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

40화

격신술을 운용하자 영근 주변으로 도문이 피어나고 영혼이 타오르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신식이 급속히 증폭하며 사고 속도가 가속되었다.

강화된 신식은 벽각우의 영압에 한결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장호연은 빨라진 사고 속도를 통해 영수들과 더욱 긴밀하고 신속하게 의사를 교환했다.

그 결과 한층 짜임새 있는 연계 공격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장호연이 벽각우의 주의를 끄는 동안, 백호는 더욱 효과적으로 술법을 펼쳐 놈의 발을 묶거나 요력이 실린 흙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방해했다.

그 덕분에 금령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공격 기회가 주어졌다.

카가강!

금령이 고속으로 이동하며 벽각우 위를 지날 때마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불꽃이 터져 나왔다.

금령의 몸 주위로는 연한 푸른빛의 풍속성 영기가 소용돌이치며 비행 속도를 가속시켰다.

바람의 신속함과 금속의 예리함을 동시에 지닌 금령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궁지에 몰린 벽각우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기이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동시에 붉게 충혈된 두 눈에 섬뜩한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그와 동시에 장호연의 시야가 흐릿하게 왜곡되며, 절벽으로 가로 막혀 있던 풍경이 삽시간에 변했다.

사방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환술!'

장호연이 알기로 벽각우에게 이러한 신통은 없었다.

이처럼 정교한 환술은 보통 여우나 뱀 요수에게서 발견되는 신통이었다.

장호연이 주변을 살피는 사이, 우측에서 거대한 화염이 그를 덮쳐왔다.

너무도 선명하고 생생한 감각은 그것이 진짜라고 말해주었다.

장호연은 화염을 피하고자 좌측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백호가 다급히 의지를 전해왔다.

장호연은 반사적으로 백호가 알려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가 피하려고 했던 방향에서 강력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어서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르릉!

곧이어 환술의 장막이 걷히며 현실의 풍경이 돌아왔다.

벽각우는 양 뿔에 노란 번개를 휘감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자신이 서 있던 자리 뒤편의 절벽이 강력한 뇌격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진 것이 보였다.

벽각우의 번개 공격은 놈이 지닌 가장 강력한 신통이었다.

만약 공격에 적중당했다면, 연체술이고 뭐고 그대로 통구이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위험천만한 순간을 넘긴 장호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백호를 칭찬했다.

벽각우가 환술을 펼쳤을 때, 땅속에 있던 백호 역시 그 범위 안에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백호는 환술에 속지 않고 진짜 벽각우의 위치와 공격 방향을 정확하게 감지하여 알려주었다.

이는 백호의 영각이 단순히 기운을 추적하는 것을 넘어, 환술과 같은 정신적인 기만까지 간파할 정도로 발달했음을 의미했다.

강력한 신통을 연달아 사용한 벽각우는 눈에 띄게 지친 기색이었다.

장호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저물대에서 백여 장이 넘는 부적을 꺼내 들었다.

두 장은 고장풍이 준 2계 양품 난풍부였고, 나머지는 과거 관가 무리를 처리했을 때 얻었던 1계 부적들과 자신이 제부술을 연습하며 모아온 것들이었다.

가족과 지인들이 위험에 처했을지 모르는 상황에 부적 따위를 아낄 이유는 없었다.

장호연은 망설임 없이 모든 부적에 영력을 불어넣어 벽각우를 향해 날렸다.

화염이 작렬하고, 얼음송곳이 쇄도하며, 날카로운 금빛 검기가 벽각우를 향해 폭풍처럼 쏟아졌다.

1계 부적들은 벽각우의 방어력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놈의 요력을 어느 정도 소모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난풍부는 격렬한 바람 칼날이 되어 벽각우의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들을 남겼다.

장호연의 마음을 읽은 금령과 백호도 요력을 아끼지 않고 벽각우를 공격했다.

벽각우는 뿔에서 번개를 분출해 반격을 시도하거나, 번개로 이루어진 구형 보호막을 펼쳐 방어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 사람과 두 영수의 절묘한 협공에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마침내 벽각우가 바닥에 쓰러졌다.

놈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콧구멍에서는 가쁜 숨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요수의 육체가 강력한 이유는 내단과 정혈이 품고 있는 기운 때문이었다.

요력이 고갈된 벽각우는 이제 속세 무인의 칼에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벽각우는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광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는 본래의 검고 순한 빛을 되찾았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송아지처럼 두 눈에는 더 이상 악의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을 선회하던 금령이 소리 없이 땅으로 내려왔다.

금령은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쓰러진 벽각우를 바라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땅속에서 쏙 하고 튀어나온 백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벽각우에게 다가갔다.

뛰어난 영각을 지닌 백호는 벽각우의 기력이 완전히 다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백호는 벽각우의 코를 앞발로 툭툭 건드리더니, 마치 자신이 벽각우를 쓰러뜨린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했다.

장호연은 신식을 집중해 벽각우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던 중 그는 벽각우의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했다.

'이건?'

장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벽각우의 심장에서는 3계 요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요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 기운은 앞서 벽각우의 환술에 당했을 때 느꼈던 섬뜩한 기운과 동일했다.

온순한 것으로 알려진 벽각우의 비정상적인 광기와 환술 능력이 바로 저 기운 때문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장호연은 숨을 몰아쉬는 벽각우를 잠시 바라봤다.

이윽고 그는 벽각우에게 다가가 혈맥 감별술을 펼쳤다.

놀랍게도 벽각우는 상품 혈맥을 지니고 있었다.

'그냥 죽이기는 아쉬운데.'

벽각우는 뛰어난 혈맥을 지닌 데다, 일반적인 벽각우에게서는 볼 수 없는 환술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뛰어난 방어력에 준수한 공격력, 특수한 신통까지 갖춘 셈이었다.

장호연에게는 마침 방어에 쓸만한 영수가 필요했다.

잠시 고민한 그는 백호를 통해 벽각우가 자신의 영총(靈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인지 물었다.

벽각우는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의 영수가 되기를 택했다.

장호연은 즉시 혼계를 맺어 벽각우를 새로운 영수로 삼았다.

계약을 마친 벽각우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회복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벽각우는 요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내단이 손상되었다.

외부의 도움 없이 부상에서 회복하려면 최소 몇 년간은 정양이 필요할 터였다.

현재 장호연에게 남은 엘릭서는 부상을 1회 치료할 분량뿐이었다.

벽각우가 죽음을 목전에 둔 것이 아닌 이상.

자신의 목숨줄이 될지도 모르는 귀한 엘릭서를 소모할 수는 없었다.

곧이어 그는 영수들을 영수대로 들여보낸 뒤 지체 없이 운암방시로 이동했다.

***

장호연이 계곡을 벗어나던 그 시각.

하늘 저편에서 자줏빛 법의를 걸친 노인이 붉은 깃털의 거대한 영금을 타고 운암방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노인은 희끗희끗한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는 옅은 잔주름이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한 안광만은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를 연상시킬 만큼 강렬했다.

천봉염가의 세 번째 노조는 운암방시 방향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번뜩이는 영광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웬 놈들이 우리 세가의 영역에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게지?'

염가삼조는 영금의 등 위로 발을 가볍게 굴렀다.

그의 뜻을 알아챈 적염조(赤炎鳥)가 힘찬 날갯짓과 함께 붉은 잔상을 남기며 운암방시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암방시 상공에 다다른 염가삼조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성벽 일부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수많은 요수들이 방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수사들과 뒤엉켜 혈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염가삼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분노를 드러냈다.

그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미천한 짐승 따위가 인족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니!"

염가삼조는 석린수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영압이 사방을 불사를 듯한 기세로 석린수를 짓눌렀다.

견고한 방어력을 지닌 석린수는 집법대원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맞아가며 천천히 내성을 향해 나아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놈은 축기기 중기 수사가 내뿜는 압도적인 기세에 위협을 느끼고 육중한 몸을 움츠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저, 저분은··· 천봉염가의 어르신이다!"

"축기진인께서 오셨으니 이제 살았어!"

"모두 힘을 내라! 진인께서 저 흉악한 요수를 처치해 주실 것이다!"

염가삼조의 등장은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때, 석린수의 지척에 도달한 염가삼조가 팔을 휘둘렀다.

붉은 영광이 번뜩이며 불꽃 문양이 새겨진 법검(法劍)이 소매 안에서 튀어나왔다.

검신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피어올라 주변을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강력한 법기와 비술로 무장한 축기기 수사는 동급의 2계 요수보다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봉염가는 연기술에 정통한 가문으로, 염가노조들의 법검은 뛰어난 신통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염가삼조의 법검에는 그의 강력한 법력이 담겨 있어 전투를 장시간 벌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진족공법(鎭族功法)인 연보화운경(煉寶火雲經)을 운용할 시 법력의 위력을 2할 가까이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작열하는 불꽃을 두른 법검이 석린수의 단단한 바위 갑각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하늘을 선회하던 적염조 또한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강하하며 부리와 발톱으로 석린수를 협공했다.

카강!

법검과 적염조의 공격이 연이어 석린수의 피부를 때렸다.

그러나 석린수의 갑각에는 옅은 흠집과 그을린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염가삼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계속해서 법검을 조종해 석린수를 공격했다.

석린수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육중한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두꺼운 꼬리를 휘둘러 적염조를 공격했고, 입으로는 요력을 응축해 염가삼조에게 쏘아보냈다.

하지만 놈의 둔한 꼬리는 날렵한 적염조를 맞추기에 역부족이었고, 입에서 뿜어낸 영기 광선은 염가삼조를 보호하는 반투명한 호신법조(護身法罩)에 막혀 그대로 흩어졌다.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석린수 혼자 축기기 중기 수사와 2계 초기 영금의 합공을 이겨내기는 불가능했다.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버티고는 있었으나, 인간과 영금의 끊임없는 공격에 점차 요력이 소모되며 움직임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염가삼조가 석린수를 묶어두자, 집법대는 비로소 한숨 돌릴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집법대를 지휘하던 백월장가의 수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성안에 침입한 요수들을 처리한다! 각 부대는 흩어져서 놈들을 소탕하라!"

그의 호령에 따라 집법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모이고 흩어졌다.

집법대가 떠난 후로도 염가삼조와 석린수의 공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석린수의 방어력이 워낙 견고했던 터라 쉽사리 승부를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10여 분쯤 더 흐른 후.

마침내 장호연이 운암방시에 도착했다.

그는 외성벽의 무너진 틈을 통해 안으로 진입했다.

이동하는 도중, 장호연은 신식을 펼쳐 외성의 상황을 살펴봤다.

요수들이 지나가며 파괴된 듯한 가옥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지만, 범인들이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성 입구 근처에서 벌어지는 염가삼조와 석린수의 전투를 목격할 수 있었다.

'축기진인이 언제 온 거지?'

장호연은 염가삼조의 복장을 통해 그가 천봉염가의 노조임을 알 수 있었다.

축기기 중기 수사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법력과 현란하기 그지없는 법검의 움직임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길어야 몇 수를 버티지 못하고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장호연은 염가삼조의 눈에 띠고 싶지 않은 생각에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현재 그는 벽각우를 상대하기 위해 장신주를 사용하고 격신술까지 펼친 상태였다.

설령 축기기 중기 수사라도 그의 염식술을 간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축기기 중기 수사가 일반적인 파허술을 펼쳤을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비전으로 불릴 만한 파허술이나 그와 관련된 법기를 지녔다면 위장이 탄로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축기진인처럼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아랫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사정을 일일이 캐묻거나 간섭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설령 장호연의 진짜 실력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기에 미리부터 겁을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염가삼조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호연에게 향했다.

동시에 축기기 중기 수사의 강대한 신식이 그의 전신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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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염가삼조는 장호연을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장호연에게 머문 것은 일순에 불과했다.

2계에 오른 연체술이 그의 흥미를 잠시 돋우긴 했지만, 결국 장호연의 경지는 연기기 초기.

그에게는 한 점의 위협조차 되지 않는 개미와 다를 바 없었다.

장호연은 염가삼조의 신식이 사라진 것에 안도하며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내성으로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요수들이 나타났다.

곧이어 그는 늑대 요수의 공격에 목숨이 위태로운 여수사를 발견했다.

여수사는 반쯤 부서진 검을 들고 힘겹게 술법을 펼치며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요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장호연은 즉시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늑대 요수가 여수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바로 그 찰나.

장호연의 주먹이 맹렬한 속도로 요수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직!

잘 익은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늑대 요수의 머리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

2계 연체사의 강철 같은 육체 앞에서 1계 후기 요수는 찰흙으로 만든 인형과 같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여수사는 살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장호연을 넋을 잃고 바라왔다.

"두 번은 못 구해 드리니 안전한 곳으로 피하십시오."

장호연은 주변에 다른 위협적인 요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대로 백월선당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가는 길에 마주치는 요수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했다.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요수들의 살점이 터져나가고 뼈가 으스러졌다.

정은 광산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운암방시에는 10만 명에 달하는 수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 대다수가 연기기 중기 이하였지만, 나머지 1푼의 수사들만 힘을 합쳐도 요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방시를 습격한 요수들은 하나같이 눈이 붉고 비정상적으로 흉포하여, 섣불리 싸움에 나섰다가는 목숨을 잃을 위험이 컸다.

지켜야 할 것이 있거나 큰 이익이 따르지 않고서야, 목숨을 내던져가며 요수와 싸울 이는 거의 없었다.

