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한 달 후.
휴가를 얻은 장호연은 고혜음과 함께 운암방시로 돌아갔다.
상점가에 들러 영선의 재료를 구매하던 중, 그의 눈에 천봉보화재가 들어왔다.
'염가의 네 번째 노조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장호연은 조만간 염정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옮겼다.
고장풍의 거처에 도착한 그는 고혜음과 함께 인사를 올렸다.
그런 두 사람을 고장풍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고장풍의 안색은 한 달 전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장호연은 만약 병세가 악화되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엘릭서를 사용해 병을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세가 호전되었고, 아직 20년 정도의 수명이 남아 있다고 했으니.
자신이 방시를 떠난 후에 치료해도 문제 없을 것으로 보였다.
장호연은 고장풍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강휘령을 찾아갔다.
강휘령 모녀는 새로운 거처에 잘 적응한 상태였다.
강휘령은 장호연이 사 온 귀한 음식 재료들을 들고 요리를 하러 주방으로 갔다.
장호연이 여진희와 놀아주는 사이.
강휘령은 오랜만에 돌아온 장호연을 위해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다.
다음 날.
장호연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한 그는 산수 두립으로 용모를 바꾼 뒤 천봉보화재로 향했다.
"아이고, 두 도우!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염정은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장호연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상외의 환대를 받은 장호연은 염정이 왜 이러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무탈하게 보냈습니다. 염 도우께는 잘 지내셨는지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영차를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장호연이 무심한 듯 질문을 던졌다.
"혹시 최근 운암방시나 고양진 근처에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염정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사실 얼마 전에 영경진가의 축기장로 두 분이 운암방시에 다녀가셨습니다. 제게 최근에 주변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캐물으시더군요. 특히 이계 요수들이 나타난 적이 있었냐고 말입니다."
천봉염가와 영학구가의 전쟁이 시작된 후, 염가삼조는 다시 족지로 돌아갔다.
현재 운암방시의 총책임자는 다시 염정이 맡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이계 요수들은 왜 찾는답니까?"
"자세한 연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두 분께서 얼마 전 수조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실망한 눈치로 떠나셨습니다. 축기장로들이 직접 움직인 걸 보면, 필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장호연은 영경진가라는 이름과 그들의 행보에 속으로 혀를 찼다.
'영경진가에서 나섰다라. 분명 축기 장로를 죽인 흉수를 찾기 위해 온 것이겠지?'
다행인 점은 수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해 돌아간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축기장로의 죽음이 요수들의 소행이라 여기는 듯했다.
찻주전자 하나를 다 비울 때까지 장호연과 염정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염정이 깊은 한숨과 함께 염가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의 얼굴에는 얼핏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아··· 사실 저희 가문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습니다. 네 번째 노조께서 금단기 돌파를 위해 떠나신 지 오래인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십니다. 다른 노조들께서 백방으로 찾아보셨지만, 결국 얼마 전 빈손으로 돌아오셨지요."
염정의 입에서 장호연이 기다리던 정보가 흘러나왔다.
장호연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염 도우께서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천봉염가가 굳건해야만 부용인 백월장가 역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런 만큼 염가사조의 실종은 장호연에게도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한동안 대화가 이어지고.
충분한 정보를 얻은 장호연은 수련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구매한 뒤 천봉보화재를 나섰다.
신기하게도 염정은 그에게 물건 가격을 1할이나 깎아주며, 꼭 거래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종 들러 담소를 나누자는 말을 건넸다.
사흘 간의 휴가를 마친 장호연은 다시 광산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감각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각성 능력의 사용 횟수가 충전된 것이었다.
장호연은 엘릭서를 어떻게 사용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엘릭서를 전부 벽각우에게 사용하면 부상을 치료함과 동시에 기반까지 한꺼번에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벽각우의 기반을 강화하는 일은 추후로 미뤄두기로 했다.
수도계에는 어떤 예기치 못한 위험이 닥쳐올지 알 수 없다.
그런 만큼 자신의 목숨줄이 되어줄 엘릭서를 전부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장호연은 벽각우를 회복시켜 즉시 활용 가능한 전력으로 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급할 거 없어. 천천히 안전하게 가자.'
그에게는 아직 천년의 수명이 남아 있다.
수련을 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급급해하는 것.
지금 당장은 손해처럼 보이는 선택일지라도, 신중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결국 자신을 더욱 창대한 길로 이끌어줄 터였다.
엘릭서에 여유가 생긴 장호연은 그동안 미뤄왔던 실험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엘릭서가 자신이 익힌 독공까지 해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정화할지 궁금했다.
장호연은 세 겹의 결계를 설치한 후 엘릭서를 생성해 옥병에 담았다.
결계를 펼친 것은 그저 버릇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그는 이제 엘릭서를 생성하는 데 주변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엘릭서는 분명 존재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지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알아챌 수 없었다.
금단기 수사에 필적하는 탐지력을 지닌 백호조차 엘릭서를 감지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라면 일반적인 수사의 신식으로 엘릭서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장호연은 미리 준비해 둔 독초를 삼킨 후 독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근에 미약한 독기가 생성되었다.
그는 기대되는 마음으로 1할 분량의 엘릭서를 복용했다.
결과는 실로 의문스러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엘릭서는 독기를 정화하지 않았다.
장호연은 대체 엘릭서가 작용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엘릭서가 스스로 의식이라도 가졌나? 그래서 상황에 따라 작용 방식을 달리하는 건가?'
각성 능력은 그의 영혼에서 발현되는 힘이다.
만약 엘릭서에 의지가 담겨 있다면, 그 주체는 바로 자신이어야 함이 옳았다.
'선도에 오른 후 영혼의 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 그렇다면 혹시 내 의지로 그 효과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전생에도 엘릭서의 효과를 조절해 보려는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과 그때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수도자는 자신의 영혼을 인지하고 그것을 신식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다룰 수 있었다.
짧은 고민 후, 장호연은 다시 1할 정도의 엘릭서를 분리해 복용했다.
곧이어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독기가 사라졌어?"
조금 전 장호연은 독기를 정화하면 좋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의도대로 독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장호연은 지금까지 엘릭서를 사용하면서 그 능력을 다소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엘릭서의 효과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엘릭서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 장호연의 얼굴에 환희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효과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특정 효능만 골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외부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엘릭서를 더욱 유용하게 활용할 길이 열렸음을 의미했다.
'영혼을 강화하는 효과만 남겨서 양혼단이라고 속이고 팔아볼까? 아니면 영근이나 영혼의 부상을 치료하는 요상 성약으로 판매해도 될 테고.'
엘릭서의 활용 방법은 얼핏 떠오르는 것 만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지 돌파에 목메는 사람들과 기반이 망가져 선도가 끊어진 이들까지.
노예가 되는 혼계를 맺고서라도 양혼단과 요상 성약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을 터였다.
장호연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실험을 더 진행했다.
본래 엘릭서는 금속이나 일정 크기 이상의 생명체에 닿으면 즉시 효과가 발휘되었다.
그는 이 점을 확인하고자 사기그릇에 소량의 엘릭서를 담고 1계 영광을 떨어뜨려 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영광이 정금으로 변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엘릭서의 발동 여부까지 조절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호연은 한동안 엘릭서를 어떻게 활용할지 행복한 고민을 이어갔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그는 이만 거처를 나섰다.
그는 경비대원들에게 순찰을 돌고 오겠다고 말한 후 숲속으로 이동했다.
광산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착한 후, 금령을 소환해 30분 정도를 다시 날아갔다.
중림산맥 깊은 곳으로 들어간 그는 땅으로 내려왔다.
백호를 불러내 주변 경계를 맡긴 그는 마침내 벽각우를 소환했다.
푸른 영광과 함께 20여 미터에 달하는 거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영수대에서 나왔음에도 벽각우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벽각우는 장호연의 영수가 된 이후로 지금까지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장호연은 벽각우를 치료하기에 앞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과거 금령을 치료하기 위해 엘릭서를 먹였을 때 영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는 엘릭서의 효과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원한다면 그런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엘릭서의 정확한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인위적인 간섭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혼계는 영혼과 영혼을 하나로 융합시킨다.
아무리 엘릭서라도 이미 하나로 합쳐진 영혼을 분리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반드시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장호연은 금령과 백호에게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대비시켰다.
두 영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2계 요수의 강대한 요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마실 엘릭서와 벽각우에게 먹일 엘릭서를 준비했다.
만약 혼계가 해제된다면 어떤 반작용이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장호연은 엘릭서의 1할을 분리하여 벽각우에게 먹였다.
그 순간, 벽각우의 몸에서 경이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영력의 무리한 운용으로 손상되었던 내단이 완벽히 치유되며, 천지영기를 맹렬한 속도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가죽 곳곳에 남아 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고, 거칠고 푸석했던 털가죽에는 영롱한 윤기가 감돌았다.
