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화 - 겨울 수렵(2)

벽을 넘은 자들은 청각, 후각, 시각 등의 모든 능력이 한층 강화된다.

그리고 벽을 넘은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능력들은 조금씩 더 상승한다.

저 멀리에서 이쪽으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향해, 아이신은 신중하게 활을 겨눴다.

‘온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아 그리 두껍지 않은 아이신의 팔에 힘줄이 터질 것 처럼 솟아올랐다.

아이신은 자기가 원하던 타이밍이 오자마자 활 시위를 사정없이 강하게 당겼다.

- 핑!!! 핑!!! 핑!!!

벽을 넘은 자 특유의 강한 팔 힘으로 활을 쏘아냈기 때문에, 화살은 저 높이 하늘을 향해 맹렬하게 쏘아졌다.

다섯 발의 화살을 연달아 쏘아내자 팟!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강한 팔 힘으로 끝까지 시위를 한계까지 연달아 당긴 통에, 사슴 힘줄로 만든 활 시위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형?? 방금 뭐 한 거야?”

“오빠 활 시위가···”

“괜찮아. 잠깐만 여기 있어.”

아이신은 바타르에 올라타고 부락 뒤편 숲으로 향했다.

‘여기쯤일텐데···’

바타르의 위에서 두리번 두리번 무언가를 찾고 있던 아이신의 눈에 찾던 것이 들어왔다.

‘저기 있다.’

아이신이 화살을 쏘아 떨어뜨린 것은 이 시기에 하늘을 이동하는 겨울 철새였다.

먼 곳에서 기러기떼가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아이신은, 활 시위가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고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아낸 것이다.

‘다섯 마리인가. 이 정도면 되겠어.’

커다란 기러기 다섯 마리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은 아이신이 바타르를 타고 돌아오자, 아이덴과 아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 그거 혹시···??”

“겨울 철새야.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거든.”

“오빠 진짜 대단해!!”

“배고프다고 했지 아이나? 잠깐만 기다려 봐. 오빠가 금방 맛있게 만들어 줄게.”

아이신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부락 뒤편 숲으로 동생들을 데려온 후, 익숙한 솜씨로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피웠다.

“오빠 벌써 이런 것도 배웠어?”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 겨울 수렵에 참가하는 전사라면 이런 걸 할 줄 알아야 하거든.”

사실은 제국 기병대장 시절 야영을 밥먹듯이 하느라 몸에 익힌 기술이지만, 동생들은 대단하다는 눈으로 아이신을 바라보았다.

‘좋아. 예상대로 기름이 잔뜩 껴 있네.’

이 시기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철새들은 그 몸에 지방을 잔뜩 축적해둔다.

아이신은 뜨거운 돌 하나를 불에 달군 뒤 남동생 아이덴에게 보였다.

“아이덴. 잘 봐. 새의 깃털을 쉽게 뽑으려면 이렇게 하면 돼.”

아이신은 뜨겁게 달궈진 돌을 천으로 감싸 붙잡은 후, 새의 배에다가 슬슬 문질렀다.

뿌리가 살짝 익은 깃털은 그것만으로도 깔끔하게 뽑아졌다.

“신기해! 이런 것도 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맞아. 너희도 나중에는 해야 하는 거니까 미리 알아두면 좋을 거야.”

“알았어! 가르쳐 줘 형!”

아이신은 능숙한 솜씨로 깃털을 모두 벗겨낸 뒤, 작은 칼로 새의 내장을 손질한 후 강가에서 차가운 물에 고기를 깨끗하게 씻었다.

튼튼한 나뭇가지에 깔끔하게 손질한 새고기를 끼운 아이신은 곧바로 모닥불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

“빨리 먹고 싶다!”

지방기가 많은 철새의 고기에서 기름이 뚝뚝 흘러내리며 모락모락 익어갔다.

새고기가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에, 아이덴과 아이나의 입에서 군침이 흘러내렸다.

“이 정도면 됐다. 먹자, 얘들아.”

“잘 먹을게 형!”

미리 넓직한 돌 하나를 강물에 씻어다가 접시처럼 중앙에 놓아둔 아이신은, 새고기에서 살을 발라 연신 돌 위에 올려놓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기러기 통구이 한마리는 순식간에 남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후아···배불러···”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진짜 오랜만이야.”

아이신은 배를 두드리는 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남은 새가 네 마리니까, 우선 손질부터 해 둬야겠네.’

동생들이 앉아서 쉬는 동안, 아이신은 능숙하게 나머지 네 마리의 새를 손질하여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들었다.

‘이걸 어디다가 보관하면···그렇지.’

아이신은 동생들과 함께 마굿간으로 돌아온 후, 손질된 새고기들을 줄로 묶어 천장에 매달았다.

‘어차피 벨린다는 마굿간 근처에도 오지 않으니까. 여기라면 들킬 염려가 없어.’

아이신은 작업을 완료한 후, 동생들에게 일렀다.

“겨울이라 날벌레가 꼬일 일도 없고, 추우니까 고기가 상할 일은 없을 거야. 배가 고프면 고기를 잘라다가 불에 구워먹도록 해. 할 수 있겠지, 아이덴?”

“응! 불씨를 숲에 가져가서 구워 먹으면 되는거지?”

“그래. 새고기가 크니까 이 정도면 오래오래 두고 먹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아이신까지 세 명이서 기러기 한 마리를 배가 터지도록 포식했지만.

살이 통통하게 찐 겨울 기러기는 원래 산야족 성인 한 명이 먹기에도 양이 꽤 많다.

아이덴과 아이나처럼 어린 아이들이라면 다리 하나씩만 잘라서 먹어도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될 것이다.

가슴살과 다른 살들의 양을 생각하면 기러기 한 마리만 가지고도 동생들이 며칠을 아껴먹을 수 있겠지.

네 마리 분량의 기러기 고기가 있다면 아이신이 겨울 수렵을 떠나 있더라도 동생들이 배가 고파 주리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형. 그런데 활 시위가 끊어져서 어떻게 해?”

“괜찮아. 출발은 내일 아침이니까, 오늘 밤새 수리하면 돼.”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대충은. 아버지께 물어보면서 하면 될 거야.”

“그런데 오빠 되게 신기하다! 어떻게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 새들을 쏴서 맞추는 거야?”

“부족의 다른 어른들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

사실 산야족은 겨울 철새를 따로 사냥하지 않는다.

벽을 넘은 지 한참 지난 아이신 정도나 이동하는 철새 떼를 향해 화살을 쏘아 맞추는 것이 가능하지.

어지간한 전사들은 그런 식의 기예를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벽을 넘은 뛰어난 전사가 있을지라도, 굳이 날아가는 철새에게 화살을 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괜히 실패하면 애꿏은 화살만 버리는 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물자가 부족한 산야족에게는 화살 하나 하나도 귀중한 자원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일을 하느라 화살을 낭비하느니, 그걸로 다른 짐승을 잡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고기만이 아니라 가죽이나 뿔 등의 부산물들이 두루두루 쓰이는, 훨씬 더 유용한 짐승을 말이다.

“나는 마저 물을 길어 놓을 테니까, 너희들은 마굿간에서 조금 쉬고 있어.”

커다란 물 항아리에 차가운 강물을 가득 채워넣으면, 벨린다와 동생들이 나흘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동생들이 조금이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아이신은 강을 왔다갔다하며 큰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

이튿날 아침.

아이신의 부락에서는 전사들이 저마다 옷을 두껍게 갖춰 입고, 휴대할 식량들을 챙긴 뒤 부락 중앙에 모였다.

“그럼 다녀오리다.”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전사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저마다 기나긴 수렵을 떠나는 가장을 배웅하는 와중에도, 벨린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부족의 다른 전사들까지 모두 자기 노예인 것마냥 취급하는군.’

뭐 강대한 대족장의 딸로 정말 공주처럼 자란 여자일테니, 새삼 질리지도 않는다.

“출발하도록 하지.”

“옛, 족장!”

아이신을 포함하여 열 명 정도의 전사들은 그렇게 말을 타고 부락을 뒤로 했다.

“아이신은 올해가 첫 사냥이로구나. 긴장되지는 않니?”

아이막과 아이신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나이든 전사, 지르칼이 웃으며 물었다.

“조금은요.”

“열 세 살에 사냥을 따라가는 전사는 정말로 드물지. 네 아버지인 아이막 족장도 그 나이에는 집에서 바구니나 엮고 있었을 게다. 껄껄껄.”

“험험···이 사람아. 나는 그래도 열 네 살에는 사냥에 따라 갔었네.”

아이막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신을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지르칼과 아이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신. 너도 알다시피 지르칼은 우리 부족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한 전사다. 올 겨울 사냥에서 네게 많은 것을 가르치라 내 일러두었으니,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물론입니다, 아버지.”

“지르칼 자네도 잘 부탁하네. 아이신이 훌륭한 전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지도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차 용맹한 전사가 될 이의 교육을 담당할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

산야족들이 사는 동쪽 변방은 험한 산맥과 구릉, 숲이 어우러진 척박한 땅이다.

개중에서도 특히 짐승들이 많이 사는 땅들이 있었고, 겨울이면 산야족들은 각자 알고 있는 곳에서 사냥을 하곤 했다.

약 사흘을 꼬박 말을 타고 이동하자, 드디어 아이막의 부족이 사냥을 하는 구역에 이르렀다.

“도착했다. 아이신, 이 곳의 위치를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 주변이 저희 부족이 겨울마다 사냥을 하는 곳이어서인가요?”

“잘 알고 있구나. 물론 숲과 들에 무슨 주인이 있겠냐마는,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것이다. 근처에는 다른 부족이 벌써 사냥을 시작했을지도 모르니, 가급적 서로의 사냥터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지.”

물론 아이신은 회귀 전에도 몇 번 사냥에 따라갔었기 때문에 어렴풋이 이곳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뭐 그 때는 열 여섯살에 처음 따라갔으니, 열 세 살인 지금하고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지만, 아이막을 비롯한 다른 전사들은 곧바로 조를 나누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야족의 겨울 수렵은 하루 이틀로 끝나는 종류의 사냥이 아니다.

못해도 열흘은 이곳에서 머무르며 사냥을 이어가기 때문에, 머무는 동안 거주할 야영지를 선정하고 꾸며야 하는 것이다.

“이곳이 좋을 것 같군.”

아이막은 다른 전사들과 주변을 돌아다니며 최적의 야영지를 물색했다.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식수를 확보하기 쉬운 곳.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강한 바람을 막아줄 숲이 있는 곳.

마지막으로 멧돼지나 사슴 등의 사냥감이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할 것 등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야영지를 만들어야한다. 먼 길을 이동하느라 피곤하겠지만 조금 서두르도록 하세.”

“예, 족장.”

“우리도 피곤하니 오늘은 어서 쉬고 싶다구요.”

야영지 중앙에 커다란 화톳불이 피워졌다.

전사들은 중앙 화톳불을 둘러싸듯 원형으로 임시 천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신 역시 다른 전사들에게 천막 설치법을 배우기도 하고, 원래 알던 지식을 통해 바닥 작업을 하기도 하며 일손을 보탰다.

그렇게 야영지가 완성되자, 시간은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지르칼, 잠시만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이신은 자기 천막에 들어가 쉬고 있던 부족의 늙은 전사, 지르칼을 불렀다.

“그래, 뭐가 궁금한고? 아이막 족장이 부탁하셨으니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든 다 가르쳐주마.”

“덫을 만들고 싶은데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그거라면 내일 다 같이 설치할 테니 지금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사슴과 멧돼지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거대한 함정을 여럿 설치해야 하거든.”

그러나 아이신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기 위한 커다란 덫 말고요.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잡는 덫을 만들고 싶어요.”

“음?? 작은 덫? 가르쳐줄 수야 있다만 여기서는 필요가 없을 텐데?”

지르칼이 그렇게 되물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산야족은 짐승을 잡기 위한 함정이나 덫을 놓는 데에 익숙했고, 짐승의 몸집에 따라 큰 덫과 작은 덫을 구별해서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작은 덫의 경우, 이렇게 멀리까지 수렵을 왔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렇게나 먼 곳으로 사냥을 온 까닭은, 부락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사슴이나 멧돼지 등의 큰 짐승을 잡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니까.

아이신은 지르칼의 그런 설명을 듣고서도, 한사코 작은 덫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질문했다.

“그냥 배워놓고 싶어서 그래요. 오늘은 지금부터 시간이 있잖아요. 부탁이에요, 지르칼.”

“그렇다면 뭐···이쪽으로 와 보거라.”

지르칼은 아이신에게,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을 잡기 위한 작은 덫의 설치법과 재료 등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고맙습니다, 지르칼. 나머지는 제가 혼자서 해 볼게요.”

“지금 이걸 설치하겠다고?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늦으면 안 된다. 겨울은 해가 짧으니 금세 어두워질 수 있어.”

“걱정마세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아이신은 야영지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며, 무언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낮은 나무가 모여 있고, 거기에 좁은 구멍들이 나 있는 곳···’

몇 군데 알맞은 위치를 발견한 아이신은 지르칼이 가르쳐준 대로 덫을 설치하고, 가져온 육포를 조그맣게 잘라 놓았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대여섯 곳에 덫을 설치하자,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아이신이 야영지로 돌아가자, 아이막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이신에게 물었다.

“아까 전부터 보이지 않던데, 어디에 갔던 것이냐?”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왔습니다, 아버지.”

“날이 밝을때는 괜찮지만, 어두울 때는 혼자 움직이지 말도록 해라. 멧돼지나 사슴이 많은 곳은 필연적으로 맹수들의 영역이니 말이다.”

산야족 전사들은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야영지 중앙에 모여 가져온 육포와 말린 나무열매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신은 다른 전사들이 일어나기도 훨씬 전에 눈을 뜨고 천막에서 나왔다.

‘잘 됐으려나.’

아이신은 다른 전사들이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변에 설치한 덫들을 하나씩 둘러 보았다.

다섯 군데의 덫을 둘러보았음에도 아이신이 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쉽지 않겠다며 아이신이 마지막 여섯 번째 덫 주변에 도착했을 때였다.

“삐이익!!!”

눈이 쌓인 숲 속에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신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있다···!’

아이신은 덫에 걸린 무언가를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 정도 크기의 맹수.

이곳 동쪽 변방에서만 서식하는 담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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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 겨울 수렵(3)

담비의 가죽은 엘린도르 왕국이나 솔라리온 제국에서는 귀부인들의 사치품으로 이름이 높다.

다만 회귀 전 아이막의 부족에서는 담비를 그다지 집중적으로 사냥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담비의 가죽이 그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는 것을 잘 몰랐다는 점.

두 번째로는 담비라는 동물이 생각보다 영리해 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

세 번째로는 아이막의 부족처럼 영세한 부족은 당장 식량이 될 수 있는 커다란 동물부터 잡는 게 우선이라는 점 등이었다.

‘잡는 것도 까다로운데 잡아봤자 고기도 얼마 나오지 않으니, 굳이 잡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

다만 산야족 중에서도 벨린다의 부족처럼 강대한 부족의 경우, 담비의 가죽이 지닌 가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분명 벨린다의 부족에서 주변 부족들에게 공물로 담비 가죽을 요구했다던 기억이 나.’

아이신은 제국 기병대장으로 있으며 단순히 야만족들을 토벌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솔라리온 제국의 야만족 정책은 적절한 교화와 이간책을 복합적으로 구사하였는데, 아이신은 야만족과의 교역 등에서도 일정 부분 실무를 담당했었다.

‘제국의 야만족 정책은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부족들을 우대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주였으니까.’

