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쾅! 쾅! 쾅!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 곳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기갑 보병이 폭발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단 한 기만으로 천 명의 일반 병사를 대신한다는 기갑 보병 수백 기가 단 한 명을 상대하지 못하고 박살 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기갑 보병들은 피아 숲 금지된 구역에서 보았던 그 기갑 보병과 동급의 개체들인데 그때와 달리 이셀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것이 밤의 힘을 사용하는 이셀라다.
오트보의 동력 마법과 루카의 전력이 합쳐져 겨우 파괴했던 기갑 보병들이 아무것도 못하고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며 테도르는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오, 오늘이 가장 약한 날이라며. 그런데 저 정도로 강하다고?’
은빛 검기를 휘두르며 특수 마도 병기로 무장한 마도 병사와 기갑 보병을 유린하는 이셀라,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가다간 3황자님께서 주신 병력이 모두 사라질 텐데……!’
산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마도 병사와 기갑 보병이었지만, 추풍낙엽처럼 쓸리는 것으로 보아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몰살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때,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야~ 화려하네~.”
“당신은……!”
그의 등장에 테도르는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는 알고 있었다.
“테도르군, 어때? 황실의 비밀병기 ‘밤’의 힘이.”
“……도와주러 오신 겁니까?”
“물론이지. 일반 병사들로는 달빛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 대답에 테도르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사내의 도움이 있다면 제아무리 밤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분명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테도르군, 세상의 이치에 대해 알아?”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무언가를 내놓아야 해. 달빛을 잡기 위해선 그만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거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테도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테도르는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 마흐트라님?”
“그래서 말인데 테도르군. 혹시 희생을 좀 해줄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을… 으아악!”
마흐트라라고 불린 사내의 팔에서 벗어나려던 테도르는 갑자기 목에 무언가가 주입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혈관 내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 강렬한 통증을 느끼게 했다.
“으극… 윽… 아아악!”
“이런~ 테도르군.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마흐트라는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하지만 엄살이라 하기엔 테도르의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가 너무 극명했다.
투두둑! 우드득!
근육과 뼈가 뒤틀리더니 기이할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올랐다.
잘생긴 얼굴은 흔적도 남지 않았고 보이는 것은 찢어진 피부와 그 사이에 드러난 붉은 근육, 그리고 이성을 잃은 듯 흰자위만 남은 눈이었다.
어느새 최초의 형태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변형이 끝난 테도르.
트롤이나 오우거와 비견될 정도로 거대해진 그는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오~ 테도르군. 이전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 멋진데?”
“후욱… 후욱…….”
“아, 이건 선물이야. 달빛과 싸울 때 도움이 될 거야.”
마흐트라는 그렇게 말하며 테도르의 몸에 보석 같은 것을 박았다.
테도르는 움찔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마흐트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변형된 테도르의 등을 툭 쳤다.
“자~ 그럼 테도르군. 우리 연구의 성과를 한 번 보여주라고.”
“그으… 그어어어어어!”
테도르는 괴성을 내지르며 마도 병사와 기갑 보병들을 몰살하는 이셀라를 향해 도약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절벽 아래 호수가까지 내려온 테도르는 이셀라를 발견하고 다시 함성을 내질렀다.
“그어어어엉!”
“?”
이셀라는 테도르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한 생명력의 존재, 하지만 평소에 볼 수 없는 형태의 적이었다.
츠츠츠!
“이건…….”
그리고 변형된 테도르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보라색 연기.
그것은 주변에 흩어진 시체들에게 스며들었다가 붉은색으로 바뀌어 다시 테도르의 몸으로 돌아갔다.
투둑! 투두둑!
붉은색으로 변한 연기를 흡수할 때마다 테도르의 몸이 점점 더 기괴하게 바뀌었고, 그와 비례해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강해졌다.
“흉물스러운 걸 준비했군.”
싸늘하게 말한 이셀라는 곧바로 돌진하며 은빛 검기를 휘둘렀다.
콰가각!
검기는 변형된 테도르의 몸에 박히고 폭발하려다가, 점점 약해지더니 사라졌다.
“!”
“그르르… 그어어!”
동시에 변형된 테도르가 이셀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쾅!
이셀라의 몸보다 커진 테도르의 팔이 땅을 찍을 때마다 약한 땅울림이 생겼다. 직격하면 이셀라조차도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았다.
‘이번에 진심으로 아가씨와 날 죽일 생각인건가.’
달이 뜨지 않는 밤, 거의 전쟁에 동원될 정도로 많은 기갑 보병과 마도 병사들, 거기에 처음 보는 괴물까지.
작정을 하고 미리아와 이셀라를 죽일 생각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이셀라는 심호흡했다.
‘아마 이게 끝이 아니겠지. 이 녀석으로 달빛을 소모시켜서 이후에 나올 적과 싸울 때 확실하게 마무리 할 생각일 거야.’
달이 뜨지 않는 밤은 소모된 달빛을 회복시키기 어렵다. 어제 최대한 많이 달빛을 모아놨지만 오늘을 넘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
‘최대한 아끼면서 싸워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변형된 테도르가 이셀라의 앞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스르륵― 서걱!
“그어억!”
거대한 주먹이 풍압을 가득 싣고 날아갔으나 오히려 변형된 테도르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주먹을 검면으로 흘려낸 이셀라가 그대로 물흐르듯 움직여 약한 부위를 베어낸 것이다.
오해할 수 있는데 검기를 발사하는 것은 꽤 효율적인 전투법이다.
신체강화에 소모되는 마력을 아낄 수 있고 근접 전투에 비해 체력 소모도 적다. 거기에 다수의 적을 효과적으로 사살할 수 있다.
하지만 변형된 테도르처럼 체급이 높은 상대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때문에 신체강화와 더불어 좀 더 밀도 높은 검기를 사용해야 하며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피해를 주는 기교까지 필요하다.
어지간한 검사는 방금 그 주먹에 피떡이 되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셀라는 루카가 인정하는 검의 고수.
그런 그녀에게 그냥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테도르의 주먹을 흘려내고 베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살과 뼈를 베는 감각에 충분히 유효타를 먹였다 확신하는 이셀라, 그녀는 다음 일격으로 치명타를 먹이려 했다.
콰득!
그녀가 베어버린 갈비뼈 부근에서 새로운 팔이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
쿠당탕! 콰광!
갑자기 튀어나온 새로운 팔에 맞은 이셀라는 몇십 미터는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쿨럭! 쿨럭!”
마력으로 몸을 강화했지만 그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피를 토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상정한 것 이상의 위력, 밤의 일원이 되기 위해 수행하던 시절 이후 이보다 강한 상대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츠츠츠!
그녀의 몸이 다시 은빛으로 물들었다. 달빛이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쿵! 쿵!
“그어어!”
하지만 그녀에게 틈을 줄 생각이 없는 듯 어느새 팔이 세 개가 된 테도르가 땅을 두들기며 도약해 그녀에게 날아갔다.
날아오는 그것을 보며 이셀라는 심호흡을 했다.
-달무리 감옥
파앗!
은빛의 띠가 생성되어 테도르를 가두었다. 공중에서 멈춘 테도르는 발버둥을 쳤지만 달무리는 흔들리지도 않았다.
“스읍.”
이셀라는 숨을 삼키며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녀의 눈빛이 고요해진 순간 달빛이 하늘을 갈랐다.
-비산하는 달
촤자작!
달빛이 테도르에게 닿은 순간 수많은 검기가 비산했다. 무수히 많은 검기들이 흡수하는 것보다 더 빨리 테도르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파삭!
마지막 남은 하나의 살점마저 먼지로 만들어버린 뒤 달빛은 밤하늘을 물들이며 사라졌다.
툭!
그리고 검기마저 파괴하지 못한 어떠한 보석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가는 숨을 내쉬고 있는 이셀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힘은 뭐지? 필요 이상으로 달빛을 소모하게 만들고 있어……!’
테도르를 공격할 때 이상한 힘이 그녀에게서 달빛을 빼앗아가는 듯했다. 때문에 비산하는 달을 끝까지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절반 정도 소모했나. 앞으로 어떤 녀석이 나올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진짜 아껴야해.’
이셀라가 힘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바닥에 떨어진 보석을 주웠다.
“역시 재능 없는 녀석은 변이해도 별 거 없나. 그래도 악마석에 생명력을 꽤 많이 채워줬으니 제 역할은 한 거라 쳐줘야겠군.”
“넌 누구지?”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경계하는 이셀라, 그에 사내는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라이셀 판드리가, 벌써 내 목소리를 잊은 거야? 서운한데~”
“무슨 소리를…….”
“어차피 어둠 속에서도 내 얼굴은 잘 보이잖아. 아, 이 얼굴은 처음인가?”
그의 말처럼 이셀라는 어둠 속에서도 상대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내의 얼굴은 그녀의 기억에 없었다.
“이 얼굴… 서, 설마?”
이 얼굴이라는 말에 이셀라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달빛을 최대로 발산했다.
“아하하!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나도 너랑 직접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제3황자를 택한 건가! 어둠!”
“쉿! 그거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 마흐트라로!”
마흐트라는 당황한 듯 손을 입에 대며 주변을 훑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 근처에 살아 돌아갈 사람은 없을 테니 상관없나. 일단 너랑 내가 직접 싸우면 그야말로 대참사니까 그러지는 말자고. 난 그냥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러 온 거야.”
“아가씨를 배신하지 않겠다.”
“우리랑… 하하, 그렇겠지?”
제안을 다 말하기도 전에 거절하는 이셀라를 보며 마흐트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악마석이라 불린 보석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그럼 잘 있어. 살아남으면 식사라도 하자고.”
“잠깐! 기다… 크윽!”
화악!
이셀라가 마흐트라를 붙잡으려는 순간 악마석에서 강력한 힘이 발산되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질적인 힘에 이셀라는 신음을 흘렸다.
‘이 힘은 대체 뭐지? 어째서 내 달빛을 빼앗는 거 같지?’
테도르를 공격할 때 느꼈던 힘이 빼앗기는 듯한 느낌. 그것이 저 보석에서도 느껴졌다.
‘저걸 부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이셀라가 검기를 날리려는 순간.
투곽! 투두둑! 후두둑!
주변에 있는 마도 병사의 시체와 기갑 보병 잔해들이 보석에게 달라붙었다.
“……!”
미리아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보석은 어느새 시체와 잔해들로 이루어진 탑이 되어 있었다.
붉은 안개가 흘러나오는 탑.
붉은 안개는 닿는 것만으로 아직 살아 있는 마도 병사와 기갑 보병들을 강화시켰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강화된 적들, 달빛을 빼앗는 기이한 붉은 안개, 그리고 달이 없는 하늘.
모든 것이 이셀라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황녀님.’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포기하면 미리아가, 황녀님이 죽는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나일 것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을 지키는 것이 기사의 도리.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눈빛이 더 강인해졌다.
이셀라는 검으로 다가오는 적들을 겨누며 소리쳤다.
“달빛의 기사 라이셀 판드리가, 이 목숨을 바쳐서 네놈들의 더러운 손이 아가씨에게 닿지 않도록 하겠다!”
“각오는 좋다만, 그랬다가는 누군가가 빌런이 될 거라서 말이지.”
그 순간, 미려한 목소리와 함께 천둥이 울렸다.