애초의 우려와는 달리 혼계가 해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릭서의 신비한 힘이 벽각우의 부상을 치유하는 동안에도 둘 사이의 혼계는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이를 통해 혼계는 엘릭서로도 해제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아직 실험해 볼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만약 엘릭서에 혼계를 해제 혹은 정화하려는 의지를 담았을 경우에는 어떠한 반응이 일어날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 실험은 추후 백호를 상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장호연과 백호의 유대감은 상당히 두터웠다.
혼계가 해제된다고 해서 백호가 그를 적대하거나 도주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는 법.
행여나 혼계가 풀린다고 해도 금령이 있으면 쉽게 제압이 가능할 터였다.
곧이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벽각우가 눈을 떴다.
순수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온몸에 활력이 넘치는 듯, 벽각우는 크게 투레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각우가 기뻐하는 감정이 심령을 통해 장호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벽각우는 기쁜 마음을 표출하듯 제자리에서 앞뒤로 폴짝폴짝 뛰었다.
그 육중한 움직임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산이 흔들렸다.
장호연은 벽각우를 진정시킨 후 몸 크기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벽각우의 거대한 몸이 순식간에 일반 황소 크기로 줄어들었다.
장호연은 벽각우의 몸에 손을 얹고 내부로 신식을 주입했다.
엘릭서에 의해 벽각우가 치료되는 건 당연한 일.
그가 확인한 것은 다름 아닌 벽각우의 심장이었다.
본래 벽각우의 심장에는 3계 요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흉포한 요력이 깃들어 있었다.
엘릭서의 권능은 그 요력마저 여지없이 정화했다.
다만 신기하게도 벽각우의 심장에는 여전히 3계 수준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 기운은 아무런 이질감 없이 벽각우의 기운과 융화된 상태였다.
장호연은 벽각우에게 환술을 펼쳐보라고 지시했다.
놀랍게도 벽각우가 펼치는 환술은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변해 있었다.
이제 백호조차 환술을 간파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벽각우가 말하길, 환술을 펼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으며 그 범위 또한 월등히 넓어졌다.
장호연은 한층 강력해진 벽각우의 신통을 보며 크게 만족했다.
이어서 그는 벽각우에게도 정식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앞으로 너를 청우(靑牛)라 부르마."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우는 낮은 울음소리로 화답하며 장호연에게 친근감을 표했다.
장호연은 영수를 도구처럼 여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청우와 더욱 깊은 유대감을 쌓기 위해 심령과 신식, 그리고 육성을 모두 사용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청우는 산속에서 풀을 뜯으며 조용히 살아왔기에 삶에 특별한 굴곡은 없었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청우가 인간들을 공격했던 때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청우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장호연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수조가 벌어진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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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청우는 흑린묵교에게 붙잡혀 강제로 부하가 되었다.
흑린묵교는 자신의 정혈 일부를 청우의 심장에 주입했고, 그 이후로 청우는 통제할 수 없는 흥분과 광기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흑린묵교의 명령하에 수많은 요물들이 모여 몇몇 인간들을 만났다.
청우는 심령을 통해 자신이 만난 인간의 모습을 장호연에게 보여주었다.
그 얼굴은 깊은 주름과 음험한 눈빛을 가진 냉혹한 인상의 노파였다.
그 외에 미약한 기운을 품은 인간들도 있었지만, 눈여겨보지 않아 기억하지 못했다.
수도세력들은 수도계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도첩이나 옥간 형태로 보관하여 자제들에게 숙지시킨다.
이는 다른 세력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강자의 기휘를 범하여 화를 입지 않기 위함이었다.
장호연은 청우가 보여준 노파의 얼굴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빠르게 대조했다.
이내 그는 노파의 정체가 영학구가의 축기노조 중 한 명임을 알 수 있었다.
'영학구가가 멸문의 길을 걷기로 했나 보군.'
수도자가 요수와 결탁하여 인간을 습격하도록 사주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이러한 비밀을 알고도 섣불리 외부에 알릴 수 없었다.
자신이 청우를 제압하고 영수로 삼았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모를까.
영학구가의 소행이라는 물증을 제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도계에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강력한 수도세력에게 붙잡혀 평생 엘릭서를 생산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될 확률이 극히 높았다.
당장이라도 영학구가의 추악한 만행을 폭로하고 싶었지만, 명확한 증거 없이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실을 묻어둔 채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장호연은 정은 광산에 머물며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갔다.
그간 있었던 일 중 중요하다고 할 만한 것이라면, 고장풍 몰래 엘릭서를 복용시킨 일 정도가 전부였다.
장호연은 광산 주변을 순찰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거처에 머물며 수련에 몰두했다.
현재 그는 극품 공법인 오원진결을 수련하며, 공법은 운용할 때마다 극품 영단인 양원단(養元丹)을 복용 중이었다.
또한, 주변 영기를 모으는 하품 취령반과 영혼을 강화하여 인당혈과 영근의 부담을 줄여주는 극품 안신향까지 사용했다.
영맥의 등급을 제외하면 그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어 수련에 임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는 과거처럼 실력을 숨길 필요도 없는 상황.
전력으로 수련하면 늦어도 사오 년 안에는 연기기 중기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천년의 수명을 지닌 그에게 사오 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장호연이 수련에 매진하는 사이, 각성 능력이 충전되어 엘릭서 1회분을 추가로 얻게 되었다.
이번 엘릭서는 망설임 없이 청우에게 사용했다.
청우의 혈맥은 그의 기대대로 지품을 넘어 천품으로 진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천품 혈맥이 된 청우는 새로운 천부신통을 각성했다.
천부신통은 혈맥 속에 잠재된 본능과 같았기에, 청우는 마치 오랫동안 단련한 것처럼 능숙하게 새로운 신통을 다룰 수 있었다.
이제 청우는 단순히 번개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을 넘어, 요력과 결합하여 자유자재로 형태를 부여하고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뇌기가 깃든 지진을 일으켜 땅속과 지상에 발을 디딘 이들을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현재 청우의 요력은 2계 원만 요수와 동급 수준이었다.
만약 청우가 진짜 2계 원만에 올라선다면, 그때는 가단진인(假丹眞人)과도 겨뤄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가단진인이란 3계 요물의 내단이나 정핵(精核) 같은 외물을 이용하여 유사 금단을 맺은 수사를 일컬었다.
일반적으로 가단진인은 금단기 초기 수사의 7할에 달하는 법력과 수명을 지녔다.
하지만 가단을 맺은 대가로 더 이상 정상적인 수련을 통해 경지를 높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청우가 가단진인과 겨뤄볼 만하다는 것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청우가 지닌 요력의 총량이 가단진인에 필적한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격의 차이가 존재했다.
대경계를 넘어서면 신식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영력 또한 응축된다.
청우의 요력과 가단진인의 법력 사이에는 같은 무게의 쇠공과 나무공 같은 차이가 있었다.
두 기운이 충돌한다면, 청우의 요력은 쇠공에 부딪힌 나무공이 서서히 부서지고 마모되듯 점차 힘을 잃게 될 터였다.
1년 후, 각성 능력이 충전되었다.
이제 엘릭서를 사용하는 데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상황.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새로운 엘릭서의 사용처를 결정했다.
엘릭서의 강화 효과는 최초 복용 시에만 발휘되며, 그 이후로는 질병 치유나 활력 증진 등의 효과만을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이 허실의 경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지는 미지수였다.
혹시라도 기반이 다시 강화되거나, 전혀 다른 종류의 이로운 결과를 얻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그리고 각성 능력에 대한 정확한 실험을 위해 엘릭서를 직접 복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장호연은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엘릭서를 입안에 생성했다.
엘릭서를 재복용한 결과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예상대로 육체의 기반이 다시 강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무려 3년 치에 해당하는 근기가 증가했다.
엘릭서의 새로운 능력을 알게 되자 장호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만약 이 효과가 지속된다면, 3년마다 엘릭서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수명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것은 단 한 번의 경험에 근거한 가설에 불과했다.
복용 간격이나 횟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도 있고, 어쩌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엘릭서의 능력에 관해서는 앞으로 긴 시간을 두고 여러 실험과 검증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장호연의 가슴은 희열과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
영생은 모든 수도자가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목표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영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화신선사의 수명은 제한이 없으나 그들은 천지규칙에 의해 억압받았다.
천지의 기운을 빼앗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신선사들은 천지의 입장에서 커다란 기생충이나 다름없었다.
그로 인해 화신기 수사들은 일정한 주기로 하늘의 분노인 뇌겁(雷劫)을 감당해야만 했다.
