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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제사장과 신녀란 천마를 가장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었다.

깊고 거친 길을 가장 앞에서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자 천마.

그 가장 뒤에서 천마를 따르는 이들을 인도하였던 것이 제사장과 신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사장과 신녀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커다란 사명을 다하는 관계였거늘 무림의 멸망 이후 천마의 자리가 견디기 어려운 공백인 채 세월이 흐르며 점점 더 멀어져갔고 당대에는 아예 대립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견해의 차이였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천마의 공백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

한데 그것이 실질적으로 천마신교를 운영하는 입장이던 제사장 일파가 실권을 잡으면서 비어 있던 공백을 아예 천마가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 들었으니 완전히 대립하게 되었는데 신녀 일파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이고 말았다.

천마신교를 운영하며 실권을 쥔 제사장 일파와 달리 신녀 일파는 다만 상징성이 전부였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제한돼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점점 힘의 추가 기울어 버렸으니 제사장이 앞마당인 제이각으로 신녀를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천마신교가 종교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뿌리였기에 가장 중요한 '상징성'이 신녀 일파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 단순한 무림 문파였다면 신녀는 이미 없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종교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점점 더 옅어지고 있는 천마신교에서는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신녀 일파가 축출당할 미래가 확정돼 있었다.

그런 시기에 무녀들을 대동한 채 제이각에 들어선 신녀는 면사(面紗)로 눈을 제외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그렇게 얼굴을 가린 신녀의 본모습을 제사장조차 본 적이 없었으니 모든 것이 제사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자신의 면전에 수하들을 대동하고서 들어온 것부터 시작하여 얼굴까지 가리다니.

이것은 아직 신녀 일파를 완전히 억누르지 못한. 그 권위와 상징성만큼은 아직 침범하지 못하는 제사장 일파의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니 심기가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구려."

비대한 몸의 두꺼운 얼굴 거죽으로 그런 심기를 가린 채 제사장은 웃는 낯으로 말한다.

그 웃는 낯이, 얼굴을 보니 좋다는 말까지 결코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신녀 또한 눈동자에 티내지 않고 답했다.

"예, 제사장."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낭비로 느껴지는 대화였다.

"이렇게, 이토록 위대한 우리 천마신교의 은혜가 요즘들어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오. 그러니 신녀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오."

"어떤 것을 말씀이십니까."

"올해의 천마제. 더욱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어떻겠소?"

"……."

계속되는 헛소리에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려는 차 그것을 확 잡아당기는 듯한 소리였다.

"무림을 대표하는 것이 천마제 아니겠소. 그것을 더 성대하게 치름으로써 우리 교의 은혜가 더 널리 퍼질 수 있지 않겠소?"

무어라 답해야 할지 순간 판단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제사장은 말을 이었고 더더욱 신녀는 판단이 어려워졌다.

천마제를 더 성대하게 하자.

이것이 결코 제사장이 할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자신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는 걸 신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 끔찍한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신녀가 천마신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천마신교가 천마신교일 수 있게 하는 것. 무림을 대표하는 집단으로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러한 상징성 때문이니까.

그런 신녀의 상징성을 공고히 하고 널리 퍼뜨리는 것이 천마제였다.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할 수만 있다면 없애고 싶은데 천마신교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꼴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이 천마제였다.

어쩔 수 없이 천마제는 유지하되 할 수 있는 한 축소하고 신녀의 위신에 흠집을 내는 쪽으로 온갖 수작을 부리던 것이 제사장이었는데.

그게 수십 년째인데 갑자기 천마제를 크게 하자는 소리를 하니 신녀를 보좌하는 경험 많은 무녀들조차 이게 도대체 무슨 헛소린가 싶은 표정을 다 감추지 못할 지경이었다.

"허허.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교를 위한 일 아니겠소. 내 최대한 협조하고 지원하리다!"

하지만 대놓고 그게 무슨 수작이냐고 물어보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제사장이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서류까지 작성하자고 하니 신녀 일파는 당장 거절하지 못하고 천마제의 규모를 더 키우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보중하시오. 신녀가 우리 교의 상징 아니겠소."

"……."

그렇게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혼란스러운 신녀 일파를 보내고서 제사장은.

주욱-

마치 괴물처럼 입을 주욱 늘리며 웃었으니 그 뒤로 검고 끈적한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르륵.

그것은 결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무림의 멸망을 가져온 가장 증오스러운 것이었으니 마기(魔氣).

그르르르-

그 마기 안에서 짐승이 낮고 소름끼치는 잇소리를 내었으니 지옥견(地獄犬)의 울음소리였고.

"크흐흐흐……."

제사장은 지옥견이 신녀를 보았음에 더없이 만족하며 괴물의 얼굴로 웃었다.

* * * *

거처인 도원각(到願閣)으로 돌아온 신녀는 따르는 이들과 며칠을 고민하였으나 제사장의 의도를 짚어낼 수 없었다.

꿍꿍이가 있음이 확실한데 그것을 알 수 없으니 진퇴양난의 답답한 상황이 되었다.

한데 그러한 시기에 신녀는 하나둘. 권위와 상징, 의무가 되는 법복(法服)을 내려 놓았으니 말했고.

"부탁하마."

신녀를 모시는 무녀들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 틀림없이 수행하겠나이다."

* * * *

[저것은 천마가 아니다.]

[저것을 천마라 하는 신녀는 더 이상 신녀가 아닌 마녀이니 찢어 죽여야만 한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 마침내 터져 나온 천마신교에서의 비극.

그 비극의 시기에 도령은 특히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신녀를 마녀라 매도하고 팔아넘긴 마교도의 세력에 한줌 밖에 남지 않았던 신녀의 세력은 그러나 격렬히 저항하였으니 그 안에 있었다.

[내 죽어서라도 너희를 붙잡을 것이다. 죽어 진창이 된 몸으로 너희의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을 것이니 죽어서도 너희는 나를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하나같이 목숨을 내던진 무녀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귀기(鬼氣)가 서려 있던 그녀는 무공이 그리 특출나지 않았음에도 마교도들마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였다.

주련화.

그 무녀의 이름이었으니 도령이 무림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흑안방 방주 주련화가 바로 그녀다.

틀림없이 무녀인 그녀가 천마신교 내 신녀의 거처인 도원각에서 신녀를 모시지 않고 이곳에, 이 시기에 있다는 걸 도령은 알고 있었다.

막지 못한. 이미 너무 늦어 막을 수 없었던 비극 후.

도령은 남은 천마신교도들의 사실상 교주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천마에게 천마신공을 사사한 후계자요 천마와 소통하며 천마의 뜻을 전달할 수 있고 심지어 현현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신녀의 역할을 홀로 수행할 수 있었으니 도령 외에 그 역할을 할 자가 없었다.

그런 역할을 맡았기에 천마신교 내의 많은 기록 또한 열람할 수 있었으니 신녀를 모시는 무녀 중 한 명이었던. 비극의 때에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주련화에 관한 문서도 보았고 바로 지금.

비극을 막기 위해 신녀와 연결되는 길로 주련화 그녀를 찾은 것이다.

그녀라면 믿을 수 있다.

신녀에 대한 마음이 확실하고 심지어 신녀를 가장 곁에서 모신다는 무녀의 신분으로 천마신교 바깥에 있다.

그녀를 통하면 신녀에 닿을 수 있다.

처음 계획은 무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쌓고서 자연스럽게 흑안방의 의뢰를 받는 방향이었다.

천마제가 가까운 때 일손이 부족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비록 신분의 위장을 위해 세운 문파라고 하지만 흑안방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만 했으니 외부에 의뢰를 맡기는 건 또한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몇 건 뛰어난 실력으로 일처리를 하면 어렵지 않게 닿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렇게 돌아갈 것도 없이 주련화와 만났고 이렇게 그녀 쪽에서 먼저 의뢰를 해 왔으니 많은 수고와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이제 다음은 흑안방과 더욱 가까워져 천마신교 내에 들어가는 것이다.

외부인. 그것도 외부 문파의 고용된 입장에서 제대로 된 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외부의 영세한 업체이기에 복잡한 역학 관계를 따지지 않고 맡길 수 있는 일을 맡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상조 회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당연히 그와 관련된 곳이었고 그렇게 관련된 곳이라면.

도령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 계획을 위한 첫 시작이 일백화 채취다.

재료가 있는 곳은 사기. 그러니까 죽음의 기운이 강한 던전이다.

평범하게 자연으로 돌아간 사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땅에서도 채취할 수 있지만 그래서는 폭증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니 이 시기엔 사기가 그득하여 그만큼 일백화가 많이 피는 던전을 찾게 된다.

혼자 가면 좋겠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하고 동행하는 이가 생겼다.

-저희 방에 머물고 계신 식객이 계십니다. 실력은 확실한 분이시니 함께 가시면 더 많은 성과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련화의 입장에서는 배려였고 또 상식적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던전에는 혼자 가는 것보다 여럿이 가는 게 더 낫고 특히나 도령은 이번이 처음으로 무림에 온 것 아닌가.

사람을 붙여주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고 그것을 거절할 명분이 도령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별채에서 만났으니.

"하하하! 반갑소! 나는 주호문이라고 하오!"

호탕하게. 아니 솔직히 말해 호탕한 척 웃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공자였다.

사슴 같은 눈망울에 고운 목선과 어깨선.

최대한 하하하 웃고 있지만 남자답다기보다는 그야말로 가녀린 미소년 그 자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고 피부는 희니 무인의 모습도 아니었고 어디 부잣집에서 고생 하나 안 하고 자란 도련님이 무림인 흉내를 내면 이럴까 싶다.

그 옆에는 그런 철부지 공자님을 걱정해 집안에서 붙여 준 호위무사로 보이는 여무사가 있었으니 이쪽도 흰 피부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미녀이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어서 실력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게.

누가 보아도 전혀 던전에서의 파밍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쓸데없이 시선을 모으는 풍류미공자와 미녀 호위무사의 조합을 마주한 도령은 드물게도 당황하여 바로 반응하지 못했으니 보였기 때문이다.

도령(道靈).

영혼을 인도하기 위하여 영혼을 볼 수 있고 영혼과 접할 수 있는 도령의 앞에서는 그렇기에 변장이 통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성별을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변장이라 하여도 말이다.

도령은 생각했다.

'…신녀가 왜 여기서 나오지?'

51

도령은 의뢰 수행을 위한, 그러니까 일백화를 채취할 던전 안에서 쓸 물품들을 사기 위해 종합 상점가로 향했다.

그리고.

"호오. 호오."

도령의 뒤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전혀 숨기지 않는 풍류 공자가 있었다.

선이 굵은 미남이 아닌 순정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꽃미소년과 꽃미남의 중간 즈음 되는 외모의 공자가 고급 비단으로 짜낸 옷을 두르고 이런 건 처음 봤다는 얼굴로 상점가의 여기저기를 살피니 무지막지하게 시선을 모은다.

'아! 저건 내가 알려줘야 해!'

그런 시선을 보내며 걸음을 떼지 못하는 처자들이 그득했는데 실제로 다가가진 못했다.

하아아악!

마치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내고 털과 꼬리를 잔뜩 세운 듯 경계하는 미녀 호위무사가 한 걸음 뒤에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령이 보기엔 하얀 털이 풍성한 랙돌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 기세가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 같았으니 감히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풍류 공자가 아닌 냉미녀 호위무사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들까지도 말이다.

그런 둘 때문에 전혀 관심이 미치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된 도령이 파티를 짜게 된 둘을 이끌고서 주련화가 소개해 준 종합 상점에 들어섰다.

모험가에게 필요한 것들을 종류별로 잘 분류하여 깨끗하고 밝은 곳에 전시해 두었으니 과연 주련화가 소개해 줄 만한 곳이라 생각하며 도령이 우선 식량 코너로 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선호하시는 게 있습니까."

그러면서 보편적으로 챙기게 되는 건량, 말린 식량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풍류 공자가 놀라며 묻는다.

"아니, 저런 걸 먹소?"

"……."

저게 사람이 먹는 건가?

그런 시선으로 물으니 도령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풍류 공자가 이어 말하니.

"무릇 일하는 자라면 따듯한 밥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니오?"

"……."

골 때리는 놈이 왔네.

상인이 고개를 슬쩍 틀어 안 보이는 각도에서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따듯한 밥을 먹으면 좋기야 할 텐데 실상은 좀 어렵습니다, 주 형."

"어째서 그렇소, 김 형."

풍류 공자 주호문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얼굴로 물었고 도령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느긋하게 머물며 밥을 해 먹을 환경이 잘 되질 않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운반하는 것도 부담이고 오염 방지 처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던전이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다.

제아무리 익숙하고 만만한 곳이라 해도 아차하는 순간 죽음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란 말이다.

그런 곳에서 느긋하게 요리를 해 밥을 먹을 만큼의 여유를 가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그 요리해 먹을 재료를 요리할 수 있는 상태로 운반, 보관하는 건 어지간한 모험가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고 말이다.

"…제가 운반하겠습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홍 무사. 스스로를 그렇게 말한 호위무사가 결코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말했으나.

"호위무사의 본분은 주 형을 지키는 것일 텐데 홍 무사님. 식량을 지키기 위해 본분을 소홀히하는 건 본말전도가 아닐까요?"

"……."

도령의 논리에 말문이 터억 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식량의 구매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상인이 나섰다.

도령에게 당신이 고생이 많다는 시선을 보내고서 해결책을 하나 내놓았으니 그것은.

"전투식량이라 한답니다."

