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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또 다른 추적자

이레인이 안내한 곳은 어느 낡은 고성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져서 간신히 원형을 알아볼 수 있는, 오래되고 오래된 곳.

아무리 버려진 성이라지만 저런 것이 이런 외딴곳에 있다니.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헤치고 들어와서야 완전한 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규모가 작지 않았다.

“여긴 어디요?”

아이반이 묻자 이레인이 곰방대를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서부 연합 왕국이 지금의 모습으로 합쳐지기 전에 존재하던 자잘한 나라들이 다 어떻게 되었겠어? 그 흔적이지.”

오래전 멸망한 나라의 왕성이란 뜻. 그 말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확실히 한 나라의 왕성다운 웅장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닳고 깨지고 무너졌지만 군데군데 새겨진 조각이나 전체적인 규모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이 더욱 황폐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던 번성한 곳이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앙상한 나무와 마른 풀만 가득했다. 어째서인지 이곳의 바람은 조금 더 싸늘한 듯했다.

“아무리 망국의 왕성이라지만 꼴이 너무 초라한데.”

아이반이 중얼거리니 델피노가 말을 받았다.

“대륙의 서쪽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크고 작은 것을 다 포함하면 백 개도 넘는 나라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졌습니다. 이곳 역시 그중 하나겠죠.”

그런 혼란을 거쳐 지금과 같은 서부 연합 왕국이 탄생한 것은 불과 200년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사라진 도시가 어디 하나둘이겠나.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른하던 기색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에 그놈들이 있단 말이오?”

“며칠 전에 수상한 자들이 이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들었지. 지금까지 있는지는 알 수 없어.”

“이왕이면 한 번에 잡았으면 좋겠군.”

우웅-.

아이반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어디선가 까마귀 두 마리가 나타났다. 얼마 전 요정의 숲에서부터 함께하게 된 녀석들이다.

그는 꺼림칙한 기분을 털어 내지 못하면서도 녀석들을 원본의 이름을 따서 후긴과 무닌이라 불렀다.

“고디 흐라픈블로트스(Goði hrafnblóts).”

노르드의 언어로 ‘큰 까마귀를 부리는 사제’라는 뜻.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후긴과 무닌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풍경이 그대로 아이반에게도 보였다.

남의 시야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꽤 어색했지만 아이반은 빠르게 적응했다. 그는 헤임달이 내려 준 권능을 통해 잠깐씩이나마 초월자의 시선마저 경험했던 몸이었다.

여기저기 무너져서 구멍이 숭숭 뚫린 성이 보였다. 하늘에서 살펴보니 그냥 보는 것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동안 후긴과 무닌의 시야로 안쪽을 살펴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이내 지워 버렸다. 아직 후긴과 무닌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안에 있다면 틀림없이 눈치를 채겠지.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별로 건진 것이 없군. 직접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소.”

일행은 자연스럽게 대열을 갖춰 움직였다. 전방에는 든든한 리자드맨 전사인 사나운 이빨이, 그다음은 전천후로 대응이 가능한 아이반이, 가장 중요한 사제인 델피노가 서고 마지막은 후방에서 견제가 가능한 이레인이 활을 빼 들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반은 힐끔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아직 신뢰가 없는데 그녀를 후방에 둔다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과민한 반응이야.’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직 모두 털어 내지 못한 버릇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조금은 무뎌질 필요가 있었다.

일행은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덩치 큰 사나운 이빨마저도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리자드맨 사회에서 훌륭한 전사는 곧 훌륭한 사냥꾼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런 그가 섣불리 기척을 흘릴 리가 없었다.

착!

앞서 움직이던 사나운 이빨이 꼬리를 세웠다. 무언가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반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니 사나운 이빨이 바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본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열다섯, 아니 열여섯인가?’

주변을 넓게 움직이며 조금씩 단서를 모아 규모를 짐작한 아이반이 일행에게 수신호로 알렸다.

‘적, 열여섯, 안쪽, 여섯.’

열여섯 명이 들어와서 열 명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흔적은 없었으니 안쪽에 여섯 명이 있으리라.

레인저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복잡한 수신호라면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수신호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물론 사나운 이빨은 그런 아이반의 수신호조차 제대로 이해한 눈치가 아니었다. 대신 그 나름으로 설명을 더하려 했다.

휙, 휙!

사나운 이빨은 안쪽을 가리키고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뜻이지?’

아이반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나운 이빨은 뭔가 더 설명하려다 말고 안쪽을 가리켰다. 이건 다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빨리 들어가자는 의미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흔적이 끊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오래 방치되어 흙으로 덮인 돌바닥은 다행히도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녀석들이 지하로 내려갔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여 줬다.

한때는 나무로 된 문이 달려 있었겠지만, 지금은 썩어 없어졌고 지하로 가는 계단만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근처에 다가가자 일행의 표정이 모두 굳었다. 드디어 사나운 이빨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비릿한 철의 냄새. 피와 죽음의 향기.

아이반의 신호를 받은 델피노가 빛의 구슬을 안쪽으로 던져 넣어 어둠을 밝히고, 일행이 단번에 지하로 뛰어 내려갔다.

착!

스릉!

무기를 꺼내 들고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지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녀석들의 흔적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벽과 바닥을 통째로 색칠할 정도의 핏자국. 시커멓게 말라붙은 그 흔적. 무언가 그려졌던 마법진은 불타서 이리저리 뭉개지고 지워졌다. 그 주위로 재가 흩뿌려져 있었다.

델피노가 만들어 낸 빛의 구슬이 그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 줬다.

“…망할 놈들.”

아이반은 역겨움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먼저 냉철한 이성으로 주변을 파악했다.

흑마법의 흔적, 사악한 마력의 잔향. 여기서 무언가 의식이 이루어졌음이 분명했다.

말라붙은 피는 흥건했지만, 뼛조각 몇 개를 제외하고는 시체가 없었다.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모습. 제물로 바쳐진 흔적이다.

“열여섯이 들어와서 열이 다시 빠져나갔지. 이곳에 여섯이 남았군.”

아이반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섯 중 하나가 아직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곱.”

이레인이 그의 말을 정정했다.

“하나는 임산부였어. 출산이 머지않았던 것 같은데, 안타깝네.”

그렇게 말하는 이레인의 눈이 옅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령을 통해 이곳에 남은 기억을 훑어보고 있는 모양이다. 땅의 기억을 읽는 것은 아주 숙련된 정령사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어때, 뭐가 좀 보이오?”

“그저 역겨운 놈들이라는 것 정도만. 악마의 마력이 정령들을 밀어내서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죄다 음침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네.”

그 말에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녀석들이 했던 의식에 비하면 제물이 적소. 전에 우리가 봤던 것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바쳤는데. 혹시 다른 의식인가?”

“글쎄요, 흔적이 뭉개져서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건 악마의 힘을 불러오는 주문이 아니라 악마에게 힘을 바치는 주문입니다. 어쩌면 대규모 의식이 부담스러워서 몇 번에 나눠서 의식을 진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이라고 단서를 붙였지만 델피노는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악마 숭배자들의 행태에 대해서라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니 그의 말이 맞겠지.

“오래된 흔적은 아니오. 며칠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빠르게 추적하다 보면 곧 따라잡을 수 있을…….”

말을 하던 아이반이 표정을 굳히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행이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물었다.

“적입니까? 녀석들이 다시 돌아왔습니까?”

“모르겠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오.”

후긴과 무닌을 풀어서 주변을 경계하게 하였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공격당해서 역소환되었다. 지독하게 빠르고 깔끔한 솜씨였다.

타다닥!

일행은 서둘러 지하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올라오자마자 이레인이 정령을 부르고 활시위에 화살을 올린 채 훌쩍 뒤로 물러나 모습을 숨겼다. 자신이 공격하기 쉬운 포인트를 찾아 움직인 모양이다.

‘힐러를 버리고 혼자 움직인다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델피노 근처에 실체화하지 않은 정령 셋이 대기하고 있었다. 안정성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게 이레인의 스타일인 모양이다.

하긴, 전방이 다 뚫릴 정도라면 엘프 레인저가 근접전을 벌이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너흰, 못 지나간다!”

사나운 이빨이 콧김을 뿜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이내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챙! 채쟁!

아이반 역시 마력을 끌어올리며 바깥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에게 검을 휘둘렀으나 자연스럽게 피하며 손을 내저었다.

휘리릭!

바닥에서부터 식물의 줄기가 뻗어 나와 상대의 발을 묶었다. 자기 관조를 계속하고 신비로운 지식에 익숙해진 아이반은 이전보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크게 능숙해진 모습이었다.

피우웅!

아이반이 발을 묶으니 곧바로 이레인의 화살이 날아왔다. 상당히 날카롭고 강력했지만, 상대는 두꺼운 방패를 비스듬히 세우는 것만으로 공격을 흘려 보냈다.

화르륵!

그 너머로 아이반이 뿜어낸 불길이 덮쳤으나, 새하얀 방어막이 밀어냈다. 그 힘의 성질을 깨달은 아이반은 변신을 풀고 창을 내지르려다 말고 뒤로 거리를 벌렸다.

“모두 공격을 멈추시오!”

아이반이 그리 소리치자 상대 역시 움찔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델피노에게 향했다. 그의 몸에서는 신성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한동안 경계심을 유지한 채 서로를 바라보다가 상대측에서 먼저 무기를 내렸다.

“찬란한 빛의 주께서 내린 힘!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그건 우리가 할 말이오. 먼저 공격한 쪽은 그쪽이잖소.”

퉁명스러운 아이반의 말투에 상대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가증스러운 악의 종자라 여겼는데, 신중하지 못했군요.”

살짝 고개를 숙인 그들은 일제히 성호를 긋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불의 주, 쿤다라를 모시는 자들입니다. 악마의 주구를 추적하던 중이었습니다.”

쿤다라 교단은 아룬 교단 다음으로 교세가 강한 곳이었다. 성황청을 구성하는 아홉 교단 중 하나.

아이반은 그들을 흘깃 살펴보면서 대답했다.

“우리도 그렇소. 녀석들의 뒤를 쫓는 중이지.”

델피노가 봉성의 목걸이를 꺼내자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성의 목걸이는 임무를 수행 중인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이 걸고 다니는 물건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신분 증명은 없었다. 신성력은 이미 확인했고.

그렇지만 그들은 마냥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반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아룬 교단의 사제가 이곳에 무슨 일이오? 이번 일은 쿤다라 교단에서 맡아 해결하기로 결정이 난 것으로 알고 있소만.”

어딘가 딱딱하고 차가운 눈을 가진 남자가 등장하자 델피노가 물었다.

“교단의 뜻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추적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죠. 그런데, 누구십니까?”

남자의 눈이 천천히 일행의 모습을 훑었다. 그렇게 살펴보고 나서야 그가 대답했다.

“피에르 로렝. 신앙의 적과 마주하는 자요.”

그 말에 델피노의 얼굴이 굳었다.

“…이단심문관이시군요.”

“그렇소.”

피에르 로렝이 웃었다. 아이반은 그 미소에서 진한 피 냄새를 맡았다.

51화 까마귀 기다리는 곳

성기사와 사제, 이단심문관.

주변을 훑어보던 사나운 이빨이 낮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리자드맨의 언어는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그저 거친 숨소리와 차이점을 알기가 어려웠다. 비밀스럽게 대화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저들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피 냄새가 짙은 남자다.”

“같은 적을 쫓는 신전의 병력이오.”

“그런데 왜 이렇게 경계를 하는 거지?”

“이단심문관이 끼어 있으니까.”

성황청의 이단심문관이라고 하면 어떤 의미로는 악마보다 더욱 악마 같은 악명을 달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온갖 피비린내가 나는 뒷이야기들이 이어졌고, 때로 사람들은 악마보다 그들을 더욱 두려워했다.

성스러운 손톱 뽑기, 정의로운 물고문, 신실한 인두질.

넘치는 신성력으로 완벽하게 상대를 치료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문 기술은 이미 유명했다. 한 번 고문할 때마다 경전 한 구절을 읽어 주는데 가장 얇은 경서마저 모두 읽은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전에 모두 ‘회개’한다던가.

아이반이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이단심문관은 결코 함부로 움직이지 않소. 움직였다면 반드시 결과를 봐야만 하는 자들이니까.”

원래 성황청은 귀족과 상하관계가 아니었지만 대륙인의 대부분은 성황청 아홉 교단의 신도였다. 혹여 이단이라고 낙인이라도 찍히면 귀족이라 해도 목이 뎅강 잘려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단심문관이 움직이는 것은 귀족들에게도 저항감이 상당한 일이었다. 그 자체로 정치적인 여파가 강하니 웬만한 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쿤다라 교단이 맡아서 하는 일인데 아룬 교단이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지. 성황청 교단 사이의 힘겨루기 같은 건가?’

