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화

“화, 황녀님 언제부터 그곳에……?”

“처음부터요.”

가볍게 답하는 그녀의 뒤로 이셀라, 본명 라이셀 판드리가도 모습을 드러냈다.

왕실의 비밀병기 ‘밤’에서 ‘달빛’을 담당하는 그녀의 등장에 원로 교사들은 더욱 긴장했다.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늙은이들은 그렇게 놀래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색하게 반응하는 그들 사이에서, 제일 판단력이 빠른 부학원장 에틸렌이 먼저 브리드의 말에 반응했다.

“그나저나 황녀님. 추천이라 함은……?”

“갑자기 S클래스 세 명이 휴학해서 곤란한 상태잖아요? 한두 명 정도 A클래스에서 S클래스로 올려야 할 텐데, 그렇다고 아무나 올리면 다른 진영에서 항의를 할 테고요.”

현 에르난 제국에는 세 개의 파벌이 있다.

하나는 에르난의 고고한 혈통인 황실.

다른 하나는 가장 존경받는 마법사 마피고르 킴벌리를 중심으로 한 킴벌리 공작파.

나머지 하나는 에르난 제국의 경제를 책임지는 파티겔 공작파다.

세 파벌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돕는, 라이벌이자 협력자인 상태를 고수하고 있지만 이런 실질적인 손해를 보지는 않는 자존심 싸움에서 굽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많이 고민하고 있죠.”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후우… 황녀님.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이곳에 오게 해드린 것만 해도 힘든 일이었는데 또 뭘 부탁하시려는 겁니까?”

“어머,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서운한 말인가요? 제 덕에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화, 황녀님!”

당황하는 부학원장 에틸렌을 보며 쿡쿡 웃은 브리드 에르난은 사진 한 장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세 원로 교사들은 그 사진을 보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 사람이면 괜찮을 거예요.”

“확실히 괜찮은 인물이긴 합니다만…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기도 하고, 킴벌리 공작가 쪽에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킴벌리 공작가의 자식은 이미 고학년이지만 그의 밑에 있는 귀족가 중에서 올해 입학하는 자식을 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을 내버려두고 루카를 S클래스로 올려 보내면 잡음이 생길 것은 분명했다.

신중한 태도로 말하는 에틸렌에게 브리드 에르난은 눈웃음을 지었다.

“아뇨. 제 말은 그 사람을 뽑으면 아무 잡음이 없을 거라는 뜻이에요.”

“……아.”

잡음이 나오는 걸 막아주겠다는 말이다.

고작 아카데미 1학년인 그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는 에틸렌은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하지만 곧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인 듯 반문했다.

“황녀님, 외람된 말이지만 왜 굳이 그런 리스크를 져가면서까지 트래버스 가문의 차남을 S클래스에 올리시려는 겁니까? 그와 친분을 쌓아봤자 트래버스 가문은 2황자님을 지지할 텐데요.”

“외람된 말이면 안 하면 안 되나요?”

“…….”

에틸렌은 침묵했고 브리드 에르난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에 올려둔 사진을 회수에 품 안에 넣고 뒤돌아섰다.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요.”

“……예?”

“그럼 잘 부탁할게요~.”

그렇게 가벼이 대답한 브리드 에르난은 뒤에 시립해 있던 라이셀 판드리가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남은 원로 교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원로 교사들에게서 멀어지자, 라이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녀님. 로벤…….”

“라이셀.”

“……죄송합니다. 그분께 이러한 일로 도움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려던 그녀를 제지하는 브리드, 라이셀은 사과를 한 뒤 주변을 훑어보고 대상을 에둘러 표현했다.

브리드는 쿡쿡 웃었다.

“당연하지. 애초에 킴벌리 공작도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진 않을 거야. 그 밑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는 사람들이 시끄러울 뿐.”

자기 자식도 아니고 파벌의 얼굴도 모르는 아무개를 위해 킴벌리 공작이 앞에 나설 리는 없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기껏해야 백작에서 자작 정도. 그 정도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자력으로 S클래스에도 못 들어가는 머저리들이잖아. 킴벌리 공작파에서도 그냥 적당히 넘어가자고 할 거야.”

“하지만 그건 그 자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라이셀, 넌 그와 검을 맞댔으면서도 모르겠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S클래스에 들어가지 못한 건 에르난 아카데미의 실수야.”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듯 라이셀은 침묵했다.

하지만 곧 다시 불평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황녀님, 어째서 그 망나니 같은 자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말했잖아.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어, 얼굴 말입니까?”

당황하는 라이셀을 보며 브리드는 쿡쿡 웃었다.

“농담이야. 물론 얼굴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지만 그 녀석은 쓸모가 많아. 정치적으로든 이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는 용도로든.”

“그렇… 습니까…….”

라이셀은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받아들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해줬으니.”

브리드는 생긋 웃었다.

“날 재밌게 해줘야 할 거야.”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 * *

“어? 너, 너 어떻게…….”

입학식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끝나고 기숙사 배정도 끝나고 수강 신청도 끝났을 무렵, 갑자기 S클래스에 루카가 나타났다.

그런 그를 보며 오트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래저래 설명하기 귀찮아진 루카가 아주 빠르게 말했다.

“S클래스 학생이 갑자기 세 명이나 휴학해서 어쩔 수 없이 A클래스 학생을 올리게 됐는데, 내가 뽑혔어.”

“지, 진짜? 아니지 참. 당연한 거지! 네가 S클래스가 아닌 게 이상했어!”

당황하다가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까지 지르는 그를 보며 루카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넌 마법 난 검술이라 같이 수업 듣는 일은 적겠지만 말이야.”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공통 과목은 같이 들을 텐데.”

아무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오트보였다.

루카는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일행은 없어?”

“어? 어… 응.”

“?”

떨떠름하게 말하는 오트보.

루카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혹시 왕따당하는 건가?”

“와, 왕따라니. 그냥 친한 사람이 없는 거야.”

“어째서?”

묻는 루카를 보며 오트보는 시선을 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입학식 때 일 때문이군.”

“…….”

꼴사납게 한 대 맞고 날아가는 그를 보며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 녀석이 나서지 않아도 그 머저리 3인방은 잘 처리했겠지만… 나를 위해 나서준 녀석이 괜히 피해를 보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오트보가 나서지 않아도 그 상황은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가여운 소년의 궁상맞은 꼴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

분명 원작에선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정이 가는 녀석이다.

‘……게다가 남 같지도 않은 모습이니.’

어째선지 그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게다가 반을 바꾸는 소란 때문에 그도 혼자인 상태.

함께 할 사람이 늘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리고 그녀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루카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리며 툭 내뱉듯 말했다.

“뭐, 남 말할 처지는 아닌가.”

그의 말에 오트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너도 혼자야?”

“클래스 교체 때문에 이것저것 바빴어. A클래스 학생들과도 친해질 겨를이 없었지. 딱히 친해질 생각도 없었지만.”

시큰둥한 그를 보며 오트보는 조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기숙사는?”

“그 녀석들이 쓰던 곳 그대로 받기로 했어.”

“와! 놀러 갈게!”

“쯧, 괜히 말해줬군.”

“하하!”

상당히 기뻐 보이는 오트보, 그를 보는 루카의 입가도 꽤 둥글었다.

“수업은 어떻게 했어?”

“평범해. 공통 과목은 거의 다 들었고 전공도 필수만 골랐어.”

아카데미의 수업은 대학교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1학년은 일단 기본 공통 과목을 들어야 하고, 전공도 필수 전공을 선택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시간표 있어?”

“쯧.”

“어… 와! 공통 과목 전부 다 같은 거네?”

잘 됐다며 웃는 오트보는 모를 것이다.

루카가 벨라를 통해서 그의 시간표를 보고 맞춰줬다는 것을.

애초에 루카는 그와 같이 다닐 생각이었다.

“지겨운 인연이군.”

“잘 됐잖아! 이제 좀 아카데미 생활이 재밌어지겠어!”

기뻐하는 그를 보며 루카는 입술을 삐죽일 뿐이었다.

잠시 행복한 얼굴을 하던 오트보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루카, 인연이란 게 정말 있나봐!”

“또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하려고.”

“아니, 화… 크흠! 아, 아니지. 미리아 있잖아!”

미리아라는 말에 루카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그녀들도 공통 과목이 전부 같은 거야?”

“응! 이거 참 운명 아니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역시나군.’

당연히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분명 루카가 오트보와 수업을 맞출 거라 예상하고 시간표를 짰을 것이다.

이미 원작에서 주인공에게 했던 일이니까 말이다.

‘어그로가 많이 끌린 모양인데. 뭐 좋아. 나도 그쪽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이미 이렇게까지 엮였으니 도망갈 생각은 없다.

“좀 있으면 수업 시작하겠네. 넌 이번에 무슨 수업이야?”

“검술 전공 수업.”

“아, 그렇겠네. 나도 마법 전공 수업이니까.”

아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루카는 피식 웃은 뒤 돌아서며 말했다.

“점심시간에 제2학생식당으로 오도록.”

“아, 응!”

함께 점심을 먹을 상대가 생겼다는 것에 오트보는 기뻐 보였다.

* * *

SA클래스 1학년 검술 전공 수업은 검술학부 제3 기초 검술 훈련장에서 진행됐다.

수업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루카는 마침 교단에 들어서는 남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륙에서는 드문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

-지구로 따지자면 ‘동양인’처럼 생겼지만 이곳에서는 소수 민족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얍삽한 느낌과는 별개로 큰 키와 단련된 두꺼운 체형이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저 자가 크리피 모스토군.’

전장의 악몽이라 불리는 검사 크리피 모스토.

에르난 제국배 검술 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을 한 실력자 중에 실력자다.

다만 원작에서는 주인공을 집요하게 괴롭히다가 2학년쯤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주인공과의 결투에서 패배하고 아카데미를 나간 후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1학년이었을 때 크리피 모스토는 이미 E클래스의 검술 전공 교사였어. 원래 SA클래스 검술 전공 교사였던 사람이 왜 그렇게 갑자기 강등되었을까?’

여기에도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스승도 실력만큼은 인정한 사람이었지. 와일드 트래버스를 뛰어넘는다는 루카 트래버스의 꿈을 이루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거야.’

덤으로 친분을 만들어두면 힌트를 얻을 가능성도 있으니 1학기 수업 정도는 투자할 만했다.

루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단 위에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첫 수업이군요. 사람이 몇 명 줄었지만 그래도 짝수가 맞춰져서 다행입니다.”

교단에 선 크리피 모스토는 온화한 분위기에 약간 날렵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성격은 그렇다 쳐도 실력은 제대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상당히 단련된 몸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때도 말했듯 제 수업은 기본적으로 2인 1조입니다. 저는 합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수행평가부터 시험까지 모두 2인 1조로 진행합니다.”

“흠.”

이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 원작에서 읽은 이야기니까.

주인공도 이 수업 덕분에 ‘그녀’와 친해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의 짝이 될 사람이 누구냐는 것.

그때 크리피가 루카에게 다가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트래버스군. 당신의 짝이 될 만한 사람이 딱 한 명뿐입니다.”

“예. 상관없습니다.”

“하아… 당신 같은 분을 이런 천한 신분의 사람과 한 조로 만들고 싶지 않지만, 제 수업의 규칙을 깰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말하며 불결하다는 눈빛으로 뒤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뒤에 있는 사람을 본 순간, 루카는 왜 그가 E클래스로 강등되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쯧.”

달빛을 머금은 듯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여인이라기보다는 무인에 가깝지만 마치 명장이 연마한 듯 강인하고 날카로우며… 아름다운 형상.

그녀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태도에 크리피가 더욱 발광했다.

“어허! 감히 에르난 제국의 국방을 책임지는 트래버스 가문의 귀한 도련님께 혀를 차다니!”

“괜찮습니다, 모스토경.”

“하지만…….”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크리피의 얍삽하고 비열한 모습은 원작의 묘사 그대로였다.

‘역시 주인공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머리를 깬 인물. 보통이 아니군.’

루카도 평민 출신이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크리피가 아니었다.

“아는 사이입니다.”

“예?”

아는 사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크리피, 그리고 그런 그를 무시하며 루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꽤 질긴 인연이군, 이셀라.”

“……친근하게 말 걸지 마라, 망나니.”

“이익! 평민 녀석이 감히 백작가의 자제분에게!”

거기에 있는 것은 이셀라, 본명 라이셀 판드리가로 황녀를 지키는 검이었다.

11화

-황… 아, 미리아 아가씨 교실로 모시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셀라. 넌 검술 수업이고 난 마법 수업이잖아.

-하지만 아가씨를 지키는 게 제 의무입니다!

-여긴 제국의 자랑이자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인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야. 이 안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게다가 네가 수업을 안 들어서 A클래스로 떨어진다면 우린 더욱 더 같이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될 텐데, 괜찮겠어?

-아카데미 수준의 검술 수업은 듣지 않아도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석 점수는? 출석 점수가 부족하면 해당 과목은 무조건 불합 판정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

-이셀라. 항상 말하지만 바로 앞이 아닌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수까지는 생각하고 행동해.

모시는 주인에게 한 소리 듣고 침울해진 이셀라의 앞에 나타난 것은 ‘망나니’ 루카 트래버스였다.

“후… 하필 이런 문제아와 한 학년을 한 조로 행동해야 하다니.”

“너무 열 내지 마라. 어차피 다 그녀의 안배 아닌가.”

“……?”

그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이셀라.

그녀의 반응에 루카는 피식 웃었다.

“A클래스와 S클래스 둘 다 들을 수 있는 SA클래스 수업을 네 스스로 신청하지는 않았을 텐데.”

“……!”

에르난 아카데미는 클래스에 따라 신청할 수 있는 수업이 정해져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높은 클래스가 신청할 수 있는 수업은 수준과 난이도가 높다.

그리고 또 당연한 말이지만 보통 S클래스 학생들은 S클래스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을 신청하려 한다.

낮은 클래스 학생과 같이 들을 수 있는 수업은 자존심 상하니까.

물론 이셀라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지만, 수업 신청을 그녀가 하지 않은 것 또한 맞다.

“몰랐나? 아무래도 좋지만 방해는 하지 마라. 나는 증명해야 하고, 그녀도 그걸 원할 테니.”

“……흥, 너나 내 발목 잡지 마.”

머리가 둔한 이셀라지만 대충 이 모든 게 황녀, 아니 미리아의 안배라는 것을 눈치챘다.

어쩐지 수업에 가라고 그렇게 닦달을 하더라니.