결국 집법대를 중심으로 평소 엽요사로 활동하던 일부 산수들만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백월선당에 도착하자 백월장가 소속의 집법대원들과 다른 가족들이 한데 모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집법대의 본래 임무는 운암방시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혈족의 안위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백월선당 앞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장천명을 비롯한 가문 어른들과 고혜음, 진위청까지 모두 힘을 합쳐 20여 마리의 요수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장은소는 부채 모양의 법기를 우아하게 휘두르며 날카로운 바람 칼날을 날렸다.

동시에 부적을 던져 요수들의 발을 묶거나 움직임을 둔화시키며 효과적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그때, 장은소와 싸우던 표범 요수가 교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어 고혜음을 공격했다.

"혜음아!"

장은소는 다급히 고혜음을 불렀다.

고혜음 역시 신식을 통해 표범의 움직임을 인지했으나, 그녀의 육체 능력은 요수의 기습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때, 은은한 은광을 두른 인영 하나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표범에게 쇄도했다.

장호연은 강철과 같은 주먹으로 표범의 머리통을 단숨에 터뜨렸다.

"사제!"

"호연아!"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가족들과 지인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외성벽에서 장호연과 헤어졌던 가문의 숙부 중 한 명이 물었다.

"무사했구나, 호연아. 그 벽각우는 어찌 되었느냐?"

장호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참을 쫓아오더니, 제가 안 보이는 곳으로 숨자 중림산맥 방향으로 떠나더군요. 아마도 이성을 잃은 상태라 자신이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장호연의 설명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방시를 습격한 요수들의 상당수가 이성이 온전치 않아 보였기에, 본능적으로 익숙한 중림산맥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말을 마친 장호연은 곧바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구련금신결을 운용하자 희미한 은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부 위로 피어올랐다.

요수들의 발톱이나 이빨이 몸에 닿을 때마다 은빛 기운은 순간적으로 더욱 짙어졌다.

그는 요수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넘기며 무자비하게 도륙을 이어갔다.

장호연은 따로 무술을 익히지 않았지만 수도자의 초인적인 운동신경과 신식을 통해 전투에 최적화된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그는 요수 무리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순식간에 10여 마리를 쓰러뜨렸다.

"이렇게 쉽다고?"

"멍청한 요수들을 상대할 때는 연체술만한 것이 없군!"

장호연의 압도적인 무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 같이 감탄을 터트렸다.

염가삼조가 석린수를 묶어두는 사이.

집법대가 대대적으로 움직이며 1계 요수들을 처리해 나갔다.

집법대와 몇몇 산수들이 내성을 침입한 요수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눈치만 살피던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전투에 가담했다.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백월선당 주변은 물론이고 운암방시 내성 전체에서 더 이상 움직이는 요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처참하게 널브러진 요수들의 시체와 부서진 건물 잔해가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호연아, 고생이 많았다. 네 덕에 안전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고맙다, 호연아!"

"호연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한두 명은 다쳤을지도 몰라. 고생했다!"

백월선당에 앞에 모인 사람들이 장호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압도적인 영압이 느껴지며 자줏빛 법의를 걸친 노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장호연을 향하던 환호와 안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마치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긴장과 경외감이 뒤섞인 눈으로 염가삼조를 바라봤다.

그때, 고장풍이 염가삼조에게 걸어가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인. 비인(鄙人) 고장풍이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고 대사. 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 와봤는데, 역시나 고 대사셨군요. 전에 용화방시에서 뵙고 삼십 년 만이지요?"

고장풍은 한때 축기기 수사였다.

비록 지금은 도기가 무너져 연기기에 머물고 있었으나 여전히 2계 하품 제부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이에 염가삼조 역시 그를 축기진인에 준하는 예우로 대해주었다.

고장풍은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염가삼조와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진인께서는 어인 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덕분에 저희가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용무가 있어 중림산맥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그간 채굴한 정은을 수거해 갈 겸 방시에 들른 것인데, 이런 변고가 생겼을 줄은 몰랐습니다."

"실로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군요. 진인께서 오지 않으셨더라면 오늘 운암방시는···."

주변의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염가삼조는 오직 고장풍에게만 집중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후 고장풍이 고혜음과 진위청, 장호연을 불렀다.

"제 손녀와 제자들입니다. 혜음아, 어서 진인께 인사드리거라."

고혜음이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염가삼조는 그녀가 고장풍의 손녀라는 말에 온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다음은 진위청이 자신을 소개했다.

"영경산(英慶山)의 진위청이라 합니다. 진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위청의 출신을 들은 염가삼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영경진가는 천봉염가와 같은 축기세가였으나, 그 세력과 위상은 천봉염가를 월등히 능가했다.

최근에는 원영상종에 입문한 혈족이 금단기에 오르며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염가삼조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진위청의 인사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장호연이 앞으로 나섰다.

"노조께 인사드립니다. 백월장가의 장호연이라고 합니다."

장호연을 본 염가삼조의 눈빛에 흥미가 어렸다.

"아까 그 젊은이로군. 그런데 고 대사의 제자이면서 어찌 연체술을 익혔는가? 그 길은 재물이 적잖이 들 터인데. 고 대사께서 상당히 아끼시는 모양이군."

옆에 있던 고장풍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제가 그럴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정은 광맥을 처음 발견한 공을 세운 것이 바로 호연입니다. 다만 타고난 영근 자질이 부족하여, 스스로 몸을 지킬 방도를 강구하고자 연체술을 연마하는 중이지요."

"영근 자질이 부족하다니요?"

염가삼조가 의아한 표정으로 장호연을 다시 한번 위아래로 훑어봤다.

"호연이는 팔영근을 지녔습니다."

그 순간, 염가삼조의 얼굴에 떠올랐던 흥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보니 범속한 자였군.'

팔영근의 자질로는 평생 연기기를 벗어나지 못할 터.

그에게 장호연은 손짓 한 번에 스러질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염가삼조는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장호연을 번지르르한 외모에 운만 좋은 보잘것없는 인물이라 간주했다.

그때, 고장풍의 말이 이어졌다.

"호연이가 비록 영근 자질은 조금 부족할지 모르나, 부도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제부술을 배운 지 고작 오 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식 제부사가 되었지 뭡니까."

"오 년 만에 말입니까?"

염가삼조는 장호연의 숨겨진 재능을 알고 다시금 그를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팔영근의 자질로 그런 성취를 이루다니. 역시 고 대사의 제자답게 비범한 구석이 있군요."

"과찬이십니다. 제자의 재능이 어찌 저의 덕이 되겠습니까. 제가 훌륭한 제자를 만난 것이겠지요."

고장풍은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장호연을 은연중 무시하는 염가삼조의 태도에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다시 바뀌자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호연이의 진짜 재능을 알면 지금처럼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장호연은 부령도체를 지닌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도체를 타고났다고 해서 반드시 그와 관련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부령도체를 지닌 사람이라도 제부술에 재능이 없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귀한 자질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부도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으니, 가히 구름을 만난 용과 같았다.

고장풍과 염가삼조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진한 눈썹을 가진 중년 남자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염가삼조에게 다가와 공손히 예를 갖췄다.

"염정이 노조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정아. 오랜만이로구나. 잘 지냈느냐?"

"예, 노조."

염정은 염가삼조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뒤, 저물대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저물대를 받아 든 염가삼조는 신식을 불어넣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내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채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은의 양이 상당하구나. 앞으로도 운암삼가와 잘 협력하여 방시를 관리하도록 하거라. 정은 광산이 발견된 만큼 운암방시의 중요도가 크게 높아졌다. 너에게도 그에 걸맞은 권한과 지위를 줄 터이니 앞으로도 가문을 위해 힘쓰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노조! 가문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염정은 자신의 운이 점차 트이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한때 좌천이나 다름없는 운암방시 관리자로 부임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런데 정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그의 지위와 영향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다.

'정금이 부와 행운을 부른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가 보군.'

염정은 자신의 운이 트이기 시작한 것이 정금을 공급해 주던 산수, 두립을 만나고부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두립 덕분에, 그는 가문에 공훈을 쌓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한편 빈약했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울 수도 있었다.

만약 자신이 천봉보화재에서 공훈을 쌓지 못했다면, 운암방시의 총책임자 자리는 필시 가문의 다른 혈족에게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염정은 몇 년간 소식이 끊긴 두립을 떠올리며, 다음에 만나게 되면 반드시 후하게 사례하리라 마음먹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염정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라 염가삼조에게 말했다.

"그런데 노조. 아까 전에 정은 광산과 중간 거점에서도 요수가 습격해 왔다는 급보를 전해왔습니다."

"뭣이? 그곳에도 이계 요수가 나타났단 말이냐?"

"예. 광산에는 이계 후기와 중기 요수가 각각 한 마리씩, 중간 거점에는 이계 초기가 둘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터라 손을 쓰기에는 늦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노조께서 친히 나서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알겠다. 부용가문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상종으로서 어찌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염가삼조는 고장풍을 바라봤다.

"고 대사, 본도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대사의 제자를 잠시 빌릴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염가삼조의 시선이 장호연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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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고장풍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호연이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계 요수 중 한 놈을 처리하는 동안, 고 대사의 제자가 다른 놈의 시선을 끌어준다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염가삼조의 말이 끝나자 장호연이 스스로 나서며 말했다.

"사부님. 제자, 기꺼이 돕겠습니다."

사실 장호연은 염가삼조와 가능한 한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중간 거점과 광산에는 백월장가의 사람들이 다수 파견된 상황.

혈족들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가문의 정예 자제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만 있겠는가.

장호연이 흔쾌히 수락하자 염가삼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기다렸다는 듯 적염조가 땅으로 내려섰다.

염가삼조가 적염조의 등에 올라타는 사이.

고장풍이 염려 가득한 눈빛으로 장호연에게 당부했다.

"호연아, 부디 몸조심하거라."

장호연은 고장풍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적염조의 등 위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이어서 적염조가 힘찬 날갯짓과 함께 순식간에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비행 영금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경험은 실로 색달랐다.

발아래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에.

장호연은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순간 장호연은 금령이 떠올랐다.

언젠가 금령을 세상에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게 되는 날.

금령을 타고 드넓은 창공을 가로지르며 천하를 굽어보는 광경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지상의 경치를 감상하던 장호연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염가삼조가 중림산맥에 용무가 있었다고 말한 것은 필시 실종된 염가사조를 찾기 위함이었을 터.

그가 이렇게 돌아온 것이 염가사조를 찾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수색에도 불구하고 끝내 찾지 못해 포기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언젠가 자신도 축기기를 넘어 금단기에 도전하는 날이 올 것이다.

장생대도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염가사조의 일은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중간 거점까지는 운총마를 타고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적염조를 타고 이동하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당도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중간 거점에는 이미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방어 시설 곳곳은 파괴되었고, 1계 요수들이 거점 내부를 휩쓸며 수사들을 학살하는 중이었다.

두 마리의 2계 요수는 어찌 된 일인지 수사들을 죽이기보다 거점을 파괴하는 데 혈안인 듯 보였다.

수사라는 맛있는 먹잇감을 제쳐두고 시설물 파괴에 열중하는 모습은 확실히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너는 저 왼쪽 놈을 맡아라."

"예, 노조."

대답을 마친 장호연은 망설임 없이 적염조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상대는 온몸이 짙은 회색 털로 뒤덮여 있고, 몸 곳곳에는 불길한 보랏빛 결정체가 박혀 있는 거대한 산견(山犬) 요수였다.

산견 요수가 날뛸 때마다 건물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고, 미처 피하지 못한 주변의 수사들은 놈의 날카로운 발톱 아래 속수무책으로 찢겨나갔다.

장호연은 비행술을 시전해 몸의 균형을 바로잡으며 산견 요수를 향해 경금술을 펼쳤다.

카강!

눈두덩이를 공격당한 산견 요수가 고통스러운 울음을 토해내며 장호연을 노려봤다.

장호연은 산견 요수의 주의를 끌기 위해 연이어 술법을 펼쳤다.

산견 요수는 벽각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렵한 움직임을 보였다.

장호연의 방어력이 2계 중기 요수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체급 차이에서 오는 충격량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놈에게 공격을 허용한다면 좋지 않은 꼴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장호연은 산견 요수의 번개 같은 앞발 공격을 피하며 놈의 눈을 향해 화염구를 쏘아 보냈다.

화염구를 통째로 씹어 터트린 놈은 흉포한 울음소리를 내며 장호연에게 쇄도했다.

장호연이 산견 요수와 고군분투하는 사이.

염가삼조는 두더지와 도마뱀을 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형상의 요수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는 법검에 저장된 법력을 아낌없이 소모하며 요수의 요력을 빠르게 고갈시켰다.

얼마 후, 요수의 요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바로 그때.

법검이 선홍색 빛줄기로 화하여 요수의 벌어진 입속으로 날아들었다.

작열하는 화염을 두른 법검이 요수의 내부를 휘젓자,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대한 요수가 힘없이 쓰러졌다.

축기기 중기 수사의 압도적인 법력 앞에.

2계 초기 요수는 별다른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염가삼조는 요수의 사체를 빠르게 거둬들인 후 산견 요수를 향해 지체 없이 날아갔다.

"물러서라!"

대기를 불태우는 듯한 영압과 함께 염가삼조의 법검이 산견 요수를 공격했다.

축기기 중기 수사의 압도적인 법력과 법검의 현란한 공세 앞에, 산견 요수는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산견 요수의 요력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법검이 놈의 척추를 가르며 지나갔다.

신경이 끊어진 산견 요수는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허헝!

놈은 흉포하게 울부짖으며 사나운 이를 드러냈다.

