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요즘 학생들은 너무 용감하군요. 금지 구역에 이렇게 당당히 들어오다니.”
크리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지한 기갑 보병에게 다가가 그것을 이리저리 살폈다.
“거기에 학생들이 접근하면 적당히 위협해서 쫓아 보내도록 둔 기갑보병까지 이렇게 부수다니. 그냥 넘어가긴 힘들겠군요.”
“칼날까지 꺼내서 학생을 죽이려고 한 기갑 보병을 부순 게 저희 문제인가요? 오히려 그 기갑 보병이 아카데미의 재산이라면 그것 때문에 죽을 뻔한 저희가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거 같은데요?”
“칼날……?”
미리아의 말에 크리피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부러진 나무에 박힌 칼날을 발견했다.
“으음?!”
그리고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뭐, 뭐죠? 기갑 보병은 살상 모드가 아니면 절대 칼날을 꺼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기갑 보병 내부에 있는 마법을 확인하면 무엇 때문에 살상 모드로 전환되었는지 알 수 있지만 크리피는 검술 교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장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흠! 그럼 그건 제가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여러분 모두 이곳에서 나가도록 하세요.”
“예?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가라고요?”
“그럼 안 나가고 여기서 뭘 할 생각인가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 크리피, 그에 미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바로 앞에 금지 구역의 중심이 있잖아요! 거기까지는 보고 나가야죠!”
“중심……? 아~ 그렇군요. 확실히. 용케 여기까지 왔군요.”
중심이라는 말에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확인한 크리피, 그는 감탄하며 루카와 친구들을 보았다.
“어차피 기갑 보병을 보았으니 나중에 이야기를 해주겠지만…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금지 구역의 비밀을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지, 진짜요?!”
“예. 따라오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는 크리피, 루카와 친구들을 들뜬 기색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몇 분 걷지 않아 숲을 나온 그들은 입을 쩍 벌렸다.
“거기 출력 확인해 봐.”
“조금 부족한 거 같은데. 제대로 마법진 새겨진 거 맞아?”
“아오, 그럼 또 재조립해야 해?”
상급생으로 추정되는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수십 개의 기갑 보병이 나열되어 있는 공장.
“이게 여러분이 찾던 금지 구역의 비밀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크리피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금지 구역은…….”
“예. 기갑 보병 연구 구역입니다. 기밀 유지 및 안전을 위해 이렇게 숨겨둔 거죠.”
“그럼 저 숲에 길을 잃게 하는 마법이 걸린 것도…….”
“예. 길을 잃은 학생이나 여러분처럼 모험심이 강한 학생들이 이곳에 오는 걸 막기 위해 해둔 거죠.”
“…….”
미리아는 실망한 듯했으나 오트보는 꽤 흥미로운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흠…….”
루카는 주변을 둘러보며 폰을 꺼냈다.
‘이런 게 왜 1년 만에 사라진 거지?’
데몬즈가 테러를 해서 여기가 사라졌다, 라고 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이유다.
‘이런 시설이 있다고 해서 파괴할 이유는 없을 텐데?’
기갑 보병에 대한 연구는 데몬즈에서도 하고 있다. 굳이 이곳을 견제해야 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닐 터.
아니, 견제를 한다고 해도 대놓고 이곳을 전부 없앨 정도로 심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연구한 정보를 빼내는 게 더 이득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갑 보병이 기밀이라고 하지만 이런 곳에 꽁꽁 숨길 필요가 있나?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
[에르난 아카데미의 전설 - 피아 숲의 신상]
- ???
- ???
- ???
- ???
- ???
* 해당 힌트 관련 정보 입력 가능 회수 : 10
루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피아 숲의 신상에 관한 힌트를 보았다.
‘일단 알아낸 정보를 넣어봐?’
고민하던 그는 ‘아카데미에서 숨기고 있는 기갑 보병 시설’이라고 입력해 보았다.
-올바른 정보를 입력하였습니다. 힌트가 갱신됩니다.
‘맞았다!’
루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힌트를 보았다.
[에르난 아카데미의 전설 - 피아 숲의 신상]
- ???
- 아카데미는 피아 숲 금지 구역에 기갑 보병 시설을 숨겨두었다.
- ???
- ???
- ???
* 해당 힌트 관련 정보 입력 가능 회수 : 9
‘……아, 이런 식이야?’
이전 힌트가 퀘스트처럼 일정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었다면 힌트 조각모음은 추리게임처럼 단서를 조합해야 하는 모양이다.
‘하… 일단 좋아. 나중에 방에 가서 좀 생각해 봐야겠어.’
루카가 생각을 접을 때 갑자기 휘파람 소리와 함께 휘슬이 그의 어깨에 날아와 앉았다.
삐익!
“?”
루카는 의아한 표정으로 휘슬을 보았다. 휘슬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이리저리 몸짓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삐익!
그의 말에 휘슬은 바로 다시 어딘가로 날아갔다. 동시에 강한 탈력감이 그를 덮쳤다.
“윽!”
풀썩!
“루카?”
실제로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 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오트보가 그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바로 달려왔다.
‘젠장… 의식이…….’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 루카는 쥐어짜듯 말했다.
“벨라에게… 그때 그 약을…….”
“루카? 루카! 정신 차려!”
그대로 루카는 기절했다.
* * *
“흑흑, 도련님. 허약하지 않으신 분이 어쩌다가 이렇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기숙사의 침실이었다. 옆에서는 벨라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도련님! 일어나셨군요!”
꽈악!
벨라는 눈을 번쩍 뜨고는 갑자기 그를 꽉 껴안았다.
‘부드러워.’
루카는 이명현의 삶을 포함해서 처음 겪는 여자의 포옹에 순간 멍해졌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놔, 놔.”
“도련님… 살아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잖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데?”
루카의 물음에 벨라는 손가락 세 개를 폈다.
“3일?”
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3주?”
벨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서, 설마 3달?”
루카는 아찔함을 느끼며 물었고 벨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루카는 묻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3시간?”
“네. 정확히는 제가 소식을 듣고 와서 도련님에게 약을 먹이고 세 시간 만에 일어나셨어요.”
“그냥 말로 해. 헷갈리게 하지 말고.”
루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도련님! 설마 몸이 아직 안 좋으신 건가요?”
“……아니. 입에 남아있는 약 냄새가 너무 역해서.”
과연 걸레 짠 물, 끔찍한 맛이다.
루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애들은?”
“제가 올 때까지 도련님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트보 도련님이 제발 그때 그 약을 먹여달라고 사정을 하시더라고요.”
“허, 성실한 녀석.”
루카는 피식 웃은 다음 침대맡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배를 쓰다듬었다.
“배고파. 간식이라도 좀 가지고 와줘.”
“금방 수프를 만들어 올게요!”
벨라가 나가자마자 루카는 폰을 꺼냈다. 힌트 조각모음에 정보를 넣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알림이 떠 있었다.
-조각모음 중인 힌트가 제거되었습니다.
“……뭔 개소리야.”
당황한 루카는 바로 피아 숲 힌트를 열어보았다.
[에르난 아카데미의 전설 - 피아 숲의 신상](이 힌트는 제거되었습니다.)
- ???
- 아카데미는 피아 숲 금지 구역에 기갑 보병 시설을 숨겨두었다.
- ???
- ???
- ???
* 해당 힌트 관련 정보 입력 가능 회수 : 9
“어어?!”
말 그대로 사라진 힌트,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 잠깐. 이게 뭐야……?’
그런데 그의 눈에 또 다른 알림이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새가 진화 중입니다. 관련 어플리케이션이 생성됩니다.
“뭐?”
루카는 바로 어플을 찾아보았다.
[하늘새 성장일기]
-이 어플리케이션은 하늘새의 성장을 기록합니다.
-하늘새는 특수한 에너지를 흡수할 때 성장합니다.
-현재 하늘새는 1단계로 진화 중입니다.
[휘슬]
종족 : 하늘새
성장치 : 1단계(진화 중)
사용 가능한 하늘의 힘 : 번개
총평 : 아직 성장 중입니다. 두드러진 특징이 없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키워주세요
“음……?”
루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정황상 휘슬이 금지 구역의 중심에서 내 생명력까지 이용해 뭔가를 했고 그거 때문에 무슨 진화를 해서 이런 게 생긴 건가?’
여기서 생기는 걱정은 단 하나.
‘설마 그 공장이 폭발하지는 않았겠지?’
휘슬이 뭔가를 잘못 건드려서 원작처럼 그 공장이 사라지진 않았나, 살짝 걱정이 되었다.
‘조용한 거 보면 별일 없는 거 같긴 한데.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무슨 일이 있었다면 벨라가 말해 줬을 것이다.
“도련님~ 따뜻한 양파 수프에요~”
“고마워.”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보아하니 휘슬은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이야기를 해야겠다.
* * *
“후… 루카 괜찮겠지?”
“고작 그 정도의 힘을 썼다고 쓰러질 남자는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미리아를 위로하는 이셀라, 하지만 미리아는 조금 답답한 얼굴이었다.
“몸도 안 좋은데 내가 괜히 탐험하자고 해서 무리를 한 걸까?”
“제가 몇 번 싸워봐서 아는데 그렇게 쉽게 쓰러질 사람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상한 일에 엮였다고 들었어. 학생이 세 명이나 죽는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몸이 안 좋아졌을 수도 있잖아.”
미리아는 이미 루카가 어떠한 일에 연루된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학생이 세 명이나 죽은 것도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그에게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줄 겸 그녀가 기대하던 청춘을 즐겨볼 겸 아카데미 전설 탐험을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약해질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이셀라. 너 루카에 대해 잘 알아?”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아니. 그냥. 뭔가 되게 잘 안다는 듯이 말해서.”
“그, 그게…….”
쩔쩔매는 이셀라를 보며 미리아는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그보다 슬슬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오트보는 어디에 있지?”
“그 녀석은 다른 교사에게 불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 미리아 필레! 찾았다!”
“?”
그때 누군가가 그녀들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누구냐!”
이셀라는 바로 경계하며 미리아의 앞에 섰다.
“아~ 미안. 하보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설마 안 올 줄은 몰랐거든.”
청량한 미소년, 이라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리는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테도르 파티겔이야. 잘 부탁해.”
“……!”
에르난 제국의 경제를 책임지는 파티겔 공작가의 5남, 테도르 파티겔이었다.
21화
에르난 아카데미의 학생 수첩에는 간단한 sns 기능이 있다.
통신, 메시지 전달 정도만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용한 물건이다.
-오늘 편한 시간에 제 사무실로 와주십시오.
“흠…….”
크리피의 문자 메시지였다. 연락이 오리라 예상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걱정은 되었다.
‘휘슬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어플리케이션의 변화를 봤을 때 하늘새인 휘슬이 무슨 짓을 한 건 분명하다. 다만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
‘아무 일 없었다고 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수습할 수 있을 정도의 사고만 쳐다오.’
휘슬이 하늘새로서의 힘을 각성하는 것까지는 좋은 일이다. 그러니 그것을 상회할 정도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저번 제안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도 못했는데 또 오게 되다니.’
검술을 가르쳐주겠다는 크리피의 제안에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그의 사무실 앞에 서게 되었다.
루카는 약간의 어색함을 느끼며 저번처럼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오시죠.”
그때와 똑같은 반응, 루카는 문을 열고 들어가 크리피의 반응을 살폈다.
“일찍 오셨군요.”
평소와 똑같은 태도, 어쩌면 휘슬이 생각보다 큰 사고를 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루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차를 준비할 테니.”
이번에는 차를 준비한 모양이다.
크리피는 찬장에 가서 홍차 세트를 가지고 와 세팅했다.
“요즘은 참 편리한 물품들이 많군요. 알아서 차를 끓이는 찻주전자라니.”
찻잎과 물을 넣으면 자동으로 차를 끓여주는 찻주전자, 귀족들에게는 보편화된 마도구다.
차는 직접 우려내야 맛있다고 하는 소수파도 있지만 요즘은 대부분 이 마도구를 사용한다.
‘판타지 세계관이라고는 해도 인터넷 없는 것만 빼면 사실상 생활수준은 비슷하군. 하층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변방의 가난한 지역은 몰라도 이런 대도시 부근은 그냥 지구에서 해외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발전되어 있다.
자동 마차나 지금 사용하는 찻주전자뿐만이 아니라 무거운 물건도 쉽게 옮겨주는 부유 선반, 먼지흡수와 물질압축 기능이 달린 쓰레기통, 거기에 깨끗한 화장실까지 없는 게 없다.
몇몇 부분에서는 오히려 현대의 과학보다 뛰어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없지. 그게 제일 중요한데.’
종종 벽돌이 된 폰을 볼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인터넷을 만들고 싶군.’
루카가 가능성 없는 망상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 차를 따라준 크리피가 입을 열었다.
“몸에 이상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기갑 보병을 파괴하느라 무리를 한 탓에 마력 탈진 증상을 보였던 듯하군요.”
“예. 의료 마법사도 그런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 일이 징계를 받아 마땅한 일인 것을 알고 있겠지요.”
루카는 잠깐 경직했다.
휘슬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 걱정하느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학교 기물을 파손한 것이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리아가 말했듯 기갑 보병이 칼날까지 꺼내며 위협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막았을 뿐이고요.”
“확인 결과 기갑 보병이 살상 모드로 전환된 건 일정량 이상의 충격을 받아서 라더군요. 기갑 보병의 모드를 전환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건 대단하지만 얌전히 제압당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아예 금지 구역에 안 들어갔으면 좋았을 거고요.”
정론이다. 애초에 금지 구역에 들어간 게 잘못이니까.
