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살아남으려면
“으하하! 좋구나!”
아이반의 창을 도끼로 막아 낸 발크룬이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 날카롭고 묵직한, 동시에 짜릿한 공격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렇게 밀려나서 자세가 흐트러진 순간 마법사가 외운 주문이 발동되고 마력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나타나 그의 팔다리를 붙잡아 묶었다.
그리고 그사이 빌리가 끼어들어 발크룬의 허벅지를 베었다. 빌리의 검이 스치고 지나가자 피가 튀기고 상처가 쩍 벌어졌다.
“흐, 이러면 이제 제대로 움직이지 못…….”
“하찮은 것아, 네게는 관심이 없다.”
뚝!
뚜둑!
발크룬이 힘을 주기 시작하자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마력 사슬이 터져나갔다. 황소가 잡아당겨도 멀쩡할 텐데 녀석은 너무나 쉽게 끊어내고 있었다.
쾅!
단숨에 구속에서 벗어난 발크룬의 도끼가 빌리를 후려쳤다. 작은 방패를 부수고 갑옷마저 쪼개며 그를 멀리 날려 버렸다.
다행히 빌리의 몸이 잘려 나가지는 않았으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며 피를 뿜었다.
퍽!
“으윽!”
성벽에 부딪혀서 바닥을 구르는데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부상이었다. 그가 만만한 실력은 아닐 텐데 단 한 방에 무력화가 되니 다들 긴장감에 표정이 굳었다.
[실드차지!]
[칼날바람!]
[태산누르기!]
[월광참!]
발크룬은 자신을 가격하는 공격은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에 집중했다. 등이 갈라지고, 다리가 베이고, 가슴이 찢어져도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렇게 발크룬이 방어를 포기한 채 달려들자 다른 이들은 버티지 못했다.
이미 셋이나 전투불능이 되어 나가떨어진 상태, 남은 이들 역시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앞을 든든히 버텨 줘야 할 기사와 용병들이 그렇게 무너지니 하나 있던 마법사 역시 별달리 힘을 쓰지 못했다.
푸슉!
차르르!
그렇게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고, 혼자 남은 아이반은 창을 회수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뭔 속셈이지?’
손맛은 분명히 있었다. 녀석의 어깨를 꿰뚫고 피가 뿜어졌건만 어째 마음이 영 껄끄러웠다.
저렇게 큰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변을 정리한 이유가 뭐지? 저러고도 나를 이길 수가 있다는 뜻인가?
“흐, 이제야 싸울 맛이 나겠구나. 인간 전사.”
발크룬은 온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피를 잔뜩 흘리면서도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몸으로 싸울 수나 있을까? 금방 뒈질 것 같은데.”
그렇게 대꾸하면서 아이반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발크룬을 구하기 위해 적들이 밀려오고 병사와 기사들이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틀림없이 이길 것 같은데, 주변 상황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위험했다.
“어디를 보는가!”
그렇게 소리친 발크룬이 도끼를 휘둘렀다. 아이반은 그걸 걷어내면서 확신했다. 확실히 아까보다 힘이 약해져 있었다. 놈도 많이 지친 것이다.
“흐, 그 눈빛. 마음에 들지 않아.”
그때 발크룬의 눈이 붉게 변했다.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에 여기저기 생겨났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아이반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광폭화? 광전사였군.”
단숨에 잃어버린 체력을 회복하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크게 상승하는 광전사의 대표적인 기술.
짧은 지속시간이 지나면 크게 약화되는 단점이 있지만 애초에 장기전으로 갈 수 없는 지금은 단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슈우욱!
쾅!
다시 한번 둘이 맞부딪쳤다. 욱신거리는 손목. 지쳐 쓰러지려던 녀석이 이전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날뛰고 있었다.
치지직!
번개가 녀석의 몸을 때렸지만, 이전과 달리 조금도 움찔하는 기색이 없었다. 광폭화 상태에서는 저항력이 크게 강해졌다.
쾅!
쩍!
녀석이 도끼를 내려치자 성벽의 일부가 부서졌다. 실로 파괴적인 힘. 정면에서 힘으로 맞상대해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순수하게 전사로서의 역량만 비교하면 아이반이 밀렸다.
아마 레벨로만 따지면 서로 비슷하겠지. 한쪽으로만 우직하게 성장한 발크룬과 이런저런 스킬트리를 동시에 올리고 있는 아이반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아이반의 장점, 외력을 빌린다.
“토르!”
아이반이 크게 소리치자 몸속 깊은 곳에서 찌릿찌릿 힘이 솟아올랐다. 모처럼 볼만한 전사들의 싸움에 흥이 난 것인지 아이반의 몸에 내려앉은 그의 힘이 꽤나 강렬했다.
치이익!
아이반의 창이 녀석의 몸을 스친다. 단단해진 가죽을 뚫고 피를 보았지만 이내 연기와 함께 상처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광폭화 시간 동안은 계속해서 상처가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병신, 조루 소리를 듣던 광전사가 현실이 되니 실로 무시무시했다.
“더! 더! 더! 그거로는 부족하다!”
광폭화라는 말 그대로 이성을 잃어가는 것인지 녀석의 움직임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녀석의 공격이 더욱 거세게 변해서 쉽게 파고들 수가 없었다.
“너의 목을 타르칸께 바치겠다!”
파바바박!
오크투신 타르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휘두르는 도끼에서 붉은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을 쓸어버리듯 훑고 지나가는 녀석의 공격에 병사들이 피해를 입고 쓰러졌다. 이제 더 이상 외부의 개입을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토르, 천둥이 치는 날에도 이렇게 비실비실하오?’
정말로 오크투신 타르칸의 이름으로 투잡이라도 뛰는 건가. 그래서 지금 내가 밀리고 있는 건가.
아이반이 속으로 그렇게 놀리듯 말하자 하늘에서 커다란 번개가 내리꽂혔다. 마치 헛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번쩍!
우르르, 쾅!
번개가 발크룬의 몸을 내리쳤다. 과연 그것은 버틸 수가 없는지 녀석의 몸이 비틀거렸다.
푸슉!
그 틈을 노리고 아이반이 한 방 제대로 먹였다. 창이 녀석의 아랫배를 꿰뚫고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치지직!
하얀 번개가 아이반의 창을 타고 녀석의 내장을 지져 버렸다. 아무리 저항력이 높아져도 내장에 직접 때려 박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
“으으윽!”
내장이 엉망으로 변하는 그 지독한 고통을 씹어 삼킨 발크룬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위대한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 발크룬이다!”
배를 꿰뚫은 창을 한 손으로 쥐고 도끼를 내려찍었다. 미처 창을 회수하지 못한 아이반의 머리를 쪼개 버릴 듯 떨어져 내렸다.
그때 허공이 쩍 갈라지며 무언가 아이반의 손에 나타났다. 전투용 마법 스크롤. 청색 마탑에서 눈물을 머금고 구입했던, 더럽게 비싼 그것.
아이반은 단숨에 스크롤을 두 개나 찢었다. 그러자 그 안에 담긴 마법이 즉시 발동되었다.
화아악!
은은한 빛이 보호막이 되어 아이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비록 그것은 발크룬의 도끼질에 단숨에 박살이 났으나, 잠깐이나마 틈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아이반이 뒤로 몸을 빼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두 번째 마법. 근거리에서 터져 나가는 화염구, 강력한 충격파.
화르륵!
쾅!
발크룬의 몸이 단숨에 불타오른다. 내리던 비가 뜨거운 열기에 증발되었다 식기를 반복해 시야를 가렸다. 마력을 매개로 타오르는 불꽃은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스윽!
아이반이 손을 뻗자 공간을 뛰어넘어 창이 다시 손에 잡혔다. 그 짧은 시간 달아오른 창대가 꽤나 뜨거웠다.
치이익!
달아오른 장대를 붙잡고 아이반이 자세를 잡았다.
목표는 발크룬의 심장. 단숨에 녀석의 목숨을 가져갈 바로 그곳.
[천둥걸음!]
[관천(貫天)!]
슈우욱!
푸슉!
창이 쏘아지고 불타고 있는 녀석의 가슴을 꿰뚫었다. 심장을 찌르는 감각이 손끝에 분명히 느껴진다.
주르륵
창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생명이 쏟아지고 죽음이 흘러든다.
녀석의 몸이 비명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토르, 돼지 한 마리 올려보냈소. 마음껏 뜯어 드시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니 나름의 별미겠지.
아이반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튀어 올랐다.
띠링!
[퀘스트: 우두머리 사냥(완료)]
[보상: 대량의 경험치, 천둥신의 만족감, 13골드 83실버]
“만족했다니 다행이군.”
솔직히 무척이나 피곤했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이반은 창을 지팡이 삼아 버티고 섰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음에도 적들은 아무도 덤비지 못했다. 그만큼 아이반의 기세가 거칠었기 때문이다.
푹!
휙!
까맣게 불타서 쓰러진 발크룬의 시체를 창을 찔러 놈들에게 보내 주자 녀석들은 공포와 분노로 눈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덤벼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더니 발크룬의 시체를 둘러매고 사라졌다.
뿌우! 뿌우우우!
이내 뿔피리 소리가 들리고 오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적들의 군세는 강력했으나 가장 강력한 전사이자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의 목숨이 사라졌으니 순순히 물러가기로 한 모양이다.
“그, 저놈의 시체는 왜 돌려주었습니까?”
분노와 복수심으로 눈이 불타오르는 병사 하나가 그리 물었다.
그는 발크룬을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병사였고, 동시에 적들의 지원을 막아서기 위한 병사였다. 저 녀석 하나 때문에 수많은 동료를 잃었으니 분이 풀리지 않았겠지.
“저 새끼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목을 장대에 매달아 성문에 달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한이 서린 병사의 외침에 아이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오크들이 끝까지 밀고 들어왔을 거다. 그러면 더 많은 병사가 죽었겠지. 요새를 지키는 것도 힘들 테고.
차라리 시신을 수습하게 해서 돌려보낸 것이 최선이었다. 적어도 아이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오크로드가 열 받아서 밀고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씨부럴, 그건 다른 이들이 알아서 하겠지.
아이반이 맡은 임무는 발크룬을 죽이는 것이고, 그를 통해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그 뒤의 일이야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아이반은 부서진 성벽 조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고 있으니 속에서 충만한 기운이 솟아 그의 몸을 진정시켰다.
간당간당하던 경험치가 채워져 레벨이 하나 오른 것이다. 아주 약간이지만 힘이 강해지고 마력이 깊어졌다.
레벨업의 영향으로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빌리가 씨발씨발 욕을 내뱉으며 옆에 나타났다.
“안 죽었소?”
“거의 죽을 뻔하기는 했지.”
그는 힐링포션을 마치 물처럼 들이켰다. 인상이 잔뜩 찌푸려진 것이 내상도 만만치 않게 입은 모양이었다.
빌리는 엉망으로 부러져 버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젠장, 하마터면 팔 병신이 될 뻔했어.”
“여기서 할 만한 소리는 아닌데.”
아이반이 힐끔 뒤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투에서 팔이 잘려 나간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뭐. 그 양반이야 돈 많은 귀족이니 알아서 할 텐데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소? 지금쯤 사제가 옆에서 잘린 팔 갖다 붙이고 있을 텐데. 아니면 씨부럴, 기계 팔이라도 하나 달고 다니든가 하겠지.”
“다른 이들은?”
“처음에 녀석에게 걷어차인 용병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는 어찌어찌 살아남았소. 팔 잘린 양반이야 저기 있고, 마법사는 내상이 심해서 후송되었지. 골반이 으스러진 기사가 하나 있는데, 뭐. 그거야 어쩔 수 없는 피해 아니겠소?”
“오크 새끼 하나 잡으려고 제대로 피똥 쌌군, 망할.”
발크룬은 분명히 네임드 중에서는 약한 편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엑스트라. 그럼에도 이런 피해를 입었으니 질릴 정도였다.
‘더 강해져야 해. 살아남으려면.’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병사, 놈들의 시체. 피와 죽음.
“…갈 길이 멀군.”
전투가 끝났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21화 그런 인생
발크룬이 죽고 놈들이 조용해졌다. 그 후로도 공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힘이 빠진 듯 대충 공격하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섰다.
덕분에 요새는 평화로웠다. 비록 그것이 영원한 평화가 아니라 곧 깨어질 살얼음 같은 것이라고 해도.
폭풍전야. 지금의 고요함에서 그런 싸늘함이 느껴졌다.
아이반은 성벽 위에 서서 놈들이 숨어 있는 숲 너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2주가 지나고 중앙에서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얼핏 수를 확인해 보니 지금 요새에 남은 병사들을 모두 물갈이하고도 남을 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병사들을 그냥 놀게 두지는 않겠지만.
“지원군이 오면 달라질 거라더니 헛소리가 아니라 꽤 수가 많군.”
옆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쩍 내뱉던 빌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야 끝이 났다는 얼굴이었다.
“흐, 이제 길드에나 돌아가 봐야겠어. 하여간 나는 현장이 체질에 안 맞아. 당신도 떠날 생각인가?”
그는 친근한 말투로 아이반에게 말을 걸었다. 지난 2주간의 의뢰, 꽤나 강렬했던 전투를 함께했다는 이유로 조금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전쟁용병도 아니고, 이런 장기 의뢰는 영 내 취향에 안 맞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어디로 떠나려고? 별것 없으면 나와 함께 가지. 우리 쪽에는 아직 괜찮은 의뢰가 많이 있다고.”
“나를 그대의 성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고?”
“흐흐, 그런 의도도 있지. 어차피 누군가의 의뢰를 수행할 거라면 내 추천으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나?”
능글맞은 빌리의 말에 아이반은 그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갈 곳이 있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위험한 곳인가?”
“칼밥을 먹고 살면서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나. 그저 가야 할 때가 되어서 갈 뿐이오.”
아이반이 강해질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 레벨을 올리거나, 장비를 맞추거나, 스킬을 익히거나.
그중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효율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비였다. 더 높은 등급의, 더 좋은 성능의 아이템으로 도배를 하는 것.
다만 현실이 된 세계에서 좋은 아이템을 구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레어급은 말 그대로 희귀했고, 유니크급은 말 그대로 유일했다. 비슷한 아이템은 있어도 같은 아이템은 없었고, 전체적인 개수마저 무척이나 적었다.
게임 속에서는 잡템이라고 버리는 유니크가 이곳에서는 어느 유서 깊은 가문의 가보쯤 되는 물건이니 오죽할까.
