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최후의 기회

테라니아력 891년 6월 5일

테라니아 수도, 레비에타니아 – 국가통제청 고등 회의실 ‘노바룸’

노바룸.

은회색 석벽으로 둘러싸인 이 무심한 공간은 언제나처럼 냉정했다.

국가통제청 고위 국장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네라카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앙 홀로그램에는 ‘네라카 총독 데이란 카이론 — 징계절차 개시’라는 붉은 문구가 떠올랐다.

정식 징계가 결정되었고, 데이란 카이론은 테라니아로 소환되었다.

테라니아 – 국가통제청 특별 심문실

데이란 카이론은 무광택 금속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을 부풀게 만드는 군복 대신, 회색 제복 같은 포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은 여전히 교활하게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

알두스 바르크 행정총감은 서류철을 덮으며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데이란 총독,

귀하는 식민지 통제 실패와 절차 무시, 공화국 이념 훼손의 책임으로 소환되었소.

귀하에 대한 징계 절차가 정식 개시되었음을 통보하는 바요.”

데이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다가,

갑자기 억울함을 참지 못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총감 각하, 부디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일부 과오는 인정하겠습니다만,

모든 것이 저 하나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바르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론을 하시오.”

데이란은 급히 말문을 열었다.

“네라카는 원래부터 불안정한 식민지였습니다!

오바라카계 주민들은 공공기관과 치안 유지에 극도로 비협조적이었고,

경찰 내부마저 명령 불복종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듯 짧게 두드렸다.

“더욱이 공화국 중앙당국은,

제 수차례 예산 증액 요청을 무시했소.

드론 전력 강화, 장갑차 보강, 공안 요원 충원 요청—

그 어떤 것도 제때 지원되지 않았소!”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네라카의 40% 이상은 여전히 황무지요!

인구밀도는 낮고, 통신망은 빈약하며, 교통망은 붕괴 직전이었소.

이런 조건에서… 제가 무슨 수로 완벽한 통제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끝내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저는 부당한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뿐이오!

책임을 전부 저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오!”

회의장은 차가운 침묵에 잠겼다.

바르크는 손끝으로 서류를 천천히 정리했다.

그리고 긴 호흡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하의 항변은 이해하였소.

분명 구조적 문제와 지원 부족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소.”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허나, 총독이란 자리는—불리한 여건을 뛰어넘는 역량을 요구하는 법.

귀하는 책임을 외부로 돌리기 바빴소.

이 자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는, 그 자격을 잃을 뿐이오.”

데이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르크는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청은 귀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소.”

데이란은 눈을 치켜떴다.

“귀하는 네라카 내 봉기를 자체적으로 진압할 권한을 부여받을 것이며,

만약 성공한다면, 징계 절차는 재검토될 수도 있소.

그러나 실패할 경우, 귀하의 모든 권한은 즉시 박탈되고,

네라카는 군정 직할 통치로 전환될 것이오.”

바르크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단호했다.

“이번이 진정한 마지막이오, 데이란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빛 속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억울함이 희미하게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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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니아력 891년 6월 8일

네라카 행성 – 총독부 지하 병력통제실

총독부 지하.

경보등이 섬광처럼 번쩍이는 가운데, 데이란 카이론은 군복을 걸쳤다.

그의 어깨 위에는 다시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었다.

수십년전 네라카 정복전쟁에 중령으로서 참전했던 그는, 다시 전쟁광과도 같은 지휘관으로 돌아왔다.

통제 스크린 앞에는 지휘관들이 집결해 있었다.

“계엄군 6개 대대, 중형 전차대 2개 중대, 강습 드론 전대 3개 편성.”

데이란은 침착하게 지휘봉을 가리켰다.

“목표는 네라카 제7구역 시가지 전역

반군 세력 소탕 및 시위 진압.

작전명은 ‘강철의 안개’라 명명한다.”

그는 말끝을 단호히 다듬었다.

“적은 농민도, 노동자도, 반항하는 어린아이들도 아니다.

우리는 공화국 질서를 훼손하는 무장 반란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지휘관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란은 더 세게 말했다.

“필요하면 발포하라.

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다.”

그의 말에는 불길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네라카 – 팔콘네스트 지하 통제실

지하 터널을 따라 이어진 팔콘네스트는, 금속과 폐광 잔해로 이루어진 무거운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통로를 타고 번지는 전자기기의 미세한 진동음, 환기구 너머로 스며드는 매캐한 공기,

그리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침묵은, 이 지하 도시가 숨을 죽이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블랭크는 조용히 작전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전자 지도 위에는 붉은 색으로 계엄군의 이동 경로가 점으로 찍혀 있었다.

기술팀 리더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계엄군, 움직임이 이상해.

산맥 포위를 포기하고 전병력이 시가지로 재배치됐어.”

정보 담당자는 단말기 화면을 펼쳐 보이며 덧붙였다.

“그러고서는 지금, 네라카 시가지 남부,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거기서 계엄군 주력이 집결하고 있어.

그쪽을 돌파하지 않으면, 시가지 전체 봉기를 지원할 수 없어.”

블랭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터널 안 희미한 조명 빛이, 그의 얼굴선을 차갑게 조각하고 있었다.

“오스킬이라…”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곳은 단순한 교차점이 아니었다.

네라카 제7구역 전체를 남북으로 가르는 대동맥.

광산물 수송로이자, 식량과 연료 보급선이 통하는 요충지.

