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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아주 평범한 이세계 생활

주룩주룩

우르르 쾅쾅!

비가 아주 세차게 내린다. 가끔가다 번쩍거리는 번개가 내리치고 뒤이어 커다란 천둥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따라 하늘이 요란하군. 토르께서 심심하신 모양이야.”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반은 이내 본인이 뱉은 말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언제부터 자기에게 신앙심이 있었다고 번개가 내리치는데 토르의 이름을 들먹인단 말인가.

저건 그냥 허공에서 일어나는 전기의 방전 현상에 불과했다. 양전하와 음전하, 플라즈마 상태의 무언가. 문과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

‘젠장, 너무 물들어 버렸어.’

이 낯선 땅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고향의 기억은 흐릿해졌고, 쓸모없는 기억만 가득 채워졌다.

세계와 신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필멸자는 결코 닿지 못할 심오한 지식도, 적의 머리를 효과적으로 쪼개는 방법도 그가 알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 모든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을 포함해서.

“…망할.”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있는 가죽 자루가 괜히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 속에는 아이반을 덮치려던 강도들의 대가리가 다섯이나 들어 있었다. 잘려나간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신선한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 대가리를 잘라서 들고 다니다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새삼스럽게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쪽 세계에 너무도 쉽게 적응해 버린 자신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이 엿 같은 세계가 문제일까.

“카악, 퉤!”

불쾌한 감정을 가득 담아서 털어내듯 바닥에 침을 뱉은 아이반은 낡은 문을 열고 용병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평소 북적북적한 곳이지만 비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서인지 오늘은 한적하기만 했다.

“흠, 흠!”

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접수원은 반쯤 의자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게임에서처럼 미모의 직원 같은 건 없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험악한 아저씨들뿐이다.

당연한 일이다. 용병처럼 거친 자들을 다루려면 접수원도 거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연약하게 보이는 여성에게는 고함을 떽떽 지르고 온갖 개지랄을 다 떨어도 얼굴에 칼자국이 난 근육질 대머리 마초남이 접수원이라면 조용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의뢰 완료 보고.”

“무슨 의뢰를 가져가셨더라?”

“근처에 얼쩡거리던 강도 퇴치. 모두 다섯이오.”

접수원은 아이반이 들고 있던 자루를 힐끔 살폈다. 그 속에 강도의 머리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썩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젠장, 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밥맛이 뚝 떨어지는군. 저기 놓고 가시오. 정말로 강도가 맞는지 경비대에 보내서 확인을 해야만 하니까. 보상을 받으려면 며칠 정도는 걸릴 거요.”

“얼마나?”

“그거야 모르지. 망할 경비대 놈들이 얼마나 미적거리며 움직일지에 따라 다르니까. 그래도 떼먹지는 않을 거니 안심하시오.”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미적거리는 것은 경비대뿐만이 아닐 게 분명했으니까.

이래서 강도 처치 같은 의뢰는 웬만하면 피해야 했다.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원한관계를 만든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보상도 거지 같은 데다 과정마저 복잡했다.

멍청한 강도 놈들이 자신을 덮친 것이 문제였지 사실 아이반도 굳이 스스로 찾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사람 잡는 솜씨가 제법인 것 같은데, 현상금 사냥꾼이시오? 얼굴이 낯설군.”

“여기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소. 그리고 사람 잡는 것보다는 괴물 놈들을 잡는 게 전문이지.”

“흐, 하긴. 강도나 괴물이나 그게 그거지.”

치안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세상이었다. 칼밥 먹고 살다 보면 사람을 잡다가 괴물도 잡고, 괴물 잡으러 나섰다가 사람을 잡기도 했다.

“그나저나 근처에 좀 괜찮은 숙소는 없소? 초행이라 아무 곳이나 대충 들어갔더니 지난 며칠간 잠자리가 아주 끔찍했거든.”

“숙소라, 그건 돈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소?”

“적당한 걸로.”

“흠, 그렇다면 바람소리 여관으로 가보시오. 새로 생긴 곳인데, 방은 좀 좁아도 깨끗하고 조용하다더군.”

“경험은 아닌가 보오?”

“흐, 나는 집이 바로 옆에 있는데 여관 갈 일이 뭐가 있겠소? 다른 사람들 평이 그렇다는 얘기지. 아, 거기 맥주랑 안주는 확실히 괜찮소. 그건 내가 먹어 봤거든.”

용병길드 직원에게 자세한 위치를 물어본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쨌거나 처음 숙소보다는 낫겠지.’

그곳은 정말 최악이었다. 제대로 세탁이 되지 않은 침구에 벌레들이 득시글했으니까.

이 망할 세상으로 넘어오게 된 이후로 아이반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자신의 몸을 물어뜯으려는 벌레들과 동침할 만큼은 아니었다.

스르륵.

탁!

새로 생긴 곳이라는 건 맞았는지 문에 기름칠이 잘되어 있어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열렸다.

은은하게 내부를 밝히는 마력등의 불빛, 한쪽에 가득 쌓여 있는 술병과 오크통.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꽤 운치 있었다. 너무 시끄럽지도 않았고.

‘깔끔해서 좋군. 방도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아이반이 안쪽을 둘러보고 있으니 여급이 얼른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고, 손님! 비를 많이 맞으셨네요! 필요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술? 식사? 잠자리?”

“셋 모두. 일단 오늘 하루 묵어 보고 괜찮으면 장기 숙박을 고려해 보겠소.”

“숙박은 1인실인지, 아니면 다인실인지…….”

“1인실로.”

“그러면 1박에 20코퍼예요. 혹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시려면 거기서 4코퍼만 더 주시면 되고요. 아침 식사 포함이랍니다.”

이전에 머물렀던 여관에 비해 두 배나 비싼 금액이었지만 아이반은 순순히 품에서 동화를 꺼내 내밀었다.

정말로 침대가 깨끗한 곳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만했다. 거기에 따뜻한 물로 목욕이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네, 여기 열쇠 받으시고. 2층 끝에 있는 방이에요. 뜨거운 물이 준비되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을 확인한 아이반은 크게 만족스러웠다.

자그마한 침대와 짐을 넣어 둘 수 있는 옷장이 전부. 들었던 대로 방은 크지 않았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 정도면 몹시 훌륭한 여관이었다.

“비싸게 받아먹을 만하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아이반은 먼저 축축한 옷부터 벗어 던졌다.

위에 걸친 망토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잔뜩 젖었다. 가죽 신발 안까지 물이 새어 들어와 질척거리는 것이 몹시 찝찝한 상태였다.

주르륵.

신발을 뒤집자 거기서 물이 흘러내렸다. 방금까지 발과 함께하던 물이.

아이반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거 제대로 씻어서 말리지 않으면 엄청 냄새가 나겠어.’

냄새만 나면 다행이지, 어쩌면 무좀이 걸릴지도 몰랐다. 더 심하면 봉와직염이나.

어쨌든 축축해진 옷을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은 아이반은 젖은 몸을 닦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차피 곧 씻으러 갈 거지만 그렇다고 계속 젖은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 꺼낸 옷은 물기 한 점 없이 뽀송뽀송했다. 비바람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인벤토리 속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인벤토리, 상태창, 스킬, 퀘스트. 레벨과 경험치.

그 모든 것은 아이반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요소였다. 이쪽 세계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존재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부터 유희를 위해 넘어온 존재.

물론 이곳이 평범한 온라인 게임이던 시절의 설정일 뿐이다. 아이반은 이곳에서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다른 이방인의 존재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긴, 게임 속으로 들어온다니. 그런 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나는 왜.

아이반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한숨으로 비워냈다.

지난 몇 년간 고민했던 주제였지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제는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것만 하기에도 버거운 세계였다.

똑똑똑!

“뜨거운 물이 준비가 되었어요!”

씁쓸한 마음을 털어내기 딱 좋은 소식이었다.

아이반은 바구니에 한가득 쌓여 있는 옷더미를 여급에게 내밀며 세탁을 부탁했다. 물론 그 값으로 동화 두 개를 더 건네주었다.

“깨끗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더 좋은 숙소에서는 방에 개인 화장실, 개인 샤워실이 붙어 있었지만, 이곳은 잠자리 빼고 모두 공용이었다.

뜨거운 물로 씻으려면 4코퍼, 차가운 물로 씻으려면 2코퍼. 하여간 싼지 비싼지 가늠이 잘 안 되는 미묘한 물가였다.

이 동네는 기본적으로 현대와는 다른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지는데, 아예 중세 유럽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또 마법이 발달되어 있어서 대중없었다.

“으흐흠!”

인벤토리에서 비누를 꺼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씻어낸다.

빗물에 핏물까지 뒤집어써서 찝찝했는데 뜨거운 물을 끼얹으니 아이반은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반투명한 메시지창이 아이반의 눈앞에 튀어 올랐다.

띠링!

[긴급 퀘스트: 강도를 잡아라!(완료)]

[보상: 미량의 경험치, 3실버 75코퍼]

3실버 75코퍼.

1실버가 100코퍼였으니 결국 강도 다섯의 머리가 가진 가치는 여관에 보름 동안 머물 숙박비에 불과했다.

물론 이건 시스템의 보상이고 따로 용병 길드에서 받아야 할 금액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반은 경험상 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숨값 한번 저렴하군.’

물이 차갑게 식어가는 만큼 아이반의 기분도 차갑게 식었다.

얼른 목욕을 마친 아이반은 1층으로 내려와 호밀빵과 스프, 구운 닭과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다행히 음식은 맛이 있었고, 아이반의 기분은 조금 나아질 수가 있었다.

그날 아이반은 숙박비와 목욕, 세탁비, 식비로 강도 하나만큼의 목숨값을 사용했다.

2화 먹고살려면 해야지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 아이반은 누군가 깨운 것처럼 번쩍 눈을 떴다.

따로 알람시계랄 것이 없었지만 이세계에 떨어지고 몇 년 동안 개고생을 하다 보니 습관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이쪽 세계의 사람들은 대체로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일찍 하루를 마쳤다.

횃불, 양초는 물론이고 마력으로 움직이는 조명도 있었으나 그것이 모두를 밝힐 만큼은 아니었다. 자연히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서 일과도 정해졌다.

딸칵!

“비는 그쳤나?”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본 아이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렇게 쏟아지던 비는 다 그치고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늘도 그렇게 비가 내렸으면 그대로 하루를 공칠 뻔했으니까.

대부분 서민은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아이반이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제 세탁을 맡겼던 옷들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의상을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

“으하하! 오늘은 어디로 갈 거냐면 말이야…….”

“으으,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어지러워 죽겠…….”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곳답게 1층은 벌써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어제 안면을 터 익숙해진 여급을 발견한 아이반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방이 깔끔하고 좋더군. 음식도 괜찮았고. 장기 숙박을 하고 싶소.”

“헤헤, 우리 여관이 괜찮기는 하죠. 얼마나 머무르실 생각이세요?”

“일단은 한 달 정도. 연장은 그때 되어서 결정하겠소.”

“장기 숙박 고객은 할인이 되니까 5실버만 주시면 돼요.”

아이반은 품에서 은화 다섯 개를 꺼내 내밀었다. 반짝이는 은화를 받아든 여급은 한층 친절해진 미소로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아침 식사 메뉴는 따로 주문할 수가 없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호밀빵 한 덩어리에 걸쭉한 스튜가 한 그릇, 약간의 버터와 필요하다면 샐러드 조금.

호밀빵은 딱딱해서 그냥 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따뜻한 스튜 속에 집어넣으면 부드러워지겠지.

여기 호밀빵이 특별히 더 오래되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원래 호밀빵은 따끈따끈하게 굽고 난 뒤에 몇십 분만 식으면 이렇게 딱딱하고 질기게 변했다.

‘오늘 저녁에는 하얀 밀빵을 먹을까?’

딱딱한 호밀빵에 비해 부드러운 밀빵은 조금 더 가격이 비쌌다. 한국이랑은 반대였다. 한국은 호밀 수입이 극히 적어서 호밀빵의 가격이 오히려 비쌌으니까.

영양식이나 건강식, 다이어트 음식. 뭐, 그런 이름을 달면 다 그렇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반은 스튜를 씹어 삼켰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요리 실력은 있는 곳이다.

식사를 마친 아이반은 느긋하게 상점가로 향했다. 메인 거리에서 약간 더 들어가야 나오는 무기점.

아이반은 배낭에서 꺼내는 척을 하며 인벤토리를 열어 부러진 검 몇 개를 늘어놓았다. 모두 어제 강도를 제압하며 습득한 물건이었다.

“이것들을 팔고 싶소.”

