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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끈적이며 번들거리는 김초월의 눈이 도령이 품에 안은 플레루스틴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 깃든 것은 순수한 식욕이었으니 도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입에 담기 더러운 이야기지만 그것이 성욕이었다면 차라리 인간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추악하다 해도 인간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놈의 눈에 깃든 것은 식욕이었으니 플레루스틴이 순수한 먹이로 보이는 것이었고 인간의 시선이 아니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인간이 아닌 김초월은 말했다.

"그거. 내놔."

도령이 답했다.

"난 사람이 하는 이야기만 들어."

도령(道靈).

영혼을 인도하는 능력을 타고난 도령은 그렇기에 영혼을 볼 수 있었으니 그 눈에 비친 김초월의 영혼은 이미 사람이 아닌 추악한 마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물이 되어 버린 영혼을 따라가는, 서슴지 않고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있는 김초월의 육신 또한 급속하게 마물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김초월을 보는 도령의 시선은 인간을 보는 시선이 아니었으니 그 시선을 마주한 김초월은 분노했다.

"너 이 새끼! 날 무시했던 새끼! 너 이 빌어처먹을 새끼가! 이 새끼!"

그 분노를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할 만큼 이성이 옅어지고 혼란스러운 김초월은 그러니까 참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썩어 버린, 김초월의 주위에서 일렁이고 있던 거대한 줄기들이 땅을 갈아엎으며 도령에게 쇄도했다.

검은 해일이 덮치면 이러할까 싶은 기세와 규모는 어지간한 이라면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쳐다볼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인간이었던 김초월이 아닌 마물이 되어가고 있는, 흡성대법을 익혔던 자가 남긴 파멸을 확정지을 씨앗의 힘은 이미 앞서의 남자에 준하고 있었다.

스으-

그 공세에 도령의 품에 안겨 있던 플레루스틴이 힘을 썼다.

사아아아-

그녀를 중심으로 하여 바람이 불었다.

엘프(Elf).

숲의 요정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압도적인 마나와 자연친화력을 타고나니 원소계 능력에 매진하면 틀림없이 그 분야의 대가가 된다.

플레루스틴은 특히나 개중 풍속성의 친화력과 재능이 대단했으니 의지를 일으키고 마나를 퍼뜨리자 대번에 세상의 바람이 응답하여 크게 일렁였다.

화악!

그리고 몰아치니 한 줄기 한 줄기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밀려들던 검게 썩은 줄기들을 베어내 가루로 흩날리게 만들었다.

파스스-

경이로운 힘이다.

앞서 흡성대법을 익힌 무림인을 압도했던 바로 그 힘이다.

"흐……."

그러나 그 힘에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김초월은 전혀 당황하거나 압도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여유를 보인다.

"스승이 제법 잘 양념을 해놨는데 그러고도 아직 파닥거리는구나?"

그 힘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본래 그것은 아득한 영역에서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힘이어야 했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지금 휘두른 힘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마물이 되어가고 있는 김초월이 그 과정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힘겹게 작용하였으니 판단한 것이다.

저 정도라면 내가 이긴다고.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고.

그 판단은 안타깝게도 틀리지 않았지만 플레루스틴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도령은 멈추지 않고 플레루스틴의 내부를 좀먹고 있는 마기를 정화해 주고 있었으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몇 번은 더 무리할 수 있었고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후발대가 도착할 것이다.

괴물. 마물이 되어가고 있는 저 인간은 강하지만 아직 온전히 마물화하지는 않았으니 후발대만 도착한다면 해결할 수 있다.

탑 안과 지구의 시차 때문에 버텨야 할 시간이 적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포기할 만큼 플레루스틴은 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꺾이지 않고 가능성을 붙잡으려는 플레루스틴의 푸른 눈동자를 본 김초월이 또 히죽 웃었다.

"안 와."

"무슨 뜻입니까."

"안 온다고. 네가 기다리는 거."

"……."

"잠갔거든. 문. 내가 여기 주인이야."

여기저기 잘라먹은 엉망인 문장이었지만 플레루스틴은 물론이요 도령도 그 의미를 대번에 이해했다.

놈이. 김초월이 던전을 폐쇄해 버렸다는 것을.

이곳에 그득한 마기와 동기화하고 아마도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까지 오염시키고 있는 놈은 지금 '던전 보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던전의 보스란 것은 던전을 성립케하는 중심인 코어의 역할을 겸하며 특수한 능력을 가지게 되곤 하는 법이었으니 개중엔 전투에 돌입한 순간 던전을 폐쇄해 버리는 능력을 지닌 놈이 드물지 않게 나오곤 했다.

하필이면 김초월이 바로 그 능력을 가지고 지금 사용하고 만 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아아아아아…….

마기에 잠식당한 검은 대지에서 언데드화한 몬스터들이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끔찍한 형상의 것들이 마기에 녹아내리고 짓이겨진 더욱 끔찍한 꼴로 몸을 일으키니 그것은 김초월의 네크로맨시였다.

던전화하였기에 본래 자연스레 발생하여 던전을 배회해야만 했던 몬스터들.

그것들마저 분별없이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는 삼켜 버리니 거기서 비롯된 부정적인 기운이 점점 커지고 오염이 번져 뿌리가 마물화하는 것이다.

다만 에너지를 다 빨려 버린 몬스터의 사체는 그대로 남았고 보스화한 김초월은 대지에 묻혀 있던, 썩지 않고 뿌리에 얽혀 있던 몬스터의 사체를 인지하고 일으켰다.

그르르…….

단번에 천 마리가 넘는 몬스터의 사체를.

"히히. 히히히! 히히히히……!!"

본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스스로의 대규모 네크로맨시에 취해 김초월이 아가리를 주욱 찢으며 웃는다.

네크로맨서들의 로망이라는 '군단'은 그러나 쉽게 이를 수 없는 아득한 영역이었다.

군단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군세를 이루는 것부터가 아득한 일이었고 그것을 운용하는 건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스스로가 아닌 모듈의 힘을 빌려 할 수 있기에 지구 출신의 네크로맨서는 설령 그 내용물이 부실할지언정 기어코 군단을 만들어내곤 한다.

김초월은 그러나 도대체 언제 자신만의 군단을 이룰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는 신세였다.

군단을 만들어낸다 해도 그럴싸한. 저 심층에서 활약할 수 있을 만한 군단을 만드는 건 남에게 말이야 못하겠지만 절대 안 될 거라 포기하고 있었다.

그르르르르…….

그렇게 포기했던 군단이 지금 김초월의 앞에 도열했다.

하나 하나가 마기에 물들어 어설픈 모험가는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개체들만으로 이루어진 군단이.

마기를 머금고 있어 닿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그것들이 도열해서는 도령과 도령의 품에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플레루스틴을 노려본다.

김초월의 명령만 있다면 저 천이 넘는 언데드가 모조리 덤벼들 것이다.

덤벼들어, 살점을 다 뜯어 먹으려 할 것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너희들이."

즐거움과 기대로 시커먼 눈이 번들거린다.

죽여도 죽지 않는 군대를 움직여 끊임없이 짓밟아 빛나는 눈동자를 절망으로 물들이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릴 정도로 즐겁다.

그 눈을 뽑아먹는 건 잊지 못할 별미가 되겠지.

플레루스틴은 그 끔찍한 상상으로 번들거리는 김초월의 시선에도 여전히 꺾이지 않은 의지로 생각한다.

'내가 용기를 내야 해.'

최악의 상황이었다.

던전 보스가 던전을 폐쇄해 버린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들어올 수단이 없다.

던전을 다시 개방하려면 던전 보스를 잡아야 하는데 마물화가 진행 중인 저것의 힘은 흡성대법으로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와 연결되었으니 규모만 따지자면 플레루스틴의 풀 컨디션에 준한다.

설상가상, 하필이면 놈의 기반이 네크로맨서였으니 마기에 오염된 몬스터가 그 앞에 군단을 이루어 도열했다.

차라리 하나였다면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플레루스틴은 생각한다.

내가 용기를 내야 한다고. 내가 무언가를 포기해서라도 승리의 가능성을 붙잡아야만 한다고.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이지만 다행히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플레루스틴을 품에 안은 도령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으니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마기를 정화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덕분에 몸을 움직일 수는 있는 수준으로 호전되었다.

최악이라도, 목숨을 걸면 저것을 토벌할 가능성이 있다.

스윽.

그런 플레루스틴의 결심을 읽기라도 한 듯 도령은 마침내 플레루스틴을 내려 놓았다.

잡고 있던 손까지도 놓아 주었으니 그 따스한 품을 벗어나 플레루스틴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고.

저벅.

그녀보다 빠르게 도령이 앞으로 나섰다.

"…도령?"

저벅.

도령은 그랬다.

선함을 믿고 선함을 추구하니 그 선함으로 인한 결과가 잘못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김초월을 마주한 지금 김초월을 일찍 죽였으면, 이라는 가정도 하지 않는다.

도령이 판단할 당시의 김초월은 틀림없이 사람이었으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때문에, 심지어 그 미래마저 바꾸었는데 단순히 편해지기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은 건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 판단으로 인해 지금 플레루스틴이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되고 잘못되어서도 안 된다.

선에 기반하여 내린 판단과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되어선 안 된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

저벅.

도령은 나섰다.

"플레루스틴."

"네, 도령."

그리고 걱정스런 눈동자의 플레루스틴에게 말한다.

"오늘 우리 비밀을 하나 만들어야 할 거 같아요."

"비밀?"

"네. 우리 둘의 비밀."

고개를 끄덕이고 도령은 더 나아간다.

나아가서, 김초월과 김초월의 군단 앞에 섰으니 김초월이 크히히힉 웃는다. 유쾌하다는 듯.

"너 따위가 내 앞에 서? 감히? 너 따위가?"

김초월은 지금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본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지고한 엘프마저 비웃을 수 있는 강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너 따위가, 내 앞에 선다고? 크히히히힉!!"

인간이었던 시절이라면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나빴을 것이고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것을 발산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김초월은 너무나 기분 좋게 웃었으니 지금 앞에 선 도령이 너무나 하찮고 하찮게 보여 자신의 우위를 빛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틀림없이 미래에 심층에서 활약할 강대한 모험가가 되었어야 할 도령의 미래를 지금, 내가 짓밟아 부숴 버릴 수 있다.

그러니까 크히힉, 미친듯이 웃는 김초월을 마주하여 도령 또한 옅게 웃었다.

솔직히 앞서 자폭했던 남자라면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목숨을 건다 해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허를 찌른다 하여도 승리하고 살아남을 확률은 절반에도 한참을 미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히히힉!"

저 김초월을 상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을 서슴없이 버리고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저것은 틀림없이 힘만큼은 앞서의 남자에 준하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저것은 아직 온전히 마물이 되지 않았고 인간일 적의 힘을 쓰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네크로맨서였다.

그래. 네크로맨서.

그리고 지금 그 네크로맨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탑의 가장 깊은 곳 기원에 닿았던 가장 지고한 네크로맨서.

'나와라.'

스르르…….

마스터 네크로맨서 김도령이었다.

41

사아아아아-

도령의 발밑으로 어둠이 번진다.

그것은 흔히 알려진 형태는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불사자의 무덤. 네크로맨서가 언데드를 보관하는 불사자의 무덤이었다.

하아아아아…….

그리고 그 안에서 언데드가 몸을 일으키니 스켈레톤들이었고.

스르르륵.

검은 기운이 스켈레톤들을 감쌌다.

네크로맨서가 비로소 귀족이라 불릴 수 있게 되는 시작점이라는 기술인 무장기(武裝氣)다.

불사자의 무덤에 여덟 마리의 스켈레톤과 그것을 모두 무장시킬 만큼의 무장기까지.

그것은 인간 시절의 김초월이었다면 도저히 믿지 못할. 나아가 배가 아프다 못해 꼬여 버릴 만큼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각성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클랜이 작정하고 밀어준다 해도 최소 몇 년은 시간을 갈아 넣어야 도달할까 말까인 것들을 보여준단 말인가.

"히힉. 히히힉! 크히히힉!!"

그러나 지금의 김초월은 다만 너무나 유쾌하게 그것을 비웃었으니 하찮게 보였기 때문이다.

부럽기는커녕 한없이 하찮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저따위 하찮은 무장기를 두른 스켈레톤 여덟 따위는 지금 당장 흔적도 없이 짓밟아 버릴 수 있으니까!

"가라!!"

쿠쿠쿠쿠쿠쿵!!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지를 뒤흔들며 김초월의 군단이 돌진한다.

거기에 망설임없이 맞서는, 대장으로 보이는 유독 커다란 스켈레톤을 필두로 한 스켈레톤들은 용맹해 보이지만 고작 여덟으로 막기에 천이 넘는 군단은 중과부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초월의 마기에 물든 군단은 대번에 여덟 스켈레톤을 덮쳤고 흔적도 없이, 충돌음조차 남기지 못하고 휩쓸린 것 같았다.

"히히! 히히힉! 크히히……히?"

그런데.

화륵.

김초월의 군단 사이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끔찍하게 검은 것들 사이에서 그것을 태우는 더욱 검은 불꽃이 일렁였으니 화악!

한순간에 폭발하듯 번지며 군단을 갈라 버린다.

그리고 드러나는 건 검은 갑주보다 검은 불꽃을 두르고 있는 스켈레톤들이었으니 군단에 짓밟히지 않고 오히려 갈라버린 그 불꽃은 귀화(鬼火)요 불꽃을 두른 스켈레톤은 귀화병(鬼火兵)이다.

