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수상했던 평야족들
아이신은 에르시에느를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자세한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아가씨의 호위는 우리가 할 테니, 네가 해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 통역이다.”
“여행 중에 제가 통역을 해야할 일이 있습니까?”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만 떠난다면 길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대충 야영지를 만들어서 자면 되겠지만, 아가씨께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킨단 말이냐!”
“가는 길에 들를 평야족 부락의 위치는 이미 모두 계산해 놓았다. 너는 거기서 우리가 시키는대로 통역을 해 주면 된다.”
확실히 평야족 부족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최종적으로 가야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평야족 구역의 얼음꽃 숲이다. 들어본 적이 있나?”
“이봐. 아직 어린 산야족 같은데 평야족 구역을 어떻게 들어봤겠나. 우리 병사들도 못 가본 놈들이 태반인데.”
“그것도 그렇군.”
기사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아이신은 깜짝 놀랐다.
‘얼음꽃 숲이라고?? 설마···’
기사들은 당연히 아이신이 그곳을 모를거라 단정하고 넘겨버렸지만.
아이신은 회귀 전 얼음꽃 숲 근처에 사는 평야족 부락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문하려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가게 되었군. 에르시에느 아가씨에게 감사해야겠는걸?’
다만 아이신이 얼음꽃 숲이 있는 부락을 방문했을 때는.
순찰과 같은 밋밋한 임무가 절대로 아니었다.
당시 아이신이 맡은 임무는 부락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라는 변경백의 특명이었다.
‘변경백 밑에서 기병 대장을 맡은지 2년차였던가. 그 놈들이 갑자기 강해져서는 주변 부락을 마구 침공했었지.’
알다시피 변경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야만족들이 세력을 키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이다.
아이신은 곧바로 기병대를 이끌고 평야족 구역으로 향했고, 놈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런데, 금세 토벌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이신의 부대는 놈들에게 상당히 고전했었다.
‘무기가 달랐어. 솔직히 지금까지도 어떻게 놈들이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산야족과 평야족들이 쓰는 무기의 재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이막의 부족처럼 소규모 부족들이 쓰는, 마수나 짐승의 뼈를 날카롭게 갈아서 만든 무기.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산야족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살상력을 가진다.
다른 하나는 투구르 부족이나 벨린다의 부족처럼 규모가 큰 부족에서 사용하는, 조잡한 재질의 철제 무기.
산야족과 평야족들이 제국과 왕국에서 철제 농기구를 구입해 쓰기 때문에 착각하기 쉬운데.
의외로 동쪽 변방에도 철광석은 충분히 매장되어 있다.
다만 철제 제련 기술에서 야만족들과 제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규모가 큰 부족들은 부락마다 대장간과 대장장이를 두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기껏해야 철광석을 녹여 불순물이 많고 조잡한 철제 무기를 만들어내는 정도.
농기구처럼 특정 목적에 맞는 정교한 철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야만족의 기술로는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상대했던 평야족 놈들은, 분명 제국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잘 제련된 무기를 쓰고 있었어.’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이, 제국과 왕국은 야만인들에게 철제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법으로 엄금하고 있었다.
아이신은 힘겹게 놈들을 전멸시키고 나서야, 놈들이 사용하는 무기의 출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철제 농기구를 개조해서 만든 무기였지. 문제는 놈들 외에는 단 한 곳도 그런 시도를 한 놈들이 없었다는 거야.’
철제 농기구를 개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건 제국과 왕국에는 상당히 큰 일이 될 터였다.
아이신은 이를 위해 산야족과 평야족 대부락의 대장간들을 샅샅이 뒤지라 명령했다.
그러나···
- 아이신 대장님.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것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놈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만든 조잡한 철제 무기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대장간들을 샅샅이 수색했는데도 못 찾은 것을 보면, 그때 그 놈들이 특이했던 것 아닐까요?
사람을 보내어 규모가 있는 부락들의 대장간이며 창고를 미친듯이 수색했는데도.
놈들처럼 철제 농기구를 개조해 무기로 쓰는 놈들은 단 한 곳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야만족의 기술로 철제 농기구를 불법 개조하여 무기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면.
세력을 키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대부락 놈들이 진작에 그걸 시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놈들이 어떻게 농기구를 무기로 개조했는지는 그 후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
회귀 후 부족을 어떻게 하면 강하게 만들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이신이, 그때 철제 농기구를 개조하던 놈들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도저히 평야족 구역에 갈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평야족 구역에 아이신 혼자 어떻게든 찾아간다 해도.
놈들이 산야족 전사인 아이신을 반길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놈들의 대장간을 조사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일테고.
‘에르시에느 아가씨의 호위 명목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놈들 부락에 들어갈 수 있어. 정말 좋은 기회다.’
아이신은 고개를 홀끗 돌려 자기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에르시에느를 바라보았다.
오늘 에르시에느는 출발할 때부터 매우 들뜬 표정이었다.
아이신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자각하자, 에르시에느는 잠깐 아이신의 눈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생각해보니 회귀 전에도 아가씨는 얼음꽃 숲에 가보고 싶어하셨지.’
워낙 경치가 좋기로 요새 병사들에게 소문이 난 곳이다.
그러나 에르시에느는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 변경백께서 명하신 일이다. 부락 터가 있는 곳을 비롯하여 강 주변 숲까지 싹 불태워라.
- 옛!!
저항하는 놈들의 전사들을 전멸시킨 뒤, 부락 터는 물론이요 얼음꽃 숲이라고 불리는 주변 숲까지 모조리 불질러 없앤 것이 아이신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신은 그때까지도 그 숲이 그렇게 경치가 좋은 곳인지 알지 못했었다.
- 아아···이곳의 겨울 경치는 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절경이었는데.
- 정말 아깝구만. 우리 딸래미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불타는 숲을 바라보며 옆의 병사들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서야, 아이신은 이곳이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에게 물었다.
- 이곳에 뭐가 있었나?
- 지금은 여름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의 겨울은 정말 끝내주게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했지요.
- 오죽하면 얼음꽃 숲이라고 불리겠습니까.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겠지만요.
그로부터 약 1년 후, 아이신은 이혼하고 돌아온 에르시에느로부터 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되었다.
- 그러고보니 아이신. 아이신도 얼음꽃 숲이라는 곳에 가 봤어?
- 가본 적은 있습니다.
- 말이 이상한데? 그래서, 어땠어?
- 제가 그곳에 갔을 때는 여름이었고, 백작님의 명령에 따라 그곳의 부락을 토벌하고 숲을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 그곳을 전부 태웠다고?? 어째서?
- 그들이 백작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 그럴수가···
에르시에느가 엄청나게 침울해하길래, 아이신은 드물게 에르시에느에게 되물었었다.
- 그곳에 무슨 추억이라도 있으십니까?
- 음···추억은 아니구. 나 엄청 어릴 때부터 꼭 얼음꽃 숲에 가보고 싶어했거든. 할아버님이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 ······
- 소박맞고 변경백령으로 돌아오면서 딱 하나 기대하던 게 얼음꽃 숲에 가보는 거였는데. 후훗···정말 되는 일도 없네. 어쩌겠어. 할아버님이 시킨 일이라는데.
- 죄송합니다, 아가씨.
- 아냐. 아이신이 뭐가 미안해. 그럼 아이신도 얼음꽃 숲을 본 적은 없는 거구나. 똑같네, 우리.
그때 실망한 에르시에느의 표정은 수도에서 다 시들어버린 꽃처럼 지내던 때보다 더욱 어두웠기 때문에, 아이신은 아직도 그 얼굴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곳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셨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한편, 아이신이 자기 쪽을 쳐다보자 에르시에느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가, 갑자기 왜 쳐다보는 거야? 깜짝 놀랬네.’
평소 요새의 병사나 일하는 아주머니 등 누구에게나 스스럼 없이 말을 거는 에르시에느지만.
아이신의 근처에만 서면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어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아이신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에르시에느는 그제야 고개를 바로하고 아이신을 곁눈질했다.
‘기껏 같이 여행 온 건데 한 마디도 못하다니. 그럴 수는 없어···!!’
안절부절 못하던 에르시에느는 공연히 옆에 있던 아이엘란을 붙잡고 대화를 시작했다.
“저기, 네 주인님은 원래 저렇게 말이 없으셔?”
“주인님이요? 그런 것 같아요. 별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세요.”
“으으음···너네 주인님이 장남이라며. 동생들은 몇 명이야?”
“주인님 밑으로 남동생이 한 분, 여동생이 한 분, 그리고 배다른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분씩 계셔요.”
“배다른 동생들?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는데?”
“여동생분을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어머, 나랑 똑같네. 나도 어머니가 안 계시거든.”
“아가씨도요?”
“응. 우리 어머니도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셨어. 그보다 동생들 이름은 뭐야?”
원래 쾌활한 성격인 에르시에느는, 아이엘란과 엘프어로 신나게 대화를 나누느라 아이신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신은 에르시에느와 아이엘란의 대화를 듣다가, 조용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동생들이 궁금하십니까?”
“까, 깜짝아!! 뭐야? 너 엘프어도 할 줄 알아??”
에르시에느는 아이신을 가까이서 보고는 또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엘프어로 말하면 뒤에 따라오는 기사들이나 아이신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조금 크게 떠들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아이신이 엘프어를 못 할 리가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엘프 노예 아이를 구해줄 때 엘프들과 담판을 지었다고 했었잖아. 난 몰라.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도 이건 기회다.
아이신 쪽에서 먼저 물꼬를 터 줬으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아이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티는 내지 않으면서.
“그, 그런데. 우리 오늘은 어디서 잘 거래?”
“저도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기사님들께 물어보고 오면 되겠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어차피 때가 되면 말해줄건데 뭐. 그보다 얘 어때? 이제 내 말 잘 듣는다?”
에르시에느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가 타고 있는 백마, 아젠트의 고삐를 살짝 잡아 당겼다.
“제가 그 때 길들였던 말이군요.”
“이름은 아젠트야. 얘 엄청 똑똑해. 가끔 보면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니까.”
아이신은 왠지 모르게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회귀 전, 아이신은 아직 시집 가기 전의 활발했던 에르시에느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이신이 본격적으로 에르시에느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 수도 사관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그때는 이미 에르시에느가 변경백령의 한 떨기 꽃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시들어버린 후였다.
변경백령으로 돌아온 후에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 태양처럼 눈부셨다던 에르시에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아이신은 이렇게 순진무구하고 티없는 에르시에느를 처음 보는 것이다.
‘어쨌든 아가씨 덕분에 일찍 그곳에 갈 기회가 생겼으니. 아가씨도 보고 싶어하셨던 경치를 마음껏 볼 수 있었으면.’
그들의 여정은 열흘 가까이 이어졌다.
기사들끼리만 말을 달렸다면 3~4일만에 도착할 거리였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평야족 부락에 들러 일찌감치 에르시에느를 쉬게 하고, 하루 세 끼를 제대로 챙기느라 시간이 두 배 이상 소요되었다.
‘정말 행복해. 절경이라는 얼음꽃 숲을 아이신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정말 아무 소원이 없을 것 같아.’
하루하루 에르시에느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여행을 즐겼다.
그들이 점점 더 동쪽 깊은 곳에 발을 디딜수록, 주변 풍경은 어느새 새하얀 눈밭으로 변해갔다.
열흘째 되던 날.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부족이 틀림 없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얼음꽃 숲을 영역으로 하는 평야족 부락에 도착했다.
온통 새하얀 눈밭이 펼쳐진 부락 주변에는, 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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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 수상한 늑대무리(1)
“여긴 지금까지 들른 부락들 중에서 제일 큰 것 같아.”
“아, 저도 주인님께 들었어요. 이곳에는 칠십 가구가 넘는 평야족이 살고 있다고 하셨어요.”
“흐음···그런데 아이신은?”
“기사님과 함께 이 부족의 족장을 만나러 가셨어요. 오늘 잘 곳을 제공 받아야 하니까요.”
“아이신이 없었으면 정말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겠다. 아이엘란 너도 수고가 많아. 내 수발을 드느라.”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노예 생활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행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기사 세 명과 에르시에느를 남겨두고, 아이신은 얼른 족장의 집으로 향했다.
“이거, 제국의 기사님들이 아닙니까?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족장은 꽤 나이가 많은 전사였다.
이들도 오래 전부터 변경백이 주최하는 마시에 참여하며 변경백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들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족장에게 이야기했다.
“이 마을에 며칠 묵으려 한다.”
“함께 모시고 온 분은 변경백의 손녀이신 에르시에느님이시다. 이 부락에서 가장 좋은 집을 내어와야만 할 것이다.”
물론 노련한 변경백은 아무 대가도 없이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위엄과 공포만으로 야만족들을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당근을 함께 건네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변경백의 선물이라며 기사들이 내민 패물과 질 좋은 피륙 등을 건네받은 족장은 만면에 미소를 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저의 집이 가장 크고 따뜻합니다. 저의 집을 내어 드릴 테니 얼마든지 쉬다 가십시오.”
그러나 아이신은 족장을 비롯한 전사들의 표정이 티가 나도록 어두운 것을 눈치챘다.
‘뭐지? 묘하게 활기가 없는걸?’
아무래도 산야족과 평야족들이 사는 동쪽 변방은 워낙 겨울이 혹독하고 춥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겨울이면 모든 사람들이 말수가 줄어들고 마을 전체가 조용해지는 경향은 있다.
다만 이 부락은 그런 것을 감안해도 너무 우중충하고 음산한 침묵마저 감도는 듯했다.
‘사람이 칠십 가구가 넘게 사는 부락이 이렇게 활기가 없기는 힘들어. 부락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이신은 족장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기사들이 아이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에르시에느 아가씨가 기다리신다. 어서 방을 안내해달라고 전해라.”
“명심해라. 어떤 상황이든 아가씨의 신변이 우선이다. 이 날씨에 언제까지 아가씨를 밖에 세워둘 셈이란 말이냐!”
기사들의 재촉에, 아이신은 우선 묻는 것을 미루고 족장의 집을 안내 받았다.
동쪽 변방의 해는 짧았기 때문에,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들은 보초를 서는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신은 그러나 잠결에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불길한 울음소리들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 아우우우우우우--
- 아우우우우우우우우--
*
다음 날.
새벽의 어둠이 걷히자마자, 아이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봐야할 것이 많아. 대장장이의 존재부터 밤새도록 들리던 늑대 울음소리까지.’
활기라고는 없는 마을 분위기 하며 이상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아이신은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방을 나와 집 뒤편으로 돌아가니, 늙은 족장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예상대로군.’
산야족이든 평야족이든,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장작패기를 하며 잠을 깨는 일이 많다.
그러나 장작을 패는 족장의 모습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신 한숨을 내쉬며 장작을 쪼개는 족장에게 다가간 아이신은,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냈다.
