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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소설과 불운

“요즘 7황자님이 조금 이상하시죠?”

오래된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가장 어린 하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개 하녀가 황족을 입에 담다니 원래라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언사였지만, 일하는 사람도 적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 7황자궁에서 이런 무례를 일일이 따지는 이는 없었다.

“예전보다 짜증도 덜 부리시고, 또 물건도 좀 덜 던지시구요.”

특히 사람한테는 이제 잘 안 던지세요…….

하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젠 일하겠다고 오는 사람도 없다는 걸 드디어 깨달으신 게 아닐까?”

심드렁하게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하녀가,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게 그럴듯한 의견을 냈다.

찬밥 신세인 7황자궁엔 오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 늘 인력이 부족했다.

원래 있던 사람들을 7황자가 죽이거나 반 죽여 놓거나, 위협해서 다들 나가기도 했고.

일손이 부족해 안 그래도 바쁜데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기 때문에 이 주제는 곧 사용인들 사이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아니에요. 분명 뭔가 이상한데…….”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막내 하녀 안나만이 납득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 영민한 아이의 말이 맞았다.

아니, 반은 맞다.

지금 낡아빠진 7황자궁 창가의 나무 위에 앉아 빨래터 하녀들의 수다를 듣고 있는 이 몸은 7황자, 란 아바란의 것이니까.

안에 있는 영혼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28세 남자의 그것이지만.

덧붙이자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개쓰레기 자식에다가 어차피 3년 이내에 목이 찢겨서 죽을 예정이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꽤 간단하다.

전부 읽었거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곳이 책 속 세상이고 난 그 속에 들어오게 됐다는 얘기다.

***

그날은 평소보다 좀 더 피곤한 하루였다.

직장인 일상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그럼에도 좀 더 담배가 당기는 그런 날.

아침엔 난데없이 계단에서 구두 끈이 풀리는 바람에 지하철을 한 번 놓쳤고, 겨우 지각을 면했나 했더니 웬일로 일찍 나온 과장이 쿠사리를 줬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 시간에 오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내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일이라고 평탄하지 않았다.

신입사원들은 기초적인 실수들을 몇 번이나 범했고 귀찮아지는 건 나였다.

게다가 기 빨리는 하루 끝에는 지루한 회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요즘은 회식을 강요하는 문화는 사라졌다는데, 코딱지만 한 우리 회사는 시대의 발달 궤도에서 관성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온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늘 가는 회사 건물 뒤편의 삼겹살 집에 들어가야 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과장의 의미 없는 무용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삼겹살을 주워먹었다.

얻는 것도 없는데 단백질이라도 보충해야지.

“대리님은 휴일에 뭐하고 지내세요?”

그런 내게 초롱초롱한 눈의 여사원이 말을 걸었었다.

오늘 자주 실수했던 옆 팀 신입.

전화 응대를 하며 끙끙대고 있던 정말 신입 중의 생신입이었다.

일머리가 없어 보이지도 않는데 왜 저럴까 싶다가 그녀의 사수를 떠올리자 납득이 갔었다.

맨날 자리 비우는 월급 도둑 김 대리.

무슨 주식을 한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근무시간에도 핸드폰만 부여잡고 있어서 주변인들 일처리에까지 영향을 주던 사람이었다.

사수가 뭣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우물쭈물대는 게 답답해서 대신 받아줬던 건데.

거기에 고마움을 크게 느꼈던 건지 나름 친해지려는 게 눈에 보였다.

난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미안하지만 그녀의 사수 대신 일일이 일을 가르쳐주고 싶지도 않았고, 애초에 난 회사에 친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아! 대리님도 집순이, 아니지, 집돌이신가 봐요. 저돈데…… 집이 제일 안정되잖아요. 전 밖에 있다가도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뭔가 충전되는 것 같고 그렇더라구요.”

사회성이 좋은 건지 내 무뚝뚝한 대답에도 대화를 이어가려는 모습이 안타까워 대충 대답하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나려 할 때였다.

“집돌이는 무슨. 이 대리는 집돌이가 아니라 그냥 수도승이지, 수도승.”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녀의 사수, 그러니까 월급 도둑 김 대리였다.

그의 통통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불만스럽게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수의 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입사원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네?”

“주말에 부장님이 등산 가자고 불러도 안 나와, 골프도 안 쳐, 딱히 취미랄 것도 없잖아? 야근 수당 받는 일은 꼬박꼬박 챙겨서 하는데 그 돈으로 열심히 꾸미는 것 같지도 않고…….”

이 말을 하며 김 대리는 노골적으로 내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지저분하거나 낡은 건 아니었지만, 명품으로 둘러싼 김 대리와 비교되긴 했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자신의 명품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대리도 좀 더 자기계발에 쓰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안 그래? 주변에 동의를 구하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옆자리 동료들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술에 꼴아 판단력이 흐려진 그는 저들의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어색한 반응을 동의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버지 상을 당해도 바로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하고, 사람이 어떻게 그래?”

기어이 사적인 일까지 끌고 오는 그의 모습에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내 딱딱한 물음에 스스로도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조금 움찔하던 그는 그런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더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개도! 이 대리보다는 사람같이 살겠다구요!”

볼륨 조절을 잃은 그 외침에 떠들썩하던 주변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김대리와 나를 보며 수근거렸고 듣지 못한 사람들은 뭐야? 뭔데? 등의 취임새를 내며 이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난 가까운 테이블을 훑어보다 한숨을 쉬며 김 대리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기서 누가 제일 개 같은지는 확실해진 것 같은데.”

사과는 내일 술 깨고 제정신으로 하라는 말을 끝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

김 대리는 내 말에 발끈했는지 뭐라 입을 뻐끔거렸다.

원래 사회란 게 큰 분란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우리 테이블 주변에 앉아있던 그의 동기 몇 명이 웃으며 김 대리를 감싸 안고 데려갔다.

덕분에 김 대리의 지나가던 똥개 발언은 그냥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정말이지 피곤한 하루였다.

김 대리가 날 은연중에 못마땅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노골적인 적의를 표현한 건 또 처음이라 썩 기분이 좋지도 않았고.

이후 아무 일도 없던 듯 회식은 계속됐고, 평소처럼 부장의 꼬장을 감내하며 주변인들이 그를 택시에 태움으로써 끝이 났다.

“저기, 대리님…….”

대충 마무리하고 파하려는 날 아까의 신입사원이 조심스레 불러세웠다.

“아깐 죄송해요. 제가 괜한 얘길 꺼내서 이상한 소리나 들으시구요.”

무른 소리를 하는 사원을 빤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잘못하지 않은 일로 사과하는 버릇 들면 회사생활 오래 못 버팁니다.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난 원래 툭툭 내뱉는 말 아니면 성격에 맞지 않아 그만 들어가보라며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전 이 대리님처럼 사는 게 더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요!”

등에 대고 신입사원이 소리를 질러 놀라 뒤돌아봐야 했지만.

“김 대리님 말대로 본능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건 정말 개 같은 새끼잖아요! 그냥 짐승새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외치며 그녀는 다시 뒤돌아 버스 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그 과격한 언사에 어이가 없어 그쪽을 잠시 바라보다 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저쪽도 어지간히 취했군.

사회 초년생들의 주량을 넘은 음주 문제나 이것저것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내가 사는 낡은 빌라 앞에 와 있었다.

빌라 이름을 새겼던 페인트칠은 다 벗겨져 원래 이름을 알아볼 수도 없고, 신축했을 당시엔 새하얬을 벽은 아이보리 색이 다 되어버린 건물, 오래된 내 보금자리로.

1층에다 방은 두 개밖에 없지만 나름 살 만했다.

조금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며 침대로 쓰러졌다.

싸늘한 거리를 걸을 땐 몰랐던 취기가 서서히 올라왔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로 오늘 하루 끝에 몰아쳤던 사건, 대화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수도승, 지나가던 개, 짐승새끼.

마지막 단어에는 픽 웃음이 나버렸지만.

짐승새끼라는 말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그 어린 신입사원은 나보고 인간적이라고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김 대리가 그 단어에는 좀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본능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것도 나름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술이 들어가니 별 시답잖은 생각이 다 드네.

사실 굳이 수도승 같은 삶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지는 몇 달이 됐다.

은행 대출금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딱히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닌지라 지금까지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어쩌면 굳이 수도승처럼 살 필요가 없지 않을까?

누구 말대로 짐승처럼 살아보고?

아니, 난 그렇게 살고 싶은 걸까?

술로 어질한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기분이 좀 가라앉았기에 난 고개를 돌려 침대맡의 작은 책꽂이로 손을 휘적휘적 뻗었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내 방에서 침대를 제외한 유일한 가구였다.

책꽂이에는 빼곡하게 책들이 꽂혀 있었다.

김대리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라고 한 건 틀린 부분이 없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게 내 유일한 취미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의 전권을 모으는 것.

내가 초등학교 때 출판된 데다가 크게 히트를 친 작품도 아닌 그저 그런 판타지 소설이라 종이책이 아니면 좀처럼 구하기 어려웠다.

대출금을 갚고, 저축을 하고 남는 생활비를 조금 쪼개서 프리미엄이 붙은 이 책을 하나둘 사 모으는 걸로 난 스트레스를 풀었다.

한 번에 모든 시리즈를 파는 곳이 없어 겹치는 권수도 몇 개 있지만 그건 나름대로 책이 망가질 걱정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1권은 3권이나 있다.

난 그중 하나를 빼서 펼쳤다.

기분이 좀 안 좋아질 때면 이렇게 모아 놓은 책을 다시 정독하곤 하는 것도 취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습관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제는 거의 외우기까지 한 소설의 첫 줄을 읽어 내려갔다.

눈이 이상하게 가물거린다고 생각하면서.

[신의 종족의 몸에도 인간과 같은 색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홍색 피였다. 그는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쏘……ㄷ……ㅇ……ㅡ……ㅁ…….]

그날은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이상할 정도로.

책의 첫 문장을 채 읽지도 못하고 난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수마에 빠져들었다.

책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침대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아, 책 구겨지면 안 되는데.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던 것도 같았다.

<미션 ㅇ……료. ㅂ……너……보상……로 특……한 능력이 주어집니다. 대상……ㅇ……ㅇ……구에 따라 능력은…….>

누구 마음대로 뭘 준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난 공짜라는 말은 안 믿어.

그러니까 필요없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정신을 까무룩 잃는 바람에 이루진 못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까악?

중세시대에나 볼 법한 장식이 들어간 창틀과 그 위에 앉은 까마귀가 날 반겨주고 있었다.

“으악!!!”

2화- 악의 축(1)

처음엔 웬 까마귀 모형이 있나 싶어 눈을 여러 차례 비볐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시야는 맑았고 녀석은 여전히 선명했다.

눈에 이상이 생긴 것도, 저게 모형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해지자 난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좀 낡긴 했지만 우리 집보다도 넓어 보이는 고급스러운 방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디야?”

“까악!”

중얼거리는 내게 대답하듯 까마귀가 울었다.

이놈은 대체 뭐길래 아까부터 인간이 소리를 지르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고?

그 까마귀가 이상하다는 마음 반, 우선 창 밖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마음 반으로 침대에서 나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곧 창가에 흐릿하게 비치는 생경한 얼굴에 멈춰 서야 했지만.

“……어?”

눈꼬리가 올라가서 좀 사나워 보이는, 그리고 소년과 어른의 사이에 있는 조금 앳되어 보이는 얼굴.

20살쯤 됐을까?

안타깝지만 내가 회춘한 건 아니었다.

공통점이라고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밖에 없는, 그냥 생판 남의 얼굴이었으니까.

묘하게 눈에 익은 얼굴이긴 했지만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보던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어렸을 때 얼굴도 아니었고.

난 창가에 비치는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봤다.

손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안면 근육 역시 내가 조절하는 대로 움직였다.

틀림없는 내 몸인데도 다른 사람의 얼굴이 움직이는 데서 오는 괴리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기절할까?”

였지만,

“……까아악?”

내 얼굴이 비친 창문 뒤로 내 혼잣말에 대답하듯 우는 까마귀 덕분에 힘이 빠져 실현되지는 못했다.

심각한 분위기를 깨버리는 게 어이가 없어 녀석을 응시했다.

“까아악!! 까아악!!!”

