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초월(超越)의 영역.
그것은 말 그대로 생명 본연의 타고나는 한계를 넘어선 영역을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나 법칙을 넘어섰다는 것이니 이 초월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 상식과 법칙이 뒤틀리고 부정당하는 탑의 '심층(深層)'에 도전할 자격을 갖추는 것이 되었다.
초월자(超越者). 혹은 트랜센더(Transcender).
그들은 탄생부터 초월의 영역에 있는 초월종인 드래곤에 버금가는 자들이었으니 지금.
악마에 최대한 가까운 존재가 된 지옥귀들은 바로 그 초월자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인간은 깃들일 수 없는 마기를 깃들이고 그것을 하나로 연결하여 개개의 역량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규모의 마기를 이룩한다.
그로써 상식과 법칙. 섭리를 넘어설 수 있었으니 악마에 최대한 가까워진 지옥귀들은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그 힘을 다루는 수준이 초월의 영역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수준이라 해도 서 있는 위치만큼은 그러했으니 초월자의 눈으로 귀화병을 볼 수 있었고 지옥귀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륵.
텅 빈 안와에 영혼을 태워 일으킨 불꽃을 밝히고 있는 저것이. 심장 대신 타오르는 불꽃으로 영혼을 태워 발생하는 힘을 동력으로 삼은 스켈레톤이.
도대체 어떻게 영혼을 고정하고 또 어떻게 영혼을 태워 힘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초월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기초적인 거대한 섭리'로는 도저히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저것은 단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보아도 알 수 없어 두려운 섭리로 만들어진 스켈레톤이 어디까지나 이해할 수 없는 섭리로 만들어진 것일 뿐 그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다는 거였다.
콰앙!
그러니까 망설임없이 행동한 두 마리 지옥귀의 공격에 거대 맹수와 닮은 거대한. 유독 커다란 덩치의 스켈레톤은 단지 검을 들어올릴 수 있었을 뿐 속수무책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제아무리 대단한 섭리로 만들어졌다 해도 소체가 '평범한 스켈레톤'이어서야 부수는 것은, 단순히 부수는 것을 넘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던 거다.
비죽-
예상대로의 결과에,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쉬웠던 일에 하나가 된 지옥귀들이 동시에 입가를 주욱 찢어 웃는다.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웠으나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몇 번이고 부숴 버리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화륵!
"……!"
맞닿았던 순간 옮겨 붙었던 불똥이 삽시간에 커지며 두 마리 지옥귀의 팔을 내달렸다.
마치 기름에 절여진 것에 불이 번지듯 단숨에. 도저히 꺼지지 않을 기세로.
서걱!
지옥귀들은 망설임없이 타오르는 팔을 잘라냈다.
그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또 간단한 해결법이었다.
인간이 아닌 악마에 가까운 지옥귀들의 육체는 팔을 잘라내는 것에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츄하학!
또한 삽시간에 새로운 팔이 돋아났으니 신체의 결손 같은 문제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조심하였으나 설령 다시 한 번 불이 옮겨 붙는다 하여도 이럴 생각으로 망설임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하학!
떨어뜨린 팔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으니 여유롭게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
훅!
처음 번지는 불이 아니었다.
이미 아까 잘라낸 팔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해일처럼 일렁이고 있었는데 거기에 또 하나의 불길이 번지는 것이다.
화악!
심지어 그것이 바닥만이 아닌 허공에서까지 일어나 번지니 지옥귀들은 깨달았다. 마기를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저 불꽃은 마기가 사라질 때까지 꺼지지 않는 것이란 걸.
'회수해야 한다!'
지옥귀들은 그것을 깨닫자마자 즉시 행동하여 일대에 퍼뜨렸던, 유리한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퍼뜨렸으나 독이 되어 버린 마기를 삽시간에 회수했다. 하지만.
화악!
그것은 이미 한참이나 늦어 있었으니 정신을 차린 순간. 인지한 순간에는 이미 늦어 버린 해일처럼 번져 있는 불은 꺼지지 않을 거대한 화마(火魔)가 되어 있었다.
화르륵!
"……!"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대가리를 쭈욱 뻗는 맹수처럼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옥귀들은 감히 그것을 마주하지 못하고 거리를 벌려야 했으니 닿는 순간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이 붙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결코 닿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저것은 정말로 위험한 것이니 상대해서는 안 된다.
초월의 영역에 이르렀기에 저것이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위험한 것이란 걸 본능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또 판단했다.
저 불꽃이 아닌. 저 불꽃과 불꽃을 다루는 스켈레톤을 일으킨 원인인 도령을 제거해야 한다고.
훅!
판단한 순간 지옥귀들이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하나가 아닌 전체가.
도령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 기묘한, 거대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던 무공은 부정할 수 없이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을 구사하는 도령이 '초월하지 못한 인간'이었으니 악마화한 지옥귀 전체가 덮치면 단 한 수조차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정확한 판단이었고 실제로 도령이 무공으로써 대항하려 했다면 계산대로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악!
"……!!"
지옥귀들은 단 한 수면 충분했을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다급히 몸을 날려야 했으니 불꽃이 덮쳤기 때문이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도령을 중심으로 하여 불꽃이 지옥귀들을 노리고 몰아쳤으니 공격을 계속했다간 재가 되어 버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은…….'
지옥귀들은 등줄기를 서늘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처음 치솟아 번진 불꽃은 두려웠으나 다만 발생하여 일렁였으니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옥귀들을 위협한 불꽃에는 틀림없이 의지가 깃들어 있었으니 지옥귀를 능동적으로 노리는 위협이 되어 있었다.
화륵.
그렇게 일렁이는 불꽃 저 너머에 도령이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지옥귀들은 다만 '무언가'라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나무의 뿌리가 얽히며 양끝에 희고 검은 구슬을 감싼 듯한 지팡이.
그것은 불꽃을 다루는 기묘한 스켈레톤보다도 아득한 영역에 있는 것이었으니 아예 '보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
첫 번째 삶에서 도령을 상징하는 아티팩트였던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에 심지어 세계수의 살아있는 뿌리와 생명의 정수까지 더해져 탄생한 그야말로 지고의 아티팩트.
초월의 영역에 있는 지옥귀의 눈으로도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것을.
스으-
도령이 손에 쥐고 호흡하고 있었다.
호흡에 따라 기운이 내부를 순환한다.
기운은 찬란한 생명의 찬가와 같은 연신기와 인간을 포근하게 감싸는 어둠을 닮은 사령기를 동시에 품고 있었으니 나선을 그리며 하나 되어 흐르는 기운의 흐름은 경이롭다.
스으-
그리고 그 경이로운 기운의 흐름에 생명의 정수와 사령기의 정수를 동시에 엮고 있는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가 공명하니 외부와 연결되고 흐름이 외부에까지 확장한다.
화륵!
그로써 외부와 연결된 도령은 마기를 태우는 불꽃마저 흐름의 안에 두니 염열지옥의 주인이 되었다.
화륵!
염열지옥(炎熱地獄).
몸에서 불꽃이 일어나 몸을 태우는 고통을 주는 지옥이니 이 초월적인 불꽃은 그야말로 악마조차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죄 지은 자들의 공포 그 자체였다.
가장 많은 악마를 죽인 네크로맨서.
그리고 그 네크로맨서가 악마를 태웠던 불꽃의 지옥.
일전에는 일으킬 수는 있었으나 다루지 못하여 불완전했던 그것을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지금은 온전히 다룰 수 있었으니 마침내.
화륵!
염열지옥이 마침내 온전히 강림한 것이었다.
……따닥.
저도 모르게 덜덜 떨어 이를 부딪친 지옥귀가 있었다.
초월의 영역에 이르렀기에 염열지옥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볼 수 있었고 그렇게 아는 것이 독이 되어 잠식하는 공포에 잡아먹힌 것이었다.
따닥. 따다닥.
그리고 군체가 된 지옥귀들에게 그 공포가 퍼져 나가니 도령이 묻는다.
"인과응보라는 말. 알아?"
이것은 귀화병이 되어 죽어서도 영혼이 타는 고통으로 죗값을 치르고 있는 마골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염열지옥의 불꽃은 잡아먹은 죄의 크기만큼 타오른다.
또한 염열지옥의 불꽃은 잡아먹은 죄의 크기만큼 거세고 뜨겁다.
스스로 지은 죄의 크기만큼 감당을 해야만 하는 것.
죄 지은 자일수록, 더 커다란 죄를 지은 자일수록 그것을 감당케 하는 마스터 네크로맨서를 두려워 하였으니 악마들이 가장 두려워 하던 것이 신도 아닌 도령이었던 것이다.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 악마가 되기 위하여 상상할 수도 없는 죄를 지은 지옥귀들은 그렇기에 심판을 위해 내려온 신보다 더 불꽃 가운데 선 도령이 공포스러웠다.
이제 의미없는 이야기지만.
놈들은 차라리 철저하게 무공으로 싸워야 했다.
철저하게 무공으로 싸웠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놈들과 싸우며 성장하고 깨달음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이른 도령이었으나 그럼에도 지옥귀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도령 또한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육체를 믿고서 목숨 걸고 싸워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놈들은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로써 싸우려 하였으니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절망에 내몰리게 되었다.
도령에게 있어 무공이란 아직 미숙한. 이제서야 오롯이 서서 나아갈 길을 알고 걷기 시작한 힘이었다.
그러나 도령에게 있어 네크로맨시란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한 번 정점에 이르렀던 힘이었으니 지옥귀들은.
따닥.
따다닥.
묻는 말에 대답은커녕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마스터 네크로맨서로서의 도령을 마주하고 만 것이다.
스으으-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를 쥔 도령은. 가장 많은 악마를 죽였던 염열지옥을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된 도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종지부를 찍기로 하였으니 저 끔찍하고 추악한 것들을 향해 염열지옥의 불꽃이 수축하기 시작하였고.
"캬아아아아악!!"
공포에 이성을 잃은 하찮은, 악마를 닮은 죄 지은 것들이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도령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화악!
그 죄 지은 것들이 도령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완전히 수축한 불꽃의 장벽 바깥으로 나온 것은 그 형체만을 겨우 유지한 재뿐이었고.
사아아-
그나마도 단번에 흩날려 흩어졌다.
그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것을 모두 태워 버리고서야 불꽃이 사그라들었으니 염열지옥이 사라졌고 잿더미가 된 자리에는 작은 검은 구슬들이 반쯤 묻혀 있었다.
그것은 저승으로 떠나는 영혼이 남긴 원(怨)과 한(恨)이 뭉쳐 만들어지는, 귀화병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인 형옥(刑玉)이 아니었으니 오로지 추악한 기운과 감정이 뭉쳐 만들어지는 흉옥(凶玉)이었다.
염열지옥의 불꽃에도 사라지지 않은 죄의 정수.
푸푸푹.
-끄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도령의 네크로맨시가 추악한 영혼을 꿰뚫어 붙잡았다.
가장 처음 재가 되어 흩어졌던 11번부터 1번 조장까지 열 하나의 영혼이다.
마기에 물들고 악마에 가까워진 육체는 스켈레톤의 소체로도 쓸 수 없었다.
심지어 영혼마저 마기에 절어 평범하게는 쓸 수 없는 더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들도 쓸모가 있었으니 도령은 죽어서도 도망치지 못할 끔찍한 형벌을 그 영혼에 내렸다.
푸욱-
-꺼헉?
검은 흉옥이, 이승에 있는 것이 도령의 손에 의해 이승을 떠났으나 저승에 가지 못하고 붙잡힌 영혼에 쑤셔 박혔다.
꾸드드드드득-!!
그리고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래서는 안 될. '질량이 없는' 영혼이 끔찍하게 구겨져 흉옥에 갇혔으니 스스로 지은 죄의 결정에 갇힌 영혼을 도령은 망설임없이.
화륵!
-끄으아아아아아아악!!
귀화병 안의 타오르는 불꽃에 쑤셔 박았다.
너무나 끔찍한 비명과 함께 흉옥을 품은 귀화(鬼火)가 전과 비할 수 없이 거세게 타올랐으니 이것은 그래.
귀화병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었다.
61
되감겨 사라진 전생에서.
심층 그 너머 탑의 기원을 향해 나아가던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군단은 하나의 세계라 하여도 감히 전쟁을 마음먹지 못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그 정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군단을 구성하는 가장 아래의, 말단의 병사인 귀화병마저도 불사를 자랑했으며 죄 지은 자에게는 염열지옥의 불꽃을 휘두르는 공포의 첨병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귀화병은 그렇지 못했으니 도령의 네크로맨시가 아직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소체의 문제가 가장 컸다.
당장 이번 싸움으로 인해 더는 일으킬 수 없게 된 거대 맹수 몬스터들의 사체부터가 그렇다.
이미 죽은 것을 일으켜 부리니 언데드에게 있어 두 번의 죽음은 없다.
그러나 소체, 언데드를 구성하는 몸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면 평범한 네크로맨서들이 그렇듯 지금 도령의 네크로맨시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부서지고 재생하기를 반복하면 소체가 열화하여 결국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귀화병은 마스터 네크로맨서였던 도령을 상징하는 군단의 병사였으나 그 소체가 '평범한 뼈'여서야 제아무리 네크로맨시로 커버해도 한계가 있었다.
귀화를 두르고 무장기로 강화한다 해도 결국 평범한 뼈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전생의 수준에 이르는 귀화병을 만들기 위한 소체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그 방법이 바로.
-끄으아아아아아악!!
죄 지은 영혼이 스스로의 죄에 갇혀 만들어지는 흉옥(凶玉)이었다.
흉옥은 그 이름대로 흉악한 옥이다.
끔찍하고 추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것들이 뭉쳐 만들어지는 정수에 그 원인이 된 영혼을 가둔 것.
그렇게나 흉악한 것이기에.
화아아아아악!!
죄 지은 것을 장작으로 하는 귀화(鬼火)를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게 만들 수 있었다.
-끄으아아아아악!!
염열지옥은 죄를 태우는 귀화의 불꽃이다.
그 귀화가 죄를 태워 만들어내는 힘으로 움직이는 귀화병은 그렇기에 귀화와 귀화가 태우는 것이 만들어내는 힘에 비례하여 강해지는데 지금 악마에 지극히 가까운, 비할 데 없이 최적의 장작이 떨어졌으니 전에 없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재앙의 정수부터 시작하여 이번 지옥귀까지 몇 번 되지 않았던 싸움이 그러나 너무 버거웠기에 사실 귀화병 또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귀화의 장작이 되었던 마골 등의 죄 지은 영혼은 물론이요 평범한 소체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이런 식의 싸움이 한 번만 더 있었다면 중간에 더는 일으키지 못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한데 그 불꽃과 소체가 되는 뼈에 죄 지은 영혼들에게는 절망적이게도 새로운 힘이 깃든다.
화아악!
-끄아아아아아악!!
흉옥에 의해 살아나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귀화가 더 높은 차원의 힘을 영혼과 소체에 깃들이니 죄 지은 영혼들은 더욱 오래, 더 거세게 타오를 수 있게 되었고.
끼리릭.
귀화병의 소체가 된 뼈 또한 더 높은 차원으로 '탈태'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그것은 연신극기공. 천마신공의 단련공인 연신극기공에 비유하는 것이 천마신공을 전수해 준 스승인 천마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가장 적절했다.
한계를 거듭 넘어 더욱 단단해지고 그럼에도 더 유연해졌으며 탄성이 있었으니 인간의 뼈에서 상위 차원의 다른 것으로 승화(昇華)했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스으으-
그리고 그렇게 승화한 뼈 위로 검은 기운이 스며들고 이내 쌓여 갑주의 형태를 이루었으니 그것은 귀화의 힘을 깃들인 갑주를 두른 언데드.
흔히 말하기를 '데스 나이트(Death knight)'가 되었다.
귀화병들이 일개 스켈레톤에서 엘리트 몬스터라 불리는 상위 개체인 데스 나이트가 된 것이다.
비록 전생에서의, 하나 하나가 '왕'의 클래스였던 때에는 비할 수 없겠으나 여덟 마리 귀화병이 모두 데스 나이트 클래스가 되었으니 아마도 머지 않아 큰 싸움을 해야 할 도령에게 있어선 충분히 호재라 할 수 있었다.
