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투구르 부족의 침략(1)
“정말 이걸 다 받아도 되는거냐? 아이신?”
“말 세 마리를 판매한 것 치고는 너무 과하게 받은 것 아닙니까, 족장?”
아이막과 지르칼은 자신의 부락으로 전달된 물건들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오후, 그들이 판매하기 위해 끌고 온 말을 감정한 제국 관리가 이렇게 말했다.
- 좋은 군마로군. 그리고 너희 부족에게 변경백께서 선물을 내리시겠다 하셨다.
- 특별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
- 혹시 어떤 물건들을 받을 수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이신은 능숙하게 관리와 협상을 했고, 다음날 오전 변경백의 선물이 도착했다.
무려 노새 두 마리가 끄는, 선물이 가득 담긴 수레 한 대라는 형태로 말이다.
“아이신. 정확히 확인해 본 것이 맞느냐?”
“말을 세 마리를 팔았는데 대가로 노새 두 마리를 받는 게 이게 정말 맞는 겁니까??”
사실은 아이신도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암만 마시가 원래 제국이 손해를 보면서 치르는 행사라고는 하지만, 이건 그 수준을 넘어섰는데?’
제국에서 주최하는 마시의 경우 일반적으로 제 값에 말을 사고파는 거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애초에 이 마시라는 것은 변경백의 야만인 정책의 정수가 담긴 고도의 전략.
산야족과 평야족들이 정성들여 키운 군마를 원래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팔아 제국의 군마를 확보하고.
그렇게 확보한 군마를 통해 기병을 양성하여 북쪽과 동쪽변방의 야만인들을 방어한다.
변경백령에 있을 때, 아이신은 변경백령 재무 담당 문관들이 불평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 말 몇 마리 구매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내줘버리면 예산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정말.
- 이럴거면 그냥 변경백령에서 따로 말을 기르는게 나은거 아닌가?
- 쉿! 이 사람들아! 불평하는게 변경백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가는 경을 칠 걸세!
아이신은 그럴 때마다, 단기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문관들의 한심함에 혀를 찼다.
‘산야족과 평야족에게 말은 직접적인 전투력이나 다름 없는데, 그걸 사들이는 것만으로 전쟁이 얼마나 억제되는지 모른단 말인가.’
뭐 앉아서 숫자만 가지고 씨름하는 재무담당 관리들이 뭘 알겠냐만은.
어쨌든 마시에서 사들이는 말의 가격이 시세보다 비싼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아이신 부락이 받은 물건들은 말 세 마리의 대가라기에는 과하게 많긴 했다.
“전사들이 입을 천으로 된 면갑옷에 농기구, 여기에 소금까지 주시다니···”
“안 그래도 인구가 늘어서 암염에서 얻는 소금으로는 조금 빠듯했는데 이거 정말 잘 됐습니다!”
아이신은 어렴풋이 변경백의 의도를 짐작했다.
‘선물을 내린다고 했을 때 짐작한 게 맞아떨어졌군.’
회귀 전, 변경백의 밑에 있을 때 아이신은 변경백이 한탄하던 것을 여러번 들었다.
- 남쪽과 북쪽만 키울 것이 아니라, 산야족 놈들의 중앙 구역에도 말 잘 듣는 놈들을 하나 만들어뒀어야 했건만.
- 어째서 키우지 않으셨습니까?
- 중앙 구역은 특히 험한 곳이라 접촉부터 쉽지 않았다네. 게다가 믿고 키워줄만한 가망이 있는 부락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 변경백께서 손을 놓고 계신 사이에, 남쪽과 북쪽 큰 부락들이 중앙 구역 부락들을 흡수했다는 말이십니까?
- 그렇지.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중앙 구역에 수족같은 부락을 하나 만들어뒀을 거네.
변경백이 야만족을 관리하는 방식의 핵심은, 말 잘 듣는 부락을 밀어준 뒤 그 부락이 다른 부락을 통제하게 만드는 것.
다만 이렇게 할 경우, 지나치게 세력이 커지는 부락이 생기게 마련이다.
변경백은 그렇게 커진 부족이 최종적으로 야만족들을 통일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 때문에 충성을 맹세하는 부족을 하나만 만들지 않고, 구역별로 몇 개씩 뒀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지대가 척박한 중앙 구역의 산야족들을 미처 신경쓰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벨린다의 친정이나 투구르 부족 등의 대부락이 중앙 구역의 작은 부락들을 흡수해버렸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도 변경백은 중앙 구역에 통제가 가능한 부락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을 거란 말이지.’
변경백은 아이신을 자신의 수족처럼 여겼고, 그런 아이신에게는 야만인 정책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아이신은 제국의 순찰대가 부락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시기 변경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하고 마시에 참가한 것이다.
‘솔직히 변경백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달갑지는 않지만, 이 선택 외에 우리 부족이 당장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
몇 년 안에 다가올 북쪽과 남쪽 부락들의 본격적인 침략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한 끝에 아이신이 내린 결론이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산야족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변경백과 척을 져야 하지만.
그 전까지는 차라리 변경백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세력을 키우는 것이 한없이 정답에 가깝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지요. 아버지.”
“그래. 부락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겠구나.”
“이 노새들은 험한 곳에서는 말보다 더 운반용으로 적합하니, 수확물을 겨울 부락에 가져다 놓을 수고도 크게 덜었습니다요.”
아이막과 지르칼, 아이신은 그렇게 수레 가득 실린 선물과 그것을 끄는 노새 두 마리까지 가지고 부락으로 돌아갔다.
여름이,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
“옳지! 말에게 명령을 내릴 때는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아이덴.”
“후아···! 나도 이제 잘 타지, 형?”
“오빠, 오빠! 다음은 내가 탈래!”
“저도 타고 싶어요, 주인님!”
“아이엘란! 왜 오빠를 자꾸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렇지만, 주인님은 주인님인걸요.”
“싸우지들 마. 아이나도 아이엘란도 말을 잘 다루는 법을 차차 가르쳐줄 테니까.”
마시에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났다.
그리 길지 않은 동쪽 변방의 여름이 끝나고,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이 한창이었다.
아이신은 남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심혈을 기울여 동생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열두 살이 된 아이덴은 벌써 성인 전사 못지 않게 말을 잘 타게 되었고 아이나와 아이엘란도 슬슬 기승이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이 속도라면 셋 다 열 다섯살이 될 무렵에 벽을 넘을지도 모르겠어.’
그와 함께, 아이신은 본인의 신체가 점점 더 전사의 신체에 맞게 변모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시에 다녀온 후, 아이신의 키는 그새 손바닥 반 뼘 가까이 더 성장했다.
그냥 키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이미 벽을 넘은 아이신의 신체는, 성장과 동시에 가장 효율적으로 몸을 쓰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부락의 베테랑 성인 전사들도 아이신과 마상 창술 대련을 하면 당해내지 못했고, 활을 쏘는 감각 역시 갈수록 날카로워져 갔다.
‘동생들도 나처럼 할 수 있게 된다면, 부락 전사들의 수가 적어도 능히 더 많은 수의 적을 막을 수 있을 거야.’
하루하루 강해져가는 자신의 신체와,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동생들을 보는 것이 아이신의 요즘 가장 큰 낙이다.
“오빠! 그 얘기 또 해 줘!”
“아이나도 참. 형한테 그 이야기 벌써 열 번을 넘게 들었잖아.”
“그래두! 큰 오빠 이야긴 몇 번을 들어도 재밌단 말이야!”
아이신은 난처한 듯 웃으며 아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나가 말하는 것은 아이신이 변경백에게 변경백의 애창을 하사받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이나는 특히 변경백의 손녀, 에르시에느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예쁘다던 귀족 아가씨는 오빠가 길들여준 말을 잘 타고 있을까?”
“그럴거야. 에르시에느 아가씨는 남자들 못지 않게 말을 잘 타시니까.”
“그걸 큰오빠가 어떻게 알아?”
“아, 그냥 그렇게 느꼈어. 그 변경백의 손녀잖아.”
“으음···하긴. 부락 전사 아저씨들도 큰 형이 아빠 아들이라서 나이가 어려도 재능이 대단하다고들 했어.”
“나도 그 아가씨 한 번 보고 싶다아···”
아이신은 무심결에 에르시에느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대답을 했다가 얼른 수습했다.
‘에르시에느 아가씨라···’
회귀 전, 변경백의 밑에서 기병 대장으로 있을 때도 아이신은 에르시에느 영애를 자주 봤었다.
그때는 아이신도 에르시에느도 30대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에, 영애라는 칭호는 이미 애저녁에 졸업했지만.
‘아가씨는 스무 살이 넘어서 수도로 시집을 갔다가, 이혼하고 변경백령으로 돌아오셨지.’
변경백의 총애를 받으며 제국 수도 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신은 결혼하여 수도에서 살게 된 에르시에느 영애를 한 번씩 만날 일이 있었다.
용건은 주로 변경백의 선물이나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 에르시에느 아가씨. 백작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편지도 있습니다.
- 고마워, 아이신. 변경백령은 어때?
- 저도 요즘은 거의 돌아가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 여긴 너무 답답해. 아이신은 사관 학교를 졸업하면 제국 기병대에 들어갈 거지?
-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 아이신이 부러워. 나도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었다면···
에르시에느 영애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변경백령에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에르시에느 영애는 제약이 넘쳐나는 수도의 귀족 부인 생활이 도통 성미에 맞지 않았다.
에르시에느가 얌전한 인형처럼 있기를 바랐던 남편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
결혼한지 1년이 되지 않아, 남편은 에르시에느를 무시하고 바람을 피기 시작했다.
‘변경백령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가 이혼하고 돌아오셨을 때는, 놀라긴 했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것 같았지.’
수도에서 유일하게 에르시에느의 말 상대가 되어줄 사람은 아이신뿐이었다.
그런 아이신마저 제국 기병 대장이 되고 최종적으로 변경백령으로 발령이 나버리자, 에르시에느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 아이신. 말 타러 조금 멀리 나갈거야. 에스코트해 줄거지?
- 아가씨. 저와 단 둘이 자꾸 외출하는 건 사람들 보기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 소박맞고 돌아온 여자한테 누가 그런 걸 따져. 그리고 아가씨 소리 좀 그만해. 내 나이가 몇인데.
-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변경백령의 한 떨기 꽃이라 불렸던 에르시에느 영애는, 그렇게 변경백령에서 혼자 외롭게 시들어갔다.
‘에르시에느 아가씨는 이번에도 똑같이 수도에 시집을 가시겠지. 그건 바꿀 수 없을 거야.’
변경백을 넘어야 할 적수로 생각하고 있는 아이신이지만.
에르시에느를 생각하면 어째선지 연민의 감정이 드는 것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이신이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던 그 때였다.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저 멀리에서, 다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말발굽소리가 아이신의 예민한 귀에 들렸다.
‘뭐지? 들려오는 소리는 말 한 마리밖에 없는데.’
아이신은 얼른 자기 창을 쥐고, 말이 다가오는 방향을 주시하며 동생들을 뒤로 숨겼다.
잠시 후, 아이막 부족 여름 부락에 전사 하나가 다급하게 말을 타고 진입했다.
아이신은 그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나르가 부족의 전사님이 아닙니까?”
“요, 용맹한 아이막의 아들이구나! 큰일이다!! 아이막 족장님은 어디에 계시지??”
“우선 숨을 좀 돌리시고 제게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남쪽에서 다른 부족의 침공이 있었다!! 벌써 부락 하나가 짓밟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단 말이다!!”
“뭐라고요?!!”
아이신의 생각보다 더 일찍, 위험이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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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 투구르 부족의 침략(2)
여름 마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구르 부족의 족장 투구르는 곧장 아들들을 소집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음. 그래. 투구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
“예. 도착한 것은 저와 형님 뿐입니다.”
“칠칠치 못한 놈들 같으니···”
투구르 족장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각자가 모두 분가하여 꽤 큰 부락의 족장으로 있었다.
규모로 따지면 당연히 투구르 족장의 부락이 가장 크긴 하지만.
대부족이라는 것은 본래 족장이 다스리는 하나의 부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투구르 부족의 경우처럼 아들이나 사위, 심지어는 손자의 부락까지도 모두 투구르 부족이라는 대부족 안에 포함이 되어야만, 근방을 주름잡는 큰 부락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다른 족장들은 오고 있느냐.”
“연락을 넣어놨으니 저녁 전에는 모두 도착할 것입니다.”
“흠···”
여기에 실질적으로 투구르 족장을 대족장으로 섬기는, 혈연관계가 없는 산하 부락까지.
이런 휘하 부락의 전사들을 모두 합하면, 투구르 부족은 천 명이 훨씬 넘는 전사들을 동원할 수가 있다.
뭐 저기 북쪽, 아이신의 계모인 벨린다의 친정은 투구르 부족보다도 더 규모가 크지만.
어쨌든 남쪽에서는 투구르 부족만큼 규모가 큰 부족은 몇 개 되지 않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투구르 족장의 세 아들을 비롯하여 산하의 족장들이 모였다.
투구르는 모인 족장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은 자들도 있겠지만, 이번 마시에서 변경백이 보인 태도가 심상치 않다!”
“변경백이 말입니까?”
“직접적으로 무슨 말을 했습니까?”
투구르가 대충 마시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으나, 휘하 부하 족장들은 그다지 공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늘 있는 변경백의 변덕 아닙니까.”
“자기 창까지 줬다는 건 조금 놀랍기는 하군요.”
투구르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다.
‘변경백의 총애를 받는 놈이라면 금세 성장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전에 여지를 잘라내야만 해.’
그러나 직접적으로 놈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위험하다.
놈들의 성장을 억제할 방법은 결국 하나.
“가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확장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북쪽의 작은 부락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암만 변경백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부락이 커질 방법은 결국 주변 다른 부족들을 휘하로 받아들이는 방법 뿐이다.
자연적으로 부락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기다렸다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릴 테니까.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북진하여 놈들 주변의 작은 부락들을 죄다 흡수해 놓는다면.