멱 따는 소리와 구별하기 힘든 울음 소리를 내던 녀석은 뭐가 신났는지 이젠 날개를 조금 푸드덕거리기까지 했다.

“내 말이라도 알아듣나?”

“까악!!!”

착실히 대답 비슷한 것까지 하고 있었다.

남의 몸에 들어와 까마귀랑 교감하고 있는 이 상황이라니.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답은 하나였다.

“개꿈이로군.”

탁! 탁!

허탈하게 나온 혼잣말에 녀석은 또 창문 두드리기로 대답을 해왔다.

열어 달라는 의미가 분명한 만큼 들어오겠다는 의지 또한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꿈 속이라고 해도 그런 혼파망까지 보고 싶진 않았다.

탁! 탁! 탁! 탁! 타닥!

하지만 내가 열어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녀석은 더 맹렬히 창문을 치기 시작했다.

그냥 웃긴 까마귀가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까마귀였다.

덜컹. 덜컹.

그냥 시끄러운 것뿐이었다면 무시라도 해보았겠으나,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창틀이 녀석의 부릿짓에 맞춰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쪽에서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쉿! 젠장, 알았으니까 그만해.”

아무리 꿈 속이라지만 값비싸 보이는 구조물이 파손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소시민적인 면모가 튀어나와, 난 창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앉아 머리를 비볐다.

“너, 이 방 주인이 기르던 새야?”

그렇다기엔 방 안 어디에도 새장이나 동물을 길렀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비싸 보이는 방에 날짐승을 들이는 건 아닌 것 같아, 얌전해진 녀석을 다시 밖으로 풀어주기 위해 녀석이 앉은 팔을 창 밖으로 내놓았다.

녀석은 어깨를 털어내려고 하는 내 손길이 두렵지도 않은 지 얌전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똑똑.

“카악?!”

가볍게 털어내려고 뻗었던 손이 노크 소리에 놀라 순간 녀석의 모가지를 콱 잡고 말았지만.

새는 놀라 버둥거렸고 나도 덩달아 놀라 얼른 녀석을 놓아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녀석이 내게 눈으로 욕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 고의는 아니야.”

당황한 녀석에게 최대한 침착하게 사과의 말을 건넸지만 까마귀는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윽.”

녀석에 대한 미안함이 가시기 전에 찾아온 건 손가락에 전해져 온 미약한 통증이었다.

방금 전 불쌍한 조류의 발버둥으로 인해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왜 아프지?”

꿈 속에서 느껴질 리 없는 통증이 너무 뚜렷하다는 점이었다.

***

똑똑똑.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계속되는 노크 소리가 날 압박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이게 왜 아픈 거지?

애초에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가?

그건 절대 아닐 텐데.

문득, 어쩌면 이 모든 게 현실일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까지 희미했던 현실감이 억세게 나를 붙들었다.

***

이거 정말 큰일이잖아?

난 지금 모르는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

그 꼴을 지금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게 생겼다.

그런데 그걸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그 말을 믿어 주긴 할까?

나라면 어디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상대라고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들어온 몸은 키가 껑충 크긴 했지만 얼굴로 봐서는 성인은 됐을까 싶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차라리 어른의 관심을 바라는 사춘기 소년의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여주면 다행이지.

망설임없이 정신병원 통원치료 혹은 입원치료부터 하자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내가 대답이 없자 문을 두드린 이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황자님. 세인입니다.”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그런데 황자라니, 나보고 한 말인가?

진짜 말 그대로 황자인 건가.

아니라면 부모님의 작명 센스가 대단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상대는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에 손을 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저런 식으로 들어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난 머리를 팽팽 돌려야 했다.

그래, 일단 몸의 주인인 척하며 시간을 벌어보자.

바로 내가 이 소년이 아니라 어디 먼 곳의 28살 먹은 회사원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결론을 내린 난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로 창가에 기대섰다.

창 밖에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내 식은땀을 조금 말려줬다.

이 순간만큼은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 훌쩍 날아가버린 까마귀가 부러워지려 했다.

제길, 아까 그 새처럼 날아서 도망칠 수나 있었으면.

이건 그냥 실없는 생각이었다.

바글바글한 지하철 안에서 아, 순간이동 능력이 있었으면 하고 잠시 잠깐 바라보는 것처럼 딱히 진심 어린 소원이 아닌 그저 혼자만의 투정 같은 것.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뱃속 깊은 곳에서 열이 올랐다.

그건…… 그건 그러니까 28년 인생을 살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으로, 단전에서 시작된 열이 따뜻한 슬라임 형태로 온몸을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 뱃속의 태아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 잠시 넋을 놓게 되는 그런 느낌.

하지만 그것은 허망할 정도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마치 내 착각이었던 것처럼.

방금 그건 뭐지?

철컥.

영원 같았던 그 찰나의 감각에 어리둥절해하던 난 문 손잡이 돌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맞아, 우선 저 사람을 어떻게든 해야지.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성큼 들어왔다.

난 혼신의 연기를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몸의 주인은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 그에 맞춰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세상에…….”

예상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로 늘 미소를 잃지 않던 사람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들어온 이의 얼굴이 저렇게 경악스러울 순 없었다.

남자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이게 뭐야.”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한 반응이었다.

노기까지 어린 남자의 목소리에 난 바로 태세를 바꿔 설명을 하기 위해 인상을 풀고 입을 열었다.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전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까악! 까……악?”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웬 까마귀 소리가 성대를 타고 나왔다.

난 당황해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니, 저 갑자기 초면에 까마귀 소리 내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까악!! 까악!!”

하지만 나오는 건 여전히 까마귀 소리라 설득력이 없었다.

“방을 이 따위로 관리하다니…….”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린 남자는 내게 다가왔다.

“쉭! 나가!”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오자 그냥 큰 게 아니라 정말 거대했다.

아, 아니구나.

남자가 거대한 게 아니었다.

그제서야 난 내가 작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날 쫓아내기 위해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고, 난 창틀에 앉아있다가 얼결에 팔을 파닥이며 방 안을 한 바퀴 날아다녔다.

내가 날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전에 난 이제 종이를 말아쥐고 날 겨냥하는 남자를 피해 창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오기 전 창문에 언뜻 비친 내 모습은,

“까악!!!”

영락없는 까마귀였다.

***

여기까지가 아무도 모를 빙의 첫날의 수치스러운 동시에 유익한 경험의 기록이다.

유익하다고 한 건 그 덕분에 내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날, 난 까마귀가 되어 당황스러운 몸을 이끌고 밤까지 그 일대를 날아다녀야 했다.

덕분에 황성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를 훔쳐 들었고, 저 높이 올라가 펄럭거리는 국기에 그려진 세 개의 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땐, 밤하늘에 떠 있는 선명한 세 개의 달 아래에 한참을 앉아있을 수 있었다.

이것들은 내가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 [다크 헤더]에 빙의했다는 결론을.

***

책 속의 세상에서 7황자로 빙의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다.

저절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길 기다려봤지만 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다들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식사시간을 제외한 어떤 때에도 사람을 들이지 말라는 명령만 착실히 이행했을 뿐.

덕분에 난 차분하게 내 상황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을 가로질러 벽에 붙어있는 거울을 다시 한번 살폈다.

까만 머리와 눈동자, 올라간 눈매, 자세히 봐야 보이는 왼쪽 눈썹을 끊어 놓은 흉터 자국.

이 몸은 틀림없이 아바란 제국의 제7황자, 란 아바란이다.

“젠장, 하필이면…….”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필이면 일곱째였다.

첫째, 둘째, 셋째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 황자.

형제자매 중 가장 취급이 안 좋은 데다가 나이도 애매한.

현 황제는 자식이 꽤 많아서 내가 막내도 아니다.

외동 아들에서 순식간에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생겼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차피 3년 이내로 대부분 죽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주인공 손에 죽는다.

그래, 안타깝지만 우리가 악의 축이다.

3화- 악의 축(2)

선선한 바람과 척척한 가을 냄새가 불어오는 오후.

난 아직도 7황자의 몸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침대에서 꼬박 하루를 침대에서만 보낸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그 정도야 사건이라고 칠 정도는 아니니까.

그걸 제외하면 난 놀라울 정도로 이 세계에 잘 적응하는 중이었다.

[다크 헤더] 시리즈를 100번도 넘게 완독한 나에게 이 세상의 전개는 손바닥 위를 보듯 뻔했기 때문에 딱히 조급함도 들지 않았고, 아직 원작이 시작되려면 1년이라는 기간이 남기도 했으니까.

그 동안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래도 썩 할 수 있는 일이 없긴 했다.

난 여전히 7황자를 연기하며 하루를 보냈고, 딱히 누구도 그런 나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 안나라는 아이의 의심 어린 시선이 꽂혔지만, 그 녀석은 내가 눈길만 줘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다가 눈을 내리깔곤 했기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진 않았다.

그래도 지난번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이상하다는 걸 떠들고 다니면 곤란하긴 한데.

똑똑.

멍하니 책상을 두들기는 날 현실로 끌고 온 건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였다.

“뭐냐.”

“황자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난 정보 수집을 위해 읽던 책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들어와.”

하녀 3명이 은색 트레이를 밀며 들어왔다.

마침 안나는 냄비에 졸아든 설탕시럽처럼 트레이에 달라붙은 채로 바퀴를 밀고 있었다.

저 녀석이 문제란 말이지.

빨래터에서 내가 이상하다고 중얼거리고 내 변화를 신경 쓴 유일한 꼬마.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식사를 준비하는 하녀들을 바라봤다.

하녀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식은 땀을 흘리며 음식을 조금씩 그릇에 덜어 놓았다.

뜨거운 차가 든 사기 주전자를 내려놓을 때는 살짝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고서 내 눈치를 열심히 살피기까지 했다.

내가 7황자의 몸에 빙의했다는 걸 들키지 않은 데는 고용인들의 이런 반응 덕도 컸다.

7황자의 짐승만도 못한 성깔 머리를 다들 두려워했으니까.

란은 소설에서 황족 중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인물로서, 그로 인한 열등감을 자신보다 신분이 낮고 만만한 이들에게 푸는 성격이었다.

푼다는 건 주로 폭력, 심하면 살인, 가벼우면 짜증 정도를 뜻한다.

한마디로 쓰레기였다.

이전에 워낙 지랄맞은 짓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내가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사용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잘못을 빌기 바빴다.

죄 없는 사람들을 압박하는 게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덕분에 다들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나름 열심히 소설 속 7황자를 연기하기도 했고.

우선은 조용히 있다가 소설의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되기 전에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바라는 일이었으니까.

원작의 흐름도 고려하려면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저 아이가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다.

요즘 사람한테는 그릇을 안 던지는 게 이상하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차마 사람한테 던질 순 없어 그냥 바닥에 몇 번 찻잔을 던졌던 게 화근이었나.

그냥 둬도 괜찮을까?

아까처럼 다른 고용인들한테 내가 이상하다는 걸 계속 어필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똑똑똑.

안나의 처분에 대해 고민하는데 갑자기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내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황자님, 세인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전혀 실례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키가 껑충 크고 마른 남자가 사과했다.

그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들어올린 얼굴에는 나를 향한 경멸의 빛이 어려 있었다.

첫날 까마귀가 된 나를 내쫓았던 남자였다.

***

세인.

7황자의 비서관.

소설에 언급된 인물의 첫 등장이 신기해 그를 찬찬히 뜯어봤다.

깔끔하게 넘긴 옅은 갈색머리, 핼쑥한 볼, 콧대에 걸친 작은 안경, 마지막으로 190은 돼 보이는 마른 몸.

얼핏 학자 같아 보이는 외양과 달리 실무 능력은 형편없다.

그는 현 황후의 먼 친척뻘로, 황후를 무서워하는 원작의 7황자를 멸시하는 인물이다.

사실 여기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황후가 그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어리석은 소설 속 란은 알지 못하고 황후를 들먹거리는 세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황자님께서 이리 미욱하시니 제가 황후 전하께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7황자는 대부분 입을 다물곤 했다.

세인에게 당하고 나면 황자는 아랫사람들에게 더 히스테리를 부렸다.

세인은 황자가 그런 기품 없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걸 특히 좋아했다.

자신은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 황자 앞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저렇게 서 있는 거겠지.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요 일주일 간 귀체가 불편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고귀하신 황족께서 편찮으실 수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소인, 매우 걱정했습니다. 황자님. 하지만 황자님께서 처리해주실 중요한 업무들이 있어 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어리셔서 이해하지 못하실 수도 있지만 워낙 급한 사항이라서요.”

