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0화
도령의 시선과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지부장의 시선이 따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을 확인한 지부장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으니 거기에 있는 것이 부르기를 시험의 돌.
이곳 지부의 명물이었기 때문이다.
시험의 돌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특별한 기믹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모험가 파티가 커다란 돌이 상식 이상으로 단단해 혹시 무언가 있나 싶은 맘이 들어 고생하여 가져왔으나 단순히 크고 단단한 돌이란 게 밝혀지면서 버려졌고 모험가 등록소의 넓은 공터에 폐기하기 전 잠시 두었던 커다란 돌덩이였다.
한데 그게 정말로 아주 크고 단단하며 어차피 폐기해야 할 것이니 모험가 지망생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데 써보자 싶었던 거다.
그리고 한두 번이 아닌 일 년이 넘도록 모험가 지망생들의 모듈에서 기인한 능력을 받아내고도 멀쩡하여 이곳의 명물이 된 것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지망생이요 첫 걸음을 내딛기 전의 모험가 수준으로는 결코 부술 수 없는 돌.
그 흔적만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있는 탑에서 캐어 온 엄청나게 크고 단단한 돌.
그렇게 크고 단단한 돌덩이는 무려 5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켰고 거기에 흥미가 생긴 드래곤. 그래 무려 드래곤이 재생 마법을 걸어주면서 지금의 '시험의 돌'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는 시험의 돌은 웬만큼 '물리력'에 자신있는 이가 아니라면 선택하지 않았으니 도령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수준급의, 탑의 심층을 목표로 할 정도로 대단한 네크로맨서라면 사령술에 기반한 마법으로 돌을 대번에 부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강력한 고위 언데드인 데스나이트 등을 부려 단칼에 두 조각으로 쪼개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고위 네크로맨서의 이야기였지 결코, 결코 모험가로서의 첫 걸음도 내딛지 못한 초보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초보 네크로맨서의 부식 마법으로는 저것의 표면조차 부식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시체를 언데드로 일으킨다 하여도 그 느리고 약한 피지컬로는 애초에 이야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각성하고 얼마 되지 않은. 그래서 사령기조차 터무니없이 부족할 네크로맨서는 그러니까 말 그대로 최소한의 사령술을 쓸 수 있다는 것과 언데드를 일으키기라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밖에 어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철저하게 대기만성형으로 당장 성과를 내는 것이 불가능할 네크로맨서가 도대체 뭘 믿고 시험의 돌을.
"……어?"
의문으로 그득했던 지부장의 얼굴이 멍청해져서는 입을 헤 벌렸다.
그것은 막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도령을 비웃으려 했던 예의 젊은 모험가 무리도 다르지 않았으니 믿기 어려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츠츠츳-
도령의 손 위에 시커먼, 그러니까 마나가 아닌 사령기가 뭉쳐 있었다.
마나와 마찬가지로 체내에 깃드는 사령기는 평범하게는 이렇게 구체화되지 않는다.
모듈의 힘을 빌려 능력을 사용할 때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임의로 '지구의 인간'이 구체화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저, 저거?!"
그러니까 이건 틀림없이 모듈의 힘이어야 했고 '마법'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의 형태에 모두는 네크로맨시와 함께 또 하나 귀족 모듈로 분류되는 아주 유명한 모듈을 동시에 떠올렸으니.
"에, 에너지 컨트롤?"
"에너지 컨트롤이라고?"
바로 에너지 컨트롤(Energy control)이었다.
츠츠츠츳-!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경악한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도령의 양손에 응축된 사령기가 거칠게 일렁였다.
힘이 계속 집중되는데 크기는 전혀 커지지 않았으니 반발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츠츠츠츳!
도령은 그렇게 모인 사령기를 두 팔로 주욱 잡아 늘렸으니 그 모습이 마치 힘껏 활시위를 당긴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도령은 그런 형태로 사령기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주욱 잡아당긴 사령기의 활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일렁인다.
그렇게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된 화살을 겨눈 활시위를 도령은 망설임없이 놓았고.
훅-
그 어떤 폭발음도 없이 검은 화살은 깔끔하게 시험의 돌을 꿰뚫었다.
네크로맨시도 무공도 아닌, 제 3의 방법으로.
* * * *
웅성웅성-
모험가 등록소의 로비가 벌떼라도 쑤시고 지나간 뒤인 듯한 꼴로 웅성였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구멍이 뚫린, 드래곤이 건 재생 마법의 힘으로 서서히 메워지고 있는 시험의 돌에 향해 있었으니 그 구멍을 만든 도령에 관한 이야기로 웅성이는 것이었다.
"와, 진짜 역대급이네."
"그러게 말이야. 자신있는 이유가 있었어."
에너지 컨트롤.
말 그대로 에너지를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모듈인데 이 모듈에서 말하는 에너지가 마나와 그 아래 하위의 힘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해당 모듈을 귀족 모듈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으로 대우받게 했다.
인간이 초월적인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무공과 함께 대표적인 힘인 마법이 마나를 특정한 법칙에 따라 운용하여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에너지 컨트롤은 순수하게 힘 그 자체를 의도한 형태로 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모듈이었다.
마법이 마나의 칼날을 공식에 따라 마나를 운용하여 만들어낸다면 에너지 컨트롤은 순수하게 마나 그 자체를 칼날의 형태로 컨트롤하면 그만이니 특정 분야에 있어선 에너지 컨트롤이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이었고 특히나 실전에 적합했다.
여기에 그것보다 커다란 장점이 대부분의 모듈과 궁합이 좋고 시너지가 난다는 점이었는데 오늘 온 뉴비는. 도령은 네크로맨시만이 아니라 에너지 컨트롤까지 동시에 각성한 것으로 보이니 시작부터 금수저를 두 개나 쥐어 버린 것으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도령을 험담했다가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던 이들은 창자가 꼬여 죽을 것만 같은 얼굴로 질투를 하고 있었다.
에너지 컨트롤을 보유하고 있다면 굳이 1년이나 사령기를 모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마나 링크 등을 이용하여 마나만 쌓아도 그걸로 충분히 1인분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도령과 달리 무려 1년 반을 사령기를 쌓고서야 모험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험담하던 이들의 리더였으니 뒤틀린 심성에 그렇게나 배가 아픈 것이다.
그렇게 사령기의 화살 한 방으로 지부를 뒤흔든 도령은 지금.
"계약하세!"
지부장의 성대한 대접을 받으며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말은 계약서라고 하지만 사실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모험가 쪽에 유리한 내용이 많았으니 읽을수록 모험가의 부담을 덜어준다.
대체할 수 없는, 지구 문명 재건과 발전을 위한 재화를 탑에서 파밍해 올 수 있으나 항상 수요가 부족한 것이 모험가였다.
거기에 여러가지 이유로 인류 연합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등록을 하지 않는 이가 많아 더더욱 부족한 것이 등록 모험가였는데 이번에 대형 신인이 스스로 계약하겠다며 찾아와 도령의 맞은편에 앉은 지부장은 싱글벙글한 얼굴이다.
지부의 실적이 곧 그의 실적이기도 했고 나름 인류의 발전을 위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 더 그랬다.
그래서 이보다 친절할 수 없는 얼굴로 지부장은 하나라도 더 챙겨주기 위해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물었다.
"그래, 자네 내정된 클랜은 있는가?"
클랜(Clan).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 모험가들의 집단이다.
처음에야 아무것도 모른 채 목숨을 걸고 주먹구구식으로 탑에 도전해야 했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생기고 체계가 갖춰지면서 모험가들은 집단을 이루었다.
하나보단 둘이, 둘보단 더 많은 인원이 더 많은 걸 더 쉽게 할 수 있는 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험가들의 집단인 클랜은 역량이 부족한 인류 연합을 대신하여 첫발을 내딛은 초보 모험가들을 이끌어 주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이제와서는 클랜에 드는 것이 당연해지다시피 했으니 지부장은 물어본 것이다.
도령이 어느 클랜 소속인지.
네크로맨시로도 모자라 에너지 컨트롤까지 보유한 도령의 초보답지 않은 능숙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느 대형 클랜에서 작정하고 시작부터 키운 게 아닌가하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도령은 그러한 지부장의 시선에 빙긋 웃으며.
"네. 있습니다."
있다고 답했다.
"역시. 그랬구먼. 그럼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이 정도나 되는 루키가 내정된 클랜이 없을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의 지부장에게 도령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내정된 클랜이 기존에 있는 클랜이 아닌 미래에 자신이 만들 클랜이란 것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두는 것이 귀찮은 여러가지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해 줄 것이었으니까.
이는 지부장은 물론이요 바깥의 사람들까지 당연히 그렇게 여기고 있는, 도령이 보여 준 것이 사실은 에너지 컨트롤 모듈이 아니라 도령 스스로가 직접 사령기를 다룬 것이라는 내용까지 포함해서였다.
이 시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다룬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이 시기 온전한 힘을 갖추지 않은 지금 드러내서는 좋을 게 없었으니.
앞으로의 일에 필요하기에 시작부터 두 개나 되는 귀족 모듈을 각성한 특별한 각성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로 했으나 그 이상은 아직 이르다.
도령은 그저 빙긋 웃는 것으로 많은 것을 생략했고 거기에 지부장이 친절하게 조언을 덧붙였다.
"너무 잘 알고 있겠지만 굳이 한 마디만 더 하겠네. 가능하면 파티를 짜서 모험에 나가도록 하게. 요즘 실종자가 좀 느는 추세라서 말이야."
"실종자요?"
"그래. 아직까지는 그냥 그럴 수 있다 싶은 수준이긴 한데 실종자가 요즘 들어 제법 늘었거든. 뭐가 있을지 몰라."
모험가란 직업은 낭만이란 껍질 안에 잔혹한 현실을 품고 있다.
칭송받는 대단한 모험가라 해도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스러질 수 있었으며 연차가 얼마 안 된 모험가들 사이에선 정을 주면 자신만 힘들어진다는 말이 농담이 아닐 정도로 쉽게 목숨을 잃곤 했다.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불행이 겹쳐 '실종자'가 잠깐 느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지부장은 아무래도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몬스터가 아닌 사람에 의한 소행……이라든가 말이다.
도령은 그러한 걱정을 친절하게 말해 준 지부장에게 감사합니다, 답했다.
"유의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예. 잘 부탁드립니다."
* * * *
"그래. 등록을 했구나."
"네."
"그래, 우리 아들. 크게 성공했으면 좋겠네."
"네. 그렇게 될게요."
"그래야 손주를 볼 수 있겠지."
"아."
부모님은 도령의 모험가 등록을 그저 축하해 주었다.
이미 결정된 일 괜히 나쁜 말을 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대신 앞으로의 일을 묻는다.
"회사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모험가가 되면 당연하게도 보통은 전업으로 모험을 하게 된다.
목숨이 걸린 일을 철저히 준비하여 수행하고 돌아와서는 그 성과를 정리해야만 한다.
동시에 요양을 하고 단련을 하면서 다음 모험을 준비하여야 하니 여기에만 모든 시간을 써도 부족할 지경이다.
하지만 도령은 그러한 보통의 선택을 하지 않았으니.
"계속 다닐 생각이에요."
"회사에?"
"네. 그만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도령은 그러한 모든 것을 수행하면서도 회사에 다닐 능력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다.
나중에 가치가 폭등하여 드래곤조차 아쉬워하게 될 마나 링크를 안정적으로 대량 수급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네크로맨서에게 필수적인 사령기마저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적나라하게 말해 꿀이 넘쳐흐르는 달디단 곳이 바로 직장이었으니 어떻게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가능한 동안은 직장에 계속 다닐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얼마든지 장기간의,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는 모험까지도 가능했으니까.
이 탑에서의 모험은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특수한 환경에 있었다.
11
11화
"너, 모험가 등록을 했다면서? 그것도 에너지 컨트롤 보여주고."
"하하. 네. 그렇게 됐어요."
"와, 부럽다 진짜. 솔직히 네크로맨시 각성하고 내가 남 부러워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그 생각이 많이 흔들리네."
도령의 '시작부터 듀얼 모듈'은 벌써부터 회사에 쫙 소문이 퍼져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네크로맨시 모듈을 각성해 그것만으로도 미래가 창창한 뉴비가 알고 보니 거의 동시에 어떤 면에선 네크로맨시보다 더 귀족 모듈로 취급받는 에너지 컨트롤까지 각성했다고 하니 하루아침에 소문이 퍼지고 부러운 시선을 받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 음. 왔니."
당장 사장 오명보의 도령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더욱 조심스러워진 것만 봐도 그 위상을 짐작할 만했다.
에너지 컨트롤은 그 자체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강력한 모듈이지만 다른 좋은 모듈과 조합되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니 추후 도령이 손꼽히는 지구 출신 모험가가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강자에게 약한 오명보는 미래의 강자가 될 도령에게 벌써부터 알아서 기는 것이었다.
같이 일하는 염습조의, 추후 군단을 지휘하는 네크로맨서를 꿈꾸는 예비 네크로맨서 선배들이야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령을 부러워하는 건 숨기지 않았으니 그래.
지금의 도령은 뉴비임에도 뉴비 같지 않은 존재감을 뽐내는 헤비급 뉴비가 되어 있었다.
도령이 의도한 대로 말이다.
그렇게 기대를 받는 헤비급 뉴비로서 도령은 거침없이 첫 모험의 준비를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하여 착착 해 나갔다.
특별히 신경을 더 쓴 건…… 없었다.
으레 모험가라면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할 식량과 물, 조금 더 편히 노숙할 수 있는 것들을 챙기고 그것이 든 배낭이 너무 비대해지지 않도록 한 것이 그나마 특별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첫 주말.
"다녀오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아침 전까지는 돌아올게요."
"그래. 잘 다녀 와. 조심하고."
