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30화 기다림의 끝

델피노가 아이반을 데리고 간 곳은 근처에 있는 작은 신전이었다. 아룬 교단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반은 오히려 놀랍기만 했다.

“이런 곳에도 신전이 있었소?”

“많은 분들이 노력한 결과죠.”

“고생 꽤나 했겠군.”

대륙 북쪽은 노르드인들을 포함해 크고 작은 민족들이 흩어져 각자의 신을 모시고 있었다. 이곳은 그런 대륙 북부와 가까워서 다른 여타 메이저급 교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에서 중소 도시까지 작게나마 신전이 마련돼 있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과연 대륙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아룬 교단다웠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델피노는 일반적인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출입하는 본당을 넘어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다 사제와 마주칠 때가 있었으나 그들은 크게 눈을 뜨더니 아무런 말이 없이 목례를 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간혹 델피노와 아이반에게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하는 사제들은 있었으나 낯선 이가 이곳까지 들어온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로 연락을 하고 찾아온 것도 아닐 텐데.

아이반이 그것을 궁금하게 여기니 델피노가 웃으며 설명했다.

“이것 때문입니다.”

“목걸이?”

“신성력을 감추는 봉성의 목걸이는 구마사제가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뜻이죠. 악마와 싸우고 있으니 우리를 응원하는 것입니다.”

구마사제가 봉성의 목걸이를 하고 나타났을 때는 임무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최대한 협조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했다. 워낙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교단 차원에서 배려를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구마사제에게 임무 중 주어지는 경비는 꽤 풍족한 편이었다. 따로 신전에 요청하지 않고도 아이반의 비싼 몸값을 감당할 만큼.

물론 델피노는 최근 다른 방법으로도 주머니가 풍족해지는 법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신전에서 경비를 조금 덜 받아도 되겠지.

드르륵!

사제들이 방해 없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지하 기도실을 빌린 델피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얼마 전 흑마법사의 피를 닦은 천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다.

“정말 그것으로 놈들을 찾을 수 있겠소?”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사제 스킬 중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반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게임이던 시절부터 존재하던 일부에 불과했지만.

델피노는 걱정 말라면서 허허 웃었다.

“저희들이 놈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녀석들이 사용하던 사악한 힘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었죠. 그 힘을 이용하는 것 역시 가장 가까이에서 악마와 싸우고 있는 구마사제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일이기도 합니다.”

델피노는 분필을 꺼내 바닥에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도형을 자도 없이 그리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했다.

“악마의 상징을 그리고 그 힘을 찬란한 빛의 주의 이름으로 억눌러 적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녀석들의 흑마법을 살짝 이용하는 것이죠.”

사방에 양초 네 개를 켜서 밝힌 델피노가 다시 한번 차분히 마법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요.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유리병에서 피 묻은 헝겊을 꺼내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요사스러운 악마의 이름과 찬란한 빛의 신의 이름이 들어간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웅-.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따라 공기가 흔들린다. 순식간에 이질적인 기운이 마법진 안에 차올랐다.

화르륵!

피 묻은 헝겊에서 검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델피노의 두 눈에서 푸른 안광이 흘러나왔다.

화아아-.

델피노의 머리 위, 지하임에도 어디선가 뿜어진 환한 빛이 검붉은 불꽃을 억눌렀다. 그때 델피노가 미리 준비해 뒀던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츠즈즉!

검붉은 불꽃이 나침반 안에 스며들고, 아룬의 빛이 그것을 감싸자 마침내 이질적인 기운들이 사라졌다. 델피노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푸른 안광마저 흩어지고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었다.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델피노의 안색이 파리했다. 옆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 않아도 상당히 심력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괜찮소?”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그렇게 손을 내젓다가 나침반을 가리켰다.

“이제 이것으로 녀석들을 추적하면 됩니다.”

“이것으로? 어떻게?”

“이것이 녀석의 피와 악마의 마력과 공명하여 위치를 알려 줄 것입니다. 유지 시간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지만 꽤 강력한 단서를 얻은 셈이죠.”

그 나침반처럼 생긴 악마추적기가 아이반은 영 의심스러웠지만, 델피노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꽤 성능이 괜찮은 듯했다.

‘뭐,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믿을 만하겠지.’

악마추적기의 화살표가 빙글빙글 돌더니 곧 멈춰서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 방향이 녀석들이 있는 장소인 모양이다.

그걸 보니 기력이 돌아온 것인지 델피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힘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겠습니다.”

* * *

아이반과 델피노는 빠르게 움직였다. 신전에서 꽤 덩치가 좋은 말을 빌려 밤낮없이 달렸다.

그렇게 이틀쯤 달리자 녀석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북부 경계에 있는 마을이로군. 그동안 멀리도 도망쳤어.”

아이반이 마을의 위치를 떠올리고 있을 때, 델피노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좋지 않습니다.”

“무엇이 말이오?”

“평범한 마을이 아닙니다. 이곳 영주의 별장이 있는 곳이죠. 영주의 영향력이 아주 강한 장소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는 것은…….”

“영주가 한통속일지도 모른다는 소리군.”

아이반에게는 전혀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일이니까. 어차피 어느 영주가 손을 잡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나. 차라리 이렇게 밝혀지면 마음이 편했다.

“어떻게 하시겠소?”

그 질문에 델피노는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에 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둘만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이미 본단에 연락을 했으니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 감시를 하면서 기다려 보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노숙할 준비를 해야겠군. 마을을 쉽게 살필 수 있으면서 이쪽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때부터 둘은 관도를 벗어나 험한 곳으로 움직였다. 안타깝게도 말은 풀어서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움직여서는 쉽게 들킬 테니까.

그렇게 인적이 없는 숲을 헤치며 이동한 끝에 마을의 모습이 아주 잘 보이는 장소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사실 더 좋은 장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좋은 장소는 적이 눈치채기도 쉬웠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군.”

아이반과 델피노는 능숙하게 은신처를 꾸렸다. 주변에서 쉽게 파악하기 힘들도록 돌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은폐 엄폐를 하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조그마한 화덕도 만들었다.

이리저리 연기 통로를 꼬아서 만들면 외부에서 불을 피웠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음식을 조리할 수는 없었다. 음식 냄새는 생각보다 멀리 퍼지기 때문이다. 그저 열기로 추위를 몰아내는 정도로만 써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마을은 어떤 변화도 없었다. 새로이 들어가는 인물도 없었고, 새로이 나가는 인물도 없었다.

‘이렇게 멍하니 마을만 바라보고 있으니 경계 근무를 서던 때가 떠오르는군.’

하루에도 몇 시간씩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었다.

그럴 때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는 것이 잡담.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온갖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경계 근무를 같이 서고 나면 선후임과 조금 더 친해지는 점도 있었다.

‘설마 내가 이런 빌어먹을 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다른 누구처럼 전역하면 뭐 하지 고민하다 꿈을 털어놓았었다. 그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것 중에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딱 하나는 있었다. 여행을 가겠다는 것. 자신이 모르는 장소로 훌쩍 떠나 세상을 둘러보겠다는 것.

당연히 20대 대학생들이 흔히 하는 배낭여행을 생각했지 이렇게 엿 같은 방식으로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당신의 꿈은 뭐였소?”

아이반은 무심코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었다. 쓸데없이 감성적이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델피노는 그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글쎄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는 것을 원해서……. 아,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때는 빵집 주인이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갓 구운 빵이 가득하니 빵을 많이 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었죠. 하하, 그때는 저도 어렸습니다.”

그는 신전에서 자랐다고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아룬 교단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그를 맡아 키운 모양이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앙심이 싹트고, 자연스럽게 사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제가 된 후로는 좋은 선배를 많이 만났죠.”

“기억에 남는 선배라도 있소?”

“음, 막시우스 선배랑 친했죠. 그분 덕분에 제가 구마사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좋은 분이었나 보군. 그분도 구마사제였소?”

“그렇습니다. 훌륭한 분이셨죠.”

과거형 어미.

그 말에서 아이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위로 대신 그저 입을 다물었다.

“괜찮습니다. 선배가 실종된 지도 이미 10년 가까이 지났고요. 흔한 일입니다.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이 바닥에서 실종은 사망했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실로 우울한 이야기였으나 그는 담담히 말할 뿐이다. 그래,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분이 마지막으로 활동하던 곳이 이쪽 지역이었습니다. 이번에 악마 숭배자들을 찾아서 정화한다면 그분께서 조금이나마 편안해지시겠죠.”

“그렇게 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

이전까지와는 달리 지루해서가 아니라 분위기가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괜한 소리를 내뱉어서 분위기만 조졌네.’

이래서 아싸는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되는데.

아이반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니 몸이 굳는 것 같아 스트레칭이라도 좀 할까 싶어서였다. 솔직히 그냥 있으려니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렇게 몸을 풀던 아이반은 문득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델피노에게 물었다.

“혹시 병력이 언제쯤 도착하겠소?”

“으흠, 빠르게 움직였다면 아마 거의 도착하기는 했을 텐데……. 하루나 이틀이면 도착할 겁니다.”

“하루나 이틀이라. 그건 너무 긴 것 같은데…….”

아이반이 창을 들어 올리자 델피노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그냥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얼른 시선을 돌려 나침반을 내려다보니 화살표가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변에 악마의 기운을 가진 놈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뭐? 언제 이렇게 가까이……!”

“우리가 감시하는 동안 저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소리겠지.”

탁!

탁!

타다다닥!

아이반이 사방에 설치했던 부비트랩이 하나둘씩 작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먼 곳부터 함정을 깔아 놓았는데, 그게 사방에서 작동했다는 말은 적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들은 일부가 함정에 당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 정도는 전혀 피해가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어차피 감정도 없는 놈들이지만.

킁킁.

코를 스치는 죽음의 냄새. 최근 들어 아이반이 질리도록 상대하고 있는 언데드의 것.

스스슥.

마른 낙엽을 밟으며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수가 너무 많은데? 당신을 지키는 것이 꽤나 버거울지도 모르겠소.”

그 말에 델피노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웃었다.

“제가 안전한 곳에서 보호만 받았다면 구마사제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동안 옷에 숨겨져 있던 델피노의 팔뚝이 드러났다. 분명 신성력으로 치료를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남은 상처들. 그는 결코 편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델피노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이반이 정면을 노려보았다.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곧 폭풍으로 변했다.

쾅!

31화 이름을 지우다

썩어 버린 손들이 다가오다 칼날 같은 바람에 잘려 나간다.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가벼워진 몸들이 바깥으로 밀려 나간다.

그런 거센 바람을 한 점에 모아서 쏘아 내고, 번개를 불러와 땅에 내리꽂는다.

도끼를 던져 몸통을 가르고, 창을 꽂아 파괴한다. 검으로 목을 베고 거리를 벌린 뒤, 화살에 불꽃을 담아서 쏘아 보낸다.

푸슉!

화르륵!

그렇게 시체를 불태우며 사방을 밝혔으나 밤의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무리였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녀석들에 가려져 그 불꽃마저도 이내 사라졌다.

탁!

손을 뻗어 회수한 창으로 한 바퀴 크게 휘두르고 단검을 던져 녀석들의 몸에 박았다. 목, 팔뚝, 허리. 위치는 제각각이었다. 애초에 시체 녀석들에게 살아 있는 사람의 급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치지직!

아이반의 손에서 뻗어 나온 번개가 녀석들의 몸에 박혀 있는 단검을 타고 흘러들어 간다. 번개는 사령핵을 파괴하고 녀석들을 그저 고깃덩이로 돌려놓았으나 다른 녀석들은 그것마저 발판으로 삼아 다가왔다.

그렇게 한 발이 앞으로 나가면, 세 발을 뒤로 물려야 했다. 적이 너무 많았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닌 놈들이라고 해도 이렇게나 수가 많으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쾅!

푸쉬이이.

가끔은 쓰러진 녀석들이 폭탄이 되어 터져 나가기도 했다. 그 충격에 아이반의 몸이 흔들리면 녀석들은 한 발자국을 더 가까워졌다.

“당신의 어리석은 종에게 빛을 내려 주소서!”

화아아-.

아이반의 뒤쪽에서 성스러운 빛이 터져 나왔다. 시독과 함께 맴돌던 저주가 물러나고 아이반에게 손톱을 휘두르던 녀석들마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신성력이 휩쓸고 간 틈에 잠깐의 여유가 생긴 아이반이 델피노에게 소리쳤다.

“여기서는 버틸 수가 없소!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벗어나야만 하오!”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일단은 저쪽!”

아이반은 하체를 단단히 땅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창을 단단히 잡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리스의 제우스처럼, 켈트의 루 라바다처럼, 그리고 저기 저 먼 곳, 천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오딘처럼.

폭풍신의 가호를, 오딘의 축복을.

쾅!

공기가 터져 나가는 굉음과 함께 창이 쏘아졌다. 그 창을 휘감아 돌고 있던 폭풍이 가로막는 것을 모두 쓸어버리고 길을 열었다.

“따라오시오!”

인벤토리에서 원형 방패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땅을 박차고 달리며 덤벼드는 녀석들을 튕겨 냈다.

천둥걸음에 이어 실드 차지.

아이반이 단단히 앞을 지키며 달리자 델피노가 뒤를 따랐다. 그가 연신 기도문을 읊조리며 달렸다.

“찬란한 빛의 영광이여, 만물의 축복이여. 여기 내려와 어둠을 밝히시고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화아아-.

델피노의 몸에서 환한 신성력의 빛이 터져 나오고, 후방을 노리던 녀석들을 불태웠다. 동시에 아이반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상처마저 회복시켰다.

축복, 치유, 퇴마의 동시 사용. 그가 수준 높은 구마사제였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그렇게 포위망을 뚫고 나가면서 아이반은 흘깃 주변을 살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망할 놈들! 이거 아무래도 몰이를 당하고 있는 것 같소.”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지만 조금씩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달려도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 미리 의도된 몰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마을로 들어가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억지로라도 벗어나야…….’

