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20

20화

일사천리로 구성돼 즉시 임무에 착수한 조사대의 조사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규모의 확장을 논하며 사안을 벌써부터 더욱 심각하게 다루고 있었으니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서는 비교적 단순하게 사건을 생각했다.

투입된 이들의 면면이 워낙 대단했으니까.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부터 시작하여 유니온의 실력자들이 나섰는데 잡아야 할 건 아직 마물로 전락하지 않은, 흡성대법에 기대어 인간을 잡아먹는 실력이 미천한 무림인이었으니 일이 금방 끝날 거라 생각한 건 차라리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한데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신속하게 움직여 전문적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여기저기서 과거의 흔적만 발견될 뿐 그 자리에서 증발이라도 한 건지 이후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탑을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자 그들은 완벽하게 심각해졌으니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마족이 연관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조사대의 확장과 조금 더 전문적이고 광범위한 조사를 논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건의 확장 소식에 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천마신교에 숨은, 마골에게 은밀히 흡성대법을 주었을 자들의 윗선인 악마 숭배자들이 머리털이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활동이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바로 그러던 차에 모험가 등록소의 지부장이 좋은 소식이 있다며 연락을 주었기에 도령은 퇴근 후 지부장을 만나러 등록소로 향했다.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곳인 모험가 등록소는 그러나 제법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마족과 얽힌 일 때문에 모험을 나가기가 조심스러운 시기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편할 테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도령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이들이 마골에게 잡아먹혔을 것이고 더 커다란 비극이 일어났을 테니까.

이는 지부장 또한 다르지 않은 생각이어서.

"어서오게, 자네!"

"이번에 아주 큰일을 해 주었어. 이곳 지부를 대표로 감사하네."

도령에게 감사를 말했다.

"자네의 용감한 조사와 신고 덕분에 마물이 출현할 수도 있었던 사건을 미연에 인지하고 방지할 수 있게 되었어."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칭찬까지 들으니 좋네요."

"하하! 사방에 자랑해도 좋아. 자네의 업적은 인류 연합에서도 인정한 거니까."

"인류 연합에서요?"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포상도 나왔고 말이야! 자, 자네 거야. 받게!"

그리고 지부장이 건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락하여 말했던 좋은 소식. 포상이었다.

받아들어 보니 물자 교환권이다.

이 시대 탑의 일부가 된 지구에서는 귀하게 취급되는 소고기 등의 물자로 바꿀 수 있는 교환권.

어떻게 보면 돈보다 귀한 그 교환권을 받아들고서 도령은 빙긋 웃었다.

"정말 큰일을 한 게 맞나 보네요. 이런 것까지 받게 된 걸 보면."

"하하하! 그렇지. 정말 큰일을 한 거야."

지부장은 연신 칭찬을 해 주었고 그런 지부장의 태도에 도령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는 지부장실을 나와 로비로 이동한 뒤에도 계속 되었으니.

"여, 루키. 마실래?"

모험가들 중 한 명이 도령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음료를 건넸다.

"어, 감사합니다."

호의가 그득한 얼굴로 내민 음료였기에 도령은 우선 받아들었다. 다만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에 모험가는 씨익 웃으며 말했으니.

"네 덕분에 마물이 나올 뻔한 위기를 막을 수 있었잖아? 그게 고마워서 쏘는 거야."

"맞아. 부담없이 받으라구. 덤으로 밥도 사달라고 해. 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말야."

"아니, 쏘려면 네가 쏴야지 왜 내 돈으로 네가 으스대는 거야?"

"하하하!"

이번 사건으로 인해 모험을 나가기가 꺼려지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령에게 잘 했다고 말을 해 주었으며 호의적이었다.

근시안적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여 그렇게 도령에게 잘 했다 말 해 주는 그들은 그러니까 분명히 좋은 사람들이었고 도령은 자신의 선택을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에.

"칫. 그냥 신고 하나 한 걸로 뭘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게 말이야. 괜히 바깥에 나가기만 불편하게 됐는데."

초를 치는 자들이 있었으니 도령이 처음 모험가 등록소에 온 날부터 이죽이며 비아냥거렸던 바로 그 젊은 녀석들이었다.

"자네들!"

들으라는 듯 지껄인 소리였고 일반인에 비해 훨씬 감각이 날카로운 모험가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 대번에 사람들의 얼굴이 찌푸려졌고 지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다가가 혼낸다.

"내 항상 말하지 않았던가!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고! 왜 그렇게 남들의 미움을 살 소릴 고민없이 내뱉는 건가!"

"……."

파티장으로 보이는 놈의 주둥이가 삐죽 튀어 나온다.

걱정하여 해 주는 말임에도 자신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억울하다는 얼굴이었고 그것이 지켜보던 이들이 결국 한 마디씩 던지게 만들었다.

"야, 초월아. 슬슬 철 들 때도 되지 않았냐."

"너 생각해서 좋은 말 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자꾸 스스로 미움 사는 짓을 골라서 하냐."

"그러니까 계속 적을 만드는 거잖아."

모두가 잘못했다고 하면 받아들이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로써 성장할 수 있는 법인데 아무래도 저 젊은 파티는.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녀석은 전혀 들을 태도가 아니고 변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칫."

그리고 잔뜩 인상을 쓴 채 저와 함께하는 녀석들과 지부를 나가 버렸으니 지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어휴. 마음 쓰지 말게. 자네를 질투해서 저러는 것이니."

"질투요."

"그래. 저놈 저거, 네크로맨서라고 주변에서 기대를 받으면서 괜찮은 클랜에 들어갔는데 몇 번 사고를 치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단 말이지."

네크로맨서라고 하면 어지간해서는 품고 가는 법이고 잘 대우해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덕꾸러기가 될 정도라면 보통 폐급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에 비해 자네는 이렇게나 인정 받고 벌써부터 공을 세웠으니 질투를 하는 거야."

그런 자신의 처지와 달리 똑같이 네크로맨시를 각성한 도령은 거기에 더하여 에너지 컨트롤 모듈까지 각성하고 첫 모험부터 벌써 공을 세운 것처럼 보이니 배가 아파 못 살 지경이란 거다.

"그랬군요."

도령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였으니.

'…이때부터 싹수가 노란 놈이었구나.'

도령은 놈을. 김초월을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도령이 다니던 회사에 네크로맨시 모듈을 각성하고선 찾아와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나간 놈이었다.

겉으로야 충분히 사령기를 모았으니 나간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장 오명보가 하도 태도가 불량하고 분위기를 망쳐 자른 것이었다.

그 귀한 네크로맨서를 해고해 버릴 정도로 놈의 근태는 엉망이었고 주변 분위기도 개판으로 만드는 놈이었단 말이다.

그런 김초월의 전설 아닌 전설을 선배들에게 충분히 들었던 도령은 놀랍게도 더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 본인도 모르는 '미래의 김초월'을 알고 있었다.

놈은. 김초월은 결국 클랜에서 퇴출당한다.

태도를 고치지 못하고 사고를 몇 번 더 쳐 네크로맨서임에도 퇴출을 당해 버리는 것이다.

이후 모험가판에서 겉돌며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다 덜컥 기연을 얻어 버린다.

그래.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기연을 얻어 버려선 강력한 모험가가 되었고…… 결국 본성을 바꾸지 못하고 그 힘만큼이나 커다란 사고를 쳐 수배범이 되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도주했다는 말이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수배범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책임을 졌다면 그래도 계속 유명한 모험가로 남았을 텐데.

김초월은 도주했고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되었으니 결국.

흑마법사가 되었다.

악마 숭배자들의 꼬임에 빠져 그들과 어울리며 마족의 마법에 손을 대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예 인간이길 포기한 놈은 나를 그딴식으로 대했던 너희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는 적반하장의 태도로 이곳 마을을 습격하였고 비극을 일으켰다.

돌이킬 수 없고 씻을 수 없는 비극을.

그러니까 도령은 김초월을 처음 본 순간부터 자세히 살피고 또 고민하고 있었다.

저것을, 비극을 일으키기 전에 제거해야 하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비극을 이유로 아직 죽어 마땅한 죄를 짓지 않은 자를 제거하여도 되는가.

어렵게 생각하자면 한없이 어려운 문제였으나 도령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당장 답을 내릴 수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까.

간단하다.

저 싹수가 노란, 김초월이 얻게 될 기연을.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바로 거기서 딱! 쟁취했단 말이지!]

놈이 하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녀 잘 알고 있는 놈의 기연을 도령은 압수할 생각이었다.

* * * *

스으으-

도령은 깊이 호흡하며 내부를 관조했다.

약 2주.

모험조차 거르고 흡성대법에 집중한 도령의 안에서 제법 거세진 한 줄기의 내공이 혈도를 내달린다.

연신극기공과 흡성대법의 시너지는 도령이 예상한 것 이상의 속도로 내공을 쌓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연신극기공의 육체를 보호하고 초월의 영역으로 진화시키는 공능이 흡성대법만으로는 소량을 오랜 시간을 들여 소화해야 했던 기운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더 많이 흡수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때문에 귀화병들에게서 에너지를 뽑아내느라 영혼들이 조금 더 뜨끈한 업화에 불타야 했지만 어차피 용서받지 못할 살인자들의 영혼.

도령은 거리낌없이 업화의 화력을 높였고 무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디서 천년하수오 하나가 뚝 떨어지는 기연이라도 만난 것처럼 내공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본래는 정직하게 몬스터를 잡아 그 마나로 모듈을 강화하고 강화된 모듈에 의한 육체 강화를 생각했다.

탑의 시스템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으니 도령은 모듈 강화에 의한 빠른 육체 강화를 도모하고 그로써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던 거다.

모듈의 기능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도령에게 있어 모듈의 강화는 의미가 없지만 그로써 병행되는 육체의 강화는 평범하게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령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었으니까.

한데 흡성대법과 천마신공의 단련공인 연신극기공의 시너지 덕분에 더 좋은 쪽으로 계획을 수정하였으니 내공의 빠른 증진을 이루게 되었다.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많은 양을 획득할 수 있는 사령기나 모든 능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마나는 마나 링크를 통하여서도 단기간에 일정 이상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내공은 당장 지름길이란 게 없었다.

이 시점에서는 영약 같은 걸 구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저 정직하게 연신극기공을 통하여 쌓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내공을 흡성대법 덕분에 예상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쌓을 수 있었으니 살인자들을 만나 머릿속에 떠오른, 유니온을 움직여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을 견제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느라 하루이면서 동시에 한 달의 모험에 해당하는 손해를 훨씬 넘어서는 이득으로 메꾼 셈이다.

본래는 심장에 깃든 사령기의 성장이 훨씬 빨랐고 덩치가 더 컸었는데 마치 균형을 이루듯 근래 덩치가 훌쩍 커진 연신기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두근!

거세게 혈도를 내달리는 연신기는 마치 '그 다음'을 요구하듯 점점 더 빨라지고 또 점점 더 거세진다.

도령은 그렇게 전에 없이 빠르고 강해진 연신기의 기세에 깨달았다.

연신극기공이 다음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21

21화

멸망하기 전 현대의 문명은 육체의 단련에 관해서도 고도화된 지식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에 따르면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연신극기공의 단련은 명백하게 몸을 망가뜨리는 말도 안 되는 오버 트레이닝일 것이었다.

그러한 오버 트레이닝을 오버 트레이닝이 아닌, 그럼에도 나아가기 위한 천마신공을 익힐 수 있는 초월적인 육체를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내공. 천마신공의 단련공인 연신극기공의 연신기(鍊身氣)였다.

연신극기공의 호흡법을 통하여 쌓게 되는 내공인 연신기는 몸을 보호하고 진화시키는 기운이니 본래는 망가져야 할 몸을 보호하고 진화시켜 더 질기고 단단하게, 그러면서도 유연한 초월의 영역으로 육체를 이끈다.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한계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다.

두근!

그러한 공능의 원천인 연신기가 온몸을 거세게 내달리며 뚫고 나올 듯하니 마치 몸을 공격하는 듯하다.

그러나 도령은 연신기를 의심하지 않았으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연신기가 이렇게 온몸을 뚫을 듯 자극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시기라는 걸 알리는 작용이라는 것을.

그래. 동공(動功)에 입문해야 할 시기였다.

동공이란 그 이름 그대로 움직이며 행하는 수련이다.

일반적으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를 관조하며 하는 내공 수련을 움직이면서 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동공이라고 하는데 연신극기공은 그러한 동공을 내외를 동시에 수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두근!

도령은 터질 듯 뛰는 심장과 혈도를 내달리는 연신기를 느끼며 집을 나와 걸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몸으로 담담히 걸어 인적이 드문 산중턱에 올랐으니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스으-

그러한 몸으로 도령은 호흡을 골랐다.

고르고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한 발 내딛으니.

꽈아아앙!

땅이 움푹 패이며 힘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솨아아아아아-

폭탄이라도 터진 것만 같은 그 힘의 작용은 다름 아닌 도령의 몸 안에서 몰아치는 연신기의 작용이다.

덩치가 커진 연신기는 그만큼이나 거대한 힘으로 도령의 내부를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연신기를 만든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한 육체로도 그냥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

도령은 그것을 그러니까 '이치'로써 다스리기 시작했다.

내딛은 한 발. 진각(震脚)에서 시작하여 안 그래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연신기와 어우러져 더욱 증폭된 것을 도령은 억누르는 대신 흐름에 따라 허리를 틂으로써 부드럽게 이끌었다.

힘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도령의 인도에 따라 흘렀고 어깨에 이르렀다.

그대로 두면 어깨가 부서져 터져 버릴 힘.

도령은 이어 팔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다시 힘을 이끌었으니 멈추지 않고 순환하는 원이 만들어졌고 도령은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도령은 이어 팔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다시 힘을 이끌었으니 멈추지 않고 순환하는 원이 만들어졌고 도령은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물꼬가 트이듯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졌으니 원을 그리던 힘이 흐르고 도령은 그 힘을 다시 이끌며 계속, 계속 이끌었다.

