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0

1화 - 회귀하다(1)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아이신은 뜬금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말이라는 놈들은 말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다네.”

“제가 어찌 생각하는줄 알고 그러십니까.”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보다 더 똑똑할 거라는 말 아니겠나.”

업혀 있던 부대장은 그게 지금 이런 상황에 굳이 필요한 말이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아이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돌아가면 우리 바타르가 망아지 때부터 얼마나 똑똑했는지 밤새 이야기 해주도록 하지.”

“아이고 됐습니다. 우리 기병대에 대장님 말 자랑을 모르는 놈도 있답니까. 술만 드셨다하면 질릴 정도로 바타르 이야기만 하셨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많이 했었나? 내가?”

“그보다 슬슬 내려주십쇼. 대장님도 알지 않습니까.”

“뭘?”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저를 여기 버리고 가셔야 대장님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실 것 아닙니까?”

그걸 모르겠냐, 바보 자식아.

업고 있는 네놈 배에서 피가 철철 흘러가지고 등이 뜨뜻할 지경인데.

아이신은 이를 꽉 깨물고는, 씹어뱉듯이 뇌까렸다.

“죽어가는 부하 놈 내버려두고 가는 대장도 있다더냐.”

“하핫. 그렇지요. 대장님다우시네요. 그런데 진짜 힘듭니다. 내려주십쇼. 부탁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앞에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 밑에 부대장을 내려놓았다.

임시방편으로 지혈을 해 놓기는 했지만, 동여맨 천을 뚫고 어느새 새빨간 피가 줄줄 흘러나와 천을 적시고 있었다.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건 무리겠지요?”

“그래. 이미 사방이 다 포위됐다. 바타르가 있었어도 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는 건 힘들겠지.”

“그래도 그 바타르 덕분에 여기까지 도망온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 바타르가 어떤 말인데.”

- 쌔애애애액!!

순간, 뒤에서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무언가를 감지한 아이신은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검을 등 뒤로 후려쳤다.

- 채앵!!!

저 멀리서 날아온 눈 먼 화살이 칼에 부딪혀 떨어지자, 부대장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뭐 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겠네요.”

“어차피 너나 나나 둘 다 죽을 건데 유언이 전해지기나 하겠냐.”

“그건 그렇지요.”

부대장은 자기 옆에 털썩 주저앉은 아이신을 빤히 보더니, 분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이신 대장.”

“왜.”

“이거 그러니까, 숙청이지요?”

“그런 셈이지.”

“죽어라 변방을 돌아다니며 야만인 놈들을 상대한 결과가 고작 이거랍니까?”

“옛 말에 사냥이 끝나고 나면 용맹한 사냥개를 잡아 구워먹는다고 하지 않나.”

“저기 엘프 놈들은 아직 건재하잖습니까?”

“엘프 놈들이야 자기네들이 먼저 제국을 어찌할 깜냥은 없는 놈들 아닌가.”

숨을 헐떡이는 부대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신이, 별안간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하다.”

“대장님이 뭐가 미안합니까?”

“내가 조금 더 중앙 정치를 신경 썼더라면, 하다못해 유력한 끈이라도 만들어뒀더라면 자네와 다른 부하들이 허무하게 죽는 일은 없었을 텐데···”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십쇼. 대장님이 다른 놈들처럼 정치판에나 기웃대는 사내였다면, 다들 대장님을 그만큼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가?”

“하.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걸 보니, 진짜 좀 있으면 뒈지려나 봅니다. 눈이 감기는 느낌도 들고요.”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음···그래. 옛날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옛날 이야기요? 혹시 대장님 옛날 이야기인가요? 한 번도 해 준 적 없잖습니까?”

“그랬지.”

“이야, 이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보람이 있네요. 죽기 전에 대장님 옛날 이야기도 듣게 되고.”

그 와중에 활짝 웃는 부대장을 보고, 아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밝힐 생각이 없었는데.

“나는 말이야. 제국 출신이 아니라네.”

“제국 출신이 아니라고요? 그럼 저 어디 왕국이나 후국 출신인가보지요?”

“아니, 그것도 아닐세. 실은 말이야. 나는 동쪽 변방의 산야족 출신이라네.”

“···예?”

부대장의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 당연히 그런 반응일 수밖에.

“정말입니까? 대장님이 산야족···그러니까 야만족 출신이라고요?”

“그래.”

“제국 북부와 동부의 야만인 놈들에게 미치광이 도살자 소리를 들으면서 놈들을 벌벌 떨게 만들던 대장님이요??”

미치광이 도살자는 좀 심하지 않냐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신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속고만 살았나?”

“너무 충격이라 그럽니다. 아니 그럼 대장님은 자기 손으로 동족들의 뿌리를 뽑았다는···”

“무슨 헛소리야.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애초에 야만인 놈들은 자기네들끼리 더 심하게 싸우는 놈들인데.”

“아, 그랬지요. 하긴, 조금만 이간질 시켜도 서로 죽을때까지 싸우는 통에 꽤 편하게 토벌한 부족이 여럿이었지요.”

“애초에 내가 제국으로 도망친 것도, 우리 부족에서 나를 제외하면 모두 다른 부족 놈들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라네.”

“어쩐지···그러니까 그런 겁니까? 대장님이 그렇게도 야만인 놈들을 때려잡던 이유가,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던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지.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더군.”

“그건 무슨 소립니까?”

“부락끼리 그렇게 치고받고 싸운 까닭은,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 제국의 이간질이었다는 말이지.”

“듣고보니 참 기구합니다. 결국 대장님의 진짜 적은 따로 있었는데, 대장님은 그놈들에게 평생 이용만 당하시다가···”

부대장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는 입을 다물었다.

피를 그렇게도 많이 흘렸으니 이만큼 대화를 나눈 것도 사실 힘든 일이었을거다.

이윽고, 감았던 눈이 힘겹게 떠지더니 그의 입에서 느릿느릿한 말이 흘러나왔다.

“마누라랑 우리 딸래미는 괜찮겠지요?”

솔직히 확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신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럼. 우리는 어디까지나 야만인 잔당을 수색하는 임무 도중에 죽은 걸로 처리될 테니까. 순직이지.”

“순직. 그거 좋군요.”

“위로금에 유족 연금까지 두둑하게 나올 테니, 남은 가족들이야 어떻게든 밥 굶지 않고 잘 살지 않겠나.”

“젠장. 그거 듣던 중 다행이네요. 갑자기 마음이 팍 놓여가지고 바로 죽어버릴 것 같습니다그려.”

“실없는 사람 같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방으로 그들을 포위한 적들의 살기가, 숨길 생각도 없이 이쪽으로 쏘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부대장이 천천히 얘기했다.

“그래도 가장이라고, 죽을 때가 되니 마누라랑 딸래미 얼굴밖에 안 떠오르네요.”

“좋은 아버지구만.”

“대장님은 지금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하셨으면서.”

그러게 말이다.

부대장의 그런 말을 듣고 있으려니, 아이신의 머리에 문득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 동생들이 생각나는구만.”

“동생들이요?”

“그래. 내가 장남이었거든. 동생들이 나를 참 잘 따랐는데···”

“대장님같은 형이라면 그렇겠네요. 저도 형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맨날 두들겨 맞기만···”

- 피피피피핑!!!

- 채채채채챙!!!

- 푸푸푸푹!!

그러나 부대장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사방에서 그들을 포위하던 놈들이 화살을 난사했고.

아이신이 미처 쳐내지 못한 화살들이 부대장의 목이며 심장 부근을 깊숙히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편히 가게.”

고개를 툭 떨군 부대장에게, 아이신은 짧게나마 마음속으로 묵념을 했다.

“그걸 다 쳐내다니···!!”

“지독한 놈 같으니···이쯤 되면 그냥 항복할 것이지.”

쏘아진 화살을 전부 쳐내는 것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한 적들이 그제야 아이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이놈들을 뚫고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위치가 완전히 특정됐으니, 이제 더 많은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히겠지.

그렇다면···

- 파밧!!

아이신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어, 뒷발을 박차며 도약했다.

“방패병!! 퇴로를 막아라!!”

“그냥 얌전히 죽을 것이지 발악을 하다니···”

- 채애앵!!!

이미 궁사들의 앞에 자리잡고 있던 방패병들이, 거대한 철 방패를 들고 아이신의 앞을 막아섰다.

아이신은 발을 높이 들고, 방패병이 들고 있던 방패를 콱 하고 밀어버렸다.

- 투우우욱!!

- 쿠구궁!!!

“제, 젠장!! 무슨 힘이 저렇게 쌔단 말이냐!!”

“어, 어!! 조심해!!”

- 촤아아악!!

방패병이 넘어진 틈을 타, 아이신은 놈의 머리를 투구째로 베어 날려버렸다.

“화살!! 화살을 쏴라!!”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군이 맞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럼 저 놈이 도망치게 두라는 말이냐!! 어차피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한 작전이다. 놈은 단신으로 야만인 수천을 뚫고 도망친 적도 있는 괴물이다. 차라리 그 편이 아군의 피해가 적다!!”

그 말과 함께, 끼이익 하며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들이 사방을 울렸다.

‘이건 못 막는다. 그렇다면 한 놈이라도 더 길동무로 삼아주겠어.’

아이신은 화살을 쳐내는 것을 포기하고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다.

“으, 으아아아악!!”

“쿠우욱!!”

“마, 마지막에 와서···”

- 피피피피핑!!!

- 푸부부부부부북!!!

앞을 막고 있던 방패병과 뒤편 궁수 몇 놈을 베어넘기자, 일제히 화살이 쏘아졌다.

어깨와 배, 심장과 등, 허벅지 등에 꽂힌 화살로 인해 아이신의 몸은 고슴도치처럼 꿰뚫렸다.

이윽고,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다.

- 쿠우우우웅!!!

“놈을 쓰러뜨렸다!!”

“숨이 붙어있는 동안에는 안심할 수 없다!! 조금만 기다려라!!”

개···자식들···내가 무슨 마수라도 되냐. 이만큼 화살을 맞았는데도 위험하게.

앞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배에 꽂혀 있던 화살이 뚝 하고 부러졌고, 화살촉이 더더욱 아이신의 복부 깊은 곳을 찔러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그래도 저는···전사로 죽었네요.’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이신은 한많은 삶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을 터다.

*

“허억···허억···허억···”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이신은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 땀으로 가득하다.

“뭐지? 어째서 내가 살아있는 거지?”

고슴도치처럼 화살 수십 발을 맞고 쓰러져 최후를 맞이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살아 있지?

그보다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그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이신의 볼을 무언가가 조용히 핥아주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 냄새는···”

미끌미끌한 혀의 감촉과, 짐승 특유의 냄새.

부드럽게 볼을 핥아주는 것은 분명 말의 혀다.

그것도 그가 가장 잘 아는, 그의 애마.

“바타르···?”

“히히히힝!!”

아이신이 이름을 부르자, 바타르는 익숙하게 울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둠 속에 눈이 적응하자,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마굿간이잖아? 그런데 이 배치는···?”

아주 오래되어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아이신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곳은 분명···

바로 그때.

마굿간의 문이 열리더니, 조심스럽게 누군가가 들어왔다.

“형···또 여기 있었어?”

“우리도 여기서 같이 잘래, 오빠!”

마굿간을 통해 새어들어온 달빛이, 아이들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아이덴과 아이나.

죽을 때까지, 아이신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던 가여운 동생들.

정신을 차리자, 아이신은 동생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 와락!!

“혀, 형??”

“오빠?”

“으흑···흑흑흑흑···아이덴···아이나···!!”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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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회귀하다(2)

동생들을 껴안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아이신은 이 상황에 대해 찬찬히 생각할 수 있었다.

‘분명 나는 제국에 의해 숙청당했어. 그런데 어째서 어릴 적에 죽은 동생들이 있는 거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지만.

아직 동생들이 살아있던, 어린 시절로 회귀했다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아이신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아이덴, 아이나. 너희가 올해 몇 살이지?”

“뭐야 형. 오늘 이상하다? 나는 열 살이고 아이나는 아홉 살이잖아.”

“오빠가 몇 살인지도 까먹은 건 아니지?”

머릿속으로 동생들의 나이를 계산해 본다.

분명 남동생 아이덴은 그보다 세 살 밑이었고, 아이나는 아이덴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럼 나는 지금 열 세 살이라는 말인가.’

어렴풋이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열 세 살이면 아직 그가 가족들과 함께 부족에서 단란하게 살아가던 시절이다.

물론 완전히 단란한 가정이라기에는 벌써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때, 아이신은 죽기 직전 부대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대장님은 지금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하셨으면서.

부대장의 질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적의 화살에 꿰뚫려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동생들의 얼굴이었다.

아직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불쌍한 동생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아이신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맞아.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어차피 동생들은 죽을 수밖에 없어.’

회귀 이전.

아이신이 열 여덟이 되던 해에, 강대한 다른 부족의 침략이 있었다.

부족장이던 아이신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전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전사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붙잡혀 노예가 되었다.

아이신은 가까스로 혼자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지만, 동생들은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제국 기병대장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복수하지는 못했어.’

제국으로 도망친 아이신은 신분을 숨기고 제국 변방 기병대에 들어갔다.

모든 전사들이 뛰어난 기병인 부족 특성상, 아이신의 마상 창술이나 궁술은 금세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승진을 거듭하여, 종국에는 제국 기병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그 쓰임새가 다하여 헌신짝처럼 버려지기는 했어도 말이다.

