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화- 사냥대회(5)

다리가 땅을 박차는 느낌이 새로웠다.

뜨겁게 열이 나는 온몸의 근육에선 김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푸르릉.

콧바람을 뿜으며 팔다리로 바닥을 박찼다.

엎드려서 개처럼 달렸다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말이 됐다는 말이다.

하하, 세상에.

난 힘차게 달리고 있는 검은 다리를 내려다 봤다.

틀림 없이 검은 말의 발굽과 다리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썩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조류는 되는데 포유류는 안 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처음엔 당황했지만 지금은 ‘내 능력이 사실 까마귀로 변하는 게 아니라 동물로 변하는 것’이고 ‘내가 그 사실을 알아채는 데 2달 정도 걸렸다’는 것보다 이제는 내가 공작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난 최대한 세차게 발을 굴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수록 폐가 팽창하며 엔진이 도는 것처럼 에너지가 생성됐다.

말은 달리면 이런 느낌인 모양이군.

내가 직접 달리는데도 마치 마차를 탄 듯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인간이었다면 나무며 작은 가시 덩굴에 여기저기 부딪히고 긁혀서 다쳤겠지만, 말로 변하니 여기저기 부딪히기만 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사람을 태운 말인데도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더 가면 사람들이 많은 대형동물 구역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초조해졌다.

원래 계획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에 난 작게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렸다.

"히히힝!!"

내 목소리 대신 숲 속을 울리는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마귀로 변했을 때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내 성대를 타고 나오는 소리가 다른 짐승의 울음소리가 되는 것은 내가 진짜 짐승이 됐다는 걸 절감하게 했다.

내가 마지막 인간의 존엄성을 잃은 대가였는지, 앞서가던 공작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것 같았다.

“워, 워.”

다행히 그는 완전히 말을 멈추고 씩씩거리는 자신의 갈색 말을 달랬다.

나도 속도를 줄이곤 그의 말 곁으로 다가갔다.

저 갈색 말처럼 급하게 달리느라 입에서 침이나 거품이 나지 않았으면 하는데.

희끗희끗 흰색 머리가 섞여 있는 은발 머리를 가진 기골이 장대한 노익장이 안장 위에서 곧은 자세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의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가 날 훑었다.

아고니 피더스.

그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로, 원래대로라면 나와 직접 마주치는 장면조차 묘사되지 않는다.

나는 공작이라는 인물을 꽤 인상깊게 봤기 때문에, 처음 책 속의 세계에서 7황자에게 빙의하게 되고 그를 만날 기회가 생길 것인가 몇 번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사람 대 사람이 아닌 사람 대 짐승으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내가 지난번처럼 변신한 게 맞다면 그는 내가 7황자의 말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애초에 황족과 같은 색의 말을 타는 건 다들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사냥대회에 참가한 귀족들 중 우리와 같은 말을 탄 사람은 없었다.

그 증거로 사냥 대회 참가자 중 황족이 아닌데 금빛 갈기를 가진 백마를 탄 사람은 하나도 볼 수 없다.

뭐, 내가 모는 흑마를 타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좀 다르긴 했다.

4황자가 날 조롱하기 위해 선사한 말과 같은 털 색을 가진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귀족은 없었으니까.

피더스 공작은 나를 보더니 슬슬 다가와 그가 타고 있던 갈색 말에서 뛰어내렸다.

“7황자님의 말이 여긴 왜…….”

그는 중얼거리며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살폈다.

안장도, 등자도 심지어 고삐도 없이 가방만 달랑 목에 매고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공작은 나를 빙 둘러보다 한숨을 쉬며 그의 말 안장 옆에 매 둔 가방을 뒤적거렸다.

난 안심했다.

역시 그냥 버리고 갈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문제는 그를 톨린이 기절해 있는 호숫가까지 데려가는, 잠깐, 뭐하는 거야?

공작은 짐에서 꺼낸 길다랗고 튼튼한 줄로 이리저리 매듭을 만들더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 모양새를 보아하니 급하게 밧줄로 간이 고삐를 만들어 내게 씌우려는 것 같았다.

역시 백전노장답게 손재주도 좋았다.

푸릉!

난 고개를 휘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뭐, 굳이 씌우려고 한다면 결국 피할 순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인간으로 돌아갔을 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난 강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몇 번 더 고개를 푸닥거리고는 그가 들고 있는 밧줄 끝 덥석 물었다.

“쉬……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주려는 것뿐이야.”

그는 내가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밧줄을 억지로 뺏으려 하지 않고 날 다독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비를 낭비하지는 않는 사람이라, 내가 정 말을 안 듣는 것 같으면 내 얼굴을 잡고 억지로 매듭을 지을 거다.

내가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난 공작을 한 번 보고는 밧줄을 이로 살짝 끌어당겼다.

강하지 않은 힘에 공작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날 따라올 의지가 있다는 걸 확인한 나는 잠시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그가 주둥이 끝으로 그가 타고 온 말을 가리켰다.

공작은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의외로 순순히 갈색 말의 고삐를 손에 쥐고 날 따라왔다.

정 말을 안 들으면 고삐 정도는 매줄까 마음먹었던 난 안심하며 둘을 이끌었다.

검은 말이 사람 하나와 갈색 말 한 마리를 끌고 가고 있는 기묘한 행렬이 완성됐지만 뭐, 돌고 돌아 드디어 상황이 해결되고 있는 것 같았기에 난 안심했다.

***

피더스 공작은 자신을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검은 말의 뒤통수를 보며 스스로 뭘 하고 있는 건가 고민했다.

그러니까…… 말에게 끌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꽤나 능동적인 자세로.

황금 여우를 쫓던 중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이 녀석 덕분에 사냥은 완전히 말아먹었지만, 황자의 말을 그대로 둘 순 없었다.

안장도 없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7황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은 7황자를 떠올렸다.

얼굴도 몇 번 마주한 적 없는 검은 머리의 황자.

처음엔 검은 머리 황자의 등장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귀족들이었지만, 곧 그에 대한 황가의 태도를 보고 입장을 굳혔다.

황가에서 그는 공기와 마찬가지였다.

분명 존재하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그를 대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져도.

사람을 위협하고 때려도.

……사람을 죽여도.

그는 벌을 받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묻어졌을 뿐.

상대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때문에 그를 존경하진 않을지언정 구태여 다가가 분란을 만드는 이는 없었다.

공작 역시 몇 번 하인들을 죽어라 패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감히 황족의 행동을 막을 순 없어 그냥 지나쳤다.

피더스 공작은 황가에 충성하는 이였기 때문에 7황자에게도 신하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지만,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선 황제나 7황자의 다른 형제자매를 봤을 때 느껴지는 신성함이 없었다.

절로 고개 숙이게 만드는 경이도 없었고, 무릎 꿇게 만드는 압도적 카리스마도 없었다.

얼굴이 찌푸려지는 난폭함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7황자를 도우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황가에 대한 충성심을 프라이드로 삼아왔던 그였다.

이제는 그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그는 그저 황가의 일이라면 그가 모른 척해왔던 7황자의 일이라도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나서는 것이다.

7황자가 기르는 말조차 다치게 할까 봐 염려하면서.

공작은 말한테 끌려가는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이제까지의 인생을 나타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말 치고는 꼬리를 빳빳이 내리고 걷는 검은 말을 바라봤다.

“너도 나랑 비슷한가 보구나.”

피더스 공작은 중얼거렸다.

그 난폭한 7황자가, 자신이 기르는 짐승이라고 해서 친절하게 대하거나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평소 행적으로 봐서는 4황자가 보낸 흑마가 수치스러워 거칠게 다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이 말은 지금 왔던 자리를 되돌아가고 있었다.

훈련받은 대로 하고 있는 걸 거다.

주인과 떨어져도 주인에게 찾아가도록, 혹은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그러니 이 길 안내의 끝엔 아마 7황자가 있거나, 자신이 길을 잃었을 때 돌아오라고 배운 곳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다.

아는 건 그것밖에 없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면 어제의 폭력은 희미해질 테니까.

왜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는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하긴, 말이 무슨 많은 생각을 하며 살겠는가.

그리 생각하며 공작은 다시 7황자의 흑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너도 그저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명령하는 대로 살아라. 무지와 망각만큼 행복한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면 굶어 죽진 않을 거다.”

원래 공작은 이렇게까지 말이 많은 사내가 아니었지만 숲은 조용했고 듣는 이는 없었다.

앞뒤로 보폭을 맞추는 말만 두 마리 있었지.

평소보다 조금 솔직해진 건 그중 검정색 말의 눈빛이 기이하게 올곧아 보이기 때문이라고 공작은 막연히 생각했다.

아무리 60살 넘은 기사단장 출신의 노장이라도, 설마 말로 변신한 7황자가 지척에서 그의 자조 어린 혼잣말을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듣고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

크아악!!

심장을 관통당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마차만 한 곰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하던 1황자 라시아는 손을 까딱여 데려온 하인들과 사냥꾼이 시체를 챙기도록 지시했다.

“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의 곁에 말을 세운 3황자가 빙긋이 웃으며 칭찬의 말을 건넸지만 1황자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3황자는 그런 1황자를 살피면서 그의 곁을 기웃거렸다.

살살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거리는 것이, 이번 사냥의식에서 그의 능력이 예전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3황자가 황권을 쥐게 될 것이라던 소문과 자신은 관계없는 일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소문의 근원지인 주제에 담도 작았다.

기왕이면 좀 더 대담하게 행동해보지.

아예 내 앞에서 대놓고 형님의 시대는 갔다는 유치한 시비라도 붙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지금 심장이 꿰뚫려 쓰러지는 건 저 별 볼 일 없는 곰이 아니라 보기 싫은 이놈이었을 텐데.

“아바란의 미래를 짊어지실 분은 역시 형님밖에 없으십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처음으로 받은 긍정적인 대답에 밝아지는 3황자의 얼굴을 보고 비웃음을 띠며 라시아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아우는 알맞은 위치에서 제국을 지켜야지.”

3황자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황태자가 정해지고 태자가 황제가 되면 나머지 형제들은 각자 수도에 남을 수도 있고, 혹은 멀리 유배되기도 한다.

아바란을 신의 이름으로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1황자는 지금 3황자에게 미래의 유배를 확정지어 준 것이다.

라시아는 더듬더듬 말을 이으려는 3황자를 세워 두고 말을 몰았다.

그는 애초에 수도에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전부 죽이거나, 멀리서 평생 젊은 날의 영광을 곱씹으며 비참하게 살아가게 만들 생각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뭘 잡긴 한 거냐?”

라시아는 주변에서 회색 늑대의 눈을 지지고 있는 2황자에게 장난스레 말을 붙였다.

“당연하죠. 형님보다 큰 걸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같이 짓궂은 표정으로 응수하는 그의 동생에 라시아는 크게 웃으며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2황자, 디토 아바란.

그가 형제자매 중 유일무이하게 아끼는 그의 동생이었다.

똘똘하고 유쾌한 그의 동생은 쓸모가 많았고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므로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신임하고 있는 동생이었다.

황제가 되면 그 곁에 남아 자신을 보좌하게 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이 녀석은 평생 노동착취를 하겠다는 말을 잘도 포장하신다며 볼멘 소리를 하긴 했지만.

“비웃지 마십시오. 이번엔 진짭니다.”

웃기만 하는 형에게 골이 났는지 다시 비죽거리는 동생을 보며 라시아는 놀리듯 말했다.

“글쎄다, 내가 요즘은 이상하게 상태가 좋아서 말이지. 이번에도 사냥대회 우승은 내가 딸 것 같은데?”

라시아는 유쾌한 기분에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다시 사냥을 시작하러 말을 달렸다.

때문에 그는 듣지 못했다.

“그러게요. 이상하기도 하지.”

장난기 가득한 입꼬리를 올리고 중얼거리는 2황자의 목소리를.

11화- 방관자의 고뇌(1)

“톨린!”

공작은 저 멀리 호수가 보일 때쯤 호숫가에 서있는 말 위에 엎어져 있는 자신의 보좌관을 발견하곤 놀라 달려나갔다.

“이게 대체…….”

“으윽.”

머리에 말라 붙어있는 피까지 발견했는지 공작은 주변을 매섭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범인은 여기 서 있으니 아무도 찾지 못했지만.

나는 나대로 그가 설마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렇게 세게 맞진 않았을 텐데?

잠시 상태를 살피던 공작도 톨린이 심각하지 않은 상태라고 판단했는지 그를 조심히 말에서 끌어내렸다.

호숫가에 그를 내려놓고 가방을 뒤지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난 다시 우리가 걸어 나왔던 풀숲으로 슬슬 걸음을 옮겼다.

우선 인간으로 돌아와야 뭘 하든 할 수 있을 테니까.

푸릉?

나를 따라 주인을 바라보던 갈색 말이 그런 날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큰 소리로 울거나 하진 않았다.

숲으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난 반쯤 쓰러져 서로 기대고 있는 너도밤나무 두 그루가 만들어낸 공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까마귀나 말이나 다르진 않았는지, 이전의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눈을 떴을 때 난 7황자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살짝 돌아간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난 걸음을 재촉했다.

