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난폭한 호수
피우웅!
화살이 날아온다. 아이반은 재빨리 방패를 꺼내 앞을 막았고, 그 보호를 받으며 델피노가 기도를 올렸다.
“찬란하신 빛의 주여, 그 따스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델피노의 몸에서 따스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위잉-.
아이반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방어막의 존재를 느꼈다. 날아오는 화살들이 가로막혔다. 화살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뿌우, 뿌우우우-.
“우! 우! 우!”
다시 한번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오크들의 기묘한 기합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방향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온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닥!
리자드맨 전사들은 적을 그저 기다리지만 않았다. 오크들이 눈에 보이자마자 달려들었다. 오크는 강인한 전사의 종족이었으나, 리자드맨은 더했다. 그 커다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폭발적인 속도는 오크들의 목을 베어 버리기 충분했다.
아이반 역시 검을 쥐고 달렸다. 선두에 있던 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옆에서 다가오는 녀석을 발로 차서 치우고, 그 뒤에 있던 녀석의 목을 날렸다.
도끼가 어느 놈의 두개골을 쪼개 놓고, 창이 녀석들의 가슴에 새로운 숨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녀석들의 핏물이 아이반의 몸을 적셨다. 오크들의 피는 붉고, 뜨거웠으며, 비릿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오크들을 쓰러뜨리고 있으면서도 아이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흘깃 리자드맨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처음의 기세를 잃고 조금씩 막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단단한 가죽에 상처가 하나씩 새겨졌다.
오크들은 그저 수만 많은 약병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가 강인한 전사이자 투사였고, 자신의 죽음이 이 땅에 영광을 가져온다고 믿는 광신도였다.
오크들은 치열한 싸움을 좋아했다. 피가 끓는 전투 속에서 황홀감을 느꼈다. 강자와의 전투가 곧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모시는 종족신, 오크 투신 타르칸이 그것을 원했다. 때문에 자신보다 약하다고 해서 방심할 수가 없었다.
쾅!
사나운 이빨이 검을 휘두르자 바위가 부서지고 바닥이 갈라졌다. 그 주변에 서 있던 오크들의 몸이 쪼개지고 팔다리가 짓뭉개졌다.
그러나 오크들은 사지 중 하나를 잃어도 투지를 잃지는 않았다. 눈을 붉게 물들이며 한 번이라도 칼을 더 휘두르려고 애썼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무기를 휘두르지 못한다면 깨물어서라도.
그런 자들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을 넘어가면, 그리고 그 뒤에 수백이 있고 수천이 있다고 생각하면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로 돌아간다!”
사나운 이빨이 그리 외쳤다. 이대로는 버틸 수가 없다.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오크들은 그들을 순순히 보내 주지 않았다. 짙은 주력이 피어오르더니 숲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나무가 자리를 옮기고 길을 지웠다. 그 너머에서 날카로운 투기가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막힌 듯하다.
“주술사! 아주 제대로 준비했구나!”
사나운 이빨이 본인의 이름대로 사납게 소리쳤다. 주술사가 후방을 막았으면 그것을 뚫고 지나가기는 어려웠다. 답은 전진. 앞으로 나아간다.
“난폭한 호수로 간다! 그곳은 우리들에게 유리한 곳이니 오크들이 쉽게 날뛰지 못할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아이반과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리자드맨에게는 호수가 익숙했지만 인간들에게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을 바꿀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나운 이빨은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 그저 우연일까?’
갑자기 찾아온 인간들, 이어진 오크의 공격. 언뜻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사나운 이빨은 어딘가 껄끄러웠다.
아이반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리자드맨들이 쉽게 이용당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번개가 흘러나왔다. 그는 신의 힘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길을 열겠소. 따라오시오.”
사나운 이빨은 잠시 아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간다. 뒤처지는 놈들은 꼬리를 잘라 버릴 거다.”
* * *
일행은 오크들의 포위를 뚫으며 난폭한 호수로 향했다.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놈들의 추격에 리자드맨 전사들이 몇이나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전사들의 시체를 수습할 시간조차 없이 버려두고 움직였기에 리자드맨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안 좋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모두 저 빌어먹을 인간 놈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곳에 정말로 뱀신 모르나의 제단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의심과 적의, 불만의 감정이 허공을 떠돌았다.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델피노가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을 회복시키고 있었지만 여전히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들은 원래 델피노의 치료마저 거부하려고 했었다. 도대체 인간의 호의를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그때 사나운 이빨이 끼어들어 소리쳤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싸우고 있는 자를 믿지 못하겠다니 어쩌자는 것이냐!”
리자드맨 전사들은 사나운 이빨의 말을 듣고 억지로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 오크들이 자신들을 노리기보다 아이반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전사들을 진정시킨 사나운 이빨 역시 아이반을 곱게 보지는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다.”
“해명이랄 것까지야. 동쪽에서 칼춤을 좀 췄더니 그게 인상적이었나 보지.”
아이반은 자연의 구도자 테잔과 마주했노라, 오크 로드 카르타크의 스물 몇 번째 아들인 발 어쩌고의 심장을 꿰뚫었노라고 말했다.
“오크 로드 카르타크가 생각보다 가정적인 남자였나 보군. 그 가정이 수십 개라 자기 아들 이름도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부하들에게 내 목을 가져오라고 시켰을 줄이야.”
예상하건대, 카르타크가 정말로 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오크 군세의 선봉 전사이자 자신의 아들이었던 녀석을 죽인 자를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오크 로드로서의 위엄이 살지 않았겠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모르되, 보였다면 반드시 죽인다. 오크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설명을 들은 리자드맨들은 애써 불만을 억눌렀다. 전사가 전사로서의 임무를 다하다가 생긴 원한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역시 가증스러운 인간 놈들에게 당했다고 여길 뿐이다.
어설프게나마 만들어지고 있던 믿음이 사라진다. 서로를 동료로 여기기보다는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했다.
뱀신 모르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계약은 계속되겠지만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였지만 아이반은 느낄 수 있었다.
‘좋지 않아.’
오크들이 그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리자드맨들까지 등을 돌린다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쯤에서 상황을 바꿔야만 했다.
“이제 곧 난폭한 호수요. 거기서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찾아야겠군.”
아이반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리자드맨들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저 도마뱀 같은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델피노마저 그들이 어이없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노골적이었다.
“난폭한 호수는 넓다. 그곳에서 숨겨진 제단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유가 있다고 한들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한 것은 아니지. 혹시 그대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나?”
“그건 아니지. 하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소.”
아이반은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오히려 의아했다. 그러면 자기가 이곳에 몇 달이고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당장 오크들이 공격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난폭한 호수에 제물을 바치고, 뱀신 모르나를 믿는 신도의 피가 흘러들어 가면 숨겨져 있던 제단이 반응할 것이오.”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나? 우리조차 모르는 것을…….”
“제단은 오래전 나가들이 만든 것이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델피노에게도 번역해 알려 주자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묘하게 변했다.
“나가들이 만든 유적이라고요? 그거, 괜찮겠습니까?”
델피노의 걱정은 당연했다. 리자드맨이 인간과 친하지 않은 종족이라면 나가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종족이었으니까.
대륙 동쪽에 있는 로만 왕국에서는 그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으나, 대륙 서쪽에서는 나가의 악명이 만만치 않았다.
“유적이 위험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나가들은 모두 떠났으니까.”
뱀신 모르나의 적자라 할 수 있는 나가들은 그녀의 인도에 따라 이곳을 버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게 벌써 수백 년도 훌쩍 넘은 일이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뒤에서 오크가 추격하고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유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난폭한 호수는 원래라면 아이반과 델피노 둘이서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자드맨 전사들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에 있는 유물을 모두 챙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일부라면 어떻게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또 대박이 터질지도 모르지.
아이반은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일행을 이끌었다.
난폭한 호수는 그 이름과는 달리 고요하기만 했다. 잔잔한 물결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 이름이 난폭한 호수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물론 그 이름 역시 나가가 이곳에 머물던 시절의 흔적이었다.
진지한 눈으로 호수를 둘러보던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지 않소. 얼른 제물을 바치고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찾아야만 할 것이오.”
그 말에 리자드맨 몇몇이 움직이려 했다. 근처에서 사슴이라도 한 마리 잡아와 바치려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오크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라 사슴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럴 필요 없소. 제물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죽을 벗겨 놓아서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이 녀석은 황금 멧돼지였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신화의 흔적이 닿은 녀석이니 평범한 사슴보다야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어울리겠지.
“이것에 당신들의 피를 뿌리시오. 신도의 피 냄새를 맡은 뱀신 모르나가 반응할 것이오.”
원래는 인신 공양을 해야만 할 것이다. 신도 하나의 목숨을 바치고 신을 부르는 의식. 하지만 대신 황금 멧돼지를 바치고 그 위에 신도들의 피를 뿌렸으니 대충 구색이나마 갖춘 셈이다.
이걸 못 받겠다고 뱀신 모르나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당신들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하오’라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씨부럴, 따지려면 입맛 까다로운 지들 여신에게나 따지라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하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리자드맨들은 이내 돌아가며 자신의 팔뚝을 긋고 그 피로 황금 멧돼지를 적셨다. 상처는 델피노가 얼른 치료해 주었으나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이 정도면 대충 리자드맨 하나만큼의 피는 되겠지.
리자드맨들은 자신들의 피로 젖은 황금 멧돼지를 들어서 호수 안쪽으로 멀찍이 집어 던졌다. 그리고 모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뱀신 모르나, 수백 년간 침묵하고 있던 옛 신.
한참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던 리자드맨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은 전혀 느끼지 못하던 신성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감격에 몸을 떨 때, 난폭한 호수가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물이 거칠게 흔들리고 위로 솟구쳤다.
거울 같던 호수가 깨어난다. 그 이름대로 난폭한 호수가 눈을 뜬다. 솟구치는 물줄기로 생긴 하얀 물거품을 뚫고 호수 한가운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혹은 성. 뱀신 모르나의 제단이자 나가들이 만들어 놓은 신성한 뱀 굴.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나운 이빨은 한 번 더 여신의 이름을 외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이반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분의 시선을, 그분의 숨결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그 말에 아이반은 흘깃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신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니까.”
그가 어떻게 말하든 리자드맨들은 모두 흥분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 오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린 모양새였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침착해 보이던 사나운 이빨마저도 몸이 달아올라서 뱀신 모르나의 제단으로 향했다.
자신의 신이 아니라고 해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델피노는 찬란한 빛의 주, 아룬에게 기도를 올렸다.
“잠들어 있던 뱀신 모르나가 이제 깨어나는 것입니까?”
기도를 마친 델피노가 아이반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뱀신 모르나가 잠들어 있다는 말은 옳지 않소.”
“그러면……?”
“신의 사정이란 복잡한 법이지.”
모두가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신경 쓸 때 아이반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폭한 호수가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을 되찾은 것과 달리 숲은 고요했다.
아직 적의 뿔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41화 어둠 속으로
호수를 뚫고 솟아오른 길을 따라 뱀신 모르나의 제단으로 향했다. 커다란 동굴로 들어가니 얇은 막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그것이 나가들의 도시를 숨기고 있던 결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계 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느낌이 달랐다. 바깥은 요 며칠 내리던 비가 그치고 화창한 날씨였으나 이곳은 아주 차갑고 축축한 곳이었다. 무언가 그를 통째로 입에 넣고 핥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졌다.
천장에는 발광석이 박혀 있어 빛을 뿌리고 있었으나,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너무 흐려져서 오히려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빛의 구슬을 띄워 시야를 밝히면서 델피노가 낮게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곳입니다. 마치 뱀의 입속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러니까 뱀 굴이지. 어울리는 곳 아니오?”
“그렇기도 하군요. 여기가 나가들이 살던 곳입니까?”
“한때는.”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멓고 커다란 수로에 낡고 부서진 벽과 건물들. 여기저기 이끼가 끼어 있었으며 축축하고 음습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냄새가 가득했다.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밝고 아름다웠을 도시였다. 그러나 버려진 지 너무 오래되어 지금은 그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뱀신 모르나의 존재를 느끼고 한껏 들떠 있던 리자드맨들 역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스르륵.
투두둑!
멀리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거친 물소리가 들렸다.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그저 옛 나가의 유적을 찾았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어찌하시겠소? 바로 수색할 생각이오?”
아이반의 질문에 사나운 이빨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이나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다. 오크들이 추격하는 와중에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
그는 금방이라도 뱀신 모르나의 흔적을 찾기 위해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억눌렀다. 유적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나가의 도시는 규모가 꽤 컸다. 잠시 탐색한다고 모든 것을 다 확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입구는 좁고, 안은 넓다. 여기서 오크를 막는다. 그리고 더 많은 전사들을 부른다.”
사나운 이빨은 품에서 붉은 보석 같은 돌을 꺼냈다. 그가 마력을 집중하자 이내 붉은 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약속된 신호였다. 유적을 발견했다는 것, 위험이 있다는 것.
