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벨루지아의 요구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아이막 부족에는 근방 부족의 전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사냥제를 수확이 끝난 직후로 바꾸니 여러 모로 편해진 것 같습니다.”
“그보다 부족 연합이 모두 모여서 사냥을 하니 능률이 다르긴 다르군요.”
“아이막 족장이 나서서 엘프들과 무역을 중개해주신 덕에, 농작물 수확량이 예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원래 중앙 구역 약소 부족들은 사냥제를 한겨울에 개최하곤 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작은 부족의 경우 가을에 수확이 끝나더라도 일손이 부족해 곧바로 장기간 사냥을 떠날 여건이 되지 않는다.
마을의 장정들이 힘을 합쳐 겨울을 나기 위한 가옥의 수리며 보존식의 준비를 해야 했고.
주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채집도 하고 주변 숲에서 간단한 사냥을 병행하여 근방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모을 수 있는 식량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겨울이 오면 사냥제를 치르고 모든 전사들이 장기간 사냥을 떠나는 식.
그러던 것이, 아이막이 주변 부족들의 연합을 구성하고 맹주가 된 후 여러모로 변하였다.
제국과 엘프 왕국의 철제 농기구 수입을 중개하여 농작물 수확량을 충분히 늘렸고.
모든 부족이 모여 사냥을 하는 것으로 능률을 올려, 평시에도 보존식의 비축을 넉넉하게 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춰, 작년부터 연합으로 묶인 산야족들은 가을 수확이 끝난 후, 맹주인 아이막의 부락에서 사냥제를 치르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올해 사냥제의 최고 전사는 아이막의 차남 아이덴!”
“모든 족장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용맹한 아이막! 장남에 이어 차남까지 이리 훌륭한 전사의 자질을 보이다니. 대체 아들들을 어떻게 키운 것이오? 우리도 자식 교육에 참고를 좀 합시다.”
올해 열린 사냥제에서는 아이신의 동생 아이덴이 당당하게 최우수 전사로 선정되었다.
“작은 오빠! 축하해!”
“정말 잘 했다, 아이덴.”
“고마워 형. 근데 아직 얼떨떨해.”
“뭐가?”
“나 형이랑 마상 봉술 대련 할 때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잖아. 아니, 이기는 걸 떠나서 형을 제대로 맞춰본 적도 없는데···”
아이덴은 몇 년 전 아이신이 그랬던 것처럼, 일반 궁술과 마상 궁술에서 다른 어린 전사들을 크게 압도했다.
비록 마상 궁술은 아직 조금 미숙했지만, 대부분 마상에서는 허수아비를 맞추지도 못한 다른 전사들에 비하면 뛰어난 성과.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체 마상 봉술이 시작되자 아이덴은 마주치는 전사들을 모두 간결한 동작으로 낙마시켜버리고 최후까지 남은 전사가 되었다.
“그건 큰 오빠가 너무 강해서 그런 거지 작은 오빠가 약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주인님은 제국의 기사보다도 강하신 분이니까요. 아이덴도 또래에 비해서는 충분히 강한 전사에요.”
“아, 맞다. 작은 오빠! 마상 봉술 시합할 때 보니까 갈렌 언니도 지켜보고 있더라.”
“뭐? 갈렌이?? 어디?”
“끝나자마자 대장간으로 돌아갔어.”
아이막은 저들끼리 화목하게 얘기하고 있는 자식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족장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제 사냥제가 모두 끝났으니, 미뤄놨던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했던 것이다.
“결국 자디란은 오지 않았군요.”
“모두가 연합을 이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자디란의 부락은 위치가 여기서 가장 멀기는 하지요. 붉은 강을 건너야 하는 곳에 있으니.”
“그렇다 해도, 참가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명백히 맹주에 대한 실례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자디란이 올해부터 따로 자기 주변 부락을 모아 별도의 사냥제를 개최하려 한다던데···”
일전에 사냥제에서 아들 자루스가 크게 망신을 당했던, 족장 자디란의 이야기다.
아이막이 변경백의 공언을 받고 근방 부족 연합의 맹주가 된 후.
자디란은 일단 연합 체제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첫 해에는 아무 불만 없이 사냥제에도 참여했고, 연합의 대규모 수렵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작년부터, 자디란은 묘하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냥제에 참여할 만한 어린 전사가 있음에도 데려오지 않았고.
새로운 연합 사냥제를 위해 각자 가져오기로 합의가 된 공양 품목도 가져오지 않는 등.
누가 봐도 이 연합에 불만이 있다는 식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아이막은 우선 자디란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 사냥제를 마무리하려 했다.
“어쨌든 올해도 다 함께 사냥을 하여 연합의 우정을 공고히 하고, 전사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도록 합시다.”
“맹주님의 말대로입니다. 이렇게 함께 사냥을 하는 것으로, 전사들의 조직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비록 한 부락에서 살지는 않지만, 연합의 전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같은 부락의 전사들처럼 한 몸이 되어 움직일 것입니다.”
“그럼 부락으로 돌아가는대로 전사들을 소집하여 사냥터로 모이도록 합시다.”
“타르야 족장님. 말씀드린 건은 잘 부탁드립니다.”
“자디란에게 사람을 보내어 불참의 이유를 묻는 것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 맹주의 뜻인데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아직 사냥제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지만, 족장들은 빠르게 사냥제를 파하고 제각각 자기 부락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바로 그때.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아이막 부락 입구에 두 명의 건장한 전사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매제! 우리 매제는 어디 있나!”
“사냥제를 한다고 들었는데 벌써 끝난 건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막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혀, 형님들??”
“오, 거기 있었군.”
“무슨 연합 놀이를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매제 신수가 아주 훤하구먼. 껄껄껄.”
저 멀리서 놈들을 지켜보던 아이신도 놈들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저것들은 벨린다의 오빠들이잖아? 분명 벨타르와 벨고르였던가.’
아이신이 곧바로 떠올린 것처럼, 저 남자들은 아이막의 손윗처남이자 벨린다의 오빠인 벨타르와 벨고르.
회귀 전에도 간혹 벨린다를 보기 위해 몇 년에 한 번 찾아오곤 했었다.
‘내가 열 다섯이 된 후로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놈들이 웬일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신은 외삼촌들, 아니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사실 남남인 저 놈들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
‘저것들이 부락을 찾아올 때는 좋은 일이 한 번도 없었지. 놈들에게 방을 내주느라 아이나와 아이덴까지 마굿간에서 잠을 자야 했고.’
최종적으로는 저 둘 중에 하나가 부락을 침공하여 결국 아이막의 부족을 멸망시켰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인 어른께서는 평안하시지요?”
“그래. 자네가 바쁜 건 알지만, 사위 된 도리로서 가끔은 아버지를 찾아봬야하는 것 아닌가?”
“그보다 우리 여동생은 잘 지내는가? 조카들이 얼마나 컸는지도 궁금하군.”
“제 처라면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밀린 이야기가 많으실 테니 먼저 하고 계십시오. 얼른 끝내고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음, 그래. 자네가 수고가 많네.’
벨린다의 오빠들, 벨타르와 벨고르는 아이막의 안내를 받아 먼저 벨린다를 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갔다.
“벨린다! 우리 동생은 잘 있었느냐?”
“오라버니들??”
두 오빠를 오랜만에 만난 벨린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서 들어와요. 먼 길 오느라 피곤하죠?”
“뭐 그리 피곤하겠느냐. 우리 둘 다 동생이 이런 아무것도 없는 누추하고 가난한 곳에서 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딴 것쯤 고생도 아니···”
“음??”
벨타르와 벨고르는 으레 찾아올 때마다 하듯, 여동생의 불쌍한 처지를 위로해주려다가 집 안 풍경을 보고 말을 멈췄다.
‘집 안에 뭐가 많아졌는걸?’
‘바닥에 깔아놓은 건 양털 깔개잖아? 이건 분명 제국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건인데···’
‘아니, 그보다 저 자개가 달린 가구들은 엘프제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한 4~5년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만 해도.
벨린다는 오빠들이 찾아오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다.
- 오라버니. 저 진짜 여기서 더 못 살겠어요!!
- 우리 귀여운 동생아. 생활이 많이 어려운 것이냐.
- 먹는 음식은 늘 똑같고! 옷은 짐승 가죽으로 지어 입어야 하고! 노예 한 명 없어서 제가 집안일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 으으음···그래. 아버지께 네가 이리도 힘들게 살고 있다고 우리가 꼭 말을 해 주마.
- 꼭이요! 꼭! 아아···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왜 나를 이런 곳에 시집 보낸 거에요?
- 조금만 참거라. 네가 조금 고생하는 것으로, 우리 부족 전체가 큰 이득을···
- 벨고르. 거기까지만 해라.
- 앗···예, 형님. 벨린다가 너무 안쓰러워 제가 잠깐 말 실수를 했습니다.
- 무슨 말이에요 그게? 제가 고생하는 거랑 부족이 무슨 상관이죠?
- 여자인 너는 알 것 없다. 아버지의 뜻은 절대적이니, 어쨌든 조금만 참거라. 우리가 말은 잘 해 주마.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이번에도 여동생이 살기가 힘들다는 불평을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의 얼굴에는 수심이라고는 없었고, 집 안에는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제국과 엘프 왕국제 가구며 소품들이 가득했다.
“벨리온. 벨리바. 뭐하고 있니? 삼촌들한테 인사 해야지.”
“삼촌!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 어···그래. 옷이 아주 예쁘구나.”
아직 어린 조카들, 벨리온과 벨리바가 입은 옷을 보니 심지어 엘프 왕국제 비단으로 지은 비단옷이다.
물론 벨타르와 벨고르도 자기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런 옷을 입히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 변화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조카가 한 명 더 생겼구나?”
“몇 살이지? 이름은 뭐라고 하느냐?”
“벨리움이에요.”
“녀석. 이런 환경에서는 더 이상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하더니, 떡두꺼비 같은 조카를 하나 더 낳았구나.”
“요즘 부락 사정이 괜찮아졌거든요.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으음···매제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겸사겸사 네가 잘 사는지도 보고 싶었고.”
