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선택의 결과
다시 각양각색의 금발머리들이 모인 기다란 탁자에 앉게 된 난, 이번엔 어떻게 이 지루한 시간을 때워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지난번엔 옆에서 시비를 걸어 대는 8황자를 무시하며 탁자에 그려진 나뭇결 개수를 세는 걸로 시간을 보내봤는데 별로 효과적이진 않았다.
어차피 세 명이서 짝짜꿍하는 자리에 뭐하러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을 다 부르는 건지.
다른 이들은 매번 같은 레퍼토리가 지루하지도 않은지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 지난 의식과 다를 게 없었다.
아, 다른 게 있긴 했다.
이번에는 저 8황자, 셀로스 아바란이 저 지루한 무리에 동참했다는 것.
사냥제 이후로 처음 열리는 가족 의식이었다.
내 재수없는 이복동생은 오늘 내게 나와 한 존댓말과 관련된 약속 때문인지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랬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눈 앞에서 7황자에게 존댓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까.
그건 죽어도 싫었는지 셀로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탁자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만들어내는 위화감 때문에 몇몇은 그를 힐끗거리며 바라보긴 했지만.
하지만 8황자가 갑자기 내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하는 꼴을 보였다가는 주변에서 곁눈질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건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녀석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8황자의 시비 없이 탁자의 나뭇결을 세면 되는 건가?
세상에, 저 녀석의 싸가지 없는 시비가 손톱만큼이라도 그리워지는 날이 오다니.
실없는 생각을 하며 팔짱을 끼는데 뒤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지루해 보이는구나.”
탁자의 끝자락에 앉은 이들은 평소엔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라, 안 그래도 뻣뻣하던 자세들을 곧추세웠다.
“1, 1황녀님을 뵙습니다.”
밀빛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려 목선을 드러낸 1황녀, 멜틴 아바란이었다.
사냥 대회에서의 만남 이후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자리였다.
그녀는 파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 향해 시선을 잠시 주고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 의미 있는 가족 행사니 좀 재미없더라도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던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우아하게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멜틴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주변 이들은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이들을 따라 고개를 내려야 했고.
그리고 얼핏 든 고개 사이로 날 보며 웃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장난스럽게 눈을 접은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놀리러 온 거군.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남동생에게 핀잔을 주러 온 누나 같은 행동을 하는 그녀를 보며 난 조금 안심했다.
사냥제에서의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듯했으니까.
그건 그녀가 날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고, 이제 잠시 동안은 그녀가 날 의심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크게 걱정했던 부분이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간 내가 말했던 동쪽 이민족의 풍습에 대해서 조사해보기라도 한 걸까.
그래도 당분간은 아예 죽은 듯이 지내야겠군.
주인공이 오기 전에 저쪽과는 더 얽혀서 좋을 게 없었다.
지금처럼 누나 노릇을 하며 놀겠다고 다가와도 골치 아플 게 분명했으니까.
제발 남은 시간 동안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그런 소원 비스무리한 것을 속으로 빌고 있는데, 아까까지 잠시 잠깐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날 불렀다.
“너 뭐야.”
나는 연회장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연 8황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말 안 걸 줄 알았는데?
셀로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뭔가 먹던 과자를 빼앗겨 억울한 아이 같기도 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1황녀와 무슨 접점이라도 있는 것인가 고민하는 거겠지.
“뭐냐니, 네놈의 ‘형님’이지. 1황녀가 너의 누님인 것처럼.”
내가 조금 짓궂게 말하자 녀석은 살풋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누님라는 말에 짜증이 난 건지, 형님이라는 말이 거슬렸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단순한 반응이었다.
처음에 비하면 나름 절제라는 것을 배운 것 같기도 했지만.
“언제든 부르고 싶을 때 불러봐도 좋고.”
내 말에도 녀석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존댓말을 할 바에는 그냥 입을 다물겠다는 의지가 보여 난 또 픽 웃었다.
애새끼 같긴.
그리고 지금의 녀석은 저렇게 애같이 구는 게 가장 잘 어울렸다.
가까운 미래까지도 그래주면 더 고마울 거고.
***
톨린이 꼬박 하루를 기절해 있다가 눈을 떴을 때, 피더스 공작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가주의 보좌관이 아닌 공작 대리였으며, 갑작스러운 가주의 부고로 인해 불안정한 공작가를 물어뜯으려는 하이에나 무리들에게서 공작가와 어린 소공작을 지켜야 했다.
다들 공작이 무슨 생각으로 겁 많고 소심한 톨린 크리사에게 가주 대리를 맡긴 건지 모르겠다고 수군거렸다.
가주의 빈 자리를 채우기에 그는 턱없이 작은 사람이라고, 피더스 공작가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어린 소공작은 빈털터리가 되어 거리에 나앉을 것이라고 다들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말들이 그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공작가를 지키는 충견이 완전히 광견이 되어버렸다고, 피더스 공작가를 건드리는 사람은 피를 봐야만 할 것이라고, 톨린 크리사 밑에서 자라게 될 소공작은 한없이 불쌍한 아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을 모았다.
결론적으로 모두 톨린 크리사가 미친놈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
똑똑.
“가주 대리님, 잭입니다.”
“들어와.”
짧지만 차갑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공작가의 기사단장 잭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문을 열었다.
목을 덮을 정도로 길어진 푸른 머리를 대충 묶어 내린 톨린이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기사단 내 분위기는 어떻지?”
그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네. 말씀하신 대로 2기사단에서 소공작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던 자들이 있어, 죄를 물어 엄지와 검지를 잘라 내보냈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남아있지만 조만간 바로잡힐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제 발로 떠났던 이들이 돌아오려는 움직임이 있던데, 단 한 명도 받지 마.”
“네.”
싸늘하게 말하는 톨린을 잭은 안타깝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톨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저 나가 보라는 그의 명령에 경례를 한 후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고니 피더스가 죽었다.
그것도 황실의 손에 사형당했다.
이것이 공작가에 주는 타격은 엄청났다.
잭도 한동안 자신의 꿈과 같았던 아고니 피더스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고니 피더스는 충성스러운 황실의 검이면서 동시에 자랑스러운 피더스 공작가의 기둥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잭은 한동안 실의에 빠져 제대로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을 보냈었다.
하지만 톨린은…… 그는 실의에 빠질 여유도 없어 보였다.
하루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톨린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바로 얼마 전, 사냥제에서 돌부리에 걸려 또 돌부리에 머리를 박았다고 어색하게 웃던 소심한 보좌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고 매섭게 일을 처리했으며 가차없이 복수했다.
2주도 지나지 않아 공작의 고용인들은 절반이 잘려 나갔다.
주인 잃은 피더스 공작가의 부와 명성을 뜯어먹으려는 이들이 보내거나 회유한 사람들이었다.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일이었지만 잭은 그 소심하고 담이 작은 톨린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이 아직도 얼떨떨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사실 공작가는 전에 없던 적극적인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었고,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번영하는 듯했기 때문에 잭이 공작가의 기사단장으로서 슬퍼할 일은 하등 없었다.
하지만 옛 동료로서 잭은 더 이상 고용인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으며 딱딱거리는 톨린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공작가에서 오랜 시간 톨린과 일을 해온 사람들 중에선 잭처럼 느껴서는 안 되는 슬픔을 몰래 품고 있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남쪽에서 발견된 탄광에는 주변에 영지가 있는 존스 남작이 소유권을 주장할 거다. 그에겐 오래전에 공작가에 달아 놓은 빚이 있으니 그것과 맞바꾸자고 해. 법안대로 따지면 어차피 당장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별수 없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가차없는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는 톨린의 보좌관, 페일 역시 예전의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톨린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슬픔을 달랠 조그만 틈이 있다는 점에서 잭과는 약간 달랐다.
“그리고 오늘 오전 중으로 신전 근처에 들러 공사가 잘되고 있는지 살필 수 있게 일정을 빼놔라.”
“네.”
페일은 낮게 대답하며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전대 공작이 그렇게 세상을 뜨고 인간 같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톨린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몇몇 구석에서 예전의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아직 어린 소공작을 볼 때 나오는 채 갈무리되지 못한 씁쓸한 표정이나, 지금 같은 작은 친절과 미련들.
거리의 벌레라고 불리는 부랑아들이었다.
톨린은 벌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상관을 바보 같다고 욕하고 원망하는 대신, 그가 지키려던 것들을 감싸 안았다.
그런 게 그의 안에 남아있는 톨린다움이라고 페일은 생각했다.
***
톨린은 점심 시간을 쪼개서 나온 거리에 마차를 세워 두고 창가로 보이는 바쁜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건축은 손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톨린은 소수의 전문 인력과 함께, 직업을 잃어 주변을 떠돌며 작고 사소한 범죄에 손을 댔던 이들도 함께 고용했다.
느리고 돈이 많이 들겠지만 동시에 여럿을 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톨린은 여전히 그의 전 상관, 아고니 피더스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그의 목숨과 피더스 공작가를 버리고 선택한 이들에게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자선사업이나 다름없는 이 행위는 그가 죽은 공작을 기리며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동시에 남은 소공작을 지키겠다는 그의 맹세의 증거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쉽게 1황자의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겠다는 고집 비슷한 것도 들어 있다면 들어 있었고.
그는 담당자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린 후 다시 마차를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는 까만 새의 존재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한 채.
21화- 융합
파삭거리는 마른 잎을 밟는 내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바람 소리가 만들어내는 나뭇잎 비벼지는 소리는 짐승이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곳은 중형 동물 구역, 흔히 늑대나 사슴, 호랑이 같은 것들이 사는 구역이다.
중형 동물 구역에 이런 것들이 살면 대형 동물 구역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 곳은 좀 사람 같지 않은 인간들이 사냥하러 가는 곳이다.
1황자가 지난 사냥제에서 잡아온 자이언트 베어나 웨어울프 같은 것들.
숲의 깊고 깊은 곳, 전문 사냥꾼과 몰이꾼과 함께 가는 곳이란 말이다.
당장 늑대 한 마리에게 덮쳐져도 갈기갈기 찢길지도 모르는 내가 쉽게 발을 들일 곳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된 상태니까.
“찍.”
긴장이라곤 태어나서 한 번쯤 해봤을까 싶은 녀석도 함께 와서 내 긴장감을 함께 소멸시켜 주려 노력했다.
“좀 들어가라. 여기서 니가 잡혀가면 난 목숨 걸고 도와주지 않아.”
난 가방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다람쥐를 억지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 다람쥐도 함께 왔다.
녀석과 함께한 지 벌써 며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작은 녀석은 어디든 날 따라오려고 했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그건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소동물 구역까지야 녀석과 비슷한 녀석들밖에 없고, 설마 포식자가 나타났다 해도 어느 정도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크기였다 치지만 오늘은 정말 위험하다는 걸 녀석에게 전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때는 인간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굴던 녀석이 이번에는 그런 건 알아듣지 못한다는 듯이,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고집을 피워 댔다.
결국 또 도토리로 주의를 돌리고 나와야 했다.
아니, 나왔다고 생각했다.
중형 동물 구역 앞에 다가와 움직이는 가방을 보며 또 당했다는 걸 깨달아야 했지만.
“넌 매번 어떻게 하는 거냐?”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은 정말 꼼꼼히 가방을 뒤져보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너도 어디 밖에서 빙의한 다람쥐인 거 아니야?”
내 미심쩍은 눈빛에도 녀석은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쫑긋거렸다.
“안에 사람이 들었든 뭐가 들었든 상관없으니까 오늘은 정말 밖으로 나오면 안 돼.”
난 녀석을 다시 밀어 넣고는 가방 문을 닫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갑자기 내게 공격을 가해오는 녀석은 없었지만 이렇게 작은 먹이가 앞에서 알짱거리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중형 동물 구역에 이 작은 동물을 두고 올 수도 없어 데려와야 했고.
녀석도 어쨌든 야생에서 살던 다람쥐니 포식자 앞에서는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난 조심스레 제법 덩치가 있을 법한 녀석이 남기고 간 발자국이 이어진 길로 걸음을 옮겼다.
***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했던 꽤 큰 동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뀍!!! 뀍!!! 뀍!!!”
익숙한 녀석이 함께 있던 점은 좀 의외였지만.
“크르릉.”
노란 안광을 빛내며 날 노려보는 늑대와 그 발 아래 꼬리를 밟혀 허우적대는 낯익은 다람쥐는 결코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아니었다.
“넌 언제 또 나간 거야.”
지금 와서 가방 안을 확인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난 한숨을 쉬며 흥분 상태의 커다란 육식 동물과 눈을 맞췄다.
내 몸집의 3배는 되어 보이는 회색 늑대였다.
실제의 늑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현대에서나 빙의 후나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컸다.
머리 하나가 내 머리 세 개는 붙여 놓아야 할 것 같은 크기에 조금 기가 질리기까지 했다.
이를 드러내고 몸을 부풀린 모습을 보니 뭔가 단단히 열 받아서 더 크기가 커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뭐가 됐든 내가 함부로 덤빌 상대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난 천천히 한 손에 들고 있던 석궁을 멀리 던져 놓았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펴 들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표현했다.
“자, 봐. 아무것도 없어. 공격하려는 게 아니다. 네 무리의 영역을 침범하려던 것도 아니고.”