아룬 교단이 로만 왕국에서 한 건 올렸으니 이쪽은 쿤다라 교단이 한 건 올리겠다는 정치적인 거래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악마 숭배자와 혹시 연결된 것이 아니냐며 귀족을 압박하고 쿤다라 교단의 힘을 키우겠다는 생각.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일까? 의심스러운데…….’

아이반은 발뒤꿈치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룬을 새겨 넣었다. 그렇게 마력을 불어넣고 발을 비벼서 흔적을 지워 버렸다.

다른 이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다행히 성공했다. 아이반의 신호를 받은 사나운 이빨이 시선을 끌어 준 결과였다.

“뜨거운 물로 씻고 싶다! 비늘을 반들반들 닦고 싶다! 꼬리가 간지럽다!”

리자드맨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있는 아이반에게는 웃음이 터져 나올 법한 내용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퍽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리자드맨이 거세게 쉭쉭거리면서 꼬리를 들어 올리니 움찔할 수밖에 없겠지.

성기사들이 경계심을 올리며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서로 노려보기만 할 뿐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델피노와 피에르 로렝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흥분한 모양이오.”

“갑자기 습격을 받았으니까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소.”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델피노가 뒤쪽을 흘깃 확인하고는 이야기를 끊었다.

“이런 사정이니 우리는 어서 빨리 출발해야겠습니다. 녀석들이 지금도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군요.”

그 말에 피에르 로렝이 델피노의 눈을 마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우리 역시 흔적을 확인한 뒤 빠르게 녀석들을 쫓을 테니.”

피에르 로렝이 손을 내저으니 성기사들이 한 걸음 물러나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일행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숨겨 뒀던 짐마차에 올라탔다.

“이단심문관이라니,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사내였소.”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델피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소문이 흉흉하기는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그렇게 무섭기만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실 이단심문관은 누구보다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정말로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분들이니까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무시무시한 고문 기술자로 활동하기보다는 종교재판관으로 활동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내가 상상한 그대로던데.”

델피노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뭐, 그런 분도 있는 거죠.”

이레인이 코웃음을 치며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폼을 잡고 있는 것치고는 정작 움직임이 굼뜨네.”

“그래도 저분이 귀족들을 압박하고 있으니 기사단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덕분에 적들은 더욱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소규모로 의식을 진행하고 있고. 붙잡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 괜히 물만 흐리는 거지.”

“소규모로 의식을 진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효율이 떨어져요. 수십 번을 반복해도 부족할 텐데, 그 전에 잡히고 말 겁니다.”

“녀석들이 언젠가 못 참고 튀어나오겠지. 하지만 설마 그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이야? 아무리 내가 엘프라지만 그렇게 느긋할 수는 없겠는데.”

스읍, 후-.

이레인이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자 멀리서 퍼덕거리고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그녀에게 날아와 앉았다. 비둘기의 다리에는 조그마한 나무통이 달려 있었고, 그 속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들어 있었다.

“전서구, 오래된 방식이군.”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레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엘프는 오래 사니까. 인간들에게는 오래된 방식이 내게는 익숙한 방법이야. 그리고 때로는 오래된 방법이 가장 세련된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아스가르드의 전사. 당신의 까마귀는 들켰지만 이건 아니잖아.”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새하얀 종이로만 보이는 것을 손으로 훑던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설프게 들쑤시고 다니니 흔적을 찾기가 더 어렵네. 일단은 서쪽으로 가 보자고. 녀석들이 그쪽으로 간 것 같으니까.”

* * *

“…….”

피에르 로렝이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고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성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들을 이대로 보내 줘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피에르 로렝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크게 느껴지지 않은 덤덤한 눈빛이었으나 성기사는 움찔 놀랐다.

“그러면 저들을 막았어야 하오?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아룬의 사제를?”

“그건…….”

성기사가 입을 다물자 피에르 로렝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일행의 리더로 보이던 마법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마법사, 움직임이 좀 특이하던데.”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직접 부딪혔던 성기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마법사로 보였지만 움직임은 전사에 가깝더군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지만, 사각에서의 공격도 반응이 빨랐습니다.”

그 말을 듣고 피에르 로렝의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

“특이한 일이군. 구마사제가 저런 자들과 함께한다고?”

한쪽 눈을 가린 마법사에게서는 노르드의 신성이 느껴졌다. 리자드맨은 당연히 뱀신 모르나의 신도일 테고, 활을 들고 있던 여성은 모습을 감춘 엘프였을 거다. 자신들의 신을 잃어버리고 감히 스스로가 신이 되기를 원했던 무엄한 종족.

심판해야 할 이단은 아니었으나 하나같이 이교도였다. 그것도 악신인지 아닌지 모호한 신들을 모시는 자들. 여러모로 피에르 로렝에게는 껄끄러운 상대였던 셈이다.

스쳐 지나간 자들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낸 피에르 로렝이 성기사와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지하를 살피고 있는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방에 묻어 있는 혈흔만으로도 처참한 광경이 연상되었다.

“흔적은 좀 어떻소?”

“자신들이 모시는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고 끝냈습니다.”

“다른 의도는?”

“이곳은 역시 눈속임인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알 수 없다, 확정되지 않았다.

한참이고 부정적인 대답을 듣던 피에르 로렝이 고개를 들었다. 담담하던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이글 불타는 듯 격렬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든 상관없소. 하지만 잃어버린 성물은 반드시 우리가 먼저 찾아야만 하오. 무슨 일이 있어도!”

* * *

“아이반!”

델피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갑자기 아이반의 안대 너머에서 핏물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주르륵-.

가죽으로 된 안대를 피로 적시면서 아이반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피를 닦아 내고 새로운 안대를 꺼내 착용했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다른 이들을 진정시킨 그는 낮게 주문을 외웠다.

“흐라픈프레이스투드(Hrafnfreistuðr)”

노르드의 언어로 ‘큰 까마귀를 검사하는 자.’

마력을 머금은 그의 언어는 곧 마법이 되었다. 바닥을 적신 그의 피에서부터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나타나 그의 어깨에 앉았다.

가만히 무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던 아이반이 문득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내 까마귀가 두 번은 들키지 않았구려.”

온갖 세상을 돌아다니며 몰래 염탐하기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누군가의 마법이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허무하게 들킬 리가 없지.

아이반이 짐짓 당당하게 그리 말하자 곰방대를 물고 있던 이레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 참으로 재주가 많은 자로구나.”

“다음에는 당신 실력을 확인하기로 하지.”

아이반이 욱신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이단심문관이 그저 정치질만 하려고 온 것은 아닌 모양이오. 잃어버린 성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소? 그걸 찾고 있는 것 같던데.”

그 말에 델피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워낙 그런 전설은 많아서……. 다른 단서는 없습니까?”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소.”

“음, 잃어버린 성물이라…….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라면 역시 붉은 잔이겠죠. 잔으로 받은 피의 무게만큼 힘을 빌려준다는 성물입니다.”

“피? 그건 전혀 성물의 느낌이 나지 않는데.”

“피는 결국 가장 진한 생명의 정수이자 희생의 상징이니까요. 그러니까 600년쯤 전에, 붉은 피의 성자 알베르홈…….”

길고 지루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아이반은 대충 한 귀로 흘리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무닌(Muninn, 기억)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기억 속을.

왠지 간질간질한 것이 기억이 날 법도 했다.

‘악마, 폐허가 된 성, 성물, 붉은 잔, 녀석들이 서쪽으로 움직였다고 했나?’

몇 가지 키워드를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한참을 살펴보다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지금 이곳에 뭐가 있소?”

“지금은 그냥 바위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뭐가 있었소? 폐허가 된 성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것.”

지도를 내려다보던 이레인이 툭 내뱉었다.

“망국의 도시, 저항의 지하 요새.”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여기로군.”

피눈물 지하 성채.

한때는 영웅이었던 자가 안식에서 깨어나 타락한 성물을 쥐고 악마의 힘을 휘둘렀던 장소.

오래전, 지금과는 다른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한 걸음 앞서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소.”

목표를 정한 일행은 그대로 나아갔다. 최단 거리로 빠르게.

아이반이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이레인은 꽤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그를 막지는 않았다. 세계수가 선택한 특이점을 믿어 보고자 했다.

저항의 지하 요새는 수백 년 전, 어느 나라가 망하면서 최후의 결사 항전을 하던 곳이었다. 바위로 된 산을 파고들어 요새를 만들고 수십 년간 저항운동을 하던 곳.

시간이 흘러 사람은 모두 죽어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요새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이 사라진 곳을 이름 모를 몬스터들이 차지한 채로.

“정말 이곳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엉뚱한 곳을 들쑤시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이레인이 다시 한번 우려를 표했지만 아이반은 자신의 결정을 꺾지 않았다.

톡톡.

자신의 안대를 두드린 아이반이 말했다.

“내 눈이 달린 일이오. 갑자기 옛 유적지 관광을 하고 싶어져서 온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푸드득!

까악까악-

바위산 위로 까마귀들이 홰치고 날아올랐다. 피와 죽음, 비릿한 영광의 길로 그를 안내했다.

52화 괴물의 입

저 멀리 보이는 바위산을 확인한 일행은 근처 마을에 들러 식료품을 챙기고 마차를 맡겼다.

“건초를 넉넉히 주시오. 돌아오면 금액을 지불할 테니.”

혹시 그들이 말과 마차를 챙기고 그대로 입을 닦을 수도 있었지만, 아이반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때는 쉬고 있던 도끼가 일을 할 테니까.

마을 주민에게 바위산과 지하 요새에 대한 정보를 묻자 그들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백 년 전, 아시콘 왕국의 마지막 후예들이 그곳에서 결사 항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수십 년을 버텼지만 결국 모두 죽었다더군요.”

“혹시 그곳에 가 본 적은 없소?”

“저곳에 말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워낙 길이 험한 데다 온갖 몬스터들이 들끓는 곳인데요. 흉흉한 소문도 많고…….”

마을 주민이 떨떠름한 낯빛을 보이자 아이반이 대답을 재촉했다.

“흉흉한 소문이라면?”

“그, 결국 망국의 후예들이 모두 죽은 곳이 아닙니까? 한과 원망이 남아 귀신이 되어 떠돈다는 말도 있고, 마지막에 악마의 힘을 빌리려다가 실패해서 몬스터의 소굴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아무튼 이런저런 전설들만 남아 있습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없죠.”

악마의 힘.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일행은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

사실 이런 전설은 워낙 흔해서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마냥 옛이야기로만 들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일행은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바위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왜 이쪽으로는 오지 않는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버려져 있던 지하 요새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제대로 닦여 있는 길이 없었고, 죄다 절벽과 골짜기였다. 때로는 짙은 수풀과 나무가 앞을 가로막았고, 그것을 넘어서면 뾰족한 바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망국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몸을 숨기던 곳이다.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해 일부러 험하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 들어갔을 텐데,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다를 것이 뭐가 있겠나.

후긴과 무닌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일행의 길잡이 역할을 하던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럽게 복잡하군. 길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빙글빙글 돌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어. 그저 자연적인 것만은 아니고, 아마 인간의 손길이 조금은 닿았던 모양이오.”

망국의 잔당을 추격하던 군대가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위를 옮기고 나무를 심어서 길을 숨기고 이리저리 꼬아 뒀던 듯하다.

예전에는 아마 그 사이사이에 함정도 많이 만들어 뒀겠지만 수백 년이나 시간이 지난 만큼 다행히 함정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옛날에는 길이었던 곳이 막히고, 새로운 통로가 생겼소. 아주 개판이야.”

하지만 단순히 길이 험한 것만으로 일행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정도는 쉽게 뛰어넘어 움직일 수가 있었으니까.

일행 중에 가장 육체적 능력이 약한 델피노마저도 일반인과 비교하면 대단히 훌륭한 편이었다. 예전에 아이반이 그에게 건네주었던 생명의 구슬이 그의 몸을 강건하게 만든 것도 있고.

컹컹!

아이반은 내친김에 두 마리 늑대 정령마저 소환했다. 후긴과 무닌처럼 원형의 이름을 따 게리와 프레키라는 이름을 붙여 준 녀석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일행을 호위했다.

그렇게 후긴과 무닌, 게리와 프레키를 데리고 왜소한 마법사로 변신해 있으니 아이반은 그야말로 오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의 몸에서 가끔 스파크가 튀어 몸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치지직!

토르는 먼저 나서 두 손으로 적을 때려 부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 아이반의 모습은 그가 원하는 전사다움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이렇게 불만을 토해 내는 것이다.

물론 그건 아이반 역시 불만스러운 부분이었다.

‘씨부럴, 그게 싫으면 오딘이 내 눈을 뺏어 갈 때 막았어야지. 빌어먹을 토르!’

눈이 하나 없다는 것은 전사에게 무척이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감각으로 사각을 없앤다고는 해도 순수하게 전사로서의 역량은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 재기, 주변 파악, 동체 시력과 반응.

