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20화 - 교역과 세력 구도(3)

“350엘린은 조금 과한데···”

개중에 수장으로 보이는 엘프가 난색을 표했으나, 아이신은 여전히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시세는 알고 있습니다. 맹수형 마수의 가죽은 300엘린 전후에서 판매되지 않습니까?”

“그거 말 잘 했구나. 300엘린 전후로 팔리는 가죽이 어떻게 350엘린이 된단 말이냐?”

“놈의 머리를 보십시오.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엘프 상인들은 아이신의 말을 듣고 붉은 털의 마수 가죽의 거대한 대가리를 다시 한 번 살폈다.

과연 마수의 대가리는 산야족 전통 기술로 머리뼈를 제거하고 보형물을 집어넣어 살아있을 때와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신은 대가리 이곳 저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엘프 상인들에게 설명했다.

“이런 맹수형 마수를 잡을 때 대부분의 가죽은 머리가 상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짐승의 머리를 노리는 것은 사냥꾼에게 기본 중에 하나니까요.”

“저희는 놈을 잡을 때 뒤에서 심장을 깊숙히 찔러 한 번에 절명시켰습니다. 머리는 거의 손상이 없지요.”

엘프 상인들은 아이신의 말을 듣고는 저희들끼리 수군수군 상의를 시작했다.

‘솔직히 이런 작업은 귀찮다. 나는 상인이 아냐.’

제국 기병대장쯤 되면 무턱대고 싸움만 잘 해서 될 일은 아니다.

제국 기병대는 원래 중앙군 소속이지만.

아이신이 기병대장에 오른 후 그 임무의 특수성으로 인해 중앙보다는 변경백의 휘하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았다.

정확히는 아이신이 대장으로 있던 기병대만 따로 변경백 휘하로 들어간 것에 가깝지만 그 부분은 일단 차치하고.

‘그래도 그 때의 경험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 건 정말 다행이야.’

야만인 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변경백은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변경백은 잡은 마수의 부산물을 가끔 엘린도르 왕국에 판매하여 예산을 확보하곤 했는데.

아이신의 기병대는 변경백 령의 재무담당 관리들이 엘린도르 왕국의 상인들을 만날 때 자주 동행했었다.

이 과정에서 아이신은 자연스럽게 교역품들의 시세와 감정법, 기본적인 흥정 능력을 익혔던 것이다.

‘너무 과도하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면, 적당히 이들에게 맞춰 주는 것이 낫다.’

회귀 전의 경험으로 볼 때, 아마 변경백 령의 재무담당 관리들 같았으면 400엘린 이상도 받아낼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신은 굳이 어울리지 않는 고도의 흥정까지 해가며 한계까지 이익을 추구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아이신. 아까 놈들이 50엘린인가 하는 금액을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엘프놈들은 뭐라고 하는 거냐?”

“300엘린 근처에서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뭐, 뭐야? 그놈들이 그래도 동포인데 우리를 등쳐먹으려고 했단 말이냐??”

“이건 다른 부족의 족장들에게도 일러 놓을 필요가 있겠구나.”

아이신이 느끼는 감정도 사실 지르칼과 아이막이 느끼는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투구르 부족 놈들이 200엘린 정도만 쳐줬다면, 관계 유지를 위해 한 번 정도는 놈들에게 팔아 줬을 텐데 말이야. 50엘린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지.’

회귀 전의 경험으로 아이신이 파악하는 산야족의 현재 세력 구도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동쪽 변방을 가로로 크게 나눠 북쪽이 평야족들의 구역, 남쪽이 산야족들의 구역.

그 남쪽 산야족 구역을 또 다시 가로로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눠 가장 북쪽이 벨린다의 부족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역이다.

벨린다의 부족에서 조금 남쪽, 그러니까 중앙 부근은 아이막의 부족과 비슷한 소규모 부족들이 수백 개가 넘게 살고 있고.

세 구역 중에 최남단이자, 남쪽의 엘린도르 왕국과 가장 가까운 구역이 남쪽 대부락들의 구역이다.

그러나 아이신이 제국 기병 대장에 올랐을 무렵에는 이 균형은 이미 거의 깨져 있었다.

대부락들의 목표는 결국 산야족을 본인들이 통일하고 대족장에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벨린다의 부족은 솔라리온 제국과의 교역으로 부락을 크게 성장시켜 나갔고.

남쪽 대부락들은 엘린도르 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그 세력을 서서히 늘려가고 있는 상황.

어느 정도 부락의 체급을 키운 그들이 본격적으로 다른 부락을 흡수하려고 나서는 것이 불과 몇 년 후의 일이다.

‘우리 부락이 침략을 당한 시기는 이 때보다도 조금 빨랐다고는 하지만···’

다만 변경백은 하나의 거대한 부락이 산야족 전체를 통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병대장 아이신이 맡은 역할이 바로 이 때, 선을 넘는 부락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하여 본보기를 보이는 일.

벨린다의 부족과 남쪽 대부락들은 변경백의 눈치를 보며 야금야금 중앙의 작은 부족들을 흡수해 나갔다.

아이신이 부락의 내실을 강하게 다지려는 것도 결국 이런 세력 구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투구르라는 놈의 부락과는 앞으로 척을 지게 되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남쪽 대부락 놈들의 눈 밖에 나서 별로 좋을 것은 없지만.

아이신은 언제까지고 놈들의 기에 눌려 살 생각이 전혀 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상대해야 하는 놈들이니 말이다.

“좋다. 350엘린으로 매입하도록 하지.”

“힘들게 잡아온 물건의 가치를 알아봐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보다 엘프어가 굉장히 능숙하군. 이 근방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상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엘프가 은근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아이신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돌려줬다.

“배울 기회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보다 몇 가지 여쭤볼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래. 뭐든 물어보게. 내 아는 선에서 뭐든 답해주도록 하지.”

아무래도 태도가 호의적인 것이, 350엘린의 가격도 이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음이 분명하다.

“철로 만든 농기구를 파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거라면 저쪽 구역에 있네. 우리 상회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군.”

“혹시 대략적인 시세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농기구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다 다르기는 하네만···”

엘프 상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신에게 대략적인 시세들을 일러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닐세. 좋은 물건을 팔아줬으니, 이 정도야 어렵지 않지. 이미 거래가 끝나서 하는 얘기네만, 그대들이 팔아준 가죽은 요 몇 년 새 우리가 매입한 곰가죽 중에 가장 질이 좋네. 다음 번에도 이런 물건이 있거든 우리를 찾아오도록 하게. 내 가격은 후하게 쳐 줄 테니.”

아이신은 엘프 상인의 태도에서, 이 정도면 믿을 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과도하게 가격을 올려 받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나.’

상인이라는 족속들이 극한의 이득을 추구하는 족속들이라고는 하지만.

아이신이 회귀 전 겪어본 상인이라는 부류들은 이득만큼이나 신뢰를 중요시 여겼다.

물론 눈 앞의 이익만을 쫓아 평판은 신경쓰지 않는 상인도 많지만 말이다.

‘한 번 시험해볼까?’

아이신은 바타르가 매고 있던 짐에서 담비 가죽 하나를 슬쩍 빼내어 엘프 상인들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혹시 이것도 팔아볼까 하고 몇 장 가져왔는데, 가격을 얼마나 쳐주실 수 있습니까?”

아이신은 엘프 상인들의 눈을 스치고 지나간 당황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이건···담비가 아닌가?”

“예. 많이 잡히는 놈은 아니지만 털이 고와 비싸게 팔린다는 말을 듣고 가져왔습니다. 사실은···”

아이신은 살짝 말꼬리를 흐리며 저 멀리 투구르 부족 천막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희와 같은 ‘숲의 사람들’이 이걸 사고 싶다고 하기에 마침 친분이 있는 그 쪽에 팔까 하다가 먼저 말을 꺼내본 것인데···”

사실은 친분이고 자시고 오늘부로 투구르 부족과는 척을 지게 생겼지만, 아이신은 천역덕스럽게 행동했다.

그러자 부하로 보이는 엘프 상인이 화들짝 놀라 다급히 아이신에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네! 팔 거면 우리에게 팔도록 하게! 가격은 충분히 후하게 쳐줄 테니 말이야!”

“어느 정도를 쳐 주실 수 있습니까?”

“가죽의 질에 따라 다르지만, 이 정도면 처리가 잘 된 상등품이네. 한 장에 20엘린은 충분히 줄 수 있네!”

20엘린 정도면 아이신이 기억하기로 절대 후려치는 금액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담비의 가죽은 그 희소성 때문에 함부로 값을 후려칠 수도 없는 물건이다.

머리가 돌아가는 상인이라면, 구하기도 힘든 담비의 가죽을 꾸준히 팔아줄 상대가 나타났는데 눈 앞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 가격을 후려치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뭐 그래도 상인 중에는 눈 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놈들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이들은 최소한 그 정도로 바보같은 상인은 아닌 모양이다.

아이신이 대답을 하지 않자,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우리가 오늘 귀인을 만난 것 같구나. 영특한 아이야. 혹시 담비 가죽을 몇 장이나 들고 있는고?”

“스무 장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합쳐 400엘린을 곧바로 주도록 하마. 그리고 오늘 묵을 곳이 없다면, 우리 상회의 숙소를 무료로 이용하게 해 주마. 대신, 앞으로도 담비 가죽을 얻으면 우리에게 팔아준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아이신은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가죽을 얻으면, 어르신의 상회에 가장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좋아, 좋아. 통성명이 늦었구나. 우리 상회는 실반 상회이고, 나는 상회의 장인 린델이라고 한단다.”

“아이신이라 합니다. 이쪽이 저희 아버님이자 족장이신 아이막이십니다.”

린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막에게 손을 내밀자, 아이막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이름이 딱히 엘프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은 모양이네.’

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해도 작은 분쟁에서 몇 번 이름을 떨친 것뿐이니, 상인 엘프라면 아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이제 곧 해가 지고 장이 파할 때가 됐으니, 어떠냐? 이대로 우리와 함께 상회 숙소로 가는 것은? 원한다면 함께 식사를 하며 이것저것 알려주도록 하마. 이곳은 처음이지 않느냐?”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엘프들을 따라 걷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아이신은 지르칼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아이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냐? 엘프어는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야??”

“엘프들의 앞에 서니,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습니다.”

“허어···사냥신께서는 정말 못 하는 일이 없구나. 그래서, 가격은 잘 받았느냐?”

수다스러운 지르칼과 달리, 아이막은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았다.

“아이신이 어련히 알아서 했지 않겠느냐. 우리 아이신이 어디 보통 아이도 아니고.”

“족장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궁금하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나는 아이신을 믿네.”

“그보다 아이신.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 저 엘프들을 따라가는 것 같은데?”

“오늘 장은 어차피 파할 시간이기도 해서, 저들이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준다 했습니다.”

“그거 정말 잘 됐구나. 마침 이 늙은이는 좀 쉬고 싶었거든.”

“허허···사람 참.”

아이막과 아이신, 지르칼은 엘프 상인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엘프 상인들은 질 좋은 담비 가죽을 공급받을 거래처가 늘어 기뻐했고, 아이신은 이들로부터 현재 엘린도르 왕국의 정세와 교역에 관한 정보를 상당히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엘프 상회의 숙소에서 푹 쉬고 일어난 다음 날.

“오늘 오전에 필요한 것들을 다 산 후 곧바로 부락으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신과 아이막, 지르칼은 장이 열리자마자 철제 농기구를 구매하기 위해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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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 교역과 세력 구도(4)

아이막과 아이신이 실반 상회 숙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다음 날.

투구르 부족의 교역 책임자인 바자크는 이제나 저제나 아이막과 아이신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룬! 다니룬은 어디 있나?”

“찾으셨습니까, 바자크 님.”

바자크는 아직도 아이막과 아이신이 자기들을 찾아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며 다니룬에게 물었다.

“놈들이 대체 왜 아직도 오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 그보다 놈들이 어제 어디에서 묵었지?”

“그게···”

다니룬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원래 같으면 그가 아이막 부자의 행동을 감시해야만 했었다.

‘어차피 어제 저녁이면 바자크 어르신을 찾아와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릴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감시 임무를 대충 넘겼는데.

예상 외로 아이막 부자는 밤 늦게까지도 투구르 부족의 천막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왜 말을 못하느냐. 놈들이 어디에서 묵었는지는 뻔하지 않느냐?”

“차,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바자크는 혀를 끌끌 찼다.

꼴을 보니 저 어린 놈이 감시를 게을리한 모양이다.

‘그래도 좀 빠릿빠릿한 놈인줄 알았거늘···’

어차피 놈들이 묵을 곳이라고 해 봐야 정해져 있다.

이곳은 엄연히 엘린도르 왕국의 영토.

투구르 부족은 몇 년간 이곳을 드나들며 상인들과 관계를 맺었기에 큰 천막을 치고 머무는 것을 허락 받았지만.

물건을 조금 팔기 위해 찾아온 작은 부락의 산야족들은 아무데서나 자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엘프들의 감시를 받으며 허름한 간이 숙소에서 단체로 묵는 방법 외에는 없으니, 놈들도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올해는 생각보다 가난한 놈들이 많이 찾아오지를 않아서 가뜩이나 성과가 시원찮았으니···놈들이 가진 마수 가죽을 꼭 후려쳐야 한다.’

엘린도르 왕국이 산야족과의 교역을 위해 지정해둔 마을은 이곳 외에도 몇 군데가 있었다.

개중에 이 마을은 특히 투구르 부족이 몇 년간 공을 들여 자리를 잡은 마을.

이곳을 찾아오는 남쪽의 작은 부락 산야족들은 대부분 엘프어가 통하는 투구르 부족에게 물건을 판매했다.

그러면 투구르 부족은 싸게 매입한 동물의 가죽이나 약초 등을 엘프들에게 정가에 팔아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간혹 엘프어를 배워서 수수료를 물지 않으려는 영약한 놈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놈들은 잘 기억해뒀다가 살벌한 경고의 말을 전하면 대부분 이 중개 교역을 받아들이곤 했다.