‘이것이 황녀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다짐하는 이셀라의 눈이 흘끗 루카를 향했다.

‘그런데… 이 망나니는 어떻게 안 거지?’

광장에서의 검술 실력도 그렇고, 정말로 미리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남자에게 뭔가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잠깐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미리아님의 검, 오직 그 뿐.

다른 이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는 이셀라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는 루카, 그런 그들에게 크리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조가 만들어졌으니 다시 한 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크리피 모스토. 부끄럽게도 전장의 악몽이라 불리며 에르난 제국배 검술 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을 한 명예로운 기사이자 여러분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데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꾸는 들리지 않았다.

루카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니 모두들 그렇게 달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SA클래스란 S클래스에 있기엔 조금 모자란 이들과 A클래스에 있기엔 조금 뛰어난 이들이 선택하는 수업이다.

S클래스에 들어갈 실력은 있지만 완전한 S클래스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신분이 낮은 자들, 그리고 A클래스에 있지만 S클래스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이 SA클래스를 신청한다고 보면 된다.

S클래스 강의는 고위 귀족의 자제나 왕족, 심지어 황족에게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몇몇 사람만이 개설할 수 있고, 그런 강의의 수는 적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S클래스 안에서도 급차이가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S클래스에서 밀려난 이들과 그런 S클래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 A클래스 학생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수업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을 어필하는 듯 별명과 경력을 자랑하는 크리피의 모습 또한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우선 오리엔테이션 때에도 말했듯이 제 수업에서는 최대한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와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 왜요?”

그러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는 듯 몇몇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태도에 화가 날 만도 하지만 크리피는 표정 변화 없이 차근차근 말했다.

“이곳에서 수업을 듣는 이들 대부분이 전장에서는 지휘관, 영지에서는 영주, 황성에서는 근위기사 등에 배정될 것입니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높죠. 그리고 인간과 싸운다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싸울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결투든 전쟁이든 마력을 사용할 텐데 왜 마력을 안 쓴다는 거죠?”

“인간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마력 차가 큰 상대라면 일기토가 금방 끝나겠지만, 비슷한 상대라면 마력을 전부 소모할 때까지 전투가 일어나겠죠. 마력을 전부 소모한 상태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순수한 검술 실력입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저는 그 순수 검술 실력을 실전을 통해 단련시켜 줄 계획입니다. 그러기 위해 2인 1조를 만들었으며 3단계로 수업을 계획했습니다. 1단계는 기본적인 전투 기술 훈련, 2단계는 무작위 상대를 상대하는 훈련, 3단계는 다대다 전투 훈련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크리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학생들의 집중력은 떨어졌다.

대부분 그의 말에는 관심이 없고 서로 작게 잡담하고 있었다.

‘수업 방식은 그대로군.’

루카는 이미 크리피의 수업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수업을 들은 것도 있다.

주인공에게 패배한 이후 크리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니까.

‘그런데 왜 힌트가 생성되지 않는 거지? 이렇게 만났잖아.’

올리버 때는 그냥 대충 인사만 한 거였는데도 힌트 모음이 갱신되었다.

하지만 미리아나 지금 크리피의 경우에는 힌트가 생성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트보에 대한 힌트도 생성되지 않았어. 조건이 뭐지?’

중간에 하차하고 소식이 없던 이들과 접점이 생겼는데 힌트가 생기지 않은 이유.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크리피가 검을 휘둘렀다.

휭! 휭휭!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으나 칼날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공기를 베는 소리는 무거웠으며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다시 검이 칼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방금 보여드린 것이 현대 검술의 기본기 중 하나, 기만 베기입니다. 검을 빠르게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빛과 시선의 빈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당하면 대응하기 힘든 기술이죠.”

“하, 검술 대회 2회 우승이 요행은 아니었나 보군.”

루카의 옆에 있던 이셀라가 감탄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황녀를 지키는 검이자 에르난 황실의 검은 비밀 중 하나인 그녀가 저렇게 말할 정도니, 크리피의 검술이 뛰어난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자, 그럼 이 기술의 요령과 파훼법을 알려드릴 테니 자신의 파트너와 연습해 보시길 바랍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검을 뽑아 차근차근 기만 베기에 대해 설명하고 연습을 하는 시간을 주었다.

루카와 이셀라도 서로 마주 보고 연습하게 되었다.

“흥, 이런 기본기 정도는 예전에 마스터했는데.”

“그거 다행이군. 널 어떻게 가르쳐야 덜 불쾌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

이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루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둘 다 기만 베기를 마스터했다고 해도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지.”

“그러면?”

“그때 방해받았던 것을 이어서 해볼까.”

그의 말에 이셀라도 검을 뽑으며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한 말 중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이었어.”

“단,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싸우도록 하지. 일단은 수업 중이니까.”

“좋아. 마력을 쓰지 않고 기본기만으로 싸우겠어.”

이셀라는 칼자루를 꽉 잡으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이런 망나니 따위 마력을 안 쓰면 별 것도 아니지!’

‘밤’의 일원인 이셀라에게는 그럴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시작하지.”

“선공은 양보해주겠어.”

“레이디에게 처음을 양보하는 건 기사의 기본예절인데.”

“…….”

“뭐,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레이디라는 말에 갑자기 살기를 띄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피식 웃었다.

순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흥! 뻔한 수를!’

이셀라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의 검에 응수하려다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검을 쳐냈다.

키이이이잉!

“…….”

“호, 그걸 받아 내다니.”

루카의 검을 쳐낸 이셀라의 칼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셀라는 자신의 칼날을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얼굴로 루카를 보았다.

“오~ 참철입니까? 역시 트래버스 가문의 자제분께서는 기본기를 모두 숙지한 모양이군요.”

그리고 그들의 겨루기를 멀리서 지켜보던 크리피가 감탄하며 다가왔다.

현대 검술의 기본기 중 하나인 참철, 그것으로 루카는 첫 한 합에 이셀라의 검을 베려했다.

‘망나니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건실하게 연습했나.’

루카는 그냥 참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가벼운 선제공격을 위시한 참철을 펼쳤다.

기본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공격이었다.

아마 조금만 더 방심했었다면 그녀의 검이 반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검사에게 있어 검을 잃었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하는 법.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패배할 뻔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트래버스 가문의 도련님이십니다.”

“모스토경, 아직 대련 중입니다.”

“아, 실례. 제가 너무 무례했군요.”

크리피가 뒤로 물러나자 루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셀라를 보았다.

“왜 그러지? 눈빛이 달라졌군. 허를 찔린 게 분한가?”

“……딱 하나 사과하겠어. 네게 선공을 양보한 거. 그건 내가 널 너무 무시했다고 생각해.”

“알아주니 고맙군. 그럼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가겠다는 건가?”

그의 말에 이셀라는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래. 지금부터 널 진심으로 박살내 주겠어.”

에르난 황실의 비밀 병기 ‘밤’에서 ‘달빛’을 담당하는 기사, 이셀라가 진심을 보이기로 했다.

* * *

‘쯧, 다들 죽은 눈을 하고서는. 이래서야 내 연줄이 되어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크리피는 학생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에르난 아카데미에 부임하고 몇 년이나 수업을 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다들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귀족들과 친분을 쌓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크리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에르난 아카데미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신분 상승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귀족의 자제를 제자로 삼아 대성하면 날 더 높은 곳까지 데려다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검술에 관심이 없구나.’

평민 출신인 크리피.

그는 검에 재능이 있었다.

우연히 검에 대한 재능을 발견 이후, 그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 공훈을 쌓고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모스토’라는 성을 받게 되었지만, 곧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공훈을 세우긴 했지만 결국 평민 출신이잖아.

-뛰어난 검사이긴 하지만, 그게 뭐? 그보다 더 뛰어난 검사가 이미 많은데?

-흠… 어차피 평민 따위 쓰다 버리는 장기말이잖아.

그는 결국 평민보다는 높지만 귀족 태생보다는 낮은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이곳 에르난 아카데미에 왔다.

‘귀족 태생의 제자를 만든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자신의 검술로 대성한 귀족 태생의 제자가 나중에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 자신을 끌어올려주는 것을 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온 첫날부터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된 고위 귀족의 자제들은 다 S클래스 전용 수업만 듣고, 하위 귀족이나 버러지 같은 평민들만 내 수업을 들으니.’

수업에 관심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그를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으로 만들어줄 학생은 아예 그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지쳐갔고 평민에 대한 혐오감만 늘었다.

챙! 챙! 챙!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음에 안 드는 놈들만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필 눈에 띄는 것이.’

크리피는 검과 검이 부딪치며 생기는 불똥 하나마저 놓치지 않고 그들의 대련을 보고 있었다.

‘형의 그늘에 가려진 계승 가능성 0퍼센트의 백작가 차남과 평민이라니.’

루카와 이셀라, 두 사람의 대련은 점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려한 기술이 없는 담백한 기본기의 격돌, 하지만 기본기가 왜 기본기인지 알려주듯 두 사람의 검무는 묵직하고 깔끔했다.

그런 두 사람의 대련을 보며 크리피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

그것은 호승심.

누군가와 겨루어서 이기고 싶다는 마음.

무인의 기본이 되는 그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저 두 사람이 성장하는 건 보고 싶은데.’

크리피의 미래가 바뀔 어떠한 ‘결심’이 생겨나고 있을 때, 대련의 결말이 나왔다.

챙!

휘잉휘잉휘잉! 푹!

누군가의 검이 날아가 바닥에 꽂혔다.

“내가 졌군.”

“……쯧.”

승자는 이셀라였다.

12화

‘절대 이길 수 없다.’

본격적으로 검을 몇 번 부딪쳤을 때 루카가 느낀 감상이었다.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

그의 비장의 수를 써도 이길 가능성을 점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벽이었다.

‘이게 황실의 비밀 병기인가. 확실히 다르군.’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도 이 정도의 격차라면 ‘밤의 힘’을 사용할 때 그녀가 얼마나 강할지는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설정상 두 사람의 나이는 동일한데 이 정도의 격차가 나온다는 것에 감탄이 나올 뿐이다.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목을 끌고 있군.’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그는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뭘까. 이 묘하게 아쉬운 느낌은.’

속에서 뭐라고 해야 하나, 애달픈 느낌이 들었다.

루카 본인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것을 무시하며 슬쩍 손에 힘을 풀었다.

챙!

루카의 검이 날아가 바닥에 박혔다.

“내가 졌군.”

“…….”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는 루카를 보며 이셀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지우고 검을 회수했다.

“쯧.”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혀를 차긴 했지만 말이다.

“두 사람 모두 훌륭했습니다. 착실하게 쌓은 기본기가 얼마나 깔끔하면서도 무거운지 잘 보여주는 대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학생들도 이 두 사람처럼 열심히 기본기를 단련할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라겠습니다.”

크리피는 몰려든 학생들을 돌려보내 연습을 시키고 아직 미묘하게 달아있는 루카와 이셀라에게 다가왔다.

“다시 한번 훌륭하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특히나 이셀라 학생, 평민이라고 무시했던 점 사과 드립니다.”

처음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그를 보며 이셀라는 입술을 살짝 떨다가 시선을 돌리며 짧게 답했다.

“……예.”

“두 학생 모두 대련으로 인해 지쳤을 텐데, 오늘 수업은 더 듣지 않고 나가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루카 학생은 오후 수업이 마치고 제 사무실에 와주면 좋겠군요.”

그에 두 사람은 흘끔 서로를 보았다.

하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옮긴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수업 때 뵙겠습니다. 잘 쉬십시오.”

* * *

“어머?”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선 미리아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셀라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명령을 무시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지? 이게 밤의 일원인가?’

미리아는 속으로 감탄하며 이셀라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셀라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심각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 그녀가 다가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

“이셀라?”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미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눈이 마주친 후에야 겨우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린 이셀라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 쳤다.

“화, 황ㄴ…….”

“이셀라!”

“아,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말실수를 할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셀라를 보며 미리아는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불러도 대답 안 하고.”

“아, 그, 그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미리아는 조금 놀랐다.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없는 이셀라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굉장한 흥미로움이 찾아왔다.

“왜? 수업 때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닙니다.”

“설마 루카 트래버스와 관련된 거야?”

“!”

“어머?”

이셀라가 정곡을 찔린 반응을 하자 미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루카 트래버스에게는 뭔가가 있어. 나 이외에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던 이셀라가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재미있게 해줄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에 잔뜩 흥미가 일었다.

그때,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어라? 미리아 양이랑 이셀라 양?”

“?”

미리아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레스 가문의 차남이시군요.”

“하하, 편하게 오트보라고 불러주세요. 그나저나 같은 수업이었네요!”

“오호호.”

멋쩍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미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실수했네. 공통 수업은 어쩔 수 없어도 마법 수업까지 같이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 남자는 재미도 없고 능력도 없어 보인단 말이야.’

이 수업을 신청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이 수업을 듣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오트보 그레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정말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방금 루카 이야기했어요? 점심에 걔랑 식사하기로 했는데.”

“어머.”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미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 세상에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없구나.’

오트보가 들었다면 눈물을 한 방울 흘렸을 생각을 하며 미리아는 그에게 살짝 다가갔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저희 같이 식사 할까요?”

“예? 저, 저야 좋죠!”

“아, 아가씨?”

상반되는 반응을 보이는 오트보와 이셀라.

하지만 미리아는 신경 쓰지 않고 생긋 웃었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나요?”

“아, 제2학생식당에서 먹기로 했어요!”

“가깝네요. 그럼 바로 갈까요?”

“그렇게 하시죠!”

“아가씨…….”

이셀라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미리아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은 같이 제2학생식당에 갔고 거기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루카와 만났다.

“루카! 우리 왔어.”

“…….”

“아! 공교롭게도 미리아 양과 같은 수업을 신청했더라고!”

신나서 떠드는 오트보를 보며 루카는 광대를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쉬며 냉정을 되찾고 미리아를 보았다.

“다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머, 같은 학생끼리 무슨 말씀이세요. 말 편하게 해도 돼요.”

“……그러도록 하지, 미리아.”

이셀라가 발끈하여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지팡이를 꺼낸 미리아가 그녀의 입을 막으며 생긋 웃었다.

“나도 말 편하게 할게, 루카 군.”

“나, 나도 괜찮아… 요?”

“물론이지, 오트보 군.”

“아자!”

“아가씨…….”

뛸 듯이 기뻐하는 오트보를 보며 루카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미리아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어머, 볼일이라니? 같이 식사하는 거 아니야?”

“……그게 다인가?”

눈썹을 꿈틀거리는 루카, 그에 당황할 만도 하지만 미리아는 태평하게 답했다.

