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니아력 891년 6월 10일
테라니아 수도, 레비에타니아 – 국방부 청사 회의실
국방부 회의실은 군사적 목적 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특수 합금과 강화 유리로 마감된 실내는 음향 반사까지 계산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오로지 기능성만을 고려한 고광도 조명이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곳은 권력의 중심부이되, 장식은커녕 인간적 따뜻함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구조물들만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회의실 한가운데, 두 명의 인물이 마주서 있었다.
그중 한 명, 국방부장관 제무르 카르비엘은 곧게 편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레비에탄 민족 출신으로, 금발의 머리카락을 다듬었으며,
차가운 벽처럼 빛나는 옅은 청색 눈동자를 가진 인물이었다.
넓은 어깨, 날카로운 턱선, 전장을 헤쳐 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강인하고 절제된 풍모.
그는 공화국 정규군을 대표하는 존재였으며, 전통적 군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제무르는 천천히 손을 뒤로 모은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행정총감 바르크 경.”
말투는 조심스럽되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필요한 존칭과 예의를 갖추었지만,
그 이면에는 단호하고 굴복을 모르는 권위가 깔려 있었다.
“네라카 사태에 대하여, 현 시점에서 상황을 보고해 주시겠소.”
맞은편에 서 있던 사내는 알두스 바르크, 국가통제청의 실질적 수장.
냉정하고 완벽하게 다려진 제복,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의 회색빛 눈동자 역시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르크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예, 국방부장관 각하.”
그는 말을 고르고, 담담히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네라카 제7구역을 중심으로 한 반군 활동이 격화 중에 있으며,
계엄군은 총독 데이란 카이론의 직접 지휘 하에 반군 및 시민 봉기를 진압 중에 있습니다.
총독은 6개 대대, 중형 전차대 2개 중대, 강습 드론 전대 3편대를 동원하여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을 중심으로 제압 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제무르는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물었다.
“총독에 대한 징계 처분은 어떠한가?”
바르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본청은 이미 네라카 총독 데이란 카이론에 대한 징계절차를 공식 개시한 바 있습니다.
허나, 본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징계 집행은 일시 보류한 상태이며,
총독에게 자력으로 네라카 사태를 수습할 최후의 기회를 부여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철저히 절제되어 있었다.
단순한 변명도, 과장도, 감정도 없었다.
오직 기계적 보고만이 흘러나왔다.
제무르는 팔짱을 풀고 천천히 회의실을 걸었다.
회색 강철 바닥에 군화의 발소리가 느리게, 그러나 일정한 리듬으로 울렸다.
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위압적이었다.
마치 전쟁 직전, 바람 한 점 없이 가라앉은 들판 같았다.
마침내, 그는 걸음을 멈추고 바르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행정총감 경.”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섬뜩할 정도로 정확했다.
“공화국은 식민지 하나의 문제를 넘어,
체제의 안정성과 질서를 논하고 있소.”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만일 네라카 사태가 자력으로 진압되지 못하고,
계엄군이 반군에게 굴복하거나,
혼란이 제어 불능 수준으로 확산된다면—”
그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뚜렷이 강조했다.
“국방부는 정규군의 직접 개입을 검토할 것이오.”
그 말은 선언이었다.
경고가 아니라, 통보였다.
바르크는 짧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국방부의 정규군이 투입된다는 것은,
국가통제청이 통제권을 상실하고,
네라카가 사실상 군정 하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실패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국가통제청에 돌아올 것이었다.
바르크는 고개를 들고 차분히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국방부장관 각하.”
제무르는 마지막으로 짧게 말했다.
“공화국은 혼란을 허용하지 않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을 떠났다.
강철과 석광으로 이루어진 이 무심한 공간에는,
단 한 조각의 동정도, 연민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날 밤, 국가통제청 본청 총감 집무실
도시는 이미 깊은 밤에 잠겨 있었지만,
국가통제청 본청의 최상층, 알두스 바르크의 집무실에는 여전히 창문을 뚫고 희미한 조명이 깃들어 있었다.
넓은 사무실은 불필요한 장식 하나 없이 깔끔했다.
회색 금속으로 짜인 가구, 암회색 카펫, 차가운 공기.
모든 것이 질서와 절제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알두스 바르크는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 있었다.
스크린 속에서는 네라카 상공을 도는 공화국 정찰 위성의 생중계 영상이 느릿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시민 시위대,
즉흥적으로 구축된 반군 진지,
그리고 그들을 압박하며 전선처럼 조여오는 계엄군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차가운 청색 음영 속에 뒤섞여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르크는 가만히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화면을 응시했다.
눈빛은 한없이 냉정했고, 숨결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고요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여기서 피가 흘러내린다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스스로에게 말하듯, 혹은 사무실 벽에 각인시키듯.
“—책임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게 되겠군”
홀로그램 스크린 위,
광장 한복판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밀어붙이는 장면이 재생됐다.
희미한 섬광, 쓰러지는 사람들, 먼지를 일으키며 후퇴하는 민중.
그 잔혹한 풍경은,
책상 위에 놓인 문서 한 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르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칠 것 없이 정돈된 집무용 책상 앞에 섰다.