"네."
도령은 마침내 첫 모험에 나섰다.
그것은 본래 아주 특별한 일이어야 했고 또 기대와 공포로 인한 두근거림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했지만 도령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아주 특별한 일이고 또 기대로 두근거리기는 한다. 처음이라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것이 온전한 처음이 아닌 첫 번째 삶에서의 모든 실패와 비극을 되돌리기 위한 첫 걸음이라는 것이 평범한 다른 이들의 처음과는 달랐다.
공포는. 불안으로 인한 공포는 가지지 않는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그로 인해 겁먹는 대신 오직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만을 가진다.
다시 주어진 삶과 기회.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 외의 미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첫 걸음을 내딛은 모험이 겨우 하루짜리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도령은 일반인은 달려도 따라오기 어려울 만큼 빠른 걸음으로 금새 마을을 나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향해 걸었다.
그야말로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펼쳐져 하늘과 땅이 맞닿은, 너무 아득하여 사람의 걸음으로 정말 도착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스르르-
그러나 그 지평선이 얼마 가지 않아 일렁이며 녹아내리듯 불확실해졌으니 바로 이곳이 '지구의 끝'이었다.
인류가 살던 행성 지구가 아닌 탑의 층 중 하나로서의 지구의 끝이자 탑과의 경계인 것이다.
탑에 살게 된 인류는 이것과 마주함으로써 처음으로 지구가 탑에 귀속되었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되곤 했다.
도령은 그러한 인류의 상식을 넘어선 현상인 '차원의 경계'를 망설임없이 넘었다.
사아아아아아-
물 속에 있는 듯 중력을 느낄 수 없는데 동시에 몸과 세상의 경계마저 잠시 흐릿해지니 평범하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스쳐가고 다음 순간 도령은 전혀 다른 세계에 서 있었다.
특별히 다른 건 없는 것 같았다.
숲. 전혀 다른 장소이긴 하였으나 '숲'이었으니 지구의 어딘가에 떨어진 것만 같다.
하지만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분명히 식물이지만 지구에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종(種)이 전혀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하는 '다른 세계'의 식물로 그득한 숲을 지구의 인간은 결코 몰라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 이름대로 차원의 경계를 넘음으로써. 그저 한 걸음 내딛은 것만으로 도령은 지구의 층을 벗어나 탑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도착한 것이었다.
별을 벗어난 우주도 아니고 전혀 다른 차원을 탑에서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을 수 있었다.
탑의 층 중 하나인 지구를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인 탑에 그저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또 이렇게 탑의 세계를 통하여 무공이 있는 세계나 마법이 있는 세계에도 갈 수가 있었다.
평범한 우주의 단위를 넘어 차원의 단위를 그렇게 논하게 만드는 것이 인류의 상식을 아득히 넘어서 있는 탑의 세계였고 또 그러한 탑이었기에 상식을 벗어난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시간이었다.
슥-
들어올린 도령의 손 위에 놓인 시계는 두 개의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으니 대략 30배의 속도다.
이렇게 30배나 빠르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곳. 탑의 시간이었다.
탑의 시간은 지구보다 30배나 빠르게 흐른다.
정확히는 탑의 시간이 대부분의 차원보다 30배 정도 빠르게 흐르니 이 또한 다차원으로 구성돼 있다는 탑의 특성 중 하나였다.
의외인 건 이 부분을 탑에 귀속되었던 초기 시절 인류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부분인데.
[아. 이거 나 영화에서 봤어.]
[우주에선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 있다고 했지.]
그 이유가 지구에서 크게 성공한 영화에서 우주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다르게 흐를 수 있다는 걸 알려줬기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뭐 그 영화를 도령은 본 적이 없었으나 태어나기를 탑에서 태어나 이것이 당연한 세상을 살았기에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그에 따라 지구에서는 하루이지만 탑에서는 약 한 달인 시간을 알차게 쓰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웠다.
갈 길이 멀어 아쉽지만 첫 모험부터 무언가 대단한 수확을 거두기는 어려웠다.
급하다 해서 능력을 벗어난 속도로 달리다간 크게 넘어져 다칠 뿐이다.
'초보자 구간'에 대해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면 남들은 모를 지름길이나 노하우라도 활용했겠지만…… 아쉽게도 도령은 초보자 구간을 평범하게 겪지 않아 그 부분에 있어서도 취약한 편이었다.
'무총에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렵고.'
무총(武塚). 이름 그대로 무인들의 무덤이다.
고상하게는 그렇게 부르는데 실제로는 죽여도 죽여도, 심지어 시체를 남김없이 태워 버려도 다시 나타나 덤비는 무림인 언데드들에 모험가들이 치를 떨며 '끝없는 악몽'이라 부르는 던전.
그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싸우며 무공 모듈을 각성하길 원하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이렇다 할 장점이 없어 기피되는 곳이었지만 도령에게는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그곳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곳이 어떤 곳이며 그곳의 무인들이 어떤 이들인지 천마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장은 그곳을 나아갈 힘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아쉽게도 조금은 뒤로 미루어야 했고 정공법으로 나아가기로 결론을 내렸다.
크르륵-
무성한, 그러나 앞서 무수히 오간 이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긴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이질적인 기척과 악취가 감각을 찌른다.
쿵.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녹색 피부에 한 번 부수었다가 엉망으로 재조합한 인간을 보는 듯한 괴물이었다.
키는 160도 안 되어 보이지만 근육질에 옆으로 커다란 몸이 위협적이다.
흔히 부르기를 오크.
지능은 낮지만 뛰어난 피지컬과 번식력이 특징인 '몬스터'였다.
탑의 세계엔 이렇게 몬스터라 불리는 괴물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저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오갈 수 있음에도 평범한 이들은 감히 세계를 오갈 수 없게 만드는.
설령 강력한 모험가라 하여도 감히 심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초월적인 몬스터들까지도 탑의 안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는 그렇게까지 강력한 몬스터는 아니었으나 초보 모험가라면 아차하는 순간 놈이 들고 있는 피묻은 몽둥이에 머리가 깨지는 수가 있었다.
멍청하지만 본능에 새겨진 사냥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고 타고난 피지컬 또한 초보 모험가를 압도할 정도는 되었으니까.
견습이라면 최소한 셋 이상이 조를 짜고 경험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드'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스각-
죽었다.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도령이 날린 마나의 칼날에 목이 베여서.
심층에 서식하는 상식을 무시하는 괴물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몬스터인 오크는 도령을 마주하여 그렇게 간단히 죽었고 이어 그 시체에서 푸른 마나의 알갱이가 미미하게 스며 나와 도령에게 깃들었다.
지구의 모험가들이 편하게 말하기를 '경험치'였다.
지구의 인류는 모듈의 힘으로 몬스터를 잡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었다.
잡은 몬스터에게서 스며 나오는 마나를 모듈이 흡수함으로써 강화가 되는데 그 강화 효과를 인간이 고스란히 받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사아아-
도령은 그렇게 오크에게서 빠져 나와 자신에게 깃드는 마나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스으-
가만히 서서는 깊이 호흡하며 영혼에 깃든 모듈로 가려는 마나를 심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모듈이 아닌 자신의 육체에 그 마나를 깃들였으니 모듈이 아닌 도령 자신이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모듈.
그것은 분명히 지구의 인류가 탑의 심층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이미 초월적인 힘을 깃들일 수 있는 수단을 갖추었거나 타고난 다른 세계와 지구가 경쟁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힘이자 시스템이었으나 그것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끝'에 도달할 수 없었다.
모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어야 했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도령은 한 번의 실패로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주체로써 모듈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었다.
모듈 시스템으로 평범하게는 불가능한 토벌한 몬스터에 깃들어 있는 순수한 마나를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듈에 깃듦으로써 모듈을 강화하고 모듈의 효과가 강해지니 인간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도령은 그렇게 모듈 시스템이 뽑아낸 마나를 모듈이 아닌 자신의 몸에 깃들이니 모듈을 성장시킬 필요가 없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로 이미 한 번 아득한 영역에 도달하였던 도령은 모듈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도령이 선택한 정공법은 정직하게 몬스터들을 토벌하여 경험치를 쌓는 것이었으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빠른 길이 되었다.
이곳. 마치 지구인을 배려해주듯 피라미드의 최하층 몬스터를 허무하리만치 쉽게 토벌하고서는 획득하는 마나를 모듈이 아닌 스스로의 육체에 깃들인다.
이 마나는 도령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었으며 천마신공의 단련공인 연신극기공으로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육체가 더 강해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한 달.
도령이 정공법으로 말도 안 되는 성장을 하게 해 줄 시간이었으며 그렇기에 도령은 굳이 첫 모험을 혼자 나선 것이었다.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심층 그 너머에 나아간 마스터 네크로맨서였던 도령은 그렇기에 또한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능력자였으니 회귀하여 돌아왔음에도 상식적이지 않은 그 능력과 폭발적인 성장을 제한없이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선 '솔로 플레이'가 최적인 것이다.
그렇게 3일을 인적이 드문 길을 일부러 찾아 도령이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
"응?"
12
12화
탑의 기원을 향하는 것이 아닌 지구의 모험이라고 하면 대개 파밍과 모듈 강화를 위한 여정이었다.
지구 문명의 재건에 소요되는, 비싸게 팔리는 것들을 파밍할 수 있는 장소를 목표로 삼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배회하는 몬스터를 잡는 게 골자다.
몬스터를 토벌함으로써 획득하는 마나. 그러니까 경험치를 통하여 모듈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파밍으로 돈도 버는 일석이조의 여정인 것이다.
서벅.
하지만 도령은 조금 달랐다.
초보자들이 흔히 방문하게 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난 길이 있고 오가는 이들을 몇 번은 마주치게 되는 돈도 되고 경험치도 벌 수 있는 정규 루트를 벗어나 인간의 흔적 대신 몬스터의 흔적이 그득한 길을 걷고 있었다.
인간을 위한, 인간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다져진 길이 아닌 야생의 길은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의 체력을 앗아가고 시야와 몸놀림을 제한하는 법이었으나 도령은 거침이 없었다.
팔다리가 온전한 몸은. 내외를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고 가득 채운 몸은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이런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크륵.
그 육체에 깃든 감각은 수풀 사이 사냥감을 노리고 은밀히 숨은 몬스터의 기척을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스각-
영혼에 새겨져 리셋되지 않은 힘은 몬스터의 숨통을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어 목줄을 베어 비명조차 허용하지 않은 몬스터의 사체에서 스며 나오는 기운을 도령은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하여 모듈이 아닌 육체에 깃들였으니 그 광경은 다른 이가 보았다면 인간만이 아니라 드래곤과 마족마저 뒤집어졌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단순히 지구의 인간이 마나를 제어해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탑의 시스템'에 따라 흘렀어야 할 마나를 임의로 다루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도령이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말도 안 되는 경이로운 속도의 성장을 할 수 있었기에 도령은 굳이 조용히 솔로 플레이에 나선 것이었고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스슷-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수풀 너머에서 나타난 이들은 무기를 든 채 경계하는 기색이었고 도령 또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마주했다.
"음? 사람이잖아?"
"……."
"아, 대기. 사람이었어. 사람."
하지만 그 날카로운 분위기와 경계는 곧 풀렸으니 가장 앞에 서 있던. 마치 살인자와 같은 얼굴과 기세였던 중년 남성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옆집 이웃의 얼굴로 변하며 손을 들어 흔들었기 때문이다.
"뭐야. 사람이었어?"
"하하."
백정이 살아있는 생물을 고기로 만들기 위해 칼을 들었던 것만 같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리고 친절한 이웃의 얼굴로 그들은 도령에게 다가왔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좀 놀라게 한 것 같네. 미안해, 미안해."
웃으며 다가와 먼저 사과하는 얼굴을 마주하여 나쁜 말을 하기란 쉽지 않다.
도령은 마주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모험가는 항상 그렇게 경계하는 게 옳죠."
"하하!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혼자야?"
남자는 물으며 주위를 스윽 둘러본다.
마치 일을 벌이기 전 목격자가 없나 살피는 것만 같은 행동이지만 다르게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얼마든지 보일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정규 루트도 아닌 으슥한 곳에서 마주하게 된, 그것도 혼자 있는 젊은 모험가라니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네. 혼자입니다. 신나게 몬스터를 잡다 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
"아, 그랬구나. 그런데 혼자서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고? 대단하네."
"아! 쟤 걔잖아. 이번에 그 듀얼 모듈."
뒤에서 누군가가 기억났다는 듯 소리쳤다.
그 말에 도령과 마주하고 있던 중년 남자 또한 아, 하는 얼굴로 손을 탁 쳤다.
"너구나! 이번에 네크로맨시랑 에너지 컨트롤 동시에 각성했다던."
"벌써 소문이 다른 데까지 퍼졌나 보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네크로맨시랑 에너지 컨트롤인데 그럴 수밖에 없지. 이야, 그렇구나. 듀얼 모듈이면 이해할 만하지. 솔로잉도."
중년 남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도령을 흘긋거린다.
그리고 물었다.
"어때. 할 만해?"
"네, 뭐."
"음……."
제아무리 귀족 모듀을 두 개나 각성했다 해도 첫 모험을 혼자 나선 이상 제법 힘든 것들이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 도령에 중년 남자는 순간 입을 우물거렸다.
"어, 그래도 말야.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는 게 더 편하고 경험치도 많이 벌 수 있지 않겠어? 게다가 요 근처에 가다 보면 괜찮은 파밍처도 있는데 같이 가면 더 많이 벌 수 있거든. 어때?"
"글쎄요……."
도령은 파티 플레이 제안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중년 남자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너 정도 되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만하지. 그래도 말야, 같이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거든. 우리 전도유망한 루키님이랑 친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알려줄 수 있는 것도 많고 말야. 이를테면…… 너 식량은 충분히 챙겨 왔어?"