그런 아이반이 좋은 아이템을 구할 방법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던전을 털어 유물을 발굴하는 것.
위험하다는 이유로 지금껏 피해 다녔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약간의 위험을 피하려고 더 큰 위험을 마주할 수는 없으니까.
“제법 험한 길인가 보군. 눈빛이 심각한 것을 보니. 몸조심하게. 우리처럼 몸뚱이로 먹고사는 놈들이 사실 제일 몸을 아껴야 하는 법이야.”
“워낙 험한 인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잘 모르겠군. 조언은 감사히 듣겠소.”
아이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우중충한 기운이 싹 사라지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내 인생도 이리 맑았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천둥신과 폭풍신의 이름을 그리도 부르면서 맑은 날은 개뿔.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날씨야말로 그의 인생에 어울렸다. 어쩌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싸우고 살아남기를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지.
뛰어난 전사를 발할라로 부르기 위해 오딘이 인간 세상에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도록 만들었다는 신화의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혹시 지금 그의 인생도 오딘이 그런 저주를 내린 것은 아닐까.
“…오딘, 빌어먹을 자식.”
진실이야 어쨌든 그렇게 욕을 내뱉고 나니 아이반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 * *
저벅저벅.
아이반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갔다. 중간에 말이라도 하나 구할 수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전쟁 때문인지 말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걷기만 하는 것도 꽤나 무료한 일이었다. 한번 이동하기 시작하면 최소 며칠을 말없이 움직여야만 하니까. 이럴 때 펫이나 소환수라도 하나 있었으면 괜찮을 텐데.
물론 단순히 심심하기만 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던전을 공략하기로 했으니 믿을 만한 동료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
혼자서 그 위험한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전투는 물론이고 야영준비, 불침번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하기는 버거웠으니까. 다만 믿을 만한 동료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이 다섯이나 모이면 반드시 그중 하나는 쓰레기가 있다.
아이반은 그 격언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었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 그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당장 얼마 전 버려진 수도원을 공략할 때 어떻게 되었나? 용병길드에서 다년간 평가한 후 믿을 만하다고 해서 청색 마탑의 의뢰에 추천을 해준 용병이 둘이나 배신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중 하나는 욕망에 담백해야만 하는 무투가였으니.
보물을 눈앞에 두고도 변하지 않는 존재란 극히 드물었다. 전투 중에 등을 맡길 만큼 믿을 만하면서 실력도 있는 동료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령술, 소환술, 조련술. 아이반의 관심이 그런 쪽으로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굳이 수많은 던전 중에서 아이반이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유이기도 하고.
“…이래서 동료가 있어야 해.”
아이반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앞을 바라보았다.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거칠고 비릿한 기세를 보면 사람을 써는 데 익숙한 놈들이다.
‘누구지?’
잠깐 그를 암살하려는 그린스킨이 아닐까 고민했던 아이반은 생각이 떠오른 것보다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어설픈 놈들일 리가 없었다.
아마도 산적, 강도, 아무튼 남의 주머니와 자기 주머니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지장애 씨부럴 놈들.
아이반이 발걸음을 멈춰 서자 놈들이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구나. 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이미 늦었다!”
아무리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어도 아이반의 덩치라면 경계할 법도 했다. 그런데 녀석들은 별 두려움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숫자와 경험을 믿는 것이다. 한두 번 털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냥 세금을 못 내서 산으로 도망갔다거나 입에 풀칠할 것이 없어서 강도가 된 놈들은 아니군.’
아이반이 슬쩍 눈을 돌려 수를 확인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이 열둘, 숨기고 있는 것이 다섯. 무장은 검이나 창, 활. 방어구는 별거 없고 무기를 쥔 자세를 보면 제법 휘둘러 본 솜씨지만 그리 뛰어난 수준은 아니다.
“흐,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잔뜩 쫄아서는…….”
퍼걱!
말을 하던 녀석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어느새 집어던진 도끼가 녀석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서였다.
“어, 뭐?”
갑작스런 상황에 녀석들이 당황한 사이 아이반이 검을 뽑아 달려갔다.
[천둥걸음!]
푸른 번개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아이반을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의 사지가 하나씩 잘려 나갔다.
제대로 반응을 하는 놈이 하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오크 전사들을 상대하다 이런 놈들을 만나니 무슨 허수아비를 베는 느낌이었다.
투두둑!
다급하게 쏘아 보낸 화살은 아이반을 스치지도 못했다.
천둥걸음은 무파 썬더울프의 기본기면서 전부라고 불리는 기술이고, 그것을 갈고닦은 아이반의 수준은 웬만한 썬더울프의 수련자들보다 훨씬 높았다.
괜히 율리아 밀러가 천둥걸음 하나만을 익힌 아이반을 썬더울프의 수련자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거야 아이반을 방심시키기 위해 호의적으로 떠든 말이긴 하지만.
파바박!
도망가려는 녀석들의 몸에 단검이 꽂힌다. 제대로 번개를 머금은 단검이 팔다리에 박히자 녀석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쉬엄쉬엄했음에도 겨우 몇 호흡. 산적 열일곱을 쓰러뜨리는 데는 그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반은 투척한 무기를 회수하면서 생존자를 한곳으로 모았다. 잔뜩 겁에 질렸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다루기가 쉬웠다.
“산적들은 너희들이 전부인가?”
“그, 그렇습니… 윽!”
대답하던 녀석의 목에 단검을 쑤셨다가 빼냈다.
피를 콸콸 쏟아내며 털썩 쓰러지는 녀석의 모습. 단번에 죽지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서서히 잠잠해지는 것을 본 다른 산적들의 눈에 깊은 공포가 서렸다.
‘물어서 대답을 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이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거짓말하지 마라.”
열일곱이면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처음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 보인 태도가 너무 여유만만이었다. 실력도 허접한 놈들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 지랄을 했겠지. 아니라도 뭐, 한 놈 목을 따고 다른 놈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으니 상관없고.
아이반이 다음을 가리키자 녀석이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더, 더, 더 있습니다!”
“몇이나?”
“대, 대략 서른 명쯤… 윽!”
아이반의 단검이 다시 누군가의 목을 쑤시고 돌아왔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듣지 않는다.”
그렇게 몇 명쯤 더 바닥에 쓰러지고 나니 제대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총 인원은 오십삼, 개중에는 용병 출신 간부와 기사 출신 대장이 있다고 했다.
기사 출신이 여기서 왜 산적질인가 싶었지만 뭐, 범죄자 새끼겠지. 흔한 이야기였다.
“흐음…….”
아이반은 찬찬히 녀석들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깔끔한 복장, 잘 관리된 무기, 살이 오른 얼굴. 여러모로 평범한 산적들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산적이 생각보다 그렇게 수익성이 좋은 사업은 아닐 텐데. 그것도 그렇게 많은 수를 데리고 있으면서.
슥슥.
단검에 묻은 피를 살아 있는 녀석의 옷에다 닦았다. 녀석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지만 아이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의문에 눈이 가늘게 변했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군.’
기개가 그렇게 좋은 놈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이들이 모두 끝까지 숨기고 있는 비밀이란 것이 대체 뭘까?
아이반은 그리 오지랖을 떠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엮였으니 한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툭!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녀석을 발로 차서 일으켰다. 놈이 덜덜 떨면서 그를 바라보자 아이반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너희 산채로 가자.”
그놈은 바닥을 구르는 시체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홀로 남게 된 녀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아이반은 녀석을 재촉하면서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피와 죽음, 시체가 가득했다. 어딘가의 성격 더러운 신들이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나도 많이 물들었군.’
하긴,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아이반의 자조 섞인 웃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22화 좋은 친구들
“저기냐?”
“그, 그렇습니…….”
으드득!
여기까지 안내를 해준 산적의 목을 꺾어서 근처에 대충 버려둔 아이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가 정말 이놈들의 산채라고?’
여기까지 오면서 주변 산세와 지리를 훑어보았다. 더 좋은 자리가 있어 보이는데 하필이면 이곳이라고? 산적들의 은신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개방적이지 않나?
아이반은 한껏 기척을 죽이고 조금씩 다가갔다. 망을 보고 있는 녀석이 있었지만 형식적일 뿐 전혀 의욕이 없었기에 몸을 숨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읍!”
중간에 재수 없게 마주친 녀석의 목을 따고 안으로 들어간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화덕의 크기, 장작이 타고 남은 재의 양, 그 외 자잘한 주변 흔적들까지.
오십여 명이 생활하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기껏해야 열댓 명이나 머무르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할까.
‘은신처가 하나가 아닌가? 주로 생활하는 곳이 따로 있나?’
그렇게 고민하던 아이반이 문득 표정을 굳혔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명백히 그의 침입을 깨달은 움직임이다.
‘벌써 들켰다고? 이렇게나 빨리?’
아이반은 얼른 마력을 끌어올려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러자 무언가 얇은 실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이반의 마력이 그것에 닿자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사라졌다.
“마법사! 마법으로 감시를 하고 있었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아이반은 그대로 눈에 보이는 녀석의 머리를 때려 부쉈다.
단단한 도끼가 연약한 인간의 머리를 가르고 피와 뇌수를 흩뿌린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이반이 날뛰기 시작했다.
잘려 나가는 팔, 다리, 목. 그렇게 순식간에 일곱 명이 쓰러지자 녀석들이 주춤거리며 한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간부, 혹은 대장. 그런 놈들.
“네 녀석은 뭐 하는 놈이기에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그러게 사람을 보면서 산적질을 했어야지.”
“뭐? 젠장! 일을 나간 녀석들이 잘못 건드렸군. 그렇게 상대를 봐가면서 움직이라고 해도…….”
“산적 놈들 주제에 예절 교육도 했나 보군. 안타깝게도 학습 태도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아이반은 아무렇게나 대꾸하면서 주변을 힐끗힐끗 살폈다.
마법사, 마법사를 찾아야 했다.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살려 보낼 수는 없…….”
휘리릭!
말을 하던 녀석의 입에 도끼를 날려 보냈다. 선빵필승. 언제나 반박자 빨리 움직이면 그만큼 우선권을 얻는다.
입을 나불거리던 녀석의 머리가 터져 나가자 그 옆에 있던 녀석이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녀석을 죽여라!”
그 녀석이 소리치자마자 모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놈이 산적 두목인 모양이었다.
“안타깝군, 시작부터 두목을 처리하고 들어가나 했는데.”
스걱!
창을 들이미는 산적 똘마니의 목을 벤 아이반은 문득 음습한 마력이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을 둔하게 붙잡고 쇠약하게 만드는 저주.
물론 그 저주는 아이반의 몸에 달라붙는 것과 동시에 불타 사라졌다. 얼마 전에 공략했던 던전, 버려진 수도원에서 상대한 저주받은 수도자와 썩어가는 손아귀와 비교하면 지금의 저주는 하찮은 수준이었다.
‘이쪽!’
저주와 이어진 마력통로를 역으로 훑어 방향을 알아낸 아이반이 몸을 던지려는 순간, 산적 간부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캉!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던 아이반은 문득 그들이 자신의 검을 막아 낸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별것 없던 놈들이었는데 갑자기 힘과 속력이 증가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으드득!
앞을 막아선 녀석들의 눈이 시뻘겋게 변하고 몸이 커진다. 근육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체온이 상승했다.
보통 사람의 몇 배로 강해진 근력과 반응 속도로 아이반의 몸을 후려쳤다.
쾅!
놈들의 공격을 받아낸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꽤나 묵직했다. 기술은 형편없었으나 육체적 성능만은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듯했다. 그 정도로 아이반을 위협할 수는 없겠지만.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뻗어 나온 번개가 녀석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 커다란 근육과 덩치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바닥에 쓰러진다. 근력과 속도가 강해진 것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나약한 마력저항력이었다.
화르륵!
그때 아이반을 노리고 화염구가 쏘아졌다. 주변에 있는 다른 녀석들이 다칠 수 있음에도 상관없이 날려 버린 마법.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들고 속삭이듯 외쳤다.
“오딘.”
그 이름을 머금은 창이 화염구를 꿰뚫고 쏘아진다. 상대의 마법을 깨부수고 날아가 마법사의 머리 옆에 박혀들었다.
우웅-
아이반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몇몇 도망가려던 녀석은 있었으나 머리가 사라지고도 그러지는 못했다.
아이반은 여유롭게 창을 회수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자존심 강한 마법사는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움보다 분노를 느끼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넌 뭐냐!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우리 일을 방해하는……!”
푹!
“으악!”
아이반은 창을 마법사의 허벅지에 찔러 놓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 창이 네 머리를 날려 버리지 않은 것은 그저 빗나갔기 때문이 아니다.”
“으으윽!”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법사를 보면서 아이반은 코웃음을 흘렸다.
“인내심이 자존심만은 못하군.”
하여간 고통에 더럽게 약한 놈이었다. 겨우 그걸로 엄살 피우기는.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도 아니면서.
끼익!
마법사가 있던 오두막 문을 열어 보니 코를 찌르는 약초향이 느껴졌다. 아니, 독초였다. 아주 강한 중독성을 지니는 마약의 재료이기도 하고.
‘단순히 산적질만 하는 것치고는 상태가 좋아 보인다고 했더니 약장사가 메인이었나?’
하지만 그랬다면 죽음을 앞두고도 마법사의 존재를 숨기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반은 급격하게 육체가 변했던 간부들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끙끙 앓고 있는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음습하고 끈적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냥 마법사가 아니로군.’
아이반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약, 흑마법사, 악마숭배자.
그렇다면 그 산적 똘마니들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그냥 산적질을 하던 것과 악마숭배를 하는 흑마법사의 주구가 된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다더니 이런 놈들이 날뛰고 있었군.”
아니, 이 빌어먹을 세상은 원래 엉망이었다.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었다.
툭!
아이반은 흑마법사의 옆구리를 발로 후려찬 후 물었다.
“네놈이 섬기는 녀석은 누구냐?”
그 말에 흑마법사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소리쳤다.
“죽음의 인도자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분이 너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흑마법사의 눈동자 너머로 흐릿하게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가 섬기고 있을 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아이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허접한 놈을 섬기는군. 이왕 악마의 노예가 될 거라면 파멸의 마왕 정도는 되어야지, 그 부하의 노예라니.”
“뭐, 뭣이! 죽음의 인도자께서 가만두지…….”
스걱!
데구르르.
아이반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목을 베었다.
마법사란 하나같이 꼰대에 고집쟁이, 정신병자인데 악마를 숭배하는 흑마법사는 거기서 더 나아간 미친놈들이었다.