“친구끼리 식사를 같이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그래! 친구끼리 같이 식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지금까지 계속 혼자 식사를 하던 오트보가 격하게 동조했다.

혼자만 먹다가 둘도 아니고 넷이 되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는가.

루카는 혀를 차고는 뒤돌아섰다.

“그러면 빨리 가자. 자리를 잡아야 하니.”

“오케이!”

흥분해서 뛰던 하체부실 오트보가 음식을 가지고 가다가 넘어질 뻔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대충 잘 넘어가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우… 바닥이 미끄럽네…….”

“운동을 좀 하라니까.”

“마, 마법 손실이 나서 어쩔 수 없어.”

여전히 헛소리하는 그를 보며 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앉은 미리아를 보았다.

“역시 남자들은 많이 먹네.”

“저, 저도 많이 먹습니다, 아가씨!”

“음… 이런 건 굳이 경쟁할 필요 없지 않아?”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루카는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무슨 꿍꿍이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식사하자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텍스트로 본 그녀는 차갑고 냉철하며 잔인한 사람이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 계산된 것이었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계획을 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와는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힌트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만 친분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급속도로 가까워져 버렸다.

이제 와서는 거리를 두기도 애매하고, 쉽게 거리를 둘 만큼 틈을 주지도 않겠지.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루카는 빵을 먹으며 헤실헤실 웃는 오트보를 흘끔 보았다.

“헤헤, 역시 같이 먹으니까 더 맛있는 거 같아.”

“……쯧.”

원작에서 오트보는 아마 주인공과 만나는 시점인 내년까지 계속 혼자였을 확률이 높다.

필연적으로 주인공에게 시비를 거는 초반 빌런이 될 인물이었으니 루카와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성격이 나빴던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안쓰러워진다.

13살이란 어린 나이에 집안에서 눈치를 보다가 겨우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 그것도 최고의 반에 들었다고 겨우 숨통이 트였을 텐데.

거기서조차 고독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주인공과 만나서 불구가 되고 다시 집안의 애물단지가 된다면….

굳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아도 오트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예상되었다.

“천천히 먹어.”

“응!”

뭔가 손이 가는 동생이 생긴 느낌이다.

루카는 알게 모르게 피식 웃으며 앞을 보았다. 그리고 경직했다.

“…….”

미리아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루카는 잠시 침묵하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니,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 루카 군이랑 오트보 군.”

“맞아! 우리 진짜 친한 친구야!”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오트보가 해맑게 말했지만 미리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루카는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문제라도 있나?”

“왜 그렇게 까칠해? 그냥 순수하게 사이가 좋아 보여서 말한 거야.”

“헤헤, 우리가 그렇게 친해 보이…….”

“오트보, 닥쳐.”

“……응.”

자꾸 끼어드는 오트보를 조용히 시킨 루카는 미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이 바보가 있는 이상 이 여자와 거리를 두는 건 어려울 테고. …그렇다면 미리 기싸움을 해둘 필요가 있겠군.’

너무 척질 필요도, 너무 가까워질 필요도 없다.

다만 쉽게 이용할 수 없을 거라는 인식은 줘야 했다.

“난 하고 싶은 말을 빙 돌려서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니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하도록.”

“그래? 그럼 혹시 검술 수업에서 이셀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 아가씨?!”

그 말에 당황한 것은 옆에 있던 이셀라였다.

스프에 빵을 찍던 그녀가 당황해서 빵을 떨어뜨렸고 수프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에 맞은 오트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루카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았다.

“……뭐?”

미리아의 물음이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였기 때문이다.

“아니 수업 마치고 교실에서 나오는데 이셀라가 이상했단 말이야.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해야 하나? 이셀라가 이런 적은 처음이거든!”

“아, 아가씨 그건…….”

“그래서 혹시나 해서 네 이름을 말했더니 엄청 신선한 반응을 하는 거야! 그러니 안 궁금하고 배기겠어?”

그렇게 말하는 미리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녀와 같았다.

‘뭐, 뭐지? 이건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거지?’

루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까지 긴장하고 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질문은 순수했다.

“역시 르베르타가 반한 기사님은 달라. 이셀라는 그런 거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오늘 이상해진 거야!”

“아가씨! 그게… 그게 아니라!”

“아~ 빨리 말해줘~ 나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겨우 깨달았다.

‘……이 녀석도 피해자였던 건가.’

오트보와 마찬가지일 듯하다.

소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흥분하는 이 소녀는, 모종의 사건으로 최악의 황녀가 되고 만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웅웅-

“!”

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13화

[조건을 충족하여 힌트가 추가되었습니다.]

[아카데미에 드리운 어둠]

-아카데미의 어둠과 연관된 사람을 찾으세요.(○)

-아카데미의 어둠과 실제로 조우하세요.

-???

-???

-???

-???

[불사의 황녀]

-브리드 세테그 에르난의 가짜 신분, 미리아 필레와 친해지세요.(○)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를 위험에서 구해주세요.

-???

-???

-???

-???

*기본 힌트 조건 2개를 더 충족하면 추가 힌트가 제공됩니다.

이번에도 갱신된 힌트 모음.

다만 알고 있는 정보가 적어서 그런지 개방된 항목이 적었다.

하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도 좀 신경이 쓰이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추가 힌트인가.’

웹소설을 많이 읽어본 애독자의 감으로 보건데 저기서 충족해야 하는 기본 힌트라는 건 아마 신이라는 자가 얘기했던 그가 해야만 하는 것들, 그러니까 회수해야 하는 맥거핀들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판디아 세계의 신이라고 해요!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저희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부디 우리 세계의 이야기를 완성시켜주길 바랄게요, 애독자님.

루카의 전생, 그러니까 이명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곳 판디아 세계의 신과 무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힌트가 이 힌트 모음일 것이다.

거기에 여기서 말하는 추가 힌트는 그것을 더욱 쉽게 해줄 단서, 그러니까 원작에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은 기연 같은 것들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어쩌면 주인공도 못 얻어 본 다섯 번째 위대한 영혼의 위치 같은 것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흥분되었다.

‘그나저나 지금이 원작 시작 시점에서 1년 전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됐었는데, 실수했어.’

흔한 전개고 많이 봤던 상황이다.

중후반부에 만나는 인물을 초반부에 봤을 때 성격이 달라서 당황하는 것.

그러나 새로운 삶을 살면서 이성적으로만 판단한다는 게 실제로 경험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너무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면 안 되겠군.’

루카는 그렇게 다짐하며 눈앞에 있는 명패를 보았다.

‘크리피 모스토.’

식사와 오후 수업을 마치고 그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과연 E클래스 교사로 격하되지 않았을 때의 그는 어떨까.’

검술 수업에서 이셀라를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크리피 모스토가 E클래스 담당으로 떨어진 이유.

이셀라를 차별한 것에 분노한 미리아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작에서 묘사되던 크리피는 그야말로 치졸하고 역겨운 인물이었다.

다만 지금은 원작보다 앞선 시간대, 그때만큼 최악은 아닐 거라고 생각되었다.

‘제법 강하다고 묘사되는 인물인데도 주인공한테 패배한 이후 행적이 묘연한 게 신경 쓰이긴 했어.’

제국배 검술 대회에서 2회 우승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인물임엔 틀림없다.

그런데 루카가 더 신경 쓰고 있는 건, 원작 주인공의 스승 격 인물인 ‘과거 제국 최강의 검사’가 1회차 중반부 전쟁 파트에서 ‘그 녀석이 있었다면 이 전쟁이 훨씬 쉽게 끝났을 텐데’라고 언급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주인공도 한 번은 살릴까 고민하기도 했었지.’

물론 하는 짓이 너무 역겨워서 항상 두들겨 패서 아카데미에서 쫓아냈지만 말이다.

‘교사가 학생식당까지 찾아와서 접시를 떨어뜨리게 했을 때는 작가가 실제로 겪은 일 아니냐는 댓글이 달릴 정도였지.’

루카는 그 치졸한 행동을 잠시 떠올린 후 심호흡을 하고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시죠.”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오자 루카는 표정관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 속 인물과 지금의 크리피는 다른 사람이란 걸 다시 한번 상기하며.

크리피는 서류를 읽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학기초라 일이 많군요.”

“괜찮습니다.”

“저쪽에 앉아서 기다려주시죠. 찬장에 있는 건 아무거나 먹어도 됩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찬장에는 술 몇 병과 비스킷 정도만 있을 뿐 차나 커피 같은 것도 없었다.

“아차, 아무리 그래도 술은 안 됩니다. 아직 일과 중이니까요.”

“예.”

“음? 그러고 보니 차나 커피를 구비해둬야겠군요. 이곳에 오는 사람이 없다 보니 생각을 못했습니다.”

크리피가 멋쩍은 미소를 짓자 루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음료는 잘 마시지 않습니다.”

“역시 훌륭한 검가의 일원은 다르군요.”

의미 없는 대화를 마치고.

크리피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루카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다가 폰을 꺼내 메모를 훑었다.

‘달빛의 기사가 있는데도 위험에 빠질 정도면 도대체 어떤 위협이 오는 걸까. 그걸 예상해야 해.’

주인공조차 1회차 때는 절대 이길 수 없었던 달빛의 기사 이셀라.

그리고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녔으며 위기 때마다 번뜩이는 지혜를 보이는, 신기(神器) ‘디멘션 코어’의 힘을 사용하는 미리아.

그 두 사람이 1년 사이에 무슨 일을 겪기에 그렇게까지 사람이 바뀌게 되는지 궁금했다.

‘모든 일의 원흉인 데몬즈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뭔가 석연찮단 말이지.’

왠지 뭔가 더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기 전에 크리피의 일이 끝났다.

“드디어 끝났군요.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루카의 앞에 앉은 크리피는 양손을 모으며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감사합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의욕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게 무슨…….”

“두 사람이 기본기만을 사용해서 대련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은 모양입니다. 무인을 꿈꾸고 있지 않더라도 동경하게 될 정도로 멋진 대련이었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피의 눈이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졌다.

크리피는 교사 일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의욕적으로 가르쳐도 학생들은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물론 신분 상승이라는 흑심을 가지고 한 행동이긴 하지만, 그것과 동일할 정도로 훌륭한 검사를 키우고 싶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SA클래스인 이상 그의 수업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가 가르치는 것은 멋없는 기초 검술.

학생들은 성적을 위한 행동을 취할 뿐이었다.

‘아무리 의욕적으로 해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자.’

결국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차라리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자신의 쓸모를 보여 친해지는 쪽을 택했다.

지위가 높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갈 것 같은 학생에게는 좋은 성적을 주고 좋은 말만 했으며, 평민 출신이나 낮은 지위의 학생에게는 일부러 더 모질게 대했다.

원래 권력에 취한 사람일수록 아랫사람을 더 무시하는 법이니까.

“두 사람 덕분에 다른 학생들의 태도가 바뀐 것을 보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잊고 있던 무인의 마음가짐까지 떠올랐죠.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루카는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뭐라고 답해도 애매한 대답이 될 것 같았다.

크리피 또한 그것을 알았는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셀라 학생에게도 말할 예정이지만, 우선 루카 학생에게 묻고 싶군요. 제 수업을 계속 들으실 겁니까?”

“무슨 뜻입니까?”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루카가 되물었다.

“제 수업에서 가르치는 것은 기초 검술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이미 기초 검술을 거의 완벽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상 필요한 것은 경험뿐인데, 제 수업에서는 그것을 충족시켜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 말은…….”

“SA클래스가 아닌 S클래스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S클래스 교사 중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분명 두 사람을 지금보다 더 높은 단계까지 올려줄 것입니다.”

‘그분이라.’

크리피가 말하는 S클래스의 지인은 십중팔구 ‘과거 제국 최강의 검사’일 것이다.

주인공의 스승,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검사였던 자.

물론 그런 사람의 제자로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큰 영광이고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루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백 퍼센트 주인공이랑 부딪치게 되잖아. 그 미친개랑은 마주치고 싶지 않아.’

루카는 가급적 주인공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일단 자신에게 정해진 파멸을 회피하는 것.

굳이 주인공과 친분을 쌓거나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 싶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다른 누구의 검술도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나마 단련하고 싶은 것은 기초뿐.”

“제가 소개시켜드릴 분이 누군지 알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라면 감히 말하건대 당신을 ‘가문의 제1계승권자’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겁니다.”

“…….”

크리피의 말에 루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에 크리피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양손을 들었다.

“어이쿠, 제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모스토경. 한 번만 더 그런 무례한 말을 할 경우 정식으로 문제 삼을 겁니다.”

루카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자 크리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명심하겠습니다.”

‘과연, 가문에서 무시 받는 차남이라고 해도 송곳니의 혈육은 송곳니라는 건가.’

물론 크리피 입장에서는 빨대를 꽂아본 것이다.

와일드 트래버스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실제로 수업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 루카가 보여준 퍼포먼스를 보고 나니 두 사람의 격차가 그렇게 엄청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송곳니의 재림이라는 와일드 트래버스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것은 맞지만, 루카에게서 느껴지는 잠재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감히 말하건대 지금 방식으로는 와일드 트래버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제 말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면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군요.”

그렇기에 크리피는 위험을 감수하고 입을 열었다.

루카 트래버스라는 인물에게서 무언가의 가능성, 그리고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들어보겠습니다.”

“트래버스 가문의 검술은 물론 뛰어난 검술입니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당신에게 맞는 검술은 아닙니다.”

“크리피 모스토.”

루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루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직 남아있는 ‘루카 트래버스’의 잔재가 그 발언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불쾌하겠지만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이건 저 크리피 모스토가 아카데미에 온 이후 처음으로 내보이는 진심이니.”

루카의 반응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크리피는 강경했다.

“아마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검술이 스스로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잡고 있는 것은 트래버스 가문의 차남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함이겠지요.”

“그만! 그 이상 말한다면…….”

“제가 개선시켜드리겠습니다.”

루카는 경직했다. 그리고 크리피는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저 크리피 모스토가 전장의 악몽이라 불리는 이유. 그것은 하나의 검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고 겪은 검술 모두를 받아들이고 익혀 상대할 수 없게 변형시키는 재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트래버스 가문의 검술을 당신에게 맞는 형태로 바꿔줄 수 있습니다.”

“…….”

“믿어주십시오. 당신이 형을 이길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크리피는 끝까지 힘 있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루카는 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새끼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크리피가 한 말 중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 있었다.

순간 루카 트래버스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젠장, 그 검술을 어떻게 네가……!