오크들이 대규모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마을에서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이곳에 지원을 올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예상치 못하게 오크들이 꽤 많은 병력을 투입했지만 원래 이곳은 오크들의 영역이 아니라 리자드맨들의 영역이었다. 그들이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나운 이빨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로 덧붙였다.
“다른 부족도 있다.”
리자드맨들은 원래 영역 의식이 대단히 강한 종족이었고, 그것은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부족이 다르다면 협력자보다는 경쟁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일. 다른 부족과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밀릴 것 같으면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뱀신 모르나의 제단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숨기겠지. 잠들어 버린 여신을 다시 깨우는 영광을 다른 부족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뭐, 그렇다면 알겠소. 당신들의 뜻에 따르지.”
아이반은 그리 대답하면서 아직 어둠에 잠긴 도시를 바라보았다.
저기 무언가 있었다. 그것이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은 리자드맨이 나가와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든 지 너무 오래되어 아직 깨어나지 못한 탓일까.
뱀신 모르나의 옅은 시선이 리자드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이 버림받은 도시에 남은 놈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타다닥!
리자드맨들은 얼른 입구 쪽 건물을 돌아다니며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좁은 영역이나마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부지런히 움직여 장애물을 만들었다.
오크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동선을 제한하고 공격하기 쉽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대충이나마 방어 준비를 마치니 사나운 이빨은 빛의 구슬을 없애 줄 것을 요청했다.
“적은 어둠 속에서 약해지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 그 이점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리자드맨은 야간 시야가 상당히 좋았다. 델피노와 아이반에게는 그저 어둡게만 느껴지는 희미한 발광석의 힘으로도 사방이 훤히 보일만큼.
그들은 후각도 무척이나 예민해서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이반이 숲에만 들어오면 신경질적으로 냄새를 신경 쓰는 것은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당장 개나 고양이, 코모도왕도마뱀 같은 녀석들도 수 킬로미터 밖에서 냄새를 포착하는데 이 망할 판타지 세계는 오죽할까.
아이반이 흘깃 델피노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구슬을 없애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알겠소. 그러면 빛의 구슬은 없애기로 하지.”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델피노가 둥실둥실 떠다니던 빛의 구슬을 지워 버렸다. 순식간에 어두워졌으나 델피노가 또다시 기도문을 중얼거리자 사방이 눈에 들어왔다.
“밤눈을 밝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시야가 기묘해져서 적응하시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대로다. 평소의 시야와는 전혀 달라서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반에게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다.
‘…이거 적외선 화면 아냐?’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딱 이런 식이었다. 어쩌면 델피노가 사용한 신성술 역시 비슷한 원리인지도 몰랐다. 과학 대신 이능을 사용하는.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반은 문과였다.
‘과연 빛의 신을 모시는 사제다운 재주야.’
그렇게 대충 넘긴 아이반은 문득 표정을 굳혔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온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전사의 감, 전신의 힘을 사용하는 자의 느낌.
적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투가 머지않았다.
“전투 준비! 적들이 온다!”
아이반이 낮게 외치자 리자드맨들이 재빠르게 전투태세로 돌아섰다. 인간들에 대한 믿음이나 호불호는 둘째 치고 아이반 개인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전사였다. 그런 그가 전투를 알렸으면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델피노, 이것을 가지고 계시오.”
인벤토리에서 석궁과 볼트를 꺼내어 내밀었다. 뒤엉켜서 싸울 때는 아군을 공격할 위험이 있으니 참아야겠지만 녀석들이 막 등장했을 때는 꽤나 쓸모가 있을 거다.
끼이익-.
델피노가 석궁을 받아들자, 아이반은 활을 꺼내 당겼다. 이제 곧 이곳으로 넘어올 녀석들을 노리며 숨을 골랐다.
스읍- 후우-.
낮은 숨소리만 울려 퍼지는 고요한 시간. 몇 초, 몇 분이 마치 몇 시간 같은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결국 녀석들이 등장했다. 오크들이 손에 하나씩 횃불을 들고 있는 상태로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반은 최적의 공격 시점을 잡기 위해 조금 더 기다렸다.
‘잠깐, 아직, 지금……!’
피우웅!
아이반이 쏘아 보낸 화살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크의 가슴을 꿰뚫었다.
피우웅!
푸슉!
아이반은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델피노 역시 부지런히 석궁을 쏘았다.
녀석들의 팔을 꿰뚫고, 머리에 박히고, 때로는 가슴이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횃불을 들고 있는 놈들만큼은 반드시 명중시켰다. 녀석들이 쓰러지면서 들고 있던 횃불이 바닥을 굴렀다.
아직 녀석들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 빠르게 공격해서 또다시 빛을 빼앗았다.
그렇게 선두에 서 있던 무리를 무너뜨리니 오크들이 날아오는 화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우! 우! 우!”
팍!
기묘한 기합 소리와 함께 날아가던 화살이 막힌다. 방패가 있는 녀석들은 방패로, 그게 없는 녀석들은 사각으로, 그러지 못한 녀석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동료의 시체로 화살을 막았다.
그렇게 막으면서 천천히 전진하려 할 때, 리자드맨들이 뛰어들었다.
스걱!
소리 없이 달려들어 오크들의 목을 베었다. 익숙한 듯 어둠에 몸을 숨기고 적을 죽이는 모습이 그야말로 사냥꾼과 같았다.
때로 훌륭한 전사와 훌륭한 사냥꾼은 같은 존재였다. 리자드맨들이 그러했다.
그렇게 먼저 들어온 녀석들을 반쯤 처리했을 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쾅!
리자드맨 전사 하나가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 너머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오크 하나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웃고 있었다.
“리자드맨이라, 손맛이 괜찮군! 네놈들의 가죽을 벗겨서 방패로 만들어 주마!”
평범한 오크가 아니었다. 리자드맨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덩치에, 힘은 그들보다 훨씬 강한 듯했다.
뒤에서 활을 쏘고 있던 아이반이 창을 들었다. 그리고 건물을 박차고 녀석에게 향했다. 그 녀석 역시 한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으로 거리를 좁히고 창을 휘둘렀다. 아이반의 체중과 속도까지 실어서 날린 일격. 그러나 녀석은 한 손으로 막아 내며 껄껄 웃었다.
“네 녀석이 아이반인가, 인간?”
탕!
아이반은 대답 대신 도끼를 날렸으나 녀석은 고개를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그리고 짜증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묻고 있지 않나, 인간!”
쿵!
녀석이 강하게 발을 구르며 창을 내리찍었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은 긴 리치. 아이반이 미처 몸을 빼기 전 머리 위로 창이 떨어졌다.
“커억!”
창을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았으나 깊은 곳에서부터 신음이 흘러나왔다. 녀석의 힘이 너무 강했다. 순간적으로 바닥에 박혀 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토르!’
아이반이 속으로 그리 외치자 천둥신의 힘이 그에게 깃들었다. 속에서부터 묵직하고 파괴적인 힘이 흘러나왔다.
치지직!
번개가 튀며 녀석의 창을 밀어냈다. 그 따끔따끔한 손맛에 녀석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놈이구나. 멍청한 동생의 심장을 부순 녀석이.”
그렇게 웃고 있던 녀석의 표정이 이내 흉신악살같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분노를 담아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나는 스라칸! 피의 복수를 하겠다!”
녀석이 창을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 힘을 모두 담아 아이반에게 내리쳤다.
아이반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린다. 손목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터무니없는 힘. 제대로 된 오크 전사의 실력이었다.
그야말로 네임드. 세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강자.
“…빌어먹을 토르, 조금만 더 힘을 빌려주시오.”
아이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번개가 더욱 굵어졌다. 그의 힘이 더 강해지고, 육신이 더 튼튼해졌다.
그러나 아이반은 느끼고 있었다. 점점 균열이 커지고 있다. 신의 힘을 담은 그릇이 점점 부서지고 있다. 그토록 미루고 미뤄 왔던 부작용이 점점 그를 덮치고 있었다.
저 멀리, 멀고 먼 곳. 아스가르드에 있는 신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심드렁하게, 누군가는 불안하게, 누군가는 흥미롭게.
아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쾅!
다시 한번 녀석과 부딪혔다. 이번에는 스라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녀석의 가슴에 생채기가 생기고 갑옷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피를 토한 것은 아이반이었다.
주르륵.
진득한 피가 흘러나온다. 다급하게 그의 몸 안으로 델피노의 신성력이 밀고 들어왔으나 깨져 가는 그릇을 붙일 수는 없었다.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다. 그의 치료술은 의미가 없었다.
치지직!
그의 몸속에 차오르고 있는 힘은 여전히 강대했으나, 그것을 뿜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토르가 빌려주었던 자신의 힘을 거둬들였다.
“윽!”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힘에 아이반이 비틀거렸다. 치명적인 틈. 만약 사나운 이빨이 스라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면 방금 전 그는 죽었으리라.
왈칵 피를 뱉어 낸 아이반이 창을 들어 올렸다. 포기할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녀석을 쓰러뜨릴 수가 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녀석의 창이 아이반의 옆구리를 뜯고 지나갔다. 미처 반응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아이반! 아이반!”
델피노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달려오고 있었으나 아이반은 차마 오지 말라고 소리칠 수도, 심지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몸에서 힘이 빠진다.
파앙!
키에에엑-.
“이건 또 무엇이냐!”
무언가 커다란 것이 수로를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이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이반은 정신을 잃었다.
42화 잃고, 얻다
어둡고도 밝은 곳. 온 세상 소리가 가득해 시끄럽지만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아 고요한 곳.
한참 동안, 그 기묘한 세계를 둥실둥실 떠돌고 있었는데, 문득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딘, 토르, 헤임달, 로키, 아직은 누군지 모르는 자들까지.
신들이 아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는 존재감과 경이로운 기세를 흩뿌리며 지켜보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존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이반은 그 순간 자신이 위대한 신격의 손바닥 위에 올라 있음을 느꼈다.
휘이잉-.
폭풍이 그를 흔들었다. 전쟁이 그를 시험했다. 마법이 그를 파헤치고, 지혜가 그를 판단했다.
위대한 신격이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 아이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동안 몇 번이나 아이반은 찢기고 재조합되고 있었다.
지금 위대한 신격, 오딘이 그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영혼을 수확하여 발할라로 데려올 것인지, 그리하여 위대한 천상의 전사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더욱 많은 피와 죽음, 전투를 거듭하게 하여 지금보다 강인하게 만들 것인지.
그 기묘한 고통 속에서 아이반이 이를 악물었다.
“오딘이여!”
필멸자는 결코 견디지를 못하는 곳에서 아이반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영혼을 쥐어 뽑을 듯 손에 들고 있던 오딘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아이반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무나 강한 존재감에 온몸이 짓눌리고, 위대한 신성을 마주한 눈이 타들어 갈 듯이 아팠지만, 그럼에도 소리쳤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꼭두각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하하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가 그리 웃고 있는 느낌이었다.
감히 이 필멸자가 뭐라고 하였나? 맹랑하고 건방진 전사가 감히 발할라의 영광을 거절한다는 것이냐?
신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것만으로 아이반은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은 결코 아이반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았다. 수확할 곡식을, 도축할 돼지를 바라보듯 하였을 뿐이다.
이 곡식이 더욱 탐스럽게 익을지, 돼지가 더욱 살이 찔지를 고민하지 그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망할 아스가르드!’
아이반은 고통 속에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들을 바라보며 투지를 끌어올렸다.
전사의 애원, 처절한 외침과 슬픔의 비명에는 반응하지 않던 오딘이 그 적의 어린 눈빛에 빙긋 웃었다. 끝까지 전의를 잃지 않고 싸우고자 하는 정신에 만족했다.
그는 아이반의 영혼을 거두는 대신, 다시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아직 천상에 오기는 이르다. 발할라의 영광을 받기엔 부족하다. 지상에서 조금 더 나의 이름을 외쳐라. 그곳에서 더욱 큰 시련을 경험하고 강인한 전사가 되어라.
아이반의 몸을 쥐고 있던 위대한 신격의 손이 사라졌다. 그러자 아이반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서.
* * *
아이반이 눈을 떴다. 온몸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갈 듯 무거웠다. 온갖 기력을 다 쏟아 낸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몹시 어두웠다. 아이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이곳이 나가들의 도시, 뱀신 모르나의 버려진 제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갑고 축축했다. 그리고 쿰쿰하고 답답했다. 그런 냄새가 있었다. 그런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스윽.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옆에 있던 델피노가 옅은 빛의 구슬을 만들면서 다가왔다. 흐릿한 빛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곤한 듯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이반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소?”
“글쎄요, 아마 열 시간쯤? 어쩌면 그것에 조금 못 미칠 것 같기도 하고.”
아이반은 자신이 열 시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보다 그 정도 되는 시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음에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상황이 좋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오?”
“커다란 뱀이 나타났습니다. 언뜻 보았는데 바실리스크처럼 보이더군요. 그 녀석이 날뛰는 사이 당신을 데리고 뒤로 후퇴했습니다. 나가의 도시 깊은 곳까지 들어왔죠.”