루카는 침묵했고 크리피는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애초에 아카데미는 금지 구역에서 생기는 일로 학생에게 처벌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금지 구역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고 약속만 하면 말입니다.”
“……그게 지금까지 금지 구역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였군요.”
“예. 여러분처럼 패기 넘치는 학생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테니까요.”
그것이 지금까지 금지 구역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였다.
“구태여 금지 구역으로 정해진 그곳에 온갖 장애물을 뚫고 비밀을 밝혀낸 모험심 넘치는 학생들은 전부 자신의 후배들도 이 모험을 즐기기를 바랐던 거죠. 물론 이런 허무한 결말을 자기만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건 그들에게 꽤 좋은 추억이었을 겁니다.”
낭만 있는 어조로 말하는 크리피를 보며 루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빌미로 검술을 배우게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후후,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루카 학생 성격상 그렇게 한다면 제대로 제 말을 들을 리가 없을 테니.”
크리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찻잔을 들었다.
“차나 한잔하고 가시죠. 아, 혹시나 다른 교사분들이 물으면 제가 설교했다고 해주시고.”
“제 목표는 송곳니의 재림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크리피, 루카는 입술을 비틀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까?”
“그야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기본기를 단련하는 것은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크리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양손을 모았다.
“빈말이 아닙니다. 첫 수업 때 보여주었던 이셀라 학생과의 대련에서 보여준 기본기는 오랜 수련을 쌓은 상위 기사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훌륭한 완성도였습니다. 민감한 말일 수 있지만 기본기가 그렇게 완성된 것은 아마 가문에서 루카 학생에게 비전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이다. 루카 트래버스는 트래버스 가문의 비전 검술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해봐야 가문의 기사들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과 형인 와일드 트래버스가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따라 하는 정도.
“와일드 트래버스 학생을 멀리서 본 적이 있는데 골격이 루카 학생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더군요. 트래버스 가문의 비전 검술은 아마 그런 골격에 맞는 거칠고 파괴적인 부류일 겁니다. 그리고 또 민감한 말일 수 있지만 루카 학생은 그런 검술에 맞지 않은 골격입니다.”
크리피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갑자기 루카의 손목을 잡았다. 루카는 움찔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크리피는 그의 손목을 돌려 손바닥을 보았다.
“슬쩍 보긴 했지만 역시나군요.”
벨라가 정성스럽게 치료했지만 여전히 상처투성이인 루카의 손.
크리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아마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트래버스 가문의 검술에 맞지 않은 당신의 육체 탓에 주변에서 당신을 그저 와일드 트래버스의 재능에 밀린 차남 정도로 생각했겠지요. 당신은 그저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으려 한 것뿐이었습니다.”
“…….”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전장을 휩쓸 무렵 당신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와 검을 겨뤄본 적도 있고요. 그렇기에 감히 트래버스 가문의 검술을 당신보다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피는 루카와 눈을 마주쳤다.
“트래버스 가문의 검술은 당신에게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당신에게 맞는 검술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마주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루카, 조금은 노기 서린 목소리였다.
‘루카 트래버스’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희 같은 무인이 의견을 관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루카의 손목을 놓은 크리피는 방긋 웃었다.
“자리를 옮길까요?”
* * *
“아무리 그래도 교사와 학생의 대련인데 진심으로 할 수는 없겠죠.”
제3 기초 검술 훈련장.
휴일이라 아무도 없는 그곳에 루카와 크리피가 서 있었다.
크리피는 막대기로 자신의 주변에 원을 그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원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
“후후, 너무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시죠. 전 이래 봬도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였던 사람이니까.”
루카의 침묵에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생각한 크리피.
하지만 루카는 흥분을 숨기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였다.
‘이 에피소드를 내가 겪게 되다니!’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크리피와의 결투.
전에도 말했지만 주인공이 겪은 에피소드였다.
처음으로 겪는 원작에서 나온 이벤트다. 애독자였던 루카가 흥분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크리피는 방긋 웃었다.
“아, 그리고 당신의 그 찌릿찌릿한 힘을 사용해도 됩니다.”
“!”
언제 알아본 것일까, 라는 생각보다 그 정도로 자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찌릿찌릿이라고 한 걸 보면 번개의 힘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인데. 마력 없이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워록 같은 전투 마법사들과 한 번이라도 싸워봤다면 번개의 힘을 무시하지 못할 텐데 저렇게 여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전장의 악몽이라 불릴 만큼 많은 싸움을 경험한 크리피라면 분명 어딘가에서 한 번 정도는 경험이 있을 텐데 말이다.
“대신 훈련용 목검은 마력을 견디지 못하니 제가 평소에 사용하는 검을 쓰겠습니다. 특수한 효과는 없지만 마력으로 코팅되어서 튼튼하거든요. 루카 학생도 평소에 사용하는 검을 써도 됩니다.”
“……예.”
“후후, 대련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들뜬 표정으로 검을 뽑는 크리피, 그에 대응하듯 칼날을 꺼내는 루카.
발검 후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어색함에 생기는 침묵이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전투에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하며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귀족의 관점에서는 허술하겠지만 전장에서는 이런 결투를 할 때 보통 동전을 던집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말하며 동전을 꺼냈다.
“하늘로 던져진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결투가 시작되죠.”
팅!
동전이 하늘로 튕겨져 나갔다. 깔끔하게 튕겨진 동전은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툭, 휭!
동전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루카가 앞으로 돌진했다.
챙!
“!”
-첫 일격은 가볍게 튕겨져 나갔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크리피를 날려버리지 못했다.
원작에 나온 묘사 그대로였다. 분명 완벽한 일격이었는데 크리피의 검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제법 묵직하군요. 하지만 그뿐입니까?”
가볍게 도발하는 크리피. 루카는 순간 울컥했다.
“후우.”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해볼 만해.’
호승심이 일었다.
주인공도 해본 일을 그라고 못할 게 뭐인가.
심지어 지금의 루카는 신에게 받은 치트키를 사용하지 않은 주인공보다 강한 상태다.
‘할 수 있어!’
마음을 다잡으며 루카는 크리피를 향해 도약했다.
캉!
다시 한번 가볍게 흘려진 루카의 검. 하지만 루카는 바로 자세를 바꾸며 다른 방향에서 크리피를 공격했다.
캉! 캉! 캉!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이어지는 세 번의 검격, 한 방 한 방이 치명적인 공격이었지만 크리피는 물 흐르듯 부드럽게 공격을 흘려냈다.
“확실히 훌륭한 기본기입니다. 하지만 조금 뻣뻣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군요.”
“…….”
상대가 교사인지라 차마 닥치라는 말은 하지 못하는 루카, 하지만 크리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이 오르긴 했다.
파지직!
“호오.”
루카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개방하는 번개의 힘.
‘이걸 적이 아니라 아군이 될 사람에게 먼저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루카는 광대를 살짝 떨었다.
‘역시 저 사람, 짜증 나.’
주인공이 기를 쓰고 아카데미에서 쫓아낸 이유, 크리피의 도발은 굉장히 짜증 났다.
“다쳐도 모릅니다. 크리피 교사.”
“후후, 한번 해보시죠. 루카 학생.”
루카는 번개의 힘을 검에 담고 심호흡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다시 뜬 순간.
콰직!
에르난 아카데미 훈련장에 벼락이 쳤다.
22화
루카는 차오르는 고양감에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넘치는 힘, 가벼워진 몸, 무엇보다 이상하리만치 또렷한 시야.
원래도 시력에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세계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 인간을 이겨야겠지.’
솔직히 이 힘이 있다면 크리피의 도움 없이도 형인 와일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냥 힘 테스트를 하는 느낌으로. 위험하면 마력을 쓰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루카는 검을 양손으로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크리피를 향해 도약했다.
팟!
그야말로 번개와 같은 속도로 크리피 앞에 나타난 루카,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 것 같은 속도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본능처럼 크리피의 빈틈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
번개와 같은 그의 검을 흘려낸 크리피, 루카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다른 방향에서 그를 공격했다.
파지직!
번갯불이 튀고 루카의 몸이 잔상을 만들며 크리피를 사방에서 공격했다.
하지만 크리피는 그 모든 공격을 피하고 흘려내면서도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호오,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힘이군요.”
“…….”
사람 열받게 하는 것도 완벽했다.
루카는 이를 뿌득 갈며 번개의 힘을 더욱 강하게 발산했다.
검 끝에 모아지는 번개를 보며 크리피는 자세를 취했다.
“대단한 힘인 건 맞지만… 아직 미숙하군요.”
휘잉!
바람을 가르며 루카의 검이 크리피를 향해 날아갔다.
막아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번개의 일격, 그 앞에서 크리피는 초연했다.
캉!
“!”
번개가 크리피에게 닿기 직전 휘어지듯 바닥에 내리꽂혔다. 돌진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루카의 몸이 기울었고 그 틈을 타 크리피가 멱살을 잡았다.
쾅!
“크윽!”
“어이쿠, 괜찮습니까?”
그대로 반대편 바닥에 꽂힌 루카, 크리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괘,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루카 학생의 힘이 강맹해서 말입니다. 다치지 않게 하려면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
루카는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크리피의 뒤를 보고는 숨을 참았다.
파직! 파지직!
아직도 남은 번개의 힘의 잔재, 그것에 의해 크리피가 그려놓은 원과 그 뒤를 제외한 모든 곳이 처참한 폐허가 되어있었다.
‘이게… 번개의 힘……?’
경이로울 정도로 강한 힘,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워지는 사실이 있었다.
‘크리피는 이걸 마력 없이 상대했다고? 그리고 그런 크리피를 주인공이 박살 냈다고?’
거기에 하나 더.
번개의 힘으로 강화된 시력 덕분에 알 수 있었다.
크리피가 그를 제압하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마력 없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마력은 만능의 힘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게 해주는 만능의 힘.
그것이 있기에 인간은 이종족들이나 몬스터들과 싸워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사내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런 초월한 힘을 상대할 수 있다니.
“생각이 많아진 눈빛이군요. 어떻게 마력 없이 이런 강대한 힘을 상대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 모양입니다.”
“……그 검의 힘입니까?”
“후후, 이 검에 마법이 걸린 건 사실이지만 이번 전투에서 그 힘을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번개의 힘 때문에 검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마법 정도만 발동되었지요.”
크리피는 멋지게 검을 한 바퀴 돌리고 검례의 자세를 취했다.
“제가 마력 없이 루카 학생을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루카 학생이 그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 아마 그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마력을 써야 했을 겁니다.”
크리피는 검례 자세에서 천천히 칼끝을 내려 루카를 겨누었다.
“다른 하나는 루카 학생이 제 경험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전장에서 검사인 제가 마력 없이 마력을 가진 사람들과 싸울 일이 얼마나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
루카는 침묵했다.
그를 살짝 무시한 것은 사실이다. 원작에서는 결국 마력을 사용하지 않다가 주인공에게 패배했으니까.
“그럼 이것으로 제 능력을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칼끝을 거둔 크리피는 그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전장의 악몽 크리피 모스토, 감히 당신에게 말합니다. 제가 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루카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내민 그의 손을 잡았다.
“……저의 패배입니다.”
그렇게 루카는 크리피 모스토의 제자가 되었다.
* * *
루카를 돌려보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크리피는 찬장에서 술을 가져와 의자에 앉았다.
‘후후, 죽을 뻔했군요.’
그의 팔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까지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잘하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저도 아직 멀었군요. 호승심을 참지 못하고 도박수를 쓰다니 말입니다.’
크리피는 술병째로 술을 들이켜고는 한숨과 함께 입술을 닦았다.
‘과연 트래버스 가문. 차남에 불과한 루카 학생에게도 이런 엄청난 힘을 숨겨두다니. 놀랍군요.’
착각이지만 트래버스 가문에 대한 경외심이 높아졌다.
크리피는 다시 술을 들이켠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긴. 저런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송곳니의 재림을 이기기는 무리일 테니 상관없다는 거겠죠.’
송곳니의 재림 와일드 트래버스.
크리피 또한 그 소문을 익히 들어왔고 실제로 한 번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격이 다르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으니. 10년만 지나도 분명 대륙 제일의 검사가 될 재능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세대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루카 학생이라면 그를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크리피는 루카를 일으켜 세울 때 잡았던 그의 손을 떠올렸다.
곱상한 외모와 다르게 굉장히 투박한 손.
수없이 많은 수련의 흔적이 느껴졌다.
게다가, 단순히 노력한다고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루카에겐 그 노력을 체화할 수 있는 재능 또한 있었다. 단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을 뿐.
‘그의 노력과 제 지도가 있다면 불가능은 없겠죠.’
크리피는 피식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노트를 꺼내 무언가 긁적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사무실 문이 부서지듯 벌컥 열렸다.
쾅!
“어이, 애송이. 잘 지냈냐?”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크리피의 눈이 동그래졌다. 크리피는 한숨을 푹 쉰 뒤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스승님.”
“어쩐 일이긴. 이제 슬슬 네가 같잖은 권력욕 버리고 무사수행을 떠날 생각이 들었나 싶어서 왔지.”
“…….”
스승님이라 불린 존재의 말에 크리피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을 대답이라 여겼는지 크리피의 스승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흥. 됐다. 욕심 덕분에 그 경지에 오른 놈이니 그게 한계겠지.”
“스승님이 아무리 뭐라고 하셔도 제 대답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
그때 크리피가 입을 열었다. 그는 루카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제는 스승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뭐야 애송이. 너 설마 제자를…….”
크리피의 스승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씩 웃었다.
“흥, 그래도 얼마 전보다는 나아 보이는군. 잘 해봐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크리피 본인은 몰랐을 것이다.
이 타이밍에 루카를 제자로 삼은 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말이다.
* * *
크리피와의 결투를 끝내고 돌아온 루카는 침대에 누워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직!
