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화 – 불꽃은 땅에서 시작된다

테라니아력 891년, 행성 네라카.

공화국 식민지 제7구역, 외곽 경찰통제소.

현지 시각 새벽 03시 04분.

방 안은 완벽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한때 질서를 수호했던 공화국 기동경찰들은, 지금은 차가운 시체로 강철 바닥 위에 흩어져 있었다.

탄흔도, 전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빠르게, 그리고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강철로 된 바닥은 얼룩진 피와 기체 잔해가 뒤섞여 검붉게 번져 있었다.

그 중앙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어둠을 품은 존재였다.

슬럼가의 절망을 걸친 듯한 칠흑빛 코트를 입고,

마치 공간 자체를 응고시킨 듯 조용히 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짙은 흑갈색, 오바라카인의 혈통을 지닌 얼굴이었다.

강인한 광대뼈, 단단한 턱, 검은 이마와 깊은 주름,

그리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태초의 별빛처럼 냉정한 눈빛.

그는 오바라카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황폐한 시대를 초월한 자였다.

홀로그램 송출 패널 앞에 선 그는,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 송출되는 공화국의 선전 영상을 바라보았다.

“공화국은 정의다.

공화국은 통합이다.

테라니아는 하나의 운명을 따른다.”

찬란하게 빛나는 화면은,

이 썩어가는 식민지에 부조리하게 어울리지 않는 광휘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흥도 깃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 모든 것을—

공화국의 통합이란 허상과 정의란 위선을—

오래전에 꿰뚫어 보았다.

그의 기억은, 붉게 물든 거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네라카.

황무지로 가득한 이 행성은,

공화국의 손길이 닿은 후 급속히 썩어갔다.

“경제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토지 강탈.

“사회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강제 이주된 수백만의 가난한 민중들.

공기는 매연에 질식했고, 거리는 붕괴된 철골과 버려진 폐기물 더미로 가득 찼다.

슬럼가에서는 부패한 관리들이 주민을 갈취하고, 기동경찰은 불법 체포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곳은 더 이상 ‘도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화국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소년이었던 그는,

바로 그 심연 한가운데서 태어나 자라났다.

고철과 매연, 붉게 갈라진 대지,

기동경찰대의 드론이 쉴 새 없이 순찰하는 철제 골목.

슬럼의 아이들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거기엔 별도, 희망도 없었다.

있었던 것은 오직, 죽음에 가까운 공기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그날.

“불법 거주자 소탕 작전.”

경고도 재판도 없었다.

기동경찰들은 네라카 제7구역을 봉쇄하고, 무차별 사살을 시작했다.

그는 열 살이었다.

부모와 형제, 여동생과 함께 있었다.

짧은 총성.

짧은 비명.

짧은 삶.

모든 것이 불타올랐고,

그는, 불타는 거리와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그날,

그의 심장은 얼어붙었다.

감정은 죽었고, 남은 것은 오직—

생존에 대한 본능과 싸움에 대한 본능뿐이었다.

그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주먹으로.

칼로.

총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자라난 그는, 이제 단순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공화국이 심은 절망의 열매였고,

체제를 무너뜨릴 첫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흔적 없이 움직였다.

특수부대 요원을 암살했고, 식민지 고위 행정관을 처단했으며,

공화국의 정보망과 통신망을 붕괴시켰다.

공화국 정보국은 그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일격의 유령이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도시 하나가 침묵한다.”

그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부정되었고,

출생 기록, 거주 기록, 생체 정보 모두 삭제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공화국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현재.

그는 조용히 송출 패널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패널이 다른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공화국 총리 제롬의 연설.

“나는 테라니아의 피를 이었다.

무질서한 자들은 정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의 질서 위에서, 나는 불협을 노래하겠다.”

그는 단말기를 꺼냈다.

광자 지령 발신.

위치 추적 불가, 복호화 불가, 발신자 불명.

그리고 그 순간,

네라카의 어두운 하늘은 보이지 않는 떨림을 시작했다.

테라니아력 891년, 행성 테라니아.