아무래도 이곳에 있던 녀석이 침입자를 발견하고 공격한 것 같았다. 뱀신 모르나의 신도인 리자드맨들과 함께 있던 아이반과 델피노는 무시했지만 차마 오크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
어쩌면 뱀신 모르나가 미약하게나마 개입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결코 친절하거나 자비로운 신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욕이 강했다. 자신의 것을 침범하려는 오크들을 용서할 수 없을 거다.
“그나저나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아이반은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스라칸의 창이 뜯고 지나갔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미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옆구리는 멀쩡하군. 고생하셨소.”
그러나 델피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그릇을 말하는 겁니다.”
아이반은 입을 다물었다. 과도하게 신의 힘을 담으려 했기에 산산이 부서졌던 영혼의 그릇이 지금은 어설프게나마 붙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오딘이 손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르륵.
갑자기 아이반의 오른쪽 눈에서 강렬한 고통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릿하던 것이 그저 어두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윽!”
아이반이 신음을 흘리니 깜짝 놀란 델피노가 얼른 다가와 신성력으로 그를 치료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반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소용없소. 이건 낙인이오. 내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표식이지.”
씨부럴, 빌어먹을 오딘. 자기 거라고 침을 찍어 발라 놓는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아이반은 그렇게 속으로 욕설을 삼키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머릿속에 신비한 지식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죽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세계의 시작과 종말에 대하여, 비밀스럽고 강력한 룬 문자와 그 힘에 대하여.
한쪽 눈으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그는 다른 쪽의 눈으로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동안 안 쓰고 모아 두고 있었던 스킬 포인트가 뭉텅이로 사라져 있었다. 누구의 짓인지 명확했다.
참으로 악취미였다. 본인과 비슷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한쪽 눈을 가져간 것도, 창에 몸이 꿰뚫린 그에게 룬 문자와 마법을 새겨 넣은 것도.
탁!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몸에 점차 마력이 차올랐다. 신들이 불어넣어 주는 힘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반이 바깥으로 향했다. 전투가 막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인지 사나운 이빨이 돌 더미를 의자 삼아 앉은 채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일어났나?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툭 하고 내뱉는 말에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쨌거나 잃어버린 뱀신 모르나의 시선을 찾아 준 은인이자 잠깐이나마 같이 싸우고 있는 전우였다. 시체를 치우는 것보다야 살아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거의 죽을 뻔했소. 신들이 영혼을 가져가려는 것을 막으려고 발악하다 겨우 돌아왔지.”
“신의 부름을 거절하다니, 그건 좀 아쉽겠어.”
“전혀. 그리 신앙심이 독실한 편은 아니라오.”
아이반은 한쪽 눈을 몇 번이고 끔뻑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 오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보였으나 언뜻 거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감각이 흐트러지고 영 시야가 어색했다.
‘…망할, 엘프들의 숲에 한번 가기는 해야겠어.’
신이 직접 새겨 넣은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그나마 쉽게 얻을 수가 있는 방법이 엘프들의 숲에 가는 것이었다.
일단 엘프들의 숲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입수 난이도는 더럽게 어려웠다. 귀한 물건이니 귀쟁이 놈들이 쉽게 내어주지는 않으리라.
결국 아이반은 또다시 제 발로 시련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다. 어쩌면 오딘은 그것을 노리고 눈을 앗아 갔는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용케 지금까지 버텼소.”
“모두 신께서 보낸 왕뱀 덕분이다. 신성한 뱀이 신의 적을 공격했다.”
보통 바실리스크 하면 공포의 상징이었으나 이들에게는 신성한 영물로 느껴지는 듯했다.
하긴, 뱀신을 섬기는 자들이니 커다란 뱀이 그리 보이겠지. 본인들도 비슷하긴 하고.
“바실리스크는 어찌 되었소?”
“큰 상처를 입고 다시 물로 돌아갔다. 스라칸이 강하긴 강하더군. 과연 오크 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이다.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다.”
“녀석의 명성이 당신들에게까지 퍼졌소?”
“오크 로드 카르타크가 씨를 많이 뿌렸지만 거기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다섯이라고 들었다. 녀석은 그중 하나다.”
“발크룬은? 내가 동쪽에서 죽인 녀석도 카르타크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모른다. 그런 이름은.”
아이반은 묘하게 실망스러웠다.
발크룬도 나름 강한 놈이었는데. 그래도 선봉 전사를 맡을 정도는 되었는데.
녀석의 명성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오크들 내부에서나 알려진 정도였던가.
멀리 오크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사나운 이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이름대로 사납게 이빨을 보이면서 소리쳤다.
“놈들이 또다시 온다! 스라칸이 움직인다!”
스라칸은 오크 로드 카르타크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은 녀석이었다. 평범한 리자드맨 전사들로는 막을 수가 없는 존재. 아이반이 크게 부상을 입고 나가떨어졌던 만큼 자신이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나운 이빨이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아이반이 먼저 나갔다.
“괜찮나?”
“맡겨 주시오.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으니까.”
아이반은 하나 남은 눈으로 어둠을 꿰뚫어 보았다. 시력은 줄었으나 기감이 더 예민해졌기에 어둠 속에서 싸우기엔 지금이 더 나았다.
신의 힘은 쓸 수 없었다. 눈은 하나가 사라졌다. 그러나 아껴 두고 아껴 뒀던 스킬 포인트를 써서 새롭게 얻은 힘은 그것을 대체할 만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하나 남은 눈에서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아이반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자 스라칸이 껄껄 웃었다.
“목숨 줄이 참으로 질기구나, 인간! 이번에야말로 목을 베어 주마!”
바실리스크를 상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는지 녀석의 복장이 꽤나 지저분해졌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스라칸의 기세는 여전히 당당했다.
‘강하다.’
아이반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강했다. 이전까지 그가 본 자들 중에 스라칸과 비견될 만한 존재는 극히 드물었다.
신격이나 대악마, 강자의 분신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껏 만나 본 적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네임드. 이름이 알려진 강자.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훌륭한 전사였으나, 세계를 뒤흔들 만큼은 아니었다. 겨우 그런 자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으로 단번에 거리를 좁힌 아이반이 창을 휘둘렀다. 이전과 같은 공격. 당연히 아이반의 공격은 막히고,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스라칸이 지루한 듯이 말했다.
“더욱 약해졌어. 싸울 맛이 나지 않아.”
녀석이 심드렁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창을 휘둘렀다. 빛처럼 쏘아진 창이 아이반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그 순간 스라칸의 얼굴이 굳었다. 손맛이 전혀 없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슴이 꿰뚫린 아이반의 모습이 흩어진다. 아이반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눈앞에서 창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쨍그랑!
다시 한번 스라칸이 창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아이반의 머리를 날려 버렸지만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이반은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게 뭐냐! 환상? 내가 그런 잔재주를 눈치채지 못한다고?”
분한 듯이 소리치는 스라칸을 보며 아이반이 차갑게 말했다.
“아니꼬우면 마방을 올렸어야지.”
“마, 뭐?”
화르륵!
창을 쥐고 있는 아이반의 주위에 룬 문자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든 룬 문자들이 동시에 불타올랐다.
사방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스라칸은 그것이 환상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아이반이 땅을 박차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쾅!
43화 승리의 대가
스라칸은 아이반의 창을 거둬 냈다. 여전히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화염은 몹시 신경이 쓰였다.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스치고 지나간다. 살갗으로 느껴지는 열기는 가짜가 아니었다.
쉬익!
눈앞을 가리는 불길에 신경 쓰는 사이 등 뒤를 노리고 검이 휘둘러졌다. 창을 휘둘러 떨쳐 내니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든다.
“정말이지 잔재주만 가득하구나!”
스라칸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는데 바닥이 변했다. 단단한 흙바닥이 어느새 질척질척한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그걸 예상치 못한 스라칸의 발이 붙잡혔다. 그의 발을 삼킨 진창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스라칸의 움직임이 멈추자 도끼가 날아왔다. 검이 휘둘러지고 날카로운 바람이 피부를 베고 지나갔다.
분명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으나, 마치 여럿에게 포위를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감히! 네놈 따위가 나를 사냥하려 드느냐!”
분노를 터트리며 창을 휘둘러 대는 스라칸을 보면서 아이반은 숨을 죽였다.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죽여서 녀석의 등을 베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또다시 빙글빙글 돌았다. 스라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환영으로 덫을 깔아 놓고 반대쪽에서 활을 쏘았다.
피우웅-.
마법으로 녀석의 시선을 끌고 미미하게 환경을 바꿔 녀석의 움직임을 제어한다. 은신과 암습으로 이어지는 사각에서의 공격, 천둥걸음과 관천을 사용한 정면의 압박, 아주 하찮은 함정과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화살까지.
아이반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사용해 녀석을 조금씩 깎아먹고 있었다. 절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건 전사의 싸움 방식이 아니었다. 호쾌함은 없고 음습하고 치열한 계략이 난무할 뿐이다. 토르는 그것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치지직!
미약한 스파크가 튀며 아이반의 몸을 따끔하게 때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사로서 당당하게 싸우다 죽느니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겠다.
우웅!
아이반이 창을 찔렀다. 스라칸은 그의 창을 막아 냈으나, 창을 둘러싸고 있던 룬 문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각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룬 문자 넷이 스라칸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팔다리를 붙잡고 몸을 무겁게 만든다. 감각을 뒤흔들고 체력을 빼앗았다.
아이반의 마력이 자신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확인한 스라칸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타르칸이시여! 피의 영광을! 광기의 축복을!”
녀석의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안 그래도 단단하던 몸이 더욱 단단해지고, 커다랗던 덩치가 더욱 커다랗게 변했다.
단숨에 잃어버린 체력을 회복하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크게 상승하는 광전사의 대표적인 기술.
오크 투신 타르칸에게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광전사만이 그의 축복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힘.
타다닥!
녀석의 몸에 새겨졌던 룬 문자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그를 제어하려던 마력이 튕기고, 붙잡고 있던 얼음이 깨져 나갔다.
“후욱, 후…….”
녀석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이 붉게 변하고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바실리스크를 상대하면서, 아이반을 상대하면서 새겨졌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마지막 패까지 까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녀석이 먼저 지쳐서 힘이 빠지든가, 아니면 아이반이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든가 둘 중에 하나였다.
아이반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더욱더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황금 멧돼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빛을 빨아먹고 그를 어둠 속에 숨겨 주었다.
암살자의 걸음과 기척을 숨기는 법이 그의 존재를 지웠다. 전사의 날카로운 감각과 튼튼한 육신이 그를 움직였고, 레인저의 경험이 강자를 사냥감으로 만들었다. 마법사의 지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파박!
스라칸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와 사방을 뒤집었다. 땅을 파고들고, 물을 솟구치게 했다.
아이반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녀석의 창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상처가 새겨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왈칵!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급하게 주어진 마법사로서의 힘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조금씩 힘이 빠진다.
그런데도 아이반은 한쪽 눈에 투지를 담았다. 버티면 이긴다. 버티면 기회가 온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흐읍, 후우…….”
스라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호흡 소리가 약간이지만 변했다. 자신의 강한 힘을 견딜 수가 없어서,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내뱉던 호흡이 아니라 지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몇 번이고 살이 찢어지고, 불타올랐다. 오크 투신 타르칸이 내려 준 광전사의 힘은 그 모든 부상을 착실히 회복시켜 주었으나 그렇다고 멀쩡할 리 없었다. 체력이 줄어든다.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진다.
그 약간의 차이가 틈을 만들었다. 여기저기 파이고 뒤집힌 땅은 몹시 불안정했다. 심지어 군데군데 진창이 얼어붙은 땅은 미끄럽기도 했다. 그것이 아주 약간이지만 스라칸을 비틀거리게 했다.
그것을 확인한 아이반이 폭발적으로 땅을 박차고 나아가 창을 찔러 넣었다. 그의 동생, 발크룬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처럼.
끼이익!
아이반의 창이 스라칸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심장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녀석이 한 손으로 아이반의 창을 붙잡고 버텼기 때문이다. 실로 강인한 힘이었다.
“이건, 진짜구나!”
스라칸은 자신의 가슴에 박힌 창을 붙잡은 상태로 자신의 창을 휘둘렀다. 눈앞에 있는 아이반의 목을 잘라 버리려고 했다.
매우 날카로운 시도. 그러나 아이반은 비웃음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확신하지는 말았어야지.”
파각!
아이반의 머리가 날아간다. 피가 흩뿌려지고 시체가 쓰러진다.
그런 환영 너머로, 겨우 한 걸음 뒤에 아이반이 멀쩡히 서 있었다.
방패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목표는 녀석의 가슴에 박힌 창. 마치 망치가 정을 때리듯, 나무에 못을 박아 넣듯이.
실드 차지, 산을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강력하게.
쾅!
스라칸은 더 이상 창을 붙잡지 못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 녀석의 가슴을 파고들어 살을 한 움큼 뜯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몸을 비틀어 심장을 보호했으니 대단한 일이었으나 틀림없이 치명상이었다. 꺼져 가는 광전사의 힘으로도 단번에 회복하지는 못했다.
“으, 윽!”
