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5

50화. 사신관 보상

“크아아!”

전력으로 내달리는 마기헌.

잔혹한 악마와 같던 그 위세는 어느새 사라졌다.

가까스로 흑마견을 뿌리친 채 마현에게 달려드는 그 모습은 그저 처절하기만 했다.

마기헌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물론, 마현의 상태도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문제는 놈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크롸아!

컹컹!

흑마견들이 매섭게 쫓아오고 있다.

이미 기울어진 승부.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신에게 남은 승부수는 오직 하나뿐이다.

‘기회는 단 한 번!’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다음 순간. 마기헌의 두 눈이 적색 빛으로 타올랐다.

[스킬 ‘악의 참격’를 사용합니다.]

[스킬 ‘암쇄파’를 사용합니다.]

[스킬 ‘환영 족쇄’를 사용합니다.]

.

.

.

칠흑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고.

부유하는 어둠의 구체가 파동포를 쏘았다.

지면에서 솟아난 사슬 족쇄가 입을 벌렸다.

피의 가시가 비처럼 내렸다.

마현을 향해 날아드는 흑마법들.

스킬 ‘악마화’의 효과로 전보다 강력해진 흑마법이 마현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통할 리가 없잖아.”

“크으읏!”

한순간의 도약이었다.

마현이 일순간 쇄도하자 흑마법은 애꿎은 대련장만 박살 냈다.

마기헌은 이를 악물고 마현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앙!

맞부딪히는 검.

두 힘의 격돌에 강렬한 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마현과 마기헌의 힘이 비등하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기에 마기헌은 믿을 수 없었다.

대성좌님을 통해 성장한 능력치.

악마화와 화염검 스킬로 강해진 자신이다.

그런데 어찌…….

“네놈이 나와 견줄 수 있는 거냐!”

분명 능력치만큼은 놈을 압도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저 따라잡은 것에 그쳤다니.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현은 피식 웃었다.

그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구천마제 신공을 휘두르고 있는 그조차도.

매번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생각하고 있다.

이 힘을 다루는 한.

패배란 없을 거라고.

“꼬우면 너도 죽다 살아나라.”

“그게 무슨……!”

그 순간.

한 번의 접점 이후 벌어진 간격이 한걸음에 좁혀졌고.

마현이 휘두른 검이 섬찟한 궤적을 그어 내자.

쨍!

화염검이 깨졌고.

마기헌의 머리 위로 솟아난 두 뿔이 잘려 나갔다.

진무극이 천여령에게 맞서며 펼쳤던 검초.

그 완벽한 일격에 마기헌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파스스―

“으, 으으…….”

마기헌을 비호하던 두 힘이 사라지자.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무력함이 그를 잠식했다.

그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현이 마치 저승사자와 같았다.

“오, 오지 마라! 놈!”

질겁한 얼굴로 바닥을 기었다.

다가오는 마현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 꼴은.

누가 봐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모습이었다.

“오지 마!”

“그, 그만!”

“멈춰!”

마침내 마현의 그림자가 마기헌의 위에 드리웠을 때.

마기헌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지켜보는 누군가는 생각했다.

다음에 있을 마현의 일격을 막기 위한 손짓.

혹은, 마현의 존재를 손으로 가리기 위한 알량한 생각이라고.

하지만 그건 마기헌의 속을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씨익.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마기헌의 얼굴.

거짓말처럼 겁먹은 표정이 사라졌다.

그 얼굴에 비웃음이 맺혔다.

다음 순간.

파라락!

마기헌의 팔이 변화했다.

살가죽이 뒤집히며 검붉은 털이 솟구쳤고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났다.

팔의 외형이 야수의 그것처럼 변질되는 것이다.

‘이 완벽한 순간을 기다려 왔다!’

이 상황은 성좌―화신 계약서에 비롯된 것.

「제6조 (의무 및 대가)

계약자는 다음과 같은 의무를 지닙니다.

· 을이 허락한 신체 일부에 갑이 현현할 권리를 갖는다.」

즉, 이 순간 나의 성좌, 몰살의 황태자님께서 오른팔에 현현하는 것이다!

방심하고 있을 마현에 저주를 새기기 위해서!

“.......!”

단상 위에서 지켜보던 마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변화가 무슨 상황이며.

무엇을 위함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성좌가 격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의지를 표출하기 위한 것.

일개 필멸자인 인간은 성좌의 격 앞에 무력하다.

하물며 그 의지가 인간을 해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마휼이 대련장 위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몰살의 황태자가 현현을 마친 후였다.

쩌억―

손바닥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눈이 떠졌다.

거울처럼 마현을 비추는 그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마치, 잘 가라고 배웅하는 듯이.

검지에 맺힌 저주의 빛이 붉게 번뜩였고.

그것이 쏘아졌다.

피이잉―

빛의 속도로 뻗어 나가는 저주의 궤적.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진행되었다.

마기헌과 동격의 수준은 물론이고.

뛰어난 기감을 가진 고수나.

높은 레벨에 이른 헌터가 와도 피할 수 없다.

그만큼 완벽한 순간에 이루어진 일격.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지 않는 한.

‘결코 피할 수 없음이다!’

마기헌과 몰락의 황태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휼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두가 마현의 끝을 예상했다.

저주의 빛이…….

[……!]

빈 허공을 가로지르기 전까진!

!

!

천장을 뚫고 나아가는 저주의 빛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영문을 모르는 후예들은 그 찰나의 번뜩임에 숨죽인 채 감탄했고.

상황을 인지한 원로들은 딱딱하게 굳었다.

마휼은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무슨…….”

마기헌의 두 눈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성좌가 현현함과 동시에 영혼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고.

저주의 빛이 쏘아지는 순간에는 마현은 이미 자신의 품을 파고든 상태였으니까.

마치,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그때였다.

몰살의 황태자가 현현하고 있는 오른팔이 갈라지며 입이 생겨났다.

그 역시 경악에 물든 듯했다.

“하,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어떻게 피한 것이냐!”

성좌마다 저주를 새기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어디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저주가 가해질지는 제각각 다르다.

하물며 자신의 저주는 빛의 속도로 쇄도한다.

그러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마현이 자신을 간파했다는 것이!

“미래를 알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었거늘!”

“그래? 그럼, 뭐.”

마현이 피식 웃었다.

“미래를 봤나 보지.”

서걱―

마기헌의 팔이 허공에 솟구쳤다.

손바닥에 박힌 몰살의 황태자의 눈은 여전히 경악에 물든 채였다.

* * *

추락한 마기헌의 팔이 대련장을 뒹굴고.

현현한 성좌의 흔적이 사라질 때.

대련장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마현.

이를 가장 먼저 의식한 사람은 사신관주였고.

그의 외침이 뒤따랐다.

“대련을 종료한다. 승자는 마현이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마현! 마현! 마현!”

마현을 연호하는 후예들.

시끄러운 환성이 사신관을 가득 채웠다.

‘후…….’

그제야 마휼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아찔했군.

설마 성좌가 후예들 간의 싸움에 개입할 줄이야.

뒤늦게 부아가 치밀었다.

‘대성좌는 개나 소나 하는 건가!’

제아무리 성좌라 하여도 암천마가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몰살의 황태자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 듯이 선을 넘었다.

그것도 이미 후계자로 인정한 나의 손주 ‘현’이에게 말이다!

정말이지 길가에서 마주쳤으면.

보신탕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녀석이다.

그만큼 마휼의 속은 들끓었지만.

입가에 미소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클클클!”

그 일격을 마현이 가볍게 극복해 냈으니까!

‘정말이지 고얀 놈이로다.’

마휼의 시선이 마현에 향했다.

녀석은 자신을 부르짖는 후예들을 향해 가볍게 손 인사를 해 주고 있었다.

내심 속으로 이 뜨거운 열기를 즐기고 있는가 보다.

녀석의 입가가 씰룩이고 있었으니까.

― 방금 것도 담았겠지?

마휼이 비서장에게 물었다.

마현이 멋지게 저주를 피해 내는 장면.

절대 놓쳐선 안 될 순간이었다.

― 이미 편집 중에 있습니다!

과연 비서장이라 불리는 자.

마휼의 신임을 받을 만했다.

그렇게 모두가 기뻐할 때.

또다시 마기헌만이 함께할 수 없었다.

“끄으윽…… 제길!”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

마현과의 모든 승부에서 완벽하게 패배했고.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형님의 기대.

그리고 마승철의 복수.

그 무엇도 해낼 수 없었다.

인생을 잃은 것이다.

남은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대성좌님뿐이었다.

스윽―

그때 검을 회수하는 마현이 눈에 들어왔다.

잔혹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린 놈.

마기헌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마현을 불렀다.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거냐.”

어딘가 담담한 그 말에는 비아냥이 섞였다.

사실, 마기헌은 알고 있었다.

마현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 만큼은 절대 죽일 수 없을 거란 걸.

‘아무리 네놈이라도, 신경 쓸 수밖에 없겠지.’

놈이 지금 날고 긴다고 해도.

이제 막 후계자가 된 입장이다.

하물며 천박한 출생 덕에 방파에 놈을 지지할 자도 손에 꼽는다.

그리고 아무리 실망스럽다 해도 나는 암익파의 귀공자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죽인다는 건.

그야말로 암익파에게 명분을 주는 것과 같다.

즉, 마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두려울 것이다.

다가올 미래, 우리 암익파가 어떻게 나설지를!

“크흐흐, 하긴 두렵겠지. 네놈 혼자선 암익파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아, 어쩌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겁나는 거냐?”

