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맥주 한잔의 여유
“돌아왔군.”
성벽을 지키던 병사가 힐끔 아이반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온갖 오물에 더럽혀지고 안색도 썩 좋지 않은 사람이 셋.
다섯이 같이 나가서 셋만 돌아왔으나 병사들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누군가 목숨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물며 위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요즘 숲속을 살피러 들어갔다면 더욱.
병사들은 다만 실력 좋은 용병이 둘이나 목숨을 잃을 정도로 숲속이 위험해졌다는 사실에 표정을 굳혔을 뿐이다. 그것이 부디 자신들을 불행에 빠뜨리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설마 저 숲속에서 던전을 발견했을 거라고는, 용병 길드에서 신뢰할 만큼 등급이 높은 용병이 둘이나 일행을 배신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든 사건에 대해 용병길드에 보고를 마쳤을 때 빌리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묘하게 변했다.
“스벤과 율리아가 배신을 하고 파티원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고?”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빌리에게 에민이 벌컥 화를 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정식으로 마탑에 건의해서 항의를 하겠다고 에민이 소리를 질러대자 빌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 그저 당황스러워서. 스벤은 그렇다 쳐도 율리아까지 배신을 했다는 건 좀 충격적이군. 그것도 둘이 손을 잡았다고? 둘 사이에 그럴 만한 친분이 있었나?”
그 말에 랄프가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은 같은 의뢰를 맡은 적이 꽤 많았소. 성격이 극과 극이라 잘 어울리지는 못했는데, 어쩌면 그건 내 생각뿐이었을지도 모르겠어. 하긴, 묘하게 의뢰가 많이 겹친다고 했지. 우연만은 아니었군.”
스벤과 꽤 깊은 친분을 나눴다고 생각하던 랄프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신은 도대체 뭘 보고, 뭘 보지 못했나.
별별 사건을 다 경험해 본 베테랑 용병에게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생긴 모양이다.
“젠장,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더니. 하여간 이 짓을 하다 보면 더러운 꼴을 너무 많이 본단 말이야. 이러니 누굴 믿을 수가 있나.”
빌리는 낮게 욕설을 내뱉고는 고민에 잠겼다.
이번 일은 용병길드로서도 꽤나 큰 손실이었다. 쓸 만한 용병 둘을 잃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쓸 만한 용병이 배신을 때리고 청색 마탑의 마법사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던전 발견이야 어쨌든 원래 의뢰 목적은 동쪽 숲의 이상현상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공적인 임무.
마탑이 그런 임무를 수행하려고 공식적으로 용병길드에 협조를 구해서 믿을 만한 용병을 소개받았는데, 그 용병이 의뢰주인 마탑의 마법사를 죽이려고 했다? 사실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망할 놈들. 뒈지려면 곱게 뒈지지 길드에 똥물을 뿌려?’
이미 죽어 버린 놈들을 떠올리며 빌리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녀석들의 시체라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일단 유적지 쪽으로 조사단을 보내겠소. 그게 절차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사실로 판명이 된다면 길드 차원에서 마탑에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보상이 있을 거요. 랄프와 아이반, 당신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겠지.”
깊은 한숨을 내쉰 빌리가 고개를 숙였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사람을 잘못 본 내 잘못이오.”
그렇게 말하는 빌리의 표정은 진심으로 숙연해 보였다.
물론 완전히 미안함이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일로 용병길드 지부장 비슷한 것에서 결국 지부장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한 단계 떨어지게 될 테니 그것이 속이 쓰렸다.
그걸로 아이반이 할 일은 모두 끝이었다. 뒤처리야 용병길드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라고 의뢰 수수료를 그만큼이나 떼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보통은 미적미적 움직이다 그대로 덮어 버리겠지만 청색 마탑이 엮인 이상 그럴 리가 없었다. 번개같이 처리하겠지. 잘못은 어차피 죽은 놈이 다 떠안을 테고.
‘이참에 골치 아픈 일들을 모두 그놈들 탓으로 돌려 처리해 버릴지도 모르겠군.’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지난 며칠 동안 머리는 충분히 많이 썼다. 큰돈을 벌었으니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장기 숙박을 걸어 놓았던 바람소리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동화 네 개를 내밀며 빠르게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뜨거운 물에 들어간 채 눈을 감고 있으니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씨부럴, 보물이고 나발이고 다 뭐야. 이게 지상낙원이지.”
며칠 동안 흙먼지, 뼛가루, 썩은 피와 살점, 독 연기까지 죄다 뒤집어쓴 아이반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땟국물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는 돈을 추가하고 몇 번이나 뜨거운 물을 보충받아야만 했다.
슥,
스슥!
그렇게 때를 씻어내고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까지 정리하고 나니 충분히 미남이라고 불릴 멀끔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이반에게는 영 낯설기만 했다.
“…쯧.”
하얀 피부에 우뚝한 콧날, 짙은 눈두덩이, 금발에 푸른 눈동자.
이건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노르드의 모험가, 아이반 에시르손의 얼굴이지.
얼굴도, 이름도, 행동과 사소한 습관, 사고방식까지.
이제는 원래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이렇게 문득문득 자각할 때마다 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퍼해야 하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기뻐해야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작은 거울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외면한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빳빳한 새 옷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국밥. 뜨끈한 국밥이 먹고 싶다. 이왕이면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서 얼큰하게.
오늘은 얼큰해지고 싶은 날이다.
* * *
“이봐, 아이반! 여기야, 여기!”
아이반이 근처에서 든든한 국밥을 한 그릇 뚝딱하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1층 테이블 하나를 붙잡고 랄프가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아이반은 그를 흘깃 보고 지나치려는데, 랄프가 손을 뻗어서 굳이 그를 자리로 불렀다.
“무슨 일이시오?”
“흐, 무슨 일이긴! 우리는 동료가 아닌가, 동료! 그 빌어먹을 곳에서 살아 돌아온 동료! 보물을 함께 나눈 친구!”
랄프는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결코 입 밖으로 뱉지 않을 말들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다.
보물. 그 말이 들린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나겠군.’
물론 지금은 용병길드가 개빡쳐서 눈이 돌아간 상황이니 함부로 일을 벌였다간 죄다 잡혀서 머리가 댕강 날아갈 거다.
소문에 빠르고 생각이 있는 놈들이라면 욕심이 생겨도 쉽게 움직이지 않겠지.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현명했다면 아이반이 던전에서 사람을 썰 이유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셨군.”
아이반이 무서운 얼굴로 바라보자 랄프가 찔끔 목을 움츠렸다. 본인도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크, 크흠! 미안하게 되었소!”
“아니, 넘어가지. 어차피 곧 소문이 퍼질 테니.”
랄프의 앞자리를 빼고 앉은 아이반이 맥주를 시켰다.
이 동네는 죄다 수제맥주라 가게마다 술맛이 다 달랐는데, 확실히 여기 맥주는 매력이 있었다.
꿀꺽꿀꺽.
찌르르.
“크으!”
따끔한 탄산이 목을 찌르고 차가운 맥주가 넘어간다. 그렇게 한 잔을 쭉 들이켜 마시고 나니 목구멍에 잔뜩 끼어 있던 텁텁함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여기 맥주 두 잔! 고기와 소시지도 넉넉하게.”
새롭게 주문을 마친 아이반이 앞을 보니 랄프가 깨작깨작 감자를 조각내고 있었다. 영 기운이 없었다.
‘뭐라도 위로를 해야 하나?’
평생을 아싸로 살아온 아이반은 사람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망할 세계로 넘어온 뒤로는 다가오는 사람마다 목을 따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서부터 고민해야 했고.
따끈따끈한 소시지 하나를 입에 집어넣은 아이반은 우물거리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방패를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군. 그냥 길바닥에서 익힌 기술은 아닌 것 같던데?”
그러자 랄프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흐, 그렇소. 한때 기사 지망생이었거든. 딱딱한 기사단 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몇 년 다니다가 때려치웠소. 꾹 참고 버텼으면 기사님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지. 그때는 나도 어렸소.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래서 그는 스벤과 쉽게 친해졌다고 했다. 규율이 엄하기로 소문난 동부 전선 레인저 출신이라 이리저리 공통점이 많았으니.
“젠장. 어쩌면 그 자식은 레인저 생활이 답답해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거기서도 동료를 찌르고 튀었을지도 모르겠군. 망할 자식.”
한참이고 스벤을 욕하던 랄프는 이내 자신의 기사단 시절 이야기를 읊어 놓았다.
남자는 어디서나 술 마시면 스포츠 이야기, 여자 이야기, 군대 이야기라더니 이세계에 와서도 그건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다.
“흐, 당신은 어떻소? 듣자 하니 노르드는 척박해서 사람이 억셀 수밖에 없다던데. 몬스터도 많이 튀어나오고.”
대륙 북부는 눈과 얼음이 가득한 척박한 동네였다. 거기서 사는 사람들을 노르드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외모나 생활상, 모시는 신들이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라는 것을 보면 딱 바이킹이었다.
노르드인들은 세계수가 불타고 세상이 멸망하는 재앙을 피해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정착했다고 하는데, 듣다 보면 라그나로크 이후에 세계를 건너왔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다 뒤졌을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왜 멀쩡히 살아서 가호를 내리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노르드인들 사이에서는 온갖 신화적 해설이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인데, 아이반은 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안 되는 거로 따지면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지금 상황도 말이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몬스터 때려잡는다고 경험치가 오르고 스킬 포인트로 기술을 배우는 것은 정상적인 일인가.
어쨌든 가짜 노르드인인 아이반에게 북부에서의 추억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충 자신의 군 생활을 떠올리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북부에는 계절이 세 개밖에 없소.”
“응? 그게 무슨 뜻이오? 너무 추워서 여름이 없다는 말인가?”
“여름, 겨울, 빙하기. 여름에는 팔뚝만 한 요정들이 날아다니고 겨울에는 사방이 얼어붙지. 빙하기에는 숨 쉬는 것조차 고역이오. 침을 뱉으면 날아가다 얼어붙는 곳이니.”
“그거 끔찍하군.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이오?”
“사람 목숨은 질기니까.”
“크, 그래도 요정이라니. 한 번쯤은 나도 보고 싶군.”
“추천하지는 않소. 나와 동료들은 그들을 팅커벨이라 불렀는데 아주 사악하고 역겨운 모습이었거든. 사실 요정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존재요.”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른 채 입을 놀리면서 아이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살폈다.
아까 전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근처에 있던 몇몇 손님이 바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도.
힐끗.
아이반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자신이 머무는 방이 있을 공간을 향해.
‘…젠장, 오늘 밤에도 곱게 잠들긴 글렀군.’
11화 편치 않은 길
“으으, 으어억!”
지끈지끈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랄프는 한참을 끙끙거렸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숙취가 심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이제 일어났소?”
낮고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 언뜻 부드럽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랄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아이반이 창가에 앉아 목걸이를 닦고 있었다. 이번에 던전을 해결하면서 그의 몫으로 떨어진 물건이었다.
“생각보다 술이 약하시더군. 죽은 듯이 잠들기에 깜짝 놀랐소. 물론 진짜로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그 말에 랄프가 주변을 둘러보니 좁은 여관방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각자 꺾일 수가 없는 방향으로 팔다리를 하나씩 꺾은 채 쓰러져서.
“이, 이건……!”
“지난밤에 당신이 술을 먹다 함부로 입을 놀린 결과지. 그나저나 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밤에 습격이라니, 하여간 개 같은 곳이야. 너무 역겨워서 친근함이 생길 정도군.”
사실 이 습격마저도 랄프의 수작질은 아닐까 의심하며 놈들을 캐물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냥 아이반이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너무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동료를 의심하며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젠장, 엿 같은 세상이군.”
시니컬하게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사람은 없소. 꽤 마음에 들던 여관이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러니 뒤처리는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같이 의뢰를 하면서 쌓은 정으로 하룻밤 목숨을 지켜 줬으면 의리는 다 했으니까.”
“그, 미안합니다.”
“별말씀을.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는 법이지. 이겨내시오.”
그렇게 툭 말을 내뱉은 아이반은 가죽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떠나야 할 때가 된 듯싶었다. 이곳 음식은 한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한 달 장기 숙박을 걸어두고 며칠 머물지도 못했군.’
아까운 일이지만 이런 것이 용병의 삶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를 부평초와 같은 삶. 여기저기 던져 주는 사료를 헉헉거리며 핥아먹는 개 같은 인생.
1층에서 가볍게 아침을 해결한 아이반은 방을 비우고 여급에게 떠날 것이라 일러두었다.
계약했던 한 달에서 며칠 정도 여유가 있었으나 그 차액을 되돌려 받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런 조건으로 할인을 받았으니까.
아이반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고 용병길드로 향했다. 역시나 용병길드는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한쪽 구석에서 인상을 찡그리며 누군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빌리가 아이반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큰 건 하나 성공시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하러 왔소? 거 참, 부지런한 친구로군.”
“내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은 아니오. 간밤에 잠자리가 뒤숭숭했거든.”
그것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빌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위로했다.
“저런, 그렇게나 발 빠른 녀석들이 있었군. 망할 놈들, 그런 속도로 의뢰나 해결할 것이지.”
“그래서 에민의 숙소가 어딘지 물으러 왔소. 더 귀찮아지기 전에 청색 마탑에 유물들을 팔아넘기려고 하오.”