제국에 복종하지 않는 부족은 철저히 응징하고, 복종하는 부족에게는 상을 내린다.

그 상의 일환이 바로 교역이었다.

예를 들면 산야족에게서 모피나 잘 키운 말 등을 구매하는 대가로 질 좋은 철제 농기구나 사치품 등을 내어주는 식.

그런 식의 교역으로 인해 제국에게 복종하는 부족은 점점 더 강성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 작은 부락들을 지배하에 놓았던 것이다.

“삐이익!! 삑!!”

아이신은 덫에 걸린 담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빨을 드러내고 사납게 울부짖고 있지만, 앞발이 덫에 걸린 탓에 그 이상 저항하지는 못하는 상태.

‘모피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아이신은 재빠르게 담비의 목덜미 뒤를 잡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목을 꺾었다.

- 뚜둑!!

“삐이이이이익!!!”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담비가 축 늘어졌다.

“후우···”

아이신은 능숙하게 덫에서 죽은 담비를 빼내고, 그 자리에서 해체를 시작했다.

회귀 전 부족에서 배웠던 것 외에도, 변방을 돌아다니며 부하들과 사냥을 하며 그때그때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 많았기에 이런 작업은 익숙하다.

아이신은 쳐놨던 다른 덫들을 보수하고, 몇 군데에 덫을 더 설치한 후 야영지로 돌아왔다.

*

아이신이 야영지에 돌아오자, 막 일어난 아이막이 의아하다는 듯 아이신에게 물었다.

“아이신. 어디 갔다왔느냐?”

아이신은 잠시 고민했다.

‘담비를 잡으러 간 것 까지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자신이 회귀했다는 허무맹랑한 사실이면 몰라도, 이 정도는 숨길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아이신은 품에서 담비 가죽을 꺼냈다.

“이걸 잡으러 갔었습니다.”

아이막은 아이신이 건넨 담비 가죽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담비로구나. 어제 지르칼과 뭔가 하는 것 같더니 그게 이것 때문이었느냐?”

“예. 지르칼에게 작은 덫을 설치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네 동생들에게 목도리라도 만들어주려고 했느냐. 허허. 기특한 녀석.”

아이막의 반응에서 아이신은 확신을 가졌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담비 가죽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모르시는 게 분명해.’ 

뭐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담비 가죽이 제국과 엘프 왕국에서 사치품으로 떠오른 것은 50년도 지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솔라리온 제국이 야만족 정책을 수정하면서 야만인들과 교역을 시작했고, 그때 제국으로 넘어간 담비 가죽이 수도 귀족들에게 유행을 탔기 때문이다.

“그것도 좋겠지만, 이 가죽을 팔아 부족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구해볼까 합니다.”

“담비 가죽을? 어디에 말이냐?”

“사냥제에 참여한 다른 부족 아이에게 얼핏 들었습니다. 남쪽 엘린도르 왕국의 엘프 상인들이 담비 가죽을 원한다고 하더군요.”

“그래? 나는 처음 듣는 말이구나. 엘프 놈들이라···”

아이막은 몇 년 전 싸웠던 엘프 왕국의 군대를 떠올렸다.

엘린도르 왕국은 산야족이 사는 변방을 개척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군대를 보냈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벌어졌다.

아이막이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을 얻은 것도 그런 분쟁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이막은 아이신의 말을 대수롭게 않게 넘겼다.

“뭐 그건 나중에 차차 생각해 보자꾸나. 우선은 올해 사냥이 가장 중요하니 말이다.”

“물론이죠, 아버지.”

작은 부락이라지만 아이막은 엄연히 족장이고, 족장의 의무는 부족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안 그래도 올해는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냥을 성공시켜야만 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다.

가져온 보존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아이막은 본격적인 사냥을 위해 전사들을 집합시켰다.

“올해도 모두 고생해주길 바라네. 본대와 몰이조, 정찰조는 작년과 똑같이 하도록 하겠네.”

부락 전사들은 아이막의 지시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말을 타고 자신의 위치로 향했다.

“아이신, 너는 지르칼과 함께 왼쪽 몰이조로 가거라.”

“예, 아버지.”

아이신을 포함한 열 한 명의 전사들은 모두 말을 타고 정해진 대열을 만들어 야영지를 출발했다.

“아이막 족장께 대략적인 것은 배웠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주마. 우선 맨 앞 정찰조인데···”

천천히 말을 몰며 지르칼이 아이신에게 설명해주었다.

아이신은 지르칼의 설명을 경청하기는 했으나, 사실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래봬도 전생에 겨울 수렵을 두 번은 따라갔었으니까.’

산야족의 사냥법은 부족의 전사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모든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족장의 본대가 맨 뒤에 따라오고.

족장의 좌우 양 옆에 날개처럼 몰이조가 배치된다.

그리고 정찰조가 적당한 짐승들을 발견하면, 그때부터 몰이사냥을 시작하는 것이다.

“보통 겨울 수렵을 하면 어느 정도 짐승을 잡나요?”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도 뻘쭘하여, 아이신은 지르칼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사냥이 잘 된다면 한 번에 사슴을 5마리가 넘게 잡을 수도 있지. 멧돼지 같은 놈들이라면 2~3마리를 한 번에 잡을 수도 있고. 하지만 겨울 멧돼지는 포악하니, 가급적 단일 개체를 노리는 편이 안전하단다.”

“부락과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데 잡은 고기는 어떻게 처리하죠?”

“그건 그때그때 다르지. 잡은 짐승의 수와 날씨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니 내가 그때마다 알려주도록 하마.”

그렇게 정찰조를 제외한 본대와 양익의 몰이조가 1시간 정도 천천히 말을 몰고 있을 때였다.

“족장님! 사슴 한 쌍을 발견했습니다!”

“방향과 위치는?”

“북동쪽 개활지와 숲의 경계입니다.”

정찰조 한 명이 쏜살같이 달려와 보고하자 아이막은 미소를 지었다.

“첫 날 부터 운이 좋구나. 양익 몰이조는 말을 타고 후방을 차단하고, 개를 풀어 사냥감을 유도하라.”

“어느 쪽으로 유도할까요?”

“여기서 북동쪽이라면 개활지의 가장자리, 바위 절벽 쪽이 적당하겠지. 강가 쪽은 수심이 옅어 사슴들이 도망갈 수 있으니 신중하게 몰아야 한다. 강가로 가면 실패할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본대의 반은 개활지 높은 곳에서 대기한다. 몰이조가 사슴을 몰아오면 가능한 다리를 노려 활을 쏜다. 현재 바람의 방향은?”

“남쪽에서 불어오고 있습니다.”

“바람을 등지고 사격 기회를 찾아라.”

“옛!”

“본대는 나를 따라 퇴로를 막을 것이다. 모두들 각자 맡은 역할을 잘 해주게.”

아이막의 지시에 따라,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아이신은 지르칼을 따라 말을 달리며 생각했다.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숲 사람들의 사냥 방식은 정말 실전이나 다름이 없구나.’

아이신이 제국 기병대장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제국 기병대는 우월한 전력을 갖추고도 산야족과의 분쟁에서 자주 패배하곤 했었다.

장비와 무기가 열악한 산야족이 적과 맞서 싸우는 방식은 지금 아이막이 지시한 것과 매우 유사했다.

모든 전사가 뛰어난 기병이라는 이점을 살려 빠른 정찰을 통해 적을 발견하고, 기동력을 통해 적들을 원하는 곳으로 몰아넣는다.

그럼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활을 쏘거나, 쫓기던 전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협공하는 식으로 적들을 포위해 싸우는 것이다.

“저쪽이다! 아이신, 보이느냐.”

지르칼이 가리키는 방향을 주시한 아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큰 숫사슴과 어린 암사슴이네요.”

“그래. 아이막 족장이 우려한 대로 놈들이 강가를 향해 도망치는구나.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보거라.”

아이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강가쪽으로 이동해서 활을 쏘며 놈들을 몰아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

“정답이다. 역시 아이막 족장의 아들이야. 그럼 곧바로 강가쪽으로 이동하자.”

아이신은 바타르의 고삐를 세게 당겨 속도를 높였다.

탁 트인 개활지와 강가를 달리는데, 사슴들이 자꾸만 강가를 향해 방향을 트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는···’

제국 기병대장 출신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이신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대로 사슴들의 뒤를 쫓으며 몰아넣기만 해서는 사슴들이 도하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 피잉! 피잉!!!

아이신은 망설이지 않고 달리는 사슴들을 향해 활을 쏘아냈다.

쏘아진 화살의 궤적이 절묘하게 강가 바깥쪽에서 사슴들을 향해 날아갔고, 사슴들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잘했다, 아이신! 이대로 몰아넣자꾸나!!”

의도대로 몰아넣어진 사슴들은 이윽고 개활지 바위 절벽으로 몰아넣어졌다.

막다른 절벽에 다다른 사슴들이 뒤를 돌아보자, 아이막이 이끄는 본대의 전사 셋이 어느새 쫓아와 사슴들의 퇴로를 막았다.

“가능하면 다리를 쏴 맞춰라.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옛!”

아이막의 지시에 따라 높은 지대에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활을 쏘아냈다.

- 핑!! 핑!! 핑!!

그러나 강한 바람이 불어와 화살들이 제대로 닿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 천천히 다가간다.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신중하게.”

아이막의 본대와 몰이조가 퇴로가 막힌 사슴들을 향해 천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아이신은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다가가다가 활을 들었다.

- 핑!!! 핑!!!

“끄르르르르륵!!!”

아이신이 쏘아낸 화살은 정확히 한 쌍의 사슴의 다리를 하나씩 맞췄다.

아이막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숨통을 끊어 주어라!”

“맡겨두시라구요, 족장!”

- 푹!!!

창을 꺼낸 전사들이 마무리를 짓자, 사슴들은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축 늘어졌다.

아이막은 말에서 내려 전사들을 돌아본 뒤 손을 높이 들었다.

“모두 잘 해 주었다! 첫 사냥에 사슴을 두 마리나 잡았으니, 올 겨울은 사냥의 신께서 우리를 굽어 살펴 주시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구나. 껄껄껄.”

사냥의 성공을 기뻐하는 전사들의 함성 소리가, 칼바람이 부는 겨울 숲에 메아리쳤다.

*

아이막의 부족이 사냥터에 도착하기 하루 전.

먼저 도착한 다른 산야족 부족의 전사들이 근처에 야영지를 완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서쪽이 용맹한 아이막이 이끄는 부족 구역이었지요?”

“그렇다. 가능하면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거리상으로 우리가 가까우니 하루 정도는 먼저 사냥을 해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 구역에 사냥감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요.”

“으음···그건 내일 생각하도록 하자. 어서 마무리하고 오늘은 어서 쉬는 편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놈들이 도착했는지 둘러보도록 하지요.”

해가 짧은 변방의 겨울에는 금세 밤이 찾아온다.

모든 전사들이 단잠에 취해있던 한 밤 중.

부족의 어린 전사 하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꼭 자는 도중에 소변이 마렵단 말이야.’

자기 전에 억지로라도 소변을 봐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어린 전사는 아영지 뒤편 숲으로 걸어갔다.

- 쪼르르르···

“어으으으, 시원해.”

야영지 한가운데 커다랗게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밤이지만 사물을 분간할 정도로는 앞이 보였다.

볼일을 마친 그가 바지 춤을 끌어올리는데···

“쿠으으으···쿠으···”

그의 뒤편에서, 오금을 떨게 만드는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온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어린 전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부, 붉은 털의···!!”

“쿠워어어!!”

- 촤악!!!

어린 전사가 상황을 인지할 틈도 없이 거대한 앞발이 휘둘러졌다.

어린 전사를 단매에 때려 죽인 악마는 그의 몸을 입에 물고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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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 붉은 털의 악마(1)

아이막의 부족은 첫 날 사냥에 성공한 뒤로도 3일 동안 매일 큰 수확을 올렸다.

“4일 동안 사슴이 여덟 마리에 멧돼지가 세 마리, 토끼가 스무 마리라.”

“예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성과가 좋습니다 족장!”

“이 정도면 슬슬 도축한 고기와 가죽들을 부락에 가져다 놓아도 되겠는데요?”

겨울 사냥의 장점 중 하나는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보관하기 쉽다는 점이다.

동쪽 변방의 겨울은 특히 혹독하기 때문에, 도축한 고기를 그냥 눈에 파묻어놓기만 해도 신선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올해 사냥의 성공은 누가 봐도 아이신의 공이 가장 컸다.

“아이신은 정말 족장님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았구나.”

“아니, 솔직히 족장님보다 나은 것 아닙니까?”

“열 세 살이 사냥에 따라오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다른 전사들 두 명 분을 해내고 있잖습니까.”

아이신은 부족 전사들의 쏟아지는 칭찬에도 그저 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다른 전사분들이 하시는 걸 잘 보고 배운 덕입니다.”

“허허허. 아이신. 그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겨울의 사냥제에서도 또래 최고의 전사로 인정을 받았지 않느냐. 올 겨울의 사냥으로 너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부족의 전사가 되었다. 가슴을 펴거라.”

아이막은 장남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실 아직도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긴 하다.

고작 열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은, 정찰조든 몰이조든 맡기기만 하면 다른 전사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활약을 해냈다.

오늘은 심지어 달려오는 멧돼지에게서 도망치면서 활을 쏘아 멧돼지의 머리를 정확히 맞추기까지.

오죽하면 아이막은 이런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정말 우리 아이신이 사냥의 신의 선택을 받은 전사인 건가?’

산야족이 비록 지금은 수 백 개가 넘는 부족으로 쪼개져 있지만.

약 삼백년 전, 모든 산야족을 통일하고 솔라리온 제국과 엘린도르 왕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대족장이 있었다.

그의 생전에 산야족은 제국과 커다란 전쟁을 여러 번 치러 이기는 무시무시한 성과를 거뒀다.

비록 그의 사후 다시 여러 부족으로 쪼개어져 지금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어쨌든 산야족들에게 사냥의 신의 선택을 받은 영웅은 분명 실존했던 인물인 것이다.

“오늘 잡은 멧돼지까지 도축한 후에 일부는 부락으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으음. 그것도 좋을 것 같네. 여자와 아이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럼 우선 여기서 해체를 하지요.”

전사들은 능숙하게 방금 잡은 커다란 멧돼지를 도축하기 시작했다.

싱싱한 간은 그 자리에서 전사들이 생으로 씹어먹고, 먹기 곤란한 내장은 개들에게 먹인다.

그런 후 고기를 큼지막한 덩어리로 잘라 가죽과 함께 말에 싣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야영지에 돌아갔을 때, 그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객들이 아이막과 전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맹한 아이막!! 기다리고 있었소!!”

“아니, 나르가 족장님이 아닙니까? 저희 구역에는 무슨 일로···??”

아이막 부족의 전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며칠 전 사냥제에 찾아왔었던 다른 부족의 족장이었다.

족장뿐 아니라 대 여섯 명의 전사들도 함께였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지쳐보였다.

“부탁이 있소, 용맹한 아이막. 우리 부족의 전사들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소.”

“자초지종을 설명해 보십시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붉은 털의 악마가···이 근방에 나타났소! 내 아들을 포함하여 네 명의 전사가 놈에게 당했단 말이오!!”

절규하듯 외친 나르가 족장의 외침에, 모든 전사들이 순간 얼어붙었다.

정신을 차린 아이막 부족의 전사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추궁하기 시작했다.

“부, 붉은 털의 악마라고요??”

“놈은 여기보다 남쪽에서 주로 출몰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보다 놈이 전사를 넷이나 해쳤다니요??”