지구에서 전해진 '신문물' 전투식량이었다.

"이것은 보관도 용이하고 조리도 간편하니 이렇게,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따듯하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오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단 말이오!"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일정 시간 열을 내어 포장 내부의 음식을 데우는, 그야말로 신문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투 식량에 주호문이 감탄했고 뒤의 호위무사 또한 '이 정도라면!'이라는 시선을 보낸다.

"좋소! 이걸로 합시다!"

"그…… 아닙니다."

상인이 하려던 말은 비쌀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였다.

하지만 풍류공자 주호문은 누가 보아도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들내미였으니 굳이 가격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었고 실제로 주호문은 아무렇지 않게 은자를 꺼내 값을 치렀다.

"파운드 케이크? 음. 내 언젠가 듣기로 밥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더니 이런 것이었군."

"……."

그렇게 식량을 구매하고 나니 다음은 필연적으로 익숙해져야만 하는 노숙을 위한 물품이었다.

여기서는 홍 무사가 더욱 경악하여 소리쳤으니.

"뭐라!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한 장소에서 잔단 말인가!"

"……."

상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리고 도령이 말했으니.

"음. 그렇군요. 주 형과 나는 사내이니 괜찮겠지만 홍 무사께서는 어렵겠군요."

"……."

홍 무사의 두 눈이 사정없이, 미친듯이 떨리고 말았다.

그래. 지금 파티의 구성은 사내 둘과 여자 하나였던 것이다.

홍 무사는 어떻게 말을 주워담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식은땀을 줄줄 흘렸는데, 여기서 또 상인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요즘은 개인용 막사란 것이 잘 나옵니다. 이것도 지구에서 온 신문물인데 완타치 텐트……라고 합니다."

"허어!"

상인이 시범을 보인다고 잘 접혀 있던 것을 툭 던지니 놀랍게도 허공에서 크게 부풀며 한 사람이 충분히 잘 수 있는 텐트가 됐다.

풍류 공자 주호문이 거기에 또 크게 감탄을 하며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고 세 개의 텐트를 구매했다.

'온실 속 도련님이 씀씀이는 시원시원하니 좋구먼!'

상인은 쭉쭉 올라가는 매상에 주호문에 대한 호감도가 수직 상승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의류 매대로 이동했으니 주호문이 묻는다.

"음? 옷은 왜 보는 거요, 김 형."

"하루이틀 머무는 게 아니니까요. 갈아입을 옷이 있는 게 좋습니다."

"아! 그렇군. 옷은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었지."

"……."

"……."

* * * *

유능한 상인과 돈 많은 풍류 공자 주호문, 그리고 홍 무사와 함께 한 쇼핑은 어떻게든 잘 끝이 났다.

간단한 의뢰 하나 수행하기 위해 준비한 것치곤 너무 호화로워 배보다 배꼽이 몇 배나 더 커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 쇼핑에 평생 처음 경험하는 것들로 감정의 샤워를 한 주호문은.

"허어. 모험가들이 이렇게나 불우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었을 줄은 내 몰랐소."

상인이 들었다면 또 눈을 질끈 감았을 소리를 하였으니 도령은 빙긋 웃고 말았다.

참 세상 물정 모르고 모험에는 일절 도움이 안 될 철부지 도련님 같은 이 주호문이 사실은. 그가 아닌 '그녀'가 바로 신녀였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태생적 차이로 인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손짓 하나 하나까지 그녀는 완벽하게 남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또한 신체적 특징인 목젖부터 시작하여 몸의 선까지 완벽하게 분장하였고 어쩔 수 없는 손은 멋드러진 장갑까지 꼈으니 길을 거닐며 수많은 시선을 모았음에도 그녀가 남장했다는 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완벽한 남장이 도령에게는 시작부터 간파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도령은 영혼을 접하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본질인 영혼은 분장할 수가 없었으니 보자마자 안 것이다.

이 부잣집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연기하는 것이 놀랍게도 신녀라는 것을.

다만 그녀가 무림을 대표하는, 인류 연합의 대표보다 고귀하다는 신녀이기 때문에 웃은 건 아니었다.

도령이 기억하는. 비극의 끝에서야 마주할 수 있었던 신녀와 지금의 신녀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기억 속 신녀는 말했다.

[나의 앞에 나타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에게 나의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님을. 틀림없이 실존하는 것이었음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인. 그리고 후예님. 만나뵐 수 있어서 저는 이 이상 없을 만큼 기쁩니다.]

[그러니, 미안하다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너무 늦은 도령에게 감사하다고. 미안하다 말하지 말아 달라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피폐해진 채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어 바라던 곳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너무 늦어 결코 바라던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비춘, 도달하지 못할 곳을 비추는 빛을 마주하여 오히려 빛보다 찬란하게 미소지었었다.

[나를 위해 슬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의 신녀를 기억하는 도령의 눈에 지금의 신녀가 비친다.

아직 자신의 방 안이 세상의 전부이던 어린 시절부터 신녀가 되어야 했고 너무 어린 나이에 그 자리의 무게를 알아 버린 소녀는 그러나 맑은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전혀 모르던 세상을 반짝이는 눈으로 담으며,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몰랐던 것을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물었고 알게 된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니 도령은. 너무 늦어 버린 때에 빛이 다 바래 다시는 그 색을 채우지 못할 만큼 피폐했던 때에 오히려 감사하다 말했던 신녀를 기억하는 도령은 그래서 미소짓는다.

천마이면서 스승이었던 영혼.

그 영혼이 경험해야만 했던 비극 중 하나였던 그녀가 지금 눈앞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 도령은 다시금 생각한다.

이번 삶에서는.

이 영혼이 비극에 이르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 * * *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를 마친 도령과 주호문, 홍 무사. 다시 말하면 도령과 신녀, 신녀를 호위하기 위해 또 무사로 분장한 무녀 중 한 명까지 세 명의 파티가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던전으로 향했다.

주호문이 신녀라는 걸 알고 또 주련화 또한 신녀를 모시는 무녀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아니 두 사람 사이 시선의 교환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도령은 모른 척해 주었다.

목적지인 던전까지 가는 길은 무림을 넘어 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던전에 도착할 때까지 몬스터를 마주할 일은 없었으니 길이 다 닦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백화가 나고 자라는 던전은 좋은 파밍처였으니 일부러 클로즈를 하지 않고 관련 문파들이 꾸준히 관리를 하는 것이다.

이 관련 문파들 중 하나가 흑안방이었고 도령과 주호문, 홍 무사는 흑안방의 표식을 하고 있었기에 가는 길에 마주한 이곳을 관리하는 험상궂은 무사들과의 불필요한 마찰도 없었으니 정말로 아무 일 없이 던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하! 나만 믿으시오. 이래봬도 실력에는 자신이 있다오, 김 형."

"네. 든든하네요."

도령은 그 던전의 입구인 차원의 일렁임 앞에서 긴장과 기대를 다 감추지 못해 들뜬 목소리로 호언장담하는 주호문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왜. 어째서 그녀가 '주호문'으로 변장하여서까지 도령의 앞에 나타난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앞서 주련화가 상단의 앞에 나타난 것까지도 어쩌면 전부가 우연은 아닐 거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기묘할 정도로 일이 잘 풀렸던 모든 것이 신녀가 도령과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 의도한 것이었다고.

도령은 신녀와 마주한 순간 다 알게 되었다.

"갑시다! 김 형!"

"네. 주 형."

반짝이는 눈에 한껏 기대를 담은 그녀가 즐거웠으면 하여 도령은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으니 생각한다.

왜 여기에 왔냐고.

'언제 물어볼까?'

52

던전은 탑의 안에서 보존되지 못한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 여러가지 이유와 영향으로 뒤틀리고 일그러지며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뒤틀리고 일그러지며 탄생하였으니 던전은 일반적으로 지성체의 입장에서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고 보편적으로 몬스터가 창궐하게 된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아가 클로즈해야 하는 이유였는데, 일반적으로는 그래야 하지만 모든 던전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연과 하늘이 그렇듯 던전 또한 다만 그렇게 존재할 뿐이니 인간의 선악을 구분하지 않았고 인간에게 이로운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 도령이 주호문, 홍 무사와 함께 들어선 던전이 바로 그렇게 인간에게 이롭게 된 던전이었다.

푸욱.

"조심하시오, 김 형! 이 앞은 늪이니."

"예, 주 형."

도령과 주호문, 홍 무사가 나아가는 길은 일견 풀이 무성하게 자란 땅 같았지만 사실은 군데군데가 푹 꺼지는 늪지대였다.

그리고 그 늪을 품은 짙은 밀림이 펼쳐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녹색이 아닌 어두운 검녹색으로 물들어 있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실제로 인간에게 오로지 해로운 것들로 가득하였다.

탑에서 입장한 던전은 늪지대를 품은 밀림이었다.

이 늪이 던전에서 개체를 늘려 나가는 저급한 몬스터들을 끊임없이 삼키니 그 시체가 다 소화되지 못하고 부패하고 썩어 인간에게 부정적인 사기(死氣), 죽음의 기운이 점점 더 짙어졌다.

오염이 심각한 곳은 독안개가 상시 흐르며 독에 내성이 생기거나 아예 독을 품은 곤충, 식물, 동물이 배회한다.

이것을 방치하면 결국 거대한 재앙이 되어 던전에서 쏟아지니 평범하게는 클리어하고 클로즈를 시도해야 했으나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니 항상 수요가 있는 일백화 등의 재료를 채취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아가 사기가 그득한 장소는 일부 모험가들. 대표적으로 네크로맨서들에게 최고의 수련장이 되어 주었으니 '기부금'을 내고서 사용하기를 바라는 이가 줄을 섰다.

스으-

'돈 내고 들어올 만하네.'

도령이 호흡하며 사기를 흡수하면서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네크로맨서 입장에서는 영양가(?)가 풍부한 밀림.

그러니까 이곳 지역의 문파들은 힘을 합쳐 이곳. 던전 '일백림(日白林)'을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고 수익을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였다.

외부인이거나 관리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이는 돈을 내고 들어와야만 하는 던전.

도령과 주호문, 홍 무사는 그 관리 문파 중 하나인 흑안방의 일로 왔기에 그저 표식을 달고 확인을 거치는 것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우글우글.

그리고 그 단어가 마치 형상화한 듯, 조금 과장을 보태면 식물보다 사람이 더 많은 듯 던전 안에 넘쳐나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게 되었다.

"……많네요."

"으음."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지라.

폭증한 백일화 등의 수요에 따라 총동원된 이들이 일백림 안에 그득하였으니 알박기로 말이 많았던 레텔 정글조차 비할 수 없을 만큼 인구 밀도가 높았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돈 내고 들어온 네크로맨서들이 생체 정화기가 되어 사기의 밀도를 낮출 정도였다.

으레 이런 던전은 먼저 온 사람이 임자였고 흑안방은 관리 문파 중에선 힘이 약한 편이었으니 얌전히 더 깊이 들어가야만 했다.

사실, 자칫 바닥없는 수렁에 삼켜질 수 있는 늪이 산재해 있고 아무리 옅다 해도 멈출 수 없는 매순간의 호흡에 지장을 주는 사기가 그득한 밀림을 나아가는 건 힘들고 또 힘든 일이었다.

걷는 것만으로 마치 발목을 붙잡는 귀신이 있는 것처럼 체력을 앗아간다.

그런데 독기로 인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흡마저 자유롭지 않다.

스물거리며 얽혀드는 독을 품은 곤충 등에 이르러선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만 믿고 따라오시오, 김 형!"

"하하. 믿겠습니다."

주호문은. 변장한 신녀는 마치 초등학생이 전날부터 기대하여 잠을 설친 소풍을 나온 것처럼 들떠 있었으니 도령은 빙긋 웃었다.

신녀는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다만 고고한 구름 위의 소녀였지만 동시에 무림인이어서.

내공을 품은 무림인이어서 체력적인 부분은 물론이요 미미한 사기까지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독을 품은 것들. 독물(毒物) 또한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 던전에서의 것들은 감히 무림인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신녀는 그 들뜬 기분을 유지한 채 던전을 나아갈 수 있었고.

"자, 이렇게 하면 편합니다. 주 형."

"오, 그렇군! 고맙소, 김 형!"

"생생한 게 아니라 이제 지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의 꽃잎을 찾는 겁니다."

"오! 이해가 쏙쏙 되는군!"

본래 지구에서 온 도령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함께 하였음에도 도령에게 일백화 채취법에 관해 배우는 걸 전혀 신경쓰지 않고서, 그저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게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첫날밤이 되었으니 또 도령이 노숙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타닥.

"이렇게 불을 피우면 나오는 재를 아까 평탄화하며 파 둔 땅에 고루 뿌려줍니다. 그리고 다시 덮으면 이렇게. 추위와 독기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덤으로 이곳의 독물들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게 되지요."

"호오, 흥미롭구려."

열기가 올라오는, 평탄화한 땅 위에 자리를 잡고 식사도 했다.

"자, 이렇게 안에 든 것을 똑 부러뜨리면 열이 확 올라오니 잠시 두면 따듯한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오오. 지구의 과학이란 것은 정말로 신기하군."

사실은 마법으로 구현한 것이지만 모티브는 고체 연료 쪽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 즉석에서 가열해 먹은 전투 식량의 맛은…….

"으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신녀의 입맛을 전혀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이는 홍 무사도 다르지 않았으니 둘은 남기지 않고 다 먹긴 하였으나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가 만족스럽지 못해 큰일이군요, 주 형."