혹시 톨린의 상태가 정말 나빠서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공작이 마음먹었으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할 것이었다.

말이었을 때보다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난 벌써 3번째 걷는 길을 바로 찾아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시야가 트이며 익숙한 호숫가와 말 두 마리, 사람 두 명이 보였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 엉킨 실타래는 조금씩 풀리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점점 다가가자 그들의 대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톨린, 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알겠나?”

머리에 수건을 대고 있는 톨린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확실한 게 없습니다. 그냥 갑자기 머리에 큰 충격이 와서…….”

“주변에 이게 떨어져 있었어. 누군가 자네에게 돌을 던진 모양이야.”

공작이 톨린에게 피가 묻은 돌멩이를 보여줬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피가 묻은 면적이 유난히 커 보였다.

젠장, 저걸 그냥 두고 오다니.

“세상에, 이 크기라면…… 혹시 암살 의도가 있던 걸까요?”

“확신할 수 없겠군. 나랑 자네는 말이 비슷하니. 날 노린 걸 수도 있겠어.”

……공작과의 만남은 그냥 1년 후로 미뤄도 되지 않을까?

주인공은 주인공이니까 주인공 버프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벌여 놓은 일에는 책임을 져야지.

아까 헤롱거리던 톨린의 상태로 봐선 내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원래 사람이 머리를 맞은 직후엔 잠시 기억이 날아가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공작님, 정신을 잃기 전에 익숙한 얼굴을 봤습니다.”

“뭐? 그게 누군가! 그놈이 범인일 수 있겠어.”

“7황자…… 7황자님이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성장형 캐릭터니까, 시간축이 어찌 되든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난 이번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공작을 대면할 기회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파삭.

하지만 늘 신은 내 편이 아니었고, 난 주로 상대를 원망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내 짧은 도피는 금방 끝났다.

난 발 아래 놓인 유난히 커 보이는 너도밤나무 열매를 노려봤다.

아까 인간으로 변할 때 가방 끄트머리에 걸려 나온 것 같은 그놈은 이미 처참하게 부서진 후였지만.

후…….

난 한숨을 조금 고르고 뒤를 돌아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발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는 공작과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고개를 숙인 톨린이 보였다.

“그래, 사냥은 잘돼 가나?”

어차피 망친 거라면 완전히 말아먹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썰렁한 우리 세 명의 사이를 채웠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피더스 공작이었다.

“7황자님을 뵙습니다.”

“7, 7황자님을 뵙습니다.”

뒤이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톨린은 그대로 고개를 처박고 들지 않았다.

“황자 저하의 말을 숲에서 발견했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닐까 하여 말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봤습니다, 황자님.”

곤란해하는 톨린을 두고 한 발짝 나선 피더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자 그는 아차 싶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말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정말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그건 신경 쓸 거 없네. 바로 알아서 돌아갔을 거야. 워낙 영특한 녀석이라서, 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영특하다 못해 맹랑한 내 말은 지금쯤 어디서 풀이나 뜯고 있을 것이고, 공작과 마주했던 흑마도 어찌되었든 제자리에 이렇게 잘 찾아왔으니.

“그렇다 해도,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올리지 않고 나에게 사죄했다.

난 순종적인 그를 바라보며 숲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무지와 망각만큼 행복한 건 없다고 중얼거리던 그를.

책에서 그는 이때쯤 겪은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만 그를 애써 무시한다.

즉, 공작은 지금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고 혼란스러운 상태다.

그리고 난 그 틈을 노릴 생각이고.

난 공작의 눈치를 살피는 톨린을 주시하다 입매를 뒤틀었다.

그에겐 조금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그런 것보다.”

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자 공작은 의아했는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보좌관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은가?”

내가 걸음을 옮겨 그보다 반 보 뒤에 서 있던 톨린에게 다가가자 공작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다친 모양이지?”

겁이 많은 톨린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의 목덜미에 흐르는 식은 땀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난 경의 정수리나 보자고 하는 게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내가 방금 뭐라고 했나?”

내가 압박하자 그는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야 했다.

톨린 크리사.

크리사 백작가의 삼남으로 정세에 밝고 능력도 있지만 겁이 많아 두드러지지 못한다.

그런 그를 처음으로 믿고 데려와 준 것이 바로 피더스 공작이다.

피더스 공작은 공작대로 그를 많이 아끼는 이유가 있고.

요는 저 푸른 머리의 청년이 공작을 자극하기에 아주 좋은 대상이란 거다.

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이마가 살짝 찢어진 걸 빼곤 양호하군.

맞는 순간 충격이 너무 커서 기절한 모양이지만 상처 자체는 심각하지 않아 보였다.

저 정도는 일주일간 제대로 치료하고 잘 자면 나을 거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다친 건데 오랫동안 괴롭히는 것도 인간답지 못한 처사지.

빨리 끝내줘야겠다.

“돌에라도 맞은 것 같군.”

“히끅!”

그는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 공작과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자님, 지금 그는 몸이 좋지 않아…….”

“지금 내가 그대의 보좌관에게 말하는 게 보이지 않나, 공작?”

당황해서 끼어드는 공작에게 난 차갑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황족의 명령엔 불복종할 수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딸꾹질까지 시작한 톨린은 눈가가 빨개져서 울기 직전이었다.

아마 내 소문에 대해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산 채로 사람을 삶는 황자라는 말까지 돌던데.

그가 들은 소문이 너무 잔인하지 않은 것이었길 바라며 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뭘 봤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게 나라고도 한 것 같고. 정말인가?”

“아, 아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무엇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머리에 피딱지가 앉아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그 절박한 모습을 지켜보는 공작의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다.

난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럼 자네는 오늘 돌에 맞은 것도 아니고, 날 본 것도 아니야. 그렇지?”

“네, 네. 맞습니다, 황자님.”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그럴 리가 있나.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던진 돌에 맞았고 날 본 게 맞았다.

원래대로라면 당장에 내게 해명을 요구하고 사과를 받고, 내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난 여전히 7황자니까.

법 따윈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다른 황족이라고 다르지 않을 거고.

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무표정하게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야지, 자기세뇌 같은 합리화를 깨고 나와 객관적인 사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혼란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니까.

스스로 직접 알을 깨고 나온다면 고통이 조금 덜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공작에겐 어려운 일이다.

지금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공작은 나중에 좀 더 큰 걸 잃게 될 거고.

난 덜덜 떠는 톨린을 그대로 세워 두고 공작에게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것 보게, 공작. 황족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이렇게 복종하니, 자네 부하는 정말…… 충성스럽군.”

공작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약간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황가에 영혼을 다해 충성하는 공작의 신하다워.”

그는 또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속은 그의 입만큼 조용하진 않을 것이었다.

“소공작도 마찬가지겠지? 공작의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까. 미래의 그가 정말 기대돼.”

소공작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던 그는 얼굴을 번쩍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그 안에 담긴 건 선명한 분노였다.

난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도 충실한 황가의 검이 될 거야. 그대와 같은 길을 걷겠지. 이렇게 황족의 말이라면 그저 빌빌대는.”

“그, 그건…….”

“기쁘지 않나?”

내 질문에 그는 정신을 차렸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은 아버지인 공작이겠군.”

“…….”

“부디 그때도 자랑스러워하길 바라, 공작. 어떤 상황에서도 황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대의 아들을.”

공작의 주름 깊은 눈가가 잘게 떨렸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오늘 공작과 톨린은 고생이 많았네. 내 말을 돌봐 주고, 날 돕기 위해 이곳저곳 끌려 다녔을 텐데. 이건 그에 대한 보답이야.”

난 줄곧 메고 다니던 가방을 풀어 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쿵.

그의 발치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가방의 입구가 조금 열리며 안에 들어찬 것이 슬쩍 보였다.

……돌멩이였다.

그래, 이게 사냥도 안 하는 내가 하루 종일 이 무겁디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닌 이유였다.

그에게 가방 가득 담긴 이 돌무더기를 건네기 위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톨린을 돌에 맞추는 바람에 완전히 그를 조롱하는 모습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마치 이 돌로 톨린을 맞추고 그를 놀리는 것 같지 않은가.

자, 여기 네 보좌관을 맞췄던 돌이란다. 내가 한 게 맞다고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피더스 공작께서는 아무 말도 못 하지? 라는 메시지라도 전달하는 것 같은 모양새.

이렇게까지 할 계획은 없었지만 차라리 공작을 더 자극할 수 있다면 잘됐지 싶기도 했다.

“감사, 드립니다, 황자님.”

“그래, 오늘 하루는 그걸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말도록.”

그는 말없이 내가 던진(떨어뜨린) 가방을 주워 어깨에 멨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흔들리지는 않았다.

뭔가 자신을 다잡은 것 같다고 난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흠잡을 데 없는 기사의 몸가짐을 다했고, 날 불손하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안의 무언가가 오늘 분명히 변했을 거다.

난 그의 눈동자를 좀 더 살펴보다 이만 가보겠다며 돌아섰다.

말을 잃었기 때문에 공작의 말을 빌려야 하긴 했지만.

끝까지 정말 완벽한 쓰레기군.

난 말을 몰고 가다 잠시 고개를 돌려, 여전히 호숫가에서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둘을 눈에 담았다.

미안한 짓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원작에서 내년의 사냥대회에서 전통에 맞서 황제에게 첨언한 뒤 절벽 아래로 떨어질 사람이다.

그때의 공작은 이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후라 나같은 촉매제가 없어도 된다.

죽진 않는다.

그럼 주요인물이 아니니까.

다리를 한 쪽 잃고 그는 기적처럼 살아난다.

그리고 모든 신분과 이름을 버리고 외다리 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외다리 징, 소설의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친구이자 부모이며, 그리고 주인공의 유일무이한 스승이다.

12화- 방관자의 고뇌(2)

소동물 구역을 가로질러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서늘한 바람이 공작과 톨린 사이를 스쳤다.

톨린은 아까부터 잔뜩 굳은 얼굴로 묵묵히 걷는 공작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우물쭈물거렸다.

이 힘겨운 침묵을 먼저 깨고 입을 연 것은 피더스 공작이었다.

“괜찮나?”

“예, 당연하죠! 그렇게 세게 맞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시죠.”

톨린은 어색하게 묻는 그의 상관을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그러다 머리가 지끈거려 다시 이마를 감싸 쥐어야 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공작의 눈이 더욱 가라앉았다.

“정말입니다. 멀리 동쪽의 이국에는 하늘에서 갑자기 돌이 떨어져 큰 구덩이가 되기도 한다더군요. 제가 맞은 돌도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전 운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에 맞았는데 머리에 구멍이 난 게 아니라 상처 하나 나고 말았으니까요.”

공작은 그의 안쓰럽기까지 한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며 그저 무표정하게 얼굴을 끄덕였다.

톨린은 그걸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 그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남은 한 마리의 말을 공작이 아닌 자신이 타고 있는 것도 불편했다.

7황자를 그냥 걸어가게 둘 수 없어 공작은 그에게 말까지 줘서 보냈다.

덩치 큰 성인 남자 두 명이 한 말을 타고 갈 수는 없었다.

덕분에 이렇게 자신은 말 위에 타고, 공작은 걸어서 가는 중이었다.

톨린은 머리에 다시 돌을 맞는 일이 있어도 자신이 걸어서 가겠다고 주장했지만, 공작은 톨린이 말에 타지 않으면 돌무더기가 든 이 가방을 메고 호수에 뛰어들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말에 올랐다.

둘은 더 이상 7황자와의 일을 입에 담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말을 골랐다.

“……그나저나 어떡합니까? 아무것도 못 잡으셨잖아요. 보아하니 황금 여우도 놓치신 것 같고.”

톨린은 오늘 있었던 일에서 둘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공작에게 물었다.

“글쎄, 한물간 노인네 소리나 듣겠지, 뭐.”

공작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이제 저 말고 다른 이들도 공작님을 그렇게 부르겠군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둘은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마치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억울하고 아픈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톨린은 이유도 모르고 돌에 맞았지만 상대가 7황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어떤 처벌도 원하지 않았고, 황족을 상대로 더 이상 항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일을 묻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지금 나누는 얘기만큼 가볍게 마음을 비우자고.

공작 역시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가 10년 넘게 알아온 그의 상관은 자신보다 더 황족의 명령에 반발하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톨린의 생각과 달리, 공작은 마음을 비우긴커녕 머릿속이 온통 7황자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충실한 황가의 검이 될 거야. 그대와 같은 길을 걷겠지.

7황자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선명했다.

그건 분명히 한때 공작이 가장 바라왔던 미래였다.

자신의 뒤를 이어받은 소공작의 자랑스러운 황가의 검이 되는 것.

그리고 피더스 공작가가 대대손손 그 일을 물려받는 것.

-그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은 아버지인 공작이겠군.

다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또 그의 귓가를 울렸다.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공작은 이제 감히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걸음걸음이 마치 늪에 얽힌 듯 무거운 것은 어깨에 멘 가방 때문이라고 애써 스스로에게 되뇌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뿐.

