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반군 팔콘네스트는 시민 봉기와 기습 작전으로 네라카 제7구역의 중심지인 중앙광장과 행정청을 점령하고, 제7구역 전체를 사실상 장악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계엄군은 무력하게 패주하고, 총독부가 위치한 제3구역까지 반군의 위협이 가시화된다.
위기에 몰린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계엄군 내 유일한 구심점이었던 호르스트 베르켄 전 사령관의 복귀를 추진한다. 하지만 베르켄은 초기 제안을 거부하며, 과거의 해임과 책임 전가를 이유로 냉담하게 거절한다.
결국 총독 카이론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직접 베르켄을 찾아가 간곡히 설득한다. 베르켄은 끝내 계엄군 전 병력에 대한 전권을 조건으로 복귀를 수락하며 다시 사령관으로 돌아온다.
복귀 직후 베르켄은 전장의 절망적 실태를 점검하고, 정규군 투입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지만, 총독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이에 따라 베르켄은 정규군 없이 현 병력만으로 반군을 막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다.
한편 반군 측에서는 최근 계엄군의 움직임에 일정한 질서와 전략적 재편성이 감지되자, 정보통을 통해 “이건 호르스트 베르켄이 돌아온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블랭크는 계엄군이 아직 완전히 재편되기 전이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하고, 제3구역 관문을 향한 선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단한다. 이제, 네라카의 운명을 가를 새로운 전투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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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니아력 891년 7월 2일 – 네라카 제3구역 관문 전투
서늘한 새벽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시간, 제3구역 관문 앞은 폭풍 전의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계엄군의 병사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긴장된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있었고, 방어선을 따라 배치된 중화기와 자동화 포탑들은 섬뜩한 위압감을 드러냈다.
관문을 사이에 두고 반군 병력 역시 공격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블랭크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전술지도를 살피며 마지막 명령을 전달했다.
“시간이 왔다. 모든 부대, 작전 개시!”
우측 공격대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레이나가 지휘하는 병력은 도로 양측 건물 사이로 은밀히 접근하며 우측 관문 측면을 노렸다. 그러나 그들이 관문을 향해 접근하던 순간, 건물 창문과 지붕 위에서 강력한 탐조등이 갑자기 켜졌다.
“적이다! 엄폐해!”
계엄군의 기관총과 소총이 쉴 새 없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반군 병사들은 급히 엄폐물을 찾았지만, 미리 설정된 사격 지점에서 정확하게 퍼부어지는 총격에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엄폐물 확보! 방패병 앞으로!”
레이나는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병력을 이끌고 가까스로 근처 건물로 이동했다. 하지만 계엄군은 정확히 그들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고 있었고, 레이나의 부대는 철저한 교차사격망에 갇혀 발이 묶였다.
한편, 관문 외벽을 노린 특공대는 소음기를 장착한 소총과 폭약을 이용해 신속히 접근하고 있었다. 외벽까지 접근한 특공대원들은 폭약을 설치하려 했지만, 벽면에 설치된 센서가 이를 감지하며 자동 포탑이 즉각 활성화됐다.
“엎드려! 포탑이다!”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든 총탄과 레이저 빔이 특공대원을 꿰뚫었다. 생존자들은 혼비백산하며 근처 폐허 뒤로 숨었으나, 무자비한 자동화 포탑의 공격으로 점차 수가 줄어들었다.
블랭크가 이끄는 중앙돌파 조는 대담하게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장갑 차량과 중화기를 앞세우고 관문 중앙을 강타하기 위해 진격했다.
“관문을 부숴라! 밀어붙여!”
반군의 기갑 차량이 굉음을 내며 관문을 향해 돌진하자, 기다리고 있던 계엄군의 중장갑 병력과 대전차 로켓포가 일제히 응수했다.
“적 기갑 접근! 대전차조, 발사!”
로켓포에서 발사된 로켓이 정확히 반군 차량을 명중시켰다. 차량은 불길에 휩싸이며 뒤집혔고, 뒤따르던 보병들은 당황하여 급히 흩어졌다.
관문 위에 설치된 기관총 진지에서 포화가 쏟아졌다. 블랭크는 엄폐물 뒤로 뛰어들며 고함쳤다.
“밀리지 마! 돌파구를 찾아라!”
하지만 계엄군은 준비가 너무 철저했다. 관문 앞 광장은 금세 피와 연기로 가득 차고, 쓰러진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오전 7시, 결국 블랭크는 치아를 갈며 무전을 통해 패배를 선언했다.
“전 병력 철수! 작전 실패다!”