그래서 도령이 말했으나 맛없는 걸 참고 다 먹은 주호문은. 신녀는 오히려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김 형. 나는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라 그저 즐겁기만 하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행히 신녀는 새로 알게 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리고 일과의 마지막으로 불침번을 서게 되었는데.

"오늘은 제가 중번을 서겠습니다. 두 분이 초번과 말번을 맡아 주십시오."

서로의 신뢰가 필요한 불침번을 첫날은 홍 무사가 도령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하하. 홍 무사는 걱정이 너무 많아."

반대로, 사실상 이번이 첫 만남이라고 해야 할 신녀는 낯선 사내라 할 수 있는 도령을 신뢰하고 푹 잠들었으니 이 부분이 또 기묘하다고 도령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 나흘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 가며 아주 조금이나마 경계를 푼 홍 무사마저도 사람을 쉽게 믿는다는 소릴 들을 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어 홍 무사까지 도령이 불침번일 때 조금 더 깊이 잠들 수 있게 되었을 때.

"교대 시간입니다, 김 형."

"네."

고요한 새벽. 오늘 중번을 맡았던 주호문이 도령을 깨웠다.

전과 같다면 그렇게 깨운 뒤 자신의 텐트로 향했을 주호문이.

"……."

신녀가 오늘은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니 도령은 생각했다.

아. 오늘이구나.

그저 평범한 나날의 반복이었다.

영세 문파라고, 여기는 우리 구역이라고 시비를 거는 무림의 왈패 양아치들을 만나지 않았고 운이 나쁘면 마주하게 되는 살인자나 던전의 변이도 없었다.

또한 희박하게 출몰하곤 하는 위험한 돌연변이 마물도 만나지 않았고 가끔 튀어 나오는, 이 시기 씨가 마르는 몬스터들 또한 딱 이 던전의 평균적인 수준이었으니 이렇다 할 만큼 힘을 쓸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다만 평범했던 나날들.

그러나 그 평범했던 나날들 속에서 주호문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신녀는 도령과의 인연을 쌓아 나가며 무언가를 확신한 듯 했고 그것이 담긴 눈을 마주하여 도령 또한 확신했다.

지금이 바로 이야기를 나눌 때라고.

타닥.

도령에게 배운 대로 오늘은 신녀가 직접 만든 잠자리 위로 올라오는 온기를 느끼며 둘이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신녀가 물었다.

"김 형은, 어째서 여기 왔습니까."

도령은 담담하게 답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입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며 도령의 시선이 신녀에게로 향하니 신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마주하고서, 정면으로 물었다.

"혹시 그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할 곳이. 그리고 만나야만 할 사람이 있는 곳이 천마신교입니까."

도령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는 바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신녀."

"……!!"

"……!!"

* * * *

천마신교. 제사장이 머무는 제이각.

흡사 태사의와 같은 자리에 앉은 비대한 체구의 제사장은 마물을 닮은 얼굴로 주욱 입을 늘려 웃었다.

그르르-

그 앞에는 제사장이 지옥에서 하사받은. 그래 공물을 바치고 하사받은 '마물(魔物)'이 있었으니 지옥견이었다.

지옥견.

마족이 부리는 지옥에 서식하는 마물.

흔히 마물하면 떠올리는 끔찍한 괴물은 아니었으나 이 지옥견은 한 가지 특수한 능력이 있었으니 한 번 보고 인지한 대상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주일 내의 흔적이라면 설령 대륙의 끝이라 해도 추적할 수 있었는데 제사장은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신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사받은 지옥견이 신녀를 볼 수 있게 했다.

단순히 계획을 진행하는 것만이라면 사람을 보내도 될 것을 굳이 제이각까지 신녀를 불러 대화한 건 그런 이유였던 거다.

만일에 대비하여. 혹시라도 신녀가 도주할 경우 추적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럴 의도로 신녀를 인지시켰던 지옥견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걸 알게 해 주었으니 신녀가 은밀히, 그야말로 은밀히 천마신교 바깥으로 빠져 나갔다는 것이다.

두 눈을 부릅 뜰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으니 제사장이 알기로 신녀는 단 한 번도 천마신교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천마신교 바깥은커녕 거처인 도원각 바깥으로도 잘 나서질 않았고 근래엔 특히나 천마제의 준비로 인해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시기인데.

바로 이런 시기에 도원각도 아니고 천마신교 바깥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에 두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은밀히 잠마대를 보낸 결과 도저히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래. 거기에 은밀히 끄나풀을 두었구나, 신녀여.'

외부와 이어지는 신녀의 비밀 거점 중 하나를 찾았다.

심지어 그 거점을 담당하는 것이 거슬리고 또 거슬리는 집법당주의 손녀라는 것까지.

제사장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봐라."

"예, 제사장님."

"지옥귀들을 풀어라."

"…명대로 하겠나이다."

부복하며 대답하는 이의 눈동자가 목소리와 함께 미미하게 떨렸다.

지옥귀는 본래 천마신교에 있어선 안 될. 제사장이 은밀히 숨기고 있던 패 중 하나였기에.

그리고 그 숨겨 두었던 패 중 하나를 뽑아든 이유는 명백했으니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번거롭게 시간을 허비하며 천마제까지 갈 것도 없이 천마신교의 정점에 설 수 있을 것이었다.

53

채앵!

그것은 칼을 뽑는 소리였다.

그리고 마치 저 끝에서부터 이곳까지 뽑아내는 듯 말 그대로 소리의 속도로 가까워졌으니 반듯하게 잠들어 있던 홍 무사. 본래 홍련이라 불리는 무녀의 발검에서부터 이어지는 쇄도와 찌르기였다.

평범한 영상을 고속으로 돌린 듯 정교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빠르기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깊은 이치가 깃들어 있었으니 이곳 무림에 오며 보았던 평범한 무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지극한 이치에 닿기 위한 무공이었다.

당장의 얕은 파괴력이 아닌 이치에 닿기 위한 상승무공(上乘武功). 그것을 연마하며 경지에 오른 무인의 찌르기는 인지하였음에도 대처할 수 없는 무리(武理)를 담고 있었으나.

그 선의 끝에 있는 도령에게는 닿지 못했다.

스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제압을 위해 목을 겨눈 검끝을 도령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틀며 손등으로 밀어냈다.

"……!"

부드러운.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바닷물 같은 힘에 홍련은 저항하지 못하고 검이 밀리고 말았으니 훤히 상체가 드러나고 만다.

거기에 허리를 틀며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간 오른손이 뻗으니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홍련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도령의 손가락이 홍련의 흰 목덜미에 닿았다.

스으-

"……."

홍련은 거기에 대항하는 대신 멈추었다.

그녀가 그러했듯, 그녀의 목덜미에 닿은 도령의 손가락에서도 살기는 단 한 점도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만 경악하였으니 눈이 떨리고 있었다.

홍 무사. 홍련은 신녀를 모시는 무녀(巫女)이면서 동시에 무녀(武女)였다.

신녀를 보위하는 무녀. 이 무림에서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힘은 필수적이었으니 신녀 일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공이 뛰어난 무녀인 것이다.

비록 이번의 은밀한 외출에서 신녀를 지키기 위해 이미 알려진 손꼽히는 실력자가 아니라 그 뒤에 가려져 있던, 후대를 위해 양성하던 무녀들 중 한 명인 홍련이 동행하게 되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러한 무녀들 중 가장 뛰어난 홍련이 뽑힌 것이었으니 홍련의 실력은 결코 낮지 않았다.

홍련 스스로도 그러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무림에서도 동년배들 중 자신을 이길 이가 결코 많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스윽.

부드럽게 손을 거두는 도령에게 단 한 수에 패배하고 말았다.

물론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뻗은 검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신녀의 정체를 말한 도령을 제압하기 위해 뻗은 검이었으니 어디까지나 제압을 위한 한 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도령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그 끝이 어디인지. 도령의 경지를 홍련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고 동년배를 상대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마주한 도령이 아닌 뒤에서 나왔다.

"천마의 후예셔. 홍련."

"……!"

신녀의 대답에 이번엔 도령이 놀랐다.

그리고 시선을 신녀에게로 향하니 사라락.

변장을 풀면서 그 피어나는 난초와 같은 본모습으로 신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이곳 무림에서 만났을 때가 아니라.

"…바로 그때부터, 알아보았던 거군요."

"예.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도령의 회사에 천마제를 진행할 네크로맨서를 차출하기 위해 왔을 때.

아직 도령이 회귀 후 제대로 된 힘을 갖추기도 전에.

도령은 신녀와 눈이 마주한 것만 같았고 한 번에 그치지 않은 두 번의 눈맞춤에 그것이 착각이 아니란 걸 확신했었다.

그 두 번의 눈맞춤의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물었다.

"교에 천마신공은 전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구분할 수 있는 문헌조차 남지 않았죠. 그런데 어떻게 날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무림에. 나아가 탑 전체에 천마신공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전설만이 전해질 뿐.

그러니 알아볼 수 있는 이도 없었다.

굳이 전해지는 전설 속의 천마신공을 체현하지 않고서야 도령이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구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이는 설령 천마신교의 교도라 해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묻는 도령을 마주하여 신녀는 여전히 난초와 같이 미소짓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신열을 앓고 죽음의 문턱 앞에 섰을 때. 천마께서 제 손을 이끌고 직접 삶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신녀는 신열을 앓았다고 했다.

신열(神熱).

평범한 열병이 아닌 내려진 죽음과의 싸움으로 인한 열.

그렇기에 패배하면 죽음에 이르지만 살아남는다면 죽음마저 이겨낸 힘이 신체와 영혼에 깃든다고 무림에는 전해지고 있었다.

신녀는 그것을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앓았고 본래는 죽어야 했다고 전해 들었다.

실제로 한 번 심장이 멈추기까지 했는데 놀랍게도 잠시 뒤 다시 심장이 뛰었고 거짓말처럼 신열이 나았다고.

신녀는 그것을 천마께서 돌려보내 주셨다고 말했고 본래 내정되어 있던 이를 대신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신녀가 되었다고 했다.

'…그랬구나. 그게, 신녀였구나.'

도령은 그것이 어린 소녀의 착각이 아닌 진짜 있었던 일이란 걸 알았다. 지금 알게 되었다.

도령과 함께 했던 천마가 어느날 했던 말.

[내가 잠들어 있었을 때. 접촉했던 영혼이 있었다.]

[나는 온전치 아니하여 그 영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나 원치 않는 죽음의 기운으로 힘겨워하고 있기에 가볍게 도와주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천마는 이곳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 닿은 영혼이 있었다고 했다.

죽음의 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저승으로 끌려가는 듯 했던 영혼을, 더 살고 싶어 했던 영혼을 본능으로 도왔다고 했었는데 놀랍게도.

마치 인연이라는 게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천마가 도왔던 그 영혼이 신녀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녀는 자신을 살려 준 것이 천마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이제야 알았다.

신녀는 단순하게 나고 자라며 천마신교에 영향을 받았기에 그토록 천마를 신앙한 것이 아니었다.

신열을 앓고 원치 않는 죽음에 떠밀리던 때에 천마에게 구원 받았기 때문이었다.

구원 받았기에 흔들림없이 마지막까지. 너무나 피폐한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에도 천마의 존재가 증명된 것만으로도 구원 받은 얼굴로 눈을 감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알고 나니 이제서야 보인다.

신녀의 영혼 깊은 곳. 거기에 틀림없이 천마의, '천마신공'의 흔적이 있었다.

아직 전성기 때의 경지를 되찾지 못했기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전생에서는 영혼마저 닳아 없어져 천마신공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 그때 보았던 기억 속 영혼이 눈을 흐리게 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명하게 보이니 신녀가 도령을 알아보았던 이유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안에 깃든 천마신공과 같은 기운을 도령에게서 느꼈으니 그녀는 확신한 것이다.

도령이 천마와 연관 있는 자라고.

그러니까 아주 많은, 말로 하기엔 너무나 크고 많은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서 바깥으로 나와 도령을 만났다.

그리고 함께 지내며 천마의 후예란 것을 확인했다.

대놓고 수련하지 않았으나 도령은 틀림없이, 매일 연신극기공의 수련을 계속해 왔으니까.

도령의 내부에서 포효하는 연신기를 신녀는 자신의 영혼에 깃든 천마신공의 기운을 통하여 느꼈으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도령을 천마의 후예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분명했고 심장보다 가까운 감각의 확신이었다.

여기에 자신을 보는 도령의 눈에 깃든 무조건적의 호의까지.

도령을 보는 신녀의 눈에는 오직 믿음뿐이었다.

"후예께서 무림에 오신 것은, 천마신교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시지요?"

그러니까 도령도 망설이지 않았다.

"네. 나는 천마강림을 이루기 위해 왔습니다."

"……!!"

* * * *

"제사장은 악마 숭배자입니다."

천마신교에 악마 숭배자들이 있다.

그 악마 숭배자들이 천마신교를 좀먹고 있으니 우두머리가 제사장이다.

평범하게는 천마신교도가 아니라 무림의 양민이라 하여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였다.

지구로 따지자면 인류 연합의 대표가 지옥의 악마들을 숭배하는 자이고 지구를 팔아먹기 위해 암약하고 있다는 음모론만큼이나, 어떤 면에선 그것보다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도령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를 찾아야만 했고 차근차근 나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할 수 있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증거를 수집하며 천마신교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녀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야 했으니 하루이틀, 한 달을 넘어 연단위의 시간을 논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렇군요. 제사장이……."