쾅!

갑자기 바닥이 터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폭발에 휘말려 아이반이 허공을 날아올랐다.

“크헉!”

멀찍이 튕겨 나가서 바닥을 데굴데굴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아이반은 멈춰 섰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아이반!”

깜짝 놀라 소리치는 델피노에게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입에 머금은 핏물을 퉤 하고 뱉은 아이반이 앞을 노려보았다.

단순한 폭발의 충격이 아니었다. 강력한 저주가 그의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웬만한 저주는 통하지도 않는 몸인데 이렇게 당하다니. 단번에 이렇게 힘이 빠지는 것을 보면 적이 꽤나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화아아-.

델피노가 서둘러 아이반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으나 이번 저주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멀스멀 그의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생명의 구슬을 꺼내 가슴에 갖다 대고 나서야 몸이 회복되고 지독한 저주가 조금씩 밀려났다.

스스슥.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갈라지고 누군가 앞으로 걸어왔다.

푸석푸석한 머리칼, 흐릿한 눈동자, 바짝 말라붙어서 생기가 하나도 없는 피부.

그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었구나. 생명의 구슬을 가로챈 녀석이. 이번에는 이쪽의 일까지 방해를 하려 들다니, 실로 오만하고 불쾌한 자로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아이반은 듣기 싫은 녀석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몸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그 몸도 언데드로 만든 인형이로군.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자신은 없었나?”

“아직은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어리석기는 씨부럴. 시체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 되게 무게를 잡네. 대가리를 확 깨 버릴라.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욕설을 내뱉다가 힐끔 델피노를 보았다.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반은 곧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갑자기 사악한 기운이 나타나서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녀석의 여유가 그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델피노, 아무래도 마을 쪽으로 가야겠소. 저걸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다행이군요.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 짧은 사이, 복잡한 감정을 다 털어 버리고 무섭도록 무감정한 얼굴이 된 델피노가 단검을 꺼내 들더니 자신의 팔뚝을 죽 그었다.

주르륵.

왈칵 쏟아지는 뜨끈뜨끈한 핏물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그가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이쪽은 제가 막겠습니다.”

“가능하겠소?”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아이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를 믿고 마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화아악!

아이반의 등 뒤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사라지고 낮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은 빛이 나타났다.

곧이어 싸우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이반은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타다다닥!

빠르게 달려간 아이반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한 번에 훌쩍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악한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데드의 썩은 핏물과 전혀 다른, 살아 있는 생명의 신선한 피 냄새였다.

“…이 새끼들이.”

아이반이 마을 광장에서 본 것은 거대한 의식이었다. 사악한 악마를 이 땅으로 불러내는 지독한 행위.

약에 취한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흐느적거리며 서 있었다. 누구는 빵을 만들다가, 누구는 바느질을 하다가, 누구는 가구를 만들다가 그렇게 변했다. 개중에는 영주의 별장을 지키고 있었을 병사들의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던 그들이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질 때마다 중앙에 있는 불꽃에서 어두운 기운이 더욱 거세게 피어올랐다.

스스스슥!

사악한 불꽃에서 거대한 눈동자의 환영이 떠올라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시선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마주했던, 잊을 수 없는 존재의 것이었으니까.

죽음의 인도자.

파멸을 부르는 사악한 대악마.

휙!

그때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으면서도, 심지어 이미 죽어 바닥에 쓰러졌던 자들 역시도.

사악한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어두운 불꽃을 둘러싸고 있던 흑마법사들이 아이반에게 손을 뻗었다.

쾅!

아이반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우레와 폭풍을 타고 단번에 거리를 좁혀 사악한 불꽃으로 다가갔다.

파삭!

앞을 가로막는 방어막이 유리처럼 부서진다. 지독한 저주는 미처 그의 몸을 파고들지도 못하고 번개에 타 버렸다.

쿵!

아이반이 바닥을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흑마법사 하나의 몸을 꿰뚫었다. 창이 녀석의 몸을 관통하고 땅에 박혔다.

치지직!

화르륵!

이미 심장을 잃어버린 녀석의 몸을 번개가 후려치고 불꽃이 핥았다. 순식간에 한 녀석이 숯덩이가 되어 흩어지자 다른 녀석들이 검은 불꽃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녀석들의 몸으로 검은 불꽃이 옮겨붙었다.

‘뭔 미친 짓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흑마법사들의 덩치가 폭발적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인간의 몸을 버리고 악마의 화신체로 변하는 중이었다.

쿵!

단번에 변이를 마친 한 녀석이 발로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땅이 갈라지고 뼈다귀만 남은 시체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검은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사악한 기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었다.

“흐읍!”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아이반이 다급하게 허리를 비틀어 창을 찔러 넣었다. 폭풍이, 불꽃이, 번개가 그의 창을 따라 검붉은 화염을 꿰뚫었다.

욱신.

분명 실체가 없을 화염을 찔렀음에도 묵직하게 밀려오는 충격. 아이반이 이를 악물고 힘을 더하자 검붉은 불꽃이 마침내 사라졌다.

쾅!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린 사악한 마력이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퍼졌다. 그 충격에 아이반이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후우…….”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순식간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아이반의 튼튼한 육신이 추위에 살이 아릴 정도였다.

단순한 온도 변화가 아니었다. 원혼이 뭉쳐 만들어진 심령의 냉기였다.

-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지고 아이반은 쿨럭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알지 못할 고통과 슬픔, 절망과 분노가 그의 감정을 유린하려 들었다.

화르륵!

그때 로키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방에서 침투하는 저주와 악귀를 불태우고 시체를 장작으로 삼았다.

으슬으슬 춥기만 하던 몸이 다시 온기를 되찾고 굳어 있던 몸이 풀어졌다. 그러나 아이반이 미처 무언가 하기도 전에 그의 옆구리를 무언가 후려쳤다.

퍽!

아이반의 몸이 멀리 날아갔다. 시체 골렘의 주먹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녀석의 손이 아이반에게 닿는 것과 동시에 로키의 불꽃이 옮겨붙었으나,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이라 태우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며 아이반이 일어서려는 것을 원혼들이 들러붙어 찍어 눌렀다. 실체화된 망령의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화르륵!

다시 한번 로키의 불꽃으로 망령을 불태우며 자리를 옮겼으나 온갖 언데드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자기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고 모두 죽어 버린 사람들마저 언데드가 된 채 일어나 아이반을 붙잡았다.

사방에서 적이 밀려온다. 그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 아이반은 자신의 신들에게 기도했다.

오딘, 토르, 로키, 헤임달. 아무나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씨부럴 존재여.

나에게 힘을. 저 개자식들을 쳐 죽일 강력한 힘을.

흐흐하하하하!

어디에서 웅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상의 신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우웅-.

속에서 폭발적인 힘이 솟아오른다. 오른손에 번개를 감고, 왼손에는 불꽃을 피웠으며, 다리에는 폭풍을 담았다.

쾅!

아이반을 둘러싸고 있던 언데드들이 단번에 사라졌다. 칼날 같은 바람에 잘게 조각났으며, 번개로 지져지고, 불꽃으로 타올랐다.

시체 골렘이 통째로 불타 사라지고 악령들이 흩어진다. 계속해서 시체들을 뱉어 내던 구멍이 닫히고 주변이 일순간 조용하게 변했다.

변이한 흑마법사들, 악마의 화신들을 공격할 찬스였으나 아이반은 채 두 걸음을 떼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으윽!”

사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지나치게 강한 힘이 그의 몸속에 쏟아져서 터질 것만 같았다.

생명의 구슬이 품고 있던 생명력을 다급하게 토해 내지 않았다면 진작 몸이 터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들은 아이반의 몸 상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요청했던 대로 힘을 건네줄 뿐이다. 그 강력한 힘에 아이반이 짓눌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의 전사라면 그 정도 시련은 당연히 이겨 내야지. 그 정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불렀단 말이야? 그런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드득.

아이반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신과의 연결을 끊어 냈다. 그 강력한 힘들을 밀어내니 그제야 호흡이 돌아왔다.

실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때 광명을 두르고 그들이 나타났다.

신전의 적, 신앙의 적들을 쳐부수는 교단의 정예.

성전기사단이 은빛 갑옷과 신성한 빛을 휘감고 적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하며 아이반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니 그들이 거친 숨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아이반 에시르손, 구원하겠습니다.”

“밖은 어떻소? 델피노 사제가 남아 있었는데.”

“이미 정리되었습니다. 이제 저 녀석들만 처리하면 되겠군요.”

척!

수십이나 되는 성전기사단이 동시에 칼을 들어 올리자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왔다. 그 신성한 힘이 악마의 힘을 꿰뚫고 그들을 억눌렀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쉬고 계시겠습니까?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마무리까지 함께하겠소.”

아이반은 다시 허리를 펴고 앞으로 나왔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천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신들에게 나약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창을 다시 쥐고 당당히 앞에 섰다.

그동안 악마의 화신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 보였던 위압감이 무색하게 연신 밀리고 있었다. 사악한 마력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폭력적인 기세가 꺾였다.

하긴, 사악한 놈들을 때려잡는 것에는 성전기사단만 한 베테랑들도 없겠지.

한번 신성력이 터져 나올 때마다 놈들의 몸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다. 그러다 놈들이 거세게 반항할 것 같으면 성전기사단은 얼른 자리를 바꿔 가며 상대했다.

기가 막힌 합격술. 얼마 전 아이반이 보았던 엘프들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엘프들은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렇지 못한 성전기사단의 모습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지독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 성과이리라.

푸슉!

-으아아아!

아이반은 악마의 화신 하나의 팔을 잘라 내면서 흘깃 성전기사단을 살폈다.

하나하나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만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둘이 된다면, 셋이 된다면, 다섯이 되고 열이 된다면 어떨까?

그들은 여럿이 모일수록 강해졌다. 결코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다.

꽈악.

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이반은 화풀이라도 하듯 악마의 화신에게 창을 박아 넣었다.

데구르르.

마지막 악마의 화신마저 목이 잘리고 바닥을 굴렀다. 그것으로 전투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적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대승이라 할 법도 하건만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주변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폐허가 되고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다.

‘씨벌, 피곤해서 뒈지겠군.’

아이반은 그렇게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던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정되었다. 생명의 구슬이 지금도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데드가 신성한 불길에 불타고 남겨진 재가 가득한 들판. 델피노가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고, 팽팽하던 피부는 탄력을 잃고 주름을 만들었다.

다친 곳은 없었으나, 과연 이것을 멀쩡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지불한 대가가 결코 적지 않았다.

“안쪽도 정리가 되었나 보군요. 의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악한 마력이 퍼지는 것을 보긴 했습니다만.”

“글쎄, 중간에 창을 찔러 넣어서 방해를 하긴 했는데, 과연 막아 냈는지는 모르겠소. 그러기에는 놈들이 마지막에 뿜어낸 마력이 너무나 불길하군.”

“그렇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그 녀석은? 본체로 보이는 녀석이 안쪽에 없던데 도망갔소?”

“예. 잡지 못했습니다. 녀석이 인형으로 쓰던 몸은 되찾았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델피노의 손에는 낡은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델피노의 목에 걸려 있는 것과 아주 닮은, 그러나 훨씬 오래되고 생채기가 많은 봉성의 목걸이.

그는 그것을 품에 챙기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실종자가 하나 줄었군요.”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 이것 역시 흔한 일이었다.

32화 참아야 한다는 것

아이반은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방 침대에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이곳에 있으니 영 어색해서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신전에서 잠들어 보기는 처음이군.’

신전의 방은 좁았지만 정갈했다. 딱 필요한 가구만 최소한으로 놓여 있는 것이 마치 사제들의 금욕적인 삶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하나하나 기름으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나면 반드시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장비를 손질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방문 앞까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라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아이반이 손질하던 장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모습을 그가 보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온갖 장비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집어넣기를 반복하는 아이반의 스타일 때문에 제대로 된 전투를 하면 들킬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시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보군.”

“쉬고 계신데 혹시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칼이나 닦고 있던 참이었소.”

“그러면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델피노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반은 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그리고 마력을 움직여 불꽃을 피우고 그 위에 주전자를 둥실둥실 띄웠다.

요즘 아이반이 하고 있는 마력 변환 연습이었다. 불을 피우는 것과 주전자를 허공에 띄우는 것을 동시에 유지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적당히 화력을 조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흔들려서 물이 넘치지 않게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쪼르르르.

“맛은 어떨지 모르겠소. 차는 신전에 있던 것을 썼지만 내 실력이 그리 좋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차는 본디 향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차가 맛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아이반은 겉으로 표가 나지 않게 시무룩한 마음으로 차를 들이켰다. 어찌된 일인지 더럽게 썼다.

한 모금 맛을 본 차를 멀찍이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 밤에 무슨 일이시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내일 아침에 대신전으로 떠나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미리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델피노는 홀로 적을 막으면서 무리를 했다. 그로 인해 정신과 육체, 영혼이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단순히 신성력을 쏟아붓는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적한 신전이나 수도원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양에 집중해야겠지. 그러고도 그가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까지 보고 싶을 텐데, 이렇게 떠나게 되니 아쉽겠소.”

“그건 저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매일같이 밖으로만 나다녔으니 돌아갈 때가 되기는 했죠. 그동안 바깥 물이 많이 들었으니 기도실에 앉아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신앙을 새로 닦아야죠.”

그는 너털웃음으로 덧붙였다.

“허허, 계속 놀러 다니다가 앞으로 신전에 붙어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몸이 근질거립니다. 고행의 시작이로군요.”

과연 누가 그에게 놀러 다녔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가장 힘든 곳에서 고생하다 회복을 위해 돌아가는 것을 그는 오히려 고행이라 표현했다. 실로 강인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 척을 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정말로 좋은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는 아이반이 아주 드물게 경험한 좋은 사람이었다.

“이제 이곳에 더 많은 교단의 식구들이 올 것입니다. 부디 그들이 무사히 임무를 수행했으면 좋겠군요.”