반군은 급히 퇴각을 시작했지만, 계엄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후퇴하는 병력은 혼란 속에서 추가 피해를 입었고, 계엄군은 남부 시가지 북부 일부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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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라카 제7구역 북부, 3구역 관문 전선 – 반군 진영
검붉은 연기 사이로 반군 통신망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한때는 정밀하게 작동하던 전술 네트워크는 지금 고막을 찢는 교신음과 단절된 호출음으로 뒤엉켜 있었다.
“좌익 기동조 전멸 직전! 레이나 소대는 포위됐다! 중앙 통로, 적 기계화 부대 돌입 확인!”
지휘통제소 내부는 마치 난민 캠프처럼 아수라장이었다. 반군 통신병들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무전을 조율했고, 정보장교는 붕괴 직전의 전선 지도를 부여잡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분명 관문 구조물은 노출된 구역이었잖아! 드론 정찰에서도 방어군 밀도는 낮다고—”
정보분석 담당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그가 뱉는 말마다 오류와 오판을 확인하는 고백이 되었고, 주변에 있던 전술참모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피멍든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나의 음성은 무전기 너머로 간신히 전달됐다. 그녀의 목소리는 먼지가 잔뜩 낀 듯 거칠고 급했다.
“우측 고지, 계엄군 박격포 진지 있었어! 시야 확보도 안 되는 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잠시 정적. 그러고는 다시 짧은 비명, 그리고—
“쿵!!”
관제실의 천장이 울렸다. 반군 지휘소 인근에도 유탄이 떨어지고 있었고, 진지 밖 방벽에 설치해 둔 모래주머니는 먼지와 함께 하늘로 튀어올랐다.
“탄약 트럭 3번 차량 피격! 보급이 끊긴다!”
“지금 철수안하면 병력 절반이 포위당해!”
블랭크는 침묵했다. 그의 앞엔 홀로그램 지도 위로 반군의 기동 방향을 죄어오는 붉은 선이 칼날처럼 형성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반격이 아니었다. 적은 정확히 반군의 공격 루트를 예측했고, 병력 배치와 화력 지점 설정, 유도 전선과 차단 전선까지, 마치 바둑판 위에 모든 수를 미리 깔아둔 장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켄.”
그의 목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건 그 자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무대응이 아니라 유인. 무방비처럼 보인 관문은 덫이었다.
“지금… 철수 결단 내려야 합니다.”
정보참모의 목소리는 허공에 부서지듯 메마르고 낮았다.
하지만 블랭크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밖에서 들려오는 연이은 폭발음과 붉은 연기 속에서 무너져가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나의 마지막 통신이 도달했다.
“블랭크… 나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후방 포격 지원이 필요해. 안 그러면, 우리 소대는 전멸이야.”
“…알았다.”
그는 무기를 옆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떨궜다.
“전 부대 철수. 전열 정비, 레이나측 후퇴로 확보 후 재집결.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반군의 모든 채널에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고, 일부 병력은 필사적으로 계엄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레이나를 구출해냈고, 남은 병력은 황급히 낙오자를 끌어안고, 부상자를 부축하며 연기 속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짓눌린 흙과 불길 속을 지나, 팔콘네스트 깃발이 천천히 낮게 깃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3구역 관문 너머 고지에서 베르켄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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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네라카 제3구역 – 관문 지휘통제실
호르스트 베르켄은 차분한 눈으로 전술 지도를 응시했다. 그의 사전 준비와 정밀한 배치는 예상대로 완벽히 작동했다. 공격의 세 축 모두를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반군은 무너졌다.
“현재 상황은?”
베르켄의 질문에 참모가 즉각 보고했다.
“적은 전방에서 철수하고 있으며, 우리 병력은 7구역 북부 일부를 이미 수복 중입니다.”
베르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총독 데이란 카이론이 흥분된 목소리로 다가왔다.
“좋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지금 당장 추가 공세를 펼쳐 7구역 전체를 탈환해야 하네!”
베르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총독님, 오스킬 때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적은 퇴각 중이지만 완전히 무너진 게 아닙니다. 보급도 부족하고, 병력도 여전히 피로한 상태입니다. 섣부른 추격은 오히려 우리의 피해를 키울 뿐입니다.”
카이론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베르켄을 쳐다봤지만, 베르켄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전선을 정비하고 병력을 재편할 때입니다. 반군은 이번 타격으로 당분간 방황하고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결정적인 기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총독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베르켄은 다시 지도 위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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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니아력 891년 7월 3일 – 밤
네라카 제7구역, 팔콘네스트 임시 사령부 (오스킬 북측 동굴 진지)
서늘한 밤공기 속에 갇힌 듯, 동굴 내부는 비현실적으로 조용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전선 전방에 있던 병사들이 피투성이로 돌아와 방바닥에 누워 있었고, 붕대를 감은 채 흐느끼는 소리와 신음이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식량을 나르는 자원봉사자들의 발소리조차 신중하고 조용했다. 그것은 더 이상 승리에 도취된 반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망의 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지휘참모실에는 심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지도를 펼친 테이블 주위로 블랭크, 레이나, 정보분석관 칼로, 통신책임자 마렌, 그리고 몇몇 고위 전투 지휘관들이 앉아 있었다. 전원 말이 없었다. 지도 위에는 3구역 관문을 중심으로 계엄군의 강력한 진지 배치가 표시되어 있었고, 방금 벌어진 전투의 붕괴 궤적이 빨간 선으로 추적되어 있었다.