***

천막이 모여 있는 석탑에 거의 다다르자 먼저 온 참가자들과 기다리던 대기자들이 날 흘끔거렸다.

힐끗거리는 거야 익숙하다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다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 바쁘니 뭘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내 말은 어디로 간 거야?

정말 마구간에라도 돌아갔나?

만약 그렇다면 너무 영특하게 군 벌로 저녁을 굶기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7황자님을 뵙습니다.”

갑옷에 금장이 새겨진 기사 둘이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황실 기사단인가.

“뭐냐?”

“1황녀 저하께서 7황자님을 찾으십니다.”

1황녀라.

지난 의식에서 8황자가 경기를 일으키던 첫째 누나였다.

뭐, 그 녀석이 형제자매 중에 나 말고 안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나한테는 가까이서 얼굴 마주보고 얘기 나눠 봤자 좋을 거 없는 상대였다.

난 말 고삐를 짧게 쥐며 말했다.

“사냥하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이 꼴로 황녀님을 뵐 순 없지. 나중에 찾아뵙겠다 전해라.”

둘 중 좀 더 어려 보이는 녀석이 텅 빈 내 안장으로 슬쩍 눈길을 주는 걸, 남은 한 명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치며 막았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황녀 저하께서 황자님이 아끼시는 말을 맡아 두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오시지 않으면 어찌 처리하실지…….”

“됐다, 앞장서.”

난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말에서 내려섰다.

그들은 내가 순순히 나서자 안심한 표정으로 하얀색의 화려한 천막이 있는 방향으로 날 안내했다.

4황자가 선물한 말을 잃어버렸다고 말이 돌면 성격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 황자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말이 통하는 상대가 낫겠지.

어쨌든 말을 되찾아야 하기도 하고.

1황녀라면 최대한 늦게 마주치거나 가능하면 황궁을 벗어날 때까지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맹랑한 말은 돌아가면 마구간 옆에 도살장이 세워진 걸 보게 만들 거다.

***

황실은 사실 사람이 평생 만나선 안 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황제는 말할 것도 없이 내 형제자매들을 포함한 모든 황족들은 전원 지나가다 곁눈질로도 봐선 안 되는 이들이고.

그중 1황녀는 꽤나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왔구나.”

이렇게 하얀 가죽을 구하기도 힘들겠다 싶은 색의 천막 입구를 하인들이 열어주자 중앙에 자리한 갈색 소파에 앉은 1황녀가 날 맞아주었다.

긴 밀빛 머리를 늘어뜨린 아름다운 얼굴의 1황녀, 멘틸 아바란은 빙긋이 웃으며 내게 소파 곁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1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내가 앉기보다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하길 선택하자 그녀는 흠 소리를 내며 몸을 소파 뒤로 편하게 젖혔다.

“딱딱한 인사는 넣어두거라.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냐. 서로 편한 존재가 돼야지.”

“전 딱딱한 인사와 적당한 거리가 가장 편합니다, 황녀님.”

“하하하, 내 동생이 이렇게 융통성 없는 인사인지는 몰랐구나.”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 모습에 난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래, 다른 동생들이 대부분 불 같은 구석이 있으니, 너처럼 좀 바위 같은 녀석이 있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난 여전히 서서 그녀에게 대답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의자 쪽으로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자리에 앉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괜찮습…….”

“팔이 아픈데.”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지만 이번엔 그냥 버틸 수 없는 제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보기보다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집요하게 날 눈으로 쫓는 그녀와 마주봐야 했다.

잠시간 대치 후 황녀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황녀는 눈에 짓궂음과 경계, 그리고 잔인함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훈훈한 1황녀의 천막 안으로 바깥의 서늘한 바람이 한 가닥 들어와 내 목덜미를 훑었다.

아니,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이어진 황녀의 말 때문에 목덜미에 오른 소름과 구분할 수 없게 됐으니까.

“내 동생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지?”

날카로운 질문이 날 꿰뚫었다.

이래서 1황녀와는 마주하기 싫었던 거다.

소설 다크 헤더에서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마니스를 가지고 쥐고 태어난다.

마니스는 전부 자연과 관련된 능력으로 발현된다.

황제는 불, 1황자는 물의 마니스를 사용한다.

그리고 1황녀의 능력은 어찌 보면 모든 자연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냥 성격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가 아니잖아? 잘 모르겠지만 난 너보다 널 더 잘 알거든.”

1황녀의 능력은 인간이다.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

그리고 이건 피더스 공작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

침착해야 했다.

소설에 빙의한 순간부터 누군가 내 이질감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황녀는 능력이 능력인 만큼 가장 첫 번째로 들키지 않을까 예상해 왔고.

다행히 난 소설을 100번도 넘게 읽은 애독자고, 남들보다는 멘틸 아바란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안다.

그녀의 능력이 발동되지 않게 하는 조건까지도.

그녀는 나보다 나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했지만 글쎄, 이젠 아닐 거다.

란 아바란의 몸엔 28살 먹은 아저씨가 하나 들어와 있고 그녀는 그걸 아직 모르니까.

난 작게 한숨을 쉬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1황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걸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은 신중하게 하렴. 널 모시는 사람들을 전부 백치로 만들면 생활하기 힘들지 않겠니?”

살벌하군.

그래도 덕분에 조금 남아있던 긴장감이 풀렸다.

난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7황자의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신지 알지도 못한다.

그녀의 입매가 굳는 것을 확인하며, 난 속으로 어딘가에서 멀쩡하게 살아 계실지 모르는 란 아바란의 어머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을 보냈다.

***

가만히 생각하면 멘틸 황녀가 날 직접 불러내서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서 그녀의 능력이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었다면 그냥 날 조종해서 답을 얻어냈으면 될 테니까.

아마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것도, 내게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려서일 거다.

원작의 7황자는 멘틸의 능력에 휘둘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1황녀의 저 지옥 같은 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소설에서 1황녀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이들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

첫째, 1황녀와 피가 이어져 있을 것.

이건 일단 내 몸이 란 아바란의 것이니 충족이 된다.

그리고 둘째, 멘틸 아바란에게 성애가 아닌 가족애를 느낄 것.

문제는 이 두 번째 조건이다.

1황녀에게 성애를 느낄 일도 없지만 가족애는 더더욱 느낄 일이 없다.

내 친부모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가족애 같은 것을 이제 겨우 두 번째로 얼굴을 마주하는 그녀에게서 느낄 리가.

그럼에도 황녀가 내 마음을 조종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소설의 빙의자인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할 뿐.

이 상황에서 내가 할 건 한 가지다.

그녀가 납득하도록 내가 1황녀에게 가족애를 느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난 그녀가 습관처럼 반복하는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안다.

13화- 방관자의 선택(1)

멘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눈을 바라봤다.

내 말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거라면 내가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 역시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파란 눈동자가 날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았니?”

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아마 7황자의 모친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란 아바란의 어머니는 꽤 유명하니까.

현 황제는 자식이 많다.

내 형제자매가 스무 명이 넘는데 그들 모두 어머니가 같을 리가 없지.

황후를 제외한 정부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내 어머니가 유명한 것은 그들 중 유일하게 황실에서 도망쳐 나간 여자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묘사는 없다.

7황자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원작에서 황실에서 도망친 그녀는 스쳐가는 대화에서 잠시 나오거나 7황자를 모욕할 때 사용되고는 다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란과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이민족의 하나 남은 왕족이라고 했다.

7황자가 12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황실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춘다.

몇몇은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마니스를 갖지 못한 반푼이 검은 머리의 황자를 낳자 부끄럽고 두려워 어린 아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소리가 7황자의 귀에 들어가면 당장 발광을 했기 때문에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지만.

뭐, 8황자처럼 대놓고 말하는 놈들도 있긴 하다.

어쨌든 그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머리카락 하나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내가 이렇게 안심하고 변명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고.

난 팔짱을 끼고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황녀 앞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간 매일 해가 질 때쯤 동쪽으로 한 마리의 매가 날아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뭐? 라는 물음이 황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어머니가 살던 동쪽의 먼 나라에서는 왕족이 서거하면 한 달 동안 새를 한 마리씩 불러들인다고 하더군요.”

황녀는 무감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가 내 말을 끊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무감각하게 말을 이었다.

“왕과 왕후가 죽으면 송골매를, 왕자나 공주가 죽으면 검은 매를 부른다고요.”

멘틸은 여전히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하나 남은 동쪽의 공주가 다행히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동쪽에서 잠들었다는 걸요.”

내가 말을 마무리하고도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돌았다.

나도 그녀가 내게 묻지 않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창문을…….”

그녀가 잠시 입을 열었다가 침을 한 번 삼켰다.

“……매일 창 밖을 살폈나?”

글쎄, 7황자가 정말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난 개인적으로 그러지 않았길 바라지만.

그런 속마음을 감추며 난 대답했다.

“침대 맡에 바깥 풍광이 좋은 창문이 하나 있어서요.”

가끔 저절로 눈이 간 것뿐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는 내 대답에 1황녀는 또 입을 다물고 잠시 이마를 감쌌다.

그리고 몸을 뒤로 젖혀 소파에 완전히 기대앉았다.

“……그래, 그래서…… 갑자기 남은 혈연이 소중해지기라도 했니?”

“그럴 리가요.”

난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내 주위엔 나보다 오래 살 사람밖에 안 남았구나 깨달았을 뿐입니다.”

“…….”

1황녀가 이마를 짚었던 손을 치우고 고개를 들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 나가 보렴.”

그녀는 처음과 같은 상냥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내게 말했다.

난 이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나가기 직전에 원래의 목적이 떠올라 뒤돌아봐야 했지만.

“제 말을 맡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녀는 그제야 떠오른 듯 단말마를 뱉더니 아주 방긋 웃었다.

“7황자궁 마구간에서 아주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영특한 말을 뒀어.”

난 이를 꽉 깨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섰다.

1황녀는 정말이지 만나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다.

***

천막을 나와 옆에 매어 둔 말을 끌고 걸었다.

바람이 불어와 풀 냄새와 함께 날 쓸고 지나갔다.

따뜻한 천막 안이 아닌데도 그 안에서 느꼈던 바람보다 싸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1황녀는 아마 내 말을 완전히 믿진 않더라도, 완전히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다.

그녀는 황족들 중 유일하게 혈연 관계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니까.

물론 관련 없는 사람한텐 한없이 잔인해지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말한 것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검은 매가 지나가는 걸 한 달 동안 지켜봤다는 건 거짓이었지만, 먼 동쪽의 나라에 있는 장례문화 같은 것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 것까지 거짓말을 했다가는 금방 들통날 게 뻔했다.

매일 창 밖을 살폈냐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난 개인적으로 정말 아니길 바란다.

서재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던 이민족의 문화에 관한 서적들이나, 유난히 창가에 침대와 의자 자리를 고집해 놨던 것들 역시 큰 의미가 아니길…… 그러길 바란다.

뿌우--뿌우--뿌우--

사냥 대회의 마무리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숲을 울렸다.

난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재단이 있는 곳으로 말을 이끌었다.

오늘의 진짜 미션을 완료하기 위해.

***

톨린은 공작가의 천막으로 돌아오자마자 대기중이던 주치의에게 보내졌다.

“세상에, 지나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또 돌부리에 머리를 찧었다구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놈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의사는 톨린의 상처 모양을 보고 더는 묻지 않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줬다.

“다음에 넘어질 땐 넘어뜨린 돌부리에 화풀이라도 하고 오시죠. 발로 차기도 하고 밟아 보기도 하고.”

그리 중얼거리는 중년 의사를 향해 톨린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그랬다가는 여기 톨린이 아닌 톨린의 모가지만 오게 될 것이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여기 있게. 사냥 대회의 마무리는 나와 잭이 하고 오지.”

붕대를 싸매고 있는 톨린을 보며 공작이 말했다.

“예? 아닙니다. 이거 정말 치료만 요란하게 한 거지, 그냥 가벼운 상처입니다.”

“일주일 정도 약 먹고 쉬면 되는 상처인 건 맞지만, 치료만 요란하게 했다는 건 좀 거슬리는군요.”

의사의 볼멘소리에 공작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이나 쉬어야 한다고? 중상이네, 중상이야. 자, 폐막까지 여기 누워서 잠이나 한숨 자고 있게.”

“잠은 무슨 잠입니까! 전엔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휴가 한 번 안 주시더니!”

힘으로 자신을 의료용 침대에 눕히는 피더스 공작에 톨린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래. 그동안의 서러움은 이걸로 퉁치자고.”

“아니 그게 무슨 날강도 같은…….”

“톨린, 아무리 가벼운 상처라지만 피를 좀 흘려서, 그렇게 난리를 치면 가벼운 현기증이 올 수 있어요.”

“으윽.”

“거 봐요.”

의사의 말대로 띵한 감각에 머리를 감싸 쥔 톨린의 어깨를 공작이 툭툭 쳤다.

“쉬고 있게.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

톨린은 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서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한 톨린은, 7황자와 아예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는 공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내년 휴가까지 퉁치는 거니까 푹 쉬게!”

공작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며 천막을 나섰다.