그때는 암만 변경백의 총애를 받더라도 부락을 크게 키우기는 힘든 것이다.
투구르의 깜짝 선언에 휘하 족장들이 모두 놀라고 있던 그 때···
“투구렌! 이제 도착했느냐!”
“죄송합니다, 형님. 하지만 저의 부락은 가장 북쪽에 있어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투구르 족장의 삼남, 투구렌이 늦게서야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 이제서야 왔단 말이냐. 못난 놈 같으니라고.”
삼남을 바라보는 투구르 족장의 시선은 싸늘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는데, 삼남 투구렌은 작년에 엘린도르 왕국과 밀무역을 하다가 들통나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교역은 정해진 마을에서, 정해진 시기에 절차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단 말이오!
-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만 제 아들 놈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에···
- 변명은 됐소. 밑사람의 잘못은 곧 윗사람의 잘못과 다르지 않소! 같은 일이 또 다시 생긴다면 그 때는 조치를 취할 것이오!
본디 엘린도르 왕국과 솔라리온 왕국은 야만족들과의 교역을 엄중히 제한하고 있었다.
교역은 늘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장소에만 하는 것이 원칙.
그런데 삼남 투구렌 놈은, 족장의 허락도 없이 엘린도르 왕국과 밀무역을 시도한 것이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됐다. 너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먼저 움직일 생각하지 말고 자중하고 있거라!”
그러나 투구렌에게도 반박할 말은 있었다.
‘분가할 때 내게만 다른 형제들보다 더 적은 가축과 적은 가구를 나눠주고서는. 부락을 키우려는 것도 막는단 말인가.’
아들이 넷이나 있으면, 개중에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다.
투구렌은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하는 짓이 굼뜨고 눈치도 없어 투구르 족장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
그것은 장성하여 분가할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위에 두 형들은 투구르 족장이 미리 봐놓은 입지가 좋은 땅에, 많은 가축과 많은 가구를 가지고 분가했는데.
삼남 투구렌은 두 형이 분가한 직후 분가하느라 부락의 재산이 적어 형들보다 적은 재산을 받아야만 했다.
부락의 입지도 훨씬 북쪽까지 가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고.
‘아버님이 나만 그렇게 차별하지 않았다면, 밀무역에 손을 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막내 투루론의 경우, 막내이기 때문에 분가를 하지 않고 부락에 남았다.
만약 아버지 투구르가 죽으면, 아버지의 부락은 그대로 막내 투구론이 이어받게 될 것이다.
이쯤되니 투구렌은 분가했을 때부터 가족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엘프들과 밀무역을 한 까닭도 어떻게든 자기 부락을 키워보기 위한 노력이었고.
“······”
투구렌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투구르 족장의 명령에 고개만 끄덕였다.
회의가 끝난 후, 투구렌은 형님들에게서 마시에서 있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은 우리보다 북쪽, 조그만 부락을 변경백이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다.”
“고작해야 말 세 마리 정도 팔러 온, 가난한 놈들을 뭐 때문에 견제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투구렌.”
형들의 말을 듣던 투구렌의 머릿속에, 기발한 방법이 떠올랐다.
‘결국 아버님도 슬슬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겠다는 뜻 아닌가? 이건 도리어 내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쫓겨나듯이 아버지 부락에서도 한참 북쪽에 터를 잡고 분가를 했을 때만 해도 미래가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투구르 족장과 산하 족장의 부락들의 구역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차피 엘린도르 왕국의 영토.
여기는 고작 야만족인 그들이 함부로 침략하기 곤란한 곳이다.
그러나 북쪽은 다르다.
북쪽의 작은 부락들을 침략하여 재물을 빼앗고 영토를 확장할 계획이라면.
오히려 투구르 부족 가운데에서도 최북단에 부락을 꾸려놓은 자신의 부락이 유리할 수도 있다.
“어쩌겠습니까. 아버님도 나이가 드셨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냥 자중하고 있겠습니다.”
“생각 잘 했다. 네가 밀무역을 하는 바람에 아버님께서 여간 골치를 썪으신게 아니다.”
“힘든 시기일수록 형제들끼리 뭉쳐야 하는 법이다. 너도 그건 잘 알고 있겠지.”
형들의 말에, 삼남 투구렌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많은 재산과 좋은 입지를 선점해서 잘먹고 잘사는 주제에.
그러면서 자신의 부락이 힘들 때는 별다른 도움도 주지 않은 것들이 이제와서 뭉치자고?
그러나 투구렌은 그런 속내를 감쪽같이 숨기고, 웃으며 형님들의 손을 잡았다.
“물론입니다. 형제들끼리 돕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돕겠습니까.”
자기 부락으로 돌아온 투구렌은, 즉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가을 수확이 끝나는 즉시 북진할 것이다!! 말을 정비하고 전사들을 훈련시킨다!”
원칙적으로 침략을 통해 재물을 얻으면, 참가한 부락은 기여도에 따라 재물을 나누게 되어 있다.
아버지나 형들에게 저 만만한 먹잇감들을 나눠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가을 수확이 끝나자마자.
투구렌은 자기 부락 이백 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북으로 원정에 나섰다.
목표는 산야족 구역 중앙 부근의 작은 부락들.
이번 원정을 성공시킴으로서, 기어코 자신이 형들보다 더 부강한 족장이 되리라 다짐한 삼남이었다.
*
“침략자들에 의해 주변 부족이 무너졌다고??”
“추수한 곡식과 고기를 뺏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저항하는 전사는 죽임을 당하고 아이와 여자, 노인들은 노예로 끌려갔단 말입니다!!”
“침략자들의 수는 얼마나 되나?”
“도망쳐온 다른 부족 전사의 말을 들어보면 백 명을 훨씬 넘는다 했습니다!!”
나르가 부족 전사의 말을 들은 아이막은 화들짝 놀랐다.
무너진 부족들은 모두 사냥제를 함께 치르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부락들.
심지어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노예로 끌고 갔다는 것을 보면, 이번 침략은 일반적인 침략과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나르가 족장은 어디 계신가?!!”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저희 족장님만이 아니라 옆의 타르야 부족 역시 소식을 듣고 부락을 버렸습니다.”
“그건 올바른 판단이다. 이럴 때는 뭉쳐서 대항해야만 한다. 작은 부락 하나씩 상대해서는 절대 승산이 없지.”
아이막은 우선 전사들을 모두 소집하고, 전투 태세를 갖췄다.
잠시 후.
나르가 부족장이 휘하 전사 열 명을 포함한 자기 부락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나르가 부족 옆의 타르야 부족장 역시 휘하 전사 열다섯과 부락 사람들을 데리고 피난왔다.
“용맹한 아이막!! 큰일이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맞서 싸워야지요.”
“이곳에서 이틀 거리의 부락이 이미 놈들의 말발굽에 짓밟혔습니다. 놈들이 진격을 서두른다면, 여기까지 하루면 도착할지도 모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족장들을 보며, 아이신은 생각했다.
‘나르가 부족과 타르야 부족 전사들을 우리 부족 전사들과 합쳐도 겨우 오십 명 정도. 적의 선봉은 막을 수 있어도, 후발 부대까지 막기는 힘들다.’
적의 규모가 전사 백 명을 넘는다는 것은, 아마 대부락 산하의 부락 하나가 쳐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회귀 이전, 대부락들이 작은 부락의 구역을 공격할 때는 먼저 작은 부락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산하 부락이 선봉이 되어 출격을 했었다.
그 후 적의 본대라 할 수 있는 대병이 출격하여, 작은 부락 구역을 싹 쓸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아이신은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족장들에게 다가가, 아이막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아이신. 그래. 무슨 일이냐.”
“변경백께 놈들의 침공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변경백께···??”
아이막과 다른 족장들은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힘으로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제3의 선택을 아예 고려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이 시기의 변경백은 남쪽과 북쪽 대부락들이 함부로 세력을 키우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아. 뒤이어 따라올 침략자들의 본대를 막기 위해서는 변경백의 도움 없이는 힘들어.’
다만, 다른 족장들은 몰라도 아이막은 아이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이유는 전혀 모르지만, 아이신이 하는 말이라면 들어서 나쁠 것이 없다.
아이막은 아들의 의견을 얼른 지지하고 나섰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 보거라. 네가 직접 갈 테냐?”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맞서 싸워야지요. 제가 알아서 변경백께 연락을 취해놓겠습니다.”
“좋다. 그 부분은 너에게 일임하마.”
아이신은 얼른 밖으로 나간 뒤, 아이엘란을 불렀다.
“아이엘란! 네게 중요한 임무를 맡겨야겠다.”
“주인님, 뭐든 맡겨만 주세요!”
사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는 아이신이 직접 가는 편이 가장 좋다.
당장 트라켄 요새까지 가는 길을 제대로 아는 것도 몇 명 되지 않고.
무엇보다 제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이 이곳에서 본인뿐이니까.
하지만 이런 중요한 전투에서, 일반 전사들보다도 훨씬 강한 자신이 빠졌다가는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떠오른 것이 엘프어를 할 줄 아는, 엘프 노예 아이엘란인 것이다.
“트라켄 요새로 가서 변경백께 도움을 청해야겠다. 네가 아니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제가 그런 중요한 임무를···”
“트라켄 요새에는 최소한 엘프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다. 바타르를 빌려줄 테니, 트라켄 요새로 가서 누구에게든 부탁해서 변경백을 만나라. 만나서 아이막의 부락이 침공을 당했으니 한시바삐 원군을 보내달라 청하거라.”
갑자기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아이엘란이었지만, 그는 결의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님의 명령을 완수하겠습니다···!!”
아이신은 아이엘란을 바타르에 태웠다.
“여기서 서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라. 길은 바타르가 안내해줄 테니, 헷갈리는 길이 있으면 바타르에게 맡기면 된다.”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바타르에 탄 아이엘란이 서쪽 트라켄 요새로 떠난 후, 아이신은 족장들이 회의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놈들을 막아낼 것이다.
아이신은 곧장 회의중인 족장들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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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 투구르 부족의 침략(3)
아이신이 아이엘란을 변경백령으로 보내려고 나가있는 동안에도.
아이막과 나르가 족장, 타르야 족장은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용맹한 아이막. 놈들과 어떻게 싸우는 게 좋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세 부족 전사들을 모두 합쳐도, 놈들의 절반도 채 되지 않소.”
솔직히 아이막 역시 이렇다할 확신은 없었다.
‘같은 ‘숲의 사람들’과 이렇게 제대로 전쟁을 하는 것은 처음이니···어렵구나.’
아이막이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을 받았을 때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젊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족장들에 비해 훨씬 젊은 아이막이지만, 그때는 그저 어린 혈기에 선봉으로 서서 침략자 엘프들을 마구 베어 넘겼을 뿐이다.
“적이 쳐들어올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우리쪽에서 먼저 기습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습이라···”
“확실히 용맹한 아이막, 그대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소.”
“성인 전사 다섯이 덤벼도 그대를 막지 못할 것 아닌가.”
“과찬이십니다. 놈들은 어쨌든 이곳으로 원정을 온 입장이니 우리보다는 지쳐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싸울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 먼저 용맹히 놈들을 공격한다면, 기세로 극복할 수 있을 겝니다.”
한창 회의가 무르익어갈 무렵, 아이엘란을 변경백에게 보낸 아이신이 들어왔다.
“아이신, 어떻게 되었느냐?”
“아이엘란을 보냈습니다. 트라켄 요새에는 엘프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그 아이 외에는 적임자가 없었습니다. 그보다 적을 맞을 준비는 어떻습니까?”
“음. 족장들끼리 계속 회의를 하고 있다. 적들이 행군하는 길목에 대기하다가, 지친 놈들을 기습하려 한다.”
아이신은 아이막의 계획을 자세히 들은 후 생각했다.
‘확실히 아버지께서 생각해낼 법한 계획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쁜 계획은 아니야.’
이번 전쟁은 십수 년 이상 큰 내전이 없었던 이 구역 산야족들에게는 큰 사건이지만.
회귀 전 수도 없이 많은 전장을 경험해 본 아이신 입장에서는 매우 작은 규모의 전투일 뿐이다.
나중에 투구르 족장이 직접 천 명이 넘는 전사를 끌고 온다면 모를까.
‘적은 많아야 이백 명 안팍일 테고, 우리는 오십 명. 이 정도 규모라면 전사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매우 커. 그리고 아버지의 기량이라면 능히 해내실 테지.’
회귀 후, 아이신의 신체는 괄목상대할 만큼 효율적으로 성장하여 열 다섯인 지금은 부족의 베테랑 성인 전사들마저도 뛰어넘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막에게는 아직 당해낼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신은 회귀 직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귀 전 수많은 전장에서 수도 없이 용맹한 전사들을 몸으로 겪은 아이신이었기에.
아이막이 얼마나 대단한 전사인지 이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벽을 넘은 전사들보다도 한층 강한 전사다. 솔직히 말해서 회귀 전의 나도 아버지보다 강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어.’
아이막의 기량이 그 정도로 남달랐기 때문에.
회귀 전 아이신이 벨린다의 방해로 남들보다 느리게 성장했으면서도, 제국에서 늦게나마 두각을 보인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하더라도 우리 쪽의 피해가 너무 커.’
아버지와 나르가 족장, 타르야 족장이 선봉에 서서 더 많은 수의 적을 용맹히 상대한다면.
아마 침략자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잘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쪽의 피해도 무조건 클 것이고, 아이막의 부족처럼 작은 부족에게는 몇 명의 전사를 잃는 것도 큰 피해다.
아이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기가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주제 넘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잠깐만. 이 아이는 용맹한 아이막 그대의 아들이 아닌가? 족장들이 이야기하는 데에 끼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은데?”
타르야 족장이 정당한 반박을 했으나, 아이신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나르가 족장이 곧바로 아이신을 두둔하고 나섰다.
“타르야 족장. 아직 소문을 듣지 못했소? 용맹한 아이막의 장남인 아이신은 사냥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뛰어난 전사요.”
“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전사에게 무슨 사냥신의 축복이란 말입니까.”