다른 능력으로 부족한 점을 채우고 결론적으로 더 강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눈을 되찾기 전까지는 예전처럼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오딘이 눈을 가져갈 때 그걸 막았어야지, 오딘한테는 찐따처럼 가만히 있다가 왜 나한테 이 지랄인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노려보았고, 그의 몸을 따갑게 때리던 스파크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아이반?”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를 부르는 델피노에게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지하 요새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은 것 같소.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겠어.”

저항의 지하 요새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을 파고들어 가 만든 곳이었다. 원래는 그 입구를 이런저런 것들로 잘 안 보이게 막아 뒀겠지만, 시간이 지나 훤히 드러난 모양이다.

시커멓게 뚫린 구멍이 마치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딱 그 말이 정확했다.

“…찬란한 빛의 주여,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은총을.”

델피노가 낮게 읊조리자 시야가 변했다. 언젠가 아이반이 경험한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볼 수 있는 신성술이었다.

일행은 아주 조심스럽게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속에서는 아주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늑대와 까마귀는 돌려보낸 상태였다.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곳에서는 그들이 활약할 수도 없었다.

툭!

사나운 이빨이 아이반을 두드리고는 코를 가리켰다. 냄새가 난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배웠던 수신호를 사용해 설명을 더했다.

‘적, 소형, 수가 많음.’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아주 낮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아이반의 손짓을 본 델피노가 방어막을 만들고, 이레인이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날카로운 바람을 날렸다.

휘이익!

날카로운 바람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속이라 그 소리가 증폭되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

파바박!

찌직, 찍!

낮고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달려왔다.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보이는 눈. 마력을 머금고 몬스터가 된 괴물 쥐들의 습격이었다.

탁, 타닥!

팔뚝만 한 크기의 쥐들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모습이 꽤나 끔찍했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갉아먹는 녀석들이었다.

쾅!

“얼어붙어라!”

아이반이 바닥을 내리찍으며 그리 외치자 안 그래도 추운 동굴이 더욱더 차갑게 변했다. 바닥에 서리가 내리더니 그대로 괴물 쥐를 붙잡고 얼음 동상으로 만들었다.

아이반이 그렇게 붙잡아 세우니 이레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바람의 정령이 움직이며 얼어붙은 괴물 쥐들을 파괴했다.

수십 마리쯤 그렇게 해치우고 나니 나머지 녀석들이 등을 돌리고 후다닥 흩어졌다. 나타날 때만큼이나 재빠른 녀석들이었다.

“젠장, 짜증 나는 놈들인데.”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크고 강한 녀석보다 저런 약하고 수가 많은 놈들이 신경을 갉아먹었다. 시도 때도 없이 습격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덤벼드는 놈들은 그게 무엇이든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렇게 떨떠름한 마음으로 조금 더 나아가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낮은 목소리로 델피노가 질문하자 아이반은 꼼꼼히 바닥과 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쪽인 것 같소. 오래전이지만 이쪽이 더 많이 닳아 있군. 즉 사람들의 움직임이 많았다는 뜻이지. 인공적으로 길을 만든 흔적이 있소.”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끄덕일 때 이레인이 혼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왼쪽이야. 오른쪽은 바람이 통하지 않는데 왼쪽은 뚫려 있어. 지하 성채에서도 숨은 쉬어야 할 테니 바람을 따라가는 것이 맞겠지.”

정령을 다루는 엘프가 그리 말한다면 틀릴 리가 없었다. 아이반은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면 오른쪽은 함정이었겠군.”

그렇게 몇 번쯤 갈림길을 뚫고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니 마침내 지하 성채의 문이 보였다.

돌로 된 문은 반쯤 부서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무언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파괴되어서 흔적만 알아볼 수 있었다.

우웅-.

마력으로 간이 결계를 친 아이반이 델피노에게 말했다.

“잠깐 불을 밝혀 보시오. 이것이 무엇인지 보고 가야 될 것 같으니.”

은은한 빛의 구슬이 떠오르고 일행은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무슨 그림이었을까요?”

“글쎄, 망국의 역사? 신에 대한 기도? 아니면 원망? 어쩌면 경계 근무를 서다 심심해진 병사들이 낙서 같은 것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림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으나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 쓰이는 문자는 아니었고 대륙 서부의 고대어였다.

“피에서 피를, 죽음에서 죽음을.”

손으로 글자를 만져 보던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델피노가 무겁게 말했다.

“오래된 격언입니다. 원래 그런 뜻이 아닌데 이들은 복수를 다짐하는 문구로 썼나 보군요.”

본디 고귀한 희생에 대한 격언이었다. 누군가의 피를 지키기 위해 피로 대신한다는 것, 죽음을 막기 위해서 죽음으로 지킨다는 것.

그러나 이곳에 새겨진 문구에서는 처절한 복수의 감정이 느껴졌다. 진한 원망이 가득했다.

“한낱 글귀에서 한이 느껴진다니, 마을 주민이 악마 운운한 것은 아예 헛소문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이레인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대답했다.

“때로 악마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지.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도.”

다만 그 결말마저 숭고하지는 않았다. 보통 어두운 진실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에 전해지지 않을 뿐.

슥!

문득 느껴지는 흐름.

이레인이 안쪽을 노려보고 사나운 이빨이 꼬리를 내리쳤다. 델피노가 낮게 기도를 올리고 아이반이 허리를 폈다.

으드득!

왜소한 몸으로 변신해 있던 아이반의 몸이 커진다. 굽었던 어깨가 벌어지고 다시 근육이 차오른다. 흔한 마법사의 모습에서 벗어나 건장한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전보다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망국의 왕자가 우리를 파티에 초대하는 모양이오.”

쿠구구궁!

땅이 울리고 공간이 흔들린다. 진한 마력이 일렁이며 사방으로 퍼졌다. 원래 있던 장소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진다.

옛 망국의 후예들이 부흥을 다짐하던 저항의 지하 성채에서 아이반에게 익숙한 피눈물 지하 성채로 변화한다.

던전화. 어떤 유적이 진한 사념과 마력의 영향으로 옛 모습을 일시적으로 되찾는 것.

수백 년 전에 죽어 사라졌던 망령이 깨어났다. 어제와 같은 복수심을 불태우며 새로 얻은 몸을 움직였다.

동굴의 입구가 괴물의 입처럼 보였던 것은 역시 위험신호였다. 이제 조용히 잠들어 있던 괴물이 이빨을 드러냈다.

온 동굴을 울리는 거대한 외침이 쏟아졌다.

-피에서 피를! 죽음에서 죽음을!

53화 피눈물 지하 성채

무너져 내린 돌벽이 시간을 거슬러 새것처럼 변했다. 부서진 문이 수복되고 먼지가 되었던 조각과 글자들이 다시 선명하게 바뀌었다.

자신들이 당했던 억울한 멸망의 순간을, 복수의 원념을 담은 벽화가 나타나자 일행은 모두 표정을 굳혔다.

주르륵.

피에서 피를, 죽음에서 죽음을.

그들이 새겨 놓았던, 그들이 외쳤던 그 문구가 순식간에 붉게 변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 코를 찔렀다.

피로 물든 벽화를 보면서 델피노가 신음처럼 신을 불렀다.

“빛의 주여, 어찌 이런 일이…….”

음습하고 사악한 기운이 번졌다. 악마의 힘이 던전을 물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을 불렀겠지만, 그들이 겨우 인간의 나라 하나가 사라졌다고 개입할 리가 있나. 자연스럽게 망국의 후예들이 부르짖는 이름이 달라졌겠지.”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악마는 목적이 무엇이든 공평하게 힘을 빌려주오. 대가 역시 공평한 파멸이었으나 이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지. 아니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을지도 모르고.”

나라의 재건을 꿈꾸던 숭고한 목적이 흐려지고 원수의 파멸만을 바라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을 거다. 수십 년간 이런 척박한 동굴에서 생활하며 원한만 커졌겠지.

탁!

아이반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 아니라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좁은 동굴에서는 창이 썩 유용하지 않았다.

“던전이 깨어났으니 이제 악마 숭배자들이 이곳을 알아차렸을 거요.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정리해야만 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겠어.”

화아아-.

델피노가 빛의 구슬을 더욱 환하게 피워 올렸다.

이전까지는 혹시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이 빛을 보고 공격을 할까 싶어 어둠을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빛의 구슬이 환하게 빛날수록 그것에 깃들어 있는 신성력이 악마의 기운에 물든 적들을 억누를 것이다.

“던전이 되었으니 부서졌던 함정도 되살아났겠어. 이전보다 꼼꼼히 살펴야겠네.”

이레인의 주변으로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의 정령과 땅의 정령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의심스러운 것들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선두엔 델피노가 서서 길을 찾고, 후방엔 사나운 이빨이 서서 습격을 대비했다. 그렇게 대열을 갖추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뚝뚝!

푸드덕!

사방에서 온갖 잡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정신을 갉아먹고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일행은 흔들리지 않았다.

슥.

아이반이 발걸음을 멈췄다. 짙은 적의와 살기가 그의 피부를 찔렀다. 이레인이 한쪽 벽을 가리키자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아이반의 검을 타고 날아간 마력이 그대로 벽을 꿰뚫었다. 그러자 얇은 벽 너머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자들이 나타나 달려들었다.

“아시콘의 영광을!”

“적의 피를 마시고 살을 뜯어라!”

창백한 얼굴, 잔뜩 낡아서 해진 옷, 충혈된 눈으로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리는 오래전의 망령들.

던전의 마력에 이끌려 다시금 재현된 옛 망국의 잔당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아이반은 손목에 마력을 집중하고 앞으로 내밀었다. 리자드맨 부족에게 받았던 팔찌가 순식간에 황금 방패가 되어 적의 공격을 막았다.

깡!

적의 검이 방패를 때렸으나 아이반은 별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황금 방패는 단순히 휴대가 간편한 것 이상의 성능을 보여 주었다.

탁!

아이반은 단단히 발을 내리찍고 앞으로 밀고 나갔다. 실드 차지, 방패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적을 뒤로 밀어내고 아이반이 검을 휘두를 틈을 만들어 주었다.

스걱!

단숨에 적 세 명의 목을 베어 나갔다.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이내 그마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썩은 육신조차 없이 마력으로 만들어진 망자의 최후였다.

휘이잉.

먼지가 바람에 흩날렸다. 이레인의 손짓을 타고 날아간 칼날 바람의 영향. 아이반이 셋을 처리하는 동안, 동료들 역시 각자 그 정도는 처리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별것 없는데?”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델피노가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안쪽으로 갈수록 달라질 겁니다. 사악한 악마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요. 분명 심상치 않은 존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아이반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정말 이곳에 성물이 있는 것입니까? 온통 음산한 마기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데.”

“던전화가 되려면 그만한 핵이 필요하지. 아마 성물은 던전핵이 되어 있을 거요.”

“…성물이 타락했다는 겁니까?”

“망국이 남긴 최후의 보물, 그걸 가지고 이곳으로 숨어든 왕자. 성물을 붙잡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없고. 머릿속에서 상황이 대충 그려지지 않소?”

캉!

비스듬히 벽이 열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 내며 아이반이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신보다 악마가 값을 더 잘 쳐줬던 모양이오. 아니라고 해도 급전이 필요하면 어쩔 수 없지. 사채업자가 지독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알면서도 손을 벌리는 거요. 방법이 없으니까.”

드르륵, 탁!

아이반은 작동되고 있는 함정을 파괴해 멈췄다. 사람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지독한 함정들이 많았으나 아이반의 날카로운 눈과 경험, 이레인이 부리는 정령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함정보다도 복잡한 길이 문제였다. 지하 요새는 온통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길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던전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걸렸다.

드르륵!

한쪽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열린다. 아래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고, 위에선 마기에 물든 흡혈 박쥐들이 습격했다.

사나운 이빨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며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던 흡혈 박쥐들이 그대로 튕겨져 벽에 박혀 들었다. 그 틈을 뚫고 넘어오려던 흡혈 박쥐들 역시 이레인의 손짓에 갈기갈기 찢겼다.

그렇게 함정과 습격을 몇 번이나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커다란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일행은 잔뜩 경계하면서 문을 살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크기였다.

“안쪽은 상당히 넓은 공동인데? 이 안이 진짜인가 봐. 아무래도 이쯤에서 쉬어 가야 할 것 같아.”

정령을 이용해 앞을 탐색한 이레인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을 움직이고 하룻밤을 자고 다시 이틀을 움직였다. 다들 튼튼한 몸이었지만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뒤로 물러난 일행은 야영 준비를 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탁, 타닥!

먼저 조그맣게 모닥불을 만들었다. 지하였으나 많은 사람이 살던 곳인 만큼 바람구멍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불을 피우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일렁이는 불꽃 앞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이레인이 중얼거렸다.