“으음, 원래 손님의 위치는 함부로 알려 주는 것이 아닌데…….”
잠시 고민하던 빌리는 이내 그 정도는 상관없겠다고 여긴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에민은 경비대에서 직접 치안을 맡고 있는 고급 여관에 묵고 있었다. 던전에서 겪은 일로 크게 위협을 느낀 그가 자리를 옮긴 것이다.
듣기로는 용병길드에서 사과를 표하며 공짜로 호위를 붙여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고 했다.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이반이 그쪽으로 갔을 때 에민은 마침 1층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세상의 무서움을 깨닫는 것과 별개로 아이반에게 신뢰가 생긴 그는 크게 반겨 주었다.
“어서 오세요! 하하, 식사하셨습니까?”
“먹고 왔소. 하지만 이곳 음식도 궁금하기는 하군.”
맞은편에 앉은 아이반이 가볍게 식사 주문을 마치자 에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정말 며칠 만에 편하게 잤습니다. 언데드에게 위협당하지 않는 밤이라는 건 정말 행복한 것이더군요.”
“그거 부럽군. 나는 어제도 밤잠을 설쳤는데.”
“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치 않은 밤손님이 몇 찾아왔소. 술이 들어가니 랄프의 입이 가벼워지더군.”
“…그렇군요.”
구운 소시지와 달걀프라이, 하얀 밀빵과 샐러드, 거기에 호박으로 만든 스프까지.
간단한 식사였지만 맛이 깔끔했다. 확실히 고급 여관의 음식이라 수준이 높았다. 물론 가격도 높았다. 아이반이 묵었던 여관의 몇 배쯤.
“청색 마탑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오? 이번에 얻은 유물들을 청색 마탑에 팔고 싶은데.”
그 말에 에민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렇습니까?”
이번 일에 아이반의 활약이 무척이나 뛰어났던 만큼 그가 가져간 몫이 상당히 많았다. 그걸 모두 청색 마탑에 팔겠다니 그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오늘 오후에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습니다. 밥 먹고 마차를 구하려고 했죠. 같이 가시겠습니까?”
“빨라서 좋군.”
이곳에서 청색 마탑까지의 거리는 대략 7일이 걸렸다. 말 두 마리에 마차 하나, 마부까지 포함해서 4실버로 협상을 마친 둘은 각자 2실버씩을 꺼내 지불했다.
탈탈탈탈, 탁!
다닥다닥, 탁!
싸구려 짐마차를 대충 손봐서 만든 마차는 쿠션감이 전혀 없어서 움직일 때마다 끊임없이 엉덩이를 두들겼다.
이걸 타고 일주일이라니, 차라리 곤장 몇 대를 맞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천천히 멀어지는 성벽을 보던 아이반이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강도 대가리를 넘기고 받아야 할 보상금을 챙기지 못했군.’
3실버 75코퍼.
아주 하찮고 하찮은 누군가의 목숨값.
그것을 떠올리던 아이반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숨값이 잊혔다.
* * *
팅!
슈우욱!
푹!
화살 한 방이 사슴의 미간을 꿰뚫었다. 펄쩍 뛰어서 도망가려던 녀석이 풀썩 바닥에 쓰러진다.
살을 가르고, 내장을 버리고, 피를 빼고.
빠르게 그 작업을 진행하고선 고기를 한 덩이 크게 썰어내어 불판에 올렸다.
치익, 치이익!
익어가는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 허브를 뿌렸다. 그 옆에 버섯과 양파, 감자까지 곱게 익어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번진다.
인벤토리에서 포크와 나이프, 접시까지 꺼내 완벽히 세팅하고 내밀자 에민이 허허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아공간이 있으니까 좋기는 좋군요. 길바닥에서도 그럴듯한 요리를 먹을 수가 있다니.”
“뭐, 그렇지. 아무래도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닐 수가 있으니 말이오.”
아이반이 인벤토리를 사용한 것은 던전에서 마지막에 새로운 검을 꺼낼 때 딱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걸 에민이 봤던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마법이 걸린 검이라 허공에서 나타났다고 여겼지만, 마법사인 에민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흔한 것이 아닌 만큼 숨길 수 있으면 숨기고 싶었지만 이미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아이반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인벤토리를 쓰고 있었다.
휙!
남은 사슴 고기를 인벤토리에 던져 놓은 아이반은 사슴 스테이크를 한입 깨물어 삼켰다.
확실히 야생에서 살던 녀석이라 질기고 잡내가 났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요리 스킬이 있었으면 이것도 맛있게 변했을 텐데.’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이반은 이내 머릿속에서 털어 버렸다.
지금도 온갖 스킬트리를 다 타고 있는 중이었다. 요리 스킬이 생존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스킬 포인트를 사용해서까지 습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스킬 포인트를 좀 아껴야 해.’
원래 스킬 포인트가 그렇게 빡빡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잡캐라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스킬 포인트가 없다고 아예 스킬을 익히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노력과 재능에 따라서 얼마든지 상위 스킬을 익힐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당장의 생존이 급해서 이리저리 쓰기 바빴지만, 지금이라도 아껴 놓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노력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가 없는 강력한 스킬들을 익히지.
아이반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금방이라도 스킬창으로 가려는 손을 억눌렀다.
“이게 물을 만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탑에서는 기초 마법서를 팔기도 한다고 들었소. 그건 좀 쓸 만하오? 너무 어렵게 적혀 있거나 하면 좀 그런데.”
그 말에 에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마법서가 쉬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혹시 마법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누구나 관심은 있지. 그야말로 마법 아니오?”
“아이반 씨는 아스가르드 신을 모시는 전사가 아닙니까? 그런데 또 마법을 배운다는 것은…….”
“오딘께서는 마술신이자 지혜의 신이시오.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그분을 모시는 자의 숙명이지.”
신앙심은 개뿔도 없으면서 말은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신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전형적인 노르드 전사로 보이겠지.
“으흠, 그렇군요. 저도 노르드 신화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에민이 흔쾌히 대답했다.
“원래 기초 마법서라고 해도 아무나에게 판매를 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이반 씨가 이번에 세운 공도 있고, 유물을 저희 마탑에 판매하시기로 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거 다행이로군.”
“만약 정말로 기초 마법서를 구매하시면 제가 잠깐이나마 교육을 해드리죠. 겨우 며칠 수업을 듣는다고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마법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한결 편하실 겁니다.”
마법사에게, 그것도 마탑의 마법사에게 과외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입문한 것이 아니라면 과외비로 골드깨나 깨졌으리라.
‘이참에 마법을 익혀서 광역기 하나쯤은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물론 기초 마법서에 쓸 만한 공격기술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게 얼마나 하찮은 것이든 스킬 포인트를 아끼면서 새로운 기술을 추가할 수가 있다면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했다.
또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이반에게 숨겨진 대마법사의 재능이 있었을지.
그런 희망적인 상상을 하면서 아이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아이반 씨가 없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밖에 못 한다는 것이 오히려 죄송하네요.”
“그거면 충분하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
그때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눈에 마력을 집중해 시력을 끌어올리고 저 멀리 능선을 바라보니 큼지막한 덩치의 오크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에 화려한 염료로 그림을 그린 채 창을 들고 있는 오크 전사.
그는 한동안 아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사라졌다.
“원래 이 근방이 오크들의 영역이었소?”
“예?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영역싸움이 치열하다고는 들었죠. 아시다시피 그린스킨과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고 있잖습니까?”
오크와 고블린, 트롤, 그 외 몇몇.
인간들의 패권 행보에 반발하여 세력을 일으킨, 초록색 피부를 가진 자들.
“그린스킨이라…….”
그러고 보니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었지. 그러면 조만간 큰일이 하나 벌어지겠군.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새로운 전장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12화 마탑도시 블루라인
다그닥, 다그닥.
털털털털.
며칠 동안 계속 마차에 타고 있으니 엉덩이가 마비될 것 같았다. 허리도 욱신거리는 것 같고.
분명 튼튼한 몸이라 멀쩡할 텐데도 아이반은 마차가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다음부터는 싸구려 마차 대신 그냥 말을 타고 다녀야겠군.’
그렇게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씩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웬만한 국경도시보다 웅장한 성벽이었다.
“드디어 블루라인이 보이는군요!”
블루라인은 청색 마탑이 위치한 마탑도시였다. 에민 입장에서는 힘들고 거친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셈이니 오죽 기쁠까. 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제대로 배움을 얻고 돌아왔군.”
“하하, 덕분에 한동안은 마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죠. 저는 역시 연구실이 편한 것 같습니다.”
원래 이불 밖은 위험한 법이다. 이 망할 세계에서는 이불을 덮고 있어도 습격받을 수 있는 동네고.
아이반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따뜻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누워서 귤 까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보고 싶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리움이 밀려왔다. 괜히 입맛이 쓰다.
‘씨부럴.’
아이반은 시선을 돌려 블루라인을 바라보았다.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딱 보기에도 구획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청색 마탑이 세워지고 나서 도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외딴곳에 세워졌던 마탑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가 생기는 과정에서 중구난방으로 만들어질 법도 한데, 마탑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덕에 마치 계획도시처럼 발전한 것이다.
오래된 마탑이 있는 도시들은 대개 이런 경우가 많았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도록 만든 곳도 있으니까.
“혹시 아이반 씨는 이전에 블루라인에 방문한 적이 있으십니까?”
“처음이오. 그동안은 인연이 없었지.”
“그렇습니까? 하하, 그러면 제가 안내해 드리죠. 블루라인에는 맛있는 음식점도 많습니다.”
성문에는 무기를 든 병사들이 주르륵 서서 출입심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기하고 있는 줄이 상당히 길었다.
마탑도시는 중앙정부에 세금도 내지 않는 자치도시라 출입심사가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탑 소속 마법사인 에민과 함께 움직이니 그 모든 것이 쉽게 통과되었다. 애써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출입심사도 간편하기 짝이 없었다.
에민이 수더분하게 행동해서 그렇지 사실 마탑 소속 마법사는 어디를 가나 준귀족 취급을 받았다. 하물며 이곳은 청색 마탑이 다스리는 도시가 아닌가? 편할 수밖에.
“바로 마탑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쉬었다가 하시겠습니까?”
“길게 끌 것 없지. 일단 거래부터 끝내겠소.”
“알겠습니다. 하하,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겠군요. 설마 제가 정말로 던전을 발견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청색 마탑은 블루라인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오망성을 그리며 서 있는 부속 건물과 중앙에 높이 솟은 메인 건물.
웅장하기로는 웬만한 대영주의 영주성보다도 웅장한 맛이 있었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외벽과 화려한 무늬 덕분에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상당할 듯했다.
‘그저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청색 마탑의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이반의 눈에 건물을 타고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의 움직임이 보였다. 수많은 마법이 중첩되어 있는 요새와 같은 건물이었다.
아이반이 다소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에민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청색 마탑입니다. 대륙 최고의 마탑이자 제 집이기도 하죠.”
그러자 옆쪽에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흥, 대륙 최고는 무슨. 아직은 아니야. 간신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면 몰라도.”
감히 청색 마탑의 코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웬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백발을 아무렇게나 길러두고 입에 곰방대 비슷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늙은 마법사.
그가 입고 있는 로브나 가슴의 브로치를 보면 청색 마탑 소속의 마법사인 듯싶었다.
“이 녀석아, 자랑도 정도껏 해야지. 내 낯이 다 부끄럽다.”
“사부님!”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네. 조용히 해! 이 녀석아!”
에민의 외침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른 늙은 마법사는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아이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묘하군, 기묘한 사내야.”
한동안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요릭이라고 한다. 저 둔한 녀석의 사부 되는 놈이지. 넌 뭐냐?”
늙은 마법사의 태도는 일견 무례해 보일 수 있었지만, 아이반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원래 마법사들은 괴팍한 사람이 많았다.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소개를 했다면 그들 중에서는 상당히 예의가 갖춰진 편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이반이 그동안 경험한 마법사들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뻣뻣하고 괴팍한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왕이나 대귀족 앞에서도 그러지는 못하겠지. 씨부럴 놈들.
“아이반 에시르손. 모험가요.”
“딱히 이름이 궁금한 것은 아니고. 어디서 왔나?”
“북부 출신이오.”
그 말에 요릭의 표정이 팍 굳어졌다.
“씨부럴, 젊은 놈이 말마다 끝마디 잘라먹는 것 좀 보게. 북부? 북쪽이면 다 너희 집이야? 세상이 동서남북밖에 없는데 북쪽이라고 하면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
숨 쉬듯이 꼰대어를 발사하던 요릭이 문득 입을 다물고 아이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군 시절에 연등실에서 자신을 갈구던 선임이 떠올라 움츠러들 뻔한 아이반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 눈빛을 마주했다.
“왜 그러시오?”
“북부, 에시르손. 혹시 노르드 출신인가?”
“그렇소.”
“…그렇군.”
갑자기 요릭의 표정이 침착해지고 눈빛이 깊어지자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만 있던 에민의 표정이 한층 더 불안해졌다. 혹시 사부가 또 뭔 지랄을 할지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그걸 보면서 쯧, 하고 혀를 찬 요릭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게. 제자 녀석이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친구를 데려왔는데 그래도 밥은 먹여서 보내야지.”
내가 에민과 친구였나?
아이반은 에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를 치지 않은 동료라면 친구라고 불러도 안 될 것은 없었다.