이곳에 악마 숭배자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마약을 유통시킨 것조차 사악한 의식을 위한 제물 만들기였다는 것도 밝혀졌고.

이제 어둠 속에서 움직이던 구마사제는 뒤로 물러나고 성전기사단이 활약할 차례였다. 영주와의 연결 고리도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니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수가 있겠지.

결코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사실 한발 물러나서 교단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신앙의 불모지에 단단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

명분은 충분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사악한 음모를 꾸몄다는 명백한 증거에, 영주와의 연결 고리가 의심스러우니 다른 영주들까지도 압박할 수가 있고, 심지어 지역 주민의 환영까지 받을 테니.

아마 이 땅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성황청의 다른 교단들까지 하나둘씩 숟가락을 얹게 될 터였다. 동쪽에서 발생한 전쟁과 남부의 혼란으로 아무리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사정이야 어쨌든 동료들을 걱정하는 델피노의 순수한 마음에는 아이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 것이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탁.

잠시 동료들을 위해 기도를 올린 델피노는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이것은 약속한 보수입니다.”

“처음 계약보다 조금 더 묵직한 것 같은데?”

“그만큼 고생을 하셨으니 당연합니다. 노력에는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죠.”

아이반은 거절하지 않고 주머니를 챙겼다.

운동선수에게 몸값이 자존심이듯 용병에게도 몸값은 자존심이었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한 푼도 깎을 수가 없다는 독기였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 값을 낮추는 일이었으니까.

아룬 교단은 부유한 편이니 조금 더 챙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 주십시오.”

델피노는 추가로 작은 단검을 내밀었다.

겨우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으나 화려한 세공이 되어 있는 은도금 단검이었다. 이것만 해도 아이반이 받았던 의뢰비 이상의 가치가 충분히 있을 터였다.

“이건 무엇이오?”

“계약을 넘어 교단의 은인에게 주는 징표입니다.”

아룬 교단에 큰 기여를 한 외부인에게 주는 선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심신이 맑아지고 사악한 마귀와 악령들을 쫓아낼 수가 있다고 했다.

“대신전에서 일 년 동안 축복한 단검입니다. 대륙 어디를 가든 아룬 교단의 식구에게 그 단검을 보여 준다면 호의적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슬쩍 웃으면서 덧붙였다.

“조금 더 현실적인 혜택을 말하자면 교단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을 할인해 드립니다. 아룬 교단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으니 꽤나 유용하겠죠.”

교단에서 판매하는 것은 단순히 성수만이 아니었다. 교단이 직접 생산한 물건뿐만 아니라 신도들이 생산한 물품 역시 일부 교단의 이름으로 보증하여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할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교단의 은인에게 주는 징표라는데 찔끔 내리지는 않겠지.

아이반이 단검을 받아 들자 뭔가 청명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귀한 선물이오.”

“하하, 사실 내일 성전기사들이 드릴 예정이었는데 제가 드리겠다고 우겨서 가져왔습니다. 좋아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그러고 델피노는 무심코 차를 마셨다가 흠칫 놀라 입을 뗐다.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델피노가 찻잔을 멀리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반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자신이 대접한 차를 그가 마시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용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본론이 남아 있었다.

“밤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지는 않군.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 보시오.”

인사야 아침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을 건네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가 굳이 밤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반이 빤히 바라보자 델피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노르드의 신들께서 당신에게 참으로 무거운 사랑을 내려 주셨더군요.”

“뭐, 그렇지. 감당하기 버거운 관심이오.”

아이반이 그렇게 말을 받자 델피노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이것이 실례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곡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델피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신은 무너질 겁니다. 그릇이 깨져서 목숨을 잃게 되겠죠.”

그 말에 아이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찻잔 대신 인벤토리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차보다는 술이 필요한 이야기로군.”

아이반이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내려놓았다. 그가 내밀자 델피노 역시 한 모금 크게 마시고는 입을 닦았다.

“계속 말을 해 주시오.”

“신들의 사랑은 때로 우리 같은 필멸자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기도 합니다. 가지고 있는 그릇 이상의 힘을 받으면 결국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죠. 이미 당신도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아이반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최근 들어서 크게 느끼고 있는 일이었다.

신성력은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게 빌려 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노력보다 초월자의 의지가 더욱 중요했다.

막말로 신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면 신성력이 강한 것이고, 신들이 관심이 없다면 신성력이 약했다.

문제는 아이반이 과한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이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인은 그도 알고 있었다.

‘스킬 포인트의 부작용이야.’

스킬 포인트는 아주 간단하게 힘을 주었다. 언어학을 배우면 온갖 언어에 능통하게 되고, 검술을 배우면 세세한 움직임과 원리까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게 신성력까지 작용되니 이런 일이 생긴 거다.

신성력 스킬은 신들의 관심을 강제로 끌어왔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아이반에게 호감이 생긴 것이다.

아이반의 수준이 높지 않았으니 아주 미약한 정도겠지만 신격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엇이 나의 관심을 가져가는가, 무엇이 호감을 만들었는가, 내가 은총을 내리지 않은 자가 어떻게 나의 힘을 사용하는가.

그때부터 아이반은 자신이 찍은 스킬 이상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정말로 신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지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천상의 신들이 몇이나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아이반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신들의 존재감은 너무나 선명해서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신들을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아이반이 수많은 기술들을 익혔으면서도 막상 정말로 힘이 필요한 순간이 되면 신을 찾는 것은 그런 공포에서 오는 의존성 때문일 것이다.

아이반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술병을 털어 비웠다.

“고맙소. 앞으로는 조심해야겠군.”

* * *

휙휙!

신전을 떠난 아이반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검을 휘두르기를 계속했다. 전투 때마다 아스가르드의 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고치려는 의도에서였다.

입으로는 그렇게 싫다 소리를 치면서도 정작 그들의 힘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게 쉬운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일이었다. 신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진작 이랬어야 했다.

치지직!

그런 아이반의 다짐이 토르는 못마땅한 듯했지만 다른 신들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이것 또한 나름의 재미라고 여긴 것이겠지.

자신에게 반항하는 사람에게 더 끌린다니, ‘나를 때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를 외치는 드라마 속의 재벌도 아니고. 하여간 취향이 음흉한 놈들이었다.

아이반이 그렇게 검을 휘두르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산길 한가운데 누군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길이라고는 이것 하나뿐이고, 심지어 인적도 드문 곳이라 아이반은 무척이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사람이군. 돌아갈까?’

의심스러운 상황은 일단 피하는 것이 옳았다. 괜히 호기심을 드러냈다가 위험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아이반이 슬쩍 길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려는데 저 멀리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아이반은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묻겠다! 그대가 감히 에시르손이라 자칭한 자인가!”

아이반 에시르손. 그의 이름. 아니, 이제는 그의 것이 되어 버린 이름.

아이반이 피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그 대답과 함께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슬 갑옷에 철제 투구, 등에는 둥근 방패가 걸려 있고, 허리춤에는 검과 도끼가 달랑달랑. 남자의 팔뚝은 근육이 가득해 무척이나 굵었고, 허벅지는 그것보다 더욱 굵었다.

누가 보더라도 전사의 모습. 아이반은 크게 경계심을 높였다.

‘먼저 도끼를 날려야 하나? 아니면 창을 던질까? 거리를 벌려서 화살을 쏘는 게 나으려나?’

순간적으로 그런 고민을 했으나 차마 먼저 공격을 하지 못했다. 거친 기색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묘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면서 기쁜 듯했고, 즐거운 것 같기도 하면서 묘하게 실망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살의는 없었고, 먼저 공격하고자 하는 기색 역시 없었기에 아이반은 검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참아 냈다.

“자신이 에시르손이라고 주장하는 자여!”

“아이반 에시르손.”

“주장하는 자여!”

“그래, 무슨 일이오?”

그는 아이반을 위아래로 몇 번이나 훑어보더니 소리쳤다.

“그대가 에시르손이라 자칭할 자격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아이반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쉬익!

33화 영웅의 이름

검을 휘둘렀다. 가장 짧고 간결한 방법으로.

별다른 꾸밈이 없었기에 더욱 빠르게 느껴졌을 그 검을, 놀랍게도 상대는 허리를 비트는 것으로 쉽게 피해 냈다.

그가 만만치 않은 전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움직임을 보면 예상보다 더한 실력자인 듯했다.

쿵!

아이반이 강하게 앞발을 내디디면서 나아갔다. 검을 위에서 아래로 재차 휘둘렀다. 그 섬광 같은 공격을 상대는 무기를 뽑아 받아 냈다.

쾅!

검과 검이 부딪히고 강한 반동이 되돌아왔다. 아이반은 자신의 힘만큼이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상대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르륵.

남자가 미묘하게 검을 비트는 동작에서 노련한 전사임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육신이 강한 자가 아니라 전사로서의 역량 역시 뛰어난 자였다.

챙!

투두둑!

다시 한번 강하게 검을 휘둘러 부딪친 후에 뒤로 몸을 날리며 도끼를 집어 던졌다. 상대가 그것을 쳐 내는 사이, 아이반은 멀찍이 물러나 숲으로 들어갔다.

“잠깐! 멈추어라!”

남자가 그리 외쳤으나 아이반은 코웃음을 쳤다. 적이 멈추라고 진짜로 멈추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피우웅!

아이반은 화살을 날리면서 계속 거리를 벌렸다. 나무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가지를 옮겨 다니면서 활을 쏘고 있으니 남자가 쉽게 달라붙지 못했다.

‘설마 혼자인가? 정말로 주변에 더 없나?’

아이반은 활로 남자를 견제하면서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변을 훑었다. 난리를 부리고 있으면 이쯤에서 적이 더 튀어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것이 퍽 이상했다.

그때 남자가 분통이 터진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익! 나는 그대와 대화를 하고자 하였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그게 대화를 하려고 다가오는 사람의 기세였다고? 개소리가 창조적이군.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언뜻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라기에는 꽤나 소극적인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스윽.

아이반은 여전히 활시위를 당긴 상태로 물었다.

“대화? 무슨 대화를 하고자 하시오? 그냥 시비를 걸면서 한판 붙자는 뜻이 아니었나?”

그러자 남자가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여! 역시 그대같이 배포가 없는 자가 에시르손일 리가 없다!”

쉬이익!

쿵!

그가 강하게 손도끼를 던지자 나무 하나가 통째로 꺾여서 쓰러졌다.

아이반은 다른 나무로 건너가지 않고 그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남자의 앞에 섰다. 다른 적이 없다면 굳이 거리를 벌리면서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상대는 강하고 노련한 전사였으나 자신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활을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낸 아이반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내가 나를 에시르손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왜 시비요?”

“왜라니! 그대는 정녕 에시르손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모른단 말인가! 그러면서 감히 에시르손이라 자칭했단 말인가!”

아, 씨부럴.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달고 싶어서 달고 다니는 이름도 아닌데.

아이반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싶어 하니 일단 때려눕히고 이야기를 나눠 볼 작정이었다.

휘이익!

“큭!”

상대가 신음을 흘리며 밀려났다.

아까와는 달랐다. 그냥 평범한 무기상점에서 구입한 철검을 들었을 때와 성장형 유니크 장비를 들었을 때는 아이반의 움직임부터가 달라졌다.

치직, 치지직!

쾅!

천둥걸음, 이어서 하늘 찌르기.

남자가 방패로 막았으나 표정을 찡그렸다. 충격이 상당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대부분의 힘을 흘려 버리고 칼을 휘둘러 반격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노련했다.

스으윽.

상대가 휘두른 칼을 아이반이 창대로 막았다. 웬만한 강철 이상으로 튼튼한 창대에 흠집이 새겨지는 모습이 가슴이 아팠다.

‘가만두지 않겠…….’

속으로 이를 갈던 아이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의 검에서 번쩍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짜릿한 번개가 창을 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익숙한 힘이었다. 그가 자주 사용하던 천둥신 토르의 번개였으니까.

팟!

아이반이 그를 휙 밀어내며 창을 털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번개가 파바박 바닥을 때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 손이 저릿저릿했다. 항상 적을 태우던 토르의 번개가 자신을 향하니 꽤나 위협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천둥신의 힘이다! 그런 가짜 번개 따위로 감히 에시르손을 자칭하다니! 가만두지 않겠…….”

어딘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늘어놓던 상대가 입을 딱 벌렸다. 아이반의 몸에서 더욱 강한 번개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천둥걸음이 내뿜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천둥신 토르의 힘을 토르의 전사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망할 것.”

아이반은 아이반 나름대로 기분이 나빴다. 신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힘을 끌어다 쓰게 될 줄이야. 신의 힘을 멀리하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담배랑 다를 바가 없었다. 몸에 해롭다고 생각하며 끊어야지 다짐을 해도 결국은 손이 가는 것을 보면.

치지직!

힘을 더 빌려줄까 놀리듯 눈앞을 스치는 번개를 억누르고 몸 안에 차오르는 신의 힘을 다시 밀어냈다.

충만하게 몸속을 채우던 천둥신의 힘이 사라지고, 대신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야기를 하자고 했소? 그러면 팔다리는 필요가 없겠군.”

“자, 잠깐! 잠깐만 멈추…….”

“창에는 귀가 없소, 전사.”

* * *

카악, 퉤!

바닥에 침을 뱉은 아이반이 삐딱한 표정으로 전사의 몸을 깔고 앉았다. 제대로 제압이 된 상태로 바닥에 깔린 남자의 입에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이야기를 할 자세가 되었군. 왜 나를 찾아온 거요?”

아이반의 질문에 남자가 신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으윽! 에시르손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것을 확인하러 왔소.”

아이반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래서 왜 나를 찾아왔느냐, 에시르손이라는 것을 확인해서 어쩌려는 것이냐.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쉽게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 그러나 아이반이 창을 들어 올리자 얼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긴 것은 용암으로 샤워를 해도 뜨끈뜨끈하다고 떠들어 댈 것처럼 마초같이 생겼으면서 태세 전환은 더럽게 빠르군.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에시르손을 확인해야만 했소!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에시르손.