“몇 년 전 붉은 털의 악마를 나와 용맹한 아이막의 부족 전사들이 함께 사냥했다는 말을 못 들으셨소? 용맹한 아이막의 장남 아이신은, 그때 창 한 자루만을 손에 쥐고 놈의 굴에 머리를 들이밀었소. 사실 붉은 털의 악마는 이 어린 전사가 혼자 잡은 것이나 다름이 없소.”
“뭐, 뭣···?? 그게 정말입니까? 붉은 털의 악마를 잡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당연히 용맹한 아이막의 공이라 생각했습니다.”
“용맹한 아이막의 장남은 단순히 용맹하기만 한 것이 아니오. 내가 보증하도록 하지.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아이신은 나르가 족장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자신의 생각한 계획을 설명했다.
“거리를 생각하면 놈들은 자기들 부락에서 출발한지 엿새는 지났을 겁니다. 분명 어느 정도 지쳐있을 테고, 그것을 노려 정면에서 놈들을 맞서 싸우는 것도 효과는 있겠지요. 다만 적과 우리의 전력 차이가 너무 납니다. 우리 쪽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을 확실히 섬멸하기 위해서는 유인 작전을 쓰는 편이 낫습니다.”
“유인 작전이라···”
“더 자세히 말해보도록 해라, 아이신.”
“놈들은 이곳이 초행이고, 우리는 이 주변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제 계획은, 놈들을 호랑이 아가리 협곡으로 유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그곳의 지형은 적을 끌어들이기에 알맞긴 하구나.”
아이막은 곧바로 아이신의 계획을 알아차렸으나, 다른 족장들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듯했다.
“호랑이 아가리 협곡?? 특이한 이름이구려.”
“사실 이 근방은 용맹한 아이막 그대의 영역이니 우리는 아무래도 잘 알지 못합니다.”
“족장님들도 그곳의 지리를 보면 납득하실 겝니다. 그건 차차 보여드리기로 하고···다만 아이신. 네 계획에는 문제가 있다.”
아이막이라고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계책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산야족은 본디 몰이사냥을 즐겨 하는 사람들이고, 전쟁에서도 적을 사냥하듯 몰아서 섬멸하곤 했으니까.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이 계획대로 움직여줄 때의 이야기다.
유인 작전은, 특히 유인을 담당할 노련한 전사들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유인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놈들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락이 침공당할지도 모른다.”
아이막이 이런 설명을 하자마자, 아이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유인은 제가 맡겠습니다. 특히 날랜 전사들 열 명을 뽑아, 기필코 놈들을 몰아넣을 겁니다.”
“네가??”
아이막도 놀라고, 계획을 들은 다른 족장들도 놀랐다.
노련하고 용맹한 족장들이 들을 때도, 아이신의 계획은 성공하면 확실히 이길 수 있지만.
계획이 실패했을 경우 잃는 것이 너무나 많아보였으니까.
그러나 아이막은 결의에 찬 아이신의 눈빛에서, 마치 아이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사냥신께서 저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아이막은 지금껏 보여준 아들의 놀라운 행보를 떠올렸다.
그래, 아이신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자리의 최고 결정권을 가지게 된 아이막이, 다른 족장들에게 말했다.
“아이신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성공할 거라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세 부락의 모든 전사들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전장으로 향했다.
여름 부락에 남아 있던 여자와 아이, 노인들, 그리고 피난온 다른 부족의 노약자들은 모두 아이막 부족의 겨울 부락으로 급히 피난했다.
산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의 시발점이, 이곳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아이막의 부락이 위치한 산야족의 중앙 구역에는 기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
산야족들은 이 강을 사슴내라고 불렀는데, 이는 사슴이 산야족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식량이기에, 산야족의 젖줄인 강에 사슴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한 사슴내의 평온을 깨뜨리며.
투구르 족장의 삼남 투구렌이 이백의 전사를 거느리고 북진했다.
“다음은 어느 놈이냐. 후후···”
행렬의 중앙에서 말을 모는 투구렌의 표정에서는 자신감과 함께 오만함이 넘쳐흘렀다.
그들은 북진한지 사흘만에 치러진 첫 교전을 압도적인 전력차로 승리한 후, 놈들의 부락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저항하는 전사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어 투구렌의 부락으로 끌려갔다.
거침없이 사슴내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데, 먼저 보내놓은 정찰조가 달려와 보고했다.
“놈들의 여름부락으로 보이는 곳을 발견했지만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또 말이냐??”
투구렌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북진하고 맨 처음 만난 부락은 압도적인 전력차로 꺾어버렸으나.
그 교전에서 도망친 놈들이 벌써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했는지, 벌써 두 곳이나 텅텅 빈 부락을 발견했다.
눈치 빠르게 도망간 부족은 말할 것도 없이 나르가 부족과 타르야 부족이었고.
“다만···”
“뭐 새로 발견한 것이라도 있느냐?”
“이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넓은 협곡의 입구가 있었습니다. 안까지는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분명 놈들의 겨울 부락이 안쪽에 있을 것 같은 지형이었습니다.”
“그래? 그거 잘 됐구나. 여름 부락은 비울 수 있어도, 겨울 부락은 함부로 비울 수 없을 테지.”
잘하면 도망친 놈들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자.
투구렌의 얼굴에 다시금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투구렌이 이끄는 이백의 전사들이 조금 더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 핑!!
- 핑!!
- 핑!!
강가의 풀숲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화살 몇 대가 본대를 향해 날아왔다.
“이크!!”
“히히히힝!!”
그 바람에 선봉에 서 있던 전사의 말이 몸통에 화살을 맞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 저 앞이구나!”
동시에, 열 명 남짓한 그림자가 강가 풀숲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아이신과 아이막 부락의 전사들이었다.
“활을 쏘며 뒤로 도망칩시다. 놈들의 대응을 보고 거리를 조절하는 겁니다.”
- 핑!!
- 핑!!
아이신의 명령에 따라, 아이막 부락 전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활을 쏘며 뒤쪽으로 천천히 도주했다.
산야족은 늘 부락 단위로 대규모 몰이사냥을 하는 사람들.
같은 부락 사람들끼리는 꼭 말이 아니더라도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직력이 있다.
문제는 아이신이 유인해야할 투구렌 역시 산야족이라는 점이었다.
“그럼 그렇지. 저번 놈들과 똑같구나. 경기병들은 양쪽으로 크게 돌아서 놈을 쫓는다. 창기병은 나와 함께 직진으로 놈들을 추격한다. 전 속력으로 달려, 놈들이 화살을 쏠 여유를 주지 마라!”
“옛!!”
투구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준비한 대로 군대를 크게 나눴다.
지금부터는 사냥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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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 투구르 부족의 침략(4)
투구렌은 창을 든 휘하 전사들과 함께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놈들은 어차피 거리를 벌리고 활을 쏘는 것 외에는 수가 없다! 가까이 붙어서 목을 잘라주어라!!”
며칠 전 약탈한 부락 놈들도, 지형의 이점을 살린답시고 말을 타고 먼 거리에서 활을 쏴대며 투구렌에게 덤벼들었었다.
꼴을 보아하니 이놈들도 그것말고는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도망치면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것은 물론 효과적인 공격 방식이지. 하지만 그건 저기 엘프나 제국의 보병들을 상대할 때나 유용한 것임을 놈들은 모르는군.’
달리는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는 산야족과 평야족은, 경보병을 상대로는 무적의 상성을 자랑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활을 쏘고, 도망치면서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다가와서 활을 쏴대면 보병으로서는 경기병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경기병에게도 당연히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근접에서 공격하는 같은 기병이다.
‘물론 우리가 제국이나 엘프 놈들처럼 좋은 갑옷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차피 경기병은 근접으로 붙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
엘린도르 왕국과 솔라리온 제국은, 야만족들의 기병 전술을 방어하기 위해 안쪽에 철조각을 덧댄 갑옷들을 착용하곤 했다.
산야족의 활로는 아무래도 이런 갑옷을 뚫기가 쉽지 않았고, 게다가 이런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붙어 경기병을 공격하면 이때는 방법이 없어진다.
물론 투구렌이 끌고온 산야족 전사들에게 그런 튼튼한 갑옷은 없다.
그래도 투구르 부족처럼 큰 부락은, 조잡할지언정 부락에 대장간 하나씩은 있어 질 낮은 철제무기를 만들 수가 있기 때문에.
조악한 품질의 철 창을 가지고 활을 쏘는 경기병들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쫓아라! 적의 목을 자르는 전사에게는 따로 큰 상을 내리겠다!!”
한편, 투구렌이 부대를 나눠 자신을 쫓는 것을 확인한 아이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기본은 하는 놈이군. 하지만···’
아이신은 성인이 되기 전에 산야족 부락에서 탈출하여 제국에서 성장했음에도.
산야족과 평야족의 전투방식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너같은 놈들을 수백 번이 넘게 상대해봤단 말이다.’
그야 당연히 제국 기병대장으로서 아이신이 주로 상대했던 것이 산야족과 평야족들이었으니까.
“호랑이 아가리 협곡으로 놈들을 유인합니다! 잡히지 않도록 전속력을!”
투구렌이 창을 든 기병들과 함께 직선으로 자신을 쫓아오는 것을 본 아이신은 곧장 도주 명령을 내렸다.
놈들이 전속력으로 쫓아온다 해도, 이곳은 아이막 부족의 영역이다.
산야족이 사는 곳은 척박하고 험한 동쪽 변방.
산야족의 말들은 이런 숲이나 산악 지형에서도 잘 달릴 수 있도록 훈련된 말들이지만.
그럼에도 초행길을 달리는 말과 늘 달리던 길을 달리는 말은 속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아이신은 선두에서 능숙하게 전사들을 이끌며, 호랑이 아가리 협곡으로 투구렌 부족의 전사들을 유인했다.
‘놈들은 전형적인 몰이사냥 대형을 취하고 있어. 이쪽 길로 도망치다보면, 놈들의 왼쪽 날개와 부딪히게 될 것이다.’
아이신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자신들을 포위하는 적의 경기병의 위치를 찾았다.
잠시 후,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신의 시야에 수풀이 흔들리는 것이 포착되었다.
‘저기군.’
아이신은 손을 높이 들고, 왼쪽을 향해 신호했다.
- 피피피핑!!!!
평소 사냥할 때 약속되어있는 지시에 따라, 전사들이 일제히 그 방향을 향해 활을 쏘아냈다.
“히히히힝!!”
“어어어엇!! 저 놈들이 우리가 여기 있는줄 어떻게 알고!!”
“제길!! 맞대응이다!!”
풀숲에서 막 튀어나와 아이신을 포위하려던 적의 왼쪽 날개 경기병들은 나오자마자 화살 세례를 맞고 자리에 멈췄다.
보기 좋게 놈들의 포위를 벗어난 아이신은 뒤를 슬쩍 쳐다보고 외쳤다.
“속도를 조금 줄입시다! 근접 기병이 보이는 정도까지는 거리를 조절해야 합니다!”
아이신의 지시는 완벽했고, 적의 포위망을 완벽하게 벗어나면서도 적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절묘한 거리를 유지했다.
투구르 족장의 삼남 투구렌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이신과 전사들을 보며 부아가 치밀었다.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는 놈들이구나! 어디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자꾸나!!”
놈들이 암만 잘 도망친다 해도, 도망치는 것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
특히나 이번 전쟁은 자신들이 놈의 부락을 바라고 침략한 전쟁.
놈들의 겨울 부락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부락을 찾기만 하면 어차피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
“놈들은 어차피 자신들의 부락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한다! 계속 쫓다보면 언젠간 잡힐 수밖에 없다!!”
얼마나 그렇게 추격전이 계속되었을까?
아이신은 드디어 놈들을 호랑이 아가리 협곡 입구까지 끌어들였다.
“준비해온 것들을 버리고, 곧장 안쪽으로 들어갑시다!”
아이신의 명령에 따라, 전사들은 미리 준비해둔 낡은 활이며 부러진 화살들을 땅바닥에 휙휙 던지고 협곡으로 진입했다.
잠시 후.
투구렌의 본대 역시 호랑이 아가리 협곡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여기를 지나면 분명 놈들의 겨울 부락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말이군. 안 봐도 여기를 지나면 분지가 있을 위치다. 이 정도 넓이라면 대군이 이동하기도 수월하겠군.”
“저기 보십시오! 놈들이 흘린 활과 화살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제 놈들도 피가 말리는 모양인가보구나. 쫓기는 사냥감이 여유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투구렌 부족 역시 동쪽 변방에서 살아가는 산야족들.
초행길이라도, 동쪽 변방 산악 지형에는 어느 정도 일관된 지형적 특성이 있다.
이런 식의 협곡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협곡을 지나 부락을 만들기에 적합한 분지가 나오게 되어 있다.
“양쪽 날개는 그대로 양옆에 서고, 본대는 가운데에서 협곡을 그대로 통과한다. 협곡의 넓이가 넓으니 충분히 모두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투구렌의 예상대로, 이 협곡은 아이막의 겨울 부락으로 가는 입구 중 하나였다.
길다란 협곡을 통과하면, 거대한 분지에 조성된 아이막의 겨울 부락이 나오는 구조.
다만 투구렌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협곡이 어째서 호랑이 아가리 협곡인지, 놈들은 전혀 모른 채 우리를 쫓아 들어오겠지.’
아이신은 투구렌의 군대보다 먼저 협곡을 지나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협곡은 이름 그대로 한 번 삼킨 것은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거대한 호랑이의 아가리와 같았다.
양옆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수백 년 묵은 침엽수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협곡의 가장 큰 특징은, 협곡 내부 깊은 곳으로 들어올수록 협곡의 폭이 서서히 좁아진다는 데에 있었다.
협곡에 들어서고 한참 후에야, 투구렌은 뭔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협곡의 폭이 아까보다 조금 좁아진 것 같구나?”
“족장님! 아무래도 대열을 조금 길게 늘어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조금 기분 나쁜 협곡이군. 어쨌든 빨리 통과하도록 하자. 놈들의 부락을 발견하면, 마음껏 약탈을 허용해주겠다.”
