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찔한 소원
한라가 살짝 붉어진 안색으로 말했다.
“오늘 제게 소원권을 청구하신다고요……?
어젯밤. 불꽃처럼 타올랐던 파티.
밤이 깊어 모두가 술기운에 달아올랐을 때.
마현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 너, 설마 잊지 않았겠지.
― 네? 뭐가요?
― 내가 사신관 시험을 박살 내면, 내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거.
― 앗!
― 크크, 이제 와서 모른 척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난 절대 안 넘어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깜짝 놀라는 한라.
마현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내일 나를 찾아올 때. 마음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어딘가 얄미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 내 소원은 너의 전부를 걸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지금.
한라는 오만가지 생각을 거친 후, 마현을 찾아온 것이다.
“그날 제게…… 각오해야 할 거라고 하셨죠.”
그녀는 지금도 마현이 무엇을 요구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하고 있는 경우의 수들은 존재했다.
그것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숭한 생각들이었다!
꼴깍.
‘도, 도대체 뭐려나?’
알 것 같지만. 잘 모르겠달까?
왠지 마현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는 그녀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한라. 네가 그럴수록 나도 말하기 난감해져.”
“앗. 그, 그럴게요.”
“그래, 그럼…… 일단 세인트 길드 건부터 보고해 줄래?”
마현은 차분하게 세인트 길드에 관해 물었다.
세인트 길드.
만인의 우상이 된 영웅들의 단체.
회귀 전, 그들은 인류의 희망이었다.
누구보다 탑을 높이 올랐고, 가속화되는 지상의 위기를 해결해 줄 구원자들이었다.
마현은 그 길드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세인트의 최정예인 그들과 함께 탑에 올랐다.
‘그리고 배신당했지.’
누가 알았을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 믿었던 그들이, 우리의 절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외계 성운으로 도망칠 기회만을 엿보는 배신자들이었다는 걸.
마현은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순간 절망의 검에 꿰뚫렸던 자리.
그곳에 더 이상 상처는 없지만.
그날의 기억과 감촉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녀석들을 소중한 동료로 생각했다니.
정말이지 바보 같군.
놈들은 전혀 나를 동료로 여기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놈들에게 죽어 과거로 돌아왔고.
배신의 대가는 칼이 되어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다.
훗날 마주할 놈들에게 갚아 주기 위해서.
물론, 쉽지 않겠지.
탑의 정점에 올랐다는 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과 노력, 그리고 운이 받쳐 줘야 하니까.
실제로 나와 함께했던 그놈들은 괴물처럼 강했다.
특히, 그레이는 일검에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를 정도였다.
그래, 엄청 강했지.
감히 그 힘에 맞선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살이 떨릴 정도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지?’
10년 전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나는 검귀의 힘을 얻었다.
즉!
놈들이 강해지기 전에,
내가 더 강해져서 없애면 그만인 것이다!
‘흐, 아주 간단명쾌한 이치야.’
다만, 이제 와서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게 강한 힘을 지녔고, 탑의 정점에도 올랐는데.
어째서 내린 선택은 외계 성운 측으로 넘어가려던 거지?
아니, 그보다는…….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 거지?’
무턱대고 적의 진영으로 넘어갈 리는 없다.
분명 그들과 사전 합의가 있었을 터.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 인류는 근본적으로 외계 성운과의 접촉이 차단되어 있으니까.
물론, 소통이 가능한 마물도 있다.
사신관 시험에서 만났던 리치처럼 지성을 가진 놈들.
하지만 그것들이 마물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화가 가능할지언정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
마치,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처럼, 놈들의 사고방식은 오로지 인류를 죽이는 것으로 귀결되니까.
그 외에도 이상한 건 한둘이 아니야.
탑을 등반한다는 건, 외계 성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이는 지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행위이며.
우리가 탑을 높이 오를수록 자연스럽게 침략은 약화된다.
지상의 게이트 발생 빈도도 줄어들게 된다.
그래야 하는데.
탑의 정점에 올라선 시점에 지상은 터무니없는 재앙들이 속출하고 있었지.
끝내 멸망한 나라도 있었다.
마치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는 듯이.
이 모든 것이 단순 기우인가?
아니면.
‘놈들과 관련이 있는 건가?’
어찌 됐건, 내가 놈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없다.
하지만 딱 하나는 확신한다.
그건 놈들이 있어선 안 될 존재란 거다.
그렇기에 한라에게 세인트 길드에 조사하게 한 이유는 지금 놈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리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다.
“알아본 건 어때? 세인트 길드는 지금 뭘 하고 있어?”
“저, 그런데요, 도련님. 세인트 길드 말인데요.”
“응?”
“없다고 하던데요?”
뭐라고?
“없데요. 그냥 검색 결과 없음인데요?”
“그럴 수가 있나?”
“정말이에요. 하루 종일 찾아봤다구요?”
참고로 이 시기의 나는 바깥에 어두웠다.
어쩌면 한라의 말대로 세인트 길드가 아직 창설되지 않은 시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창설되고 단기간에 그렇게 강해진 거라고?’
명문, 명가라 불리는 단체는 보통 몇 세기를 거쳐서 만들어진다.
길드 역시 마찬가지.
제아무리 강한 헌터를 영입한다고 해도, 단기간에 수준급 반열에 올라서기란 어렵다.
세인트처럼 최정상에 올라서는 건 그야말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이걸 세인트 길드가 해냈다니……. 이상한데?’
아니, 이상하게 보니까 다 이상해 보이는 건가?
물론, 괴물 같은 녀석들이 많이 모였으니 그렇게 될 수 있다지만.
그럼, 그놈들을 도대체 어떻게 모을 수 있던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한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인트 길드원이라고 말씀하셨던 사람들에 대한 인적 사항 말인데요.”
“응.”
“그레이와 화영영을 제하면 없던데요? 김새롬?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
하, 뭐야. 이 녀석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굉장히 썩은 내가 나는데.’
뭔가 커다란 비밀을 건드린 듯한 느낌이다.
탑의 정상에 오를 정도로 강했다는 건.
지금 시점에서는 적어도 랭킹에 등록되어 있어야 할 정도다.
그레이와 화영영처럼.
즉, 지금 놈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건 말도 안 된다.
강해지기 위해선 레벨 업이 필수다.
탑을 오르며 마물을 처치하고 공적치를 쌓다 보면.
결국, 시스템이 랭킹에 기록하게 되어 있다.
그런 놈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게다가 하나같이 세인트 길드로 뭉쳤다고?
‘뭐 하는 놈들인 거지?’
의문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한라가 서류 뭉치를 건넸다.
“아, 다만, ‘존 스미스’의 정보는 있긴 해요.”
그 서류에는 미국의 존 스미스 18명과 영국의 존 스미스 11명 등등.
수많은 존 스미스들에 관한 인적 사항이 있었다.
“동명인이 많더라구요. 누굴 말씀하신 것인지 몰라서 일단 다 정리해 봤는데요.”
“잘했어!”
한라가 건넨 서류 중에 있었다.
세인트 길드원으로서 나와 함께 탑을 등반했던.
훗날 파열권성이라 불리게 되는 그 괴물이.
그런데.
“F급?”
세계 헌터 협회에서 헌터의 등급을 설정했다.
F급이라 하면 마력을 각성했을 뿐인 일반인.
고유 스킬이나 레벨, 공적치, 성좌의 유무, 잠재력 등.
모든 것이 최하를 가리킨다.
그리고 F급은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결코, 두 주먹으로 용을 죽일 정도로 강해질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한 건.
“행방불명?”
“아마, 게이트에서 실종된 게 아닐까요?”
일반적으론 그렇겠지만.
“하, 웃기네.”
이 녀석들 봐라.
이제 보니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잖아?
어디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지?
파도 파도 끝이 없군.
그리고 이건 빙산의 일각조차 안 될 게 분명하고.
일반인 신분인 한라의 권한으로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겠지.
놈들에 대해 더 파헤쳐 봐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비슷한 미래가 벌어질 게 불 보듯 뻔하니까.
흠, 할아버지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봐?
그렇다면 분명 더 많은 걸 알 수 있긴 할 것 같다.
급이 높을수록 깊이 있는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야. 그렇게 접근해선 안 돼.’
지금 와서 느끼는 건, 이 사안이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거다.
구린내가 오진 달까.
이만큼 숨겨진 게 많은데 밝혀진 게 없다는 건.
그 이상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놈들을 지키고 있다는 판단이다.
할아버지의 선에서 움직인다면 오히려 대놓고 자극하는 꼴이 되겠지.
이런 건 원치 않는다.
놈들이 내 눈 밖에서 나를 노리려 들 테니까.
‘일단 내 선에서 알아보는 게 낫겠어.’
성장할 시간을 벌 겸.
차근차근 알아 가 보는 거다.