신들의 피가 흐르는 고귀한 혈통, 그중에서도 신들의 인정을 받은 위대한 전사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

아사 신족의 아들, 위대한 신의 전사.

그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그대 말대로 수백 년은 지난 일이오. 그런 낡은 이름에 이렇게 집착할 이유가 있나?”

낡은 이름. 그 말에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제압당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서 분노를 토해 내었다.

“낡은 이름이라! 어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고귀한 혈통의 이름이자 위대한 전사의 증거이거늘!”

그는 진심으로 분한 듯 씩씩거리면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이반이 낡은 이름이라 말했던 에시르손이 그에게만은 소중한 의미가 있었나 보다.

‘이해할 수가 없군.’

아이반이 노르드인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자신이 아이반 에시르손이라고 소개를 했을 때도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묘한 미소를 짓거나 오랜만에 듣는다며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럴 자격이 있냐며 비아냥거리거나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비를 걸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에시르손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아는 노르드인들은 아무도 그렇지 않던데. 그대만이 에시르손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군. 단순히 흥미만은 아니야. 사라진 지 수백 년도 더 지난 옛 영광의 이름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아이반이 그를 깔고 있던 자세를 벗어나 한 걸음 물러서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서는 고통이 느껴졌고 옷가지는 흙먼지로 더럽혀졌으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나는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의 아들이자 오래전 위대한 전사들에게 무기를 건네주었던 자의 후손이오.”

그 말에 아이반은 피알라르의 손을 흘깃 보았다. 확실히 무기를 들어서 생긴 것과는 다른 형태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저 전사일 뿐만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자이기도 했다.

대장장이가 전사를 겸하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원래 노르드에서는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여길 정도로 전투적이었다.

“그래,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의 아들. 당신은 어떻게 에시르손을 확인하려 했소? 그렇게 확인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소?”

피알라르는 어떻게 확인하려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그저 목적만을 읊었다.

“진정한 영웅에게 내가 만든 검을 바치려 했소. 그게 선대의 임무였고, 나의 목표니까.”

그는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 같은 것이라 해도.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장인을 칭송하지 않소. 가장 훌륭한 영웅의 무구를 만든 자를 칭송하지.”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돌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이 만든 무구를 사용해 줄 진정한 영웅을 찾기 위해.

“글쎄, 영웅이 과연 그대의 무기를 써 줄까? 그만한 실력이 그대에게 있다는 소리요?”

아이반의 물음에 피알라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당신이 쓰는 싸구려 무기들보다는 괜찮겠지. 당신이 들고 있는 창은 훌륭한 녀석이지만 나머지는 형편없소.”

그 말에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몇 개는 나름 실력이 좋다는 장인에게 구입한 것인데…….’

히드라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주었던 그 장인에게서 구한 것들도 있었다. 그걸 모두 싸구려라고 딱 잘라 말하니 괜히 불쾌해졌다. 더럽게 비싸게 주고 샀는데.

“으흠…….”

피알라르는 통증으로 욱신거리는 몸이 영 신경 쓰이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병에 찰랑이는 황금색 액체. 뚜껑을 여니 상큼하고 달콤한 사과향이 가득 퍼졌다.

피알라르가 그걸 들이켜자 그의 몸에 생겨났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일종의 회복 포션인 셈이다.

“이둔의 황금사과를 갈아 만든 회복약이군. 맛이 좋은 대신 더럽게 비싸서 웬만해서는 구할 수가 없는데…….”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피알라르가 황금사과 주스를 하나 더 꺼내 그에게 던졌다.

“그쪽도 하나 드시든가.”

아이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받아 든 황금사과 주스를 쭉 들이켰다. 독이 든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괜히 배포가 작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꿀꺽.

한 모금 넘기는데 입안에 화려한 맛이 번졌다.

과연 이둔의 신성력으로 키운 황금사과. 일반적인 과일을 뛰어넘는 달콤함과 상큼함이다. 솔직히 그가 평생 먹어 왔던 사과주스보다 훨씬 맛있었다.

“무기가 잘 팔리는 모양이오. 이런 것을 몇 병씩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누가 만든 무기인데,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나의 이름을 역사에 남겨 줄 영웅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일이오.”

그는 무척이나 자부심이 강했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내 창에 그런 흔적을 남기다니, 저 무기도 평범한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군.’

아이반이 그렇게 자신의 창을 바라보고 있으니 피알라르가 입을 열었다.

“패배한 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 당신이 영웅의 이름에 어울리는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건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에시르손은 노르드 전사들 중 최고라고 칭할 만한 자가 아니면 결코 짊어질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아니, 그들조차 부담스러워서 수백 년을 내려놓았던 이름이었다. 적어도 피알라르가 보기에 아이반은 자격이 부족했다.

“하지만 싹이라면 보이는군. 따라오시오. 당신의 창에 생긴 흉터는 지워야 하지 않겠소?”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알라르의 뒤를 따랐다.

그는 손에 든 유리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스가르드에도 괜찮은 신이 있군.’

34화 돼지 사냥

피알라르는 과격해 보이는 첫인상에 비해 꽤나 신사적인 남자였다. 비록 목소리가 걸걸하고 무척이나 시끄러웠지만.

그는 길을 걸으면서 몇 번이나 강조했다.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대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소.”

“그리 거친 기세로 다가와 놓고?”

“…뭐, 다소 오해의 소지는 있었지.”

피알라르는 그래도 제대로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먼저 칼부터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작게 투덜거리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신은 그 누구보다 노르드의 전사다운 사내로군.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노르드의 정신을 잃어버렸소. 그래서 진정한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야.”

“나는 딱히 노르드의 전사답게 행동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게 생각한다고 되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지. 그게 맞는 건데.”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는 전사가 되기보다는 모략꾼이 되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오. 그게 대륙의 놈들이 말하는 소위 ‘문명화’가 된 결과인 셈이지.”

대륙인들은 노르드의 사람들을 무식하고 폭력적인 야만인이라고 여기지만 과연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앞에서 칼을 휘두르지 않고 뒤에서 휘두르는 것이 ‘문명화’가 된 일인가.

피알라르는 그것에 대해 말을 늘어놓으며 짙은 경멸과 분노를 섞었다. 노르드인이 아닌 자들, 그들이 대륙인이라 부르는 존재에게 꽤나 시달림을 당했던 모양이다.

인종 차별, 종족 차별, 남녀 차별, 신분 차별, 빈부 차별.

이전 세계에 비해 이 빌어먹을 땅에서는 그런 차별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인권이란 개념은 학자들이나 떠드는 이상적인 단어였고, 현실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자들을 차별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익숙한 세상이었다.

아이반 역시 어느 정도 힘과 명성을 쌓기 전에는 아주 지독한 대접을 받았고, 지금도 은연중에 그를 깔보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비록 그의 칼이 무서워서 대놓고 말은 못 해도.

고생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보던 아이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것은 노르드인들도 마찬가지이지.’

노르드인이라고 그를 반갑게 맞이했던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나, 뒤에서 칼로 찌르나 결국 당하는 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감성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그놈이 그놈이었다.

노르드인들의 가장 큰 돈벌이가 노략질이었다.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서 용병질이지.

사실 몇몇 신뢰할 만한 용병들을 제외하면 용병질이라고 해도 결국 노략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소위 문명화가 되었다는 대륙의 귀족들조차 승자의 권리라면서 당당하게 강간, 약탈, 방화를 하는 시대였으니.

‘갑자기 델피노가 그립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몇 안 되는 인격자였는데.’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짐짓 피알라르에게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명인들은 예의 없는 말을 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야만인보다 더 무례하지.”

옛날, 어디선가 봤던 말을 늘어놓으니 피알라르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 바로 그거요! 그 말이 정말로 옳다니까!”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도착한 곳은 근처에 위치한 소도시였다.

나지막한 성벽에 한껏 풀어져서 하품을 쩍 내뱉고 있는 병사들.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훑고만 지나가는 출입심사.

어떻게 보면 나태하고, 어떻게 보면 평화에 길들어진 모습이었다. 로만 왕국의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린스킨과의 전쟁이나 근처에서 발생한 악마 숭배자들의 음모 역시 이곳까지는 아직 여파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기는 그게 전부요?”

“뭐, 더 있어야 하나?”

“그건 아니지. 이쪽은 좀 눈에 익은 것 같은데……. 흠, 통과!”

무장을 마친 근육질 덩치 둘이 같이 도시로 들어가려 하니 잠깐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졌으나 병사는 결국 통과를 외쳤다. 괜히 여기서 잡아 봐야 귀찮기만 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피알라르는 성벽에 붙어 있는 어느 집으로 안내했다. 내부에는 가구가 별로 없어 싸늘했지만 한쪽에 딸려 있는 작업실에는 이런저런 쇳조각들이 가득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소?”

“지금은. 곧 떠날 거요. 이 근처는 다 훑어서 썩 매력적이지 않아졌거든.”

“매력적이지 않다?”

“영웅의 씨앗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요. 나는 내 무기를 사용할 사람을 찾고 있으니까.”

화르륵!

화로에 불을 지핀 피알라르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앉으시오. 창을 손질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건네주자 피알라르 역시 자신의 아공간 상자에서 도구를 꺼내 창을 다듬기 시작했다.

꽤나 겉이 낡아 있는 것을 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물건인 듯했다.

아이반이 그걸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피알라르가 마치 뽐내듯 말했다.

“대대로 우리 집안에서 사용하던 것이오. 이 마법의 상자 같은 경우는 이 땅으로 넘어오기 전부터 쓰던 녀석이지.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직계 혈통이 아니면 다른 이들은 열 수가 없소. 어리석은 많은 이들이 시도를 했다가 목숨을 잃었지. 그런 마법이 걸려 있거든.”

“꽤나 강력한 마법인가 보군.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뭐, 옛 난쟁이들의 솜씨지. 지금 저기 산맥 속에 파묻혀 있는 드워프가 아니라 그 난쟁이 말이오.”

신화 속에서 가끔 신들도 엿 먹였다는 난쟁이의 솜씨라면 그리 자신만만할 법도 했다. 보통의 인간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아이반은 자신의 힘을 굳이 시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슥, 슥!

피알라르는 창을 손질하면서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비는 형편없으면서 이 창만큼은 정말로 좋군. 살아 있는 녀석이오. 아주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 혹시 이것도 옛 난쟁이가 만든 물건이오?”

“글쎄, 잘 모르겠소. 내가 아는 건 그 창의 이름이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라는 것밖에 없소.”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라, 아주 묘한 이름이군. 이 녀석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지 궁금한데.”

그는 창에 새겨져 있는 룬 문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름에는 힘이 담겨 있소. 옛 난쟁이들의 물건이라면 더욱 그러하고. 이 창이 그대를 어디로 이끌지 궁금하군.”

그 말에 아이반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듣고 보니 자신의 처지와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창은 과연 길을 잃은 대전사에게 길을 찾아 주는 녀석일까, 아니면 길을 잃게 만드는 녀석일까.

“손질은 끝났소. 별거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나을 거요.”

창을 건네받자마자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날을 갈고, 흠집을 지운 뒤에 무언가를 발랐을 뿐인데 왠지 손에 착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전보다 손에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창의 움직임도 뭔가 더 호쾌해진 듯했다. 창이 품고 있는 힘의 변화는 전혀 없었지만 손맛이 달랐다.

쉬이익!

팡!

“잠깐 손을 대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달라진다고?”

아이반이 놀라서 눈썹을 위로 올리자 피알라르가 껄껄 웃었다.

“그게 제대로 된 장인의 솜씨지. 이전의 창은 당신에게 맞춰진 물건이 아니었으니 아주 약간만 바꾸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다고 느끼는 거요. 수준 높은 전사들은 민감한 법이니까.”

“잠깐 손댄 창이 이 정도면 당신의 무기는 어느 정도일지 몹시 탐나는군.”

“미안하지만 무기는 줄 수가 없소. 내가 팔아 봐야 그 창이 있는 이상 당신에게는 부무장밖에는 안 되니까.”

“이 창보다 좋은 물건은 없는 모양이오?”

“글쎄, 있다면 그건 진정한 영웅에게 갈 물건이겠지. 언젠가 당신이 노르드의 모두에게 진정한 에시르손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그때 기꺼이 무기를 바치겠소. 그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니까.”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아이반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지금 내 방어구가 마땅치 않소. 괜찮은 방어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소? 당신이 팔지 않는다면 다른 괜찮은 자라도 소개를 해 주시오.”

그 말에 피알라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구는 내 전문이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해 줄 수가 있지. 대신 그대가 재료를 가져와야 할 거요. 훌륭한 재료가 아니라면 결과도 훌륭하게 나오지는 않겠지.”

실력 있는 장인인 만큼 피알라르의 기준은 상당히 까다로울 터였다. 그가 훌륭한 재료라고 표현할 정도면 결코 개나 소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아이반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걱정 마시오. 귀한 놈으로 가져오지.”

* * *

“그, 이쪽으로 가면 정말로 뭐가 나오는 거요?”

피알라르가 의심스럽다는 듯 그렇게 묻자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그렇게 떠들어 댈 거면 그냥 돌아가시오. 지금도 억지로 끼워 준 것이니까.”

“아니, 당신이 그리도 귀한 재료라고 자신만만하니 뭔가 좀 의심스러워서 그렇지.”

“닥치고 따라오시오. 예민한 놈이라 계속 떠들어 대면 근처에 코빼기도 안 보일 거요.”

피알라르에게 강하게 경고한 아이반이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살폈다. 은신에 용한 놈은 아니었다. 분명 찾다 보면 흔적이 있기는 할 거다.

아이반은 그렇게 삼 일 동안 말 한마디 뱉지 않고 찾아다닌 끝에 겨우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커다란 짐승의 발자국, 부러진 나무, 그곳에 끼어 있는 황금색 털.