우르릉!
파지지지직!
하늘에서 거대한 번개의 기둥이 내리꽂혔다.
번개는 이셀라를 제외한 모든 적들을 관통하며 폭발시켰다.
“넌……!”
이셀라는 번개와 함께 나타난 소년을 보았다.
신비로운 매력의 진녹색 머리카락. 호수를 담은 듯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하늘을 담은 듯한 연파랑색의 날개까지.
소년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거들러 왔다. 이셀라.”
루카가 도착했다.
31화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 아니 점심까지도 오트보는 계속 고민했다.
‘난 그냥 백작가의 차남이라고. 황권다툼 같은 거에 꼈다간 그냥 묻혀버릴 거란 말이야……!’
오트보는 주제를 알았다.
그는 백작가의 차남, 거기에 순서를 뛰어넘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심지어 장남인 형은 그레스 가문의 역사 속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천재라 불리는 상태, 오트보가 가문을 물려받을 확률은 0이었다.
그런 그가 황권다툼에 참가하는 것은 촛불에 뛰어드는 불나방과 다름없는 일.
‘루카는 잘생기고 강하기라도 하지 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오트보가 못생긴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잘생긴 편이었다.
다만 옆에 있는 게 월간 파티피플 선정 에르난 제국 10대 소년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인 루카라는 게 문제였다.
참고로 오트보는 그 순위에서 10위 안에도 못 들었다.
‘마법도 어정쩡해 머리도 어정쩡해 생긴 것도 어정쩡해. 이런 내가 황권다툼에 끼어들어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미리아를 구하러 가는 건 주제넘은, 리스크뿐인 일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저희 같이 식사 할까요?
-너, 너 왜 하필 이 수업을 신청한 거야!
-못 나가면 어때. 아카데미 탐험을 하자!
문득 떠오르는 미리아와의 추억.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그 잠깐의 추억이 떠나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 순수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또 나타날까?’
느낌상 루카는 미리아를 도와줄 것 같았다.
오트보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줬던 것처럼, 미리아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줄 것이다.
그러니 만약 미리아를 포기한다면 루카 또한 포기해야 한다.
‘그건… 싫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루카뿐일 것이다.
백작가의 차남. 형에게 비교당하는 동생.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한 사람.
둘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비록 오트보는 루카처럼 강해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같은 경험을 공유한 것은 맞다.
‘……그렇다면 나도 결단을 내려야겠지.’
결국 오트보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의 일이 두렵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어. 난 앞으로 나아갈 거야.”
한걸음 더 내딛기로.
결심한 순간 오트보는 기숙사 방을 나섰다.
“루, 루카?!”
그런데 기숙사 문 밖에 루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늦으면 버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다행이 늦지 않았군. 보아하니 결심한 모양인데.”
루카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따라올 건가?”
“……응!”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대답에 루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빨리 가지. 늦기 전에.”
“그런데 늦다니? 지금이 몇 신데… 어?”
의아한 표정을 짓던 오트보는 그제야 기숙사 내부에 불이 들어온 것을 눈치 챘다.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두워진 상태.
“루, 루카. 혹시 밖에서 오래 기다렸어?”
“그걸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미안.”
아무래도 루카는 밖에서 꽤 많이 기다려준 듯하다.
“그런데 루카. 이런 말하기 좀 그런데 난 뭘 할 수 있어?”
불사의 황녀인 미리아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고작 1학년인 루카와 오트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 자동 마차를 조종할 수 있나?”
“어? 어… 이론은 알아.”
“그럼 됐다.”
동력 마법으로 움직이는 자동 마차.
오트보라면 그것을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그런데 해본 적 없어! 조종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트보. 지금 그게 중요한가?”
불안해하는 오트보를 보며 루카는 무심하게 되물었다.
오트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결의에 찬 눈빛을 했다.
“……아니. 해볼게!”
“더는 시간을 지체하게 하지 마라.”
“응!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자동 마차 보관소는 이쪽이 아닌데?”
두 사람은 자동 마차 보관소가 아닌 검술학과 건물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겠다만,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는 황권다툼에서 미리아와 이셀라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에엑.”
갑작스러운 패배 선언에 오트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린 뭐 하러 가고 있는 거야?”
“이런 일은 어른에게 맡겨야지.”
“도와줄 어른이 있어?!”
그리고 두 사람은 누군가의 사무실 앞에 섰다.
“크리피… 모스토……?”
“들어가겠습니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을 여는 루카, 하지만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허허, 루카 학생,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크리피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기분 좋게 취한 듯 알딸딸한 얼굴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학생의 궁금증 해결은 교사의 의무지요. 뭐든 말해보십시오.”
크리피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루카는 사무실의 창문을 열며 말했다.
“혹시나 제가 위험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이쿠, 루카 학생. 누가 당신을 괴롭히기라도 하는 겁니까?”
“예. 아마 3황자께서 절 싫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예?”
“루, 루카!”
루카의 말에 크리피와 오트보 둘 모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는 창틀에 올라가며 말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스승님께서는 어쩔 생각입니까?”
“스, 스승?”
스승이라는 단어에 오트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크리피를 보았다.
크리피는 잠시 침묵하며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상대는 그 누가 되었든 제가 왜 ‘전장의 악몽’인지 알게 될 겁니다.”
그가 왜 전장의 악몽인지 알게 된다, 그 한마디에 루카는 안도했다.
“믿겠습니다. 오트보!”
“어, 어?!”
“나와 그 녀석들의 목숨은 이제 네게 달렸다. 스승님과 함께 내가 학생 수첩에 보낸 위치로 최대한 빨리 와라.”
루카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삐익!
휘파람 소리와 함께 휘슬이 나타났다.
“휘슬! 동조해라!”
“주인, 말했을 텐데. 본좌와 강제로 동조하는 건 대가가 필요하다고.”
“내가 볼품없이 땅바닥에 머리 찍기 전에 빨리 동조해.”
휘슬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왠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강제 동조. 천익 해방.
파앗!
루카의 등에 연파랑색 날개가 펼쳐졌다.
동시에 추락하던 그의 몸이 하늘로 비상했고 엄청난 속도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오트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 넌 도대체…….”
“오트보 학생이라고 했습니까?”
그때 들고 있던 잔을 비운 크리피가 일어섰다. 그리고 뒤에 있는 검을 챙기며 말했다.
“놀라고 있을 틈이 있습니까? 루카 학생의 말을 들었을 텐데요. 당신의 손에 당신 친구들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네, 넷!”
루카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살벌한 느낌. 오트보는 당황해서 차렷 자세를 했고 크리피는 히죽 웃었다.
“안내해 주세요. 저의 첫 제자가 뛰어드는 사지로 말입니다.”
전장의 악몽이 아주 오랜만에 돌아올 예정이다.
* * *
“루카 트래버스?”
이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황자가 개입한 이상, 이미 아카데미 학생의 수준을 넘어선 일이었으니까.
가문에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상황에 루카와 오트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힘은…….”
물론 루카의 기본기가 대단한 수준인 것은 맞지만, 단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고작 1학년이었다. 뭔가 숨겨둔 힘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본격적인 실전을 치르기엔 아직 실력도, 경험도 부족하다 판단했었다.
그런데.
이셀라는 주변을 훑어봤다.
붉은 안개로 강화되었던 마도 병사와 기갑 보병들이 한줌 재가 되어 휘날렸다.
그것만으로도 루카의 힘이 그녀의 달빛처럼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는 선배 중에 시력이 좋은 분이 계셔서 말이야. 미리아의 움직임을 파악해 달라고 해뒀다. 덕분에 귀찮은 일이 생겼지만.”
루카는 투덜대며 그녀의 앞에 섰다. 동시에 그의 등에 있던 날개가 사라졌다.
휘청!
“루카 트래버스!”
그런데 루카는 갑자기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셀라가 당황하며 그에게 다가갔지만, 루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신경 쓰지 마라. 힘을 좀 많이 썼을 뿐이니까.”
강제 동조를 한 부작용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했다. 번개의 힘이 전신을 휩쓸며 마력 회로가 타는 것 같은 통증을 주었다.
‘젠장. 더럽게 아프군.’
그나마 등장하면서 번개의 힘을 좀 발산했기에 이 정도지 아니었다면 얼마나 아팠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크큭, 그러게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했잖아.
머릿속에서 휘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는 입술을 비틀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번개의 힘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네 몸에 남은 힘을 쓰는 것 정도는 괜찮아.
‘알겠다.’
그나마 다행인 이야기였다.
루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검을 잡았다.
“다행히 늦지 않은 모양이군.”
“……와준 건 고맙지만 네 도움은 필요 없어.”
“고맙다고 말하다니 생각보다 더 위기였던 모양이군.”
루카는 피식 웃으며 앞을 보았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악마석과 3황자의 사병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악마의 힘인가. 너와 미리아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었지.”
“저 힘의 정체를 알고 있나?”
“보통 자연의 힘은 악마의 힘에 약하다. 딱 하나만 빼고.”
파지직!
루카의 눈동자에 번갯불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섬광이 번쩍이며 그의 몸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파사삭!
그러자 다시 움직이던 3황자의 사병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
“하늘의 힘. 유일하게 악마의 힘에 대응할 수 있는 자연의 힘이지.”
이셀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루카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만큼은 나도 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리라 본다만.”
“……발목 잡지 마라.”
이셀라는 달빛의 힘을 발산하며 그의 옆에 섰다.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쾅쾅쾅!
이셀라가 달빛의 힘으로 쓰러트리면, 루카가 번개의 힘으로 마무리했다.
두 사람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싸웠다.
악마의 탑은 죽어가는 3황자의 사병을 계속해서 살리고 강화시켰지만, 번개의 힘에 의해 먼지가 된 존재들은 살리지 못했다.
달빛과 번개에 의해 적들은 점점 줄어갔고 어느새 악마의 탑만 남았다.
“제법이군, 루카 트래버스.”
“…….”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셀라와 달리 루카의 눈은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이셀라는 흘끔 루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만 쉬어라, 루카 트래버스.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
“방심하지… 마… 악마는…….”
풀썩.
말을 하던 루카가 쓰러졌다.
이셀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가 다시 악마의 탑을 보았다.
달빛이 없는 밤이라 그런지 몸이 꽤 무거웠다. 그리 오래 싸우지 않았음에도 이셀라는 밤새 전투를 치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이제 끝을 내지.”
이셀라는 묵직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쩌저적! 투두둑!
그때, 악마의 탑이 갈라지며 악마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석은 곧장 붉은 안개를 뿜어내며 주변에 있는 먼지들을 삼켰다.
“허튼 짓을!”
-비산하는 달빛
촤자작!
은빛 검기가 쏘아지며 밤하늘과 함께 악마석을 갈랐지만, 조금의 흠을 만들어냈을 뿐 멈추지는 못했다.
결국 악마석은 주변의 먼지들을 모두 빨아들이더니 점차 어떠한 형태를 띄어갔다.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늘의 힘을 가진 자가 쓰러져서 다행이군. 이 형태를 취하지 못할 뻔했어.”
“!”
붉은 안광을 가진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셀라는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윽!”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은 이셀라의 바로 앞, 이셀라는 반응하지 못하고 주먹을 허용했다.
쾅!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이셀라, 그녀를 무시하며 그것은 루카에게 다가갔다.