사실 데스 나이트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연차의 네크로맨서가 비장의 수단으로 삼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탄생한 여덟 마리의 데스 나이트, 그것도 귀화병이 도령의 발밑으로 퍼져 나가는 불사자의 무덤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여덟 개의 흉옥을 소모하였으니 남은 세 개의, 지옥귀의 영혼을 가둔 흉옥 세 개를 든 도령이 인벤토리를 열었고.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놀랍게도 그 안에서 피어나는 난초를 닮은 소녀와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나왔으니 다름 아닌 신녀와 홍련이었다.
그래. 신녀와 홍련은 도령의 인벤토리 안에 있었던 것이다.
객잔에서 지옥귀들이 감지했던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하게 만든 기묘한 느낌은 도령이 신녀와 홍련을 인벤토리에 감추는 과정이었다.
설마. 겨우 이런 곳에서 도령이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놈들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옥귀들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던 둘은 제법 오래 도령을 걱정한 듯한 기색이었는데 실제로 적지 않은 시간 도령을 걱정하였으니 다른 차원인 인벤토리 안은 탑과 같은 속도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 안에 들어오기까지의 시간이 짧긴 하였으나 탑 바깥에서의 시간이어서 두 사람은 상당한 시간을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도령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공자님!"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공자님이라 부르기로 호칭을 정했던 신녀가 빠르게 다가와 도령의 손을 붙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가슴팍과 팔까지 어루만지고 싶은데 남녀가 유별하고 내성이 없는 신녀는 이 상황에서도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다만 시선만큼은 강렬했으니 도령은 여기저기 찢긴 자신의 복장을 그제서야 자각한다.
'음.'
하긴. 놀랍게도 그 격전에서도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도령이었으나 옷까지 다 지키진 못했으니 옷이 말 그대로 넝마가 되었다.
겉만 보면 만신창이로 보일 법도 하다.
"진정하세요, 신녀님. 피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잖아요?"
"아……."
그 말대로 도령에게서 피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자 그제서야 진정하고서, 그러나 도령의 손을 꼭 붙잡은 자신의 두 손을 자각하고서 다시 얼굴을 붉히며 신녀는 주춤 한 걸음을 물러났다.
……흘끔.
그리고 찢긴 옷 사이로 드러난 근육을 어디까지나 상처를 입진 않으셨나 확인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하며 몰래,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신녀를 그저 충직하게 보좌하며 홍련은 감탄했다.
경이로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그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홍련은 전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남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흔적과 잔류하는 기운이 홍련으로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영역에서의 싸움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기에.
그런 싸움을 하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 말하며 미소짓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도령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감탄하고 경이하는 것이다.
마침내 나타난. 천마신교의 견딜 수 없는 공백을 채워줄 후예는 이토록 강하구나.
도령은 얼굴을 붉히는 신녀와 눈동자에 경이가 그득한 홍련을 마주하여 빙긋 웃었다.
그리고 조금 진지한 얼굴이 되어선 말했다.
"그럼, 말씀 드린 대로 움직이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 * * *
도령을 추적해 탑까지 들어갔다 돌아온 지옥귀들은 여전히 흑안방의 멸문이라는 큰 사건에 웅성이는 인파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뒷번호의 지옥귀들과 합류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윗서열인 12번 지옥귀가 조장의 말을 전달하고 다른 지옥귀들을 이끌었다.
-멀리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여전히 객잔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은밀히 동행한 잠마대원들을 동원하여 객잔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하고 주변에 천라지망을 펼쳤다.
대놓고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무려 천마신교 최고의 은밀부대인 잠마대와 어지간한 무녀 따위는 우스운 지옥귀가 펼친 천라지망이었으니 신녀와 무녀 하나 정도는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없다고?"
"예. 흔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일다경(一茶頃).
말 그대로 차 한 잔 마실 시간만에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거라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객잔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리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한식경(食頃). 그 두 배의 시간인 30분이 지나고 한 시진(時辰), 두 시간이 지나서도 그 어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자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12번 지옥귀를 흔들었다.
두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작정하고 포위망을 펼친 채 수색하는 것이 지옥귀와 잠마대였으니 말이다.
신녀와 홍련의 수준을 생각할 때 이 시간이 지나서도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렇게 하루가 지나 버리자 12번 지옥귀는 일이 틀어졌다는 걸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해야 한다.'
조장을 포함한 상위 서열의 지옥귀들이 아직도 탑에서 나오지 않은 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상위 서열 지옥귀 열 하나가 어린 놈 하나 따위에게 진다는 가능성 따위는, 12번 지옥귀에게 있어 차라리 누군가가 탑의 기원에 닿아 소원을 이루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영겁에 달하는 고통을 그 어린 놈에게 주고 있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그랬기에 빠르게 달려가 현장에 도착한 지옥귀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곳에는 상위 서열의 지옥귀들이 없었다.
다만 무언가가 타고 남은 잿더미가 일부 흩어져 있을 뿐.
그리고 그 잿더미들의 근처에서 또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바로 그곳에 신녀와 무녀의 흔적이 있었다.
"뭐란 말이냐."
12번 지옥귀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김도령'이란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 12번 지옥귀는 도저히 진실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원히 정답에 도달할 수 없는 고민을 하다 결국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왔으니 인원을 나누어 절반은 탑에서 발견된 신녀와 무녀의 흔적을 쫓고 또 절반은 대기하며 잠마대를 통하여 본단에. 제사장에게 상황을 보고하였으니 하루를 더 소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소비하며 머물던 객잔에서 믿을 수 없는 소문을 들었으니 놓쳤던 신녀와 무녀의 행방이었다.
"자네, 들었나?"
"무얼?"
"그…… 천마신교의 신녀께서 저기 흑안방의 멸문 때문에 친히 무림맹에 방문하셨다고 하는군."
"그 신녀께서, 직접 말인가? 사실인가?"
'뭐라고?'
"그래! 참이지! 내 어찌 감히 신녀님을 입에 담으며 거짓부렁을 하겠는가!"
"허어……."
"정월 지부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신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보았다더군."
"정월 지부면 바로 근처이니 곧 여기까지 오실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천마제 때문에 바쁘실 텐데 설마 여기까지 직접 왕림하실 줄이야……."
보부상과 마을 주민의 대화를 들으며 12번 지옥귀는 조금, 머리가 덜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객잔에서 사라진 신녀가 3일 거리의 다른 마을에 있는 무림맹 지부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거야 탑의 길을 이용하였다고 하면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으나 자신들 지옥귀의 존재를 알아채고서는 도주한 신녀가 지근거리의 무림맹에 '친히 방문하였다'는 소식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피식-]
12번 지옥귀는.
[뻔한 유인에 당한 걸 아직도 모르겠어?]
도령이 피식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62
-형월 지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도령은 말했다.
이곳, 흑안방이 있던 신강의 형월을 관리하고 있는 무림맹 지부는 관아와 더불어 믿을 수가 없다고.
은밀함이 특기인 악마를 숭배하는 악마 숭배자들은 또한 은밀하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었으니 형월의 무림맹 지부와 관아는 이미 상당 부분 악마 숭배자들에게 먹혀 있었던 거다.
놈들이 암약하고 있으니 지옥귀와 잠마대가 더욱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그 뒤처리마저 어영부영 늦어지는 판국이다.
도령은 이곳이 이미 이 시기부터 악마 숭배자들에게 잠식당해 있다는 걸 전생에서의 기록을 보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흑안방을 조사하러 나온 무림맹과 관아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거다.
그러니까.
-정월 지부로 가야 합니다.
[너무 완고하여 설득의 여지가 없음.]
[멸문시켰다.]
전생에서의 기록에서 또한 보았던 것으로 머지 않아 멸망하는 정월 지부에 관한 기록이었다.
이곳 형월 지부와 달리 정월 지부를 관리하는 자들은 너무나 완고하여 악마 숭배자들이 파고들 여지가 없었고 결국 멸문시켰다는 내용.
그 내용에 따라 정월 지부는 믿을 수 있었으니 도령은 탑의 길을 이용하여 정월의 무림맹 지부로 방향을 잡았다.
가는 길에서의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도령에게 속아 지옥귀와 잠마대가 전혀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었으니까.
무려 조장을 포함한 상위 서열의 지옥귀들이 향한 방향, 그것도 탑은 철저하게 비어 있었으니 쉼없이 달릴 수 있었고 탑의 시간으로 며칠과 무림에서의 시간으로 한나절이 지났을 때.
사박.
"헉."
"신녀님!"
조용한 마을이었던 정월에 신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박.
거창한 호위대는 없었다.
구중궁궐을 압축한 수준인, 이동 요새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티팩트의 영역에 있는 가마에 타지도 않았다.
다만 한 명의 무녀만이 수행하고 있을 뿐인 신녀는 그러나 오롯이 스스로의 존재감으로 길을, 마을을 가득 채웠으니 과연 한 세계를 대표하는 자로서의 신비로운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귀하디 귀한 신녀만을 위한 복장을 두르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외모를 숨기는 특별한 면사를 썼음에도 그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장엄한 존재감이 전혀 가려지지 않는다.
거기에 오직 신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한 걸음 물러나 수행하는 무녀까지도 그 차가운 아름다움이 가려지지 않으니 신녀와 무녀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마을을 가득 채웠고.
"어서 오시오, 신녀."
정월 지부에 도착했을 때엔 입장상 '님'을 붙이지 못했으나 태도만큼은 더없이 정중한 무림맹 정월 지부장이 정문 앞까지 구성원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 * * *
정월 지부의 응접실.
지부는 물론이요 담장 너머 모인 마을 사람들의 관심까지 집중된 가운데 지부장인 중년의 남성은 찻물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부담감으로 그득한 속을 숨기며 신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신녀(神女).
뭉뚱그려 단순하게만 따져도 무림맹의 맹주와 동등한, 상징적인 면에선 오히려 그 이상이었으니 겉모습이 아름다운 소녀라 해도 작은 마을의 지부장이 마주하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나 부담스러운 신녀에게 지부장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고.
"이번에는 어쩐 일로 왕림하셨습니까."
"흑안방의 멸문과 관련하여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흑안방을 멸문시킨 것은 악마 숭배자들입니다."
"……!!"
주르륵.
어찌나 놀랐는지 나름 작은 마을에서는 고수 행세를 할 수 있는 지부장이 들고 있던 찻잔에 신경을 쓰지 못해 찻물이 주르륵 흘렀다.
만약 수련을 게을리 했다면 머금고 있는 찻물조차 주르륵 흘렸을 지경이다.
그만큼이나, 악마 숭배자란 단어가 충격적이었다.
도령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악마 숭배자들은 그렇게까지 간단히 언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전염병을 만들고 퍼뜨리는 자들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그런 악마 숭배자를, 무림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하나인 신녀가 언급했다.
"그리고 악마 숭배자들은 아직 떠나지 않았으니 이 주변에 숨어 있습니다. 이곳 정월 지부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급히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신녀가 직접, 도대체 왜 이곳까지 제대로 된 수행원들도 없이 왔는가.
지금도 그것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었으나 하나만큼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흑안방을 멸문시킨 것이 악마 숭배자들인데 그들이 아직 떠나지 않았으며 이곳 정월 지부까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런 말을 신녀가 아니고서야 단번에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정월 지부장은. 작은 마을의 평범한 무인인 지부장은 그러나 결코 악마 숭배자들에게 굽히지 않았던 자로서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
소문은 천리마보다 빨라서 작은 마을에 신녀가 모습을 드러낸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퍼지기도 전에 더 빠른 소문이 퍼져 나갔으니 천마신교의 앞마당이라는 신강에 충격적이게도 악마 숭배자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 악마 숭배자들이 바로 흑안방을 멸문시킨 자들이었다는 내용이었으니 이 소문이면서 정보를 무림맹 정월 지부는 관아는 물론이요 유니온에도 공유하였고.
"…알겠습니다."
유니온에 공유된 정보는 이미 지구와 무림을 오가며 악마 숭배자들을 추적하고 있던 엘프.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에게도 흘러들어갔다.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추적대의 장비를 점검하고 물자를 보충하였으니 이유는 명백했다.
[무림에서 만나요, 플레루스틴.]
"무림으로 가겠습니다."
* * * *
신녀가 무림맹 정월 지부에 방문한 다음날.
지부에 또 한 번 큰 손님이 방문하였으니 다름 아닌 신녀의 수행원들이었다.
[늦지 않게 저의 수행원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사안이 급박하여 먼저 왔다는 신녀의 뒤를 따라 악마 숭배자들의 흔적을 조사한 수행원들이 시간으로 따지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착한 것이었다.
그 수행원들이란.
"언니!"
"신녀님! 무사하셨군요."
외부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친언니를 만난 듯 안겨오는 신녀를 친동생처럼 안아 주는 '주소연'이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단아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소녀.
도령과 처음 만났던 때의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던 '주련화'의 모습이 아니라 신녀보다 겨우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본래의 모습을 한 그녀가 바로 신녀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집법당 당주의 손녀이자 신녀의 언니가 되어 주었던 소녀였다.
"다행이에요, 언니."
"신녀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녀는 정말로 다행히, 도령이 말했던 대로 무사했다.
습격이 있었던 때에 늦지 않게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때에 만일을 대비하여 마련해 두었던 안전가옥에서 믿을 수 없게도 신녀가 무림맹 지부에 나타났고 수행원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어느 정도 의도하여 낸 듯한 소문에 흑안방의 생존자들과 함께 날듯이 이곳으로 달려와 신녀와 재회했다.
중간에 습격자들을 만나 목숨을 건 사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다졌는데 기묘하게도 포위망에 숭숭 구멍이 뚫려 있어 싸움 없이 올 수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계신 겁니까."
해야 할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주소연은 우선 그것부터 물었다.
결코 이곳에 신녀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에 대한 신녀의 대답은 믿을 수 없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천마의 후예님을 만났어요, 언니."
"……네?"
"교내에, 악마 숭배자들이 있었어요. 그 우두머리가 제사장이었어요."
"……네?"
"언니. 우리는 천마제를 열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해요."
"후예님께서 그 자리에서 천마신검으로 자신을 증명하실 거예요."
"……네?"
주소연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신녀가 해 주는 이야기를 그러나 절반도 믿을 수가 없었다.
* * * *
"……어머."
문득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리며 놀라는 건 수수한 시녀복의 소녀였다.
또한 시녀복만큼이나 수수하게 보이는 듯 했던 외모가 다음 순간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되니 말도 안 되게 매력적이고 또 아름다운 소녀였다.
한 번 시선이 가면 다시는 눈을 떼지 못하게 될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그 이상의 매력이 깃들어 있다.
시녀복을 두른 소녀가 지니기에는 너무나 대단한, 아니 자연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차라리 저주의 영역에 있는 아름다움과 매력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괴이한 소녀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건 와야 할 영혼이 오지 않아서, 였다.
그래. 계약에 따라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녀의 수중에 떨어져야 할 영혼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계약이 끊기고 '강탈당했다'는 것을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범하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녀. 그냥 악마도 아니고 '고위 악마'인 그녀와 계약한 영혼을 평범한 방법으로는 강탈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또 깨닫는다.
"…나의 공백을 채워 줄 이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구나."
빙긋-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 매력적인 입술로,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검고 깊은 눈동자에 애타는 기다림을 가득 채우며 그녀는 말했다.
"어서, 만나고 싶구나."
그리고 방을 나서는 그녀는 다음 순간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으니.
"…신녀를 놓쳤다 합니다."
"뭐라고?"
분노하는 제사장의 앞에 부복하여 잠마대원으로서 보고했다.
* * * *
무총(武塚).
죽여도 죽여도. 심지어 시체를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태워 재로 만들어도 끊임없이 나타나 덤비는 무림인 언데드가 끝없이 나와 끝없는 악몽이라고까지 부르는 던전.
그 무림인 언데드와 끝없이 싸워 무공 모듈을 각성하길 바라는 '쥐뿔도 없는' 지구인이 아니고서야 이렇다 할 이득이랄 게 없어 버려진 던전이다.
그나마도 대상이 언데드이다 보니 제대로 된 무공을 경험하거나 대련하며 배울 수 없으니 말 그대로 엉망인 삼류 무공 모듈 정도나 각성하게 되니 말이다.
그 정도라면 차라리 돈을 모아 삼류 무관에라도 가는 게 낫다.
그러한 무총에.
버려진 던전이었기에, 심지어 이 무총에 묻힌 것이 사실은 멸망의 시대 승천한 천마를 믿고 따르던 '마지막 세대' 무인들이라는 걸 알았던 천마신교의 교인들조차 몰랐던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서벅.
도령이 섰다.
-정월 지부로 가야 합니다.