마기헌이 끌끌 웃으며 마현을 비웃었다.

어떻게든 놈이 분노하는 꼴을 봐야 했다.

그것이 곧 약점일 게 분명하니까.

그때 마현이 가볍게 웃었다.

이어진 말은 무척이나 뜬금없었다.

“나는 보고 싶거든.”

보고 싶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나를 살려 두는 이유라고?”

“그래, 솔직히 너도 보고 싶잖아.”

왜 자꾸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마기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 마현이 말을 이었다.

“네 엄마, 마지영.”

마지영. 그것은 어머니의 성함이었다.

어째서 놈이 내 엄마를 보고 싶다는 거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려는 순간이었다.

마기헌은 떠올리고 말았다.

“네, 네놈 설마……!”

사신관에 입관하기 전 어머니와 만났던 순간을.

그 차가운 강철 의수의 감촉을!

그리고 그 원흉이.

마현의 애미라는 사실까지도!

즉, 놈은 두 팔을 잃은 자신과 어머니가 나란히 선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크아아아! 이 쓰레기 새끼가!”

마기헌이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능력치 강화 스킬의 반동으로 더 이상 힘을 끌어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마지영이 참 좋아하겠어. 아들이 자신을 너무 닮아서 말이야.”

마현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등 너머로 마기헌의 파렴치한 욕설이 난무했다.

물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기헌? 당연히 이대로 죽게 둘 수 없지.’

처음에는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대련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가 진(眞)네크로맨서의 힘을 각성하기 전까진!

진각성을 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영혼만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시체를 남기지 않든.

남의 것이든 중요치 않다.

모조리 내 것이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기헌의 가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마기헌이 악마를 공급할 수 있는 보물이 된 셈이다!

‘크크, 한평생 쓸모없는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알아서 도움이 되어 줄 줄이야!

마기헌의 악마는 곧 나의 하수인.

놈이 강해질수록 나는 강해지는 것이다!

이젠 기대되기 시작했다.

과연 마기헌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과연 내가 마왕을 하수인으로 다룰 수 있을지가 말이다!

벌써부터 주기적으로 마기헌을 찾아가 악마를 빼앗을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마기헌인데.’

솔직히 조금 걱정된다.

아까 마기헌의 눈빛을 읽은 나는 알 수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자처럼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이었으니까.

놈이 방금까진 강한 척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면 다를 수도 있다.

가문이 마기헌을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졌고 앞으로 느끼게 될 테니까.

‘새삼 내가 마기헌을 걱정하게 될 줄이야.’

그만큼 놈이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 주길 바랐다.

그때였다.

“마혀어언!”

쩌렁쩌렁한 외침이 사신관에 울렸다.

의무대의 부축을 받은 마기헌이 내게 씩씩거렸다.

“나는 크윽! 너를 죽일 거다!”

창백한 안색임에도 붉게 타오르는 눈빛이 형형했다.

“반드시! 강해져서 돌아와서!”

불굴의 의지가 피어올랐다.

“내 손으로 너를 직접 죽일 테다!”

그 말에 마현은 미칠 것 같았다.

‘강해져서 돌아온 다라.’

이렇게 듣기 좋은 말이었던가!

마기헌의 불붙은 살의.

그 짙은 욕망과 집념이 소용돌이친다.

결코 놈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현은 어깨너머로 마기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수 있다면.”

마치 불가능하다는 듯한 그 말에 마기헌은 더욱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결코 볼 수 없었다.

씨익.

마현의 짙은 미소에 담긴 무한한 기대감을.

* * *

[참가 중인 성좌의 수: 0]

별자리 연회가 종료된 지금.

사신관 종료식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시험이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만.’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일들투성이다.

처음에는 통과만을 목표로 했던 시험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엮여 지금 이 순간이 되었으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원래의 역사를 엉망진창으로 바꾼 것이다!

‘크크, 정말 속 시원할 정도로 난리 쳤군.’

원하던 복수도 이루었고.

바라던 성좌와 계약도 해냈다.

그리고.

할아버지.

어느새 나를 보는 그 눈동자에 꿀이 가득 담겼다.

아직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이전 생과는 달리 마음의 벽 하나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된 이상. 앞으로의 미래 역시 달라질 테지.’

마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암익파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았다.

가문을 멸망시키려는 움직임에도 변화가 생기겠지.

어쩌면 회귀의 이점이 흐려졌을 수도 있다.

‘상관없어.’

이제 와 그딴 걸 신경 쓸 내가 아니다.

운명이며 미래고 간에.

그런 건 힘이 있는 자가 결정짓는 거니까.

즉, 강해지면 그만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안 그래도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강해지고 있건만.

그보다 더 빨리, 한시 빨리 강해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 기회는 제때 찾아왔다.

단상 위에서 마휼이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계자 마현은 들어라. 너에겐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보상의 정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암천단과 1급 금고 선택권…….”

우수한 성적을 낸 후예라면 받을 수 있는 암천단.

성좌의 선택으로 화신이 되었다면 1급 금고 선택권.

마현은 모조리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의 독대가 있을 예정이다.”

보상으로 가주와의 독대가 추가된 것!

그 말에 듣고 있던 원로들과 사신관주의 표정이 제각각 바뀌었다.

“쿨럭…….”

알아차린 것이다.

마휼의 사적인 욕망이 가득 담겼다는 걸!

크흐흠! 뭐, 말 정돈할 수 있잖은가!

이 몸은 가주다.

손주와 말도 못 섞는 게 말이 된다는 거냐!

마휼이 말은 안 했지만.

그러한 느낌을 눈치채지 못할 원로들은 없었다.

그저 사신관 시험 전과는 180도 다른 그 모습에 놀란 것이다.

물론, 이제 와 감히 마휼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으니.

“흠흠. 가주님과의 독대. 아주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 되겠군.”

“아아, 소통은 중요한 법이지.”

“정말 기대가 되는 시간이로군. 크흠흠.”

괜히 이제 와 바람을 잡는 원로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사신관주만큼은 다르게 보았다.

사신관을 주관하는 자답게 섬세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가주님, 시험이 너무 고되었습니다. 시일을 따로 정하는 것이 어떨지요.”

그렇다.

이번 사신관 시험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마현.

그 말은 마현이 가장 피곤하고 힘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휴식이 필요한 시점.

마휼은 뒤늦게 뜨끔했다.

지극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니까.

‘크읏, 잠깐 눈이 멀었군.’

고작 이런 사소한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니.

그만큼 마휼은 마현과의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제길, 어쩔 수 없겠군.

아무리 그래도 현이의 회복이 더디면 안 될 일이다.

왠지 당분간 일이 손에 안 잡힐 것 같은 느낌이지만.

마휼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시일을 말하라.”

필요한 만큼 시일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돌아온 마현의 답은 입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저는 언제든 취할 수 있는 휴식 따위보단.”

씨익.

“가주님과의 시간이 더 끌립니다.”

건강하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린 마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원로들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는 것이다.

마현의 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그리고 마휼은.

‘클클클!! 이 발칙한 노옴!’

수명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군. 따라와라. 마가의 후계자여.”

단상을 벗어나는 마휼의 발걸음이 가볍게 떨어졌다.

51화. 할아버지

암흑성운의 어느 한 차원.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이 아이가 정말…… 나의 화신이라고?”

나는 최하급 성좌다.

격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는 이 성좌의 세계에서 그야말로 최약.

이제 막 성좌가 된 나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최하급 성좌의 화신이.

대성좌의 화신을 무참히 박살 낸 것이다!

“흐하핳, 나 이래도 되는 거야?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냐구!”

너무 기뻐 절로 몸이 방방 뛰어다닐 정도다!

사실, 처음 마현의 생각을 읽었을 때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했다.

상대는 대성좌와 계약한 화신이다.

혹여나 불구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막 각성한 두 화신의 힘의 크기는 성좌의 격에 비례하니까.

“하! 내가 바보였어!”

무려, 마현이다!

이 나의 화신은 최강이라고!

두 눈으로 봤지 않은가.

그 아이가 사신관에서 보여 준 저력을!

성좌인 자신이 격에서 밀린다는 것만으로 절로 고개를 숙이다니.

이건 자신의 과실이었다.

물론, 핑계를 대자면.

극적으로 마현과 계약하게 되면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마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순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드는 의문도 있었다.

‘어째서 저렇게 강할 수 있지?’

마현은 젊다. 그 나이대에 보여 줄 기량이 아니었다.

거기에 능력치도 뭔가 좀 이상해.

결코, 10레벨 수준이 아니었다.

‘스킬도 없었지.’

가지고 있는 건 적령소환과 내가 준 암천뿐.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은 많았지만.

가장 특이한 건 이거다.

‘진각성.’

대체 그게 무슨 현상인가.

성좌인 자신도 처음 듣는 상황.

온갖 정보가 집대성한 성좌 위키에서 정보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두텁고 오래된 서책인 화신백과사전에서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토록 의문이 많은 아이였지만.

히죽.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실수는 앞으로 안 하면 그만.

모르는 것도 앞으로 알아가면 그만!

지금은 그저―

“므흐흐! 만세!”

마음껏 즐기는 거다!

‘앞으로 마현과 함께하는 한 내 미래는 달라지겠지!’

어쩌면 성좌로서 가장 염원하는 격의 승급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괜한 설레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 기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화신에게 티를 낼 수 없음이다.

성좌란 본디 위엄이 있어야 하는 바.

따라서 그녀는 시스템을 통해 성좌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이곳.