약한 스파크가 튀며 번개의 힘이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라.’
번개의 힘을 제대로 쓰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라는 말은 조금 의아했다.
‘힘을 제어한다는 게 뭐지?’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과 몸 안에 있는 마력 회로 덕분에 루카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번개의 힘 또한 그냥 쓰려고 하면 쓸 수 있었다.
그런데 크리피는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고 했다.
‘힘의 제어랑 마력의 제어는 다른 개념인가?’
의문은 깊어지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쯧, 그냥 내일 크리피를 만나서 물어볼 수밖에 없나.’
어찌 되었건 간에 이제 크리피는 루카의 스승이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였다.
“흠흠. 힘을 제어하고 싶은 거야?”
“……?”
여자 목소리긴 한데 벨라의 것은 아니었다. 대략 루카 또래 정도 될 것 같은 목소리.
벨라가 ‘도련님, 저 몰래 기숙사에 여자를 들이시다니… 이 벨라는 도련님의 성장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 같아요!’라고 하기 전에 목소리의 출처를 알아야 했다.
“음…….”
루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방에 있는 것은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휘슬뿐.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한 루카는 고민 끝에 반드시 대답을 하게 되는 마법의 말을 하기로 했다.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었어.”
“?!”
대답이 들려온 곳은 휘슬 쪽, 아니 휘슬이 대답을 하고 있었다.
“휘슬?”
“흥! 고귀한 하늘새인 본좌에게 그런 한심한 이름을 붙이다니. 눈물이 다 나잖아.”
“허.”
루카는 헛웃음을 흘렸다.
모양새가 웃겨서였다.
병아리보다 조금 큰 정도의 조막만 한 덩치. 짧은 날개.
거기에 귀여운 여자 목소리로, 저런 무협지 속 아저씨나 쓸 것 같은 단어로 말하는 새라니.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잠깐만. 혹시?’
왜 휘슬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나, 라는 것보다 먼저 무언가가 떠올랐다.
루카는 바로 폰부터 꺼내보았다.
[하늘새 성장 일기]
[휘슬]
종족 : 하늘새
성장치 : 1단계
사용 가능한 하늘의 힘 : 번개
총평 : 1단계 성장을 마쳤습니다. 이제 휘슬은 전생의 기억을 조금 되찾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생명력이 가득한 것을 먹이면 더 많은 과거의 힘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어플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용이 바뀌어져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는다라. 그래서 저런 말투인 건가.’
루카가 폰을 보자 휘슬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또 그 이상한 판을 보고 있는 거야? 그런 것보다 본좌에게 집중해!”
“?”
이상한 판이라는 말에 루카는 눈을 꿈뻑였다.
그리고 폰과 휘슬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너, 이게 보이는 건가?”
“그 이상한 판을 말하는 거라면 당연하지.”
“허.”
루카는 감탄했다.
‘신이 만든 것도 볼 수 있다니.’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기는커녕 쳐다보고 있다는 것 자체도 느끼지 못하는 폰을 보다니.
확실히 보통 생물은 아닌 듯하다.
‘원작 설정에 나오지 않은 특성이 있는 건가?’
루카가 하늘새의 힘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 때 휘슬이 파라락 날아 그의 어깨에 앉았다.
“조금 전에 힘을 제어하고 싶다는 갈망이 느껴졌어. 맞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냐?”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감정은 느낄 수 있어. 네가 떠올린 갈망의 감정은 예전 주인들도 내비쳤던 감정이니까 알 수 있지.”
휘슬은 부리로 자신의 몸을 다듬으며 말했다.
“‘그것’의 심장을 소화하느라 생명력을 조금 빌린 것만으로 쓰러지는 주인은 본좌도 곤란하니 성장을 해줘야겠어.”
“그것? 아아.”
그것이라는 말에 루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이해했다.
‘피아 숲의 신상 이야기겠군. 그런데 그게 대체 뭔데 심장이 있는 거지? 설마 제국의 엄청난 기밀에 손을 댄 건가?’
그런 루카의 생각을 읽은 듯 휘슬은 부리를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 그건 어차피 작동하지 않는 고철에 불과하니까. 오히려 억지로 작동시키면 폭발할 시한폭탄을 해결해 준 거라고.”
“시한… 폭탄……?”
시한폭탄이라는 말에 루카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하필 피아 숲에 있는 기갑 보병 연구소, 1년 후에 생긴 공터, 그리고 데몬즈의 흔적.’
그 순간,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띠링!
-조건을 만족하여 새로운 어플리케이션 ‘비하인드 스토리’가 생성됩니다.
-‘피아 숲의 신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해방하였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해방 특전이 제공됩니다.
23화
[비하인드 스토리]
[피아 숲의 신상]
비밀 등급 : 5
피아 숲에는 고대의 기갑 거신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에르난 제국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카데미의 기갑 보병 연구소를 세우고 특별한 몇몇 연구원만이 기갑 거신병을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가 데몬즈에게 넘어갔고 데몬즈의 첩보원이 기갑 거신병을 훔치려고 하다가 코어가 폭발했습니다.
기갑 거신병 코어의 폭발 가능성을 염두에 둔 에르난 제국의 보호 마법으로 주변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 몇 명과 연구원, 그리고 데몬즈의 첩보원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이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군요.
기갑 거신병의 심장을 하늘새 휘슬이 먹었으니까요.
‘재밌네. 이런 방식인가.’
루카는 슬슬 이 패턴에 익숙해졌다.
원작에서 적당히 넘어갔던 배경 설정 같은 것들을 파헤치면 무언가 선물을 주는 방식.
이것 또한 게임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신은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찾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 같네.’
신이 루카에게 바란 것은 세 가지.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막는 것과 맥거핀처럼 사라진 캐릭터들의 행방을 찾는 것,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이었다.
거기서 이 세계에서의 삶을 즐기는 방식으로 자신이 미처 밝히지 못한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 주는 것, 그것을 제일 선호하는 느낌이다.
‘힌트 조각모음이나 지금의 경우만 봐도 어떻게든 풀어내지 못한 스토리를 찾아달라고 하는 거 같긴 해.’
루카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을 때 다시 휘슬이 말을 걸었다.
“아무튼 대충 이해한 거 같으니까 계속 말하자면, 번개의 힘은 하늘의 힘 중에서 가장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제어하기 어려워. 당장은 주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만큼 다룰 수 없어. 억지로 제어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주인의 몸을 해치겠지.”
“해결책은 있나?”
“물론이지. 제일 좋은 건 본좌와 합체하면 돼.”
당당한 휘슬의 말에 루카는 잠시 침묵했다가 눈가를 살짝 떨었다.
“합체?”
“그래. 본좌와 주인이 합체하면 굳이 주인이 번개의 힘을 제어할 필요가 없어. 본좌가 제어하면 되니까.”
“그… 합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면 좋겠다만.”
루카의 조금 떨떠름한 반응에 휘슬은 그제야 깨달은 듯 부리를 흔들었다.
“합체라고 해서 진짜로 본좌와 주인이 하나가 되는 건 아니야. 우리 둘의 정신을 완전히 동조시키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본좌의 영혼이 주인을 지키는 날개가 된다.”
“날개……!”
루카는 바로 에테르나의 날개를 떠올렸다.
‘천익! 주인공도 상대하기 힘들었던 그 천익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그럼 바랄 게 없지!’
앞으로 데몬즈와 자주 마주치게 될 텐데, 그때 천익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루카는 들뜬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어떻게 하면 되지?”
“어…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
“……?”
들뜬 마음이 갑자기 식었다.
그의 감정변화를 느낀 듯 휘슬은 황급히 변명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본좌는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라고.”
“그럼 어째서 합체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건 생각이 났으니까.”
루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실망의 감정이 느껴지자 휘슬은 부리를 딱딱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래도 본좌가 마음만 먹으면 위험할 때 강제로 발동할 수 있어!”
“……강제로?”
“응! 대신 강제로 동조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대가?”
“응. 잠깐 사용하는 거라면 며칠 못 움직이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오래 사용하면 불구가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본좌가 연결을 끊겠지만.”
며칠 못 움직이는 대신 잠깐이라도 천익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페널티 없이 사용하는 게 제일이겠지. 얼른 휘슬의 기억을 되찾아줘야겠는데.’
일기에 따르면 생명력이 강한 것을 더 먹이면 된다고 했다.
‘굳이 그런 걸 찾으려 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까지 하던 대로 맥거핀을 찾다 보면 알아서 얻어질 거야.’
아카데미에 있는 지금 무리해서 휘슬을 성장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 더. 번개, 아니 하늘의 힘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있긴 해.”
“왜 그걸 먼저 말하지 않은 거지?”
“희미한 기억으로 본좌의 이전 주인들은 이걸 별로 안 좋아했거든.”
휘슬은 그렇게 말하며 부리를 그의 목에 댔다.
찌리릿!
“?!”
순간 번개의 힘이 온몸을 관통했다. 찌릿한 그 감각에 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하늘의 힘을 본좌와 주고받으며 그 힘을 느끼는 게 이 힘에 익숙해지는 데 아주 유용해. 다만 인간의 몸으로 그걸 하는 건 상당한 고통이 따르는 모양이야.”
“……과연.”
확실히 이전 주인이란 자들이 싫어할 만했다. 루카도 바로 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저주파 마사지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저릿함이 한 부위가 아니라 전신에 느껴졌다.
그럼에도 루카는 웃었다.
루카 트래버스의 독종 기질이 나온 것이다.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 눈앞에 있는데 고통 따위에 물러설 루카가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나 해야 하지?”
“하루에 30분 정도. 이걸 1년만 반복해도 하늘의 힘을 제어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거야. 덤으로 주인의 신체도 훨씬 강해질 거고.”
“……30분?”
30분이라는 말에 루카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독종인 루카의 정신으로도, 30분이나 겪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정도의 짜릿함과 고통이었으니까.
“아, 걱정하지 마. 바로 30분씩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처음엔 5분씩 3번 정도로 시작해서 조금씩 시간과 횟수를 늘려나가면 돼.”
“……나쁘지 않군.”
그제야 마음을 다 잡은 루카, 어깨 위에 있는 휘슬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뭐해? 시작 안 하고.”
그에 조그마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던 휘슬이 돌연 눈으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각오하라고.”
그리고 부리가 닿는 순간.
찌리릿!
“…으, 으윽!”
그야말로 지옥 같은 15분이었다.
* * *
‘확실히 아침이 다르군.’
다음날 눈을 뜬 루카는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도 건강한 몸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뛰어넘어 활력이 넘친다고 할 정도의 상태였다.
“어때? 하길 잘했지?”
기고만장한 어조로 말하는 휘슬, 하지만 루카는 딱히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군. 그런데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무슨 소리야?”
“예전과 달리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까지처럼 내버려두면 되나?”
보통은 이런 사람 말을 하는 펫이 생기면 같이 붙어 다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휘슬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됐어. 필요할 때 부르면 나타날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렇다면야.”
휘슬은 그대로 창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막 친해질 생각은 없는 건가?’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휘슬의 태도에 루카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수업 들을 준비를 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벨라가 준비한 식사를 하고.
가방을 챙긴 후 수업 장소로 향한다.
‘몇 번을 해도 감회가 새롭군.’
지구에 있을 때, 회사에 다닐 때 종종 하던 생각이었다.
- 다시 학교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똑같은 일, 메마른 사람들, 그저 늙어가기만 하는 하루.
누군가는 과거의 추억으로 살아간다는데, 이렇다 할 추억 하나 없는 그에게는 정말 쉬는 시간에 읽는 소설만이 삶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소설에서 종종 나오는 학창시절의 빛나는 이야기들, 그것들을 생생하게 체험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 오게 되었다. 그러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루카! 몸은 좀 괜찮아?”
“어제 학생수첩으로 말한 것처럼 멀쩡하다.”
가는 길에 오트보를 만나서 수업 구역까지 같이 갔다. 많이 걱정했었지만 멀쩡한 그의 모습을 보니 안도한 모양이다.
“그럼 점심에 봐!”
“그래.”
이제 점심에 만나는 것도 거의 약속한 것과 다름없었다.
“자, 오늘부터는 참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술은 꽤 고난도지만 굉장히 중요한 기술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터득하기를 추천 드립니다. 잘만 익혀두면 활용법도 다양하고 퍼포먼스 또한 뛰어나니까요.”
오늘은 크리피의 기초 검술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이곳에 온 학생들은 모두 검술의 기초는 알고 있지만 대부분 숙달하기 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루카처럼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크리피의 지도에 따라 기초를 다시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럼 루카 학생과 이셀라 학생도 지도 부탁드립니다.”
기초를 마스터 한 루카와 이셀라는 조교 느낌으로 다른 학생들의 검술을 봐주고 있었다.
“흥, 백작가의 차남이랑 평민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기초만 숙달했을 뿐이지 실제로 결투하면 내가 이길 거 같은데?”
첫날 루카와 이셀라의 대련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시기하고 무시하는 부류도 몇 있었다.
그래서 크리피가 미리 못을 박아두었다.
“아, 혹시나 이 두 학생의 실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언제든 결투를 신청해도 괜찮습니다. 제가 증인이 될 거고, 이 두 사람을 이기면 앞으로 제 수업에 나오지 않아도 학점 A+를 드리겠습니다.”
루카와 이셀라를 이길 수 있다면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챙!
“크윽!”
“꽤 정확한 참철이었다. 다만 너무 정확해서 읽기 쉽더군.”
오늘도 결투를 빙자한 대련을 했지만 누구도 루카를 이기지 못했다.
마지막 도전자의 칼날을 베어버린 루카는 가볍게 검을 털고 칼집에 넣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오후에 연습할 학생은 지금 신청해 두십시오.”