“오죽하면 그대들의 구역까지 와서 이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이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놈이 근방 가축을 물어가는 것으로 악명이 높기는 했지만, 사람을 해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막이 입을 열었다.

“놈이, 마수가 된 것이 분명하군요.”

마수라는 말에 다시금 좌중이 잠잠해졌다.

아이신 역시 이 상황을 따라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붉은 털의 악마···그래. 이제 기억이 나. 열 세 살 겨울에는 유독 식량도 부족했는데 사냥의 성과도 시원치 않아 굶는 날이 많았어. 분명 붉은 털의 악마가 나타나 사냥을 방해 받았다고 하셨지.’

그리고 더 중요한 정보가 바로 마수화(魔獸化).

사람 중에 벽을 넘어 일반적인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지는 사람이 나오듯.

짐승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힘을 타고난 개체들이 있다.

그런 강한 개체들이 간혹 더욱 큰 힘을 각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수화이다.

문제는 마수화된 짐승들은, 그때부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붉은 털의 악마는 분명 거대한 불곰이었지. 벽을 넘은 전사가 몇 명은 있어야 잡을 수 있는 놈이 분명하다.’

다만 마수화된 맹수들은 사람을 공격한다는 특성 때문에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당장 아이신만 해도 제국 기병대장 시절 마수를 수 백 마리 이상 잡았다.

제국에서도 변방, 산야족이나 평야족과 맞닿아있는 땅에서는 심심찮게 마수들이 발생했고, 이런 마수를 잡는 것도 엄연히 제국 기병대의 역할이었으니까.

‘붉은 털의 악마는 내년 겨울에나 더 큰 부족의 전사들을 백 명이 넘게 동원하고서야 간신히 잡았다고 들었어.’

아이신이 참여하지 못한 회귀 전의 열 세 살 겨울에도, 분명 붉은 털의 악마가 이곳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때도 나르가 족장이 아들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별 수 없이 이곳에서의 사냥을 포기했겠지.

아마 다른 부족의 구역에서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기 위한 최소한의 짐승만을 잡아 돌아갔을 것이다.

‘곤란한데.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은데 말이야.’

아이신은 첫 날과 마찬가지로 작은 덫을 곳곳에 놓아 조용히 담비 가죽을 모으고 있었다.

지금까지 잡은 담비는 세 마리.

아이신의 계획대로라면 올 겨울에 최소한 스무 장이 넘는 담비 가죽을 확보해야만 한다.

“우선 몸부터 좀 녹이고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신 것 같으니 뭐라도 좀 드시고.”

암만 다른 부족일지라도.

험한 동쪽 변방에서 살아가는 산야족은 서로의 어려움을 다짜고짜 외면하지 않는다.

아이막은 전사들에게 모닥불을 더 크게 피우라 지시하고, 도축해놨던 사슴고기를 구워 나르가 족장과 전사들에게 대접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용맹한 아이막.”

“올 겨울은 유독 혹독하여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할 텐데 이렇게 고기를 나눠 주시다니···”

아이막은 걸신들린 것처럼 고기를 뜯어먹는 나르가 부족의 전사들을 보다가 물었다.

“사냥을 아예 하지 못하신 겁니까?”

“딱 하루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첫 날 사냥이 끝난 그 날 밤, 제 아들이 악마의 습격을 받았기에···”

산야족은 은혜를 입었다면 더 크게 돌려주어야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들을 잃은 족장은 기필코 복수를 해야할 의무가 있다.

나르가 부족은 그리하여 사냥을 중지하고 곧바로 붉은 털의 악마를 추격했다.

그러나, 놈을 잡기는 커녕 오히려 교활한 놈의 습격에 전사들을 차례차례 세 명이나 더 잃은 것이다.

“그런데 용맹한 아이막. 사냥이 잘 된 모양입니다?”

나르가 족장은 허기가 조금 가신 뒤 아이막 부족 야영지를 둘러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야영지 한쪽편에 눈을 쌓아 저장해둔 임시 식량고의 규모만 봐도, 산야족은 사냥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다.

아이막 부족 야영지에는 벌써 눈을 높이 쌓은 커다란 식량고가 몇 개나 보였다.

이 정도면 짐승을 수십 마리는 잡았다는 말이다.

“올해 유독 운이 좋았습니다. 제 아들 아이신이 제 몫을 다해주기도 했고 말입니다.”

“아, 그대의 아들이라면 분명 겨울의 사냥제에서 최고의 전사라 찬사를 받은···”

아이신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르가 족장을 보며 슬쩍 목례를 했다.

그런 아이신을 바라보는 나르가 족장의 얼굴에 수심이 깊게 드리웠다.

“그래, 용맹한 아이막의 아이야. 너도 기억하느냐. 고작 며칠 전에 내 막내 아들과 함께 사냥제를 치렀지 않느냐.”

아이신은 금세 이 나이든 족장을 닮은 한 소년을 떠올렸다.

사냥제에서 아이신이 활약하자 유독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던, 선한 인상의 소년 전사였다.

‘그 아이가 붉은 털의 악마의 습격을 받고 죽은 건가.’

아이신 역시 덩달아 측은한 기분이 들어 나르가 부족 전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마디를 던지려던 그 때였다.

“히히히힝!! 히힝!!”

“바타르??”

저쪽에서 다른 말들과 함께 쉬고 있던 바타르가, 어느새 빠른 걸음으로 아이신에게 다가와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신의 어깨 부근을 깨물거나, 오른쪽 앞 발로 바닥을 몇 번이나 세게 밟아대기까지.

아이신은 그런 바타르의 행동을 의아해하다가, 별안간 바타르의 행동 패턴을 기억해냈다.

‘이건 설마??’

아이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창을 높이 든 후 전사들에게 외쳤다.

“마수가 근처에 있습니다! 무장을!!”

다른 전사들은 아이신의 이런 행동에 당황하였다.

아이막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아이막은 뛰어난 전사의 감으로, 이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창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라!!”

아이막의 명령에 따라 아이막 부족의 전사들과 나르가 부족 전사들까지 모두 자기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신은 바타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후, 신중하게 그곳을 주시했다.

다음 순간···

“쿠워어어어어어어어!!!!!”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포효가 울리며, 거대한 무언가가 뒷발로 몸을 일으켰다.

가슴 부근에만 피를 칠한 듯 붉은 털이 흩날리는, 성인 전사의 키보다 두 배 이상 거대한 곰이었다.

“부, 붉은 털의 악마···!!”

“어째서 이곳에!!”

“놈이 우리를 습격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오!!”

아이신은 당황하지 않고 붉은 털의 악마를 똑바로 응시했다.

붉은 털의 악마와 야영지 사이에 떨어진 거리는 불과 백 보 남짓한 거리.

주변에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과 비교해도, 붉은 털의 악마는 결코 그 크기가 작지 않아 보였다.

“놈이 공격해 올까요?”

“이곳의 사람들만으로 놈을 당해낼 수 있을지···!!”

붉은 털의 악마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는 듯했다.

마치, 그곳에 있는 전사들의 수를 하나하나 헤아리고, 그들의 강함을 가늠해보기라도 하는 듯.

영원과도 같은 찰나가 이어지고 마침내.

- 쿵!! 쿵!! 쿵!!

붉은 털의 악마는 일어선 몸체를 다시 낮추고는, 네 발로 그곳을 천천히 벗어났다.

악마가 물러갔음에도, 그 자리의 전사들은 한참 동안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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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 붉은 털의 악마(2)

“저, 저렇게 큰 곰이라니···!!”

“아니 그보다!! 놈이 방금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 것 아닙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전사들의 당황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백 보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놈의 습격에 전사가 몇 명이나 당했을지 알 수 없는 일.

게다가 더 무서운 사실이 있었다.

“그렇게 큰 놈이 접근하는데,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요??”

붉은 털의 악마는 고작 야영지에서 백 보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녀석의 크기와 속도를 고려하면 코 앞이나 다름없는 거리다.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전사들에게, 아이신이 천천히 말했다.

“바람입니다.”

“바람?”

“야영지를 기준으로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고 있습니다. 붉은 털의 악마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접근하고 있었죠. 바람을 맞으며 접근했기 때문에 놈의 냄새나 기척이 가려진 겁니다.”

“그, 그럴수가···!!”

“곰이 그런 행동을 하다니···!!”

물론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는 것은 사냥을 업으로 하는 산야족들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

문제는 붉은 털의 악마가 이것을 똑같이 따라했다는 데에 있었다.

“다른 맹수라면 몰라도, 불곰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전사들이 당한 것도 설마 이런 이유로···!!”

불곰 역시 후각이 매우 좋은 맹수이지만.

기본적으로 불곰은 잡식성이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냥꾼이다.

불곰이 냄새를 활용하는 방식은 후각을 통해 먹잇감의 냄새를 파악하고, 그것을 뺏는 방식.

신체 구조 역시 조용히 몸을 숨기고 이동하여 순식간에 기습하는 방식과는 맞지 않다.

그런데, 이런 불곰이 마치 기습에 특화된 호랑이 같은 맹수나 보여줄 것 같은 사냥법을 보여준 것이다.

“아이신이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용맹한 아이막! 그게 무슨 말입니까?”

“놈은 마수니까요. 일반적인 불곰들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통 불곰이라면 애초에 사람이 머무는 야영지에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신은 아버지 아이막이 하는 말을 듣고 내심 감탄했다.

‘아버지는 마수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계셨던 모양이네.’

암만 변방에 사는 산야족이라 할지라도, 마수라는 것은 그리 자주 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증거로 이 자리에서 아이막을 제외한 다른 전사들은 모두 붉은 털의 악마를 일반 불곰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아이신. 너는 어떻게 놈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느냐?”

아이막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으나, 아이신은 바타르의 갈기를 쓰다듬어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바타르가 불안하다는 듯한 신호를 보내기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것뿐입니다.”

“영리한 말이로구나. 다른 말들은 놈이 접근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아이신이 제국 기병대장 시절 마수를 수백 마리 토벌하는 동안.

당연히 바타르는 모든 전투에서 아이신과 함께였고, 마수와 일반 짐승들의 차이를 학습했다.

방금 전처럼 마수가 근처에 다가오면 바타르가 먼저 알아차리고 신호를 주는 것 역시 전생에 흔하게 겪었던 일이다.

어쨌든 아이신과 아이막의 말을 들은 전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반적인 불곰보다 훨씬 크고 강한데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라니···”

“여기 전사들만으로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전사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아이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벽을 넘은 전사는 아버지와 나르가 족장, 그리고 나까지 셋인가.’

회귀 전 수백 마리의 마수를 잡아본 아이신은, 붉은 털의 악마를 잠깐 마주한 것으로 놈의 전력을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근방 부족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는 것 치고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아이신이 파악한 놈의 강함은 기껏해야 자신이 전생에 상대했던 마수들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만, 약한 마수라 할지라도 지금의 전력으로 상대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건 그렇지 않다.

‘놈과 정면에서 맞붙을 기회가 있다면 모를까, 기습을 즐겨 쓰는 놈이라면 쉽지 않아.’

회귀 전, 근방의 큰 부락에서 붉은 털의 악마를 사냥했을 때는 백 명이 넘는 전사가 동원되었다고 들었다.

아마 그 중에 벽을 넘은 전사는 많아봐야 세 네 명 정도.

하지만 다른 전사들이 놈을 넓게 포위해서 몰아넣고, 벽을 넘은 전사들이 궁지에 몰린 놈을 협공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 인원이 놈을 몰아넣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군.’

벽을 넘은 사람들을 포함해도, 여기 있는 전사들은 고작 열 대여섯명 정도가 고작이다.

이 정도 인원으로는 사슴이나 멧돼지는 몰아넣을 수 있어도, 저렇게 크고 강한 마수를 몰아넣을 수는 없다.

전사들의 불안이 전염되기 전에, 아이막이 다급히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놈을 어떻게 할지는 차차 생각하도록 합시다.”

동쪽 변방의 낮은 짧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붉은 털의 악마와 조우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시간.

놈을 추격하려 해도, 지금부터는 불가능한 시간이다.

“놈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두 함께 행동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어떻습니까? 나르가 족장님?”

“용맹한 아이막. 크나큰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오. 사냥의 신의 축복이 그대 부족에게 널리 이롭기를···!!”

“다 돕고 사는 거지요. 놈이 언제 나타날 지 모르니, 밤새 보초를 세워 경계를 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그 날은 전사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며 불안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막은, 아들이 먼저 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신. 벌써 일어났느냐.”

“예, 아버지.”

아이신은 주변에 쳐놓은 담비 덫을 살펴볼까 하다가, 붉은 털의 악마를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대신 자신의 창과 활 등을 점검하고 보수하던 도중, 아이막이 일어난 것이다.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나 보구나.”

“마수가 나타난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까요.”

“그렇지. 붉은 털의 악마라···”

아이막은 고민에 빠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상대하기 버거운 마수가 나타난 이상, 이곳에서 얼른 철수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족장으로서의 무게감이, 그에게 선뜻 결정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신이 있어준 덕에 올 겨울 사냥은 유독 잘 풀렸지. 이 좋은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아. 겨울은 이제 시작이니, 조금이라도 많은 짐승을 잡고 싶은데···’

첫 3일 동안 크고 작은 짐승 수십 마리를 잡기는 했지만.

동쪽 변방의 겨울은 혹독하고 매우 길다.

잡은 짐승을 모두 가지고 부락으로 돌아가봐야, 보름 정도면 모두 소비하게 될 것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아이막은 별 생각없이 아이신에게 물었다.

“아이신.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붉은 털의 악마를 피해 부락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보느냐?”

아이신은 아이막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회귀 전에는 분명 이 상황에서 붉은 털의 악마를 피해 돌아오셨겠지.’

그 때문에 열 세 살의 겨울은 유독 식량난에 시달렸고, 아이신과 동생들은 매일 배고픔에 허덕이며 쥐죽은 듯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솔직히, 아무도 아사(餓死)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겨울이 아니면 이렇게 사냥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 주변 강한 부족들과 맞서 싸울 힘을 어서 기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당장 아이신의 부족을 멸망시킨 북쪽 벨린다의 부족 외에도.

아이막의 부락보다 더 남쪽을 주름잡고 있는 강한 부락들도 몇 개나 있다.

이들과 맞서 싸울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정말 한시라도 낭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남은 겨울을 보낼 식량을 확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마수는 강해. 만약 놈을 상대하다가 상하는 전사가 많이 나온다면, 그 때는 부락이 더 힘들어질게다.”

“아버지는 혹시 마수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래. 아직 벽을 넘기 전에, 다른 전사들과 딱 한 번 상대해 봤단다. 놈은 마수화된 오소리였는데, 놈을 상대하느라 전사가 몇 명이나 죽어나갔었지. 하물며 곰이라니···”

아이신은 그제야 아이막의 걱정을 이해했다.

‘오소리 마수라니. 그런 놈을 상대하셨으니 겁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산야족과 달리 발전한 제국에서는 마수를 그냥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류를 시도했다.

제국은 이를 마수학이라 칭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마수학의 기본 원칙 중 이런 것이 있었다.

<강한 짐승이 마수화 되는 것보다, 작은 짐승이 마수화 되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

곰이나 호랑이 같이 강한 짐승들은, 강한 만큼 다른 짐승들보다 수월하게 벽을 넘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짐승들의 경우 마수화가 된다 해도 덩치가 더 커지고, 힘이 조금 더 세지고 지능이 조금 더 높아지는 정도가 고작.

문제는 작고 약한 짐승이 마수화를 했을 때다.