-놀랐나? 이것은 내 타고난 능력과 데몬즈의 기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힘, ‘이미테이션’이다. 내가 겪은 기술 모두를 받아들이고 익혀 상대할 수 없게 변형시키는 힘이지

원작 주인공과 후반부 중간보스급 인물의 대화가 떠올랐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태엽이 맞물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크리피가 이미테이터였어?’

웅웅!

그 순간, 핸드폰이 연달아 진동했다.

[조건을 충족하여 힌트가 추가되었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힌트가 갱신되었습니다.]

[전장의 악몽 크리피 모스토 -> 무인의 악몽 이미테이터]

-크리피 모스토의 수업을 듣고 그의 호의를 받으세요.(○)

-크리피 모스토의 능력과 이미테이터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해 내세요.(○)

-???

-???

-???

14화

“……조금만 생각해 보고 답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일단 자리를 피한 루카는 곧장 폰을 꺼내 힌트부터 확인했다.

내용을 읽고 나니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했다.

‘그럼 주인공한테 지고 아카데미에서 쫓겨난 다음 데몬즈에 들어간 거야?’

생각해 보면 그것밖에 답이 없긴 하다.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가 원하는 것을 데몬즈가 이루어줄 수 있으니까.

‘그래. 알고 나니까 의미심장한 부분들이 있었구나.’

크리피가 이미테이터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뭔가 묘한 부분들이 복선처럼 느껴졌다.

주인공과 크리피가 결투했을 때도.

-이 자식, 내 검술을 파악하고 있는 건가?

-후후, 이 정도인가요? 제 수업을 똑바로 들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하아, 어쩔 수 없군. 이 힘은 쓰지 않으려 했는데.

주인공과 이미테이터가 처음 만났을 때도.

-후후,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날 알아?

-잘 알지. 널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 텐데.

그리고 주인공이 결국 이미테이터를 이겼을 때도.

-결국 또 져버린 건가. 난 널 이길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르겠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라서 말이야. 네가 이길 미래는 단 하나도 없어.

-후후, 그럴지도. 어쩌면 난 처음부터 이렇게 될…….

뭔가 애매하긴 하지만 복선 같은 느낌의 말을 한 것 같았다.

‘아니면 크리피가 너무 욕을 먹어서 직접적으로 말하기 좀 그랬나?’

얘 왜 또 나옴? 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크리피가 이미테이터라면 설마 다른 사람들도…….’

사라졌던 사람들 대부분 후반부 보스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몇몇 인물은 이미 예상이 가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미리아와 이셀라는 중반에 사라졌는데 왜 후반부에 보이지 않았던 거지?’

그 두 사람이랑 일치하는 인물은 없다.

‘두 사람의 특성을 가진 녀석이 하나 있긴 한데… 아니겠지.’

살짝 짚이는 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초중반에는 절대 만날 일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생각할 게 더 많아졌군.”

루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숙사의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삐이이이익!”

그때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루카는 익숙하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것을 피했다.

팍!

루카는 슥 뒤를 보았다.

작은 하늘색 새 한 마리가 벽에 부딪쳐 잠시 멈췄다가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안에 있던 벨라가 나와서 힘겹게 맞이했다.

“도, 도련님. 이제야 오셨군요.”

방이라고 했지만 열 명은 거뜬히 들어올 수 있는 복층 구조의 큰 방이었다.

식솔들이 머무는 작은 방도 따로 마련되어있고 침실과 거실, 그리고 주방이 분리되어있는 최고급 방이었다.

보통 귀족들은 하인 하녀 서너 명쯤은 이곳에 데리고 와서 사는데 루카는 벨라 한 명만 데리고 왔다.

벨라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휘슬이 어지간히 날뛰었나 보군.”

“말도 마세요. 도련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한시를 가만히 있지 못했다니까요!”

휘슬이라는 말에 바닥에 쓰러졌던 새가 벌떡 일어나더니 빠르게 날아와 루카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좋다는 듯 부리로 뺨을 비비적거렸다.

“도련님을 정말 좋아하네요.”

“뭐, 엄마라고 생각할 테니까.”

루카의 생명력으로 부활한 하늘새, 그것이 휘슬이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나중에 더 많은 생명력을 머금으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새가 될 것이다.

파직.

휘슬의 날개에서 스파크가 살짝 튀었다.

그것의 몸 안에 내제된 힘이 루카에게 스며드는 것이었다.

‘이게 있는 이상 초반에는 어지간하면 별일 없을 거야.’

하늘의 일곱 가지 힘 중 하나인 번개의 힘.

하늘의 힘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힘이며 갓 태어난 하늘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터득하는 힘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용자에게 부하가 심하긴 하다.

그렇지만 루카는 자신 있었다.

평범한 마을 소녀였다가 데몬즈에게 붙잡혀 약물로 억지로 강화된 에테르나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단련한 루카가 더 잘 사용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후~ 그나저나 도련님, 학원 생활은 어떤가요?”

“그럭저럭.”

“친구는 생겼나요? 아, 그레스 가문의 차남분 말고 다른 분이요!”

“친구 같은 건 필요 없어. 그 녀석도 친구라기보다는 그냥 같이 붙어 다니는 것뿐이고.”

“아이 참, 또 그런 말씀을.”

벨라는 마치 엄마처럼 잔소리를 했지만 루카는 시큰둥했다.

“도련님. 한 번뿐인 청춘을 뜨겁게 즐기셔야죠! 그레스 가문의 차남분 말고도 다른 사람도 좀 만나고, 여자도 만나보고! 하셔야죠!”

“만났어. 점심도 오트보랑 다른 여자 두 명이랑 같이 식사했어.”

“예?! 진짜요? 누구랑?”

벨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에 루카가 히죽 웃었다.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

“미리아 필… 아.”

벨라는 미리아가 황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미묘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저…….”

“이상한 걱정하지 마. 나도 정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형님이랑 계승권을 두고 싸울 생각도 없고.”

“……그랬죠.”

어딘가 슬픈 듯 답하는 그녀의 반응에 루카는 입술을 비틀었다.

‘어쩌라는 거야.’

와일드 트래버스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루카가 완전히 경쟁을 포기한 듯하니 또 아쉬운 반응을 보이는 벨라.

무슨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알아보라고 한 건?”

“여기 있어요.”

루카의 말에 벨라는 바로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루카는 그것을 받아 슬쩍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벨라가 일은 잘해.”

“그럼요. 저는 도련님의 전속 하녀니까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미는 벨라를 무시하며 루카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 알아서 저녁 먹고 정리해줘.”

“……예?”

“잘 부탁해. 전속 하녀님.”

그대로 루카는 들어갔고 혼자 남은 벨라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히잉… 친구라도 한 명 데리고 올 걸…….”

혼자는 외로운 그녀였다.

* * *

“음~ 좋아. 다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군.”

은색 장발, 실눈에 단안경.

학자 같은 분위기의 점잖은 미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석 패널에 떠 있는 정보들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침투하기 힘들었지만, 역시 구멍 하나만 뚫리니까 금방금방 장악되는걸?”

마석 패널에는 에르난 아카데미 소속 직원과 학생에 대한 정보가 떠 있었다.

“역시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아. 이들을 전부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계획을 더욱 앞당길 수 있겠어.”

그는 후후, 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다가 어느 정보를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런데 이건 뭐야. 루카 트래버스에 대한 공작이 왜 이것밖에 안 된 거지?”

루카 트래버스, 와일드 트래버스에게 밀린 비운의 천재.

그를 타락시키기 위한 공작을 분명히 시작했었는데 진행사항이 전혀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내가 직접 A클래스로 넣어놨는데 언제 S클래스에 올라왔지? 그리고 그 멍청한 삼인조는 왜 휴학한 거야?”

생각하지 못한 변수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지. 더 발버둥 치면 나야 좋지.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으니까 말이야.”

마석 패널을 책상 서랍에 넣은 단안경의 사내는 사무실에서 나왔다.

때마침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에게 인사했다.

“마틴 선생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여러분.”

마틴 커브스, 올해부터 에르난 아카데미에 들어온 신임 교사인 그는 부드러운 태도와 잘생긴 얼굴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물론 이 모든 건 계획을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절망을 줄까. 어떻게 해야 그가 좌절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살짝 핥는 마틴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 올해는 꿀수업을 너무 못 들었어. 개빡세.”

“그러니까. 이거 유급되면 클래스 떨어지는 거 아니야?”

“아 제발. 나 그러면 집에서 쫓겨난단 말이야.”

넓디넓은 에르난 아카데미 부지에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이 많다. 그리고 그런 곳에 모여서 농땡이 치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중 마음에 그늘이 있는 학생이 보였다.

“여러분, 고민이 있는 모양이네요.”

“아오, 깜짝이야. 누구세요?”

“그 사람이잖아. 올해 새로 온 교사. 여자들이 좋아하는.”

마틴의 등장에 세 학생들은 껄렁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끄시죠, 빽도 뭐도 없는 교사면서 학생 일에 끼어들면 피곤해져요.”

“맞아. 듣자하니 A클래스? B클래스 수업 맡고 있다는 거 같은데, 우리한테 신경 꺼요.”

“하하하.”

마틴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눈을 살짝 떴다.

움찔!

작게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본 학생들은 움찔하며 멈췄다.

마틴이 속삭였다.

“제 부탁을 들어주면 그 고민을 해결해줄게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 * *

벨라가 준 서류와 폰의 내용을 비교하고 있던 루카는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대충 맞아들자 히죽 웃었다.

“역시 올해였나. 에르난 아카데미의 보안이 뚫린 해가.”

원작의 내용만으로는 몇몇 인물들이 언제 이 아카데미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사소한 거 하나하나 묘사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책 속의 세계에 들어왔으니 놓친 정보를 직접 찾을 순 있었다.

루카가 벨라에게 구해달라고 한 정보는 현 에르난 아카데미 소속 직원과 학생들의 명단과 간단한 신상 정보였다.

비교 결과 딱 올해 들어온 직원 중에 데몬즈의 스파이가 있었다.

“마틴 커브스. 이 녀석이 올해 들어왔었군.”

마틴 커브스는 초반 스토리에선 잘 언급이 안 되는 인물이다.

그냥 착한 교사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주인공이 별로 안 좋아하는 그런 캐릭터 정도.

하지만 중반부 전쟁이 끝난 이후 본격적으로 주인공이 데몬즈와 맞부딪칠 때 그 정체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올해 이것저것 작업을 쳐놓을 거고. 그걸 방해한다면 주인공은 평탄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게 된다는 거지?”

루카는 슬쩍 폰을 보았다.

-우선 지금 시점은 주인공이 아직 이 세계에 도착하기 전, 즉 최초의 시간입니다. 부디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두 번째는 애독자님이 지적하셨던 ‘나올 수도 있었는데 나오지 않은 캐릭터’들의 행방을 확인하시고 그들이 주요 사건 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마지막으로… 이번 삶을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를 이쪽 세계로 보낸 신이 부탁한 세 가지.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다시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 캐릭터들을 구해주기.

그리고 이번 삶을 충분히 즐겨주기.

‘내가 여기서 데몬즈의 계획을 방해한다면 어그로가 나에게 끌리겠지.’

신의 부탁을 무시하고 적당히 선을 타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히 놀고 적당히 즐기다가 적당히 숨으면 회귀가 되는 것도 모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헤, 역시 같이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

-아~ 빨리 말해줘~ 나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아, 아가씨?!

문득 점심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순박하게 웃는 미래의 악역들.

별거 아닌 일에 웃고 즐거워하는 그들이 어쩌다가 독자들에게 욕을 먹는 악역이 되었을까.

‘어쩔 수 없나. 내가 무슨 계약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신이란 작자의 부탁도 들어주긴 해야 하니.’

여기서 루카가 데몬즈의 계획을 방해하면 세 가지 부탁이 모두 만족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루카는 피식 웃었다.

“남들은 기연이고 스승이고 심지어 히로인까지 뺏어간다는데. 고마운 줄 알아. 난 네 불행을 모두 가져가줄 테니까.”

그때였다.

웅웅!

생각지도 못 한 타이밍에 폰이 울렸다.

‘…이상하다? 힌트가 나올 때가 아닌데?’

새로운 인물을 만난 것도 아니고, 기존 힌트에서 더 나아갈 만한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진동이 울리지?

루카는 의아한 얼굴로 폰을 보았다.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이 추가되었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그의 다짐이 신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런 선물을 주는 것을 보니 말이다.

15화

“으아아, 배고파.”

“아침 안 먹었어?”

“응… 늦잠을 자서…….”

에르난 아카데미의 수업은 한국 사람 기준으로 상당히 널널했다.

일단 오전 9시에 첫 수업이 있다는 것부터 할 만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많이 주고 빨리 수업을 마치는 경우도 잦으니 좋군. 그렇다고 수업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야자까지 다 겪어본 루카에게 이 정도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루카를 봐. 멀쩡하잖아!”

“아가씨! 저도 멀쩡합니다!”

“이셀라 이런 걸로 경쟁할 필요 없어…….”

공통 수업을 같이 듣다 보니 어느새 파티가 되어버린 네 사람.

그들을 보니 루카는 학창 시절 때 채우지 못한 어떠한 갈망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파티원이 신분을 숨긴 황녀와 황실의 비밀병기다 보니 유소년기에 좋아할 만한 비밀놀이를 하는 느낌이라 더 재밌었다.

형제가 없었던 그에게 동생 포지션이 되어주는 어느 철없는 백작가의 차남이 있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동갑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3일 만에 네 사람은 꽤 많이 친해졌다.

정확히는 이셀라를 제외한 모두가 친해졌다고 봐야 하나.

이셀라는 아직도 루카와 오트보를 경계하며 미리아에게만 호의를 표했다.

“빨리 점심 먹으러 가자. 제2학생식당 갈까?”

“거긴 다음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 너무 멀어. 제3학생식당으로 가자.”

“거기 메뉴가 좀 별로던데.”

메뉴가 별로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제3학생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후 수업은 뭐지?”

“기초 체력 단련 수업.”

“에엑, 그런 게 왜 기본 공통 과목이야?”

“어린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한대.”

“말도 안 돼…….”

운동을 하면 마법 손실이 온다는 오트보에게 기초 체력 단련 수업은 그야말로 재앙과 같은 수업이었다.

“기초 체력 단련을 왜 3시간이나 하는 거야…….”

“3시간은 운동해야 몸에 자극이 오지.”

“자, 자극?”

“이참에 너도 신체 단련에 좀 관심을 가져봐라. 남자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근육이 있어야지.”

“나, 난 마법사란 말이야. 그리고 루카 너도…….”