벨린다가 오랜만에 오빠들과의 재회를 즐기고 있을 때, 아이막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님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냥제 뒤처리를 하느라···”
“아니, 괜찮네. 벨린다. 중요한 이야기를 좀 해야하니,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려무나.”
“그렇게 할게요.”
벨타르와 벨고르는 여동생이 순순히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도 소소하게 놀랐다.
‘애가 제 엄마를 닮아서 성깔 더럽기로는 부족 여자들 중에 누구도 따라가질 못했는데.’
‘순순히 나가는 걸 보면 요즘 정말 살 만 한가 보구만.’
아이신이 일부러 벨린다를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선물 공세를 펼쳐서 일어난 결과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벨타르와 벨고르는 우선 찾아온 목적을 위해 아이막에게 본론을 꺼냈다.
“실은 아버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네.”
“장인어른께서···말입니까?”
“그래. 자네도 알겠지. 아버지께서 진정한 의미의 대족장이 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말이야. 마치 삼백년 전의 대족장 야르삭처럼.”
“장인어른께서는 이미 존경받는 대족장이신데 어찌···”
“그건 아니지. 당장 여기서 더 남쪽에는 자기들을 대족장이라 칭하는 무리들이 있지 않나? 아버지는 놈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어하시네.”
“으음···그렇군요. 그럼 제게 그런 뜻을 전하시라고 하신 겁니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네. 알다시피 자네 부족이 우리보다는 놈들의 부락과 훨씬 가깝지 않나? 전사들을 모아, 감히 대족장을 칭하는 남쪽 놈들에게 찾아가도록 하게. 찾아가서 아버지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한 뒤, 놈들에게 복종의 공물을 받아오면 되네.”
“······만약 놈들이 거부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네가 대신 놈들을 응징하도록 해야지. 대족장의 뜻에 반한 놈들인데 응당 그 자리에서 대족장의 뜻을 보여야하지 않겠나?”
아이막은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단호히 거절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지금도 수많은 부락을 산하로 거느리신 존경받는 대족장이 아니십니까? 구태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는 이 계절에, 어째서 무해한 전사들의 피를 흘리라 강요하신단 말입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벨타르와 벨고르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이 벌어질 것처럼, 험악한 공기가 그 자리에 감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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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 벨루지아의 속내
“지금 우리가 잘못 들은겐가? 매제. 다시 한 번 말해보게.”
“그리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배은망덕한 놈이 감히 대족장님의 은혜도 모르고···!!”
성질이 급한 차남 벨고르가 당장이라도 아이막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벨루지아의 장남 벨타르가 그를 제지했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형님!! 이놈이 감히 아버님의 뜻을 무시했단 말입니다!!”
“매제. 이유가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대족장께서는 납득하시지 않을 걸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지금부터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그런 쓸모없는 일을 위해 전사들의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쓸모없는 일이라···그렇군. 이제 알 것 같아. 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말이야.”
벨타르는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냉소적인 말투로 말했다.
“자네가 변경백의 개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나는 믿지 않았네. 우리 매제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용맹함 하나로 뭇 사내들의 인정을 받은 최고의 전사가 아니었나. 그런데 변경백의 비호를 받으며 무슨 소꿉 장난 같은 연합을 만들고 대장 노릇을 하더니,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군.”
“말씀하신 남쪽 놈들이 약한 동족들을 핍박하려 하기에, 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모욕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조무라기같은 것들이 얼마나 모인들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아버지까지 갈 것도 없다! 내가 거느린 전사들만 이끌고 와도 너희같은 것들은 뼈도 남기지 않고 짓밟아줄 수 있다! 변경백이 언제까지 너희 놈들의 뒤를 봐줄 줄 아느냐!!”
이번에는 벨타르도 차남 벨타르의 격분을 제지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그 자리에 감돌며, 눈싸움이 이어졌다.
이윽고, 벨타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고르. 돌아가도록 하자.”
“형님!!”
“아버지께서 듣고 판단하실 문제다. 매제, 내 한 마디만 하지.”
벨고르는 싸늘하게 일갈하며 방을 나갔다.
“고개를 숙일 대상이 누구인지를 잘 판단하는 것이 좋을 걸세. 자네는 아직도 젊으니 사리 분별을 못 하는 모양인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네.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그 알량한 연합 놀이라도 잘 유지하고 있기를 바라네.”
한 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벨타르와 벨고르가 떠나갔다.
둘이 떠난 후, 아이신은 슬며시 아이막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으음···아이신, 네게는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 네 외삼촌들은···”
열입곱 살이 된 아이신은 이제 거구인 아이막과 비교해도 별로 차이가 없을 정도로 몸이 성장했고, 아이막은 사냥신의 계시를 듣는 아들을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었다.
아이막의 말을 들은 아이신은 곰곰히 생각했다.
‘어쨌든 놈들도 변경백 무서운 건 아는 모양이군.’
회귀 전에는, 내년 쯤 놈들이 아이신과 동생들의 분가를 요구하고는 아이막이 그것을 거부하자마자 쳐들어와 부족을 멸망시켰다.
얼핏 보면 지금 상황도 그때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놈들은 아이막 부족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담스러운 제안을 하고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침공의 명목으로 삼았으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 놈들의 행동도, 작금의 상황도.’
물론 회귀 전에도 변경백은 벨루지아 부족이 더 이상 세력을 넓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견제했지만.
그 때는 아이막 부족 침공까지는 탈 없이 넘어갔을 확률이 크다.
그 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듣기로는 어디까지나 말을 듣지 않는 사위에 대한 ‘내부 통제’ 정도의 행위로 넘어간 듯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르다.
벨루지아가 아이막에게 강요한 제안도 자식들의 분가같은 일견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수확철에 굳이 전쟁을 전제로 한 도발을 수행하라는 것.
전쟁의 명분이야 원래 대부분은 어거지에 말장난이라지만, 이건 그럼에도 정도가 심하다.
그리고 변경백의 상황.
회귀 전과 달리, 변경백은 모처럼 찾게 된 중앙 구역 산야족 통합이라는 카드를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다.
만약 벨루지아가 중앙 지역에 무슨 불손한 움직이라도 보인다면, 변경백은 곧장 균형을 깨는 놈들을 응징하려 할 것이다.
아이신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판단을 끝내고는, 안심하라는 듯 아이막에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
“네 외가에서 어떻게 나올지를 모르니 조금 불안하구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해서, 그들이 저희를 당장 어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래. 지금은 다가온 겨울에 대비하는 것이 먼저일 테니.”
동쪽 변방의 가을은 길지 않다.
혹독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낭비할 시간이 없다.
아이막 부족은 곧장 앞으로 다가온 연합 사냥을 위해 사냥제의 여운을 뒤로하고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
대족장 벨루지아의 아들들, 벨타르와 벨고르는 아이막 부족을 떠난 뒤 자기들 부족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족장의 부락으로 향했다.
부락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대족장 벨루지아를 알현했다.
장남 벨타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며 보고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그래. 소문은 정말이더냐?”
“소문 이상이었습니다. 입지가 좋은 부락이기는 했으나 4~5년 전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얼추 헤아려봤을 때 서른 가구 이상이 부락에 상주하는 듯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겨울을 대비하여 비축해둔 식량의 질과 무기의 상태, 결정적으로 놈의 집에 값비싼 제국과 엘프제 가구들을 보니 이 놈들이 정말로 변경백의 지원이라도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보고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벨타르와 벨고르의 이번 남쪽행은 아이막 부족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대족장 벨루지아는 그러나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들들에게 재차 물었다.
“내가 명령한 것은 잘 전달했느냐?”
“똑똑히 전달하긴 했습니다. 다만···”
벨타르는 잠시 말을 흐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놈은 단칼에 아버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호오···놈이 정확히 뭐라고 했느냐?”
“아버님은 더 세력을 넓히지 않으셔도 충분히 모두가 존경하는 대족장이니, 그런 쓸모없는 일로 전사들의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껄껄껄. 그래. 놈의 말이 맞구나. 이미 뭇 전사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있으니.”
“아버님!”
차남 벨고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제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삼백의 전사를 이끌고 가, 놈과 놈의 연합이라는 조무래기들을 짓밟고 대족장의 권위를 바로 세우겠나이다!!”
씩씩거리는 차남을 보며, 벨루지아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했다.
“놈을 짓밟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허락해줄 수 없다.”
“아버님!!”
“변경백이 우리와 놈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 쪽에서 대군을 일으킨다면, 놈은 그것을 빌미로 나의 팔다리를 자르려 할 것이다.”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어디 생판 모르는 놈들을 약탈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쨌든 놈은 아버님의 사위이고,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산하 부락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가 놈을 응징한다 한들, 집안 내부의 분란이었을 뿐입니다. 변경백이라 한들 집안 싸움에까지 뭐라고 하겠습니까.”
“벨고르. 이 못난 놈. 너는 변경백이 바보로 보이느냐?”
“예, 옛···?”
“그런 명분은 어디까지나 힘 있는 자가 없는 놈들을 짓밟을 때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아라. 변경백이 그것을 빌미로 우리를 벌할 명분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으냐?”
“그, 그건···”
벨고르는 벨루지아의 일갈을 듣고서야 주춤하며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벨루지아의 장남 벨타르가 그제야 대화에 다시 끼어들었다.
“아버님. 그러나 이것이 예사 문제는 아닙니다. 놈이 지금은 우리가 경계할 세력이 아니지만, 변경백의 비호가 이어진다면 나중에는 어찌될지 모릅니다. 놈의 부락은 워낙 입지도 좋고, 근방의 약소 부족들은 한 번 생긴 구심점을 쉽게 이탈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네 말이 맞다, 벨타르. 그러나 벨타르야. 너는 나를 바보로 알고 있구나.”
“예, 옛??”
이번에는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오자, 장남 벨타르는 당황한 듯 벨루지아에게 되물었다.
“너희를 놈에게 보낸 것은, 말하자면 최후 통첩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래봬도 가족에게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어쨌든 놈은 나의 사위이고, 변경백의 비호를 받아 부락을 잘 키웠다 해도 그 힘을 나를 위해 쓴다면 나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않느냐? 놈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흔쾌히 놈을 지지하고 향후 너희처럼 나의 측근으로 귀히 대해줄 생각이었다.”