“이렇게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군.”
그 말에 에민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사부님 성격이 좀 강하셔서…….”
“괜찮소. 마법사 중에서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요릭은 입은 거칠어도 사람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기 제자를 아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마 제자를 밖에 내보내고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타이밍을 딱 맞춰서 이렇게 만날 리가 없었다.
제자를 값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나 실험도구쯤으로 바라보는 사이코패스들도 많은데 이 정도면 아주 인격적인 셈이지.
“…도대체 그동안 어떤 마법사들을 만나셨기에?”
에민이 질린 듯한 얼굴로 물었지만, 아이반은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가면 되오?”
* * *
마탑에서 먹는 첫 식사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다른 영지로 치면 영주성에서 대접받는 셈이니 요리사의 실력이야 의심할 바가 없었다.
소고기는 부드러웠고, 국물은 깊었다. 양식 코스가 아니라 동양식 정찬에 가까운 식사였기에 만족도가 더욱 높았다.
어우야, 살치살 살살 녹는다.
그렇게 아이반이 음식을 즐기고 있는 사이, 에민이 마탑을 떠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게 된 요릭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뭐? 던전?”
“네. 호수 근처에 있는 오래된 유적 밑에 실제로 숨겨진 공간이 있더라고요. 그게 던전화가 되어서…….”
쨍그랑!
어지간히 놀랐는지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앞자락에 소스가 튀어서 엉망이 되었지만 요릭은 신경도 쓰지 않고 되물었다.
“진짜로 그곳에 미발견된 유적이 있었다고?”
“네. 수백 년 전에 그곳에서 수도자들이 몰래 악마소환의식 같은 걸 했나 보더라고요.”
“그래? 그러면 혹시 악마도 튀어나왔더냐?”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악마였죠. 해골을 뒤집어쓰고 뼈로 된 낫을 휘두르던 놈인데 정확한 정체는 잘 모르겠…….”
그쯤에서 아이반이 끼어들었다.
“썩어가는 손아귀. 녀석의 이름은 썩어가는 손아귀요.”
그러나 에민과 요릭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썩어가는 손아귀라면 대악마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인지도가 있는 네임드 악마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역사서와 악마성전에도 이름을 올린 녀석이라고 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고 보니 묘사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저희는 그런 녀석을 이긴 겁니까?”
“본체가 아니었으니까. 불완전한 소환이었고, 그마저도 던전의 마력에 의해 겨우 구현화가 된 상태였소. 제대로 소환이 이루어졌다면 대재앙이 되었겠지.”
설명을 들은 요릭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썩어가는 손아귀 같은 네임드 악마를 처리한 것은 큰 업적이야. 고생했구나.”
그렇게 칭찬을 하던 요릭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미발견된 유적, 그것도 던전화가 된 곳을 털었으니 챙겨온 유물이 적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어디에 있냐? 어디에 있어!”
몸이 달아오른 듯 요릭이 재촉을 하자 에민이 큼지막한 주머니를 꺼냈고, 아이반이 그 두 배쯤 되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허공이 쩍 하고 갈라지며 주머니를 토해내는 모습에 요릭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아공간? 아티팩트는 아닌 것 같고 고유능력인가? 그건 또 신기한… 아, 에시르손이라고 했던가?”
다른 사람이라면 이것만으로도 깜짝 놀랐겠지만 요릭은 스스로 아공간을 창조할 수가 있는 수준 높은 마법사였다.
청색 마탑의 장로의 눈에는 흔해빠진 아공간보다 낡은 주머니 속에 있을 유물들이 더욱 궁금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내 연구실로 가자!”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하고 요릭의 연구실로 향했다.
마법사의 공방은 본인의 마법이 가장 강력하게 발현될 수가 있도록 최적의 세팅을 끝내 놓은 곳이었다.
그런 곳으로 들어간다니 약간 불안하기도 했지만 아이반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유물을 제대로 감정하려면 본인의 공방에서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요릭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유물만 맡기는 것은 더욱 불안한 일이었다.
“오호, 악에 물든 로자리오라! 이건 또 재미가 있군. 오백 년 전의 아룬경전도 가치가 있고.”
가볍게 훑어보는 것만 해도 거의 네 시간. 시간관계상 아이반의 몫으로 떨어진 유물들만 먼저 살펴봤음에도 그 정도가 걸렸다.
문외한에게는 몹시 지루한 일이었지만 저것들이 다 돈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아이반 역시 괴롭지만은 않았다.
“이걸 모두 팔 생각인가?”
“그렇소. 여기 이 반지만 빼고.”
“으잉? 그게 여기에 있는 것 중에 가장 가치가 있는 놈인데…….”
“그러니까 챙기는 거요. 쉽게 구할 수가 없으니까.”
마력 순환을 약간 빠르게 하고 회복 속도를 상승시키는 반지.
게임 속의 기준으로 따지면 겨우 레어급이 되려나 싶은 아이템이지만 사실 이 정도면 상당히 귀하고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게임 속에서 전설급, 신화급 이런 말도 안 되는 놈들만 들고 다녀서 그렇지 현실적으로는 레어급만 해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희귀한 수준이니까.
“크흠, 그건 좀 많이 탐나는데…….”
유물로서의 역사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성능마저 훌륭했다. 마력 순환을 빠르게 만들고 회복 속도를 상승시킨다는 것은 마법사에게는 더없이 좋은 옵션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끙끙거리면서 고민하던 요릭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건 다른 물건과 교환하는 것이 어떤가? 우리 마탑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 중에 그대와 딱 어울리는 것이 있어. 노르드의 전사, 그것도 에시르손이라면 그런 반지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거야.”
님 선제시.
자신이 거래상 우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반이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어떤 물건인지 보고 판단하겠소.”
물론 아이반의 여유로운 표정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이반은 애써 경악을 감추며 속으로 외쳤다.
‘이게 이런 곳에 있다고?’
13화 전장의 바람
게임이 오래되어 뉴비는 줄어들고 라면 먹으면서도 월드보스를 잡을 수 있는 고인물들의 비중이 높아지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있었다.
이미 격차가 하늘과 땅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신규 유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신규 캐릭터 경험치 이벤트나 아예 높은 레벨을 쥐여 주는 점핑 캐릭터.
그때 레벨에 맞춰서 일일이 장비를 갈아 치우는 것은 몹시 귀찮은 일이었다. 레벨업 속도가 너무 빨라서 기껏 장비를 바꿔 봐야 얼마 쓰지도 못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성장형 무기였다. 캐릭터의 레벨에 따라서 같이 진화하는 아이템.
동급의 다른 아이템들과 비교하면 성능이 많이 떨어져서 고레벨이 되면 외면받지만 초중반 빠르게 레벨을 올릴 때는 장비값을 아낄 수 있는 도구.
게임 속에서는 잡템 취급을 받았지만 좋은 장비를 쉽게 구할 수가 없는 지금은 그 어느 것보다 아이반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아이반은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물었다. 솔직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걸 레어급 반지와 교환한다고?’
아무리 성장형 무기가 같은 등급의 다른 장비들에 비해 성능이 부족해도 겨우 레어급 반지와 교환할 수준은 아니었다.
사용자에 따라서 강해지는 옵션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꽤나 탐나는 것이 아닐까?
개나 소나 전설급, 신화급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게임 속도 아니고 현실이 된 지금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능일 텐데.
아이반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읽지 못하는 것인지 요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알아보지 못하겠나? 노르드의 유물이야. 주변에 흩어진 물품들을 보면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모시던 전사의 물건이 틀림없어.”
“…그렇군.”
“화려한 기능은 없어도 단단하고 날카롭지. 사용자의 근력을 미약하게 강화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솔직히 그 반지 하나와 바꾸기는 아깝지만 연구할 만한 것은 다 연구했어. 다시 노르드의 전사가 사용한다면 나쁘지 않겠지.”
아이반은 자세히 살피면서 슬쩍 떠보듯 물었다.
“기능은 그것뿐이오? 다른 것은 없고?”
“그래. 왜? 부족한가? 그대에게 썩 어울리는 물건 같은데.”
“글쎄, 하필이면 창이라는 것이 좀 그렇군. 검이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요릭의 표정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모른다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레벨에 따라 같이 성장하는 무기.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혹시 플레이어였던, 상태창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반이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짐짓 고민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요릭이 마치 호객하듯 덧붙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유물이지만 상한 흔적 하나 없지.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물건이야!”
한참이고 그것을 들어주던 아이반이 마치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무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면 충분하긴 하지. 그런데 혹시 마법서를 좀 구할 수는 없겠소? 마탑에서는 기초 마법서를 팔기도 한다던데.”
“기초 마법서? 그렇기는 하지만……. 공짜로 줄 수는 없어! 그건 따로 골드를 받아야 해.”
“반지도 팔기 싫은 거 억지로 바꾸는데 좀 깎아 주실 수는 없소?”
그 말에 요릭이 기분이 팍 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색 마탑이 어디 시장 바닥에서 생선 파는 곳인 줄 아나? 흥정은 거기 가서 하게. 지식의 가치는 깎을 수가 없어. 대신 다른 편의를 봐주지.”
마법사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했다. 돈 몇 푼으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정말로 금액을 깎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성장형 아이템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목표였으니.
“뭐, 알겠소. 그러면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지.”
“흐흐, 정말인가? 잘 생각했어!”
아이반은 반지 대신 창을 챙기고, 거기에 더해서 금화 수십 개를 건네받았다.
주머니에 묵직하게 들어 있는 것이 모두 금화라니, 숲에서 그 개고생을 하며 벌어들인 의뢰비가 겨우 금화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았다.
“의뢰 하나 잘 해결해서 대박이 터졌군.”
하물며 가장 중요한 성장형 무기까지.
항상 이런 보상이 뒤따른다면 아이반은 몇 번이고 악마의 대가리를 날려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은 거래였소.”
“클클클, 합리적인 거래였지. 우리 마법사들은 장사치나 용병 놈들처럼 서로의 뒤통수를 후리기 위해 노려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
너스레를 떠는 요릭을 보며 아이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개소리가 무척이나 아크로바틱하군.’
아이반의 경험에 의하면 마법사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괴팍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 탓에 계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긴, 그것이 마법사들의 본질이지.’
세계의 법칙을 왜곡하고 자기 마음대로 바꾸려면 본인의 생각이 옳다는 독선적인 사고방식과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어야만 했다.
모든 마법사가 괴팍하고 독선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스윽, 휘익!
아이반이 몇 번 창을 휘둘러 보다 얼른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요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창은 별로라더니 자세가 그럴듯하군. 그 무기의 주인도 에시르손이 사용한다면 만족할 거야.”
그러자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에민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계속 에시르손, 에시르손 하시던데 아이반 씨의 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그 질문에 요릭은 표정을 굳히고 에민을 바라보았다.
이 빡대가리 새끼는 무슨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는 거지? 도대체 스승에게 뭘 배웠기에?
그런 눈빛을 하던 요릭은 이 멍청이의 사부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흘렸다.
“이 한심한 녀석아! 노르드인에게는 성이 없어. 그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할 뿐이지.”
스벤의 아들이라면 스벤손, 아이반의 아들이라면 아이반손.
그러니 에시르손, 에시르의 아들.
“에시르는 아사 신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노르드 신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이 바로 아사 신족이지.”
“그렇다면…….”
“아사 신족의 아들, 그들의 피를 이은 자. 고귀한 혈통을 가졌으며, 신들의 인정을 받은 대전사. 그런 자만이 감히 에시르손이라 자칭할 수가 있지.”
요릭은 아이반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덧붙였다.
“말하자면 노르드의 오래된 왕족이라 할 수 있겠어. 물론 이자가 사기꾼이 아니라면.”
그래, 그런 설정이 있었지. 캐릭터 배경설정 따위는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찾아서 읽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노르드에는 왕가가 없소. 그러니 오래된 왕족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군. 따지고 보면 지금 노르드인들 중에서 서로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도 없고.”
“신의 인정을 받은 전사라는 말은 옳고?”
“신이 나를 인정했는지가 지금 무슨 의미가 있소? 당신이 나를 인정했는지가 중요하지.”
“노르드인답지 않은 말이야.”
“당신이 나보다 노르드인들에 대해 잘 알 것 같지는 않은데.”
“흐, 그것도 그렇군.”
거기까지 말한 요릭은 어서 나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이번에 얻은 유물들을 얼른 연구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요릭의 연구실을 빠져나온 아이반은 에민의 안내를 받아서 무사히 기초 마법서 몇 권을 구할 수가 있었다. 덕분에 방금 받았던 금화 주머니가 단숨에 홀쭉하게 변했지만.
탈탈탈.
금화 대신 먼지만 흘러나오는 주머니를 바라보며 아이반이 이를 악물었다.
‘사기꾼보다 더한 놈들!’
아이반은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 * *
“맹자 왈,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라, 맹자가 말하길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 하였소. 공자 왈, 덕불고 필유린이라, 공자가 말하길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했지. 그대는 상정고금예문이 1234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소?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해서는 논할 수가 있겠소? 수요와 공급의 법칙, 베블런 효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으니 에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내 심정이 딱 그것이오.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청색 마탑에서 기초 마법서를 구매하고 약속대로 에민이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외계어를 읊었다.
그렇게 며칠쯤 강의를 듣고서야 아이반은 어렵게 인정할 수가 있었다. 더럽게 어려워서 무슨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역시 문과인가? 문과가 문제인가?