수업이 끝나고 루카는 크리피에게 다가갔다.
“크리피… 스, 스승님?”
“교사, 선생 같은 편한 호칭으로 불러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고요.”
“……크리피 선생님. 제 검술은 어떻게 할 겁니까?”
선생님이 그나마 입에 붙었다.
그의 말에 크리피는 후후 웃은 다음 고개를 저었다.
“저도 당장 당신에게 맞는 검술을 가르쳐 드리고 싶지만, 검술이란 게 뚝딱하고 바로 나오는 게 아니잖습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시지요.”
확실히 해주겠다고 한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갑자기 검술이 뚝딱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다.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셀라에게 다가갔다.
슬쩍 보니 다른 학생들의 오후 연습 신청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식당으로 같이 갈 건가?”
“……아니. 오늘은 아가씨께서 따로 갈 곳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 어쩔 수 없군.”
이셀라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신청서를 크리피에게 주고 먼저 훈련장을 떠났다.
루카 또한 훈련장을 떠나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는 오트보가 있었다.
오트보는 루카를 발견하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 여기야!”
“일찍 왔군.”
“미리아는 오늘 일이 있대.”
“이셀라에게 들었다.”
“오늘 학식 엄청 맛있는 거 같은데. 아쉽게 됐어.”
이때 루카는 알지 못했다.
이것이 ‘불사의 황녀’ 스토리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였음을 말이다.
24화
“먼저 가보겠다. 아가씨께서 일이 있다고 하셨으니.”
“그래.”
오늘도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난 이셀라.
루카는 학생 식당으로 가서 오트보를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그냥 바로 오트보에게 가기로 했다.
어째선지 오트보는 항상 늦었기 때문이다.
‘하긴, 나랑 이셀라가 빠른 편이기도 하지.’
루카와 이셀라는 크리피의 조교 노릇을 하며 마무리 연습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얻었기 때문에 오트보와 이셀라보다는 빨리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항상 먼저 식당에 가거나 마법학부 건물로 가서 기다리는 편이었다.
‘이 근처였는데. 어디지?’
마법학부로 가는 길은 항상 이셀라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더니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윽!”
콰당탕!
그때, 앞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킥킥! 앞을 잘 보고 다녔어야지~.”
누군가를 둘러싸고 몇몇 학생들이 웃으며 조롱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다니는 곳이라고 해서 다를 거 없군.’
루카는 혀를 찼다.
혈기 넘치는 학생들이 있는 곳이니 다툼이나 따돌림 같은 게 일어나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마 대상이 되는 사람은 평민일 테니 반항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어디 누가 당했는지 얼굴이나 볼까?’
루카는 슬쩍 사람들 틈으로 바닥에 넘어져 책을 줍고 있는 학생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을 본 순간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트보?”
* * *
“미안 오트보, 오늘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어? 으응! 다음에 봐.”
“응, 다음에 봐~.”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가버린 미리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오트보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미리아는 나 같은 거랑 달리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녀야 하니까.’
오트보는 씁쓸했다.
첫날부터 거하게 사고를 친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미리아가 같이 이야기를 해주지만 막 살갑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루카가 있을 때만 잘 대해주니까.’
마치 루카의 친구인 오트보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지 그냥 오트보에게 잘 대해주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어쩔 수 없어. 나라도 나 같은 사람보다는 루카가 좋으니까.’
똑똑한 것도 아니고 누구라도 감탄할 정도로 잘생긴 것도 아니며 가문에서 좋은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닌 자신보다 루카가 호감이 가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루카는 왜 나 같은 거랑 같이 있어주는 걸까?’
물론 루카도 집안에서의 취급 같은 게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월간 파티피플 잡지에 나올 정도로 인기 있는 사람인지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실력도 뛰어나고.’
반 배정 시험에서도 그렇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현재 듣고 있는 수업 대부분에서 이미 A+급 성적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소문 생각하니까 조금 그러긴 하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긴 하니까. 혹시 그것 때문에 그냥 나랑 같이 있어주는 건가?’
요새 루카에 대해 돌고 있는 흉흉한 소문을 생각하며 오트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런 생각을 하면 뭐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오트보는 책을 챙겨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학생 식당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퍽!
“윽!”
콰당탕!
누군가가 그의 다리를 발로 찼다.
오트보는 화려하게 넘어지며 책을 떨어뜨렸다.
그런 그의 옆을 누군가가 다가와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 앞을 잘 보고 다녔어야지~.”
“그러니까! 한심하게 넘어지는 꼬락서니 하고는.”
“…….”
뒤에서 발로 찼는데 앞을 봐서 어떡하라는 거야? 라고 항의하고 싶은 오트보였지만 그들의 얼굴을 본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S클래스인 헤토프 후작가의 장남 이가르 헤토프, 그리고 도갈 백작가의 장남 페르피 도갈이었다.
두 가문 모두 잘 나가는 마법사 가문이고 두 사람 다 성적이든 주목도든 오트보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야야, 애한테 왜 그래? 암만 S클래스 수업을 못 따라오는 멍청이라지만 덕분에 우리 성적이 좋아지잖아.”
“가문빨로 겨우 S클래스에 비집고 들어온 녀석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계속 설치는 걸 보면 속이 답답하잖아.”
“인정이긴 해~.”
웃고 떠들며 조롱하는 그들에게 오트보는 대꾸하지 않고 떨어진 책을 주웠다. 대꾸해봤자 더 조롱당할 것을 알았다.
“쯧.”
툭!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가르 헤토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그가 줍던 책 하나를 바로 쳐 옆으로 밀어냈다.
오트보는 움찔했지만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멀어진 책에게 다가가 주웠다.
“저 자식이 우릴 무시하나?”
“재미없게. 뭐라도 반응해봐.”
툭! 툭!
그들은 계속 오트보의 몸과 책을 발로 툭툭 쳤지만 오트보는 아무 말 없이 책을 줍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떠나려 했다.
“짜식이, 야. 어디 가!”
툭!
그에 페르피 도갈이 거친 어조로 말하며 오트보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그게 누군가의 몸에 맞았다.
“응? 너 뭐… 어?”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페르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먼저 친 거다.”
텅! 풀썩!
“페, 페르피!”
그의 발차기에 맞은 페르피의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로 정신을 잃은 페르피.
이가르는 당황하며 페르피의 안색을 살폈다.
“허약하군.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
갑작스러운 소란에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하던 오트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
* * *
‘참지 못했군.’
따돌림의 대상이 오트보인 것을 보고 끼어들까 생각했지만 처음엔 참았다.
괜히 끼어들어서 일이 커지면 서로 곤란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책을 발로 차는 것에서 참지 못했다.
-슈웃!
-내, 내 책 가지고 축구하지 마…….
-이명현 시X아. 분위기 잡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우리가 놀아주는데 안 재밌냐?
-하, 하지만…….
-아 X발 기분 개X같네. 너 때문에 기분 나빠졌잖아. 어쩔 거야?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다.
하필 그때랑 비슷하게 맞고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나서버렸다.
‘문제 생기면 결투 한 번 더 하지 뭐.’
점점 사고방식이 루카 트래버스를 닮아가는 그.
루카는 흘끔 오트보를 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그의 얼굴에 루카는 고갯짓했다.
“일단 가지.”
“……응.”
루카와 오트보가 떠나는 길에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어머 쟤 어떡해? 그 소문이 진짜였나 봐!”
“조심해야겠는데. 방금 페르피 날아가는 거 봤어?”
“교사들은 뭐하는 거야? 저런 녀석을 내버려두고.”
그 수군거림을 들으며 오트보는 슬쩍 루카의 얼굴을 보았다.
“…….”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지나가는 학생도 거의 없는 아카데미의 어느 구석, 루카는 주변을 훑고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쩍 오트보를 보았다.
“괜찮나.”
“……응.”
“그럼 됐다.”
솔직히 더 해줄 말이 없었다. 어설프게 위로해줘봤자 더 힘들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루카는 멋쩍게 목을 살짝 긁었다가 뒤돌아섰다.
“그럼 식사나 하러 가지.”
“왜 구해준 거야?”
그 말에 나아가던 루카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괜히 나섰나.’
도와주는 것 또한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참지 못했을 뿐.
그렇다고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루카는 시치미 떼기로 했다.
“무슨 소리지?”
“도와준 거잖아. 그 녀석들한테서.”
“그냥 네게 가는 길에 어떤 녀석이 나를 공격했다. 그래서 되갚아준 것뿐이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루카를 보며 오트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구나. 음. 그래.”
“…….”
“루카. 넌 왜 나랑 같이 다녀주는 거야?”
루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오트보를 보았다.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너도 슬슬 알고 있잖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능한 애라는 거.”
“무능?”
“미리아가 얘기 안 했어? 내가 지금 S클래스 수업 못 따라가는 거.”
금시초문이다. 미리아는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
“모른다. 그런 거에 관심 없기도 하고.”
“하하, 그렇겠지. 넌 잘하고 있으니까.”
“다만 좀 의문이 드는군. 넌 반 배정 시험에서 제대로 S클래스에 배정되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충분한 실력이 있을 텐데?”
반 배정 시험이라는 말에 오트보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 더 흐려졌다.
“그거야 내 장점이 동력 마법뿐이니까.”
“그게 무슨 문제지?”
“동력 마법 외에 다른 건 다 못한다고. 반 배정 시험 때도 가문의 마도구를 가져와서 겨우 그렇게 배정된 거야. 남들은 ‘훌륭한 동력 마법이군요!’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기초 마법은 못 쓰고 동력 마법만 쓸 수 있는 반푼이 마법사야.”
오트보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이미 마법학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내가 그런 반푼이 마법사라는 걸. 동력 마법은 잘 할 수 있으니까 자동 마차 관리나 마력 기차 기관사 같은 건 되겠지. 그런 내겐 한심한 미래밖에 없어. 그런 나랑 왜 같이 있는 거야?”
“…….”
“생긴 것도, 실력도, 가문에서의 취급도 나보다는 네가 나을 거야. 그러니 넌 나랑 같이 있으면… 네가 더 돋보이게 느껴져서 그런 거 아니야?”
루카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야 저 녀석이 마음에 걸린 이유를 알겠군.’
루카는 오트보가 왜 신경 쓰였는지 깨달았다.
찌질한 것도,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것도,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것도.
오트보 그레스라는 인물은 과거의 루카, 그러니까 이명현과 닮아있었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루카는 오트보 그레스라는 인물을 이미 구원한 줄 알았다. 적어도 혼자 돌아다니지는 않도록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과연 그때 무엇을 필요로 했을까.’
오트보가 과거의 그와 닮았다면, 과거의 그가 원하던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에게 있는 결핍, 그가 갈망하던 것, 그것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난 그걸 저 녀석에게 받았던 것 같군.’
루카는 그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네 눈에는 내가 실력, 외모, 가문 같은 시시한 것으로 친구를 고르는 놈으로 보였나.”
“…친구?”
친구라는 말에 오트보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확실히, 루카가 스스로 그를 친구로 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왜 놀라지? 매일 아침 같이 등교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저녁에 서로의 기숙사 방에 놀러가는 사이를 보통 친구라고 칭하지 않나?”
“그, 그렇긴… 한데…….”
“굳이 말해야만 친구가 되고 우정이 생기나? 그렇다면 말해주지. 난 너와 친구다.”
동그랗게 떠진 오트보의 눈을 보며 루카는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우습군. 내게 친구가 되자고 먼저 손을 내민 건 너였는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나, 나? 내가?”
“잊었나? 네가 처음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루카 트래버스의 기억 속에서도, 지금 루카의 기억 속에서도 오트보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에게 비교당하는 동생끼리, 같은 백작가의 차남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하지 않았나.”
“……!”
“실망이군. 그냥 입에 발린 말이었나.”
루카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오트보는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아, 아니야! 그러니까… 맞아! 아니, 그러니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오트보, 그런 그를 보고 루카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농담이다. 이상한 망상도 끝난 듯하니 이제 식사를 하러 가지. 슬슬 진짜 배고프다.”
오트보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앞으로 걸어가는 루카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나, 나 진짜 네 친구야?”
“그렇게 의심이 된다면 아니었던 걸로 하지.”
“아, 아니야! 믿어! 완전 믿어! 우린 친구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그를 보며 루카는 방긋 웃었다.
“그럼 됐다.”
“……!”
그 미소를 보며 오트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아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아.”
“무슨 소리지?”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갑자기 배고프네. 오늘 학식은 뭘까?”
그렇게 말하며 평소와 같은 태평한 얼굴을 하는 오트보, 그런 그를 보며 루카는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군.”
이번엔 확실히 루카의 감상이었다.
25화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루카는 평범한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변이라고 할 만한 것은 미리아와 이셀라가 만남을 피하는 것 정도.
“오늘도 미리아는 약속이 있대.”
“뭐, 그렇겠지.”
일주일이 지나자 루카는 무덤덤해졌다.
혼자서 학교에 다니는 것은 익숙했고 애초에 오트보가 있으니 혼자가 아니기도 하니까.
하지만 오트보는 꽤 서글픈 얼굴이었다.
“이제 우리랑 같이 다니지 않을 생각인가?”
“뭐… 주말에도 같이 놀러 나가지 않은 걸 보면 그런 거겠지.”
두 사람에게는 사실상 첫 주말인 이번 주말에도 미리아와 이셀라는 그들과 함께 하보크로 가지 않았다.
또 약속이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을 텐데. 우리 같은 차남들과 사귀는 건 득이 없다는 걸 깨달았겠지.”
“너, 너무 슬픈 이야기잖아.”
“나는 상관없지만 이렇게 계속 만남을 거절당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일 텐데.”