“음? 아, 어제 통역을 하던 젊은 전사로군. 변경백의 손녀께서는 자리가 불편하지 않으셨다던가?”
“배려해주신 덕에 푹 잤습니다. 아가씨께서도 만족하셨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족장은 으레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힘없는 자세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아이신은 그런 족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부락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왜 그런 걸 묻나?”
“그냥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초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지 않습니까.”
“허허···초상이라···이대로면 줄초상이 날 수도 있겠군.”
족장은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더니, 대답 대신 아이신에게 되물었다.
“그보다 어제 기사님들에게는 묻지 못하였는데, 변경백의 손녀씩이나 되는 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왜 오신겐가?”
“아가씨께서는 얼음꽃 숲과 얼어붙은 수정폭포를 꼭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얼음꽃 숲? 허허···그거 곤란하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이신의 물음에, 족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혹, 어제 자는 동안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였나?”
“이상한 것이라면···혹시 늑대들이 우는 소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젊은 전사가 잠귀가 밝군. 실은 올 가을부터, 부락 근방에 늑대가 떼로 나타났다네.”
“고작 늑대가 조금 많이 나왔다고 한들 뭐가 문제입니까? 이 마을 전사들의 숫자라면 놈들을 상대하고도 남을 텐데요.”
“그게 그렇지가 않네.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꼬···”
족장은 그러면서도 아이신에게 마을의 상황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산야족이든 평야족이든, 봄에서 가을까지는 농사를 짓고 채집을 하는 것을 주력으로 한다.
본격적으로 대규모 수렵을 시작하는 것은 수확이 끝난 가을부터.
아이신 일행이 묵은 이 평야족 부락에서도 가을이 되어 수확을 끝내자마자 전사들이 수렵을 위해 부락을 떠났다.
그런데···
- 느, 늑대다!! 늑대가 마을에 들어왔어!!
-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은?!! 없으면 여자와 노인이라도 무기를 들어라!!
대부분의 성인 전사들이 부락을 비운 사이.
스무 마리가 넘는 늑대들이 부락에 침입했다.
부락에 남아 있던 평야족들은 저마다 활과 창을 들고 침입한 늑대들을 막았지만, 부상자가 몇 명이나 나왔다.
- 늑대들이 어째서 마을에···??!!
- 놈들이 또 침입해올지 모른다! 어서 족장님과 전사들에게 알려야 한다!!
조금 먼 곳에서 대규모 수렵을 하고 있던 족장과 전사들은,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라 수렵을 중단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 다친 사람은 없는가?? 아이들은 어떤가??
-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지만···
- 아이가 둘이나 물려갔습니다.
-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늑대새끼들이···!!!
화가 난 족장은 전사들을 이끌고 부락 주변 늑대들을 소탕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 에잇!! 영악한 놈들!!
- 족장님. 늑대들을 사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립니다.
- 놈들은 본디 사냥당하는 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 놈들이 모여사는 곳을 찾을 수는 없나?
- 그건 쉽지 않습니다. 놈들은 인간이 찾기 힘든 곳에 소굴을 만드니···
영악한 늑대들을 사냥하는 것은 수렵 민족인 평야족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족장은 별 수 없이 다시 전사들을 모아 다시 사냥을 떠났다.
- 이번엔 전사들을 몇 명 남기고 가도록 하자.
- 예 족장님.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 우리는 수백 년 동안이나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습니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부락이 비었다고 늑대들이 쳐들어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군.
그 말대로다.
암만 부락에 전사들이 적다 해도.
사람이 모여사는 부락에 늑대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부터가 평야족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 늑대들은, 부락의 상황을 멀리서 감시하기라도 하는지 기회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사람을 공격했다.
-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던 여자 하나가 공격을 당했습니다!!
- 부락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늑대들이 도망가는 것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 무슨 늑대들이 이렇게 지능적으로 움직인단 말이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부락 사람들은 일의 심각함을 피부로 느꼈다.
칠십 가구가 넘는 부락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손이 비는 전사들이 모두 멀리 수렵을 떠나 짐승을 충분히 잡아와야만 한다.
그런데 늑대들의 공격때문에 모든 전사들을 동원할 수가 없으니 그만큼 사냥 효율이 떨어지게 되었고.
심지어 부락 주변으로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거나 장작용 나무를 해오는 일에도 성인 남자가 몇 명이나 뭉쳐 다녀야만 했다.
앞으로 다가올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집의 보수를 비롯하여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불필요한 노동력을 자꾸 낭비하고 있으니 도무지 진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 이대로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며, 식량의 비축을 충분히 할 수가 없다.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단 말이다.
- 주변 부락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조금 떨어진 부락에 도움을 요청해 봤으나, 돌아온 대답은 매몰찬 거절이었다.
- 숲에 사는 놈들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고작 늑대새끼들을 못 잡아서 무슨 호들갑이란 말이오?
- 우리도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한시도 낭비할 틈이 없소! 그 정도는 알아서 해결하시오!!
참 야속하다 싶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자신들이라도 비슷하게 대했을 것 같았다.
- 고작 늑대 새끼들 때문에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누가 이 기막힌 상황을 믿어주겠는가···!!
그렇게 도저히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부락 사람들은 떨어져가는 식량과 부족한 장작 등을 바라보며 서서히 공포에 질려갔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이신도 늑대들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늑대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락을 공격하는 거지? 이런 일은 정말 흔치 않은데···?’
아이신은 혹시나 해서 족장에게 물었다.
“혹시 늑대 우두머리를 확인하셨습니까? 놈이 마수가 되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걸 알 수가 없네. 우리도 그런 생각은 해 봤지만, 특별히 몸집이 월등히 크거나 공격적인 늑대를 본 사람은 없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지.”
아이신은 우선 알겠다고 말한 뒤, 에르시에느가 머물고 있는 족장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느새 에르시에느의 아침 식사 준비를 끝낸 기사들이 구운 고기와 빵, 말린 과일 등을 차려놨다.
“아이신. 어디 다녀 왔어? 어서 같이 아침 먹자!”
열흘 동안 함께 다니며 에르시에느는 아이신이 친근해졌는지, 식사 시간이면 꼭 함께 밥을 먹으려고 했다.
아이신은 그러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에르시에느와 기사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얼음꽃 숲을 보러 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깜짝 놀란 에르시에느가 소리를 질렀고, 기사들도 궁금한 표정으로 아이신을 추궁했다.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혹시 여기 부락 놈들과 관계가 있나? 놈들이 아가씨의 뜻을 막았다면, 가만둬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닙니다. 이 부락 사람들과 관계 있는 일은 맞지만, 부락 사람들 탓은 아닙니다.”
아이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족장에게서 들은 늑대 무리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기사들의 얼굴에도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늑대들이 그렇게 떼로 움직인다면, 아가씨를 함부로 모셔갈 수는 없지.”
“혹시 아가씨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그래서 말인데, 늑대들을 우리가 몰아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이신의 제안에, 기사들은 저들끼리 고민을 시작했다.
에르시에느 역시 식사를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기사들은 저들끼리 이야기가 끝난 듯 아이신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아가씨의 뜻을 들어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야만족들이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해결하고 길을 여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듣기에 너도 훌륭한 전사라 들었다. 우리와 동행하여, 아가씨의 길을 막는 늑대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도록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으므로, 기사들은 시원시원하게 아이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이신은 바타르를 타고 네 명의 기사와 함께 부락을 나섰다.
‘늑대들은 어디···’
평야족이 사는 곳은 산야족이 사는 산악지형과 달리 비교적 평탄한 지대와 큰 강이 흐르는 곳이다.
그렇다고 제국의 도시처럼 기름진 땅은 아니라서 척박하기는 매한가지지만.
눈이 좋은 아이신은 산악 지형보다 훨씬 더 주변을 넓게 바라볼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아이신의 눈에 몇 마리의 늑대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곳에 늑대 몇 마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용히 접근하도록 합시다.”
“그게 보인단 말이냐?”
“눈이 좋은 꼬마로군. 산야족들은 다 그런가?”
기사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우선 아이신의 뒤를 따랐다.
암만 기사들이라 해도, 짐승을 사냥하는 데에 있어서는 초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접근했을 때, 아이신은 늑대들이 다가오는 자신들을 눈치채고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지금입니다. 전속력으로 돌진합시다.”
아이신은 그 말과 함께 바타르의 고삐를 세게 당겼다.
“히히히히힝!!!”
바타르는 큰 울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곧장 전속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초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아이신은 맹렬한 기세로 늑대들에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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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 수상한 늑대무리(2)
바타르의 질주를 확인한 늑대들이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는 것이 보였지만, 아이신은 멈추지 않았다.
‘평범한 말이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늑대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바타르라면···!’
사람이 늑대를 사냥하기 힘든 까닭은, 애초에 늑대가 사냥당하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인한 네 발로 달리는 늑대는 매우 빠르고, 그 지구력이 월등하여 몇 시간이고 달릴 수 있다.
순간 속력은 늑대보다 말이 빠르지만.
사람을 태운 말이 지구력으로 늑대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신과 바타르는 다르다.
일찌감치 벽을 넘고, 이제는 일반적인 벽을 넘은 전사들보다도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아이신이 저 멀리서부터 늑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바타르는 아이신이 멀리서부터 계산한 최적의 루트로, 늑대들이 도망가기 전에 질주를 시작한다.
벽을 넘은 말인 바타르가 최고 속력을 낸다면, 뒤늦게 출발한 늑대를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
아이신은 점점 가까워지는 늑대들을 바라보며, 손에 쥔 변경백의 창을 높이 들었다.
“월!! 월!!”
위기를 감지한 늑대들이 맹렬히 짖어대며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소용없이 바타르에 탄 아이신의 신형(身形)이 빠른 속도로 늑대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히히히히힝!!!’
퍼억!!
퍼억!!
- 휘이이이익!!!
바타르가 커다랗게 울어대는 것과 동시에, 아이신이 들고 있던 변경백의 창이 커다랗게 휘둘러졌다.
“캬아아악!!”
“캭!!”
깨갱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마리의 늑대가 피를 토했다.
아이신은 바타르를 멈추게 한 뒤, 도망가는 나머지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됐나.’
도망가는 놈들에게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아이신은 뒤를 돌아 쓰러진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저곳에 널부러진 늑대들은 세 마리.
두 마리는 바타르에게 부딪혀 거세게 튕겨나갔고, 한 마리는 아이신이 휘두른 창에 크게 베여 그대로 즉사했다.
아이신은 바타르에서 내린 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늑대들의 숨통을 신속하게 끊었다.
“캬아아아아악!!”
늑대들의 단말마가 사방으로 울려퍼질 때가 되어서야, 기사들이 뒤따라 도착했다.
“이, 이건 대체···!!”
“이 놈들을 네가 잡았나??”
“우리도 전속력으로 달려왔는데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어떻게 늑대를 세 마리나···?!”
기사들이 놀랄 만도 했다.
애초에 기사들은 사람을 상대로만 싸울 줄 알지, 사냥에 있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볼 때는, 아이신이 저 멀리에서 갑자기 늑대들을 발견하고 말을 달리기 시작하더니.
그것을 쫓아가니까 늑대가 세 마리나 죽어서 널부러져 있는 것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우선 이 놈들을 싣고 부락으로 돌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그래.”
“변경백께서 너를 두고 어린데도 뛰어난 전사라고 하시더니, 빈말이 아니었구나.”
“이 사람이···그렇게 말하면 백작님 눈이 옹이구멍이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건 내가 똑똑히 기억해뒀다가 변경백께 보고를 해야겠군!”
“그게 무슨 음해인가!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장난일세. 껄껄. 그럼 이걸로 정리된 것이냐?”
아이신은 그 말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족장에게 듣기로는 수십 마리의 늑대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 놈들은 그저, 주변에서 부락의 동향을 살피던 정찰조밖에 되지 않겠지요.”
“무슨 늑대들이 사람처럼 행동한단 말이냐. 늑대라는 놈들은 원래 그런가?”
“짐승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으니···”
기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죽은 늑대를 말에 실었다.
아이신은 먼저 부락으로 되돌아가는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바타르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히힝···!”
혹시 다치지는 않았느냐는 걱정스러운 손길에, 바타르는 전혀 문제 없다는 듯 짧게 울고는 아이신의 손을 핥았다.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바타르와 부딪히면, 늑대 따위가 버틸 재간이 없지.’
기실 말이라는 동물은 원래 겁이 많은 동물이다.
다만 말, 특히 군마가 유용한 까닭은 말이 그만큼 머리가 좋고 주인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말이 아닌 나귀나 노새라면, 타고 있는 주인이 명령한다해도 절대로 맹수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은 다르다.
겁이 많아 혼자서는 맹수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않는 말이지만.
잘 길들여진 군마는 그것을 이겨내고 오로지 주인의 명령만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암만 무서운 맹수라 할지라도, 주인이 놈을 물리치고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행동.
그 결과가 이것이다.
‘회귀 전에는 호랑이도 바타르에게 튕겨나가면 큰 부상을 입곤 했으니.’
사람을 태운 군마의 무게는 성체 호랑이 몸무게의 두 배에 달한다.
심지어 바타르는 일반적인 말보다 더 근육질에 더 빠른 속력을 내는 말이다.
그러니 암만 호랑이같은 맹수라 할지라도, 바타르에게 정면에서 부딪히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이다.
아이신과 기사들이 죽은 늑대들의 시체를 싣고 부락으로 돌아오자, 평야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늑대를 잡았다고??”
“그것도 세 마리나??”
“어서 족장님을 불러와라!”
서둘러 달려온 족장도, 부락 중앙에 널부러진 늑대 시체들을 보고 깜짝 놀라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이 놈들을 잡아 주신 겁니까?? 과연 제국의 기사님들이군요!!”
“우리가 잡은 것이 아니다.”
“이쪽의 젊은 전사가 잡은 것이다. 우리는 구경밖에 하지 않았다.”
“저 어린 전사가 말입니까??”
족장은 놀라운 표정으로 늑대 시체와 아이신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놀랍구나.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전사가, 늑대를 세 마리나 사냥해올 줄이야. 우리 부락의 성인 전사들도 이렇게는 할 수 없다.”
“이 늑대들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는 얼음꽃 숲으로 가야만 하니, 겸사겸사 이곳에 머무르며 늑대들을 계속 잡아드리도록 하지요.”
“이런···!! 우리 부락에 큰 복이 내렸구나!”
아이신은 족장과 부락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조금 걷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야족 사람들은 곧바로 아이신이 잡아온 늑대를 능숙하게 해체했다.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 뒤(늑대같은 육식동물의 내장은 먹지 않는다), 커다란 솥에 늑대고기를 넣은 국을 끓였다.
“오랫동안 신선한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덕분에 부락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었네!”