화신기 수사들은 수천 년에 한 번씩 도래하는 뇌겁의 기운으로 신혼(神魂)을 씻어내면, 다시 그만큼의 수명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아가 화신기를 넘어 진정한 신선의 반열에 오를 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불멸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하지만 장호연에게 이는 모두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일 뿐이었다.
고작 연기도인인 그로서는 화신 선사가 실제로 뇌겁을 겪는지조차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저 허황된 믿음이라 치부했던 영생의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호연은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장호연이 원하는 건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었다.
선도는 천지의 기운을 강탈하여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지난한 싸움이다.
무한한 수명과 왕성한 근기만 있다면 수도계의 정점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새 또 한 해가 지났다.
장호연의 일상은 지난 몇 년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이어졌다.
다만, 평온한 나날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쓰이게 한 일은 여진희에게 찾아온 건강상의 변화였다.
여진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해져, 이제는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올 정도였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기운이 부쩍 쇠약해지고 수면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강휘령의 걱정은 날로 깊어만 갔다.
장호연은 여진희가 빙극도체라고 거의 확신한 상태였다.
여진희의 나이는 올해로 열다섯.
빙극도체의 완전한 각성까지는 앞으로 1년 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
정은 광산 내부.
장호연은 자신의 거처에서 좌정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주변 공기는 그의 고요한 호흡에 맞춰 미세하게 떨리며 느리게 유동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원신비전의 관상도를 감오하며 대도법칙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그는 마침내 원신비전 1층의 문턱을 성공적으로 넘어섰다.
대부분의 공법이 그러하듯, 원신비전 역시 단계가 높아질수록 수련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입문 자체는 비교적 수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원신비전 1층에 입문하기까지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양혼결은 관상법을 통해 영혼을 단련하는 극히 내밀하고 섬세한 수련법이다.
극도의 집중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요구하는 수련 과정은 지루하고 고되기 짝이 없어, 수많은 이들이 더딘 진척에 좌절하거나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장호연은 고작 3년 만에 원신비전 1층에 입문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것도 오원진결 수련과 제부술 연마를 병행하며 거둔 성과였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호연 자신도 이례적인 수련 속도에 의아함을 느낄 정도였다.
양혼결은 혼력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강화된 영혼을 다시 배양하는 데에는 더 큰 노력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양혼결의 수련 난이도는 계속 높아질 뿐이었다.
양혼결의 이러한 특성을 생각하면 단순히 엘릭서로 기반이 강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호연은 자신의 수련 속도가 빠른 이유를 명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했다.
본래의 장호연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영기를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전생의 자아가 각성한 이후, 그의 심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졌고 그제야 비로소 영기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원신비전의 수련 속도가 이토록 빠른 이유는, 아마도 별도로 강화된 그의 심력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것이 아니라면 그의 경이로운 수련 속도를 설명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원신비전의 수련 속도는 영근 같은 외적 요인이 아닌, 수련자의 정신력과 노력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다만 여기에도 타고난 자질이 적용되기에 병목 현상은 존재했다.
원신비전은 각 층을 돌파할 때마다 수련 시간이 대략 두 배씩 증가했다.
지금의 속도라면 앞으로 오륙 년 안에 2층을 돌파할 수 있을 터였다.
만약 병목 현상을 겪지만 않는다면 대성을 이루기까지 백 년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장호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원신비전의 관상도를 깊이 관조하기 시작했다.
***
장호연이 묵묵히 수련에 정진하는 사이.
외부 정세는 예측 불가능한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학구가는 지난 몇 년간 천봉염가의 동태를 예의주시해 왔다.
그들은 여러 경로로 수집한 첩보와 정황 증거들을 통해, 염가사조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비록 염가사조의 명혼등이 꺼진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모든 정황이 그가 죽음에 이르렀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었다.
염가사조는 홀로 동급 수사 두세 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천교였다.
영학구가는 이러한 강적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본래 영학구가는 천봉염가의 휘하에 있던 연기한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어수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천재가 나타나 옥현종의 지원 아래 축기세가로 승격한 것이었다.
초기에 두 가문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영학구가가 세력을 확장하며 천봉염가의 이익을 침범하기 시작했고, 결국 양립할 수 없는 관계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오랜 앙숙인 천봉염가를 타도하고, 가문을 부흥으로 이끌어 줄 정은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족지를 지킬 제일노조를 제외한 네 명의 축기노조를 모두 동원하여 천봉염가의 족지를 기습한 것이었다.
천봉염가는 영학구가의 급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천봉염가의 최고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제일노조는 자신을 희생하여 가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환생조차 포기한 제일노조는 도기를 불태우며 구가노조 두 명을 끌어안고 자폭했다.
그 장렬한 희생으로 구가노조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른 하나는 수십 년 이상 요양이 필요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염가이조는 호족대진의 힘을 빌려 남은 두 명의 구가노조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두 가문 간의 치열하고 처절했던 전투가 끝이 났다.
제일노조가 세상을 떠나자 천봉염가에 남은 축기진인은 두 명이 되었다.
반면 영학구가는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축기진인을 세 명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학구가는 더 이상 천봉염가를 공격하지 않았다.
전력상으로는 다소 우세했지만, 만약 천봉염가가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맞선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축기노조 한 명을 잃은 것만으로도 영학구가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만약 그들이 천봉염가를 완전히 섬멸한다 하더라도 가문의 축기노조가 한두 명밖에 남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 또한 외부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두 축기세가 사이의 전면전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천봉염가는 영학구가를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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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과거 영학구가는 관가와 비가를 조종해 공작을 펼쳤다.
당시 천봉염가는 염가사조의 부재를 이유로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데 그쳤었다.
하지만 이제 두 가문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
천봉염가는 영학구가에게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아무리 축기세가라 해도 핵심 전력인 축기기 수사는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상대 부용세력들이 연합하여 본가를 직접 노린다면, 연기기 이하 혈족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에 두 세가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당장의 전면전을 피하고, 상대 부용세력의 전력을 소진시키는 소모전을 택했다.
천봉염가는 정은 광산의 채굴 작업을 중단시켰다.
나아가 모든 부용세력에게 적령군과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상위 세력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하위세력은 좋든 싫든 강제로 동원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연기한문들은 이번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멸문의 참화를 당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할 시 적대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막대한 자원과 영지를 차지할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각 가문은 사활을 걸고 다가올 전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
고양진은 영학구가의 영역인 적령군과 인접해 있었다.
불행히도 백월장가는 두 세력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탓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전운이 짙어지자 운암방시는 극심한 불안과 혼란으로 술렁였다.
비록 세력 간의 전쟁이라지만 산수라고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시장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었다.
당장의 생존과 직결되는 법기나 부적 등의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으며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반대로 수련에 필요한 영단 같은 자원의 가격은 빠르게 내려갔다.
내일의 생사조차 불투명한 상황에, 사람들은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당장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광산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 와 있던 애뢰산 주가와 황중복 남가의 수사들은 황급히 족지로 복귀했다.
운암삼가 역시 각자의 족지로 흩어졌으며, 장호연과 고혜음도 운암방시로 돌아갔다.
운암방시에 도착한 장호연은 즉시 고장풍의 거처로 향했다.
그는 고장풍을 설득하여 가문으로 모셔갈 생각이었다.
현생의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던 전쟁 때만 해도 운암방시 산수의 3할가량이 희생되었다.
하물며 이번에는 축기세가 간의 전면전이 벌어진 상황.
천봉염가의 영역인 여남군을 벗어나지 않는 한, 사실상 어디든 안전한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여남군을 떠나기도 쉽지 않았다.
고양진은 적령군과 인접해 있기에, 여남군을 벗어나려면 반경 만 리에 달하는 광활한 영역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 긴 여정 중에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고장풍은 장호연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장호연은 고장풍, 고혜음, 강휘령, 여진희와 함께 족지로 향했다.
족지에 도착하자 장은소가 미리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연아, 무사히 왔구나. 가주님께서 네가 도착하는 대로 의사당으로 오라 하셨다. 고 대사님은 내가 잘 모실 테니 어서 가보거라."
"네, 고모님."
장호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즉시 의사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사당 문 앞에 이르자 안에서 열띤 논의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의사당에는 가주 장운경을 비롯해 가문의 모든 장로와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이 외에도 장호연보다 한 항렬 높은 연기기 후기의 혈족들이 그들의 뒤로 시립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 장호연과 같은 항렬은 없었다.
장호연은 장운경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장천명의 뒤에 섰다.
이어서 가주와 장로들이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두고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적령군과 가장 가까운 서쪽 지형의 방어를 강화해야 합니다!"
"아니다, 동쪽으로 우회하여 기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비 전력을 그쪽에 집중시켜야 한다."