아무래도 같은 남쪽 구역에 부대끼고 사는 이상, 작은 부락이 큰 부락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뒷감당이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아이막이라는 놈이 사는 곳은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알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거지?’

바자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엘린도르 왕국과 이런 식의 교역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은 기껏해야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투구르 부족을 포함한 몇 개의 남쪽 부락이 교역을 독점하며 크게 성장했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남쪽의 작은 부락들이 겨울이면 이곳을 찾아와 자연스레 투구르 부족의 영향 아래 교역을 하게 된 것이다.

‘놈들이 사는 곳에서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못해도 열흘 이상 말을 타고 달려야 할 텐데.’

물론 언제까지고 남쪽 구역의 산야족들만 엘프들과 교역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저 먼 곳에 사는 놈들이 당연하다는 듯 이곳에 물건을 팔기 취해 찾아온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놈들을 만나게 되면 이 부분을 추궁해야겠구나.’

바자크가 그렇게 대가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

바자크의 부하 다니룬은 산야족들이 단체로 머무는 간이 숙소에서 애타게 아이막 부자를 찾고 있었다.

“거기! 혹시 커다란 곰 가죽을 지닌 세 남자를 보지 못했나?”

“곰 가죽을 가진 놈들이라면 글쎄요···”

“바자크 어르신께서 시키신 일이다! 젊은 놈 하나와 어린 놈 하나, 늙은 놈 하나다! 정말 그들을 본 자가 아무도 없는가??”

바자크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숙소 근방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지만, 아이막 부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군. 놈들은 이곳이 아니면 묵을 곳이 없을 텐데??’

이곳은 엄연히 엘린도르 왕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치안 유지를 위해 투구르 부족 외의 산야족들은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신분을 보증해줄만한 높은 신분의 엘프를 알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놈들은 이번에 이곳을 처음 찾아온 뜨내기들이 아닌가?

다니룬이 그렇게 간이 숙소 근방을 뒤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

“음? 이게 누군가. 투구르 부족의 다니룬 아닌가. 아침부터 뭘 그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겐가?”

다니룬은 자신의 귀에 들려온 엘프어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가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반 상회의 린델 님!”

“그래. 아침부터 고생이 많군. 뭘 그리 애타게 찾아다니는 겐가?”

“별 일 아닙니···”

다니룬은 순간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린델이라는 귀가 긴 너구리가 자기 행동을 지켜보다가 말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린델 님. 혹시 마수의 가죽이라며 커다란 곰 가죽을 지니고 있는 저희 동족 셋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봤다마다. 아주 질이 좋은 가죽이기에 우리가 좋은 값으로 매입을 했네.”

“예??? 아니 그게 무슨??”

다니룬은 화들짝 놀라 린델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것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린델은 그런 다니룬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반응이 그런가? 우리가 좋은 물건을 구한 것이 그렇게 배가 아픈가?”

“아니···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데 자네들 좀 너무했더구만.”

“그건 무슨 말이십니까?”

“어제 다 들었네. 그 좋은 가죽을 고작 50엘린에 사겠다 했다면서?”

다니룬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이 귀 긴 놈이 모든 걸 다 알고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닌가?

“저는···말단이라 잘 모릅니다. 그자들과 이야기를 한 것은 바자크 어르신이셨기 때문에.”

“그래? 그럼 바자크에게 가서 좀 전해주게. 중간에서 이문을 내는 것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상도덕은 지키라고 말일세. 적당히라는 것이 있지 않겠나.”

“예???”

다니룬은 이 엘프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얼빠진 대답만을 내뱉었다.

린델은 그런 다니룬의 반응을 무시하고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다니룬에게 물었다.

“그런데, 담비 가죽은 올해는 겨우 그게 끝인가?”

“예, 예··· 그래도 올해 저희가 질 좋은 것으로다가 열 장을 넘게 구해드렸지 않습니까?”

“담비라는 놈들이 아무래도 많이 잡히지는 않나 보지?”

“그게 복잡합니다. 놈들은 깊고 험한 곳에서만 사는데다 영역권도 넓습니다. 사람의 기척에 민감하기 때문에 활 같은 걸로 잡을 수도 없지요.”

“흐음···그래. 알겠네. 수고가 많구만.”

“예, 예···!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헐레벌떡 자기 부족 천막으로 돌아가는 다니룬을 보며, 린델은 어제 아이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담비라는 놈들이 원래 그렇게 많이 잡히지 않는가?

-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저희 역시 올 겨울 내내 잡은 것이 고작 이 정도이니까요.

- 흐음···그런데 저기 투구르 놈들은 자네들보다 훨씬 전사들의 수도 많고 부락도 크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자네들보다도 담비 가죽을 적게 가지고 있던데.

- 그건 당연합니다. 저희는 놈들보다 더 북쪽, 험한 곳에서 왔으니까요.

- 험하다?

- 담비라는 놈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고 험한 곳에서 주로 서식합니다. 투구르 부족을 포함하여 이곳에 교역을 하러 온 다른 작은 남쪽 부락들이 사는 곳은 상대적으로 험하지 않으니, 안 그래도 희소한 담비를 더욱 보기 힘든 것이지요.

- 그렇다면, 자네들과 비슷한 곳에 사는 산야족들은 그래도 담비를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얘기군.

- 최소한 남쪽 부락들에 비하면 그럴 겁니다.

- 그러면 내 부탁 하나 함세. 자네들과 친한 부족들에게, 우리가 담비 가죽을 원한다는 소문을 내주게. 내 사례는 톡톡히 할 터이니.

-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부족들에게도, 어르신의 상회에 가죽들을 팔라고 전하겠습니다.

- 그래!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우리쪽에서 통역을 구해볼 테니 염려 말라고 해주게.

아이신의 말에 의하면, 투구르 부족을 포함하여 엘린도르 왕국의 국경에서 가까운 지역은 상대적으로 담비가 적게 산다고 한다.

저 다니룬이라는 놈도 같은 말을 한 것을 보면 이건 틀림없는 사실.

지금까지는 왕국의 국경에서 가까운 산야족들만 이곳에 사냥감을 팔러 왔는데, 저 아이신이라는 아이가 소문을 잘 내준다면 내년부터는 더 수월하게 담비 가죽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린델은 허둥지둥 멀어져가는 다니룬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상회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

아이신은 아이막과 지르칼을 데리고, 이른 아침부터 장을 돌아다녔다.

어제 린델이라는 엘프 상인이 매우 친절하게 구매하고 싶은 물건들의 시세와 파는 곳 등을 알려줬기 때문에.

그들은 헤매는 일 없이 수월하게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정말 튼튼하구나. 이런 것들이 있으면 돌아가자마자 땅을 갈아엎을 수 있겠어.”

“잘만 하면, 올해부터는 농사지은 것만으로도 밥 굶는 일은 없겠는데요?”

아이막과 지르칼은 철제 농기구들을 만져보며 연신 감탄의 말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산야족들은 철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이 없다 보니, 가히 신세계라고 할 만했던 것이다.

아이막은 그러다가 목소리를 죽여 아이신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무기를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 많이 아쉽구나.”

“아무래도 놈들이 우리를 여전히 경계하고 있다는 거겠죠.”

아이신의 대답대로, 엘린도르 왕국과 솔라리온 제국의 교역에는 커다란 원칙이 있었다.

- 야만족들에게 철제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엄금한다.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산야족, 평야족과 제국, 왕국간의 교역으로 서로가 큰 이득을 보고 있기는 했지만.

제국과 왕국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분쟁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옛날 산야족이나 평야족은 간혹 농사가 잘 되지 않고 사냥까지 잘 되지 않으면 국경 부근의 마을들을 약탈하곤 했다.

제국의 야만족 정책이 성공적으로 돌아가는 지금에는 그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지만.

산야족과 평야족들이 적은 인원으로도 제국과 왕국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좋은 철로 만든 무기가 있다면 사냥을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냥신께서 계시를 또 내려주시겠지요.”

뭐 당연히 아이신도 이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당장은 우선 순위가 낮을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철제 농기구를 살펴보기도 하고 필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구매하기도 하던 그 때였다.

“아아아아아아악!!!”

“이 놈!! 어디 한 번 본보기를 보여주마! 어딜 감히 주인님의 음식에 손을 대고···!!”

아이신과 아이막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찢어지는 듯한 아이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건 무슨 일일까요?”

“아이가 우는 소리 같았는데.”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을 몇 명이나 키우는 아비의 입장이라서일까?

아이막이 궁금증을 내비치기에 그들은 슬며시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 철썩!! 철썩!!

고작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밖에 되어보이지 않는 엘프 꼬마가, 성인 엘프에게 무자비한 채찍질을 당하고 있었다.

“아이고 저런···엘프 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답니까? 저런 작은 아이를 어떻게···”

지르칼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이신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아이신은 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저 아이는···?’

뭔가를 느낀 아이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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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교역과 세력 구도(5)

‘틀림없어. 아이덴이나 아이나와 같은 반응이다.’

아이신 자신도 아직 뭐라고 이름 붙이지 못한 능력.

그러니까 자신이 이끌어주면 이른 나이에 벽을 넘을 수 있는 자질이, 채찍질을 당하는 엘프 꼬마에게서 느껴진 것이다.

아이신은 인파를 헤치고 조금 더 앞으로 나갔다.

주변은 어느새 매 맞는 아이를 구경하기 위해 마을의 엘프 남녀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신은 자기 옆에 조금 나이 들어보이는 엘프를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저게 무슨 상황인가요?”

“음? 우리 말을 잘 하는 야만인 꼬마로구나. 뭐 흔한 일 아니겠느냐.”

“흔한 일이요?”

“보나마나 저 노예 놈이 주인 말을 거스른 모양이지. 오늘 아주 끝을 볼 모양인데.”

아이신은 노예라는 말을 듣고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 엘린도르 왕국은 지독한 신분제 사회였지.’

엘린도르 왕국의 엘프들이라고 하면 제국이나 왕국과 구별되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가장 큰 특징이라하면 역시 그 기다린 귀와 인간의 2배는 되는 수명.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하고 인간보다 평균적으로 키가 크다는 것.

그리고 이런 외형적인 특징만큼이나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으니, 그것은 철저한 세습 신분제 사회라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엘린도르 왕국 엘프 중에 절반은 노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솔라리온 제국 영토의 반의반의반의반도 되지 않는 엘린도르 왕국이 천 년 가까이 번성하는 이유.

그것은 엘린도르 왕국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국은 그 넓은 영토를 완벽하게 통치할 수 없어 일정 부분 봉건제를 병행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몇 번이고 반란으로 왕조가 바뀌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엘린도르 왕국은 왕족과 귀족, 평민과 노예의 신분제를 엄격히 적용하여 내분의 씨앗을 미연에 통제했다.

‘국가를 오래도록 존속하기 위한 방안이라고는 하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

아이신은 회귀 전 엘린도르 왕국과도 여러 번 협력하여 야만족과 교전을 치렀다.

특히 거친 땅에 사는 마야족들이 힘을 합쳐 엘린도르 왕국을 침공했을 때, 아이신은 용맹한 엘프 전사와 전장에서 동고동락하며 친분을 쌓았다.

‘루메스···’

그는 아이신이 지금껏 봐왔던 엘프 전사 중에 가장 용맹한 전사였다.

주로 활과 단검을 사용하며 근거리 전투를 꺼리는 다른 엘프들과 달리.

루메스는 기다란 창이나 검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언제나 선봉에서 야만족들을 도륙하곤 했다.

언젠가 아이신은 루메스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 루메스. 자네는 목숨이 두렵지 않나? 뭐 때문에 그리 뒤가 없는 것처럼 싸우는 거지?

루메스는 아이신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 목숨을 바칠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운명의 사슬을 끊어낼 수 없거든.

- 운명의 사슬?

-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루메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엘린도르 왕국의 세습 신분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루메스의 어머니가 노예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귀족이지만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노예 신분이라는 것.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아버지와 다른 형들을 주인님으로 모셔야만 했다는 것.

그런 노예 신분을 자력으로 벗어나기 위한 몇 안 되는 방법이, 왕국 최북단에서 야만족들과 싸워 공을 세우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루메스에게 말했었다.

- 엘린도르 왕국은 자네 정도의 실력자를 그 따위로 대한단 말인가?

- 아이신. 능력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네. 엘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은 웬만해서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거라네. 그래도 나는 형편이 좋은 편이지.

- 무슨 형편이 좋단 말인가.

- 신께서 내게 뛰어난 전사의 자질을 내려주셨으니까. 기필코 노예 신분을 벗어나, 내 아이에게는 이런 비참한 일을 겪지 않게 만들걸세.

루메스는 그저 담담하게 그리 대답할 뿐이었다.

아이신이 죽기 1년 정도 전에, 마수를 잡는 임무를 하다가 엘린도르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오게 된 적이 있었다.

- 오랜만에 루메스의 얼굴이나 보고 갈까.

루메스는 엘프들이 만든 전진기지 겸 마을에 주둔하며, 야만족들과 교전이 일어나면 바로바로 싸우러 가곤 했었다.

아이신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보초병 엘프에게 루메스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보초병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 왜 대답을 못하는가? 루메스는 마을에 있느냐고 묻지 않나.

- 그것이···

아이신은 엄연히 제국의 기병대장 신분이었기 때문에 엘프들도 모두 아이신을 정중히 대하곤 했다.

아이신은 루메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 직감하고 마을의 엘프 병사들에게 루메스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누구에게도 루메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아이신이 별 수 없이 마을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 저기, 아이신 대장님.

- 자네는···?

아이신을 불러세운 것은 아이신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루메스와 같은 노예 엘프 전사였다.

-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조금 그러니···

- 우리 주둔지로 가지.

기병대의 주둔지로 그를 데려가자, 그제야 그가 루메스에 대한 일을 알려주었다.

- 루메스는 몇 달 전에 죽었습니다.

- 루메스 정도로 강한 전사가? 마야족과 교전을 하다가 죽었나?

- 아닙니다. 루메스는 마을의 귀족에게 처형당했습니다.

- 뭐라고?? 대체 왜??

루메스의 동료 전사가 말하길.