“두 번째 안건으로, 게이트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읽어 보시고 결정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번 서류 역시 그 두께가 상당하다.
내가 가능한 한 많이 조사해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원체 그녀가 일을 열심히 하는 까닭이다.
“아, 도련님께서, 모조리 조사하라고 하셔서 정말 모조리 담긴 했지만, ‘X’표를 한 곳은 누가 봐도 정말 위험한 곳이에요. 그러니 절대 가시면 안 돼요!”
그렇군.
‘X’를 한 곳에 가면 15레벨 달성은 물론이고, 특별한 하수인을 만들 가능성도 커지는 건가?
피식.
알기 쉬워서 좋은데.
“고마워, 역시 한라 너뿐이야.”
“후후, 늘 안전제일이랍니다?”
아무튼, 이로써 세 개의 안건 중 두 가지가 끝났다.
남은 건…….
“어…… 다음은 말이죠?”
한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쑥 숭한 생각이 나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소원권을 청구하신다구…….”
한라는 말을 하면서 마현에게 시선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으으으, 때가 와 버렸다!’
소원권 내기.
보통은 장난삼아서 하는 내기라고는 하나.
한라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 그야 그렇잖아요.
도련님은 반쯤 제가 키운 거기도 하고.
그 술에 취한 채 허송세월 살던 이 양반이.
한순간에 이렇게 기특하게 바뀐 거로 모자라 후계자까지 되었다는데.
‘모, 못 해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애써, 스스로에게 변명도 해 보는데.
다만.
꼴깍.
‘도, 도대체 뭐려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각오해야 할 정도라니.
내 전부를 걸어야 할 정도라니.
그런거…….
화끈.
숭한 상황일 게 분명하잖아!
‘소, 소원인 이상. 뭐가 됐든 들어줘야겠지?’
그때부터였다.
한라는 마현이 의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근 한 달 사이에 이젠 제법 남자다워진 마현이.
섬세한 이목구비 속 야시꾸리한 눈매에 시선을 사로잡는 눈물점 하나.
가녀렸던 몸에는 어느새 남자임을 과시하는 넓은 어깨가 생겼고.
고된 운동의 끝에 만들어진 가슴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철없던 소년의 모습은 가고.
청년이 되어 버린 마현.
나…… 도련님이라면.
‘괜찮을지도.’
마음의 준비는 됐다.
그때.
“히끅!”
마현이 스윽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왔다.
“한라.”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는데.
어느새 한라는 벽에 다다랐다.
물러설 곳은 없었고.
그녀의 위로 마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시선을 내린 한라.
홍당무가 된 그녀의 어깨에 마현이 손을 얹었다.
“긴장하지 마.”
“……안 했어요.”
“그래? 그럼 말해도 되겠어? 내 소원.”
두근두근!
“마, 말해요.”
한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은…….”
두근! 두근!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머릿속이 하얗게 타오르는 순간.
마현이 소원을 말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네가 군대에 가는 거야.”
엣?
“네?”
뭐라고?
“군대에 가 줘야겠어. 한라.”
결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56화. 누나
군대.
외부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한 조직.
헌터들이 국내의 게이트와 탑 등반에 주력하는 동안,
군은 멸망한 북한과 태평양의 마물로부터 인류를 보호한다.
인류의 방패.
군대가 있기에 국가는 존재하며 국민은 안심할 수 있다.
이처럼 숭고한 집단이나.
그 누구든 갑자기 가라고 한다면.
충격에 정신이 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구, 군대요……?!”
한라의 두 눈이 떨렸다.
아무래도.
이 양반이 미친 것 같았으니까!
마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라가 생각하는 그 군대가 맞다는 듯이.
‘많이 놀란 모양인데.’
나라도 그럴 거 같긴 해.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짓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말 필요한 일이다.
‘내가 아닌, 한라를 위해서.’
한라가 내게 영약을 준 그 날.
나는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한라는 힘을 원하고 있어.’
왜, 한라는 마가에서 일하고 있을까?
이따금 궁금했다.
한라라면 마가보다 더 좋고 편한 곳에서 일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지.
전생에 한라는 그다지 돈을 밝히지 않았다.
다른 비서들과는 달리 돈 때문에 마가에서 일하는 느낌이 아니다.
마가를 좋아해서도 아니다.
정확한 이유를 들은 적은 없지만.
분명한 건, 마가에 목적이 있기에 남아 있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마가와 엮였다면 좋은 일 때문은 아닐 터.
따라서.
‘한라는 마가에 한이 있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즉, 한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마가에 남아 있어야만 했던 거겠지.
그러려면 내가 사신관에서 살아 돌아와야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전생의 나는 너무 형편없었다.
스스로도 사신관 시험에서 죽겠구나 확신할 정도였으니.
한라도 내심 체념했던 거겠지.
그런데 이번 생은 아니었어.
나는 영약을 받았다.
그것도 한라의 연봉의 반 이상 하는 영약을 받았다.
‘이건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야.’
나야, 구천마제 신공을 얻었으니 자신 있었지만.
남들의 눈에는 뒤늦게 발악하는 모습에 불과한 상태였으니까.
하물며 다른 후예들은 10년을 넘게 준비하는 시험인데.
한 달 미친 듯이 운동을 한다고 결과가 뒤집힐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이러면 도박도 아닌가?’
아무리 봐도 극악의 가능성이다.
이 정도면 그저 믿고 싶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을 뚫고 살아 돌아오기를 말이다.
즉, 한라는 0%만 아니라면.
그 확률이 0.1%만 되어도 내게 영약을 줄 셈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 가문에 그녀의 절실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 테고.
‘어쩌면 그날 한라가 나를 위해 몸을 던졌던 것도 같은 이유인가?’
그 사실은 한라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필요하다는 거다.
물론, 나는 얼마든지 힘이 되어 줄 거다.
무엇을 원하든 이뤄 줄 생각이다.
나의 소중한 사람이 불행하지 않길 바라니까.
그렇기에 한라는 군대로 가야 한다.
나는 후계자가 되었고.
앞으로의 싸움은 개인 간의 다툼이 아닌.
방파 간의 전쟁이나 다름없으니까.
‘한라는 딱 좋은 사냥감에 불과해.’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
위험한 건 나보다는 내 주변이다.
스스로를 지켜 낼 힘이 없다면.
내가 곁에 없을 때.
바람 앞 촛불처럼 사라질 테니까.
“하, 하하. 좀 웃겼어요. 도련님. 아휴, 제가 군대를 왜 가요.”
“난 네가 힘이 필요한 걸 알고 있어.”
“……네?”
한라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가 기울었다.
“네가 마가에 있는 이유.”
그 말에 한라는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이유라니요……?”
“잘은 모르지만, 꼭 이뤄야 할 게 있단 걸 알아.”
한라의 입이 다물어졌다.
의문이 들겠지.
내가 어떻게 짐작하고 있는지가.
물론, 그저 이유를 밝힐 수 없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이미 정했으니까.
“나는 너에게 힘이 될게.”
그 목표가 무엇이든.
나는 한라의 힘이 되겠다.
그 말에 한라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정말이냐고.
응, 진심이야.
난 내 편은 끝까지 챙기는 편이야.
“하지만 언제든 지켜 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무리야.”
앞으로 나는 더 바빠질 테고.
매번 곁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
“너는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해.”
아니면.
“적어도 내가 있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어야 하지.”
방파가 약하니 내가 없을 때 한라를 지킬 수 없다.
흑검대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답은 하나다.
강하게 만드는 것.
“도련님…….”
한라는 감동한 듯이 눈망울이 커졌다.
누구든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식었던 피가 다시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대화는.
그녀로서는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어제 특무대 신수정 소령과 연락했다.”
“트, 특무대요?”
신수정 소령.
할아버지와 연줄이 있던 만큼, 가문에 몇 번 찾아왔으며.
전생에 가문이 멸망했을 때, 나와 할아버지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준 은인이다.
특징은, 그녀를 향한 모든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것.
신수정이라는 이름도, 소령이라는 직위도 마찬가지다.
특무대라고 불리지만, 그녀가 속한 조직은 이름이 없다고도 들었다.
모든 것이 극비.
그리고 그녀의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괴물처럼 강하다고 한다.
‘한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안타까워했지.’
죽음에 안쓰러워하기보다는.
― 아악! 노리고 있었는데! 제기랄!
인재를 놓쳤음에 분노한 것에 가까웠다.
신수정 소령은 한라에게서 남들은 볼 수 없는 재능을 찾은 것이다.
그 말은.
‘한라도 괴물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는 거겠지.’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신수정 소령이라면 한라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렇기에 어제 할아버지께 연락을 부탁드린 거다.
“너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셨다. 당장 내일모레 오시겠다고 했어.”
“아, 아니, 잠깐만요!”
“응?”
감동에 겨웠던 것도 잠시.
한라는 다시 창백해진 안색으로 물었다.