그는 가져온 종이뭉치를 식사가 버젓이 놓여있는 탁자 옆에 보란듯이 올려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부디 바로 서명해 주시지요.”

긴 말을 끝으로 그는 콧대에 걸친 안경을 한 번 씰룩였다.

물론 길고 긴 헛소리다.

우선 7황자는 워낙에 멍청하고 능력도 없어서 급한 일을 맡기지 않는다.

그냥 체면치레로 오는 서류들이지.

기껏해야 마구간의 말 먹이를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 등 하등 쓸모없는 사안들이다.

저 남자가 한 말 중에 옳은 말이라고는 황족이 아픈 건 처음 본다는 말이 다일 것이다.

원래 황족은 좀처럼 아프지 않다.

잘 병들지도 않고.

그게 소설에서 주어진 이들의 설정값이다.

7황자도 나름 보통 사람보다는 몸이 튼튼하긴 하지만 형제자매들과 비교하면 거의 일반사람이다.

그건 열등감 덩어리 7황자에겐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을 거다.

세인이 그걸 모를 리는 없고.

7황자였다면 멍청해서 못 알아들었거나, 알아들었어도 그냥 부들부들 떨기만 했을 거다.

물론 난 7황자가 아니라서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사무적인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내가 화를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마른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조소를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그는 그리 말하며 조금 전부터 옆으로 빠져 떨고 있는 하녀들을 흘끔 곁눈질했다.

어디 할 거면 해보라는 듯이.

의심 많은 안나의 오해를 풀어줄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다.

***

멍청한 7황자놈.

세인은 일주일째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7황자를 짓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전부터 황자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놈이 말을 듣질 않았다.

싫은 티를 내면서도 서명하라는 대로 서명하고, 수치스러워하면서도 곧이곧대로 듣고 있던 얼간이 주제에.

애초에 황족 같지도 않은 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부터가 가당찮았다.

황족은 신의 종족이다.

온 세상이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 만물은 황족들 중심으로 돌아갔다.

오직 황족들만 가질 수 있다는 아름다운 금발머리는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인 역시 어렸을 때부터 황족에 대해 들으며 자랐고, 황족은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게다가 자신은 황후의 먼 친척이기까지 했다.

친인척이라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멀고 멀긴 했지만.

황족과 가까운 존재라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과 아깝게 그들과 연을 맺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그로 하여금 황궁에서 일하겠다는 꿈을 키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학문에도 무술에도 특별한 재능이 없던 그는 뒤로 뇌물을 바치고서야 겨우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보게 된 황족은 말 그대로 신의 현신이었고 고결함의 상징이었다.

황궁에서의 그들의 생활은 마치 신의 세계라도 본뜬 듯 호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주 정당해 보였다.

자신이 모시는 저 7황자를 제외하면.

처음 이 성질 나빠 보이는 검은 머리 황자를 본 날을 세인은 잊지 못한다.

멍청하고 볼품없었으며 천박했다.

그에게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서류뭉치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뺨이 긁히기까지 했다.

저딴 게 황족이라고?

자신보다도 멍청해 보이는 7황자는 나름 황족이라고 또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았다.

황족들 사이에서 먼지처럼 있을지언정 귀족들은 황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그의 패악을 못 본 척해줬다.

다른 황족들처럼 호화롭게 살진 않더라도 돈 걱정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가난한 백작가의 삼남으로 이리저리 돈을 구걸하러 다니는 그와는 달랐다.

덜떨어져 보이는 저딴 놈이 뭐가 잘났다고.

세인은 들끓는 분노와 질투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꿈꿔왔던 황족의 수족으로 사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기껏 떨어진 자리가 버려진 황자의 뒷바라지나 하는 역할이라니.

하지만 이미 무리해서 돈을 모아 뇌물을 바친 후였다.

이제 와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어, 그는 황자의 밑에서 일하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너……. 황후 전하의 친척이라는 게 정말이야?

멍청한 황자가 그렇게 묻기 전까진.

세인은 그의 눈에 비친 두려움과 약간의 호기심 그리고 희망을 읽었다.

아, 이 황자는 멍청하긴 해도 쓸모는 있는 모양이구나.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멍청한 황자는 서명하라는 대로 서명하고 쓰라는 대로 썼다.

황자궁으로 오는 예산을 빼돌려도 녀석은 아무것도 몰랐다.

인내심이 바닥나 보일 때 황후를 가끔씩 거론하면 금세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하녀나 하인들에게 풀었다.

세인은 그 추한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반푼이긴 하지만 황족이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우월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쓰레기 짓은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줬다.

역시 저런 쓰레기는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루하루가 성공가도였다.

그랬는데.

일주일 전, 황자는 갑자기 자신의 방에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아무리 비서관이 왔다고 전하라고 해도 하인과 하녀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사실 황자가 그렇게 말하면 세인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게 맞았다.

아무리 덜 떨어진 황족이라지만 그가 명령하면, 자신이 정말 황후의 친애하는 친척이 아닌 이상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새삼 그 기분 더러운 사실이 상기되자 세인은 묻어 놓았던 열등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는 늘 추하고 멍청한 황자로 있어야 했다.

황자궁 돈을 빼돌릴 것만 믿고 끌어 쓴 돈 때문에, 조작된 서류에 황자의 서명이 슬슬 필요하기도 했다.

“황자 전하는 아직도 방에 틀어박혀 계시나?!”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나가는 하녀를 다그쳤다.

“지…… 지금은 방에서 식사 중이십니다.”

그의 충혈된 눈에 겁을 집어먹은 하녀는 최소한의 정보만 내뱉고는 도망가 버렸다.

식사…… 식사 중이란 말이지.

방에서 식사 중이라면 주변에 하녀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오늘은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지.

그러면 그 멍청한 황자는 또 화를 주체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게는 찍소리도 못하겠지.

어쩌면 옆에 있는 하녀들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죽일지도 모른다.

그것만큼 추한 광경이 또 있을까.

세인은 자신이 무슨 표정인지도 모른 채 노크를 하고 바로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황자는 건방진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황자님, 세인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고용인들 앞에서 황자를 모욕 줄 생각에 신이 난 세인은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바라보는 황자가 자신을 찡그리는 것도, 주눅든 것도 아닌 완벽한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4화- 악의 축(3)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명백한 조소가 걸린 얼굴엔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함께 담겨 있었다.

“할 말이라…….”

난 느리게 다리를 풀고 일어섰다.

“위험한 거 아닌가? 그런 언사.”

내 말에 세인은 정말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충신의 진심 어린 간언이 어떻게 위험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그저 할 말을 하러 왔다는 말 따위를 가리킨 것이 아님을 놈이 모를 리가 없었지만, 상대는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을 고수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중얼거린 난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하는 하녀 세 명에게 다가가 차갑게 말했다.

“이봐.”

“네……네, 황자님.”

하녀들에게 화풀이를 시작할 것이라 예상한 건지 세인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네깟 것들이 들을 수 있을 만한 얘기가 아니니까 다들 귀 막아. 한마디라도 훔쳐 들은 걸 들키는 날엔 손가락 없이 일해야 할 거야.”

내 말에 모두 사색이 되어 귀를 꾹 막는 걸 확인한 후 난 다시 세인에게 몸을 돌렸다.

“세인.”

“……네, 황자님.”

세인은 날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알다시피 난 세인처럼 달변가가 아니야.”

“그게 무슨…….”

“그러니까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 노크부터 시작할까?”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표정의 세인에게 난 턱을 까딱거리며 명령했다.

“나갔다 다시 들어와. 이번엔 비서관답게. 내 허락이 떨어지면 들어오고.”

“……하!”

세인은 내가 그의 버릇을 들이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열심히 생각하신 게 똥개 훈련인가요.”

필요하다면.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말씀 받잡겠습니다, 황자님. 몇 번을 반복하셔도 제대로 가르쳐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쿵쿵거리며 밖을 나섰다.

제대로 내 허락을 구하고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번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러진 않겠지.

방금 예고하고 갔듯이, 니가 이 짓을 몇 번을 반복해도 난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였으니까.

하긴 그 자존심에 먼저 시비를 걸고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긴 싫을 것이다.

그것도 고용인들 앞에서.

그래도 난 그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며 사기로 된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똑.똑.똑.

벌컥.

절도 있게 문을 두들긴 후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내 허락의 말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이제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날 잠시 바라봤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내 손을 확인하곤 얼굴에 경악이 어렸고

쨍그랑!!!

“으악!!!”

곧 온몸을 웅크리며 주저앉아야 했으니까.

내 손을 떠나간 찻주전자는 그의 왼쪽을 스치고 벽에 부딪쳐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안에 있던 따뜻한 차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이……이게 갑자기 무슨…….”

그가 공포로 흔들리는 눈을 들어올렸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가르쳐 준 거잖아. 몸으로.”

난 비죽이 웃으며 대답했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알았나?”

덧붙였지만 그는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가 봐. 반복학습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오고.”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그는 종이인형처럼 비척비척 일어섰다.

“다음엔 삐끗해서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지만.”

세인은 하얗게 질려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빠르게 사라졌다.

이 정도면 됐겠지.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난 아직까지 귀를 꼭 막고 있는 하녀 셋에게 다가갔다.

내 발끝을 본 그들은 슬금슬금 얼굴을 들었다.

내가 머리에서 손을 떼는 시늉을 하자 다들 엉거주춤 귀를 막던 손을 떼어냈다.

“이제 치우고 나가.”

이전보다 더 삐걱대는 셋을 보며 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걸로 7황자가 여전히 사람한테 그릇 던지는 또라이라는 소문이 다시 돌 것이었다.

***

세인은 그 사건 이후로 조용해졌다.

성의 주인인 척 거들먹거리는 세인을 싫어하던 사용인들은 이 일로 좀 시끌벅적했지만.

하루 일과를 마친 하녀들의 숙소에도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래도 황자님이 요즘 좀 변한 것 같니, 안나?”

그녀를 놀리듯 묻는 하녀 언니의 말에 안나의 입이 부루퉁해졌다.

그에 옆에 있던 린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왜 애를 놀리고 그래? 아니야, 안나. 니 말이 맞았어. 정말 변하셨더라.”

“언니가 생각해도 그렇죠? 좀…….”

“겁나 무서워지셨어.”

잠 잘 준비를 하던 하녀들이 그녀의 말에 깔깔 웃으며 야유했다.

“야! 애 놀리지 말라며!”

“아니, 근데 진짜라니까? 이번에 그 비서관일로 난리일 때 나도 있었잖아. 전에도 난폭하셨는데, 지금은…… 차분하게 난폭하셔.”

“그게 뭔 소리래. 넌 예쁘게 못생겼니?”

별 흰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옆 자리 동료가 놀리자 린은 그녀를 흘겨봤다.

“……넌 앞으로 다시는 식사 당번 안 바꿔 줘. 얘, 앤. 넌 무슨 뜻인지 알지? 그때 같이 봤잖아!”

린은 안나와 함께 문제의 점심식사 시중을 들었던 나머지 하녀를 향해 물었다.

앤은 앞치마를 꼬매느라 내리고 있던 시선을 슬쩍 올렸다가 다시 수선에 집중하며 툭 뱉었다.

“적중률은 좀 떨어지신 것 같더라. 그 진상 머리는 못 맞추신 거 보면.”

그녀의 담담한 대답에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윽고 숙소의 불이 꺼지자 소란스럽던 방 안에 서서히 고요함이 찾아왔다.

모두가 잠든 사이 안나는 가만히 누워 회상했다.

주전자를 던지기 직전 슬쩍 귀를 꽉 막은 자신들의 손을 확인하던 7황자님의 시선을.

‘역시 이상해, 좀…….’

“친절해지신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리며 안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어떤 의미에선 전보다 무서워지신 것도 같아.

안나가 가장 어린 나이에 황궁에서 일하게 된 데에는 7황자 밑에서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황자님이 거칠어 보이길 원하다신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정말 입조심해야지.

다짐하며 안나는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란의 퍼포먼스는 초기의 목적을 반만 달성하고 끝났다.

***

세인이 예의없이 문을 여는 일은 없어졌다.

사실 아예 이쪽으론 발길도 주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어디 가서 성격 좋단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티포트로 사람 머리 맞추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에 난 조금 안심했다.