-끄으아아아악!

죄 지은 영혼을 태워 일으키는 불꽃인 시귀화(屍鬼火)를 두른 도령의 귀화병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던 김초월의 군단을 도륙한다.

화아아아악!

그 궤적을 따라 일어나는 검은 불꽃은 삽시간에 베인 언데드를 장작 삼아 결코 꺼지지 않고 커지니 군단 전체로 번진다.

단 여덟이 천이 넘는 군단을 불사르며 오히려 전진한다.

"저게…… 뭐야."

김초월이 그 불꽃을 멍하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마물화하며 흐려지던 이성이 거짓말처럼 뚜렷해질 정도로 저것은 믿을 수 없고 또 충격적인 것이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인간을 버리고 마물이 되어가는 중의, 심지어 보스화까지 하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된 김초월은 그러나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내재된 영혼을 태워 그것을 힘으로 삼아 움직이는 스켈레톤이란 건 단지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지금의 김초월'이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성립시켰고 구현한 것인지 그 끝자락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미지(未知).

보고 있으나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번져가고 있으니 다시 선명해진 김초월의 이성에 스멀스멀 공포가 배어난다.

"……."

그리고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건 플레루스틴도 다르지 않았다.

이해와 상식이 일그러지는 심층에서까지 활동하는 엘프인 플레루스틴 아흘레라마저 저것이 도대체 무언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끄으아아아악!!

다만 영혼을 불태워 힘으로 삼는 저 구조는 너무나 극악무도한 것으로 보이니 도령이 나쁘게 보여야만 할 텐데.

꾸욱-

도령이 잡아 주었던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온기가 도령을 그렇게 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저벅.

그리고 도령은 나아간다.

화륵!

도령이 나아가는 길은 마치 도령을 경배하듯 검은 불꽃이 끝없이 일렁이며 뻗고 있었으니 이 불꽃. 시귀화는 마스터 네크로맨서라 불리며 네크로맨서의 정점이었던 도령이 역설적이게도 '네크로맨서의 천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시귀화는 죄 지은 영혼을 태우는 불꽃이요 죄 지은 자의 삿된 기운, 그리고 부정적인 기운을 태우니 거기에는 정화하지 못한 사령기마저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까 순수한 사령기를 다루지 못하는 네크로맨서는 도령의 앞에서 모든 힘의 기반이 되는 사령기를 쓸 수가 없었고 쓴다 해도 시귀화의 연료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리고 매일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도령은 이제 귀화병에 무장기를 두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시귀화마저도 무장시킬 수 있었다.

그런 도령의 앞에서 더럽기 짝이 없는 사령기로도 모자라 마기에 물든 언데드를 일으키다니.

화아아아악!!

그 군단은 모조리 시귀화를 키우는 장작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김초월의 오염된 군단을 불사르며 도래한 것이 염열지옥(炎熱地獄).

마스터 네크로맨서에 의해 도래하는 삿된 것을 태우는 지옥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화륵.

김초월은 일렁이며 가까워지는 불지옥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다.

저 사기꾼 같은 새끼를 벌레처럼 짓밟을 수 있는 내가 되었을 텐데.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텐데 왜 지금 나는 또 저것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는 거지? 그래서는 안 되는데.

저 새끼는 또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야?

부득부득 이가 갈리고 덜덜 떨리는 주먹의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아.'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그렇지.'

저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빼앗으면 되잖아.'

나는 흡성대법을 전수받은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았나.

세계수의 뿌리마저 집어삼키고 오염시킨 내가 아닌가.

던전 보스가 되어 시스템의 백업까지 받고 있는 지금 저 새끼의 것을 빼앗으면 되잖아!

나는 네크로맨서이면서 흡성대법을 익힌 특별한 존재.

나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잖아.'

김초월의 눈동자가 희번득거리고 입꼬리가 주욱 찢어진다.

그런 김초월의 미간을.

퍼억!

무언가가 꿰뚫었다.

뇌가 꿰뚫린 김초월은 그것이 도령의 폭렬시라는 걸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아직 마물화가 덜 된 김초월은 뇌가 꿰뚫렸으니 사고가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부글부글.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김초월의 반쯤 마물화된 몸은 뇌가 꿰뚫렸음에도 죽지 않았고 그것을 부글거리며 단숨에 재생해 버렸다.

허무하지만 그래서 쉽게 끝낼 수도 있었을 일이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인데 도령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훅-

"……!!"

김초월이 죽지 않을 것은 이미 예상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 김도령이 재로 만들어 버린 마물만 해도 군단을 이룰 정도는 될 것이었으니.

도령은 그저 놈과의 거리를 좁힐 잠시의 틈이 필요했고 그 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순간 거짓말처럼 쇄도한 도령을 마주하여 김초월은 두 눈을 부릅뜨며 '심법(心法)'을 운용했다.

흡성대법.

김초월을 온갖 번잡하고 엿 같은 것에서 해방시켜 준 스승에게 전수받은 유일한, 그러나 위대한 무공.

모듈화한 흡성대법은 김초월이 그저 의지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최적으로 동작해 주었으니 생성한 단전에서 일어난 내공이 단숨에 온몸을 내달리고서 어리석게도 거리를 좁힌 도령을 집어삼킬.

퍽!

"……!!"

…집어삼키지 못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검은 내공은 그것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맥'이 끊겨 버렸다.

혈도를 꿰뚫은 한줄기 쐐기 같은 충격이 원인이라는 걸 김초월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새!"

퍽!

분노하여 다시 기운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도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혈(穴)에 도령의 주먹이 꽂히며 내공이 운용되지 않았다.

"씨발!!"

김초월은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욕을 짓씹고서는 그러나 한 발 물러났다.

네크로맨서인 김초월은 근접 전투 수행 능력이 전무했다.

그러니까 성질과 달리 도령의 '볼 수조차 없는 공격'이, 그것도 모듈에 의한 능력의 작용을 끊어 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본능적으로 회피를 선택하며 어떻게든 흡성대법을 운용하려 했다.

슥-

물러나며 그나마 넓어진 시야에 도령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당겨지는 어깨에 이어 자연스레 주먹이 보이고 김초월은 움찔, 팔을 들어 올렸으나.

퍽!

"꺽."

반대편에서 틀어박힌 주먹에 이번에도 내공의 운용이 무산되었고 날카로운 충격이 몸을 꿰뚫는다.

퍼퍼퍼퍼퍽!!

속수무책.

분명히 도령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의 양팔이 내뻗는 것인데 김초월은 도령의 어깨 아래 주먹의 궤적을 단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퍼퍼퍼퍼퍽!!

그러니까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도령의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마치 뒤집힌 거북이마냥 허우적거릴 뿐 흡성대법을 운용할 수가 없었다.

보스화하지 않았다면. 이미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와 연결돼 있지 않았다면 그것조차 끊겨 버렸을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씨바아아아아알!!"

그런 자신의 꼴이 너무나 답답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괴성에 담아 내지르지만 단전에 갇힌 흡성대법의 내공은 터져 나오지 못한다.

김초월은 깨닫지 못했지만 차라리 막무가내로, 무공이 아닌 순수하게 힘을 휘둘렀다면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저항하는 걸 넘어 도령을 위협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흡성대법을 배워 버렸고 그것을 초월적인 힘의 기반으로 삼은 김초월은 그것에 기대었으니 무엇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무공(武功). 그것의 오직 내공 운용법만을 그나마도 모듈로 전수받은 김초월은 초월적인 힘을 휘두르는 괴물이 되었으나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 입문자에 불과했으니 도령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령은.

스으-

천마신공의 후계자였으니까.

모듈이 아닌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구사할 수 있는 무인(武人)이었으니까.

"……!"

슬쩍 움직이는 어깨에 숨쉴 틈도 없이 얻어맞는 김초월의 감각이 움찔하며 몸이 반응한다.

그 반응을 마치 미래를 보고 온 듯 예상한 도령의 반대편 주먹이 김초월의 단전에 꽂히니 꿈틀거리던 흡성대법의 내공이 뛰쳐 나오지 못하고 다시 처박힌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사예(詐豫)

상대의 예측을 속이는 천마신공 맨손 무예의 수법.

본래는 복잡한 수싸움을 거는 초식이지만 김초월을 상대로는 일방적인 유린이 되었다.

"씨바아아아알!!"

그 덕분에 조금 더 내공 운용의 맥을 끊기 위한 힘을 싣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뻐억!

김초월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속도에 치중한 연타로 보이는 도령의 주먹은 한 방 한 방이 온힘을 실은 정권이었다.

그게 아니면 뚫을 수 없을 만큼,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김초월의 육체는 괴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물리 공격 특화 모듈의 모험가라 해도 뚫을 수 없을 만큼.

뻐어억!

그러나 도령은 그 육체를 뚫고 흡성대법의 운용을 위한 길이 되는 혈도에 충격을 줄 수 있었으니 천(穿), 대상을 꿰뚫는 이치를 주먹에 깃들일 수 있었다.

"이 개새끼가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뚝, 김초월의 이성이 분노에 완전히 잡아먹히고 마기가 들끓었으니 힘의 제어를 완전히 놓아 버리고 방어마저 도외시한 채 흡성대법을 폭주시키려 한다.

평범하게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힘을 휘두르려는 것이었고 위기였으나 그렇기에 그 전까지 찰나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도령은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에 결정적인 한 수를 장전했다.

꾸우웅-!

내딛는 한 걸음은 비로소 제대로 내딛은 진각의 한 걸음이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커다란 힘을 일체의 소실없이 오롯이 주먹에까지 전달하는 일련의 흐름에 온몸이 연동하며 증폭의 과정을 더한다.

오오오오오오-!!

그리고 도령의 안에서 하늘을 내달리는 용처럼 포효하고 있던 연신기가 그 힘을 감싸니 이치를 담은 주먹이.

백타(白打) 천(穿)

이치를 구현하는 초식이 김초월의 단전을 꿰뚫었다.

두웅-!

42

푸스스-

힘의 원천이 된 단전을 꿰뚫린 김초월에게서 마기가 독안개처럼 새어 나왔다.

줄줄 새어 나오는 그것은 주변을 녹여 버리는 치명적인 기운이었으나 오래 유지 되지 못하고 마치 알콜처럼 기화하였으니 그릇이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죽어 죽지 않고 부숴도 재생하는 언데드가 그것을 가능케하는 코어를 부수면 재로 돌아가 버리는 것처럼.

힘을 담고 있어야 할 그릇이 깨졌으니 마기를 소실하기 시작한 김초월의 마물화가 진행되던 몸은, 마기로 성립하던 몸은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던 듯 보였던 김초월은 그러나 소리를 낼 수 없었으니 그대로 육체가 소멸해 버렸다.

다만.

-…고맙다.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해야 할 감사를 말하였으니 도령은 옅게 웃었다.

본래는 영혼마저 오염돼 구원받지 못했어야 했다.

그러나 온전히 마물화하기 전에 육체를 소실하고 그 마기가 빠져 나갔으니 영혼만큼은 구원받은 것이다.

마기에 물들기 전 사람으로서의 영혼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김초월의 영혼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사람'으로서 은혜에 감사를 말하고서는 승천하였으니 도령은 웃을 수 있었다.

'좋은 곳으로 가서 다음 생은 좋은 삶을 살기를.'

그리고 기원하여 주었으니 도령에게 막대한 양의 마나가 스며들었다.

보스를 토벌함으로써 주어진 '경험치'다.

도령은 그것을 모듈이 아닌 자신의 심장에 깃들였으니 단번에 불룩 늘어난 마나를 느낀다.

평범하게는 결코 토벌하지 못했을 규격 외의 보스를 토벌한 결과다.

게임 같은 데서는 아마 밸런스 등 여러 이유로 온전히 경험치를 주지 않았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격차가 있던 보스를 쓰러뜨린 보상을 그러나 여기엔 따로 장치가 없었던지 온전히 받을 수 있었으니 마나가 배로 늘어난 것 같다.

여기에 보상까지.

띠링-!

['생명력이 응축된 세계수의 뿌리'를 획득하였습니다.]

'어…….'

예상치 못한 걸 받았다.

나쁜 게 아니라 좋은 쪽. 그것도 너무 좋은 쪽으로.

뚝 떨어진 이것은 도령이 이 던전에서 채취하려 했던 것보다 월등히 더 좋은, 보자마자 알 정도로 좋은 것이었다.

다만 지금 그것을 세세히 살필 상황은 아니었으니 도령은 우선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뒤에서 플레루스틴이 응시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마주한다.

플레루스틴 아흘레라.

3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고 그 세월동안 모험가로서 실력을 갈고닦은 그녀는 심층에 도달하였으니 이 탑에서 정점을 다툴 자격을 획득한 모험가였다.

한데 그런 그녀의 눈으로도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뉴비'이면서 심지어 인간이 나타났으니 도령이었다.

심층에도 당연하지만 네크로맨서가 있다.

소위 말하는 귀족이라 불리는 게 무의미할 만큼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이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있었으며 유니온에도 네크로맨서가 있다.

그 네크로맨서들을 심층의 모험가로서 봐 왔고 이해할 수도 있었던 플레루스틴이었으나 도령의 네크로맨시는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보아도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공 또한 그랬다.