“황금색 털? 도대체 뭘 추적하고 있는 거요?”

“황금 멧돼지.”

“뭐? 굴린부르스티? 그게 이곳에 있다고?”

굴린부르스티는 아스가르드의 신, 프레이가 타고 다니는 황금색의 멧돼지였다. 물속이든 하늘이든 그 무엇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신화 속의 영물.

당연히 아이반이 노리는 것은 그런 놈이 아니었다.

“미쳤소? 내가 그런 놈을 어떻게 잡아? 내가 노리는 놈은 그저 황금색 털을 가진 멧돼지요. 튼튼한 가죽을 지녔지만 굴린부르스티와 비교될 만한 놈은 아니지.”

정체야 어쨌든 녀석의 가죽은 방어구로서는 무척이나 훌륭한 재료였다. 물론 사냥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쪽으로 가 봐야겠소. 이제 슬슬 녀석의 영역을 찾은 것 같으니.”

찾은 단서를 토대로 점점 범위를 좁혀 간다. 중간에 겁 없는 몬스터들이 공격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둘 다 숙련된 전사들이라 어렵지 않게 때려눕히면서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추적이 쉽지는 않았다. 원래 야생동물들은 생각보다 훨씬 활동 범위가 넓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금 멧돼지는 그 털빛만큼은 신화와 연결되어 있는 영물이었고.

“이쯤 되면 모습이 보일 법도 한데 더럽게 비싸게 구는군.”

“실제로 비싼 놈이잖소? 귀한 놈이니 찾는 게 어려울 수밖에.”

아이반은 녀석이 한 바가지 질펀하게 싸 놓은 변을 나뭇가지로 찔러 보았다.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고 수분이 남아 있었다. 녀석의 흔적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점점 흔적이 잦아지고 있었다. 이 근처에 녀석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쁘지 않군. 좀 고생하기는 해도 잘 찾아가고 있…….”

말을 하던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 앞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보지 못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짐승은 아니었다. 이족보행을 하는, 지성을 가진 자들이다.

풀이 눌린 자국을 따라가다 마침내 흐릿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한 아이반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피알라르가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시오?”

“이 발자국. 신발이 좀 익숙해서. 이런 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보통 오크들의 발자국인데…….”

오크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원래 이곳에 살던 놈들인가?

“혹시 이 근처에 오크 부족이 있다는 소리 들어 보신 적 있으시오?”

“흠, 나도 이 지역 출신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피의 동맹에 합류하지 않은 독립 오크 부족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 놈들이었으면 좋겠지만 영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그 동굴 쪽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빠르게 주변을 좀 확인해 보고 갈 테니까.”

아이반은 그렇게 말하고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레인저와 암살자의 기술이 합쳐지니 숲을 달릴 때도 크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 연습을 한 보람이 있었다.

‘흔적만 보면 열 명이 안 되는데, 혹시 한 무리만 있는 게 아닌가?’

빠르게 움직이던 아이반이 문득 허리를 낮췄다. 멀리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근처 나무로 올라가니 오크들이 뭐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 보니 황금 멧돼지를 거의 잡았다가 놓친 모양이었다. 지금 다른 조에서 추적 중이라는 말도 있고.

그러나 아이반은 그 내용보다도 말 그 자체에 집중했다. 아이반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북동부식 오크 방언. 이쪽 녀석들이 아니야.’

아이반은 무심코 동쪽을 바라보았다.

결국 동부 전선이 무너졌다.

35화 그를 위해서

약속했던 동굴에서 피알라르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싸구려 육포가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지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그의 표정은 아이반을 보고서 더욱 굳어졌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피알라르가 씹고 있던 육포를 퉤, 하고 뱉고는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주변은 살펴봤소?”

“살펴봤는데, 상황이 그리 좋지 않소.”

“황금 돼지와 초록 돼지가 동시에 돌아다니는데 좋을 리가 없지. 정보가 있소?”

아이반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짧은 검을 꺼내 들면서 말했다.

“일단 황금 멧돼지는 잡히지 않았소. 하지만 오크 놈들이 그걸 추적하고 있는 중이지.”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고.”

“이 지역 오크 놈들이 아니오. 동북부에서 내려온 놈들이더군. 동부 전선에서 녀석들을 막아내는 데 실패했소.”

동부 전선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든, 이미 무너졌든 상황이 더럽게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피알라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황금 멧돼지고 나발이고 온통 전쟁터가 되게 생겼군. 여기에 나타난 놈들의 수가 많소?”

“확인한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꽤나 많겠지. 그러니 놈들이 여유롭게 황금 멧돼지나 사냥하고 있는 게 아니겠소?”

아이반은 피알라르를 재촉했다.

“빨리 움직여야 하오. 괜히 녀석들에게 들켜서 공격을 받으면 그저 귀찮은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젠장, 재수도 더럽게 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않는 건데.”

그들은 황금 멧돼지를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어서 빨리 도시에 알려야 했다.

오크들의 동선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동하는 와중에 문득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들렸다.

쉬익, 쉬익!

저 멀리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웬만한 황소보다도 덩치가 커다랗고 털빛이 황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이 찾아다니던 황금 멧돼지가 분명했다.

“…저 녀석이 당신이 말하던 그 녀석이오? 확실히 대단해 보이는군. 저 녀석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들면 아주 훌륭하겠어.”

훌륭한 재료를 만난 피알라르의 눈이 몽롱해졌다. 수많은 재료를 다루어 봤지만 그도 황금 멧돼지는 결단코 처음이었다. 장인에게 처음 만나는 재료만큼 설레는 것이 있을까?

“욕심을 비우니까 녀석이 나타났군. 세상일이란 것이 모두 이런 식이라니까.”

“오크를 피해서 움직이다 보니 저 녀석과 동선이 겹쳤나 보오. 오크들이 녀석을 우리 쪽으로 몰아준 꼴이 되어 버렸어.”

“어찌하시겠소? 저 녀석을 잡을 거요? 잔뜩 지쳐 보이는 게 지금이 기회 같은데.”

그 물음에 아이반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지?’

오크들이 저 녀석을 쫓고 있으니 이대로 시간을 끌면 결국 마주치고 말 거다. 저 녀석을 사냥한다고 소란을 벌이면 오크들이 더욱 빨리 오겠지.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약간의 여유가 있기는 했다. 저 녀석이 쉬고 있다는 뜻은 오크들과 꽤 거리를 벌렸다는 뜻일 테니까.

녀석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반짝이며 움직이는 황금색 털가죽. 그것을 보고 있으니 아이반의 눈동자에 욕심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스윽.

결국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빠르게 녀석을 처리하고 통째로 아공간에 넣어 가져가야겠소. 시간을 더 끌 이유가 없군.”

“흐흐, 좋은 생각이오.”

꽈악!

아이반이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자세를 잡았다. 목표는 녀석의 심장. 일격에 꿰뚫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쉬익!

한껏 마력을 담아서 집어 던지니 창이 마치 사라진 듯이 보였다. 아이반이 던진 창이 어느새 녀석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뀌이익!”

녀석이 화들짝 놀라 몸을 틀었다. 아이반의 투창이 녀석의 심장 대신 가죽만 잘라 내고 튕겨 나왔다. 피가 왈칵 쏟아졌으나 목숨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놈이 날뛰기 시작했다.

“젠장! 저걸 피했다고?”

가죽이 지나치게 튼튼한 탓도 있었다. 만약 아이반이 활을 쏘았으면 화살이 박히지도 않았으리라.

차르륵!

피알라르가 강철로 된 그물을 뿌렸다. 황금 멧돼지를 뒤덮은 그물이 바닥에 박혀 들었다가 이내 으드득 끊어졌다. 중대형 몬스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만든 물건인데 잠깐을 버티지 못했다.

“맙소사, 괴물은 괴물이군!”

쾅!

단숨에 천둥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녀석의 머리를 베려고 했으나 칼이 깊이 박히지가 않았다. 지독하게 가죽이 질겼다.

왈칵!

녀석의 목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황금색 가죽을 적셨다. 황금 멧돼지가 고통과 분노, 공포에 질려서 몸을 비틀었다.

“크허엉!”

둥! 둥!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파였다. 나무가 쓰러지고 바위가 부서져 나갔다. 짐승 하나가 날뛰는 것만으로 산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퍽!

녀석의 박치기를 방패로 막아 낸 아이반이 멀찍이 날아가 나무를 쓰러뜨리고 바닥에 넘어졌다. 튼튼한 방패가 쪼개지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망할 놈, 힘은 더럽게 좋네.”

아이반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콧김을 잔뜩 뿜으며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아이반을 죽이겠다는 기세였다. 그야말로 저돌적이었다.

“흐읍!”

아이반이 도끼를 집어 던졌다. 그의 도끼가 녀석의 엄니를 부수고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놈이 고통에 고개를 돌리자 달려오던 방향이 틀어졌다.

아이반은 녀석이 그를 지나치려 할 때 훌쩍 몸을 날려서 놈의 등에 올라탔다. 무척이나 흔들리고 불안정했지만 아이반은 털가죽을 붙잡고 녀석의 목덜미까지 기어갔다.

“아이반!”

피알라르가 크게 소리치며 그에게 창을 던졌다. 그걸 낚아챈 아이반이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꿰뚫고 창을 박아 넣었다.

관천, 하늘 꿰뚫기.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고 지나가겠다는, 아주 단순하고 파괴적인 기교가 녀석의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 뇌를 휘저었다. 그러자 녀석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닦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은 다 뒤집어지고 나무는 모두 꺾여 있었다. 이렇게나 난리를 쳤으니 오크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스윽.

아이반은 숨이 끊어진 황금 멧돼지의 시체를 통째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쉴 시간이 없소. 뒈지기 싫으면 미친 듯이 달리시오.”

* * *

뒤늦게 아이반과 피알라르의 존재를 알고 추적해 오는 오크들이 수백이었다. 그들은 추적자들을 제거하면서 빠르게 몸을 내뺐다. 오크들은 이쪽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서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도망칠 수가 있었다.

완전히 분노로 눈이 돌아 버려서 끝까지 쫓아올 것 같던 오크들은 아이반과 피알라르가 산맥을 넘으니 다시 되돌아갔다. 아직까지 산맥을 넘기엔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다시 피알라르가 머물고 있던 소도시로 돌아온 둘은 그대로 경비대를 찾아가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증언했다.

“우리는 저 산맥 너머에서 오크 무리를 보았소.”

“뭐? 거기까지 갔다고? 그런데 오크들이야 어디서나 잘 나타나는 놈들이 아닌가?”

“녀석들이 쓰는 말을 들었소. 무기도 확인했지.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소. 지금 동부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그 녀석들이오. 동부 전선이 무너졌으니 이곳으로 녀석들이 곧 들이닥칠 거요. 방어 준비를 해야만 하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이반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굳건하게 로만 왕국의 동쪽을 지키던 동부 전선이 무너졌다는 말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동부 전선이 무너진다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나 알고서 하는 말이냐! 야만인 둘이서 헛소리나 늘어놓는군!”

비난, 비웃음, 불신.

피알라르는 크나큰 모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감히 전사의 말을 거짓이라고 음해한단 말인가.

“젠장! 이래서 대륙인들과는 이야기가 안 통한다니까! 그렇게 있다가 오크 놈들에게 몸이 토막 나야만 정신을 차리지!”

피알라르는 몹시 불쾌한 기색이었다. 당장이라도 경비대를 때려눕힐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간신히 화를 참아 내고 자리를 떠났다. 휙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싸늘했다.

자신의 공방으로 돌아온 피알라르가 코웃음을 쳤다.

“잘되었군. 어차피 떠나려고 했는데.”

애초에 이곳은 대륙인인 로만 왕국의 영역이지 노르드의 땅이 아니었다. 이곳이 전쟁터가 되든 어쩌든 그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나는 다시 노르드로 돌아가려고 하오. 이런 곳에서 영웅을 찾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는 혐오스러운 감정을 가득 담아 몇 번이고 대륙인들을 욕하더니 아이반에게 말했다.

“아이반, 나와 함께 노르드로 돌아갑시다. 내 그곳에서 거하게 대접하겠소.”

그 말에 아이반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초대해 줘서 감사하지만, 나는 이곳에 남아야겠소.”

“뭐? 설마 여기서 오크 녀석들과 싸울 생각이오? 저 멍청하고 무례한 대륙인 놈들을 위해?”

믿지 못하겠다는 피알라르의 눈빛에 아이반이 피식 웃으며 긍정했다.

“그렇소. 그리할 것이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신들이 피와 죽음, 전투를 원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무분별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전쟁은 막대한 경험치를 주었다. 특히나 그것이 메인 이벤트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아이반의 영적인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는 결국 레벨을 올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른 신앙인들처럼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해서 기도를 하며 정신을 단련하는 일은 그와 전혀 맞지 않았다.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아이반에게는 어느새 평화보다 전투가 더 익숙해졌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것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 전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이들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었다고?”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지. 그럼에도 나는 이리해야만 하오.”

계속 위험을 회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다가올 더 큰 위험에 잡아먹힐 것이다. 운명의 주박은 퀘스트란 이름으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살아남아 영웅이 되거나, 실패해서 망자가 되거나.

아이반이 원치 않은 선택지가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지만 그는 영웅을 탐내지 않았다. 그저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뿐이다.

속사정이야 어쨌든 그런 아이반의 모습은 꽤나 영웅적으로 보였다. 그게 피알라르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는 챙기고 있던 짐들을 다시 풀어 놓았다. 마법의 상자에서 도구를 꺼내 늘어놓고는 차갑게 식어 있던 화로에 불을 붙였다.

“…사흘. 그 안에 황금 멧돼지의 가죽으로 당신의 방어구를 만들어 드리겠소. 그 뒤에 나는 미련 없이 떠날 거요.”

갓 잡은 짐승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드는 데 사흘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말리고, 다듬고, 자르고, 손질하고. 그 과정들을 생각하면 일반적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옛 난쟁이들의 마법 같은 기술을 일부나마 전승하고 있는 피알라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고맙소.”

