가 있으면 내가 대가리를 깨 버리겠지만.
**
에인이 마법을 배우는 동안, 나는 미궁 지역을 방문해 에인의 완드에 필요한 재료를 모은다.
18층 보스의 리젠에 걸리는 시간은 24시간, 하루에 한 번씩 반복해서 잡다 보니 점점 클리어 타임도 줄어만 간다.
[코끝을 찌르는 진득한 썩은내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몸, 바다에 빠져 죽은 시체가 걷고 있었소.]
[이것은 질 나쁜 괴담이 아닌, 그 공방의 주인이었던 마법사의 말로요.]
[무모한 모험가여, 부디 저 끔찍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오늘은 아예 시스템 메시지가 끝까지 나오기도 전에 잡아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걸로 습득한 파편의 숫자는 총 25개, 조합을 통해 심연의 근원을 두 개까지 만들고도 몇 개 남는 갯수다.
에인이 파편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해서 일부러 넉넉하게 구한 건데, 이 불길한 아이템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심연의 파편에 어떤 설정이 붙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수호 : 저번에 물어본 거 알아봤음, 캡쳐 보낼테니까 직접 읽어봐]
고고학자 성향의 도전자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해, 파편과 호문쿨루스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아 보았다.
그 밖에도 이 18층에서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들에 대한 정보도 있는 대로 수집했다.
우선 내가 가장 걱정한 심연의 파편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파편은 불길한 마력을 풍기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냥 마력의 성질이 조금 특이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다.
여러 정보를 근거로 추측해 보면, 파편에 담긴 마력이 미궁을 오염시킨 원인일 가능성은 있다곤 하지만.
파편에 담긴 마력 자체가 문제를 일으킬 만큼 사악하고 위험한 무언가는 결코 아니라는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마력은 그냥 마력, 결국 중요한 것은 마력을 다루는 사용자의 의지라고.
“다행이네.”
에인이 심연의 파편에 관심을 두는 모습을 보고, 자꾸만 쎄한 기분이 들어서 조사해 본 거였는데.
내가 알아낸 내용이 확실하다면, 에인의 완드 재료로 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완드에 갈아 넣은 시점에서 재료 원본의 성질은 흐려지고, 마력은 주인의 뜻을 따르게 된다고 하니까.
에인이 파편의 마력을 이용해 악마 소환을 시도한다거나, 호문쿨루스 제조를 시도한다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된다.
그 조그만 꼬마가 그런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고- 혹시 몰라 악마에 관해서는 단단히 교육해두기도 했으니.
에인은 내가 들려주었던 다크엘프의 동화 속에 나오는 멋진 현자가 되고 싶어한다.
악마와 마왕을 무찌르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현자가.
그런 꼬마 에인이 심연의 파편으로 나쁜 짓을 벌인다는 상상은 하기 어렵다.
뭐, 애초에 가진 마력 자체가 쥐꼬리만 해서 뭔가 거한 사고를 벌이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
매일같이 비슷한 일만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청색 마탑에 체류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그 사이 에인의 마법적 성취는 놀랄 만큼 진보했다.
고질적인 마력량 부족 때문에 거창한 마법은 역시 쓸 수 없지만, 습득한 마법의 레퍼토리는 어마어마한 수준.
최대 일곱 개의 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으며, 기교 면에서는 이미 마탑주에 버금간다고 한다.
“마력량만 많았어도 진짜 전설속의 현자가 되고도 남았겠어, 아깝단 말이지.”
청색 마탑주는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다.
듣자하니, 에올피아의 마법사 명단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에인은 거기서 제 엄마를 찾아내 짚은 모양이고.
주문을 맡긴 완드도 거의 완성 직전이라고 하니, 청색 마탑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소리다.
“나중에 엄마랑 진혁악마님이랑 또 올게, 선생님.”
“오냐, 꼭 와야 한다.”
“작은 선생님도, 나중에 또 봐.”
에인은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했다. 마탑주는 에올피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예쁜 꼬마가 그 성질 나쁜 불쟁이년의 자식이라니, 속이 다 쓰리구만.”
에인이 지목한 ‘엄마’는 다름 아닌 적색 마탑의 마탑주, 내가 에인의 엄마 후보로 꼽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마탑주님도 에인 못지않은 자식을 가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식 계획은 여전히 없으십니까?”
“내가 자식은 무슨 자식이냐, 나는 갓난아기 돌볼 자신 없다.”
“갓난아이 때는 제가 돌볼 텐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갓난아이만 아니면 잘 돌보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 사실이 마탑주와 에올피아에게 묘한 영향을 미친 모양이지만,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에인의 ‘엄마’에 대해서도 그간 걱정이 많았지만, 적색 마탑같은 메이저 마탑의 탑주라면 그나마 걱정을 덜었다.
여기서부터 적색 마탑과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하루 정도면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겠지.
내일 아침 완성된 완드를 받아서 출발하고, 에인을 바래다주기만 하면 퀘스트는 끝.
