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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소설 속에 빙의하였다.

그것도 비참한 최후가 예정된 엑스트라로.

그래서 끔찍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몇몇 등장인물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친해진 인간들이 어딘가 이상하다.

하나같이 원작에서 주인공과 싸우다가 행방이 묘연해지는, 빌런이 될 예정인 녀석들이었다.

“루카, 이번 무도회의 파트너를 부탁해도 되겠지?”

누구도 믿지 않던 최악의 황녀가 에스코트를 맡기고,

“루카 선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번에도 제가 지켜줄게요!”

모든 인간을 죽이겠다며 울부짖던 고대병기의 동조자가 지켜주며,

“아, 루카군.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요. 혹시 시간이 있나요? 연구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실험을 위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미친 아인이 집착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빌런들의 구원자가 되었다.

1화

“도련님! 도련님!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으음… 흠…….”

명현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몸을 포근히 안아주는 이불의 촉감이 너무 좋아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아… 9월부터는 아카데미에 가야 하는데 이렇게 아침에 약해서야 어떡할는지.”

‘……아카데미?’

명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며 주변을 훑었다.

어느 시대, 어느 양식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대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의 가구들이 가득한 어느 방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굉장히 부유한 집안인 것 같았다.

“어머나 도련님. 도련님께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모습에 저 벨라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 같답니다.”

“……벨라?”

낯선 이름, 적어도 한국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이름이다.

명현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

그림으로 그려낸 것 같은 하녀가 눈앞에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처럼 묶고 검은색 드레스에 흰색 레이스 달린 앞치마를 두른 그녀.

벨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나요, 도련님?”

“……으극.”

그때 명현이 갑자기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다.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기억과 명현의 기억이 뒤섞였다.

-루카 멜본노 트래버스.

-에르난 제국의 송곳니 트래버스 가문의 차남.

-재능을 가졌으나 다른 별을 쫓느라 절벽에서 떨어진 우둔한 이.

뒤섞이는 기억 속에서 ‘이명현’이 이쪽 세계에 오기 직전에 겪었던 일들도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판디아 세계의 신이라고 해요!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저희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부디 우리 세계의 이야기를 완성시켜주길 바랄게요, 애독자님.

“우욱! 우우욱!”

“도, 도련님? 도련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구토감이 몰려왔다.

그사이에 흐릿한 장면들이 스쳤지만 곧 기억의 파도 속에 묻혀 사라졌다.

“정신 차리세요! 도련님!”

“손… 대지 마라……!”

“!”

명현은 무의식적으로 다가오는 벨라를 밀쳐내며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의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다.

명현은 당황하여 벨라를 보았지만 그녀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무덤덤한 반응을 내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

“저는 이만 나갈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벨라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런 그녀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던 명현.

그의 머릿속에 또다시 여러 이미지가 떠올랐다.

-도련님, 더 이상은 무리에요! 그러다가 몸이…….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벨라!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무도 없는 훈련장에서 명현으로 추정되는 소년이 악에 받친 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몇 시간이고 검을 휘두르던 소년은 결국 탈진하듯 쓰러졌고 그런 그에게 벨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소년은 차갑게 그녀를 내쳤다.

벨라는 충격받은 얼굴로 결국 뒤로 물러섰고 소년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소년이 하고 싶었던 말은.

“……벨라.”

“네?”

갑작스러운 명현, 아니 ‘루카 트래버스’의 부름에 벨라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루카는 잠시 침묵했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 한 잔만 가지고 와.”

“아, 넵!”

벨라는 조금 환해진 얼굴로 황급히 방을 나갔고 루카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이거면 된 거냐. 루카 트래버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몸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루카 트래버스고 자시고,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보자.’

루카 트래버스의 사념을 잠깐 진정시킨 명현은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일단, 나는 이명현이었어.’

아직도 머릿속에서 ‘이명현’과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본인이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살던 평범한 20대 청년 이명현, 취미는 웹소설 읽기.

하지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 언제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무언가… 무언가 계약을 한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

스치는 기억 속에서 자신을 신이라고 소개한 누군가와 대화한 게 떠올랐지만 어째선지 너무도 흐릿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리는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빙의를 한 모양인데. 어떤 소설에 빙의한 거지?’

워낙 읽은 소설이 많아서 무슨 소설에 들어온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벨라라는 이름이야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어디서 보긴 했지만 저런 외형의 벨라는 처음 봤다.

트래버스 가문이라는 것도 처음 들어보는 것 같고.

‘하다못해 소설 제목만 알아도… 응?’

그렇게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침대를 더듬던 명현이 멈칫했다.

손에 무언가가 잡혔는데 묘하게 익숙한 그립감이었다.

침대 한 귀퉁이로 시선을 내리자 보인 것은…

그가 사용하던 폰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그렇게 중얼거린 명현은 폰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잠금 해제를 눌렀다.

화면이 넘어간 폰은 완전히 초기화되어 있었다.

남아있는 어플도 메모장과 카메라, 갤러리뿐이었다.

신기한 점은 배터리도 사라졌다는 점.

배터리가 없어도 켜질 수 있게 되어있는 것 같았다.

“메모장에는 뭐가…….”

본능적으로 메모장을 누른 루카는 그 안에 담긴 글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몸은 마음에 드시나요, 애독자님?

-기억 동기화가 되어있겠지만 그 아이가 처한 상황을 알 수 있게 정보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부탁드릴 것은 세 가지입니다.

-지금 시점은 주인공이 아직 이 세계에 도착하기 전, 즉 최초의 시간입니다. 부디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두 번째는 애독자님이 지적하셨던 ‘맥거핀처럼 사라진 캐릭터’들의 행방을 확인하시고, 그들이 주요 사건 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마지막으로… 이번 삶을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편지처럼 남겨둔 메모였다.

그밖에 다른 메모들도 많이 남겨져 있었는데,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세 가지.

[현 대륙 상황 요약]

[루카 트래버스의 삶]

[힌트 모음]

‘엄청 친절하네.’

거의 떠먹여 주는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근데 제일 중요한 소설 제목은 어디 있어?’

명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메모장을 훑다가 멈칫했다.

[아카데미의 구원자가 되었다]

드디어 소설의 제목을 찾았다.

그러나 명현, 이제는 루카가 되어버린 그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소설 내용과 함께 하나둘씩 태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세계, 착각, 하렘, 후회, 아카데미. 그리고…….’

루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루프물.’

이 소설은 ‘지구에서 넘어온 한 남자가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아 즐겁게 놀다가,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죽는 것에 좌절하여 아무도 잃지 않기 위해 시간을 돌리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였다.

‘메모에 따르면 지금이 최초의 시간인 것 같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루프를 시작할 거고, 당연한 말이지만 루카는 루프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그가 지금부터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루프하여 사라질 의미 없는 일들이 되고야 말겠지.

‘그렇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겠지.’

루프를 막거나.

루프를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완벽한 환경을 만들거나.

‘우선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어.’

루카는 메모에 적힌 내용들을 읽으며 그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 * *

아카데미의 구원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에 들이닥친 재앙을 물리쳐서 구원자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갑자기 히로인 한두 명이 진짜로 죽는 파격적인 전개가 시작되었고, 주인공이 죽은 히로인들을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루프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 당시에는 상당히 참신한 스토리였다.

처음에는 사이다패스적인 요소와 매력적인 히로인, 그리고 주인공의 성장 등이 겹쳐 꽤 인기가 있었지만 소재 특성상 작품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져서 독자가 줄었고 그에 비례해 작가의 무리수도 늘었다.

‘결국 주인공이 루프를 포기하고 자살을 한다는 최악의 결말로 끝이 났었지.’

초반부는 진짜 명작이라 생각했고 하나의 인생 소설이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결말에 참지 못하고 작가에게 장문의 댓글을 달은 적이 있었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여기로 오게 된 건가?’

이때 주인공이 이렇게 했으면 이렇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때 주인공이 이런 선택을 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같은 이야기를 댓글로 주절주절 읊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인 점은.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인데 왜 지금에 와서야……?’

이 소설이 완결된 것도, 댓글을 달았던 것도 모두 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이후에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래서 트래버스가 뭐냐고.’

이 소설이 무슨 소설인지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카 트래버스란 인물이 도대체 누군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트래버스라는 성을 본 기억이 없는데?’

주요 인물 중 트래버스라는 성을 가진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메모에 나와 있나 확인해 보았지만 그곳에조차 없다.

‘힌트 모음에 있나?’

그래서 힌트도 확인했지만.

(비어 있음)

이런 화면만 뜰 뿐이었다.

‘힌트는 뭔가 조건을 만족해야 생성되는 모양인데.’

웹소설 읽던 짬이 있는데, 척하면 척이다.

이 정도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어디서 내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까?’

루카 트래버스의 생애도 슬쩍 보았지만 딱히 원작 주인공과 연관된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게 그의 고민이 깊어지던 무렵, 벨라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도련님! 식사와 목욕 준비도 함께 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목욕…….”

“우선 여기 물이에요!”

벨라는 그렇게 말하며 예쁜 컵에 담긴 물을 내밀었다.

루카는 컵을 받다가 문득 물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하진 않지만 그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벨라. 거울 어딨어?”

“예? 바로 뒤에…….”

“크흠.”

떨떠름한 벨라의 대답에 루카는 헛기침을 하고 뒤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본 순간 숨이 막혔다.

-호수가 담긴 듯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신비로운 매력의 진녹색 머리카락

보는 순간 특정한 묘사가 떠올랐다.

물론 다른 모든 것도 완벽했다. 마치 대륙 최고의 화가가 붓놀림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려낸 듯한 외모였다.

하지만 눈동자와 머리색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머리색은 혹시 트래버스 가문의……?

-그만. 그 이름은 버렸다.

-아… 죄송해요.

소설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주 짧지만 확실하게 트래버스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또 떠올랐다.

주인공의 가장 강한 조력자인 가면의 검사 윌루를 묘사할 때면 항상 나오는 묘사가 ‘호수가 담긴 듯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신비로운 매력의 진녹색 머리카락’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내가 윌루?’

자신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떠올린 루카의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나쁘지 않아. 세계 최강의 검사라면 조금만 노력해도 루프를 신경 쓰지 않는 환경을 만들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루카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윌루는 동생이 한 명 있다는 언급이 종종 있었어. 근데 루카 트래버스에게는 동생이 없는데?’

동기화된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에 동생은 없었다. 대신 형이 한 명 있었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번엔 어떤 기억이 마치 장면처럼 떠올랐다.

-기다리는 것도 심심한데 스몰토크라도 할까. 윌루 넌 성이 뭐야?’

-…….

-하아… 재미없기는.

-가문을 지키지 못했을 때 성을 버렸다. 지금 이름도 가명이지.

-아, 알드노아 때…….

-혈육들은 모두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았던 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그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노예로 끌려갔지. 거기서 귀족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창관에 팔렸고 병으로 죽었고. 이제 내게 남은 건 복수뿐이다.

-……그래. 모든 일의 원흉, 데몬즈를 같이 없애버리자고.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주인공이 가면의 검사 윌루와 함께 암흑 결사 ‘데몬즈’의 본부를 암습할 때 있었던 대화였다.

루카는 거기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도련님?”

루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동생 쪽이었냐고!’

입에 담기도 뭐한 끔찍한 최후가 예정된 엑스트라.

그게 루카 트래버스였다.

“…….”

모든 게 혼란스럽지만 딱 하나 확실한 목표가 잡혔다.

미래를 바꿔야 한다.

루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2화

하루가 지났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진짜로 소설 속 세계에 왔다는 것이 말이다.

‘싫지는 않네.’

이전 삶에 미련은 없다.

어렸을 때부터 다투던 부모님은 중학생 때 결국 이혼했다.

얼떨결에 따라간 엄마는 재혼했고, 새아빠는 이명현을 싫어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그나마 소설만이 낙이었다.

20살이 되고 바로 군대로, 제대 후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고졸도 들어갈 수 있는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반복되는 집, 회사, 집, 회사, 집……

그야말로 시멘트의 색 같은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설을 보면서 항상 꿈꾸던 판타지 세계, 연예인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거기에 앞으로 펼쳐질 일을 알고 있다는 이점까지.

제일 좋은 점은 역시 13살이라는 것, 그가 만끽하지 못한 즐거운 학창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는데…….

‘어떻게 미래를 바꾸지?’

정해진 끔찍한 최후를 바꿔야 한다.

이 소설 특성상 큰 운명은 어지간해서는 막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알드노아 전쟁’같은 사건은 무슨 수를 써서든 일어난다.

‘전쟁을 막는 건 불가능하지만… 소소한 이야기는 바꿀 수 있어. 어느 영지가 전화에 불타지 않게 하는 것 정도는.’

트래버스 가문이 멸망하지 않으면 루카가 노예로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주 약간 걸리는 점이라면 대부분의 루프에서 가면의 검사 윌루가 나왔다는 점인데…….’

주인공이 윌루에게 처음으로 자세한 사정을 들은 루프 이후, 주인공은 더 이상 그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난 제국이 전쟁으로 큰 손실을 입지 않았음에도 그는 주인공 파티에 왔었다. 그리고 항상 복수를 꿈꿨다.