뚜둑.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이끄는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뿌드득, 단련된 근육마저 버티지 못하고 찢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삐걱이는 육체를 힘의 흐름에 따라 거세게 흐르는 연신기가 스며들어 더 단단하고 질기게, 그러면서도 유연하게 회복시킨다.

그 과정에서 육체가 자아내는 이치가 세포 한 올 한 올마다 깃드니 도령은 무(武)가 깃드는 육체에. 팔다리에 전율하며 또 환희했다.

[이대로면 넌 죽을 것이다, 도령아.]

[하지만 나는 너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니. 그럼에도 기필코 나아갈 너의 가능성을 믿으니 전수하도록 하마.]

[천마신공을.]

천마는 도령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으니 살리기 위하여 전수했다. 천마신공을.

첫 번째 삶에서 도령은 그 천마신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익힐 수가 없었다.

'그날'의 비극으로 도령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팔다리를 잃었으니까.

미래의 가능성이 닫히게 됨을 알면서도 당장 살기 위해서, 당장 나아가기 위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으로 그득했던 팔다리는 천마신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잃었던 팔다리를 다시 주어진 삶의 기회와 함께 되찾았고 지금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힘을 깃들이고 있다.

뿌득.

뚜두둑.

찢어지고 으스러지는 감각은 분명히 고통스럽다.

감당하지 못할 힘을 억지로 감당하며 지극한 이치를 자아내는 '그럼에도 나아가는' 단련의 과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크나큰 고통의 연속일 것이었다.

쿠웅-!

그러나 힘차게 진각을 내딛는 도령은 웃고 있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하게 나아가는 감각.

나의 팔과 나의 다리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니 분명하게 나의 팔과 다리로 나아가는 환희란 그 과정에서의 고통마저 기쁨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계 너머로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도령의 몸짓에 이 시기엔 본래 깃들 수 없었을 지극한 이치가 깃드니 그것은 연신극기공 그 너머에 있는 천마신공의 이치였다.

도령이 천마에게 배웠던.

그러나 육체의 한계로 인해 함부로 구사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치가.

스으-

내딛는 발걸음에는 가늠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으나 앞서와 달리 폭음을 내지 않았고 힘의 파동도 퍼져 나가지 않았으니 그 전체가 오롯이 이치의 흐름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각에서 비롯한 온전한 모든 힘이 다리를 타고 승천하는 용과 같은 기세로 치솟는다.

그 힘은 이치를 따르는 도령의 허리를 거쳐 어깨로. 어깨에서 팔로. 팔에서 마침내 손끝에 이르니 거듭하는 회전을 거쳐 미증유의 영역에 이르러 있었다.

도령은 그것을.

훅-

방향을 자연스럽게 바꾸어 정면이 아닌 하늘로 향했다.

후오오오-

폭음은 없었다.

하늘로 치솟은 힘을 막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그저 하늘에 닿았으니 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 * * *

내공의 증진은 연신극기공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고 도령은 내공의 증진만이 아닌, 본래 모듈로써 의도했던 육체의 진화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

그 육체를 또 연신극기공으로 담금질하며 다시 맞이한 주말. 도령은 모험가 등록소로 향했다.

다름 아닌 의뢰를 받기 위해서였다.

모험가들의 일거리는 크게 사냥과 파밍, 의뢰로 나뉘는데 개중 의뢰는 여러가지 필요에 의해 모험가들이 합당한 보수를 받고 수행하는 일로 모험가와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모험가 등록소에서 취급하고 있다.

그러니까 방문한 모험가 등록소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은 편이었다.

예의 사건은 여전히, 더 큰 스케일로 진행 중이었으나 그로 인해 유니온의 영향이 크게 미치면서 오히려 치안이 좋아지고 일대의 안전이 확보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지구 주변에 도주한 놈은 물론이요 놈과 관련된 위험 요소가 없는 게 확실해졌다.

사건의 스케일이 커졌으나 그로써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피부에 와닿는 치안은 역대 가장 좋은 시기였으니 처음 불안이 커졌던 것과 반대로 분위기가 좋아져 버린 거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의 로비를 지나 도령이 게시판 앞에 서니 지나가던 모험가 중 한 명이 말을 건다.

"여, 루키. 의뢰 수행하게?"

"네. 이제 좀 안전해졌으니까요. 일해야죠."

"하하! 그렇지. 수고해."

"네.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도령의 눈은 어느새 의뢰를 모두 훑었다.

그리고 한 달이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의뢰서 하나를 떼어서는 데스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의뢰를 맡으려고 하는데요."

"네, 안녕하세요. 어……."

도령의 인사에 도령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던 베테랑 직원은 자연스럽게 의뢰서를 건네받아 확인하고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의뢰서의 내용이 베테랑 직원이 말문이 막히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직원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모험가님. 이 의뢰는……."

"네, 알고 있어요. 인기가 없죠."

도령이 가져온 의뢰는 한 마디로 '악성 재고' 같은 것이었다.

누구도 하기 싫어 기피하는 내용의 의뢰. 돈이 안 되는데 오래 걸리고 심지어 번거롭기까지 하다.

레벨링. 그러니까 모듈 시스템을 부여받은 지구인의 특권으로 사냥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성장을 목적으로 가는 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구역이라 무엇 하나 매력적인 부분이 없는 던전의 클리어.

그것이 바로 도령이 가져온 의뢰서의 내용이었으니 아직 물정을 잘 모르는 뉴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 중 눈에 띄는 아무거나 가져온 것이란 생각을 직원은 했던 것일 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잘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얼굴이었고 도령은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다 알고 가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접수해 주세요."

"그,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도령이 막힘없이, 다 안다고 하며 접수를 요청하자 고개를 끄덕이고선 접수를 진행했다.

생각해 보면 도령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주 영향력 있는 클랜에 가기로 내정돼 있다는 거의 정설로 여겨지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집중 케어를 받고 있다면 '이곳'에 관해 모를 리 없을 테니 다 알고 가는 것일 테고 다 계획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계획이라고 하면…….

'평판작 같은 건가?'

모험가로서의 이득을 생각하자면 여기는 정말로 무엇 하나 건질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도유망한, 시작부터 귀족으로 여겨지는 모듈을 둘이나 각성한 루키가 굳이 갈 만한 거라고 하면 그 '평판작'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다 하다 안 돼 등록 모험가의 몇 안 되는 의무 중 하나인 일 년에 두 번은 공적인 의뢰를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이용하고서야 클리어되는 던전.

그런데 이게 6개월 주기로 리셋이 되는 악질이라 매번 그렇게 억지로 클리어할 이를 찾아야 하는 던전.

이 던전을 의무가 아니라 먼저 나서서 클리어 하는 건 그러니까 차라리 봉사라 해야 할 일이었고 요즘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루키인 도령이 더욱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굳이 이 던전의 클리어를 선택한 건 아닌가. 직원은 생각한 것이다.

단순한 모험가로 남지 않고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그런 것도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러한 직원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도령은 실제로 그러한 평판. 정확히는 지부장을 포함하여 모험가 등록소에 좋은 이미지를 남기려고 했다.

그래야 이후의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편해지는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이득이었다.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것들.

그러니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얼마 전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바로 거기서 딱! 쟁취했단 말이지!]

이 던전이 바로 도령의 첫 번째 삶에서 틈만 나면 김초월이 지껄였던 기연을 얻었던 던전이니.

"등록 완료 되었습니다. 혹시 언제 출발하실지 질문드려도 될까요?"

"네. 오늘 갈 겁니다."

도령은 지체하지 않고 김초월의 기연을 압수하러 가려는 것이었다

22

22화

의뢰를 수주한 도령은 시장으로 향했다.

모험에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보존과 취식이 용이한 식량에 비교적 간단한 구조이지만 그래서 휴대와 사용이 간편한 정수 필터 등.

지구의 고도화된 문명에 기반한 장비들은 차원을 넘는 과정에서 모조리 파괴돼 쓸 수가 없어 재난시 쓰는 생존 키트 비슷한 느낌의 구성이 되었다.

그래서 클래식하게 챙긴 물품들이 든 가방은 도령의 상체보다 컸으니 줄이고 줄인 게 이 정도였고 때문에 본격적으로 가면 전문적으로 짐을 옮기고 지키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로 모험가들에게 있어 반드시 챙겨야만 하는, 그러나 부피가 커지는 물자는 고민거리였다.

더 깊은 곳을 나아가는 고등급의 모험가들은 이 부분의 불편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마법이 가미된, 흔히 '아티팩트'라 부르는 비싼 마법 용품을 챙기곤 했지만 도령에게는 아직 이른 이야기였다.

뭐…… 지금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스르르-

도령은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인벤토리를 열고서는 그 안에 가방을 넣었다.

도시 크기의 저장 공간을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도령에게 있어 모험에 필요한 짐의 보관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짐을 해결한 도령은 가벼운 몸으로 집에 도착하였으니 집안일을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부모님과 함께 먹을 저녁 식사였다.

밤새 일을 하는 도령의 부모님은 주말이라 해도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고선 생활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오후 늦게 기상을 한다.

전생에서는, 그러한 부모님이 집안일을 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나이를 조금씩 먹으며 나만이 아닌 주변을 볼 수 있게 되고서야 그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고 거들기 시작하며 부모님의 미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미소를 조금 더 보기 위해 도령은 노력하기 시작했지만.

비극이 찾아오며 바라던 미래는 끔찍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시 주어진 삶에서는 그 비극이 결코 오지 않도록 할 도령은 그때엔 늦어 했던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움직인다.

깔끔하게 청소를 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저녁을 준비했다.

"어머, 도령아."

"좋은 저녁이야, 엄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부모님이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깔끔하게 청소한 식탁에 저녁을 차리니 부모님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난다.

그 미소가, 그것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도령을 또 미소짓게 했다.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요리를 배웠지?"

"이미 엄마가 다 해 둔 거 데우고 차린 거 뿐인데 그렇게 칭찬하면 기쁘긴 하네."

"호호호."

화기애애하다. 따듯하다.

도령은 그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내놓았으니 다름 아닌 이번 사건을 신고하고서 포상으로 받은 물자 교환권이었다.

"이건?"

"저번에 제가 큰일 했잖아요. 그러고 받은 거예요. 물자 교환권."

"어머머! 그런 걸 받았었어?"

"응. 뭐 엄청난 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니고 식료품 쪽에서 가장 혜택이 크더라. 그러니까 아버지, 엄마. 주말에 이거 쓰세요."

"우리가?"

"네. 저 모험 나가면 대충 드실 거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맛있는 거 챙겨서 드세요. 저녁에는 저도 돌아올 테니까 안 쓰지 마시고요."

"꼭 그렇게 하세요. 약속입니다?"

* * * *

저녁. 도령은 설거지까지 마치고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출발하였으니 이번 생에서의 두 번째 모험이다.

'흐음?'

미래의 거대한 해악이 되지 않도록 김초월의 기연을 압수하기 위해 차원의 경계로 향하던 도령은 그 길을 평소와 달리 모험가로 보이지 않는, 그것도 적지 않은 수가 오가는 걸 보게 되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들고 나르고 있었으니 그러한 운반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로 보였고.

쿠웅. 쿠웅.

'아.'

입장하자마자 무슨 공사 현장 같은 소음이 들려왔으니 도령은 곧 무슨 일인지 알게 되었다.

저 멀리. 그러나 선명하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 도시의 일부'가 박혀 있었다. 그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산물인 컴퓨터 그래픽으로 어색하게 합성한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바로 멸망한 지구의 파편이었다.

지구층을 감싼 탑의 차원에 전혀 다른, 멸망의 여파로 엉망이 된 도로와 비스듬히 무너져 기운 빌딩 등이 있는 '멸망한 지구'가 비현실적으로 박혀 있었으니 현실임에도 모니터 너머 어설프게 합성한 것처럼 보이고 마는 것이다.

멸망의 순간 지구는 탑이라는 이해를 넘어선 영역에 있는 것의 덕분에 그 안에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보존되지는 못하였으니 그렇게 보존되지 못한 '세계의 파편'이 그 끝을 모를 탑의 차원을 떠돌다 박혀 버린 게 저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편에는 멸망하기 전 지구의 문명이 남아 있었으니 콘크리트 등은 물론이요 그 시대의 공산품까지 연구 가치가 있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수집가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인 보물들이 그득하였으니.

쿠구구궁!

"조심해서 분해해! 이게 다 얼마인지 알아?!"

"여기 좀 거들어 봐!"

이렇게 많은 전문 업자들이 모험가들을 대동하고서는 몰려들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안 그래도 인간의 영역이나 다름 없는 이곳 일대에서 잠시라고 하지만 마물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도령은 편히 목적지를 향해 걸으며 그들을 잠시 응시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 것이었는데 무리 사이에서 어느 문양이 시야에 들어오자 의미가 생겼다.

황금상회(黃金商會).

금실로 수놓은 그것은 탑에서 손꼽히는 상단의 이름이었다.

어느 곳이든 사회를 이루고 사는 집단 사이에서 물류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흐름이었고 그 흐름을 타고 돈을 버는 상회란 집단이 탄생하는 법이다.

황금상회는 그러한 집단 중 손꼽히는 곳이었으니 무림과 제르는 물론이요 엘프의 숲이나 드래곤과도 연결돼 있다고 했다.

돈을 밝히기는 하지만 신용과 물건이 확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황금상회.

'만나야 하는데…….'

도령은 바로 그 황금상회의 상단주와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미래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이후의 일이었고 당장은 할 수 없었으니 시선을 떼고 걸음을 빨리하려는 차 아는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 플레루스틴 님."