한데 그 일이 지금 눈앞에서 갑자기 목표에 이르러 버렸다.

제사장이 악마 숭배자란 말을 신녀가 그 어떤 근거도 논하지 않았으나 믿어 버렸다.

홍련은 상황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갑작스럽게 급가속한 지금에도 도령의 말을 믿기 어려워 했으나 신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을 묻는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신녀와 만났고 신녀가 절대적인 신뢰의 시선을 보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령은 길게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총으로 갈 겁니다."

"무총이라고 하시면……."

무총(武塚).

무인들의 무덤.

죽여도 죽여도. 시체를 남김없이 태워도 다시 나타나 덤비는 무림인 언데드들이 출몰하는 던전.

모험가들이 치를 떨며 '끝없는 악몽'이라 부르는 던전이다.

그 무림인 언데드와 끝없이 싸우며 무공 모듈을 각성하기를 바라는 지구인이 아니고서야 눈길도 주지 않는 던전.

[네가 조금만 더 빨리 그곳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도령은 기필코 그 던전에 가야 했으니 가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련화 무녀께서 이곳에 계시는 이유인 그곳입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무총.

그곳은 사실 옛 시대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묻힌 무덤이다.

승천했다 전해진 천마를 믿고 따르던 '마지막 세대' 무인들의.

멸망의 때에 목숨을 불사르며 싸웠던 이들의 무덤.

전대 신녀는 그것을 고문서를 해석하다 알게 되었고 신녀 일파는 제사장 일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조사를 위하여 흑안방을 세우고 믿을 수 있는 무녀를 파견하였으니 주련화였던 거다.

하지만 몇 년을 조사하였으나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여 답답하던 차였는데 바로 그 무총을 천마의 후예가 언급했다.

그리고 거기에 가야만 할 놀라운 이유를 말하였으니.

"나는, 그곳에 잠들어 있는 천마신검을 찾으러 갈 겁니다."

54

천마신교에는 천마의 신물(神物)이라 할 만한 것이 단 하나도 전해지지 못했다.

멸망의 시기 한 번 멸망했던 것이 이유 중 하나로, 천마신교는 잿더미가 되었었다.

탑에 의해 세계가 보존되기는 했으나 지구가 그랬고 여타의 수많은 세계가 그랬듯 어디까지나 세계만이 보존되었을 뿐 불타 사라진 것들 대부분은 보존되지 못했다.

또 더 커다란 이유이자 비극이 있었으니 천마가 남긴 유일한 제자였다.

너무 일찍 승천한 천마는 그러나 안심하고 승천할 수 있을 정도로 뒤를 맡길 수 있었던, 찬란한 재능으로 빛나던 제자가 있었으니 천마를 따르던 믿을 수 있는 이들이 보필할 것이었고 아주 잠시 소천마(小天魔)라 불리겠으나 곧 온전히 천마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키이야아아아아아!!]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멸망이 들이닥치고 말았다.

차원의 균열을 뚫고 들이닥친 마족은 너무나 강했고 소천마는 아직 천마가 아니었으니 비극을 막지 못하였고 그 넋도, 쥐었던 천마신검도 천마신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소실되었던 천마를 상징하던 가장 상징적인 신물인 천마신검(天魔神劍)이.

"천마신검이…… 무총에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네."

도령은 그저 간단히 답하였으나 그 답이 무엇보다 명료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도령은 전생에서 천마신검을 되찾았었다.

비록 천마신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온전히 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아……."

신녀는 두 손을 모으고 찬양하듯 감탄했다.

천마의 후예가 천마신검을 되찾는다.

그것으로 뒤틀리고 일그러졌으며 사실은 끔찍하게 오염되고 있던 천마신교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거라고 한 치의 의심없이 믿는다.

도령은 그런 신녀의 믿음과 달리 일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란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많이 겪어왔으니까.

도령이 전설로 전해지던 모습 그대로의 천마신공을 천마신검으로 구사한다 하여도 놈들은 도령과 천마신검을 부정할 것이다.

[저것은 천마가 아니다!]

천마를 부정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부정을 사실로 만들어 버리려 할 거다.

논리로 이기기 가장 어려운 무논리에 힘을 실어 놈들은 신녀와 도령을 없애려 들겠지.

하지만 괜찮다.

다시 사는 도령은. 다시 주어진 삶을 힘껏 살고 있는 도령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이제는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승리를 확정지을 것이다.

그럴 생각으로 말했다.

"의뢰도 완수했으니, 나갈까요?"

"예! 언니도 분명히 환영해 줄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도령의 마스터 네크로맨서로서의 감각이 의뢰를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의 일백화를 채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흑안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가 지체없이 계획을 실행할 생각으로 조금 빠르게 걸으며 도령은 물었다.

"언니라고 하면 주 방주님을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예.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신 분입니다."

언니라는 호칭이 신경쓰여 물으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더 자세한, 전생에서는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는 길가에 버려진 부모를 찾지 못할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대로 두었다면 얼마 가지 못해 죽었을 아이를 집법당주께서 거두어 주셨고 그렇게 갑자기 생긴 아이를 언니는, 연 언니는 마치 진짜 동생이 생긴 것처럼 기뻐하고 아껴 주셨습니다."

"그랬군요."

화 언니가 아닌 '연 언니'라 신녀가 말했으나 도령은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주련화. 그 겉모습까지 포함하여 본래의 이름과 외모가 아닌 것은 은밀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본명은 주소연이었고 나이도 신녀보다 겨우 몇 살 위인 스물셋이었다.

신녀 일파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집법당 당주의 손녀에 관해서는 무녀의 신분이란 것도 있고 은밀한 임무를 수행 중이어서 많은 정보가 남아 있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인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도령이 지금 그것을 알고 있는 건 조금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니 티내지 않았던 건데 신녀와 이야기하며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충성심이 아니라 정말로 가족이라 생각했던 거구나.'

[내 죽어서라도 너희를 붙잡을 것이다. 죽어 진창이 된 몸으로 너희의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을 것이니 죽어서도 너희는 나를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무녀들 중에서도 가장 처절했던, 귀기마저 서려 있던 그 외침은 신녀를 정말 가족이라 여겼기에 서린 한(恨)이었던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 때의 감정을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간직하였으니 그렇게 소중한 존재를 비극의 끝에 잃어야만 했던 그녀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도령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신녀와 함께 기억했었다.

"돌아가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군요."

"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 또래의 감정을 감추지 않는 신녀가 보기 좋다고 도령은 생각했다.

전생에서는 보지 못했던 자매의 사이 좋은 모습을 보는 것도 회귀하여 노력했기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한데.

"……."

"……."

마침내 나온 던전 바깥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던전을 나온 도령과 다시 주호문이 된 신녀, 홍 무사가 된 홍련을 보는 시선들이 결코 평범하지가 않았다.

기묘한 기류.

무시무시한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심지어 그것이 일행과 관련돼 있는데 그것을 일행만이 모르는 분위기.

도령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법 거침이 없어 보이는 분위기를 두른 남자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남자는 과연 그 분위기대로, 여기에 입까지 근질근질했었던 듯 도령의 물음에 머뭇거리지 않고 답을 해 주었다.

그 내용은.

"간밤에 흑안방이 멸문했다."

"……!!"

신녀의 얼굴이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 * * *

-갑작스런 일이었지.

-새벽에 복면을 뒤집어쓴 시커먼 것들이 흑안방을 덮쳤고 단번에 불태워 버렸어.

-불이 치솟고서야 마을에서는 일을 알게 됐지.

도령은 신녀, 홍련과 함께 날듯이 달려 흑안방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현장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려주듯 소란이 인파와 함께 점점 더 커져갔고 이내 매캐한 냄새가 풍겨 왔으니 정말로.

타닥.

"……."

흑안방이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문파라 할 만큼의 위용과 규모를 갖추었던 흑안방이 뼈대까지 다 타버린 채 열기조차 가시지 않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도령과 신녀, 홍련이 던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이에. 이곳에서의 시간으로 겨우 하룻밤 사이에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믿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술렁였고 현장에는 급파된 무림맹의 무인들과 관아의 포졸들이 조사를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천마신교의 앞마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둘러선 이들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다.

그 말대로 이곳은 신강. 무림을 대표하는 천마신교가 자리잡은 천산 산맥이 굽어보는 지역이었거늘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언니……!"

신녀가 참사의 흔적인 잿더미로 달려가려 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이 붙잡지 못한 이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진정하세요."

도령은 그러한 신녀의 손을 붙잡고서 자신에게로 당겼으니 두 사람의 거리가 전에 없이 가까워졌다.

스으-

그리고 두 눈을 마주하며, 손을 맞잡은 채 연신극기공을 운용하였으니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일어난 기운이 놀랍게도 신녀와 공명했다.

두근.

크지 않은. 마치 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 느끼게 되는 심장의 고동과 같은 공명.

심장보다 가까운 곳에서 영혼에 울리는 듯한 그 공명이 따스하게 퍼져 가며 신녀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하여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를 되찾은 신녀에게 도령이 말했다.

"지금 저곳에 가서는 안 됩니다."

'무림맹'과 '관아'가 함께 있는 자리.

저기에 신녀가 뛰어들었다가는 일이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고 꼬여 버릴 것이다.

주호문으로 남장을 한 신녀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였고 틀림없이 무림맹과 관아에도 몰래 기생하고 있을 악마 숭배자들의 보이지 않기에 막기 어려운 수작들이 밀려들 거다.

"괜찮습니다. 주 방주님은 살아 계실 거니까요. 그렇죠?"

"…네.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신녀 일파가, 그것도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집법당주의 손녀가 파견된 곳이다.

겉으로야 영세한 문파이지만 그 내부는 전혀 달랐으니 아무리 지금의 도령이라지만 집중하여 마나를 퍼뜨리고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을 만큼 정교하고도 은밀한 비밀 통로가 잿더미 아래에 있었다.

"우리가 지금 그걸 의식하면. 혹은 만나러 가면 더욱 주 방주님을 위험하게 만들 겁니다."

왜냐하면.

"놈들은 떠나지 않았으니까요."

흑안방을 불태운 자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스으으-

오히려 뻔뻔하게, 대놓고 현장을 살피고 있으니 철저하게 감추었으나 도령만큼은 속일 수 없어서 그 끔찍한 몰골과 악취가 주변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지옥귀.'

지옥귀(地獄鬼).

천마신교에 숨은 악마 숭배자들의 우두머리인 제사장이 부리던 마귀들.

악마가 악의를 그득 담아 이지러뜨린 무공을 익힌 놈들로 이미 반은 마물이라 보아야 할 것들은 그렇기에 하나 하나가 평범한 무림 고수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괴물이었다.

그런 것들이 지금.

스으으-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선 주변을 둘러싸고 틀림없이 '주호문이 아닌 신녀'를 훑고 있었으니 도령은 알았다.

지금 가장 위험한 건 주 방주가 아닌 신녀라는 것을.

인파의 사이에 있는 신녀는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위험한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도령은 호흡을 깊이 했다.

평범하게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신녀와 홍련은 저들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격차는 절망적이다.

최정예의 무녀들이 호위하고 있다 해도 위험할 수 있는 것이 지옥귀들의 습격인데 지금 신녀의 곁에는 오직 홍련뿐이었으니 이건 제사장이 작정하고 신녀를 죽이려고 보낸 것이다.

전생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 무언가가 달라진 것이었고 그 원인은 명백하였으니 도령 자신이었다.

신녀가 도령을 보았고 도령을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해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도령은 그렇게 바뀌어 버린 지금이자 미래를 결코 신녀가 행복해질 미래로 이어야만 했다.

"주 형."

"…예. 김 형."

도령은 우선 자신과 신녀, 홍련이 옷에 장식해 두었던 흑안방의 표식을 뗐다.

"저기로 갑시다."

그리고 인파 사이를 뚫고 나가며 한 곳을 가리켰으니 그곳은 지극히 급박한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난간에서 목을 쭈욱 빼고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객잔(客棧)이었다.

55

도령의 손가락을 따라간 홍련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도령이 천마의 후예라는 것부터 시작하여 흑안방이 잿더미가 돼 멸문해 버린 지금까지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상황의 연속에 온통 혼란뿐인 홍련이 물었다.

"그…… 공자님."

"네, 홍 무사님."

"지금 혼잡한 객잔에 가는 것은 은밀한 칼을 막기에 어렵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도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예. 일반적으로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흑안방을 습격한 것은 지옥귀라는 것입니다. 악마의 무공을 연마한, 이미 사람보다 악마에 더 가까운 것들이죠."

처음부터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치해 두었으니 민감한 내용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천마신교에 결코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천마신교만이 아니라 악마 숭배자가 아니고서야 가까이해선 안 될 것들이죠."

그런 것을 보냈다는 데에서 제사장이 아주 작심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다만 이것을 제사장은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플레루스틴 아흘레라.

유니온의 실력자이자 심층에 도달한 모험가인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가 도령에게 진실을 듣고서 그것을 믿었으니 천마신교를 옥죄기 위해 조사대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몰아붙이면 놓칠 수 있었으니 은근하게.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괴롭히기는 하는데 확신을 가지지 못해 굴 안을 아무렇게나 찔러보는 것처럼.

그래서 아파도 소리내지 못하고 굴 안에서 움츠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두었으니 제사장은 기회다 싶어 비장의 수단 중 하나를 꺼내들긴 했으나 마음껏 휘두를 수가 없는 것이다.