반드시 농담이어야만 한다고 중얼거리며 그는 딱딱한 환자용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이봐.”

빠져들려고 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어떤 목소리가 멀어져가는 정신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눈을 뜨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톨린은 당장 일어서며 예를 갖추려 했다.

“헉! 7황자 저하를 뵙, 으극!”

일어서려는 그의 어깨를 잡는 손이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려는 그를 막는 바람에 숨구멍 막히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뉘어야 했지만.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피가 몰려서 어지러울 거다.”

“화……황자님께서 여긴…….”

설마 이번엔 아예 머리를 부숴 주러 왔다는 건 아니겠지.

덜덜 떠는 그에게 7황자는 의외의 말을 건넸다.

“머리는 어때? 일주일 정도 쉬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황자님.”

소름 끼치도록 구체적이고 정확한 기간 선정에 톨린은 경악했지만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설마 일부러 기간을 설정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건가?

이번에 맞추는 놈은 전치 1주, 저기 저놈은 전치 3주, 이렇게?!

톨린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듯 7황자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 쉬는 동안은 항생제…… 아니지, 올리브 잎을 의사에게 처방 받도록.”

“예, 예, 황자님.”

팼으면 패고 다녔지, 맞진 않았을 것 같은 그가 상처 치료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톨린은 대답했다.

무엇이 그의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도록 압박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애저녁에 성공하셨으니 제발 떠나 달라고 톨린은 빌고 싶었다.

소문보다 7황자는 과묵하고 표정이 없어 그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말을 잘 듣는군.”

숲에서 그를 충성스럽다고 비꼬던 7황자가 떠올라 톨린은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도 그런 걸까?

톨린은 7황자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는 의외로 아무런 감정없이 살짝 열린 천막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건 오늘까지로 하고.”

갑자기 톨린을 향해 말하는 7황자의 목소리에 톨린은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쉬는 건 내일부터 하지. 지금은 당장 폐막 의식을 보러 가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당장이요?”

“그래. 지금 당장.”

명령을 해야 듣는 건가? 중얼거리는 황자에게 톨린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그는 다시 입꼬리를 한쪽만 기울여 웃고는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련없이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 모습이 기묘해 톨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게 그 말을 하기 위해 오신 겁니까?”

조심스레 물어 놓고도 스스로 겁대가리 없는 짓이었다고 자책하는 톨린에게 고개를 돌린 7황자는 픽 웃더니, 마침 그의 옆에 있던 탁자에서 의료용 붕대를 하나를 들고는 다시 천막의 입구로 향했다.

“아니, 붕대가 필요해서 얻으러 온 거야. 다른 곳은 전부 폐막 의식을 보러 가서 비어 있었거든.”

톨린은 그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황족에게 뱉은 말을 불이행할 수 없어 곧바로 천막을 나서 재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건 톨린의 30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임과 동시에 가장 다행스러운 행동이었다.

***

재단이 가까워지자 톨린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조용했다.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도, 환호 소리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적막이 흐르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톨린은 그제야 절벽 바깥의 까마득한 높이를 아래로 하고 푸른 구체 하나가 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공작님!!!”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톨린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곧 누군가의 발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지만.

다행히 그의 절규를 들은 건지 공작의 시선이 넘어져 있는 톨린에게 닿았다.

그 회색 눈동자는 톨린을 발견하곤 잠시 커졌다가 이내 그 속에 안심과 만족감이 감돌았다.

톨린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며 왜 거기에 있는 거냐고, 다시 올 순 없느냐고.

하지만 이는 말이 되지 못해 뻐끔거리는 톨린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시간은 톨린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곧 잔인한 목소리가 울렸다.

“죄인 아고니 피더스의 즉결 사형을 집행한다.”

그리고 그를 감싸던 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톨린은 마치 시간이 그에게만 천천히 흘러가는 듯 느리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공작의 몸과 꾹 감기는 그의 눈동자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작도, 그를 바라보던 회색 눈동자도, 그 무엇도.

톨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14화- 방관자의 선택(2)

모두의 예상대로 사냥 대회 우승의 영예는 1황자가 차지했다.

이제 그가 황위를 이어받지 못할 거라는 소문은 순식간에 사그라들 것이었다.

그는 등등하게 황제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사냥한 자이언트 베어와 웨어 울프를 보고도 황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작년과 별로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황족의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에 압도당하는 사람들.

전통대로 1황자는 황제 앞에서 소원을 말할 거고, 귀족들은 그걸 이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병력을 차례대로 바치려 들 거다.

지난 대회에서 우승했던 4황자는 뭘 빌었더라?

그래, 태양의 숲에 자꾸 드나드는 국경지역의 유목민을 소탕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었다.

이번에는 몇 달 전 금광이 발견됐다는 젠달 지역의 개발권을 달라고 빌 것이라고 공작은 생각했다.

그럼 그 지역의 금광을 발견한 귀족과 개발에 투자한 다른 귀족과 상인들은 파산하거나 큰 손해를 볼 테지만, 반항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긴장한 채 1황자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폐하, 최근 수도에 있는 시에라 대제님을 모시는 신전 주변에 도둑들과 부랑아들이 자리를 잡아 신전의 품격을 낮추고 치안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를 해결하고 망가진 신전의 미관을 재정비할 수 있는 권한을 감히 청합니다.”

잠시 주변에 술렁이는 소리가 일었다.

귀족들은 의아해했지만 곧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소원은 갑작스럽긴 하지만 정당했기 때문이었다.

웅성이는 군중 사이에서 공작은 고요히 절망해야 했다.

그는 주먹을 꼭 쥐었다.

1황자가 말하는 수도의 신전이 어느 곳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에게 악몽을 선사한 그 거대한 건물을 그는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1황자가 일컫는 부랑아와 도둑들이 누군지 피더스 공작은 알고 있었다.

부모 잃은 고아들과 병자들이 모여 사는 움막집 무리를 전부 쓸고 싶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공작저에 지원을 요청할지도 몰랐다.

그럼 충성스러운 피더스 공작은 그에게 아낌없이 자원과 그들을 쓸어버릴 병사들을 몇 내주어야 할 거고.

이후 벌어질 사업에도 그는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었다.

조금은 희미해졌다고 믿었던 작은 아이의 피범벅이 된 얼굴이 다시 선명히 떠올랐다.

사실 아이의 시체를 발견한 순간부터 공작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인 걸까?

공작은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아이를 발견했던 신전 주변부에 부랑아들이 많은 것은 황가가 지시했던 신전 증축사업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주변에 있던 집 수십 채를 밀고 거대한 신전 건물을 세웠다.

집과 직업을 잃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앉았고 범죄를 저질렀다.

많은 아이들이 그 해 부모를 잃었다.

신전에서 더 많은 공물을 거두며 부랑아의 수는 더욱 늘었다.

또한 공작은 제국으로 넘어온 이민족들이 국경에서 기웃거린 건, 제국이 조용히 살고있던 그들의 작은 터전을 이유 없이 짓밟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갈 곳을 잃고, 그렇다고 받아들여 주는 곳도 없는 그들은 추운 겨울마다 제국의 국경에서 목숨을 걸고 줄다리기를 했다.

피더스 공작은 위험 인자를 척살하라는 명령을 망설임 없이 이행했다.

하지만 위험한 인자들이니 척살하라는 그 명령을 받들었다.

공작은 그 외에도 납득했다고 생각하고 수행했던 수많은 명령들도 이와 같을 것을 알았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가 행해왔던 일들은 오늘 숲에서 톨린에게 자신이 한 짓과 다를 게 없었다.

부당함을 알고도 모든 것이 정당한 것처럼 꾸미는 것.

그걸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는 것.

여기서 또 가만히 있는다면 그 같은 일이 반복될 것도 알았다.

공작은 눈을 꾹 감았다.

이번에 눈 앞에 아른거린 것은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비아냥거림.

-황가에 영혼을 다해 충성하는 공작의 신하다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착각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부디 그때도 자랑스러워하길 바라, 공작. 어떤 상황에서도 황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대의 아들을.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 역시 공작은 알고 있었다.

***

황제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이견이 없다면 우승자에게 기꺼이 그의 정당한 권리를 허하노라.”

“감사합니다.”

1황자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곧 쏟아질 박수갈채 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침묵만이 맴돌았다.

의아해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벌레들 중에서 그나마 나았던 1기사단의 단장.

지금은 은퇴한 지 꽤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그가 모든 이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지금 감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공작?”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 1황자의 질문에 피더스 공작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자 저하,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 아고니 피더스는 이 자리에서 가주 자리를 내려놓고 저의 보좌관, 톨린 크리사를 가주 대리로 임명하는 것에 감히 허락을 구합니다.”

“지금 이게 무슨…….”

1황자는 화가 난 듯 소리를 높이려 했다.

“역시 허하도록 하지.”

하지만 황제의 무심한 허락에 곧 입을 다물었다.

아고니는 황제에게 예를 다한 뒤 잠시 뒤를 돌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성한 의식을 방해한 죄는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좌중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상 사형 선고를 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모르는 이는 그곳에 없었다.

“하! 결정에 번복은 없어, 공작.”

1황자의 표정에 짜증과 비웃음이 동시에 드러났다.

공작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1황자는 황제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별 표정 변화 없이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더스 공작은 이 순간에도 그를 향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경애가 샘솟는 자신을 느끼며 그의 선고를 기다렸다.

황제는 그런 공작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집행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즉결 사형을 선고한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공작은 조용히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이를 받아들였다.

***

형은 빠르게 집행됐다.

전통대로 방해를 받은 1황자는 순식간에 피더스 공작을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둥 안에 가뒀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보는 사냥대회에서의 즉결 사형 앞에서 새삼 이 전통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깨달았다.

산 채로 절벽에 던져져야 하기 때문에 목숨이 붙어있어야 된다는 조건대로 1황자는 공작을 죽이지 않았다.

의식을 방해받은 화풀이는 해야겠다는 듯 한껏 그의 숨통을 조였을 뿐.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올리며 그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절로 숨막히는 광경에 몇몇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물기둥에 갇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더스 공작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손을 들어 물을 움직이고 있는 1황자였다.

그는 나라의 전설 같은 인물을 모두의 앞에서 간단히 죽이는 이 상황에 대한 흥분감과 분노로 인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도 쉬지 못하는 자신의 꼴이 통쾌한지 입가에는 얇은 웃음까지 걸고.

아마 그는 다음 대 황제가 될 것이다.

그땐 저기 무감하게 앉아있는 황제처럼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지.

다음으로 공작은 30여 년간 따랐던 그의 주군을 눈에 담았다.

그는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노익장이 익사당하는 걸 전시하면서도 별 감정 변화가 없어 보였다.

마치 스스로가 벌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황제는 개미라도 밟아 뭉개듯이 무감각하게 자신을 죽이는 중이었다.

그것이 조금 웃겨 그는 폐까지 물이 들어차는 것을 느끼면서도 설핏 웃음이 났다.

우습게도 그간 미친 듯이 술렁이던 가슴이 고요했다.

그제야 조금 눈이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잘난 듯이 목숨의 무게가 어떻고 운명이 어떻고 말해왔으나 자신도 그들 앞에선 그저 벌레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귀한 황족의 검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늦은 깨달음이 주는 고통은 수압과 함께 압축되어 사방에서 공작을 짓눌렀다.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축 늘어지자 1황자는 그를 감싸던 기둥을 구형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를 가둔 구체는 그의 키만 한 지름으로 줄어들었고 서서히 움직였다.

전통대로 절벽으로 그를 떨어뜨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삶은 전부 의미 없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마지막 단 한 순간만은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공작은 생각했다.

동시에 뒤에 남을 그의 어린 아들이 떠올라 죽어가는 와중에도 걱정이 앞섰다.

“공작님!!!”

그와 동시에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공작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톨린이었다.

그의 믿음직한 보좌관이자 오랜 시간 함께해온 어린 친구.

막사 안에서 쉬고 있어야 할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던 것도 잠시, 공작은 마지막으로 너무 많은 짐을 남기고 간다는 미안함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앞으로 몇 년은 힘든 나날이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적어도 소공작이 가문을 물려받을 때까지는 그러겠지.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톨린이라면 잘 해낼 것이다.

똑똑한 그의 친구라면 남은 아들을 잘 챙겨줄 것이고, 영특한 그의 아들은 톨린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을 표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상상했던 미래와는 다른 무언가가 펼쳐지겠지만 그게 불행은 아닐 것이라고 공작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냥 뇌에 산소가 통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죄인 아고니 피더스의 즉결 사형을 집행한다.”

황실 보좌관의 외침과 동시에 1황자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공작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공작의 머릿속에 7황자가 건네줬던 돌무더기가 떠올랐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 가방 덕분에 괜히 미적거리지 않고 한 방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서인지, 분명히 다시없을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중인데도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시선에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사람이라든가.

공작은 썩 보고 싶지는 않았던 얼굴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7황자였다.

오늘 숲에서 그를 조롱하던 그가 사람들 틈에서 그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피더스 공작은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등을 밀어준 것도 어쩌면 그였을지 모른다.