지구의 인간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시스템인 모듈이 무엇인지 플레루스틴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달인의 수준에서 힘을 쓸 수 있게 해 주니 그만큼이나 모듈은 효율적으로 동작한다.

도령은 그렇게 달인의 수준에서 작용하는 모듈을 발동조차 하지 못하게. 완벽하게 읽고서 맥을 끊어냈으니 그것은 심층의 영역이었다.

모듈만을 믿고 거기에만 의지한 채 심층에 도달한 인간을 처참하게 무릎 꿇게 만드는 '진짜'의 영역.

거기서 한 번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 마침내 모듈을 극복한 인간만이 심층에서 강자로 활동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영역을.

각성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인 도령이 무공으로 보여 주었다는 말이다.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보여준 불사자의 무덤이나 무장기는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한다.

네크로맨시에 이어 에너지 컨트롤 모듈마저 각성했다고 했던가? 그러고도 모자라 무공까지.

이것마저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한다.

상식이 무너지는 심층에 도달한 모험가 정도 되면 어지간한 일에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경향이 생긴다.

이는 엘프인 플레루스틴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런 플레루스틴마저 이것은. 이 자리에서 본 것들은 도저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었다.

그러니까 의심을 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저벅.

천천히 다가오는 도령을 마주하여 플레루스틴은 그러지 못했다.

도저히, 적대감이 생기질 않는다.

"손. 잡아도 될까요?"

그걸로도 모자라 그 말에 손을 내밀어 버리고 만다.

다시 잡아주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반갑다.

'무릎 베개, 해 줘도 되는데.'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리는 자신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이어서 자기 합리화를 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아무래도 마기의 영향인 것 같다는 회피성 판단을 해 버린다.

그 마기를 정화해 주는, 무릎 베개까지는 해 주지 않은 도령이 말한다.

"후발대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치료해 드리고 싶어서요."

"아……."

사실 플레루스틴 정도 되는 엘프니까 티를 내지 않는 것이지 마기에 의한 잠식은 말도 못하게 고통스럽다.

몸 안에서 끊임없이 화상을 입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평범한 사람은 그 쇼크로 결국 정신을 잃기도 하니 이렇게나 담담한 플레루스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티내지 않는 플레루스틴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끔찍한 마기를 자신의 몸을 통하여 흡수하고 정화해 주는 도령의 배려가 또 대단한 것이다.

정화를 위해 잠시라도 마기를 받아들인다는 건 똑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또 타인의 고통을 자신에게로 옮기는 것이었으니 고통을 덜어 자신에게로 옮기는 도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플레루스틴은 말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플레루스틴은 이어 말하였으니.

"우리, 언제 만날까요?"

* * * *

요즘 들어 조용할 날이 없는 도령네 마을이 다시 한 번, 그것도 크게 떠들썩해졌다.

시작은 흡성대법을 조사하던 유니온의 조사대 책임자인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가 마침내 흡성대법을 익힌 자를 토벌했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유니온의 조사대가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음에도, 그 범위를 점점 넓혀가고 있음에도 오리무중이던 흡성대법을 익힌 자를 드디어 찾아내 토벌한 것인가 싶었다.

놀랍게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오갔던 레텔 정글 깊숙한 곳에 던전이 있었고 그 안으로 도주한 흡성대법을 익힌 자를 추적하여 토벌했다, 로 끝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토벌한 것은 흡성대법을 익힌 자였으나 추적한 자가 아니었고 하나도 아니었으니 '흡성대법을 익힌 김초월'이 던전 보스화하였고 토벌됐다는 내용이 추가로 전해져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흡성대법을 익힌 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여겨지던 것이 사실이었고 실제로도 그런 느낌이었다.

한데 그 다른 세상의 존재여야 했던 흡성대법을 익힌 자가, 그것도 던전 보스까지 돼 버린 게 같은 마을에 살던 주민이었으니 충격이 피부에까지 와 닿은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가능성이 사건을 끝낼 수 없게 만들었다.

김초월에게 흡성대법이 전수되었다는 것이 흡성대법은 단시간에 전수가 가능한 것이라는 이야기로 이어졌으니까.

갑자기 발견된 흔적이 앞서 발견한 것들과는 너무나 상이했던 이유가 도주하던 자에게 흡성대법을 전수받은 자였기 때문이며 전수받은 자가 아직 어설퍼 흔적을 남겼다는 가정이 성립했다.

그러니까 사건은 끝나지 않았고 조사는 계속되었으니 이는 틀림없이 악마 숭배자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시나리오였을 것이고 도령에 의한 변수일 것이다.

그렇게 악마 숭배자들의 계획을 엎어 버린 도령이 함께 있었던 것도 소문에 포함됐는데 뜬금없이 도령이 함께 있었던 이유가 레텔 정글의 '알박기' 때문에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던 건 아닌가하는 이야기가 돌아서 알박기하던 클랜들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소문의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된 도령은 늦은 밤 조용히 보상을 꺼내 들었으니 '생명력이 응축된 세계수의 뿌리'다.

그 이름 그대로 생명력이 응축된. 온전하게 살아있는 '단절되지 않은' 세계수의 뿌리.

본래 도령이 생각했던 건 분별없이 마물마저 흡수하며 혼탁한 기운을 품은 한정없이 성장해 버린 세계수조차 아니게 된 뿌리의 일부였다.

그 뿌리의 일부만을 채취하여 도령이 직접 정화 과정을 거친 뒤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기능 일부나마 구현할 수 있는 임시 아이템의 재료로 쓰려 한 것이었는데.

정화 작업을 거칠 필요도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그것도 살아있는 세계수의 뿌리가 손에 들어왔다.

'진짜 너무 좋은 게 생겨 버렸는데…….'

살아있는 세계수의 뿌리.

그 말은 곧 이걸 심으면 진짜 세계수가 자랄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렇게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세계수의 뿌리라 해서 모두가 다 아는 세계수로 자라는 건 아니다.

아득한 세월에 걸쳐 성장하며 세계수로 승화(昇華)한 개체만이 세계수로 자랄 수 있으니 그 과정에서 엘프들의 지극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건 도령이 그 아득한 세월을 살며 보살핀다 해도 세계수로 자라기는 힘들겠지만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재료가 되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물건이었다.

세계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득한 생명력과 함께 품은 세계수의 뿌리.

이거라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장인에게 맡김으로써 전생에서 쓰던 것보다 더 좋은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

이렇게 역으로 너무 좋은 물건을 입수한 탓에 임시 지팡이로는 만들 수가 없게 되었다.

[플레루스틴 님!!]

더 좋은 걸 얻었고 상황의 흐름에 따라 굳이 던전에 있던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 일부를 채취하지 않았던 게 아쉬운 선택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

도령은 그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때엔 그게 최선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 방법이 있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쪽으로 이것은 크게 도움이 될 예정이었으니 도령은 생명의 정수를 꺼냈다.

따스한 순백색 생명의 빛을 은은하게 퍼뜨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이것은 그 힘으로 내공 수련의 효율을 증폭시켜 준다.

한데 생명력으로 그득한 세계수의 뿌리는 다른 방향으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게 해 주었으니 도령은 내공 수련에 세계수의 뿌리를 함께 쓸 생각이었다.

단순히 기운의 밀도를 올리는 것만이라면 세계수의 뿌리는 비슷한 효과가 있기는 한데 생명력의 정수에 미치지 못한다.

세계수의 뿌리의 진가는 흡수하는 내공의 질을 올리는 데에 있다.

살아있는 세계수의 뿌리는, 정상적인 뿌리는 호흡하듯 자연의 기운을 흡수하고 다시 자연에 환원하는데 그렇게 환원한 기운은 더없이 깨끗하면서도 순도가 높았으니 생명의 정수로 인해 방 안에 그득한 기운을 더더욱 높은 효율로 흡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둘이 시너지를 일으킨 효과는.

'와…….'

'2회차'답게 눈이 한없이 높은 도령마저도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경험치 치트를 쓰고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 지경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임시를 만드는 것보다 월등한 효과였다.

그러니까 도령은 이번 보상에 전혀 불만이 없었는데.

사아아아아-

'음?'

기분 좋은 변수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43

스으-

혈도를 내달리는 연신기의 기세는 깊고 느릿한 호흡과 달리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거세다.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용이 내달리는 듯한 기세.

도령의 경지가 깊어지는 것에 비례하여 점점 더 거세지는, 육체의 내외부를 두드려 단련하는 연신기의 기세가 지금 특히나 대단했는데 외부에서 유입되는 기운이 전에 없이 순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정수에 의해 비할 데 없이 높아진 밀도의 기운이 생명력으로 그득한 살아 있는 세계수의 뿌리에 의해 한 번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로써 도령을 중심으로 한 주위가 생명력으로 넘치면서 순도까지 높아졌으니 그것을 받아들인 도령의 내부 또한 활발해진 것이다.

내공을 세는 단위인 갑자(甲子)라는 것이 세월을 뜻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내공이 쌓이는 게 이렇게 빠르고 수월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도령은 본래 의도했던.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가 있는 던전에 갔던 이유인 전력 상승을 위한 임시 장비를 만든다는 계획이 어긋났음에도 전혀 문제라 생각하지 않았다.

임시 장비부터가 본질적으로 힘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훨씬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한데 거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다.

스르르-

'음?'

내공 수련을 하고 있으나 이번에 도령의 감각은 생명의 정수와 세계수의 뿌리 때문에 외부에도 세심하게 뻗어 있었다.

개중 세계수의 뿌리가 갑자기 잔뿌리를 움직이기 시작해 도령을 당황케 했다.

심지어 그 잔뿌리가 생명의 정수를 휘감으니 다급히 심법의 운용을 멈추어야 하나 싶었는데.

사아아아-

심법의 운용 중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던 감각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뻗어나간 세계수의 뿌리는 생명의 정수를 감싸고 그 기운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언뜻 보면 생명의 정수를 흡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료하게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도령은 알 수 있었으니 세계수의 뿌리는 생명의 정수의 기운을 흡수하였다가 다시 생명의 정수에 돌려보내며 '순환'하고 있었다.

고여서는 언젠가 고갈될 뿐이다.

순환함으로써 오히려 더 성장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 단지 기운을 품고만 있던 생명의 정수가 세계수의 뿌리와 얽힘으로써 더 확장하고 있는 걸 도령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체로도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정수가, 세계수의 뿌리와 얽힘으로써 그 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스으으-

그리고 그 순환의 안에 도령마저 포함되면서 도령은 다시 한 번. 진 에너지 컨트롤을 각성했던 때와 같은 우주의 순환을 맛보았다.

'아…….'

순환(循環)이라는 게 무엇인지 도령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기에 그것이 너무나 '작은 앎'이라는 것 또한 도령은 알고 있었고 지금 영혼을 스쳐가는 것이 '커다란 앎'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커다란 앎을 지금은 다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한 번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도령의 영혼은 더 확장할 수 있었고.

우우웅-

외부의 자극에 커다란 앎에서 나오게 되었다.

외부의 자극에 무아지경이 깨진 것이었으나 아쉽진 않았다.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깨달음이었으니 더 있어 보아야 의미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그것을 알 수 있는 경지에 도령은 있었다.

'이건.'

대신 그 자극을 준 것에 시선이 갔으니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였다.

생명의 정수, 그리고 세계수의 뿌리의 순환에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까지도 반응한 것이었으니 도령은 인벤토리에서 그것을 꺼냈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아아-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가.

순수한 사령기로 이루어진 코어가 생명의 정수와 세계수의 뿌리가 얽힌 그것에 합쳐지며 빛이 터져 나온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선 결국 도령이 심법의 운용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띠링-!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가 탄생하였습니다.]

도령의 눈앞에 전생에서도 본 적이 없던 지팡이가 탄생해 있었다.

* * * *

오전.

도령은 부모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자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자리이기도 하였으니 어머니가 걱정하며 말한다.

"도령아. 이번에 큰일 있었다면서."

근무 중 들은 이야기를 집에 오자마자 꺼내는 어머니에게 도령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큰일이 있기야 했지. 나는 구경만 했지만."

"구경만 해?"

"응. 유니온의 엘프님이 나서서 해결하셨는데 내가 뭘 하겠어. 그냥 구경만 한 거지."

"음……."

너무나 자연스러운 답에 부모님이 '그런가?'하는 얼굴이 되어 버린다.

단순한 너스레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도령이었기에 육감이란 게 있는 인간이 그렇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여기에 도령이 또 절묘하게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으니.

"우리 이사는 좀 나중에 가야 하겠죠?"

"그래야 할 거 같구나."

다름 아닌 이사의 이야기다.

본래는 집주인이, 바뀐 집주인인 황금상회의 말단 상인이 서류와 함께 퇴거 요구를 하였으니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었다.

한데 그게 황금상회의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로 인해 마을과 상생하는 쪽으로 마을 개발 계획이 바뀌면서 조금 추이를 지켜보는 쪽으로 도령네 가족의 계획도 바뀌었다.

마을 외곽의 안 쓰던 황무지를 개발하여 황금상회 건물을 올리면서 시장 쪽도 리모델링한다고 하니 마을 전체의 부동산이 제법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될 지는 회귀한 도령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안정될 때까지 지켜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거품이 너무 끼면 차라리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나았으니까.

"저는 그럼 등록소에 다녀올게요."

식사를 다 하고 도령은 뒷정리 후 그렇게 말했다.

"등록소에?"

