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니아력 891년 6월 3일
공화국 국영방송 통합 보도국 – 특별 뉴스 생방송
"이상입니다.
지금부터는 특별 속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남성 앵커는 담담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의 배경 화면에는 공화국 문장이 엄숙하게 떠 있었고,
그 아래로 긴급속보 자막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공화국 국가통제청 공식 발표]
[렉사일, 에트론, 판테니온 등 인근 식민 행성 봉기 진압 완료]
"국가통제청은 오늘 오후 16시,
네라카 인근 렉사일, 에트론, 판테니온을 포함한 모든 주요 식민 행성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완전히 진압되었음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영상이 바뀌었다.
── 렉사일 행성.
거대한 광산 도시의 한복판.
시위대는 도로를 점거하고 공화국 깃발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진압드론 부대가 투입되었다.
공중에서 뿌려진 최루탄과 전기충격탄에 군중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완전무장한 기동경찰대가 검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몇 분 만에 거리 전체가 진압당했다.
── 에트론 행성.
산업지대.
분노한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몰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대형 드론포대가 일제히 비살상 탄을 발사했다.
강철같은 질서 속에서 시위대는 포위되고, 주요 지도부는 전광석화처럼 체포되었다.
── 판테니온 행성.
도심 광장에서 시민 수천 명이 궐기했지만,
바닥을 진동시키는 중장갑차 행렬이 중심부를 압도했다.
무장진압병력은 병렬 대형을 유지한 채 광장으로 밀어붙였고,
반격할 틈조차 주지 않고 시위대를 가두었다.
영상은 처절했다.
하지만 끝은 한결같았다.
모든 저항은 짓밟혔고,
모든 봉기는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방송은 다시 앵커의 얼굴로 돌아왔다.
"모든 지역은 현재 공화국 치안 부대와 계엄군에 의해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으며,
추가 충돌 위험은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짧은 순간.
그 차가운 발표 뒤에,
별도로 강조된 단 하나의 행성 이름이 있었다.
"네라카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ㅡ네라카는 불타고 있었다.
도시도, 슬럼도, 심지어 산맥 기슭까지도.
제7구역의 도심은 이미 사실상 붕괴했다.
오바라카계 주민들이 주거하던 구역은 철제 바리케이드와 벽돌더미로 가득 차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마다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깨진 가로등 아래,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도로를 점거했다.
공화국 계엄군은 거리를 하나하나 되찾으려 애썼지만, 저항은 질기고 거칠었다.
슬럼가에서는 이미 무정부 상태가 시작되었다.
약탈과 방화가 번졌고,
거리마다 가판대가 부서지고 상점이 불탔다.
한때 아이들이 뛰놀던 광장엔,
이제 검은 연기와 깨진 유리 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네라카 산맥의 기슭, 팔콘네스트가 숨은 산 인근에서도 소요는 확산되었다.
농민들은 낫과 쇠스랑을 들고 봉기했고,
산악촌 주민들은 각자 만든 급조 무기를 손에 쥐고 공화국 순찰대를 습격했다.
산허리 마을에서는 심지어 계엄군 수송 차량 하나가 매복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산속에서 터진 급조폭발물의 폭음은,
잠시 동안 산맥 전체를 울렸다.
공화국 계엄군은 대응했지만,
모든 지역을 동시에 통제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너무 병력이 부족했다.
농촌 구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곡창지대에서는 오바라카계 농장민들이 연대를 맺고 트랙터와 농기구를 무장해 도로를 점령했다.
도로 위에는 넘어뜨린 경장갑차가 피폐한 채 방치되어 있었고,
드론 정찰기들은 간헐적으로 격추당했다.
네라카는 더 이상 공화국의 질서를 따르지 않았다.
수백만 명의 시민이 스스로 분노를 깨닫고, 스스로 총을 들었다.
공화국이 부여했던 '질서'라는 이름의 껍데기는,
네라카의 대지 위에서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한편, 네라카 총독부에서는...