“이런 곳에서 하늘의 힘을 보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분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여기서 죽여주겠다.”
그것의 주먹이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 그것의 몸에 은빛의 띠가 생성되었다.
-달무리 감옥
쓰러져 있는 이셀라가 덜덜 떨리는 손을 그것에게 뻗고 있었다.
그것은 감탄했다.
“그 상태에서 아직도 이런 힘을 쓸 수 있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죽기 전에는 루카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거다. 악마.”
“재밌군. 좋아. 그렇다면 너부터 죽여주지.”
악마는 은빛의 띠를 붙잡았다.
동시에 달빛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미 모아둔 힘은 다 썼겠지. 생명을 태워서 달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거다.”
“크윽!”
악마의 말대로였다.
이미 이셀라는 달빛을 모두 사용했고 초인적인 정신력과 생명을 태워 억지로 달빛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가 달빛을 흡수하자 그녀의 의식은 순식간에 흐려졌다.
팟!
결국 달무리 감옥도 사라졌다.
악마는 루카를 흘끔 보았다가 이셀라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잘 가라 인간이여. 내일의 해를 볼 수 없음을 슬퍼하도록.”
‘……아가씨.’
흐린 의식 속에서 이셀라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요?”
“?”
서걱!
그때 악마의 팔이 잘렸다.
악마는 순식간에 그곳에서 멀어진 뒤 잘린 팔뚝을 붙잡았다.
툭.
잘린 악마의 팔을 발로 찬 크리피는 방긋 웃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요.”
전장의 악몽이 도착했다.
32화
“이런이런, 루카 군은 참 신기한 것을 적으로 두고 있군요.”
“…….”
어깨를 으쓱이는 크리피를 보며 악마는 침묵했다.
‘강한 인간이군. 어떻게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가온 거지?’
크리피에게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다. 그가 악마석에 봉인되기 전에 본 인간들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저나 참으로 독특한 생김새군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악마와 유사한 형태 같습니다. 그러니 악마 군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
“무뚝뚝한 친구군요. 그럼 일단 악마 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왠지 조롱하는 것 같은 크리피의 말투, 악마는 살짝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귀찮게 하지 마라. 요행으로 팔을 자른 건 칭찬할 만하지만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츠츠츠!
주변에 있던 먼지가 악마에게 모이며 순식간에 잘렸던 팔이 재생했다.
악마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자신의 건재함을 내보였다.
“오~ 그렇군요~. 대단합니다.”
“…….”
“자랑시간은 끝난 건가요? 그럼 이제 싸워도 되겠지요?”
나긋한 어조로 열받는 말을 하는 크리피, 악마는 조금 더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에 서 있죠. 안 그러면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피식 웃은 크리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검끝으로 그를 겨누었다.
“전장의 악몽 크리피 모스토, 당신에게 한 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꿈틀.
“……네가, 네가 날 가르치겠다고? 이 나를?”
“예~ 뭐. 이래봬도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에서 교사를 하고 있거든요.”
그 말에 악마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격분하며 외쳤다.
“인간 따위가 감히 나를 가르치겠다고!”
쾅!
분노한 악마에게서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과는 다른, 자연계의 마나와는 다른 특이한 힘이었다.
악마만이 사용하는 힘. 마기였다.
‘대충 1단계는 통과했군요.’
그것을 보며 크리피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전장의 악몽 크리피 모스토의 필승전략 그 첫 번째, 상대방을 흥분시킨다.
‘2단계는 절찬리에 진행 중이고요.’
크리피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루카 쪽을 보았다.
언제 왔는지 오트보가 조심스럽게 루카를 업고 풀숲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크리피 모스토의 필승전략 그 두 번째는 전장에 그의 약점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아직은 네놈 정도의 인간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만, 그 오만함을 넘어가 줄 수 없구나. 모아둔 생명력을 다소 소모하더라도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허허, 재밌군요. 쉽게 당해주진 않겠습니다.”
크리피가 검술 자세를 취할 때 뒤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느새 이셀라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검을 쥐고 있었다.
“……선생 혼자서 감당할 존재가 아닙니다.”
“어이쿠, 그렇다고 반쯤 죽어가는 학생이 상대할 존재도 아니죠.”
크리피는 되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가서 루카 군을 지켜주십시오. 이곳으로 오면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아마 오트보 학생만으로는 지켜내기 힘들 겁니다.”
“!”
“그리고 저 크리피 모스토, 현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 중 하나라 자부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밤’의 일원과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밤의 일원이라는 말에 이셀라의 눈이 잠시 커졌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뒤돌아섰다.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이셀라가 멀어질 때까지 크리피는 계속 악마를 경계했다.
크리피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의 먼지가 모이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일대를 모두 파괴할 정도로 강한 에너지는 아닌 듯하니 일단 내버려둘까요. 설혹 그렇다 해도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고, 우리 학생들이 도망칠 시간도 벌어야 하니 말입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크리피 모스토의 필승전략 그 세 번째, 완전한 무심.
상대를 흥분시키면서 본인은 가장 냉철한 마음으로 싸우는 것. 오랜 시간 전장에서 싸워온 그는 마음을 죽이는 방법을 알았다.
스르륵!
몇 초 지나지 않아 악마에게 모인 먼지가 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흉흉한 빛으로 장식된 잿빛의 마검.
그것을 쥔 악마가 나직이 읊조렸다.
“네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으로 너를 죽여주겠다.”
휭!
악마의 속셈을 파악한 이상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크리피, 그는 눈으로 쫓지 못할 속도로 악마의 뒤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캉!
놀랍게도 악마는 그 기습을 바로 막아내고 역으로 검을 휘둘렀다.
다만 그 정도는 예상했었는지 크리피 또한 가볍게 그 공격을 피하고 거리를 벌렸다.
“재주가 그것뿐인가? 사각으로 파고들어 반응하지 못하게 공격하는 것?”
“보여드릴 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 아쉽군요.”
악마의 도발에 가볍게 응수한 크리피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펴며 다리를 벌리고 검을 안쪽으로 당기는 자세를 취했다.
휭!
“!”
조금 전 크리피가 한 것과 같이 악마 또한 눈으로 쫓지 못할 속도로 움직여 그의 앞에 나타났다.
동시에 피하지 못할 속도로 휘두르는 잿빛의 마검. 그것은 공간을 찢으며 크리피에게 나아갔다.
챙!
“……?”
악마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순간 깨닫지 못했다.
검을 끝까지 휘둘렀으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크리피가 절도 있게 검을 휘두르며 다시 기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푹!
그리고 바닥에 잿빛의 마검 칼날이 박혔다.
악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자상이 나 있었다.
악마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이 반토막 나 있었다.
악마는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크리피와 마주했다.
“네놈…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허허, 전 평범한 인간입니다. 다만 살기 위한 발버둥을 누구보다 많이 친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느 순간 크리피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실눈이라 보이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는 맹수와 비슷한 호박색이었다.
“하지만 뭐, 지금 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죠. 어차피 당신은 여기서 사라질 테니까.”
“그 눈, 그런가. 넌 ‘후보자’였군.”
그렇게 중얼거린 악마는 반토막 난 잿빛의 마검으로 그를 겨누었다.
“네 강함을 인정하겠다. 그러니 내 전력을 보여주도록 하지.”
휘우우우웅!
강한 기류와 함께 먼지가 폭풍을 이루며 악마를 삼켰다.
폭풍 속에서 파직!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의 그림자가 커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상반신은 황소, 하반신은 인간인 반인반수의 거대한 괴물이 튀어나왔다.
먼지로 이루어진 잿빛 동체와 검붉은 마기가 집중된 뿔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내 이름은 먼지의 악마, 하겐. 너를 죽일 존재의 이름을 기억해둬라.
그것을 올려다보며 크리피는 태연했다.
“이런 이런, 그렇다면 저도 제가 왜 전장에서 떠났는지를 보여줘야겠군요.”
츠츠츠
크리피의 검이 먹빛으로 물들었다.
달이 없는 밤이라 어두웠지만 그 희미한 빛마저 빨아들인다고 느껴지는 진한 먹빛이었다.
-놀랍군. 불완전하긴 하나 의지가 섞인 에테르 블레이드라니. 네놈은 이미 인간의 한계에 도달했구나.
먼지의 악마 하겐은 감탄했으나 곧 흉흉한 안광을 번뜩였다.
-그렇다 해도 인간은 인간. 나를 이길 수는……!
파직!
그때 한 줄기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에 맞은 순간 먼지의 악마 하겐의 기운이 흐트러졌고, 크리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리피류 오의 – 만화검萬化劍
촤라락!
수많은 검의 환영, 하나하나가 다른 검술을 담은 그 검의 환영이 먼지의 악마 하겐을 휩쓸었다.
-크아악!
파스스-
하겐의 단말마와 함께 먼지와 마기는 모두 흩어졌다.
그 후에 남은 것은 악마석뿐이었다.
삐익!
“?”
그때 휘파람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악마석을 집어갔다.
크리피는 그것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루카가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를 떠올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뒤돌아섰다.
“오트보 학생이 잘 도망쳤을는지 모르겠군요.”
슝!
그대로 크리피는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잘 들으세요. 전투가 시작되면 제가 상대를 도발할 겁니다. 그 틈을 타 루카 군을 데리고 도망치세요.
-저 산 안에 아직 적들이 좀 남은 것 같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무운을 빌죠.
산에 들어가기 전 크리피와 했던 약속에 따라 오트보는 루카를 업고 바로 도망쳤다.
“헉… 헉… 헉……!”
오트보는 지금 살면서 제일 열심히 뛰고 있었다.
오로지 루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만타스 교수님 감사합니다……!’
기초 체력 수업 때 거의 토하면서 했던 달리기,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뛸 수 있었다.
툭! 콰당!
“으앗?!”
하지만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그가 거친 산길을 달리다 보니 나무뿌리나 자신의 발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오트보는 정면으로 넘어졌다.
옆이나 뒤로 넘어지면 루카가 다칠 테니까.
“으으…….”
넘어질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력으로 신체를 보호하고 있기에 상처는 잘 안 나지만 흙과 낙엽으로 얼굴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언제 적들이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
오트보는 비틀비틀 일어나 다시 달렸다.
‘으으… 비행마법을 배워둘 걸 그랬어.’
바스락!
“흐이익?!”
열심히 달리던 그의 앞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키이잉!
그 소란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은 기갑 보병이었다.
오트보는 그것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목격자는 전부 사살하라!”
“으갸악!”
하지만 돌아선 곳에는 마도구로 무장한 마도 병사가 있었다.
다시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오트보, 그리고 그곳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 제발…….”
또 나올 적이 있다는 사실에 오트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보다 발이 빠르군, 오트보 그레스.”
“……!”
들린 것은 익숙한 목소리, 오트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쾅! 콰직!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셀라가 기갑 보병과 마도 병사를 정리한 뒤였다.
“이, 이셀라!”
“후… 늦지 않은 모양이군. 루카 트래버스는?”
“루카는 괜찮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아!”
업혀 있는 루카를 슬쩍 살펴 본 이셀라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셀라 또한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눈빛이 선명했다.
“너 쓰러져 있던 거 아니었어? 괜찮아?!”
“네게 걱정 받을 정도로 약한 몸은 아니다.”
“아… 응…….”