‘성좌 익명 커뮤니티’

그중에서도 화신이 없는 성좌들이 모이는,

‘나만 없어 화신’ 줄여서 ‘나없화’에 게시글을 올렸다.

타다다닥―

게시글을 남기는 그녀의 문장은 평소 말투와 달랐다.

온갖 군상이 모인 커뮤니티 문화에 맞춰 문장을 구사했다.

『ㅋ먼저 간다.』_ㅇㅇ(444.66.)

:굳이 긴 말 안 해도 무슨 상황인지 알 거라 믿는다.ㅋ

‘흐흐,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늘, 화신을 구하고 나없화를 탈출하는 이들을 보며 이 순간을 바라던 그녀였다.

답장은 빠르게 달렸다.

늘 커뮤니티에 상주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ㅈㄴ 분탕질 오지네 ㅋㅋ 탈출하는 척하면 속을 줄 아냐?]

[조만간 화신 뒤지고 다시 기어 올 듯 ㅋㅋㅋ]

[다른 성좌한테 화신 뺏기고 X되는 미래 보이쥬~ ㅋㅋ]

[얘한테 답글 달지 마라 ㅇㅇ 걍 분탕임.]

[니가 나보다 먼저 탈출한다고? ㅋㅋ 어그로 오지네.]

예상대로의 뜨거운 반응!

삽시간 수십 개의 악랄한 댓글이 달렸다.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신성한 성좌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

이처럼 나없화는 성좌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녀석들이 자주 모인 곳이었다.

[추천: 0][비추천: 444]

‘훗, 역시나 패배좌들 답네.’

한땐 질 나쁜 놈들의 댓글에 속이 들끓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저놈들과 다르니까!

오히려, 저들의 더러운 악의가 짜릿한 승리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ㅋ 화신 털기에 당해 봐야 정신 차리지.]

이와 비슷한 맥락의 댓글들이 많아지자, 그녀도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화신 털기.’

말 그대로 화신을 강탈하는 행위다.

성좌의 세계는 격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자신 같은 최하급 성좌가 가까스로 화신을 계약했을 때.

급이 높은 성좌가 나타나 화신을 가로채는 일이 존재했다.

‘비일비재하지.’

격을 소모한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좋은 화신은 그 소모 값 이상의 리턴을 가져온다.

그런 점에서 우리 마현은 그야말로 로우 리스크―하이 리턴인 아이.

앞으로 수많은 화신 털기 시도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 이게 잘난 화신을 둔 성좌가 짊어져야 할 무게인가.”

이런, 왕관의 무게가 참 무겁군.

괜히 걱정이 앞설 정도로 말이야.

물론, 막을 방법은 있다.

성좌 계약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계약 당사자 한 명의 확고한 의사와 충분한 격이 필요하다.

즉, 마현이 다른 성좌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해 줄 생각이 없다.

마현이 자신에게서 돌아서는 일이 없도록 할 테니까.

‘반드시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어. 마현, 네가 나를 선택한 그 순간을.’

물론,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마현과 서로 알아갈 시간이 필요한 것.

때문에 마현이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 그 아이는 나름대로 중요한 시간을 보내는 듯했으니까.

“뭐,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마현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었다.

복도를 걷는 두 남자.

어딘가 피가 이어진 듯한 둘을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 * *

가주전으로 향하는 마휼.

한 발짝 뒤로 마현이 함께했다.

‘크흠…… 난관이로군.’

마휼의 안색이 어둡다.

간만에 일생일대의 난관에 처한 기분이다.

사신관에 있을 때만 해도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에 휩싸여 마현에게 독대를 주선했지만.

막상 사신관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인지한 것이다.

자신이 방관했던 딸의 아들과 걷고 있음을.

그렇게 지금 마휼은 중대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첫마디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크윽,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딴 고민을 하다니.

원래라면 자연스럽게 물꼬를 트고 대화를 주도했던 자신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입이 선뜻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말하는 법을 까먹은 것처럼 말이다.

목숨을 위협하는 마물의 앞에 섰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나도 참 많이 늙었군.

고민이 깊어지던 차.

마침내 마휼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이었다.

“……고생했다.”

그 말은 마현이 살아온 시간만큼 무겁게 울렸다.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못난 탓에 고생시킨 건데 이제 와서 고생했다라니.

어쩌면 마현이 속으로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말 한마디로 마음이 풀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마휼은 감내하기로 했다.

마현이 어떤 말을 하든 겸허히 받아 주기로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마현의 말은 그런 자신의 긴장을 맥없이 풀어 버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마휼은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이 내게 고생이 많았다니.

그건 마치, 마현이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잖은가.

‘어째서……?’

마휼은 뒤돌아 마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씨익.

“이제야 제대로 할아버지를 보게 되는군요.”

자신을 향해 선한 미소를 짓는 마현의 모습이.

‘…….’

이 나이 먹고 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있다.

웃는 얼굴 아래에 깊은 칼날을 감출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정녕, 네놈은 나의 방관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마현은 절대 아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눈동자로 그 겉과 속이 같음을 알 수 있었다.

따듯한 마현의 진심이 마휼의 가슴에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왜냐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까.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할아버지라니……!’

처음 알았다.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이렇게 듣기 좋다는 걸!

크윽―

하지만 가주로서의 위엄을 놓을 수는 없는바.

마휼은 안간힘을 쓰며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힘썼다.

“할아버지?”

“크흠! 가주전이다. 할아버지란 말은 삼가라.”

왠지 심장에 안 좋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현이 말을 이었다.

“밖에서는 괜찮죠?”

하! 이 녀석!

설마 앞으로도 이 나를 할아버지라 부를 셈인가!

피식.

‘고얀 놈이 아주 속을 뒤집어 놓는군.’

어느새 마휼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마음대로 해라.”

“하하, 알겠습니다. 가주님!”

클클클.

마하윤을 지독하게도 닮았군.

고집불통인 점도 말이야.

왠지 무거웠던 그 입술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나저나 구음절맥은 어떻게 된 것이냐.”

사신관에서 보여 준 마현의 모습은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특히, 구음절맥.

그것 때문에 마현이 유년기에 다른 일족처럼 흑마법을 익힐 수 없었고 병약하게 지내지 않았던가.

심지어 자신은 신의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마현을 치료해 주고자 말이다.

헌데, 마현이 조금도 지장이 없어 보이니 내심 크게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좀처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마현을 슬쩍 바라봤을 때에야 녀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적응했습니다.”

“그래, 적응…….”

?

음?

구음절맥이 적응할 수 있는 거였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힘들게 신의를 구하려는 것이 너무 바보 같지 않나!

“뭐라고?”

“적응했습니다.”

어딘가 설명하기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는 마현.

그런 마현을 잠깐 바라본 마휼이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허, 그래,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

너무 섣부른 접근이었다.

우린 아직 처음 대화를 나눈 사이인데.

선뜻 비밀을 밝히기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아직.

아직이라…….

마현과의 심적 거리를 인지한 순간이었다.

가주가 된 후 잊고 지냈던 감각, 향상심이 끓어올랐다.

‘훗, 간만이군 이런 느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과 마현 사이의 간격을 좁혀 보고 싶어진 것이다.

고맙게도 고얀 놈이 먼저 와 줬으니.

이제는 내 차례인가.

씨익.

‘언젠가는 그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하지.’

왠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생긴 듯한 이 기분.

마휼은 정말 오랜만에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때였다.

“가주님.”

맞은편으로부터 두 남자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을 알아본 마휼의 얼굴에 싸늘한 그늘이 드리웠다.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저들은?’

저들의 정체는 ‘마현’도 알고 있었다.

“마문윤과 마동재가 가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암천파의 마문윤과 그의 아들 마동재.

암천파인 만큼 어머니와 형제지간이었다.

즉, 따지고 보면 나의 외숙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와 그딴 건 무의미하지만 말이지.’

마문윤은 한창 어머니가 날아다닐 적에 주색에 찌들어 살았다고 한다.

늘 마하윤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려졌으며, 나아가 어머니에 밀려 후계자가 되지 못했으니까.

오죽하면 어머니가 임신하셨을 때에 직접 찾아와 통쾌해하며 뱃속의 나를 욕했다고 한다.

물론, 그 대가로 온몸의 뼈가 꺾여 죽을 뻔했다고.

“한데, 가주님. 저 아이는 누구입니까?”

마문윤이 나를 가리켰다.

일면식이 거의 없었으니 못 알아보는 것이다.

나는 가볍게 묵례를 취했다.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새롭게 후계자가 된 마현입니다.”

“후계자?”

나를 바라보는 둘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마치, 나를 가늠하려는 것 같달까.

특히, 마동재의 표정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후계자로서 선두 주자라는 거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냐.”

“곧 있을 회의에 앞서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안건은?”

“그게…….”

마문윤이 마휼과 말을 섞을 때였다.

마동재가 전음을 날렸다.

― 어이, 나는 마동재다. 내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겠지?

내 머리 위에 선 듯한 말투다.

하긴 모를 수가 없지.

암천마가를 이끄는 암천파의 직계 혈손이자 아직까지는 소가주 후보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니까.

‘아직까지는 말이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소가주는커녕 그 발치에도 못 미치는 녀석이다.

원래라면 마기헌에 따라잡힐 녀석이니까.

또, 마가 멸문의 날에는 그 종적을 찾아볼 수도 없었지.

어디서 뭐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의 나도 모른다.

즉.

‘거른다.’

굳이 놈과 엮일 필요는 없다는 판단!