“죄다 엉망이군. 부러진 것은 그렇다 치고 멀쩡한 놈도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

검을 들어서 살펴보던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것들은 고철값 정도밖에는 챙겨 줄 수가 없겠군. 제대로 쓰려면 전부 녹여서 다시 만들어야만 해.”

그럴 거라 생각했던 아이반은 별말 하지 않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장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 괜찮은 물건들이었다.

게임이던 시절의 아이템과 비교를 하면 안 된다. 그때 아이반이 들고 다니던 물건은 어디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것들이니까.

‘그 아이템 하나만 가지고 있었으면 팔자가 바뀌는 건데…….’

풀강화 신화급 아이템은 무슨, 처음 이 망할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는 빵 한 조각이 없어서 굶어 죽을 뻔했다.

안쪽을 돌아다니면서 꼼꼼히 무기를 살펴보던 아이반은 화살 한 통과 도끼 하나를 골랐다.

도끼는 모양새가 토마호크와 프랑시스카 사이쯤으로 보였는데, 이런저런 용도로 쓰기 좋아 보였다. 물론 집어던져서 누군가의 대가리에 박아 넣기도 좋았고.

“이 두 개의 값은 얼마요?”

“들고 온 고철이랑 대충 값이 비슷해 보이는데 그냥 들고 가게.”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아쉬운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아이반은 기어이 싸구려 나이프 하나를 더 챙겨서야 가게를 벗어났다.

이번에 아이반은 용병길드로 향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 법. 아침마다 의뢰가 갱신되니 빠르게 움직일수록 좋은 일거리를 잡았다.

나름 빠르게 움직였지만 무기점을 들렀다가 와서 그런지 용병길드는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한산하던 어제저녁과는 달랐다. 날이 좋으니 다들 일하러 일찍 나온 것이다.

‘장거리 호위는 좀 별로고, 고블린 사냥? 이건 좀 끌리는군.’

새로운 의뢰가 뭐가 있는지 게시판을 살피고 있으니 누군가 아이반에게 말을 걸어왔다.

“허, 어제 강도 대가리가 든 주머니를 가져오더니 바로 일을 하려고 그러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대화를 했던 접수원이었다. 그는 꽤 고참인 모양인지 다른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홀로 유유자적 여유로웠다.

“지금 의뢰를 가져간다고 오늘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좋은 의뢰가 있는지 확인하러 왔소.”

“흐흐, 꿀 같은 의뢰는 사람들이 귀신같이 채서 가져가지.”

낄낄 웃어대던 접수원은 주변을 힐끗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제 들고 온 목은 확인했소. 칼질이 제법 날카로우시던데? 다섯 모두 절단면이 매끄러운 것이 단번에 잘랐더군.”

사람의 머리는 생각보다 질겼다. 그걸 단번에 잘라내었으니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칼밥 먹고 돌아다니는 녀석이면 그 정도는 해야지. 무슨 드래곤의 대가리를 자른 것도 아닌데 칭찬이 과하군.”

“흐, 맞는 말이오. 하지만 요즘에는 그걸 못하는 놈들이 너무 많거든.”

그는 제대로 칼 쓰는 법도 모르면서 농사짓기 싫다는 이유로 용병질을 시작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렸다.

“대부분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팔다리가 하나쯤 잘린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 그래, 뒤지거나 포기하는 건 괜찮다 이거야. 하지만 그런 놈이 많으면 의뢰 성공률이 떨어지거든. 몬스터를 잡으러 가서 칼질 한번 안 해보고 돌아오는 놈들이 부지기수라오.”

주변에 있던 용병 몇 명이 움찔하며 자리를 피했다. 저 말처럼 농사짓기 싫어서 가출한 놈들인 듯싶었다.

‘농사가 싫어서 칼질을 한다고? 삶이 심심해서 죽고 싶다는 뜻인가? 철이 없군.’

용병은 그리 멋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로망을 찾으려면 기사가 되어야지 용병은 무슨 용병인가.

아이반이 그동안 경험한 것에 의하면 용병의 대부분은 사기꾼에 양아치였고, 사이코패스 살인마에 쓰레기였다.

진짜 제대로 된 놈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언제 뒤질지 모르는 목숨을 붙들고 있는 인생막장의 병신놈들이었다.

호위 의뢰를 받아서 강도를 막아 주다가, 강도가 없으면 가끔은 스스로 강도가 되어 주는 역지사지의 실천자.

물론 용병들에게 신뢰는 몹시 중요한 가치였고,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용병은 높은 몸값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만큼 정직, 믿음, 신뢰와는 벽을 단단히 쌓은 개노답 새끼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여간 쓸모 있는 놈들이 요즘에는 너무 적단 말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다가와 이렇게나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이 남자는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친화력이 넘쳐나서 입이 근질근질한가?

아이반은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저 잡담을 하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뭘 원하시오?”

그 물음에 접수원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이반 에시르손, 북부에서 온 신비로운 모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소. 어제 당신이 돌아가고 나서야 기억이 떠올랐지.”

“내 명성이 그리도 대단한지 몰랐군.”

“당신이 서쪽에서 히드라를 잡았다는 소문이 진짜요?”

“잡기는 잡았소. 제대로 성장한 놈은 아니었지만. 머리도 세 개밖에 없더군.”

히드라는 성장하면서 머리가 하나씩 늘어나는 녀석들이었다. 제대로 성장을 끝내면 머리가 아홉 개가 된다고 했고, 또 누구는 백 개가 넘는다고도 했다.

그런 신화적인 괴물들에 비하면 머리 세 개 달린 히드라는 그저 좀 사나운 뱀 수준에 불과했다. 아이반은 어디서 자랑을 할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가 세 개라고 해도 히드라는 히드라지. 평범한 전사라면 독기 때문에 근처에 다가가기도 힘들 텐데.”

“허약한 전사들이나 그렇겠지.”

“당신처럼 강한 전사가 보기에는 다들 허약해 보일지도 모르겠군. 허허.”

그러다 그는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오. 그대와 같은 강자에게 딱 맞는 의뢰가 있으니.”

그는 스스로를 빌리 안게이트라 소개했다. 평범한 접수원인 줄 알았건만 이곳 용병길드의 지부장쯤은 되는 위치라고 했다.

“지부장이면 지부장이지, 지부장쯤 되는 건 뭐요?”

“용병길드 내부 조직도에 대해 알고 싶으시오? 그러면 말해 드리고.”

흥미 없는 이야기.

아이반은 자리에 앉아서 일 이야기를 꺼냈다.

“의뢰는 무엇이오?”

“동쪽 숲의 몬스터들이 얼마 전부터 갑자기 포악해졌소. 안쪽으로 들어가 그 원인을 좀 알아봐 주시오.”

“예상되는 이유라도 있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지만 동쪽 숲에서 얼마 전에 강한 마력반응이 있었다는군. 청색 마탑에서 마법사가 나올 거요. 거기에 우리 쪽 사람 몇 명까지 해서 함께 움직이면 되오.”

아이반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으흠…….”

사실 썩 끌리지는 않는 의뢰였다.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으니까. 게다가 마탑의 마법사라니.

‘그 괴팍한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그동안 아이반이 봤던 마법사는 죄다 어딘가 하나쯤 나사가 빠진 놈들이었다. 마탑 소속이라면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도 진짜인 녀석들이고.

“그, 마탑의 마법사는 반드시 데려가야 하오?”

아이반이 떨떠름하게 묻자 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법사도 없이 어떻게 조사를 하시려고? 그리고 이건 애초에 청색 마탑의 의뢰요. 그들이 껄끄러운 것은 알겠지만 마법사를 빼놓고 가는 건 불가능하오.”

그러자 아이반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거절해야 되나?’

껄끄러운 의뢰에 껄끄러운 동료.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아이반의 마음이 점점 거절로 기울어 가던 그때, 빌리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아, 내가 의뢰금에 대해 말하지 않았군. 역시 마탑의 의뢰라 금액이 화끈하지. 금화 한 개. 어떻소? 좀 끌리오?”

“…언제 출발하오?”

금화 하나, 실버로는 100실버. 몇 달간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 강도 100명의 목숨값.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3화 가시밭길

사흘 후, 동쪽 성문 앞.

이곳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약속 시간은 정확하지 않았다. 대충 해가 뜰 때쯤 모인다는 것이 전부였다.

회중시계나 손목시계 같은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비쌌다.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 같은 상류층이라면 모를까 인생 밑바닥이 대부분인 용병들이 들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번에 같이 일을 하게 될 용병들은 시궁창 같은 놈들 속에서 그나마 믿을 수가 있는 자들.

마탑의 의뢰를 받을 만큼 신용도가 검증된 사람들, 말하자면 이 지역 용병들의 에이스뿐이었기에 다들 부지런했다.

아이반이 동쪽 성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명은 도착해 있었고, 다른 한 명 역시 늦지 않게 나타났다.

‘한 명은 레인저, 한 명은 검방 전사. 마지막은 무투가인가?’

그중에서 아이반의 시선을 끈 것은 무투가였다. 낡은 도복 위에 걸친 가죽갑옷과 양손에 금속 건틀릿,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여성.

남들 다 칼이며, 창이며, 활이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와중에 무기 없이 맨손격투라니 병신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영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기, 내공, 마력, 마나, 오러, 차크라.

부르는 명칭이야 어쨌든 그런 초월적인 힘이 존재하고, 그것으로 육신을 강화한다거나 하는 이능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역시 무기를 드는 것이 더 강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곳에서 무투가는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고 육체를 단련하는 고행자이기도 했다.

무기를 들지 않고 적을 상대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발전을 꾀한다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었다.

물론 아이반은 그런 복잡한 배경 설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은 원래 게임이었던 곳이다. 판타지 게임 속에서 무투가라면 흔한 직업이 아닌가. 그냥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래도 무투가라면 실력은 확실하겠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능숙하게 이능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맨손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

무투가들의 무파(武派)에서는 수련자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니 정식 무투가라면 실력은 믿을 만했다.

“용병들은 다 온 것 같군.”

“마법사는?”

“그 양반이 늦는 건 이해해야지. 엉덩이 무거운 마법사 양반 아닌가?”

먼저 자신을 소개한 것은 검방 전사였다. 꽤 큼지막한 덩치에 붉은 수염이 탐스러운 근육질의 남자.

“나는 랄프요. 보다시피 검과 방패를 주로 쓰고, 앞에서 공격을 받아내는 것에 익숙하지. 여기 활쟁이는 스벤. 동부전선 레인저 출신이라 숲에서는 꽤 믿음직한 놈이지.”

“랄프, 내 소개는 스스로 하고 싶었는데.”

“흐흐, 말솜씨도 별로인 녀석이. 아, 그리고 이쪽의 무투가 숙녀는…….”

“율리아 밀러, 뇌랑권(雷狼拳) 수련자.”

그녀는 크게 친근한 성격은 아닌지 딱딱하게 말을 뱉었지만 그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솔직히 꽤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썬더울프라, 오랜만이군.”

“그대는 이전에 우리 무파의 수련자를 만난 적이 있었나?”

“그렇소. 한 번쯤은. 아마 안도렐에서였던가?”

무투가 자체가 드문 존재라 쉽게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썬더울프라면 무투가들의 무파 중에서는 꽤 메이저한 편이다.

지난 몇 년간 개고생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아이반이 한 번쯤 수련자를 봤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혹시 누구를 만났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마티아스.”

“마티아스 선배인가, 그는 무탈해 보였나?”

“2년 전까지는. 상당히 유쾌한 남자였지. 안도렐에서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소.”

“다행스러운 소식이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연고가 있어서인지 셋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여기서 낯선 이라고는 아이반밖에 없는 셈이다.

“아이반 에시르손. 이것저것 다루지만 검이 제일 익숙하오. 이쪽에 온 지는 며칠 되지 않았소.”

“그래, 듣기로는 서쪽에서 히드라를 잡았다던데…….”

또 그 이야기군. 뱀 새끼 하나 잡아서 몇 년을 우려먹겠어.

아이반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것 아닌 놈이었소. 어쩌면 히드라가 아니라 그냥 돌연변이 뱀이었을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마침내 마탑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가 마법사라는 것을 사방팔방에 알리고 싶은 것인지 기다란 로브와 큼지막한 지팡이를 쥐고 있었는데, 슬쩍 살펴보니 여행용 장비를 제대로 챙기기는 했는지 영 어설픈 모양새였다.

“크흠!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서…….”

달랑달랑.

덜컹덜컹.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자 그가 짊어지고 있는 배낭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저것 매달려 있는 것들이 제대로 고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온갖 숲의 괴물들을 다 불러 모으겠군.”