블랭크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거운 눈으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턱 밑에는 피가 묻은 붕대가 느슨히 풀려 있었고, 흙먼지와 피로 얼룩진 그의 외투는 전장의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증표였다.
“우리 병력은 기습으로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는 낮게 말했다.
“하지만 베르켄은 그걸 알고 있었어. 우리는… 정확히 유도된 거야. 우리가 덮친 게 아니라, 덫에 걸린 거지.”
레이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질끈 묶으며 입을 열었다.
“저 자식은 단순히 군사적으로 유능한 게 아니야. 심리전도 대단해. 우리가 성급하게 나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실제로 그리 됐고.”
정보담당 칼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의 공세에서, 우린 계속 직진만 했어요. 오스킬을 밀어붙이고, 남부시가지 두드리고, 3구역 관문을 향해 달려갔지. 그는 우리가 ‘계속 정면으로 치고 나올 것’이라 예측하고 있던 거야. 그러니 우리가 먼저 바꿔야 해.”
블랭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해봐. 어떤 방법이 있지?”
칼로는 손끝으로 지도를 짚었다. 3구역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 위치한 두 개의 구역, 4구역과 5구역. 원래 산업지대와 주거지로 구성된 곳이지만, 전략적으로는 3구역 서측을 감싸는 거대한 반원형이다.
“여긴 병력 배치가 희박합니다. 비정규전 중심의 방어계획이기 때문에, 4, 5구역에는 별다른 요새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특히 5구역 동부지역은 한때 공화국 산업 시설이 폐허화된 지역이라, 외곽 감시선조차 단선에 가깝습니다.”
블랭크는 미간을 좁혔다.
“우리 병력 대부분이 7구역에 있잖아. 4구역과 5구역을 공략하면, 전선을 산개해야 하는데 부담이 크지 않나?”
칼로는 침착히 설명을 이어갔다.
“우린 지금 ‘기동력’을 가진 유일한 세력입니다. 계엄군은 7구역에서 병력을 거의 소모한 상태고, 병사들 다수가 방어에 고정되어 있어요. 대신에, 우린 산개 전선을 형성하면서도 민병대와 현지인들을 이용한 재보급과 경로 확장이 가능하죠. 특히 4구역은 이미 몇몇 지하조직이 저희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레이나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즉, 정면은 무조건 못 뚫는다. 지금처럼 물량과 화력으로는 안 돼. 하지만 우리가 우회해서 4, 5구역을 경유해 3구역을 반원형으로 포위한다면… 적은 그걸 견딜 수 없겠지.”
“정면은 교란용, 실제 주력은 반원형 포위망 형성…?”
“맞아.”
레이나는 오른손으로 지도 위에 포위선을 그었다.
“4구역 남부에 있던 시민 조직을 활용해, 게릴라를 조직하고. 동시에 5구역 동부 폐허 구간으로 기동 병력을 이동시켜. 두 구역에서 동시에 위협하면, 계엄군은 3구역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어.”
마렌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3구역 안에서도 불안정해질 겁니다. 총독부는 지금 3구역에 모든 걸 걸고 있어요. 포위 조짐만 보여도 내부적으로 흔들릴 테지.”
블랭크는 한참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도를 손끝으로 가볍게 짚었다.
“좋아. 지금부터 이 전쟁은 ‘중심을 깨부수는 싸움’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부터는, 조여오는 전선 안에서 적을 질식시키는 싸움이다.”
그의 말에 방 안은 조용한 전율로 물들었다. 이전의 무모한 돌격은 패배로 끝났지만, 이번엔 전술적 포위와 정치적 압박이 결합된 ‘서서히 조여오는 죽음’의 시나리오였다.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그래, 아주 좋아. 적을 쳐부수는 게 아니라, 적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거야.”
정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4, 5구역의 시민들과도 접촉을 확대하겠습니다. 정예기동부대는 4구역을 경유해 5구역 폐허로 이동. 다음 48시간 안에 기습 경로 확보하겠습니다.”
블랭크는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3구역을 포위한다. 그리고, 공화국 총독부를 무릎 꿇게 만들자.”
동굴 내부, 차가운 석벽에 반사된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전장의 종언을 예고하듯 낮고 무겁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