"응. 나 그거 구경하러 간 게 아니라 일하러 간 거잖아. 꽤 많이 벌어왔어."

"그래?"

"응. 우리 집 사려면 많이 벌어야지."

도령은 집을 나서 모험가 등록소로 향했다.

"쟤지?"

"어."

등록소에 들어서자 모험가들의 시선이 도령에게 몰리며 수군거렸으니 마을을 술렁이게 만든 사건에 단골로 등장한 게 그 이유다.

그렇게 시선을 모으는 뉴비 아닌 뉴비 도령이 들고 온 커다란 자루를 쿵, 하고 내려 놓고서는 접수원에게 말했다.

"이거, 판매할게요."

"어…… 네."

접수원이 워낙 커다란 자루에 뭔가 싶어 그것을 열어 확인했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시만요!"

무엇 하나 싼 것이 없는. 진귀한 것들로 그득하였기 때문이다.

레텔 정글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들 중 비싸다는 것만 골라 채취해 온 것 같은데 개중엔 한 달에 한두 개 보기도 힘들 만큼 진짜 귀한 것들도 있어 접수원의 손이 바빠졌고 주변에서도 도우니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린다.

"뭐야 저거?"

"깊이 들어갔다고 하던데 진짜 깊이 들어갔나 보네……."

"여, 여기 정산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령은 정말로 큰 소득을 올렸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고.

"좋아 보이네?"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으니 동네 누나다.

시장에서 생선 가게를 하는 아주머니의 딸이면서 등록소에 취직한 사람.

어릴 적 함께 놀았으나 머리가 굵어지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것이 저번 일로 제법 녹아내리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안녕, 누나."

그래서 인사를 하니 그녀도 빙긋 웃는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좋아 보이네?"

도령에게야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으나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천재지변에 휘말렸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것처럼."

그러니까 조심스레 그녀는 농담을 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데이트하러 가는 거."

"……응?"

* * * *

세계수의 단절된 뿌리로 인해 생긴 던전에 가는 길에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안목으로 겸사겸사도 아니고 제법 각 잡고 채취한 것들을 팔아 이사에 보탬이 될 돈을 번 도령은 상점가로 향했다.

마나 링크를 이용하는, 이번에 재개발로 인해 술렁이는 상점가가 아니라 전기를 이용하는 '번화가'로 향했으니 거기에 오늘 만나기로 한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와…… 진짜 말이 안 나온다."

"그러게. 진짜 이쁘긴 하더라."

"그러게. 진짜 이쁘긴 하더라."

아직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나기로 한 이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길거리가 술렁이고 있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며 오히려 잦아들었으니 귀가 밝다는 게 잘 알려진 이에게 혹시라도 대화가 들릴까 조심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인 카페에 이르러선 그것이 절정에 달했으니 도령의 시선이 만나기로 한. 주변에 있는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으로 향했다.

사라락.

 그 어떤 귀한 실을 가져온다 하여도 댈 수 없을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금발이 가볍게 부는 바람에 사락인다.

주변의 풍경을 담는 짙은 푸른 눈동자는 호수보다 깊어 보이며 하얀 피부는 첫눈보다 깨끗하다.

그런 그녀가 새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앞에 두고 있으니 비어 있는 앞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 함부로 앉지 못했으니 모두의 시선이 귀결되게 만드는 그녀가 사락이는 금발 사이로 쫑긋 솟은 귀가 뾰족한 엘프, 그것도 심층에 이른 모험가이면서 유니온 소속의 플레루스틴 아흘레라라는 걸 주변의 이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엘프도 아니고 심층에 이른 모험가에게 수작을 걸 만큼 한없이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낼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스윽-

"……!!"

그래서 비어 있으나 오로지 관심만 줄 뿐인 자리에 누군가가 서슴없이 앉았을 때 주변이 술렁였으니 그렇게 주변을 술렁이게 만든 도령이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플레루스틴."

"네, 안녕하세요. 도령."

새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녀는 약속에 따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으니 그 누군가는 도령이었다.

[우리, 언제 만날까요?]

던전 안에서 도령은 많은 것을 보여 주었고 그것을 본 플레루스틴은 도령과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한 말이었고 도령은 망설임없이 답했다.

[내일. 나가서 내일 바로 만나요, 우리.]

그리하여 오늘 약속이 잡힌 것이었으니 도령과 플레루스틴은 만난 것이다.

"음……."

"……."

우선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눈 둘이었으나 바로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둘이 어색해서가 아니라 워낙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새하얀 원피스 차림의 플레루스틴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도령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것도 너무나 조용한 가운데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꺼내야 할 내용이 가볍지가 않았다.

그래서 도령이 음료를 주문하고 그것이 나왔을 때 제안했다.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플레루스틴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달리 생각한 장소가 없으시다면 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44

주문한 음료를 들고 도령은 플레루스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려 엘프와. 그것도 그냥 엘프가 아닌 유니온의 플레루스틴 아흘레라 사복 버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도령에게 전에 없이 진한 시선이 꽂힌다.

도령은 한때 너무나 익숙하게 따라다녔던 그러한 시선이 오랜만이라 신선한 느낌을 받으며 플레루스틴과 함께 걸었으니 그녀가 이끈 목적지는 다름 아닌 유니온 지부였다.

이곳 마을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은 아니지만 가장 특별한 곳.

근래의 사건 때문에 더욱 특별해진 유니온 지부에 플레루스틴이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함께 들어온 도령에게 시선을 주었으니 아아, 이번 사건 때문이구나 짐작하는 것이 눈을 통해 보인다.

그 시선을 보내는 것이 엘프에 수인. 인간이지만 제르의 마법사와 무림의 무림인까지 누구 하나 강자 아닌 이가 없었으니 이곳 '초보자 구역'에 있기엔 모두가 규격 외의 강함을 깃들이고 있었다.

마족의 수법이 깃든 흡성대법의 비급 일부를 가지고 도주한, 마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의 추적에 진전이 없어 점점 보강되면서 규모를 키운 추적대와 그 관련자들이었으니 이 정도나 되는 강자들이면 '계층 공략'을 논해도 될 정도라는 생각이 드는 도령이었다.

중층 이상은 무리겠지만 그럼에도 무려 탑의 하나의 층을 공략하는 세계 단위의 이벤트인 계층 공략을 논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강자들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모여 활동하고 있으니 도령의 계획대로 천마신교에 숨어있는 악마 숭배자들의 많은 수작을 시작도 전에 분쇄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 강자들을 지나쳐,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유니온의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제법 깊숙한 곳에 있는 집무실이었으니 그녀의 방.

유니온 내에 있는 그녀의 집무실이었다.

"이곳에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카페에서 사 온 음료가 아직 남아 있었기에 따로 차를 내오지 않고 플레루스틴은 도령과 바로 마주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서로 마주하니 도령은 생각한다.

플레루스틴 아흘레라.

전생에서는 다만 이름 정도만 들어 보았던 엘프였다.

유니온 소속이었던 만큼 몇 번 대규모 공략이나 토벌 등에서 함께 한 적은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던 인연.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 삶에서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그리고 함께 살아남은 인연을 쌓았으며 그 과정에서 플레루스틴 아흘레라라는 엘프가 어떤 엘프인지 알았으니 해도 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솔직히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판단을 내린 도령은 망설이지 않았으니.

사아아아아-

도령의 발밑에서 돌연 검은 기운이 배어나는 물처럼 퍼져 나갔고 플레루스틴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도령을 마주했다.

하아아아…….

그렇게 열린 불사자의 무덤에서 그날 보았던 커다랗고 이해할 수 없는 스켈레톤. 귀화병이 몸을 일으켰을 때도 그러했다.

스윽.

하지만 도령이 불사자의 무덤에 기반한 인벤토리에서 '흡성대법의 전반부'를 꺼내들었을 때엔 그 짙은 푸른 눈동자에 파문이 일고 말았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물었다.

"어째서, 거짓말을 했나요?"

[혹시, 이 책의 절반에 관해 더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플레루스틴의 두 눈을 마주하고서 도령은 거짓말을 했었다.

[아뇨. 알지 못합니다.]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앞에 두고서 진실을 보이지 않으면서까지, 말이다.

거기에 대해 도령은 솔직하게 말했다.

"거짓말을 해서, 플레루스틴과 조사대가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에게 닿기를 바랐습니다."

"……!"

담담하게 나온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에 플레루스틴의 눈동자에 일었던 파문이 더 커진다.

"이 흡성대법은 사실 위험한 무공이 아니었어요. 이름은 흡성대법이지만 세간의 인식과 전혀 다른 조금 다른 형태의 무공이었죠."

"하지만 이 무공을 나쁘게 뒤틀고 수련자를 마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무공으로 만든 게 마족이었고 그 무공의 출처가 바로 천마신교. 그 안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악마의 무공을 익힌 게 이 녀석. 마골이란 이름의 악당이었어요."

"……."

왜 갑자기 저 불가사의한 스켈레톤을 꺼내나 했더니 바로 플레루스틴과 조사대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흡성대법을 익힌 자가 바로 저 스켈레톤이었다.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이 악마의 무공을 전수하고 세상에 보낸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 우리가 토벌했던 자는 악화되는 상황에 플레루스틴의 조사대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의도해서 보낸, 또 다른 악마의 무공을 익힌 자였을 거예요."

"…그랬던 거군요."

플레루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령이 이제서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짐작한다.

"그냥 이야기해서는 이런 것, 누구도 쉽게 납득해 주지 않았겠군요."

"네. 애초에 닿는 것조차 어려웠겠죠."

다짜고짜 각성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것도 지구의 인간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것이 정말로 플레루스틴에게 닿을 수나 있었을까.

닿기 전에 악마 숭배자들의 표적이 되어 큰일이 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그 외에 아주 많은, 여러가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도령의 거짓말은 '최선'이었고 그로써 정말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많은 것이 이루어졌음을 플레루스틴은 부정하지 않았다.

플레루스틴이 추구하는 선(善)이란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어리석어서도 안 되고 매몰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기에.

도령의 선을 위한 거짓말은 틀리지 않고 옳았다고 판단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도령.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진실이라 믿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플레루스틴."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는 건가요?"

천마신교는 무림을 대표하며 나아가 탑에서도 손꼽히는 집단이었다.

그런 집단의 안에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충격적인 비밀을 각성한지 얼마되지 않은 도령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심층의 모험가인 그녀가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강함까지 포함하여 도령은 납득할 만한 답을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도령은 그녀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답을 하나 준비하였으니 그것은.

"내가, 천마의 후계자이기 때문입니다."

"……."

플레루스틴은 반응하지 못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해 그것을 유예했다.

잠시의 시간이 주욱, 길게 늘어났고 플레루스틴은 말했다.

"손을, 줄 수 있나요?"

도령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때처럼 플레루스틴은 도령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고 다시 잠시, 그러나 길게 침묵했다.

그리고 나온 말은.

"도령."

* * * *

무림(武林).

천마신교 내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전각인 제이각(祭理閣).

천마신교를 양분하고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제사장이 머무는 그 전각 안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은밀한 특수집단인 잠마대의 대원이 부복하고 있었으니 그를 내려다 보는, 흡사 태사의와 같은 자리에 앉은 살이 뒤룩뒤룩 찐 제사장은 심기가 아주 많이 불편한 얼굴이었다.

"실패했구나."

"예.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쿵!

살이 덕지덕지 붙은 주먹이 팔걸이를 내리친다.

아껴 두고 있던 패를 꺼낸 것이었다.

단순히 흡성대법을 전수받은 게 아니라 제법 경지에 이른 자였으니 꽁꽁 숨겨 두었고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려 했다.

그것을 희생시킨다는 큰 결심을 하면서까지 아주 숨통을 조여오는 유니온의 시선을 돌린다는 계획을 세웠고 진행했는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꼬여 버린 것인지 더욱 최악으로 일이 치달아 버렸다.

흡성대법은 지구의 인간에게 간단히 전수될 수 있으니 그것을 전수한 놈은 여전히 추적을 피해 숨어 있다는 쪽으로.

제사장이 그렸던 그림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으니 도대체가 이 화를 주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된 것이지?"

제사장의 물음에 잠마대원이 사건의 흐름을 조사한 대로, 세세하게 읊었다.

그 과정에서 도령의 이름 또한 틀림없이 언급 되었지만.

"그래. 플레루스틴 아흘레라가 생각보다 더 대단했던 건가. 빌어먹을……."

전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도령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마스터 네크로맨서이자 천마신공을 익히고 회귀했다는 걸 모르는 이상 지극히 상식적인 흐름이었다.

"뒷처리는?"

"깔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거라도 제대로 돼야지."

아주 조금 제사장의 기분이 좋아졌다.

흡성대법을 상승의 경지까지 익힌 자를 천마신교 내에 숨겨 두었다가 파견하는 일련의 일처리가 너무나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나 되는 자를 숨겨 두었다가 내보내는 게 문제가 없었을 만큼, 천마신교를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믿음에 보답하지 못하는 신이란 건 쇠락하는 법이지.'

천마신교가 떠받드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천마는 멸망의 시기에는 물론이요 지금까지도 교도의 기도에 답하지 않았다.

그런 자를 언제까지고 인간이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후계자조차 없어 천마의 자리가 견딜 수 없는 공백이 되어 버린 지금은 더더욱 믿음이 옅어져만 갈 뿐이다.