한껏 부풀어 올랐던 덩치가 다시 줄어든다. 스라칸은 피가 쏟아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창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이 없었다.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피의 복수를 천명하고 이루어진 일대일 결투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은 몹시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바라보고만 있던 오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설마 스라칸이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혼란이 퍼졌다. 아직 결투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스라칸의 명예를 위해 기다려 줘야 하는지, 아니면 달려가서 그를 구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때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 녀석이 수로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쉬이익!
커다란 덩치,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바실리스크가 입을 쫙 벌려서 스라칸을 덮쳤다. 그는 몸을 비틀며 바실리스크의 턱에 창을 박아 넣었으나, 거듭된 전투로 크게 다치고 지쳐 버린 몸은 반응이 늦었다. 결국 그의 한쪽 팔이 바실리스크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우라아아!”
바실리스크의 개입으로 신성한 결투가 깨졌다고 판단한 오크들이 달려들어 스라칸을 구해 냈다. 그사이 아이반도 훌쩍 뒤로 물러났다.
“아이반! 괜찮습니까!”
다른 쪽에서 싸우고 있던 델피노가 달려와 그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아이반의 상태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신성의 그릇이 깨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격렬한 싸움을 한단 말인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것이다.
아이반은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바닥에 뱉고는 흐릿한 눈으로 적진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을 완전히 죽여 버렸어야 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놓아주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소.”
계속된 전투로 아군의 수가 많이 줄었고, 몹시 지쳐 있었다. 스라칸이 죽었다고 오크들이 눈이 뒤집혀서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하면 막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아이반의 손끝을 무디게 만들었고, 녀석의 목숨을 살렸다.
뿌우,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아이반이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다행히도 녀석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잔뜩 상처 입고 피에 젖은 사나운 이빨이 품속에서 붉은 돌을 꺼내며 말했다.
“전사들이 가까이 왔다. 그들을 보고 오크들이 물러가는 거다.”
연락을 하고서 만 하루, 혹은 이틀쯤 될까? 생각보다 리자드맨들의 움직임이 빨랐다.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연락이 오자마자 움직인 모양이다.
하긴 오크들이 그렇게나 많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뱀신 모르나의 제단과 연관이 있는 일인데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리지는 않았겠지.
띠링-
사건의 종료를 알리는 맑은 소리가 아이반의 귀에 울려 퍼졌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체력과 마력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다량의 경험치, 약간의 골드와 아이템.
보상의 시간이다.
* * *
“오크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토록 찾던 신의 흔적을 발견했군.”
리자드맨 족장, 웅크린 불꽃이 이빨을 보이며 말했다. 아이반과 델피노의 눈에는 퍽 사납게 보였지만 그 나름대로는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듯했다.
“피해가 컸소. 예상치 않게 오크들이 강력했지.”
척 보기에도 죽거나 다친 리자드맨 전사들이 많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웅크린 불꽃 역시 새로 생긴듯한 상처를 몇 개쯤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피해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폈다.
“신을 배알하는 데 어찌 피를 흘리지 않을 수가 있겠나? 오크의 피를 제물로 바치니 그분께서 크게 기꺼워하실 거다!”
신도들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신이었다. 그런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 죽음을 피할 리가 없지.
리자드맨은 자신들의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 뱀신 모르나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모든 건 별일 아닌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 여긴다면 다행이오.”
버려진 나가의 도시는 다행히도 무사했다. 오크와의 전투로 입구 쪽은 아주 개판이 되었으나, 깊은 곳에 있는 성은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보물들이 남겨져 있을 거다. 언젠가 그녀의 흔적을 찾아올 자들을 위한 선물이.
단체로 이사를 해서 떠나간 빈집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게 좀 이상할 법도 하지만, 이쪽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신의 제단을 초라하게 만들겠나.
뱀신 모르나의 제단은 몹시 위험한 곳이었으나 그녀의 신도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저 안쪽을 모두 탐색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반과 델피노는 그 수색에 참여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끼어서 자기 몫을 주장하고 싶었으나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뱀신 모르나의 신도인 리자드맨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던 것들이 아이반과 델피노에게는 적대적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야만 했다.
웅크린 불꽃이 적당히 챙겨 준다고 했으니 그저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쉬이이.
오크들과 싸우느라 반쯤 죽을 뻔한 파수꾼, 바실리스크는 바닥에 몸을 누인 채로 리자드맨들이 잡아 온 사슴을 넙죽 받아먹고 있었다.
델피노는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흠, 바실리스크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본 적이 있기는 한가 보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죠.”
보통은 바실리스크 같은 대형 몬스터를 만났을 때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러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서 볼 기회란 없었다.
틀림없이 델피노도 아주 치열한 전투를 경험했을 거다. 그런데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몬스터라니, 색다른 경험일 수밖에.
탁!
한동안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반이 움직였다. 그냥 앉아서 쉬고 있는 것도 버거운 몸 상태이면서 어디론가 가려는 모습이었다.
“어디에 가십니까?”
델피노가 의아한 듯 물어보자 아이반이 할 말을 고르다가 내뱉었다.
“주인을 잃은 주머니가 많소.”
델피노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44화 하나를 더하다
아이반과 델피노는 리자드맨의 마을에 며칠간 머물면서 푹 쉬었다. 그러면서 격렬한 전투로 지치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비록 피해는 있었으나, 잠들어 버린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찾고 그녀의 시선을 느꼈으니 리자드맨 입장에서 그들은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해 주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음식이었다. 리자드맨들의 식문화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좋은 시력과 후각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미각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들의 식사는 거의 배를 채우기 위한 수준이었고, 맛이랄 게 딱히 없었다.
그냥 날로 먹거나, 가끔은 불에 익혀 먹었다. 그게 전부였다. 양념 같은 것이 없다는 소리다.
아이반과 델피노가 아주 고급스러운 입맛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의 내장이나 겨울잠을 자다가 잡혀 온 개구리를 산 채로 뜯어 먹는 건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결국 아이반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고 보면 전에 곰탕 이야기를 했었지. 그거나 만들어 보겠소.”
불을 지피고 큼지막한 냄비를 위에 얹었다. 그리고 사골을 끓이고 고기를 익혔다. 손이 제법 많이 가기는 했지만 고소한 냄새가 술술 풍기니 그 노력이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어느 가게에서 돈을 주고 사 뒀던 김치 비슷한 채소 절임까지 올려서 한입 먹으니 맛이 썩 괜찮았다. 겨울에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니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반과 델피노가 이런저런 요리를 하면서 먹고 있으니 궁금해진 것인지 가끔은 사나운 이빨이 찾아와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인간들의 음식은 재미있어. 하지만 만드는 데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쓸 필요가 있나?”
“그, 맛이라는 게…….”
설명을 하려던 델피노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이었다.
“먹기 위해서 지나치게 많이 움직여야 한다. 깨끗한 물도 많이 필요하고 불을 피울 땔감도 많아야 하지. 배를 채우는 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인간에게 식사란 그저 배고픔을 채우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즐거운 행위지.
그걸 증명하기 위해 아이반은 비장의 국밥을 만들어 제공했지만, 사나운 이빨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역시 미각이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라 그런지 딱히 별다른 맛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저 새로운 식감이기에 신기할 뿐이지.
“씹는 맛은 별로 없지만 따뜻한 국물이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그러면 그냥 뜨거운 물을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안타깝게도 요리 스킬을 익히지 못한 아이반의 솜씨로는 그가 감동할 수 없을 듯싶었다.
그렇게 쉬면서 한편으로 아이반은 끊임없이 명상하며 자기 관조를 계속했다.
몸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마력과 세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작업, 세계를 자신의 사상으로 물들이는 일이었다.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비밀스러운 지식을 실제로 꺼내 쓰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 밖에도 할 일이 많았다. 한 번 깨졌던 신성의 그릇도 조심스럽게 고쳐 가고, 달라진 감각에도 적응해야만 했다.
한쪽 눈으로 보는 세상은 꽤 색다른 느낌이었다. 시야의 사각을 채우는 법, 틀어진 원근감을 되찾는 것도 모두 시간이 걸렸다.
가죽으로 안대를 만들어 썼는데, 얼굴에 달라붙는 그 감촉이 영 어색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반은 손가락으로 그 거친 가죽을 더듬다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부럴, 개지랄하다가 눈 하나 잃었네.”
분명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 텐데. 나중에 도저히 넘기 힘든 벽을 만났을 때, 그럴 때를 위해 스킬 포인트를 아끼고 아꼈건만 결국 당장 살아남는 것이 문제였다.
조금은 강해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나 같은 놈이 미래를 대비하기는 개뿔. 괜히 큰 그림을 그린다, 어쩌다 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어.
아이반은 괜히 후회스러웠다. 후회의 상처를 눈에다 새긴 꼴이다.
그가 안대를 쓰다듬고 있으니 델피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상처가 쑤신 겁니까?”
델피노는 자신이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가 생겼다는 게 영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 평소에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그걸 알기에 아이반은 안대를 만지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저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 그렇소.”
“그 눈은…….”
델피노는 몹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신이 직접 새겼으니 영광스러운 성흔이라 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눈이라니. 그 또한 신을 모시는 자로서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 걱정할 것 없소. 눈을 회복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신이 직접 새긴 성흔을 지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충 떠오르는 것만 해도 다섯은 넘는군.”
물론 그 다섯 가지 방법 모두 욕이 튀어나올 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나, 어쨌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닌가.
“나는 죽지 않았소. 그러니 다른 것들은 되돌릴 수가 있지.”
아이반은 자신에게 말하듯 그리 중얼거렸다.
그래, 살아 있다. 살아 있는 한 기회는 언제나 그와 함께했다.
* * *
적당히 몸이 회복되고 달라진 감각에 적응할 때쯤 리자드맨 족장, 웅크린 불꽃이 그들을 불렀다.
“안대를 새로 했나? 어울리는군. 노련한 전사 같아.”
“내가 조금 더 노련했다면 안대를 찰 일은 없었겠지. 무슨 일이오?”
“그대들의 몫이 정해졌다.”
그사이 버려진 나가들의 도시,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모두 탐색한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 안에는 꽤 많은 보물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를 아이반과 델피노에게 내어주려는 것이다.
웅크린 불꽃은 꽤 많은 양의 황금과 보석을 가리켰다.
“안에 있던 것 상당수는 우리의 신, 위대한 뱀 여신을 기리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외부인에게 내어줄 수는 없지. 대신 그에 상응하는 양의 금과 보석을 준비했다.”
아이반은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소.”
사실 마음 같아서는 흥정을 해 보고 싶었지만 뱀신 모르나와 관련된 일이라 참았다. 리자드맨들이 모시는 신을 놓고 ‘님, 제시요’ 하고 뻗대면 은인이고 나발이고 배에 칼이 박힐 거다.
금과 보석만 해도 상당한 양이었다. 실질적으로 유적을 공략하는 데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것만 해도 대단한 호의였다. 게다가 그들이 준비한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뱀 문양이 새겨진 단검, 붉은 보석이 박힌 팔찌, 황금을 꼬아서 만든 목걸이가 두 개.
“뱀 소환의 단검에는 뱀의 혼이 담겨 있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황금색 뱀들이 나타나 그대를 지켜 줄 것이다.”
시범을 보이듯 웅크린 불꽃이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 주변에 황금색 뱀들이 나타나 혀를 날름거렸다.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저 뱀들은 상대를 마비시키는 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위험한 순간에 아주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
“저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군. 그대가 가지는 것이 나을 것 같소.”
그 말에 델피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빛의 신 아룬의 사제가 뱀신 모르나의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들고 다닌다는 것이 영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단검이 쓸 만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팔찌는 방패였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숨겨져 있던 방패가 나타나는 보물. 이건 좀 애매했다. 분명 귀한 물건은 맞았지만, 쓰임새가 영 미묘했기 때문이다.
델피노가 쓰자니 기본적으로 방패를 활용할 실력이 아니고, 아이반이 쓰자니 어차피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쓰는 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보물이라니 평범한 무기상점에서 산 방패보다는 낫겠지.’
아이반이 팔찌를 착용하니 남은 것은 목걸이 두 개뿐이었다.
“이것들은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독성을 어느 정도 걸러 주는 물건이다. 마력을 불어넣으면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뿜어내기도 하지. 어쩌면 여행자에게는 가장 필요한 보물일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목에 걸어 보니 과연 겨울의 한기를 상당히 막아 주는 느낌이었다. 외부의 온도 변화에 민감한 자들이 준비한 물건다웠다.
“우리는 이제 난폭한 호수를 중심으로 새롭게 영역을 만들 생각이다. 우리의 신과 통하는 제단을 버릴 수는 없지.”
그리고 이것으로 오크들이 산맥을 넘을 길이 막혔다. 리자드맨의 영역을 빙 돌아서 가려면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니 쉽게 포기하려 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리자드맨을 밀어낼 수는 없을 거다. 그린스킨에게는 싸워야 할 전선이 너무나 많았다.
웅크린 불꽃이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대는 참 신비로운 자다. 겨우 며칠 만에 기세가 전혀 다르게 변했어.”