레인저 스벤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숲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장기로 삼는 레인저에게 지금 모습은 마치 재앙처럼 보이는 듯했다.

그 말을 들은 것인지 마법사의 귀가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기도 본인의 준비 상태가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아이반은 오히려 크게 안도했다.

‘드물게 정상적인 마법사로군. 아직 젊어서 마법사 물이 덜 들었나?’

숲속으로 직접 들어가 이상현상을 조사한다는 것은 몹시 위험하고 귀찮은 일이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마탑의 늙은이들이 직접 움직이기 싫으니 대충 젊은 마법사 하나를 보낸 모양인데, 아이반 입장에서는 이쪽이 훨씬 나았다.

행동이 어설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말을 알아듣잖아.

“배낭을 이리 주시오. 안쪽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

역시나 제대로 바깥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는 초보자의 짐이었다. 꼭 필요한 것이 없고 없어야 될 것은 많은 비효율적인 가방.

“유리 플라스크? 이건 왜 필요하오? 거기서 연금술이라도 하시려고? 숲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을 거요. 그리고 식량이 너무 적군. 육포랑 곡식가루를 조금 더 챙겨야 하오. 물도 부족하군.”

물론 마법사는 고급 인력인 만큼 웬만하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도록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서로 헤어졌을 때 자신이 먹을 최소한의 식량은 마법사라도 챙겨야지.

용병들이 이것저것 알려 주며 가방을 정리해 주는 데는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물론 필요한 물품을 새로 구매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마법사의 숙소에 다시 가져다 놓는 것까지 포함한 시간이었다.

아공간 마법이 새겨진 마법물품은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더럽게 비쌌고, 스스로 아공간 마법을 사용하려면 고위 마법사쯤은 되어야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짐을 효율적으로 들고 다니는 것부터가 용병들의 실력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파티 같은데?’

탱커로 세울 수가 있는 든든한 국밥 같은 검방 전사 하나에 빠르게 치고 빠지면서 적진을 휘저을 수가 있는 무투가, 길잡이와 후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레인저, 거기에 후방에서 화력을 담당할 마법사까지.

아이반 자신이 부족한 쪽에 힘을 실어 줄 수가 있으니 딜탱 조합으로는 꽤나 안정적인 파티 구성이었다.

‘용병길드 추천이니 실력이 평균 이상은 할 테고.’

사실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가끔 의뢰를 위해 이런저런 사람들과 파티를 맺다 보면 상상을 초월한 병신들이 튀어나오고는 했으니까.

사람이 다섯이 모이면 쓰레기가 반드시 하나는 있다는 금과옥조의 명언.

게임 속에서야 서로 화기애애하게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헤어졌을 것이 현실이 되니 가끔은 진짜로 칼질까지 할 만큼 심각했다.

아이반이 괜히 이것저것 잡다한 것에 능숙해진 것이 아니었다. 스킬 포인트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잡캐가 된 것은 동료를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 많아서였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안심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마탑에서 마법만 연구하던 샌님 마법사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천국이지.’

어쩌다 보니 출발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파티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젊은 마법사, 에민이 생각보다 분위기를 잘 읽고 싹싹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라 오만하고 괴팍한 사람이 많았다. 경력을 웬만큼 쌓은 용병이라면 적어도 몇 번쯤은 마법사와 함께할 일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꽤나 질릴 만한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와중에 수더분한 마법사라니, 몇 시간 출발이 늦어진 걸로 인상을 찡그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는 평민 출신이거든요. 어릴 때 스승님을 따라 마탑으로 들어간 뒤에 밖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에민은 지루한 마탑 생활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그, 실험을 하다 보면 폭발할 때가 있거든요? 근데 마탑은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소리가 울려 퍼져서 잠을 자려면…….”

다들 꽤 흥미롭게 들었다. 마탑은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일반인은 안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대단한 비밀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쉽게 듣기 힘든 이야기였으니 나중에 맥주 한잔하면서 꺼낼 안줏거리로는 충분하리라.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더 이상 성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깊숙이 숲속으로 들어가자 다들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스스스슥!

지지직!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잎사귀가 서로 비벼지는 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고요할 것만 같은 숲속은 생각보다 훨씬 시끄러운 곳이었다. 그중에 미묘한 단서를 찾아내 움직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리 전해 듣기로는 마력 반응이 느껴진 곳이 숲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수 근처라고 들었소. 위험한 곳을 많이 지나가야 할 테니 내 말을 반드시 따라 주시오.”

길잡이를 맡은 스벤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동부전선 출신의 레인저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는 숲속에서도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시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벌려 척후를 맡았다. 다른 이들은 그의 수신호에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멈칫!

앞쪽에서 신호가 왔다.

- 몬스터 발견. 수는 둘.

잠시 고민한 아이반이 몬스터 종류가 어떻게 되냐고 수신호를 보내자 스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인저들이나 알 수 있는 복잡한 수신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스벤은 신기한 눈빛을 하면서도 답을 보냈다.

- 만만한 상대, 칼날뿔멧돼지, 혼자 처리하겠음.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벤은 활을 꺼내들고 빠르게 쏘아 보낸 후 앞으로 나아갔다. 결과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뒤이어 그쪽을 지나갈 때 아이반이 화살을 회수하며 확인하니 확실히 실력이 괜찮았다.

‘한 마리에 한 번씩. 미간을 꿰뚫어서 죽였군.’

아이반이 엄지를 치켜올리자 스벤이 씨익 웃었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연계 퀘스트: 동쪽 숲의 비밀 - 1]

[최근 안도렐 동쪽 숲이 이상해졌다. 그 비밀을 파헤쳐 보자.]

[보상: 대량의 경험치, 스킬 포인트 +1, ???]

‘연계 퀘스트?’

그동안 긴급 퀘스트니, 서브 퀘스트니 하는 것은 많이 있었지만 연계 퀘스트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연계 퀘스트가 뜬다고?

보상도 이상했다. 물음표야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량의 경험치에 스킬 포인트라니, 전에 본 적이 없는 수준의 보상이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아이반의 표정이 저절로 굳어졌다.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어 있다!’

4화 죽음의 숲

이 빌어먹을 세계는 한때 게임이었다. 게임이 현실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게임인 척했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때는 그러했다.

당연히 메인이 되는 스토리가 있었다. 요즘의 게임들이 흔히 그러하듯 대륙이 불타오르고 세계가 갈라지는 평범한 세계멸망 스케일의 시나리오가.

그동안 아이반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그저 게임과 현실이 다를 뿐이겠지, 하면서 넘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반은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기 이전의 시점에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병신 같은 세계가 더욱 지옥처럼 변한다는 뜻이다.

“흐흐, 1골드라니. 씨부럴. 그게 설렁탕이었군.”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명대사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김 첨지가 된 것만 같았다. 가정폭력범, 츤데레의 원조, 고등학생의 적.

아이반이 알 수 없는 말을 낮게 중얼거리자 파티원들이 모두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임무 중에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는 파티원은 언제나 경계대상인 법이다.

“느낌이 좋지 않소. 빨리 이상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거나, 포기하고 서둘러서 숲을 빠져나가야만 하오.”

그 말을 들은 다른 파티원들은 영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의뢰비로 큰돈을 받고 움직이는 처지인데 시작하자마자 불길한 소리를 내뱉는 동료라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쪽에서 히드라를 잡은 전사라고 하기에 대단하게 여겼더니, 겁이 많으시군.”

“언제는 위험하지 않은 의뢰가 있었나? 황금을 만지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지.”

“이제 막 숲에 들어왔는데요. 원인을 확인하지 않고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한마디씩 내뱉는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 곱지 않았다.

사람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반드시 한 명은 쓰레기가 있지.

아이반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명언.

이번에는 청색 마탑의 마법사 에민이 그 역할을 맡을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의 눈빛을 보니 아이반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젠장, 재수 옴 붙었군.’

더 말을 할수록 분위기가 악화될 것 같아 입을 다물려고 하는데, 길잡이 스벤이 그의 편을 들었다.

아무래도 레인저들이나 사용할 법한 복잡한 수신호 방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대단히 신기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잠깐,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요. 보아하니 레인저 교육도 받으신 것 같던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숲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반드시 보고하는 것이 레인저들의 규칙.

한때 레인저였던 스벤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숲의 전문가가 그리 말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퀘스트가 발생했으니 틀림없이 위험한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으니까.

“…의뢰받은 내용은 숲의 몬스터들이 포악하게 변했으니 살펴보라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숲으로 들어왔지.”

“다 아는 이야기군.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상하지 않소? 꽤 깊숙이 들어왔는데 이때까지 만난 몬스터가 겨우 칼날뿔멧돼지 두 마리뿐이었다는 것이?”

“그거야 모두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최대한 피해 갔으니…….”

아이반은 대답 대신 길잡이인 스벤을 보았다. 그라면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을 거다.

“…저 말이 맞아. 숲이 너무 조용해.”

“뭐? 스벤! 그게 무슨 뜻이야?”

“최대한 전투를 피해서 움직인 것은 맞아. 내가 그렇게 인도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흔적이 적어.”

아이반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동안 발견한 흔적은 죄다 며칠이 지난 것들뿐. 몬스터들이 포악해졌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흔적들이 보이지 않았소. 오히려 이 근방의 몬스터들이 줄어 버린 것 같은데…….”

저 말이 맞냐는 듯 사람들이 바라보자 스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 당신, 정말 제대로 레인저 교육을 받았군?”

“살려고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어디서 자랑할 수준은 아니오.”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알아들었다.

“…젠장. 놈들이 뭉치고 있군. 몬스터 웨이브인가?”

“호수 근처에서 몬스터 리더라도 태어났나?”

몬스터는 하나의 종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종이 모여서 사이좋게 하하호호 하고 있을 리 만무.

그런 놈들이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치열한 약육강식의 사투 끝에 일대에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몬스터 리더가 태어났다는 의미였다.

이번 의뢰주는 청색 마탑. 사람들의 시선이 에민에게 향했다. 이번 이상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청색 마탑에서 나왔으니 그가 결정하라는 뜻이다.

잠시 고민하던 에민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몬스터 리더가 나타났다는 증거라도 확인해야만 해요.”

아직은 모든 것이 추측일 뿐. 에민의 말은 옳았다. 돈을 받아먹었으면 그만한 값을 해야만 했다.

마탑은 호구가 아니었다. 의뢰금이 후한 만큼 철저하게 계약을 진행했다. 임무에 실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면 서둘러야겠군. 만약 정말로 몬스터 리더라면 숲에 머물수록 위험해지는 것이니.”

그들은 해가 지기 직전까지 숲을 휘젓고 다녔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몬스터는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몬스터와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순수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 * *

타닥타닥.

화르륵!

모닥불이 조용히 타오른다. 아이반과 일행은 그것을 바라보며 각자 육포를 입에 쑤셔 넣었다.

싸구려 육포 특유의 거칠고 뻑뻑한 맛을 억지로 참으며 질겅질겅 씹었다. 하나를 삼키려면 한참이나 턱을 움직여야만 했다.

향신료도 적당히 써서 맛도 있고 부드럽게 만든 고급 육포라면 환장하며 먹겠지만 그런 사치를 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젠장, 뜨끈한 국물이라도 한 숟가락쯤 먹었으면 좋으련만…….”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싸구려 육포를 씹고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중간에 그럴듯한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입구를 돌과 흙, 나뭇가지 등으로 막으면 안쪽에서 불을 피워도 밖으로 불빛이 흘러나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작 불을 피워 놓고도 그걸 요리에 쓸 수는 없었다. 숲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이었다. 음식 냄새가 사방으로 퍼질 테니 육포를 데워 먹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꽤나 숲속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망할, 이제는 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겠군. 숲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검방 전사, 랄프가 바깥을 노려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늑대새끼 우는 소리 하나도 들리지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걸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봐야겠지. 불침번은 어떻게 하시겠소?”

“마법사 양반은 빼고 나머지가 두 시간씩 하면 되겠군.”

제비뽑기로 정해진 순서는 랄프, 율리아, 아이반, 스벤.

영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이반은 침낭에 몸을 집어넣고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빠르게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그래야 체력을 유지할 수가 있으니까.

아이반은 귀중한 스킬 포인트 몇 개를 수면에 투자한 상태였다. 언뜻 멍청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웬만한 공격 스킬 하나보다 그의 목숨을 더 많이 살려 주었다.

빠르게 네 시간이 지나고, 아이반은 번뜩 눈을 떴다. 율리아가 그를 흔들어 깨우기 직전이었다.

“일어났소.”