"…도령 님이시군요."

바로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였다.

도령의 계획에 따라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의 피를 말리고 있는 바로 그 플레루스틴 아흘레라다.

결코 찾을 수 없는 마골과 찢겨 나간 절반의 비급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그녀가 조사대의 몇 명을 대동하고서 이런 곳까지 온 이유는 명확했다.

"세계의 파편 때문에 오셨군요."

"네, 맞습니다."

세계의 파편.

탑에는 지구 외에도 아주 많은 세계가 보존돼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보존되지 못한 세계의 파편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파편이 특수한 환경과 맞물리면 평범한 탑의 차원인 '필드'와 차별화되는 별도의 공간인 '던전'이 되곤 했다.

플레루스틴은 돌연 이곳에 박힌 지구의 파편이 그러니까 어떤 특수한 작용에 의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특수한 작용이 다름 아닌 오리무중인 마족의 수법을 익힌 무림인이 관련된 것은 아닌가 확인차 온 것이었다.

뭐, 결과는 당연하게도 짐작부터가 헛짚은 것이었으니 꽝이었고 말이다.

지구의 파편은 던전화하지 않았고 차원의 조각 그대로 탑의 차원에 융합되었으니 속된 말로 '노다지'였고 전문 업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채취를 하고 있다.

"덕분에 마음 놓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플레루스틴 님."

"아니,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럼 고생하세요."

"네. 안녕하시길."

도령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플레루스틴을 지나 가야 할 길을 갔다.

플레루스틴은 바다를 닮은 짙은 푸른 눈동자로 그런 도령의 등을 담았는데 곁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인간입니까, 플레루스틴 님."

플레루스틴의 눈동자가 도령에게서 목소리를 낸 쪽으로 옮겨갔다.

거기에는 두 발로 선 늑대 인간이 있었으니 수인(獸人)이었다.

지구의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육체 능력을 타고나는 종족.

타고난 육체만으로도 수십 년을 단련한 무인과 싸울 수 있는 그들은 여기에 각자 특수한 능력에까지 특화돼 있었는데 플레루스틴과 함께 온 수인은 후각이 특히나 발달하여 추적에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을 갈고닦아 특화하였으니 추적의 전문가로 유니온의 조사대에 참여하였는데 떠나가는 도령을 날카롭고 거친 시선으로 훑는 중이었다.

"이번 사건을 신고한 인간입니다. 신경쓰이는 게 있으십니까."

"예. 평범한 인간인데 우리를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이상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의식과잉이었으나 따져보면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수인은 조금 더 날것의 법칙을 따랐다.

약자는 고기가 되는 것이 당연했고 현명한 강자에게는 또 충성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한 법칙에 따르자면 방금 플레루스틴과 마주한 인간은 '약자'였다.

어떻게 비유하는 것조차 번거로울 정도로 너무나 격의 차이가 나는 약자.

하지만 전혀 약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굳이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았던 자신을 무슨 지나치는 행인처럼 여겨 신경쓰지 않았고 심지어 그는 물론이요 그의 무리 전체가 덤벼도 감히 상대가 되지 않을 강자이면서 또 현명한 존재인 플레루스틴을 마주하여서도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약자가 아닌 절대적인 강자인 것처럼.

수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었으니 점점 멀어지는 도령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주변에 있는 무수한 인간들이, 나름 탑을 모험하는 모험가란 인간들까지도 감히 그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데 말이다.

플레루스틴은 그러한 수인의 반응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금…… 특이한 인간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를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에게서는 전혀 사악함이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이 아닌 진실을 꿰뚫어 보는 엘프의 안목이었으니 수인은 즉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현명한 강자인 플레루스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인과 달리 정작 말을 한 플레루스틴의 시선이 이번엔 도령의 완전히 멀어진 등을 담는다.

'…정말로 기묘한 인간이로군요.'

수인의 말이 새삼 잦아들었던 플레루스틴의 도령에 대한 관심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 * * *

도령은 플레루스틴과 수인의 시선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는 그러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좋다.

이후에 플레루스틴을 통하여서도 만나야 할 존재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관심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며 나아갔고 약 한 시간을 걸어 마침내 도착했다.

목적했던 '던전'에.

세계의 파편이 특수한 작용에 의하여 별도의 이공간화한 것.

눈앞의 던전은 바로 그 이공간화한 세계의 파편이었으며 이번에 도령이 수주한 의뢰를 수행해야 할 던전은.

타닥.

매캐한 재와 죽음으로 뒤덮인 멸망을 반복하는 세계였다.

23

23화

타닥.

특유의 차원을 넘는 감각이 온몸을 스쳐가고서 던전에 입장하여 가장 먼저 무언가가 타는 소리를 듣는다.

이어 매캐한 재가 후각을 자극하고 재와 죽음으로 그득한 세계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한 방울의 생명조차 남지 않은 마른 가지가 잔불에 타닥이며 검은 재로 변해가고 세계에는 공기보다 더 많은 죽음이 떠돌아다니는 듯하다.

이곳. 멸망한 세계의 보존되지 못한 파편이 던전화한 곳은 그랬다.

그리고 이 세계가 멸망하였으며 던전화한 이유는.

캬아아아아…….

저 아래. 절벽 아래를 가득 채운 언데드 때문이었다.

얄궂다고 해야 할까. 마스터 네크로맨서였고 다시 사는 지금도 그러한 도령이 이번 삶에서 처음으로 입장하여 클리어해야 할 던전이 언데드에 의해 멸망한 세계였던 것이다.

정확히 이 세계가 어떻게 언데드에 의해 멸망한 것인지는 모른다.

세계 전체가 불타 버렸던 이유 또한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세계에는 언데드가 그득하다는 것이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계속해서 발생하는 언데드는 이윽고 이 던전을 나와 지구에까지 퍼진다는 거다.

마치 계속 차오르는 물이 넘치듯 말이다.

그러니까 지구에서는 이 던전을 처리해야만 했으니 처음에는 무작정 이 던전에 그득한 언데드를 계속 토벌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발생하는 언데드를 무작정 토벌하는 건 눈이 계속 내리는데 싸리비로 눈을 쓸어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근본적인 공략법을 찾아야했고 곧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마을이 있다는 걸 수색하여 발견했다.

그리고 그 마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검은 구체를 부수자 거짓말처럼. 마치 허상이었던 것처럼 이 던전을 가득 채운 언데드들이 사라졌던 거다.

사람들은 기뻐하였으나 곧 이것이 완벽한 공략법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던전의 완벽한 공략은 곧 던전의 닫힘이었으니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 소멸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 던전을 유지하는 코어로 의심되었던 검은 구체를 부수었고 언데드들이 사라졌음에도 던전은 고스란히 남았으니 던전은 클로즈, 닫히지 않았고 역시나 몇 개월 뒤. 다시 언데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멸망하여 언데드가 쏟아지는 순간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넘게 완벽한 공략법을 찾지 못한 채 반복하는 멸망을 주기적으로 검은 구체를 부수어 잠시 멈추기를 계속해 온 것이 바로 이 던전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내가 바로 거길 닫은 네크로맨서란 말이야!]

김초월이 이곳 던전을 닫게 되는 것이 도령의 전생의 미래였다.

서벅.

도령은 김초월이 그렇게 던전을 클로즈하며 기연을 얻게 되는 미래를 압수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정석이 된 공략법에 따라 움직였다.

언데드와의 교전을 최대한 피하며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검은 구체가 있는 마을로 갈 것.

파괴한 검은 구체가 다시 나타나고 쏟아지는 언데드들의 경로는 일정치 않았으나 지형은 일정하였으니 놈들이 통행할 수 없는 구역을 파악하여 만든 지도가 있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한나절을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한쪽은 언데드와 싸워 그 무리를 뚫고 나아가야 하지만 일직선으로 나아갈 수 있어 최단 거리가 된다.

다른 한쪽은 언데드와의 교전을 피할 수 있지만 멀리 빙 돌아가야 해 오히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길이다.

상황과 성향에 따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도령은.

캬아아아아아…….

언데드와 싸워 나아가는 쪽을 택했다.

재와 죽음으로 그득한 세상을 배회하는, 그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린 무수한 언데드의 앞에 선 도령은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얼굴이다.

지금 도령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수련 환경'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모듈 시스템으로 강력한 능력을 고민없이 구사할 수 있고 또 그 모듈을 오직 사냥만으로 강화하여 육체의 강화까지 할 수 있는 지구의 인간은 그러나 탑의 진짜 강자들 앞에서 대부분이 너무나 간단하게 바보가 되어 버리곤 했다.

모듈 시스템이 모든 걸 해 주니 본래 그 능력과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행착오와 고민, 거쳐야 할 과정 대부분을 생략해 버리게 되니까.

어떤 고민도 연구도 없이 손에 쥐게 된 것이니 자신의 것임에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많은, 자신을 강자라 생각했던 인간 모험가들이 한 번 꺾여 버린다.

도령은 모듈의 능력에 관해서는 전혀 그러한 문제가 없었다.

모듈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대부분을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능력을 깊이 이해했으니까.

그러지 못했다면 애초에 탑이 마스터 네크로맨서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육체의 부분에서는 아직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스스로의 육체에 그 진리를 깃들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팔다리가 온전치 못했으며 그 대신 붙여 둔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또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이 닫혀 있던 것들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팔다리가 온전한 지금도 아직 진리를 깃들이지 못했다.

연신극기공과 흡성대법이 시너지를 일으켜 단시간만에 예상을 훨씬 넘어선 내공을 도령은 쌓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내공은 연신기(鍊身氣)가 되어 육체의 급격한 진화를 촉진하였으니 도령의 지금 육체는 신화 속 무공 천마신공의 단련공인 연신극기공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급격한 진화를 이루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빠르지 않은데 도령의 고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걸 넘어 아예 환희하는 특수한 상황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속도를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 도령은 자신의 것임에도 지금의 육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었다.

익숙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여기서 저 시야를 가득 채운 언데드와 싸울 것이다.

싸워서 지금의 육체가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체감하고 온전히 인지할 것이다.

쾅!

진각을 밟으며 도령은 언데드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캬악!

갑자기 쇄도한 도령의 존재에 언데드가 한 박자 늦게 아가리를 쩌억 벌렸으나 그때엔 이미, 말 그대로 한 박자가 늦어 있었다.

꽈앙!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한 걸음으로 언데드의 이빨을 피하는 위치를 점하는데 그렇게 내딛은 한 걸음이 진각이 된다.

이어 허리에서부터 어깨, 주먹에 이르기까지의 회전이 진각의 힘을 옮기며 동시에 증폭하니 언데드에 닿는 도령의 주먹은 무림인의 주먹이었고.

꽝!

마치 폭탄이 터진 듯 언데드에게 작렬하여 뒤에서 밀려들던 언데드의 한 축을 무너뜨려 버렸다.

도령의 주먹이 작렬한 언데드가 포탄처럼 날아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도령은 진각부터 시작하여 주먹을 쏘아내기까지 찰나의 행위를 완벽하게 해내고 그만한 힘을 운용하였음에도 여유가 넘치는 몸을 확인했다.

쾅!

이어 옆에서 밀려드는 언데드를 피하면서 동시에 한 번 더 진각을 밟았다.

그러기 위해 한계까지 관절을 가동하여야 했고 균형을 유지하며 강하게 땅을 밟아야 했으나 이번에도 육체는 도령의 의지를 완벽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수행하면서도 전혀 부하가 걸리지 않았다.

꽈아앙!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연하게 해낼 수 있는 '한계 안의 행위'라고.

평생을 경험해야 했고 그래서 그것이 당연한 삶을 살았던 도령에게 부족하고 불편한 육체의 감각은 이제 지워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핫."

그래서 도령은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것을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캬아아아아아!!

언데드가 밀려든다.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이 있는가하면 괴물의 형상을 한 것도 있고 인간 정도 되는 크기의 언데드가 있는가하면 집채만 한 크기의 언데드도 있었다.

그것들이 뒤섞여 밀려드는 것을 도령은 피하지 않았다.

한 번,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받아치고 싶어졌으니까.

쿠웅!

강하게 내딛는 발은 진각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수백 년을 산 나무의 뿌리처럼 도령을 지지한다.

이어 내뻗은 주먹에 담기는 것은 마주한, 해일처럼 밀려드는 언데드의 무리를 받아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할 만큼의 힘이 담겨 있었으니 도령은 망설임없이 그 주먹을 때려박았고.

꽈아아아아앙!!

언데드의 해일이 도령의 주먹에 꿰뚫려 산산이 부서졌다.

쩌저적-!

그 여파로 도령이 뿌리 내린 대지가 쩌저적 갈라졌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힘의 여파가 퍼져 나간 것이었는데 여파가 아닌 힘 그 자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도령의 육체는.

"하핫."

멀쩡했다.

부서지지 않았다.

오히려 담금을 위한 망치질을 한 듯 진화하려 한다.

두근!

몸 안에서 연신기가. 연신극기공이 작용하며 더 나아가라고 도령을 재촉한다.

그 재촉을 도령은 반겼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도령이 오히려 더 컸으니까.

스으으-

호흡을 정돈하고 깊이한다.

스으-

이어 자세를 잡으니 그것은 연신극기공의 동공(動功).

도령은 지금의 육체를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고자 한다.

나아가며 진리를 깃들이고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 것이니 도령은.

캬아아아아-!

그 육체와 정신에 천마신공과 이어지는 무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꽈아아앙-!

* * * *

타닥.

마른 장작이 타오른다.

멸망한 세계의 가파른 절벽 위.

모닥불 하나가 타오르고 있었고 그 위에 스튜가 끓고 있으니 자리잡은 도령이 피워올린 불꽃이요 식사였다.

던전의 유일한 마을로 향하는 길에는 이렇게 곳곳에 쉬어갈 수 있고 잠들 수 있는 포인트들이 있었다.