“본래 육식동물의 고기는 누린내가 나기 때문에 별로 맛은 없지만, 이런 상황에는 그것도 귀하지. 자네들도 들게!”
때 아닌 연회가 크게 벌어졌고, 부락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에르시에느는 족장의 집에서 아이엘란과 함께 따분하게 앉아있다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니?”
“알아보고 올까요?”
아이엘란은 얼른 밖으로 나가 이 소란의 원인을 알아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에르시에느의 볼이 새빨개졌다.
“우리 변경백령 기사들보다 훨씬 낫다···나도 아이신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걸.”
“아가씨, 그건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나도 알아. 그냥 해 본 말이야. 근데 저 사람들 그럼 지금 늑대고기로 국을 끓이고 있는 거야?”
“네. 세 마리를 전부 넣고 끓여서 온 부락 사람들이 나눠먹는다고 하네요.”
“늑대고기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좀 가져와줄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엘란은 밖으로 나가 커다란 솥으로 다가간 다음, 에르시에느의 몫이라며 늑대고깃국을 한 그릇 받아왔다.
에르시에느는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코를 찌푸렸다.
“뭔가 별로 좋은 냄새는 아닌데.”
“그러네요.”
“아이엘란, 너도 늑대고기는 처음이야?”
“예. 저도 먹어본 적 없어요.”
“네가 먼저 먹어 봐.”
아이엘란은 조심스럽게 나무 숟가락으로 늑대고깃국을 떠먹어보고는, 오물오물 고기조각을 씹었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네요.”
“그래? 그럼 나도 어디 한 번···”
자신을 얻은 에르시에느가 얼른 늑대고깃국에 도전해봤지만, 결과는 뻔했다.
“이게 무슨 맛이야!!!”
암만 다른 영애들에 비해 와일드한 에르시에느라지만, 누린내가 진동하는 늑대고깃국은 아가씨가 먹을만한 음식이 아니었으니까.
*
아이신이 잡아온 늑대들로 한 바탕 잔치가 벌어진 다음 날.
아이신은 그 날도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대장장이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야겠어.’
원래라면 외부에서 찾아온 사람이 갑자기 대장장이와 대장간을 찾는다고 하면 경계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부락의 골칫거리였던 늑대를 잡아온 덕에, 부락 사람들은 순식간에 아이신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 대장간? 뭐 수리할 것이라도 있나보지?
-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활을 조금 손보고 화살촉을 좀 얻을까 해서요.
- 그런데 우리 마을은 지금 대장간이···
- 문제가 있습니까?
- 실은 올해 가을에 대장장이 부부가 모두 죽어버렸다네.
- 예?? 그럼 지금 부락에 대장장이가 없습니까?
- 어린 자식이 하나 있긴 한데···그 가족은 워낙 괴짜였어서 말이지. 새 대장장이를 구해야하는 상황이긴 한데 워낙 이런 상황이다보니 거기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다네.
- 대장장이가 없다면 제가 대장간에 가서 혼자 무기를 조금 손보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 좋아. 대장간은 부락에서도 끝에 떨어져 있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찾아가 보도록 하게. 사람이 없으면 그냥 대장간의 물건은 마음대로 쓰도록 하게. 골칫거리인 늑대들을 잡아줬으니, 족장으로서 그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네.
아이신은 그렇게 얻은 정보를 가지고 대장간으로 찾아갔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아이신은 조심스럽게, 족장이 알려준 집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신은 매캐한 먼지 냄새에 기침을 했다.
“콜록···뭐야. 아무도 없나?”
대장간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듯, 퀘퀘한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이신은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대장간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느 대부락에나 있는 평범한 대장간인가. 규모는 별로 커 보이지 않는군.’
이곳 부락도 칠십 가구 정도가 사는 만큼, 작은 규모의 부락은 아니지만.
투구르나 벨린다의 친정같은 진짜 대부락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큰 부락은 아니다.
대장간이 있다고 해 봐야 그놈들의 대장간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곳에서 대체 무슨 수로 철제 농기구를 개조해서 무기로 만든 거지? 알 수가 없군.’
아이신은 찬찬히 대장간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아이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아이신은 재빨리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투박하게 생긴 창날과 화살촉들이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창날과 화살촉이지만, 회귀 전부터 철제 무기를 수십 년 동안이나 다뤄온 아이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분명해.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았고, 손을 많이 봐야할 것 같긴 하지만. 이건 제국제 철이야.’
아이신이 더 정확한 확인을 위해 그것들을 손에 쥐고 일어나려던 그 때였다.
“누구냐? 누군데 함부로 남의 집을 뒤적거리는 거야!!”
아이신은 당황하지 않고 뒤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여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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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 얼음꽃 숲(1)
“귀가 먹었어? 남의 집에서 뭐하는거냐고 묻잖아!”
아이신을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 아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직 어려보이는데. 기껏해야 나랑 비슷하거나 두 살 정도 어린 것 같군.’
위협적인 태도에 비해 여자 아이의 덩치는 전혀 크지 않았다.
키는 동생인 아이덴보다 조금 클까?
여자아이답지 않게 짧게 자른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얼핏 보면 남자 아이로 착각할 법한 소녀였다.
“여기가 대장간이 맞나?”
“그래! 보면 몰라?”
“활과 화살을 조금 손보고 싶은데. 네가 대장장이인가?”
“그런 사람은 없어. 돌아가.”
아이신은 그러나 대답 대신 소녀의 손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확인한 아이신은, 재빨리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의 손을 잡아챘다.
“잠깐 실례.”
“꺄, 꺅!! 뭐하는 거야!!”
여자아이답지 않게 상처가 가득한 손을 확인한 아이신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졌다.
‘검과 활을 다루는 전사들의 상처와는 다른 자잘한 상처들. 이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불에 데이고 낫는것을 반복해야만 생기는 종류의 상처가 분명해.’
팟!!
소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손을 뿌리치고 아이신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뭐,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빨리 나가지 못 해?!!”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뭐라고?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족장에게 대장간의 사용 허가는 받았다. 방금 대장간을 둘러보니, 아주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있었던 모양이군.”
“헛소리 하지 말고···나가!!!”
소녀는 그렇게 빽 소리를 지르더니, 바닥에 떨어져있던 창촉이며 화살촉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아이신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신이 그것을 피해 밖으로 나가자마자, 소녀는 안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것이 좋겠군.’
자기보다 더 작은 소녀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강제로 대장간을 더 조사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신은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소녀의 날이 선 태도에서, 왠지 모르게 그녀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다.
아이신은 닫힌 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겠다.”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아이신은 대장간에서 떠났다.
아이신이 떠난지 한참 후에야, 다시 대장간의 문이 열리더니 소녀가 고개를 빼꼼하고 내밀었다.
“···그 미친놈은 갔나?”
어제 웬일로 부락이 시끌벅적했기 때문에, 거의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소녀도 드물게 밖에 나갔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부락 중앙으로 가자, 그녀를 알아본 부락 아주머니들이 얼른 그녀를 반겼다.
- 갈렌! 오랜만이구나.
- 집에 식량이 떨어지지는 않았니?
- 아직 괜찮아요. 저 혼자밖에 없는걸요.
- 미안하구나. 어린 너 혼자 사는데 우리가 더 신경을 써줬어야 하는데···
- 요즘 전사들이 제대로 사냥을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단다.
- 오늘 이건 무슨 일이에요?
- 이거? 아 글쎄, 변경백의 손녀라는 분과 함께 온 젊은 전사가 부락 주변을 서성이던 늑대를 세 마리나 잡아왔다지 뭐니?
- 늑대를 세 마리나요??
- 갈렌 너도 알다시피 요즘 영악한 늑대들이 부락을 노리는 바람에 전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잖니.
- 잡은 늑대의 소유권은 전부 우리 부락에 준다길래, 족장님이 세 마리를 모두 잡아 잔치를 벌이라고 하셨단다.
- 온 김에 너도 국 좀 받아가렴. 고기도 한 덩이 가져가고.
- 부모님이 없어도 잘 이겨내야 한다.
- 여자인 네가 꼭 부모님을 이어서 대장장이가 될 필요는 없잖니. 새 대장장이는 족장님이 근처 부락에 수소문하고 있다고 하셨으니, 적당한 시기가 되면 마을의 전사와 가정을 꾸리거라.
-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갈렌도 벌써 처녀티가 조금씩 나는 것 같은데? 어떠니. 우리 작은 아들이 올해 열 아홉인데···
- 아유, 이 이도 참! 아직 열 네 살밖에 안 된 애한테.
- 어쨌든 갈렌! 아줌마들도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다. 우리 마음 알지?
- ···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돌아가 볼게요.
- 그래. 국이랑 고기는 우리가 나중에 따로 챙겨서 너희 집에 가져다 주마.
- 앞으로는 자주 밖에 나와서 인사라도 좀 하고 그러렴.
가만히 있었다가는 아줌마들이 끝도 없이 말을 시킬 것 같길래.
대장장이 소녀, 갈렌은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엄마···아빠···’
대장장이셨던 소녀의 부모님은, 약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
부모님의 죽음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소녀 한 명뿐이었지만, 아무도 소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다.
부모님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늑대 무리가 마을에 침입하는 등 부락 전체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러다가, 아이신이 떠나기 전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 방금 대장간을 둘러보니, 아주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있었던 모양이군.
미친 놈.
대장간을 잠깐 둘러봤다고, 자기가 뭘 안다고 마음대로 지껄인단 말인가.
“청소라도 할까.”
대장간은 소녀의 집과 바로 붙어있었지만, 소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단 한 번도 대장간 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대장간을 보며 손을 움직이려던 소녀는, 그러나 그대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래서···안 들어오려고 했던 건데···”
소녀는 두 손을 얼굴에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녀가 흘린 눈물이, 유달리 흰 빛을 뿜어내는 모루에 방울방울 떨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
에르시에느와 아이신 일행이 평야족 부락에 머문지도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아이신은 그 동안 매일매일 부락 바깥으로 나가 늑대들이 근처에 있는지 감시했고, 간혹 가까운 거리의 늑대들을 발견하면 달려가서 사냥하는 것을 반복했다.
“닷새 동안 다섯 마리면 상당히 많이 잡았구나.”
“이 정도면 더 이상 늑대들이 얼씬거리지 못하지 않나?”
“셋째 날까지만 늑대를 봤고 그 다음부터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을 보면···”
기사들의 말처럼, 최근 이틀 동안은 부락 주변에서 아예 늑대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아이신은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가 없었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늑대들의 행동이 자기가 아는 늑대들의 행동과는 묘하게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기사들과 그렇게 오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에르시에느가 슬며시 다가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이신. 언제쯤이면 얼음꽃 숲을 보러 갈 수 있어? 나 너무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그래도 아가씨의 안전이 먼저라고 기사님들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직감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에 아이신은 기사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기사들이 말을 바꿨다.
“물론 아가씨의 안전은 어느 때라도 최우선해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벌써 이 마을에서 닷새가 넘게 있었지 않느냐. 심지어 요 이틀 간 늑대라고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고.”
“이 정도면 주변 늑대들은 모두 겁을 먹고 내뺐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얼음꽃 숲을 구경할 때도 너와 우리가 아가씨 곁에서 철저히 경호를 할 테니, 감히 누가 덤빌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신은 기사들의 말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눈치챘다.
‘저들도 원래 요새에서 각자 맡은 임무와 일상이 있으니. 이제 슬슬 돌아가고 싶을 테지.’
아이신 역시 회귀 전에는 제국의 기사였고, 변경백 휘하 기병 대장으로 활동할 때는 이런 기사들을 여럿 밑에 두고 부렸었다.
그럼에도 아이신이 망설이고 있자, 에르시에느가 활기찬 목소리로 아이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아이신이 나를 지켜줄 거잖아? 안 그래?”
“아가씨. 섭섭합니다요.”
“변경백께 아가씨의 호위 임무를 받은 것은 분명 저희인데 왜 이 아이에게만 그러십니까.”
“흥이다. 아저씨들 그래서 늑대 한 마리라도 잡았어?”
“사냥이라면 저 소년 전사가 더 잘 하겠지만 아가씨의 신변을 지키는 것은 저희가 낫습죠!”
“됐어. 나는 아이신보고 지켜달라고 할 거야. 응? 아이신. 이제 얼음꽃 숲을 보러 가자.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잖아.”
에르시에느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아이신은, 불현듯 회귀 전 에르시에느의 쓸쓸했던 표정을 떠올렸다.
정략결혼 상대와 이혼을 하고 변경백령에 돌아온 그녀가 그나마 기대하고 있던 것이 얼음꽃 숲을 보러 가는 거였을 텐데.
그녀는 결국 어릴 때부터 보고 싶었다던 그 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다.
하필이면 아이신 본인이 그 얼음꽃 숲을 모조리 태워버린 까닭에 말이다.
‘기사들이 다섯이나 있으니 설마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어차피 아이신이 반대한다 해도, 이미 에르시에느와 기사들이 저렇게까지 말하면 방도가 없다.
결국 그들은 결정을 마치고 부락을 출발했다.
“음? 산야족 소년. 어째 평소보다 짐이 많은 것 같구나?”
“거리가 조금 된다고 들었으니까요. 만약을 위한 겁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거니, 저녁이 되기 전에는 돌아와야지.”
“아가씨에게 노숙을 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굳이 그런 것을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뭐 알아서 하거라.”
혹시나 싶어서 산야족들이 장기 원정을 나갈 때 쓰는 간단한 도구들을 챙기는 아이신을 보며 기사들이 한 마디씩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들은 말없이 얼음꽃 숲을 향해 말을 달렸다.
몇 시간 정도 말을 몰았을까?
드디어 그들의 앞에, 동쪽 변방 최고의 절경이라는 얼음꽃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너무 예뻐···정말 듣던 그대로 얼음 요정들의 정원 같잖아?”
에르시에느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그 어떤 아름다움과도 차원이 달랐다.
온 세상이 숨을 멎은 듯, 눈부신 순백(純白)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강가를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게 하얀 얼음 결정체로 뒤덮여 있었다.
잔가지 하나하나, 마른 잎사귀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피어난 수정(水晶) 같은 서리꽃들은, 마치 겨울의 정령들이 밤새 빚어놓은 예술 작품 같았다.
“아이신! 저기 좀 봐!”
에르시에느는 아젠트를 타고 천천히 풍경 속을 걸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에서, 가끔씩 얼음 결정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사락-’, ‘차랑-’하는 소리는 마치 요정들이 속삭이는 노랫소리처럼 맑고 청아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칼날처럼 시리면서도 비할 데 없이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와 정신마저 아득하게 만들었다.
“아가씨. 그쪽은 강입니다.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세요.”