공화국 정보국 본부 – 전략정보실.

현지 시각 14시 23분.

정보실 내부는 무거운 정적에 잠식되어 있었다.

가끔 키보드 타건음과 모니터 전환음만이, 생명처럼 작은 떨림을 남길 뿐이었다.

벽면 스크린에는 네라카 제7구역의 감시 영상이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경찰통제소는 불타고 있었고, 감시초소는 끄트머리조차 남지 않았다.

흐릿한 연기와 붉게 달아오른 금속만이 폐허를 증명하고 있었다.

정적을 가르는 목소리가 터졌다.

“블랭크입니다.”

정보요원의 보고에, 고위 정보장교 라이하르트 제커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탁자 위에 부딪히며 짧은 진동음을 울렸다.

그는 피곤에 젖은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또 그 놈인가… 제기랄.”

옆자리의 젊은 분석관 엘 존슨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이 열일곱 번째입니다.

이대로 두면… 네라카 7구역 전체가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겁니다.”

그는 분노보다, 깊은 피로를 더 많이 담은 얼굴이었다.

몇 달 동안 그들은 이 유령 같은 존재를 추적했지만, 항상 헛수고였다.

존슨은 추가 영상을 열었다.

모든 감시 카메라와 드론망, 감시 초소가 한순간에 무력화된 기록이었다.

“이번엔 단순한 테러가 아닙니다.

작전 계획이 치밀하고, 이동 경로는 완벽했습니다.”

제커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문 인식을 눌렀다.

잠시 후, 비밀등급 3레벨 문서가 열렸다.

스크린 위로 한 개의 인물 파일이 떠올랐다.

BLANK

• 식별불가

• 출생기록 삭제

• 생체패턴: 비공식

• 생존 가능성: 89%

“우리가 그를 놓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제커가 말했다.

“하지만…”

존슨은 잠시 말을 고르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이번엔 다릅니다.

블랭크가 통제소 내부에 침입해 네라카 총독 송출 시스템을 해킹해 총독 연설 영상을 유포했습니다.”

제커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가짜 연설을 퍼뜨린 건가?”

“아닙니다.” 존슨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연설입니다.

과거 기록, 최고 보안등급 1. 내부망에서만 존재하던 ‘국시(國是) 연설문’입니다.”

제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회의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건 우리조차 쉽게 열람할 수 없는 자료인데…”

“그래서 문제입니다.”

존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블랭크는 단순한 반란분자가 아니라,

공화국의 심장을 조준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공화국 네라카 총독부 – 특별대책실.

네라카 총독부는 슬럼과 잿더미로 둘러싸인 황폐한 세계 속에서, 단 하나 찬란한 백색 성채처럼 솟아 있었다.

외벽은 빛나는 합금으로 덮여 있었고, 첨탑들은 군사 위성 통신망과 직접 연결되어 은은한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거대한 방벽과 고압 전자벽은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 모든 광휘는 허울에 불과했다.

총독부의 내부는 이미 부패와 무능으로 좀먹고 있었고,

그곳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위선과 공포뿐이었다.

총독의 집무실은 광활하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검은 대리석 바닥, 붉은 가죽 소파, 천장에는 공화국의 문장이 새겨진 황금장식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과잉된 장식은 오히려 이곳이 얼마나 시대에 뒤처진 곳인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총독 데이란 카이론이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뚱뚱한 몸집을 가진 사내였다.

군복은 잘 다려져 있었지만, 단추는 그의 배를 억지로 끌어안듯 팽팽히 당겨져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육중한 몸이 묵직한 소음을 냈다.

회색빛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두툼한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옅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오래된 나태와 오만이 고여 있었다.

카이론은 젊은 시절 한때 유능했던 군인이였지만,

지금은 권력과 사치에 찌든, 살아있는 부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것은 확고했다.

—잔혹함.

—지배욕.

—그리고, 위기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완고한 의지.

카이론은 거대한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손가락이 종이를 천천히 문지르듯 훑었다.

그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서 도시 하나를 무력화시켰다고…?

웃기는군. 무슨 전설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손에 쥔 보고서는 단호했다.