트래버스 가문이 속한 동부 지역까지 전란이 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하겠다며 주인공과 힘을 합쳤었다는 게 좀 걸렸다.

‘거기에 그 윌루의 동생인데 약하다고?’

가면의 검사 윌루, 본명 와일드 트래버스는 이 소설에서 누가 제일 강하냐를 논할 때 꼭 1,2순위를 다투는 강자다. 그의 혈육인 루카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면 왜 등장인물로 단 한 번도 안 나왔을까?’

갑자기 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트래버스 가문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계속 멸문되고 그로 인해 와일드가 주인공 파티에 들어가는 것도 막을 수 없는 큰 운명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더욱.’

루카의 눈에 결심이 맺혔다.

‘그 운명을 비틀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큰 운명은 어지간해서는 막지 못하지만 아예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할 수는 있다.

‘아니. 해야만 해.’

루카는 결심했다.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변태 귀족의 성노예로 살다가 창관에 팔려 성병으로 죽고 싶지 않아……!’

그런 결말만큼은 사양이다.

‘주인공이 찾은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과거에 심어진 문제의 씨앗을 미리 파괴하는 것과 압도적인 힘으로 현재에 찾아온 운명을 뒤트는 것, 마지막으로 새로운 인연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지.’

여기서 루카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압도적인 힘을 얻는 것뿐인가.’

문제의 씨앗을 미리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건 주인공이 증명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그리고 ‘루카 트래버스’나 ‘이명현’이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 정도로 친화력 있는 인물이 아니다.

결국 방법은 하나, 압도적인 힘을 얻는 것뿐.

‘운명을 뒤틀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은 역시 위대한 영혼이나 고대 병기 같은 건데, 아마 바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야.’

원작의 기억이 살짝 희미하긴 하지만 제일 강한 힘을 얻는 방법이나 조건 같은 것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은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적당히 강하고 유용한 힘을 얻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문제는 주인공과 부딪치면 안 된다는 건데. 다행히 지금이 최초의 시간이면 주인공이 알고 있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겠지.’

주인공은 말 그대로 치트급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맞부딪치면 무조건 진다. 그러니 최대한 주인공과 겹치지 않게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가장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지?’

주인공과 겹치지 않되 당장 어느 정도 효율이 나오고, 후반에도 사용할 수 있으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형편 좋은 힘이 있을 리가…….

‘다소 제약은 있지만 그걸 써볼까.’

있다. 그렇게 형편 좋은 힘이.

‘구하기 조금 까다롭긴 한데… 방법이 없나?’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벨라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벨라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도련님?”

“……응.”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벨라 뿐이다.

* * *

-벨라. 지금 내가 불러주는 곳에 가서 뭐 하나만 사와.

-네!

“도련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걸까?”

벨라는 묘하게 변한 루카의 태도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최근 루카의 행동거지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아니 정확히는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에 합격한 이후부터 많이 이상해졌다.

“하긴, 그 대단하신 아벨의 재림과 비교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트래버스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에르난 제국의 송곳니 아벨 트래버스.

건국공신이자 역대 최강의 검사를 꼽으면 반드시 거론되는 존재.

그런 아벨 트래버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재능을 지녔다고 불리는 현 트래버스 가문의 소가주 와일드 트래버스.

그 또한 현재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며 당연한 말이지만 승승장구 중이다.

“차라리 불합격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아이에 비하면 부족하니.”

여린 외모와 달리 루카는 꽤 검술에 매진했다. 실제로 재능도 꽤 있어 나이에 비하면 매우 뛰어난 검술을 지녔다.

하지만 언제나 와일드 트래버스라는 산 앞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은 가주님보다 마님을 닮았으니 그쪽으로 정진하면 나을 텐데. 어렸을 때부터 비교당한 것 때문인가.”

벨라는 다시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부터 지켜주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나저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날카롭던 우리 도련님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부드럽게 행동하는지 몰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금도 분명 거칠고 막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루카를 오래 모셔 온 벨라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드러운 편이었다.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는 것 자체가 루카에게 있어선 치욕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변화는 좋지만 도련님은 왜 이런 걸 구해오라고 하신 걸까?”

거기엔 루카가 구해달라고 한 것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벨라는 다시 한번 그것을 슥 훑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생각을 해봐야 의미가 없지. 사용인은 주인님의 말을 따르는 게 일이니까.”

그리고 벨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 * *

벨라가 필요한 것을 사러 간 며칠 동안 루카는 스스로의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장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기억 덕분에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어색했지만 금세 몸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휘잉! 텅! 텅! 텅! 쿵!

며칠간의 훈련으로 몸에 완전히 적응한 루카는 곡예하듯 하늘을 날았다.

그의 목검이 공중에 떠있는 표적을 정확히 맞추고 바닥에 있는 허수아비에 마무리 일격까지 깔끔하게 꽂았다.

‘몸이 깃털 같아! 거기에 힘도 넘쳐! 이런 거 처음이야!’

체육 시간에 움직이기 싫어 아프다는 핑계로 기본 점수만 받았던 이명현의 몸과 달리 루카 트래버스의 몸은 그 아름다움과 달리 치명적인 힘을 숨기고 있었다.

“흥. 이 정돈가.”

한 번의 훈련을 마친 루카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을 깨달은 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 다시금 여러 기억이 스쳤다.

-역시 작은 도련님도 대단하시네. 저 나이에 벌써 저 정도의 움직임이라니.

-하지만… 역시 소가주님에 비할 바는 아니군.

-이봐, 그런 말 마. 아벨의 재림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의 훈련을 도와주던 기사들의 속삭임.

악의는 없다. 그들 또한 와일드 트래버스에게 벽을 느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담백한 감상을 읊조린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어린 루카 트래버스에게 그것은 형에 비하면 자신은 쓸모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쯧, 겨우 이것밖에 할 수 없는 건가.’

‘형이라면 이것보다 더…….’

‘흥. 시시하군.’

결국 루카 트래버스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폄하했다.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 여겼다.

“…….”

그런 루카 트래버스에게 빙의된 이명현,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흉터가 많은 손바닥.

그의 섬섬옥수가 망가질까 걱정한 벨라가 훈련이 끝나고 지쳐 쓰러져 기절했을 때 몰래 약을 발라주었지만 그래도 흉터가 남을 정도로 많은 훈련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형을 이길 수 없었다.

꽈득.

루카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리고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휘잉!

목검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친 소리가 나왔다.

가볍게 휘두른 검은 상념 하나를 베어냈다.

휘잉! 휘잉! 휘잉!

루카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상념이 하나씩 사라졌다.

쾅!

어느새 모든 상념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휘두르던 목검이 박살났다.

루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헉… 헉… 헉…….”

땀이 비처럼 흐르고 팔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었다.

“……이길 수 있어. 반드시.”

루카는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카 트래버스’의 사념에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바꾸는 것 말고도 목적이 하나 늘었군.’

최강을 뛰어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준 루카 트래버스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도련님~ 명령하신 거 구해왔… 도련님!”

“……생각보다 빨리 구해왔군.”

“아니, 몸은 괜찮으세요? 어머 손 좀 봐!”

그때 벨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

“…….”

묘한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당연한 일이다. 본래의 루카 트래버스였다면 지금 해야 할 대사는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루카는 달랐다.

“뭐해?”

“!”

하지만 지금의 루카는 달랐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 루카.

“평소에 바르던 거, 어디 있어?”

“도련님……!”

벨라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감격한 듯 눈가를 적시며 언제나 앞 호주머니에 넣어두던 연고를 꺼냈다.

목검이 깨지며 파편이 그의 손에 박혀있었지만 벨라는 능숙하게 그것을 빼내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이런 거에 안 익숙하다고, 망할 루카 트래버스 녀석.’

‘이명현’이었을 때 여자에게 그다지 호의를 받지 못한 탓에 이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종종 속삭이는 ‘루카 트래버스’의 후회가 그를 움직였다.

‘당장 이 저택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벨라 뿐이니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지만. 아니 애초에 루카 트래버스는 왜 벨라 같은 사람한테까지 그렇게 매정했던 거야?’

그리고 노력한 사람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벨라처럼 헌신하는 사람이 계속 홀대 받는 것도 꽤 서글픈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루카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후후,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쯤은 간단하니까요.”

벨라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준비해 온 꾸러미를 흔들었다.

루카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손을 뻗었지만 결국 힘없이 팔을 떨구고 말았다.

“도련님, 오늘은 쉬시고 이건 나중에 보는 게 어떤가요?”

“……알았어.”

아쉽지만 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 처진 루카의 시선이 벨라가 가져온 꾸러미를 향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얻었어. 당장 저걸 열어보고 싶지만 어차피 체력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으니.’

내일 눈 뜨자마자 저것부터 처리해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루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

또다시 묘한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벨라는 슬쩍 루카의 눈치를 보았다.

루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욕실로 데려다줘.”

“네! 도련님!”

벨라는 무겁지도 않은지 루카를 번쩍 들어 올려 굉장히 기쁜 표정으로 옮겼고 어색하게 그녀에게 안긴 루카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누구의 웃음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3화

다음 날, 푹 쉰 덕에 아주 맑은 정신으로 일어난 루카는 침대 옆에 놓아둔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몇 병의 물약과 잿빛으로 굳은 알 하나가 있었다.

‘후, 긴장되는군.’

루카는 조심스럽게 잿빛으로 굳은 알을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소설을 보다 보면 가끔 너무 일찍 나와서 주인공 버프 때문에 쉽게 버려진 악역 캐릭터가 있다.

‘아카데미의 구원자가 되었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익 에테르나.

평범한 시골 소녀였던 에테르나는 어느 날 시장에서 잿빛으로 굳은 알 하나를 얻게 되는데 요리를 하려다가 실수로 손을 베어 그 알에 피를 묻히게 된다.

그러자 알은 피를 흡수하며 생기를 조금 되찾게 되었고, 이걸 보고 신기함을 느낀 에테르나는 며칠에 걸쳐 피를 조금씩 뿌려주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알은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

생기를 되찾은 알은 마치 심장이 뛰듯 맥동했고 에테르나는 그것을 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난 것은 하늘빛 날개를 가진 작은 새.

작은 새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에테르나를 어미로 여기고 따랐다.

그런데 작은 새가 태어나자 에테르나의 몸에 이변이 생겼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무슨 일을 해도 지치지 않는 활력이 생긴 것이다.

파지직!

“!”

거기에 더해 약하지만 번개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놀라면서도 신기해하는 그녀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도둑고양이 같은 년, 이 귀중한 것을 훔쳐 가다니!”

“네? 저, 전 도둑질 같은 건…….”

“하늘새의 새끼는 한 번 어미로 삼은 것을 바꾸지 않으니 다시 알로 만들어야 하지만 그럴 시간도, 자원도 남지 않았다. 네가 몸으로 갚아야겠다.”

그들은 에테르나를 납치하여 세뇌시키고 도구로 삼아 하늘새의 힘을 이용하였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천익 에테르나.

하늘의 날개를 가진 소녀였다.

‘결국 주인공의 손에 죽어서 불쌍했는데, 이젠 평범하게 살아가겠지.’

죽음이 유일한 구원이었던 악역이었기에 이렇게라도 구원을 해주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름 좋아하는 캐릭터였으니까.’

스토리가 꽤 절절해서 인상에 남았었다.

그래서 자세한 설정을 찾아보았었고, 그 덕에 이렇게 쉽게 하늘새의 알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쳐도 용케 벨라가 헷갈리지 않게 잘 구해오긴 했네. 역시 어머니, 멜본노 쪽 사람이라 그런가.’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새의 알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종이에 베이는 것도 아픈데.’

일단 피를 내야 하긴 한다.

평범한 시골 소녀인 에테르나는 어떻게 그 고통을 참고 알에 계속 피를 묻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진정한 힘이 개방되지 않은 천익도 그 정도의 힘이었는데 과연 완전히 개화한 천익은 얼마나 강할까?’

루카는 그런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당장의 고통을 참기로 했다.

서걱

‘윽…….’

칼날이 가볍게 손바닥을 베었다.

마력을 두르지 않은 피부는 가볍게 베여 피를 흘렸는데, 생각과는 달리 신음이 나오지 않았다.

‘음? 역시 루카 트래버스의 몸이라 그런가? 신음이 나오지는 않네.’

생각해 보니 목검 파편이 손에 박혔을 때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었다.

‘이제는 좀 이 몸에 익숙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어색할 때가 있네.’

루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에서 피가 떨어져 하늘새의 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꼭 며칠에 걸쳐서 먹일 필요가 없다고 했었지.’

‘아카데미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설정집 같은 게 있었다. 당시 어렸던 그는 그것을 꽤 상세히 봤고 특히나 좋아했던 천익에 관한 이야기는 더 자세히 보았기에 잘 알고 있다.

사실 알에 굳이 피를 뿌릴 필요는 없고 생명력만 주입하면 되는데 루카는 생명력만 주입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생명력이 깃든 피를 먹이는 것이다.

일정량의 생명력을 주입하여 하늘새의 알이 완전히 힘을 되찾으면 그때부터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이 주입된다.

다만 에테르나는 우연히, 아니면 하늘새의 알이 본능적으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선천적으로 생명력의 양과 회복량이 많은 체질이었다.