“알아! 아이신도 이쪽으로 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숲을 가로지르는 강물만이 유일하게 제 빛깔을 간직한 채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백색 비단 위에 그어진 한 줄기 먹선처럼,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강 건너편으로도 끝없이 펼쳐진 얼음꽃 숲은 몽환적인 안개에 희미하게 싸여,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차원의 입구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에르시에느는 하염없이 그 장대한 경치를 눈에 담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이신과 함께 이런 걸 볼 수 있다니, 정말 너무너무 행복해. 하지만···’
가슴이 벅차오를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는데.
어째서 이 공간에 아이신과 단 둘이 아닌 걸까?
자신의 옆에서 함께 말을 타고 있는 아이신과, 살짝 뒤에서 따라오는 기사들을 바라본 에르시에느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별안간, 에르시에느는 아젠트의 고삐를 잡아 당기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이신! 이쪽으로 와! 아저씨들 따돌릴 거야!!”
“아가씨!!”
아이신은 재빨리 에르시에느의 뒤를 따랐지만, 기사들은 움직임이 한 박자 늦었다.
“어, 어어어!!”
“아가씨!! 마음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언제나 저희가 붙어있어야 하는데···!! 이럇!!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리 느린 게야?!”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좀처럼 속도가 안 나오는 모양인데. 아가씨는 언제 저기까지 가셨지???”
“빨리 쫓아야 한다!!”
원래 야만족 손에서 자란 아젠트와 명마인 바타르는 눈이 많이 쌓인 이런 지형에서도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기사들의 군마는 혹독한 변방에서 망아지 시절을 보낸 말들이 아니기에 속도가 더디게 나왔다.
에르시에느는 그런 기사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좋았어! 이대로면 금세 아이신과 단 둘이 될 수 있겠어.’
에르시에느는 벅찬 가슴을 안고, 계속해서 얼음 요정들의 정원을 질주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더 이상 기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바로 뒤에 아이신만이 에르시에느를 따라오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아가씨. 너무 멀리 왔습니다.”
“아이신은 나랑 단 둘이 있는게 싫어?”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사님들은 아가씨의 호위를 위해 여기까지 와 계신 겁니다. 그들의 사정도 헤아리셔야지요.”
“치···딱딱해. 근데 정말 여기 너무 아름답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군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에르시에느는 곁눈질로 아이신의 얼굴을 살폈다.
경치가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아이신의 표정에는 한 점의 미동도 없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에르시에느는 아이신의 앞으로 아젠트를 향하게 한 후, 순식간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보다 여기 경치가 더 예뻐?”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에르시에느는 속으로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더 예쁘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꼭 아이신 입에서 듣고 싶어.’
아이신과 에르시에느는 한참 동안 그렇게 얼굴을 맞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르시에느의 심장이 더욱 크게 뛰고,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왜 아무말도 해주지 않을까? 아이신. 설마 내가 싫은 거야···?’
아이신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에르시에느는 점점 더 불안해져갔다.
혹시 티를 내고 있지 않을 뿐이지, 아이신은 이 머나먼 곳까지 자신을 위해 따라온 것이 귀찮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벅차올랐던 마음이 급격하게 차가워지며 심장을 주먹으로 움켜쥔 듯 아파왔다.
그래, 마치 혹독한 겨울 추위에 온 몸이 떨려오는 것처···
“아가씨. 뭔가 이상합니다.”
아이신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에르시에느는 정신을 차렸다.
‘어? 뭐지? 아까까지만 해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는데?’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주변에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히히히히힝!!”
“아, 아젠트!!”
당황한 에르시에느의 백마, 아젠트가 크게 울었으나 아이신이 재빨리 바타르의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바타르가 한 번 짧게 우는 것으로 아젠트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이신과 에르시에느는 아직도 바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가만, 이건 분명 예전에···’
아이신이 뭔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저 멀리서 불길한 울음소리가 아이신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 아우우우우우우--
- 아우우우우우우우우--
아이신은 본능적으로, 변경백의 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피에 굶주린 늑대 무리가, 저 멀리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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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 얼음꽃 숲(2)
아이신은 곧장 에르시에느에게 소리쳤다.
“아가씨! 도망쳐야 합니다!!”
“어, 어디로?? 아니 그보다 이 날씨는 뭐야??”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신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눈을 감았다.
- 아우우우우우우--
- 아우우우우우우우우--
늑대들의 울음소리는 처음엔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또렷하게 울려왔다.
심지어 방향도 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다.
‘제길···눈보라가 거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이신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만 한다.
머리를 차갑게 만든 뒤, 아이신은 바타르의 마체를 양 허벅지로 꽉 조이고 양쪽 귀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신호를 보냈다.
‘바타르는 영리한 말이다.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나만큼이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겠지. 이럴 때는 나보다 바타르의 직감에 맡기는 편이 나아.’
바타르는 푸릉! 푸르릉! 하며 투레질을 하더니, 아이신의 의도를 알아들은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히히히히히힝!!!!”
바타르가 크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높이 쳐들어 두 다리로 일어섰다.
- 쿵!!
바타르가 앞발을 내려찍은 곳은, 원래 서 있던 위치보다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옆이었다.
‘좋아. 이제는 바타르의 직감을 믿는 수밖에 없어.’
늑대들은 한 방향이 아니라 몇 군데에서 이곳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 같았다.
만약 도주 경로를 잘못 정하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빨리 늑대들을 마주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바타르는 아마도 포위망을 좁혀오는 모든 늑대들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을 찾아낸 것이 분명하다.
‘그뿐만이 아닐 거다. 내가 아는 바타르라면, 도주 경로 외에 다른 것도 고려했을 거야. 나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다.’
긴박한 상황이지만, 아이신은 바타르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회귀 전에도, 아이신은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을 바타르의 도움으로 벗어났었다.
아이신과 바타르는 서로가 할 수 없는 것을 서로가 보완해주는, 마치 한 몸과도 같은 관계였던 것이다.
“아가씨! 이쪽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아젠트에게 맡기십시오! 제 뒤에 꼭 붙으셔야 합니다!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놓칠 수도 있습니다!!”
아이신과 에르시에느는 천천히 각자의 말을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거세게 치고 있었지만.
바타르의 발디딤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아젠트 역시 바타르의 꽁무니에 바짝 붙어 바타르의 발자국을 똑같이 밟으며 이동했다.
- 아우우우우--
- 아우우우우우우--
- 아우우우우--
그러나 그럼에도 늑대들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건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이동할 수밖에 없고, 늑대들은 달려서 접근하고 있을 테니까.’
아이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바타르를 재촉하지 않으며 눈보라를 헤치고 나아갈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올 때 쯤, 바타르가 발을 멈추고 투레질을 했다.
“푸륵···! 푸르륵···!!”
아이신은 바타르가 안내한 장소를 둘러보았다.
바로 정면에는 사람 키보다 몇 배는 높은, 굵은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담장을 치듯, 조금 더 작은 나무들이 반원을 만들며 자라 있었다.
‘여기라면···!’
한 눈에, 아이신은 어째서 바타르가 자신들을 이곳으로 인도했는지 이해했다.
이곳에 등을 지게 되면, 나무들이 뒤를 지켜주기 때문에 뒤를 잡힐 걱정이 없어진다.
심지어 양 옆으로도 낮은 나무들이 자라있기 때문에, 위치를 잘 잡으면 늑대들은 절대로 아이신을 협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 아우우우우-!!!
- 아우우우우우우-!!!
이제 정말 코 앞에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아이신은 재빨리 에르시에느에게 외쳤다.
“아가씨! 시간이 없습니다! 저 쪽! 제 뒤로 가십시오!! 그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으, 응!! 알겠어! 아이신을 믿을게!”
에르시에느가 뒤편으로 가자마자, 아이신은 바타르에게서 내렸다.
- 푹!!
그러고는, 변경백의 창을 손에 들고 눈밭에 강하게 꽂았다.
‘올 테면 와 봐라.’
고작 몇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저 멀리서, 늑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르···”
“크르르르르···”
아이신은 창을 땅에서 빼낸 뒤, 창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오른발로 진각을 밟았다.
“와라아아앗!!”
“월!! 월!!”
“월!!!”
아이신의 기합과 동시에, 늑대들이 아이신에게로 달려들었다.
- 푸슉!!
아이신은 곧장 정면을 향해 빠르게 창을 찔렀다.
“캥!!”
아이신이 내지른 창 끝은, 정면에서 달려든 늑대의 눈과 주둥이 사이, 정확히 급소를 파고들었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눈밭에 고꾸라졌다.
‘다음···!!’
동시에 아이신은 창대를 빠르게 회수하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위쪽에서 덮쳐오던 다른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이신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월!! 월!!”
바로 다음 순간.
어느새 아이신의 왼쪽으로 이동한 또 다른 늑대가 달려들어 창대를 물어 뜯으려 했다.
‘회수할 틈이 없다. 그렇다면···!!’
아이신은 창대를 회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왼손으로 창대를 단단히 잡았다.
- 퍽!!!
그대로 힘을 주어 옆으로 후려치자,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늑대가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캥···!!!”
그 충격이 어찌나 강했던지, 늑대는 눈밭을 몇 바퀴 굴러 나무에 부딪힌 뒤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제국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창이라더니 빈말이 아니었군. 창대마저 이렇게 단단하고 견고할 줄이야.’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오른쪽에서 또 다른 늑대들이 달려들기에, 아이신은 창을 고쳐잡고 크게 휘둘렀다.
- 휘이이익!!
마치 살아있는 용이 꼬리를 휘두르듯, 창은 아이신의 몸 주변에 원형의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 촤아아악!!
“캐애애앵!!!”
가장 먼저 달려든 늑대의 앞발이 잘려 나가고, 그 뒤를 따르던 놈은 창대에 옆구리를 강타당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크르르르···”
“크르르르르르···”
달려들던 늑대들이 멈칫했다.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늑대가 눈밭에 쓰러졌기 때문에, 놈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최소한 스무 마리가 넘는 놈들일 것이다.’
아이신은 호흡을 정돈하며 다시 한 번 자세를 가다듬었다.
“월!! 월!!”
“월!!!”
다시 한 번,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치열한 교전이 반복되며, 한 두 마리씩 늑대들의 시체가 눈 밭 이곳저곳에 쌓여갔다.
“···!!”
또 한 놈의 급소를 찌르고 창을 회수한 아이신이,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돌리며 창을 휘둘렀다.
어느새 아이신의 왼쪽, 낮은 나무 위로 올라간 늑대가, 아이신을 맹렬히 물어뜯을 기세로 도약한 것이다.
- 촤아악!!
“캐애앵!!!”
늑대는 거의 아이신에게 도달했으나 마지막 순간 아이신이 휘두른 창에 주둥이가 잘렸다.
그러나 뻗은 늑대의 앞발은 기어코 아이신의 어깨에 닿았다.
- 찌지지직!!
늑대의 앞발이 아이신의 어깨 부분 옷자락을 찢으며 지나갔다.
하마터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지만, 아이신은 용케 위기를 넘겼다.
“이게 끝이냐!! 목숨이 아까운 놈들은 마저 덤벼라!!”
“월!! 월!!”
“월!! 월!!!”
아이신이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것에 반응하여, 아직 살아있는 늑대들이 맹렬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 때, 늑대 한 마리가 아이신의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쪽은···젠장!’
아이신이 지키고 서 있는 통로는 좁았고, 창으로 대부분의 범위를 커버할 수 있지만.
하필 저 늑대는 창의 간격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공간으로 돌아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에르시에느 아가씨가 위험하다···!!’
그런데, 아이신이 놈을 막으려 움직이기도 전에 놈이 무언가에 치여 하늘 높이 붕 떴다.
“히히히히힝!!”
그곳에서는 바타르가 뒤를 돌아 울부짖고 있었다.
바타르는 아이신의 뒤에서 주인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다가, 한 마리의 늑대가 빠져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뒷발차기로 놈을 정확히 차서 날려버린 것이다.
‘바타르···!’
늑대들은 회심의 마지막 공격까지 실패하자 당황한 듯 자리에 멈춰섰다.
바로 그 순간···
- 키이이이익···!!
지금까지의 늑대 울음소리와는 전혀 다른, 날카롭고 기묘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들리자, 아이신을 포위하고 있던 남은 늑대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 타닥 타닥 타닥!!!
놈들은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신은 물러가는 늑대들을 쫓지 않았다.
창을 손에 꽉 쥔 그대로, 소리가 들려온 숲 깊은 곳을 노려보았다.
‘예상대로, 놈들을 통제하는 다른 놈이 있었군.’
어쨌거나 지금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다.
늑대들이 도망가는 것을 끝까지 확인한 아이신은, 그제야 뒤를 돌아 에르시에느에게로 돌아갔다.
“아이신!! 괜찮아??”
“괜찮습니다, 아가씨.”
“꺅!! 어깨에 피!! 아이신!! 어떡해!!”
아이신은 에르시에느가 가리키고 있는 왼쪽 어깨를 바라 보았다.
아까 나무 위에서 도약한 늑대의 앞발이 찢은 곳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혈을 해야하는데 조금만 도와주시겠습니까.”
“으, 응!! 내가 뭘 하면 돼?”
아이신이 손짓하자 바타르가 아이신의 곁으로 재빨리 다가왔다.
아이신은 능숙하게 바타르의 안장 옆 주머니에서 짐승가죽 조각과 말린 사슴 힘줄 끈을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짐승가죽 조각을 상처부위에 강하게 눌러 압박한 후 에르시에느에게 힘줄 끈을 건넸다.
“아가씨. 여기에 매듭을 지어주십시오. 꽉 묶어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나한테 맡겨!”
에르시에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신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에르시에느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아이신의 팔 근육을 느끼고 마른 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몰랐는데 이렇게나 단련된 몸이었구나. 아이신이 이 팔로 나를 으스러질만큼 강하게 껴안아 준다면···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아이신이 다쳤잖아! 빨리 지혈을 해야지. 에르시에느 이 바보! 음란해!!’
에르시에느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얼른 사슴 힘줄 끈을 아이신의 상처부위에 단단히 묶었다.
아이신은 매듭이 제대로 묶였는지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보라가 점점 거세지고 있어. 일단 바타르가 찾아준 장소 덕에 강한 바람은 대부분 막을 수 있긴 하지만···’
암만 동쪽 변방의 추운 날씨를 대비하여 둘 다 따뜻하게 입고 왔다고는 해도.
밖에서 너무 오랜 시간 있었고, 움직이지 못한 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면 위험하다.
아이신은 주저하지 앉고 바타르에게 싣고 온 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이신. 뭐 하는 거야?”
“아무래도 여기서 야영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아가씨를 묵게 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아니야 아니야!! 왜 사과를 해. 나 그렇게 세상물정 모르지 않아.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줘.”