제사장은. 악마 숭배자들은 그런 천마신교를 속에서부터 조금씩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으니 썩은 부위는 이제 스스로 번져 나갈 만큼 크고 또 깊어져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녀 일파가 천마신교를 떠받치고 있어 유니온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제사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결심했다.

"준비는?"

"계획대로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사실은 조금 더 신중하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을 기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에 결행하려 했던 것.

그러나 계속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과 그 이유가 된 신녀를 더 이상 가만두기 어려워졌고 또 그 신녀가 천마제의 준비로 다른 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지금이 적기라 판단했기에 결심한 것이다.

'신녀를 숙청한다.'

도령의 전생에서는 한참 더 뒤에 일어났어야 할 일.

"이번 천마제가 우리의 위대한 날이 될 것이다."

"예!"

'신녀 일파의 숙청'을 제사장은 이번 천마제에서 결행하려 했다.

* * * *

[도령. 당신을 믿겠습니다.]

도령의 손을 잡고 그 온기를 느끼는 듯 숙고하던 플레루스틴은 그렇게 말하며 도령을 믿어 주었다.

그리고 도령이 말해준 것들을 참고하여 조사대의 방침을 세우겠다 말하였으니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의 숨통을 더욱 옥죄는 성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었다.

도령이 알고 있는 비극적인 미래를 막는 것을 넘어 '해피 엔딩'에 이르기 위해선 더 나아가야만 했다.

도령의 손으로 해야만 할 것들이 있었다.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을 도려내고 신녀가 천마와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천마신교가 그토록 기원하였던 천마강림(天魔降臨)을 이루어낸다.

도령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어.'

무림(武林)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45

도령의 하루 끝과 시작은 항상 단련이었고 스스로의 한계 너머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스으-

한없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동작은 그렇기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단련이란 걸 알게 한다.

편하기 위한 느림이 아니다.

이를테면 팔을 굽히는 과정을 한 시간에 걸쳐서 한다면. 혹은 무릎을 굽히는 과정을 마찬가지로 한 시간에 걸쳐서 한다면.

그것은 편할 수 있는 느림이 아닌 몸을 한계 너머로 몰아붙이는 동작이 될 것이다.

스으-

도령은 그 한없이 느린 과정에서 어디에 어떻게 자극을 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나아가 극한의 단련을 위한 연신극기공의 초식들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고 있으니 평범한 이는 찰나조차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오오오오오오-!!

포효하는 연신극기공이 혈도를 내달리며 외부는 물론이요 외부와는 비할 수조차 없이 취약한 내부마저 두드리고 있다.

짓이겨지고 부서지며 아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더 질겨지며 더 유연해진다.

그것은 마치 단조(鍛造). 금속을 끊임없이 두들겨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닮아 있었다.

도령은 그러한 단조의 과정에서 이제 육체를 몰아붙이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다.

단순히 육체를 혹사하는 것만으론 유의미한 효과를 보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러니까 이 단계에 오면 연신기가 진화하니.

오오오오오-!

다만 혈도를 흐르던 연신기가 가속하며 육체의 내외를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점점 더 덩치를 키워가고 있는 연신기의 공능은 놀라워서 계속해서 도령이 한계에 이르고 그 너머로 나아가길 재촉하니 도령은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두근!

도령의 내부만을 내달려야 할 연신기가 외부에 치달으니 도령이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의 힘이었다.

마치 연리지처럼 가지가 얽히며 뻗은 형태의 지팡이에 순백색과 칠흑의 구슬이 양끝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범상치 않은 그것은 느낌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는 물건이었으니 세계수의 뿌리에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와 생명의 정수가 합쳐진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였다.

심층에서도 보물이라 불리는 생명의 정수에 네크로맨서의 정점이었던 도령의 '종결 무기'의 핵심 재료였던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의 코어까지 세계수의 뿌리가 얽히며 탄생한 말도 안 되는 아이템.

이름 그대로 생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힘과 인간을 포근하게 덮는 어둠을 닮은 순수한 사령기가 세계수의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순환하는데 그 커다란 순환이 도령의 내부에서 내달리는 연신기마저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태프를 매개로 더 커다란 외부의 흐름에 연신기의 흐름이 합쳐지니 내부의 순환이 외부로 나아가며 확장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세계'였으니 도령은 이 순간 진(眞) 에너지 컨트롤이 무엇인지 그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에너지 컨트롤.

명료하게 말하여 힘을 다루는 그것은 또한 하나의 이치로 진 에너지 컨트롤은 그것마저 포함하는 더 큰 범위에서의 이치다.

'가짜가 아니었던 거야.'

진 에너지 컨트롤의 존재가 있으니 에너지 컨트롤이 가짜라는 쪽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에너지 컨트롤 또한 힘을 다루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다만 이치 중의 하나였고 그것을 좀 더 확장한 것이.

조금 더 크고 본질적인 것이 진 에너지 컨트롤이었으니 이는 사고의 전환과 확장이요 새로운 앎으로 이어지는 깨달음이었다.

'그렇구나.'

그리고 그 깨달음은 스태프의 힘을 더하여 도령이 자연스럽게 힘을 외부로 순환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사아아-

도령은 이 순간 공간을 가득 채운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미래에 '마나 링크(Mana link)'라 불리며 많은 것을 바꾸었던 현상이었다.

'이렇게도…… 할 수 있었던 거구나.'

힘주어 붙잡지 않았고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의 흐름을 외부에 연결하였으니 이 순간 작은 공간에 불과하다고 하나 흐름은 도령의 것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본래 믿을 수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도령이라 하여도 일이 년 정도로는 도달할 수 없었을 경지였으니 바로 오늘.

'시작해도 되겠어.'

도령은 미래를 계획보다 더 빨리 바꾸기로 결심했다.

* * * *

저녁에 가까운 오후.

퇴근 시간이 되었으니 퇴근할 수 있는 이들의 얼굴에 활기가 도는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어, 수고했어."

도령은 오늘 평소와는 다른 길을 걸었으니 다름 아닌 사장실. 오명보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어, 그래. 도령아."

깡패 같은 인상과 실제로 깡패였던 오명보는 그러나 마치 사장이 아니라 윗사람을 본 듯한 얼굴로 쭈뼛거렸으니 거기에 도령은 즉시 본론을 말했다.

"사장님. 저 비정규직이 되어야 할 거 같아요."

[그게 뭔 소리야 이 새끼야.]

도령이 기억하는. 지금도 익숙한 전생의 오명보였다면 대번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사실은 그때를 떠올려서 일부러 이렇게 요상하게 말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오명보는 도령이 기억하고 익숙한 오명보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으니.

"어, 그……. 도령아. 미안한데 내가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자세히 설명을 해 주겠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스터 네크로맨서이자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는 도령을 소름 돋게 만들 정도로 상식적이고 부드러운 반응이었는데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도령이 각성한 그날부터 바뀌기 시작한 관계는 자연스럽게 오명보가 도령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형태가 되었다.

오명보 스스로가 그것을 자처하였으니 도령이 보여 준 것들이 무엇 하나 범상치가 않다.

심지어 바로 어제는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와, 그것도 사복 차림의 그녀와 만났다고 하니 사적으로 만날 정도로 그녀와의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 아닌가!

'이 새끼 뉴비 아닐지도 몰라.'

아니. 아닐지도 몰라가 아니라 아니다. 확실하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성장과 능력이지 않은가.

아예 유니온의 실력자와 사적으로 만나는 것까지 보면 이제서야 각성했다는 것도 연막이고 유니온의 실력자와도 교류가 가능할 정도로 대단한 클랜에서 작정하고 키운 연막 뉴비인 거다 이놈은.

그러니까 오명보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는다.

"무슨 일이 있다면 설명해 줘. 최대한 수용해 볼게."

"……어, 네. 일이 좀 생길 거 같아서요."

도령은 적응되지 않는 오명보의 조심스러움에 회귀하고 아마도 처음일 당황을 보이며 말했다.

"일?"

"네."

도령의 계산대로였다면 최소 1년. 적어도 2년 정도는 이 회사에 꾸준히 다녀야 했다.

그렇게 회사에 다니며 마나 링크를 벌고 사령기를 쌓으며 준비를 해야 무언가를. 바꾸어야 할 것들을 바꾸기 위한 힘을 갖추고 시작할 수 있을 거라 계산을 했다는 말이다.

한데 그 계산은 기분 좋게, 아주 완전히 빗나갔으니 하고자 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수준에 너무 빨리 도달해 버린 거다.

가능하다면 가능한 만큼 빨리 시작하는 게 좋았다.

다만 그것이 어려우니 타협하고 또 타협하여 최소 1년까지 일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러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까 움직여야만 했다.

무림에 갈 준비를 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탑의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계층 이동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림으로 가게 되면. 오가게 되면 당연하게도 회사에 계속 다니기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더더욱 일이 잘 풀리게 된다면 더 이상 도령은 평범한 모험가가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마나 링크를 모으는 것 또한 월급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꾸준히 회사를 다니기는 어려워질 거 같으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당장 그만두거나 일이 닥쳐서 통보하는 건 경우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미리 말씀드리는 거고 이후에는 알바로 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을까요?"

괜찮을까요.

어디까지나 의견을 구하는 말이었지만 오명보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 응. 물론이지. 우리 도령이가 편한대로 해야지."

"……네. 감사합니다."

우리 사장님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 * * *

[천마신교 내부를 직접 조사하는 건 어려울 테고 그런 낌새를 내는 것조차 위험할 수 있겠죠.]

[도령의 말대로입니다.]

플레루스틴이 도령의 말을, 천마신교 내에 악마 숭배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믿어 주었지만 당장 손대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어디 작은 악당 소굴도 아니고 무려 한 세계를 대표하는. 심지어 그 세계를 상징한다고까지 할 수 있는 무림의 천마신교였으니 말이다.

내가 들었는데 거기에 악마 숭배자가 있으니 조사 좀 해야겠습니다 말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고 개연성을 어디 갖다 버리고 조사한다는 가정을 한다 해도 100%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까 일을 진행하려면 확실한 무언가를 준비해야만 한다.

최소한 이 거대한 조직 내에 기생하고 있는 악마 숭배자들의 꼬리가 튀어 나올 만큼의, 그들의 소굴을 뒤흔들 수 있는 패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녀다.

신녀(神女).

지고지순한 천마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그녀와 닿고서 그녀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충분히 천마신교를 좀먹고 있는, 병들어 가고 있는 천마신교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그녀와 만나 일을 진행한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이것이 계획인데 신녀는 물론이요 천마신교의 교도들과 무림의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찾을 방법을 하나 생각해 둔 게 있다.

그리고 또.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웅성웅성-

퇴근 후 제법 길어진 해에 아직 밝은 시간.

도령은 웅성이는 사람들을 보았으니 그 너머에 황금상회의 복식을 갖춘 이들이 보였다.

황무지를 개발하여 황금상회의 건물을 세운다는 계획이 가시화되며 상회 소속의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도령은 개중 따로 움직이는, 좋은 옷을 갖춰 입었으나 털털한 분위기의 소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맥락없이 다가가 초면에 인사했는데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부분이 과연 상인답다고 해야 할까.

좋은 옷을 입었고 제법 눈에 띄는 미모의 소녀는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두를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누구든 호감에 다가가 말을 걸 수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법 눈썰미가 있다면.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러니까 이 자리의 지휘를 맡은 건 노련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으나 그들을 하나로 묶는 건 그녀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을 거다.

그런 그녀에게 도령이 에너지 컨트롤의 수법을 응용하여 그녀에게만 목소리가 전달되도록 하여 말했다.

-제가 좋은 이야기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요, 황금상단주.

"……!"

-혹시 시간 되시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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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장님, 손님 좀 모실게요."

"그래."

소녀가 말했고 이곳 상단의 지부장이었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대화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시선이 모였던 특별한 그림이 당연한 그림으로 바뀌어 버렸다.

사실은 갑작스러운 만남이었고 심지어 이 마을에서 너무나 유명해진 도령. 거기에 황금상회에서 나온 이들의 만남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짧은 대화로 그렇게 만든 소녀가 이끄는 대로 도령은 따라갔으니 임시로 쓰는 건물의 어느 방이었다.

말 그대로 임시로 둔 건물이고 방이라 그런 티가 났으나 겉보기와 달리 필요 최소한의 보안 조치는 다 되어 있었으니 과연.

황금상단주가 데려온 곳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도령이었다.

그런 도령을 마주하여 옅게 미소짓고 있는 소녀. 황금상단주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이번에도 바로 알아봤어.'

저번의 일도 있었기에 특히나 공을 들인 호문클루스로 왔다.

말이야 간단해 호문클루스지 인공 생명체인 호문클루스란 건 제르의 대마법사라 해도 제대로 된 개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단위의 예산을 나라에서 지원 받아야 할 정도다.

그렇게나 귀한 게 뜬금없이 이런 마을에 있으면. 그것도 황금상회의 일행 안에 있으면 황금상단주라고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애초에 호문클루스란 걸 꿰뚫어 보았다는 것부터가 문제다.

탑에서 이름을 떨치는 특별한 이들은 호문클루스를 알아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정도는 되어야 호문클루스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물며 호문클루스에 해박한 이들 중에서도 전문 지식이 없다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공을 들인 게 지금 황금상단주가 아바타로 삼은 개체였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지금 마주한 이 특별한 소년은 '나'를 알아본 걸까.

'음…….'

그리고 그런 속내를 티를 내지 않을 뿐 고스란히 읽고 있는 도령은 조금 미안해졌다.