언데드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쓸 수 있는 포인트들이다.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쏟아지는 언데드들은 그러나 텅 비어 있었으니 영혼도 깃들어 있지 않았고 육체를 구성한 것 또한 대부분이 죽음의 기운 뿐이어서 시체라 하기도 민망했다.

때문에 수가 많음에도 작정하고 움직이면 싸움을 피할 수 있었고 상대하기도 어렵지 않은 언데드들은 잡아도 마나를, 그러니까 경험치를 거의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지구의 인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도령은 달랐다.

꾸욱-

가볍게 힘 주어 쥐는 주먹에 전에 없이 강력한 힘이 깃들고 그 힘 이상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일주일.

도령은 반쯤 무아지경으로 언데드들을 돌파하며 연신극기공의 동공을 계속하였으니 경험치는 보잘것 없었으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실질적인 강함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저 아래. 목표로 했던 마을이 보이니 도령은 식사를 하고 짧은 수면을 취하여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선 마을의 정문으로 향했다.

향하며, 떠올렸다.

[씨이발 새끼들이! 겁대가리 없이 인사도 없이 덤벼들더란 말이야?! 시체 새끼들 따위가! 감히 네크로맨서한테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감히 이 김초월님한테 덤벼든 새끼들이 용서받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허세가 그득했던 김초월의 그날의 이야기를.

'히든 피스'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선택을.

[다, 쳐죽여 버렸지.]

마을 내의 모든, 검은 구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언데드들이 아닌 '진짜 언데드'들을 다 죽이면 숨겨져 있던 공간이 나타난다.

도령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던 그 내용을 떠올리며 마침내 마을 앞에 섰다. 그리고.

키이야아아아아아!!

불타고 부서진 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언데드'들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아니. 아니었어.'

김초월의 그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24

24화

키이야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비에 불어난 계곡물이 밀려들며 내지르는 괴성 같았다.

마을 앞에 선 순간 무너진 담 너머에서 둑이 터진 듯 언데드가 밀려들었으니 그러한 언데드들의 기세를 마주한 이들의 선택은 한정돼 있을 것이었다.

잠시 물러서거나 혹은 맞서거나.

그리고 대부분은 저 밀려드는 언데드들을 토벌하는 것을 택한다.

솔로 플레이를 한 도령과 달리 일반적으로 이곳은 파티를 이루어 공략하는 곳이었으니 기세야 대단하다지만 텅 빈 껍데기뿐인. 굳이 말하자면 '경험치 1짜리'의 약해빠진 언데드들을 고지를 앞두고 도망쳐 피하는 대신 화풀이 겸 정면에서 쳐부수는 걸 택하는 것이다.

초보라고 하지만 모듈을 각성한 어엿한 모험가가 느리고 지능도 없는 언데드들을 상대로 질 리가 없다. 하물며 파티로 왔음에야.

초중반에야 체력을 아끼기 위해 싸움을 최대한 피한다지만 클리어를 앞에 두고서까지 체력을 아끼기 위해 시간을 들여 물러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물러서지 않고 언데드들을 토벌하며 나아가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검은 구체를 부수는 것으로 의뢰의 완수다.

던전의 클리어는 아니지만 이곳 던전을 가득 채운 언데드가 모두 사라지고 약 6개월 정도는 두어도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김초월은.

[내가 그 씨발 새끼들 다 쳐죽이고 얻었단 말이야!]

검은 구체를 바로 노리는 대신 덤벼들었던 언데드를 다 죽이며 화풀이를 했다.

나름 몇 년을 모험가로 활동하며 뉴비라 불리지 않게 될 정도의 연차가 되었으나 그 행실로 인해 다른 모험가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고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다들 기피하는, 그것도 초보자들이나 수행하는 이곳 던전을 맡게 된 울분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 개새끼들이! 병신 같은 새끼들이 나한테 덤벼?! 어?! 덤비냐고!!]

발광을 하며 보이는 족족 언데드를 찢어발겼을 것이고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샅샅이 마을을 뒤져 언데드란 언데드는 모조리 다 부수었을 것이다.

[……어?]

그리고 그것이, 김초월이 기연을 만나게 된 공략법이었다.

[그냥, 그냥 다 처리해 보고 싶었던 거지.]

술만 들어가면 소리 높여 지껄이던 그날의 일 중 말을 아끼고 얼버무렸던 두 부분 중 하나.

그냥이라고 하였으나 김초월을 아는 이들 대부분이 화풀이로 언데드를 다 찾아 죽이다 우연히 얻게 되었을 거라 확신했던 공략법.

하지만 도령은 지금 이 순간. 언데드들을 마주한 순간 알게 되었다.

-아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어!!

그것은, 던전을 닫았으나 완벽하게 틀린 공략법이었다.

캬아아아아아!!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언데드들이 도령에 가까워졌다.

언데드들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흉흉하게 이빨과 손톱을 도령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도령은.

슷-

그렇게 덤벼드는 언데드들을 피했다.

기묘한.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한 걸음으로 언데드들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수십이나 되는 언데드들을 그 기묘한 걸음으로 피하고서 찰나 멈춰섰으니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앞서의 무리와 다음 무리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었으니 도령은 거기서 강하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꾸우웅-!

진각.

강하게 내딛는 그 한 걸음은 몇 번이고 도령이 주먹을 내지르기 위해 밟은 것이었으나 이번엔 힘의 규모가 완전히 다르다.

진각으로 인해 생성된 힘에 내공이 깃든다.

힘과 내공이 나선을 이루며 엮이고서는 허리, 어깨, 팔의 회전을 거치며 몇 배로 증폭하고 내뻗는 주먹에 이르는 순간 그저 단순한 주먹이 아닌 무(武)의 이치가 깃든 주먹으로 작렬하였으니.

꽈아아아아앙!!

발경(發勁)이었다.

단순한 힘의 증폭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내공을 담아 연신극기공의 무공 초식으로 터뜨린 것이다.

그 힘은 상식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으니 밀려들던 언데드의 흐름을 폭격이라도 맞은 듯 으스러져 날아가 버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언데드 한 무리를 거침없이 박살낸 도령은 그러나.

캬악!

옆에서 덤벼드는 다른 언데드의 공격은 그저 피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캬아아아악!

그 언데드를 지나쳐 다시 나아가며 마주한 몇이나 되는, 달려드는 언데드들도 그저 피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덤벼드는 언데드에는 주먹을 내뻗었다.

꽈앙!

평범한 주먹이 아닌 무공의 이치가 깃든 주먹에 언데드는 놈을 움직이게 하던 사령기의 코어가 박살이 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흩어졌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떤 언데드의 공격은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하지 않는데 또 어떤 언데드는 마주한 순간 먼저 주먹을 날려 코어를 박살내 먼지로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심히 지켜보면. 보는 눈이 있는 이라면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도령이 공격을 피하기만 한 언데드들은 공격을 계속하지 않고 저편으로 달려나간다.

던전 바깥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혹은…… 마을에서 멀어지려는 것처럼.

그리고 도령이 서슴없이, 먼저 주먹을 내뻗곤 하는 언데드들은 놀랍게도.

캬아아악!

그렇게 달려나가는 언데드들을 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냥 보아선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언데드들은 결코 한 무리가 아니었으니 뒤에서 유심히 지켜보아야만 구별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껏 그 구분을 해낸 이가 없었다.

하지만 도령은 그렇게 통찰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그것을 대번에 구별해낼 수 있었다.

구별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악!!

-죽고 싶지 않아아아아!!

들렸으니까.

도령사(道靈士).

타고난 능력으로 영혼을 볼 수 있고 또 영혼을 접할 수 있는 도령은 던전이 만들어낸 언데드들 사이에서 '진짜 언데드'인 마을 사람들의, 죽었음에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멸망을 반복하는 시체에 깃든 영혼의 절규를 너무나 선명하게 들을 수가 있었으니까.

서벅.

살기 위해 그저 필사적이었던. 언데드가 아닌 마을 사람들을 보내고 그들을 쫓던 던전이 만들어낸 언데드들은 부수며 도령은 재와 죽음으로 뒤덮인 마을에 들어섰다.

-안 돼! 하지마! 그러지 마아아아아!!

-죽으면 안 돼애애애애애!!

여전히 들려오는,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의 절규로 그득한 마을 안에.

그 절규를 도령은 외면하지 않으며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크게 난 길이 아닌 샛길에 들어선다.

캬아악!

마을을 배회하던, 길을 막고 있던 언데드들이 덤벼들었고 도령은 자비없이 손을 떨쳐냈다.

꽈앙!

가볍게 쳐낸 듯 보였던 손에는 그러나 경력(勁力), 이제 다룰 수 있게 된 내공의 힘이 깃들어 있었으니 던전이 만들어낸 언데드가 품고 있던 코어를 꿰뚫어 단번에 침묵시켰다.

그렇게 언데드들을 쳐내며 나아가던 도령의 옆에서.

캬아악!

그늘에 숨어 있던 대형견이 덤벼들었다.

안구가 텅 비어 버린 언데드가 된 대형견이다.

슷-

도령은 그 대형견의 이빨을 간단히 피해 버리고서는.

스으-

대형견의 몸통을 가볍게 밀어냈다.

캬학?!

그저 부드럽게 밀어낸 것 같은데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러나 부드럽게 대형견을 밀어낸다.

경력. 내공이 깃든 힘이 도령의 의지에 따라 바로 흩어지지 않고 계속 작용하니 대형견은 버둥거리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꽈앙!

그 사이 도령의 자비없는 손이 주변의 언데드를 모조리 박살냈다.

그렇게 도령이 모든 언데드를 박살내고 다시 대형견을 마주하자.

-…….

대형견은 도령을 경계하면서도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다.

다만 몸으로 뒤에 있는 문을 지키고 우직하게 서 있을 뿐이니 도령은 텅 빈 안구 대신 그 영혼을 마주하여 빙긋 미소지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지킬 수 있을 거야."

크릉.

대답을 들으며 도령은 나아갔다.

키이야아아아악!!

더 깊은 곳.

역시나 던전이 만들어낸 언데드들에 의해 길이 막힌 곳에서 그야말로 미친듯이 다른 언데드들을 물어뜯고 연신 돌로 찍는 언데드를 하나 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구. 그러나 말 그대로 귀기 어린 기세로 다른 언데드들을 물어뜯고 돌로 찍고 있으니 모르고 보면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도령은 얼굴을 찌푸릴 수 없었다.

-안 돼! 가지 마! 안 돼!

-내 아이는, 내 아이는 절대로 먹을 수 없어어어어어!!

그것이 어머니의 저항이었으니까.

아이를 지키기 위해 겁많고 소심한 사람이 어머니로서 저항하고 있었으니까.

퍼퍽!

도령은 길을 막고 있던 언데드들을 부수며 나아갔다.

캬아악!

돕기 위해 온 도령을 어머니는 구분하지 못하고 돌을 휘둘렀다.

도령은 그 돌을 피해 앞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를 부드럽게 뒤로 밀어냈다.

밀어내어 담이 무너진 좁은 틈 사이 아이의 곁에 보내고서.

꽈아아앙!

그 앞을 비극을 반복하던 던전의 언데드들을 부수어 지켰다. 남김없이.

그리고 말하였으니.

"괜찮아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괜찮을 거예요."

약속하고서 나아갔다.

저벅.

언데드와 언데드들이 싸우는 풍경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모르고 보면 그저 상잔이었으나 영혼을 보고 영혼을 접할 수 있는 도령에게는 처절한 비극이자 저항으로 보였다.

평생을 함께 살았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운, 태어난 그 순간부터 가족이자 집이었던 곳을 지키기 위해 이가 다 빠질 때까지 싸운 충성스러운 개가 있었다.

심약하여 남에게 나쁜 소리조차 한 번을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 어머니이기에 괴물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가족을 위해 두 다리를 잃었음에도 손가락의 뼈가 다 닳아 없어지도록 괴물을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아버지도 있었다.

멸망의 순간.

그렇기에 비극이 너무나 흔하게 덧씌워져 그 처절함이 그저 하나의 검음이 되어 버린 마을을 나아갔다.

충성스러운 개가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어머니가 아이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아버지가, 가족의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멸망의 반복 속에 갇혀 있던 언데드가 아닌 마을 사람들의 비극을.

파각-

도령은 끊어냈다.

끊어냈다고, 마을 가장 안쪽 검은 구체에 금이 가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던전은 언데드가 되어 멸망의 비극을 반복하는, 이 세계에 갇힌 영혼들에 의해 계속되던 것이었다.

그들의 절망이. 가늠할 수 없는 절망이 이곳을 던전으로 만들었으며 비극이 반복되게 하는 것이었으니 당장은 그 비극에 의한 힘이 응축된 검은 구체를 부숴 현상을 멈춘다 해도 결국 던전 안에 갇힌 영혼은 그대로여서 다시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던전을 닫기 위해선 반복되는 비극을 끊어내고서 그들을 구원해야만 했다.

그것이, 옳은 공략법이었다.

사아아아아-

오직 재와 죽음뿐이던 세상에 빛이 어린다.

어둠 속에 조금씩 새어 나오던 빛은 이내 마을 전체를 비추기 시작하였으니 비극에 매몰되어 있던 이들의 영혼까지 비추었다.

-아아…….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비극을 반복하였던 걸까.

이미 바래어 버린 영혼은 제대로 된 형상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을 구원해 준 도령에게 감사를 표하였으니 도령은 빙긋 웃으며 그저 축원해 주었다.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정말로. 정말로 좋은 곳에 가시기를.

그리고 마침내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살기를 도령은 바라였고 그들의 성불을 지켜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근!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빛에 내몰렸던 어둠이 크게 튀었으니 도령은 몸을 돌렸다.