"음……."
* * * *
도령은 중년 남성의 파티에 임시로 합류했다.
일곱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상당히 붙임성이 좋은 이들로 보였다.
도령을 설득하여 임시로 함께 다니게 된 그 순간부터 이것저것 도령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말야, 보통은 저쪽 길로 가는데 이쪽 길로 가면 몬스터를 덜 만날 수 있단 말이지. 몬스터야 잡을 수 있다면 최대로 잡는 게 좋지만 이런 길도 있다고 알아두면 나중에라도 요긴하게 쓸 일이 있지 않겠어?"
"그렇네요."
"저놈. 저놈은 보기랑 다르게 시력이 좋지 않아. 대신 청력이 좋으니까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면 의외로 안 싸우고 지나갈 수도 있어."
모험가의 노하우라는 건 그 자체로 자산이 되는 법이라 클랜원이 아니고서야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그런 노하우를 아낌없이 도령에게, 뉴비에게 알려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리고 식사 시간.
"어때?"
"먹을 만하네요."
"하하! 그거 극찬 맞지?"
도령을 파티에 끌어들인 이유가 되었던, 한 달을 모험하기 위한 충분한 식량을 가진 그들은 저녁 시간 도령을 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요리를 만들었고 그것을 대접했다.
도령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웃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은 그러니까…… 분명히 아주 좋은 모험가들로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둘러앉은 자리에서 도령이 물었다.
"이 길로 더 들어가면 그 던전이 있단 거죠?"
"맞아! 원래는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곳이 아니라구?"
"우리 미래의 대모험가님이니까 몰래 알려주는 거야? 하하핫!"
그들은 아주 좋은 던전이 있다고 했다.
몬스터들도 그리 까다롭지 않은데 비싸게 팔리는 것들이 제법 있는 던전이라고.
그런 곳을 도령과 친분을 쌓기 위해서, 또 조금 더 편히 파밍하기 위해서 알려줄 겸 파티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뉴비라고 하지만. 네크로맨서로서는 기대할 수 없지만 에너지 컨트롤 모듈을 지닌 원거리 딜러로서는 충분히 도령도 한 몫을 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오오, 그래. 이거지."
"역시 에너지 컨트롤이구만."
실제로 도령은 에너지 컨트롤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으로 파티의 전투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고 말이다.
"수고했어. 내일 하루만 더 고생하면 도착할 거야."
던전으로 향하는 길은 정규 루트와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고 좁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해 과연 이렇게나 구석지고 으슥한 곳이라면 아는 이가 드물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길이었다.
실제로 이틀차인 오늘까지 단 한 명의 다른 모험가도 만날 수 없었다.
"피곤할 테니 먼저 자."
"네. 감사합니다."
늦은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두 명의 불침번을 제외한 모두가 잠에 들 시간이 되었다.
도령은 그들의 배려로 마지막 순번에 배정되었으니 지금부터 이른 새벽까지 계속 잘 수 있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 있다 해도 뉴비는 뉴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할 수밖에 없을 거라 그들은 생각했고 그 생각처럼 도령은 머리를 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두 명의 불침번은 그런 도령의 상태를 확인하고선 모닥불에 마른 잎처럼 보이는 것을 넣었다.
타닥. 타다닥!
불이 조금 거세졌다.
그리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는데 그것이 도령이 잠든 곳에까지 퍼졌다.
평범한 연기였다면 제법 매캐한 냄새로 인해 깰 수밖에 없었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 연기는 색깔과 달리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지 않았으니 도령은 반응이 없었고 두 불침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일을 대비하여 들고 있던 무기를 꼬나쥔 채 느긋하게 걷는 둘은 도령과 처음 마주 했던 때의, 생물을 고기로 해체하기 위한 백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으-
그러한 모습으로 도령의 앞에 선 그들 중 한 명이 망설임없이 칼집 채로 칼을 내리쳤으니 도령의 머리를 깨부술 기세였고.
터억.
도령의 손에 칼이 막혔다.
"……어?"
도령은 잠이 든 것처럼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한데 거기서 귀신같이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각도로 팔이 나와 칼집을 받아냈으니 도령의 머리를 내리친 놈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놈의 면상에 역으로 칼이 박혔다.
꽈직!
도령이 칼집을 쥔 손을 힘주어 밀자 손잡이 부분이 마치 망치처럼 놈의 면상을 찍은 것이다.
놈은 거대한 충격에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나자빠졌다.
그리고 잠시의 텀도 두지 않고서 자신의 것이 된 칼을 도령이 옆으로 휘둘렀으니 빠아악.
쿠당탕탕!
관자놀이를 거세게 얻어맞은 놈이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선 먼저 당한 놈과 거의 동시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둘을 그렇게 가볍게 제압한 도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주변에서도 기척이 있었으니.
"이야, 우리 루키 위험한 놈이었네."
느긋하게 감탄하며 일어나는 중년 남자를 포함한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불침번을 서던 둘이 도령을 죽이려다 역으로 당하는, 평범한 파티였다면 대번에 뒤집어졌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너, 알고 있었구나?"
그들이. 그들 전체가 바로 요 근래 실종자들을 만들었던, 피해자들을 죽여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 살인자 집단이었으니까.
그들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습에 실패한 이들을 때려눕히고서 빼앗은 검을 든 도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 연기 꽤 잘 했는데?"
정말로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친절한 선배 모험가로서 도령에게 잘 대해 주었으니 의심받을 만한 요소라곤 하나도 없었을 텐데.
"정말로 궁금해서 말야. 어떻게 안 거야?"
앞으로 참고해서 더 철저하게 일을 진행해야 하니까.
그런 의도로 묻는 중년 남자를 마주하여 도령은 스으, 사신의 기척을 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나 피냄새가 지독한 곳에 데려왔으면서. 몰랐기를 바란 거야?"
13
13화
"하! 이 젓만한 새끼가 되도 안한 무게를 잡네."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꽤나 컸고 그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허세가 묻어나고 있었다.
피냄새가 지독하다는, 그냥 들으면 뜬구름잡는 소리나 다름없는 도령의 말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이 정말로 피해자들을 죽여 묻어 버린 곳이었으니까.
철저하게 뒤처리를 하여 피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 정말로 그들에겐 그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으나 사신의 기척을 닮은 도령의 목소리가 언급한 피냄새가 마치 숨죽이고 숨어 있던 그들을 발견한 사신의 시선이 향한 것만 같아서.
마치 다 알고서도 일부러 이곳까지 따라온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그로 인한 동요와 공포를 숨기기 위해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허세로 몸을 크게 부풀려야만 했다.
"끄으으."
"이, 씨발……."
거기에 중년 남자에게 힘을 보태듯 도령에게 얻어맞고 나자빠졌던 둘이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두 놈 중 칼의 손잡이에 찍혔던 놈의 면상이 서서히, 느리지만 분명하게 회복되고 있었으니 도령은 놈이 치유력이나 재생력과 관련된 모듈을 각성한 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당했던 둘은 그러나 그렇게 몸을 일으켰고 백정의 얼굴이 되어선 뿌득 이를 갈았으니 일곱 명의 살인자가 도령의 정면을 반원 형태로 둘러싸고선 노려 보았다.
"죽여 버린다, 이 새끼야."
"아니.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씹어먹어 주마."
유치하고 진부한 그 말은 실제로 그렇게 해 온. 사람을 끔찍하게 죽여 온 살인자들의 말이었기에 끔찍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끔찍함은 도령을 전혀 뒤흔들지 못했으니 도령은 고요히 서 있었고 살기등등한 일곱 살인자들은.
"……."
덤벼들지 않았다.
승리를 확신하고 도령을 찢어 죽이고 싶어 몸이 달아올라 있음에도.
당장이라도 도령을 어떻게 할 것이며 무조건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얼굴이었음에도 놈들은 즉시 덤벼들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었고 도령은.
탓!
역으로 먼저 망설임없이 그저 자신을 둘러싸고만 있던 놈들 중 하나에게로 쏘아졌다.
"……!"
관자놀이를 얻어맞았던 놈이었는데 몸을 일으키긴 하였으나 회복이 덜 되어 자세가 엉망이던 놈은 심지어 경계조차 느슨했으니 설마 도령이 먼저 달려들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고.
뻐억!
갈비뼈에 때려박힌 도령의 주먹에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허물어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며 내부에까지 충격을 주었으니 결코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놈을 완전히 뒤로 하고 도령은 한 걸음 강하게 옆으로 내딛었다.
쿠웅!
평범한 한 걸음이 아닌 강하게 내딛은 그것은 무인(武人)의 일보(一步)였으니 파생된 힘이 퍼지지 않고 고스란히 관절과 근육을 거쳐 도령의 주먹에까지 이어졌고.
꽈아앙!
뻗은 도령의 주먹은 바로 옆에서 비딱하게 서 있던, 치유나 재생 관련 모듈을 지니고 있을 살인자의 가슴에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충격을 때려박았다.
뭐지.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네크로맨서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에너지 컨트롤을 쓰는 원거리 딜러였는데?
아니, 애초에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는 거지?
"씨, 씨발! 죽여!!"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완전히 예상 밖의 상황에 혼란에 빠졌던 중년 남자가 그렇게 외쳤을 때엔 면상에 이어 가슴팍까지 으스러진 놈이 썩은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가고 그 옆의, 중년 남자의 바로 옆에 있던 살인자의 무릎이 도령에게 걷어차여 박살나고 있던 때였다.
빠각.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턱을 얻어맞은 놈이 넘어가고 중년 남자의 칼이 도령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표정은 어설픈데 검의 궤적은 깔끔하니 검술이나 무기와 관련한 모듈을 각성한 놈인 것 같다.
다만 그 모듈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고 심지어 모듈을 지닌 놈이 완전히 글러먹었으니 그러한 검이 '무림인'인 도령에게 닿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고.
콰직.
중년 남자 또한 앞서의 놈들과 다르지 않게 무릎이 박살난 뒤 가슴팍이 함몰되어 바닥에 엎어졌다.
이어 남은 셋도 다르지 않은 꼴로 바닥에 엎어졌으니 그들은 앞서의 자신감과 우위에 있던 일곱이란 수가 참으로 무의미하게도 처참하게 제압당했다.
도대체 무얼 믿고 그리도 당당했는지 어이가 없을 만큼.
"끄으으……."
그나마 개중 극심한 고통에 앓는 소리라도 낼 수 있는 두 놈의 시선이 나자빠진 놈들 중 하나를 향했다.
그 시선엔 분명히 원망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으니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놈의 탓으로 돌리는 감정을 도령은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바로 놈이 살인자들의 자신감의 근거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놈에게 능력을 일정 시간 무력화할 수 있는 약품 같은 걸 제조할 수 있는 모듈이 있었다는 거다.
모듈에는 전투, 예술만이 아닌 다양한 효과의 모듈이 있었으니 개중엔 상태 이상 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 물품을 만들 수 있는 모듈도 있었고 살인자들 중 하나가 그러한 모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물품을 이용하여 그동안 이 제대로 된 실력도 갖추지 못한 살인자들은 손쉽게 모험가들을 죽일 수 있었던 거다.
하나, 혹은 둘. 본래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을 숫자의 파티까지도.
친절한 얼굴로 이것저것 다 알려주며 속없이 착한 모험가의 얼굴을 하고서 다가가 자연스럽게 음식 등에 능력을 무력화하는 약품을 섞어 먹이고선 효과가 돌면 학살한다.
모듈의 힘을 잃은 모험가는 그저 몸이 조금 강한 인간일 뿐이며 특히 이곳 초보자 구역을 모험하는 이들은 모듈없이는 결코 모듈이 있는 모험가를 이기지 못하니 그들은 마음껏, 압도적인 우위에서 그 끔찍한 학살을 자행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들은 즐겁게 도령을 난도질하는 미래를 확신했다.
도령이 아무런 의심없이 약품을 섞은 음식을 먹고 경계조차 하지 않고 잠들기까지 했으니까.
귀족 모듈인 네크로맨시와 에너지 컨트롤을 동시에 각성했다고는 하나 뉴비다.
네크로맨시는 애초에 지금 단계에서 크게 경계할 필요도 없고 그나마 위험할 수 있는 에너지 컨트롤 또한 약품에 의해 먹통이 되었을 테니 아무것도 못하는 애새끼 하나를 처리하는 건 식후 운동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에 수면향까지 피웠으니 잘 손질된 식재료를 다루는 것보다 쉬운 일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그런데 도대체 지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수면향이야 억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음식을 처먹었는데 왜. 왜 저렇게 날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한 것이 네크로맨시도 에너지 컨트롤도 아닌 '체술(體術)'이라는 게 가장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무공일 것이다.
무공이 아니고서야 나름 전사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듈을 갖춘 그들 일곱을 이렇게나 허무하게 제압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듀얼이 아니라 트리플이었다고? 모듈이?'
세 개의 모듈을 단시간에 각성한 모험가가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모듈을 무력화하는 걸 먹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작동한단 말인가.
정말로 이 새끼가 약품을 잘못 만들었던 건가?
그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 중 하나가 제조한 약품은 잘못되지 않았으며 놀랍게도 지금 정상적으로 도령의 체내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작동 원리는 모듈과 사용자의 연결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으니 모듈 없이도 온전히 모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령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누구라 해도 그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 그들의 잘못이라 하는 건 가혹하겠지만 불합리는 아니었다.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살인자들에게 합리와 불합리를 논하는 건 사치를 넘어 오히려 죄라 해야 할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도령은 그 인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들을 망설임없이 끝내려 하였으나.
"…묘한 놈이 굴러들어왔구나."
쾅!
소리가 도달하는 것과 동시에 들이닥친 거대한 충격에 주욱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파르르-
"……."