게다가 세인의 사건 이후로 사용인들이 좀 더 겁을 먹었는지 내 침실이나 집무실로 명령없이 발걸음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정말 해야 하는 청소나 빨래를 위해 오는 시간 외엔 이곳이 귀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다들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덕분에 난 한가하다.

이렇게 나무에 앉아서 바람이나 쐬면서 쉴 수도 있고.

날개도 몇 번 퍼덕여 보고.

부리도 좀 닦아 보고…….

그래, 난 지금 까마귀로 변해서 나무 위에 앉아있다.

정확히는 집무실 창가에 있는 상수리나무 가지 위에.

첫 번째로 까마귀로 변했던 다음에도 시험 삼아 까마귀로 몇 번 변해본 적이 있었다.

많이는 아니고 한 두어 번.

사람들이 집무실이나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이게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이다.

왜 난 까마귀로 변할 수 있는 걸까?

다크 헤더는 옛날 판타지 소설이다.

마법 같은 힘도 존재하고 무서운 몬스터, 인외 종족도 나온다.

이 세계엔 마니스라는 게 있어 이것을 지닌 사람은 특별한 힘을 쓸 수 있다.

마니스는 극히 일부 사람들만이 타고난다.

7황자가 이렇게 취급이 안 좋은 것도 다 그것 때문이다.

마니스를 타고나지 못한 유일한 황족이기 때문에.

이 몸의 주인을 이렇게 콤플렉스 덩어리로 만든 데 기여를 한 설정값이다.

-근데 내가 이렇게 변신이 가능한 건 아무리 봐도 마니스 때문인 것 같단 말이지…….

“까아악- 까아악-”

이놈의 울음소리는 적응이 안 된다.

어쨌든 마니스는 사람마다 다른 능력으로 발현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능력들은 전부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예를 들어 황제는 불의 능력을 쓰고 1황자는 물의 마니스를, 2황자는 불을 쓴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까마귀로 변하는 마니스는 소설에서도 본 적 없는 능력이었다.

아니면 첫날 내가 목덜미를 잡았던 까마귀가 저주라도 내린 걸까도 고려해 봤지만, 내가 무슨 까마귀로 변해서 오직 공주의 키스만으로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까마귀로 변했다 사람으로 변했다 할 수 있는 걸 봐서는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난 지금의 상황이 소설의 전개대로 진행되길 바라니까.

물론 주인공이 조금 고난을 덜 겪을 수도 있고, 약간은 더 쉬운 길로 갈 순 있겠지만 안전하게 내가 아는 원작대로 일들이 진행되길 바랐다.

내가 이곳에 이렇게 여유롭게 있는 건, 원작 시작은 1년이 남았고 내가 죽으려면 3년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원작을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크 헤더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다.

이건 14살짜리 꼬맹이가 구립도서관 소설 코너 구석에 박혀 있던 낡은 판타지소설 시리즈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변치 않는 사실이다.

100번은 넘게 읽었을 이 소설이 내가 아는 완결로 끝나길 바라는 것이다.

물론 3개월쯤 지나도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바로 튈 거지만.

난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찌뿌둥한 날개를 퍼덕였다.

***

“오늘 뭘 한다고?”

“저, 저녁 의, 의식을 여십니다. 7황자님도 오늘 참석하셔야 합니다.”

비서관 대신 말을 전하러 온 시종은 내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처럼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맡은 바 할 일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았으니까 나가 봐.”

“네, 황자님.”

젊은 시종은 인상을 찌푸린 내가 잉크병을 집어던질 것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뛰듯이 걸어나가느라 바쁜 와중에 책상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젠장."

문이 닫히자마자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황제와 내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자리라니.

황제는 달에 한 번, 혹은 그 이상 황제의 자식들과 함께 이 거룩한 의식의 시간을 가진다.

말이 의식이지, 후계자 시험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히 7황자는 후계자 측에도 못 끼니, 꿔다 놓은 보리자루 신세다.

그럴 거면 그냥 아예 부르지도 않으면 될 일이지만, 황제 직계 자식들은 모두 다 참가하는 게 관례라서 그건 또 안 된다는 논리다.

회사 회식보다 더 불편할 게 뻔한 그런 곳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있을 것을 생각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거의 만나지 않더라도 형제자매라면 날 잘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내 행동거지가 이상하다고 의심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내가 다크 헤더의 애독자였기 때문에 7황자에 대해서 이렇게나마 아는 것이지, 사실 이 몸의 주인은 비중이 많지 않은 엑스트라 악역이기 때문에 세세한 습관이나 생활, 모든 인간관계 같은 것은 책에 나오지 않는다.

최대한 인상 찡그리고 바닥만 보고 있어야겠군.

환복을 도와주러 온 하인에게 옷은 두고 소화제나 준비해 놓으라고 명하며 다짐했다.

오늘은 먹은 게 없어도 체할 게 분명했다.

***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만찬장은 내가 지내는 쓰러져가는 궁의 식당과 비교하면 화려하다 못해 찬란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모든 이들이 온 게 아닌지 군데군데 비어 있는 자리가 있었다.

당연히 가장 상석인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어 길다란 테이블의 가장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이 정도는 소설에서도 언급이 된 설정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주변을 조금 둘러보았다.

어쨌든 처음 만나는 형제자매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들에 대한 내 첫 감상은, 우선 눈이 부시다였다.

미모가 눈이 부시다 이런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눈이 아팠다.

하나같이 화려한 금발 머리들이라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는 눈부심에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확실히 이 사이에 있으면 7황자는 까마귀가 따로 없을 것 같긴 했다.

이제 그냥 가만히 앉아있다가 의식에서 하는 척만 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면 한 달 정도는 또 조용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짓을 두세 번만 반복하면 된단 말이지.

“반푼이 새끼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고개 빳빳이 들고 있네.”

그때마다 이렇게 화려한 곳에 오게 되는 건가.

“야. 지금 내 말 무시한 거냐?”

회식은 식비라도 아껴 주지, 이건 뭐…….

“야!”

지금 날 부른 건가?

아까부터 얼핏 들리던 언짢음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기가 많이 도는 금발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이였다.

말을 건 그는 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8황자, 셀로스 아바란.

나보다 머리 반절은 커 보이지만 2살 어린 내 이복 동생이었다.

아, 썩 좋은 저녁은 아니겠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5화- 조착의 징후

셀로스 아바란.

나보다 두 살 어린 녀석으로, 엄마는 다르지만 형제이긴 했다.

저 녀석은 날 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원작에서도 나와 몇 번 같은 장면에 나온다.

저 녀석도 악역 엑스트라니까.

마니스가 없어 가장 말석에 앉아있는 나와 가까이에 자리잡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니스가 적은 축에 속하고.

“비루한 것이 배워 먹질 못하더니 이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냐?”

생각을 하느라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 무시당한다고 느낀 건지 녀석의 말씨가 거칠어졌다.

“아, 미안하다.”

저 녀석이랑 있을 때면 란은 대부분 주눅들어 있던 것이 떠올라 일단 간단한 사과를 건넸다.

잘못한 것 없이 사과하는 게 얼마 만이더라?

하지만 내 사과가 성에 차진 않았는지 녀석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너 돌았냐?”

8황자는 원작보다 아직 2살이 어려서인지 소설에서의 묘사보다 좀 더 다혈질이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나아지기도 한다는 게.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좀 너그러워졌다.

어쨌든 내 안엔 28살 아저씨가 나앉은 상태가 아닌가.

17살이면 고1이다.

고딩 장단에 어느 정도 맞춰줄 의향도 있었다.

“왜, 버러지같은 어미에게도 버려져서 제대로 사과하는 법도 못 배웠나 보지? 벌레 새끼면 벌레 새끼답게 고개 푹 수그리고 비는 거라고.”

……동생이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 늘 궁금했는데 이런 기분이었군.

지랄맞네.

“지랄맞네.”

8황자의 눈이 커지며 얼굴이 그 머리색만큼이나 불그스름해졌다.

그 얼굴을 보아하니 혹시라도 내 중얼거림이 너무 작아 듣지 못했을 확률은 낮은 것 같았다.

새로 생긴 이복동생은 귀가 좋은 모양이었다.

수습, 수습을 해야지.

만나자마자 내 가정교육을 걱정해주는 착한 동생을 달랠 말을…….

“……동생이 귀는 멀쩡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구나.”

고백하자면 현대에서도 지금도 난 사람 긁는 말을 하는 데 조금 재능이 있다.

***

평소 자신의 앞에선 입도 뻥긋 못하던 이복 형에게 모욕을 듣자 당황했는지, 8황자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다짜고짜 패드립부터 날린 것치고는 꽤나 수줍은 반응이라 가만히 그를 응시하니,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탁자를 치고 일어났다.

“너 이 자식……!”

10년 만에 가정교육 운운하는 말을 들어 좀 울컥한 감이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소란을 원하진 않았다.

지금까지야 평소처럼 8황자가 7황자를 나무라는 걸로 보일 수 있었다.

한숨을 쉬며 녀석을 진정시키려 했다.

다행히 소설 속 저 녀석은 나보단 늦게 죽어서, 난 8황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와 8황자 사이를 갈랐다.

나와 녀석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시녀 두 명을 대동한 아름다운 여자였다.

풍성한 금발의 그녀는 아름다운 황족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만큼 화려한 이목구비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한 번 마주치고 8황자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우리 자리를 지나쳤다.

“황제 폐하 앞에서 소란스러운 꼴을 보이면 안 되잖니.”

나긋한 목소리가 앉아있는 나와 엉거주춤 서있는 8황자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노란 빛이 조금 도는 긴 금발 머리가 눈에 띄는 그녀는 목소리만큼 말씨도 부드러웠지만 8황자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녀님.”

금세 얼굴이 하얘진 녀석은 고개를 수그리고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겁을 먹었는지 조용해진 8황자를 잠시 바라보다, 이젠 거의 다 채워진 푸른색 암석으로 된 테이블을 훑어봤다.

거의 대부분이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금발들이 앉아있으니 안 그래도 화려한 내부가 더욱 호화로워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테이블 반대 끝편의 상석이었다.

황제의 자리로 보이는 맨 앞 상석에서 왼쪽 두 번째로 떨어진 자리엔 조금 전 8황자를 본의 아니게 겁주고 갔던 여자가 앉아있었다.

역시 1황녀였군.

그렇다면 왼쪽 첫 번째 자리에 앉은 남자는 1황자, 그 남자의 건너편에 앉은 이는 3황자일 것이다.

그리고 1황녀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성격 좋아 보이는 남자가 2황자.

저 자리 배치와 끝자리에 앉은 나, 그리고 8황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나이 순으로 다들 앉아있는 게 아니다.

황제와 가까운 자리일수록 백발에 가까운 백금발이 된다.

털색별로 분류해 놓은 강아지도 아니고 무슨 짓인가 싶지만 다 의미가 있다.

이 세계에선 마니스가 강한 사람일수록 백금발에 가까운 금발머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런 밝은 금발머리를 갖는 것은 황족으로 정해져 있고.

달리 말하자면 일반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강력한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검은 머리 주인공을 제외하면 말이다.

원작 속 7황자는 주인공도 아니고, 금발도 아닌 흑발이기 때문에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마니스를 갖지 못했고 이 모든 푸대접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28년 평생을 그런 판타지적 요소에서 동떨어진 인생을 살던 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은 사지 멀쩡한 몸뚱어리만 있으면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지기 마련이니까.

“황제 폐하 드십니다.”

시종의 엄숙한 목소리에 어수선하던 장내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황제는 느릿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언뜻 군복처럼 보이는 검붉은 색 정복을 차려 입은 그는 60이 넘는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건장한 체격에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세상 다 산 듯한 눈빛과 귀찮은 가득한 몸짓이 그가 결코 얼굴만큼 젊은이는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었다.

“모두 앉으라.”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내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모서리가 둥근 삼각형 형태의 석판이 놓여있었다.

황제와 황제 양옆으로 각각의 모서리가 향하게 놓여있는 저것이 이 의식의 핵심이다.

성인 남성 손바닥 높이의 이 푸른 판은 푸른 대리석 탁자의 매끈함과는 다른 요요한 빛을 띠고 있었다.

“바로 시작하지.”

다행히 황제는 신속한 일처리를 좋아하는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한 손에는 영광을, 한 손에는 신념을, 맞잡은 두 손 끝에는 불귀를.”