“약속을 지킬 뿐이오. 훌륭한 재료를 가져오면 방어구를 만들어 준다고 했으니.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는 없지.”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황금 멧돼지의 시체를 꺼내 놓자 피알라르는 그를 밖으로 쫓아냈다. 작업을 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면 방해가 될 뿐이었다.

아이반은 그 앞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그동안 공방에서는 끊임없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 망치를 모루에 내리치는 소리, 무언가를 찢고, 자르고, 새겨 넣는 소리.

그리고 사흘 뒤, 마침내 소리가 멈췄다.

끼익.

공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피알라르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그 짧은 시간, 살이 빠진 듯 얼굴이 홀쭉하고 기운이 없었다.

아이반은 그가 사흘 내내 작업을 계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계속.

“…다 끝났소. 안으로 들어오시오.”

그의 입에서는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반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깐 쉬기를 권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아이반에게 완성품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건 당신의 물건이오. 당신이 그것을 집어 드는 모습을 나는 반드시 봐야만 하겠소. 그래야만 완성이 될 테니까.”

피알라르의 몸은 쇠약해졌을지언정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했다. 장인의 정신으로 밝게 빛났다.

“흐흐, 내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왔소. 당신도 만족할 거요.”

그가 장담한 대로였다. 피알라르의 작품을 확인한 아이반이 놀라움에 입을 떡 벌렸다.

‘이걸 겨우 사흘 만에 만들었다고?’

36화 씨를 뿌려라

황금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가죽 갑옷이었다.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깨와 팔, 다리까지 모두 갖춰진 한 세트였다.

보통이라면 몇 달을 고생하고서도 감히 완성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을, 그는 겨우 사흘 만에 만들어 낸 것이다. 실로 놀라운 솜씨였다.

‘이런 자를 내가 모르고 있었다고?’

이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장인이라면 이름이 알려졌어야 옳았다. 물론, 그의 무기가 잘 팔린다고 했으니 북쪽에서는 나름 유명한 사람이겠지만…….

노르드, 장인, 영웅, 그뷔드뮌드 손.

아이반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키워드가 재조합되었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가 얼핏 떠올랐다.

메마른 땅의 대장장이, 황금망치.

게임이던 시절, 당연하게도 각 지역마다 무기를 수리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이 있었다. 그중 서부 메마른 땅에 있는 대장간의 주인이 바로 황금망치였다. 아주 시니컬하고 돈을 더럽게 밝히던, 그런 캐릭터.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모르고 있었지만 일단 의심을 하고 보니 묘하게 피알라르와 황금망치가 닮은 것 같았다.

‘본인일까? 아니면 아버지나 혈족?’

만약에 본인이라면 도대체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기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 걸까.

게임은 모든 캐릭터의 과거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줬을 뿐이다.

“어떻소? 꽤나 괜찮지 않소?”

“훌륭하오. 그 짧은 시간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소. 성능이 중요한 거지.”

아이반은 그가 건네주는 황금 가죽 갑옷을 감탄스럽게 바라보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급하게 만든다고 어딘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당장 황금으로 빛나는 것만 해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착용을 하니 황금빛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빛을 빨아들이는 듯 검은색으로 변했고, 조금 헐렁한 듯하던 갑옷이 스스로 크기를 줄여서 아이반의 몸에 달라붙었다. 갑옷을 입었으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가벼웠다.

퉁퉁!

아이반이 가슴을 두드려 보았다. 입을 때는 그리도 부드럽던 것이 무척이나 단단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유니크급이다.

“흐흐흐, 어떻소?”

“굉장하오. 이런 걸 만들 수가 있다니 내 장비들을 쓰레기 취급을 할 법도 하지.”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 그건 내 선물이오. 부디 그대가 미래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아이반이 값을 치르려고 했으나 피알라르는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그는 아이반을 밖으로 내쫓았다.

“나는 이제 밥도 먹고 좀 자야겠소. 그러니 그냥 가시구려.”

아이반이 다음 날 다시 찾아갔으나 피알라르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대로 딱 사흘만 더 머물고 가 버린 모양이다.

언젠가 메마른 땅으로 간다면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어쨌든 그렇게 나흘이 지나는 사이, 도시는 부쩍 소란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야만인들의 말이라면 못 믿겠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아이반의 정체를 알고는 크게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사람들과, 오크 로드의 아들을 죽이고 흑마법사 무리를 해치운 업적이 있는데 과연 거짓을 말하겠냐는 사람들, 그리고 그는 아이반이 아니라 그저 사칭하는 다른 자일 것이라는 사람들까지.

사실 아이반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쪽에 더 가까웠다. 수백 년을 든든하게 로만 왕국을 지켜 온 동부 전선에 대한 믿음이 그리도 두터웠다.

그렇게 긴가민가하는 사이, 동쪽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동부 전선이 무너졌고, 마침내 동부 회색성채가 놈들의 손에 떨어졌노라고.

큰 전쟁 없이 평화에 물들어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일이 눈앞에 닥쳤다. 이곳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고,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시장에는 먹을 것이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는 버티기를 택했고, 누군가는 피난을 선택했다. 병사들은 싸우고자 무기를 들었으나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팔이 덜덜 떨렸다.

“…아주 개판이로군.”

급히 그를 초청한 경비대에서 적들에 대해 설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이반은 한심함에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병사들은 싸우고자 하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주민들에게는 전쟁을 대비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다들 혼란에 빠져서는 적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먼저 무너져 내릴 기세였다.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줄었다. 가게도 문을 닫고 침묵에 빠졌다. 몇몇 곳은 그래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었지만 손님이 없었다. 그저 경험해 보지도 못한 전쟁의 광기에 물들어 약탈을 하려는 강도 놈들만 들이닥쳤다. 전쟁이 가까워졌다는 소식만으로 이미 치안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고 있었다.

“허, 이런 와중에 돌아다니면 안 되지! 위험하다는 말 못 들었어?”

“위험을 알려 줬으니 이제 그 값을 받아가야겠군.”

“뒤져서 나오면 동화 하나에 한 대씩…….”

숙소로 돌아가는 아이반의 감각에 강도 짓을 하는 놈들이 걸렸다. 제법 덩치가 큰 놈들 셋이서 하나를 벽에 몰아넣고 겁박을 하고 있었다.

저런 힘이 있었으면 창칼이나 휘두르면서 전쟁을 준비하든지 할 것이지 이런 때에도 한 푼이라도 더 털어 보겠다고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한 놈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몰랐으면 모를까, 시야에 들어온 이상 나서야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좀 쌓이던 참이었는데 좋은 샌드백을 만난 셈이다.

아이반이 그렇게 싱글벙글한 마음을 숨기고 다가가는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녀석들을 모두 바닥에 때려눕혔다.

아주 간결하고 실전적인 동작, 그러면서도 목숨에 지장은 주지 않는 자비로운 손속.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델피노!”

그 말에 녀석들의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던 델피노가 아이반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아이반! 이곳에 있었군요!”

“당신은 분명히 성황청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소? 아니, 그것보다 지금 뭘 하고 있는…….”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짭짤, 아니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이들의 영혼에 묻은 때가 조금은 벗겨지겠죠.”

그러면서 빛의 신 아룬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는 델피노였다. 그는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따로 머물고 있는 곳이 있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죠.”

“그러면 따라오시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있으니까. 지금 도시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여관에 머물기도 힘들 거요.”

아이반은 그를 데리고 피알라르의 공방으로 향했다. 피알라르가 떠나고 난 거처에 아이반이 자리를 잡고 사용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으나 사람 둘이 머물기에는 충분한 장소였다. 아이반이 그곳을 쓰고 있다고 피알라르가 뭐라 말하지는 않으리라.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차와 주전자를 꺼내자 델피노가 움찔하더니 얼른 그것을 받아 자신이 손수 차를 끓였다.

과연 차에 익숙한 사람이 끓인 것은 다른지 향이 은은하면서 맛이 달았다.

그렇게 차로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자 아이반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지금쯤 성황청에 도착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요?”

“원래는 성황청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가고 있는 도중에 동부 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 몸은 어쩌시고? 후유증이…….”

“구마사제로서 싸울 수는 없겠지만, 제게 남아 있는 힘으로 한 사람만이라도 더 치료할 수가 있다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빙긋 웃는 델피노의 미소는 가벼웠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치료가 필요한 곳에 사제가 있어야지요. 제 몸이 아프다고 남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어찌 찬란한 빛의 주를 모시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신의 인성부터가 차이가 나서 그런지 사제의 마음가짐이 달랐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먼저 적을 죽이면 아군이 다칠 일이 없을 것 아니냐고 껄껄 웃으면서 닥돌이나 하기를 원할 텐데.

아이반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그를 믿을 수가 있는가, 그에게 등을 맡길 수가 있는가, 그리하여 그를 동료로 삼을 수가 있는가.

답은 그렇다. 그를 믿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 동료는 구할 수가 없으리라.

한 번은 흘려보낸 인연이었으나,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이반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델피노, 혹시 나와 함께할 생각은 없소?”

“네? 그게 무슨…….”

“원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나의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닥칠 거요. 그대가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게 나의 운명이니까. 신들이, 망할 세상이 원하는 운명이니까.”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억눌러서 말하고자 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새어 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감정을 느낀 델피노가 입을 다물었다. 결코 가볍게 들을 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아이반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가진 뜻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결국은 대의로 향하게 될 거요. 내가 살아남고자 할수록 영웅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끊임없이 위험이 닥칠 것이다.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 그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이반은 그가 자신의 동료가 되기를 원했다. 그 요청에 델피노는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찬란한 빛의 주, 아룬이시여.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감탄사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습관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델피노는 그 말을 듣고 저기 멀고 먼 곳, 찬란한 빛의 땅에서 그분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흐릿하던 신성의 빛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생명력을 불태워 아룬의 힘을 청할 때처럼.

아룬의 시선이 닿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대한 천상의 신이 한낱 필멸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반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위대한 빛의 주, 아룬조차 관심을 기울일 정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가 성황청으로 향하지 않고 결국 발길을 돌렸던 것 역시 아룬의 뜻일지도 몰랐다. 불현듯 그를 스쳤던 감정과 결심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닐까.

감동과 격정으로 몸이 떨렸다. 그 순간, 델피노는 마음을 정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분이 저를 쓰시려 하니 그저 따를 뿐입니다. 하찮은 이 몸이 당신의 앞길을 밝히는 횃불이 된다면 기꺼이 몸을 불태우겠나이다.”

델피노가 그리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삭막했던 아이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마침내 이 험한 땅에서 진정한 동료를 만났다.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하던 그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동료를 만들게 되리라. 더 이상은 홀로 외로워하는 일 없이, 이방인으로서 그저 세계를 떠도는 일 없이.

아이반은 이 땅에 떨어진 지 수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방인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세계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저 외부에서 지켜보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가 된 느낌이었다.

비록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반은 이제야 출발점에 섰다.

스윽.

아이반은 인벤토리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생명의 구슬을 꺼내 델피노에게 내밀었다.

비록 백 년이 넘게 혹사당하고 던전의 핵이 되어 많은 힘을 소모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델피노가 깜짝 놀라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이반은 담담하게 말했다.

“영적인 그릇이 부족했던 나와 달리 당신은 육신의 그릇이 깨진 것이 더욱 큰 문제였지. 생명의 구슬이 당신의 깨진 그릇을 회복시켜 줄 거요.”

막대한 신성력을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우며 아룬의 힘을 받아들였었다. 그 때문에 정신과 육체, 영혼에 상처를 입었으니 생명의 구슬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원래부터 정신과 영혼은 강인한 남자니까.

“이건, 너무 과분한 물건입니다.”

“사양할 필요는 없소. 그 물건 이상으로 당신이 고생할 것이니까.”

생명력과 회복력을 높여 주는 보물이지만 그것보다 수준 높은 힐 노예, 아니 회복 기가 있는 동료 하나가 훨씬 귀했다. 애초에 힐러용 장비에 들어가는 재료였고.

“좋습니다. 이제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신이 지켜보고 있다. 사제로서 이보다 더욱 고귀한 임무가 무엇인가.

델피노의 굳은 신념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아이반이 대답했다.

“파밍이오.”

“…예?”

37화 차가운 손님

동부 전선이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로만 왕국은 방어선을 크게 뒤로 물리기는 했어도 전의를 상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동부 지역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라도 되찾기를 원했다.

마지막까지 아끼고 있던 최정예 병력이 마침내 동원되었다. 왕국마법사단이 움직이고, 적룡기사단이 움직였으며, 서부와 남부의 군단 일부가 동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린스킨은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 동부 회색성채를 차지했으나, 그 때문에 더욱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만 왕국의 동부를 차지하면서 대륙 남부에 있는 제국, 마리난과 마주하게 되었다. 갑자기 전선이 확대된 셈이니 한동안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때문에 로만 왕국의 북부를 공격하는 무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반은 강하게 주장했다.

“이대로 버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앞서 방어선을 구축해서 녀석들이 넘어오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오.”

편하기로는 당연히 수성이 편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했다. 대부분의 농지와 생활 기반은 성벽 바깥에 있었으니까.

녀석들이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자행하고 논밭과 건물을 불태우는 데 집중한다면 그 피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성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선제공격을 해서 쫓아내는 것이 옳았다.

아이반이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 댔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영 소극적이었다.

“그, 오크들은 강병이고 동부를 무너뜨렸는데 우리만으로 가능하겠나? 병사가 너무 적은데……. 오히려 빈틈을 녀석들이 파고들면 성마저 넘어갈 수도 있어.”

로만 왕국의 북부는 오랫동안 평화에 물들어 있었다. 전투다운 전투를 제대로 경험해 본 적도 없었고. 그래서 전투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소극적으로 방어하기를 원했다.