너도 나처럼 말랐잖아, 라고 말하려던 오트보는 자세히 보니 꽤나 두꺼운 루카의 팔뚝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며 미리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나도 몸 두꺼운 남자가 좋더라.”

“아, 아가씨! 저도 두껍습니다!”

“이셀라 넌 여자잖아…….”

시답잖은 만담을 하며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가서 커피에 케이크까지 먹은 뒤 다음 수업이 있는 제7운동장으로 향했다.

“아니 식사를 하고 케이크가 들어가는 거야?”

“후후, 원래 여자는 디저트 배가 따로 있는 거야.”

“아, 아무리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지만 케이크 한 조각이 아니라 한 판을 다 먹는다고……?”

“여자의 몸은 미스터리야. 알려고 하지 마.”

“와…….”

잡담을 하다 보니 제7운동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 있는 학생의 숫자가 조금 적었다. 묘하게 표정도 다들 안 좋아 보였다.

“뭐야. 여기 분위기 왜 이래?”

“그러게. 다들 뭔가 우중충한 느낌인데.”

“이 수업 교수 이름이 뭐지?”

잠자코 있던 루카가 갑자기 물었다.

그에 오트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답했다.

“만타스 세르보카 교수였나?”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미리아의 안색이 급격히 파리해졌다.

루카는 천진한 표정의 오트보를 보며 말했다.

“왜 네가 이 수업을 신청한 거지?”

“왜긴. 그냥 넣었지. 어차피 들어야 하니까.”

“내 말은 왜 하필 만타스 교수의 기초 체력 수업을 선택했냐는 거다.”

“?”

“몰랐던 모양이군.”

의미심장한 루카의 말에 묘한 불안감을 느낀 오트보는 미리아의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을 발견했다.

“응? 미리아, 왜 그래?”

“아… 아…….”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덜덜 떨기 시작하는 미리아.

이셀라가 황급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너, 너 왜 하필 이 수업을 신청한 거야!”

“아니, 아무 생각 없이…….”

“아악! 망했어!”

오트보에 맞춰 수업을 신청한 루카, 그리고 루카를 따라 수업을 신청한 미리아였으니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선택이었다.

미리아가 주저앉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쯤 되니 오트보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루, 루카. 만타스 교수가 왜? 유명해? 안 좋은 쪽으로?”

“흠… 나는 딱히 상관없다만…….”

루카는 뺨과 턱을 살짝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너와 미리아는 꽤 힘들지도 모르겠군.”

“지, 지, 진짜?!”

“아, 그리고 너 이제 굳이 신체 단련하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 없을 거다.”

“……왜?”

“그야.”

루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가 운동장 가운데 있는 단상에 올라갔다.

햇살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하얗게 센 머리가 인상적인 튼튼한 몸을 가진 할머니였는데, 에르난 제국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내 기초 체력 단련 수업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나는 전 에르난 제국군 소속 특수 임무 수행 부대 부대장 만타스 세르보카라고 한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학생들을 순식간에 집중시켰다.

잠시 좌중을 둘러본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대신, 대륙 제일의 에르난 황립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도록 너희들의 기초 체력을 누구보다 높게 단련시켜줄 것을 약속하겠다! 알겠나, 제군들!”

노인이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보통이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곧게 펴지는 느낌이었다.

루카는 그녀를 보았다가 피식 웃으며 오트보에게 못다 한 말을 마쳤다.

“저분이 알아서 널 단련시켜줄 테니까.”

“아… 아… 안 돼……!”

“거기! 정숙!”

오트보에게 지옥문이 열렸다.

* * *

“흡! 흡! 흡!”

“기초 체력을 기르는 방법은 단 하나, 모든 기초 체력을 소모하여 몸이 그릇을 넓히도록 하는 것뿐이다!”

“흡! 흡! 흡!”

“따라서 제군들은 모든 마력과 체력을 다 소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달리도록 한다!”

“흡! 흐읍! 흐읍!”

만타스 교수의 수업은 심플했다.

달리기. 하지만 그냥 달리기가 아닌 마법 연구소에서 특수 제작한 보조 장비를 착용한 달리기였다.

착용자의 마력을 지속적으로 흡수하여 무게도 바뀌고 신체 회복도 시켜주는 훈련용 장비인데 이걸 착용한 채로 달리면 죽을 만큼 힘들다.

특히 마법사들은 마력은 많은데 체력이 적어 더 힘들다.

이미 반쯤 죽어가는 오트보처럼 말이다.

“힘들면 회복 마법을 써도 된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달리는 의지와 체력과 마력을 모두 소모하는 것이니까!”

“귀… 귀 아파…….”

확성기를 쓰고 있지 않은데도 만타스 교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달리는 학생들의 귀를 아프게 했다.

안 그래도 힘든데 귀까지 아프니 더 힘든 기분이었다.

“이, 이 와중에 저 두 사람은 대체…….”

두 명만은 예외였다.

무인에게 이 수업은 꽤 재미있는 수업이었다.

특히 라이벌 같은 느낌의 상대가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이 장비 최대 무게가 너무 낮잖아.”

“우연이군. 동감이다.”

루카와 이셀라. 두 사람은 독보적인 속도로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두 사람 아주 활기차고 좋군! 다른 사람들도 저 두 사람을 본받아 열심히 뛰도록!”

“헉… 헉… 헉…….”

“괴… 괴물들…….”

남들 한 바퀴 돌 때 세 바퀴 이상 돌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다른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삑! 삐익!

“자! 휴식! 휴식까지가 진정한 훈련이니 무리해서 지속하지 말고 쉬면서 하도록!”

3시간의 수업 중에서 50분은 뛰고 10분 쉬는 것을 반복하였다.

물론 루카와 이셀라는 쉬는 시간에도 뛰려고 했지만 만타스 교수가 제지했기에 어쩔 수 없이 쉬었다.

“나쁘지 않은 수업이군. 처음으로 널 따라 넣길 잘한 것 같다.”

“허억… 허억… 허억…….”

“평소라면 기분 나쁜 소리를 할 텐데 조용한 걸 보니 정말 힘든 모양이군.”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는 오트보를 보면서 루카는 히죽 웃었다.

“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헉… 헉… 이셀… 이셀라… 날 두고… 가지 마…….”

“아가씨이이이!”

이셀라가 미리아의 페이스메이커가 되면서 아쉽게도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된 루카는 이렇게 된 거 오트보의 옆에서 같이 뛰어주기로 했다.

“헉… 헉… 헉…….”

“머리와 목, 어깨가 땅에 대하여 꼿꼿한 자세를 취하도록 해라. 긴장을 풀고 몸을 되도록 편하게 하고 가슴을 펴.”

“헉… 헉…….”

“호흡을 조절해. 아무렇게나 호흡을 하면 더 힘들 뿐이다.”

“습, 후우, 스읍, 후우, 스읍…….”

“잘하고 있다. 그대로만 해라.”

루카가 같이 뛰어주니 오트보의 자세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점점 안정을 찾고 달리는 그를 보며 루카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거다. 그렇게 30분만 더 뛰면…….”

“흐어어…….”

“이봐, 정신 차려.”

체력이 없는 마법사에게 30분 뛰라는 말은 너무도 가혹했다.

하지만 보조 장비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뛸 수는 있었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 2세트까지만 하고 끝내겠다. 모두 수고했다!”

“허억… 허억…….”

“주말 잘 보내도록!”

인사와 함께 쿨하게 떠난 만타스 교수.

하지만 다들 지쳐서 그녀에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

만타스 교수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루카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오트보를 보았다.

“죽어가는군.”

“허억… 허억…….”

“필요한 거라도 있나?”

“허억… 허억…….”

“흠, 물이라도 가지고 와주지.”

루카는 히죽 웃으며 물을 가지러 갔지만 근처에 있어야 할 물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돗가까지 간 루카의 앞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어이! 루카 트래버스!”

“?”

전혀 일면식이 없는 세 사람, 그들은 2학년 B클래스 학생들이었다.

“너 이 자식 마음에 안 들어.”

“갑자기?”

너무 뜬금없는 그들의 말에 루카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하는 거라 생각한 2학년 삼인조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둘러쌌다.

“그래! 좀 두들겨 패야지 직성에 풀리겠어!”

“하하! 쫄았냐? 그러게 평소에 좀 조용히 다녔어야지!”

“흠…….”

그들을 보며 루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장면이다.

“불행을 가져가주겠다 말하긴 했지만, 벌써 이렇게 될 줄이야.”

“뭐라는 거야?”

“알 거 없다.”

루카는 물통을 내려놓고 손목을 풀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소를 날렸다.

“뭐 하고 있지? 덤비지 않고.”

“이 자식이!”

2학년 삼인조는 동시에 루카에게 달려들었다.

* * *

퉁! 퉁! 쿠당탕!

“크악!”

“뭐, 뭐야? 이 녀석 만타스 교수의 기초 체력 수업 들은 거 아니야?”

“왜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거냐고!”

세 명의 2학년들을 상대로 거의 압도하고 있는 루카.

2학년 삼인조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하고 급소를 툭툭 쳐 날려버린 루카는 건들거리듯 말했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내게 덤비다니, 10년은 멀었군.”

“우, 우리 한 살 차이 나는 거 아니야?”

“그런 거 받아주지 마! 다시 공격해!”

루카는 느긋했다.

지금까지 루카가 수행하며 목표로 삼은 것은 역대급 재능의 검사인 와일드 트래버스였다.

재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를 깎는 수련을 해왔다.

그런 그에게 1학년이 듣는 기초 체력 수업은 평소 하는 훈련보다 못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 턱이 없는 2학년 삼인조, 그들은 그저 어떻게든 루카의 체력을 깎기 위해 번갈아 가며 달려들 뿐이었다.

“젠장, 치다 보면 쓰러지겠지!”

“3대1이라고! 우리가 질 리가 없어!”

“허. 두들겨 팰 가치도 없군.”

제대로 무투술을 배우지 않은 그들의 주먹은 루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루카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하는데 그들은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하니 먼저 지치는 쪽이 어느 쪽일지는 자명했다.

“헉… 헉… 헉…….”

“제… 젠장… 왜…….”

“하, 한 대도… 안 맞는 거야……!”

결국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2학년 삼인조가 먼저 지쳐버렸다.

루카는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이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누가 사주한 건지 말해주실까.”

“무, 무슨 소리를…….”

“사실 누가 사주했는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그냥 확인차 물어보는 거다. 사주한 녀석을 말해주면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넘어가 주지.”

루카의 제안에 2학년 삼인조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마, 말해?”

“그 사람이 말하면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안 그럼 어떡해! 우리 셋이 저 녀석에게 덤볐다가 발렸다는 소문이 돌면 아카데미 못 다녀!”

“그건 그렇지만…….”

“아으 그냥 내가 말할게!”

결국 셋 중 한 명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널 두들겨 패서 모욕하라고 한 사람은 마…….”

펑!

말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학생의 머리가 터졌다.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나머지 사람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펑! 펑!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2학년 학생들의 머리도 폭발했다.

피와 뇌수가 주변에 난자했다.

그 사이에 선 루카의 머리가 현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무슨… 무슨 일이……?’

“어이쿠, 이게 무슨 일이죠?”

“!”

그때, 뒤쪽에서 귀를 녹일 것 같은 부드러운 미성이 들렸다.

루카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발견하고는 경직했다.

-은색 장발과 실눈에 단안경. 학자의 아키타입 같은 외형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부드러운 미소에 모두가 호의를 보였다.

자연스럽게 묘사가 떠올랐다.

원작의 등장인물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루카는, 빙의한 이래 처음으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X됐다.’

아직 마주쳐선 안 될 인물을 만나버렸다.

16화

마안魔眼의 소유자 마틴 커브스.

루카는 그와 직접적으로 맞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니까.

‘마틴 커브스는 주인공과 접점이 거의 없어. 그 때문에 정확히 뭘 할 수 있고 뭘 했는지 몰라.’

정체가 드러나긴 했지만 회귀 후 아카데미에서도 접점이 거의 없었다.

아마 마틴 커브스가 주인공의 담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어떡하지?’

루카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려보았다.

머리가 비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읽은 소설이 많으니 이런 상황에 써먹을 수 있는 해결책을 떠올리려 했다.

‘……어?’

그런데 뭔가 기억이 희미했다.

‘아카데미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를 제외한 다른 소설의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루카 트래버스와 기억이 섞인 탓인가?’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본능처럼 단 한 가지 생각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틀리면 죽여야 한다.’

그의 안에 있는 루카 트래버스가 한 말인지 그 스스로 떠올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여기서 이걸 빌미로 마틴이 무슨 짓을 한다면 바로 최악의 결말로 향한다는 것.

‘하늘새의 힘을 선수치길 잘했군.’

다행인 것은 루카가 하늘새의 힘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루카가 제일 먼저 기연을 고를 때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세 가지다.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주인공과 겹치지 않는 것, 그리고 당장도 유용하되 미래에도 어느 정도 가치보존이 될 것.

하늘새의 힘은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힘이었다.

‘데몬즈가 하늘새의 힘을 그렇게까지 얻으려 했던 이유는 하나였지. 그게 적에게 넘어가면 아주 불편해지니까.’

하늘새의 힘, 그러니까 ‘하늘’의 힘은 악마의 힘에 저항할 수 있다.

그리고 마틴이 가진 마안은 악마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상태지만 딱 한 번.’

짧은 시간 견적을 내본 루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악마의 힘을 내보이는 그 순간이라면,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야.’

텁.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검의 칼자루에 손을 대는 루카.

그런 그를 보며 마틴은 속으로 감탄했다.

‘외모와 달리 상당히 터프하군요. 이런 상황에서 목격자부터 제거할 생각을 하다니. 치밀하다고 해야 하나요?’

아주 약간 다르게 해석해버린 마틴은 방긋 웃었다.

‘후후, 좋습니다. 그냥 멍청하게 속는 것들보다야 이렇게 이빨이라도 드러내는 게 훨씬 사냥하는 맛이 있으니.’

탄탄대로를 걸어오며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대륙의 어린 싹들을 썩게 만드는 데몬즈의 ‘아카데미 장악’.

그 계획에 제일 먼저 파견된 것이 마틴인 이유는 이러한 잔혹함 때문이었다.

‘일단 조금 달래줘야겠군요.’

마틴은 마치 야생동물처럼 자신을 경계하는 루카가 놀라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한 채 머리가 터진 시체들 앞으로 가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이건 고대의 흑마법이군요. 문헌에서 본 적 있습니다.”

“?”