낮은 황제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은 아니다.

초대 황제가 죽기 전에 남겼던 말로, 황가에 내려오는 전통 같은 것일 뿐.

작중에서도 별 의미는 없어서 그냥 작가가 멋있어 보이려고 넣었구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 앞에서 보니 또 색다르군.

나만큼이나 건조한 눈의 황제는 천천히 석판의 모서리에 손을 올렸다.

그건 뭔가를 주입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언뜻 보면 그냥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우우웅.

크게 진동한 석판은 푸르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의 아지랑이 다발이 석판의 정가운데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름드리 나무만 한 두께의 빛무리는 마치 넝쿨처럼 뻗어 나와 탁자를 덮었고, 끝자리인 내 앞에 닿을 듯한 거리까지 이어졌다.

더 이상 빛이 뻗어 나가지 않자 황제는 손을 떼어냈다.

빛 다발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넋을 놓게 되는 아름다운 광경에 자리한 모두가 경이롭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황제가 손을 올린 저 비범해 보이는 석판은 고대유물 프라사.

초대 황제가 남긴 몇 안 되는 유물이다.

마니스를 주입하면 시전자의 마니스 양을 측정해준다.

그리고 황가의 사람들이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의식을 갖는 것은 이 측정을 위해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의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마니스의 양은 힘의 크기를 나타낸다.

가장 큰 마니스를 지닌 사람이 차기 황제가 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앉은 이들은 누구든 프라사에 손을 올려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마니스를 선보일 수 있다.

황제의 양옆에 앉은 두 명까지 손을 올려 측정을 끝내고 나면 누구든 나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도전하는 사람이 없어 의식은 그렇게 끝난다.

왜냐하면 황가의 사람들은 모두 12살이 되면 한 번씩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마니스를 측정하기 때문이다.

이때 정해진 순위는 성인이 되어서도 좀처럼 뒤집어지지 않는다.

뭐, 어디 기록을 뒤져보면 예외는 있을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극히 예외의 경우인 것이다.

쉽게 말해 이 의식은 허울 좋은 전통인 것이다.

말로는 누구에게든 시도할 기회가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두의 앞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누가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인지.

황태자가 될 이에게는 자리를 공고히 하는 자리가 되고, 황제에게는 자신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기회가 된다.

“오, 오늘은 특히 더 대단하십니다, 폐하.”

거대한 힘에 대한 여운이 가시자 저 멀리 넷째인지 다섯째인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감탄의 말을 건넸다.

황제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확실히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것보다 좀 더 대단한 광경이었던 것 같다.

그 때도 빛이 이렇게 탁자 끝에 닿았던가?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곧이어 황제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1황자에게로 순서가 돌아갔다.

그는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로 강력한 물의 마니스를 사용한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른 쪽 모서리 위에 손을 올렸다.

우우웅-

푸른 탁자가 황제 때와 마찬가지로 밝게 빛났다.

나는 슬슬 지루해져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의 1황자라면 아직 황제만큼 커다란 힘은 내지 못할 거다.

아마 탁자의 절반을 넘을 정도가…….

“큭!”

“형님!”

모두가 기대했던 아름다운 장관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의 코에서 흘러나온 새빨간 피가 턱을 타고 흥건히 퍼져 파란 탁상을 어지럽혔을 뿐.

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1황자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2황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누구 없느냐!”

그 다급한 목소리에 대기중이던 시종들이 급하게 들어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내부는 엄숙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황족과 시종들 모두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젠장…… 쿨럭! 난 괜찮으니까 다 물려!”

“형님, 그래도 의사를…….”

시종들은 1황자의 짜증스러운 손짓에 엉거주춤 멀리서 서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주고받거나 손으로 입을 막고 이를 지켜봤다.

하지만 이 모든 이들 중 나만큼 당황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난 자신한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순간, 오직 나만이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1황자는 곧 죽는다.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원작의 시작이 6개월 앞당겨진 것이다.

***

밤의 의식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이 났다.

첫째를 급하게 1황자궁으로 보내고 나니 의식이고 뭐고 더 이상 진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줄곧 무표정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황제는 그저 오늘은 이걸로 끝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을 뿐이었다.

나도 급한 걸음으로 낡은 침실로 향했다.

이상했다.

이래선 안 됐다.

현재 란은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인 19살의 몸이다.

원작의 시작은 1년 후였어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반년 후 1황자는 오늘처럼 의식의 중간에 코피를 흘렸어야 한다.

그 후 상황은 점점 안 좋게 돌아가고.

이전까지 1황자의 마니스가 나머지 형제자매들보다 높았기 때문에 차기 황제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황궁에는 피바람이 불게 된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황권 다툼의 서막이자 원작의 첫 페이지다.

그게 6개월이나 빨라진 것이다.

과연 이것만 앞당겨진 걸까?

아니면 시간 축이 아예 앞당겨진 걸까?

6개월이라는 시간은 인간이 변하고 성장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만약 1황자의 죽음만 앞당겨진 것이고 나머지는 그대로라면?

주인공이 아직 황실을 상대로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면?

……만약 주인공이 이걸 계기로 황족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등허리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는, 그것만은 안 됐다.

녀석이 지면…….

불안감에 거칠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안 있어 환복을 돕기 위해 하인 둘이 문을 두드렸다.

난 그들이 들어오길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방 문을 열었다.

“다 나가 있어. 이제부터 쉴 테니까 내일 아침까지 그 누구도 성에 들이지 마라. 들어오는 사람도 들인 사람도 차라리 죽고 싶다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니까.”

둘은 하얗게 질려 더듬더듬 알겠다고 대답하곤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다.

“후…….”

진정해야 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은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소설 속 세계라 해도 마찬가지다.

난 천천히 방 안의 조명을 하나둘 꺼갔다.

다행히 난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100번은 넘게 읽은 애독자다.

어쩌면 세상에서 다크 헤더를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다.

난 조용한 방을 한 번 둘러보곤 천천히 창가로 향했다.

게다가 난 설정값 외의 능력이 한 가지 더 있지 않던가.

비록 영 멋은 없지만 지금의 내겐 유용한 능력이지.

창 밖으로 사람 없는 낡은 빨래터와 저 멀리 황실 소유의 사냥터에 나 있는 무성한 나무가 보였다.

7황자에게 주어진 낡은 방은 조경조차 이렇게 엉망이었지만, 덕분에 이쪽을 신경 써서 보는 이도 없었다.

난 눈을 감고 그날처럼 바랐다.

하늘을 날고 싶다고.

이윽고, 이제는 조금 익숙한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난 새까만 날개를 펼쳐 창 밖으로 나섰다.

이제 여유로운 황궁 생활은 전부 물 건너갔다고 예감하며.

6화- 사냥대회(1)

1황자, 라시아 아바란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을 물리고 주치의에게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그 멍청한 노인네는 그가 코피를 쏟았다는 말을 듣고 1황자만큼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황족은 좀처럼 병들지 않는다.

남들보다 배는 튼튼하고 독이 듣지 않으며 병들지 않는 육체.

마니스와 더불어 그들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그런데 갑자기 코피를 한 컵이나 쏟다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맥을 짚던 그 돌팔이 늙은이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만 괘종시계처럼 반복했다.

성을 이기지 못하고 주치의의 숨통을 조이려다 코피를 한 번 더 쏟고 말았다.

“젠장!”

코끝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1황자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줄줄이 하녀, 하인들을 끌고 와 시중을 들게 했을 테지만 이런 추태를 아랫것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오전까지만 해도 몸에 아무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과를 보냈었다.

그런데 의식에서 마니스를 사용할 때는 온몸의 핏줄에 불길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손을 타고 흘러내리던 붉은 피.

라시아의 머릿속으로 생전 처음으로 공포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설마 힘을 쓸 때마다 이렇게 되는 것인가?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만약 힘을 쓸 때마다 죽어가는 거라면?

앞으로 마니스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세워지자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내 인생은 뭐가 되는 거지?

평생을 황제가 되기 위해 살아온 몸이었다.

그런데 마니스를 쓸 수 없는 반푼이가 되어 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린다.

벌레처럼 여기던 저기 저 사용인들이랑 다를 게 없어지는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어쨌든 몸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납득하지 못했다는 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불안감에 떨리는 손끝을 느끼며 라시아는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서랍 안엔 언젠가 2황자가 멀리 갈색 피부의 인간들이 사는 나라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선물해줬던 물담배가 들어 있었다.

원래는 중독성 있는 것이라고 약이라고 했지만, 황족은 마약이나 독약에 중독되지 않으니 그저 이것이 주는 쾌락을 즐기기만 하면 됐다.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큼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없었다.

목이 긴 줄을 잡아 입에 물려는 순간이었다.

“불안하면 그것부터 줄이는 게 현명할 텐데요.”

무감한 목소리가 창가에서 들려왔다.

“누구야!”

라시아는 거칠게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인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라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2미터 가까이 되는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키와 체격.

벌레만도 못한 그의 반푼이 동생이었다.

“하! 네놈이 미친 게 분명하구나. 여기가 지금 어디라고 네깟 놈이…….”

곧이어 스스로가 저딴 벌레놈에게 놀랐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라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치려 했다.

“그러게요.”

표정변화 하나 없이 그의 말을 잘라먹는 침착한 동생 덕분에 그러진 못했지만.

“뭐……?”

곧이어 7황자는 라시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같은 게, 쥐도 새도 모르게 제국에서 두 번째로 안전하다는 차기 황제님의 방에 들어와 있는데 겁도 안 내시고. 역시 1황자님은 저랑은 달리 신의 자손이 맞으신가 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검은 머리의 어린 황자는 처음으로 비죽이 웃었다.

그 모습에 라시아는 목 뒤로 서늘한 감각이 쓸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놈의 말대로였다.

침실 주변의 사람들을 물렸다고 해도 이곳은 1황자궁이다.

여전히 침실이 있는 층을 벗어나면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빈틈없이 경비를 돌고 있고, 건물 외벽에도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누구도 함부로 들어와서도, 들어올 수도 없는 곳.

그런데 눈 앞의 이놈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안에 있었던 거지.

그간의 안온한 삶에서 느껴보지 못한 미지에 대한 공포가 오늘 하루, 여러 번 1황자를 덮치고 있었다.

***

이놈, 생각보다 단순하고 겁이 많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다곤 하지만, 차기 황제 소리도 듣는 놈이 저렇게까지 표정을 숨기지 못해서야.

그냥 떠보듯 던진 말이었는데 1황자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너…… 뭐야, 여태껏 없는 듯 지냈잖아. 바짝 엎드려서, 벌레답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안 그래도 코피를 쏟고 혼자 별생각을 다 했던 건지 녀석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잖아!”

이러다 나이 서른 먹은 첫째 형을 울리겠다 싶기도 하고 더 소리를 높였다가는 누구든 오겠다 싶어 난 입을 열었다.

“벽 타고 올라왔습니다.”

다행히 1황자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날 어디 아픈 놈 보듯이 보기 시작했지만.

“……니가?”

1황자는 자신에 비해 비실해 보이는(20대 평균의 팔뚝) 팔을 흘끗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하긴, 이 팔로 수많은 함정을 피해 4층 높이 건물 벽을 타고 올라왔다고 하면 나라도 저렇게 볼 것 같았다.

“아니요, 농담이었습니다.”

“그럼 뭔데?”

1황자는 슬슬 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느끼는 듯 찡그리며 물었다.

“사실…….”

내가 고개를 낮춰 목소리를 깔자 1황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나에게 집중했다.

“새처럼 날아왔습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잠시 멍해지더니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너, 네놈이 지금 날 갖고 노는…….”

진실을 알려줘도 믿지를 않으니 별 수 없네.

난 어깨를 으쓱하곤, 덕분에 조용해진 1황자의 말을 잘랐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뭐가!”

“피. 쏟으셨잖습니까.”

1황자는 입술을 꾹 물었다 씹어뱉듯이 말했다.

“황족에겐 이깟 건 아무것도 아니야.”

“일주일 후엔 입에서 피를 토할 겁니다.”

녀석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방금 주치의는…….”

“아무 이상 없다고 했을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1황자는 입을 완전히 다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에서 진득한 의심이 묻어났다.