어차피 나는 구음절맥으로 전음을 익히지 못해서 답도 못 한다.

해서 나는 마문윤과 할아버지의 대화에 집중했다.

“회의 안건은 15―30레벨 공략대 추가 지원 건입니다.”

“저층 공략이군. 누가 주최한 거지?”

―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거다. 후계자가 되었다고 해도. 뒤늦은 너에게 소가주 자리는 공중누각이라는 걸.

공략대 추가 지원이라…….

공략대란 말 그대로 전장에서 마물과 맞서 싸우기 위한 전력이다.

다만 중요한 건 이거다.

추가 지원.

‘이미 한 번 실패했군.’

선발대가 실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이런 경우 공략에 성공하면 더 높은 공적치를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전투가 일어난 차원의 주인으로부터 스킬을 얻을 수 있을 테지.

‘15레벨이라.’

최소 지원 가능 레벨은 15.

지금 내 레벨은 10.

필요한 레벨은 5.

― 선택해라. 내게 복종하고 나와 함께 마가를…… 잠깐.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긴 하는 거냐?

‘가능성 있으려나?’

아마 없을 것이다.

레벨이야 어떻게 올린다 해도.

공략대에 들어갈 후계자는 오늘 회의에서 선택될 테니까.

― 야, 너! 방파가 어디야!

“전멸인가?”

“아닙니다. 다만, 백가 측 후계자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백가라, 재밌게 됐군.”

그때였다.

빠드득!

이빨이 날카롭게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고.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마동재의 몸 위로 마력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마문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마동재가 나를 가리켰다.

“네놈! 이 내가 선배로서 조언하고 있는데 감히 나를 무시해!”

그 말에 마문윤이 눈을 부라리며 마현을 응시했다.

마치 마현을 압박하려는 듯이 그 눈이 푸르게 물들었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얼간이 녀석.’

마동재는 피식 웃었다.

제아무리 경쟁하는 후계자 사이라 해도, 같은 가문 사람이다.

그 안에 위계와 질서가 있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나의 아버지와 율법을 중시하는 가주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크크, 넌 후회 좀 해야겠다.’

그때였다.

사아아―

마문윤이 마현을 압박하려는 순간.

장내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마력이 내려앉았다.

천근만근 어깨를 짓누르는 그 힘에 마문윤과 마동재의 두 눈이 커졌다.

“커헉! 가, 가주님!”

“지금 내 앞에서 무얼 하는 짓이지?”

“그, 그게……!”

말이 길어질 틈조차 없다.

점점 강력해지는 기운이 마문윤을 반으로 접을 것만 같았으니까.

“내가 네놈을 잘못 키웠구나.”

“끄윽!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마침내 사죄하는 마문윤.

마동재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 어째서 가주님이 저놈의 편을!’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와 자신은 암천파 직계다.

이쪽을 두둔하는 게 맞지 않은가!

“내게 조언을 했다고?”

그때였다.

마현이 비릿한 미소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네놈이 내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이 어떻게 조언이 되지?”

!

마동재는 순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 저놈의 어머니를 욕했단 말인가!

“자, 잠깐……! 커흑!”

변명할 틈은 없다.

자신도 아버지처럼 반으로 접힐 것만 같았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사죄하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싸늘한 눈초리를 남기며 마휼이 자신들을 지나쳤다.

“쯧. 가자꾸나. ‘현’아.”

“네, 가주님.”

멀어져 가는 마휼과 마현의 뒷모습.

이를 바라보는 ‘마문윤’의 두 눈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거칠게 떨렸다.

‘현아라니……?’

살면서 처음 보는 다정함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암천파의 모든 혈족, 나아가 그 잘났던 딸년에게도 그런 적 없었다.

언제나 차갑고 쌀쌀맞았으며, 늘 기준이 높아 칭찬 한마디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 녀석에게는…….

그 순간 마문윤의 뇌리가 번뜩였다.

‘마현…… 설마?’

케케묵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장 묻어 두고 싶었던 시절의 일들.

언제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자신을 지워 버렸던 그년.

그 무엇보다 악랄하고 제멋대로였던 망나니.

한때 아버지께서 가장 신뢰했던 그 개자식.

마하윤.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그 악몽 같은 누이에게 아들이 있었고,

그 이름이 마현이라는 진실이 눈앞에서 번뜩였다.

‘내가 어떻게 마하윤을 잊었는데.’

“아, 아버지?”

“빌어먹을 인연이 또 이어지는 건가.”

마문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신은 언제나 마하윤에 뒤처졌지만.

지금은 다르다.

동재는 이미 한참을 앞서 나간 상태니까.

“동재야.”

“네, 네?”

“당분간 주색을 멀리해라. 도박도 끊고 사교도 접어라."

마동재는 반발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 아버지가 여느 때와 달리 격정을 억누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놈에겐 절대 져선 안 된다.”

52화. 감당할 수 없는 것

가주전 지하 금고 지대.

암천마가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신성한 공간이다.

세상에 수많은 아이템과 무구가 있지만.

이 안에 있는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보물이라 여겨지는 것들이며.

그 가치는 다이아 반지 따위의 하찮은 귀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여도 마력을 지닌 그것들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1급이라 하면 단연 입수 난이도가 높은 것들을 의미한다.

스스로 주인을 선별하는 무기나, 찰나 간 사용자를 배 이상 강화해 주는 아이템이나.

학습으로는 절대 익힐 수 없는 스킬을 펼치게 해주는 아티팩트거나.

희귀하고 특별한 것을 넘어 사용자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 1급 금고에 있었다.

즉, 이제 막 화신이 된 자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몇 단계의 성장을 이루는 것과 같다.

촤르르륵―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관문을 수차례 통과하고.

가주만이 해제할 수 있는 결계가 풀렸을 때.

마침내 마현은 1급 금고의 내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과연 마가의 재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금고답다.

1급이라면 분명 희소한 것들뿐일 텐데.

얼추 수백은 넘어 보이는 것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으니까.

‘여기가 1급 금고.’

전생에 연이 없던 장소다.

후계자는커녕 낙오했던 나였고.

가문이 멸망하면서 발을 디딜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곳에 서 있다.

“많이 신기한가 보군.”

내 얼굴에 설렘이 묻어 나왔던가.

전생에 강력한 아이템들을 다뤄 본 나였지만.

눈을 어디에 두어도 진귀한 아이템들로 가득한 이곳에 있으니.

왠지 마음이 고양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마가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이곳이 말입니까?”

“그래.”

수 세기에 걸쳐 명가로 거듭한 마가다.

그 과정에 수많은 후계자가 탄생하고 그들이 일궈 낸 업적들은 전리품이 되어 이곳에 있었다.

물론, 마휼은 그러한 아이템만을 말한 건 아니었다.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수백 권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저건.”

“마가의 흑마법들이지.”

가문 내 대서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흑마법들이다.

마가 혈족 중에서도 선택받은 자만이 다룰 수 있는 흑마법들이 이곳에 안치된 것이다.

“하나같이 쓸모가 뛰어난 것들이다. 하나만 대성해도 랭커가 되는 데에 어렵지 않지.”

“그렇군요.”

그때 불쑥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 좋은 것들이 대서고에 있으면 마가의 평균 전력이 강화되지 않겠습니까?”

“바보 같은 놈들이 익히더니 미친놈이 되더구나.”

“저런.”

강력한 만큼 사용자의 재능도 크게 받쳐줘야 했던 것이다.

마휼이 피식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익혀도 될 것 같은데. 하나 가져가는 게 어떻겠느냐?”

확실히 1급 금고에 보관된 흑마법이라면, 성취가 올라갈수록 이곳의 웬만한 아이템보다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공부랑은 안 친합니다.”

구음절맥으로 흑마법을 놓은 지 오래.

기초, 기본 지식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마휼도 이해했는지 ‘그런가’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좀 더 금고의 안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사아아―

‘이건?’

사이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전생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건 아티팩트 따위가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나의 영감(靈感)이 반응한다.’

강력한 영혼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 금고에는 나와 할아버지뿐이었으니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이와 비슷한 느낌을 최근에 겪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별자리 연회장?’

미약하지만 본능적으로 사람을 위축시키는 이 느낌은 꼭 연회장에서 느낀 성좌의 기운과 비슷했다.

영혼을 볼 수 있는 힘인 영안(靈眼)을 발휘했다.

그러자 금고의 끝, 정확히는 그 벽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음.’

어째선지 형태를 정확하게 식별할 수 없다.

아직 내게는 자격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고유의 색을 지닌 영혼이라니.’

그동안 봐왔던 새하얀 영혼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론, 그 색깔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지만.

도대체 뭐지?

어째서 가주전 지하에 저런 것이 있는 거지?

의문이 강하게 들 때였다.

할아버지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설마, 저 너머의 것이 느껴지는 것이냐?”

“예. 느껴집니다.”

“허, 그럴 수가 있나.”

“저것의 정체가 뭡니까? 어째서 저런 게 저희 가문에 있는 거죠?”

잘은 모르지만.

저 영혼의 주인은 인간과 격을 달리하는 무언가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물음에도 할아버지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 골똘히 생각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저 너머의 공간은 특급 금고다.”

특급 금고.

들어 본 적 있다.

그곳은 오직 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으나.

가주조차 독단으로 물건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고.

반드시 원로들과 상의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가문에서 기밀로 여기는 것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너에게 말해 줄 수 없다.”

“흠, 아쉽군요.”

어쩔 수 없나. 이 또한 가문의 율법일 테니 말이다.

언젠가 기회가 올 때까지 참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할 때였다.