“그니까 군대에 잠깐 다녀오라는 게 아니라…….”
이 도련님이 설마…….
“‘입대’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아아, 아니겠지.
어떤 미친놈이 입대를 강요한단 말인가.
분명, 잠깐 심부름 좀 하고 오라거나.
거기서 사람을 만나고 오라거나.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하하.
한라는 떨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마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진지했다.
“맞아.”
“네?”
“그곳에 가면 너는 강해지게 될 거야.”
야, 마현.
나 재미없어, 이제.
그만해.
“하하, 농담이시죠?”
“…….”
“농담…… 맞죠?”
진짜, 그만하라구!!
속으로 절규했다.
하지만.
“한라, 다 너를 위한 거야.”
마치, 용기를 불어넣듯 한라의 어깨를 잡은 마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한라는 도망치지 말라는 듯이 붙잡힌 느낌이었다.
“군대가 농담이 아니라고요? 내일 입대라고요?!”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사실이야.”
“그게, 사실이라……. 하하하!”
“자주 면회 갈게.”
면회?
하!
마침내 한라는 인정하고 말았다.
이 미친놈이 결코, 농담하는 게 아님을.
당장 내일모레부터 입대한다는 사실을!
‘아아, 하늘이여!’
풀썩.
한라는 기력이 쇠한 듯 쓰러져 버렸다.
“한라? 한라!”
“으그극! 마혀언……!”
눈이 뒤집힌 한라가 이를 갈았다.
마가를 향한 한이 더욱 깊어진 듯이.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숭고한 달의 여인’이 어딘가 질린 투로 말했다.
― 터무니없이 잔인한 녀석이로다…….
* * *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한라의 기분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아,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도련님이 나를 버릴 리가 없어!”
그 믿기지 않는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려 하거나.
“마혀언! 이 개망나니 자식! 감히 키워 준 은혜를 이따구로 갚아!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어!?”
이 모든 일의 원흉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거나.
“그, 그래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야. 도련님 말씀대로라면 더없이 좋은 기회라구…….”
애써 차가운 현실을 마주해 보거나.
“하아…… 엄마, 아빠……. 흐으윽.”
점차 다가오는 입대의 시간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에 인생을 겪은 한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야, 마현!”
“어?”
“어어? 이게 확! 누나라고 불러라 이제.”
사람이 사나워졌군.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만…….
나는 장단에 맞춰 줬다.
“……누나.”
“그래, 말은 잘 듣네. 평소에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미안. 이제 좀 괜찮아?”
마현은 한라의 파격적인 행동에도 고분고분 잘 따랐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강제로 입대시켰으니까.
‘이해해야지.’
내가 한라였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봤는데.
나는 이미 나를 살해한 후였다.
“하― 미안? 미안한 줄은 아나 봐?”
“그래도 다 너를 위한…….”
“아, 됐고! 면회 안 오면 죽일 거야. 그런 줄 알아!”
“물론이지, 자주 갈게.”
“그래, 정말 그래야 할 거야. 안 오면 탈영해서라도 찾아갈 거거든.”
희번뜩 떠진 한라의 두 눈이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빛났다.
진짜로 탈영해서 나를 죽일 것처럼.
‘하하, 무섭구나.’
그래도 기특하다.
어떻게든 안 가겠다고 말할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아는 거겠지.
조금 여러 가지가 생략되기는 했지만.
이 길이 옳다는 걸.
진정되는 한라에 내심 안도했다.
그때였다.
“그리고!”
한라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우리 사이는 고작 반걸음.
서로의 입김이 닿는 거리.
그녀가 따지듯이 검지 끝을 내 가슴팍에 찔렀다.
“네 소원 너무 막 나갔어. 알지?”
“음, 어,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한라의 치켜세운 두 눈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듯, 뚜렷한 눈빛으로 분명히 말했다.
“나도 소원 빌 거야.”
응?
“내가 다시 마가로 돌아오면, 넌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할 거야.”
지금만큼은 누구도 그녀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오해.”
한라의 혀끝이 윗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듯 한쪽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내 소원도 너의 전부를 걸어야 할 테니까.”
“어…… 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전생의 한라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 *
그렇게 한라와의 일이 일단락됐을 무렵.
나는 마가의 공동묘지로 향했다.
영면원(永眠園).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만든 이곳에는 역대 마가 일족들이 잠들어 있다.
층계마다 늘어선 수십 개의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묵직하다.
나는 그 수십의 무덤을 지나.
가장 아래의 층계로 내려갔다.
쏴아아―
수풀이 우거진 이곳을 바람이 휘감았다.
그림자가 바람결 따라 너울거렸다.
한낮에도 어두운 이곳에, 다른 묘들과 달리 초라하고 볼품없는 묘가 있었다.
「암성파 마하윤」
“엄마, 나 왔어. 새삼 고향에 온 기분인걸?”
어머니의 묘 앞에 섰다.
가문의 율법을 어긴 죄로 원래라면 이곳에 묻히지도 못하셨을 테지만.
어느 날 갑자기 허가가 떨어졌단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개입한 덕분이겠지.
그 대신인지 몰라도, 묘의 격이 현저히 떨어지고 관리를 받지 못하긴 하지만.
그렇기에 한라가 주기적으로 직접 관리를 해 주고 있었다.
“여길 얼마 만에 온 거지?”
전생까지 통틀어서 거의 15년 만에 온 건가?
15년…….
참 늦게도 왔다.
어머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생의 나는 이곳에 거의 찾아온 적이 없었다.
스스로 어머니를 찾아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
가문이 멸망하고 이곳도 쑥대밭이 되면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찾아뵐 기회조차 잃었다.
“오랜만이네요. 제가 보고 싶었나요?”
하지만 앞으로는 종종 찾아뵈려고 한다.
이유?
말해 뭣 하나.
‘찾아올 면이 섰잖아.’
사신관? 박살 냈잖아.
내가 우리 엄마였어도 자랑스러울 만하잖아!
좋은 일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
그리고 앞으로도 난 잘될 테니까.
어머니께 좋은 말씀 자주 전해 드리려고 한다.
쪼르륵―
“엄마도 한잔해.”
잔에 술을 담아 묘 앞에 두었다.
그리고 내 잔에도 술을 따라 마셨다.
크―
사실, 자주 찾아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솔직히 미신 따위 믿지 않지만.
자주 찾아오면 이 쓸쓸한 곳에 계신 어머니도 좋아해 주실 테니까.
가끔 얼굴을 비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거고, 어떤 좋은 일들이 펼쳐질지 떠들고 나면.
‘분명, 어머니도 좋아하실 테지.’
또다시 술 한잔 마셨다.
크―
‘성공해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쏴아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무덤가에 내리는 햇빛이 따듯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풀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 참 좋은 어머니였겠구나.
“숭달여?”
― 네가 이리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숭달여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마치 무덤에 찾아온 나를 기특하게 여기듯이.
― 사실, 조금은 네가 막돼먹은 화신이 아닌가 싶었다. 망나니랄까. 과연 누가 너를 이렇게 키웠는지 궁금했다.
“…….”
― 하지만 너의 지금 이런 면을 보니, 도리는 아는 녀석이라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니, 숭달여는 내가 한라를 강제 입대시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녀석은 내가 건실한 인간인 점을 아직 못 본 것이다.
―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둔 걸,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겠어.
“그렇겠지?”
― 훗, 물론이다. 왠지 나도 새삼 흐뭇하구나. 내 화신이 누군가를 공경할 줄도 아니 말이야.
“숭달여…….”
어머니를 찾아뵌 적이 처음이라 그런가.
숭달여가 이런 순간을 좋아하는 건 처음 알았다.
회귀가 역시 좋아.
모르던 것도 알게 되니까.
‘앞으로 더 많은 걸 알게 될까?’
왠지 그런 기분이 든다.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 것 같은 기분이.
누군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저벅저벅.
“하윤이가 자식은 잘 뒀군.”
그는 암천마가의 주인이자.
내 어머니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 말이 퍽 듣기 좋았는지 피식 웃었다.
“그래, 할아버지다.”
마휼은 마현의 곁에 섰다.
“나도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
“물론이죠.”
이에 가주인 그가 허름한 묘 앞 흙바닥에 앉았다.
늘 가장 높은 옥좌에 앉아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쏴아아―
딱히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가 가늘게 들릴 뿐.
정처 없이 맑은 하늘을 볼 뿐이었다.
마치, 이 함께하는 시간을 음미하듯이.
그때 문득, 마현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이 자리, 터가 좀 별로였네.’
어머니가 누운 묘의 방향은 마가 일족들의 무덤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 있지만, 마가 일족들의 무덤가는 따듯한 햇볕이 내렸다.
이 또한 차별인가?
흠.
‘바꿔 드려야겠군.’
만약 정말 소가주가 된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마휼이 입을 열었다.