만약 제국이나 왕국의 경험많은 장군이나, 또는 노련한 산야족 족장이었다면 지금까지 진행한 것이 아깝더라도 여기서 부대를 물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구렌은 전혀 재능있는 전사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침략을 서둘러야할 이유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분명 우리의 출진을 눈치챘을 것이다. 빠르게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른 부족 놈들에게 먹잇감을 모두 빼앗기고 말 것이다···!!’
투구렌이 먼저 북진을 해버린 이상, 이 사실이 알려지면 결국 모든 투구르 부족이 뒤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싸움은 기세가 중요한 법.
고작 선봉으로 나선 투구렌이 조금의 약탈만을 하고 돌아갔다가는 이후 중앙 구역 침략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니까.
기껏해야 중앙 구역의 부락 몇 개를 약탈하는 것으로는 형님들 부락과의 격차를 절대 줄일 수 없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더 많이 약한 부족을 약탈하고 노예를 늘려 격차를 줄여야만 하는 것이다.
“신중히, 그러나 속도를 줄이지 말고 계속 이동하라!”
아이신이 협곡을 먼저 지나가고, 투구렌의 부대가 뒤따라 협곡을 이동하고 있을 때.
나르가 족장과 타르야 족장은 협곡 깊숙한 곳 양 옆에 숨어 매복하고 있었다.
숫자가 부족한 나르가 족장의 전사들과 함께 매복하고 있던 지르칼이, 젊은 전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긴장 풀게. 뭔 어깨에 힘이 그리 들어가 있나.”
“지르칼. 정말 아이신이 적들을 유인해올 수 있을까요?”
“그 아이막 족장의 아들이다. 그저 믿는 수밖에 없어. 최고의 사냥꾼은 기다리는 것을 아는 사냥꾼인 법이야. 표범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거는 걸세.”
그들은 바위가 되고 나무가 되어, 숨죽인 숲 그 자체로 완벽히 동화되어 있었다.
나뭇잎이 하나 스치는 소리에도, 모두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와 함께, 협곡 전체가 마치 쏘아지기 직전의 팽팽한 활시위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저기! 아이신과 전사들입니다.”
“준비해라! 곧 적들이 이곳을 통과할지도 모른다!”
아이신이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전사들이 더욱 숨을 죽이고 이제나 저제나 투구렌의 부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슨 협곡이 가면 갈수록 지나가기가 힘들어진단 말이냐?”
“대열을 조금 더 늘어뜨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잘 뭉쳐서 협곡을 지나오던 투구렌의 부대는.
좁아질 대로 좁아진 협곡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깊숙히 들어온 이상 이제 뒤로 물릴 수도 없다.
투구렌의 옆에서 함께 말을 타고 있던 나이든 전사 하나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냈다.
“저기···족장님.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돌아가자고?? 여기만 통과하면 분명히 적의 부락이 있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냐!”
“뭔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적이 매복이라도 하고 있다면 이 대열로는 대응하기가 힘듭니다.”
“이놈!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라!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모르느냐!”
투구렌이 역정을 부리며 늙은 전사의 우려를 단칼에 무시하며 소리를 지른 그때였다.
“지금이오!!”
지르칼의 외침과 함께, 나르가 족장과 타르야 족장도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다! 굴려라!”
“호랑이 아가리가 입을 벌렸다!! 놈들의 뼈까지 함께 삼켜버리는 것이다!!”
우르르르르르르릉!!!
협곡 양 옆에 매복하고 있던 전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커다란 나무와 돌덩이를 굴려보냈다.
그 우뢰와 같은 소리에, 투구렌 부대의 말들이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워, 워!!”
“조, 족장님!! 매복입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이신은 뒤에서 우레와 같이 울려퍼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말머리를 돌렸다.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신의 동생 아이덴과 아이나가 기다란 창을 함께 들고 아이신에게 달려갔다.
“형! 창 받아!”
“고마워 아이덴, 아이나. 그럼 갑시다! 놈들을 쓸어버립시다!!”
변경백의 애창을 손에 쥔 아이신이, 말머리를 돌리자마자 투구렌의 부대를 향해 용맹히 뛰쳐나갔다.
호랑이 아가리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무시무시하게 빛나며 아가리로 들어온 것들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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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 투구르 부족의 침략(5)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집채만 한 바위와 수십 년은 묵었을 법한 거대한 통나무들이 투구렌 군대의 머리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크아악! 뭐, 뭐야! 하늘에서 돌이···!”
“말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길, 비켜!”
“족, 족장님! 길이 막혔습니다! 후미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투구르 족장의 삼남, 투구렌은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약해 빠진 것들이···!!”
그저 포식자의 입장에서 사냥감을 쫓기만 했는데.
설마 쪽수도 적은 것들이 이런 식으로 매복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황한 투구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르가 족장과 타르야 족장은 쉴새없이 고함을 치며 전사들을 독려했다.
“대열 한가운데로 굴려라!!”
“놈들에게 지옥을 선사해주어라!!”
준비한 돌덩이와 통나무를 모두 굴리자, 투구렌의 부대가 서 있던 곳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놈들이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전사들이 외쳤다.
“숨통을 끊어 주겠다!!”
“도망갈 테면 도망가 보아라!!”
협곡 양 옆의 전사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투구렌의 군대에게로 들이닥쳤다.
아이신 역시 보고만 있지 않았다.
‘바타르가 아닌 것은 조금 아쉽지만.’
바타르는 지금 엘프 노예 소년, 아이엘란을 태우고 한창 서쪽 트라켄 요새로 달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신은 변경백에서 받은 제국 최고의 신창(神槍)을 휘두르며 투구렌의 군대 정면으로 돌진했다
“감히 쳐들어온 대가를 죽음으로 치르게 해 주겠다!!”
아이신이 휘두르는 창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뱀처럼, 혹은 분노한 용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궤적에 닿는 모든 것은 부러지고, 찢겨나가고, 꿰뚫렸다.
마치 폭풍의 눈처럼, 아이신은 가장 치열한 혼돈의 중심을 향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우리 전사들이···! 흩어지지 마라! 뭉쳐서 뚫어야 한다!”
망연자실한 투구렌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전사들을 독려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전혀 전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 촤악!!
- 철썩!!
- 촤아아악!!
이백 명의 전사들이,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특히 투구렌의 군대는, 정면에서 달려와 거대한 창을 마치 자기 수족처럼 휘둘러대는 아이신의 기세에 전의를 상실했다.
“괴, 괴물이다!!”
“놈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제길!! 살고 봐야지!! 왔던 길로 도망가자!!”
전사들의 사기가 이렇게나 땅에 떨어지니, 결국 투구렌 역시 맞서 싸운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걸음아 날 살려라 협곡 입구로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럇!! 더 빨리 달리지 못할까!! 놈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더 빨리 달리란 말이다!!”
아직 살아있던 투구렌 부족의 남은 전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투구렌을 비롯하여 말을 탄 전사들은 좀 더 빠르게.
난리통에 말에서 떨어지거나 말이 죽어버린 전사들은 두 다리가 부서져라 뛰었다.
그런데 협곡의 입구 근처까지 달려왔을 때, 그들은 입구를 막고 있는 다른 전사들을 발견했다.
“아, 아니!! 여기에 왜 또 놈들이 있단 말이냐!!”
투구렌은 당황한 표정으로 협곡 입구를 막고 있는 열 대여섯 명의 전사를 바라보았다.
전사들의 중앙에, 특히 기골이 장대한 전사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개중에 그가 누군지 알아본 전사 하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용맹한 아이막···”
“설마 놈들이 우리가 도망갈 것까지 예상하고···??”
이백 명의 전사 중에 거의 백 명의 전사가 기습으로 죽었고.
큰 부상을 입어 그 자리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전사도 약 오십 명.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온 전사는 기껏해야 오십이다.
물론 제대로 된 오십 명의 전사라면, 퇴로를 막고 있는 열 대여섯 명의 전사와 상대가 안 될 리는 없다.
그러나 때로, 진짜 전쟁에서는 숫자 따위보다 사기가 훨씬 중요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제국 병법서에는, 성을 포위하던 2만의 군대를 상대로 고작 500의 특공대가 성문을 열고 나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적의 대장을 사로 잡아버린 사례도 있을 정도다.
“그렇게 쉽게 도망가게 둘 수는 없지. 우리 아들이 목숨을 걸고 네놈들을 유인했으니.”
그러니 암만 투구렌 부족 전사들의 수가 더 많다 해도.
이미 기습을 당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사기에, 용맹한 아이막이라는 이명을 앞에 두고서는 전의를 상실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놈도 이 협곡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라! 사격 실시!!”
“옛!!”
아이막이 협곡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뒤에서 전사들이 활을 쏘자, 투구렌은 이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뒤에서는 다른 놈들이 쫓아오고 있다! 여기를 뚫어내지 못하면, 그냥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그 말에, 그나마 정신을 차린 투구렌 전사들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이막이 지키고 있는 호랑이 아가리 협곡 입구로, 투구렌과 전사들이 무질서하게 달려 나갔다.
“하압!!”
“으윽!!”
“도망···칠 수 있었는데···”
아이막은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도망가는 놈들을 마구 도륙했다.
동시에, 저 뒤에서 아이신이 전사들과 함께 쫓아오고 있었다.
“히히히힝!!”
“가랏!! 더 빨리 가야한단 말이다!!”
호랑이 아가리 협곡의 입구는, 그러나 열 다섯의 전사로 모두 막기에는 조금 넓었다.
투구렌을 포함하여, 투구렌 부족의 전사 스무 명 정도가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대장을 잡지는 못했나.’
아이신은 호랑이 아가리 협곡 입구에서 멀어져가는, 말을 탄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오늘 그들은 믿을 수 없는 대승리를 거뒀다.
“아이신···!!”
아이막이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아이신을 응시하다, 이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우오오오오오오!!!”
호랑이 아가리 협곡에, 승리에 도취된 산야족 전사들의 함성이 오래오래 메아리쳤다.
*
“멀쩡한 말이 칠십 필에, 놈들에게서 노획한 무기며 갑옷 등은 셀 수도 없습니다!”
“시체가 백오십이 훨씬 넘는데, 정말 우리가 놈들을 이겼단 말입니까!!”
거짓말같은 승리가 끝나고, 아이막 부족의 모든 사람들은 사후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협곡에서 죽은 말이며 전사들의 시체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고.
쓸만한 무기나 갑옷은 벗겨 내야만 한다.
다행히 아이막의 겨울 부락에는, 현재 부락 사람들 외에 나르가 부족과 타르야 부족의 노약자들도 함께였다.
고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라면, 어린 소년이나 소녀들까지도 모두 동원되어 시체를 한 곳에 모으고 옷을 벗겼다.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시체는 한 곳에 모아 모두 소각했고, 말의 시체는 멀쩡한 부위는 모두 도축하여 고기로 만들었다.
“이렇게 고기가 많다면 전부 말리더라도 양이 너무 많다. 오늘은 실컷 먹고 마시도록 하겠다!!”
아이막이 그렇게 선언하자, 모든 부락민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마침 지금은 수확이 막 끝난 가을.
원래라면 지금부터 늦겨울까지 계속 사냥을 하여 겨울과 봄에 먹을 짐승의 고기를 비축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산야족들은 몇 달 동안 신선한 고기를 배부르게 먹어본 일이 적었다.
아이막 부족과 나르가 부족, 타르야 부족의 남녀노소 모든 부족민들은 죽은 말의 고기를 구워 배가 터지도록 포식했다.
“이제 슬슬 전리품의 분배를 해야하지 않겠소?”
“이렇게나 많은 재물을 얻어본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나르가 족장과 타르야 족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아이신과 아이막을 바라 보았다.
원래 산야족의 법도에서는, 기본적으로 얻은 전리품은 함께 싸운 모두가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예외는 있었는데, 특별히 공이 큰 전사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전리품을 갖도록 하였다.
‘솔직히 이번 승리의 공은 죄다 아이막의 아들에게 있지 않은가.’
‘작전을 모두 제안하고, 가장 위험하고 힘든 유인 작전을 몸소 성공시켰으니.’
솔직히 이 정도 공이라면, 전리품의 대부분을 아이막 부락에서 가져가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아이막은 단호하게 다른 족장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고생해서 큰 일을 치렀으니, 전리품은 모든 부족이 공평하게 나누도록 합시다.”
“용맹한 아이막.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리야 그래주면 고맙지만 공을 더 많이 세운 전사들에게 불만이 있지 않을지···”
공을 더 많이 세운 전사란 당연히 아이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막은 고개를 저었다.
“전리품은 차고 넘치도록 많습니다. 공평하게 나눠도, 죽은 말의 고기만 해도 부락민들이 몇 달을 먹을 정도가 됩니다.”
나르가 족장과 타르야 족장은 아이막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전리품 분배를 받아들였다.
물론 여기에도 아이신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한창 전리품을 집계하던 중에, 아이신이 조용히 아이막에게 말했던 것이다.
- 아버지. 이번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다른 부족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 그래. 네 말대로 하마.
사실 아이신이 저리 말하지 않았더라도, 아이막 역시 이번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이신처럼 정확히 정세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막 역시 이번 침공이 한 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부락 하나의 힘으로 강대한 대부락들을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결국 필요한 것은 연합···’
중앙 구역의 산야족들은, 큰 부락이 없이 중구난방으로 수백 개가 넘는 부족이 넓게 퍼져 살고 있다.
아이신은 회귀 전 일어났던 산야족의 역사를 다시금 떠올렸다.
‘기껏해야 5년 뒤면, 남쪽과 북쪽의 대부락들이 본격적으로 중앙을 침범할 것이다. 그걸 막을 방법은 우리도 거대한 연합체제를 구성하는 수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믿을 만한 동료를 많이 만들어 놔야만 한다.
그리고, 각 부락들의 힘 역시 키워야만 할 테고.
‘근방의 다른 부족들은 이제 겨울이면 엘린도르 왕국으로 내려가 모피를 팔고, 철제 농기구 같은 것들을 사오고 있어. 내년부터는 마시에도 참가를 독려해야겠군.’