그래, 여러 의미로 7황자 덕분에 마지막은 편안히 가는 건가.

원망은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공작은 마지막으로 7황자를 바라봤다.

그는 묘한 낯으로 공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벌리고 그를 향해 속삭였다.

‘아직…….’

그의 입 모양을 읽느라 잠시 집중하는 순간, 그의 몸이 사람들의 시야를 벗어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떨어지느라 생긴 중력에 대한 저항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러 생각들이 한 번에 떠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사람들 사이에서 황제와 같이 아무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던 7황자에 대한 생각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오늘 일어날 일을 알고 있던 걸까?

설마 그래서 빨리 떨어지라고 이 가방을 주고 오늘 하루 종일 갖고 다니라고 했던 걸까?

빨리 훅 가라고?

만약 그렇다면 정말 눈물 나게 고맙군.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그의 마지막 중얼거림이었다.

분명…….

‘아직…….’

아직…….

‘못 죽습니다.’

못 죽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흡사 저주 같기도 하던 7황자의 말에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지만 공작의 정신력이 유지해준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곧 기절해 버렸으니까.

그와 동시에 그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와 그를 감쌌다.

15화- 속임수는 아닌

공작이 사라진 절벽에 남은 건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선명한 공포였다.

다들 이걸로 확실히 알았을 거다.

황가의 뜻을 거스르는 게 뭘 의미하는지, 그리고 저들에겐 뭐든 실현할 힘이 있다는 것도.

공작은 수많은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영웅이었다. 작게나마 마니스를 쓸 줄 알던.

그런 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죽는 모습을 봤으니 공포심이 극에 달할 만했다.

만인의 영웅도 저 앞에선 그저 하찮은 생명일 뿐이구나.

저렇게 쉽게 죽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군중의 표정에선 의식의 흐름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공작가에 위문의 뜻을 담아 사냥 대회의 우승자가 바친 진상품을 보내지.”

황제는 비아냥과 다름없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숙여지는 고개 사이로 사람들 틈에서 쓰러져 있는 공작의 보좌관이 보였다.

공작과 함께했던 기사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심약한 그는 기절했던 건지 맥없이 늘어진 몸을 힘겹게 들어, 사라져 가는 황제와 1황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톨린은 이내 독기 어린 눈을 감추려는 듯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꽉 움켜쥔 손 사이로 흐르는 피는 그가 마음까지 조아린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황제와 라시아가 자리를 뜨고 그 뒤를 나도 형제자매들과 함께 따랐다.

뒤를 슬쩍 돌아보자 귀족들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선 톨린은 일어서 다시 이곳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공작의 부고를 지켜야 하는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난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한 히든 에피소드의 완성이었다.

***

1황자의 침실은 내 침실과 비교하면 볼 게 많다.

윤기가 도는 마호가니 책상, 호랑이 비슷한 무언가의 가죽이 깔린 바닥, 가고일 손톱으로 장식된 전등.

이거 하나만 갖고 나가 팔아도 1년은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이런 장인이 단 몇 개 만들었을 것 같은 장식품은 추적을 피하려면 어둠의 경매장 같은 뒷거래밖에 선택지가 없다.

때문에 나처럼 당장에 인맥도 뭣도 없는 사람은 원가의 10분의 1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리턴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커서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나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백금발 머리가 들어왔다.

“왔습니까?”

“으악!!!”

1황자는 정말 놀랐는지 체통 없이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

공작이 사형당하고 삼 일 정도가 지난 오늘이었다.

1황자는 그 일로 완전히 예전의 위상을 되찾았고 그의 지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최근의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오늘 그걸 깨러 온 게 좀 민망할 정도로.

“그렇게 큰 소리 내시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지난 코피 사건 이후로 그가 침실에 더 이상 하인, 하녀들을 침실로 잔뜩 데리고 와 수발 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목소리를 줄이라는 의미로 주의를 줬다.

내 덤덤한 충고가 그를 더 열 받게 한 것 같긴 했지만.

“너 정말 미친놈이냐? 왜 남의 침실에 맨날 소리도 없이 들어와 있어?! 내가 지난번엔 정신이 없어서 착각한 줄 알았는데, 너 정말 아무런 기척도 없어! 어떻게 한 거냐!”

그렇겠지.

까마귀로, 아니지.

까마귀와 말로 변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인지, 아니면 이 몸이 워낙 벌레 이하 취급을 받아서인지 황족들은 마니스를 사용할 수 있음에도 내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까지 전부 감지하면 사람이 미쳐버릴 수 있으니 몸이 저절로 무감각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싶다.

나를 날아다니는 새, 혹은 벌레 정도로 느끼는 것 같은데.

집중하거나 신경 쓰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그런 것으로.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면 몇 번 실험해 봤기 때문이다.

대상은 눈 앞의 저 단순 무식한 황자님이다.

연회가 있었던 밤 1황자는 분명히 방에 들어와 있던 날 눈치채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몇 번, 까마귀로 변신해 1황자 주변을 얼쩡거려봤다.

1황자는 나라는 걸 눈치채기는커녕 주변에 새가 날아다니는 것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 능력을 밝힐 마음은 없었기에 바로 1황자의 주의를 돌렸다.

“그렇게 팔팔하신 거 보니 이제 코피는 안 쏟는 모양입니다.”

시끄럽게 종알거리던 1황자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날 쏘아봤다.

후작을 죽일 때와 비슷한 눈이었다.

죽일 듯이 노려봤다는 거다.

번들거리는 그 눈을 나에게 고정한 채 그가 이를 갈듯이 내뱉었다.

“너. 지금 내 목숨 한 번 구했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주제 파악은 해야지. 내가 벌레 새끼한테 감사 인사라도 하면서 납작 엎드릴 줄 알았던 건 아니겠지?”

날 위협하려는 듯 손을 들어올리는 그를 보면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무슨 일이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저렇게 태도가 바뀌다니.

그나저나 벌레 새끼를 강조하는 걸 보면, 지난 대화에서 내가 내뱉었던 벌레 새끼라는 단어를 꽤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 같았다.

속이 좁군.

책으로 읽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역시 저 녀석도 황제감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아직 구한 것도 아닌데요.”

그러니 기고만장해질 것도 없다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1황자의 얼굴에 미약한 당혹감이 서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마니스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다 고쳐진 게 아니었어?! 네놈이 이제 됐다고 했잖아!”

오히려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쉽게 고쳐질 거라고 생각한 건데?

내가 대답없이 가만히 있자 놈은 점점 흥분했고 목소리를 점점 높이기 시작했다.

“날 속인 거냐?!”

“완전히 고쳤다는 소리는 처음부터 한 적 없는데.”

내 태연한 대답에 놈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애초에 한 번에 뚝딱 치료 가능한 거였으면 원작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도 않았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녀석은 내 침묵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죽었다 살아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직 살아난 것도 아니고 니 목숨줄은 내가 쥐고 있다는데 열 받을 상황이긴 하지.

그래도 바로 공격부터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1황자는 지난번 치료로 정말 몸이 제 컨디션을 찾았다는 걸 증명하듯, 그날 밤처럼 코피를 쏟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손을 들어올렸다.

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성격 하난 정말 급하군.

“뭐야?!”

흉포한 그의 공격이 내 몸을 꿰뚫는 불상사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뿜어낸 화살은 청소기가 먼지 빨아들이듯 내 손 안으로 흡수됐으니까.

정확히는 내 손 안에 담긴 이 조그만 돌덩이 안으로.

황자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건, 그건 날 치료한다고 썼던 거잖아. 그것도 거짓이었나?”

1황자는 순식간에 무력화된 자신의 공격에 충격을 받았는지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그때도 치료할 생각이 없었으면 그냥 죽어가도록 뒀어도 될 일입니다. 그랬으면 제가 이렇게 공격받을 일도 없었을 거구요.”

그럼 도대체 방금 일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보라고 쓰여 있는 듯한 1황자의 표정에 난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몸 속을 돌아다니는 오염된 마니스를 빨아들여야 했거든요. 이걸로.”

돌을 가볍게 들어올리자 1황자는 그것이 자신의 모든 마니스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움찔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 손 안에 든 이것은 1황자의 몸을 좀먹고 있는 마니스 거둬들이는 유일한 수단이자, 공작에게 안겨줬던 구호품이다.

원래는 원작 후반부쯤에 나오는 아이템이지만 아주 조금만 가져다 썼다.

좀 쓰는 대신 주인공한텐 찾기 편한 방법을 가르쳐 주고 떠날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마니스를 빨아들이는 만능 아이템은 아니다.

발동을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황자의 상태는 이를 실험하기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고.

연회날 밤, 1황자가 살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물었던 그날, 난 그에게 이 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마니스를 쏟으십시오. 돌이 더 이상 마니스를 빨아들이지 않을 때까지요. 다 끝나면 다음 걸로 또 하고 또 하면 됩니다.

-뭐? 이딴 돌멩이에다? 지금 날 놀리는 거냐?

1황자는 그날 밤도 말이 참 많았다.

-못 믿으시겠으면 그냥 뒤돌아 나가서 빠르게 죽어가시면 됩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잠자코 돌을 쥐고 기운을 흘려 넣었다.

-처음엔 만찬에서처럼 코피가 좀 나겠지만, 점점 나아지는 게 느껴질 겁니다. 코피가 멈추면 그만두십시오.

처음에도 반신반의하던 그는 돌이 예상과 다르게 부서지지 않고 마니스를 빨아들이자 놀란 듯했다.

코피를 쏟을 땐 미리 그럴 것이라고 했는데도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의심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일을 계속했다.

1황자의 코피가 멈출 때쯤엔 그의 발치에 수십 개의 돌멩이들이 가득했다.

그만하면 됐다는 말에 1황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자리를 떴고, 나는 그 돌들을 챙겨왔다.

그 이후로 그가 날 보러 오는 일은 없었고 나도 그를 찾아갈 일이 없었다.

그동안 1황자는 멋대로 모든 일이 종결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치료하는데 왜 저절로 내 공격을 흡수해? 내 명령대로 움직여야지!”

1황자의 배신감 가득한 목소리가 내 회상을 깼다.

“여기에 힘이 흡수되어 버린다는 게 1황자님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다 치료되면 그 돌은 더 이상 나한테 효과가 없는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여전히 의심스럽게 날 바라보며 또 윽박질렀다.

“그럼 얼른 다 뽑으면 되잖아. 왜 찔끔찔끔 빼는 건데?”

첫 번째 이유는 그럴 경우 과도한 원작 파괴라는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다.

“너무 과도하게 빼내면 쓰러질 테니까요. 황자가 쓰러질 정도로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돌게 하고 싶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리고…….”

그리고 두 번째는,

“몇 가지 들어주실 게 있습니다.”

당연히 이용해먹을 가치가 있어서다.

“이 벌레만도 못한 새끼가 지금 내 목숨을 걸고 협박하는 거냐? 내가 황제가 되면 너 하나 잡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지금 내 손을 안 잡으면 황제가 되기도 전에 죽을 거고요.”

녀석의 눈이 다시 분함과 분노로 뒤덮였다.

“너……!”

“우선 말투부터 고쳐볼까요?”

또 목소리를 높이려는 그의 말을 끊고 입꼬리를 올려 웃자, 1황자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앞에서 목소리 높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난 누가 나한테 윽박지르는 데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거든.

16화- 실험(1)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둘러보며 난 커튼처럼 나무줄기가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들어갔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인간일 때보다 좋아진 청력 덕분에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소리와 잎사귀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동물들의 발자국 소리.

좋아, 사람은 없군.

난 안심하며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 높아진 시야와 조금 떨어지는 시력으로 돌아온 나는 가지를 밀고 나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들이 주변 시야를 막았지만 곳곳에 작은 동물 발자국이나 집으로 보이는 것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곳은 바로 얼마 전 사냥대회가 열렸던 황실 삼림의 소동물 구역이다.

그리고 이곳에 아무도 모르게 와 있다.

아, 한 명은 안다.

1황자, 라시아 아바란.

이곳의 사람을 물려준 것이 1황자니까.

비록 엄청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황실 삼림을 비워 달라고? 내가 들어가는 걸로 하고? 내가 왜?

볼륨은 낮췄지만 불만 가득해 보이는 목소리에 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니까 왜 내가 들어가는 걸로 하냐!! ……고.

또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는 내 눈치를 보며 뒷말을 작게 속삭였다.

-전 제가 거길 오가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하거든요.

-왜?

-누군가의 치료 때문에 들락거리는 거니까 사람들 시선을 끌었다가는 좋을 게 없을 텐데요?

1황자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사람을 붙여서 따라올 생각은 버리시죠. 전 기척을 지우는 것만큼 읽는 것도 잘하니까.

뜨끔한 표정을 지은 1황자는 내가 그럴 리가 있겠냐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셔야죠. 사람을 붙이면 내가 거기서 숲을 빙빙 돌기만 할 텐데. 그럼 치료만 늦어지는 거고.

1황자는 그 말을 듣고 날 노려보긴 했지만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노려봐도 기껏해야 내 방을 몰래 뒤지거나 내일 모레쯤 사람을 숲에 푸는 것밖에는 못하겠지.