이럴 때는 ‘루카 트래버스’가 아닌 ‘이명현’이 나왔다.
“만남과 이별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그녀가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이 지속되는 걸 바랄 정도로 재밌지 않았을 뿐이다.”
“……루카.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아줘. 눈물이 날 것 같단 말이야.”
우울한 루카의 말을 견디지 못한 오트보가 울상을 지었다.
“미, 미리아에게도 사정이 있는 걸 거야. 우리 재밌게 잘 놀았었잖아!”
“네가 그걸로 좋다면 나도 상관없다.”
“…….”
아직 희망을 가진 것 같은 오트보는 루카의 말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얌전히 식사를 하던 루카는 흘끔 오트보를 보았다.
‘씁, 내가 너무 말이 심했나?’
루카도 이명현의 네거티브한 자아가 나왔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트보라면 재치 있게 받아쳐 줄 거라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다.
‘뭐… 난 딱히 상관없지만 저 녀석이 계속 우울하면 좀 그러니까. 불사의 황녀 힌트도 다 열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한 루카는 크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인다면 내가 알아봐 주겠다.”
“알아봐 준다고?”
오트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홱 들었다. 루카는 움찔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때문에 갑자기 저러는 건지 나도 좀 궁금했으니까.”
“지, 진짜? 그런데 어떻게?”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쏴야지. 마침 내일 검술 수업이 있으니.”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풀었다.
“오랜만에 그 녀석이랑 결투를 해야겠군.”
미리아를 잡으려면 이셀라를 공략해야 한다.
* * *
“오늘은 참철의 심화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아직 참철을 숙달하지 않은 학생들도 일단 이론은 들어두도록 하세요. 시험에 나옵니다.”
“저, 저희 시험도 치나요?”
“당연하죠. 오리엔테이션 때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크리피의 수업 시간이 돌아왔다.
모두가 이론을 듣고 있을 때 루카는 이셀라에게 다가갔다.
“이셀라.”
“…….”
그의 부름에도 이셀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결투 한 번 하지.”
“……결투?”
그를 무시하려던 이셀라도 결투이라는 말에는 반응을 했다. 수업을 똑바로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두 사람은 결투에 거절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셀라는 왠지 결투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어차피 우리는 시험 안 쳐도 되니 먼저 결투를 하지. 크리피 선생님에게는 미리 말해뒀다.”
“……알겠다.”
미리 준비를 해둔 루카의 모습에 이셀라는 더 이상 빼지 않고 바로 검을 챙겼다.
훈련장의 결투 영역으로 간 두 사람은 바로 검을 뽑고 자세를 취했다.
“평소대로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기만으로 하면 되겠지.”
“알겠다.”
“그럼 시작하지.”
챙!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맞부딪친 두 사람의 칼날.
칼날이 맞닿은 순간 이셀라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고작 몇 주 만에 뭔가가 달라졌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이셀라는 알 수 있었다.
루카의 검이 더 단단해지고 무거워졌다는 것을.
챙! 챙! 챙!
이어지는 연격, 그 사이에 여러 기본기가 섞였지만 두 사람 모두 침착하게 대응했다.
캉! 캉! 캉!
점점 가열되는 두 사람의 검무, 어느새 크리피의 이론 수업이 끝나고 구경하러 온 학생들이 많아졌다.
챙! 휘잉휘잉휘잉! 푹!
누군가의 칼이 날아가 땅에 박히며 찾아온 결투의 끝.
“이번엔 나의 승리군.”
“……쯧.”
이번에는 루카의 승리였다.
“오오~”
“잘하네…….”
“여러분 보셨죠? 저게 참철의 응용입니다. 저렇게 해야 A+입니다.”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루카는 천천히 이셀라에게 다가갔다. 이셀라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났지만 루카는 멈추지 않았다.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칼날에 군더더기가 생겼다.”
“뭐?”
상당히 당황한 것 같은 이셀라의 반응, 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느껴지나?”
“검을 맞대면 싫어도 느껴지지.”
“쯧.”
이셀라는 혀를 찼다. 그리고 주변을 흘끔 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저 교사에게 말해줄 수 있나?”
“그러지.”
루카는 바로 크리피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녀와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받았다.
“루카 학생도 역시 청춘이군요. 뜨겁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후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뭔가 이상한 오해를 산 거 같지만 아무튼 잘 해결되었다.
“여긴…….”
“어차피 점심에는 그 녀석과 다른 곳에 가겠지. 커피 한잔하지.”
루카는 이셀라와 아카데미 내에 있는 카페에 왔다.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지만 대부분은 연인으로 보였다.
이셀라는 그와 단둘이 가는 것이 조금 고민되는 눈치였으나 태연한 루카의 태도에 결국 그를 따랐다.
“저번 주부터 어렴풋하게 느껴지긴 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이.”
“그, 그랬다고?”
“그래.”
루카의 말에 이셀라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수긍했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소리를 할 수는 없지. 맞다. 저번 주부터 그 녀석이 아가씨를 현혹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
루카의 되물음에 이셀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테도르 파티겔. 그 녀석이 자꾸 아가씨에게 달라붙는 게 문제였다.”
“테도르 파티겔?”
파티겔 공작가는 에르난 제국의 3대 파벌 중 하나이며 제국의 경제를 담당하는 곳이다.
세금 징수, 물자 유통, 인적 자원 관리 등 핵심적인 일을 전부 하고 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곳이다.
거기에 대륙에서 제일 큰 상단인 파티겔 상단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황실과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진 가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데 테도르 파티겔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데?’
적어도 원작에서는 나온 적 없는 이름이다.
파티겔 공작의 자식이 꽤 많은 편이라 파티겔이라는 성을 가진 캐릭터가 두세 번쯤 나온 적은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루카가 그를 모른다는 걸 눈치챈 이셀라가 대답했다.
“파티겔 공작의 5남 11녀 중 5남이다.”
“……5남 11녀 중 5남?”
“그래.”
파티겔 공작의 종족번식의무 수행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단어였다.
이셀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테도르 파티겔은… 잘 논다.”
“잘 논다고?”
“그래.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11남이라지만 그래도 파티겔 공작가의 일원인 테도르 파티겔은 사교성이 굉장히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파티란 파티는 다 갔고 상당히 많은 친구를 사귀었으며 아카데미에 이미 파벌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미리아가 흥미를 느꼈다.
“아가씨와 나는…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그렇게 놀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좀 충격적이었다.”
“뭘 어떻게 놀았길래.”
“……엄청났다.”
그 이상은 도저히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것 같은 이셀라.
평소와 달리 살짝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 뭔가 귀여워서 더 건드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피곤해질 것임을 알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요즘 점심을 같이 안 먹는 것도 그 녀석과 같이 먹는 건가?”
“그래. 아가씨께서는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 네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이제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내가 위험하다고?”
루카의 되물음에 이셀라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최근에 네게 일어난 사건이 아마 아가씨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본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지.”
데몬즈의 마틴과 싸운 게 미리아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정말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셀라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세하게 말해주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그렇다. 아가씨께서 너희를 싫어한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다.”
“……그렇다 치고.”
루카는 입맛을 쩝 다시고는 화두를 옮겼다.
“그런데 네가 문제라고 하는 걸 보니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테도르 파티겔이 아가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건 뭐…….”
루카는 말하다가 멈췄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윗선 중 몇 명은 아가씨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뒷조사를 해보니 테도르 파티겔은 그들과 연이 없더군.”
“그래도 파티겔 공작가 사람인데, 자체 정보망이 있을 확률은?”
“우리의 조력자를 무시하지 마라. 황성에서도 지금 아가씨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적다.”
거기까지 말한 이셀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어도 테도르 파티겔은 알아선 안 된다는 게 맞겠군. 그가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어째서?”
“…….”
그의 되물음에 이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루카는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말해주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아가씨의 조력자가 그 녀석의 아버지니까.”
“!”
이셀라의 말에 루카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4황녀의 조력자가 파티겔 공작이었다고? 진짜로? 하지만 파티겔 공작은…….’
너무 엉뚱한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정보가 나와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루카는 억지로 태연하게 말했다.
“못 들은 걸로 하지.”
“……역시 너한테는 말해도 괜찮았던 것 같군.”
이셀라는 조금 안도하는 표정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멸문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파티겔 공작이 테도르 파티겔에게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겠군. 꽤 신중해야 할 사안이니.”
“아가씨도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그 녀석이 뭐라고 말하자 괜찮다고 말하시더군. 나에게조차 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말이다.”
불쾌하다는 듯 말하는 것을 보니 괜찮은 이유를 이셀라에게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루카는 피식 웃은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말을 들어야지. 넌 미리아의 충직한 검이잖아.”
“…….”
이셀라는 침묵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참는 눈치였다.
그에 루카는 슬슬 그녀가 바라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말하도록.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일단 친구니까.”
“……친구.”
친구라는 말에 이셀라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쉰 뒤 자신의 앞에 놓인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후. 루카 트래버스. 혹시나, 혹시나 가능하다면.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라면.”
이셀라는 잔을 내려놓은 다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테도르 파티겔이 어떤 녀석인지 조사해 줘.”
“재밌군. 네 녀석의 부탁이라니.”
루카는 그녀처럼 잔을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주도록 하지.”
* * *
수업이 모두 끝나고 루카는 오트보를 기숙사 방에 불러서 이셀라와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테도르 파티겔?”
“그래. 미리아가 우리를 바람맞히고 노닥거리는 녀석이라고 하는군.”
테도르 파티겔이라는 말에 오트보는 입을 쩍 벌렸다.
“엄청 유명 인사잖아!”
“그 정돈가?”
“너보다는 아니지만 꽤 유명하지!”
내가 그 정도로 유명하다고……? 라며 당황하는 루카에게 오트보는 어디선가 잡지를 꺼내 왔다.
“봐! 여기 월간 파티피플에도 나왔어!”
“그게 뭔데.”
원작에서도 본 적 없는 잡지에 루카는 신기함 반, 놀라움 반의 감정으로 그것을 받아서 이리저리 살폈다.
‘이런 것도 있구나.’
꽤 좋은 질감의 종이에 색깔이 있는 잡지였다.
“테도르 파티겔은 월간 파티피플에 꽤 자주 나오는 사람이야!”
“허.”
루카는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테도르 파티겔에 대해 나온 부분을 보았다.
남자답게 거친 듯하면서도 잘생긴 그의 사진과 그가 이번 달에 참석한 파티, 그리고 거기서 보여준 퍼포먼스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미리아는 테도르 파벌에 들어간 거구나…….”
오트보는 마치 첫사랑을 금발 태닝 양아치에게 빼앗긴 소년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나지도 않고 서운하지도 않고 그저 슬퍼 보이는 얼굴.
루카는 안쓰럽다는 듯이 그를 보다가 잡지를 덮었다.
“아무튼 이셀라의 말로는 그 녀석이 수상하다고 조사를 좀 해달라더군. 미리아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그 녀석을 조사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조사라고 할 게 있나? 테도르 파티겔은 오늘 팬티 색깔도 잡지에 올라올 정도로 잘 알려진 사람인데.”
“……진짜로?”
루카의 물음에 오트보는 잡지의 한 페이지를 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진짜였다.
“허.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데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네. 미리아가 화… 크흠! 아, 아무튼 그거에 대해서 테도르 파티겔이 알 수가 있나?”
오트보도 드디어 그것에 의문이 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사한다고 해도 우리가 뭘 할 수 있어?”
“난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너도 뭔가를 할 수 있겠지. 아닌가?”
“…….”
의미심장한 루카의 말에 오트보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다시 미리아와 놀고 싶은 거 아닌가? 그럼 억지를 부려서라도 테도르 파티겔의 흠을 찾아서 둘의 사이를 나쁘게 해야지.”
“어? 그, 그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럼 너의 미리아에 대한 마음은 거기까진 거겠지.”
우물쭈물하던 오트보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결의에 찬 눈을 하며 말했다.
“조, 좋아. 나도 어떻게든 그 녀석의 나쁜 점을 찾아볼게!”
“진짜로 그런 걸 찾으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상관없겠지.”
이상한 방향으로 불타오르는 오트보를 보며 피식 웃은 루카는 슬쩍 옆을 보았다.
“듣고 있었지? 벨라.”
“물론이죠, 도련님. 이 벨라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벨라의 목소리, 오트보는 움찔했지만 이젠 그녀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루카는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어디 우리의 친구를 되찾아볼까.”
탐정 놀이의 시작이다.
26화
“이번 에트라 갤러리 신상 봤어? 내 맘에 쏙 들던데?”
“봤어! 봤어! 나 미스 블랑의 목걸이 벌써 예약했는데 언제 올까?”
“어머, 정말? 어떻게 예약했어?!”
쉴 새 없이 떠들며 까르륵거리는 여학생들.
쾅!
“읏차! 신기록!”
“이야~ 이 새끼 힘은 진짜 존나 세!”
“나와봐, 내가 신기록 바로 깨줄게.”
펀치머신을 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남학생들.
“그때 내가 그 녀석에게 한마디 했지. 어이, 그따위로 할 거면 나와.”
“에~ 진짜?”
“진짜로. 그러니까 그 녀석이 다리를 덜덜 떨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소년과 맞장구를 쳐주는 소녀.
“……이런 게 청춘인가.”
그리고 그런 소년소녀들을 보며 묘한 감상에 젖은 미리아.
그녀는 에르난 아카데미 학생 사교장에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내일 사교장에 파티 있는데 놀러 갈래?
-네?
-여기 초대장이야. 내 이름으로 불렀으니 꼭 와줘야 해. 알겠지?