"호족대진을 유지하기 위한 영석은 충분합니까? 유사시를 대비해 비축분을 다시 점검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문의 방어 태세와 전력 배치에 관한 논의가 오가는 가운데, 순찰대로부터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순찰대는 족지에서 한나절 거리에 영학구가의 부용세력인 선운곡 형가 무리가 집결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놈들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섣불리 움직였다가 매복에 당할 수도 있소. 일단 놈들이 족지 근처까지 오도록 유인한 뒤, 호족대진의 힘을 빌려 섬멸하는 것이 안전할 게요."
결국 가문 사람들은 굳이 족지 밖으로 나가는 대신, 적들이 접근하면 호족대진을 활용해 맞서 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회의 중에 다른 의견이 제기되었다.
"적들의 공세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적의 동태를 보다 면밀히 살피고, 예상치 못한 위험에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합니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장호연이 말했다.
"제가 외부로 나가 적들을 감시하겠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장호연에게 쏠렸다.
몇몇 장로들은 우려를 표했다.
"호연아, 네 마음은 알겠다만 그건 너무 위험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네가 정찰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맞습니다. 정찰은 경험 많은 순찰대에 맡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적의 매복이나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신식의 강도가 중요했다.
사람들은 장호연의 실력이 연기기 3층인 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위험한 정찰 임무를 맡는 것을 말렸다.
하지만 장호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2계 연체사임을 강조하며 임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가문에서 나만큼 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
원신비전을 수련한 그의 신식은 가문의 그 누구보다 강력했으며, 영력의 총량 또한 연기기 원만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세 마리의 2계 영수가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홀로 형가 무리를 몰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나가는 김에 손을 좀 써두는 게 좋겠어.'
장호연은 상황을 봐서 적들의 숫자를 줄여놓을 생각이었다.
얼마 후, 장운경의 허락하에 장호연이 정찰 임무를 맡기로 결정되었다.
장호연은 호자 항렬의 자제 중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정은 광맥 발견이라는 큰 공적에 더해, 고장풍의 제자가 되고 제부술에 비범한 재능까지 보이자 가문 내 위상은 날로 상승했다.
이제는 그가 부령도체와 같은 희귀 체질을 지녔을 거라는 추측까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정찰조 임무는 자칫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가문의 어른들은 이런 위험한 임무에 자원한 장호연을 대견하게 여기면서도,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족지를 떠나기 전, 장호연은 장운경으로부터 전의부 한 장을 받았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전의부는 천 리 밖까지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귀한 보물이었다.
전의부는 금단대종에서 직접 관리하는 전략 물자로, 매년 천봉염가에서 각 부용세력에게 소량 지급하는 것이 전부였다.
족지를 벗어난 장호연은 이내 인적이 드문 산길에 멈춰 섰다.
그는 변형술을 운용하여 순식간에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으로 모습을 바꾼 뒤 검은색 장포로 갈아입었다.
변신을 마친 그는 소매 안의 영수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세 줄기 영광이 터져 나오며 금령, 백호, 청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호연의 명령을 받은 세 영수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변형술을 펼친 금령은 검은 매로 변해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백호는 땅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우 역시 장호연이 가르쳐 준 변형술과 염식술을 익힌 상태.
푸른빛이 감돌던 털가죽은 칠흑처럼 검게 변했고, 머리의 뿔은 더욱 크고 위협적으로 자라나 인상이 한층 사납게 바뀌었다.
장호연은 청우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들은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산길로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은 백월장가의 족지.
망루 위에는 새벽 경계를 맡은 호자 항렬의 남자 수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밤새 이어진 긴장감에 피로가 역력했지만, 그는 정신을 다잡으며 족지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미세한 변화가 포착되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수사는 어둠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망루에 매달린 경종의 밧줄을 움켜쥐었다.
마침내 그의 눈에 갈색 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어둠을 뚫고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적습이다!"
정적을 찢는 그의 외침과 함께, 망루 위의 경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종소리는 족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족지 중앙의 거대한 석탑에서 푸른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청명한 푸른 빛은 이내 거대한 반구 형태의 보호막으로 화하며 족지 전체를 감쌌다.
호족되진이 발동되며 웅혼한 영력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어둠 속에서 작열하는 듯한 붉은 빛을 머금은 부적 10여 장이 섬광처럼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허공에서 서로 이끌리듯 모여들며 요사스러운 붉은 기운을 토해냈다.
부적들이 서로 공명하며 맹렬히 타오르더니, 이윽고 하나의 거대한 창처럼 응축되었다.
콰아앙!
붉은 창이 보호막 위로 작렬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충돌 지점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문이 연쇄적으로 퍼져나갔다.
보호막은 마치 거센 폭풍우를 만난 수면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푸른 빛이 눈에 띄게 흐려지고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백월장가의 호족대진은 1계 극품 영맥 위에 수많은 1계 극품 진법들을 중첩해 구축한 복진(複陣)이다.
그 위력은 2계 진법에 준했기에, 설령 축기기 수사가 직접 나선다고 해도 단시간에 파훼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진법의 기운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때, 부적의 정체를 알아본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파금부(破禁符)다!"
파금부는 진법을 파괴하는 데 특화된 부적이었다.
제작에 귀한 영재들이 다수 소모되며 제작 난이도 또한 극히 높아, 전의부보다도 더욱 귀하게 취급받는 전략 물자였다.
거처에서 급히 뛰쳐나온 장운경은 호족대진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갈색 도포를 입은 수사들이 법기를 꺼내 들고 대기 중이었다.
복장을 통해 그들이 영학구가의 부용인 청계곡 목가의 수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형가와 목가, 두 가문이 함께 움직였군!'
장운경의 시선이 적진의 선두에 서 있는 목가의 가주에게 닿았다.
목가 가주는 미소를 지은 채 진법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여유로운 표정을 본 장운경은 이번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장운경은 영력을 끌어올려 크게 외쳤다.
"모두 지정된 위치로 가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족지 곳곳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법기를 꺼내 들고 방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백월장가는 형가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적의 급습에도 비교적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의 절반도 채 모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파금부가 섬뜩한 붉은 빛을 터뜨리며 날아들었다.
이전의 충격으로 방어진의 위력이 급감한 상황.
쾅!
족지를 감싸고 있던 푸른 광막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진법이 무너지자, 목가의 수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족지 안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족지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진법이 너무 빠르게 무너지면서, 장가 사람들은 방어 태세를 채 갖추기도 전에 적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방에서 각양각색의 섬광과 번뜩이며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다급한 외침과 고통스러운 비명이 뒤섞여 족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적들의 난입에 당황한 장가 수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미처 완성되지 못한 방어선은 제 기능을 발휘하기도 전에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장가와 목가의 전투는 초반부터 피 튀기는 격전으로 흘러갔다.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싸우고 있음에도, 장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학산 구가의 부용세력들은 오래전부터 구가의 지원 아래 전쟁을 준비해 왔다.
목가 수사들의 손에 들린 법기는 장가의 것보다 한 등급 이상 좋아 보였다.
연기기 중기 수사들조차 상품 법기를 다뤘고, 상급 부적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목가와 장가가 혈전을 벌이는 사이.
전장의 외곽으로 목가의 수사들과 다른 복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남자는 반듯하고 잘생긴 용모를 지녔지만, 오만한 눈빛과 얇은 입술 탓에 가까이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
그의 옆에는 허리가 잘록하고 요염한 자태의 목가 여인이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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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남자는 정원을 산책하듯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목가 여인이 그의 팔에 은근히 몸을 기대며 교태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구 공자님처럼 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싸움에 직접 나서려 하십니까? 백월장가 정도는 저희 목가 선에서 능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만 자리를 옮겨 소첩과 함께 밤을 즐기심이 어떠하신지요?"
아름다운 여인의 노골적인 유혹에도 남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피 튀기는 전장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구 공자님···."
여인이 다시 한번 나긋한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그제야 남자는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우니 이만 가보거라."
날카로운 신식을 마주한 여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남자는 떠나가는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남자의 정체는 구가삼조의 친손자인 구신욱이었다.
그동안 그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수련에만 매진해 왔다.
마침내 연기기 9층과 구련금신결 5층을 돌파한 그는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현재 천봉염가는 축기진인을 외부로 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가삼조는 손자의 실력이라면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고, 이번 백월장가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다.
여인이 떠나고 잠시 후.
구신욱의 피부 위로 은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가올 전투에 대한 흥분에 그의 숨소리가 차츰 거칠어졌다.
찰나의 순간, 구신욱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며 사라졌다.
어느새 그는 장가 수사들이 밀집한 곳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콰직!
섬광처럼 뻗어 나간 그의 주먹이 장가 수사의 머리를 가격했다.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머리를 잃은 수사가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구신욱은 폭풍처럼 전장을 휘저으며 장가 수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광폭한 그의 공격에 미처 피하지 못한 목가 수사들까지 휘말려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계 연체사다!"