녀석의 검은 동공이 내 비어 있는 양쪽 손을 살폈고, 난 상대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도록 기꺼이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씩씩거리던 늑대가 서서히 호흡을 고르는 것과 함께 나도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크릉.”
녀석은 완전히 진정했는지 드러내던 이를 도로 집어넣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발 밑에 놓인 불쌍한 다람쥐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찍!! 뀍!!!”
녀석은 밟힌 꼬리가 아픈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크르릉.”
녀석은 다람쥐를 보자 또 열이 받는지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 작은 녀석을 굳이 먹겠다고 저렇게 잡고 있는 건 아닐 테고.
게다가 진정하고 본 상대는 예상보다 온건한 성질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냥 무작정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늑대의 말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간의 내 작은 일행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먼저 선빵을 날렸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어, 난 천천히 대치중인 두 녀석에게 다가갔다.
“둘 다 진정해. 너도 덩치는 산만 해서 이 작은 녀석을 괴롭혀 봤자 별로 마음 편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내가 가만히 말하자 늑대 녀석은 마치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귀를 한 번 팔랑이더니 푸- 숨을 내쉬고는 조그만 악동을 짓누르던 발에서 힘을 뺐다.
역시 이 세계의 동물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 듣는다니까.
이제 조금 동의를 구하고 목 부분만 쓰다듬으면 오늘 하루는 돌고 돌아 성공이 될 것이었다.
“찍!”
“크릉!!”
“잠깐……!”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담만은 더럽게 큰 조그만 다람쥐 녀석은, 자신을 짓누르는 힘이 없어지자마자 쏜살같이 튀어나와서 늑대의 앞발을 물었다.
늑대는 놀라움과 나에 대한 약간의 배신감, 그리고 분노가 치민 듯했다.
순식간이었다.
흥분한 늑대는 자신의 앞발에 붙어있는 녀석을 내동댕이치고 입을 벌려 한입에 씹어 삼키려 했다.
난 내가 생각한 것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렸을 때 아버지 몰래 500원을 주고 사왔던 노란 병아리가 떠올랐던 건지도 모르고.
그 녀석은 맞아 죽었고 난 죽도록 맞았었는데.
난 한 손으로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작은 녀석을 감싸고, 다른 한 손을 뻗어 커다란 야생동물을 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할 게 틀림없는 힘으로 늑대의 목덜미와 가슴 어딘가를 밀었다.
늑대를 막을 만한 게 뭐가 있지?
내가 변할 수 있는 건 작은 설치류나 기껏해야 여우, 새는 까마귀가 전부다.
늑대로 변할 수 있다면 늑대가 좋겠지만, 제대로 목을 만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우선 까마귀가 되어 이 빌어먹을 다람쥐 녀석을 낚아채 가야 하나?
생각은 많았지만 사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였다.
늑대의 이빨은 지척까지 다가왔고, 난 여전히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영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젠장, 날개 달린 늑대든 뭐든 돼라.’
그리고,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
“피더스 공작가에서 수도 중앙 지역에 대피소를 세우는 자선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성이 딱딱하게 말했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2황자, 디토 아바란은 흠 소리를 내며 내용물이 빈 크리스탈 잔의 끄트머리를 빙글거렸다.
그의 입가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퍽.
그가 만지작거리던 크리스탈 병이 날아가 남자의 머리에 맞고 둔탁한 소리를 내는 순간까지도 디토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일그러지지 않았다.
“열 받네.”
“죄송합니다.”
흐르는 피를 닦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남자는 이마를 타고 내려온 피가 눈에 들어가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지금 피더스 공작가 가주 대리로 어떤 게 앉아있더라?”
“톨린 크리사입니다. 크리사 백작가의 삼남으로, 피더스 가에서 죽은 아고니 피더스의 보좌관으로 13년간 일했습니다.”
“아, 버러지같은 것들이 쌍으로 일을 귀찮게 만든 거로군.”
여전히 빙글거리는 얼굴로 중얼거린 디토 아바란은 이번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독수리 모양의 장식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그의 보좌관을 향해 투포환을 던지듯 자세를 취했다.
“…….”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남자를 잠시 응시하던 2황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장식품을 내려놓았다.
“넌 맞아도 소리도 안 지르고 움직이지도 않아서 별로 재미가 없단 말이야.”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 보좌관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됐다. 재미가 없으면 일처리라도 빨라야지. 크리사 백작가의 최근 5년간 세금 내역을 조사해라.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히면 바로 백작을 구금해.”
“네, 황자님.”
“나갈 땐 저 더러운 건 가져다 버리고.”
2황자가 바닥을 뒹굴고 있는 피 묻은 크리스탈 잔을 향해 턱을 까딱이자, 그의 충성스러운 보좌관은 다시 한번 깊이 고개 숙인 뒤 조심스레 잔을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는 의자 뒤로 몸을 기울여 화창한 하늘을 눈에 담았다.
딱히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바라본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더러운 것 같은데 바깥의 하늘은 그대로인 것 같아 거슬렸다.
요즘 들어 무언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잘 굴러가던 톱니바퀴의 어딘가가 작은 걸림으로 덜컥인 것 같은 감각.
그럼에도 톱니바퀴는 멈추지 않았지만,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모든 게 계획대로 원래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예상보다 빨리 몸이 무너진 듯했던 1황자가 시작이었다.
그건 한순간의 착각이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 그의 상태도 이상했지만, 그건 그저 부작용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문제는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태도였다.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멍청했고, 단순했으며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자신이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익사하는 중인 것도 모르고.
그런데도 간혹 그의 의도와 다르게 행동하곤 했다.
‘그건, 누군가 1황자를 조종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아고니 피더스의 죽음이나 공작가의 자선사업도 그와 관련이 있는 걸까?
2황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극히 적은 확률이었다.
십 년을 넘게 이어온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 속에 누군가가 난입하다니.
그럴 이유도,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완전히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라면.
디토 아바란은 매우 적은 확률이라는 걸 알면서도 만약을 상상해 봤다.
그건 꽤나 즐겁게 놀아볼 만한 상대가 되지 않을까?
2황자는 다시 즐겁게 웃으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
2황자의 즐거운 놀이 상대 후보는 숲의 한가운데에서 멍하니 네 발로 서 있었다.
까만 날개를 파닥거리며.
회색 털이 돋아난 자신의 몸을 한 번 둘러보고 등 뒤에 돋아난 몸집에 비해 앙증맞은 까만 날개에도 시선을 던진 7황자, 란 아바란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봤자 크르릉거리는 짐승 소리밖에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새로운 발견을 자축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그러니까,
커스텀도 가능했던 거군?
22화- 도움의 손길
다람쥐를 공격하려던 늑대는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열을 뿜으며 발광하는 것에 당황해 잠시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더니, 그 자리에 까마귀 날개가 돋아난 늑대가 나타나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현명하기도 하지.
“찍!! 찍!!!”
그에 비하면 이 녀석은 머리가 어디 부족하거나 위험을 인식하는 부분이 망가진 게 분명했다.
작은 녀석은 매우 흥분한 듯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제에 내 몸 위로 올라타 파닥이는 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찍찍 소리를 내기까지 했고.
그래, 나도 놀랍다.
“워웅.”
목소리 대신 처량맞은 늑대 울음소리가 울렸다.
양파도 아니고 까면 깔수록 이상한 능력이었다.
동물로 변할 수 있는데 거기다 원하는 대로 서로 섞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생각보다 너무 능력의 범위가 커서 불안할 지경이었다.
무슨 핸디캡 같은 거라도 있는 거 아니야?
뭐, 너무 많이 쓰면 수명이 줄어든다든가 그런 조건들.
그런 비가시적인 것들은 보이지도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마니스를 사용한다고 수명이 줄어든다는 내용은 책에 없었으니 일단 두고 볼 수밖에.
난 다시 한번 내 요상한 꼴을 돌아보았다.
다시 봐도 늑대 몸에 까만 날개가 난 게 맞았다.
이 꼴을 연금술사들이 봤다면 당장 해부부터 하려고 들었을 텐데.
동물들을 합성해 키메라를 만드는 것에 돈과 노력을 들이는 장면도 있었으니.
뭐, 연금술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날개 달린 늑대를 발견하면 당장 사살부터 하려고 들지도 몰랐다.
사람이 지금 이 시간에 들어올 리는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더 이상 이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아 난 곧바로 인간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돌아오는 것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어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난 재빨리 일어섰다.
“윽.”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윙윙 울리는 머리를 감싸며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전에는 꽤 오랫동안 동물로 변해 있었어도 이런 부작용은 없었기 때문에 꽤 당황스러웠다.
합성해서 변하는 건 좀 더 체력을 쓰는 건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사고 속도는 느렸고 몸이 물먹은 것처럼 쳐졌다.
낭패로군.
어질거리는 머리에 손등을 올리고 눕자 쾌청한 높은 나뭇가지에 반쯤 가린 하늘이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이지만 근처엔 늑대보다 큰 육식동물들이 드글드글할 텐데.
중형 동물 구역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있다가는 야생동물의 밥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젠장, 이렇게 어이없이,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마지막 남은 생존 본능이 몸을 질질 끌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나무 기둥의 썩은 구덩이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다람쥐 녀석은 쪼르르 날 따라와 몸을 웅크린 내 곁에서 볼을 자그만 손으로 찹찹 소리를 내며 두드렸다.
하긴, 녀석도 여기서 보호해줄 사람이 없으면 같이 죽을 게 자명했다.
찹찹.
찰지게도 때리는군.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지만 조약돌 같은 손으로는 좀 따가운 것 외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넌, 여기서 살아나가면 정말 가만 안, 둬…….”
억지로 온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자 아득한 편안이 밀려오며 오감이 서서히 둔해졌다.
***
란 아바란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다람쥐는 미동도 않는 그의 볼을 몇 번 더 두들겨보다가, 움찔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폭 쉬었다.
그게 어떻게 봐도 단순한 다람쥐의 행태는 아닌지라 퍽 기괴했다.
“이봐, 정말 정신을 잃은 거냐?”
하지만 다람쥐의 입에서 소년과 소녀의 사이에 남은 듯한 오묘한 목소리까지 나오자 기괴함은 이제 괴기함으로 변했다.
“이거 원. 나약한 놈이로고.”
다람쥐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는 나무 구덩이 밖으로 몸을 돌렸다.
작은 몸은 구덩이 입구를 나오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의 형체로 변했다.
나무 구덩이 앞에서 그르렁거리고 있던 늑대 두 마리가 다람쥐였던 이에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다가갔다.
조금 전 앞발을 물린 늑대와 그의 짝으로 보이는 둘이었다.
“크르릉.”
단단히 신경에 거슬린 듯 보이는 둘에게 이 수상한 치는 빙그레 웃었다.
말간 얼굴이 더욱 순하게 풀어졌지만 늑대 두 마리는 경계를 풀지 않으며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진정해, 아까는 미안하다니까? 너도 내 꼬리 한 번 밟았잖아? 그냥 그걸로 퉁치자고.”
“크릉, 컹!”
“쩨쩨하긴. 오랜만에 본 건데 이렇게 속 좁게 굴 거니? 인사 좀 한 것 가지고.”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두 늑대에게 긴 머리의 수상한 이는 눈을 반짝 빛냈다.
두 늑대는 여전히 상대가 짜증나지만 그래도 더 이상 뭐라 할 수는 없다는 듯 어깨를 곧추세웠다.
아까까지 그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이는 고맙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에 두 늑대는 란 아바란이 누워있는 나무 쪽을 바라보며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 늑대가 낑낑거리자 수상한 이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저 녀석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인간이지. 두 눈으로 봤으니 잘 알 거 아니야.”
빙글거리는 얼굴이 앞발을 물린 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늑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비비고 그르릉 소리를 냈다.
대화를 끝낸 둘에게 빙긋이 웃은 이가 말했다.
“그러니 영역의 녀석들에게 전해. 모두 문후하러 오라고. 보아하니 녀석의 방식대로면 일 년이 걸려도 모자라게 생겼거든.”
늑대들의 얼굴에 긴장된 빛이 어렸다.
그들은 저 장난스러운 얼굴이 이번만큼은 결코 농담도 장난도 아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둘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고개를 하늘로 높이 들어올렸다.
“아우우--”
“아우우우우--”
둘의 하울링 소리가 숲을 울렸다.
다른 늑대무리 뿐 아니라 숲의 모든 동물들에게 보내는 인도이자 경고였다.
모두가 기다리던 이가 드디어 왔다는, 그러니 그들의 희망에게 의무를 다하라는.
“아, 오늘은 말고. 아직 나약한 녀석인지라 지금은 잠들어 있거든.”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하는 시선을 늑대들이 던졌지만 상대는 그저 빙글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늑대들은 짜증을 삭이며 다시 하울링을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 감정을 담아서, 그들의 영역에서 발견한 다람쥐는 얼마든지 공격해도 좋다는 말을 덧붙여서.
하하하 즐겁게 웃는 소리와 함께 늑대 울음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숲을 울렸다.
***
피더스 공작가는 새벽부터 찾아온 손님을 맞느라 조금 이른 아침을 맞이했다.
상대는 크리사 백작가의 장남인 이고 크리사였다.