데이란 카이론은 붉은 경보등 아래 서 있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그의 이마 위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재난 보고가 쏟아졌다.
그는 국영방송 속보를 확인했다.
렉사일—진압 완료.
에트론—진압 완료.
판테니온—진압 완료.
그의 손이 떨렸다.
다른 행성들은 질서를 되찾았는데,
자신만은,
자신이 통치하는 네라카만은,
아직도 혼돈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어째서...?"
카이론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똑같은 공화국 군대였고,
똑같은 무기였고,
똑같은 명령이 아니었나..?"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다른 총독들은 승리를 가져왔고,
자신은 실패를 기록했다.
그것은 단순한 행정적 과오가 아니었다.
공화국 고위당국자들 앞에서의 치명적인 수치,
그리고—
곧 닥칠 냉혹한 심판의 예고였다.
그 순간,
통신요원이 숨을 죽이며 다가왔다.
"총독님, 총독부 보안통제실로 긴급 회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국가통제청 직접 소집입니다."
카이론은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이제 변명의 여지는 없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잡듯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한편 팔콘 네스트에서는...
네라카 산맥 – 팔콘네스트 인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하늘은 아직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계곡 너머, 산허리를 넘어 흐르는 바람에는 매캐한 연기 냄새가 실려 있었다.
도심을 뒤덮은 불길이 이곳까지 번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여운은 산맥까지 타고 왔다.
팔콘네스트를 포위하고 있던 공화국 계엄군은 혼란에 빠진 도시 전체를 수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총독부로부터 긴급하게 내려진 지침은 명확했다.
"산맥 포위 작전 중지.
전 병력, 즉시 시가지로 재배치."
순식간에 이동이 시작되었다.
장갑차 부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계곡을 빠져나갔고,
기동보병들은 무거운 장비를 메고 황급히 산길을 내려갔다.
남겨진 건 고요였다.
산맥은 다시, 원래의 침묵을 되찾고 있었다.
팔콘네스트 안에서는 긴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터널 곳곳을 채우고 있던 전사들과 기술자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손을 꽉 쥐었고,
누군가는 힘없이 주저앉아 바닥에 등을 기대었다.
정보 담당자가 마른 목소리로 보고했다.
"계엄군… 전원 철수 완료."
기술팀 리더는 방어도면을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블랭크.
그는 벽에 기대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히 떨고 있었다.
살아남았다.
아직은.
ㅡ팔콘네스트 지하 통제실
고요했다.
폭풍이 지나간 직후의 침묵처럼,
팔콘네스트 내부는 차가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전투 복구 작업을 끝낸 저항군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때, 통제실 스크린에 새 경보가 떴다.
정보 담당자가 급히 단말기를 조작했다.
"렉사일… 에트론… 판테니온…"
그는 천천히 보고했다.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모두 진압됐습니다."
정적이, 한층 더 깊어졌다.
블랭크는 탁자에 팔을 걸치고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누군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우린… 너무 서둘렀던 걸지도 몰라."
또 다른 동료가 덧붙였다.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린 불꽃만 던져버렸어."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벽을 주먹으로 쳤다.
기술팀 리더가 힘없이 말했다.
"불씨는… 타오르기도 전에 꺼졌습니다."
블랭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뿌린 건 혁명이 아니었어.
그냥… 폭발물이었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동료들은 고개를 떨군 채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폭발이 일어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아.
그들은… 피하고 싶어해."
한동안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방 안에는 오직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백색소음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블랭크는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그 벽에는, 잊혀진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칼다.
에트론에서 사망한 저항군 소대장.
이제는 이름만 남은 전우.
그의 이름 아래,
블랭크는 손바닥을 조용히 얹었다.
"칼다는 준비돼 있지 않았어.
우린… 그를 너무 일찍, 혼자 보냈다."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블랭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깃들어 있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그는 짧게 중얼거렸다.
"이 불은 작지만,
꺼지지 않았다."
한편 테라니아에서는..