‘사냥한 수백 마리의 마수 중 가장 까다로운 놈은 토끼, 여우, 까치같은 놈들이었지. 특히 여우 마수는 인간보다 더 지능이 높은 것 같았어.’

원래 같으면 강한 짐승들의 먹잇감밖에 되지 않는 약한 짐승이 천운을 타고나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보다 더 강한 포식자를 몇 번이나 역으로 죽이는 데에 성공한 경우.

이런 마수들은 단순히 힘만 세지는 것이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능력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토끼 마수의 경우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돌아다니다가 땅에서 튀어오르는 식으로 기습을 했고

여우 마수의 경우 근방 늑대들을 자기 휘하에 넣고 마치 인간 장군처럼 놈들을 통솔했다.

아이막이 상대한 오소리 마수는 마수학에 따르면 그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겠지만, 곰이나 호랑이 마수보다는 훨씬 까다롭고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납득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여기서 아버지께 마수학 개론이 어쩌네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이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젯밤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말해 보거라, 아이신.”

“사실은, 요즘 들어 머릿속에서 자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사냥제 전날부터였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몸에 알 수 없는 힘이 깃든 것 같았습니다. 활을 쏘면 명중하고, 창을 들면 상대의 허점이 보였습니다.”

“그게 정말이더냐?!”

아이막은 숨을 삼켰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아들이 자신을 닮아 뛰어난 전사의 자질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암만 그래도 열 세 살 짜리 소년이 최고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명중시키고.

자기보다 몸집이 두 배는 큰 소년을 마상 창술로 거뜬히 이기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설마 정말로 우리 아이신이, 신의 선택을 받은 전사였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이 아이신의 말대로 사냥의 신의 선택과 계시를 받았다면 납득이 간다.

아니, 그것 말고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들었느냐, 아이신!!”

“붉은 털의 악마를 꼭 토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힘을 제게 내려주겠노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붉은 털의 악마를 피해 도망갔던 과거와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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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붉은 털의 악마(3)

“이 일은 다른 전사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거라.”

아이막은 아이신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은 굉장한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어.’

산야족에게 사냥의 신의 선택을 받은 전사는 유명한 전설이고, 삼백 년 전 실제로 신의 선택을 받은 대족장도 있었다.

그 때문에 모든 산야족 전사들은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거나, 자신의 아들이 신의 선택을 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만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이랬다.

- 신의 선택을 받은 전사가 다른 부족에서 나온다면, 모든 ‘숲의 사람들’이 그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을 지키기 힘든 약한 부족이야 쉽게 따르겠지만.

이미 강대한 힘을 가진 대부락들 입장에서 그런 전설적인 전사가 나오는 것은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닌 것이다.

“물론입니다, 아버지.”

“좋다. 다른 전사들에 대한 것은 맡겨두거라. 그리고 신의 계시가 내려온다면 언제라도 아비에게 알려다오.”

아이막은 밖으로 나와 전사들을 준비시켰다.

그러고는, 족장의 위엄을 담아 큰 소리로 선언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악마에게 우리의 터를 내어주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우리는 나르가 부족을 도와 붉은 털의 악마를 사냥하도록 하겠다!”

아이막의 선언을 들은 나르가 부족 전사들과 족장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어려운 결정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맹한 아이막.”

“과연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에 걸맞는 최고의 전사십니다. 이로서 죽은 전사들의 빚을 갚아줄 수 있겠군요.”

평소 사냥 대열처럼 본대와 좌우 날개로 부대를 구성한 아이막은, 자신의 옆에서 바타르를 타고 걷는 아이신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냥의 신께서 혹시 구체적인 방안을 알려주시지는 않더냐?”

아이신은 아버지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순순히 믿어주셔서 일이 잘 풀리겠어.’

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산야족이라면 그 어떤 전사라도 사냥의 신을 진심으로 믿고 기도 드리기는 하지만.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그걸 누가 쉽게 믿겠는가?

‘사냥제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인 것이 정답이었어. 그게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순순히 믿어주셨을 리가 없지.’

아이신은 태연하게 아이막에게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별 말씀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놈의 흔적을 쫓아가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건 계시와는 다른 것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아직 이것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우선 제가 가장 선두에 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암만 편리하다 해도 아무때나 사냥의 신의 목소리가 들려서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아이신은 적당히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아이막의 질문을 넘긴 후, 좌익 날개의 선두에 섰다.

‘사실 이건 사냥의 신보다는 바타르가 전문이지.’

앞서 말했듯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특정한 개체는 벽을 넘는다.

그리고 아이신이 볼 때, 바타르 역시 회귀 전에 분명 벽을 넘은 것 같았다.

다른 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미묘한 명령도 바타르는 언제나 완벽하게 이해했고.

마수의 기척을 느끼거나 마수의 흔적을 토대로 추격하는 것 역시 다른 말들은 하지 못하는 바타르만의 특기였으니까.

‘부탁한다, 바타르.’

아이신은 회귀 전의 경험을 살려 붉은 털의 악마의 흔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부자연스럽게 꺾여진 낮은 나뭇가지를 찾거나, 눈밭에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을 찾으면 곧바로 바타르에게 보여주고.

그러면 바타르는 그게 마수의 흔적인지 그냥 짐승의 흔적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비슷한 곳을 수색해도, 바타르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여기도 아닌가.’

동쪽 변방의 거친 산과 숲에는 여러 맹수들이 산다.

붉은 털의 악마가 이 구역으로 흘러들어왔다고 한들, 다른 맹수들이 곧바로 달아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찾은 흔적들은 아무래도 다른 짐승들의 흔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타르는 마수가 내뿜는 특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까.’

회귀 전에도 마수의 흔적을 찾기 곤란할 때면 늘 바타르의 도움을 받았었다.

바타르보다 훨씬 후각이 좋은 제국의 군견도 마수의 기척은 찾을 수 없었는데, 그건 마수의 기척이 후각과는 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몇 군데의 흔적들을 더 둘러보는데, 얼어붙은 계곡 근처에서 드디어 바타르가 반응했다.

“히히힝!! 히힝!!”

바타르가 그 자리에 멈춰서 투레질을 시작하자 나란히 걷던 지르칼도 멈춰섰다.

“아이신. 네 말이 갑자기 왜 저러느냐?”

“뭔가를 느낀 것 같습니다.”

“허허···정말 영리한 말이구나. 붉은 털의 악마가 다가오는 것도 가장 먼저 알아채더니만.”

아이신은 말에서 내린 후 바타르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바타르는 눈밭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얼어붙은 계곡 상류를 목으로 가리키며 또 다시 투레질을 했다.

“히힝!! 히히힝!!!”

아무래도 상류로 올라가야할 것 같기에, 아이신은 지르칼에게 말했다.

“본대와 우익 날개 정찰대를 모두 이곳으로 불러모으죠.”

“뭔가를 찾아냈느냐?”

“예. 바타르의 반응을 봐서는 계곡 상류에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다. 내가 가서 모두를 불러오마.”

잠시 후, 지르칼이 모든 전사들을 불러왔다.

“아이신. 뭔가를 찾았느냐?”

“예. 계곡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다. 다들 주변을 경계하며, 상류로 오르도록 한다!”

산야족의 겨울 사냥은 몰이사냥이기 때문에, 산맥의 깊숙한 계곡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곳은 봄이나 여름에 약초나 나무 열매 등의 채집을 위해 드나드는 곳.

바타르를 따라 계곡 상류로 올라가자 점점 더 깊은 골짜기가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들이 들어가기 힘들 것 같은데요.”

“아이막 족장. 어떻게 합니까?”

아이막은 살짝 아이신쪽을 곁눈질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전사들에게 말했다.

“우리 부족의 전사들은 이곳에서 말을 지키고, 나와 아이신, 지르칼과 나르가 부족 전사들은 걸어서 들어가도록 하겠다.”

눈이 푹푹 쌓인 깊은 산중으로 걸어들어가자, 곳곳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전사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붉은 털의 악마가 남긴 발자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주변에 놈이 머무르고 있는 걸까요?”

“무슨 발자국 크기가···”

눈밭에 찍힌 발자국은, 다 큰 산야족 장정이 그 자리에 누워도 상체를 모두 덮을 만큼 거대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수색하는데, 나르가 족장이 별안간 큰 소리로 외쳤다.

“모, 모두 이쪽으로!!!”

나르자 족장의 외침을 들은 모두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주변에서 가장 큰 나무 바로 밑에, 부자연스럽게 쌓인 눈과 거기에 파묻혀 있는 팔이 보였다.

나르가 족장은 팔에 매여있는 가죽 띠를 보고 이성을 잃은 듯 그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이알···!! 내 아들아···!!”

아이신과 아이막도 상황을 눈치채고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눈을 파헤치자, 반쯤 먹혀버린 어린 전사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잔악무도한 놈이···!!”

“다른 전사들의 시체도 있을지 모릅니다. 찾아봅시다.”

이윽고 그들은 주변 곳곳에 파묻혀 있던 다른 전사들의 시신을 차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시체는 하나같이 내장 부분이 뜯어먹혀 있었고, 엉덩이나 넓적다리 등 살코기가 많은 곳들도 부분부분 뜯어먹힌 상태였다.

‘이런 광경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아이신은 착잡한 심정으로 통곡하는 나르가 부족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제국 기병대장 시절 토벌한 마수의 대부분은 이런 맹수형 마수들이었다.

다만 기병대가 어디 한가한 집단도 아니고, 그들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인명 피해가 크게 일어난 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겪었다.

“시체를 모두 들어라. 가지고 돌아가야한다!”

“옛···!!”

나르가 족장이 명령하자 나르가 부족 전사들이 시체들을 하나씩 들고 옮기려 했다.

아이신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르가 족장에게로 갔다.

“나르가 족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용맹한 아이막의 아이야. 이곳을 잘 찾아내 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시체를 곧바로 부락으로 옮길 생각이십니까?”

“물론이다. 모두 가족이 있는 전사들이다. 발견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전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건 안 됩니다.”

아이신이 단호하게 말하자, 나르가 족장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냐! 그럼 우리가 죽은 전사들을 이곳에 버리고 가야한다는 말이더냐!”

나르가 족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어느새 아이막도 아이신의 옆으로 와서 팔짱을 끼고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붉은 털의 악마는 아직 토벌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시체를 부락으로 옮겼다가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화를 당한다고?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이냐?”

“모르시겠습니까? 붉은 털의 악마가 시체를 이곳에 묻어둔 까닭을 말입니다. 놈은 상하기 쉬운 내장을 먼저 먹은 후, 나머지 부위를 저장해둔 겁니다. 나중에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나르가 부족 전사들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겨울철의 곰은 먹이를 한 번에 다 먹지 않고 남겨서 눈에 파묻어 놓는데, 분노에 눈이 멀어 이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아이신은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을 읽고 재빨리 설득을 이어나갔다.

“곰은 자기 먹이에 대한 집착이 무섭도록 강합니다. 마수가 되어도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집착이 더 강해지겠지요. 시체를 부락으로 가지고 간다면, 붉은 털의 악마는 무조건 부락을 덮칠 것입니다.”

그제야 나르가 족장도 아이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당황한 그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이대로 놈이 전사들의 시신을 뜯어먹는 것을 놔둬야 한단 말이냐.”

아이신은 그런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전생에도 시체를 앞에 두고 판단이 흐려진 가족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상황이 괜찮은 편이다. 저런 마수에 의해 마을 하나가 전멸하는 일도 흔했으니.’

아이신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일은 회귀 전에도 몇 번이나 겪었고, 비슷한 상황에서 마수를 잡기 위해 유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늘 대장인 아이신의 몫이었으니까.

“나르가 족장님.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이 시신들은, 바꿔 말하면 붉은 털의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한 전사들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물?”

“우리 인원으로는 붉은 털의 악마를 몰아 넣어서 사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전사들의 시신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놈은 자기 먹이에 대한 집착이 강하니, 이걸로 놈을 꾀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사들의 시신을 어찌 그런 일에 쓴단 말이냐.”

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막이 아이신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나르가 족장님. 아이신의 말이 맞습니다. 전사들의 시신을 곧바로 장례지내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보다 복수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용맹한 아이막···”

“우리가 돕겠습니다. 기필코 붉은 털의 악마의 숨통을 끊어, 죽은 전사들의 넋을 함께 위로합시다.”

“·········”

나르가 족장은 한참을 망설이는 듯 했지만, 이윽고 아이막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오, 용맹한 아이막. 그래도 한 부족의 장이라는 자가, 분노로 인해 판단이 흐려졌구려. 그대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리다.”

“큰 결심 하셨습니다. 함께, 악마를 꼭 잡아냅시다.”

죽은 전사들의 시신은 그렇게 거두어졌다.

야영지로 돌아온 아이막은 지르칼에게 곧바로 지시했다.

“지르칼. 야영지 주변에 큰 함정들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설치해야하네.”

“이미 다른 놈들에게 준비를 시켰습니다요.”

죽은 전사들의 시신을 야영지 중앙에 놓아둔 후, 전사들은 주변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덫을 놓았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불을 몇 개씩이나 더 크게 피웠다.

아이막은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아이신에게 물었다.

“아이신. 정말 이렇게 하면 되겠느냐? 놈이 유인이라는 것을 눈치챈다면···”

“괜찮습니다. 놈은 분명 걸려들 겁니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하니 한결 편안해지는것 같구나.”

아이막은 분명 개인의 무력으로만 따지면 근방에서 가장 강한 전사지만.

다른 족장들에 비해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스무 살이나 어린, 아직 젊은 족장이다.

막내 아들을 잃은 나르가 족장과는 아버지와 아들뻘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는 만큼, 다른 족장들에 비해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겪어본 적 없는 이런 상황에서 믿음직한 장남의 행동이 알게 모르게 큰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아이신도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다.

아이막의 말처럼, 놈이 일반적인 곰보다 훨씬 영리해졌다면 이게 유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놈의 행동 패턴은 짐승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 지금까지 만나본 불곰 마수 중에 그 정도로 머리를 쓰는 놈도 없었고.’

아이신이 믿는 것은 역시 회귀 전 수십 년 동안이나 쌓인 자신의 경험이다.

그렇게 동쪽 변방의 짧은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고, 곧이어 밤이 찾아왔다.

“······”

“······”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붉은 털의 악마는 다가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전사들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불안하게 주변을 경계하던 그때였다.

“···히히힝!! 히힝!!”

아이신은 바타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계획이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했다.

“악마가···옵니다!!”

아이신이 전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기 무섭게.

야영지 동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곳곳에 피워놓은 불빛으로 놈의 모습이 똑똑히 드러난 순간···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털의 악마가 포효했다.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속도로, 놈은 야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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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 붉은 털의 악마(4)

“쿠워어어어어어!!!!!”

붉은 털의 악마는 예상대로 정확히 죽은 전사들의 시신을 쌓아놓은 곳으로 달려왔다.

아이신과 전사들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으며, 대열을 단단히 유지했다.

악마의 앞발이 전사들에게 닿을 만큼 가까이 접근한 순간···

- 쿵!!!!!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악마의 몸체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놈이 함정에 빠졌다! 사격!!!”

- 핑!!!

- 핑!!!

- 핑!!!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악마가 빠지자, 전사들은 일제히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털의 악마는 머리와 앞발을 마구 휘두르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냈다.

그럼에도 미처 막지 못한 화살들이, 놈의 몸과 머리 곳곳에 박혔다.

‘약한 편이래도 마수는 마수군. 생각만큼 함정에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함정 바닥에는 짐승의 뼈를 뾰족하게 갈아만든 것들을 설치해두었다.

일반 불곰이었다면 아마 이것으로도 큰 상처를 입거나 곧바로 절명했을지도 모르지만.