공작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톨린의 가족이 방문했으니 오늘은 공작가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금 가시지 않겠느냐고 수군거렸다.
페일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굳이 정정해주지 않은 채 굳게 닫힌 응접실 문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방 안에선 화기애애한 형제 간의 대화 대신 차가운 질의 응답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지난 밤에 크리사 백작님께서 황실의 명령으로 자택 구금을 선고받으셨다. 조사 기간 동안 죄가 확실해지면 황실 감옥에 수감될 거라는군.”
내가 정말 그걸 물었겠어?
톨린 크리사는 안 그래도 날카로워진 신경을 곤두세우는 무뚝뚝한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다음 대의 백작이 될 예정인 자신의 큰 형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도 필요한 최소한의 얘기가 아니면 잘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형이 오늘만큼 짜증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틀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톨린은 평소보다 조금 무디게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크리사 백작님만큼 평생 청렴하게 사신 분도 없을 텐데.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걸 나한테 일일이 알려줬다고…… 아.
“나 때문인가 보지?”
그게 아니면 최근 몇 년간 피더스 공작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곤 얼굴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동생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크리사 가의 일을 언제부터 저에게 구구절절 말해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글쎄.”
“공작가의 행보가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데 건드릴 게 없어서 만만한 크리사 가에 손을 뻗었거나.”
“그것도 글쎄.”
“정말로 몰라서 온 게 아니잖아. 서신도 없이 갑자기 온 주제에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세요. 황실에서 내 쪽으로 어떤 조건을 보내나 확인하러 온 거 아니야?”
“말씨가 날카로워졌구나.”
톨린은 이제 비웃음도 말라버려 무감하게 자신의 큰 형을 바라봤다.
귀족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과 행보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도와줄 생각이 있느냐?”
막냇동생을 바라보는 이고의 눈은 무감했다.
톨린은 잠시 고민했다.
우습게도 저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 저걸 도와주고 나면 공작가에 돌아올 불이익은 있는가’였다.
피가 섞인 아버지가 위험한 상황인데 자신은 피더스 가문을 걱정하고 있었다.
핏줄이란 얼마나 부질없는지.
톨린은 예전엔 무서워 마지않아 했던 큰형의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손님방을 내주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을 뿐이었다.
***
집무실로 돌아온 톨린은 손으로는 공작 대리로서 일을 처리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생각을 정리했다.
공작가를 지키기 위해 예전보다 귀족들 사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긴 했지만, 황실의 뜻을 거스를 만한 짓은 아직 하지 않았다.
이건 황실과 피더스 공작가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이기도 했다.
아고니 피더스의 일탈로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아 휘청이는 공작가를 돕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짓밟지도 않는 황실이었다.
황실에 대항했다는 불명예를 갖게 된 공작가를 벌주듯 모른 척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실의 검이 완전히 사라져서 좋을 것이 없는 그들이었으니까.
늘 그래 왔던 대로 충실한 모습을 보이기만 한다면, 아마 다음 대의 공작부터는 천천히 원래의 위상을 되찾을 것이었다.
오히려 충성에 굶주린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는 더 강한 복종을 맹세할지도 모르고.
이전만큼 황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이 사라진 톨린에게는 그것이 입맛에 써, 그는 가끔씩 어린 소공작을 보며 쓴웃음을 짓곤 했다.
그를 지키는 데 급급해 황실에 충분히 고개 숙이고 있는 톨린이었다.
그 미묘한 외줄타기를 무엇보다 신경 쓰고 있기도 했고.
무엇이 그들을 거슬리게 한 걸까?
***
톨린과 그의 형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피더스 공작가에서 신전 근처에 쉼터를 만드는 일을 황실에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요청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톨린은 황금으로 장식된 지나치게 화려한 편지를 탁자에 올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말로는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고 쓰여 있지만, 쉼터 사업에 개입하고 싶다는 의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편지였다.
사냥제에서 1황자가 제안했던 건 신전 근처의 부랑아들과 범죄자들을 소탕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톨린은 그의 진짜 목적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수도에서 부랑아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게 언제부터인데 갑자기 그들을 소탕하겠다고 나선단 말인가.
자리에 뭔가를 만들려는 게 아닌 이상에야.
하지만 이 상황은 마치…… 그들이 벌레라고 정의 내린 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톨린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크리사 가를 구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피더스 공작가에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23화- 독사와 생존
끝없이 이어지는 정원을 지나는 마차 안에서 톨린은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봤다.
잘 손질된 나무들, 도감에서나 보던 제국 곳곳에서 나는 꽃들은 톨린의 눈을 즐겁게 만들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까지 즐겁게 해주진 못했다.
그의 머릿속엔 오늘 열릴 귀족 회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 쉼터 사업을 걸고 넘어지는 걸까?
목적은 남은 거리의 사람들인 건가?
미관을 해치니 그냥 치워버리려고?
어차피 황가의 말이라면 공작가로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데, 굳이 크리사 백작까지 볼모로 잡은 이유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톨린은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 눌렀다.
“괜찮으십니까?”
맞은편에서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페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신경 쓰지 마라.”
“두통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건 졸음이 와서 안 된다. 얼마나 남았지?”
“이제 5분 정도 더 가면 도착할 겁니다.”
“……넓기도 하군.”
저 멀리 보일 듯 말듯 가물가물한 숲의 인영을 애써 무시하며 톨린은 차창을 닫았다.
***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 대리 톨린 크리사 님입니다.”
상아빛 회의장 안으로 든 톨린은 자신에게 일제히 모이는 시선을 무시한 채 탁자의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고니 피더스가 공작위를 지키고 있을 때는 모두 가까이 다가와 얼굴이라도 한 번 들이밀지 못해 안달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공작의 사형 이후 모두 등을 돌렸다.
애송이가 맡게 된 피더스 가문이 쇠망하는 건 한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예상치 못하게 톨린은 공작가의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고 잘 지키고 있었고.
톨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불편과 책망, 그리고 약간의 경멸이 드러났다.
이곳엔 피더스 가의 부를 넘보다 톨린에게 크게 데인 이들도 있었으니까.
“얘기 많이 들었소,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 대리께서 아주 다망한 매일을 보내고 있다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밀리오 공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같은 공작가지만 전통과 기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피더스 공작가와 비교를 당하는 밀리오 공작가였다.
아고니 피더스에게 되지도 않는 은근한 시비를 걸던 그를 톨린은 기억했다.
톨린은 그에게 예의상 고개를 약간 숙이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황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앉아서 쉴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톨린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고니 피더스가 지금 대리의 모습을 보면 아주 슬퍼하시겠군.”
거슬리는 그의 목소리가 담아서는 안 되는 이름을 입에 담기 전까지는 그러려 했다.
톨린은 웃느라 올라간 그의 기름진 볼을 훑어보며 빙긋이 마주 웃었다.
“밀리오 공작님이시군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 여기저기 기웃대고 있습니다.”
“젊은이답게 일 처리에 대중이 없더군.”
그제야 자신에게 집중하는 톨린의 말에 밀리오 공작은 큭큭 웃으며 대답했다.
은근히 그를 무시하는 듯한 밀리오 공작의 대답에도 톨린은 진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속삭였다.
“그래서 보시는 것처럼 겁도, 망설임도 없답니다.”
“뭐요?”
멍하니 묻는 통통한 얼굴과 마주한 톨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별장에 특별한 취미를 숨겨두고 계시던데…….”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밀리오 공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걸, 어떻, 어떻게!”
“쉬…… 그렇게 당황하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 다 알게 될 텐데?”
그 담담한 목소리에 밀리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밀리오 공작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사람들이 피더스 공작가의 광견이 어쩌구 할 때마다 마음껏 비웃던 그였다.
재수없는 아고니 피더스 옆에 기가 죽어 붙어있던 녀석이 뭘 할 줄 안다고.
“…….”
“회의 안건이 밀리오 공작의 사형 여부로 변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 싶지 않으면 오늘은 입다물고 있지. 비밀 장소를 옮기기에 하루로는 부족할 거 아니야?”
누가 이놈을 광견이라고 부르던가.
이건 독사였다.
주변 모든 적을 물어 죽이는 독사.
***
이제 좀 조용해졌군.
톨린은 하얗게 질린 밀리오 공작에게서 시선을 뗐다.
“황제 폐하와 1황자님 드십니다.”
타이밍 좋게 시종이 모두가 기다려 온 사람의 도착을 알렸다.
아름다운 백금발을 가진 두 남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황제는 그들이 앉아있는 탁자가 내려다보이는 황좌에, 1황자는 그 옆에 자리잡았다.
마치 인간을 내려다보는 하늘 위의 신과 같은 그림이었다.
인간답지 않은 얼굴과 빛나는 백금발 머리카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 모습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톨린 역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들에게 순간순간 튀어나오려는 불충과 황족을 향한 존경이 섞인 눈을 보이지 않기 위해.
***
회의는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제법 매끄럽게 흘러갔다.
갑자기 열게 된 귀족 회의인 만큼 모두 황제가 언제 진짜 안건을 꺼낼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한 세율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황제는 무표정하게 앉아서 필요한 최소의 말을 할 뿐이었다.
잔잔한 표면에 돌을 던진 건 황제 보좌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한 1황자, 라시아 아바란이었다.
회의가 끝나기 직전 발언권을 요청한 라시아 아바란은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수도에서 근래 범죄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톨린 쪽을 힐끗거렸다.
라시아는 톨린을 향해 팔을 뻗으며 그를 가리켰다.
“모든 게 피더스 공작가의 쉼터 건설 사업 덕분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범죄율이 줄어들고 거리의 치안이 좋아진 것 모두가요. 피더스 가문은 언제나 그랬듯 황실의 검이자 귀족의 귀감입니다. 그런 그들을 굽어살피는 것 또한 황실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준비된 대사를 치듯 매끄럽게 말하는 1황자의 모습에 장내가 술렁였다.
황좌에 앉아 이들의 바라보고 있던 황제는 입을 열었다.
“피더스 공작 대리, 황실에서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 무엇을 원하는가?”
황제의 파격적인 언사에 모두가 가만히 앉아있는 공작 대리의 말에 집중했다.
톨린은 그 속에서 싸구려 연극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대사는 이미 주어졌으니 뚝딱거리더라도 그의 신에게 맞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황공한 말씀에 감히 한 가지 청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 톨린은 말을 이었다.
“쉼터 사업은 인근의 주민들을 고용해 진행하는 만큼 전문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에 황실의 조력을 간청드립니다.”
톨린은 말을 마치고도 계속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표정을 확인하진 못했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그가 지금 황실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도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자는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봤고 톨린을 향해 말했다.
“윤허한다.”
피더스 공작가의 젊은 가주 대리는 다시 한번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황제는 말을 이었다.
“1황자가 이 일에 책임을 맡게 될 거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눈치 없는 누군가의 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회의장에 울렸다.
***
라시아 아바란은 퍽 상쾌한 기분으로 1황자궁에 들어섰다.
그는 따분한 회의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겁먹은 표정을 내려다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은 그 건방진 피더스 공작가의 녀석을 엿 먹였다는 사실에 더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지난 사냥대회에서 전통을 들먹이며 그의 앞길을 막았던 건방진 아고니 피더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고대의 전통 때문에 그는 사냥대회에서 완벽하게 자신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계획을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황제의 눈에 완벽하게 들기 위해서는 초대 황제의 신전을 지키고 그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만 한 것이 없다는 판단으로 빈 소원이었다.
그런데 그 노망난 피더스 공작이 갑자기 나서는 바람에 다 수포로 돌아갔다.
피더스 공작은 그 대가로 목숨을 바쳤으며 그의 목숨을 끊은 것 역시 1황자 본인이었으나, 그는 원래 남이 바친 희생 같은 것을 신경 쓰는 이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머릿속엔 벌레 같은 놈이 자신을 방해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라시아에게 남은 공작가 녀석들을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그의 똘똘한 동생이었다.
-피더스 공작이 목숨을 걸었던 것은 아마 그 일대의 부랑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일 겁니다. 지금은 남은 공작 대리가 주변에 그들을 위한 시설을 세우고 있다는군요.
그깟 벌레새끼들 때문에 자신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1황자는 더욱 분노했다.
그런 그에게 2황자는 속삭였다.
-그들의 일에 끼어드십시오, 형님. 공작이 목숨을 바쳐 지킨 것을 공작을 죽인 당사자가 농락하는 것만큼 모멸적인 일은 없을 겁니다.
1황자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덧붙인 2황자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책임질 이는 이미 정해져 있고요.
라시아 아바란은 벌써부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엔,
“아,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회의가 늦게 끝났나 보군요.”
“으아아악!!!!”
최근 그를 가장 괴롭히는 혐오스러운 검은 벌레 자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
“야!! 너 뭐야! 침실에만 있는 거 아니었어? 여긴 왜 왔어?”
놀라서 펄쩍 뛰는 와중에도 그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만은 제대로 익혔는지, 소리 낮춰 소리지르는 개인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그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날 노려봤다.
“웃으며 들어오는 걸 보니 회의는 만족스럽게 끝났나 봅니다?”
“오늘도 치료 때문에 온 거냐?”
그는 내 앞에서 멍청하게 함박 웃는 모습을 보여준 게 쪽팔렸는지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물었다.
“아니요, 오늘은 대가를 받으러 왔습니다.”