차가운 그녀의 대답에 오트보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이셀라는 입술을 살짝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한계까지 써서 현기증이 온 것뿐이었다. 마력만으로도 이런 잡병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자, 잡병? 이것들이?”
“그래.”
이제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는 오트보, 이셀라는 어둠 속을 보았다.
“많지는 않지만 아직 3황자의 잔당들이 남아있다. 내 상대는 안 되겠지만 싸우고 있을 때 너를 향한 기습을 완벽하게 막아줄 수는 없어.”
“괘, 괜찮아! 다른 건 몰라도 루카만큼은 지켜낼 테니까!”
비장한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이셀라는 앞을 보았다.
“믿고 맡기지.”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은 착각일까.
* * *
“이런 이런, 화려하게 해놨군요.”
크리피는 오트보가 자동 마차를 숨겨둔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기계 잔해와 시체, 그리고 마차 앞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셀라가 있었다.
“그 악마는 어떻게 됐습니까?”
“파랑새가 물어갔습니다.”
“……예?”
뜬금없는 그의 말에 이셀라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으나,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기에 크리피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떻게 잘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루카 군과 오트보 학생은?”
“안에 있습니다.”
이셀라는 순순히 옆으로 비켜주었고 크리피는 슬쩍 마차 안을 보았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이럴 때는 확실히 학생 같군요.”
루카와 오트보는 기대어 앉아 쿨쿨 자고 있었다.
마치 놀다가 지쳐 잠든 아이들처럼 말이다.
33화
‘앞으로 30분인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어두운 공간.
그곳에서 미리아는 11시간 30분째 있었다.
취침으로부터 8시간, 위기로부터 12시간.
이것이 미리아와 이셀라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이셀라는 괜찮겠지?’
이 공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미리아라고 해도 바깥의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후… 디멘션 코어를 좀 더 잘 쓰게 된다면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있을까?’
그녀는 아직 디멘션 코어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한다.
<디멘션 코어를 다루는 방법> 같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승도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 가장 강한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생존본능 덕분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다른 공간으로 보내는 ‘왜곡’과,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을 만드는 ‘폐쇄’를 터득할 수는 있었다.
다만 본능에 의존한 기술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
‘디멘션 코어의 힘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이셀라를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이 공간에 혼자 있을 때면 항상 이런 잡념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마법 공부와 마력 회로 강화에 집중했다.
덕분에 S클래스에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셀라에게 도움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후,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미리아는 심호흡을 했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매번 긴장되었다.
‘여기서 나갔을 때 이셀라가 없으면 어떡하지?’
매번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불안을 날려주려는 듯 언제나 이셀라는 그 앞에 있었다.
미리아는 애써 웃었다.
이셀라를 믿고 있기에.
그녀가 지켜줄 거라 믿고 있기에.
파앗
“……이셀라?”
그러나 이번엔 이셀라가 없었다.
아니, 이셀라뿐만이 아니라 폐쇄공간 안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없었다.
절벽도, 호수도, 산도 말이다.
털썩
“도대체… 무슨 일이……!”
미리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미리아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셀… 이셀라…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장난치지 말고 나와줘… 이셀라… 괜찮은 거 맞지? 살아있는 거 맞지? 날 지켜줘… 무서워… 나 혼자서는 안 돼… 제발…….”
평소의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주저앉아서 덜덜 떨며 계속해서 이셀라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 눈가가 젖고 숨이 가빠졌다.
“아가씨!”
“!”
그때 들려오는 이셀라의 목소리, 미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거기 계셨군요, 아가씨!”
“미리아……?”
“죄송합니다!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아가씨께서 은신처에 들어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아가씨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급하게 달려와 미리아의 안색을 살피는 이셀라.
그녀는 미리아가 안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상황을 설명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미리아가 애도 아니고, 네가 잠깐 시야에 안 보였다고 울기라도 할 거 같나?”
“루, 루카. 그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루카? 오트보?”
그때 함께 나타난 루카와 오트보.
루카는 무덤덤하게 이셀라를 타박했고 오트보는 미리아의 눈가를 보고는 황급히 그를 말렸다.
그들의 등장에 당황하는 미리아를 보며, 이셀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도와줬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아가씨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셀라?”
이셀라가 평소에는 절대 내뱉을 리 없는 약한 말을 하자 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젯밤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루카는 혀를 찼다.
“쯧, 귀찮은 녀석을 친구로 둬서 고생이군.”
“그러니까.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평소라면 네 녀석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만, 이번만큼은 아가씨의 실책이 크니 할 말이 없군.”
죽이 척척 맞는 세 사람.
미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셋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굳이 따지자면 네 덕이지. 네 멍청한 행동들 때문에 우리가 몹시 고생했거든. 함께 고생을 하면 친해진다고 하지 않나.”
“루카 트래버스. 그 이상 아가씨를 모욕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물론 이번에는 아가씨의 실책이 크지만 말이야.”
“이거 큰 실례를 했군. 어떤 머저리가 남자한테 빠져 죽을 뻔한 걸 목숨을 걸고 살렸지만, 이 정도의 말도 허용되지 않는다니. 미안하게 됐다.”
“……도대체 어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리아에게 결국 세 사람은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3황자의 사병은 예상했지만… 아, 악마라고?”
“다행히 마침 내가 하늘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네가 오늘 마주한 것은 시체가 되어버린 우리들이었을 거다.”
“마침 하늘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인정하겠다.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나조차도 위험했겠지.”
이셀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오트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찔하네.”
“오트보 네 역할도 컸다. 크리피 교사를 제때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아마 위험했을 거다.”
“지, 진짜?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활약이 있는지 없는지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오트보는 이셀라의 칭찬에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미리아.
만약 이셀라의 긍정이 없었다면 이 말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황당한 이야기니까.
“3황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황실의 혈육이라고 해도 악마 같은 고대의 존재와 손을 잡는다면 ‘아센티 교단’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3황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중 문제다.
미리아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었던 것 같지만, 루카와 오트보의 도움으로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당장의 증거가 없으니 그를 추궁할 수는 없겠지만, 이 일은 미리아의 인생에서 꽤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지. 난 지금 몹시 피곤하니 빨리 돌아가자.”
“으으, 아카데미까지 자동 마차를 운전해야 하다니…….”
“사고 안 나게 잘 운전해라.”
뒤돌아서는 루카와 절망하는 오트보, 그리고 그들을 보며 아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이셀라.
세 사람을 보며 미리아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젯밤의 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부럽네.’
죽을 뻔했다는 사람들에게 부럽다고 하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리아는 훨씬 친해진 것 같은 그들이 부러웠다.
먼저 가던 루카가 멈칫하더니 복잡한 감정에 갈팡질팡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이 미리아. 오늘 점심은 같이 먹을 건가? 오트보 녀석이 자꾸 너랑 같이 점심 먹고 싶다고 보채는군.”
“루, 루카!”
아주 약간 장난기가 섞인 그의 말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오트보.
미리아는 그들을 보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좋아. 오늘은 약속이 없으니까 특별히 같이 먹어 줄게!”
“뻔뻔하군. 오트보, 대체 저런 여자의 뭐가 마음에 드는 거지?”
“루카! 쉿!”
웅웅!
그때 루카의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루카는 의아한 표정으로 폰을 꺼내 보고는 입술을 비틀었다.
[불사의 황녀]
-브리드 세테그 에르난의 가짜 신분, 미리아 필레와 친해지세요.(o)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를 위험에서 구해주세요.(o)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를 둘러싼 어둠의 근원을 찾으세요.
-???
-???
-???
힌트가 갱신되었다.
* * *
루카와 오트보, 미리아와 이셀라, 거기에 밤새 3황자의 사병들을 모두 해치운 크리피를 태운 자동 마차는 다행히 사고 없이 아카데미에 돌아올 수 있었다.
크리피는 아카데미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피곤하다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네 사람은 어느 정도 잠을 자기도 했고 아직 젊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다가 점심까지 먹고 헤어졌다.
“그럼 나도 이만 쉬러 가겠다.”
“응, 루카. 내일 봐!”
“그래.”
오트보를 보낸 루카는 그제야 자신의 침실 침대에 누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폰을 보았다.
[알림 : 수령하지 않은 특전이 있습니다. 확인하십시오.]
[알림 : 하늘새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알림 : 사용하지 않은 조각모음 슬롯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많은 알림이 와있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스토리만 보고 있었더니 뭔가 많이 왔었네.’
휘슬을 필두로 이것저것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폰을 봐도 상황 타개를 위한 정보 수집을 하느라 어플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전은… 아, 비하인드 스토리.’
그러고 보니 비하인드 스토리 해방 특전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걸 받은 기억이 없다.
루카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들어가 특전을 확인했다.
[피아 숲의 신상 비하인드 스토리 해방 특전]
-비밀 등급 5의 ‘피아 숲의 신상’ 비하인드 스토리 해방에 성공하였습니다.
-특전으로 ‘5등급 정보 검색 이용권’이 제공됩니다.
‘정보 검색이라.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지.’
폰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이상 정보 검색이나 상점 이용 같은 게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힌트 조각모음처럼 정보 검색에도 제약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등급으로 둘 줄이야.’
루카는 바로 검색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정보 검색]
-등급에 맞지 않은 내용을 검색할 경우 이용권은 소모되지만 정보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검색 이용권으로 최대 세 번까지 검색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검색한 정보는 자동으로 저장됩니다.
검색 어플리케이션을 켜자마자 나오는 주의사항, 아무래도 정보의 중요도를 역추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둔 것 같다.
‘뭘 검색하지?’
그런데 당장 뭘 검색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피아 숲의 신상 정도의 비하인드 스토리면 딱히 크게 중요한 스토리도 아닌 것 같고. 이걸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겠지.’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하늘새 성장일기를 보았다.
[하늘새 성장일기]
[휘슬]
종족 : 하늘새
성장치 : 2단계(진화 중)
사용 가능한 하늘의 힘 : 번개, 구름
총평 : 첫 악마의 힘을 흡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하늘새의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악마 사냥의 시작입니다. 더 많은 악마의 힘을 흡수하여 과거 악마들로부터 인류를 구원했던 진정한 하늘새의 힘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
루카는 휘슬이 언제 악마의 힘을 흡수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성장일기의 변화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화 중이라니 지금 대화할 수는 없을 거 같고, 이것도 일단 넘어가야 하나?’
악마의 힘을 어떻게 흡수했는지 궁금하지만 당장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진화가 끝난 휘슬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카는 조각모음을 켜려다가 문득 힌트가 갱신된 것을 떠올렸다.
[불사의 황녀]
-브리드 세테그 에르난의 가짜 신분, 미리아 필레와 친해지세요(o)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를 위험에서 구해주세요(o)
-미리아 필레와 이셀라를 둘러싼 어둠의 근원을 찾으세요.
-???
-???
-???
“흐음…….”
굉장히 어려운 미션이었던 미리아와 이셀라를 위험에서 구해주는 것은 어떻게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엔 둘러싼 어둠의 근원을 찾으라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감이 안 잡히네. 3황자가 어둠의 근원 아니야? 도대체 걔한테 또 뭐가 있다는 거지?’
고민을 하는 그의 눈에 또 다른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아카데미에 드리운 어둠]
-아카데미의 어둠과 연관된 사람을 찾으세요.(o)
-아카데미의 어둠과 실제로 조우하세요.