그사이 허공을 선회한 법검에 강렬한 화염이 깃들더니 산견 요수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내장이 불길에 타들어 가는 지독한 악취와 함께 놈의 거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2계 요수들이 모두 죽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염가삼조와 장호연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렸다.

염가삼조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리쳤다.

"이만 가자!"

산견 요수의 사체를 챙긴 염가삼조는 곧장 적염조에 올라탔다.

얼마 후, 그들은 정은 광산 상공에 도착했다.

정은 광산의 모습은 중간 거점보다 훨씬 처참한 상태였다.

수많은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방어 시설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모조리 파괴되어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수의 모습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염가삼조는 미간을 찌푸리며 광산 책임자를 찾았다.

그러자 감독관인 장운휘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요수들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이상하게도 조금 전에 일제히 물러갔습니다."

염가삼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수들이 물러난 시점이 중간 거점의 2계 요수들이 죽은 직후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염가삼조는 광산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말했다.

"방어진은 최대한 빠르게 복구해 주겠다."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고 판단한 염가노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적염조의 등 위로 올라탔다.

염가노조의 시선이 장호연에게 향하자, 그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노조, 저는 이곳에 남아 가문 사람들을 돕겠습니다."

염가삼조는 장호연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도 쓸만한 녀석이니 힘쓴 대가는 줘야겠지.'

염가삼조는 2계 초기 요수의 내단 하나를 장호연에게 던져주었다.

장호연이 단순히 부용세력의 이름 없는 수사였다면 이런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호연은 명망 높은 고장풍의 제자이며 제부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훗날 그가 2계 제부사로 성장할 경우를 생각해 미리 관계를 터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조!"

염가삼조는 장호연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적염조는 힘찬 날갯짓과 함께 순식간에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염가삼조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장호연은 장운휘에게 자세한 피해 상황을 물었다.

운암방시는 장호연과 염가삼조의 빠른 대처 덕분에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정은 광산은 그야말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광산에 파견된 운암삼가 인원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백월장가였다.

지리적으로 중림산맥과 가깝고 광산 개발에서도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백월장가는 다른 두 가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파견했던 탓이었다.

인명 피해도 뼈아팠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문제도 심각했다.

광산에서 일하던 산수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한 탓에, 앞으로의 채굴 작업에 차질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요수의 습격이라는 공포스러운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터.

설령 높은 급여를 제시한다 해도 목숨을 걸고 일하려는 사람을 새로 찾기란 녹록지 않을 것이었다.

단기간 내에 정상적인 채굴량을 회복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장호연과 장운휘가 침통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몇몇 그림자들이 어두운 숲속으로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관진악의 일당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판단하여 조용히 자리를 뜨는 중이었다.

관진악 일당은 혼란을 틈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그들의 행동을 목격한 다수의 산수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겁수로 돌변하며,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관진악의 시선이 멀어지는 장호연에게 머물렀다.

그의 눈에는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정은 광맥의 최초 발견자가 장호연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가문 사람들이 죽게 된 사건에 그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백월장가를 뿌리째 없애주마!'

정은 광산은 욕심이 난다고 해서 한 번에 빼앗거나 들고 도망갈 수 있는 그런 보물이 아니었다.

이번 습격은 정은 광산을 차지하기 위한 계획의 첫걸음으로, 우선 천봉염가 부용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앞으로 운암삼가, 그중에서도 백월장가를 완전히 와해시킬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될 터.

관진악은 머지않은 날 이루어질 복수를 기약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수조가 휩쓸고 지나간 지 어느덧 석 달이 흘렀다.

그 사이 천봉염가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2계 상품 방어진을 광산에 설치해 주었다.

운암삼가 역시 총력을 기울여 보조 진법들을 추가로 구축하며 방어력을 끌어올렸다.

또한, 순찰 인원을 대폭 늘리고 경보 체계를 강화하는 등 다방면으로 조치가 이루어졌다.

덕분에 광산은 이전보다 훨씬 안전한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광부를 새로 모집하는 일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운암삼가는 요수 습격으로 전력의 4할 가까이를 잃었다.

전력이 온전했을 때도 수조를 막지 못했는데,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공포가 산수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천봉염가는 세 번째 노조를 운암방시에 좌진(坐鎭: 무력으로 한 지역을 수호)케 하여 요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웠다.

또한, 천봉염가의 세력권에 속한 심곡진에서 애뢰산 주가와 황죽봉 남가를 불러들여 부족한 경비 인력을 충원했다.

두 가문은 천봉염가에 의해 멸문당한 비가와 관가를 대신하여 새롭게 연기한문으로 올라선 세력이었다.

이러한 다각적인 조치 덕분에 정은 광산은 점차 안정을 되찾고, 이전과 같은 수준의 채굴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장호연은 가문의 정예 인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정은 광산을 관리하는 일에 자원했다.

수도 세력이 시간과 자원을 들여 인재를 양성하는 이유는 결국 세력을 보호하고 번영시키기 위함이었다.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은 이상, 장호연은 위기의 순간에 그 은혜를 갚을 책무가 있었다.

채굴 작업은 별도의 감독관이 관리하고 있었기에, 장호연이 할 일이라곤 주기적으로 광산 주변을 순찰하는 것뿐이었다.

덕분에 그가 수련할 시간은 충분했다.

게다가 광산 내부는 상품 영맥에 버금가는 농밀한 영기가 흐르고 있어 수련에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장호연은 이제 막 하품 제부사가 되었기에 혼자서 제부술을 수련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고혜음이 그의 제부술 수련을 지도해 준다는 명목으로 광산에 함께 머무르기로 했다.

이는 고장풍이 장호연에게 제안하여 성사된 일이었다.

장호연이 정은 광산으로 떠나기 전날 밤.

고장풍과 고혜음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문득 고장풍이 잔잔한 어조로 물었다.

"혜음아, 너는 호연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호연 사제요?"

고혜음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너도 겪어보았듯이 호연이는 심성이 더없이 바른 아이다. 그리고 호연이는 분명 부도와 관련된 특별한 도체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아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된다. 할아버지 생각에 호연이 정도면 너의 짝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네 의견은 어떠한지 궁금하구나."

고혜음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고장풍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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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내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삼십 년 정도다. 만약 부상이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게다. 살아생전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네가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꼭 보고 싶구나."

고혜음은 올해 서른아홉 살로 속세의 범인이라면 손자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하지만 수백 년 이상의 수명을 누리는 수도자에게 그녀의 나이는 파릇한 청춘과 다름없었다.

선도를 포기하지 않은 수도자들은 백 세를 전후로 하여 도려를 맞이했다.

고장풍의 병세를 늦추거나 치료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이상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분명 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방법이 있을 거예요."

고장풍이 자신의 죽음을 거론하자 고혜음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어딘가에는 그의 부상을 치유할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지위와 재력으로 그런 기회를 얻기는 불가능했다.

고장풍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혜음아. 늙은이의 욕심이겠지만, 할아버지는 네가 아이를 낳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더는 바랄 것이 없겠구나."

고장풍의 바람을 들은 고혜음의 두 뺨이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함께 가슴 한구석이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장호연은 예의 바르고 성실하며, 수려한 용모에 뛰어난 배경과 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혜음은 자연스레 그의 진중한 성품과 따뜻한 마음씨에 빠져들었다.

고혜음은 양손을 꼭 쥔 채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제가 호연 사제를 좋게 생각한다 해도, 사제의 마음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 점은 걱정할 것 없다. 이건 내 손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혜음이 너는 아름다운 외모에 사영근의 자질, 그리고 젊은 나이에 이계 제부사가 될 재능까지 갖추지 않았느냐? 객관적으로 봐도 너의 조건은 호연이에 못지않다.

그리고 너와 호연이가 도려의 연을 맺게 된다면, 그때는 할아버지가 네게만 알려주었던 그 비밀을 공유하도록 하거라. 그것만으로도 호연이에게는 일생일대의 기연이 될 테지."

고장풍의 말에 고혜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고장풍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이에 관한 건 할아버지의 작은 바람일 뿐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거라. 아이를 갖는 것도 좋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너의 행복이다."

수도자의 영혼과 육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남자가 사정하는 것은 정(精)을 쏟아내는 행위이며, 여자가 임신하면 태아에게 기(氣)를 빼앗기게 된다.

남자의 경우 과도한 방사(房事)만 삼가고 적절히 보양한다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아무리 정성껏 보양한다 해도 임신과 출산, 회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진원의 손실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고 근기가 쇠할수록 수련 과정에서 병목 현상에 부딪히기 쉬워진다.

젊은 시절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지체되는 수년의 시간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기회를 완전히 앗아갈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자질의 한계까지 자신을 시험하며 수련에 매진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평생 연기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산수들에게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고혜음은 말없이 고장풍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고장풍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연이란 서둘러서 되는 일이 아니니, 광산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차분히 생각해 보거라."

고장풍은 이만 말을 멈추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고혜음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듯 조용히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

다음 날 아침.

장호연은 자신의 거처에서 강휘령과 여진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여진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장호연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열한 살이 된 여진희는 이제 아이의 티를 벗어가고 있었지만, 장호연에게는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광산으로 떠난다는 말에 여진희는 몹시 서운해하며 자신도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댔다.

하지만 요수의 위협이 도사리는 험지에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숙부가 계속 그곳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고, 한 달마다 사흘씩 운암방시로 돌아올 수 있단다. 그때 다시 만나면 되지 않겠니?"

하지만 여진희는 울먹이며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보다 못한 강휘령이 다가와 아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만류했다.

"진희야. 소야께서도 중요한 일로 가시는 것이니 이만 보내드리자꾸나."

강휘령은 이내 장호연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소야, 부디 몸조심하시고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염려 마세요, 형수님. 혹시 제가 없는 동안 도움이 필요하면 백월선당을 찾아가시고요."

장호연은 강휘령에게 여진희를 잘 돌보라는 당부를 남기고 고장풍의 거처로 향했다.

거처에 도착하자 고혜음과 진위청이 먼저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호연은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안채로 들어가 고장풍에게 인사드렸다.

"떠날 채비는 모두 마친 게냐?"

"예, 사부님. 지금 바로 사저와 함께 출발할 생각입니다."

고장풍은 품속에서 부적 여러 장을 꺼내 장호연에게 건넸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아끼지 말고 사용하거라."

부적은 총 여덟 장으로 모두 2계 초기 양품이었다.

부적의 부문을 살펴본 장호연은 그것들이 각각 공격, 방어, 도주, 은신 등에 사용되는 부적임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장호연은 고장풍의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진위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제, 떠나기 전에 영차 한잔하고 가게. 오늘을 위해 내가 귀한 영차를 구해놨다네. 장담컨대 이런 영차를 맛보기는 쉽지 않을 걸세."

진위청의 권유에 따라 네 사람은 탁자에 앉았다.

곧이어 은은한 향을 풍기는 찻잔이 놓이고, 차를 마신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터뜨렸다.

진위청의 말대로 깊고 그윽한 영기가 느껴지는 최상급 영차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은 경악으로 변했다.

고혜음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사형! 이 차 뭔가 이상해요."

영차를 마시고 잠시 뒤.

전신에 퍼진 영차의 기운이 머리 위로 솟구치더니 영기의 통로인 인당혈을 단단히 막아섰다.

신식과 영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범인으로 돌아간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장호연의 상태는 고혜음보다 훨씬 심각했다.

인당혈이 막힌 것은 물론, 온몸으로 독기가 퍼져나가며 얼굴에는 옅은 보랏빛 기운이 감돌았다.

고장풍은 마른침을 삼키며 진위청을 바라봤다.

진위청의 얼굴에는 평소의 온화함 대신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위청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너무 놀라실 것 없습니다, 사부님."

진가는 본래 연단술에 정통한 가문이었다.

진위청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풍을 배신할 결심을 굳히고 가문에 연락하여 은밀한 지원을 받아 두었다.

진위청은 태연한 목소리로 자신이 먹인 약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차에 탄 것은 치명적인 독약이 아닌, 단지 수도자를 제압할 목적으로 고안된 특수한 약물이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효는 한 시진 정도면 자연히 사라질 겁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장호연에게 향했다.

"너는 이계 연체사이니, 그에 상응하는 독을 써서 무력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너에게 사용한 독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약해질 것이다."

진위청은 사부와 사매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한 행동은 단순히 세간의 비난을 떠나, 자신의 도심에도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행위였다.

하지만 장호연에게 한 말은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그가 장호연에게 먹인 2계 영독(靈毒)은 반 시진마다 독성이 두 배씩 강해졌다.

진위청의 말에 장호연은 조용히 눈빛을 빛냈다.

그는 독이 두렵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엘릭서를 복용해 독을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 년간, 장호연은 엘릭서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두 가지 실험을 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격신술로 손상된 영혼을 치유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엘릭서의 치유 효과가 허실의 경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현계의 육체에 작용하는 기운에 대한 실험이었다.

수도계의 독은 단순히 육체를 물리적으로 손상시키는 독성 물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반적인 육체의 부상이라면 수도자는 영력을 운용하여 쉽게 치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독의 진정한 위협은 그 안에 담긴 특수한 독의 기운에 있었다.

이 기운이 체내에 잔류하며 회복과 치유를 방해하고 육신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장호연은 엘릭서가 2계 영독을 해독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공존했다.

각성 능력은 자신의 영혼에서 비롯된 힘이다.