깊은 밤 은밀하게 일을 벌이고 흑안방을 굳이 완전히 태운 것도 큰 소란이 일어도 지옥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지옥귀의 존재가 무림맹은 물론이고 관아의 눈까지 있는 지금 드러나서 유니온의 시선을 끌었다가는 곤란할 테니 눈이 많은 곳에서 지옥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 두었을 겁니다."

무림맹(武林盟)은 한 마디로 무림의 유니온이다.

그들 또한 악마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증오하며 인류 연합의 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황실(皇室)의 관아까지 있는 마당에 대낮에 지옥귀를 날뛰게 만들어 정보가 유니온에 전달되는 위험을 쉽게 감수할 리가 없다.

당장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선 객잔이 최선의 판단이었다.

도령의 설명에 홍련은 납득했고 천마의 후예가 하시는 말씀이 틀릴 리 없다 생각하는 신녀까지 동의하였으니 셋은 바로 근처의 객잔에 들어섰다.

그리하여 굳이 북적이며 소란스러운 객잔의 한 자리를 비집고 차지하여 앉아 모두의 관심이 외부로 쏠리는 중에 세 사람만이 안으로 눈을 모은다.

"신녀님. 짐작가는 바가 있습니까?"

많은 것을 생략했으나 총명한 신녀는 안에 담긴 뜻을 다 알아듣고서는 고민하는 얼굴이 된다.

이번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 신녀의 행적을 추적당한 이유를 알겠냐는 말이다.

세상 일이란 완벽할 수 없는 법이고 예측하고 대비할 수 없기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난다.

신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번 일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만전을 기하였고 제사장 일파는 신녀의 외출을 전혀. 정말로 전혀 눈치채지 못한 동향이었다.

흑안방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녀 일파의 핵심 중 핵심인 집법당주의 손녀가 파견되었던 만큼 보안과 경계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그 어떤 낌새도 없이 갑자기, 대비는커녕 전조조차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정보력에 이만큼이나 격차가 났었다면 신녀 일파는 진작에 무너졌어야 했다.

그러니까 도저히 짐작가는 게 없는 얼굴의 신녀에게 다시 물었다.

"자그마한 거라도 좋습니다. 평소와 다른 게 있었다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거라면."

신녀는 없다고 말하는 대신 정말로 무어라도 평소와 달랐던 게 있었나 짚어 보았고 이야기했다.

"얼마 전 제사장의 납득가지 않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여전히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제사장이 굳이 제이각으로 불렀던 일을 신녀는 말했고 도령은 바로 거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지옥견이었군요."

"지옥견이라고 하시면?"

"지옥의 마물 중 하나입니다."

지옥견은 이 시기엔 아직 유명하지 않은 마물이었다.

마물이라고 하면 끔찍하고 위험한 파괴적인 괴물이며 마족을 부르는 '문'이 된다는 것만이 유명한 시기였으니 그와는 다르게 특수한 능력을 지닌 지옥견은 은밀하게 운용되기까지 했으니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은밀함은 악마의 특기다.

들키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들키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싹 틔우고 자라게 만드니 의심암귀(疑心暗鬼).

있지도 않은 귀신, 악마가 있다 의심하여 서로 상잔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러한 악마의 은밀함을 극대화한 듯 존재를 감추는 데에 특화돼 있는 것이 지옥견이다.

동시에 그렇게 숨어서 일방적으로 한 번 인지한 대상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추적할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도령은 사건의 전말을 대번에 파악해냈다.

신녀의 은밀한 잠행은 본래 들키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제사장이 수작을 부려 지옥견이 신녀를 인지토록 하였으니 지옥견에 의해 신녀가 천마신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제사장에게 알려졌고 행선지까지. 흑안방까지 드러나고 만 것이다.

"조용히 나오기 위해 신녀께서는 호위조차 홍 무사님밖에 대동하지 않으셨죠?"

"…예."

"제사장은 이걸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천마신교 내에서, 아직 그 상징으로 굳건한 신녀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다.

하지만 바깥이라면.

외부에서 신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이 일어난다면 좋은 명분으로 삼을 수 있기까지 하다.

제대로 된 호위조차 한 명뿐인 지금 제사장은 도령의 말대로 절호의 기회를 붙잡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니온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지금 무리해서라도 신녀를 죽이기 위해 지옥귀를 보낸 거고.

신녀 일파가 마련한 은밀한 거점인 흑안방을 멸문시킴으로써 신녀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고립이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옥귀가 신녀를 죽이는 데에는 말이다.

"따로 연락해서 구원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란이 일어났으니 교에서 움직이긴 하겠으나 며칠은 걸릴 것입니다."

신강. '천마신교의 앞마당'이라고 하지만 무림의 거리 개념은 지구와 많이 달라서 그 앞마당이란 것이 무림인의 걸음으로도 일주일은 걸리는 거리다.

외부의 문물과 마법이란 것이 무림에 퍼진 덕분에 소식은 빠르게 전해질 수 있겠으나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는 이 세계에서 서로가 만나기 위해선 적어도 며칠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지했던 대로 평범하게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홍련은 고수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자였으나 지옥귀 둘을 감당하기도 벅차다.

그런 지옥귀가 도령이 감지하기로 스물에 달하니 사람의 거죽을 하고선 이 주변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있다.

놈들의 포위를 뚫고 신녀, 홍련과 함께 무사히 도주할 방법은 도령에게도 없었다.

그러니까.

도령은 말했다.

"나를 믿어줄 수 있습니까?"

"네. 믿습니다."

찰나의 고민조차 없이 신녀는 올곧은 눈으로 도령을 믿는다 말하였다.

"…믿겠습니다."

여전히 상황을 다 따라가지 못한 얼굴인 홍련 또한 결국 도령을 믿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잠시만 저를 믿어 주십시오."

도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신녀와 홍련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세 사람은 방 하나를 잡아 2층으로 올라갔고 지옥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지옥귀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으니 눈에 의지하지 않아도 감각으로 신녀와 홍련의 기척을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

놈들이 하나 같이 두 눈을 부릅뜨며 사정없이 흐트러지고 말았으니 방금, 스스로의 감각으로 느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걸 느낀 탓이다.

어린 놈이 신녀와 무녀를 동시에 껴안는 것 같았는데 다음 순간.

'사라졌, 다고……?'

마치 그대로 집어삼켜 버린 것처럼 신녀와 무녀의 기척이,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의 감각으로 느꼈으나 도대체 이걸 어떻게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지옥귀들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판단을 내릴 틈도 주지 않고 상황은 가속했으니.

탓!

어린 놈이. 방 안에 들어갔던 도령이 창문 너머로 몸을 날리더니 삽시간에 멀어졌다.

혼자서.

-쪼, 쫓아라!

다급히 가장 서열이 높아 조장 역할을 맡은 지옥귀가 전음, 내공에 목소리를 실어 지옥귀들만이 들을 수 있게 하여 외쳤으니 은밀하게 숨어 있던 지옥귀들이 몸을 날렸다.

-네, 넷은 남아서 이곳 주위를 지켜라!

그리고 행동하고 난 뒤에야 이곳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뒤늦게 말하였으니 가장 뒤에 있던 넷이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열여섯이 쭉쭉 멀어지는 도령을 추격했다.

'네크로맨서라고 했는데?'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일을 벌이느라 자세히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의 정보는 확보하였으니 놈은 틀림없이 네크로맨서였다. 그것도 지구의.

한데 지금 소리도 없이 능숙하게 지붕을 밟고 나아가는 놈의 몸놀림은 틀림없이 경공(輕功). 빠르게 나아가기 위한 무공의 공부였으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구인놈들의 특징이라는 모듈의 힘인가.'

하지만 임무의 수행에는 굳이 이해가 필요치 않은 부분이었으니 간단히 넘겨 버리고 지옥귀들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투웅!

마치 화살이 시위를 떠나듯 안 그래도 빨랐던 지옥귀들의 몸이 더욱 가속했다.

반쯤 마물인 놈들은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같이 대단한 고수였으니 힘껏 달리는 도령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고.

처억.

무림의 세계를 벗어나 탑의 외진 영역에서 도령을 포위했다.

지옥귀들이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곳에서야 포위진을 구성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무림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혔을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있었던 지옥귀들의 조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녀를 어떻게 했느냐."

그리고 도령은 피식 웃으며 답했으니.

"당연히 반대편으로 갔지. 뻔한 유인에 당한 걸 아직도 모르겠어?"

"……."

가벼운 도발에 지옥귀들의 조장은 넘어가는 대신 고민하였으니 판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감각으로는 도령이 마치 신녀와 무녀를 삼킨 것만 같았다.

그리고 '혼자서' 도주하였으니 어어 하며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일단 몸을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기만책이라면.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신녀(神女)'가 결코 평범할 리 없으니 그들의 감각을 혼란케하고 정말로 반대로 도주한 것이라면.

지금 눈앞의 어린놈은 그런 신녀가 도주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희생한 게 된다.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자니 뻔한 유인이란 말이 너무나도 거짓말 같다.

반쯤 마물화하여 참는 것이 어려워지고 대부분의 경우 참지 않아도 되는 지옥귀의 조장은 그러니까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민하였고 도령은.

고민하는 지옥귀를 마주하여 도령은 피식 웃었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다 거짓말이다.

56

보란듯이 피식 웃은 도령은 그러나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이쪽만 유리하다는 듯 여유를 부리는 태도였는데 오히려 그 노골적인 태도까지가 지옥귀들이 판단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옥귀들의 조장은 그렇게 끌려가는 게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과감하게 결론을 내리고서 말했다.

"12번. 넷을 데리고 가 그 객잔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하고 천라지망을 펼쳐서라도 도주로를 차단하라고 전해라."

"신녀를 찾는다면 어떻게 하지?"

"주변에 눈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 창자를 끄집어내 맛을 보고 널어 놓아도 좋다."

"크흐흐……. 알겠다."

만족한 얼굴로 12번이라 불린 놈은 16번까지의 넷을 데리고 달려갔다.

객잔에 남은 나머지 넷의 지옥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도령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조장에게로 옮기고서 말했다.

"망설임이 없네?"

"간단한 이야기다."

말 그대로 간단한 이야기였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오직 도령뿐이다. 조장의 입장에서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 객잔에서 멀리 가지 못한 곳에 신녀가 있을 것이다.

당장이야 감각을 속이고 저 어린 놈이 도주하여 판단을 흐리게 하였으나 결코, 결코 그의 감각조차 속이고 신녀가 도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경지가 얕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해진다.

이 어린 놈이 유인을 하고 포위가 느슨해진 사이 도망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장의 감각에 신녀가 도주하는 기척은 잡히지 않았으니 객잔을 벗어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설령, 백 번 양보하여 놓쳤다 하여도 지옥귀들만이 아닌 은밀하게 파견된 잠마대원들까지 주변에 퍼져 있으니 작심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잡게 되면.

"신녀를 멋지게 요리하여 만천하에 보일 것이다."

살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온갖 고통을 다 경험하고서야, 죽음이 오히려 구원이라는 듯한 얼굴로 숨이 끊어질 것이다.

그 결과물을 본 자들은 본 것이 영혼에 새겨져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리고.

"네놈은…… 감히 우리를 방해한 네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을 오래도록 맛볼 것이다. 시간을 잊고서 영겁이라 느낄 만큼 말이다."

마침 이곳은 인적이 드문 탑의 내부였으니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목숨이 끊어져도 너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죽어서 진정으로 영겁의 고통을 헤매며 감히 우리의 행사를 방해한 것을 후회해라."

"…하핫."

진지하게 선고하는 지옥귀들의 조장을 마주하여 도령은 다시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게 선고하는 지옥귀들의 조장을 마주하여 도령은 다시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하고 있는지. 놈들은 모르고 있었다.

타앗!

그것을 모르는 놈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시야의 바깥에서 지옥귀 하나가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손에 쥔 검을 쭈욱 뻗었는데 시리게 빛나는 칼날의 형태가 평범하지 않았다.

톱을 닮은 칼날. 심지어 그 하나 하나가 안쪽으로 휘어 있었으니 베는 게 아니라 끔찍하게 쥐어 뜯기 위한 형상이었다.

팟!

빛살 같은 찌르다.

도령은 거기에 늦지 않게 반응하여 몸을 틀었는데 놀랍게도 그러한 동작에 맞추어 마치 미리 동선을 짜기라도 한 것처럼.

슷-

놈의 손목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칼이 도령을 뱀처럼 추적했다.

최적의 회피 동작을 최악의 악수로 만들어 버리는 궤적이었으니 몸을 이미 틀었기에 피할 수 없는, 몸이 더 이상 가동할 수 없는 영역으로 몰아붙여 베는 정교한 무공 초식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실전을 쌓아 비로소 완성된 역사가 있는 고등 무공의 초식.

고절한 무공이 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궤적.

그러나 그 궤적은 도령에게 닿지 못했다.

스으-

"……!"

틀림없이 닿았어야 하는 그 검과 도령의 몸 사이에 결코 닿을 수 없는, 짧지만 결코 닿지 못할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을 떼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반보 미끄러짐으로써 만들어진 간극이었다.

지옥귀의 초식을 알지 못한 채로는 얼마나 대단한 무공의 천재라 하여도 즉시 대응하여 만들어내지 못할 움직임과 그로써 만들어지는 간극.

그것을 도령은 너무나 간단히 구사해냈으니 신공(神功)을 익힌 도령에게는 어렵지 않은 대응이었다.

천마신공. 그 안의 맨손 무예인 백타(白打)의 보법에는 처음 대면한 자를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기습적인 초식에마저 간단히 대응할 수 있는 이치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쿵.