그 덕에 알이 생명력을 흡수해도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었지만 루카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생명력 회복을 돕는 물약도 사 오게 한 것이다.

‘이 물약을 파는 연금술사의 행방도 얼른 파악했으면 좋겠네.’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물약을 만든 ‘베른 도이너’라는 연금술사는 굉장히 뛰어난 성능의 발명품들을 많이 만들었지만 원작에서 밝혀지지 않은 이른바 미확인 떡밥으로 루카가 찾아야 할 인물 중 하나이다.

츠츠츠

“오.”

루카가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늘새의 알이 천천히 색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루카는 감탄하며 주먹을 쥐어 피가 더 잘 나오도록 했다.

주르륵

하늘새의 알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떨어지는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빨아들였다.

상처가 스스로 지혈될 때쯤 하늘새의 알은 완전히 색을 되찾았다.

“어우 어지러워.”

루카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물약의 뚜껑을 따 내용물을 마셨다.

“우욱!”

내용물을 입에 넣은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과연 명성에 걸맞은 맛이군. 주인공이 왜 고문할 때 이걸 썼는지 알겠어.’

이 물약의 별명은 걸레 빤 물, 그 명성에 걸맞은 끔찍한 맛이었다. 다만 효과는 확실한지 어지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지러움이 사라진 게 약 효과 덕분인지 끔찍한 맛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은 다음 하늘새의 알을 보았다.

푸른빛 배경에 구름 문양. 조금 전까지 피를 스펀지가 흡수하듯 빨아들인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알이었다.

“최소한의 준비는 끝났고. 남은 건.”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지개를 켠 다음 훈련장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더 이 몸에 익숙해지는 것뿐.’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 * *

반 배정 시험.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는 학생의 실력에 따라 반 등급에 차등을 둔다.

이는 물론 학생들의 경쟁심을 부추기기 위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은 높은 집안의 자식들일 가능성이 높으니 신분 차이를 확고히 하려는 저의도 있었다.

‘실제로 주인공은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내지만 평민이라서 최하위 반에 들어가니까.’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들었다.

“도련님! 짐은 제가 들게요!”

“됐어. 무겁지도 않은데 뭘.”

“하지만…….”

반 배정 시험이 치러지는 곳은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가 있는 대도시 하보크.

교통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마력 열차나 비공정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간다.

덕분에 해외의 학생들도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에 편하게 올 수 있다.

“하인들을 더 데리고 가시면 편할 텐데요.”

“어차피 자동 마차를 타고 갈 건데 하인이 뭐가 필요해.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시험만 치고 돌아올 거잖아.”

다소 변방에 위치한 트래버스 가문이지만 그래도 도로가 잘 깔려있기 때문에 자동 마차를 타고 적당한 속도로 사흘만 가면 하보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짐이나 하인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많이 챙길수록 복잡할 뿐이다.

하지만 벨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 하보크 같은 대도시에 가는 김에 충분히 놀고 오셔야죠!”

“뭘 놀아. 할 것도 없는데.”

루카는 현대 문명을 누리던 자신에게 이 세계의 놀이문화가 재밌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당장이라도 가슴이 뛰는 모험이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륙에 놀거리가 무엇인지는 소설에서 대충 봐서 다 알고 있다.

“이번 달 월간 센티멘탈호에 따르면 지금 하보크에서 빗소리 악단의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고 해요! 그걸 듣지 못하면 나중에 아카데미에 가서 사귈 친구들과 할 이야기가 없어질 거라고요!”

“없어도 딱히… 잠깐만. 무슨 악단?”

“빗소리 악단이요!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악단 중 하나라고요!”

루카는 묘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빗소리 악단이 뭔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꽤 주요 인물이 포함된 악단이니까.

‘문제는 그게 왜 지금 나오는 거지?’

원작에서 주인공이 반 배정 시험을 칠 때 하보크를 둘러보는 장면이 몇 번이고 나왔다.

그리고 그때 단 한 번도 빗소리 악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설마… 벌써 뭔가 바뀐 건가?’

천익 에테르나가 워낙 초반에 나오는 빌런이라 하늘새의 알을 가져간 것으로 인해 큰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 가치가 적지 않은 만큼 벌써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조금 신경 쓰여. 그냥 넘어갈 순 없겠는걸.’

빗소리 악단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루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빗소리 악단인지 뭔지 하는 건 보러 갈게.”

“어머나! 도련님도 유행을 파악하고 계셨군요! 만날 훈련만 해서 벨라는 많이 걱정을 했답니다!”

“…….”

감격하는 벨라를 보며 루카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슬쩍 저택을 보았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언제쯤 돌아오시지?”

“……요즘 국경 지역의 동향이 이상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조금 서글프게 말하는 벨라에게 무덤덤하게 답한 루카였지만 어떠한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원래의 루카가 삐뚤어진 이유가 형에 대한 열등감뿐만은 아니구나.’

루카의 몸에 빙의된 이후, 단 한 번도 트래버스 가문의 가주와 안주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 * *

마법이 발달하면서 이제 굳이 살아있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물론 평민들이나 가난한 귀족들은 여전히 말을 타고 다니지만 상류 귀족들은 말처럼 관리하기 힘들고 불편한 이동 수단을 지양하는 추세였다.

도로가 있어야만 하는 단점이 있지만 자동 마차를 이용할 수준의 귀족이라면 굳이 도로가 없는 곳에 갈 필요도 없다.

“어머나, 저희 말고도 학생들이 많네요~.”

“관심 없어.”

“도련님도 참.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니 관심을 가져주세요~.”

며칠의 여행 끝에 하보크에 도착한 루카와 벨라.

그곳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에르난 제국 물류의 심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화려하고 거대한 곳이었다.

어디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화려한 외관의 가게가 많았다.

‘해외여행 온 기분이네.’

실제로 해외여행을 간 적은 없지만 말이다.

확실히 텍스트로 볼 때와 실제로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소리가, 열기가, 색채가 액정 너머로 보던 것과는 다른 감각을 주었다.

‘벨라 말대로 노는 것도 괜찮을지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생동감 있고 활기 넘치는 이 광경에 루카는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은근슬쩍 속삭이는 벨라.

“빗소리 악단 말고도 재밌는 볼거리가 많은데 어떤가요, 도련님?”

“……됐거든.”

퉁명스럽게 대꾸한 루카는 시계를 보았다.

“그보다 시험장이 어디야? 등록해야지.”

“등록은 이미 해뒀답니다. 가서 확인만 하면 돼요.”

“좋아. 안내해.”

벨라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거대한 돔 형태의 어느 건물, 일명 아카데미 시험장이었다.

원래도 큰 이 건물 안을 공간 마법으로 더 늘려서 시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이번 회차 반 배정 시험에 등록한 트래버스 가문인데요.”

“반갑습니다. 바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시험장에서도 루카가 특별하게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것을 귀족이 직접 하는 것도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 벨라가 다 처리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트래버스 가문의 작은 별 아니야?”

작은 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트래버스 가문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루카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옅은 빨간색 머리카락에 주근깨, 키는 꽤 크지만 다부져 보이지 않는 체격이었다.

-뭐가 그리 불편한지 얼굴이 살짝 찌그러진 듯했다.

‘이 느낌은…….’

묘사가 바로 떠오르는 것을 보니 소설에서 본 인물 같았다. 루카가 소설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빨강머리 소년은 당황한 모양새였다.

“트래버스. 아직도 이 별명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모두가 널 칭찬하기 위해 붙인 별명이라니까?”

“…….”

“나 참, 붙임성 없는 건 여전하네. 같은 백작가의 차남끼리 친하게 지내자니까.”

백작가의 차남, 이라는 말에 루카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하찮은 평민 주제에 감히 동력 마법의 본가인 그레스 백작가의 차남, 나 오트보 그레스를 무시하다니!

-하하하! 죽어라! 하찮은 평민!

-마, 말도 안 돼! 평민 따위가 나 오트보 그레스를……!

그는 초반에 주인공을 띄워주기 위한 빌런이자 중후반까지 종종 나오는 설정인 ‘동력 마법’을 제일 처음 선보인 캐릭터인 오트보 그레스였다.

“……어?”

“가, 갑자기 왜 그래?”

뜬금없이 당황하는 루카를 보며 덩달아 당황하는 오트보, 하지만 루카는 그에 답해줄 수 없었다.

‘잠깐만 오트보 그레스는 분명…….’

루카는 벨라를 보았다.

“벨라! 내가 에르난 아카데미 몇 기 입학생이야?”

“예? 도련님, 딱 100회라 절대 잊을 리 없다고 하셨잖아요!”

“100회…….”

루카의 광대가 파르르 떨렸다. 스치듯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몹시 길었던 교장의 말이 드디어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럼 끝으로 101회 입학생 여러분, 모두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101회라. 딱 100회가 아닌 게 아쉽지만 아무래도 좋다. 내 청춘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루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주인공이 오기 전이구나.”

“뭐가? 왜 그래?”

지금 시점은 주인공이 아직 이 세계에 도착하기 전, 말 그대로 주인공이 도착하기 1년 전의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천천히 눈을 뜬 루카의 시야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오트보가 보였다.

‘모르는 것도 많고 변수도 많겠지만, 기회인가.’

주인공이 이 대륙에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과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이후 스토리를 아는 만큼 유추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가지고 싶었지만 시간상 가질 수 없던 것들, 예를 들어 하늘새의 알 같은 것들도 얻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미래, 바꿀 만한데?’

루카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운 가능성이 빛나고 있었다.

4화

한차례 머리를 정리하고 나니,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 속 오트보에 대한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잘 부탁해, 작은 별님. 나도 너처럼 형에게 치인 차남이야.

-농담이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오트보 그레스. 그레스 백작가의 차남이지. 형에게 비교당하는 동생들끼리 잘 지내보자고!

종합해 보자면,

‘말 많고 귀찮은 녀석.’

이게 루카 트래버스가 남긴 오트보에 대한 평이었다.

언뜻 보면 부정적인 평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안 좋게 보는 루카 트래버스치고는 나쁘지 않은 평이었다.

삐쩍 마른 빨강머리의 소년을 바라보며, 루카의 머리 또한 빠르게 돌아갔다.

‘원작에선 주인공한테 시비 걸다가 금방 사라지는 엑스트라일 뿐이지만…….’

문득 한 가지 설정이 떠올랐다.

오트보가 ‘동력 마법’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오트보는 후반부 행적이 드러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동력 마법은 후반에도 등장하는 주요 마법 중 하나였다.

그런 동력 마법을 쓸 줄 아는 녀석이라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서로 아는 사이 같으니, 주변 상황이라도 알아볼 겸 조금만 친해져 볼까?’

루카가 한참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자 오트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긴장했어? 조금 있으면 시험인데 괜찮아?”

그 말에 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닥쳐.”

말하고도 흠칫 놀랐다. 조금쯤 친해져 보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는데 저절로 튀어나와 버린 반응에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까칠한 거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그런데 루카의 대꾸가 만족스러운 듯 오트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괘, 괜찮은 건가? 이런 식으로 말해도.’

루카는 당황했지만 오트보는 그저 히죽 웃으며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 뿐이었다.

“그보다 컨디션은 어때? 아무리 장남에게 밀리는 차남들이지만 그래도 S클래스에 들어가지 않으면 부끄럽잖아.”

에르난 아카데미에는 S부터 E까지 6개의 클래스가 있으며 백작급 가문의 자제가 A클래스 이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굉장한 불명예였다.

물론 정말 어지간히 못 하는 게 아니라면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적어도 A클래스에는 배정해 준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백작가의 자제 중 재능이 있다면 S클래스에는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루카는 걱정하지 않았다.

루카 트래버스의 몸에는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쌓아온 그간의 노력 또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거기에 빙의한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했던 자신의 노력까지 곁들여졌으니, 입학시험 정도는 두려울 게 없었다.

다음 발언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는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컨디션은 노력하지 않는 놈의 변명일 뿐.”

“캬!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오만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발언이 입에 착 감겼다. 마치 이래야만 하는 것처럼.

루카는 오트보의 반응을 보며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갑자기 너무 다르게 행동하면 이상하게 볼 테니까.’

일단 처음 만나는 ‘등장인물’이니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나쁠 것은 없다.

현재의 루카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1년 전 시점이라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벨라가 있긴 하지만 내게 정보를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좋지.’

그런 타산도 있지만 나름 반가운 것도 있다.

좋은 쪽은 아니긴 해도 처음으로 알고 있는 인물을 만난 거니까.

‘그런데 1년 전이라고는 해도 내가 알고 있던 인상과는 좀 다른데?’

원작에서의 오트보는 오만하고 건방진 캐릭터라는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넉살 좋은 어린애 정도의 인상이었다.

역시 사람은 실제로 만나봐야 아는 건가.

애초에 원작 주인공과 루카는 신분부터 다르니 오트보의 반응이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스스로 말했듯 비슷한 처지이기에 동질감을 느껴 친하게 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도련님, 반 배정 시험 등록 확인이 끝났어요. 일찍 신청한 덕분에 바로 들어가면 된다고 해요.”

“알았어.”

“어이, 같이 가자고~”

마침 타이밍 좋게 벨라가 루카를 불렀다.

루카는 바로 그녀에게로 갔고 오트보 또한 그를 따라가려다가 제지당했다.