과거 엘릭서가 2계 영광인 진철을 진금으로 변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안에 깃든 영기마저 1계 수준으로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이를 통해 엘릭서가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의 한계가 1계까지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엘릭서가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2계 영독을 1계 수준으로 떨어뜨리기만 해도 그 역할은 다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장호연은 1계 요수 한 마리와 치명적이지 않은 2계 영독을 준비해 실험에 들어갔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요수의 몸을 잠식하던 영독의 독기가 정화되고 순수한 영기만이 남았다.

즉, 독의 해로운 속성만을 정화하고 순수한 영기는 그대로 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예전에 금령에게 걸었던 영계가 흩어진 것처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인만을 제거하는 현상과 일치했다.

이를 통해 엘릭서가 단순히 독기뿐만 아니라 마기(魔氣), 귀기(鬼氣), 살기(煞氣)와 같은 온갖 부정적인 기운까지 정화할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었다.

다만 궁금한 점은, 자신이 독공을 수련할 경우 엘릭서가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정화할까 하는 부분이었다.

당시에는 엘릭서에 여유가 없었기에 실험은 다음으로 미뤄둔 상태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지만 일단 두고 보지.'

장호연의 몸을 잠식하는 독의 기운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진위청의 주장대로 시간이 지나 독이 사라진다면, 굳이 귀한 엘릭서를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장호연은 진위청의 말이 사실과 다를 경우에 대해서도 대비해 두었다.

비록 인당혈은 막혔지만 영수들과 이어진 심령은 건재했다.

진위청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금령을 소환해 놈을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저물대를 여는 것 정도는 금령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장호연은 언제든 영수를 소환하고 엘릭서를 복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진위청은 자신의 계략이 잘 들어먹힌 것에 만족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어서 그가 소매를 털자 여덟 개의 깃발이 튀어나와 주변을 가로막는 금제를 형성했다.

금제가 완성되는 모습을 본 고장풍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배신감과 실망감에 목이 잠겼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진위청이 냉소하며 말했다.

"왜라고 하셨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제가 받아야 할 것을 되찾기 위해서지요."

"받아야 할 것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순간 진위청의 얼굴에 원망의 기색이 어렸다.

그는 장호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지난 수십 년간 사부님을 모신 것은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왜 저 자식을 그토록 편애하신 겁니까? 저놈에게 제부 전승과 사매를 모두 줄 작정이셨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고장풍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 진위청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의 어르신께서 금단기에 오르셨습니다. 머지않아 영경진가는 세가의 탈을 벗고 금단대종으로 발돋움하게 될 겁니다. 이때 제가 사부님의 삼계 제부 전승을 가문에 바친다면, 저 역시 가문의 지원 아래 축기기에 오를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겠지요."

장호연을 향한 질투심.

고혜음의 마음이 자신이 아닌 장호연에게 기울어진 것에 대한 박탈감.

무엇보다, 모든 연기기 수사의 꿈인 축기기에 이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모든 감정이 뒤엉켜 그를 배신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이끌었다.

"네 이놈!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벌인 것이냐?"

진위청의 말을 들은 고장풍의 얼굴이 격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고작이라니요. 장생대도를 향한 노력이 어찌 고작이란 말로 폄하될 수 있겠습니까? 사부님. 얼마 후에 가문의 축기장로님을 뵙기로 약조되어 있기에, 제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때 삼계 제부 전승을 바쳐야만 저 또한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요. 그러니 더는 시간 끌지 마시고 순순히 전승을 내어주십시오."

"내 너를 그리 믿었거늘. 내가 미처 악종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비록 표현이 서툴러 말하지는 못했지만, 고장풍은 진위청을 단순한 제자가 아닌 친손자처럼 여기며 깊이 아꼈다.

그런 제자에게 배신당한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장풍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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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어리석은 놈 같으니. 혜음이의 도려는 스스로 택할 일이니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내 도통을 잇는 건 전적으로 너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내가 떠나기 전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싶어 엄하게 대했던 것인데.

그리고 내 전승을 통해 축기기에 오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면, 어찌하여 내게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은 것이냐? 너의 선도를 위해 내 전승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어주었을 텐데 말이다!"

고장풍의 말에 진위청은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는 스스로의 생각과 의심 속에 매몰되어 고장풍과 진실한 대화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충격과 죄책감에 진위청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대도를 위해 비정의 길을 걷기로 했지만, 고장풍을 사부로 모시고 존경하며 따랐던 지난 세월에는 분명히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이를 악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이제 와서 변명하려는 것일 게 분명해!'

진위청은 고장풍의 말에 반발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러면 이게 다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 정말 그리하셨다면 왜 단 한 번도 그런 표현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부님께서 저를 그리도 아끼셨다면, 조금이나마 그 속내를 내비치기라도 하셨어야죠. 제가 선인도 아닌데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하시는 말씀조차 살기 위해 하는 거짓말일지 누가 알겠냐는 말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앞으로 셋을 셀 테니, 그 안에 옥간을 넘기십시오. 만약 거부하시면 먼저 사매의 팔 하나를 자르겠습니다."

"네 놈이 어떻게 혜음이에게···."

진위청의 협박에 분노를 참지 못한 고장풍은 기운이 역류하여 입으로 왈칵 피를 쏟아냈다.

순간 과거의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젊은 시절 채약사로 활동하던 그는 산행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수사(大修士)의 동부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3계 제부 전승과 양혼결, 축기단 등의 보물을 얻은 그는 백여 년 간의 수련 끝에 축기기에 오를 수 있었다.

마침내 축기기를 돌파해 기세등등했던 고장풍은 우연히 여수사를 겁탈하려는 색마를 만나게 되었다.

색마의 경지가 연기기 수준에 불과했기에 고장풍은 별생각 없이 손을 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색마가 정체를 숨긴 삼라종의 진전제자였다.

색마는 고장풍을 상대하며 그의 신식이 범상치 않음을 즉시 간파했다.

고장풍을 제압한 색마는 그에게 비밀을 실토하라며 협박했다.

결국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은 고장풍은 색마에게 양혼결을 넘겨주었다.

색마는 고장풍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도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여수사를 죽인 뒤 떠났다.

힘겹게 축기기에 오른 고장풍은 여수사를 구하지도 못하고 선도가 끊어지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만약 그때 어설픈 인정과 객기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삼라종의 진전제자와 엮일 일도. 오늘날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목숨을 위협받는 치욕스러운 상황에 놓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한순간의 선의가 자신에게 돌려준 것은 파멸과 배신뿐이었다.

고장풍은 속으로 자조하며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좋다. 전승을 넘겨주마. 대신 혜음이를 절대로 해치지 않겠다고 심마서약을 하거라."

축기기를 목표로 둔 진위청이라면 돌파를 방해하는 심마서약을 감히 어기지는 못할 것이었다.

진위청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서약을 읊었다.

그 모습을 본 고장풍이 옥간 하나를 꺼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얼마 후, 그는 진위청에게 옥간을 던졌다.

옥간을 받은 진위청은 기록된 정보를 확인하고는 희열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 혹시 전승 중에 빠진 부분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중에 저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희 가문의 어른들께서 나서실 수도 있고요."

고장풍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완전한 삼계 제부 전승을 기록했다."

진위청은 고장풍의 말이 사실인지 영계를 걸어 확인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고장풍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는 충고하듯 덧붙였다.

"사부님. 오늘 일은 모두 잊으십시오. 만약 외부에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퍼져 저희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사부님과 사매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이건 제자로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진심 어린 조언이니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진위청은 고장풍과 고혜음을 한차례 바라본 후 이를 악물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고혜음은 고장풍의 입가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그를 위로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고장풍과 고혜음의 인당혈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고혜음은 진위청이 설치해 둔 진법을 해제하며 말했다.

"할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 괜찮아졌으니 걱정 말거라."

영기가 순환하자 어두웠던 고장풍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래도 사형···. 아니, 그 배신자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네요."

이어서 고혜음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장호연에게 물었다.

"사제, 괜찮은 거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게 일계 상품 해독단이 있으니 일단 이거라도 복용하는 게 어때?"

"아닙니다. 지금 독 기운이 점차 약해지고 있어서 이대로라면 체백의 힘으로 금방 회복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사용한 독약이 이계에 속하는 터라 일계 해독단을 복용해 봐야 별다른 소용이 없을 테고요."

사실 장호연의 몸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안색은 녹색에 가까워지고, 손톱은 보랏빛 독기로 완전히 물들었다.

독기는 이미 그의 전신에 퍼진 상태.

이대로라면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한 줌 독수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장호연은 자신의 진짜 상황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운암방시에서 2계 영독을 해독할 방법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2계 영독에 중독되었다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을 터였다.

장호연은 엘릭서를 복용해 독을 치유할 생각이었기에, 자신의 상황을 숨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런 망할 자식이! 나를 속여?'

진위청의 말대로 처음에는 영독의 기운이 점차 약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자, 힘을 비축한 짐승이 날뛰듯이 독성이 더욱 강렬해지며 그의 오장육부를 맹렬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장호연은 독기로 인해 제멋대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두 눈에는 차가운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장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억누른 채, 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저 악종을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즉시 가문에 연락해 놈을 추격하도록 요청하겠습니다."

고장풍은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체념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되었다, 호연아. 그놈의 말대로 영경진가는 머지않아 금단대종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높다. 괜한 악연을 만들어봐야 우리만 더욱 비참해질 게다. 그러니 액땜했다 생각하고 그놈에 관해서는 더 이상 떠올리지 말거라."

"사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문에 상황을 알리고 광산행을 늦추러 가보겠습니다."

"알겠다. 그놈이 너에게 쓴 독은 육체에 직접적인 손상을 주는 맹독이니, 부디 몸조리에 힘쓰도록 해라."

"예, 사부님. 일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장호연은 고장풍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고혜음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장호연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인사를 마친 장호연은 조금의 아픈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고장풍이 거친 기침을 연이어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고장풍의 정신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충격은 정기신의 조화를 무너뜨려 건강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장호연은 조만간 고장풍에게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자는 남은 근기의 양을 통해 자신의 수명을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관명술을 사용하면 일 단위로 정확히 측정하는 것도 가능했기에 급사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고장풍의 병을 치료하는 건 장호연에게 아주 간단한 일이다.

다만 엘릭서의 능력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기에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함부로 고장풍의 병을 치료했다가는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고장풍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크나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현재 장호연은 축기기 수사를 상대로 자신을 지킬 만한 보명수단을 마련한 상태다.

그래서 그는 가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2계 제부사에 오르는 대로 운암방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장호연은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전력을 다해 제부술 수련에 집중하면 늦어도 오륙 년 안에 2계 제부사가 될 자신이 있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운암방시를 떠나고 10년 후쯤 고장풍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백호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운암방시의 누구도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없을 터.

고장풍이 잠든 사이 몰래 엘릭서를 먹인다면, 누구도 그와 고장풍을 연관 짓지 못할 것이었다.

고장풍의 거처를 나선 장호연은 더는 고통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잔뜩 구겼다.

구련금신결을 전력으로 운용하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맹독에 저항했다.

하지만 구련금신결은 외부의 충격에 강한 저항력을 지녔을 뿐, 독성에 대한 저항력은 여느 연체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장호연은 간신히 거처 앞에 도착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달리 크게 흐트러져 있었고, 안색은 썩은 고름처럼 황록색으로 변해 있었다.

대문을 넘자 정원을 관리 중인 장휘령의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호연을 바라봤다.

곧이어 그녀는 장호연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크게 놀라 소리쳤다.

"소야! 안색이 어찌 이리···."

장호연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독 내성을 기르는 수련을 하다 독기가 조금 남아서 그런 겁니다. 금방 회복될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장호연의 차분한 목소리에도 강휘령은 여전히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녹색 빛이 감도는 얼굴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호연의 성정을 알기에 더 이상 깊게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소야. 그럼 조심해서 수련하세요."

"네, 형수님. 저는 이만 연공실로 가보겠습니다."

장호연은 짧게 답하고는 연공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휘령은 장호연이 연공실 문을 닫고 들어갈 때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연공실에 도착한 장호연은 즉시 방어 진법을 작동시켰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저물대를 두드린 그는 엘릭서가 담긴 옥병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격신술의 후유증으로 손상된 영혼을 치유한 이후.

장호연이 보유한 엘릭서는 부상을 딱 1회 치료할 수 있는 분량뿐이었다.

각성 능력이 충전되려면 아직 몇 달이 남은 상황.

장호연은 귀한 엘릭서를 소모하게 만든 진위청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곧이어 옥병의 마개를 제거한 그는 남아 있는 엘릭서를 모두 마셨다.

그 순간, 기적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독기로 인해 시체처럼 푸르죽죽한 빛을 띠던 피부와 섬뜩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손톱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건강한 혈색을 되찾았다.

동시에 피부 표면에서는 농밀한 영기의 흐름이 퍼져 나오며 은빛 광채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육체를 부패시키던 독성은 엘릭서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독성이 정화된 영독은 그의 체백을 단련하는 영약으로 변했다.

목숨을 위협하던 문제가 한순간에 간단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장호연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어서 두 눈에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장호연은 결코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악의를 품은 자를 가만히 두고 볼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역시 사부를 배신한 놈을 믿을 수는 없는 법이지. 세상을 빠르게 하직하는 게 꿈이라면 내가 도와주마.'

진위청이 운암방시를 떠난 지 이미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수도자의 이동 속도를 감안하면 이미 일이백 킬로미터는 너끈히 이동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놈의 도주 방향을 모르는 이상 추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장호연은 이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금령과 백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념을 멈춘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연공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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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연공실 밖에는 강휘령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장호연의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자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장호연은 강휘령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성문으로 향했다.