그녀의 머리가 아플 정도로 깊은 고민에 대한 답이 사실은 정말 간단한 거라서.

도령은 그냥. 그냥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도령(道靈). 영혼을 인도하기 위하여 영혼을 볼 수 있고 또 영혼을 접할 수 있는 도령이었으니 호문클루스에 투영되는 황금상단주의 영혼이 그냥 보인다.

다른 이들에게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도령에게는 본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 마스터 네크로맨서로서의 안목과 지식 이전에 호문클루스로 정체를 가리는 위장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고나면 허망해질 의문으로 고민하는 황금상단주의 고민을 끊어주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좋은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멘트는 무슨 사이비 방문 판매원 같다. 그러나 황금상단주의 정체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꿰뚫어 보았으며 은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황금상회 암행상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동생의 존재까지도 당연하다는 듯 잡아내는 도령은 너무나 특별하였으니 이렇게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게 만든다.

"제가 필요한 때에 구매할 권리를 드렸던 생명의 정수. 그것 말고 또 다른 생명의 정수가 있습니다. 이건 심지어 대략적으로 추정해도 일반적인 생명의 정수의 세 배는 넘는 생명력을 품고 있는. 자칫 잘못하면 생명력이 폭주해 버릴 만큼 비정상적으로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겁니다."

"그걸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

정말로 무어라 해야 할지.

이번에도 평범한 거래가 아닌 걸 들고 왔다.

어떻게 보면. 아니 대부분은 사기꾼의 수작 같은 이야긴데 그것이 진실로 들리게 만드는 것이 도령을 황금상단주에게 있어 특히나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물건은 천마신교의 안. 악마 숭배자가 된 제사장과 그 일파가 폭주하기 직전의 생명의 정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

황금상단주가 표정 관리를 잊고 두 눈을 부릅 뜰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것을 무슨 일상적인 비즈니스 토크를 나누듯 던져 버린 도령이 이어 믿을 수밖에 없는 서류를 꺼냈다.

이마를 어루만지는 산들바람 같은 마나가 느껴지는 직인이 찍혀 있는 그것은 플레루스틴 아흘레라. 유니온의 유명한 엘프가 직접 쓰고 직인을 찍은 서류였다.

"저는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도령은 믿기 힘들지 몰라도 유니온의 정의로운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의 이름이 더해지면 공신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게 황금상단주가 더 믿을 수 있도록 서류를 보여주고서 도령은 말했다.

"천마신교 내에 악마 숭배자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것은 확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을 폭로할 증거가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찾아야만 했는데 가능성이 있는 게 물류였습니다."

거대한 조직의 특성상 제아무리 자급자족에 공을 들인다 해도 모든 걸 내부에서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자연스레 물류. 물건의 흐름이란 게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 제사장 일파와 이어지는 흐름 또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마신교를 내부에서부터 좀먹고 있으며 장악하고 있는 자들이 꽁꽁 감추고 있을 그 물류의 흐름을 찾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겠죠. 애초에 시도하는 것부터가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구요."

꽁꽁 숨긴 것을 찾기 위해선 그만큼 깊이 접근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민감한 약점에 접근하는 것과 같으니 대번에 경계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었고 그래서야 본말전도. 그들이 더욱 꽁꽁 숨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니까 황금상회였다.

"황금상회라면 은밀하게. 들키지 않고 그 흐름을 추적할 수 있을 겁니다."

"제사장 일파는 천마신교에 전해지는 두 개의 보주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의 특성을 역이용해서 주변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대신 마기로 채우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과하게 집중된 생명력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데, 일을 성공한다면 그렇게 쌓인 생명력을 황금상단주께서 원하는 곳에 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도와주신 것에 대한 사례 중 하나이고 정식으로 더 많은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

도령을 마주한 소녀. 황금상단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숙고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득. 정말로 문득 본질적인 것 하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를. 어째서?'

이렇게나 충격적인. 설령 정말로 가까운 사이라 해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충격적인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말해 주었다.

도대체 어떻게인지 모르겠지만 생명력이 과하게 응축돼 폭주하기 직전의 생명의 정수가 그녀에게는 평범한 생명의 정수 이상으로 쓸모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던 것까지 포함하여 그 이유가.

도령이 그녀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숨기지 않았으나 도령이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되려 이 순간에서야, 이 상황에서야 깨달았다.

도령이 흔들림없이 그녀를 신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도대체 무엇이 눈앞의 특별하디 특별한 소년이 자신을 믿게 만드는 것인지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흔들림없는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으니 그녀는 굳이 이성적인 상인으로서 물었다.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건가요.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기에."

도령은 거기에 또 충격적인 답을 돌려 주었다.

"제가 천마의 후계자여서요. 천마신교를 되찾으려 해요. 음…… 조금 더 적나라하게 진심을 말하자면 나를 위해서, 라고 할까요?"

나를 위해서.

도령의 그 말이 황금상단주는 어째서인지 '나를 위해서'라고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으니.

* * * *

[알겠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였네.'

도령은 생각보다 쉽게 황금상단주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찾아가 기세 좋게 이야기하기는 했으나 설득이 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생명의 정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래'를 하기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부분들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도령은 제법 많은 것을 오픈하고 또 많은 것을 준비했었다.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내가 천마의 후계자이기에.

천마의 후계자로서 악마 숭배자들이 좀먹고 있는, 하필이면 그 악마 숭배자가 천마신교를 양분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제사장 일파를 몰아내야 했기에.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고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이유였다.

또한 그녀에게 약속한 것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경우 하려고 했던 말.

[일이 성공하면 내가 바로 천마신교의 지존. 천마이면서 교주가 될 테니까요.]

그래. 일이 성공하면 도령은 정말로 천마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것이니 천마신교의 지존이자 교주가 될 것이었다.

생명의 정수와 관련된 약속은 물론이요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값을 치를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미래'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 거절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황금상단주. 용제가 아끼던 자매 중 언니 쪽인 세나는 그 자리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말이다.

'내 생각보다 문제가 심한 걸까.'

용제와 관련한 문제는 십 년도 더 뒤에야 덮쳐오는 재앙이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생이요 상황이란 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라는 걸 아는 도령이었기에 조금 걱정이 된다.

세나의 기색으로 보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역시 가능하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녀와 이야기한 또 하나의 계획을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 * * *

그리고 한 달.

도령이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와 그로써 가능해진 힘에 익숙해지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이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시대.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초인들의 시대에 건축이란 건 충분한 자본만 있다면 하룻밤 사이에도 끝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 황무지였던 땅에 황금상회의 지부가 들어섰다.

그 이름 '황금'에 어울리면서도 과하지 않고 주변과 조화되어 더욱 고귀하게 보이는 이 마을의 지부는 세계의 끝. 지구의 경계가 가까운 만큼 다른 층으로의 물류 허브 중 하나로 기능할 예정이었고 오늘 첫 물량과 의뢰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법 많은 마차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개중 무림으로 향하는 마차들 사이에 내부를 꼼꼼하게 가려 두어 무언가 귀중한 걸 실었나 싶은 게 몇 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안에 실은 것이 장례와 관련된 것이어서 그럴 뿐 특별한 게 아니었고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마차들을 관리하는 이는 그러니까 단 한 명이었다.

그나마도 전문가가 아니라 모험가를 겸하는 이가 배치되었으니 젊은 소년이었고.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 잘 부탁한다."

이번이 첫 '계층 이동'임에도 불구하교 묘하게 여유가 보이는 소년은 뉴비임에도 뉴비로 여겨지지 않는 네크로맨서.

가만히 앉아 지켜볼 생각이 없는, 직접 계획 중 하나를 진행하기 위해 나선 도령이었다.

47

전생에서와 달리 황금상회의 지부가 마을에 들어서게 된 원인을 도령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도령에 의한 변화였으니 도령의 계획에 따라 유니온의 조사대가 일대를 이잡듯 뒤지면서 '지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무수한 세계가 모인 탑은 그러나 각 계층, 세계의 시간과 세계를 감싸고 연결하는 탑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에 유통이 성립할 수 있었는데 이 유통망을 구축하기 위해선 탑의 지도란 게 중요했다.

몬스터의 출몰이 적어 가능한 전투를 피할 수 있으면서 원하는 지역과 연결되는 최적의 길을 찾아야 했으니 이게 그 지도란 것이다.

본래는 모험가를 고용하여 필요한 구역의 지도를 만들어야 했고 이게 상당한 돈과 인력이 드는 일이었는데 이번은 유니온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이곳, 낙후된 구역의 좋은 지도가 만들어졌고 황금상회의 말단 상인은 쓸 수 있겠다 싶어 해당 지도의 정보를 사면서 지부장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거다.

그런 배경을 거쳐 마을의 황무지에 황금상회의 지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동시에 진행된 마을과 시장의 개발은 여러가지 이해 충돌이 있어 지지부진한 편이고 가끔 고성이 오가기도 해 아쉬운 부분이었으나 무려 황금상단주가 이곳에 와 있으니 잘 조율돼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론이 날 거라 도령은 믿었다.

예의 말단 상인을 단순히 징계하는 게 아니라 본사로 보내 더 많은 걸 보고 느끼도록 조치하였던 것처럼.

포기하는 대신 더 나은 방향으로의 품을 들이는 성향인 세나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령이 지금 신경써야 할 것은 이곳 황금상회 지부의 첫 개시다.

제법 양이 되는 물량 중 도령이 있는 곳은 무림으로 향할 짐을 실은 마차들 사이다.

몇 대의 마차에 실린 짐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따지고 보면 모험가라기보다는 상회의 관리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양은 제법 되지만 기본적인 물건과 재료들이어서 그렇게까지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기본만 할 수 있으면 되는데 또 그런 '일반인'을 아무리 그래도 데려가기는 어려웠으니 모험가이면서도 이 일을 맡을 만한, 말을 하는 이도 과연 그런 이가 있을까 싶은 적임자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런 모험가가 있었으니 도령이었다.

상조 회사에서 몇 년 일했고 얼마 전 네크로맨서로 각성한. 뉴비라고 하기엔 존재감이 커져 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초대형 신인인 도령이 말이다.

하물며 도령은 요 한 달 사이 퇴직금까지 잘 정산하여 퇴직 후 알바 느낌으로 일을 하고 있던 차라 즉시 참여가 가능했고 이렇게 황금상회의 상단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출발하겠습니다!!"

상단 책임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무림으로 출발했다.

이번 생의 첫 계층 이동이었다.

* * * *

계층 이동(階層 移動).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지구에서 무림으로의 계층 이동은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아니었다.

바로 인접한 층이기도 했고 지구와 무림 사이에는 어지간히 멀리 나가지 않는 한 하급 몬스터들이 배회하는 곳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한 하급 몬스터의 출몰과 더불어 차, 배, 기차, 비행기 등의 운송 수단을 쓰지 못하고 직접 걷거나 말이 이끄는 마차를 써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정도가 특기할 만한 부분이었다.

다만 이번의 계층 이동이자 상단의 이동은 거기에 개척의 의미가 더해졌다.

황금상회에서 유니온에 접촉하여 지도를 샀고 길을 정하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정보일 뿐이니 이번에 직접 그 길을 오가며 '개척'하는 임무까지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를 위해 고용된 모험가들은 과연 황금상회에서 고용한 이들답게 일처리가 나쁘지 않았고 실력도 무난한 편이었다.

"그래요? 음. 알겠습니다. 들은 대로 수행하게."

"예, 대형."

주가 된 건 무림 출신의 모험가들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땐 지구인과 비슷한 어투였다가 저들끼리 말할 땐 무림의 어투가 되는 것이 제법 시선이 갔다.

그리고 또 시선이 가는 게 하나 있었는데…….

캬아아악!

퍼엉!

덮쳐드는 몬스터들을 폭력적으로 압도하는 무공이다.

계층 이동에 있어 전투를 완전히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은 차라리 어느 정도 전투를 감수하고서 이동 거리를 좁히는 게 합리적이었으니 더더욱 그 사이의 간극을 잘 조율해야 하는 상단은 몇몇 포인트에서의 전투를 이미 상정하고 있었고 무림 출신의 모험가들이 나서서 그 어떤 위기도 없이 정리중이다.

곤충을 사람 크기로 키워 놓고서 키틴질의 번들거리는 다리를 흉기로 개조한다면 그러할까 싶은 꽤나 혐오스러운 외형의 몬스터였는데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대했다.

꽈아아앙!

놈들의 특징은 보기보다 훨씬 강한 완력이었는데 그 완력을 압도하는 힘으로 단번에 단단한 외피를 터뜨려 버리고 코어마저 박살내니 말 그대로 '폭력적으로 압도하는' 형태였고 도령은 그게.

'흐으으으음…….'

계속해서 눈에 걸렸으니 아쉬웠기 때문이다.

좀 가볍지만 확 느껴지게 말하자면 '아, 무공 저렇게 쓰는 거 아닌데'다.

무림 무공의 주류가 저런 형태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마족의 침공을 이겨내지 못하고 멸망한 무림은 무(武)를 의심하게 되었고 도(道)보다 힘을 더 추구하게 되었으니 저런 식의 무공이 주류가 된 것이다.

전생에서는 거기에 관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지금은 계속해서 눈길이 가고 마니 이제 도령 또한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흡성대법을 익혔던 마골이 지껄이기를 '고루한 무공'. 그러나 감히 마골 따위가 입에 담기엔 너무나 위대한 신화시대의 무공인 천마신공을 제대로 익히고 있는 무인 말이다.