하지만 내 방엔 아무것도 없을 거고, 사람을 풀어도 숲의 넓은 면적에서 돌이란 돌은 다 모아올 수도 없을 거다.

황실 소유의 숲을 아직 일개 황자인 그가 마음대로 뒤엎을 수도 없을 거고.

물론 치료법 때문에 숲을 찾았다는 건 반만 사실이다.

그 말은 반쯤은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으니까.

난 숲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동물들의 흔적을 밟았다.

이끼 사이에 숨겨진 초식동물의 배설물이라든가, 작은 발자국, 혹은 갉아먹다 버린 나무열매 같은 것들.

오늘 난 내 능력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지난번 흑마 사건으로 어쩌면 내가 까마귀 아닌 다른 동물들로 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겨우 까마귀로만 변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보다 괜찮은 능력이라면,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 능력이 정말 동물로 변신하는 것이라면.

난 떡갈나무 주변의 축축한 땅을 찾아 주변에 작고 긴 원통형 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안을 준비해온 나무열매로 조금 채웠다.

머리 나쁜 녀석이 운 좋게 걸리면 그 녀석으로 실험해 볼 생각이었다.

여러 번 실험해 보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큰 동물은 내가 다치지 않고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당장 늑대부터 시도해 보려 해도, 아마 난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뜯어 먹힐 텐데.

작은 것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주 작은 것부터.

그러니까 뭐, 다람쥐 같은 것.

빼꼼.

살짝 부패한 나뭇잎과 이끼로 덮어놓은 구덩이에서 작은 형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작은 머리에 줄무늬 꼬리, 보릿빛 몸통.

의심할 여지없는 다람쥐였다.

“…….”

“…….”

나와 다람쥐는 둘 다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다람쥐는 다람쥐대로 집을 나섰는데 웬 거무튀튀한 인간과 마주쳐서 놀랐고, 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목표를 만나 놀랐다.

“그, 일단 이리 와봐.”

당황한 난 설치하려던 덫을 슬슬 옆으로 숨기며 녀석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다고 야생동물이 내게 다가올 리가…….

쪼르륵.

……있었다.

당장 달아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녀석은 맹한 얼굴로 내 손 위에 올라왔다.

심지어 녀석은 나와 눈을 맞추고 코를 벌름거렸다.

7황자가 정말 동물들한테는 인기가 많은 건가?

“그렇게 사람 말을 잘 듣다가는 금방 잡힐 거다.”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는 내 말에도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 위를 종종거렸다.

그래, 내년 사냥대회에서는 그냥 굴 안에서만 있어라.

***

원래 내 계획은 준비해 온 덫으로 작은 동물을 아무거나 잡아 가둬 둔 상태에서 변신의 조건을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정 안 되면 까마귀로 변해서 한 마리 낚아채서 가두든가.

그랬는데.

“가만. 가만히 좀 있어봐.”

이 정신없는 녀석이 너무 쉽게 손에 들어오는 바람에 난 이 작은 녀석을 가두지도 못해 허둥대야 했다.

내가 다른 손으로 가방을 뒤적거리는 동안 녀석은 이제 날 완전히 자신의 친구라고 인식한 건지 내 몸을 이리저리 오르내렸다.

방금 손 위에 올라와 준 건 그냥 우연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 작은 다람쥐는 도저히 가만히 있질 않았다.

“자자, 이걸 봐.”

난 비장의 수를 꺼냈다.

녀석은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고 내 손에 들린 도토리에 홀린 듯 시선을 고정했다.

준비해 온 나무 열매들 중에서도 가장 윤기가 나고 가장 오동통한 걸로 골라 놓은 놈이었다.

다람쥐는 열매에서 까만 눈동자를 떼지 못했다.

“쉬. 가만히.”

난 녀석의 조그만 손에 그 도토리를 쥐여 주었다.

녀석의 눈이 조금 커지고 그 눈동자는 곧 감동을 받은 듯 날 바라봤다.

내가 별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다람쥐는 선물을 받아들여도 좋다는 내 뜻을 읽었는지 그 통통한 도토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입을 열어 볼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난 입을 벌리고 있는 다람쥐의 손에서 재빨리 도토리를 가로챘다.

헛입질을 한 녀석은 잠시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빈 손과 내 손 안의 도토리를 번갈아 봤다.

날 향한 자그만 두 눈동자에 황망함과 함께 짙은 배신감이 차올랐다.

그래, 이거였다.

난 지난 두 번의 변신 직전에 내가 했던 일들을 찬찬히 되짚어봤다.

빙의 첫날에 모가지가 잡혔던 까마귀, 사냥 대회 때 날 두고 도망쳤던 흑마.

둘의 공통분모는 자명해 보였다.

배신감.

녀석들의 눈에 가득 찼던 감정이 내가 변신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조건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줬다 뺏는 것만큼 배신감이 드는 일도 없었다.

“찍! 찍! 뀍!”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듯 다람쥐는 나에게 잔뜩 약이 올라 쥐 같은 소리를 내며 작은 손으로 내 몸 여기저기 패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미안하다.”

난 녀석에게 다시 도토리를 쥐여 주었다.

까만 눈동자의 작은 친구는 뭔가 불만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탐스러운 선물을 거부할 수 없겠는지 날 노려보며 도토리를 받아 들어 내가 또 뺏어갈세라 얼른 입 안에 넣었다.

분노의 찍찍 소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난 진정한 녀석을 곁에 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조건은 충족된 것 같았다.

다른 녀석들처럼 날 향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니 내 가설이 맞다면 이번엔 난 다람쥐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었다.

까마귀로 변할 때처럼…….

음, 다람쥐는 뭘 할 수 있지?

난 날 위아래로 오르내리던 녀석을 떠올렸다.

‘나무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고 싶다.’

난 줄곧 그랬듯이 따뜻한 기운이 날 감싸 안길 기다렸다.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뜬 난 여전히 커다란 인간이었고, 그런 날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다람쥐가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열 받아, 열 받아, 열 받아!”

라시아 아바란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침실에 누워 베개를 쳐댔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안에 있던 거위 털이 터져나와 날렸으나 그걸론 그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빌어먹을 제 일곱 번째 남동생.

이름도 기억나지 않던 벌레 새끼.

그가 지금 이 방에서 신세에도 없는 셀프 감금을 하고 있는 원인이었다.

-1황자님은 지금 사냥을 나간 걸로 되어 있으니 그 시간 동안은 침실에서 나와선 안 됩니다.

건방지게 명령하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1황자는 다시 한번 울화가 치밀어 올라 애꿎은 침대에 주먹을 꽂았다.

평민들의 1년 생활비로도 감당하지 못할 손실이었으나 그딴 건 라시아가 알 바 아니었다.

원래는 벌레답게 잘 바닥을 기던 놈이 아니었나?

아니,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라시아는 그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황태자로 책봉될 미래를 점지받은 이였다.

아래의 하급들을 하나하나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어렸을 적 마니스를 측정하기 직전에 웬 검은 머리 황자가 태어났다고 황실이 떠들썩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긴 했다.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땐 역시나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 반푼이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하지만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여기엔 황제가 그를 철저히 무시한 것도 있었지만, 황족간의 사이가 철저한 약육강식인 이유도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녀석한텐 관심이 없었고, 마니스가 적은 다른 형제자매는 황족의 이름을 단 주제에 마니스가 없는 그를 혐오했다.

1황자는 관심이 없는 파였다.

하지만 이젠 혐오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두고 보자.

치료가 끝나기만 하면 그놈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서 7황자궁 창문에 걸어 놓겠다고 생각하며 1황자는 화를 삭였다.

똑똑.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던 중, 누군가 침실의 문을 노크했다.

“누구냐.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2황자 저하께서 황자님을 찾으십니다.”

기사 한 명이 1황자궁 앞까지 찾아온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자 1황자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2황자라면 그가 유일하게 믿는 그의 진짜 동생이 아니던가.

유쾌한 녀석을 보며 기분을 풀고 싶은 마음에 벌떡 일으켰던 몸이었지만 1황자는 다시 몸을 누이고 말았다.

-그 누구도 만나선 안 됩니다. 1황자님은 사냥터에 계신 거니까요. 2황자님이 찾아와도 결코 만나지 마세요. 이를 어기시면 저도 더 이상 도와줄 게 없습니다.

재수없게 말하던 그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젠장, 난 사냥터에 갔으니 없다고 전해라.”

라시아는 결국 기사에게 그렇게 말을 전하고 다시 침대에서 베개를 패기 시작했다.

***

“1황자 저하께선 지금 황실 삼림으로 사냥을 즐기러 가셨습니다.”

“이런, 오늘은 날을 잘못 잡았구나. 알겠다.”

2황자 디토 아바란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뒤돌아 1황자궁을 빠져나갔다.

그의 입꼬리에 맺힌 미소에 문지기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걸어 나오는 내내 미소를 지우지 않던 2황자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 1황자궁의 침실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더욱 짙게 미소 지으며 등을 돌려 다시 길을 걸었다.

“누가 우리 멍청한 형님께 사람 가리는 법을 가르쳤을까.”

즐겁게 중얼거리며.

17화- 실험(2)

오늘의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혹시 충분히 녀석을 화나게 하지 않았나 싶어 몇 번 더 도토리를 줬다 빼앗아 봤지만 조약돌만 한 손에 몇 대 더 맞았을 뿐이었다.

난 내가 세운 가설이 맞을 거란 확신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꽤 당황했다.

이것 말고는 둘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았는데.

게다가 까마귀는 같은 공간에 있던 시간이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말과 비교할 사항도 없었다.

난 한숨을 쉬며 날 노려보는 다람쥐를 마주봤다.

그리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까마귀는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대신 별로 한 일도 없긴 했다.

“그럼 재연하기도 쉽겠지.”

난 다시 도토리를 꺼내 들었다.

오늘 이 작은 녀석은 큰 포상을 받게 될 거다.

***

결론적으로 난 결국 7황자궁에 돌아올 때까지 다람쥐로 변하지 못했다.

까마귀의 모습으로 날아오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다람쥐는 까마귀나 말보다 훨씬 더 정신머리가 없는 편이었다.

어떻게 어깨 위로 올라온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내가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변신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동안 녀석은 3개의 도토리를 가지고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야망이 없는 다람쥐였다.

하녀가 저녁을 가지고 들어올 시간이 다 되어갔기 때문에 난 도로 가방을 메고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녀석의 집은 그 주변일 테니 수고했다는 의미로, 덫으로 쓰려던 통을 엎어 나무열매들을 흩뿌려주고 왔다.

다음을 기약하며 난 미련없이 숲을 떠났다.

숲에 올 때보다 가벼웠을 게 분명한 가방이 묵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상심이 컸나 생각하며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

똑똑.

“화, 황자님, 저녁식사를 준비해왔습니다.”

“들어와.”

대충 가방을 책상 주변에 던져두고 인간으로 돌아온 난 다행히 제 시간에 하녀를 들일 수 있었다.

오늘의 식사 당번은 안나로군.

이미 몇 번이나 7황자의 식사 준비를 도운 적이 있었으나 안나는 여전히 노크를 한 후 한 번씩 발음을 씹었다.

저녁은 간단하게 하라는 내 말에 따라 요리사는 양파 스프와 샐러드, 훈제 오리 요리 3가지만 준비해 보냈다.

안나는 야무진 손놀림으로 책상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안나가 준비를 다 끝낼 때쯤 난 잠시 눈을 감고 피곤한 몸을 의자 쪽으로 뉘었다.

오늘의 실패 원인은 아무래도 동물을 가둘 만한 케이지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에 갈 때는 덫을 놓기 전에 곁에 사육장부터 준비해 놓자고 다짐하던 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안나가 왜 안 나가고 있지?

평소 같으면 준비를 끝낸 후 내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야 했지만 아까부터 안나는 조용했다.

이상함을 느낀 내가 눈을 뜸과 동시에 안나가 입을 열었다.

“귀, 귀여워!!”

내가 기대했던 말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뭐?”

설마 간땡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이상 7황자에게 그런 불경한 말을 할 리는 없으므로 난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답지 않게 얼빠지게 물어봤지만 녀석은 무언가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듯 내 발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찍?”

익숙한 얼굴의 주인이 줄무늬가 돋보이는 복실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날 뻔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이상하게 묵직했던 가방이 떠올랐다.

조금 급하게 오느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기시감의 주인이 녀석이었다니.

이 다람쥐는 가방 안에 들어있던 도토리와 개암나무 열매를 야무지게 챙겼는지 볼이 빵빵해져서 날 올려다봤다.

그래, 야망 있는 다람쥐였다 이거지?

“아! 화, 화, 황자님, 그, 주변에 숲이 있어서 잘못 들어온 다람쥐일 거예요. 제, 제가 얼른 밖으로 내쫓겠습니다!”

내가 다람쥐를 노려보고 있자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안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더듬더듬 다람쥐를 변호했다.