"모두 놈을 집중 공격하라!"
장가 수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구신욱을 향해 여러 법기들이 날아들었고, 불덩이와 얼음 송곳으로 변한 부적들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하지만 구신욱은 코웃음을 치며 날아드는 법기를 맨손으로 잡아 부숴뜨렸다.
몇몇 공격이 그에게 적중하기도 했지만, 몸 위를 얇게 둘러싼 은빛 기운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아무리 2계 연체사라 할지라도 체내에 품을 수 있는 기운에는 한계가 있는 법.
연기기 후기 수사 여럿이 도주하며 협공을 펼치면 결국에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 가문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백월장가는 구신욱 한 명만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시킬 여유가 없었다.
구신욱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압도적인 무력은 전장의 흐름을 완전히 목가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치열한 난전 속에서 필사적으로 적들과 싸우던 장운경과 장로들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모두가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푸른 섬광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나타났다.
섬광은 경로상에 있던 목가 수사 여럿을 단숨에 베어내며 구신욱을 향해 쇄도했다.
바람이 시작된 곳에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인이 서 있었다.
다소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두 눈만큼은 별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정기가 넘쳐 보였다.
노인의 등장을 목격한 장가 수사들이 일제히 반색하며 외쳤다.
"고 대사님이다! 고 대사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셨다!"
"이제 살았어!"
구신욱은 측면에서 날카롭게 날아오는 바람 칼날을 가볍게 피했다.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방해한 고장풍을 노려봤다.
"늙은이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그때, 고장풍의 손에서 2계 하품 부적 한 장이 푸른 영광을 발했다.
부적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날카로운 바람 칼날로 변해 구신욱에게 맹렬히 날아갔다.
구신욱은 코웃음을 치며 바람 칼날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는 구련금신결의 기운이 뭉친 주먹으로, 유형화된 바람 칼날들을 연달아 후려쳤다.
퍼퍼펑!
바람 칼날들이 그의 주먹에 부딪혀 터져 나가며 푸른 영기 파편들이 허공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구신욱의 흉포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고장풍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른 손이 허리춤의 저물대를 스치자, 여덟 장의 1계 극품 회풍부가 허공으로 떠올라 순식간에 진형을 이루었다.
여덟 장의 부적이 공명을 일으키며 그 기운이 순식간에 2계 하품 수준까지 치솟았다.
풍속성 기운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반투명한 바람 밧줄로 변해 구신욱의 사지를 단단히 옭아맸다.
"부진!"
구신욱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바람 밧줄을 끊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밧줄의 기운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으나 단번에 끊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속박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사이.
고장풍은 이미 새로운 부적들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여덟 장의 1계 극품 난풍부가 허공에 나타나 또 다른 진을 형성했다.
곧이어 셀 수 없이 많은 예리한 바람 칼날들이 구신욱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이런 한미한 가문에 부진을 다루는 이계 제부사가 있다니!'
구련금신결을 5층까지 수련한 구신욱의 육체는 2계 후기 요수에 필적하는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부진의 위력은 2계 하품 수준에 그쳤기에,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바람 칼날에 법의는 순식간에 누더기처럼 변했고.
피부 곳곳에도 회초리에 맞은 듯한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저 부적들도 기운이 다할 터. 그때 네놈의 머리통을 박살내주마!'
구신욱은 이를 악물고 부진의 기운이 소진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장풍은 첫 번째 부진의 기운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이미 다음 부진을 설치하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세 번째에 이어 네 번째 부진까지 연달아 완성되자.
마침내 구신욱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대체 부적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 거지?'
아무리 강력한 체백을 지녔다고 한들 영력이 고갈되면 한낱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력이 바닥나 바람 칼날에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 분명했다.
연이은 부진의 맹공에 구신욱의 몸을 보호하던 은빛 기운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오만한 기색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구신욱은 품속에서 작은 옥패 하나를 꺼내 들고는 심히 아깝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곧이어 그는 주먹을 꽉 쥐어 옥패를 깨뜨렸다.
쩌어엉!
눈부신 백색 광휘와 함께 귀청을 찌르는 고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구신욱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던 바람 밧줄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침내 자유를 되찾은 그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도주를 감행했다.
"어딜 도망가려 하느냐!"
고장풍은 잔상을 남기며 도망치는 구신욱을 향해 쉬지 않고 바람 칼날을 날렸다.
구신욱은 분노와 굴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전장에서 멀리 벗어났다.
그의 악에 받친 외침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오늘 일은 반드시 되갚아주마, 늙은이!"
고장풍의 예상치 못한 등장과 구신욱의 허무한 도주에 목가 수사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그들의 공격은 눈에 띄게 약해졌고, 이내 장가의 반격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장풍은 이왕 백월장가를 돕기로 한 이상 어설프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연이어 부진을 펼쳐 목가의 진형을 뒤흔들며 막대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모두 퇴각하라!"
결국 목가의 가주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후퇴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후, 원래 계획대로 형가와 힘을 합쳐 백월장가를 다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본래 목가와 형가는 함께 백월장가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더 많은 공적과 전리품을 독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목가는 형가와의 약속을 어기고 단독으로 선공에 나섰던 것이다.
목가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구신욱이라는 강력한 지원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신욱이 도주했으니, 이제 후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
목가가 패퇴하여 물러나던 그 시각.
형가의 수사들이 집결해 있는 계곡 어귀에, 검은 소를 탄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장호연이었다.
곧 있을 전투를 앞둔 형가 수사들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 정체 모를 인물이 등장하자, 계곡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형가 수사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즉시 법기를 꺼내 들고 중년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 야심한 시각에 우리 형가의 집결지에 나타나다니. 단순한 우연일까?'
경계조를 책임지고 있던 형가의 사장로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향해 파허술을 펼쳤다.
중년인에게 느껴지는 신식의 강도는 고작 연기기 초기 수준에 불과했다.
상대가 실력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기에, 사장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심 자신의 파허술이 실패했을 리 없다고 지레짐작했다.
눈앞의 중년인은 법의도 아닌 평범한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의 행색은 변방을 떠도는 산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본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이놈을 상대로 손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백월장가와의 전투를 목전에 둔 사장로의 마음은 이미 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입가에 음험하고 잔인한 미소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사장로는 중년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의미 없는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이곳은 우리 형가가 잠시 머무는 곳이니 다른 길로···."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도 법기가 섬뜩한 살기를 내뿜으며 중년인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사장로는 중년인이 피할 수 없는 완벽한 기습이라 확신하며 그의 죽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사장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크게 놀라 소리쳤다.
중년인이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비도 법기를 맨손으로 잡아챈 것이었다.
"이, 이계 연체사!"
사장로는 당황한 와중에도 비도를 회수하기 위해 공물술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그러나 중년인에게 붙잡힌 비도는 웅웅거리는 소음만을 요란하게 발할 뿐,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윽고 쇠가 뒤틀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견고한 법기가 반으로 부러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장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재수가 없으려니 일이 꼬였군.'
상대가 2계 연체사라는 걸 알게 된 사장로는 더 이상 그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현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연기기 중기 이상의 수사만 3백 명 가까이 운집해 있었다.
자칫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2계 연체사 하나를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도주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를 붙잡기는 쉽지 않을 터.
앙심을 품은 중년인이 가문의 혈족들을 노릴 가능성을 생각하면 신중히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사장로는 자신의 섣부른 도발을 내심 후회했다.
그는 중년인에게 정중히 사과한 뒤 적절한 보상을 약속하고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전쟁이 끝난 후 중년인을 추적하여 처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장로가 막 사과를 하려던 찰나.
그가 서 있던 땅이 순식간에 질척한 수렁으로 변했다.
이어서 진흙으로 이루어진 촉수가 나타나 그의 몸을 휘감았다.
사장로는 입도 한번 뻥끗해 보지 못하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사장로가 사라진 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단단한 땅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태에 형가의 수사들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사, 사장로님!"
"사장로님께서 당하셨다!"
"적습이다! 적이 나타났다!"
그들의 다급한 외침은 삽시간에 계곡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계곡 안쪽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형가 수사들이 일제히 법기를 꺼내 들고 계곡 어귀로 몰려들었다.
곧이어 형가의 이장로가 상기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중년인에게 파허술을 펼쳐 그가 연기기 초기라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다.
"감히 우리 형가의 장로를 공격하다니! 사장로는 어디 있느냐? 당장 그를 풀어주지 못할까!"
이장로는 경계를 서던 혈족에게 전의술로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사태의 발단이나 과정이 어떠하든 간에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가문의 장로가 정체 모를 외인에게 공격당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장로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수백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중년인의 모습에, 이장로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즉시 가주에게 전의술을 펼쳐 의견을 물었다.