말 한마디에 간교한 술책과 사악한 저주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놈들이니 깔끔하게 죽이고 넘어가는 것이 마음 편했다. 궁금한 건 좀 참지 뭐.
애초에 흑마법사들의 영혼과 정신은 그들이 숭배하는 악마에게 저당 잡혀 있어서 고문한다고 해서 쉽게 정보를 뽑아낼 수도 없었다.
지독하기가 웬만한 악마숭배자 뺨친다는 성황청의 이단심문관의 화려한 거짓말탐지기술쯤 되면 모를까 아이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반은 흑마법사의 시체에 침을 탁 뱉었다.
“그런 잡스런 악마의 저주라니, 웃기지도 않군.”
그가 평소에 외치는 이름이야말로 마신 그 자체였다. 음모와 협잡, 배신과 폭력이야말로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 아닌가.
자신을 숭배하는 전사의 뒤통수만 노리다 결국 죽여서 영혼을 가져간 후 영원히 싸우게 만든다니, 이거야말로 완성형 네크로맨서에 사악한 악마가 따로 없지.
어쩌면 아이반이 악마숭배자를 싫어하는 것은 지독한 자기혐오의 다른 형태일지도 몰랐다.
치지직!
휘잉!
마치 항의라도 하듯이 따끔한 전기와 불쾌한 바람이 스쳤으나 아이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남은 산적들을 모았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내라. 나에게 말하는 것이 이단심문관에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 말에 산적들이 모두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모시는 신과 종파를 막론하고 성황청 이단심문관에 대한 소문은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손톱 뽑기, 정의로운 물고문, 신실한 인두질.
손톱 뽑고, 발톱 뽑고, 이를 뽑고, 혀도 뽑고. 그러다 뽑을 것이 없으면 넘치는 신성력으로 멀쩡하게 치료해서 다시 뽑는다는 이단심문관.
듣기로는 고문을 한 번 할 때마다 경전 한 구절을 읊는다는데, 가장 짧은 경전조차 한 권을 모두 낭독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모두가 ‘회개’했으니까.
겁에 질린 산적들은 앞다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뱉어댔고, 그것을 잘 기억한 아이반은 사이좋게 그들을 동료 곁으로 보내 주었다.
마지막까지 혹시나 살려 주려나 싶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산적을 베어 넘긴 아이반이 산채를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발크룬을 잡으며 큰돈을 벌기는 했지만 쓴 돈 역시 많았다. 청색 마탑에서 비싼 돈을 주고 샀던 전투용 마법 스크롤을 두 개나 써버렸으니까.
‘역시 그때 화염구만 날릴 걸 그랬나? 아니, 그랬으면 근거리에서 화염구를 날릴 틈을 만들지 못했겠지. 실드도 쓰긴 써야 했어.’
아이반은 괜히 쓰린 속을 붙잡고 주변을 뒤졌다. 비싸게 약을 팔아먹던 놈들이라 그런지 꽤나 부유했다.
이렇게 아낌없이 넘겨주는 것을 보니 참으로 좋은 친구들이었다. 한쪽이 죽어서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갑이 두둑해졌군.”
* * *
본의 아니게 흑마법사와 결탁한 산적 무리 하나를 처리한 아이반은 이전과 달리 길을 벗어나 아예 인적이 없는 숲으로 움직였다.
중간에 마을도 몇 번 들를 기회가 있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곳을 영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반이 처리한 산채는 산적 규모에 비해서 크기가 작았다. 그건 산적 놈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는 뜻. 주변 마을이 통째로 범죄에 가담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정도로 규모가 크다면 혹시 모르지, 영주쯤 되는 권력자가 뒤에서 비호하고 있을지도. 여러모로 이 근처 치안이 엉망이라는 소리였다.
천하의 평안을 위해 노력하는 영웅호걸도 아니고 아이반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위험하고 의심스러우면 피해 가야지.
그렇게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 움직이고 있는데, 아이반은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물적인 본능, 전사의 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아이반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또 뭐야? 오크? 흑마법사? 옛날에 뒈진 놈들의 동료?’
금방이라도 도끼를 꺼내 던질 준비를 하던 아이반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에 담긴 감정이 좀 묘했기 때문이다.
분명 호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의라고 하기엔 미묘했고, 살의라고 하기에는 잔잔했다.
휘이잉-
그때 볼을 스치는 바람, 부드러운 향기.
코로 느낀다기보다는 정신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감각.
“숲의 요정, 엘프가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그 말에 답하는 것처럼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23화 던전 쟁탈
끝이 뾰족한 귀,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티 없이 맑은 피부, 길쭉길쭉 늘씬한 몸매와 미형의 얼굴.
그야말로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이었다. 흔히 보아왔고, 흔히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
누군가는 숲의 요정을 만났다고 좋아하겠지만 아이반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낯선 이는 언제나 위험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엘프는 스스로를 숲속에 가둬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종족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하필 엘프라니,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소문답게 엘프들은 몹시 아름다웠으나, 그 이상으로 이질적이라 마주하면 어딘가 영 꺼림칙했다.
이 땅의 엘프는 모두가 자연의 정령이 육신을 가진 태초의 요정들의 피를 잇고 있었고, 그들의 감정선은 보통의 인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굴곡이 깊지 않아 살아 있는 생명체다운 표정이 없었다. 미형의 외모와 곁들여 마치 잘 깎아 놓은 인형처럼 보였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이곳이 그대들의 영역은 아닐 텐데.”
엘프들은 다른 종족과의 접촉, 특히 인간과 가까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들이 느끼기에 인간은 너무나 빠르게 살았으며, 감정변화가 지나치게 격렬했다. 가까이 했다가는 불이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안 좋은 영향을 받으리라 여겼다.
“…….”
모습을 드러낸 엘프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또르르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서 생명체의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유리구슬 같았다. 그 눈빛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꽤 눈치가 빠르다 자부하는 아이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 귀쟁이 새끼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먼저 도끼를 던져서 선방 날려야 하나?
아이반이 그런 고민을 할 정도로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아스가르드의 전사로군요. 우리가 찾던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녀는 무척이나 외모가 아름답고, 목소리도 예뻤지만 감정이 워낙 옅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섬뜩함이 먼저 느껴졌다.
“웃기는 소리군. 지나가고 있는 사람을 붙잡아 세워 놓고는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다니.”
“무엇이 알고 싶은가요?”
“엘프가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주변을 수색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군. 무슨 일이오?”
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었으나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았다. 엘프들은 감정의 기복이 극히 적어서 이성적인 대응이 앞서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할 수 없다고 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순순히 대답할 가능성이 컸다.
그 예상대로 엘프가 입을 열었다.
“근처에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하여 움직였을 뿐입니다.”
아이반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지칭하는 것은 엘프 특유의 기묘한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정령을 조상으로 하는 그들은 아직 정신체로서의 특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세계수라고 하는 특유의 시스템을 통해 서로의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숲에 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라 복수였고, ‘나’가 아니라 ‘우리’였다.
“흑마법사, 악마의 추종자들이 이런 깊은 숲속까지 돌아다닌다고? 그들이 엘프들에게도 무슨 짓을 하였소?”
“그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며칠 전에 작은 충돌이 있었지. 그들을 피해서 일부러 인적이 드문 숲을 관통하며 움직이고 있었소.”
“그렇군요. 얼마 전부터 악마를 숭배하는 사악한 자들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엘프의 눈동자가 슬쩍 움직였다. 그 순간 아이반은 무언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 들어서 표정이 굳어졌다.
엘프들의 눈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나 외형을 보는 것을 넘어서 그 본질이나 기질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낯선 감각이었다. 그러니 엘프들은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둥의 헛소리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당신은 혹시 우리에게 알려 줄 것이 있습니까? 정보에 대해 보답은 하겠습니다.”
“글쎄, 알려 줄 것이 많지는 않은데.”
그들이 믿음직한 뒷배를 끼고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 신체변이를 사용한다는 것, 적어도 그들 중의 일부는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섬기고 있다는 것.
“그들이 붉은파라스꽃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확인했소. 아마 마약으로 만들어 유통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어쩌면 다른 용도로 썼을지도 모르지.”
“붉은파라스꽃은 강력한 독초이면서 마법촉매이기도 하죠.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겠군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정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 기묘한 기운이 들어 있는 돌멩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고 있으니 설명을 덧붙였다.
“정령석입니다. 보아하니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정령석? 글쎄, 이게 나에게 의미가 있나? 팔면 돈이 될 것처럼 보이기는 하오만…….”
아이반은 정령과 관련된 스킬은 전혀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대뜸 이것이 도움이 된다니 의아하기만 했다. 엘프들이 그저 금전적 가치로 정령석을 내밀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더욱.
“그렇습니까? 이상한 일이로군요. 정령들이 이렇게나 그대에게 호감을 표하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정령석이 도움이 될 수 있겠죠. 그럼 이만.”
그리고는 훌쩍 몸을 날려 숲속으로 떠나 버렸다. 나타난 것처럼 발소리 하나 없이 빠르고 가볍게.
홀로 남은 아이반은 정령석을 쓰다듬으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정령? 나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나?”
물론 대단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껏 아이반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지.
그저 입문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하급 정령 정도 소환할 수 있는 친화력이란 소리.
크게 전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 하나라도 재능이 있는 분야가 있었다니 아이반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스킬 포인트를 찍지 않아도 정령과 계약을 할 수가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
그렇게 정령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아이반은 미소를 날려 보내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흑마법사가 이 근처까지 돌아다니고 있다고? 이 숲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나?’
이 숲속, 엘프의 영역과 맞닿아 있는 장소, 흑마법사들이 탐낼 만한 것.
왠지 녀석들이 원하는 것과 그가 목표로 한 것이 같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숲에 숨어 있는 비밀이 또 있지는 않을 테니까.
피해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직접적으로 부딪쳐야만 하는 모양이다.
‘하긴 망할 놈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별짓 다 하고 다닐 때가 되기는 했지.’
속으로 그렇게 욕을 내뱉은 아이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녀석들이 가로채기 전에 그가 먼저 차지해야만 했다.
* * *
아이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발 늦었군.’
나름 빠르게 온다고 했는데도 늦어 버린 것이다. 머릿속으로 대충 어디쯤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도, 실제로 와 본 적이 없었기에 길을 찾는 데 한참 걸린 것이 패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들 역시 아직 던전에 진입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일단 던전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니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준비를 마치는 것이 정상적인 공략 절차였다.
‘하지만 여유가 길지는 않을 거야. 저들도 엘프가 주변을 순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이곳에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겠지.’
길어야 며칠, 아니면 몇 시간.
아이반은 다소 초조해졌지만 그럴수록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적은 많았고, 그는 혼자였으니까.
그들이 감지하지 못할 거리에서 은밀하게 살피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을 강제로 안쪽에 밀어 넣으면서 정보를 뽑아내고 있어.’
아마도 어디선가 납치해 온 사람들. 그들에게 낙인을 찍고 강제로 정신속박을 걸어서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방식은 아주 추잡스러웠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아마 앞으로 며칠까지도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슬슬 선택해야만 했다. 지금 덮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포기는 아니야. 여기를 포기하면 나중에는 더 힘들어져.’
아이반이 괜히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헤임달, 당신의 힘을 빌려주시오.”
아이반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그의 몸에 헤임달의 권능이 내려앉았다.
우웅-
순식간에 확장되는 청각과 시각. 그 예민한 감각으로 아이반은 적진을 노려보았다. 혹시 그가 파고들 틈은 없는지 찾아보기 위해.
그러던 아이반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익숙한 기척을 발견했다. 엘프 몇 명이 반대쪽에서 적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얼마 전 그와 만난 엘프도 함께 있었다.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아서 이곳으로 온 건가? 아니면 내 뒤를 따라서?’
아이반은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 더욱 기척을 숨겼다.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더욱 복잡해져서 적이 늘어나든지.
‘흑마법사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확실한데, 과연 엘프들이 나를 알아차렸을까?’
아이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엘프들이 끼어들어서 판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사이 던전 내부에 대해 만족할 만큼 파악이 된 것인지 흑마법사 무리는 노예들을 뒤로 빼고 던전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엘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우웅!
푸슉!
일제히 쏘아진 화살들이 던전 밖에 남아 있던 녀석들을 향해 박혀들었다.
엘프의 궁술은 과연 신기에 도달해서 빗나가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 한 발을 쏘아서 두셋을 맞히거나 날아가다 휘어져서 꽂히기도 했다.
그렇게 몇 명이 쓰러지자 놈들이 크게 소리쳤다.
“화살! 엘프다!”
위잉-
흑마력을 사용한 어두운 방어막이 나타나 화살을 막아섰다. 그러자 화살만으로 그것을 뚫는 것이 꽤 부담스럽다고 여긴 것인지 엘프들의 일부가 활을 거두고 직접 달려들기 시작했다.
흑마법사들은 남아 있던 노예들을 움직여 강제로 엘프들의 길을 막아섰다. 그들이 결코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흑마법사들은 알았지만 단지 한 호흡을 벌기 위해 그렇게 던져 버렸다.
초록 풀숲에 붉은 피가 튀었다. 노예로 부려지던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 생명을 토해냈다.
그들이 강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엘프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불쌍한 인간을 구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없으니까.
숲을 위협하는 자, 사악한 흑마법사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던 아이반이 기척을 드러내고 창을 집어던졌다. 말 그대로 번개처럼 쏘아진 창이 검은 방어막을 꿰뚫고 흑마법사 하나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윽!”
새로운 적의 등장에 놀란 흑마법사들이 움찔하고, 엘프들마저 아이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움직임을 멈추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러다 아이반의 창이 흑마법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을 보고 일단 적은 아니라 판단했는지 엘프들이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흑마법사들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하필이면 그분들이 던전으로 들어간 틈을 노리다니!”
강한 자들은 이미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빠진 상황. 그것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한탄하던 흑마법사들이 저주의 말을 토해냈다.
“망할 귀쟁이 놈들! 네놈들의 숲을 몽땅 태워 버리고 말겠다!”
화살에 꿰뚫리고 칼에 베이면서도 흑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살아있던 노예들은 물론, 이미 죽은 사람들까지 바짝 말라붙었다.
“으으어어억!”
순식간에 살이 썩고 피부가 늘어진다. 살아있는 채로 언데드로 변해가는 지독한 고통에 비명과 함께 몸부림을 치던 사람들이 풀썩 바닥이 쓰러졌다가 몸을 일으켰다.