“진혁악마님, 나 빨리 엄마 보고 싶어.”
그리고 퀘스트가 끝나면, 에인은 깡통 NPC가 되고 만다.
그 사실은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지만, 결국은 찾아올 이별이었다. 아쉽지만 괜찮다.
내 목표는 단순히 엘레노어를 되살리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엘레노어에게 ‘다음’을 약속했다.
탑의 시스템에 얽힌 영혼- 깡통 NPC 에겐 결코 있을 수 없는 ‘다음’을.
“그래, 엄마 보러 가자.”
그렇다면, 이 꼬마에게도 똑같이 ‘다음’을 주면 그만이다.
나는 무수한 욕망을 불태워, 탑의 천장을 뚫고 나아갈 불화살이다.
이번에는 그저 작은 불씨가 하나 더 붙었을 뿐이다.
159. 하룻밤
다음 날, 에인은 마침내 완성된 완드를 받아들었다.
“재질은 수정목이라는 나무의 목재다. 광물처럼 단단한데도 가벼워서, 이만한 크기로도 휘두르기 좋을 거야.”
마탑주는 간략하게 완드에 사용된 재료나 탑재된 기능등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대부분은 에인의 요망대로였다.
“진혁악마님, 이거 봐. 한 쌍.”
에인은 완드에 새겨진 자신의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같은 문장을 새긴 게 그렇게 좋을까.
그 밖에는 뭐, 확실히 잘 만들어진 완드다. 내구도나 마력 전도율을 제외하면 내 미스릴 완드를 웃도는 성능이 나오겠지.
걱정거리던 심연의 파편이 내던 불길한 마력은 크게 사그라져 얌전하게 변했고……확실히 비싼 돈을 들인 값을 한다.
“주의사항이나 그런 건?”
“여기에 끼워 뒀다.”
“이건 뭔데, 마법서?”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두꺼운 책 몇 권을 건넸다. 이거, 에인이 공부할 때 쓰던 마법서 같은데.
“어차피 저 꼬마는 이미 다 익혔을거고, 어디에든 유용하게 써라. 마법을 배우고 싶댔지?”
허 참,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일전에 지나가듯 말한 것뿐이었는데, 마법을 배우고 싶다던 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
첫인상은 서로 처참했지만, 그동안 꾸준히 얼굴을 보면서 지내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녀석이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에서 들어본 마법사 평균 인성에 비교하며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훌륭하다고 해도 되려나.
“어어……고맙다, 잘 쓸게.”
나는 마법서와 완드의 설명서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 간략하게 챙긴 나머지 짐을 확인했다.
야영 세트는 이제 필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챙기고, 에인의 여벌옷은 넉넉하게 가져가고.
“선생님, 잘 있어. 나중에 또 올게.”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마법도시 게헨나를 떠났다.
목적지는 셰올 시, 게헨나 다음으로 많은 마탑이 모여 있는 도시이자 적색 마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
뭐,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지만- 혈사교의 본거지가 있던 숲을 헤치고 나갈 때처럼 험한 길을 가는 건 아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거라, 그냥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느긋하게 하루쯤 걸을 뿐.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짐이나 여벌옷 따위도 혹시 몰라서 챙긴 것에 불과하다-
“어이!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
-라고 생각했는데, 길을 떠난 지 십 분 만에 무기를 든 도적 떼가 우리를 가로막았다.
음, 내가 중세 판타지 세계관을 너무 얕본 건가. 백주대낮의 도로에 이런 패거리가 당당하게 나타날 줄이야.
그래봤자 똑같은 대사밖에 말할 줄 모르는 저급 NPC에, 머리 위에 떠있는 콘솔도 병아리 같은 노란색.
후딱 정리하고 지나갈 생각으로 손을 풀며 앞으로 나섰는데, 내 뒤에 있던 에인이 등을 콕콕 찔렀다.
“진혁악마님, 나 이거 해볼래.”
아무래도 요 꼬마가 완드의 성능을 실험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
에인의 완드에 담긴 여러 기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마력을 생산하고 충전하는 능력이다.
이는 어마어마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보유한 마력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에인의 결점을 완벽하게 메꾸어 준다.
다만, 내가 구해온 심연의 파편과 최상급 마법석을 아낌없이 갈아 넣었음에도 그 최대 충전량 자체는 대단치 못하다.
그러나 에인은 단순히 마법의 습득과 시전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마력의 효율적인 활용에도 무척 능했다.
“그아아아악!”
에인이 완드를 몇 번 휘두르자, 무장한 도적들은 하늘로 날아올라 팽이처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약하다고는 해도 나름 18층에 걸맞은 강함을 지닌 도적들인데, 맥없이 구역질하다 기절해버린다.
도적들의 몸무게를 합하면 수백 킬로그램은 될 텐데, 그걸 저렇게 엄청난 속도로 돌려버리다니.
단순한 염동 마법처럼 보이지만, 에인의 곁에 떠올라 있는 마법진은 세 개.