“오트보 도련님. 저희는 중간 순번이라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뭐? 빨리 등록 안 하고 뭐 했어!”

“죄송합니다.”

오트보 쪽의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하… 루카 트래버스랑 같이 시험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나. 관전은 가능하지?”

“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어쩔 수 없지. 루카 트래버스! 시험장에서 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떠난 오트보를 흘끔 본 루카는 혀를 찼다.

“시끄럽네.”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 같지 않나요? 도련님이랑 동갑이고 그레스 백작가면 트래버스 백작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으니 사귄다고 하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까요?”

“하, 저 녀석은 그냥.”

루카는 앞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많고 귀찮은 녀석에 불과해.”

루카 트래버스의 평은 완벽했다.

* * *

반 배정 시험은 간단했다.

마법사가 만들어낸 가짜 몬스터의 파괴.

시험관이 직접 컨트롤하는 몬스터기 때문에 당연히 위험하지 않지만 실제 몬스터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박력을 낸다고 한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시험장에 들어온 루카는 심호흡을 했다.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니 이런 무대 같은 곳에서 검을 휘두른다는 게 너무도 어색했다.

하지만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이, 그리고 며칠간 해온 적응 훈련이 그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참가 번호 3번, 트래버스 가문의 루카 멜본노 트래버스, 앞으로 나오게.”

올해 반 배정 시험의 시험관이자 저명한 마법사 올리버 덴베스타. 그는 엄숙한 어조로 루카를 불렀다.

루카는 격리된 필드 안에 들어가 올리버의 앞에 섰다.

-스캔

올리버는 마법으로 루카의 몸을 확인했다.

‘음? 이 힘은 뭐지?’

루카의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힘에 그는 살짝 의구심을 느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근엄하게 말했다.

“자네라면 상위 개체에 도전해도 되겠군. 도전하겠나?”

“예.”

상위 개체를 잡는 것은 A클래스 이상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일정 마력 이상을 보유해야 시험관이 제안한다.

“알고 있겠지만 상위 개체의 몬스터는 가짜라고 해도 심신이 약한 자라면 기절할 정도의 살기를 내뿜는다. 괜찮겠나.”

“예.”

무심한 단답. 사람에 따라서는 대충 대답한다 느낄 수 있지만 적어도 올리버는 그 대답에서 묵직한 결의를 느꼈다.

“좋네. 10초 후에 시험을 시작하겠네.”

올리버의 말과 함께 루카는 눈을 감았다.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한마디, 그와 동시에 스치듯 지금까지 노력한 것들이 떠올랐다.

루카 트래버스의 사념, 그것을 베어 넘기던 것, 손에 박힌 목검의 파편들.

그리고 그 이전에 루카 트래버스가 쌓아놨던 모든 것.

‘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카는 눈을 떴다.

동시의 올리버의 입에서 호령이 떨어졌다.

“시작!”

팟!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강한 재생력과 마법저항력을 가진 상위 몬스터 트롤이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으깨버릴 정도의 근력을 가진 괴물이다.

“키에엑!”

소리를 지르며 루카의 몸뚱이보다 큰 방망이를 휘두르는 녹색 괴물.

텍스트로 보던 것과는 딴판의 입체감에 루카는 순간 몸이 굳었다.

“시시하군.”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리게 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혼잣말이었다.

말버릇 같은 그 한마디, 평소 훈련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내뱉던 말이었다.

‘그래. 시시하네.’

정신을 차린 순간 자신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는 트롤의 움직임이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루카는 심호흡조차 하지 않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며 몇 번이나 해온 동작을 그대로 재현했다.

텅!

털어내듯 가볍게 휘두른 검에 트롤의 방망이가 튕겨져 나갔다.

트롤의 무게중심이 무너지고 주춤하는 순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루카의 몸이 한 바퀴 돌며 원심력이 담긴 베기가 그것의 가슴에 닿았다.

촤자작!

“끼에엑!”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트롤의 가슴팍이 갈기갈기 찢겼다.

물론 목이 베이지만 않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속설에 맞게 찢기자마자 바로 재생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연이어 꽂히는 루카의 검격은 트롤의 재생보다 빨랐다.

촤작! 촤작! 촤자작!

마치 야수가 사냥감을 물어뜯는 것 같이 거칠지만 무거운 일격들.

에르난 제국의 송곳니라 불렸던 트래버스 가문의 시초 아벨 트래버스의 검술다운 공격이었다.

콰드득!

마지막으로 숨통을 끊듯 목덜미를 도려내는 루카.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검을 회수할 때까지 그의 숨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훌륭하군.”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올리버가 나직이 감탄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가짜 몬스터를 사라지게 한 그는 루카의 앞에 섰다.

“평가는 감독관들이 하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최상위권의 점수를 받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네는 만족하지 않겠지.”

루카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버를 보았다. 올리버는 그를 내려다보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족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와일드 멜본노 트래버스의 시험도 맡았네.”

“…….”

“자네의 검술은 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군.”

울컥.

루카의 속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야말로 사족이군요.”

“자네의 아버지에게 안부 전해주게. 가끔은 수도에 와서 친우의 집에 들렀다 가라고.”

뒤돌아선 루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만날 수 있다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에잉, 그 친구는 집에서도 그러는 모양이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그를 뒤로한 채 시험장을 나왔다.

루카는 꽤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트래버스 가문과 거울 마도회가 친분이 있었구나! 그래서 윌루가 그들을 도와주자고 한 거였어!’

원작에서 윌루가 뜬금없이 거울 마도회를 도와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원작 독자로서의 의문이 풀린 것도 기뻤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큰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웅웅!

그때 익숙한 진동이 느껴졌다.

“?”

루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호주머니에 넣어둔 폰을 꺼냈다.

폰의 잠금을 해제한 루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건을 충족하여 힌트가 추가되었습니다.]

‘오!’

잠겨있던 기능의 해금, 이것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없다.

루카는 흥분해서 바로 메모 어플을 켜서 비어 있던 힌트 모음에 들어갔다.

[거울 마도회에 숨은 악마]

-거울 마도회와 연관된 사람을 만나세요. (○)

-거울 마도회가 숨기고 있는 것을 밝혀내세요.

-거울 마도회의 진정한 목표를 찾으세요.

-???

-???

‘오……!’

마치 퀘스트처럼 떠 있는 항목을 보며 루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그거잖아!’

‘이명현’의 충고 중 하나였던 ‘거울 마도회는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왜 중요할 때 나타나지 않은 건가요?’의 해답,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 바로 이해했어.’

루카는 눈을 반짝였다.

이런 식으로 그가 충고했던 것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힌트가 갱신되고, 그 힌트를 충족시키면 비밀을 알게 되는 구조.

여러 소설에서 봐온 매우 잘 알고 있는 방식이다.

“루카 트래버스! 굉장한데!”

“…….”

그리고 그때 오트보가 다가왔다.

그는 굉장히 흥분한 듯 약간 상기된 얼굴로 루카 앞에 섰다.

“이 정도면 S클래스는 확정이나 다름없겠는걸!”

“당연한 일이야.”

“하하! 그렇겠지. 나도 열심히 해야겠는데!”

신나서 떠들어대는 그를 보며 루카는 슬며시 폰을 아공간 포켓에 넣었다.

흥분한 오트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며 은근슬쩍 말했다.

“좋아! 그럼 우리의 S클래스 합격을 축하하며 끝나고 하보크 시가지에서 노는 거 어때?”

“S클래스 합격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축하부터 하겠다고?”

“그러고 안 되면 항의해야지! 나도 같이 항의해 줄게! 차남을 무시하는 거냐고!”

원래라면 이런 건 거절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후에 빗소리 악단을 알아보러 가야 하기도 했고, 등장인물과 너무 가깝게 지내면 무슨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루카는 기분이 좋았다.

우려했던 시험에서 훌륭하게 실력을 발휘했고, 소설에서 보던 상황을 실제로 겪은 것 덕분에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광장에서 기다리지.”

“그럼 어쩔 수 없…… 뭐?”

물론 당연히 그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던 오트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는 그런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두말하게 하지 않도록. 광장에서 기다리겠어.”

“……아, 알았어! 금방 끝내고 올게!”

오트보가 신나서 시험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옆에 나타난 벨라.

은근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아뇨. 아무것도. 그럼 벨라는 얼른 빗소리 악단 티켓을 구하러 갈게요!”

“쯧.”

혀를 찬 루카는 시험장 건물을 나섰다.

눈부신 햇살이 거리를 선명하게 비추는데, 한국에선 보지 못 했던 독특하게 생긴 건물들이 각자의 색과 멋을 드러내며 늘어져 있었다.

잿빛이었던 이명현 때의 삶과는 달리 색이 짙은 루카 트래버스로서의 삶.

“……나쁘지 않네.”

누구의 감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루카는 광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5화

시력이 좋아진 덕분인지 아니면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더욱 선명한 색채로 보이는 광장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루카는 알 수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왜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지 이제야 알겠네.’

만날 sns에 여행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하지 못했었다.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위험할 수도 있고 귀찮은 일도 많은데 굳이 저렇게 다녀야 하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와보니 또 다른 느낌이다.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네.’

새로운 경험이라는 게 이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루카가 그 감각을 즐기고 있을 때 벨라가 슬픈 표정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죄송해요. 빗소리 악단의 티켓을 구하지 못했어요.”

“…….”

“아무래도 지금 굉장히 인기 있는 악단이다 보니 내일 예약분까지 모두 팔렸다고 해요. 적어도 모레는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아쉽다는 듯,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루카의 눈에는 빤히 보였다.

“그럼 그냥 돌아갈까.”

“예? 하, 하지만 도련님. 그… 아! 그레스 백작가의 차남분과 약속도 있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만 하고 돌아갈까.”

그냥 돌아갈까, 라는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벨라.

‘역시 일부러 못 구한 척 하는 거군.’

스스로 그렇게 유능하다고 자부하는 벨라가 암표 하나 못 구할 리가 없다. 구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본인이 하보크에서 놀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 루카가 좀 더 노는 것을 바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루카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관심 있다 뿐이었지 꼭 가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하, 하지만…….”

“어~이, 루카 트… 아니지. 루카! 헤헤!”

그때 오트보가 싱글벙글 웃으며 멀리서 달려왔다.

“자, 작은 도련님! 너무 빨리 뛰시면 넘어질 수…….”

뒤에서 하녀가 그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지만, 신나서 뛰어다니는 오트보를 따라잡기 힘들어 보였다.

루카는 벌써부터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다가 움찔했다.

“어?”

오트보가 무언가에 걸려 공중에 붕 떴다.

멍청한 표정을 짓는 오트보와 그를 보며 경악에 찬 표정을 짓는 하녀가 눈에 들어왔다.

“쯧.”

그 모습을 보며 루카는 혀를 찼다.

파직!

순간 그의 눈동자에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동시에 루카의 시야에서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 힘을 이런 곳에서 처음 사용하게 되다니.’

루카는 헛웃음을 지은 뒤 오트보에게 다가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켁!”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렀다.

오트보는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지만 지면에 얼굴이 박히는 불상사는 면했다.

“작은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괘, 괜찮아. 고마워 루카.”

“다음부터는 넘어지기 직전에 공중부양 마법을 사용하는 순발력을 갖추도록.”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뒷덜미를 놓아주었고 오트보는 하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도련님… 방금 그건……?”

벨라가 무언가 눈치챈 듯 물었지만, 딱히 해명할 생각은 없었기에 루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빗소리 악단의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떡할래, 오트보.”

“응? 무슨 소리야 루카. 그런 건 이미 구해뒀다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오트보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품에서 티켓을 꺼냈다.

벨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루카는 일부러 그녀의 앞에 서며 얼굴을 가렸다.

“좋아. 그런데 티켓이 왜 그렇게 많아?”

“그거야…….”

오트보는 히죽 웃으며 티켓을 흔들었다.

“여기에 시험 치러 온 다른 여학생들이랑 가려고 준비했지.”

“…….”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는 루카에게 오트보가 슬쩍 다가왔다.

그러고는 팔꿈치로 그를 꾹 누르며 은근하게 말했다.

“믿고 있다고, 작은 별님. 황녀님을 꼬실 때처럼 잘 부탁한다고!”

“그게 무슨… 아.”

아까부터 작은 별이라고 해서 무슨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의 눈은 마치 작은 별이 빛나고 있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르베르타 황녀님.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아뇨.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

-……네?

제5황녀 르베르타 에르난의 열 번째 생일파티에 억지로 끌려가서 있었던 일이다.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에 따르면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은 파티였다.

그래서 빨리 돌아가려고 각을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르베르타 황녀가 말을 걸어서 짜증 났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루카 트래버스 이 새끼는 왜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리는 거지……?’

백작가의 차남에게 계승권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황실과 피를 섞을 수 있는 기회는 천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냥 무시해 버리다니.

‘이렇게 생기면 이런 짓을 해도 아쉽지가 않구나.’

몸 안에 있는 이명현은 아쉬워 죽을 것 같지만 루카 트래버스라는 사람은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 같았다.

루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손을 흔들었다.

“귀찮아. 그런 거 딱 질색이야.”

“하, 하지만.”