“요새는 요새야. 외부의 침입을 막기에는 최적화되어 있어.”

사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단순히 피곤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벌써 며칠이나 강제로 금연을 하는 상황이 문제였다.

그녀가 곰방대에 채워 넣은 연초는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불안감을 줄여 주는 역할을 했다. 그건 일반적인 금단증상보다 훨씬 정신적인 압박감이 강했다.

이레인의 손이 움찔거렸다. 무심코 품 안에 있는 곰방대를 꺼내려다 참아 내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다른 쪽에서는 사나운 이빨이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자신의 꼬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오랫동안 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운 듯했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델피노도 편안하지는 않았다. 세상을 훤히 밝히는 태양의 빛은 아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고, 아룬의 신도로서 그 빛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은총에서 멀어진다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모두 동굴 속에 들어와 이렇게 며칠이나 돌아다니는 것이 힘겨웠다.

짙은 어둠과 불안감 속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함정과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탁!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주전자와 찻잎을 꺼냈다. 요정의 숲에서 챙겨 온 신선한 찻잎이었다.

그가 차를 끓이려는 것을 델피노가 얼른 받아 들었다. 그리고 요정의 차를 끓여서 이레인에게 내밀었다.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받았다. 홀짝이며 한 모금을 들이켜는데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풀렸다.

“그리운 맛이야. 내가 이걸 인간에게 대접받다니, 우습네.”

요정의 숲에서 나는 찻잎은 향만으로 머리를 맑게 해 줬다. 다들 좁고 어두운 동굴을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가 조금이나마 가시는 느낌이었다.

‘나도 슬슬 지치는군. 토르여, 내가 어찌하면 좋겠…….’

후르륵 요정 차를 마시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문득 표정을 굳히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땅에 박아 넣었다.

그는 금이 간 그릇이 또다시 깨어질까 봐 그동안 자제하고 있던 천둥신의 힘을 모처럼 불러왔다.

“토오르으!”

치지직!

쾅!

아이반의 몸을 타고 흘러나온 번개가 사방으로 퍼졌다. 천둥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지고 증폭되어 시끄럽게 귀를 때렸다.

갑작스런 아이반의 행동에 깜짝 놀란 동료들이 귀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델피노의 물음에 아이반이 표정을 굳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자드맨 전사, 악마와 싸우던 구마사제, 종족을 위해 세계수와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엘프.

그런 자들이 너무 빠르게 약해졌다. 이들의 의지가 결코 약할 리가 없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토르에게 기도를 올린다니, 말도 안 되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겨우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소.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갈대 같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약해질 리가 없지. 악마의 솜씨요.”

그 말에 모두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나?

화아악!

델피노가 신성력을 한껏 뿜어내니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악마의 기운이 밀려났다.

그리고 지금껏 일행의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피로와 정신적인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 틈에?”

델피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마와 싸우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던 그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은밀한 술수였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이레인은 비교적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단번에 원인을 지목했다.

“피로 물든 글귀와 벽화! 여기저기 벽에 새겨져 있기에 그냥 기분이 나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조금씩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었어!”

옳은 추론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뿐인가?

아이반은 정신 공격에 관해서라면 상당히 저항력이 높았다. 그조차 당할 정도로 악마의 힘이 강한가? 겨우 던전의 힘으로 구현된 파편일 뿐이면서?

아이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이다 문득 결론에 도달했다.

“…녀석들이 벌써 도착했군. 한발 먼저 악마와 접촉했어.”

명색이 지하 요새인데 출입구가 하나뿐일 리가 없지. 악마가 적극적으로 막아 내는 그들에 비해 악마 숭배자들은 쉽게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거다. 오히려 악마가 안내인이라도 붙여 주지 않았을까.

악마의 힘이 점점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건 그저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쉴 시간이 없소! 녀석들이 의식을 시작했소!”

으드득!

이를 악문 아이반이 뛰쳐나갔다. 거대한 문, 피눈물 지하 성채의 성문을 단번에 부수고 안으로 들었다.

화르륵!

저 멀리 검붉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언젠가 그가 보았던 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 주위에 시커먼 망토를 뒤집어쓴 흑마법사들이 서 있었다. 아이반은 얼른 그들을 처리하려 했지만 그의 앞에 창이 박혀 들었다.

쉬이익!

쾅!

움찔한 아이반이 걸음을 멈추자 흙먼지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결국 여기까지 왔나, 빌어먹을 반역자들!

한때 나라를 지키던 최고의 기사, 어쩌면 명군이 되었을 영웅. 망국의 왕자가 어둠에 물든 눈빛으로 그리 외쳤다.

“반역자는 무슨! 길이나 비키시오!”

-왕성을 불태우는 것을 막지 못했으나, 이곳을 불태우는 것은 막겠다!

“씨부럴! 불장난은 저쪽에서 하고 있는데!”

망국의 왕자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악마의 힘에 물들어 버린 타락자였고, 던전의 힘에 이끌려 나타난 망자였다.

그가 보는 것은 아이반이 아니라 수백 년 전, 마침내 이곳까지 파괴했던 그때의 반역자들이었다. 과거에 갇힌 존재에게 대화는 무의미했다.

-나의 나라를 되찾겠다!

망국의 왕자가 그리 외쳤다. 사방에서 그를 따르는 망자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54화 원한이 남아

척, 척!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낡은 갑옷을 걸치고, 오래된 무기를 쥐었다. 그러나 낡고 오래된 장비는 녹슬지 않고 여전히 시퍼렇게 날이 살아 있었다.

어둠을 밝힐 기름은 없었으나 갑옷을 닦을 기름만큼은 남겼고, 해지고 찢어진 옷에 덧댈 천은 없어도 칼날을 닦을 천은 남겼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복수를 다짐하던,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병사들이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일어섰다.

“피에서 피를! 죽음에서 죽음을!”

병사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끝까지 쥐고 있던 원념이 실체를 드러내고 공간을 뒤흔들었다.

“윽!”

뒤늦게 아이반을 따라온 델피노가 신음을 흘렸다. 온 사방에 지독한 원념이 가득했다. 그것이 악마의 힘을 통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찬란한 빛의 주, 아룬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찬란한 주여, 위대한 빛이여. 지금 이 땅에 당신의 권능을 내리시옵소서. 어둠에 물든 안타까운 자들에게 따듯한 자비를 베푸소서.”

화아아-.

델피노의 등 뒤로 빛이 떠올랐다. 그의 기도를 들은 빛의 신 아룬이 응답하여 찬란한 빛을 지하 성채에 내려 주었다.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빛이 퍼지자 피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던 병사들의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악마의 힘과 원념으로 이루어진 몸이 정화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신이 또다시 우리를 버리려 하다니!

쿵!

분노한 망국의 왕자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시커먼 오라가 흘러나와 병사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빛으로 정화되던 병사들이 다시 원념을 불태웠다. 그들의 눈에서 이전보다 더욱 진한 피눈물이 쏟아졌다.

“아시콘의 영광을!”

“우리의 땅을 되찾아라!”

끝까지 망국의 왕자를 모시던 기사들이 소리쳤다. 병사들이 그에 호응하며 달려들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에 겁먹지 않고 앞을 막아섰다.

“나, 붉은 계곡 소용돌이 부족의 전사!”

그의 세로동공이 더욱더 날카롭게 변했다. 전투의 흥분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사나운 이빨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오래된 검은 나의 몸을 더럽힐 수가 없다!”

쾅!

사나운 이빨이 홀로 수십의 병사를 막 아내는 동안 이레인이 활을 빼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활시위를 당겼다.

끼익!

그녀의 주변에 흐르던 공기가 압축된다. 그녀가 쥐고 있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화살이 수십 개나 허공에 만들어졌다.

피우웅!

이레인이 마침내 활시위를 놓자 그녀의 화살이 순식간에 병사들을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뒤따르던 바람의 화살까지 모두가.

병사들의 몸을 파고든 바람의 화살이 순식간에 팽창한다. 압축되어 있던 공기가 제 모습을 되찾고, 그만큼 주변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강렬한 폭발음이 피눈물 지하 성채를 뒤흔들어 놓았다.

콰광!

후드드!

땅이 흔들리고 지하가 요동쳤다. 성벽에 금이 가고 천장의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걸 신호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이반이 달려들었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을 통해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창을 휘두른다. 망국의 왕자가 그걸 받아치고 반격을 하려고 할 때, 아이반이 슬쩍 옆으로 돌아가 불꽃을 내뿜었다.

화르륵!

망국의 왕자는 뜨거운 화염이 자신을 덮칠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돌렸다. 잠시 잠깐의 틈. 아이반의 환영이 그의 눈을 가리고 반응을 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반이 뿜어낸 불꽃은 녀석의 몸을 태우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 시커먼 오라가 흘러나와 불꽃을 막아 냈다.

-나의 왕국을 그렇게 불태웠느냐!

퉁!

아이반은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은신, 기습, 환영 마법을 순식간에 조합하여 적의 감각을 속이고 사각으로 움직였다.

두 마리 늑대 정령이 그것을 도와주었다. 망국의 왕자를 공격해 아이반이 몸을 숨길 수 있게 만들었다.

컹, 컹!

한껏 자세를 낮춘 늑대 정령들이 망국의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결코 강하지 않았으나 두려움을 몰랐다.

게리(Geri)와 프레키(Freki), 둘 모두 탐욕스러움을 뜻하는 이름.

오딘이 다루는 늑대를 원형으로 같은 이름을 받은 녀석들이었다. 노르드 신화에서 말과 이름은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신화 속의 존재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기에 점점 그들을 닮아 가고 있었다.

전사자의 시체를 뜯던 늑대의 힘이 그들에게 깃들었다. 그 이빨로 망국의 왕자를 깨물어 그가 이미 한참이나 전에 죽어 버린 전사자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하찮은 미물마저 나를 막아서느냐!

쾅!

망국의 왕자가 늑대들을 떨쳐 날렸다. 그 창으로 게리와 프레키의 머리를 꿰뚫어 녀석들을 없애 버렸다.

늑대 정령들이 역소환되는 충격이 아이반을 때렸고, 그렇게 생긴 미세한 흔들림을 통해 망국의 왕자가 아이반의 위치를 알아차렸다.

-쥐새끼 같은 놈! 도망치지만 말고 그 목을 내놓아라!

게임 더럽게 하네. 마치 그와 같은 극찬을 들은 듯 아이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진심으로 흡족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이미 육신이 썩어 사라져 내놓을 목도 없으면서 나대지 마시오.”

쉬이익!

아이반이 마력을 가득 실어서 강하게 도끼를 날렸다. 망국의 왕자가 그것을 쳐 내며 반걸음쯤 뒤로 물러난 순간, 아이반이 주문을 외웠다.

“발드르 갈가(Valdr galga)”

노르드의 언어로 말하길, 교수대의 지배자.

휘리릭!

망국의 왕자가 밟은 룬 문자에서부터 마력의 밧줄이 솟아나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려 목을 매달기 시작했다.

점점 숨을 조이는 밧줄을 붙잡고 망국의 왕자가 이를 악물었다.

-이, 익! 반, 역자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나라가 불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수대에 매달려 목숨을 잃었던가.

명예로운 죽음으로 백성들을 살리길 원했던 부왕은 온갖 수치를 받으며 목이 매달렸고, 장군이 그랬으며, 동생들이 그러했다.

그 증오스러운 것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에 망국의 왕자가 분노를 토해 내었다.

-모조리 씹어 삼키겠다!

투두둑!

마력으로 만들어진 교수대가 무너져 내린다. 망국의 왕자가 뿜어내는 사악한 마력이 주변을 부수고도 모자라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아이반은 흘깃 위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선 아직도 흑마법사들이 의식을 진행 중이었다. 검붉은 화염이 불타오르며 악마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걸 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망국의 왕자가 가까이 다가와 창을 휘둘렀다.

-다시는 너희에게 왕좌를 넘겨주지 않겠다!

휘익!

창이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풍압에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둔중한 충격에 머리가 멍해진다.

잠시간의 방심. 망국의 왕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원래라면 막았겠지. 하지만 눈을 잃어버리고 생긴 사각을 파고들었기에 아이반의 반응이 늦었다.

이어지는 공격이 다가온다. 날카로운 창이 그의 목을 꿰뚫으려 했다. 그 순간 아이반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토르.’

쿠르릉!

쾅!

지하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늘에 있을 천둥과 벼락이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윽!

망국의 왕자가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창을 쥐고 있는 그의 발이 시커멓게 변하고 뜨거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반의 몸에서 흘러나온 천둥신의 권능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치지직!

온몸에 충만하게 차오른 천둥의 힘을 느끼면서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길게는 버틸 수가 없소. 그러니 짧게 끝냅시다.”