적중을 확신했던 공격이 빗나가는 걸로도 모자라 지옥귀는 자신에게 결코 닿지 않았어야 할 도령이 거짓말처럼 간격을 좁히며 진각을 밟는 것을 보아야 했다.

반보(半步). 한 걸음도 아닌 반 걸음이 공격이 빗나가기도 전에 이미 좁혀져 있었으니 쏘아지는 주먹을 인지하였음에도 피하기엔 늦었다.

그리하여 작렬하니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천(穿)

투웅!

한줄기 꿰뚫는 이치가 놈의 단전을 틀림없이 꿰뚫었다.

푸학!

단순한 감각이 아닌 물리적으로 단전이 꿰뚫렸으니 피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포탄처럼 튕겨나가며 상처가 벌어지고 내장이 튀어나와 궤적처럼 피와 함께 주욱 늘어지니 조장이란 놈이 말했던 창자가 늘어진 꼴을 지옥귀 중 하나가 보이게 됐다.

그 모양만 보자면 참으로 참혹하고 잔인한 꼴이다.

인간에게 고민없이,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강대한 힘.

그러나 도령은 그 힘을 망설임없이 구사하여 단전을 꿰뚫었으니 그래도 되었기 때문이다.

놈들은 지옥귀. 인간의 거죽을 쓰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미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것들이었으니.

"크흐흐흐……."

꿰뚫린 배의 상처가 벌어져 피와 내장을 흩뿌린 놈이 아무렇지 않게, 인간 같지 않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마치 시간이 되감기듯 슈르륵. 이미 흩뿌려져 땅에 스며들던 피는 물론이요 더러운 바닥에 늘어져 오염됐어야 할 내장마저 안으로 빨려들어가서는 제자리를 찾고 뻥 뚫렸던 구멍이 메꿔졌다.

초재생(超再生).

놈은 그것을 과시하듯 보여 주었으니 실제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령의 공격을 '일부러' 맞은 것이었다.

피할 수는 없었겠으나 막을 수는 있었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니 맞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제법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어디 명문가의 놈이더냐."

"하지만 턱없이 모자라구나.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이니."

제아무리 공격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도령을 절망케하고 자신의 절대적 우위를 맛보려 한 것이다.

평범한 것들은 이렇게 몇 번 초재생 능력을 보여주면 정신적으로 흔들리고 이내 포기해 버린다.

발악하듯 몸을 날리니 무인(武人)으로서의 정교함은 사라지고 짐승만도 못한 발버둥만이 남는 것이다.

지옥귀들은 그렇게 무너진 것들의 눈깔을 뽑아 먹는 것을 즐겼다. 한데.

"그깟 재생이 그렇게나 자랑스러운가 보구나."

도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뭐라?"

"인간임을 포기하고 반마가 되어서 가지게 된 그 하찮은 능력이 그렇게나 자랑스럽냐고 했어."

"……."

사아아아-

일대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실제로 얼어붙은 것은 아니었으나 무섭게 가라앉은 지옥귀들의 눈과 분위기가 정말로 공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도령의 말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네놈……. 무어냐."

반마(半魔).

반은 악마라는 그 단어는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단어였다.

반은 하찮은 인간이지만 나머지 반은 위대하고 또 위대한 악마라는 말이었으니까.

온전한 악마가 되기 위한 여정에 있는 자를 칭하는 단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도령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금의 재생에서 안 게 아니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도령은 놈들 '지옥귀'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은밀함은 악마의 특기다.

그리고 놈들이 익힌 '마공(魔功)'에는 악마의 은밀함이 녹아 있었으니 심지어 천마신교의 절대고수 중 한 명인 집법당주조차 교내를 당당히 활보하던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도령이 알아보았으니 그들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령이 절대고수마저 넘어선 안목을 지닌 존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공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 있다는 말인데 그것을 기필코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무림의 반마들 대부분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날 거다.

그러한 이유로 여유를 잃고 심각해져 버린 지옥귀들을 마주하여 도령은 피식 웃었다.

신녀나 홍련은 상황이 급박하여 짚어내지 못한 부분이지만 사실 '지옥귀'라는 것은 악마 숭배자와 한통속인 것을 넘어 핵심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 기원에 가장 가까이 닿았던 마스터 네크로맨서였던 도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 존재 자체만으로 제사장의 모든 계획을 박살내 버렸다.

지옥귀와 마찬가지로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 될. 알려질 가능성이 본래는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을 지옥견의 존재를 도령은 알았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다.

이어 파견된 것이 지옥귀라는 걸 알았고 그 지옥귀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과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았으니 상황을 여기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아주. 아주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또 끔찍한 경험을 했어야 할 신녀와 홍련이 그러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렀으니 남은 것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너는 감히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네놈은……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는 모든 것을 실토해야만 할 것이다."

쾅!

아까의 지옥귀가 다시 덤벼들었다.

아까와 달리 전력을 다하여 진지하게 칼을 내뻗었으니 휘감긴 기세와 덮쳐드는 힘이 차원이 다르다.

훅!

피하지 못했다면 팔이 날아갔을 것이다.

아주 끔찍하게 팔이 찢겨 나가고 잘린 단면이 너덜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령은 지옥귀보다 먼저 움직였으니 지옥귀보다 느렸으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빠르고 강한 공격은 심지어 정교한 초식에 담겨 있었으나 도리어 그렇기에 담긴 무공의 이치를 도령은 읽어낼 수 있었고 미래를 예측하듯 초식의 경로, 정교하게 짜여진 투로(套路)를 읽어내 반호흡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거다.

쿠웅!

그러한 회피는 동시에 공격을 위한 한 걸음이 되었으니 회피를 위한 한 걸음은 진각이 되었고 도령의 손이 지옥귀에 작렬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진(振)

꽈아아앙!

진각에서 비롯된 힘이 내공과 나선을 그리며 합쳐지고 증폭하여서는 주먹에서 쏘아져 지옥귀의 안에서 폭발하였다.

꿰뚫는 천과 달리 진은 맞닿은 것에서 그 경력(勁力), 힘이 폭발하여 단어 그대로 진동하며 퍼진다.

지옥귀는 그 경력의 폭발을 막을 수 있으나 굳이 막지 않았다.

옆구리가 터져 나가고 내장마저 손상돼 평범한 인간이라면 치명적이었을 상처를 입었으나 반마답게 금방 회복할 것이었으니까.

고통에 이르러선 아예 쾌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방어를 완전히 놓아두고 공격에 집중하였으니 도령이 막을 수 없는 일격을 꽂아 넣으려 했다.

그러나.

덜컥.

"……?!"

놈의 몸이, 반마이면서 동시에 무공의 고수이기에 철저하게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할 몸이 덜컥였으니 그나마 의지대로 움직인 눈이 도령의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비추었고.

빠악!

이어 주먹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57

퍼석.

본래 났어야 할 소리였다.

덜컥이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은 몸은 그러니까 찰나 샌드백과 같았고 도령의 주먹이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고 뻗었으니 치명적인 일격이 되어 지옥귀의 머리를 부수어야 했다.

심지어 머리가 부서져도 재생할 수 있는 지옥귀는 그러나 그것만큼은 위험했으니 방어해야만 했다.

재생할 수는 있으나 머리와 심장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특히나 머리는 부서진 순간 무엇도 할 수 없는 몸뚱이만 남으니 너무나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된 몸에 또 한 번 치명적인 훼손이 있으면 죽을 수 있으니까.

반마(半魔)의 지옥귀들은 초재생이라 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무한하지 않았고 불사(不死)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여유와 방어를 도외시 했던 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몸을 사리기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도령에 대한 경계도 포함돼 있었다.

"네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수라 불릴 만한 경지에 이르고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한계까지 넘어 반마가 된 지옥귀에게 있어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평소 경험할 일이 없는 이변, 그것도 두려운 이변이었다.

빠악!

……뿌득!

보법을 밟아야 할 종아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회피하지 못한 탓에 이번엔 갈비뼈가 박살났다.

그것만이었다면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지옥귀는 부서질 듯 이를 갈았으니 다시 한 번 진(振)의 수법으로 때려박힌 도령의 주먹. 그것이 단순히 옆구리뼈를 박살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래. 독(毒). 반마인 지옥귀이기에 독이 되는 생명력이 응축된 기운이 몸 안에서 끈질기게 날뛰고 있었다.

도령이 진의 수법에 담은 것이 단순한 내공이 아닌 연신극기공의 기운이었던 탓이다.

도령이 매순간 한계를 넘어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찬가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기운.

그것이 진의 수법에 따라 폭발하고 지옥귀의 내부에 퍼져 나가니 부정적인 기운에 맞서 결코 그냥 흩어지지 않고 끈덕지게 날뛰며 놈들의 내부를 고장내 버리는 것이다.

빠악!

그렇게 고장난 몸에 익숙지 않은 지옥귀는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뻐버버버벅!!

가진 힘을 최대한 펼쳐 몸을 보호하고 있지만 그것도 금방 뚝뚝 끊겨 버리니 한 번 잡은 승기를 도령은 놓치지 않았고 반대로 지옥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놓친 흐름을 걷잡지 못하였으니 체크메이트.

두 수. 두 번의 공방 안에 심장이 박살날 것이었고 그로 인해 기운의 운용이 불가능해져 보호받지 못하게 된 머리가 날아갈 것이 명료해졌다.

그리고.

"놈!"

지켜보던 다른 지옥귀가 몸을 날렸다.

"……."

당연한 말이지만 1:1로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옥귀들은 얼마든지 수로 도령을 짓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꼴에 무림인이기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과 자존심 때문이었다.

무명소졸(無名小卒).

무림에 이름 석 자조차 알리지 못한 어린 놈을 상대로 지옥귀나 되는 자신들이 동시에 덤벼서야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슈아악!

하지만 그 자존심을 세우다 하나가 죽을 것 같으니 더 이상 체면을 생각지 못하고 다른 하나가 더 나서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령이 상대하고 있던 것은 11번. 이 자리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자로 무공 또한 가장 떨어지는 자였는데 그보다 앞의 서열인 10번이 가세하였으니 쏘아지는 검의 기세가 확연히 더 거세다.

이런 식이라면 도령이 끝없이 불리해질 것 같았으나.

크헝!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도령의 발밑으로 퍼져 나가는 검은 기운 안에서 거대한 표범이 뛰쳐나와 10번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

절묘한 순간을 파고드는 기습에 10번이 크게 놀랐으니 공격의 맥이 끊어졌고 퍼석.

그 틈에 도령은 확정되었던 결정타를 꽂아 넣었으니 심장이 파괴되고 머리가 부서진 11번의 몸뚱이가 나무토막처럼 널브러졌다. 이어.

사아아아아…….

초재생을 지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을, 말 그대로 지옥의 악마 같았던 지옥귀 하나가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

삽시간이었다.

심장이 부서진 지옥귀가 머리까지 부서지자 재가 되어 사라진 것은.

그렇게 지옥귀 하나가 진실로 죽어 버리자.

"죽여 버리겠다!"

10번이 짐승처럼 아가리를 쩌억 드러내고 침을 흘리며 덤벼들었다.

크헝!

그 앞에 무장기를 두른 표범 언데드가 나서 발톱을 휘둘렀다.

"건방진 놈!"

그러나 10번은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대번에 비어 있던 왼손을 후렸으니 응축된 내공이 포탄처럼 쏘아져 표범 언데드의 거죽을 꿰뚫고 척추마저 부수어 버렸다.

콰직!

그것을 분노한 얼굴로 한 번 더 팔을 휘둘러 치워 버린 10번은 그러나.

훅-

"……!"

거짓말처럼 시야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아래에 도령이 나타나자 두 눈이 커졌으니 대응이 불가능한 절묘한 틈이었기 때문이다.

꽈앙!

보았으나 맞추어 대응할 수 없는 호흡과 움직임의 틈에 때려박힌 주먹은 앞서 11번이 그랬던 것처럼 10번의 몸에 응축된 생명력이라는 독을 퍼뜨렸다.

평범한 주먹이 아닌 진각에서부터 시작된 발경이었기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멀리 나뒹굴었고.

크어어엉!

도령의 발밑에서 튀어 나온, 레텔 정글의 깊숙한 곳에서 얻은 또 다른 거대 맹수인 불곰 언데드가 뒤에서 척추뼈를 베려 들었던 9번을 몸으로 들이받았다.

꽝!

"감히!"

과연 고수라는 것인지 대형 트럭이 갑자기 들이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습에도 놈은 밀리지 않고 오히려 무장기마저 뚫고서 불곰 언데드를 꿰뚫어 버렸다.

갈비뼈 사이를 파고든 손이 안에서 내공을 폭발시키니 불곰 언데드의 가슴팍이 터져 나가며 널브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

놈 또한 그 기세를 이어 나가지 못하고 10번과 마찬가지로 대응할 수 없는 순간과 각도에서 도령을 보아야 했으니 꽈앙, 심장에 때려박히는 주먹에 덜컥 몸이 고장나서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푸욱!

8번도 그랬다.

평범한 인간의 상식으로는 경험할 수 없고 생각하기 어려운, 튕겨 나가는 9번의 배를 뚫고 튀어 나온 8번의 검에도 도령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은 걸 넘어 마찬가지로 8번의 배를 뚫고서 주먹을 내질렀으니 똑같은 수를 쓸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해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8번의 손목을 박살냈고 연신극기공의 기운이 때려박혔다.

덜컥.

그로 인해 축 늘어진 손에 9번의 몸통까지 꼬여 상체가 앞으로 휘청 기울었고.