그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는 도령의 눈으로 보기에 저것은 너무나 깊이가 아쉽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느라 멀리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놓아 버린 이들로 보이고 말아 안타깝다.

하지만 그런 말을 여기서 그들에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속으로 삭이고 있자니 감각에 걸리는 게 있다.

'음.'

드드드드드-

낮게 땅이 울리며 가까워지는 그것들을 도령만이 아닌 상단의 모험가들도 금방 눈치챘다.

애초에 대놓고 달려오는 무리였기에 따로 알릴 것도 없었고 그 정체 또한 탁 트인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 던전에서 쏟아진 것인 모양입니다, 대형."

"음. 아직 정리가 덜 된 구역이라고 했으니 거기서 나온 모양이로구나."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뿐 담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드드드드드!!

달려드는 몬스터의 수가 상정한 것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인명 피해는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양의 수가 많다 해도 호랑이를 어쩔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운송하는 물자의 피해를 다 막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또한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자의 손해를 보는 건 그들의 평판 하락과 직결되는 일이었으니 뒤의 이들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얼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밖에.'

언제까지고 얼굴만 찌푸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놈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으니 남자. 대형이라 불리는 호위대의 대장은 빠르게 정해진 대로의 진형을 짜도록 명령을 하고 칼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가까워지는 기척이 있었으니 기억에도 남지 않은 어린 모험가였다.

솜털이나 겨우 벗었을까 싶은 모습.

게다가 지구 출신인 것 같으니 이런 상황에서 하등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고 그런 놈이 바쁜 중에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대신 다가오자 그의 표정이 또 찌푸려지고 만다.

"무슨 일이지?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위급시 거친 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령은 그러니까 그의 태도를 이해하고서 그의 말대로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정해진 방진의 을 구역. 저 혼자 막겠습니다."

"……뭐라고?"

호위대 대장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고 말았다.

방진(方陣)의 을(乙) 구역. 

지구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전선의 우측을 혼자 막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디 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는 고수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을 법한 소리를 지구 출신의 뭐하는지도 모를 놈이, 그것도 손해를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지껄이고 있으니 결국 그의 입에서 분노한 큰 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고.

사아아아아아-

그 순간의 호흡을 끊는 절묘한 타이밍에 도령의 발밑에서 배어나는 물처럼 검은 어둠이 번져갔다.

그리고 그 어둠 아래에 보이는 것들에 호위대장의 눈이 커졌으니 도령이 발언의 이유를 말했다.

"제가 네크로맨서거든요."

* * * *

저 멀리서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보았을 때 호위대장은 생각했다.

'이번은 길보다 흉이 많겠구나.'

유니온의 실력자들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구역이라고 들었다.

그게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시기여서인지 예상보다 더 몬스터가 적었고 어쩌면 수월하게 일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그게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던 건지 갑작스레 어느 던전에선가 대량으로 쏟아진 몬스터와 조우하고 만 것이다.

던전이 정리되지 않았으니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하필 지금 발생했고 이 넓은 탑에서 그들과 조우하였으니 이건 정말 불합리한,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재해였다. 

그러니까 그는 제법 경력 있는 모험가답게 억울하지만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지킬 수 있는 건 최대한 지키는 선택을 하려 했다.

그리고 호위대장이. 그들이 믿고 따르는 대형(大兄)이 그런 선택을 하리란 걸 오랜 세월 함께해 온 호위대의 다른 무인들도 다 알고 있었기에 명령이 내려오기 전 미리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좌측 방진에 3할의 전력을 더한다!"

갑자기 그런 소리가 들려와 급박한 실전임에도 불구하고 움찔, 움직임이 멈추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좌측 방진에 3할. 그건 곧 우측을 포기하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부족한 전력으로 최대한 얇게, 가능한 전체를 지켜야만 위험 부담은 커지지만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는 대신 좌측의 방어선을 공고히 하면 좌측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고 위험도 줄겠지만 짐의 절반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단 말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그들의 시선이 대형, 호위대장에게 한 번 향했다가 텅 비게 된 우측으로 향했는데.

'어?'

'뭐야?'

그 우측에 홀로 앞으로 나서는 인간이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지구 출신의 인간이었다.

무공도 마법도 신체적 능력도 타고나지 못한 '열등한 인간'.

탑의 시스템 덕분에 어느 정도 격차를 메꿀 수 있게 되었으나 여전히 탑 안에서 지구 출신의 인간은 은연중 무시당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저게 무슨 짓인지. 어떤 기대조차 없는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도령의 발밑으로 검은 어둠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쿠오오오오오-!!

맹수가 포효하며 뛰쳐나왔다.

48

캬아아아아아!!

저 너머에서 삽시간에 가까워진 대량의 몬스터들은 고블린이었다.

녹색 피부에 이족 보행을 하는 것이 오크와 닮았지만 오크에는 댈 수 없는, 인간보다 겨우 조금 나은 피지컬에 키는 훨씬 작아 난쟁이라 불러야 할 녀석들은 그러니까 밑바닥의 하급 마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악한 수준이라도 방어구를 갖추고 무기에는 독을 바르는 등 교활하고 잔혹한 데다 최소 수십 이상의 무리를 이루니 역시나 경험이 부족한 초보 모험가들에게는 철저하게 주의해야만 할 몬스터였다.

인간을 찌르고 무력화하는 데에는 독 묻은 작은 날붙이로 충분했으니 그것이 다수가 몰려들면 큰 위협이 된다.

그런 몬스터가. 독으로 번들거리는 무기를 꼬나쥐고 덤벼드는 고블린의 수가 수백에 이르니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밀려든다.

'으음…….'

그리고 이제 육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고블린들의 눈은 툭 튀어나와 시뻘게져 있었고 조악하게나마 방어구를 두른 몸은 그러나 깡말랐으니 굶주려 있는 게 확연하게 드러난다.

근방에 클로즈하지 못한 던전 중 하나에 서식하던 것들이 영역 싸움에서 밀려 쫓겨난 것이란 걸 경험 있는 모험가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쫓겨 나온 놈들은 잘 먹지 못하고 악에 받쳐 있는데 영혼에 새겨진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까지 더해져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물고 늘어지니 모험가들의 표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호위대장은 나름 경력이 긴 모험가였던 만큼 그런 경우를 몇 번이고 경험했으니 길보다 흉이 많겠구나. 예상한 것이었는데.

캬오오오오-!!

예상과는 일이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튀어나간 건 상단에는 없던 거대한 검은 맹수였다.

표범을 닮은 그것은 그야말로 검은 번개처럼 고블린 무리를 덮치고서는 할퀴었으니 전열이 말 그대로 찢겨 나가며 무너졌다.

이어 그것이 시작이라는 듯 거대한 발톱이 몇 번이고 번쩍이니 또 삽시간에 주변의 고블린들이 육편으로 변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키에에에엑!!

눈이 돌아간 고블린들은 몬스터답게 동족이 찢겨 나감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둘렀다.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독 묻은 단검을 휘두르는가 하면 꼬챙이를 쑤셔 넣는 놈도 있다.

카강!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표범의 거죽에 닿지 못했으니 사아아, 검은 기운이 마치 갑주처럼 표범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견 있는 모험가들은 그것이 무장기(武裝氣). 귀족이라 불릴 수 있는 네크로맨서의 기술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리고 무장기를 두른 맹수가 날뛰고 있으니 설령 고블린의 무기가 무장기에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에 닿아도.

스각! 푸욱!

설령 그것을 뚫고 들어간다 해도 문제가 될 수 없었으니.

캬아아아아!!

아무렇지 않게 날뛰는 표범이 언데드였기 때문이다.

그래.

무장기를 두른 표범은 이미 죽은 존재를 네크로맨서가 언데드로 일으킨 것이었으니 생명에게나 통하는 조악한 고블린의 독이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장기를 두른 언데드는 표범만이 아니었다.

우오오오오!!

도령을 중심으로 하여 발밑에 퍼져 나간 어둠에서 또 한 마리의 거대한 맹수가 뛰쳐나와 내달린다.

고릴라를 닮은 그것은 그러나 고릴라의 세 배는 될 법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콰과광, 그저 돌진하는 것만으로 고블린들을 분쇄해 버린다.

쿠오오오오오!!

이어 뛰쳐나온 불곰을 닮은, 역시나 거대한 맹수 또한 고블린들을 가을날 바싹 말라 나뒹구는 잎처럼 부숴 버리니 이미 그것은 한 명의 모험가와 군대의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하나둘이 아니었고 셋도 아니었다.

부오오오오!!

여덟이나 되는 거대 맹수 언데드가 도령의 발밑에서 일어나 달려가서는 무장기까지 두르고 날뛰니 고블린의 진형은 이미 무너졌고 자연재해에 휩쓸린 듯 쓸려나간다.

도령이 레텔 정글에서 마주했고 토벌하여 언데드로 일으킨 거대 맹수들은 그렇게나 강했다.

가볍게 말해 초보자 구역에 있어서는 안 될 수준 높은,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덩치부터가 월등한 녀석들이 무장기까지 두르자 고블린들이 무리를 이루어도 감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귀화병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레텔 정글에서 언데드로 일으킨 맹수들 중 '일부'만을 꺼냈음에도 이렇게나 압도적이다.

키이이……!

그렇게 언데드를 부려 고블린 무리를 유린하는 도령을 언덕 위에서 은밀하게 노린 고블린 궁수가 있었으나.

퍼억!

그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도령의 시선이 닿는 순간 미간이 꿰뚫려 바닥으로 낙하했으니 도령이 쏘아낸 마나의 화살이었다.

폭렬시까지도 필요없었다.

그저 간단하게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을 쏘아내는 것만으로도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는 것은.

퍼퍼퍼퍽!

몇 마리나 되는 고블린 궁수가 그렇게 역으로 저격을 당해 후두둑 떨어져 내리니 감히 도령을 노리기 위해 대가리를 내미는 놈이 없어졌다.

'허어…….'

그것을 지켜보며 호위대장은 그저 감탄했다.

지켜보며 감탄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처음 도령은 방진의 을 구역을 맡겠다 했었다.

그러니까 우측 구역만을 맡겠다 했었고 그것만 해 주었어도 놀라운 활약이었을 텐데.

캬야아아아!!

우오오오오!!

도령이 부리는 언데드들은 우측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고블린의 대군 전체를 유린하고 있었다.

짐을 지켜야 해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어야 할 상단의 호위대는 그래서 떠밀리듯 굴러온 고블린들만을 처리하면 될 정도로 여유가 생겼으니 호위대장까지도 주변을 살피며 감탄할 여유가 있었던 거다.

솔직히 무시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지구의 인간. 그것도 별볼일 없는 마을의 초보 모험가가 해 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냉정히 말해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한데 그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

거대한 언데드를 부려 대군을 유린하고 마법으로 저격하는 그 모습은 비록 고위 지역에는 통하지 않겠으나 이곳에서만큼은 틀림없이 귀족이라 불리는 네크로맨서 그 자체였다.

그 귀족 네크로맨서 덕분에 전선은 짐을 지키기 위한 얇은 방어선이 아닌 저편까지 밀려가 있었으니 호위대장은 판단했다.

"을진과 병진이 방진을 새로 구축한다. 나를 포함한 갑진은 돌진해서 놈들을 소탕한다!"

"예! 대형!"

짐을 지키기 위해 웅크리고 있던 무인들 중 특히나 실력이 뛰어났던 호위대장을 포함한 이들이 공세로 전환하였으니 도령의 언데드가 날뛰는 반대편에서 고블린들을 베기 시작했다.

스각!

도령이 보기에야 깊이가 얕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기 어려워 보이는 무공이었지만 평범하게 고블린들을 압도하기엔 차고 넘쳤으니 놀랍게도.

황금상회의 상단은 수백의 고블린 무리와 조우하였으나 단 한 명의 네크로맨서의 활약 덕분에 어떠한 피해도 없이 놈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

* * * *

"이야! 소형제! 정말 놀랍구먼!"

"하하. 감사합니다."

고블린을 모두 토벌한 상단은 즉시 뒷정리에 돌입했다.

놈들이 떨어뜨린 것들 중 쓸 만한 것들을 추려 챙기고 이빨, 가죽 등도 상태가 좋은 것들만 따로 손질하여 챙겼다.

비록 하급 중에서도 하급 취급인 고블린이라지만 그 수가 수백 정도 되면 이렇게 챙기는 부산물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입이 된다.

계약에 따라 이것은 상단이 아닌 모험가 개인의 수입이 되는데 그 부수입 중 절반을 단독으로 챙기게 된, 그만큼의 눈부신 활약을 한 도령의 주위로 호위대의 사람들이 몰려 칭찬일색이다.

정리가 끝나고 자리를 옮겨 가지게 된 휴식 시간에 그렇게 흥을 내며 도령을 칭찬할 정도로 도령의 활약은 대단했다.

도령이 아니었으면 부수입이 문제가 아니라 호위 성공 수당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요 손해를 본 물건값은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배상하지 않았겠지만 이 업계에서 특히나 중요한 신용에도 먹칠을 했을 테니 칭찬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나이에 벌써 그 정도 경지의 네크로맨서라니. 앞날이 아주 눈부시구먼, 눈부셔!"