상쾌한 숲의 향기가 사라지고 칙칙하고 퀴퀴한 시체 냄새가 가득했다. 사악한 어둠이 땅을 적시고 음습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스스로의 육신마저 새하얀 백골로 바꾼 흑마법사들이 푸른 안광을 빛내며 깔깔 웃었다.
“너희들에게 죽음이 찾아오리라!”
손을 뻗어 창을 회수한 아이반이 탕탕 가볍게 발을 땅에 구르고는 중얼거렸다.
“지랄하네.”
쾅!
24화 보고 느끼다
한걸음에 간격을 좁혔다. 흑마법사들이 미처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아이반의 창이 두개골을 깨부수고 들어갔다.
중간에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그의 창을 막아서려 했으나, 거칠고 폭력적인 천둥신의 힘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파각!
단숨에 머리가 터지고 뼛조각이 흩날렸다. 그 둔탁한 손맛을 느끼면서 아이반은 속으로 생각했다.
‘스켈레톤 메이지가 되니 피나 살점이 튀지 않아서 좋군.’
차르르륵!
어둠에서 튀어나온 마력사슬이 아이반의 몸을 묶으려 들었다. 그것을 엘프들의 화살이 끊어 내었다.
파바박!
흑마법사들에게 부려지는 노예들은 자신들의 생명으로도 모자라 죽음마저 바쳐서 아이반의 앞을 막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조해서 만들어 낸 언데드 따위로는 아이반을 막기에 한참이나 부족했다.
아이반이 또다시 스켈레톤 메이지 하나를 감자탕에 넣기 좋게 조각을 내는 동안 엘프가 그들의 친구들을 이 땅 위로 불러왔다.
우웅-.
화아악-.
-아하하하하!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이 깔깔 웃으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암흑에 물들어 있던 땅이 단숨에 정화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들이 쏘아 보낸 사악한 마법들이 깨져 나가고 정령들이 뿜어내는 힘이 언데드의 몸을 불태웠다.
-으, 으아아아!
흑마법사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입으로 뱉는 것이 아니라 정신파, 혹은 그 너머의 처절한 비명.
헤임달의 권능을 통해 아주 작은 일부분이나마 초월자의 감각을 가지게 된 아이반은 그들의 영혼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뼈만 남은 육신에 간신히 붙어 있다가 그것마저 사라지자 흑마법사들과 계약한 악마가 손을 뻗어 그들의 영혼을 회수한 것이다.
영혼을 바치고 힘을 얻는다. 이것이 악마 숭배자의 말로였다. 이제 악마의 땅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리라.
그렇게 흑마법사들의 영혼을 가져간 악마가 눈을 돌렸다. 노예로 부려지던 사람들의 영혼마저 탐을 내는 것 같았다.
척!
그것까지는 용납할 수 없었다. 목숨은 지켜 주지 못했어도 영혼은 지켜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반이 창을 땅에 박아 넣고 악마의 앞을 막아섰다.
“이들은 너의 권속이 아니다. 역겨운 녀석아.”
우웅-.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 기운이 그것에 동의했다. 멀고 먼 그곳, 아득한 천상에서 아래를 굽어 살피던 신들이 자신의 전사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치지직!
휘이잉!
아이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번개와 창에 머금은 폭풍이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악마는 그들의 영혼을 포기한 듯 순순히 돌아섰다. 계약대로 흑마법사의 영혼만을 거두고 사라졌다.
겉으로는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반은 희미한 악마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주르륵.
아이반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아서 이를 꽉 깨물었다.
‘…망할.’
본체는 당연히 아니었고 분신마저 아니었다. 그저 정해진 계약에 따라 영혼을 수거할 뿐인 힘의 일부분.
그러나 헤임달이 빌려준 초월적인 감각은 그 너머의 본신을 보고 말았다. 강력한 힘을 품고 있는 사악한 존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은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는 자연재해와도 같은 막강함. 압도적인 강자를 마주하고서 느껴 버린 공포에 아이반의 얼굴이 질려 버렸다.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저런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거야?”
아이반은 침을 가득 모아 바닥에 퉤, 하고 뱉어 냈다.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불쾌한 감정을 그렇게나마 털어 내고서야 침착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방금 그것은……?”
엘프들의 표정에 모처럼 생명체다운 감정이 드러났다.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영혼을 회수하려는 대악마를 막아선다는 건 웬만한 정신 상태로는 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만물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 그들의 눈에는 방금 전의 상황이 똑똑히 보였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사악한 악마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다니.
“아스가르드의 전사, 당신은 정말로 신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군요.”
얼마 전 그와 만났던 여성 엘프가 나서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미한 감탄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러니 보기가 훨씬 낫군.’
엘프들의 외형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극도로 드물어서 마치 로봇이나 인형처럼 보였다. 그것이 그들을 꺼리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였다.
불쾌한 골짜기.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감이 증가한다는 이론.
어쩌면 아이반이 다른 이종족은 만나도 무덤덤하게 넘기면서 엘프만은 유독 이렇게 불편하게 여기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형은 인간과 닮았으나 감정에서는 아주 이질적이었으니까.
“사랑이라기보다는 관심이라는 표현이 맞겠지. 그리고 신들의 관심이란 필멸자에게는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오.”
“그렇습니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소.”
초월자의 사고방식은 필멸자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들이 세상 만물을 대하는 기준은 인간이 감히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게이머나 제작자의 시선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게이머에서 한낱 등장인물로, 플레이어에서 캐릭터가 되어 버린 아이반으로서는 도저히 그들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깊이 생각할수록 자신의 처지가 그저 한탄스럽게 여겨졌다.
“그나저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이놈들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소. 계속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오?”
아이반의 물음에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동굴 속에 있는 일렁이는 차원문,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엘프들은 서로 눈 한 번 맞추지 않고, 이야기 하나 나누지 않고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는 이곳에 남고,”
“우리는 들어갈 것입니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그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럿이 말하고 있음에도 전혀 막히거나 어색한 점이 없었다. 엘프들은 세계수라는 시스템을 통해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기 때문이다.
입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뿐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로 토론을 마치고 의견을 결정한 상태였다.
“나 역시 들어갈 것이오. 저 안에 잠들어 있을 유물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을 마친 아이반이 강렬한 눈빛으로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만일 자신이 노리는 물건에 손을 댄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유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숲에서 위험이 사라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 대답에 아이반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부디 그러기를 빌겠소.”
말은 누가 못 해. 입으로만 하는 약속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그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냥 넘어갈 뿐이다.
귀쟁이 놈들, 만약 내 뒤통수를 친다면 그대로 잘게 토막을 쳐서 얼큰한 요정 찌개로 만들어 주마.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다짐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를 진행했다.
“안에 들어간 놈들이 우리의 존재를 몰랐으면 좋겠지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아마 충분히 알고 있을 거요.”
던전 밖에서 노예들만 집어넣어서 정보를 수집하던 놈들이다. 당연히 모종의 연결이 있을 테고, 밖에 있던 흑마법사와 노예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 이런 사정을 이미 안에서 알아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그렇다면 놈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안에서 아이반과 엘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하는 것, 아니면 던전을 공략하는 속도를 더욱 높여서 빠르게 유물을 챙기고 빠져나가는 것.
‘진입하기 전에 긴장 좀 하고 들어가야겠군.’
아이반이 던져 놓았던 도끼를 챙기는 사이, 준비가 끝난 것인지 엘프 넷이 던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는 혹시 모를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려는 모습이다.
“야, 너, 거기, 그쪽. 그렇게만 부르기는 좀 그렇군. 잠깐이나마 손발을 맞춰야 할 텐데 그렇다면 서로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소. 나는 아이반이오. 아이반 에시르손.”
에시르손.
그 이름을 듣고 엘프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노르드의 전설을 그들 역시 알고 있었고, 에시르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당신이 신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었군요. 저는 엘레나 이븐우드입니다.”
이븐우드?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도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였으나 아이반의 머릿속에는 이븐우드라는 이름밖에 남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성씨였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수의 무녀가 이븐우드일 텐데, 무슨 관계지?’
엘프는 워낙 폐쇄적인 데다 장수하는 종족이라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혈연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같은 성씨를 사용한다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꽤나 귀한 신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엘프 사회에서 신분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인간들의 기준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소리지.
‘내가 설정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알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한국의 많은 게이머가 그렇듯, 아이반 역시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 파밍 하는 데에만 집중했지 제대로 배경 설정을 파고들거나 하진 않았다.
퀘스트를 수행하기보다는 수십 번씩 같은 던전을 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어쩌다 퀘스트를 진행해도 지루한 설명이야 빠르게 스킵하는 것이 국룰이 아닌가.
이렇듯 게이머들 대부분이 어떤 몬스터를 몇 마리나 잡아야 되는지, 퀘스트 아이템을 몇 개나 모아야 되는지, 그래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흥미를 보일 뿐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반 역시 그런 흔한 유저였다. 당연히 짬밥이 있으니 알 만한 것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으나 이런 디테일한 정보는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설정을 읊어 대는 사람들에게 ‘네다씹’이라고 댓글을 달고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이반은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엘레나 이븐우드. 중요한 인물인가? 그렇게까지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조심해야겠군.’
그는 한층 더 경계심을 높이면서 앞으로 나섰다.
“알겠소. 그러면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바로 뒤따라 진입하시오. 혹시 앞을 막아서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정리를 해 놓지.”
오딘, 토르, 그 외에 빌어먹을 아스가르드의 신들.
아이반이 나지막하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몸속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힘이 차올랐다. 곧 있을 전투가 즐거운 모양인지 힘을 빌려주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피와 죽음. 치열한 전투와 영광스러운 승리. 혹은 비참한 패배와 절망스러운 운명.
아이반의 앞에 놓인 길이 무엇이든 그들은 끝까지 흥미롭게 지켜볼 것이다. 이 빌어먹을 인성 파탄자 쓰레기 놈들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 전사가 고난에 빠질수록 더욱더 큰 오르가슴을 느끼는 변태 새끼들이니까.
꽈악.
무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아이반이 던전으로 펄쩍 뛰어 들어갔다.
화아악!
무언가 일렁이는 느낌이 아이반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곡된 공간을 넘어서 던전으로 진입한 것이다.
쿵!
뛰어든 기세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 아이반이 창을 들고 주위를 경계했으나 예상하던 습격은 없었다. 아무래도 먼저 진입한 흑마법사들은 기다렸다가 공격을 하는 대신 빠르게 유물을 차지하는 쪽을 선택한 듯했다.
동굴 속으로 들어왔지만 보이는 것은 나무가 울창한 숲속이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경험했다시피 던전 안의 세계는 평범한 곳이 아니니까.
화아악!
뒤를 이어 엘프들이 던전으로 들어왔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부드럽게 땅에 내려앉았다. 확실히 다들 외모가 받쳐 주니 그 모습마저도 예술적으로 보였다. 망할 외모지상주의 같으니라고.
“조용하군요.”
활을 꺼내 들고 사방을 경계하던 엘레나 이븐우드가 그렇게 말을 뱉었다. 엘프의 날카로운 감각과 정령들의 시선에도 적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머리 위에 지옥불이 떨어지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으니 다행이군.”
그렇게 대꾸한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온몸에 구멍이 뚫려서 죽어 버린 사람의 시체가 몇이나 바닥을 굴러다녔다. 흑마법사 녀석들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억지로 밀어 넣은 노예들이었다.
검붉은 핏자국을 따라서 눈을 움직이던 아이반의 시선이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에게로 꽂혔다. 나무의 뾰족한 가지 끝에서 덜 마른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뻔한 패턴이지.
“공격에 대비하시오!”
아이반의 외침과 함께 주변 나무들이 빳빳하게 가지를 세우고 밀고 들어왔다.
쉬이익!
25화 죽을 수도 없는 곳
아이반이 창을 굳게 쥐고 휘둘렀다. 그를 향해 덮쳐들던 나뭇가지들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팍!
한 발자국도 움직일 필요 없이 그저 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격을 거둬 낸 후 엘프들을 힐끔 살폈다. 그쪽으로도 나뭇가지가 창처럼 찔러 들어왔지만 투명한 방어막에 막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하긴, 엘프들이 겨우 이런 걸로 상처를 입지는 않겠지.’
휘이잉!
바람의 정령이 사납게 몸을 털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두꺼운 나무들을 썰고 지나가 장작더미로 만들었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도 번개가 뻗어 나가 주변 나무들을 때렸다. 그렇게 몇 그루쯤 반으로 쪼개 놓으니 사방이 다시 조용하게 변했다.
제법 질기고 튼튼했지만 그래 봤자 나무였다. 사람을 잡아먹으려 드는 미친놈들이었으나 일행이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앞서 지나간 놈들이 한 번 정리를 하고 넘어가서 그런지 별거 없군.”
아이반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널려 있는 장작더미를 뒤적거렸다. 향이 좋은 것이 이걸로 훈제를 하면 요리가 꽤 맛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죽여서 자신들의 양분으로 쓰려던 놈들이라 막상 그렇게 요리를 하면 식욕이 떨어질 테지만.
“…여기 있는 나무들은 정상이 아니군요.”
엘프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거의 없는 그들답지 않게 불쾌한 모습. 숲의 요정들에게 이곳은 그만큼 괴로운 곳이었다.
“지나치게 생명력이 충만하다 못해서 비틀린 곳이오. 평범한 풀마저 이곳에서 자랐다면 괴물이 되기 충분하지.”
“아이반 에시르손, 그대는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정보를 요청합니다.”
“아예 모르지는 않지. 애초에 내 목적이 이곳에 잠들어 있을 유물이니까.”
창을 한 바퀴 빙글 돌려서 어깨에 걸친 아이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아마도 백 년쯤 전에 미친 마법사 하나가 마탑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 하나를 훔쳐서 달아났소. 꺼져 가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고, 나아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마탑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던 마법사가 마지막에 자리를 잡고 은거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비틀린 생명의 둥지. 미쳐 버린 마법사가 만들어 낸 키메라와 폭주한 유물이 만들어 놓은 지독한 던전.
“도대체 그 보물이 무엇이기에 악마 숭배자들이 노리고 있는 것입니까?”
“생명의 구슬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오. 막대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서 그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체력이 상승하고 불치병을 치료하거나 상처를 회복시킨다더군.”
사실 게임 속에서는 그리 인기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캐릭터가 불치병에 걸릴 일도 없고, 체력이 떨어져도 체력 포션을 마시면 금방 회복되니까.
설정에 나와 있는 효과는 의미가 없었고 그저 힐러 전용 장비를 만들 때 간간이 들어가는 재료 아이템에 불과했다.