“그렇다면···”
아이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곳은 나무들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기에, 얼마든 필요한 것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작은 나뭇가지를 되도록 많이 모아주십시오. 시급히 불을 피워야 합니다. 저는 그 동안 야영지를 만들고 있겠습니다.”
“알았어! 나뭇가지 말이지? 내게 맡겨!”
에르시에느가 나뭇가지를 모으러 간 사이, 아이신은 능숙하게 가져온 도구를 이용해 산야족의 간이 천막을 빠르게 만들어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져왔는데,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 했어.’
아이신이 천막 내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을 때, 에르시에느가 들어와 품에 든 것을 와르르 쏟았다.
“아이신. 이 정도면 돼?”
“예. 우선은 그 정도면 됩니다. 불을 피우겠습니다.”
아이신은 천막 중앙에 나뭇가지를 쌓은 뒤, 부싯돌을 이용해 곧바로 불을 붙였다.
- 화르르르륵
모닥불이 천막 안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후에야, 아이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급한대로 하룻밤을 지낼 준비는 끝났나.’
아이신은 자기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에르시에느를 바라보았다.
아이신이 건넨 짐승 가죽을 몸에 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에르시에느는 몹시 추운 듯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렸을 테니,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한꺼번에 몰려왔을거야. 어쩐다···’
회귀 전의 경험으로 인해, 아이신은 추운 곳에서 야영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전문가다.
그런 아이신이 볼 때, 에르시에느의 상태는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간이 천막 안에서는 큰 불을 피울 수 없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에르시에느는 계속해서 체온이 낮아져 위험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아이신은 결심을 하고, 에르시에느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무례를 범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으응···? 무슨 말이야 아이신?”
“기분이 나쁘셔도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아가씨의 생존을 위한 일입니다.”
아이신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 팔을 뻗어 에르시에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다음 순간, 아이신은 에르시에느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꼭 밀착시켰다.
‘뭐뭐뭐뭐뭐뭣···!!’
에르시에느는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머리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에르시에느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더니, 이윽고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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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 얼음꽃 숲(3)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는 달아오른 열기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아이신···??’
사실은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도 되지 않았었다.
마침내 눈에 담게 된 얼음꽃 숲의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풍경.
그 속에서 아이신과 함께 말을 달리며 받던 눈부신 햇살.
그렇게 간신히 단 둘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정처없이 아이신을 따라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이곳에 도착했더니.
스무 마리가 넘는 늑대무리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해왔다.
‘멋있었어···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이 생각날 정도로.’
놀랍게도 아이신은 창 한자루만을 휘둘러 그렇게나 많은 늑대무리를 모두 물리쳐버렸다.
그리고 능숙한 재주로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우기까지.
거기까지만 해도 에르시에느가 오늘 하루 느낀 경험이 너무 과해서 머리가 터질 정도였는데.
‘심장 소리··· 이대로면 아이신에게 들킬지도 몰라.’
쿵 쾅 쿵 쾅 하는 심장 소리가 너무나 크게 울려, 에르시에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에르시에느도 벌써 열 다섯 살의 숙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까닭인지는 머릿속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응. 맞아. 그래두···’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아이신의 팔은 아까 만져봤던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단단하다.
에르시에느는 자연스럽게, 조금 전 아이신의 어깨를 지혈해주며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아이신에게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렇게 된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뭔가 조금 아쉽다.
분명 아이신과 몸을 밀착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안겨있다는 자세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통에, 에르시에느는 저도 모르게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하아아···”
곧바로 아이신이 에르시에느의 변화를 눈치채고 물어왔다.
“아가씨.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아이신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에르시에느는 단번에 아이신의 말을 잘랐다.
“아냐 아냐! 으음···그러니까, 아직 추워서 그래!”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아이신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절대로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그런 에르시에느의 마음도 모르고, 아이신은 계속해서 다른 말만 했다.
“죄송합니다. 여기서는 불을 더 크게 피울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아지실 겁니다.”
“그, 그러면 있잖아···”
에르시에느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마도 아이신은 절대로 에르시에느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에르시에느에게 크나큰 무례를 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정신 차려,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 너 그렇게까지 요조숙녀는 아니잖아.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한 발자국을 떼야만 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상황도 그랬다.
비록 알 수 없는 날씨의 변화 때문에 조난 당하긴 했지만.
아이신과 단 둘이 이렇게 몸을 밀착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전적으로 에르시에느 본인의 공이다.
그녀 자신이 아이신과 단 둘이서만 얼음꽃 숲의 경치를 보고 싶어했고.
그렇게 호위 기사들을 따돌린 것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으니까.
에르시에느는 조심스럽게 아이신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너무 추워서 그러는 거니까. 다른 뜻은 없는 거 알지?”
말을 마치자마자 에르시에느는 아이신의 허리를 가느다란 두 팔로 꼭 껴안고, 몸을 돌려 얼굴을 아이신의 가슴팍에 묻었다.
‘따뜻해···’
심장이 아까 전보다 더욱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얼굴은 숫제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이 자세라면 들키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에르시에느를 설레게 만든 것은, 아이신의 심장 박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아이신도 이 상황이 두근거린다는 뜻으로 봐도 될까?’
에르시에느가 아이신을 그렇게 꼭 껴안고 있음에도.
아이신은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에르시에느는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만 가지고도, 앞으로 1년 동안은 밤에 오늘 일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에르시에느가 달아오른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히던 그 때···
- 꼬오옥
에르시에느는 자신의 등 뒤로 부드럽게 둘러지는 아이신의 팔을 느낄 수 있었다.
에르시에느가 원했던 것처럼 으스러질 정도로 꽉 껴안아 주지는 않았지만.
분명 아이신은 에르시에느를 부드럽게 마주 안아 주고 있었다.
“하아아···”
에르시에느는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듯한 포근함에 저도 모르게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요람 속에서 행복하게 잠을 자던 어린 시절처럼, 에르시에느의 어깨가 일정한 주기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벌써 잠들기는···싫은데···’
그것을 끝으로, 에르시에느 폰 로인클로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날이 밝았나.’
아이신은 희미하게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중간중간 얕은 잠에 들기는 했지만, 아이신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꼬박 밤을 새웠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물론 바타르가 알려주었을 테지만···’
최소한 전날 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깊은 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중간중간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야 하기도 했고.
- 쌔근 쌔근
그러다 아이신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세상 모르게 잠에 취해 있는 에르시에느를 내려다 보았다.
‘곤란한 아가씨야, 정말.’
회귀 전, 아이신과 관계를 맺었던 에르시에느는 이미 시들기만을 기다리는 귀족 아가씨였다.
그 성격에서 보통 귀족 여인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 느껴졌지만, 기본적으로 삶을 반쯤 놔버린 듯한 위태로움이 짙게 깔려있었다.
‘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왈가닥 아가씨였다더니. 정말 그 말대로였네.’
그럼에도 어제 에르시에느가 자기 쪽에서 먼저 아이신을 껴안았을 때는, 천하의 아이신도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에르시에느를 부드럽게 마주 안아주자, 곧바로 잠에 취해 손을 풀고 아이신의 무릎으로 머리를 떨궈버렸지만 말이다.
‘우선은 조금 더 주무시게 놔둘까.’
아이신은 조심스럽게 에르시에느의 머리를 받치고, 두툼한 가죽을 밑에 깐 바닥에 에르시에느를 똑바로 눕혀 주었다.
밖으로 나가자, 바타르와 아젠트가 아이신을 반겨 주었다.
“히힝!!”
“히히힝!!”
바타르는 영리하기 때문에, 분명 빽빽한 나무 사이에서 바람을 막아줄 장소를 알아서 찾았을 것이다.
마침 다른 말 한 마리가 더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두 마리가 꼭 붙은 채 밤을 보냈으리라. 간밤의 아이신과 에르시에느처럼.
아이신은 바타르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주변을 살폈다.
‘어제 눈보라가 그렇게 치던 것이 거짓말처럼 맑은 날씨군.’
사실 아이신은 어제 갑자기 일어난 날씨의 변화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거의 짐작하고 있었다.
늑대 무리를 불러모으던, 사방으로 울려퍼지던 날카로운 소리.
‘어떤 마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인간 장군처럼 늑대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마수다. 까다롭겠군.’
솔직히 말해서 이전에 상대했던 붉은 털의 악마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까다롭고 강한 마수가 분명하다.
놈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려니, 에르시에느가 조심스럽게 천막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에르시에느 아가씨.”
“으, 응···”
이미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햇살마저 비추고 있는데도, 어째선지 에르시에느의 얼굴은 여전히 새빨간 그대로였다.
“속히 돌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기사님들이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응. 내가 도와줄 건 없어?”
“괜찮습니다. 조금만 앉아 계십시오.”
아이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간이 천막을 해체하고 짐을 바타르에게 실었다.
준비가 끝났기 때문에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에르시에느 쪽을 바라본 그 순간···
- 꼬르르르륵!!
에르시에느의 배에서,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렸다.
“이, 이건···우으···”
“배가 고프신가 보군요. 그러고 보면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셨으니까요.”
아이신은 배에서 난 소리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황해서 허둥지둥 하고 있는 에르시에느에게 뭔가를 건넸다.
“저희들이 먹는 것이라 입맛에 맞지는 않으시겠지만, 괜찮다면 드십시오. 돌아갈 때까지의 허기는 면하게 해줄 겁니다.”
“이게 뭐야···?”
에르시에느는 자기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동그랗게 뭉쳐진 무언가를 받아들고 아이신에게 물었다.
“곡물의 가루를 사슴의 지방으로 반죽하고, 말린 나무 열매를 섞어 뭉친 것입니다.”
“흐음···아이신은 평소에 이런 걸 먹는 거야?”
“자주 먹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장기간 밖에서 지내야할 때, 그 중에서도 식사를 준비하기 힘든 상황에만 먹습니다.”
에르시에느는 받아든 경단을 살짝 베어 물었다.
‘식감은 좀 이상해.’
처음 느껴보는 꾸덕꾸덕한 질감에 에르시에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조심스럽게 몇 번 더 씹자 입 안 가득 고소하면서도 살짝 비릿한 동물성 지방의 향이 퍼졌다.
기름진 맛 사이사이로 새콤달콤한 말린 나무 열매의 맛이 느껴지고.
씹으면 씹을수록 곡물의 구수한 맛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뭔가 아이신과 더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어.’
자신에게 이것을 건네주며 ‘허기는 면하게 해줄 것’이라던 아이신의 무심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 거칠고 투박한 음식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험난한 동쪽 변방의 삶을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낯설었던 경단의 맛이 왠지 조금은 특별하게, 그리고 조금은 애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신과 에르시에느는 그렇게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무사히 부락으로 귀환했다.
*
“아이고 아가씨이이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나 정말 한숨도 자지 못했단 말입니다!!”
아이신과 에르시에느가 부락 입구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기사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에르시에느는 말에서 내린 후, 미안하다는 듯 기사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해 아저씨들. 내가 너무 제멋대로 행동했지?”
“정말 반성하셔야 합니다!!”
“변경백께서 오늘 일을 아셨다가는 경을 치실 겁니다!!”
“다시는 요새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구요!!”
에르시에느는 머쓱하게 웃으며 기사들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는 말을 먼저 해 주었다.
“그렇지? 이번 일이 알려지면 기사 아저씨들도 곤란한 거지? 그럼 오늘 일은 할아버님한테는 비밀이다?”
“크, 크흠···”
“원래 같으면 변경백께 여기서 있었던 모든 일을 낱낱이 고해야하지만···”
“아가씨께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번 딱 한 번 만입니다?”
“그럼 난 조금 쉴게. 기사 아저씨들도 이제 걱정하지 말고 좀 쉬어.”
아이신은 기사들과 에르시에느가 투닥거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근처에서 보고 있던 족장에게 다가갔다.
“부락의 모든 사람들이 그대의 신변을 걱정했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아이신은 족장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갑자기 변화무쌍하는 날씨에, 누군가의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것만 같은 늑대들의 움직임이라···”
“분명히 마수의 소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짚이는 마수라도 있으십니까?”
제국만큼 마수의 생태가 체계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동쪽 변방의 야만족들은 수백 년 전부터 마수와 함께 공존해왔고, 그에 따른 본인들만의 정보가 있었다.
그러나 족장은 전혀 짚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기 수염만 쓰다듬더니, 한참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 근방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사는 마수는 내가 아는 한 없네. 다만···”
“짚이는 것이 있다면 뭐든 좋습니다.”
“자네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오른 건데, 몇 달 전 죽은 대장장이 말이네. 실은 그 아이도 제 부모와 함께 현장에 있었다네. 어찌된 일인지 혼자서만 도망쳐 왔고, 자초지종을 물어도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말이네. 하필 직후 늑대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느라 아무도 그 아이를 신경써주지 못했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아이신은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과 달리 조금 깨끗해진 내부가 보였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이신을 노려보는 소녀가 보였다.
“이, 이 미친놈이 또 왔잖아? 야! 당장 안 나가?!!”
소녀는 아이신을 향해 또 손에 집히는 것들을 마구 던지려고 했지만, 아이신이 말하는 것이 더 빨랐다.
“네 부모님에 관한 것이다. 잠깐만 내 말을 들어줄 수 없겠나?”
물건을 집어던지려던 소녀가 멈칫하는가 싶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네가 뭔데 우리 부모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지?”
“이건 내 짐작이지만···”
아이신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창촉과 화살촉 중에 몇 개를 골라서 주웠다.
그리고, 소녀에게 내밀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희 부모님은 특수한 방법으로, 철제 농기구를 무기로 개조하고 계시던 것 아니었나?”
대장장이 소녀, 갈렌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리는 것을 아이신은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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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 수정 동굴의 마수(1)
아이신은 회귀 전 수많은 종류의 마수를 상대했다.
가장 흔하게 상대한 것은 이전에 상대했던 붉은 털의 악마처럼 단순히 신체가 강화된 놈들.
이런 놈들은 사실 꼭 벽을 넘은 전사가 없더라도 수백 명이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결국 잡을 수 있다.
오히려 까다로운 놈들은 원래 먹이사슬이 낮은 짐승이 천운을 타고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마수가 되는 경우.
아이신은 늑대들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날씨까지 바꿔버리는 이번 마수도 그런 부류라고 확신했다.
‘이런 놈들은 능력도 까다롭지만, 꽁꽁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산야족이나 평야족처럼 원래 맹수와 마수를 많이 상대해본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어쩌다 이런 위험한 마수가 제국 변방 마을 근처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몇 달 만에 마을 몇 개가 멸망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신은 이런 위험한 마수가 나타났을 때의 행동지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급히 놈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마 단서는 이 대장장이 가족이 쥐고 있을 것 같군.’
대장장이 소녀, 갈렌은 아이신의 말을 듣고 당황한 듯 했으나 곧바로 얼굴빛을 바꾸고는 아이신에게 소리쳤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우리 부모님이 잘못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니. 전혀 그럴 의도는 없다. 오히려 네 부모님이 존경스럽더군.”