루메스는 오래 전부터 몰래, 지역의 엘프 귀족 유지의 딸과 사랑을 속삭였다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을 유지했었는데, 결국 밀회 현장을 발각당해버렸다.

- 그래서, 자네들은 루메스가 죽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단 말인가?

- 아닙니다. 노예들을 비롯하여 평민 전사들까지 모두 루메스를 용서해달라 청했습니다. 수도에서 오신 장군께서도 루메스를 아끼셨으니, 별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귀족이 그 날 저녁 곧바로 루메스의 목을 잘랐습니다. 하필 수도의 장군께서 원정을 떠나 계셨던 때였기 때문에···

- ···루메스의 묘는 어디에 있나?

본래 평민 엘프나 귀족 엘프의 시신은 수목장으로 치러진다.

그러나 죄를 지어 처형당한 노예 엘프의 경우, 시신을 불에 태워버리거나 거적떼기에 싸서 짐승들이 먹도록 산골짜기에 버린다고 했다.

- 시신을 불에 태우려는 것을, 어떻게든 부탁하여 겨우 빼올 수 있었습니다. 마침 이 근처에···루메스의 묘가 있습니다.

아이신은 곧바로 안내받은 곳으로 향했다.

루메스의 시신을 묻어놓은 나무는 생전에 루메스가 자주 오르내리며 위에서 야만족들을 감시하던 나무라 했다.

- 죽기 전에, 루메스가 대장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 내 이야기를?

- 자기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지만, 친구는 꼭 복수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그리 전해달라 했습니다.

- ······

아이신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기 신분과 과거에 대한 일을 철저히 함구했다.

아이신을 거둬준 변경백도 아이신이 그저 산야족 출신이라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과거는 알지 못했다.

그런 아이신이 생전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 것이 루메스와, 죽기 직전의 부대장 둘 뿐이었던 것이다.

- 그곳에서는 자유롭길 바라네. 친구여···

루메스가 묻힌 땅 위에, 그가 즐겨 마시던 거친 엘프 막술을 부어주며 아이신은 용맹한 전사를 그렇게 가슴에 묻었다.

‘루메스가 그랬지. 엘린도르 왕국에서, 노예는 엘프가 아니라 그저 가축이나 다름 없는 신세라고.’

굳이 루메스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만은 아니다.

인파를 헤치고 앞까지 나간 아이신은 채찍질을 하려는 성인 엘프를 몸으로 막아서며 외쳤다.

“멈추십시오!”

“음? 아니 이 야만인 놈이···! 비켜라!”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성인 엘프는 아이신의 말을 무시하려다가, 자신도 채찍질을 계속하기가 조금 힘들었는지 한숨을 돌리며 대답했다.

“우리 말을 잘하는 꼬마로군. 그래, 말해주지. 저 놈은 주인님의 상에 올라갈 음식을 마음대로 집어 먹었다.”

“음식 좀 집어 먹었다고 이렇게 어린 아이를 죽을 만큼 가혹하게 때린단 말입니까?”

“허? 짐승이 그럼 말을 한다고 듣겠느냐. 짐승은 맞아야 말을 듣는 법이다. 이제 비켜라. 오늘 저 놈의 버릇을 제대로 잡을 것이다.”

아이신은 망설이지 않고 품에 손을 넣었다.

쩔렁 하는 소리와 함께, 은화 꾸러미가 성인 엘프의 앞에 내밀어졌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고작 짐승이라면, 제가 이 아이를 사겠습니다. 200엘린입니다. 이 정도면 짐승의 값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주변에 모인 엘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저 평소처럼 노예가 매 맞는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것뿐인데.

갑자기 웬 산야족 꼬마가 채찍질 당하는 노예를 감싸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유창한 엘프어로 이야기를 하고 갑자기 노예를 사겠다며 거액을 내밀기까지.

무료한 북쪽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재미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2, 200엘린??”

성인 엘프는 갑자기 불러진 큰 액수에 당황했으나, 이내 아이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만인 놈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잔말 말고 거기서 비켜라!”

액수야 어쨌든 자신도 고용된 입장이다.

고용주가 이곳에 있다면 모를까, 그리고 상대가 같은 엘프라면 모를까.

자신은 우선 노예 놈의 교육이라는 본분을 다하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아이신을 밀쳐내고 채찍질을 재개하려던 성인 엘프의 뒤에서,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리게.”

“또 누가 방해···엇? 실반 상회의 린델님 아니십니까?”

뒤를 돌아본 성인 엘프는 깜짝 놀랐다.

‘저 분이 갑자기 왜 끼어드시는 거지?’

성인 엘프는 평민 신분으로 주인에게 고용되어 노예들의 관리를 하는 사람인데.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은 겨울이면 이 마을을 찾아오곤 하는 유명한 귀족 상인이다.

린델은 상인답게 아이신이 뭘 하려는지 눈치로 파악하고는 얼른 아이신에게 속삭였다.

“이 노예를 사고 싶은 게로군. 내가 도와주도록 함세.”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닐세. 이걸로 내 자네에게 사례는 미리 한 걸세.”

어제 말한, 주변 다른 부족들에게 실반 상회가 담비를 매입한다는 정보를 흘려달라는 건에 대한 사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노예 아이의 주인이 누구인가?”

“그것이···이 마을의 유지이신데···”

“안내하게.”

“예?”

“못 들었는가? 내 손님이 이 노예를 사고 싶다 하니, 그대의 주인에게 내가 직접 말씀을 드리겠네.”

“어어어어···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놈아! 어서 일어나라!”

아이신은 아이막과 지르칼에게 뛰어가, 잠깐 좀 다녀올 데가 있으니 상회 숙소에 돌아가 계시라고 전했다.

그렇게 아이신과 린델이 성인 엘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온 몸에 상처가 가득한 엘프 노예 소년도 비척비척 일어나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소년의 커다란 눈망울은 여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지금부터 자신의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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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교역과 세력 구도(6)

엘프 노예 아이의 주인인 귀족 엘프는 아이신이 제시한 금액을 듣고 흔쾌히 아이를 팔았다.

“200엘린이라면 팔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저 말도 듣지 않는 놈을 사서 어디다 쓰려는 지는 모르겠소만.”

당연히 아이신이 다짜고짜 노예를 사겠다고 했다면 돈이고 뭐고 무시했을 테지만.

린델이라는 이름난 상인이자 귀족 엘프가 보증인 비슷하게 거래를 주선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엘프 노예 아이는 주인 집 마당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왜 때리지 않지?’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다.

젖먹이때 수도에서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팔려왔는데, 아이의 어머니는 추운 북쪽 기후와 모진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가 일곱살 때 죽어버렸다.

‘···배가 너무 고파.’

노예도 엄연히 주인의 재산이자 노동력이기 때문에, 엘프 주인들은 노예를 굶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뇌가 끝나 말을 잘 듣게 된 성인 엘프 노예의 이야기.

어린 엘프 노예의 경우, 어릴 때 버릇을 들여 놔야 한다며 조금만 말을 듣지 않아도 모진 채찍질과 함께 밥을 굶기기 일쑤였다.

아이는 어제 하루를 꼬박 굶은 뒤, 도저히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주인이 먹을 음식에 손을 댔던 것이다.

- 끼이익

아이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택의 문이 열리고 주인과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베라모스! 베라모스는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요!!”

엘프 노예 아이의 원래 주인이 소리를 지르자, 아이에게 채찍질을 하던 시종장이 어디선가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저 아이를 이 분들에게 팔기로 하였다.”

“이 놈을 판다굽쇼??”

“그래. 손님들께서는 마저 볼 일이 있으시다하니, 아이를 깨끗히 씻겨서 실반 상회로 데려다 주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요. 이 놈아! 이리로 따라 오너라.”

눈치가 빠른 그는 얼른 주인의 말을 이해하고 아이를 마당 뒤편으로 데려갔다.

아이를 씻겨주며, 시종장 베라모스는 무서운 표정으로 아이에게 겁을 주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구나. 싹수가 노란 놈 같으니.”

“···시종장님.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너는 저 야만족들에게로 팔려가는 것이다. 놈들이 밥이나 제대로 주겠느냐. 그러게 고분고분히 말을 잘 들었으면 팔려가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아이가 겁먹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지만, 초점이 없는 아이의 눈에는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베라모스는 쯧쯧하고 혀를 차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밥만 주지 않겠느냐. 야만족들이 사는 땅은 춥고 거친 곳이다. 두고 봐라. 너는 매일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인님 같이 좋은 분 밑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줄도 모르고.”

시종장 베라모스는 아이를 모두 씻긴 뒤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실반 상회로 향했다.

상회에 도착하자, 어느새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구입한 아이신 일행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거기 가서도 잘 살아라, 이놈아.”

아이의 인수가 끝나자, 아이신은 린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신세가 많았습니다.”

“그래, 이제 돌아가는가?”

“예. 부락까지는 갈 길이 머니까요.”

“기껏 친분을 쌓았는데 아쉽군. 내년 겨울에 꼭 볼 수 있기를 바라네.”

주변 부족들에게 담비 가죽에 대한 소문을 잘 내서, 꼭 같이 데려와 달라는 말이다.

아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어.’

회귀 직후, 아이신은 우선 부락의 고질병인 식량 부족부터 해결해야겠다 느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가진 힘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겨울 수렵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잠을 줄여가며 덫을 설치해 담비를 잡아 가죽을 모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비싸고 질 좋은 철제 농기구들을 충분히 구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붉은 털의 악마를 잡은 덕에 필요한 농기구는 물론 농작물 종자들까지 살 수 있었어.’

거기서 끝이 아니다.

아이신은 불안한 표정으로 바타르에 함께 타고 있는 엘프 노예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만한 자질이 있다면, 분명 루메스와 같은 뛰어난 전사로 성장하겠지.’

벽을 넘은 전사 하나 하나의 존재는, 특히 소규모 전투에서 큰 빛을 발한다.

어찌보면 이번 겨울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이 아이를 얻은 것일수도 있다.

아이신과 아이막, 지르칼은 그렇게 뿌듯한 기분으로 엘프 마을을 나서 부락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재촉했다.

*

열흘 동안 다시 먼 길을 달려, 아이막 일행은 다시 부락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형!”

“오빠아!!”

아이신 일행이 돌아오자, 여느 때처럼 아이덴과 아이나가 뛰어와 그들을 반겨주었다.

“잘 있었어?”

“응! 이제 날씨도 많이 따뜻해졌어!”

“뭐 사온 거야 형??”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어머니는 안에 계시지?”

“응. 안에 계셔. 벨리온이랑 벨리바도.”

“나는 조금 있다가 들어가도록 하마, 아이신.”

아이덴과 아이나는 아이신 일행이 자루 가득 들고 온 물건들이며, 안절부절 못하는 엘프 소년 등을 보며 묻고 싶은게 많아보였지만, 우선 아이신을 기다렸다.

아이막이 말들을 마굿간에 데려다 놓는 동안, 아이신은 방에 들어가 벨린다에게 꾸벅 절을 했다.

“돌아왔습니다, 어머님. 저희가 없는 동안 별 일 없으셨지요?”

“···흥. 20일이 넘도록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니? 뭐 별 일은 없었다만.”

“부락에 필요한 것들을 사러 갔었습니다. 그보다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뭘 보라는···”

벨린다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신을 흘겨보다가, 아이신이 내민 물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만, 이건??”

벨린다는 얼른 아이신이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촉촉한 윤기를 머금은 천이, 마치 물결처럼 부드럽게 벨린다의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렸다.

햇빛에 비춰보자, 부드러운 감색 바탕 위로 자줏빛과 금사가 은은하게 번졌다.

벨린다는 이 고급스러운 천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친정에 있을 때, 대족장인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만이 특별한 날에 이걸로 지은 옷을 입곤 했으니까.

‘엘린도르 왕국이나 제국의 귀족들이 옷을 만들 때 쓰는 비단이잖아?’

아이신은 벨린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실반 상회에서 특별히 질 좋은 비단을 여러 장 샀다.

놀란 듯한 벨린다를 보며, 아이신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엘린도르 왕국에서도 지체 높은 여인들이 이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흐···흥! 어미를 바보로 아는구나. 내가 이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어쨌든 잘 사왔구나. 뭐 다른 건 또 없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신은 벨린다의 말에 화답하듯, 큼직한 병을 꺼냈다.

“벨리온, 벨리바. 이건 너희 선물이다.”

“선물??”

벨리온과 벨리바는 멀뚱하게 벨린다의 옆에서 아이신을 쳐다보고 있다가, 자기들 이름이 불리자 얼른 대답했다.

아이신은 미소를 띄며 병의 뚜껑을 열었다.

달콤한 냄새가, 아이들의 코를 자극했다.

“먹어봐.”

“우와···!! 뭐야 이거??”

“이렇게 달달한건 처음 먹어봐!” 

아이신이 내민 것은 엘린도르 왕국의 특산품인 과일 꿀절임이었다.

벨린다 역시 옆에서 하나를 집어 먹더니 순식간에 심술궃은 얼굴이 풀어질 정도로 극상의 단맛을 자랑했다.

‘이 정도면 이 여자의 환심은 충분히 샀겠지.’

회귀 전, 벨린다의 친정이 그렇게도 일찍 부락을 침공한 까닭은 아무래도 벨린다의 입김이 컸다.

워낙 입지가 좋은 땅이기 때문에 굳이 벨란다가 쏘삭거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침략당했을 테지만.

최소한 벨린다가 자기 오빠들한테 불평이란 불평을 다 늘어놓지 않는다면 몇 년은 시기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작 그 몇 년이, 아이신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어머니, 그럼 저는 아버지를 도울 일이 있으니 나가 보겠습니다.”

“으으음. 그래, 다녀오느라 고생했다.”

아이신의 의도대로 벨린다는 좋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만면에 웃음기를 띄었다.

아이신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와 부락 중앙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아이막이 부락민들을 모두 모아놓고 중앙에 철제 농기구들을 좌르르 늘어놓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족장님?”

“음.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네. 이건 나와 아이신이 저 멀리 엘린도르 왕국까지 가서 사온, 철제 농기구들이네.

“엘프제 철이요??”

“그 귀한 걸 사오셨다고요??”