“사람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오. 그게 내가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맞는 말이다. 살아남으려면 변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웅크린 불꽃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 짐짓 당당한 태도로 외쳤다.
“나, 우리, 붉은 계곡의 소용돌이 부족이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대의 여행에 우리의 전사가 함께하기를!”
쿵! 쿵! 쿵!
주변의 전사들이 모두 발을 구르며 호응했다. 그 모두가 아이반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내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고 계시오? 어떤 모험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오?”
“모른다! 하지만 위대한 뱀 여신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대의 길은 언젠가 그녀에게 닿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전사가 함께하기를 원한다.”
그 말과 함께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공용어가 능통하면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가 있는 전사, 그리고 아이반과 델피노가 어색하게 여기지 않을 존재.
사나운 이빨이 동료가 되기를 청했다.
“붉은 계곡의 소용돌이 부족의 전사, 사나운 이빨! 그대의 길을 함께하고자 한다!”
쿵! 쿵! 쿵!
대답을 재촉하듯 둘러싼 전사들이 발을 굴렀다. 그 웅장하고 위엄 넘치는 퍼포먼스를 담담히 받아넘기면서 아이반은 흘깃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료의 의견을 들어야만 했다.
웅크린 불꽃이 말을 할 때는 리자드맨의 언어였지만 사나운 이빨은 공용어로 외쳤다. 그래서 무슨 상황인지 대충 깨달은 델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십시오.”
“괜찮겠소?”
“그는 훌륭하고 강인한 전사죠. 우리의 등을 맡길 만한 자입니다.”
델피노가 그렇게 말한다면 아이반으로서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직 누군가를 동료로 들인다는 것이 껄끄럽고 불안했지만, 그걸 이겨 내야만 했다.
“위험한 일이오, 목숨을 장담할 수 없소.”
“문제없다!”
“적으로 오크 정도는 우습지. 사악한 흑마법사나 대악마, 신화 속의 괴물,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강자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을 거요.”
“그건 짜릿한 일이다!”
“때로 개처럼 목숨을 구걸해야 할 수도 있소.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이 없어서 누군가를 죽이고 강탈해야 하는 지옥 같은 상황이 올지도 모르지.”
“나의 피와 살을 뜯어 먹겠다!”
사나운 이빨의 대답에 아이반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좋소.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소.”
“무엇인가?”
“길은 내가 정하오. 내가 살라면 살고, 뒈지라고 하면 뒈지시오. 가능하겠소?”
사나운 이빨이 그의 이름에 어울리는 이빨을 보여 주었다. 그건 그 나름의 웃음이었다.
“별것 아니군. 그리하지.”
아이반은 손을 내밀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 손을 붙잡았다.
그걸 보고 있던 웅크린 불꽃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선언했다.
“전사들의 앞길에 축복을! 축제를 열어라!”
45화 요정의 숲
응당 축제라 하면 먹고 마시는 것이 주된 일이었으나 리자드맨의 축제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미각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 먹는 것으로 흥을 올리는 대신, 사냥감을 뱀신 모르나에게 바치고 북을 치며 노래하기를 즐겼다.
물론 그들의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듣기에는 기묘한 것이라 노래 역시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축제는 축제인지 다들 즐거워했다.
그렇게 밤이 되고 다 같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씻는 것으로 축제는 마무리되었다.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스스로를 가다듬는다는 의미였다.
어디 하나 깨부수고 어제 안주로 뭘 먹었는지 확인하면서 길바닥에 몇 명쯤 널브러져 있는 것이 일상인 인간의 축제와 비교하면 참으로 건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이틀쯤 축제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아이반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은 마을 밖을 나섰다.
붉은 계곡 소용돌이 부족의 족장, 웅크린 불꽃은 직접 마을 어귀까지 나와 그들을 배웅했는데, 그 와중에 알게 된 것이 꽤 충격적이었다.
“잘 다녀와라, 아들아.”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아버지.”
사나운 이빨과 웅크린 불꽃이 서로 그리 인사를 하며 작별의 포옹을 했다. 그러니까 둘은 부자 사이였던 모양이다.
“족장의 혈육이었소?”
아이반이 그렇게 물으니 오히려 사나운 이빨이 몰랐냐는 듯 되물었다.
“그걸 몰랐나?”
“말을 안 했으니 몰랐지.”
“으흠, 그런가? 아버지와 나는 무척이나 닮아서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숨기려 한 것은 아니다.”
그 말에 아이반과 델피노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리자드맨 얼굴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되물어 봐야 싸우자는 말밖에는 안 되니까.
“그나저나 짐이 무척이나 많군. 그게 다 뭘 챙긴 거요?”
사나운 이빨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 그 덩치가 묻힐 만큼의 짐이라니.
“나에게 공용어를 알려 준 늙은 전사가 인간의 마을은 몹시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챙겼지.”
그는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일일이 읊어 주었다. 이야기가 계속될 때마다 아이반과 델피노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했다.
“벌레 퇴치용 약 같은 것은 그렇다고 치고, 곰 사냥용 덫은 왜 들고 가는 거요?”
“저는 그것보다 입욕제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그는 마을 근처에서만 움직이다 보니 장거리 여행이 처음이었다. 사냥하며 숲을 며칠쯤 돌아다니는 것은 익숙했으나,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걸릴지 모르는 모험은 한 적이 없었다.
노련한 전사의 면모 뒤에 어설픈 시골뜨기 모험가의 느낌이 묻어났다. 구체적으로 집에 있는 비상금을 훔쳐서 용병이 되겠다고 가출한 농장의 셋째 아들 같은.
아이반은 모험가가 어떻게 짐을 싸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하면서 그의 짐을 대폭 줄였다. 산더미 같은 짐을 적당한 배낭 크기까지 줄인 후 빼놓은 물건을 모두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것들은 내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꺼내 주겠소.”
대부분의 짐을 빼앗긴 사나운 이빨이 묘하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그는 화제를 돌리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마을을 떠나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음, 글쎄. 원래는 이곳 근처에 숨겨진 던전이라도 찾아볼까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소. 시간도 걸리고 오크 녀석들이 신경 쓰이니.”
“그렇다면?”
잠깐 망설이던 아이반이 대답했다.
“요정의 숲으로 가고자 하오. 내 눈을 고칠 수 있을 만한 비약이 그곳에 있으니까.”
아이반이 길을 정했다. 목적지는 요정의 숲, 엘프들의 영역.
델피노가 우려를 표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괜찮겠습니까? 엘프는 만만찮게 폐쇄적인 종족인데…….”
“인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오. 그들에게 초대를 받기도 했지.”
그리고 폐쇄적인 종족이라는 것도, 사실 까놓고 보면 인간에게 개방적인 종족은 거의 없었다. 크게 보면 인간이 오히려 폐쇄적인 종족이 아닐까? 아무도 안 놀아 줘서 스스로 모두를 왕따로 만드는 느낌.
“엘프의 초대라, 놀랍군요. 하여간 당신과 있으면 심심할 틈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조금 안타깝군. 나는 항상 심심하게 사는 것을 꿈꾸는데 말이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자신을 그렇게 놀려 두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뭐라도 하라는 듯 등을 떠밀곤 했다. 그게 퀘스트가 되었든, 신의 의지가 되었든.
쉬더라도 침구류 일광 건조하고, 장비류 정비하고, 청소 깔끔하게 한 뒤에 쉬라는 주말 당직 행보관 같았다. 그러면서 자기는 할 것만 하면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는다는 개소리나 내뱉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최대한 숲을 빨리 빠져나가겠소. 또다시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명의 맛을 즐겨야겠으니.”
* * *
“잠깐! 검문을 하겠… 어?”
성문에서 일행을 막아선 병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의 제국이나 서부의 연합국과는 달리 대륙 동쪽에 있는 로만 왕국에서는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이종족을 보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리자드맨은 더욱.
“왜, 문제 있나? 병사?”
사나운 이빨이 유창한 공용어로 물었지만, 병사는 제대로 말을 알아들은 기색이 아니었다. 당황해서 얼이 빠진 모양이다.
다행히 옆에 있던 아이반과 델피노를 알아본 병사가 있어서 성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는 있었지만, 사나운 이빨은 퍽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항상 이런 식이군. 인간들은 나를 보면 놀라기부터 한다.”
“그, 세간의 이미지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리자드맨이 두렵기도 하거든요.”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종족들을 깊은 산과 숲, 황무지로 쫓아낸 것은 정작 인간들이 아닌가? 우리가 인간을 두려워해야지, 왜 인간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거지?”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말하자 델피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원래 때린 것보다 맞은 것을 더 잘 기억하는 것이 사람이오.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들은 먼저 빛의 신 아룬의 신전으로 향했다. 거기서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는 의도였다.
아룬 신전의 사제는 사나운 이빨을 보고 잠깐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반겼다.
“산맥으로 들어가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그렇소. 여기 리자드맨의 도움으로 오크들의 진군을 차단했지. 그들은 결코 산맥을 넘지 못할 거요.”
“그건 다행이로군요.”
그러면서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동부는 이미 그린스킨에게 완전히 먹혔다는 것, 왕국의 정예들이 출동하고서도 큰 성과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새롭게 그린스킨과 국경선을 마주하게 된 남부의 제국이 오히려 패배해서 물러났다는 것.
“지금 분위기는 최악입니다. 그동안 무시하고 있던 그린스킨들이 이렇게나 무서운 힘을 감추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죠. 소문이지만, 그린스킨에게 대항하기 위한 연합이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저 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린스킨, 그러니까 피의 동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신뢰의 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 대략 지금쯤이니까.
아이반은 그 소식을 듣고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본격적인 난세가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피와 죽음 속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런 아이반의 모습을 본 아룬 신전의 사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게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너무 좋지 않은 소식만 전해 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피곤하시겠군요.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그 말에 아이반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고기, 맥주, 따뜻한 잠자리.”
사나운 이빨이 슬쩍 덧붙였다.
“거기에다 목욕까지.”
아룬 신전의 사제가 빙긋 웃었다. 스스로 산맥으로 들어가 오크들을 막아 낸 영웅이 바라는 것치고는 너무 소박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모두 가능한 것들이로군요.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룬 신전에서 준비해 준 음식은 맛있고, 푸짐했다. 잠자리 역시 따뜻하고 푹신했으며, 목욕까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영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확실히 분위기가 아주 심각하고 무거워졌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도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완전 최악이군.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어둡고 불안과 짜증만이 가득하오.”
아이반의 말에 델피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좋은 소식은 없고 전부 암울한 이야기뿐이니 사람들의 얼굴이 밝을 수가 없겠죠.”
“이런 곳에서는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할 것 같소. 적당히 준비되면 떠나도록 합시다.”
엘프의 숲은 여기서 며칠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이반이 알고 있는 엘프의 숲이 그렇다고 해야 옳았다.
엘프가 머무는 숲, 그러니까 요정의 숲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곳이었다.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의 어디쯤 요정의 숲이 있었고, 그곳으로 가는 입구만이 이런저런 숲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원론적으로는 세상 모든 숲이 요정의 숲과 이어져 있었다. 그중 물질계에 존재하는 엘프의 마을은 요정의 숲으로 들어가는 주된 입구를 지키는 관문인 셈이고.
아이반은 처음 엘레나 이븐우드를 만났던 장소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며 수색을 시작했다.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영 막막했다. 쉽게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엘프들은 몸놀림이 무척이나 가벼워서 발자국이 깊지 않았다. 마치 풀 위를 밟고 지나가는 듯 땅에는 흔적이 없었다.
아이반에게는 레인저의 지식과 경험이 있었으나, 그것으로도 엘프를 추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믿을 수밖에.
“이런 식으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찾지 않더라도 근처까지 가면 그들이 나타날 거요. 낯선 이들이 요정의 숲으로 가는 입구에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니까.”
지루한 일이었다. 그러나 숲에서 먹고 자기를 반복하며 훑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결국 그들이 나타났다.
휘이잉-.
겨울 숲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바람이 스치고 부드러운 향기가 흘러나왔다.
육신의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기묘한 향기.
아이반은 눈을 하나 잃었으나,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기감으로 그들의 존재를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엘프 다섯이 어느새 나무 위에 서서 활을 당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얼굴이었다.
그들은 델피노를 바라보았고, 사나운 이빨을 경계했으며, 아이반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당기고 있던 활을 내려놓았다.
“한둘 정도는 익숙한 얼굴이군. 나를 알겠소?”
“당연합니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아이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로군요.”
“나는 세계수의 초대를 받고 찾아왔소. 혹시 동료가 있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오?”
그 말에 엘프들이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었으나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끝나고, 엘프 하나가 입을 열었다.
“세계수의 초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당신들을 우리의 숲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엘프들이 일행을 데리고 겨우 몇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방의 풍경이 달라졌다. 겨울 숲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모두 사라지고, 마치 봄이나 여름처럼 잎이 파릇파릇한 나무가 가득했다. 꽃이 피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 왔다.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결계를 통과해 요정의 숲으로 넘어온 것이다. 만약 엘프의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장소였다.
스르륵.