아이신은 투박하게 개조된 창촉과 화살촉을 바라보며, 찬찬히 갈렌에게 이야기했다.
“솔직히 아직 제대로 무기로 쓰기에는 조잡한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제국제 철을 임의로 녹이거나 펴서 개조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기 인생을 걸고 연구를 했겠지.”
아이신의 말을 듣자, 갈렌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아이신에게 쏘아붙였다.
“그,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체?”
“너도 들었다시피 나는 함께 오신 아가씨를 위해 부락을 위협하는 늑대 무리를 소탕하는 중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늑대들은 무언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지. 아마도 마수일 것이다. 지금 유일한 단서는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너의 증언 뿐이다. 너만 괜찮다면, 부모님의 원수를 내가 꼭 갚아주도록 하겠다.”
갈렌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딱 멈춰섰다.
이윽고, 그녀의 눈가에 하얀 액체가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어, 어어···? 왜지?’
갈렌은 당황하여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쳐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에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노력을 인정해준 사람은···이 사람이 처음이야.’
기실, 갈렌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에서 괴짜로 취급받고 있었다.
산야족이나 평야족은 원래 모든 부락민들이 협동하여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갈렌의 아버지, 가론은 대장장이 일에만 평생을 바치느라 부락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 이보게 가론. 자네 실력이야 누구나 인정하지만 마을에 대장간 일이 뭐 그렇게 많지는 않잖나. 평소에는 사냥도 좀 돕고 겨울나기 준비도 돕고 살아야지 않겠나?
- 이보슈 족장. 내게 주어진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고 있지 않소. 내 딴에는 다 생각하는 것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 이해를 좀 해 주시우.
가론은 그렇게 말하며 대장간에 의뢰가 없을 때에도 하루 종일 대장간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어린 갈렌은 그런 아버지가 내심 미워서 어머니에게 칭얼거리기도 했었다.
- 엄마! 아빠는 왜 다른 아저씨들처럼 사냥을 나가거나 하지 않는거야? 다른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나랑 놀아주지도 않는단 말이야!
- 갈렌. 아버지는 대장장이시잖니. 사냥을 나가는 것보다 아버지의 일이 부락에는 훨씬 중요하단다.
- 거짓말! 부락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들은 전사들이라고 애들이 그랬어! 옆집에 목수 아저씨도 사냥철이 되면 함께 사냥을 나가잖아!!
- 아버지가 지금 하시는 일은, 나중에 분명히 부락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갈렌, 네가 조금만 더 이해해 주렴.
암만 대장장이나 목수, 무두장이 등의 전문가들이 부락에 꼭 필요한 직종이라고는 하지만.
산야족이나 평야족들은 아무래도 전사들을 우대하고 다른 직업을 하대하는 경향이 은연중에 있었다.
가론은 괴짜라는 시선과, 부락의 일에 적게 참여하는 대가로 남들보다 적은 식량을 분배받았지만 그럼에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나갔다.
갈렌은 조금 더 자란 후에야 아버지가 뭐 때문에 그토록 열중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 아빠. 이건 부서진 농기구잖아요? 이건 고칠 수도 없어서 새로 사와야 한다고 들었는데 왜 대장간으로 가져오셨어요?
- 갈렌. 잘 보거라. 애비는 이걸 가지고, 짐승의 뼈나 돌 같은 것보다 훨씬 견고한 무기를 만들게다.
- 그게 가능해요? 제국은 우리보다 불을 다루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서, 우리 대장간에서는 제국제 철은 녹일 수도 없다면서요. 겨우 근처에서 캐낸 철광석을 녹여도 불순물이 많아서 품질이 안 좋다고···
- 그렇지. 그래서 지금까지는 대장장이가 되어서도 고작 남이 만든 것을 수리하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있다면···
갈렌은 아버지가 보여준, 시퍼런 빛을 내뿜는 망치를 보고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가론이 쓰던, 교역으로 얻은 이가 빠진 낡은 제국제 쇠망치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망치와, 망치와 한 세트를 이루듯 공명하는 모루까지.
- 이건 빙철석이라고 하는 거란다. 얼음꽃 숲의 깊숙한 곳, 수정폭포 뒤에 숨겨진 동굴에서만 얻을 수 있지.
- 빙철석은 제국의 철보다도 훨씬 견고한 강도를 자랑하지만, 불에 닿으면 고유의 성질을 쉽게 잃어버리지. 그래서 빙철석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걸 활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단다.
- 갈렌. 애비는 한 평생 이 빙철석을 연구해왔다. 이 근방에서는 수정 동굴에서만 극소량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걸로 무기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빙철석을 이용해 대장간의 도구를 만든다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 오랜 연구 끝에, 빙철석을 완벽히 제련하는 법을 거의 터득했다. 이것만 있으면 뛰어난 화력이 없어도 제국제 철을 가공해서 무기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게야.
아이러니하게도, 갈렌은 여자의 몸임에도 대장장이로서의 재능을 가론에게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니, 오히려 가론이 갈렌의 재능을 보고 자신보다 낫다며 감탄할 지경이었다.
- 갈렌! 네 재능이라면 어지간한 남자 대장장이들보다도 훨씬 나을 게다. 대장장이는 그저 힘만 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과연 내 딸이구나. 껄껄껄.
베테랑 전사들처럼 사냥과 전투의 개념에서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가론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충분히 벽을 넘은 감각을 가진 대장장이였다.
그리고 갈렌은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대장장이인 아버지의 지도로 금세 성인 대장장이 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던 올 가을.
- 갈렌. 네게 가르칠 것은 모두 가르쳤다. 빙철석을 제련하는 곳에 너도 함께 가자꾸나.
- 한 번 시작하면 며칠은 거기서 묵어야 할 테니,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자꾸나.
가론이 빙철석을 제련하는 과정은 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저온의 냉기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신비로운 힘이 깃든, 빙철석이 채취되는 동굴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했고, 제련의 마지막 단계에 수정 동굴의 알 수 없는 힘이 깃든 차가운 물에 담궈야 하는 등 가론만이 터득한 노하우가 몇 가지나 녹아 있었다.
가론의 가족은 가을 수확이 끝날 무렵 부락을 출발하여, 얼음꽃 숲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 갈렌. 내가 지금껏 터득한 모든 기술을 네게 알려주겠다. 잘 보고 배우도록 해라.
거의 일주일이 넘도록.
가론의 가족은 근처에 야영지를 펼쳐놓고 낮이면 살이 떨릴만큼 추운 수정 동굴에 들어가 빙철석을 제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드디어 가론이 원하던 수준의 완벽한 제련이 끝났을 때였다.
- 해냈다! 이거라면 이제 할 수 있다! 족장과 부락 사람들도 이제는 내 공을 인정해 줄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벽을 넘지 않은 전사들도 더 강한 짐승을 잡을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
- 축하해요, 여보!
동굴이 떠나가라 가론의 가족이 기뻐하고 있던 그 때···
- 키이이이이익!!!
수정 동굴을 진동하듯 날카로운 짐승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다음 순간, 갈렌은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와 아버지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 으, 으으윽!!!
- 여보!!
- 키이이이익!!
그 무언가는 잔영만을 남기며 동굴 안을 빠르게 질주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에는 순식간에 큰 상처들이 생겨 피투성이가 되었다.
- 갈렌!! 너라도 도망가거라!! 어서!!
- 아, 아빠···!!
- 이···짐승 놈이!!
퍼어억!!!
가론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빙철석 망치가, 무언가를 타격하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던 그것이 잠깐 움직임을 멈춘 사이, 갈렌의 어머니가 갈렌의 몸을 거칠게 동굴 밖으로 밀었다.
- 어서, 어서 도망쳐야 해, 갈렌!
- 어떻게 나 혼자만···
- 엄마랑 아빠는 다리를 크게 다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 갈렌, 너만은 살아야 해.
- 그래···가서 족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무나.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빙철석과 빙철석 망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갈렌 너밖에 없다. 어서! 어서 도망가거라, 갈렌!!
갈렌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해온 일이다.
만약 자신마저 여기서 함께 죽어버린다면, 아버지가 지금껏 세상에 살아온 의미가 모조리 사라지는 것이다.
- 타다다다다닥!!
갈렌은 그렇게 수정 동굴에서 도망쳐왔고, 그것이 부모님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갈렌이 가까스로 부락으로 도망쳐오고 며칠 후부터, 늑대 무리들이 영악하게 부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갈렌은 최대한 간략하게, 대강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했다.
“부모님을 죽인 놈의 정체는 솔직히 알 수 없었어. 그래도, 그곳의 위치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몰라.”
“그거면 충분하다. 안내를 부탁하지. 내가 꼭 너희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주겠다.”
“······”
갈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다음 날, 날이 밝기도 전에.
아이신은 바타르에 갈렌을 함께 태우고 부락을 출발했다.
“저기, 이렇게 일찍 출발할 필요가 있는 거야?”
“오히려 지금 시간이 아니면 안 된다.”
“너희들은 제국의 기사들과 함께 왔었잖아? 왜 그들은 데려가지 않아? 너 혼자서 그 놈을 어떻게 잡겠다고.”
“그것도 마찬가지다. 기사들을 데려간다면, 모든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있다.”
아이신은 일전에 다녀왔던 얼음꽃 숲의 거리를 고려하여, 적당한 속도로 바타르를 몰았다.
그들이 얼음꽃 숲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 슬슬 걷히고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할 때였다.
아이신은 갈렌의 안내를 따라, 얼음꽃 숲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 수정 폭포와 수정 동굴이라는 곳은 어디지?”
“수정 폭포는 저곳이야. 한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 얼음꽃 숲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공간이지. 하지만 뒤에 숨겨진 수정 동굴은 우리 가족 말고는 아마 아무도 몰라.”
“그냥 폭포 뒤로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전혀. 폭포 뒤로 가는 입구가 따로 있어. 나도 처음 갔을 때는 이런 길을 어떻게 발견했나 싶었다니까.”
갈렌의 말처럼, 수정 동굴로 가는 길은 빽빽한 나무 숲을 지나 은밀히 숨겨져 있었다.
드디어 폭포 뒤에 도착한 아이신은, 저 멀리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커다란 동굴 입구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분명 저곳이다. 숨길 수도 없는 마수의 기척이 느껴지는군.’
아이신은 동굴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스산한 기운이 온 몸에 경고를 하는 듯했으나, 아이신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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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 수정 동굴의 마수(2)
‘이 기척···다행이다. 마수는 도망가지 않은 모양이야.’
아이신이 영악한 마수를 잡으러 오면서 기사들을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심지어 새벽같이 출발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런 마수는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자기 영역 근방을 훤히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어. 기사들을 데려갔다면, 놈이 도망갈 위험이 있었으니까.’
마수학 개론에 따르면, 먹이사슬이 낮은 짐승이 마수가 된 경우 해당 개체의 단일 전투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지는 않다.
아마 이 동굴에 숨어 있는 마수의 경우도, 단순한 전투력은 일전에 사냥한 붉은 털의 악마보다는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지능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을 것이다.
자신이 숨어 있는 은밀한 장소를 들킨다면, 그리고 그곳에 제국의 기사가 다섯이나 침입하는 것을 알아챈다면.
영악한 마수는 주저없이 굴을 버리고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달아날 것이다. 아이신은 비슷한 유형의 마수를 상대해봤고,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놈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에르시에느 아가씨와 함께 겪은 것을 생각하면, 놈은 야행성 마수가 분명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앞을 분간하기도 힘든 눈보라가 친 까닭도 저 마수의 능력일 것이다.
저런 마수들 중에는 좁은 자기 영역에 한해서 기상 이변을 일으키는 마수도 드물지 않으니까.
다만, 마수의 그런 능력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아이신과 에르시에느가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었을 때, 눈보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개어 있었다.
그 말은, 마수가 능력을 사용하는 시간이 저녁부터 새벽까지라는 말과 같다.
그 때문에 아이신은 일부러 새벽에 부락을 출발하여, 마수의 활동시간이 끝난 이른 아침에 얼음꽃 숲에 도착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아이에게서 이 수정 동굴의 위치를 듣지 못했다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
암만 회귀 전의 경험으로 제국의 그 누구보다 마수의 생태를 깊이 파악하고 있는 아이신이지만.
결국 마수가 꽁꽁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를 찾아내는 것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아이신은 온 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수정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이 기척···틀림없이 이 안에 있다.’
수정 동굴 안은 예상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바깥의 눈부신 얼음꽃 숲과는 달리,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벽면의 결정들과 얼음 기둥만이 간헐적으로 시야를 밝혔다.
‘조금 더 안쪽인가.’
아이신은 창을 고쳐 잡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감에 따라, 신비로운 수정 동굴의 모습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처럼 날카로운 종유석.
바닥에서 기묘한 형태로 솟아있는 석순.
그리고 천장의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거대한 석주를 이루는 것이 마치 신이 빚어놓은 예술작품처럼 그 자태를 뽐냈다.
‘어디냐. 모습을 드러내라.’
아이신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키이이이익!!”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이신을 향해 쏘아졌다.
‘칫···!’
아이신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키이익!!!”
이미 형체는 사라진 뒤였다.
대신, 날카로운 발톱이 아이신이 방금 서 있던 자리의 얼음 바닥을 깊게 할퀴었다.
- 찌지직!!
“큭···!!”
다시 오른쪽.
이번엔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종유석 끝에서 하얀 꼬리가 휙 하고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아이신의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 챙!!
아이신은 재빨리 창을 들어 이번에는 놈을 막아냈지만, 놈의 민첩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키이이이익!!”
벽을 넘어 월등히 뛰어난 아이신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내 방어를 그대로 이용했다고??’
놈은 놀랍게도, 아이신이 휘두른 창대를 발판 삼아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아이신은 놈이 반대편 종유석으로 연기처럼 스며드는 것을 똑똑히 포착했다.
‘그렇군. 구조물과 동화되는 능력인가.’
확실히 이거라면 먹이사슬이 낮았던 마수가 가지기에 알맞은 능력이다.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아마도 종유석과 석순에 한정하여 자신의 몸을 동화시키는 능력.
갈렌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의 부모도 어디서 공격해오는지 종잡을 수도 없는 마수의 공격에 순식간에 당했다고 했다.
‘단순히 구조물과 동화되는 것에 그치지 않아. 놈은 구조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동시에 공격을 하는군.’
평범한 전사라면 이 상황에 당황했을 테지만, 아이신에게는 회귀 전 수많은 마수를 잡아온 경험이 있었다.
아이신은 망설이지 않고 창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유려한 동작으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슉! 슉! 슉! 슉!
아이신이 휘두르는 창의 궤적에 따라, 바닥과 천장의 석순과 종유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차차차차차차창!!!