그 말에 천둥의 신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자신을 부른 전사가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지켜보았다.

피와 죽음, 치열한 전투.

전장의 냄새를 맡은 천둥신이 아주 약하게 망치를 휘둘렀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전사가 버틸 수 있을 만큼.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번개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 막대한 힘으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번쩍!

쾅!

그야말로 천둥걸음. 번개와 같은 속도와 위력으로 다가간 아이반이 망국의 왕자를 걷어찼다. 왕자의 몸에서 음산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막아섰지만, 감히 천둥신의 망치를 견딜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튕겨 나간 망국의 왕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대로 아이반을 공격하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사나운 이빨에게 막혔다.

“나는 너의 피를 보지 못했다!”

주변에는 한 줌 핏물과 흙먼지로 돌아간 병사들의 흔적만 가득했다. 그 많은 병사를 모두 처리하고 사나운 이빨은 망국의 왕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인간보다 훨씬 큰 체구로 휘두르는 두꺼운 검은 거의 둔기에 가까운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망국의 왕자가 단번에 뚫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사이, 아이반은 두 다리를 단단히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땅을 밀어내듯 앞으로 움직이며 허리를 비틀었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그의 단단한 팔을 타고 창을 쥐고 있는 손까지 전달되었다.

창을 힘껏 던지면서 아이반이 크게 소리쳤다.

“토오르으으으!”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창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어느새 흑마법사들이 둘러싸고 있던 검붉은 악마의 불길을 꿰뚫고 그곳에 박혀들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온다. 곧 천상의 힘이 지하에 닿았다.

콰과광!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악마의 불꽃을 둘러싸고 있던 악마 추종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지하 성채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삐-.

마력으로 보호했음에도 귀가 먹먹해졌다. 순간적으로 청력을 상실해 더없이 조용해진 곳에서 아이반은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반은 문득 몸이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강렬한 존재감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의 인도자.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부하이자 신화와 역사에 이름을 새긴 대악마.

검붉은 악마의 불꽃이 녀석의 눈동자가 되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시선에 들어온 이 한심하고 짜증나는 필멸자를 바라보았다.

[너 는 막 을 수 없 다. 하 찮 은 필 멸 자 야.]

녀석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영혼이 뒤흔들렸다. 아직은 결코 넘을 수가 없는 막대한 존재감에 아이반이 짓눌리려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토르.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호전적이며 가장 강하다는 천둥의 신.

그가 아이반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악마의 존재감에 짓눌리던 전사가 쓰러지지 않도록 일으켜 세웠다.

천둥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만 보았다.

“…이반! 아이반! 정신 차리십시오!”

문득 들려오는 델피노의 외침에 아이반이 눈을 끔뻑였다.

‘방금 그건 뭐였지? 뭔가를 본 것 같았는데?’

얼떨떨한 표정으로 델피노를 바라보니 그가 신성력을 퍼부어 그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제 귀는 좀 들립니까?”

커다란 소리에 고막이 터져 버린 것을 델피노가 신성력으로 회복시킨 모양이다. 사나운 이빨 역시 괴로운 표정인 걸 보니 그도 청력을 잃었다가 되찾은 모양이었다.

멀쩡한 것은 이레인 정도였다. 그녀는 바람의 정령으로 아예 진공상태를 만들어 소리를 차단했었다.

“으흠…….”

속이 울렁거리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다 낫지도 않았는데 신의 힘을 빌린 것은 좀 무리였나?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강해지고 엘프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받으면 멀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은? 다른 적들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이레인이 대답했다.

“모두 처리했어. 같이 갈 뻔도 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푸른 마력광이 흘러나왔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정령들이 무너져 내리는 흙과 바윗덩이를 막은 후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다행히 깔려 죽지는 않았네. 운이 좋은 걸까?”

“평범한 지하가 아니라 이미 던전화가 된 곳이니까 더는 무너지지 않을 거요. 현실이 아닌 이계니 던전핵을 제거하면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겠지. 그 전에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지 않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델피노가 짝하고 손뼉을 쳤다.

“파밍이로군요!”

55화 끊어지다

일행이 피눈물 지하 성채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잔뜩 지친 모습의 성기사가 보였다.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검을 들어 올렸다.

“누구냐!”

성기사는 그리 소리를 지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어느 버려진 성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기를 내리시오.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소. 아예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닌데.”

아이반은 손을 내저으면서 흘깃 성기사의 상태를 살폈다.

피곤한 얼굴, 더럽혀진 갑옷, 잔뜩 올라가 있는 경계심.

신앙심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고된 단련을 거듭하는 성기사가 이런 모습이라니. 일행이 지하에서 고생하는 동안 바깥에서도 상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게 분명했다.

‘하긴, 피눈물 지하 성채에서 정작 흑마법사들은 별거 없었지. 밖에서 이들이 주력을 막고 있었나 보군.’

아이반이 슬쩍 눈짓하자 델피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전에 이들이 보인 태도를 보면 이러는 편이 옳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델피노가 빛의 신 아룬의 신성력을 내뿜어 성기사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성기사는 순간 움찔했으나 신성력을 확인하고는 한결 긴장감이 풀어진 듯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었으나 신성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악마 숭배자와 한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성기사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간밤에 흑마법사들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악마 숭배자를 쫓는다더니,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군요.”

“우리도 지하 요새에서 흑마법사들을 보았죠. 그들을 처리하고 막 빠져나온 참입니다.”

그러면서 델피노는 슬쩍 뒤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단심문관께서도 함께 계십니까? 안쪽에서 꽤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놀라운 것이라면……?”

“그건 아무래도 피에르 사제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성기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짧게 피리를 불어 신호를 날리더니 일행에게 말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일행은 그의 안내를 받으면서 바깥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피와 시체가 가득했다. 대부분은 몬스터였고, 때로 언데드와 흑마법사의 시체, 가끔은 성기사와 사제의 것도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왜?’

악마 숭배자에게는 극상성이라 할 수 있는 성기사와 사제가 이렇게나 많았다. 보통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당히 싸우다 빠졌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의식이 중요했다는 걸까? 아니면 저게?’

아이반은 흘깃 델피노가 쥐고 있는 상자를 보았다. 그 속에는 피눈물 지하 성채의 핵이었던 붉은 잔이 들어 있었다.

한때 성물이었다는 붉은 잔은 이미 악마의 마력에 물들어 타락한 상태였다. 그것을 델피노가 신성력을 쏟아부어 임시로나마 봉인을 해 둔 것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대로 홀릴 만큼 지독한 마력을 줄줄 뿜어내고 있었다. 범상치가 않았다.

탁!

임시로 만들어진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피에르 로렝이 앉아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그의 표정에도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래, 나를 찾아오셨다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델피노가 쥐고 있는 상자에 눈길이 머물렀다. 뛰어난 구마사제인 델피노가 거의 완벽하게 기운을 차단하고 있는데도 단번에 알아보는 것을 보면 그 역시 평범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건 무엇이오?”

“지하 요새에서 찾은 물건입니다. 던전핵이 되었다가, 악마 숭배자들이 하는 의식의 핵이 되기도 했죠. 겨우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델피노가 상자를 내밀자 피에르 로렝이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문득 화염처럼 뜨거운 신성력을 내뿜어 막사를 감싸 안았다. 과연 이단심문관이었다. 신성력의 질과 양이 상당했다.

덜컥!

델피노가 임시로 만들어 놓았던 봉인이 풀리고 지독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시커먼 기운이 밖으로 나가려다 화염 같은 신성력에 막혀 타올랐다.

상자 안에는 낡고 상처 가득한 황금색 잔이 하나 들어 있었다. 한때는 신성하게 불타올랐을 것이 그 빛을 잃은 채로 오히려 어둠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붉은 잔, 잃어버린 성물이 어째서 이렇게…….”

무심코 붉은 잔을 들어 올리려던 피에르 로렝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습하고 사악한 악마의 마력이 그의 손을 물들이려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감히 파고들려 하다니, 악마의 기운이 참으로 지독했다.

결국 다시 붉은 잔을 내려놓은 피에르 로렝이 상자를 덮고 신성력으로 억눌렀다. 붉은 잔이 뿜어내는 마력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봉인하고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것이 저기에 있었소? 망국의 지하 요새에?”

“그렇습니다. 모습은 비록 그렇게 변했지만 말이죠.”

그 옛날 붉은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기적을 행할 때 사용했다는 성물이었다. 알베르홈이 쿤다라 교단의 사제였으니 붉은 잔 역시 따지고 보면 쿤다라 교단의 성물인 셈이다.

그런 것이 수백 년이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망국의 요새에서 이런 꼴로 발견이 되다니 피에르 로렝의 입장에서는 몹시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붉은 잔을 봉인한 상자를 쓰다듬다가 감정을 털어 버리고 물었다.

“이것을 나에게 가져온 이유가 있을 터, 붉은 잔을 쿤다라 교단에 돌려줄 생각이오?”

그 질문에 델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붉은 잔은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악마의 힘을 몰아내고 다시 정화해야만 했다.

그건 임시로 봉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 대신전에서도 몇 년은 걸렸다.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때 자신들의 성물이었던 붉은 잔이 다른 이의 손에서, 그것도 타락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쿤다라 교단이 아니었다. 그건 신앙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니까.

그냥 이것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다른 보상을 챙기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빛의 신 아룬의 사제인 델피노가 상대라면 쿤다라 교단이 대충 입을 닦고 끝낼 리도 없고.

피에르 로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이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똑바로 아이반과 눈을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물을 금전으로 거래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이것으로 그 대가를 치르겠소.”

팟!

피에르 로렝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단번에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살이 쩍 갈라지고 붉고 뜨거운 피가 주르륵 바닥으로 흘렀다.

팔에 상처를 내서 무례를 사과라도 하겠다는 뜻일까? 어차피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멀쩡해질 텐데 팔을 자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의미야.

아이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흐르는 것 정도는 이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평범한 퍼포먼스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주르륵.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떨어지던 핏방울이 허공에 멈추고, 바닥을 물들였던 피가 일렁거리면서 위로 솟아올랐다.

어느새 붉고 뜨거운 피는 모습을 바꿔서 붉고 뜨거운 검이 되어 있었다.

탁!

피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검을 한 손으로 쥐고서 피에르 로렝이 말했다.

“브리카, 우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검이오.”

그러자 델피노가 감탄을 터트리며 외쳤다.

“피의 검 브리카! 그럼 당신은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나의 먼 선조시오. 그분의 피를 이었지.”

피에르 로렝은 검을 바닥에 꽂으면서 말했다.

“이것을 그대에게 주겠소, 아스가르드의 전사. 붉은 잔을 되찾는 값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의 눈빛을 받은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왜소하게 변신하고 마법사로 분장해도 상대는 그것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으드득!

아이반이 어깨를 폈다. 굽은 허리가 펴지고 근육이 차오른다. 작고 왜소하던 덩치의 마법사에서 강인한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검을 잡았다.

피의 검 브리카는 따뜻하지 않았다. 뜨거웠다. 피보다는 불꽃을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손등이 따끔해서 돌려 보니 유려한 문장이 새겨졌다가 이내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일종의 주인 인증이 끝난 셈이다.

그 모습을 보던 피에르 로렝의 눈동자에 드물게도 서운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브리카가 그대를 환영하는군. 우리 가문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오.”

아이반은 브리카를 빤히 바라보다 자신의 핏속으로 숨겼다. 이 검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는 잡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좋은 검이오. 잘 쓰겠소.”

피에르 로렝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을 하나 내어주겠소. 쉬려면 거기서 쉬시오.”

* * *

며칠쯤 그곳에서 머물면서 일을 마무리 지은 일행은 쿤다라 교단과 헤어져 이레인의 거처로 향했다.

지하 요새로 가기 전 마을에 맡겨 둔 말과 마차는 다행히 도끼를 쓰지 않고도 멀쩡히 돌려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걷지 않고 편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레인의 거처에 도착한 모두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상당히 힘든 일정이었다. 솔직히 아주 피곤했다.

“그래도 의뢰는 나쁘지 않게 해결했군.”

“인정하지. 당신 실력이 꽤 괜찮았어.”

치익!

이레인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의자에 앉았다. 짜증스러운 기색이 있던 그녀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의뢰 대가가 뭐라고 했지? 잃어버린 눈을 회복하는 것? 그러면 다시 요정의 숲으로 가야겠네. 그 눈을 치료하려면 세계수의 힘이 필요하니까.”

“아마도. 이제야 이 답답한 안대를 벗어 버릴 수 있겠어.”

톡톡.

아이반이 자신의 안대를 두드렸다. 꺼슬꺼슬한 감촉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도착하자마자 목욕을 하러 들어가는 사나운 이빨을 보면서 아이반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일단 며칠만 신세를 지겠소. 그 후 헤어집시다.”

“알아서 해. 방은 많으니까.”