“또 뭐?”
1황자는 불만스럽게 날 바라봤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
“피더스 공작가의 시설 건축에 도움을 준다고 해 놨을 겁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는 물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지만 난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것과 관련된 작은 부탁입니다.”
녀석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아무리 네놈이 말해도 그건 취소 못 하니까…….”
“아뇨, 반드시 1황자님이 맡아서 하십시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거 모릅니까?”
내 조언에 순간 녀석의 얼굴에 굉장히 억울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선 최대한 느릿하게 진행하십시오.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황실에서 피더스 공작가를 도와 커다란 규모의 쉼터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이요.”
그건 어렵지 않겠지.
1황자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별로 어렵지 않은 내 부탁이 의아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도대체 네놈의 목적이 뭐냐?”
글쎄, 굳이 말하자면.
“생존일까요?”
1황자의 얼굴에 다시 한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기색이 돌았지만, 난 아무 말 없이 그를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24화- 거짓말쟁이와 거짓말쟁이
1황자가 피더스 공작가에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는 소식은 황실 안팎으로 파장을 가져왔다.
누군가는 버려진 피더스 공작가가 다시 황실의 비호를 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고, 또 혹자는 1황자가 나선 것 자체가 피더스가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며 다시 일어서려는 공작가를 황실이 아예 짓밟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들 했다.
결국 경과를 지켜보자는 파와 미리 피더스 공작가에 다시 붙어야 한다는 파가 나뉘어 그들만의 미묘한 경쟁구도를 구축했다.
귀족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만큼 톨린의 마음 역시 시끄러웠다.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톨린은 황제가 1황자를 거론할 때의 아득함을 떠올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공작가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피더스 공작가를 두고 귀족들이 벌이는 신경전 때문에 오히려 이전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공작저의 다른 이들은 모두 톨린이 아고니 피더스가 죽은 후 그랬던 것처럼 강철같이 공작가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작의 죽음 이후 하루만에 자리를 털어냈던 것처럼.
그가 혼자 집무실에 앉아 있을 때면 스멀스멀 자신을 옥죄는 죄책감에 하던 일을 멈추고 괴로워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는 늘 직접 대면으로 확인했던 소공작의 후계자 교육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보고를 통해 관리하고 있었다.
도저히 어린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공작을 죽인 이였다.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하던 얼굴, 한순간 사라져버리던 공작.
그의 기억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사라져 본 적 없는 모든 것들.
그리고 그 순간마저도 잔인하게 웃고 있던 1황자.
톨린은 그날 이후로 아무도 모르게 종교를 버렸다.
신의 종족이 그런 이들이라면 차라리 그 안의 신을 부정하겠노라 마음먹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나약한 인간이고 그가 사는 곳은 신의 세상인지라, 그들에게 불복할 순 없었다.
남은 것들을 지키겠다 마음먹은 그는 엎드려 그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노력했다.
회의장에서 톨린은 1황자 앞에서 눈빛조차 조심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마치 인간 앞의 개미라도 된 듯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줬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 덕분에 피더스 공작가와 그의 아버지는 무사했지만, 모멸감과 죄책감이 그를 덮쳤다.
어쩔 수 없었다고,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1황자와 마주하는 것을 소공작이 보게 될까?
아버지의 원수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소공작에게 보여주는 것이 톨린은 두려웠다.
시야가 차단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오던 톨린은, 지금껏 애써 지우려 노력하던 그의 옛 상사의 얼굴을 오랜만에 마음껏 떠올렸다.
공작이 만약 죽은 자들의 안식처, 테리툼에 다다라 그들을 굽어보고 있다면 톨린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까?
톨린은 죄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고니 피더스는 지상세계에 멀쩡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톨린을 굽어살필 수 없었다.
“날 좀 보내 주시오! 난 그냥 평범한 늙은이란 말이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긴 했지만.
***
아고니 피더스는 현재 여전히 사지가 묶인 채로 지하감옥에 갇혀있었다.
이곳에 잡혀온 지 약 이 주일.
이들은 아고니 피더스의 소지품을 전부 빼앗고는 낡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이곳에 그를 가뒀다.
아고니를 감옥에 가둔 이들은 그에게 죽지 않을 최소한의 양식을 제공하고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아고니가 음식을 주러 오는 이에게 아무리 자신을 가둔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해 달라고 해도, 그들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릇만 밀어 넣고 갈 뿐이었다.
아고니가 미칠 지경이 되어 아직 성치 않은 다리로라도 탈출을 감행해야겠다고 생각한 오늘, 드디어 아랫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리가 감옥을 방문했다.
아고니는 자유롭지 못한 팔다리로 힘겹게 일어서 그들에게 소리쳤다.
“날 좀 보내 주시오! 난 그냥 평범한 늙은이란 말이오!”
그런 그를 감옥 바깥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대부분 뒷자락이 바닥까지 끌리는 긴 로브를 쓰고 있었는데, 아고니를 굉장히 위험한 야만인을 대하듯 감옥에서 조금 떨어져 그를 바라봤다.
아고니 피더스는 사지가 묶인 자신을 추궁하는 이들을 향해 절실하게 자신은 60이 넘은 선량하고 운이 좀 없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며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쳤다.
60대로는 보이지 않는 건강한 풍채와 키 때문인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 보이긴 했지만.
“라텔이여, 이자가 정말 동굴의 입구를 열고 들어온 게 맞는가?”
가장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이 아까부터 벽에 기대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검은 머리의 젊은이에게 물었다.
아고니를 동굴에서 끌고 온 금빛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아고니는 제발 자신의 결백을 밝혀 달라는 의미를 담아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고니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네,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입구를 열어 보니 그가 동굴의 한가운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흠.”
라텔이라 불린 청년의 말에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고 중얼거린 이들은 모두 다시 한번 아고니를 바라봤다.
황실의 개라기엔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돌무더기나 매고 무작정 이곳에 들어온 게 이상했고, 그냥 보통 사람이라기엔 그의 기백이 남달랐으며, 우연이라기엔 이곳은 50년 넘는 기간 동안 철저히 외부인을 막아냈던 신의 요새였다.
“아니, 난 그런 동굴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오.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졌고, 눈을 떠 보니 그곳이었단 말이오. 아까 몸을 수색해 봐서 다 알잖소.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단출한 차림으로 사냥 대회에 임했던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아고니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옷이 좀 고급이긴 하지만 공작이라 보기 힘들기도 했으니까, 계속 우기면 그냥 부유한 상인 정도라고 속여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절벽에서 떨어지는 충격 때문인지 겉옷은 너덜너덜해지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동굴은 아미카 님의 입김이 닿은 곳입니다. 그냥 들어오게 됐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일 것입니다.”
로브를 쓴 이들 중 조금 젊어 보이는 목소리의 남자가 아고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거짓이라면 아바란의 후손이 우리를 찾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건 우리를 지켜주던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는 뜻도 되고.”
라텔이라는 청년에게 말을 걸었던 긴 수염의 남자가 대답하자 이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는 듯했다.
아고니 피더스는 억울해 팔짝 뛸 지경이었다.
스스로도 어쩌다 이런 이단자들의 아지트 같은 곳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저들은 자신의 말 같은 것은 들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고니는 걸음을 옮겨 감옥의 창살 가까이 다가가 그들에게 호소했다.
“날 돌려보내 주시오. 집에서 어린 자식이 기다리고 있소. 동료에겐 무거운 짐까지 맡겨 놓고 왔단 말이오.”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어린 소공작과 톨린이 그가 벌인 일의 대가를 대신 치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걱정과 미안함이 몰려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의 진심 어린 부탁에 아고니를 의심하던 이들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대답 없는 모습에 아고니는 어쩌면 이들도 자신을 동굴에서 데려온 저 젊은이처럼 약간의 친절을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미안하지만 이방인이여, 당신은 살아서는 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소.”
앞으로 나선 긴 수염의 노인은 그런 아고니의 희망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아고니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대들은 확실하지 않은 의심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는 건가.”
“작은 희생으로 전체가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
“…….”
아고니 피더스와 담담하게 말하는 노인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당신 말대로 황실에서 보낸 그대들의 적이라면, 날 죽여도 어차피 이곳은 발각될 거요.”
“시간을 끌 순 있겠지. 혹은 당신 자체를 볼모로 잡을 수도 있고.”
“내가 정말 재수없게 걸린 황실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라도?”
“그럴 리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소.”
노인은 아고니의 대답에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지금 당장 죽거나, 죽을 때까지 우리들의 손에 붙잡혀 있던가.”
아고니와 노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감옥의 창살에 가까이 다가온 노인의 로브 사이로 그의 탁한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노인은 아고니를 담담히 살폈고 아고니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신경전을 먼저 깨뜨린 것은 아고니였다.
“하핫.”
그의 웃음 소리에 상대의 눈썹이 들썩이는 것을 보며 아고니는 고개를 가만히 기울였다.
“기싸움은 그만합시다, 아미카를 숭배하는 이들이여.”
아고니는 팔다리가 묶인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감옥 바깥의 사람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단 두 명, 아고니를 압박하던 노인과 라텔을 제외하고.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아고니는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그렇게 순진함을 유지할 나이가 아니라오, 나는.”
“무슨 뜻일까?”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긴 수염의 노인의 물음에 아고니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날 죽이지 못할 것을 안다는 소리요.”
아고니 피더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고, 많은 이들을 그의 손으로 죽였다.
여느 애송이라면 겁에 질려 간단한 사고를 못할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렇게 멍청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았다.
“날 죽일 수 있었으면 진작에 고문부터 했겠지. 내가 혹시나 정말 상관없는 사람일까 불안해서 그러지 못했다면 애초에 그대들은 날 죽일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런 건 상관없는 이들이었다면 날 건드릴 수조차 없는 이유가 있던 거고. 노인장의 눈을 보니 후자인 것 같지만.”
아고니는 여전히 말이 없는 눈 앞의 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미카의 선택을 받아 들어오게 된 사람일까 두렵다거나.”
아고니의 말은 정답이었던 듯 로브를 쓴 여럿이 숨을 헉 삼키는 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그리고 아고니를 추궁하던 노인은 천천히 눌러썼던 로브를 벗었다.
백발의 구불거리는 머리와 조금은 개구져 보이는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들켰는걸?”
아까까지의 위엄은 거짓이었다는 듯 장난스럽게 말한 노인은 창살 너머로 아고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지가 묶인 이에게 악수를 청하는 건가 하고 노려보던 아고니는, 그를 묶고 있던 밧줄이 순식간에 여러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25화- 비밀친구
아미카의 가호를 받는 구역으로 공작을 날려버린 지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난 분명 100번도 넘게 상상해 왔을 인물을 다시 한번 그려 봤다.
검은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키가 큰 청년.
피더스 공작은 지금쯤 만나게 됐을지도 몰랐다.
이 소설의 주인공, 검은 머리의 라텔과.
그는 황실의 눈을 피해 아미카를 모시는 이들의 손에서 자라 보호받는 중이니까.
만약 그곳도 제국처럼 원작의 시작 시점이 빨라졌다면, 피더스 공작은 아마 주인공과 함께 다시 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원작에서는 원래 절벽 아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공작이 부랑자 생활을 하다가 아미카의 공간 밖으로 나온 라텔과 마주치지만, 이번엔 아예 둘을 억지로 만나게 했으니 좀 더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었다.
제국 바깥은 이곳과 다르게 원작의 예정된 흐름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공작은 6개월을 그 안에서 생활하다가 오게 되는 거고.
걱정은 좀 되지만 주인공이나 그에게나 나쁜 선택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만약 아미카의 공간 역시 시간이 앞당겨져 라텔이 좀 더 빨리 수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난 잠시 생각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높은 하늘, 신선한 공기, 푸릇한 나뭇잎과 이끼.
이 풍경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 되겠지.
사람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감상적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일까.
황실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이곳과도 어쩌면 얼마 안 있어 이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조금 천천히 둘러보게 됐다.
어쩌면 오늘은 찍찍거리는 녀석이 없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걸지도.
숲에 갈 때면 매일같이 따라다녔던 그 다람쥐는 내가 기절했던 그날 이후로는 가방에 몰래 숨어오거나 하는 기행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도 두려움이라는 걸 알긴 하는군.
다행이었다.
“크릉.”
난 거친 콧김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늑대의 2배 정도 크기의 곰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따라나왔다가는 정말 그 자리에서 비명 횡사할 수도 있었을 듯하니까.
***
“이곳은 선생님도 아시듯 아미카 님을 모시는 사람들이 숨어 사는 곳입니다. 그분의 가호 덕분에 저희는 보잘것없는 생명과 고귀한 사명을 이어가고 있죠.”
아고니, 아니 이곳에서 통칭 ‘징’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 이상한 나라를 소개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로브를 쓴 이들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하던 이였다.
자신을 ‘렌’이라 소개한 그는 능구렁이 같이 보이던 늙은이의 명을 받아 자신에게 이 아미카의 공간이라는 작은 세계를 안내해주는 중이었다.
‘징’은 결국 이들의 감시 하에 어느 정도 일상생활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안내까지 해주다니.
감옥에서 내보내주는 것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늙은이를 너무 배려하는 것 아닌가 걱정까지 될 정도의 친절이었다.