빠악!

이를 악물고 보호하여 박살나는 것만큼은 피한 대가리가 휙 꺾이며 나가떨어졌다.

가능하면 끝장을 내고 싶었으나 7번과 6번까지 나선 탓에 도령은 수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방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몰아치는 7번과 6번의 공세는 도령이 반격의 틈을 찾지 못하고 수비에 집중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결국 도령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앞서 나가떨어진 것들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하나 하나가 치명타가 되어 일어나지 못했겠지만.

뿌드득-!

"감히……!"

10번은 물론이요 심장에 치명적인 기운이 깃든 주먹이 때려박힌 9번과 배가 두 번이나 관통당하고 휘저어지기까지 한 8번마저도 멀쩡하게 회복해서는 몸을 일으켰다.

초재생.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파괴하거나 재생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박살을 내지 않는 한 반마라는 것들은 재생하여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물며 그런 것들이 이제는 다섯이나 나서서 도령을 잡고자 하였으니 당장이라도 도령이 밀려야만 할 것 같은데.

커헝!

"……크흣!"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10번과 9번이 공격하는 사이의 틈에 무장기를 두른 표범 언데드가 난입했다.

거죽이 뚫리고 척추가 박살났던 표범 언데드는 그러나 반마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회복해서는 난입하였으니 말 그대로 언데드이기 때문이다.

반마들의 재생력? 그것은 도령이 부리는 언데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마스터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언데드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날 리가 없다. 더더욱.

캬아아악!

"성가시다!!"

콰쾅!

'수(數)의 우위'라고 하는 것은 본래 네크로맨서의 것이니 도령의 발밑 어둠에서 튀어 나와 날뛰는 언데드들의 수가 스물이 넘었다.

처음 하나 대 열여섯에서 시작하여 지옥귀들의 수가 줄었음에도 하나 대 열하나였던 것이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 도령 쪽의 수가 두 배는 넘게 되었다.

하지만.

'무어란 말이냐. 저놈은……!'

"크흣!"

"빌어먹을 놈이!!"

지옥귀들이 애를 먹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상황을 지켜보는 지옥귀들의 조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경악케 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을 움직이는 도령 그 자체였다.

빠각!

크허헝!

인간의 몇 배나 되는 덩치의 거대 맹수들은 그러나 지옥귀들에게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 한 수에 가죽을 뚫고 뼈를 부술 수 있었으며 심장을 쥐어 터뜨릴 수도 있었다.

슷-

"……!"

하지만 지옥귀들은 그 다음의 결정적인 수를 펼칠 수가 없었으니 공세가 끝나고 다음의 한 수로 전환되는 '맥'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도령을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흡과 호흡의 사이. 뻗은 팔을 회수하기 위한 시간과 회수하기까지의 비어 버린 공간.

지금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인지하지 못했던 틈.

그것을 파고드는 도령에게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허용해야 했고.

꽈앙!

"이노오오오옴!!"

짐승처럼 내지르는 괴성과 달리 뜻에 따라주지 않는, 덜컥이며 고장난 몸이 도령을 추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계속.

다섯이나 되는 지옥귀가 마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도령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힘의 우위는 명백했다.

지옥귀들이 도령을 힘에서는 물론이요 속도에서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힘과 속도에서 앞서는 지옥귀들이 다섯이나 나섰음에도 도령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으니 뒤에서 지켜보는 지옥귀들에게는 보였다.

본래 지옥귀들의 장점이어야 했을 초재생보다 우위에 있는 불사(不死)의 언데드를 다루는 도령이.

또 본래 지옥귀들의 장점이어야 했을 무(武)를 더욱 높은 경지에서 다루는 도령이.

스으-

깊디 깊은 도령의 눈은 지옥귀들의 조장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지극한 이치에서의 무를 구사하고 있었다.

퍼석!

눈이 시뻘게져 덤벼드는 9번의 앞을 막아선 표범 언데드의 대가리가 으깨졌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채 휘두른 주먹에는 힘이 너무 실려 있어 여기저기가 경직돼 있을 수밖에 없었고 변수에 대비할 여유가 부족했으니.

빠각.

극단적으로 좁아진 시야의 바깥에서 파고든 발차기가 관자놀이에 때려박혀 뇌가 뒤흔들린 채 꼴사납게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이냐.'

공격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맞았고 심지어 박살나기까지 한다.

크르릉!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여서는 역공을 가하니 싸우는 상대의 전의를 단번에 짓이겨 버리는 것은 지옥귀들의 특권이어야만 했는데.

빠각.

또한 그것이 단순히 재생력만을 믿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들을 압도하는 무(武)를 휘두르는 절대적인 고수가 지옥귀였는데.

'어떻게 저 새파랗게 어린 놈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한 지옥귀들의 자부심을 정면에서 박살내는 것이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심지어.

'우리를 상대하며, 우리를 짓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단 말이냐!!'

지금 도령은 태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형상으로, 흔들리나 결코 꺾이지 않는 형상으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이런, 느낌이구나.'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극의(極意).

서(緖)

깨달음의 길이 빛나고 있었다.

58

백타(白打).

맨손 무예를 뜻하는 말이다.

타고난 본연의 몸으로 무공의 이치를 구사하는 것으로 천마신공 안에도 그와 관련한 공부가 있었다.

단순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지극한 이치를 담고 있었으니 도령은 천마신공을 전수받으며 그 안의 백타를 보고서 처음으로 사람의 몸이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동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 한정된 범위 안에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천마신공의 백타였다.

[나는, 익힐 수 없겠네요.]

하지만 도령은. 천마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도령은 백타를 익힐 수가 없었다.

팔다리와 함께 모든 것을 잃었던 날.

죽음보다 끔찍한 비극을 경험했던 그날 이후 살아가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팔다리의 회복이라는 가능성을 포기해야만 했으니까.

겉으로는 멀쩡한 팔다리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감당치 못할 사기를 담는 그릇이 되어 버린 것으로는 무공을 익히고 구사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포기해야 했다.

포기하기 싫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그것을.

쿠웅!

다시 한 번 주어진 삶의 기회에서 최선을 다하여, 스스로의 팔다리로 익힌 것을 도령은 모든 것을 다하여 구사하고 있었다.

"노오오오옴!"

사람이 아닌 끔찍한 괴물의 얼굴로 덤벼오는 지옥귀의 칼에 도령은 망설임없이 손을 뻗었다.

전생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내다 버릴 수 있는. 어쩔 수 없이 적의 접근을 허용 했을 때 몸에 붙어 있으나 육체가 아닌 것을 버리는 행위였으나 이번 삶에서는 다르다.

백타(白打) 수(受)

스으-

마치 깃털이 사라락 내려앉듯 도령의 손이 끔찍한 기세를 품고 또 끔찍한 형상을 한 칼의 면에 닿았다.

그리고 마치 하나가 된 듯 착 붙어 떨어지지 않고서 도령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니 지옥귀의 얼굴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당한 꼴이 된다.

그것은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수법인 수다.

밀려드는 강맹한 힘에 저항하는 대신 안으로 당겨 받아들이며 동조한다.

그리하여 흐름에 합류한 순간 살짝.

슷-

백타(白打) 도(導)

아주 살짝 그 방향을 비트니 도착점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

외부에서 뒤트는 것이 아닌 내부에서 이끌어낸 변화에 지옥귀는 끌려가고 말았다.

외부에서의 충돌에 의한 것이라면 지옥귀가 얼마든지 맞받아 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변화는 그 자신에 의한 힘이자 기세였으니 필요한 때에 제어할 수 없었고.

백타(白打) 점(占)

제어하지 못한 자신의 힘에 끌려가 훤히 드러난 지옥귀의 빈틈을 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에 최적의 장소를 도령은 이미 점하고 있었다.

쿠웅-!

그렇게 자리를 점하는 한 걸음은 진각이었으니 이동이면서 동시에 공격의 시작이었고.

스으-

당겨진 오른손에 지옥귀는 예의 몸을 고장내는 주먹, 연신기를 잔뜩 머금은 진(振)의 수법을 담은 발경이라 생각하였으니 뒤늦게라도 주먹을 막기 위한 자세를 잡으려 했다. 

콰직!

하지만 날아든 건 주먹에 집중하느라 비어 버린 시야 바깥의 아래쪽이었으니 도령의 발이 지옥귀의 정강이뼈를 부수었다.

백타(白打) 사예(詐豫)

상대의 예측을 속이는 수법이다.

무공을 익히고 무공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더욱 잘 속게 되는 수법.

그 이어지는 백타의 연환에 지옥귀는. 10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바닥에 처박혔으며 다른 지옥귀의 구원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으으으으을!!'

쾅!

지옥귀는 그렇게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리쳤다.

왜. 어째서.

놈을 향한 공격이 단순히 무력화 되는 걸 넘어 빈틈이 드러날 정도의 헛손질이 되고 이어 쏘아지는 도령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해 병신 같이 나가떨어지기를 벌써 몇 번째인가.

지옥귀는 이 반복되는 불합리가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짚어보면 똑같은 상황의 반복인데 그것을 부수질 못하고 있었다.

도령은.

[기본은 눈이다.]

그것을 성립케하는 스승, 천마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있었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보아 알아야 한다.]

지옥귀들은 틀림없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악마의 힘을 얻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 이치를 등한시하였으니 도령은 틀림없이,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지옥귀들의 움직임과 그에 담긴 무의 이치를.

이치란 자연스러운 흐름과도 같았으니 도령은 흐름의 방향을 꿰뚫어 볼 수 있었고 그로써 예측할 수 있었다.

훅-

꽈앙!

도령이 지옥귀보다 느리지만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였고 그 공격을 무력화하고 역공을 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는 것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니 단련해야만 한다.]

스으-

지옥귀가 악마와 같은 얼굴로 뻗어오는 손에 도령이 망설임없이 자신의 손을 뻗는다.

그 공격에 온전히 힘이 실리기 전에 도령이 손을 뻗어 마중을 나가 버림으로써 초식이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만.

쿠드드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내는 손을 통하여 전해지는 힘이 범상치 않았으니 이미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평범하게는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 버릴 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거대한 힘이었다.

스으-

"……!"

하지만 도령은 그러한 힘마저 받아내고, 동조하여 흘려내 버렸으니 그럴 수 있도록 육신을 단련해 왔다.

전생에서 하지 못했기에 한으로 남았던 육신을 단련하여 거듭 한계를 넘어 초월하기를 반복해왔다.

아는 것을 행사할 수 있는 단련된 몸을 만들었다.

그렇게 원하는 방향으로 힘을 유도하고 흘려내었으니 지옥귀가 휘청였고 놈이 자세를 바로 하기 전 도령은 이미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곳에 서 있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을 점할 것. 그것이 나의 백타의 극의다.]

천마는 백타의 극의. 정수가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을 점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가르침이었으니 한정된 범위 안에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인간의 가동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지옥귀들이 도령에게 닿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이유는 그러한 제한된 가동 범위의 바깥에서 찌르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만 있었다면 그럼에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응할 수 있도록 육체의 자세를 고치거나 위치를 옮기면 되니까.

그러나 도령은 가동 범위 바깥에서, 대응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였으니 지옥귀들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으-

도령의 눈이 깊어진다.

그 눈만큼이나 호흡도 깊어졌으니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아니 결코 동시가 아닌 공격을 확장한 모든 감각으로써 인식했다.

공격에 담긴 무의 이치가 선이 되었고 그 선이 뻗어 도달할 때와 장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슷-

그저 반보 움직이는 것으로 가장 먼저 받아내야 할 선이 그려지는 때와 장소에 도령의 선이 합쳐졌고 그것을 다음으로 받아내야 할 선에 이었으니 쾅.

지옥귀 둘이 엉키고 말았고 그 틈에 도령이 서니 나머지 모든 공격마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이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일 만큼 기이한 순간이었고 거기에 선 도령은 뒤엉킨 지옥귀들이 반응할 수 없는 시간에 반응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니 쾅.

당겨진 어깨에 주먹이 날아올 거라 예측한 지옥귀의 갈비뼈를 후려차 부수었다.

수(受). 도(導). 점(占). 사예(詐豫).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위치에서 구사하기까지.

도령은 그 모든 과정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으니 깨달았다.

'이어져 있는 거구나.'

하나 하나 필요한 때에 필요한 초식을 구사하였으니 도령은 그것을 구분하여 적재적소에 구사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니 모든 것은 하나의 흐름이었던 거다.

다만 그 하나의 흐름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우니 구분하여 하나 하나, '친절하고 또 쉽게' 가르친 것이 초식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나누어진 단편적인 이치들.

도령은 그 이치들을 다시 하나로 합칠 수 있었고 비로소 하나의 온전하고 지극하며 커다란 이치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마침내 깨달았다.

[너는 총명하니 언젠가 알게 될 게다.]

극의(極意) 서(緖)

천마신공 내 백타를 관통하는 지극한 이치를.

그것을 깨달은 순간 도령은 더 이상 지옥귀들의 힘과 속도를 어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스으-

그것이 채 뻗기도 전에 선명하게 보였으니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을 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콰앙!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을 점할 수 있으니 지옥귀들의 힘과 속도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옥귀들의 수를 감당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일으킨 탓에 완전히 박살나 버려 거대 맹수들을 더 이상 언데드로 일으킬 수 없게 되었으나 혼자가 된 지금 지옥귀들의 수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리는 선이 어떤 것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 것들은 오히려 도령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놈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납득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이고 말았다.