“으흠,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 것인지…….”
답답한 표정으로 두꺼운 마법서를 뒤적거리던 아이반이 손을 펼쳤다.
화르륵!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꽃이 나타났고, 이내 그것이 다섯 개로 갈라졌다가 화살표, 하트를 그리고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걸 바라보던 에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잘하시면서 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솔직히 에민은 마법의 기초에 대해 알려 주면서도 아이반이 금방 그것을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법은 학문이고, 그것은 겨우 며칠 만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놀랍게도 아이반은 겨우 3일 만에 기본적인 마력 사용법에 대해서 깨닫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 답답하다고 말을 내뱉고 있으니 황당하기만 했다.
‘내가 기초를 익히기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솔직히 에민은 아이반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가는 아이반의 굵직한 팔뚝에 자신의 대가리가 박살 날 것 같아서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지만.
그런 에민의 생각이야 어쨌든 아이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원래 힘을 다루는 것은 익숙하니까. 몸에 때려 박으면 기초적인 속성변환이나 움직임 정도야 간단하지. 하지만 도대체 그 원리를 모르겠단 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개소리를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마법의 원리라는 것이 그동안 아이반이 알고 있던 상식과는 완전히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옳다고 세계에 떼쓰는 지독한 고집쟁이였다.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세상의 법칙에 의문을 제시하고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뼛속까지 반골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 이성적이었으나 그 이성은 자의적이고, 누구보다 현명하지만 그 방향이 편향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마법이 현실에 발현되니까.
스스로를 상식인이자 지성인이라고 믿고 있는 아이반에게는 그것이 영 껄끄러운 일이었다. 뭔가 하나씩 불편하게 걸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렵군, 어려워. 이 마법사적 사고방식이 없다면 높은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기는 어렵겠어.”
아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 불문하고 머릿속에 지식을 때려 넣고 몸에 경험을 새겨 주는 스킬 포인트의 존재가 있었으니.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쉬운 길이 눈앞에 있으니 점점 눈이 돌아갔지만 의지력으로 억눌렀다. 이제는 큰 그림을 봐야만 했다. 당장이 아니라 미래를 그려야만 했다.
“후…….”
답답한 마음에 바깥을 바라보던 아이반의 눈에 어딘가 바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왠지 성문이 소란스럽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이지?’
피, 부상. 겨우 살아남아 도망친 패잔병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반은 오크 전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블루라인으로 오던 길에 먼 산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오크 전사.
전장의 바람이 마침내 이곳까지 불어왔다.
14화 동부회색성채
이종족. 인간과는 다르지만, 인간과 비슷한 존재.
그들은 숲에서 살았고, 들에서 살았으며, 산과 계곡, 강과 바다에서 살았다.
때로는 인간의 영역과 겹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나 때로는 크게 겹치기도 했다. 인간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라면 다른 종족들에게도 살기 좋은 법이었기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숲을 떠나지 않는 엘프나 광산에 처박혀서 사는 드워프들은 아예 인간과의 접촉을 회피하거나, 일부분 교류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호전적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 인간이 무서워 그것을 포기하고 척박한 땅으로 밀려나야만 하는가.
그들은 도저히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싸워서 쟁취하기를 선택했다.
고블린, 오크, 트롤,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한 몇몇 종족.
그들은 하나로 뭉쳐서 스스로를 피의 동맹이라 불렀고, 인간들은 그들을 녹색 피부를 가진 자들, 그린스킨이라 일컬었다.
“복장을 보니 블루라인의 병사들은 아니군요. 아마 접경지를 지키던 수비대일 겁니다. 아무래도 근처에서 그린스킨들과 크게 한판 붙고 가까이에 있던 블루라인으로 후퇴한 모양이네요.”
“상태를 보니 이긴 것 같지는 않군.”
“그러게 말입니다. 접경지의 수비대면 꽤나 강병일 텐데, 요즘 그린스킨들의 기세가 무섭기는 하군요.”
에민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블루라인 근처까지 전장이 확대되고 있으니 그로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접경지의 수비대가 크게 패퇴하여 물러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고, 성문 근처의 소란스러움이 블루라인 전체로 빠르게 번졌다.
도저히 조용히 강의를 들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두꺼운 마법서를 덮은 아이반은 노려보듯이 성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오크 새끼들이 날뛰는군.’
팔라딘과 다크나이트, 지온공국과 지구연방, 호드와 얼라이언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북군과 남군, 위촉오.
그렇게 진영을 나눠서 서로 경쟁을 시키는 시스템 때문에 아이반은 게임이던 시절부터 그린스킨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을 선택한 그에게 그린스킨들은 거의 대부분 적이었고, 귀찮게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현실이 되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용병 일을 하다 보면 그린스킨의 목을 베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그러다 보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종족을 뛰어넘은 화합과 아름다운 우정, 건설적인 미래를 향한 발걸음.
다 좋은 말이지만 눈앞에서 창을 들고 배를 쑤시러 달려드는 놈들을 보면 사랑스러운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씨부럴, 대륙의 평화를 위한 대화의 장 같은 것은 큰 뜻을 품은 누군가가 알아서 하겠지.
아이반은 간디가 아니었다. 창칼 앞에서 겸허한 표정으로 물레나 돌리고 있을 배짱은 없었다.
“한동안 책이나 읽으면서 좀 여유롭게 쉴까 했더니 상황이 받쳐 주지 않는군. 조만간 일거리가 생기겠어.”
“떠나실 생각입니까?”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래야 할 것 같소. 전투가 활발하다는 것은 용병들이 필요한 곳도 많다는 뜻이니. 젠장, 원치도 않은 대목이군.”
일복이 많은 것인지 좀 쉴 만하면 무슨 사건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시기가 다가오다 보니 앞으로는 더하겠지.
띠링!
[퀘스트: 높아지는 긴장감]
[최근 동부 접경지에 그린스킨들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그곳에서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라.]
[보상: 대량의 경험치,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성장형)의 봉인 해제]
갑자기 튀어나온 메시지.
아이반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요즘 따라 퀘스트가 잦군. 이제야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다 이거지. 거기에 성장형 무기의 봉인을 풀어 준다, 보상도 훌륭하군. 피할 명분이 없어.’
분명 성장형 무기인데 어째 반응이 없다더니 봉인이 되어 있었나? 원래는 신규유저 성장용 아이템이었으면서 봉인이라니, 웬 개수작이지?
아이반은 몹시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퀘스트가 그를 점점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훌륭한 보상으로 성장을 도와주면서 슬슬 방향을 틀어서 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망할 세계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 셈인가?’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격파하고 마침내 세계를 구하는 영웅.
게임 속에서는 평범한 일이었으나 현실이 된 지금은 그게 얼마나 끔찍한 길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하거나 도망칠 수가 없다는 것이 슬픈 사실이다.
“…젠장.”
만약 퀘스트를 회피하고 보상을 거부해서 성장이 느려졌을 때, 약한 상태로 앞으로 있을 재앙들에게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퀘스트가 가리키는 길은 분명 지독한 가시밭길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 그런 험난한 사지 속으로 들어가야만 희망이 있었다.
퀘스트와 저기 저 천상의 신들은 그를 끊임없이 시련과 고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고, 그걸 이겨내고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겠지.
아주 엿 같고 더러운 일이었다.
* * *
짧은 휴식을 끝내고 본업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 아이반이 의뢰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서부에서 히드라를 잡고 동부에서 던전을 해결하며 여러 번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한 아이반을 원하는 곳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뛰어난 용병을 구한다는 것은 곧 그만큼 위험한 임무라는 뜻이었지만 아이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언제는 퍽이나 안전했다고.
그래도 아이반 나름대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 스크롤을 청색 마탑에서 몇 개 구입했으니까.
원래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판매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거래를 할 때 마법서의 값을 깎아 주는 대신 다른 편의를 봐주겠다던 요릭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꽤나 수월하게 구할 수가 있었다.
이게 편의를 봐준 건지 그냥 장사를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더럽게 비싸긴 했지만. 망할 놈들.
아이반은 한참이고 스크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이걸 쓰는 것보다 그냥 칼침 한 방 맞아 주는 게 나은 것 같은데.”
위험이 닥쳐도 돈이 아까워서 머뭇거리다가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하하, 그래도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없죠. 비싸긴 해도 성능은 확실하니 그게 아이반 씨의 목숨을 한 번은 구해 줄 겁니다.”
“이거 불발이 나는 경우는 없소?”
“하나하나 다 마력회로 검수를 하기 때문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손상된다거나 강한 마력적 이상으로 발동이 안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할 텐데, 그런 경우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에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안정성이 높은가 보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에 제조상의 실수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아이반이 눈이 돌아간 채로 마법사 대가리를 쪼개기 위해 돌아올 테니까.
“그러면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인연이 있다면. 그대도 보중하시오. 그 깨달음인가 뭔가 하는 것도 좀 얻어 보고.”
에민과 작별 인사를 마친 아이반은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성문을 나섰다.
기초 마법서에 전투용 스크롤, 있으면 꽤 유용한 마법도구까지 몇 개 구입했더니 주머니가 순식간에 홀쭉해졌다. 먹고살려면 또다시 누군가의 대가리를 쪼개야만 했다.
터벅, 터벅!
동쪽으로 며칠쯤 움직였더니 딱딱한 표정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성벽이 보였다.
동부회색성채.
여기가 바로 동부 접경지를 관리하는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멈추시오!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소?”
“블루라인에서 의뢰를 받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소.”
아이반이 내민 의뢰서를 대충 훑어보던 병사는 통과를 외쳤다. 각지에서 용병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는 시점이라 검문이 간소화된 듯했다.
동부회색성채 안쪽으로 들어가서도 몇 번이고 의뢰서를 내밀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피곤한 기색의 작전관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아이반 에시르손. 용병길드와 청색 마탑의 추천을 받았다고?”
“그렇소.”
“용병길드는 그렇다 치고 청색 마탑이라니, 잘도 그 괴팍한 놈들의 추천을 받았군. 웬만한 귀족들 앞에서도 뻣뻣한 것이 마법사란 족속인데. 그들은 남을 함부로 인정하지 않지.”
꽤나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작전관에게 아이반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어쩌다 보니.”
불성실한 대답이었지만 작전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용병길드와 마탑의 추천을 동시에 받은 인재는 극히 드물었다. 이 정도의 실력과 신뢰를 겸비한 고급 용병이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좋아. 자네가 배치될 부대를 알려 주지. 레인저 셋, 기사 하나, 중급 용병 일곱에 숙련된 병사가 스물다섯.”
“꽤 강한 전력이군. 특별한 임무라도 있소?”
아이반의 질문을 받은 작전관은 쓴웃음과 경멸을 동시에 담아서 대답했다.
“똑같아. 오크 대가리를 따는 것. 다만 직접 숲으로 들어가서 유격전을 펼쳐야 하니 힘들고 위험한 임무는 맞지.”
“숲에서 그린스킨을 상대해야 한다니, 쉽지 않겠군.”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임무니까. 그걸 위해서 자네들에게 비싼 돈을 주는 것 아니겠나?”
“옳은 말이군. 그러면 지금 바로 그쪽으로 합류하겠소.”
자신이 배치받은 부대로 향하면서 아이반은 주변을 힐끔 살폈다.
하나같이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더러워진 옷, 힘이 빠진 손, 피곤한 표정.
그 모든 지표가 전황이 좋지 않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려진 것보다 접경지의 전투가 더 힘든 모양이다.
아이반이 말을 이끌고 동부회색성채 외곽 숙영지에 들어가자 누군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누구요? 여기에 함부로 들어왔다가는 목을 칠 수도 있소.”
“아이반. 방금 배치받은 용병이오.”
“용병? 타이밍 한번 환상이군. 방금 출발하려고 했는데.”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싸울 수 있소?”
“돈을 받아먹었으면 싸워야지.”
“화끈해서 좋군. 나는 케빈 말그레이요. 기사고, 적어도 당신이 의뢰를 수행하는 동안은 지휘관으로 있을 거요. 중간에 뒤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기사 케빈은 손가락으로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숙소는 이쪽, 연병장은 저쪽. 빈자리면 아무 곳이나 괜찮으니까 자리 잡아서 짐 정리하고 전투 준비해서 바로 연병장으로 오시오.”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식량은 얼마나 챙겨야 하오?”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린 케빈이 대답했다.
“하루. 어차피 그 이상은 있을 수가 없소.”
“유격부대라고 하기엔 작전 기간이 짧은데?”
“유격부대? 흥, 그건 위쪽의 생각이겠지. 곧 깨닫게 되겠지만 숲속으로 들어가서 며칠씩이나 있을 만큼 상황이 만만치 않소.”
무서울 정도로 표정을 굳힌 케빈이 하나하나 씹어 삼키듯 말했다.
“저 안에 있는 놈들은 괴물이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농락당하다가 심장이 뜯길 거요.”
그 말에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숲을 바라보았다.
사사사삭
방금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숲속이 마치 괴물이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느껴졌다.
15화 용맹의 증명
무엇이 그리 급한지 아이반이 숙소에 짐을 놔두고 연병장에 도착하자마자 기사 케빈은 부대의 이동을 지시했다. 덕분에 아이반은 다른 동료들과 제대로 통성명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되게 서두르는 느낌이군. 이렇게 바쁘게 출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소?”