“정 원한다면 힌트를 줄 수는 있다.”

할아버지?

내 고개가 획 돌아가자.

할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 전에 소가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주겠느냐?”

“소가주라면…….”

소가주.

후계자들은 소가주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생각조차 한 적 없다.

애초에 전생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였고.

구음절맥이 치료되고 화신이 된 후에는 머잖아 가문이 멸망해 사라졌다.

그렇기에 지금에서도 큰 뜻은 없었다.

그저 가문의 멸망을 막고, 나를 죽인 세인트 놈들에게 복수를 마치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 어떤 지위나 권력을 바랐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속한 방파를 키우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는 철저히 세력이 강하고 커야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가주라니…… 무슨 대답을 해야 하려나.’

나의 고민에 할아버지가 거들었다.

“고민되느냐.”

“생각지도 않았던 거라서요.”

“생각지도 않았다니. 잘 됐군.”

그런 대답도 나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대답이든 상관없었던 것인지.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저 벽 너머의 것은 하윤이가 가져온 것이다.”

“어머니가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조금 놀랐다.

“저것의 정체는 이 나도 잘은 모른다. 봉인된 상태이기 때문이지.”

“설마, 어머니가 봉인한 겁니까?”

“그건 모른다. 다만,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 봉인을 뚫고 힘이 새어 나올 정도로 강력하다는 건 알 수 있지.”

어머니가 도대체 뭘 가져온 거지?

궁금해 미치겠다.

“하지만 추측하는 건 있다.”

마휼은 저 봉인된 무언가를 처음 받았을 때.

인간과 격이 다른 무언가가 깃들었음을 느꼈다.

“성좌와 관련된 게 아닌지 싶구나.”

“성좌!”

직접 그 물건을 본 적 있는 할아버지와 내 생각이 비슷했다.

“그런데 참, 이해할 수 없군. 네놈은 도대체 어떻게 느낀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여기선 느껴지지 않을 터인데.”

“그건…….”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로다.”

할아버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말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나를 보며 진중한 눈빛을 보냈다.

“저 너머의 것을 갖고 싶으냐.”

“그게…….”

“괜한 말은 마라, 네 눈에 탐욕이 보인다.”

“네? 아하하!”

이런, 들켜 버렸나.

애써 겸손한 척하려고 했건만 실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저 너머의 것이 영혼인 이상.

미친 듯이 갖고 싶어졌으니까.

“예, 제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훗, 솔직하군.”

할아버지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클클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원한다면 가질 수 있다. 네놈이 소가주가 된다면 말이지.”

가지려거든 자격을 갖춰야 한다.

할아버지는 이를 위해 내게 소가주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현아, 너에게 묻겠다.”

“예.”

“소가주가 될 수 있겠느냐?”

소가주.

지금의 나는 후발주자라 할 수 있다.

이미 한참도 전부터 수많은 후계자가 소가주가 되기 위해 경쟁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소가주를 목표로 한다면. 그들을 제칠 정도로 빠르게 강해져야 할 것이다.

그때였다.

“아니, 말을 잘못했군.”

할아버지가 말을 정정했다.

“너는 소가주가 되겠느냐?”

마치, 원한다면 될 수 있다는 투로.

‘소가주라.’

한번 상상해 본다.

내가 소가주가 된 세상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말이다.

십중팔구 난장판이 될 것 같은데.

태생부터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일까.

나의 행보에 반발하고 일어서는 자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그런 이들을 향해 힘과 권력을 풀로 스윙하는 내 모습이 선명했다.

뭐가 됐든, 내가 가문 위에 서게 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지금의 나처럼.

아주 귀찮고 시끄러워지겠군.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씨익.

“정점에 오르는 것도 재밌겠군요.”

어차피 후계자 중에선 내가 그나마 낫다는 걸 전생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다.

다른 누가 그 자리에 앉는 것보단 내가 앉는 편이 괜찮겠지.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클클클, 말 한번 재밌게 하는구나. 앞으로 계획은 있겠지?”

“네, 우선 조만간 게이트를 가 볼까 합니다.”

게이트의 마물을 토벌해서 레벨을 높이고, 그들을 하수인으로 만들어 근원의 힘을 키울 것이다.

그다음에는 공적치를 쌓기 위해 본격적으로 탑을 오를 예정이었다.

“그렇군, 도와주마.”

“음, 가주님은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훗, 그놈의 중립.”

할아버지가 가볍게 웃었다.

조금은 씁쓸한 미소였다.

“중립만 지키니 중립 외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겠더군.”

잃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더랬다.

마휼도 그러했다.

중요한 건 중립이니 규율이니 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앞으로 내 마음대로 살 거다.”

진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 들으면 까무러칠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다.

“암익파가 들으면 물어뜯기 좋은 말이군요.”

“명심하는 게 좋을 게다. 네놈도 나와 공범이 되었으니까. 클클클.”

“공범이라.”

설마, 할아버지께 이런 농담을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전생의 할아버지는 늘 생명의 불씨가 꺼질 듯 말 듯했기에.

이럴 여력이 조금도 없었다.

“흐흐, 뭐가 됐든 함께한다니 좋군요. 저질러 봅시다!”

“클클클!”

마휼은 왠지 마현과 말이 길어질수록 강하게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오늘이 첫 만남이나 다름없을 터인데.

왠지 오래전부터 쭉 이어진 인연 같았다.

“네놈에게 숙제를 내주마. 1주일 안에 15레벨을 만들어라.”

“15레벨이라면…….”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마문윤과 할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는다.”

내가 공략대에 갈 기회를 만들어 줄 생각인 것이다.

“할 수 있겠지?”

레벨을 올린다는 것은 마물을 죽여야 하는 것.

1주일 만에 5레벨이라고 하면 필히 나보다 강력한 마물들을 죽여야 한다.

보통이라면 불가능하기 짝이 없는 요구다.

하지만.

“저를 제대로 보셨군요.”

나는 할 수 있다.

“해내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요한 걸 챙겨가면 되겠군.”

관건은 1급 금고에서 마현의 힘을 키워 줄 아이템을 고르는 것이다.

이곳에서 눈감고 아무거나 가져가도 분명 그 가치를 할 테지만.

신중할 필요는 있다.

‘어차피 여기있는 것들은 다 탑에서 나온 전리품이다.’

즉, 언젠가 내가 구할 수 있는 것들도 더러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구하기 어려운 편이 좋겠어.

내 성장 속도에 쉽게 따라잡히지 않고 오랫동안 쓸 수 있는 거로.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얼추 수백이 넘는 이 아이템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까.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이 많은 것들을 다 둘러볼 필요는 없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이끌었다.

“이처럼 보물이 쌓여 있는 곳에서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하지.”

무턱대고 좋아 보인다고 고르면 안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필요한 것을 중점으로 고르라고 했다.

“공부와 절교한 네 녀석에겐 이런 것도 좋겠군.”

그것은 학습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는 ‘스킬북’으로.

할아버지는 단거리 순간이동 스킬인 ‘블링크’를 추천했다.

확실히 블링크 정도의 마법이라면.

모든 순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언제든 적의 방심을 노릴 수 있다.

“네 녀석의 근원과 어울리는 이것도 잘 어울리겠군.”

그건 내게도 익숙한 아티팩트였다.

‘군주의 팔찌!’

착용하는 것만으로 하수인들의 능력치가 향상되며 갑옷을 두르게 된다.

소환 계열 근원을 타고난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아티팩트였다.

이 팔찌를 얻기 위해서는 수천의 하수인을 다루는 오버로드를 죽여야 하기에 구하기도 힘들었다.

다음은 수많은 도검이 진열된 곳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너는 검을 잘 쓰더구나.”

마휼의 말대로 모두가 마현의 검술에 의문을 지녔다.

다양한 이유로 놀랐지만.

무엇보다 납득할 수 없는 건 마현의 검술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이다.

마치, 검술 명가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난감한 순간이 왔군.’

구음절맥도 그렇고 검술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쉽사리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상식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해결하거나 성장시킬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시간이 흘러도 결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궁금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유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궁금하긴 하군.”

“그런데도 안 물어보시려는 겁니까?”

“그래. 나는 묻지 않는다.”

의외였다.

나 같으면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바닥에 꽂힌 수많은 검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 그것에 관해 묻거든 답하지 말아라.”

그 누구에게도 말이다.

가장 소중한 이들에게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마라.

스릉―

바닥에서 뽑힌 명검 한 자루를 내게 보였다.

날카로운 검날로 서슬 퍼런 예기가 은은하게 드러났다.

“비밀이란, 지켜질 때 가장 큰 무기가 되기 마련이니까.”

아, 그런 거였나.

할아버지는 이미 내가 말해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 비밀을 지켜 줄 생각까지 하고 있던 것이다.

‘역시 할아버지인가.’

새삼 깊은 연륜이 느껴진다.

“이 검이라면 네놈의 그 잘난 검술에도 격이 맞겠지.”

명검. 청명월광검(淸明月光劍)

달빛처럼 투명한 푸른빛이 검신에 흐르는 검이었다.

검술의 궤적에 맞춰 예기를 발산하는데.

명검답게 달이 뜨면 사용자의 육신이 향상되고 더욱 날카로운 예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분명 처음 보는 것일 텐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비슷한 검을 봤을지도 모르고.

“내 추천은 여기까지다. 이 중에서 고른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할아버지가 골라 준 것들은 하나같이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것들이다.

세 아이템 모두 이 금고에서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니까.

말씀대로 뭘 선택하든 후회할 일은 없겠어.