“당신은 루카 트래버스 학생이지요? 입학식 때 일로 유명해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루카 트래버스 학생의 미모를 질투한 누군가가 나쁜 일을 벌인 모양이군요.”

우선 이 상황에서 루카를 옹호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는 누가 봐도 끔찍한 일을 겪은 학생이 진정할 수 있도록 농담을 해주는 선량한 교사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루카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를 건 애들을 두들겨 패고 뒷배를 물었더니 머리가 터졌다.

그리고 정황상 그 머리를 터뜨린 마법을 건 마틴이 와서 걱정을 해주고 있다.

‘몰카 같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되고 있었다.

‘일단 저게 진짜 걱정해서 하는 일은 아닐 거잖아.’

루카에게 시비 건 사람들이 ‘마’자로 시작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머리가 터지고, ‘마틴’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수습하는 게 우연일 리는 없으니까.

‘나 때문에 어느 정도 순서나 방식이 바뀌었을지는 몰라도 아직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을 테니. 지금 마틴이 하는 행동도 루카 트래버스에게 무언가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하는 일이겠지. 그렇다면…….’

그의 머리가 정리되고 있을 때 마틴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선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죠. 괜히 루카 학생에게 피해가 갈수도 있으니까.”

“…….”

“여긴 제가 잘 처리해두겠습니다. 나중에 제 사무실로 와서 이 사건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마틴은 애초에 이 일을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었다.

큰일이 되어봤자 그의 행동에 제약만 될 테니까.

‘그리고 이 일은 루카 트래버스를 협박하는데 아주 훌륭한 재료가 되어줄 테니까요.’

도와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루카의 불안을 자극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속내를 아는 루카는 입술을 비트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학생이 세 명이나 죽은 상황을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고? 어이가 없네.’

만약 내막을 몰랐다면 그냥 마틴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백작가의 차남이라고 해도 아직 13살.

눈앞에서 또래 세 명이 갑자기 죽으면 혼란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몸에 있는 사람은 13살짜리 꼬맹이가 아니었다.

잠자코 당해주지 않는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는 건 안 좋은 판단인 것 같습니다.”

“……예?”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 듯 조금 떨떠름하게 되묻는 마틴.

루카는 귀족의 정석 같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교수인 거 같은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 소개가 늦었군요. 마법역사학 교사 마틴 커브스라고 합니다.”

“마틴 교사, 당신이 말한 대로 이것이 고대의 흑마법에 의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감히 대륙 제일 에르난 아카데미에 흑마법사가 잠입했다는 뜻이니까요.”

강직한 어조로 말하는 루카, 그에 마틴의 미소가 살짝 어색해졌다.

‘왜 이러는 거죠? 흑마법 이야기는 괜히 꺼냈나요?’

마틴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루카가 쐐기를 박듯이 얘기했다.

“철저히 원흉을 파악해서 아카데미에 숨어든 추악한 흑마법사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제게 불이익이 있다고 해도.”

“…….”

그 단호한 태도에 마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가면 상황이 안 좋겠군요. 현장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데 말입니다.’

뭔가 이상해진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그는 루카의 불안을 자극했다.

“하지만 루카 학생, 안 그래도 여러 구설수에 오른 당신이 이런 일에 휘말렸다고 하면 더더욱 평판이 안 좋아질 텐데요? 이 일을 모사한 사람도 그걸 노린 것일 텐데, 괜찮겠나요?”

“그렇다면 그들은 트래버스 가문을 건드린 죗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루카의 담담한 대답에 마틴은 침묵했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당장은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나중에 천천히 무너뜨립시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봐야 바뀌는 게 없다고.

일단 이 상황을 넘기고 나중에 이야기를 진행해야겠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눈을 크게 뜨는 마틴, 그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본 순간 루카는 올 게 왔음을 직감했다.

‘겨우 여기까지 왔군.’

마안魔眼.

악마의 힘이 깃든 저 눈으로 여기 죽어있는 세 학생들에게 금제를 걸었을 것이다.

분명 그에게도 비슷한 일을 할 것임을 루카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아직 내가 하늘새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라. 그러니 딱 한순간 빈틈이 생길 터.’

그것을 위해서 일부러 마틴 입장에서 답답하게 행동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원작에서 마틴이 마안 외에 보여준 게 없어서 저것 말고도 다른 무슨 힘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심하고 있는 동안에는 허를 찌를 수 있겠지. 그리고 녀석을 죽이기만 한다면 모든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어.’

죽은 마틴의 눈을 조사하기만 하면 그에게 악마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고 학생들을 죽인 게 루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뇌기를 보여주는 것은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이런데 망설일 틈이 없었다.

루카가 뇌기를 발현하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인기척이 느껴졌다.

“휘유! 이게 무슨 일이야?”

“!”

그에 마틴이 바로 눈을 감았다.

루카에게도 그의 당황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근처에 사람이 오지 못하도록 주구呪具를 설치해 뒀는데?’

“당신은……?”

탐스럽다고까지 느껴지는 풍성한 금발.

고귀한 귀족임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품격 있는 몸짓.

거기에 환한 미소를 가진 미청년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이름은 미카 웰즈, 고귀한 웰즈 가문의 장남이지.”

“웰즈 가문……!”

웰즈 후작가, 원작에서도 몇 번 언급된 적이 있다.

혈족 특유의 능력으로 ‘감시자’라는 직책을 맡게 되는 고귀한 혈통.

‘그렇다면… 윌루의 조력자겠군.’

미카 웰즈라는 이름이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없었지만 도망자 시절에 감시자가 도움을 주었다, 라는 대목은 있었다.

그러니 윌루, 그러니까 와일드의 친구라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어째서 이 시점에 그가 나타난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르난 아카데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지만 눈으로 본 일을 부정할 수는 없는 법. 이미 선도부에 연락을 했으니 목격자들 모두 가만히 있어주겠어?”

나긋한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마틴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죠. 다만 이 일을 직접 겪은 루카 학생은 심적으로 많이 힘들 테니 배려를 해줄 수 있습니까? 이곳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음… 하긴. 아직 1학년 학생인데 이런 일을 겪었으니 꽤 충격이 컸겠어.”

미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카를 보았다.

“그럼 루카 트래버스. 나를 따라와.”

“예.”

루카는 순순히 미카를 따랐다.

수돗가에서 조금 떨어지자 미카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어이, 와일드의 동생.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없습니다.”

묘한 그의 반응에 루카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미카는 수돗가 쪽을 흘끔 보았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저건 대체 뭐야? 까딱하면 우리 둘 다 죽을 뻔했잖아.”

“그게 무슨…….”

“웰즈 가문 사람의 눈은 특별해. 평범한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지. 아까 그 교사에게서 아주 끔찍한 힘이 보였어.”

그의 말에 루카는 감탄했다.

‘역시 감시자의 혈통은 다르군.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않았을 텐데 악마의 힘을 볼 수 있다니.’

악마의 힘은 흑마법보다 상위의 힘이라 감지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루카도 마틴이 마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 힘을 사용하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카 웰즈. 그리고 감시자 집안.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군.’

루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손목을 잡고 걷던 미카가 멈췄다.

어느새 두 사람은 학생과 교직원들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미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이젠 괜찮겠지. 뭐에 휘말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네 형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운명을 타고났나 보구나.”

“형님과 친하십니까?”

“당연하지. 아니면 너를 지켜보고 있었겠어?”

그렇게 말하는 미카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사고 친 거 치고는 잘 지내고 있어서, 이번 주까지만 지켜보다가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돼버렸네. 흠, 그렇다고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미카는 무언가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품 안에서 쪽지를 꺼내 루카에게 내밀었다.

“이건……?”

“내 통신 코드야. 저런 일이 있었으니 아카데미 내부 단속을 강화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내가 널 지켜봐 줄 테니까.”

“…….”

그렇게 말하며 윙크하는 미카.

루카는 잠시 생각하다가 쪽지를 받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으응? 어, 으응.”

“그럼 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떠나는 루카를 보며 미카는 뺨을 긁적였다.

“와일드 말로는 부끄럼쟁이라더니 꽤 솔직한 애네.”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꽤나 달랐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도착한 루카는.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소리지.”

“그거 피 아니야?”

“피가 맞습니다, 아가씨!”

“너 누구 줘패고 왔어?”

“……아.”

해명하느라 잠깐 피곤했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니 루카도 한동안 조사를 받았다.

학생들을 죽인 게 루카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금방 밝혀졌지만 왜 그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원한을 산다고 해봐야 그가 휴학시킨 삼인방 정돈데, 그들이 악마의 힘을 가진 사람들과 연관되어있지 않다는 건 금방 나오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겼다.

“마틴 커브스 교사… 아니, 용의자 마틴 커브스가 도주했습니다.”

마틴 커브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조사가 시작되면 도망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도망치니 조금 걱정이 되는군.’

뭔진 몰라도 계획이 틀어졌을 테니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게다가 마틴 커브스 외에도 데몬즈의 첩자가 더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루카 학생, 아쉽겠지만 이번 주말은 아카데미에서 나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에르난 아카데미는 대도시 하보크 근처에 지어져 있어 주말이면 학생들이 하보크 시가지에 놀러간다.

1학년들은 오리엔테이션과 기숙사 합동 교육 때문에 강제로 첫 주는 외출이 불가능하다.

아카데미 안에 2주 동안 갇혀서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첫 외출만 기다리는 학생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래서 어지간히 큰 사고를 친 게 아니라면 외출금지를 시키는 일은 잘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진짜로 신변이 위험할 수 있기에, 우선 루카만 외출금지를 시킨 것이다.

“루카! 주말에 하보크로 갈 거지?”

“후후, 그때처럼 노는 거야? 설레는데?”

“아가씨가 기쁘다면 저도 기쁩니다!”

문제는 루카와 놀 생각에 들떠있는 친구들이었다.

루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어떻게 말해도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해 대충 말하기로 했다.

“난 이번 주 외출금지 당해서 못 간다.”

“뭐?!”

“셋이 놀고 오도록.”

오트보는 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미리아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 셋이 잘 놀다…….”

“그럼 아카데미 탐험을 하자!”

“…뭐?”

“아가씨?”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지도를 꺼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못 나가면 어때. 아카데미 탐험을 하자!”

철없는 황녀님의 기행이 시작되었다.

17화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미리아가 누워 잠들어 있다.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이 공간은 미리아가 소유하고 있는 신기 ‘디멘션 코어’로 만든 곳으로, 이곳에서 그녀는 완전히 안전하다.

다만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나갔을 때 어떠한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

“으음… 흐아암~.”

내장된 시간 마법으로 정확한 시간에 일어난 미리아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딱! 화악!

어둠이 걷히고 나온 것은 피와 살점으로 가득 찬 방, 그리고 그 사이에 의연히 서있는 라이셀 판드리가.

그녀는 침대 위에 미리아가 나타나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황녀님.”

“오늘부터는 미리아라니까. 좋은 아침 ‘이셀라’.”

“죄송합니다, 미리아 아가씨.”

‘이셀라’와 인사를 주고받은 그녀는 익숙하게 시체와 피를 피하며 걸어 나갔다.

이러한 일을 몇 번이나 겪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어머나, 오늘은 좀 많네.”

“죄송합니다. 기상시간 전에 처리했어야 하는데.”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침실 밖은 더 끔찍했다.

융단처럼 쌓인 시체들.

그나마 이셀라가 어느 정도 정리는 한 듯 지나갈 틈은 있었지만 피에 발이 젖는 것은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철퍽, 철퍽.

미리아는 그 피에 젖은 길을 무덤덤하게 걸으며 투덜거렸다.

“오늘 같은 날도 이렇게 암살자를 보내야 했나? 섭섭하게.”

“암살자를 보내는 이들은 저희가 오늘 하보크로 가는 걸 모를 겁니다.”

“후후, 나도 알아 이셀라. 그냥 하소연해본 거야.”

“죄송합니다! 황녀님!”

“미리아라니까.”

“죄송합니다! 미리아 아가씨.”

아직도 말이 어색한 이셀라를 보며 미리아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피에 젖은 길을 걸으면서도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금 섬뜩했으리라.

솨아아!

흐르는 물로 피를 씻어내는 미리아와 이셀라.

미리아는 황녀의 신분이지만 수행인을 둘 수 없었다.

암살자들이 너무 많이 와서 수행인들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녀에게 그럴 수 있냐, 라고 할 수 있지만 황성에서 그녀를 황녀로 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황가의 수치인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달그락.

“…….”

미리아는 자신의 목에 걸린 정사면체 보석을 보았다.

이것의 이름은 디멘션 코어. 그녀는 이것에게 선택받았다.

-마, 말도 안 돼! 황가의 보물이 출신도 불분명한 천한 계집을 선택했단 말인가?

-말조심하십시오! 신기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은 황가의 혈족이라는 증거! 그녀는 이제부터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녀입니다!

-젠장, 왜 하필 저런 것에게 신기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신기를 가졌으니 정식으로 황녀가 될 수 있었다.

‘브리드 세테그 에르난’이라는 이름과 밤의 일원인 라이셀 판드리가도 받았다.

그러나 이미 황위 계승전의 구도는 제1황자와 제3황자 둘의 혈전으로 예정되어있는 상태.

그녀가 낄 틈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방해였다.

-이 상태면 신기를 가진 제4황녀가 지지하는 쪽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겠군요.

-하지만 상대편도 그렇게 생각할 터.

-가지지 못한다면 죽이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하겠죠.

공교롭게도 똑같은 생각을 한 제1황자와 제3황자.

후견인이 없는 제4황녀쯤은 순식간에 처리하겠다는 판단이었다.

원래 황권다툼에서 정적을 암살하는 무식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괜히 건드려서 서로 바닥을 보일 때까지 싸우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4황녀는 세력이 없다.

그래서 부담 없이 암살자를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정말 아찔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미리아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처음 암살자가 온 날.

이셀라가 그들을 썰어버리는 것을 보며 구역질을 했었다.

그때는 암살자가 왔다는 사실보다 그 암살자를 무정하게 베어 넘기는 이셀라에게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황녀님의 침실을 더럽히기 전에 처리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피와 살점이 묻은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그녀를 보며 미리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진짜로 이 더러운 권력다툼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살아남아야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디멘션 코어의 사용법도 알아내고 후견인도 찾으며 계승권 싸움에 끼어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으로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는데도 성공했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디멘션 코어와 이셀라의 도움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대강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불사의 황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가자,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음식을 먹을 때도 노심초사.

매일 밤 자는 것도 디멘션 코어와 이셀라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황녀라지만 대단한 대우를 받지도 못한다.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정녕 맞는 것인가.