얼핏 단단해보이는 구조물들이지만, 종유석이나 석순의 강도는 그렇게까지 단단하지 않다.
제국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변경백의 창날 앞에서, 삐죽삐죽죽 솟아있던 종유석들이 종잇장처럼 찢겨 깨져버렸다.
“키이이이익!!”
아이신은 분명히 당황한 듯한 마수의 울음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두를 필요 없다.’
놈의 공격은 어차피 구조물 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하며 발톱과 이빨로 공격하는 것.
아이신이 휘두르고 있는 창의 궤적은 기본적으로 그런 식의 공격을 전 방위에서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 더해, 창날이 스치는 부분을 절묘하게 구조물에 닿게 만든다.
마수는 아이신에게 접근하지도 못할 뿐더러, 아이신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서서히 숨을 곳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 우지끈!! 콰자자작!!!
아이신은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장에서 종유석들이 부러져 떨어지고, 바닥의 석순들이 박살 났으며, 벽면의 유석들이 파편처럼 튀었다.
‘이 쯤이면···’
아이신은 부서지는 종유석과 석순들을 연신 이동하는 마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도망칠 곳이 한정된다면, 놈의 움직임을 특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이신은 놈이 다른 종유석으로 이동하려는 그 순간, 놈의 이동경로에 정확히 창을 휘둘렀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익!!!”
마침내 아이신의 일격이 제대로 먹혔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놈의 모습을, 아이신은 찬찬히 눈에 담았다.
‘백색 털을 가진 여우로군. 눈여우인가.’
아이신은 기다렸다는 듯 파괴를 멈추고 자세를 낮춰 눈여우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동굴 안은 부서진 돌과 얼음 조각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눈여우가 숨을 곳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이제 네놈의 재주는 끝이다.”
“키이이이익!!”
눈여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눈에 보이는 커다란 석주로 도약했다.
그러나 아이신은 이미 놈이 그 곳으로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 휘이이익!!
아이신은 석주를 향해 변경백의 창을 강하게 투척했다.
- 콰과과과광!!!!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아이신의 창이 석주를 박살냄과 동시에, 동굴 안에 날카로운 마수의 단말마가 귀를 찢을 듯 울려왔다.
‘끝인가.’
아이신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창에 꿰뚫린 채 피를 토하며 죽어 있는 눈여우의 모습을 확인했다.
동시에, 붉은 털의 악마를 끝장냈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힘이 몸에 깃드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벌써 회귀 전 가장 강할 때의 힘에 근접했어.’
일반적인 맹수가 아니라 마수를 잡았을 때만, 그것도 마수의 숨통을 직접 끊었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힘.
아마 이 정도면 곧 용맹한 아이막이라 불리는 아버지의 힘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아이신은 잠시 숨을 돌리고, 동굴 바깥으로 나왔다.
“어, 어떻게 됐어? 우리 부모님은??”
“진정해라. 우선 마수는 잡았다.”
“잡았다고??”
아이신이 마수 눈여우의 시체를 들어올리자, 갈렌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 놈이 엄마와 아빠를···”
“놈의 습격에서 두 달이 넘게 흘렀으니, 살아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체라도 찾아야할 테니 들어가자. 도와주도록 하마.”
“···좋아.”
아이신과 갈렌은 수정동굴의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들어갔을까?
벽이 막혀 있는, 수정으로 벽면이 환하게 빛나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빠와···엄마야. 분명해.”
갈렌이 허겁지겁 달려가, 평야족의 옷과 함께 널부러져 있는 뼈다귀와 해골들을 품에 껴안았다.
아이신은 주저앉아 부모님의 유골을 끌어안고 들썩이는 갈렌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갈렌은 마음을 정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자. 엄마와 아빠를 묻어줄래.”
“부락 근처에 묻어줄 생각인가?”
“아니. 이 동굴 근처에 묻을 거야. 아빠가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시던 동굴이었으니까.”
“유품은 찾았나?”
갈렌은 대답 대신 손에 든 것을 들어올려 보였다.
마치 냉기를 머금은 것처럼 은은하게 푸른 빛을 발하는, 투박한 망치였다.
아이신은 대번에, 저 망치가 바로 철제 농기구를 개조하는 데 쓰인 범상치 않은 망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장이의 망치에서 저런 기운을 느낄 줄이야.’
간혹 벽을 넘은 뛰어난 전사가 애착을 가지고 다루던 무기 중에는 특별한 힘이 깃든 무기가 있다.
산야족이나 평야족의 무기는 그 질이 조악하기 때문에 거의 없는 일이지만.
예를 들어 당장 아이신이 쓰고 있는 변경백의 창 역시 벽을 넘은 자들만 느낄 수 있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깃들어있다.
그런데 저 망치에는, 변경백의 창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순한 기운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아이신이 한 눈에 저 망치가 회귀 전 그토록 찾아다니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때문이고.
“여기, 여기다가 묻어드릴래.”
“도와주도록 하지.”
갈렌은 아이신과 함께 땅을 파고 유골을 묻으며, 어제 말해주지 않은 모든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작은 봉분을 만드는 것으로 모든 작업이 끝나고, 잠시 서서 무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갈렌이 말했다.
“마수를 잡았으니까, 이제 늑대들이 부락을 습격할 일은 없는 거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럼 너는 이제 돌아가는 거냐?”
“돌아가야지. 이제 이 곳에 볼 일은 없으니.”
“그럼 혹시···나도 같이 너희 부족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까?”
아이신은 살짝 놀란 눈으로 갈렌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갈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가능하면 갈렌을 아예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부락의 구성원을 함부로 빼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 망치를 이번 일의 대가로 받거나, 하다못해 저 망치의 제작 방법을 배워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갈렌 쪽에서 먼저 아이신을 따라 산야족의 부락에 합류하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나고 자란 부족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우리 부족에서는 아무도 나를 대장장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아. 사실 이상하잖아. 여자가 대장장이라니. 족장님은 어차피 새 대장장이를 구하실 거라고 말하시고. 마을 아줌마들은 얼른 나를 마을의 혼기가 찬 전사와 맺어주려는 생각뿐이야. 계속 마을에 남아있다면 결국 그렇게 되겠지. 그럼 아빠의 뒤를 이어서, 이 망치로 아빠처럼 부족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만드는 꿈은 이룰 수가 없어.”
“그래서, 떠나겠다는 건가.”
“그러니까 조건이 있어. 너희 부족에서는, 여자인 나라도 대장장이로 써 줄 수 있어?”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여자 대장장이라니, 사실은 아이신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무엇보다 산야족이나 평야족은 노동력을 위해 여자들을 어떻게든 혼인시켜서 부족의 전사가 될 아이들을 낳도록 강요하는 문화가 엄연히 존재하고.
“좋다. 다만, 네가 따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있다 해도 그것만 만들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 부족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 될 것이다. 괜찮은가?”
“물론이야. 그럼 이제 한 부족 사람이네. 잘 부탁해.”
아이신은 온통 굳은살과 상처 투성이인 갈렌의 손을 맞잡고, 짧게 악수를 나눴다.
어느새, 동굴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주는 듯한 포근한 함박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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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 2년 후
평야족 부락으로 돌아온 아이신은 잡은 눈여우 마수의 시체를 족장에게 내밀었다.
“이 놈이 그 마수라고?”
“그렇습니다.”
“자네처럼 어린 전사가 혼자 힘으로 마수를 잡다니···”
“보시다시피 작고 교활한 마수입니다. 마수 자체의 힘이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그렇게 보이는군.”
“놈이 늑대들을 조종하고 있었으니, 이제 늑대에 의한 피해는 없을 겁니다.”
붉은 털의 악마와 달리, 눈여우 마수는 딱히 마수 자체의 부산물은 가치가 없다.
‘기껏해야 작은 여우 가죽인데, 특출나게 윤기가 나는 것도 아니고 뼈가 단단한 것도 아니니까.’
이미 놈의 힘은 아이신이 모두 흡수했으니, 기껏해야 그냥 여우 가죽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수 시체의 소유권이야 누구에게 가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에르시에느는 혼자 마수를 사냥하고 온 아이신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위험하잖아. 기사 아저씨들을 데려갔어야지!”
“보셨다시피 전혀 강한 마수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그보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늑대들을 잡느라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요했습니다. 변경백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아이신을 따라 가겠다는 갈렌의 의견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저 젊은 전사를 따라가고 싶다고?”
“네. 제 부모님의 원수를 대신 갚아줬으니까, 은혜를 갚고 싶어요.”
“뭐···그럼 그렇게 하거라.”
사실은 부족의 구성원을 함부로 다른 부족에게 넘겨주기 싫지만, 변경백의 총애를 받는 것 같은 산야족 전사가 심지어 부락의 골칫거리까지 해결해줬는데 그를 따라간다는걸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야족 마을을 떠나면서, 에르시에느는 아쉽다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아이신과 함께 밤을 보낸 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아.’
멀어져가는 평야족 마을을 바라보며, 에르시에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
변경백은 무사히 돌아온 에르시에느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공주님! 여행은 즐거웠느냐? 위험한 일은 없었고?”
“아이 참, 할아버지두. 기사 아저씨들이 다섯이나 따라갔는데 무슨 일이 생길 수가 있어요?”
“껄껄껄. 그건 그렇구나. 나중에 할애비에게도 얼음꽃 숲의 절경에 다해 말해다오. 우리 손녀의 입으로 듣고 싶구나.”
호탕하게 웃고는 있지만 얼굴이 풀어진 것이 영락없는 손녀 바보다.
에르시에느를 호위했던 기사 다섯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에르시에느 아가씨가 아무 말 하지 않으시겠다 약속하시긴 했지만···’
‘아가씨를 하룻밤 동안 놓쳤던 것은 죽을 때까지 우리만의 비밀인거 다들 알지?’
‘암!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구!’
암만 변경백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했으나, 에르시에느의 말 한 마디면 다섯 모두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기사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자고 합의했다.
변경백은 에르시에느를 돌려보낸 뒤, 기사들과 아이신에게 돌아섰다.
손녀 바보였던 헤실거리는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곧바로 그는 냉혹한 변경의 왕으로 돌아왔다.
“예정 날짜보다 며칠 늦었군. 호위 과정에서 뭔가 변수가 생긴 것 아니더냐?”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기사들의 전신을 꿰뚫어보듯이 안광을 번뜩였다.
기사들은 그 눈빛에 호랑이 앞에 선 강아지처럼 몸을 떨었으나, 곧바로 약속한 대로 말을 맞췄다.
“그 건으로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얼음꽃 숲으로 가는 길을 웬 마수가 막고 있었습니다.”
“아가씨의 요망을 이뤄드림과 동시에 야만인들에게 백작님의 자비로움을 널리 알릴 기회라 판단, 마수 토벌을 진행하였습니다.”
“전리품인 눈여우 마수의 시체입니다. 나중에 학자들에게 던져주면 희귀한 마수의 표본이 생겼다고 좋아할 듯합니다.”
“마수를 잡는 데에는 여기 산야족 젊은 전사의 공이 매우 컸습니다.”
옛 말에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격언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거짓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진실을 말하면서 그 속에 약간의 거짓을 숨기라는 것이다.
마수의 시체까지 들이밀며 예정일보다 늦은 이유를 얼추 진실에 가깝게 설명했으니, 에르시에느를 놓쳤다는 거짓말은 그 속에 감쪽같이 숨겨졌다.
“호오···아이신이?”
그리고 변경백은 다행히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관심을 아이신에게로 돌렸다.
기사들은 그걸 재빠르게 캐치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이신을 칭찬했다.
“평야족 놈들과의 통역과 교섭도 이 어린 전사가 톡톡히 제 몫을 해 주었습니다!”
“뛰어난 전사라 들었는데 마수를 잡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전사를 진작부터 알아보신 백작님의 안목에 다시금 감탄할 따름입니다!”
“역시 백작님의 깊은 뜻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화제가 아이신에게 넘어가면 에르시에느에 관한 것은 완전히 숨길 수 있다.
기사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이신의 능력과 변경백의 안목을 연신 찬양했다.
듣기 좋은 말을 실컷 들은 변경백은 흡족하게 웃으며 아이신에게 선심쓰듯 물었다.
“좋다. 내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줬으니, 응당 보상을 내리는 것이 옳겠지. 갖고 싶은 것이 있느냐?”
아이신은 변경백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했다.
‘기껏해야 호위와 통역 임무였으니 뭘 준다고 한들 큰 것을 받을 수는 없을 거다. 여기서는···’
아이신은 그러면서 아이엘란이 밖에서 맡고 있는 변경백의 창을 떠올렸다.
확실히 변경백에게 이 창을 받은 후, 투구르 부족을 상대할 때나 사냥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변경백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번 임무로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이런 무기 하나 정도야.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이신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 말과 제가 입을 수 있는 갑옷을 한 벌씩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갑옷을?”
“예. 저희가 입는 짐승 가죽 옷은 질기긴 하지만 견고하지는 않습니다. 사냥을 할 때 조금 더 도움이 될까 하여···”
“크게 어렵지 않은 부탁이구나. 수도의 기사들이 입는 움직이기 편한 갑옷을 사람과 말 각각 한 벌씩 준비해 주도록 하마.”
“변경백의 은혜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수도의 기사들이 입는 갑옷이라면 아이신도 잘 알고 있다.
철조각들을 엮어서 만든 갑옷인데, 가볍고 움직임이 편한데다 특히 화살 공격을 방어하기에 알맞은 갑옷이다.
‘결국 갑옷이라는 것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모양새가 정해지는 것이니까 말이야.’
제국 기병들의 갑옷이 이런 형태가 된 것은, 결국 제국이 상대해야 했던 적들이 북방의 유목민들이나 동쪽 변방의 야만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세한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면 북방 유목민이든 동쪽 변방 야만족이든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활을 쏘는 경기병들.
이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화살을 방어할 수 있으면서도 너무 무겁지는 않은 갑옷이 필요하다.
예전에 수도의 대장장이들이 전신을 두꺼운 철로 덮어버리는 전신 판금 갑옷을 개발한 적도 있었는데, 기사들이 그걸 두고 한마디씩 했던 적이 있다.
- 저런 무거운 갑옷을 입고 퍽이나 말을 타고 치고 빠지면서 활을 쏘는 야만인들을 잡겠구만.
- 말이 무거워서 제대로 달리겠나. 금방 지치기도 할 테고.
- 야만족들을 상대할 때는 놈들이 활을 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쫓아가면서 근접으로 조지는 수밖에 없다니까.
- 저런 거 입고 놈들을 쫓다가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지쳐서 내가 먼저 탈진하겠구만. 여름 같으면 땀으로 온 몸을 적실 판이야.
경기병들을 상대하기에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그 갑옷은 결국 세상에 나오자마자 퇴출되었다.