-???
-???
-???
-???
‘……잠깐만. 이건 또 왜 안 바뀐 거야?’
아카데미의 어둠, 마틴은 이미 만났다. 거기다 그의 정체까지 알아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 드리운 어둠이 바뀌지 않았다.
폰을 지그시 바라보던 루카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데몬즈와 아카데미의 어둠은 다른 건가? 아니, 애초에 데몬즈는 어둠이 아닌가?’
웅웅!
“아, 깜짝이야.”
그때 갑자기 울리는 학생 수첩, 루카는 또 폰에 무슨 변화가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다가 시큰둥한 얼굴로 학생 수첩을 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귀에 댔다.
“무슨 일입니까, 크리피 스승님.”
34화
-스승님.
-왜.
-어째서 제게 이렇게 잘 해주시는 거예요?
-뭘 잘해줘?
-전장에 있을 때는 검술 가르쳐주고, 전장 떠나게 되니까 아카데미 같은 곳에 넣어주고.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이 녀석아, 내가 네 성격 아는데 넌 황족 밑에 들어가봤자 싸우고 폭동 일으켰다가 처형될 놈이야.
-그건 또 무슨 막말이에요?
-이거 봐라. 하늘 같은 스승님한테 말하는 본새 봐라. 황실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빤하다 빤해.
-……그냥 밑에 두고 갈구려는 거 아니에요?
-내 밑에서 욕먹는 게 낫지. 두고 봐라. 너도 제자 생기면 내 마음 다 이해하게 될 테니까.
크리피는 스승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크리피 정도의 강자는 하룻밤 잠들지 못한 것으로 지치지 않는다.
애초에 전장에서 살아온 그는 한숨도 자지 않고 3일을 싸우던 일도 비일비재해서, 어젯밤 정도의 일로 지쳐 쓰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제자가 생기면 이해하게 될 거라니.’
오랜만에 겪은 전투 덕에 피가 끓었다. 밤새 검을 휘두르며 전장에서 날뛰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피곤하다는 핑계로 먼저 사무실로 가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니 더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아카데미에 오게 된 이야기 말이다.
‘일단 제자가 생기긴 했습니다, 스승님.’
솔직히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루카와 이셀라의 결투를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특히 루카의 그 혈기와 기본기만 단련된 검술을 보니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래서 여러 계산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꽤 충동적으로 제자가 될 것을 제의했다.
루카는 거절했지만 오히려 거절하니까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와일드 트래버스 이야기도 꺼냈고, 대련도 제안했다.
‘후후, 덕분에 죽을 뻔했지만요.’
크리피는 그때를 회상하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제자라…….’
솔직히 갑자기 찾아와서 자기가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땐 미친놈인가 했다.
거기에 상대가 3황자라지 않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스승님께서는 어쩔 생각입니까?
하지만 그 한마디에 뭔가 가슴이 뭉클했다.
스승님.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은 뭔가 달랐다.
‘아주 약간은 당신이 이해되는군요, 스승님.’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생각될 정도다.
동시에 그의 스승이 왜 그를 아카데미로 데리고 왔는지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도 당신 눈에는 제가 어리게 보이는 모양이군요.’
크리피는 다시 한번 쿡쿡 웃으며 교사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루카에게 연락을 했다.
“할 말이 있는데 제 사무실로 와주겠습니까?”
-……금방 가겠습니다.
“천천히 오시죠.”
루카와의 통화를 끝낸 크리피는 다시 술을 따랐다.
‘정식으로 사제관계가 된 이상…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야겠죠.’
함께 사선을 넘었으니 둘은 이제 한배를 탄 사람이다.
거기다가 크리피의 손으로 확실히 3황자의 사병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죽였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아무래도 황권다툼에 연루된 거겠죠. 이셀라 학생은 밤의 일원일 테니, 정황상 그녀가 모시는 미리아 학생이 요즘 행방이 묘연한 불사의 황녀 브리드 에르난일 테고요.’
루카와 이셀라가 대련할 때, 그녀의 검술에서 밤의 일원임을 대충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은 거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루카를 만나며 이전까지의 삶을 털어낸 영향이 더 크지만.
‘루카 군이 어디까지 말해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만 그를 믿게 된 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크리피는 그렇게 생각하며 잔을 비웠다.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고를 세 번쯤 반복했을 때, 루카가 도착했다.
똑똑.
“들어오시죠.”
노크와 함께 들어온 루카는 벨라를 대동한 상태였다.
크리피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벨라를 흘끔 보고는 허허 웃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트래버스 가문의 은밀부대 사람이군요. 걱정하지 마시죠. 이 근처에 도청은 없습니다.”
“그건 제가 판단한답니다.”
벨라가 웃으며 단칼에 대답했다.
눈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는 냉정한 느낌이었다. 평소 루카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이쿠, 은밀부대 분들은 모두 쌀쌀맞군요.”
크리피는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갔다.
루카도 그를 따라 소파로 갔고 둘은 마주 본 상태에서 자리에 앉았다. 벨라는 자연스럽게 루카 뒤에 섰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요.”
크리피가 말을 고르며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루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리아 필레는 제4황녀 브리드 에르난입니다. 이셀라는 그녀의 호위 달빛의 기사 라이셀 판드리가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루카, 크리피는 아주 잠깐 멈칫했지만 곧 미소를 띠었다.
“알고 있습니다.”
루카는 바로 그렇겠지, 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평민인 이셀라에게 바로 존대를 할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에 그가 이미테이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충 예상했다.
대련에서 본 검술로 이셀라가 밤의 일원임을 알아차렸을 거라고.
‘그 정도는 눈치 채야 스승으로 삼지.’
실력 없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실 생각은 없었기에 루카는 크리피의 대답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말했다.
“스승님과 저는 이제 한배를 탄 상태이니 모두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렇군요.”
짧게 대답한 크리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제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요.”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한잔 따른 그가 잔을 반 정도 비웠을 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장의 악몽이라고 불렸던 제가 왜 전장을 떠났는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이긴 했다.
전장의 악몽이라 불렸고 평민 출신으로도 성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검사였던 그가, 왜 하필 아카데미로 왔고 어떻게 아카데미로 왔는지.
따지고 보면 꽤 궁금한 이야기였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우선 첫 번째. 전장에서 싸우기엔 제가 너무 강해져버렸습니다.”
“…….”
루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원작의 크리피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담백하게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데도 크리피가 말하면 왠지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크리피는 검을 꺼냈다.
“전장에 너무 강한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현시대의 전쟁은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권의 나눔, 그리고 전략병기의 실험이 목적이니까요.”
이건 루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루카 트래버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시대의 전쟁은 그저 거대한 실험장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다.
“마법의 발전으로 너무 많은 잉여자원이 생겼고, 그것이 평민들에게 분배되어 그들 중에 계몽을 원하는 이들이 나온다면 현 신분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형태로 자원을 낭비하고 혹여나 평민, 혹은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쌓는 것이 현 고위 귀족들의 목표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 덕에 기갑 보병이나 마도 병사 같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들이 생겨나고 있죠.”
크리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츠츠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합니다. 아무리 마법이 발전해도 결국 검사들이 남아있는 이유, 저와 같은 존재들이 나타나서입니다.”
이번만큼은 루카도 크리피의 말을 역겨워할 수 없었다.
칼날에서 빛나는 에테르 블레이드를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었군요.”
“여기까지만 했으면 그래도 전장에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지휘관 명목으로.”
“그럼……!”
그때 크리피의 에테르 블레이드가 검게 물들었다.
그것을 보며 루카는 숨을 멈추었다.
‘이 사람 이렇게 강했어?!’
사실 루카는 크리피가 마스터의 경지에 상대 기술을 흉내 내는 것으로 먹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리피는 에테르 블레이드에 ‘의지’를 섞을 수 있는 경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것이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에테르에 의지를 섞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긴 했습니다. 다만 보다시피 의지의 색이 좀 불길해서 말입니다.”
“……아.”
크리피는 대륙에서 보기 드문 소수민족이다. 거기에 새까만 에테르 블레이드. 좋은 소문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전장에서 쫓겨나 황실의 비밀부대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아, 아쉽게도 ‘밤’은 아니었습니다.”
크리피는 검을 거두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때 스승님이 절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와서 교사나 하라고. 덕분에 황실의 비밀부대가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느긋한 생활을 하게 되었죠.”
“스승님이라 하면…….”
“최강의 검사를 논할 때 항상 거론되는 분이시죠. 무적검 제리츠. 그분이 제 스승님입니다.”
무적검 제리츠. 과거 제국 최강의 검사이자 원작에서 주인공의 스승이 되는 사람.
별명에 ‘무적’이 붙는 만큼 굉장히 강한 사람으로 나온다. 꽤 싸가지 없는 주인공도 그 사람만큼은 존경했을 정도로.
안타깝게도 무인의 악몽 이미테이터에게 죽는다.
‘이렇게 보니 꽤 의미심장하군.’
정확한 인과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으로 인해 타락한 크리피가 빌런인 이미테이터가 되어 주인공을 위협하고, 주인공의 스승이자 자신의 스승인 제리츠를 죽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분과의 인연도 참 오래되었군요. 제가 17살 때 처음 만났었으니.”
크리피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무튼 스승님의 도움으로 이곳에 왔으니 뭐라도 성과를 내고 싶었습니다. 제가 강해지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이 이상 신분이 높아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죠.”
서글픈 이야기였다.
전장에서 아무리 공훈을 세워도, 그 스스로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결론은 황족의 개가 되는 것이라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자들이 이 나라의 귀족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전장에서 공훈을 세운다고 해도 작위를 내리는 건 결코 원치 않는 것이다.
“저보다 아득히 신분이 높은 사람을 제자로 삼는 것, 그게 제가 더 높은 신분이 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꽤 타당한 생각이었다.
완전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무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를 황실의 비밀부대로 끌고 가는 세상인데, 스스로도 더 강해져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결국 혈연, 지연, 학연이 전부라는 결론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높은 귀족가의 자제들 중에는 검술에 집중하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기껏해야 취미생활 정도.”
“……SA클래스에 들어갈 사람이면 그 정도뿐일 겁니다.”
“하하, 확실히 S클래스는 조금 다를 수 있겠죠. 하지만 제가 S클래스 수업을 맡기는 좀 힘들어서 말입니다.”
크리피가 아무리 경험 많은 실력자라곤 해도, 그가 제국제일검은 아니었다.
전쟁이 끊이질 않는 세상이다.
크리피와 비슷한 수준의 마스터들은 충분히 있었고, 그중에는 귀족도 있다.
그러니 평민 출신인 크리피가 S클래스를 맡을 수는 없는 것이다.
크리피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무튼 이곳에 와서 5년 정도 꽤 힘들었습니다. 물론 생활은 이전보다 편했지만 전장에 있을 때처럼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저 혼자 필사적인 게 견디기 힘들더군요. 그 때문에 성격도 좀 안 좋아졌고요.”
루카는 진짜 힘들어서 성격이 안 좋아진 게 맞습니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 당신과 이셀라 학생이 대련하는 것을 보고 피가 끓더군요.”
말을 마친 그가 술잔에 있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살짝 떴다.
-그것의 눈은 마치 맹수와 닮아있었다.