그러나 일행은 편히 쉬지 못했다. 다음 날 누군가 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찾아왔기 때문이다.

쿵쿵쿵!

아침에 제일 먼저 씻으러 가려는 것을 방해받은 사나운 이빨이 불만스러운 듯 꼬리로 바닥을 치면서 문을 열었다.

탁탁탁!

“무슨 일인가!”

씩씩거리며 불쾌한 숨을 몰아쉬던 사나운 이빨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야? 여기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초를 태우던 이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 내 집에는 무슨 일이지?”

그 말대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기사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무장을 갖춘 것이 썩 유쾌한 이유는 아닌 듯 보였다.

흘깃 안쪽을 보며 일행의 모습을 확인한 성기사가 아주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빛의 신 아룬의 사제 델피노, 그리고 그 일행. 맞소?”

“맞습니다만…….”

“잠깐 조사를 해야겠소. 급한 상황이니 부디 실례를 용서하시오.”

“조사? 도대체 무슨 조사를 한단 말입니까? 무슨 일이기에?”

델피노가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성기사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성기사 스물일곱, 사제 아홉, 이단심문관 하나. 모두가 죽거나 실종되었소.”

뒤에서 듣고 있던 아이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56화 등불

“무슨 소리요? 그들이 죽었다는 것이!”

아이반이 크게 소리치자 성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곳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오. 솔직히 말하자면 내부적으로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소.”

그러면서 성기사들은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재촉했다. 성기사와 사제가 한 번에 수십 명이나 죽어 버렸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뭐, 알겠소.”

아이반과 일행은 순순히 성기사들과 동행하여 조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이번 일은 그들 역시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이반과 일행은 순식간에 무장을 갖추고 집을 나섰다. 성기사들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참고인이지 용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달라질 수도 있겠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춤의 검을 매만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면 모두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다.

불의 신 쿤다라의 신전으로 향했다. 신도들의 눈을 피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니 심각한 표정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버려진 지하 요새에서 악마 숭배자들과 만났다고 했죠. 뭔가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까?”

“의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악마의 힘을 불러와 세상을 뒤흔드는 사악한 의식이었죠.”

“정확히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육망성을 그리고 악마의 일부를 소환하여, 제물을 바치고 차원 방벽을 약화하는…….”

구마사제인 델피노의 증언은 상당히 심층적이었고, 사실적이었다. 상대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군더더기를 빼고 핵심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그때의 일에 대해 알려 주고 나서야 물어볼 수가 있었다.

“그러면 이제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저희도 알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웃으며 헤어졌던 사람들이 죽었다니 무척이나 심란하군요.”

그 말에 조사를 맡은 사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대들과 헤어지고 사흘 뒤, 악마 숭배자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긴급 통신 구슬을 통해 급박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현장을 확인했는데,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있더군요.”

“그러면 그들은……?”

“일부는 사망을 확인했고, 나머지는 모두 실종 상태입니다.”

실종자 생환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종 상태라는 것은 그저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악마 숭배자들에게 인간의 시체는 무척이나 훌륭한 재료였다. 심지어 성직자의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겠지.

“우리는 그들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합당한 복수를 해야겠지요. 영원한 불꽃이 지켜보고 있는 한, 우리의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조사를 맡았던 사제가 다소 격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진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 동안 이어진 조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 늙은 성직자가 눈을 감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이런저런 황금색 수실로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특별히 권위적인 표정이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돌고 있는 분위기에서 높으신 분이라는 느낌이 확 풍겼다.

델피노가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성호를 그으며 인사했다.

“로메른 추기경님!”

로메른 추기경은 쿤다라 교단의 서부 연합 왕국 지역의 대교구 대주교였다. 말하자면 서부 연합 왕국에서 가장 높은 쿤다라 교단 성직자.

우연히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말하자면 웬만한 나라의 공작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비슷했으니까.

로메른 추기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른일세. 별것 없는 늙은이지.”

허허 웃는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수십 명이나 되는 성직자가 죽거나 실종된 상황이니 즐거울 수가 없었다.

“실종되기 전 피에르 사제에게 짧게 보고를 들었네. 악마 숭배자와 싸우는 데 그대들의 도움이 컸다고.”

“도움이랄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그저 저희도 그들을 쫓는 와중에 겹쳤던 게지요.”

“그래, 그랬구먼.”

로메른 추기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운 목숨이 사라졌네. 다들 세상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몸을 불태우던 사람들이야.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게.”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다. 추기경이 직접 나와 부탁하니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일행이 떠나고 홀로 남은 로메른 추기경은 강단을 바라보았다. 불의 신 쿤다라의 상징과 같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늙은 성직자는 그 횃불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이 어두운 땅에 당신의 등불을 내려 주소서.”

* * *

쿤다라 신전에서 나온 일행은 말없이 짐을 챙겼다. 또다시 적을 추적할 준비를 하였다.

한 번의 시도는 막아 냈지만, 녀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보상은 추가로 받아야겠소. 수지가 맞지 않아.”

“요정의 숲에서 알아서 챙겨 줄 거야. 우리는 그렇게 보상이 짠 종족이 아니라고.”

“글쎄,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일행은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고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상대는 수십 명이 넘는 성직자들을 습격해서 처리했다. 절대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의식이 마무리되고 이쪽이 마지막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사방에 퍼져 있던 악마 숭배자들의 힘이 이쪽으로 뭉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아이반이 심각하게 말을 꺼내자 델피노가 대답했다.

“그래서 다른 교단에서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악마 숭배자들과 싸울 병력을 모으고 있어요.”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 역시 말을 얹었다.

“지금 저희 교단의 성전기사단 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구마사제와 전투수녀단 역시 활동 중이고, 지역 영주들과 왕실에 기사단과 병사들까지 요청했습니다. 녀석들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레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새의 발목에 묶여 있던 종이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 녀석들이 꽤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녀는 이전과 달리 엘프의 외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부 연합 왕국 곳곳의 숲과 요정의 숲의 연결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가끔은 자연적으로도 그럴 수가 있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게, 여러 숲에서 동시에 그럴 리가 없어. 숲의 흐름을 거부하는 힘, 그러니까 악마의 힘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소리지.”

아이반 역시 동의했다.

“흩어져 있던 놈들과 뭉친 녀석들을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될 거요. 어쩌면 대악마라도 소환했을지 모르지.”

“대악마를 소환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녀석들의 의식을 막지 못한다면 사실이 되겠지. 틀림없소.”

쿤다라 교단의 사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신화시대 이후로 대악마가 물질계에 직접 소환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신화시대에는 있었다는 소리군.”

아이반은 그러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눈, 안대를 톡톡 가리켰다.

“악마가 날뛰고 숲이 불탄다. 나는 그런 미래를 보았소.”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으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노르드의 신화는 모두가 미래에 대한 예언과 그것에 대비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모두 신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일단 현장을 확인해 보고, 그 근처에서 수색을 시작해야겠소. 이미 도착해 있는 추적대와 합류하는 것이 우선이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출발했다.

덜그덕, 덜그덕!

말과 마차가 빠르게 달렸다. 말을 탈 수 있는 이들은 말을 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마차를 탔다.

쿤다라 교단에서 제공한 마차는 예전의 그 싸구려 개조 짐마차와는 달랐지만, 워낙 빠르게 달리다 보니 충격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사나운 이빨은 사흘 동안 왜 자신의 종족은 말을 탈 수가 없는 신체 구조인가 한탄했다. 강인한 전사인 그에게도 꽤 고역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서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거기엔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부서진 나무, 파헤쳐진 바닥, 흩뿌려진 피의 흔적.

겨우 수습한 시체는 모두 치워진 상태였다. 대부분 습격한 녀석들이 시체까지 가져가서 남은 것은 신체의 일부밖에 없었지만.

현장만으로 격렬했던 전투를 짐작한 이레인이 눈을 찌푸렸다.

“지독하네.”

“그렇습니다. 어찌 이런 일을……!”

분노를 토해 내는 성기사를 바라보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압도적으로 이길 수도 있었는데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지.”

스읍, 후-.

곰방대에 연초를 채워 넣은 이레인이 한 모금 뻐끔 빨아들이고는 물었다.

“어때, 아이반. 당신은 알아볼 수 있겠어?”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

말을 하던 아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무겁게 말했다.

“…정령이 전혀 없군.”

물질계에서 실체화된 정령을 보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자연적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신체의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정령은 세상 만물 모든 것에 깃든 힘이자 세상 만물 그 자체의 화신이었다. 이렇게 정령의 흔적이 전혀 없는 장소란 일반적이지 않았다.

연기를 내뱉으면서 이레인이 설명했다.

“보통은 알아볼 수 없겠지만 정령사라면 알아야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건 인위적으로 지워진 거야. 자연에 반하는 아주 강대한 힘이 지나가서 정령들이 사라진 거지.”

그녀는 아주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습격자라면 전투가 이렇게 치열할 리가 없어. 가지고 놀았다는 말밖에는 안 되지. 이래서는 단서를 찾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던 아이반이 문득 표정을 굳히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피의 검 브리카가 솟아올라 손에 잡혔다.

“뭐지? 적인가!”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외쳤으나 아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하지만 좀 느낌이 이상해서.”

우웅-.

피의 검 브리카가 떨리고 있었다. 특별히 마력을 주입한 것도 아닌데 검이 울리는 것이다.

예전 주인의 죽음을 듣고 애통해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울부짖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백 년간 피로 전승되던 검이었다. 어쩌면 미약한 영성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반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도대체 왜 브리카가 울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신성력이 반응하고 있소.”

원래 피의 검 브리카는 성검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피에르 로렝에게 듣기로는 선조가 알 수 없는 경로로 얻게 된 보물이라고 했고.

그러나 한때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사용하였고, 그 이후 수백 년간 지속해서 불의 신 쿤다라의 신성력을 받아들인 브리카에는 그 힘이 묻어 있었다.

그 신성력이 지금 반응하고 있었다. 불의 신 쿤다라가 자신의 신도를 학살한 악마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화르륵!

브리카에 묻어 있던 신성력이 남김없이 타올랐다. 그리고 피의 검과 감응해 어느 곳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아이반의 눈에 낯선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유적지, 산, 지하, 오래된 보물, 원한의 땅.

주르륵!

아이반의 잃어버린 눈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가죽으로 된 안대를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진 핏물이 그대로 검은 까마귀로 변해 날아올랐다.

“신이 단서를 쥐여 주는군.”

57화 어둠이 내려앉은 사이

아이반은 자신이 본 단편적인 장면을 통해 목적지를 정했다. 요정의 숲과 연결이 끊어진 장소를 중심으로, 정령의 흔적이 사라진 길을 따라 추적했다. 후긴과 무닌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를 이끌었다.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전혀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동행하는 성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 추적술에 대해서는 꽤 익숙하다고 여겼는데 바닥에는 전혀 실마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맞을 거요. 정령의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발자국이나 그런 건 다른 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쪽은 다른 이들이 이미 추적하고 있잖소?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게 함정으로 보이는군. 진짜는 이쪽이오. 적어도 적의 핵심 전력은 확실하지.”

실체화조차 하지 못하는 미약한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정령사가 아니면 어려웠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눈에 보이는 흔적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지만 아이반과 이레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정령의 기운이 지워진 길을 따라가던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정령들이 도망갈 정도로 지독한 녀석이야. 만약 녀석과 싸우게 된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과연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마흔 명에 가까운 성직자 부대가 그대로 전멸했다. 그들이 그저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 악마 숭배자들과의 전투에 익숙한 성기사와 전투사제,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실로 무시무시한 전력이었다.

적이 나뉘었지만 그게 그리 좋은 소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추적하고 있는 아군 역시 나뉘었으니까.

“다른 쪽의 수가 더 많지만 내가 보기엔 이쪽이 더 위험해. 녀석은 물질계에 강림한 악마나 다름없어. 무슨 힘을 숨기고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문제지.”

“물질계에 강림한 악마라니, 그 정도입니까?”

“거의 본체에 가까운 악마의 화신이야. 저 녀석들이 대악마를 소환하려 한다기에 믿지 못했는데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동안 대륙 각지에서 이어진 사악한 의식으로 차원 방벽이 흔들린 상태였다. 거기에 본체에 가까운 악마의 화신이 움직이고 질 좋은 제물까지 얻었으니 신화시대에나 활동하던 대악마를 소환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타락한 성물에, 그와 연관이 있는 자의 피라니. 너무나 위험하군.’

아이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녀석들이 죽음의 인도자를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겠소?”