아이반에 주위에 있던 용병 하나에게 슬쩍 물어보자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녀석들이 숲속에서 장난질을 치고 있소. 우리는 그걸 망치러 가는 거고. 타이밍이 중요하니 서두를 수밖에.”
그의 말에 따르면 숲속에서 그린스킨의 주술사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유격부대는 그 주술을 파훼하고 가능하면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을 임무의 목표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보통은 깔짝깔짝 움직이면서 토템을 부수는 일만 하고 있지. 젠장, 상식적으로 제대로 된 마법사도 없이 주술사를 상대하는 것이 쉽겠소? 하여간 윗대가리들은 생각이 없다니까.”
한동안 사령부를 욕하던 용병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점점 숲이 가까워지자 긴장되는지 마른 입술만 적셨다.
고오오오.
가까이서 확인한 숲은 뭔가 더 기이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숲을 감싸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그린스킨의 주술사들이 사용한 주술의 흔적이라는 것을 아이반은 깨달았다.
‘망할, 이 동네 숲들은 하나같이 이 지랄이야.’
원래 아이반은 숲에서 산책을 하거나 캠핑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미세먼지 가득한 도시에서 벗어나 피톤치드 가득한 숲으로 들어오면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나.
하지만 이 망할 이세계의 숲속은 결코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해지기는 개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장감에 스트레스만 가득했다.
슥슥슥!
부대에 속한 레인저 셋이 발걸음 소리도 없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들은 먼저 움직이며 흔적을 찾고 길을 인도할 것이다.
척, 척, 척!
부상으로 빠진 몇 명을 제외하고도 서른 명이나 되는 인원이 움직이는데 발걸음을 제외하고는 잡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다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도 조심스럽게 들렸다.
앞서나가던 레인저들이 주변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 케빈이 다른 이들에게 토템 수색을 명령했다.
“나무 위나 바위틈, 그런 곳에 놈들이 숨겨 놓은 토템이 있을 거요. 그걸 찾아서 파괴하면 되오.”
주술토템은 일종의 배터리나 안테나 같은 역할이었다. 주술사의 주력을 강화하고 주술을 넓게 퍼트리기 위한 기물.
곳곳에 숨겨진 토템들을 부수는 것만으로 놈들이 사용하는 주술의 위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가 있었다.
아이반은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주술의 특성상 토템들을 완전히 보이지 않게 가려두거나 땅속에 박아두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뱀, 호랑이, 사자, 곰. 그런 동물들의 모습을 본떠 나무를 깎아 만든 토템들.
대단히 완성도가 뛰어나거나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심한 듯 대충 툭툭 깎아서 만들었음에도 그 특징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그 무심함과 숲속의 기묘한 분위기가 합쳐져 토템이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공포스러운 상징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부대원들이 하나둘 토템을 발견해서 파괴하고 있는데, 어느 병사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으윽!”
때마침 근처에 있던 아이반이 그쪽을 바라보니 병사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무 밑에 숨겨져 있던 토템을 집어 드는 순간 기묘한 주력이 뿜어져 나와 병사에게 스며든 것이다. 손등에 순식간에 수포가 자라나 진물이 흘렀다.
순식간에 달려와 병사의 상태를 확인한 케빈이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놈들. 가면 갈수록 지독하군. 우리가 토템을 파괴하는 것을 알고 저주를 걸어둔 토템을 섞어뒀어.”
케빈이 품에서 성수를 꺼내 병사의 손등에 뿌리자 진물을 흘러내던 수포가 가라앉았다. 다행히 임시로 만들어진 저주술이라 효과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흠…….”
쭈그려 앉아서 병사가 바닥에 내팽개친 저주토템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데…….”
이제 겨우 기초 마법을 익히고 있는 아이반이 단번에 주술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기감과 마술신 오딘을 통해 얻은 비밀스러운 지식들로 이 저주토템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즉시 토템 수색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오.”
대뜸 아이반이 그렇게 말하자 케빈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요?”
“이 저주토템은 그저 우리를 귀찮게 하거나 토템 수색을 방해하려는 의도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저주가 발동된 순간 주술사가 이곳의 위치를 깨달았을 거요.”
“놈들의 추격이 시작된다는 소리군. 젠장! 한동안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케빈은 얼른 흩어졌던 부대원들을 모아 숲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꽤 많은 토템을 파괴했으니 소득이 적지는 않았다. 이만하면 돌아가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린스킨들은 기어이 그들의 뒤통수를 잡아채려는 모양이다.
스스슥!
타다닥!
빠르게 숲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던 중에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아이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보다 시야가 좀 흐릿해지지 않았나? 안개가 좀 짙어진 것 같…….’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얼른 주변에 소리쳤다.
“자연적인 안개가 아니오! 주술사들이 근처에 있……!”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강한 바람이 불었다.
휘이잉!
거센 바람에도 안개는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순식간에 짙어져 사방을 감싸기 시작했다. 손끝이나 겨우 보일 정도로 짙어진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오오오!
쉬이이익!
강한 바람이 숲속 나무에 부딪혀 귀곡성 같은 소음을 퍼트렸다.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소리가 주변에 가득해서 아이반의 감각을 뒤흔들어 놓았다.
시각에 이어서 청각까지. 주변의 기척을 읽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숲속에 워낙 기이한 주력이 가득 퍼져 있다 보니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주술진 한가운데로 들어온 상태였다.
“사방을 경계하라! 놈들이 습격한다!”
케빈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부대원은 모두 각자의 무기를 빼들고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
곧바로 습격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공격은 시작되었다. 짙은 안개에 이어 여기저기 부딪히는 바람 소리가 서서히 그들의 집중력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인저!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겠나!”
케빈의 물음에 레인저들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쉽지 않습니다. 주술진이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것을 넘어서 방향감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빠져나간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부대가 뿔뿔이 흩어질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냥 말라죽으라고? 여기는 적진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겐 불리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다른 이들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이 아이반은 검을 이마에 대고 신을 불렀다.
“헤임달, 당신의 권능을 내게 빌려주시오.”
우웅-
아스가르드의 수문장, 비프로스트의 파수꾼, 아홉 우주의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자.
전승에 따르면 헤임달의 눈은 만물을 꿰뚫어 보고 귀는 양털이 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헤임달의 권능이 아이반에게 내려앉으니 방금까지 시야를 가리던 안개를 꿰뚫어 보고, 귀를 가리던 세찬 바람 너머의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으음!”
비틀!
감각이 끝도 없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필멸자는 결코 알지 못할 초월자의 시선을 훔쳐보는 듯했다.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때려넣어지고 진한 두통에 어질어질했다.
그 드넓고 높은 감각은 이내 아이반의 수준에 맞게 조절되었으나 짧은 순간만으로 크게 심력을 소모하고 말았다. 아직 초월적인 감각을 받아들이기엔 아이반의 수준이 무척이나 낮았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 있었으나 아이반은 헤임달을 탓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부족한 탓이지 그의 탓은 아니었으니까.
배신과 협잡, 쌈박질밖에 모르는 다른 신들과 달리 헤임달은 아주 성실하고 친절했다. 아마 이것 역시 그가 더 많은 권능을 쥐여 주려고 했기에 생긴 부작용이겠지.
치지직!
아이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난데없이 검에 스파크가 튀기고 따끔하게 손을 때렸다. 왜 헤임달만 그렇게 감싸 주냐는 누군가의 투정이었다.
‘덩치는 산만 한 양반이 우습지도 않게 이게 무슨 짓이야?’
사춘기 여고생도 아니고 이런 것에서 토라진다고? 적이 눈에 보이면 무조건 대가리를 후려쳐 뚝배기를 깨는 양반이 쓸데없이 감성이 섬세하기는.
하여간 제멋대로에 감정적인 것이 애새끼나 다름없었다. 힘세고 폭력적인 양아치 애새끼라니, 끔찍하기 짝이 없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은 더욱 스파크가 강해진 검을 쥐고 전투자세를 잡았다. 적들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적 접근! 공격에 대비하시오!”
아이반이 갑자기 그렇게 외치자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적들이 멈칫했다. 감각을 가리는 주술진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움직임을 읽은 것인지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기습이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것을 버렸다. 대신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부웅-
캉!
병사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지던 도끼를 아이반이 막아섰다. 도끼질이 꽤나 묵직했다. 그린스킨이 제대로 된 추격자를 보낸 모양이다.
“으억!”
그렇게 한 명은 구했으나 아이반이 미처 막아 내지 못한 곳에서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각도, 청각도 제한된 상황 속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기감이 제대로 열려 있지 않은 병사들에게는 바로 눈앞에서 도끼가 튀어나오는 느낌일 테니 대처를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을 상대하라! 버티면 이긴다!”
푸슉!
자신을 습격한 오크 전사 하나의 목을 베면서 케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는 왜 버티면 이기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헛된 희망이나마 있어야 병사들이 무너지지 않았으니까.
“젠장, 오크 놈들이 머리를 쓰기는!”
오크들에겐 힘을 숭상하고 잡기를 혐오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크전사들이 마치 암살자처럼 안개 속에 몸을 숨겼다가 습격하기를 반복했다.
원래대로라면 오크전사들이 크게 불만스러워했을 텐데 움직임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존재가 근처에 있다는 소리였다. 오크전사들이 불만조차 내뱉을 수 없을 정도의.
아마도 네임드. 어쩌면 아이반이 이름을 알고 있는 녀석일지도 모르지.
온몸이 짜릿짜릿했다. 약간의 긴장감과 전투의 흥분이 그를 고양시켰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라.
퀘스트의 글귀를 떠올린 아이반이 검을 들어 올렸다.
쾅!
16화 숲의 주술
아이반이 검을 휘두르자 오크전사의 몸이 주르륵 뒤쪽으로 밀려나간다. 그렇게 얻은 틈으로 손도끼를 던졌다.
푸슉!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병사를 습격하려던 다른 녀석의 가슴에 도끼가 박혀들고 피가 흩뿌려진다.
병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눈앞에서 갑자기 오크의 피가 튀겨 자신의 몸에 묻고 나서야 방금 본인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쯤 아이반은 또다시 덤벼드는 오크 전사의 목을 베고 다른 쪽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피, 상처, 죽음.
순식간에 여섯 명의 전사가 바닥에 쓰러지자 오크들은 침착함을 잃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 우! 우!”
기묘한 소리를 내뱉으며 오크전사들이 아이반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부담이 한결 줄었으나 이미 몇 명이나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기습에 많은 이가 당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 하지만 아이반이라고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역시 제대로 된 광역기가 있어야만 하나? 공격이든 버프든 뭔가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군.’
아이반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검을 휘둘렀다. 여러 명의 오크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거센 압박을 받으면서도 하나씩 바닥에 눕혔다.
그가 짙은 안개와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케빈이 소리쳤다.
“아이반! 주술진을 구성하는 토템들을 먼저 파괴해야만 하오!”
옳은 소리였다. 하지만 케빈은 본인이 그렇게 외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몇 명이나 되는 오크 전사들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와중에 숨겨진 토템까지 찾아야 한다고? 그게 가능할까?
물론 아이반은 가능했다.
치직, 치지직!
오크전사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아이반의 검에서 번개가 쏘아져 어딘가로 날아갔다. 토템이 까맣게 타버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번개로 셋, 도끼로 하나, 발뒤꿈치로 둘.
주변의 토템을 몇 개쯤 부수자 안개가 확연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확보되자 케빈은 얼른 부대원들의 상태를 먼저 확인했다.
서른 명의 부대원 중에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겨우 열다섯. 절반이나 되는 인원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젠장, 피해가 너무 큰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케빈이 흠칫 놀랐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는 아이반 주위에 그 두 배쯤 되는 수의 오크전사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습격한 오크전사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나름 그린스킨이 가려 뽑은 실력 있는 전사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강자였다.
동수라면 전멸을 각오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아이반이 거의 혼자 해결한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 모두를 혼자 상대하고 있었단 말이오?”
케빈이 경악하며 물었으나 아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를 노려보며 말을 내뱉었다.
“얼른 병력을 수습해서 빠져나가야 하오. 뭔가 더 있소.”
주술이 깨지고 안개가 풀리기 시작하자 남은 오크전사들이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호전적이기 짝이 없는 오크전사들이 그냥 후퇴할 리가 없었다. 그것도 동료들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단순히 죽음이 두려웠다거나 상황이 불리해서 도망간 것이 아니다. 그런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오크들은 강자와 싸우다 죽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족속이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싸우다 숨이 다하면 위대한 오크투신 타르칸의 곁에서 영원한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오크나 노르드인이나 전투에 눈이 돌아간 건 똑같네. 오크투신 타르칸이라, 혹시 오딘이나 토르가 투잡이라도 뛰고 있는 건가.’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반은 긴장감을 내려놓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움직임이 영 껄끄러웠다.
‘뭔가 있어. 아직 네임드도 나오지 않았고.’
오크 전사들은 강하지만 훈련 상태가 썩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면 실시간으로 누군가의 지시를 듣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직 네임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호전적인 놈들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는 거지?
아이반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네임드가 전사가 아니군. 주술사가 네임드였어.”
그러면 곧 무시무시한 주술이 퍼부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시신들은…….”
“수습할 시간이 없겠지. 알고 있소. 하지만 입맛이 쓰군.”
살아남은 부대원들을 재촉해 움직이면서도 케빈의 시선이 계속 뒤쪽을 향했다. 시신을 그냥 숲속에 내버려 둬야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괴로운 모양이다.