-호박색 눈, 거기에 비친 것은 모두 간파당한다.
‘호박색 눈… 진짜 이미테이터였구나.’
그의 눈동자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의 눈과 같았다.
눈을 제대로 뜨니 인상이 달라졌다.
이전에 그 얍삽한 인상과는 달리 압도적인 강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나 루카 군의 검은 제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검이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건…….”
“루카 군과 다른 케이스지만, 평민 출신인 저 또한 배울 수 있는 게 기본기뿐이었거든요. 그것만이라도 어떻게든 갈고 닦아 살아남기 위해, 혹은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느낌이 닮았었습니다.”
크리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게 제가 당신을 제자로 삼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대충 제 과거와 당신을 제자로 삼은 이유를 다 말한 것 같군요.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루카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제 검술은 언제 완성됩니까?”
“……하하, 역시 루카 군은 다르군요. 이런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다니.”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 이미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고, 당신 또한 저를 제자로서 최선을 다해 지켜줄 거라는 믿음을 주었으니.”
무심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의 답이 크리피는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다음 달 시험이 끝난 후부터 바로 검술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꽤 엄격하게 가르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뭐죠?”
루카는 잠깐 주저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라 생각했기에 말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당신에게 꽤 많은 불합리한 일이 생길 겁니다. 예를 들면 E클래스 교사로의 격하 같은…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목격자를 전부 없애긴 했지만, 3황자 쪽에서 크리피가 개입한 것을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 세상에는 마법이나 정령 등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있으니까.
그럴 경우 확실한 증거는 없어도, 별다른 지지 세력이 없는 크리피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쯤은 간단할 것이다.
“아~ 그거야 뭐… 괜찮습니다.”
그에 크리피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이제 저는 교사가 아니라 스승이니까요.”
35화
“그게… 정말이야?”
미리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이셀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어둠’이 제3황자에게 붙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루카 트래버스의 말에 따르면 ‘악마의 힘’이라는 것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악마라니, 그건 그냥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거잖아. 그리고 만약에 진짜 있다면 아무리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교단이라 할지라도 나설 텐데?”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미리아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이 이야기를 이셀라가 말한 게 아니었다면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3황자가 뭐가 아쉬워서 악마에게 힘을 빌린다는 거야? 1황자와 3황자의 세력은 비등비등하잖아.”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저는 어젯밤 그 악마의 힘 때문에 죽을 뻔했습니다.”
“그건…….”
“루카 트래버스와 오트보 그레스, 그리고 크리피 교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아가씨를 다시 볼 수 없었을 겁니다.”
“……!”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이셀라가 이렇게 약한 말을 하다니. 미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던 거지?’
하룻밤 만에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나 바뀌다니.
그것도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이셀라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아가씨, 저는 어제 밤의 일원이 되기 위한 훈련 이후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실을 지키는 밤의 일원인 제가 말입니다. 흘려들으실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3황자는 정쟁에서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릴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흘려듣지 않았어. 그냥 이해가 안 가서 그래. 3황자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말이야.”
현 황권다툼의 중심인 1황자와 3황자. 그들의 세력은 지금도 충분히 탄탄했다.
1황자는 뛰어난 화술과 교섭력, 그리고 새로운 것을 향한 끊임없는 투자로 황실 내부의 지지세력을 만든 건 물론이고 길드와 여러 중상위 귀족들, 거기에 해외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중립을 표하고 있는 파티겔 공작가와 거래를 통해 서로를 지지한다는 소문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1황자라는 정당성이 컸다.
3황자는 마법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마법사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미 아카데미 시절부터 여러 새로운 마법 이론을 많이 개발했고, 그 덕에 외부 세력인 마탑에서도 그와 협업을 원하는 이야기가 잦았다.
거기에 제국 3대 세력 중 하나인 킴벌리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그 권세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튼튼한 지지층이 있는 제3황자가 왜 리스크를 짊어지면서 악마의 힘에 손을 댔다는 거야?”
“리스크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악마의 힘이 강했다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실제로 달빛조차 그 악마의 힘을 이길 수 없었으니까요.”
“……네가 이길 수 없다고 하니까 할 말이 없네.”
제4황녀 세력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이셀라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셀라가 패배를 선언하니 어떠한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루카 트래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진심이야?”
“진심입니다. 그가 가진 하늘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 또한 평소의 이셀라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이 이셀라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되었다.
어쩌면 어젯밤에 사실 이셀라는 패배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셀라는 세뇌당한 누군가가 아닐까.
‘하지만 맹세는 그대로니 다른 사람이거나 나를 배신할 리는 없는데…….’
위험한 순간에 언제나 이셀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밤의 일원에게 주어진 권능 때문이다.
삶을 바치기로 맹세한 존재가 필요한 순간에 나타날 수 있는 대신 주인을 절대 배신할 수 없다.
배신하면 밤의 권능에 의해 죽는다.
그러니 설혹 세뇌를 당했다고 해도 이셀라가 그녀를 배신하는 일은 없다.
눈앞에 그녀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그녀의 결백은 증명된 것이다.
“아가씨께서 원래 준비하고 있던 계획에 루카 트레버스를 추가하는 게 제일 좋으리라 판단됩니다.”
“뭐? 하지만 그건… 하… 좋아. 하지만 루카를 데리고 오면 오트보 걔도 데리고 와야 하는데? 걘 너무 쓸모가 없잖아.”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하는 미리아, 하지만 이셀라는 여전히 단호했다.
“어젯밤 루카 트래버스가 가장 큰 역할을 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오트보 그레스와 크리피 교사 둘 중 한 명만 없었어도 우리 모두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그 정도야? 하지만 그 녀석 마법 실력이 형편없는데?”
“적어도 그의 동력 마법에 대한 이해도와 자동 마차 운전 실력만큼은 믿을 만합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가 자동 마차의 안정 장치를 해제하고 속도를 한계 이상까지 올린 상태에서, 완벽한 운전으로 저희가 있는 곳까지 크리피 교사를 데리고 온 덕분에 늦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그녀였지만 미리아는 떨떠름했다.
“그건 베테랑 자동 마차 운전수도 할 수 있는…….”
“아가씨!”
“아, 알았어! 으…….”
다그치듯 말하는 이셀라, 꽤 오래 함께했지만 이런 태도를 취하는 그녀는 처음이라 미리아는 압도되고 말았다.
“후… 좋아. 쓸모가 없으면 쓸모 있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들었다가 너를 잃을 뻔했잖아. 이젠 들어야지.”
미리아는 쓴웃음을 지은 다음 한숨을 쉬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그래도 좀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꽤 서글퍼 보이는 그녀를 보며 이셀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가씨께서는 테도르 파티겔과 함께 할 때보다 루카 트래버스와 오트보 그레스와 있을 때 더 즐거워 보였습니다. 아가씨께서 종종 말하는 ‘청춘’에 가까운 건 그들과 함께 할 때 아닐까요?”
“……그래?”
미리아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픽 웃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 *
“하루 편하게 쉬는 것조차 방해할 줄은 몰랐군.”
“하루 종일 쉬었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어제 뭘 했는지 옆에 있는 녀석에게 듣지 못한 건가?”
루카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미리아와 이셀라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꽤 퉁명스러운 그의 어투에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오트보가 그를 말렸다.
“너무 그러지 마, 루카. 쟤들도 고생 많이 했을 텐데.”
“넌 생색을 좀 더 내지 그러나.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도와달라고 해서 구해주게 된 거 아닌가.”
“루, 루카?!”
오트보를 놀리는 게 꽤 재밌었는지 이번에도 짓궂게 말하는 루카, 오트보는 당황해서 그의 이름을 부를 뿐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시시덕거리는 그들을 보며 미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걸 보여주는 거, 나한테는 꽤 리스크 있는 일이거든? 그러니 일단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좀 해봐.”
“아가씨께서 말하는 걸 듣도록!”
“이, 이셀라. 너도 목소리 낮춰.”
미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시간대라 시선이 끌리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카데미의 클럽 활동 구역.
한국으로 치면 동아리 건물 같은 곳이다.
루카는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이런 곳에 있는데 왜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거지?”
“그야 1학년은 클럽 활동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렇군.”
루카는 바로 납득했다. 금지가 되어있으면 확실히 문제가 되니까.
“정확히는 1학년의 클럽 활동 체험은 가능하지만 클럽에 가입하는 건 불가능해. 이 시간대에는 클럽 활동 체험이 불가능하니까 1학년도 입장 불가야.”
“그렇군.”
열심히 설명하던 오트보는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는 듯한 루카의 얼굴에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야.”
“……?”
그곳은 계단과 복도 사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루카는 슬쩍 주변을 훑어본 다음 미리아를 보았다.
“혹시 불량 클럽 그런 건가?”
“무슨 소리야?”
“보여주는 게 리스크라고 했는데 이런 곳으로 안내하길래 그런 건 줄 알았지.”
루카의 반응에 미리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지잉!
그녀의 손등이 살짝 빛나며 빈공간에 문이 나타났다.
“오.”
“비밀 클럽이야?! 와! 나 이런 거…….”
“이셀라. 쟤 입 막아.”
루카는 작게 감탄했으나 오트보는 상당히 흥분해서 큰 목소리를 냈고, 곧 미리아의 명령을 받은 이셀라에게 입이 틀어 막혀 조용해졌다.
“들어가자.”
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루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고 뒤이어 오트보의 입을 막은 이셀라도 주변을 훑어보며 따라 들어갔다.
우웅!
문으로 들어간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어느 순간 배경이 바뀌어 있었다.
꽤 넓은 강당 같은 공간이었다.
다만 책상과 의자만 놓인 게 아니라 침대, 소파 등 휴게용 가구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장비들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으음? 뭐야. 손님?”
그때,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소파에 누워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정리하지 않은 주황색 단발머리, 창백한 안색과 짙은 다크서클, 마치 좀비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미리아는 그 흉흉한 모습이 익숙한 듯 태연하게 답했다.
“아니요. 저희 새 멤버에요.”
“새 맴버?”
좀비 같은 인상의 사내는 루카와 오트보를 슥 훑어보고는 다시 누웠다.
“잘 지내.”
“네. 가자.”
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카와 오트보를 클럽 아지트 안쪽으로 안내했다.
루카는 지나가면서 슬쩍 좀비 같은 인상의 사내를 보았다.
묘사가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작에 나오는 인물은 아닌 듯했다.
“……누구?”
“선배. 이곳의 보안을 맡고 있어.”
“허, 보안이라. 뭐 그렇게 대단한 걸 숨기고 있는 거지?”
루카의 질문에 미리아는 그를 흘끔 보았다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아지트 중앙에 있는 커튼으로 가려진 무언가 앞에 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걸 보여주는 건 꽤 리스크 있는 일이야. 부디 내가 너희를 믿은 만큼 보답해 주기를 바랄게.”
“바로 어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펄럭!
루카가 불평을 다 내뱉기 전에 미리아는 커튼을 걷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을 본 루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카데미 전체를 비추고 있는 홀로그램, 그것은 걸어 다니는 사람도 모두 보여주고 있었다.
-“어때? 이래도 아카데미가 내 손안에 있다는 말이 거짓말 같아?”
-불사의 황녀란 이름이 그냥 붙은 게 아닌 듯했다.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저런 감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저것 때문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묘사… 라기보다는 어느 구절이 떠올랐다.