아직, 벨린다의 부족에게 복수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가족들을 지켜내고 놈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생각해야 할 것은 산더미처럼 있지만 지금은 재회의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아이신은 수십년 만에 다시 만난 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스르르 잠에 들었다.

*

다음 날 새벽.

마굿간 짚더미에서 일어난 아이신은 동생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뺨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칼바람의 정도로 보면, 겨울의 초입인가.’

회귀 전 제국 기병 대장이었던 아이신의 주 임무는 북부와 동부의 야만인들을 필요에 따라 응징하는 것.

때문에 수도에 머무는 날보다 변방에서 지낸 날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니 몸으로 느껴지는 추위의 정도로 계절을 파악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13살···13살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지?’

다만 너무 옛날의 기억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아직 단편적으로만 떠오를 뿐이다.

잠시 새벽 겨울의 찬 공기를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벌써 일어났느냐. 아이신.”

“아버지···”

30대 중반 정도의 기골이 장대한 사내.

이 부락의 부족장이며, 아이신과 동생들의 아버지인 아이막이다.

“긴장했느냐?”

“······”

맥락도 없이 받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아이신은 난감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회귀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테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응시하고 있자, 아이막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이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핫. 마음은 알겠지만 몸에 힘을 빼려무나. 올해는 우리 부족에서 의식을 주관한 덕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너는 아직 열 세 살이지 않느냐.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열 대여섯 살이니 이번에는 참가하는 데에 의의를 두거라.”

의식? 그리고 열 대여섯 살의 소년들···아!

‘겨울의 사냥제구나.’

아이신은 어렴풋이, 지금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사냥의 신에게 전사들의 안전과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던가.’

대다수의 제국민들은 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분없이 야만인이라 불렀지만.

제국 상층부에서는 편의상 야만인들을 구분해서 불렀다.

아이신의 부족처럼 거친 숲과 산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산에 사는 야만인이라 하여 산야족.

변방의 넓은 들과 평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평야에 사는 야만인이라 하여 평야족.

마지막으로 정말 인간이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거친 데다 마수까지 서식하는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물과 함께 산다하여 마야족이라 불렀다.

당연히 산야족이라는 단어는 제국에서만 쓰는 말이고, 산야족 사람들은 자신들을 ‘숲의 사람들’이라 칭했다.

그 ‘숲의 사람들’에게는 겨울이면 치르는 특별한 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겨울의 사냥제다.

‘아무래도 겨울의 사냥은 1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니 말이야.’

거친 숲과 산에 사는 산야족은 물론 1년 내내 사냥을 하지만.

겨울의 사냥은 개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

낮은 단계의 농업이나 채집을 병행할 수 있는 다른 계절과 달리.

변방의 혹독한 겨울에는 사냥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의 영토 근방에서만 사냥을 하는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의 수렵은 장기간에 걸쳐 먼 곳까지 원정을 떠난다.

당연히 평소보다 훨씬 위험한 사냥이 되기에, 겨울의 초입이 되면 근방의 우호적인 부족들이 모여 사냥제를 치르는 것이다.

“어차피 일찍 일어났으니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느냐?”

아이신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서서히 납득하고 있으려니, 아이막이 아이신에게 부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아이신은 선선히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그럼요. 뭘 도와 드리면 될까요, 아버지.”

“부족의 다른 젊은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제단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이른 아침의 추위를 헤치며, 둘은 부락 뒤편 넓은 장소로 향했다.

거기에는 돌을 깎아 만든 제단과, 동물의 머리뼈로 만든 듯한 장식물 등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 잠깐만 서 있어 보거라.”

아이신이 제단 옆에 서자, 아이막은 제단 양 옆에 놓인 장식물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하고, 장식물들을 들어 위치를 바꾸기도 하였다.

“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막이 땀을 닦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아버지.”

“으음. 의식용 장식의 배치는 이 정도면 완벽한 것 같구나. 다만 저 돌제단을 통째로 들어서 조금 옆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아이막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사냥제에 올릴 고기며 곡식, 과일 등을 놓는 돌제단이었다.

아무래도 저 무거운 제단을 들어 옮기기 위해서는 부족의 다른 전사들을 더 불러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둘이서 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그렇다 치고 반대편은 건장한 전사 두 명이 맞잡고 들어야만 옮길 수 있을 게다.”

아직 열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장남이, 자신있다는 듯 돌제단 맞은편에 가서 섰다.

“일단 한 번 시도는 해 보시지요.”

“녀석···혈기왕성할 때라는 것은 알겠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막은 일단 아이신의 맞은 편에 가서 섰다.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한 전사가 되어야 할 아들이다.

이 정도 만용쯤은 부리는 것이 전사의 자질에 걸맞는다 생각하며, 아이막은 제단을 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들어올리는 게다. 자, 하나, 둘, 셋!”

으럇차!!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아이막은 돌제단을 번쩍 들어올렸다.

어차피 아들은 이걸 들 수 없을 테니 껄껄껄 웃어주며 너는 아직 멀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리라.

그런데···

“크···으으으읏···”

단전 깊은 곳에서 짜내는 듯한 기합소리와 함께, 돌제단이 번쩍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당연히 아이막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입을 딱 벌렸다.

“아, 아니···이게 어떻게···!!”

“큿···아버지···위치를 어디로···”

“어, 어어어. 조금만 내 쪽으로, 그렇지 그렇지. 여기에 놓자꾸나. 팔에 힘을 바로 빼지 말고 천천히.”

마침내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돌제단은 정확히 아이막이 의도한 위치에 놓아졌다.

- 털썩!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신을 바라보며, 아이막은 아직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고작 열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네가 벌써 벽을 넘었을 리는 없는데···그래. 역시 내 아들이구나. 힘이 세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내가 미처 몰랐다. 이 정도면 나 어릴 때보다 훨씬 힘이 좋은 것 같구나.”

아이신은 아버지를 향해 마주 웃어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사실은 이미 벽을 넘었습니다.

‘회귀 전에는 이십대 후반에나 벽을 넘었는데, 이 어린 몸으로도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을 줄이야.’

제국에서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 표현하고, 숲의 사람들은 벽을 넘었다 말하는 종류의 힘.

그 정체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일반인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를테면 방금처럼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때.

벽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무식하게 팔에 힘을 주어 들어올리겠지만.

벽을 넘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팔의 특정 부분들에 고루 힘을 분산시켜 최상의 효율을 낸다.

뿐만 아니라 벽을 한 번 넘는 순간, 체력과 근력의 총량이 월등히 높아질 뿐 아니라 모든 오감이 날카롭게 버려지는 것이다.

회귀 직전, 아이신이 뒤에서 날아오는 눈 먼 화살을 쳐냈던 것도 벽을 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만 아직 열 세 살의 미숙한 신체이기 때문일까.

아이신은 자신의 힘이, 회귀 전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뭐 그 덕분에 아이막이 볼 때는 단순히 또래에 비해 힘이 월등히 좋은 정도라며 의심 없이 넘어갔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제국에서는 백인대나 천인대의 대장쯤 되어야 간간이 벽을 넘는 자가 나오는데 말이야.’

어릴 때는 몰랐지만, 벽을 넘은 지금의 아이신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서는 벽을 넘은 자 특유의 안정된 자세가 느껴진다.

그리고 아버지뿐 아니라, 오늘 사냥제를 위해 찾아오는 부족의 대표들 역시 대다수가 벽을 넘은 사람일 것이다.

‘벽을 넘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야. 수십 년 이상을 전사로서 경험을 쌓으며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살아남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제국의 군인들 역시 혹독한 훈련을 통해 성장하고 수많은 실전을 경험하지만.

이 변방의 거친 땅에서 매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전쟁인 산야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에서는 수백 명에 한 명 꼴로 나오는 벽을 넘은 자들이, 이 땅에서는 수십 명에 한 명 꼴로도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제국 역사에 이름을 떨친 용맹한 황제와 장군 중에서는, 그러한 경험 없이 벽을 넘은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추측이지만 제국 역사에 이름이 남은 변방의 대족장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아이신이 어제 새벽 내내 생각하고 있던 하나의 가설.

절대다수의 벽을 넘은 자들은 빨라야 이십대 중반, 늦으면 사오십대가 지나서야 벽을 넘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벽을 넘는 데에 성공한, 그야말로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들이 존재한다.

제국 수백 년의 역사에도 몇 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설적인 영웅들.

회귀라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있었지만.

어쨌든 아이신 역시 몸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벽을 넘은 것은 같지 않은가?

‘뭐 그들이 나처럼 벽을 넘은 후 죽어서 회귀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 아직은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 이 어린 몸으로 벽을 넘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많은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럼 슬슬 돌아가서 다른 전사들을 깨우자꾸나. 오전 중으로 사냥제의 준비를 끝내야 하니 말이다.”

“예, 아버지.”

아이신은 아직도 마굿간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생들을 깨운 후, 다른 전사들과 함께 다시 부락 뒤편으로 향했다.

“사슴 육포는 이쪽으로.”

“말린 산딸기를 더 쌓아올려!”

“그렇지. 제단에 덮어씌울 곰 가죽은 대가리가 정면으로 보이도록.”

부족장인 아버지와 경험 많은 노인들의 진두지휘에 맞춰, 사냥제의 준비가 착착 갖춰졌다.

그렇게 해가 머리 위에 걸리는 시간이 되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 정도면 부족함이 없겠지요?”

“물론이외다. 족장께서 고생이 많으셨소.”

“이 쪽으로 이주해온 후, 부락에서 주관하여 치르는 첫 행사이니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뿌듯하게 완성된 제단을 바라보고 있던 그 때였다.

“흥. 사냥제라 해서 나와봤더니 고작 이 정도 규모인가요? 이래서 가난뱅이 부족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박살내버리는,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

“벨린다···”

아이신은 잠시 잊고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회귀 전 아이신의 부락을 멸망시킨 강대한 부족.

그곳에서 시집 온, 가증스러운 자신의 계모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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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겨울의 사냥제(1)

아이신과 동생들을 낳아준 친모는, 여동생 아이나를 낳은 후 몸이 약해져 죽어버렸다.

그때 아이신의 아버지 아이막에게 접근한 것이, 계모 벨린다의 친정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공물을 받고, 사냥의 신께서 퍽이나 전사들을 지켜주겠군요.”

“허허···아무래도 당신 친정하고 비교하면 조금 부족해 보일 수는 있겠지.”

“제사가 끝나면 말린 산딸기는 손대지 못하게 해요. 우리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리 하리다. 날이 추우니 당신은 들어가서 좀 더 쉬구려.”

원래 같으면 이런 부족의 큰 행사는 족장의 아내인 벨린다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벨린다는 사냥제 준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족장인 아이막에게도 늘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회귀 전에는 아버지가 왜 저러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도 그럴 것이 벨린다의 친정이 바로 아이신의 부족을 침략해 멸망시킨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벨린다의 친정은 전사를 천 명 이상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대부족.

강한 전사로 이름난 아이막을 회유하기 위해 벨린다를 시집보내기는 했으나.

결국 그들의 목적은 벨린다가 낳은 아이가 아이막의 부족을 이어받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을 빨리 분가시키라는 명령을 듣지 않았고, 놈들은 그걸 빌미로 우리 부족에 쳐들어왔었지.’

산야족이 사는 동쪽 변방은 매우 넓지만 척박하기 때문에.

부락에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인구가 늘어나면 젊은 전사들은 부락을 떠나 분가를 하게 된다.

아이신의 아버지 아이막 역시 스무 살이 넘은 후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했고.

그렇게 자식들이 하나 둘 부락을 떠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이 자연스럽게 부락을 이어받는 것이다.

‘저 가증스런 여자 때문에 나와 친동생들이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회귀 전, 아이신과 아이신의 친동생들은 계모인 벨린다에게 대놓고 구박을 당했다.

벨린다는 언제나 좋은 음식은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 먼저 먹였고.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들에게 매질을 하기도 하고 가혹한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족장인 아이막은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벨린다를 홀대했다가는 강대한 대부락인 벨린다의 친정에게 빌미를 주는 셈이니까. 어쩌면 그들은 은근히 그런 상황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부락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족장님! 다른 부족 대표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모두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옛!”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의 사냥제가 시작된다.

*

“숲의 숨결과 들판의 맥을 다스리는 분이시여.

우리의 화살이 바람처럼 날카롭고,

우리의 발걸음이 사슴처럼 가벼울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우리의 마음에 늑대의 지혜를 주소서.

숲의 길을 꿰뚫는 눈과,

무리를 이끄는 지략을 우리에게 내려 주소서.

우리의 팔에 곰의 힘을 주소서.

적을 꺾는 굳센 힘과,

추위를 이겨내는 인내를 내려 주소서.

우리의 심장에 호랑이의 용맹을 주소서.

두려움 없는 발톱과,

승리를 쟁취하는 포효를 내려 주소서.

신께서 우리에게 숲을 열어주시고,

그 안에 깃든 생명을 나누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선물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부족의 전사들이,

당신의 가호 아래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보호해 주소서.

우리의 창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형제가 다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부족의 아이들이 배부르고,

우리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당신께 맹세하오니, 우리는 당신의 뜻을 따르고,

숲과 들판을 존중할 것입니다.

신이시여, 들으소서.