마수화된 불곰인 붉은 털의 악마의 두꺼운 가죽을 뚫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깊은 함정이지만 놈이 언제 빠져나올지 모른다. 최대한 큰 상처를 입혀야만···!!’

다른 전사들과 함께 뒤에서 활을 쏘던 아이신은 아이막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활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막은 아이신의 말을 듣고 손을 높이 들었다.

그것으로 모든 전사들은 사격을 멈췄다.

동시에, 미리 역할을 정한 전사들이 긴 창을 들고 악마에게 다가갔다.

“전열! 일제히 놈을 찌른다!!”

아이막의 명령에,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놈을 향해 창을 뻗었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털의 악마는 미친듯이 팔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찔러져오는 창을 쳐내려 애를 썼다.

마수의 가죽은 분명 일반 짐승보다 더 두껍고 튼튼하지만.

그렇다 해서 날카로운 화살촉과 창끝을 무한정 막아낼 수는 없다.

- 우지끈!!

놈이 휘두른 눈먼 앞발치기에 두어 사람의 창대가 그대로 부러졌지만, 아이막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손을 들었다.

“전열! 물러나고 후열 준비!”

그 말과 함께 전열의 전사들은 창을 회수했다.

창이 부러진 전사들은 재빨리 부러진 창의 끝부분을 회수하고, 예비용 창대 끝에 다시 창날을 단단히 묶었다.

“후열! 일제히 놈을 찌른다!!”

붉은 털의 악마가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전사들의 찌르기가 다시 이어졌다.

아이신은 전열에서 다시 대기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지금까지는 전혀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낮에 나르가 부족 전사들의 시신을 야영지로 가져온 후.

아이막 부족과 나르가 부족 전사들은 심혈을 기울여 함께 함정을 파고, 놈을 상대할 준비를 갖췄다.

일부러 야영지 주변 길을 평평하게 골라 놈이 달려오기 쉬운 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의도하지 않은 길에는 나뭇가지나 커다란 돌덩이 등을 쌓아 놈의 진로를 제한했다.

그 결과 놈은 정확히 전사들이 의도한 루트 중 하나로 달려왔고, 보기 좋게 함정에 빠진 것이다.

‘생각보다는 멀쩡한 것 같지만, 이것도 상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놈이 함정에 빠진 후의 상황도 몇 번이고 연습하며 대비했다.

먼저 일제 사격을 통해 놈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 후 창으로 놈을 사정없이 찌른다.

예비용 창대를 몇 개나 준비해두고, 창대가 부러지면 즉시 회수하여 그 자리에서 보수한다.

모두 아이신이 제국 기병대장 시절 마수를 사냥할 때 사용했던 방법들이다.

‘다만 아직이야. 약한 축에 든다해도 놈은 마수. 이대로 허무하게 잡힐 리가 없어.’

그리고 아이신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몇 번이나 전사들의 찌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붉은 털의 악마가, 별안간 더욱 크게 포효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곰의 울음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절한 포효.

아이신은 재빨리 아이막에게 외쳤다.

“함정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좋다! 모두 놈에게서 거리를 둔다! 불 주변으로 피하라!!”

아이막이 그렇게 외치자마자 전사들은 이곳저곳 정해진 위치로 흩어졌다.

다음 순간, 붉은 털의 악마가 두 앞발로 땅을 강하게 누르더니, 그대로 그걸 도움 닫기 삼아 함정에서 뛰어올랐다.

“고, 곰이 저런 움직임을···!!”

“당황하지 마라! 이것도 모두 예상한 대로다!!”

붉은 털의 악마는 함정에서 벗어난 후 시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놈의 전신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고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공격은 충분히 먹혔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 그리고 아이신은 짧은 창을 손에 들고 세 방향에서 놈을 크게 포위했다.

붉은 털의 악마는 셋을 하나씩 둘러보더니, 가장 체구가 작은 아이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워어어어어어어!!!”

아이신은 간발의 차이로 놈의 움직임을 피하며, 놈의 옆구리에 짧은 창을 박아넣었다.

동시에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이 붉은 털의 악마를 협공했다.

“이놈!! 막내 아들의 원수!!”

“흐야아아아압!!”

붉은 털의 악마는 아이신을 쫓던 것을 멈추고 자신을 공격하는 두 전사에게 돌아섰다.

“쿠우워어!! 쿠워어어어!!!”

아슬아슬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주변 곳곳에 쌓아놓은 방해물들 때문에 붉은 털의 악마는 생각만큼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세 전사는 민첩하게 놈의 움직임을 피하며 놈을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유도했다.

‘벽을 넘은 전사가 그래도 셋이나 있어서 다행이다. 둘이었으면 이 작전도 힘들었을 테니.’

이 자리에 벽을 넘은 전사는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 그리고 아이신까지 셋.

아이신이 이런 류의 마수를 상대해본 결과, 벽을 넘은 전사 둘만 가지고는 마수 하나를 온전히 상대하기 쉽지 않다.

아마 회귀 전 완전한 기량의 아이신 같은 전사가 둘 정도라면 겨우 가능했을 것이고, 그마저도 부상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벽을 넘은 전사가 세 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놈이 암만 기민하게 움직인다 해도, 벽을 넘은 세 명의 전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야영지는 철저히 놈의 동선을 방해하기 위해 낮부터 심혈을 기울여 구조물들을 설치했다.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 아이신은 붉은 털의 악마의 공격을 힘겹게 피해가며 놈을 다른 함정으로 유인했다.

이윽고···

- 쿠구구구궁!!

보기 좋게 다른 함정에 빠진 붉은 털의 악마가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포효했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억!!!!”

아이신은 본능적으로, 이번에 놈이 입은 피해가 치명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함정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십시오!!”

맹수형 마수들에게는 일반 짐승과 다른,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그 패턴은 마수의 부상이 얼마나 누적되느냐에 따라 다른데, 놈이 첫 번째 함정에서 처음 빠져나왔을 때가 그러했다.

놈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원래 힘과 속도를 초월했고, 그때부터 벽을 넘지 않은 전사들은 절대 놈을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신은 그런 상황이 오면 벽을 넘은 전사들만으로 놈을 상대해야 한다고 아이막에게 미리 언질을 했다.

그리고 맹수형 마수가 이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피해를 받아 전투를 속행하기 힘들 정도가 되면.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 휘이이익···

- 쿵!!

- 쿵!! 쿵!! 쿵!!

붉은 털의 악마는 두 번째 함정에서 어렵사리 도약하여 벗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영지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이막은 곧바로 전사들을 불러모았다.

“모두 잘 해 주었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마수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것은, 우리 부족에게 사냥의 신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사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나르가 족장이 아이막에게 다가왔다.

“용맹한 아이막.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나르가 족장의 얼굴에는 당장이라도 놈을 추격하고 싶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막내 아들과 전사들의 원수를 하루라도 빨리 갚아주는 것이, 족장이자 아비인 그의 의무니까.

그러나 아이막은 고개를 저었다.

“나르가 족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밤은 위험합니다. 놈이 어둠 속에서 기습이라도 한다면, 또 전사들의 희생을 치를지도 모릅니다.”

아이막은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정말 아이신이 말한 대로 되었군.’

놈을 맞이하기 위해 함정을 파고 방해물을 설치하는 것이야 다른 산야족들도 흔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붉은 털의 악마가 보여준 행동.

아이신은 놈이 함정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것을 예상했고, 그러고 나면 원래보다 한층 강해질 것이라 아이막에게 말했다.

그리고 놈을 거기서 더 한층 몰아붙여 큰 상처를 입힌다면, 놈이 이곳에서 도망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놈이 도망가면, 곧바로 전사들을 쉬게 해야 합니다. 사냥의 신께서는 날이 밝은 후 놈을 추격하라 하셨습니다.

아이막의 마음 속에, 아이신을 향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약간의 의심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어린 아이신이 자기 혼자 힘으로 어떻게 예상한다는 말인가?

이런 건 아이막이 알기로 그 어떤 지혜로운 산야족 전사도 알지 못하는 일인데 말이다.

“날이 밝으면 곧바로 놈을 추격한다! 교대로 보초를 서고, 다른 전사들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

완전히 어둠이 걷히기 전, 야영지의 전사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막은 사냥한 멧돼지 고기를 아낌없이 굽고 국을 끓여 전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정말 붉은 털의 악마를 사냥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올 겨울은 물론이요 부락이 크게 성장할 기회가 된다.’

마수는 분명 두렵고 위험한 존재지만.

그런 강한 마수를 잡는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장 마수의 뼈는 일반 짐승의 뼈보다 훨씬 단단하고 견고하다.

마수의 뼈로 화살촉과 창날을 만들면, 견고한 가죽이나 갑옷도 충분히 뚫어낼 수 있다.

게다가 마수의 가죽은 권력자들이 무척이나 탐을 내는 물건.

제국이나 왕국의 상인들에게 마수의 가죽을 비싸게 팔면, 부락에 필요한 가축이나 농기구 등을 사올 수도 있을 것이다.

밤의 장막의 걷히기 시작하자마자, 아이막은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놈을 추격한다! 사냥의 신이 우리를 굽어살펴주시니, 기어코 악마를 처단할 것이다!!”

그들은 붉은 털의 악마가 도망친 길을 따라 빠르게 추격을 개시했다.

곳곳에 흘러내린 마수의 피와, 눈밭에 찍힌 거대한 발자국이 정확히 놈의 도주 경로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어제 나르가 부족 전사들의 시신을 발견한 계곡 상류에 도달했다.

“예상대로 이 근처에 놈의 은신처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들과 전사들의 원수···모습을 드러내라!!”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토대로, 그들은 더욱 깊은 숲 속으로 발을 들였다.

얼마 정도 걸었을까?

그들의 눈 앞에, 나뭇가지와 수풀로 가려진 토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하다. 이곳이 놈의 은신처다.’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그들은 거기 멈춰서서 전사들을 통제했다.

“놈이 은신처에 숨어들어간 것이 분명하군요.”

“용맹한 아이막. 입구에 불을 피워 놈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르가 족장이 제안한 것은 너구리나 오소리를 잡을 때 흔히 쓰는 방식이다.

아이막도 거기에 동의하여, 전사들은 얼른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굴 속으로 흘러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붉은 털의 악마는 굴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놈이 벌써 숨을 쉬지 못해 나와야 하는데···”

의아해하는 전사들 사이에서, 아이신은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을 했다.

‘마수의 은신처는 일반 짐승들의 은신처와 달라. 불 좀 피운다고 놈을 꾀어낼 수는 없지.’

마수학 개론에 따르면, 마수가 은신처로 삼은 곳에는 특수한 힘이 깃든다.

이는 마수가 은신처에서 잠을 자는 동안 자연스레 깃드는 것인데,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런 식의 공격을 대부분 무효화 시킨다.

그러니 밖에서 암만 불을 피워봤자, 놈이 숨을 쉬지 못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수는 은신처에서 쉬는 동안 믿기 힘들만큼 빠르게 자신의 몸을 회복하지. 시간을 줘서는 안 돼.’

아이신은 결심을 하고 짧은 창을 들었다.

아이신은 마수의 은신처 입구에 피워놓은 불을 꺼버린 후, 서서히 입구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아이막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이신! 뭘 하는 게냐?”

“불을 피우는 것으로는 놈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느냐?”

아이신은 아이막과 다른 전사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마수의 굴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놈을 밖으로 내보내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 자리의 모든 전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신을 주목했음에도, 아이신은 그저 담담하게 다른 전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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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 붉은 털의 악마(5)

“암만 상처를 입었다 해도 놈은 마수다! 마수의 굴에 단신으로 들어가겠다니, 너무 위험하다!”

아이막은 필사적으로 아이신을 만류했다.

어젯밤, 붉은 털의 악마와 혈투를 벌이며 놈의 강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터다.

그러니 아이막 입장에서는 아이신이 하는 말이 제 발로 죽으러 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들린 것이다.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나 아이신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장 아이신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놈은 치명상을 입긴 했지만 하루면 회복할 것으로 보였다.

‘피를 엄청 많이 흘리긴 했지만, 놈의 팔이나 다리가 잘린 것도 아니니 말이야.’

앞서 설명했듯, 마수학 개론에 따르면 마수가 머문 은신처는 마치 마법사의 공방처럼 마수 특유의 기가 깃든다.

이 은신처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격 등을 어느 정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마수의 회복력을 크게 올려주는 역할도 했다.

아이신의 경험으로 볼 때, 사지가 멀쩡한 붉은 털의 악마는 은신처에서 하루만 휴식을 취하면 다시 전투가 가능할 정도까지 회복할 것이다.

‘시체를 이용한 유인책은 두 번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야. 이 인원으로 놈을 여기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다음 번에는 불가능하다.’

이건 비단 마수가 아니라 짐승이라도, 지능이 높은 맹수들은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

인원이 적은 아이막 부족과 나르가 부족의 전사들은 상처를 회복한 붉은 털의 악마를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놈을 어떻게든 피해가며 겨울 수렵을 마쳤다 하더라도.

일반 짐승에 비해 인간에게 더욱 공격성을 보이는 붉은 털의 악마가 이후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다.

‘예전에도 숨통을 끊지 못한 마수가 도망간 뒤 다시 돌아와 그 지역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한 적이 있었지.’

그러니까 지금, 놈이 상처를 입고 굴에 틀어박혀 있는 지금 놈의 숨통을 끊어야만 한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아이신은 그러나 아이막에게 씨익 미소지어주었다.

“저는 위험해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말입니다.”

아이신의 그 당당한 태도에, 아이막은 다시금 깨달았다.

‘아, 이 역시 아이신에게 사냥의 신께서 계시를 내린 것인가?’

지금은 모든 전사들이 아이신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사냥의 신이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당장 아이신에게 사냥의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철저히 함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이막 본인이 아닌가?

“제가 들어가면 붉은 털의 악마는 분명히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놈은 약해진 상태이니 포위하고 계시다가 일제히 놈을 공격하십시오.”

아이신은 그 말과 함께 굴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노릿한 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이신은 회귀 전 어느 늙은 평야족 사냥꾼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 은신처에 틀어박힌 곰을 무슨 수로 유인합니까? 놈은 마수라 굴 입구에 연기를 피우는 것도 먹히지 않습니다.

- 허허. 젊은 기사 양반. 언젠가 도움이 될 테니 꼭 기억해 두시게. 곰이라는 놈은, 자기 굴에 들어온 침입자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네.

아이신은 그때 막 제국 기사단에 들어간 신참이었고, 지금처럼 마수화된 불곰 토벌 임무를 받았었다.

기사단이 힘을 합쳐 어떻게든 놈에게 상처를 입히고 굴 속으로 몰아넣었는데, 놈은 무슨 수를 써도 은신처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 어디 마법사님이라도 모셔와서 굴 속에 폭발 마법을 때려 박으면 되려나?

- 아서라. 귀한 몸이신데 이런 하찮은 임무에 투입시킬 것 같냐.

그곳은 제국 동쪽 변방에서도 꽤 북쪽에 위치한 평야족의 구역이었고, 기사단은 놈을 토벌할때 평야족 사냥꾼 노인의 도움을 받았었다.

기사단이 어찌할 줄을 몰라하자, 노인은 잘 보라고 말한 후 창 하나만 들고 마수의 은신처로 기어 들어갔던 것이다.

- 기사 양반이 곰 입장이라면, 매일 잠을 자는 침대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싶겠나?

- 놈이 밖으로 나오거든 기사 양반들이 마무리를 지어주게.