운암방시를 벗어난 그는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어서 변형술을 사용하여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준비를 마친 그는 영수대를 두드려 금령과 백호를 동시에 불러냈다.

"백호, 놈을 추격해."

장호연의 명령에 백호가 코를 씰룩거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백호의 동그란 눈이 반짝 빛나더니 한 방향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장호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금령을 타고 이동하는 대신 직접 뛰어가기로 했다.

신행부를 발동한 그는 경신술을 펼쳐 백호의 뒤를 쫓았다.

그사이 금령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주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주었다.

백호는 땅 위를 달리다가도 순식간에 땅속으로 몸을 숨기며 놀라운 속도로 이동했다.

때때로 진위청의 냄새를 다시 확인하려 잠시 멈추기까지 했음에도, 둘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백호의 속도는 장호연이 전력을 다해도 따라잡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만약 신행부가 아니었다면 백호에게 한참이나 뒤처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령이 연결된 덕분에 백호의 위치를 파악하며 꾸준히 쫓아갈 수 있었다.

***

그 시각, 진위청은 운암방시에서 삼사백 리쯤 떨어진 구릉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신행부를 계속해서 사용하며 사력을 다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제기랄!'

현재 그의 내면은 상반된 두 감정으로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문의 지원을 받아 축기기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스무 해 넘게 따르던 사부와 혼인까지 생각했던 사매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가문과 종문을 중시하는 수도계의 관례상, 스승을 배신한 행위는 분명히 크나큰 죄악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부와 사매를 해치지는 않았으니, 스스로 도리를 다했다고 자위했다.

더불어 이 모든 일이 고장풍의 불분명한 처신 탓이라며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다.

'이게 다 내 천성이 너무 선한 탓이다. 잘못은 그들에게 있으니, 내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했다.

원래 수도계의 법도란 강자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법이다.

머지않아 가문이 금단대종의 반열에 오른다면, 자신이 벌인 일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터였다.

물론 누군가는 등 뒤에서 수군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입도 뻥긋 못하는 버러지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가치조차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당당한 축기기 수사가 된다면, 누가 감히 면전에서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진위청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불안감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후면 장로님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다. 장로님을 뵙게 되면 이 불안감 또한 사라질 거야.'

금단대종의 격을 갖추려면 금단기 수사뿐 아니라 종문을 대표할 만한 3계 기예가 필요했다.

고장풍의 제부 전승은 금단대종으로 승격을 노리는 영경진가에게도 귀한 보물이었다.

그들은 제부 전승을 안전하게 수거하기 위해 축기장로 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마침내 진위청은 축기장로와 만나기로 약속한 계곡에 도착했다.

그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주위를 살폈지만 아직 장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그때였다.

진위청의 눈에 하늘 저편에서 2장 길이의 비주(飛舟)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비주 위에는 문사풍의 중년인이 축기기 초기 수사의 강대한 영압을 발산하며 서 있었다.

곧이어 비주가 계곡 입구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진위청이 반색하며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장로님!"

"그래, 위청아. 오랜만이로구나. 물건은 무사히 가져왔겠지?"

"예, 장로님. 다행히 가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했다. 가문에서도 네 공을 높이 살 것이다."

축기장로의 칭찬에 진위청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그는 제부 전승이 담긴 옥간을 꺼내기 위해 허리춤에 있던 저물대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때.

두 사람이 딛고 선 땅이 아무런 예고 없이 뒤흔들리며 아래로 꺼지기 시작했다.

단단했던 대지는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질척한 수렁으로 변모했다.

동시에 진흙으로 이루어진 굵은 촉수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라 그들의 하반신을 단단히 휘감았다.

"헛!"

"이, 이게 무슨!"

축기장로와 진위청이 동시에 경악성을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두 사람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위청은 진흙 촉수의 강력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상하게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축기장로는 진흙 촉수를 뿌리치고자 급히 법력을 운용했다.

그러나 발목을 휘감고 있는 진흙 촉수의 힘은 축기기 수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축기장로와 진위청이 경악하며 버둥거리는 사이.

땅이 부풀어 오르며 순백의 털을 지닌 거대한 서요(鼠妖)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요에게서는 처음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동그란 눈을 부릅뜨자 2계 중기에 달하는 강대한 요력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날카로운 날짐승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고개를 든 축기장로는 날개폭 4장에 이르는 거대한 요금(妖禽)이 쏜살같이 강하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곧이어 별다른 기운을 발하지 않던 요금에게서도 서요와 마찬가지로 2계 중기의 강력한 영압이 느껴졌다.

"이계 요수! 어찌 이런 곳에 둘씩이나!"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영기가 극도로 희박한 영빈지지(靈貧之地)였다.

일반적으로 요수들은 영맥이 흐르지 않는 척박한 곳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세상일에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1계 요수라면 혹시 모를까, 2계 요수가 이런 황무지에 나타난 것은 상식을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영빈지지에 이계 중기 수준의 요수 두 마리가 동시에 나타나다니.'

축기장로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위험을 감지한 그의 사고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그는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나타난 요수들을 보며 큰 괴리감을 느꼈다.

수진서가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원래 대부분의 서요가 뛰어난 은신 능력을 타고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시응까지 기운을 감쪽같이 숨긴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전투력이 강한 요수일수록 은신 능력이 떨어졌다.

2계로 진화한 금시응은 동급 요수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전투력을 자랑했다.

그런 요수가 저토록 완벽하게 기운을 은폐했다는 것은 그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설마 금시응이 염식술을 익히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계 요수가 술법을···.'

축기장로는 즉시 자신의 가정을 부인했다.

2계 요수의 지능은 뛰어나 봐야 대여섯 살 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3계 요수라면 또 모를까.

인간조차 익히기 어려운 염식술을 요수가 깨우쳤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상념에 빠진 와중에도, 축기장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빛이 감도는 옥패를 꺼내 들었다.

법력을 주입하자 옥패가 강렬한 빛을 발하며 그의 주변으로 얇지만 견고한 기운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푸른 광채가 번쩍이자, 그의 몸을 휘감았던 진흙 촉수들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잘려 나갔다.

축기장로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수렁에서 간신히 발을 빼낼 수 있었다.

진위청은 여전히 수렁의 강력한 속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영력을 끌어올려 발버둥 쳤지만, 요력이 담긴 진흙의 속박은 연기기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그는 속수무책으로 수렁에 갇힌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축기장로와 2계 요수들의 격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축기장로는 즉시 비행술을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그의 전방으로 금빛 섬광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하늘에서 강하한 요금이었다.

'빠르다!'

축기장로는 동요를 감추고 차분하게 법력을 끌어올렸다.

푸른 빛의 호신법조가 물결치듯 피어올라 그의 전신을 감쌌다.

동시에 저물대를 두드려 거대한 청동 솥을 소환했다.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보정(寶鼎) 표면에는 신비로운 도문이 빼곡히 새겨져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기합과 함께 보정을 전방으로 날려 보냈다.

카강!

금령의 날카로운 금빛 발톱이 보정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강력한 충격에 보정은 수 미터를 밀려나며 웅웅거리는 진동음을 토해냈다.

그 충격파가 축기장로에게까지 전해져 내장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금령은 보정과의 충돌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더니, 더욱 매서운 기세로 축기장로에게 날아들었다.

축기장로는 즉시 보정에 법력을 더하며 금령을 향해 쏘아 보냈다.

거대한 솥이 포탄처럼 날아갔다.

그 순간, 금령의 몸 위로 연한 푸른 빛의 영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풍속성기를 두른 금령의 움직임은 한 줄기 바람과도 같았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각도로 몸을 틀어 날아오는 보정을 스치듯 피했다.

금령은 순식간에 축기장로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콰앙!

금빛 영광을 두른 날개가 축기장로의 호신법조를 강타했다.

대기를 울리는 파열음과 함께 푸른 빛의 호신법조가 산산조각 났다.

"크윽!"

법력과 요력이 격돌하며 발생한 충격파가 축기장로의 신식을 뒤흔들었고, 인당혈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전신에 강력한 충격을 느끼며 맹렬한 속도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축기장로는 필사적으로 법력을 운용해 추락하는 몸을 허공에서 간신히 멈춰 세웠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무섭게 떨어지는 금령의 발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땅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축기장로의 발이 막 땅에 닿으려던 찰나.

땅속에 숨어 있던 백호가 다시 움직였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바닥이 예고 없이 다시 질척한 수렁으로 변했다.

동시에 땅속에서 날카로운 바위 창 하나가 불쑥 솟구쳐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축기장로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간신히 치명상은 피했다.

하지만 옆구리를 깊게 스치고 지나간 바위 창은 그의 법의를 찢고 내장이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금령과 백호의 연계 공격은 오랜 시간 합을 맞춘 듯 지극히 정교했다.

금령이 정면에서 몰아치면 백호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찌르며 그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빈틈을 만들었다.

그 빈틈없는 협공 앞에 축기장로는 저물대에서 새로운 부적이나 법기를 꺼낼 작은 여유조차 얻지 못했다.

사실 축기기 초기에 불과한 축기장로의 실력으로 금령 하나만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런 판국에 백호가 적재적소에 나타나 발을 묶고 끊임없이 빈틈을 파고들자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다시금 호신법조가 깨진 그때.

스걱!

축기장로는 오른쪽 어깨에 살이 타는 듯한 격통과 함께 섬뜩한 허전함을 느꼈다.

금령의 매서운 일격에 그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통째로 잘려 나간 것이었다.

"빌어먹을 짐승 놈들!"

팔을 잃은 고통과 치욕에 축기장로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전력으로 법력을 운용해 보정에 불어넣었다.

허공에 떠 있던 보정의 아가리에서 시뻘건 불길이 용솟음쳤다.

작열하는 화염 기둥은 금령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이어서 그는 소매를 털어 부적 두 장을 허공에 날렸다.

한 장의 부적은 극한의 냉기를 품은 안개로 변해 금령에게 날아갔고, 다른 부적은 노란 번개로 변해 땅속을 향해 떨어졌다.

냉기를 품은 안개가 금령을 덮쳤다.

금령은 형체가 없는 바람처럼 표홀하게 움직이며 화염 기둥과 냉기 사이를 빠져나갔다.

땅속에서는 강력한 번개의 기운을 느낀 백호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쿠르릉!

뇌격이 엉뚱한 땅을 강타하며 흙먼지를 피워 올리자마자, 백호는 다시 땅을 뒤흔들어 축기장로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축기장로가 비틀거리는 순간 금령이 다시금 그에게 쇄도했다.

축기장로는 호신법조를 간신히 다시 응집해 금령의 공격을 막아냈다.

연이어 이어지는 금령의 맹공과 백호의 예측 불가능한 방해 공작에 그의 법력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결국 그의 몸을 보호하던 호신법조가 다시 한번 깨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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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결국 상황의 불리함을 깨달은 축기장로는 방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머리 위로 보정을 띄우고 희미한 호신법조를 두른 채 쏟아지는 공격을 견뎌냈다.

그러나 두 영수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협공에 법력이 모래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 빠르게 소진되었다.

'내가 정녕 여기서 죽는단 말인가···.'

전투 전에 품었던 격렬한 분노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마음속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허망함으로 가득 찼다.

결국 대부분의 법력을 소진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더러운 짐승 놈들! 나 혼자 죽을 성싶으냐!"

그는 마지막 남은 법력을 끌어모아 보정을 자폭시켜 금령과 동귀어진할 각오를 다졌다.

보정이 붉은빛을 토하며 불안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땅속에서 기습 위주로 움직이던 백호가 번개 같은 속도로 땅 위로 솟구쳐 올랐다.

이마에 요력을 집중시킨 백호는 그대로 축기장로의 미간을 향해 박치기를 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축기장로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인당혈에 충격을 받은 축기장로는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속절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바람처럼 날아든 금령이 그의 목덜미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쥐었다.

마치 잘 익은 과일을 따듯 그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졌다.

축기장로는 자신이 누구에게, 왜 죽었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축기장로의 숨이 멎는 순간.

허실의 경계에 응축되어 있던 진원이 현계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주체가 되는 영혼이 사라진 상태의 진원은 순수한 영기의 형태를 띠었다.

허공으로 물결치듯 퍼져나가는 농밀하고도 순수한 영기는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기운을 수도자가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인을 잃은 진원이 천지로 회귀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과도 같았다.

천지로 흩어지는 기운을 흡수하려면 천지와 도를 겨뤄 그것을 빼앗아야 한다.

이는 선도의 정점에 오른 화신선사라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이 도도한 흐름을 가로막고 그 기운을 취하려는 것은 맨몸으로 폭발하는 화산을 막으려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천지의 일부로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요물들에게는 수도자와 다른 규칙이 적용되었다.

요물이 살아있는 생명을 섭취하여 자신의 힘으로 삼는 것은 천지가 정해놓은 자연의 섭리였다.

수도자가 천지로부터 빼앗은 기운을 요물이 다시 포식하는 과정은 어찌 보면 천지가 정한 거대한 순환의 일부라 할 수 있었다.

축기장로의 진원은 한두 호흡을 내쉬는 사이에 천지로 환원되었다.

축기장로의 진원이 완전히 사라진 그때.

계곡 너머 언덕 위로 검은 도포 차림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중년인은 비호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너른 구릉을 단숨에 가로질러 진위청 앞에 멈춰 섰다.

진위청은 중년인을 경계하거나 적대하지 않는 요수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비로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단순한 요수가 아니라 겁수가 부리는 영총이었군!'

진위청은 사부를 배신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그토록 염원하던 3계 제부 전승을 손에 넣었다.