내가 다람쥐 가죽을 어떻게 벗겨줄까 고민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아이는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곤 바닥에서 앞발을 세우고 서있는 녀석을 향해 급하게 손을 뻗었다.

“꺅!”

안타깝게도 저 조그만 녀석은 내 경험에 의하면 그리 얌전한 동물이 아니었다.

다람쥐는 순식간에 안나의 손길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안나는 자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다람쥐의 재빠른 움직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으악! 하지 마!”

앙증맞은 검은 눈과 어울리지 않게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다람쥐는 기어코 안나를 타고 올라가 아이의 얼굴에 철썩 달라붙었다.

안나는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쥐새끼 하나 못 잡는데 부엌에서는 무슨 수로 일하는 거냐.”

난 한숨을 쉬며 안나의 얼굴에 붙은 작은 녀석을 붙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안나는 자신 있게 나서 놓고 비명만 지른 것이 민망했는지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그냥 밖에 내보내면 알아서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다가 주변의 길고양이에게 잡아 먹히지만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내가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손에 완전히 결박되어 얼굴만 삐죽 내민 녀석은 자세가 불만스러운지 뀍뀍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앗.”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녀석은 내가 피할 새도 없이 내 손을 꽤나 세게 물고는,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쪼르르 빠져나와 책장을 타고 올라갔다.

이렇게 보니 다람쥐는 생각보다 강인한 생물이니 길고양이 같은 건 이빨 하나로 격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밖에 내다 버려도 알아서 잘 살아갈 듯했다.

“헉! 황자님! 피, 피가!”

안나의 경악에 손을 살피니 꽤 깊이 물렸는지 피가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제가!!! 가서 약을 구해오겠습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니 소란 피우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안나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갖 소란을 피우며 방을 뛰쳐나갔다.

그래, 아이의 입장에선 눈 앞에서 황족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을 봤는데 까무러칠 만도 하지.

게다가 간접적으로라도 자신이 관련되어 있는데.

난 납득하며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을 바라봤다.

책장의 가장 위칸에 자리잡은 앙증맞은 녀석은 머리를 손으로 손질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내려오지 그래?”

녀석은 내 말에도 콧구멍을 몇 번 벌름거리더니 뒤돌아 책과 책 사이에 볼주머니에 저장해놨던 나무열매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올라갈 수만 있었으면 바로 잡아서 밖으로 내보낼 텐데.

아주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하하, 세상에.”

어이없게도 오늘 오후시간 동안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감각이 온 몸을 덮었다.

익숙한 열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난 손바닥만 한 다람쥐가 되어있었다.

조그마해진 손이 내려다보이자 헛웃음이 나왔다.

배신감은 무슨, 그런 복잡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목을 만지면 되는 거였단 말이지?

“찍?! 찍찍! 뀍!!”

난 사람이 다람쥐로 변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목격하고 졸도하려는 다람쥐를 보며 조금 웃었다.

책장을 오르는 몸이 가벼웠다.

***

그날 소소한 것들이 변했다.

우선 안나가 날 조금 존경하게 된 것 같았다.

난리를 피우며 구급약품을 구해 온 안나는 내가 다람쥐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얌전하게 만든 걸 보고 놀라서는 ‘역시 눈빛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난 그걸 들었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그래, 날 무섭다고 생각하면 좋은 거겠지.

그리고 난 숲으로 조금 자주 오게 됐다.

많으면 하루에 3마리, 적게는 0마리씩 변할 수 있는 동물들을 확보했다.

혹시 개수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므로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들을 중심으로.

이를 통해 알게 된 내 능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물들은 나에게 꽤 호감을 갖는 것이 맞다.

안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계의 야생동물들이 특별히 인간에게 우호적이거나 친근한 것이 아니었다.

능력의 영향인지 녀석들은 내가 처음에 만나서 먼저 다가가도 크게 경계하지 않았으며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이들의 목덜미를 매만지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줬다.

둘째, 하지만 지능이 높은 동물일수록 처음 내게 갖는 호감만으론 목덜미를 만지는 게 힘들다.

셋째, 이전에는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에 맞는 동물로 변하는 방법밖에 몰랐지만, 사실 그냥 무슨 동물로 변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해당 동물로 변할 수 있다.

두 마리밖에 없을 때는 날고 싶다 아니면 달리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에 가장 적절한 동물로 저절로 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신할 수 있는 동물의 가짓수가 많아지며, 원하는 동물이 되고 싶다고 바라면 그냥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를 들면 이렇게.

‘족제비로 변하고 싶다.’

눈을 떴을 때, 난 윤기 나는 털을 가진 몸이 긴 족제비가 되어 있었다.

“찍!! 찎찍찍!!!”

그리고 내 등에 타고 있던 다람쥐 녀석이 기겁해서 울기 시작했다.

이것도 소소한 변화들 중 하나다.

내가 가는 곳을 이 다람쥐가 따라다니게 되었다는 것.

녀석은 그날 이후로 내가 사람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다른 것으로 잠깐 변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동족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야생으로 도저히 이전에 살던 숲의 굴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다람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녀석이 나타났던 곳 근처에 내려주고 발을 뗐지만 녀석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리저리 피해도 보고 숨어도 봤지만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여러 번 접전이 있었지만 난 결국 패배했다.

까마귀로 변해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 쫓다가 나무에 머리를 갖다 박고 기절한 녀석을 이길 수 없었으니까.

덕분에 완전히 녀석은 날 따르게 됐고.

내가 숲으로 가는 날이면 녀석은 까마귀로 변한 내 등에 올라타 나와 숲을 거닐게 된 것이다.

“찍!! 찍찍!”

아직은 갑자기 다른 동물로 변하면 성을 내며 날 패긴 하지만.

***

오늘은 별다른 소득 없이 숲을 나와야 했다.

소동물 중에서는 이제 특별히 필요한 능력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앞서 말했듯 혹시 변할 수 있는 동물종류의 개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중형이나 대형 동물들을 확보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중형 동물 구역으로 가야 하나.

까마귀의 모습으로 숲을 빠져나온 난 주변을 살피며 내 방 창문으로 날아들어갔다.

방은 몇 시간 전 나갈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란 내 명령을 정말 칼같이 지켜주는 고용인들 덕분에, 난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숲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아무도 안 왔던 모양이군.

난 안심하며 메고 갔던 가방을 풀어냈다.

지난 며칠 숲 속을 날아다니고 뛰어다닌 것 때문인지 피곤이 조금씩 몰려왔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난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깐 눈 좀 붙여야지.

-어서 7황자를 부르라니까??!!!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전부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

죄송하지만 7황자님의 명령으로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기사 한 명을 힘으로 쓰러뜨리는 소리가 들리자, 난 한숨을 쉬며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난 소란스러운 문 앞 상황을 상상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기사의 목을 틀어쥔 붉은 머리 청년의 시선이 나에게 따라붙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내 지랄맞은 동생, 8황자였다.

18화- 비밀과 주인공(1)

“꼭 저같이 거지같은 곳에서 지내는군.”

8황자, 셀로스 아바란은 내 집무실을 훑어보곤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긴, 1황자가 살던 곳과 비교했을 때 이곳은 좀 낡고 볼품없긴 했다.

그래도, 원래 살던 오래된 빌라에 비하면 호화로울 지경인데 말이지.

난 부의 상대성에 대해 고민해 보다, 뭐 마려운 개처럼 불안정하게 앉아있는 8황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황자같이 사는 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려면 내가 매일 직접 찾아가 봐야겠네.”

“뭐?! 그럴 필요 없어. 오지 마. 죽어도 오지 마.”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녀석은 흠칫하며 날 만류했다.

“난 평생 거지같이 살아서, 황자다운 삶을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래. 못 배운 형한테 동생이 가르쳐 줘야지.”

“젠장! 너도 거지같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까 오지 말라고!”

녀석이 날 노려보며 결국 말을 정정했다.

난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황자답게 사는 형 모습 구경하러 온 건 아닐 거고.”

내가 운을 띄우자 녀석이 주춤주춤 내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 문 앞에서 다른 사람 멱살잡이를 할 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보니 그간 녀석이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눈 아래가 거뭇했고 얼굴은 까칠했으며 살이 내려 광대가 조금 도드라졌다.

녀석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그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 다 까발릴 거지?”

한참을 망설이던 녀석은 눈을 한 번 꾹 감더니 나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오늘은 사냥 대회 이후 첫 번째로 열리는 황제의 가족 의식이니까.

또 그 긴 탁자에 모든 형제자매들이 모여 앉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거기서 내가 입을 어떻게 놀릴지 걱정된 거겠지.

8황자가 움직일 건 예상 범위 안이었다.

오히려 녀석이 오늘까지 날 찾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난 놀라는 중이었다.

사냥 대회 다음 날 득달같이 달려올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해서 암살자를 고용해 칼을 갈고 있는 건가도 싶었다.

그런데 그냥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찾아온 것뿐이라니.

녀석의 답지 않은 소심함에 픽 웃으며 난 대답했다.

“글쎄.”

“그게!!!”

셀로스는 내 미적한 태도에 열이 받았는지 책상을 탁 치며 소리를 지르려다가,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소리야.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확실히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말할지 말지는 내 마음이라는 뜻이지.”

“젠장,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들어준다고? 무슨 수로?”

“…….”

셀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대충 웬만한 것들은 들어줄 수 있긴 할 거다.

돈을 쥐여 줄 수도 있고, 사람을 사줄 수도 있고, 녀석이 거지같다고 욕하던 이 성을 바꿔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녀석에겐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사람이 뒤를 지키고 있으니까.

아직 그 사람에게 나에 대해 말하진 않은 것 같았지만.

나에 대해 말했다면 처음엔 원하는 걸 줄지 모르지만, 얼마 안 지나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려고 했을 테고.

“평생 입다물고 있을 거라곤 못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어쩌면 올해는 아닐지도 모르지.”

너무 압박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난 녀석을 안심시켰다.

상대는 오히려 의아하고 불안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와서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역시 10대라 그런지 불만도 불안도 많았다.

“왜 그래? 기대한 거라도 있어? 원한다면 오늘 연회장에 들어가자마자 탁자에 올라서서 외쳐줄 수도 있어. 8황자의 마니스로는 사실 촛불이나 겨우 킬 수 있을 거라고.”

“너, 내가 이렇다고 해서 니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영원히 병신이고 반푼이야.”

내 비아냥에 녀석의 눈동자가 제법 매섭게 빛났다.

웬일로 맞는 말도 하는군.

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 말대로야.”

“뭐?”

사납게 날 노려보던 녀석은 오히려 내가 동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그 말이 맞다고. 정말 드물게 니가 옳은 소리를 했다는 뜻이지. 흔치 않은 기회니까 음미하고.”

“날 지금 놀리는 거냐?!”

자기가 맞다고 해주는 데도 셀로스는 또 금방 열이 오르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난 그런 그를 찬찬히 뜯어봤다.

나보다 머리 반은 큰 빨간 머리의 이복동생을.

몸집만 컸지 어린애나 다름없는 녀석을.

“오랜만에 옳은 소리 했으니까 새겨 둬야지. 상대가 병신 된다고 니가 뭐 좋아질 건 없다는 거. 니 입으로 방금 말했잖아?”

“…….”

“잘 기억해.”

녀석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난 그런 녀석에게 일일이 설명해 줄 만큼의 친절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됐으면 썩 나가라며 내쫓았다.

8황자는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더 이상 있다가는 내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문으로 몸을 돌렸다.

“아.”

녀석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그를 불러 세웠다.

“뭐든 들어준다고 했지?”

“필요 없다며.”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

8황자는 약 오른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원하는 게 뭔데?”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뒷말을 이으려는 녀석의 말을 자르며 난 툭 뱉었다.

“존댓말 써.”

“뭐?!”

셀로스는 황제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탭 댄스 추는 걸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지?

“내가 형이잖아.”

“니가 왜 내 형이야!”

“내가 일곱 번째 황자고 넌 여덟 번째니까?”

“그건…….”

“내가 두 살 많아.”

사실은 열한 살 많지만 녀석은 알 리 없으니.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난 약속대로…….”

“누가 싫대! 알겠어!”

“…….”

“알겠, 어요.”

녀석은 자존심 상해 미치겠다는 듯이 급하게 방 문을 닫고 나섰다.

약속대로 비밀은 지켜줄 테니 안심하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는데.

***

똑. 똑. 똑.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파리한 얼굴을 때리고 흘러내려갔다.

또옥.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마지막 방울이 그의 관자놀이를 쳤다.

그 충격에 드디어 굳게 감겨 있던 깊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꿈벅. 꿈벅.

시야가 잘 잡히지 않아 그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선한 자만이 갈 수 있다는 테리툼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축축한데? 그럼 호디에인가? 황족은 신의 종족이라는 교리가 정말이었나 보군.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도 호디에이라서 이런 건가?’

호디에라면 사람을 산 채로 잘랐다가 붙였다가를 반복하는 요괴 에스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없는 걸 보면 또 호디에는 아닌 것 같고.

온몸이 쑤시는 걸 보면 이미 몇 번 붙였다가 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일생 동안 성실하게 배워왔던 종교 지식을 의식의 흐름대로 정리하던 공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 죽은 게 아니구나.