용병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케빈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기사이자 지휘관. 지금 상황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사이 방금의 습격에서 홀로 살아남은 레인저가 길을 찾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방금 주술진 안을 헤매면서 방향감각이 완전히 틀어진 데다 숲도 뭔가 이상했다.
“익숙한 숲이 아닙니다.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숲속 지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방향은 잡을 수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숲을 빠져나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형이 너무 변해서 안전한 길인지 장담할 수가 없군요.”
“젠장, 시간이 없는데…….”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낮고 맑은 소리였으나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크지도 않은 소리가 부대원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으니까.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젠장, 늦었군.”
그 외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폭발적으로 주력이 흘러나왔다. 기감이 둔감한 병사들마저 몸을 움츠릴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기이이에에에악!
숲이 울부짖는 것 같은 기묘한 소음이 들리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거세게 흔들려서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지? 지진인가?”
당황스러워하는 병사들에게 아이반이 대답했다.
“지진이 아니라 주술이오. 숲이 움직이고 있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이반의 말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던 용병 하나가 얼어붙었다.
농담이 아니라 주변 숲이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강력한 주력으로 생명력을 얻어 나무들이 뿌리를 들어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툭! 투두둑!
파악!
주술에 의해 눈을 뜬 나무정령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행동은 굼뜨고 느릿했지만 커다란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두려운 것이었다.
“젠장, 이러려고 숲속에 토템을 뿌려서 주력을 먹이고 있었군.”
쾅!
“흡!”
가까이서 눈을 뜬 나무정령 하나가 두꺼운 팔을 내리쳤다. 케빈은 기사답게 방패로 그 공격을 받아냈지만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꽤나 버거웠던 모양이다.
[실드차지!]
쿵!
그냥 막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 케빈이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섰다. 그가 방패로 후려치자 그 덩치 큰 나무정령이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챙!
“윽! 이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겁니까?”
병사 하나가 쓰러진 나무정령에다 검을 휘둘렀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야말로 나무로 이루어진 몸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웬만한 공격은 제대로 박히지도 않으리라.
“제대로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공격은 소용이 없을 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길을 열어 줄 테니 숲을 빠져나가시오.”
“뭐? 그게 어떻게 가능…….”
거기까지 말한 케빈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홀로 오크전사 서른을 도륙한 것을 확인한 참이었다. 말이 안 되지만 어쩌면 그는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나무정령들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으나 움직임이 빠르지는 않으니 누군가 어그로를 끌어 준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터였다. 그 어그로를 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아니, 그러면 당신은 어쩌려고? 설마 스스로를 희생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텐데, 아직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잖소?”
영웅적인 희생, 찬란한 산화.
기사인 케빈은 그런 것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이반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할 수 있으니까 할 뿐이다.
“주술사의 주력이 무한하지는 않을 터. 적당히 이들을 막아 내다가 몸을 빼겠소.”
“젠장! 그렇다면 나도 남겠소!”
그 말에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휘관이 여기 남아서 뭐 하려고? 병사들을 이끌어야지.”
“하지만 여기에 그대만 내버려 둘 수는…….”
“방해요. 혼자가 편하오.”
그 말에 케빈이 이를 악물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이반과 케빈의 실력 차이는 명백했고, 스스로가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꼭 살아 오시오.”
“당연한 말을. 사령부에 성과금이나 넉넉히 준비해 달라고 전해 주시오. 용병에게는 그게 최고의 칭찬이니.”
“반드시 그리하겠소. 만약 상부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재산을 털어서라도.”
쓸데없이 열혈이군. 그냥 빨리 빠져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반은 애써 심드렁한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열겠소.”
고오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은 자세를 낮게 잡아 하체에 힘을 집중하고 단번에 앞으로 튕겨 나갔다. 실로 전광석화, 번개 같은 움직임.
[천둥걸음!]
푸른 번개가 터지고, 어느새 아이반은 나무정령의 눈높이까지 뛰어올라 있었다.
부웅-
나무정령이 아이반을 후려치려 했으나 그런 느릿한 움직임으로는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몸을 틀어 가뿐하게 피한 아이반이 검을 내려쳤다.
[뇌룡참(雷龍斬)!]
치지직, 쾅!
벼락에 맞은 나무가 쪼개지듯 나무정령이 쩍 갈라졌다. 속살이 시커멓게 타 버리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으어어어!
나무정령이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내질렀다. 성대를 통하지 않은 목소리가 정신파의 형태로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것이 다른 나무정령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으고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앞으로 달리시오! 뒤돌아볼 시간에 달려서 숲을 빠져나가라고!”
그렇게 소리를 치고 나서야 움직이는 부대원들을 보면서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태생이 아싸라 그런지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혼자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래야 숨겨 놓았던 것들을 마음껏 쓸 수 있기도 하고.
스으윽!
쥐고 있던 검 대신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
어느 노르드 출신의 전사가 사용했다는 창이었고, 등급은 유니크급, 소유자의 강함에 따라 성능이 상승하는 성장형 아이템.
우웅-
창이 떨리고 온몸에 미약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직 봉인된 상태임에도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평범한 철검보다는 훨씬 나았다.
역시 이래서 템빨이 최고였다. 그만큼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하기는 더럽게 어려웠지만.
게임이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풀강화 신화급 장비 세트만 있었으면 이미 옛날 옛적에 깽판 치고 돌아다녔을 텐데.
고등학생이 아닌 게 문제였나?
휘익! 휘이잉!
아이반의 몸을 감싸고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고 돌멩이가 부서지는 거칠고 파괴적인 폭풍이 나타났다.
망할 아스가르드의 신, 염병할 영웅적인 업적.
아이반은 그렇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것으로 나의 용맹을 증명하겠소!”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고, 그들을 후퇴시키기 위해 홀로 남아 적을 상대한다.
이것보다 더욱 용맹한 일이 어디에 있겠나. 실로 천상의 신들이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였다.
하하하하!
아이반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폭풍 같은 바람소리가 마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어쩌면 성격 나쁜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며 진짜로 웃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오딘, 당신에게 이 전투를 바치겠소!”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아이반은 그런 환청이 들렸다.
아니, 어쩌면 그런 뜻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라고. 바치겠다고 했으면 얌전히 받아 처먹어야지.
신을 모시는 전사가 하기에는 실로 오만불손한 생각이었으나 피와 죽음, 용맹한 전투와 비참한 운명이라면 환장해서 못 견디는 전쟁의 신은 기꺼이 힘을 내려 주었다.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 강렬한 힘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기다린 것처럼 나무정령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푸슈욱!
쾅!
17화 싫은 세계
나무정령들이 바닥을 후려치자 땅이 뒤흔들린다. 땅을 붙잡고 있던 큼지막한 나무들이 모두 나무정령으로 변해 뿌리를 들어 올려서 지반이 한껏 불안해진 상태였다.
어디는 커다란 바위가 튀어나오고, 어디는 갑자기 구멍이 뚫려 아래로 꺼졌다. 수맥이라도 건드렸는지 물이 콸콸 쏟아지는 곳도 있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이반이 날아올랐다.
슈우욱!
쾅!
[천둥걸음!]
푸른 번개가 번쩍이고 아이반의 몸이 쏘아진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터져 나오는 천둥소리, 그의 몸 주변을 돌고 있던 거센 바람. 그 모든 것이 합쳐지니 지금의 아이반은 그야말로 폭풍을 닮아 있었다.
쾅!
아이반이 창을 내지르자 나무정령의 몸이 터져 나간다. 강한 바람이 고목을 꺾듯 나무정령을 꺾어버리고 한낱 장작더미로 만들었다.
쉬이익!
아이반이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닥에 골이 파이고 나뭇가지가 부러진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나무정령들의 몸을 조금씩 베어 가른다.
탁, 타닥!
두껍고 단단한 나무정령들의 피부, 나무껍질이 벗겨진다. 속살을 파고들어 마치 피 같은 수액들이 흘러나왔다.
수십이 넘는 나무정령과 그를 상대하고 있는 한 남자.
주변을 둘러싸고 공격을 가하는 나무정령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숲 전체가 덮쳐드는 것 같았지만 아이반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적이 상처를 입었다.
마치 홀로 자연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위대함.
실로 영웅적인 모습.
성격 나쁜 폭풍의 신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전사에게 조금 더 많은 힘을 내려 주었다. 아이반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바람이 조금 더 거세게 변했다.
아이반은 그것을 그저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기꺼이 신의 이름을 외쳤다. 이 전투를 그에게 바치기로 했으니까.
“오디이인!”
쾅!
아이반이 소리치며 창을 던지자 전방의 적들이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그 커다란 덩치의 나무정령을 셋이나 꿰뚫었음에도 창은 완전히 힘을 잃지 않고 바위 깊숙이 꽂혀 거세게 흔들렸다.
스윽!
탁!
손을 뻗자 바위에 박혀 떨고 있던 창이 공간을 뛰어넘어 아이반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지금 아이반은 오딘의 가호를 받아 그의 힘을 끌어 쓰고 있는 상태, 이 정도 잔재주는 어렵지 않았다.
“후우…….”
아이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창을 굳게 쥐었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정령 수십을 모두 캠프파이어하기 딱 좋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숲속에 흐르는 주력은 여전히 강대했고,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강자의 시선 역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스슥, 스스슥!
주변에 널려 있던 나무정령의 잔해 일부가 한곳에 모여 형태를 갖추었다.
나뭇가지는 뼈가 되었고, 바닥에서 솟아오른 흙이 살이 되어 그것을 뒤덮었다. 마지막으로 나뭇잎이 피부가 되어 달라붙자 어느새 그것은 지팡이를 쥐고 있는 오크 주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흘흘흘, 강한 전사로…….”
쾅!
오크 주술사가 기묘한 웃음을 터트리다말고 머리가 터져 나갔다. 아이반이 얼른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도끼가 그를 꿰뚫고 지나간 것이다.
푸드득!
오크 주술사는 피와 살점 대신 나무 수액과 흙을 뿌리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곧 움찔거리더니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또다시 나무와 흙더미에서 오크 주술사의 모습이 되었다.
슈우욱!
캉!
이번에도 아이반의 도끼가 날아갔으나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흙더미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그 너머로 오크 주술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성질 급한 놈이군. 명예도 모르는 자식.”
낮게 중얼거리는 말은 오크어였다. 아이반이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겠지.
하지만 아이반은 삐딱하게 창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적이 나타났는데 잡담을 듣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니오?”
아이반의 입에서 흘러나온 유창한 오크어. 심지어 그는 북동부식 오크 사투리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오크들의 언어를 이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정말 오크가 아니라면 피의 동맹 내에서도 흔치 않았다. 하물며 인간이 그럴 줄이야.
오크 주술사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오크들의 말을 할 줄 아는군?”
처음 아이반이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졌을 때 제일 난감했던 것이 바로 언어였다. 요상하게 생긴 놈들이 쏼라쏼라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체계에 최적화된 인물이었고,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이세계 기본 회화 같은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반에게는 스킬 포인트가 있었다. 언어학 스킬을 습득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스킬을 익히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언어학은 단순히 대화를 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의 지식을 주입해 주었다.
여러 종족이나 지역별 언어, 고문 해석과 암호학, 기호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쓰임새가 많았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언어학 스킬은 부가직업 중 하나인 언어학자 루트를 타기 위한 기초 스킬이었으니. 단순히 외국어를 쉽게 익히는 것으로 끝난다면 스킬 포인트가 아까웠다.
하지만 적에게 그런 사정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이반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단순해서 익히기 쉽더군. 멍청한 오크 대가리로 배우려면 언어 구조가 어려울 수가 없지.”
아이반이 도발하듯 그렇게 내뱉었지만 오크 주술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노련한 그가 적의 입담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흘흘, 그러한가? 나는 다른 언어를 익히는 것이 어렵던데.”
“그건 그대가 빡대가리라서 그런 거요.”
이 말에는 오크 주술사도 잠깐 당황했다.
“뭐, 뭣?”
주르륵
그렇게 짐짓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아이반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적의 정체를 알아차렸기에 한 치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
그린스킨이 자랑하는 네임드 주술사이자 후일 열두 명의 대주술사 중 하나로 추대되는 인물.
‘네임드라도 이건 너무 네임드인데?’
물론 시기상으로 아직 대주술사가 된 시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놀라웠다. 대주술사도 아니면서, 본신도 아니고 분신으로 이 정도의 압박감이라니.
“얼마 전부터 인간들이 내가 깔아뒀던 토템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그래서 숨겨뒀던 수까지 꺼내들었는데 설마 전사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다니, 예상 밖의 일이야.”
테잔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아이반은 크게 불편함을 느꼈다.
‘무슨 꿍꿍이지?’
금방이라도 튀어나가려는 창을 붙잡았다. 처음과 달리 그의 정체를 알게 되니 쉽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괜히 카운터를 당할 것 같기도 했고.
할 수 없이 아이반은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오래된 나무들을 단번에 나무정령으로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꽤나 속이 쓰리겠어.”
“흘흘흘, 걱정해 주는 겐가? 꽤나 마음이 따뜻한 전사로군.”
“그대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소. 배에 칼을 쑤시면 보통 화끈하다고 느끼더군.”