도령은 신녀와 홍련을 무림맹 정월 지부로 보내고서 자신은 따로 움직여 탑을 나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향했으니 다름 아닌 무총이었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그곳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천마가 아쉬워 했던 바로 그 무총에 늦지 않게, 아주 이르게 입장하였다.
하아아아아…….
그리고 나타난 언데드를 마주하여 스으, 자세를 잡았다.
천마를 믿고 따르던 마지막 세대의 무인들을 만날 시간이었다.
63
무림의 신강이 아닌 탑에서의 정월로 가는 길을 도령은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무총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니 미리 알아 두었다.
홍련도 탑에서 정월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신녀를 모시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았으니 일대의 지리를 외우는 건 당연히 해야 할 기본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도령과 신녀, 홍련은 표국도 잘 오갈 일이 없어 흐릿해진. 지도가 있어도 찾기 어려운 길을 멈추지 않고 찾아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의 갈림길에서 도령은 무총으로 신녀와 홍련은 정월로 가야가는 갈림길에서 망설임없이 갈라졌다.
정월로 가는 신녀와 홍련을 도령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굳은 심지를 지니고 결코 꺾이지 않을 신녀와 홍련이 잘 해나갈 거라고 도령은 흔들림없이 믿었으니까.
신녀도 도령을 걱정하지 않았다. 도령이 천마신검을 쥐고서 자신을 증명하고 천마강림을 이룰 것을 틀림없이 믿었으니까.
그렇게 신녀가 믿는 도령이 며칠을 걸어 무총에 도착하였다.
무총(武塚). 무인들의 무덤.
그 던전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키는 이 하나 없이 다만 간소한 제단만이 있었으니 영혼을 위로하고 제사지내는 이 제단이 놀랍게도 천마신교의 신녀를 모시는 무녀들에 의해 세워지고 관리되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렇게 천마를 믿고 따르던, 잊혀진 마지막 세대의 무인들이 눈감지 못한 무덤에 도령이 망설임없이 진입했다.
사아아아아-
중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심해를 통과하는 듯한 감각이 스쳐가고 다음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니 던전의 내부는 황폐하고 오염된 평야였다.
단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인 평야. 그리고.
캬아아아악!
배회하던 언데드가 입구에서부터 덤벼드는 곳.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눈코입조차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빚다 만 찰흙 같은 형상의 언데드가 지독한 원(怨)과 한(恨)을 질척이며 손을 뻗는다.
평범한 이들은 그 지독한 원과 한에 지워지지 않는 오물이 묻은 듯한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캬아아아악!!
그리고 그런 언데드가 또 숨 막힐 듯한 투쟁심을 가지고 덤벼드니 며칠은 잊지 못할 짙은 감정의 찌꺼기가 남을 거다.
하지만 도령은 담담히 덤벼드는 언데드에 주먹을 내뻗었다.
투웅-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천(穿)
꿰뚫는 이치를 담은 주먹이 언데드의 내부에 있는 코어를 정확하게 꿰뚫으니 언데드를 움직이던 힘의 덩어리가 파괴되고.
퍼석.
언데드가 마른 흙처럼 무너져 부서졌다.
캬아아아악!!
그러나 습격은 끝나지 않았으니 배회하던 언데드는 하나가 아닌 수십이었기 때문이다.
캬아아아아악!!
수십이나 되는 언데드가 지독한 원과 한을 두르고서는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투쟁심을 다만 난잡하게 부딪쳐 온다.
도령은 그러한 언데드를 일일이 무로써 꿰뚫었다.
투웅.
투웅.
편리하게 상대할 수 있는 마법을 쓰지 않고 오직 주먹. 무공으로만.
그렇게 무공으로 언데드를 움직이는 코어를 부수며 나아가는 도령의 뒤로는 물기라곤 없이 마르고 썩은 흙과 같은 잔해만 남았으니 무총에 오는 이가 없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앞서 재앙의 정수가 있던 던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배회하다 모험가가 들어서는 순간 덮쳐드는 언데드들은 빈껍데기였다.
죽은 자의 육체가 아니었고 승천하지 못한 영혼이 깃들지도 않았다.
다만 지독한 원과 한에 오염된 유기물이 덕지덕지 붙어 움직일 뿐이니 평범한 모험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경험치'도 없고 떨어지는 부산물도 없다.
그런 것이 또 아무것도 없이 황폐한 평야를 배회할 뿐이니 사람이 오는 게 이상한 일이다.
탑에는 얼마든지 좋은 던전이 많았으니까.
도령은 그런 아무것도 없는 평야를 빈껍데기뿐인 언데드들을 묵묵히 부수며 나아갔다. 마치 선명한 길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이곳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멸망한 무림의 보존되지 못한 세계의 파편인 평야가 펼쳐져 있을 뿐이니 도령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사아아아아-
오직 도령이기에 볼 수 있는 원과 한의 흐름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었다.
언데드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원과 한이 뭉친 코어를 부수면 흩어지는 부정적인 감정이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었다.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이 없는 투쟁심만으로 움직이는, 이 끝없이 펼쳐진 듯한 평야를 채운 언데드들의 원과 한의 기원이 되는.
두근!
너무나 거대한 원과 한으로 뭉쳐져 있는 진짜 언데드를.
영혼을 볼 수 있고 영혼을 접할 수 있는 도령이기에 가늠하기 어려운 아득한 세월에도 색이 바래지 않은 너무나 거대한 원과 한을 마주하여 심장이 뛰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한 언데드이다.
두근!
그러나 그 언데드에 깃든 것이. 뒤로 펼쳐진 것이 하늘을 덮을 듯한 원과 한이니 바다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의 전체를 실제로 마주한 듯한 감각에 심장이 뛰는 것이다.
이 평야를 뒤덮은 빈껍데기의 언데드를 가득 채운 원과 한은 여기서 흘러나온 파편들에 불과했다.
타악!
그렇게나 거대한 원과 한을 영혼에 품은 언데드가 덤벼들었다.
부웅!
그리고 쏘아지는 주먹은, 솔직히 말해 엉망이었다.
원과 한의 규모만 보자면 한 도시의. 어쩌면 나라의 재앙이 될 수도 있을 법한 것을 품은 영혼의 주먹이라기엔 너무나 엉망이다.
백타의 극의인 서(緖)에 닿은 도령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 한 수에 코어까지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움직임.
그러나 도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느리고 부정확하며 불안정하기에 최대한 집중하여 그것을 '보았다'.
느리고 부정확하며 불안정한 주먹에 깃든 무의 이치를.
주먹에 담긴 무공이 본래 어떠한 선을 그리는지를 집중하여 봄으로써 볼 수 있었고 그에 맞추어 움직였다.
똑같이 느리게. 하지만 상대와 달리 선명하고 정확하게.
그럼으로써 상대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캬아아아악!!
그러한 도령의 주먹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령의 주먹을 상대하지 않고 언데드는 마구잡이로 엉망인 무공을 늘어놓는다.
도령의 선에 어우러지지 않고 제멋대로 그림을 망쳐 버린다.
퍽!
본래는 맞지 않아야 할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향하는 주먹이 도령을 때리기도 했다.
스으-
하지만 도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주먹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서두르지도 않았다.
언데드의 '본래 무공'을 느리고 선명하고 정확하게 피하고 받아내고 반격하는 무공을 수행했다.
옆에서 보면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광대 놀음으로까지 보였다.
마구잡이로. 대상조차 없어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투쟁심을 발산하는 언데드를 상대로 저게 무엇하는 짓인가.
오직 시간 낭비였고 다만 광대 놀음 같았으니 비웃음을 살 만한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보였다.
마구잡이로 휘적이는 듯한 언데드를 상대로 저 혼자 진지하게 허공에 무의 이치를 자아내고 있으니 귀하디 귀한 것을 진흙탕에 더럽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령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한 시간, 두 시간, 한나절을 넘어 하룻밤이 지나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지극한 천마신공의 이치를 그리고 또 그렸으니 어느 순간.
스으-
언데드의 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성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육신이 죽어 부패하고 영혼에 깃든 이성의 빛마저 꺼져 버렸음에도 지우지 못한. 각인되어 영혼과 하나가 된 이치가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뻗어 나온 것이었으니 마침내 '무공'이었다.
무공. 무인이 영혼에 깃들이는 무(武)로써 이치를 궁구하는 수단이니 그것이 태동하여 길을 비추었고 비친 길을 따라 이성이 다시 빛나며 신념과 함께 걷는다.
스으-
필요치 않기에 없었던 호흡을 언데드가 시작한다.
죽은 육신에 호흡은 필요치 않으니 그것은 몸을 움직임에 있어 필요치 않은 것이었으나 이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으니 마구잡이이던 언데드의 선은 이윽고 오롯한 무공의 형태를 그리게 되었다.
탓-
그리고 마침내 선과 선이 마주하니 무공과 무공이 처음으로 맞닿은 것이었고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언데드의 무공은 거침이 없는 강권(剛拳)이었다.
그러나 과하지 않았으니 물러날 줄 알았고 부드럽게 넘길 줄도 알았다.
파앙!
도령은 강하게 뻗은 주먹을 수(受)의 수법으로 받아냈다.
깊이가 얕은 무공이었다면 그 수법에 빨려들어와 단번에 균형을 잃었겠으나 여유를 두었던 무인의 강권은 오히려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힘으로써 도령의 균형을 앗으려 한다.
도령은 그것을 달(达)의 수법으로 받아쳤으니 밀려드는 힘의 방향을 바꾸어 무인을 띄워 버렸다.
그리하여 가지게 된 반호흡의 시간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젖혀졌던 몸을 튕기며 올려차니 무인이 때에 맞추어 방어하지 못할 공격이 되었다.
툭.
그러나 본래 척추를 끊어 놓았어야 할 도령의 공격은 가볍게 상대에게 닿고서 떨어졌으니 그것이 서로의 목숨을 건 생사결(生死決)이 아닌 무공을 겨루는 비무(比武)였기 때문이다.
도령은 가볍게 몸을 튕겨 내려서서는 자세를 바로하였다.
그리고 도령을 마주하여 내려선 언데드가 아닌 무인이 된 자가 또한 자세를 바로하며 물었으니.
-존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존명(尊名). 위대한 이의 이름을 묻는 무인의,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도령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김도령. 천마의 이름을 이을 28대 후계자입니다."
담담하지만 흔들리지 않을 이름에 무인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헤아릴 수 없는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나타난 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소천마를 뵙나이다.
소천마(小天魔).
이윽고 천마가 될 후계자를 마주한 이의 원과 한이 흘러 내리고 환희로 영혼이 빛난다.
도령은 그렇게 구원받은 영혼. 천마의 승천 후 멸망과 싸웠으나 패하여 안식에 들지 못한 무인의 경의를 받아들이며 말했다.
"나는 스승을 뵙고 스승을 따르던 무인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존명(尊命)!
무인은 그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경의를 표해야 할 이의 위대한 길을 비추었으니.
사아아아아-
이제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너무나 거대한 원과 한이 평범한 이의 눈에도 비치는 것이 되어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문이 되었다.
던전에서 다른 던전으로 이어지는 차원문.
도령의 전생에서는, 결국 무총이 사라질 때까지 와야 할 이가 오지 않아 열리지 못했던 문.
그 문이 이번에는 늦지 않게 열렸으니 도령은 망설임없이 문 너머의 진짜 무총에 입성했다.
그리고 도령을 맞이한 것은.
키이야아아아아아악!!
지옥의 아비규환이 이러할까 싶은, 대상이 없기에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투쟁심으로 울부짖는 언데드들이었다.
빈껍데기가 아닌, 승천하지 못한 영혼이 죽어서도 썩어 없어지지 못한 육신으로 절규하는.
모르는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이들에게 그것은 다만 끔찍한 언데드들의 참상이었겠으나 알고 있으며 볼 수 있는 도령에게 그것은 절규였다.
뜻을 관철하지 못한 채 꺾이고 말아 끝없이 커져만 갈 뿐인 원과 한의 절규.
천마의 승천 후 그 뜻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한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싸웠으나 지키지 못하고 스러졌기에 죽어서도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이들의 절규.
도령은 그렇게 절규하며 밀려드는 이들을 마주하여 자세를 바로하였다.
그리고 포권하며 말하였으니.
"천마의 이름을 이을 28대 후계자. 소천마 김도령."
스으-
"증명을 위한 비무를 청하겠습니다."
쿠웅!
64
[네가 조금만 더 빨리 그곳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전생에서 도령은 무총에 관해 너무 늦게 알았다.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고서야, 되돌릴 수 없게 되어서야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
천마와 만나고서 천마에게 그곳이 어떤 곳인지 듣고서야 간 무총은 이미 무총이 아니었다.
애초에 천마로 인해 유지되던 것이 무총이었고 그곳이 더 이상 무총이 아니게 되었기에 천마가 세상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도령과 만날 수 있었으니.
도령이 천마와 만났을 때엔 이미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갈 수 있었다면.
담담하던 천마의 말과 얼굴에는 그러니까 숨길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키히힉! 키히히히힉! 캬하하하학!!]
신녀 일파를 제거하고 확보한 문서를 통하여 무총이 천마를 따랐던 마지막 세대 무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란 걸 알게 된 제사장 일파이자 악마 숭배자들은 그 안에 있던 가늠할 수 없는 원과 한을 모조리 빨아들였고 그로써 제사장은 진짜 악마가 되었었다.
인간이, 진짜 악마가 되었다.
이후 도령이 찾았던 때의 무총에 악마 숭배자들이 빨아들이고 남은 일부의 원과 한이 형옥을 산처럼 쌓을 정도였으니 그 '일부'만으로도 형옥이 산처럼 쌓일 정도였던 원과 한이 본래 얼마나 거대하고 깊었을지 도령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짐작하기 어려웠던 원과 한을 지금.
캬아아아아아!!
도령은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다.
밀려드는 언데드들의 공세는 결코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성이 지워지고 썩어 빠진 육체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이, 결코 위협적일 수가 없었다.
스으-
하지만 포권의 자세를 풀고 호흡하는 도령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흔들렸으니 도령이 영혼을 볼 수 있고 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썩어 스러지기 전의 육체가 아닌 그에 깃든 영혼과 영혼의 감정이 도령을 뒤흔든다.
[부탁하마.]
[존명!]
승천하기 전 천마가 남긴 마지막 부탁을 받들었던 '마지막 세대'의 무인들.
그저 지존으로서의 천마가 아닌 가혹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며 가장 앞에서 나아가던 이를 따르던 인간으로서 그들은 천마의 뜻을 지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돌연 찾아온, 감당할 수 없는 멸망에 목숨을 태워서도 결국 지키지 못했던 것이.
그 무엇 하나 지키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던 그들의 감정이 수천 년을 지나서도 흐려지지 않았으니 도령을 뒤흔든다.
'탑'의 한 달은 탑에 포함되었으나 별개의 세계에서 대체로 하루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구보다 먼저 멸망하였고 이 탑에서 오랜 세월이. 정말로 오랜 세월이 지나 버린 지금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긴 세월을 이렇게 한탄해 왔던 걸까.
도령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감히 위로하겠다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다만.
온전히 마주하였다.
처음에는 늦었으나 이번에는 늦지 않았으니.
다만 온전히 마주한다.
캬아아아악!!
뻗어오는 주먹은 온전한 이치를 전혀 구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거칠게 휘두를 뿐이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극의(極意) 서(緖)
그러나 비로소 이치에 닿은 도령의 눈은 그 안에 담긴 이치를 읽어내었으니 이치와 함께 영혼을 마주하여 움직인다.
백타(白打) 달(达)
부웅!
도령이 뻗은 손은 틀림없이 힘의 방향을 바꾸는 백타의 초식을 구사하였으나 언데드의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손의 힘을 다른 방향으로 흘리지 못했다.
애초에 닿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령이 본 것은 언데드가. 그 안의 무인이 온전히 구사한 무공이었으나 실제로 행해진 건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이었으니.
퍼퍼퍼퍽!!
그런 것이 사방에서 밀려드니 도령은 혼자서 제멋대로 무공을 휘적이다 언데드들에게 얻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옷은 찢어졌으나 상처는 크지 않았다.
다만 그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아 보일 수 있었으나.
-…….
그것을 지켜보는.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연 무인의 영혼은 오체투지하여 경의를 표했으니 고개 숙여 물기 어린 얼굴을 감추었다.
스으-
도령은 온전히 본 것에, 허공에 무공을 계속하였다.
멈추지 않았다.