“…예민하군. 별다른 이상은 없다. 숲은 조용해. 그걸 좋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좋아해야지. 자고 있다가 칼 맞고 일어나지는 않았으니.”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장비를 확인하는데, 어째 율리아가 자러 가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완전히 교대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정석적인 불침번 방법이지만 용병들이 그렇게 빡빡하게 행동할 리가 없었고, 대부분은 눈을 뜬 것을 확인하자마자 휙 자러 가기 마련이다. 무언가 그에게 할 말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반이 지긋이 바라보자 율리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그대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어.”

난 또 뭐라고. 갑자기 사랑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아이반은 묘한 실망감을 느끼면서 대꾸했다.

“별일 아니군. 나는 벌써 잊었소.”

“간단하게라도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신다면 얼른 자시오. 그래야 내일 잘 싸우지.”

“…그래.”

율리아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아이반은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전과 똑같은 풍경, 이전과 똑같은 고요함. 나뭇가지가 부딪히고 잎사귀가 비벼지는 소리는 여전히 요란했지만,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숲의 풍경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숲?’

호숫가에서 생긴 마력반응. 청색 마탑의 의뢰, 숲속 몬스터들의 이상행동.

마력반응을 확인한 청색 마탑은 인위적인 일이 아닌지 의심했다.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어 있는 퀘스트,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숲, 숲속 몬스터들의 움직임.

아이반의 머릿속에서 착착 퍼즐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언데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이반이 바깥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숲은 고요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곳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킁킁.

코끝으로 죽음의 냄새가 스쳐 지나간다.

아이반은 서둘러 일행을 깨우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눈을 뜬 용병들은 눈을 한번 비비고 나니 다들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무슨 일이오?”

“숲이 조용하던 이유가 있었소. 언데드요.”

“뭐? 언데드?”

“자세한 것은 나중에 저쪽 마법사에게 들으시고, 얼른 짐을 챙기시오.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 하오.”

언데드는 자신이 잃어버린 생명에 엄청난 집착과 증오를 보인다. 차갑게 식어 버린 자신의 피를 다시 데우기 위해 살아 있는 자들의 피를 끊임없이 탐하는 끔찍한 존재들.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언데드들이 금방 찾아내고 말 거다. 언데드의 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포위당하는 순간 끝난다.

“…젠장, 얄궂군.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반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다른 한 손에 투척용 도끼를 쥐었다.

스스슥!

스스스스슥!

썩다 만 살점, 부러진 뼈와 멈춰진 심장.

움직여서는 안 되는 자들이 움직인다. 생명 대신 죽음으로 채워진 부정한 존재들.

끼기기긱!

이미 생명을 잃어 뿌옇게 변한 눈동자가 기어이 아이반을 찾아냈다.

5화 눈먼 자들의 선택

“전투 준비!”

아이반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파티원들은 정리하던 짐들을 내팽개치고 무기를 들어 올렸다. 따로 정하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서 움직였다.

이제는 둔한 자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언데드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젠장! 동굴 입구를 막고 버텨야 하나?”

“수가 많아! 그래서는 말라죽는다! 위험해도 벗어나야만 살 수가 있어!”

짧은 의견 교환 후, 파티원들은 일제히 동굴 밖으로 뛰어나왔다. 다행히 언데드들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적들만 해치운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길을 연다! 떨어지지 않게 바짝 붙어 와!”

그렇게 소리친 랄프가 일행의 선두에 섰다. 그는 검을 든 팔을 등 뒤로 돌리고 방패를 몸에 딱 붙인 기묘한 자세를 하고 앞을 노려보다가 언데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실드차지!]

짧은 도약 후 상대에게 달라붙어 방패로 밀치는 탱커의 기본 스킬.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어중이떠중이들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방패술이 랄프의 손에서 제대로 펼쳐졌다.

슈우욱!

쾅!

강력한 충격파와 함께 전방의 적들이 일제히 밀려 나간다. 그렇게 생긴 짧은 틈을 치고 율리아가 뛰쳐나와 마무리를 했다.

강한 진각, 거기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스피드, 앞으로 달려 나가며 펼쳐지는 연격기.

쿵!

스스슥

치지직, 치지지직!

율리아의 몸에서부터 뿜어진 푸른색 번개가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주먹질을 한 번 할 때마다 마치 천둥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들리고 언데드들이 무너져 내린다.

[천둥걸음!]

[뇌격권(雷擊拳)!]

반쯤 썩어서 진물이 뚝뚝 흘러내리던 언데드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이미 죽은 놈들이었으나, 생명을 대신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던 사령핵이 부서지자 허무하게 쓰러진다.

“빨리 달라붙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야!”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랄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큰 기술을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반동이 있었다. 준비 시간 없이 남발할 수가 없었으니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포위당할 뿐이다.

슈욱! 슈우욱!

“젠장! 언데드라니, 나랑은 상성이 나쁜데!”

뒤를 향해 화살을 날리던 스벤이 욕설을 내뱉었다. 언데드는 이미 죽어 버린 놈들이라 단번에 급소를 공략해서 핵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면 상처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모든 화살을 머리나 심장에 박아 넣는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화살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고, 회수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더더욱.

[매직 미사일!]

투명한 마력으로 만들어진 투사체 몇 개가 날아가 좀비의 몸을 때렸다. 녀석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지! 이거야 마법사 양반! 계속 이렇게… 망할!”

넘어졌던 좀비가 다시 일어났다. 살점이 떨어지고 달랑거리던 손목이 날아갔으나 녀석은 이전과 똑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위력이 부족한 모양인데, 조금 더 강한 마법은 없…….”

말을 하던 스벤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청색 마탑의 마법사 에민은 헥헥거리면서 죽을 듯 살 듯 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매직 미사일이라도 몇 번 날린 것이 용하다 여길 정도로 안색이 엉망이었다.

마법은 극도의 정신 집중과 세밀한 마력 컨트롤이 필요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육성된 배틀 메이지가 아닌 이상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건 에민을 탓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마법사는 이렇게 쓰이는 게 아니니까.

슈우욱!

푹!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옆에서 달려들려던 좀비늑대의 머리가 잘려서 바닥을 구른다.

“고, 고맙……!”

아이반은 감사를 표하려는 에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호흡을 아끼시오. 한참은 더 달려가야 하오.”

스걱!

푸슉!

아이반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 하나가 바닥에 쓰러진다. 사령핵만을 노리는 극도로 효율적인 칼놀림. 그러나 그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생각보다 속도가 늦어. 따라잡힌다.’

파티원들은 다들 실력이 있었지만 언데드를 상대하는 방법은 미숙했다. 지금은 강한 힘으로 밀고 가고 있었지만 금방 지치고 말 거다.

당장 에민의 체력이 가장 문제였다. 그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이 벌써부터 느껴졌다.

‘분명히 지휘 개체가 있을 텐데…….’

자연발생한 언데드들이 아니었다. 지금 이 녀석들을 움직이고 있는 중간 보스급 개체가 근처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마력을 듬뿍 머금은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환하게 주변을 살필 수가 있었다.

‘이놈은 아니고, 저놈도 아니고, 저기 저 녀석은… 그래, 네놈이구나.’

목표를 확인한 아이반이 사납게 웃으며 손을 바꿔 쥐었다. 투척용 손도끼를 오른손에 쥐고 축복을.

“토르, 토르. 망할 놈의 빌어먹을 토르. 내 적의 대가리를 부수기 위해 힘을 빌려주시오.”

우웅-

저 멀리, 아주 멀고 먼 곳. 필멸자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천상의 한 귀퉁이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반의 몸속에서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이 솟아올랐다. 망할 천둥의 신이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자신의 전사를 위해 힘을 빌려준 것이다.

대가리를 부수라. 적의 대가리를 부수고 썩은 핏물로 축제를 열어라.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천둥의 신은 그것으로 만족한 듯 축복을 내려 주었다.

우웅-

치직, 치지직!

마치 말조심하라는 듯 따끔거리는 손도끼를 치켜들고 아이반은 자신의 적을 향해 집어던졌다.

“토오오르으으으!!!”

슈우욱!

퍽!

하얀 번개는 썩은 트롤의 몸을 가르고 머리에 박혀들었다. 중간에 검은 방어막이 막아섰지만, 신의 축복을 받은 도끼는 그것을 부수고 기어이 골통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건방진 전사가 자신의 적을 가리키자 오만한 천둥의 신이 껄껄 웃었다. 자신의 전사를 위해 친히 망치를 내리쳤다.

번쩍!

쿠구구쾅!

아주 잠깐 밤이 낮이 되었다. 하늘에서부터 한줄기 벼락이 내려와 손도끼의 손잡이를 타고 썩은 트롤의 몸을 지져 버렸다. 그것으로 모자라 놈의 주변에 있던 언데드 몇까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파괴적인 광경을 본 일행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도끼를 던지자 번개가 내리치고 언데드를 쓸어버렸다는 것만으로 할 말을 잃기에는 충분했다.

“…이거 그냥 내버려 뒀으면 당신이 혼자서 다 쓸어버릴 수가 있었던 거 아니오?”

질린 듯한 표정으로 랄프가 묻자 아이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적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고? 나라고 매번 이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거야 그렇겠지만…….”

“헛소리 말고 길이나 뚫으시오. 밤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이곳을 벗어나야 하니까.”

그다음 랄프가 사용한 실드차지부터는 묘하게 힘이 없었다.

* * *

챙!

도르르르, 탁!

날이 밝았다. 밤새 뛰어다니던 랄프는 적당한 동굴을 발견하자마자 무기를 집어던지고 쓰러지듯 바닥에 뻗어 버렸다.

“씨부럴, 모처럼 빡센 밤이었어.”

강인한 체력의 검방 전사가 욕설을 내뱉을 만큼 지난밤은 무척이나 고단했다. 낮에는 어떻게 숨어 있었던 것인지 사방팔방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언데드들의 대가리를 부수고, 정신없이 달리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가장 체력이 약한 마법사 에민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서 눈이 풀려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툭 건드리면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체력을 보존한 아이반은 마지막까지 후방에 남아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동굴로 들어왔다.

“모두 사라졌소. 해가 뜨니 아무래도 언데드들이 움직이기엔 껄끄럽겠지.”

“그건 밤이 되면 놈들이 또다시 나타난다는 뜻이군. 젠장, 내가 수락한 의뢰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날카로운 시선이 에민에게 박혀들었다. 임무 수행 중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의뢰인이 욕을 먹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따가운 눈총 정도로 끝났으니 몹시 신사적인 태도였다. 이들이 용병 길드의 추천을 받을 정도로 급이 높은 용병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한 명쯤은 칼을 뽑아서 의뢰인의 목에 들이댔을 거다.

“청색 마탑에서 알고 있는 것은 뭐요? 여기서 숨길 생각은 하지 마시오, 마법사 양반. 상황이 이러니 꼭 알아야 하겠소.”

어제에 비해 확연히 공격적으로 변한 말투. 에민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마탑에서는 얼마 전에 숲속 깊은 곳에서 이질적인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원래 거기에는 오래된 유적이 하나 있는데, 사실 그동안은 별다른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쪽에서 마력반응이 나타나고 숲의 몬스터들이 포악해졌다고 하니 사실 유적에 뭔가 숨겨진 것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 나와서…….”

유적.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용병들의 눈빛이 변했다. 몹시 위험한 곳이었으나 잘만 하면 인생을 바꿀 만한 대박이 숨겨져 있는 곳이 바로 유적이었다.

“유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신만 움직인다고? 군침을 흘릴 사람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 그건 마법사들이 더하지 않나?”

율리아의 날카로운 질문.

에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유적에 뭔가 더 있을 거라는 건 소수의견입니다. 이미 거기는 수백 년 동안 알려질 만큼 알려졌거든요.”

적어도 청색 마탑의 상층부, 늙은 마법사들은 별것 없으리라 여겼다는 소리다.

그런 뜬소문에 몸이 달아오른 것은 젊고 모험심이 많은 마법사밖에는 없을 정도로.

“우리를 공격했던 언데드들은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지. 명백히 누군가 만들어 낸 놈들이야. 이게 과연 유적과 관련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사령술과 관련이 있었다면 수백 년 동안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그 ‘설마’ 하는 마음 때문에 조사를 의뢰했던 것 아니오? 알 수 없는 일이지.”

동쪽 숲의 오래된 유적이라, 여기에 대체 뭐가 있었지?

아이반은 미간을 찡그리고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는 딱히 설정에 파고드는 스타일의 게이머는 아니었기에 이런 쪽으로는 몹시 약했다.

“그래서 들어갈 건가? 아니면 빠져나갈 건가?”