“현아. 나는 늘 하윤이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단다. 그래서 말이다.”
“네.”
“흠, 정말 혹시나 말인데…….”
“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할아버지답지 않게 어째서 뜸을 들이는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는 네 아비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푸흡!”
무척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분명하건대 그 안에 날카로운 송곳이 숨어 있었다.
“쿨럭, 예?”
“궁금하더구나. 하윤이가 어떤 놈팡이를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보통 녀석이 아닐 거다. 이 지경이 되도록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으니 말이다.”
차분하지만, 그 안에 분노가 끓어오른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이 분노도 같이 끓어오르고 계실지도 모른다.
“아는 게 있다면 말해 다오. 결코, 그 녀석을 손대려고 하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의 눈웃음 속에 날카로운 맹수의 눈동자가 보였다.
맞는 거 같은데?
아주 갈가리 찢어 죽일 거 같은데?
하지만.
“죄송합니다.”
나 역시 잘 모른다.
“어머니는 끝까지 제게 아버지의 정체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독한 년.”
“…….”
“아쉽군.”
정말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가 내 생부를 찢어 죽일까 봐 조용히 계셨던 게 아닐까?
나는 화제를 돌릴 겸 말을 꺼냈다.
“그보다, 할아버지. 여기 영 터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도 수긍했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제가 소가주가 되면 더 좋은 곳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이 영면원에서 가장 높은 곳이 혈족 중에서도 특히 큰 업적을 이룬 이들이 안치된다.
이를테면, 가주나 대표 화신이나 하이 랭커가 된 이들.
어머니는 가주가 되지 못했지만, 대표 화신이기도 했고, 하이 랭커이기도 했다.
그저 나를 낳아 이곳에 있을 뿐이다.
“가능하면 저 가장 높은 곳이 좋겠군요. 햇볕이 잘 드니 아주 마음에 듭니다.”
“흠, 그런가…….”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의 안색은 썩 밝지 않았다.
딱히 내 말에 거부감을 느끼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또다시 한차례의 정적이 있었고.
불어오던 바람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네놈에게는 알려 줘야겠구나.”
“네?”
갑자기 무엇을 알려 주신다는 거지?
마휼이 결심한 듯이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이어진 말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 무덤에 하윤이는 없다.”
어?
“네?”
그게 무슨 말이지?
어머니 무덤에 어머니가 없다고?
“관에 하윤이를 넣기 전, 시신이 사라졌다.”
57화. 반드시 눈앞에 무릎 꿇려 드리겠습니다
‘마휼’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 딸인 마하윤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마주하게 된 순간을.
“……모두 나가라.”
“알겠습니다.”
싸늘한 시체 안치실.
마휼은 자신을 따라 들어왔던 이들을 모두 내보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건만…….’
마하윤은 알 수 없는 병세가 심화되던 와중이었다.
끝을 알 수 없었던 힘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타오르던 생명은 점차 촛불처럼 가늘어져 갔다.
그렇기에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잠에 빠진 마하윤을 마주한 순간.
더이상 그 아이가 깨어나지 않음을 인지했을 때.
가슴의 한 뭉텅이가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이리도 아픈 것이냐…….
‘속만 썩이는 딸이었잖은가!’
빠드득―
마휼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고 목에 핏줄이 섰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으으아!”
누군가 쥐어뜯는 것처럼 심장이 옥죄였다.
뜨거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하윤을 마주한 순간부터, 바닥이 무너진 것처럼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이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쌓아 올린 것들을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가문의 율법을 어긴 딸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으아아아!”
못 본 새 수척해진 딸의 모습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지켜야 하는 건 그딴 것들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 간단한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아― 하윤아!”
살면서 늘 옳은 선택을 해왔다고 자부했지만.
마휼은 이날 자신이 완벽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그 방증이었다.
마휼은 한참을 일어설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마휼이 시체 안치실을 나왔을 때.
한 아이와 마주쳤다.
분명, 마가 일족 특유의 흑발 자안을 가졌으나 처음 보는 그 얼굴에 의문이 들었을 때.
그 아이가 제 딸의 시체 안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마현.’
시체 안치실로 들어간 마현은 제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눈물 하나 없이, 오히려 작게 미소마저 지었다.
‘저 아이는 제 어미가 죽었는데 슬프지 않은 것인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마휼은 금세 깨달았다.
아니다. 저 아이가 저럴 수 있는 건.
자신과 달리 계속 제 어미의 곁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저 미소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마현의 몸부림이었고.
‘마현…… 마현이라…….’
그날 마휼의 뇌리에 그 모습이 각인되었다.
시간이 흘러, 마하윤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에 대한 말이 오갈 때.
마휼은 암익파가 가문의 율법에 따라, 가문의 균열을 초래한 마하윤의 시신을 실험체로 쓰자는 말을 묵살시켰고.
그간 그녀가 쌓아온 공로를 인정하여 가문의 땅에 누울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입관식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이변이 발생했다.
“시신이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그게 정말입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시체 안치실에 놓인 마하윤이 사라졌다는 것.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냐!”
불가능하다.
현장에는 보안 카메라가 있었으며,
몇 겹의 보호 마법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보안카메라 영상은 순간 지지직거리며 불안정해지더니 화면이 흐릿해졌고.
다음 순간 정상이 되었을 때 시체는 사라졌다.
찰나의 시간이었다.
보호 마법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멀쩡히 작동 중이었다.
온전히 시체만 가져간 것이다.
‘어떤 놈이 감히!’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게 되어있다.
자신의 보호 마법을 건들지 않았더라도.
시체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사용했을 터.
하지만 마휼이 흔적을 추적하는 스킬을 발휘했을 때.
그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가중되는 혼란.
그 속에서 마휼은 속이 까맣게 타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빠드득―
찾겠다. 찾아서!
‘내 딸을 우롱한 녀석을 죽이겠다!’
짙은 분노에 휩싸인 마휼은 무작정 암익파를 덮쳤다.
암익파는 시체를 통한 흑마법을 연구하기도 했고.
처음부터 시체에 눈독을 들였던 놈들이었으니까.
“사, 살려 주십쇼!”
하지만 놈들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는 계획 중이었지만.
무덤에 들어간 직후를 노리고 있던 정황이 드러났다.
“크아악!”
계획을 짠 놈들의 사지를 분질러 버린 마휼은 계속해서 범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범인은 마가의 엄중한 보안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지.
끝끝내 어떠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지금.
마하윤의 무덤에는 마하윤이 없다.
“미안하구나.”
“그런……. 어째서 왜 아무도 제게 알려 주지 않은 거죠?”
자초지종을 들은 ‘마현’은 충격에 휩싸였다.
전생에도 들은 적 없는 내용이었다.
“마가의 모든 보안이 뚫렸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지금도 가문에서도 아는 이는 손에 꼽는다.”
기밀이었다.
가문의 치부를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
‘뭐냐,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나는 어딘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숭달여가 제 일인 양 목소리를 높였다.
― 이건 정말 미친놈이로구나.
‘숭달여?’
― 뭘, 넋이 나가 있느냐! 정신 차려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찾는다?
이미 수년이 지난 일인데?
할아버지도 찾지 못했는데?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러나 숭달여의 말에 마현은 눈을 빛냈다.
‘……맞아. 찾아야지.’
이 사실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다?
그건 더 말도 안 되는 일!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다 못 한 마당이다.
이대로 어머니와의 연이 끊어지게 되는 건 결코 바라지 않는다!
찾아 주지.
누가 어머니의 시신을 가져갔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되찾아 주겠다!
‘겸사겸사 범인도 시체로 만들어 주고 말이야!’
― 바로 그거다! 나의 화신이여!
내심 어머니의 시체가 이미 소모되어 세상에 없을 가능성도 떠올랐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마가의 보안을 뚫고 가져갔을 정도라면.
반드시 어머니의 시신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가치가 높은 것을 허투루 쓰진 않을 테니.
분명, 원본을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테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 내 생각엔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겠구나.
맞는 말이다.
생판 남이 대뜸 마가 보안을 뚫고 시신을 가져갈 가능성은 현저히 낮으니까.
“할아버지. 혹시 얼마나 알아보셨습니까?”
나는 얼마나 진척이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가히 충격이었다.
“거의 다다.”
“어머니와 관련된 사람을 죄다 조사했다고요?”
“그래,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친구, 지인, 동료 등등. 한 번이라도 얽혔다는 말이 있다면 죄다 조사했다. 진심으로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허, 그렇군요.”
설마 이미 모두 조사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물론, 할아버지도 모르는 어머니와 얽힌 사람이 있긴 할 테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오직 어머니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은 도저히 찾을 수 없더구나.”
그가 누구인지 예상했다.
“제 생부 말입니까?”
“그래, 여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놈. 심증이지만, 나는 놈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 하윤이의 눈에 들었을 테니 결코 평범한 녀석은 아닐 테지.