물론 산야족이라고 철의 존재조차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산야족이 사는 땅에도 철광석이 나는 곳들이 있고, 규모가 큰 산야족 부락에는 마을에 대장간이 있어 초보적인 제련을 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규모가 큰 부락에서 만들어내는 무기나 농기구도 제국이나 왕국제에 비하면 그 품질이 조악했다.

그러니 이들의 반응이 이토록 놀라운 것이다.

“붉은 털의 악마 가죽을 비싸게 팔아서 사왔지. 이제 슬슬 땅을 갈아엎어야 할 때 아닌가. 한 번 시험삼아들 써 보게.”

아이막의 말을 듣고 산야족 전사들과 아낙네들이 철로 만든 삽이며 갈퀴 등을 하나씩 손에 들고 이곳저곳을 파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끝내주는데요?!!”

“이거라면 벽을 넘지 않은 전사도 힘들이지 않고 땅을 팔 수 있겠습니다!”

“개간하지 못한 땅들도 충분히 개간할 수 있겠는데요?”

“족장님은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사오셨답니까?”

아이막은 아이막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 사냥의 신께서 굽어살펴 주시는 것 아니겠는가. 날도 풀렸으니, 이제 슬슬 농사를 시작하도록 하세.”

마음 같아서는 아이신이 사냥신의 계시를 받아 엘프어로 말도 하고 온갖 활약을 다 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이신이 조금 더 클 때까지는, 지르칼과 둘만 이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다짐하는 아이막이었다.

부락민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 후, 아이막은 슬며시 아이신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새엄마는 좋아하더냐?”

“예. 기뻐하는 눈치셨습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사냥신께서는 대체 어떻게 알고 그런 것까지 다 알려주신다더냐?”

뭔가 애매한 상황이 올 때면 그냥 죄다 사냥신의 덕이라고 둘러댔기 때문에, 아이신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막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덴과 아이나가 기다렸다는 듯 아이신에게 물었다.

“형! 쟤는 대체 뭐야??”

“생긴 게 우리랑 달라! 그리고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해!”

아이막, 지르칼과는 돌아오는 길에 대충 이 아이에 대한 것을 모두 말해뒀지만.

아이덴과 아이나에게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아이들은 지금껏 엘프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아이신은 뭐라고 아이를 소개해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미래에 훌륭한 전사가 될 것을 확신하고 데려온 거긴 한데···일단은 노예를 사 온 거고. 으으음···’

아이를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던 아이신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해줬다.

“너희 동생이야.”

““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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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 1년 반 후

엘프 노예 소년을 사 왔을 때, 당연하다는 듯 아이막과 지르칼이 아이에 대해 물었다.

- 아이신. 그 아이는 대체 뭐냐?

- 엘프인 것 같은데···아직 어린 엘프구나.

아이신은 천연덕스럽게 또 사냥신의 이름을 팔아먹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경우와 달리 구체적으로.

- 사냥의 신께서 이 아이를 꼭 구하라 하셨습니다.

- 이 아이는 장차 훌륭하게 성장하여 우리 부족에 없어서는 안 될 전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이신이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에, 아이막과 지르칼은 그 이상 묻지 않고 엘프 마을을 나섰다.

엘프 노예 소년은 바타르의 등 위, 아이신의 앞에 타서 마을을 떠나며 생각했다.

‘내, 내가 말을 다 타 보네?’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빠르게 덜컹거리며 이동하는 감각.

여느 또래 소년들처럼, 처음으로 말을 탄 엘프 소년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엘프 소년의 머릿속에는 시종장 베라모스의 말이 계속해서 맴도는 듯했다.

- 야만족들이 사는 땅은 춥고 거친 곳이다.

- 두고 봐라. 너는 매일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인님 같이 좋은 분 밑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줄도 모르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돈을 받고 팔려가는 노예 신세.

마을을 벗어나긴 했지만, 자신의 신분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오히려 베라모스의 말처럼, 지금까지가 천국이었고 앞으로는 지옥같은 나날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을을 떠난 첫 날부터, 엘프 소년은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다.

- 먹어라.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배가 고플 테지.

식사 시간이 되면 그들은 엘프 소년에게도 자신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것을 주었다.

‘이 사람들이 나의 새 주인님일 텐데. 어째서 나와 같은 것을 드시는 거지?’

당장 주인 어른이 드시는 음식에 손을 댔다가 정말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한 것이 오늘 아침의 일인데 말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날이 저물 때 일어났다.

- 거기 앉아서 쉬고 있으렴.

그들은 낮이면 계속해서 말을 타고 이동을 했고, 저녁이면 적당한 곳에 야영지를 만들어 노숙을 했다.

야영지를 만드는 과정은 엘프 소년이 보기에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힘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들은 주변의 튼튼한 나뭇가지와 들고 다니던 짐승 가죽으로 세 네 명이 들어가 잘 수 있는 간이 천막집을 만들어냈다.

바닥에는 마른 풀과 나뭇가지, 짐승 가죽들을 깔아 냉기를 막고 능숙하게 내부에 불을 피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소년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고, 식사 시간이 되자 따뜻한 국을 아이에게도 똑같이 내밀었다.

‘이렇게 따뜻한 음식은 처음이야···’

그러면서 소년의 머릿속에는 또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저렇게나 힘들어보이는 일을 하면서, 왜 내게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거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잘 준비를 시작했다.

엘프 소년을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여긴 주인님들이 주무시는 곳일 거야. 이만큼 공들여 만들었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자야겠지?’

겨울이 끝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밤에는 칼날처럼 시린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다.

저런 곳에서 자면 얼어 죽을 텐데.

밖에 커다랗게 피워놓은 모닥불 근처에 말들이 서로 붙어서 자고 있으니, 자신도 저기 끼어서 자면 되려나?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신이 아무렇지 않게 아이에게 말했다.

- 추우니 이리로 들어오거라.

아이는 얼떨결에 주인님들과 함께 좁은 천막에서 자게 되었다.

비좁았지만 오히려 좁기 때문에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자느라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아이신은 밤새도록 소년을 꼬옥 안아 주었고, 소년은 그렇게 아이신의 품 안에서 저도 모르게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만들고 소년을 깨웠다.

소년은 따뜻한 국을 호호 불어서 먹으며 어제 있었던 일을 멍하니 떠올렸다.

‘이렇게 푹 잔 것이 대체 얼마만이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소년은 아이신의 품 안에서 자기도 했고, 아이막이나 지르칼에게 안겨 잠에 들기도 했다.

출발한지 엿새가 지났을 때, 아이신은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 그러고 보니 아직 너의 이름도 모르는구나. 이름이 뭐니?

귀족 저택의 사람들은 엘프 노예를 이놈 저놈하면서 지칭했고, 그게 아니면 ‘꼬맹이’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분명히 이름이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불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

돌아가신 소년의 어머니가 지어줬고, 오직 어머니만이 불러주던 이름이.

- 미엘란···입니다.

- 그래.

아이신은 다음날, 아이막에게 이야기했다.

- 분명 저 아이는 노예 신분으로 저희에게 팔려온 아이입니다. 하지만 사냥신께서 저 아이가 훌륭한 부족의 전사가 되리라 하셨으니, 노예처럼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네 말이 맞다. 그리고 사실 우리처럼 작은 부족에 무슨 노예가 필요하겠느냐. 네 새엄마의 친정에는 노예들이 수십 명이 넘게 있다고는 하지만···

- 그래서 말인데, 아이에게 새로 이름을 지어주고 싶습니다.

- 이름을?

- 예. 저 아이의 이름은 미엘란이라 한다는군요. 가족처럼 길러내겠다는 의미에서, 아이엘란으로 지어도 되겠습니까?

-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어차피 말도 네가 가르쳐야 할 터이니.

그날 밤에 곧바로, 아이신은 아이에게 말했다.

- 네 이름을 새로 지어주겠다. 너는 앞으로 아이엘란이다.

- 아이엘란···

엘프 노예 소년은 그렇게 미엘란에서 아이엘란이 되었다.

아이엘란이 자기가 새로 받은 이름에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가를 깨닫는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이덴과 아이나는 아이신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얘가 어째서 우리 동생이야 형??”

“으으음···나는 동생 생기면 좋긴 한데!”

아이신은 그저 간단하게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살 거니까. 이름은 아이엘란이라고 해.”

“어라? 그러네. 우리랑 비슷하구나.”

“내가 누나인 거지? 맞지?”

아이덴은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었으나, 아이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이엘란의 손을 잡았다.

“누나라고 불러!”

물론 아이엘란은 아직 산야족의 언어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아이나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며, 마을에 도착하여 느끼고 있던 두려운 감정이 스르르 녹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나. 이 아이는 아직 우리 말을 잘 못해.”

“엥? 그럼 어떻게 해?”

“이제부터 가르쳐 줘야지. 아이나가 누나니까 잘 돌봐줄 수 있지?”

“응! 너무 좋아!”

사실 벨리온과 벨리바도 아이나의 동생이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생각보다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나 입장에서는 오히려 진짜 동생이 생긴 기분인 것이다.

그 광경을 미소지으며 지켜보던 아이막이 그제야 아이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자. 들어가자꾸나. 아이엘란을 너희들 어머니에게도 소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네요. 들어가요 아버지!”

“아이엘란, 방으로 들어가자!”

그렇게, 아이엘란은 아이신의 가족이자 동생으로 산야족 부락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계절이 흘러갔다.

봄과 여름, 가을이 지나 다시 한 번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였고.

혹독한 겨울을 다시금 이겨낸 후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었다.

아이신이 열 네 살.

아이덴이 열 살, 아이나와 아이엘란이 아홉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

산야족은 사계절 내내 사냥을 하지만.

그래도 봄에서 가을까지는 사냥보다 농업에 조금 더 큰 비중을 둔다.

아이신이 회귀한 지 1년 하고도 절반이 더 지난 여름, 아이막의 부족은 농사일에 한창이었다.

“새참 먹고 합시다!”

“어우···이제 허리를 펴 보네.”

1년 전과 달리 아이막의 부족에는 꽤 사람이 늘어 북적북적했다.

고작 열 가구 남짓했던 아이막의 부족에 어째서 이렇게 사람이 늘어났는고 하면.

- 아버지. 봄이 되면 분가한 젊은이들이 찾아오지 않나요?

- 그렇지. 작년에는 유독 농사도 채집도 시원찮았으니, 특히 많은 전사들이 분가해야 할 게다.

거친 동쪽 변방에서, 부족이 굶주릴 때 이를 해결할 가장 쉬운 방법은 먹는 입을 줄이는 것이다.

특히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나면.

이듬해 봄에는 성인 남녀를 짝지워 그대로 분가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신이 회귀한 이듬해 봄, 근처 가난한 부족에서는 앞다투어 장성한 자식들을 분가시켰다.

‘아무래도 농작물을 수확하는 시기까지 버틸 수가 없으니까.’

이런 젊은이들은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떠돌아 다니다가 적당한 곳을 찾으면 자리를 잡아 새 부락을 만들기도 하고.

어쩌다 여력이 있는 부락을 만나게 되면 그대로 그 부락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막의 경우도 약 15년 전에 같은 상황을 겪었다.

전례없는 대기근이 닥쳤기에 근방 부락 젊은이들과 함께 분가하였고.

떠돌아다닌 끝에 입지가 좋은 곳을 찾아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부락을 만들었던 것이다.

- 분가한 전사들이 찾아오면 적극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냥신께서도 하루 빨리 부락의 힘을 키우라 하셨거든요.

-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다. 네가 활약해준 덕에 식량이 넉넉하니, 사람이 늘어도 수확철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게다.

과연 날씨가 따뜻해지자 남쪽과 북쪽에서 강제로 분가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아이막 부락 주변에 나타났다.

아이막은 하룻밤 묵기 위해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설득하여 손쉽게 부락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열 가구이던 부락의 인구가 스무 가구가 넘었다. 시작이 나쁘지 않아.’

암만 아이신이 회귀 전의 지식과 특출난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해도.

남쪽의 대부락이나 벨린다의 대부락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결국 절대적인 전사의 수가 맞아야 한다.

결국 아이신이 회귀한 나비효과로 인해.

아이막의 부락은 몇 달 만에 부족의 힘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새참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아이덴과 아이나, 아이엘란이 신이 나서 뛰어왔다.

“형! 잡초 제거 끝냈어!”

“오빠가 가르쳐준대로 하니까 확실히 힘이 덜 들어가는 것 같아!”

“가, 같이 가요, 아이나!”

“아이엘란! 누나라고 부르랬잖아!”

“미, 미안해요. 아이나 누나.”

요 1년 반 동안 아이신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역시 동생들의 교육이었다.

아이신은 틈이 날 때마다 아이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고, 말타기나 활쏘기 등도 직접 지도했다.

농사일 역시 몸을 많이 쓰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안성맞춤.

1년 정도가 지나자, 동생들은 확실히 또래보다 몸을 쓰는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내게 되었다.

‘아이엘란의 성장도 순조롭고 말이야.’

처음에는 데면데면했던 엘프 소년, 아이엘란은 어느새 아이막 가족의 일원으로 녹아 들었다.

특히 아이나가 제 친동생처럼 아이엘란을 보살폈기 때문에, 아이엘란은 산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빠르게 부락의 일원이 되어갔다.

새참을 다 먹고 난 후, 아이막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지에 묻은 흙은 툭툭 털며 아이신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집에 다녀오마. 네 새엄마를 한 번 보고 와야할 것 같구나. 아이신. 무슨 일이 생기면 지르칼과 상의하거라.”

“예, 아버지.”

벨린다는 지금 아이막의 또 다른 아이를 임신 중이다.

아이신이 회귀하기 전에 벨린다가 낳은 아이는 벨리온과 벨리바 둘 뿐이었는데.

어째서 원래 없었던 동생이 생긴 것인지는 아이신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이막은 자리를 떠났고, 다른 사람들이 한창 오후의 농사일에 열심이던 그때였다.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다른 사람보다 특히 귀가 좋은 아이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대체···??’

산야족은 북방의 유목민들만큼이나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유의 기승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말발굽 소리는 그 미묘한 리듬이 절대 산야족 기수의 것이 아니었다.