못 죽이는 거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놔주기에는, 숨어사는 그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거 아닌가?
정말로 황실에서 보낸 첩자가 맞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무리 아미카가 보낸 사람일지도 모른다곤 하지만 이렇게 구석구석 지리까지 가르쳐 주려는 건 너무 간 것 아닌가.
아니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던가.
애초에 감옥에 방치하던 그를 보러 온 것도 더 이상 간만 보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던 게 아닐까.
“걸음이 너무 빠릅니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이들을 의심하느라 징이 조금 뒤쳐지자, 앞서가던 남자는 아직 부목을 댄 그의 오른쪽 다리를 흘끗 보며 물었다.
“아.”
징은 자신이 감옥 바깥을 너무 꼼꼼하게 훑는 것으로 보였을까 싶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풍경이 너무 멋져서 둘러보다가 그랬소.”
그 대답에 상대는 눈썹을 조금 구기더니 다시 앞을 향했다.
자신을 이곳에 멀쩡하게 남겨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더니 지금은 이렇게 그 늙은이의 지시대로 관광까지 시켜주고 있는 걸 보니, 상관의 말에는 절대 복종하는 성격인 건가?
“제가 좀 빠르게 걷는 편이니 어디가 아프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괜히 중간에 쓰러지시면 더 곤란합니다.”
이쪽은 보지도 않은 채 쌀쌀맞게 내뱉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징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면 그냥 성격이 복숭아처럼 무른 건가?
그 성격 나빠 보이는 늙은 치는 그렇게 안 보였는데 말이지.
아리송한 마음을 숨기고 징은 조금 더 느려진 걸음으로 걷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
마을이라기엔 이곳은 규모가 컸고 사는 이들도 꽤 많아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아까 전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오랫동안 발길이 머물렀다는 것이 영 빈말은 아니었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평야를 등지고 오래되어 보이지만 깨끗하고 낮은 하얀 건물들이 마을을 이루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올려다본 높고 푸른 하늘이 그를 집어삼킬 듯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무명의 나라는 분명히 아바란과 다른 하늘 아래 놓인 공간인 것이다.
신 아미카.
지금 와서는 얼굴도 전해지지 않는 사라진 신.
아미카를 믿는 이들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았다.
아고니 피더스 공작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미카를 믿던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나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옛날 이야기처럼 남아 있었다.
아고니 피더스 역시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가 갓 후계자 교육을 정식으로 받기 시작할 때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잔당들을 모두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들었다.
그의 아버지에게서.
지금은 흐릿한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아버지가 그 야만인 같은 이들을 소탕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또 피더스 공작가가 황실을 위해 앞장서서 이단자들을 물리쳤다고.
위험하고 난폭한 이단자들을 드디어 전부 물리쳤다고.
……그렇다고 배웠다.
***
이곳을 한 바퀴 돈 후, 렌이라는 남자와 징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과는 떨어져 있는 신전으로 돌아왔다.
“렌 님.”
검은 머리의 청년이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걸어 나왔다.
징을 이곳에 끌고 왔던 이였다.
이름이 라텔이라고 했지.
“장로님께서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렌은 징을 향해 눈짓했고 이번엔 앞으로는 렌을, 뒤로는 라텔이라는 젋은이를 끌고 신전의 안으로 향했다.
다른 주택에 비해 크기가 꽤 큰 신전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었다.
바깥을 안내받을 때도 말이 없던 둘이었다.
렌과 비슷하게 말이 없어 보이는 한 명이 들어왔다고 해서 셋 사이에 갑자기 화기애애한 대화가 돌 리가 없었다.
징도 먼저 입을 열 필요를 느끼진 않아 그저 그들을 따라 걸었다.
뚜벅.
뚜벅.
절그럭.
절그럭.
조용한 가운데 렌의 구두 소리와 라텔의 허리춤에 걸린 칼이 흔들리며 나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 냈다.
걸음 속도도, 보폭도 맞춘 듯 움직이는 둘을 보니 조금 웃음이 났던 것도 같았다.
“둘은 부자지간이오?”
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어딘지 비슷한 분위기를 내뿜는 둘이 신기해서.
제국에 두고 온 그리운 아들이 떠올라서 나온.
“아닙니다, 전 부모가 없습니다.”
바로 뒤에서 돌아오는 담담한 대답에 징은 스스로의 입을 때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아, 미안하오. 늙은이가 주책 맞아 헛소리를 했소.”
“…….”
라텔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고, 셋 사이에서는 이전보다 확연히 무거워진 침묵이 맴돌아야 했다.
징은 다음에 언젠가 라텔이 자신의 팔다리를 다시 묶겠다고 나서면 한 번쯤은 반항 없이 묶여주겠다고 다짐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이번에도 ‘또’ 공사를 늦춰야 한다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톨린은 짜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감정이 끓어올라 조용히 금장으로 장식된 편지를 집어던졌다.
그 모습에 경악한 보좌관 페일이 누가 볼세라 급하게 날라간 편지를 집어 들어 고이 책상 위에 올렸다.
“그, 황실에서 필요한 목재를 수급하는 데 조금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페일은 스스로가 하는 말이 톨린의 열을 식혀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무엇이든 해보고자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죄했다.
내일 당장 날아다니는 사자를 구해 오라고 명령한다면 기적의 연금술이라도 발명해 바칠 사람이 수두룩한 황실이었다.
그깟 목재가 설령 금으로 된 나무를 베어 오는 것이라 해도 못 구할 리가 없다는 건 톨린도, 페일도, 지나가던 거지도 알았다.
“나가 봐.”
“예.”
페일은 목례하고 조심히 방 안을 나왔다.
얼핏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톨린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는 것이 보였다.
“후우.”
페일은 톨린의 집무실을 나와 참았던 숨을 몰아 쉬며 걸었다.
귀족 회의가 소집된 후로 황실은 수 차례 공작가의 요청을 거절했다.
아니, 완벽한 거절이라면 속 시원히 알아서 공사에 착수하련만, 여러가지 이유를 대가며 뒤로 미룬다는 게 문제였다.
이번의 목재 건은 차라리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의 없는 이유들.
톨린은 황실에서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그걸 지켜보는 페일도 하루하루 말라가는 것만 같았고.
“톨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흐억!!”
페일은 생각지 못한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볼썽사나운 목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거리고 말았다.
복도 코너에서 그와 마주친 어린 소공작은 페일의 그런 반응에 오히려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제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아니, 아니야. 갑자기 말을 건 내가 나빴네.”
연신 사과를 하는 페일에게 손을 내저은 아이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래, 톨린은 집무실에 있나?”
“예. 지금 당장 가서 소공작께서 찾으신다고…….”
“아닐세. 바쁜 듯 보이니.”
소공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니 자네가 대답해 주면 돼. 또 공사가 뒤로 미뤄진 건가?”
페일은 이 작은 아이를 미래의 공작으로 대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너무 어린 그에게 많은 걱정을 짊어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적당한 대답을 찾느라 애를 먹었고, 약간의 타협 끝에 말했다.
“예. 하지만 소공작께서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황실에서 일이 생겨 조금 연기된 것뿐입니다.”
그에 소공작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하지만 페일이 그것을 읽어내기엔 그의 주위에 아이가 있은 적이 없었고, 소공작은 나이에 비해 야무진 편이라 빠르게 이를 지워냈기 때문에 그가 소공작의 불편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래. 그렇다면 안심이군. 고생하게.”
소공작은 페일과 헤어져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똑똑한 아이였다.
피더스 가문에서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문제를 톨린과 다른 어른들이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동시에 다들 이렇게 자신을 신경 써 주는데도 어째서 마음이 무거운 걸까에 대한 답은 알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가 사랑하는 이들은 다들 소공작이 슬퍼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줬고, 그건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를 덮치는 날이 있었다.
소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까악--”
그리고 창가에 얌전히 앉아 작게 우는 까마귀를 발견했다.
“까망아!”
그는 반갑게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를 알아온 듯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그를 어깨 위로 올렸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찾아보니까 까마귀는 겨울에 떠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해서 인사도 없이 가버렸을까 봐 걱정했다구.”
아이는 윤기나는 까마귀의 날개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어? 이건 무슨 털이야?”
소공작은 날개 끝쯤에서 갈색의 털을 발견하곤 의아해 물었다.
“친구라도 만나고 온 거야?”
까마귀는 대답없이 조용히 날개를 다듬었다.
소공작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손에 묻은 털을 닦아냈다.
그것이 황실 숲에 서식하는 거대한 곰의 털인 줄은 상상도 못한 채.
26화- 이상한 놈과 좋은 놈
훈훈한 방 안에서는 어린아이가 까마귀에게 말을 거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졌다.
“까망아, 그래서, 톨린은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똘똘해 보이는 꼬맹이는 내 날개를 만지작거리며 조잘거렸다.
“페일이 그러는데 공사가 늦어져서 신경이 곤두선 거래.”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녀석의 말을 들으며 녀석이 책상 위에 펼쳐 둔 호두를 몇 알을 부리로 쪼아 먹는 척을 했다.
그게 좋은 건지 아이는 담아두었던 말들을 더 적극적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조금 지루하지만 사소하진 않은 시간이다.
어린아이는 어른에 비하면 솔직하고, 동물은 사람에 비해 비밀을 털어놓기에 적합한 상대다.
이 두 가지가 모여 녀석이 날 말 못하는 상담사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이는 현재 공작가의 상황이나 톨린의 상태, 혹은 공사의 진행 상황 같은 것을 세세하게는 아니지만 얼추 아는 대로 내 앞에서 조잘거렸다.
이 똑똑한 피더스 공작가의 후계자는 나이에 비해 아는 게 많았지만, 그만큼 가문의 어른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걸 말 못하는 짐승에게 털어놓는 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내게 정을 붙인 듯 보이기도 했고.
누군가 순진한 아이를 이용해 먹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다.
“까망아? 내 말 듣고 있니?”
그나저나 정말 적응 안 되는 이름이군.
까만 새니까 까망이라니, 어린애다운 건지 단순한 건지 알 수 없는 작명 센스였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아이는 연신 내 날개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날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를 보며, 아이와 이렇게 안면을 트게 된 첫날을 떠올렸다.
***
소공작은 피더스 공작이 죽은(것으로 처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까마귀로 변해 공작가를 둘러보던 날 가장 먼저 발견한 녀석이었다.
-까마귀……?
정확히는 침대에 처박혀 울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훔쳐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거였지만.
눈이 퉁퉁 부어서 창가에 나온 아이는 도망가지 않는 까마귀가 신기한지 잠시 울음을 멈추고 날 안으로 들였다.
보통 까마귀였다면 그의 보호자나 가정부가 기함을 할 장면이었겠으나, 아버지 잃은 아이를 배려했던 건지 다른 고용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공작가의 내부를 확인하기에 썩 나쁜 기회는 아닌지라 나도 녀석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고.
게다가 빙의 첫날 밖에서 내 말에 반응하는 까마귀에게 문을 열어 준 전적이 있는 난 녀석을 이해했다.
내 경우엔 까마귀가 거의 공갈 협박으로 침입했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소공작 덕분에 난 그때의 그 양아치 새 녀석보다는 신사적인 방법으로 공작가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넌 겁도 없니? 사람한테 이렇게 가까이 오면 안 돼.
아이는 키워준 그의 아버지를 닮아 오지랖이 넓었고 똘똘했다.
-오늘은 아버지의 무덤에 다녀왔어. 톨린은 아버지가 테리툼에 다다르셔서 날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하던데. 이상하게 난 아버지가 아직 어딘가에 살아 계실 것만 같아.
말도 많고 묘한 데서 예리한 구석도 있었고.
날 까망이라 이름 붙인 녀석은 나에게 공작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추할 수 있는 말들을 해줬다.
그렇게 생성된 한쪽의 일방적인 신뢰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난 웃으며 조잘거리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톨린은 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 신전 근처의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한번 보고 싶어. 곧 있으면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할 나이이기도 하고.”
녀석은 어딘지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전에 피더스 가문의 일들을 제대로 살펴보고 싶어. 톨린이랑 페일은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까.”
기특한 소리를 하는 녀석을 보다 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희망이 이뤄지는 날은 아마 지금 밤잠 설쳐가며 일하는 누군가의 억장이 무너지는 날이 될 텐데.
오늘 알아낼 것들은 다 알아냈다는 판단에, 난 호두를 쪼던 것을 그만두고 날개를 몇 번 퍼덕였다.
“어? 벌써 가게? 오늘은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니야?”
녀석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아쉬운 티가 났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너한테도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얼른 가 봐.”
순한 녀석은 가만히 창문을 다시 열어줬다.
난 밖으로 나가서도 공작가 저택을 몇 바퀴 더 돌았다.
아고니 피더스가 사라진 공작저는 어쩐지 가시가 돋친 듯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멀리 집무실에서 머리를 감싼 톨린을 한 번, 서류를 들고 복도를 걷고 있는 페일을 한 번,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잭을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의 방을 한 번 눈에 담고 난 날아올랐다.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한번 보고 싶어.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리던 것을 떠올리자 날개에 힘이 들어갔다.
소공작을 주시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작에서 이름도 나오지 않는 저 작은 소공작은 원래 사냥제 이후에 죽는다.