“그 말씀은···”
“다른 놈들 같았으면 이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놈은 나의 제안을 거부했지. 그렇다면, 나도 놈을 더 이상 내 가족의 울타리에 넣고 보호해줄 생각이 없다. 가족이 아니라면, 짓밟아야할 적일 뿐이지.”
“그러나, 아버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놈을 응징하려 한다면, 변경백이 곧장 우리를 제지할 거라고 말이니다.”
“그렇지. 분명 우리는 놈을 응징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직접 응징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직접 응징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래. 놈들끼리 내분이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 변경백이, 저희끼리 싸우는 놈들에게까지 관여할 것 같으냐?”
“아무래도···크게 관여하지 않으려 하겠지요.”
“그런 것이다. 다만 암만 변경백이 우리 사정에 밝다 해도, 우리 산하 부락이 독단적으로 한 쪽을 지원하는 것까지는 알 수 없겠지.”
장남 벨타르는 그제야 자기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설마 이 모든 일을 진작부터 예견하고 계셨던 겁니까?”
“물론이다. 내가 섬길 주인을 착각한 개새끼를 그냥 내버려둘거라고 생각했느냐.”
변경백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는, 아들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저 지켜보고 있거라. 놈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를, 뼈가 시리도록 깨닫게 될 것이다.”
*
아이막 부족 연합 산하의 타르야 족장은 사냥제가 끝나고 자기 부락으로 돌아가자마자 준비를 서둘렀다.
“연합 사냥을 위한 출정 준비는 끝났나?”
“옛!”
“곧장 출발하도록 하자. 아이막 맹주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다만···”
타르야 족장은 아이막에게 부탁받은 것을 떠올리고 충직한 부하 하나를 따로 불렀다.
“너는 이 길로 자디란의 부락에 찾아가거라. 놈은 이번 사냥제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맹주께서 놈의 변명을 들어주시기로 했으니, 가서 맹주의 뜻을 전하고 놈의 답변을 받아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시급히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타르야 부족의 전사는 곧장 더 동쪽의 자디란 부족으로 말을 달렸다.
자디란 부족으로 가는 길에는 붉은 강이라 불리는 큰 강이 있다.
강을 크게 돌아가면 2~3일 정도가 걸리지만, 말을 타고 어렵사리 강을 건너면 곧장 놈들의 구역으로 갈 수 있다.
타르야 부족의 전사는 신중히 길을 골라 강을 건너고는, 빠르게 자디란의 부족에 도착했다.
“음? 누구인가? 신분을 밝혀라?”
“타르야 부족에서 왔소. 우리 족장님과, 연합의 맹주인 아이막 족장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소.”
타르야 부족의 전사가 입구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으려니, 부락의 족장, 자디란이 전사를 알아보고 그쪽으로 다가왔다.
“호오···아이막의 말을 전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타르야 부족의 전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자디란뿐 아니라, 분명 한 부락의 족장으로 보이는 나이들고 노련한 전사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분명 이 근방의 쿠나르 족장, 그 옆에는 테네르 족장이었던가? 어째서 이곳에 모두 모여있는거지?’
자디란은 전사가 족장 몇 명을 알아본 것을 눈치채고 웃으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오늘은 사냥제 날이라네. 자네가 먹을 복이 있군. 젯밥이라면 푸짐하게 대접하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그보다···”
“아, 그래. 무슨 말을 전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 어디 한 번 들어봄세.”
“어째서 맹주가 주최하는 사냥제에 참여하지 않으셨는지,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자디란은 전사를 바라보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보고도 모르겠나? 우리는 그 치졸한 연합에서 빠지도록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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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 중앙 산야족 내전(1)
“치, 치졸한 연합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묻나? 아, 타르야 족장은 원래 그 애송이와 한 패였던가.”
“이는 연합에 대한 모욕입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주시지 않는다면, 큰 문제로 번질 겁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라···자네 정말 몰라서 묻나?”
자디란은 타르야 부족의 전사를 바라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붉은 강 서쪽에, 가을이면 살찐 적사슴들이 번식을 위해 모인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것이 연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관계가 있지. 그 구역은 원래 붉은 강에서 가까운 부족들의 사냥터였네. 헌데 그 졸렬한 연합에는, 붉은 강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부족이 절반이 넘지. 그런데도 작년에는 멋대로 붉은 강 서쪽에서 대규모로 몰이사냥을 하지 않았나?”
“분명 그 때 자디란 족장님의 부족도 기여도에 따라 공평하게 사냥감을 분배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부족이 각자 사냥을 할 때보다 큰 이득을 봤는데, 어째서 그걸 문제삼으신단 말씀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자디란 족장의 옆에 서 있던 테네르 족장이 끼어들었다.
“그럼. 그 연합에 들지 않은 다른 부족들은 손해를 봐도 된다는 말인가? 그 연합 놈들이 거기서 사냥을 하는 바람에, 원래 그곳에서 사냥을 하던 다른 부족들이 큰 피해를 입었네. 이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그, 그것은···”
타르야 부족의 전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을 듣고 말꼬리를 흐렸다.
타르야 부족 내에서는 나름 족장의 측근이지만, 여러 부족 간의 미묘한 알력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들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말을 찾던 그가 우물쭈물하다가 생각나는 한 마디를 던졌다.
“그, 그렇다면! 다른 부족 분들도 모두 연합에 참여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더 많은 부족이 연합에 참여한다면, 모두가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원하신다면 저희 족장께 말씀드려 언제든 맹주께···”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이번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다른 족장, 쿠나르 족장이 냉소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 졸렬한 연합에 참여한 다른 족장들은 배알도 없나? 아이막이라는 놈은 다른 족장들보다 아직 한참 어린 애송이가 아닌가?”
쿠나르 족장의 가시 돋친 말을 들은 자디란이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애송이라는 말에 너무 의미를 두지 않길 바라네. 우리 모두 아이막이 얼마나 강한 전사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네. 분명 이 근방을 통틀어도, 아이막을 힘으로 꺾을 전사는 아무도 없을 걸세. 다만, 전사로서 용맹한 것과 우두머리로서 현명한 것은 다르네. 다른 족장님들께서는 그 말을 하고 싶으신 거라네.”
타르야 부족의 전사는 날이 선 듯한 족장들의 태도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자신이 뭐라고 더 말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은 시급히, 이 중대한 사항을 족장께 알려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여러 족장님들의 뜻, 연합의 족장님들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아 참. 내 한가지 말하는 것을 잊었군.”
자디란은 돌아가려는 타르야 부족 전사를 붙잡았다.
그리고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선언했다.
“붉은 강의 서쪽, 적사슴 사냥터는 우리 연합이 쓰겠네. 만약 이를 어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도 장담할 수 없네. 가서 똑똑히 전하도록.”
“······”
타르야 부족의 전사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곧장 말을 타고 부락을 나갔다.
그가 부락을 나가자, 자디란의 옆에 있던 다른 족장들이 한 마디씩 했다.
“저리도 뻔뻔한 놈들이 있다니.”
“자디란 족장님. 놈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이 참에 사냥은 미뤄두고 곧장 놈들을 치는 것은 어떻습니까? 모자란 사냥감은 놈들의 부락을 약탈하는 것으로 메꾸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자디란은 그러나 그 의견에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은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가 아닙니까?”
“그것은···자디란 족장님의 말이 맞습니다.”
“놈들이 순순히 붉은 강의 서쪽 사냥터에서 물러난다면, 굳이 피를 흘릴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자디란 족장님. 놈들이 순순히 물러나겠습니까?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승산은 있습니까?”
자디란은 그 말에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 연합 외에도 놈들과 함께 싸울 전사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힘을 합한다면, 놈들의 졸렬한 연합은 맥없이 무릎을 꿇을 겝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군요.”
“역시 자디란 족장님이십니다. 무릇 맹주가 되려면 자디란 족장님처럼 경험많고 현명한 분이어야 하는 법입니다!”
“어디 나이도 어린 놈이 제 일신의 힘만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꼴이라니···”
자디란은 다른 족장들의 반응을 즐기다가, 문득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막과 놈의 아들 아이신···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자디란이 아이막과 아이신 부자에게 악감정을 가진 것은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다.
몇 년 전에 열린 사냥제에서, 그의 아들 자루스는 아이막이 아들 아이신과 대련을 하다가 보기좋게 낙마하고 망신을 당했다.
그것까지는 별 문제가 아니다.
그저 어린 전사들끼리 대련이고,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자도 있으니.
문제는 아들 자루스가 그 날 이후, 말의 눈만 봐도 겁을 먹으며 제대로 말을 타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이 놈 자루스야!! 족장의 아들이 되어가지고 말이 무서워서 타지 못하겠다니! 그게 무슨 되먹지 못한 소리냐!
- 하, 하지만···말의 눈을 보기만 해도 오금이 떨리고 발이 땅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버님···
- 그놈들의 부락에서 돌아올 때도 말을 타고 돌아왔지 않느냐? 어째서 이제는 못 타겠다는 말이냐?
-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든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버님. 빠른 시일 내로 극복하겠습···
- 듣기 싫다! 강제로라도 말에 타거라! 내 평생 많은 전사들을 봐왔지만 말이 무서워서 타지 못하겠다는 전사는 본 적도 없다!!
전사들을 시켜 강제로 자루스를 말 위에 타게 했으나, 말이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자 자루스는 비명을 지르며 낙마해버렸다.
- 우, 우와아아아앗!!!
자디란과 전사들이 깜짝 놀라 떨어진 자루스에게 달려갔을 때, 자루스는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아들이 다시 말을 탈 수 있기까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아직도 말을 타고 빨리 달리지는 못한다. 용맹한 전사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던 내 아들이 반푼이만도 못한 겁쟁이가 되어버리다니···모두 놈들의 탓이다!!’
자디란은 아이막과 아이신을 생각하기만 해도 이를 갈아대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그러던 중, 주변 정세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다.
- 조, 족장님!! 변경백입니다!! 변경백이 우리 부락으로 오고 있습니다!!
- 뭐, 뭐라고?? 그 로인클로 변경백 말이냐??
소스라치게 놀라 부락 근처에 전사들을 이끌고 나가보니, 정말로 로인클로 변경백이 제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주변에 도착해 있었다.