하지만 좀처럼 선택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나같이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니까.

거기에 각각의 장단점이 분명했다.

‘블링크’는 찰나에 단거리를 순간 이동할 수 있지만.

연속 사용이 어렵고, 타인의 마력으로 장악된 공간에서는 지장이 있다.

대상의 보호막 안에 들어갈 수 없고, 온몸으로 마력을 발산 중인 대상의 곁에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블링크의 효용이 떨어지지.

수준 높은 검사들은 블링크의 스킬 이펙트를 확인하는 순간.

기감으로 예상 위치를 특정할 수 있고, 재빠른 속도로 블링크 못지않게 거리를 좁힐 수 있다.

요점은 내 부족한 이동기를 채워 주며 유틸성이 뛰어나지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무의미해질 수 있다.

‘군주의 팔찌’도 마찬가지지.

하수인이 강해지고 갑옷을 두르는 것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특히 레이드 할 때의 안정성은 무시할 수 없지.

문제는 갑옷을 입게 되면서 행동에 제약이 생기게 된다.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라면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하수인이란 생전에 비해 굼떴으니 조금 더 굼뜬 건 큰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많이 버텨 주는 편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난 아니야.

진각성을 거친 후, 나의 하수인은 생전의 움직임을 유지한다.

나아가 회복을 할 수 있지.

군주의 팔찌는 그런 점에서 내게 양날의 검과 같다.

현재 지닌 나의 강점을 조금 내려놓아야 하니까.

요점은 안정성이 강화되는 대신, 하수인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명검 ‘청명월광검’.

사실 단점이랄 건 없다.

검사로서 좋은 검을 지닌다는 건 필수 불가결한 요소니까.

다만, 앞서 두 아이템이 내게 부족한 점을 채워 주는 거라면.

검을 선택한다는 것은 오직 나의 검술로서의 강점만을 살리는 것이다.

요점은 공격의 극대화다.

“후…….”

“고민되느냐.”

“예, 쉽지 않군요.”

“훗, 시간은 많다.”

마현이 집중할 수 있도록 마휼은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사실, 다 좋다.

단점을 생각해 봐도 말이다.

다만.

‘뭔가 부족한데.’

분명 다 좋은데.

뭔가 이거다 싶은 게 없다.

어째서지?

왜 선뜻 마음이 일어서지 않는 걸까.

어느 것을 선택해도 모범 답안일 것이며.

그것이 곧 정석으로 받아질 터인데 말이다.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고민만 깊어지는 때였다.

― 움찔

음?

그건 손바닥만 한 수정구였다.

스산한 빛으로 물든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찔거렸다.

‘봉인구잖아.’

요컨대 마물을 봉인하는 아이템이다.

거기에 이미 마물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1급 금고에?

“할아버지, 저건 뭐죠?”

“아, 저건…….”

마현이 가리킨 것이 뭔지 이해하자 마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지금 네놈이 감당할 수 없다.”

“지금 제가 감당할 수 없다고요?”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어딘가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느낌.

“그거 정말…….”

씨익.

“마음에 드는군요.”

어쩐지 보자마자 내 꺼다 싶었다.

53화. 행복이 별거냐

“고얀 놈. 결국 고집을 부리는구나.”

“하하, 저도 저를 어찌할 수가 없군요.”

어쩔 수 없다는 말과는 달리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이미 마현의 손에는 ‘봉인구’가 있었다.

어차피 스킬이나 아티펙트, 명검 같은 것들은 탑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물론, 그렇기에 가능한 한 구하기 어려운 것들로 선별했던 거지만.

제아무리 그것들이 희소하다고 한들, 이 봉인구 속 마물만 못하다.

‘심연의 크로코달루스라고 했지.’

기본적으로 한평생 찾아볼 기회조차 드문 녀석이다.

녀석이 있는 곳은 ‘그림자 군도’.

과거 공략대가 7번 넘게 실패한 차원이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이 녀석이라고 한다.

레벨에 비해 그 힘이 너무 강해 봉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전투가 일어나는 각 차원에는 ‘레벨 제한’이 존재한다.

시스템의 보호를 통해 형성된 그 제약으로 외계 성운의 무분별한 침공을 막을 수 있었고.

필멸자들은 뜬금없이 격이 다른 마물과 마주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

즉, 레벨 제한은 인류의 방패이자 성장을 위한 울타리로써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

수많은 이레귤러가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레벨로 힘을 규정할 수 없는 놈이다.

‘이놈처럼.’

심연의 크로코달루스는 환경에 따라 크기와 힘을 포함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둠이 짙게 깔리는 곳에서는 거대하고 강력하다.

온 세상이 짙은 어둠으로 이루어진 그림자 군도에서 녀석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었다.

물론, 반대로 빛이 밝은 곳에서는 작고 약해지는 약점이 있지만.

그렇다 한들 지금의 내가 놈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 미치겠군.’

눈앞에 맛있는 게 있는데 그게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이 괴롭다.

하지만 그래서 흥분되는 거다.

그런 녀석을 내가 거두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이곳의 그 어떤 보물들보다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테니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물론, 이걸 선택하면 당장에 힘이 되지 않겠지만.

그 또한 전혀 상관없었다.

히죽.

그야, 그렇지 않은가.

‘내게는 구천마제 신공이 있으니까!’

하물며 이미 3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거기에 근원의 힘으로 앞으로 하수인을 모을 수 있다.

즉!

굳이 1급 금고의 보물들이 아니어도 강해질 방법은 충분히 넘쳐나는 것이다!

‘아아, 이런 게 세상을 혼자 산다는 건가.’

너무 좋군.

매일 누리고 싶을 정도야.

봉인구 속이 갑갑한지 마물은 계속해서 바둥거렸다.

나는 그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다려. 머잖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 줄 테니.’

― 움찔!

어째서인지 봉인구의 떨림이 잠잠해졌다.

마휼은 그런 마현의 생각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네놈, 이 녀석을 부릴 생각이군.”

“네, 맞습니다.”

“원래라면 터무니없는 소리라 할 테지만. 뭐, 됐다.”

심연의 크로코달루스는 원래 네크로맨서가 하수인으로 삼을 수 없다.

‘심연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마물들은 대체로 죽으면 어둠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휼은 이미 마현이 사역마를 하수인으로 부리는 것을 본 바.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현이라면 하수인으로 삼을 방법이 있으리라 여겼다.

‘클클. 참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로다.’

천재라 불리는 놈들도 못 하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쉽게 해낸다.

온통 비밀로 가득한 마현은 보면 볼수록 더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녀석에 대해 알아 가는 맛이 있을 게 분명했다.

‘훗, 이러다 빠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스스로도 어이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장에 자신이 조금 변화했더라도.

누군가에게 빠져든다는 것은 한평생 냉혈한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형식상의 보상은 여기까지다. 영약은 약당에서 직접 전달해 줄 거다.”

“형식상이라면?”

“그래, 설마 소가주로 만들어 준다는 내가 고작 이 정도로 끝낼 거라 생각했느냐?”

마휼은 마현을 이대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하나쯤은 더 안겨 주고 보내려는 것이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뭐든 좋으니.”

“할아버지…….”

“쯧, 가주님이라 부르라 했거늘.”

혀를 차는 그의 얼굴은 밝았다.

“혹여나 거절은 마라.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일종의 속죄이기도 하니까.”

딸과 손주를 방관한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후회다.

비록, 그 손주가 잘 자라 이 자리에 있고.

녀석이 제법 자신을 좋게 봐 주는 것 같지만.

적어도 그때 내린 선택의 결과를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을 수밖에 없겠군요. 비싼 것도 되나요?”

“……가능한 선에서 해 주지.”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무엇을 부탁드리는 게 좋을까.

마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골라 준 세 개 중에 하나를 달라고 할까?’

그렇다면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될 터다.

하지만.

‘틀렸어.’

이 안에서 유출되는 보물들은 기록에 남는다.

이는 가주직 남용으로 보일 수 있고.

암익파 세력에 딱 좋은 먹잇감을 주는 것과 같지.

할아버지야 해 주실 것 같긴 하지만.

나로서는 할아버지가 가주로서 건재하실 때가 가장 든든한 힘이다.

그편이 앞으로도 유리하게 굴러갈 테니까.

즉, 가문의 재산을 요구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선택은.

‘할아버지 고유의 자산 내에서 결정하는 거겠군.’

할아버지는 가주 이전에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랭커였다.

지금은 나이를 먹고 후계 양성을 위해 은퇴했지만.

오늘날까지 쌓아 온 경험과 명성은 헛되지 않았다.

또 그 둘 못지않게 쌓아 온 것이 있다.

“마침 필요한 게 있습니다.”

“말해라.”

인맥.

“특무대 신수정 소령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분께 최고의 인재가 이곳에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 * *

가주전을 나왔을 때는 이미 달이 뜬 밤이었다.

“할아버지도 참, 괜찮다고 했는데 말이지.”

내 부탁을 들은 직후 할아버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고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내 주머니에 강제로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까맣고 네모난 그것은 ‘블랙카드’였다.

경제적 자유를 내게 준 것이다!

― 클클, 네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듯이. 내 고집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카드가 생겼다.

피식.

‘요긴하게 써 드리겠습니다.’

모처럼 할아버지와 첫 만남이 잘 풀린 것 같아 발걸음도 가볍다.

어느새 가문 외곽에 있는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 이틀 만에 돌아오는 건가?’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왠지 길게도 느껴졌다.