팔이 통제에서 벗어나 떨린다.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지 않았다면.
연신극기공의 단련으로 몸에 깃든 특별한 내공인 연신기(鍊身氣)로 늦지 않게 팔을 보호하지 못했다면 부러졌을 것이다.
그렇게 떨리는 팔이 전생에서의, 억지로 그 기능을 하도록 붙였으나 허무하게 떨어졌던 때의 기억을 자극하였으니 도령은 꾸욱.
주먹을 힘주어 쥐어 떨림을 없애며 흔들리는 정신 또한 바로 잡고서 고개를 들었다.
쿵.
거기에는 거대한 인간이 있었다.
2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키가 무색할 정도로 살덩이가 덕지덕지 붙은 인간이.
도령은 눈썰미로 그자가 40대 정도의 남자라 파악했다.
거기에 눈밑이 시커멓고 머리털 또한 듬성듬성 빠져 있는 것이 탁기(濁氣), 그러니까 좋지 않은 기운에 잠식당한 상태라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
"…너였구나."
"뭐라?"
"니가 바로, 저놈들을 부리던 원흉이었구나."
살인자 놈들을 마주하여 살피면서 도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왜'였다.
놈들이 왜,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가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살인은 목격자가 없는 한 밝혀질 일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차원을 넘는 과정에서 그나마 지구에서는 쓸 수 있게 된 전자기기가 박살이 나 무용지물이 되다 보니 그 구조가 간단한 녹음기조차 모험에는 쓸 수가 없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살인이란 위험한 일이었고 여러가지로 부담도 큰 일이었으니 그것을 감수할 만한 이득이 있어야만 했는데 놈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와 달리 인간이 인간을 죽여도 마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었으니 이쪽은 애초에 논외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지구는 이미 몇십 년 전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을 거다.
살인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그것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노릴 만한 것이라면 재화였는데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도령을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노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굳이 친절한 모험가 선배의 가면을 쓰고서 이렇게 으슥한 곳까지 유인하여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전리품조차 챙기지 못한 도령을 노릴 이유가 말이다.
그래서 생긴 의문이, 지금 저 비대하고 거대한 인간을 마주하여 해소되었다.
본래는 저렇지 않았을. 단순히 과식을 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몸.
그리고 그 안에서 날뛰는. 도령이기에 꿰뚫어 볼 수 있는 내부의 서로 섞이지 못하고 울룩불룩 제멋대로 날뛰는 탁하디 탁한 기운.
그것은 뱃속에 집어넣었으나 채 다 소화하지 못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이 독이 되어 나타난 부작용이었으니 도령은 그러한 능력과 부작용을 보이는 힘을 알고 있었다.
"너, 흡성대법을 익힌 놈이구나."
"……!"
14
14화
"……하."
놈의 목소리는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대담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크게 놀랐기 때문에.
도령의 말대로 놈은 무림의 금기 중의 금기였던 흡성대법을 익힌 무림인이었다.
흡성대법(吸星大法).
기본 골자는 타인의 힘을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로 삼는 무공이다.
모듈 시스템이 아닌 무공으로써 강해지는 무림인은 흡성대법이란 마공(魔功)을 수련함으로써 상대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
판타지 쪽에 비슷한 것을 찾자면 사람의 피를 빨아 양분으로 삼는 뱀파이어(Vampire)가 있다.
흡성대법에 당하면 피땀흘려 모은 내공을 빼앗기는 건 물론이요 진원진기, 그러니까 생명력의 원천까지 빨리게 되면 목숨을 잃고 그 시체는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니 말 그대로 사람의 고혈을 빨아 자신의 힘으로 삼는 것으로 터부시되는 무공이었고 익힌 자는 사람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놈은. 마골이란 이름의 놈은 무림에서 도망쳐 지구층까지 온 것이었으니.
"무림에서 흡성대법을 대놓고 쓰면서 설치기엔 나약하니 이렇게 지구 근처에 숨어서 잔챙이들을 부려 모험가들을 노린 거였구나."
"놈!"
꽈아앙!
도령이 그것을 정확히 짚어내자 분노하여 짐승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충격파를 쏘아냈다.
한 번 도령을 거세게 뒤흔들었던 그 충격파는 다름 아닌 장풍(掌風)이었다.
손바닥을 통하여 뿜어내는 내공이 물리력을 가지고 상대를 덮치는 것이었는데, 도령에게 밀려든 것은 마치 폭탄이 폭발하며 발생한 힘처럼 난폭하고도 거대하여 막아도 막아낸 것이 아니었다.
촤아아아아악!!
어떻게든 정통으로 맞지 않고 비껴냈으나 일부의 힘만으로도 몇 미터나 날아가야 했으며 그러고도 해소하지 못한 힘에 또 몇 미터나 되는 고랑을 만들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이미 그릇이 넘칠 정도로 흡수했구나.'
어지간한 고수라 해도 흉내내지 못할 어마어마한 힘이 담긴 장풍이었다.
애초에 장풍이란 것 자체가 내공을 유형화하고 체외로 발출하여 물리력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만 구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무림에서 고수(高手)라 불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했다.
도령이 가늠하길 놈은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림인이란 움직임만 보아도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 놈의 수준은 결코 높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어지간한 고수는 압도해 버릴 수 있는 위력의 장풍을 날렸으니 바로 흡성대법의 힘이다.
깨달음없이 내공을 발출할 수 있기까지.
그리고 그렇게 발출하는 내공이 담긴 장풍의 위력이 어지간한 고수를 압도해 버릴 수 있게 되기까지 도대체 놈은. 놈은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은 것일까.
내공에 그치지 않고 몸뚱이가 저렇게 비대해질 정도가 되기까지 얼마나.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어야 했을까.
놈의 안에는 희생자들에게서 빨아낸 생명의 힘이 그렇게나 그득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터질 정도로 가득.
쿠구구구구구궁-
그렇게나 터질 듯 가득한 내공을 일으킨 놈의 기세가 일대를 뒤흔든다.
마나와 다르지만 비슷한 힘인 내공을 유형화하고 그것으로 물리력을 증폭할 수 있는 무림인은 이미 초인이다.
비록 마골이 깨달음이 아닌 흡성대법의 힘에 기대어 그 내공을 다루는 것이 미숙하다 하여도 힘 자체로 작은 천재지변과 같으니 그러한 힘을 잘 알고 있는 듯 도령에게 당하여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살인자들에게도 희망의 빛이 깃든다.
네크로맨시에 에너지 컨트롤, 심지어 무공이라는 힘까지도 지니고 있는 도령이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하고 벌레처럼 짓눌릴 미래를 확신한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마주한 놈은 불합리 그 자체의 이곳에 있어선 안 될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사람을 먹고 또 먹어 괴물이 된 놈, 마골이 내공의 기세로 도령을 짓누르며 말했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을지도 관심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네놈이 나의 신공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양분이 될 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먹으면 자신의 흡성대법이 완성될 것이라고.
콰앙!
그리고 쏘아진 장풍은 굉음만큼이나 대단하고 빨라 대번에 도령을 놈이 원하는 대로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그것은 거짓말처럼 반 걸음 옆으로 물러난 도령을 스스로 빗겨간 것처럼 빗나가 뒤에서 폭발하였으니 놈의 눈이 커지게 만들었고.
"잘못 알고 있네, 너."
"건방진 놈!"
쿠웅!
놈이 분노하여 강하게 내딛는 걸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뻗은 손에서 연달아 장풍이 쏘아진다.
고오오오오오-!
하나만으로도 도령에게는 치명적인 목숨의 위협이 몇 개나 밀려들었다.
그 목숨의 위협은, 유형화된 기운은 그러나 눈으로는 제대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충격파였으니 도령은 감각을 최대한 벼려내 곤두세워야만 했다.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는 거대한 트럭이 모습을 감춘채 몇 대나 밀려드는 것만 같다.
평범한 이였다면 그러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짓눌려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위협.
그러나 도령은 그것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선명하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일체의 흔들림없이 몸을 움직였다.
스으-
가장 먼저 한 발을 뒤로 물리며 강하게 지탱하니 디딤발로 삼는다.
이어 두 손에는 연신극기공으로 쌓은 내공인 연신기(鍊身氣), 몸을 지탱하고 보호하는 기운을 최대한 두르고서 충격파를 공을 받듯이 받아낸다.
콰드득!
콰드득!
찰나 가해지는 무시무시한 힘에 내딛은 발에서부터 허리, 어깨, 손목에까지 엄청난 부담이 가해지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회귀 후 단련하는 매 순간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섰던 경험과 그로써 얻게 된 육체에 대한 확신이 그 충격파를 찰나 받아낼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로써 자연스럽게 팔을 뒤로 당겨 이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충격파를 끌어당기는 순간 힘의 흐름은 도령의 수중에 있었으니 허리를 자연스럽게 틀며 한쪽 손의 힘을 완전히 풀어 충격파를 빗겨냈다.
꽈아아아아앙!!
정면에서는 받아낼 수 없는 힘의 흐름을 유도하여 빗겨낸 것이다. 무공으로써.
그렇게 목숨을 위협하는 하나의 충격파를 빗겨낸 도령의 팔다리엔 상당한 부하가 걸렸으나 찰나의 쉴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고오오오오오-!
마골이 쳐낸 장풍은 아직 몇 개나 더 남아 있어 도령을 곤죽으로 만들기 위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하나라도 맞는 순간 치명적이었다.
몸이 으스러져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도령은 그러니까 육체의 비명을 무시하고서, 그럼에도 육체가 버텨줄 것이라 믿으며 몇 개의 장풍을 더 쳐내야만 했으니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요구였지만.
꽈과과광!!
도령은 망설임없이 움직였고 그것을 해냈다.
회귀 후 단련해 온 연신극기공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흐음."
그러한 도령의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목숨의 위협에 대한 저항을 마골은 관찰하는 태도로 훑어보고 있었다.
도령에게 있어선 몇 개나 되는 목숨의 위협이 놈에게는 그저 가벼운 손짓 몇 번에 불과했다는 듯한 여유를 가지고.
도령이 결코 놈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한 눈으로. 그리고 말하였으니.
"그래. 저 하찮은 것들이 당할 정도의 능력은 있는 놈이었구나. 제법 명문의 무공을 익힌 태가 나."
슬쩍 놈의 시선이 훑는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는 일곱의 살인자들의 눈에는 이제 희망이 완연하다.
그저 손짓 몇 번으로 도령을 압도한 놈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나 고루한 무공을 믿고서 이렇게 설친 것이 너의 명을 재촉하게 되었구나."
"고루하다, 고."
"그래. 너에게선 보이는구나. 여직 그 낡아빠진 고루한 관습을 버리지 못한 멍청한 것들의 흔적이."
그것은 이곳 탑의 일부가 된 무림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지구가 그러했듯 무림 또한 멸망에 휩쓸렸고 탑에 귀속됨으로써 존속될 수 있었다.
그래. 존속하는 것이 아닌 존속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림을 지켜내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의 구제로 무림은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한 멸망과 존속의 과정에서 그들은 무에 대한 신념이 꺾이고 말았으니 무림의 멸망을 가져왔던 '마족(魔族)'을 상대로 참패한 것이 무림인이 그동안의 무(武)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충격으로 뒤틀려 버린 무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武)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 있었으니 마골은 비웃은 것이다.
무라는 것은 결국 힘이요 그 힘으로 적을 쳐죽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데 그 시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무엇인지 모를 무공'을 익힌 도령의 실력은 보아줄 만한 것이었으나 결코 그에게 있어 위협이 될 수는 없었으니.
그러나.
"그것은 어디의 무공이냐."
그럼에도 묻는다. 도령의 무공이 무엇인지.
놈의 눈에는 욕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실대로 고하고 그 비급을 바친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주도록 하마."
기실 놈이 가진 흡성대법은 그저 내공을 늘리는 법에 관해서만 기록되어 있었으니 그 내공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무공'을 탐내고 있는 것이었다.
"……핫."
그러한 욕심이 그득한 얼굴을 도령은 비웃었다.
"감히 분수에 넘치는 걸 욕심내네. 너."
"네놈이, 죽는 것보다 끔찍한 꼴을 당하고 싶은 모양."
"감히 나의 무공을 고루하다고 한 것. 또 감히 나의 무공을 욕심낸 것. 무엇 하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추악한 것의 추태이고 또 용서할 수 없는 죄야."
절묘하게 놈이 아가리를 벌린 순간의 맥을 칼날처럼 끊은 도령의 눈동자가 끝없이 깊어진다.
"하지만 그 죄를 이번에 단죄하는 건 내가 아니야."
"미쳐 버린 것이냐."
그렇게 말하며 마골은 또로록 눈을 굴렸다.
혹시라도 주제도 모르고 지껄이는 놈의 지원군이 온 것은 아닌가 하고 살핀 것이다.
하지만 놈이 보아야 할 것은 뒤로 뚫린 길이 아니었다.
사아아아아아-
놈은 저지른 죄가 묻힌 땅을 보아야만 했다.
"무, 무어냐!"
검은 어떤 것이 땅에서 스며나와 퍼지기 시작했다.
연기? 물? 아니. 그것은 보아도 도저히 알 수 없었으니 알 수 없었기에 공포였다.
놈에게는 그것이 마치 지옥으로 붙잡은 것을 끌고 들어가는 손이 무수히 뭉쳐 형체를 잃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은 것을 끌고 가는 공포로 보였다.
그 공포에 잠시 짓눌린 사이 어느새 검은 것은 놈의 발목을 뒤덮고서는 단단하게 옭아맸으니 발작하듯 몸을 뒤틀어도 떨어지질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쿠우우우우웅-!
놈은 내공을 폭발시켰다.
가장 자신 있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내공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꽈과과과과과광!!
