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테라니아력 891년 6월 10일.
네라카 행성의 제7구역,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국가통제청의 징계절차가 개시된 가운데,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하라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는 6개 대대와 중형전차, 드론 전대를 이끌고 시민군과 반군이 결집한 교차지점으로 진격했으며, 최후통첩을 발송하여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반군은 응답하지 않았다.
카이론은 발포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전장이 뒤집혔다.
EMP 폭발로 드론 전대가 무력화되고, 은폐되어 있던 대전차지뢰가 일제히 터지며 계엄군의 전열은 와해되었다.
오스킬 교차지점은 짙은 안개와 불꽃, 무너진 전차 속에 잠겼고, 전투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네라카의 운명을 건 결전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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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니아력 891년 6월 10일
네라카 제7구역,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대지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EMP의 여파로 공중에 떠 있던 강습 드론들이 기괴한 진동음을 내며 연쇄적으로 추락했고, 뒤이어 이어진 대전차지뢰의 폭발은 한밤의 적막을 뚫고 붉은 섬광으로 치솟았다. 철로를 따라 늘어서 있던 전차대는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거대한 금속의 산더미는 붕괴된 방호벽처럼 무너져 내렸다.
계엄군은 혼란에 빠졌다.
드론 통제 체계는 마비되었고, 무전 채널은 노이즈로 덮였다. 선두에 있던 기동보병대는 상부의 명령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졌고, 방패를 움켜쥔 병사들의 동공은 갈 길을 잃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진형은 빠르게 무너졌다. 포격을 막아줄 장갑차는 파편으로 변했고, 지휘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둠과 안개, 그리고 폭발의 잔향 속에서 그들은 하나의 지휘체계를 갖춘 군대가 아닌, 한낱 ‘분열된 무장 집단’처럼 허공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그의 검은 코트는 이미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왼쪽 어깨엔 장갑조차 없는 전투복이 찢겨 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오히려 더욱 명확했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어떠한 부연도 필요하지 않았다.
블랭크.
‘네라카의 유령’이라 불리는 사내.
계엄군에게 있어선, 이미 전설이자 공포의 화신이었다.
그는 달리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나 굳세게 걸었다.
마치 공포 자체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걸어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계엄군은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응 매뉴얼도, 훈련된 전술도 없는 공포의 대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첫 번째 교전은 빠르게, 잔혹하게 시작됐다.
블랭크는 소총을 들어 올리려던 병사의 팔뚝을 그대로 낚아채 꺾었다.
팔이 두 번 뒤틀리며 어깨 너머로 꺾이자, 병사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허공을 돌았다.
그의 발등이 병사의 턱을 강타했고, 무겁게 들린 신음과 함께 그의 헬멧은 반 바퀴 돌아간 채로 흙바닥에 처박혔다.
바로 옆에서 소리를 들은 또 다른 병사가 달려들었다.
블랭크는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전신을 틀어냈고, 그대로 뒤로 꺾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지축이 흔들릴 만큼 강한 충격.
병사의 방탄복은 바닥과의 충돌로 찢겼고, 피와 침이 튀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세 번째 병사는 방탄방패를 들고 블랭크를 밀쳐내려 했지만,
블랭크는 그의 공격선을 비틀며 가슴팍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정권이 박힌 순간, 병사의 갑주 내부에서는 갈비뼈가 부서지는 뻐걱 소리가 들렸고, 그는 헛구역질을 하며 무릎 위로 접혀 쓰러졌다.
공격은 일방적이었다.
훈련된 병사들조차, 블랭크의 반응속도와 폭력적인 완급조절 앞에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는 몸 전체를 무기처럼 휘둘렀다.
팔꿈치로 급소를 찍고, 무릎으로 턱을 꿰뚫고, 정강이로 목덜미를 찍었다.
등 뒤에서 덮친 병사에게는 허리를 틀며 팔꿈치를 등뼈 사이에 꽂았고,
정면에서 달려든 두 명은, 땅을 차고 튀어오른 도약으로 한 명의 가슴을 밟고 넘어가며, 다른 한 명의 헬멧을 무릎으로 으깨버렸다.
소리는 점점 잔혹해졌다.
“끼익—!”
“으아악!!”
“총을! 총을 겨눠—!! 으아… 안돼…!”
계엄군은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무전기도 버리고 도망쳤고, 어떤 이들은 어깨가 탈골된 채 바닥을 기어갔다.
병사의 얼굴이 블랭크의 발끝에 짓밟히자, 그의 이빨과 피가 섞여 흙바닥을 적셨다.
그의 검은 코트는 피를 머금었고,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계엄군은 공포에 질려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총은, 블랭크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혼란에 빠진 계엄군 병사들 중 일부는 명확한 사격 명령 없이, 눈앞의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난사로 번졌다.
기동 보병들의 탄창에서 뿜어져 나온 연사는 철로 주변을 훑었고, 총열이 향한 방향엔 전투원이 아닌 시민들이 있었다.
첫 번째 사상자는 광산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었고,
그 자리에 쓰러지자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이어지는 총성.
폭음.
피.
가방이 찢기고, 피범벅이 된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머리 위로 퍼져나가다가 금세 흙먼지와 섬광에 묻혀버렸다.
“사격 중지!! 민간인이—!”
반군 측에서 누군가 절규했지만,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탄환은 이미 도시의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
블랭크는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돌렸다.