[가주님, 이자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한 것이 무언가 석연치 않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형가 가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그는 중요한 전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2계 연체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장로를 해친 적을 이대로 보내준다면 가문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 분명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형가 가주는 중년인을 향해 파허술을 펼쳤다.
'영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변형술로 본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군.'
중년인의 얼굴은 그가 알고 있는 주요 인물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형가 가주는 눈앞의 중년인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중년인이 정체를 숨긴 고계 수사였다면, 사장로가 공격하자마자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었을 터.
중년인이 연기기 수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태연함에 일말의 불안감이 일기는 했지만, 그것은 필시 도주를 염두에 두고 부리는 여유일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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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결단을 내린 형가 가주는 연기기 후기 이상의 혈족들에게 전의술을 펼쳤다.
이어서 그는 예고 없이 거대한 도끼 형상의 법기를 꺼내 중년인을 공격했다.
그 순간, 수십 명의 수사들이 빠르게 몸을 날려 중년인의 주위를 에워쌌다.
동시에 각양각색의 법기들이 일제히 중년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비검, 길이가 2장에 달하는 장창, 음산한 녹색 빛을 머금은 독침 등.
수십 개의 법기들이 중년인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맹렬히 쇄도했다.
바로 그때.
중년인을 공격하던 형가 수사들의 얼굴이 한순간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 여파로 중년인에게 날아가던 법기들이 통제력을 잃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수도자는 신식을 통해 주변의 미세한 기척까지 남김없이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형가의 수사들은 코앞에 선 혈족의 기척마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온몸이 얼음물에 빠진 듯 오싹한 환각이 엄습했다.
마치 깊은 심해에 내던져진 듯한 극심한 고립감과 원초적인 공포가 그들의 정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기괴한 환상은 다름 아닌 청우가 펼친 환술이었다.
엘릭서로 인해 강화된 청우의 혼력은 축기기 후기 수사의 두 배에 달했다.
그 결과 환술 능력이 통상적인 2계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었다.
만약 청우가 2계 후기에 오른다면, 그때는 금단기 수사를 상대로도 환술이 통할지도 몰랐다.
형가 무리가 환술에 빠져 허우적이는 사이.
두 척 길이의 검은 그림자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소리 없이 날아들었다.
검은 그림자는 파공음조차 내지 않으며 환상에 빠진 형가 수사들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았다.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 있던 형가 수사들은 예외 없이 목이 잘려 나갔다.
동시에 땅에서는 진흙 촉수들이 솟아나 그들을 무자비하게 땅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장호연은 바닥으로 나뒹구는 형가 수사들의 머리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가문과 종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끈끈한 혈족애와 동문 간의 정이 존재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울타리는 아군과 적군을 명확히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울타리 밖의 존재는 모두 잠재적인 경쟁자이자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장생대도를 향한 길이란 본디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수도자들은 가차 없이 적을 짓밟고 그들의 피와 살로 자신을 살찌웠다.
이런 무정한 세계에서 적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은 아군에게 칼을 겨누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십 명에 달하는 형가의 정예 수사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환술의 범위 밖에 있던 형가 수사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극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혈족들의 머리가 속절없이 잘려 나가고.
땅에서 불쑥 솟아난 진흙 촉수가 혈족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공격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상황을 살피던 형가의 육장로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이제 그는 눈앞의 중년인이 정체를 숨긴 축기산수라 확신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문이 멸문당할 수도 있다!'
이미 축기산수의 심기를 건드린 이상, 여기서 살아서 도망친다 한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축기진인의 분노는 가문의 존속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 분명했다.
족지에 남은 혈족들을 생각하면 무작정 도망치기보다, 먼저 자비를 구해보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었다.
육장로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선배님! 저희가 미처 선배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형가에게 한 번만 살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는 황급히 땅바닥에 몸을 던져 오체투지했다.
육장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른 형가 수사들도 즉시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필사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장호연은 땅바닥에 엎드린 형가 무리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형가의 핵심 전력인 연기기 후기 수사들은 이번 싸움으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아직 수백 명의 수사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연기기 중기 이하의 오합지졸들이었다.
이 정도 전력으로는 백월장가에 위협이 되지 못할뿐더러,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는 것조차 어려울 터였다.
장호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영수들의 공격을 멈췄다.
여기서 형가의 나머지 혈족을 죽이는 건 무의미한 학살에 가까웠다.
그는 영력을 운용해 쇠가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그나마 예를 차릴 줄 알기에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주겠다. 향후 백 년간 고양진에서 형가의 혈족이 단 한 명이라도 발견된다면, 그날로 형가는 수도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예, 선배님! 다시는 고양진에는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장호연의 말에 육장로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영학구가의 명을 받들어 백월장가를 공격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주를 포함한 핵심 전력 수십 명이 정체 모를 축기진인에게 목숨을 잃은 상황.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영학구가에서도 더는 참전을 강요하지 못할 것이다.
축기기 산수는 형가는 물론이고 영학구가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축기진인 하나가 작정하고 가문의 기반을 흔들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축기산수와 충돌을 벌일 일은 가능한 피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육장로는 머리가 깨져라 땅에 이마를 찧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이어서 그는 남은 혈족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계곡을 떠났다.
장호연은 백호에게 전리품을 수거하고 시체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그는 청우를 몰아 계곡을 빠져나왔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 들어선 그는 청우를 멈춰 세웠다.
장호연이 너른 바위 위에 앉자, 백호가 나타나 그의 앞에 전리품을 꺼냈다.
서른 개에 달하는 저물대 안에는 영석, 단약, 부적, 공법과 기예 전승, 각종 재료 등 실로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영석으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보물들은 더 이상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담담한 얼굴로 저물대 안의 물건들을 훑어보던 그의 눈에 문득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장호연은 한 저물대에서 십수 장의 부적 묶음을 꺼내 들었다.
파금부는 총 열 장, 전의부는 세 쌍이나 되었다.
이 부적들은 영석만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둘 다 전략물자로 취급되는 귀한 보물로, 특히 파금부는 금단대종 이상의 대세력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물품이었다.
장호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종류의 부적을 자신의 저물대에 보관했다.
그는 남은 저물대들을 빠르게 확인하며,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영석이나 영단, 부적 등을 따로 챙겼다.
정리를 끝마친 그는 남은 물건을 모두 백호에게 넘겨주었다.
백호는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잽싸게 저물대를 삼켰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장호연은 이만 족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금령을 불러 등에 올라탄 뒤, 빠른 속도로 족지를 향해 날아갔다.
족지 근처에 도착한 장호연은 인적이 드문 곳에 내려 변장을 해제했다.
영수들을 들여보낸 그는 족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족지에 도착한 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족지 곳곳에는 뚜렷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코끝을 자극하는 희미한 피 냄새에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분명 형가는 고양진을 떠났는데. 대체 뭐지?'
장호연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빠르게 이동했다.
곧이어 그는 침통한 표정을 한 족형을 만날 수 있었다.
"형님. 혹시 족지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족형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간밤에 청계곡 목가 놈들이 기습을 해왔다. 파금부까지 동원해서 호족대진을 깨뜨리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했지. 거기에 이계 연체사까지 나타나 혈족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고 대사님께서 도와주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장호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돌아가신 분은 몇 분이나 되고요?"
"사망한 혈족이 열일곱에 중상자도 서른 명이 넘는다."
족형은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중에는 장호연이 어릴 적 유난히 그를 아껴주었던 숙부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이라 할지,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 중에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 연체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사부님께서 처리하신 겁니까?"
"그자는 고 대사님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도주했다."
"제가 있었다면 놈을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나저나 목가 놈들이 언제 이계 연체사를 키웠는지 모를 일이군요."
천봉염가가 영학구가와 전쟁을 선포한 즉시.
가문에서는 상대의 전력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중에 목가에 이계 연체사가 있다는 정보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자는 목가의 혈족이 아니다. 놈은 분명히 영학구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쉰 살도 채 안 되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이계 연체사이면서 연기기 구층이더군. 그런 자가 어떻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영학구가요? 그자에 대해 더 아시는 게 있습니까?"
순간 장호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지금 의사당에서 장로회의가 열리는 중이니, 자세한 건 어른들께 여쭤보거라."
장호연은 일단 의사당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는 족형과 인사를 마치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의사당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호연을 발견한 장운경이 말했다.
"호연이 왔구나. 고생이 많았다. 정찰은 어찌 되었느냐? 형가는 아직 계곡에 있더냐?"
장호연은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보고했다.
"형가 무리가 집결해 있던 계곡으로 가봤습니다. 그런데 형가의 복장을 한 수십 구의 시신만 보이고,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의사당 안의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장호연을 바라봤다.