엘프가 손짓하자 앞을 가리고 있던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비켜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온갖 정령과 요정들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델피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 멀리 시야의 끝에 커다랗고 커다란 나무가 솟아오른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 커서 그 끝이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세계 전부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웅장함, 세계 그 자체일 것만 같은 위대함.
스윽.
아이반은 가죽 안대를 쓰다듬었다. 그의 잃어버린 눈이 욱신거렸다. 마치 세계수가 그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왜지?’
묘한 표정을 짓던 아이반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46화 정해진 것
아이반과 일행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움직였다. 정령의 숲은 참으로 기묘한 곳이었다. 마치 동화 속 세상으로 걸어 들어온 기분이다.
엘프의 마을은 참으로 제각각이었다. 어느 집은 흙으로 지어졌고, 어느 집은 돌로 지어졌으며, 어느 집은 나무로, 또 어느 집은 여러 재료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재질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으나, 하나같이 주변과 잘 어우러졌다. 그렇게 다르면서도 통일감이 느껴졌다.
인간 둘과 리자드맨 하나. 낯선 방문객이 등장하자 마을에 있던 엘프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박혀 들었다.
엘프들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무감정한 듯 굳은 얼굴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기묘한 곳이다. 내 취향과는 영 맞지 않아.”
사나운 이빨이 낮게 중얼거리자 엘프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가 돌아왔다. 리자드맨의 언어로 한 말이었는데 저 엘프는 과연 알아들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엘프는 일행을 흙으로 만들어진 어느 집으로 안내했다. 기본적인 가구는 갖춰져 있었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으나 생활감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비어 있던 집입니다. 여기서 쉬고 계시면 곧 당신들을 안내할 우리가 올 것입니다.”
그렇게 파수꾼 엘프들이 사라지자 델피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답답한 곳입니다. 이곳은 환상적이지만 불편하기만 하군요. 엘프들의 시선이 버겁습니다.”
“예전에 엘프를 만난 적이 있소?”
“예전에 서부 연합국에서 두어 번쯤 봤습니다. 그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집 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살펴보던 사나운 이빨이 끼어들었다.
“그건 세계수를 벗어난 엘프들이라 그럴 거다.”
“예?”
“숲을 벗어나면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진다고 들었다. 그러면 엘프들 역시 감정을 가지게 된다더군.”
세계수 네트워크와 연결이 되어 있을 때 엘프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수와 떨어지게 되면 항상 누군가와 공유하던 생각과 감정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엘프 역시 다른 생명체들과 비슷하게 변한다고 했다.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거들었다.
“넓은 호수에 차 한 숟가락을 타 봐야 아무 변화가 없지만, 찻잔에서는 큰 변화지. 세계수를 벗어난 엘프들은 오히려 감정에 솔직하고 표현이 확실하다고 들었소. 나도 그런 엘프를 본 적은 없소만.”
항상 함께하던 세계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게 되니까.
그래서 숲을 벗어나 인간들 틈에서 활동하는 엘프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엘프들은 모두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사나운 이빨이 투덜거렸다.
“엘프들의 집에는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가 없군. 씻는 즐거움을 모르는 자들이다.”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를 찾듯이 집 안을 돌아다니더니 욕조를 찾았던 모양이다.
“엘프들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집에도 욕조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소. 기껏해야 따뜻한 물을 받아서 끼얹는 정도지.”
몸을 담글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물을 받아 놓는다는 것은 사실 꽤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그만한 공간도 필요했고,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으며, 그걸 데우는 데 들어가는 연료도 필요했다.
예전에 사나운 이빨이 인간의 음식은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한 이유가 그대로 목욕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뭣?”
사나운 이빨은 조금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집마다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에 머물렀던 인간의 집에는 커다란 목욕탕이 있었다!”
“그건 신전이잖소?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가 있으니. 그리고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았소. 공용 목욕탕도 있고, 훌륭한 저택에는 커다란 목욕탕이 딸린 경우도 많지. 다만 일반적인 서민의 집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거요.”
아이반은 그러면서 고급 여관에는 방마다 욕조가 딸린 욕실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속삭였다.
“그런 곳이라면 마음껏 목욕을 할 수 있겠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그 소리를 들은 사나운 이빨이 노동 의지를 불태웠다. 인간들의 돈을 모아 반드시 고급 여관에서만 묵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걸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델피노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엘프들이 대체 어떤 이유로 당신을 초대했을까요? 외부인을 쉽게 자신들의 숲으로 들이는 종족이 아닐 텐데…….”
“글쎄, 그건 이제 알려 주겠지.”
아이반이 진지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러고 있으니 곧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에 본 얼굴이었다. 엘레나 이븐우드. 세계수의 무녀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일 것으로 예상되는 존재.
“노크도 없이 들어오셨군.”
아이반의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인간들의 예의입니까? 죄송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군요.”
하긴, 세계수로 연결된 엘프들이 노크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존재를 다 알고 있으니 의미가 없는 짓이지.
“세계수의 초대를 받고 찾아왔소. 그대가 전해 주었지.”
“그렇습니다. 세계수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아이반. 그리고 아룬의 사제, 모르나의 전사까지도.”
엘레나 이븐우드의 눈동자가 일행을 하나씩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은 마치 투명한 유리 같았다. 예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딱히 세계수의 마음에 들 만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아이반이 그렇게 물어보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엘레나 이븐우드는 아이반을 밖으로 안내했다.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이 따라나섰고, 그녀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하늘을 떠받치듯 구름을 뚫고 솟아난 세계수의 위엄은 실로 대단했다. 그들은 그쪽을 향해 걸었으나 전혀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세계수는 얼마나 큰 것입니까? 언제쯤 도착할 수가 있죠?”
델피노가 그렇게 감탄하며 묻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도착할 수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세계수는 실존하는 나무가 아닙니다. 커다란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결코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느껴질 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또다시 아이반의 잃어버린 눈이 욱신거렸다. 둔탁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아이반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눈이 아프군. 마치 세계수와 공명이라도 하는 것 같아.”
아이반이 알기로 저 세계수는 노르드 신화에 나오는 세계수 위그드라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세계수라는 개념이야 워낙 흔한 것이 아닌가. 단군신화의 신단수, 기독교의 생명의 나무, 심지어 조지아 신화에도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나무가 등장한다.
그런데 어째서 오딘이 앗아간 눈이 이렇게 세계수와 반응하는 것일까.
오딘의 시선이 느껴졌다. 토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헤임달과 로키의 시선도 느껴졌다. 언젠가 한 번씩 그를 스쳐 지나간 이름 모를 아스가르드 신의 시선 역시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낯선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저 멀리, 거대한 나무가 그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아이반이 안대를 붙잡고 있으니 엘레나 이븐우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세계수를 만나 보시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까는 세계수는 실존하는 나무가 아니라고…….”
말을 하던 델피노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온 사방을 채우는 웅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으흠…….”
델피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득한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아이반만이 느끼고 있던 초월자의 시선을 다른 이들 역시 느끼게 된 것이다.
일행은 모두 엘레나 이븐우드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기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델피노는 빛의 주 아룬의 이름을 부르고, 사나운 이빨은 큼지막한 검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웅-.
아이반은 어느새 자신이 낯선 공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우주, 그곳을 채우는 세계수의 모습.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엘레나 이븐우드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그대를 초대하였다.]
그 말을 듣고 아이반의 표정이 굳었다. 단순히 육성이 아니라 정신파에 가까운 의사 전달. 이것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세계수가 직접 강림했다고? 겨우 나 때문에?’
경악하는 아이반에게 엘레나 이븐우드의 몸을 빌린 세계수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나는 이미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계수는 엘프들이 사용하는 세계수 네트워크 그 자체이자 엘프들의 집합의식이 신성을 얻은 실체 없는 초월자였다.
그 신성의 조각은 모든 엘프에게 나뉘어 있었으니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계속해서 엘프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니.
“어찌하여 나를 불렀소?”
아이반이 잔뜩 경계하며 묻자 세계수가 답했다.
[그건 그대가 세계의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운명이라는 것은 몹시 중요한 개념이었다. 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흐름.
세상 모든 것이 나름의 운명에 묶여 있었으나 아이반은 아니었다. 그는 그 절대적인 흐름을 한 손에 쥐고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이 수많은 신들이 그를 주목하는 이유였다.
“이해할 수 없소.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하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운명을 휘두른단 말이오?”
아이반이 불만스럽게 외쳤다.
지금껏 신들의 의지에, 퀘스트라는 빌어먹을 존재에 휘둘리기만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아이반은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계수는 단언했다.
[그리하여 세계의 운명이 요동치고 있으니 그대가 운명을 휘두르는 것이다. 바뀌지 않는 미래가 변화하고 있으니 그대의 힘을 부인할 수 없다.]
모두 다른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예정된 것이었으나 아이반은 아니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존재조차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신격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에 얽매여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신격이었으니까.
빛의 신 아룬은 빛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오크 투신 타르칸은 전투와 광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자 그들의 운명이었다.
플레이어. 하나의 세계를 게임 판으로 삼아서 가지고 노는 존재.
한낱 캐릭터로 전락한 자신에게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었나, 그런 가치가 존재했었나.
아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그저 궁금해서 나를 불렀단 말이오? 그대의 장난감으로 쓸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가 궁금해서?”
독기가 가득 담긴 아이반의 물음에도 세계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완벽한 신격이 아니니까. 오히려 나는 그대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무엇을 말이오?”
[나의, 우리의 운명을 바꿔 주길 바란다.]
“신격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나처럼 미약한 자가 잘도 하겠군.”
아이반이 그리 내뱉자 세계수는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의 잃어버린 눈이 고통스럽다고 했지. 그것이 어째서인지 아는가?]
“씨부럴, 빌어먹을 오딘이 가져간 내 눈으로 구슬치기라도 하는 모양…….”
[나의 존재가 그의 아픈 기억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뭔 상관이냐는 듯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던 아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놀랍게도 세계수가 짙은 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만간 불타서 사라진다. 그게 내 운명이다.]
47화 또 다른 길
“아이반! 괜찮으십니까!”
귀를 때리는 델피노의 외침에 문득 정신을 차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이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세계수가 그를 부르기 바로 직전의 그 모습이었다. 아마 현실에서의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 경계할 것 없소. 이미 다 지나갔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세계수가 나를 불렀소. 이야기를 나누었지.”
“세계수와 이야기를……?”
델피노가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는 엘프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갑자기 신과 대면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생각보다 말이 많더군. 혼자 심심했던 모양이야. 자세한 것은 조금 이따가 알려 드리겠소.”
그렇게 말을 줄인 아이반이 시선을 돌려 엘레나 이븐우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깐 사이에 대단히 지친 모습이었다.
‘하긴, 세계수의 정신을 잠깐이나마 자신의 몸에 강신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세계수는 엘프의 집합의식이 신격화된 초월자이며, 세계수의 신성은 모든 엘프가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모든 엘프가 세계수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엘프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으니까.
적합도가 아주 높은 극소수의 엘프만이 가능한 일이었고, 그들을 따로 세계수의 무녀라고 불렀다.
하필 무녀인 이유는 최초로 세계수와 감응한 존재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세계수의 무녀가 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제 당신이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소? 엘레나 이븐우드.”
그 말에 엘레나 이븐우드는 지친 기색을 지우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엘레나 이븐우드. 세계수의 무녀인 시아린 이븐우드의 동생이자, 한때 무녀가 되기를 원했던 자입니다.”
이전까지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억지로 덤덤한 척을 하는 듯했다. 그만큼 감정의 유동이 심하단 뜻이었다.
자신이 하는 말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 잠시나마 세계수의 정신을 자신의 몸에 강신시킨 여파로 보였다.
초월자인 세계수조차 자신이 불타 사라질 운명이라는 말을 하며 감정을 내보였는데, 어찌 개인이 그 무거운 감정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엘레나 이븐우드 역시 지금은 격한 감정에 휩쓸려 대단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긴 했다.
아이반과 일행은 처음 안내를 받았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 명만 있으니 아이반은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털어놓았다.
어째서 자신의 잃어버린 눈이 반응했는지, 어째서 세계수가 자신을 초대했는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델피노가 아주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어째서 찬란하신 빛의 주께서 그대에게 관심을 가지셨는지, 뱀신 모르나가 시선을 주었는지, 세계수가 초대를 하였는지.”
델피노는 운명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서 한참이고 설명을 시작했다. 아룬 신전의 해석과 다른 교단의 해석까지 비교해 가면서.
물론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은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사나운 이빨의 물음에 아이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오. 세계수 역시 그걸 알았으면 본인이 해결했겠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우리의 힘이 초월자와 비교한 수준은 아니잖소? 우리의 능력에서 벗어난 일을 시키진 않을 것이오.”
일행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었으나, 세상에는 그들보다 강한 자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있었다.
세계수의 의도 역시 운명에서 벗어난 아이반을 변수로 활용하자는 것이지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욱신욱신.
또다시 잃어버린 눈이 쑤셨다. 세계수조차 가만히 있는 것을 오딘이 못 견디고 들썩거리는 중이었다.