잠시 후, 정말로 마수화된 곰이 굴 밖으로 튀어나왔고 아이신과 다른 기사들은 힘을 합쳐 놈의 목숨을 끊는 데 성공한 것이다.

‘꽤 강렬한 경험이었고, 이후 우리의 보고를 토대로 마수학 개론의 내용이 상당부분 보충되었지.’

다만 그럼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맹수형 마수들은 자기 은신처에 들어온 침입자를 안에서 해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는 했지만.

드물게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 마수도 발견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 경험에 의지할 수밖에 없겠지.’

어차피 올 겨울에 이 마수를 잡지 못하면 많은 것이 힘들어진다.

동생들을 허무하게 앗아간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신은 얼마든지 자기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이신은 망설이지 않고 토굴 끝까지 자기 몸을 확 밀어넣었다.

- 쿵!!

끝까지 몸을 밀어넣자, 아이신은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휴식을 취하던 붉은 털의 악마가, 고개를 돌려 아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쿠워어어어!!”

아이신은 귀를 찢는듯한 놈의 포효를 들으며 짧은 창을 꽉 쥐었다.

놈의 포효는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포효라기보다, 예상하지 못한 침입자를 보고 놀라 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그래, 나는 너의 잠을 방해하러 온 침입자다.

나가지 않는다면 네 피로든 내 피로든 방에 칠갑을 해 줄 테다.

그게 싫다면 밖으로 나가라.

나간 다음 나를 여기서 끄집어 내라.

아이신과 붉은 털의 악마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사실은 아이신이 놈의 굴에 떨어진지 5초도 지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붉은 털의 악마가 재빨리 구멍으로 그 거체를 날리는 것이 보였다.

아이신은 망설이지 않고 놈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크윽!!!”

“거리를 벌려라! 놈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 집중해라!!”

붉은 털의 악마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일반 전사들은 놈을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다.

벽을 넘은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이 놈을 견제하는 동안, 일반 전사들은 놈에게 화살을 날리며 진로를 방해했다.

‘지금이다!’

붉은 털의 악마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공격하는 강한 전사 둘에게 당황하여 큰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이신은 훤히 드러난 놈의 뒤통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

‘기회는 단 한 번···!’

아이신은 제국 기병대 시절 수도 없이 마수를 사냥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앞발로 쳐내기 위해 붉은 털의 악마가 두 발로 높이 일어선 순간.

아이신은 정확히 놈의 좌측 허리 부근에서 창을 밑에서 위로 사정없이 찔러넣었다.

- 푸슈슈슈슉!!!

아이신의 손에, 놈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다는 감각이 확신처럼 스며들었다.

아이신은 창을 꽂은 채로 뒤로 크게 도약하여 놈에게서 벗어났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털의 악마는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 앞발을 강하게 후려쳤다.

무시무시한 풍압이 아이신의 귀를 때렸으나, 아이신은 간발의 차로 놈에게서 벗어나 있었다.

‘곰은 커다란 대가리에 비해 뇌가 작아. 정확히 뇌를 노릴 수 없다면, 무조건 심장을 노리는게 정답이다.’

아이신은 자신의 손에 느껴진 감각을 확신하며, 다가오는 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이신을 향해 다시 한 번 앞발이 들어 올려졌지만, 아이신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 쿵!!!!!!!!!

붉은 털의 악마의 거체가, 아이신에게 닿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어느새 생기를 잃어버렸다.

“노, 놈을 잡았어···!!”

“영웅이다. 아이신은 사냥의 신께서 내려주신 영웅이 분명해!!”

아이신은 자신의 몸에, 힘이 깃드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마수의 숨통을 끊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힘.

회귀 전에도 마수의 숨통을 본인이 직접 끊을 때마다 조금씩 힘을 얻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비유하자면 회귀 전에 얻은 힘들은 그저 찌꺼기 수준의 힘이고, 오늘 얻은 것은 온전히 저 마수의 정수가 자기 몸에 깃든 느낌이다.

아이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 어째서 그토록 강했는지 알 것 같다. 어린 시절 벽을 넘었다는 것이 이토록 큰 차이를 만들어낼 줄이야.’

일반적으로 벽을 넘은 전사들은 암만 빨라도 이십 대 중반에 벽을 넘는다.

그때는 이미 신체가 완전히 성장을 끝낸 시기.

그러나 신체가 완전히 성장을 끝내기 전, 어린 나이에 벽을 넘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처럼 실전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나이를 먹어 신체가 성장할 때.

어린 나이에 벽을 넘은 전사는 더더욱 효율적으로 그 신체가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벽을 넘은 전사들보다도 확연히 더 강한, 말 그대로 영웅이 될 수밖에.

‘할 수 있다. 이거라면 분명 전생에 하지 못한 복수를···!!’

아이신은 벅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끼며 붉은 털의 악마의 대가리에 발을 올리고 주먹을 높이 들었다.

모든 전사들이 아이신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새하얀 입김들이 뿜어나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산야족 전사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

“정말 큰 은혜를 입었소. 용맹한 아이막과 그의 아들, 용맹한 아이신.”

야영지에 돌아온 후.

나르가 부족의 모든 전사들은 아이막 부족의 전사들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이막은 뿌듯한 표정으로 부족 전사들과 아이신을 번갈아보다가, 나르가 족장의 허리를 일으켰다.

“제가 아닌 그 어떤 전사라도, 이웃의 도움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용맹한 아이막 그대와 다른 전사들에게 큰 빚을 졌소. 만약 용맹한 아이막 그대들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대들을 도울 것을 사냥의 신께 맹세하오.”

아이막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르가 족장이 한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설령 아이막 부족이 그 어떤 강대한 적을 상대로 하더라도, 나르가 부족은 아이막 부족의 편에 설 것이다.

“그보다 전사들을 넷이나 잃으셨으니, 올 겨울 사냥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

“어쩌겠소. 우선은 부락으로 돌아가 죽은 전사들의 넋을 위로한 후, 있는 사람들로 어떻게든 버텨내야지요.”

“그러지 마시고 올 겨울은 저희와 힘을 합쳐 사냥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막의 제안은 타당한 것이었다.

몰이사냥을 주로 하는 산야족의 사냥법은, 최소한 열 명 정도의 전사가 있어야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고작 여섯 명 밖에 남지 않은 나르가 부족이 혼자 고군분투하느니, 아이막의 부족과 힘을 합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나르가 부족은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아이막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시 한 번 감사하오. 용맹한 아이막.”

“함께 사냥을 하면 부족간의 의리가 더욱 두터워지지 않겠습니까.”

연신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나르가 부족 전사들을 보낸 후, 아이막은 부족 전사들에게 외쳤다.

“우리도 우선 부락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아이막 부족의 전사들은 개선 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부락으로 돌아갔다.

부락 입구에 도달하자, 멀리서 그들이 오는 것을 확인한 여자와 아이들이 곧바로 부락 중앙에 모였다.

아이막과 전사들은 잡은 사냥감들을 부락 중앙에 넓게 펼쳐놓았다.

“고기다!!”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이 잡아오시다니, 올해 사냥이 잘 되었나보죠?”

“하하핫. 그게 다 아이신의 공이지. 과연 우리 족장님의 장남이야.”

“어머. 아이신이요?”

“그럼! 저걸 한 번 보라구.”

“히익···!!”

부락의 여자들은 전사 둘이서 중앙에 펼치는 거대한 곰의 가죽을 보고 기겁을 했다.

“저, 저게 뭐예요?? 무슨 곰이 저렇게 커요??”

“그냥 곰이 아니야. 마수라구.”

“마, 마수를 잡았다고요? 우리 부족 전사들만으로??”

“반 정도는 아이신이 잡은 거나 다름 없지. 우리 부족의 미래가 참으로 밝다니까!”

그 때, 저 멀리서 벨린다와 함께 아이신의 동생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형!!”

“아이신 오빠!!”

아이신은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동생들을 한 손에 하나씩 번쩍 안아주었다.

“아이덴, 아이나. 나랑 아버지가 없어도 잘 지냈지?”

“응! 오빠 덕분에!”

“형, 근데 이건 뭐야? 형이랑 아버지가 잡아온 거야?”

“나중에 천천히 말해줄게.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야지.”

아이막이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아이신에게 말했다.

“그래. 형이랑 먼저 들어가 있거라. 나는 전사들과 사냥감의 분배를 마쳐야 하니 말이다.”

아이신은 아무 생각 없이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어??’

아이신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을 눈치챘다.

아이덴과 아이나의 움직임에서, 참을 수 없는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벽을 넘은 자의 시선에서 볼 때 매우 효율적이지 못한 움직임을 느꼈다고 해야할까?

‘물론 벽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평소 행동부터 효율적이지 못해. 하지만 그걸 이 정도까지 느낀 적은 없었는데?’

그뿐만이 아니다.

벽을 넘은 자들의 효율적인 움직임은, 말하자면 본능적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자연스럽게 몸이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취하는 것에 가깝지, 머리로 이해하고 움직이는 종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신의 눈에는, 아이덴과 아이나가 어떻게 걸으면 벽을 넘은 사람처럼 걸을 수 있을지 방법이 보이는 듯했다.

아이신은 시험삼아 아이덴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이덴, 잠깐만 멈춰볼래?”

“왜, 형??”

아이덴이 자리에서 멈추자, 아이신은 아이덴의 옆에 서서 이리저리 자세를 교정했다.

너무 펴진 허리를 미세하게 굽혀서 자연스럽게 만들고 턱을 살짝 당기게 만들어준 후 다시 말했다.

“이대로 앞으로 걸어볼래?”

“응!”

아이덴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다가 또 다시 자세가 흐트러졌지만, 아이신은 머리에 번개가 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이건···제국의 초대 황제나 다른 영웅들이 가지고 있었다던 능력이 이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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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 영웅의 자질

대륙 수 천 년의 역사에서.

한 시대의 영웅이라 평가 받은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솔라리온 제국을 창건한 초대 황제의 기록 중.

<황제의 곁에는 하나하나가 대륙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장군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황제가 어린 시절부터 그 곁을 보좌하던 친우이자 종복들이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걸출했던 이는 황제의 친동생인 솔리온으로서···>

또는 삼백년 전, 산야족은 물론이요 평야족까지 통일하고 제국을 위협했던 대족장의 기록에서.

<대족장 야르삭의 수하들 중 유독 뛰어난 족장들을 제국은 네 마리의 맹견이라 칭했다.>

<변방을 통일하고 제국의 수도까지 쳐들어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하나하나가 모두 제국의 백전노장들만큼이나 뛰어난 이들이었다.>

<이들은 야르삭이 어린 시절부터 그를 섬기며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라 전해진다.>

<특히 야르삭의 친동생인 야르투는, 야르삭 사후 짧은 기간 대족장에 오르기도 했으며···>

영웅 자신들의 무위가 일반적으로 벽을 넘은 전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은 물론이요.

그들의 곁에는 본인만은 못하지만 역시 일반적으로 벽을 넘은 전사들보다는 더 뛰어난 심복들이 함께했다는 공통점이다.

특기할 점은 이 심복들이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그들을 따랐다는 것과.

개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심복은 영웅의 직계 혈연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 아비가 신의 부름을 받았다면, 그 아들 역시 신의 부름을 받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걸물들이 어린 시절부터 모여들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 시대를 풍미한 영웅들에게는, 뛰어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저런 가설들이 난립한 결과, 현재 제국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설은 이랬다.

- 역사에 남을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본인의 힘도 중요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자들 역시 중요하다. 이런 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곁에 있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천운. 그러니 영웅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다.

제국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고, 아이신 역시 아무 의심 없이 저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신은 그 가설이 근본부터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감각이 맞다면, 아이덴이나 아이나도 10대 시절에 벽을 넘을 수 있을지 몰라.’

신체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벽을 넘은 전사에게 얼마나 큰 강점이 있는지는, 며칠 전 붉은 털의 악마를 자기 손으로 쓰러뜨리며 체험했다.

‘솔라리온 제국의 초대 황제나, 대족장 야르삭 역시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이신이 느낀 감각이 맞다면, 그 동안 제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풀어내지 못한 역사의 비밀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그들이 단순히 천운을 타고나서, 마침 그 시대에 이름난 전사들이 어린 시절부터 따랐던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따르던 자들을 제국의 초대 황제나 대족장 야르삭이 이끌어주어 뛰어난 전사로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아버지. 다음 사냥은 언제 떠나세요?”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아이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덴도 아이나도 피부가 반들반들하고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이, 아무래도 아이신이 잡아 놓은 철새 고기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다.

“3일 후에 다시 출발할 계획이란다. 이번에 사냥이 잘 되어서 조금 여유가 생겼구나.”

“······”

신이 나서 멧돼지 고기로 만든 국을 먹고 있는 아이들과 달리, 벨린다는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이제 나를 사냥에 따라가지 못하게 만들 명분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저 여자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

전사들이 부락 중앙에 잡은 사냥감들을 늘어놓는 동안.

가장 큰 화제는 누가 뭐래도 아이신의 활약이었다.

이번에 잡은 짐승들의 반은 아이신이 잡은 거나 다름없다느니.

흉악한 마수를 잡기 위해 용맹히 마수의 굴에 뛰어들고, 기어코 마수의 숨통을 끊어버렸다느니.

분명 이대로 성장한다면 근방에 이름을 널리 떨칠 용맹한 전사가 될 것은 틀림없다느니.

함께 사냥을 나갔던 전사들은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아마 각자 집에 돌아가서도 자기 부인과 아이들에게 더 자세한 무용담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신은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벨린다를 보며 걱정이 앞섰다.

‘결과적으로는 저 여자를 엿먹인 꼴이 되어버렸으니, 이것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 어쩐다.’

아이신이 이대로 다시 아이막을 따라 사냥을 떠나버린다면.

아이덴과 아이나는 쌓여버린 벨린다의 화를 그대로 받아 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일찍 철이 들어 벌써 야무진 티를 내는 아이덴과 달리, 아이나는 그런 구박을 당하면 서럽게 울어버릴 테지.

고민하던 아이신의 머릿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 사냥 말인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음? 말해보아라, 아이신. 너도 이제 어엿한 부족의 전사이니, 의견을 내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다음 사냥에 나갈 때, 저는 며칠 부락에 머물다가 뒤따라가도 될까요?”

“···?? 그건 무슨 뜻이냐?”

아이막은 아이신의 부탁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

사냥의 신께 계시를 받고, 벌써 용맹한 전사라는 찬사를 받는 아들이 부탁을 한다고 하기에.

사냥을 조금 더 일찍 가자거나, 아니면 사냥의 신께서 또 무슨 계시를 내려 줬다거나 그런 것을 상상했는데.

아이신의 부탁이라는 것은 전혀 뜬금없는 것이었으니까.

벨린다 역시 저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사냥에 따라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놓고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구나. 전사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거니?”

“아닙니다, 어머님. 실은 저번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내가 뭘?”

“식사 전에 잠깐 집안 곳곳을 둘러봤습니다. 눈이 많이 쌓여서 지붕 한쪽이 무너졌는데 이것도 보수를 해야 할 것 같고, 뒤편 흙담도 손을 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장남이 되어서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못한 점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이신은 그러면서 진심이라는 듯 벨린다에게 머리를 숙였다.

벨린다는 아이신의 그런 행동에 당황하는 듯 하다가 툭 쏘아붙였다.

“흐, 흠···! 그래. 알긴 하니 다행이구나. 내가 모두 하기엔 힘이 드니 네가 맡아서 부족한 부분을 고쳐 놓거라.”

“아버지. 그렇게 됐으니 집안일을 모두 끝내 놓고 뒤에 합류해도 될까요?”

아이막은 그제야 아이신의 의도를 간파했다.