“지르칼! 이쪽으로 와주세요! 다른 분들도!”

아이신은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지르칼과 다른 부락민들을 불러 모았다. 

이윽고 아이신이 쳐다보고 있던 방향의 숲 속에서, 말을 타고 있는 건장한 남자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신은 벽을 넘은 자 특유의 시력으로 가장 먼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저건···제국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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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 제국 기병대와의 조우

아이신은 남자들의 복장을 보고 대번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이신이 회귀 전에 매일같이 입고 다니던 바로 그 옷.

바로 제국 기병대의 제복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기병대가 대체 왜 이곳에??’

물론 아이신은 제국 기병대, 정확히는 변경백 휘하의 기병대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변경백 휘하 제국 기병대의 주 임무는 국경 부근에 출몰한 마수의 토벌.

또는 제국의 야만인 정책에 반하는 야만인들의 응징.

그 외 야만인 정책에 관련하여 무력이 필요한 모든 임무였다.

이런 임무 중에는 꽤 멀리까지 순찰을 나가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니 멀고 험한 동쪽 변방의 오지까지 기병대가 찾아오는 일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소리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이건 솔직히 짐작할 수가 없다.

회귀 전에도 제국 기병대가 아이막의 부락까지 순찰을 왔다갔을수도 있지만.

아이막이 그런 사소한 일까지 자식들에게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아이신이 머릿속으로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자니, 어느덧 세 명의 병사가 이쪽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그들도 몰려 있는 아이막 부락 사람들을 확인했을 것이다.

말의 속도를 점차 줄여가며 접근하는 것을 보면, 다짜고짜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서,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우리는 명예로운 솔라리온 제국의 병사다! 이곳의 족장은 누구인가!”

당연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제국어였고, 부락민들은 이걸 알아듣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나! 족장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나!”

“이봐, 진정하라구.”

“이쪽 지역의 산야족들은 아직 조사가 덜 되었잖나. 제국어를 할 줄 아는 놈이 없을 수도 있지.”

“곤란하게 되었군. 찾은 이상 보고를 해야 하는데.”

기병대의 병사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동안, 아이막 부락의 사람들도 동요하여 수근대기 시작했다.

“우리와 같은 동족이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하게 생긴 옷이네. 전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

“근방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데···혹시 저들이 말로만 듣던 제국 사람들인가?”

“뭐? 제국??”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아이신만 유일하게 병사들의 말을 알아 들었다.

‘조사가 덜 되었다···옳거니. 이 놈들은 그냥 이 근방을 순찰하러 온 놈들이구나.’

아이신은 다시 한 번 기억 속의 동쪽 변방 지도를 떠올렸다.

거대한 동쪽 변방을 가로로 절반을 나눠서 북쪽이 평야족 구역, 남쪽이 산야족 구역.

산야족의 땅은 또 다시 가로로 삼 등분하여 세 구역으로 나뉜다.

그 중에 북쪽이 벨린다 부락이 위세를 떨치는 구역.

중앙 부근이 아이막 부족을 비롯하여 중소규모 부락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사는 구역.

남쪽이 투구르 부족 등의 대부락 몇 개가 경쟁하는 구역이다.

이 중 솔라리온 제국이 주목하는 곳은 북쪽과 남쪽 구역.

아무래도 무시할 수 없는 대부락들이 포진해 있는 만큼, 제국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동향을 철저히 수집했다.

그러나 아이막 부족이 사는 중간 구역은 부락의 조사가 별로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나마 조사가 되어있던 부락도, 아이신이 제국 기병대장이 되어 변경백 밑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쓸모 없는 정보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중간 구역 대부분의 부락이 남쪽과 북쪽 대부락들에 흡수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도 여기까지 순찰대가 다니기는 했었구나.’

대충 상황을 파악한 아이신이 그제야 병사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신이 가까이 다가가자 병사들이 의아한 듯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음? 저 놈이 왜 다가오는 거지?”

“몸은 컸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이는 놈인걸? 이놈이 족장일 리는 없는데.”

“이 놈! 그 이상 다가오지 말아라!”

아이신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춘 후, 자연스럽게 제국어로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워낙 경황이 없었기에. 족장님은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어어??”

“제국어??”

아이신의 입에서 유창한 제국어가 튀어나오자, 병사들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후, 병사 하나가 얼른 아이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놈! 우리 기병대는 이 곳에 대한 것을 전혀 들은 바가 없다! 어떻게 제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이냐! 바른 대로 설명하지 못할까!”

사냥신의 축복으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편리한 핑계는 이들에게 댈 수 없다.

그러나 아이신은 이미 이런 상황을 진작부터 대비하고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 놓았다.

“저희 부락은 엘린도르 왕국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솔라리온 제국의 상인들도 있지요. 교역을 위해 제국어를 배웠을 뿐입니다.”

아이신은 천역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들고 있던 농기구를 살짝 들어보였다.

아이신의 의도대로, 눈치 빠른 병사 하나가 그것을 가리키며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저건 정말인 것 같은데? 야만족들이 저렇게 정교한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엘린도르 왕국과 교류가 있다면 제국어를 하는 놈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족장이 이곳에 없어? 곤란하게 되었군.”

아이신은 놈들이 충분히 경계를 풀었다고 생각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필요하다면 데려다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저희 부락에 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게 용건을 말해주시면 이야기가 더 빠를겁니다.”

“호오···야만인 주제에 똘똘하구나. 그러나 절차는 절차다. 너희 족장에게 안내해준다면, 네가 그 사이에서 통역을 하도록 하라.”

아이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부락민들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은 솔라리온 제국의 기병대입니다.”

“제국의 기병대??”

“이,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거래?”

“족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와 지르칼이 이들과 함께 가야할 것 같습니다. 큰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은 하던 일을 계속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신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켜놓고, 지르칼과 함께 말을 타고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족장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병사들은 군말없이 아이신의 뒤를 따라왔다.

말을 타고 수십 분을 달린 후, 그들은 부락에 도착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아이신은 부락 중앙 공터에 지르칼과 병사들을 세워놓고 아이막을 부르러 뛰어갔다.

“아버지!”

집의 문을 열고 아이막을 찾자, 아이막이 곧장 밖으로 나왔다.

“아이신? 무슨 일이냐?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무슨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제국의 병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아하···제국의 병사가. 음? 지금 뭐라고???”

아이막은 제국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거 큰일이잖느냐!! 제국에서 우리 부족을 왜 찾아왔단 말이냐!!”

“괜찮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냥신께서 우리에게 해가 될 자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이신이 익숙하게 사냥신을 팔아먹자, 아이막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잠깐. 제국 놈들은 엘프들과는 또 언어가 다를 텐데? 아이신, 너 혹시···?”

“예. 저들과도 말이 통하게 됐습니다.”

“거 참 봐도 봐도 신통하구나.”

생전 배워본 적도 없는 엘프어며 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판이니.

아이신이 매번 곤란할 때마다 사냥신을 팔아먹어도 아이막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아이막은 곧바로 밖으로 나와 제국 병사들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이 부락의 족장 아이막이오.”

병사들은 다른 산야족 전사들보다도 눈에 띄게 기골이 장대한 아이막을 보고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봐 온 야만인들 중에 제일 강해보이는데?’

‘작은 부락의 족장이라고 무시할 놈이 아니구만 이거.’

아이신의 통역으로, 이들은 아이막에게 부락의 가구수와 전사의 수, 근방 다른 부락들에 대해 물었다.

“음···그러니까 이 근방에는 눈에 띄게 강한 부족은 없다는 말인가?”

“그렇소.”

“이거 큰일이구만. 작은 놈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다 돌아다니며 조사한담.”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우선 이 정도만 하고 보고하는 게 좋겠군.”

“슬슬 돌아가세.”

병사들은 그것으로 용건은 끝났다는 듯, 말을 타고 부락을 나가려 했다.

아이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놈들에게 달려갔다.

“저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아까 그 똘똘한 놈이로군. 뭐냐.”

“얼핏 듣기로 변경백께서 여름이면 저희같은 사람들에게서 말을 사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시(馬市)를 말하는 거로군. 네 말대로 변경백께서는 1년에 한 번씩 야만인들에게서 군마를 사들이시지.”

“저희 부족도 참가할 수 있습니까?”

“음? 너희 부족에서?”

병사들은 아이신을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변경백이 야만인들에게서 군마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마시에는 꽤 규모가 큰, 먹고 살만한 부락들만 참가했기 때문이다.

“너희 부족이 그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변경백께서는 군마를 좋은 값에 사주신다 들었습니다. 몇 마리 되지 않지만, 저희도 남는 군마를 팔아보려 합니다.”

“흠···뭐 군마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좋다. 위치와 시기를 알려줄 테니, 생각이 있다면 말을 들고 찾아오도록 해라.”

“너희 부족의 대한 것은 상부에 보고해놓도록 하지.”

제국 병사들이 떠난 후, 아이신은 곧바로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만간 전사 몇명을 데리고 제국인들을 만나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제국인들을? 저들이 뭐라고 하더냐, 아이신.”

“군마를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허허···군마라···아니, 잠깐. 아이신. 설마 이것도 모두 사냥의 신께서 미리 계시를 내려주신 내용이었느냐???”

아이막이 이렇게 놀라는 까닭이 있었다.

산야족은 북방 유목민만큼이나 말을 잘 타고, 그만큼 말을 키우는 노하우가 있는 사람들이다.

산야족은 말을 두 종류로 나누어 키웠는데, 하나는 운반과 운송, 말젖과 고기를 얻는 용도.

다른 하나는 사냥과 전쟁때 타고 다니는 군마다.

이런 말들은 먹이에서부터 차이가 났는데, 일반 운송용 말은 방목지에서 풀을 뜯어먹게 하고, 겨울이면 건초를 먹였다.

군마는 풀도 먹였지만, 매일 충분한 양의 콩을 먹여야 한다.

단백질이 풍부한 콩을 망아지 때부터 먹인 말은, 성장함에 따라 이미 그 마체가 운송용 말과는 사뭇 남다르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털, 여기에 매끈하게 갈라진 근육까지.

아이신은 회귀한 그 해 겨울, 엘프들에게서 콩 종자를 대량으로 사 왔다.

이듬에 봄, 아이신은 철제 농기구로 넓게 개간한 땅에다가 특히 콩을 많이 키웠다.

이렇게 수확한 대량의 콩으로, 아이신은 새로 태어난 망아지 중에 군마의 자질이 있는 망아지들을 엄선하여 정성껏 키웠다.

한 번은 아이막이 의아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 아이신. 우리 부족의 군마는 충분하지 않으냐. 이렇게 키우면 전사의 수보다 군마가 너무 많아질 텐데.

- 분명 이놈들이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바로 지금이, 남아도는 군마가 필요한 때였던 것이다.

‘변경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어.’

아이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한 인물을 떠올렸다.

변방의 야만족들에게는 사신이라고 불리는 노익장이자, 회귀 전 아이신의 상관.

제국의 선창(先槍), 로인클로 변경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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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 마시(馬市)(1)

회귀 전. 열 여덟 살의 아이신은 벨린다 부족의 침공에서 가까스로 도망쳤다.

바타르를 타고 서쪽으로 쉼없이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로인클로 변경백령.

몇 달 동안 도시의 빈민가에서 구르며 간단한 제국어를 익힌 아이신은 변경백령의 말단 병사로 들어갔다.

회귀 전에도 용맹한 아이막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신의 무예는 또래에 비해 특출났었다.

비록 벨린다의 방해로 충분한 단련을 하지 못했음에도, 아이신이 주목받은 것은 필연이었다.

- 나를 아버지라 생각하거라.

임무에서의 활약으로 로인클로 변경백의 눈에 들게 된 아이신은, 변경백의 추천으로 수도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신은 그곳에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최종적으로 제국 기병 대장의 자리에 올랐다.

- 야만인들의 토벌을 위해, 제 3기병대를 변경백령으로 보내주십시오.

변경백이 손을 쓴 결과, 아이신이 대장으로 있던 3기병대는 사실상 변경백 휘하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이신은 변경백의 수족으로서 야만인 정책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시(馬市)에는 변경백이 꼭 참가하게 되어 있지. 변경백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아이신은 기억 속 로인클로 변경백의 모습을 떠올렸다.

칠십이 넘은 고령임에도, 변경백은 그 어떤 전사보다 장대한 기골의 용사였다.

변방의 야만족들은 산야족, 평야족을 가리지 않고 변경백을 두려워했다.

간혹 작은 부락에서 겁도 없이 변경의 마을을 약탈하거나 하면, 변경백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아이신에게 명령했다.

- 저 겁대가리 없는 야만인 놈들을 단단히 교육시키고 오거라.

변경백의 명령을 받은 아이신의 토벌은 무자비했고, 이는 단순히 약탈자들에 대한 경고만이 아니었다.

-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랫것들을 똑바로 관리하지 못한 죄입니다!!

한 차례 피의 토벌의 이루어지고 나면, 그 주변 대부락의 족장들이 어김없이 변경백을 찾아왔다.

그 강대한 부락의 족장들이 바닥에 이마를 쿵 하고 찧을 정도로 고개를 쳐박고는, 변경백에게 용서를 빌었다.

로인클로 변경백은 그럴 때마다 특유의 호랑이같은 안광으로 놈들을 내려다 보았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변경백이 자리를 뜰 때까지 대족장들은 감히 바닥에서 이마를 떼지 못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 정도가 아니었지.’

로인클로 변경백의 진정한 무서움은, 야만인들을 힘으로만 다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자였다.

직접 찾아와 머리를 바닥에 숙인 대족장들은, 그만큼 변경백에게서 많은 것을 받는 자들이었다.

‘당근과 채찍, 그리고 교화와 이간. 변경백은 동쪽 변방을 다스리는 법을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로인클로 변경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변방의 안정이었다.

그가 평화주의자라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황제도 두려워할 막강한 군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변경백령에서는 그야말로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동쪽 변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실적이 따라야만 했다.

변경백은 이를 위해서라면 아끼던 부하의 목숨이라도 냉혹하게 거둬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회귀 전의 아이신같은 충직한 부하의 목숨 말이다.