악마와 관련되면 구마사제인 델피노의 의견이 가장 정확했다. 아이반이 그에게 묻자 긴 침묵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울 것 같군요.”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짚어 보던 델피노가 점점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됩니다. 죽음의 인도자는 너무 강력해요. 아무리 밑 작업을 하고 제물을 준비해도 물질계에 온전히 소환할 수 없는 거물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선주 종족, 말하자면 드래곤이나 거인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선주 종족이 움직였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움직였다면 제물이고 뭐고 필요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 델피노는 다른 악마를 소환하기에는 충분한 힘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죽음의 인도자가 아니더라도 위험한 악마들은 많습니다. 만약 그들이 소환되어 힘을 키운다면 결국에는 악마의 땅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죠.”

그렇게 된다면 성직자 수십의 목숨이 사라진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대륙의 존망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행은 모두 입을 다물고 추적에 집중했다. 잔뜩 경계심을 올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연락을 받은 성황청의 각 교단들과 서부 연합 왕국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렸다. 대군이 움직이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게 가능한지, 앞으로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북쪽 숲으로 이어지는군.”

“근처에 요새가 있습니다. 그쪽에서 하룻밤을 묵고 출발하시죠.”

잠잘 시간도 쪼개 가며 추적하고 있었다. 다들 강인한 사람들이었지만 최상의 상태일 수는 없었다. 단순히 추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일도 대비를 해야만 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쉬는 것 역시 추적의 일부였다.

“그러면 그쪽에서 쉬었다가 가겠소. 다시 숲으로 들어가면 마음 편히 쉴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까.”

일행이 근처에 도착하자 요새가 바쁘게 움직였다. 낯선 이들이 갑자기 다가오니 혹시 무슨 공격이 아닐까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멈추시오! 당신들의 정체를 밝히시오!”

요새의 성벽 위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아이반은 힐끔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에는 그가 나서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성기사는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우리는 쿤다라 교단의 성전기사단입니다! 악마 숭배자를 추격하는 도중 잠시 머물 곳을 찾아왔습니다!”

쿤다라 교단, 성전기사단, 악마 숭배자.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이름들이었다. 요새 안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창칼을 든 기사와 병사 몇몇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성전기사단이라고? 악마 숭배자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소립니까?”

“최근 그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악마의 주구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새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서부 연합 왕국에서도 악마 숭배자를 추적하느라 떠들썩했으니까.

그래서 기사는 의심을 거두었다. 성기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확실히 쿤다라 교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황청의 권위는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종교적인 권위는 실질적인 권력과는 또 다른 것이라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교단의 성기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악한 종자들이 이쪽에 있습니까? 성벽 너머에는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숲밖에 없는데.”

“그것을 노리고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겠죠. 우리는 흔적을 따라왔을 뿐입니다. 하룻밤만 머물 수 있겠습니까?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숲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기사는 거부하지 못했다. 악마 숭배자와 엮인 일에 괜히 비협조적으로 나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혹시 앙심을 품은 교단에서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고 몰아붙이면 아주 곤란했다.

“크흠, 알겠습니다. 그럼 누추한 곳이지만 안으로 들어오시죠.”

기사가 직접 모셔 오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잔뜩 긴장해서 자세를 바로 했다. 높으신 분들에게 찍히면 괴로운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반은 지나가면서 성벽 위에 있는 병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겨우 열다섯이나 먹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앳된 얼굴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열다섯이면 충분히 성인으로 인정을 받으니까.

목숨 값이 가벼운 세계였다. 어릴 때부터 밥값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다.

안내를 하던 기사가 힐끗 아이반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반은 따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기에 그 역시 쿤다라 교단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서지는 않아도 다들 아이반을 리더로 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를 높은 사람이라고 여겼겠지.

“혹시 뭔가 불편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악마를 때려잡으러 왔다는 성전기사단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기사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묻자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저 어린 병사들이 눈에 보여서.”

“아, 그러시군요. 얼마 전에 신병들이 왔습니다. 이제 적응하는 단계니, 부족하게 보이실 수도 있겠죠.”

기사의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그것을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성전기사단이 가면 병사들을 죽어라 굴려야겠다는 생각이겠지.’

아이반은 불쌍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얼른 덧붙였다.

“부족하다니, 그렇지 않소. 군기가 들어 잔뜩 날이 서 있소. 모두가 훌륭한 기사가 있는 덕분이겠지.”

그 말에 기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자신을 칭찬하는 말인데 불편할 리가 있나.

“하하, 아닙니다. 안쪽으로 드시죠. 부족하지만 환영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소. 다들 악마와 싸울 생각에 날카로워져서 만찬을 즐길 여유가 없으니. 악마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길에 대접을 받겠소.”

“역시 쿤다라 교단의 성전기사단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반은 그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요새의 지휘관은 그들에게 방을 내주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자그마한 요새라 남은 방이 없어서 원래 머물던 이를 밀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신 연병장 한쪽에 천막을 쳤다.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물건들을 꺼내는 것을 본 기사와 병사들이 역시 높으신 분이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억지로 모른 척했다. 지금에 와서 그냥 용병입니다, 하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최근 숲이 묘하게 시끄럽다고 합니다. 숲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자잘한 습격이 계속 이어진다는군요.”

“그게 특별한 거요?”

“글쎄요. 성전기사단이 왔으니 그냥 하는 말이겠죠. 뭐라도 악마의 기운을 느꼈다면서 대답하려고. 하지만 그중에서 꽤 건질 만한 것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들 이상하게 악몽을 자주 꾼다는군요.”

델피노가 심각하게 말했으나 다른 이들은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병들이 새로 들어왔다지 않소? 악몽을 꾸는 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이반도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악몽을 많이 꿨었다. 눈을 뜨고 나면 현실이 악몽보다 더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해졌고.

‘김 상병, 이 개자식!’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추억에 감탄사를 터트린 아이반이 표정을 굳혔다. 델피노가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병만이 아니라 베테랑 병사들까지 그렇다는군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악몽은 가장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악마의 징표입니다. 세 명 중 한 명꼴로 매일 악몽을 꾸고 있다면 의심해 볼 만하죠.”

“그러면 거의 근처에 도착했다?”

“그렇습니다. 저 숲속에 녀석들의 은신처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 내일부터 힘든 싸움이 되겠어.”

그리고 그날 밤,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

불침번들만 눈을 뜨고 서 있는데 하늘 위로 음습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도, 기사들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악마의 기운에 민감한 성직자들과 일행들은 단번에 잠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사악한 힘이 주변에 가득 퍼지고 음습하고 축축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기저기를 밝히고 있던 횃불들이 동시에 빛을 잃었다.

위에에엥-.

끼이이악-.

고요하던 요새에 갑자기 거친 바람이 불고 귀곡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들이 소리쳤다.

“불을 밝혀라! 횃불들을 다시 켜!”

델피노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빛의 신 아룬을 불렀다.

“찬란하신 빛의 주여, 당신의 자비를 이곳에 내려 주소서!”

델피노의 머리 위에 새하얀 빛의 구슬이 떠올랐다.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원래는 그랬어야 했다.

치이익!

빛의 구슬이 뿜어내는 빛이 멀리 뻗지 못했다. 안개같이 어두운 기운에 막혀서 주위만 겨우 밝혔다.

신성력을 막아설 정도로 진한 악마의 기운.

아이반은 본능적으로 도끼를 집어 던졌다.

휘리릭!

58화 천둥을 부르다

도끼가 일순간 어둠을 찢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괴물 하나가 그것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시뻘건 눈을 한 거대 박쥐. 아이반은 녀석의 몸을 발로 누르면서 도끼를 회수했다. 그리고 사납게 물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거대 박쥐, 전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물의 입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흘흘흘, 아스가르드의 전사. 네가 언제까지 우리의 일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나?”

아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영원히.”

“건방진 놈. 어디 날뛰어 보아라. 그래 봐야 하찮은 인간…….”

파각!

아이반은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헛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박쥐 괴물은 녀석의 사역마에 불과했다. 계속 붙잡고 있어 봐야 시간 낭비겠지.

착!

어느새 완전 무장한 상태로 대열을 갖춘 성기사들이 일제히 신성력을 피워 올렸다. 그들이 한 몸처럼 내뿜은 신성력이 서로 증폭되며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자신들이 내뿜는 신성력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력이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모두 축복을!”

치이익!

델피노가 생명의 구슬을 손에 쥐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삿된 것을 쫓고 주변을 정화하는 신성 결계를 펼쳤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의 몸속을 파고들던 악마의 기운이 신성 결계에 막혀 타들어 갔다.

“으으윽!”

그러나 악마의 기운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정화되어 사라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최대한 저항해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쓰러졌다.

“우어어어!”

결계 밖에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미처 악마의 기운을 몰아내지 못했더니 눈이 뒤집어져서 마구잡이로 주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차마 그들을 베지 못하고 땅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신성력을 내뿜어 그들의 몸에서 악마의 기운을 몰아냈다.

악마의 기운에 취해 날뛰던 병사들은 빠르게 제압되었으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믿고 있던 동료에게 갑자기 습격을 당했기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들은 상처를 입은 이들마저 치료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직 적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는데 신성력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은 일격. 지금은 요새를 지키는 병력이 많다는 것이 전혀 장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수가 아무리 많아도 악마의 기운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날뛰는 아군을 진정시키는 데 더욱 많은 힘이 들어갔다.

“영리해. 그리고 치밀하고. 무엇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의 힘을 깎아 내고 있어. 요새로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실수인지도 모르겠어.”

스읍, 후-.

이레인은 연초를 태우면서 중얼거렸다.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이런 수작을 벌이다니 상당히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야.”

요정의 숲에서 재배된 찻잎을 섞은 연초의 연기는 사이한 기운을 정화하는 효능이 있어서 그녀의 주위로는 악마의 기운이 다가오지 못했다.

우웅-.

그녀의 주변으로 정령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자연의 화신인 정령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어떤 면에서 신성력과 비슷해 악마의 힘을 막아내는 것이 조금 더 수월했다.

-꺄하하하!

정령들이 마치 아이처럼 웃는 소리가 정신파의 형태로 사방으로 번졌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악마의 기운에 홀려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요새의 소란을 진정시키는 와중에 아이반은 문득 요새 바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악마라면 그저 이렇게 마무리하지는 않을 터였다. 요새를 한 번 뒤집어 놓았으면 그 틈을 이용해 공격해야지. 그래야 지금의 혼란이 더욱더 치명적이니까.

타다닥!

아이반은 단번에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마기에 취해서 덤벼드는 병사를 후려쳐 기절시키고는 후긴과 무닌, 두 마리 까마귀를 소환해 바깥으로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리쳤다.

“몬스터! 숲에서부터 몬스터들이 오고 있소!”

요새 내부의 혼란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처참했다.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았고, 악마의 기운에 당해서 정신을 잃은 이들 역시 많았다.

현재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전체의 삼분의 일 정도. 성직자들 역시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사망자와 부상자 이상의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숲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몬스터들이 움직이면서 화들짝 놀란 동물들이 급히 몸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와 아이반의 옆에 선 사나운 이빨이 숲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천, 어쩌면 그 두 배가 넘는다.”

요새를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숫자.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도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소. 하룻밤 쉬고자 이곳으로 왔는데 그만큼의 여유도 없이 싸움이 시작되는군.”

그러면서 그는 요새의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는 왜 갑자기 병사들이 미쳐서 날뛰는지도 잘 모르고 있으니까.

“지금 남은 병력으로 몬스터의 습격을 막을 수 있겠소?”

아이반이 묻자 요새 지휘관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말했다.

“…어렵습니다. 몬스터가 이천이라니, 그 정도면 평소의 요새 병력으로도 막기가 어려울 텐데 지금은 멀쩡히 움직이는 병사도 몇 없습니다.”

성벽을 지키고 있을 병사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단순히 싸우는 것도 힘든데 쓰러진 병사들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일단 성벽이 뚫리고 나면 대학살을 막기는 어렵겠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몬스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떨어뜨리려고 칼을 휘둘렀다.

쿵! 쿵!

칼날뿔 거대멧돼지가 성문을 들이박았다. 나무로 된 성문이 흔들거리고 조금씩 부서져 갔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의 사마귀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성벽 위로 올라온다. 겁에 질린 병사가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거대 사마귀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파각!

도끼를 던져 사마귀를 처리한 아이반이 주변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녀석들이 더 이상 성벽을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어야겠군. 어떻게든지.”

스윽.

아이반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들고 옆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이빨, 미친 짓을 한 번 해 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소?”

그 말에 사나운 이빨이 껄껄 웃었다.

“예전에 그대가 말했다. 살라고 하면 살고, 뒈지라고 하면 뒈지라고. 자,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몰려오는 놈들을 모두 때려잡고 살아 돌아오는 것. 가능하겠소?”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검을 강하게 쥐었다.

“가능하냐고 묻지 말고, 가능하게 만들라고 명령하라. 검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따라오시오. 내 등을 당신에게 맡기겠소.”

숲을 벗어나 까맣게 몰려오는 몬스터의 무리. 악마의 기운에 잠식되어 눈이 뒤집어진, 그래서 흉포함만이 남은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아이반이 성벽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 힘을 그대로 실어 창을 집어 던졌다.