아마 원작과는 형태가 다소 다른 탓일 것이다.
아카데미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는 홀로그램, 원작에서 표현한 것처럼 아카데미 전체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이곳 클럽 건물의 형태는 구현했다.
‘1학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머리가 꽃밭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치밀하군.’
루카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오트보가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이게 뭐야?”
“내 디멘션 코어의 힘을 응용해서 특정한 영역을 감시하는 마법이야. 정확히는 고대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은 연구 단계지만 곧 이 건물 내부에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도 다 알 수 있을 거야.”
“뭐?”
오트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관음 행위 아니야?”
“……뭐?”
안 그럴 거 같은 사람의 입에서 꽤 적나라한 이야기가 나와버렸다.
36화
꽤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한 탓인지 미리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난 그저 나를 위협할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 이걸 만든 거야!”
“하, 하지만 여기 내부에 일반인들도 있고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그걸 다 보는 건 관음…….”
“어허, 오트보. 관음이 아니라 도시盜視, 혹은 도견盜見이라고 한다.”
“아, 그, 그런 거야?”
“뭐… 나중에는 정말 관음이 될지도 모르지만.”
“헉!”
“그게 무슨 소리야?!”
은근히 자극하는 루카, 그에 미리아는 더 격하게 반응했다.
“이건 우리를 지켜줄 울타리가 될 기술이야! 언제 어디서 1황자와 3황자의 공격이 올지 모르는데 미리 대비하는 게 뭐가 나빠!”
“나는 나쁘다고 한 적 없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에서 네가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는 오트보의 반응이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뭐… 그… 엇…….”
루카의 무덤덤한 말투가 미리아에게 더 큰 충격을 주는 듯했다.
미리아는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루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그에 대한 너의 대처도 잘 알겠다.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기에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란 걸 스스로도 알지 않나?”
“난… 난 그냥 너희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을 뿐이야! 너희가 나 때문에 위험에 처했으니까…….”
상정하지 못한 반응이었던 듯 미리아는 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 활용가치가 무궁무진한 능력을 루카와 오트보가 보면 ‘와아~ 대단해~ 역시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야!’ 같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4황녀의 황권다툼에 끼어들게 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루카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다? 이상한 이야기로군. 우리가 배신이라도 할 거란 말인가?”
“어? 아, 아니…….”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다. 아마 우리가 널 도와줌으로 인해 3황자를 비롯한 네 적에게 공격당할 것을 걱정하고 있고, 우리 또한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맞아.”
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걸 두려워했으면 애초에 널 구하러 가지 않았을 거다.”
“…….”
“나와 이 녀석은 1학년이지만 백작가의 차남으로서 꽤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 어느 정도 계산도 할 줄 알지. 트래버스 가문과 그레스 가문 정도면 아무런 증거 없이 탄압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냥 백작가도 아니고 국방을 책임지는 트레버스 가문과 동력 마법의 원조인 그레스 가문은 제법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차남이라고 해도 가문의 혈육을 아무 증거 없이 탄압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정도의 품격도 가지고 있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리고 또 하나, 툭 까놓고 말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너를 도와주는 건 멍청한 짓이 맞다. 계산했을 때 어느 정도 손해라고 생각하긴 했다.”
“엣.”
루카의 솔직한 말에 미리아와 오트보 두 사람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의 반응에 루카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도와줬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너희들은 어차피 계승권 없는 백작가의 차남이니까 4황녀 파벌에서의 가능성을 본 거 아니야?”
“그래.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저 편집증 환자나 생각할 법한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준 거겠지.”
루카의 신랄한 말에 미리아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
감시 시스템을 구상할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완벽한 기술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말하니 뭔가 부끄러웠다.
“굳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널 도와준 이유는 하나다. 네가 친구라서.”
“친… 구……?”
“그래. 친구. 그것 말고는 널 도와줄 이유가 없지.”
낯간지러운 말을 무덤덤하게 말하는 루카, 하지만 무덤덤하기에 더욱 진심으로 느껴졌다.
“오트보가 다시 한번 너와 점심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이셀라가 테도르 파티겔을 조사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사의 끝에 너의 위기를 발견했다.”
루카는 오트보와 이셀라, 그리고 미리아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도와주기로 했다. 이성적인 영역에서 널 도와주는 건 미친 짓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와 이셀라와 함께 노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으니까. 안 그런가, 오트보.”
“어? 으응, 그렇지.”
갑자기 바통을 넘기는 루카, 오트보는 당황했지만 곧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3황자가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많이 했어. 하지만 친구를 잃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루카와 함께 너희를 도와주겠다고 선택한 거야.”
“그게 이유라고? 진심이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묻는 미리아에게 루카는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말도 안 돼.”
“아가씨.”
여전히 믿지 못하는 미리아, 이셀라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미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이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느껴졌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라고.
“……알았어. 그러니까. 하아.”
미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흐린 눈빛으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난 1황자와 3황자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었어. 그래서 너희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 그리고 그 이상으로… 너희까지 배신하는 게 두려웠어.”
배신은 여러 번 당해봤다.
고용한 사람에게, 후견인이 되어주겠다고 한 사람에게, 거래를 한 사람에게.
그리고 이번에는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배신당했다.
“그래서 너희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어. 너희가 선택한 길이 실망할 정도로 나약한 길이 아니라고. 나는 너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더는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녀의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뿐이었다.
“셈이 빠른 건지, 순수한 건지, 악한 건지, 선한 건지. 한쪽만 해라.”
그때 루카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루카의 눈이 미리아와 마주쳤다.
그의 호수와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친구라서 도와줬다는 말은 믿지 않으면서, 믿음을 주기 위해 저런 걸 보여줬다는 말은 믿으라는 건가? 재밌군.”
“…….”
“속마음을 제대로 말해라. 나에겐 네 추악한 연기가 안 통하니까.”
아무리 친구라곤 하지만 황녀를 상대로 하기엔 꽤 거친 언사였다.
그러나 마치 속을 간파당하는 듯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오히려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가 후련해진 것 같았다.
‘들켰었던 건가.’
미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연기였다.
루카와 오트보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미리아는 연기를 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소설에서 읽은 소녀나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학창생활을 연기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을 그저 그녀의 학창생활을 재밌게 해줄 도구 정도로 생각했으니까.
재밌지 않은가.
고작 백작가의 차남이라는 녀석이 제5황녀의 에스코트를 거절했다.
그게 괘씸하기도 하고, 속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찾아가서 이셀라에게 적당히 위협을 주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이셀라의 위협을 막아냈다.
고작 백작가의 차남이라는 녀석이 황실의 비밀병기인 달빛의 검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벼운 위협이라 할지라도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재밌는 장난감이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 아카데미에서도 그와 같이 지내기로 했다.
같이 지내보니 생각보다 더 재밌었다. 이셀라에게 묘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가 신기했다.
그래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가,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을 데가 있는 패로 키워볼까? 싶기도 했다.
그냥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버릴 장난감처럼. 망가지지 않게 적당히 신경 써주는.
미리아의 루카에 대한 마음은 딱 그 정도였다.
애초에 오트보는 관심 없었다. 그냥 루카라는 장난감에 딸린 부속품 정도.
반대로, 테도르는 조금 달랐다.
그에게 끌린 것은 그를 어느 정도는 대등한 인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5남이지만 훌륭한 가문을 배경으로 둔 것, 미약하지만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어낸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가 겪어보지 못한 즐거움을 보여준 것.
그래서 테도르에게 끌렸고 그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카데미 생활에서 바랐던 것은 재미였고, 그 측면에서는 루카보다 테도르가 더 그녀를 만족시켜줬으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테도르는 3황자의 끄나풀일 뿐이었고, 루카는 스스로의 무력과 지략, 인맥으로 이셀라와 자신을 지켜주었다.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은 백작가의 차남 주제에, 3황자를 적으로 둔다는 위험한 수를 두면서까지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연기까지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난감이 아니었구나.’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버릴 적당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체스판 위의 말, 아니, 어쩌면 체스판 앞에 마주한 상대.
그녀가 가늠하지 못할 상대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셀라의 말이 맞을지도.’
루카를 S클래스로 올려주면서 자신을 재미있게 해주길 기대했었는데, 사실 그건 아카데미 생활에서의 재미 정도를 원했던 거였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해줄 줄이야.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저울에서 루카의 무게추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추악하다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리고 너 정말 1학년 맞아?”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야 난 진짜 1학년은 아니니까. 나, 너희보다 누나라고.”
미리아는 그렇게 말한 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난 너희가 내게 복종하기를 바랐어. 내 매력이든 내 힘이든. 어떤 것으로든 간에 말이야.”
처음으로 내뱉는 진짜 속마음이었다.
그에 루카는 피식 웃었다.
“이제야 그 역한 속마음을 드러내는군.”
“아 진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래, 그래. 일단 계속 말해봐라.”
놀리듯 말하는 루카를 보며 미리아는 눈을 부라렸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저걸 보면 내게 경외심 같은 게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 대단하고 무서운 힘이잖아. 모두를 감시할 수 있다는 거.”
“하지만 오트보 녀석이 그냥 불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지.”
“그러니까! 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미리아는 오트보를 보며 쏘아붙이듯 말했고, 오트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난 그러니까…….”
“됐어. 농담이야. 하… 뭐라고 해야 하나. 좀 순수한 반응에 놀랐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라고 좀 당황했어.”
미리아는 이제 감정을 좀 추스린 듯 차분해졌다.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했어. 루카는 꽤 흥미로웠지만 오트보는 사실 그렇게 쓸모 있는 말이 아니잖아. 그래서 나름 순수하게 행동했어. 친구란 게 어떤 건지 맛을 본다는 느낌으로. 나름 재밌었어. 내게 도움은 안 될 것 같았지만.”
“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내 연기가 나름 잘 먹혔던 모양이네. 그런 얼굴인 걸 보니.”
오트보는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에 미리아는 조금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가 루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넌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내가 너희를 대하는 게 장난이었다는 걸.”
“글쎄. 처음부터였던 것 같군.”
“허, 대단하네.”
사실 몰랐다. 미리아가 원래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걸.
원작에서의 그녀가 냉혈한에 모든 사람을 체스말로 보는 빌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여기 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런데 여기에 오고 나서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이미 빌런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아직 결정적인 무언가를 겪지 않았기에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거지, 어느 정도 어두운 성격이 있다는 것을.
‘여자란 무섭군. 사랑을 이야기하는 순수한 소녀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게 연기였다니.’
루카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겉으로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래도 이 바보는 네가 꽤 마음에 든 거 같고, 나도 이 촌극에 어울리는 게 가문에 있을 때보다는 재밌었으니 잠자코 있었다. 친구놀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군.”
“루, 루카!”
자꾸 자신의 치부를 들추자 오트보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네. 친구놀이라는 거, 나쁘지 않네.”
그 이후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서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루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슬슬 돌려보내 주지 않겠나. 지금부터 쉬어야 내일 수업에 지장이 없을 것 같군.”
“……그래. 뭐, 내일 점심에 같이 식사하면서 또 이야기하면 되지.”
“오트보, 드디어 네가 바라던 걸 이루게 되었군.”
“루, 루카!”
“후후. 그렇게 나랑 같이 식사가 하고 싶었어? 오트보?”