네라카 제7구역, 경찰 통제소, 감시 기지—

모두 단 하나의 존재에 의해 침묵당했다는 사실.

부관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덧붙였다.

“총독님, 전문가들은 그를 단순한 반군으로 보지 않습니다.

군 훈련 이상의 체계성과 기술을 갖춘 인물로 분석됩니다.”

카이론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육중한 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창문으로 걸어가, 슬럼으로 변해가는 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잿빛 도시, 가난과 분노에 잠긴 슬럼가들, 불안에 떨고 있는 민중.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블랭크는 우리가 만든 괴물일지도 모르겠군.”

카이론은 천천히 몸을 돌려, 부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즉시 계엄령을 선포해라.

제7구역뿐만 아니라 네라카 전역을 특별 관리구역으로 지정한다.

블랭크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는—

예외 없이, 반역자로 간주하라.”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단호했다.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순간, 총독부 전체가 숨을 삼키는 듯 조용해졌다.

그리하여,

네라카는 비로소 거대한 화산처럼 끓기 시작했다..

테라니아력 891년, 행성 네라카.

제7구역 폐허 — 일주일 후.

불에 그을린 고철 더미.

쇠락한 거리.

검붉은 대지 위를, 한 남자가 조용히 걷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발밑으로는 공화국의 표식이 부서진 채 짓밟히고 있었다.

그는 목적지도, 대답할 대상도 없이 앞으로 걸었다.

다만, 그의 존재 그 자체가 질문이었고,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세계에 던지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후,

도시의 불빛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테라니아력 891년, 행성 네라카.

제7구역 계엄령 발령 후 36시간 경과.

도시는 죽은 듯 조용했다.

전력망은 끊기고, 공공 네트워크는 차단되었으며, 하늘에는 드론 감시망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네라카는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침묵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공화국 네라카 총독부 – 특별방송센터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고압적인 표정으로 방송 연단에 섰다.

두 다리는 그의 육중한 몸을 겨우 지탱하다시피 했지만, 두 눈만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식민 통치자의 권위, 그리고 조급한 불안이 그 안에 뒤섞여 있었다.

그는 공화국 담당기관과 상의하지 않았다.

어떤 승인도, 절차도 없이—오직 자신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공화국 문장이 걸린 배경 아래,

카이론은 굳은 목소리로 낭독을 시작했다.

“테라니아력 891년 5월 14일부로, 행성 네라카 전역에 특별 계엄령을 선포한다.”

곧 이어진 포고문 낭독은 차갑고 무자비했다.

제1조. 행성 네라카 전역은 공화국 치안법 제77조에 따라 군사 통제 하에 둔다.

제2조. 모든 공공 집회, 행진, 시위는 즉시 불법으로 간주한다.

제3조. 반공화국 선동행위 및 저항행위는 반역죄로 간주하며, 현장 사살을 포함한 즉결 조치를 시행한다.

제4조. 통행금지령은 매일 20시부터 06시까지 적용되며, 위반자는 체포 또는 사살된다.

제5조. 모든 민간 통신망은 즉시 단절 및 검열 대상이 된다.

제6조. 공화국 질서 회복에 방해가 되는 자는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군법에 의거해 처분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선언은 망설임 없었다.

“공화국에 대한 저항은 곧 존재의 부정이다.

모든 반역자는 처단될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도시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슬럼 북구 – 오바라카인 구역

“그들이 우리를 다시 짓밟으려 한다!”

첫 번째 함성이 터졌다.

오바라카인 청년의 절규는 광장을 가득 메웠고, 그 함성은 이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오바라카인—

네라카의 원주민이자, 공화국 내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민족.

한때 자랑스러웠던 문화의 후예들이었지만,

공화국은 이들을 산업 하층민, 치안 관리 대상, 투명 인간으로 몰아넣었다.

공화국을 지배하는 레비에탄 민족은 달랐다.

그들은 체계와 질서를 중시했다.

조직적 사고, 효율성, 인내심, 그리고 자기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레비에탄은 스스로를 “테라니아 문명의 계승자”로 여겼다.