도령은 그렇게 날아드는 칭찬을 마주하여 웃는 얼굴로 능숙하게 받는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 덕분에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으니 여러분들의 덕도 크지 않을까요?"

"하하!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구먼!"

일반적으로 지구 출신의 인간이 은연중 무시당하는 게 일상인 시대에 그들의 도령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반대였으니 이는 도령이 실력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지구 출신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 있다는 악평이 도는 건 지구 출신의 모험가들로서는 썩 기분 좋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런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모듈이란 것이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을 여럿 건너뛰게 만드는 탓인데 도령은 거기에 해당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증명하였으니 특히나 힘을 숭상하게 된 무림인들은 도령을 단번에 인정한 거다.

"각성한지 얼마 안 됐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근데 각성한 모듈부터가 보통이 아니라더니……."

"유니온이랑도 연관돼 있다는 거 같던데. 그냥 루키가 아니라는 소문이 맞나 봐."

그리고 주변에서 은근히 시선을 보내는 이들 또한 수군거리며 도령이 보통이 아니라 하고 있으니 상단의 특성상, 상단의 사람들과 여기저기를 다니는 호위대 무인들을 통하여 이 소문은 제법 빠르게 퍼져 나갈 것 같았고 도령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서 소문이 퍼지며 이름값이 오르는 건 도령이 어느 정도 의도한 바였고 그를 위해 이 정도까지 힘을 쓴 것이었으니 이렇게 오르는 이름값이 도령이 하고자 하는 일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해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이름값은 많은 것을 편하게 해 주었고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위기 상황에서의 활약으로 도령이 화제가 되던 중이었다.

"……."

슥.

감각이 좋은 이들부터 순서대로 입을 다물고 무기를 다시 손에 쥐었으니 가까워지는 기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몬스터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라는 걸 대놓고 기척을 퍼뜨려 알리고 있었으며 진하게 풍겨오는 고블린의 피냄새까지 더하여 적이 아니란 걸 알리는 듯하다.

하지만 탑을 모험함에 있어 몬스터만이 아닌 만나는 사람 또한 경계를 놓아서는 안 되었으니 호위대는 그 철칙을 소홀히 하지 않고서 경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의 흥청이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가운데 저편. 시선과 감각이 집중된 수풀을 헤치고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음?"

호위대장의 당겨졌던 긴장이 스윽. 조금 느슨해졌다.

"아. 호 무사님이셨군요."

그리고 저편에서 나타난 검고 긴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고블린의 피가 묻은 무복을 두르고 있음에도 단아한 분위기를 가릴 수 없는 미녀 또한 안도하는 기색이었으니 둘은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또 인연이라 해야 할지.

'음…….'

공교롭게도 그녀는 도령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49

"그러셨군요. 주 방주께서도 그것들의 습격을 받으셨던 거군요."

"예. 본래는 여기까지 올 일이 아니었습니다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조우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풀어졌다.

그리고 함께 식사까지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마주했던 무리가 이번 상단 호위대의 대장, 호 무사와 안면을 튼 사이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흑안방(黑安幇).

탑의 계층 중 하나가 된 무림의 신강 지역에 뿌리를 둔 쉽게 말하자면 무림의 종합 상조 회사 같은 문파다.

장례와 관련된 전반적인 부분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관련한 물품을 파는 상점도 운영한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회사 같지만 지구와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있으니 무력(武力)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무림에서 무언가를 운영하는 집단은 어딘가에 기대는 게 아닌 이상 무조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킬 무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이에 따라 흑안방도 작은 조직이라고 하나 무림 문파로서의 구색을 갖추고 있으니 방주인 주련화 또한 사장이면서 동시에 방주였다.

호 무사는 신강 출신으로 동생들과 함께 주로 신강에서 활동하였는데 흑안방의 의뢰도 여러 번 수행한 적이 있었고 방주인 주련화와도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금방 경계를 풀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 이유도 들었다.

고블린. 상단이 마주했던 만큼의 대규모는 아니었으나 거기서 떨어져 나간 적지 않은 수의 무리와 흑안방 사람들이 조우하였으니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본래 계획했던 경로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소규모 문파라 하나 방주까지 바깥에 나오게 된 이유도 명료하였으니.

"이 시기가 되면 항상 그랬지만 정신없이 바빠지게 된답니다."

"그렇겠네요."

도령과 마주 앉아 빙긋 웃는 그녀의 말대로 천마제였다.

천마제(天魔祭).

무림을 대표하는 집단인 천마신교의 가장 중요한 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행사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 관련한 업계 전체가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흑안방 또한 영세하다지만 관련한 업체로 계약에 따라 공급해야 할 물량이 있었고 워낙 바빠 방주까지도 현장에 나와야 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옅게 웃으며 말하는 흑안방주 주련화에게서는 나이보다 깊은 지혜와 연륜이 묻어난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무림인들이 겉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30대 중반 정도일 것이다.

무림에는 조혼(早婚)이 일반적이니 도령 정도 나이의 아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아마도 결혼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사람을 어른으로 성장케 한다는 아이가 없음에도 어쩐지, 사업가로서의 느낌까지 더하여 '어른'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녀였다.

-이렇게 된 것, 혹시 함께 귀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흑안방은 자연스럽게 상단에 합류하여 함께 가게 되었다.

수상한 집단이 아닌 믿을 수 있는 무력 집단의 합류는 탑을 나아감에 있어 언제나 환영이었으니까.

그리고 흑안방은. 주련화 방주는 자연스럽게 도령의 근처에서 함께 가게 되었으니 도령이 맡은 물건들의 대부분이 다름 아닌 흑안방으로 갈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또, 아무래도 이 안에서는 도령과 가장 접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네크로맨시는 대우받는 힘이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꺼려지는 힘으로 통했다.

흑안방 또한 시체팔이니 어쩌니하는 소리가 없지는 않았으니 아무래도 이쪽 계통은 초면이라 해도 어떤 유대감 같은 게 있는 거다.

그래서 도령과 주련화는 초면이었으나 금방 담소를 나눌 수 있었고.

"벌써부터 대단한 경지의 사령술사셨군요."

"그렇다니까요, 누님. 소협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넉살 좋고 입담도 좋은, 호 무사의 동생 중 한 명이 슬쩍 다가와 아까의 이야기를 자신의 무용담처럼 맛깔나게 늘어놓으니 주련화가 추임새를 넣어 주며 감탄한다.

능숙하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했지만 감탄만큼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

여기에 도령은 은근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쳐가며 살피는 그녀의 시선을 모른 체 했다.

뭐 그런 느낌으로.

이후로는 아무런 사건없이 무난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마침내 도착했다.

일렁이며 합쳐지는 차원의 경계.

그것을 넘는 순간 무림이 펼쳐졌다.

* * * *

일렁이던, 마치 커튼 같던 차원의 경계를 넘은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단순히 다르다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세월을 쌓아온 전혀 다른 문명이 펼쳐졌으니 똑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란 걸 오감으로 느끼게 만든다.

다른 양식의 건물, 다른 양식의 복장, 미묘하게 다른 외모까지.

그리고 지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밀도의 자연지기(自然之氣)까지.

도령은 평범하게 한 걸음 내딛는 것으로 다른 차원으로 계층 이동을 한 것이었다.

따져보면 차원의 이동이란 것을 이렇게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 할 수 있다는 게 참 말이 되지 않는 일 같지만 이 탑에서는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렇게 차원 이동이 당연시되는 세계였기에.

나아가며 스쳐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면 청바지 등의 차원을 넘을 수 있었던 지구의 문물이 곳곳에 섞여 있으니 낯섦 속에 익숙함으로 어쩐지 친근함이 느껴지는 이곳이 바로 탑의 무림이었다.

지구도 그렇지만 무림 또한 외곽일수록 타차원의 문명이 조금 더 짙게 나타나곤 했다.

[나중엔 구결도 무선 이어폰 끼고 들을지 모르지.]

[무림 여협들이 하이힐 무공을 쓰는 걸 보고 싶구나…….]

……멸망 이전의 문명을 자세히 아는 이들은 그런 소릴 하곤 했는데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군데군데 지구의 문명이 보이는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니 곧 이곳의 황금상회 지부에 도착하게 되었다.

도령네 마을의 지부와 마찬가지로 황금이란 이름을 연상케하는 고급스런, 과하지 않아 오히려 더 기품이 느껴지는 지부는 마을의 한적한 외곽에 자리잡으로써 아주 넓은 마당을 품고 있었으니 가져온 모든 물건을 안에 들이고도 공간이 남았다.

"오오, 어서들 오시오. 먼길 고생 많았소!"

지부장은 이곳 출신 사람으로 서글서글하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주 방주께서도 고생 하셨구려."

그 좋은 성격으로 이곳 유지이면서 마당발이기도 한 그는 주련화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아는 척을 하고선 바쁘게 움직였다.

"푹 쉬셔야 하니 내 빨리 일을 처리해 보리다!"

말만으로도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그는 그러나 꼼꼼한 사람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감독하며 지구에서 온 물건들을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꼼꼼하게 확인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정말로 일처리가 빨랐으니 유능한 사람이란 생각이 드는 도령이었다.

"음! 완벽하군! 정말로 수고들 하셨소!"

확인을 끝낸 지부장은 즉시 임금을 지급하였고 호위대장으로 일했던 호 무사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감사하오."

"하하! 가는 길도 잘 부탁드리겠소!"

이번 호위 임무는 왕복이었다.

가져온 물건을 여기 두고 또 여기서 지구로 보내는 물건을 호위하며 가는 것이다.

그 사이 며칠은 이곳 지부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머물며 보내면 되는데 호 무사와 그 동생들은 한 잔 하러 갈 생각에 기분 좋은 얼굴들이다.

다만 도령은 그들과 따로 행동할 예정이었으니 돌아가는 상단에는 합류하지 않는다.

도령의 시선이 관리를 맡았던, 마차에 그대로 실려 있는 장례와 관련된 물품의 앞에 마주하고 있는 지부장과 주련화에게로 향했다.

개중에서도 주련화에게 시선이 머무니 도령이 이곳에 온 이유와 연결되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마침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처럼 도령과 주련화의 시선이 맞았으니 그녀가 다가왔다.

"소협. 지부장님과 이야기 중 들었는데 혹시 시간을 좀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

운이 좋군.

그런 말이 떠오르는 흐름이었다.

자연스럽게 주련화와 연결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주련화가 먼저 다가왔다.

도령은 상단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무림에서 얼마간 머물 예정이었다.

지부장과 이야기하다 그것을 알게 된 주련화가 다가와서는 시간을 좀 내어 달라 했으니 도령으로선 대환영이었고 함께 흑안방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걸 내어 주셨는데 맞지 않을리가요. 좋습니다."

마주하고 앉아 차를 마신다.

그렇게 찻잔의 온기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고 주련화가 본론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천마제로 인해 저희 방 또한 손이 많이 바쁜 상황입니다."

"이런 중에 거래처 중 한 곳에 문제가 생겨 공급에 차질이 있었고 저희로서도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천마제를 경험했던 만큼 아무리 바쁘다 해도 납품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영세 업체로서 어쩔 수 없이 주변의 환경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니 거래처의 문제가 흑안방에까지 확산되고 만 것이었다.

앞서는 단순히 바쁜 것이라 말했지만 실제로는 거래처에 문제가 있었던 걸 굳이 말하지 않았던 거다.

"호 무사께서는 물론이고 다른 분들께서도 소협의 실력이 군계일학이라 하시니 혹여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뢰였다.

모험가에게 하는 의뢰.

"저희가 납품해야 할 물건의 원재료가 되는 것이 일백화입니다."

일백화(日白花).

무림의 장례에 쓰이는 물품들에 특정한 향을 내기 위해 쓰이는 재료로 장례 도구라고 하면 대부분은 이 향이 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만큼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도령은 이 부분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러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니 주련화도 읽어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채취를 위해선 그 자리에서 가공할 필요가 있어서 일손이 부족함에도 마땅한 분을 찾을 수 없어 고민이 많던 차였습니다."

큰방울꽃과 비슷하게 일백화도 채취 과정에서 가공을 해 주어야만 재료로 쓸 수 있었는데 관련 지식과 기술을 굳이 익히는 모험가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 많지 않은 모험가들이 지금은 모두 바빠 여유가 없고 말이다.

그러던 차에 도령이었다.

"혹여, 괜찮으시다면 일백화의 채취를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음…….'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괜찮은 건가?

도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련화.

작은 문파인 흑안방의 방주.

그러나 사실 그 정체는 천마신교의 신녀와 이어져 있었으니.

"예. 힘 닿는 만큼 돕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굴러들어온 행운을 찰 이유는 없었다.

* * * *

제이각(祭理閣).

신녀와 함께 천마신교를 양분하는, 그리고 현재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지배하고 있는 제사장이 머무는 전각에 특별한 이가 방문하였다.

장인이 한땀 한땀 전통을 짜올려 완성한 무복(巫服)을 갖춰 입은 무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에 들어서는 그녀는 제사장과 함께 천마신교를 양분하는 바로 그 신녀였다.

과거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관계가 멀어지다 당대에 이르러선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제사장과 신녀.

그렇기에 정말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제이각에 발을 들이지 않는 신녀였는데 무슨 일인지 제사장 쪽에서 방문 요청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신녀는 그 방문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으니.

"어서오시오, 신녀."

제사장이 몇 겹의 거죽을 쓴 듯한 얼굴로 신녀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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