그러나 그것은 땅만을 깊이 뒤엎을 뿐 일대에 깔린, 어느새 주변을 다 덮었으나 분명히 발목을 덮을 정도일 뿐일 텐데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같은 검은 것을 어쩌지 못했다.
스르륵.
대신 뒤엎어진 땅에서 드러난 것 하나가 검은 것 위에 떠올랐으니 그것은 두개골이었다.
놈이 잡아먹은 사람의, 희생자의 두개골.
그 두개골에 시커먼 기운이 깃들었으니 희번득, 눈이 되어 놈을 응시했다.
"으아아아아아악!!"
놈이 공포에 미쳐 비명을 내지르며 날뛰었으나 그렇게나 자랑하던 내공의 힘은 두개골을 부수지 못했다.
꽈과과과광!!
대신 검은 것으로 뒤덮인 그 아래 땅이 폭발하여 패였다. 패이고 또 패이니 그 안에 묻혀 있던 놈이 잡아먹었던 이들의 뼈가 하나둘.
스르륵-
검은 것의 위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검은 것의, 공포의 한가운데에 서서 도령은 나직이 말했다.
"너는 죽을 거야. 아주 끔찍하게. 니가 저지른 죄로. 그리고 죽어서도,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그리고 마침내 부르니 그것은 이곳에 깃든 너무나 끔찍하고 또 비통한 원한(怨恨)을 가진 영혼들.
"일어나세요, 여러분."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네크로맨시(Necromancy)가 그들을 일으켰다.
15
15화
김도령.
탑의 층 중 하나가 된 지구에서 태어난 도령에게는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던, 영혼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던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니 시스템이 이름 붙이길 도령(道靈)이라고 하였다.
영혼을 인도하는 자.
이 영혼을 인도하는 자는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영혼을 볼 수 있었고 또 영혼을 접할 수 있었으니 그 능력이 미숙한 어린 시절부터 도령은 영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태생이 선하였던 도령은 하다못해 영혼이 좋은 곳에 가기를 빌어주고자 관련한 회사에 취직한 것이었으니 도령이 네크로맨시를 각성한 것은 필연이었고 또, 그저 강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써 시체를 다루었던 네크로맨서들과는 전혀 다른 네크로맨시를 구사하는 네크로맨서가 되는 것 또한 필연이었다.
흡성대법을 익히고 무림에서 도망쳐 지구의 근방에 숨어든 놈은 물론이요 놈이 부린 살인자들도 몰랐다.
이곳에 도달하기 전부터 이미 도령이 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승천하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배회하는 영혼들을 보고 있었음을.
너무나 고통스럽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의 원(怨)과 한(恨)이 이곳에 그득하여 도령을 뒤흔들고 있었음을.
그러니까 도령이, 사실은 한참 전부터 더없이 분노하고 있었음을.
사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분노한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네크로맨시가, 사령기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원과 한을 실체화한다.
일대를 가득 채운 원과 한이 알 수 없는 검은 것 위로 떠오른 뼈에 깃드니 피와 살을 대신하여 형상을 이루고 몸을 일으킨다.
하아아아아…….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분명한 사람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인간이라기보단 형체가 불확실한 귀신에 가까웠고 실제로 그러했으니 원귀(寃鬼).
너무나 억울하고 끔찍하게 죽어 그 한으로 승천하지 못하고 귀신이 된 이들이 일어난 것이었고.
"으아아아아악!!"
마골과 알 수 없는 검은 것 속에서 부서진 몸으로 허우적거리던 살인자들이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었다.
이제 놈들에게도 보였기 때문이다. 원귀에 깃든 피해자들의 영혼이.
피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검은 눈동자가 살인자들을 담고 있었으니 서서히, 서서히 그들에게 원귀들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들이 감히!!"
공포를 외면하기 위해 더 크게 분노한 마골이 온 힘을 다해 장풍을 쏘아낸다.
꽈과과광!
그것은 몸부림과도 같았으니 필생의 힘을 담고 있었으나.
그 장풍을 정통으로 맞은 원귀에게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였으니 놈의 눈이 찢어져라 커지게 만들었다.
도령은 그것이 굳이 의미없는 일이라 말해주지 않았다.
도령의 사령기로 실체화한 그들 원귀들을 이룬 것이 원과 한이요 그 원과 한이 너무나 크고 깊어 한낱 마골 따위의 장풍으로는 결코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것은 죄 지은 자가 그 업보에 짓눌려 삼켜지게 만드는,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심층마저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불가해(不可解)의 네크로맨시임을.
하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그러하니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거리를 좁힌 원귀를 놈들은 막을 수 없었고 피할 수 없었으니.
콰직.
으지직.
"끄으아아아아악!!"
원귀들이 놈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쿠드득.
으드득.
그것은 잠시라도 보고 있기 어려운 너무나 끔찍하고 또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도령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슬프고 또 슬프게 보였으니 인간의 영혼을 원귀로 만든 원한, 원(怨)과 한(恨)을 풀기 위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가진 마나로도 부족해 그 육신까지 놈에게 잡아먹혀 죽은 영혼이었다.
그러한 끔찍한 죽음이 승천하지 못하고 이곳에 묶인 원귀가 되게 만들었고 이곳을 떠돌게 만들었으니 지금 여기에.
영혼을 이끄는 네크로맨서인 도령의 네크로맨시가 그들을 이끌어 죄지은 자를 직접 심판할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을 유린했던 살인자들을 뜯어먹고 그들을 산 채로 씹어삼킨 마골을 똑같이 씹어삼키는 원귀들의 원과 한은 놈이 쌓은 힘보다 더 크고 깊었으니 감히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륵. 끄르르르륵!"
결국 내장이 다 파먹히고 목까지 파먹히기 시작한 마골에게서는 더 이상 인간의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꼴이 되었음에도 아직 죽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놈의 흡성대법엔 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효과 또한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놈이 부리던 다른 살인자들과 달리 벌써 죽어야 했을 상태임에도 죽지 못한 채 산 채로 뜯어먹히는 고통이 계속 되고 있으니 눈깔이 뒤집힌 놈에게선 인간의 이성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오직 죽음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니 이윽고 콰직, 마지막 남은 심장이 씹히는 순간 놈은 도리어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마침내 죽게 되었음에.
그러나 놈은 그토록 바라던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죄에서, 고통에서 도망칠 수 없었으니.
"죽음으로도 너는 도망칠 수 없어."
-으아아아아아악!!
그 영혼의 목줄이 도령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 * * *
-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마골은 공포로 미쳐 날뛰었다.
죽었는데.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왜 선명한 시야에 도령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며 목줄이 붙잡힌 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아아아악……!
그래서 그저 공포로 발광하던 놈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검은 공포에 속박당한 채 산 채로 뜯어먹히던 육체 대신 온전한 영혼이 지금 있으니 놈은 분명한 감촉이 느껴지는 도령을 짓뭉개려 하였고.
-끄으아아아아악!!
도령의 손에서 흘러나온 사령기에 뇌가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벌레처럼 기었다.
그렇게 벌레처럼 기며 다시 도령을 보는 순간 알게 되었다.
-뭐, 야.
도령의 본질. 영혼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깊이를.
영혼이 불타는 고통조차 일순 잊을 정도로 그것은 인지를 넘어선 충격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한낱 어린 인간의 영혼이 저렇게나 거대하고 깊을 수 있단 말인가.
-끄아아아아아악!!
그 영혼에서 기인한 검은 힘에 마골은 다시 도령의 영혼을 마주하지 못하고 비르적거렸다.
비르적거리며 그제서야 보게 되었다.
그보다 먼저 죽었던 그가 부리던 살인자들 또한 똑같이 고통받으며 땅을 기고 있는 것을.
그러는 사이, 살인자들을 다 뜯어먹은 원귀들이 도령에게로 다가왔다.
땅을 기는 살인자들을 지나쳐서.
하아아아아…….
도령의 앞에 서서는.
스윽.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하였으니 그것은 더 이상 원귀가 아닌 인간의 영혼이었다.
산 채로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잡아먹혔던 그들이 원한을 스스로 풀고서 사람의 영혼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해 준 도령에게 그들은 아직 온전히 않은 이성으로도 떠나기 전 감사를 표하였으니 도령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그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도령은 바라며 기원하였으니 영혼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서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사아아아아-
그들의 너무나 크고 깊은 원과 한으로써 만들어졌던 알 수 없는 검은 공포도 흩어졌다.
투욱.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 검은 구슬들이 떨어졌으니 영혼들이 승천하며 이승에 둔, 두고 간 다 풀지 못한 원과 한이었다.
그토록 깊은 원과 한을 어떻게 한 번에 다 풀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은 도령 덕분에 주어진 원한을 풀 수 있는 기회에 만족했고 도령의 축원에 남은 원과 한을 두고서 성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원과 한이 도령의 사령기에 의해 뭉쳐 형상화한 것이 검은 구슬, 형옥(刑玉)이었으니 도령은 이것을 이용하여 죄 지은 자가 죽어서도 도망치지 못할 형벌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그건……!
뇌가 타는 듯한 고통이 어느새 가시자 도령의 눈치를 보던 살인자들이 벌벌 떨었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본능으로 알았다. 저건. 저것은 결코 닿아선 안 될 너무나 끔찍한 것이란 걸.
-오, 오지마! 오지 말라고 이 새끼야!!
그래서 공포에 발악하지만 육신을 잃고 무력한 영혼이 된 놈들은 마스터 네크로맨서인 도령에게 저항하지 못했고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크고 깊은 원과 한이 뭉친 구슬이 쑤셔박혔으니.
-끄으아아아아아악!!
놈들이 가지고 있던 영혼의 인간의 형상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벗겨지고 내장이 썩어 흘러내리고 뼈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뼈만 남은 영혼이 또한 뼈만 남은 자신의 시체에 갇히니 따각. 시체가 몸을 일으켰다.
스켈레톤(Skeleton).
네크로맨서가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부리게 되는 뼈로 이루어진 언데드.
도령 또한 그 일반적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가장 먼저 일으킨 언데드가 스켈레톤이 되었다.
그러나 스켈레톤의 종(種)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으니.
사아아아아아-
살인자들의 영혼에 자리잡은 구슬에 깃든 원과 한이 올올이 풀려나오며 스켈레톤을 갑주의 형태로 뒤덮었다.
화륵!
이어 갑주에 보호받는 갈비뼈 안에 시커먼 불길이 타올랐으니 스켈레톤이 된 시체의 영혼. 그러니까 살인자들의 영혼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악!!
-끄으아아아악!!
평범한 이들은 결코 듣지 못할. 그러나 도령에게는 선명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말 그대로 영혼이 불타는 고통에 살인자들이 내지르는 절규다.
시귀화(屍鬼火).
그 시작부터 달랐던 네크로맨서인 도령이 만들어낸 네크로맨시.
영혼을 불태워 언데드에 깃들임으로써 그것을 동력으로 하니 차원이 다른 강력한 언데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영혼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내는 힘은 그야말로 격이 다른 것이다.
다만 육신에 그치지 않고 죽은 자의 영혼을 태워 만들어내는 힘이니 그 제물은 결코 평범한 이들이 되어선 안 되었는데 전생에서의 도령에겐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죄 지은 영혼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도령이 심층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마주한 구제할 수 없는 죄인의 영혼이 너무나 많았으니 그들만으로도 도령은 시귀화를 피워 올린 무수한 언데드로 이루어진 군단을 아래에 두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 처음으로 일으킨 언데드가 바로 그 시귀화를 품은, 도령의 군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스켈레톤들이었으니 도령의 변화에 시스템이 반응했다.
띠링-!
[사용자의 모듈 스테이터스가 업데이트 됩니다]
- - - -
직업 : 마스터 네크로맨서(Master Necromancer)
칭호 : 도령사(道靈士)
메인 모듈(Main module) 1. 네크로맨시(Necromancy)
옵션(Option) 1. 도령(道靈)
옵션(Option) 2. 수육(受肉)(비활성화)
옵션(Option) 3. 군세(軍勢)
……
- - - -
네크로맨시 모듈의 세 번째 옵션인 군세가 활성화 되었다.
군세는 지구의 네크로맨서들이 목표로 하는 군단을 이끄는 네크로맨서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개화해야만 하는 옵션이었으니 이것이 있어야만 기본이 세자릿수에 양에 집중하면 네자릿수에까지 이르는 언데드를 수월하게 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단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데에 특화된 모듈도 있지만 따로 생각하는 조합이 있지 않고서야 여섯 개로 한정되는 모듈 중 한 자리를 할애하는 것보다 네크로맨시의 하위 옵션으로 군세를 두는 것이 조합상 더 나았기에 필수 옵션이 된 것이었다.
'스켈레톤들을 만들자마자 조건을 충족했다고 보는 건가.'
본래 군세는 스스로의 힘으로 스물이 넘는 언데드를 일일이 신경써서 통솔하다보면 언젠가 개화하게 되는 옵션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얼마 되지 않아, 타고난 재능이 없다면 최악의 경우 몇 년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적어도 도령처럼 이렇게 단번에 개화하는 경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처음 도령이 회귀하여 스테이터스가 업데이트 되었던 것처럼 도령의 영혼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듈 시스템이 인식하는 순간 갱신되는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띠링-!
[사용자의 모듈 스테이터스가 업데이트 됩니다]
'역시.'
하나 더 활성화되어야 할 옵션이 있었다.
16
16화
화륵.
두개골 안 휑한 안와에 검은 불꽃이 눈동자를 대신하여 일렁인다.
그 아래를 보면 검고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시커먼 갑주가 스켈레톤의 뼈를 감싸고 있으니 마치 검은 불꽃의 갑주를 두른 듯하다.