거기에는 이미 모든 서명이 끝난 문서가 놓여 있었다.
[비상시 군정 전환계획 – 네라카 식민지]
엄정한 검은 글씨로 인쇄된 제목,
냉정한 관료주의의 언어로 가득 찬 수백 줄의 조항들.
‘민간 통치권의 자동 정지’,
‘총독 권한 회수’,
‘군정 사령부 임시 설치’,
‘필요시 초법적 조치 승인’——
한 문장 한 문장이,
수백만 인명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폭력을 품고 있었다.
바르크는 문서를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살짝 종이의 모서리를 집었다.
한 번, 짧게 쓸어내리듯 손을 움직였다.
그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맹목적 충성도,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
오직 한 국가의 ‘질서’라는 이름 아래,
필요할 때 필요한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결국 문서 위로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덮었다.
마치 이 모든 선택이 이미 오래전에 예정된 것처럼.
밖에서는 레비에타니아의 야경이 무심히 펼쳐져 있었다.
끝없는 도시 불빛,
질서 정연한 고속도로,
차가운 별빛조차 그 질서를 거스를 수 없었다.
바르크는 조용히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홀로 중얼거렸다.
“혼란은 허용될 수 없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
테라니아력 891년 6월 10일
네라카 – 제7구역 외곽,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짙은 새벽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가운데,
철로 주변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계엄군 대부대는 전열을 완전히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중형 전차들은 일제히 포신을 들어 교차지점을 겨누고 있었고,
기동 보병대는 방패를 맞댄 상태로 밀집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중에서는 강습 드론 전대가 일렬로 부유하며 목표를 조준하고 있었다.
그 맞은편,
붕괴된 철교 주변 폐허와 임시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시민군과 반군이 농성하고 있었다.
광산 노동자들이 어설픈 방패를 들고 선두에 섰고,
그 뒤에는 저항군 출신 전투요원들이 소총과 자제 폭발물을 준비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흩어진 콘크리트 잔해 뒤, 오바라카인 소년병들조차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방아쇠에 손을 얹고 있었다.
적막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포성이 터지지 않은 것은,
아직 양측 모두 마지막 실낱 같은 선택지를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총독 지휘차량 내부.
데이란 카이론은 중후한 군복 차림으로 지휘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고뇌를 넘어 냉혹한 결의로 굳어 있었다.
그는 통신장교에게 명령을 내렸다.
“최후통첩을 송신하라.”
즉시, 모든 방송 주파수로 메시지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본부에서 모든 반공화국 무장세력에게 통고한다.
네라카 제7구역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일대에서 즉시 무장 해제하고 항복하라.
주어진 시간은 10분이다.
저항 시 모든 군사적 대응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공허한 정적이 무전망을 타고 울렸다.
총독은 곧바로 이어서,
반군 수괴——공식 기록상 ‘블랭크’로만 알려진 자에게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특수 채널 47-B를 개방하라.”
통신요원들이 바삐 주파수를 조정했다.
“네라카 저항세력 지도자에게 고한다.
당신은 남은 병력과 민간인의 생명을 위해 항복을 고려할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았다.
즉시 응답하라.”
침묵.
오직 송신기의 백색잡음만이 대답할 뿐이었다.
몇 차례 반복된 호출.
그러나,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카이론은 무표정하게 송신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한순간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통제실에 명령을 내렸다.
“사격 준비.”
순식간에 계엄군 진영이 진격 태세로 돌입했다.
전차 포신이 미세하게 들리고,
보병들은 조준선을 맞추었으며,
드론들은 타격 경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데이란 카이론은 손을 들어 발포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 순간——
“쾅!!”
하늘이 번쩍였다.
철로를 따라 설치된 다수의 EMP 폭발 장치가 동시에 작동했다.
강렬한 전자기 펄스가 공중을 가르고 퍼져나갔다.
드론 전대가 일제히 제어를 상실했다.
기이한 전자음과 함께
공중에서 불규칙하게 꼬이며 추락하는 드론들, 불꽃을 뿜으며 땅에 처박혔다.
지휘실이 패닉에 빠졌다.
“드론 전대 통제 불능!”
“전자기 교란 감지!”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곧이어,
철로 주변에 은밀히 매설된 대전차지뢰가 일제히 터졌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철로는 찢어졌고,
굳건하게 대열을 유지하던 전차대는 차례로 폭발에 휘말려
차체가 뒤집히고, 포탑이 날아오르며,
검붉은 불꽃과 연기가 대지를 삼켰다.
거대한 장갑차량들은
순식간에 고철 더미로 변해갔다.
지축을 흔드는 충격.
흙먼지와 잔해가 하늘을 가렸다.
계엄군 진영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지휘채널은 엉망이 되었고,
각 대대는 지휘부의 명령 없이 생존 본능에 따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데이란 카이론은 진동하는 지휘차량 안에서
비명을 삼키듯 이를 악물었다.
“……반격 개시!
모든 부대 즉시 재정비!”
그의 명령이 늦게나마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미,
전장의 주도권은 손에서 미끄러져 있었다.
⸻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짙은 안개 속에서, 반군과 시민군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이제, 반격이 시작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