“영지민의 피해가 클 것이오. 어떻게 당장의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바깥이 모두 불타고 나면 식량이 부족해 결국 굶주리겠지. 세금도 제대로 거둘 수 없을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반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말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듣고 있던 영주 쪽 참관인이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에 움찔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참관인의 눈치를 보던 지휘관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겨울이다. 거둘 것은 다 거뒀으니 설령 밭이 불탄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겨울에는 일부러라도 불태우지 않는가?”

그 말에 다른 이들이 옳은 말이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병신 같은 의견의 허술한 점을 지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씨부럴 놈들, 이미 수확한 곡식이 불탈 것은 생각하지도 않나? 집이 사라지면? 보가 무너지면? 방앗간이 파괴되면? 바깥에 있는 주민들을 다 성 안에 수용할 수는 있고?’

언제나 든든하게 그들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동부 전선이 무너지고 그린스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병사들이 그들을 떠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듯했다.

아이반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병사를 움직이지 않겠다면 물자라도 지원해 주시오. 내가 숲으로 들어가 오크 놈들을 조금이나마 막아 보겠소.”

“뭐? 당신이? 도대체 왜?”

“나의 신께서 이 전투를 원하시니까. 명예로운 전투만이 나를 발할라로 이끌어 줄 것이오. 전사는 싸움을 피하지 않소.”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아룬의 사제와 성전기사단의 일부가 함께 움직일 거요. 그들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다더군.”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델피노가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하신 빛의 주의 은총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합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은 법이지요.”

둘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지휘관도 마냥 거절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지원 물량을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물자를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선 아이반은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차갑게 웃었다.

“이 정도면 빼먹을 만큼 빼먹었군. 빈손으로 떠나지는 않아도 되겠소.”

“그렇습니까? 저는 영 기분이 좋지 않군요. 어쩜 저리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지…….”

“원래 평화가 길면 무능한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법이오.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아서 내게는 이것도 다행스럽게 느껴지는군.”

저들이 어떻게 나오든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챙겼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이런 위기 상황에도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기는 것을 보면 욕심이 강한 자들이오. 어쩌면 악마 숭배자들의 유혹에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르지. 안 그렇소?”

“예? 그건…….”

“‘합리적인 의심’이지. 구마사제로서 그런 의견 정도는 교단에 보고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 말에 델피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상황이 상황이잖소?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지.”

아이반은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으면서 앞을 가리켰다.

“자, 이제 창고나 털러 가 봅시다.”

* * *

인벤토리에 각종 물품들이 꽉꽉 채워지니 아이반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성전기사단의 몫까지 받아 왔기 때문에 양이 꽤나 많았다.

“이건 신전에 맡겨 성전기사단에게 건네주도록 하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갈 거요. 오크 녀석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챙겨야만 하는 것들이 있소.”

원래는 황금 멧돼지만 챙기고 끝내려 했지만 저 산맥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금쯤 꽤나 오크들과 부딪히고 있는 중일 테니 한 발 슬쩍 들이밀어 보면 박대를 당하지는 않으리라.

아이반과 델피노는 산맥 쪽으로 향했다. 약간은 동쪽에 치우쳐져 있는, 그래서 조금은 더 위험한 곳으로.

이틀쯤 걸어서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하던 아이반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왜 그러십니까?”

“하늘이 심상치 않군. 곧 비가 내릴 것 같소. 겨울비치고는 꽤나 거세게 내리겠어.”

경험 많은 용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기 전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한 방울씩 비를 뿌려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오크 놈들이 그들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그들 역시 움직이는 것이 까다로웠다. 산에서, 그것도 비가 내리는 산에서 움직이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었다.

아이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제 슬슬 속옷까지 젖어서 축축해질 게 뻔했다.

“그래도 비가 내려서 시간은 벌었소. 서둘러 보지.”

둘은 비를 맞으면서도 한동안 더 걸었다. 웬만큼 어두워져서 시야가 가려질 때가 되어서야 동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동굴은 원래 곰이 쓰던 곳인 듯했는데, 주인이었을 녀석은 동굴 앞에 누워 숨이 끊어져 있었다.

곰의 시체를 본 델피노가 크게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크들이 사냥한 것일까요?”

“그건 아닐 거요. 그랬다면 이렇게 사냥감을 방치하지는 않았겠지.”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곰의 시체를 살폈다. 혹시 무슨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기를 다 들고 간 것도 아니고 가슴만 뜯어져 있군. 심장만 빼서 가져간 거야.’

간혹 배부른 짐승들이 사냥감의 내장만 빼먹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건 짐승의 솜씨는 아니었다. 명백히 도구를 사용해 죽인 것이다.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그들을 만날 수도 있겠소. 쓰읍,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

말을 하던 아이반이 문득 표정을 굳히고 바깥을 보았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입니까?”

그의 표정 변화를 빠르게 눈치챈 델피노가 물었지만 아이반은 확답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소. 하지만 무기를 들고 있소.”

“무기?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면 오크들?”

“그건 아니오. 오크들의 기척과는 너무나 달라.”

아이반이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아 드는데, 멀리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갑고 매끈한 비늘로 덮인 피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날름거리는 혓바닥.

그 모습을 확인한 델피노가 신음처럼 외쳤다.

“…리자드맨!”

도마뱀을 닮은 외형과 강력한 영역 의식 때문에 리자드맨들은 인간과 그리 친한 종족은 아니었다.

그런 리자드맨 십수 명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들이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인데…….’

리자드맨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비늘은 자잘한 공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했다.

예전 어느 습지에서 시비가 붙은 용병 하나가 리자드맨에게 잔인하게 해체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델피노는 그때가 떠올라서 절로 입안이 말랐다.

그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싸우게 된다면 차라리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아이반이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대장으로 보이는 리자드맨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쉬이익, 쉐엑, 스솨악, 삭!”

리자드맨이 혀를 날름거리며 거친 숨소리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뱉어 냈다.

“어, 저거 혹시 우리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겁니까?”

델피노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놀랍게도 표정을 굳힌 아이반의 입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시익, 스슈욱, 솩! 스시샥!”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둘은 쉬익거리며 숨소리를 주고받았다. 그제야 델피노는 그 기묘한 숨소리가 리자드맨 특유의 언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면 리자드맨 언어를 알고 있다는 건가?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아이반은 숨기고 있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과연 찬란하신 빛의 주, 아룬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사내였다.

델피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대화가 끝난 것인지 리자드맨이 공용어를 내뱉으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적이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지.”

“그러시오. 우리는 식사를 하고자 하는데 그쪽은?”

“우리는 그대들처럼 자주 무언가를 먹을 필요가 없다. 기다리겠다.”

아이반이 그쪽을 흘깃 살피고는 델피노를 동굴 속으로 이끌었다.

“일단 저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나 하시오.”

“무슨 일입니까?”

“예상치 못한 손님. 어쩌면 잠깐 정도는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존재.”

아이반은 자세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도 리자드맨과의 만남은 예상 밖의 일이었기에 아직 머릿속으로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

“곰을 보고 나니 왠지 곰탕이 먹고 싶군. 뜨끈한 국밥에 밥이나 말아서 한 그릇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여기서 냄새를 풍기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니 대충 샌드위치나 씹으면서 끝냅시다.”

아이반은 그러면서 흘깃 리자드맨 쪽을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나 본데.’

기회일까? 아니면 위기?

샌드위치를 씹는 아이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38화 지나칠 수 없는 시선

식사가 끝나자 리자드맨들은 아이반과 델피노를 이끌고 움직였다. 물론 야밤에 비를 맞으며 행군을 한다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커다란 덩치들이 같이 움직이고 있어서 대놓고 말을 못 할 뿐이다.

힐끔.

델피노가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냥 이대로 따라가도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아이반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빗속을 헤치며 한 시간을 더 이동한 끝에 리자드맨들이 세운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법 커다란 동굴에 큰 천막까지 설치해서 널찍한 공간이었다. 여러모로 곰의 누린내가 가득하던 그 좁은 동굴보다는 나았다.

리자드맨들은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모닥불 앞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빗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들도 원치 않는 일이었으리라.

리자드맨들의 안내를 따라가 안쪽에 마련된 장소를 배정받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여기는 임시 캠프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욕조가 있다고요?”

델피노가 눈을 끔뻑이며 황당해하자 아이반이 주변을 살피다가 마력을 흩뿌렸다. 그들을 감싸는 얇은 결계. 이전보다 한층 자연스러워진 방음 마법이었다.

아이반은 그렇게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서야 설명을 시작했다.

“인간들의 인식과는 달리 리자드맨들은 몹시 깔끔한 종족이오. 아마 칼로난 대륙에서 제일 발전한 목욕 문화를 가지고 있을걸.”

이들은 체온 유지 문제로 더울 때면 차가운 물에, 추울 때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기를 즐겼다. 자연히 목욕 문화가 발달하였고, 자신들의 비늘 틈에 무언가 묻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몹시 깔끔한 종족이었다.

씻으면 스스로가 약해진다고 생각해서 평생을 씻지 않고 사는 더러운 트롤 새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썩은 내가 수백 미터는 족히 퍼져 나가는 역겨운 놈들. 그런 놈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오크, 고블린 놈들도 추잡하기는 매한가지다.

“더러운 그린스킨 놈들, 상회 입찰이나 할 줄 알지 쓸모도 없는 놈들이오.”

그렇게 리자드맨의 목욕 문화의 우수성으로 시작해서 그린스킨을 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요상한 설명을 들은 델피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음, 내가 본 리자드맨들은 특별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구마사제로서 많은 곳을 돌아다녔던 그는 리자드맨을 볼 일이 꽤 많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들이 특별히 깔끔 떤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적을 찢어 그 피로 몸을 적시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위험한 자들이 아닌가.

그런 델피노의 얼굴을 본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전사들이니까. 리자드맨들은 전사가 아니면 영역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소. 그대가 만난 리자드맨들 역시 전부 전사 계급일 거요.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오물이 묻을 것을 각오하고 인간 사회에 나선 자들이니 그런 걸 못 느꼈을 수도 있겠지.”

“그들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아까 보니 그들의 언어도 하시고. 저는 그들이 금방이라도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입맛을 다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별거 없는 잔재주지. 그래도 덕분에 우리가 공격받지 않고 이렇게 대접을 받고 있군.”

마치 거친 숨소리와 같은 리자드맨의 언어는 무척이나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종족이 익히기는 몹시 어려웠다. 그런 것을 아이반이 사용하니 호의적으로 나오는 거지 실제로는 이렇게 친절한 자들이 아니었다.

심장을 뽑은 사냥감의 시체를 여기저기 널어놓는 것은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공격을 당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리자드맨에게 한 발쯤 걸치려고 했던 것은 맞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너무 빨리 만났소.”

원래 리자드맨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계곡이나 늪지까지는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벌써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큼 오크들의 존재를 위협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들의 힘으로 오크를 견제하려는 아이반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주도권을 잡기보다는 끌려가게 생겼다.

“아까 하셨던 대화는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우리가 오크들이 산맥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왔다고 했소. 물론 저들은 믿지 않았지. 겨우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이름을 좀 팔았소. 저들은 우리를 일종의 사신으로 알고 있을 거요.”

“그걸 저들이 믿었습니까?”

“리자드맨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무니까 믿을 수밖에. 다소 폭력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저들 역시 지성적인 종족이오. 사신을 박대하지는 않소.”

그렇게 일단 시간은 벌었지만 거짓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아이반은 진짜 사신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당연히 이후의 계획도 있으시겠죠?”

“…….”

“…아이반?”

원래 계획은 적당히 오크들을 견제하면서 근처에 있는 던전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걸 공략해서 보상을 챙긴 후에야 상황을 봐서 리자드맨 쪽으로 접근하려 했지.

예상치도 못하게 이들을 빨리 만나서 순서가 뒤엉켰다. 소득 없이 몸을 빼기도 그렇고, 그냥 들어가기도 그렇다.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소. 리자드맨이 군침을 흘릴 만한 정보들은 가지고 있으니까.”

“이들을 믿을 수는 있겠습니까?”

그 말에 아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부모, 형제, 자식도 상황에 따라서 서로 뒤통수를 치는 것이 세상살이였다. 그런데 처음 만난 놈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것도 언어도, 문화도, 심지어 종족도 다른 녀석들을.

“그래도 서로 쓸모가 있을 때까지는 적대할 이유가 없지. 그 아슬아슬한 줄을 타는 것이 문제겠지만,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군.”

거기까지 말한 아이반은 방음 결계를 거둬들였다. 조용히 의견을 나누는 거야 일행들끼리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너무 길어지면 의심을 사는 법이다.

리자드맨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아이반에게 말을 걸었던 자는 아니었다.

파충류를 닮은 리자드맨의 얼굴은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특유의 비늘 색이 조금씩 달랐기에 알 수 있었다.

“밤 춥다, 목욕?”

그가 꽤나 숨소리가 많이 섞인 공용어를 내뱉었다. 다른 종족이 리자드맨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리자드맨 역시 공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짧은 단어 위주로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비에 젖었더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좋긴 하겠군요.”

델피노가 그렇게 대꾸하자 리자드맨이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너무 길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까 전 그자는 공용어가 꽤나 익숙하던데. 하긴, 무리의 대장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챙길 수는 없겠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아이반이 리자드맨의 언어로 통역을 해 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들의 언어로 말했다.

“몸이 차가워지면 좋지 않지. 저기 달궈진 돌이 있으니 원하면 가져가서 물을 데우시오. 깨끗한 물은 저기 저 샘에서 떠 오면 되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를 부르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물일곱 번째 발톱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뜻이 그렇다는 의미다. 원래의 발음은 쉭쉭거리는 소리라 아이반이 델피노에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가자 아이반은 욕조를 확인했다.

“이런 곳에서 옷을 벗고 씻어야 한다니 영 불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 몸에서 쿰쿰한 쉰내를 풍기며 돌아다니면 저들이 우리를 한심하게 여길 거요.”