장호연은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전하듯, 최대한 담담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시신은 목이 잘려 있었고, 일부는 기이하게도 땅속에 반쯤 파묻힌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시신들 중에는 형가의 가주와 장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문의 어른들은 장호연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황당한 표정이었다.
한 장로가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형가 가주까지 당했단 말이?"
그들은 언제 형가가 쳐들어올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핵심 전력이 몰살당했다니, 도저히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잠시 술렁이던 의사당은 이내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형가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다행이었으나, 정체불명의 강자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어른들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사이.
장호연은 옆에 있던 숙부에게 다가가 영학구가의 연체사에 대해 물었다.
그러던 중 그는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자가 구련금신결을 수련했다고요?"
장호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학구가의 놈이 어째서 우리 가문의 연체공법을 익히고 있는 거지?'
물론 가문에 남아 있는 구련금신결도 잔본에 불과하니, 영학구가가 다른 경로로 잔본을 얻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숙부가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본래 구련금신결은 영학구가의 연체공법이다. 과거 비가와 관가가 천봉염가를 배신하고 영학구가 편에 섰을 때, 그 대가로 일부를 전수받았던 게지. 이후 놈들이 멸문하면서 남은 재산을 운암삼가가 나누어 가졌고, 그때 우리 가문이 구련금신결의 잔본을 얻게 된 것이다."
장호연이 연체사의 정보를 캐내는 사이.
가문의 어른들은 목가를 상대할 대책을 논의 중이었다.
장운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목가가 빠르게 퇴각한 탓에 그들이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형가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나, 두 가문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온다면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번에는 고 대사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막아냈지만, 언제까지고 그분의 도움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더구나 그 연체사가 다시 쳐들어온다면, 필시 고 대사님에 대한 대비까지 하고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되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깊은 우려가 서려 있을 때.
장호연은 다시 한번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젊은 나이에 연기기 구층에 이계 연체사라면, 분명 영학구가의 핵심 인물일 거야. 가문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신중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겠어.'
마침 그에게는 형가를 상대하며 만들어 둔 중년인의 신분이 있었다.
만약 중년인이 백월장가와 인연이 있었다면 목가의 공격에 그리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
중년인으로 변장해 목가와 이계 연체사를 처리하면, 그들의 죽음을 백월장가와 연결 짓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계획을 세운 장호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저는 이만 사부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보겠습니다."
장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가보거라. 그리고 가문을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거라. 이번 도움에 관해서는 추후 정식으로 보답을 드릴 것이다."
"예, 가주님."
장호연은 의사당을 나와 고장풍의 거처로 향했다.
고장풍과 고혜음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장호연은 가문을 대신해 고장풍에게 감사를 전한 뒤 그의 안부를 물었다.
"사부님. 심력의 소모가 크셨을 텐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는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강 수사의 영선 덕분인지 요 근래에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천만다행입니다. 정기신은 서로 하나이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면 더욱 좋아지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 걱정해 주어서 고맙구나."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당한 후, 고장풍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단지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 수십 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를 짓누르던 마음의 짐이 사라지며 평안이 찾아왔다.
이는 모두 장호연 덕분으로, 자신이 없더라도 그가 고혜음을 안전하게 지켜주리라는 깊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호연과 고혜음의 관계였다.
정은 광산에서 함께 지내기 시작한 후로, 둘 사이에는 동문 이상으로 발전할 듯한 미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다만 장호연이 수련에만 몰두하는 탓인지 눈에 띄는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장풍은 그것만으로도 내심 만족했다.
지금처럼 서로 교류하고 의지하는 시간이 쌓이면, 먼 훗날에는 자신이 바라던 관계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온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지내던 고장풍에게 신비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인지하지도 못한 어느 순간부터 정기신이 미세하게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부상을 회복시킬 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식을 운용해도 예전처럼 영혼에 큰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호전된 상태였다.
도기가 망가진 이후 처음 겪는 긍정적인 변화는, 그의 메마른 마음에 실낱같은 기대감을 피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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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장호연은 편안한 미소를 짓는 고장풍을 보며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엘릭서의 발동 효과를 조절할 수 있게 된 후, 고장풍 몰래 엘릭서를 먹였다.
다만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십수 년에 걸쳐 서서히 발현되도록 설정해 둔 상태였다.
장호연이 이처럼 신중한 방식을 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손상된 지 백 년이 넘은 도기가 하루아침에 회복될 경우, 고장풍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수(邪修)의 관심을 끌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고장풍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일찍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장풍에게 남은 수명은 20년 정도였기에, 어차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치료를 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 경우에 위험한 건 고장풍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장풍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뻗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
그래서 장호연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마치 기적처럼 고장풍을 치료할 생각이었다.
행여 누군가 고장풍을 심문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수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엘릭서의 효능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장호연은 이러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장풍의 부상을 치료하기 어려운 근본 원인은 오랜 세월 누적된 정기신의 심각한 불균형 때문이었다.
정기신은 본디 긴밀하게 연결된 유기적인 관계이기에, 어느 하나가 크게 왕성해지거나 쇠약해지면 다른 것들 역시 연쇄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다.
수도계에서는 때때로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신묘막측한 기사(奇事)가 벌어지곤 한다.
따라서 고장풍이 심경의 변화를 통해 스스로 정기신의 균형을 바로 세우고 점진적으로 부상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비록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언정 완전히 허황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장호연은 고장풍의 회복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여, 사람들이 그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계획했다.
심지어 고장풍조차도 이러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설령 누군가 고장풍에게 수혼술을 사용한다 해도, 이는 긴 세월 심경의 변화 끝에 찾아온 기적적인 회복으로 여겨질 터였다.
이처럼 철저한 안배를 통해, 장호연은 자신의 개입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그 배후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의심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만약 고장풍에게 자신의 능력을 밝히고 상의했다면 진작에 안전한 방향으로 그를 치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호연은 엘릭서의 비밀을 절대 누구에게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장호연처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수도자는 죽을 때까지 법열의 환희를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다만 그것이 결국 닿을 수 없는 꿈임을 알기에 체념할 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엘릭서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수도자에게 엘릭서를 드러내는 것은, 지독한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약물 중독자의 눈앞에 마약을 들이미는 것 이상의 위험한 행위였다.
설령 고장풍이 비밀을 지킨다고 해도, 외력으로 인해 비밀이 노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둘이 되는 순간, 비밀은 더 이상 진정한 비밀이 아니게 된다.
장호연은 엘릭서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자신과 주변인 모두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고장풍과 대화를 마친 장호연은 즉시 족지를 나섰다.
족지에서 한참을 벗어난 그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으로 변신한 뒤, 금령과 백호를 소환해 목가를 추적하도록 지시했다.
백호의 뛰어난 후각과 영각, 그리고 금령의 광범위한 정찰 능력이 더해지자 적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호연은 목가가 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로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림산맥 부근의 계곡에서 목가 무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장호연은 먼저 연체사를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얼마 후, 백호가 체백이 왕성한 남자가 있는 곳을 알려왔다.
남자는 목가 무리와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다.
장호연은 금령이 전하는 신식을 통해 남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길이가 6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비주 위에 남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장호연은 목가 무리의 시선을 피해 남자가 있는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이어서 그는 흑우로 변한 청우에 올라타 비주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같은 시각, 구신욱은 비주 위에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자신을 농락한 늙은 제부사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골몰했다.
"구 공자님처럼 귀하신 분께서 어찌 그깟 늙은이 하나에 마음을 쓰십니까? 그보다 더 즐거운 일로 관심을 돌리심이 어떠하신지요?"
옆에 있던 목가의 여인이 그의 목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교태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야릇한 손길이 구신욱의 분노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이내 마음이 동한 구신욱은 목가 여인의 웃옷을 거칠게 벗겨냈다.
햇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백옥 같은 어깨와 보드라운 솜털이 그의 욕망을 자극했다.
구신욱의 눈에 욕정이 들끓던 그때.
숲 한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구신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광대뼈가 도드라진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검은 소를 타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중년인은 구신욱과 목가 여인을 차례로 바라보더니, 이내 목가 여인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목가 여인이 발끈하며 구신욱에게 애원했다.
"구 공자님! 저 더러운 자가 추잡한 눈으로 저를 모욕했습니다! 저 불경한 놈을 당장 죽여주십시오!"
구신욱은 감히 자신의 물건을 탐하려는 중년인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는 중년인을 향해 거리낌 없이 신식을 뻗었다.
'연기기 초기?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았는데 잘 됐군. 내 유흥을 방해했으니 머리통을 박살 내주마.'
구신욱은 비주에서 내려 중년인에게 걸어갔다.
상대를 얕잡아본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중년인에게 몸을 날렸다.