루카가 쓰러진 날 처음 만난 테도르가 미리아에게 건낸 초대장, 미리아는 고민 끝에 그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파티겔 공작가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알고 있고 왜 굳이 그녀에게 직접 찾아와 초대장을 건넸는지 궁금했다.
거기에 그녀의 목적은 청춘을 즐기는 것.
루카와 어울리는 것도 즐거웠지만 다른 경험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이~ 초면인 거 같은데. 사교장은 처음이야?”
“그럼 우리가 안내해줄게! 같이 놀자!”
“가까이 오지 않도록.”
사교장에 처음 온 그녀에게 달라붙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모두 이셀라의 싸늘한 호위에 물러났다.
미리아는 이셀라를 흘끔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뭐, 확실히 질 안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 상관없지만. 조금쯤은 즐기고 싶은데.’
빰빠바 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사교장 중앙에 있는 무대에 몇몇 학생이 뛰어 올라갔다.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려는 듯 상체를 탈의한 남학생들, 모두 훤칠한 미소년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테도르 파티겔, 청량한 미소에 누구나 흐뭇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둥! 두둥! 두두둥!
“꺄아악!”
“이야~ 테도르~ 잘생겼다~.”
“여기 봐줘요! 선배!”
격렬한 비트에 맞춰 그들이 춤을 추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
미리아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들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격정적인 무대가 끝나고 무대에서 학생들이 내려왔지만 신나는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무대 어땠어?”
사교장 내의 열기가 절호조인 상태, 미리아 또한 그 열기에 취했을 때 그녀에게 테도르가 다가왔다.
“…….”
미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춤을 추고 와서 그런지 살짝 땀에 젖은 그의 모습은 청량하면서도 혈기 넘치는 섹시함이 보였다.
“더러운 꼴로 아가씨에게 다가오지 마라.”
물론 이셀라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매력이었다.
그러나 이셀라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는 것을 느끼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가씨?”
“비켜봐, 이셀라.”
“?!”
이셀라는 옆으로 빠졌고 미리아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이셀라의 무례는 넘어가 주세요. 저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하, 고마워. 솔직히 조금 상처받았거든.”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멋진 무대였어요.”
미리아의 말에 테도르는 환하게 웃으며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음료를 가져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잔해. 미토나의 과일 블렌드야. 이번 파티를 위해 공수해 왔어.”
“이상한 거 타지는 않았죠?”
“하하! 아참. 이런 거에 민감하겠네.”
테도르는 그녀에게 내민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그녀에게 다신 내밀었다.
“이제 괜찮지?”
“……이런 거에 민감하겠네, 라고요?”
미리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이셀라의 손이 칼자루에 닿았다.
그에 테도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이쿠, 진정해.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바로 징계라고.”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왜 평범한 시골 귀족의 자제인 저를 이런 곳에 부른 건지.”
차가운 그녀의 말에 테도르는 방긋 웃었다.
“예쁘니까.”
“……네?”
“예뻐서 초대했어. 여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 예쁘고 잘생겨야 하거든. 한 번 둘러봐.”
그렇게 말하며 주변은 슥 돌아본 테도르는 미리아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봤는데 네가 너무 예뻐서 초대했어.”
“……장난하지 말고요.”
“진짠데. 아, 그것 말고도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테도르는 슬쩍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셀라는 바로 그를 막으려 했지만 미리아가 제지했다.
“아버지가 잘 챙겨주라고 했거든.”
“!”
그의 속삭임에 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슬쩍 그의 얼굴을 보았다.
“딱히 강요는 안 할게. 하지만 한 가지는 자부할 수 있어. 나랑 놀면 재밌을 거야. 누구보다 아카데미 생활을 잘 즐길 수 있게 해줄 자신이 있거든. 여길 봐.”
테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양팔을 벌렸다.
신나는 음악, 춤을 추는 소년소녀,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음료.
미리아가 경험하지 못한 청춘이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
“아가씨.”
이셀라는 뭔가 불만이 있는 얼굴로 그녀를 불렀지만 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생각을 끝낸 미리아는 테도르의 손에서 음료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음료는 맛있었고 독은 들어있지 않았다.
“좋아요, 테도르 파티겔. 당신과 어울려주죠.”
“아가씨!”
“좋은 생각이야. 그럼 통신코드 좀 줄래?”
그렇게 미리아는 테도르 파벌에 들어가게 되었다.
* * *
“아가씨, 그 남자는 뭔가 음흉합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괜찮아 이셀라. 그 사람은 우리 편이니까.”
“하지만…….”
미리아는 이셀라가 ‘우리 편’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
테도르가 그들의 조력자인 ‘파티겔 공작’이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보내준 선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셀라는 테도르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파티겔 공작가가 황녀님을 지지한다는 게 알려지면 반대쪽 진영에서 물어뜯으려 할 건데, 그걸 고작 5남인 테도르 파티겔에게 알려줬을 리 없잖아.’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기에 테도르 파티겔이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불만이 테도르의 가벼움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미리아는 그녀에게 속마음을 드러내기로 했다.
“이셀라. 루카가 습격을 당한 건 알고 있지?”
“……예.”
“아마 우리 때문일 거야. 습격한 사람의 신원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까.”
미리아는 착각하고 있었다. 루카가 습격당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어디선가 정보가 샜을 거야. 그러니 암살자를 보낸 거겠지. 아마 나를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을 공격하는 게 더 효과적으로 내 의지를 꺾을 거라 생각했을 거야.”
“그건… 확실히.”
이셀라는 그에 반박하지 못했다. 어차피 미리아를 노려봐야 이셀라에게 막힐 테니 그냥 친한 친구들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멘탈을 공격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에르난 아카데미니까 자주 이러지는 못하겠지만 루카를 더 이상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런 점에서 테도르 파티겔은 괜찮아. 그를 죽게 하면 파장이 클 테니까.”
“……확실히 그를 암살하는 건 꽤 많은 고민을 해야겠군요.”
“그치?”
송곳니의 재림 와일드 트래버스에게 밀린 차남 루카 트래버스가 죽는 것과 현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자 파티겔 공작가의 일원인 테도르 파티겔이 죽는 것은 파급력 차이가 클 것이다.
“난 삶을 즐기러 여기에 왔어. 추억을 쌓기 위해 온 거야. 슬픈 기억을 쌓으러 온 게 아니라고.”
“아가씨…….”
“그러니까 이셀라.”
미리아는 쓰린 웃음을 지었다.
“우리도 즐기자.”
상처 입기 두려운 그녀는 영원한 우정보다 찰나의 즐거움을 택하기로 했다.
* * *
그 이후부터 미리아는 루카와 오트보에게서 멀어졌다.
점심도 테도르 파벌 사람들과 먹고 오후에는 사교장에 놀러 갔다.
주말에도 하보크에 있는 사교장과 파티겔 상단 소속 부티크, 그리고 유행하는 살롱에 다녔다.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친구들이 늘었다.
잡스러운 가십거리와 값비싼 옷 브랜드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아는 향수 뭐 써?”
“어? 난…….”
“그러고 보니 미리아는 반지가 없네. 왜 그래?”
“어머, 리타!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자들의 기싸움에 밀리게 되었다.
제4황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치품을 두를 수 없었다.
그보다 돈이 필요한 곳이 많았으니까.
“원하는 거 있으면 골라.”
“어? 하지만…….”
“하하, 괜찮아. 이런 거 없으면 좀 피곤하잖아.”
그런 그녀에게 테도르는 환하게 웃으며 많은 것을 선물로 주었다.
그녀의 방에 옷과 장신구, 화장품이 늘어나고 치장하는 일도 많아졌다.
“어머, 미리아! 그거 마담 레비동의 신상 아니야?”
“앗, 헤헤, 맞아.”
“어우 기지배, 재주도 좋아~ 이걸 어떻게 구했어?”
“어떻게 구하긴.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거 아니야?”
“나, 남자친구라니. 아니야.”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치는 미리아, 그런 그녀에게 아직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이 부추겼다.
“테도르 지금 여자친구 없잖아. 기회 아니야?”
“어? 하지만…….”
“잘생겼지, 몸 좋지, 잘 놀지, 거기에 돈도 많아. 완벽하잖아!”
객관적으로 봤을 때 테도르는 완벽했다. 성격도 좋고 돈도 많고 재밌고.
그건 미리아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사귄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사귀는 게 사귀는 거지 뭐가 더 필요해?”
“미리아는 너무 순수하다니까.”
“그, 그런가?”
“요즘은 다들 그런 거 모르고 일단 사귀잖아. 아카데미에 있을 때 연애해 봐야지 졸업하고 나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정략결혼 하는 경우도 많대!”
확실히 사교장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제 연인이었다가 오늘은 남이었다가 내일 다시 연인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어차피 우리 같은 여자들은 진로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그냥 아카데미에서 눈 맞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제일이니까.”
“맞아. 얼굴도 모르는 이상한 아저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거에 비하면 테도르는 최고지! 그냥 한 번 사귀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만나보고 싶어.”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미리아도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책에서만 봤던 사랑, 그것의 주인공이 될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테도르는 그냥 파티겔 공작의 말에 따라 날 도와주는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내심 궁금했다.
‘테도르는 과연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짓는 테도르, 처음에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심장이 살짝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게… 사랑인가?’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테도르가 말했다.
“미리아. 내일 나랑 단둘이 외출 나갈래?”
“……어?”
그녀 인생에서 제대로 된 첫 데이트 신청이었다.
27화
시간을 조금 거슬러, 루카와 오트보의 탐정 놀이 선언 이후.
두 사람은 일단 각자 정보를 구하기로 했다.
벨라에게 정보 수집을 맡기긴 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기에 루카는 뭐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기숙사 휴게실로 향했다.
‘친구를 좀 더 사귈 걸 그랬군.’
목적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대인관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늘려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다만 루카도, ‘루카 트래버스’도 친구를 사귀는 건 장기가 아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이렇게 휴게실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아하하! 그랬다니까? 그 교수가……!”
“야. 왜 말을 하다 말아?”
“……나, 나가자.”
“왜?”
“일단 나가!”
문제는 그가 휴게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본 학생들이 모두 도망친다는 것.
책을 보는 척 폰을 하고 있던 루카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테도르보다 유명하다는 게 사실이었나.’
그를 보는 순간 말을 멈추고 도망치는 것을 보니 모르긴 몰라도 굉장한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오트보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카는 책을 덮었다.
여기에 있어봤자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진짜 여기에 있네?”
“?”
그때 누군가가 당당하게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브로치를 보아하니 3학년인 것 같았다.
흔한 갈색 머리카락에 밋밋한 얼굴, 그나마 특색이라 할 수 있는 건 실눈 정도였다.
루카는 그의 위아래를 슥 훑어보고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묘사가 안 떠오르는 걸 보니 원작에 나온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미카 웰즈의 경우도 있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당장은 모르는 사람이다.
본능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한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의문의 3학년이 깍지를 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진행하지. 내 이름은 보거스 레디오. 에르난 아카데미의 정보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아, 네 소개는 하지 않아도 돼. 알고 있으니까.”
“……?”
다소 뻔뻔한 그의 태도에 루카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보거스 레디오는 히죽 웃으며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역시 그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은 다르네. 입학하자마자 동급생 세 명을 때려눕혀 퇴학시키고 시비 거는 상급생 세 명을 죽였다는 그 신입생. 눈빛부터가 아주 살벌해~.”
“……허. 그런 거였나.”
유명하다고 해서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닌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의 쓴웃음을 비웃음이라 착각했는지 보거스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역시 뜬소문이지? 그럴 거라 생각했어. 뭐, 반쯤은 진실이겠지만.”
뼈가 있는 그의 말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루카는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뭐 하러 온 거지?”
그에 보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브로치가 달린 옷깃을 흔들었다.
“어이, 나 선배야. 경어정도는 쓰라고.”
“소문의 반쯤은 진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그런 걸 따지나?”
“……하. 그렇긴 해.”
다시 웃음을 흘린 보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이번엔 내가 널 필요로 해서 온 거니 굽혀주지.”
“내가 필요하다?”
“맞아. 내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는데 고급 정보가 필요하거든. 요즘 이쪽 바닥에서 제일 수요가 많은 게 너에 대한 이야기라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표정을 짓는 보거스, 루카는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루카 트래버스라는 인물에 대해 비밀이라고 할 만한 게 몇 없을 텐데.”
“많지. 예를 들면 어떤 간식을 좋아하는가, 어떤 옷 브랜드를 선호하는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여성상에 매력을 느끼는가. 그런 거 말이야.”
“그딴 게 고급 정보라니, 요즘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할 일이 참 없는 모양이군.”
루카의 날카로운 말에 보거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보통 사람은 이런 게 고급 정보가 아니야. 너라서 고급 정보인 거지.”
“송곳니의 재림에 밀린 백작가의 차남에게 그런 가치를 부여하다니, 우습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자기 정보 못 가져가게 호위도 두면서?”
호위라는 말에 루카는 순간 의문을 가졌지만 곧 벨라를 떠올리고는 내색하지 않았다.
“더 말이 필요한가? 난 내 태도를 보여준 것 같은데.”
“아~ 그런 거야? 역시 백작가의 차남은 협상도 잘하네~.”
보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호위까지 물리고 지금 찾고 있는 정보가 있는 모양인데, 나와 협력하는 게 어때? 아직 규모가 크다고 말할 정보는 아니지만 호위를 비우고 스스로 정보를 찾으러 나온 네게 제일 먼저 왔다는 점에서 실력은 인정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운이 좋았던 것 아닌가.”
“부정은 않겠어. 아마 곧 다른 정보상도 네게 접촉을 하겠지. 호위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학생 수첩이었다.
“이건 내 학생 수첩과 연결된 개조 학생 수첩이야. 이것을 써야만 나와 연락할 수 있지.”