그리고 갑주 아래 갈비뼈에 보호받는, 본래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시커먼 불꽃이 자리잡고 영혼을 태워 해골 병사에게 힘을 공급하니 평범한 스켈레톤과는 격을 달리하는 능력을 지닌 도령의 해골 병사. 도령의 군단의 토대가 되는 귀화병(鬼火兵)이다.
전생에서는 이 시기에 그 어디에도 없던 존재로 나중에. 조금 더 나중에 천마신교가 완전히 변질되어 마교(魔敎)로 전락하였던 때에.
또 용제의 사체가 오염돼 마물이 되어 드래곤 산맥을 태워 없앴던 때에.
[이대로면 넌 죽을 것이다, 도령아.]
[하지만 나는 너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니. 그럼에도 기필코 나아갈 너의 가능성을 믿으니 전수하도록 하마.]
[천마신공을.]
도령이 천마에게 천마신공을 전수받고 마교가 아닌 천마신교의 28대 교주이자 천마의 대리자로서 심층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였을 때 군단의 가장 앞에 서던 것이 귀화병이었다.
이곳에 있기엔 너무나도 불합리한 죄악이었던 마골과 그 일당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불합리한. 그야말로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내린 천벌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지금 이 시기에, 그것도 지금의 도령이 일으키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는 힘이었으나 전생보다 더 빠르게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선 필요한 힘이었으니 머지 않은 때에 일으키게 될 거라고 도령은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첫 모험부터.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첫 모험부터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을 만나고 귀화병으로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다.
전생에 어렴풋이 언젠가 실종되는 모험가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억이 없었으니 유야무야 넘어간 일 같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다.
아마도. 화가 나지만 아마도 전생에서 흡성대법을 익힌 놈은 성공적으로 힘을 키워 무림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허나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도령에 의해 이렇게.
-끄으아아아아악!!
죽어서도 그 영혼이 불타는 업보에 이 이상없을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귀화병은 정말로 눈에 띈다.
여덟의 귀화병 중 마골의 뼈로 일으킨 특히나 덩치가 커 몬스터의 사체로 만든 건 아닐까 싶은 외형만이 아니라 그 자체.
영혼을 태워 동력으로 삼은 평범한 스켈레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스켈레톤들은 도령을 사정을 모르고 보면 시체를 넘어 영혼마저 착취하는 악당으로 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너무 큰 주목을 받게 될 것이고 그 관심은 온전한 힘을 갖추지 못한 지금의 도령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 테니 아직은 공개적으로 거느리기엔 이르다.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고도, 이러한 언데드들을 줄줄이 데리고 다니는 건 실제 생활하는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애로 사항이 생긴다.
그리고 마치 그런 부분을 배려하는 것처럼 시스템은 다수의 언데드를 일으킨 네크로맨서의 모듈에 한 가지 옵션을 확정적으로 부여하여 주었으니.
[사용자의 모듈 스테이터스가 업데이트 됩니다]
- - - -
직업 : 마스터 네크로맨서(Master Necromancer)
칭호 : 도령사(道靈士)
메인 모듈(Main module) 1. 네크로맨시(Necromancy)
옵션(Option) 1. 도령(道靈)
옵션(Option) 2. 수육(受肉)(비활성화)
옵션(Option) 3. 군세(軍勢)
옵션(Option) 4. 불사자의 무덤
……
- - - -
바로 군세에 이어 활성화된 불사자의 무덤이라는 옵션이었다.
불사자의 무덤.
권속이 된 언데드들을 네크로맨서가 따로 보관할 수 있도록 모듈 시스템이, 그러니까 탑이 부여해 주는 이공간이다.
쉽게 말해 전혀 다른 차원의 격리된 일정 공간을 네크로맨서가 언데드를 보관할 수 있는 개인 공간으로 탑이 제공해 준다는 거다.
몇몇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정말 게임 속의 것처럼 그저 편하게 여기고 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이건 사실.
[정말로 터무니없단 말야, 탑은.]
도령의 기적과도 같은 인연 중 하나였던, 무려 용제(龍帝)가 터무니없다 말할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차원이란 초월 존재인 드래곤은 물론이요 심층에 가장 가까운 층이라고 하는 마계의 고위 마족들조차 어쩌지 못하는 것인데 탑이라는 정말로 불가해한 '어떤 것'은 그걸 일개 지구인 네크로맨서들의 편의를 위해 모듈 시스템에 엮어 넣어서는 제공하는 것이다.
스르르르-
그러니까 도령의 발밑에 열린 검은 늪 같은 것으로 총 여덟 마리의 귀화병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다른 차원에 이동, 보관할 수 있게 해 주는 불사자의 무덤이란 옵션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심층의 괴물들마저 다루지 못하는 차원이란 걸 임의로 재단하여 개개의 인간에게 부여하는 터무니없는 현상이었고.
[…이러면 연구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렇지, 도령?]
도령은 제대로 불이 붙은 용제와 함께 연구함으로써 이렇게나 터무니없는 불사자의 무덤이란 옵션까지도 조금, 정말로 조금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에 이르고 드래곤들을 이끌고 다스리던 용제가 함께 하였으니 모듈로 가능한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도령조차도 차원과 관련된 불사자의 무덤만큼은 겨우 흉내내는 데에 그쳤다는 말이다.
한데 그렇게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고 제법 여러가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개중 가장 유용한 것을 꼽자면.
'인벤토리 다시 획득……인가.'
바로 게임에서는 흔하게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흔하지 않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인벤토리'란 것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본래 불사자의 무덤은 오직 권속으로 거느리게 된 언데드만을 수납하고 또 꺼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 기능만이 허락된 모듈이었다.
한데 도령은 그걸 용제의 연구를 돕고 함께하며 이치의 끝자락이나마 이해하였으니 원하는 다른 형태로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게임에서 흔히 보는 인벤토리의 기능이었던 거다.
다른 능력들과 달리 인벤토리는 불사자의 무덤이 활성화되어야만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불사자의 무덤이 이번에 활성화 되었으니 도령은 거기에서 기반한 전용 이공간의 활용이 가능해졌고 앞으로 무겁고 큰 배낭을 짊어질 필요없이 이렇게.
스르르-
일렁이는 공간에 모험에 필요한 것들을 잔뜩 넣어 둔 커다란 가방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늠하기로 커다란 도시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격리된 이공간이 인벤토리의 넓이였고 어떤 것을 수납하고 꺼내는 데에 제약도 없었으니 활용도는 앞으로 무궁무진할 것이다.
전생에선 심층에 나아간 때에나 이게 가능해졌는데 그러한 심층의 상식을 벗어난 것들 중 하나였던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인벤토리'를 이제는 첫 모험에서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다.
"후우……."
도령은 그 인벤토리가 잘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회귀하고서 처음으로 피로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몸이 지쳤다.
본래 이곳을 오가는 이들에게는 천재지변과 같은 마골이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육체를 한계까지 혹사하고 고위 네크로맨시까지 사용한 게 원인이다.
경이로운 속도로 힘을 쌓아가고 있는 도령이었고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도령이었지만 아직 그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엔 요원하다.
그것을 한 번의 네크로맨시로 텅 비어 버린 사령기를 통해 느끼며, 더 강해질 필요성을 느끼며 도령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이 아니다.
승천한 이들의 남은 육신. 그러니까 유골이나마 정리하여 한데 모은 것이었다.
능숙하게 뼈들을 구분하여 분류하고 깊이 패인 구멍 중 하나에 두었다.
그리고 부러진 나무를 손질하여 덮으니 아쉬운 대로 잠시 유해를 둘 만한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을 이 자리에서 묻는 대신 임시로 두고서 도령은 마골이 나타났던 방향으로 향했으니 나아간 끝에는 양쪽의 절벽이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긴 공간에 너저분하게 얼기설기 엮은 거처가 있었다.
다름 아닌 마골과 놈이 부리던 살인자들이 쓰던 공간이다.
흡성대법을 익히고 무림에서 도망친, 그렇게나 눈에 띄는 놈이 무림인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지구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을 리 없었으니 마골은 이곳에 거처를 두고 머물렀던 것이다.
거처의 바깥에는 모험가들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산 채로 잡아먹었던 끔찍한 흔적이 그득했다.
어차피 누구도 오지 않을 으슥한 곳이라 생각했는지 피조차 제대로 지우지 않았는데 그런 곳에 다 정리하지 않은, 혹은 놈들이 제것인양 쓴 피해자들의 물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더욱 보는 이를 분노하게 만든다.
도령은 그것들을 당장 정리하는 대신 잠시 그대로 두고서 더 안으로 들어갔다.
조악하게 만든 가재도구가 몇 있는 걸 제외하면 인간이 아닌 짐승이 살고 있었던 것만 같은 더러운 공간을 지나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게 잠금 장치를 철저하게 해 둔 문이 보였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마골이 개인적으로 머문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이었으니 도령은 에너지 컨트롤의 능력으로 마나의 칼날을 만들어 잠금 장치를 베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
역겨운. 외부보다 더 인간이 머무는 곳에서 나서는 안 될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도령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냄새를 참고서 내부를 확인했다.
'저건가.'
찾고자 했던 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본래 모험가들의 것이었을 통일감이 전혀 없는 물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의 구석.
모포로 가려진 바닥의 균열의 틈에서 낡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吸星大法]
바로 마골이 익혔던 흡성대법의 비급이었다.
익히는 순간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면 즉시 살해당한다는 그 위험한 무공을 기록한 비급이 이렇게나 하찮게 숨겨져 있었던 거다.
도령에게 무공이 고루하니 어쩌니 하던 놈이 이렇게 낡은 비급을 지니고 있는 게 어떻게 보면 우습지만 알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스승 없이 비급으로만 무공을 익히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중에, 무공을 어느 정도 깨우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으니 글자만이 아닌 글자를 이루는 '획'에서까지도 무공의 이치가 숨겨져 있곤 하는 것이 비급의 '구결(口訣)'이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스승없이 흡성대법을 비급으로 익힌 듯한 마골은 비급을 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얕은 경지로 보고 기억한 것을 스스로의 것이라 해도 결코 믿을 수 없었으니까.
도령은 잠시 서서 그 책의 내용을 훑어 보았다.
그 끝을 모를 탑의 힘으로 탑 안에 귀속된 세계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으니 읽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더욱 도령의 경우 무림의 신화 속 무공으로 여겨지는, 그리고 실제로 그리 여길 만한 아득한 이치를 담고 있었던 천마신공을 전수받았기에 구결을 통하여 흡성대법이 어떤 무공인지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어쩌면.'
문득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
17
17화
도령은 차분하게 흡성대법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초반부.
흡성대법의 비급은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입문자를 위하여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으니 도령은 확신할 수 있었다.
초반부만 보자면 흡성대법은 결코 마공(魔功)이라 부를 수 없는 제대로 된 무공이라고.
흡성대법이 대상의 기운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라면 식물이나 동물에는 물론이요 대부분에 깃들어 있는 기운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었으니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어 그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것을 결코 그 자체로 마공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칼이 그러하듯 사용자의 문제다.
그리고 마공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이론상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에서 기운을 흡수하고 또 그것을 정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한 흡성대법을 보며 도령은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으니 그것은 회귀하여 다시 주어진 삶에서 목표로 삼은 비극을 막는 것.
개중 용제(龍帝)와 드래곤의 비극을 막는 것이었다.
도령이 막아야만 할 비극 중에는 드래곤 산맥을 지워 버렸던. 용제의 사체가 마기(魔氣)에 물들어 마물로 일어나 일으킨 비극도 있었다.
안 그래도 개체가 많지 않았던 드래곤의 수가 급감하였고 심층을 공략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너무나 많은 재화들이 증발하였다.
[나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지은 영혼이니까.]
밝은 척을 하였던 용제는 그러나 결코 지우지 못할,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할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끝까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육신이 저지른 비극을 자신의 죄라 여기고서.
그런 죄책감을 안고서 결코 도령을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밝은 척을 하였던 용제를 도령은 항상 안타까워 하였고 다시 주어진 삶에서는 그 죄책감을 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려 하였는데.
이 흡성대법이 거기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몰입하여 책장을 넘겨 나갔는데 그것이 중반부에 이른 순간.
"……."
도령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거기에 마골이 사람을 잡아먹게 만든 마교(魔敎)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 * * *
무림이 멸망한 것은 무림을 침공한 마계(魔界) 때문이었다.
탑의 세계 중에선 기원에 가장 가까운. 심층의 가장 깊은 층이라는 그 마계다.
마계의 마족들은 차원에 구멍을 내어 다른 차원과 이어지는 통로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으니 거침없이 침략을 개시하였고 그 세계가 다름 아닌 무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림은 일패도지(一敗塗地)했다.
처참하게 패배하였고 멸망으로 치달았으니 절망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를 지키지 못했고 탑에 의해 멸망을 피하고 존속된 무림은 무(武)에 대한 신념과 믿음이 꺾이고 말았으니 오직 힘을 추구하게 되었고 마골은 그러한 힘을 추구하게 된 무림의 단면이라 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는.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불합리에 맞서고자 한 이들의 집단이요 가장 앞에서 가장 험한 길을 나아가며 밝은 횃불을 드는 자인 천마(天魔)를 숭상하는 천마신교는 그러한 흐름에서 빗겨나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이 믿은 것이 무가 아닌 천마였기에.
가장 앞에서 가장 험한 길을 나아가며 밝은 횃불을 드는 천마는 그 어떤 불합리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기는 자였으니 오히려 더더욱 믿음이 강해졌던 것이다.
교주님이 있었다면.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던 천마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천마는 그러한 믿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믿음이 옅어지는 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그래도. 그렇다 해도.
무림을 침공하여 멸망에 치닫기까지 온갖 끔찍한 짓을 자행했던 마족에게로 붙은 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것은 천마가 아니다.]