실제로 변경백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위명을 익히 듣고 있던 자디란은 얼른 변경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변경백은 번쩍이는 안광을 그에게 향하며, 이렇게 물어왔다.
- 네가 이 부락의 족장이냐.
- 예···예! 자디란이라 합니다.
- 네 놈은 너의 부족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당황한 자디란에게, 로인클로 변경백은 자기 부하를 시켜, 얼마 전 벌어진 투구르 부족의 북침을 자디란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자디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그럼 변경백께서는 놈들로부터 저희 미천한 것들을 지켜주시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자디란의 말을 듣자 변경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노성을 질렀다.
- 이 놈!!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가 네놈들의 뒤치닥거리나 할 만큼 한가로운 사람으로 보이느냐!!!!
-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옵고···
변경백은 자디란을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부하들을 시켜 누군가를 데려오게 했다.
변경백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자디란은 깜짝 놀랐다.
‘저, 저놈은···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아이막 놈이 아닌가??’
놈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요 몇 년은 사냥제에도 참가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째서 놈이 변경백과 함께 있는 것인가?
당황한 자디란에게, 변경백이 기절초풍할 말을 던졌다.
- 이쪽의 전사는 몇 배나 되는 투구르 놈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 내었다. 나 바르테어 폰 로인클로는 너희 야만인들이 분란없이 평화롭기 살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다. 이쪽의 전사, 아이막을 중심으로 뭉쳐, 앞으로는 너희들의 힘으로 너희를 노리는 놈들에게 대항하도록 하라.
- 자디란 족장.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자디란은 당장이라도 아이막이 내민 손을 거칠게 쳐내고 싶었지만, 간신히 그것을 참고 손을 맞잡았다.
그 때부터 자디란은,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제대로 잠에 든 날이 없었다.
‘벨루지아님께서 손을 내밀어주시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놈이 같잖은 대장노릇을 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을 것이다. 정말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군.’
물론 그는 여전히 뭇 전사들을 이끄는 대족장이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새로 만든 연합에서, 그는 만장일치로 맹주에 추대되었다.
‘벨루지아 대족장의 명성은 숲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지만, 그 역시 수십 년 전에는 일개 부락의 족장이었을 뿐이다. 그의 힘을 빌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나의 영향력을 크게 키워야만 한다.’
비록 아직은 미약하지만, 운과 시기가 따라준다면 분명 그 역시 수백, 수천의 전사를 거느리는 대족장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럼 어서 사냥제를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사냥의 신께 특별히 크게 제를 올렸으니, 분명 올 가을과 겨울에는 사냥의 신께서 우리 연합을 위해 합당한 축복을 내려주실 거외다.”
“옳습니다. 감히 사냥감을 독점하려는 비열한 놈들에게, 사냥의 신께서 웃어주실 리가 없지요.”
“돌아가서 얼른 전사들을 이끌고 붉은 강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막 연합보다 며칠 늦게, 자디란을 중싱므로 한 중앙 산야족 연합도 수렵을 위해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붉은 강 서쪽.
사냥을 위해 길을 나서는 자디란 연합의 전사들의 손에는 평소 그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조잡한 철제 무기가 들려 있었다.
마치, 짐승만이 아니라 더욱 큰 것을 사냥하겠다는 의지가 전사들에게 깃들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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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 중앙 산야족 내전(2)
아이막 연합은 사냥제를 끝내자마자 대규모 수렵을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확실히 작년엔 인원이 너무 많아 효율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지요.”
“연합의 전사들을 둘로 나눠서 사냥을 진행한다면, 예년보다 더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맹주. 분발하셔야겠습니다? 장남에게 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이막은 장난스럽게 농을 거는 나르가 족장에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렴. 질 수는 없지요. 그래도 애비로서는 또 아들 놈이 나보다 나았으면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기대를 해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벌써부터 워낙 뛰어난 전사로 이름이 높으니.”
“연합의 젊은 전사 중에 아이막 족장의 장남 아이신을 경외하는 전사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신은 고작 열일곱 살의 젊은 전사이지만, 이미 연합 내에서 그 위상이 드높았다.
이는 나르가 족장과 타르야 족장 등, 연합의 축이 되는 족장들이 아이신의 활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까닭이 컸다.
- 그 붉은 털의 악마를 열 세 살에 앞장서서 토벌한 전사일세.
- 그냥 사냥한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놈의 굴에 머리부터 집어넣고 놈을 밖으로 끄집어냈다네.
- 그게 정말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강심장이기에 그런 짓을···
- 그걸 앞에서 실제로 봤으니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
붉은 털의 악마를 토벌했던 열 세 살 때 이야기와.
- 남쪽 투구르 부족 놈들이 이백의 전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그 아이신이라는 전사가 목숨을 걸고 놈들을 유인했다네.
- 어지간한 베테랑 전사들도 그 정도로 수가 차이나면 냉정히 적들을 유인하기 힘든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
- 그 뿐인가? 매복이 성공한 후 말머리를 돌려 창 한 자루로 놈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네. 내 생전 그리 뛰어난 창술은 본 적도 없네.
투구르 부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열 다섯 살 때의 이야기까지.
연합의 젊은 전사들은 처음에는 그런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 했으나, 그 후 2년 동안 이어진 협동 사냥에서 아이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올해 사냥부터는 아이신이 연합 절반의 인원을 통솔하여 따로 사냥을 하는 것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냥을 위해 붉은 강의 서쪽 구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매, 맹주!! 도착하셨군요. 그보다 큰일입니다!!”
“음? 타르야 족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타르야 부족의 부락은 가을의 사냥터인 붉은 강 서쪽 적사슴 사냥터와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연합의 다른 부족들이 전사들을 모아올 동안 먼저 야영지를 꾸리는 역할을 맡았는데,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타르야 족장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온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자디란 놈이 연합을 배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놈을 주축으로 하여 독자적인 연합을 만들었다 합니다!!”
“뭐, 뭐라고요??”
“말도 없이 연합에서 빠진 것도 모자라 독자적인 연합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뭐 이런···!!”
다른 족장들이 모두 분노하여 한 마디씩 하는 가운데, 아이막은 맹주답게 상황을 냉정히 파악했다.
“자, 자. 우선 진정들 합시다. 자디란이 연합에서 빠진 건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만, 꼭 배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연합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부족으로 구성된 것이니, 빠지겠다 해도 막을 명분은 없습니다. 다만 연합을 빠짐으로서 생기게 될 손해는 저들이 감수해야겠지요.”
웅성웅성하던 다른 족장들은, 아이막의 말을 듣고 안심한 듯 상황을 다시 파악했다.
“그건 맹주의 말이 맞습니다. 연합에서 빠지면 아쉬운 것은 저들이지요.”
“독자적으로 연합을 만들었다 해도, 뭐 뾰족한 수는 없을 겝니다.”
그러나, 진정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타르야 족장이 외쳤다.
“그게 문젭니다!! 놈들은 붉은 강의 서쪽, 그러니까 이곳 적사슴 사냥터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이를 어긴다면 전쟁도 불사할 기세였단 말입니다!!”
“뭐, 뭐라고요?? 적사슴 사냥터를??”
그제야 족장들은 이 상황이 단순히 자디란이 연합을 빠진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경우 없는 것들을 보았나···”
“물론 암묵적으로 서로가 사냥을 하던 곳은 있었지만, 당장 작년에만 해도 적사슴 사냥터는 우리 연합 외에 다른 부족들도 함께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자디란에게 붙은 놈들이 그 놈들입니까?”
“아마도 맞는 것 같습니다. 붉은 강의 동쪽, 자디란의 부족과 인접한 쿠나르 부족과 테네르 부족이 자디란의 부락에 함께 있는 것을 우리 전사가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분노를 표하는 족장들의 태도에서 보듯, 적사슴 사냥터라고 불리는 이곳은 가을과 겨울에 중앙 구역 산야족들의 중요한 사냥터였다.
동쪽 변방의 사슴 중에서도 적사슴이라고 불리는 큰 사슴들은, 봄과 여름에는 비교적 지형이 평탄한 남쪽이나 북쪽에 퍼져 살다가, 가을이면 중앙의 산림 지대로 이동하곤 했다.
이는 적사슴들의 생태와 관련이 있었는데, 봄과 여름에는 고지대의 초원이나 북쪽 평야 지형에 사슴들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새싹을 비롯한 다양한 풀들이 자라기에 사슴들은 그곳에서 봄과 여름을 보낸다.
가을이 되면, 다른 종류의 사슴들보다 몸집이 큰 적사슴들은 산림 지대로 이동하여 도토리나 뿌리 식물 등을 먹으며 본격적인 번식을 준비한다.
특히나 몸집이 큰 편인 적사슴들은, 눈이 쌓이는 겨울이 되면 개활지에서는 살아남기가 힘들다.
이런 점에서 산야족 중앙 구역은 특히 지대가 험한 산림이 많아 눈이 덜 쌓이고 나무껍질이나 겨울눈, 침엽수 입 등을 먹으며 버틸 수가 있다.
적사슴들은 그래서 겨울이면 중앙 산야족 구역의 깊은 산림이나 바람이 덜 부는 계곡으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내는 것이다.
“이건 그냥 생트집입니다. 적사슴 사냥터는 몇 개 부족이 독점할 만큼 좁은 곳이 아닙니다.”
“모든 부족이 함께 사냥을 해도 충분할 만큼 넓고 사슴의 개체수도 많은 곳이거늘···!!”
실제로 그랬다.
지금처럼 연합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중앙 구역 산야족들은 이 적사슴 구역에서 사냥을 하곤 했다.
아이막 부족이 겨울마다 사슴과 멧돼지를 잡던 곳 역시 넓게 보면 적사슴 사냥터라 불리는 붉은 강의 서쪽 산림이었고.
다른 부족들 역시 위치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겨울 수렵은 적사슴 사냥터를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맹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사냥을 속행합니까?”
아이막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려 노력했다.
“타르야 족장님. 자디란에게 그 말을 들었던 전사는 언제 돌아왔습니까?”
“어제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붉은 강을 우회하지 않고 바로 돌아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급한 사안이었으니까요.”
자디란이 구성한 새 연합의 부족들은 대부분 붉은 강의 동쪽에 근거를 두는 부족들이다.