신이시여, 응하소서.

이 가혹한 계절이 끝날 때까지,

당신의 손길이 우리를 감싸 주소서.”

곰 가죽으로 덮어 씌워진 제단 앞에서, 산야족 대표들이 경건하게 엎드렸다.

이번 사냥제를 위해 모인 산야족의 대표들은 약 10명.

산야족들은 기본적으로 각 부락이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이지만, 근처의 부족들과는 싫든 좋든 교류를 해야 한다.

겨울의 사냥제는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 사는 산야족 대표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행사인 것이다.

오후 내내 치러진 기나긴 의식이 끝나고, 저녁이 되어 각 부족의 대표들은 커다란 방에 모여 앉아 몸을 쪼였다.

“후우···올해 사냥제도 어떻게든 치러냈군.”

“용맹한 아이막. 자네가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먼 길 오시느라 다른 분들이 더 고생하셨지요.”

방 한가운데 커다란 솥에서,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산야족은 다 큰 돼지들을 도축하여 저장 식품을 만들지만.

이번에는 사냥제를 위해 한 마리를 잡지 않고 남겨뒀던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각 부락 대표들은 밀린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근방을 주름잡고 있던 붉은 털의 악마를 올해도 잡지 못했다지요?”

“놈 때문에 가축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봄이 되면 또 얼마나 많은 가축을 잃게 될지···”

악명 높은 맹수에 대한 이야기부터.

“제 아들놈입니다. 부족한 아이지만 이번 사냥제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제 조카놈입니다.”

함께 데려온, 사냥제에 참여할 어린 전사들의 소개까지.

아이막은 다른 어린 전사들의 소개를 듣다가 문득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다른 아이들하고는 덩치 차이가 조금 나는구나.’

겨울의 사냥제는 사냥의 신에게 기원을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다.

비슷한 규모의 부락 10개의 대표들은, 사냥제에 참여할 때 열 대여섯 살쯤 되는 부족의 어린 전사를 함께 데려온다.

첫 날 사냥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끝나고 나면.

다음 날은 부족의 대표인 어린 전사들끼리 서로의 무예를 겨루는 행사가 치러진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전사는 자기 부족 뿐 아니라 근방 부족들에 이름이 알려지고 또래의 존경을 받기 때문에.

전사로 이름을 떨치고 싶은 어린 전사들이라면 누구나 사냥제에서의 활약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용맹한 아이막. 올해 자네 부족에서는 누가 참가하는가.”

“제 장남이 나가기로 되었습니다. 아이신. 족장님들께 인사 올리거라.”

“아이막의 아들 아이신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신이 자기 소개를 하자, 일순간 다른 부족 대표들의 눈에 의아하다는 눈빛이 떠올랐다.

“오호···용맹한 아이막의 장남이라.”

“그런데 조금 어린 것 아닌가? 자네 올해 몇 살인가?”

“올해로 열 세 살이 되었습니다.”

“흐음···”

그도 그럴 것이 성장기의 전사들은 한 두 살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난다.

열 대여섯 살도 아직 뼈가 완전히 굳지 않은 소년들인데.

열 세 살이면 아직 키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어린 아이가 아닌가.

아이막 역시 그런 눈빛을 읽었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다른 대표들에게 설명했다.

“사냥제에 참가하기는 아직 어린 나이이나, 아이신을 제외하면 부락에 적당한 나이의 전사가 없었습니다. 다른 족장님들의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양해랄 것이 있겠는가.”

“다만 자네도 알다시피 사냥제에서 다치는 전사들도 많으니, 그 부분이 걱정되어 그런다네.”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가려는데, 맨 처음 자신을 소개했던 소년 전사 하나가 비꼬는 투로 아이신을 가리켰다.

“그래도 그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 아닙니까. 영광이군요. 아이막의 아들을 꺾어, 제가 더욱 용맹한 전사라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아이신은 그쪽을 마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처음 자기를 소개할 때, 아이막의 옆에 앉아 있는 아이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것을 눈치챈 터다.

그리고 아이신은 뒤늦게, 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벨린다의 친정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를 돕기는 커녕 그쪽에 붙어 우리 부족을 약탈한 놈이구나.’

아이막의 부족은 기껏해야 열 가구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부족.

마찬가지로 사냥제를 위해 모인 근방 부족들도 비슷한 규모의 작은 부족들이다.

이렇게 규모가 작은 부족들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부락원들끼리 먼 친척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국이 그들을 공격한다던가 하면 똘똘 뭉쳐서 대항하곤 했다.

그런데 저 자루스라는 놈의 부족은 간교하게도 강대한 벨린다의 친정에 붙어, 앞장서서 근방 부족들을 침략했던 것이다.

아이신은 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주 대답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저 역시 내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용맹한 아이막의 이름을 걸고, 사냥제에서 승리해 보이겠습니다.”

“뭣···?!”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는 설마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용맹한 아이막의 이름은 근방 부족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다른 부족장들에 비해 매우 젊지만, 20대 중반의 나이에 벽을 넘었던 것으로 유명한, 근방에서 가장 용맹스럽다는 전사다.

근방의 어린 전사들은 모두들 그런 아이막에 대한 존경과 함께 호승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암만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이라지만 고작 열 세 살 밖에 안된 꼬마가 나를 이기겠다?

이건 전사로서 자신을 모욕한 것과도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어린 전사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루스가 뭐라고 한 마디 더 해주려는데, 자디란이 그를 제지했다.

“아버님···”

“가만히 있거라. 내일 본때를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

자루스의 아버지인 자디란은 아들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인 뒤, 다른 족장들에게 껄껄껄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거, 제 아들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들놈을 대신하여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을 위해 슬슬 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이막 역시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

아이신은 자리를 떠나며 자신을 노려보는 자루스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받아주었다.

감히 부락간의 의리를 배신한 놈들을, 아이신은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

변방의 겨울은 빠르다.

사냥제를 위해 찾아온 각 부족의 대표들은, 일어나자마자 마굿간으로 향했다.

“용맹한 아이막. 간밤에는 덕분에 편히 쉬었소.”

“우리 말들의 상태는 어떻소?”

산야족에게 말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가축이다.

그렇기에 산야족은 집집마다 튼튼한 마굿간을 만들어놓고 1년 내내 세심하게 말을 관리하는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소이까? 분명 내 말은 족장의 마굿간에 뒀다 들었는데···”

자디란은 의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말이라는 동물은 본디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던 동물이기 때문에 서열에 민감하다.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모르는 말들과 마굿간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 간혹 문제가 생기곤 한다.

확실하게 우두머리가 될 말이 있다면 모를까, 대장 기질이 있는 말들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서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음? 아니 이 녀석이??”

그런데 자디란은 마굿간 한구석에 얌전히 서있는 자신의 말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평소 같으면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기세를 과시하던 녀석이, 미동도 하지 않고 얌전히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이.

‘이 녀석은 우리 부족 다른 모든 말들의 대장이다. 다른 마굿간에서 신세를 지는 일이 있을 때에도 늘 마방의 우두머리가 되곤 했지. 대체 어째서···??’

자디란은 동요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이막에게 물었다.

“용맹한 아이막. 나와 내 아들의 말을 제외한 이곳의 다른 말들은 누구의 말들입니까?”

“나르가 부족장님과 그 아들의 말, 그리고 저와 제 아들 아이신의 말까지 총 여섯입니다.”

자디란은 다른 다섯 마리의 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늘 말과 함께 살아가는 산야족은 말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여섯 마리 중에 가장 자신감에 차 있고, 귀를 앞으로 세운 채 다른 말들을 지켜보는 말.

자디란은 저놈이 자기 말을 복종시킨 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용맹한 아이막. 혹시 저 말이 그대의 말이오? 정말 대단하구려. 내 말이 다른 말들과 있으며 저리 얌전한 것은 오늘 처음 보았소.”

“아닙니다. 저의 말, 바타르입니다.”

자디란은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 자신의 아들과 기싸움을 하던,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 아이신이라는 소년이다.

“너의 말이라고? 누가 봐도 지금 너의 말이 이 마방에서 가장 서열이 위이지 않느냐?”

자디란은 기가 막혔다.

산야족은 자기가 탈 말을 망아지때부터 직접 길들여 함께 성장한다.

고작 13살짜리 꼬마의 말이라면, 말 역시 아직 어린 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말이 하룻밤만에 처음 보는 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마방의 대장이 된다고?

자디란은 어이가 없어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 문득 이게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그렇군. 아이막 이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음흉하군. 사냥제에서 자기 아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하기 위해 자기 말을 빌려준 것 아닌가?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이 울겠구나.’

그는 다 알겠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띄며, 확신을 가지고 아이신에게 물었다.

“그렇군, 그렇군. 그래, 용맹한 아이막의 아이야. 너의 말은 올해 몇 살인고?”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신의 대답에 자디란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바타르는 올해로 두 살 반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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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겨울의 사냥제(2)

두 살 반이라고??

자디란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이신과 아이신의 말 바타르를 돌아보았다.

‘무슨 두 살 짜리 말이 다른 말들을 다 굴복시키고 대장 노릇을 한다는 소린가?’

산야족이 기르는 말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20년 정도.

말의 마체는 두 살이면 다 자라지만, 몸만 컸다고 능사는 아니다.

이를테면 산야족 역시 열 여덟 살 정도 되면 신체적으로는 강건한 전사가 되지만.

그렇다고 열 여덟 살 짜리가 서른 살이나 마흔 살이 넘은 전사들의 상대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반면 아이신은 저 자디란이라는 남자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바타르가 어떤 말인데. 제국 기병대에 들어갔을 때부터 바타르는 늘 다른 말들을 복종시켜 왔다고.’

오히려 바타르가 다른 말들의 눈치를 보며 설설 피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타르에게 다가가던 아이신은, 순간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잠깐만. 근데 바타르는 지금 두 살 반이잖아??’

방금 자기 입으로 자디란에게 바타르의 나이를 이야기해 놓고.

정작 자신은 제국 기병대 시절 감각으로 바타르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 맞다.

‘바타르가 저렇게 어릴 때부터 다른 말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가??’

솔직히 거기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단 회귀 전에는 아이신 자신도 아직 말이라는 동물에 대해 어른들만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칫.”

자디란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가지고 온 자루에서 압축한 건초를 꺼내 자기 말에게 먹였다.

이곳에 모인 산야족들은 모두 식량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가난한 부족들이다.

그러니 자기 말에게 먹일 사료 정도는 본인들이 휴대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

뭐 기껏해야 하루 묵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휴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자디란은 잠시 후 자기 아들 자루스가 마굿간에 들어오자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귀에 속삭였다.

“저 아이막의 아들이라는 놈의 코를, 네가 오늘 아주 납작하게 눌러주거라.”

“저 역시 벼르고 있습니다. 건방진 놈 같으니.”

*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에, 아이막의 부락에 모인 산야족 대표들은 어제 먹다 남은 돼지고기 국으로 요기를 하고 부락 중앙으로 모였다.

“모두 갈 길이 머신 분들이니,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산야족의 사냥제는 크게 두 가지 행사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는 첫날에 치른, 사냥의 신에게 전사들의 안전과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사.

두번째가 부족의 어린 전사들끼리의 무예를 대결하는 대항전이다.

“규칙은 여느 때와 같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어린 전사들의 활쏘기 능력을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산야족은 칼이나 창 등의 무기도 잘 쓰지만, 특히 매서운 궁술로 유명한 사람들.

당연히 어린 전사들의 무예를 평가할 때도 궁술 능력을 가장 먼저 본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실 분이 있습니까?”

어린 전사들이 망설이는 가운데, 자디란은 자기 아들 자루스에게 속삭였다.

“자루스. 네가 먼저 하거라.”

“어째서입니까?”

“사냥제는 짐승을 사냥할 때와는 다르다. 네가 먼저 나가 좋은 모습을 보이면, 뒤에 하는 놈들은 그것만으로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렇군요···! 아버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자루스는 과연 자기 아버지의 지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아이막에게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가 먼저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용맹한 아이막.”

“좋다. 저쪽 금을 그어놓은 곳에 서거라.”

자루스는 표시된 곳에 대각선으로 서서 발을 어깨 너비 정도로 벌렸다.

궁술 평가는 짚으로 만든 작은 허수아비의 머리를 명중시키는 것.

총 세번에 걸쳐서 평가하는데, 처음은 30보 거리의 허수아비를 맞춰야 한다.

‘하던 대로 하면 할 수 있어. 숨을 가라앉히고···’

자루스는 심호흡을 한 후, 망설이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 피이잉···!!

- 푹!!

호쾌하게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얼굴을 꿰뚫었다.

“다음!”

자루스는 곧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는 70보 거리의 허수아비를 맞추는 것.

30보 거리 정도는 사실 여덟 살 짜리 산야족 아이들도 맞출 수 있지만, 70보 부터는 쉽지 않다.

자루스는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 피이이잉···!!

- 푹!!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화살은, 이번에도 역시 허수아비의 얼굴을 정확히 꿰뚫었다.

“과연···아드님의 실력이 대단하군요.”

“허허허. 아닙니다. 이 정도는 다른 아이들도 모두 해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자디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흐뭇하게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기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루스의 궁술은 부족의 성인 전사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정확히 얼굴을 맞추다니···”

“이거 쉽지 않겠는데.”

“역시 그 자디란 님의 아들인가.”