그러나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제대로 된 회복 스킬이 없는 아이반에게는 꿀 같은 녀석이었다. 그걸 차지할 수만 있다면 상처를 입어도 조금은 안심할 수가 있겠지.
“생명과 죽음은 양면성이 있으니 그것을 타락시켜서 제물로 삼는다면 아주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겠지. 아마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사용하려 할 거요.”
거기까지 말한 아이반이 엘레나 이븐우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생명의 구슬에 대해 관심이 생겼냐는 의미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레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손에 넣도록 만들면 안 되겠군요. 추적의 속도를 높여야겠습니다.”
아이반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전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배신을 생각하지는 않는 걸까, 아니면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이미 뒤통수를 칠 계획을 세워 놓은 걸까.
“…알겠소.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묘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아이반은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 안이었지만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앞서 진입한 흑마법사 일행이 이미 쓸고 지나간 터라 상대할 몬스터도 변변찮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튀어나와 일행의 목을 졸랐을 넝쿨 식물은 이미 가닥가닥 끊어져서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산성 수액을 뱉어 먹이를 녹여 먹을 식인 풀은 재가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살아 움직였을 나무와 지독한 환영을 보여 주었을 독초 무리가 흔적만 남기고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일행은 그저 그런 흔적을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충분했다.
이곳은 더 이상 게임 속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죽은 몬스터들이 리젠 된다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쉬이익!
파르륵!
가끔 살아남은 몬스터가 덮치기는 했지만 녀석이 달려드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쏘아진 화살이 녀석을 꿰뚫고 지나갔다.
화살이 무슨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을 때는 아이반도 꽤나 마른침을 삼켰다. 엘프들은 그저 느껴지는 기세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배신해서 자신과 싸우게 되었을 때 과연 이길 수가 있을까? 승률을 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는 입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사악한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집니다.”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의 다 따라잡았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내뱉는 엘프들을 무시하고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을 눈에 집중해 시력을 끌어올리자 저 멀리서 무언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멀리 못 갔군. 그만큼 이 던전이 까다로웠다는 소리인가?”
타다닥!
아이반과 엘프들은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길 근처에 쓰러져 있는 괴물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모습이 하나같이 제멋대로였다.
곰의 덩치에 악어의 이빨이 있는 녀석, 늑대의 머리에 원숭이의 몸을 하고 있는 녀석, 머리가 둘인 놈, 팔이 여섯 개인 놈.
“이건 키메라로군요.”
“흑마법사 놈들이 부리던 것이 아니오. 원래 이곳에 있던 녀석들이지.”
일찍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연구를 하던 미친 마법사의 실험체. 그 흔적.
아무렇게나 신체 부위가 결합되어 있는 키메라의 모습은 무척이나 불쾌했다. 말 그대로 생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린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녀석들의 힘이 만만치 않은 것인지 흑마법사들은 아직 보스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그 앞에 붙잡혀 있었다.
“이런! 벌써 녀석들이!”
한창 키메라들과 전투를 하던 흑마법사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름 빠르게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이 망할 키메라들 때문에 결국 엘프들에게 뒤를 따라잡힌 것이다.
그들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엘프들을 바라보다가 아이반에게 슬쩍 눈빛을 주더니 물었다.
“인간? 인간이 어째서 엘프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거지?”
극히 폐쇄적인 엘프들의 종족 성향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긴 했다. 물론 흑마법사들이 생각하는 대로 아이반과 엘프가 완전히 같은 편인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반은 대답 대신 창을 집어 던졌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뒈진 다음에 자기 영혼을 끌고 갈 악마에게나 물어보라지.
치지직!
쾅!
번개를 잔뜩 머금은 창이 순식간에 녀석의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흑마법사 하나의 심장을 뚫고 박혀 들려는 찰나, 어느새 튀어나온 검붉은 기사가 검을 휘둘러 창을 막아 냈다.
챙!
생기 없이 말라붙은 얼굴, 푸른 안광.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마력이었고, 피 대신 흐르고 있는 것은 사악한 마법의 시약이었다.
데스 나이트. 한때는 밝게 빛나고 있었을 긍지를 모두 잃어버린 죽음의 기사.
“…확실히 바깥에 있던 놈들과는 다르군.”
허접한 스켈레톤 뼈다귀가 아니라 하나같이 제대로 된 언데드 사역마를 다루고 있었다.
흑마법사는 셋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들이 다루는 사역마를 생각하면 결코 수가 부족하진 않았다. 지금도 그들은 수십이나 되는 사역마를 부리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그 배 이상을 더 꺼내 놓을 터였다.
스윽-.
아이반이 손을 뻗자 바닥을 구르던 창이 날아와 잡힌다. 사악한 손길이 바닥에서 그를 붙잡으려는 것을 비웃으며 그는 발을 강하게 굴렀다.
쿵!
마력을 머금은 발길질이 땅을 후려치자 스멀스멀 기어 오던 저주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아이반을 노리고 쏟아지던 마법은 엘프들이 정령의 힘으로 막아 내었다.
휘이익!
쾅!
아이반은 한 걸음 앞으로 달려가서 창을 찔러 넣었다. 죽음의 기사가 둘이나 나타나 그것을 막아서자 손목이 시큰했다. 녀석들이 자신의 팔이 꺾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힘껏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죽음의 기사들이 잠깐이나마 멈칫한 틈을 타서 마무리를 하려고 했으나 저급한 좀비들이 몸을 날려 시간을 벌었다.
좀비가 완전히 뭉개지기 전, 아이반은 그 얼굴을 보았다. 흑마법사가 부리던 노예 중 하나였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던전 입구에 버려두고 쓸 만한 것은 좀비로 만들어 챙긴 모양이다.
아이반의 시선이 다시 흑마법사들로 향했다.
“더러운 네크로필리아 변태 새끼들.”
그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가 끓어오르자 몸을 감싸고 있던 폭풍마저 강렬하게 뻗어 나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가볍고 빠르게, 동시에 무겁고 강렬하게.
[천둥걸음!]
우르르, 쾅!
정말로 천둥이 울리는 것과 같은 소음과 함께 아이반이 날아올랐다. 몸에 휘감은 폭풍과 발에 머금은 우레가 그의 앞길을 열었다.
죽음의 기사 하나가 찌그러진 깡통이 되어 튕겨져 나갔다. 금속으로 된 갑옷이 찢어지고 상반신의 절반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반신이 날아간 녀석조차 흑마법사들의 마력이 훑고 지나가자 꿈틀거리면서 다시 일어났다. 이래서 제대로 된 흑마법사가 부리는 언데드가 무서운 것이다.
끊임없는 소모전.
아이반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구도였다.
또로로롱!
그때 어딘가에서 영롱한 소리와 함께 주변에 상쾌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계속된 전투로 약간이나마 무거워졌던 아이반의 몸이 가벼워지고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더 이상 부서진 녀석들이 회복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모래로 변했다. 사악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한낱 시체로 되돌아갔다.
-아아, 아!
엘프들이 소환한 정령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에 담긴 맑은 기운이 사악한 힘을 억눌렀다.
파각!
재수 없게 주변을 얼쩡거리던 키메라의 머리를 터트려 버린 아이반이 다가가자 흑마법사들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사역마들이 파괴되는 속도는 빨랐다. 앞을 막고 있던 키메라는 모두 처리했지만 그사이 아이반과 엘프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아이반이 날뛰는 동안 은밀하게 움직인 엘프들이 벌써 데스 나이트를 셋이나 파괴했고, 수많은 사역마들이 정화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의 목숨마저 노리고 있었다.
푸슉!
방어막을 깨고 들어온 엘프의 화살이 팔에 박혀 들자 흑마법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무언가 좋은 수가 필요했다.
그들은 남은 마력을 모두 한곳으로 모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 자신들이 모시는 악마의 힘을 빌려야 하지 않겠나.
악마는 결코 자비롭지 않으나 계약만큼은 철저히 이행했다. 그들이 육신과 영혼을 바친 만큼 힘을 내려 줄 것이다.
“위대한 죽음이시여! 당신의 종이 이렇게 비나이다!”
우웅-.
흑마법사들이 탈진하기 직전까지 마력을 불어넣자 공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질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과 연결이 생기고 일렁이는 통로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데몬 게이트.
사악한 악마들의 땅과 이어지는 문이었다.
화아악-.
즐겁게 노래를 부르던 정령들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데몬 게이트에서 뿜어지는 사악한 기운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 휘하에 있는 어느 마족이 하찮은 권속의 요청을 받고 이 땅 위에 나타나려 하…….
푸슉!
그때 땅에서 뾰족한 나무가 갑자기 자라나 흑마법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마력을 공급하던 자들이 모두 죽어 버리자 데몬 게이트는 닫혔고, 이 땅에 강림하려던 악마는 또다시 차원 방벽 너머로 추방되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 아이반은 이전보다 더욱 긴장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새롭게 나타난 것은 몹시 기묘한 모습을 한 존재였다. 피부는 살가죽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나무껍질과 같았고, 그 피부를 뚫고 얇은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돋아나 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식물의 줄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들고 있는 나무 지팡이는 사실 들고 있는 것인지 손에 붙어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넝쿨로 하나가 되어 이어져 있었다.
나무가 된 사람,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한 나무.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를 보면서 엘레나 이븐우드가 드물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인간도, 나무도 아니면서 서로 억지로 이어 붙인 불안정한 생명체군요. 이것도 그 미친 마법사가 만들어 낸 키메라입니까?”
그 말에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지 않소.”
“그럼 원래부터 저런 끔찍한 생명이라는…….”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이 바로 미친 마법사라는 뜻이오.”
마법사들은 원래 미친놈들이니 두 번 미쳤으면 정상으로 돌아올 법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수학 공식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지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망할, 조졌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
아이반이 심각한 표정으로 창을 들어 올렸다.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 던전의 핵을 겸하는 보스는 던전을 만들어 낸 마력에 묶여서 일정 영역 밖으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설마 던전 보스가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줄이야.
“죽은 녀석을 던전의 마력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구슬 때문에 애초에 죽지 않았던 거군. 그래서 속박되어 있지 않았던 거야. 젠장, 이런 변수도 고려했어야 했는데…….”
녀석의 가슴에 박혀 있는 붉은 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바로 생명의 구슬이었다. 지금 이 빌어먹을 던전을 만들어 낸 원흉이자 아이반이 노리고 있는 아이템.
아이반이 물욕을 불태우고 있으니 이미 반쯤 동물을 벗어나 식물로 향해 가고 있는 녀석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에엘프으, 조오으은 시일허엄체에다아아!
녀석의 외침과 함께 죽어 나자빠져 있던 놈들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그리고 공허한 눈으로 다시 일어났다.
강력한 생명력이 이미 숨이 끊어진 육신조차 치료해서 되살린 것이다. 그렇게 정신과 영혼은 이미 죽어 사라지고 썩지 않은 육신만이 남아 미쳐 버린 마법사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방법은 전혀 달랐으나 이 또한 언데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생명을 모독하고, 죽음을 능욕하는 지독한 행위.
누가 죽음은 평안한 잠이라고 했던가. 마음 놓고 편히 죽을 수조차 없다니, 이곳은 참으로 빌어먹을 세계였다.
‘오딘, 당신도 나를 저렇게 부리고 싶은가?’
아이반이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26화 불나방
우두둑.
그런 소리가 들리고 숲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풀이 자라고 나무가 커졌다. 굵어진 뿌리가 땅을 뒤흔들고 평범한 식물들이 괴물이 되어 눈을 떴다.
이전에 경험한 나무정령과 비슷했다. 물론 그것은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장기간 주력을 먹여서 나무정령을 깨운 것이고, 이건 그저 막대한 생명력에 물들어 몬스터로 변이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차르륵.
땅에서 나무뿌리가 뻗어 와 아이반을 노렸다. 바위조차 으스러뜨릴 힘을 품고 있었지만, 아이반이 도끼로 내리치자 쩍 하고 갈라졌다.
그사이를 노리고 미친 마법사가 부리는 영혼을 잃은 생명들이 덮쳐들었다. 자신을 막는 나무를 부수면서 오로지 아이반을 죽이는 것만을 목표로.
“키에에엑!”
괴성을 지르며 날아오른 녀석의 몸이 공중에 그대로 멈췄다. 엘레나 이븐우드의 정령들이 붙잡아 들어 올린 것이다.
푸슉!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녀석의 심장에 아이반의 창이 파고들었다. 창을 뽑아내자 왈칵 피를 품으며 녀석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생각보다 간단하…….”
말을 하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심장을 터트렸던 녀석이 다시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녀석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 역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막대한 생명력이 터져 버린 심장마저 재생시켜 새로운 목숨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야말로 언데드. 탄생뿐만이 아니라 그 행태마저도 똑같았다. 이것을 보고 흑마법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고, 사악한 죽음의 마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쾅!
정령의 힘으로 놈을 완전히 짓눌러 버리면서 엘레나 이븐우드가 소리쳤다.
“생명의 힘을 가지고 생명을 모욕하는 데 사용하다니……!”
본질을 볼 수 있는 엘프들에게 이 녀석들은 무척이나 역겨운 존재였다. 안이 텅 비어서 껍질만 움직이는 고기 인형. 차라리 사령술에 의해 부려지는 언데드는 원래 그렇다고 여기며 넘어가겠으나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던한 엘프들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한껏 감정을 토해 내었다. 분노한 엘프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콰과광!
엘프들이 쏘아 보낸 화살들이 마치 폭격처럼 적에게 날아가 꽂혔다. 막아서는 것을 용서치 않고 꿰뚫어 터트리면서 주변을 정리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괴물들이 모두 어딘가 구멍이 뚫린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소오요옹어업다아.
정말로 반쯤 나무로 변해 버린 미친 마법사가 느릿하게 말을 뱉으며 지팡이를 움직였다. 그러자 부서진 나뭇조각에서 다시 뿌리가 자라고 줄기가 자랐으며, 잎이 생기고 꽃이 피어올랐다.
코로 느껴지는 꽃향기가 이렇게나 역겨운 적은 처음이었다. 지나치게 강렬해서 머리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엘프들이 몸을 비틀거렸다. 단순히 꽃향기가 짙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속에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감각을 교란시켰다.
독성에 강한 저항력을 가진 아이반만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분다. 아이반의 몸을 타고 흐르던 폭풍 같은 바람이 넓게 퍼져서 꽃향기를 밀어냈다. 그것을 바람의 정령이 도와주자 다시 상쾌한 공기만이 가득해졌다.