퍼퍼퍼퍽!
그로 인해 끊임없이 몸을 두드리는 공격을 감당해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령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천마신공이 깃들고 매순간 한계를 넘어 나아가는 육체는 무너지지 않으니 수많은 언데드들의 공격과 그에 깃든, 도령만이 볼 수 있는 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원과 한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이곳에서 해소될 수 없는 원과 한에 갇혀 있던 영혼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두드림은 이제야 비로소 길을 걷게 된 수준이지만 그 길이 천마의 길이기에 틀림없이 천마의 길을 걷는 자의 손길이었고.
[부탁하마.]
두근-
해소될 수 없어 끝없이 계속 되는 비극의 굴레를 반복하던 이들의 영혼에 마침내 새로운 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 주었다.
[뒤를 부탁하마.]
두근-
다만 대상없는 투쟁심에 원과 한을 부딪치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난다.
영혼에 새겼던 신념에 빛이 깃들고 그로써 또한 영혼에 깃든 무가 썩어가던 몸에나마 깃드니 이제서야.
쿵!
주먹과 주먹이 마주한다.
그리하여 일어나는 영혼의 파동이 퍼지고 퍼지고 또 퍼지고.
그리고 공명하여 커지고 커지고 또 커져서.
-…용마전의 강용소입니다, 소천마.
"반갑습니다. 강 무사님."
주먹을 마주하기 전 인사를 나눌 수도 있게 되었다.
쿠웅!
주먹을 마주한 이는 가장 먼저 오체투지하여 눈물을 감추던 무사의 곁에서 똑같이 경의를 표하였다.
하나둘.
그렇게 경의를 표하는 이가 늘어갔고 그들을 속박하면서 동시에 지키고 있던 기운이 해방돼 어딘가로 흘러갔다.
하루. 이틀. 사흘.
영혼들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넘어 마침내 빛을 되찾은 날들이 지나가고 이윽고 모든 원과 한이 빛으로 바뀌었을 때.
-소천마를 뵙습니다!!
쿠웅-!
도령은 그들의 시선을 등으로 짊어지며 무총의 가장 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들을 속박하였던. 그러나 사실은 지키고 있었던 어느 고결하고도 위대한 영혼의 힘이 한곳에 모여 비로소 온전한 힘을 깃들인 것이 거기에 있었다.
천마신검(天魔神劍).
한 세계를 대표하는 보물이자 신물(神物)은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에도 뒤지지 않는 아티팩트로서의 빛을 발한다.
전생에선 빛을 잃었던 검.
도령이 되찾았으나 사용할 수도 없었던 검이 지금은 온전한 빛을 발하며 무총을 비추고 있으니 도령은.
콰악-
그 검을 망설임없이 쥐었다.
쿠웅!
쥐자마자 천마신검에 깃든 아득한 차원의 기운이 도령을 관통한다.
그것은 육체를 짓누르지 않는다.
신물이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초월적인 검은 육체가 아닌 영혼. 그것도 영혼의 본질을 관통하니 감당할 수 없는 자는 '삶' 그 자체를 잃고 텅 비어 버린 영혼만이 저승으로 흘러가 버릴 것이다.
힘이 아닌 영혼. 천마신검을 쥐기 위해선 꺾이지 않는 의지를 깃들인 영혼이어야만 했고.
스으-
그것은 이번 삶에서 도령이 가장 자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스릉-
천마신검이 뽑혀 나와 도령의 손에 쥐어졌다.
묵빛의 일견 수수해 보이는 검은 그러나 우주보다 순수하게 검은 것을 벼려낸 듯하니 그 어떤 것도 천마신검의 궤적 앞에서 제 형상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한 검신에는 도령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이번에는, 늦지 않았구나.
"……!"
도령이 아닌 다른 존재가 그 검신에 비치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그리고 검신에 비치던 존재가 놀랍게도 검의 바깥으로 나와 형상을 이루었다.
사라락.
흩날리는 것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무복(武服)이다.
고결한 검은 무복.
그 검은 무복에 마치 밤하늘을 노니는 듯한 용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으니 마치 밤의 제왕이 두르는 곤룡포 같다.
또 검은 곤룡포를 두른 것은 곤룡포보다 검고 아름답고 강한 이였으니 밤하늘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한 기다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를 마주하여 도령은 두근, 크게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이번에는, 늦지 않았구나.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인가.
도령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떼어 목을 쥐어짜 소리를 내었다.
"스승, 님."
다만 그렇게 부를 수 있을 뿐이었던 도령을 마주하여 그녀가.
도령의 스승이자 길을 비추어 주었던 은인이자 동반자가 세상 그 어떤 별이 빛나는 밤하늘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제자야. 오랜만이로구나.
스승 천마(天魔)가 답해 주었다.
* * * *
"…신녀를 놓쳤다 합니다."
"뭐라고?"
부복한 채 보고하는 잠마대원을 앞에 두고 제사장은 열에 익은 돼지와 같은 얼굴로 분노하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기어코 화를 참지 못해 쾅, 팔걸이를 두들기니 그 옛날엔 황제에게나 진상 되었고 지금도 거부가 아니면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자단목으로 만든 의자의 팔걸이에 쩌저적. 금이 가 버린다.
"지옥귀 스물이 잠마대와 함께 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옥귀 스물과 잠마대가 고작 무녀 한 년을 데리고 간 신녀를 못 잡았다고? 왜?"
마치. 정말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제사장의 기세에 잠마대원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존재감을 죽였다.
그래서 제사장은 답하는 잠마대원의 목소리가 전혀 떨리고 있지 않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객잔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
"예. 지옥귀들의 조장조차 그 기척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어린 지구인이 도주하는 것을 따라 탑에 들어갔다가, 조장을 포함한 상위 서열들이 실종 되었다고 합니다."
"……."
제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화를 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분해졌다.
거짓으로 화를 내거나 화가 사그라진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 너무 터무니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는 받았다.
지구에서 온 웬 초짜 모험가 따위와 장난질을 하고 있다는 걸.
그 자체에는 거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보고를 허투루 받아들인 게 아니라 조사해 보니 정말로 초짜 지구인 모험가였으니까.
그래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막이고 이제서야 알게 된. 그러니까 정말로 은밀하게 두었던 비밀 지부라 할 수 있는 집법당주의 손녀가 있는 흑안방이란 곳에 이유가 있다고 보았고 미리 지시해 두었다.
흑안방을 멸문시키되 거기에 있는 자료들은 최대한 확보하라고.
그 지시는 정확히 들어맞아서 놀랍게도 버려진 던전인 무총이 천마를 따르던 무인들이 묻힌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과연 신녀 일파가 집법당주의 손녀를 파견하면서까지 은밀하게 관리할 만한 충격적인 비밀이었다.
지체하지 않고 그곳을 확보하기 위해 따로 추가로 잠마대를 포함한 악마 숭배자들을 보냈으니 낭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길래 신녀는 물론이요 상위 서열의 지옥귀들까지 증발한단 말인가.
어디 은거 고수를 만나 전멸했다는 악질적인 농담이라도 들은 기분이다.
그리고 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신녀가 무림맹 정월 지부에 나타나 악마 숭배자들에 의해 흑안방이 멸문했다고 선언한 소식까지 전해지자.
"……하."
"이건 틀림없이 무언가가 잘못 되었군."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고선 다시 명령했다.
"제세원주를 보내라."
"예?"
"제세원주를 보내라고 하였다. 신녀를 마중 나가라 해라."
잠마대원은 제사장의 명령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야만 했으니 제세원주라고 하면.
"…아드님을, 말씀이십니까?"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65
천마와 도령이. 스승과 제자가 마주하였다.
도령은 그 아름답고도 장엄한 스승의 모습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주하고 있는 스승 천마는 그렇게나 선명한 모습 그대로의, 마지막 순간 보았던 때와 같은 모습이니 도령은 다시 한 번 묻는다.
"내가 아는, 스승님이 맞습니까."
그리고 천마 또한 미소지으며 다시 한 번 답한다.
-그래. 너의 스승 도연화이니라.
"…그렇, 군요."
함께 회귀하였다.
도령 혼자가 아니라 은인이자 스승이었던 천마 또한 함께 회귀하였음을 도령은 알게 되었다.
-나는 너의 영혼과 이어져 있었으니 오히려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그렇네요."
그 말대로였다.
천마의 영혼은 도령에 의해 '이쪽 세계'에 고정될 수 있었고 도령을 통하여 세상에 현현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 있도록 영혼과 영혼을 이어 두었으니 도령의 회귀에 천마가 함께한 것은 그녀의 말대로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기쁨에 빙긋 웃으며 도령은 말했다.
"아쉽네요."
-무엇이 말이냐.
"스승님과 이곳에서 만약 처음 만난 것이 되었다면……."
-되었다면?
"와, 여자 천마다라고 했을 텐데."
-…뭐냐. 그 대자대비한 부처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최악의 멘트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최악이라 생각하는 얼굴이었던 천마는 그러나 끝에 가서 말이 힘을 잃었으니 어느날의 사소한 대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난 아름답지 않느냐.]
[그렇죠.]
[그러니 이 몸의 미모를 순수하게 찬양하는 자가 하나쯤 있어도 좋았을 것을.]
[하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스승님이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제가 찬양해 보도록 할게요. 기왕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멘트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은 거 없을까요?]
[와, 여자 천마다 같은 거라면 잊지는 못할 거 같구나.]
"기억하고 계신 거 보니 진짜 제 스승님 맞네요."
다시 빙긋 웃는 도령의 말에 천마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나 좋은 분위기 속에서 도령은 이어 희망을 말했다.
"스승님이 함께 회귀하였다면 용제도, 그리고 황제도 기억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겠네요."
-내가 그러하니 그들 또한 그렇다고 봐야겠지.
"빨리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 버렸네요."
똑같은 탑 안이지만 처음부터 탑이었던 구역과 탑에 귀속된 세계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너무나 크게 차이가 난다.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천마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용제와 황제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니 그들의 시간 감각이 평범한 인간과는 아득히 다르다고 하지만 도령은 최대한 빨리 재회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도령은 기쁨을 만끽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으니.
"신교로 가도록 해요, 스승님."
-그러자꾸나.
천마가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한 세계의 파편을 닫았습니다.]
* * * *
다시 살게 된 도령이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할 미래라 생각했던 천마신교의 미래를 바꾸기 위하여 천마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다 따져보면 신녀와 따로 행동하고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것이 탑 안이었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에서의 한 달이 바깥에서는 하루였으니까.
천마제가 한 달 가까이 남았다는 걸 생각하면 안에서는 무려 신녀의 조력을 얻고 바깥에서는 유니온의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의 조력을 받을 수 있으며 이제는 천마까지 곁에 있는 지금 도령은 바라던 미래를 붙잡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웃으며 진짜 무총이라 할 수 있는 던전 안의 던전에서 나온 도령의 표정이.
"……."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던전 안의 던전에서 나온 도령의 앞에 세 마리의 지옥귀와 제사장을 따르는 잠마대원들까지 악마 숭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온 이유는 첫눈에 꿰뚫어 보았다.
이곳 무총이 어떠한 곳인지 안 제사장이 본래 이곳에 그득했을 원과 한을.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를 따랐고 멸망에 목숨을 불살라 싸웠던 무인들의 원과 한을 빨아먹으려 온 것이었다.
"제압해라."
불필요한 말은 없었다.
세 마리 지옥귀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자가 명령했고 잠마대원들이 덤벼들었다.
그리고 도령은.
뿌드드드득.
"끄으아아아아아악!!"
평소라면 여유를 두고 상대했을 도령이 이번만큼은 한 줌의 여유조차 두지 않고 철저하게 놈들을 부수어 나갔다.
감히 이곳을 더럽히러 온 악마 숭배자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두지 않고 그 팔다리를 철저하게 부수었다.
스으-
잠마대원이 살을 꿰뚫고 뼈를 부술 의도로 뻗은 주먹이 도령의 손에 닿은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힘을 잃었다.
백타 수(受)의 수법으로 받아내 당기니 잠마대원은 자신의 힘을 모조리 빼앗긴 것이었다.
그렇게 빼앗은 힘을 도령이 달(达)의 수법으로 놈의 안을 제멋대로 내달리게 하였으니 뿌드드득!
놈의 팔이 전혀 다른 생명체가 날뛰는 것처럼 뒤틀리며 쓸 수 없게 되었다.
"끄아아아아악!!"
도령이 지나간 길은 그런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하고 끔찍한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파괴되어 버린 잠마대원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그만큼이나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평범한 인간에게는 쓰지 않을 수.
하지만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악마 숭배자들에게는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수였으니 도령은 망설임없이 잠마대원들을 파괴해 나갔다.
"놈!!"
그것을 지켜보던 지옥귀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보통을 아득히 넘어선 힘과 속도는 어지간한 고수들을 그것만으로도 압도할 듯하다.
하지만 이미 그런 지옥귀를 상대해 보았고 또 그로써 하나의 이치에 닿은 도령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스으-
백타 수.
극의인 서(緖)를 깨달은 도령의 백타는 상식적이지 않은 힘과 속도에 무공의 초식마저 구사하는 지옥귀의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고서 당기더니 그 힘을 강탈해 버렸다.
"……!"
경악한 지옥귀가 대응하려 하지만 힘을 강탈당하고 비어 버린 찰나이기에 대응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미 도령은 다음의 이치를 구사하고 있었다.
백타 달.
쿠드드드득!
그 경지가 잠마대원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지옥귀는 그러나 잠마대원과 마찬가지의 꼴로 팔이 뒤틀려 박살이 나 버렸다.
다만 하나 명백한 차이가 있었으니 사람이기를 포기한 지옥귀는 그것에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죽어라!!"
그러니까 팔이 이해할 수 없는 두려운 힘에 박살이 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편 팔을 뻗어 도령의 목을 붙잡으려 한 것이었지만.
스으-
그 팔이 다음 순간 검은 선이 그어짐과 동시에 사라졌으니 이것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일순 굳어 버렸다.
'……뭐지?'
팔이 사라졌다.
그렇게 만든 것은 검은 선이다.
말 그대로 검은 선. 그것이 단순히 팔을 잘라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잘라내면서 덤으로 팔이 잘린 것만 같은 감각에 휩싸이게 만들었으니 지옥귀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검은 선을 만들어낸 것으로 향했고.
쿠웅!
심장이 거대한 어떤 것에 짓이겨지는 듯한 충격에 힘이 풀려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만든 것이, 도령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더러운 것이 보는 눈은 있나 보구나."
도령은 말 그대로 더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지옥귀를 내려다 보며 손에 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천마신검.
무림의 유일무이한 보물이었으니 감히 지옥귀 따위는 보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는 상식을 넘어선 신물(神物)이다.
마스터 네크로맨서 스태프<세계수>와 같은 신물이지만 이것은 검이요 삿된 것을 무수히 베어왔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지옥귀의 정신을 깎아 먹는다.
그렇게 정신이 난도질당한 지옥귀들은 버티지 못하고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두근!
인간의 것이 아닌 심장이 뛰는 소리.
쿵! 쿵! 쿵!
주르륵.
그 인간의 것이 아닌 심장이 뿜어내는 마기가 흘러내려 놈들을 뒤덮고 하나로 이었으니 이미 보았던 그것은 악마화다.
단 세 마리의 지옥귀가 합쳐진 것만으로도 악마화가 가능했으니 놈들은 앞서 만났던 것들보다 더 강한 지옥귀들이었다는 말이다.
그 연장선으로 세 마리가 하나의 군체가 되어 발휘하는 힘은 틀림없이 앞서의 놈들보다 더욱 거대하고 위협적이었겠지만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앞서의 놈들이 그랬듯 놈들은 해서는 안 될 최악의 패를 꺼내든 것이었으니까.
-네놈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네놈은 죽어서도 고통받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보여주마!
화륵!
-……!!
검은 불꽃이 피어나니 지옥귀들이 경악하여 아가리를 다물었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놈들이었기에 피어난 불꽃이 무엇인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 불꽃을 깃들인, 이제는 스켈레톤이 아닌 데스 나이트가 된 귀화병들이 도령의 발밑 어둠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덟 마리의 데스 나이트 귀화병이 사방으로 퍼지며 악마화한 지옥귀들을 둘러싸고 불의 벽을 일으켰다.
"끄아아아아아악!!"
터져 나오는 처절한 비명은 사지가 박살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마기에 허우적거리던 잠마대원들이다.