붉은 강은 물살도 빠르고 깊이도 얕지 않아 일반적으로 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은 곳.
그러나 간혹 말과 함께 도하할 수 있는 포인트가 몇 군데 있었다.
붉은 강 동쪽의 부족들은 보통 그런 곳을 통해 강을 건너 이동하곤 했다.
‘거리를 생각하면, 놈들은 아직 사냥터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놈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먼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옳다.’
아이막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는 족장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적사슴 사냥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놈들과는 척을 지게 될 수밖에 없지요. 다행히 놈들보다 우리가 적사슴 사냥터에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강 근처에 자리를 잡고, 놈들의 동태를 살피며 이후의 대처를 하도록 합시다.”
아마 아이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완벽히 같은 결론을 내렸을 정도로, 아이막의 판단은 정확했다.
다른 족장들 역시 아이막의 판단에 찬성하여, 그들은 곧바로 붉은 강이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부득이하지만 이곳에 야영지를 만들고, 강 주변에 전사들을 배치하도록 합시다.”
“맹주의 판단이 백번 옳습니다. 기껏 우리가 적사슴 사냥터에 먼저 도착했으니, 이점을 살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단단히 지키고 있으면, 놈들은 강을 건너지 못할 겝니다.”
아이막과 다른 족장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아이막의 판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는 것은 바로 다음 날 증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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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디란의 연합은 사냥제가 끝나자마자 연합의 전사들을 모아 붉은 강으로 진격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 놈들의 대처가 어설프다면 곧바로 도하하여 강의 서쪽에 진을 친다!”
붉은 강이라는 이름은 삼백 년 전, 산야족과 평야족을 통일한 대족장 야르삭 때에 붙은 이름이다.
대족장 야르삭은 산야족과 평야족을 통일한 직후, 엘프 왕국과 솔라리온 제국의 협공을 받았다.
야르삭을 그대로 놔두면 더 큰 위협이 되리라 판단한 왕국과 제국은 동쪽 변방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고, 야르삭은 마침내 강의 동쪽까지 밀렸다.
그러나, 대족장 야르삭은 붉은 강에서 끝내 제국과 왕국의 동맹군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뒀다.
엘프들과 제국 병사들이 흘린 피가 강을 빨갛게 물들였고, 그 때부터 산야족과 평야족들은 이 강을 붉은 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족장 야르삭이 진정한 이 땅의 패자가 된 곳이라니. 묘한 일이군.’
자디란은 붉은 강으로 향하며,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대족장 야르삭의 붉은 강 전투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산야족과 평야족들은 대족장 야르삭이 어떤 식으로 제국과 왕국에게 승리했는지 그 전말을 알지 못한다.
분명 야르삭이 세운 야만족의 나라가 번성했을 때는 구전으로 붉은 강 전투의 전말이 꽤 자세히 전해졌으나.
대족장 야르삭 사후 이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중간 중간 계속 내용이 빠지고 바뀌어버린지라, 결국 야르삭이 제국과 왕국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 외에는 전설 비슷하게 이야기가 바뀐 탓이다.
붉은 강 전투의 전말을 그나마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붉은 강 주변에서 그때부터 살고 있던 부족 몇 개뿐이다.
“맹주. 붉은 강이 보입니다.”
“이 근처에서 붉은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은 두 군데 뿐입니다. 그 중 가장 직선 거리가 짧은 곳이 저곳입니다.”
족장들의 말을 들은 자디란은 지체하지 않고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곧바로 강을 건너도록 합시다.”
전사들은 말에서 내린 뒤, 조심스럽게 말을 끌고 강에 몸을 집어넣었다.
붉은 강은 강폭도 넓고 깊이 역시 성인 전사의 키의 몇 배는 된다.
다만 상대적으로 강폭도 좁고 깊이도 성인 전사의 가슴께 정도밖에 오지 않는 위치가 두 군데 있었다.
천천히 건널 수밖에 없긴 하지만, 일단 강을 직선으로 건너게 되면 강을 북쪽으로 우회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강 서쪽에 도착할 수가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도하에 가장 적합한 포인트 중 하나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도하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강을 조금 건넜을 때, 선봉으로 건너던 전사 하나가 소리쳤다.
“자, 잠깐!! 적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 핑!!
- 핑!!
그 말과 무섭게, 저 멀리에서 두세 대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자디란 연합의 족장들은 아직 강을 건너지 않고 상황을 보고 있다가 혀를 찼다.
“제길···아이막 놈···!!”
“눈치가 빠른 놈이군요.”
자디란 역시 속으로 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놈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강을 건넜다면, 우리를 돕기로 한 벨루지아 족장 산하 부락에 곧바로 사람을 보내어 합류시킨 후 놈들을 상대할 수 있었거늘···!!’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을 건너려던 전사들을 도로 물린 후, 자디란을 얼른 전사 하나에게 명령했다.
“네가 혼자 저쪽으로 건너 가거라. 당장 그곳에서 비키지 않으면, 우리와 정말 한 번 해보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다고 전하여라!”
“옛!!”
자디란 연합의 전사는 그렇게 천천히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단신으로 강을 건너는 전사를 향해,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지만.
자디란 연합의 사자(使者)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쏘기 위해 활을 겨누고 있는 반대편 아이막 연합의 전사들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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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 중앙 산야족 내전(3)
아이막 연합이 붉은 강 근처에 본진을 꾸린 바로 다음 날 오후.
붉은 강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전사 하나가 다급하게 족장들의 막사로 들이닥쳤다.
“매, 맹주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적입니다!! 자디란 놈들의 연합으로 보이는 전사들이 지금 붉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뭐, 뭐라고??”
“오오···용맹한 아이막. 그대의 판단이 무섭도록 정확했소이다!!”
아이막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명령을 내렸다.
“모든 전사들은 붉은 강으로 이동한다!”
붉은 강의 강폭과 물살을 생각하면, 자디란 연합의 모든 전사들이 강을 건너는 데에는 시간이 꽤 소요된다.
아이막 연합의 전사들이 붉은 강에 도착했을 때는 당연히 놈들이 아직 강을 반의 반도 건너지 못했을 때였다.
자디란 연합의 선봉이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막은 자기 활을 높이 들었다.
- 핑!!
- 핑!!
일신상의 무용에 있어서는 중앙 산야족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아이막의 화살은, 먼 거리임에도 거의 정확하게 선봉의 전사를 향해 날아갔다.
눈이 좋은 나르가 족장이 얼른 놈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외쳤다.
“놈들이 돌아갑니다. 맹주의 화살이 맨 앞에 있던 놈을 거의 스치고 지나갔나 봅니다.”
“이 먼 거리에서 건너오는 놈을 거의 맞출 뻔 하다니, 맹주의 활솜씨는 정말 대단하군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여기서 기다려 봅시다.”
잠시 후.
이번에는 전사 하나가 단신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저건 우리에게 뭔가 전하기 위해 오는 놈 같군요.”
“놔둡시다. 저 뻔뻔한 자디란이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요.”
자디란 연합의 사자(使者)는 강을 건너자마자 아이막 연합의 전사들에게 제지당했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자디란 맹주님의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먼저 무기를 버려라!”
사자는 무기를 압수당하고 전사 둘에게 팔을 잡힌 상태로 아이막과 족장들에게로 안내되었다.
아이막은 사자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자디란 맹주께서 보내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맹주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 자디란 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족장께서는 분명 경고하셨다 들었습니다. 붉은 강의 서쪽, 적사슴 사냥터는 우리 연합에서 쓸 것이니 함부로 구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자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이막 연합의 족장들이 분기탱천하여 사자를 향해 가시돋친 말을 쏘아붙였다.
“적사슴 사냥터가 언제부터 붉은 강 근처의 부족들만을 위한 사냥터였단 말이냐!!”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모든 부족이 공평하게 사냥을 해오던 곳이다! 자디란이 아주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아이막 족장! 놈들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아이막 역시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그대로 사자에게 고했다.
“적사슴 사냥터는 사냥의 신께서 모든 숲의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신성한 사냥터이다. 우리는 한 발자국도 이곳에서 물러날 수 없으니, 원한다면 힘으로 취해보라 전하라.”
산야족이나 평야족은 전쟁을 할 때, 서로의 사자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암만 사자가 기분 나쁜 말을 전하러 왔다 해도, 사자를 멀쩡히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그는 명예도 모르는 사내답지 못한 족장으로 근방에 이름이 퍼지게 된다.
자디란 연합의 사자는 왔던 대로 강을 건너 붉은 강의 서쪽으로 되돌아간 후 곧바로 아이막의 뜻을 전했다.
“놈들이 기어코 피를 원하는군요.”
“자디란 맹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디란이 바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는 애초에 그대들이 곧바로 도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자디란의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처음 보는 전사가 자디란에게 속삭였다.
자디란은 움찔 하고는 전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거라고 보고 계셨소?”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전사들이 우회하여 붉은 강의 동쪽으로 돌아갔을 때, 그대들이 도하하여 놈들을 협공하는 것이오. 우리의 존재를 슬슬 드러내도 될 것 같으니, 정확한 도하 시기만 잘 잡아보시오.”
자디란은 당황했던 마음을 다잡았다.
짐작대로, 이 전사는 벨루지아의 산하 부락에서 자디란에게 파견된 전사였다.
자디란은 곧장 동맹의 존재를 연합의 다른 족장들에게 공표했다.
“다들 주목해주시오. 우리의 작전을 도와줄 분들이 계시오. 비록 아이막 놈의 잔재주로 인해 곧바로 도하하지는 못하게 되었으나, 이 분들과 힘을 합쳐 놈들을 무찌르면 되오. 이 분들의 전사들을 합하면 우리가 두 배는 더 전사들의 수가 많으니, 곧장 도하하지 못했다 한들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소이다.”
아이막의 재빠른 대처로 자디란 연합의 속공은 막아냈으나, 두 연합 간의 전쟁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자디란 연합의 사자가 강을 건너 되돌아가자마자.
아이막은 재빨리 아이엘란을 불렀다.
“아무래도 아이신이 이끄는 전사들도 모두 데려와야 할 것 같구나. 놈들이 강을 건너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알겠습니다. 제가 주인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부탁하마.”