***
“벌레 같은 자식! 시간을 얼만큼 끌 건지를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
톨린만큼은 아니지만 자꾸만 미뤄지는 공사 때문에 열이 오른 것은 1황자도 마찬가지였다.
라시아는 치료를 위해 가끔씩 들르는 7황자에게 그냥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면 되는 것 아니냐며 닦달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라시아 아바란은 무표정한 7황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볼수록 이상한 녀석이었다.
금전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권력을 탐하는 것 같지도 않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바라는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건방지고 열 받는 조건을 내걸거나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할 뿐.
문제는 그것들이 1황자의 행동에 제약을 주는 것들이라는 것이었다.
달관한 듯한 태도로 그를 대하는 것도 역시 거슬렸다.
아니지, 사실 녀석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그 빌어먹을 치료제만 아니면 진작에 숨통을 끊어 놨을 텐데.
라시아라고 해서 녀석의 뒤를 밟거나 방을 뒤진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방 안엔 거지같은 책을 빼고는 개인의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뒤를 밟은 날이면 녀석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사라진다고 했다.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것이 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건지 답답해 라시아는 애꿎은 침대만 차야 했다.
-치료가 필요 없다면 사람을 보낼 것 없이 저한테 직접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붙였던 다음 날 7황자의 무표정한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그 말이 또 라시아의 성질에 불을 붙였다.
-감히 내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노기 어린 라시아의 눈빛에도 녀석은 움찔도 하지 않았다.
-어째섭니까?
-뭐?
-죄 없는 기사들 목숨 가지고 한 건 장난이 아닙니까?
녀석이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 1황자는 바로 눈치챘다.
7황자를 쫓다 놓쳤던 녀석은 목숨으로 그 무능함을 갚아야 했으니까.
그에게는 라시아의 분노를 피하게 해줄 비밀의 치료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딴 것하고 이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1황자는 생각했다.
-그깟 벌레 자식들이랑 지금 날 비교한 거냐?
7황자는 대답 없이 가만히 1황자를 바라봤다.
둘 사이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은 라시아였다.
-……뭐야? 왜 아무 말도 없어?
-비교할 수 없긴 하죠.
7황자는 가라앉은 눈으로 1황자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저한테 붙이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7황자는 입을 다물었고 한동안 치료는 없었다.
처음 며칠은 별 이상이 없었다.
그에 사실은 자신의 몸이 완치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던 라시아였지만, 얼마 후 한 번 코피를 쏟고 나서야 7황자에게 사람을 붙이는 것을 그만뒀다.
“그 버러지만도 못한 놈.”
왜 몸은 좀처럼 낫질 않는 거지?
1황자는 이를 갈며 애꿎은 책상을 뜯었다.
이 치료가 끝나면 녀석을 죽일 여러 가지 방법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황자 저하, 2황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이 조용히 디토 아바란의 방문을 알려왔다.
라시아는 분노가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를 안으로 불렀다.
2황자는 눈부신 금발을 흔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1황자 저하, 귀체는 건강하신지요?”
“푸핫, 그 징그러운 말투는 뭐냐?”
디토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와 말투가 라시아의 분노를 잠재웠다.
“귀족들 말투를 따라해 봤습니다. 퍽 닮지 않았습니까?”
장난기 어린 대답에 라시아는 인상을 썼다.
“그런 쓰레기같은 것들의 말투를 따라하지 마라. 괜히 더러운 버릇이 든다.”
디토는 신경질적인 1황자의 반응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또 귀족들이 거슬리는 짓이라도 했습니까? 지난번 회의에서 이야기가 잘된 것으로 아는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디토는 곧 알아챘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피더스 가문에서 감히 이상한 억지라도 부린 겁니까? 요새 공사가 늦어진다고 했습니다. 재무부에서 내려오는 서류가 쌓였습니다.”
그의 말에 라시아는 혀를 찼다.
실상 억지를 부리는 것은 이쪽이지만 디토는 아직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대외적으로는 피더스 가문과 의견 조율이 되지 않아 공사가 미뤄지는 것으로 되어있었으니까.
“아니, 아니다. 그냥 바빠서 그런 것뿐이다.”
“아쉽네요. 모처럼 형님을 물 먹인 녀석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는 기회인데 말입니다.”
그 말에 라시아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누군가의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게 면 팔리기도 하고, 아무리 아끼는 동생이라도 황권이 걸린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리는 건 꺼림칙했기 때문에 둘러댄 말이었다.
물론 7황자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기도 했고.
그런데 상대가 도리어 순진하게 열을 내주니 라시아는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뭐, 그렇지. 나도 하루빨리 착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흠…….”
“뭐냐?”
“형님, 그렇다면 저에게 맡겨 주시죠.”
“무엇을 말이냐?”
라시아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디토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수도의 자선 사업 말입니다. 형님이 그렇게 바쁘시다면 제가 형님의 대리로 가서 어느 정도 일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유능한 건 아시잖습니까?”
“아…….”
동생의 언변이 즐거워 잠시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던 라시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디토 녀석이 일에 빠릿한 거야 라시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황자로서의 정무 중 조금 까다로운 일을 맡긴 적도 많았고, 녀석의 의견이 도움이 되었던 적도 꽤 있으니까.
이번 일도 맡기기만 하면 자신의 뜻대로 잘 해낼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일부러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일을 맡겼다가는 더 이상 변명하기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생, 생각해 보마. 황제 폐하 앞에서 말씀드린 일인 만큼 이번엔 좀 신중하고 싶구나.”
라시아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한 말투로 2황자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1황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상대가 눈치챌까 슬쩍 눈치를 봤지만, 2황자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히려 죄송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마음이 앞서 생각이 짧았습니다.”
라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피곤하니 이만 나가 보거라.”
라시아는 급하게 디토를 내보내려 했고, 디토 아바란은 이 역시도 이상할 거 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럼,”
그는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빙긋이 웃으며 라시아에게 말했다.
“건강하십시오, 형님.”
라시아는 오늘따라 짙은 동생의 미소를 바라보며,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지는 디토를 배웅했다.
27화- 조사
“이곳 구경은 즐거웠소, 징?”
징은 단출하게 만들어진 재단 앞에 서서 빙긋이 웃는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에서의 고상한 말투는 때려치웠는지 그는 이제 격의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징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상대는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죽일 수 없으니 살리고, 홀대할 수 없으니 환대하겠지요.”
저놈의 말장난.
징은 혀를 찼다.
“내가 아미카의 사자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내내 갇혀 있는 거고?”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계속 살아있을 수 있지 않겠소.”
빙글거리는 대답에 징은 입매를 굳게 당겼다.
아미카를 믿는 자들에 대해서 남은 자료는 얼마 없다.
그들이 시에라 아바란을 믿는 제국민들만큼이나 신에게 맹목적이라는 것 정도.
그나마도 공작가의 가주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얕은 지식이었지만.
어쨌든 저 작자가 자신을 바깥으로 내보내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돌아봐서 알겠지만 살아가기 썩 나쁜 곳은 아니라오.”
굳은 얼굴의 그를 눈치채지 못한 척 장로는 빙그레 웃었다.
“괜히 말 돌리지 마시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거요. 환대해 드린다고도 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판단에 징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그놈의 아미카의 사자라는 걸 증명하면 난 나갈 수 있는 건가?”
거칠어지는 말씨에 라텔이라는 젊은이가 칼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분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징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가능성만 있는 지금도 이렇게 풀어주는 사람들인데, 정말 사자가 맞다고 하면 엎드려서 절이라도 하겠군.
“좋소,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어떻게 하면 날 그 사잔지 호랑인지로 인정한다는 거요?”
“그건 모르지.”
“뭐라고?”
7황자가 준 가방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징은 틀림없이 그에게 온 힘을 다해 집어던졌을 것이다.
노인은 화내지 말라는 듯 두 손을 들어올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너무 화내지 마시오. 원래 사제들이란 아는 게 없소. 신의 말을 듣는다고 지껄이는 것들은 다 사기꾼들이라오. 바깥 제국에서도 절대 속지 마시오.”
“댁은 장로잖소!!!”
징이 노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달려들자, 뒤에 서 있던 라텔은 바로 부목을 대고 있는 징의 오른쪽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그 발을 가까스로 피하며 엎어진 징은 노인 공경이라고는 모르는 무서운 젊은이를 황망하게 바라봤다.
동굴에서도 오른발만은 부목을 대주던 라텔에게 남 모르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뭐, 마음을 가라앉히고 찾아보시오. 이곳은 아미카의 공간이 아니오. 징이 정말 아미카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이라면 길을 내려 주실 거요.”
아니면 평생 여기 짱 박혀 있어야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감옥에 박혀 있지 않다는 점만 빼면 원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까지 편하게 지내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장로는 떠나고 말았다.
저녁 때는 신전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가 떠나기 전에 반드시 저 노친네를…….”
주저앉아 있는 징에게 다가온 라텔이 그를 북돋웠다.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일어나시죠.”
징은 그를 노려봤다.
“왜, 젊은이가 도와주기라도 할 건가?”
“예.”
흔쾌한 대답에 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의심을 가득 담고 있는 징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한 라텔은 어깨를 으쓱였다.
“불만이십니까?”
“그래, 매우 불만이야. 뒤에서 늙은이 발이나 거는 인간을 어떻게 믿겠나?”
“좋게 생각하시죠. 뒤에 있는데도 칼은 안 휘두르는 인간이잖습니까.”
담담하게 뻔뻔한 젊은이의 태도에 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동굴에선 정면으로 칼 빼들고 협박하던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노인만이 아니었다.
아미카를 믿는 놈들은 전부 사람 신경 건드리는 법에 도가 튼 녀석들임에 틀림없었다.
***
그렇게 괴상망측한 공간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징은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열심히 신전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늘 검은 머리의 청년, 라텔이 따랐다.
“자네는 할 일도 없나?”
“이게 이번에 제게 주어진 일입니다.”
“날 감시하는 게?”
징의 물음에 라텔은 담담히 대답했다.
“장로님은 징에게 도움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좀 떨어져주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징은 말해도 입만 아픈 사실을 꾹 삼켰다.
장로가 말한 증거를 찾겠다는 이유로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는 그였지만, 그건 돌아다닌 지 하루 만에 포기했다.
증거는 무슨 증거.
그저 평화로운 마을에 지나지 않는 이곳은 조사할 거리조차 없었다.
게다가 장로가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어디 가서 신의 말을 들었다고 하는 놈이 나서면 사기꾼이 틀림없다고.
진짜 기적이라도 눈 앞에서 행하지 않는 이상 뭐든 옳지 않은 답이라고 돌려보낼 게 뻔했다.
폐쇄적인 집단인 만큼 그저 위험 분자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겠지.
그런 장난에 놀아나 줄 정도로 그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징은 자신의 뒤에서 따라 걸어오는 라텔을 흘끗 바라봤다.
그는 무표정하게 정면만 보며 걷고 있었다.
지난 만남에서의 말실수 이후로, 원래도 편하진 않았던 둘 사이는 미묘한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인 건지, 아니면 부모라는 존재가 큰 의미를 가지기엔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라텔은 징의 작은 실수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지냈다.
이미 괜찮다고 한 일을 계속 언급하는 것 역시 괜히 상처를 들쑤시는 일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 징은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아무 일도 없던 듯 행동하는 라텔에게 동조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의 질문에 그나마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아예 결실이 없는 건 아니어서, 사흘 정도 열심히 발품을 팔고 다닌 결과 알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이곳은 대부분 자급자족해서 살기 때문에 화폐가 필요 없다.
정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밖으로 나가 몰래 구해서 돌아온다.
그럼 밖에서 쓰는 화폐는 어떻게 구하냐는 징의 물음에 라텔은 말을 아꼈다.
훔치는군.
징은 빠르게 이해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롭고 욕심이 없어 보였다.
제국의 시골 지역에서도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들은 하루하루를 느릿하게 살아갔다.
징이 그들에게 무언가 물어볼 때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처음엔 외부인을 배척하는 건가 생각하던 징은, 세 번째 사람에게 말을 걸고 나서야 그저 오랜 시간 생각을 하느라 대답이 느린 것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장로가 라텔을 붙여준 건 징이 속 터져 죽지 말라는 배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라텔은 물어보면 바로바로 대답이 나오긴 했으니.
마지막으로, 음식이 정말, 매우, 끔찍하게 형편없었다.
징은 신전에서 챙겨온 모래알 같은 호밀가루가 씹히는 빵을 우물거리며 나무에 기댔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있으면 그를 짓누르는 짐들이 가벼워지는 착각이 들기도 해서 징은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음식이 맛있어지지는 않았지만.
전쟁터를 전전하던 경험이 없는 그냥 귀족 가문의 노인이었다면 아마 못 버티고 뱉어버렸을 맛이었다.
이것도 그 장로의 사람 엿 먹이는 방법인가 의심하던 때도 있었지만, 몇 번의 저녁식사를 통해 그가 먹는 것도 이같은 맛대가리 없는 빵과 멀건 죽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쾌락이라곤 없는 공간이로군.
그것도 아미카의 가르침인 건가?
아니지, 너무 깊게 파고들면 안 된다.
고개를 두어 번 저은 징은 사포 조각 같은 나머지 빵을 입에 욱여넣고 일어섰다.
“이봐, 라텔.”