[저것을 천마라 하는 신녀는 더 이상 신녀가 아닌 마녀이니 찢어 죽여야만 한다!]
끝까지 천마를 믿었던 신녀를 마녀라 매도하고 마족에게 팔아넘긴, 그걸로도 모자라 천마신교를 마족을 숭상하는 마교로 전락시켜 버린 자들을 천마의 진전을 잇고 천마신교의 28대 교주가 되었던 도령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되는 것이다. 나의 뒤를 이어 천마신교의, 스물여덟 번째 천마이자 교주가.]
[그리고 천마신교를 더럽힌 마교를 토벌해다오.]
그러니까 도령의 눈은 흡성대법의 중반부에 눌어붙은 마교의 흔적에 그토록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이다.
인간이면서. 그리고 무림인이면서 마족에게 붙어 내부에서부터 천마신교를 좀먹어 들어가고 있을 자들이 흡성대법을 마공으로 뒤틀어 놓은 내용이 중반부부터 계속된다.
마골이 인간이면서도 내공을 흡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을 잡아먹는 짓을 벌였고 그럼으로써 힘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가 흡성대법의 중반부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도령은 알았다.
천마신교를 내부에서부터 좀먹어들어가고 있는 자들.
마족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비극들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는 걸.
그러니까 판단했다.
이 일을 여기서 끝내선 안 된다고.
* * * *
도령은 처음 계획과 달리 며칠도 되지 않아 지구로 귀환했다.
탑이 아닌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귀환한 셈이다.
그렇게 지구로 돌아온 도령은 즉시 모험가 등록소의 데스크로 가 말하였으니.
"탑에서 살인자들을 만났습니다. 지부장님에게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으니 즉시 연락을 좀 부탁드립니다."
"아, 그 네? 네!"
즉시 본론부터 말한 도령에게 데스크의 직원은 잠시 당황했다가 '살인자'란 단어에 화들짝 놀라서는 크게 답하고서 지부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직원이 나와 지부장실로 안내했으니 도령이 들어서자마자 지부장이 묻는다.
"살인자들을 보았다고?"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심각한 얼굴의 지부장을 마주하고 앉아 도령은 차분하게 일을 설명했다.
"혼자 사냥을 하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의도해서 그런 장면을 연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부장은 주의를 주었음에도 혼자 사냥을 간 도령의 행동을 지적하여 말을 끊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이야기는 계속됐다.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챙겨 온 식량을 요리해서 나누어 주었고 도움이 될 노하우도 이것저것 알려주더군요. 참 만나기 드문 좋은 선배들 같았습니다."
"……."
전형적인 일을 진행하기 전 밑작업을 하는 자들의 행동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나쁜 자들이라면, 말이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의심스러운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아마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불길한 느낌 때문이었을 겁니다.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불길함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아서 찬찬히 살펴 보았고 지부장님이 말씀해 주신 요즘 늘었다는 실종자들과 관련된 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위험하지 않았나?"
"믿는 구석이 있었거든요."
"그랬군."
지부장은 생각했다. 앞서 생각과 달리 자신의 조언을 도령이 무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믿는 구석이란 게 도령이 들어가기로 내정돼 있다는 클랜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지부장에게 도령의 말이 이어진다.
"의심하면서 살펴보니 의심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좋은 던전이 있는데 거기에 왜, 굳이 아는 이가 없다는 던전을 생판 모르는 남인 나에게 알려주겠다는 걸까. 내가 미래에 잘 나가는 모험가가 될 테니 미리 친분을 다져 두고 싶다는 말이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좋다는 던전이 너무나 으슥한 곳에 있는 것도 그래서 아는 이가 없다는 쪽으로 납득이 되는 게 아니라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날 유인하려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 가려던 차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 말인가?"
도령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던 지부장이 바로 물었다.
"정찰이라면서 나갔던 사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서는 제가 듣지 못하게 무어라 무어라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똑같이 하얗게 질려서는 뭐라 말 붙일 틈도 없이 어딘가로 달려가 버리더군요. 저를 내버려 두고서."
"……허."
도령의 말대로라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진 거다.
살인자들이 그렇게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작업을 하던 도령을 두고서 달려갈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지부장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저는 그 뒤를 쫓았습니다. 아쉽게도 중간에 흔적을 놓쳐서 하루를 헤매야 했고 그래서 뒤늦게서야 현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피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피, 피바다?"
"네. 피바다요. 열 명 가까운 사람이 피를 사방으로 쏟아낸 것 같았습니다."
"으, 으음……."
갈수록 이야기가 어려워진다.
살인자들이 모종의 일이 생겨서는 도령을 팽개쳐 두고 달려갔는데 뒤늦게, 하루 늦게 쫓아가 보니 현장이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는 거다. 심지어.
"거기에 그 살인자로 추측되는 자들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살인자들이 없었다고?"
"네. 대신 실종자들로 추측되는 사람들의 유해와…… 유품이 있었습니다. 살인자들이 거점으로 삼은 곳 같았습니다."
이 정도 되면, 도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살인자라는 건 확정이었다.
한데 도령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그리고, 이게 있었습니다."
"음?"
도령이 '반이 찢겨 나간 낡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또 본론부터 말했으니.
"살펴보니까, 아무래도 마족의 수법이 기록된 책 같았습니다."
"뭐, 뭐라고!"
지부장이 전에 없이 경악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마족(魔族)'이란 단어는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지부장을 그렇게 맨얼굴로 놀라게 할 만큼 끔찍하고 또 두려운 것이었다.
마족. 심층 깊은 곳에 있는 층인 마계에 살며 다른 층의 생명을 괴롭히고 살해하길 즐기는 끔찍하고 또 두려운 악마들.
드래곤과 천사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에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그들은 언급만으로도 지구의 인간들을 공포에 질려 굳어 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극소수의 강력한 모험가들을 제외하고서는 지구에서 그들 악마에 대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꼬임에 넘어간 인간은 그들을 부르는 흉악한 마물로 전락해 버리니 단순히 마족의 수법이 기록된 책자의 등장만으로도 지부장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심각해졌고 거기에 도령이 말했다.
"이거, 유니온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유니온? 그, 그렇군. 그래야겠어."
유니온(Union).
탑의 질서를 수호하고 협력하여 가장 깊은 곳 기원에 함께 도달하기 위하여 여러 층의, 그러니까 세계가 맺은 동맹이다.
마계를 필두로 한 악하고 강력한 것들에 대항하여 천사와 드래곤, 엘프 등 선함을 추구하는 세력이 연합하였으니 사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지구가 더 빨리 탑에 정착하고 문명을 복구해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각 세계의 자립을 응원하고 자치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탑 차원에서의 문제가 되면 개입하여 힘을 보태어 주니 마족과 연관된 일이 발생한 것 같다는 지부장의 신고에 즉시 강력한 존재를 파견하여 주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지원관님."
지부장이 꾸벅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니온에서 파견한 그 강력한 존재는 사라락, 마주 고개를 끄덕여 답례하는 행동에 흘러내리는 금발이 아름답고 또 탐스러운.
귀가 뾰족한 엘프였다.
18
18화
사라락.
마치 황금 호수의 일부를 떠다 자아낸 듯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사락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보는 이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 아래 첫눈 같은 새하얀 피부와 깊은 바다를 연상케하는 짙은 푸른 눈동자 또한 마주하는 이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그녀의 가장 큰 특징은 금빛 머리카락을 뚫고 나온 뾰족한 귀였으니 그녀는 엘프였다.
엘프(Elf). 지구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 요정족 엘프가 이곳 탑에서는 실존했다.
무림과 함께 지구에서 편의상 판타지 세계라 부르는 '제르(Jr)'에서 인간과 공존하는 그들은 마나에 대한 압도적인 친화력과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육체 능력, 그리고 긴 수명을 타고난다.
본래 그것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그들은 그러나 다른 세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멸망을 마주하여 패배한 경험으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연마하기 시작했으니 이곳 탑에서 그 재능을 긴 수명 동안 연마한 엘프들은 모두가 뛰어난 전사이자 레인저였고 또 대마법사였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인형 같은 가녀리고 아름다운, 심지어 열일곱 정도나 되어 보일까 싶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는 그 외모와 달리 어지간히 강화한 모듈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베테랑 인간 모험가라 해도 범접할 수 없는 이백 년을 넘게 산 강력한 존재였다.
사라락.
그런 엘프가 자연스레 배어나는 주위를 압도하는 존재감으로 지부장을 긴장시키며 그가 건넨 책자를 받아들어 살폈다.
사락.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조용히 책자를 넘기며 살피는 엘프 대마법사의 짙은 푸른 눈동자가 깊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이것은 끔찍한 마족의 수법이 기록된 책자가 맞군요."
"그, 그렇습니까."
"예. 정확히는 그것을 무림의 인간이 무림의 방식으로 조금 이지러뜨린 불완전한 무공이란 것입니다."
엘프는 변질된 흡성대법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이것은 마족이 제물을 잡아먹고 힘을 키우는 능력에 기반한 수법입니다. 그것이 완벽하다 해도 생물을 마족으로 전락시키는데 이것은 손을 대어 불완전한 수법이 되어 버렸으니 익힌 자는 마족도 아니고 마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그, 그 말씀은."
"…이것을 익힌 자가 살아있고 계속해서 익힌다면 이곳에 마물이 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지부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흔히 말하는 마물이 아니라 마계의 마물은 아직 그 힘이 대단치 않은 지구 입장에선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재앙이었다.
베테랑 모험가들이 최소 수십은 나서야 제법 피해를 입고서야 제압할 수 있는 정도이니 작은 도시 단위의 명운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게 마계의 마물이란 말이다.
엘프는 그러한 지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말했다.
"신속하게 대처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 현장을 조사해야 할 것 같으니 조사대의 구성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부장은 즉시 움직였다.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가장 우선하여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만큼 이곳 등록소이자 지부의 총력을 다하여 베테랑 모험가들을 수배했다.
등록 모험가가 가지는 몇 안 되는 의무 중 하나인 일 년에 두 번은 공적인 의뢰를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과 이곳 구역 전체의 위기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던 만큼 심각한 분위기에서 금방 베테랑 모험가들이 모였다.
그들은 처음엔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곧 유니온의 엘프가 함께 간다는 말에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곳이 속된 말로 '뉴비 세계'이기에 사악한 자들에게 취약한 만큼 강력한 존재가 파견이 되었고 그들 중 한 명이 엘프였기에 안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엘프를 필두로 하여 지부장까지 포함된 조사대가 출발하였으니 그 안내역으로 도령 또한 포함되었고.
저벅.
가장 앞에서 엘프와 함께 길을 안내하며 걸었다.
목적지는 모험가의 빠른 걸음을 기준으로 하여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고 마족과 마물이란 단어가 포함된 심각한 일이었던 만큼 누구도 여유를 두지 않아 더욱 빨리 도착하게 될 예정이었다.
사라락.
엘프는.
엘프족 특유의 하늘하늘한 옷자락과 부드러운 금발이 사락이는 소리를 내며 평온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빠르게 가장 앞에서 걷는 엘프는 옆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고 걷는 도령을 짙은 푸른 눈동자에 담았다.
조금 특이하여 시선이 갔다.
그녀를 마주한 인간은 그것을 드러내든 숨기든. 크든 작든 어떤 형태로든 흔들리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란 걸 수십 년 동안 탑의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또 이십 년 넘게 지구를 경험하며 그녀는 잘 알게 되었다.
한데 지금 곁에서 걷는 인간에게선 그런 게 없었다.
다른 인간들이 거센 바람을 마주한 촛불 같았다면 도령은 그러니까…… 호수에 비친 태양 같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보고 있지만 그 실체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잠깐만.'
엘프는 그리고 거기서 잠시, 정말 잠시 우뚝 멈춰 섰으니 스스로가 떠올린 태양이란 단어에 당황한 것이었다.
비유로 떠올리는 것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데 아무리 직접적이지 않다지만 그녀가. 그것도 지구의 어린 인간을 보고서 '태양'을 떠올렸다고?
처음 그녀를 마주하였을 때 잔뜩 굳고 흔들렸던 인간과 달리 그 인간보다 조금 어린 인간은 평온한 얼굴이어서 잠시 시선이 갔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곁에서 나란히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지만 우주의 드넓은 영역에 빛을 비추는 별인 태양을 떠올리다니.
그런 스스로가 당황스러운 엘프였고 그녀의 짙은 푸른 눈동자에 담기는 도령의 존재감이 커졌다.
'관심'이란 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엘프는 도령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입니다."
"플레루스틴 님이시군요. 저는 김도령입니다."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의 시선에 조금 더 관심이 짙어졌다.
엘프는 관심있는 상대와 대화를 나눔에 있어 이름을 밝히는 문화가 있었는데 도령이 그걸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개 또한 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의 인간과 달리 지구의 인간은 그러한 풍습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도령은 능숙하게 받았다.
그래서 조금은 호감을 가지게 된 채로, 그러나 공과 사를 구분하여 플레루스틴은 물었으니.
"도령. 당신이 이 책을 발견하여 중요한 증거라 생각하고 가져 왔지요."
"네."
"혹시, 이 책의 절반에 관해 더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도령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름답지만 어직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엘프가 도령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런 외형과 달리 짙은 푸른 눈동자는 마치 심해가 인간을 들여다 보는 것만 같았으니 감히 거짓을 허용하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플레루스틴의 시선을 마주하여 도령은.
"아뇨. 알지 못합니다."
흡성대법의 비급 절반을 찢어 인벤토리에 둔 도령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눈을 마주한 채 잠시 응시하던 플레루스틴은 도령에게서 거짓을 찾지 못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하얗고 기다란 검지손가락을 핑크빛 입술에 대고서 고민하였으니 찢어진 책의, 무엇이 쓰여 있을지 모를 절반의 행방이다.