[그때, 그게 나왔단 말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25

25화

마을은 두 개의 절벽이 맞물린 아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입지와 이미 무너졌지만 마을의 규모에 비해 너무나 두텁고 높았던 벽, 창고 등으로 볼 때 세계가 멸망을 향해 치닫던 중 만들어진 마을처럼 보였다.

그러한 마을의 뒤편. 맞물린 절벽의 가장 깊은 곳.

본래는 마을 사람들이 대피소로 지었을 곳에서 그것은 나타났다.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곳. 그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숨어 노란 눈을 빛내고 있었을 짐승의 심장을 찢고 튀어 나온 듯한 끔찍한 것이.

두근!

저것이다.

도령은 맥동하는 그저 끔찍하고 어두운 그것이 이 세계의 파편을 던전화한 진짜 코어라는 것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저것은 단순한 코어가 아니었으니 이 세계가 던전화하는 동안, 그리고 던전화한 뒤로 얼마나 반복해왔을지 모를 멸망의 비극이 자아내는 부정적인 힘을 다 흡수하여 독자적으로 축적한 힘을 행사하는 재앙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단순한 힘이 아니라 그 힘을 계속해서 쌓기 위해 멸망의 비극을 반복하게 만드는 재앙의 정수.

그러니까 마을의 검은 구체는 재앙의 정수가 힘을 다 흡수한 뒤 남은 찌꺼기 같은 것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 기연이란 건 진짜 뭐였어. 김초월.]

[아, 그…… 뭐. 네크로맨서를 위한 보약이라고 해 둘까.]

[아니! 그게 답이 되겠냐고, 임마!]

틈만 나면 기연에 관해 지껄이면서도 두 부분에 한하여서는 항상 말을 얼버무리던 김초월.

개중 가장 중요한 기연의 정체에 관해 단 한 번도 명확히 말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못했던 이유를 재앙의 정수와 마주한 순간 도령은 알게 되었다.

두근!

저것은.

두근!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너무나 거대한 재앙이었다.

김초월 따위가 감히 수습할 수 있는 게 아닌.

두근!

그것이 멸망의 반복이 끊기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콰아아아아아!!

마치 심장처럼 뛰는 재앙의 정수의 고동에 맞추어 비극으로 쌓은 검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콰득!

도령은 땅을 내딛은 발에 내공까지 집중하여 겨우 밀려나지 않고 버티고 설 수 있었다.

고작 파동만으로도 그렇게 겨우 서서 버티는 것이 한계였던 짧은 사이.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악!!

승천해야만 했던 영혼들이 검은 사슬에 묶여 절규했다.

도대체 얼마나 반복했을지 모를 비극의 굴레를 마침내 끊고 승천했어야 할 영혼들이.

기필코 좋은 곳으로 가 마침내 행복해야만 할 영혼들이 그들의 얼마나 반복했을지 모를 비극을 먹고 자란 것에 붙잡혀 다시 그 비극의 굴레로 끌려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지직-!

츠츠츳-!

도령은 주먹을 콰득 쥐고서 마나를 일으켰다.

일으킨 마나를 구체화하며 주먹을 푼, 분노로 떨리는 손에 응축하였으니 모험가 등록소의 테스트에서 보여 주었던 시험의 돌을 단번에 꿰뚫었던 바로 그 '폭렬시(爆裂矢)'를 사령기가 아닌 마나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당시 간이로 구사하였음에도 시험의 돌을 꿰뚫었던 폭렬시는 도령이 첫 번째 삶에서 즐겨 사용하던 마나 운용법 중 하나였으니 원거리에서 거대한 마물을 일격에 즉사시킬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아직은 그 정도의 위력을 바랄 수 없지만 모험가 등록소에서 테스트를 받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성장한 도령의 지금 폭렬시도 결코 그 위력이 범상치 않았지만.

꽈아아아앙!!

도령이 쏘아낸 폭렬시는 영혼을 붙잡은 검은 사슬을 끊지 못했다.

모자랐던 것이다. 힘이.

재앙의 정수는 그렇게 힘이 모자랐던 공격을 날린 도령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콰아아아아!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몇십 개나 되는 검은 사슬이 재앙의 정수에게서 더 솟아나 속박한 마을 사람들을 뒤덮으려 한다.

항거할 수 없는 재앙.

사람의 정신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결코 대항할 수 없으며 막을 수 없는 재앙.

쇄도하는 검은 사슬은 그렇게만 보였고 또 비극의 반복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

카아아앙!

그 비극을 끌어당기던 검은 사슬이 허공에서 나타난 귀기(鬼氣)가 일렁이는 칼에 부서져 떨어졌다.

두근!

재앙의 정수가 크게 한 번 튀었다.

그리고 마치 눈이 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했으니 거기에는 공간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르르-

재앙의 정수와 도령, 그리고 그 가운데 재앙의 정수에 끌려가던 영혼들의 사이에 공간이 일렁이고 있으니 그 너머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난다.

화륵.

귀화병(鬼火兵).

텅 빈 안와에 눈 대신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그것들은 다름 아닌 도령의 군단의 초석이 되는 귀화병들이었다.

영혼을 태워 일으키는 불꽃을 갑주처럼 두른, 유독 커다란 마골의 뼈를 소체로 한 놈을 중심으로 하여 여덟 마리의 귀화병이 재앙의 정수가 영혼을 잡아끌던 사슬을 부수며 도령의 앞에 공간을 넘어 도열하였다.

그렇게 영혼을 속박하여 삼키려던 검은 사슬을 부수고 귀화병을 도열시킨 도령이 선언했다.

"내가 축원한 영혼들이야. 그 길을 막아서는 건 용서할 수 없어."

그래.

도령이 축원한 영혼들이었다.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가 행복해야 할 영혼들이란 말이다.

그래야만 할 미래를 비극으로 바꾸려는 행위를, 도령은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두근!

그렇게 영혼들의 앞을 막아선 도령에게 재앙의 정수가 한 번 더 고동하며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것은 자석에 이끌리듯 바닥에 깔린 검은 기운이 치솟게 만들었고 마치 작살처럼 도령 너머 영혼을 노리고 쏘아졌다.

카앙!

그러나 재앙의 정수가 만들어낸 작살은 영혼을 꿰뚫지 못했다.

도열한 귀화병이 도령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을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칼로 막아낸 것이다.

아직 원하는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도령의 마나와 사령기로는 재앙의 정수를 막아낼 수 없었다.

얼마나 반복하였는지 모를 비극에서 비롯한 기운을 축적해 온 재앙의 정수가 품은 기운은 지금의 도령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거대했기 때문에.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본래의 경지를 오롯이 발휘할 수 없는 도령이 재앙의 정수를 막을 수 없게 했다.

카아아앙!

하지만 귀화병은 다르다.

힘의 격차는 마찬가지로 아득하지만 힘의 질이 다르다.

귀화병은 도령의,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네크로맨시로 일으킨 스켈레톤이니 아득한 힘의 차이를 메꿀 정도로 격의 차이가 있었고 재앙의 정수가 감히 도령이 축원한 영혼을 집어삼키는 것을 철벽처럼 막아내는 것이다.

카아아아앙!!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영혼을 태워 그 힘으로 삼는 귀화병은 재앙의 정수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모든 시도를 저지한다.

도령은 그렇게 귀화병을 움직이며 재앙의 정수 본체를 두 눈에 담는다.

전투는 호각……이라고 봐야 하는 상태다.

어느 쪽도 밀리지 않지만 동시에 어느 쪽도 밀지 못하고 있다.

도령의 귀화병은 질에서 앞서지만 양에서 밀려 재앙의 정수에게 밀고들어가지 못했다.

영혼들을 지켜야 한다는 목적도 있다.

재앙의 정수는 반대로 양에서 우위에 있어 공세를 계속할 수 있지만 그 힘의 질이 떨어져 귀화병을 밀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평행선을 그리는 전세는 그러나 계속될 수 없었다.

귀화병의 힘이 무한하지 않으니까.

영혼을 태워 그 힘으로 삼는 귀화병은 그렇기에 영혼이 다 타 버리면 평범한 스켈레톤으로 전락하고 만다.

본질만이 남으면 영혼은 승천해 버리고 동력을 잃은 귀화병은 평범한 스켈레톤이 되어 버리니 힘의 규모에서 압도하는 재앙의 정수에 단번에 쓸려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도령은 승부를 보아야 했고 방법을 고민하려던 순간이었다.

두웅-!

"……!"

변화는 도령이 아닌 재앙의 정수로부터 시작되었다.

재앙의 정수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심장처럼 고동하던 그것이 깊고 거대한 울림과 함께 크게 팽창했다. 마치 힘이 폭발한 것처럼.

그렇게 팽창한 것이 삽시간에 도령에게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커지더니 거인의 형상을 이루고서는.

콰아아아앙!!

거대한 팔로 도령을 내리쳤다.

찰나였다.

구체였던 재앙의 정수가 거인이 되어선 도령을 내리치기까지의 시간은.

도령은 그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감각을 한계까지 벼려내 대응하였기에, 그 감각에 늦지 않게 몸이 움직여 준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앙의 거인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후웅!

내리친 주먹을 그대로 도령이 피해낸 우측으로 휘두른다.

단지 그 행위만으로도 도령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되었다.

재앙의 거인은 재앙의 정수가 품고 있던 가늠할 수 없는,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를 세계의 멸망 속 비극이 만들어낸 끝이 보이지 않는 부정적인 힘을 직접 두르고 휘두르는 것이니 그 행위 하나 하나가 도령에게는 천재지변과 같은 위협이 되는 것이다.

속도와 힘. 양쪽에서 도령이 쫓아가기 어려웠다.

화륵.

귀화병들이 영혼을 더 거세게 태워 피워낸 힘으로 앞을 막아섰다.

꽈과과과광!!

귀화병들은 그러나 찰나를 버티는 것이 한계였다. 그나마도 뼈가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덕분에 도령은 다시 한 번 거인의 팔을 피할 수 있었으나 위협은 계속된다.

꽈아아앙!

부서진 귀화병 대신 다른 귀화병들이 막아섰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꽈아아아아앙!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마골을 소체로 한 귀화병마저도 허무하게 부서져 흩어졌다.

그저 끊임없이 휘두르는 팔이 대항할 수 없는 생명의 위협으로 도령을 노렸고 도령을 지켰던 귀화병을 모두 부수었다.

그렇게 모든 귀화병을 부순 재앙의 거인은.

쿠웅.

멀찍이 물러선 도령을 이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판단하였는지 무시하고서 영혼들을 사슬로 속박한다.

-아아.

-안 돼! 싫어어어어어어!!

영혼들이 절규했다.

평범한 이들은 결코 듣지 못할 절규.

그러나 영혼을 이끌기 위하여 영혼을 볼 수 있고 또 영혼을 접할 수 있는 도령에게는 세상을 가득 채우는 절규다.

그 절규를 귀로 듣는 도령의 눈에 재앙의 거인이 영혼을 삼키기 위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크릉!

충직한 대형견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덤벼들지만 그 저항은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미 빛이 다 바래버린 영혼은 재앙의 거인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영혼들에게 있어 확정된 비극이었고.

꽈아아앙!!

그 비극이 싫었던 도령의 주먹이 재앙의 거인의 뻗은 팔을 후려쳤다.

부오오오오오오-!!

재앙의 거인은 즉시 격렬하게 반응했다.

포효하며 도령에게 주먹을 내리쳤다.

그 압도적인 면적과 속도는 도령에게 회피를 허락하지 않는다.

찰나 떠오르는 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

위협이 되었던 건 귀화병이었지 도령이 아니었다는 듯 귀화병을 다 부수자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렸던 재앙의 거인.

그 뒤를 철저하게 준비하여 확신의 순간 노렸다면 재앙의 거인을 꿰뚫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이 영혼들은. 도령이 축원하였던 영혼들은 다시 한 번 멸망의 굴레에 휩쓸리고 말았겠지.

그렇다 해도.

그렇다 해도 도령이 죽으면 다 소용없는 것 아닌가.

결국 이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요 무엇 하나 구원하지 못할 바보 같은 선택이었지 않은가.

'아니.'

쿠득!

도령은 주먹을 쥐었다.

쿠우우웅!

발을 강하게 내딛었다.

도령이 원한 건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었다.

축원한 영혼이 하나도 빠짐없이 승천하는 것.

그러면서 도령 또한 이 재앙의 거인을 토벌할 것.

도령은 두 가지를 다 이루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결코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재앙의 거인에 맞서 도령은 주먹을 내뻗었고.

꽈아아아아앙!!

온몸을 으스러뜨리는 충격이 도령을 짓눌렀다.

콰드득-

부서진다.

온몸이, 부서질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도령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스승이 되어 준 인연.

천마의 이야기였다.

[도령아.]

[너는 미래에 팔다리를 되찾을 것이다.]

기원에 도달할 것이었으니까.

도달하여 분명히, 소원을 이룰 것이었으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너는 너 자신을 믿는 연습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스승님. 당신은 미래까지 예언하시는군요.'

콰득!

도령이 주먹을 힘주어 다시 한 번 쥐었다.

26

화륵-

그것은 다시 피는 시귀화(屍鬼火)의 불꽃이었으니 철저하게 부서졌던 귀화병이 다시 일어나며 피운 불꽃이었다.

언데드.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언데드였던 스켈레톤 귀화병은 그렇기에 재앙의 거인에 부서졌으나 도령의 의지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난 것이었고.

카아앙!

다시 한 번 영혼을 붙들었던 검은 쇠사슬들을 끊어냈다.

부오오오오오-!!

재앙의 거인은 분노했다.

강렬한 본능에 따른 행사를 방해하는 귀화병에 더없이 분노하며 날뛰려 하였으나.

콰득!

맞닿은 주먹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위협'에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두근!

그래.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위협이 있었다.