‘어린 것이 생각이 깊기도 하지. 네가 나보다 낫구나, 아이신.’

벨린다가 자기 소생의 벨리온과 벨리바만을 편애한다는 사실을.

아이막은 알면서도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족장으로서 부락을 이끌어가기에도 힘에 겨워 거기까지 신경을 쓰기가 힘들기도 했고.

여전히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처가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이신은, 가장인 아비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헤아리고 벨린다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는 것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이신. 네 엄마는 동생들을 챙기는 것만 해도 힘이 들지 않겠느냐. 네가 남아서 집안일을 도운 후 뒤따라오도록 해라.”

아이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연히 아이신이 진심으로 벨린다에게 미안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사람이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 법이거든.’

아이신은 회귀 전, 제국에서 살아남으며 자연스럽게 사람을 상대하는 처세술을 몸에 익혔다.

암만 벨린다가 자신과 동생들을 미워한다 해도, 그녀도 사람인 이상 아이신이 이렇게 순종적으로 나온다면 한풀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다.

‘저 여자가 계속 나를 경계하다가 자기 친정에 이상한 소리라도 한다면, 그건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회귀 전에는 몰랐지만, 아이신은 며칠 동안 자기 부락을 살펴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이신은 제국 기병대장으로 있으며 제국에 반항하는 야만족은 무자비하게 토벌했고.

제국에 머리를 조아리는 야만족들에게는 포상을 내려주며 그 일환으로 자신이 산야족 부락에 방문하는 사절 역할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수많은 산야족과 평야족 부락을 방문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락이 위치한 장소를 수십 곳이나 눈여겨볼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 아이막이 자리 잡은 이곳은, 척박한 동쪽 변방 치고는 드물게도 강과 산을 끼고 있는 분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보통 아이신의 경험으로 대부락들의 입지가 이와 비슷했는데, 아이막 부락의 경우도 분명 이곳을 거점으로 큰 부락을 형성하기에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벨린다의 부족이 아이막 부락을 노린 까닭도 지금에 와서는 완벽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입지의 부락을 자기들 것으로 만든다면, 자기 부족의 입김을 더 넓은 곳까지 쉽게 미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충분한 힘을 키울 때까지는 벨린다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아이신의 진짜 목적은 또 있었다.

‘오늘 느낀 감각이 맞다면, 아이덴과 아이나를 옆에서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자세를 교정해줄 필요가 있어.’

사실은 이게 더 중요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덴과 아이나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교정하여 이른 나이에 벽을 넘게 만드는 것.

그건 단기적으로는 아이덴과 아이나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신의 몸을 지킬 힘이 되어줄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동생들이 아이신을 도와 벨린다의 부족이나 제국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제국의 초대 황제나, 대족장 야르삭과 같은 능력이 내게도 있는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시간을 두고 검증해야 할 필요가 있어.’

상대적으로 부락이 한가한 겨울에 동생들과 함께 집에 남는다면.

집안 곳곳을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동생들의 자세를 교정해줄 수도 있고, 다른 것을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처럼 돌아왔으니 우선 오늘은 푹 쉬도록 하여라, 아이신.”

다음 날부터, 아이신은 본격적으로 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

아이신의 의도대로, 아이덴과 아이나는 빠르게 몸의 자세들을 교정해나갔다.

“형이 시킨대로 하니까 장작을 훨씬 쉽게 팰 수 있네!”

아이덴에게 장작패기를 알려주며 자연스레 도끼질을 하는 자세를 잡아주고.

“오빠! 물 한 동이 길어 왔어!”

아이나에게는 작은 나무통으로 물을 길어오게 하면서 어깨에 힘을 빼고 드는 법을 익히게 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아이신은 자신이 몰랐던 여러 가지를 새로이 알게 되었다.

‘동네의 다른 꼬마들은 암만 움직임을 봐도 교정하기가 마땅치 않아.’

정확히는 다른 꼬마들은 너무 손볼 곳이 많아서 사실상 교정이 불가능한 것에 가까웠다.

며칠 동안 부락의 꼬마들을 살펴보며 아이신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우리 부락에서 내가 지속적으로 자세를 교정해서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건, 아이덴과 아이나, 벨린온과 벨리바 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신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이신과 동생들은 모두 용맹한 전사인 아이막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이기 때문에.

이미 태어날 때부터 벽을 넘은 전사가 될 자질을 타고났고, 그걸 아이신이 더 빠르게 개화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게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냐. 제국의 초대 황제나 대족장 야르삭의 주변에 괴물같은 전사가 수백 수천 명이 될 수 없던 이유가 있었네.’

아이신처럼 이른 나이에 벽을 넘은 전사가, 자기 주변의 아이들을 일찌감치 벽을 넘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벽을 넘은 전사보다 훨씬 뛰어난 괴물들을 수도 없이 양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신이 볼 때, 그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아이덴과 아이나를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며 자세를 교정해주어도, 동생들은 다음 날이 되면 바른 자세를 잊어버리기 일쑤.

다음 날 새로 자세를 교정해주면 다시 나아지지만, 이게 완전히 자기 몸에 체득될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심지어 행동 하나하나마다 효율적이지 못한 자세는 넘쳐난다.

정말 어린 시절부터 열과 성을 가지고 교정을 해 주어야만, 남들보다 빨리 벽을 넘는 자질이 개화되는 것이다.

‘뭐 이것만 해도 어디야. 동생들이 제 몸을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 시간을 투자해야지.’

아이신은 아이막과 다른 전사들이 사냥을 떠난 후에도 나흘을 더 부락에 머무르며 집안일을 끝내고, 동생들의 자세를 봐주다가 바타르를 타고 사냥에 합류했다.

사냥터에 도착하면 아이신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냥에 임했다.

올 겨울 함께 사냥을 하게 된 나르가 부족의 전사들도 모두 아이신을 다시 나오기 힘든 최고의 전사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그 과정에서 부락 간의 의리가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 충분한 짐승을 잡으면 다시 부락으로 돌아오고.

며칠 쉬면서 동생들의 자세를 봐주다가 다시 사냥을 떠나는 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동쪽 변방의 살을 에는 추위는 한풀 꺾였고, 얼어붙은 강이 조금씩 녹으며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돌아올 무렵.

아이신은 슬슬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아이막에게 말했다.

“완전한 봄이 오기 전에, 남쪽 엘프 왕국의 상인들과 거래를 하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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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 교역과 세력 구도(1)

“엘프 왕국의 상인들이라···”

아이막은 아이신의 말을 듣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올 겨울 첫 사냥 때 아이신이 그런 말을 했었지.’

아이신은 큰 짐승을 사냥하는 틈틈히 덫을 놓아 담비를 잡으며, 담비의 가죽을 엘린도르 왕국 상인들에게 팔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이막은 또한 며칠 전 나르가 족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기억해냈다.

- 용맹한 아이막. 그러고 보니, 붉은 털의 악마를 잡고 남은 가죽은 어떻게 쓰고 계시오?

- 가죽 말입니까. 앞으로 의식을 할 때 요긴하게 쓸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으음···물론 그것도 좋지만, 마수의 가죽은 남쪽 엘프 상인들에게 비싸게 팔린다 들었소.

- 엘프 상인들 말입니까?

- 나도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아는 이야기는 아니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려.

-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알아봐야지요.

아이막이 알기로 아이신은 담비 가죽을 수십 장이나 모았다.

사냥신의 계시를 받은 아이이니, 분명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아이막은 결정을 내리고는 아이신에게 대답했다.

“좋다. 마침 네가 활약해준 덕에 올 겨울 사냥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 둘만으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

“마수의 가죽은 부피가 상당하니, 한 사람 정도는 더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르칼을 데려가면 어떨까요?”

“음···좋은 생각이다. 그는 나이가 많고 지혜로우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쳐도 분명 도움이 될 테지.”

아이막은 그 용맹으로는 근방 산야족들에게 최고의 명성을 떨치는 족장이지만.

다른 족장들에 비해 열 살에서 스무 살이 넘게 어린 족장이다.

그런 아이막을 잘 보좌하여 부락을 꾸려가는 것이 늙고 지혜로운 전사 지르칼.

지르칼은 아이막의 말을 듣더니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신을 칭찬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아이막 족장.”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지요. 예전에 얼핏 듣기로, 엘프 왕국의 상인들은 유용한 물건들을 굉장히 많이 판매한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땅을 고르는 데 쓰는 튼튼한 농기구 같은 것을 판다고 들었지요.”

“그래?”

“질 좋은 철로 만든 농기구가 있다면, 척박한 땅을 갈아엎어 농작물을 더욱 많이 심을 수 있을 겝니다.”

“허어···족장이 되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이건 아이막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막 부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동쪽 변방의 중앙보다 살짝 남쪽.

아이막 부족의 북쪽을 주름잡고 있는 것이 벨린다의 친정인 대부락이고, 아이막 부족의 남쪽에도 근방을 주름잡는 대부락이 몇 군데 있었다.

그리고 이 대부락들보다 더 남쪽에, 엘프들의 왕국인 엘린도르 왕국이 존재한다.

벨린다의 친정의 경우 솔라리온 제국에 충성하는 척을 하며 혜택을 받아 부락을 성장시켰고.

동쪽 변방 남쪽의 대부락들은 주로 엘린도르 왕국과의 교역으로 다른 부족들과 차이를 벌려나갔다.

이들은 규모가 작은 다른 산야족 부락이 발전하는 것을 경계하여, 엘린도르 왕국에 대한 정보를 적절히 통제해왔다.

엘린도르 왕국과 남쪽 대부락간의 사이가 원만해지기 시작한 것은 고작 몇 년 전의 일.

아이막의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엘린도르 왕국의 대규모 침공 직후의 일이다.

그러니 최신 정보를 얻지 못한 작은 산야족들은 여전히 엘린도르 왕국을 적으로만 생각했고, 이들과의 교역으로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 역시 제국 기병대장으로 있지 않았다면, 제국과 왕국, 산야족 간의 역사와 변화된 관계를 알지 못했을 거야.’

지르칼이나 나르가 족장이 건너건너 엘프 왕국 상인들과의 교역 정보를 들은 것을 보면 정보가 조금씩은 알려지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정도의 소문만 믿고 굳이 남쪽에 내려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은 산야족 부락은 별로 없다.

아무래도 작은 부락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더 급급하기도 하니까.

“그럼 내일 곧바로 출발하면 되겠느냐?”

“예. 엘린도르 왕국과의 경계 부근에, 엘프 상인들과 교역을 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좋다. 나와 지르칼, 아이신 너까지 세 명이서 다녀오자꾸나.”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붉은 털의 악마의 가죽을 싣고 세 전사는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

“날씨가 많이 풀리긴 한 모양이군요.”

“어딜 가도 눈들이 모두 녹아 있으니, 이동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구만.”

“다른 놈들은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텐데 이 늙은이만 동행을 시켜 가지고 고생을 시키십니까.”

“허허허. 그런 말 말게. 자네가 아니면 누가 이런 중요한 일을 보좌하겠나.”

“또 그런 말로 늙은이를 부려먹으시려는 게지요. 에잉.”

아이막과 아이신, 지르칼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기실 지금 시기는 산야족 전사들이 여유롭게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기다.

산야족의 겨울 수렵은 눈이 쌓이고 강이 얼어붙은 계절에 특히 강점을 가진다.

눈이 녹고, 얼어붙은 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사냥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짐승의 발자국이 눈에 바로 찍히지도 않고, 눈밭에 비해 짐승들이 달아나는 속도도 빠르니까.

‘올해는 아이신 덕에 모든 부락민들이 봄이 올 때 까지 먹고도 남을 만큼 짐승을 잡았으니.’

눈이 녹고 얼어붙은 강이 다시 흘러도, 아직 농사를 짓기에는 이른 계절이다.

산야족은 주변 험한 땅 중에서 그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씨를 뿌리고, 추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들을 주로 기른다.

이런 작물들은 생존력이 강하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대신, 아무래도 생산량이 턱없이 낮다.

그렇기 때문에 산야족은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병행하여 필요한 식량을 곳곳에서 조달하는 것이다.

‘원래 같으면 눈이 녹아도 계속해서 어려운 사냥을 해야만 했을 테지. 완전한 봄이 될 때까지 버틸 식량을 구하려면 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세 명이서 수십 일에 걸쳐 엘프 상인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아이신의 공이라는 말이다.

거의 열흘 가량을 이동하자, 그들의 앞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저긴가 봅니다.”

“허어···정말 엘프들이 지키고 있구나.”

동쪽 변방을 하도 제 집처럼 누비고 다닌 덕에, 아이신은 엘린도르 왕국과 산야족들이 교역을 하는 마을의 위치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마을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멈춰라! 신분이 증명된 자가 아니면 들여보낼 수 없다!”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엘프 전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들을 제지했다.

아이막과 지르칼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 족장. 이 엘프놈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

“어어···나도 엘프어는 모르는데···”

아이신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지금 내가 여기서 엘프어를 해도 되나?’

아이신은 회귀 전, 제국 기병대장 시절에 엘프 왕국과도 긴밀히 연계하였다.

엘린도르 왕국에게도 산야족은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동쪽 변방 야만인들을 통제하려는 솔라리온 제국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연합을 하였으니까.

당연히 아이신은 엘프어를 배워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고, 그래서 방금 엘프가 하는 말도 곧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뭐 적당히 사냥신이 알려줬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어차피 거래를 하려면 엘프 상인들과 교섭을 해야할 테고.’

아이신이 적당히 판단하여 엘프 보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거기 잠깐! 복장을 보니 이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숲의 사람들’이 분명하오. 멀리서 교역을 하러 온 모양이니 우리를 믿고 들여보내주면 좋겠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엘프 보초에게 엘프어로 외쳤다.

아이신은 엘프어를 구사하는 사내를 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저 사람도 분명 우리와 같은 산야족처럼 보이는데? 엘프어를 잘 구사하는군.’

사내는 엘프 보초를 그렇게 안심시키더니, 아이막에게로 다가왔다.

“이거, 멀리서 오셨나 봅니다. 교역을 하러 오셨습니까?”

“예. 정말 감사합니다. 엘프어를 하지 못해 곤란했던 참인데.”

“하하하. 아닙니다. 같은 ‘숲의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지요. 이곳은 처음 오시는 겁니까.”

“예. 엘프 상인들이 좋은 물건들을 판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저는 투구르 부족의 다니룬이라 합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이곳은 엘프들의 마을입니다. 엘프어를 하지 못하신다면 여러모로 곤란하실 텐데···저희가 도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이막은 지르칼과 아이신을 슬쩍 곁눈질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흔쾌히 산야족 청년에게 답했다.

“좋습니다.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좀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이쪽으로 따라 오십시오. 저희 부족의 어르신과 인사를 시켜드리겠습니다.”

산야족 청년은 그러다가 힐끗, 아이막이 짊어지고 있는 마수의 가죽을 곁눈질했다.

아이신은 그의 눈빛에 잠깐 깃들었다 사라진 탐욕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투구르면 분명 남쪽 대부락 중 하나의 족장 이름이다. 무턱대고 믿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군.’

벨린다의 부족만큼 강대하지는 않지만, 동쪽 변방의 최남단에는 꽤 큰 부락들이 몇 개나 있다.

회귀 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이놈들은 몇 년 전부터 엘프 왕국과 교역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놈들이 그저 같은 산야족이라는 이유로 순순히 다른 산야족의 교역을 도와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쨌든 아이막과 아이신, 지르칼은 청년의 안내를 받아 마을 중앙 커다란 천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자크님! 교역을 하고 싶어하시는 동족을 모셔왔습니다.”