“본래라면 이런 위험은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지. 하지만…….”

유적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정말로 미발견된 유적이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도 한 번쯤은 모험을 걸어 볼 만했으니까.

“그래도 바로 진입하는 것은 위험해. 언데드용 장비로 세팅을 마친 다음이라면 가능성이 있겠지.”

오래된 마법서,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 금화와 보석.

욕심이 슬금슬금 움직이며 그들의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눈먼 용기는 실패의 두려움을 외면하고 성공의 달콤함만을 가리켰다.

아이반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어있는 연계 퀘스트의 완료, 그 보상.

종류는 달랐지만 욕심이 생긴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용맹함인가, 만용인가.’

아이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을 해치울 때는 잘만 느껴지던 신의 존재를 지금은 찾을 수가 없었다.

6화 버려진 수도원

숲을 벗어나 성벽 안쪽으로 들어온 일행은 최대한 은밀하게 짐을 꾸렸다.

벌써 돌아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허허 웃으며, 처음 합을 맞춰 보느라 손발이 맞지 않아서 돌아왔다, 금방 안으로 들어갈 거라 둘러댔다.

잃어버린 짐들을 다시 구매하고, 언데드를 상대하기 좋은 장비들로 교체했다. 랄프와 스벤은 큰마음을 먹고 은으로 도금된 무기도 샀다고 했다.

주말에 신전으로 가면 성수랍시고 뿌리는 맹물이 아니라, 제대로 성직자가 신성력을 쏟아부어서 축성한 성수도 몇 병을 챙겼다.

“젠장, 망할 신전 놈들. 물에다가 손만 몇 번 담그면 되는 것을 가지고 더럽게 비싸게 팔더군. 효과가 없기만 해봐라, 당장 신전에 쳐들어가서 사제 놈들 대가리를 다 부숴 버릴 거야.”

랄프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한쪽 품에 성수를 소중히 쑤셔 넣었다. 말과는 달리 성수를 몹시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틀. 아주 짧은 정비를 마쳤다. 어디서 정보가 샐지 모르니 다들 서둘러 출발하고자 했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면 언데드들이 우리를 알아차릴 겁니다. 위험하지만 밤에도 움직여야만 해요. 쉬더라도 밤중에 두 번 정도는 장소를 바꿔야 합니다.”

계속 이동하면서 잠을 끊어 자야 한다는 뜻이다. 휴식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최악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이는 편이 낫겠군.”

투덜거리는 랄프에게 스벤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두운 숲을 무시하지 마. 언제 언데드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을 돌아다닌다니, 무모한 일이야. 얼마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

“이동하려면 언데드가 튀어나오지 않는 낮에 많이 움직여야 하오. 낮에 베이스캠프를 만들면서 이동하고, 밤이 되면 왔던 길을 돌아오면서 쉬어야겠지.”

같은 길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나아가야 하니 속도는 좀 나지 않겠지만 어두운 밤에 모르는 길을 찾아 나설 수는 없었다.

“다른 의견 있소?”

아이반이 묻자 다른 이들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 별말 하지 않았다. 다들 동의한다는 뜻이다.

조금 귀찮고 피곤한 것 정도로 언데드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스스슥!

타다닥!

일행은 빠르게 숲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이전과 같이 스벤이 선두에서 길잡이를 맡고, 추적술을 인정받은 아이반이 후방에서 훑으며 전진했다.

겨우 며칠 만에 다시 방문한 숲속은 이전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살아 있는 몬스터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 있던 놈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야. 언데드 놈들이 돌아다니니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뿐이지.’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하늘에서 장대비를 퍼붓던 그날 이전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으니까.

‘좋지는 않군. 언데드들이 동쪽 숲을 장악할 만큼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니.’

뒤쪽에서 흔적을 확인하며 움직이던 아이반은 흘깃 선두에 선 스벤을 바라보았다.

동부전선 레인저였다는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아차렸을 거다. 그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역시 욕심이 눈을 가려서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어쨌든 그들의 전략, 낮에 안전한 루트를 확보하고 저녁에 조금씩 후퇴하며 휴식한다는 것은 꽤 잘 들어맞았다.

멀리서 언데드들이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졌으나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기 전에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반은 영 껄끄러웠다. 이것이 전략이 좋아서인지 적들이 자신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흘이 되기 전에 유적이 있다는 호수 근처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이제는 점점 언데드들이 촘촘하게 숨어 있어서 조용히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확실하군요. 유적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사기(邪氣)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언데드들이 창궐한 것은 유적이 원인인 게 틀림없습니다. 맙소사, 정말로 미발견된 유적이 숨어 있었다고?”

에민이 감탄하고만 있자 율리아가 빠르게 물었다.

“진입 방법은? 저 많은 언데드를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

“최단거리로 뚫어야죠. 일단 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외부의 언데드들이 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대신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무언가를 상대해야만 하겠지.”

“흐흐, 그 정도 위험은 알고 있었잖아? 재수 없으면 뒤지는 거고, 운이 좋으면 살아남겠지. 막대한 보물을 가지고.”

“안에 보물이 있을지 없을지 아직 알 수 없다만.”

“있을 거야. 황금은 귀신같이 찾아내는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크흐흐, 그러면 마법사 양반? 언제 진입할 거요?”

“내일 아침. 언데드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 들어갑시다. 마지막으로 유적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죠.”

수백 년 전, 이곳에는 수도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 신전을 세우고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한 상태로 신앙심을 가다듬던 수행자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곳을 찾는 수행자는 점점 줄어들었다고 했다. 신앙심만을 등불로 삼아 극도로 폐쇄된 수도원의 생활을 견디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빛의 신, 아룬을 모시던 그들은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고 버려진 수도원만 이렇게 유적으로 남아…….”

역사를 줄줄 읊어대던 에민의 말을 끊은 것은 랄프였다.

“그런 것까지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고, 그래서 저기는 원래 빛의 신, 아룬을 모시는 수도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은 언데드를 뿜어내는 마굴이 된 거요? 중요한 것은 그거지. 우리가 저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상대해야만 하는 놈들이 무엇이냐, 하는 것.”

한창 즐겁게 역사를 늘어놓던 에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대답했다. 이전과는 달리 간결하게.

“아룬의 신전 중에서는 오래된 악마나 마물을 봉인해 둔 곳이 있습니다.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이곳이 그런 곳이었나 보죠.”

“오래된 악마? 마물? 그거 우리가 상대할 수는 있는 거요? 아룬의 신전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봉인만 해뒀던 놈들인데…….”

“그런 놈들은 이미 소멸되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수도원이 버려졌을 이유가 없죠. 봉인은 대신전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중간에 실수로 전승이 끊겼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아룬교단은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에민을 보면서 아이반은 헛웃음을 삼켰다.

‘허술한 곳이 아니라고? 세상에 백 퍼센트는 없는 법이지.’

이전까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긴가민가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직접 눈으로 보니 확신할 수가 있었다.

버려진 수도원. 한때 그가 미친 듯이 돌고 돌았던 인스턴스 던전.

흔한 이야기였다. 수도원에서 신앙심을 가다듬던 수도자들이 타락하여 악마를 소환하려 했다는 것 정도는.

결국 본단에 걸려서 이단심문관과 성전기사단이 출동해 싹 쓸고 지나갔는데 지하에 숨겨져 있던 불완전한 데몬 게이트를 발견하지 못했고,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플레이어가 마무리한다는 것이 버려진 수도원의 스토리였다.

‘지금 파티로 클리어가 될까?’

아이반은 팔짱을 낀 채 다른 이들을 살펴보았다. 하나하나 실력이 나쁘지 않은 이들이지만 영 확신이 없었다.

지금은 게임을 하는 게 아니었다. 현실이 된 던전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공간이었다. 친절하게 모든 것이 공략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까.

당장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으면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 게임과 달리 지금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원래 클리어가 될 시점보다 지금은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아이반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저렙 인던이고, 게임 속에서는 솔플도 가능한 곳이야. 적정 레벨보다 내가 높으니 괜찮을 것도 같은데…….’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이른 시기에 방문하게 된 던전의 불확실성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은 확실하게 쉬고, 배도 든든하게 채워야겠군. 내일 아침부터 힘깨나 써야겠어.”

* * *

“흐읍, 차!”

슈우욱!

쾅!

퍼져 나가는 충격파. 아침이라 행동이 굼뜬 언데드들을 깨부수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랄프의 실드차지에 이은 율리아의 뇌격권.

앞을 막고 있던 언데드들이 일순간 밀려나고, 그 위로 날카로운 얼음 화살들이 꽂힌다. 냉기가 뿜어지고 안 그래도 굼뜬 언데드들이 얼어붙어 완전히 멈춰 섰다.

이전의 어설픈 매직미사일과는 확연히 다른 마법. 제대로 준비한 마법사의 공격은 대포와 다를 게 없었다.

“나이스, 마법사 양반!”

피슈웅!

파각!

얼어붙은 언데드들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스벤의 화살. 사령핵이 부서진 언데드들은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예전 밤에 그들을 덮쳤던 녀석들보다 숫자는 훨씬 많았지만 상대하기는 훨씬 편했다. 높게 떠오른 태양이 부정한 마력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막힘없이 뚫고 들어간 일행들은 어렵지 않게 버려진 수도원에 진입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던 유적지. 한쪽 구석이 폭삭 무너져서 숨겨져 있던 입구가 드러나 있었다. 음산한 마력이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와 그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입구를 발견했다! 안쪽으로 들어간다!”

느릿하게 몰려오는 언데드를 피해서 얼른 그곳으로 향했다. 그 급박한 와중에도 아이반은 무심코 펄쩍 뛰어 들어갔다.

입던은 점프가 개념. 현실이 되었음에도 그 병신 같은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화아악!

쿵!

무언가 일렁이는 공간을 지난다 싶더니 어느새 바닥에 착지해 있었다. 분명히 계단을 통해 내려왔건만 뒤를 돌아보니 출입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던전화가 된 공간입니다. 핵을 부수고 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에민은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평생 마탑에서 마법만 연구하던 그가 언제 던전에 들어와 봤을 리가 없었다. 배운 대로 설명은 하지만 본인도 신기하겠지.

“그만 두리번거리고 집중하시오. 던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이전에 아이반은 두어 번쯤 던전을 해결한 적이 있었다. 게임 속에서와는 달리 아주 끔찍하고 더러웠으며,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한 곳이었다.

물론 그때보다 아이반은 훨씬 강해졌지만, 지금 들어온 던전의 수준 역시 그때보다 훨씬 높았다.

저레벨용 던전이라고 얕볼 수는 없었다. 혼자서 악마를 때려잡고 용종을 사냥하는 전설적인 업적을 세워도 게임 속에서는 저렙이라며 개무시를 하니까.

“던전은 이계요. 오래전에 죽은 영웅이 적이 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진 지 오래된 마물이 멀쩡히 돌아다니기도 하지.”

낮게 중얼거리는 아이반의 말을 듣고 모두 무기를 들었다.

신기함은 접어두고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오감을 날카롭게 세우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간다.

탁!

“윽!”

방패로 몸을 가리고 움직이던 랄프의 몸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 랄프의 시선을 무시하고 스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한참이나 무언가를 살피던 스벤이 욕설을 내뱉었다.

“씨부럴, 여기 수도원이라고 하지 않았소? 아무리 던전으로 변했다지만 이딴 게 왜 있는 거지?”

철컹

슈칵!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던지니 바닥에서 날카로운 철창이 솟아올랐다. 한 발짝만 더 갔으면 랄프의 가랑이를 찔렀을 거다.

“안타깝군. 내 안에 숨겨진 성적 취향에 대해 알아볼 기회였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을 하는 랄프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꽤나 놀란 모양이다.

“멀쩡한 수도원이었으면 아무리 망했다고 한들 언데드가 튀어나올 리가 없지. 당연한 일이니 피해서 넘어가시오.”

“젠장, 이런 함정에 대해서는 약한데…….”

스벤이 투덜거리며 길을 찾는 사이 아이반은 가만히 튀어나온 철창을 바라보았다.

핏자국은 없고, 파편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에 부딪혀서 희미하게 깎여 나간 흔적.

아이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선객이 있군.’

7화 저주받은 수도자

사실 미발견된 유적은 무척이나 위험했고, 그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모든 유적이 잃어버린 옛 왕가의 비밀창고 같은 것도 아닐 텐데 일단 뚫고 들어간다고 무조건 금은보화가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대개 미발견된 유적이 열이라면 그중에 다섯은 꽝이었고, 셋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만 가득한 곳이었으며, 둘 정도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금은보화를 품고 있었다.

겨우 2할, 혹은 그 이하.