네놈이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당황한 건 알겠지만 머리를 좀 쓰시죠. 내가 죽이려고 했으면 여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올 필요도 없이 그냥 뒀을 텐데.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대로 가면 잘못될 것 같잖아요?”

1황자는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었지만 기색이 많이 죽은 것이 느껴졌다.

“지금 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될지는 본인도 대충 알 거고.”

침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하자 녀석이 움찔했다.

“이미 알겠지만 마니스를 쓸 때마다 피를 쏟게 되는 겁니다. 쓰면 쓸수록 더 심해질 거고. 지금은 점막이 약한 코뿐이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마니스를 한 방울만 써도 온몸에서 피를 뿜고 죽을지도 모르죠.”

녀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내 첫째 형이 단순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겁을 조금만 줘도 주는 대로 반응을 해 주니.

애초에 그래서 당한 거겠지만.

생각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입꼬리가 다시 비죽이 올라갔다.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경멸하던 벌레새끼가 되시겠네요.”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드디어 대화란 걸 할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

“안나, 역시 니 말이 틀렸어.”

손도 대지 않은 점심 식사를 담은 트레이를 밀고 식당으로 들어오며 린이 소근거렸다.

“황자님은 조금 이상하신 게 아니라 엄청 이상하셔.”

“이번에도 전혀 안 드셨어요?”

“포도 한 알도.”

린은 그릇을 들어 보였다.

이미 저녁시간이 다 되었건만, 점심 때 내갔던 모양 그대로 놓인 초록색 포도는 조금 말라 있었다.

안나는 그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엔 영양 상태 부실한 짐승처럼 싹싹 긁어 드셨는데, 또 무슨 일이시지?

그녀는 황자님의 행동변화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번엔 그녀뿐만 아니라 몇몇도 눈치챈 듯이 보였고.

다만 그들은 애초에 7황자에 대한 충성심도, 관심도 없이 그저 언제 죽을지 모를 살벌한 일상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오직 안나만이 힘들고 고된 일상 속에서 그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변화라고 해도 7황자가 특별히 친절해지거나 고용인들에게 살가워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사용인들은 7황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예전엔 그 이유가 방 안에 틀어박혀 무기력하게 책을 읽거나 창 밖이나 보고 있어서였다면, 요즘은 놀랍게도 황자가 바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서재에 들어가 책을 뒤지거나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끼니를 챙겨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하인들에겐 번번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중에 가서는, 서재에 있을 때 자신을 찾는 사람은 하루 종일 굶어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또 가끔은 편한 차림으로 성 밖을 나갔다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옷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기 때문에, 다들 요 근래 좀 조용하시더니 다시 취해서 난동을 부리다 오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무관심한 그들 틈에서 또 안나만이 황자의 또렷한 눈빛을 발견했다.

안나는 이번에도 황자님에게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음식을 덜어내는 린에게 “성장기신가 봐요.” 작게 중얼거리며 그릇 정리를 계속했다.

***

따각. 따각.

난 흔들리는 말 위에서 뻑뻑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1황자가 의식에서 코피를 쏟은 지 1개월.

다들 쉬쉬하는 듯했지만 1황자가 황족으로서의 능력과 차기 황제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 아니냐고 뒤에서 수군댔다.

이제 1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적어졌으니 3황자나 1황녀에게로 기회가 돌아간 것이라는 의견도 서서히 나오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를 묵살하기 위해 1황자가 무리해서 황제에게 사냥 대회를 앞당겨 달라고 간청한다.

초조해진 1황자의 이 무리한 전략은 그런대로 먹혀 들지만, 그의 몸을 좀먹게 하고 수명을 단축시킨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의 흐름은 어느 정도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사냥 대회는 앞당겨졌고, 1황자는 여기서 자신이 아직 마니스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것이다.

톱니바퀴가 조금 이르게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이 황성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지 외부에서, 그러니까 주인공에게도 일어나는 일인지 아직까지 알 수가 없다는 거지만.

사냥대회와 코피 사건은 연쇄적인 인과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나머지 사건은 적어도 제국에서는 알 수가 없다.

내가 할 일은 두 시간축이 연결되는 곳이 잘 맞물리도록 중간에서 중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의 사건들을 내 통제하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죽은 척하고 멀리멀리 튀어야지.

역시 이런 열정적인 역할은 내게 안 맞아.

뿌우-뿌우-뿌우-

미래 계획으로 잠시 나가 있던 정신을 잡아채는 낮은 뿔피리 소리에 난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금빛 갈기가 달린 백마를 탄 내 형제자매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사냥 대회를 위한 행렬이다.

물론 난 맨 뒷자리다.

이 정도는 내 재량으로 빠질 수 있는 행사지만, 오늘의 난 참가를 선택했다.

내 계산이 맞다면 오늘 중요한 인물의 운명을 바꾸고 바깥의 전개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벌레 같은 네놈한테 어울리는 새까만 말이구나?”

그 전에 옆 자리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이 닭벼슬 놈을 따돌려야 할 텐데.

7화- 사냥대회(2)

8황자는 지난 의식 때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한 것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는지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1시간째.

그 시간 동안 녀석은 황궁에서 나오면서부터 꾸준히 저렇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상대의 안구 건강을 칭찬해야 할지 집념을 칭찬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집념이었다.

황족이라서 눈 근육을 저렇게 혹사시켜도 눈이 덜 아픈 건가?

황족은 눈 주변 근육도 보통사람보다 더 짱짱할 수도 있겠다는, 생산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생각으로 정신을 어디 먼 곳으로 날려보내며 난 나대로 열심히 녀석을 무시했다.

지난 사건으로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다면, 원작 시작 1년 전이라서 그런지 저 녀석은 내가 책에서 읽었을 때보다 아주 조금 더 다혈질이고 충동적이라는 점이다.

당장 탁자를 치고 나에게 덤벼들 기세였던 녀석을 떠올리면 적어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함부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꽤 중요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현대에서 살아갈 때도 20대 후반에게 10대의 혈기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차라리 어디 마음껏 뿜어내고 조용히 좀 하라는 마음에서 가만히 있어줬다.

“너 이 새끼, 지금 내 말 무시해?!”

하지만 내 담담한 태도가 녀석을 더 열 받게 한 것 같았다.

상대를 해주면 화를 내고 상대를 안 해주면 약 올라 한다.

이런 안하무인의 상황이 바로 동생이 생기면 겪는 일인 건가.

내가 이렇게 딴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녀석은 계속해서 욕 혹은 욕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녀석은 이번에는 최소한 지난번처럼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소한 목소리는 낮추고 있긴 했다.

장하다고 칭찬할 수도 없고.

주로 내뱉는 단어들은 버러지, 벌레 새끼, 더러운 피, 천박한 검은 말 정도였다.

천박한 검은 말이라.

개인적으로는 금빛 말보다 마음에 드는데.

난 가만히 날 태우고 걷고 있는 온몸이 새까만 털로 뒤덮인 흑마의 갈기를 살살 쓰다듬었다.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푸르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7황자는 사람들한테는 인기가 없어도 동물한테는 호감을 사는 모양이군.

다시 목덜미를 긁적여주자 녀석은 작게 히힝 소리를 내곤 걸음에 힘을 실었다.

저 쪼잔한 닭벼슬의 말처럼 천박하지는 않았다.

물론 말이 천박한 게 뭐 어떤 건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내 눈엔 그런대로 우아해 보였으니까.

“꽤 귀여운 녀석인데 주인이 7황자라 푸대접을 받는구나.”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녀석은 다시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 세계의 동물들은 묘하게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지.

닭벼슬 녀석은 또 내가 자신의 말은 무시하는 주제에 짐승에게는 말을 건다고 한바탕 왁왁거리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무시할 수 있었다.

이 흑마는 검은 머리의 마니스도 없는 황자를 놀리기 위해서 넷째 황자인가 누군가가 어렸을 적의 7황자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금빛 갈기를 가진 백마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온몸과 갈기가 새까만 흑마.

황족들 사이에 있으면 더 새까맣게 보여 7황자가 수치스러워했다고 한다.

황족은 괴롭힘도 돈지랄로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 참…… 마음에 든다.

지척의 어린 황자처럼 입만 털지 말고 계속 이런 식으로만 괴롭혀라.

뭐 기왕이면 검은색 보석이나 검은색 검 같은 걸로 선물해 달란 말이다.

이렇게 눈에 안 띄는 색의 말은 나중에 황궁에서 도망칠 때 가져가기 편하기도 하고.

8황자의 목소리가 거의 잦아들 때쯤 드디어 숲의 시작을 나타내는 작은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위상을 보여주는 이 커다란 황실 삼림의 입구에 다다르면 사냥 대회의 개막 의식이 간단히 이뤄질 거고, 본격적인 사냥 대회의 시작이다.

보통 여기서 이기는 건 황자나 황녀로 정해져 있다.

일반인이 마니스 운용자를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금발을 타고난 황가의 사람들은 원래 신체능력이 월등하다.

그런데 사냥대회에서 능력 사용이 금지된 것도 아니니, 이런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원래가 황실 사냥 대회는 그냥 황실의 위상을 드높이고 살벌한 분위기에서 정책 발표나 하자는 행사다.

전통적으로 사냥 대회에서 1위를 한 사람은 황제에게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

이것도 초대 황제가 사냥을 즐기던 데서 시작된 전통이라는데 지금은 그냥 황족들의 정치적 도구일 뿐이다.

우승하는 놈들이 죄다 황족이니, 황제의 마음에 드는 소원이나 유리한 것들을 고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탑이 세워진 곳 옆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자리해 있다.

황족의 신성한 전통에 반해서 이의를 제기한 죄로 그 사람은 절벽 아래로 내던져진다.

대신 목숨을 건 대가로 그 해의 소원은 한 번 반려된다.

그래 봤자 다음 해에 다시 사냥 대회가 열려서 우승자가 다시 그 소원을 빌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이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으므로 대부분 나서서 반대를 표하는 사람은 없다.

뭐, 이외에도 황족들의 들끓는 살육 본능도 좀 발산해주려는 것도 취지라면 취지다.

“사냥이 시작되면 네놈과 그 말부터 잡아 가죽을 벗겨 산 채로 불태워주마.”

이 닭벼슬처럼 에너지 넘치는 놈들 좀 진정시키려고.

이제 탑에 다 왔다는 걸 알았는지 이를 갈며 말하는 녀석과 1시간 반 만에 눈을 맞춰줬다.

정말로 하루 종일 나만 쫓아다니면 오늘은 내가 좀 곤란하거든.

“그럼 안 되지.”

내가 드디어 대답을 하자, 욕을 퍼부을 준비를 하던 닭벼슬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내가 이상했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녀석의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되면 사실 니가 기껏해야 호롱불밖에 못 켜는 황족인 걸 다들 눈치챌 텐데.”

녀석의 눈이 커지며 얼굴이 파래지는 걸 지켜본 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얌전히 지내. 내가 미쳐서 오늘 너한테 날 태워보라고 모두의 앞에서 소리쳐 봐야 널 도와줄 게 아무것도 없잖아.”

뿌우우-

타이밍 좋게 울린 뿔피리 소리와 함께 드디어 지루한 행렬이 멈췄다.

숲의 입구, 석탑에 도착했다.

조금 먼 거리에서 보이는 석탑은 돌을 대충 쌓은 듯 보였는데, 금은동으로 휘감겨 있던 황궁과 비교하면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오래된 저 건물은 태초의 탑으로 불린다.

저것도 초대 황제가 세운 것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사냥 대회의 개회 의식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의식은 황제가 뽑은 후계자 후보가 그의 힘을 선보임으로써 황가의 힘을 귀족들 앞에서 과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에서 1황자가 무리하게 힘을 쓰는 것이 바로 그 장면이다.

나는 원작을 다시 한번 복기하며 석탑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 재단의 틀밖에 없었던 다소 투박한 석탑 주변엔 그와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텐트와 재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랫사람이 꽤나 갈려 나갔겠군.

사냥 당일이라고 별로 다를 바는 없는지, 고위 귀족들과 황족의 수발을 드는 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난 당연히 데려온 사람이 없었다.

7황자궁 하인들을 부려도 됐지만,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데 내가 그들을 데려올 이유가 없었다.

난 바쁜 이들 틈에서 말을 끌고 다니며 조용히 석탑과 숲의 입구를 유심히 살폈다.

