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침묵하는 흉터

[지난 이야기]

계엄군의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진입 직후, 반군 측은 거대한 전자기장과 대전차지뢰를 동시 폭발시키며 계엄군 전열을 무력화시켰다. 혼란에 빠진 병력은 전투 지휘를 상실했고, 이 틈을 타 ‘네라카의 유령’ 블랭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 혈혈단신으로 계엄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패닉에 빠진 일부 병사들이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시작하면서, 현장은 통제되지 않은 대학살로 변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참극 속에서 블랭크와 반군은 시민들을 우선 대피시킨 뒤, 교차지점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오스킬은 진압되지 못한 채 불타올랐고, 살아남은 자들의 눈앞엔 참혹한 폐허만이 남았다.

테라니아력 891년 6월 11일

네라카 제7구역 – 시가지 남부, 전후 재정비구역

한때 ‘질서’를 상징하던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은 이제 불에 탄 철판과 끊긴 레일, 그리고 이름 모를 시신들만을 남긴 채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블랭크와 시민군이 철수한 이후, 계엄군은 폐허 위에 남은 부서진 진지를 점령했지만, 그 자리는 승리가 아닌 참상의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계엄군은 무너진 전열을 수습하며 구역 내의 잔존 시위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공중 지원이 무력화된 상황에서도 기동보병과 지상 병력은 더 이상 저항이 없는 구간부터 ‘질서 회복’을 위한 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오스킬 인근 지역의 봉기는 하루 만에 대부분 진압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라는 단어는 곧 한계의 증명이기도 했다.

도심부 고층 폐허와 슬럼가 골목, 그리고 하수도 지하에는 여전히 남은 저항자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들은 장비도 수색도 없이 은신한 채 반군의 새로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가지는 결코 완전히 조용해지지 않았다. 통제의 경계는 파괴된 철로처럼 삐걱거렸고, 어느 순간 어디서든 다시 불붙을 수 있는 잔불이 널려 있었다.

네라카 – 팔콘네스트 내부, 지하통제실

오스킬 철수 이후, 팔콘네스트는 외형상 조용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결코 평온함이 아니었다.

지하를 울리는 환풍기음 너머로, 어딘가 균열진 기류가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통제실에는 전투 후 복귀한 지휘요원들과 생존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실내 공기는 건조했고, 누구 하나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벽면의 전자 패널에는 오스킬 철로에서 촬영된 공화국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 영상이 느리게 재생되고 있었다.

흙먼지와 연기 속에서 시민들이 쓰러지고,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엄마의 손을 놓치는 장면은 수십 번을 돌려보아도 마모되지 않는 충격을 주고 있었다.

정보담당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이 영상은 결정적입니다.

우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증거이자, 공화국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기록입니다.

이걸 내부망을 거쳐 외부 채널로 확산하면, 최소한 여론전은 우리가 쥘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됐다.

하지만 누구도 환호하거나 안도의 숨을 내쉬지 않았다.

“그래, 유리하지. 전략적으로는. 근데…”

팔콘네스트 출신의 젊은 전투원 한 명이 말을 이었다.

눈동자는 붉게 충혈돼 있었고,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가볍게 떨렸다.

“그 사람들, 우리가 데리고 간 거였잖아.

우리가 오스킬로 간다고 하지 않았으면…

그 시민들, 총알 맞을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잖아.”

누군가 고개를 들려다보다가 다시 숙였다.

다른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손에 쥔 물통을 내려놓았다.

죄책감은 말보다 먼저 퍼져 있었다.

숨소리, 눈빛, 잠깐 머뭇거리는 동작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그것은

군사적 유불리를 계산하는 통제실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게였다.

블랭크가 그 정적을 뚫고 말했다.

“우리가 그들을 데려갔던 건 맞다.”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우린 싸우려 했고, 살리려 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잠시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가 다시 회의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건 우리가 아니다.

그들을 죽인 건, 방아쇠를 당긴 자들이고—

그걸 명령한 자들이다.”

정보담당자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걸 이용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블랭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이 영상 다시 볼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그는 영상 속 시민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반복되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 묻는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음에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퍼뜨린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를—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 순간, 침묵은 단절되었다.

정보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보드를 다시 잡았고, 옆자리에 앉은 통신 담당은 영상 송신 경로를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의 입술은 다물어졌지만, 눈동자 안에서는 싸움 이전의 감정—죄책감과 슬픔—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팔콘네스트 내부에서 시작된 메시지는

공화국 전체의 침묵 위에 파문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같은시각, 행성 테라니아 – 국방부 청사 회의실

국방부 청사는 군사 기술과 행정 효율의 집약체였다.

강화유리 너머로 테라니아 수도의 빽빽한 방어 위성 구조물이 보였고,

실내는 단단한 강철과 합금으로 마감돼 있었다.

회의 테이블 상석엔 국방부 장관 제무르 카르비엘이 앉아 있었다.

군복의 주름은 각이 져 있었고, 그의 금발 머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냉각된 금속처럼 냉정했고,

모든 판단은 정밀하고, 모든 표현은 절제되어 있었다.

책상 건너편에선 실무 장성단이 분주하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각 사령부 파견 대표자들은 최근 전송받은 ‘오스킬 철도 교차지점 학살사건’ 영상 자료와

팔콘네스트 측의 방송 송출 정보를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정규군의 투입을 검토해야 합니다.

네라카는 현재 민간 반란을 넘어서 준-내전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계엄군만으론 시가지 전체 봉기의 확산을 막기 어렵습니다.”