그 증거로, 다른 어린 전사들 모두가 자루스의 실력을 보고 동요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던 자디란은 아이막과 아이신 쪽을 쳐다보고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아이신의 표정에는 전혀 동요가 없다.

물론 아이막 역시 그저 웃는 얼굴이고 말이다.

‘용맹한 아이막이라고는 하지만, 나 역시 놈에 뒤지지 않는다. 내 아들 역시 그럴 것이다.’

이렇게 함께 사냥제를 치르며 서로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바꿔 말해서 이렇게 결속을 다지지 않으면 언제든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근방에 사는 부족들끼리는 영역 등의 자잘한 문제로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고,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다툼이 부족끼리의 피의 항쟁으로 발전한 역사는 수도 없이 많으니까.

‘아이막의 아들놈의 기를 완전히 눌러주거라, 자루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전사들의 무예를 겨루는 이 사냥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소규모 부락끼리의 관계에서, 강한 전사 한 명의 한 명의 존재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존재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음!”

70보 거리의 허수아비를 완벽하게 맞춘 자루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망설이지 않고 이동한 그는, 이번에는 살짝 긴장하며 활을 들었다.

‘100보 거리는 실패할 때가 더 많지만,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다.’

100보 거리의 표적을 맞추는 것은 성인 전사들로서도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자루스는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중하게 시위를 당겼다.

- 피이이이이잉···!

- 푸북!!!

이번에는 꽤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허수아비의 몸통을 맞췄다.

“100보 거리를 성공시켰어?!!”

“머리는 아니지만, 몸통을 맞춘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야.”

“젠장···나는 맞출 수 있으려나.”

다른 소년들과 어른 전사들의 반응을 보며, 자루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잘했다, 자루스.”

“뭘요. 마지막에도 얼굴을 맞췄어야 했는데···”

“그 정도면 훌륭하다. 숙련된 전사라 해도, 100보 거리에서 저렇게 작은 머리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아.”

평소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에게 이 정도로 칭찬을 받게 될 줄이야!

자루스는 날아갈 듯 기뻤다.

그리고 자루스는 곧바로, 자기 아버지의 지혜에 감탄하게 되었다.

“다음!”

- 피이잉!!

“빗맞았다!!”

“70보 거리도 쉬운 게 아니라니까.”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 넌 어떻게 70보 거리에서, 심지어 머리를 맞춘 거지?”

어느덧 서로 안면을 익히고 말을 튼 소년들은, 금세 친해져서 저희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운이 따라줬을 뿐이다.”

“겸손하기까지 하군!”

아버지 자디란의 말대로, 자신이 첫 번째 순서로 나가 좋은 결과를 보이자.

뒤에 쏘는 소년들은 아무래도 압박을 느꼈는지 자루스만큼 표적을 잘 맞추지 못했다.

30보 정도야 다들 쉽게 맞췄지만.

70보는 아예 맞추지 못하거나 몸통을 맞추는 소년이 많았다.

100보에 이르러서는 아직 자루스 외에는 한 사람도 맞추지 못했고.

‘그야 나도 100보는 열 발을 쏘면 서너발 정도 맞추니까. 오늘은 실제로 운이 좋았던 거지만.’

암만 운이 따라줬다고 해도, 오늘은 사냥제다.

또래끼리의 사냥제에서 이런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두고두고 자신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마치, 5년 전 엘프 왕국의 침략을 앞장서서 막아내어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으로 불리우는 저 젊은 족장처럼.

“마지막 순서로군. 아이신!”

“예, 아버지.”

그 아이막의 아들이 마지막 순서로 활을 들고 나왔다.

자루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른 소년들과 함께 아이신이 30보 표적 앞에 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저 아이는 아직 우리보다 어리잖아.”

“30보 정도는 맞추겠지. 저건 우리 부족에서는 코흘리개 꼬마들도 맞추니까.”

아이신은 그런 주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용히 활을 들어올렸다.

‘분명 예전에는 30보 정도만 겨우 맞췄던가.’

회귀 전에도 열 세 살 때 이 사냥제에 참가했지만.

그때는 아무래도 자기보다 두 세 살 위인 다른 소년들에 비해 아이신은 여러모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드는군.’

아이신은 피식 하고 웃으며, 순식간에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냈다.

- 피이잉···!

- 푹!!

화살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머리를 꿰뚫었다.

“오···자세가 괜찮은데?”

“그래도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인데, 저 정도는 해야지.”

자디란도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30보 정도를 맞췄다고 뭘 호들갑들이야. 70보만 되어도 밑천이 드러나겠지.’

“다음!”

아이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70보 표적의 앞으로 향했다.

열 세 살 짜리 산야족 소년들이라면 보통 70보 거리의 몸통을 맞추기만 해도 나이에 비해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신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 피이이잉···!

- 푹!!

이번에도, 화살은 허수아비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오오···머리를 맞췄군요.”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를 제외하면, 머리를 맞춘 것은 저 아이가 두 번째인가요?”

“나이를 생각하면 굉장한 솜씨입니다. 역시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이군요.”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입니다.”

이번에는 족장들 사이에서도 감탄이 터져나왔다.

아이막은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속으로 의아했다.

‘아이신이 저렇게 활을 잘 쐈던가?’

최근 몇 년은 부족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사냥에 열중하다보니.

솔직히 자기 아이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계모인 벨린다가 어련히 잘 길러주리라 생각하며 전적으로 집안일을 맡겼는데, 부족의 다른 전사들에게 들은 아이신의 궁술은 그냥 또래들과 비슷한 정도라 했다.

‘그러고 보면 어제 돌제단을 함께 들어올렸을 때 보여준 힘도 예사롭지 않았지. 아비로서 제대로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그저 대견하구나.’

남들의 반응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듯이.

아이신은 100보 앞의 표적으로 이동했다.

족장들과 어린 소년들 모두 땀에 손을 쥔 채 아이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 사냥제에서 100보 거리의 허수아비를 맞추기라도 한 것은 자루스가 유일하다.

상식적으로 열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100보 거리의 표적을 맞추겠냐고 생각하면서도.

그 자리의 모두는 70보 거리의 표적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쏘아 맞췄던 아이신의 침착함에 묘한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아이신이 시위에 손을 거는가 싶더니, 아무렇지 않게 시위를 당겼다.

- 피이이이이잉···!!

- 푹!!!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작은 머리를 꿰뚫었다.

아이신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볼만하군.’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거나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단 두 명의 남자만 얼굴을 있는 힘껏 찌푸리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교활한 자디란과 자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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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겨울의 사냥제(3)

“대, 대단하군!!”

“100보 거리의 표적은 성인 전사들도 쉽게 맞추지 못하는 거리인데 말이야!”

“심지어 저 작은 머리 부분을 맞췄지 않나! 용맹한 아이막. 자네의 아들은 확실히 자네의 피를 이어받았구만!”

각 부족의 대표들은 이 놀라운 결과에 각자 한 마디씩 하며 아이막을 축하했다.

아무래도 오락거리가 부족한 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냥제는 몸이 달아오르는 행사였다.

각 부락의 힘을 어린 전사들을 통해 대신 겨룬다. 이 얼마나 직관적이며 원초적인 오락인가?

어느 정도는 관망하는 입장에서 유희를 즐기는 족장들에 비해, 어린 전사들의 놀라움은 비할 수 없이 컸다.

“저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도 100보 거리에서는 머리를 맞추지 못하였는데···”

“제길···13살 짜리 아이에게 졌다가는 우리 삼촌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오, 이쪽으로 돌아온다.”

아이신이 어린 전사들 쪽으로 되돌아가자, 자루스는 잠깐 찡그렸던 얼굴을 얼른 바로했다.

언제 그런 불손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그는 아이신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과연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이구나. 어제 했던 말이 허언이 아니게 되었어.”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라고 했나?”

아이신은 내밀어진 손을 맞잡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자루스는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느꼈다.

‘뭐, 뭐야?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녀석이 어째서 이렇게 커 보이는 거지?’

벽을 넘은 자가 옅게 뿜어내는 위압감이, 벽을 넘지 못한 자를 본능적으로 위축되게 만드는 것이지만 자루스는 아직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가까스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내민 손을 슬며시 거두며 주변의 아이들에게 외쳤다.

“하, 하지만 가만히 서서 활을 쏘는 것은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말을 탄 상태에서 정확히 화살을 쏘아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너희도 알 테지?”

“그건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의 말이 맞아.”

“뛰어난 전사라면 말을 탄 상태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야.”

다른 소년들이 자기 말에 동조하자, 자루스는 조금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래! 컨디션이 유독 좋은 날이라면 활이야 누구라도 잘 쏠 수 있어. 하지만 말 위에서는 다르지! 고작 열 세 살짜리가 마상 궁술을 제대로 하는 일은 어느 부족을 가도 없다고!’

어느 정도 소란이 잦아들자, 부락의 주인으로서 오늘 사냥제의 진행을 맡은 아이막이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어린 전사들의 궁술을 잘 보았습니다. 듣던 대로 모두 뛰어난 전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허나 우리 ‘숲의 사람들’에게 가만히 서서 화살을 쏘는 것은 그저 시작일 뿐입니다. 다음 순서로 어린 전사들의 마상 궁술 대결이 있겠습니다.”

아이막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아들, 아이신 쪽을 살폈다.

가만히 서서 화살을 쏘는 거야 열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자기 아들이라도 때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산야족의 아이들은 대여섯 살 정도부터 말을 타는 것을 배우지만, 기마술이 완전히 몸에 익는 시기는 열 살이 넘어서이다.

그러니, 열 세 살 소년이라면 말을 다룰 수는 있어도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은 미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 이번에도 자네가 먼저 하겠나?”

“으음···”

자루스는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아버지 자디란의 말처럼, 이런 궁술 시합에서는 자신이 먼저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유리하다.

다만 마상 궁술은 열 대여섯 살의 소년들에게도 아직은 버거운 기술이다.

좋은 결과를 낸다면 다행이지만, 까딱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오히려 다른 소년들이 용기를 가지고 더 좋은 결과를 낼 지도 모른다.

자루스가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아이막의 아들, 아이신이 먼저 하겠습니다.”

아이신의 외침에, 다른 족장들과 소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보게 아이막. 저 아이가 벌써 마상 궁술을 할 줄 아는가?”

“우리 아들도 조금은 할 줄 아네만 열 세 살때는 제대로 하지 못했었는데···”

“아이막 자네가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켰나보구먼. 자기보다 두 세 살 많은 아이들을 오히려 압도하는 저 당당함이라니.”

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아이막은 겉으로는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아직 부족한 아이인데 오늘 대체 어찌된 일인지. 좋다. 아이신 네가 먼저 시작하거라.”

아이신은 기다렸다는 듯 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타르···’

회귀 직전.

바타르는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사람으로 치면 노년기에 접어든 노마(老馬)였음에도 아이신과 부대장을 태우고 전 속력으로 세 시간을 넘게 달렸다.

그러나 암만 뛰어난 명마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는 법.

체력이 다한 바타르가 쓰러지자, 아이신은 눈물을 머금고 죽어가는 바타르를 내버려 둔 채 부대장을 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못난 주인을 만나, 한 평생 고생만 하다 갔구나.’

결혼을 하지 않았던 아이신에게, 바타르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었다.

열 여덟의 나이에 기적적으로 혼자 살아남아 부족을 빠져나왔을 때도, 그는 바타르와 함께였다.

신분을 숨기고 제국 변방 영주의 마굿간지기로 살아갈 때부터, 제국 기병대에 들어가 이윽고 기병대장이 되기까지.

그는 틈만 나면 바타르와 함께 먹고 자며 고락을 함께 나눴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바타르.’

회귀 전에는 20년 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비느라 바타르의 온 몸은 상처 투성이였다.

다만 그런 상처는 군마에게도 영광의 증표였던 걸까.

다른 말들은 바타르의 온 몸에 새겨진 거친 상흔과, 번들거리는 눈과 코에서 뿜어나오는 숨결만으로도 압도당해 저절로 고개를 숙이곤 했다.

지금의 바타르는 고작 두 살 반의 투지가 넘치는 젊은 말.

이전 생에서 바타르의 관록을 드러내주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명마로서의 자질을 드러내듯 벌써부터 주변 말들이 바타르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지만 말이다.

- 휘익!

아이신이 휘파람을 한 번 불자, 바타르는 또각또각 앞으로 다가왔다.

‘예전처럼 내 눈빛과 작은 손짓들 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바타르라면 금세 해줄 테지.’

두 살 반의 어린 바타르라면 아직 미묘한 명령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마상 궁술에 필요한 속도 조절이나 방향을 변경하는 정도는 문제 없다.

아이신은 재빠르게 바타르에게 올라타, 한쪽 다리를 바타르의 갈비뼈에 붙이고 다른 쪽 다리는 살짝 구부려 나무 등자를 단단히 밟았다.

“규칙은 전과 비슷하다. 30보와 70보, 100보 거리의 허수아비를 맞추면 된다. 다만 부락 전체를 둥글게 한 바퀴 돌고 난 후, 직선으로 달려 지정된 위치에서 활을 쏘아 맞추면 된다. 이해했느냐.”

“예, 이해했습니다. 아버지.”

“좋다, 30보부터 시작하거라.”

아이신은 출발 위치에 선 후, 바타르의 갈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가자, 바타르.’