그녀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군. 나름대로 잘 싸우고 있지만, 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그렇게 보여요?

고민이 깊어질 때 그녀의 후견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하는 건 어떨까.

-황제 폐하를 말씀하는 건가요?

-큭큭, 그래. 그 아둔한 녀석도 너처럼 방황하던 때가 있었지.

후견인은 속삭였다.

-아카데미에 손을 써두마. 거기서 ‘브리드 세테그 에르난’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한 번 살아봐라.

-아카데미요……?

-그래. 거기라면 적어도 다른 황자들의 암살자가 널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다.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다면 말이지.

-아카데미에 가서 뭘 하라는 거죠?

-나를 네 보모라고 생각하는 건가?

-…….

제안을 받고 며칠 간 고심한 미리아는 결국 승낙했다.

그 며칠 사이에 또다시 암살을 겪으니,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에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가면 이런 일은 적어질 테니까 너도 좀 쉴 수 있겠네.”

“저는 밤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잠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차게 대답하는 이셀라지만, 미리아는 그저 쓰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셀라는 몇 년째 밤에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리아의 호위, 독이 없는 식사 준비, 그리고 황성에서 나와 따로 살고 있는 그들의 거처 관리까지.

오랜 시간 과로에 시달리는 상태였다.

‘이셀라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이셀라 말고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고.’

어느 날 누군가가 준 소설에서 보았었다.

-청춘에서 얻은 인연은 평생을 가는 재산이 되고 추억은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것이 진짜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한 번쯤은 도전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 출발할까?”

“네! 아가씨!”

모든 준비를 마치고 미리아와 이셀라는 저택의 앞에 섰다.

황궁에서 나온 뒤 몇 년간 살았던 정든 집을 떠나려 하니 묘하게 섭섭했다.

미리아는 잠시 저택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돌아올 땐 다른 친구와 함께 왔으면 좋겠네.”

그런 바람을 안고 그들은 하보크로 향했다.

* * *

“아카데미 탐험이라니. 여기를 탐험하자고?”

“응!”

“아니 탐험할 게 뭐가 있다고…….”

되묻는 오트보를 보며 해맑게 답하는 미리아.

떨떠름한 얼굴을 하는 오트보를 보며 이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아가씨의 말에 반기를 드는 거냐?!”

“아, 아니. 반기를 드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제법 투닥거리는 게 익숙해진 오트보와 이셀라를 보며 미리아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카를 보며 말했다.

“어때? 아카데미 탐험 재밌을 것 같지 않아?”

“흠…….”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잠시 머릿속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나쁘지 않군.”

“에엑?! 루, 루카?!”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내가 아카데미의 전설을 조사해봤거든! 여기 봐!”

그렇게 말하며 지도를 톡톡 치는 미리아.

오트보는 그 모습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루카에게 속삭였다.

“루, 루카. 진짜 주말에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거야?”

“출입 금지가 떨어졌으니 당연히 남아 있어야겠지.”

“하, 하지만…….”

오트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그에 미리아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뭐야 오트보. 너 설마 루카를 두고 외출 나가려던 생각이었어?”

“당연히 아니지! 그냥… 으…….”

오트보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망설이는 듯 앓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카데미 탐험… 하지 뭐…….”

“좋은 생각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 전설에 따르면…….”

신나게 떠드는 미리아를 보며 루카는 생각했다.

‘저 녀석의 속셈이 뭐든 아카데미 탐험은 나쁘지 않아. 데몬즈 녀석들도 달빛 옆에 있으면 쉽게 다가오지 못할 테고, 주인공이 온 시점에서 없던 보물도 지금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이 타이밍에 이렇게 좋은 제안을 하는 게 미심쩍긴 하지만 루카 입장에선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주말에 신이 준 선물을 시험해볼 예정이었는데, 이러면 더 좋지.’

애초에 루카 혼자였어도 아카데미 안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물론 안전을 위해 벨라를 호위로 붙여두고 말이다.

그런데 벨라를 대신해서 이셀라가 옆에 있어준다니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황실의 비밀병기와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 벨라의 진짜 힘은 알 수가 없으니.’

루카의 전속 시녀 벨라.

다재다능한 그녀는 루카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돌봐준 하녀였다.

정확한 무력은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에도 없지만, 아무리 차남이라고 해도 백작가의 귀한 자식을 호위 한 명 없이 하녀 한 명만 붙여서 아카데미 시험을 치러 가게 한 것만 봐도 트래버스 가문에서 벨라의 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벨라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지만…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 기다려야겠지. 일단 시키는 일은 다 잘해주고 있으니까.’

루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미리아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루카. 듣고 있어?”

“그래. 아카데미의 전설 중 하나인 피아 숲의 신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

“어, 진짜 듣고 있었네.”

뭔가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픽 웃었다.

“아무래도 좋지만 피아 숲은 금지된 구역을 제외하면 모든 곳이 탐색 완료된 곳일 텐데. 설마 금지된 구역으로 가자는 건 아니겠지?”

“바로 그거야.”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리아의 모습에 오트보는 이마를 짚었고 루카는 오트보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대신 내뱉었다.

“정신이 나갔군.”

“왜? 금지된 구역이라고 해도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곳이니 그렇게 위험할 리가 없잖아. 거기에, 우리에겐 이셀라도 있고.”

“호위는 맡겨만 주십시오, 아가씨!”

이셀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듯 가슴을 쫙 펴고 주먹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루카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이셀라가 단순한 호위 기사 정도로 알고 있는 오트보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눈치였다.

“그래도 선생님들한테 들키면 큰일이 날 거야!”

“괜찮아. 첫 주말이라 학생 감시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하보크에 갔어.”

“하, 하지만 그러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불안한 듯이 말하는 오트보를 보며 미리아는 히죽 웃었다.

“걱정하지 마. 그 어떠한 상황이 와도 우리는 안전할 거야.”

“…….”

결국 포기한 듯 오트보는 입을 다물었고 미리아는 지도를 접고 하늘로 주먹을 뻗으며 힘차게 소리쳤다.

“좋아! 그럼 내일 제1회 아카데미 전설 탐험을 떠나자!”

그렇게 아카데미 탐험대가 결성되고 내일을 기약하며 멤버들은 해산, 루카는 자신의 기숙사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폰을 꺼냈다.

- 힌트 조각모음 어플리케이션이 실행되었습니다.

18화

[힌트 조각모음]

- 정보를 조합하여 단편적인 힌트를 생성합니다.

- 생성된 힌트를 모아 하나의 문서자료로 만들 수 있습니다.

- 한 번에 하나의 힌트에 관한 조각모음만이 가능합니다.

- 직접적인 스토리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건에 한해서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 제한된 횟수의 정보만 입력이 가능합니다.

주인공에 대한 루카의 다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이 선물이라도 주듯 새로 추가해 줬던 어플리케이션, 힌트 조각모음.

이것저것 제약이 있지만 힌트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정보를 넣는 편법은 안 되고, 스토리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힌트는 줄 수 없다는 거잖아.’

언뜻 보면 제약만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충분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전에 말했다시피 스토리에서 중요한 줄기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해도 스토리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주인공이 아카데미의 전설에 대해 조사해 봤을 땐 전부 허탕이었지.’

다만, 전설에 관한 것은 찾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데몬즈가 남긴 흔적을 찾는 대목이 있었다.

루카는 거기에 주목했다.

‘정황상 주인공이 찾던 시점에는 아카데미의 전설을 모두 데몬즈가 가져갔다, 라고 보면 되는데. 마틴이 갑작스럽게 퇴장하게 된 이 시점에서는 과연 어떨까?’

데몬즈가 아카데미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않게 된 현 시점.

밝혀지지 않은 기연이 존재할 가능성에 루카는 조금 들떴다.

‘이거지. 이런 숨겨진 걸 찾는 게 또 묘미지.’

루카는 히죽 웃으며 어플리케이션에 무언가를 입력하였다.

‘에르난 아카데미의 전설 중 하나인 피아 숲의 신상’

우웅!

그것을 입력하자 액정에 무언가를 검색하듯 원형 표시가 떴다가 사라졌다.

[에르난 아카데미의 전설 - 피아 숲의 신상]

- ???

- ???

- ???

- ???

- ???

* 해당 힌트 관련 정보입력 가능 회수 : 10

‘아, 이런 방식인가?’

기존 힌트와 비슷한 방식에 추가로 정보입력 가능 회수라는 항목이 새로 생겼다.

‘10개면 넉넉한 거 같기도 하고 부족한 거 같기도 하고.’

다만 여기서 무슨 정보를 더 입력해야 할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내일 생각할까.’

루카가 그렇게 생각하며 폰을 덮을 때 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내일 외출 못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친구랑 어디 가기로 했어.”

“……뭐, 뭐라고요?!”

투다닥!

루카의 대답에 벨라는 화들짝 놀라서 그의 침실 안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디 가신다고요? 친구랑? 혹시 오트보 도련님인가요?”

“항상 같이 다니는 셋.”

“그분들이 도련님이랑 같이 있어 주기로 한 거예요?! 오! 세상에!”

벨라가 굉장히 감격한 듯 벅찬 표정을 짓자 루카는 시큰둥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어차피 아카데미 안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어울려주는 것뿐이야.”

“고마운 거죠! 그분들이 혼자 남을 도련님을 생각해서 외출도 마다한 건데! 내일 아카데미에 남을 1학년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쯧,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부탁할 게 있어.”

루카의 부탁이라는 말에 벨라는 감정을 추스르고 평온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무엇이든 명령해 주세요, 도련님.”

“아무래도 아카데미 안에 이상한 것들이 들어온 모양인데 조사를 해야겠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만 조사해 봐.”

“도련님을 음해하려던 자의 동료를 찾으라는 뜻이죠?”

바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벨라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련님, 그런 이들이 있는 이상 도련님의 신변보호를 위해 제가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있는 게 든든하긴 하지만 그 ‘불사의 황녀’잖아. 근처에 있는데 나까지 위험해지진 않을 거야.”

“그건… 그렇겠네요.”

불사의 황녀에 대한 소문은 벨라도 들어봤었다.

그녀를 노리는 암살자들은 많았지만 모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그 소문.

“하긴 그들도 아카데미 내부 감시가 강화된 지금 도련님을 노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겠죠.”

“그리고 노려도 괜찮아. 얘가 있으니까.”

삐익!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열린 창문으로 어둠을 뚫고 하늘색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루카의 어깨에 앉았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커졌지만 여전히 귀여운 형상이었다.

“이젠 예전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지 않네요. 이 벨라는 또 다른 아이의 성장이 참 감격스럽답니다.”

“아무튼 너도 조심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알겠지?”

루카의 말에 벨라는 쿡쿡 웃은 뒤 한쪽 눈을 감으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벨라, 누구보다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하. 방심하지…….”

퉁명스럽게 답하려던 루카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 순간 벨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쫓지 못했다.

“……괜한 걱정을 했군.”

정말 유능한 하녀를 뒀다.

* * *

대도시 하보크 근처에 만들어진 에르난 아카데미는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명성에 맞게 학습을 위한 여러 환경을 구비해두었다.

그 중 하나인 피아 숲은 자연계 마나의 관측과 특수한 약초 재배, 여러 지형에서의 전투 방식 등을 연구하기 좋은 곳이었다.

다만 굉장히 넓기 때문에 길을 잃기 쉬워 정해진 길 외에는 길잡이를 대동하는 게 필수다.

“자! 다들 준비는 됐지?”

“예! 아가씨! 도시락도 전부 준비되어 있습니다!”

“으으… 진짜 가는 거야?”

그 피아 숲 앞 입구에 루카와 친구들이 모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리아와 이셀라는 조금 텐션이 오른 상태였고, 오트보는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은 듯 어벙한 얼굴이었다.

‘대단하군.’

그리고 루카는 이렇게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산과는 또 다른 느낌의 숲.

그 대자연의 신비에 저절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자~ 일단 금지된 구역은 꽤 깊은 곳에 있으니 바로 가자!”

“자, 잠깐만. 길잡이 없이 가는 거야?”

“당연하지. 금지된 구역에 데려다 주는 길잡이가 있겠어?”

너 바보야? 라고 묻는 것 같은 미리아의 눈빛에 오트보는 움찔했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그건 그런데… 길을 잃으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난 절대 길을 잃지 않으니까.”

“왜 그렇게 자신하는 거야……?”

너무도 자신만만한 미리아를 보며 오트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아는 쿡쿡 웃은 뒤 자신의 가슴팍을 살짝 매만졌다.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난 내가 갔던 곳은 절대 잊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흥,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만약 길을 잃어도 내가 너희 모두를 업고 한 방향으로 뛰어 나가면 되니까.”

“……오. 그건 좀 듬직한데.”

계속 오트보가 불안해하는 것으로 인해 미리아가 곤란해 할 것 같자 결국 이셀라가 고민을 해결해버렸다.

‘갔던 곳을 잊지 않는다라. 디멘션 코어의 능력 중 하나인가?’

루카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디멘션 코어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원작에서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원작에서의 미리아도 디멘션 코어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했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당장은 좀 그렇겠지.’

루카는 우선 디멘션 코어에 관한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에서 야영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바로 가는 게 좋을 텐데.”

“야, 야영?!”

그의 말에 오트보는 끔찍하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며 바로 뒤를 따랐다.

하지만 먼저 갈 것 같던 미리아가 움직이지 않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야영할 거 아니었어?”

“…….”

앞서 가던 루카와 오트보는 멈칫했다.

그리고 슥 고개를 돌려 미리아와 이셀라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셀라가 메고 있는 가방이 이상하게 좀 컸다.

“…….”

“…….”

루카와 오트보는 서로를 보았다.

오트보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루카는 한숨을 푹 쉬고는 미리아를 보았다.

“이 미친X이 X랄도 정도껏 해라.”

“루, 루카?!”

“네, 네 이놈! 황족 모독으로 당장 목을 쳐주마!”

“이, 이셀라?!”

그야말로 미친개들의 싸움 같았다.

* * *

“쳇, 알았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면 되잖아.”

결국 야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오트보와 미리아를 루카와 이셀라가 업고 금지된 구역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휙! 휙! 휙!

“마, 마법을 쓰지 않고 이 정도 기동력이라니.”

“너도 이렇게 할 수 있어야지.”

“으… 절대 무리야.”

“글쎄. 만타스 교수의 수업을 계속 들으면 될 거라 생각한다만.”

“으악.”

잡담을 하면서 루카는 주변 풍경을 보고 감탄했다.