몇몇이 심복도 없이 돌아다니는 나에게 시선을 던지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오늘 벌어질 일을 준비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과 중앙귀족들이 자리를 잡자 의식은 바로 시작됐다.

인간적으로는 마음에 안 드는 황제지만 저렇게 일 처리가 빠른 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황제가 금장으로 장식된 거대한 재단 위에 올라섰다.

뿌우우--뿌우우-

두 번의 긴 뿔피리 소리에 맞춰 황제가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첫째 황자가 그에 맞춰 엄숙한 분위기로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을 내민 순간 재단 아래에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힘을 불어넣었다.

아마 그랬을 거다.

가시적인 힘은 아니라 보이진 않았지, 곧이어 벌어진 광경에 따르면 꽤 강한 힘이었을 거고.

그의 두 팔 안에서는 자그마한 물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모인 이들 모두가 혹시 이번에도 1황자가 피를 쏟지는 않을까 긴장 혹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번엔 내가 개입했으니까.

작은 소용돌이는 빠르게 몸집을 키워 이윽고 고대의 석탑만큼 몸을 불렸다.

1황자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소용돌이의 안에서 늑대의 모습을 한 또 다른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물로 된 늑대는 재단 아래에 모인 이들의 머리 위를 뛰어다니다 크게 도약해 하늘 사이로 사라졌다.

늑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 잔해가 분산시킨 빛이 만든 무지개가 몇 가닥 만들어졌다.

재단에는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감히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광경에 다들 넋을 놓고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뿌우우--뿌우우--

의식이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고동 소리가 두 번 울리고 나서야 사람들은 하나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어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숲을 채웠다.

1황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환호를 즐기다, 소리가 잦아들 때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시 아래로 내려섰다.

이걸로 1년에 한 번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가 사람들 앞에서 힘을 선보이는 개회 의식이 끝이 났다.

1황자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앞으로 원작 시작까지의 시간을 좀 더 벌어줄 것이다.

사냥대회에서의 1차 미션은 무사히 완료한 셈이다.

1황자가 내려서고 이번엔 황제가 입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냥 대회를 시작한다.”

황제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모인 사람들은 하나 둘 준비해 온 파티를 꾸려 광활한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1황자가 자신의 미션을 완료했으니 난 이 곳에 온 내 목적을 달성해야겠지.

난 흑마의 고삐를 치며 숲의 소동물 구역으로 말을 달렸다.

히든 에피소드의 시작이다.

***

“황제께서 이번엔 조금 일찍 귀족들 기 죽이기에 돌입하셨군.”

심드렁한 목소리에 겁 많은 그의 보좌관 톨린은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보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빠르게 속삭였다.

“제발 그런 불경한 말씀은 혼자 계실 때, 저와 공작님이 요만큼도 관련 없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졌을 때! 그때만 해주십시오!”

그 호들갑스러운 모습에, 그가 말하는 불경한 발언을 했던 톨린의 상사의 얼굴에 한심한 것을 본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톨린, 나도 발 뻗을 곧은 보고 눕는 사람이다. 아니면 이 나이까지 살지도 못했지. 전방 50피트 거리에 들을 만한 사람은 없어.”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보좌관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무료하게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개막 직전에 1황자가 쏘아 올렸던 거대한 늑대가 만들어낸 무지개가 아직 희미하게 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상반되게 그의 속은 진탕으로 얼룩진 듯 복잡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이름은 아고니 피더스.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로 한때 50이 넘는 나이까지 전쟁터에서 선봉장을 맡았던 노익장이자, 오늘 누군가로 인해 운명이 크게 바뀔 불쌍한 중생이다.

8화- 사냥대회(3)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 시종들은 전문 사냥꾼들을 불러 숲을 구역별로 나눈다.

안 그래도 제국에서 귀하다는 분들만 모이는 이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귀족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약한 마니스를 부려서 신체가 튼튼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억지로 사냥대회에 참가하긴 했지만 동물을 잡는 것보다는 학구에 힘을 쓰는 게 맞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냥 좀 다치는 걸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 하나 죽으면 일이 좀 복잡해질 거다.

책임은 그대로 사냥 대회 준비를 했던 고용인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구역 분할은 정확하게 이뤄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나뭇가지에 단단히 묶여 흔들리는 이 천들이다.

소동물이 주로 출몰하는 곳은 흰색 천을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중형 동물은 파란색, 대형 동물들은 빨간색의 천이 걸린다.

보통 소동물 구역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 중형은 중간, 대형 동물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난 흰색 천이 파란 색으로 변하는 구역을 찾기 위해 고삐를 세게 쥐었다.

황실 소유의 삼림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라,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피더스 공작을 만나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물론 무작정 찾는 건 아니다.

내 계산이 맞다면 피더스 공작은 오늘 중형 동물 구역에서 소동물 구역으로 넘어오니까.

이맘 때 그는 황금빛 털이 섞인 여우를 잡아서 황제에게 바친다.

문제는 그냥 과거를 언급하는 장면에서 잠깐 나온 짧은 정보라, 정확히 어디에서 언제 여우를 잡는지는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게 내가 지난 며칠간 더럽게 바빴던 이유들 중 하나다.

내가 피더스 공작보다 더 빨리 황금 여우를 찾아야 하니까.

최근 일주일, 난 시간이 날 때마다 까마귀로 변해 이 커다란 숲 속을 뒤지고 다녔다.

녹음으로 우거진 숲 속에서 황금빛 여우를 찾는 건 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크나큰 착각이었다.

숲 속에서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는지, 녀석은 밤이 아니면 잘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굴을 계속 옮겨 다녔다.

겨우겨우 서식지를 찾았을 때, 난 붉은 여우에게 목덜미를 앞발로 한 대 후려 맞는 경험과 독수리에게 날개로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쓰다듬어지는 경험을 적립한 후였다.

그리고 겨우 찾아낸 것이다.

이 영리한 황금 여우가 어딜 주로 돌아다니는지를.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봐야 했다.

평소 실력이 좋아 중형이나 대형동물 구역에서 사냥을 즐기는 피더스 공작이 여우 같은 소형 동물을 발견했다는 건 중형 구역과 소동물 구역의 경계에서 여우를 발견했다는 뜻일 것이다.

직후에 물가에서 손을 씻었다는 묘사가 언뜻 되어있었던 걸 보면 근처엔 호수 내지 큰 물웅덩이 같은 것이 있어야 했다.

중형구역에서 사냥을 하던 중 여우를 발견했을 테니, 사냥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내가 늦진 않았을 거고.

이 모든 정보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내 무릎까지 오는 회양목 비슷하게 생긴 나무들이 조금 모여 있는 호수 앞.

난 말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쥐고 천천히 주위를 서성였다.

늦진 않은 것 같았다.

호수 주변은 아직 어떤 사냥도 벌어지지 않은 듯 고요하고 정갈했다.

다가올 변화를 바로 알아채기 위해서는 숲 속의 풀 벌레 소리와 나무에 이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이제 이곳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공작이 나타나면 그를 멈춰 세우고 내 볼일을 보면 내가 할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푸르릉! 푸르릉!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조금 느릿하게 걸음을 걷던 흑마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갑자기 약하게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삐를 쥐고 목을 두드려봤지만 녀석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계산에 없었던 녀석의 배신에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 아까까지 나름 친한 건 아니어도 손발은 잘 맞추지 않았나?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내 말을 듣지 않는 녀석은 뭔가 거슬린다는 듯이 오른쪽 앞발을 조금 세게 구르며 계속 푸르릉 소리를 냈다.

등자의 오른쪽에 달린 내 가방이 거칠게 흔들렸다.

설마…….

“설마 무거워서 그래?”

그리고 거짓말처럼 녀석이 뒤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이 녀석 진짜 내 말 알아드는 거 아니야?

빙의 첫날의 까마귀가 떠오르는 말의 모습에 살짝 소름이 끼쳤다.

그 다음으로 찾아온 건 약간의 억울함이었다.

“원래 말은 짐마차도 끌고 그런 거 아니었어? 넌 겨우 가방 하나랑 사람 하난데.”

내가 뭐라고 하든 녀석은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도저히 내릴 기색을 보이지 않자 녀석은 이번엔 뒷발을 들썩거리며 안장에 엉덩방아를 찢게 만들었다.

“아- 알겠다. 내릴 테니까 그만해.”

그 난폭한 행동에 난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말에서 내려야 했다.

내가 내리자마자 녀석은 만족했는지 똑각또각 호수로 다가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 내가 헛웃음을 짓든 말든, 녀석은 우아하게 물을 마시고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누구 말대로 천박하기는커녕 적어도 나보다는 품격 있는 모습임에 틀림없었다.

이제 좀 쉬었으니 됐겠지 하는 마음에 가방을 들고 다가가자,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했다.

“……허!”

이 어이없는 복병에 난 몇 번 더 말을 타려는 시도를 해 봤지만 녀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말이랑 대치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공작을 놓치면 다음 차선책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 두고 보자. 마구간지기한테 밥을 반으로 줄이라고 할 테니까.”

난 녀석을 흘겨보다가 어딘가에서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다시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 안 되면 돌이라도 던져야지 뭐.

***

피더스 공작은 파란 깃발이 드문드문 보이는 풀숲을 해치며 걷고 있었다.

“오늘은 영 운이 따라 주질 않나 봅니다.”

따라오던 보좌관 톨린이 깐죽거렸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문제였다.

평소라면 귀신 같은 솜씨로 늑대니 사슴이니 두어 마리 정도 잡았을 테지만, 오늘은 속이 복잡하여 도저히 사냥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동물들의 흔적 같은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작은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무지개가 사라진 하늘은 청명했다.

저 하늘 아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아고니 피더스.

나라에서 피더스라는 이름 세 글자를 못 들어본 이가 없을 정도로 그의 가문은 오랜 기간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의 중추를 쥐고 있는 곳들 중 하나였다.

풍족한 삶, 명예, 자연스레 따라오는 존경.

모든 것이 보장된 삶이었지만 그는 요즘 들어 머릿속을 스멀스멀 잠식하는 불안감이 불쾌해 견딜 수가 없었다.

대대로 황가를 모셔온 기사 가문으로 황실의 검이자 방패가 되어온 피더스였다.

황족은 신 그 자체, 신의 화신으로 먼 옛날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였다.

초대 황제 시에라 아바란은 신비로운 힘으로 수십 개로 쪼개져 서로 전쟁을 멈추지 않는 이들을 평정했다고 한다.

통일된 제국을 아바란이라고 명명한 초대 황제에 대한 기록은 1000여 년이 넘어간 지금은 거의 신화로만 남아있지만, 남은 황족이 바로 이의 산 증거라고 공작은 배워왔다.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한 번이라도 그들의 경이로운 금빛 머리칼을 보면 존경심과 경애가 솟아올랐다.

피더스 공작은 30여 년 전 아버지를 따라 들어온 황궁에서 존경해 마지 않는 그분들을 처음 뵀다.

60이 넘어가는 지금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는 그저 책과 가정교사를 통해 들어왔던 황족에 대한 경애를 무의미한 시간 낭비로 만들었던 그날의 충격만은 또렷하게 간직했다.

다른 어떤 묘사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바로 신 그 자체였다.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무언가를 감히 바라볼 수도 없다는 기분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때만큼 자신의 가문이 자랑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초대 황제의 곁을 보필하던 태초의 가문 중 하나로 지금까지 그들의 검으로 남은 가문이 대견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고위 귀족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나타난다는 마니스 보유자로 판명이 났을 땐 정말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가문을 잇기 전부터 망설임없이 그들을 위해 검을 들었다.

그렇게 경애와 충성을 연료 삼아 달려온 세월이 30여 년이었다.

그는 몇 해 전 황실 기사단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몸이 완전히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이제 자신의 뒤를 이어 황가를 보필할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황족에게 충성해야 하는 이유, 그들의 고귀함과 경이로움 등을 아직 어린 늦둥이 아들에게 가르쳤다.

우리 가문의 역학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했고 이를 잘 따라오는 아들을 보며 이게 바로 노년의 행복이라 생각했다.

이제 몇 년 후엔 장성한 이 아이가 내 뒤를 이어 황가를 보좌할 것을 상상하니 이만큼 만족스러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완전무결한 그의 세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붕괴의 시작은 작은 틈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댐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그저 사소한 변덕이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수도를 둘러보던 날이었다.