말고삐를 살며시 당기자, 바타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첫 발을 내디뎠다.

“히히히힝!!!”

힘찬 울음소리를 신호로, 바타르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좋아. 내가 아는 바타르의 움직임이다.’

회귀 전의 아이신은 지금의 아이막과 비슷한 서른 중반의 나이였다.

혹독하게 단련된 강철같은 몸과 아버지를 닮아 큰 키, 두터운 몸까지 열 세 살인 지금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신과 달리 바타르는 두 살 반인 지금이나 회귀하기 직전인 노마(老馬) 시절이나 그 마체에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신체적인 기량이 눈에 띄게 하락한 회귀 직전보다 지금의 바타르가 훨씬 기운이 넘친다고 할 수 있다.

- 따그닥···따그닥

아이신은 일부러 느릿느릿한 속도로 부락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여기서···방향을 튼다.’

말고삐를 가볍게 좌로 잡아당기자, 바타르는 알아들었다는 듯 부드럽게 방향을 바꾸었다.

이대로 정면으로 달려가면 30보 거리를 금으로 그어 표시해 둔 위치에 도달한다.

아이신은 왼손으로 활을 쥔 채, 그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나···둘···지금이다.’

아이신은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들고, 재빨리 시위에 걸고 쏘아냈다.

- 피이이이잉···

- 푹!!

아이신이 쏘아낸 화살은, 30보 거리 앞 허수아비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다.

“오호···마상 궁술도 나쁘지 않군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아직 마상 궁술이 완벽하지 않을 테니, 느리게 달려 정확도를 올리는 방법을 선택했군요.”

족장들에게서 감탄이 터져나왔으나, 다들 생각보다 놀라지는 않았다.

느린 속도로 안정감 있게 달리다가 활을 쏘아내는 거라면 저 나이에도 어찌저찌 가능한 일이긴 하니까.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 역시 그런 아이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되찾았다.

‘고작 그 정도 속도라면 나도 30보든 70보든 충분히 맞출 수 있다. 역시 아직 젖비린내 나는 꼬마였군. 마상 궁술에서 확실히 실력 차이를 보여주겠다.’

마상 궁술 시합은 화살을 정확하게 쏘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에서 화살을 쏘아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 정도 속도로 100보 거리의 표적을 맞추는 것보다, 오히려 빠른 속도로 달려 30보를 정확히 맞추는 것이 더욱 높은 점수를 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자루스는 말 위에 올라탄 아이신과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자루스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신의 눈은 분명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똑똑히 지켜보기라도 하라는 듯.

“다음! 70보 거리를 준비하도록 해라.”

아이신은 다시 출발선에 선 후, 바타르의 말고삐를 부드럽게 당겼다.

“히히히힝!!!”

바타르는 다시 한 번 아이신의 명령에 크게 울며 또각또각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보여주도록 하지.’

아이신은 두 넓적다리에 조금 힘을 주어 바타르를 살짝 압박하고는, 고삐를 조금 더 세게 당겼다.

그것을 신호로, 바타르는 아까에 비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음? 오히려 속도를 올린다고?”

“이건 만용이 아닐까요? 빠르게 달리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저 속도로 활을 쏘는 것은 어린 전사들에겐 쉽지 않은 일인데···”

다들 아이신이 70보 거리에서는 오히려 속도를 더 줄여서 달릴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직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 아이신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신은 그런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고 빠르게 부락을 한 바퀴 돌았다.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바타르는 경쾌하게 달려, 아까와 같은 지점에서 부드럽게 좌로 회전했다.

‘하나···둘···’

아이신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속으로 신중하게 타이밍을 잰 후, 망설이지 않고 말 위에서 화살을 쏘아내었다.

- 피이이잉···!

- 푹!!!

“저, 저런!!!”

“또 머리를 맞췄습니다!!”

“저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속도로···!!”

지켜보던 족장들과 부락 사람들, 어린 소년들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경악하여 입을 딱 벌린 사이.

아이신은 멈추지 않았다.

“어, 어어?? 저 아이가 설마??”

“멈추지 않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저게 무슨···!!”

아이신은 말고삐를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최고 속력을 내는 거다. 바타르.’

바타르는 그런 아이신의 명령에 응해주었다.

“히히히히힝!!!”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바타르는 맹렬한 기세로 부락 주변을 다시 돌기 시작했다.

태양이 이제서야 떠오르기 시작한 부락 전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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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겨울의 사냥제(4)

“100보 거리를 연달아 도전하려나 봅니다.”

“저런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은 노련한 전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아이신은 바타르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빠르게 부락을 돌았다.

이제 해가 뜨기 시작한 고요한 산야족 부락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더, 더 달려보자. 바타르.’

아이신이 고삐를 더욱 세게 당기자, 바타르는 알았다는 듯 더욱 그 속력을 높여만 갔다.

부락 전체를 크게 돌았음에도, 아이신은 멈추지 않았다.

“엇? 벌써 한 바퀴를 지나쳤지 않습니까?”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군요.”

“어린 전사의 투지는 대단하나, 저런 속도로 달리며 활을 쏘는 것은 아직 이른 것이 아니었는지···”

아이신은 100보 앞의 허수아비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서, 순식간에 반 바퀴를 더 돌았다.

그러자 아이신의 눈 앞에, 자신이 쏴 맞혀야할 100보 앞 허수아비가 보였다.

‘여기다, 바타르!’

아이신은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고삐를 휙 틀며 신호를 주었다.

바타르는 정확히 신호에 맞춰 회전하여, 다시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음?? 용맹한 아이막. 자네 아들은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잠깐!! 혹시 이건??”

족장 몇 사람이, 본능적으로 아이신이 지금 뭘 하려는지 알아챘다.

아이신은 자신의 쏴야할 허수아비를 등 뒤로 하고 달려나갔다.

최고 속력으로 달려나가던 바타르는 어느새 100보를 표시한 금을 지나쳤다.

‘지금!!’

아이신은 활을 든 채로 몸을 180도로 홱 돌렸다.

어느새 시위에 걸린 화살이, 뒤편 허수아비를 향해 맹렬하게 쏘아졌다.

- 피이이이잉···!!

- 푹!!!

아이신의 화살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머리를 맞췄다.

그것도, 100보를 표시해둔 금을 훨씬 지나친 거리에서.

자신이 쏜 화살의 향방을 확인하지도 않고, 아이신은 익숙한 몸짓으로 바타르의 고삐를 강하게 당기며 두 넓적다리로 바타르의 몸을 꽉 압박했다.

“히히히히히힝!!!”

그 신호에, 바타르는 크게 울부짖으며 제 자리에서 두 다리를 높이 들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기승.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그 자리의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방금 일어난 놀라운 일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윽고, 족장 한 사람이 입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감탄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믿을 수가 없군!!!”

“그 빠른 속도로 활을 쏘아내는 것도 놀라운데, 몸을 뒤로 돌려 쏘아내어 표적을 맞추다니!!”

“우리 부족의 가장 노련한 전사라도 저런 신기를 보여주기는 힘들 것이오!!”

“용맹한 아이막!! 그대의 아들은 하늘은 내린 명궁이군!!”

“위대한 사냥의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전사가 분명하도다!!!”

산야족은 비록 하나로 잘 뭉치지 못하고, 소규모로 모여 살아가는 경우가 많지만.

솔라리온 제국이나 엘프 왕국인 엘린도르 왕국은 늘 그들을 경계해왔다.

제국에서는 흔히 산야족이 1만 명 모이면, 대륙에 당해낼 자가 없을 것이라는 격언이 내려오곤 했다.

그런 산야족의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이 마상 궁술.

특히, 그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도 버거운 제국 기마 궁수들에 비해.

산야족 전사들은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어느 방향에서든 화살을 쏘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것이 바로, 아이신이 방금 보여준 달리는 말 위에서 180도로 몸을 홱 틀어서 활을 쏘아내는 기술.

산야족 전사 중에서도 숙련된 전사들만이 보일 수 있는 신기다.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돌려 화살을 쏘아낸다고?!!”

“난 저거 아직 시도도 못해봤는데···”

“그냥 말 위에서 정확하게 쏘는 것도 솔직히 힘들다고!!”

“아니 그보다 저 속도로 달리면서 어떻게 활을 쏘아내는거야?? 이게 말이 되나??”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우리면 몰라도, 자루스 너라면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건가?”

당연히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 역시 이 결과를 받아들고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 저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어린 놈이, 저런 말도 안되는 묘기를 부린다고??’

자루스는 자신의 무예가, 적어도 근방 또래 산야족 전사들 가운데에서는 비할 바가 없는 수준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산야족 전사들 중에서도 천재로 불릴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러니, 자신을 한낱 범부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재능을 처음 목도한 그의 충격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과열된 분위기는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고, 한참 후에야 아이막이 두 손을 들고 다시 진행을 시작했다.

“어쨌든 순서가 남았으니, 다른 전사들의 실력을 보아야겠지요. 다음 순서로 참가할 전사가 있는가?”

자루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소년들은 모두 아이막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족장들의 입에서 사냥의 신의 축복을 받은, 하늘이 내린 명궁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는데.

그 다음 순서로 참가하면 얼마나 크게 비교될 것인가?

‘아버님.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자루스는 절박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 자디란을 쳐다보았으나, 자디란 역시 눈을 부릅뜨고 그 자리에 멈춰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막의 입에서 하필이면 가장 달갑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지원자가 아무도 없다면···자디란의 아들 자루스. 자네가 먼저 쏘도록 하게.”

“제, 제가 말입니까?”

“자네 역시 방금 활쏘기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나? 자네가 먼저 할 수밖에 없네.”

자루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망아지처럼, 자기 말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

‘제길···제길···!!!’

자루스는 자기 아버지의 지혜가 도리어 원망스러웠다.

이어진 자루스의 차례에서, 자루스는 30보 허수아비의 머리도 맞추지 못했다.

간신히 30보 거리 허수아비의 몸통을 맞췄고, 70보 거리의 허수아비는 맞추지도 못하고 허수아비의 옆을 스쳐갔다.

100보에 이르러서는 아예 허수아비를 스치지도 못하고 저 멀리 허공을 향해 빈 화살을 쏴버렸고.

‘차라리 먼저 하는 것이 나았어. 70보 거리 정도는 평소에도 곧잘 맞췄었는데···!!’

- 사냥제는 짐승을 사냥할 때와는 다르다. 네가 먼저 나가 좋은 모습을 보이면, 뒤에 하는 놈들은 그것만으로 부담을 느낄 것이다.

아버지 자디란의 말처럼, 자루스는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중압감 속에서 활을 쏴야만 했다.

그 결과 평소 보여주던 실력을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고.

물론 자루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이익!!!”

“아예 스치지도 못하다니!!”

조금이라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소년 전사들은 명백히 자기 능력에 벅찬 행동을 취했다.

평소 달리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30보 거리의 허수아비도 맞추지 못하는 소년.

긴장한 나머지 화살을 쏴야할 위치를 한참 지나쳐 앞으로 나간 후에야 활을 쏴버린 소년.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달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마지막 순간 집중력을 놓쳐 저 멀리 허공으로 화살을 쏘아 날린 소년.

오죽하면 아이신은 다른 소년들이 측은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안 그래도 아직 전사라고 부르기도 힘든 미숙한 아이들인데, 너무 과하게 압박을 줬군.’

산야족의 소년이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전사로 만들어지기까지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하다.

대여섯 살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하여, 여덟 살 무렵부터 활을 쏘기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승법을 배운다.

열 두 살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훈련을 시작하고.

열 다섯 정도가 되면 부족의 어른 전사들을 따라 수렵에 참여한다.

그렇게 열 여덟 살이 될 무렵에서야 신참 전사로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신참 전사는 어디까지나 신참이다.

방금 아이신이 보여준, 최고 속력으로 달리는 말에서 방향을 틀어 활을 쏘아대는 신기는,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전사들도 가볍게 해낼 수 없다.

마지막 소년의 차례까지 끝나고 나자, 그제야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용맹한 아이막. 다음 순서를 진행해야하지 않겠나?”

“그렇지요.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그 자리의 모두가 하늘이 내린 천재의 위용을 목도한 여운에 깊이 잠겨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는 그 여운을 오래 음미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소년 전사들은 모두 말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하도록 하라! 사냥제의 마지막 순서가 있을 것이다!”

동쪽 변방의 겨울은 해가 짧다.

아직 어둑어둑한 시간부터 사냥제를 진행했기 때문에 아직 날만 밝았을 뿐이지 태양이 머리 위에 걸리려면 한참 남았지만.

갈 길이 바쁜 다른 부족 사람들은 아직 태양이 완전히 머리 위에 걸리기 전에 길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다음 순서는 뭐였지?”

“어···아버지께 들었었는데.”

“분명 서서 쏘는 궁술을 먼저 하고, 그 뒤에 마상 궁술···”

소년들이 제각각 떠들며 자신의 말 상태를 점검할 때, 자루스는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아이막 이놈···숫제 괴물을 키웠구나.”

자디란의 말을 듣고 자루스는 순간 움찔했다.

자디란은 그런 아들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자루스가 탈 말의 상태를 점검하며 작게 속삭였다.

“다음 순서가 뭔지 기억하고 있느냐?”

“예···분명 모든 전사들이 마상에서 뒤엉켜 싸워 최종 승자를 가르는 시합이었지요.”