오바라카인은 그들의 눈에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차별은 제도화되었고,

공화국의 통합이란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 통합의 균열이 드러나고 있었다.

광장에서는 오바라카인 민중들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그 깃발에는 단 한 문장이 붉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다.”

계엄군은 경고했다.

물러서라고, 흩어지라고.

그러나 민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제 파이프를 들고, 불붙은 병을 들고, 돌을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첫 번째 사상자가 쓰러졌지만,

군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물결쳤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네라카는 깨어나고 있었다.

네라카 시가지 – 제7구역 외곽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폐허를 가르고 있었다.

블랭크.

그는 포위망을 감지했다.

드론, 저격수, 경장갑차, 기동보병대.

공화국은 그를 사냥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냥당할 존재가 아니었다.

폐허 건물의 그림자 속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드론 하나를 잡아 부수고,

지상 병력의 포위선을 향해 돌진했다.

첫 번째 접촉.

기관총을 든 병사 두 명.

블랭크는 짧게 뛰어올라 벽을 딛고 착지하자마자,

한 병사의 손목을 꺾고, 다른 병사의 무릎을 부러뜨렸다.

두 번째 접촉.

저격수가 숨어 있는 옥상.

블랭크는 철제 구조물을 발판 삼아 단숨에 옥상까지 치솟았다.

저격수는 총을 들기도 전에 목덜미를 꺾였다.

포위망이 좁혀올수록,

그는 더욱 빠르게, 더욱 맹렬하게 움직였다.

장갑차가 포신을 돌릴 때,

블랭크는 그 죽음의 그림자보다 빠르게 측면으로 미끄러졌다.

폐허 속, 먼지와 파편을 가르며,

그는 공화국의 완벽한 통제망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지하 저항기지 – 팔콘네스트(Falcon nest)

네라카 산맥 광산 폐허를 개조해 만든 거대한 지하 기지.

고철과 붕괴된 석재 사이에 숨겨진, 네라카 최후의 저항심장부.

그러나 이곳에도 긴장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계엄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기술팀 리더가 낮게 중얼거렸다.

“포위망이 좁혀오고 있어. 24시간 내로 여기도 위험해질 거야.”

정보 담당자는 터미널에 손을 얹고, 급히 송신 상황을 정리했다.

“렉사일, 에트론, 판테니온 등.

그리고 베르시아, 안테로스,…

수많은 행성에 네라카 봉기의 소식이 확산됐다.”

공화국의 억압받던 식민지들.

광부, 항만노동자, 농장민들 소수민족.

그들도 각자의 별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그림자가 통로를 따라 들어왔다.

블랭크.

붉게 얼룩진 전투복, 짙은 먼지,

그러나 그의 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팔콘네스트의 전사들은 그를 바라보았다.

영웅을 맞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함께 싸우는 전우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상황은?”

블랭크가 짧게 물었다.

기술팀 리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

정보 담당자가 덧붙였다.

“하지만 기회도 있어.

공화국은 처음으로, 통제권을 잃었어.”

통제실

커다란 스크린 위,

네라카 행성 전역에서 봉기 신호가 퍼지고 있었다.

빨갛게 표시된 지역들—

공화국 기동대가 붕괴된 구역,

계엄군이 고립된 슬럼,

전력망이 마비된 산업지구.

네라카는 무너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균열은 시작됐다.

블랭크는 통제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전술 단말기를 손에 쥐었다.

“계획대로 간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날 밤,

팔콘네스트 내부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약을 점검하는 손,

의무 키트를 정리하는 의사들,

장비를 수리하는 기술자들,

그리고 총을 조이는 전사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곧 폭풍이 닥칠 것이다.

네라카 외곽 – 폐허지대

계엄군 특수기동대가 어둠을 가르고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레비에탄이 있었다.

냉철하고, 규율을 중시하며, 감정을 억제하는 특성.

공화국의 심장부를 이루는 민족.

“질서 없이는 문명도 없다”는 신념을 체화한 자들.

그들에게 오바라카인의 분노는—

혼란이었다.