“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찬가지로 사포 같은 빵을 다 먹은 라텔이 대답했다.
징은 저 멀리 느티나무로 보이는 수목 한 그루를 기점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를 가리켰다.
“저 땅은 어디까지 이어지나?”
“…….”
그저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라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지? 지금까지 대답이 늦지 않았던 그였기에 징은 의아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그는 무표정하게 먼 곳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기에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라텔이 입을 열었다.
“눈으로 보이는 곳까지 이어집니다.”
생각보다 철학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놀리는 건가? 생각한 징이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난 며칠은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상대가 저런 식으로 대답하면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 그럼 저쪽에는 사람이 얼마나 살고 있나?”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이번엔 대답이 너무 빨랐다.
저렇게 넓고 좋은 땅에 왜 누구도 자리를 잡지 않는 건지 이해도 가지 않았고.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곳곳을 안내해 주던 렌도 미묘하게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었지.
그저 ‘저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징은 미간을 주름을 톡톡 건드렸다.
제국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에서 살지 못할 이유는 대체로 셋 중 하나다.
황족 소유의 땅이거나, 사람을 잡아먹는 무언가가 살거나.
“마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번 대답 역시 빨랐다.
“사람이 사는 곳을 찾을 거면 반대편이 나을 겁니다. 저쪽은 정말 가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래, 그런 것 같군.”
징은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멀리 떨어진 곳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사람이 살 법한 곳에 거주지가 없다면 셋 중 하나다.
누군가의 소유이거나, 사람을 잡아먹는 무언가가 살거나.
……큰 비밀이 숨겨져 있거나.
***
식사를 마친 둘은 다시 유유히 마을을 거닐었다.
절뚝절뚝 걷는 장신의 노인 뒤를 따르는 젊은이의 모습은 꽤 눈에 띄었으나 이곳에선 그런 것은 상관없는 듯했다.
다들 그저 느릿하게 자신의 하루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전 내부에도, 바깥에도 서재로 보이는 곳은 없던데, 문헌을 보관하는 곳이 따로 있는 건가?”
“신전의 지하에 있긴 합니다.”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들어갈 수 있나?”
“장로님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흠.”
그 능구렁이 같은 노인을 다시 만나긴 싫었던 징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민간인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나 책방은 있나? 그것도 찾아보기 힘들던데, 좀 멀리 있는 건가?”
“아미카의 공간에 그런 건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라텔에게 징이 놀란 듯 물었다.
“책이 없다고? 그럼 이곳 사람들은 글을 모르나?”
“아니요, 글은 다들 읽을 줄 압니다. 쓸 줄도 알고요.”
그럼 신전이 지식을 독차지하기라도 하는 건가?
“신전의 지하에 있는 책을 신전 사람들만 보고 있다는 얘기는 아닐 테지.”
라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로님께 허락을 맡는다는 것도 그냥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이제껏 거절당한 사례가 없습니다. 애초에 별로 찾는 사람들은 없지만.”
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공간이군, 정말로.
그런 그를 바라보던 라텔은 묘한 눈으로 덧붙였다.
“지하에 있는 서재라고 해도 그리 많은 책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
징은 그의 말에 곧 입을 다물었다.
신전에 모아 놓은 책은 아마 세상에 마지막 남은 아미카에 관한 문헌일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불타거나 녹아내렸을 테니까.
마지막 남은 책들이라.
여전히 아바란을 모시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인지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 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한 번쯤 보고 싶군.”
***
“소공작님, 5분 후면 상단에 도착합니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의 말에, 내부에서 창문 밖을 보지 않기 위해 애쓰던 소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년이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아이는 돌아가신 피더스 공작의 뜻을 받아들여 후계자 교육을 이어갔다.
오늘은 피더스 가문이 소유의 상단에서 일을 보는 톨린과 함께하고 오는 길이었다.
소공작은 이 길을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워하게 됐다.
바깥의 풍경을 볼 때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웃으며 그를 데리고 다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으로 창 밖을 바라보며 신이 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자상한 그가 떠올라 소공작은 가슴이 울렁거렸고 가끔은 눈 뒤쪽이 따가워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톨린이나 페일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마차를 혼자서 타고 가고 싶다는 소공작의 고집을 들어준 톨린 덕분에 이 비밀은 혼자만의 것으로 남을 수 있었다.
소공작은 이 길을 지나갈 때면 최대한 마차의 창을 커튼으로 가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스스로가 조금 한심해 소공작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런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을까?
좀 더 커서 어른이 된다면 슬픔이 옅어지게 될까?
이렇게 커다란 걸 보면 영원히 작아지지도, 옅어지지도 않을 것만 같은데.
그럼 없어지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쿵!
생각이 깊어지려는 작은 머리는 큰 소리와 함께 갑자기 멈춘 마차의 벽면에 부딪히며 작동을 잠시 멈췄다.
“무슨 일이냐!”
화가 단단히 난 듯한 톨린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소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무슨 일이냐?”
“잠시 접촉사고가 있던 모양입니다. 안에 계십시오.”
기사의 대답에 안심한 소공작은 다시 의자에 등을 붙였다.
안심하고 있는 아이의 눈에 충돌의 충격으로 인해 살짝 열린 차창이 들어왔다.
소공작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차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두 쌍의 동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사람들이 사고로 정신없는 와중에 호기심을 채우러 온 2명의 고아로 보였다.
“어…… 안녕?”
어색하게 인사하는 소공작에 깜짝 놀란 이들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28화- 예상치 못한(1)
“어……, 안녕?”
소공작의 어색한 인사에, 창에 붙어 안을 들여다보던 두 쌍의 작은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작은 아이는 그 예민한 토끼 같은 모습에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그간 눌러왔던 호기심이 스리슬쩍 고개를 들었다.
한 번쯤은 가까이서 살펴보고 싶었던 이들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마주할 줄은 몰랐지만.
무엇보다 피더스 공작이 타계한(걸로 알려진) 이후로 또래의 아이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중간해진 피더스 가문의 지위와 위치를 고려해서 톨린은 소공작이 또래 아이들과의 모임에 나가는 것을 최소화했었다.
소공작은 홀린 듯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간 어른들 틈에서만 지내느라 잊고 있던 비슷한 나잇대의 아이들이 주는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떠올렸던 건지,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길거리의 평민들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흥미였는지는 소공작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멀리 꼬질꼬질한 맨발이 멀지 않은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이 언뜻 보였다.
그 뒤에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발바닥만큼이나 꼬질한 무언가였고.
어찌나 급했는지, 떨어뜨리고 간 것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건 아이들의 옷차림만큼이나 낡아빠진 나무 조각이었다.
스스로 만든 것인지, 어찌 보면 도마뱀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소공작의 절친한 친구(라고 혼자 생각하는) 까마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꽤나 아끼던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손 떼가 잔뜩 타 있는 데다가 정성 들여 눈, 코, 입이 그려져 있었고 도망친 아이들의 행색으로 봐서는 뭔가를 소유할 수 있을 처지는 아닌 듯했으니까.
소공작은 아이들이 들여다봤던 창가의 반대편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조금 전 곧 도착할 것을 일러주던 기사 한 명이 소공작을 향해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한 번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지?”
“예. 부상자가 생긴 모양입니다. 얘기가 조금 길어지겠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기사의 말에 소공작은 고개를 조금 빼 톨린이 타고 있던 마차를 살폈다.
바퀴가 아예 빠진 모양인지 톨린은 아예 밖으로 나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주변을 호위하던 이들이 가까이에 모여 있었다.
5분 정도는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지 않을까?
소공작은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하며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재빨리 반대편 문을 통해 마차를 나와 나무조각을 집어들었다.
사고 현장에 정신이 팔린 어른들은 작은 소공작이 소리도 없이 빠져나가 골목길로 걸음을 옮기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
소공작은 똑똑한 아이였고 나이에 비해 신중한 편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기에는 미숙했다.
예를 들어 거리의 부랑아들이나 노숙자들이 모이는 골목길에서 물건의 주인만 찾아주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랬다.
아이는 망설임없이 걸음을 옮겼다.
소공작의 예상이 맞다면 그들은 톨린이 말했던 거리의 부랑아들이 틀림없었다.
소공작이 한 번쯤 보고싶어 마지않던.
생각보다 발이 빠른 아이들이었는지 예상했던 것보다 깊이 들어가야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가 지저분한 두 머리통을 발견한 건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주점 뒤편의 쓰레기 더미 옆이었다.
소공작은 소곤거리는 두 명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
“정말 돈을 받을 수 있어?”
작은 아이가 큰 아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걸? 지난번에 질은 귀족 아가씨랑 부딪혔더니 더럽다고 숄을 버리고 갔대. 팔아서 어머니 약값을 벌었다고 엄청 좋아했어. 우리도 운이 좋으면 옷가지 하나는 버리고 갈 수도 있겠지.”
큰 아이가 대답했지만 작은 쪽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곁에 붙어있던 떨거지한테 맞아서 일주일은 앓아야 했잖아. 옆 동네에 있던 애는 매타작에 죽기도 했다던데.”
걱정스러운 작은 녀석의 말에 조금 덩치가 큰 아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눈동자 역시 불안으로 떨렸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는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둘 다 어른이 되기 전에 굶어 죽을 거야.”
이번엔 작은 녀석이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내가 가서 저 깐깐해 보이는 아저씨한테 가서 부딪혀 볼게. 엄청 비비적거릴 테니까 겉옷이든 모자든 간에 뭐든 버리면 넌 그걸 들고 튀어.”
소공작은 깐깐해 보이는 아저씨가 톨린을 지칭한다는 걸 알아챘지만 웃음이 나진 않았다.
아이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작은 녀석은 그런 소공작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진 모르고 당황해 큰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왜 니가 가?”
큰 녀석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작은 녀석을 바라봤다.
“그래야 살 확률이 더 올라가지. 넌 잘못 맞으면 골로 가. 난 많이 맞아봤으니까 적당히 피할 줄도 알고.”
“우리 둘 다 잘못 맞으면 골로 갈걸. 그리고 지난번에 질이 주워 온 책에서 봤는데, 원래 무게가 적게 나가면 충격을 덜 받는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라는 뒷말은 홀랑 빼먹은 작은 아이가 야무지게 말했다.
“뭐? 정말이야? 그럼 이제부터 먹을 건 다 너 줘야겠다. 나도 작아져야 맞아도 덜 아프지.”
“앗, 그건…….”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큰 아이에게 당황했는지 작은 아이가 우물거리다 포기했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번에는 내가 가 볼게.”
“야, 웃기지 좀 마. 손도 달달 떨리는 주제에.”
“이건! 밥을 못 먹었더니 당이 부족해져서 그래.”
작은 아이는 민망했는지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주물거리며 대답했다.
그에 큰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넌 정말 별걸 다 아는구나. 그래도 안 돼. 혹시 내가 심하게 다치면 머리 좋은 니가 날 보살펴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안 나겠다는 생각에 소공작은 서로 목숨을 걸겠다며 티격태격하는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으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어린 소공작은 나이에 비해 신중한 편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분리하지 못하는 미성숙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목숨을 걸고 귀족들에게 못된 짓을 할 각오를 다지고 있던 아이들을 쉽게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점이 그랬고, 패닉이 온 비교적 큰 아이가 소공작에게 달려들 것을 예상하지 못한 점이 그랬다.
대신 소공작은 오늘 인생의 변수에 대해서 고찰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었다.
***
“라텔이여, 이방인은 어때 보이던가?”
가물가물한 촛불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가던 장로의 물음에 뒤따르던 라텔은 잠시 말을 골랐다.
“아주 부지런합니다.”
그 올곧은 대답에 장로는 껄껄 웃었다.
“하하, 아주 부지런하단 말이지.”
장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구불구불한 머리와 수염이 살살 나부꼈다.
“그래, 그렇게 빨빨거리고 움직이는 노인은 보기 힘들지, 특히 여기선.”
“…….”
그 말에 라텔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징이라는 그 건장한 노인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정말 열심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다녔다.
라텔은 절뚝이는 발을 열심히 움직이던 키 큰 노인을 떠올렸다.
참으로 이상한 노인이었다.
그는 절박해 보였지만 최악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으며, 태도에선 어딘지 묘한 기품이 흘렀지만 동시에 망가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점심은 꼭 언덕 위에 올라 먹어야 한다고 우기며 기다시피 위를 오르던 그의 뒷모습은, 그렇게 저돌적인 노인을 본 기억이 없는 라텔에게 제법 진한 인상을 남겼다.
아들을 만나야 한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지난번 부모에 대해 묻고는 입을 다물고 은근히 제 눈치를 보기도 했지.
“탈출할 문이라도 찾던 모양이군. 어차피 방법은 없을 텐데. 도와달라고 하진 않던가? 문을 여는 모습을 봤다면 그대가 내보내 줄 수도 있다는 걸 알 텐데.”
장로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라텔은 회상에서 벗어나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한테는 주로 마을에 관해 묻거나 길을 안내받을 뿐이었습니다.”
“흠. 그래, 또?”
“내일은 장로님과 함께 지하의 서고를 둘러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뭐?”
그의 대답에 노인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서고에 가고 싶다고 직접 말했단 말이지?”