지옥귀들은 평소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었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비명이 처음으로 두렵게 들렸다.
화악!
그렇게 만드는 검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도령이 선고했다.
"죽어서도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마스터 네크로맨서가 선고와 함께 지옥불을 움직였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악!!
* * * *
사아아아-
염열지옥의 불꽃이 삿된 것을 모두 태우고 난 뒤의 자리엔 열 네 마리의 데스 나이트와 열 여섯의 귀화병이 도령의 주변에 도열하고 있었다.
앞서 열한 마리의 지옥귀를 토벌하며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인 흉옥이 열한 개 생겼다.
개중 여덟 개를 써서 귀화병을 데스 나이트로 승화시켰는데 이번에 세 마리의 지옥귀를 더 토벌하여 흉옥이 여섯 개가 되었고 그것을 모두 써서 잠마대원의 사체와 영혼으로 만든 귀화병을 추가로 데스 나이트로 승화시킨 것이다.
-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그리고 데스 나이트가 되지 못한 것들은 평범한 귀화병이 되었으니 총 서른 개의 죄 지은 영혼이 끔찍한 비명을 멈추지 못하고 내지른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로구나.
"네."
이 비명을 들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산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운 도령이었다.
하지만 그저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신 행동하는 것이 도령이었으니 던전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지직-
"……!"
-이것은!
세계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했으니 정말로 세계가 찢겨 나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영역에서 세계를 잡아당기니 세계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가며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뭐지?'
도령은 이것이 도대체 어떤 현상인지 알 수 없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로서의 지식과 경험으로도 이런 것은 처음이었으니 천마도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 던전에 더 남아 있을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다른 무엇도 아닌 시스템이 '던전을 닫았다'고 공언했으니까.
하지만 또 다른 생각도 드니 이미 시스템의 에러를 일으킨 '진 에너지 컨트롤'을 지니게 된 도령에게 있어 더 이상 시스템은 완벽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선 나가야 한다!
"……예."
도령은 잠시 생각을 미루어 두었다.
세상을 찢을 정도로 강력한 인력(引力)은 세계에 그치지 않고 도령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것에게 끌려가 삼켜질 것이니 망설일 틈이 없었고 도령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던전 바깥으로 달렸다.
짧지 않은 거리였으나 전력을 다한 도령은 단숨에, 무사히 던전을 나올 수 있었다.
츠츳-
던전의 입구이자 출구인 차원의 균열이 흩어지듯 사라졌고 도령을 삼키려던 인력도 사라졌다.
"지금 나온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러나 도령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잠마대원들을 마주하여 심각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놈들의 행색과 뒤에서 작게 수군거리던 말의 내용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봐."
66
주소연.
천마신교 내 신녀 일파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집법당의 당주인 주소천의 손녀로 나이보다 성숙한 분위기의 그녀는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판단하기 위해선 이성적인 근거가 필요했으니 제아무리 신녀의 이야기라 해도 '천마의 후예'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를 믿기가 어려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다.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똑똑한 후배이면서 나이는 그녀보다 연상인 홍련이 그렇게까지 평가할 정도라면 과연 대단한 이이긴 할 것이다.
홍련은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하였으나 천마신교 내에서도 뛰어난 아이들 중 특히나 더욱 뛰어난 아이들만이 될 수 있는 무녀 중 한 명이 되었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무녀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혔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재능만큼이나 엄격한 그녀의 기준에서도 도령은 특별하고 대단하게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하지만 천마의 후예인 소천마(小天魔)를 기준으로 해 버리면 너무나 위대하고 무거운 그 이름에는 홍련의 기준마저 감히 미치지 못한다.
신녀와 만나 도령이 해냈고 해내겠다는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어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릴 만큼 소천마란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다.
주소연이 직접 본 도령은 대단해 보이긴 하였으나 그 정도인가에 대해선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애초에 뜬금없이 신녀가 도령을 만나기 위해 흑안방에 오겠다는 것도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몸이 멀어 목소리가 닿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도령을 경험하지 못해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그녀도 천마제를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만큼은 동의했다.
그것이 신녀 일파의 권위였으며 제사장 일파에 맞설 수 있는 최대의 패였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나날이 약해지고 있는 신녀 일파의 입장에서 7년에 한 번 있는 행사인 천마제는 비장의 패이면서 반전을 위한 한 수였다.
제사장이 꾀하고 있을 더러운 수를 감안하고서라도 진행해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는 무사히 돌아가야 했고 당장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흑안방을 단숨에 멸망시켰던 도령이 말하기를 '지옥귀'라는 것은 그녀조차 하나를 상대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고수였으나 신녀와 홍련의 말대로라면 믿기 어렵지만 바로 그 도령에게 절반이 토벌당했다고 한다.
신녀와 홍련이 무사히 정월의 무림맹에 올 수 있었으니 믿기 어려워도 믿어야 했다.
남은 절반과 제사장의 수족이 되어 버린 잠마대가 걸리기는 하는데 이쪽도 무림맹에 신녀가 있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고 '악마 숭배자'가 이곳을 배회하고 있다는 정보에 유니온의 실력자가, 지구에서 마물의 흔적을 추적하던 추적대가 온다고 하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니 정말로 제사장 일파가 악마 숭배자들이라면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신중하게 움직인다면 무사히 교로 돌아가 천마제를 치를 수 있을 거다.
"계십니까."
그렇게 주소연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담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다우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곳 무림맹 정월 지부 지부장의 아들이었다.
대단한 미남으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이미 아버지를 넘어서는 실력을 지녔고 무림맹 본단의 정예 부대에 소속되는 게 확실시 된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노력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겸손하기까지 했으니 누구라도 호감이 갈 수밖에 없다.
"3일 뒤 출발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그런 미남이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알려주려 직접 왔으니 신녀에 대한 호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도록 은근하게, 조심스럽게.
그 태도는 또래의 여성이라면 결코 싫어할 수 없을 만한 것이었으나…….
"……."
"괜찮다고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예.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녀에게는 전혀 닿지 못하였으니 눈조차 맞춰주지 않는 태도에 꽃미남 소협은 실망하며 물러가고 말았다.
단순히 시선을 주지 않는 게 아니라 일말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호수에 비친 달에 손을 뻗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주소연은 그렇게 또 한 명의 마음을 꺾어 버린 신녀에게 이런 상황이기에 조금은 장난스레 말했다.
"괜찮지 않았니? 저 팔뚝만 해도 훔쳐보는 아이들이 적지 않던데."
짓궂은 농담. 평소 신녀는 그런 농담에 약간 곤란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었다. 그런데.
"…후예님의 근육이 몇 배는 더 대단했어요."
"……."
"……."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신녀는…… 남자의 시선마저 극도로 꺼렸는데?
주소연이 아는 신녀는 그랬다. 제세원주가. 제사장의 아들인 제세원주가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어릴 적부터 역겹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더러운 마물이 입맛을 다시는 꼴로 신녀를 훑어 보았으니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버렸던 것이다.
한데 그런 신녀가 뭐라고?
무녀의 입장이지만 가족으로서. 친언니보다 더 언니로서 주소연은 신녀의 변화에 당황하였고.
"신녀님. 교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바로 그 제세원주가 신녀를 호위하겠다며 정월 지부에 찾아와 버렸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주소연은 거처에 들이닥친 제세원주 고수환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하여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이를 힘주어 물었다.
신녀만큼은 아니어도 그녀 또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남자를 두려워하고 혐오했을 것이다. 저놈 때문에.
겉보기엔 나쁘지 않은 미남으로 보인다.
그러나 눈. 저 번들거리는 눈 아래 깔린 추악한 감정이 마주하는 이를 참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제세원주 고수환이 연락도 없이 여기 나타난 이유는 명백했다.
'…우리를 감시하려는 거구나.'
호위라는 명목으로 둘러싸 가두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른 짓을 하지 못하게 시야의 안에 가둔다.
그러니까 연락도 없이 이렇게 들이닥친 거다.
그것 자체는 상관없다. 어차피 가능한 빠르게 교에 돌아가려 했으니까.
문제는 저 제세원주와 마주하는 것을 신녀가 지독히도 꺼린다는 것이다.
단순히 감시하는 것을 넘어 신녀를 정신적으로 뒤흔들겠다는 더러운 의도까지도 제사장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어?'
조심스레 확인한 신녀의 기색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성격의 제세원주는 자신을 꺼리고 두려워하는 신녀의 모습마저 즐기곤 했는데 너무나 평온한 기색의 신녀는 오히려 하찮은 것을 보고서 빙긋 웃는 얼굴이었다.
스윽.
그래서 당황하는 고수환을 여보란 듯 내리깔아 보며 신녀가 눈짓하였으니 주소연이 말했다.
"호의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시지요."
"……알겠습니다."
고수환은 표정을 완전히 관리하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오래 보이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 꼴이 통쾌해 주소연은 빙긋 웃고서는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방 안에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제 괜찮은 거야?"
신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네요."
"……?????"
이게 무슨 소리지?
"저 더러운 시선을 보니 후예께서 저에게 주신 그 눈빛이 떠올라서요……. 그게 너무나 비교 돼서, 그리워지네요."
"……."
이게 진짜 무슨 소리지.
주소연은 조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무언가가 신녀의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 * * *
여러가지를 의도했을 제사장의 제세원주 파견은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 신녀가 하루아침에 제세원주를 아무렇지 않게, 하찮게 여기게 되면서 역으로 제세원주의 멘탈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씨발! 씨발! 무어란 말이냐 저년은! 도대체!"
자신을 두려워하는 그 꼴을 보고 있자면 부르르 몸이 떨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 흔쾌히 달려왔거늘.
하루아침에 역으로 더없이 하찮은 것을 보는 태도로 여유를 보이니 고수환은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그런 채로 아무 일 없이. 정말로 호위 무사의 꼴이 되어서는 신녀를 교까지 안내하였으니 신녀는 심지어 거침없이 제이각에 또 방문을 해서는.
"계획안입니다."
터억 서류를 내밀었으니 다름 아닌 이번 천마제에 관한 계획안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앞서의 어떤 천마제도 감히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대한, 너무나 성대한 규모였으니…….
"그…… 신녀님."
"네, 금감원주님."
"성대한 것은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그, 너무……."
천마신교의 재정을 담당하는 금감원의 금감원주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냐고 감히 직접 말을 꺼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한 마디로 하자면 행사에 나라 전체를 초대하는 정신이 나가 버릴 듯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평소 사려 깊던 신녀는 그 눈치를 어디다 두고 온 듯 금감원주의 시선을 모른 척 했다.
"제사장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무림을 대표하는 우리 신교의 은혜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더욱 성대하게 치르자고. 저도 동의합니다. 이번에는 이 정도는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에게 시선을 보내며 그 이름을 언급하니 제사장은 안 그래도 불편한 심기에 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빠그라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했다.
'저것이 갑자기 주화입마라도 들었나…….'
평소 새장에 갇혀 빌빌대는 듯하던 것이 갑자기 생기가 넘쳐나서는 방약무인하기 짝이 없다.
쿠득.
그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 제사장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저 얼굴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끔찍한 아래에 처박히는 꼴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신녀의 말씀대로다. 진행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제사장은 신녀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끔찍하고 더러운 곳에 처박고자 하였다.
신녀는 그런 제사장에 맞서 생에 가장 기쁘고 영광된 날이 될 천마제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천마제의 날이 밝도록.
도령의 소식이 없었다.
* * * *
…신녀와의 약속에 늦어 버렸다.
쉬지 않고 달려온 도령은 저 하늘 위.
천마신교가 자리잡은 천산 산맥 위 하늘을 구름처럼 가린 거대한 '영기(靈氣)'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도령조차 예상치 못했던. 유례가 없었기에 계산하지 못했던 일로 인해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한 달.
천마제가 시작하기 한 달 전 천마신교 주변에서 차근차근, 하나둘씩 준비하여 진행했어야 할 일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모아 만천하에 제사장 일파가 악마 숭배자임을 증명하려던 계획을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이미 천마제가 시작하였고 거대한 영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때에야 천산 산맥 앞에 섰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도령은 늦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늦지 않았구나.
"……네."
도령의 곁에 함께 하는 스승. 영혼으로 곁에 함께 하는 천마의 말에 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천마신교는 천마신교였다.
그리고 신녀는 아직 천마제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신녀였으며.
바로 그때에 김도령은 천마신공을 익히고 회귀한 마스터 네크로맨서로서, 비극을 맞이하지 않은 천마를 곁에 두고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또.
쿵!
도령만이 들을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부복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으니 다만 오체투지하여 경의를 표하는 천마를 따르는 무인들을 짊어지고서.
-가자꾸나, 제자야.
"네."
도령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나아갔다.
67
도령은 회귀 후 단 한 번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위험하거나 당장의 힘이 아쉬웠던 경우가 있긴 하였으나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큼의 일은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는 말이다.
평범한 모험가들에게야 하나 하나가 목숨을 건, 평생의 술안주로 삼았을 일들이 마스터 네크로맨서였던 도령에게는 성장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그런 도령이 생명의 위협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형태로 겪였으니 던전이. 세계가 갈기갈기 찢겨 빨려들어갈 정도로 막강한 인력(引力)이 작용하면서 도령 또한 거기에 휩쓸릴 뻔한 것이다.
만약 그 인력이 대부분 세계에 작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령마저 끌어당겼다면 정말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평범한 이였다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분간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만큼 두려운 미증유의 상황을 경험한 도령은 그러나 흔들림없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분명하게 들었다.
"4주나 이런 상태라니. 전대미문이로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를 일이야."
4주나 이런 상태.
짧은 대화였지만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한 것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라 도령은 말했다.
"…다시 말해 봐."
4주나 이런 상태라고? 무총에 들어가 보낸 시간은 틀림없이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텐데 4주라니 말이 안 된다.
물론 그런 도령의 의문에 잠마대원들은 친절히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임무 중 잡담을 나눌 정도로 성격이 달랐으나 그럼에도 잠마대원들이었으니 상황이 발생하자 즉시 감정을 지우고 특수 집단의 무인답게 움직였다.
스으-
귀신처럼 뒤에서 파고드는 칼날이 있었다.
양측에서 베어오는 두 개의 칼날에는 살기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악랄한 수였으니 도령의 팔다리를 잘라내고서 일을 진행하겠다는 의도가 고스란히 읽혔다.
살기가 없어 더욱 은밀하며 도령이 나오자마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자들의 칼이었으니 그 은밀함과 속도는 과연 천마신교 최고의 특수 부대 중 하나다웠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으니 도령을 상대로 기습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것도 팔다리를 노리다니.
푸욱!
"……!!"
"……!!"
살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 둘이 하나처럼 낮게 퍼졌다.
기습했던 잠마대원 둘의 심장을 허공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칼이 꿰뚫은 것이었다.
도령의 발밑이 아닌 허공에서 어둠이 퍼지며 튀어나온 그것은 틀림없이 불사자의 무덤에서 귀화병이 뻗은 칼이었으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에서의 공격에 잠마대원 둘은 허무하게 심장이 꿰뚫려 절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훈련을 받았음에도 남은 잠마대원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동요를 감추지 못하였으니 공간 너머에서 칼이 튀어나와 심장을 찌르는 건 '저층의 상식'을 벗어난 대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령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평범한 대처였으니 전성기의 힘을 되찾지 못한 지금에도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도령의 전생에서 마스터 네크로맨서의 팔다리가 온전치 않으며 근접전에 취약하다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상식이었다.
안 그래도 본체가 노려지기 쉬운 것이 네크로맨서였는데 다른 쪽으로는 약점을 찾을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의 상징이자 군단의 주인이었던 마스터 네크로맨서 도령이 근접전에서 취약하다.
그 약점을 노리는 악한 것들은 셀 수가 없었고 특히나 그 안에 악마가 있었으니 도령이 경험해야 했던 기습이란 게, 특히나 팔다리를 노리던 수법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지간한 심층의 모험가라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도령을 상대로 팔다리를 노린 기습을 걸다니.
악마가 들어도 자살을 참 재밌게 한다고 포복절도할 짓이었다.
훅-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둘의 심장을 꿰뚫는 것으로 기습을 해결한 도령에게 잠마대원 일부가 망설임없이 달려들었다.
의도는 뻔했다.
좌우로 갈라져 모습을 감춘 잠마대원들의 기습이 성공할 수 있도록 목숨으로 미끼를 자처하며 신경을 어지럽히려는 것이다.
그 기세에서 결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당연한 일이었으니 특수 부대인 잠마대원이 쉽게 입을 열 리가 없다.