이제 영화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하여 운수가 이토록 사나울 수 있단 말인가!

진위청은 자신의 선도를 가로막는 하늘을 저주하며 깊은 원망을 내뱉었다.

이어서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살길을 도모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는 영경진가의 혈손인 진위청이라 합니다. 저희 진가는 얼마 전 금단노조가 탄생하시고 현재 금단대종으로 승격을 준비 중입니다. 장로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가문에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저를 살려주신다면, 이 일이 선배님과는 무관하며 단지 요수의 소행이었다고 가문에 보고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어떤 금제라도 받아들일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진위청은 자신의 배경과 금단노조의 존재를 드러내며 상대를 압박하려 했다.

하지만 중년인은 희미하게 조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가문이 금단대종이 된다 한들, 이미 죽은 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장호연은 백호로부터 진위청이 축기장로와 만났다는 내용을 전해받았다.

그는 이대로 진위청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린 적을 두고 물러나는 것 역시 그의 도심을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결국 장호연은 축기장로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장로의 경지가 축기기 중기였다면 아쉽지만 복수를 포기했을 터였다.

그러나 축기기 초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금령의 전투력은 축기기 중기 수사와 붙어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백호까지 가세하면 축기기 초기 수사 하나쯤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장호연은 영수들의 힘만으로 축기기 수사를 처치했다는 사실에 짜릿한 성취감을 느꼈다.

장호연은 백호에게 신호를 보내 이만 진위청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이대로 끝내는 건 부족해. 적어도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죽어야 제대로 된 복수지.'

이렇게 쉽게 진위청을 보내주면 찝찝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진위청의 얼굴에 떠오를 절망과 후회를 목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곧이어 장호연의 얼굴에 푸른 영광이 아른거리더니 이내 본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진위청에게서 장호연이 바라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너는, 장호연!"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진위청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두 마리의 2계 영수에게 향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평소 장호연이 데리고 다니던 1계 영수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저놈들이 그놈들이었구나! 저런 강력한 영총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철저하게 숨겨왔다니. 참으로 음험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다!'

자신이 사용한 영독은 2계 후기 연체사도 버티기 어려운 지독한 독성을 지녔다.

그런데 이제 막 2계 연체사에 오른 장호연이 독을 해독한 것은 물론이고,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을 추격해 온 상황.

이는 장호연이 비범한 기연을 얻었거나 대단한 배후를 지녔음을 의미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협상을 시도했다.

"장 사제, 잠시 내 말을 들어보게! 나까지 죽으면 분명 가문에서 흉수를 찾기 위해 나설 것이네. 조사를 이어가다 보면 사부님을 찾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일 테지. 그렇게 되면 자네는 물론이고 사부님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을 걸세."

진위청의 필사적인 호소에도 장호연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진위청은 심장을 조여오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재빨리 허리춤에 있는 저물대를 장호연에게 던졌다.

"장 사제, 이걸 받게! 그 안에 삼계 제부 전승과 내 모든 재산이 들어있네. 동문의 정을 생각해서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게."

장호연은 날아오는 저물대를 가볍게 낚아챘다.

"동문? 제정신이 아니군. 어차피 너만 사라지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된다. 그런데 이딴 걸로 협상을 하려 들어?"

말을 마친 장호연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백호."

장호연이 작게 속삭이던 그때.

진위청을 붙잡고 있던 수렁 속에서 날카로운 바위 창 하나가 솟구쳤다.

바위 창은 진위청의 복부를 꿰뚫고 등 뒤로 빠져나왔다.

바위 창에 서린 흉포한 요력에 의해 진위청의 내장은 순식간에 곤죽이 되었다.

진위청의 두 눈에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장호연은 서늘한 눈으로 진위청의 죽음을 바라봤다.

이어서 그는 술법을 펼쳐 진위청과 축기장로의 사체를 남김없이 불태웠다.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타고 남은 재, 심하게 손상되어 영성을 잃은 법의, 저물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장호연은 기대에 가득한 얼굴로 축기장로의 저물대를 끌어와 백호에게 살펴보도록 했다.

다행히 저물대에는 금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수사들은 저물대에 금제를 걸어 소유자 외에는 함부로 열지 못하게 해두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강제로 저물대를 열려다가는 금제가 발동하여 내부의 보물이 사라지기도 했다.

장호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저물대에 신식을 주입했다.

곧이어 그의 입가에 기쁨의 미소가 그려졌다.

저물대 안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값진 보물들로 가득했다.

하품 영석만 50만 개에 달했고, 중품 영석 또한 무려 2만 개나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장의 2계 부적들과 2계 하품 법기, 진법 법기 등 다양한 보물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더불어 수도계에서 널리 쓰이는 영단들도 다량 보였는데, 해독에 효과적인 청기단(淸氣丹)이나 영력 회복을 돕는 회기단(回氣丹) 같은 2계 단약들이었다.

이 외에도 연단이나 연기에 사용되는 희귀한 영재와 영광들 역시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게 다 얼마야?'

다른 건 차치하고 영석만 해도 하품 영석 250만 개에 달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연기기 수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은 것이다.

장호연은 수사들이 왜 겁수가 되어 노략과 약탈을 일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누군가가 평생을 바쳐 이룬 결실을 송두리째 빼앗을 수 있다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장호연은 겁수의 길을 걸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또 모를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행위는 그의 도심에 정면으로 위배되었다.

게다가 수도계는 어디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연기기 수사가 실은 정체를 숨긴 원영기 노괴일 수도 있는 법.

당장 눈앞의 축기장로나 과거 관가 무리처럼 언제든 역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장호연은 저물대에서 영석과 옥간을 모두 꺼내 백호에게 확인토록 했다.

수도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기이한 추적 수단들이 존재한다.

약탈한 보물을 함부로 지니고 다녔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적 비술에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백호의 영각은 매우 뛰어나 보물에 깃든 미세한 기운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기운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판별할 능력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영석 본연의 순수한 영기 외에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일단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었다.

또한, 옥간은 수도자의 신식을 사용해 정보를 기록하는 매개체였다.

옥간 자체에 특별한 표식을 심어 놓지 않은 이상 추적을 당할 염려는 없었다.

백호는 코를 씰룩이며 영석과 옥간을 꼼꼼히 살펴봤다.

곧이어 백호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 후에야 장호연은 모든 보물을 자신의 저물대에 옮겨 담았다.

"백호,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이어서 그는 축기장로의 저물대를 백호에게 건넸다.

저물대 내부에 어떤 교묘한 표식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축기장로의 저물대를 사용하는 건 자신이 축기기 수준의 금제를 간파하고 해제할 능력을 갖춘 후에 시도하기로 했다.

본래 저물대 안에는 저물대를 넣지 못하지만, 백호의 체내 공간에는 공간 물품을 넣는 것이 가능했다.

백호의 체내 공간은 천부신통으로 형성된 특수한 아공간이었다.

설령 금단기 고수라 할지라도 그 내부를 엿보거나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현시점에서는 가장 안전한 보관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저물대를 가지고 있으라는 소리에 백호가 반색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록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귀한 보물을 잔뜩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호의 수집욕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백호는 축기장로의 저물대를 재빨리 삼켰다.

이어서 장호연은 진위청의 저물대를 확인했다.

그가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고장풍의 전승이 담긴 옥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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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3계 제부 전승의 정보량은 실로 방대하기 그지없었다.

장호연이 아무리 뛰어난 기억력을 지녔다 한들, 그 모든 내용을 단시간에 완벽히 기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수사의 강대한 영혼을 고려하면, 정보를 단순히 저장하는 것 자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진정한 문제는 기억이 아닌 그 방대한 지식을 온전히 이해하고 체득하는 과정에 있었다.

장호연은 제부 전승이 담긴 옥간을 자신의 저물대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이전에 살폈던 진위청의 저물대 속 물건들은 대부분 1계 수준의 하찮은 것들이었기에, 딱히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었다.

방금 전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은 장호연의 눈에 진위청의 유품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쓸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시간이 날 때 천천히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장호연은 금령과 백호에게 요력을 방출해 주변의 기운을 흐트러뜨리라고 지시했다.

이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추격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천지영기는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축기기 이상의 경지에 오른 수사들은 강대한 신식을 운용하여 천지영기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을 읽어내는 영흔술(靈痕術)을 펼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과거 그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나마 추측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기는 한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남겨진 흔적은 자연스레 옅어지고 추적은 점차 어려워지기 마련이었다.

만약 강력한 기운으로 그곳을 뒤엎어 버린다면 영기가 남긴 본래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설령 누군가 이곳에서 무언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해도, 기껏해야 강력한 요수의 흉포한 요력을 느끼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금령과 백호가 동시에 요력을 방출했다.

찬란한 금빛 뇌광과 거대한 흙먼지 폭풍이 주변 일대를 격렬하게 휩쓸었다.

요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과 잔류 영기는 순식간에 뒤섞이고 흩어져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이 정도라면 금단기 수사가 직접 찾아와 영흔술을 펼친다 해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장호연의 지시에 따라 백호는 땅을 뒤엎어 지면에 남은 전투의 흔적까지 말끔히 지웠다.

모든 뒷정리를 완벽하게 마친 장호연은 백호를 데리고 금령의 등에 올라탔다.

금령은 날개를 한차례 펄럭여 순식간에 하늘 높이 솟구쳤다.

***

영경산 진가.

사당안에는 역대 조상들의 위패와 가문의 핵심 인물들의 명혼등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평소라면 엄숙한 정적만이 감돌아야 할 사당 안에 경악과 다급함이 뒤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오, 오장로님의 혼등이!"

사당을 지키던 수등집사(守燈執事)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등불 하나가 빛을 잃은 채 가느다란 연기만을 힘없이 피워 올리고 있었다.

수등집사는 오장로의 명혼등이 꺼진 사실을 즉시 다른 장로들에게 전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한 가문의 축기장로들은 황급히 사당으로 달려왔다.

꺼져버린 명혼등을 직접 확인한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대체 누가 우리 진가의 장로를 해쳤단 말이냐!"

"큰일이다! 오장로의 비보가 알려지면 노조께서 얼마나 진노하실지···."

오장로는 가문의 유일한 금단노조와 피를 나눈 친형제로, 둘의 우애는 각별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변고 앞에 장로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당 안에는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끝에 마침내 가문의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노조께서는 현재 원영도자(元嬰道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시험에 참여 중이시다. 만약 지금 이 시점에 오장로의 비보를 전한다면, 시험에 온전히 집중해야 할 노조의 심경에 큰 동요가 생길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자칫 그 충격으로 도심에 문제가 생겨 시험을 망치게 될 수도 있다."

영경진가의 금단노조는 변이 영근인 풍영근과 뇌영근으로 이루어진 이영근자였다.

거기에 더해 검수(劍修)에게 최고의 도체 중 하나로 꼽히는 검명도체(劍鳴道體)까지 지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교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속한 원영상종 내에서도 보기 드문 뛰어난 재능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원영도자 선발 시험에서 우승을 차지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점쳐졌다.

만약 금단노조가 원영도자가 된다면, 영경진가는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숙원을 풀고 명실상부한 금단대종으로 발돋움하게 될 터였다.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이 중차대한 시기에 노조의 심기를 건드려 시험을 망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장로가 말을 이었다.

"따라서 이 일은 노조께 철저히 비밀로 하도록 하겠다. 대신, 노조께서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오장로를 해친 흉수가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것만이 노조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다른 장로들은 대장로의 판단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장로들의 만장일치로 오장로의 죽음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영경진가의 이장로와 삼장로가 오장로를 죽인 흉수를 찾기 위해 조용히 족지를 떠났다.

***

운암방시로 돌아온 장호연은 가문에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정은 광산으로의 발령을 이틀 뒤로 미뤘다.

급한 용무를 처리한 그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고장풍의 거처를 찾아갔다.

믿었던 제자에게 당한 배신의 충격이 실로 컸던 모양인지, 고장풍은 단 하루 만에 눈에 띄게 쇠약해져 있었다.

그의 안색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연신 마른기침을 힘겹게 토해냈다.

고혜음의 눈에는 고장풍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 역시 진위청의 배신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고장풍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장호연을 본 고혜음은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광산에는 같이 못 갈 것 같아."

본래 그녀는 진위청이 고장풍을 잘 모셔줄 것이라 믿었기에, 장호연과 함께 광산으로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위청에게 끔찍한 배신을 당한 지금, 쇠약해진 고장풍의 곁을 지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아닙니다, 사저.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사부님을 모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장호연은 고혜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때, 힘없이 눈을 감고 있던 고장풍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혜음아. 너는 예정대로 호연이를 따라 광산으로 가거라."

"아니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편찮으신데 제가 어떻게···."

"내 말을 듣거라."

고장풍은 고혜음의 말을 잘랐다.

"마음은 고맙다만, 네가 이곳에 남는다고 해서 내 병세가 당장 나아질 것도 아니다. 네 귀한 시간을 늙은이에게 낭비하느니, 호연이와 함께 제부술 수련에 정진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훨씬 값진 투자가 될 것이다.

특히 지금은 호연이가 제부술을 수련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라 네 도움이 꼭 필요하다. 호연이는 대도법칙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니,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여 수련에 매진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게다. 그러니 내 걱정일랑은 하지 말고, 예정대로 호연이와 함께 떠나거라."