과연, 일리가 있어.
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수준도 높아진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기 직전의 시기는 하이 랭커로서 나날이 전성기를 갱신하던 시기다.
분명, 지금쯤 그자는 남들과는 격이 다른 힘을 지녔을 터다.
‘누굴 찾아야 할지 명확해졌군.’
전생에는 나 살기 바빠 찾아볼 생각조차 못 했지만.
궁금해졌다.
과연 어머니가 사랑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단서도 있다.
‘하이 랭커.’
힘과 공적치를 토대로 결정되는 시스템 랭킹.
하이 랭커는 시스템 랭킹 상위 1%의 헌터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놈들과 쉽게 엮이기 위해서는 나 역시 하이 랭커가 되어야 한다.
즉, 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변함이 없겠군.’
계획에 변함은 없다.
오직 성실함만이 답인 것이다!
“현아, 혹여나 그놈을 만나거든 말이다.”
“네, 걱정 마세요.”
나는 이제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반드시 눈앞에 무릎 꿇려 드리겠습니다.”
마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헌터란 마물과 싸우는 자들을 일컫는 말.
외계 성운의 침략과 시스템 차원의 탑이 발생한 이후.
세상은 헌터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강한 힘을 지니면 돈과 명예가 따라오게 되었다.
하지만 힘이 필요한 곳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매년 수백 명의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기 위해 대부분은 더 강해지길 갈구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길을 택한 건 아니었다.
“바보도 아니고 왜, 먹고사는 일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지?”
“키킥, 적당히 힘을 키웠으면,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우흐흐흐! 바보 바보 바보!”
통칭 ‘삼 형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세 의형제는, 타고난 헌터로서의 자질이 있었기에 제법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강한 마물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그날로 헌터의 길을 접었다.
근본부터 썩어 빠진 그들답게, 대신 다른 것을 사냥하기로 했다.
인간.
그들이 말하는 활용법은 결국, 약자를 사냥하는 것에 불과했다.
아무튼, 그들의 타고난 재능은 어두운 곳에서 빛났고,
어느덧 청부업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마침내 제법 급이 높은 사람과 연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암천마가가 비호하는 인천의 한 호스트바.
“아이고, 또 막내님이 터뜨리셨네~”
“하하하! 재밌다, 재밌어! 한 번 더!”
“오빠, 진짜 헌터였어?”
“이 흉터 보여? 이게 어쩌다 생긴 건지 알면 너 나한테 반할걸?”
문란한 여인들과 둘째와 막내가 술판을 벌이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담배 연기만이 자욱하게 피어났다.
“후― 이게, 마님께서 말씀하신 그년의 정보냐?”
“네, 마침 내일부터 장기 출장을 나간다고 하군요.”
삼 형제의 맏형인 ‘왕석’은 가면의 사내로부터 서류를 받았다.
가면의 사내는 암천마가 암익파의 마지영의 손발로.
서류에는 ‘한라’라는 여인의 신원과 특징 등이 적혀 있었다.
쓰읍, 후―
왕석의 입에서 자욱한 연기가 나왔다.
어딘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은 덤이었다.
“장기 출장? 비서가 주인님 곁을 오래 비울 일이 있나?”
“저야 모르죠.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가.
뭐, 맞는 말이다.
사소하긴 하지.
“내일이라, 이번 건은 빠르게 끝나겠군.”
“예, 늘 하던 대로 잘 부탁드립니다. 소리 소문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해 주세요.”
“전문가에게 훈수는.”
“아 참, 그리고 마님의 요구 사항은 반드시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
그러고 보니, 마지영은 이번 의뢰를 맡길 때 한 가지 요구 사항이 있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거?”
“네, 맞습니다.”
그 말에 여인을 끼고 놀던 둘째와 막내가 킬킬 웃었다.
“크핫! 정말 그래도 되겠어? 우린 정말 마음대로 해 버린다고.”
“우흐흐! 마음대로 한다!”
“예예,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가면의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망가져 버린 그녀의 모습에 슬퍼해야 할 누군가가 있거든요. 가능한 한 오래 살아서, 오래 슬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야, 배우신 분이네!”
“너, 말 잘한다! 너 우리 동료가 돼라!”
“아, 그건 좀 별로고요. 나머지는 잘 부탁드리지요.”
말을 마친 직후 떠나는 가면의 사내.
왕석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침을 뱉었다.
“퉤! 하여간, 아무리 봐도 재주 없는 놈이야.”
어딘가 자신들을 깔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직의 핵심은 고객 응대에 있다.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어떤가?
잠깐 참으면 큰돈이 나오는데!
특히, 마님께서 주는 의뢰들은 대체로 액수가 크다.
그리고 이번 건의 경우에는 간만에 애들도 의욕적이었다.
“으흐흐, 마음대로 망가뜨려 보자고!”
“좋아! 좋아! 좋아!”
뭐, 그럴 수밖에 없나?
나도 그렇고 저놈들도 그렇고.
우리는 판만 깔아 준다면.
씨익.
‘제법 즐길 줄 아는 녀석들이거든!’
이년도 참, 운이 더럽게 없나 보다.
뭔 짓을 했길래 마님의 화를 산 걸까.
하여간 벌써 그 비명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오늘 일은 이제 끝났으니…….
“이봐라! 왕의 등장이다! 계집들은 당장 술을 들고 내게로 오라!”
이제 좀 즐겨 보실까!
58화. 입대
마현의 저택 앞.
고동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딘가 충격받은 투로 물었다.
“도련님, 이거…… 정말 맞습니까?”
“필요한 일이야.”
달이 지고 해가 떴다.
그 뜻은.
“아아아! 안 돼에!”
입대의 날이 밝았다는 뜻이다.
전날 보여 줬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한라.
그녀는 입대의 아침이 밝자 패닉에 빠졌다.
‘내가 입대한다니?’
꿈이 아니었어!?
기어코 눈앞에 다가온 끔찍한 현실.
분명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때가 되니 그냥 미칠 것만 같았다!
“도련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했어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흐아앙!”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한라, 너무 걱정하지 마. 별거 아니야.”
“도련님은 군대도 안 가 봤으면서!”
“…….”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명가 일족은 그런 데 안 간다.
군대에 있는 것보다 헌터로서 활약하는 편이 더 국익에 이롭기 때문이다.
“그래도, 네가 가는 곳은 평범한 군대가 아니야.”
특무대.
그것도 극단적으로 모든 사항이 극비로 치부되는 곳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더 힘들잖앙, 으흐흑! 그냥 나 비서로 살래에!”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한라.
지금은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숭달여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 여자를 울리다니, 내 화신은 참으로 나쁜 남자로다…….
나쁘다라…….
심히 나쁜 짓을 하긴 했지.
‘난처하구만.’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약한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흔들린다.
아무래도 가녀린 여인에 불과했던 한라에게 입대란 생각 이상으로 가혹한 시련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한라를 위한 일이야!’
비교적 이성적이었던 전날의 한라도 수긍하지 않았던가.
지나고 보면 그녀는 결국 내게 감사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순간, 전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듯 떠올랐다.
― 각오해.
치켜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한라의 모습.
마치 모든 것을 쟁취할 듯한 그 눈빛.
― 내 소원도 너의 전부를 걸어야 할 테니까.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던 그 순간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소원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어주지 뭐.
그게 뭐가 됐든, 내가 할 수 있으면.
들어주도록 하자!
그렇다면 한라도 나름 이 앙금을 풀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때였다.
빠앙―
한차례 경적을 울리며 영내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어디서 한두 바퀴 구른 듯, 성치 않은 외관을 지닌 지프차.
그 위풍당당한 등장에 모두 신수정 소령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으, 으아아…….”
한라의 험난한 미래도 짐작할 수 있었다.
끼이익―!
검은 지프차가 미끄러지듯 드리프트 하며 바로 앞에 정차했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는데 그 사이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련님, 이분이…….”
“그래.”
마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실렸다.
“신수정 소령이다.”
선글라스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지는 백발의 여인.
입에 문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녀의 존재감을 더욱 강조했다.
일상복 차림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험한 아우라가 풍겼다.
그녀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마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네가 마현이냐?”
“예, 제가 마현입니다.”
신수정 소령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마현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청 강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수준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야.
분명, 눈앞에 있지만, 그녀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느낌.
마치 세상에서 존재를 지운 것만 같다.
그녀가 육신의 기운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라와 고동석은 신수정 소령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지듯 시선이 자꾸 다른 데로 돌아갔다.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는 것처럼.
하지만 마현은 아니었다.
구천마제 신공 2성에 오르면서 강화된 ‘영감(靈感)’.
지금 마현의 눈에는 그녀의 존재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호오, 너…….”
신수정 소령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마현이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흐으음.”
그녀는 마현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위험한 기색이 감돌았다.