아이반은 속으로 한바탕 욕설을 내뱉었다.
‘씨부럴! 그만 좀 하시오! 전 여친 닮은 사람을 봤다고 술 취해서 연락하는 진상 같으니까.’
이미 라그나로크는 지나갔다. 위그드라실은 불타 사라졌고, 그들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왔다. 이쪽 세계수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막는다고 해도 이미 흘러간 그들의 과거는 바꿀 수가 없었다.
물론 오딘이 설마 그걸 모를까. 알면서도 견딜 수가 없겠지. 다시 한번 세계수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본다는 게.
노르드의 주신, 오딘의 삶은 항상 언젠가 있을 라그나로크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였음에도 결국 준비가 부족하여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아니, 모든 신들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노르드 신화에서 멸망의 날을 라그나로크라고 부르는 것이다. 직역하자면 신들의 운명. 결국 아무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해진 미래.
‘세계수가 불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나?’
마왕이 존재한다면 응당 한 번씩은 강림해야 했다. 무림에 200년간 평화가 지속하였다면 정사혈전이 벌어지고, 재난 영화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나왔다면 반드시 무너져야만 했다. 플레이어의 시선으로 봤을 때 세계수란 그런 존재였다.
아이반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사나운 이빨이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최고지.”
“잊으셨나 본데, 여기엔 욕조가 없소.”
“…망할 귀쟁이 놈들!”
* * *
다음 날, 감정이 정리된 모양인지 엘레나 이븐우드가 평상시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여기서 평상시의 모습이란 과연 생명체가 맞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표정한 상태란 뜻이다.
“편히 쉬셨습니까?”
“그렇소. 어디서든 잘 자는 것이 내 특기니까.”
“다행이군요. 세계수를 만나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썩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소. 지금도 여기가 쑤시거든.”
아이반은 자신의 안대 위를 쿡 하고 찍으며 가리켰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사정은 알겠지만, 솔직히 나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의 의뢰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가 아니겠소?”
“이해합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지형이 제법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대륙전도였다. 마을이나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는 않아도 산이나 강, 계곡과 같은 자연물은 상당히 잘 나와 있었다.
엘레나 이븐우드는 몇 군데 표시가 되어 있는 곳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악한 의식들이 연달아 행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차원 방벽이 흔들리고 요정의 숲의 경계가 무너졌죠. 지금은 모두 복구가 되었습니다만, 의식들이 행해질 때마다 피해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아이반과 델피노의 표정이 굳었다. 그중 하나가 어딘가 익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긴, 악마 숭배자들이 있던 곳 같은데…….”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제물로 바쳐서 행하던 의식.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의 힘이 흘러나오던 바로 그곳.
델피노의 눈빛이 무척이나 날카롭게 변했다. 구마사제로서의 감이 그에게 속삭였다.
“정확히 의식이 이루어진 장소가 어디입니까?”
엘레나 이븐우드는 다시 한번 몇 군데 장소를 가리켰고,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던 델피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성황청에서 확인한 곳과 거의 일치하는군요. 악마 숭배자들의 짓이 확실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엘레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의식이 계속될수록 차원 방벽이 약해집니다. 다른 차원에 있는 악마들을 이 땅으로 불러오기 쉬워지죠. 그뿐만이 아니라 요정의 숲이 강제로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기를 원합니다.”
악마 숭배자가 활동하는 것은 대부분 인간의 영역이었으므로 엘프들이 움직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러니 외부의 손을 빌려 해결하려는 모양이다.
“악마 숭배자들의 의식을 막아 달라? 쉽지 않은 일이오. 적은 무척이나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소. 신전의 추적도 뿌리칠 정도로. 심지어 우리는 수도 적은데 무슨 수로 막겠소?”
아이반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방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대들만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이반은 깨달았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일을 맡길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모양새였다.
자신이 비록 특이점이라고는 하지만 외부인을 완전히 믿고 일을 맡길 수는 없겠지. 이들은 그렇게 개방적인 종족이 아니었다.
“보수는?”
“성공한다면 눈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당신의 깨진 그릇도 어느 정도는 치료할 수 있겠죠.”
나쁘지 않았다. 아니, 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예전 델피노가 말했듯 신이 직접 새겨 놓은 상처를 회복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깨진 그릇마저 회복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받아들이겠소.”
그녀가 원한 활동 지역은 서쪽이었다. 로만 왕국의 서쪽이 아니라 대륙의 서쪽, 서부 연합 왕국.
잘된 일이었다. 오크 로드 카르타크의 아들 하나를 죽이고, 하나를 반쯤 시체 상태로 만들어 돌려보냈으니 녀석이 얼마나 눈이 뒤집어졌겠나.
이참에 서쪽으로 가서 적당히 힘을 기를 때까지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아이반이 그런 다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엘레나 이븐우드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친구가 없으시군요.”
뭐지? 지금 나를 아싸라고 놀리는 건가?
아이반의 손이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도끼를 꺼내 들려다가 겨우 참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이반이 삐딱하게 되묻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엘프 특유의 그저 사실을 늘어놓는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전에 주었던 정령석을 사용하지 않으셨군요. 그대에게서 정령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이 있었다. 자신에게 정령 친화력이 느껴진다고 했었지.
아이반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인벤토리에서 정령석을 꺼내 손에 쥐었다.
“워낙 바빴소. 인간 세상에서 정령과 이어지는 방법을 찾는 게 쉽지 않았고.”
그 말에 엘레나 이븐우드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친구가 되는데 따로 방법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아이반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인간들은 그렇소. 누군가를 만날 때도 방법이 필요한 법이지.”
인간 중에 정령사가 드문 것은 정령과 소통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태생이 정령에 가까워서 쉽게 계약을 맺는 엘프와는 상황이 달랐다.
“정령계와 가까운 이곳과 달리 물질계에서는 실체를 가진 정령을 보기가 어렵소. 따로 정령 소환진을 사용해서 계약해야만 하는데, 나는 그런 방법을 모르오.”
물론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면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거다. 자연스럽게 머리에 지식이 새겨지고 정령의 호감도도 얻을 수가 있겠지.
하지만 마법이나 검술처럼 개인의 역량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를까, 정령처럼 타인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은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기가 꺼려졌다.
신성력을 그렇게 올려서 지금껏 얼마나 고생했던가. 정령도 그런 식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아이반의 이야기를 들은 엘레나 이븐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이곳은 요정의 숲이니까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정령들의 쉼터로 안내하겠습니다.”
48화 매캐한 만남
정령은 자연물의 화신이다. 바람이나 불, 땅과 물 같은 일반적인 자연의 속성이 정령이 되는 경우는 흔하고, 나무나 늑대, 공포, 사랑과 같은 개념적인 존재에서 태어나는 정령들 역시 드물지 않았다.
정령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고, 세상 만물 모든 것에 정령이 깃들 수가 있었으나 실체를 가지고 나타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특히나 물질계에서는 이런저런 속성이 난잡하게 섞여 있어서 정신체가 스스로 실체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웬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정령이 아니라면 그저 미약한 존재감만 느껴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요정의 숲은 달랐다.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에 있는 이곳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정령들이 실체를 가지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직 무엇이라 말하기 힘든 미약한 힘의 흐름부터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불꽃, 허공에 떠 있는 물방울,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있는 동물의 모습까지.
그 모든 것이 정령이었다. 제각기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자연물의 화신.
엘레나 이븐우드가 안내한 곳은 요정의 숲에서도 가장 정령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그 찬란하고 환상적인 풍경은 아이반마저 감탄하게 했다.
“이건,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 정말 훌륭한 곳이다.”
요정의 숲은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솔직히 일행들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엘프 특유의 분위기가 그들을 압박해서 그저 갑갑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정령들이 한자리에 이렇게나 많이 모여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떨렸다. 몹시 초월적인 광경이었다.
스윽.
낯선 이들이 등장하자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정령들이 일행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리저리 흩날리며 돌아다니다가 슬쩍 뺨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아하하하!
어디선가 꺄르르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델피노는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물의 정령이 만지고 지나간 볼에서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퍼졌다.
“평생 이런 광경을 보리라곤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일행이 다들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자 엘레나 이븐우드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위쪽으로 올라갔다. 저 정도면 엘프로서 아주 크게 웃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도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정령들이 그대들을 환영하는군요. 이 중에 당신의 친구가 되어 줄 아이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아이반은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번쩍거리던 번개의 정령이 그의 손에 내려앉았다.
순간 전기가 몸을 스치는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고통은 없었고 오히려 시원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
말을 하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손 위에서 몸을 뒹굴던 번개의 정령이 흠칫 놀라는 것처럼 그의 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감이 아주 강력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천둥의 신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감히 가까이 다가오려는 번개의 정령이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슥-.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정령들이 빠르게 멀어졌다. 정신체인 그들은 누구보다 초월적인 시선에 민감했다. 아이반의 배후에서 지켜보고 있는 신들의 존재가 버겁기만 했다.
치지직!
휘이잉-.
화르륵!
천둥의 신이 모른 척 망치를 만지작거렸다. 폭풍의 신이 하나 남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의 신은 지금이 타이밍이냐며 불꽃을 피웠다.
감히 자신들의 권능을 빌리면서 잡스러운 정령의 힘을 섞으려 드느냐고 따지는 듯한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속성이 겹치는 정령들은 이미 멀찌감치 도망을 가 버렸고, 그러지 않은 정령들도 거리를 벌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엘레나 이븐우드와 델피노, 사나운 이빨이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아이반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좀 나대지 마시오.’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한 걸음 안쪽으로 들어가자 딱 그만큼 정령들이 뒤로 물러났다.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이대로 정령은 그저 물 건너가는 것인가 싶었는데, 뒤에 있다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서는 녀석들이 있었다.
회색빛 털을 가진 늑대 두 마리, 짙은 검은색 깃털에 제법 커다란 덩치를 가진 까마귀 두 마리.
감정과 개념을 근원으로 삼은 정령들이었다. 무엇을 원형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아이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놈들.”
정령은 자연적으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념이나 문화에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있지만, 특히 미녀의 모습을 하는 것들이 많은 건 운디네의 영향이었고, 역시 수많은 불의 정령이 있었지만, 특히 도마뱀의 형상을 한 것들이 많은 건 샐러맨더의 영향이었다.
두 마리의 까마귀, 두 마리의 늑대. 그런 모습의 녀석들이 아이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후긴과 무닌, 게리와 프레키.
오딘이 데리고 다닌다는 녀석들을 원형으로 태어난 정령들이 틀림없었다.
‘나를 말 그대로 아바타로 만들 셈이야.’
아바타(Avatar), 곧 하늘에서 내려온 자. 위대한 천상의 신이 지상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든 분신.
예전이라면 집어치우라고 소리를 쳤을 것이다. 결코 닮아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을 가진 전사라면 감격스러운 일이었으나, 아이반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저 묘한 불쾌감만 느껴질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신과 닮았다는 말은 신의 힘을 끌어내는 데 부담이 적어진다는 말과 같았다. 그를 기원으로 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도 저항이 적었다.
마법은 곧 기적의 재현이었고, 신의 흉내였다. 신이 직접 자신을 화신으로 만들고 있다면 가지고 있는 역량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코스프레 약간 해 주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너무나 컸다. 이건 만족스러운 거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생각이 원래 본인의 성격과 묘하게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 반문한 아이반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법이 문제였다. 마법사의 신비로운 지식과 사고방식이 그를 물들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지독한 고집쟁이이며 자신만의 기준에 파묻혀 사는 괴팍한 자들이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까지 서슴지 않는 미친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과 과정만 생각하는 마법사적 사고방식이 서서히 아이반에게 깃들고 있었다.
강해질수록 자신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그걸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아이반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반이 가만히 서 있으니 엘레나 이븐우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들이 그대와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나와 맞는 녀석들은 이놈들이 전부인가 보오.”
“그러면 정령석을 꺼내 마력을 불어넣으시면 됩니다.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함께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반은 품에서 정령석을 꺼냈다. 그리고 정령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피를 마시고 시체를 뜯는 지옥에 함께하고 싶으면 오너라.”
마력을 머금은 정령석이 녹아들 듯 사라지고, 잘게 부서져 빛으로 흩날렸다. 정령들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우웅-.
아이반은 자신과 이어지는 또 다른 라인이 생긴 것을 깨달았다. 정령들의 존재가 좀 더 뚜렷하게 느껴지고 새로운 힘이 차올랐다.
하하하하하.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령들의 순수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어두운 목소리였다.
* * *
“이제 출발하겠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으니.”
정비를 마친 아이반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연합 왕국까지는 저희가 보내 드리겠습니다. 숲을 벗어나시면 먼저 이곳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그녀가 자세한 설명을 해 드릴 겁니다.”
요정의 숲은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에 위치한 곳이었고, 그 출입구는 대륙 전역의 숲에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요정의 숲을 경유한다면 공간을 뛰어넘어 일종의 포털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걸어가려 했다면 로만 왕국에서 서부 연합 왕국까지는 한참이나 가야 했다. 중간에 대수림이나 강철 산맥이 끼어 있어서 멀리 돌아가야만 했을 테니까.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을.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엘레나 이븐우드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이내 다른 엘프가 등장했다. 일행을 서부 연합 왕국까지 안내할 자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새로운 엘프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점점 멀어지는 엘프의 마을과 요정의 숲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습니다.”