중장 한 명이 결단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교전 사상자가 수백 명에 달하고,

민간인 피해 영상은 외부 채널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공화국의 체면에도 타격이 큽니다.”

그러나 제무르는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표면을 두드리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지금, 7구역 시가지에 진입해 있는 병력이 누굽니까.”

“예, 총독 직속 계엄군입니다.

6개 대대 규모가 주요 시가지 진입로를 확보 중입니다.”

제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추가로 정규군을 투입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장성들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장을 가로질러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미 계엄령 하에, 일정 수준 이상의 병력이 7구역에 전개돼 있습니다.

상황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지금,

정규군이 투입되는 순간부터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이건 단순한 병력 보강이 아니라, ‘군대가 시민과 싸우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이오.”

장성 중 한 명이 불만을 억누르듯 반론했다.

“그러나 총독이 무능하고, 계엄군이 사실상 통제를 잃었다면—”

“그렇기에 우리는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무르는 말끝을 단호하게 마무리했다.

그는 테이블 옆에 세워진 전자 패널을 가리켰다.

화면엔 오스킬 철도 일대의 공중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드론이 격추된 하늘, 무너진 전차, 그리고 흐릿하게 남은 시민들의 혈흔.

“오스킬 사건은 이미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경엔 계엄군이 있지, 정규군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규군이 이후 개입하게 되면—책임의 경계는 모호해집니다.”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뼛속까지 날카로웠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개입하면,

사건은 단순한 ‘계엄군의 오판’이 아니라

‘공화국 전체의 의도된 학살’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장성들의 얼굴에 무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은, 잠시 지켜볼 때입니다.”

제무르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말을 마무리했다.

“총독에게 주어진 기회를 마지막까지 보장하시오.

정규군의 개입은 상황이 ‘체계적으로 붕괴되었을 때’만 검토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단 하나의 전차도, 단 하나의 보병도 보내지 마시오.”

회의실엔 더 이상 반론이 없었다.

냉정한 명령.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기도 했다.

지켜볼 것이냐, 움직일 것이냐.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이었다.

회의는 그 직후 종료되었다.

제무르는 자리를 뜨며 말했다.

“공화국은, 필요 이상으로 칼을 뽑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칼을 언제 휘두를지는—아직,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제무르는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누가 입을 여느냐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것이겠군.”

이날 이후, 공화국은 일시적으로 네라카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보류하고 상황을 관망하기 시작했다.

같은시각 행성 네라카 – 총독부 사령부

광장에서의 학살이 끝난 지 하루가 지났지만, 총독부 지휘통제실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분명 제어 체계는 복구됐고, 통신망도 임시 연결선을 통해 응급 재가동되고 있었지만, 공간에 흐르는 공기 자체가 정상이 아니었다.

가볍게 웅웅거리는 냉각기의 저주파음조차 마치 병사들의 신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한가운데,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멍하니 전방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피로와 먼지로 얼룩진 군복,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눈가의 검은 그림자,

그리고 차마 다시 재생하지 못한 오스킬 전장의 잔혹한 영상들이

지휘실 한켠의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무한 반복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정보장교가 바삐 다가왔다.

“총독님! 긴급 보고입니다.”

카이론은 늦게야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명확한 감정이 사라진 허무함 그 자체였다.

“말해보게.”

“팔콘네스트 소속 반군 측에서… 오스킬 전투 당시 촬영된 영상 일부를 송출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됐습니다.

영상에는 민간인 피격 장면,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 정황, 그리고 철도 위 시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이론의 눈동자가 그제야 미세하게 흔들렸다.

“송출? …어디로?”

“내부 시가지 메시지망, 비인가 위성 회선, 그리고 가상사설망 우회 경로까지…

현재 기술팀이 추적 중이지만, 복수의 터미널에서 신호가 분산 송출되고 있어 완전한 차단은 어렵습니다.”

잠시 정적.

카이론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은 무거웠고, 발자국마다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걸어서 홀로그램 제어패널 앞에 섰고, 떨리는 손으로 지도를 조작해

제7구역 전체의 통신 인프라 현황을 띄워냈다.

“이게…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 굳은 결심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7구역 연결망을 차단하라.

비인가 중계탑, 우회 전송 회선, 상업용 메시지망 전부.”

정보장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총독님… 그건 시가지 전체 통신망을 마비시키는 조치입니다.

의료기관, 식량 분배 센터, 일부 공공방위 시설까지…”

그러나 카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은 무너졌지만, 목소리는 어딘가에 매달리듯 날카로웠다.

“그 영상이 확산되면, 이제 끝이다.

누구도 날 보호하지 못해.

내가 지휘하는 이 모든 구조가… 바닥부터 흔들릴 거야.”

그는 더 이상 ‘총독’이 아닌,

무너지는 체제 속에서 간신히 체면을 지키려는 ‘패전자’의 모습이었다.

“7구역 전체—즉시 통신망을 차단하라.

민간 목적이건 뭐건…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정보장교는 끝내 짧게 경례를 붙이며 명령을 이행하러 돌아섰다.

그리고 불과 몇 분 후,

네라카 제7구역 전역의 송신탑 수십 곳이 순차적으로 차단되었고,

광역 연결망은 거대한 전자 정적과 함께 침묵에 빠졌다.

그 밤,

네라카 7구역은 사실상 눈먼 구역이 되었다.

빛은 있었지만, 말은 없었다.

눈은 있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지휘실의 전면 유리창 너머,

자신이 지키지 못한 도시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스스로를 감금한 죄수처럼,

내려야 할 명령이 남지 않은 방 안에서

상황이 내려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