“불법일 텐데.”
“하하, 들키지만 않으면 불법이 아니지. 그걸로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를 요청해. 한 번은 공짜로 정보를 제공해주지. 그게 마음에 들면 다음부터는 대가를 내고 정보를 받는 거야. 어때?”
루카는 그것을 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여기에 도청, 혹은 그와 비슷한 정보 수집 기능이 있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보거스의 물음에 루카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한마디 내뱉었다.
“내 소문의 일원으로 만들어주지.”
“…….”
농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무심한 눈빛과 높낮이 없는 목소리 때문에 상당히 살벌하게 느껴졌다.
보거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얘… 1학년 맞아?’
1학년이 할 만한 수준의 협박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했던 보거스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럴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
“그리고 하나 더, 굳이 이걸 써야 하나? 당장 얻고 싶은 정보를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상관없어. 무슨 정보가 필요해?”
그 대답에 루카는 개조된 학생 수첩을 흔들며 말했다.
“테도르 파벌에 대한 모든 정보.”
“그 많은 걸 다 달라고? 수지타산에 맞지 않은 것 같은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보거스에게 루카는 들고 있던 학생 수첩을 내밀었다.
“그럼 됐다. 필요 없어.”
“아, 자, 잠깐만. 하… 알았어. 알았다고.”
당황한 기색의 보거스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작은 마석 단말기 하나를 꺼내 슬쩍 본 다음 말했다.
“진짜로 테도르 파벌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달라는 거지?”
“그래.”
“후… 알았어. 나중에 네 방 앞에 소포로 보내놓을게.”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루카는 학생 수첩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만족할 만한 거래가 되길 바라지.”
* * *
보거스 말고도 자칭 ‘정보상’이라는 사람들이 몇 명 더 왔었다.
정보상이 몇 명이나 된다는 점이 놀라웠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곳은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에르난 아카데미, 이곳에 얽힌 이해관계가 몇 개나 되는지 헤아리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다만 제일 처음에 온 보거스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너무 간을 본단 말이야.’
꽤 쿨한 거래였던 보거스 때와는 달리 너무 재는 듯이 행동하는 다른 정보상들의 스탠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띠링!
-문 앞
“허,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
대충 다른 정보상들과의 접촉이 끝났을 무렵 보거스와 연결된 개조 학생 수첩에 짧은 메시지가 왔다.
그것을 보고 기숙사 방으로 가보니 문 앞에 소포가 와있었다.
뜯어보니 현대의 태블릿처럼 사용할 수 있는 마력 단말기 세 개가 들어있었다.
-테도르 파벌 구성원 정보
-테도르 파벌 연계 세력
-테도르 파벌 운영 사업
“허……?”
단말기 하나하나 허용 용량을 꽉 채워서 정보가 담겨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 그것을 보고 나서야 보거스가 당황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걸 공짜로 받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긴 하군.’
사실 뒤에 두 개는 필요 없고 앞에 하나만 받아도 되는 일이지만 스스로의 입으로 ‘테도르 파벌에 대한 모든 것’을 요청해놓고 뒤에 두 개는 필요가 없으니 환불해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빚을 지고 살 수는 없지.”
루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개조 학생 수첩으로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그다음 단말기를 천천히 정독했다.
정보는 제법 상세했다.
모든 구성원들의 가문, 학년, 학과, 간단한 대인관계, 특이사항 등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있었다.
단말기 내부 정보를 모두 읽은 루카는 턱을 쓰다듬었다.
‘신경 쓰이는 건 두 가지인가.’
하나는 핵심 인물이 없다는 것.
보통은 파벌 내에서도 어느 정도 알력다툼을 하게 되어있다.
1인자의 왼팔 오른팔 경쟁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테도르 파벌에는 그런 게 없다.
잘생기고 예쁘기만 하면 남작이고 평민 출신이고 신경 쓰지 않고 일단 스카웃한다.
‘그 때문에 구성원에 세력이 다양하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말이야.’
황실과 킴벌리 공작파, 그리고 파티겔 공작파.
테도르 파벌에는 이 세 가지 세력이 섞여있으면서도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지낸다고 한다.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고.’
루카는 두 번째로 신경 쓰이는 부분에 대해 보았다.
-‘미리아 필레’ 전담 인원.
“흠…….”
구성원 중에 미리아를 전담하는 인원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임무 내용은 알 수 없고 미리아 외에도 전담 인원이 있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수상하다.
‘이거에 대해선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을 거 같군.’
보거스에게 추가로 정보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만 당장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정보를 제공받는 것은 위험하다.
‘보거스란 자도 아직은 신뢰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 벨라에게 조사를 시켜본 다음 믿어도 돼.’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단말기를 보았다. 그리고 뺨을 긁적였다.
‘문제는… 미리아를 전담하는 사람이 여자라는 거군.’
당연한 말이지만 미리아에게 붙어있는 사람은 여자다.
그리고 루카는 여자가 조금 껄끄러웠다.
‘남자는 그냥 두들겨 패든 협박을 하든 하면 되는데 여자한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전 생에서 여자와는 담 쌓은 삶을 살아왔고 이번 생에서도 그렇게 여자와 친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루카 트래버스… 이 얼굴을 가지고 어째서 그런 금욕적인 삶을 살아온 거야…….’
기억 속의 루카 트래버스는 오로지 형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훈련만 했었다.
억지로 사교 활동을 해도 적당히 시간만 때울 뿐이었으니 여자와 대화하는 방법 같은 건 잘 모른다.
‘미리아처럼 이미 알고 있는 캐릭터가 아닌 여자와의 대화라…….’
미리아야 원래 알고 있는 캐릭터고, 오트보가 너무 불쌍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걸었던 것뿐이다.
거기에 사교계에서 사용하는 예의상 하는 말을 몇 마디 했던 것뿐, 이번엔 정보를 빼내기 위해 어떻게든 심리전을 해야 한다.
“……생각만 해서는 답이 없겠군.”
고민을 하던 루카는 결국 그런 결론을 내리고 미리아 전담 인원 중 한 명인 파스모 티에라는 여자애가 자주 간다는 찻집으로 향했다.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별 거 없었다.
그녀가 자주 간다는 찻집이 기숙사 근처에 있어서였다.
“흠~ 흠흠~”
파스모 티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굉장히 강한 웨이브가 들어간 양갈래 머리, 금발, 장신.
왠지 주변 사람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테도르 파벌 사람답게 수려한 미모였다.
“……후우.”
그녀를 보며 루카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흠~ 흠~ 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파스모 티에는 루카가 다가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이 있는 듯 다가와서 가만히 서있는 루카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따라와라.”
“……네?”
그렇게 딱 한마디 하고 뒤돌아서는 루카.
파스모 티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떠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두고 그를 따라갔다.
찻집 뒤쪽 인적이 드문 공간에 온 루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와줘, 내 안의 루카 트래버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믿을 건 ‘루카 트래버스’의 본능뿐.
루카는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스모 티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슨 일로 소녀를 부른 것이에요……?”
쾅!
“?!”
질문을 하던 파스모 티에는 갑자기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고 얼굴을 가까이 하는 루카를 보며 숨을 참았다.
“파스모 티에. 묻는 말에 대답해라. 미리아 필레에게 무슨 짓을 했지?”
안타깝게도 루카 트래버스라는 남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28화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것인가요?!’
파스모는 처음 겪는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남자에게 대시를 받아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에르난 제국 사람이 아니며 이국적인 매력이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 남자는 많았으니까.
쾅!
“파스모 티에. 묻는 말에 대답해라. 미리아 필레에게 무슨 짓을 했지?”
하지만 이런 협박에 가까운 말을 면전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벽에 몰아붙이고 숨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한 채로 눈을 마주치며 말이다.
‘예, 예쁘다.’
사나운 태도의 루카를 보며 파스모가 떠올린 것은 생뚱맞게도 그의 눈이 너무나도 예쁘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고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인 것이에요?”
“네가 미리아 필레 전담 인원이라는 건 알고 있다. 전담 인원이 하는 일이 뭐지?”
“아~ 테도르 파벌의 전담 인원은 새로운 멤버가 파벌에 적응하기 쉽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미리아 양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 붙는 전담 인원도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말한 파스모는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당신은 누군가요? 설마 미리아 양의 남자친구인 것인가요? 세상에! 하지만 미리아 양에게는 테도르 군이 있는데! 이것이 비극적인 삼각관계인 건가요?!”
“…….”
그녀의 태도에 루카는 침묵했다. 너무 예상 밖의 상황이라 적절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파스모가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어머, 어머머머! 정말인 건가요? 소녀! 이런 비극적 결말이 예정된 깊은 사랑이 정말 흥분되는 것이에요!”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녀를 보며 루카는 계속 침묵했다가는 굉장히 귀찮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친구가 그녀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내러 왔을 뿐이다.”
“정말이에요? 친구 핑계를 대는 게 아닌 것이에요?”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내게서 다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거다.”
무덤덤하게 답하는 그를 보며 파스모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부채를 꺼내 입을 살짝 가렸다.
“생각해보니 미리아 양에 대한 테도르 군의 태도가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한 것이에요.”
“어떤 점이?”
“맨입으로 말해주기 싫어요.”
루카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뭘 원하지?”
“소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인 것이에요.”
파스모는 눈웃음을 지었다.
“낙사樂事.”
* * *
“쯧,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루카는 파스모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혀를 찼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군. 조금 더 알아보고 말을 걸었어야 했나.’
이상한 말투를 쓸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에르난 제국민이 아닐 줄은 몰랐다.
-파스모 티에 정보
이름 : 파스모 티에
학년 : 2학년
클래스 : S
소속 : 연금학부 이형異形연성학파
파벌 : 테도르 파벌
출신지 : 라마타 제국의 티에 공작령
특징 : 라마타 제국민답게 독특한 말투와 생김새. 그리고 미적인 감각. 더 자세한 정보는 추가 요금 필요.
테도르 파벌 내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리 루카라도 그 짧은 시간 안에 전부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수확이 나쁘진 않아.’
-테도르군은 원래 여자에게 다가가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미리아 양에게만은 달랐던 거예요.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줬고 적극적으로 대시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이상한 점은 반드시 그녀 주변에 허영심이 넘치는 인물들을 배치했던 것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소녀가 미리아 양의 전담 인원이 되었던 것도 소녀의 재력이 남들보다 좀 더 뛰어난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소녀는 재미 때문에 이곳 테도르 파벌에 있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은 이곳이 아니면 있을 곳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에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파스모의 말에 따르면 다른 구성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테니.
‘테도르 파벌이 아니면 있을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래서 테도르에게 강한 충성심을 보이는 건가.’
루카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앞에 섰다.
“다녀왔습니다, 도련님.”
“……벨라.”
공손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벨라, 루카는 꽤나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벨라는 쿡쿡 웃었다.
“제가 보고 싶으셨나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얻은 정보나 말해.”
“후후.”
옅은 웃음을 흘린 벨라는 종이 몇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루카는 그것을 받아 슬쩍 훑어보았다.
“제가 없는 사이에 도련님도 어느 정도 정보를 얻으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마 테도르 파벌에 대한 정보를 얻으셨겠죠. 그래서 저는 다른 쪽 정보를 찾았어요.”
“다른 쪽 정보?”
“예. 파티겔 공작가에 대한 정보요.”
벨라가 내민 종이에는 파티겔 가문의 관계도에 대해 적혀져 있었다.
“파티겔 가문에는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관계가 상당히 복잡해요. 그 중에서 테도르 파티겔은 세력이 약한 축에 속하거든요.”
“흐음.”
“무엇보다 테도르 파티겔에게 뛰어난 건 사교성뿐이에요. 그것 외에는 다른 혈육들과 비교할 만한 재능이 단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편이죠.”
테도르는 잘 노는 것 외에는 딱히 재능이 없었다.
에르난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도 거의 턱걸이였고 항상 C클래스와 D클래스를 전전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래도 파티겔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것과 피를 이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금전적인 자유 덕분에 잘 노는 것을 이용해서 파벌을 만들 수 있었다.
“파벌을 만든 건 대단하지만 그렇게 주목받는 파벌은 또 아니에요. 다른 잘나가는 파벌들이 테도르 파벌을 내버려두는 이유는 그냥 천박한 것들과 굳이 닿고 싶지 않다, 라는 것뿐이에요.”
“허, 우습군.”
“그러니 테도르 파티겔은 가문 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가 사교계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이유 또한 가문 내부가 아닌 외부 세력에 들어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벨라의 결론에 루카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테도르 파티겔이 미리아에게 접근한 건 그녀와 함께 세력을 키우고 싶어서인가?”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죠. 4황녀의 세력이 약하긴 하지만 그녀는 ‘불사의 황녀’라고 불릴 정도로 오래 생존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그녀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 다른 세력이 붙을 수도 있겠죠.”
“테도르 파티겔 일생일대의 도박수 같은 건가.”
불사의 황녀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해도 4황녀의 세력은 약한 편이다. 언제 다른 세력에게 휩쓸릴 지는 미지수.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투자하는 것은 테도르 입장에서 매우 큰 도박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면 좀 미묘하군. 테도르 파티겔도 일생일대의 도박수를 건 입장에서 우리가 관여하면 그림이 좀 이상한데.”
“그렇긴 하죠.”
테도르도 상당히 노력하는 입장인 건데 이걸 방해하면 너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결론이 이상해질 무렵 그의 학생 수첩이 울렸다.
웅웅
“?”
오트보였다.
“무슨 일이지.”
-그… 알아낸 게 있는데… 네 방에 들어가도 될까?
“그러도록.”
벌컥.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오트보는 바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
“…….”