‘흐흐, 한라랑 고동석이 깜짝 놀라겠지?’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지 않은가.

솔직히 사신관 시험에서 꼼짝없이 패망할 거라 의심치 않았을 거다.

둘은 마지막까지도 내 걱정을 놓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후계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고동석은 몰라도, 한라는 놀라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피식.

‘보나 마나 자기가 나를 키워 냈다며 좋아하겠지.’

벌써부터 뿌듯해하는 그 얼굴이 선명하다.

기분 좋게 저택 문을 열었다.

끼이익―

“다녀왔……?”

저택 안은 온통 캄캄했다.

어디에서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달빛이 내리는 바깥이 더 밝아 보일 정도다.

“한라?”

그리고 수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 기척을 숨기려고 작정한 것처럼.

“…….”

‘견제인가.’

후계자가 되었으니 견제가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소가주직을 두고 경쟁한다는 것은 방파끼리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그런 점에서 아직 방파의 규모며 세력이 열세한 나는 좋은 먹잇감이다.

암익파인가?

아니면 다른 놈들?

한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니까.

나는 저택에 숨어든 자가 있는지 보기 위해 영안을 켰다.

어둡기만 했던 저택이 흑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저택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수는 스물이 넘는군.

거기에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

그곳은 내 침실.

그리고 그곳에 한라도 있었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한라를 중심으로 서 있는 것이다.

“……하.”

차분하게 돌아가는 머리와 달리.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었다.

어떤 놈일까?

누군들 상관없다.

선을 넘는다면 나 역시 넘을 수밖에 없으니까.

마현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신관 전과는 달리 그 움직임은 마치 유령의 움직임처럼 신속하고 기척이 없었다.

그렇게 2층의 문 앞에 당도했을 때.

마현은 조용히 검을 뽑았다.

그렇게 한차례 심호흡하고 다음 순간.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

콰앙!

“누가 감히 내……!!”

“꺄아악!”

“으아아악!”

“뭐, 뭐야앗!”

‘뭐, 뭐지?!’

왜 너희가 놀라는 거냐!

딸깍―

침소의 불이 켜진 것은 그때였다.

그러자 마현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놀랄 수밖에 없었으니까.

“도, 도련님?!”

“마, 마현 님이다!”

한라와 고동석.

그리고 고동석의 흑검대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고깔모자와 폭죽을 들고서!

“너희들, 이게 무슨…….”

“후, 후계자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퍼벙! 펑!

불협화음으로 터지는 폭죽들.

그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파티였음을!

“설마, 나를 위해서?”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누구 도련님인데요.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죠! 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내가 가주전을 다녀오는 사이.

한라와 고동석들은 이미 내가 후계자가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제길,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솔직히 무척 당황스럽다.

전생을 거친 나로서는 이런 상황은 늘 인질극과 암살을 시도하려는 놈들과의 사투였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직, 나를 위해 축하하는 일이 없었다.

이제 이를 어쩌면 좋지?

그때, 한라가 박살 난 문짝을 들어 올렸다.

곧 울상이 된 표정을 지었다.

“히잉, 이거 어떡하죠?”

“음…….”

침음성을 흘리는 고동석과 흑검대원들.

나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으악…….”

커다란 수제 케이크가 부서진 문짝에 납작하게 짜부라진 것이다.

촛대는 부러진 채 케이크 속에 파묻혀 있었다.

먹지도 쓰지도 못하게 된 케이크.

초코 시럽으로 레터링된 글씨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현 도련님은 절대 무적!』

한라가 직접 쓴 듯한 유치하고도 귀여운 글귀다.

‘허허허.’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

축하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이따위로 날려 먹는 건가.

“어…….”

“음…….”

“흠…….”

모두가 이 파티가 시작과 동시에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마현은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회귀 후 첫 파티다.

내가 망치긴 했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내가 바라 온 순간이기도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니까.

그러니.

‘절대 이대로 끝내지 않겠다!’

“동작 그만! 지금부터 모두 내 말 잘 들어.”

모두의 시선이 마현을 향했을 때.

마현은 주머니에서 그것을 집어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척!

거멓고 네모난 물체.

블랙카드가 영롱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과연 그 자유의 상징을 못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저, 저건 설마.”

“다 따라 나와. 내가 쏜다!”

“와아아아!”

“마현! 마현! 마현!”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그 첫 번째.

먹고 싶은 걸 먹는다.

그 두 번째.

공짜로 먹는다.

‘역시 돈이 좋군.’

행복이 별거냐.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거늘.

마현을 따라나서는 고동석과 흑검대원들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피었다.

“앗싸! 오늘 아주 불살라 보는 거예요!”

한라도 한껏 웃으며 따라나섰다.

54화. 숭고한 달의 여인

또각또각.

사신관 시험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지영’은 제 아들인 마기헌이 머무는 처소로 향했다.

아직 어떠한 소식도 듣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아들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듣는 편이 더 기쁠 테니까.

‘뭐, 안 봐도 뻔하지만.’

음,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내 아들들은 너무 잘났거든.

맏이인 마재헌은 말할 것도 없고.

마기헌도 어려서부터 온갖 스킬을 섭렵했으니.

사신관 시험 따위는 그저 거쳐 가는 관문에 불과하지 않겠어?

‘하, 너무 잘나도 탈이랄까? 후후.’

벌써부터 뿌듯한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마침내 마기헌이 있는 침실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어, 어머니…….”

“기헌아!!”

그 자랑스러운 아들이 팔 한쪽을 잃었다는 사실을!

“너, 팔이, 팔이 어떻게 된 거야!”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

아무리 봐도 팔 한쪽이 없잖아!

마지영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사신관에서 마기헌에 대적할 만한 후예는 없었다.

시험 자체에서도 마찬가지.

그 무엇도 마기헌을 이렇게 만들 요소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때 마지영의 뒤로 그녀의 아버지이자 암익파주인 마광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마광익은 사신관을 박차고 나간 후,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혔고 이성이 돌아왔다.

그제야 자신이 손주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조금 실망스럽긴 했어도, 미안한 마음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네, 네 녀석 팔이 어떻게 된 거냐!”

그 짧은 사이에 손주 녀석의 팔이 없어졌다!

“하, 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아니, 아버지는 왜 모르시는 거죠? 지켜보신 거 아니었나요?”

“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마광익도 혼란스럽긴 매한가지다.

잠깐 안 본 사이에 팔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제,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마기헌이 충격에 물든 둘에게 자초지종 설명했다.

시작은 대성좌와 계약한 사실부터였다.

“아들! 아아, 역시!”

“정말 대성좌와 계약을 했단 말이냐?”

“아니, 아버지는 어째서 모르시는 거죠?”

대성좌라는 말에 순간 둘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그 자체로 경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근원이 디아볼로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하긴, 누군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천재 중에 천재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저는 반드시 마현, 그놈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크읏, 놈이 간악한 수를 써서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마현을 죽이고자 유도했던 후계대전.

그곳에서 오히려 패하고 한쪽 팔이 잘리게 된 상황을 전해 들었을 때.

마광익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듣기에는 마기헌이 악수를 둔 것처럼 들렸다.

대성좌와 계약한 이상 후계자는 이미 떼 놓은 당상이었는데.

일부러 후계 대전을 열어 승부를 통해 후계자격을 얻으려 한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럼, 후계 자격은 어떻게 된 것이냐……?”

중요한 건 후계자가 되었느냐다.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결국 마기헌의 가치는 우려했던 최악으로 떨어진다.

즉, 암익파가 마가를 장악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수치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는 마기헌.

마광익은 굳은 얼굴로 일어났다.

“쯧, 머저리 같은 놈.”

“하, 할아버지.”

“누가 네놈의 할아버지라는 게냐!”

“아버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획 돌아선 마광익은 대꾸도 하지 않고 떠났다.

그가 떠나는 발걸음 뒤로 방문이 부서질 듯이 닫힐 뿐이었다.

쾅!

“아아, 할아버지…….”

우려했던 결과.

마기헌은 할아버지의 실망을 진즉에 예상했지만.

분개하며 떠나는 그 모습에 속이 쓰라렸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싶었다.

“너무 개의치 말거라. 네 할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바라봐 줄 거란다.”

“……크윽. 어머니.”

“아들…….”

주르륵―

이를 악무는 마기헌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았다.

어지간히도 분하고 슬픈가 보다.

그런 제 자식의 모습에 마지영도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마기헌의 모습이 과거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으니까.

사신관에서 패배한 것도.

팔을 잃어버린 것도.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는 것도.

마하윤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날과 똑같았다.

싸늘한 강철 의수의 감촉.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과 고통.

그리고 또다시 반복된 역사.

빠드득.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분노를 들끓게 했다.

‘감히, 나로도 모자라 내 아들까지……!’

마하윤이 죽었으나.

여전히 그 뿌리가 남아 자신들을 좀 썩게 하다니!

‘마현, 이러고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니?’

그렇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마하윤은 손쓸 틈도 없이 강해졌고, 또 한순간에 죽었지만.

너는 아니다.

‘이 내가 어떻게든 고통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해 줄 테니까!’

물론, 놈이 후계자가 된 이상, 가문의 요인으로 치부된다.

함부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오히려 암익파의 대업에 화를 부르는 꼴.

섣불리 수를 쓰기보단 시간을 들여 조금씩 목을 졸라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니, 절대 그럴 생각은 없어.’

마지영은 전음으로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

― 삼 형제에게 확실하게 전해.

삼 형제.

그들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천한 잡놈들.