다음 순간―
“내 취향인데?”
무심한 듯 툭 던진 한마디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
?!
아무렇지 않게 본심을 말하는 그녀에 한라와 고동석은 순간 굳어 버렸다.
전생에 짧게나마 예방 접종을 한 마현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군인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다소 저돌적인 그녀였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올래? 잘해 줄게.’
찡긋―
신수정 소령이 치명적인 윙크를 날렸다.
오긴 뭘 와.
저 말에 승낙하는 순간.
어쩌면 입대는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숭달여는 다르게 느낀 모양이다.
― 흐음, 직진하는 스타일이라. 마음에 드는구나.
확실히 숭달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은근 소나무 취향이니까.
― 하지만 나는 아직 허락할 수 없음이니라.
‘숭달여?’
― 자고로 이성 간의 만남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서두르기보단 우선 친구부터 시작이 맞느니라.
‘…….’
미안한데 그런 거 아니야.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에잉, 쩝, 아쉽네.”
아쉽다니.
이럴 때는 보통 농담이라 하잖아?
전생에는 만남이 짧아 잘 몰랐지만.
어쩌면 신수정 소령이 내 생각보다 괴상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네가 말한 한라인가?”
신수정 소령의 타깃이 변경되었다.
나 싫다는 마현 대신, 본건인 한라에게로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다.
한데 그 순간.
“음?”
무언가를 알아본 듯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보기까지 했다.
“으, 으으으…….”
“……호오?”
입대의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한라.
반면에 신수정의 눈은 점점 더 커져 갔고.
마치,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그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이놈 봐라?”
곧바로 차에서 뛰어내린 신수정 소령이 한라에게 다가갔다.
“이거 진짜냐?!”
신기한 듯이 그녀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럴수록 한라는 더욱 경기를 일으켰다.
신수정 소령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라의 특별한 체질이.
그리고 한라의 손을 잡아 본 순간.
씨익!
그녀는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으하하하!”
틀림없다.
눈앞의 한라는 신수정 소령이 그토록 바라온 인재인 것이다!
마치, 모든 숙원을 푼 듯한 그녀의 광오한 웃음.
어딘가 탐욕에 젖은 듯한 그 소리가 영내에 울려 퍼졌다.
한라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라! 한라라! 아주 좋은 울림이다!”
“으, 으으으……. 으흐흑! 싫어!”
“너는 군인이 될 상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인재야!”
“아아, 아니에요! 저는 천상 비서라구요!”
하! 천상 비서?
넌 고작 그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재가 아니다!
신수정 소령은 가소롭다는 듯이 외쳤다.
“그렇다면 내가 널 천상천하 유일무이 군인으로 만들어 주마!”
‘도대체 이 미친년은 뭐야?!’
한라는 눈앞의 신수정 소령이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집념과 탐욕으로 물든 악마와도 같았으니까.
이젠 두려울 지경이었다.
“도, 도련님…….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아요. 나 그냥 안 갈래!”
“어허! 이미 늦었다. 한라 대원! 왜냐하면…….”
찰나에 신수정 소령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뒷걸음치던 한라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신수정 소령의 발에 걸린 한라는 빙그르르 돌며 균형이 무너졌다.
다음 순간.
처억!
한라는 신수정 소령의 품에 안겨 있었다.
“넌 이미 이 언니가 찜했거든.”
“히이익!”
어제까지만 해도 패기 넘쳤던 한라.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마치 호랑이 앞에 놓인 고양이 꼴과 같았다.
특히, 이상한 건 어딘가 뒤틀린 듯한 신수정 소령의 모습이다.
‘나, 잘못 선택한 건가?’
마현은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신수정 소령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약간 평범함과 거리가 조금 있어 보였을 뿐.
적어도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후, 앙큼한 구석이 있어.”
“으아앙! 도련님, 이건 정말 아니야! 으흐흑!”
“군인의 좋은 점을 잔뜩 알려 주마.”
미친놈이 따로 없다.
“저, 신수정 소령님.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질문? 말해 줄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뭐, 마현 동생이라면 조금은 알려 주지.”
동생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신수정 소령이 나를 좋게 보는 것 같다.
아마도 한라가 그녀의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테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다.
“한라를 얼마나 강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시죠?”
사실 이것 때문에 그녀를 부른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만약, 그녀의 대답이 영 시원찮다면,
지금이라도 한라의 입대를 막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뭐, 그건 마음먹기에 달렸지. 하지만…….”
하지만?
그 순간 한라를 바라보는 신수정 소령의 입가에 희열이 어렸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만큼도 가능하고 말이야.”
그건 충격적인 말이었다.
신수정 소령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적어도 그녀가 하이 랭커 급에 이르는 수준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호오, 이제 좀 끌리나?”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니야. 내 눈엔 보인다고? 한라 대원의 진심이!”
“으, 으으아…….”
신수정 소령이 흘린 말에 순간 떨림이 멈추었던 한라였지만.
광기에 물든 신수정 소령의 말에 다시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눈에 이채가 어렸다.
마음 한쪽에 한가지 확신이 선 것이다.
신수정 소령을 따라간다면.
정말로 강해질 수 있다는 걸.
‘기회…….’
이번 일이 그녀에게 기회라는 사실도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때였다.
지프차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신수정 소령과 함께 온 대원이었다.
“대장님! 슬슬 출발해야 합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신수정 소령은 자신의 품에 안긴 한라에게 미소를 지었다.
씨익.
“자, 그럼 갈까? 한라 대원?”
“으, 으아아…….”
한라는 또다시 경기를 일으켰지만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았다.
제 발로는 결코 갈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훗, 이 파릇파릇한 녀석.”
그런 한라가 너무도 좋은지 신수정 소령의 입가에 미소가 만개했다.
마침내 신수정 소령에 의해 차에 탑승하게 된 한라.
이로써 그녀의 입대가 완전히 확정된 것이다.
“한라. 괜찮아?”
나는 내심 걱정되는 마음에 창문을 두드렸다.
“이 꼴을 보고도 괜찮다는 말이 나와?”
창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 그녀의 꼴은 엉망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눈물로 충혈된 얼굴.
하지만 그 눈빛에는 결심이 섰다.
“한라…….”
“치, 누나라 불러.”
“누나.”
“다녀올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 한라.
이제야 어제의 당돌한 모습이 되었다.
“면회 안 오면 죽일 거야.”
“알았어.”
“소원권도 진짜니까 잊지 마.”
“그래.”
부르릉!
그 순간 엔진 소리가 울렸다.
출발의 때가 다가왔다.
한동안 한라를 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때 한라가 말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응?”
“내, 내 생각 많이 해.”
어…… 응?
“그, 그럼 강해져서 돌아올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창문이 올라갔다.
차 안에서부터 신수정 소령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한라가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아앙!
그렇게 한라를 태운 지프차가 이곳을 떠났다.
입대해 버린 것이다.
“어…… 도련님. 생각보다 성정이 잔인하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순간을 지켜본 고동석의 소감이었다.
마현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다.
사람을 다시 봤다는 듯이 말이다.
“왜, 너도 보내 줄까?”
“아잇! 무슨 말이 그렇게 됩니까! 저는 마가를 지켜야 해서 무립니다.”
고동석이 손사래 치며 내게서 더 멀리 떨어졌다.
웃기는 놈이네.
가고 싶다고 해도 못 가는 곳이다.
물론, 그게 내가 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지만.
“대신, 네가 해 줘야 할 게 있어.”
“제가 할 일 말입니까?”
후계자가 된 후로, 흑검대는 정식으로 내 방파에 편입되었다.
이제 내 명령에 따라 가문의 업무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군대만 아니라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잘됐네, 이거 받아라.”
신원과 용모파기가 적힌 인물의 리스트를 전달했다.
세인트와 관련된 녀석들을 아는 대로 모조리 적어 낸 것이다.
“이건…….”
“이놈들이 어디서 뭐 하는지 찾아서 몰래 조사해 줘.”
“도련님 설마, 제게 수색 정찰을 맡기시는 겁니까?”
마치, 자신의 큰 덩치를 보고도 이런 임무를 맡길 수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확실히 어디 숨어서 조사하기엔 들키고도 남을 덩치다.
하지만.
“무리냐?”
“훗, 사람을 아주 잘 보셨습니다.”
의문을 제기하던 고동석의 눈빛은 이미 흥미로 가득했다.
정말 자신이 해도 되냐는 듯이!
“제가 몸은 이래 보여도 움직임은 날카로운 단검과 같지요.”
“치, 이젠 웃기는 것도 잘하네.”
늘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과를 보내던 고동석이었지만.
나와의 일탈을 시작으로 그는 점차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게 되었다.
“임무를 받들겠습니다!”
“너무 빠지진 마라.”
“네!”
역시, 이 녀석은 제 욕망에 솔직하다.