특히나 악마 숭배자인 이것들에게 고문은 결코 통하지 않을 것이니 살아서 잠마대원이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도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으니.
푸푸푹-!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데스 나이트로 승화한 귀화병들의 칼이 거침없이 잠마대원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악마 숭배자들에게 내리기엔 너무 자비로운 죽음이었는데 이 또한 도령은 개의치 않았다. 무얼.
-끄으아아아아악!!
죄 지은 자에게 있어 도령의 앞에서 죽는다는 건 도망이 아닌 더욱 커다란 공포와 절망의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영혼이기에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붙잡힌 잠마대원들이 절규한다.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해 그야말로 무엇도 하지 못한 채 미지의 공포와 고통이 정수리를 꿰뚫으니 다만 절규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영혼의 정수리에 고통과 섞여 도령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말 해."
-끄아아아악!!
-크흐흐. 어림도 없다!
도령은 고문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 외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마법 등의 다른 수단도 배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도령은 불편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으니 그런 수단들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아아-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지워질 거야. 영원히."
잠마대원의 영혼 중 하나가 말단부터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범한 고통을 전혀 동반하지 않았으나 당사자는 물론이요 지켜보던 잠마대원들이 모조리 영혼이 쥐어짜이는 고통마저 잊을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사라진다.
미지의 죽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영원히 지워진다는 걸 영혼이기에 인지할 수 있었고 그것이 다만 공포로 영혼을 가득 채워 버렸다.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끔찍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도령이 인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것들에게는 선(善)을 베풀지 않는 도령이 그들에게는 저승의 염라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마, 말하겠, 말하, 말하겠다! 말하겠다!! 말하겠다!!
고장난 것처럼 버벅이다 이윽고 절규하듯 소리친다.
앞서의 악마 숭배자다운 악랄함과 광기는 일절 찾아볼 수 없다.
그런 팔다리가 반쯤 사라진 놈의 절규를 도령은 들어 주어 영혼을 지우던 것을 멈추어 주었지만.
사아아아아-
멈칫했던 영혼의 분해가 다시 시작되자 사라지는 잠마대원이 발광했다.
-왜! 왜! 왜!! 말한다고 했잖아! 말할게! 들었던 대로다! 4주가 지났다!
"늦었어. 더 빨리 결정 했어야지."
일정 이상 진행된 영혼의 분해는 멈출 수 없다.
도령은 멈추어 줄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안 돼! 안 돼! 안돼애애애애애!!
그렇게 절규하는 영혼 하나가 영원히 사라지는, 지켜보던 잠마대원들이 정신이 붕괴할 정도로 끔찍하고도 공포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도령은 담담하게 시선을 남은 잠마대원의 영혼들에게로 향했다.
"말 해."
* * * *
-끄으아아아아악!
-크히히힉! 아아아악!!
정신이 나가 버린 채 귀화병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형옥의 안에서 영원히 불타는 고통을 받고 있는 잠마대원들이 토해낸 정보를 도령은 신강을 향해 가며 되짚었다.
4주나 이런 상태.
언뜻 들었던 그 말대로 바깥에서의 시간이 4주나 지나 있었다.
탑의 '바깥'이라 할 수 있는 귀속된 세계의 하루가 보편적으로 탑의 안에서 대략 한 달인데 반대로 탑의 안인 던전에서 며칠을 보낸 사이 무림에서는 4주가 흘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다르게 흐르게 된 무총 안으로 돌연 입장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말이다.
상식이 무시되는 심층의 가장 깊은 곳을 나아갔던 도령조차 믿기 어려운,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전례조차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일이다.
던전이 어떻게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던전은 틀림없이 정상적으로 클로즈 되었고 그렇게 클로즈된 던전은 자연스럽게 마나로 환원돼 사라진다.
급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도령도 급하지 않게 던전을 나오려 했던 거다.
한데 돌연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차원을 찢을 정도로 강력한 인력이 발생하여 세상을 삼키고 그 과정에 있는 동안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차원의 균열은 입장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고?
무언가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사건이 아니라 거대한 차원에서의 어떤 것을 경험한 것 같다.
진 에너지 컨트롤도 그렇고. 이번의 일까지.
도령은 기원에까지 닿았던 전생에서도 알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비밀'에 닿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조금 복잡했던 도령의 정신에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많이 늘었구나.
귀가 아닌 정신에 전달되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천마의 것이었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영혼의 목소리에 도령이 빙긋 웃으며 또한 영혼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답했다.
-그런가요?
-그래. 내가 참 제자를 잘 두었어.
천마는…… 상냥한 스승이었고 또 도령의 삶의 인도자였다.
항상 긍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 스승이 되어 준 천마였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
도령의 영혼에 새겨진 신념은 다름 아닌 그녀에게 나누어 받은 것이었다.
-어떠하냐. 본녀가 전수한 무공은 제법 너의 마음에 들었느냐?
그러한 천마의 물음에 도령은 복잡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여 한 곳에 미뤄두고 빙긋 웃었다.
-예. 최고입니다.
-하하! 다행이구나.
천산 신맥을 두 눈에 담는다.
그 산맥이 품고 있는 천마신교를 두 눈에 담고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천마를 향한 너무나 거대한 기원을 담는다.
멸망 후 끝내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던 그 기원을 이번 삶에서는 전달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늦지 않은 그곳을 향해 나아간 도령은 마을 어귀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었으니 한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
거기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는, 본래 무림에는 없던 지성체인 수인(獸人)이 있었으니 늑대 인간이었고 다름 아닌 유니온 소속의 능력자였다.
두 번째 모험을 나서던 길에서 만났던 플레루스틴의 곁에 있던 그 늑대 수인이다.
도령이 그러하듯 늑대 수인 또한 도령을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탑에서의 모험으로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 모험가라지만 도령은 그 정도가 차원이 달랐다.
본래 성장에는 벽이라는 게 있어 제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그 앞에서는 막히고 정체할 수밖에 없는 법인데 도령에게는 그런 게 없는 것만 같았다.
일전 스쳐 지나갔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 같다.
[이번 사건을 신고한 인간입니다. 신경쓰이는 게 있으십니까.]
[예. 평범한 인간인데 우리를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이상합니다.]
그날 보고 파악했던 도령은 틀림없이 평범한 인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목줄을 물어뜯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하고도 나약한 인간.
그러나 지금 마주하고 있는 도령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으니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없다.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근육을 잔뜩 긴장시킨 늑대 수인을 마주하여 도령은 그러나 빙긋 웃었으니 말했다.
"플레루스틴에게, 안내해 주시겠어요?"
* * * *
늑대 수인 켈버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상하 관계가 정해진 것만 같았다.
다름 아닌 도령의 아래에 자신이 위치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도령의 부탁에 군말없이 플레루스틴에게로 안내하였으니 도령은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었다.
사라락.
열어둔 창문으로 흘러든 바람에 사락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엘프 플레루스틴을.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어린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깊디 깊은 분위기가 언밸런스하여 더욱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외모를 완성하는 그녀가 도령을 마주하여 말했다.
"…늦었군요, 도령."
도령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늦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였으니.
"하지만 내가 바라던 미래를 이루는 데에는 아무것도 늦지 않았어요, 플레루스틴."
68
7년에 한 번 열리는 무림을 대표하는 행사인 천마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안 그래도 무림을 대표하는 규모였던 천마제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역대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게 되었으니 무림 전체가 들썩였다.
"천마신교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그에 관한 평가는 마냥 긍정적이지 않았으니 소리 죽여 말하는 양민의 주변에서 술을 함께 마시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신녀 일파가 갈수록 약세라지."
"흑안방의 일도 그렇고 앞마당에서 악마 숭배자가 날뛰었으니 체면에 먹칠을 하기도 했고 말이야."
천마신교가 예전 같지 않다.
여전히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이지만 그 위세가 점점 빛이 바래고 있다는 걸 양민들마저 느끼고 있었다.
굳건해야 할 내부에서의 흔들림이 외부에도, 심지어 그들에게도 보이고 있었으며 감히 천마신교의 앞마당인 신강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날뛰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러한 흔들림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천마신교는 여전히 천마신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은 이번 천마제를 역대 가장 성대한 천마제로 만들려 한다고 보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무림 전체를 초대할 정도의 규모였으니 과연.
"그래도 천마신교는 천마신교란 거겠지."
"그래. 그러니까 천하의 유니온이라 해도 조사란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것이지."
* * * *
수원각(受願閣).
천마신교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전각의 가장 깊은 곳에 그녀가 있었다.
사라락.
움직임에 흘러내리는 금발이 마치 황금 호수가 흐르는 듯 아름답다.
그 머리카락 사이 뾰족 솟은 귀와 열일곱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외모가 엘프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게 하는 그녀는 플레루스틴 아흘레라.
심층에 도달한 위대한 모험가이면서 유니온 소속으로 마물을 추적해 무림까지 온 조사대의 대장이었다.
달칵.
그런 그녀를 마주한 것은 또래로 보이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싱그러운 난초를 닮은 소녀였으니 바로 신녀다.
유니온의 손님을 신녀가 직접 맞이한 것이었으니 이 둘의 만남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앞서 마골과 관련한 일로 시달렸고 켕기는 게 있는 제사장은 명분이 확실한 유니온의 조사대를 그러나 최대한 냉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흐름에 따라 이번 사태의 관련자가 된 신녀가 나서서 플레루스틴을 들였으니 제사장이 복장이 터지는 가운데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입니다.]
[서리화입니다.]
신녀. 서리화는 어지간해선 스스로 알려주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말하며 플레루스틴과 마주했었다.
천마의 후예께서 직접 이번 일을 도와줄 믿을 만한 이라고 하였으니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의 눈에는 신뢰가 가득하였고 그래서 플레루스틴 또한 좋은 첫인상을 가지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더없이 좋았던 첫 만남과 달리 몇 번이나 만나며 친분이 쌓였음에도 이후의 대화 내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어려울 것입니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외모임에도 차를 마시는 것에서 연륜과 우아함이 느껴져 더욱 신비로운 외모를 완성하는 플레루스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신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조사에서 어떤 소득도 얻지 못했습니다."
유니온의 조사대는 한달음에 무림까지 달려왔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실 예견되었던 결과였으니 은밀함이 특기인 악마와 그 숭배자들을 상대로, 그것도 '천마신교' 내에서 암약하는 자들을 상대로 단기간만에 무언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식으로 천마신교에 조사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말이다.
신녀가 호의적이라지만 천마신교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제사장 일파였고 제사장 일파가 다른 걸 다 떠나서 외부 세력이 내부를 조사하겠다는 데 응하는 건 그냥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걸 다 이미 알고 있었고 감수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플레루스틴이 이대로라면 어렵다 말하는 건 그렇게나 은밀한 악마 숭배자들을 무너뜨릴 계획이 그녀가 아닌 도령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무총에 갇혀 있는 듯한 도령에게 말이다.
악마 숭배자들이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서 놈들을 모두 토벌해야 할 도령이 들어간 무총에서 돌연 이상 현상이 일어나 출입구인 차원의 균열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당장 무어라도 달려가 조치를 취하고 싶은데 그 무총을 제사장 일파가 점검하고서는 사태를 은폐하였으니 신녀 일파도 접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충돌을 감수하고 무리를 한다면, 플레루스틴이 조금 입장이 곤란해질 것까지 감수한다면 무총의 이변이야 세상에 알릴 수 있겠지만 제사장 일파가 무슨 짓을 해도 드나들지 못하고 있는 차원의 균열을 신녀 일파라고 해서 늦지 않게 조치할 확률은 희박했다.
거기다 당장의 천마제에서 제사장 일파의 흉계도 경계해야만 한다.
제사장이 먼저 나서서 천마제를 크게 열자고 제안하였으니 틀림없이 어떤 끔찍한 흉계를 품었을 지금 나눌 여력이 없었다.
흑안방을 멸문시키고 얻은 정보로 무총이 어떤 곳인지 제사장 일파가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무언가를 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상황이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기만 할 것이 예상돼 다만 암울한 상황. 그런데.
"……."
경청하며 차를 드는 신녀에게서는 일말의 의문도 불안도, 걱정도 보이지 않았으니 오직 믿음뿐이었고 그래서 플레루스틴은 물었다.
"서리화. 당신의 믿음에 대한 근거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녀의 일말의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탱하고 있는 걸까.
플레루스틴의 물음에 신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믿음이, 근거를 필요치 않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필요하지 않는 믿음……."
"예."
어차피 신녀는 서서히 죽어가는 입장이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지만 그녀는 결코 어리석지 않은, 오히려 현명한 소녀였으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서서히 죽어가는 입장이란 걸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점점 더 신녀 일파는 약해질 것이고 제사장 일파가 득세하니 이윽고 제거당할 입장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알면서도 신녀는. 그녀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가장 앞에 서야 하는 입장인 신녀는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나 사실은 그녀 또한 입장과 비슷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런 신녀의 앞에 구원의 빛이 내렸다. 마치 그때처럼.
그 구원이 약속하였으니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만 믿으며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 * * *
결국 도령이 나타나지 않은 채 천마제의 4일차가 되었다.
흑안방을 거쳐 신녀에게까지 닿아야 했다.
이후 신녀의 조력을 받을 계획이었고 그러지 못했더라도 도령이라면 틀림없이 천마신교에 입성하여 그 안에서 증거를 찾았을 것이다.
산 자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적나라하게 쌓여 있을 증거를 도령은 찾을 수 있을 것이었고 산 자가 볼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제사장의 앞에, 만천하에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도령은 이제서야 천산 산맥의 신교에 도달하였고 그나마도 천마제의 반절이 넘은 4일차이니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
도대체 제사장이 무슨 수를 쓸 것인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신녀 일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는 하였으나 너무 많은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으니 최선을 다했음에도 안심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상황은 이미 제사장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기껏 온 유니온의 조사대도 어디까지나 손님의 입장으로 천산 산맥에 머물고 있을 뿐 명확한 증거 없이는 개입할 수 없었다.
애초에 탑의 질서를 수호하고 협력하여 가장 깊은 곳 기원에 함께 도달하기 위하여 선한 지성체들이 모인 연합 유니온의 기본 스탠스부터가 각 세계의 자립과 자치를 응원하는 것이었다.
탑 차원에서의 문제에는 강력한 개입 의지를 보였으나 '세계 안에서의 문제'라면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플레루스틴은 도령을 통하여 이것이 마족과 관련된 문제라는 걸 믿지만 유니온을 설득하기엔 부족했으니 개인의 차원이 아닌 유니온 차원에서의 도움을 주기 어려웠다.
그러한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도령은 그러나 일말의 불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네. 늦었습니다.]
스스로도 늦었다고 말했으면서도 이어 말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늦지 않았다는 듯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구해 주었던 그때처럼.
그래서 플레루스틴의 도령을 담은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으니 복잡해진 머리로 그녀는 말했다.
"손을, 줄 수 있나요."
"네, 플레루스틴."
도령이 망설임없이 건넨 손을 그날처럼 두 손으로 붙잡고서는 고민했다. 아니, 스스로를 설득하고자 했다.
도령이 믿는 것을 그녀 또한 믿고서 과감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한데 그 고민이 끝나기 전에 도령이 또 한 번 그녀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게 만드는 제안을 하였으니.
"플레루스틴."
"네?"
"함께 천마제를 보러 가지 않을래요?"
* * * *
천마제가 열린 천산 산맥과 그 안에 자리 잡은 천마신교는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제사장 일파와 신녀 일파 사이의,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의 속사정이 마치 다른 세계의 일인 것처럼 웃고 떠들고 함께 행복해 하는 천마제의 거리는 무림의 축제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보기가 좋았다.
바로 그 무림의 축제에.
사라락.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금발의 엘프가 한 명 있었으니 플레루스틴 아흘레라였다.
그것도 평소의 플레루스틴이 아닌 분홍색 매화를 곱게 수놓은 실용보다 치장을 더 중시한 무복을 입었으니 평소보다 몇 배나 파괴력이 대단한 플레루스틴이었다.
지구의 문명에 정통한 이가 보았다면 엘프 플레루스틴의 무림 스킨이라며 눈이 돌아가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도령조차도 조금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네.
옷을 갈아입는다고 했을 때엔 별 생각이 없었다.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이렇게 축제에 어울리는, 그것도 무림이란 배경에 딱 맞으면서도 예쁘게 차려입을 줄은 몰랐던 도령이었다.