정신을 차린 엘프들이 다시 밀려오는 녀석들을 처리하고 있을 때, 아이반은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나의 적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부수고 적의 피를 뿌릴 수 있는 힘을!”
오딘, 토르, 프레이, 씨부럴 아무나.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저 멀리, 멀고 먼 천상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토르가 껄껄 웃었다.
맹랑하고 건방진 자신의 전사를 위해서 아스가르드 최고의 투신이 기꺼이 힘을 내려 주려 했다.
그때 천둥신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아스가르드 최고의 사고뭉치, 거짓말과 장난의 신. 한 번쯤 세계를 멸망시킨 대전쟁을 주도했으면서도 여전히 아스가르드의 신으로 불리는 자.
아하하하하!
아이반은 어렴풋이 로키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미약한 불씨가 되어 아이반의 창에 스며들었다.
화르륵!
쥐고 있던 창에 강렬한 불길이 치솟는다. 그것은 주변에 있던 엘레나 이븐우드마저 움찔 놀라며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였지만 아이반은 전혀 뜨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신의 화염, 로키의 불꽃.
아이반은 불타는 창을 들고 키메라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러자 로키의 불꽃이 녀석에게 옮겨붙어 몸을 불태웠다. 끊임없이 재생하는 육신마저 로키의 화염이 감싸자 한낱 평범한 시체가 되어 타들어 간다.
그렇게 숯덩이로 만들어 놓고서 로키의 불꽃은 다시 아이반의 창으로 돌아왔다. 다른 무엇에도 옮겨붙지 않고서.
“이제야 좀 마음이 맞는 신이 붙었군.”
한때 아스가르드를 불태우고 신들의 대가리를 터트렸던 존재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자인가.
아이반은 크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려들었다. 새롭게 얻은 로키의 불꽃을 마음껏 휘둘러 보았다.
화르륵!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들을 로키의 힘이 불살라 버렸다. 이리저리 장난치듯 옮겨붙는 불꽃에 뒤덮여 연기조차 내뿜지 않고 숯덩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적들이 하나씩 불타오르자 마치 숲 전체가 불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조차도 세상 전부를 불태우려 했던 로키의 불꽃에는 부족한 제물이었겠지만.
더 이상 무한한 생명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저 하찮은 장작더미가 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미친 마법사는 그제야 느릿하게 분노를 터트렸다.
-내애 수웁으을 부울태애우우다아니이!
둥, 둥!
미친 마법사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나무와 풀들이 순식간에 자라난 것처럼 미친 마법사 역시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나갔다.
겨우 몇 걸음. 미친 마법사는 완전히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고 몸이 나무로 만들어진 거인이 되어 아이반을 내려다보았다.
-모오두우 지잇누울러어 주우마아!
쿵!
미친 마법사의 커다란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바위를 부수고 땅을 꿰뚫는 일격. 바닥이 내려앉고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반은 가볍게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는 것으로 피해 냈다. 공중에 떠 있는 그를 향해 또다시 공격이 날아오려는 것을 엘프의 화살이 막아섰다.
파바박!
미친 마법사의 관절에 화살이 다다닥 박혀 들었다. 녀석의 관절이 꺾이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들어 올리던 손은 정령들에게 붙잡혀 빼낼 수가 없었다.
그때, 센스 있게 엘레나 이븐우드가 정령으로 허공에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반이 그것을 밟고 미친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아안드에느은…….
[관천(貫天)!]
푸슉!
아이반의 창이 녀석의 머리를 파고든다. 미친 마법사의 몸에서는 붉은 피 대신 수액 같은 액체가 흘러내렸고, 이내 로키의 불꽃에 그것마저 증발되어 온몸이 타들어 갔다.
탁!
녀석의 가슴에 붙어 있던 생명의 구슬을 뽑아내자 그 커다란 덩치가 허무하게도 너무나 간단히 재가 되어 사라졌다.
우웅-.
미친 마법사가 쓰러지자 공간이 뒤흔들린다. 핵이 사라지자 던전이 붕괴되고 뒤틀렸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니 그들은 어느 한적한 숲속에 서 있었다.
“분명 동굴로 들어갔는데 나오니 숲이로군요.”
“던전은 기묘한 이차원 세계니까 입구와 출구가 반드시 같으리란 보장은 없지.”
그렇게 대답한 아이반이 몸을 돌려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자, 악마를 섬기던 흑마법사는 모두 죽었소. 그들이 노리던 물건은 내 손에 있고, 던전은 해결되어서 사라졌지. 이제 그대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배신을 하려거든 배신해라. 내 손에 들고 있는 이 생명의 구슬이 탐나지는 않은가?
아이반은 그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침묵이 이어진 후에 엘레나 이븐우드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말했던 대로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악마의 추종자가 숲에서 사라지고 위험을 제거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사실을 읊을 뿐이라는 듯 그녀가 말을 했지만 아이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관심이 없었다면 대답이 그렇게 느리지 않았겠지. 욕심은 있지만 뺏어 가지는 않겠다는 거야.’
그것이 아이반의 강함을 보고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정말로 양심적이어서 나온 생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군. 방금 전까지 힘을 쓴 것만으로 충분히 나의 신들을 만족시켰으니까 말이오.”
“우리는 그렇게 야만스럽지 않습니다. 욕망을 못 이겨 약속을 번복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글쎄, 스스로 성격 좋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로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직까지 못 만나 봐서.”
엘레나 이븐우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언젠가 우리들의 숲으로 오십시오. 우리는 그대를 손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손님? 저 폐쇄적인 귀쟁이들이? 잠깐 같이 싸운 것 정도로 마음을 열 종족이 아닌데?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그대를 손님으로 환영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수의 전언입니다.”
“…그렇군.”
‘세계수의 전언’이라는 표현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는 엘프들의 정신이 모여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신앙이 집약되어 탄생한 초월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시스템이나 네트워크로서가 아니라 초월자로서의 세계수가 자신의 성녀로 삼은 것이 바로 세계수의 무녀.
그런 세계수의 무녀와 같은 성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수의 전언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이븐우드. 평범한 귀쟁이 년은 아니란 소리군.’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그리하겠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물론 한참 기다려야만 할 거다. 그는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곳에 갈 생각이 없으니까.
서로 감정과 생각을 나눌 수가 있는 엘프들의 합격술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 모이면 모일수록 시너지가 강한 종족이니 그 본거지로 들어가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고도 단단히 준비를 해야만 하리라.
게다가 수백, 수천의 엘프들이 돌아다니는데 하나같이 무표정에 감정 없는 말투라니,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
“그러면 이만.”
그렇게 엘프들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떠났다. 주위에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반은 힘을 거둬들였다.
그의 창에서 그때까지 이글거리고 있던 로키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몸 안에서 충만하게 솟아오르던 힘마저 휘발되어 날아갔다.
단번에 많은 체력과 힘을 써 버려서 몸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피곤함에 눈이 감길 정도였다.
‘그래도 이게 있으니 좀 낫군.’
아이반은 생명의 구슬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얼마나 혹사당한 것인지 이리저리 금이 가고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아까 전에 던전에서 봤었던 그 대단한 모습은 이제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던전에서 뿜어냈던 힘 정도라면 금방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역시 무리였나 보다.
“하긴, 씨부럴. 적일 때는 강하던 녀석이 동료가 되면 귀신같이 약해져서 짐 덩어리 병신이 되는 게 이 바닥 법칙이지.”
생명의 구슬을 다시 집어넣은 아이반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마치 지팡이처럼 사용해 숲을 빠져나왔다.
뒈지게 배가 고팠다.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뜯고 맥주나 벌컥벌컥 들이켜면 그걸로 족할 것 같았다.
물론 야채는 말고. 던전에서 살아 움직이던 풀 쪼가리를 워낙 많이 봤더니 그건 썩 당기지가 않았다.
고사리 무침이 산낙지처럼 꿈틀거린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식욕이 뚝 떨어질 거다.
‘도시에 도착하면 푹 쉬어야겠어.’
빡세게 달렸더니 몸이 삐걱거렸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면서 몸을 조율하고 다시 싸우러 나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은 곧 씁쓸해졌다. 어쨌든 결론이 싸우는 것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했고, 앞으로의 길이 그러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무언가와 싸워 이긴다는 뜻이었다.
전사의 영광이나 투쟁의 즐거움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입 안이 썼다. 얼른 맥주로 이 텁텁한 감정을 씻어 내려야 할 것 같다.
27화 싸우거나, 싸움을 준비하거나
보드라운 베개와 이불의 감촉이 무척이나 좋고 포근했다. 아이반은 사실 한참 전에 깨어났음에도 이 포근한 느낌이 좋아서 억지로 눈을 감고 몸을 뒤척거렸다.
잠깐의 게으름, 그리고 밀려오는 자괴감. 이렇게 누워 있어 봐야 뭐하나 싶은 마음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팡팡!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침대를 두드렸다. 모처럼 자신을 위해 휴식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비싼 숙소를 잡았더니 침대부터 남달랐다.
볏짚을 이불 삼아 덮고 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성공한 느낌이었다. 이게 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벌어들인, 그야말로 피 같은 돈 덕분이다.
아이반은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비싼 숙소인 만큼 방에 전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 있었다. 마법 세공까지 사용해서 뜨거운 물도 콸콸 나오는 훌륭한 시설.
덕분에 가격은 아주 살인적인 곳이었다. 1박 가격이 동화가 아니라 은화를 단위로 했으니까.
보통은 돈 많은 상인, 혹은 귀족들이나 머무르는 숙소였다. 아이반이 제대로 사치를 부린 셈이다.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고 나온 아이반은 직원을 불러 자신의 방으로 아침식사를 배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보통은 식당에 내려가서 먹었지만, 기왕 비싼 숙소에 머무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더 그곳을 즐기려는 의도였다.
식사 후 교양을 익히는 것처럼 우아하게 기초 마법서를 펼쳐 든 아이반은 채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더럽게 어렵네.”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개소리를 더욱 복잡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해서 쓴 것만 같았다.
평생 이런 것만 보고 있으니 마법사들이 다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지.
독서는 접고 숙소를 떠났다. 아이반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용병 길드. 딱히 의뢰를 맡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아보기에는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을 뿐이다.
끼익-.
경첩이 삐걱거리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에 있던 용병들이 흘깃 아이반의 얼굴을 살폈다. 보통은 그러고 나서 금방 시선이 흩어졌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머무는 시간이 긴 것 같았다.
‘뭐지?’
아이반이 의아한 기색을 감추며 길드 접수원 앞에 앉았다. 역시나 친절하고 미소가 예쁜 여직원 따위는 없었고, 얼굴에 칼자국이 하나 그어져 있는 대머리 마초 남자 직원이었다.
보통 베테랑 용병들이 은퇴하고 접수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같은 경우인 모양이었다. 척 보기에도 험악하게 생긴 것이 숙련된 살인마의 관상이었다.
‘사람 잘 쑤시게 생겼군.’
그는 아이반의 얼굴을 보자마자 툭 말을 내뱉었다.
“요즘 화제의 인물이 찾아왔군.”
“화제의 인물? 그게 무슨 뜻이오?”
아이반이 되묻자 그는 모르고 있었냐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얼마 전부터 용병 하나가 리무네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거기는 더럽게 비싼 곳이라 용병들이 머무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그런 의미지.”
“이거 서러워서 돈지랄도 못 하겠군. 목숨 걸고 벌어들인 돈을 쓸 때도 눈치를 봐야만 한다니.”
“흐흐, 사실 단순히 용병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 때문은 아니오. 당신이라서 그런 거지. 아이반 에시르손.”
그 말에 아이반은 쓴웃음을 흘렸다.
‘씨부럴, 인스타나 페북, 트위터 같은 SNS를 할 때에도 팔로워 하나 없었는데 여기서 유명해지는군.’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가 알아본다는 사실이 참 기분이 묘했다. 명성이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아이반의 명성은 모두 칼을 휘둘러 만든 것이 아닌가. 명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악연도 많다는 뜻. 그는 자기 목에 걸린 현상금이 높을수록 좋아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동부 전선에서 오크 전사들을 아주 토막을 쳐서 쓸어버렸다고 하더군. 오크 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을 죽였다지? 녀석의 이름이 아마 발크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소?”
전에는 히드라에, 이번에는 오크 로드의 아들인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무슨 트로피도 아니고 하나씩 수식어가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명성이나 칭호, 타이틀 뭐 그런 거.
추가 능력치가 붙어서 갈아 끼울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둘씩 잘도 늘어난다. 괜히 사람 난감하게.
하긴, 어디 산속에서 폐관 수련을 한 것도 아닌데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겠지.
“글쎄, 이미 죽은 놈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놈이 떠들기를 자신이 카르타크의 스물 몇 번째인가, 서른 몇 번째인가 되는 아들이라는데, 아마 그 정도면 지 애비도 이름을 잘 모를 거요. 그걸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다니, 병신 새끼였지.”
“흐흐, 안타깝지만 그건 아닌 것 같군. 아들을 잃은 오크 로드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동부를 두드리고 있다고 하니까. 꽤 아끼던 아들이었던 모양이오.”
아이반이 떠나온 이후 그쪽은 전투가 더욱 크게 번졌다고 한다. 덕분에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죄다 그쪽으로 몰려가서 여기는 오히려 의뢰가 남아돌 지경이라고 했다.
“온 김에 의뢰 하나 가져가시겠소? 당신 정도면 골라가도 괜찮지. 지금은 일손이 많이 딸리는데 잘되었군.”
“의뢰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정보를 얻으려고 온 거지.”
“으흠, 그렇소? 이거 잠깐 기대했는데 아쉽군.”
길드 직원은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보이면서 의뢰 목록을 옆으로 툭 치워 버렸다. 그리고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정보가 필요하시오?”
“이 근처에서 쓸 만한 정보는 없는지, 요즘 북부는 상황이 어떤지.”
“북부? 아하, 그러고 보니 당신은 노르드 출신이었군.”
길드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원을 만들었다. 돈을 달라는 소리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아이반이 못 이기는 척 코퍼 몇 개를 올려놓으니 그가 흠흠 헛기침을 하면 챙겼다.
“아, 적어도 은화는 받아야 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기꺼이 지불하지.”
“흐흐, 제대로 털어먹어야겠군. 좋소. 안쪽으로 들어오시오. 당신이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면.”
2층 사무실 한쪽 조그마한 쪽방으로 그를 안내한 길드 직원이 소파에 앉았다. 돈을 받아먹었으면서 물 한잔 내주는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가장 큰 건은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린스킨과의 전쟁이오. 동부 전선이 다른 곳으로 확장되느냐 마느냐 할 정도로 심각하다더군. 당신이 거기서 왔으니 분위기를 모르지는 않을 거요.”