목숨을 걸고 위험한 장소로 들어가는데 너무 낮은 확률이 아닐까?

그건 그렇지 않았다. 한번 대박이 터지면 인생을 바꾸고, 나라를 바꾸고, 역사를 바꾼다. 그 보상에 비하면 확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던전을 노리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란 소리지.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발견해서 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하지만…….’

아이반은 턱을 긁적이면서 바닥을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제대로 된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뚜렷한 것은 모두 그와 일행들의 것일 뿐.

하지만 일단 의심을 가지고 잘 살펴보니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흔적들이 몇 개나 눈에 띄었다.

‘…발자국을 숨겼군. 왜?’

누군가 금방 뒤에 따라 들어올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대개 던전의 구조는 직선이 아니었다. 각 잡고 사각에 숨으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목표는?

유적을 탐사하고 찾아낸 보물을 강탈하려는 의도겠지.

아이반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불특정 다수를 노린 것이 아니야. 분명히 우리를 목표로 하고 있어. …정보가 샜군.’

중간에 한번 마을로 돌아갔던 것, 그것이 문제였으리라.

숲의 이상을 조사한다면서 성수를 사고 언데드용 장비를 구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개중에 눈치 빠른 몇은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수도 있겠지.

아이반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바닥을 기다시피 함정을 찾아내고 있던 스벤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젠장, 뭘 그리 고민하고 계시오? 할 거 없으면 같이 이쪽으로 와서 함정이나 찾아보시지.”

“…이곳에 봉인되었다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소. 던전이 되었으니 오래전에 사멸했다는 그놈이 또다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뭐? 대악마가 튀어나온다고?”

깜짝 놀란 일행의 시선이 박혀들자 에민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나타난다고 해도 진짜 대악마는 아닙니다. 던전의 마력에 의해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가짜죠. 던전의 마력이 아주 강대한 수준은 아니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원본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하겠지. 혹시 그에 대한 정보는 없소?”

“으흠, 네. 뭐가 봉인되어 있었는지는 아룬교단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비밀이라……. 그래도 마력 패턴이나 언데드들이 창궐하는 것을 보면 역시 사령계통의 악마일 텐데, 개중에 유명한 것은…….”

자신의 전공 분야를 찔러서 그런지 에민은 폭포수처럼 관련 정보를 토해냈다. 이 근처에 떠돌고 있는 민담이라거나, 역사서의 내용, 자신의 추측 등등.

이미 이곳 던전의 보스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아이반은 관심도 없었지만,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에민과 대화를 계속했다.

누군가 먼저 던전에 들어와 숨어 있다는 사실은 숨기기로 했다. 괜히 그것을 밝혔다가 어딘가 숨어 있을 그들을 크게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망할. 수도원에 무슨 이런 무식한 함정들이 다 있지?”

스벤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용케 함정을 다 찾아냈다. 이런저런 함정이 많이 있었지만 아주 높은 수준의 것은 없어서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몇 번쯤 갈림길이 나왔지만,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미로로 만들어진 곳도 아니고 수도원이었다. 아무리 던전이 되어서 변형이 생겼다고는 해도 그리 복잡한 구조는 아니었다.

“씨부럴, 이 뼈다귀 놈들은 언제까지 나오는 거야?”

파각!

랄프가 욕설을 내뱉으며 방패를 휘둘렀다. 허연 두개골을 단단한 방패가 부수자 끼긱끼긱 움직이던 뼈다귀가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스켈레톤, 좀비, 구울.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방심하고 있을 때쯤 튀어나와 공격을 해서 영 거슬렸다. 제대로 휴식을 하지도 못하고 계속 긴장을 하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다. 확연히 짙어진 사기(邪氣), 싸늘한 바람.

드르르륵!

돌로 된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아주 오래되어 낡고 더러워진 사제복을 입은 시체, 한때는 신실했던 타락한 존재.

죄 많은 육신과 타락한 영혼이 던전의 마력을 받아들여 나타난 괴물, 저주받은 수도자.

‘그래, 이쯤이면 중간 보스가 등장해야지.’

검을 굳게 쥔 아이반이 소리쳤다.

“보통 놈이 아니오! 모두 경계하시오!”

아이반의 경고와 함께 저주받은 수도자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소리를 질렀다.

- 누우가아 우우리리르을 깨애워었느은가아아!

저주받은 수도자의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영혼을 뒤흔드는 비명 같은 외침에 속이 답답해지고 몸이 무거워진다.

“저주다! 모두 성수를 들이켜!”

일행은 일제히 품에서 성수를 꺼내 마셨다. 그 속에 담겨 있던 신성력이 온몸을 감싸고 저주받은 수도자의 마력을 밀어냈다.

하지만 위협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서부터 피눈물을 흘리는 시체가 솟아올랐으며, 벽을 뚫고 원혼들이 날아다녔다.

“젠장, 타락해서 지들끼리 인신공양을 하던 새끼들이 억울하면 얼마나 억울하다고.”

낮게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은 검을 굳게 쥐고 신을 불렀다.

‘토르, 썩은 시체를 토막 낼 수 있는 힘을……!’

우웅-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 신성한 힘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 있는 역겨운 놈들을 모두 도륙 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파괴적인 힘이었다.

치지직,

치지지지직!

쥐고 있던 검에 새하얀 번개의 힘이 깃들고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사기를 태워 버리듯 타닥타닥 소리가 퍼지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원혼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원혼은 무시하시오! 저 녀석을 잡아야 하오!”

아이반의 외침에 율리아가 저주받은 수도자에게 달려들었다.

슉, 슈우욱!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퉝겨지듯 앞으로.

길을 막아서는 시체들을 무시하고 날아가듯 솟아올라 양손에 기를 듬뿍 담고 휘두른다.

[천둥걸음!]

[아랑인(餓狼刃)!]

말 그대로 굶주린 늑대가 먹이를 씹어 삼키듯 날카롭게 내려찍는 공격.

무파 썬더울프가 자랑하는 뇌랑권의 오의는 금방이라도 녀석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율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쾅!

끼야아아악!

굉음과 함께 저주받은 수도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이 드러났다.

슬픔, 절망, 공포, 분노.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원혼들이 빼곡하게 움직이며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공격을 막아낸 원혼들의 일부가 흩어지며 토해낸 비명이 율리아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강력한 원념이 저주가 되어 그녀의 몸을 옭아맨 것이다.

멈춰 서 있는 율리아의 목을 노리고 움직이는 시체들. 그 언데드들의 손길이 닿기 직전, 번개 같은 손도끼가 놈들을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콰과광!

치직, 치지직!

“정신 차려! 몸에 마력을 돌리고 끊임없이 움직여!”

그렇게 소리를 지른 아이반은 율리아가 뒤쪽으로 몸을 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까다롭군.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저주나 정신공격은 상대하기가 어려워.’

물리적으로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때때로 뿜어지는 저주받은 수도자의 마력과 원혼의 비명이 문제였다. 그곳에 담긴 저주와 정신공격이 일행의 체력과 정신력을 서서히 깎아먹고 있는 것이다.

몸을 무겁게 만들고, 감각을 교란시키는 저주와 헛것을 보게 만들고 감정을 동요시키는 정신공격.

끊임없이 성수를 들이키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성수에 담긴 신성력이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낼 만큼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제 하나만 있었어도 상황이 훨씬 나았을 텐데……!’

살기 위해 이것저것을 익혔을 뿐 아이반은 제대로 된 사제나 성기사가 아니었다. 스킬 포인트가 부족해서 광역 스킬은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혼자서 버티는 것은 문제없었으나 다른 이들의 저주나 정신공격까지 막아 줄 힘은 없었다.

‘잡캐의 비애로군, 젠장.’

장기전이 되면 불리하다. 적당히 힘을 아끼면서 가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쏟아부어야 할 것 같았다.

“랄프! 시선을 끌어 보시오! 길을 뚫고 녀석의 목을 쳐야겠어!”

“저 녀석이 두르고 있는 방어막은 어쩌려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길이나 열어!”

입술을 깨물던 랄프는 앞에 있는 녀석의 목을 베고 자세를 잡았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방패도 앞으로. 기합을 내지르며 몸에 붙인 후 한 걸음 전진.

“흐아압!”

일순간 전장의 시선을 잡아끄는 외침. 랄프의 온몸에서 날카로운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마력은 전방에 있는 놈들의 몸을 뒤흔들어 자세를 무너뜨렸고, 그 후에 이어진 충격파가 놈들을 뒤쪽으로 한껏 밀어 넣었다.

[전사의 외침!]

[도발!]

[실드차지!]

물 흐르듯 흘러간 기술 연계로 공간이 생기자 그 위에 에민의 마법이 쏟아졌다.

슈슈슉!

쾅!

얼음구체 세 개가 동시에 날아와 박혔다. 앞을 막아서던 시체들이 단번에 얼어붙고 가루가 되어 터져 나갔다.

[아이스 스트라이크!]

전방의 적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물론 지금도 바닥에서 끊임없이 시체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금방 채워지겠지. 그러나 아이반에게는 그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온몸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푸른 번개가 뻗어 나와 주변의 적들을 후려쳤다.

자세는 낮게, 걸음은 크게. 마치 공간을 뛰어넘듯 쏘아져서 빠르게.

스스슥

쾅!

아이반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율리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그건……!”

그녀의 말이 채 뱉어지기 전에 아이반은 어느새 간격을 좁혀서 저주받은 수도자의 눈앞에 서 있었다. 실로 번개 같은 움직임, 천둥 같은 발걸음.

그렇게 다가간 아이반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오오디이이인!”

휘이익!

아이반의 검이 휘둘러진다. 번갯불과 검기를 휘감고 원혼의 장벽을 베어 가른다. 사악하고 역겨운 영혼을 불태우고 가려진 천막을 치워냈다.

콰과광!

끼이이이엑!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명.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일행의 몸마저 순간 굳어 버릴 정도로 농밀한 정신공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어어리이서억으은거어엇!

저주받은 수도자가 손을 내밀었다.

비록 방금 그 공격으로 원혼들은 모두 흩어졌으나 어차피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오는 것. 눈앞에 굳어 버린 전사의 공격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만약 저주받은 수도자에게 제대로 된 이성이 있었다면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푸슉!

- 끄, 끄어어어어!

저주받은 수도자의 등에서부터 나타난 창이 그를 꿰뚫는다. 원혼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아니라면 육체의 성능 자체는 별것 없었기에 막을 수가 없었다.

- 어어째애애서어어!

하찮은 육신을 꿰뚫은 창에는 신성한 힘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방금 공격 자체가 아스가르드의 위대한 신, 오딘의 것을 흉내 낸 것이었으니까.

초월자가 보기에는 아주 하찮고 하찮은 재주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자신들의 전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기에 위대한 신은 친히 가호를 내려 주었다.

그 무게는 자신의 신을 저버린 하찮은 수도자가 감당하기엔 무척이나 무거운 것이었다. 비록 자신이 원했던 신이 아니라 이교도의 신이라 해도.

- 또오다아아시이이어어두움으으로오오!

화르륵!

저주받은 수도자의 몸이 불타오르고, 일행을 공격하던 시체와 원혼마저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서쪽에서 히드라 새끼를 잡은 이후로 오랜만에 꽤 만족할 만한 경험치가 차올랐다.

‘그나저나 언제 신도의 목숨을 뺏어갈지 모르는 사악한 신과 악마를 섬기던 타락한 수도자라니. 잘 어울리는데 쟤는 왜 죽는 거… 윽!’

속으로 한껏 이죽거리던 아이반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까불지 말라는 듯 신성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온몸을 적시는 탈력감에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반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젠장, 여기서 잠깐만 쉬다 가야겠소.”

일행들은 당연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8화 적보다 가까운 것

저주받은 수도자를 해치운 뒤로부터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질이 좋아졌다.

사령술을 사용하는 스켈레톤 메이지, 나름의 무장을 갖춘 스켈레톤 워리어, 강화된 좀비와 구울.

말하자면 중간 보스 이후에 등장하는 정예몹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이전에 등장했던 녀석들보다 강한 녀석들이었다. 몸이 튼튼하고 움직임이 훨씬 빠르고 매끄러웠다.

그러나 아이반은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다고 느꼈다. 나타나는 숫자가 줄어들었기에 칼질을 덜 해도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된 광역기가 없었기에 차라리 숫자로 밀어붙이는 쪽이 까다로웠다.

‘앞으로는 광역기도 신경을 써야겠어. 당장 쓸 만한 게 뭐가 있지?’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지고 아이반은 꽤나 힘을 쌓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효율적으로 강해지는 방법은 아니었다.