아이엘란이 말을 타고 떠나려하자, 아이나가 얼른 아이엘란에게 합류했다.
“아이엘란. 어디 가?”
“아이나. 주인님을 모셔오라는 족장님의 명령이 있었어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아이나도요?”
“응. 아이엘란 혼자서만 가기 심심하잖아.”
아이신이 전사들을 데리고 사냥을 하는 곳은 이곳에서 북동쪽 부근.
아이나와 아이엘란은 오후 내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날이 어둑어둑 해져서야, 아이나와 아이엘란은 아이신의 야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빠!!”
“아이나? 아이엘란까지? 여기는 무슨 일이야?”
찾아온 동생들을 보고 아이신과 아이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이번에 아이막을 따라다니며 사냥을 배우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신의 야영지에는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신에게, 아이엘란이 재빨리 대답했다.
“주인님! 큰일이에요!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요!”
“뭐라고? 전쟁? 자세히 말해 봐.”
아이엘란에게 전말을 모두 들은 아이신은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자디란이라···놈과 이렇게 또 엮이게 되다니. 속이 시꺼먼 놈들은 결국 변하지 않는 건가.’
동시에 아이신은, 아버지 아이막의 대처를 듣고 새삼 아버지가 뛰어난 전사였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제국의 뛰어난 장군들이었어도 아버지처럼 했을 거야. 붉은 강처럼 큰 강이 막고 있는 지형이라면, 적이 건너오기 전에 주변을 선점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 아버지는 병법을 배우신 적이 없을 텐데 말이야.’
아이신이야 제국 사관학교에서 제대로 된 병법을 배웠지만, 실전에서 잔뼈가 굵은 야만족들의 감각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병법만 배워서 될 것 같았으면 제국이 야만족과의 교전에서 무조건 승리를 해야 맞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오늘은 밤이 늦어서 이동하지 못 해. 내일 동이 트자마자 아버지와 합류해야겠구나.”
“알겠습니다, 주인님. 제가 여기 다른 전사들에게도 그렇게 전할까요?”
“부탁한다, 아이엘란.”
“오빠. 우리 여기까지 오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적사슴을 많이 잡아놨으니까, 아이나가 좋아하는 배받이살을 구워줄게.”
“와아! 아이엘란, 빨리 전하고 와. 같이 먹고 자자.”
“아이나도 참. 큰형은 아이나한테 너무 오냐오냐 한다니까.”
아이신은 아이나가 좋아하는 사슴 갈비살을 구워 배불리 먹이고 동생들을 재웠다.
동이 트자마자, 아이신은 전사들을 이끌고 아이막의 본진으로 향했다.
“아이신. 빨리 왔구나. 이야기는 들었느냐?”
“예. 그보다 식량은 얼마나 있습니까?”
“사냥을 하나도 하지 못했으니, 며칠 동안 버틸 보존식 뿐이다.”
“잘 됐군요. 저희는 이틀 동안 사냥을 해서 잡은 짐승들이 꽤 있습니다. 모두 가져 왔으니, 이것으로 전사들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오오···그래. 이번에 사냥을 위해 본대를 둘로 나눈 것이 결과적으로 큰 이득을 가져왔구나.”
아이막은 우선 살찐 적사슴과 멧돼지 몇 마리를 구워, 이틀 동안 고생한 전사들에게 배불리 먹였다.
고기를 실컷 포식한 전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올라가자, 족장들 모두가 기뻐했다.
“역시 어떤 때라도 전사들은 잘 먹어야 사기가 오르는 법입니다.”
“이건 사냥의 신께서 우리에게 웃어주고 계신다 생각해도 되겠군요!”
“놈들은 강을 건너려는 시도가 막혀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져 있을 겝니다.”
작은 만찬이 끝난 후, 아이신은 아이막과 족장들을 따라 붉은 강으로 향했다.
‘붉은 강···이곳은 제국 기병대장 시절에도 몇 번이나 와봤던 곳이다. 비록 시간이 좀 지났지만, 이곳에 오니 기억이 나는군.’
회귀 전 워낙 동쪽 변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이신은 이곳의 지리도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 지형은 제국 사관학교를 졸업했다면 모를 수가 없기도 했다.
‘제국 병법서에서도 특히 중요한 부분이었지. 붉은 강에서 벌어진, 대족장 야르삭과 제국, 왕국 연합군 간의 대첩.’
잠시 회귀 전의 일을 떠올리며 그리운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아이신은 곧장 그 생각을 접어두고 강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신. 보이느냐.”
“강 건너편에, 적들이 진을 치고 있군요.”
벽을 넘은 아이신과 아이막에게는 저 멀리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놈들의 깃발 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놈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도하를 시도했지만, 우리가 곧바로 대응해서 막아냈단다.”
아이막은 그 이후에도 지형을 면밀히 파악하여 최적의 대응을 펼치고 있었다.
놈들이 밤에 몰래 도하할 것을 대비하여 전사들을 둘로 나누어 교대로 재우고, 도하가 가능한 위치에는 불을 크게 피워 놈들의 움직임을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아이신은 이곳의 지리를 기억하고는, 아이막과 족장들에게 물었다.
“혹시, 도하가 가능한 위치는 이곳 한 군데 뿐입니까?”
“음? 허허···용맹한 아이막. 그대의 아들은 정녕 열일곱 살이 맞소?”
“맹주의 부락 위치를 생각하면 적사슴 사냥터와 붉은 강의 지리를 잘 알 것 같지는 않은데, 곧바로 그런 생각부터 하는 것이 퍽이나 놀랍구려.”
다른 족장들이 아이신의 통찰력을 칭찬했으나, 아이신은 개의치 않고 아이막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아이막은 곧바로 아이신이 궁금했던 것에 대해 말해 주었다.
“다른 족장님들의 말씀대로 예리하게 봤구나. 붉은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은 단 두 군데 뿐이다. 이곳과, 이곳에서 반 나절 정도 말을 달리면 나오는 지점이지. 그 곳들 외에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강하여 절대로 말과 함께 건널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곳에는···”
“당연히 전사들을 보내놓았다. 서른 명 정도의 전사들을 보내어, 마찬가지로 불을 크게 피우고 놈들의 동향을 한 나절마다 보고받고 있다.”
아이막은 그렇게 말하고는, 안심하라는 듯 또 다시 덧붙였다.
“도하를 철저히 막고 있으니, 놈들은 크게 강을 우회하여 돌아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적들이 돌아오는 길목 곳곳에도 전사들을 배치해 놓았다. 혹, 놈들이 2~3일을 걸려 돌아서 온다고 해도 비슷한 숫자라면 좋은 위치를 선점한 우리가 승산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아이막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족장들도 자신만만하게 아이신을 향해 말했다.
“맹주님과 다른 족장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놈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역으로 계산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용맹한 아이막의 장남 아이신.”
“심지어 그저께부터 첫 서리가 내리고 있지 않느냐? 예년에 비해 혹독한 계절이 빨리 찾아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생겼고, 놈들은 사냥감이 적은 붉은 강 동쪽에 진을 치고 있으니 시간마저 우리 편이다.”
“내일부터는 일부 전사들은 사냥을 보내어 식량을 더욱 비축해놓도록 해야겠습니다, 용맹한 아이막.”
바로 그 때.
아이신은 족장들의 대화에서 번뜩하며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때 이른 첫 서리···???’
아이신은 재빨리 바타르를 찾았다.
아이막이 그런 아이신을 따라와 의아한 듯 물었다.
“아이신? 무슨 일이냐? 그렇게 놀란 듯한 얼굴로.”
아이신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또 익숙한 핑계를 댔다.
“사냥의 신께서 경고를 하셨습니다. 다만 그 경고의 내용이 명확치 않아···확인해보려 합니다.”
“뭐라고? 사냥의 신께서? 알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아이신은 아이덴과 아이엘란을 데리고, 곧장 붉은 강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형? 무슨 일이야?”
“주인님···”
아이신은 대답하지 않고 더욱 빠르게 바타르를 채찍질했다.
도중에 아이막이 미리 전사 수십 명을 보내놓은, 다른 한 군데의 도하 포인트가 보였으나 아이신은 무시하고 더욱 남쪽으로 내달렸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아이신은 강폭이 넓은 하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덴, 아이엘란. 오늘은 이 근처에서 자야할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야영지를 만들어 다오.”
“걱정 마세요, 주인님.”
“우리한테 맡겨, 형!”
아이신은 동생들에게 야영지의 설치를 맡겨놓고, 곧장 바타르와 함께 어두운 강 근처로 향했다.
“바타르. 혹시 이 강의 이 위치가 기억나니? 나는 너와 예전에 건넜던 기억이 나는데”
바타르는 알아들었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태도로, 히히힝 울기만 했다.
아이신은 바타르를 타고, 신중하게 강을 건너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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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 중앙 산야족 내전(4)
첫 번째 도하 시도가 막힌 후, 자디란 연합에서는 족장들의 회의가 한창이었다.
“호오···그러니까, 이곳에서 북쪽에 있는 부락에서 200명의 전사를 보내준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붉은 강을 크게 우회하여 놈들을 칠 것입니다.”
자디란이 벨루지아 산하 부락의 도움을 족장들에게 공표하자, 자디란 연합 족장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자디란 맹주께서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우리 연합 전사들의 숫자가 약 200명 정도. 아이막 놈들의 연합도 대충 그 정도일 것입니다.”
“우리 숫자가 두 배나 많으니, 놈들은 당할 재간이 없을 것이외다!”
“먼 북쪽 부락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는데, 맹주께서는 참 신통하기도 하군요.”
“그런 인맥도 맹주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질 아니겠습니까. 아이막 놈들을 쳐부수고 나면, 전리품을 어떻게 분배할지 슬슬 생각해봐도 되겠습니다그려. 껄껄껄.”
자디란 연합 족장들은 기뻐하며 얼른 다음 작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놈들을 치기 위해서는···”
“결국 강을 건너 도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뗏목을 만들어 건너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사람은 건널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많은 말들과 함께 뗏목을 타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오.”
“아, 도하할 수 있는 곳이 남쪽에 한 군데 더 있지 않습니까? 이 곳에서 반나절 정도 남쪽에 말입니다.”