“그렇지. 그래서 이 동네 치안은? 오다가 산적을 만났는데.”
“개판이지. 동쪽에서 그린스킨들이 지랄하니 숨어 있던 범죄자 놈들도 같이 나대고 있소. 흑마법사들마저 돌아다닌다더군. 단순히 뜬소문이 아니라 몇몇 용병들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정보요.”
그렇게 대놓고 돌아다니던 놈들이었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마탑이나 신전의 반응은 어떻소?”
“글쎄, 마탑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신전은 이미 발칵 뒤집어졌지. 성전사나 구마사제가 움직이고 있다고도 하고, 성황청의 이단심문관이 파견된다는 말도 있고, 전투수녀가 조사 중이라고도 하고 말이 많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소.”
“영주들은?”
“뭐, 다들 병사를 움직여 조사하는 척은 하고 있지. 하지만 아시잖소? 진짜 흑마법사라면 기사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면 그게 다 돈이라는 거. 어차피 신전이 알아서 할 테니 적극적일 이유가 없지.”
“그렇군.”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봤던 것 이상으로 이쪽의 상황이 엉망인 모양이었다. 아마 영주 중에 몇 명은 흑마법사와 결탁한 상태겠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했다.
“북부는 어떻소? 조용한가?”
“거기는 뭐,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린스킨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서 그쪽도 꽤나 긴장 중이라는 소리는 들었소. 어디나 다 그렇긴 하겠지.”
그 외에도 그는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았다. 몇몇 것들은 꽤나 유용한 정보였고, 나머지는 전혀 의미가 없는 헛소리였다.
“그만, 거기까지.”
아이반은 질린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도대체 자신이 어느 귀족 마누라가 바람난 이야기를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할 수 있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오. 잘 들었소.”
아이반은 품에서 은화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입술을 달싹거리던 길드직원이 흡족한 표정으로 받아 챙겼다.
“살펴 가시오.”
* * *
깡! 깡! 깡!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튀고 뭉툭한 쇠몽둥이가 조금씩 검의 모양으로 변했다.
조용히 가게로 들어온 아이반이 그걸 한참이나 보고 있으니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망치를 내려놓았다.
“덩치도 커다란 녀석이 뭘 그리 보고 있나? 작업하는 데 괜히 신경 쓰이게.”
“그거 계속 두드리지 않아도 되겠소?”
“이건 이미 망했어. 다음에 날을 잡아서 새로 만들어야지.”
공구를 제자리에 정리한 노인이 땀을 닦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불 앞에서 장시간 망치질을 했더니 얼굴이 익은 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방해가 된 것 같소.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괜찮아. 술 마시고 했더니 잘못 두드려서 그러니까.”
…술? 뜨거운 열기에 얼굴이 익은 게 아니라 술기운이었나?
아이반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면서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찾아왔는데 자리에 없더군. 바쁜 일이 있으셨나 보오?”
“바쁘기는, 술이나 퍼마시느라 바쁜 거지. 그래서 용건은? 뭘 맡기려고 하나?”
노인은 이 근처에서 꽤나 유명한 장인이었다. 워낙 성격이 까다롭고 위치가 이 따위라 가게가 크지는 않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아이반과는 인연이 좀 있었다. 예전에 아이반이 서부에서 히드라를 잡았을 때, 그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이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돈을 오지게 뜯어 갔었다.
“이것 좀 수리를 해 줄 수 있겠소?”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엉망으로 변한 히드라 가죽 갑옷을 꺼내자 노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거 상태가 왜 이래? 두어 번쯤 죽었다가 살아났나?”
화살이 스쳐서 찢어지고, 오크 전사의 도끼가 훑어서 갈라졌다. 어느 곳은 언데드를 상대하다가, 어느 곳은 나무정령을 상대하다가, 어느 곳은 미친 마법사를 상대하다가.
그렇게 하나둘 피해가 누적되다 보니 가죽 갑옷이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방어구의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으흠, 이건 안 돼.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수리가 쉽지 않고, 억지로 수리를 한다고 해도 예전만은 못할 거야.”
“그렇소?”
아이반은 아쉬운 듯 히드라 가죽 갑옷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세 개밖에 달리지 않은 놈의 가죽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대단한 갑옷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녀석 덕분에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을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니 괜히 마음이 허했다.
“남은 히드라 가죽이라도 좀 있나?”
“그럴 리가. 그때 다 팔아넘겼잖소. 그걸 지금껏 들고 다닐 이유가 없지.”
“그러면 방법이 없군. 평범한 가죽으로 만든 녀석이 마음에 들 리도 없고.”
“일단 그거라도 줘 보시오. 맨몸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아이반은 그동안 노획한 잡다한 무기들을 팔아넘기고 새롭게 장비를 갖췄다. 험하게 써서 상태가 영 이상해진 검도 새것으로 바꾸고, 도끼도 교체했으며,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가슴을 보호하는 가죽 갑옷도 하나 구매했다.
그러고 나니 조그마한 가게에 있던 물건을 거의 다 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럽게 많이도 샀군.”
아이반이 손을 덜덜 떨면서 돈을 넘겨주었다. 돈이 들어오는 것은 어려워도 나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거면 도대체 국밥이 몇 그릇이야?’
그래도 장비에 돈을 아낄 수는 없었다. 가능한 최고의 성능과 최고의 품질로.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디서 또 좋은 가죽이 생기면 찾아오게. 싸게 해 줄 테니까.”
싸게는 개뿔. 술 처먹어야 한다고 또 비싸게 받아먹겠지.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단검 하나만 서비스로 챙겨 주시면 안 되겠소?”
“…가져가게.”
사람의 마음이 참 웃긴 것이 그 많은 돈을 써 놓고도 단검 하나를 덤으로 챙겼다고 왠지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그렇게 단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입구에 서서 빤히 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반이 그걸 알아차리고 시선을 주었음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이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 전에 던전으로 변했던 버려진 수도원을 해결한 노르드의 전사, 아이반 에시르손이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다행이군요. 당신께 의뢰를 맡기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아이반은 의뢰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당장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강해지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하지만 단번에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 말을 막아서듯 퀘스트 창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퀘스트: 흑마법사의 음모]
[사악한 흑마법사의 계획을 막…….]
‘망할 퀘스트. 또다시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다니.’
아이반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을 당당히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실망스러웠다.
대충 메시지를 넘긴 아이반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이야기를 좀 들어야겠군.”
치지직!
휘이잉!
약하게 스파크가 튀고 바람이 불었다. 그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신들이 자신을 드러내며 흥분하는 것을 보면 또 싸움이 멀지 않은 모양이다.
‘씨부럴, 휴가가 벌써 끝났군.’
이럴 줄 알았으면 침대에서 뒹굴면서 늦잠이나 잘걸.
28화 대화의 자세
‘정체가 뭐지?’
아이반은 자신을 찾아온 의뢰인을 방으로 안내하면서 슬쩍 그의 모습을 살폈다.
낡고 해진 옷이었지만 더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제멋대로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는 안정되었고 상체가 흔들리는 것이 불안하지 않았다. 손을 보면 무기를 다루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고 곱게 자라난 것도 아니었다. 오래된 노동으로 생긴 흔적이다.
‘평범한 농사꾼? 정체를 숨긴 귀족? 돈 많은 상인?’
그 무엇과도 딱 들어맞는 것이 없었다.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텐데.
“이쪽이오.”
아이반의 의문이 채 풀리기도 전에 방에 도착했다. 직원을 불러 약간의 다과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비싼 숙소이기는 하지만 응접실이 딸린 스위트룸은 아니었다. 아주 넓지는 않았고, 그저 침대 옆에 조그마한 탁자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치이기는 했다.
후루룩.
직원이 가져다준 차를 국물 들이켜듯 털어 넘긴 아이반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묻지 않겠소. 생각보다 내가 유명하더군. 알고자 하면 충분히 알 수가 있었겠지.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찾았나가 아니라 왜 찾아온 것이냐가 아니겠소? 일 이야기를 해 봅시다.”
아이반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의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대로 시원시원한 성격이시군요. 좋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뜸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놓았다. 그러자 아이반은 방금 전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신성력이 남자의 안에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봉인구. 힘을 막는 것이 아니라 힘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인가? 정체를 숨기는 용도로군.”
아이반이 그렇게 추측을 입으로 내뱉자 의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델피노라고 합니다. 찬란하신 빛의 주, 아룬을 모시는 사제입니다.”
잠깐 신성력을 뿜어내는 걸로 자신을 증명한 델피노가 다시 목걸이를 착용했다. 그러자 또다시 신성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신기하군.’
아이반이 예민한 감각을 집중해서 그를 훑었다. 그가 빛의 신 아룬의 사제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쉽게 그 흔적을 찾아내기 어려울 만큼 감쪽같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감추는 것을 보니 아주 비밀스러운 의뢰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이 지역에 숨어 있는 악마 숭배자와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내는 임무죠.”
그는 아이반에 대해 조사를 했다고 순순히 밝혔다. 그동안의 행적을 살피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의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르드의 신들에게 사랑받는 전사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군요. 당신이 악마 숭배자와 손을 잡을 리가 없죠.”
아이반이 얼마 전 버려진 수도원이 던전으로 변한 사건을 해결했다는 사실 역시 그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곳은 모종의 이유로 철저하게 파괴된 곳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때 찬란한 빛의 주를 모시던 자들이 타락한 장소죠. 그곳에 다녀오셨으니 짐작하셨을 겁니다.”
“그렇소. 썩 유쾌한 장소는 아니더군.”
델피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같은 아룬의 사제로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빛의 신을 모시는 자가 어찌하여 어둠에 물들 수가 있단 말인가.
“저희는 그곳이 갑자기 던전으로 변한 이유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흑마법사와 악마 숭배자들의 수작이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비슷한 일들이 최근 들어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반은 대충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의문을 표시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갑자기 무엇을 노리고?”
“저희도 그 목적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발견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동부 전선에서 그린스킨들과 전쟁까지 터졌다.
아룬의 신전뿐만 아니라 다른 신전의 사제들까지 죄다 전쟁터로 불려 가는 중이라 인력이 아주 부족하다고 했다.
심지어 대륙 북부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위치한 이곳은 원래부터 신전의 영향력이 약한 곳이었고.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해 함께 조사를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의뢰금 외에도 활약에 따라 저희 신전에서 따로 보상을 해 드릴 것입니다. 신전은 공을 세운 자에게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대륙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빛의 신, 아룬의 사제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만큼 재정이 풍족하다 보니 어떻게든 챙겨 줄 수 있다는 소리겠지.
마탑과의 인연이 귀한 것처럼 신전과의 인연 역시 귀했다. 가능하면 의뢰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미 퀘스트가 뜬 뒤라 방법이 없기도 했지만.
“의뢰를 받아들이겠소.”
“감사합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질 것입니다.”
세상이 밝아지는 만큼 내 인생도 밝아질 수가 있을까.
델피노는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으나 아이반은 마주 웃지 못했다.
* * *
“우선 이곳부터 자세히 찾아봐야겠습니다.”
델피노가 먼저 조사해야 할 장소로 짚은 곳은 도시 외곽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어느 빈민가였다.
그가 그동안 모아 온 정보, 아이반이 산적을 털면서 얻었던 정보가 겹치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흑마법사들은 이곳에서 마약을 유통 중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빈민가에 도착하자마자 썩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풍겼다. 단순히 코로 느껴지는 것보다 어둡고 패배감 가득한 절망의 냄새가 더욱 강렬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허름한 집, 길거리에 대충 앉아 있는 우울한 눈동자의 사람들.
빈민가에는 특유의 분위기란 것이 있었지만 이곳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닮아야 할 아이들의 눈빛조차 지고 있는 석양 같았다.
‘며칠을 돌아다녀도 영 이상한 곳이군. 느낌이 아주 묘해.’
의문을 삼키고 아이반은 코너를 돌았다. 안쪽에는 선객이 있었다. 반쯤 약에 취한 눈으로 뻐끔뻐끔 무언가를 피워 대고 있는 건달, 양아치, 혹은 강도.
아이반이 흠칫 놀라는 척을 하며 뒷걸음질을 치자 녀석들이 히죽 웃으면서 길을 막았다. 빈민가 뒷골목에 나타난 낯선 사람. 강도질을 하기에 딱 좋은 대상이 아닌가.
“흐흐, 거기 친구. 우리가 지금 술이 좀 고파서 그런데 네 돈으로 좀 마시면 안 될…….”
앞쪽에 셋, 뒤쪽에 둘. 그 외에 따로 보고 있는 사람은 없음.
주변의 기척을 확인한 아이반이 허리를 폈다.
으드득.
기묘한 소리와 함께 왜소했던 아이반의 덩치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암살자의 변장술은 다 좋았지만 온몸이 뻐근한 것이 별로였다. 격한 움직임을 할 수도 없고.
‘그래도 배워 두니 다 쓸데가 있군.’
옛날에 뒤통수를 쳤던 녀석을 죽여 버리려고 익혔다가 한참을 잊고 있던 기술이었다. 그걸 이렇게나마 사용하니 다행이다.
“어, 어?”
눈앞에서 사람이 바뀌는 모습을 본 강도들이 입을 쩍 벌렸다. 분명 덩치가 작은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어깨가 떡 벌어진 전사가 내려다보고 있다니.
녀석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아이반이 주먹을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아이반에게 무투가로서의 소양은 별로 없었지만 그게 그의 주먹을 맞아도 아프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윽!”
털썩.
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강도들이 쓰러진다. 그저 조금 더 지독한 양아치에 불과한 놈들이었다. 아이반이 맨손이라고 한들 그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쓰러진 강도들을 한쪽 구석에 몰아넣고 한 놈을 붙잡아 일으켰다. 녀석은 아파서 끙끙거리고 있었으나 아이반이 뺨을 후려치니 벌떡 일어났다. 물리치료가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그때쯤 멀리 떨어져서 몸을 숨기고 지켜보던 델피노가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약을 빨던 녀석들은 맞소. 약을 팔던 녀석들인지는 이제 알아봐야지.”
이놈들을 찾으려고 아이반이 며칠이나 빈민가를 돌아다녔다. 괜히 덩치 큰 노르드 전사가 돌아다니면 위화감만 주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으니 안 쓰던 암살자의 변장술까지 사용하면서.