여러 가지의 마법을 겹치고 겹쳐, 매우 적은 소모값으로 이같은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당탕!
기절한 도적들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에인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나 잘했지.”
참고로 저 브이는 내가 알려준 제스처다. 대충 승리를 의미하는 동작이라고 말해 줬었지.
하는 짓은 마냥 귀엽지만, 가진 재능은 여전히 경악스럽다.
개미 눈곱만 한 마력만을 사용해서,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적 다수를 아무렇지 않게 제압하다니.
이 꼬마가 마력량까지 많았으면, 정말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현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되었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분명히 됐을 거다.
“잘했어, 대단한데?”
나는 꼬마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근데 꼬마야, 전에 보여줬던 그 마법은 이제 쓸 수 있는 거야? 엄마가 제일 좋아한다는 그 마법?”
에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질문은 마탑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몇 번 건넨 적이 있다.
에인의 마법적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해, 이미 단순한 기교 면에서는 마탑주를 옛적에 뛰어넘은 수준이다.
하지만 에인이 마법을 배우고 싶어했던 가장 큰 이유, ‘엄마가 좋아하는 마법’은 아직도 구현하지 못하는 상태.
정황상, 마탑주가 오랜 기간 연구하고 있는 마법이라는 건 확실한데.
대체 무슨 마법이길래, 마탑주를 능가하는 재능을 보유한 에인에게조차 이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엄마 마법 너무 어려워……마법진이랑 다 외웠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마법으로 내 앞에 펼쳐 보였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크기의 종이에 빼곡하게 가득 그려진 마법진, 전체의 형태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프렉탈 구조로 이루어진 다양한 도형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 마법식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다.
나도 이제 마법에 문외한까지는 아니기에, 대충은 알 수 있다. 이 마법진이 얼마나 굉장한 물건인지.
“꼬마야, 이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어? 너희 엄마는 이 마법을 왜 좋아할까?”
“몰라. 진혁악마님은 알아?”
“아니, 나도 몰라서 물어본 거야. 보통 마법이 아닌 건 확실한데.”
굉장한 마법진이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모르겠다. 이 마법이 무엇을 위한 마법인지.
화염 속성에 전문일 터인 적색 마탑의 마탑주가, 왜 이런 마법을 연구하고 있는 건지도.
[화면 캡쳐]
적색 마탑주를 만나보면 직접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나는 마법진을 캡처해 저장해 두었다.
**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셰올 시에 도착했다.
사실 이보다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에인이 건강해지고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숲 속을 주파하던 때처럼 느릿한 속도로 이동했으면 반나절 정도는 더 걸렸을 테지.
“진혁악마님, 나 이제 엄마 볼 수 있어? 보러 가는 거야?”
“날이 어둡잖아, 하룻밤만 자고.”
“응, 나 오늘은 일찍 잘게. 빨리 내일 됐으면 좋겠다.”
나는 일단 가까운 숙소를 잡았다. 이런 밤에는 마탑의 문도 닫혀 있을 테니까.
물론 조금 억지를 부리면 바로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곧 에픽 퀘스트가 끝난다. 그러면 꼬마 에인은 엄마 곁으로 돌아가고, 곧 자의식을 잃고 깡통이 되어버리겠지.
그 자체는 애저녁에 각오한 일이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뭉그적거리고 싶었다.
“진혁악마님, 나 잠이 안 와.”
에인은 평소와 다르게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그런 소리를 하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여기가 콩닥콩닥해서 시끄러워, 어떡해?”
에인은 자신의 가슴께를 콩콩 두들기며 그렇게 말했다. 엄마를 다시 만나는 게 너무 기대되는 모양이다.
자기 딴에는 심각한 고민이랍시고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마냥 귀엽기만 하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응,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래? 엄마는 어떤 분이신데?”
에인은 이불 속에서 몸을 마구 꼼지락거리며 재잘재잘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예뻐, 그리고 착해, 진혁악마님 만큼 착해.”
여전히 표현력이 떨어지는 꼬맹이다. 나만큼 착하다니, 그거 보통은 칭찬이 못 되는데 말이야.
나는 한동안 에인의 두서없는 재잘거림을 들었지만, 결국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에인은 정말 엄마를 세상 전부처럼 여긴다.
아이에게 부모란 그런 존재다. 누가 뭐래도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기준이고, 우주고, 전부다.
혈사교에게 끌려와 괴로운 시간을 겪었을 텐데도, 이 아이는 자신이 입은 상처와 괴로움을 말한 적이 없었다.
에인의 작은 입은 항상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재회의 소망만을 재잘거렸다. 내가 무엇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나는 에인의 가지런한 회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이 아이의 앞날이 행복하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적색 마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구의 마법사에게 간략하게만 사정을 설명하고, 마탑주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마탑주님께선 모르는 얼굴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혹시 무슨 관계신지……?”
젠장할, 어쩐지 너무 쉽다고 생각했다.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