“예, 어떤 책들이 있는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날카롭게 빛나는 노인의 금안에 라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입꼬리를 올려 웃은 장로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드디어 아미카 님의 뜻을 찾아볼 마음이라도 든 건가.”
징이 그럴 마음을 먹은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지 들떠 보이는 기색에 라텔은 별말 없이 노인의 뒤를 따랐다.
대화를 이어가던 둘은 징이 갇혀 있던 신전 지하의 감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노인은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에 걸린 3개의 자물쇠를 차례로 풀었다.
방 문이 열리자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초들이 장식을 이룬 제단이 나타났다.
촛불이 에워싼 중앙엔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석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베일로 얼굴과 어깨를 가린 석상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섬세했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한 베일이었지만 그 아래의 이목구비를 볼 수 있는 이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아미카의 신상이었다.
얼굴조차 드러나지 못해 베일 밖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마저 차마 어루만지지 못하는.
노인은 그 아래에 무릎 꿇으며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기도를 올렸다.
부디 우릴 이렇게 만든 이들에게 끝이 오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
“장로님께서 전해주시라 하셨습니다.”
징은 새벽부터 그의 방을 찾아온 라텔을 가만히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뜨지 않아 푸른 새벽녘 하늘이 그의 시야를 어슴푸레 밝혔다.
“고맙네. 노인보다 새벽잠이 없는 젊은이. 아주 친절해.”
그의 힘 없는 대답에 라텔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가지고 온 것을 들이밀었다.
징은 묵직한 그것을 받아들었다.
“혹시 수상한 물건일까 싶어 그간 여러 가지 조사해 보신 모양입니다.”
라텔이 덧붙였다.
징은 이젠 조금 너덜해진 가죽 가방을 가만히 어깨에 걸었다.
7황자가 건네줬던 가방이었다.
바깥에서 유일하게 그와 함께한 물건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수상한 물건이기도 했고.
-아직 못 죽습니다.
무슨 저주라도 하는 마냥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던 그 얼굴이 떠올라 징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몸서리를 칠 뻔했다.
라텔이 그런 그를 빤히 바라봤기에 징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래, 뭔가 나오던가?”
혹시 뭐 아미카와 관련 있는 돌멩이라거나?
그 망나니 같은 7황자가 영 걸렸다.
마치 그날 그가 황실 전통대로 즉결사형을 받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검은 머리 황자의 마지막 말은 징이 그를 미심쩍게 여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시라도 이게 아미카와 관련 있는 물건이라면 이것이 자신을 그 괴상한 동굴로 불러들였을 확률이 높았다.
탈출의 실마리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수도로 돌아가 7황자와 접촉해야 할 이유도 됐고.
라텔은 가만히 대답했다.
“아니요. 평범한 돌멩이더군요.”
“그런가?”
징은 싱거운 그의 대답에 도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예, 그리고 장로님께서 바깥에선 이런 식으로 건강을 챙기는 건지 한번 물어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꼭 배워보고 싶으시다고요.”
이딴 걸 들고 다니면 어깨가 빠질지도 모르는데 건강에 좋을 리가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상대가 틀렸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따로 말해주도록 하지.”
라텔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입을 열었다.
“네, 식사 후 서고로 오라고 하셨으니 가 보시면 됩니다.”
아, 서고를 구경하겠다고 말해 놨었지.
서고에 있는 아미카의 책들을…… 보겠다고…….
“어디 안 좋으십니까?”
걱정과 어울리지 않는 무뚝뚝한 말씨에 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네. 뭐라고 했나?”
“장로님께서 혼자 오시라고 했습니다. 지하에서 기다리시겠다고요.”
그 말을 마치고 라텔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문을 닫는 징의 손은 라텔처럼 후련하지 못했다.
징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29화- 예상치 못한(2)
서고라는 곳은 생각보다 작고, 낡았으며 무엇보다 매우 지저분했다.
“참…… 아늑하군.”
그 광경 앞에서 건넬 수 있는 최대치의 칭찬에, 먼지가 풀풀 날 것 같은 서고의 가운데에 서 있던 장로는 낮게 웃었다.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좀 지저분하긴 하지.”
허락만 받으면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라텔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사용감 없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인 책들이 들어찬 내부는 군데군데 닳아 있었다.
“아무나 드나들게 되면 소중한 서적들이 손상될 텐데.”
아마 세상에 남은 마지막 자료들일 게 분명한 것들을 이렇게 관리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건넨 질문이었지만 장로는 그저 웃었다.
“’아무나’보다는 ‘누구나’지. 둘은 같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지.
징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역시 평범했다.
나름대로 긴장감을 안고 들어온 것이 무색하게.
아바란에서 이단의 서적을 소지한 자를 앞장서서 처단했던 시절이 있던지라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징이었다.
막상 와보니 별다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읽어보고 싶은 게 있나? 누구나에는 징 역시 포함되는데.”
갑작스런 권유가 징을 사념에서 끄집어냈다.
“아, 종교 서적이 아닌 책도 있소?”
“아니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미카의 가르침을 배워볼 생각을 한 적이 없는 징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장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곳을 한 번 둘러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그, 랬지. 맞아, 내가 그랬지.”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은 이것이라오.”
그런 징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모르는지, 장로는 가장 낡아 보이는 엄지손가락만 한 두께의 책을 징의 눈 앞에 내밀었다.
그냥 책이었다.
종이로 된 뭉치.
온갖 위협적인 무기들이 목을 스칠 때에도 눈을 부릅뜨던 징은 종이 뭉치에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아직도 기사단장 아고니 피더스가 그 안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불온서적을 읽는 것은 아바란을 배반하는 것이다. 배반은 반역. 반역은…….
“사형감이야.”
낮게 튀어나온 생각의 덩어리에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장로는 다시 주름진 눈가를 접었다.
“그렇구만.”
그는 곧바로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목숨이 달렸다는데 별수 있나.”
목을 위협하던 칼이 거둬진 것만 같아 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와도 좋네.”
노인은 평온하게 말하곤 다시 먼지 구덩이 책들을 둘러보겠다며
방금 뭐였지?
뭔가 이상했다.
피더스 공작이 아닌 징이 겁먹을 이유가 하나 없었다.
징은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에 흥건한 땀을 내려다보았다.
***
전 피더스 공작이 죽을 만큼 궁금해하는 그의 아들은 현재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민망한 상황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세야? 세야? 죽은 거야? 세야!!”
쓰러진 큰 녀석의 곁에서 곧 함께 쓰러질 듯이 충격을 받아 아이를 흔드는 작은 녀석을 소공작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세야라는 이름의 큰 녀석은 조금 전 제법 빠른 속도로 소공작에게 돌진했었다.
그 민첩한 몸놀림엔 소공작 역시 당황했지만 그는 어찌됐든 피더스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그 말은 황실의 검으로써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거리의 아이가 근거리에서 덤벼드는 것 정도는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날렵하다는 뜻이었다.
세야라는 아이는 놀라운 순발력으로 소공작과 부딪히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챔과 동시에 급하게 멈춰 서려고 했다.
하지만 맨발로는 바닥과의 마찰력이 부족했는지 그대로 죽 미끄러지며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가벼운 아이가 넘어지는 꿍 소리 이후에 찾아온 그 고요한 정적을 소공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작은 아이가 울먹거리며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소공작은 당황했다.
아이들이 나누는 계획이라는 게 너무 어이가 없고 위험한 일인지라 막으려고 나섰을 뿐이었는데.
아이들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소공작이 기억하는 평민이란 대부분 소공작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고개를 조아리던 이들인지라,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흑, 윽, 세야, 눈 좀 떠 봐.”
작은 아이는 벌써 큰 아이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울고 있었기 때문에 소공작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기다리거라. 그렇게 흔들면 안 돼.”
우선 미친 듯 세야를 흔들고 있는 작은 아이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닌 듯했다.
아이는 발작을 하듯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희가 나쁜 벌레들이라서……!!! 나쁜 짓을 하려다가 이렇게 죽는 건가 봐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아무도 죽지 않아.”
소공작의 말에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기다려 보거라. 사람을 데려오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결국 소공작은 인정했다.
이건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평민이라곤 하지만 아이가 다쳤다.
공작가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주는 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소공작의 원래 뜻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는 데서 오는 미세한 죄책감이 소공작의 발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뒤돌아 가려던 소공작은 추운 바닥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는 다시 되돌아왔다.
“자, 이걸 우선 덮어 두거라. 몸을 차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작은 녀석은 소공작이 조심히 세야의 몸을 고급진 코트로 덮는 것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이 또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아 소공작은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걱정 마라. 치료는 피더스 가문에서 책임질 것이다.”
이 말을 남기고 정말로 톨린을 부르려고 발길을 돌리는 소공작에게, 작은 아이는 머뭇거리며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귀족 나으리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 어색한 존대에 소공작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플린이다.”
“플린 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재차 수그리는 아이를 두고 소공작 플린 피더스는 힘차게 달렸다.
***
덩치가 작은 아이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전까지 골목길의 끝자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소공작이 완전히 떠났다는 생각이 들 때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제 일어나도 돼, 세야.”
세야는 한쪽 눈을 슬쩍 떴다가 곁에 자신의 동료만이 남았다는 걸 깨닫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정말 똑똑하구나, 미르.”
세야는 쓰러진 자신에게 조심히 속삭였던 미르를 칭찬했다.
-계속 기절한 척해.
미르는 언제나 적절한 해결책을 찾곤 했기 때문에 세야는 두말없이 그대로 따랐다.
세야는 그대로 움찔도 하지 않고 죽은 듯 있었다.
역시나 옳은 판단이었다.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목적대로 귀족 나으리의 값비싼 옷까지 구했으니까.
신이 난 세야는 플린이 두고 간 검은색 코트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금으로 된 건가?
단추만 떼어내 팔아도 일주일은 먹을 걱정을 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엄청난 부자에다가 마음도 약한 것 같은데, 아예 다쳤다고 드러누울까? 미르?”
세야는 대답이 없는 미르를 바라봤다.
그는 아직까지 작은 머리통이 사라진 골목의 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피더스 공작가는 너무 커. 이걸로 만족해야 될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그는 여전히 골목 끝을 바라보고 있어, 세야는 의아해하면서도 상대가 미르였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럼 이제 가자.”
미르는 세야의 재촉에 천천히 시선을 떼며 일어섰다.
“귀족을 상대로 사기를 쳤으니 마주칠 일 없게 잘 피해다녀야지.”
다짐과 같은 말에 세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아이들은 고급스러운 코트를 꼭 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에 돌아와 당황할 소공작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
톨린은 황실에서의 회의 이후로 여전히 소공작과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아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서면으로만 근황을 주고받는 이상한 상황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지만 톨린은 아직 소공작을 이전처럼 대하질 못했다.
영특한 아이는 그런 그의 불편한 마음을 알아챈 건지, 눈치를 보듯 필요한 일이 아니면 톨린을 찾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마차를 혼자 타겠다고 한 것도 어쩌면 그런 배려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어른스럽지 못하군.’
톨린은 마차 안에 앉아 쑤셔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늘에야말로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아이의 배려를 받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선대 공작님에게 얼굴 못 들 짓은 하지 피해야만 했다.
아이가 어른의 눈치를 보는 이상한 버릇은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렇게 만들다
니.
“페일, 일이 끝나고 공작저에 도착하면 처리할 서류는 저녁 식사 시간에 올리도록.”
“……톨린 님, 점심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는데요.”
연신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톨린의 눈치를 보던 페일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녁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라. 서류 정리는 먹으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짜증스러운 응답에 페일은 주제 넘은 말들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작게 속삭였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톨린의 현재 관심사는 작은 아이에게 몰려 있었다.
돌아가면 바로 소공작님에게 양해를 구해야지.
그동안 일이 바빠 신경 써 주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반절뿐인 진실이라도 안심시켜 줘야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쾅!
마차 전면에 가해진 작지 않은 충격에 톨린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몸을 가누자마자 톨린은 마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톨린 님, 갑자기 나오시면 위험합니다.”
잭이 그의 곁을 지켰다.
톨린은 그런 잭에게 다급히 물었다.
“소공작님은 괜찮으신 건가?”
많이 안정됐다곤 하지만 공작가를 노리는 어리석은 무리는 어디든 존재했다.
크고 작은 위협이 없던 건 아니지만 이제껏 소공작과 함께 있을 때 이런 일어 벌어지지 않도록 안전에 만전을 기하던 톨린은 피가 식는 걸 느꼈다.
“조금 놀라신 듯하지만 어디 상한 곳은 없으십니다.”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 기사 한 명이 재빨리 보고했다.
톨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기사들을 지목하며 소공작의 마차를 호위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큰 사고가 아니었는데도 쓰러진 마부를 끌어내는 기사들의 부산스러움에도 안에서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열어라.”
톨린은 차갑게 명령했다.
사거리에서 갑자기 길에 끼어든 정신나간 놈의 얼굴과 배후를 확인해야 했다.
아무 문양도 없는 수상하기만한 마차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예리했다.
마침내 마차 문을 열고 나온 상대의 익숙한 얼굴은 그보다 더 그의 표정을 시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기서 다 보는구나.”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큰 형, 이고 크리사의 등장에 톨린은 안 그래도 가까워진 미간 사이를 바늘까지 끼울 수 있을 정도로 좁혔다.
30화- 예상치 못한(3)