‘그 해에는 유독 변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어. 변경백은 나를 숙청하는 것으로 놈들의 불만을 단숨에 잠재웠을 테지.’

무자비한 아이신의 토벌도 변경백에게 크나큰 무기였지만.

변경백은 야만족들 사이에 퍼진 아이신의 악명마저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야만족들의 불만이 특히 하늘을 찔렀던 해에, 충직한 자신의 수하를 숙청하는 것으로 놈들의 민심을 달랜 것이다.

“무슨 일인데 밖이 이렇게 소란스럽죠?”

“별 일 아니오, 여보. 몸은 조금 어떻소?”

아이신은 귀에 거슬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벨린다가, 아이신의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저와 지르칼은 일단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시(馬市)에 대해서는 여름 부락에 돌아오시면 자세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내일 돌아가도록 하마.”

겨울 부락을 떠나며, 지르칼이 아이신에게 말했다.

“이거 참. 겨울 부락과 여름 부락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일이로구나.”

“그래도 그 덕에 저희 부족은 충분한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이신 네 말이 맞다. 아이막 족장이 부락 입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았다니까.”

산야족은 가을과 겨울, 봄과 여름에 사는 곳이 달랐다.

겨울 부락이라 부르는 곳이 사실상 주(主) 정착지였는데, 이곳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산야족은 이러한 겨울 부락에 나무로 만든 튼튼한 집을 지어놓고 추운 계절을 버텼다.

반대로 여름 부락이 위치한 곳은 상대적으로 평탄하고 강을 끼고 있는 곳.

산야족의 여름 부락은 주변을 개간하여 농경지를 만들기에 적합했다.

변방 기후에 맞는 작물들을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길렀고.

농경지 주변 강가 초지에는 가축을 풀어 방목했다.

‘대부락이 되기 위해서는 겨울 부락과 여름 부락의 위치, 그 어떤 곳도 빠져서는 안 되니 말이야.’

겨울 부락의 입지가 시원찮으면 수많은 가구가 한 곳에 모여 겨울을 날 수가 없고.

여름 부락의 입지가 시원찮으면 많은 가구를 먹여 살릴 만큼의 농경지를 확보할 수가 없다.

아이막 부락의 겨울 부락과 여름 부락은 말을 타고 수십 분 정도 이동하는 거리에 있었고,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천혜의 입지였다.

‘그러니까, 더더욱 부락의 힘을 빠르게 키워서 이곳을 지켜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필코···’

제국 병사들과 변경백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이신은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

“그럼 다녀오도록 할 테니, 내가 없어도 부락을 잘 부탁들 하네.”

“걱정 붙들어 매십쇼 족장님!”

“말 비싸게 팔아오세요!”

“농기구 더 사올 수 있으면 사오시고요! 사람이 늘어서 부족하다구요.”

제국 기병대가 아이막 부락을 찾아오고 보름 후.

아이막과 아이신, 지르칼은 군마를 팔기 위해 서쪽으로 출발했다.

“여기서 얼마나 가면 될 것 같으냐, 아이신.”

“빠르게 달리면 닷새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아이막은 닷새 안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이신에게 물었다.

“닷새 안에? 그렇게 빨리 말이냐?”

“더 오래 걸릴 이유라도 있습니까?”

“으음···사실은 네 새엄마도 마시라는 것을 알고 있더구나. 어린 시절 따라가봤다고 했지. 네 새엄마 말로는 친정 부락에서 열흘이 넘게 이동하여 도착했다고 하던데···”

아이신은 아이막이 무얼 말하려는지 곧바로 파악하고는 대답했다.

“외가처럼 큰 부락은 저희처럼 적은 인원이 말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 제국 병사들이 말해주더냐?”

“예. 큰 부락은 말도 수십 마리를 끌고 가고, 다른 진상품과 교역품을 가져가느라 사람도 수십 명이 따라가는 대행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구나. 그 많은 인원이 이동하려면 천천히 이동해야 할 테고, 그러려면 말들이 먹을 식량도 더 실어야 할 테니.”

“아마 외가에서 참가하는 마시는 저희와 위치도 다를 겁니다. 조금 더 북쪽에 있는 다른 요새라 들었습니다.”

아이신의 이번 마시행은 어디까지나 변경백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다.

그러니 대부락들처럼 거추장스러운 행렬은 필요 없다.

그들은 그렇게 닷새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이윽고, 그들의 앞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견고한 요새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트라켄 요새···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그 이름만으로도 변방 야만인들의 진격을 멈추게 한다는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1년에 한 번, 변경백의 이름을 걸고 산야족들이 말을 팔기 위해 모여드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요새 바깥 드넓은 평원에, 이미 수많은 산야족들이 커다란 천막을 쳐놓고 있었다. 

아이막과 지르칼은 그 위용에 압도된 듯, 연신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정말 굉장하구나. 온 세상 사람들이며 말들이 이곳에 모두 모인 것 같지 않으냐.”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서 천막까지 펼쳐놓고 있는 걸까요? 냉큼 말을 팔고 돌아가면 되는 일 아닙니까?”

지르칼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요새 입구까지 가자, 제국 병사가 곧바로 그들을 제지하고 나선 것이다.

“멈춰라! 어느 부락에서 왔는지 신분을 밝혀라!”

“아이막 부락에서 왔습니다. 이번이 첫 참가입니다.”

아이신이 능숙한 제국어로 대답하자, 제국 병사는 옆에 놓여있던 명부 같은 것을 뒤지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기 적혀있군. 인원은 세 명이 다인가?”

“예. 저희는 작은 부락이기에.”

제국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부하에게 지시했다.

“적당한 자리를 내주어라.”

“옛!”

아이신 일행은 병사의 안내를 따라 평원의 구석으로 향했다.

“이곳이 너희의 자리다. 변경백께서는 내일 오전에 도착하실 예정이니 참고하도록.”

병사가 떠난 후, 아이신은 지르칼과 아이막에게 자기가 알고 있던 내용들을 말해주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시장과 다릅니다. 참가한 부락에서는 먼저 변경백을 알현하는 절차를 거친 후에야 말을 감정받고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것 때문에 벌써부터 천막을 쳐놓고 수십 명이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냐?”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그, 그런데 이거 우리가 낄 곳이 맞긴 하느냐? 우리처럼 달랑 말만 가지고 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지르칼이 뭔가 기가 죽은 듯한 말투로 물었지만, 아이신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원칙적으로 말을 단 한 마리만 팔더라도 제국에서는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지금까지 이걸 몰랐던 것 뿐입니다.”

아이신은 굳이 이것이 변경백의 고도의 정책이라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배정받은 자리에 천막을 치고, 말들을 묶어놓고 먹이를 주며 그 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아이신이 바타르를 타고 천막 근처를 돌아보려는데 누군가가 아이신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음? 아니, 이게 누구야?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 아이신이 아닌가?”

“바자크님···”

아이신이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남쪽 투구르 부족의 간부 바자크가 서 있었다.

바자크의 옆에는 일전에 만났던 다니룬도 함께 서 있었다.

“이거 놀랄 일이군. 자네들 설마 마시에 참가하러 온 건가?”

“예. 저희 부족에도 제국의 병사들이 찾아왔기에.”

“그래? 말을 몇 마리나 팔려고 하는가.”

“세 마리를 팔려고 합니다.”

“뭐라고? 고작 세 마리??”

바자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막 부락이 배정받은 자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물론 제국에서는 말 한 마리만 팔더라도 누구나 마시에 참여하라고 말하긴 했지. 그런데 정말 그러는 놈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큰 부락들이 아니면 이곳에 참가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생각해보면 재작년 겨울에도 고작 세 명이서 물건을 팔아보겠다고 엘린도르 왕국까지 내려온 놈들이다.

그때 일에 생각이 미치자, 바자크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 놈들이 가진 것을 후려치지 못하여 그 해 얼마나 족장께 밉보였는가를 생각하면···!!’

바자크는 놈들에게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이신에게 가까이 다가간 후,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 한 가지만 충고해주지. 이곳에는 우리 부족의 족장, 투구르 님도 와 계시네. 부디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길 바라네. 우리 족장님은 그런 모난 돌을 보면 참지 못하시는 분이···”

- 둥!! 둥!!

그러나 바자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요새의 성벽 위에서, 거대한 북을 동시에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요새의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이신은 그것을 보고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드디어 나오셨군.’

로인클로 변경백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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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 마시(馬市)(2)

“변경백께서 납시오!!”

““변경백께서 납시오!!””

호위의 우렁찬 선창에 이어, 변경백령 병사들이 떠나갈 듯이 변경백을 연호했다.

- 풀썩!

동시에, 트라켄 평원에 집결해 있던 모든 산야족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

솔라리온 제국의 선창(先槍), 로인클로 변경백은 특유의 날카로운 안광으로 드넓은 트라켄 평원을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왕의 기세.

최소한 이곳 동쪽 변방에서만큼은, 황제보다 변경백의 이름이 더 큰 울림을 가지는 것이다.

잠시 후, 단전에서부터 울려퍼지는 호위의 목소리가 고요한 트라켄 평원의 정적을 깼다.

“알현을 시작하겠다. 호명하는 이는 차례로 변경백께 고개를 조아리도록 하라!!”

트라켄 요새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마시(馬市)는, 주로 산야족 구역에서도 남쪽 부락들을 위한 행사다.

남쪽의 대부락인 투구르 부족을 비롯하여,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부족들은 모두 마시에 참가했다.

“투구르 부족의 투구르가 변경백을 뵙나이다!”

“투구르 부족 투구르의 장남 투구룬이 변경백을 뵙나이다!”

“투구르 부족 투구르의 차남 투구란이 변경백을 뵙나이다!”

로인클로 변경백은 화려한 수레 위에서, 고개를 조아린 산야족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 구도는 다분히 의도된 것.

변경백은 야만족을 맞이하는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늘 화려하고 높은 수레를 고집했다.

이것이야말로 변경백과 야만족 간의 격차를 드러내는 가장 직관적인 장치.

이윽고, 변경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변경백의 음성은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낮았고, 그로 인해 사람의 몸을 떨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변경백의 머릿속에서는 수백 가지 사고가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삼남을 데려오지 않았군. 제 아비의 허락 없이 엘린도르 왕국과 밀무역을 했다 했던가.’

로인클로 변경백이 약관의 나이로 제국 동쪽 변방에 부임한지 어언 50년.

그는 부임 후 십 년 만에 제국 변방을 괴롭히던 야만인들의 공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야만족들을 학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놈들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 놈들을 힘으로만 다스려서는, 변방의 혼란을 잠재울 수 없다.

변경백은 수십 년 전부터, 유력한 부족의 부락 위치와 족장의 이름, 자식의 수와 친척 관계 등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변방 구석구석에 수색대를 보내어 자신의 이름을 과시했고,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 복종하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는 포상을 내릴 것이다.

변경백의 앞에 먼저 무릎을 꿇은 자들에게는, 그저 의례적인 복종 표시에 비해 과한 선물이 내려졌다.

변경백은 특히 자신을 잘 따르던 놈들을 키워주기 위해, 이간과 교화를 적절히 병행했다.

현재 자리를 잡은 커다란 산야족과 평야족 부락들은, 그렇게 변경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주변 부락을 흡수하여 성장한 놈들.

그러나 변경백은 요즘 들어 자신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놈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마치 트랄 산맥의 승냥이떼처럼, 세를 불리기 시작하면 이윽고 겁도 없이 이빨을 드러내리라.’

당장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저 투구르라는 놈을 보라.

놈은 약 삼십년 전, 강대한 다른 부족들에게서 자신의 작은 부락을 지켜달라며 변경백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변경백은 놈의 충성을 담보로 하여, 친히 놈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변방에 친정을 나섰다.

근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사나운 야만족 부락 하나가 전멸당한 후, 투구르는 새로이 남쪽의 실력자로 성장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더니, 꼭 그 모양이 아닌가? 건방진 것.’

변경백령의 호화로운 저택 안에 있으면서도, 변경백에게는 동쪽 변방의 많은 정보가 여과없이 들어온다.

요사이 들리는 소문으로 보여지는 투구르 놈의 행보는, 마치 삼십년 전 멸망한 탐욕스러운 야만인 놈들과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까다로울지 모르겠군. 놈은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내게 배를 드러낸 개새끼처럼 행세하고 있으니.’

이렇듯, 변경백은 야만족들의 세력 관계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변방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머리 위에 걸려 있던 해가 눈에 띄게 서쪽으로 기울 때가 되어서야, 알현 절차가 거의 끝이 났다.

변경백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참모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이제 끝인가?”

“아닙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이번에 새로 마시에 참가한 놈들이라 합니다.”

“새로···? 족장 이름이 무엇이라 하더냐.”

“아이막이라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변경백의 주도로 변방에 마시가 열린지 어언 십수 년.

그 동안 마시에 참가하는 부족의 면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변경백은 흥미를 가지고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 두 전사를 바라보았다.

“아이막 부족의 족장 아이막이 변경백을 뵙습니다.”

“아이막 부족 아이막의 장남 아이신이 변경백을 뵙습니다.”

“······”

변경백은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조금 더 빛나는 안광으로, 놈들의 몸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약관의 나이에 동쪽 변방에 부임한지 어언 50년.

수천 명이 넘는 야만족들을 겪어 온 변경백은, 단 한 번 꿰뚫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젊은 족장이군. 기골이 장대한 것이 범상치 않은 사내로다.’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을 전혀 알지 못함에도, 변경백이 느낀 첫인상은 아이막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윽고 변경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전 알현들과 달리 쩌렁쩌렁한 소리로 선언했다.

“오랜만에 보는 사내다운 자로다. 장부와의 첫 만남을 기리며, 너희에게 선물을 내리겠노라.”

아직 통역을 듣지 못한 아이막은 변경백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아이신은 살짝 놀랐다.

‘변경백은 말 한 마디, 단어 하나도 허투루 말하지 않아. 이건 아버지를 향한 말이라기보다는, 다른 부족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하다.’

변경백은 자신의 총애를 이용하여 야만족들을 휘두르는 데에 능한 사람이다.