그는 다시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워서 사위가 보이진 않았지만 소리나 등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보아 동굴 같았다.

물에 떨어져서 운 좋게 산 건가?

물살에 떠밀려 절벽 근처의 동굴에 안착한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몸에 힘을 뺐다.

몸을 일으킬 힘까지는 없어 공작은 천천히 의식을 집중하며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해봤다.

머리, 팔, 몸, 다리…… 이런, 오른쪽 다리를 접질렸군.

순서대로 살펴본 결과, 오른쪽 발목이 시큰거리며 아파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온몸이 쑤시긴 했지만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진 게 아니었나?

분명히 1황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떨어졌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을 바라보던 톨린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봤고, 우스울 정도로 지루하다는 표정의 황제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아직 못 죽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얼거리던 검은 머리의 황자도 있었다.

비뚜름히 한쪽 입술을 올리던 7황자의 얼굴까지 떠오르자 공작은 등 뒤로 소름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7황자.

분명히 아직 못 죽는다고 중얼거렸다.

마치 내가 살아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가 사냥 대회 중 건네줬던 돌멩이가 가득 든 가방이 생각났다.

공작은 이번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허리께를 더듬거렸다.

가방이 만져지지 않았다.

떨어질 때 물에 쓸려간 모양이군.

하긴,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옷이라도 입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공작은 한숨을 쉬며 이번엔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둘러보려고 했다.

“이걸 찾으십니까?”

뒤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기겁하지만 않았다면.

공작은 자신의 몸에 힘이 없어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나이도 잊고 어린 소녀처럼 소리를 지를 뻔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도 없이 사람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윤곽으로 보아 꽤나 다부져 보이는 그 남자의 금색 눈동자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건네는 가방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공작은 뚝딱거리며 받아 들었다.

묵직한 것이 그 빌어먹을 돌무더기인 게 분명했다.

“……고맙소.”

“아닙니다, 계속 메고 계시면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아 잠시 빼놨습니다.”

“아, 그쪽이 이 늙은이를 구해준 모양이구려. 뭐라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지…….”

공작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을 속일 정도로 기척을 숨기는 데 능통한 상대였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겠지만.

30여년 간 전투를 이끌어온 그의 감이 상대는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걸 알려줬다.

생명의 은인인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아니요, 답례는 괜찮습니다.”

남자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질문에 순순히 대답만 해주신다면.”

그 기색이 결코 부드럽진 않았기 때문에 공작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대답해 주신다면 죽이진 않겠다는 뒷말이 이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피더스 공작은 고민했다.

아까 허리춤을 더듬거려 본 결과, 자신은 지금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인 것 같았다.

물살에 떠밀려 갔던지, 아니면 이 가방처럼 눈 앞의 남자가 다 수거해갔을 수도 있었다.

훈련을 게을리한 건 아니었지만 전투에 임하던 시절보다 몸이 둔해진 건 사실이었다.

몸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까?

무장하지 않은 상대라면 어떻게든…….

스릉.

공작이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허리춤에서 조용히 칼을 꺼내 들었다.

완벽한 무장 상태군.

심지어 그 자세가 꽤나 안정적이라 공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잘 벼려진 은빛 칼날의 신형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황궁과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오, 절대 아니오. 그냥 지나가다 발을 헛디딘 얼빠진 노인네요. 이름은 징이라고 하오.”

다행히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직을 내려놓은 아고니 피더스는 지금 인생에서 통틀어 가장 귀족의 자긍심이 바닥을 치는 상태였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19화- 비밀과 주인공(2)

다행히 아고니 피더스, 아니 자칭 ‘징’은 두 다리, 두 팔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그, 적어도 발이라도 풀어주면 안 되겠소?”

멀쩡한 사지가 밧줄로 묶인 채 걸어가는 중이긴 했지만.

겨우 발걸음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늘린 줄이 양 발을 구속했고 팔은 뒤로 묶인 채였다.

그래도 아예 인정머리가 없는 치는 아니었는지 오른쪽 다리에 부목 비슷한 것을 대주긴 했다.

그를 배려한 것인지 앞이 깜깜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걸음도 느릿하고.

참으로 상냥한 젊은이였다.

기왕이면 밧줄도 풀어주고 자신도 풀어주면 그 인망을 더 드러낼 수 있을 텐데.

못 걸을 것도 없지만 썩 편한 것도 아니라 말을 걸었건만 자신을 구속한 당사자는 그의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자신을 끄는 굵은 밧줄을 강아지 산책하는 목줄처럼 잡고.

“젊은이는 모르겠지만 이 나이에 넘어지면 그냥 끝나진 않는다오. 엉치뼈가 부서지면 끝장이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단 말이오.”

그는 최대한 불쌍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으나 금빛 눈의 사내가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그나저나 숲 아래 절벽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사람은 있었어도 돌아온 사람은 없었던지라 공작은 이런 동굴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처음엔 생각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걸어 들어갔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점차 자신이 정확히 어디로 흘러 들어온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깨어나자마자 황족과 관련이 있는가부터 묻는 기색을 봐선 그는 적어도 황족과 귀족들에게 반하는 세력인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이단을 따르는 이들일 수도 있겠지만, 신전과 대립하는 쪽이라면 예전에 전부 소탕됐다고 들었다.

그가 모르는 다른 단체가 있던 건가를 고민하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황실의 검으로 살아오면서 그런 부류의 인간을 잡아 바치는 것 또한 자신이 해오던 일이었던지라 공작은 습관처럼 그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이대로 따라가면 그들의 전체를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혼자 힘으론 소탕하기 힘들 테니 탈출한 후에 지원병력을 이끌고 덮쳐야 할 텐데,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람?

그다지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했던 이들에게 반발하다 사형까지 당했던 그였다.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황제를 향한 충성은 절벽에서 떨어진 그 순간 모두 버린 게 아니었던가.

그간의 인생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겐 분명히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지금 무엇보다 그가 두고 온 소공작과 공작성, 그리고 모든 걸 떠안은 톨린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얌전히 끌려갈 게 아니라.

“여기가 정확히 어디요? 왜 날 이렇게 묶어서 데려가는 거고?”

“…….”

“난 정말 황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오. 그냥 다리나 조금 다친 노인네지. 뭣 때문에 날 잡아가는 건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뭐가 됐든 전부 오해니 풀어주길 바라오. 날 데려가봤자 그냥 공간과 식량만 낭비될 뿐이니.”

사실 다 거짓말이었다.

이미 예전에 전선에서 물러난 데다가 지금은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었고 아마 평생을 은둔해서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는 어쨌든 전대의 피더스 공작이었고, 이들이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값진 정보들은 넘쳤다.

공작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저 친절한 젊은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데려가려 들 것이었다.

이렇게 온건한 방식이 아닐 것임은 자명했다.

접질린 다리를 아예 부러뜨리려 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아하니 저 젊은이는 피더스 공작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았으면 이렇게 편하게 가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왜 황족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건지는 모르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대라면 계속 교란시킬 가치가 있었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바닥이 점차 발에 익는 만큼 그의 눈도 더욱 어둠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고니는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곳이 단순히 자연발생으로 생성된 동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그냥 종유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 하나하나에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자, 아고니는 이제 정말 발걸음을 천천히 늦춰야 했다.

더 이상 따라가면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여긴 그가 떨어진 절벽 주변이 아니었으니까.

“처음 묻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아고니는 왼발에 힘을 조금 주고 그를 당기는 밧줄이 팽팽해질 때까지 버텼다.

“여긴 어디고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조금의 장난기도, 투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에 그제야 남자는 고개를 돌려 아고니를 바라봤다.

잠시간의 대치 후 금빛 눈의 사내는 입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그런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고니는 그게 당최 무슨 뜻인지 몰라 침묵했고, 상대의 목소리는 고저없이 이어졌다.

“자신의 의지가 있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요. 특히 황족을 모시는 이들이라면 여길 못 찾아 혈안이니 그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의심하는 건 이쪽이기 때문에 노인장을 묶어서 데려가는 겁니다.”

대답이 되었냐는 듯 아고니를 바라보는 눈빛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이는 들고 있던 밧줄을 내려놓고는 다시금 그가 아고니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이밀었던 검을 빼 들었다.

“그러니 이곳이 어딘지 묻는 게 정말 진심이라면 노인장은 둘 중 하납니다. 미쳤거나,”

느리게 말을 고르는 상대의 금안이 순간 번뜩이는 것 같다고 아고니는 생각했다.

그는 꿰뚫을 듯한 눈으로 아고니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신 아미카의 부름을 받고 왔거나.”

아고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젊은이는 다시 뒤를 돌아 돌기둥 중 하나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은빛 검을 그 앞에 꽂아 넣었다.

그가 손잡이를 잡고 무언가 불어넣은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검신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손잡이부터 시작된 빛이 바닥을 타고 흘러 주변의 종유석처럼 보이는 기둥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모든 석주 위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이 빛을 머금고 피어올랐다.

그리고 동굴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고니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바닥이 뒤틀리며 새로운 공간을 여는 이 광경을.

당장 발 아래에 새로운 세상이 드러나는 이 믿을 수 없는 모습을.

안개 낀 시야 사이로 아름다운 성이 보였다.

그 눈부신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아고니는 자신을 향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떤 경우라도 노인장은 풀어드릴 수 없으니 그냥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제서야 아고니는 밝아진 시야에서 자신을 개와 인간 포로 사이의 어디쯤으로 대접해준 젊은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금빛 눈동자에 짙은 눈썹, 갸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고니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이목구비가 아니었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칠흑 같은 흑발.

아고니는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이는 자신을 차악도 아닌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한 운명에 대한 한탄과, 50년도 전에 소탕되었다고 알려진 이들의 본거지에 와 있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의심, 그리고 겨우 살아난 건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는 초대 시에라 아바란 님의 큰 그림이었나 하는 원망의 결과였다.

***

피더스 공작은 잘 도착했으려나.

난 1황자의 침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주인공을 만나게 한 건 미안했지만 뭐, 죽진 않을 거다.

어쨌든 원작의 시작이 빨라진 시점에서 스승과 제자를 최대한 빨리 만나게 하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테니까.

잘만 하면 황실이 아니라 주인공이 있는 곳에서도 사건의 흐름이 빨라져 버렸는지 알 수도 있을 거고.

주인공이 사는 곳은 이곳에서는 좀처럼 확인하기 힘든 곳이니까.

그저 가장 늙은 피더스 공작이 제일 고생을 하게 만든 것이 조금 양심에 찔릴 뿐이었다.

“야! 이번엔 왜 이것밖에 안 가져와?! 더 팍팍 가져와야 빨리 나을 거 아니야!”

내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난 무표정하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소리 지르신 겁니까?”

“내가 언제 큰 소리 냈다고 그래. 그게 아니라 답답하니까 그런다.”

라시아는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훨씬 낫군.

난 소파에 몸을 묻으며, 돌 속으로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그에게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그는 열 받아 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몸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미 경험해봤기 때문에 내 말에 따랐다.

난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누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건 구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한 번에 많이 하면 1황자님이 죽습니다.”

정확히는 그의 눈에 띄는 변화를 눈치챈 누군가에 의해서 죽는 거지만.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이것도 물담배처럼 위험한 거냐?”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물담배가 왜요.”

내가 되묻자 1황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니놈이 처음 여기로 쳐들어온 날 그러지 않았느냐. 걱정되면 그것부터 끊으라고! 내가 그 말을 듣고 당장 모든 걸 끊었는데.”

“아, 그건 그냥 건강에 좋지도 않은 거 끊으시라는 뜻이었습니다.”

1황자의 얼굴이 대번에 분노에 붉으락해졌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저래 봤자 속으로 이 치료가 끝나면 내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리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것이었다.

1황자는 끓어오르는 열을 식히기 위해서 협탁 위에 준비된 물을 따라 마셨다.

난 그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사실 물담배는 그의 몸을 망치는 게 맞다.

그리고 그가 마시는 저 물도, 오늘 저녁에 먹은 음식들도, 그가 섭취하는 모든 것들이 그를 병들게 만든다.

그는 지금 독을 제 입에 들이붓고 있는 것이다.

이건 하녀장이나 요리사를 죽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몸에 심어진 씨앗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을 이 치료에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난 괜한 생각을 지우며 그에게 오늘 가져온 마지막 돌을 건넸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이것 자체로 뭐 죽는 건 아니니 겁먹지 마시고요.”

“그래. 아주 고맙다.”

이를 으득 갈며 돌을 낚아챈 그는 오늘의 마지막 치료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일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침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황자 저하, 2황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곧 나갈 테니 응접실에서 기다리라 전해라.”

1황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게 대충 돌을 건네며 대기중인 하녀에게 말했다.

“난 가볼 테니 넌 들어왔을 때처럼 그렇게 해괴한 방법으로 사라져 봐라.”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난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그것이 못마땅한 듯 보였으나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난 그런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몸에 재앙의 씨앗을 심어준 사랑스러운 동생을 만나러 가는 형의 모습을.

20화- 선택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