그는 자신의 주먹 한 방이면 중년인을 끝장내기에 충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중년인의 대응은 구신욱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검은 소에서 뛰어내린 중년인은 그를 향해 쇄도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쾅!
두 사람의 주먹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강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주먹을 나눈 그들은 곧장 거리를 벌렸다.
구신욱은 상대가 2계 연체사라는 사실에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놀람은 잠시였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그는 상대의 체백이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을 즉시 간파했다.
그런데 그때.
중년인이 갑자기 소 요수를 거둬들이더니 산속으로 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구신욱이 조소를 흘렸다.
"흥! 이제야 주제 파악을 한 건가?"
구신욱은 목가 여인을 내리게 한 후.
비주를 몰아 중년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구신욱은 중년인을 금방 추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중년인은 비호 같은 몸놀림으로 빠르게 숲속을 질주했다.
'신행부라도 사용하는 건가?'
비록 중년인이 빠르긴 하지만 그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기에, 구신욱은 느긋한 마음으로 그를 뒤쫓았다.
추격전은 나무가 울창한 숲을 지나 좁고 깊은 계곡 안쪽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점점 좁아지던 계곡이 마침내 거대한 암벽으로 완전히 틀어막혔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상황.
구신욱은 영력을 실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쥐새끼 같은 놈! 도망치는 건 여기까지다!"
그때, 막다른 길에 몰린 중년인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려 목숨을 구걸할 줄 알았건만.
중년인의 반응은 구신욱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의외의 상황을 마주한 구신욱은 왠지 모를 찝찝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며 불쾌감을 떨쳐냈다.
"마지막으로 발악이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그래. 그래야 더 죽이는 맛이 있지."
구신욱은 비주를 수납한 뒤 땅으로 내려섰다.
그는 어떤 말을 꺼내야 중년인을 더욱 절망에 빠뜨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마침 적당한 말이 떠오른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중년인이 다시 검은 소 요수를 소환했다.
"흥! 그깟 일계 요수 하나가 더해진다고 네놈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구신욱이 비웃음을 날리던 그 순간.
검은 소에게서 압도적인 요력이 터져 나왔다.
'이계 원만 요수!'
구신욱이 경악을 금치 못하던 그때.
그의 발밑 땅이 질척한 수렁으로 변하더니, 진흙 촉수가 나타나 그의 하체를 단단히 결박했다.
동시에 그는 땅속 깊은 곳에서 2계 중기 요수의 요력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마리 요수가 뿜어내는 요력이 순식간에 계곡 전체를 뒤덮었다.
구신욱은 흉포한 영압에 의해 신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크윽!"
그는 즉시 저물대에서 푸른빛을 띤 옥패 하나를 꺼냈다.
옥패에서 흘러나온 빛이 그의 미간으로 스며들자, 영혼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빠르게 해소되었다.
청심정혼패(淸心定魂佩)는 구가삼조가 그의 안전을 위해 선물해 준 2계 상품 법기로, 축기기 후기 수사의 영압까지 방어할 수 있는 귀보였다.
진짜 축기기 후기 수사의 신식 공격이라면 법기의 기운이 빠르게 소모되겠지만, 요수들이 뿜어내는 간접적인 영압을 막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구신욱은 구련금신결을 전력으로 운용하며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진흙으로 이루어진 촉수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땅속에서 날카로운 바위 창들이 무수히 솟아오르며 구신욱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위 창들은 그의 단단한 육체에 부딪혀 튕겨 나갔지만, 그 충격은 고스란히 내부로 전달되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소의 뿔에서 노란 번개가 번뜩이더니 이내 채찍처럼 변해 구신욱의 상체를 휘감았다.
파괴적인 뇌기가 구신욱의 육체를 파고들었다.
구신욱은 온몸이 찌르는 듯한 격통에 몸을 덜덜 떨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바위 창과 체내를 파고드는 번개 채찍의 공격에, 구련금신결의 기운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뚜렷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장호연은 담담한 눈으로 청우와 백호의 공격을 지켜봤다.
구련금신결 덕분에 잠시나마 버틸 수 있을 뿐.
구신욱의 죽음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청우의 뇌전 채찍은 강력한 뇌기를 주변으로 퍼트리면서도, 백호의 기운과는 조금도 충돌하지 않았다.
요력에는 청우의 의지가 담겨 있었기에, 그 범위와 위력을 조절하여 선별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장호연은 청우에게 공격을 잠시 멈추라는 의지를 보냈다.
번개 채찍의 공격이 잠시 멎자, 구신욱의 눈에 실낱 같은 희망이 떠올랐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급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제가 고인을 몰라뵈었습니다. 저는 영학산의 구신욱이라 하며, 가문의 세 번째 노조께서 제 조부 되십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조부님께서 반드시 크게 사례하실 겁니다. 원하신다면 혼계를 맺고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장호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구신욱을 바라봤다.
혼계의 주체는 계약 대상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의 정신까지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만약 정신까지 온전히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장호연은 구신욱이 죽는 날까지 가문에 저지른 죗값을 혹독히 치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구신욱을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장호연이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연체술이 꽤 쓸만하던데. 어떤 공법을 익혔지?"
"구련금신결입니다!"
"지금 그 공법을 대성한 상태인가?"
"아닙니다. 구련금신결은 총 구층으로, 저는 현재 오층을 수련 중입니다."
'역시 원본을 가지고 있었군!'
장호연은 별일 아닌 듯 말했다.
"그 정도면 삼계 공법이라는 뜻인데. 흥미롭군. 지금 공법이 담긴 옥간을 가지고 있나?"
"예, 선배님! 저물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구신욱은 황급히 옥간을 꺼내 장호연에게 날려 보냈다.
장호연은 옥간을 받아 들고 빠르게 살펴봤다.
구련금신결이 9층까지 기록된 것을 확인한 그는 이내 옥간에 불어 넣던 신식을 거둬들였다.
지금은 한가롭게 공법을 연구할 때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차차 확인하면 될 일.
장호연은 내심 기쁨을 감추며 저물대에 옥간을 집어넣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구신욱의 손에 들린 옥패로 향했다.
"그 옥패는 뭐지?"
"청심정혼패라는 혼도(魂道) 법기로, 신식을 보호하고 은폐하는 기능을 지녔습니다. 잠시지만 축기기 후기 수사의 신식 공격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연기기 주제에 혼도 법기를 가지고 다니다니. 구가삼조가 네놈을 많이 아끼나 보군."
"선배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청심정혼패가 있어봐야 잠시 죽음을 늦춰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구신욱은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리 한번 줘 보거라."
"예, 선배님. 그럼··· 저를 살려주시는 겁니까?"
구신욱은 초조한 얼굴로 장호연을 바라봤다.
그 순간, 장호연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되었다. 내가 직접 가져오면 될 것을."
그와 동시에 번개 채찍이 다시금 구신욱의 몸을 휘감았다.
"이런 개 같은 놈! 네놈을 저주하마!"
마침내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구신욱은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 후, 그를 보호해 주던 구련금신결의 기운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구신욱의 몸은 강력한 뇌전 공격으로 완전히 익은 상태였다.
두 눈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전신의 구멍에서는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장호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구신욱의 저물대와 손에 쥐고 있던 옥패를 거둬들였다.
이어서 청우가 뿜어낸 강력한 뇌기가 구신욱의 몸과 법의를 재로 만들었다.
뒤처리를 끝마친 장호연은 청우에게 주변 영기의 흐름을 교란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늘에서 맹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장호연은 자신이 구신욱을 상대하는 동안, 금령에게 목가 무리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연기기 후기 이상의 고수를 대거 잃게 된 목가는 더 이상 이번 전쟁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청우와 백호를 영수대로 들여보내고, 금령의 등에 올라타 계곡을 빠져나갔다.
장호연은 중림산맥 깊은 곳에 자리한 동굴에 몸을 숨겼다.
은폐 진법을 설치한 그는 구신욱을 처리하기까지의 과정을 여러 번 되짚어 보았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판단한 그는 비로소 숨을 돌렸다.
장호연은 편안한 마음으로 구련금신결이 담긴 옥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게 뭐야?'
옥간에는 분명 구련금신결의 수련법이 9층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옥간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옥간의 뒷부분에는 4계 연체공법에 해당하는 구련오행보권(九鍊五行寶卷)에 관한 정보가 일부 담겨 있었다.
구련오행보권은 오행 속성의 연체공법으로 이루어진 신공(神功)으로, 구련금신결은 금속성 기운을 단련하는 공법의 별칭이었다.
'후천도체!'
수도자의 영혼과 육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구련오행보권의 공법을 모두 대성하면, 단련된 체백이 영근에 영향을 미쳐 후천적으로 오행지체를 이룰 수 있었다.
장호연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옥간의 내용을 자세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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