“저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루카와 오트보는 의아한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어느 가문의 영애라도 되는 듯 꽤 차려입은 소녀 한 명과 날카로운 인상의 검사 같은 소녀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 죄송한데 저희가 빗소리 악단 공연을 보고 싶어서 왔는데 자리가 없다고 해서요. 티켓이 많은 거 같은데, 혹시 함께 볼 수 있을까요?”

“!”

오트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가운데 루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으읍.”

“아~ 물론이지! 혹시 반 배정 시험 치러 온…….”

“맞아요! 올해부터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에 다니게 된 미리아 필레라고 해요!”

“반가워! 말 편하게 해도 돼! 나도 올해부터 에르난에 다니게 된 오트보 그레스야!”

“아! 그레스 가문의……!”

거절하려는 루카의 입을 막은 오트보는 신나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약한 마법사 따위의 완력으로 검사인 루카의 입을 계속 막을 수는 없는 법.

루카는 오트보의 손을 떼어내고 속삭였다.

“잘 된 거 같으니 난 빠지겠어.”

“야, 좀! 네가 있어서 온 거잖아!”

“무슨 소리야. 네 티켓 보고 온 건데.”

“생각을 해봐. 귀족가의 여식이 티켓 따위가 없다고 저렇게 말하겠어? 그냥 같이 보자고 말하는 거잖아!”

“……?”

솔직히 루카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확신에 찬 오트보의 눈을 보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제발, 루카. 네가 안 간다고 하면 갑자기 이 가슴 뛰는 무대가 막을 내릴 거라고! 한 번만… 나 살려준다 생각하고 한 번만……!”

루카는 단칼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뒤에서 ‘가세요, 도련님!’이라는 눈빛을 보내는 벨라와 속삭임으로 거의 빌다시피 하는 오트보를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이래서 남자들이란.”

“이셀라! 쉿!”

“……이셀라?”

그때 별 감흥 없던 루카의 귀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루카는 역겹다는 듯 한숨을 쉬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명장이 벼려낸 검과 같았다. 아름답고 강인하며 위험했다.

-달을 연상시키는 은빛 머리카락도, 차갑게 굳은 입술도, 예기가 담긴 눈빛도 모두 검과 같았다.

-제4 황녀를 지키는 달빛의 기사 라이셀 판드리가, 일명 이셀라다.

문득 떠오른 문장들, 루카는 광대를 살짝 떨었다.

‘이셀라라는 이름이 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떠오른 묘사와 일치하는 외모… 우연일 리 없겠지.’

루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오트보가 눈을 반짝였다.

“뭐~야 루카. 이쪽 분을 알고 있는 거야?”

“?”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자! 가봐!”

툭.

오트보는 루카를 이셀라 쪽으로 밀었다.

루카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가, 순간적으로 느낀 살기에 반응해 검을 뽑았다.

캉!

“호?”

이셀라가 의외라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루카는 본능적으로 막아낸 칼날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짓이지?”

“네가 화… 미리아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막은 것뿐이다.”

황급히 말을 돌리는 이셀라.

보통은 별생각 없이 넘어갔겠지만, 내막을 대충 알고 있는 루카는 그 말에서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

‘역시 진짜 황녀와 이셀라였군. 그렇다면…….’

루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겠다면 여기서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지만, 올리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등장인물과 어느 정도 연관이 되면 힌트가 생길 것이다.

게다가 이 둘은 보통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암투에서 살아남은 불사의 황녀 브리드 에르난. 그리고 그녀를 수호하는 달빛의 기사 라이셀 판드리가. 이 두 사람은 원작에서 주인공과 싸우는 악역이지.’

배경부터가 남다른 등장인물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아카데미 파트에서 주인공에게 패배한 이후 브리드와 라이셀은 조용히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고 갑자기 사라졌었지. 그래서 엑스트라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사라진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게 또 어떠한 강한 힘과 관련이 있다면?

애독자였던 그이기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지금은 거울 마도회의 힌트를 얻게 된 직후였다.

좀 더 많은 힌트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힌트는 많을수록 좋아. 힌트를 얻는 조건이 갑자기 사라진 캐릭터들과 친분을 만드는 것일 수 있으니 여기서 인연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지.’

그러고 보면 공교로운 일이었다.

초반부 보스인 천익의 힘을 얻었고 극초반 악역 오트보, 거기에 아카데미 파트 중반 악역인 불사의 황녀 브리드와 그 수호자 라이셀까지.

그야말로 빌런 종합 세트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주인공과 다른 시간대인 만큼, 정해진 결말을 피하려면 우선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했다.

루카는 흘끔 오트보를 보며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고맙다, 오트보.’

치직!

마음을 먹는 순간 칼날에서 불똥이 튀었다.

“루, 루카?”

“…….”

루카에게서도 살기가 흘러나오자 오트보와 미리아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검사가 칼을 뽑아 휘둘렀다는 건 결투를 신청한 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지.”

“……물론.”

루카의 대항을 생각지 못한 것인지 이셀라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마주 살기를 내뿜었다.

루카는 검에 힘을 주며 그녀를 압박했다.

“검을 뽑은 이상 여자라고 봐주는 일은 없다.”

치직! 치지직!

점점 루카의 칼날이 이셀라의 검을 밀어냈다. 이셀라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뭐지? 이 남자의 검… 1학년의 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특별한 훈련을 한 그녀의 검은 이미 정식 기사의 수준을 벗어났다.

아무리 날고 긴다는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검이 밀린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루카! 여기 광장 한가운데야!”

“기사의 결투에 장소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명예뿐.”

“여, 여기서 싸우는 게 명예로운 거야?”

이해하지 못한다는 오트보의 얼굴.

물론 루카의 말은 헛소리다.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한 것뿐이다.

“이 여자는 아무런 위협도 하지 않은 내게 검을 휘둘렀다.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내 명예, 나아가 트래버스 가문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 같긴 한데…….”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이셀라를 대신해서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루카 트래버스, 더 나아가 트래버스 백작가에게 결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미, 미리아님!”

“검이 만든 불명예는 검으로 씻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과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닐 텐데?”

루카는 미리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셀라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셀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흘끔흘끔 미리아를 보았다.

그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졌는지 그녀의 검이 점점 더 뒤로 밀렸다.

“그녀는 저의 검이니 검의 주인이 사과하는 건 그녀가 사과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자기 검 간수도 똑바로 하지 못하는 허술한 주인이군.”

“네 이놈! 감히 저분이 누군지 알고!”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지금 중요한 건 네 그 경박한 팔이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

“이 불경한 놈!”

챙!

미리아를 욕하자 이셀라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동시에 그녀는 검을 강하게 휘두르며 루카를 밀어냈다.

루카는 뒤로 살짝 밀려 나가며 자세를 잡았다.

이셀라가 검을 양손으로 잡으며 마력을 내뿜었다.

사라락!

“다시는 그 썩어빠진 주둥아리를 나불대지 못하게 해주겠다!”

“네 팔과 내 입, 둘 중 뭐가 먼저 바닥에 떨어질지 궁금하군.”

마력에 의해 흩날리는 이셀라의 머리카락, 그리고 손등에 힘줄이 돋으며 칼날을 하얗게 물들이는 루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만!”

그때 미리아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 미리아님!”

“비켜라. 이건 이미 기사 대 기사의 명예를 건 싸움이다. 네가 그걸 막을 자격은 없다.”

이셀라는 당황했고 루카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에 미리아는 목을 가리고 있던 스카프를 풀며 말했다.

“……제 신분이 두 사람보다 아득히 높다면요?”

“우습군. 내가 아무리 백작가의 차남이라고 해도 이 제국의 높은 귀족의 성 정도는 모두 외우고 있다. 필레라는 성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그럼… ‘에르난’은 어떤가요?”

루카는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걸렸군.’

그녀의 입에서 황가의 이름이 나오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6화

“…….”

미리아의 입에서 황실의 이름이 나오자 루카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슬쩍 오트보를 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오트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톡톡.

루카가 귀를 톡톡 두드리자 멍청한 표정을 짓던 오트보가 황급히 주변에 소리 차단 마법을 걸었다.

광장 한복판이었다. 이미 너무 눈에 띈 나머지 구경꾼들이 하나둘 몰려오고 있었다.

루카는 오트보가 소리 차단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미리아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 이 광장에서 감히 황실을 들먹이는 건가. 그것도 에르난의 송곳니 트래버스 가문의 혈육 앞에서.”

“……이걸 보세요.”

미리아는 스카프로 가려두었던 목걸이를 보였다.

에르난 황실의 인장이 박힌 목걸이였다.

하지만 루카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런 허접한 가짜로 날 속이려는 건가?”

“가, 가짜라뇨. 에르난 황실의 이토록 정교한 인장을 어떻게 모조품이…….”

“그렇다면 네 말은 악단 공연을 보기 위해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여자가 에르난 제국의 고귀한 핏줄이고, 상황 파악도 똑바로 못해서 주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멍청한 애송이가 황실의 핏줄을 호위하는 고결한 기사라고 말하는 건가?”

순간 정적이 일었다.

신랄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의 표현에 미리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셀라 또한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가 무엇을 말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실을 모욕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끔찍할 정도군. 오트보에게 침묵 마법을 사용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당장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행위다. 알고 있나?”

“저… 루, 루카…….”

눈치를 보던 오트보가 루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마법으로 확인해봤는데 황실의 인장 맞는 거 같아. 황실의 인장에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바로 알 수 있거든.”

“…….”

루카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트보를 보다가 미리아를 보았다.

미리아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카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며 검을 거두었다.

“……흥이 식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없던 일로 하지.”

“뭐, 뭐?!”

이셀라가 했던 실책도, 루카가 했던 모욕도 모두 없던 것으로 하면 이보다 좋은 결말은 없다.

루카의 선택이 옳았던 건지 미리아도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셀라에게 검을 거두라고 명령했다.

“하, 하지만 미리아님. 저 남자는…….”

“이셀라… 네가 평생 훈련만 해온 건 알겠는데, 물러나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그리고 내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저쪽도 꽤 힘든 처지인 모양이다.

‘이 정도면 꽤 깊은 인상을 남겼겠지. 남은 건 아카데미에서 우연을 가장해 친해지면 될 뿐.’

루카는 속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뒤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오트보가 계속 미리아 쪽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

오트보는 뭔가 화장실이 가고 싶은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루카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트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뒤돌아서 가는 미리아와 이셀라가 보였다.

“……너 설마 이 상황에서?”

“하지만… 으…….”

오트보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하다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루카는 한숨을 쉰 뒤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티켓.”

“?”

“티켓!”

오트보는 어벙한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티켓을 내밀었다.

티켓을 받은 루카는 잠시 갈등하다가, 다시 한숨을 푹 쉰 다음 멀어지는 미리아와 이셀라에게 달려갔다.

그가 다가오자 미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그리고 이셀라는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미리아와 눈이 마주친 루카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거, 거기 레이디들…….”

“?”

“네 이놈 또 무슨 모욕을…….”

미리아는 아주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어벙한 오트보의 얼굴과 못마땅한 루카의 얼굴, 그리고 손에 든 티켓.

그러고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셀라의 입을 막는 것이었다.

“읍읍!”

“무슨 일인가요, 지나가던 기사님.”

마치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웃으며 답하는 그녀.

루카는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와 제 친구에게 빗소리 악단의 공연을 함께 관람할 영광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머나, 요즘 인기가 많다던 그 악단의 공연 티켓!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정말 저희로 괜찮은가요?”

“당신들과 같이 아름다운 레이디들을 모실 수 있는 것은 기사에게 가장 큰 명예입니다.”

듣고 있는 이셀라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것은 루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이 말하는 귀족의 격식은 이러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는지 미리아 또한 ‘귀족의 격식’에 따라 답했다.

미리아는 우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루카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슬쩍 오트보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오트보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저, 정말 저희와 공연을 보러 가주시는 겁니까, 황…….”

툭!

“커흑! 으… 아, 아니… 레, 레이디…….”

황녀라고 말하려는 순간 루카의 팔꿈치가 그의 명치에 꽂혔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오트보는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보며 미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물론이죠. 이렇게 듬직한 기사분들과 함께 하게 되어 마음이 놓이네요.”

“…….”

“이셀라. 인사.”

좋은 분위기 속에서 이셀라만이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미리아가 그녀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살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셀라는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억지로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기, 기사… 님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

루카가 비꼬듯 레이디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자 이셀라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카는 신나서 미리아에게 말을 거는 오트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덕분에 일이 잘 풀리게 되었으니 이 정도는 해주지 소년. 그리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루카는 속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이런 헌팅 같은 거 해보고 싶었어.’

빙의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

이전 삶에서는 할 수 없던 일을 해보는 것은 꽤 짜릿했다.

* * *

“와아! 오늘 꽤 재밌었어. 안 그래?”

“그 불경한 놈들을 도륙 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그 역겨운 녀석의 손목을 일격에 베었더라면…….”

“아직도 그 소리야? 너도 재밌게 놀았으면서 왜 그래?”

“재, 재밌게 놀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 없이 달리는 무인 마차 안, 미리아와 이셀라는 단 둘이 앉아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이니 괜찮지만, 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 진짜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안 돼. 알겠지?”

“죄송합니다, 황녀님. 저도 모르게…….”