뭐 그건 아직도 조금 미래의 일이고, 아이신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놈들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이엘란이 잘 해 줘야 할 텐데···’
아이신이 서쪽으로 보낸 엘프 노예 소년 아이엘란을 떠올리던 그 시각.
아이엘란은 벌써 이틀이 넘도록 전 속력으로 바타르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헉···헉···!!”
그저 서쪽으로 가라고 했을 뿐인데도, 이 바타르라는 주인님의 말은 길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가장 빠른 길만을 골라서 달리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말이라는 동물이 원래 이렇게 체력이 좋은가···??’
바타르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끔 강가가 나오면 물을 마실 때 외에는 쉬지도 않고 숲과 들을 질주했다.
아이엘란은 모르지만, 원래 아이막의 부락에서 트라켄 요새까지는 아무것도 싣지 않은 말이 가장 빨리 달린다 해도 3~4일은 걸린다.
그러나 다른 말과 달리 벽을 넘어 체력과 근력이 월등한 바타르는, 어느덧 트라켄 요새 바로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렇게 부락을 출발하고 3일째 되던 오전.
아이엘란은 우뚝 솟을 트라켄 요새를 앞에 두고 놀라고 있었다.
“여기가···주인님이 말하신 곳이구나.”
요새 입구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바타르는 자신들이 수상한 자가 아니라는 듯 느리고 당당하게 요새의 정문으로 또각또각 걸었다.
입구의 위병들은 갑자기 나타나 당당하게 걷는 말과 엘프 소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엘프 꼬마가 말을 타고 왔잖아??”
“상인은 아닌것 같은데···?? 그럼 엘프가 대체 왜??”
이윽고 요새 정문에 도착하자, 위병들은 곧바로 아이엘란에게 물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자는 이곳에 들일 수 없다!”
“너의 신분과 용무를 말하라!!”
아이엘란은 아이신에게 제국어를 약간 배우긴 했지만, 아직 병사들과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엘프어로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니까···아이막 부족! 아이막 부족에서 왔습니다! 변경백을 뵈어야 해요!”
당연히 이번에는 정문을 지키는 위병들이 아이엘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 입구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던 그 때였다.
“응? 아직 어린 엘프잖아? 무슨 일로 왔니?”
아이엘란은 조금 서툴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의 엘프어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이엘란이 봐온 인간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소녀가, 늠름하게 백마 위에 타고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아이엘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소녀가 바로, 아이나가 매일같이 아이신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던 아름다운 귀족 영애.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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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 변경백의 구원(1)
변경백령의 한 떨기 꽃.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 영애는 여름부터 지독한 상사병에 걸려 있었다.
‘하아···내년 마시 때나 그분을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자신과 할아버지의 앞에서 당당히 백마를 길들이고 트라켄 평원을 질주하던 소년.
분명 이름이 아이신이라고 했었다.
“아젠트. 너도 그 분이 그리운 거니?”
아이신이 길들여준 그 백마에.
에르시에느는 아젠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늘 함께 지냈다.
“나 요새 주변 산책 좀 하고 올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에르시에느 아가씨.”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과, 청량한 가을의 날씨.
에르시에느는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했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에르시에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할애비는 가을이 별로 좋지 않구나.
- 왜요 할아버지? 가을은 단풍도 예쁘고, 바람도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데요.
- 허허···우리 공주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변경백,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 백작이 가을을 싫어하는 이유는 조금 더 큰 후에 알게 되었다.
- 아가씨는 모르시겠지만, 수십 년 전에는 가을이면 저기 동쪽 변방의 야만족들이 쳐들어오곤 했답니다.
- 말이 살찌고 하늘이 높아지는 수확의 계절이 되면, 야만족들은 귀신같이 그걸 알아채고 마을을 약탈하러 오곤 했지요.
- 변경백께서 동쪽 변방을 잘 다스리신 덕분에 요사이는 그런 일이 없지만, 변경 마을의 노인들은 여전히 가을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요.
그때는 그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는데.
올해 가을은 조금 달랐다.
‘가을이 되면, 그 분도 동쪽 평원에서 말을 달려 이곳으로 와주시지 않으려나.’
그 늠름하고 잘생긴 산야족 소년 생각에, 요사이 산책을 할 때면 동쪽 변방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에르시에느였다.
그 날도 에르시에느는 오전부터 느긋하게 아젠트를 타고 요새 주변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요새 주변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정문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서 말 한 필이 또각또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쪽은 변방으로 향하는 숲길인데. 누가 혼자서 여기까지 왔을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 어린 소년이 위병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자는 이곳에 들일 수 없다!”
“너의 신분과 용무를 말하라!!”
“xxxx···xxx! xxxxx!! xxxx!!!’
‘엘프어?’
에르시에느는 엘프어를 약간 배웠기 때문에, 엘프들과 조금은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다만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히히힝!!”
에르시에느는 아젠트의 고삐를 당겨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작은 엘프가 당황한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응? 아직 어린 엘프잖아? 무슨 일로 왔니?”
“앗! 에르시에느 아가씨!”
“다행이다! 아가씨, 엘프어를 하실 줄 아셨군요.”
어쩔 줄 몰라하던 위병들은, 에르시에느의 입에서 서툰 엘프어가 튀어나오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이엘란 역시 에르시에느의 입에서 나온 엘프어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다시 말했다.
“아이막 부족에서 왔습니다! 변경백을 뵈어야 해요!”
“아이막??”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에르시에느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 분의 부족 이름이잖아??’
매일 같이 동쪽 변방 쪽을 바라보며 그 분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에르시에느는 얼른 엘프 소년을 붙잡고 물었다.
“그 분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분이요?”
“아이막 부족의 아이신이라는 분 말이야!”
“아, 주인님 말씀이시군요. 아직은 아무 일 없으세요. 그래도 어서 변경백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거지? 알겠어.”
에르시에느는 소년의 손을 잡아끌고, 재빨리 위병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 줘.”
“아, 아가씨. 신분도 모르는 자를 함부로 들일 수는···”
“할아버님을 뵈러 온 사람이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책임질게. 어서 열어 줘.”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위병들은 머뭇거리면서도 위에 신호를 보내 요새의 문을 열어주었다.
에르시에느는 요새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기 앞을 지나가는 병사를 불러세웠다.
“할아버님은 어디 계셔?”
“지금 시간이면 훈련장에 계실 겁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르시에느 아가씨.”
“할아버님을 좀 불러와 줘. 산야족 부락에서 할아버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람이 왔어.”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 방에 있을 테니까 와 달라고 전해 줘.”
에르시에느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는, 엘프 소년을 요새의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할아버님은 곧 오실 테니까, 잠깐만 쉬고 있으렴.”
“예, 예···정말 감사합니다.”
아이엘란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요새에 어울리지 않게.
이 방은 소녀다운 프릴이나 레이스가 잔뜩 달린 침대와 예쁜 티 세트 같은 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주인님이 말씀하신 변경백의 손녀라는 아가씨가 맞는 것 같···우왓!’
고개를 돌려가며 방 곳곳을 둘러보던 아이엘란은, 어느새 자기 코앞까지 다가와 자기 얼굴을 쳐다보는 에르시에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 나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나 에르시에느는 아이엘란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입술이 달싹달싹거리는 것이 분명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다가, 아이엘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사시는 거예요?”
“어, 어? 응. 아니 사는 건 아니구. 우리 집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 내가 하도 자주 오니까 할아버님이 내 방을 따로 만들어주셨어. 아, 우리 할아버님이 네가 찾아온 변경백이신데···”
에르시에느는 소년의 물음에 순간 얼굴이 빨개져 묻지도 않은 말을 횡설수설 내뱉었다.
‘어쩜 좋아. 그 분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더니 말이 막···’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분명 그 분은 제국에서 산야족이라고 부르는, 동쪽 변방에 사는 사람인데.
엘린도르 왕국의 엘프가 대체 왜 그 분 대신 트라켄 요새까지 왔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어린 엘프가 말이다.
왈가닥 에르시에느 영애는 얼른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너는 누구야? 아이신 님과는 어떤 관계지?”
“아 저는···”
아이엘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아이신의 노예가 된 일을 처음부터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되어서, 저는 주인님과 함께 부락에서 살게 된 거예요.”
아이엘란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에르시에느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정말 너무 고생했구나 너.”
“아, 아니예요. 엘린도르 왕국에서 노예의 처지는 대부분 비슷하니까요.”
“그 분은 어쩜 마음씨도 그렇게 고우실까.”
아이신이 엘프 노예 소년을 몸을 던져가며 구해주고, 부락으로 데려가 친동생처럼 대해준다는 말에 에르시에느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 봐.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사실은 아주 살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첫 눈에 반해서 늘 그 분의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은 그 분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일전에 변경백령 귀족 영애들의 다과회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 멜레아스 영식이 그런 분이셨다니···
- 화가 날 때마다 하인들에게 죽도록 매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도의 살롱에 드나든다 들었어요!
- 살롱이라면 수도 귀족들의 사교장이 아닌가요? 살롱에 다닌 것이 문제가 되나요?
- 에르시에느님! 그 살롱이 그 살롱이 아니랍니다! 코르티잔들이 은밀하게 주최하는 비밀 살롱을 말하는 거예요!
- 코르티잔···이요?
- 아이 참. 에르시에느님은 사교계 이야기에 너무 관심이 없으시다니까. 코르티잔은 말이죠, 남성들에게 춤과 웃음을 파는 여자들이랍니다. 고급 창부예요!
- 그런 살롱에 드나드는 남성분들은 모두 그런 여자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다니는 거라구요!
- 세상에···
- 레오니아님. 기운 내셔요.
- 세상에는 그런 남자 말고도 널린 게 멋진 남성분이잖아요!
- 훌쩍···모두들···정말 고마워요. 저 이제 남성분을 외모로만 판단하지 않을 거예요.
- 그렇죠! 뭐니뭐니해도 내면이 착한 남성이 최고예요!
- 그런 분이라야 사랑하는 상대를 진심으로 아껴주지 않겠어요?
영애들의 다과회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을 때, 에르시에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뜨끔했었다.
사실은 에르시에느 본인도 아이신이 백마를 타고 질주하던 모습과 그 잘생긴 얼굴에 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
‘불쌍한 엘프 노예 소년을 몸을 던져 구해주다니···그런 분의 내면이 바르지 않을 리 없어. 분명 사랑하는 여자도 그만큼 아껴주시겠지. 아아···그런 분을 마음에 두게 되어 행복해.’
마음 속의 안개가 시원하게 걷힌 에르시에느는, 엘프 소년에게 여러가지를 물었다.
평소에는 뭘 먹고 지내며, 어떤 집에서 자고.
가족은 누가 있고 가족들의 이름이 무엇인지까지.
- 똑똑똑
에르시에느가 그렇게 아이엘란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에르시에느. 할애비다. 열어주지 않겠느냐.”
“앗···! 네 할아버지!”
변경백,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 백작은 에르시에느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프가 아닌가? 그것도 아직 어린 엘프로군.’
변경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에르시에느가 얼른 설명해주었다.
“요새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것을 제가 데려왔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저 엘프어 배우는거.”
“그랬구나. 그런데 나는 분명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산야족이 있다 해서 왔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
변경백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엘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특유의 사람을 꿰뚫을 듯한 무서운 안광으로 아이엘란을 노려보았다.
아이엘란은 변경백의 시선을 받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변경백의 시선은 아이엘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만약 별 것도 아닌 일로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를 오라가라했다면, 죽음으로서 그 죄를 물으리라.
아이엘란은 벌벌 떨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야. 꼭 성공시켜야만 해···!’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아이엘란은 변경백에게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저는 엘프이지만 아이막 부족의 일원입니다. 남쪽의 부락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족장 아이막과 족장의 장남 아이신이, 변경백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저를 보냈습니다.”
“아이막? 호오···”
변경백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유달리 기세가 남달랐던 젊은 족장과, 손녀가 탈 백마를 길들였던 어린 전사를 떠올렸다.
이미 변경백은 중앙 구역의 산야족 부락 중에 키워봄직한 부락으로 아이막 부락을 점찍어두고 기억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좋다. 여기서 내 손녀와 함께 기다리도록 해라.”
변경백은 즉시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기사들과 참모들을 소집했다.
급하게 소집령을 내렸음에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회의실에 모였다.
그것이야말로 변경백령에서 변경백의 명령이 내리는 무게.
회의실에 모였지만, 회의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천 명의 병사를 데리고 동쪽 평원으로 향하겠다. 곧바로 준비를 끝마치도록!”
““옛!!””
변경백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좌중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위해 달려나갔다.
변경백령의 모든 군사활동은 오직 변경백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 반론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트라켄 요새에서, 몇 년만에 변경백이 이끄는 대군이 동쪽 변방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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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 변경백의 구원(2)
시간을 조금 거슬러, 투구르 부족의 삼남 투구렌이 북진을 시작하고 며칠 뒤.
뒤늦게 투구렌의 북진 소식을 알게 된 투구르 부족은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뭐, 뭐라고?? 이 놈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나!!!”
투구르 부족의 족장, 투구르는 이 기절초풍할 소식에 놀라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분명 확장을 한다고 하긴 했지만, 절대로 이런 강경책을 써서는 안 되었단 말이다···!!’
투구르 족장은 대부락의 족장답게 형세 판단에 능하고 노련한 사람이다.
현재 그에게 내려진 당면과제는 두 가지.
대부락의 확장을 경계하는 변경백에게 거스르지 않는 것과.
그럼에도 중앙의 산야족 구역으로 부락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얼핏 양립이 힘들어보이는 과제지만, 투구르 족장에게는 충분한 해결책이 있었다.
‘약속 부족을 꼭 힘으로만 굴복시킬 필요는 없다. 대부락의 권위를 보여주며 재물을 통해 회유한다면, 충분히 휘하로 들일 수 있었을 터인데.’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천천히 하나씩 공략하다보면 호응하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변경백이 암만 대부락의 확장을 경계한다 해도.