“사냥제 최고의 전사는 족장들이 협의하여 뽑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아이막의 아들놈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자루스는 자기 아버지에게 좀 더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순서가 사실 사냥제의 꽃이다. 어린 전사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숲의 사람들’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시합이지. 자루스, 잘 듣거라.”

“예, 아버님.”

자디란은 남들이 보이지 않게 말의 상태를 점검하는 척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막의 아들놈은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난 것 같더구나. 그 나이 또래의 어린 아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겠지. 자루스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놈을 상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하게 만들라는 말씀은···?”

“잘 훈련된 전사들도 말에서 낙마할 때는 부상을 입는 일이 흔하다. 사냥제에는 다양한 안전 장치가 있지만, 불의의 사고라는 것은 일어나는 법이지. 놈을 어떻게든 말에서 떨어뜨린 후, 네 말로 놈을 힘껏 밟아버리거라.”

자루스는 마치 귀기가 서린 듯한 아버지의 말을 듣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 역시 산야족의 천재 전사.

자디란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모두 읽었다는 듯, 자루스는 힘차게 대답했다.

“···예! 아버님.”

모든 전사들이 자신의 말을 점검하고나자, 아이막은 준비한 물건을 소년들에게 하나씩 분배했다.

“보다시피 나무로 만든 봉이다. 봉 끝에는 부드러운 가죽을 덧대어 놨으니, 맞더라도 치명상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이 봉을 들고 말에 탄 후, 모든 전사들이 일제히 뒤엉켜 싸우는 것이다. 규칙은 이해했는가!”

““옛!””

소년 전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기 말에 올라 봉을 쥐었다.

아이신 역시 바타르에 올라탄 후, 봉을 꽉 쥐며 생각했다.

‘암만 바타르라 해도, 이런 식의 시합에 필요한 어려운 명령은 아직 이해하지 못 해.’

말고삐를 이용하여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트는 정도야 산야족 소년들이라면 열 살때부터 배우는 기본적인 기승법이다.

그러나 숙련된 산야족 전사들은, 그보다 훨씬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말에게 다채로운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야말로 말과 일심동체가 되어서나 가능한 산야족의 무기.

아이신 자신은 회귀하여 또래보다 월등한 재주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바타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다.

‘마지막 시합에서도 압도적인 기량으로 다른 아이들을 눌러버리려 했건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군.’

회귀 전의 바타르는 아이신의 눈빛만 봐도 아이신이 뭘 하고자 하는지 알아채는 수준에 이르렀었다.

예를 들어, 아이신이 오른쪽 발로 배의 특정 부분을 툭툭 건들면 몸을 웅크린다던가.

- 기우뚱

순간.

무의식 중에 오른발로 바타르의 배를 툭툭 건든 아이신은 자기 몸이 쑤욱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이건 분명 바타르가 자신의 미세한 명령을 알아듣고 하는 그 행동이다.

아이신은 혹시나 해서 이번에는 왼쪽 발을 뒤편으로 굽혀 바타르의 배 뒤쪽을 톡톡 건드렸다.

- 또각 또각 또각

바타르는 곧바로 명령을 알아듣고 뒷걸음으로 천천히 몇 걸음을 걸었다.

“······”

아이신이 할 말을 잃고 말 위에 그냥 앉아 있는데, 바타르가 고개를 슬쩍 돌려 아이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설마···?’

아이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바타르.

혹시 너도 회귀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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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겨울의 사냥제(5)

“시합이라고는 하지만 무엇보다 전사들의 안전이 중요하다! 말에서 떨어진 전사들은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 다른 전사들은 떨어진 전사를 배려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막은 소년들을 향해 몇 번이나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냥제의 꽃이라고 부르는 시합이긴 하나···제발 아무 탈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아이막이 이렇게 걱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산야족은 척박한 환경에서 소수의 인원이 부락을 이루어 살아가는 특성상, 부락민들간의 애착이 남다르다.

바꿔 말하면, 누가 자기 부락 사람을 상하게 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부락 전체의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건 행위의 고의성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

예를 들어, 다른 부락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다가 눈을 쳐서 다치거나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다른 부락에서는 이것을 똑같이 갚아주지 않으면 부락 전체의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흔했다.

결국 아이들끼리의 작은 사고가 피를 부르는 부락 간의 항쟁으로 발전하는 것이고, 산야족들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물론 사냥제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서로 원한을 가지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앙금은 남는 것이다.

사냥제를 자신의 부락에서 주관하는 아이막 입장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제발 사상자가 나오지 않고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고.

“깃발이 들어 올려지는 즉시 시합을 시작한다. 다들 준비하도록!!”

어린 전사들은 눈이 발목까지 쌓인 공터에 둥글게 원을 형성했다.

이렇게 눈이 쌓인 환경에서는 아무래도 말들이 평소처럼 민첩하게 움직이기 힘들다.

빠르게 움직이지를 못하니 그만큼 말에서 떨어질 확률도 적고, 무엇보다 낙마하더라도 푹신한 눈 위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부상의 위험이 적어지는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어린 전사들은 머리에 푹신한 털모자를 꾹 눌러 쓰고, 짐승의 털로 만든 옷을 두툼히 껴입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낙마해도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몇 년에 한 번 꼴로 사냥제에서 부상을 입어 영영 불구가 되거나 하는 전사가 나오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윽고, 아이막이 들고 있던 깃발을 하늘로 높이 쳐들었다.

“시작!!!”

그것을 신호로 모든 소년 전사들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어지러이 섞였다.

“하아압!!”

“읏···!! 받아랏!!”

봉을 크게 휘두르며 서로 기선을 제압하는 움직임 뒤에.

하나둘씩 짝을 찾은 번식기의 사슴처럼 자신의 주변 상대와 치열한 일기토가 사방에서 벌어졌다.

개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전사는 단연 아이신과 자루스였다.

“흐야아압!!! 간다!!!”

성난 기합을 내지르며 봉을 휘두르는 자루스의 기세에, 상대하던 다른 소년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크, 크윽···막아내는 것만 해도 벅차잖아? 분명 같은 나이인데 어째서 이런 차이가···!!’

말 위에서 봉을 창처럼 휘두르는 자루스의 주변에서, 바람 소리가 슈욱 슈욱 매섭게 생겨났다.

간신히 봉을 받아낸 상대 소년은, 그러나 다음 순간 맞부딪힌 창을 밀어내는 자루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손에서 창을 놓쳐버렸다.

“앗, 아아···!!”

“끝이다!! 하압!!!”

자루스는 망설이지 않고 나무 봉으로 상대 소년의 몸통을 거세게 후려쳤다.

투욱!!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상대 소년이 말에서 떨어졌다.

“으, 으아악!!”

재빨리 낙법을 취한 소년은 눈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산야족은 말을 제 몸처럼 다루는 만큼, 말에서 떨어질 때 취하는 낙법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

안전을 고려한 다른 안배도 많았던 덕에, 상대 소년은 전혀 부상을 입지 않고 그대로 시합에서 탈락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다른 놈들 모두 내 상대는 되지 못해.’

같은 산야족이고 동갑내기 소년이라지만, 체격의 차이는 타고나는 것이다.

자루스의 아버지 자디란은 떡 벌어진 어깨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전사 중의 전사.

그 용맹한 아이막도 체구는 자디란보다 크지 않다.

자루스 역시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또래 중에서도 큰 덩치와 소년답지 않은 완력을 가졌다.

그러니 창을 맞부딪히고 힘을 겨룬 상대 소년이 버티지 못하고 밀려난 것이다.

자루스는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막의 건방진 아들놈은 어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전사들도 일대일 대결이 한창이었다.

자루스가 숨을 돌리고 있으려니, 다른 소년들의 대결도 하나씩 끝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신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유롭게 상대 소년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마 저쪽도 곧 저 시건방진 꼬마의 승리로 끝나리라.

‘곧바로 아이막의 아들놈을 노릴까? 아니면···’

자루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아이신이 아닌 다른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어차피 마지막까지 남겠지. 둘만 남은 상황에서 놈을 철저히 제압해주리라. 그리고 아버님의 말씀대로···!!’

자루스는 자기 아버지의 속내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강한 전사가 인정받는 산야족들 사이에서, 또래의 어린 전사들은 잠정적인 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이 넘도록, 솔라리온 제국이나 엘린도르 왕국이 산야족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산야족들은 동쪽 변방에서 번성하며 나날이 그 세를 키워만 갔다.

드넓고 척박한 동쪽 변방이지만, 상대적으로 비옥하고 사냥감이 많은 영역은 있는 법이다.

누구라도 그런 곳을 자기 부락의 영역으로 삼고 싶어했고, 그런 땅을 차지한 부족은 번성하며 점차 주변으로 세를 확장해갔다.

자루스의 아버지 자디란은 용맹한 전사인 만큼 그 야심이 컸고, 어릴 때부터 자루스에게 이런 생각을 주입시켰다.

- 언젠가 이 근방을 통일하고 대족장에 오르리라. 나의 아들 자루스여.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용맹하고 비정해져야 하느니라!!

결국 제국이나 엘프 왕국의 야만족 토벌이 없을 때의 산야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속내를 숨기고 있는 적일 뿐이다.

“다음은 너냐! 자디란의 아들 자루스가 상대해주마!!”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자루스와 달리.

아이신은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일기토에 임했다.

‘솔직히 따분할 정도구만.’

회귀 전 제국 기병대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목숨을 건 전투를 수도 없이 치른 아이신이다.

고작 열 대여섯 살 소년들의 움직임은 아이신이 보기에 허점이 숭숭 뚫린 구멍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타르가 이렇게 움직여주니 더더욱 편하고 말이야.’

아이신은 일부러 상대의 봉을 슬쩍슬쩍 받아주며 상대의 체력을 소모하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바타르 역시 아이신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적절한 움직임을 통해 상대 소년을 압박하여 몰아넣었고.

‘자 그럼 슬슬···’

어느 정도 합을 겨루고 나자, 상대 소년이 눈에 띄게 숨을 헐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미 벽을 넘은 아이신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상대가 받아내기 힘든 공격을 이어갔고, 무리한 움직임을 강요받은 소년은 쓸데없는 힘을 잔뜩 준 채 아이신을 상대해야만 했으니까.

- 푹!

아이신은 그러다 상대 소년의 허점이 보인 틈을 타, 봉 끝으로 상대 소년의 가슴팍을 가볍게 찔렀다.

“으엇···?!!”

상대 소년은 민첩하게 찔러 들어오는 봉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말에서 떨어지며, 상대 소년은 의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이상하다?? 분명 가볍게 찔리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 이만큼이나 밀려나는 거지?’

아이신은 벽을 넘은 자 특유의 힘조절을 통해, 봉 끝이 상대 소년의 가슴팍에 닿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살짝 힘을 주어 소년을 밀었다.

찌르는 힘이 더해지지 않으니 상대 소년은 순수하게 힘만으로 밀려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상대 소년은 전혀 다치는 일 없이 안전하게 풀썩 눈밭에 떨어져 그대로 실격되었고.

‘아직 애들인데 굳이 다치게 할 필요는 없지. 한 놈만 빼고 말이야.’

사실상 어른이 아기를 가지고 놀듯, 아이신은 상대하는 소년들이 다치지 않도록 부드럽게 제압해나갔다.

각자 치열하게 싸우던 소년들이 하나둘 탈락하고, 어느덧 자루스와 아이신만이 남게 되었다.

‘드디어 둘만 남았구나! 놈의 기선을 제압해주지!’

서로 마주한 상태에서, 자루스는 봉을 높이 들고 두 손으로 거세게 봉을 돌렸다.

- 휘리리리리리리릭!!!

팔 힘에 자신이 없다면 무거운 창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돌릴 수 없다.

물론 연습용 봉은 진짜 창만큼 무겁지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대는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

아이신은 그저 자루스가 봉을 허공에 돌리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입가를 살짝 비틀며, 누가 봐도 자루스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 잠깐 아이신의 얼굴을 스쳐갔다.

‘거, 건방진 놈!!! 오냐. 오늘 네놈에게 힘의 차이라는 것을 알려주겠다!!’

자루스는 대노하여 봉을 꼬나쥐었다.

고삐를 거세게 잡아당기며, 자루스가 무서운 기세로 아이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 휘이이익!!!

자루스는 한 손만으로 봉을 잡고, 아이신의 몸통을 거세게 후려쳤다.

- 탁!!!!

바람 소리가 거세게 울려퍼질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으나, 아이신은 어렵지 않게 자루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제법 잘 막아내는구나. 이건 어떠냐!!”

자루스는 망설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봉을 회수한 뒤, 두 손으로 봉을 잡고 재빠르게 찔러 넣었다.

“이것도 한 번 막아봐라!!”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신은 부드럽게 자루스의 찌르기를 받아넘겼다.

물흐르듯 자루스의 공격을 막아내던 아이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재능은 있는 놈이네. 기승법이며 창술에 힘까지 더할 나위 없어. 아까 보니 궁술도 상당했고.’

이대로 성장한다면, 무난히 서른 즈음에 벽을 뛰어넘고 강한 전사로 거듭날 것이다.

야심이 그득한 자기 아버지 자디란과 함께, 같은 산야족들의 피로 온 몸을 적셔가면서 말이다.

‘이제 똑똑히 기억이 난다. 벨린다의 친정과 함께 우리 부족에 쳐들어온 놈과 놈의 아비를.’