“알아. 내게 위협이 될 만한 건 모두 차단하도록 훈련을 받아온 거. 하지만 밖에 나와 보니 알겠잖아. 모든 것이 위협은 아니고 생각했던 것보다 이 나라는 평화롭다는 거. 그러니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그렇게 하면 내가 불편해질 뿐이야.”

“알겠습니다…….”

이셀라는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짧은 인생을 황녀의 보호만을 위해 훈련받아 온 그녀였다.

유연한 대처를 바라는 것은 아직 어려운 일일 것이다.

미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동생을 차버린 못된 남자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더 재밌게 된 것 같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잘 된 거 같다고 하니 이셀라는 눈에 띄지 않게 기쁜 얼굴로 인사를 했다.

미리아는 창가로 보이는 달을 보았다.

“자, 그럼 그들은 날 얼마나 즐겁게 해줄까?”

그녀의 눈이 하늘에 뜬 초승달처럼 휘었다.

“기대되네. 아카데미.”

숨은 황녀 브리드 에르난.

그녀는 원작 주인공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중반부 최고의 악역이었다.

* * *

“아~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

2대2 공연 데이트의 여운이 남은 것인지 오트보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 루카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뭐, 나쁘지 않더군.”

“루카, 신분을 숨기고 있다지만 황녀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건 크나큰 영광이라고! 그것도 백작가의 차남인 우리가!”

“그 정돈가.”

물론 루카도 내심 기분 좋긴 했다. 여자와 같이 놀아본 건 초등학생 때 이후 처음이니까.

‘그런데 역시나 빗소리 악단은 별 거 없었네.’

지금 시점이 주인공의 전이 1년 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빗소리 악단에 아직 ‘그’가 오지 않았겠지, 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확인차 들른 건데 역시나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여기서 공연을 하고 있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루카는 곧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뭐?”

“네 녀석이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이곳은 트래버스 가문에서 마련한 루카의 숙소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레스 가문에서 마련한 오트보의 숙소와 바로 옆에 위치했었다.

“어차피 바로 옆이잖아. 뭐가 문제야?”

“내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받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군. 오늘 너를 위해 그 정도로 희생했는데 저녁까지 힘들게 해야겠어?”

“아… 그, 그렇지.”

냉혹한 루카의 말에 오트보는 조금 충격 받은 듯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에 루카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늦었으니 식사만 하고 가라. 그 이상은 허락 못 해.”

“정말? 고마워! 그때까지는 하인들이 내 전속 하녀를 찾아둘 거야!”

“전속 하녀?”

뚱딴지같은 그의 말에 루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오트보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걔가 숙소 허가증을 가지고 있거든. 근데 아까 황녀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라졌어.”

“아, 그분이라면 숙소에 계셔요. 제가 옮겨놓았으니.”

“……어?”

그때 갑자기 벨라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루카와 오트보 둘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루카였다.

“왜?”

“평범한 하녀가 황녀님의 비밀 같은 걸 알게 된다면 곤란할 테니까, 제가 처리해 뒀죠?”

“…그렇군. 잘했어.”

생각지 못했던 건데 잘 처리해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만 오트보는 조금 당혹스러운 듯했다.

“루, 루카. 네 하녀 뭐야?”

“그냥 유능한 하녀지.”

“아니, 아무리 유능한 하녀라도 그렇지. 보통 하녀가 아무도 모르게 사람 한 명을 기절시켜서 숨겨둬……?”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을 했지만 루카는 한마디만 더 덧붙였다.

“우리 가문에도 남에게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는 것뿐이야. 네 가문도 그렇겠지?”

“……그러네.”

귀족 가문이 대개 그러하듯 두 백작가 또한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보다 넌 하인들이 지금도 그 하녀 찾아서 도시를 뒤지고 있다며. 돌아오라고 해야지.”

“아, 맞다. 그럼 가볼게! 잘 자!”

루카의 지적에 오트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황급히 방을 나서다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일 같이 반 배정 시험 결과 보러 갈래?”

“무슨 소리야. 결과는 한 달 후에 나오잖아.”

“도련님. 결과가 한 달 후에 나오는 건 맞지만 백작급 이상 귀족들은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어요.”

벨라의 설명에 루카는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어차피 S클래스일 텐데 가봐야 해?”

“그래도!”

“알았으니까 빨리 좀 가.”

오트보는 헤헤 웃으며 내일 봐! 라고 말한 다음 방을 떠났다.

벨라는 쿡쿡 웃었다.

“재밌는 분이네요.”

“뭘. 시끄럽기만 한데.”

퉁명스럽게 말하는 루카의 입꼬리는 창가로 보이는 달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두 사람은 시험장으로 갔다.

“오트보 그레스, S클래스입니다.”

“와!”

환호하는 오트보, 그리고 차례를 기다리며 은근히 들뜬 표정을 짓는 루카.

결과를 알려주는 직원은 서류에서 루카의 이름을 발견하고 말했다.

“그리고 루카 트래버스, A클래스입니다.”

시험 결과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

“네? 잠깐만요. 다시 한번만 확인해 주세요.”

당황해서 직원에게 다시 묻는 벨라와 황급히 친구의 안색을 살피는 오트보.

그때, 당사자인 루카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래서 이 녀석이 스토리에 나오지 않은 거군.’

입학시험은 완벽에 가깝게 치렀다.

감독관의 평도 그렇고, 아무리 처음 치르는 시험이라고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에, 루카는 루카 트래버스라는 인물이 어떤 운명을 지닌 존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 녀석은 억까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던 건가.’

그야말로 비운의 캐릭터, 그것이 루카 트래버스라는 인물이었다.

7화

“이야~ 올해도 굉장하군요! 역시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라고 해야 하나.”

“매년 감탄이 나옵니다.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다니.”

“하지만 그래도 분류는 해야겠죠. 뛰어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선별해야 하니.”

반 배정 시험 감독단, 공정하고 전문성 있는 그들의 판정에 따라 반 배정이 이루어진다.

“그럼 일단 황녀님과 그 호위는 S클래스에 배정해야겠죠.”

“어허, 황녀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차차, 죄송합니다. 제가 입방정을.”

머쓱하게 웃는 한 감독관, 다른 감독관이 서류를 읽으며 말했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왜 굳이 신분을 숨겨서 행동을 하는 건지.”

“다 어릴 때의 치기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다음 갑시다, 다음.”

“그럼 일단 점수 1등부터 배정해야겠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읽던 서류를 앞에 내밀었다.

“루카 멜본노 트래버스. 역시 트래버스 가문의 피는 다르군요. 그의 형과 같이 반 배정 시험 1등입니다.”

“크~ 역시 제국의 송곳니는 다르군요. 자식 둘 모두 이렇게 뛰어나다니.”

“사실 형이 독보적으로 뛰어나서 그렇지, 루카 트래버스의 평가 또한 그렇게 박한 것은 아닙니다. 그 재능을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피워낼지가 관건이겠군요.”

감독관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루카 트래버스는 A클래스에 배정하도록.”

“예?”

“그게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 그 말에 감독관들이 모두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고 경악하며 입을 다물었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색 장발, 차가운 표정, 그리고 특유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

네모 안에 점이 있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사내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루카 트래버스가 S클래스에 배정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A클래스에 배정하도록.”

“키, 키센 후작님. 그게 무슨……?”

가르다프 키센 후작.

마법 연구의 대가로 이름 높은 키센 후작가의 가주로 본인의 마법 실력도 8계층급으로 굉장히 뛰어난 실력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키센 마법연구사단이었다.

마탑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 연구 실력을 가진 키센 마법연구사단은 에르난 제국의 주요 전력 중 하나였다.

“트래버스 가문은 이미 와일드 트래버스가 계승권을 쥐고 있는 상태다. 갑자기 루카 트래버스가 뛰어남을 보여 가문에 영향력을 끼친다면 트래버스 백작가의 계승권에 혼란만 주겠지. 그는 적당한 범재로 남는 게 낫다.”

“하, 하지만 가문의 계승권에 관한 일은 그 가문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저희는 그저 공정하게 반 배정을 하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공정을 중요시하는 반 배정 시험 감독단답게 자신들보다 신분이 아득히 높은 후작가의 가주에게조차 반대하는 감독관들이었다.

하지만 가르다프 키센 후작은 담담했다.

“에르난 제국의 국방에 크게 기여하는 트래버스 가문에서 계승권으로 혼란이 생기면 제국 국방 전체에 큰 혼란이 일어날 터. 그것을 막는 것은 제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고작 반 배정 하나에 목을 매지 않도록.”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는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아카데미라는 드높은 명성을 가진 곳입니다. 그곳의 반 배정은 ‘고작’이 아닙니다. 명성에 걸맞은 공정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법. 그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감독관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는 가운데, 감독관 중 한 명이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상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 잠깐. 그런데 왜 이곳에 키센 후작님이……?”

그 한마디에 모두가 경직했다.

반 배정 시험 감독은 몹시 비밀스러운 일, 제국의 후작이라고 해도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가르다프 키센 후작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말을 잘 듣는 녀석이 감독관을 하도록 해야겠군.”

“그, 그게 무슨…….”

[정신 지배]

파지직!

가르다프 키센 후작의 머리 위에 특이한 정사각형 마법진이 생성되며 감독관들의 머리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감독관들은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파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들의 눈이 빛을 잃었다.

“이야~ 역시 키센 연구사단의 주인은 다르군요. 기억의 조작을 넘어서 완전히 정신을 지배하는 마법을 만들다니.”

어둠 속에서 단안경을 쓴 실눈의 사내가 나타났다. 가르다프 키센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격의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하하! 겸손하기는. 그래도 곧 완성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쓸데없는 소리를. 그보다 어째서 루카 트래버스 한 명 때문에 이런 귀찮은 일까지 해야 하는 거지?”

가르다프 키센의 말에 단안경을 쓴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높으신 분 마음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혈통 때문이라는 말이 있던데, 자세히는 몰라요.”

“혈통이라면 와일드 트래버스가 더 짙게 물려받았을 텐데.”

“아뇨. 트래버스 쪽이 아닙니다. ‘멜본노’쪽이죠.”

단안경을 쓴 사내의 말에 가르다프 키센은 슬쩍 테이블에 있는 루카의 서류를 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밀실의 밖으로 향했다.

“뒤는 맡기겠다.”

“넵, 들어가십시오!”

가르다프 키센이 떠나고 혼자 남은 단안경의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테이블에 쌓인 서류들을 보았다.

“자~ 그럼 귀여운 학생들의 얼굴이나 좀 볼까요.”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인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 * *

‘이제야 이것저것 아귀가 맞는 느낌이네.’

빙의한 이래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던 루카였다.

루카 트래버스는 왜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것인가?

재능도 뛰어나고 잘생겼으며 집안도 대단하다.

거기에 형인 와일드 트래버스는 중요한 조연 캐릭터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원작에서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루카 트래버스가 배경 캐릭터라서 그런 것이었다.

‘와일드 트래버스가 데몬즈의 적이 되기 위한 장치, 그게 루카 트래버스였던 거야.’

송곳니의 재림이라 불리는 와일드 트래버스가 가문과 국가를 저버리고 대륙의 적이 된 주인공의 아군이 되기 위한 개연성.

그것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건이 트래버스 가문의 몰락이었다.

‘일말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하려고 루카 트래버스는 반드시 죽도록 만들었구나.’

주인공이 오기 전부터 이미 루카 트래버스의 고난이 예정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뒷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충격 받지 않았지만, 진짜 루카 트래버스는 분명…….’

가슴 속에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게 느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루카 트래버스 본인이었다면 이미 폭발해서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도련님…….”

“이봐!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다시 한 번 알아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분명히 A클래스 명단에 루카 트래버스라는 이름이…….”

“이리 내!”

“아, 안 됩니다!”

접수원에게서 클래스 명단을 뺏은 오트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피어났다.

“이, 이건…….”

“……됐어.”

“루카! 난 네가 시험 치는 것을 봤어! 그리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났지. 그런데 내가 S클래스고 넌 A클래스라고? 이건 말도 안 돼!”

흥분해서 소리치는 오트보에게 루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에르난 아카데미의 감독관들은 공명정대하기로 명성이 높아. 설령 황족이라 할지라도 역량을 보여주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낮은 클래스로 보내지. 나 또한 마찬가지일 뿐이다.”

“하,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게 아니라면 백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네가 ‘에르난 아카데미’란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대륙 제일.

에르난 아카데미의 앞에 붙은 그 수식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르난 제국의 자랑이자 미래 경쟁력의 핵심, 그리고 그곳을 졸업한 모든 귀족들의 자부심을 뭉갤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계승권도 없는 백작가의 차남 따위가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오트보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루카의 말은 냉혹하고 무례했지만 사실이었다.

오트보가 흥분해서 이 이상 어떤 행위를 한다면 아이의 철없는 행동이라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야겠군. 벨라, 준비해.”

“……네, 도련님.”

“루카…….”

애처롭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오트보, 루카는 잠시 멈칫했다가 한숨을 쉰 다음 성큼성큼 접수원에게 갔다.

접수원이 움찔했지만 루카는 개의치 않았다.

“종이와 펜.”

“네?”

“종이와 펜.”

되묻는 접수원에게 높낮이조차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다시 말하는 루카.