부서졌어야 할 육체가 부서지지 않은. 의지가 꺾이지 않았기에 결코 부서지지 않을 육체로 우뚝 서서는 힘주어 주먹을 쥔 도령이.

-술사는 허약하며 근거리에 약하다.

지구의 인간들이 마법사 등 술사에 가지는 이 선입관은 탑에 휩쓸린 이 시대에 절반만 맞는 말이었다.

술사는 결코 허약하지 않다.

생명을 초월의 영역으로 이끄는 마나가 깃든 육체는 결코 허약할 수가 없었으니까.

술사 또한 마나를 익히며 그 육체가 초월의 영역에 이른다.

다만 그럼에도 근거리에 약하다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술사가 마법 등의 수단 이외에 근거리를 커버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냐의 이야기였는데 바로 이 이야기에서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네크로맨서로서 독보적인 영역에서 군림하고 있음에도 도령은 '허약하고 근거리에서 약하다'는 말에서 벗어나지 못한 네크로맨서였다.

하위의 수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급의 존재와의 싸움에서 도령은 결코 근거리에서 싸울 수 없었으니 나아가기 위해, 살아남아 나아가기 위해 포기해야만 했던 팔다리를 대신하여 몸에 붙인 것이 싸움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약점이 정점에서 군림하는 마스터 네크로맨서인 도령의 약점으로 너무나 유명해졌기에.

끊임없이 노려졌고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기어코.

[더 이상 일어날 필요 없다. 네크로맨서.]

도령이 끝에 다다르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도령은 결국 '자기 자신'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완전하게 믿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너 자신을 믿는 연습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리고 이 순간. 스스로가 믿지 못한 몸이 무너지려 한 이 순간 천마. 스승이 되어 준 존재와의 대화가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천마신공을 익히는 데에 필요한 재능은 오직 하나.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 그럴 수 있는 의지이니라.]

[네. 그랬었죠.]

[그 이유는 간단하고 또 명료한 것이다. 결코 꺾이지 않고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필요한 힘은 천마신공이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천마신공 또한 꺾이지 않으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마신공이 깃든 육체 또한. 너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이상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두근!

…이제서야 비소로 깨닫는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었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목표로 매일 한계를 깨고 그 너머로 나아가고 있음을 실감하며 더없이 기뻐하였음에도 나 자신을 믿지는 못하고 있었구나.

뿌드드득-

그러니 이렇게 삐걱이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신뢰라는 기둥이 없으니 제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외부의 힘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스으-

그리고 이제 결코 흔들리지 않을 스스로에 대한 신뢰라는 기둥을 세우니.

두근!

마침내 도령의 몸에 진실로 천마신공의, 연신극기공의 공능이 스며든다.

쿠오오오오오오-!!

기다렸다는 듯 연신기가 포효하며 도령의 혈도를 내달리고 근육을 일깨운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던 감각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마치 신(神)이라도 태어날 것처럼 무한한 힘과 생명력이 샘솟는다.

지금까지 도령이 느꼈던 모든 것이 마치 호수에 비친 달이었던 것처럼.

이제서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해방되었다는 연신기의 기쁨의 포효가 도령의 몸 전체를 미친듯이 뒤흔든다.

그러나 도령이 마침내 깨닫고 세운. 다시는 부러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신뢰의 기둥은 굳건하니 이 순간 도령의 심(心), 기(氣), 체(體)는 하나가 되고 비로소.

두근!

무(武)가 태동한다.

부오오오오오-!

위협을 느낀 재앙의 거인이 도령과 맞닿은 주먹을 당긴다.

그에 깃든 것은 얼마나 반복되었는지 모를 멸망 속 비극이 만들어낸 끝이 보이지 않는 부정적인 힘이다.

지금의 도령이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힘.

스으-

깊이 호흡하는 도령의 눈은 지금 그러나 그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재앙의 거인이 한없이 하찮게 보이고 있었다.

저렇게나 거대한 힘이다.

제대로 다룬다면 도령은 감히 찰나조차 대항할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도령은 저것이 결코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하찮게 보일 지경이었으니 힘을 휘두르는 재앙의 거인이 너무나 하찮았기 때문이다.

당겨진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팔.

그것은 도령을 압도하는 속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궤적이 너무나 선명하여 뻗기도 전에 그저 한 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맞지 않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부웅!

도령의 옆을 스치는 팔은 폭발적인 속도로 인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이 깃들어 있었으나 휘두른 재앙의 거인이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툭.

그저 가볍게 두드려 흐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도령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리하여 주먹을 휘두른 재앙의 거인이 도령이 가만히 서 있는데 저 혼자 저 멀리 벽에 날아가 처박히는 모양이 된다.

부오오오오오-!

재앙의 거인은 이러한 '이치에서 벗어난' 상황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 어떤 고민도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가늠할 수 없는 힘을 휘두를 뿐이니 진실된 무의 영역에 눈을 뜨고 내딛기 시작한 도령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부웅!

이치의 편린조차 담기지 않은 하찮은 힘의 덩어리는 이제 도령에게 닿을 수 없다. 설령 닿는다 하여도.

스으-

도령의 손이 재앙의 거인의 거대한 주먹에 닿는다.

하지만 그 힘이 폭발하는 일은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당겨지는 도령의 팔을 따라 재앙의 거인의 주먹이 따라가며 거기에 담겨 있던 힘이 도령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재앙의 거인의 것이었으나 도령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한낱 미물 따위가 저항할 수 없는 이치의 흐름에 힘의 방향이 바뀐다.

그 거대한 힘의 흐름이 맞닿은 손을 통하여 도령의 몸을 흐른다.

쿠드드드득!

지금의 도령으로선 자아낼 수 없는. 그렇기에 몸에 한계를 넘어선 부하가 걸리고 마는 힘.

그러나 도령의 의지는 이제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한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깃든 육체는 이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쿠오오오오오-!!

그리고 그러한 육체에 그득한,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가 깃든 한 멈추지 않으며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천마신공의 이치가 무(武)를 자아내니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달(达)

훅-

다음 순간 재앙의 거인은 허공에 떠 있었다.

부, 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순수한 의문이 놈에게 깃든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놈이 의문을 표시할 정도로 이것은 아득한 이치였으니 천마신공의 맨손 무공인 백타의 초식 '달'이다.

흔히 세간에 알려진 인식의 사량발천근이나 이화접목의 이치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힘을 유도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낸다.

이치가 자아내는 흐름에 상대의 힘을 빠뜨려 버리니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힘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은 그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아주 살짝 비틀어 버리면 된다.

도령은 그렇게 하여 재앙의 거인을 항거할 수 없는 흐름에 태워 허공에 띄워 버렸다.

부, 부오오오오!!

재앙의 거인은 안간힘을 쓰며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안 된다.

하려면 처음부터 저항했어야지 이미 그 흐름에 휩쓸려 버린 다음 제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재앙의 거인이라 하지만. 무수한 비극의 반복이 자아낸 가늠할 수 없는 끔찍한 힘의 덩어리라 하지만 그래봐야 한낱 미물.

이치의 흐름을 어찌 이겨낸단 말인가.

그러니 저 허공에서 무방비하게 버둥거리는 미물을 이제 도령은 꿰뚫어야만 했으니 스으, 다시 한 번 깊이 호흡한다.

두근!

두근!

마침내 깨달아 심기체가 합일하여 무를 일깨운 도령은 이제 저것을 꿰뚫을 수 있다.

여전히 가진 힘은 부족하지만 본디 무(武)라는 것은. 천마신공이란 것은 의지를 세상에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요 힘이었으니 필요한 것은 이미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스으-

쿠오오오오오-!

연신기가. 아니 거듭된 가속 끝에 그 성질이 달라져 버린 '내공'이 포효하며 내달린다.

고삐조차 없이 내달리는 그것을 도령은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도하였으니 내딛는 한 발에 그 힘이 실린다.

두웅-

폭발음은 없다.

이치에 따라 생성된 힘은 흩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포효하는 내공에 실렸고 발목, 무릎, 허리, 어깨, 팔꿈치를 지나 주먹에 이르기까지 이치의 향연 속에 내공과 함께 거듭 증폭되고 또 증폭된다.

스으으-

그러면서도 요란하게 자신을 자랑하는 대신 그저 벼리고 또 벼려졌으니 그것은 한줄기 꿰뚫기 위한 이치의 구현이었고 천마신공.

백타(白打) 천(穿)

쏘아진 이치는 명료하게 거듭된 재앙의 응어리를 꿰뚫은 것이었다.

그리고 도령은 자각하니.

'나는.'

천마신공을 익힌 네크로맨서다.

* * * *

사아아아아…….

코어. 핵을 꿰뚫린 재앙의 정수에서 조금씩 부정적인 기운이 새어 나온다.

그릇이 깨어진 이상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이 쏟아지는 건 필연적이다.

재앙의 정수가 만들어냈던 거인의 형상은 이미 모래처럼 스러져 흩어진지 오래다.

그것처럼 재앙의 정수 또한 아무 일 없이. 그저 연기처럼 안에 담겨 있던 것이 흩어져 사라지면 좋았겠지만.

부글. 부그르륵. 콰르르르르륵!!

재앙의 정수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반복하였는지 모를 비극 속에서 부정적인 기운을 흡수해 온 재앙의 정수는 말 그대로 거대한 댐과 같았으니까.

균열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한 부정적인 기운은 불길한 소리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 부하를 견디지 못한, 이미 부서진 재앙의 정수에 쩌저적 금이 가며 당장이라도 안에 든 모든 것이 폭발할 것처럼 불길하게 날뛰었다.

실제로 이대로 두면 이곳만이 아닌 던전, 세계 전체가 휩쓸릴 정도로 안에 든 불길한 기운의 양은 막대했다.

그 기운에 휩쓸린 이 세계가. 던전이 어떻게 될 지는 마스터 네크로맨서인 도령도 짐작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 '마계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끔찍하고 또 끔찍한 마계와 이곳 지구가 이어지는 문이 말이다.

결코 그렇게 되어선 안 될 일이었으니 어떻게든 재앙의 정수를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했고 다행스럽게도 여기에는.

스으으-

천마신공을 익히고 회귀한 마스터 네크로맨서가 있었다.

27

콰르르르르륵!

뚫린 구멍을 통하여 새어 나오는 부정적인 기운의 기세가 마치 부서진 댐의 틈으로 물이 쏟아지는 것만 같다.

심지어 그것이 아직 완전히 댐이 무너지기 전의, 그러나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리고 갇혀 있던 가늠할 수조차 없는 양의 물이 쏟아지기 일보직전인 것 같아 보는 이가 있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하지만 도령은 그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고 담담하게. 차분하게 쏟아지려는 부정적인 기운의 흐름을 조율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지만 아직은 부서지지 않은 재앙의 정수에 더 부담이 가지 않도록 힘의 방향을 유도하여 차분한 흐름을 만들고 원을 그리게 하여 순환하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재앙의 정수만이 아닌 도령에게도 부담이 가지 않으면서 차분한 힘의 흐름을 완성하였으며 부정적인 기운이 흐름 안에서 조금씩 증발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조율은 사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다.

어지간히 대단한 인간, 아니 엘프를 넘어 드래곤이라 하여도 섣불리 가능하다 말하지 못할 만큼.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은 난이도의 작업이다.

하지만 도령은 그것을 해낼 수 있었으니 이런 것마저 가능하기에 마스터 네크로맨서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버린다.

스으-

호흡하며 흩어지는 과정에 있던 부정적인 기운을 흡수한다.

저릿-

호흡을 통하여 흡수한 부정적인 기운이 흐르는 혈도에 고통이 가해지지만 도령의 호흡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정교하게 호흡하며 기운을 다스리니 흡성대법의 공능에 따라 탁한 기운이 정화되고 순수한 사령기만이 남았으니 고스란히 도령의 힘이 되었다.

스으-

마치 흘러나오는 모든 기운을 다 흡수할 기세로 도령은 그렇게 무아지경에서 호흡하였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그 순환의 중심에서 조금씩 환원되는 기운의 일부를 받아들여 정화,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거대한 이치의 흐름 속 '순환'의 일부가 되어 무아지경에 이르니 깨닫는다.

두근!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순환이라는 지극한 이치의 끝자락을.

생명이 나고 지는 자그마한 순환. 그 순환이 모여 이루어지는 점점 더 커지는, 그러나 결코 어긋나는 법이 없는 우주에 이르기까지의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았던 순환의 이치라는 것을 무아지경에서 일부가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아…….'

마치 스스로가 우주가 되어 버린 듯한 아득한 전능감과 끝이 없는 영혼의 확장에 도령은 전율했다.

그리고.

띠링-!

[진(眞) 에너지 컨트롤(Energy control) 모듈을 각성하였습니다!]

'……뭐라고?'

단숨에 영혼을 현실로 잡아당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일곱 번째 모듈'을 각성했다는 안내였다.

두근.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2회차인 도령조차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쿠르르!

하지만 도령은 곧 머리가 복잡해지게 만든 모든 요소를 일단은 억눌러야만 했으니 지금은 당장 재앙의 정수에서 쏟아지는 끔찍한 기운의 제어에 집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스으-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호흡을 바로한다.

그리고 휘발되기 직전이었던 깨달음을 몸 안을 순환하는 흐름에 녹이니 한 시간, 한나절, 하루, 3일.

3일이나 되는 시간이 지나서야 재앙의 정수가 품고 있던 기운을 모두 안전하게 흩어 버릴 수 있었다.

"후우……."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꼬박 기운의 제어에 힘을 쏟았던 도령은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과 힘으로 그득한 육체를 느끼고 있었다.

기운을 제어하며 얻었던 깨달음.

그 과정에서 동반되었던 흡성대법을 통한 기운의 흡수와 내공의 운기.

그로써 정신은 물론이요 육체 또한 한 차원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활력이 넘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두근.