그래서 잠시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자니 빙긋 웃으며 플레루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 입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녀가 사실은 꾸미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어 말하였으니.
"도령.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리화, 신녀에게 배웠는데 근거가 필요없는 믿음이란 것도 있더군요."
"이번만큼은 나도 신녀와 같은 근거가 필요없는 믿음이란 것을 가져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는 플레루스틴에게 도령은 다만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답하고서 함께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도령과 플레루스틴이었는데 사실은 그 옆에 또 한 명이 함께하고 있었으니 그 사람은 오직 도령만이 볼 수 있는 존재.
-이것이, 나를 기다리는 이들의 목소리로구나.
천마 도연화였다.
그녀의 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와 얼굴을 보며 도령은 말했다.
-네. 그리고 오늘 답을 듣게 될 사람들의 목소리예요.
69
천마제는 모든 선량한 이들에게 열려 있었으니 천마신교의 사람들만이 아닌 방문하는 모든 선량한 이들 또한 즐길 수 있는 축제였다.
어쩔 수 없이 신분에 따라 장소가 나뉘긴 하였으나 반대로 말하면 이곳, 모두에게 개방된 구역에서만큼은 눈치 볼 것 없이 마음 놓고 누구든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거리를 플레루스틴은 느긋이 걸으며 함께하는 도령을 두 눈에 담았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결코 느긋할 수 없는 상황이어야 했다.
하지만 도령에게선 이 축제의 분위기처럼 제사장 일파의 흉계도 신녀 일파의 위기도 다른 세상의 일인 것처럼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멀리서 오직 이 축제만을 위해 찾아온 것처럼 여기저기, 구석구석 빠짐없이 두 눈에 담을 뿐이다.
그러다 스윽 플레루스틴과 눈맞춤하더니 빙긋 웃으며 한곳을 가리킨다.
"저거 먹으러 갈래요, 플레루스틴?"
도령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하니 떡을 파는 좌판이 있었다.
갓 만들어낸 듯 온기가 피어오르는 떡은 정말로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플레루스틴도 마음이 동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엘프님이시군! 어서들 오시오!"
주변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플레루스틴이 앞에 서자 세상의 풍파가 멋드러지게 새겨진 바위 같은 중년의 주인이 씨익 웃으며 반겨 주었다.
반기되 부담스럽지 않으니 단순히 상인으로서의 경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살가운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떤 게 맛있나요?"
"흐, 다 맛있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고민이 될 테니 과일을 좋아한다면 이쪽, 혹시라도 단 걸 싫어한다면 여기 이쪽을 추천하고 싶다오."
그러면서 무엇이 들어갔는지 또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하는데 입담이 좋아 귀에 쏙쏙 들어온다.
새벽부터 공수해 온 과일을 정성스레 손질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며칠을 숙성한 재료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한 것이 없는 떡은 과연 보는 것만으로도 일품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일품의 가격이.
"두 냥만 주시오."
"두 냥이라구요?"
단 두 냥. 그러니까 지구의 물가로 따지자면 간단한 군것질거리 하나보다 싼 정도였으니 도령이 놀라 되물었다.
"하하! 그렇소. 두 냥이오."
주인장은 그런 도령의 반응에 예상했다는 듯 씨익 웃으며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확인해 주었다. 이어 설명하였으니.
"천마제에서는 그것이 옳은 가격이라오."
"천마제에서는."
"그렇소."
천마제.
그것은 유서 깊지만 작은 집단이 무림을 대표하는 천마신교가 되고 또 그 과정에서 마침내 천마라 불리게 된 이가 '바꾸어낸 세상'을 기리는 축제이기도 했다.
"서로 나누고 배려하고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는 세상. 적어도 천마제 동안만큼은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오늘은 이 가격이 맞는 거라오."
"그렇, 군요."
인건비는커녕 본전이나 겨우 건질까 싶은 가격.
하지만 서로가 나누고 배려하는 천마제 동안만큼은 그렇게 팔 수 있다고 상인은 말했다.
그리고 따듯한 떡으로 배를 채우고 돌아다니면서 그만이 아닌 대부분의 이들이 같은 마음이었으니 과연, 그 가격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축제에 내놓기 위한 점포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서로가 서로를 도왔다.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했고 힘을 합쳐 많은 일을 함께 해냈으니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 완성한 축제의 모든 것을 서로가 나누었다.
가끔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그저 베풀었다 생각하니 속인 자가 부끄러워 속죄하기 위해 땀을 흘린다.
플레루스틴은 생각했다.
비록 축제 동안만이라 해도 이곳은 참으로 이상향(理想鄕)에 가까운 곳이라고.
"좋은 곳이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윽.
고개를 끄덕이는 도령의 곁에 플레루스틴이 반걸음 더 가까워졌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고 덥석. 플레루스틴이 먼저 손을 잡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도령은 그 손을 내치는 대신 마주 힘주어 잡아 주었으니 플레루스틴은 또 생각한다.
'이게, 함께한다는 거구나.'
플레루스틴의 손을 잡고서 도령은 여전히 천마제의 곳곳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천마제를 담는 도령의 시선에 그러나 플레루스틴은 섭섭하지 않았으니 그녀 또한 도령의 시선을 따라 천마제를 두 눈에 담았다.
이 풍경은, 틀림없이 오랜 세월의 삶 속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의 사진이 되어 줄 것이었으니까.
* * * *
축제를 두 눈에 담는 것은 도령과 플레루스틴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둘 이상으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자 추억으로 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천마 도연화였다.
자신을 기리고 자신을 추억하기 위한 축제.
이 축제에서 그녀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하여 마침내 바꾸어냈던 세상을 기억하고 재현하고 있으니 다만 감동으로 그녀는 격동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를 기억해 주고 있었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대답해주지, 못했는데.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도령이 영혼의 목소리로 답했다.
-네. 이 사람들은 틀림없이 스승님의 바람을 마음으로 이어서 기억하고 있네요.
멸망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다.
엘프와 드래곤에게는 충분히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인간에게는 역사로 전해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월.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천마신교의 교도들은 그렇게나 긴 세월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천마가 바랐던 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이어져 온 것이었다.
전생에서는 보지 못했던 그것을 이번 생에서는 스승 천마와 함께 도령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편에서.
"시작하신다는군!"
"음!"
사람들이 향하는 저편에서 천마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원을 모으는 가장 중요한 행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
도원식(渡願式).
그 이름대로 기원을 전하기 위한 행사로 기원을 전하는 대상은 천마이다.
여전히 천마를 기억하고 그녀가 다시 강림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데 모아 하늘로 쏘아 올린다.
이 행사가 바로 무림의 영매와 다른 세계의 네크로맨서들까지 수많은 술사를 동원하여 천마제에서 거행하는 탑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영적(靈的) 행사였다.
수백의 네크로맨서와 또 수백의 영매가 모여 사람들의 기원을 모아 영적 기운의 형태로 가공하여서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무수한 술사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흐름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초월의 영역에 다다르니 마치 세상의 근본적인 어떤 흐름을 조율하는 듯하다.
두웅-!
그렇게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흐름은 그야말로 경이로워 술사들은 문득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인간이 아닌 흐름 속 알갱이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고.
이는 도령이 다니던 상조 회사에서 차출된 네크로맨서 또한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버렸다.
'이거, 정말로 신령한 행사가 맞는 건가?'
소리내어 말하면 대번에 경을 칠 일이었다.
어제는 처음이어서 너무 긴장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으나 오늘은 두 번째라 조금 여유가 있었으니 정말로 그런 생각이 불쑥 들어 버렸다.
느껴지는 일대를 가득 채운 영기(靈氣)가 너무나 거대하고 장엄해서 오히려 불안하고 불길함을 느끼는 것일까.
'이 영기라는 게…… 정말로 천마에게 닿을 수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어 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소리내어 말할 수는 없는 생각들을 하는 사이 거대한 영기는 중심을 향해 흐른다.
거대한 제단 위 중심에는 신녀가 있었다.
평소에도 신비로웠던 그녀가 오늘은 정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선녀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으니 그 주변으로 무녀들이 각 방위에 자리잡고서는 먼저 영기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두웅-!
조금이라도 잡생각을 하면 영혼이 그대로 휩쓸려 육체에서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압력.
무녀들은 그 압력을 버티며 정돈하여 신녀에게로 보냈으니 그녀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로 두 팔을 뻗었다.
두우웅-!
감히 인간이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대하고도 장엄한 영기가 신녀에 의해 하늘로 쏘아져 영감(靈感)을 깨우치지 못한 일반인마저도 느낄 수 있는 진동을 만들어내며 퍼져 나갔다.
그것이 정말로 하늘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으니 과연 천마신교의 본질이 '교(敎)'이며 그 영험함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행사라 할 만했다.
그렇게 하늘을 진동시킨 넷째 날의 두 번째 도원식이 마무리되며 영매와 네크로맨서들이 질서정연하게 법식에 맞추어 물러나고 마지막으로 무녀의 호위를 받으며 신녀가 제단에서 내려온다.
이후로는 이토록 경건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반전하여 흥겨운 분위기에서 제사에 올린 술과 음식을 음복(飮福), 나누어 먹는다.
특히 제단 아래에는 무림에서 천마신교의 초대장을 받고 온 황가와 명문대파의 인사들이 모이니 고위층의 사교장이 열린다.
전통적으로 이 자리에서 무림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나오곤 해 천마신교의 위상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바로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그러할 거라 사람들은 생각하였는데.
저벅. 저벅.
바로 그 분위기를 경직시키는 발소리가 저편에서부터 가까워졌다.
집단을 이루어 절도 있게 걷는 그 소리가 마치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가까워지는 군인들의 소리를 닮아 있어 주변의 분위기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저벅. 저벅.
실제로 가까워지는 이들은 천마신교 무력 부대의 무인들이었다.
제세원의 고수환을 필두로 하여 완전히 태세를 갖춘 무인들. 그리고 그 가운데 제사장이 있었으니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절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가장 권위를 세워야 할 자리에서 입어야 할 법복을 두른 제사장은 어제와 달리 굳은 얼굴로 자신을 따르는 무인들을 데리고 가장 신성한 도원식을 진행하는 제단의 아래에 섰으니 그에 대항하듯 반대편에도 무인들이 모였다.
무인에게는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순백의 무복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그들은 신녀를 지지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집법당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녀들이 수행하는 신녀가 마침내 제단을 내려왔으니 제사장과 신녀.
일반 양민들마저 알고 있는 대립하는 두 세력의 정점이 마주하였다.
"고생하셨소, 신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제사장."
오랜 세월 자신을 두렵게 하였던 제세원주 고수환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어둠이 엿보이는 제사장의 시선을 그러나 신녀는 당당하게 마주하고자 했다.
직감했다.
바로 이곳. 바로 여기에서 제사장이 그 흉계를 펼치려 한다는 것을.
최대한 준비하였으나 도대체 무얼 노리는지 알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긴장의 끈이 당겨진다.
"그렇소. 내 꼭 이 자리에서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소."
"무엇입니까?"
그런 신녀를 마주하여 제사장이 뱀처럼 얇은 곡선을 그린 입술로 물었다.
"기원은, 천마께 닿았소?"
"……!!"
"……!!"
반응은 신녀보다 주변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너무 크게 놀라 말조차 나오지 못한, 그러나 기색만으로도 일대가 뒤흔들릴 정도의 경악으로.
하지만 제사장은 그런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한 마디를 더하였으니.
"아니면…… 이번에도 닿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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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은, 천마께 닿았소?"
"아니면…… 이번에도 닿지 않았소?"
제사장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숨쉬는 것마저 두렵다는 듯 조심스러워졌으니 그 질문이 이 무림에서, 적어도 천마신교에서만큼은 결코 해선 안 될 터부(Taboo)였기 때문이다.
천마신교가 천마신교로서 성립할 수 있는 건 모두 천마(天魔)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저 작은 집단에 불과했던 것이 천마신교라 불리고 또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26대 인도자이면서 '개파조사'가 된 천마가 있었기 때문에.
또 그 집단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어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천마가 가장 앞에서 모두를 이끌었기 때문에.
심지어 천마가 승천한 뒤에도 그 이름 아래 모두가 하나되어 마족과 싸워 산화한 것이 천마신교였다.
그리고 패배하였으나 멸망을 피하여 탑에 존속된 뒤에도 천마가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란 믿음이 여전히 천마신교가 천마신교일 수 있게 해 주었다.
결국 천마신교는 이미 승천하여 이 세상에 없음에도 천마란 이름으로 성립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제사장이 그러한 천마와 천마신교의 연결고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승천한 천마에게 닿기를 바라며 기원을 전하는 것이 도원식이었으니 사람들은 언젠가는 천마에게 기원이 닿을 거라, 답이 내려올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 무색하게도 단 한 번도 기원이 천마에게 닿은 적이 없었다.
목소리가 내려온 적도 없었으니 신녀가 쏘아올린 하늘마저 떨쳐 울리는 그토록 거대한 기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흩어져 퍼져 나갈 뿐 마치 대답없는 메아리와 같았다.
사실은 이제 많이들 생각하고 있었다.
천마신교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고.
기약없는 기다림과 대답없는 믿음이란 것은 결국 세월에 깎여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아직 천마신교의 이름이 거대하니 누구도 쉽사리 입에 담지 못하고 있던 그 사실을.
'제사장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사장이 입에 담은 것에 신녀의 가장 가까이에 섰던 주소연은 머리가 하얘지고 말았다.
제사장이 그럴 줄은 몰랐다.
제사장이 바로 천마신교의 두 정점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군. 이번에도 답을 듣지 못하였구려. 그렇다면."
제사장이 '제사장'일 수 있는 것도 모두 천마신교가 있기 때문인데 그런 스스로의 자리를 파괴해 버린다고?
"천마께서 언제까지고 답을 내려주시지 않는 자를 우리는 언제까지 신녀라 부르며 존중하여야 하오?"
그러니까 신녀를 찌르는 비장의 한 수가 되어 버린 질문을 전혀 대비하지 못했고 막지 못했다.
"제사장!!"
쿠웅!
분노하여 기세로 일대를 떨쳐 울리는 건 기골이 장대하여 흰 수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젊은이를 압도하는 노인이다.
순백의 무복을 반듯하게 갖춰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그는 주소천.
신녀를 지탱하는 집법당의 당주이자 주소연의 할아버지인 집법당주 주소천이었다.
드드드드-
천마신교의 법을 집행하는 집단의 책임자답게 그의 기세는 멀리 떨어진 이들마저 숨을 삼킬 정도로 대단하였으나 제사장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했다.
마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칼끝을 제사장에게도 들이밀었다.
"왜. 내가 틀렸다면 말해 보시오. 우리 천마신교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오? 모두 천마께서 답을 내려주지 않으시기 때문이지 않소. 그 이유를 천마와 소통하여야 하는 신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오?"
"……."
집법당주 주소천은 반박하지 못했다.
어느 쪽으로든 입을 여는 순간 씻을 수 없는 불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천마도 신녀도 삿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주소연은 깨달았다.
'아.'
제사장에게 있어 천마신교와 제사장이란 것이 더 이상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어차피 천마는 없다.
그렇다면 천마신교는 결국 천마신교일 수 없고 쇠락할 뿐이니 차라리 지금 제사장은 모든 것을 부수고 그 위에 스스로 정점에 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 생각이었으니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거고 설마 이럴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신녀 일파는.
'방법이 없구나.'
전혀 대비하지 못한 신녀 일파는 천마가 답을 내려주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극무문이 교의 초대를 무시하고 오지 않았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언제까지고 천마께서 답을 주시지 않는 상황을 쉬쉬하는 게 오히려 문제이지 않는가."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일이었고 그렇다면 제사장께서 하시는 게 옳은 일이지."
불온한 흐름이 퍼져 나간다.
신녀에 대한 믿음에 먹칠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그 시작은 제사장 일파가 심어둔 자들에 의한 선동이었으나 동조하는 이들이 나타나며 거대한 흐름이 되어 신녀 일파를 휩쓴다.
"감히 신강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날뛰는 것부터가 천마신교의 흔들림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어."
"천마의 대답을 듣지 못하는 자가 천마신교를, 무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윽고 모든 칼날은 신녀에게로 겨누어지니 그 칼날을 마주한 신녀는 쿠득, 심장을 옥죄는 감각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에서 그치지 않고 폐마저 쥐어짜이는 듯하여 호흡조차 여의치 않다.
이 자리에 이르러서도 신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틀림없이 천마에 구원받았고 그 후예와 약속하였으니까.