테라니아력 891년 6월 3일
테라니아 수도, 레비에타니아 – 국가통제청 고위 회의실 '노바룸'
노바룸.
이곳은 차가운 금속과 은회색 석회광으로 건축된, 장식조차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국가통제청의 최고 정책결정자들이 모이는 이 회의장은, 단 한 줄의 미사여구 없이 권력의 기계적 논리가 집행되는 장소였다.
여기 앉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레비에탄 민족 출신이었다.
그들은 체계, 질서, 통합을 신념처럼 체화한 이들이었고,
‘혼란’과 ‘이질성’에 대해 본능적 거부감을 품은 존재들이었다.
중앙 타원형 테이블 위 홀로그램에서는
네라카 제7구역에서 벌어진 교전 영상이 무음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불타는 광장, 패주하는 계엄군, 그리고 어둠을 가르며 질주하는 검은 코트의 주인공—블랭크.
정적을 깨고, 군사령부 정보참모장인 바라 쿠넬이 서류를 넘기며 보고를 시작했다.
"렉사일, 에트론, 판테니온.
모든 소요는 진압 완료되었으며, 치안 회복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내리깔고 덧붙였다.
"네라카는 여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있습니다."
회의장은 차가운 침묵에 잠겼다.
그때, 타원형 테이블 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손끝으로 가볍게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알두스 바르크.
국가통제청 행정총감.
단단히 다려진 제복, 결빙된 듯한 회색 눈빛, 그리고 완벽히 절제된 몸짓을 지닌 사내.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 뒤, 명확하고 격식 있는 어조로 발언을 시작했다.
"먼저, 본청의 존재 목적은 단순한 치안 유지에 국한되지 않소.
우리의 소임은 모든 식민지가 공화국의 헌정 질서와 이념적 통합 아래 일관된 구조를 이루도록 보장하는 것에 있소."
바르크는 한 호흡을 멈춘 뒤, 다시 이어갔다.
"우리는 식민지 총독을 임명하고 감독함으로써, 해당 지역 사회가 자발적으로 공화국 이념을 내면화하고,
체제에 적응하도록 유도하는 장기적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소.
이는 단순한 명령 집행이 아니라, 문명적 통합의 과업이라 할 수 있소."
그는 문서 한 장을 가볍게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러나 현재 네라카에 나타난 사태는 명백히 이 기조에 반하는 것이오.
행성 내 치안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고, 민중의 불복종은 구조화되어 있으며,
반란은 자생적 저항의 형태로 확산되고 있소."
바르크는 고개를 들어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네라카 총독 데이란 카이론이 테라니아와의 공식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행성 전체를 군사 통제 상태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이오."
일부 국장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바르크는 서늘한 표정으로 조용히 문장을 이어갔다.
"공화국 법령 제18조 제7항에 명시된 바, 식민지 전역에 대한 계엄령 선포는
국가통제청, 또는 공화국 총사령부와의 협의 및 승인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오.
데이란 카이론은 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면 계엄에 돌입함으로써,
국법의 엄정성에 심각한 균열을 초래했소."
그는 서류를 가볍게 덮었다.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는 총독은 단순한 무능을 넘어, 체제의 신뢰성과 권위 자체를 훼손하는 존재라 할 것이오.
뿐만 아니라, 독단은 무질서의 서곡이며, 절차 없는 계엄은 결국 반체제의 명분만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오."
바르크는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본청은 네라카 총독 데이란 카이론에 대하여
즉시 징계 절차를 개시하고,
테라니아로 소환하여 정식 심문 및 책임 심사를 진행할 것을 요청하는 바요."
그의 목소리는 결코 높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권위는 회의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이 자리에 모인 관료들은 같은 결론을 공유하고 있었다.
곧이어 결의안이 공식 발의되었다.
[네라카 총독 데이란 카이론 — 징계절차 개시 및 테라니아 소환 결정.]
노바룸,
이 차갑고 무미건조한 공간에서,
한 인물의 정치적 생명은 무감정하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