그 말에 테잔이 오크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놈. 인간들은 예의도 없나? 그렇게 따뜻해질 거면 자기 배나 찔러서 뒈질 것이지.”
“…오크어를 다 알아듣는다니까.”
“알고 있네. 들으라고 한 소리야.”
흘흘 웃으며 아이반을 놀리던 테잔이 이내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대의 이름은?”
그 질문에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아이반, 아이반 에시르손.”
아이반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망했군.’
하필이면 이 전투를 오딘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한 뒤라 이름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건 영웅답지 못했으니까. 신들이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아이반 에시르손.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겠네. 지금은 이렇게 보내 주지만 다음은 쉽지 않을 거야.”
“보내 준다고?”
아이반은 먼저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직도 주력이 남아 있는데 그를 순순히 보내 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분신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닐…….
무언가를 깨달은 아이반이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추적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군.”
아이반이 이곳에 홀로 남아 시선을 끌고 있는 것처럼, 테잔도 아이반을 붙잡아 시간을 벌고 있었다.
쉽게 막을 수가 없는 강력한 전사와 굳이 싸움을 하는 대신 시간을 끌고 다른 오크 전사들로 하여금 도망간 인간들을 계속 추적하는 것.
오크 전사들은 충분히 강한 자들이었다. 아이반이 아니라면 부대원들을 처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나름 숨기고 있던 나무정령들까지 부서진 상황에서 그저 분신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말 몇 마디로 그것을 해냈으니 참으로 간교한 지혜였다.
“싸움을 피하다니 오크답지 않군.”
“나는 전사가 아니니까. 오크가 모두 그러하리라 생각하지 말게. 주술사에겐 주술사의 방식이 있는 법이니.”
흘흘 여유롭게 웃던 테잔이 말했다.
“테잔. 나의 이름을 그대도 기억하게. 그래야만 할 테니…….”
쉬이익!
퍽!
아이반이 던진 창이 그대로 테잔의 몸을 꿰뚫었다.
분명 아직 주력이 충분히 남아 있을 텐데도 그는 자신의 분신을 재생시키지 않았다. 그건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쓸데없이 주력을 소모하지 않고 아끼겠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당했어,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서둘러 달려갔다. 먼저 도망친 부대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쉬이익!
강하게 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지만 아이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탁!
마침내 부대원들을 발견한 아이반이 멈춰 섰다.
숲을 벗어나기 직전, 얼마 남지 않은 거리. 그곳에 바닥을 뒹굴고 있는 시체가 가득했다.
사지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 흙더미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사람들. 방금까지는 살아 있었을 부대원.
뜨거웠던 피가 차갑게 식어가고 그저 고깃덩어리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으윽, 오, 셨소?”
피가 흐르는 복부를 부여잡으며 케빈이 힘겨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방패가 반으로 쪼개지고 검조차 부서져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케빈은 연신 포션을 들이켜더니 조금 상처가 나아진 듯 나무에 등을 기대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 허허. 그대가 오기 직전 오크전사들이 몸을 빼더군. 그래서 살았소.”
거기까지 말한 케빈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덧붙였다.
“…나만.”
분노, 공포, 절망, 좌절.
온갖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서 몰아쳤다. 잔뜩 솟아오른 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주르륵
“나마아아안!!”
그 절망스러운 울부짖음을 가리며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띠링!
[퀘스트: 높아지는 긴장감(완료)]
[당신은 자신의 용맹을 증명…….]
이 타이밍에 퀘스트 완료 표시가 뜬다고?
아이반은 마치 자신이 놀림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하던 것을 얻었으나 개운하기는커녕 속이 답답해서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메시지창의 글귀를 다 읽어 보지도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하하!
흘흘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이세계. 빌어먹을 놈들.
아이반은 이곳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18화 새로운 임무
슥, 슥!
숫돌로 무뎌진 칼날을 다시 세웠다. 기름칠을 해서 닦아내고 손잡이를 다시 고정시킨다.
슬쩍 세워서 날을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비를 꺼내 손질한다.
아이반은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들고 다니는 무기가 많았고, 때문에 전투를 한번 벌이고 나면 손질해야 할 것도 무척이나 많았다.
게임에서야 대충 쓰다가 부서지면 버리거나 내구력 떨어지면 대장간 가서 수리를 맡기면 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 수는 없었다.
돈만 주면 ‘짜잔, 내구력이 회복되었습니다!’하면서 그 자리에서 쉽게 수리가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런 짓을 하면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장비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아내고, 무뎌진 날을 세우고, 기름칠을 해서 닦아내는 등 자잘한 일들은 본인이 해야만 했다. 그런 잡일까지 다 해주는 종자가 있는 고위기사도 아니었고.
“젠장, 해도 해도 끝이 없군.”
도끼와 검, 이참에 같이 손볼 화살과 단검, 가죽 갑옷까지.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그걸 혼자 다 하려니 솔직히 더럽게 귀찮았다.
슥, 슥!
아이반이 날을 세우는 소리만이 숙소에 울려 퍼졌다. 다른 이들은 모두 죽어 버렸기에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걸 기뻐할 수는 없겠지만.
으드득!
그렇게 며칠쯤 더 장비 손질을 마치고서야 마침내 허리를 펼 수가 있었다. 며칠 동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굽히고 있었더니 몸이 잔뜩 뻣뻣해졌다. 그때까지도 숙소는 채워지지 않았다.
‘…먼저 찾아가 봐야 하나?’
배치되자 첫 임무에서 부대가 개박살이 났다. 임무에 참여했던 인원은 모두 죽고 생존자는 겨우 두 명.
임무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원도 있었으나 그들은 원래 부상자로 치료를 받고 있었으니 그냥 부대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같이 복귀한 케빈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라 후방으로 후송되고 이곳에 아이반 홀로 남아 있는 것이 며칠째.
아직 용병 계약이 끝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버려 두고 있다니, 사령부가 그렇게 배려심이 넘치지는 않을 텐데.
이대로 날로 먹으면서 시간이나 보내고 있을까 고민하던 아이반은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이렇게 놀고 있는 것은 아이반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경험치가 간당간당한 것이 레벨업이 머지않았기도 했고.
“던전에서 레벨업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경험치가 이만큼이나 채워진 거지?”
아이반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시점이 되니 퀘스트가 늘고 경험치 퍼주는 것이 후해졌다. 그동안은 씨부럴 별짓을 해도 더럽게 안 오르더니.
그게 다 미끼에 목줄, 사료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반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빌어 처먹을 곳.
“아, 그래.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찾아왔군.”
아이반이 작전관에게 찾아가자 그가 크게 반기며 말했다.
처음 아이반이 도착했을 때는 그냥저냥 대하는 것 같더니 케빈의 증언으로 아이반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갑자기 친절해진 모양새였다.
“싸울 준비가 되었소. 일거리를 주시오.”
“허, 그런 거친 전투를 벌이고 나면 좀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역시 노르드 전사로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
작전관이 그렇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반은 굳이 그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경험상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자네 실력이라면 자잘한 전투에 내보내기보다는 중요한 곳에 투입하는 것이 낫지. 이제 그때가 되었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불안한데.
아이반은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사령부에서는 숲을 포기하기로 했어. 나무정령이 그렇게나 많이 돌아다니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지. 노력을 해봤지만 결과가 참담해.”
아이반이 숲에서 복귀한 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그것에 대해 증언을 했었다.
주술사들이 토템을 숲에 뿌려서 꾸준히 주력을 나무에 먹이고 있었고, 그것으로 나무정령을 깨웠다고.
지난 며칠간 그 증언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확인을 해본 결과 사령부는 직접적으로 숲에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다.
“이쪽이 막혔으니 다른 쪽으로 뚫어 봐야지. 지금 다른 쪽은 전투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어. 자네는 그곳에 투입이 될 거야.”
“미리 말하지만 나는 장기계약이 아니오. 계속 전장에 붙들려 있을 생각이 없소.”
“알고 있네. 우리도 그렇게 오래 끌 생각은 없어. 짧고 굵게 치고 끝내야지.”
그게 가능할까?
아이반은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일시적인 상황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린스킨은 앞으로 더욱 덩치를 불려서 완벽히 인간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될 테니까.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으로 나뉜 진영싸움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이반이 보았던 이 세계의 미래였으니. 몇몇 소소한 변화는 있어도 대국적인 흐름마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한 작전 내용은 그쪽에 가서 듣게. 나는 잘 모르니까.”
“알겠소.”
새로운 명령서를 받아든 아이반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등 뒤로 작전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숲에서 빠져나올 때 자네가 후방에 혼자 남았다지?”
“돌아서 덮쳤던 오크전사들은 못 막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한 손으로 열 손을 모두 막을 수는 없으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케빈 그 녀석이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늦어서 다른 이들이 모두 죽었지.”
“전장에서는 누구나 죽어. 자네는 죽인 것이 아니라 살렸네. 적어도 한 명의 목숨은.”
흐흐흐, 그렇게 웃음을 지은 작전관이 덧붙였다.
“고맙네.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 생각해 보니까 아무도 자네에게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돈 받은 만큼 일을 했을 뿐이오. 감사 인사는 돈으로 받았소.”
“흐, 글쎄? 듣기로는 받은 성과금을 유가족들에게 모두 나눠 주라고 했다던데…….”
“부정 탄 돈이라 재수 없어서 안 받겠다고 했을 뿐이오.”
이래저래 목숨값과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아이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 * *
다그닥, 다그닥!
탈탈탈탈!
마차가 움직인다. 이것도 아주 고급 마차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전에 탔던 그 싸구려 개조 짐마차보다는 훨씬 엉덩이가 편했다.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은 아이반 혼자뿐. 마부 역할을 맡은 병사가 있었으나 승객은 그밖에 없었다.
아이반을 다른 전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령부에서 내어준 마차였다. 오직 그를 태우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마차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군.’
아무리 실력이 괜찮다고는 하지만 용병 하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예상 밖의 호사였다. 기쁘다기보다는 불안하기만 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느낌이었다.
“젠장, 자대배치를 받던 그때가 갑자기 떠오르네.”
눈을 감아 봐. 앞이 보이나? 안 보입니다! 그게 네 남은 군 생활이야!
빠른년생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빠른지 연병장이나 돌아 봐!
어제 너 몇 끼나 먹었어? 세 끼 먹었습니다! 뭐 이 새끼야? 선임에게 욕을 해? 아닙니다! 그럼 여기가 안이지 밖이야?
이게 뭐로 보여? 도토리 아닙니까? 아니, 이건 드래곤볼이다. 가서 사성구를 찾아와.
찾아라, 드래곤볼! 세상에서 제일 신비로운 비밀!
“…씨부럴. 김 상병 엿 같은 새끼.”
예상치 못하게 기억 폭력을 당한 아이반이 고개를 휘휘 내저어 잡념을 쫓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이틀을 달린 끝에 새로운 전장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왔더니 피로한 느낌도 별로 없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숙소로 안내되었는데, 이것 역시 일반적인 용병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훨씬 좋은 곳이라 영 떨떠름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불안한 마음을 기껏 진정시켜 놓았더니 병사 하나가 찾아와 지휘실에서 그를 부른다며 알렸다.
‘어째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다 더 불편하군.’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지휘실에 도착한 아이반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영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드르륵!
“충성! 모셔 왔습니다!”
“어서 오시오, 아이반 에시르손. 그대의 이야기는 이미 보고서로 들어 알고 있소. 여기 이분이 알려 주기도 했고.”
꽤 계급이 있어 보이는 지휘관이 그리 말하며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빌리가 앉아 있었다.
빌리 안게이트, 얼마 전에 봤었던 용병 길드의 지부장 비슷한 위치의 사내.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얼굴이군.”
“흐, 나도 그렇소.”
“어찌 된 일이오? 용병길드 지부장 비슷한 위치라더니. 단단히 무장까지 완료하고.”
그 말에 빌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지부장 비슷한 위치에서 잘렸거든. 그 망할 년놈들 때문에 말이오.”
그 망할 년놈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율리아와 스벤이겠지. 그가 추천해서 청색 마탑의 의뢰에 들어왔다가 배신을 했던 자들.
아무래도 빌리는 그때 사람을 잘못 추천한 죄로 징계를 받아서 다시 현장을 뛰게 된 모양이었다.
“젠장, 내 나이에 다시 현장을 뛰게 될 줄이야. 사무실에서 놀고먹는 게 내 꿈이었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빌리의 몸이 무척이나 탄탄했다. 현장에서 뛰지 않으면서도 단련은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미 그가 한가락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아이반은 놀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을 제외하고 빌리를 포함해 일곱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용병이 둘에 하나는 마법사, 나머지는 모두 기사인가?’
그들의 정체를 조용히 짐작해 보던 아이반이 쓴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더럽게 위험한 일인가 보군. 나는 뭘 해야 하오?”
해야 한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당당한 말.
그런 아이반의 태도가 마음에 든 듯 지휘관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린스킨들이 미쳐 버렸는지 아주 거세게 밀려오고 있소. 어찌어찌 잘 막아 내고는 있지만 병사들의 피해가 아주 심각하오.”
지도를 꺼내 놓고 이런저런 나무 모형을 옮기며 전황을 설명하던 지휘관은 주변 사람들이 슬쩍 지루한 눈빛을 띠기 시작하자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흠흠, 앞으로 2주면 중앙에서 대규모 지원 병력이 올 거요. 문제는 그 정도 시간이면 사실 두 번쯤 점령당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그 시간을 벌어야만 하오.”