아이신은 제국 기병대장으로 있으면서 제국 동부와 북부의 야만인들을 수도 없이 베어넘겼지만.

아쉽게도 제 손으로 원수를 갚을 수는 없었다.

제국의 산야족 정책은 적절한 교화와 이간책을 병행했기에.

기병대장 정도의 지위로는 임의로 아무 부족이나 토벌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루스와 자디란 부자 역시 그때 아이신이 복수하지 못한 대상 중 하나였다.

‘못다한 복수는 기필코 내 손으로 치르겠다. 하지만 제국의 의도대로 놀아날 생각도 없어. 오늘은 그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허무하게 죽어간 동생들을 생각하자, 아이신의 마음에 불꽃이 화르르르 타오르는 듯했다.

아이신은 정신을 집중하고, 맹렬히 자루스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 툭! 툭! 툭!

나무 봉이 둔탁하게 맞부딪히며 합이 이어져갔다.

자루스는 어느 순간 바뀐 기세에 당황하고 있었다.

‘뭐, 뭐지?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다. 게다가···’

자루스는 자기 팔이 저릿저릿한 것을 느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건 자기가 힘에서도 완전히 밀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찌른다 싶으면 휘두르고, 휘두른다 싶으면 찌르는 변화무쌍한 공격.

부족의 베테랑 전사와 대련을 했을 때도, 이런 수준 높은 창술을 구사하는 전사는 없었다.

그리고 자루스가 아이신의 찌르기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다음 순간···

“히히히히힝!!!”

주인의 위기를 감지한 자루스의 말이 크게 울부짖었다.

- 투우우욱!!!!

자루스는 가슴팍에 닿은 봉이 자신을 세차게 밀어내는 느낌을 받았다.

앉은 자세 그대로, 자루스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나, 낙법을 취해야 하는데!!’

그러나 팔에 힘이 완전히 빠져버려, 도저히 낙법을 취할 수가 없다.

자루스는 볼품없이 큰 대자로 눈밭에 엎어졌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자루스의 눈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엄습했다.

“히히히히히힝!!!!!!”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자루스의 몸 위로, 바타르가 포효하며 두 다리를 높이 쳐들며 일어섰다.

묵직한 말발굽이 그대로 자루스가 누워있는 곳을 향해 내려찍는 것이 보였다.

‘주, 죽는다!!!’

자루스는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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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 겨울의 사냥제(6)

“자루스!! 안 돼!!!”

“지, 진정하십시오, 자디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디란이 뛰쳐나갔고, 아이막도 그 뒤를 따랐다.

멀리서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자루스가 말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아이신이 탄 말이 그 위를 덮친 것이다.

마치 자루스를 개미처럼 밟아 으깨버리겠다는 듯이.

“자루스!! 내 아들아!!!!”

자디란은 미친듯이 달렸다.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그 누구보다 용맹한 전사가 되어야할 아들이다.

비록 아이막의 아들놈에게 모든 방면에서 무참히 깨지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자루스가 지닌 천재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아들이,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말에 밟혀 죽거나 불구가 되다니.

상상만 해도 아찔함을 느끼며, 자디란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이막 이놈···!! 만약 자루스의 손가락 하나라도 상했다면 네놈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부락의 전사들을 모두 끌고 와, 네놈의 아들 딸의 목을 네놈이 보는 앞에서 베어주겠다!!’

자디란이 그곳에 다다랐을 때, 아이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에서 내렸다.

자루스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아이신은 바타르를 물러나게 했다.

“자루스!!!”

자디란은 여전히 큰 대자로 뻗어있는 자루스의 앞에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괜찮느냐!! 자루스!! 대답을 하거라!!”

자루스는 동공이 멍하게 풀린 상태로 고개만 까딱까닥했다.

아들의 상태를 가까이서 확인한 자디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 상처도 없다. 말발굽 자국을 보니 전혀 찍히거나 하지 않았구나. 오오···사냥의 신이시여···!!’

뒤늦게, 다른 족장들과 소년들이 그곳으로 몰려왔다.

아이신은 모두가 모이는 것을 확인한 후, 자디란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기승이 미숙한 탓에 아드님을 상하게 할 뻔 했습니다.”

자디란은 순간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이신에게 대답했다.

“아니다, 용맹한 아이막의 아이야. 만약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사냥제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사냥의 신의 뜻이니 내게 사과할 필요 없다.”

사실은 자루스의 손가락 하나라도 상했다면 피의 전쟁을 시작하려 했지만.

자기 아들의 신변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자디란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태도를 바꾸었다.

“으, 으으으···”

자기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자루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모인 다른 족장들이며 소년들은 아이신과 아이막 부자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쏟아내었다.

“용맹한 아이막! 정말 잘 봤소. 그대의 아들은 장차 그대를 뛰어넘을 전사가 되겠구려!!”

“고작 열 세 살 나이에 이토록 뛰어난 무용이라니!”

“제국 놈들이나 엘프 놈들 사이에도 이만큼 뛰어난 어린 전사는 없을 것이 분명하오!!”

연신 아이막의 어깨를 쳐주는 족장들에.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 미안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우리 부락 근처를 지난다면 꼭 들르도록 해! 너처럼 용맹한 전사라면 언제라도 환영이다.”

“이 정도 실력이면 너도 겨울 수렵에 참가하는 거지? 집이나 지키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실력인데.”

아이신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소년 전사들까지.

자디란은 자기 아들은 부축하며 작게 혀를 찼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졌지만 마지막에 웃는 것이 누구일지 두고 보아라.’

과열된 분위기는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족장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다음을 기약했다.

“올해도 이 혹독한 계절을 잘 넘기기를 빌겠소.”

“늘 그래 왔듯이, 수렵 영역이 겹치면 또 서로 돕도록 합시다.”

“날이 금방 저물테니 이제 출발해야겠습니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리지도 않았지만 서둘러야 한다.

거리가 가까운 부족도 저녁까지 부지런히 말을 달려야 자기 부락에 도착할 수 있고.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부족은 근처 다른 부락에 신세를 진 후 다음 날 또 이동을 해야만 하니까.

아이신은 다른 소년들과 족장들에게 인사를 하며, 자루스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계획대로 됐다면 곧바로 티가 날 텐데.’

자루스를 낙마시킨 후, 바타르로 밟아버릴 듯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철저히 아이신이 의도한 일이었다.

이윽고 자디란과 자루스 역시 다른 산야족들처럼 돌아가기 위해 말에 오르려는데···

“허억···허억···허억···”

“음? 자루스. 왜 그러느냐? 어서 말에 타지 않고.”

“예, 옛···! 아버님···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기 말 근처에 다가간 자루스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아이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네 놈은 앞으로 긴 시간을 낭비하게 될 거다.’

자루스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말에 올라타려고 했지만,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몇 번이나 의미없는 동작을 반복했다.

“자루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지 않느냐!”

“예, 옛. 죄송합니다 아버님. 대체 왜 이러는지···”

자루스는 아예 울상이 되어서는 떨어지지 않는 자기 발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자, 자. 진정하십시오, 자디란. 사냥제에서 무리를 한 모양입니다.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겠지요. 우리가 도와주도록 하마.”

아이신의 부족 전사 몇 명이 억지로 자루스를 들어올리고 나서야, 자루스는 간신히 자기 말에 올라타 등자에 발을 끼웠다.

“···그럼 떠나도록 하겠소.”

“으으···”

아이신은 말에 타고도 눈을 질끈 감고 위태위태한 자세로 멀어지는 자루스를 바라보며 옛날 일을 떠올렸다.

제국 기병대장 시절, 그는 10대 중 후반의 신입 기병들을 수도 없이 가르쳤다.

아이신의 지도를 받은 기병들은 수 년 후에는 산야족 못지 않은 승마술을 몸에 익혔지만, 그 과정에서 낙오하는 병사들 역시 많았다.

- 아이신 대장! 이번에도 세 놈이 보직 변경을 신청했는데요?

- 왜. 설마 또 말을 못 타겠다고 하던가?

- 그렇다고 합니다. 말의 눈만 쳐다봐도 오금이 저려 움직일 수가 없고, 자기 힘으로는 말에 탈 수도 없다고···

- 거 참 알 수 없는 일이네. 별로 다친 곳도 없다며?

- 세 놈 다 몸은 말짱합니다.

- 뭐 못 타겠다는데 어쩌겠냐. 성벽 수비대랑 경비대 쪽에 비는 인원 있는지 알아보고 거기로 보내.

아이신은 전임자들과 달리 훈련도 실전처럼 무지막지하게 병사들을 굴렸다.

당연히 훈련 도중 낙마하는 병사들도 수두룩했는데, 가끔 낙마에 그치지 않고 말에게 밟히거나 밟히기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개중에 다시는 말을 탈 수 없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아이신에게 호소하는 병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저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나중에는 왜 저런 일이 생기는지 대충 알게 되었지.’

몇 년 동안 그런 병사들을 지켜보며, 아이신은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아직 승마술이 완전히 몸에 익기 전인 어린 나이의 병사일 것.

둘째는 낙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밑에 깔려서 밟히면 죽기 직전인 상황까지 몰릴 것.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경우, 높은 확률로 그들은 두 번 다시 말을 타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 저도 다시 말을 타고 싶지요! 그런데 말 앞에만 서면 몸이 굳은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 마, 말의 눈이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습니다. 흰자위를 번들거리면서 사람을 밟아 죽이려는 것이 무슨 악마의 하수인처럼···!!

방금 자루스가 보인 증상은 아이신이 수도 없이 목격했던 병사들의 증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뭐 놈은 어쨌든 나와 같은 ‘숲의 사람들’이고, 병사들하고는 달리 어릴 때부터 말을 타왔으니 평생 말을 못 타지는 않겠지.’

그렇다 해도 저 증상은 오래 간다.

자루스가 다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만큼 회복되려면 긴 세월이 필요할 테고, 그 동안 그가 가졌던 천재성은 깃털처럼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이, 더더욱 자루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겠지.

사실상 그가 벽을 넘은 뛰어난 전사가 되는 미래는 완전히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신은 첫 복수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에 만족하며, 부족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냥제 뒷정리를 서둘렀다.

*

뒷정리가 모두 끝난 후.

마지막으로 남은 돼지고기 국으로 식사를 하며 아이신은 자기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쩝쩝···!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고깃국은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아이덴과 아이나는 신이 나서 연신 고깃국을 떠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신의 얼굴에 측은함이 감돌았다.

‘원래 같으면 고기를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은데···불쌍한 내 동생들.’

아이막의 부족이 위치한 동쪽 변방이 비록 척박한 땅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산야족은 수렵과 농업, 채집을 병행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사냥으로 잡은 짐승의 가죽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고기는 그들이 먹는다.

여기에 적은 수이지만 말과 돼지, 닭을 키우기 때문에 암만 가난한 산야족이라도 가난한 제국민에 비하면 많은 고기를 먹는 것이다.

“엄마. 이제 배 불러요. 그만 먹을래요.”

“조금만 더 먹으렴. 엄마가 뼈를 발라줄 테니까.”

“으음···그럼 조금만요.”

그 원흉인 계모 벨린다를 살짝 곁눈질하며, 아이신은 속으로만 분노를 삼켰다.

‘겨울이 되면 아이덴과 아이나는 또 비쩍 마르겠지.’

당장 아이막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벨린다는 대놓고 자기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을 차별하고 있다.

벨린다의 아들딸인 벨리온과 벨리바의 그릇에는 돼지고기가 수북한데.

아이신과 아이덴, 아이나의 그릇에는 멀건 국물에 작은 고기조각만이 떠다닐 뿐이다.

고작 그걸 가지고도 아이덴과 아이나는 맛있다면서 먹고 있는 거고.

“흠···흠···”

아버지인 아이막은 이 모든 상황을 못 본 척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이신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회귀 전에는 벨린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미웠지. 지금은 달라.’

아버지라고 계모에게 구박을 받는 자식들이 불쌍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벨린다에게 싫은 소리라도 했다가는, 강대한 벨린다의 친정이 곧바로 간섭을 시작할 테니까.

‘내 딸이 이렇게 홀대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핑계로, 이 부락을 통째로 삼키려고 하겠지.

‘뭐 그게 아니더라도 놈들은 결국 우리 부락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계획이겠지만. 벨린다의 아이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으로 말이야.’

사실 산야족의 전통에 따르면, 먼저 태어난 아이신 형제들보다 늦게 태어난 벨린다의 아이들이 족장이 되어 땅을 물려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척박한 땅에서는 아무래도 식량을 얻을 방법이 제한되기 때문에, 나이가 찬 아이들을 차례로 분가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는 막내가 남게 되고, 그 막내가 남은 재산과 땅을 모두 물려받는 것이 바로 말자상속제.

다만 이건 주로 북쪽 변방에 사는 완전한 유목민들의 경우이고, 산야족들은 반농반목으로 어느정도는 정착생활을 하기 때문에 경우가 조금 달랐다.

‘우리 부락은 최소한 50가구까지는 여력이 있어. 최소한 우리 대에는 나와 동생들이 분가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지.’

북쪽 변방의 유목민들은 말과 양 수십 마리를 데리고 다니며 주변의 풀을 먹이기 때문에 적은 가족에게도 넓은 땅이 필요하지만.