오트보는 자신의 귀를 톡톡 쳤다. 그에 루카는 벨라를 보았다.
“도청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 으… 아…….”
벨라의 대답에 오트보는 몸을 배배 꼬며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왜 그러지?”
“그… 아… 내가 알아낸 게 있는데…….”
“그건 좀 전에도 들었다. 뭘 알아냈다는 거지?”
루카는 눈살을 찌푸렸고 오트보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이게… 그… 아닐 수도 있는데…….”
“뜸들이지 마라.”
“……테도르 파티겔이 3황자와 접촉했다는 정보가 있어.”
순간 방에 정적이 맴돌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세 사람 모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루카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쾅!
“루카 트래버스!”
“?”
정적을 깬 것은 이셀라였다. 그녀는 참담한 표정으로 절규하듯 말했다.
“내일 아가씨와 테도르 파티겔이 단둘이서 외출 나가기로 했다!”
“……허어.”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됐다.
* * *
“흠~ 흠~ 뭘 입을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고르고 있는 미리아.
어느새 옷장에 가득 찬 테도르의 선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는 듯했다.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앓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셀라.
“이셀라, 아직도 테도르를 의심하는 거야?”
“……그 남자는 흑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후후, 남자가 흑심을 품은 게 뭐가 문제야?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하잖아.”
미리아는 거울을 보며 옷을 몸에 대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셀라 너도 슬슬 남자친구를 사귀는 게 어때? 그럼 내 말을 이해하게 될 텐데.”
“제게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흐음~ 과연 그럴까?”
이셀라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낸 미리아는 보석함을 열며 말했다.
“이번 주말에 나 혼자 나갈 테니까 넌 루카랑 시간을 보내는 게 어때?”
“……예?”
살짝 당황한 이셀라, 미리아는 귀걸이를 꺼내 귀에 댔다.
“테도르가 데이트 신청을 했어. 단둘이 놀고 싶대.”
“하, 하지만 아가씨. 혼자는 너무 위험합니다!”
말까지 더듬으며 말리는 그녀에게 미리아는 목걸이를 꺼내보였다.
“이게 있는데 내가 위험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네가 날 지켜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내일은 삭일朔日입니다.”
“그랬지 참.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테도르도 있으니까.”
태평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이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그 남자를 그렇게 믿으시는 겁니까? 그가 아가씨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 테도르에게 있어 난 꽤 쓸모 있는 패니까.”
“……예?”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태연하게 답하는 미리아, 하지만 그 대답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생각해 봐. 아무리 파티겔 공작가의 혈육이라고 해도 테도르는 5남이야. 테도르 파벌이란 걸 만들었지만 규모만 클 뿐 그렇게 실속 있는 파벌도 아니지.”
“그건… 맞습니다.”
“졸업까지 2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나마 잘 캐스팅한 게 그 기인奇人 파스모 티에 하나. 그런 상태에서 졸업해봤자 남은 건 유통기한 2, 3년짜리 사교계의 왕자 타이틀뿐이잖아. 걔 야심에 그걸로 만족하겠어?”
차분하게 말한 미리아는 방긋 웃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지막 기회가 온 거야. 불사의 황녀 브리드 에르난. 나와 손을 잡게 되면 그래도 뭔가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잖아.”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지. 테도르는 어떻게 해서든 날 지키고 싶을 거야.”
미리아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셀라가 그녀 몰래 열심히 테도르의 뒤를 캐봤지만 그렇게 구린 내용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있는 정보 안에서 테도르가 미리아를 미래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은 추론이었다.
“난 내 학창시절의 즐거움을 받고, 걘 4황녀 세력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거지. 서로 윈윈 하는 거래라고 볼 수 있어.”
“…….”
“너무 걱정하지 마. 이셀라 너도 즐겨! 우리에게 단 한 번 밖에 없을 이 행복한 시기를 말이야.”
어째선지 서글프게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이셀라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보내주는 수밖에.
29화
“그게… 그게 정말인가……!”
루카와 벨라, 그리고 오트보의 이야기를 들은 이셀라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트보. 아닐 수도 있다고 했지 않나. 아닐 가능성이 어느 정도지?”
루카는 냉정한 얼굴로 오트보를 보았다. 오트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말했다.
“……퍼센트.”
“뭐?”
“0퍼센트.”
루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테도르 파티겔과 3황자가 접촉한 게 100퍼센트 온전한 사실이라는 뜻인가?”
“……응.”
오트보도 그레스 가문의 특별한 무언가를 통해 정보를 얻었을 텐데, 100퍼센트라고 한다면 정말 100퍼센트일 것이다.
“그렇다면 테도르 파티겔은 4황녀 세력에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루카는 거기서 더 말하지 않았다.
이셀라에게서 살갗이 따끔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테도르 파티겔… 이 더러운 짐승 같은 놈이! 감히 아가씨를 현혹한 걸로도 모자라 배신할 생각이었다니. 당장 그 비루한 목숨을 끊어…….”
“진정해라. 정황만으로 행동하면 오히려 미리아에게 피해를 줄 뿐이다.”
“하필 삭일인 내일 제3황자와 내통하는 놈이 아가씨와 단둘이 데이트를 간다는데, 정황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셀라, 하지만 루카는 차가웠다.
“그래. 정황이다.”
“…….”
“오트보. 3황자와 테도르 파티겔이 접촉했다는 정보, 증거는 없겠지?”
“어, 으응. 하지만…….”
“그래. 사실이라는 건 믿겠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것을 내놓을 수는 없겠지.”
루카는 차분하게 말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얻은 정보로 내릴 수 있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하나는 테도르 파티겔이 미리아와 결탁하려는 것, 다른 하나는 테도르 파티겔이 3황자와 손을 잡고 미리아를 죽이려는 것. 둘 모두 증거는 없고 정황만 있는 상태다. 이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은 우리의 목을 조를 뿐이다.”
“하지만…….”
“그리고 만약 정말로 테도르 파티겔과 3황자가 결탁했다면, 우리가 끼어드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모두의 시선이 루카에게로 모였다.
“이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황권다툼에 참가하겠다는 뜻이 된다. 트래버스 가문도 그레스 가문도 이미 몸을 맡기고 있는 세력이 있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독단으로 황권다툼에 참가하는 것은 가문의 입장에서 곤란한 일이다. 어쩌면 가문에서 우리를 제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지.”
“그건…….”
“물론 미리아와 테도르 사이의 일이 공표될 일도 아니고, 우리가 끼어들었다 해도 가문의 입장이 바뀌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리스크 있는 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
루카는 무덤덤하게 읊조렸다.
“지금부터 무언가를 하겠다면 각오를 해야 할 거다.”
“…….”
“…….”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오트보도, 흥분했던 이셀라도 조용해졌다.
루카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확실히 지금 성급하게 행동하는 건 위험한 일이겠군.”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셀라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으로 향했다.
“이, 이셀라.”
“지금까지 고마웠다. 이런 정보는 나 혼자서 얻을 수 없었을 거다. 덕분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루카의 물음에 이셀라는 멈춰 섰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았다.
“!”
놀랍게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처럼 아가씨를 보필할 거다. 너희는 각자의 길을 걷도록 해라. 나와 아가씨의 억지를 받아주느라 고생 많았다.”
“억지를 부리는 건 알고 있었군.”
“하하, 할 수 있다면 다음에 식사를 대접해 주고 싶군. 그럼 이만.”
그대로 이셀라는 방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계속 고뇌하던 오트보가 물었다.
“루카, 넌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할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가가 중요하지.”
“난…….”
루카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난 좀 쉬어야겠으니 네 방에 돌아가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일 저녁이 되기 전에 네 생각을 정리해서 오도록.”
“……응.”
오트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루카는 폰을 만지작거렸고 벨라는 뺨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큰일이네요. 도련님의 몇 안 되는 친구분들이 이렇게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하실 건가요? 도련님.”
루카가 딴죽을 걸었지만 벨라는 그에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벨라의 태도에 루카는 입술을 삐죽였다.
“오트보의 결정이 어느 쪽이건 간에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거야. 다만…….”
“다만?”
벨라가 고개를 기울였고 어느새 학생 수첩을 꺼낸 루카는 입술을 핥았다.
“손해는 최소화 해야겠지.”
미리아를 구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터.
얼마나 덜 손해를 볼지가 관건이었다.
* * *
“후우…….”
긴장된 얼굴로 손거울을 보는 미리아.
평소와 달리 꽤 화려한 옷차림에 화장도 살짝 진하다.
만연한 봄과 같은 그녀의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쯤은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일찍 왔네?”
“테도르!”
갑자기 나타난 테도르, 그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여기 선물.”
그녀의 머리색과 비슷한 유채꽃이었다.
“어머! 너무 예뻐요!”
“자동 마차 안에 넣어둬. 나중에 방에 다시 보내줄게.”
“네!”
데이트 코스는 완벽했다.
우선 하보크에 도착해서 가볍게 커피를 즐긴다.
그 다음 지금 가장 유명한 극단에 가서 뮤지컬을 본다.
유쾌한 풍자극이라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창 웃고 떠들고 나니 배가 고팠다.
테도르가 예약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다음 하보크 중앙 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거리에 커플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테도르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 또한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짧은 산책 후 자동 마차를 타고 파티겔 상단 소속의 부띠끄로 갔다.
신상 옷과 악세사리를 구경하다가 테도르가 목걸이 하나를 선물해줬다.
부띠끄를 나왔을 때는 시간이 애매해서 다시 카페로 갔다.
요즘 유행하는 디저트와 커피를 즐기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첫 데이트에 외박까지는 좀 그래서 돌아가고 싶다고 하니, 테도르가 잠깐 들렀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자동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하보크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가 있는 산, 투피터드 산이었다.
그 중턱에 있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자동 마차는 거기서 멈췄다.
“와……!”
“어때? 예쁘지?”
하늘을 수놓은 별빛과 밤하늘을 비추는 거대한 호수, 그것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탄성만을 내지를 뿐이었다.
자동 마차가 비추는 조명 아래에 선 두 사람은 그야말로 낭만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꽤 열심히 준비했는데 어땠어?”
“최고였어요! 마치 하루 종일 꿈을 꾸는 것만 같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후! 이제야 나도 마음이 놓이네.”
테도르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미리아와 마주보았다.
“테도르?”
“미리아. 이제 슬슬 내 마음을 표현할 때가 된 것 같아.”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미리아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나랑 사귀어줄래?”
“앗, 죄송해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서.”
“……어?”
너무도 단호한 미리아의 대답에 테도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미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테도르가 아닌 다른 사람과도 사귈 생각이 없어요. 테도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아직 누군가와 사귀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미안해요. 하지만…….”
푹!
사과를 하던 미리아의 가슴에 칼날이 꽂혔다.
“……?”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검을 본 미리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의 귀에 테도르가 속삭였다.
“미안. 난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우유부단한 4황녀보단 확실한 3황자님을 따를 생각이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요?”
“아니. 만약 네가 나랑 사귄다고 했다면 널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거였어. 그다음 3황자님 밑에 들어갈 생각이었지.”
미리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그래서? 고작 이 칼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제일 좋겠지만, 역시 안 되겠지?”
쩌저적!
미리아를 관통했던 칼날이 깨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가슴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미리아는 가슴을 매만지며 시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디 준비해온 걸 보여주렴.”
“나와!”
척! 척! 척!
나무 그늘과 어둠 사이에서 수많은 인형(人形)이 튀어나왔다. 특수 제작된 기갑 보병과 마도구로 무장한 마도 병사들이었다.
테도르는 뒤로 천천히 물러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이 산 전체에 그분의 사병들이 깔려있지. 넌 절대 여기서 도망쳐 나갈 수 없어!”
“후후, 착각을 하고 있네. 난 도망칠 생각 없어.”
미리아는 디멘션 코어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 배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츠츠츠!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그나마 남아있던 별빛마저 삼키는 어둠이 미리아의 뒤에서 피어났다.
저벅,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고 미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과연 나의 기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척.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이셀라였다.
“어머나, 준비하고 있었구나? 하루 종일 그러고 기다렸던 거야?”
“……해가 질 즈음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현명하네.”
위기상황인 것을 모르는 건지 나긋하게 대화하는 두 사람, 하지만 테도르를 비롯한 제3황자의 사병들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배경이 일그러질 때부터 그들을 억누르는 강한 압박감. 그에 저항하고자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이셀라와 눈을 마주쳤었다.
이셀라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들어가 계십시오, 아가씨. 모두 정리해두겠습니다.”
“알았어. 내일 봐, 이셀라.”
스르르.
미리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남은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이셀라뿐이었다.
그녀 혼자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쉬이 할 수 없었다.
상대는 황실의 비밀병기 ‘밤’의 일원.
제4황녀를 불사의 황녀로 만들어준 장본인.
밤을 상대하는 것은 같은 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 하지만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밤! ‘달빛’인 네 힘이 가장 약한 날이지!”
이런 분위기에서, 기세를 가져가고자 테도르가 먼저 소리쳤다.
“그래서?”
“…….”
“오늘 내 힘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너희와 무슨 상관이지?”
스릉!
어느새 검을 뽑은 이셀라.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이 최고로 달했을 때 결국 참지 못한 마도 병사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봉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
파지지지직!
봉에서 쏘아져 나간 번개.
그것이 이셀라에게 닿기까지 걸린 찰나의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그녀가 천천히 검을 휘두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촤악!
그녀의 검이 끝까지 휘둘러진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목이 날아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으… 으… 으……!”
그리고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건 오직 테도르뿐.
그의 힘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이셀라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증원을 불러라, 테도르 파티겔.”
이셀라는 검끝을 그에게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포기한 것의 가치를 보여주겠다.”
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