전장에서 2주면 몇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정도면 들판에다 없던 성도 짓겠는데 그걸 버티라고?
“그건 우리에게 말할 게 아닌 것 같은데. 병력 지휘는 군의 소관이잖소?”
누군가 그렇게 묻자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니 당신들이 할 것은 수성이 아니라 공격이오.”
그는 적 진형의 제일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인형을 들어 올렸다.
“오크들은 전투를 할 때 가장 강한 전사가 선두에 서서 전투를 알리는 것이 전통이오. 그걸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당신들이 할 것은 그놈을 잡는 것이오. 녀석의 목을 치면 버티는 것이 한결 수월할 테니.”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 선봉을 꺾는다. 말하자면 네임드 사냥.
“실패하면 요새가 넘어가고 이 근처는 다 날아가는 거요. 망할 그린스킨 놈들이 우리 땅에 자리를 잡겠지. 가장 강한 녀석을 상대하는 일이니 무척이나 위험하오. 어때, 그래도 하시겠소?”
그 물음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정도 위험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곳에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위험하다면 제 한 몸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대신 성공하면 우리는 영웅이 되겠지. 부와 명예가 있을 테고.”
다음번 공격에 반드시 녀석의 목을 딴다. 그것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9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해가 뜨기도 전, 아이반은 자연스럽게 깨어났다. 꽤나 훌륭한 방에 고급스러운 침대라 편안하게 잘 자고 일어나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는 길바닥에서도 잘만 자기는 했다. 그걸 위해서 수면 스킬을 익혔으니까. 그래도 역시 실내에서, 그것도 고급스러운 침대에서 깨어나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달그락, 척!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장비를 꺼내 하나씩 착용한다.
면으로 된 셔츠 위에 히드라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바깥에 방수 처리된 망토를 걸친다.
그다음 손에 익은 장검을 허리춤에 걸고, 반대쪽에는 투척용 단검 두 개, 도끼 하나. 등에는 활과 화살을.
그 모든 장비가 덜렁거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킨 후에야 아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면, 가죽, 금속.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것들이 온몸을 감싸고 있으니 다소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그것이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무기와 방어구를 몸에서 떼어 놓으면 왠지 모를 불안감마저 피어올랐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서 안정감을 느끼다니, 그걸 좋은 변화라고 해야 할지 아이반은 알 수가 없었다.
휘이잉.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미 평범함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튼튼한 육체에마저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 병사들이 고생깨나 할 것 같았다.
주룩주룩.
아이반이 성벽에 도착할 때가 되니 하늘에서는 비까지 내렸다. 창검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성벽 위에는 이미 빌리가 도착해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반을 반겼다.
“흐, 오셨소?”
“놈들의 움직임은 좀 어떻소?”
“간밤에는 별일 없었지. 오크놈들이라고 밤눈이 썩 밝은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우위에 있으니 굳이 야간 공성전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오크들은 요새 근처에 진을 치고 사나흘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쳐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병사들의 긴장이 풀릴 때쯤 주기를 바꿔 이틀 연속 공격하기도 했고.
그렇게 한동안 대치를 이어가다가 최근에 급격히 전투가 거칠어졌다고 했다. 인간들이 숲으로 진입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했으니 온전히 이곳에 힘을 실을 수가 있는 것이겠지.
‘테잔은 계속 숲을 지키고 있겠지. 숲에 뿌려 둔 막대한 주력을 조율할 수 있는 주술사는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듣기로 지금 요새를 노리고 있는 오크 무리의 우두머리가 발크룬이라고 했다.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스물세 번째 아들.
무척이나 정력적인 카르타크에게는 아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대단히 뛰어난 인물도 있었지만, 솔직히 아이반은 발크룬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게임 속에서는 묘사되지 않았던 존재. 애초에 별것 없는 놈이거나 메인 스토리가 진행될 시점에는 이미 죽은 녀석이라는 소리겠지.
쏴아아-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네. 이럴 때는 좀 쉬어 갔으면 좋겠는데…….”
옆에서 병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름 비를 막기 위해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지만 방수 처리가 썩 좋지 않았는지 병사의 옷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전투라니, 끔찍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군. 항상 빌어먹을 상황에서만 싸우기 마련이지.”
저 멀리 바라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을 했나 보오. 더럽게 부지런한 녀석들이군. 그런 근면성실함으로 농사나 지어 먹고살 것이지, 빌어먹을 놈들.”
아이반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땡땡땡땡-
“총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병사들은 피곤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빠르게 움직였다. 장궁수가 성벽 위에 자리를 잡고 마법사가 정신집중을 시작했다.
화아악!
후방에서 밝은 빛이 터지며 따뜻한 기운이 성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투사제단의 대규모 축복이 그들 몸에 내려앉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잠시나마 훈훈한 기운이 맴돌고 몸속에서 용기와 활력이 피어올랐다. 피곤하던 병사들의 눈빛이 힘을 되찾고 날카롭게 변했다.
어느새 아이반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다. 발크룬을 죽이기 위해 준비된 강자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일단 대기해 주시오. 병사들이 놈으로 가는 길을 열면, 당신들이 녀석을 처리하면 되오.”
지휘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으나 몇몇은 몸이 근질거리는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들썩거렸다.
“우라아아아!”
녀석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러자 놈들의 무리가 갈라지고 남들보다 덩치가 큰 오크전사 하나가 선두에 나타났다.
“저 녀석이 발크룬이오?”
“그렇소. 아주 포악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
지휘관이 잔뜩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저 녀석에게 당한 게 꽤나 많았으리라.
“우라아아아!”
오크들이 다시 그런 소리를 지르자 발크룬이 창을 하나 받아들고 자세를 잡았다. 마치 이곳을 노리고 있는 듯한 모습.
“설마 저기서 던진다고? 거리가 얼마인데, 거기다가 비도 이렇게 오고. 그럴 리가 없…….”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정말로 투창을 쏘아 보냈기 때문이다.
피슈우우욱!
쾅!
녀석이 던진 창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굉음과 함께 성벽 한가운데 꽂혔다. 충격파에 빗물이 밀려나가는 모습이 충격적이라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퍼포먼스치고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젠장,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군.”
발크룬의 투창을 전투 선언으로 삼아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장궁수들의 화살과 마법사의 마법이 놈들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지만, 녀석들은 그게 두렵지도 않은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피우웅!
피우우웅!
아이반 역시 메고 있던 활을 꺼내들고 화살을 쏘아 보냈다. 대부분 명중하였고, 몇 발은 적들의 방패에 막혔으며, 몇 발은 그것조차 꿰뚫고 들어가 녀석의 몸을 헤집었다.
꽤 괜찮은 활 솜씨였으나 거기까지였다. 아이반은 기초적인 궁술 이외의 스킬이 없어서 더 이상 활약할 여지가 없었다.
매번 화살을 사서 써야만 하는데, 화살값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라 궁술을 깊이 익힐 수가 없었다.
이제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스킬 포인트가 아까워서 배우지 않았고.
쿵!
콰광!
놈들이 끌고 온 공성무기가 성벽을 때린다. 마법사들이 그것을 불태웠으나 워낙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는 터라 썩 결과가 좋지 못했다.
일진일퇴, 밀고 밀리고.
오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고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놈들을 떨어트렸다.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베고, 발로 후려차서 밀어내고.
많은 수가 성벽 위에 발도 채 올려 보지도 못하고 다시 떨어져 내렸으나 끊임없이 밀고 올라왔다.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성벽 위로 녀석들이 하나둘 올라온다.
“위험한데? 아직도 대기하고 있어야 하오?”
“조금만 더.”
빌리의 말을 딱 잘라 끊은 지휘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를 움직였다.
펄펄 기름을 끓여서 아래로 쏟아붓고 거기에 불을 붙여 진입을 막았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나서 성벽 위에 올라온 녀석들을 처리했다.
아슬아슬하지만 꽤 짜임새가 있었다. 괜히 그동안 버틴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녀석이 나타나자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강자! 강한 녀석은 없느냐! 하나같이 나약한 놈들이구나!”
부웅!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오른 녀석이 커다란 도끼가 휘두르자 병사 몇 명이 단숨에 허리가 쪼개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벽조차도 일부 부서져 내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 스피드.
발크룬이 사납게 웃자 병사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걸 굳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 지휘관이 낮게 말했다.
“모두 준비하시오. 저놈을 떨어뜨려 한쪽으로 밀어낼 테니. 다른 녀석들이 방해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 보겠소. 그 안에 처리해 주시오.”
병사들이 한쪽으로 도망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녀석은 그들의 시체를 밟고 조금씩 움직였다.
그 모든 것이 의도된 희생, 계획된 죽음, 예상한 결과.
냉정하게 병사들을 미끼로 사용하면서 착실히 녀석을 한곳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녀석을 따라붙으려던 놈들을 화살과 마법으로 견제하며 교묘히 고립시켰다.
“…희생이 심하군.”
아이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지휘관이 전장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저들의 죽음이 개죽음이 될지 고귀한 희생이 될지는 당신들에게 달렸소. 이제 된 것 같군. 전투를 시작하면 바로 끊어내겠소. 길게는 버틸 수가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를 하시오.”
지휘관의 신호를 받은 일행이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피와 전투에 취한 발크룬이 본대와 거리를 벌려 한쪽 구석까지 다가오자 모두 무기를 굳게 쥐고 단번에 달려들었다.
쉬이익!
쿵!
기사들의 실드차지, 이어서 도발.
묵직한 녀석의 몸이 흔들렸다. 병사들을 노리던 녀석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바위도 단숨에 부서질 충격이었으나 녀석은 잠시 비틀거렸을 뿐 크게 타격을 입은 모습이 아니었다.
“흐하하! 이제야 조금 괜찮은 녀석들이 나타났구나!”
쾅!
녀석의 도끼질에 기사의 몸이 뒤로 밀려난다. 물소가 달려들어도 코웃음을 흘리며 흘려버렸을 기사의 얼굴이 굳었다.
쿵!
쿵!
[천둥걸음!]
[뇌룡참(雷龍斬)!]
단숨에 근처에 다가온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고 둘 다 표정이 변했다. 한쪽은 즐겁게, 한쪽은 심각하게.
‘무겁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검이 엉망이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의 축이 뒤틀리고 여기저기 금이 생겼다. 내구도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그대로 폐품으로 변했다.
아이반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버리고 바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쥐었다. 힘을 숨기고 나발이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듣보잡이라고 무시했는데 네임드는 네임드인 모양이다.
우웅-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 손에 잡힌다. 봉인이 풀린 유니크 아이템, 성장형 무기의 힘이 아이반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힘이 강해진다. 속도가 빨라진다. 공격이 날카로워진다. 마력의 움직임이 경쾌해진다.
분명 동급에 비하면 성능이 좋지 않은 성장형 아이템이었지만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막대한 힘이 그의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신의 권능을 빌려서 강해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저 무기를 바꿔 들었을 뿐인데 그가 가진 육신의 성능 자체가 크게 상승했다.
이게 아이템. 남들은 결코 느낄 수가 없는, 시스템을 통한 능력치의 강제적인 성장.
쉬이익!
캉!
“음?”
다시 부딪치고, 또다시 발크룬의 표정이 변했다. 그저 재미있다는 것에서 조금 나아가 약간의 놀라움마저 담겼다.
“으윽!”
“젠장!”
마치 쓸데없는 것들을 치우듯 도끼를 휘둘렀다. 그것을 정면으로 막아 낸 기사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굴렀고, 빌리는 가까스로 피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사이 녀석도 상처를 입었다. 옆에서 덮친 기사의 검이 녀석의 팔뚝을 베었고, 용병 하나가 등을 찔렀다.
그러나 놈의 팔뚝을 벤 기사는 팔이 날아갔고, 등을 찌른 용병은 걷어차여서 수십 미터나 날아가 정신을 잃었으니 이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윽.
“흠.”
발크룬은 팔과 등에 생긴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볼에 난 상처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걸 만들어 낸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인간 전사, 네놈의 이름은?”
씨부럴 놈. 싸우다가 갑자기 통성명이라니, 선보러 나온 것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가? 하여간 오크 새끼들은 마음에 들지가 않아.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이런 헛짓을 몹시 싫어했으나 천상의 신들은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이반, 아이반 에시르손.”
역시나 당당히 이름을 밝히자마자 몸속에서 짜릿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토르가 한껏 힘을 내려 주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무식하게 쌈박질밖에 모르는 천둥의 신이었다. 전사의 기개는 더럽게 좋아하네. 그런 당당함으로 오딘이 뒤통수 칠 때나 좀 말려 보지.
아이반이 사납게 표정을 찡그리자 그의 몸에서 강력한 힘이 터져 나왔다.
치직!
치지직!
한층 거센 기세로 뿜어지는 번개를 보며 발크룬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는 발크룬! 위대한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이며 너의 목숨을 앗아갈 남자다!”
그러시든가.
아이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 녀석은 오늘 죽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주룩주룩
크르릉!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고 하늘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천둥마저 울려 퍼졌다. 토르가 힘쓰기 딱 좋은 날이다.
“토르, 돼지새끼 한 마리 제물로 바치겠소.”
힐끗 하늘을 보며 낮게 중얼거린 아이반이 창을 들었다. 그리고 번개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솟구쳤다.
번쩍!
콰과광!
20화 살아남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