몰아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인데 이상하게도.

두근!

이상하게도 도령이라는 미증유의 거대한 어떤 것에 오히려 휩쓸려 유린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감각에.

두근!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던 조장을 포함한 상위 서열의 지옥귀들이 더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었으니 두근.

주르륵…….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마저 느끼고 말았다.

'아니야.'

저것은 하찮은 무명소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위태위태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혼자의 몸으로 지옥귀들을 집어삼킨 듯하였으니 그렇게 만든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것'을 느꼈다.

저것을 더 이상 자극해서는 안 된다.

저것을 더 이상 성장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저것이, '각성'해서는 안 된다.

조장은 영혼을 옥죄는 듯한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물러나라!"

그 외침에 평소라면 흥분하여 들은 척을 하지 않았을 지옥귀들이 그러나 단번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려 도망치듯 도령에게서 멀어졌으니.

"아."

도령은 드물게도 아쉽다는 표정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말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계속했다면 마침내 깨달은 거대한 흐름 위 '더욱 거대한 흐름'에마저 닿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하지만 이내 스으, 호흡을 고르며 그 아쉬움을 털어냈으니 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이르다는 것을.

그 정도나 되는 지극한 이치를 아직 도령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좋았으니 다만 알고 있는 것을 단편적으로 휘두를 뿐이었던 백타를 이제는 오롯이 체득하였다.

스스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육체를 지탱하게 된 도령이 그 결코 꺾이지 않을 육체에 어울리는 무의 이치를 더했다. 그러니까 이제.

스으-

지옥귀들은 도령에게 무로써 닿을 수 없었다.

그것을 지옥귀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니 뿌득, 조장이 이를 부술 듯 악물고서는 말했다.

"눈부시구나. 너무나, 너무나 눈부시구나."

그것은 감탄이자 찬탄이었으나 저주를 읊는 것 같았다.

"너무나 눈부셔서 피눈물이 날 것 같을 정도로 눈부시구나. 네놈의, 네놈의 미래가."

조장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령의 미래를.

저놈은 틀림없이 무림에. 아니 무림을 넘어 탑 전체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다. 찬란하고도 찬란하고 또 찬란하게.

그러니까.

"그 미래를…… 씹어먹고 싶구나."

두웅-!

조장의, 지옥귀의 심장이 피가 아닌 검고 불길한 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59

두근!

그것은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였다.

비현실적으로 너무나 크게 들리는 그것은 지옥귀들의 심장 소리였는데 그러나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이고도 커다란 고동이 감각을 확장하지 않아도 귀에 때려박혔으니 놈들의 육체가 크게 튕길 정도로 비정상적인 고동이 계속되었다.

쿵! 쿵! 쿵!

마치 괴물의 심장을 억지로 인간의 안에 쑤셔박은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사람이 아닌 괴물의 심장으로 기능하였으니 놈들의 모공을 통하여 심장이 생산해낸, 피가 아닌 끔찍하고 더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바닥을 채우기 시작했다.

주르륵.

썩고 또 썩어 버린 끈적한 것이 고이더니 넘쳐나 일대에 퍼져 나가 땅을 뒤덮는다.

마치 늪처럼 땅을 뒤덮은 그것에 풀이 검게 시들어 삼켜지고 나무 또한 썩어 부러져 검은 늪에 처박혔다.

그것은 일견 지독한 사기(死氣)처럼 보였으나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그 이상으로 생명이라면 본능의 영역에서 끔찍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마기.

그래. 틀림없이 마기(魔氣)였다.

드드드드득!!

마기의 늪으로 채워진 땅 위에서 그것의 근원이 되었던 지옥귀들의 육체가 부서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뼈가 새로 돋아나고 찢긴 피부 대신 시커먼 가죽이 안에서 돋아나 뼈를 뒤덮었으니 그것은 마치 인간을 찢고 악마가 튀어나오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악마의 심장이, 악마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를 삼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윽고 뿔이 솟아나 자리를 잡고 돋아난 이빨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와 피묻은 채 번들거리니 하아아아, 검게 썩은 숨결을 토해내는 지옥귀들이 눈을 떴다.

흰자위가 검게 물들고 시뻘건 동공이 자리잡으니 형상만으로도 끔찍한 그것이 도로록 굴러 도령을 담았다.

악마(惡魔).

도령을 응시하는 그것들은 틀림없이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훅-!

그 악마의 형상을 한 것들 중 둘이 도령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으로 좇지 못한 그것을 도령은 한계까지 벼려내어 퍼뜨린 감각으로 가까스로 인지할 수 있었고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먼저 움직여 점할 수 있었다.

극의인 서(緖)를 깨닫지 못했다면 결코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욱-!

늦지 않게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던 도령은 그러나 완벽하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공간을 점하지는 못했으니 소매가 찢겨 나갔다.

반의 반보. 그 정도의 공간과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도령은 그것을 아쉬워하는 대신 공세에 집중하였으니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 반의 반보에 해당하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했으니 망설이지 않고 공격에 써야 했기 때문이다.

꽝!

백타(白打) 진(振)

발경의 수법으로 때려박힌 주먹을 타고 도령의 연신기가, 부정적인 것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는 찬란한 생명의 힘이 지옥귀의 내부에서 폭발하여 진동한다.

악마가 되어 버린 지옥귀들에게는 더욱 효과적이어야 할 연신기. 그러나 발경을 꽂아 넣은 도령이 오히려 즉시 물러나야 했으니.

훅-!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 듯 멀쩡한, 탈태로 인한 검은 피로 번들거리는 지옥귀의 손톱이 도령이 있었던 공간을 할퀴었기 때문이다.

"크흐흐흐……."

흉측한 입이 주욱 찢어지며 빽빽하게 들어찬 날카로운 이빨이 번들거린다.

정말로 놈은 연신기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이었다.

그럴 거라 확신했기에 사실은 일부러 맞아준 거다.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악마로 탈태한 놈들이 품은 힘의 규모가 달라졌다. 앞서와 달리 오히려 상극인 연신기를 단번에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슈각!

이어 뻗은 지옥귀의 검을 도령은 수의 수법으로 받아내지 못하고 피해야만 했으니 이 또한 힘의 규모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닿는 순간 거기에 깃든 지옥귀의 기운이 타고 들어와 역으로 잡아먹힐 수 있었다.

"크크……."

"키히히힉!"

"캬하하하학!!"

지옥귀가 크게 웃는다.

하나가 웃으니 마치 번져가듯 동시에 웃는데 그 모습이 여럿이면서도 동시에 하나 같았고 실제로 놈들은 지금, '군체'가 되어 있었다.

군체(群體).

여럿이지만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이었으니 놈들의 심장이 괴물의 것이 되어 생산한, 일대를 가득 채운 마기가 놈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완전히 합쳐질 수 없는 개체들을 마기로써 손실을 최소화하고 하나로 합쳤으니 그렇게 합쳐진 힘으로 놈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었던 하나의 경계를 넘어 초월의 영역에 이른 것이다.

그 초월의 영역에 이른 힘으로 놈들은. 놈은 도령을 몰아붙였다.

훅!

지옥귀 둘이 덤벼든다.

둘이지만 하나의 개체가 된 놈들의 사이에는 틈이 없었다.

정확히는 있었지만 도령이 파고들 수 있을 만큼의 공간과 시간이 없었다.

가장 날것의 이치이면서 격차. 속도와 힘의 격차가 그렇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볼 수는 있었으나 필요한 때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점하기 위한 속도가 부족했다.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반격을 가한다 해도 순수한 힘의 차이로 인해 연신기는 더 이상 지옥귀들에게 독이 되지 못했고 되려.

부웅!

도령은 최대한 놈들에게 닿지 않기 위하여 쉼없이 움직여야만 했으니 닿는 순간 역으로 파고드는 마기에 삼켜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신기로 최대한 몸을 보호하고 있지만 공격에 당할 경우 완전히 막아낼 수 없다.

그럴 정도로 너무나 커져 버린 힘의 격차가 상극의 관계를 역전시켜 버렸다.

쿵!

수 싸움을 포기하고 도령이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지 않으면 세 번의 공방 안에 지옥귀가 도령에게 닿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옥귀는 그것을 추격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도 멈추었다.

"키히히히."

"키히히히힉!!"

"그렇게 멈추어서 되겠느냐? 쉬지 않고 움직여야지! 캬하하학!"

대신 도령을 조롱하려 했다.

지옥귀란 절망을 먹고 타락한 것들이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 끔찍한 짓을 수없이 저질렀고 그 절망에 절어 버린 생명을 생으로 뜯어먹고 소화하여 마침내 얻은 것이 마기였다.

마기란 본래 인간이 결코 지닐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것을 억지로라도 깃들이기 위해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포기해야만 했으니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자격을 상실할 만큼의, 결코 해서는 안 될 죄를 무수히 저질렀다.

그 죄를 저지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끔찍하고도 추악한 기운을 흡수하고 또 흡수하여 마침내 탄생하는 것이 지옥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깃들인 마기를 여러 지옥귀가 동시에 해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도달하는 것이 지금의 악마화(惡魔化)다.

인간으로서의 부분을 최소화하고 존재의 대부분을 마기로 채워 악마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

아직 혼자로서는 불가능하였으나 마기를 매개로 하여 그 규모를 키움으로써 가능해지는 지옥귀들의 비장의 수법.

이 수법을 사용하면 인간으로서의 부분이 옅어져 다시는 암약할 수 없게 되니 자제해야 했지만 이번은 그러지 못했다.

저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놈을 무한한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잡아먹음으로써 위대한 악마에 한 발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또, 순수하게 짓밟고 싶었다.

아까와는 다르다.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개체와 그렇지 못한 개체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으니까.

"절망하고 또 절망해라. 아니. 절망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더 좋다. 그렇게 저항하고 또 저항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될 것이다."

"절망하고 또 절망해라. 아니. 절망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더 좋다. 그렇게 저항하고 또 저항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될 것이다."

조장은 앞으로 있을, 그동안 무수히 경험해 왔던 열락을 기대하는 눈으로 번들거렸다.

얼마나 많은 절망을 씹어삼켜 왔던가. 오늘은 그 무수히 경험했던 양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식의 쾌락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령은.

"…자랑스러운가 보구나."

"크흐?"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짓을 수없이 저질러 쌓은 그 힘이, 그렇게나 자랑스러운가 보구나."

담담히 말했다.

조장은 캬하하학 크게 웃었다.

"그래! 자랑스럽지! 이것이 힘이다! 위대한 존재에게 하사받은! 비할 데 없이 위대한 힘!"

그리고 악마의 형상을 한 지옥귀 두 마리가 덤벼드니 도령은 몸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쿠드득.

"……!"

딛고 있던 '늪'이 굳으며 걸음을 내딛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곳을 가득 채운, 땅을 덮어 버린 검은 늪을 구성하는 것이 지옥귀들에게서 기인한 마기였으니까.

이곳의 마기 전체가 또한 놈들의 육체의 연장이었다는 말이다.

그 육체의 연장에 붙잡힌 도령은 그러니까 무공으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싸움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잡아먹힐 것 같았다.

깨달음을 얻어 백타의 극의에 닿았음에도, 악마화한 지옥귀를 지금은 무공으로써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행이라 생각했다.

신녀와 홍련이 이 지옥귀들에게 붙잡혀 비극으로 끝나는 미래를 막을 수 있는 바로 지금, 이곳에 자신이 있음을.

훅!

마기를 머금어 번들거리는 지옥귀의 손톱이 검을 대신하여 가까워진다.

지금 경지의 무공으로는 거기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도령은 바로 지금 여기서 결코 패배하여서는 안 되었으니.

화륵!

마기보다 검은 불꽃이 피어나며 그 손톱을 막았다.

카앙!

"……!!"

도령의 발밑에서 퍼져 나간 검은 어둠, 불사자의 어둠에서 일어난 그것은 귀화병이었다.

텅 빈 안와에 눈동자 대신 죄 지은 영혼을 태워 일으킨 불꽃을 피워 올린 귀화병이 무장기가 아닌 영혼을 태우는 불꽃을 직접 두르고서는 지옥귀의 손톱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화악!

"……!!"

악마화하여 초월의 영역에 이르렀기에 '볼 수 있었던' 귀화병을 구성하는 것에 경악한 지옥귀가 맞부딪쳤던 검에서부터 시작하여 팔에까지 내달리며 치솟는 불꽃에 다시 경악하여 몸을 뒤로 날렸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자신의 팔을 잘랐으니 화악, 팔을 태우던 불꽃이 바닥에 늪처럼 깔린 마기에까지 옮겨 붙었다.

화르륵!

불꽃이 꺼지지 않고 번져 나간다. 삽시간에 몸을 불리며 일렁인다.

그렇게 불꽃을 키우고 번지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마기라는 걸 지옥귀들은 초월의 영역에 이른 지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어냐. 너는……!"

눈앞에 있는 것을.

지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결코 꺼지지 않을 이 무시무시한 불꽃이 일렁이는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이제서야, 정말로 이제서야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도령이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놈들은 알았다.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감히 그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아득한 곳에 도령이 있다는 말이었으니 다시 두려움이 놈들을 내리 눌렀고.

스으-

도령의 종지부를 결심한 눈이 악마를 꿰뚫었다.

악마화한 지옥귀들은 몰랐으나 그것은 되감겨 사라진 미래에서 악마들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두려워한 시선이었으니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시선이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

사라진 미래에서 그것은 가장 많은 악마를 죽인 자의 칭호였고 또.

스으-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공포였다.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