어쨌든 아이신이 갑옷을 변경백에게 요청한 것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짐승이 아니라 인간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산야족이나 평야족이다. 소수 교전이라면 갑옷 한 벌로도 엄청나게 큰 효과를 볼 테지.’
정주제국인 솔라리온 제국은 당연하게도 마상궁술이 자유자재로 가능한 수준의 경기병을 양성하기 힘들다.
심지어 그들은 주로 약탈을 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북방과 동쪽 야만들의 치고 빠지기 전법을 상대해야만 했다.
제국의 기사들이 경기병을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전법은, 적당한 수준의 방어구를 갖춘 기병이 근접으로 따라붙어 공격하는 것.
그리고 아이신은 변경백 밑에서 야만인들을 상대하느라 이런 전략에는 그야말로 도가 튼 전사다.
변경백은 흔쾌히 아이신에게 말과 사람이 입을 질 좋은 갑옷을 한 벌씩 내주었고, 아이신은 변경백에게 예를 표한 후 요새를 나왔다.
이제, 다시 부락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아이신은 어느새 열 일곱의 장성한 전사가 되었고, 동생인 아이덴도 열 네 살로 제법 젊은 전사 티가 나기 시작했다.
“아이엘란! 올해 사냥에는 너랑 나도 같이 가는 거다?”
“아, 아이나! 그렇게 잡아당기지 마요!”
아이신의 친여동생 아이나와 엘프 소년 아이엘란의 성장도 눈부실 정도였다.
남동생 아이덴도 열 세 살이 되던 작년부터 사냥에 참여해 미숙하지만 경험을 쌓고 있었고.
아이나와 아이엘란 역시 올해부터 사냥에 참가하기로 아이막과 다른 전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셋 모두 아직 몸이 모두 성장하지 않았을 뿐, 아이신의 집중적인 지도로 인해 기승 실력이나 활쏘기 실력 등은 이미 젊은 성인 전사들 못지 않았다.
“형. 형 활이 좀 휜 것 같은데?”
“그러네. 우리 동생 눈치가 빨라졌구나.”
“대장간 일을 돕다보니 그렇게 됐나. 여튼 활 줘 봐. 내가 대장간 가서 갈렌에게 부탁하고 올게.”
“녀석. 요새 대장간 출입이 이상하게 잦은 것 같다? 대장간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니?”
“아, 아냐 그런 거! 다녀올게!!”
아이신은 얼굴이 빨개지며 활을 들고 대장간으로 달려가는 아이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 딴에는 숨기려는 모양이지만, 아이신이나 아이막에게는 아이덴이 갈렌에게 반했다는 것이 훤히 다 보였다.
“아이신. 올해는 대규모 수렵의 본대를 네가 지휘해 보도록 해라. 네 기량이라면 문제 없을 것 같구나.”
“그래도 될까요, 아버지?”
“물론. 요즘은 가을부터 겨울에 하는 대규모 수렵을 주변 부락들과 늘 함께 하지 않느냐. 크게 둘로 나눠서 사냥터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약 2년 동안, 동쪽 변방에는 이렇다 할 기근이나 내전같은 것이 없는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신은 이 평화가 최대한 오래 이어지길, 동생들이 무사히 벽을 넘은 전사가 될 수 있기를 빌었다.
그러나, 아이신은 알고 있었다.
2년 동안의 평화는 살얼음 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평화였을 뿐이라고.
누군가 작은 균열이라도 낸다면, 빙판은 조각조각 균열이 가 이윽고 모두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
동쪽 변방 중앙에서 약간 남쪽.
산야족 구역에서는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커다란 분지가 산을 끼고 펼쳐져 있었다.
수백 개의 산야족 부락이 난립하는 동쪽 변방에서도, 가장 기름지고 입지가 좋은 땅이다.
그 범상치 않은 부락에, 중년의 전사 하나가 방문했다.
남자의 이름은 자디란.
작은 산야족 부락 하나의 족장을 맡고 있는 강인한 전사다.
‘정말 굉장한 규모의 부락이다. 과연 대족장 야르삭의 위상에 가장 가까운 사내의 부락이군.’
그는 안내를 받아 특히 호화로운 집으로 들어갔다.
변경백만큼은 아니지만, 위압감이 넘치는 인상의 장년 전사 하나가 주변에 전사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자디란은 그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강자에 대한 예의가 담아졌다.
“대족장, 벨루지아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앙의 균형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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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 대족장 벨루지아
대족장 벨루지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산야족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대전사다.
산야족 구역 북쪽에 벨루지아의 산하 부락은 수도 없이 많고, 이들이 수십 년 간 변하지 않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척박한 산야족의 땅에서 몇 안 되는, 기름지고 넓은 분지에 그가 몸소 다스리는 부락이 있다.
대족장이 직접 다스리는 부락에 사는 가구만 해도 이백 가구에 달하고.
혈연으로 이어진 ‘직계 부락’들만 합쳐도 수백 가구에 전사가 천 명이 넘는다.
심지어 여타 산야족 부락과 달리, 벨루지아의 부락에는 고된 노동에만 종사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벨루지아 부족의 노예들.
대족장 벨루지아는 산야족 북쪽 구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보며 세를 불렸다.
그 과정에서 벨루지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항전을 결심한 부족들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전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벨루지아 부족의 노예가 되었다.
이렇게 노예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벨루지아는 아예 노예들끼리 짝을 맺게 하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처음부터 노예로 키우기도 했다.
‘농사와 채집은 노예들이 담당하고, 전사들은 봄부터 겨울까지 사냥에 나서니 이들을 당할 재간이 있겠는가.’
작은 산야족 부락의 족장 자디란은, 대족장 벨루지아의 옆에 서 있는 강인한 전사들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암만 작은 부락의 족장일지라도, 그는 한 부족의 족장.
이 대족장의 심기를 거슬러서도 안 되지만, 너무 비굴하게 나서는 것은 전사로서 용납되지 않는다.
“이렇게 초대해주심에 감사를 표합니다.”
“그래그래.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말게. 같은 숲 사람들이 아닌가.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누며 이 만남을 축하하도록 하세.”
대족장 벨루지아는 고분고분한 자디란의 태도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반겼다.
그의 몸에서는 대족장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넘쳤지만, 태도는 호방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벨루지아 부족의 전사들은 이 대족장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평소에는 그 호방하고 수더분한 태도로 산하 부락의 족장들을 대하지만.
어쩌다 그의 의지에 반하는 산하 부락이 나올 때면 그는 무자비하게 응징을 가하고 놈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대족장 벨루지아는, 자디란을 맞아 모처럼 사냥해온 커다란 멧돼지를 통으로 구워 대접했다.
“어서 들게. 엘프 왕국에서 구해온 귀한 술도 있으니 사양말고.”
“이 귀한 것을 나눠주시다니···”
“그래봤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모두 같은 음식에 술일 뿐이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정성을 다해야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연회에 참여한 자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신 후에야, 벨루지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디란에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 어떻던가. 내 사위는 말이야.”
“······이명답게 매우 용맹한 전사입니다. 그 이명에 걸맞는 용맹과 함께 많은 자들을 따르게 만들 인망도 갖추고 있는 훌륭한 전사이지요.”
“그래? 껄껄. 내가 사위를 참 잘 뒀구만. 옳지. 이리 오너라. 고놈 꼬리를 흔드는 것이 퍽이나 귀엽기도 하구나.”
벨루지아는 말을 하다 말고 천막 안에서 돌아다니던 새끼 늑대 한 마리를 손에 들었다.
자디란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짐승을, 그것도 웬 늑대 새끼를 안고 어루만지는 벨루지아를 보고 당황했다.
‘사냥한 늑대의 새끼를 데려와 키우는 건가? 그보다 전사들의 분위기가 왜 이러지?’
조금 전까지는 서로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던 연회장의 전사들은, 벨루지아가 새끼 늑대를 손에 들자마자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모든 행동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서, 벨루지아는 새끼 늑대를 품에 안고 천천히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이 놈은 말이야. 며칠 전 사냥에서 참으로 용맹하게 저항하던 늑대의 새끼라네. 용맹한 늑대의 새끼라면 응당 이 놈도 용맹한 늑대로 자라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겠지요.”
“나는 용맹한 것을 좋아하지. 그것이 늑대든 사람이든. 이 새끼 늑대가 마음에 들었기에, 나는 직접 먹이도 먹여주고 따뜻하게 지낼 보금자리도 마련해주며 소중히 돌봤네.”
자디란은 당최 벨루지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벨루지아는 자디란의 의아한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용맹한 늑대이지만, 내가 그렇게 며칠 대해주니 놈은 점차 고분고분한 개새끼처럼 되어갔다네. 그것까지는 괜찮네. 본디 개라는 동물은,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늑대가 새끼를 치다보니 나온 놈들 아닌가.”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고분고분한 개새끼처럼 굴더라도, 놈에게는 여전히 용맹한 어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네. 좋은 일이지. 문제는 말이야. 이 놈이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에게도 개새끼처럼 굴고 있다는 말이네.”
“예? 그게 무슨···?”
벨루지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새끼 늑대는 여전히 벨루지아의 품에 안겨, 기분 좋은 듯 가르릉거리고 있었다.
벨루지아는 놈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 퍼억!!!
“깨갱!!!”
벨루지아가 그 강건한 팔로, 새끼 늑대를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패대기쳤다.
새끼 늑대는 짧은 비명만을 흘리고는 바닥에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다.
“뭐, 뭣···?!!”
자디란은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저게 대체 무슨 짓인가?
기껏 새끼 늑대들을 잡아다가 소중하게 키웠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놈을 패대기쳐 죽여버리느냐는 말이다.
‘다, 다른 전사들은···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군.’
자디란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흘렀다.
벨루지아가 앉아있는 자디란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띄고, 그러나 목소리는 전혀 웃지 않는 듯한 소름돋는 태도로 벨루지아가 말했다.
“개새끼가 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섬겨야할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짐승은 죽여 마땅하지 않나? 내가 베푼 은혜는 뭐가 되느냐는 말일세.”
“그, 그 말씀은···”
자디란은 그제야 벨루지아의 행동과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챘다.
벨루지아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등을 깊게 파묻고는 거만한 자세로 자디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더 이상 장난스럽지 않은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내 부하를 통해 몇 번이나 이야기를 들었지. 한 번 솔직하게 말해보도록 하게. 섬길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새끼를, 자네는 어찌 하고 싶은가.”
*
대족장 벨루지아는 연회를 파한 후 호화로운 대족장의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님. 돌아오셨습니까.”
“꿀을 탄 물을 준비할까요?”
“됐다. 술이나 더 가져오도록 하고 모두 나가 보아라.”
벨루지아가 돌아오자마자 노예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어왔지만, 벨루지아는 노예들을 모두 내보냈다.
잠시 후.
노예들이 간단한 말린 과일이 올라간 술상을 들여왔다.
그는 손으로 무심하게 말린 과일을 집어 먹더니, 희뿌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엘프 놈들의 술이 향기롭고 금세 취하기는 하지만, 이 놈을 마시지 않으면 술을 마셨다는 기분이 들지 않지.”
그가 노예들에게 준비시킨 술은, 가장 가난한 산야족 전사들이나 먹는 거친 곡물을 발효하여 만든 술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산야족 북쪽 구역의 강자 중 하나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정도 전부터.
중년의 나이까지, 그는 술이라고는 거친 산야족의 술밖에 마시지 못했다.
그러니, 암만 향기롭고 귀한 엘프 술이나 제국의 미주를 마셔도 술을 마셨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다.
“변경백···당신은 무서운 사람이지. 언제나 우리 숲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았어.”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킨 후, 벨루지아가 중얼거렸다.
짐작대로 그는 최근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상태였다.
“피땀흘려 이뤄놓은 나의 왕국도, 당신의 심기에 거슬린다면 얼마든지 무너져 내리겠지.”
변경백은 그 누구보다 동쪽 변방의 분란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거스르지 않는 산야족과 평야족들 키워주어 그들이 성장할 동력을 만들었다.
벨루지아 역시, 본격적인 변경백의 치세 초기부터 눈치 빠르게 변경백이 만든 질서에 순응했다.
그 결과, 그는 현재 산야족 가운데서는 범접할 수 없을만큼 강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여기까지가, 당신이 그어놓은 선이라는 뜻이오?”
산야족 북쪽 구역을 완전히 정리하기까지, 이제 한 발자국 정도 남았다.
벨루지아는 당연히, 이후 자신의 세력을 더욱 크게 키울 방법을 고심했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평야족들이 있지만, 놈들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고 저들끼리 잘 뭉치는 놈들이다.
그렇다면 만만한 것이 바로 남쪽, 중앙 산야족 구역.
거의 이십 년 정도 전, 벨루지아가 슬슬 북방의 패자 중 하나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산야족 중앙 구역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안배로, 막내딸을 중앙 구역의 족장 하나에게 시집보내며 혼수까지 넉넉하게 안겨 보냈고.
그런데, 변경백이 어떻게 알고 갑자기 아이막의 부족을 대놓고 편애하며 밀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당신의 노림수에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지. 놈이 나의 사위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손을 쓰다니.”
사실 변경백은 아이막이 벨루지아의 사위 중 하나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지만, 벨루지아는 그 사실을 몰랐다.
“사위의 땅은 충분히 거점 중 하나가 될 만하지. 적당한 때가 되면,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보내어 그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남쪽으로 뻗치려 했거늘···”
이렇게 되면 도저히 세력을 뻗칠 곳이 없어진다.
북쪽 산야족 구역은 이미 거의 모든 부락이 그에게 거스르지 않고 있고.
평야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모든 면에서 마땅치 않을 뿐더러.
중앙으로 뻗치려던 손을 변경백이 강하게 틀어쥔 모양새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벨루지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로인클로 변경백이 무서운 남자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래도···
“당신도 이제 늙었어. 당신의 이름만 들어도 이 드넓은 땅의 전사들이 벌벌 떠는 일도, 오래 남지 않았다는 말이지.”
나이는 속일 수 없다.
변경백은 이미 칠십이 넘은 나이.
빠르면 십 년 정도 후에.
늦어도 이십 년 안에, 변경백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저 투구르 놈들처럼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아. 당신은 그 즉시 나의 손과 발을 잘라버리려 들 테니. 하나···그렇다고 손을 놓고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변경백에 비교하면 초라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장기말이 여러 개 있다.
만약 장기말의 존재가 들키더라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장기말들이.
“변경백, 당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네. 결국 나는 모든 전사들의 위에 서는 진정한 대족장이 되고 말 것이야.”
밤이 늦도록, 벨루지아는 조용히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마치, 수면 밑에 조용히 숨어서 물새를 덮치길 기다리는 큰 물고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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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 벨루지아의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