뒤에서, 탄환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로 반군 요원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민간인 우선!! 이쪽으로!! 이쪽으로!!”
반군 통신요원이 철도 옆 버려진 배수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입구는 좁고 어둡고 더러웠지만, 지금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노약자부터! 아이 먼저! 어서!!”
두 명의 반군 전투원이 몸을 던져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한 명은 소녀의 등을, 다른 한 명은 소년의 팔을 끌어당기며 울음을 뚫고 외쳤다.
“괜찮아! 눈 감고 따라와!! 울지 마! 여길 벗어나야 해!!”
블랭크는 진입로를 향해 달렸다.
총알이 그 주변을 휘감았고, 포탄 파편이 먼지를 일으켰다.
그는 방패처럼 한 시민의 몸을 감싸며 앞으로 굴렀고,
이어진 자세에서 다시 일어나 어깨를 돌려 뒤쫓는 병사를 뒷손으로 쳐냈다.
반군 여성 전투원 하나가 그의 옆에 다가왔다.
“남은 사람은 다 저쪽 통로로 보냈어! 근데… 더 기다릴 시간 없어!!”
블랭크는 고개를 돌려 현장을 확인했다.
민간인 대열의 후미가 아직 배수구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노인도 있었고, 유모차도 있었다.
총성이 한 번 더 터졌다.
기둥이 날아가고, 울타리가 부서지고, 아이 하나가 머리를 감싼 채 비틀거렸다.
“쏴버려!! 이 새끼들 쏴버리라니까!!”
계엄군 병사 중 하나가 무전으로 괴성을 지르며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난사했다.
그의 얼굴은 겁과 분노와 혼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폭발 이후의 미친 군대는, 이미 군대가 아니었다.
블랭크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최종 대열! 방어진 유지! 민간인 다 빠질 때까진 물러나지 마!!”
“예!”
팔콘네스트 출신 반군 세 명이 배수구 입구 주변에 반원 형태로 서며 커버를 유지했다.
한 명은 눈을 감고 포탄 파편을 맞았지만,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았다.
마지막 노인이 통로에 들어서자, 블랭크는 마침내 손을 들어 철수를 명령했다.
“전부 철수! 교차지점은 버린다!!”
도망이 아니었다.
철수였다.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판단.
그리고 이 결정 하나로, 수백 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날 새벽,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은 뒤늦게 도착한 후속부대의 대열에 덮였고,
그 바리케이드는 더 이상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블랭크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등을 먼저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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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바람이 멎어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포연과 화염이 뒤섞여 하늘을 가르던 그곳에는, 이제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지금 이곳은 전쟁터라기보다 도살장에 가까웠다.
부서진 전차의 포탑이 레일 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불에 그슬린 장갑판 조각들이 이빨 빠진 늑대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검붉은 먼지가 뿌옇게 깔린 철로 위에는, 이름도 모를 시민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탄환은 사람의 생김새를 가리지 않았다.
아이의 가방 위에도, 주름진 노인의 셔츠 위에도, 광산 헬멧에도 탄흔이 나 있었다.
몇몇은 달아나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었고, 또 어떤 이는 쓰러진 가족의 시신을 감싸듯 웅크린 채였다.
살려고 뻗은 손들이, 도착하지 못한 출구를 향해 굳어 있었다.
이따금 살아남은 사람이 비틀비틀 일어나 주검 사이를 걷기도 했으나,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기엔,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계엄군 병사들은 시신 사이를 지나며 쓰러진 동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누구는 무릎 꿇은 채 헬멧을 벗고 얼굴을 감싸 쥐었고,
누구는 탄창이 텅 빈 소총을 질질 끌며, 하늘을 한참 올려다봤다.
장갑차의 잔해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탄약고가 터진 차량에서는 뒤늦게 화염이 번지기도 했고, 몇몇 병사들은 소화기를 들고 달려들다 그 자리에 토악질을 하기도 했다.
무너진 레일 위에서, 한 장교가 상반신이 날아간 부관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선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손은 부관의 명찰을 떨리는 손끝으로 잡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가 겨우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 모든 참상 위에,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 한 인물이 있었다.
총독, 데이란 카이론.
그는 지휘차량에서 내려 철로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붕괴된 철판과 시체 조각들이 있었고, 코끝에는 피비린내와 기름 탄내가 섞인 지옥의 냄새가 감돌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아무 지시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통신장교가 다가와 경례를 붙였다.
“총독님, 제2통신망 복구 시도 중입니다. 사령부 보고를…”
그러나 총독은 반응이 없었다.
그는 마치 듣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서 있었다.
기동대 지휘관 한 명이 다가와 절박한 얼굴로 보고했다.
“전차대는 40% 이상 손실, 드론 전대는 전량 격추.
보병 병력 중 전투불능 판정 인원 파악중…
지휘체계는 현재 사실상 마비 상태입니다.”
하지만 카이론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고, 군복 상의는 연기에 그을려 얼룩져 있었다.
지휘봉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무능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파괴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질서를 되찾겠다는 이름으로 출동했던 계엄군이,
지금은 아무도 돌이킬 수 없는 무차별 학살의 주체가 되어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공격한 거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나 혼자서…”
말은 중얼거림으로 흘러내렸다.
주변에선 장교들이 다급히 지시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총독은 그저 연기 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바리케이드를 지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