여태껏 맡긴 일에 실망을 준 적이 없을 정도로 일 처리는 봐 줄 만하다.

마현, 네놈이 나의 소중한 아이를 상처 입혔으니.

‘이번엔 내가 네놈의 소중한 사람을 부수는 게 순서가 맞겠지.’

어미, 아비도 없는 놈이라 그런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라.

놈은 그녀와 만큼은 제법 살가운 사이인 모양이다.

― 그년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

감히 내 아들을 건드린 벌.

달게 받아야 할 거야, 마현.

그녀의 눈이 표독하게 번뜩였다.

* * *

지끈거리는 머리.

마현은 깨질 듯한 이마를 감싸 쥐며 눈을 떴다.

“끄응, 여긴…….”

내 방이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 아래에서 처자고 있었다.

그때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순간이 번쩍였다.

― 도련님도 제법 술에 강하시군요!

― 이 정도는 마가 일족의 기본 소양이지!

― 한 잔 더! 한 잔 더!

― 제하하하! 저희는 도련님이 너무 좋지 말입니다!

― 하하하!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죽을 때까지 적시는 거다!

― 가즈아!

짠―!

‘그런 거였나.’

이제야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알게 됐다.

지난밤, 광란의 파티를 즐긴 것이다.

피식―

“다행히 꿈이 아니었구나.”

살면서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을 일이 없었다.

축하뿐이겠는가, 다 같이 모여 파티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가문의 균열이자 사생아로서 나를 향한 모든 시선은 곱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무능하기까지 했으니, 애초에 나란 놈은 축하를 받을 그릇이 못 됐다.

하지만.

씨익.

‘밤중의 파티는 성공적이었지!’

할아버지의 블랙카드는 최고였다.

근처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곳에서 충분히 분위기를 낼 수 있었으니까.

‘흑검대 미친놈들.’

혹여나 내 눈치를 볼까 봐, 오백만 원 이상 쓰지 않으면 집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영수증에는 천오백만 원이 넘었다.

비싼 술을 물처럼 마시면서, 밥을 무자게 먹어 버린 것이다.

정말 눈치를 조금도 보지 않는 녀석들이었던 것.

와중에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한라도 먹는 걸 좋아했던가.’

맛있는 것들이 줄지어 나오자 한라는 눈을 빛내며 쉬지 않고 먹었다.

흑검대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먹는 것도 있었다.

배가 남산처럼 커질 때까지 먹었지.

맛있는 것들로 배를 채우자 기분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피식.

한라, 웃기네. 아주 웃겨.

지금도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어째선지 가슴이 찌르르 울리기도 했다.

남이 먹는 모습을 보는데 뿌듯함이 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게 행복이지.’

역시,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좋아.

앞으로도 이런 시간으로 인생을 채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런 나날을 보내기 위해서는.

다가올 가문의 멸망을 막고, 세인트 놈들을 저지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냐.”

박살 난 문짝에 어질러진 방 안.

그중에서도 한라가 급하게 만들어 왔다는 수제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납작하게 짜부라져서 쓰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이것을 무자비하게 치워야 한다니 조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여기 있구만.”

나는 작은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 난장판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이 순간을 사진으로 담는다면 제법 오랜 시간 추억할 수 있을 테지.

이제는 볼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말이야.

찰칵찰칵―

나는 이 현장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였다.

― 흐음……. 마치, 범죄 현장을 찍는 듯하구나. 미적 감각이 이리도 전무해서야…….

“숭달여!”

다음 순간, 손바닥만 한 ‘칠흑으로 빛나는 달’의 상징체가 떠올랐다.

성좌―화신 관계가 되면 지금처럼 직접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 숭달여? 음, 그래 뭐 아무렇게나 부르거라.

본래라면 성좌의 수식언을 줄여 부르는 것은 무례한 행위라고 하지만.

그녀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는 편하고 효율적인 걸 중요시하던 그녀였으니까.

― 어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구나.

“너도 지켜보고 있었구나?”

― 그래, 모두가 흥겹게 파티를 즐기더구나.

과연, 숭달여 또한 나의 눈으로 그 파티를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 나만 빼고 말이지…….

“수, 숭달여?”

― 서운했다…….

서운했던 것이다!

파티에 끼지 못해서!

무려, 그녀는 성좌다.

인간 같은 필멸자 따위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성좌.

제아무리 최하급 성좌라 하여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안 찾을 줄은 몰랐다.

‘이 내가 뒷전이라니…….’

너무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화신이 되었다면.

막 성좌에 대해 관심이 깊을 때가 아니던가!

하지만 상황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고.

그녀는 방구석에서 마현의 눈으로 파티를 지켜보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 나도 파티를 좋아한단다. 앞으로는 나를 빼 주지 않으면 좋겠구나.

“미안해. 경황이 없었어.”

사실 그녀는 진즉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다.

“나를 위해 조용히 있어 준 거지?”

그녀는 자신의 권위보단 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성좌였으니까.

나의 시간과 감정을 최우선으로 여겨 준 것이다.

이제 막 계약을 한순간이었음에도.

“고마워.”

― 흥, 제법 생각이 깊구나. 알아주니 됐다.

숭달여는 적당히 말이 통한다고 느꼈는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 별자리 연회장에서는 경황이 없었지만. 이제는 들을 수 있겠구나.

“응?”

― 어째서 나를 선택한 것이냐?

숭달여는 지금도 마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저 처음부터 너뿐이었으니까.’

크흡.

어떤 성좌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화신에게 이런 고백을 받은 자는 없었다.

‘후, 생각만 해도 더워지네.’

기분이야 좋았지만.

아무튼 이유를 알고 싶은 그녀다.

그래야 마현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할 수 있으니까.

― 이유가 뭔지 말해 다오.

마현은 말을 고르는 듯이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냥…….”

― 그냥?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이더라고.”

하!

이 녀석…….

‘선수인가!’

숭달여의 상징체가 요동치듯 빛나기 시작했다.

마현은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통했군.’

내 말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이다!

― 크흠! 네 이놈! 요망하구나!

“하하하!”

역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숭달여의 말에 노기 하나 없었으니까.

아무렴 그렇지. 전생에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내가 그녀를 모를까.

― 하……. 이래서는 원…….

그녀는 내심 성좌로서의 위엄을 지키고 싶었는데.

마현은 이미 자신을 일반적인 성좌―화신 관계처럼 여기지 않았다.

이미 반평생을 함께한 듯한 친숙함을 보였다.

‘으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어.’

분위기가 좋은 지금.

마현에게 최하급 성좌와 계약한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알려 주기로 결정했다.

뒤늦게 그가 알고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응?”

― 너는 성좌의 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성좌의 격?”

성좌의 격은 흔히 최하급에서 대성좌로 나뉜다.

이는 단순 힘의 세기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 최하급 성좌는 그 존재가 온전치 못하다. 격이 낮아 살아생전의 기억 대부분이 봉인되어 있지.

막 성좌가 된 존재들은 그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기억만이 아닌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이는 성좌가 되기 전 맺어진 은원의 고리가 현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약 성좌가 되어서도 생전의 기억을 간직한다면, 그 힘으로 원한을 품었던 이들을 해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최하급 성좌는 전해 줄 수 있는 스킬도 몇 안 된다.

격을 높여 봉인된 기억을 풀어야 스킬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실망……했느냐?

검은 달이 조심스러운 빛을 띠었다.

자신을 그렇게 원하는 마현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최하급 성좌인 자신을 고를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알고 있어.”

마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거 격을 높이면 해결되는 거잖아.”

― ……?

“탑을 오르면서 공적치를 달성하면 해결되는 문제. 맞지?

― 맞다.

“그럼 문제없어.”

문제없다?

고작 그렇게 치부할 수준의 안건이 아니었다.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에 수많은 성좌가 최하급에서 벗어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마현은 자신 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 감은 확실해.”

씨익.

“너는 최고의 성좌야.”

그 말에 숭달여는 쉽사리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자신을 저리 신뢰한단 말인가.

마치, 미래를 보고 온 듯한 확신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 하! 너, 제법 시원하구나.

숭달여는 더욱 마현이 마음에 들었다.

나아가 마현의 거침없는 생각에 그녀 역시 힘이 솟는 느낌이었다.

― 나와 함께하는 한, 반드시 후회하지 않게 해 주마.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화신이었다.

마현도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두 번째 첫 만남.

하지만 전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달리 무기력하고 무능력했지.

숭달여의 선택을 막 받았을 적에는 쩔쩔매느라 바빴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뭣도 없었으니까.

그녀로서는 아마 많이 답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부단히 나를 일으켜 세우고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숭달여를 대성좌로 만들어 주진 못했지.’

온전한 존재, 모든 기억을 되찾고 싶어 했던 그녀였지만.

내가 부족해 이루어 주지 못했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한 삶.

‘이번에는 반드시 정점에 올려 주겠어.’

그녀를 대성좌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똑똑똑!”

그때였다.

“한라?”

한라였다.

방문이 없어 그녀가 직접 입으로 인기척을 낸 것이다.

“요청하신, 세인트 길드 및 던전 정보를 조사해 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파티를 마치고 그녀에게 조사를 부탁했었다.

벌써 다 해 온 건가?

한데, 한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순간 한라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고, 나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살짝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옅은 분홍빛을 띠었다.

― 흐음, 과연 내 화신인가?

‘무슨 소리야.’

내가 어제 술 마시면서 무슨 짓을 했나?

한라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 눈이 간신히 나를 향했다.

“오늘 제게 소원권을 청구하신다고요……?”

55화. 아찔한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