이렇게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했던 상황인데, 멍청한 삼남이 그 줄을 그냥 깔끔하게 끊어버렸다.
“아버님! 어찌하시겠습니까!”
“투구렌 놈을 막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필경 변경백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장남 투구룬과 차남 투구란이 투구르의 결정을 재촉했다.
그래도 저놈들은 사리분별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삼남과는 달리, 변경백을 두려워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네놈들은 아직 멀었다. 이 상황에 정녕 투구렌 놈을 막는 것이 정답일 것 같으냐.’
대족장 투구르는 여전히 지혜가 부족한 아들 놈들에게 실망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막을 필요 없다. 그보다 당장 전사들을 모아라. 월동 준비를 해야할 최소한의 전사들을 제외하면 모두 북진한다!”
“아,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변경백의 눈 밖에 날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은 아버님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직 네놈들은 한참 부족한 것이다, 이 아둔한 놈들아. 투구렌 놈이 이미 북진해버린 이상, 변경백이 우리를 가만둘 것 같으냐?”
“그것은···”
“분명 제재를 하겠지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어차피 변경백의 화는 예정된 일이다. 그렇다면, 아예 북진해서 가능한 놈들을 모두 굴복시켜놓고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투구렌 놈의 북진 소식이 변경백령에 알려진다면, 분명 변경백은 길길이 날뛸 것이다.
그러나 트라켄 요새까지 이 소식이 전달되려면 못해도 몇 주의 시간이 걸릴 터.
그렇다면 이왕 엎질러진 물, 가능한 모든 이득을 다 취해놓은 후 변경백에게 사후 통보하면 된다.
명분은 지어내면 될 일이고, 그럼에도 변경백의 성에 차지 않는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어쨌든 무사히 넘어가기만 한다면, 이번 북진으로 투구르 부족은 다른 남쪽 대부락을 한참 앞서갈 수 있을 테니까.
“한시가 급하다!! 산하 부락 가운데 가장 북쪽 부락에 모든 전사들을 집결시킨 후, 곧바로 북진하도록 하겠다!!”
대족장 투구르의 명령이 산하 모든 부락에 전해졌다.
각 산하 부락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동원할 수 있는 전사들을 헤아려 지정 부락으로 보냈다.
“가자! 우리의 이름을 모르는 놈들에게 공포라는 것을 똑똑히 각인시켜 줄 것이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전사들을 이끌고, 투구르는 오랜만에 친정에 나섰다.
그렇게 투구르가 대군을 이끌고 한창 북진하고 있던 시각.
투구르의 삼남, 오만하고 멍청한 투구렌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있었다.
“쫓아오는 놈은 없느냐?!!”
“예, 옛!! 주변에 다른 놈들의 흔적은 없습니다!”
“후우···그래. 좀 쉬도록 하자.”
투구르는 그제야 숨을 돌리며, 자신을 따라 도망친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도망치기는 했지만, 모두 기진맥진한 표정에 몸 곳곳에 자상이 보이는 등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백의 전사가···고작 스무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냐···”
당면한 현실에, 투구렌은 눈 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보통 대부락에서 전사들을 차출하여 군사행동을 할 때는.
부락을 방비할 인원을 포함하여 절반 정도의 전사는 남겨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투구렌의 부락은 이번 북진에 부락의 사활을 걸었다.
투구렌 부족에서 싸울 수 있는 전사 250명 중에, 부락에 남기고 온 전사는 고작 서른 명 정도.
살아남은 전사가 고작 스무 명 정도라면, 부락의 전력이 1/5로 줄어버렸다는 말이다.
‘이 인원으로 겨울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부락민들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당연하지만 전사들은 모두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들이다.
부락에 남은 여인들 대부분은 순식간에 남편과 아들들을 잃어버렸다.
암만 산야족 전사들에게 죽음이란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친구같은 것이라 해도.
이번 일은 온전히 족장인 자신의 실책이기 때문에, 족장으로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
“······”
살아남은 전사들도 투구렌과 같은 생각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투구렌은 간신히, 전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실책이다. 죽어간 전사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돌아가시죠. 족장.”
“모두가 괴롭지만, 한시바삐 돌아가 전사들의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말이 맞다. 서두르도록 하자꾸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그들은 왔던 길을 하릴없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하게 진군할 때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던 거리가, 기진맥진한 지금은 이틀이나 걸렸다.
그렇게 삼 일 정도 남쪽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멈춰라! 게 누구···엇? 투구렌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북진하셨다 들었는데 다른 전사들은 어디가고···”
“너희는 분명 형님 부락의 전사들이구나.”
앞서 정찰을 하고 있던 투구르 부족 대군의 정찰병이,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투구렌을 발견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아버님의 명을 받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아닙니다! 대족장님은 그저, 이번 기회에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약한 놈들을 모두 복종시킬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뒤따라오고 계십니다. 천 명의 전사들과 함께입니다.”
투구렌은 즉시 정찰병을 따라 본대에 합류했다.
거지꼴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투구렌을 보고, 투구르 족장은 말없이 말에서 내렸다.
“아버님···”
- 철썩!!!
굳은살이 박힌 커다란 손바닥으로, 투구르 족장은 삼남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감히 대족장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전사들을 움직였단 말이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멋대로 움직였으면 잘 하기라도 할 것이지!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말해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
투구렌은 몸을 쭈뼛쭈뼛하다가, 결국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를 전부 이야기했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투구르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벽력같은 노성을 삼남의 얼굴에 퍼부었다.
“잘 하는 짓이다 이 놈아!! 이백명의 전사를 데리고, 고작 수십 명을 이기지 못하고 역으로 당한 것도 모자라 거의 전멸?? 어디 가서 투구르의 아들이라고 잘도 고개를 들고 다니겠구나!!”
투구렌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비의 화를 받아낼 뿐이었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며 삼남을 매도하던 투구르는,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들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죽을 각오로 네 실수를 만회하거라!”
“아, 아버님! 그 말씀은···!!”
“네 놈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우리는 변경백의 노여움을 감수하고 북진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네 놈이 선봉에 서서 용맹히 싸우거라. 원수는 갚아야하지 않겠느냐.”
“그, 그건 그렇습니다! 저희 부락 전사들의 원수는, 족장인 제가 기필코 갚겠습니다.”
“그래. 그 자세면 되었다. 서두르도록 하자꾸나.”
비록 자신들이 먼저 공격했다가 역으로 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사들의 원수는 갚아줘야만 한다.
산야족에게 복수란 대를 이어서라도 완수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의 북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네가 상대한 놈들의 영역은 이 근처냐?”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있습니다, 아버님.”
“분명 아이막이라는 놈이 틀림없으렸다.”
“틀림없습니다. 부족 전사들이 놈의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건방진 놈 같으니···감히 우리 부족에 대항하려한 죄를 죽음으로 받아낼 것이다.”
아이막 부족의 영역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잠시 행군을 멈추고 말들을 쉬게 하고 있던 투구르 군대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말발굽 소리는 거칠고 투박했으며, 한 두마리의 소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가오는 놈들의 거친 말발굽 소리에는, 자신들의 접근을 숨기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족장님! 저 멀리서 말을 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숫자를 보고도 접근한다고?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투구르는 멀리서 오는 놈들을 경계하며 군대를 세워두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다가오는 놈들의 복장을 확인하는 순간, 투구르는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제, 제국의 군사가 아니냐!!”
- 털썩!!
““아버니임!!!””
주저앉아버린 투구르에게, 세 아들이 얼른 달려와 그를 부축하고 일으켰다.
제국의 병사는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병사가 투구르의 앞에 멈춰섰다.
“이 놈들이 틀림없군. 감히 백작님의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군사를 움직인 놈들이.”
“대장님! 놈입니다! 투구르 부족의 족장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놈! 자세한 말은 변경백께 직접 고하거라! 이 자리에 꼼짝도 하지 말고 대기하거라!!”
변경백의 측근 기사는 투구르에게 그렇게 통보하고,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투구르는 아직도 꿈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투구렌 이놈!! 말을 해 보아라!! 변경백의 병사가 왜 벌써 여기에 와 있는 것이냐!!”
“그, 그것은 저도 잘···”
물론 변경백령의 병사들이 간혹 동쪽 변방을 순찰하러 다니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타이밍이 안 좋아도 너무 좋지 않다.
아니, 애초에 방금 놈이 뭐라고 했던가?
- 감히 백작님의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군사를 움직인 놈들이.
‘내가 군대를 일으킨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암만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삼남 투구렌이 군사를 일으켜 북진한 것이 기껏해야 6~7일 전의 일.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변경백의 귀에 삼남의 북진이 알려지는 것만 해도 몇 주가 걸려야 정상인데.
놈들은 벌써 우리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투구르의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아, 아버님!! 저쪽에!!”
“벼, 변경백···!!”
흙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서 기세도 당당하게 투구르의 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대병이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이는 투구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제국의 선창.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 백작이었다.
이윽고, 변경백이 이끄는 수많은 병사가 투구르 군대의 앞에 섰다.
“···말에서 내리라 일러라.”
“옛···아버님···”
- 풀썩!!!
변경백이 모습을 드러내자, 천 명의 전사들이 모두 변경백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
변경백은 싸늘한 시선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투구르는 차마 고개를 들어 위를 볼 수 없었다.
변경백이 다가오는 발걸음이, 그에게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의 발걸음처럼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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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 변경백의 구원(3)
“···합당한 설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
변경백은 조용히, 그러나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낮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투구르는 고개를 숙인 채,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경백은 그런 투구르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바른 사실을 고하는 것에 어째서 시간이 걸린단 말이냐. 어서 자초지종을 고하지 못할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아니, 뭔가 생각하고 말을 한다면 그것마저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듯.
변경백의 낮은 음성이 투구르의 귀에 비수처럼 꽂혀왔다.
노련한 투구르는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변경백에게 거슬리지 않을 변명을 떠올렸다.
“저의 삼남 투구렌이 독단으로 군사를 일으켰기에, 놈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전사들을 이끌고 온 것 뿐입니다.”
이 정도면 대군을 끌고 온 것에 대한 변명도 되면서, 자신은 변경백의 뜻에 반할 생각이 없었다는 어필도 된다.
그러나 변경백은 동쪽 변방의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고 있었고, 그의 생각은 언제나 야만족들보다 한 수 앞을 내다 보고 있었다.
“아들이 독단으로 군을 일으켰다 한들,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고작 부락 하나의 전사들을 막기 위해, 이다지도 많은 전사가 필요하단 말이냐.”
“그, 그것은···”
“이놈 투구르야!! 네 놈이 정녕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를 능멸하려 하느냐!!!”
변경백의 노성에, 투구르를 비롯하여 무릎꿇은 전사들 모두 몸을 떨었다.
로인클로 변경백은 싸늘하게 투구르와 그의 군대를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독단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던 네 아들은 어찌 되었느냐.”
“···투구렌.”
투구르의 부름에, 삼남 투구렌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예, 예···제가, 아버님의 명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전사들을 일으켰습니다.”
변경백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투구르와 투구렌 부자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을 때.
투구르 족장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반역자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조치를 취한 후, 저녁에 내 막사로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
그 말만을 남기고, 변경백은 몸을 돌려 자기 병사들 사이로 사라졌다.
투구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혹한 놈 같으니···’
변경백이 무엇을 원하는지, 투구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암만 아픈 손가락이라지만, 투구렌은 자기 자식이다.
오히려 다른 형제들보다 못난 삼남이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늘 마음 속에 밟혔다.
그러나,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해야만 한다.
이건 변경백이 그나마 이 일을 크게 키우지 않겠다는, 일종의 자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투구르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삼남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족장에게 거역한 반역자의 목을 잘라라. 잘라서 내 앞으로 가져와라.”
“아, 아버님!!!”
절망한 투구렌이 엉금엉금 기어 투구르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으나, 투구르는 애써 그곳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재차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반역자를 어서 끌고 가거라!!”
““예, 옛!!””
“아버니이이이이이임!!!!”
투구렌의 절규가 울려퍼질 때, 투구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 저 멀리서 잘린 머리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
“삼남의 머리입니다.”
변경백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잘린 머리를 받치고 고개 숙인 투구르를 내려보았다.
새빨간 피가 말라붙은 머리는 분명 투구르의 삼남, 투구렌의 머리다.
“좋다. 놈의 잘못은 이것으로 덮어주도록 하겠다.”
“···아들 놈을 단속하지 못한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변경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투구르에게 고했다.
“놈은 짓밟은 부족에서 전사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갔다 들었다.”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원래 부락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가축과 식량을 넉넉히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놈이 짓밟은 부락이 몇 군데인지 파악하고 있느냐?”
“한 곳이라 들었습니다.”
“···뭐라고? 단 한 곳?”
변경백은 투구르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놈들은 짓밟은 부족의 노약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부림으로서 부족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려고 했다.
비록 삼남은 숙청했지만, 어떻게든 자기들이 취한 이득을 숨겨 최대한의 이익을 보려는 속셈이 아닌가?
“이 놈! 어찌하여 내게 거짓을 고하려 하느냐! 놈이 출발한 시점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세 군데 이상의 부락이 짓밟혔을 것이다!”
“정말입니다. 죽은 아들놈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확인해보셔도 됩니다. 아들놈은, 단 한 군데의 부락만을 공격한 후, 이어진 교전에서 대패했습니다.”
“대패했다? 이백의 전사를 끌고 가서?”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한 번도 변경백께 거짓을 고한 적이 없습니다. 아들놈을 잡으러 갔을 때, 그 아이는 고작 이십의 전사를 이끌고 도망쳐오고 있었습니다.”
“놈을 패퇴시킨 부족이 누구인지는 들은 것이 없느냐?”
“아이막의 부족이라 하였습니다.”
“아이막?”
변경백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투구르에게 말했다.
“흐음···알겠다. 명령한 사항은 칼같이 이행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부하를 보내 확인하도록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아라.”
변경백은 투구르를 물러가게 한 뒤, 곧장 엘프 소년 아이엘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오냐. 내가 방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구나. 너의 부락 전사들이, 적은 수로 몇 배나 되는 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정말입니까?!!”