흔적으로 보건대 책이 찢긴 건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고 요 며칠 사이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러니까 인간 소년의 증언대로라면 무언가 사건이 생기면서 찢겼다고 봐야 할 테니 현장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봐야겠다 생각하였고.
"여기입니다."
예정보다 더 빨리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음……."
"음."
함께 온 모험가들이 현장을 두 눈에 담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시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온 사방으로, 마치 이빨로 잡아뜯어 쏟아지게 만든 피가 대량으로 흩뿌려진 듯한 광경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 것이었다.
한데 '피를 흩뿌렸을 시체'는 조각조차 보이지 않고 오직 피만이 여기저기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공간에 흩뿌려져 있으니 기괴하기도 했다.
그렇게 참혹하고 기괴하며 끔찍한 현장에서 그들은 곧 전혀 다른 공간을 하나 보게 되었으니 도령이 수습해 둔 피해자들의 유해였다.
"저것은?"
지부장이 물었고 도령이 답했다.
"제가 수습한 피해자들의 유해입니다."
"다른 것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건드리면, 현장이 훼손되니까요. 하지만 파헤쳐진 땅 곳곳에 흩어져 있던 피해자들의 유해만큼은 수습해 두고 싶어서요. 제가 잘못한 것일까요?"
지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누가 자네의 그런 마음과 판단을 비난할 수 있겠나."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엘프 플레루스틴 또한 다르지 않았다.
도령의 그러한 마음과 행동에 오히려 또 한 줄기 관심이, 호감이 간다.
그렇게 도령이 임시로 수습해 둔 유해를 제외하고선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된 구역을 조사대는 조사하였다.
특히나 플레루스틴이 여러가지 마법까지 동원하였으니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조사가 진행 되었고 결론이 나왔다.
하나는 도령의 말대로 이들이 근래 급증하였던 모험가들의 실종 원인인 살인자들이었다는 것.
주변의 흔적이 너무나 명확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둘은 그 살인의 원인이 마족의 기술을 불완전하게 무공으로 바꾼 것을 익힌 자가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는 것.
이 또한 도령이 수습한 유해는 물론이요 거처에서 무공, 흡성대법을 익힌 자가 내공만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먹어 치웠던 흔적이 역력했다.
세 번째는…… 그들이 정말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흩뿌려진 피의 양으로 보면 평범하게는 무조건 사망했어야 했다.
하지만 모듈의 힘이 있고 무공의 힘이 있으며 마법의 힘이 있는 이 세계에서 출혈량은 사망을 확신할 근거로는 부족했기에.
더더욱 놈들의 시체 한 조각조차 찾을 수 없었으니 모종의 어떤 일이 있었고 최소한 흡성대법을 익힌 자만큼은 이곳을 빠져 나갔을 거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최악의 경우 부리던 살인자들을 흡성대법을 익힌 자가 다 먹어치우고 더욱 힘을 키워 도주했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플레루스틴이 말했다.
"광범위한 영역의 수배령을 내리고 수색대를 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수색대 말씀이십니까."
지부장이 확인하였으니 플레루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흡성대법이란 것을 익힌 자가 살아서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고 힘을 키우면 마물이 출몰하는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막아야만 합니다."
"예. 그렇지요. 조치하겠습니다."
결론은 그렇게 나왔다.
수배령을 내리고 수색대를 조직하여 흡성대법을 익힌 자를, 죽었다면 그 시체를 확인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으니 수색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도령은.
그 수색이 목표를 결코 달성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도령은 '의도대로'의 결과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극을 막기 위한 계획대로였다.
19
19화
천마신교의 기원은 한 명의 초인이었다.
타고나길 초인이었던 그는 평범하게 살고자 했다.
그러나 지방 현령의 비리를 고발하였던 그의 부모가 되려 역적으로 몰려 참수당하자 그러한 불합리의 이유를 묻고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타고난 능력을 갈고닦아 쥐게 된 힘으로 그는 고래등 같은 저택을 새로 지어 호의호식하던 지방 현령을 무릎 꿇리고 그 이유를 물었다.
현령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그의 위에 있던 성을 관리하는 고관대작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서였다고 하였으니 초인은 그 고관대작을 또 찾아가 무릎 꿇리고 이유를 물었다.
그는 또 모든 것이 천자,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에게 진상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였으니 마침내 초인은 천자마저 무릎 꿇리고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랬냐고. 왜 그러한 불합리에 나의 부모는 역적으로 몰려 죽어야 했냐고.
천자에게서도 초인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저 세상 이치가 그런 것이라고 천자는 지껄였다.
그래서 초인은 생각했다.
인간 세계의 불합리를 세상은. 하늘은 해결하여 주지 않으니 무심하고 정의롭지 않은 하늘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 이치라는 그 불합리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그것이 천마신교의 시초요 그 초인이 초대 천마였다.
그러한 천마신교의 교리는 당연하게도 불합리에 짓눌린 채 살면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민초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고 멸망 후에도 그 신념이 꺾이지 않았으니 더더욱 무림 세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니까 탑의 하나의 층이자 세계로서의 무림에서 천마신교는 흔히 지구에 알려진 그저 힘을 숭상하거나 거악(巨惡)의 상징이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반대로 절대적인 선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 만한 집단이었다.
이제는 지구의 사람들도 그러한 이미지로서의 집단으로 익숙한 천마신교.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그 천마신교 안에 유니온에 속한 모든 이들이 죽어 마땅한 악 그 자체라 여기는 악마 숭배자들이 꿈틀거리며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심지어 그것이 신녀(神女)와 함께 천마신교를 대표하고 양분하는, 천마의 자리가 오랜 세월 공백을 유지하는 동안 천마신교를 실질적으로 운영해 온 제사장(祭司長)이었다는 것을.
그 제사장이 기거하는 천마신교 내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전각 안에 얼굴을 검은 천으로 꽁꽁 감싼 이가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달려들어왔다.
천마신교의 가장 은밀한 특수집단인 잠마대(潛魔隊)의 대원은 그렇게 달려와서는 대전 가운데 부복하였으니 계단 위 상석에 앉은, 살이 뒤룩뒤룩 찐 늙은 제사장이 살집에 파묻힌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무슨 일이냐."
답답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잠마대원은 부복한 채 즉시 말했다.
"유니온의 눈이 우리에게 향했습니다."
"……뭐라?"
믿기지 않는 소릴 들은 제사장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유니온이 우리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왜?"
도대체 왜. 제사장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설명을 요구했다.
"위대한 마께서 내리신 은혜를 담은 비급과 그것을 익힌 자의 행적이 지구에서 드러났다고 합니다."
"이런 미친!"
"그것을 익힌 자와 비급 일부가 종적을 감췄고 유니온의 수색대가 조직돼 이잡듯 근방을 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저희가 먼저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나 증발한 듯 행적이 보이지 않아 사태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제사장의 살찐 몸에서 육수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게 잘 되고 있었고 또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래서 조금 욕심을 내자마자 거하게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한낱 삼류 무인 따위가 어떻게 유니온과 잠마대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이게 가능한 일인가?
"찾아라! 어떻게든 먼저 찾아 빠르게 제거해야만 한다!"
사건이 커진 지금 혹시라도 그 비급을 준 것이 제사장 일파라는 게 드러나면. 꼬리가 드러나면 평생을 쌓아온 모든 것이 끝장나는 수가 있었다.
아직 제대로 일이 반석에 오르지 않았는데.
중요한 시기인만큼 모든 것이 조그마한 변수에도 흔들릴 수 있는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제사장은 생각이 복잡하여 눈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으나 외부를 살피지 못했고 그런 제사장을 부복한 잠마대원의 어둠이 스멀거리는 눈이 몰래 훑었다.
미래가 변화하고 있었다.
* * * *
유니온의 주도로 마족의 끔찍한 기술이 섞인 무공을 익힌 자를 추적하고 수색하기 위한 조사대의 편성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마족에 대한 커다란 분노는 유니온에 속한 이들 모두가 같았고 그러한 마족의 기술을 익힌 무림인이 도주하였으며 추후 마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상황은 그만큼이나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도령은 그렇게나 빠르게 결성된, 또한 강력한 힘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 조사대가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그들이 목적한 비급도 무림인도 도령의 인벤토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흡성대법의 비급 절반과 귀화병이 된 마골은 모두 도령의 인벤토리 안에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코 목적한 것을 찾을 수 없을 테니 이렇게만 보면 도령이 악당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이로써 세상의 비극을 하나, 아니 아주 많이 막을 수 있었으니까.
찢겨 나간 비급의 절반도 그것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무림인도 찾지 못한 조사대는 그러나 마족이 연관된 이상 결코 멈추지 않을 테니 더 멀리, 더 자세하고 집요하게 조사를 계속해 나갈 것이고 사건은 계속 커져 이 시기 아무도 몰랐던 천마신교 내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의 숨통을 점점 더 옥죄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로써 도령은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던.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기 천마신교 내에 숨어 있는 악마 숭배자들이 일으킬 많은 비극을 조사대에 포함된 그 엘프가 열심히 움직여 막아 줄 것이니 그야말로 훌륭한 계획이었고 그 계획대로 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흉흉한 일이래요.
-그러게 말입니다.
-듣자하니 무림도 아주 난리가 났다던데요.
-거기는 마족 때문에 멸망할 뻔 했으니까요. 당장 또 마족과 연관된 건 다 죽여야 한다고 악마 숭배자 색출한다고 분위기가 말도 아니래요.
퇴근길에 들려오는 소식에 도령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집으로 돌아와 불사자의 무덤을 기반으로 한, 대마법사였던 엘프조차 상상도 못한 이공간인 인벤토리에서 반이 찢겨진 낡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전혀 악마의 것이 아닌 순수한 비급인 흡성대법의 전반부가 적힌 책자다.
계획을 위해 따로 챙긴 그 절반의 비급을 스으으, 호흡을 정돈하고 집중하여 도령은 정독했다.
입문자를 위해 친절하게 쓰여진 비급은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으나 도령은 한 번의 정독으로 그 이치를 꿰뚫어 보았다.
무얼. 친절하게 설명한 내용을 마스터 네크로맨서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올랐던 도령이 이해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하물며 도령은 신화 속 무공인 천마신공마저 천마의 지도 아래 배운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도령은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기운을 끌어들여 온몸을 돌게 하면서 정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게 골자야.'
흡성대법의 치명적인 단점이자 약점은 흡수한 기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였다.
혈액형으로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혈액형이 다른 피가 몸에 들어오면 멀쩡할 수가 없는 게 인간이다.
내공 또한 다르지 않아서 다른 인간의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내공이 몸 안에 들어오면 서로 충돌하여 멀쩡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림에 풀린 흡성대법이란 것들은 그걸 분리하거나 섞이지 않은 채 공존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억지로 사용하게 만드는 불완전한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마치 음식을 소화하여 그 안의 힘을 흡수하듯, 조금씩 순환하는 육체의 흐름에 포함시켜 느리지만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도령은 그러한 이치에 흥미를 느끼고 즉시 실행해 보았다.
-아아아아악!
귀화병 하나를 꺼내고서는 그 죄 지은 영혼을 태워 내는 기운을 흡성대법의 이치에 따라 흡수했다.
쿠드드득-
"……."
마치 혈관을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긁는 듯한 통증에 도령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일부러 상극이 되는 네크로맨시에 기반한 기운을 흡수한 것이었는데 과연 그래서 그런지 반발이 엄청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즉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까무러칠 고통이었으나 도령은 흔들리지 않았고 비급의 이치에 따라 그 기운을 순환하는 몸의 흐름에 담았다.
그러자 마치 오염된 물이 세월과 함께하는 흐름에 서서히 정화되듯.
전혀 다른 힘이었던 기운이 도령이 지닌 내공에 융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그리고 거기에 도령이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기분 좋은 변수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연신극기공의 공능이었다.
도령이 얻은 흡성대법의 장점은 기존 흡성대법의 부작용을 없앴다는 것이었는데 반대로 그를 위해 흡성대법의 가장 큰 특징인 급속한 성장, 그러니까 속도를 포기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동시에 안전하게 정화할 수 있는 양에도 능력에 따라 제한적이었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적인 내공심법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흡수한 기운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화 과정에 오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도령은 테스트를 위해 일부러 조금 더 상극이 되는 형태로 기운을 흡수하였음에도 예상을 훨씬 넘어선 속도로 그것의 정화를 할 수 있었으니 육체를 초월의 영역으로 이끄는 연신극기공이 움직인 것이었다.
해가 되는 외부의 요소를 거부하고 없애려 하는 건 그러니까 면역 체계와 비슷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해가 되지 않으면. 소화하고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으면 면역 체계가 아닌 소화 기관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니 도령에게는 연신극기공이 있어 면역 체계가 아닌 소화 기관이 작동하도록 해 준 것이다.
연신극기공은 초인의 무공인 천마신공을 익히고 구사할 수 있도록 육체를 초월의 영역으로 이끄는 무공이다.
그 과정에 있는 육체는. 그리고 육체에 깃든 연신극기공에서 기반하는 내공인 연신기(鍊身氣)는 어지간한 건 해가 되기는커녕 견디고 극복하여 소화해 버리도록 만들었으니 거기에는 기운 또한 포함돼 있었고 예상치 못하게 도령이 얻은 흡성대법과 조합돼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연신극기공과 조합된 흡성대법은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해 더 많은 양의 기운을 더 빨리 정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이 정도의 효과라면 차라리 또 하나의 신공이라 할 수 있었으니 도령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천마신공을 구사할 수 육체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라질 것 같다고.
* * * *
일주일 뒤. 지부장이 도령에게 연락했다.
"네, 지부장님."
-잘 지냈나, 자네. 좋은 소식이 있어 전화했다네.
20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