그렇게 고동석도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남은 건 나뿐인 것이다.
“자, 그럼 해야 할 일은 얼추 다 했으니. 남은 건, 나만 잘하면 되는 건가?”
지금으로서 최우선 해결 과제는 15레벨을 달성하는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던전을 돌아야 한다.
할아버지가 제시한 일주일의 시간 중 약 나흘의 시간이 남았다.
― 흠, 빠듯하긴 하겠구나. 하루에 서너 개의 던전을 돌아야 할 텐데?
숭달여의 말대로다.
일반적으로 레벨을 하나 높이기 위해서는 비슷한 수준의 던전을 몇 번이고 클리어해야 하니까.
‘뭐, 정석대로라면 그렇지.’
그리고 나는 정석을 굉장히 싫어한다.
날 때부터 율법을 박살 내고 태어났기 때문인가?
지루한 건 못 참거든!
“한 번에 끝낼 거야.”
― 한 번에 말이냐?
숭달여는 경악했다.
레벨은 오를수록 오르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마현이 한 번에 15레벨을 달성할 던전에 간다는 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라면 성좌로서 극구 만류해야 할 일이지만.
‘이 녀석은 마현.’
사신관 역사상 최강의 화신이다.
10레벨이지만 이미 능력치만큼은 15레벨을 능가했다.
― 할 만한 것이냐?
“응! 나만 믿어!”
― 으음, 알겠다.
사신관에서 이미 스스로를 증명한 마현이다.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물론, 여전히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어려운 일인 건 마찬가지다.
레벨과 능력치가 높다고 해도 심장을 찔리거나 머리를 다치면 죽게 되니까.
하물며 강력한 마물과 보이지 않는 함정이 존재하는 던전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런 변수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한계를 넘어서야 하지.’
그리고 당연하게도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사신관 시험 직전,
내가 운동으로 신체를 단련해 온 것처럼.
물론, 이제 와 그 지겹고 숨 막히는 한계 나부랭이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씨익.
“자, 그럼 강해지러 가 볼까.”
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슬슬 때가 되었으니까.
구천마제 신공 3성.
그 문턱을 넘어설 시간이!
“세상 참 살기 좋군!”
매번 느끼지만.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다.
59화. 천상 군인
삼 형제는 마가입구역 2번 출구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오늘은 대망의 납치 실행일.
전의 가면의 사내가 신호를 주면 곧바로 작전을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때.
띵.
가면의 사내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가면 쓴 싸가지: 한라가 탑승한 검은 지프차가 이제 막 정문을 통과했다. 차 내에는 한라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여인이 함께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니 참고해라.」
왕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인이 있다고?”
이러면 처음 계획이랑 달라지잖아!
납치 작전은 언제나 대상이 혼자일 때가 최적이다.
수가 조금이라도 많아지면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고.
소란이 발생할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다.
띵.
그때 가면의 사내가 사진을 보냈다.
「지프차.png」
「지인1.png」
「지인2.png」
정문을 통과하는 과정에 찍은 건가?
녀석이 보낸 사진에는 기스가 많이 난 지프차의 외형과 한라의 지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혀, 형님. 이 여자들……!”
“예쁘다! 예쁘다!”
“확실히 스타일들 괜찮은데.”
백발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젊은 미인이 운전대를 잡은 모습.
어딘가 터프해 보이는 그 스타일이 제법 마음을 끌었다.
“호오, 센 언니 타입이신가?”
끼리끼리 논다더니.
한라의 지인들도 제법 외모가 출중하다.
다만, 지금 관건은 그게 아니다.
이 둘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삼 형제 왕석: 이봐, 그 지인 둘은 어떻게 해?」
「가면 쓴 싸가지: 알아서 잘.」
“이 새끼가…….”
아무리 우리가 음지에서 논다지만, 이건 너무 개 같은 거 아닌가.
하지만 뭐 좋다.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정말 알아서 하면 되니까.
그리고.
‘우린 예쁜 언냐들을 좋아하거든!’
이 바닥에서 놀면서 인간들을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지 통달했다.
인질로서 제 부모들과 거래를 유도하거나.
혹은 중국의 블랙마켓에 팔아넘기면 돈으로 바꿀 수 있다.
즉, 한라의 건을 진행하면서 부수입을 챙기게 된 것이다!
“애들아, 슬슬 일하러 가 볼까?”
“흐흐, 형님! 저 둘도 챙깁니까?”
“챙겨! 챙겨!”
“뭐, 굳이 말해야 하냐?”
씨익.
“당연히 챙겨야지!”
예쁜 것들은 그 가치가 높은 법.
심지어 팔리기 전까지는 조금 가지고 놀 수도 있다.
“아, 이번에 한탕 하면 당분간 여행 좀 갔다 올까? 제법 돈도 많이 쌓였으니 말이야.”
“아따, 저는 형님이 가시는 곳이면 지옥까지도 따라가지요.”
“우흐흐! 좋아! 좋아!”
벌써 기대되는 듯이 활짝 웃는 둘째와 막내.
여행이라 했지만, 남들처럼 관광지나 도는 그런 시시콜콜한 게 목적이 아니다.
술, 여자, 도박!
그들에게 여행이란 오로지 쾌락이다.
돈 벌어서 이런 데에 써야지!
한 번뿐인 인생.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그러니 매일을 마지막처럼 화려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운전대를 잡은 왕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 돈 벌러 출발!”
부아앙!
왕석의 자동차가 출발했다.
곧 마가로 이어진 도로에서 사진과 똑같은 지프차를 발견했다.
“형님, 저거네!”
“찾았다! 찾았다!”
“그래.”
어디서 한두 바퀴 구른 듯이 기스 가득한 지프차다.
속도를 내는 그 차를 삼 형제의 자동차가 뒤따랐다.
‘저 안에 두 명이 더 있다라.’
한라와 달리 그 둘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 점이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뭐, 언젠 그런 거 신경 썼던가.’
이 바닥에서 그런 세세한 걸 다 따지면 못 살아남는다.
일은 언제나 신속, 정확 그리고 화끈하게 진행해야 하니까!
하물며 우리들의 평균 레벨은 무려 20을 넘지.
이는 헌터 상위 30%에 육박하는 수준.
밖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놈들을 만날 가능성은 작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애초에 이 구역에서 강한 녀석들은 다 꿰고 있지!’
이러니 자신이 있겠어? 없겠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겠지!
즉, 이 일로 자신들이 불상사를 당할 일은.
감히 장담한다.
‘제로 퍼센트!’
왕석의 시선이 지프차에 있을 두 여인을 향했다.
이야, 참 다들 운도 안 좋아.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말이야.
그녀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인생에 행복은 없음을.
지이잉―
그때 지프차의 창문이 열렸다.
창문 사이로 빠져나오는 연기.
아무래도 우리 백발의 미녀님께서 흡연을 하는 모양.
참 터프하기도 하시다.
‘음?’
그 순간 왕석은 인기척 따위를 느꼈다.
왠지 방금 저년이랑 눈을 마주친 것 같았는데?
이내 왕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눈 좀 마주쳤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들이 납치하려는 걸 알 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지프차의 추격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틱―
백발의 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사이에 있던 담배꽁초가 삼 형제의 유리창으로 떨어졌고.
잿가루가 유리창에 흩뿌려졌다.
“뭐야, 이 씨발.”
운전 예절을 어떻게 배운 거야!
보통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던가.
최소한 상대방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서라도 사과를 할 터였다.
그런데.
피식―
지이잉―
백발은 볼일을 마쳤다는 듯이 창문을 올렸다.
“와, 저년 한 성깔 하나 본데요?”
“으으, 무섭다. 무서운 누나다.”
“…….”
왕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계집년 주제에 싸가지가 없군.”
넌 내가 반드시 울면서 무릎 꿇게 해 주마!
예절을 주입시켜 주겠노라 다짐했다.
한 시간 뒤.
합정동의 번화가 일대.
차에서 내린 신수정 소령 일행은 인파를 뚫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삼 형제들도 차에서 내려 은밀히 그녀들을 뒤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거지?’
왕석의 생각으로는 여자 셋이 이런 외딴곳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봤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보통은 놀러 나왔다고 하면 핫플이 많은 번화가 내에서 놀 테니까.
한데, 그녀들은 굳이 상권이 죽은 구역으로 향했다.
여인들이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왕석은 마력으로 귀의 감각을 끌어 올렸다.
“저, 여기는……?”
한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앞의 가게를 가리켰다.
〈Death Bar〉
“뭐, 걸스 토크를 위한 자리랄까, 우리 쪽에서 운영하는 가게다. 들어와.”
신수정 소령이 자랑스럽게 답했다.
‘호오, 우리 쪽에서 운영하는 가게?’
방금 저 백발이 한 말은 나름 유의미한 단서다.