고혜음은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자신과 장호연을 이어주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고장풍의 강권에,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로한 데다 건강까지 급격히 악화된 할아버지를 홀로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문득 묘안이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

"사제, 혹시 강 수사 있잖아. 그분을 이곳에서 지내시게 하면 어떨까? 이제 진가 놈도 없으니 집에 빈 공간도 충분하고 말이야. 집안일을 돌봐주는 산수들은 그대로 둘 테니, 강 수사께서 할아버지 식사만 조금 챙겨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

고장풍의 거처는 중간의 담을 허물어 주택 두 채를 하나로 합친 형태였다.

그동안 한쪽 주택은 진위청이 혼자 사용하고 있었기에 강휘령 모녀가 머물 공간은 충분했다.

장호연은 고혜음의 제안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운암방시를 떠나면 강휘령 모녀만 남게 되어 아무래도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컸다.

지난 몇 년간, 강휘령의 빼어난 미모에 흑심을 품고 접근하려던 이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운암방시에서 귀족이나 다름없는 백월장가의 혈손이다.

강휘령이 장호연과 함께 지낸다는 사실을 안 그들은 이내 그녀를 포기했다.

만약 강휘령 모녀가 고장풍과 함께 생활한다면 장호연이 없더라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강휘령이 고장풍의 건강에 좋은 약선을 차려준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형수님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그때, 고장풍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혜음아, 갑자기 따뜻한 차가 한 잔 마시고 싶구나."

"네? 아, 네! 제가 금방 타 드릴게요."

고혜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고장풍이 말을 덧붙였다.

"저번에 백로다관에서 마셨던 백옥로가 참 괜찮더구나. 가서 찻잎을 조금 사 오면 좋겠다."

"네, 할아버지. 금방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고혜음은 밝은 목소리로 답하며 거처를 나섰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얼마 후.

고장풍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장호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호연아. 혜음이를 보낸 것은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란다. 원래 내게 남은 수명은 삼십 년 정도였다. 그런데 진가 놈에게 배신당하고 정기신이 흔들리면서 기존의 부상이 더욱 악화되었다. 

아직 이십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당장이야 큰일이 있겠냐마는, 세상일이라는 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로 내 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너에게 미리 삼계 제부술을 비롯한 모든 비전 전승을 전수해 주려 한다."

장호연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어찌 그리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자가 앞으로 더욱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의 병을 고칠 방도 또한 반드시 찾아낼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고장풍은 인자하지만 어딘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병을 치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이제는 설령 의술에 능통한 금단종사가 직접 온다고 해도 내 손상된 도기를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헛된 일에 정력을 낭비하지 말거라.

너를 관문제자로 삼았듯이,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제자를 들일 생각이 없다. 그러니 내 의발을 이을 사람은 혜음이가 아니면 너뿐이다. 허나 혜음이의 자질로는 아쉽게도 내 전승을 온전히 이어받기가 어렵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나의 제부 전승은 온전한 삼계 전승이기에, 이를 완전히 익히고 그 정수를 깨닫기 위해서는 적어도 축기기 후기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간 너를 쭉 지켜본 바 네가 희귀한 도체의 소유자임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너라면 능히 축기기, 나아가 그 이상의 경지에도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니 내 도통 또한 제대로 이을 수 있을 게다."

고장풍의 설명에도 장호연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만약 제가 사부님의 도통을 이어받게 된다면, 사부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벌써부터 의발 전수를 논하는 것은 제자 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에게는 이미 진위청에게서 빼앗은 온전한 3계 제부 전승 옥간이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미리 전승을 전수받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것은 마치 스승의 이른 죽음이나 불행을 바라는 것과 같아 제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장풍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전제로 앞으로의 일을 계획 중이었다.

그러나 도기가 회복된다면 함께 보낼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터.

3계 제부술은 그때 가서 전수받아도 결코 늦지 않았다.

장호연은 머지않아 고장풍의 병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망가진 지 백 년 이상 된 도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소 3계, 어쩌면 4계 이상의 영단이나 의사가 필요했다.

연기기에 불과한 고장풍 스스로 이런 기연을 얻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호연이 하룻밤 사이에 고장풍을 완치시킨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행여 고장풍에 호기심을 느낀 고계 사수(邪修)라도 나타날 경우, 고장풍은 감당하기 힘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이 세계에는 영계나 수혼술과 같이 상대를 제약하고 기억을 강제로 파헤치는 강력한 심문 수단들이 존재했다.

고장풍이 안전하려면 그조차 우연한 행운이나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믿도록 자연스럽게 치료되는 과정이 필수였다.

이러한 안배 없이 섣불리 고장풍을 치료하는 것은, 그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장호연의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고장풍의 얼굴에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장호연의 올곧은 심성에 내심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으마. 다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두거라. 내가 진위청 그 배은망덕한 놈에게 삼계 제부 전승을 넘겨준 것은 사실이다."

고장풍은 잠시 말을 멈춘 후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 말고도 다른 비전이 남아 있다. 부적만으로 진법 수준의 위력을 발휘하는 부진(符陣)의 운용법과 스스로 주인을 위기를 감지하고 보호하는 호부(護符)의 제작법이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두 비전이야말로 내 전승의 진정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장호연은 고장풍이 진위청을 속였다는 말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고장풍이 3계 제부 전승을 넘겨준 것은 맞으니 진위청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장호연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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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부진과 호부는 정확히 어떤 능력을 지녔습니까?"

"진법은 분명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발동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부진이 발동되는 속도는 단일 부적을 발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진법이 펼쳐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몇 호흡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식으로 사고를 가속하며 공방을 벌이는 수도자들에게, 몇 호흡의 시간은 진법 구축을 방해하거나 파훼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부진은 이러한 진법의 약점을 보완해 만든 비술로써, 부적 한 장을 발동하듯 순식간에 진법을 펼친 것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러 장의 부적을 동시에 사용하면 기운이 서로 간섭하여 제어가 어려워지고 위력이 되려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부진은 여러 부적의 기운을 조화롭게 엮어 운용함으로써 그 위력을 증폭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부진에도 단점은 있었다.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진법과 달리, 부진의 운용에는 매번 다량의 부적이 소모되었다.

이어서 고장풍은 호부에 대해 설명했다.

"호부는 단순히 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법기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

호부는 신식과 영력을 주입해 장기간 꾸준히 배양함으로써 그 위력을 점차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마치 금단기 수사가 본명법보(本命法寶)를 배양하는 과정을 연상시켰다.

오랜 배양으로 영성을 얻은 호부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스스로 깨어나 주인을 보호했다.

'진짜 비전이라고 할 만하네. 가문의 전승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부진과 호부에 대해 알게 된 장호연은 솔직히 갖고 싶다는 욕심이 강하게 일었다.

3계 제부 전승은 당장 급하지 않지만, 부진과 호부는 빨리 익힐수록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부진과 호부를 전수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고장풍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장호연의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래 이 두 가지 비술은 우리 고가의 진족비전(鎭族秘傳)으로 삼아 대대로 전승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 비전을 전수받으려면 혜음이와 혼인해야만 한다."

고장풍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장호연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저의 의사는 물어보고 이러시는 건가?'

잠시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감돌았다.

생각을 정리한 장호연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찌 그러느냐? 혹여 혜음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저처럼 고운 심성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분을 누가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장호연은 잠시 말을 고르며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했다.

"본래 제자는 자질의 한계로 수련에 큰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허나 부도에 입문한 뒤로 수련 속도가 빨라지면서 선도의 참된 즐거움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언젠가 한계를 맞이해 수련을 멈추는 날이 올지언정, 지금으로서는 오롯이 수련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고장풍의 비전은 누군가에게 천륜을 어기고서라도 얻고 싶은 보물일 것이다.

그런 만큼 장호연 역시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거짓된 마음으로 고혜음과 혼인하여 이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이는 스스로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훗날 도심을 뒤흔드는 마장(魔障)이 되어 장생의 길을 가로막을지도 수도 있었다.

장호연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고장풍의 얼굴에 잠시 아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장호연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따뜻하고 온화하게 변했다.

사실 고장풍은 장호연이 어떤 대답을 하든 관계없이 자신의 모든 비전을 전수할 생각이었다.

고혜음과의 혼인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그저 손녀에 대한 장호연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의 심성을 다시 한번 시험해 보려는 방편에 불과했다.

'역시 이 아이는 다르구나.'

장호연은 고장풍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고장풍은 저물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한참 후에야 그는 옥간을 장호연에게 건네주었다.

"이 옥간에는 완전한 삼계 제부 전승을 비롯하여, 부진과 호부의 비전까지 모두 담겨 있다.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니, 나를 사부로 생각한다면 거절하지 말고 받거라."

고장풍은 잠시 숨을 고른 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내가 우연히 얻은 중품 양혼결도 기록해 두었다."

본래 고장풍은 양혼결만큼은 장호연이 고혜음과 혼인을 약조한 뒤에 전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호연의 변치 않는 올곧은 심성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고혜음의 행복과 안전이다.

장호연이라면 결코 은혜와 도리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고혜음을 지켜주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장호연이 성장하고 강해질수록 고혜음 또한 더욱 안전해질 터였다.

"중품 양혼결이요?"

장호연은 진심으로 놀라 되물었다.

양혼결은 연수단과 더불어 수도계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보물 중의 보물로,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절학이었다.

어지간한 축기세가라 할지라도 기껏해야 하품 양혼결을 가문의 비전으로 삼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고장풍이 중품 양혼결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선뜻 전수해 주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호연이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고장풍이 진중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본디 감당할 수 없는 보물은 재앙을 부르는 법이다. 자칫하면 너뿐만 아니라 네 주위 사람들까지 큰 화를 입게 될 수도 있으니, 양혼결을 익혔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예, 사부님. 제자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장호연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답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부님을 해친 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장호연은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제자의 도리로서 사부의 깊은 원한을 대신 갚아줄 생각이었다.

고장풍의 얼굴에 씁쓸함과 체념이 뒤섞인 미소가 어렸다.

"그자는 이미 금단종사가 되어 삼라종의 장로직을 맡고 있느니라. 우리 같은 저계 수사는 감히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어려운 높은 위치에 오른 자다. 괜히 그자와 엮여봐야 네 앞길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보려고 애쓰지 말거라."

장호연은 고장풍의 말에 답하는 대신 그저 조용히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고장풍이 말을 이었다.

"호연아, 만약 내가 없더라도 부디 혜음이를 잘 부탁한다."

"염려 놓으십시오, 사부님. 사저는 제게 가족과 다름없습니다. 반드시 사저를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고장풍은 그제야 안심한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밖에서 고혜음이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고혜음이 정성껏 우린 영차를 들고 왔다.

세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

장호연은 한 시간가량 담소를 나눈 뒤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연공실로 들어간 그는 진법을 발동한 후 진위청의 저물대를 꺼냈다.

저물대 안에는 연기기 후기 수사가 쓸 법한 법기 몇 점과 부적, 단약 등이 있었으나, 장호연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특별한 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연기기 후기의 상품 제부사가 평생 모은 재산이니만큼, 하품 영석 10만 개 이상의 가치는 충분히 될 듯싶었다.

이제 재물에 부족함이 없는 장호연에게 법기와 같은 보물들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혹여 수련에 도움이 될 만한 공법이나 다른 수선기예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옥간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진위청의 저물대에는 1계 수준의 연단 전승이 담긴 옥간이 들어 있었다.

잠시 내용을 훑어보니 이전에 가문 보고에서 얻었던 연단 전승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자세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어서 다른 옥간을 확인하던 장호연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쇄양보원결(鎖陽補元訣)?'

쇄양보원결은 계위가 없는 공법으로, 남녀 간의 교합을 통해 서로의 기운을 교환하며 수련하는 방중비술(房中秘術)이었다.

공법을 펼치면 관계하는 내내 사정 시의 쾌감에 버금가는 희열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공법 운용이 정점에 이르면 음양교합으로 생성된 순수한 기운이 진원으로 승화하며 영혼이 고양되는 극한의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또한, 수련 중에는 기운이 끊임없이 순환하여 육체를 강건케 했기에, 도려만 견딜 수 있다면 몇 달이고 도(道)를 논하는 것도 가능했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인 척 고상하게 굴더니, 뒤로는 이토록 은밀한 비술을 익히고 있었군.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자다.'

장호연은 진위청의 위선적인 모습을 생각하며 속으로 냉소했다.

쇄양보원결이 기록된 옥간을 챙긴 그는 저물대의 물건들을 당장 쓸 만한 것과 나중에 처분할 것으로 나누었다.

다음으로 그는 축기장로에게 얻은 옥간을 확인했다.

옥간에는 2계 연단 전승을 비롯해 2계 연기공법, 영재나 영물 등의 정보와 위치가 담긴 지도, 희귀 재료 목록과 출처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장호연은 다른 건 뒤로 미루고 2계 연단 전승만 살펴보기로 했다.

연단 전승에는 영단의 레시피라 할 수 있는 단방(丹方)과 영단을 어떻게 제련하는지에 관한 연제수법(煉製手法).

단로(丹爐)와 불을 다루는 지식, 수많은 영재를 정리해 둔 도감, 단독 정화법, 연단 심득 등.

연단술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여러 옥간을 살펴보던 장호연의 얼굴에 문득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옥간에는 도체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도체 자체가 워낙 드물다 보니 그에 대한 정보 역시 극히 희소했다.

시중에서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가문의 보고에도 세간에 알려진 피상적인 수준의 정보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옥간을 살펴보던 장호연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어렸다.

"빙극도체(氷極道體)?"

빙극도체란 선천적으로 한음지기(寒陰之氣)를 생성하는 체질을 일컬었다.

인당혈로 흘러들어간 한음지기는 영근을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잠식해 간다.