남쪽의 대부락들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약소 부족의 족장을 환영한다?

변경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신에게, 이건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가능하면 이번 마시에서 변경백의 눈에 확실히 도장을 찍어두는 것이 좋아.’

아이신이 아는 변경백이라면, 처음 보는 부족에게 한 번에 많은 관심을 주지 않는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이대로 말을 팔고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기회를 노리자. 변경백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변경백을 향한 산야족들의 복종의 알현이 막을 내렸다.

*

“후우···”

변경백은 수레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젊은 놈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도 세월을 느낄 때가 된 것이다.

그런 변경백의 등 뒤에서, 사내들이 우글거리는 요새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오오. 에르시에느가 아니냐. 그래그래. 할애비가 우리 손녀를 너무 기다리게 했구나.”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변경백은 호랑이같은 안광이 어디있었냐는 듯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화답했다.

주변의 호위병들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 변경백도 손녀 앞에서는 팔불출일 뿐이구나.’

‘이런 모습 볼 때마다 정말 적응이 안 된다니까.’

‘에르시에느님도 참 별나지. 한창 사교계에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셔야 할 나이에.’

그러면서도 호위병들은 눈 앞의 소녀의 미모에 곁눈질을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올해로 열 다섯이 된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 영애.

변경백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하는 손녀다.

“할아버지! 약속한 거 잊으신 건 아니죠?”

변경백이 수레에서 일어서자, 에르시에느가 통나무처럼 굵은 변경백의 팔에 자기 팔을 끼우고는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허허. 누구 부탁인데 잊겠느냐. 제국의 수도에도 이곳 마시만큼 명마가 우글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정말 제 마음대로 한 마리 골라요?”

“고작 한 필로 되겠느냐. 우리 손녀가 원한다면 백 필의 말이라도 아깝지 않다. 껄껄껄껄.”

변경백령의 한 떨기 꽃이라 불리는 에르시에느 영애가 멀리 트라켄 요새까지 발걸음을 옮긴 이유.

그것은 변경백이 이번 마시에서 마음에 드는 말 한 필을 선물로 주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이다.

변경백 입장에서는 그저 손녀의 웃는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핑계지만 말이다.

“그럼 어디 할애비랑 함께 둘러보자꾸나. 할애비 앞에 타겠느냐?”

“피···할아버지. 저 벌써 열 다섯이에요. 할아버지랑 같이 말을 탈 나이는 지났다구요.”

“할애비 눈에는 아직도 꼬마 숙녀로만 보이는걸?”

“빨리 보러 가요! 오늘 기필코 맘에 드는 말을 가지고 말 테야.”

변경백은 내심 아쉬워하며 에르시에느를 데리고 산야족들의 천막 곳곳을 천천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변경백이 자신들의 천막 근처에 설 때마다, 말을 감정하던 제국 관리와 산야족들이 바닥에 코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쳐박았다.

“일들 보도록 하라. 그냥 둘러보고 있는 것뿐이니.”

“예, 옛!!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몇 군데의 산야족 부락을 둘러보던 중, 에르시에느 영애의 눈이 반짝였다.

“아앗! 할아버지, 저거 보세요! 백마예요!”

에르시에느의 눈이 멈춰선 곳에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흰 털의 말이 콧김을 뿜고 있었다.

변경백이 그녀와 함께 백마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백마의 주인, 투구르 족장이 깜짝 놀라 그곳으로 달려왔다.

“벼, 변경백께서 어찌하여 친히 저희 천막까지 오셨습니까.”

“이 말은 네가 가져온 것이냐?”

“바로 보셨습니다. 이번 마시에 변경백께 진상하기 위해 고르고 고른 놈입니다!”

변경백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백마를 훑어보았다.

호들갑을 떠는 것은 역시 변경백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에르시에느 영애였다.

“나 이 말로 할래요! 괜찮죠? 할아버지?”

에르시에느 영애는 제국의 선창이라는 로인클로 변경백의 손녀답게, 왈가닥에 가까운 성격이다.

사교계의 화려한 드레스보다 승마복을 더 즐겨 입고, 어쩌다 또래들의 파티에 갈 때면 남장을 하고 참석하여 어린 영애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곤 했다.

그런 에르시에느 영애도, 동화 속 왕자님이 탈 것 같은 백마를 보고는 소녀다운 로망을 한껏 드러내는 것이다.

변경백은 그런 손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표정을 바꿔 투구르 족장에게 물었다.

“내 손녀가 타게 될 말이다. 길은 확실히 들여놨겠지?”

“예, 예! 그러나 백작께서도 아시다시피 백마라는 놈들은 원체 까다롭지 않습니까. 전사들이 타는 데는 문제가 없더라도, 숙녀분이 타기에는 조금 거칠 수도 있습니다.”

“한 번 시험해보면 될 일이지. 다리안!”

“옛!”

“여기서 이 놈을 길들여보라.”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변경백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호위 기사 하나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말에서 내렸다.

“워, 워!”

기사는 익숙하게 백마의 옆으로 향하더니, 고삐를 잡고 단숨에 백마 위에 타려고 했다.

그러나···

“히히히히힝!!!”

백마는 기사가 옆에 붙으려 하자마자 길길이 날뛰며 뒷발로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 바람에 다리안이라는 기사는 백마의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변경백은 그 꼴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곧바로 다른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말 한 마리 제대로 길들이지 못하느냐. 로브렌!”

“옛! 기필코 놈을 길들여 에르시에느 님께 바치겠나이다!”

그러나 백마는 이번에는 기사가 다가오기 전부터 콧김을 뿜어내며 기사에게 투레질을 해댔다.

“페트론!”

“클로디안!”

“누녜스!”

연달아 세 명의 기사가 백마를 길들이기 위해 나섰으나, 잔뜩 흥분한 백마가 길길이 날뛰는 통에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사는 심지어 말의 뒷발에 채여 기절해버리기까지.

변경백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투구르 족장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내 손녀가 이 놈을 탔다가는 큰일이 나겠군.”

“그,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얌전한 놈이었는데 대체 오늘 왜···”

“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그 자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런 가운데, 에르시에느 영애는 눈치없이 한 마디를 보탰다.

“저 말이 꼭 가지고 싶은데···”

“에르시에느. 저 놈은 힘들겠구나. 이곳에는 다른 백마도 몇 마리 있을 테니,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

“저 말이 좋단 말이예요!”

천하의 변경백의 얼굴이 난처한 빛깔로 물들어가던 그때였다.

“제가 놈을 한 번 길들여봐도 되겠습니까?”

산야족의 발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한 제국어로.

누군가 변경백에게 담담히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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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 마시(馬市)(3)

그 자리의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저, 저 놈이···!! 족장님의 눈에 띄지 말라 경고까지 했거늘···!!’

특히 기겁한 것은 투구르 부족의 간부인 바자크.

그러나 단 한 사람, 로인클로 변경백만은 그런 상황에서도 무섭도록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내다운 자의 아들이로군. 너의 이름이 무엇인지 다시금 내게 고하라.”

“아이막 부족 아이막의 장남, 아이신입니다.”

변경백은 특유의 안광으로, 아이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호오···고작해야 에르시에느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건만. 흥미로운 놈이군.’

아이신의 태도는 정중했으나, 정중함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변경백은 이런 기세를 가진 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여전히 말 위에서 아이신을 내려다보며, 아이신의 기량을 가늠하듯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이 놈! 변경의 뛰어난 기사들이 연달아 다섯이나 길들이지 못한 놈을, 어린 네가 무슨 재주로 길들이겠다는 말이냐!”

“황공한 말씀입니다만, 사람마다 특기는 다른 법입니다.”

“특기는 다르다? 기사가 되기까지 매일 말고삐를 잡아 온 기사들보다 네가 더 낫다는 말이더냐.”

“기사님들은 말은 잘 타실지 몰라도, 말을 직접 키워본 적은 없으신 분들입니다.”

사실은 말을 타는 것도 변경의 기사 따위보다 산야족의 전사들이 더 낫지만, 아이신은 굳이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변경백은 자신의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아이신의 태도에 흥미가 동했다.

“그 놈 말은 참 잘하는구나. 그럼 어디 해 보아라. 만약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놈이라면, 내 손녀를 실망시킨 벌을 내릴 것이다.”

아이신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백마의 주변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걷기 시작했다.

- 저벅, 저벅, 저벅

“푸륵···푸르륵!!”

일부러 발걸음을 크게 내며 천천히 백마의 주변을 돌자, 백마가 옅게 콧김을 내뿜었다.

자연스럽게, 백마는 아이신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이신은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백마의 움직임을 유도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아이신의 발이 멈췄다.

“······”

아이신은 눈이 부시도록 내리쬐는 태양을 등지고 섰다.

백마는 그런 아이신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백마가 옅게 뿜어내던 콧김과 투레질은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착하지. 옳지.”

아이신은 한쪽 손을 들고 천천히 백마에게 다가갔다.

백마는 아이신이 자신의 정면에서 다가옴에도, 날뛰지 않고 그저 아이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신의 손이 백마의 머리에 닿았다.

아이신이 백마의 입 주변과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백마가 작게 울었다.

“히히힝···”

가까이서 백마의 목과 몸을 어루만지던 아이신은 몸을 훌쩍 날려 백마의 등에 올랐다.

고삐를 살짝 잡아당기자, 백마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바타르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똑똑한 놈이다.’

아이신은 고삐를 잡아당기며 짧게 외쳤다.

“이럇!”

“히히히히힝!!!”

백마는 아이신의 명령에 화답하듯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태양이 내리쬐는 트라켄 평원에서, 백마에 탄 아이신이 질주를 시작했다.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아이신은 속도를 내어 천막과 천막 사이를 지나쳤다.

낮은 장애물은 쉽사리 타넘고, 통과하기 힘든 좁은 통로도 부드럽게 통과했다.

“뭐지? 누가 여기서 말을 타는 거야?”

“호오···제법 잘 타는걸?”

“아직 어린 전사처럼 보이는데?”

아직 상황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산야족들도 아이신의 군더더기 없는 기승에 감탄했다.

그리고 이 모습에 가장 놀라고 있는 것은 당연히 변경백령의 기사들이었다.

‘저 사납던 놈을 대체 무슨 수로···!!’

‘이거 오늘 체면을 제대로 구겼구나.’

‘돌아가면 변경백께 크게 야단을 맞게 생겼네. 오늘 운수가 사납구만.’

아이신은 한참 동안 백마를 타고 이곳 저곳을 빠르게 돌고나서야 변경백의 앞으로 돌아왔다.

“이럇!!”

“히히히힝!!!!!!”

아이신이 기합을 넣으며 고삐를 강하게 당기자, 백마는 정확히 변경백의 앞에 멈춰섰다.

아이신은 백마에서 내린 뒤 변경백을 바라보며 살짝 목례를 했다.

그토록 격렬한 기승 뒤였는데도, 아이신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맺혀있지 않았다.

“······”

“······”

자리가 정적으로 물들었다.

누군가는 지금 일어난 일에 당황했고.

다른 누군가는 아이신의 기승에 감탄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변경백에게로 향했다.

저 호랑이같은 노익장이 이 일에 대해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을 깨뜨린 것은 변경백의 박수 소리였다.

- 짝 짝 짝 짝

변경백은 드물게도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솥뚜껑처럼 크고 거친 두 손으로 천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듯, 곳곳에서 갈채가 쏟아졌다.

-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박수 소리는 변경백이 손을 멈출 때까지 이어졌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자, 변경백이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나의 기사들이 오늘 크게 망신을 당하였구나.”

“미천한 재주를 보여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그럼 이제 말해보아라. 저 사나운 놈을 어떻게 길들였느냐?”

아이신은 자신의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백마의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말이라는 동물은 본디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특히 백마는 개중에서도 민감한 놈들이 많지요.”

“이는 백마의 털 색깔 때문입니다. 다른 말들과 다른 털 색깔을 가지기 때문에, 백마는 망아지때부터 다른 말들에게 주목을 받습니다. 사람도 특별히 덩치가 크거나 외모가 아름다우면 어릴 적부터 주목을 받지 않습니까?”

이 말에 변경백 옆에 있던 에르시에느 영애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신은 무시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오늘은 특히 말들이 긴장하기 좋은 환경입니다. 살던 곳을 떠나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왔고,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말들이 평원에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말이 경계를 할 수밖에 없지요.”

아이신이 거기까지 설명했을 때, 변경백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말이 민감한 동물이라는 것쯤이야 나와 기사들도 모두 알고 있다. 물론 백마가 특히 그렇다거나, 오늘의 환경까지는 고려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네가 그 예민한 말을 어떻게 길들였냐는 것이다.”

“별 것 아닙니다. 백작께서는 혹시 말이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들어본 듯도 하구나. 말이 겁이 많다는 것을 그렇게들 말하곤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다만 말이 어째서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지는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백작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저 겁이 많아서 무서워하는 줄로만 알지요.”

변경백은 아이신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지금껏 말이라는 동물은 그저 겁이 많아서 자기 그림자조차 무서워한다고 알고 있었지, 근본적이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거 흥미롭구나. 네 말대로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이유가 무엇이냐?”

“말의 눈을 잘 보십시오. 사람과 달리 말의 눈은 머리의 양 옆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옆통수에 눈이 하나씩 달린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꼬리 뒤편을 제외한 후면의 시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이 사람보다 먼저 위험을 감지하는 것도, 이처럼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넓은 범위를 늘 감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오···계속해 보아라.”

“다만 이런 말에게도 확인할 수 없는 각도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꼬리 뒤편과 완전한 정면입니다. 그러니 정면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마치 깊은 구덩이같은 장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구나. 평생 동안 말을 타 왔으면서도,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놈을 어떻게 얌전하게 만든 것이냐?”

“간단합니다. 저는 태양을 등지고 말에 정면으로 섰습니다. 자연히 말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게 되었고, 그곳에 위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얌전해진 것입니다.”

“명쾌하도다! 이토록 재치있는 아이를 만나 기분이 무척이나 좋구나. 껄껄껄껄.”