그는 최근 들어 그의 아들을 데리고 피더스 가문 소유의 상단이나 다른 사업들을 미리 보여주는 일에 재미를 붙인 참이었다.

어린 아들이 그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한 덕분이었다.

그의 말을 부드러우면서도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마차가 가는 길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난 날이었고, 마부는 평소 가는 길이 아닌 조금 돌아가는 길로 말을 몰아야 했다.

그는 이때까지 아주 평안했다.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맞아 죽어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어린아이의 시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마차를 세워라.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마차를 세우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도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이였던 것이었지만.

주변 사람을 잡고 물어보니 그는 고개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신전에서 황궁에 바칠 조공품을 훔치려다가 걸려서 저렇게 됐다고 했다.

제국에서 신전은 초대 황제와 황가를 모시는 일을 한다.

황족의 것에 손을 대는 것은 중죄로 목숨으로 그를 갚아야 한다.

피더스 공작 또한 그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몇 번이나 그 죄를 물어 죄인에게 형을 집행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어린 아이는 없었지만.

해당 죄인의 시체는 누군가 함부로 안치시킬 수도 없었다.

신을 모독한 죄인은 죄를 저지른 그 순간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불태우는 것이 아니면 만지는 이도 더럽혀진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공작 역시 아이를 들어올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그 앞에서 주저하고 있던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마냥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길가에 갑자기 멈춰선 아버지가 걱정된 그의 아들이 그를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그 말갛고 살이 오른 얼굴이 피딱지와 상처로 가득했던 아이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공작은 급히 그의 아들을 들어올려 마차에 올라탔다.

그의 심장이 다시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9화- 사냥대회(4)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공작은 서서히 진정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체가 새삼스러울 나이도, 직업도 아니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번 일은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으며 당장 내일이 되면 잊을 거라고도 피더스 공작은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이후 저택에 돌아온 공작은 이전의 일상을 이어갔다.

업무를 보고, 소공작을 교육하고, 훈련을 했다.

다만 한 가지, 밤에 침대에 누웠을 때 피투성이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를 괴롭게 만드는 과정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 얼굴이 머릿속을 차지하면 고통의 시작이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린 아이의 시체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소공작과 나이가 비슷해서려나 공작은 또 생각했다.

10살쯤 먹어 보이는 작은 아이였고, 어쩌면 소공작보다 나이가 많았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너무 말라 있었으니 먹지 못해 덜 컸을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이젠 알지 못한다.

아이는 이미 죽었고, 부모 친척 하나 없는 고아라고 했으니까.

아이의 시체는 하루 종일 길가를 굴러다니다, 새벽녘 쓰레기를 치우는 이들이 수거해 태워버렸을 거다.

벌레만도 못한 죽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어긴 건 황족의 법이었기 때문에.

신전은 엄숙한 황족의 법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었고, 공작 스스로도 그 자비없는 집행에 단 한 번도 의문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늘 옳았다.

이번 일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소공작과 나이가 비슷해서, 그래서 조금 더 신경 쓰이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저 은퇴 후 자신이 감상적이 되었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는 그날 이전처럼 편하고 행복해질 수 없었다.

공작은 기사단을 은퇴하고 비교적 여유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에, 무엇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건 결코 그에게 행운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아이에 대해 떠올릴수록 머릿속엔 다른 여러 기억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30여 년 동안 황실에 충성하며 행했던 몇몇 일들이.

개중엔 한때 그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줬던 것들도 섞여 있었다.

그렇게 그는 아이의 피투성이 얼굴을 떠올릴 때 그를 감쌌던 불편한 기분과 비슷한 것을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영토를 넘어온 이민족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아기를 안고 있는 그 회색 피부의 아낙을 벴을 때는 어땠던가.

전쟁 중에 마주했던 미숙한 소년병의 목을 쳤을 때는?

성스러운 티나스 의식을 벗어나려 했던 반란분자들을 잡아 바쳤을 때는?

그는 아이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보다는 작게, 하지만 분명히 울렁거리는 자신이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옳은 일을 하면서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당시의 감정은 공작이 지켜야 하는 신념에 비해 너무 사소한 것이었으며 황제의 기사로서의 하루하루는 너무 숨가빴다.

그는 황족을 모시는 검이었고, 검은 휘두르는 주인이 그러지 않는 이상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 됐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행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공작은 여기서 더 생각을 이어가면 나올 결론이 자신과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특히 소공작의 웃는 얼굴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것을.

점점 모호해지는 그의 인생에서 진리라 믿었던 것들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은 위험했다.

그는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덮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사실 신선한 과실과도 같아서, 덮어두고 꼭꼭 숨기다 보면 점차 말라비틀어지고 썩어 문드러져 원래의 먹음직한 모습을 잃게 되는 법이었다.

공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황제를 향한 충성심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그게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황제의 앞에서 후계자를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냥 대회에 소공작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그 영향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공작이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자기 안의 과실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모든 걸 망각하길 바랄 뿐이었다.

공작은 다시 고삐를 힘주어 잡았다.

회상에서 깨어난 그는 다시 이 청청한 숲의 한가운데였다.

그의 눈에 푸른 천이 감긴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아직 중형 구역이긴 하군.

“이제 정신 좀 차리셨습니까?”

정신은 애저녁에 차렸지만, 보좌관의 불경한 말씨에 정말 정신 놓은 꼴을 보여주고 싶다는 유혹도 들었다.

“아무것도 못 잡아가면 공작가 체면이 말이 아니라구요. 사람들이 공작님이 이제 한물간 노인이라고 수군거릴걸요?”

“사람들 생각이 맞나? 자네 생각이 아니라?”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고개를 저으며 안경을 고쳐 쓴 톨린은 다소 풀어진 공작의 표정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생각이 많으신 건 알겠지만, 마음을 다잡으셔야죠.”

톨린은 겁이 많은 만큼 신중하고 눈치가 빠른 이였다.

뭔진 몰라도 공작이 요즘 들어 좋지 않은 쪽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터였다.

공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몰았지만, 톨린도 그것이 자신의 말에 반대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바스락.

멀지 않은 거리에서 들리는 풀잎 소리에 공작은 조용히 말을 세웠다.

슬슬 뭔가를 잡긴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잡아내기 힘든 잎사귀를 밟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공작은 집중했다.

풀잎을 밟는 소리로 봐서는 그리 크지는 않은 놈 같았다.

경계에서 이쪽으로 잠시 넘어온 종인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께 바치려면 적어도 늑대는 잡아야 할 텐데.

공작은 그리 생각하며 대형 동물 구역 가까이 가기 위해 말고삐를 돌리려 했다.

대략 10피트 거리에서 풀 숲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금빛 여우 꼬리를 발견하기 전까진.

“저거 하나 잡으면 한물간 노인 소리는 안 들으시겠습니다.”

톨린이 옆에서 작게 소곤거렸다.

“동감일세.”

공작은 톨린에게 반대쪽으로 여우를 몰라는 신호를 주고 조용히 말을 끌었다.

금빛 짐승에게 석궁을 쏘는 것이 그의 충성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또 덮어두고.

***

7황자가 동물들에겐 호감을 사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난 틀렸다.

아주 확실히, 철저하게 틀렸다.

동물들은 7황자를 죽도록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난 저 멀리 소동물 구역 바깥까지 이어진 말발굽 자국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난 생각했다.

아니, 미움받는 건 안에 있는 난가?

어쩌면 흑마를 선물해줬던 4황자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지금 이 순간 날 엿 먹일 멋진 녀석을 골라서 선물했을 수도.

뭐가 됐든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거다.

“하하, 뭐 이런…….”

호숫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와 저 발굽 자국을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내 말이 멀리 도망가 버렸다.

고삐 하나 잡아볼 새도 없이 달려가 버렸다.

내가 말도 못하는 짐승을 때리거나 위협한 건 아니었다.

내가 타려고만 하면 뒷걸음질만 해대는 통에 말에 오르는 것은 포기했지만, 혹시라도 공작이 나타나면 이 녀석부터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자리를 좀 옮기려 했을 뿐이었다.

물을 마시는 녀석의 고삐를 쥐고 가볍게 끌어당기자 내가 더 이상 자신에게 타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녀석은 얌전히 따라와줬다.

이 경계 부분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갈 만한 나무를 발견한 나는 내 말을 줄기에 매어 두려 했다.

갑자기 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녀석만 아니었다면.

내가 어리둥절해 바라보자 녀석이 가만히 내 손에 든 고삐와 나무 사이를 번갈아 봤다.

곧이어 녀석의 얼굴에 배신감 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말에게 표정을 지었다고 하면 웃길 수도 있겠지만 눈빛이 정말 그랬다.

그래, 나한테 목줄기를 잡혔던 어느 까마귀가 지었던 눈빛과 아주 비슷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야생마도 아니고 평소라면 하루 종일 마구간에 묶여 있을 녀석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난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당황한 사이 녀석은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나에게 화가 난 듯 푸르릉! 소리를 내곤 힘을 주어 내 손에 들린 고삐를 빼내더니 그대로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 달려나가 버렸다.

뭐 무슨 반응을 할 틈도 없었다.

내게 일어난 상황이 믿기질 않아, 난 허망하게 말이 마시다 간 호수만 바라봤다.

마구간지기가 워낙 훈련을 잘 받은 녀석이라 묶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반대로 묶으려고 하면 말이 상처받고 도망가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던 건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갈 새도 없이 무서운 현실이 눈 앞에 닥쳤다.

혼자 남은 나는 이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공작을 정말 맨몸으로 막아서야 하는 것이다.

이전엔 말에서 내리고 서 있었어도 7황자의 말로 유명한 흑마가 서 있으면 충성스러운 피더스 공작이 말을 멈추고 나한테 주의를 돌릴 것을 나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변덕을 부리는 말에서 내릴 때도 그렇게 진지하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젠장, 멍하니 있을 게 아니지.”

달리는 말을 멈춰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제발 조금만 늦게 와라, 피더스 공작.

속으로 비는 순간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늘 그렇듯 신은 적어도 내 편은 아니었고, 누가 들어도 말발굽 소리가 분명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젠장.

장소는 알맞게 찾았는지 정확히 내가 서 있는 나무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희미하게 갈색 말과 누군가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지? 정말 몸으로라도 막아야 하나?

그 순간, 고민하는 내 눈에 나무 아래 놓인 여자 주먹만 한 돌멩이가 들어온 건 필연이었다.

난 아주 짧게 망설이고 그 돌을 들어올렸다.

피더스 공작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전투를 지휘하던 무장이었다.

내가 던지는 돌멩이 정도는 피할 것이다.

난 그를 믿었다.

여우는 놓치겠지만 말은 멈추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짱돌을 손에 꼭 쥐고 인영이 보이는 곳을 주시했다.

그리고 공작이 풀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바로 돌을 던졌다.

던지는 순간 내가 지금 60대 노인에게 돌을 집어 던졌다는 죄책감이 약간 들었지만, 바로 다음 벌어진 일 덕분에 그딴 것은 금세 사라졌다.

딱.

말을 몰던 사람은 내가 던진 돌을 피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청아한 소리가 울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말 위의 사람은 소리 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잘 훈련된 말은 히힝 소리를 내더니 점점 속도를 줄여 자신의 주인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난 당황해 쓰러진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은빛이 아닌 푸른 빛을 띄는 것을 보고 절망했다.

보좌관 톨린이었구나.

“톨린. 내 말 들리나?”

난 그의 머리를 흔들지 않으려 조심하며 그를 불러봤다.

“7……황자……?”

다행히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나를 알아봤다.

그리고 다시 말에 매달렸다.

좋아, 머리에서 피가 좀 나긴 하지만 어디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군.

내 경험상 저 정도는 그냥 찬물로 식히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일단 머리를 다치기도 했고 내 혼자 힘으론 높은 안장에서 그를 안전하게 끌어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얌전히 서 있는 말 위에 있는 그를 건드리진 않았다.

대신 내가 정말 찾는 인물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빌어먹을, 공작은 어디 있지?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니었나?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다행히 톨린이 나온 방향에서도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지만.

톨린이 쓰러져서 경로가 바뀌기라도 했는지, 공작이 분명할 소리의 주인은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이 거리에서는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난 소리를 지르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당연히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말이라도 있었으면.

아니면 내가 빨리 달릴 수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익숙한 열기가 단전에 모였다.

익숙한 기운이 내 몸을 덮었다.

10화- 사냥대회(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