“시급히 그쪽을 조사해보도록 합시다!”
자디란 연합에서는 곧바로 남쪽 도하 포인트에 정찰병을 보냈다.
그러나, 정찰병은 강을 조금 건너다가 반대편의 상황을 보고 곧장 돌아와야만 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놈들이 이미 불을 크게 피워놓고 우리가 강을 건너는지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제길···아이막 놈. 빈틈이 없구나.”
“그저 어리고 일신의 용맹만 있는 놈인줄 알았거늘···”
자디란 연합의 족장들은 별 수 없이 머리를 맞대고 다른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예 우리도 다 같이 강을 크게 우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합해서 사백 명의 전사가 우회하여 놈들을 친다면, 승산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의견은 곧바로 묵살되었다.
“아이막 놈이 이토록 교활하고 주도면밀한 것을 보면, 당연히 우회 루트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 뻔하오.”
“우회 루트는 어디까지나 도하 후 협공으로 놈들을 포위할 때만 유용하오. 놈들이 길목의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다면, 두 배의 숫자라도 우리가 불리하지.”
“놈의 교활함을 생각한다면, 분명 그쪽도 대비가 되어있을 거라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한참 동안 족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음에도, 뾰족한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족장들이 입을 다물어버린 바로 그 때.
쿠나르 족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확실하지 않은 정보라 말을 아끼고 있었습니다만···”
“쿠나르 족장님.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얼른 말을 해 보십시오.”
“모두 대족장 야르삭의 붉은 강 대첩에 대해서는 들으신 바가 있으십니까?”
“으음···? 그거라면···??”
다른 족장들은 붉은 강 대첩이라는 말을 듣고 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대족장 야르삭의 일화들은, 산야족과 평야족들이라면 누구라도 어릴 때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아버지나 어머니, 할아버지나 할머니로부터 자기 전이면 대족장 야르삭이 어떻게 제국과 왕국을 쳐부쉈는지를 몇 번이고 들으면서 잠에 드니까.
“분명 이곳에서 제국과 왕국 놈들을 쳐부쉈다는 전설이었지요.”
“그때 제국과 왕국 놈들의 흘린 피로 강이 시뻘개졌다고 하는···”
“그러고 보니 대체 어떻게 놈들을 쳐부순 거지요?”
“제가 어릴 때 듣기로는 야밤에 대족장 야르삭이 말을 타고 순식간에 강을 건너 놈들의 진형을 단신으로 종횡무진 휘젓는 사이, 다른 전사들이 도하하여 제국과 왕국 놈들을 쳐부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신화의 영역이 아닙니까.”
“애초에 놈들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 단신으로 순식간에 도하를 성공하고, 혼자서 수천 명을 상대로 종횡무진 적진을 휘젓는다는 것이 별로 신빙성이···”
다른 족장들이 저마다 대족장 야르삭의 거짓말같은 활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쿠나르 족장이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뭔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저희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대족장 야르삭의 붉은 강 대첩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음? 자세히 말해 보시오.”
“여기에서 한 나절을 더 남쪽으로 가면, 붉은 강의 하류가 나옵니다. 첫 서리가 내릴 무렵에는 붉은 강의 상류가 얼어붙어 발원지에서 흐르는 물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그때만 일시적으로, 힘겹지만 도하를 할 수 있는 포인트가 한 군데 더 생긴다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실제로 저희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대족장 야르삭의 붉은 강 대첩에서는, 야르삭이 그 시기를 기하여 남쪽으로 멀리 이동한 후 도하하였다고 했습니다. 야르삭은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힘겹게 도하한 후, 방심하고 있던 적들을 기습하여 붉은 강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요.”
“그런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은 겁니까?!!”
쿠나르 족장은 그 말에 쭈뼛쭈뼛, 약간은 자신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야 저희 부족에서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쪽으로 해서 강을 건넜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음? 어째서 말입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런 대치 상태가 아니라면, 멀쩡히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점을 두 곳이나 놔두고 뭐하러 위험한 하류에서 도하를 시도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평소에는 불가능하고, 붉은 강의 상류가 얼어붙는 추운 가을에만 일시적으로 가능하다는데 말입니다.”
“어···듣고 보니 그건 그렇군요.”
“어디까지나 그것도 대족장 야르삭 신화의 일종이라는 말입니까. 흐음···”
자디란은 곧장 쿠나르 족장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조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솔직히 대족장 야르삭이 단신으로 강을 건너 수천의 군사를 혼자 상대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보다는 훨씬 믿을만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건 맹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고 보면 쿠나르 족장님의 부락이 마침 붉은 강 하류에서 가깝지 않습니까? 혹시 그래서 쿠나르 족장님의 부족에만 그때의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니었는지···”
자디란 연합에서는 곧장 쿠나르 족장과 함께 전사 몇 명을 붉은 강 하류로 보냈다.
그들은 강을 따라 밤을 새워 달려, 아침이 되어서야 붉은 강 하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번 건너봅시다.”
쿠나르 족장은 신중하게 붉은 강 하류를 건너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곳은 다른 두 곳에 비해서는 도하하기에 적합할 만큼 얕지 않았다.
그러나 쿠나르 족장은 이곳의 깊이가 평소보다는 확실히 얕다는 것을, 직접 절반 이상을 건넘으로서 결국 확인하고야 말았다.
“다른 두 지점보다 강폭도 넓고 깊이도 깊어 힘도 많이 들고 시간도 더 걸리겠지만, 지금이라면 건널 수 있다!!”
쿠나르 족장은 곧장 전사들과 함께 연합의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다른 족장들에게 말했다.
“기뻐하십시오! 대족장 야르삭의 전설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도하가 가능한 곳이 정말로 또 있었다는 말입니까?!!”
다른 족장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자디란은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입이 귀에 걸려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냥의 신은 물론이요, 삼백 년 전의 대족장 야르삭까지 우리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담컨데, 쿠나르 족장처럼 붉은 강 하류 근처에 사는 부족이 아니고서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신묘한 계책이다.
아니, 만약 아이막 연합에 대족장 야르삭의 이 전설을 알고 있는 족장이 있다고 해도.
놈들이 설마 그것까지 고려하여 한나절이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전사들을 보내어 방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전사들을 많이 나눌 정도로 놈들의 수가 많지는 않으니까.
자디란은 자신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벨루지아 산하 부락 전사에게 당당히 말했다.
“3일 후, 동이 틀 무렵 하류에서 백 오십 명의 전사를 도하시키겠소. 그 후 한 나절을 달려 3일 후 저녁에 놈들을 기습할 테니 시간에 맞춰달라 전하시오.”
“괜찮군. 결행일은 3일 후, 저녁에 놈들을 협공하는 것이군. 내 곧장 이곳을 떠나 우리 전사들에게 전하겠소. 부디 시간에 맞아야 할 것이오.”
“염려 놓으시오! 이미 승리는 우리 것이나 다름 없소!”
자디란과 자디란 연합의 다른 족장들은, 이 신묘한 계획에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사냥의 신께서, 그들을 보며 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자디란은 그럼에도 방심하지 않고 명령했다.
“도하가 가능한 두 지점에 소수의 전사들을 보내어, 언제라도 우리가 도하할 것처럼 요란스럽게 행동하라!”
*
아이신은 바타르와 함께 붉은 강의 하류에서 강을 건너 보고는, 지금이 그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제국 병법서에 나와있는 그대로구나.’
대족장 야르삭의 붉은 강 대첩을 구전으로만 전해들은 산야족들과 달리.
솔라리온 제국에서는 붉은 강 전투의 흐름을 생존자들의 입을 빌려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 가을과 초겨울의 사이 어느 시기에, 일시적으로 강의 상류가 얼어붙어 하류의 유량이 줄어드는 시기가 있다. 야르삭은 이 시기에만 도하가 가능한 지점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나, 제국의 장군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야르삭은 주도면밀하게도 다른 두 지점에서 강을 건널 것처럼 시끄럽게 위장하여 제국과 왕국의 경험 많은 노장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이 붉은 강 대첩은 단순히 제국과 왕국의 패배만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제국 병법서의 수많은 병법 이론들을 새로 정리하게 해 준 중요한 전투였다.
그리고 아이신은 회귀 전, 동쪽 변방을 순찰하다가 마침 첫 서리가 내릴 무렵 이 강을 실제로 건너보아 병법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본 적도 있었다.
‘이상하군. 어째서 제국 사람들이 아는 것을, 아버지와 다른 족장들이 모르는 거지?’
어쨌거나 이 강을 지금 시기에 건널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
아이신은 아침이 되자마자 아이엘란과 아이덴에게 말했다.
“아이덴, 아이엘란. 곧장 아버지께 돌아가렴. 돌아가서, 아버지께는 그냥 전사들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한 후에 우리 부족의 전사들 열 명 정도를 데려오도록 해.”
“우리 부족의 전사들만?”
“아무래도 나와 손발이 잘 맞는 전사들이 좋을 것 같으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해. 여기서 한 나절 더 걸릴 테니까.”
“알았어, 형.”
“주인님. 혹시 급한 일인가요?”
“아무래도 그렇다. 최대한 빨리 부탁하마.”
“알게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인님이 시키신대로 전사들을 빨리 데려오겠습니다.”
그렇게, 아이엘란과 아이덴은 전속력으로 아이막의 본진이 있는 북쪽으로 출발했다.
첫 서리를 맞은 붉은 강 주변의 날씨가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하늘은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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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 중앙 산야족 내전(5)(여기까지 무료입니다)
아이덴과 아이엘란은 한 나절을 열심히 달려, 저녁 무렵 아이막의 본진에 도착했다.
“아버지!!”
“아이덴이 아니냐. 네 형과 같이 주변을 살펴보러 가지 않았었느냐?”
“맞아요 아버지. 형에게서 전언이에요.”
“아이신이?”
“전사 열 명을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전사 열 명을?? 다른 말은 없더냐?”
“손발이 잘 맞도록 우리 부족의 전사들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급하다고도요.”
아이막은 아이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딱히 의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사냥신의 계시를 통해 듣는 아이다. 분명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어차피 이번 사냥에 참여한 연합의 전사들은 다 합쳐서 이백 명 가까이 된다.