약에 취한 약쟁이들은 쉽게 찾을 수가 있었으나 약을 파는 녀석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을 두고 돌아다닌 끝에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인상착의는 맞는 것 같은데…….”
아이반이 빤히 바라보자 녀석이 움찔 몸을 떨었다. 놈의 머릿속에는 온통 엿 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으음,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력을 움직였다.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아주 어색하게.
느릿느릿하게 마력을 움직이면서 그는 주문을 외웠고, 곧 아이반이 뿜어낸 마력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기초 마법서를 읽고 나름 마력을 다루던 경험까지 조합하여 어설프게나마 마법을 발동한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마법사가 그걸 봤다면 어이가 없어서 쌍욕을 뱉었을 거다. 그게 무슨 마법이냐며 고함을 질렀겠지.
‘이걸 마법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 박아서 기막을 쳤다고 해야 하나.’
발동 속도도 더럽게 느리고 들어가는 마력도 지나치게 많아서 효율이 개똥이었으나 어쨌든 어설프게나마 성공했다. 그게 어딘가. 아이반이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제 이곳의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로메오 패거리, 맞나?”
“아, 아닙니다.”
순순히 맞다고 자백했으면 실망할 뻔했다. 그랬으면 오히려 의심했을 테니까.
화르륵!
아이반은 손가락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무기상점에서 서비스로 챙겨 온 단검을 달구기 시작했다. 적당히 열이 올라 단검의 날 색깔이 변하자 아이반은 그것을 녀석의 팔뚝에 대고 눌렀다.
치이익!
“으, 으악!”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바닥을 굴렀다. 고통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날뛰려는 것을 아이반이 발로 밟아 제압했다.
“나는 묻고, 너는 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네가 거짓말하면 불주사가 한 방 더 나갈 거고,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한다면 앞으로 네가 손으로 음식을 먹을 일은 없게 될 거다.”
아이반이 담담하게 그리 말하자 녀석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아, 알겠습니다! 모두 말하겠습니다!”
치이익!
“으악! 왜! 말한다고 했는데!”
“시끄러워. 귀가 아프다.”
아이반이 사이코패스처럼 그렇게 한 놈을 조져 놓고 있으니 다른 녀석들의 눈빛에 공포가 가득 어렸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되었군.”
한 놈이 지쳐서 실신하면 다른 놈을 끌고 와서 조진다. 그걸 반복하면서 아이반은 최대한 심문을 했고, 녀석들에게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런 잡것들이야 그냥 이용당한 것일 테고, 흑마법사들은 이미 이쪽에서 손 털고 나간 것 같소.”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옮겨 다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델피노는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강도들을 치료했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녀석들이 죽지 않도록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아이반이 했던 고문에 대해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들을 쫓는 구마사제로서 이것보다 훨씬 지독한 것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악마 숭배자들이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하는 것까지 포함된 말이었다. 당장 세계 최고의 고문 전문가는 성황청의 이단심문관들이었고.
이 세계에서 고문은 그리 놀라운 행위가 아니었다.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는 곳이었으니.
툭!
아이반은 쓰러진 녀석들을 발로 차면서 밧줄로 한데 묶었다. 이들을 경비대에 넘길 생각이었다.
아이반에게 강도 짓을 시도하고도 사지가 멀쩡하니 운이 좋은 녀석들이다. 경비대 쪽에서 또 무언가 처벌을 내리겠지만 죽이지는 않으리라.
“수확이 많지는 않군요.”
“몇 군데 더 털어 보면 그림이 그려지겠지.”
“일단 의심 가는 곳부터 차근차근… 뭐 하십니까?”
무심코 쓰러진 녀석들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돈을 챙기던 아이반이 아차 싶었다. 역시 사제 앞에서 할 만한 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대로 경비대에 넘겨지면 육신의 죄는 처벌받을지언정 영혼의 죄는 어쩌지 못하오. 이들의 금전이 신을 위해 쓰인다면 어리석은 영혼이 신께 조금이나마 용서를 받겠지.”
그 말에 델피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일이로군요.”
신을 향해 짧게 기도를 올린 델피노는 아이반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사이좋게 녀석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29화 피의 흔적
아이반과 델피노는 악마 숭배자의 손길이 닿았다고 의심이 되는 곳을 몇 군데 더 돌아다녔다. 그렇게 정보를 조금씩 모았으나 워낙 정보가 파편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딱히 이렇다 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핵심이 모두 빠진 채 그저 수박 겉핥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군.”
아이반은 방금 전 확보한 약을 뒤적거렸다. 역시나 진하게 풍기는 독초의 향기. 악마 숭배자들은 정말로 돈을 위해서 약을 팔았나? 이건 단순한 마약인가?
“이건 아무래도 마탑으로 보내서 성분 분석이라도 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말을 하던 아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델피노가 그대로 약을 한 움큼 쥐더니 불을 붙인 후 연기를 크게 빨아들인 것이다.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아이반은 그저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지 이건? 구마사제라더니 악마가 들리기라도 했나? 뭔 미친 짓이지?’
웬만큼 맛이 간 약쟁이들도 하지 않을 양을 단번에 들이마신 델피노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변했다. 곧 눈을 까뒤집고 몸을 잘게 떨었다.
“씨부럴, 사제가 아니라 약쟁이였네. 드루이드도 아니면서 약을 빨아?”
우웅-.
아이반이 욕을 내뱉으면서 손을 쓰려던 그때, 델피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의 신 아룬의 신성력이 그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정신을 되찾았다.
방금 전까지 약에 취해 눈이 풀려 있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델피노의 눈빛이 차분하게 되돌아왔다.
“환각 성분이 상당히 강하네요. 중독성도 심하고. 이전의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것보다 순도가 높은 것을 보니 이쪽이 핵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늘어놓는 델피노를 보면서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괜찮소?”
“이 녀석들을 조금만 더 털어 보면… 네?”
“아니, 방금 그건 좀 위험해 보였는데.”
그 약이 대체 무엇인 줄 알고 그리 흡입한단 말인가. 신성력을 끌어올려 정화하기 전에 치명적으로 작용해서 뇌를 파괴하거나 생명을 앗아 가면 어떻게 하려고.
아이반의 그런 우려 섞인 눈빛에 델피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마약에 관해서라면 제법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무리 잘 알아도 그건…….”
“괜찮습니다. 저는 구마사제니까요.”
델피노는 구마사제, 그러니까 악마를 쫓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제였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은 온 세상의 사악함을 모두 가지고 있는 마귀들이었고, 그들을 따르는 악마의 추종자들이었다.
일반인들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아주 사악하고 비참하고 잔인하며 역겨운 일들을 일상처럼 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쫓는 의지가 꺾이지 않아야 했다. 약물, 고문, 협박, 그 어떤 방법이라도.
“우리가 그들을 쫓듯 그들 역시 우리를 쫓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제들이 악마의 추종자에게 납치당했죠. 그들은 고문과 협박, 약물과 세뇌 등으로 우리의 정신을 파괴하고 타락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구마사제들은 그것에 대비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찬란하신 빛의 주, 아룬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델피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서 아이반은 짙은 신념의 향기를 맡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을 위대한 정신을 느꼈다.
동시에 깊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과연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이 어찌 그리할 수가 있는가?
아이반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당신을 그리 만들었소?”
그 말에 델피노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것은 찬란하신 빛의 주, 그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제로서 옳은 일이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죠. 그저 저는 제게 주어진 일을 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는 가끔 후회하거나 한탄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절망스럽고 잔인한 장면을 볼 때, 남몰래 아룬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며 고백했다.
“민망한 일입니다. 아직 제 믿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죠.”
그렇게 허허 웃으면서 말하는 델피노에게 아이반은 무척이나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털어놓았지만, 그 인간적인 모습이 오히려 그의 삶을 숭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 전부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지옥불로 던질 수가 있는 자라니, 그리고 그것을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이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는 자라니.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는 아이반이라 그 대단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쪽이 진짜인 것 같으니 조금 더 깊이 파 보도록 하죠.”
“알겠소. 그래도 그동안 돌아다닌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
말을 하던 아이반이 별안간 온몸의 긴장감을 단번에 높이고 허리를 폈다. 아이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진 것을 본 델피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군.”
악마 숭배자인가? 흑마법사? 여기저기 쑤셔 댔더니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고 했나?
아이반은 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였다. 시선이 날아오는 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이반이 눈치챘다는 것을 녀석 또한 알아차릴 테니까.
숲이나 산, 한적한 개활지가 아니었다. 한 블록만 지나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대로가 있었다. 잘못하면 놓치기 십상이다.
“어느 쪽입니까?”
델피노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혹시나 저쪽에서 입술을 보고 대화를 읽어 낼까 싶어서였다.
“뒤쪽. 거리가 가깝지는 않소.”
“추적이 가능하겠습니까?”
“노력은 해 봐야지.”
가장 빠르게 다가가려면 천둥걸음이 제격이지만 그건 너무 시끄럽고 화려했다. 정면으로 때려 부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런 일에 쓰기는 어렵지.
‘암살자 스킬은 숙련도가 그리 높지 않은데…….’
이상하게 델피노랑 같이 행동하면서 암살자 스킬을 쓰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았다.
사적이라 그런가?
같이 주머니를 뒤질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어.
아이반은 잡념을 지우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척을 지우고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은신], [암습]
대단한 스킬은 아니었다. 암살자의 기본 중의 기본. 그저 겉만 핥는 수준.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역량이 기술의 수준을 높여서 아주 형편없지는 않았다.
델피노는 이상하게 그쪽에 시선이 가지 않음을 깨달았다. 보고 있음에도 기척이 흐릿하다. 아주 미약한 차이지만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재주가 참 많으시군요.”
“어쩌다 보니. 잠깐만 시선을 끌어 주시오.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델피노는 벌떡 일어나 쓰러져 있던 놈들을 발로 후려 찼다.
“이 망할 녀석들! 신께서 보고 계신데 어찌 이런 사악한 짓을 하느냐? 남들의 인생을 망치고 어찌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있으며, 아룬께서 뿜어내는 빛을 맞으며 살 수 있단 말이냐! 자고로 성휘경전에 이르기를 따뜻한 태양 아래 따뜻한 마음을 갖추어야만…….”
델피노가 아룬 교단의 경전을 강독하는 사이 아이반은 슬쩍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시선에서 벗어났다.
“으이? 나 때는 말이야! 아무리 삶이 어려워도 떳떳하게 살아 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어이구! 눈 돌아간다! 이게 다 너희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이런 건 돈 주고 들어야 해, 돈 주고!”
델피노가 그렇게 시선을 끌고 있었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녀석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파고들어야 했다.
휘릭!
골목 사이로 몸을 띄운 아이반이 그대로 벽을 타고 올라갔다. 결코 지붕 위로는 가지 않았다. 녀석의 시야에 잡힐 수가 있으니.
타다닥!
빨랫줄과 난간을 밟으며 달린다. 건물 사이의 틈이 좁고 외벽이 매끈하지 않아서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전사의 날카로운 감각이 주변의 공간을 파악하고, 레인저의 경험이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암살자의 몸놀림이 발자국 소리를 줄이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달리니 녀석의 근처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어느 허름한 건물의 옥상.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녀석 하나. 주변에 다른 녀석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음.’
짧게 주변을 파악하는 사이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쯤 이미 아이반은 녀석이 있는 옥상에 올라온 상태였다.
“아니……!”
녀석이 당황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력 장벽이 피어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낼 정도니 아주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란 소리였다.
잘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겠지.
파삭!
유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녀석이 만들어 낸 방어막이 꿰뚫렸다. 아이반의 창이 녀석의 몸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푸슉!
놈의 배에 창을 박아 넣었으나 아이반은 오히려 표정을 굳혔다.
손맛이 영 이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리가 없는데.
아이반이 창을 뽑아내니 시커멓게 썩은 피가 흘러나왔다.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풍긴다.
언데드. 인형. 가짜.
아이반의 머릿속으로 그런 단어가 스치는 순간, 언데드의 육신이 부풀어 올랐다. 흑마력이 불안정하게 떨리고 덩치를 키웠다.
‘자폭!’
그 순간 느껴지는 희미한 마력의 흐름을 향해 아이반은 창을 집어 던졌고, 순식간에 폭발에 휘말려 나가떨어졌다.
쾅!
우르르.
낡은 건물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떨어져 내리는 나무토막과 부서진 벽돌, 기둥.
무너지는 건물 잔해를 쳐 내면서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온 아이반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씨부럴, 여기서 미끼를 써?”
폭발의 충격으로 속이 울렁거리고 피부가 찢어져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언데드가 폭발하면서 뿌려 놓은 시독이 몸을 파고들려고 하다 아이반의 내성에 막혔고, 썩은 피를 매개로 한 저주가 그의 몸을 맴돌았다.
스스슥!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생명의 구슬을 꺼내 손에 쥐자 죽음을 기반으로 한 저주가 밀려나 사라진다. 아이반의 피부에 생긴 찰과상이 아물고 활력을 불어넣어졌다.
덕분에 아이반은 피와 흙먼지로 더럽혀졌지만 피해는 없었다. 다만 기분이 더러울 뿐이다.
스윽.
아이반이 손을 뻗으니 멀리 날아갔던 창이 되돌아왔다. 그 날의 끝에 묻어 있는 선홍색 피. 언데드의 썩은 피와는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었다.
“쯧, 죽이지는 못한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쫓으면 잡을 수가 있을까? 힘들겠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란이 벌어지자 사람들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주변이 그렇게 아수라장으로 변하자 아이반의 날카로운 감각으로도 더 이상은 적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아이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달려온 델피노가 아이반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상처를 치료하려는 의도였으나 이미 생명의 구슬로 회복된 상태였기에 아이반은 그를 말렸다.
“잡은 줄 알았는데, 사역마였소. 언데드를 인형으로 사용해서 지켜보는 것이더군. 미끼였어.”
신중한 놈이었다. 그렇게 함정을 파다니. 괜히 이쪽의 정보만 넘겨주고 얻은 것이 없었다.
그때 아이반의 창끝을 빤히 바라보던 델피노가 물었다.
“이 피는 녀석의 피입니까?”
“반쯤은. 죽이는 데는 실패했소. 아마 팔뚝이나 약간 스친 모양이더군.”
아이반이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말을 꺼냈으나 델피노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군요. 훌륭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아이반의 창날에 묻은 피를 헝겊으로 닦아 유리병 안에 넣어 봉인한 델피노가 그걸 흔들며 말했다.
“이거면 충분하죠. 저희가 어떻게 그들을 추적하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30화 기다림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