“확인을 위해 날이 밝는대로 곧장 너의 부족으로 향하겠다. 네가 길을 안내하도록 하여라.
“예! 맡겨주십시오!”
“그래. 오늘 밤도 내 손녀를 잘 부탁하마.”
변경백은 자신의 막사를 나가는 아이엘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이곳에는, 변경백의 손녀인 에르시에느가 따라와 있었다.
- 뭐라고? 원정에 따라가겠다는 말이냐??
- 네. 저도 동쪽 변방의 대자연을 보고 싶단 말이예요, 할아버지.
- 에르시에느야. 암만 본격적인 전쟁이 아니라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할애비는 우리 손녀를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가고 싶지 않구나.
- 피···감히 할아버지에게 덤벼들 야만족은 없잖아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길까봐요.
- 그건 그렇다만···막사는 잠자리도 불편하고 너의 수발을 들어줄 시녀를 데려갈 수도 없을 것 아니냐.
- 아이 참, 할아버지두! 제가 다른 영애들이랑 똑같이 보이세요? 저 말도 잘 타구, 아무데서나 잘 자요. 수발은 그 엘프 아이한테 시킬게요. 대화를 나눠보니 어린데도 애가 똑똑해요.
-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그 엘프 아이는 어떻게 된 것이냐? 산야족 부락에 뜬금없이 왜 엘프 꼬마가 있는 건지 할애비는 영문을 모르겠구나.
- 아, 그건 제가 자초지종을 들었어요. 어떻게 된 거냐면요···
변경백은 사정을 듣고, 그 아이신이라는 소년에게 더욱 흥미가 생겼다.
‘인품도 아주 훌륭하군. 머리도 잘 돌아가는 것이, 잘 키워놓으면 투구르나 벨루지아놈들보다 훨씬 쓰기 편한 장기말이 되겠어.’
사실 변경백은 요 몇 년 동안 산야족의 통제 때문에 상당히 골치가 아팠었다.
얼핏 보기에는 남쪽과 북쪽의 대부락이 자기 구역의 작은 부락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고.
중앙은 중구난방으로 작은 부락들만이 흩어져 있어 제국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평화로운 구도이지만.
수십 년 전부터 변경백이 키워준 대부락들의 힘이 너무 강성해져 버렸다.
변경백이 원하던 것은 이 정도로 대부락의 힘이 커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규모가 조금 큰 부락을 여럿 만들어, 이들이 주변의 작은 부락을 알아서 통제하게 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놈들이 감히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변경백의 원래 의도였다.
그러나 한 번 성장에 불이 붙은 놈들은 변경백의 의도보다 훨씬 거대한 대부락으로 성장해버렸고.
놈들의 통제로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산야족들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면 누군가 산야족을 통일해버릴 위험이 커졌다.
‘가을이면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여 제국민을 죽이고 가축과 식량을 약탈하던 놈들이 없어진 것은 분명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모든 산야족이 독립된 상태로 통제되지 않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는 놈들이 가을만 되면 제국을 침략하곤 했으니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고.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제국이 평화로웠던 것을 담보로, 산야족을 통일하는 부락이 나와버린다면.
그것은 차라리 가을마다 약탈하러 오는 산야족들이 있는 것보다 더 최악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중앙 구역에 밀어줄 만한 놈들이 없나 고민했거늘, 이렇게 좋은 시기에 적당한 놈들이 나왔단 말이지.’
중앙 구역의 산야족을 키우려고 생각했음에도 그것을 실행하지 못한 까닭은.
현실적으로 중앙 구역에 말이 통하는 산야족이 없기 때문이었다.
북쪽과 남쪽 부락의 놈들은 제국이나 왕국과 꽤 오래 됐기 때문에 제국어를 할 줄 아는 놈들이 드물지 않지만.
중앙 구역의 산야족들은 죄다 약소 부족이라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놈들이기에 제국어가 통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렇다고 중앙 구역의 부락과 연결점을 찾겠답시고 북쪽이나 남쪽의 대부락을 통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 승냥이같은 놈들은, 변경백의 의도를 대번에 눈치채고 중앙 구역에 자기들 입김을 넣으려 할 테니까.
괜히 그랬다가는 중앙 구역을 키우려다가 눈치빠른 특정 대부락의 힘만 훨씬 더 실어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하늘이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와 로인클로 가문을 도와주려는 것이 틀림없다.’
암만 그래도 아직 규모가 한참 작은 놈들이다.
괜히 이번 투구르 놈들의 침공으로 무너져버리기라도 했다면.
운 좋게 찾은 산야족 통제의 열쇠가 없어질 수도 있었는데.
놈들은 자기 힘으로 그것을 훌륭히 극복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변경백 자신의 힘으로 구도를 완성하면 된다.
이튿날 아침.
변경백은 엘프 소년, 아이엘란의 안내를 받아 아이막 부락으로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저어, 변경백님.”
“오냐. 말해보거라.”
행렬의 선봉에서 엘프 소년과 함께 말을 타고 있는데, 엘프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제가 부락에 먼저 가서 족장님과 다른 분들을 이곳으로 불러와도 되겠습니까?”
“그래. 눈치가 빠르구나. 부락이 여기서 멀지 않은 모양이지?”
“예. 그러나 대군이 통과하기에는 길이 험합니다.”
“좋다.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족장을 데려오도록 하거라.”
“옛.”
아이엘란은 바타르를 재촉하여 얼른 아이막의 부락으로 향했다.
부락에 도착하자, 아이신이 아이엘란을 알아보고 얼른 그를 반겨주었다.
“아이엘란! 고생이 많았다. 변경백을 뵙고 왔니?”
“예, 주인님. 그보다 족장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다. 변경백이 바로 이 근처까지 대군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아이엘란은 변경백과 함께 오는 동안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아이신은 아이엘란의 설명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예상대로였군. 변경백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후속으로 쳐들어오는 놈들은 절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변경백과 대면할 때다.
그 늙은 너구리같은 노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내야만 한다.
아이신은 곧장 아이막을 불러, 전사들 몇 명과 함께 변경백을 맞이하기 위해 부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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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 변경백의 구원(4)
부락을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신 일행은 변경백의 군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안내를 받아 곧장 변경백의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 들어선 아이신은 변경백뿐 아니라 예상 외의 인물을 보고 살짝 놀랐다.
‘에르시에느 아가씨?’
막사 중앙 낮은 단상 위.
화려하게 장식된 교의(交椅)에 위엄있게 앉아 있는 변경백의 옆에.
어째서인지 조금 더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곳까지 따라 오시다니. 정말 어릴 때부터 다른 영애들하고는 전혀 달랐구나.’
아이신이 회귀 전 에르시에느를 처음 봤던 것은 거의 스무 살이 다 되어서였다.
그 때도 에르시에느는 변경백령의 한 떨기 꽃이라는 이명에 걸맞지 않게 말괄량이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변경백령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도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진 거라고 했다.
‘뭐 지금 에르시에느 아가씨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아이막과 아이신은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변경백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막 부족의 족장 아이막이 변경백을 뵙습니다.”
“아이막 부족 아이막의 장남 아이신이 변경백을 뵙습니다.”
변경백은 특유의 높은 곳에서 야만족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 남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려는 날카로운 안광은 깃들어있지 않았다.
변경백은 짐짓 과장되게 화났다는 말투로 아이막과 아이신에게 말했다.
“고이연 놈들이로고. 네 놈들이 감히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를 오라가라 했다는 말이더냐!”
아이신은 그러나 그 말투에서 이미 변경백이 어떤 기분인지 훤히 읽을 수 있었다.
‘저 늙은 너구리가 기분이 좋나 보구만. 야만족을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다니.’
아이신은 회귀 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변경백을 십 년이 넘도록 보필했다.
변경백은 심지어 아이신에게는 제국의 비밀 정보나 자신의 속내도 꽤 깊이 공유했기 때문에.
아이신은 변경백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는 뜻이나 표정, 몸짓과 제스쳐를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었다.
‘애초에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저 너구리가 굳이 손녀를 이런 변방까지 함께 데려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변경백의 기분이 왜 좋은지는 따로 짐작할 필요도 없다.
회귀 전, 변경백이 자기 입으로 몇 번이나 아이신에게 말했으니까.
-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중앙 구역에 수족같은 부락을 하나 만들어뒀을 거네.
이 시점에도 변경백은 산야족 중앙 구역에 자기 말을 잘 듣는 부족을 만들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알아서 말 잘 듣는 놈들이 나타난 데다 밀어줄 만한 실력까지 갖춘 것을 증명했으니 좋아 죽을 수밖에.
아이신은 변경백의 기분을 고려하여, 신중히 말을 골라 대답했다.
“미천한 것들의 청을 들어주시어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분수를 아는 놈들이로구나. 그렇다면 응당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겠지. 여봐라. 저들에게 의자를 내주어라.”
“옛!”
변경백은 드물게도 낮은 의자까지 두 개 내어주며 아이막과 아이신을 일어나게 했다.
아이막과 아이신이 의자에 앉자, 변경백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아이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놀라운 말을 들었다. 너희들이 적은 병사들로 네 배가 넘는 적을 전멸시켰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그렇게 말해주시어 부끄럽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알다시피 나도 수많은 병사들을 부리는 입장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한 사람의 장군으로서 궁금하구나. 말해줄 수 있겠느냐?”
“물론 얼마든지 이야기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무슨 신묘한 계책을 쓴 것이 아니기에, 보잘 것 없는 교전을 말씀드리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괜찮다. 한 번 이야기해보거라.”
“그리 대단한 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저희들의 옛 격언에 ‘익숙한 숲에서는 여우조차 호랑이를 피할 방도를 안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 뿐입니다.”
“호오···자세히 듣고 싶구나.”
아이신은 최대한 겸손하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자신이 쓴 유인책을 변경백에게 설명했다.
변경백은 아이신의 말을 다 듣고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며 전장이 될 곳의 지형만 잘 알아도 대부분의 전쟁은 우위를 점할 수 있지. 그러나 제국 병법에서 그것을 그리도 강조하는 까닭은, 실제 전쟁에서 저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장수가 생각보다 드물기 때문이다. 병법도 배우지 않은 놈들이 이다지도 능숙하게 유인책을 구사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구나.’
그리고 다시 들어도 저 아이신이라는 어린 전사는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야만족들보다도 제국어가 능숙하다.
발음이 능숙한 것은 둘째치고,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의 다채로움이 제국 하급 병사들보다 훨씬 나을 정도.
동쪽 변방 야만족들과 제국인들은 인종적으로 별 차이가 없으니, 옷만 제국 복식을 입혀놓으면 제국의 관료로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변경백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막과 아이신에게 대답했다.
“현명한 판단이다. 그러나 너희는 어쨌든 내 도움이 없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 쪽으로 쳐들어가려는 천 명의 후속 부대를 내가 막아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예. 아이엘란에게서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 때도 수가 적다고,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를 오라가라 하며 목숨을 부지할 작정이냐!”
얼핏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지만, 아이신은 대번에 변경백의 속내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어서 힘을 키워 놓으라는 소리지. 아마 무슨 수를 써서든 우리 힘을 키우려고 본인이 먼저 나설 것이 뻔하고.’
아이신은 곧장 변경백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해줬다.
“아닙니다. 향후 힘을 키워 오롯이 저희들의 힘으로 부족을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놈 시원시원해서 좋구나. 그러나 부락이 그리 단기간에 커지는 것이더냐. 내 자비로운 마음으로, 몸소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도록 하겠다.”
“그 말씀은···”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왔으니, 나도 얻어가야 하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이 참에 내게 찾아와 무릎꿇지 않았던 놈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위엄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족장과 족장의 아들은 그 자리에 동행하거라.”
“배움이 부족하여 변경백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친히 너희들을 이 구역의 맹주로 공언하겠다는 뜻이다. 약하고 작은 너희들이 살아날 방법은 똘똘 뭉쳐 대항하는 것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느냐?”
이 말에는 변경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이신도 깜짝 놀랐다.
‘저 너구리가 정말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네. 굳이 중앙 구역을 순회하면서 억지로 중앙 구역의 연합을 만들어주겠다는 뜻이잖아 이거?’
변경백의 행동이 너무나 빠른 것에 놀라긴 했지만, 사실 이것보다 좋은 방법도 없긴 했다.
결국 연합이라는 것은 확실한 구심점이 있어야만 성립이 되는 것.
남쪽과 북쪽 대부락들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결국 중앙 구역의 작은 산야족들이 똘똘 뭉쳐서 한 몸처럼 대항하는 것뿐이다.
변경백은 이 연합을 위해 아이막과 아이신의 부족에게 이 이상 없을 것 같은 막강한 권위를 실어주겠다는 소리다.
직접 중앙 구역 산야족을 순회하여 자신의 위엄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생각도 하지 못한 고견에 잠시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미천한 것들이 살아갈 구멍을 마련해주시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격식은 되었다. 족장과 족장의 아들은 준비를 끝마치고 곧장 다시 이곳으로 오너라. 꽤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변경백의 중앙 산야족 구역 순회가 시작되었다.
*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변경백의 순회가 이어졌다.
아이신은 무엇보다 변경백의 행동력과 준비성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너구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무서운 늙은이다.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대부락처럼 평생가도 놈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어.’
변경백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병사를 끌고 온 것 같았다.
순회가 결정나자마자 절반의 병사는 트라켄 요새로 돌려보내고.
남은 군대는 빠르게 주변 부락으로 향했다.
거기서 변경백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곧장 작은 부족 족장들을 무릎꿇렸다.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는 누구보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다. 너희 놈들은 너희의 목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내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겠으니, 여기 있는 아이막의 부족을 맹주로 하여 거대한 외적에게 대항하도록 하여라. 이들이 나의 대리인이라 생각하며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작은 부락의 산야족들은 변경백의 존재나 남쪽과 북쪽 대부락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에 급급해 정확한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변경백은 노련하게 그들을 겁주고 달랬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아이막 부족과 가까운 근방 수십 개의 부락은 자연스럽게 아이막을 맹주로 하는 연합이 되었다.