이로 인해 속성 간의 배척 현상이 심화되어 체질이 완전히 발현되기 전까지는 선도에 입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여덟 살 무렵부터 체내의 한기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여, 열여섯 살에 이르면 그 기운이 극한에 달해 모든 영근을 빙속성 영근으로 완전히 변화시켰다.

다만 화, 토, 뇌 속성 영근은 생극제화(生克制化)의 이치에 따라 소멸했다.

그렇게 남은 영근의 수에 따라 수련 속도가 배가되며, 빙속성 공법이나 술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적성을 지니게 되었다.

문제는, 도체가 완전히 발현되는 순간 한음지기가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침식한다는 점이었다.

이때 사흘 안에 3계 영단인 구양단(九陽丹)을 복용하거나, 남자와 교합하여 양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교합하는 상대가 원양정기(元陽精氣)를 지닌 순양도체(純陽道體)가 아니라면, 남자는 한음지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무슨 이런 개사기 도체가 다 있지?'

만약 오행영근을 지닌 사람이 빙극도체라면, 목금수 세 영근이 빙영근으로 변해 일영근의 세 배 속도로 수련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적절한 빙속성 공법을 익히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터.

이런 자질이라면 금단기까지는 숨만 쉬어도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빙극도체에 관한 정보를 확인한 장호연은 자연스레 여진희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빙극도체의 발현 증상과 현재 여진희의 상태가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옥간에는 구양단의 이름만 기록되었을 뿐, 단방이나 연제수법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순양도체를 찾아 합방을 시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여진희가 빙극도체라면 길어야 5년 정도를 더 살 수 있을 터였다.

장호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모든 옥간들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아직 여진희가 빙극도체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빙극도체로 확인된다면 그때 가서 상황에 맞게 행동하면 될 일이었다.

정리를 끝마친 장호연은 기대에 가득찬 눈빛으로 고장풍이 준 옥간을 꺼냈다.

옥간에 신식을 불어넣자 방대한 양의 정보가 그의 의식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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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옥간에 담긴 정보의 대부분은 3계 제부 전승에 관한 것이었다.

장호연은 제부 전승을 대충 훑어본 뒤 부진에 관한 정보에 집중했다.

부진의 종류는 총 네 가지였다.

날카로운 바람 칼날을 무수히 생성하여 적을 베는 풍인진(風刃陣).

견고한 바람 장벽을 세워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풍벽진(風壁陣).

바람의 밧줄로 상대를 옭아매어 움직임을 봉쇄하는 풍박진(風縛陣).

마지막으로 자욱한 안개와 바람을 일으켜 적의 시야와 신식을 동시에 차단하는 풍무진(風霧陣)이었다.

부진의 위력은 사용하는 부적의 종류, 등급, 수량에 따라 달라졌다.

고장풍의 3계 제부 전승으로는 최대 4계 하품 부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계 부적이라 할지라도 그 수만 충분하다면 축기기 수사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월경(越境) 전투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비술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으로 호부에 관한 정보를 살펴봤다.

호부는 일반적인 소모성 부적과 달리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위력은 호부 제작에 사용된 재료와 축적된 신식 및 영력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신식과 영력을 축기하는 문제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호부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재료의 질이라 할 수 있었다.

최고의 재료는 요수의 가죽이었다.

요수의 가죽과 내단을 융합하면 호부의 성장 한계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듯.

호부를 배양하는 데는 몇 가지 까다로운 제약과 명확한 단점 또한 존재했다.

우선 호부의 속성과 수도자가 수련한 공법의 속성이 일치하거나, 최소한 서로를 북돋아 주는 상생의 관계여야만 했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호부를 배양할 수조차 없었다.

또한, 호부는 살아있는 생명과 같아서 주기적으로 신식과 영력을 사용해 기운을 보충해 주어야 했다.

만약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성이 점차 약해져 결국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호부를 배양하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었다.

비교적 구하기 쉬운 1계 재료로 만든 호부를 2계 부적 수준까지 키우려면 최소 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오직 호부 배양에만 전념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었다.

"백 년이라···."

장호연은 호부의 제작 난이도를 보고 헛웃음을 삼켰다.

백 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부를 배양한다는 것은 연기기 수사에게는 그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했다.

수명이 오백 년에 달하는 축기기 수사라 할지라도 한평생을 공들여야 겨우 의미 있는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이처럼 호부는 강력한 위력을 지녔지만, 그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기나긴 세월 꾸준히 인내하며 노력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호부를 빠르게 배양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력이 아닌 진원을 소모하면 배양 시간을 급격히 단축하는 것이 가능했다.

만약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수도자가 진원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호부를 속성으로 완성한다면, 이를 후손이나 가문에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효율은 조금 떨어지지만 영물의 내단을 활용하는 방법 역시 유효했다.

장호연이 생각하기에 호부는 개인보다 세력의 역량을 키우기에 더없이 유용한 비술로 보였다.

장호연은 한동안 부진과 호부에 관해 살펴보며 그 신묘함에 감탄했다.

이익고 그의 신식이 옥간의 말미에 기록된 양혼결에 닿았다.

양혼결의 이름은 원신비전(元神祕典)이었다.

원신비전의 전수 방식은 장호연이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혼(魂)은 수도자의 근본이요, 도(道)의 뿌리라.

영혼의 성장은 복잡한 공법이나 각종 기예에 대한 깨달음을 쉬이 얻도록 도와주며, 수련 과정에서 흔들리기 쉬운 도심을 굳건히 다져 경지 돌파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다.

양혼결은 영혼이라는 형언하기 어려운 심오한 영역을 다루는 비술이기에, 단순한 도문 몇 개의 나열만으로는 그 정수를 온전히 담아내거나 전달하기 어려웠다.

그 요체는 관상도(觀想圖)라 불리는 신비롭기 그지없는 그림의 형태로 전해졌다.

관상도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었다.

신식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영기의 흐름을 느끼고 그 이치를 체득해야 했다.

관상도를 깊이 관조하고 그 안에 함축된 대도법칙의 심오한 이치를 깨달아감으로써, 영혼의 힘을 점진적으로 길러나가는 것이 수련의 핵심이었다.

원신비전의 관상도는 수많은 도문이 복잡하고 이어지고 중첩되어 만들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활짝 핀 연꽃을 연상케 했다.

이처럼 수많은 도문으로 이루어진 관상도를 단번에 이해하고 통달하기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옥간에는 관상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도문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관련 도문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기초적인 것들로 시작해 단계적으로 깊이를 더해갔다.

이는 수련자가 도중에 길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공법의 완성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이정표와 같았다.

원신비전은 총 5층으로 구성되며, 각 층에 도달할 때마다 혼력이 1할씩 증가했다.

1할이라는 수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수련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법.

영혼의 강화는 영기의 연화 속도, 대도법칙에 대한 이해, 심마에 대한 저항력 등 수련의 모든 측면에 연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혼을 단련하는 길은 극히 지난하여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고행과도 같았으며, 그 첫걸음인 입문의 문턱조차 결코 낮지 않았다.

원신비전 1층에 입문하는 것만 해도 보통 10년 정도가 걸렸고, 대성을 이루기까지는 수백 년이 세월이 필요했다.

게다가 양혼결 수련은 수련자의 타고난 자질에 영향을 받았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다음 경지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기기 수사에게 수백 년은 그야말로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원신비전은 중품 양혼결로, 보통 금단대종의 비전으로 전해지는 신공(神功)이었다.

양혼결을 익히는 이들이 세력의 핵심 인물이고, 그들의 성장이 결코 연기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을 고려하면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영혼을 북돋는 희귀한 천재지보를 사용할 시 양혼결의 수련 속도를 더욱 단축할 수 있었다.

다만 영혼에 관련된 천재지보는 봉황의 깃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구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적어도 금단기 정도는 되어야 그러한 보물을 구경이라도 할 기회가 주어질 터였다.

영혼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는 본영(本靈), 자아를 주관하는 진혼(眞魂), 그리고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을 관장하는 정백(精魄)이 그것이다.

영혼의 세 요소는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수련을 서두를 시 정백이 흐트러지며 감정의 폭주를 일으키거나 진혼이 손상되어 폐인이 될 위험이 있었다.

영혼의 유기적인 구조는 혼력의 강화 폭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뛰어난 양혼결이라 할지라도 본래 지닌 혼력의 두 배 정도까지 배양하는 것이 통상적인 한계치로 여겨졌다. 

옥간의 내용을 모두 확인한 장호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기반은 이미 동급 수사의 네 배 수준이었다.

이처럼 탄탄한 기반 위에 양혼결까지 더해진다면, 다른 수사들과의 격차는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 수련의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겠어.'

현재 그에게 가장 부족한 건 수련 경지다.

부진과 호부 역시 강력한 비술이었지만, 이미 세 마리의 2계 영수를 거느리고 있기에 당장의 무력 증강은 급하지 않았다.

원신비전의 수련은 영근 자질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보완해 주었다.

그는 우선 원신비전 1층 입문에 집중하고, 그동안 제부술은 틈틈이 이론만 익혀두기로 계획을 세웠다.

생각을 정리한 장호연은 문득 고장풍이 이런 보물들을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해졌다.

'이건 적어도 금단종사나 지니고 있을 법한 보물들인데. 사부님께서 금단기 고수의 동부나 비고라도 발견하신 건가?'

장호연은 고장풍이 산수로서 축기기에 오른 과정에서 큰 기연을 얻었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연의 규모는 장호연의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

이틀 후, 장호연이 정은 광산으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그는 고장풍의 거처로 향했다.

강휘령에게는 이미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하고 고장풍의 거처에 머무는 것에 동의를 얻은 상태였다.

장호연이 집을 나서자 강휘령은 딸의 손을 잡고 그를 뒤따랐다.

작별 인사를 위해 고장풍의 거처에 모인 자리에서, 여진희는 며칠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장호연에게 매달리며 가지 말라고 떼를 쓰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어딘가 뾰로통하고 쌀쌀맞은 표정의 소녀가 되어 고혜음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여진희도 제법 나이를 먹었고, 주기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덕분에 이제는 고혜음을 이전처럼 경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녀의 눈빛에는 지난 몇 년간 보이지 않았던 묘한 경계심이 다시금 서려 있었다.

장호연은 여진희가 사춘기가 되어 생긴 변덕이려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정은 광산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우면서도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장호연은 경비대를 관리하고 순찰을 돌며, 나머지 시간은 광산 내부에 마련된 거처에 틀어박혀 수련에 몰두했다.

광산 주변은 수조 이후 삼엄한 경계 덕분에 비교적 안전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1계 요수들이 간혹 나타나 주변을 왕래하는 수사들을 위협하고는 했다.

장호연은 금령과 백호를 내보내 주변 지역의 경계 임무를 맡겼다.

영리한 금령과 백호는 광산으로 접근하는 1계 요수들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처리했다.

사냥으로 얻은 부산물은 백호가 알아서 저물대에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

광산의 경비대는 장호연이 온 뒤로 요수의 출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며 의아해하면서도 반기는 눈치였다.

영수들로 자동 사냥을 돌린 덕분에, 정기적인 순찰 시간을 제외하고 외부의 방해 없이 오롯이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장호연은 오원진결과 원신비전 수련에 각각 여섯 시간씩 집중하고, 제부술 이론 공부와 부적 제작 연습에 다시 여섯 시간을 할애했다.

남은 시간에는 광산을 순찰하며 현장 상황을 점검하거나, 영수들 혹은 고혜음과 시간을 보내며 정신적인 피로를 풀었다.

수도자가 하루에 연화할 수 있는 영기의 양은 제한적이었다.

영기를 연화하는 과정에서 인당혈과 영근은 일정 수준의 부하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 공법을 전력으로 계속해서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통상적으로 하루 여섯 시간 정도가 최대의 효율로 영기를 연화할 수 있는 한계치였다.

다만 영기 흡수 속도를 평소의 절반 이하로 늦추면, 인당혈과 영근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수련을 장기간 지속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 경우 단위 시간당 수련 효율은 절반으로 떨어지지만,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수련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수련량이 두 배로 늘어나는 효과를 보였다.

고계 수사들이 폐관에 들어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공법을 수련할 때는 바로 이러한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도자의 근본이 수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결국 자신을 지킬 힘이 부족하다면 언제가 되었든 외력에 의해 그간 쌓아 올린 선도가 허망하게 끊어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호신을 위한 술법이나 다른 기예를 수련하는 것 역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연체술 수련은 2계 수준의 자원을 구하기 어려워 잠시 중단한 상태였다.

구련금신결을 제대로 연마하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2계 천재지보가 필요한데, 운암방시 같은 소규모 방시에서는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영수들의 성장에도 마찬가지로 제약으로 작용했다.

영수들의 꾸준한 성장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축기기에 도달하여, 엘릭서로 2계 영광인 진금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대방시로 넘어가 필요한 자원을 구하는 방법뿐이었다.

장호연이 광산 생활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동안.

고혜음 역시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고장풍의 당부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장호연과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했다.

삭막한 광산에서 느낄지 모를 고독감을 덜어주고자, 그녀는 장호연을 만날 때면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장호연 역시 남자이기에 고혜음이 보이는 호의와 다정함이 싫을 리 없었다.

둘 사이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묘한 기류가 흘렀다.

난해한 부문에 대해 밤새 토론하다 문득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무심결에 손길이 스칠 때면 미묘한 떨림이 전해졌다.

등불 아래 마주 앉은 고혜음의 눈동자에서 수줍은 기색이 비칠 때면, 장호연의 마음에도 오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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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