천막 한 가운데에는 여러 명의 산야족이 모여 짐승의 가죽이나 산에서 캔 약초 같은 것을 늘어놓고 있었다.

개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전사 하나가 청년을 맞아주더니, 아이막과 아이신, 지르칼을 바라보았다.

“이거이거, 이런 곳에서 같은 ‘숲의 사람들’을 보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나는 투구르 족장님의 밑에 있는 바자크라 합니다. 부족에서 엘프들과의 교역은 제가 담당하고 있지요. 그쪽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투구르 족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작은 부락을 이끌고 있는 아이막이라 합니다.”

바자크라 불린 남자는 아이막의 이름을 듣더니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아이막? 혹, 몇 년 전 엘프 놈들과의 전쟁에서 무위를 떨친 용맹한 아이막을 말하는 것이오?”

“부끄럽지만 그런 이명을 불리고 있습니다.”

“허허···이거 영광이군. 그대의 이름은 우리 부족의 전사들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젊은 전사이신 줄은 미처 몰랐는걸? 뛰어난 전사라면 응당 예를 갖춰 맞이해야 하는 법이지. 이 분들에게 편한 자리를 내어드리거라.”

“옛!”

바자크는 천막의 안쪽 방으로 아이막을 안내했다.

급조한 천막 치고는 꽤 아늑한 방에 들어가자, 곧바로 아까 아이막들을 데려온 산야족 청년이 차를 내어왔다.

“드시지요. 엘린도르 왕국의 엘프들이 취급하는 차입니다. 추운데 먼 길을 오셨으니, 몸을 풀어줄 겁니다.”

“이렇게 융숭히 환대해주시다니···”

바자크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인자하게 아이막에게 대답했다.

“용맹한 아이막이라면 충분히 이런 대접을 받으실 자격이 있소. 그래, 교역을 하러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이번에 운 좋게 마수를 잡았기에, 엘프 상인들에게 이것을 팔아보려 합니다.”

“어디 내게도 한 번 그것을 보여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아이막은 그렇게 말하며 잘 접어서 들고 온 붉은 털의 악마 가죽을 꺼내 보였다.

그런데 가죽을 확인한 바자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이놈은 설마??”

“알고 계십니까? 붉은 털의 악마입니다.”

“이놈을 잡으셨다는 말이오??”

바자크가 놀란 것도 당연했다.

붉은 털의 악마는 원래 남쪽 대부락들의 구역 근방을 넓게 돌아다니며 가축을 물어 가기로 유명한 놈이었다.

워낙 활동 범위가 넓어 아이막 부족 등이 사는 곳까지 올라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남쪽 대부락들에게 더 유명한 맹수였던 것이다.

“올 가을에 부락에서 힘을 모아 놈을 몰아내기는 했소만, 북쪽으로 도망간 놈을 끝내 잡으셨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놈이 마수가 되며 더욱 흉폭해졌기에.”

“놈이 마수가 되었다고?? 어디 잠깐만 봅시다.”

바자크는 아이막에게 다가와 가죽을 이리저리 살피기도 하고, 가죽의 강도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잠시 후, 그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아이막에게 말했다.

“정말이군. 가죽의 강도나 재질이 일반 곰 가죽과는 확연히 다르오. 이 정도라면 좋은 가격을 받을 것 같군.”

“그렇습니까. 정말 잘 됐군요.”

“그런데···”

바자크는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아이막과 지르칼을 쳐다보았다.

“알다시피 이곳은 엘프 놈들의 마을이오. 엘프 상인들은 엘프어를 모르면 거래를 해 주지 않지. 용맹한 아이막, 그대가 이것을 팔려고 한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이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어떤 제안입니까?”

“이 가죽을 우리 부족에서 매입해주겠소. 50엘린을 주도록 하지. 그거라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오. 덤으로, 가죽을 팔아준다면 우리 다니룬을 잠깐 빌려주도록 하겠소. 그는 엘프어가 유창하니, 필요한 물건들을 살 때 엘프들과의 교섭을 도와줄 것이오.”

아이막은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말처럼 자기들은 엘프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

저 바자크라는 나이든 전사의 말대로 엘프어를 하지 못하면 교역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까딱하면 여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겠지.

‘여기에 통역 역할의 젊은이까지 붙여준다하니···’

좋은 의도로 동족을 도와준다고 한다면, 이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아이막은 뭔가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족장으로서의 감 같은 것이었다.

아이막은 지르칼과 아이신을 번갈아 돌아보며 질문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옆에 앉아 있던 아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음? 이 어린 전사는 누구입니까?”

“아, 저의 장남 아이신입니다. 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봅니다.”

“호오···용맹한 아이막의 장남이라···그래. 한 번 들어보지.”

“제안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희는 이곳에 막 도착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이곳을 구경하고 천천히 둘러보고 싶습니다.”

아이신은 바자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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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교역과 세력 구도(2)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하고 싶군. 지금, 우리 부족에서 베풀어주는 호의를 거절하겠다는 말인가?”

바자크는 언제 그리 친절했냐는 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방금 전, 부족의 젊은 전사 다니룬이 자기에게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바자크님! 웬 놈들이 질 좋은 곰 가죽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 그래? 혹시 우리와 같은 동족이냐?

- 예! 엘프어를 할 줄 몰라 보초에게 붙잡혀 어버버하고 있기에, 제가 재빨리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 옳거니! 그것 참 잘 했구나. 일이 잘 풀린다면 내 너의 활약을 족장님께 말씀드려 큰 상을 내릴 수 있도록 하마.

- 감사합니다!!

눈치 빠른 젊은 전사가 놈들을 데려왔기에, 바자크는 얼른 그들을 초대하여 탐색을 시작했다.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 전사였군.’

데려온 전사가 남쪽 대부락들에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점에는 조금 놀랐지만.

직접 만나본 아이막은 이명에 비해 상당히 젊은 전사였다.

강인한 인상의 전사이기는 하나, 이런 식의 교역은 별로 경험이 없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마수화된 곰의 가죽이라면 엘프 놈들이 군침을 흘리겠지. 이걸 잘 후려친다면 단번에 족장의 신임을 얻을 수 있어.’

선심쓰는 척 가죽을 매입해주겠노라 물었는데, 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놈의 아들이라는 어린 꼬마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거절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저희가 이곳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찬찬히 살펴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보다 용맹한 아이막. 암만 그대의 장남이라 해도,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닌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데에 이렇게 끼어들어도 된단 말인가?”

바자크는 어느새 당연하는 듯 말을 놓았다.

이건 말하자면 아이막에게 슬쩍 눈치를 주는 것.

자식 교육을 얼마나 개판으로 해 놓았길래 아들놈이 족장인 아비를 무시하고 대화에 끼어든단 말인가?

그리고 이쯤에서 자신과 놈들의 상하관계도 슬슬 일러둘 필요가 있다.

아이막이라는 놈이 암만 용맹한 전사라는 이명이 있고, 한 부락의 족장이라 한들.

백 가구가 넘는 부락의 간부인 자신보다는 당연히 지위가 낮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막은 기대와 달리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아이신은 아직 어리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지혜로운 아이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인한 전사이기도 하지요. 붉은 털의 악마를 사냥할 때, 아이신 역시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제 몫을 하였습니다.”

아이막은 아이신이 사실상 붉은 털의 악마를 혼자 잡은 거나 다름없다고 말하려다가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사냥신의 계시를 받고, 특별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부락에 알려져서 좋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바자크는 아이신이 붉은 털의 악마를 함께 사냥했다는 말조차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용맹한 아이막. 암만 그대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아직 키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어떻게 다른 전사들만큼 사냥을 한다는 말이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희 족장님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이신은 정말로 성인 전사들과 비슷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지르칼까지 나서서 아이신을 옹호하고 나서자, 바자크는 탐탁치 못한 표정으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그가 냉랭한 어투로 일갈했다.

“좋소. 어디 한 번 마음대로 둘러보시오. 다만 어려움에 처한 동족들을 도우라는 것은 우리 투구르 족장님의 뜻이셨소. 한 번 이것을 거절했으니, 다음 번에도 우리가 그대들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마시오! 다니룬. 손님들을 배웅해드려라.”

아이막과 지르칼, 아이신은 쫓겨나듯 천막에서 나가게 되었다.

“이거, 저분들의 호의를 너무 냉정하게 거절해버린 것 같구나.”

“근데 아이막 족장이 보기에도 뭔가 조금 낌새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긴 했지.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일세.”

아이막과 지르칼이 아직도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천막을 떠나려는데, 맨 처음에 그들을 도와준 젊은 전사가 뛰어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용맹한 아이막과 그 일행분들.”

“아, 아까 그 젊은이가 아닌가?”

“예. 다니룬이라고 합니다. 바자크님께서 기분이 조금 상하신 것 같지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우리도 마침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호의를 거절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으니.”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엘프 놈들과 교섭을 하셔야하지 않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엘프어가 능숙하니 말이지요.”

“어어···정말 그래도 되는가?”

“예. 바자크님의 허락은 받지 못했지만, 까짓거 비밀로 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처지의 동족을 돕는 것은 ‘숲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분명 바자크님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일견 타당한 말이었고, 아이막과 지르칼은 이 말에 거의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아이신이 재빨리 그를 막았다.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호의를 거절한 입장에 또 이런 은혜를 입는 것은 너무 죄송합니다.”

“용맹한 아이막의 아드님이라고 했던가요. 괜찮습니다. 저만 입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혹시라도 불똥이 튀게 되면, 저희가 너무 죄송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신경 써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아이신은 단호하게 다니룬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니룬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막과 지르칼을 바라보았으나, 둘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니룬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럼 또 만날 수 있기를 빌겠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젊은이.”

다니룬은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퉷 하고 바닥에 침을 뱉고는 천막으로 다시 들어갔다.

안에서는 바자크가 다니룬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느냐?”

“눈치가 빠른 놈들입니다. 제가 몰래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떠나버리더군요.”

“흐음···제깟 놈들이 엘프어도 할 줄 모르면서 대체 무슨 배짱을 저리 부리는지 모르겠구나.”

“그보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 못 받으셨습니까?”

“뭐가 말이냐?”

“그 소년 말입니다. 아이막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아. 그 아이신이라는 꼬마 말이지.”

생각해보면 그랬다.

일반적인 산야족은, 이런 자리에서 족장이나 나이든 전사들이 주로 의견을 말한다.

어린 전사들은 혹 같은 자리에 있다 해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아이막의 아들이라는 꼬마는 오히려 자신이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아이막과 다른 늙은 전사는 아무 의심도 없이 그 아이의 말을 따랐고 말이다.

“생각해보니 저 꼬마가 다른 전사들과 힘을 합쳐서 마수를 잡았다고 하더구나.”

“예? 그게 말이나 됩니까?”

“하지만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까지 있는 전사가, 고작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느냐.”

“그거 참 이상하군요···”

바자크와 다니룬은 머리를 맞대고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고민해 보았으나,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바자크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이렇게 일축해버렸다.

“놈들이 괜히 작은 부락에 살겠느냐. 작은 부락에 사는 놈들은 족장이고 일반 전사고 구별도 없이 어울려 지낸다고 하더구나. 놈들이 근본이 없으니 저러는 것이다.”

“그건 그렇군요.”

“뭘 모르고 저리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는 것도, 결국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두고 보아라. 놈들은 한 나절 내로 다시 우리를 찾아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게 될 것이다.”

아쉽게도 아이막과 아이신이 바자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지만.

최소한 이 때의 바자크는 100% 확신을 가지고 단언했다.

*

투구르 부족의 천막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아이막이 아이신에게 물었다.

“아이신. 방금 건은···혹시 그것이냐?”

아이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사냥의 신께서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오오···저와 족장님이 느낀 것이 틀리지 않았나 봅니다.”

지르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맞장구를 치며 아이신을 자랑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참고로 지르칼은 아이신이 사냥의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을 들어서 알고 있다.

원래는 부족에서 아이막과 아이신밖에 모르는 내용이었으나.

지르칼에게만은 대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낫다는 아이막의 판단으로 오는 길에 모두 이야기해줬던 것이다.

“사냥의 신께서 정확히 뭐라고 하시더냐, 아이신.”

“놈들이 우리를 돕는 것이 결코 좋은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것 뿐이냐? 혹시 이 마을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그런 계시는 없었더냐?”

아이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두루뭉술한 대답을 골랐다.

“엘프들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이 대답에 아이막과 지르칼은 저게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엘프들을 만나게 되면 알 수 있을 거라니···”

“신의 계시라는 것이, 사람의 말처럼 정확하게 뭘 알려주는 건 아닌가 봅니다?”

“그보다 우리 모두 엘프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데 엘프들을 만난들 뭘 알 수 있다는 말일꼬.”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막은 이미 자기 장남이 지금껏 보여준 것을 통해 충분히 아이신을 믿고 있었으니까.

“우선 가 보도록 하자꾸나. 사냥의 신께서 말씀하셨다면, 분명 좋은 뜻이 있겠지.”

아이막과 지르칼, 아이신은 천막을 나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보자 커다란 천막이 수십 개나 펼쳐져 있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저마다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다.

“사슴의 뿔은 얼마요?”

“하나당 2엘린으로 어떻습니까?”

“그건 좀 비싼 것 같은데···”

“우리는 질이 좋은 것들만 취급합니다. 많이 사면 조금 깎아드리지요.”

상설 시장이라기보다는 임시로 열린 시장인 듯했다.

여러 명의 엘프 상인들과 산야족 전사들이, 그곳에서 서로의 물건을 살펴보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막과 지르칼은 시장을 천천히 걸으며 감탄의 말을 흘렸다.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 가득하구나.”

“사람도 엄청나게 많군요. 놈들이 모두 엘프 상인들일까요?”

“가져가면 부족에 유용할 것 같은 물건이 정말 많아. 이곳에 오기를 잘 한 것 같구나.”

그러나 아이신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장을 둘러본 아이신이, 아이막과 지르칼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저 상인과 교섭해 보도록 하지요.”

아이신이 가리킨 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남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엘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산야족들이 펼쳐놓은 좌판의 물건을 살펴보기도 하고, 흥정을 한 뒤 가운데에 수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아이신이 그쪽으로 다가가자, 엘프 하나가 얼른 아이신과 아이막을 막아섰다.

“뭐냐! 우리 주인님께 할 말이 있나!”

“마수의 가죽을 팔려고 합니다.”

“···??!!”

아이막과 지르칼은 깜짝 놀랐다.

아이신의 입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엘프어가 유창하게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듯 상행의 수장으로 보이는 엘프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잠시 후, 가장 좋은 옷을 입은 엘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말 마수의 가죽을 가지고 있나? 꼬마.”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놓을 만한 곳이 있습니까?”

엘프 상인은 그들을 커다란 천막 밑으로 데려갔다.

그곳의 바닥은 돌로 만들어 매끈매끈했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그곳을 척 가리켰다. 

아이신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막에게 전했다.

“이 자들에게 붉은 털의 악마 가죽을 보여주십시오, 아버지.”

“그, 그래. 알겠다.”

아이막과 지르칼은 얼른 그 말을 알아듣고 곰 가죽을 깨끗한 돌바닥에 펼쳐 놓았다.

엘프 상인들은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마수의 가죽에 큰 관심을 가졌다.

가죽을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재질의 강도를 확인해보기도 하던 그들이 잠시 후 아이신에게 말했다.

“좋은 가죽이군. 200엘린으로 어떤가?”

아이신은 그러나 단호하게 말할 뿐이었다.

“350엘린.”

아이막과 지르칼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이신의 흥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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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 교역과 세력 구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