아이신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변경백은 드물게도 호탕하게 웃으며 연신 손뼉을 쳤다.

본래 나이가 칠십이 넘어서는 새로운 일에 자극을 받는 일이 매우 드물다.

특히나 변경백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사의 희로애락을 남들보다 훨씬 크고 깊게 겪은 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평생을 행해왔던 사소한 일을 이토록 새로운 관점으로 보여주다니.

변경백은 새삼 자신이 대단치 않게 여겨왔던 많은 일들을 다시금 생각해 봐야겠다는 신선한 자극마저 받았다.

“저보다 훨씬 긴 세월 말과 함께하신 분에게 아는 척을 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옛 말에 아랫사람과 빈자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였다. 내 나이가 들어 오랫동안 이런 가르침을 잊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나?”

변경백이 그렇게 말하며 측근들을 돌아보자, 그들 역시 변경백의 의견에 동조하며 한 마디씩 했다.

“저 역시 이 소년의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매일같이 말을 타면서도 제 말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럽습니다.”

이 와중에,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머, 멋있어···’

로인클로 변경백의 손녀이자 변경백령의 한 떨기 꽃, 에르시에느 영애는 아이신이 말에 타고 트라켄 평원을 질주할 때부터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올해로 열 다섯 살.

정상적인 귀족가의 영애라면, 벌써 가슴이 시린 짝사랑의 상대가 한 둘쯤 있는 것이 보통일 나이임에도.

에르시에느 영애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첫 눈에 반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간혹 변경백령의 다른 귀족 영애들과 티타임을 가질 때.

다른 영애들이 또래 영식들의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힐 적에도, 에르시에느 영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허약해 보이는 놈들이 뭐가 좋다고 저 난리들이람.’

제국의 선창이라는 로인클로 백작의 이명답게.

로인클로 백작가는 무수히 많은 무인들이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다.

당연히 에르시에느 영애가 봐온 남자들은 떡 벌어진 어깨와 우람한 근육, 구릿빛의 피부에 땀내나는 사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에르시에느 영애도 소녀인지라,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탄 왕자님을 동경하는 마음이야 남들 못지 않다.

하지만 자기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저씨들에게 연애 감정이 생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보다도 허약해 보이는 또래 영식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보게 된 것이 저 아이신이라는 소년.

얼굴을 보면 아직 앳되어 보이는 것이 분명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

자신보다 이미 머리 하나만큼 더 큰 키, 그리고 앳된 얼굴에 맞지 않게 떡 벌어진 가슴과 탄탄한 어깨 등은 확실히 그가 사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하필이면 그가 방금 백마를 마치 수족처럼 부리며 이 트라켄 평원을 질주하는 것을 봐버린 것이 문제였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버린 에르시에느 영애는, 아이신이 당당하게 변경백에게 설명을 시작할 때부터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아이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변경백은 자기 손녀가 태어나서 처음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껄껄 웃으며 이렇게 선언했다.

“오랜만에 나를 기쁘게 해 준 상을 크게 내려야겠구나. 여봐라!”

“옛!”

“내 창을 가져오거라!”

측근 기사는 ‘상이라고 해 놓고 갑자기 웬 창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변경백의 창을 대령했다.

“가져왔습니다!”

변경백의 창은 제국에서도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그야말로 신창(神槍)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제국 최고의 창이다.

변경백은 말에서 내려 자신의 창을 받아들고는, 곧바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의 애창을, 이 명석한 산야족 전사에게 내리도록 하겠노라!!”

““예, 예에엣??!!””

이 기절초풍할 말에, 주변의 측근들은 물론 투구르 부족의 산야족들까지 모두 기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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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 마시(馬市)(4)

아이신 역시 변경백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변경백이 야만인에게 직접 무기를 하사한다고??’

고작 창 하나 준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동쪽 변방의 야만인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제국법상 야만인들에게 철제 무기를 사고파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으니까. 다만···’

이 경우는 조금 애매하다.

변경백은 어디까지나 무기를 ‘하사’한 것이지, 무슨 대가를 받고 판매한 것이 아니니까.

어쨌든 아이신은 얼른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변경백에게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후의에 감사하며, 이 몸과 창이 다 닳도록 충성을 약속드립니다.”

“아까도 느꼈지만 제국어가 정말 능숙하구나. 상인들에게 배웠다지?”

“그렇습니다.”

아이신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다시금 변경백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새 아버지와 나에 대한 정보를 숙지했군.’

동쪽 변방의 야만족들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변경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력한 부족의 가문 간 관계도를 철저히 정리한 뒤 이를 통해 부족을 이간질하는 것이 변경백의 특기.

아마 방금 전의 알현 이후, 아이막과 아이신 부자에 대한 정보를 다시 보고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이신. 너의 이름을 기억해두도록 하마. 향후 용맹한 전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하겠다.”

커다란 파문을 남기고, 변경백은 다시 말에 올랐다.

에르시에느 영애는 할아버지를 따라 돌아가다가 딱 한 번 고개를 돌려 아이신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그 혼자만이 빛나보였다.

*

변경백이 듣도보도 못한 약속부족의 소년을 극찬하고, 자신의 창까지 하사했다는 소식은 트라켄 평원에 와 있던 산야족들에게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아이막의 아들 아이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우리보다 조금 더 북쪽에서 마시에 참가한 놈들이라는군. 이번이 첫 참가라던데.”

“아니, 잠깐. 아이막? 혹시 용맹한 아이막을 말하는 건가?”

“그 왜, 십수년 전에 엘린도르 왕국이 대군을 보내어 개척을 시도했을 때, 용맹히 싸웠던 젊은 전사가 있었잖은가.”

“아! 기억날 것도 같군.”

“분명 그 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분가했다고 들었는데. 북쪽으로 올라갔었나보군.”

“그 아이막이라는 전사도 여전히 젊을 텐데, 아직 어린 자식마저 뛰어나다니.”

남쪽의 산야족들은 가장 작은 부락도 3~40가구 정도의 규모를 가진다.

족장 본인의 부락만 백 가구 이상이고, 분가한 자식들의 부락까지 합치면 수백 가구 이상의 규모인 투구르 부족같은 부족도 있지만.

남쪽에서는 작은 규모에 속하는 부락도 아이막 부락이 위치한 중간 지대의 산야족 부락보다는 규모가 큰 것이다.

그리고 아이막이 남쪽의 작은 부락 출신이었기에, 그의 이명을 아는 전사들도 간혹 있었다.

투구르 부족의 족장 투구르는, 아이막과 아이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노기를 띤 채 아들들을 닦달했다.

“그 젖비린내나는 애송이가 거기 끼어들 동안 너희는 무엇을 했단 말이냐! 이건 완전히 남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 아니냐!!”

투구르 족장이 분개한 것도 당연했다.

요사이 변경백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쌀쌀맞은 것을 느꼈기 때문에.

투구르 족장은 변경백령의 기사 하나에게 뇌물을 듬뿍 먹여가며 정보 하나를 입수했다.

- 다가올 마시에는 변경백의 손녀인 에르시에느 영애가 변경백을 따라오신다 하오. 소문에 변경백께서 마시에 나온 말 중 가장 좋은 말을 선물할 것이라 들었으니, 준비해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투구르 족장은 그 말을 듣고 주변 산야족 부락을 협박하다시피하여 아름다운 백마를 강탈했다.

변경백과 에르시에느 영애가 그 백마를 발견하고 가까이 왔을 때는, 뛸 듯이 기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세운 계획을 몽땅 저 듣도보도 못한 애송이가 강탈한 것이다.

“그, 그렇지만 어찌 감히 변경백께서 이야기하는 데에 끼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님!!”

“그 애송이놈이 뭘 몰라서 천방지축으로 군 것이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목이 잘렸을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투구르 족장의 아들들은 억울했다.

변경백이 기사들을 시켜서 백마를 조련하고 있는데, 거기에 끼어드는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솔직한 말로 웬 처음 보는 어린 전사가 겁도 없이 다가와 백마를 조련해보겠다 하기에.

거기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경백이 호통을 치며 주제도 모르는 어린 놈을 단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애송이와 놈의 아비가 변경백을 알현할때 변경백이 하신 말씀을 못 들었느냐?”

“선물을 내린다 하셨지요. 그런데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들어보니 고작 말 세마리를 팔러 온 놈들 아닙니까? 그 정도면 부락의 규모도 뻔할텐데 저희는 아버님이 뭘 그리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투구르 족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놈들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변경백은 무서운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암만 세력을 키웠다한들, 변경백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어찌될지 이놈들은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투구르 족장은 자신이 아직 젊었을 무렵, 삼십년 전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보, 복종을 맹세하겠습니다. 부디 저와 부족을 지켜주십시오!!

근방 강대한 부족의 침략에 주변 부락이 서서히 멸망해갈 때.

아직 젊었던 투구르 족장은 다짜고짜 트라켄 요새를 찾았다.

변경백의 신발이라도 핥으리라는 심정으로 그는 변경백에게 납짝 엎드려 복종을 맹세했고.

변경백은 젊은 족장 투구르의 복종을 받아주었다.

‘당시 우리를 위협하던 놈들도 위세로 따지자면 지금 우리 부족 못지 않았다. 그런데도 변경백이 나선지 5년도 되지 않아 그렇게 되었지.’

그 강성했던 놈들은, 변경백의 견제에 조금씩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투구르는 그 과정에서 변경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결국 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새로이 남쪽 산야족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천치분간을 못하는 놈들은 대체 뭘 믿고 이리 안일하단 말인가···!!’

자신은 그렇게 평생을 바쳐가며 간신히 부락을 크게 키워놓았는데.

아들이라는 놈들은 그런 자신의 밑에서 편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변경백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고 있다.

‘더욱 내실을 다져야만 한다. 변경백은 이제 젊지 않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 드넓은 땅을 통일하고 대족장에 오르기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투구르 족장은 부락에 돌아가면 아들놈들의 정신교육을 우선 단단히 시킨 후, 북쪽으로 진출하여 약소부족을 흡수할 계획을 더욱 치밀하게 세울 것을 다짐했다.

한편, 로인클로 변경백은 트라켄 요새 안으로 돌아간 뒤 자기 방에 걸려 있는 커다란 지도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산야족 놈들의 중앙 구역은 여전히 무주공산이었지. 북쪽과 남쪽을 먼저 키운 것이, 지금에 와서 독이 된 것인가.”

변경백의 산야족 정책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락을 밀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북쪽은 현재 벨루지아라는 놈의 부락이 확고한 패자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에게 복종하고 있고.

남쪽은 투구르 놈의 부족을 비롯하여 비슷한 규모의 큰 부락 몇 개. 그 외에도 나름대로 힘을 키운 중간 규모 부락들이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시를 통해 놈들의 전력을 일부 꺾어놓기는 했으나, 야만족들의 습성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게지.”

야만인들에게 질 좋은 군마를 비싼 값에 사들이는 마시는, 변경백이 고안한 야만인 정책 중에서도 손꼽히게 뛰어난 정책이었다.

정주제국인 솔라리온 제국은 아무래도 군마를 지속적으로 조달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기병 육성을 소홀히 했다가는 야만인들, 특히나 북쪽 변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방어할 수가 없게 된다.

이 점에서 로인클로 변경백이 고안하고 시행한 마시 제도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기상천외한 계책이었다.

동쪽 변방의 평야족과 산야족 역시 북쪽 변방의 유목민족만큼이나 사납고 제국에 위협이 되는 놈들인데.

동쪽 변방의 야만족들에게 질 좋은 군마를 사들이는 것으로 동쪽 변방 야만인들의 기병 전력이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고.

그렇게 사들인 군마를 통해 제국의 기병을 육성하여 북쪽 변방의 야만족을 상대한다.

실로 야만인으로 야만인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伐夷)의 전략이 아닌가?

변경백의 이 계책은 큰 효과를 거두어, 지난 십수년 동안 산야족 놈들 사이에서는 이렇다할 커다란 분쟁 없이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산야족 놈들의 동향에서, 변경백은 자신이 세워놓은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는 낌새를 감지했다.

“야만인놈들은 마치 승냥이떼와 같지.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즉시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 것이다.”

북쪽과 남쪽의 대부락들에서, 최근 주변 약소 부족을 침략했다는 보고가 부쩍 늘어났다.

비록 표면적으로 명분이 그럴듯하고, 아직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변경백은 어째서 지금껏 잠잠하던 놈들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놈들도 알고 있는 것이지.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가 이제는 늙었다는 것을. 괘씸한 것들 같으니.”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신도 이미 칠십을 넘어 노년기에 접어든 몸이다.

만약 자신이 죽고, 저 야만족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산야족들은 곧바로 동쪽 변방의 주인이 될 자를 두고 피의 내전을 시작할 것이다.

“감히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를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하려 들다니. 어차피 너희 놈들은 나의 손바닥 안에서 움직여야만 할 것이다.”

변경백은 그러면서 무주공산인 산야족 구역의 중앙 부근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천천히 원을 그렸다.

지금껏 중앙 부근에는 눈에 띌만한 대부락이 없었다.

그러나 이 구역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거대한 세력이 생긴다면?

북쪽과 남쪽 놈들이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는 훌륭한 억제기가 됨과 동시에.

자신의 사후, 변경백령의 후계자가 능력을 키울 때까지 놈들의 내전을 조금 더 장기화할 수 있을 것이다.

변경백이 아이막 부족의 알현에서 다른 부족들이 들으라는 듯이 환영의 뜻을 나타낸 것.

그리고 투구르 놈의 앞에서 아이막의 장남을 그토록 띄워준 까닭에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있었다.

과연 제국의 선창이라는 이명답게.

몸은 노쇠했을 지언정, 변방 야만족들을 제 손바닥 안에 쥐고 흔드는 변경백의 머릿속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만큼 치밀하고 노련했다.

그 어떤 산야족일지라도, 자신의 계획을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마치 제 생각인 것처럼 훤히 읽고 있는 산야족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변경백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생각을 읽힐 만큼 허술했다면, 50년 동안 동쪽 변방을 이토록 완벽하게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렇게, 각 세력에게 크나큰 전환점이 된 올해의 마시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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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 투구르 부족의 침략(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