접수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루카는 거기에 무언가를 휘갈겨 쓴 다음 펜을 돌려주고 종이만 든 채 오트보에게 다가갔다.

“코드.”

“?”

어벙한 얼굴로 종이를 받은 오트보.

그는 잠시 종이에 적힌 것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코드?”

“통신 코드. 영지에 도착하면 연락해.”

“……아, 응!”

그제야 루카가 준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오트보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는 시큰둥한 얼굴로 시험장을 나섰고, 그의 옆을 따르던 벨라가 쿡쿡 웃었다.

“황녀님에게도 드리지 않은 통신 코드를 백작가의 차남에게 줬네요.”

“어쩔 수 없잖아.”

루카는 뒤를 흘끔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저 시끄럽고 귀찮은 녀석을 조용히 시키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이명현의 마음인지 루카 트래버스의 마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으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그를 대신해 분노해 준 것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벨라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더는 말하지 않고 바로 숙소를 정리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정말 조금 더 놀다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도련님?”

“하, A클래스에 배정된 마당에 놀게 생겼어?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훈련해야지.”

“……분명 무슨 착오가 있었을 거예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무래도 벨라는 루카가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다 생각한 모양이다.

루카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지만 구태여 해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침묵했다.

자동 마차에서 영지로 가는 내내 벨라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주님과 마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 주실 거예요!”

“만약 진짜 그러면 말려. 괜히 일 키우기 싫으니까.”

“하지만 도련님! 도련님이 정당하게 얻어야 할 자리를 부당하게 잃었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자신의 일인 것처럼 화를 내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무심하게 답했다.

“다음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면 될 뿐이야.”

“…….”

“영지로 돌아가서 다시 훈련하고 1학기 시험에서 바로 내가 최고란 걸 보여주면 돼.”

루카는 알았다.

루카 트래버스의 본래 실력이라면 분명 S클래스는 물론이거니와 학년 톱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은 ‘천익’의 힘까지 있다.

누가 와도, 설혹 원작의 주인공이 깜짝 등장한다고 해도 1년 차인 이상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전혀 기죽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며 벨라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성장은 몇 번을 봐도 놀랍네요. 벌써 그렇게 어른이 되다니. 이 벨라는 정말 기쁘답니다.”

“어차피 나이 차이 몇 개 안 나면서 무슨 소리야?”

“후후, 그렇죠. 제가 또 실언을 했네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고개를 돌려 조용한 창밖을 보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수를 생각하며 루카의 얼굴이 깊게 잠기었다.

* * *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고.

결국 그날이 왔다.

9월 1일,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 입학식.

한 학년에 딱 200명씩 6학년까지 있으니 도합 1200명이 모두 참여하는 큰 행사다.

학생 수만 해도 1200명이지만 거기에 교직원과 학부모, 거기에 축하를 위해 온 여러 귀족들과 그 식솔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몇 천 명이 참석하는 초대형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소란스럽군.”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입학식이 열리는 대강당, 강당이라고 하지만 거의 콜로세움에 버금가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루카와 벨라가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오트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루카! 여기야!”

“쯧, 벌써부터 시끄럽기는.”

“도련님도 참, 좋으면서.”

1학년이 모이는 곳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던 오트보, 루카는 미간을 찌푸렸고 벨라는 호호 웃었다.

“그럼 전 이만 자리에 가 있을게요. 오늘은 가주님과 마님도 온다고 했으니 기대하세요!”

“응.”

현 트래버스 가문의 가주 말록스 트래버스와 안주인 메리안 트래버스.

사실상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지만 루카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좀 긴장은 되네.’

아무리 얼굴 한 번 안 비추는 부모들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부모이니 자식의 변화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

그런 소설도 제법 있었고 말이다.

‘뭐,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는 일이니까.’

거기까지는 사소한 이야기다.

문제는 당면한 학교생활이니까.

‘몇 년 만에 학생들이랑 부대끼는 건지.’

아저씨 같은 생각을 한 루카는 몸을 부르르 떤 다음 아직도 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오트보에게 갔다.

“너무 오래 팔을 흔들었나? 어깨가 아파.”

“그거 하고 어깨 아플 거면 운동을 좀 해.”

“난 마법사야! 운동하면 안 돼!”

“헛소리를 하는군.”

“진짜야. 운동하면 마법 손실 나.”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며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다만 둘 사이에는 선이 하나 있었다.

오트보는 S클래스가 모이는 곳, 루카는 A클래스가 모이는 곳이었다.

“……내년에는 같은 반에서 보자.”

“난 걱정 없지만 넌 어떻게 될지 모를 텐데.”

“야!”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루카를 좋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뭐야. 트래버스 백작가면서 S클래스에 들어가지 못한 반푼이잖아?”

시끄러운 강당의 소음을 뚫고 명백하게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8화

아카데미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특히 온갖 귀족들이 오는 에르난 아카데미는 이미 작은 정치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는 것.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사춘기 남자애 특유의 강해 보이고 싶은 심리와 ‘백작가 차남이면서 S클래스에 들어가지 못한 둔재’라는 주제는 그것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게다가 계승권도 없는 백작가 차남이지. 언젠가 진짜 귀족이 될 자작가 장남인 내가 높은 게 당연하잖아?’

백작가 차남이 계승권 다툼에서 살아남으면 보통 적당한 자작령의 주인으로 빠지는데, 트래버스 백작가쯤 되는 곳의 차남이 자작이 되면 일반적인 자작들보다는 훨씬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지방의 평범한 자작령인 브리텔에서 왕처럼 지낸 장남 리덕트 브리텔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견문도 부족했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차남에 클래스도 낮으니까 그보다 낮아 보일 뿐이었다.

“어이, 너 방금 뭐라고…….”

“오트보.”

먼저 반응한 것은 오트보였다.

이 상황에 루카가 발끈해서 나서면 A클래스가 S클래스에게 자격지심을 느껴 반발한 것으로 보일 것임을 알았기에 대신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루카는 적절히 그를 제지했다.

누군가는 말리는 포지션을 취해야 하니까.

다만 차남으로 살며 대강의 처세술을 익힌 두 사람과 달리 리덕트 브리델은 적당히를 몰랐다.

그래서 이러한 처세를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넌 빠져 오트보 그레스. 같은 S클래스끼리 싸울 필요는 없잖아.”

“같은 아카데미 학생끼리 싸울 필요가 없는 거지. S클래스든 A클래스든 미래에 에르난 제국을 위해 일할 인재들이잖아.”

“하! 같은 백작가의 차남이라고 편 들어주는 거야? 백작가 차남이면서 A클래스가 된 둔재와 S클래스에 오른 천재는 급이 다르다고!”

조금 있으면 입학식이 시작될 테니 조금만 가만히 있으면 끝날 이야기였다.

어차피 반도 다르니 잘 마주치지 않을 것이고 관심은 차차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오트보의 머리는 열관리가 좀 되지 않은 모양이다.

퍽!

“?!”

“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친 오트보, 리덕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바로 오트보의 가슴팍을 밀쳤다.

“미쳤냐!”

“으악!”

쿠당탕!

얼굴을 후려쳐도 멀쩡한 리덕트와 달리 밀친 것만으로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구르는 오트보.

검술로 에르난 아카데미에 들어온 리덕트와 운동을 하면 마법 손실이 난다고 할 정도로 제대로 된 마법사인 오트보가 힘 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명확했다.

“뭐야, 싸워?”

“하하! 입학 첫날부터 대단하군! 어떤 녀석들이야?”

“젠… 젠장……!”

넘어진 오트보는 힘겹게 일어섰지만 이미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리덕트가 조롱하듯 말했다.

“뭐야, 엄청 허약하잖아? 너도 A클래스에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자식이……!”

“그만.”

그때 루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트보를 물건 들 듯 어깨에 둘러업은 루카는 잠시 동안 리덕트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호실로 향했다.

그들의 뒤에서 리덕트와 일행들의 조롱이 이어졌다.

“아~ 루카 트래버스는 네 부하였던 거야? 어쩐지 아끼더라!”

“푸하하!”

“저 자식들이!”

오트보는 분한 얼굴로 바둥거렸지만 단단한 루카의 팔을 풀 수는 없었다.

‘아, 아니 이 녀석 팔이 왜 이렇게 단단해?’

반 배정 시험 때 활약을 보았으니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닿으니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여리여리함과는 다른, 강철보다 단단한 육체.

그런 루카가 말없이 걸으니 오트보 또한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몇 분을 걸어 양호실에 도착했다.

“어머, 새 학기 첫날부터 싸운 거니?”

“상태를 봐주십시오.”

양호 선생 레이나는 신기하다는 듯 두 사람을 보다가 오트보를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은 루카에게 웃음을 지었다.

“싸운 것 치고는 사이가 좋구나?”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어머, 그러니? 어디 보자…….”

레이나는 오트보의 몸을 살피고는 바로 찬장에서 약을 꺼냈다.

“그냥 생채기뿐이네. 긴장 때문에 근육이 살짝 놀랐을 뿐이야. 쉬면 바로 나을 거야.”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안 기다려주니?”

루카는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오트보에게 약을 바르던 레이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왜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경위를 설명해야 할 테니 저는 먼저 가 있는 게 나을 겁니다.”

“어머, 조숙한 학생이구나. 그런 건 내가 전해주면 되는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없는 편이 머리를 식히는 데 좋을 테니.”

루카가 흘끔 오트보를 보았다.

오트보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그른 행동으로 인해 친구까지 입학식에 참여하지 못해 불이익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보다는 자기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지.”

루카는 피식 웃으며 양호실을 나섰다.

“도련님.”

양호실의 문 옆에는 벨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시린 분노가 깔려있었다.

“입학식은?”

“……이미 시작했어요.”

“중간에 가는 건 역시 좀 그렇지?”

“네.”

“쯧, 고생 좀 해줘야겠어. 담당 교사랑 어머님과 아버님께 변명을 해야 할 테니.”

“……가주님과 마님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런가.”

그런 소란이 있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고 대강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루카의 부모님은 오지 않았었다.

루카는 잠시 침묵했다가 초조해하는 벨라에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까 그 녀석들 누군지 알아?”

“자작가인 브리텔 가문의 장남과 모브, 에팔 가문의 방계 자식들이에요. 주제넘은 말이지만 도련님이 알 가치도 없는 자들이죠.”

“용케 S클래스에 올라갔네.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가.’

루카는 뒷말을 삼켰다.

어떤 놈들이 자격 없는 녀석들을 S클래스로 보냈다는 말이 남에게 들리면 꽤 큰 오해를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그들의 집안에 연락을 넣을까요?”

“됐어. 그런 멋없는 짓은 하지 않아. 내게 일어난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그럼…….”

루카는 입술을 비틀었다.

“입학식 끝나고 그 녀석들이 어디로 갈지만 알아봐.”

“네, 도련님.”

* * *

“이야~ 4학년이면서 학생 대표를 맡게 되다니. 검술도 검술이지만 대단한 카리스마인데!”

“…….”

“뭘 찾는 거야, 와일드?”

호수가 담긴 듯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진녹색 머리카락.

루카와 같은 눈과 머리색이지만 완전히 다른 인상의 청년이 입학식 강당의 무대 뒤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동생 올해 입학한다며. 동생 찾는 거 아니야?”

“오~ 동생이랑 사이가 좋아? 우리 형은 나 죽이려고 안달인데.”

“하하, 네 형은 와일드 트래버스가 아니잖아. 와일드 정도면 동생이 누구라도 싸울 일이 없지.”

“하긴, 영지를 물려받는 건 당연히 와일드일 테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

시시덕거리는 친구들에게 와일드 트래버스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루카의 검술은 갈수록 날카롭고 단단해지고 있다. 나라고 해도 마지막 결투에서 이길 것을 장담할 수 없어.”

“무슨 소리야? 우리야말로 네가 지는 걸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보다 루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와일드 트래버스는 강당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결국 루카를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자리에 없었으니 말이다.

“입학식 시작한다. 나갈 준비해.”

“……알겠다.”

와일드 트래버스는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루카를 찾았지만 결국 그를 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와일드, 왜 그래? 네 동생 아직도 못 찾았어?”

“아무래도 입학식에 참여하지 못한 모양이다.”

“응? 아~ 아까 좀 소란스럽던데 혹시 그게 네 동생 이야기인가?”

와일드 트래버스가 신뢰하는 친우, 미카 웰즈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탐스럽고 풍성한 금발을 지닌 미청년이었는데, 척 보기에도 기품 있어 보이는 외모였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신경 쓰여?”

“……루카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신경 쓰여도 찾아갈 수는 없다.”

“형제 사이가 뭐 그렇지. 그럼 내가 안부나 좀 알아볼까?”

미카 웰즈의 말에 와일드 트래버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지.”

루카 트래버스가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사소한 변화가 미래를 얼마나 크게 바꾸었는지 루카 본인은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 *

“하하하! 그 녀석들 얼굴 봤어?”

“백작가도 별거 없네. 차남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세대교체를 할 때가 되었지. 에르난 제국의 낡은 귀족 제도에 젊은 피를 수혈할 때가 온 거라고.”

입학식이 끝나고 기숙사로 가는 길.

리덕트와 친구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제국에서 제법 이름난 백작가의 차남을 뭉개버리는 모습을 모든 학생에게 보여준 날이었다.