심장에 깃든 사령기 또한 세 배는 넘게 불어나 있었으니 재앙의 정수가 품고 있던 부정적인 기운의 증발하는 일부만을 흡수하였음에도 이 정도나 되는 양을 심장에 쌓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가히 반 년의 시간을 단 3일로 줄인 수준이니 기연이 따로 없다.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띠링-!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를 획득하였습니다.]

'뭐?'

타악.

도령은 살짝 놀라며 허공에서 떨어지는 검은 구슬을 받아들었다.

빛나지 않는, 그러니까 매트 블랙이라고 해야 할 색깔의 작은 구슬은 재앙의 정수가 품고 있던 부정적인 기운이 모두 증발하거나 정화되고 남은 순수한 힘의 결정이었다.

비록 대부분이 증발하였다고 하지만 셀 수 없을 만큼의 비극을 반복하며 쌓였던 힘이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대단한 것이었으니 보통이 아닌 게 남을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데.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라니.'

그런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놀랄 정도로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란 건 터무니없는 물건이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는 그 이름대로 도령이 마스터 네크로맨서가 되고서 사용했던 '종결 무기'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첫 모험의, 그것도 저층의 던전에서 탑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활동하는 모험가가 사용할 수 있는 종결 무기의 재료가 드랍됐다는 말이다.

어디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개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득템'을 해 버렸다.

'으음…….'

어디까지나 재료 중 하나이고 회귀하기 전 도령이 쓰던 스태프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선 여러가지 재료가 더 필요하다지만 당장 여기서 임시로 쓸 수 있는 재료만 구해다 더해도 두 배 이상 전력의 증가 효과를 볼 수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에 사령기의 증가, 그리고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까지.

김초월의 기연을 빼앗으러 오긴 했는데 사실 엄청난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큰 소득이다.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아아아아-

'아.'

빛의 알갱이가 마치 첫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속박에서 벗어나 이제 정말로 승천하기 시작한 영혼들이 남기는 빛이었다.

그야말로 첫눈처럼 닿는 순간 덧없이 녹아 사라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빛 알갱이는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도령의 발밑에 고였다.

그리고 영혼들이 다 승천할 즈음 자그마한 웅덩이를 이룬 그것은 앞서 재앙의 정수가 그랬던 것처럼 순수한 결정을 이루었으니 도령은 그것을 손에 쥐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도령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어떤 면에선 그 이상으로 귀한 것이었으니 '생명의 정수'라 불리는 것이었다.

승천하는 영혼들이 마스터 네크로맨서에게 남긴.

-감사합니다.

감사의 선물이었다.

띠링-!

[멸망한 세계의 파편을 닫았습니다.]

* * * *

"그 던전을 닫았다고? 누가? 뉴비가?!"

"뭐? 그 던전을 닫아? 뉴비가?!"

"아니 미친. 푸하하하하! 이게 무슨 유쾌한 소식이야!"

지구층의 어느 외곽 마을.

그 조용한 마을이 아침부터 난리가 났으니 모험가 등록소에서부터 전해진 소식 때문이었다.

-첫 모험에 나선 뉴비가 던전을 닫았다. 그것도 아주 골칫거리였던 던전을.

이 세계. 탑 안에서 던전이란 것은 보존되지 못한, 혹은 여러가지 이유로 멸망해 버린 세계의 파편이 뒤틀리고 일그러져 탄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던전을 방치해 좋을 것이 없었고 몇몇은 아예 온갖 해악을 일으키며 당장 처리하라고 협박을 하는 수준이었기에 모험가의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던전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던전의 처리에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하나가 클리어요 다른 하나가 '클로즈(Close)'였다.

클리어는 단순히 던전을 청소하는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던전 안에 방치할 경우 넘치게 되는 마물, 몬스터가 바깥으로 나와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토벌하여 개체수를 줄이는 것이 클리어다.

다른 하나 클로즈는 그러한 임시 방편을 넘어 던전을 말 그대로 '닫아 버리는' 완전한 클리어를 뜻한다.

던전화한 세계를 완전하게 공략하여 소멸시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클리어보다 클로즈가 더 낫다.

주기적으로 품을 들이는 것보다 근원을 완전히 처리하는 게 두말할 것도 없이 더 좋다.

문제는 이 클로즈라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단순하게 그냥 난이도가 어려우면 차라리 낫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그런 소수는 이미 다 닫혔고 남은 것들은 어지간한 힘으론 공략할 수 없거나 아예 클로즈 방법이 뭔지 알지 못하는 던전들이었다.

그리고 이곳 마을 근처에 초보자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클로즈 방법을 알지 못해 골치를 썩이면서도 닫지 못하던 던전 하나가 놀랍게도 처음 모험을 떠난 뉴비에 의해. 도령에 의해 클로즈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마을 전체가 들썩이며 모험가 등록소가 대낮부터 축제 분위기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야, 그 던전 그거 진짜 꼴 보기 싫었는데 우리 뉴비가 그걸 닫아 버렸네!"

"그러게 말야. 그거 안 닫혔으면 다음 당번이 나였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거 받아!"

"감사합니다."

대낮부터 벌어진 술판에 모험가들이 도령을 둘러싸고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기분을 내고 있다.

오늘은 쉬는 날이었던 모험가들이 구실 삼아 기분을 내는 것도 있었지만 정말로 그 던전이 골칫거리였으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라 정말로 즐거워하는 게 컸다.

돈도 안 되고 경험치도 안 되는데 클리어만 해도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해 속된 말로 '극혐' 그 자체였던 던전을 뉴비가 클로즈해 버렸다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 기특한 뉴비를 둘러싸고 술은 안 좋아 한다니 온갖 음료에 고기까지 쏘면서 극찬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나 전도유망한 뉴비는 이 마을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

'…씨발.'

안 그래도 도령을 험담하고 질투하던 김초월은 아주 속이 뒤집어져 위궤양이라도 걸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한소리하고 싶은데 저능아는 아니어서 지금 괜히 한 마디 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걸 알기에 입을 뗄 수 없어 더욱 위에 구멍이 날 것 같다.

그래서 그저 눈으로만 도령을 꿰뚫을 듯 구석에서 노려보고 있었는데.

스으-

어느 순간 도령과 눈이 맞았다.

두근!

김초월의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크게 뛰었다.

단순히 어떤 전조도 없이. 과정이 생략된 듯 눈이 맞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렇게 눈을 마주한 순간 마치 목덜미에 사신의 서늘한 낫이 드리워진 듯한 차가운 공포가 얼음물처럼 몸을, 아니 영혼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덜덜덜.

몸이 통제에서 벗어나 덜덜 떨린다.

단순히 보고 있을 뿐인데.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부라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지 응시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 도령의 눈을 마주한 순간 김초월은 오로지 공포로만 머리가 가득차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스윽.

한참이 지나서. 사실은 공포로 인해 주욱 늘어났던 찰나의 시간이 지나서 도령의 시선이 떨어지고서야 김초월은 잊고 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허억!"

"뭐야. 왜 그래?"

주변의 모험가 중 하나가 그래도 꼴에 같은 모험가라고 걱정해 주었으나 김초월은 대답하지 않고서는 허겁지겁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뭐야 저거."

그리고 도령은 김초월의 등에 한 번 더, 잠시 시선을 주었으니 생각하고 있었다.

저놈을 살려 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28

마족(魔族).

탑의 심층인 지옥이자 마계(魔界)에 사는 지성체로 지성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 대부분의 지성체에게 생명으로서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무조건적으로 죽여야만 하는 해악으로 규정된 것들이다.

생명을 유린하고 농락하며 죽이는 것을 오로지 쾌락으로 삼는 끔찍한 것들.

그 쾌락을 위해 온갖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으니 다른 생명을 나락으로 빠뜨려 꼭두각시로 삼곤 한다.

일전 마족의 수법에 의해 뒤틀린 흡성대법을 익힌 마골의 경우처럼 지성체를 검게 물들이고 주변까지 그것이 번지게 하는 악랄한 수법을 퍼뜨리는가 하면 더 적극적으로는 '계약'을 하기도 한다.

계약으로써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부여하여 계약자가 더 큰 힘으로 더 큰 비극을 일으킬 수 있게 말이다.

그러한 계약을 통하여 더 큰 힘을 손에 쥔 흑마법사는 그렇기에 마족과 마찬가지로 생명으로서 취급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그로써 더 큰 힘을 추구하고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것들.

김초월은 도령의 전생에서 그런 흑마법사가 된 빌런이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흑마법사가 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앙의 정수와 접촉함으로써 모종의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영혼이 오염되었을 테고 악마, 마족과 관련된 것들의 눈에 띄어 계약에까지 이르렀겠지.

당시 놈이 일으켰던 비극을 생각하면 원인이 된 '기연'을 압수하는 건 미래를 알고 있는 자로서 비극을 막기 위해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렇게 비극을 막은 지금 도령은 고민한다.

도령의 시선에 벌벌 떨고 있는 김초월을 죽여야 하는가, 하고.

이번 삶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그것 때문에 지금 죄 짓지 않은 인간을 죽여도 되는가 하는 고민을 선(善)을 타고난 도령으로서는 할 수밖에 없었다. 더더욱.

"……."

시선을 떼자 숨을 몰아쉬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김초월의 영혼을 도령은 꿰뚫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금 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 악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한 번 선택을 잘못하면 순식간에 검음이 번져가겠지만 아직은 그 영혼이 인간의 것이었던 거다.

저러한 영혼을 지닌 인간은 비극을 일으키지 못한다.

'인간으로서의 영혼'이 그러한 행위에 스스로 제동을 거니까.

그러니까 도령은 이내 결정했다.

'지금은' 살려주기로.

이대로만 산다면 김초월은 인간으로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정이 이윽고 악으로 기운다면. 그로 인해 영혼이 검게 물든 게 보인다면 도령은 망설임없이 그 숨통을 끊어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아직 짓지 않은 죄. 그러나 도령만큼은 그 죄를 선명하게 경험하고 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 * * *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도령의 부모님은 일어나 있었다.

마침 딱 저녁 식사를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도령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배고파, 엄마."

모험가 등록소의 식당에서 제법 많이 먹었지만 연신극기공을 익힌 도령은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양분으로 삼을 수 있었기에 망설임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도령, 아들의 말에 어머니의 손이 바빠진다.

"우리 아들 배고프면 안 되지! 잠시만 기다려!"

도령의 당부대로 물자 교환권을 사용해 받아 온 좋은 식재료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도령은 거기에 미소지으며 식사 준비를 거들었으니 곧 가족이 둘러앉은 푸짐한 저녁 식사 자리가 되었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을 도령은 알고 있었으니 맛있게 식사를 하는 것이 효도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맛있는 식사를 하는 건 자신도 행복해지는 일이었으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맛나게 먹는 아들의 모습에 더 행복한 미소를 짓는 부모님을 마주하여 도령은 말했다.

"아버지. 엄마."

"응?"

"나 연금 나올 거예요."

"그 던전 클로즈한 거?"

좁은 동네였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이었고 부모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 보상금도 나오고 연금도 나올 거라네. 지부장님이."

"큰일 했네, 우리 아들."

도령은 빙긋 웃으며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은 큰일이 아니에요."

"무리해서 한 일이 아니었어요. 무리할 리가 없잖아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니까 큰일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였어요."

그것은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하는 말이었다.

탑을 나아가는, 모험하는 모험가인 아들을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그 걱정이 최소화될 수 있기를.

아들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믿을 수 있고 또 안심할 수 있도록 도령은 노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제 그 어느 때든. 어떤 모험을 나아가든 무사히 돌아와서는 빙긋 웃으며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아들의 마음에 어머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러면…… 며느리는 언제 데려올 거니?"

"아. 내가 유능한 사람인데 그건 잘 계산이 안 되네."

"아니 이 불효자가?"

* * * *

밤.

든든하게 먹은 것을 연신극기공의 단련으로 모두 소화한 도령은 샤워까지 마치고서 자리에 앉아 호흡을 편안히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확인해야 할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모듈 확인,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띠링-!

- - - -

직업 : 마스터 네크로맨서(Master Necromancer)

칭호 : 도령사(道靈士)

메인 모듈(Main module) 1. 네크로맨시(Necromancy)

……

메인 모듈(Main module) 7. 진(眞) 에너지 컨트롤(Energy control)

- - - -

…거기에는 정말로 있었다. 일곱 번째 모듈이.

'일곱 번째 모듈'이란 건 마스터 네크로맨서이자 탑의 기원에 닿았던 모험가인 도령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초유의 것이었다.

경험하거나 목격하기는커녕 풍문으로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 떡하니 지금 도령의 스테이터스에 표시돼 있었으니 다시 한 번 생각이 많아진다.

하물며 그 앞에 '진(眞)'이 붙어 있으니 더더욱.

풀어서 말하자면 진이란 진짜란 뜻이니 지금 도령의 스테이터스에 있는 에너지 컨트롤이 진짜이고 그 외에, 도령이 지닌 진 에너지 컨트롤을 제외한 모든 에너지 컨트롤은 진짜가 아니란 말이 되어 버린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확대 해석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는 거다.

미래에서가 아니라 이미 과거에서 어떤 사건들로 인해 증명이 되어 버렸으니 그 시작이 바로 지구에서 있었던 희대의 사기 사건이었다.

지구의 유력자와 이름을 날린 모험가들에게 접촉하여 유실된 천마신공의 일부를 찾았다며, 당신에게만 특별히 전수하여 모듈로 각성할 수 있게 해 주겠다며 접근한 자들이 있었다.

이미 전모가 다 밝혀진 지금이야 터무니없는 소리요 속는 게 바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아주 정교하게 꾸며진 사기였으니 일부러 유력자들을 찾아가 오히려 당당하게 무언가가 필요하다 요구하였고 그럴싸한 무공까지 보여 줌으로써 신뢰를 얻었다.