중구난방으로 스킬을 찍어가며 범용성은 넓혔을지언정 그 어느 분야도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잡캐.

그것은 그동안 아이반의 목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강해지고, 쉽게 적을 해치우는 것보다 그 어느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있도록 스펙을 쌓는 것이 우선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적의 육성 루트로 한길만 파고들었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때는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었다. 미래의 강함보다 당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젠장, 이게 던전인가? 더럽게 빡세군. 아주 뒤져 버리겠소. 으윽!”

랄프가 허벅지에 성수와 포션을 흘려 넣으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옆쪽에서 치고 들어온 몬스터를 상대하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함정에 꿰뚫린 것이다.

허벅지가 크게 찢어지고 피를 많이 쏟았다. 꽤 질 좋은 포션의 힘으로 상처가 지글지글 아물고 있었지만,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때, 괜찮겠소?”

아이반이 묻자 랄프는 몇 번 자신의 다리를 굽혔다 펴고, 제자리에 뛰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보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오. 좀 뻐근하기는 한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반걸음만 더 움직였으면 아예 다리가 잘려 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아주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싸우기 불편한 정도는 아니오.”

부상을 입은 것은 랄프만이 아니었다. 에민은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하다가 내상을 입은 상태고, 율리아는 한쪽 어깨 갑옷이 부서져 나가며 팔을 다쳤다. 스벤의 경우에는 옆구리 쪽에 부상이 있고.

멀쩡한 것은 아이반뿐이었다. 그나마 아이반도 자잘한 생채기 따위는 피할 수가 없었고, 스켈레톤의 뼛가루와 좀비들의 썩은 살점 따위로 지저분해져서 겉은 아주 엉망이었지만.

‘이러다 칼 맞아 죽기 전에 먼저 병에 걸려서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툭툭!

대충 겉에 묻은 오물을 털어낸 아이반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보스룸이 코앞이었다. 이쯤에서 자리를 잡고 하룻밤 쉬어 갈 타이밍이다.

지금 일행이 느끼는 피로는 적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면서 숲을 통과하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던전 속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크게 신경을 갉아먹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 숨겨진 함정, 어두운 시야.

베테랑 용병이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평생 마탑에서 연구만 하던 에민이 느끼는 피로감은 더욱 컸다.

탁, 타다닥!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장작더미가 타오르고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방금까지 시체들과 싸우느라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것이 모닥불이 가진 매력이었다.

“오늘 밤은 형편없는 스튜라도 만들어 먹어야겠소. 망할, 몬스터 놈들이 오려면 오라지.”

스벤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차피 던전 내의 몬스터는 대략 다 쓸어버린 상태였다. 남은 것은 보스룸 안에 있을 녀석 정도. 게다가 언데드뿐이라면 여기서 음식 냄새를 풍기고 말고가 뭔 소용이겠나.

오죽하면 그리 나서지 않던 율리아가 손수 모닥불 위에 반합을 걸고 조리를 시작했다. 물을 붓고 일행들이 가진 식량을 조금씩 모아서 다 때려 넣은 용병 스타일 캠핑요리.

곡물 가루, 견과류, 육포 따위를 아무렇게나 집어넣어 끓이기만 한 요리는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는 맛이었으나 아주 최악은 아니었다. 그래도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후루룩

‘뜨끈한 국밥에 깍두기 하나 얹어서 먹고 싶다.’

전체적으로 서양풍의 분위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곳이 진짜 서양은 아니었다. 찾아보면 국밥이나 김치 비슷한 것도 없지는 않았다.

‘마을로 돌아가면 꼭 먹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율리아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무슨 일이시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아까 그대가 사용한 기술은 천둥걸음으로 보이는데……. 아니, 확실하게 천둥걸음이었어. 그대도 우리 무파의 일원이었나?”

몸에서 전기를 뿜어대며 빠르게 이동하는 보법, 천둥걸음.

그건 무파 썬더울프의 기본 보법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핵심이 되는 기술이기도 했다. 썬더울프의 기술은 모두 보법 천둥걸음을 바탕으로 펼치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익히게 되었소. 예전에 만난 썬더울프 수련자가 꽤나 인상적이었거든.”

“…마티아스 선배가 그대에게 천둥걸음을 전수했다고?”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소. 그냥 그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어설프게 따라 하다 보니 되더군. 그 이후로 노력을 좀 하기도 했고.”

그 말에 율리아는 몹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저 겉으로 보기만 하고 따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천둥걸음이 그렇게 쉽게 익힐 수가 있는 것이 아닌데…….”

“천둥걸음이 문외비밀은 아니지 않소? 마티아스도 그저 웃고는 말던데.”

무투가들은 단지 사람을 가릴 뿐 가르침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행자들이니까.

다만 대부분의 경우 알려 줘도 따라 하지 못할 뿐이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특유의 수행법으로 십수 년 이상 단련을 거듭해야만 겨우 따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쯤 되면 사실 외인이라기보다는 무투가이자 무파의 수련자라고 불러야 한다.

물론 아이반은 십수 년 동안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스킬 포인트를 사용했을 뿐이니까.

“그건 그렇지만…….”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율리아가 이내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천둥걸음을 그 정도 수준으로 익혔다면 그대는 이미 썬더울프의 수련자다. 비록 무투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투의 정신은 그대와 함께하고 있으니.”

척!

율리아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겠군. 무파 썬더울프의 수련자이자 뇌랑권(雷狼拳)의 계승자, 율리아 밀러. 새로운 수련자를 환영한다.”

“…아이반 에시르손. 천둥걸음만을 익혔소.”

“그대에 대해 본단에 알리겠다. 만약 그대에게 불합리한 위험이 닥친다면 썬더울프는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무파 썬더울프에는 스승과 제자가 따로 없었다. 그저 먼저 수련을 시작한 사람이 선배, 나중에 시작한 사람이 후배일 뿐이다.

무투가는 개인의 단련을 중시하며 극도로 개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누군가의 앞길을 막는 불합리한 위험에 대해서는 함께 움직일 줄 아는 끈끈한 동료애 역시 가지고 있었다.

“하, 여기서 이렇게나 강한 후배를 만날 줄이야.”

계속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율리아가 시원스럽게 미소를 지으니 순간 던전이 화사하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어딜 가나 시선을 잡아끌 만한 미인이었다.

“미모의 선배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하하, 딱딱하게 보였는데 그대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군.”

“누가 할 소리를.”

일행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곧 던전 공략도 마무리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오면서 은제 식기니, 금화 주머니, 사기에 물든 장비들까지 몇 개쯤 발견해서 챙겨 놓았다. 힘들어도 기분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자지. 던전을 마무리하려면 체력을 회복해야 해.”

돌더미로 양쪽 복도를 막고 각자 자리를 잡아 바닥에 누웠다. 불침번은 역시 에민을 제외한 네 명이서 대략 한 시간 반 정도씩.

초번을 맡은 아이반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에 신성력을 담아 성호를 그려 넣었다.

대단한 결계술이나 보호막을 사용할 줄은 모르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자잘한 사기(邪氣)의 움직임은 막아낼 수가 있었다.

혹시나 보스룸 안에 묶여 있을 악마 녀석이 잠자고 있을 때 수작질을 부릴지도 몰랐다. 아예 보스룸을 뛰쳐나와 덤벼올지도 모르고. 별 도움은 안 되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자신의 차례를 마치고 율리아를 깨워 불침번을 넘겨준 아이반. 그는 자신의 자리에 누웠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싶어서.

다행인지 별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반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너무 조용하게 넘어간 게 이상하군. 아니면…….’

한참을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아이반은 얼른 표정을 지우고 방금 깬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은 어제 끓였던 잡탕 국물 요리에 재료를 조금 더 넣어서 해결하고 각자 장비를 다시 정비했다.

두두둥!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 묵직한 문을 열자 짙은 사기가 밖으로 퍼져 나왔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의 사악한 기운, 죽음의 향기.

일렁거리는 불완전한 데몬 게이트 앞에서 해골을 뒤집어쓴 악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녀석이 바로 숲의 이상을 만들어 낸 원인이었다.

그 옛날 타락한 수도자들이 소환하려고 했던 악마, 썩어가는 손아귀

고오오오-

킬킬킬킬-

밀폐된 지하에서 갑자기 바람이 분다. 사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썩어가는 손아귀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 드디어 제물이 찾아왔구나!

슈우욱!

쾅!

“윽!”

바닥을 뚫고 시체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몸을 아무렇게나 이어 붙여 그럴듯하게 몸을 만들어 낸 3미터짜리 괴물.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자 탱커인 랄프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젠장! 힘이 너무 강해!”

“악마가 시체골렘을 강화하고 있소! 둘의 연결을 끊어야 해!”

끼이에에엑!

원혼들의 끔찍한 비명이 울리고 일행의 몸이 덜컥 굳었다. 단순히 정신공격만이 아니라 원혼이 실체를 가지고 그들의 손발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성수, 성유, 아무튼 신성한 무언가.

일행들은 모두 다급히 자신들이 챙겨온 것을 사용해 원혼들을 떨쳐냈다. 그동안 스켈레톤 전사가 열몇쯤 더 모습을 드러냈다.

‘토르!’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 하얀 번갯불이 튀어 올랐다.

그 번개는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것이라면 첫째가는 파괴적인 천둥신의 것이었고, 언데드들에게는 극상성이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콰과광!

천둥걸음에 이어서 빠르게 휘두르는 검. 언데드들은 한 방에 무너져 내렸으나 이내 다시 회복하여 몸을 일으켰다. 모두 썩어가는 손아귀의 사령술 때문이었다.

‘하여간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놈들이랑은 상성이 안 맞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한 걸음 뒤로 밀린다. 끊임없이 재생하는 적이란 귀찮다 못해 끔찍한 존재였다.

- 피와 영혼을 내게 바쳐라!

뼈로 된 낫을 휘두르며 악마가 달려들었다.

쾅!

앞으로 나서 썩어가는 손아귀의 공격을 막아낸 랄프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야! 체력을 뺏어간다!”

라이프 드레인, 그러니까 생명력 갈취.

온갖 저주술 가운데서 가장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내가 약해지는 만큼 상대가 강해진다는 소리였으니.

이전보다 안광이 더 밝게 타오르는 썩어가는 손아귀가 깔깔 웃었다.

- 피! 생명! 이 얼마 만에 맛보는 제물의 맛이냐!

그 순간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던 에민이 번쩍 눈을 떴다. 바닥에서부터 순식간에 성에가 끼면서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얼어붙어라!”

[얼어붙은 기둥!]

에민의 외침과 함께 바닥에서 얼음 기둥들이 솟아올라 적들을 삼킨다. 방금까지 칼을 휘두르던 스켈레톤 전사들이, 강화된 좀비들이, 시체골렘이 얼음 속에 갇혀서 움직임을 멈췄다.

썩어가는 손아귀는 하늘로 날아올라 피했으나,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얼음 속에 봉인되었다.

쿨럭!

과도한 마력 운용으로 피를 토해낸 에민이 소리쳤다.

“붙잡고 있는 것은 겨우 10분입니다! 그 안에 적을 처치해야만 해요!”

쿵, 쿵, 쾅!

얼어붙은 기둥을 발판으로 삼아 율리아와 아이반이 날아오른다. 단숨에 악마의 눈높이까지 올라간 둘은 녀석의 목을 물어뜯었다.

[아랑인(餓狼刃)!]

[뇌룡참(雷龍斬)!]

- 하찮은 것들이!

쾅!

썩어가는 손아귀가 거칠게 마력을 뿌리자 율리아와 아이반이 튕겨 나왔다. 거센 반탄력에 몸이 밀려난 것이다.

스벤이 화살을 쏘아 녀석의 움직임을 멈춰 세운 사이 둘은 자세를 가다듬고 거리를 벌렸다.

쾅!

콰과광!

썩어가는 손아귀의 손짓에 따라 얼어붙어 있던 언데드들이 하나씩 터져 나간다. 날카로운 얼음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퍼져서 시야를 가렸다.

‘녀석도 멀쩡하지는 않아!’

완벽히 목을 노린 공격이었다. 녀석 역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쾅!

사각지대에서 터지는 폭발을 순전히 날카로운 감으로 피하면서 아이반이 달려들었다.

“길을 열겠소!”

랄프의 목소리가 들리고 시야를 막고 있던 것들이 단번에 사라진다.

- 얌전히 나의 힘이 되어라!

공중에 날아오르려던 썩어가는 손아귀가 몸을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랄프가 가까이 붙어서 녀석을 뒤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으으윽!”