쉬이익!

폭풍의 힘을 그대로 머금은 창이 날아갔다. 칼날뿔 거대멧돼지의 육신을 찢고 어둠골 거대사마귀의 머리를 부순 후 핏빛 갈기늑대의 몸을 육편으로 만들고 바닥에 박혔다.

손을 앞으로 뻗는 것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창을 회수한 아이반이 옛 노르드의 언어를 읊조렸다.

“게이롤니르(Geirǫlnir : 창을 든 돌격자).”

아이반이 내뱉은 말은 그대로 주문이 되어 그의 몸에 깃들었다. 그가 창을 들고 돌격하는 한 그의 모든 행동에 축복이 머물러 강화될 것이다.

치지직!

쾅!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파란 번개를 뿜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천둥걸음과 폭풍의 창, 그야말로 인세에 나타난 자연의 분노였다.

카아악!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몬스터가 달라붙었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사마귀가 날카로운 앞다리를 휘두른다. 웬만한 검보다 길고 날카로웠지만 아이반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등을 걱정하지 않았다.

캉!

성벽에서 뛰어내린 사나운 이빨이 어느새 아이반의 등 뒤에 붙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덩치만큼 커다란 칼을 휘둘러 어둠골 거대사마귀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러고도 꿈틀거리는 녀석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가 발로 차서 뽑았다.

튼튼한 꼬리를 휘둘러 늑대의 머리를 부수고 검으로는 멧돼지의 심장을 찔렀다. 몬스터들의 핏물로 몸을 적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이반은 화염발톱곰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이반의 창이 시뻘건 불꽃을 휘감고 있는 녀석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핏물이 뿜어져 나오다 그대로 얼음이 되어 깨져 나갔다.

“얼어붙어라!”

아이반의 창에서부터 냉기가 쏟아진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이 산 채로 얼어붙어 얼음 조각상이 되었다. 그것을 사나운 이빨이 조각내면서 소리쳤다.

“이곳에 내가 있다!”

쿵!

사나운 이빨이 거칠게 발을 구르자 땅이 흔들거렸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마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악마의 기운에 홀려서 광기가 가득하던 몬스터들이 움찔 뒤로 물러날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쉬이익!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정령의 힘을 잔뜩 담은 화살들이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꿰뚫고 터져 나갔다. 땅이 뒤집어지고 불꽃이 타올랐다. 날카로운 바람이 몬스터들의 질긴 가죽을 파고들었다.

아이반이 힐끔 성벽을 보았다. 이레인이 가장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아 내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몬스터들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이 성벽 밖에서 날뛰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피해 움직인 몬스터들이 어느새 성벽을 넘기 직전이었다.

“신성한 불꽃으로 정화하라!”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열심히 성벽을 뛰어다니며 몰려오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었다. 성문 역시 반쯤 부서져서 몬스터가 들어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때 아이반은 우연히 낮에 보았던, 얼굴이 앳된 병사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성벽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기묘한 자세로 누워 하늘을 보는 중이었다.

“…….”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온 몬스터의 몸을 꿰뚫었다.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척이나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을 불렀다.

“토르, 이 전장을 당신에게 바치겠소.”

담담함 속에 격동적으로 움직이는 전사의 마음을 읽은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와 전투, 적의 죽음을 원하는 투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르릉, 쿵!

어두운 하늘에 비구름이 모여들고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개가 번쩍이고 하늘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반이 하늘로 손을 뻗었다. 천둥신이 응답하여 자신의 망치를 건네주었다.

쾅!

59화 떨리는 검

위로 뻗은 손에 천둥신의 망치가 잡혔다. 수십, 수백의 번개가 압축된 듯한 힘이 느껴지는 파괴의 상징이 나타났다.

자연의 분노. 그렇게 표현해도 좋을 막대한 힘을 손에 든 아이반은 이를 꽉 깨물었다.

으드득!

무겁다. 너무나 무겁다. 그야말로 산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필멸자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감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수없이 많은 거인의 골통을 깨부순, 말 그대로 하나의 신화를 대표할 만한 무기였다. 필멸자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치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망치의 손잡이를 쥐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쥐고 있으면 자신의 몸까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그 고통 속에서 아이반이 움직였다. 그의 팔뚝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힘줄이 솟았다.

천둥신에게는 너무나 가볍고 가벼운, 그러나 필멸자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무거운 망치를 내려찍었다.

하늘을 들어 올리듯, 바다를 밀어내듯.

하나의 신화를 대표하는 파괴의 상징이 이곳에 등장했다. 세계의 적을 부수던 힘이 나타났다.

묠니르(Mjöllnir), 뜻은 박살 내는 것.

쾅!

아이반 주변의 땅이 내려앉는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들이 막대한 힘에 짓눌려 터져 나갔다. 그리고 망치의 소리를 따라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모든 곳에서 천둥신의 존재가 느껴진다. 그의 무거운 시선이 영혼조차 붙잡았다.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녀석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천둥신의 분노를 보고 악마의 마력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감히 대항할 수가 없다. 어찌 신에게 덤벼들겠나. 이성이 없고 본능이 강한 몬스터들이었기에 더욱더 공포에 질렸다.

-키에에엑!

아직도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많았으나 이제 그들은 투지를 잃었다. 악마의 마력이 그들에게 속삭이는 것마저 무시하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다다닥!

공포에 질린 몬스터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지 못한 녀석들은 벽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만큼 초월자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위대한 천상의 신이 이곳을 훑고 지나갔음을, 잠시나마 그 위엄을 보였음을 알았다. 그것이 하나의 인간이 홀로 이루어 낸 업적이라는 사실에 그저 감탄만 토해 냈다.

특히나 성직자들의 반응이 격렬했다. 비록 모시는 신은 달랐을지언정 조금 전의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게 신의 힘이었다. 위대하고 위대한, 그래서 언제나 경이로운 초월자의 권능.

그들은 새삼스럽게 차오르는 신앙심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신성력이 새롭게 솟아나 사방으로 퍼졌다. 상처 입은 병사들이 치료되고 지쳐 있던 몸에 활력이 솟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싸워 이겼음을, 악몽과도 같은 밤을 보내고 다시 아침을 맞이했음을.

전투가 끝났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흩어지고 저 멀리 어렴풋이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 * *

“무리했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벌겋게 익어 버린 오른손을 치료받고 있는 아이반에게 이레인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살아남은 기사와 병사들은 간밤에 자신들이 보았던 기적에 대해 떠드느라 시끄러웠지만, 그녀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아이반에게 쓸데없는 희생이었음을 지적했다.

“요새를 지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어. 약간의 희생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이길 수 있었지.”

“그랬겠지.”

“알면서 왜 그랬어? 당신이 그 모양이 되면 오히려 힘들어지는데. 병사 몇 명이 죽고 사는 것보다 당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어.”

묠니르를 쥐고 있었던 오른쪽 팔은 조금만 더했다면 완전히 타 버렸을 거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던 신성의 그릇 역시 조금 전의 일로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여러모로 이득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아이반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소. 사실 병사를 위해 희생하겠다, 그런 생각은 별로 없었지. 그냥 짜증이 나서 한 번 질러 보았소. 다 때려죽이고 뒤집어엎고 싶었을 뿐이오.”

그 말에 이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네. 때로 그럴 수도 있지.”

스읍, 후-.

연초를 내뱉으면서 하는 말이 뭔가 묘했지만 아이반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팔이 거의 다 회복되었다. 델피노가 아낌없이 마력을 쏟아부은 덕분이다.

생명의 구슬은 이런 육체적인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아주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그걸 활용하니 익어 버린 팔이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오늘 숲으로 출발하는 것은 어렵겠군요. 치료해야 할 부상자가 많습니다. 하룻밤 휴식을 해서 컨디션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 역시 엉망이 되었고요.”

델피노의 말을 들은 아이반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적의 힘은 막강했다. 이렇게 지친 상태로 숲으로 들어가 봐야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어렵군.”

적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마기를 풀어 몬스터들을 밀어 넣는 것으로 아군의 전력을 대폭 깎아 먹고 발을 묶었으니까.

결국 저들의 목적이 안정적으로 의식을 진행할 시간을 버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완벽하게 적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었다. 아이반이 고민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기사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병사들을 치료할 사제 일부를 이곳에 남기고 나머지는 숲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적과 싸워 비참하게 죽어간 동료들을 잊지 않았다. 그 시체마저 능욕하고 있을 적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성기사들의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아이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비록 이들이 아이반을 존중하여 그의 의견을 많이 따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부하가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지금 악마 숭배자들을 가장 증오하고 있는 것은 쿤다라 교단이었고, 추격에 가장 열의를 보이는 것도 이들이었다. 아이반으로서는 이들을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적은 아주 강력하오. 수십이나 되는 사제와 성기사가 제대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당할 만큼. 우리는 그보다 수도 적고 지쳐 있으니 이대로 숲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길이 될 것이오.”

아이반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성기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우리가 머물러 있으면 결국 더 큰 위험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우리의 형제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델피노 역시 고민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맞습니다. 의식을 막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대악마에 가까운 악마의 소환, 데몬 게이트의 개방, 차원 방벽의 붕괴.

어느 쪽이든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추가 병력은 언제쯤 도착하오? 마음은 알겠으나 숲에서 고립된다면 적들에게 신선한 제물을 늘려 주는 것밖에 되지 않소.”

그 말에 요새 지휘관은 이틀이 걸린다고 답했다. 새롭게 군대가 꾸려져서 이곳에 배치되려면, 그리고 숲으로 들어갈 실력자들이 모이려면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 역시 이틀을 말했다. 적이 갈라졌을 때 수가 많은 쪽을 추적하기 시작한 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되돌아오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이틀, 너무 길어. 그 정도면 우리가 세 번은 전멸하고도 남을 시간이오. 의지와 능력은 별개로 생각해야지.”

아이반의 부정적인 태도에 성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우리들만이라도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죠. 여기까지 힘을 보태 준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보면서 아이반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대로 보내야만 하나. 이들만 사지로 떠나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때 오래간만에 그의 머릿속을 때리는 알림이 들렸다. 그리고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 그의 선택을 재촉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숲으로 들어가라. 그리하여 악마의 화신을 때려잡고 악마가 소환되는 것을 막아라.

팔짱을 낀 채로 찬찬히 살펴보던 아이반은 문득 보상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피의 검 브리카의 각성, 그것이 대가로 나타나 있었다.

우웅-.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몸속에서 꺼내 쥐었다. 이 녀석이 각성을 한다니,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이잉-.

브리카를 이마에 가져다 대니 떨림이 느껴졌다. 어깨에 기대 놓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 그 떨림에 공명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왜 떨리는 걸까. 자신이 당장이라도 숲으로 향하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

그때 천상에서 아래를 지켜보고 있던 외눈의 마신이 허리를 숙였다. 방랑자의 신이 길을 알려 주려 손을 내밀었다.

하찮고 하찮은 자야, 어리석은 나의 전사야. 너는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의 힘을 빌릴 생각은 하지 않는구나.

그런 환청이 들렸다. 그리고 아이반은 어느새 자신이 높고 높은 곳, 영광스럽고 위대한 장소에 있음을 깨달았다.

창대로 된 대들보에 황금 방패로 된 천장이 스쳐 지나간다. 순은으로 된 지붕 밑에 지고한 자리가 있었다.

흘리드스캴프(Hliðskjálf), 오딘의 옥좌.

그 지고한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 만물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오딘은 그중에서도 어느 곳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성벽, 부서진 성문. 이리저리 널린 피와 시체, 전투의 흔적. 그런 요새 너머에 펼쳐진 숲속. 그 안에 잠든 오래된 유적.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

위대한 초월자의 시야로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신의 감각으로 굽어 살폈다.

오래된 유적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악마의 화신이 되기를 자처한,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거죽을 벗고 시체로 살아가는 사악하고 사악한 자가 보였다.

필멸자로서는 대단한, 불멸자에게는 하찮은 경지에 도달한 악마의 화신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위대한 신의 시선을 느끼고 결계를 펼쳤다.

오딘은 손을 뻗어 그것을 걷어 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오딘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진짜 오딘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찮은 전사야, 이제 지상으로 돌아가라.

“으헉!”

아이반이 문득 고개를 숙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초월적인 일을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아이반! 왜 그러십니까?”

아이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 역시 몹시 혼란스러웠다.

‘방금 그건 뭐였지?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아이반은 온몸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스스로 오딘이 되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표정이 좋지 않다. 괜찮나?”

사나운 이빨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자 아이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저었다.

“괜찮소. 아직까지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표정을 숨긴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오딘의 옥좌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았을 때 확인했던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그는 여전히 떨고 있는 피의 검 브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단심문관, 피에르 로렝이 살아 있소.”

60화 요정 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