* * *

“으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낭에서 잠을 잤지만 다음 날 델피노의 얼굴은 영 밝지 못했다. 주변에 리자드맨이 돌아다니니 편안히 잠들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이반을 보면서 감탄했다.

“정말 간이 크시군. 나는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던데.”

“어느 상황에서도 빠르고 편안하게 잠드는 것 역시 나의 능력이니까.”

아이반이 귀한 포인트를 괜히 수면 스킬에다 투자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에도 편안히 휴식을 하기 위해서이지.

불안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편안히 잠들 수가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장점이었다. 겉으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이것이 그동안 아이반의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다고 해도 좋았다.

아침을 가볍게 먹은 뒤 그들은 길을 떠났다. 어제보다 조금은 빗줄기가 약해졌으나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겨울비는 눈보다 차가웠고, 그 속에서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고 있다가 문득 아이반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이어 리자드맨들도 무기를 들어 올렸다.

안타깝게도 델피노는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리자드맨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오크 같은데……. 녀석들이 이 빗속에서 움직일 이유가 있나?”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흘깃 리자드맨 대장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이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싸움을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 위험할 것 같지는 않지만, 조심하시오.”

델피노에게 그리 말한 아이반이 창을 뽑아 들었다.

틱, 티틱!

창 위로 빗방울이 때렸다. 싸늘한 겨울의 기운이 창을 타고 아이반의 손까지 닿았으나 전투의 열기가 그것을 밀어냈다.

후우.

전투를 앞두고 뜨거워진 몸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그의 몸에 이질적이지만 상쾌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평소 느끼던 아스가르드의 호쾌하고 강렬한 힘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신성력이 그의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아이반이 힐끔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스삭!

전투 시작을 알리는 낮은 숨소리가 사나운 이빨에게서 흘러나왔다. 리자드맨 전사들은 모두 무기를 치켜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반 역시 그리했다.

타다닥!

빗줄기를 가르며 달려 나간 아이반이 창을 내밀었다. 나무 틈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오크 하나의 가슴을 꿰뚫고 핏물을 뿌렸다.

목숨을 잃은 오크의 시체는 차갑게 식어 갔지만 아이반의 몸은 더욱 달아올랐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 그 폭력적인 걸음이 시작되자 또 하나의 오크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녀석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리자드맨과 싸우면서도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뭐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자신의 목을 가르려는 오크의 검을 피하고 발로 차 가슴을 으깨 버린 후 뒤에 있던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애초에 수가 많지는 않았다. 저쪽에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가 기묘한 소리를 내는 휘슬을 불다가 목이 잘리는 것으로 전투가 끝났다.

삐에엑-.

녀석은 죽어가면서도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아이반은 그것이 왠지 찝찝하기만 했다.

저건 무슨 의미지? 리자드맨 사이에 인간이 끼어 있는 것이 이상해서 그런가?

아이반은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고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이반은 지금은 외부인, 결정은 사나운 이빨이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는 놈들이 모두 모여들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싸우시겠소?”

“서둘러 돌아간다. 그대들에 대한 것 역시 그곳에서 처리한다.”

큰 부상을 당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명쯤 검에 스친 자가 있었으나 그는 델피노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음, 역시 리자드맨들은 폐쇄적이군요. 사제라고 해도 인간을 경계하는 모습입니…….”

델피노가 차마 하던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이반이 어느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땅을 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놀라운 흔적이라도 찾은 것인가 싶어 고개를 들이미니 아이반이 민망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냥 귀한 약초가 눈에 보여서.”

탈탈.

약초에 묻은 진흙을 털면서 아이반이 앞을 가리켰다.

“어서 갑시다. 오크들이 오기 전에.”

39화 뿔피리 울려 퍼지고

주변 환경과 땅의 질감이 변했다.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바닥이 축축하다. 이것은 비단 비가 내렸기 때문은 아니리라. 어느새 리자드맨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흙과 풀, 나무밖에 없던 곳에 이제 문명의 흔적이 보였다. 수많은 리자드맨의 시선이 움직이다 말고 낯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인간?”

“인간이라고? 여기에?”

쉭쉭거리는 낮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델피노는 괜히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이 딱히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곳은 적진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일행의 리더, 사나운 이빨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반과 델피노를 리자드맨 족장에게로 안내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들어서자 리자드맨 족장이 보였다. 그는 두꺼운 갑옷과 날카로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리자드맨은 대체로 인간보다 덩치가 컸지만 리자드맨 족장은 그중에서도 반 배쯤 더 큰 것 같았다.

인간보다 훨씬 덩치가 큰 파충류가 두 발로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꽤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반과 델피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겨우 상대의 덩치가 커다랗다는 이유로 일일이 겁을 먹기에는 그들이 살면서 겪었던 수라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쉭쉭거리는 리자드맨 특유의 언어가 족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그대는 우리의 말을 할 줄 안다고 들었다.”

“대화가 통할 정도라면.”

“신기한 일이로군.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듣기 거북할 정도는 아니야. 우리의 말을 그렇게 능숙하게 사용하는 인간도 있었군.”

언어가 통한다는 것은 서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시작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찌하여 이곳에 왔나?”

“당신들이 알지는 모르지만 오크는 전에 없던 규모로 움직이고 있소. 인간의 왕국 동쪽을 공격해서 빼앗았지. 우리는 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오.”

“그런가? 최근 들어 오크들이 조금 시끄럽기는 하더군.”

의뭉스럽기는. 오크들이 리자드맨의 영역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저 잔인하고 역겨운 오크 놈들이 산맥을 넘어 인간의 땅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소. 이미 동쪽에서 싸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소.”

리자드맨 족장이 아이반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세로동공을 가진 노란색 파충류의 눈이 그의 몸을 훑었다. 썩 기분이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사이 아이반 역시 리자드맨 족장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판단을 하는 중이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나?’

누군가를 만날 때 전투의 승패를 예상해 보는 것은 아이반의 습관이었다. 이 낯선 땅에서는 세상 만물 모두가 그에겐 잠재적인 적이었으니까.

리자드맨 족장과 주변에 서 있는 다른 리자드맨 전사, 그리고 환경까지 고려해본 아이반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못 이길 것 같은데.’

제대로 그의 움직임이나 솜씨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기세만 보았을 때 리자드맨 족장은 대단한 실력자였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힘을 빌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순수하게 개인의 역량으로만 비교하자면 아이반이 밀렸다.

엄밀히 따져서 아이반은 생존용 세팅이었고, 전투용으로 최적화된 몸은 아니니까. 버티거나 도망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상대를 쓰러뜨리기에는 결정력이 부족했다.

그동안은 그 치명적인 한 방을 신의 힘으로 채웠지만 그걸 제외한 순수한 실력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결국 중요할 때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아이반이 너무나 약했다.

“오크들이 인간의 땅을 노리고 있다, 그게 우리와 관계가 있나?”

“사이에 끼어 있지만 않았다면 관계없는 일이었겠지.”

“놈들이 우리의 영역을 피해서 돌아간다면 끼어들 이유가 없다.”

그 말에 아이반이 껄껄 웃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간다고 하였소? 아니면 친절하게 인간들을 치러 갈 테니 길이라도 빌려 달라고 한 것이오?”

인간들이 지배하는 대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패권 행보를 멈추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겠다.

오크들은, 그린스킨들은 그렇게 대의를 외치며 피의 동맹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선(善)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인간들과의 영역 다툼이지 그게 소외된 종족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신념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리자드맨 입장에서는 인간이나 오크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래도 인간은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하지만 오크는 바로 옆에 있으니까 더하겠지.

“인간을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오크들이 믿을 만한 놈들은 아닐 거요.”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

그래서 그게 정말로 친절한 제의였나? 조선은 그래서 길을 빌려주었나? 순순히 길을 빌려줬다면 과연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리자드맨은 영역 의식이 무척이나 강한 종족이었다.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서든 아니든 오크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견딜 수가 없겠지.

“적의 적은 동료라는 말이 있지. 같은 적을 공유한다면 우리는 힘을 합칠 수가 있을 거요.”

그러자 리자드맨 족장이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게 리자드맨 특유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참으로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 말하였소. 오크 놈들이 산맥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건 우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는 뜻이겠지. 그 뜨거운 피의 대가를 무엇으로 치르려고?”

“뱀신 모르나의 유적을 찾고 있겠지? 나에게 그와 관련된 정보가 있소.”

그 말에 주변의 모든 리자드맨의 기세가 변했다. 결코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존재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뱀신 모르나, 리자드맨과 나가들이 모시는 여신.

잠들어 버린 옛 신을 깨우는 것은 리자드맨의 오랜 숙원이었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오크들이 근방에서 얼쩡거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인 셈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내뱉는 것인가?”

리자드맨 족장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면서 아이반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깊은 곳까지 와서 헛소리를 할 이유가 없지. 정보는 확실하오.”

“확실하다? 그렇게 단언해서는 안 될 텐데?”

“자신이 있으니까.”

아이반은 그냥 그렇게 질렀다.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씨부럴 알 게 뭐야. 아예 단서가 없는 것도 아니니 대충 키워드만 던져두면 이들이 알아서 찾아내겠지.

여기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의심을 사고 상황에 잡아먹힌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야 상대는 이 새끼 뭐가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법이다.

“…조금 고민을 해 봐야겠군. 방을 내어주겠다. 그곳에서 답을 기다려라.”

“오래 기다릴 수는 없소. 지금도 오크 놈들이 산맥을 넘으려 준비 중일 테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서로 쉭쉭거리고 있으니 델피노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리자드맨이 내어준 숙소에서 비로소 설명을 들었다. 그러자 델피노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묘하게 변했다.

“어, 이거 상황이 좀 심각한 것 아닙니까?”

뱀신 모르나가 침묵한 것이 벌써 수백 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 단서를 리자드맨이나 나가도 아니고 아스가르드의 전사인 아이반이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정보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거짓은 아니오.”

“그렇습니까? 그러면 설마 우리가 찾으려던 던전이라는 것이…….”

“아니, 그건 뱀신 모르나와는 상관없소. 상황이 변했으니 조금 센 것을 꺼내 들어야 저들이 반응할 것 같아서 좀 크게 내질렀지.”

깔짝깔짝 내뱉는 걸로는 상황을 주도할 자신이 없었다. 도저히 물지 않고서는 못 배길 미끼 정도는 되어야 낚싯대를 흔들어 보지.

지금도 오크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니 상황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리자드맨들도 몸이 달아올랐다. 어서 빨리 아이반이 한 말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먼저 그대가 가진 정보를 풀어야 할 것이다.”

“인정하겠소. 서북쪽 난폭한 호수 아래에 뱀신 모르나의 제단이 있을 거요. 그것을 확인한다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겠지.”

“여기서 서북쪽이면 오크들의 행로와 겹치는군.”

혹시 이용만 하려는 의도가 아니냐, 그런 의심이 담긴 눈빛에 아이반은 당당히 가슴을 폈다.

“단서를 알려 주었음에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만 가겠소. 거래 상대를 잘못 선택한 셈이군.”

그러자 리자드맨 족장이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대답했다.

“…우리는 신의를 모르는 자가 아니다. 받은 것이 있다면 능히 돌려주어야지. 뱀신 모르나께서 이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뱀신 모르나의 이름을 내걸었다면 리자드맨은 계약을 준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경고이기도 했다. 만약 아이반의 말이 거짓이라면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

“나의 신들 역시 아스가르드에서 지켜보고 있소.”

휘이잉-.

치지직!

아이반이 슬쩍 신의 힘을 끌어내자 리자드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믿을 수는 없지만 그들 문화에서 신의 이름을 꺼낸 전사를 의심한다는 것은 곧 싸우자는 말과 같았다.

“그러면 정해졌군. 출진이다! 우리의 신을 찾으러 떠난다!”

쿵!

쿵!

족장이 그리 외치자 주변에 있던 리자드맨들이 모두 바닥에 발을 굴러 호응했다. 박수를 치고 무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전사들은 순식간에 준비를 마쳤다.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족장의 지시를 기다렸다.

족장은 본인이 직접 움직이기를 원했으나, 아직은 아이반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어서 사나운 이빨을 대장으로 삼았다. 사나운 이빨은 아이반과 델피노를 이곳으로 안내한 일행의 리더였다.

“떠나라! 막아서는 적을 죽이고 우리의 신을 되찾아라!”

아이반과 델피노는 리자드맨의 마을에서 딱 하루를 머물고 다시 숲으로 향했다. 목표는 서북쪽 난폭한 호수, 그리고 그 사이에 마주칠 오크들의 섬멸이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들을 움직였으니 절반은 성공했군.’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리자드맨에게 들은 오크들의 병력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동쪽에서 거세게 싸우고 있는 지금, 산맥을 넘어오는 이 루트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피해야 있겠지만 어렵지 않게 처리하리라고 여겼지.

그런데 오크들이 투입한 병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리자드맨들이 자신들 영역 밖으로 멀찍이 나와서 경계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의 수천이나 되는 놈들이 산맥에 진을 치고 있다고 했다.

황금 멧돼지를 잡으러 들어왔을 때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사이 그렇게나 늘었다? 심상치가 않았다.

‘나 때문인가? 왠지 나를 알아보는 눈빛이긴 했는데…….’

아이반은 얼핏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흘려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의식과잉이었다. 설마 본인 하나 때문에 수천이 넘는 병력을 빼서 이곳으로 돌린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게 리자드맨의 마을을 벗어나 숲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을 때, 뭔가 미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온몸에 달라붙는 불길한 공기.

숲은 너무 조용했다. 원래 숲이란 이렇게나 고요한 곳이 절대 아닌데.

챙!

아이반이 검을 뽑아 들자 주변 모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한동안 그렇게 움직였음에도 습격은 없었다. 아이반은 그걸 결코 좋아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신경이 갉아먹히는 느낌.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포위되었소. 점점 조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때 고요하던 숲을 깨우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

뿌우, 뿌우우-.

아이반은 검을 고쳐 잡았다.

적이 온다.

40화 난폭한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