델피노가 속삭이듯 말하자 사나운 이빨이 동의했다.
“이상한 곳이다. 하지만 잊지 못할 것 같다.”
거대한 세계수의 모습이나 정령들의 쉼터, 기묘한 엘프의 마을까지. 하나같이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모험가라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 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어느새 요정의 숲을 벗어나 물질계로 돌아온 것이다.
푸른 잎과 꽃이 가득하던 요정의 숲과 달리 이곳은 나무들이 다들 앙상했다.
“그래도 여기는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군요. 서부 연합 왕국으로 넘어와서 그런 걸까요?”
“그것보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거겠지. 이번 겨울은 참으로 길었소.”
숲의 경계까지 나오자 안내를 맡았던 엘프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숲을 벗어나서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끼리만 가도 될 것 같군. 그대는 돌아가시오.”
그 말에 엘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임무는 그대들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조금만 따라오십시오.”
안내자 엘프는 머뭇거리다가 숲을 벗어나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숲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사나운 이빨이 엘프를 흘깃 바라보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엘프의 표정이 저리도 풍부했군. 훨씬 살아 있는 것 같다.”
노르드 전사에 빛의 신 아룬의 사제, 그리고 리자드맨과 엘프라는 기묘한 조합이었으나 서부 연합 왕국의 성문을 통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거의 인간 위주인 로만 왕국과 달리 이쪽은 원래부터 이종족과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경비병은 힐끔 그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검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아룬의 사제인 델피노의 영향이 컸다. 아룬 교단은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대륙 어디든 웬만하면 사제는 건들지 않았다.
안내자 엘프는 그들을 데리고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상업 지구와 빈민가 사이의 애매한 지역으로 안내한 그는 어느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들어가서 그녀와 함께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이 어찌나 큰 스트레스였는지 엘프의 표정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그를 굳이 붙잡지 않고 보내 주었다.
“조심히 돌아가시오.”
“부디 그대들의 앞길에도 축복이 가득하길.”
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길바닥에 계속 서 있을 생각이 아니라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똑똑똑!
아이반이 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었다. 분명 기척은 있었기에 그는 조금 더 강하게 문을 때렸다.
쾅쾅쾅!
그러자 단단히 잠겨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쪽에서 다소 날카롭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일행이 안쪽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반쯤 소파에 파묻힌 상태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스읍, 후-.
한 뼘보다 조금 긴 곰방대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 사이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백금발 머리카락에 짙은 녹색 눈동자. 몸매가 다 드러나는 꽤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심드렁하고 나른한 표정. 길고 뾰족한 귀엔 귀걸이 세 개가 흔들거렸다.
탁탁.
곰방대의 재를 털어 낸 그녀가 물었다.
“숲에서 보냈나?”
49화 흩어지지 않는
“그렇소. 요정의 숲에서 엘레나 이븐우드를 만나 그녀에게 의뢰를 받았소. 사악한 의식을 막아 달라던데.”
아이반은 대답을 하면서도 얼떨떨했다.
나름 열린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엘프에 대해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꽤 충격적인 것을 보면.
지금껏 그가 만난 엘프는 죄다 감정이 있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없고 딱딱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동감이 넘치는 엘프를 만나니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요정의 숲에서 엘레나 이븐우드를 만났다? 요정의 숲은 외부에 함부로 개방된 곳이 아닌데, 직접 들어갔다 왔다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로 일행을 훑어보았다.
아이반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지금까지 만난 엘프들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래서 자기 생각을 감추는 것이 아주 노련한 얼굴이었다.
“세계수가 나에게 관심이 많더군.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소.”
“뭐? 아, 그래. 그랬어. 당신이 그 인간이란 말이지. 노르드인, 아스가르드의 전사, 에시르손.”
스읍, 후-.
그녀는 무심코 곰방대를 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뱉어 냈다.
“불이 꺼졌네. 입맛만 버렸어.”
곰방대를 내려놓은 그녀는 기다란 바늘 두어 개를 마치 비녀처럼 사용해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했다.
굵기와 길이를 보면 명백히 바느질에 사용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찔러 죽이기 딱 좋은 사이즈였으니.
“상당히 살벌한 것을 머리에 꽂고 계시는구려.”
아이반의 시선을 확인한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인간들 틈에서 살아 보니 이게 필요하던데. 엘프 옷고름을 한번 풀어 보겠다고 덤비는 미친놈들이 워낙 많아서.”
“어리석은 남자들이군.”
“왜 남자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이반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피 맛을 본 물건이오?”
“설마. 내가 그런 걸 머리에 꽂고 다니겠어?”
그녀가 싱긋 웃었다.
“항상 새것으로 교체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손짓하자 밀폐된 집 안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정령의 힘을 다루는 솜씨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지금 보여 준 것만으로 그녀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나는 이레인. 당신들은?”
“아이반 에시르손.”
“델피노입니다.”
“사나운 이빨이다.”
짧게 통성명을 마치자 그녀가 서류 더미를 꺼내며 말했다.
“좋아. 이제 서로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았네. 그러면 일 이야기나 하자고.”
서부 연합 왕국은 물자의 유통이 활발했다. 커다란 강과 서부 해안선을 끼고 있어서 수상 운송이 편리했고, 그 덕분에 다른 대륙과 동대륙 칼로난의 여러 나라 사이를 이어 주는 중개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부 연합 왕국은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웬만큼 특이한 일이 있어도 상대에게 그런 문화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넘어가곤 했다.
게다가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은 곳이었다. 적당히 넘어가지 않으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쪽은 흑마법사도 금지되어 있지는 않아. 정당하게 시체를 구해서 연구한다면 네크로맨서도 인정을 하는 편이지.”
그 정당하다는 것이 실은 아주 복잡하고 어이없는 방식이었으나 어쨌든 법이 그랬다.
“하지만 악마 숭배는 아니야. 그건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경계하고 있어.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만큼 선을 넘어가면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지. 그래서 악마 숭배자들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녀석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 최근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과 사망이 늘어났어. 나는 그걸 녀석들이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음, 그렇군.”
“녀석들이 하는 의식은 연달아서 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어. 조만간 이곳에서도 의식을 시도할 거야.”
평소라면 악마 숭배자들이 날뛰든 말든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녀석들이 하는 짓이 요정의 숲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거지.
“그걸 이쪽만 눈치챈 것은 아닐 텐데, 다른 쪽 반응은 어떻소?”
예를 들어 나라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리고 성황청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귀족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등등.
“왕국에서는 기사단을 풀었어. 성황청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고. 귀족들은 뭐, 이참에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하고 머리나 굴릴 테지.”
“그렇게 경계를 하는 중인데, 과연 놈들이 움직이겠소?”
그 말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델피노가 끼어들었다.
“움직일 겁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녀석들은 그 어떤 위험이 있어도 움직일 겁니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작했다면 끝을 보겠죠.”
“어째서 그렇소?”
“어디 한 곳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대륙 전역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다? 이건 본인들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들의 지시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악마들은 인간의 위험을 신경 쓰지 않죠. 악마가 명령했다면 악마 숭배자들은 어떻게든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악마에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악마 숭배자들이 본인을 어떻게 여기든 악마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저 써먹기 좋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악마 숭배자들의 피해가 크다고 하던 일을 멈출 정도로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었다면 애초에 악마라고 불리지도 않았으리라.
“웬만해선 그들은 계획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악마 숭배자들에 대해서라면 델피노가 가장 전문가였다. 십수 년을 최전선에서 그들과 맞서 싸워 온 구마사제의 의견을 믿지 않고 누굴 믿겠나.
“지금쯤 녀석들은 제물 준비가 한창이겠어. 먼저 녀석들을 찾으면 성공이고, 아니면 실패하는 거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이레인이 건조하게 말했다.
“잠깐이겠지만 동료가 되었네. 실력이 쓸 만하기를 바랄게.”
눈빛이 참으로 매섭군. 뒤통수에 화살이 박히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나 짐이 되지 마시오.”
노르드인, 아룬의 사제, 리자드맨 전사와 엘프 레인저라는 기묘한 조합의 파티는 사실 온갖 종족이 섞여 있다는 서부 연합 왕국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모습을 감춰야만 했다.
스윽.
이레인이 자신의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쓰다듬자 그녀의 모습이 변했다.
길고 뾰족한 귀는 인간처럼 짧고 둥글게, 백금발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짙은 녹색 눈동자는 갈색으로 바뀌었다.
이목구비와 피부가 미묘하게 달라져서 엘프의 화려한 미모조차 가려졌다. 지금도 제법 미녀에 속하는 외모였으나 이전과 비교하면 평범함의 범주로 들어온 셈이다.
아이반 역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지팡이처럼 꾸미고 바닥을 두어 번 내리찍자 커다랗고 건장하던 덩치가 줄어들었다. 팽팽하던 근육이 빠지고 다소 왜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챙이 넓은 모자까지 하나 뒤집어쓰니 그가 아이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단한 변신술입니다. 예전보다 더욱 완벽한걸요?”
델피노가 감탄을 했지만 아이반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이것이 모두 강제로 깨닫게 된 마법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능력이었다.
한편 아이반과 이레인이 변신하는 모습을 본 사나운 이빨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는 훌륭한 리자드맨 전사였다. 그건 마법이나 주술 같은 능력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솔직히 그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감출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나운 이빨이 당황스러워하고 있으니 델피노가 그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서부 연합 왕국에서 리자드맨은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굳이 모습을 감추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델피노마저도 옷을 갈아입고 헤어스타일을 조금 만지니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위로는 사나운 이빨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출발하겠소.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니까.”
과연 모습을 바꾼 효과가 있는 것인지 그들에게 날아드는 시선이 크게 줄었다. 사나운 이빨과 이레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곧 스쳐 지나갔다. 아주 튀는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녀석들이 로만 왕국에서는 약을 풀었지. 이쪽에서도 그렇게 하겠소?”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영주까지 가담했던 그때와 똑같을지는 모르겠군요. 대량으로 약을 팔기 시작하면 무조건 조사가 들어옵니다. 그때처럼 영주가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면 꼬리만 잡힐 뿐이죠.”
아이반과 델피노가 속닥거리고 있으니 이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단서가 아예 없지는 않아. 일단 따라오기나 하라고.”
* * *
아이반과 일행은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말을 구했으나 평소보다 몇 배나 가격이 비쌌다. 대륙 동쪽에서 그린스킨과 크게 전쟁이 벌어진 것이 서부 연합 왕국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결국 그들은 혈통 좋은 말은 구경도 못 하고, 적당한 짐말만 둘을 얻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사나운 이빨은 신체 구조상 말을 타기가 어려워서 어차피 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싸구려 짐마차와 비포장도로의 조합으로 승차감은 여전히 최악이었으나, 속을 짚으로 채운 방석을 몇 개쯤 깔고 나니 그나마 괜찮아졌다.
마부석에는 아이반이 앉았다. 정말 마부처럼 부드럽지는 못해도 말을 모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저기서 오른쪽. 그러고 한동안 직진만 하면 돼.”
옆에 앉아서 길을 알려 주던 이레인이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치익!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바로 옆에서 그 냄새를 맡은 아이반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아, 내가 실례했나?”
이레인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 때문이 아니오. 그냥 평범한 담배 냄새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오.”
단순한 담배라기엔 그 속에 섞인 약초 향이 진했다. 아이반의 예민한 감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걸 알았어? 코가 좋은데?”
“눈을 하나 잃었더니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더이다.”
톡톡.
아이반이 자신의 안대를 두드리자 이레인이 피식 웃었다.
“별로 부럽지는 않네.”
스읍, 후-.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섞여 있지. 그래야 마음이 안정되거든.”
그녀의 표정이 순간 아련하게 변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요정의 숲을 떠난 지 제법 오래된 모양이오.”
이레인이 힐끗 아이반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신의 아버지가, 어쩌면 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숲을 떠났지. 인간의 기준으로는 오래되었고, 엘프의 기준으로도 짧지는 않은 세월이 흘렀어.”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숲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동족을 만난 적도 없었다.
억지로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어 내어 밖으로 나왔는데, 또다시 세계수와 연결되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프에게 세계수와의 연결은 신체의 일부이며, 정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걸 자신의 의지로 끊어 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숲을 벗어나 밖으로 향한 엘프들은 모두가 그런 각오를 하고 나온 고행자였다. 그들은 서로의 의지가 약해질까 두려워 우연이라도 마주치기를 거부했다.
“그 정도면 요정의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소?”
아이반의 질문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임무가 끝나지 않았어. 언젠가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을 때 돌아가서 쉬어야지. 아직은 아니야. 앞으로 백 년은 넘게 거뜬하지.”
스읍, 후-.
다시 한번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전과 달리 아이반은 그 연기가 그리 가볍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거의 다 왔네. 다들 준비해.”
50화 또 다른 추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