“으으…….”
오트보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네 사람은 클럽 아지트를 나가려 했고, 나가기 전 루카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말했다시피 난 저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시 시스템?”
“그래. 하지만 뭔가 아쉽군.”
루카는 예전에 원작 ‘아카데미의 구원자가 되었다’를 읽었을 때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저게 그냥 감시만 하는 건 아쉽군. 네 디멘션 코어를 이용한 거라면 ‘감시’뿐만이 아니라 ‘간섭’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그건… 음… 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저걸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게 아닌 네가 필요할 때 잠깐 사용하는 건 충분히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루카는 그 말을 끝으로 아지트에서 나갔고 그를 뒤따르던 미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렇단 말이지……?”
이 짧은 대화가 미리아를 다른 형태로 각성시키게 될 거라고는 루카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37화
“저기… 루카.”
“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오트보가 루카를 불렀다.
“진짜로 미리아가 처음부터 연기를 한 거야? 우리와 친분을 쌓으려고?”
“그건 본인만 알 이야기지. 그녀의 말을 전부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으… 여자의 마음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오트보는 우울한 표정을 짓다가 슥 루카를 보았다.
“……왜 그러지?”
“루카. 넌 여자의 마음을 잘 알잖아.”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다. 저 녀석처럼 속이 까만 녀석을 잘 알아차리는 거지. 그리고 저 녀석의 속마음을 여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루카든 루카 트래버스든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른다.
이번에도 그냥 얻어걸린 것뿐이니까.
하지만 오트보는 루카가 여심을 파악하는데 통달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가르쳐줘!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걸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거야!”
“이런 건 말해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제발! 뭔가 작은 팁이라도!”
이전 생에서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루카에게 그런 걸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카는 무엇을 말해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디서 봤던 것 같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자의 눈물은 땀과 같다.”
“어… 뭐?”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들고 곤란한 상황이 되면 일단 우는 게 여자다. 그러니 그런 거에 속지 마라.”
상당히 왜곡된 여성상이었지만 루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는 여자를 인터넷으로 배웠으니까.
하지만 오트보는 그에 홀린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눈물은 땀… 알겠어!”
“…….”
왠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뭐, 별일 있겠어. 해봐야 저 녀석이 또 욕먹는 것밖에 없겠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마인드였다.
그런 잡담을 하는 사이 어느새 기숙사에 도착했다.
“피곤하군. 먼저 들어가지.”
“응! 내일 봐!”
“그래.”
오트보와 헤어지고 방에 돌아온 루카는 기다리고 있던 벨라와 식사를 하고 침실에 들어갔다.
루카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짐작이 안 되긴 하네.’
이번 일은 그에게도 꽤 큰 도박수였다.
미리아와 이셀라를 구하면서 꽤 많은 투자를 했다. 그리고 또 많은 리스크를 졌다.
‘3황자가 우리에 대해 알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최악을 가정해야 하니 들켰다고 치고. 벨라의 말로는 그 정도로는 가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오트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루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미리아의 위치를 찾고 이후 일어날 일에 대해 예상하고 그 다음 계획도 짜두었다.
‘십중팔구 아카데미 내에서 3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시비를 걸어오겠지. 파스모의 말에 따르면 구심점을 잃은 테도르 파벌도 우릴 피곤하게 할 거고.’
‘하지만 테도르 파벌은 잘만 구슬리면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어. 내겐 그들에 대한 정보가 있으니 거기에 더해 내 강함을 보여주면 어떻게든 될 거야.’
‘내 파벌을 만들면 3황자 지지 세력도 쉽게 우릴 공격하지 못할 거고.’
보거스에게 받은 정보와 지금 자신의 힘을 믿고 있기에 이런 계획을 짠 거겠지만, 이 계획에는 큰 결함이 있다.
테도르 파벌 사람들의 천성, 놀이를 좋아하는 그 성격을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두들겨 패는 거나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테도르 파벌을 흡수하는 것은 힘들다.
‘일단 테도르 파벌을 흡수하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아야겠군.’
하지만 그걸 모르는 루카는 그냥 막연하게 그들을 아래로 둬야겠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그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중에 그를 괴롭힐 것이 바로 내일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루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바쁘겠군.’
내일부터 정말 바빠질 예정이다.
* * *
“자, 오늘 배울 기본기는 제압입니다. 검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 파트는 종류가 꽤 많기 때문에 나누어서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우선…….”
왠지 엄청 길었던 주말이 지나고 다시 평일이 왔다.
당연히 오늘 배우는 것도 이미 마스터한 루카, 적당히 다른 학생들의 자세 교정과 대련 신청을 받아주며 시간을 때우다가 수업이 끝났다.
“…….”
다른 학생들이 마무리 연습을 할 때 루카는 슬쩍 이셀라의 눈치를 보았다.
뭔가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어색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이셀라는 슥 그를 보았다.
“아가씨께서 오늘은 같이 점심을 먹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할 거지?”
“……가자.”
생각보다 평범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평소처럼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마법학부 건물까지 갔고 거기서 오트보와 미리아를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나왔다.
“많이 기다렸지? 오트보가 또 쪽지시험을 제대로 못 해서 늦었어.”
“미, 미리아!”
“놀랍지도 않군. 배가 고프니 바로 식당으로 가지.”
마치 저번 주에 겪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는 모습에 네 사람 모두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이야기가 되는구나.’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늘 학식은 꽤 맛있는데!”
“그래? 테도르 파벌에서 먹는 곳은 더 맛있던데.”
“뭐, 뭣.”
들뜬 오트보의 호들갑에 자연스럽게 저번 주 이야기를 꺼내는 미리아, 오트보는 당황했지만 루카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때 뭘 했는지 이야기해 봐라. 이셀라 저 녀석은 그냥 굉장했다, 라고만 하더군.”
“……그것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후후, 확실히 이셀라는 그런 거에 면역이 좀 없으니까.”
미리아는 작게 웃으며 테도르 파벌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클래식이나 뮤지컬 말고 그런 춤이 있다는 거에 꽤 놀랐어. 외국에서는 그렇게 논다고 하더라.”
“나 그거 알아! 월간 파티 피플에 나왔어!”
“그 월간 파티 피플은 아카식 레코드 같은 건가? 다 거기서 나왔다고 하는군.”
“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잡지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허…….”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끝나갔다.
“슬슬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야겠군.”
“응! 재밌었어. 아, 그리고 오트보. 너 이제 오후 자유 시간에 나 따라와.”
“어… 어?”
미리아의 말에 오트보는 당황한 듯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미리아는 정색했다.
“언제까지 수업 못 따라올 거야? 넌 마법 기초가 너무 부족하니까 나한테 배워. 내 파벌에 들어온 이상 무능한 건 용서하지 못해.”
“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일단 와. 알겠지?”
에르난 아카데미의 시간표는 수업마다 다르지만 보통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오전 수업, 12시부터 1시 30분까지 점심시간, 1시 30분부터 3시까지 오후 수업, 3시부터 5시까지 자유 시간이며 오전 수업은 각 학과 전공 수업, 오후 수업은 공통 과목을 듣는다.
공통 과목 중 자유 시간까지 잡아먹는 3시간짜리 수업도 있지만 인기가 없어서 폐강된 게 많다.
다만 기초 교양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거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3시간짜리 오후 수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 시간은 놀라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오전이나 오후에 들었던 수업에서 추가 공부를 하고 싶으면 신청하고 추가 공부를 하거나 연습장을 빌려 자유롭게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클럽 활동을 하거나 연구, 혹은 대회 훈련을 하는 사람도 있다.
“너 어차피 자유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하잖아.”
“해! 연습!”
“뭘 해? 그게 연습한 마법 실력이야?”
꽤 까칠하게 말하는 미리아, 그만큼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느낌이었다.
오트보는 작게 대꾸했다.
“동력 마법은 연습하고 있어…….”
“그게 문제야! 넌 동력 마법만 잘하고 기본적인 마법은 못하잖아! 그러면 네가 자동 마차 운전수랑 마도 열차 기관장이랑 다를 게 뭐야?”
“…….”
정곡을 찔린 듯 오트보는 움찔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 할게…….”
“나도 내 시간 써서 너 도와주는 거야. 억울한 것처럼 행동하지 마.”
“……으응.”
대충 이야기가 정리된 듯하자 루카가 고갯짓을 했다.
“상황이 정리되었으면 슬슬 가지. 역사 수업 교사는 꽤 히스테릭하니까.”
“응.”
그렇게 오후 수업도 끝이 나고 자유 시간이 왔다.
“루카 너도 올 거야?”
“난 개인 훈련을 신청해 뒀다.”
“알았어.”
루카는 항상 연습장을 빌려 개인 훈련을 한다.
가문에서 할 때만큼 격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일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내면의 루카 트래버스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예전 몸이면 몰라도 지금 몸으로 훈련을 하면 상쾌하단 말이지.’
학창 시절 축구도 하지 않는 몸치였던 그이기에 이렇게 좋은 운동신경에 단련된 몸으로 하는 훈련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쾌감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저주파 마사지도 슬슬 다시 받아야 하는데 휘슬이 연락이 없군. 충전을 안 해서 번개의 힘도 없는데…….’
아직 진화 중인 휘슬, 그 때문에 번개의 힘을 충전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
루카는 휘슬을 찾으러 가볼까 생각했지만 방해하면 안 된다 생각해서 그냥 훈련장으로 향했다.
“루, 루카 트래버스님!”
“?”
혼자 훈련장으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여학생이었다.
브로치를 보아하니 그와 같은 1학년이었다.
“그… 저…….”
그녀는 쭈뼛쭈뼛 다가와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랑 결투를 해주세요!”
“……?”
예쁜 글씨체로 ‘결투장’이라 적힌 봉투였다.
루카는 결투장과 그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러지.”
* * *
“무언가를 걸고 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가벼운 결투 룰로 하겠다. 상관없나?”
“네!”
“심판 없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패배를 선언하거나 무장해제 되면 끝나는 것으로.”
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목검을 들었다.
딱 봐도 상대는 검술을 전공한 사람 같지 않았다.
왜 결투를 신청하러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후… 후…….”
긴장하고 있는 건지 심호흡을 하고 있는 소녀, 자세히 보니 앳된 느낌이 꽤 귀여운 아이였다.
‘혹시 테도르 파벌의 사람?’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취했다.
“셋을 세고 시작하지.”
“네!”
“셋, 둘, 하나.”
휭!
루카는 일단 진심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저렇게 하는 것도 연기일 수 있으니 말이다.
“히이익?!”
퉁! 탁!
하지만 결과는 김이 빠질 정도로 싱거웠다.
그냥 강하게 검을 회전시키는 것만으로 목검을 놓아버린 소녀, 목검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으으… 졌습니다…….”
“……?”
소녀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패배를 인정하고는 바로 훈련장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루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훈련장 안으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람을 보고 긴장했다.
‘함정인가!’
여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빌미로 그를 정학 혹은 퇴학에 처하게 하려는 함정,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훈련장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여자인 것으로 보아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잠깐만. 저건…….’
그런데 그녀들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낯이 익었다.
“루, 루카 트래버스님! 저의 결투도 받아주세요!”
“루카 트래버스! 내 결투를 받아줘!”
“……?”
그가 기억하지 못한 미리아를 구한 대가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