만약 그곳을 내어주면,

슬럼가의 봉기도, 중심가의 시민 저항도—모두 고립되어 질식사할 것이다.

기술팀 리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

계엄군이 아직 완전히 빠져나간 건 아니야.

아직 탐색 드론이 남아 있고, 방어선도 약하진 않아.”

정보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팔콘네스트를 비우는 것도 위험해.

섣불리 움직이면 이곳도 털릴 수 있어.”

긴장감이 지하 전체를 타고 퍼졌다.

환풍구를 통해 흘러든 바깥 공기는 차가웠고,

곳곳에선 전투 준비를 끝낸 전사들이 무거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랭크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숨는다고 달라지진 않아.”

“우린 길을 열어야 해.”

그는 턱짓으로 전자지도를 가리켰다.

“오스킬을 넘지 못하면,

네라카시는 질식한다.”

정보 담당자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팔콘네스트에 소수만 잔류하고, 나머지는 출동하자.”

결정은 번개처럼 내려졌다.

곧이어,

지하 통로 곳곳에서 긴박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통신 장비를 해체하고, 탄약과 장비를 짊어진 전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고철 방패, 개조 라이플, 수제 폭탄을 손에 든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무언의 각오를 다졌다.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블랭크는 천천히 통제실을 둘러보았다.

벽 너머엔 여전히 어린아이들과 노약자들이 남아 있었다.

팔콘네스트는 단순한 군 기지가 아니라,

이 저항의 최후 보루였다.

그는 조용히 손바닥으로 통제실의 금속 벽을 한번 쓸었다.

거칠고 차가운 촉감이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우린 여기서 시작했지만,”

“여기서 끝나진 않을 거야.”

그 말은, 명령이 아니라 서약이었다.

그날 밤.

팔콘네스트 전사들은 어둠과 폐허를 가르며 움직였다.

광산 터널을 빠져나온 그들은,

산허리의 폐광 입구를 지나,

구불구불한 계곡 지형을 따라 도시 외곽으로 진출했다.

발밑은 먼지와 쇳가루로 미끄러웠고,

머리 위에는 감시 드론의 탐조등이 마치 매의 눈처럼 어둠을 훑고 있었다.

블랭크 일행은

폐허가 된 주택가 골목을 타고,

망가진 송전탑 아래를 기어가고,

버려진 철골 구조물 사이를 통과하며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그곳은 바로 눈앞이었다.

빛도 없고,

확신도 없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테라니아력 891년 6월 10일

네라카 – 제7구역 외곽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새벽.

안개는 무겁게 내려앉았고, 희뿌연 대기 속에서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질식했고, 철로 주변은 전날의 싸움 흔적을 간신히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땅은 이미 진동하고 있었다.

먼저 소리가 들렸다.

땅속 깊은 곳을 두드리는 무거운 진동,

그 다음은 철도 레일이 낮게 떨리는 울림.

그것은 다가오는 무언가의 서곡이었다.

짙은 안개 속을 뚫고, 첫 번째 물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겁고 둔탁한 금속 질주음.

중형 전차 부대였다.

각 전차는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한 채, 짧고 굵은 포신을 어둠 속에 겨누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두꺼운 방탄복을 입은 기동 보병들이 대열을 맞춰 행진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정확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절도 있게 땅을 밟고 나아갔다.

각 병사는 헬멧에 장착된 자동 조준기를 빛냈고, 양어깨에는 다목적 레이저 소총이 매달려 있었다.

공중에는 강습 드론 전대가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규칙적인 간격으로 V자 대형을 유지한 채, 철로 상공을 유령처럼 미끄러지고 있었다.

드론들은 레이더 탐지기를 최대 감도로 작동시키며, 땅 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붉은 경광등이 번쩍이는 지휘 차량이 거만하게 열을 가르며 전진했다.

그 지붕에는 공화국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철의 명령을 내릴 총독, 데이란 카이론이 타고 있었다.

이 거대한 물결은 압도적이었다.

인간의 힘이 아니라, 기계와 체계가 밀어붙이는 질서 그 자체였다.

철도 주변에 구축된 바리케이드 위에서, 광산 노동자 출신의 오바라카 청년들은 긴장된 눈으로 저들의 진격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맨손에 고철로 만든 방패를 쥐었고,

누군가는 쇠파이프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소리칠 필요도, 경고할 필요도 없었다.

다가오는 것은 ‘진압’이 아니라 ‘도살’이었다.

짙은 안개가 가르는 그 틈새로,

공화국 계엄군의 깃발이—

검붉은 공화국 문장이, 은빛 헬멧 위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차의 엔진 소리가 최후의 거리를 삼켰다.

거대한 금속 짐승들은 무자비하게 철로를 넘어서며 전방 바리케이드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기동 보병들은 반원형 진형으로 퍼지면서 철저히 포위망을 구축했다.

공중 드론들은 저공 비행을 시작하며,

레이저 조준선들이 붉은 실처럼 바리케이드 위를 스쳤다.

사방이 무장된 기계와 병사들로 메워지는 광경은,

도망칠 구멍조차 남기지 않는 완전한 ‘봉쇄’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바리케이드 뒤에서 블랭크가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의 눈앞에는 숫자가 아니라 생명이 있었고,

이 거대한 물결을 막아야 한다는 단 하나의 사명이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운명을 가르는 첫 번째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