산야족들은 일단 농사는 지을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기 때문에 그 정도로 넓은 땅이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산야족도 부락이 감당할 수 있는 인구를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장자부터 분가를 시키지만, 최소한 아이신의 세대에서는 분가가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벨린다의 부족은 억지로 나와 동생들을 분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거기 따르지 않자 곧장 쳐들어왔지.’

심지어 아이신과 동생들에게는 제대로 된 재산도 분배하지 않고 내보내라는 조건이었기에, 아버지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곧바로 그걸 명분으로 삼아 이 근방에 쳐들어온 것이고.

아버지가 자리 잡은 땅이 워낙 입지가 좋아, 이후 이곳을 거점으로 크게 성장할 만한 곳이다 보니 벨린다의 친정이 욕심 낼 만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벨린다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당신, 이번엔 언제 떠나죠?”

“내일 아침에 곧바로 출발하려 하오.”

“올해는 농사도 채집도 영 시원찮았으니, 겨울을 보낼 식량이 충분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힘내주세요.”

“그리 하리다.”

“그리고 아이신과 아이덴에게 당신이 떠나더라도 나를 좀 잘 도우라고 말을 해 주세요. 올 겨울에는 집안 곳곳을 손 볼 곳이 많은데, 이 아이들은 어미인 나를 무시하는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아요.”

“네? 저희가 언제···”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니?”

동생 아이덴이 발끈해서 끼어들었으나, 벨린다가 노려보자마자 곧바로 눈을 밑으로 깔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신은 결심을 굳혔다.

‘동생들을 벨린다의 손에 맡기는 건 정말 싫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지금 괴롭더라도 해야만 해.’

아이신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막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벨린다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표정으로 아이신을 노려보았다.

“말하거라, 아이신.”

“올해 사냥에는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벨린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지만, 아이신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막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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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겨울 수렵(1)

“사냥에 따라가겠다고??”

“예, 어머님.”

벨린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신을 바라보더니,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금 장난하니? 너처럼 쬐끄만 아이가 사냥에 따라가서 뭘 하겠다고?”

“벨린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아이신은···”

“내가 모를 줄 알아? 집안일이 하기 싫어서 도망치려는거지? 어쩜 장남이 되어가지고 그렇게 책임감이···”

“벨린다!!”

아이막이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벨린다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사냥제 내내 집 안에만 있었으니 못 봤겠지만, 아이신은 이번 사냥제에서 훌륭히 전사의 자질을 증명했소.”

“장난하지 마세요. 사냥제에 참여하는 어린 전사들은 최소한 몸은 거의 다 성장한 아이들이잖아요. 이 아이가 무슨 수로 그런 아이들보다 뛰어날 수가 있죠?”

“나도 놀랐소. 나뿐 아니라 사냥제에 참여한 다른 부족의 족장들 모두가 놀랐지. 아이신은 활쏘기뿐 아니라 승마나 창술 등에서도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보였소. 충분히 전사로서 사냥에 참여할만한 능력이 된다는 말이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벨린다는 화가나서 아이신을 노려보았다.

물론 아이막은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이기에 그의 아들인 아이신이 그를 닮아 출중한 능력을 가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벨린다는 오히려 그걸 알기 때문에 아이신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갖은 수를 써가며 방해를 해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쉴틈도 없이 일을 시키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 활을 쏘고 말을 탔단 말이야? 암만 뛰어난 전사의 아들이라지만 그럴 수는 없어.’

타고난 재능이 암만 뛰어나다한들, 몸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밥도 적게 주고 능력을 키울 시간도 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반대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겨울철이라고 여자와 아이들이 집에서 노는게 아니에요. 아이신이 없으면 나 혼자 그걸 다 하라는 말인가요?”

아이신은 벨린다의 말을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겨울은 무슨, 벨린다 당신은 겨울이 아니라도 집안일이라고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잖아?

‘노예 하나 없는 생활은 지긋지긋하다면서 나와 동생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지. 그 덕분에 나는 열 여섯이 되어서야 처음 사냥에 따라갈 수 있었어.’

그러나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낼 수는 없다.

아이신은 조용히,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벨린다에게 말했다.

“집안일을 도와드리지 못하는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머님. 어머님이 방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뭘?”

“올해는 농사도 채집도 성과가 시원찮았으니, 사냥으로 식량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네가 사냥을 나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니?”

“집안일을 하지 못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짐승을 잡아오겠습니다. 올 겨울은 물론이고 내년 봄까지도 식량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만약 잡아오지 못하면? 말로만 큰소리를 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때는 어머니가 허락하실 때까지 다시는 사냥에 따라간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벨린다는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아이신을 응시했다.

지지않고 벨린다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이막도 아이신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내년에는 나도 조금 더 집안일에 신경을 쓰리다. 아이신은 훌륭한 전사가 될 자질이 있소.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부터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나뿐 아니라, 부족의 다른 전사들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오.”

벨린다는 혀를 세게 차더니, 다 먹은 밥상을 옆으로 밀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해요. 아이신. 너도 전사의 아들이라면, 네 입으로 한 말은 꼭 지켜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어머님.”

“···흥!”

벨린다는 고개를 훽 돌리더니,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덴, 아이나. 정리하는 것을 좀 도와줄래?”

“당연하지, 형.”

“그릇은 내가 들고 갈게, 오빠!”

익숙하게 다 먹은 밥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아이막이 아이신에게 말했다.

“아이신. 정리가 끝나고 나면 나를 따라오너라.”

“사냥 준비를 하려는 건가요?”

“잘 알고 있구나.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란다. 전사로서 사냥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네가 알아야할 것이 많다.”

아이막은 장남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의 처, 벨린다가 아이들을 편애하고 구박하는 것은 아이막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묵묵히 벨린다가 시키는 일을 하고, 전사로서의 능력까지 키웠을 줄이야.

모르긴 몰라도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노력했음이 분명하다.

‘아비가 더 노력하마. 부락을 더 크게 키워서 더 이상 처가 눈치를 보지 않도록.’

정착 초기, 벨린다가 친정에서 가져온 가축이며 식량 등의 혼수로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이겨내고 자리를 잡긴 했지만.

얼른 그 빚을 갚아내야만 진정한 족장이자 아비로서 떳떳하게 가슴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막은 식사의 뒷정리를 하는 남매를 애처롭게 쳐다보다가, 벨린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아이신이 아이막을 따라 사냥을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러 가고 나서.

벨린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도 않은 채 방에서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아···!!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변변찮은 노예 하나도 없는 이런 촌구석은 이제 지긋지긋해.”

암만 산야족이 동쪽 변방의 거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지만.

산야족 가운데에서도 부유한 부족은 존재했다.

벨린다의 친정은 그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부족.

여느 산야족 여자아이들과 달리, 벨린다는 대족장의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랐다.

‘암만 작은 부락이라지만 그래도 족장인데. 이 정도로 미개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고작 열 가구 남짓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이막의 부족은, 사실상 계급 같은 것이 없는 것과 다름 없다.

아이막이 족장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큰 집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가축이 훨씬 많은 것도 아니다.

그에 반해 벨린다의 부족은 비옥한 분지에 백여 가구가 넘게 살고 있었고, 근처 부족과의 전쟁으로 잡아온 노예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농사와 수렵을 병행하며 간신히 먹고사는 아이막의 부족과 달리, 벨린다의 친정은 노예들이 농사를 짓고 채집을 해오는 것만으로도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부락에서 받는 공물 등으로 인해, 족장의 창고에는 고기와 가죽 등이 그득그득하게 쌓였다.

“엄마! 산딸기는 어딨어요?”

“그래 그래, 우리 아들. 어미가 우리 아들을 위해 미리 챙겨놨단다. 얼른 먹으렴.”

“와!!”

“엄마! 나도요!”

“그럼, 우리 딸도 많이 먹어야지.”

불평불만이 가득한 나날 속에서, 유일하게 벨린다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자식들의 육아였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자식은 벨린다 본인의 배로 낳은 아들과 딸, 벨리온과 벨리바.

자기 배로 낳지 않은 아이신과 아이덴, 아이나는 그녀 입장에서는 완전히 남일 뿐이다.

“오빠. 나도 산딸기 먹고 싶은데···”

“조금만 참자. 봄이 되면 오빠가 바구니 가득 따다줄게.”

“그래도···! 겨울 딸기는 더 달단 말이야.”

아이덴과 아이나가 산딸기를 먹는 벨리온과 벨리바를 바라보며 속삭이자, 벨린다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 내가 아까 물을 길어오라고 한 건 어떻게 했지?”

“그거라면 조금 전에 한 통을 길어놨어요, 어머니.”

“너희는 눈치도 없니? 사냥제 때문에 집집마다 손님들이 묵고 가느라 식수가 부족하잖아! 세 통은 더 퍼놔야 물항아리가 겨우 반 정도 찰 텐데, 무슨 생각으로 한 통만 길어놓은 거니? 아무래도 내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벨린다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아이덴과 아이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죄, 죄송해요 어머니! 빨리 마저 떠 올게요. 가자, 아이나!”

“오, 오빠아!!”

벨린다는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더니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문을 쾅 닫아버렸다.

벨린다가 전 부인 소생의 이복자식들을 이렇듯 학대하는 것을 아이막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그녀 친정의 위세가 워낙 강대하기 때문에 알고도 관여하기가 힘들었다.

아이덴과 아이나는 나무통을 들고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향했다.

“훌쩍···이렇게 추운데, 언제 항아리를 다 채워놓지?”

“울지마 아이나. 오빠가 물을 길을 수 있게 얼음 깨는 것만 도와주라.”

동쪽 변방의 살을 에는 추위에는 쉽사리 강이 얼곤 한다.

얼어붙은 강을 조심스럽게 깨고, 강물을 길어다가 항아리에 부어놓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 하기에는 위험하고 고된 노동.

그래도 아이덴과 아이나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불평을 할 수가 없는 것에 가까웠다.

불평을 해 봤자 아버지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계모는 죽지 않을 만큼 매질을 한 후 밥을 굶길 테니까.

나무 통을 들고 터덜터덜 걷고 있는 아이들의 뒤에서, 누군가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덴! 아이나!”

따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말을 타고 다가오는 아이신이 보였다.

“형!”

“오빠!”

아이신은 아이막이 가르치는 내용을 금세 숙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동생들이 물을 길러 간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바타르를 타고 따라왔다.

‘이 날씨에 어린 동생들한테 이런 고된 일을 시키다니.’

아이신은 곧바로 동생들을 말 위에 태웠다.

“신난다!”

“형, 근데 세 명이 한 번에 말에 타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는 거 아냐?”

“조금 정도는 괜찮아. 바타르는 그렇게 허약하지 않고, 우리 세 명을 합쳐봤자 성인 전사만큼 무겁지도 않으니까.”

“아하···그런데 형은 사냥 준비로 바쁜 것 아니었어?”

“빨리 끝냈지. 자, 도착했다.”

강가에 도착한 후 아이신은 동생들을 말에서 내리게 했다.

“물은 내가 뜰 테니까 너희는 조금 쉬고 있어.”

“그래도 돼? 오빠 혼자 하기는 힘들 텐데.”

“아니야. 오빠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보다 아이나. 오빠가 말린 산딸기 좀 챙겨놨거든. 먹을래?”

“어? 와아! 고마워 오빠!”

아이신은 산딸기를 오물오물 먹는 아이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동생들이 들고 온 나무통과 자기가 들고 온 나무통까지 두 개를 한 번에 들고 강가로 향한 아이신은, 익숙한 자세로 얼음을 깨고 차가운 강물을 통에 가득 채웠다.

“이제 돌아가자. 너희는 바타르에 타.”

“형은 어떻게 하게?”

“물통 두 개를 들고 탈 수는 없잖아. 나는 걸어갈게.”

“응? 물통 하나도 무거운데 두 개를 들고 걸어가려구?”

“걱정하지 마. 오빠 힘 세거든.”

동생들을 바타르에 태운 후, 아이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양손에 물이 가득 찬 나무통을 하나씩 들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형 대단해!”

“우리 오빠 최고다!”

벽을 넘은 아이신에게 이 정도 무게쯤이야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 물항아리에 길어온 물을 모두 부어놓은 후, 아이신은 동생들에게 말했다.

“아직 네 통 정도는 더 떠놔야 할 것 같으니까, 형이 마저 채워놓을게.”

“정말? 고마워 형.”

“오빠가 사냥에 따라가지 않으면 좋겠다아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나는 아이신이 겨울에도 집에 있어줬으면 하는 눈치다.

“오빠. 혹시 산딸기 더 없어? 나 배고픈데.”

“아이나.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잖아. 배고파도 참아야 해.”

“그래두···요즘 밥이 매일 적단 말이야. 먹어도 금방 꺼지는걸 어떡해.”

아이신은 동생들이 하는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아버지가 계시는 동안에는 양이 적어도 끼니 때마다 밥은 챙겨줬지만, 벨린다는 아버지가 사냥을 떠난 겨울이면 하루에 한 끼밖에 주지 않았었지.’

내일 자신이 겨울 수렵을 떠나고 나면, 동생들은 추운 겨울 내내 벨린다의 구박을 받아가며 배를 주릴 것이 분명하다.

회귀한 이상 그런 꼴은 볼 수 없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잠시 동생들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신은, 순간 하늘 저 멀리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거다!’

아이신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손에 쥔 뒤, 저 멀리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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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겨울 수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