‘진짜 판타지 세계에 온 실감이 나네.’

중세 도시 같은 하보크의 풍경도 좋았지만 진짜 판타지 속이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숲도 좋았다.

몇 백 년은 된 것 같은 거대한 나무에 이끼가 껴 녹색이 더 짙었고 풀 그림자가 이따금씩 흔들리는 것도 생동감이 있어서 좋았다.

맡아본 것 같으면서도 맡아본 적 없는 풀내음도 좋았다.

‘힌트를 찾으러 왔지만 진짜 논다는 생각으로 다니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마음이 들뜬 아이처럼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순간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루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잘 알고 있는 목소리니.

‘루카 트래버스.’

원래 몸의 주인인 루카 트래버스의 사념인 걸까. 그의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었다.

‘너무 들뜨지 말라는 건가.’

루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20대 후반을 바라보던 ‘이명현’이 10대 초반인 ‘루카 트래버스’에게 들뜨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 이 상황이 애석했다.

‘나쁘지 않군.’

하지만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대화한 적은 없지만 루카 트래버스라는 인물의 삶을 모두 알게 된 사람으로서 그의 초조함을 이해하니까.

아니 루카 트래버스라는 인물을 이해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네 꿈을 이루어주겠다는 다짐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루카 트래버스처럼 힘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할 생각은 없으나 즐기는 와중에도 어떠한 행동을 할 때 확실한 이득을 취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것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나아가던 루카는 갑자기 멈췄다.

“…여길 가자고?”

“응!”

“…….”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순식간에 찌그러들었다.

경계를 기준으로 안쪽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어둡고, 축축하고, 서늘한 느낌.

루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제 10시쯤 되지 않았나.”

“9시 15분이다. 아주 빠르게 도착했으니.”

이셀라가 시계를 보며 타박했다. 그에 루카는 고개를 숙여 금지된 구역 쪽을 보았다.

“그런데 저렇게 어둡단 말인가.”

“확실히 책에서 본 것처럼 어둡네. 재밌는데?”

어둑한 느낌이 더욱 모험심을 자극하는 듯 미리아는 더 흥분한 얼굴이었고, 그에 비례해 오트보의 불안이 커졌다.

“저, 저, 저길 드, 드, 들어간다고?!”

“춥니? 왜 그렇게 떨어?”

“흠. 실제로 좀 서늘한 느낌이긴 하군.”

“아, 그런가?”

“너흰 왜 그렇게 태평한 건데…….”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을 보며 오트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홱홱 돌리고 뺨을 탁탁 쳤다.

“후, 좋아. 여기까지 온 이상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

“최근 네가 보여준 행보 중 가장 마음에 드는군.”

“치, 칭찬이지?”

욕이다, 라고 작게 말하며 피식 웃은 루카는 먼저 경계 쪽으로 다가갔다.

“바, 바로 가?”

“네가 말하지 않았나. 여기까지 온 이상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난 터프한 남자가 좋더라~.”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금지된 구역 안으로 들어갔고 미리아는 쿡쿡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저, 저도 터프합니다, 아가씨!”

“으… 두고 가지 마!”

4인방은 결국 금지된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또 다른 누군가가 금지된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19화

금지 구역은 생각했던 것만큼 축축하고, 어둡고, 서늘했다.

“바, 바닥이 미끌거려.”

“이끼가 자란 모양이군. 이 정도로 그늘진 숲이라면 이끼가 어디에 있든 이상할 게 없겠어.”

“그래? 그럼 조심… 우아악!”

몸치인 오트보가 이끼를 밟고 미끄러지는 해프닝은 이제 식상할 정도였다.

빛 마법으로 주변을 밝히면서 걷자 더욱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더 흥미진진해졌어!”

“아가씨,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미리아의 모험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 이셀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걸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단서는 있겠지?”

“없어!”

너무 해맑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는 듯 미리아는 킥킥 웃었다.

“농담이야. 일단 이곳의 전설에 대해선 기억하고 있지?”

“시험하는 건가?”

그의 날 선 말에 미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루카는 혀를 찬 다음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원래 이 숲에는 이단의 신을 믿는 이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에겐 성역이라 불리는 이곳 금지 구역에는 그들의 죽음에 분노한 이단의 신이 저주를 내렸다. 그리고 그 저주의 주체가 피아 숲의 신상이라고 불리는 무언가라고 했지.”

“이것저것 덜어내서 심심하긴 한데… 잘 요약했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저주의 주체가 신상이라는 거야.”

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지도를 꺼냈다.

“피아 숲의 금지 구역은 원형이야. 즉 신상을 중심으로 저주가 뿌려지는 형태인 거지. 우린 금지 구역의 중심으로 가기만 하면 돼.”

“하, 하지만 방향을 어떻게 알고? 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는 오트보, 하지만 미리아는 자신만만했다.

“걱정하지 마. 난 절대 길을 잃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오트보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루카는 대강 알아들었다.

‘자신만만하던 이유가 있었군.’

미리아가 길을 잃을 일이 없겠다고 했을 때는 그냥 기숙사에 제때 돌어갈 수 있겠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간지각능력을 바탕으로 반드시 금지 구역의 중심에 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주인공도 비슷한 방식으로 금지 구역 중심에 도착했었지. 근데 거긴 아무것도 없었어. 대신 어떤 큰 건물의 흔적이 있다고 했던가.’

원작에서의 아카데미 전설 찾기는 그냥 적당한 떡밥에 히로인들이랑 노닥거리는 스토리였기에 참고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자! 계획도 밝혔으니까 이젠 투덜대지 말고 따라와!”

“그게 무슨 계획이야…….”

오트보가 투덜대든 말든 미리아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저주라는 게 심해지는 듯 점점 더 어둡고, 눅눅하고, 추워졌다.

결국 오트보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으으… 너, 너무 추운데?”

“확실히, 아무리 깊은 숲속이라지만 이 정도의 기온은 말이 안 되는군.”

그가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닌 것이, 루카조차도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참지 못한 오트보가 마력을 일으켰다.

“아, 안 되겠다. 너도 보온 마법 걸어줄까?”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고 있는 오트보를 보며 루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확실히 이 정도의 기온은 마법을 건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군.”

“응? 무슨 소리야?”

“아니.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내게도 보온 마법을 걸어줘.”

사이좋게 보온 마법을 걸고 미리아의 뒤를 따르려던 찰나, 루카는 멈췄다.

루카의 뒤를 따르려던 오트보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그래, 루카?”

“……그 녀석들 어디로 갔지?”

미리아와 이셀라가 보이지 않았다.

* * *

“아가씨. 그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오트보는 몰라도 루카는 알아서 잘 살아남을 테니까.”

“예.”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두 사람.

루카와 오트보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지만 미리아는 딱히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보다 슬슬 도착할 거 같은데?”

“금지 구역의 중심 말입니까.”

“응. 그나저나 디멘션 코어가 아니었다면 못 찾을 뻔했네. 이렇게 꼭꼭 숨겨두다니.”

그녀의 말에 이셀라는 주변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건데 혹시 이 숲에는 특별한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겁니까?”

“맞아. 말 안 듣는 학생들이 이곳에 들어와도 길을 헤매다가 결국 입구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이 걸려있어. 애초에 교육을 위해 만든 아카데미인데 학생들이 진짜로 위험할 수 있는 곳을 지키는 사람도 없이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

미리아는 이곳에 진짜 신상과 저주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랑 이렇게 탐험을 해보고 싶어서 온 것이다.

‘덤으로 이렇게까지 숨기고 있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스릉!

그때 갑자기 이셀라가 검을 뽑았다.

“이셀라?”

“아가씨. 뒤로 물러서거나 디멘션 코어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그녀의 검에는 이미 달빛이 맺혀있었다.

그것을 본 미리아는 바로 종종걸음으로 이셀라의 뒤까지 갔다.

“왜? 뭐야?”

“살기는 없지만…….”

부스럭!

풀숲이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나무의 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쉽게 들여보내 줄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이셀라의 말이 끝난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텅!

그것과 이셀라가 격돌했지만 그녀는 뒤로 밀리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미리아였다.

“뭐, 뭐야 이거?”

길을 밝히기 위해 만든 빛에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골렘처럼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무언가.

하지만 골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했다. 금속으로 된 몸체에 관절도 존재했으며 겉으로 보기엔 조각상처럼 보였다.

이셀라는 그것의 손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거지만 이게 신상입니까?”

“아, 아니지 않을까. 신상이라기보단 기갑 보병에 가까운 거 같은데.”

“그럼 부숴도 되는 겁니까?”

무덤덤한 그녀의 말에 부술 수 있구나, 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미리아는 곧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어차피 통과하려면 그걸 뚫어야 하는 거 같으니까. 설마 나보고 변상하라고 하겠어?”

쿵!

미리아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이셀라는 기갑 보병을 밀어냈다. 밀려난 기갑 보병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굉음을 냈다.

텅! 텅! 텅!

그리고 자비 없이 휘둘러지는 이셀라의 검, 검과 동체가 부딪치는데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입력된 값 이상의 충격을 감지, 경계 모드에서 살상 모드로 전환됩니다.

“?”

철컥, 캉!

갑자기 기갑 보병의 팔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이셀라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반응해 검을 휘둘러 튕겨냈다.

튕겨낸 칼날이 박힌 나무에서 살벌한 소리가 나더니 무너지며 큰 소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이, 이셀라?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아가씨.”

갑자기 뭔가 분위기가 바뀌자 미리아는 걱정스러운 듯 이셀라를 불렀다.

그에 이셀라는 그녀를 안심시키면서도 기갑 보병에게 집중했다.

‘갑자기 힘이 강해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하지만 처음 맞붙었을 때와는 확실히 달라.’

기갑 보병은 기괴한 움직임으로 일어서더니 눈으로 추정되는 렌즈를 이셀라에게 고정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셀라는 눈싸움을 하듯 그 렌즈를 노려보다가 빠르게 도약했다.

쿵!

다시 한번 격돌한 둘, 하지만 이전과 달리 이셀라 쪽에서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확실히 파워가 더 강해졌다!’

이전엔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지만 이젠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로 강해진 기갑 보병에 이셀라는 약간 당황했다.

위이잉

“?”

그때 기갑 보병의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마력이 모였다. 이셀라는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돌려 그것의 턱을 후려쳤다.

텅! 피융! 콰과광!

턱을 맞고 하늘을 보게 된 기갑 보병이 입으로 광선을 쐈다.

광선에 맞은 나무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불이 붙었다.

“……?”

순간 미리아와 이셀라 두 사람 다 침묵했다. 하지만 곧 상황 파악을 끝냈다.

“아가씨! 디멘션 코어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하지만 이셀라는…….”

“제 걱정은 마십… 큭!”

텅!

기갑 보병이 다시 이셀라에게 붙었다. 이셀라는 그것을 밀어내려 했지만 생각보다 강한 힘에 저항하기 힘들었다.

“아직 낮이라 ‘밤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거야?”

“그건 괜찮지만 여기서 사용하면 아가씨께서 휘말릴 수 있습니다.”

“그럼 들어갈…….”

이셀라의 말에 바로 디멘션 코어 안으로 들어가려던 미리아는 잠시 멈췄다.

“그럼… 그럼 루카와 오트보는?”

“…….”

그 두 사람이 휘말릴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셀라, 그에 미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뒤돌아섰다.

“금방 그 두 사람 찾아서 같이 디멘션 코어 안에 숨을게! 그때까지만 버텨줘!”

미리아가 뒤돌아서서 달려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이마를 밀었다.

“?!”

“태평하군. 우리를 신경 써줄 겨를이 있다니.”

“루, 루카! 오트보!”

조금 엉망인 꼴이지만 루카와 오트보가 도착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못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물러서라.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그래! 안전한 곳으로 가자! 이셀라가 해결해 줄 거야!”

미리아와 이셀라가 그를 말렸지만 루카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내빼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리고 저건 기갑 보병이잖아.”

“맞아. 그것도 본 적 없는 특수한 형태의 기갑 보병. 우리가 상대하기엔…….”

“우리에겐 누구보다 저런 거에 전문인 녀석이 한 명 있잖아.”

루카의 말에 미리아와 이셀라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오트보가 입을 열었다.

“자동 명령을 받고 있는 기갑 보병이니까 강제 정지 명령을 걸어볼게. 그 틈에 배꼽 쪽에 있는 코어를 파괴해.”

“그러도록 하지.”

루카가 대답한 순간 오트보의 머리 위에 심장과 비슷한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동력 마법, 강제 정지 명령

키잉!

마법이 발동되자 이셀라와 맞붙던 기갑 보병이 멈췄고 동시에 루카가 그것을 향해 돌진했다.

“비켜라, 이셀라!”

“!”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따라 옆으로 빠진 이셀라, 그리고 루카의 검이 기갑 보병의 배꼽 쪽에 꽂혔다.

푹! 파직!

스파크와 함께 기갑 보병이 크게 떨렸고 잠시 후 작동을 멈췄다.

기갑 보병이 완전히 정지된 것을 확인한 루카는 검을 뽑았고 그런 그에게 오트보가 다가왔다.

“훌륭한 일격이었어, 트래버스 가문의 차남.”

“……썩 나쁘지 않은 마법이었다, 그레스 가문의 차남.”

“캬! 이걸 받아주다니! 고마워!”

두 사람 다 나름 만족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미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내가 그레스 가문의 사람인 거 몰랐어? 아무리 차남이라고 해도 동력 마법의 기본 정도는 다 배웠다고!”

현대 마법공학의 기초인 동력 마법,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선택받은 몇몇 가문의 사람뿐이다.

그리고 오트보는 그 동력 마법의 본가인 그레스 가문의 사람이다.

“아, 그런데 등록되지 않은 기갑 보병에 마법을 써보는 건 처음이었어. 성공해서 다행이야.”

“……실패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였지?”

“에이, 죽진 않았겠지, 하하.”

루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지만 오트보는 억지로 무시했다.

“……네가 나서지 않아도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감사 인사는 됐다.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니.”

물론 루카도 이셀라의 눈에서 튀는 불똥을 억지로 무시했고 말이다.

“흠, 이거 큰일이군요. 적당히 위험할 때 나서려고 했는데 설마 기갑 보병을 파괴할 줄이야.”

“?”

“당신은…….”

그때 숲의 어둠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를 본 루카와 이셀라는 경직했다.

“외출 금지를 당한 상태에서 이런 사고를 치다니, 각오는 되었습니까? 루카 학생.”

루카와 이셀라가 듣는 검술 수업의 교사, 크리피 모스토가 어째서인지 이곳에 있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