여기까지만 보았다면 그저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거대한 사기 사건으로 끝났을 텐데 그 무공을 배운 이들에게 정말로 모듈이 생기면서 일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었으니 그 모듈의 이름이.

위(僞) 천마신공(天魔神功)

……라고 표기되어 지구를 넘어 무림까지 뒤집혀 버렸다.

천마신공은 천마신공인데 위(僞). 가짜 천마신공이 모듈의 한 자리를 떠억 차지해 버렸으니 지구만이 아닌 무림까지 뒤집힐 수밖에 없었던 거다.

대번에 지구의 유력자와 모험가들은 물론이요 천마신교까지 나서서 그 사기꾼들을 붙잡았고 그들은 마스터 네크로맨서로 산전수전 다 겪은 도령조차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문'을 거쳐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토해내고서 지하 감옥의 흙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졌다.

그렇게 지구와 무림을 뒤집어 놓은 대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엘프는 물론이요 드래곤과 마족마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만들었으니 모듈과 관련한 몇 가지가 규명되었고 그중 하나가 모듈의 이름이 그것의 고유성을 절대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마신공'은 천마의 독문무공이요 신화 속 절대신공이다.

한데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해도 모듈이 될 만한 조건을 성립하고 그것을 각성한다면. 각성한 자가 '그렇게 믿는다면' 각성한 모듈의 이름은 천마신공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렇게 모듈을 각성하도록 도운 자가 의도하여 각성자를 속였고 명백히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 경우엔 위(僞). 가짜라는 게 모듈의 이름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진짜가 아님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 믿고 그렇게 널리 퍼지게 된다면 해당 능력의 모듈에는 가짜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그것이 오히려 능력을 대표하는 모듈이 된다는 것까지.

이후 진짜가 발견되면 거기에 진(眞)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천마신공은 완전히 유실되었으나 그 상징성이 상징성이고 이미 널리 퍼져 있는 것이라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지구로 흘러든 무공 중엔 제법 그런 사례가 있어 밝혀진 일이다.

그러니까.

그 사례를 잘 알고 있는 도령이었기에 지금의. 깨달음과 함께 각성해 버린 일곱 번째 모듈인 진 에너지 컨트롤의 이름에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밝혀진 사례대로라면. 그 법칙대로라면 지금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손꼽히는 귀족 모듈로 취급되는 에너지 컨트롤이.

'가짜'라는 말이 되어 버리니까.

단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기에 에너지 컨트롤이 되었을 뿐 사실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거다.

이는 정말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만이 아니라 도령마저도. 마스터 네크로맨서이면서 모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힘을 구사할 수 있는 인간인 도령마저도 에너지 컨트롤이 진짜라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아-

평소처럼 마나를 일으켜 다루어 보았다.

심장에 깃들어 있던 순수한 마나에 의지를 깃들여 세상으로 이끌어내니 푸르게 빛나는 이것은 유형화된 마나다.

본래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마나를 '컨트롤'하여 이렇게 눈에 보이게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도령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숨 쉬듯 해낸 이것이 바로 에너지 컨트롤이다.

자연의, 무공으로 하자면 이치에 따라 기운을 다루는 이것이 가짜라고? 진짜 기운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진 에너지 컨트롤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단순히 기운을 다루는 걸 넘어 도령이 알고 있는 이치마저 전부 가짜였다는 말인가.

도령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일곱 번째 모듈의 힘을 써 보기로 했다.

스스로 하는 게 아닌 모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는 말이다.

스으-

도령은 흐트러졌던 호흡을 정돈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스스로의 힘이 아닌 모듈의 힘을 의식하고 이끌어냈으니 일곱 번째 모듈 진 에너지 컨트롤이 태동하였고.

[Error.]

지직-

세상이 일그러졌다.

29

지직-

그것은 세상이 한 꺼풀 벗겨져 일그러지며 색을 잃고 어긋나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고 변함이 없어야만 할 것이 어긋나며 일그러지는 순간은 평범한 이였다면 대번에 뇌가 타들어가고 영혼이 짓이겨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치직-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언제나의 세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나 귀로 들었고 눈앞에 떠오른 'Error'가 그것이 착각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Error.]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이다.

탑의 '시스템'이란 것은 우주의 진리를 구현한 것이었으니 거기에 잘못된 것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었으며 도령마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인식이었다.

시스템 자체는 잘못될 수 있어도 그것이 구체화한 우주의 진리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 있기 어려운 것이다.

"……후우."

크나큰 충격을 호흡을 고르며 흘려낸 도령은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더 진 에너지 컨트롤 모듈을 발동해 보려 했다. 시스템을 통해서.

'……뭐?'

그러나 그 시도는 시작도 전에 무산되었으니 연결이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도령의 일곱 번째 모듈 진 에너지 컨트롤이. 영혼에 시스템에 의해 분명히 모듈로써 형상화하여 존재하고 있음에도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 - - -

메인 모듈(Main module) Error. 진(眞) 에너지 컨트롤(Energy control)

- - - -

그리고 스테이터스상에서도 변화하였으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 넘버링이 에러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모듈이었다.

스으-

호흡을 고르고 직접 마나를, 그리고 내공을 운용해 보았다.

지금껏 사용해 왔던. 알고 있는 그대로의 이 내공 운용이 에너지 컨트롤인지 아니면 진 에너지 컨트롤인지 도령은 알 수 없었다.

깨달음은 분명히 도령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 주었으나 아직 그 영역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도령은.

'여기까지.'

우선은 그 고민을 미루어 두기로 했다.

당장 골몰해서 알 수 없는 것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당장 골몰해서 알 수 없는 것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골몰해서 알 수 없는 것에 매몰되어선 시야가 좁아지고 만다.

그렇게 좁아진 시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걸 경계해야만 했으니 도령은 우선 놓아두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였다.

나아가다 보면 분명히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경험하게 될 테니 그로써 더 넓어지고 깊어진 시야로 지금은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러니까 하나로 충분했다.

일곱 번째 모듈 진 에너지 컨트롤.

이것은 틀림없이 아주 커다란 변수가 될 것이다.

* * * *

일곱 번째 모듈에 관해 당장의 결론을 내린 도령은 이어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꺼내들었으니 순백색의 따스한 구슬이었다.

도령이 비극의 반복을 끊어냄으로써 마침내 승천할 수 있었던 영혼들이 남겨준 생명의 정수.

이건…… 그 천마신교에서도 단 둘 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마치 따사로운 어느 봄날에 찬란하게 꽃망울들이 피어나는 듯한 생명의 기운이 생명의 정수에서 기인하여 방 안에 퍼져 나가고 이내 고이기까지 한다.

그것이 고이고 쌓인다고 느낄 만큼이나 생명의 기운이 넘쳐나니 이름 그대로 생명을 응축한 듯한 정수의 여파만으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혹자는 생명의 태양이라고까지 부르는 이것은 탑의 깊은 곳. 마계까지 포함하는 심층에서마저 진귀하게 여겨지는 희소하면서도 강력한 보물이다.

바로 그 마족과 대립하는 천계의 천사가 강림하여 가진 힘을 폭발시키듯 퍼뜨리며 이름을 걸고 선포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결전의 수단인 '성역(聖域)'을 이것을 해방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다.

아예 공격의 수단으로 터뜨려 버리면 끔찍하고 강대한 마족을 영혼까지 태워 버릴 수도 있는 생명의 폭발을 일으킨다.

성역이 천사가 존재를 걸고 선포하는 것이요 어지간한 마족조차 드래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생명의 정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물건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 정도나 되는 생명의 힘이 응축된 생명의 정수는 그렇기에 또 하나의 공능이 있었으니 곁에 두고 내공 수련을 할 경우 증진 효과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나의 연공실에 이게 놓여 있었지.]

천마신교의 교주로서 그 정점에 있던 천마의 연공실에 그 생명의 정수가 놓였다.

그리고 또 소천마. 천마의 후계자의 연공실에 생명의 정수가 놓여 있었으니 그 둘이 천마신교가 보유하고 있던 생명의 정수의 전부였다.

하나의 층이자 세계인 무림을 대표하는 천마신교에조차 단 둘 밖에 없을 정도로 생명의 정수는 귀했으니 이것을 곁에 두고 운공을 하면 최하급의, 그렇기에 소소한 수준이지만 그렇다 해도 영약을 섭취하고 운공을 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내공 증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효과를 매순간 볼 수 있었으니 무림에서 생명의 정수는 소문만으로도 피를 부르는 물건이었고 이는 판타지 세계인 제르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사기템'이 지금 도령의 손 위에 놓여 있었으니.

'…기연이네.'

이제 겨우 두 번째 모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여러가지로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얻게 되었다.

특히 생명의 정수는 당장 도령의 성장에 있어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었으니 유일하게 빠른 성장을 할 수가 없었던. 그래서 상대적으로 양에서 뒤쳐지고 있던 내공의 증진 속도를 빠르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번. 도령의 성장에 가속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도령이 준비하고 있던 미래의 계획에 아주 기분 좋은 변수가 되어 줄 것이었으니 생명의 정수는.

'용제.'

이후 용제와 다시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가 될 것이었다.

* * * *

"수고하셨습니다."

"어, 그래. 잘 들어가고."

아주 많은 것을 얻었던 두 번째 모험의 주말이 지나고 다음주. 도령은 평범하게 직장인으로서의 평일을 보냈다.

아직 몇 개월이나 남았다지만 네크로맨서들로만 구성된 염습조이다 보니, 천마제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네크로맨서들이 남은 곳이다 보니 안 그래도 어수선한 가운데 슈퍼 루키가 되어 버린 도령이 끼어 있어 조금 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다들 근본적으로 선한 이들이었고 크게 욕심이 없는 이들이다 보니 별다른 문제 없이 한 주가 지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주말 토요일.

"갈까, 아들."

"응, 엄마."

도령은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게 되었다.

특별한 어떤 일이 있거나 이벤트인 게 아니라 반대로 어릴 적부터 계속해 온 도령의 일상 중 하나였다.

밤에 일하는 도령의 부모님은 남들과 같은 시간에 일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도령의 어머니는 2주에 한 번. 토요일 오후에 조금 일찍 일어나 장을 보러 가는데 어릴 적 도령은 그런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곤 했다.

그것을 나이를 먹은 지금도 간간이 함께 가고 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던 거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일상이요 오늘이었다.

스윽.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앞서 걸으니 도령이 속도를 맞추어 걸었다.

"이거 주세요."

"그래."

단골집에 가 생선을 샀다.

얼려두고 먹을 거라 제법 묵직한 것을 도령이 들었다.

"든든하겠어, 언니. 도령이가 이렇게나 벌써 커 가지고는."

"호호. 그렇지. 그러는 동생네 딸도 등록소에 취직했다면서."

"응, 뭐. 평범한 사무직이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10년이 넘게 보아 온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모험가였던 남편을 잃고 혼자서 딸을 키워낸 뿌듯함이 그득하니 도령도 뒤에서 옅게 웃었다.

아직은 낮이 짧은 시기의 시장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마나 링크로 밝히는 불은 그것을 다 밀어내지 못해 빛이 있어 더욱 어두컴컴한 느낌이다.

그러나 시장을 다니는 이들은. 그리고 가판을 펼친 사람들은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으니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마주하게 된 그 광경이 도령은 기꺼워 미소짓게 된다.

마냥 이것이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가 도령은 좋았다.

그러니까 그들이 계속해서 나아가 마침내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되었고 그를 위해 도령만은 알고 있는. 도령만은 경험했던 이 마을에 닥칠 비극을 더욱 막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한 달 내에 집을 비워 주십시오."

도령이 모르는 미래가 찾아왔다.

* * * *

그는 본래 도령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인. 평범한 사람들의 아침 식사 시간이 겨우 지나간 때에 찾아 온 사람이었다.

이 시기 나이든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먹물내 물씬 나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사무적인 얼굴로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겨우 세수만 마치고 손님을 맞이한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 달 내에 집을 비워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집이 매매되어 임대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임대의 의사가 없으니 승계된 계약에 따라 한 달 내에 집을 비워 주십시오."

그리고 스윽, 서류를 내미니 정말로 집주인이 바뀌어 있었고 계약서의 내용에 따라 한 달 내에 집을 비우라는 통보서가 추가로 첨부돼 있었다.

찾아온 남자는 그 통보서를 전달하기 위해 찾아온 집주인의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필요한 말과 서류만을 전달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아버지는 그런 남자를 붙잡지 않고 보냈으니 조용히 옆에 앉아 지켜보던 도령이 물었다.

"아버지. 우리 이사가는 건가요?"

도령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갑작스런 상황이었음에도 아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아버지로서, 차분한 얼굴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참 오래 살았지. 이제 너도 이사를 한 번 경험해 볼 때가 된 것 같구나."

이 집은 도령이 태어나 지금까지 살았던 집이다.

안 그래도 그리 좋은 집은 아니었는데 당시에도 구옥이었던 것이 20년 가까이 더 세월에 색이 바랬으니 참으로 불편한 게 많은 집이 되었다.

추억……이랄 것은 있었지만 그것이 바랜 색 대신 집에 입혀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갑작스럽지만. 그리 유쾌한 이유도 아니었지만 이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 자체는 그렇게 문제가 없었다.

전생이었다면 참으로 큰일이 되었겠지만 다시 사는 지금 도령에게 있어 가족이 함께 살 새집을, 그것도 번듯한 집을 구하는 건 고난이 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더 편히 지낼 수 있는 좋은 집으로 갈 기회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문제가 그렇게 단순히 이사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다시 곱게 접어 봉투에 집어 넣은 서류.

거기에 찍힌 인장이 黃金商會. 그러니까 세계를 넘어 탑에서 손꼽히는 상회인 황금상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