"책임져라!"
"그래! 책임져라!!"
"신녀라고 할 거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라!"
하지만 처음으로 마주한, 세상이 적이 되어 자신을 찌르는 시선에는 마음을 굳건히 하지 못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깨닫는다.
모든 이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그녀가 사실은 주변의 이들에게 오히려 보호받고 있었음을.
본래 자신이 받아냈어야 할 칼날을 주변을 지켜주던 이들이 받아내 주었음을.
그것을 이제서야 알게 된 그녀의 눈가가 흐려지려 하였다.
꾸욱-
하지만 그녀는 긴소맷자락에 가려진 손으로 주먹을 꾹 쥐어 그것을 삼켰다.
지금까지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깨닫고서도 같은 꼴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마음 먹었던 것처럼 책임을 져야만 했으니까.
내가 책임지겠다고.
무엇을 책임져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앞에 서야 할 신녀로서의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심장과 폐가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더욱 심장과 폐를 쥐어짜서라도 목소리를 내려 하였고.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나입니다."
그보다 먼저, 그녀를 짓누르던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려는 목소리가 천마제를 꿰뚫었으니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젊다.
이 무림에서 예의를 차려봐야 소협(小俠)이라 불리는 게 한계일 정도로 젊고 또 별볼일 없어 보인다.
저벅.
하지만 그 젊은 도령에게 시선이 향한 순간 누구도 눈을 뗄 수 없었으니 두르고 있는 기세가 감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두근.
이는 제사장도 다르지 않았으니 도대체 누구이기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긴장시키는가 고민하였고 이내.
'저놈은……!'
도령이 바로 그 '지구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신녀가 외출하여 함께 모험하였던 지구인.
인간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악마 숭배자인 제사장은 그러나 결코 무능하지 않았으니 보고에 있었던 지구인인 도령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본질에 관하여서는 직접 마주한 지금에서야 겨우 알게 되었으니 무시해도 될 변수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계획을 실행하게 된 근래의 믿기 어려웠던 수많은 실패와 어긋남의 이유가.
다름 아닌 저 지구인 김도령에 의한 것이란 걸 이제서야 제사장은 깨닫는다.
그 모든 것의 원흉을 제사장은 노려보았다.
"…웬놈이냐."
"말하지 않았습니까.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라고."
"네놈 따위가 무어라고 감히 책임을 운운하며 자리를 어지럽히느냐. 저놈을 당장 무릎 꿇려라!"
"존명!"
대답하며 나선 것은 고수환이었다.
제사장의 아들이면서 제세원주로 제사장 일파의 2인자다.
평범하게는 그 아랫것들을 움직였을 제세원주가 직접 나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스윽-
고수환의 시선이 향한 끝에 벅찬 얼굴로 도령을 바라보는 신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저 집법당주가 주운 고아였던 시절 뇌리에 박힌 고수환에 대한 두려움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혐오로 움츠러든 신녀의 표정을 즐겼던 고수환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온갖 추악한 짓들보다 마음 먹어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신녀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고수환이었다.
그렇게 추악한 고수환의 날카로운 감각이 더 이상 자신을 신녀가 두려워하지 않게 된 원인이자 믿음이 도령이라는 걸 단숨에 알아챘다.
그러니까 지금. 신녀가 믿는 도령을 이 자리에서 패죽이지 않고선 평생을 후회할 거라는 생각으로 고수환이 직접 나선 것이다.
술렁-
그리고 고수환이 직접 나서자 일대가 술렁였다.
제세원주 고수환.
그는 단순히 제사장의 아들이라서 제사장 일파의 2인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기에.
인성과 별개로 무림에서 다음 세대의 천하를 논할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기에 제사장 일파의 2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나 되는 고수가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을 상대로 나섰으니 이내 모두의 시선은 도령에게로 향했다.
콰앙!
고수환이 한 걸음 내딛으며 일어난 폭음이 귀에 닿았을 때에 이미 도령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생각했다.
다음 순간 도령이 처참한 꼴로 무릎을 꿇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으-
"……!!"
시선이 마주한 순간 고수환의 눈동자가 커졌다.
찰나를 쪼갠 틈.
고수환은 도령의 눈동자에서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저갱을 보았다.
그리고 그 무저갱 너머에서 스물스물 일어나 영혼을 덮어 버리는 공포까지.
쿠웅!
거대한 돌에 짓눌린 것처럼 심장이 튀었다.
이러한 공포는 이만큼이나 고수가 되어서도 가늠하지 못한 아버지를 마주하여서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비된 이성 대신 오직 본능만으로 내리치는 고수환의 창에 도령의 손이 닿았으니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수(受). 도(導).
훅-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 고수환의 이성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틀림없이 자신의 것이. 자신의 힘이 빨려들어가서는 제멋대로 흘렀다.
내리친 창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튀었으니 팔과 어깨가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고 되려 끌려간 몸은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갓 무공에 입문한 초보자라 하여도 비웃음을 살 우스꽝스러운 꼴.
그러나 고수환은 그 꼴을 바로잡기도 전에 가까워지는 도령의 주먹을 또 찰나를 쪼갠 순간에 보아야만 했으니 천마신공(天魔神功) 백타(白打).
진(振).
꽈아아아아아앙!!
도령의 경(勁)이 폭발하며 고수환을 마치 포탄처럼 날려 버렸다.
쿠콰콰콰콰쾅!!
주욱 늘어졌던 찰나가 끝나고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굉음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그 폭격을 일으킨 포탄이 다름 아닌 기세 좋게 나섰던 고수환이었으며 날아든 고수환으로 인해 제사장을 호위하고 있던, 마치 성벽과 같았던 무인들의 일각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을 사람들은 뒤늦게서야 인식하게 되었다.
……주르륵.
그리고 자신을 두르고 있던 성벽의 일각을 단 일권(一拳)으로 무너뜨린 도령을 마주하여 제사장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으니.
"언제부터 교의 제사장이 함부로 감히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던가요?"
도령이 제사장에게 하문(下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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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장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도령의 아랫것, 그것도 죄 지은 자를 보는 듯한 시선과 묻는 내용이 그의 머릿속을 분노로 뜨겁게 만들었다.
"뭐, 라?"
함부로? 그 단어를 지금 나에게 쓴 건가? 그리고 저 시선은 또 뭔가.
멈칫하였던 제사장은 곧 머릿속을 가득 채운 뜨거운 분노를 토해내기 위해 아가리를 쩌억 벌렸으나.
"제사장이라고 하면."
도령의 말이 절묘한 순간 그 맥을 끊어 버렸다.
"천마를 따르는 이들 중 가장 뒤에 서는 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깊고 거친 길을 가장 앞에서 밝은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자가 천마이니 천마를 따르는 이들을 가장 뒤에서 밀어주고 받쳐주는 이들이 제사장과 신녀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장 뒤에서 헌신하는 이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들을 제사장과 신녀라 존중하고 존경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뭐죠? 제사장이라 불리면서 가장 위에서 사람들을 짓누르려는 그 태도와 시선이 제사장의 태도와 시선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태도와 시선으로 신녀에게 칼을 들이밀고서 책임을 지라 하는 것이, 옳습니까?"
"핫! 우스운 소리구나."
도령의 꿰뚫는 시선을 제사장은 비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비웃으며 그 짓누르는 시선으로 도령을 본다.
"그럼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 천마와 소통하여야 하는 신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여기서 책임을 진단 말이냐."
"사실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말하고 싶습니다."
"……뭐라?"
지켜보던 이들이 술렁였다.
설마 모두에게, 그러니까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 한 명 목소리를 내지 않았으니까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을 바란 이들이 모인 것이 천마신교였고 그것을 이루어낸 것이 천마와 그 뒤를 따랐던 천마신교였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해야만 했습니다."
"하. 신녀의 책임을 물었거늘 뜬구름잡는 헛소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서서 옳은 것을 옳다 말하는 건 비극을 불러올 뿐이었을 테니까요. 옳은 것을 옳다 말해도 그것을 관철할 힘이 없으니까요."
힘이 없는 정의는 다만 비극을 불러올 뿐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정의를 따르는 자들이 손해를 보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나서지 못하고 '가장 앞'에 섰던 신녀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하나 맞는 말은 있구나. 그 말대로다. 힘이 없다면 무얼 말해도 소용이 없음이다. 그리고 우리 천마신교가 지금 그러한 힘을 잃고 있다."
제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깃들었다.
"언제까지고 구태에 의존해 온 우리 천마신교는 힘이 없는 정의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쿠쿠쿵!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기세가 사람들을 뒤흔들었다.
"보아라! 역대 가장 성대하게 치른 천마제였으나 비어 버린 자리가 얼마나 되던가! 그중에는 천마신교를 위협할 만큼 커져 버려 이제는 천마제의 초대장마저 무시해 버린 극무문도 있다!"
마족에게 패배하여 '무(武)'를 믿지 못하게 된 무림에서는 힘을 추구하는 사상이 퍼져 나갔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이들이 모인 게 극무문(極武門)이었다.
오직 힘을 추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고 힘이란 건 손쉽게 사람을 취하게 만드니 천마신교의 세가 약해지는 틈에 극무문은 차오르는 달처럼 세를 불려나가 이제는 천마신교와 쌍벽을 이룰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천마제의 초대장에도 응하지 않으며 이제는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인 것이다.
작게 보자면 단순히 파티의 초대장을 거절한 것이지만 천마제의 상징성과 천마신교의 위상을 생각하면 무력만큼은 거대하나 상징성이 전혀 없었던 극무문이 이번 일을 계기로 그것까지 챙기려는 의도라는 걸 읽을 수 있다.
"이대로 가면 천마신교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언제까지고 천마신교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 또한 힘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정의를 논할 수 있으니 우리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서 힘의 상징으로서의 천마신교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힘이란 단어가 가지는 마력으로 제사장은 사람들을 뒤흔들고자 했다.
그 제사장의 시도에 도령은 담담히 말했다.
"틀렸어요."
"뭐라?"
"힘으로 정의를 실행하는 게 아니라 정의가 힘이 되어야만 해요."
"또 뜬구름 잡는 헛소리를……!"
"정의가 힘이 되도록 하는 것. 정의로운 자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그로써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고 두려움없이 행할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 천마이고 그렇기에 천마를 사람들이 따랐던 게 아니었던가요?"
"……!"
"……!"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불합리와 싸우기 위해 모인 것이 천마신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한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가장 앞에서 싸운 것이 천마였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힘이 정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게 천마신교의 가장 중요한 사상입니다."
"언제까지 헛소리를!"
"제사장. 천마가 부재한 때에는 당신이 그 사상을 가장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
도령의 말은 결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언성을 높이지 않았음에도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고 또 모두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바로 이곳, 이 시기에는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저 소협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장님."
앞으로 나선 것은 중년의 남자였다.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나 세상의 풍파가 고스란히 새겨진 바위를 닮은 남자는 다름 아닌 떡을 팔던 상인이었다.
천마신교의 교도이나 어떤 직책도 가지지 않았고 무인조차 아닌 그저 평범한 양민(良民).
그 양민이 목소리를 내었다.
"천마신교의 뜻은 불합리에 무심하여 자비를 베풀지 않는 하늘 대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맞서기 위해 일어난 자들이 모인 곳이지 않습니까. 나는 무지하여 어려운 건 잘 모르겠으나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만은 알겠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이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사장님."
"저도 그렇습니다 제사장님. 부디 저희의 뜻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마음 속에 불합리를 느꼈으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이들이 '옳은 것'을 말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으니 틀림없이 천마제의 탓이었다.
7년에 단 한 번. 천마가 남기고 천마신교를 통하여 이어진 뜻을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시기였기에.
그들은 평소 낼 수 없는 용기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제사장님!"
그리하여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에 제사장은 답하여야만 했다.
제사장은.
"저 이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존명!"
"……!!"
그렇게 선고했다.
제사장을 믿고 있던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말았다.
다름 아닌 천마신교의 제사장이었다.
그 누구보다 천마신교의 뜻에 충실하고 그것을 실행해야만 할 사람.
하지만 그는 천마신교의 뜻을 말하는 이들을 이교도라 하였고 칼끝이 향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그제서야 제사장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힘이 있어야 정의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의 뜻을.
힘없는 정의는 다만 짓밟힐 뿐이고 비극을 불러올 뿐이다.
그런 불합리한 세상에서 인간의 힘으로 불합리를 부순다는 천마신교의 뜻에 매료되어 천산 산맥에 살아가던 이들은 또한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제사장의 말대로, 이곳에 더 이상 '천마신교'는 없다는 것을.
제사장이 천마신교를 지우고 비어 있던 공백에 올라서려 한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양민들은 그러나 소리없이 쇄도하는 무인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정의가 힘이어야 할 이곳 천마신교에서 정의가 힘이 되게 할 이 또한.
사아아아-
절망에 빠지던 이들의 정신을 덧칠하는 검음이 있었다.
대낮의 하늘 아래 마치 밤하늘을 세상에 칠하는 듯 오직 검은 궤적이 그려졌으니 거침없이 양민들의 목줄을 움켜쥐려던 제사장 일파의 무인들이 경악하여 물러나게 만드는 검음이었다.
사람들은 그 검음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향했고 거기에는 도령이 있었다.
대낮의 하늘 아래에서도 오직 검어 마치 밤하늘 너머 우주까지도 담은 듯한 검을 뽑아든 도령이.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그 검을 처음으로 보았으나 본능으로 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알게 된 이들이 외쳤다.
"천마신검……!"
천마신검(天魔神劍).
멸망의 때에 천마가 되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후계자와 함께 소실된, 천마가 사용하였고 천마가 세계에 남긴 검.
이 무림에서 비할 것이 없는 신물(神物).
그 검이 지금 세상에 다시 나타나 하늘 아래 검음을 그렸으니 천마신검을 쥐고 있다는 것은.
"이분께서 바로 천마의 뜻을 이어 28대 인도자이자 천마가 되실 소천마 김도령이십니다."
조용히 걸어 뒤에 시립한 신녀가 도령을 말하였다.
쿠쿵!
"……!"
"……!"
그리고 경악이 퍼져 나가니 무림의 그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칭호가 천마를 가장 신앙하였던 신녀의 입을 통하여 세상에 선포된다.
그 소리가 녹아 없어질 때까지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콰르르.
"소천마……라고?"
그래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거친 소리와 함께 짓씹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도령의 주먹에 날아가 무인들과 뒤엉켜 처박혔던 고수환이었다.
피칠갑을 한 채 일어난 고수환은 악귀나 다름없는 형상으로 도령을 노려 보았다.
"이교도들이 단체로 미쳐서 날뛰는구나!"
콰앙!
분노하여 발을 구르니 쩌저적, 바닥이 갈라져 나간다.
터져 나온 기세에 돌풍이 몰아치니 고수환이 지닌 내공이 풀려나와 일대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어 고수환의 기세마저 뚫고서 서늘한 목소리가 쏘아진다.
"더 이상 헛소리를 들어주는 것은 교의 위신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겠구나. 여봐라."
제사장의 부름에 좌우로 무인들이 도열했다.
그것만으로도 신녀 일파를 넘어설 정도로 대단한 수였는데.
처처척.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행사장 전체를 포위하듯 무인들이 나타나 사방을 채웠다.
백중세라 생각했던 전력이 단숨에 몇 배나 격차가 벌어졌으니 정말로, 되려 신녀 일파가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듯한 형상이 되었다.
"참으로 중요한 날에 참으로 고약한 것들이 소란을 피우는구나. 주동자의 숨만 붙여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비없이 처단하라."
"존명!"
세상을 뒤흔드는 듯한 외침과 함께 무인들이 거리를 좁힌다.
이후 일어날 것은 명백한 비극이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 생각했던 천마신교 내 세력의 균형이 사실은 제사장 일파에게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신녀 일파는 그 힘을 감당해내지 못했고 힘이 없었던 양민들 중 정의를 말하였던 자는 비극의 일부가 되었을 뿐 무엇도 바꿀 수 없었다.
그렇게, 실제로 천마신교는 비극으로 끝을 고했다.
고했었다.
두웅-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
"……!"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 도령이 늦지 않게, 원하는 미래를 거머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있었다.
천마신검의 존재마저 부정한 제사장을 마주하여 손을 하늘로 뻗었으니 마치 거기에 응답하듯 하늘이 진동했다.
-그래, 제자야. 천마는 옳은 것이 옳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웅!
두웅!
도령이 하늘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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