그 중에서 겨우 열 명이 빠진다 해도, 전황에 별다른 지장은 없다.
아이막은 큰 의심 없이 자기 부족의 전사 열 명을 아이덴과 아이엘란 편에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이막 연합의 족장들은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 맹주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음? 무슨 일이냐?”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
교대로 야간 경계 임무를 맡겨놓은 전사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족장들이 잠을 자는 막사로 뛰어들어왔다.
“놈들이 강을 건너려 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어서 가 보도록 하자.”
아이막과 족장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붉은 강으로 가보자, 과연 자디란 연합의 전사들이 절반쯤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놈들이 이른 시간에 우리가 방심할 줄 알고 도하하려는 모양입니다.”
“맹주! 놈들을 격퇴합시다.”
“물론입니다. 전사들은 들으라! 놈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일제히 활을 쏜다!!”
- 피피피피핑!!!
아이막 연합의 전사들이 맹렬히 화살을 쏘아대자, 놈들은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맹주. 저것이 보입니까?”
“으으음···”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부터, 강 건너편에 요란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멀어서 자세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오전부터 계속해서 깃발의 수가 늘어나고 있소이다.”
“놈들이 근방의 다른 부족을 더 끌어들인 걸까요?”
“이곳으로 도하를 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 거라면,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합니다.”
오전부터 깃발의 수가 자꾸 늘어나더니, 오후에는 아예 강 건녀편까지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 둥! 둥! 둥!!
- 와아아아아아아!!!
적들의 함성소리와 더불어, 북을 치는 요란한 소리에 아이막 연합 전사들은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교대로 잠을 자며 하루 종일 놈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그렇게 하루를 겨우 보냈는데.
다음날 오전이 되자마자 남쪽 도하 포인트로 보내놓은 전사 하나가 다급히 말을 타고 달려왔다.
“맹주님!! 큰일입니다!! 놈들이 밑에서 도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이번에는 타르야 족장과 나르가 족장이 직접 전사를 따라 반나절 남쪽의 도하 포인트로 재빨리 말을 달렸다.
그곳에 도착한 타르야 족장과 나르가 족장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 저게 다 무엇이냐??”
“강 건너편에 뿌옇게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저게 대체···”
강 건너편은 거리가 꽤 있기 때문에 벽을 넘어 시력이 좋은 나르가 족장도 정확히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전사들의 함성소리와 요란하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저것은 분명 말들이 움직이면서 피어오르는 먼지였다.
그리고 그 규모는 어림잡아 백이 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럴 때가 아니오. 당장 맹주에게 알려야만 하오!!”
“놈들이 대체 어디에서 전사들을 이리도 많이···!!”
타르야 족장과 나르가 족장은 소스라치게 놀라, 전사들의 방비를 단단히 점검한 후 본진으로 돌아갔다.
“맹주!! 큰일났소!!!”
“자디란 놈들이 붉은 강 동쪽의 다른 부족들을 모두 포섭하기라도 한 모양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선 진정하고 말을 해주십시오.”
아이막은 타르야 족장과 나르가 족장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적의 수가 그렇게나 많다니···”
“깃발의 수와 말발굽 소리 등으로 보면 남쪽에도 백이 넘는 전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의 전사들은 최소한 이백은 넘는 것처럼 보이고 말입니다.”
“다 합하면 전사의 숫자가 우리의 2배 가까이 되는 것 아니오??”
아이막은 그러나 상황을 냉정히 파악했다.
“일단 진정하고 대비하도록 합시다. 자디란 놈이 아직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부족들을 끌어들였다 해도, 승산은 아직 우리에게 있습니다.”
“으으음···그것은 그렇소만···”
어차피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아이막 연합은 굳이 강을 건너줄 이유가 없다.
오히려 급한 것은 적사슴 사냥터를 차지하지 못한 자디란 연합.
그리고 강을 건너는 적을 막을 때는, 한 명의 전사가 능히 열 명의 전사를 막아내고도 남는다.
“놈들이 두 곳에 그렇게 많은 전사를 배치해 놓은 것은, 아마도 두 군데 모두에서 일시에 도하하려는 심산일 겝니다. 그러나 어차피 두 곳 모두 우리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 화살만 쏴도 놈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어나갈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론이오. 우리가 너무 당황했구려.”
아이막은 그래도 조금 불안했는지 남쪽에 서른 명의 전사를 새로 보내었다.
이로서 아이막 연합 이백의 전사들은 본진에 백 명, 남쪽 도하 포인트에 육십 명, 북쪽 우회 루트 곳곳에 서른 명이 배치되었다.
아이막 연합의 대비는 분명 완벽했다.
그럼에도, 자디란 연합이 두 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을 건널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통에, 그들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
같은 시각.
자디란 연합은 두 곳의 포인트에서 당장이라도 강을 건널 것처럼 온갖 부산을 떨고 있었다.
“결행일에 맞추기 위해서는 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된다. 그때까지 모든 전사들은 전력을 다해 놈들의 혼을 빼 놓아라!!”
아이막 연합이 예상도 하지 못하는, 훨씬 남쪽에 도하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그쪽으로 이동하여 도하할 수는 없다.
자디란 연합 전사들의 숫자도 어차피 이백 명 정도.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도하를 해 봤자, 한 나절을 달려 놈들에게 쳐들어가면 결국 같은 숫자로 싸워야만 한다.
‘대족장 야르삭이 상대했던 적은 제국와 엘프 왕국 놈들이었다. 놈들은 우리의 기마 궁술에 취약한 데다 험한 산지를 달리는 말들을 따라잡지도 못했겠지만, 아이막 놈들은 그리 호락호락 않지.’
같은 ‘숲 사람들’끼리의 내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적들도 모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승산이 높은 것은, 그냥 더 많은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여기에 앞 뒤로 놈들을 포위하여 섬멸한다면 금상첨화이고.
‘그런 의미에서 벨루지아 대부락의 도움을 받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이백의 전사와 우리 쪽 이백의 전사가 앞 뒤에서 놈들을 포위한다면, 놈들은 힘도 쓰지 못하고 우리에게 짓밟히리라.’
벨루지아 산하 부락의 전사들은 북쪽에서 내려와야하기 때문에 이동에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고려하여 확정한 결행일이 3일 후 저녁.
그래서 자디란 연합은 혹시라도 아이막 연합이 비밀스러운 도하 포인트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온갖 소란을 떠는 것이다.
마침내 결행일 전날 오전이 되었다.
자디란 연합의 족장들은 원래 도하가 가능한 두 지점에 전사들을 스무 명씩 남겨두고, 단단히 당부했다.
“지금부터 내일 저녁까지, 쉬지 않고 강 주변에서 말을 몰아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라. 그러다가 내일 저녁이 되면 일제히 도하하여 합류하면 된다.”
“옛!”
도하가 가능한 남쪽까지 이동하는 것만 한 나절.
저녁이 되면 그 곳에서 야숙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면 그 때 도하를 시작해야하는데, 그때까지 계속 아이막 연합의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디란 연합의 이 작전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이막 연합에서는, 자디란 연합이 원래 알려진 두 곳의 도하 포인트를 통해 언제든 도하할 거라고 굳게 믿게 되었으니까.
“숲을 통해 신속히 남쪽으로 이동한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놈들의 부락을 마음껏 약탈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막 연합의 눈에 띄지 않게.
자디란 연합의 전사들은 각각 도하 포인트에 이십의 전사들만을 남겨두고 한 나절을 달려 남쪽으로 신속히 이동을 시작했다.
*
아이신은 혼자 남은 뒤, 전사들이 야영을 할 만한 곳과 매복을 할 만한 곳들을 찾아냈다.
“솔직히 적들이 굳이 이곳으로 도하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조건 대비는 하는 것이 옳다.”
아이신은 제국 사관학교에서 제대로 병법을 공부한 몸이다.
아군이 예측하지 못하고, 적들은 알 수도 있는 이런 지형은 언제든 변수가 될 수 있는 지형.
그러니 이곳의 지형을 알고 있는 자신이 대비해야만 한다.
“갈대가 우거진 것이 매복하기에는 제격이군.”
강폭이 넓어지고 유속이 느려지는 하류 지역은 갈대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아이신이 전사들의 야영지와 매복 포인트들을 점검하고 있으려니, 아이엘란과 아이덴이 전사 열 명과 함께 도착했다.
“주인님! 말씀하신 대로 전사들을 데려왔습니다!”
“잘했다. 아이덴, 아이엘란.”
아이신은 도착하여 의아해하는 전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다른 족장님들은 잘 모르시는 모양이지만, 이곳에서도 사람이 걸어서 강을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래?”
“과연 아이신이구나.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는지 원.”
“하지만 본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인데···적들이 이곳을 안다 하더라도 너무 멀어서 굳이 이곳으로 오겠느냐.”
“어디까지나 우리는 만약을 위해 이곳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조를 반으로 나누겠습니다.”
아이신은 강가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전사들이 몸을 숨기고 쉴 수 있는 야영지를 만들었다.
그 후, 갈대가 우거진 갈대밭에 전사들의 몸을 숨기고 하고, 계속해서 강 저편을 주시하도록 했다.
‘다른 전사들은 벽을 넘지 않았으니,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무조건 내가 경계를 서야만 해.’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아이신은 아침에 경계를 마치고 야영지에서 푹 잔 후,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저 멀리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곳은 다른 두 곳에 비해 강폭이 넓은 데다 안개까지 옅게 끼어있어. 내 시력으로도 건너편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렇게 3일째가 되던 날.
아이신은 전날처럼 저녁부터 갈대밭에 숨어 경계에 한창이었다.
어느덧 새벽이 되어 깜깜했던 어둠이 조금씩 겉히고, 동이 트기 직전 무렵···
- 첨벙···첨벙···
- 첨벙···첨벙···
아이신의 예민한 감각이, 요 이틀 동안은 들리지 않던 수상한 물소리를 포착해냈다.
“아이엘란. 다른 전사들을 모두 깨우도록 해라. 깨워서 곧장 무장을 하고 이곳에 매복할 수 있도록 전달하거라.”
“예, 옛! 주인님!!”
드디어, 자디란 연합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그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 第六計 聲東擊西(성동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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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