비이성적인 소동이었다.

통제해야 할 질병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은 깨달았다.

질서로 감싸진 체계가,

단 하나의 불꽃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드론이 경고음을 울리기도 전에,

폐허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블랭크.

그는 마치 짐승처럼 폐허를 가르며 달려들었다.

드론의 광학 렌즈를 맨손으로 부수고,

저격수를 덮쳐 총구를 꺾고,

기동대 병사 하나하나를 무너뜨렸다.

포위망은 끈질기고,

계엄군은 훈련된 정예병들이었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몰랐다.

분노에는 규율이 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블랭크는 거칠게 움직였다.

벽을 차고, 잔해를 넘어, 다가오는 장갑차를 피해

그들은 추격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포위망은 결국—

산산조각 났다.

지하 저항기지 – 팔콘네스트

폭풍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팔콘네스트 내부는 침묵 속에서 움직였다.

기술팀은 방어선을 재점검했고, 의료진은 응급 처치 장비를 정리했다.

전사들은 짧은 휴식을 취하며 탄창을 갈았다.

블랭크는 조용히 통제실로 걸어갔다.

스캔 데이터에 따르면, 계엄군 대규모 부대가 남동쪽 터널을 통해 접근 중이었다.

장갑차, 드론, 특수부대 전열보병.

공화국은 팔콘네스트를 포위하고,

숨을 틀어막고,

최후를 맞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팔콘네스트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전투조, 대기.”

리더의 명령이 지하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말은 누구의 구호가 아니었다.

팔콘네스트에 남은 자들은

이미 그들 각자가 하나의 깃발이었다.

팔콘네스트 북부 방어선 – 터널 입구

계엄군이 진입을 시작했다.

탱크의 궤도가 갈라진 바닥을 짓밟았다.

기동보병이 포복하며 진격했다.

공중에는 소형 전투 드론들이 교차 비행했다.

블랭크는 방패막이 삼아 세운 고철더미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숨죽인 정적.

그리고—

일순간의 폭발.

저항군 저격수들이 드론을 쏘아떨어뜨렸고,

매복부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보병을 뒤흔들었다.

계엄군 선두가 흔들리는 찰나,

블랭크는 단독으로 돌격했다.

그는 장갑차의 측면을 노렸다.

도약, 착지, 손도끼로 차량의 통풍구를 내리쳤다.

차량이 주춤하는 틈에, 그는 옆에 있던 병사의 헬멧을 짓밟고 넘어섰다.

포격음, 비명, 총성.

혼돈이 소용돌이쳤다.

계엄군 지휘관은 무전기를 쥐고 절규했다.

“타겟을 사살하라! 반란 수괴 최우선 제거!”

그러나 블랭크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한 명, 두 명, 세 명—

순식간에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오바라카인 청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광산 노동자 출신, 도시 슬럼가 소년,

모두가 코트를 걸치고, 주먹과 총을 들었다.

그날 밤,

팔콘네스트는 살아있었다.

통제실

정보 담당자가 급히 보고했다.

“도시 중심부에서 새로운 봉기가 시작됐습니다!

공화국 방송망이 점령당했습니다!”

광장 스크린에,

민중들이 깃발을 흔드는 모습이 비쳤다.

검은 깃발, 붉은 글씨.

“우리는 인간이다.”

렉사일, 에트론, 판테니온 등 다른 식민지 행성들에서도

봉기의 불길은 치솟고 있었다.

가르닐라 광산도,

베르시아의 항만도,

안테로스의 공업지대도—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지하 복도

블랭크는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했다.

그의 몸은 피로로 떨렸지만,

그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들었다.

짧고, 굵게.

“우리는 끝까지 간다.”

바깥에서 폭발음이 울렸고,

지하 깊은 곳에서도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두려움을 버렸다.

그들은,

이제 역사가 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조용한 통로를 지나며,

한 아이가 블랭크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희망과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블랭크는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헬멧을 벗어주었다.

“이건 네가 지킬 거야.”

아이의 손에 쥐어진 헬멧.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