입학식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데뷔였다.

무려 에르난 아카데미에 S클래스로 입학한 자신들이었기에, 이제 졸업할 때까지 이 재능만 확실히 보여준다면 앞날은 걱정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제국의 귀족 제도까지 언급하며 자신들에게 한껏 취해있던 그들의 앞에, 루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누구야. 우리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친 루카 트래버스 아니야?”

“하하! 복수라도 하러 온 거야?”

“할 테면 해봐! 결과는 정해져 있겠지만.”

루카를 보며 리덕트와 친구들은 굉장히 흥분했다.

꼬리를 말고 도망친 개가 갑자기 다시 돌아온 모습이 너무도 우스웠다.

하지만 루카는 차분하게 호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며 말했다.

“귀족에게는 품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예절, 명예, 체면. 그러한 것들을 지키는 것이 평민과 귀족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지. 너희는 과연 그것을 지켰는가.”

“뭐라는 거야?”

루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리덕트와 친구들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듯 그를 포위했다.

“말하자면 너희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에게 조롱하는 말을 한 것, 그리고 오트보 그레스에게 손을 댄 것, 모두 우리 가문에서 제대로 항의를 한다면 너희들은 배상할 책임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이를 거라고? 푸하하! 차남 따위를 위해서 그런 걸 해주겠어?”

이죽거리는 리덕트를 보며 루카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겠지. 자작가 따위가 감히 백작가의 혈육을 건드렸으니 이는 하극상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장남인지 차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트래버스 백작가의 혈육이라는 것. 그리고 그 혈육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작위가 낮은 이에게 말이야.”

“…….”

“어, 어이. 리덕트. 저 말… 진짜야……?”

리덕트의 친구들이 갑자기 불안한 듯 그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을 보며 리덕트는 주춤했다.

하지만 곧 억지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다,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그, 그런 거짓말을… 누, 누가 믿는다고 그래?”

“내 말을 무시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너희들의 부모님이 꽤 힘들어지겠지.”

건조해서 더 묘한 압박감을 주는 루카의 말투에 리덕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우리보고 사과라도 하라는 거야?”

“아니. 예로부터 검을 든 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나.”

“뭐?”

툭.

루카는 낀 장갑을 벗어 그들의 앞에 던졌다.

“루카 멜본노 트래버스의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9화

결투.

그것은 귀족들에게 있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데 가장 유효한 수단… 이었다.

기사가 가장 가치 있던 과거에는 그랬다.

하지만 마법 무기도 많이 개발되었고 검술보다는 마력의 운용을 더 높게 평가하는 현시대에는 너무 무식하다, 야만적이다 같은 말이 많아지며 크게 영향력 있는 수단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검술을 배운 사람끼리는 아직도 결투로 명예를 지키는 것이 근본이라 대우를 받는 편이며, 특히 마법의 수효를 크게 받지 못하는 지역이나 처절하게 싸우는 국경 지역 출신 사람들은 그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결투……?”

그래서 되묻는 리덕트의 얼굴에는 약간 화색이 돌았다.

결투는 리덕트의 전문 분야였기 때문이다.

동부 변방 지방의 농산물이 주력인 브리텔 자작령.

크게 가난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부유한 편도 아니다.

그래서 영지의 병사들을 마법 무기로 무장시키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맨몸을 쓰는 검술이 주력이 되었으며 리덕트 또한 자연스럽게 검술을 주력으로 배우다가 우연히 재능이 있어 에르난 아카데미까지 오게 된 것이다.

‘마력을 사용하면 안 되는 전통 결투든, 마력을 사용해도 되는 개정 결투든 A클래스에게 지진 않겠지!’

공정하기로 유명한 에르난 아카데미에서 인정한 격차 클래스 분류, 당연히 S클래스는 A클래스 학생보다 뛰어나다는 뜻이다.

아카데미 공인을 인정하지 않을 제국민은 단 한 명도 없다.

“너희가 이기면 트래버스 백작가에서 너희에게 처벌을 요구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내 이름을 걸지.”

“!”

귀족이 이름을 걸고 하는 행동에는 책임이 생긴다.

거기에 품위 운운하며 결투를 하러 온 녀석이 저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뒤통수치진 않을 것 같았다.

“마, 만약에 우리가 진다면?”

“야! 우리가 지겠어?”

“자퇴해야지.”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너무나도 가볍게 나온 자퇴라는 단어.

하지만 그 단어가 주는 무게는 말처럼 가볍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의 결투에서 지면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평탄치 않을 거다. 그렇다면 그냥 빨리 자퇴하고 다른 아카데미를 알아보는 편이 나을 테지.”

“그, 그건…….”

“그래도 자퇴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리덕트와 친구들.

아무리 그래도 대륙 제일이라는 에르난 아카데미에, 그것도 S클래스에 들어왔는데 자퇴를 하라니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왜 그러지? 쫄았나?”

“쪼… 뭐, 뭐?!”

지금까지의 진중한 태도와 다른 저렴한 도발, 하지만 효과는 강렬했다.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게 물든 리덕트를 보며 루카는 피식 웃었다.

“아니면 됐다. 대단하신 S클래스의 학생이 A클래스 학생과 결투가 두려워 장갑을 줍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기우였군.”

“……방식은?”

“입회인이 있는 정식 결투도 아니니 전통 방식이든 개정 방식이든 상관없다. 뭣하면 너희 셋이 동시에 덤벼도 된다.”

물론 루카는 정말 상관없다는 뜻이었지만 리덕트는 그것마저 도발로 느껴졌다.

“헛소리하지 마! 너 따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래? 옆에서 시시덕거리던 네 친구들은 함께 자퇴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겠군.”

“…….”

리덕트의 친구들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리덕트는 씩씩 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카에게 시비 거는 것을 주도한 것도, 실제로 오트보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도 리덕트니 그들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기면 아무 문제 없어.”

리덕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신의 앞에 떨어진 장갑을 주웠다.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루카 트래버스! 방식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너와 나의 1대1 결투다!”

“음? 괜찮겠나? 전통 방식은 네게 많이 불리할 텐데.”

“S클래스인 나와 네가 싸우는데 마력까지 사용하면 말이 안 되잖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심 두려웠다.

A클래스라고 해도 상대는 백작가의 혈육, 특별한 마력 회로를 가졌을 테니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스릉.

“그렇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

루카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기세가 달라졌다.

‘가, 갑자기 뭐지?’

솔직히 말해서 루카를 만만하게 보았다.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 A클래스, 대놓고 조롱해도 대응하지 않는 모습.

당연히 진짜 약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단단하고 예리하다.’

그 외에 다른 감상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말 그대로 잘 벼려진 명검 같았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라는 생각이 갑자기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때 루카가 검을 내밀었다.

“검을 뽑아라, 리덕트 브리텔. 결투를 시작하겠다.”

“…….”

스르릉.

루카의 재촉에 리덕트는 눈을 질끈 감고 검을 뽑았다.

‘괜찮아! 영지에 있을 때 기사들도 이겼었잖아!’

그가 결투에 자신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영지 내에서 기사들과 몇 번이나 결투를 했었고 언제나 승리했다.

그러니 여기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나머지 두 명, 너희가 입회인을 대신해서 결투의 시작을 알려라.”

“!”

리덕트의 친구들은 긴장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 그럼 리덕트 브리텔과 루카 트래버스의 1대1 결투, 방식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검의 기예만을 사용하는 전통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인사도 시켜?”

“몰라! 아무렇게나 해!”

“야, 양방! 인사!”

“…….”

아직 애들이라 뭔가 좀 어설펐지만 루카와 리덕트는 웃지 않고 검례의 자세를 취했다.

리덕트의 친구들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손을 들었다.

“셋을 세고 시작하겠습니다! 셋! 둘!”

으득.

숫자를 세는 순간 리덕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숫자를 세는 순간.

“하나!”

챙!

루카와 리덕트가 격돌했다.

그리고 1합, 단 1합에 결판이 났다.

팍!

리덕트의 칼날이 튀어나가며 그의 머리 옆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조금 잘리고 피까지 흘렀지만 거기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바, 반칙이야!”

“맞아! 마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잖아!”

“비겁해!”

그들이 반칙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리덕트의 검이 부러진 게 아니라 잘렸기 때문이다.

그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건 오히려 루카였다.

“이상하군. 이 정도 수준이면서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방식을 제시한 건가?”

“무, 무슨 소리야?”

“참철은 검사의 기본 소양이다. 그것도 못 알아보면서 왜 전통 방식을 입에 올린 거지?”

참철, 철을 베는 기술.

마력 없이도 상대의 검을 파괴하여 무력화시키는 검사의 기술이다.

“차, 참철……?”

“참철과 참철을 파훼하는 기술을 배우는 건 전장에 나서는 검사에게 기본 중에 기본, 그걸 모르면서 전통 방식의 결투를 논하는 건 우행이다. 설마 정말 몰랐던 건가?”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리덕트를 지나친 다음, 날아간 그의 칼날을 주워 허공에 던졌다.

챙!

그리고 다시 한번 펼쳐지는 참철.

칼날은 또다시 일자로 잘려 나갔고, 그 과정에서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우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기예였다.

사실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게 기본인 트래버스 백작가와 영지를 지키는 정도만 생각하는 브리텔 자작가의 기사 수준은 당연히 차이 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분수를 모른 것 또한 그의 패인이었다.

영주의 아들인 리덕트를 상대로 브리텔 자작가의 기사들이 진심을 낼 리는 당연히 없다.

그런 영지 기사들과의 결투에서 몇 번 이겼다고 오만해진 것은 우둔함을 뽐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투 방식은 네가 정한 것이니 할 말은 없을 테고. 네가 졌을 때의 대가는 알고 있겠지?”

“…….”

리덕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패배의 대가는 자명하다. 에르난 아카데미의 자퇴.

귀족의 자식이라고 다 에르난 아카데미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의 재능이 있고 또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을 지녀야 한다.

하위 귀족이 이곳에 온 것은 꽤 큰 모험이었다.

“하,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

그렇게 말한 것은 리덕트 본인이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이었다.

“마, 맞아! 너를 조롱하고 오트보 그레스에게 상처를 준 건 사과할게! 하지만 오트보 그레스를 다치게 한 건 본의가 아니었어.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었잖아!”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야. 사정을 좀 봐달라는 거야. 제발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얘들아…….”

감동의 눈물을 한 방울 흘릴 거 같은 얼굴의 리덕트, 훈훈한 분위기였지만 루카의 얼굴은 차가웠다.

“나와 이 녀석의 결투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봐달라고? 기사의 결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어차피 정식 결투도 아니었잖아!”

“…….”

순간 말문이 막힌 루카, 단순히 떼를 쓰는 거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그냥은 넘어갈 수 없다.”

“이렇게 빌게.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보상하면 안 될까?”

타협을 요구하는 그들을 보며 루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검을 거두며 제안했다.

“그렇다면 너희 셋 다 1년 휴학하도록.”

“휴, 휴학?”

자퇴까지는 아니고 휴학, 하지만 셋 모두 해야 한다는 말에 리덕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할 때 루카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난 이미 많이 양보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절할지 정하는 것뿐. 이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

“…….”

“난 가볼 테니 일주일 안에 결정해서 행동하도록.”

통보 후 뒤돌아선 루카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자, 씨앗은 뿌려뒀고.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하군.’

그저 복수를 위해 이런 거창한 행동을 한 게 아니다.

그 이후를 위한 초석 다지기였다.

* * *

“이거 참 학기 초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벌어지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마 수습 못할 정도로 일이 커지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겠군요.”

원로 교사인 학생 주임 키리우스 블라본과 교사 총괄 벤디아 모라코, 그리고 부학원장 에틸렌 바스타는 에르난 아카데미 100년 역사에 처음 생긴 사건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S클래스 학생 세 명이 동시에 휴학을 하다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일입니다.”

“대강 알아보니 학생들끼리 다툼이 있었다는데. 낮은 클래스도 아니고 S클래스씩이나 되는 학생이 그런 일을 벌이다니, 믿을 수 없군요.”

“시험관들의 안목이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인선해야겠습니다.”

불평을 하던 그들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어떡합니까? 이대로 S클래스 학생이 적은 채로 학기를 진행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뭐… A클래스 학생을 올려야겠지요.”

“누구를 올리느냐, 그게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신중해야 하는 사항이었다.

아직 중간고사도 치지 않은 시점에서, 누구를 올려야 하는가.

“다들 아시다시피 감독관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반 배정이 끝나면 모든 정보는 파쇄됩니다. 때문에 그때의 성적으로 다시 뽑을 수는 없고.”

“이례적이긴 하지만, A클래스 이하 모든 클래스에 재배치 시험을 치르는 수밖에 없겠군요.”

“괜찮겠습니까? 반발이 심할 겁니다. 학사일정도 미뤄질 것이고 어떤 행사는 취소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나 올리면 오히려 질책을 받을 겁니다.”

“추천은 어때요?”

“?!”

세 사람만 있던 테이블에 어느새 누군가가 추가되어 있었다.

원로 교사들은 그녀를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봄빛을 담은 머리카락과 에르난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증거인 자색 눈동자.

그리고 의중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

제4 황녀 브리드 에르난이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