저년이 나름 재력이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가게가 허름하고 볼품은 없었지만.
이런 동네라면 저런 가게도 나름 가치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저년이 끌고 다니던 차도 1억이 넘는 차였고.
씨익.
‘어쩌면 인질로서 재능이 넘치는 계집이겠어.’
백발이 열쇠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금 문이 열렸으니, 안에는 저 세 명만 있을 것이다.
즉, 앞으로 저년들이 도망칠 곳은 없다.
왕석은 둘째와 막내에게 눈짓했다.
“자, 매력적인 여인분들께서 걸스 토크 하신단다. 우리가 재밌게 헌팅해 줘야겠지?”
“키킥, 오늘은 우리가 호스트입니까? 새롭구만요!”
“으흐흐! 재밌다! 재밌다!”
다들 의욕 만땅이고.
자, 그럼…….
씨익.
“가 볼까!”
삼형제는 〈Death Bar〉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이질적인 느낌이 몸을 감쌌다.
스르륵―
공간이 일렁이는 느낌.
일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건…….’
삼 형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헌터로서 살아왔던 그들로서는 아주 잘 아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헌터라면 모를 수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은…….
게이트를 통과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뭐지?’
어떻게 평범한 건물에 게이트가?
흔한 일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발생하기에 일반인들이 게이트를 다룰 일은 없다.
강대한 세력을 이끌고 있는 명가나 길드, 특수한 목적으로 지원받는 단체만이 가능하다.
즉, 뭔가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삼 형제들은 낯선 공간에 떨어졌다.
음침한 건물의 외관과 달리.
이곳은 마치 거대한 호텔의 로비처럼 밝고 웅장했으며 화려했다.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여자였고, 제각각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꿀꺽.
“혀, 형님?”
그리고 그녀들이 있었다.
한라와 친구들 말이다.
신수정 소령과 함께 왔던 특무대원이 한라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신입, 내가 말했지? 너에게 꼬리가 붙었다고.”
“저, 정말이었군요…….”
제, 젠장!
알고 있었던 건가!!
심장이 철렁 가라앉은 것만 같다.
싸늘한 분위기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온몸을 가득 채워 갔다.
마치, 함정에 빠진 것처럼.
‘나, 나가야겠어!’
그때.
백발의 여자.
신수정 소령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어이, 거기 네들. 여긴, 여성 전용 구역이야. 남자는 원래 들어오면 안 되지.”
그녀의 말에 삼 형제가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아하! 그렇군요.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바가 있길래 한번 들러 봤습니다!”
“나, 나가겠습니다! 아휴 실례했구만요! 하하!”
“나, 나간다! 나간다!”
돌아서는 삼 형제는 들어왔던 게이트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게이트가…… 없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게이트가 없는 것이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일지 몰라도, 나갈 때는 아니라는 말. 못 들어 봤어?”
“그, 오, 오해입니다.”
왕석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도망칠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청부 삼 형제. 왕석, 탁구운, 장문도.”
!
마치 저승사자가 이름을 부른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백발의 여인은 자신들의 정체를 꿰뚫고 있던 것이다.
“현상 수배 신분으로 제법 오래 살았어.”
“어, 어떻게…….”
“너희처럼 못생긴 얼굴은 흔치 않아서 바로 알지.”
제, 젠장!
위기다.
뭔가 너무 많이 잘못됐어!
뒷걸음질 치는 삼 형제.
그런 그들에게 신수정 소령이 느긋하게 다가갔다.
“너희는 못 나가. 나는 쓰레기가 눈앞에 돌아다니면 꼭 치워야 직성이 풀리거든.”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렸음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결정되었다.
탈출? 불가능하다.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결과.
무장 상태인 십수 명의 여인들이 자신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한 방향을 정해서 그곳을 집중적으로 뚫고 나아갈 생각이라도 할 테지만.
“크읏, 혀, 형님!”
“가, 강하다!”
“젠장!”
어떻게 된 게, 눈앞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보다 강했다!
여긴 뭐야.
도대체 뭐 하는 곳이냐고!
가장 이상한 건 저 백발의 여자다.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가 저 여자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저 여자가 이곳에서 가장 강한 건가?
그렇다면…….
‘얼마나 강한 거지?!’
알면 알수록 심연에 빠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뭐 하는 거지?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뿐이다.”
신수정 소령이 피식 웃었다.
“아, 설마 남자답지 않게 내빼려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어차피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삼 형제들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죽어야 한다면.
“네놈 한 명은 데려가겠다!”
삼 형제들이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이 긴 삼 형제.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한 몸과 같아서 강한 마물도 쉽게 사냥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백발을 죽이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닐 테다!
[스킬. ‘연쇄참풍’을 사용합니다.]
맏형 왕석이 만들어 낸 무수한 칼날이 허공에 은빛 궤적을 수놓기 시작했다.
가을 낙엽처럼 춤을 추며 날아가는 참격들.
[스킬. ‘강철의 아우라’를 사용합니다.]
둘째 탁구운이 그 참격을 더욱 크고 날카롭게 벼려 냈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대태도처럼 위협적인 크기로 변했고.
춤을 추는 참격은 힘 있게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스킬. ‘태풍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 막내 장문도의 스킬이 울려 퍼졌다.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게.
은빛의 강철 참격들이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로 뭉쳐 들었다.
마침내 완성된 삼 형제의 필살오의.
회오리치는 강철 칼날의 태풍이 울부짖었다.
파과과곽!
“죽어라!”
삼 형제의 전력이 신수정 소령을 향해 날아간다.
“벌레의 날갯짓인가?”
신수정 소령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조금의 흥미조차 생기지 않은 듯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 순간.
처억―
그녀가 발차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마치 훈련장에서 기본 동작을 보여 주듯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옷 아래로 드러난 다리 근육이 긴장하며, 오른발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 끝에는―
파아아아앙!
― 누구도 눈으로 좇을 수 없는 폭발적인 속도가 있었다.
차올린 오른발이 일으킨 충격파가 허공을 갈랐다.
은빛으로 빛나던 칼날의 태풍은 순식간에 두 동강 나 버렸다.
힘을 잃고 사라지는 삼 형제의 필살기.
“허어억…….”
삼 형제는 스킬조차 쓰지 않은 신수정 소령의 무위에 경악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하, 하이 랭커인 건가!”
하지만 더 이상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서서걱!
“크아악!”
눈 깜짝할 사이.
신수정 소령이 날린 압축된 풍압에 삼 형제들은 팔다리가 날아갔다.
속수무책으로 벌어진 이 일에 그들은 곧바로 전의를 상실했다.
애초에 몸뚱이만 남은 상황이다.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사, 살려…….”
“치워.”
“예!”
신수정 소령은 대원들을 시켜 삼 형제를 치웠다.
저들은 사지가 잘린 채, 비참한 여생을 보내도록 조치될 것이다.
“으어어어…….”
“크힉…….”
“아프다, 아프다…….”
짐짝처럼 끌려가는 삼 형제들.
‘한라’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뒤늦게 섬뜩함을 느꼈다.
그들의 상태가 잔혹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들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고?’
그렇다는 건, 신수정 소령님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언젠가 위기에 처했을 거란 말이었다.
‘정말 도련님 말씀대로였어.’
앞으로 후계자 싸움이 심화되면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이 될 거라는 것.
한데 그 일이 당장 며칠 만에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현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생각이 있는 분이라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떻게 이런 판단이 가능한 거지?
‘설마…… 나를 그렇게나 신경 쓰고 계셨던 건가?’
음, 그건 도련님만이 알고 계실 일이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한라의 눈에 신수정 소령의 모습이 들어왔다.
평범한 발차기로 강력한 스킬을 허무하게 소멸시킨 장본인.
그녀가 말했었다.
― 뭐, 그건 마음먹기에 달렸지.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만큼도 가능하고 말이야.
그녀만큼도 강해질 수 있다고.
그리고 방금 신수정 소령님이 보여 준 힘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해.
진정한 힘은 분명 내가 상상도 못 할 정도일 거야.
그렇다는 건…….
‘정말 놓쳐선 안 될 기회라는 거야!’
이 기회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깨달은 것이다.
그때, 신수정 소령이 한라에게 다가왔다.
조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라 대원, 눈빛이 달라졌는데?”
“아, 그게…….”
“훗, 속이 훤히 보인다. 벌써 이곳이 마음에 들었나.”
신수정 소령은 한라를 꿰뚫어 보았다.
한라는 여전히 그런 그녀가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용기 있게 말했다.
“여전히 좀 두렵긴 하지만…….”
저!
“그래도 해 보려고요. 천상 군인!”
힘을 키워 나간다.
그리고 마가로 돌아간다.
‘반드시 밝혀낼 진실을 위해서!’
한라의 결의로 빛나는 눈빛에 신수정 소령이 씨익 웃었다.
“바로 그거다, 한라 대원!”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