랄프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근육질을 자랑하던 그의 두 팔이 홀쭉하게 변해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갈취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녀석을 붙잡았고, 그것이 아이반에겐 기회가 되었다.

‘토르, 토르! 빌어먹을 토르여! 나에게 당신이 가진 힘을!’

들고 있는 것은 검, 아니 망치.

거인의 골통을 부수고 천둥을 만드는 파괴적인 힘의 상징.

치직,

치지직!

하얗게 빛나는 번개가 형태를 갖춘다. 천둥의 신에게는 아주 가볍고 가벼운, 필멸자가 들기에는 아주 무겁고 무거운 그것을 흉내 낸다.

“흐아압!”

아이반의 팔뚝 근육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마치 산을 드는 것과 같은 힘겨움으로 겨우 들어 올려 악마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과광!

악마의 몸이 찢어지고 핵이 부서진다. 던전의 마력으로 겨우 형태를 갖춘 하찮은 영혼이 찢어지고 흩어진다.

- 으, 으어어어!

바닥에 떨어지듯이 착지한 아이반의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젠장, 너무 무리한 것 같은데.’

손이 덜덜 떨려왔다.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스슥, 스스슥!

댕강!

아이반이 쥐고 있던 검이 잘게 조각나 부서진다. 바닥에 닿자마자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검. 평범한 철검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이었던 모양이다.

“후, 힘들다.”

강한 힘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기에 느껴지는 탈력감.

금방이라도 뻗어서 자고 싶었지만, 아이반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니까.

휘이익!

탁!

쉬이이익!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검은 연기.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 독성이 있었는지 에민이 거칠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타다다닥!

그리고 밖에서부터 달려오는 여러 명의 기척. 먼저 안으로 들어와 숨어 있던 불청객들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아이반은 옆에 있던 스벤의 목을 붙잡고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9화 쓰레기의 조건

“컥!”

바닥에 등을 내리꽂힌 스벤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돌바닥을 깨고 들어갈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지만 스벤은 아픔보다 먼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눈빛으로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아이반이 비웃듯이 입술을 밀어 올렸다.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정보가 새는 것 정도야 그럴 수가 있었다. 마을에 이틀이나 있었으니 누구라도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만한 무리가 먼저 지나갔는데 숲속에서부터 흔적 하나 찾을 수가 없다고? 그건 아예 서로의 루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게 가능한 것은 길잡이인 스벤뿐이었고.

불청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으면 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빡대가리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다.

“큭, 언제…….”

언제부터 알아차렸냐는 질문이었으리라.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진다고.

빠각!

아이반은 대답 대신 손에 힘을 주어 스벤의 목을 부러뜨려 버렸다.

죽이기 전에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 악당 노릇 따위는 사양이었다. 끝까지 궁금한 채로 지옥에 떨어지라지.

그렇게 아이반이 스벤의 목을 부러뜨려 죽여 버리는 것을 본 랄프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반! 네 녀석이 배신자였나!”

그는 독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면서도 적의 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꽤 깊은 친분이 있었던 스벤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자세가 흔들렸다.

“개소리하지 마시고 방패나 잘 들고 있으시오.”

“뭐?”

“습격자들이 익숙하진 않으시오? 스벤이 부른 놈들일 텐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외치려던 랄프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반의 말대로 어딘가 익숙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복면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저 장비, 저 체형들은 무척이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설마 스벤 녀석이 정말……!”

설마는 개뿔.

저 정도쯤 되는 용병이라면 원래 자신과 함께하는 고정 파티가 있기 마련이다. 남과 보물을 나누기보다는 뒤통수를 쳐서 자기 패밀리끼리 가져가겠다, 이거겠지.

아이반이 그동안 경험한 용병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뢰, 믿음, 의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는 사기꾼에 살인자에, 강도, 인간쓰레기였다.

용병 길드에 인정을 받을 만큼 높은 등급의 용병이라면 그나마 믿을 만했지만, 그 알량한 신뢰라는 것 역시 미발견 유적의 보물이라는 유혹 앞에서도 굳건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다섯이나 모이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쓰레기가 있다.

아이반이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는 명언이었다.

‘이러니 내가 동료를 믿을 수가 있나. 잡캐가 될 수밖에.’

아이반은 코웃음을 흘리면서 새로운 검을 꺼냈다.

허공에서 갑자기 무기가 나타나니 습격자들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마법무기라도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그저 인벤토리에서 꺼냈을 뿐인 평범한 철검에 불과했다.

팅!

스걱!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걷어내고 가까이에 있는 적 하나를 베었다. 그리고 다시 날아오는 화살을 흘려내고 적 하나의 목을 댕강.

그렇게 몇 명쯤 죽이고 나니 습격자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녀석은 왜 쓰러지지 않는 거야!”

다른 일행들은 이미 독에 중독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과도한 내상을 입어서 독을 밀어내지 못하던 마법사 에민이 첫 번째였고, 율리아는 어느새 바닥에 누워 있었으며, 탱커라 그나마 체력이 좋았던 랄프 역시 버티고 버티다 방금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짙은 독무 속에서 아이반 홀로 아무렇지 않은 듯 날뛰고 있으니 당황할만했다.

“흥, 조금 더 강한 독을 가져왔어야지.”

아이반이 이것저것 다양하게 익히다 보니 직접적으로 강함을 발휘할 수 있는 공격 스킬의 성장은 부족했지만 살아남기 위한 각종 내성은 오히려 동급 레벨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었다.

습격자들은 아이반이 서쪽에서 히드라를 사냥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심각하게 여겼어야 했다.

그야말로 피부를 녹이고 내장과 신경을 엉망으로 만들던 히드라의 독에 비하면 이 정도는 피자에 뿌려 먹는 핫소스만도 못했다.

스걱!

“으아악!”

습격자들의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대단하지도 않았다. 방금까지 썩어가는 손아귀 같은 악마를 상대하다 보니 다소 밋밋한 느낌마저 들었다.

‘독만 믿고 덤벼들었나 보군.’

확실히 독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래서 아이반이 가장 먼저 각종 내성을 끌어올린 것이기도 하고.

습격자들을 모두 처리한 아이반은 놈들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독을 썼다면 반드시 예비로 하나쯤은 더 해독제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해독제를 마셨다고 해도 혹시 약발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냥 재수 없다 생각하고 뒤질 것이 아니라면 해독제를 더 챙겨야지.

“흠, 이건가?”

녀석들의 품에서 해독제를 찾아낸 아이반은 다른 일행에게 하나씩 먹였다.

다행히 일행은 몸이 굳고 정신을 잃었을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너무 강한 독을 쓰면 같이 있던 스벤이나 뒤이어 진입할 습격자들 역시 피해를 입을 수가 있으니 적당히 조절했기 때문이다.

사실 공기 중에 살포하는 걸로 즉사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독은 구하기도 어려운 법이고, 해독제도 귀했다. 제대로 해독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렇게 해독제를 먹인 랄프와 에민을 독이 덜한 곳으로 옮겨 놓은 아이반은 무표정하게 율리아를 내려다보다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탁!

그러나 아이반은 율리아를 베지 못했다. 검이 목을 자르려는 순간, 튕기듯이 일어난 그녀가 거리를 벌렸기 때문이다.

“역시 깨어 있었군.”

“…어째서?”

억울한 듯이 소리치는 그녀에게 아이반은 한껏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나는 내 목을 노린 자를 결코 살려 두지 않소.”

거기까지 말한 아이반은 약간의 위트센스유머를 담아 덧붙였다.

“선배.”

스벤이 배신자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과연 배신자가 하나뿐인지, 아니면 더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

그리고 아이반은 방금 율리아 역시 배신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독이라고는 해도 다른 사람들이 너무 쉽게 쓰러졌어. 그건 미리 밑 작업을 해뒀기 때문이지. 예를 들면 음식에 무언가를 탄다거나.”

단독으로는 별 효과가 없지만 다른 것과 만나면 독성을 강하게 만들거나 내성을 약화시키는 종류의 것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보나마나 그중 하나겠지.

낭패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율리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언제 깨달았지?”

“나는 사람을 믿지 않소. 어제저녁에 당신이 굳이 나서서 요리를 하겠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지. 증거가 없었는데 이제는 생겼군.”

그 말에 율리아는 움찔 놀라더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고 있으리라 여겼던 에민이 파리한 안색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건……!”

“나는 죽을 자를 위해 설명하지 않소.”

슈우욱

쾅!

빠르게 다가간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컥!”

공격을 흘리기 위해 검면에 손등을 갖다 대던 율리아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강철로 된 건틀릿이 그대로 찌그러지며 손등이 으스러진 것이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치직.

치지직!

바닥에서 푸른 번개가 튀어 오르려다 막힌다. 그녀가 사용하는 천둥걸음은 아이반에 의해 완벽하게 파악되어 막혔다.

큰 기술을 사용할 틈조차 없었다. 완벽하게 기량으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아, 안……!”

스걱!

아이반의 검이 그녀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남다른 미모를 자랑하던 그녀의 얼굴이 하늘로 떠오르고 이내 바닥을 굴렀다.

흙먼지, 피와 뇌수.

여러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미모 역시 그렇게 더럽혀지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앞으로 썩어갈 뼈와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반이 입맛이 씁쓸했다.

“미인 선배를 환영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스스로의 육신을 단련하는 것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무투가가 물욕에 눈이 가려져 동료를 배신하다니.

신실해야 할 수도자가 타락하여 악마를 불러내지를 않나, 길을 알려 줘야 할 길잡이가 동료들의 눈을 가리고, 무투가의 육신에 근육 대신 욕심이 새겨지다니. 하여간 기분 나쁜 던전이었다.

“허, 고용한 네 명의 용병 중에 둘이나 배신자였다니.”

에민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평생 마탑에서 곱게 자라다가 진짜 길바닥 인생을 마주하니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이반에게 물었다.

“혹시 나도 죽일 겁니까?”

“내가 왜? 배신자들은 저 둘이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둘이 셋, 넷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두려움이 섞인 에민의 질문에 아이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탑의 추적은 귀찮지. 당신이 먼저 나를 죽이려 했다고 한들 목을 따기 전에 한 번쯤은 고민했을 거요. 그러지도 않았는데 내가 당신을 죽일 이유는 없지.”

“그래요? 흐흐, 그거 다행이로군요.”

그 허탈한 웃음소리에 아이반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나는 아무나 죽이는 개백정이 아니오.”

그렇게 내뱉은 아이반은 순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오늘 베어 버린 사람이 몇 명인가, 그동안 죽여 버린 사람이 또 몇 명인가.

그러고도 나는 과연 당당한가, 정말로 사람 잡는 백정은 아니었나.

아이반이 그동안 경험한 용병들은 대부분 양아치에 사기꾼, 강도이자 강간마, 살인자이자 쓰레기였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씨부럴, 기분 참 엿 같군.”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마치 죄인이 된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 하여간 사람 대가리를 자르고 나서 기분이 상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띠링!

[연계 퀘스트: 동쪽 숲의 비밀 - 1(완료)]

[최근 안도렐 동쪽 숲이 이상해졌다. 그 비밀을 파헤쳐 보자.]

[보상: 대량의 경험치, 스킬 포인트 +1, 3골드 31실버]

띠링!

[연계 퀘스트: 동쪽 숲의 비밀 - 2(완료)]

[오래된 유적에서 사기가 흘러나온다. 그 원인을 제거하자.]

[보상: 대량의 경험치, 랜덤박스(매직), 노르드 신들의 만족.]

.

.

.

메시지가 떠오르고 몇 개쯤 되는 퀘스트가 떠올랐다가 완료되기를 반복했다.

메인 스토리와 연결이 되어 있는 퀘스트답게 보상이 빵빵했다. 스킬 포인트와 랜덤박스라니. 이제야 제대로 된 퀘스트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우웅-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채워진다. 바닥난 체력이 다시 차오르고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조금 더 깊어진 마력, 조금 더 질겨진 근육, 조금 더 예민해진 감각.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대량의 경험치가 모여서 단번에 레벨이 두어 개쯤 올라간 듯했다.

‘사람 참 간사하군. 방금까지 그렇게 우울해하고 있다가 레벨이 올랐다고 또 금세 기분이 좋아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망할 세상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그게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

“…어디 놓친 보물이 없는지 둘러보시오. 랄프가 깨어나면 바로 빠져나가야겠소.”

“알겠습니다.”

아이반은 목이 부러져서 죽어 버린 스벤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았다.

“길잡이가 사라졌으니 조금 더 서둘러야겠어.”

그래도 사람이 줄어서 내 몫이 늘었군.

어느새 아이반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화 맥주 한잔의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