변경백은 순회를 마치고 돌아가며 아이신에게 말했다.
“내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것을 늘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대인의 뜻, 그 언제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음. 그래. 이제 돌아가서 너희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라. 다만, 족장의 아들 아이신.”
“옛.”
“너에게는 따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구나.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트라켄 요새로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그쪽의 엘프 아이와 함께 말이다.”
천하의 아이신도, 이건 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인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족장인 아이막이 아니라 어린 전사인 자신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라고? 그것도 아이엘란까지 함께?
‘이건 그때가 되어서나 알 수 있을 것 같군.’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아이신은 그러겠다 대답하고 아이막과 함께 변경백의 주둔지를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사랑에 빠진 소녀가 얼굴이 붉어진 채 남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물론 전혀 알지 못했다.
*
변경백의 순회 동행을 마친 후.
아이막과 부락은 한창 월동 준비로 분주했다.
특히 올해부터는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연합을 했으니, 올 겨울은 여러 부족들과 함께 사냥을 해야만 하겠군.”
“그 편이 효율적입지요. 무슨 일이 있을 때 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 아닙니까.”
본래 산야족의 사냥은 인원이 많을수록 몰이사냥으로 더욱 많은 짐승을 잡기 쉽다.
대부락들은 그래서 수백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사냥을 가는 경우도 흔했고, 이 과정에서 전사들의 합이 자연스레 맞춰졌다.
변경백에게서 남쪽과 북쪽 대부락 침공의 경고를 들은 산야족들이 적극적으로 연합에 참가했기 때문에.
올 가을과 겨울의 사냥은 가까운 부락들끼리 연계하여 하는 것으로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아이막 부족 전사들은 아이신의 부재를 조금 아쉬워했다.
“아이신이 없으니 조금 허전하군요, 족장.”
“솔직히 족장 외에는 그 어떤 전사도 아이신만큼 용맹히 사냥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불평들 하지 말게. 아이신은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 아닌가.”
“하긴. 그 변경백이 직접 내리는 임무라니.”
일전에 변경백이 요청한 대로, 아이신은 아이엘란과 함께 트라켄 요새로 향했다.
요새에 도착하자, 아이신과 아이엘란을 알아본 위병이 곧바로 성문을 열어주었다.
변경백은 알현을 위해 무릎 꿇은 아이신을 내려보며 말했다.
“내 손녀의 호위를 맡아줘야겠다.”
변경백 보좌 뒤에 서 있던 에르시에느가 기대에 찬 눈으로 아이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물론 고개 숙인 아이신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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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 변경백의 부탁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 영애는 아직 숙녀 티도 나지 않던 꼬맹이 때부터 남달랐다.
어떻게 남달랐는가 하니···
- 어머. 얘 갈기가 엄청 예쁘다. 나 얘 타볼래!
- 아가씨, 아직 승마를 배우지 않으셨잖습니까.
- 내가 앞에 타면 되잖아. 빨리 태워줘어어!!
스스럼없이 요새의 기사와 함께 말을 타기도 하고.
- 나랑 목검으로 대련을 하도록 해!
- 아가씨. 그러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저희가 변경백께 혼이 납니다···
- 괜찮아!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간다, 이야아압!!
검술을 수련하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대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리저리 뛰어 놀다 지치면, 에르시에느는 요새의 병사들을 붙잡고 물었다.
- 할아버지와 동쪽 변방에 다녀왔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어?
- 아가씨. 숙녀분이 들어도 전혀 재미 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 왜? 나 그런 이야기 좋아해. 뭐든 이야기해 줘.
로인클로 가문의 저택은 요새에서 조금 떨어진 영지에 있었지만.
이렇게 에르시에느는 틈만 나면 요새로 찾아와 기사들이나 하급 병사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곤 했다.
- 우리 공주님. 껄껄껄. 또 왔느냐.
- 할아버지두 참!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나 봐요? 또 왔냐고 하시는걸 보면요.
- 그럴리가 있겠느냐. 손녀를 이리도 자주 볼 수 있다니. 세상에 나만큼 행복한 할애비는 없을 것이다.
에르시에느가 조금 더 자라 꼬마 숙녀 티가 날 무렵에, 변경백은 아예 요새에 에르시에느를 위한 커다란 방을 만들어 주었다.
- 할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이제 요새에서 며칠 동안 자고 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 허허, 녀석도 참. 남정네들밖에 없는 요새가 뭐가 그리도 좋으냐?
- 여기는 저택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활기참이 있거든요. 말들도 생기가 넘치구, 곳곳에서 대련하는 기사들이랑 병사들로 북적거리는 식당이랑. 그래두 뭐니뭐니해도 제일 좋은 건···
에르시에느는 손가락으로 저 드넓은 동쪽 변방을 가리켰다.
에르시에느와 변경백이 올라와 있는 곳은 트라켄 요새에서 가장 높은 망루.
에르시에느는 틈만 나면 이 망루에 올라 하염없이 하늘과 숲, 산과 들을 바라보곤 했다.
- 여기서 보는 풍경이에요. 여기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면, 암만 울적한 기분이 들어도 어느새 사르르 없어지거든요.
- 그렇구나. 할애비도 여기서 보는 경치를 좋아한단다. 우리 공주님과 같구나.
꼬마 숙녀였던 에르시에느가 조금 더 자라, 이제 숙녀 티가 물씬 나기 시작했을 무렵.
에르시에느는 자연히 요새 바깥이 궁금해졌다.
이때쯤에는 요새의 모든 병사들이 로인클로 백작의 하나뿐인 손녀딸, 에르시에느가 요새에 있는 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행동했다.
에르시에느는 여전히 하급 병사들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병사들은 에르시에느가 묻는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 저기, 요새 바깥에는 뭐가 있어? 나는 요새 근처밖에 돌아보지 못했으니까, 너무 궁금해.
- 으음···동쪽 변방이라고 모두 같은 지형은 아닙니다, 아가씨.
- 알아. 산야족들이 사는 곳과 평야족이 사는 곳이 다르다며.
에르시에느의 대답처럼, 동쪽 변방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동쪽 변방을 가로로 반으로 갈라, 남쪽의 험한 산악 지형과 숲이 우거진 곳에 사는 야만족들이 산야족.
북쪽의 상대적으로 평탄한 들과 강이 흐르는 땅에 사는 야만족들이 평야족.
- 산야족들이 사는 곳은 척박하고 그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변경백께서 아가씨를 따로 보내지 않으실 겁니다.
- 그럼 평야족들이 사는 곳은?
- 거기라면 상대적으로 평탄하지요. 제국의 영토처럼 기름지지는 않지만, 사나운 맹수나 마수도 적고 야만족들의 동향도 산야족들보다 더 조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어이 이봐! 이리 와서 아가씨께 그 이야기를 해 드리지 그래?
- 그 이야기?
의아해하는 에르시에느에게, 다른 병사가 다가와 말해주었다.
- 평야족 구역으로 정기 순찰을 나가게 되면, 가끔 들르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조금 규모가 있는 평야족 부족이 있는 곳인데, 우리들은 그곳을 ‘얼음꽃 숲’이라고 부르지요.
- 얼음꽃 숲? 와···그게 뭐야?
- 놈들이 사는 부락 근처 커다란 강변가에는 넓은 숲 길이 있습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가 되면, 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얼어붙어 온통 새하얀 숲이 되지요.
- 특히 그곳의 숲은 다른 겨울 숲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크고 정교한 모양의 얼음 결정체가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뒤덮어, 마치 겨울 요정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지요.
- 말만 들어도 너무 예쁘겠다···
- 그런데 아무래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기 순찰을 나간 놈들 중에서도,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그곳에 들른 병사들만 운 좋게 그 절경을 눈에 담곤 하니까요.
호기심이 생긴 에르시에느는, 얼음꽃 숲이라는 곳에 대해 여러 병사들에게 묻고 다녔다.
- 정말 좋은 곳이었지요···기회가 된다면 마누라나 딸래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서른 살이 넘도록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본 적이 없습니다.
- 솔직히 이 요새 놈들은 감수성이라고는 씨가 마른 놈들인데, 그런 시꺼먼 놈들마저 그곳의 경치에는 압도당하고 말지요.
그때부터 에르시에느의 머릿속에는, 천하의 절경이라는 평야족 구역의 얼음꽃 숲의 광경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작년 가을. 에르시에느는 변경백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 할아버지. 나 부탁이 있는데요···
- 음? 무슨 부탁이길래 우리 공주님이 이리도 뜸을 들일꼬?
- 할아버지도 혹시 얼음꽃 숲이라는 곳을 아세요? 평야족들이 사는 곳에 있다고 하던데.
변경백 역시 수십 년 전에 꼭 한 번, 그곳에 가 본 일이 있었다.
- 할애비가 아직 젊었을 적에 한 번 가봤던 기억이 나는구나.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단다. 우리 손녀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만큼.
- 정말요? 그럼 저도 꼭 보고 싶어요. 직접 가서 보면 안 돼요? 네?
변경백은 순간 아차 싶었다.
왈가닥이라는 손녀의 성격을 고려하면, 무조건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떼를 쓸 것이 분명한데.
- 으으음···미안하구나. 암만 그래도 그곳은 우리 손녀가 가기에는 위험한 곳 같구나.
- 왜요?? 뭐가 위험한데요?
- 평야족 구역에서도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하니, 긴 시간 말을 타고 가야만 할 것이다. 평야족 부락에서 잠을 잘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런 불편한 곳에서 어찌 자겠느냐. 게다가 수틀리면 야영을 해야할 수도 있다.
- 그런 건 괜찮아요! 저 아무데서나 잘 자는 거 아시잖아요.
- 그것만 문제가 아니다. 기사들을 여럿 뽑아서 동행시켜야 하는데, 겨울이면 요새의 기사들이 그리 한가하지가 않단다. 여기에 야만족들과 말이 통하는 놈도 있어야 하는데 그놈들은 더욱 바빠서 요새를 떠날 수가 없단다. 미안하구나. 암만 우리 손녀라도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
변경백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에르시에느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에르시에느가 겨울 동안 몇번이나 부탁했지만, 변경백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에르시에느는 얼음꽃 숲에 가는 것을 단념해야만 했다.
그런데 올 여름, 아이신에게 사랑에 빠진 에르시에느의 머릿속에 번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 할아버님이 가장 문제라고 하신 게 야만족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셨잖아?’
실제로 손녀바보인 변경백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이 부분이 맞았다.
기사들이야 무리를 해서라도 몇 명 붙여주면 되지만, 에르시에느를 거기까지 데려가기 위해서는 평야족 부락들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만족 언어에 능통한 통역을 데려가야만 하는데, 그런 통역은 매우 귀한 일손이라 그런 곳에 보낼 여유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암만 변경백이 에르시에느를 아낀다지만, 공과 사를 구별하면 절대 귀한 통역을 동행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에르시에느는 이제나 저제나 그 말을 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
그러다가 변경백이 군사를 일으켜 아이막 부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할 때, 에르시에느도 그곳에 동행했고.
변경백의 산야족 중앙 구역 순회가 이어지는 동안 슬며시 변경백에게 말했던 것이다.
- 저 아이막 족장의 장남이라는 아이는 제국어를 무척 잘 하네요, 할아버님.
- 그렇구나. 제국 상인들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 타고난 머리가 매우 좋은 모양이다.
- 잘 됐네요! 저 아이를 제 호위로 붙여주세요. 야만족의 언어와 제국어를 모두 잘 하니까, 얼음꽃 숲까지 가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변경백은 에르시에느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저만한 적임자도 없기는 없다.
어린 나이이지만 이미 성인 전사들보다 월등히 강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데다 제국어와 야만족의 언어를 모두 능숙히 구사하는 소년.
저 아이라면,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에르시에느를 지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 엘프 꼬마도 손녀의 마음에 든 것 같으니.’
변경백은 드디어 손녀에게 백기를 들었다.
- 그래. 이 할애비가 졌다. 적당한 시기에, 기사들과 저 아이를 대동하여 평야족 구역으로 보내주도록 하마.
- 정말요? 만세!! 할아버지 최고!!
그런 연유로, 변경백이 산야족 중앙 구역 순회를 끝낼 때 아이신에게 이렇게 명한 것이다.
- 너에게는 따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구나.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트라켄 요새로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그쪽의 엘프 아이와 함께 말이다.
물론 아이신은 변경백의 호출을 받고 한 달 후 트라켄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배경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이신은 손녀의 호위를 맡으라는 변경백의 명령에, 공손하게 되물었다.
“아가씨의 호위라니, 그런 영광스러운 역할을 감히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구나. 정확히는 호위보다는 에르시에느의 여행을 돕기 위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 손녀의 호위는 변경백령의 기사들이 할 터이니.”
아이신은 아직 영문을 몰랐지만, 회귀 전 에르시에느의 성격을 떠올리고는 대충 납득했다.
‘에르시에느 아가씨는 워낙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셨으니까. 나도 그 때문에 함께 많이도 불려다녔지.’
어차피 지금 시기에는 최대한 변경백의 환심을 사는 것이 좋다.
아이신은 아무 의심이 없다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무슨 임무든, 맡겨주신다면 제 목숨을 바쳐 수행하겠습니다.”
“좋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사들에게 듣거라. 출발은 내일 아침이다. 방을 하나 내어줄 테니, 오늘은 거기서 묵도록 하라.”
그렇게, 에르시에느 영애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사들 다섯 명으로 구성된 호위 부대가 꾸려졌다.
에르시에느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의 백마, 아젠트에 올라 출발하며 슥 곁눈질을 했다.
‘믿을 수가 없어. 늘 보고 싶었던 곳에, 사모하는 분과 함께 여행을 떠나다니.’
이미 초겨울에 들어, 출발할 때부터 쌀쌀한 공기가 에르시에느의 뺨을 스쳐갔지만.
에르시에느는 온 몸에 열이 올라 새빨개진 얼굴로 생각했다.
이렇게 따뜻한 겨울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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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 수상했던 평야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